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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비밀레) reload #16 (완)
총성이 울렸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은빛의 세상이 부서지고 새하얀 유리조각들이 떨어져내렸다.
문고리를 놓고 당신을 향해 달려갔다. 머리를 감싸안는다. 귓가를 타고 작은 핏방울이 떨어져내렸다.
그렇게 끌어안고 나서야, 꽉막힌듯 천천히 흘러가던 시간이 다시 원래의 속도로 쏟아져내렸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도 당신을 볼 용기가 없어 한참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손아래로 흘러내린 다우라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책상밑으로 떨어져내렸다.
톨비쉬는 무어라 말을 할지 정하지 못한채 입을 움직였다.
아주 많은 단어를 망설였던것 같다. 하지만 단 한글자도 입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흐릿한 시선이 마주쳤다. 당신은 그래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아니 알아보았을 것이다.
우리들은 몇번이고 서로의 입술을 바라보며 말을 읽어내는 방법을 연습했다.
그 손가락으로 입술을 더듬고 그 온기를 머금었다.
불필요한 노력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심이 섞인 개인교습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소리조차 내지 못한 이 비겁한 마음을 몇번이고 보고 들었다. 그리고 외면했다. 베갯잎 사이로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이번에도 그랬을까? 이번에도 이 마음은 전해지지 못했을까?
종이 울렸다.
망설임이 가득한 노크가 두어번 울렸다.
아이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문과 거실의 창문 그리고 이층을 올려다보았다.
그림자가 흔들리는 순간 울렸던 커다란 폭음은 폭죽이라 하기에는 너무 큰 소리였고 무언가를 깨트렸다하기엔 너무 아픈 소음이었다.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그냥 갈까?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마지막 집까지 열심히 걸어왔지만 어쩐지 조금 겁이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분명 와도 괜찮다고 말해줬는걸. 와인샵에서 그와 마주쳤던 쌍둥이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한번 더 문을 두드렸고 잠시 고민했다.
노래를 부르지 않아서 안나오는건 아닐까? 반짝이는 금박종이로 만든 핸드벨을 들고 있는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들은 머리를 모아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고 모두 함께 모아 작은 입가득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은빛의 입김이 서리빛 공기를 녹이며 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고요한 밤중에 여린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평화를 주러온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오랜 침묵을 깨고 내려온 발소리가 현관문 앞까지 다다랐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어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리 크리스마스.
물기어린 남성의 목소리에 아이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톨비쉬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와이셔츠의 목깃에 작은 핏자국이 흩어져 있었다. 남자의 귓가에도, 뺨에도, 낯설고 무서운 모습에 몇몇 아이들이 노래를 멈춘채 입을 꼭 다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누군가는 노래를 불렀고 누군가는 주섬주섬 주머니를 내밀어 보였다.
그리고 또 어떤 아이는 톨비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피나요.”
“응..? 아아.. 전구가 깨졌거든. 전등에 베인모양이구나.”
정말일까? 아이들은 악의없는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이 부르지 않은 아이들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인상을 찡그렸다.
빨리 돌아가고 싶은데 아직도 봉투를 주지 않는 이유는 노래소리가 작기 때문이라고, 몇년동안 같은 모금을 반복해왔던 아이들은 알아서 이유를 만들어 납득하고는목소리를 높여 노래를 불렀다.
톨비쉬는 현관문 안쪽에 걸어놓은 커다란 양말모양의 주머니를 들어올렸다.
안에 들어있던 크리스마스 리본이 달린 봉투는 아이들의 선물주머니 안에. 그리고 사탕봉지가 가득 든 양말주머니는 가장 가까이 있던 아이의 품안에 안겨주었다.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이 얼굴가득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현관문이 닫혔지만 아이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쩌렁쩌렁하도록, 돌아가 따뜻한 코코아와 함께 과자를 먹을 생각에 신이난 아이들은 내친김에 3절, 4절까지 부르며 신이나 마을로 돌아가는 길을 밟기 시작했다.
톨비쉬는 아이들의 노랫소리에 맞추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다시 이층으로 올라섰다.
씁쓸한 연기의 냄새가 아직도 복도에 머물러 있었다. 방문에 비치는 그림자가 흔들린다.
톨비쉬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은 톨비쉬가 떠났던 그 모습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스탠드는 책상아래로 떠밀려 전선에 매달린채 흔들리고 있었고. 천장에서 깨어진 유리조각이 사방에 떨어져 있었다.
한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갈때마다 슬리퍼아래로 유리조각이 부서졌다.
톨비쉬는 파편들이 더 잘게 쪼게지는 것에 개의치 않아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눈앞에 그리운 이의 모습이 앉아있었다.
톨비쉬가 모아주고 나간 그 모습 그대로 곱게 손을 모아쥔 밀레시안이 가만히 눈을 뜬채 톨비쉬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기 없이 먼 허공을 바라보는 눈 위로 흔들리는 오렌지색의 조명이 비치고 있었다.
입술은 가볍게 다물어져 있었고 몸은 미동없이 앞을 향해 있었다.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머리가 숙여지고 곧 그 작은 손안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매마른 손끝에서 쓴 내음이 묻어났다. 언제까지고 잊지 못할정도로 쓰고 매운 맛이 입술과 코를 통해 흘러들어왔다.
무심코 입을 맞추는 순간 저도모르게 인상을 쓸 정도로.
톨비쉬는 처음 밀레시안의 손끝에 입을 맞추던 날을 떠올리며 웃음지었다.
웃음소리가 섞인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어깨가 흔들리고 정돈되지 못한 호흡이 몇번이고 숨을 헛들이키며 목구멍을 비틀었다.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 몇번이고 몇십번이고 몇년이고 부르며 당신의 이름을 그리워했다.
이 마음에 대답해달라고 소원했다 이 기도에 응답해달라고 손을 모았다.
차라리 원망받기를 원했다. 당신의 숨을 이어버린 것은 순간적인 나의 욕망이었기에 당신이 살아가기를 바랬던 것은 나의 이기심이었기에. 당신이 소리내어 말하기를 바랬다.
그 시선끝에 상처입는다 하더라도 당신의 빛이 깃들어있기를 바랬고 그 손끝이 내게 흉터를 남긴다 하더라도 당신의 온기를 바랬다.
거절이라도 좋으니 한번만 더 이 세상에 돌아오기를 바랬다.
당신이 에린을 떠나기를 바란다면 나도 떠나겠습니다.
그러고도 나를 거부한다면 당신에게서 물러서겠습니다.
당신이 나아가기를 바라면 나 또한 나아갈 것이고 당신이 되돌아가기를 바라면 나 또한 되돌아가겠습니다.
나는 내 마음을 드리겠습니다. 내 모든 말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그러니 나를 보세요. 내게 돌아오세요. 이 넓을 설원 당신을 쫓아갈 발자국을 나에게 보여주세요.
내가 당신을 쫓아갈테니, 세상끝까지 함께할테니. 내게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작은 희망을 보여주세요.
태양이 저무는 시간의 끝에서 그는 다시한번 소리내어 밀레시안의 이름을 불렀다.
“밀레시안…”
“왜 그러십니까?”
“아니요, 그냥 조금...”
“조금...?”
“.......”
“.......뭔가 남겨두고온 미련이 있나요?”
“........”
“뭔가 잊고온 물건은 없습니까?”
“.......”
“아니면...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고있는건 ?”
“나는.....”
“밀레시안...”
녹음의 눈동자가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내가 말했었죠. 후회는 언제해도 늦은 뒤의 일이라고. 절망도 슬픔도 모두 끝난뒤에 생기는 것이라고.”
“......”
“지금 당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누구의 것입니까.”
“.......나는..”
“지금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누구의 시선입니까.”
설원의 끝에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올려 푸른 시선을 마주했다.
당신이 웃는다.
언젠가 내게 생명을 주었던 그 소녀처럼, 당신 또한 그렇게 푸른 눈을 빛내며 내게 웃음직는다.
고요하게 또 거룩하게,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를 내어 깊은 숨을 내어 쉬는 동시에 눈을 감았다.
은빛의 방황이 끝난 이 세상의 끝은 온통 안식이 내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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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비밀레) reload #15
장례식이 끝났고 유품의 정리도 끝났다. 피오나의 건물을 흔적도 없이 비워졌다.
알반은 건물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저 건물은 어떻게 될까, 누군가가 매입할까? 아니면 그대로 방치되는 걸까. 킹은 걱정스럽게 구 피오나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요원들중 누구도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는 없었다.
주인이 사라진 건물은 순식간에 초라하게 변해버렸고 이내 스산한 분위기까지 흘러나왔다.
불이 켜지지 않는 회색빛의 거대한 빌딩은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무덤같이 느껴졌다.
톨비쉬는 삼삼오오씩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전 직장 동료들을 뒤로한채 몸을 돌렸다.
모여있던 사람들중 붉은 머리의 청년이 그를 붙잡았다. 알반의 수습요원인듯 보였다.
꼭 오늘이어야 하냐는 질문앞에 톨비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면 빠를수록 이 고통은 짧아지고 늦으면 늦을 수록 이 책임감은 가벼워 질 것이다.
하지만 결국 스스로의 결심은 변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톨비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려 팔을 뻗어내었다.
문이 열렸고 구두소리가 울렸다. 차에서 내리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둔탁한 구둣소리를 이끌로 걷고나서 머지 않아 멀리 주택가가 보였다.
사라진 피오나의 단장에 대한 소문은 마치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거품무리와도 같았다. 무성했지만 곧 가라앉았다.
그에대한 소문은 여전히 흥미로운 가십거리였지만 지금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 하고 있는것은 브류나크에 나타났던 과거의 악몽, 퀘사르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무엇을 위해 브류나크에 왔던 것일까. 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브류나크를 떠났던 것일까.
궁금증은 음모론이나 과장된 소문으로 번져나갔다.
이러저러한 추측이 난무했지만 역시 가장 신빙성이 높은 것은 그들이 다시한번 칼리번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이름모를 누군가가 머리를 들었다.
그들은 새로 만들어진 브류나크가 제2의 칼리번의 제단이라 생각하고 급습했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칼리번은 아직 에일레흐의 재단에 머물러 있던 상태였고 브류나크의 해석을 끝낸 퀘사르가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 바로 도망을 쳤다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사실이 어찌되었건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맛을 당겼고 누군가가 승인하기도 전에 뉴스의 틀을 흉내낸 허가받지 않은 종이가 먼저 인쇄되었다. 그리고 이날을 기다려왔던 몇몇이들이 피켓을 들고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그들만의, 그리고 그들을 위한 축제가 시작되었다.
톨비쉬는 차량이 떠나가기 무섭게 도로를 점거해오는 사람들의 행렬을 피해 옆으로 비켜섰다.
새까만 상복이 눈에 띄긴하겠지만 장례식장내에서의 시선에 비하면 이정도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톨비쉬는 으슥한 골목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반칼리번을 외치는 사람들의 행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벽끝에 기대어 섰다.
그들은 모든 발전과 개선이 칼리번에 의한 것이라면 실패와 부작용또한 칼리번에 의한것이라 외치고 있었다.
그래서 칼리번은 사라져야하는 걸까? 하고 물으면 의견이 갈린다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이었지만 지금은 웃음기조차 말라버린 뒤.
그런 엉성함이 통한다는 것이 오히려 짜증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들은 이 모든 비극이 칼리번 때문에 일어났다고 이야기하며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세력을 불리는 것 만이 그들의 즐거움이자 목표였다. 해결할 의지는 아무것도 없잖아.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행렬에 참여해 즐거운듯 구호를 이어나갔다.
그들은 퀘사르에대한 두려움을 호소하는것 보다 그들의 이름을 뒤집어 쓰고 다른이들을 겁주는 것을 더 즐거워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이건 누구 잘못이야? 왜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 이분법으로 분류되지 않을 질문들이 이어졌다.
경비를 소홀히한 에이전시들의 잘못일까? 아니면 인원수를 줄인 에일레흐의 잘못일까.
괴한들에게 뚫릴만큼 허술한 건물을 만든 발레스의 잘못일까? 아니면 누구의? 사람들의 관심은 과할정도로 빠르게 끓어올랐고 또 빠르게 옮겨붙었다.
누군가에 의해 크로우 크루아흐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었고 여론의 판도가 한번 뒤집혔다.
과장된 표현이라고 조작된 영상이라고 매도받던 자료들은 진실이 되었도 이리저리 알기 쉬운대로 가공되었던 음모론들은 사장되었다.
소문이 부풀려져나간다, 혼란이 가중된다. 사람들은 책임을 묻고 또 옳고그름을 따진다.
적어도 상복을 입은 요원들은 내버려뒀으면 좋겠지만, 그들은 슬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그 반짝이는 눈빛과 호기심은 흥미로움과 스릴감에 가까웠다.
진실을 파고드는 것이 그렇게 즐겁던가. 톨비쉬는 어쩐지 사과를 움켜쥐는 자신을 떠올렸다.
뚝하고 반으로 잘라낸 과육속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새하얗고 균일하게 차있는 과육의 표면으로 반투명한 과즙이 베어나오고 있었다. 그 완벽해보이는 유백색의 향긋한 과일귀퉁이 끄트머리 불과 1-2cm정도를 파고든 무언가가 매끄러웠어야할 사과의 표면을 망쳐내고 있었다. 파고들었을 무언가는 이미 사라지고 남은것은 말라비틀어진 굴착의 상처뿐.
갈색으로 변질된 상처를 도려내고 온전한 부분을 찾아 사과를 돌려보았다. 여기도 하나, 또 저기도 하나 벌레먹은 자국을 조금씩 도려내어가는 동안 사과가 점점 작아져갔다.
결국 그의 손에 남은것은 딱딱하고 질긴 섬유대와 둥그스름한 씨방, 그리고 갈변되어가는 얄팍한 사과대의 반쪽이었다.
피곤했다. 톨비쉬는 마른 한숨을 내과 함께 입가를 쓸어내렸다. 환상을 걷어낸 현실아래 매마른 입술이 쓰게 느껴졌다.
품안에 집어넣기까지 너무 많이 망설인 탓이었다.
다우라를 너무 오랫동안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이라고, 그래서 손이 쓰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톨비쉬는 아무도 듣지 않을 변명을 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 씁쓸함은 아마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몇번이고 무심코 입가를 매만질때면 그는 오늘의 기억을 떠올릴것이다. 결과가 어찌되었든 이건 그가 선택한 책임이었다.
다시 골목에서 나와 걸음을 걷기 시작하자 발밑에 바스락거리는 전단지가 밟혔다.
누구를 위한 칼리번인가. 라는 붉은 글자가 눈을 어지럽혔다. 톨비쉬는 발끝을 끌어 종이를 길 구석으로 밀어내었다.
밀레시안의 주소지까지 가는 것은 오래걸리지 않았다.
한적한 동네였다. 가끔실 길이 휘어져있긴했지만 길마다 늘어선 것은 모두 보급형 주택뿐, 끝없이 이어진 주택가의 한 구석 길안내용 안드로이드가 꾸벅꾸벅 졸고있었다.
부엉이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에게 길안내를 부탁하자 부엉이는 언제 졸았냐는듯 크게 기지개를 켜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개짓은 오래지 않아 활짝 펼쳐졌고 하늘을 두어번 선회한 부엉이는 크게 한번 울어보인뒤 다시 자신의 횃대로 돌아갔다.
톨비쉬는 한 주택앞에 멈춰선뒤 잠시 고민했다. 문을 두드릴까.
말아쥔 손이 너무나도 가볍게 느껴졌다. 톨비쉬는 잠시 자신의 손을 어색하게 바라보며 손톱끝을 매만졌다.
뭔가를 들고 왔어야 했나? 뭐라고, 진심이야? 서로 상충되는 마음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나왔다.
정신차려. 한가하게 대화하러 온게 아니라는거 알잖아.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톨비쉬는 문을 장식하는 놋쇠장식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얼굴이지? 온통 노란빛에 일그러진 쇠장식은 거울대용으로 쓰기에는 너무 최악의 조건이였다.
지금 나는 어떤 얼굴로 여기까지 온거지? 요원으로서일까? 아니면 전직 동료로서일까. 만나면 뭐라고 해야할까. 안녕 폰, 오늘 장례식장에는 왜 안왔습니까? 모두가 흘끔거리는 불편한 식장이었지만 그런대로 훌륭한 식을 마쳤습니다. 당신을 찾는 사람들이 아주 많더군요. 하지만 걱정마세요. 아무도 당신이 있는 위치를 모르는 눈치였으니까요. 나도, 그리고 우리 동료들도. 모두 당신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럼 지금 여기 도착한 나는 무엇일까. 불청객에 더 가깝지. 가슴속 은빛의 다우라가 대꾸했다.
다행히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그가 머뭇거리는 모습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톨비쉬는 꽤나 오랜 시간동안 그렇게 문앞에 서 있었다. 문을 두드리라고 요원의 톨비쉬가 말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걸 보면 집에 없는 것일지도 몰라. 놋쇠에 일그러진 톨비쉬가 대답했다.
그는 간절하게 밀레시안의 부재를 바랬다. 아니면 그 소문속의 능력처럼 미리 자신의 걸음을 알아채고 도망치기를 바랬다.
마주치지 않기를 바랬다. 동시에 그 얼굴이 보고싶었다. 묻고싶은 말이 있었다.
가능하다면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할 방법을 찾고싶었다.
그래, 전화라도 해서 당신에게 묻고싶었다. 왜 저를 떠났습니까?
톨비쉬는 천천히 열리는 문을 따라 고개를 들어올리며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그의 망설임과는 다르게 누군가의 그림자를 발견한 밀레시안은 한달음에 달려와 아무럼 경계심없이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문틈 사이로 머리가 빼꼼히 기울어져 나왔다.
“누구세요?”
당신이다. 동시에 당신이 아니다.
또다른 인격, 그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의 그림자, 허상의 가면뒤에 숨어버린 밀레시안이 가벼운 의문을 담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시한번 물어왔다.
“혹시 누군가를 찾아오셨나요?”
우리집은 아닌 것 같은데.. 라며 밀레시안은 완전히 문을열고 현관앞으로 한걸음 걸어나와왔다 집 주변을 둘러본듸 톨비쉬를 바라본다.
검은 양복에 키가 큰 남자, 가방도 짐꾸러미도 없이 맨손. 밀레시안은 잠시 고개를 기울이다가 한쪽 골목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혹시 가구매입하러 오신 분이라면 저쪽 골목건너 3번째 집이에요. 곧 이사나가시거든요.
아, 혹시 악기관련 업자분이신가요? 그렇다면 이길로 쭉 따라서 피아노소리가 들리는 집으로 가시면 되는데.. 지금쯤이면 매일 하는 연습시간이겠네요.”
“아뇨 저는..”
“아니면 집을 보러오신걸까? 음.. 제가 안내해드리고는 싶은데 저도 지금 집에 손님이 오기로 약속되어 있어서..
하지만 멀지는 않아요. 여기서 바로 꺾어서 쭉 가시면 나무둥치모양의 광장이 나오는데, 거기 은행직원에게 문의하시면 바로 빈집을 찾으실 수 있을거에요.”
‘아닙니다. 나는..”
“아 그렇네요. 제 소개가 늦었죠. 반가워요. 저는 이 집에 살고 있는…”
손을 뻗어내지 못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뺨과 입술, 코끝에 익숙한 스킨냄새가 어린 열기가 스쳐지나갔다.
“....밀레시안..”
“나는 이 집에 살고 있는....”
“그만. 밀레시안. 이제 그만하세요.”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들어올리던 손을 거두어 가슴위로 끌어당겼다.
커다랗고 마른 주먹이 가슴을 짓누른다. 평정을 가장하려는 표정사이로 괴로움과 당혹스러움이 스쳐지나간다.
흔들리는 금빛이 눈이 부시다. 원망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그 눈이 너무나도 푸르렀다.
당신이다.
기억을 지워도, 얼굴을 가려도. 이름을 버리고 시간을 버려도.
이 열기와 이 냄새, 그 눈빛, 그 목소리. 모든것이 당신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
나는 내가 아니고 나는 그것이 아니다.
부정하고 또 부인하며 흔적을 지워냈다. 더이상 그 모습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마음을 베어내어 또다른 가면을 만들었다.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줘.
밀레시안은 다시금 했던 말을 반복했다. 고장난 녹음기처럼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요, 내 이름은, 나의 이름은, 이름은. 이름. 은.
“나는…”
쏟아지는 눈물이 뺨을 적시고나서야 밀레시안은 이 하찮은 가면놀이를 이어가기엔 자신이 너무 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 수 있을줄 알았지만 이미 자신은 성장해버렸다.
예전처럼, 자신을 감추고 마음을 죽이고 그렇게 사람들 틈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줄 알았지만 그건 이미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었다.
사람의 모습을 되찾았지만 사람이기를 포기했다. 생을 이어나갈 수는 있지만 그 의미를 포기했다.
이 마음은 너무나도 얕았고 너무나도 가벼웠다. 생각을 포기하고 도망친 결과는 이토록 가여웠다.
그런데도, 그랬는데도 밀레시안은 차마 그를 앞에두고 아무런 이름도 댈 수가 없었다.
거짓말은 숨쉬듯이 할 수 있었을텐데, 기만하는 것이 자신의 본질이었을텐데.
눈앞에 선 남자의 실망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두려웠다. 지금 양 손으로 눈을 가리고 나면 두번다시 당신을 볼 수 없을것 같았다.
그래서? 새까만 어둠속 검은 손이 밀레시안의 팔을 떠받혀 올렸다. 눈을 가린다.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한채 양 손을 모아 그 눈물을 받아내었다.
고개 숙인 밀레시안의 머리위로 차가운 금속소리가 울려왔다.
탄식과도 같은 한숨이 혀끝을 간지럽혔다. 밀레시안은 얼굴을 들어올리지도 못한채 양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허탈하리만치 간단하게 돌아온 그것이 무엇인지 보지않고서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버리기 위해 나를 버렸어야 했는데 당신들은 그렇게 간단하게 그 물건을 주워들어 내게 겨눠온다.
총을 겨눈 피오나의 요원이 말했다.
“밀레시안, 나는 당신을 죽이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그럼 죽여요.”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쏟아져 나왔다.
눈을 가렸는데도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 얼굴, 그 자세, 그 손끝과 그 총구가 가리키는 방향.
마치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 마냥 조각조각난 이미지가 머릿속을 점멸한다. 숨을 들이마시고 바람을 내뿜는다.
램프가 반짝인다. 나는 이곳에, 너의 안 공허한 이 밑바닥 아래. 오랜시간동안 잘게 부숴져왔던 검은 용의 조각이 밀레시안의 발목을 부여잡았다. 떠받혀올렸던 팔을 잡아내렸다. 목을 타고 올라왔고 가슴을 헤집고 들어섰다.
피부를 갈라내고 자리잡은 검은 돌의 파편들이 비늘과도 같은 모양새로 밀레시안을 감싸안았다. 비늘조각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기대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꿈이 있었다 예상한대로 흘러가지 않는 꿈이 있었다.
만능은 아니라 실망이었지만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막연한 기대감에 부풀던 꿈이 있었다.
오랜시간동안 깨고 잠들기를 반복하던 백일몽에 절어있던 자신이 있었다. 뱀이 입맞춘 귓가에 뾰족한 비늘이 돋아났다.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전에 당신에게 묻고싶은 것이 있습니다.”
“......”
“내가 당신을 죽인다면”
“........”
“내가 당신을 쏘겠다고 말한다면.”
“..........”
“당신은 내게 저항하실 겁니까?”
공허한 바람이 딱딱하긴 귀끝을 간지럽혔다. 허기진 뱀이 흩어지는 숨결속에 남아있을 온기를 핥고 있었다.
은빛의 입김이 흩어졌다. 이 마음은 슬픔이라 이름붙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절망이라 이름붙일 수도 없었다.
후회도 아니었고 연민도 아니었다. 긍지도 아니었으며 현명하지도 않았다. 강인하지 못했다.
솜씨좋게 빠져나가지도 못할 것이고 두려움에 숨어버리지도 못할 것이다.
이 마음에 붙일 이름이 없었다.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기엔 너무 보잘것 없는 믿음이었고 얄팍하고 하찮은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다.
마음이 깨어졌고 가면은 떨어져내렸다. 밀레시안은 한없이 검고 깊은 눈으로 톨비쉬를 올려다보았다.
바이브카흐도, 검은 용도, 은빛의 상영막도, 터널터널 돌아가던 테이프도 사라진 칠흑의 공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어둠속 검은 비늘로 가득 채워진 뱀의 아이가 대답했다.
“왜 내가 못할거라고 생각해요?”
“.........”
착각이겠지..? 톨비쉬는 한순간 보인 밀레시안의 입김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숨결사이로 은색의 안개가 뿌옇게 서리다 사라졌다. 착각이겠지, 잘못 본 것이겠지. 밀레시안의 눈이 무슨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모든 빛이 검었고 또 검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다. 방금 들었던 그 목소리가 원래의 목소리인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당신을 알지 못한다. 이런 모습의 밀레시안을 알지 못한다.
극장에서 나와 가장 먼저 퀸을 찾아간 그는 밀레시안을 안막고 뭘했냐고 따져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그러는 너는 무엇을 했냐고.
그는 최선을 다했다. 이 낯선 바이브카흐의 그림자를 앞에두고 최선을 다해 밀레시안을 붙잡았다.
한순간이라도 눈을 때면 그 깊은 어둠속 어디론가로 빨려들어갈 것같은 심연의 눈동자속, 밀레시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한다. 모든 가면이 깨어진 밀레시안은 완전한 타인, 완전한 별개의 개체.
톨비쉬는 지금이라도 당장 방아쇠를 당겨야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손을 움직여. 요원된 톨비쉬의 의지가 속삭였다.
지금 당장 방아쇠를 당겨. 밀레시안을 만나기를 희망했던 놋쇠의 그림자가 속삭였다.
저 검은 짐승의 어딘가 그가 알고 있던 밀레시안이 있을것이다. 그럼 이 짐승의 거죽을 걷어내면 그 밀레시안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 또한 가짜, 혹은 그것또한 그림자. 왜 못하겠는가. 왜 저항하지 않겠는가.
시대에서 떨어져나온 휘광의 그림자에겐 단 하나의 목표가 주어져 있었다. 살아남을 것. 살아남고 또 살아남을 것.
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포기한 검은 짐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자신을 죽이려는 타인의 총구 아래서 밀레시안들이 선택할 행동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톨비쉬는 그자리에 얼어붙었고 밀레시안은 그런 톨비쉬를 빤히 바라보았다.
수십가지의 생각을 떠올렸다. 어느 방향으로 공격을 피할지 어느방향으로 반격할지 어떻게 그를 제압하고 어떻게 그를 수습할지. 어떻게 이 일을 숨길지. 없었던척, 모르는척, 그를 만나지 않았던척, 혹은 이 자리에 없었던 척 거짓의 정보를 만들어낼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마음 한구석에서 꿈틀거리는 괴로움을 꺾어내고 밀레시안은 다시금 생각했다.
죽일까?
누구를?
이 사람을.
그러니까 누구를?
피오나의 요원을
그러니까 누구를?
….
“.......”
눈물로 씻어내린 손바닥이 밀레시안의 입을 가렸다.
움직이는 입술을 숨기고 흘러나온 숨결을 끈적한 물방울로 붙잡아 소리를 죽였다.
소리가 되어 흘러나오지 못한 이름이 손바닥안을 맴돌다 허망하게 흩어져버렸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대상을 인지한다는 것. 대상을 인지한다는 것을 상대를 떠올린다는 것.
누구를?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도망쳤던가. 무엇을 두려워해서 이토록 도망쳤던가.
그일까? 아니면 그들일까. 밀레시안은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던 이름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무엇을 위한 노력인지 헤아릴 길도 없이 밀레시안은 까맣게 물들어버린 스케치북을 긁어 덮여진 색을 드러내었다. 덧발라진 녹음이 사무친다. 쌔까맣게 물들어버린 거친 손끝 아래로 녹색의 빛이 드러났다. 당신일까? 아니면 당신일까.
눈을 깜빡일때마다 녹색은 붉게, 혹은 다시 녹음으로 변하며 눈을 어지럽혔다.
거뭇한 그을음을 걷어낸 종이아래 글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동시에 속에서 매스꺼운 기분이 느껴졌다.
밀레시안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으며 집안으로 도망쳤다.
돌아서는 밀레시안에게 한박자 늦게 반응한 것은 톨비쉬도 마찬가지였다.
그자리에서 도망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톨비쉬는 현관을 밟는 것을 주저하며 어설프게 다리를 뻗어내었다.
톨비쉬가 황급히 밀레시안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 낯익은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너무나도 익숙한 밀레시안의 방에서 나던 특유의 그 잔향과 잘 다려진 페브릭따위의 냄새, 그리고 아주 옅은 피냄새.
밀레시안은 그대로 화장실앞에 주저앉아 연거푸 속을 개워내었다.
괴로운 기침이 이어지다가도 곧 위장을 쥐어짜내어 속을 뒤집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톨비쉬는 당황스러워하며 변기앞에 주저앉은 밀레시안을 내려다보았다.
엉겹결에 손을 내려 등을 두드려주려 하지만 매서운 손날과 함께 손등위로 날카로운 손톱자국이 그어졌다. 경계어린 시선이 이어졌다.
톨비쉬를 쏘아보던 밀레시안은 그의 손에 들린 다우라를 한번 돌아본뒤 다시한번 헛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멈춰있던 시간이 휘몰아쳐 들어오는 것 처럼 집안에는 또다른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밀레시안이 대답하기도전에 세차게 문을 두드리던 방문객은 요란하게 발소리를 울리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톨비쉬는 반사적으로 현관문을 바라보았지만 현관문은 여전히 열려져있는 상태. 닫혀있던 것은 부엌쪽의 작은 쪽문이었다.
부엌을 건너 거실로 들어온 사람은 밀레시안의 이웃집에 사는듯한 작은 꼬마아이 두명이였다.
“누나!! 오늘도 티비 먼저 보고 시작할게요!!”
“시작할게요!!”
골목에서 가장 목소리가 클 것같은 남자아이와 너덜너덜한 토끼인형을 든 작은 여자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거실소파에 걸터앉았다.
아이들은 익숙한듯 리모컨을 찾아 티비를 틀었고 작은 아이는 테이블에 놓여져있던 과자를 까 입에 넣었다.
아이들은 티비가 켜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호기심어린 눈으로 톨비쉬를 바라보았다.
누굴까? 손님? 설령 손님이라 하더라도 아이들은 비켜줄 생각이 없다는듯 뻔뻔한 얼굴로 톨비쉬를 훑어보았다.
아이들의 시선이 다우라로 향하기전에 톨비쉬는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감추었다.
의심어린 시선이 이어졌다. 톨비쉬가 어정쩡하게 손을 뒤로 감추는 동안 밀레시안은 입가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꺼풀안쪽으로 검은 비늘이 떨어져내렸다. 마른 모래가 버석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울리며 옷깃을 움켜쥐었다. 비켜.
밀레시안은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톨비쉬를 움켜쥐었다. 검은 눈동자가 줄어들고 본래의 색이 드러났다. 깜빡거리는 눈동자가 촛점을 맞추지 못하는 카메라처럼 연거푸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같은 위태로움이 그의 품안에 멈춰있었다. 톨비쉬는 밀레시안을 끌어안고 싶었지만 손이 충분하지 않았다. 은백색의 다우라가 서늘한 빛을 내며 흔들렸다.
아주 사소한 금속소리에 밀레시안은 미련없이 톨비쉬를 밀어내며 몸을 돌렸다.
다시한번 옅은 피내음이 스쳐지나갔다.
언제 무엇이 피빛을 비쳤는지 알길도 없이 사용자가 떠난것을 감지한 변기가 물을 빨아들였다. 휘몰아치는 검붉은 물결사이로 겹겹이 말린 휴지 한뭉치가 쓸려내려갔다.
톨비쉬가 흘러가는 물소리에 주의를 빼앗긴 동안 밀레시안의 시선은 곧장 아이들을 향해 돌아갔다.
걸음마다 검은 모래가 떨어져 내렸다. 밀레시안이 미소짓는다.
환하지는 않지만 선량하게, 부드럽게, 방금전까지 온몸을 죄어오던 뱀의 비늘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양, 밀레시안은 아이들을 향해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아이들은 아는 얼굴이 보이고 나서야 다소 안심이 된 얼굴이 되어 활짝 웃음지었다.
“있지 있지. 누나!! 아까 도로에 이상한 사람들이 막 지나갔다?”
“커다란 피켓들고 현수막도 들고 막 축제처럼 지나갔어!”
“하지만 엄마는 축제같은거 아니니까 보지 말래..!”
“막 꽃가루같이 종이도 많이 많이 뿌렸는데 아빠가 줍지도 말로 읽지도 말래..! 나 이제 글자 잘 읽을 수 있는데..!”
아이들은 골목에서 마주친 반칼리번단체가 궁금한 눈치였다.
밀레시안은 아이들이 만난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는 눈치이지만 대강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톨비쉬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무방비하게 등을 돌린채 소파에 기대어 고개를 숙였다.
방금전까지 살벌하던 검은 짐승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자아이는 여전히 자신이 어떤 글자까지 예습해왔는지를 자랑하기에 바빴고 남자아이는 길에서 마주친 이상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고싶어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퍼레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중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사람도 있었다는게 그 이유였다.
단 두 명의 아이들인데도 집안이 소란스러웠다.
화장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문득, 대화가 끊기고 세 쌍의 시선이 고개를 돌렸다.
톨비쉬는 문고리를 잡은채 머쓱한듯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한쌍으로 맞춘듯한 가면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가면으로 가려지지 않을 날카로운 시선이 그의 몸을 훑어내렸다. 오른손은 문고리 위에 왼손은 허벅지 앞에.
양 손이 모두 빈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밀레시안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밀레시안이 아이들에게 속삭였다.
미안해, 오늘은 같이 책읽어주는건 못할것 같아 과자를 다먹으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줄래? 급한 손님이 왔거든 아이들은 내키지는 않지만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입 안가득, 그리고 양손에도 가득, 테이블위로 아직 까지도 않은 과자가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톨비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면 선약이 있다고 했었던가.
밀레시안은 여전히 톨비쉬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채 가까이 다가왔다.
다가선 숨결이 어쩐지 차갑게 느껴졌다.
밀레시안은 언젠가 나이프를 내려다보던 서늘한 눈빛으로 톨비쉬를 바라보았다.
“주방으로 가있어요.”
“.......”
“애들앞에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나가라고.”
아이는 손안에든 과자까지 모두 삼킨뒤 마지막 과자의 포장지를 찢으며 소파 깊숙히 몸을 기대어 앉았다.
제멋대로 돌아가던 채널이 드디어 멈춰섰다. 아이가 조작한 것인지 아니면 무슨 기능이 달린 버튼을 눌렀던 것인지 한참동안 돌아가던 티비에서는 잠시 요란한 프로펠러소리가 들리는 화면앞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오디오소리가 사라진채 청명한 하늘을 비추는 화면속에는 어딘가의 검은 바닥을 비추며 바람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 빈 공간이 뭐가 그리 흥미로운건지 눈을 크게 뜨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밀레시안의 기세에 밀려 뒤로 물러서려던 톨비쉬도 그 화면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밀레시안도 고개를 돌렸다.
한눈을 파는 그에 대한 경멸이기도 했고 어쩐지 스산하게 들려오는 프로펠러 소리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을 먼저 이야기해야할 지 모르겠네요.”]
가면을 잃어버린 하얀 로브의 퀘사르가 말한다.
[“시간은 부족하고 해야할 말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것을 털어놓을 만큼 당신은 너그럽지 않았겠죠.
그래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부터 해야할 것같네요.
당신이 알고 있건, 알지 못했건 이 에린에 역병의 밤은 모두 세번 찾아왔습니다.
한번은 불완전했고 다른 한번은 시작되기 전에 막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번은 지금 바로 지금이될겁니다.”]
안돼. 톨비쉬는 생각이 머릿속에 도달하는 것보다 빨리 소리내어 입을 열었다.
보면 안돼. 아이들에게 말해야하는 것인지 밀레시안에게 말해야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한마디가 입안에서 툭 굴러떨어졌다.
톨비쉬의 목소리를 들은 아이들은 고개를 돌렸다.
왜요? 하고 묻고싶은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테니까요.
왜 오늘이어야 했는지는 모릅니다. 반대로 오늘이면 안 될이유도 없지요.
아무래도 좋은 이유였었고 아무 이유도 아닌것은 아니었습니다.
빨리 끝내면 빨리 끝낼 수록 좋았지만 느리게 끌면 느리게 끌 수록 좋은 점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내게 화가 났을 겁니다. 왜 그랬어야 했을까.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어야 했을까.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을 휘말리게 해놓고 그렇게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을까.
이에 관해서는 해야할 말이 길어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만은 말해두도록 합시다.
당신이 모르던 내가 있었습니다. 당신을 모르던 내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겹친 시간은 찰나에 불과할만큼 짧았고 그럼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잘모르겠나요? 그럼 당신의 주변을 둘러보세요. 당신의 주변에도 나와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고 나와같은 동료가 있을겁니다. 루에리는 당신에게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지만 당신의 안에도 우리와 같은 모습이 있을 겁니다.
당신의 이름을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그 앞에 붙었던 명칭을 생각해보세요,
그리요. 우리에게는 이 또한 하나의 퀘스트에 가까웠던 것 뿐입니다.
당신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 이름들이 지나왔던 수많은 시간들을 가까이서 들여본다면 이와같은 일들의 반복이었습니다.
사람이 적었건 규모가 더 넓었건 늘 일어나던 일이었고 늘 스쳐지나가던 당신의 일상이었습니다. 음.. 이런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제발 밀레시안. 지금은 내 말을 들어요. 지금 당신은 이걸 보면 안돼.
그는 지나치게 총명했다. 그리고 지나치게 눈치가 빨랐다. 그는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었고 그는 지나치게 경계하고 있었다.
화면의 사이사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만큼 짧은 시간.
화면이 점멸한다. 타원형의 어둠이 연속된 영상을 단절시킨다. 톨비쉬는 밀레시안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밀레시안 또한 그 어둠을 발견해 내었다. 시선이 마주친다. 녹음이 흔들린다.
밀레시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니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죠. 당신과 당신의 사람들과 당신이외의 사람들도 포함되는 본론입니다.
자 우리가 질문했던 날로부터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는데 당신들의 대답은 어땠습니까? 생각해보셨나요? 고민해보셨나요?
무엇이 주어졌고 무엇이 스스로 구해낸 것인지 한번 가늠해보셨나요? 내게 주어진 것이 정말 내것이었나요?
남에게 배풀었던 것이 정말 그를 위한 일이었나요?
어디서부터가 꿈이었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이었습니까. 당신과 여러분들은 어디까지의 꿈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레시안..!!”
[“무엇을 바랬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꿈꿨습니까. 무슨 꿈을 포기했고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붙잡혀 당겨진 팔이 멀게 느껴졌다.
바로 옆에있을 그 너무나도 느리게 움직였고 머나먼 곳에서 이야기하고 있을 그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소리가 끊어졌다. 톨비쉬의 목소리가 유리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부서진 목소리는 꿈결같이 아름다운 빛으로 흩어져내렸고 그 빛은 곧 설원의 색을 띄며 소복히 쌓여들어갔다.
아이들이 앉아있는 소파를 사이에 두고 기묘한 설원이 내려 앉았다. 발밑으로 두개 이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당신이 서 있는 설원위로 아무런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 꿈의 시작이 언제부터인지를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꿈은 깨어나는 순간 모두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가끔씩 그 찝찝한 기분이 남기도 하지만, 괜찮습니다. 다 괜찮아요.
이해하려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무엇때문인지 무엇을 위해서인지 이 모든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사람들은 그 대부분을 이해하지 않은채 흘러넘깁니다. 그러니 당신도 이해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그날부터 지금까지를, 그냥 나쁜 꿈으로 생각하세요. 아주 나쁜 꿈이요.
처음부터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그렇게 생각하세요.
언제인지 모를 까마득한 언젠가 당신은 그저 도망쳤고 이 일은 단순한 사고였습니다.
처음부터 퀘사르따위는 아무데도 없었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일찍이 같은 면을 가지고 있는 동전이 있었죠.
한쪽 면에는 아발론이라 적혀있고 다른 한쪽면에는 퀘사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둘 모두 필리아의 실리엔에 의해 쓰러졌고 둘 모두 죽음의 문턱까지 흘러나갔다 돌아왔는데도 그 운명은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칼리번의 반신이 되었고 다른 한쪽은 칼리번의 그림자가 되었지요. 무엇이 그 차이를 갈라놓았을까요. 간절함? 절실함? 진실성이었을까요? 아니면 영혼을 불태울만큼 강렬한 마음이었을까요.
그리고 또하나, 실리엔에서 태어나 칼리번에 의해 작성되었지만 스스로가 칼리번을 다룰 수 없을 것이라 여기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발론도 아니고 퀘사르도 아니었지만 그 둘 모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왜 그들은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게 되었을까요? 왜 어느쪽도 선택하지 못한채 누군가가 평가내리기를 기다렸을까요?
기억의 처음 시작이 어디인지도 모를텐데 그들은 처음 들은 목소리와 처음 본 얼굴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무엇이 당신들을 강제했습니까 무엇이 당신들을 옭아매었나요? 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맹목적이고 헌신적이었습니까?
첫번째 역병의 밤은 사물의 기록이었고 두번째 역병의 밤은 사람의 육신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세번째 밤이 무엇인지는 당신도 알겠지요?”]
섬광이 터져나왔다. 환상을 넘어 그가 손을 뻗어왔다.
꽁꽁옭아매어오는 강인한 팔을 통과해 유령처럼 반투명한 하얀 장갑이 뺨을 어루만져왔다.
따스하다. 하지만 이 온기가 누구의 것인지를 모르겠다.
지금 자신을 꽉 끌어안는 이사람의 것인지 환상속의 그의 것인지 아니면 흘러넘치는 눈물의 것인지.
[“네. 밀레시안, 이것은 한 낮에 일어나는 아주 짧은 환상입니다.
다른 이들이라면 찰나의 기시감으로 인식하겠지만 당신은 아니죠. 당신만은 아닙니다.
아발론에게도 아닐것이고 케트양에게도 아니겠지만 이젠 당신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퀘사르들도 도르카 페다인도 없어진 오늘은 세상이 당신에게만 상냥하지 못한 날.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상처가 지나갔습니다.
당신은 루에리에게서 절망하는 마음을 받았고 나에게서 후회하는 마음을 받았습니다. 마리에게서는 슬퍼하는 마음을 받았고 아발론에게서는 추억하는 마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고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걸 내려놓을 때가 왔습니다. 숨가쁘게 달려왔던 당신을 멈출때가 왔어요.
잃어버린 과거를 찾는 일을 그만 두고 넘겨받은 마음을 지키는 일을 그만두고.
당신의 마음을 당신의 것으로 채워야 할 때가 왔습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모든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온거에요.
나의 여정이 끝났던 것과 같이 당신의 여정에도 끝이 찾아왔습니다.
부서지고 갈라져 갈피를 잃었던 이야기도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습니다. 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생각하세요.
당신이 지나왔던 길의 흔적이 아닌 지금 당신의 모습을, 당신의 말들을, 곁에 무엇이 있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해야할지를.
세상의 끝에 다다른 기분은 참담할 겁니다. 겁이나고 막연히 두려울 겁니다.
이것이 끝인지 이렇게 끝내야 할 것인지 그동안의 여정은 무엇이였고 왜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를 후회할 겁니다. 슬플겁니다. 잃어버린 말들이 지나쳐왔던 전장들이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일때 떨어져나온 자신의 모습이 원망스럽고 부끄러울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것또한 당신이 건너온 운명. 흑과 백 검고 하얗던 여정의 끝에서 당신이 가장 바라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리세요.
그리고 이름을 붙이는 겁니다.
그게 당신의 새로운 이름이고 당신의 새로운 생명일겁니다. 당신이 나아갈 당신만의 길.
그 이상부터는 되돌아오는 것도 나아가는 것도 오롯이 당신의 운명이겠지만..”]
운명이겠지만..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허상을 걷어내는 거친 손길이 뺨을 돌린다.
나를 보라고, 제발 자신을 보라고. 간절하게 바라는 푸른 눈이 억지로 밀레시안의 얼굴을 잡아돌렸다.
기대는 품속에서 잘그락거리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심장의 소리를 가로막는 커다란 금속의 막대가 딱딱하게 뺨을 짓눌러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들이마시지도 내쉬지도 못한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일그러지는 입술위에 낯선 온기가 짓뭉게졌다.
[“나아가세요 당신의 삶을 향해 나아가세요. 나의 폰.
당신이 스스로 살기로 마음먹었다면 과거의 이름을 넘어서라도 나아가도록 하세요.”]
끝까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당신들이 무슨생각을 하는지 왜 그런 이름으로 돌아왔는지 무엇을 위해 그들을 희생시켰고 무엇을 위해 또다시 그렇게 자신들을 희생시키는지. 왜 나를 돌아보는 것인지 왜 그렇게도 나를 가엾게 여기는 것인지. 나는 무엇을 해왔던 걸까. 무엇을 믿었던 걸까.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지키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동시에 어렴풋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이 던진 그 모든 질문이 사람의 것이었다. 당신이 보여준 그 모든 기만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당신이 알려준 그 모든 헌신이 사랑이었고 당신이 내어준 그 모든 상처가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밀레시안은 생각했다. 차라리 당신이 있는 그 설원으로 넘어간다면 이 마음이 편해질텐데.
하지만 옭아매어오는 이 팔이 너무 강인해서 뿌리칠 수가 없었다. 눈이 부셨다. 호흡이 차오른다.
뜨겁고 달착지근한 열기가 억지로 입을 벌리고 숨을 쉬도록 강요했다.
빛은 점멸했고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섬광에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깜빡인다. 머릿속에서 그리고 또 눈앞에서 한참을 점멸하던 그 빛은 한순간에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잠시동안의 침묵이 지난 후, 톨비쉬는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이들이 울고 있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실감과 기묘한 공백감에, 그리고 놀란 마음에.
아이들은 이내 사이렌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크게 소리내어 자신들의 보호자를 찾아 현관으로 걸어나갔다.
아이들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 동시에 품안으로 묵직한 무언가가 쓰러져내렸다.
톨비쉬는 정신을 잃은 밀레시안은 추스려 안으며 생각했다. 어디로 가야할지를. 무엇을 해야할지를.
기억이 점멸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결론내였다. 혼란이 가라앉으면 곧 추격자들이 올 것이다.
그것이 밀레시안을 쫓기 위해서건 퀘사르들을 쫓기위해서건 상관없이 에린의 모든 진실을 쫓는 이들이 밀레시안을 찾아낼 것이다. 떠나야한다. 사라져야한다. 누군가가 밀레시안의 이름을 결정하기 전에, 누군가가 밀레시안의 이름대신 책임이라 부르기전에.
하지만 어떻게? 혼란스러워하는 톨비쉬의 귓가에 낯이 익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친듯 피곤에 잠긴 웃음소리는 사뭇 태평할정도로 나른하게 속삭였다. 가엾고 다정한 별의 아이. 내가 너에게 무엇을 더 남겨줄 수 있을까. 톨비쉬는 홀린듯이 자신의 손목을 들여다 보았다.
이윽고 활짝 열린 현관문 앞으로 차가 멈춰선뒤 다급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톨비쉬..!!”
“기억 안나.”
“그럴 줄 알았다니까.”
에일레흐의 대리자, 에레원은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멀린을 쏘아보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멀린은 얄미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에레원의 친필로 쓰여진 종이를 흔들고 있었다.
종이는 평소의 에레원이라면 공식석상에서는 절대로 쓰지 않았을법한 거친 필체로 쓰여져 있었다.
내용은 자신이 무언가를 기억못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사전에 공지받았으며 만일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때는 제로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겠다는 내용의 각서였다.
전적으로라는 말에서 얼마나 망설였던 것인지 종이는 몇번이고 다시 고쳐쓴 흔적이 역력했다.
수상하기짝이 없는 문서이지만 에레원은 꼼짝없이 그 종이를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서명과 필체, 그리고 흘려쓰는 버릇까지 모두 자신의 것, 에레원은 짜증스럽게 멀린을 흘겨보았다.
“문서따위는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잖아. 다른 증거를 가져와.”
멀린은 두번째 서류를 내밀었다. 영상과 음성, 기타 기기를 사용한 모든 증거물은 조작 혹은 훼손 될 위험이 있으며 이에대한 내용을 사전에 충분히 공지받았다는 내용의 문서였다. 에레원은 폭발했고 안드라스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에레원이 떠드는 동안 다우라는 숙취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며 고심하는 표정으로 테이블에 팔을 괴었다. 눈을 감고 고요하게 입을 다물었다. 곱게 감겨진 그녀의 눈꺼풀은 도무지 다시 들어올려질 생각을 하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혼란이 가라앉지를 않는 연합회의 회의장. 이제는 전 연합회가 되어버린 네 그룹의 모임은 약간의 시름과 약간의 한숨 그리고 아주 많은 짜증과 불쾌함을 가지고 멀린을 바라보았다. 대비책은 없었어? 누군가가 멀린을 향해 물어왔다.
멀린은 말없이 디바와 프로페서를 가리켰다. 서로의 기억을 확인중이던 두 사람은 멋쩍은 혹은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조증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과거의 사례를 조사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밤중에 일어났다면 수상하게 여겼을까? 기묘한 전자음이 났다면 경고의 의미로 받아들였을까?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그리고 무엇까지? 모든 것이 그들의 시선이었고 모든 것이 그들의 귀였다.
불빛 하나, 작은 소리 한 음에도 칼리번의 의지가 담겨있었고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
멀린은 아예 회의실을 떠나지 조차 않았지만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을때는 이미 깜빡거리던 회의실의 전등에 시선을 빼앗긴 뒤였다.
그 주체가 가면을 잃어버린 퀘사르였는지 아니면 짝을 잃어버린 칼리번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오직 아발론이 키운 피오나의 요원들과 일부 에린의 특수한 몇몇 사람들, 그리고 필리아의 엘프들 뿐이었다.
그러나 유난히 온화했던 푸른 머리의 엘프는 어쩐지 저도 몸상태가 너무 나쁜것같네요 라며 은근슬쩍 회의장을 빠져나갔고 대신 짙은 남빛을 가진 대리인을 보내왔다.
멀린은 메이크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딴청을 부리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혀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완전 난장판이네. 사람의 옷을 입은 작은 원숭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막대한 영향력이 사라졌음에도 에린은 너무나도 평온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간의 기시감을 느끼는 정도에서 끝났다.
민감한 이들은 상실감을 느꼈지만 곧 신경이 예민해진 탓이라며 잊어버렸다.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을 꼽으라면 그나마 도시 곳곳을 순회하던 반칼리번단체의 일원이 일제히 겁에 질렸다는 것 정도.
그들은 스스로가 무엇에 반대하고 무엇에 열광했는지 조차 잊어버린채 자리에서 멈춰섰다.
피켓은 곧 바닥으로 떨어졌고 종이뭉치는 바닥에 흩어졌다. 사람들은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무언가에 이끌려 알지못했다는 행동을 했다는 공포감에 질려 자리를 박차고 떠나갔다.
그 물건들은 보다못한 누군가가 쓰레기 봉지를 들고 나올 때까지 방치되었고 이내 분리수거장으로 이동되었다.
이전 퀘사르의 이름이 터부시되었던것과 같이 칼리번의 이름이 불길함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막연한 불안감으로 외면한 진실과 달리 일부러 조작된 진실들도 있었다.
피오나는 도산으로 처리되었고 브류나크는 특정할수 없는 괴단체에게 습격받은 것으로 조작되었다.
허공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크로우 크루아흐에서 뛰어내리는 맨몸의 괴한들보다 이름도 출신도 모를 공습부대가 브류나크로 강하하는 영상이 훨씬 더 현실성있게 받아들여졌다.
연출이 너무 영화같지 않느냐는 멀린의 핀잔에 레자르는 투명화가 가능한 커다란 캐리어가 발명되거든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며 삐딱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가상의 이야기라면 당신이 담당하는 이야기가 더 허구에 가깝지요. 멀린은 화면을 내린 뒤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제로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었고 가상의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반인중에서도 칼리번의 영향을 견뎌낸 사람들은 있었기에 이따금씩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이 튀어나오기도 했지만 의례것 그래왔듯 뜬소문으로 사라졌다.
무슨생각인지 모르겠어 그 영감. 멀린은 한번더 머리를 휘저으며 테이블위로 엎어졌다.
이제와서 피오나의 단장을 원망해봤자 자리에 없는 이를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쫓을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 그가 무슨 세상을 바랬는지 왜 피오나라는 요원들을 남겨두었는지 언제 사라졌고 어떻게 사라졌는지.
멀린은 막연하게 생각했다. 만약 브류나크가 온전히 남아있고 제 기능을 다했다면 분명 그가 원하는대로 칼리번의 입지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어 갔을거라고. 그랬다면 이와같은 혼란도 없었을 것이고 이와같은 논란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그 영광된 빛의 이름을 잊게되었을때 밤의 그늘아래 걸어나온 광명의 그림자가 마지막 빛을 꺼트릴 예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떤 얼굴인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역할을 확실히 깨달은 마지막 후계자가 번복된 예언을 깨고 시대의 막을 내렸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하지만 그렇게되지 않았지. 결국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조차도 어쩌면 예언의 번복.
머릿속이 복잡했다. 머리를 헤집는 동안에도 지도속 작은 아이콘들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뿔뿔히 흩어지는 피오나의 요원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었다.
도시속에서, 숲 어딘가에서, 바다한가운데서, 도로 어딘가에서. 점점히 줄어가는 지도위로 누군가의 비정규적 통신이 들어왔다.
멀린은 삐딱한 자세로 통화를 받았다.
“반갑네, 멀린군.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연락하게 되었네.”
“........누구신데 이렇게 귀하신곳에 누추한 영상을.”
“아.. 나는.. “
화면속 투구를 쓴 낯선이는 얼굴을 드러내어보이며 가볍게 웃어보였다.
가슴팍에 달린 방패의 앰블럼이 반짝거린다.
“일단 단장이라고 부르면 될 것같네.”
신호가 끊겼다.
킹은 집요하게 따라붙던 누군가의 추적이 끊어졌다는 것을 보고하며 쓰고있던 고글을 끌러내렸다.
6인용 차량에 4명밖에 타지 않았지만 유난히도 공기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톨비쉬는 피곤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밀레시안은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고 정처없이 달리던 차 또한 어딘지모를 휴게소에 정차했다.
퀸이 따끈한 캔 음료를 내밀었다. 포장만 보아도 달착지근한 맛이 느껴질 정도로 노골적인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뭐든 입에 밀어넣는것이 중요했다.
톨비쉬는 맛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뜨뜻한 음료를 한입에 털어넣었다.
“밀레시안은?”
“자고 있어”
밀레시안은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마신뒤 길게 내쉬었다.
눈꺼풀이 아래로 간헐적인 움직임이 보이고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걸까. 킹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길고 긴 여정동안 한번도 깨지 않은 그 꿈이 고되고 힘든 이야기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킹이 뒤를 돌아보는 동안 다시 운전대 앞에 앉은 퀸은 느릿하게 페트음료의 뚜껑을 돌렸다.
경쾌한 탄산음과 함께 역시나 달착지근한 사탕냄새가 풍겨왔다.
조금은 새큼한 음료를 꿀꺽꿀꺽 마시던 퀸이 반짝거리는 램프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룩의 연락이었다.
“연락...”
“아, 응.”
킹은 서둘러 무릎에 내려놓았던 고글을 다시 뒤집어썼다. 손가락이 움직인다, 고개를 몇번 가로젓다가 끄덕이고는 허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조금 더 가면 알반에서 이쪽으로 마중을 보내올거야.”
“믿을 수 있어?”
“추적을 끊어낸 것도 저쪽이라나봐. 제로랑 합의를 봤나봐.”
다른 이들과는? 퀸은 차마 떨어지지 못한 입술을 탄산음료로 축이며 고개를 돌렸다.
무릎을 내려다보고 있던 새파란 시선이 거울을 향해 움직였다. 출발할까? 톨비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 여행이 될것이라고, 킹은 다시금 뒤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아주 멀리, 에린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그 누구도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며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곳으로.
“눈이 내리는 곳이면 좋겠어.”
톨비쉬는 아무런 맥락없이 입을 열었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 따뜻해지겠지만, 겨울에는 온세상이 하얗도록 눈이 내리는 지역이면 좋겠어.”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마중을 나갈것이라고 이번에야말로 이 손으로 데리고 돌아올 것이라고.
나는 당신이 싫어해도 쫓아갈 것이고. 당신이 나를 거부해도 따라나설 것이다.
당신의 입으로 나를 거절할때까지 몇번이고 이름을 부를 것이고, 당신이 진심으로 나를 미워 할때까지 이 마음을 전달할 것이다. 온전한 당신의 눈으로 당신의 목소리로 당신의 이름으로 나를 밀어낼 때까지. 밀레시안. 나는.
톨비쉬는 눈을 감았다.
총성이 들려왔다.
글
톨비밀레) reload #14
타르라크의 목덜미를 뜯어낸 변이체는 살점을 물고있는 모습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내렸다.
검은 핏물이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머리 없는 몸체는 여전히 타르라크의 머리와 팔따위를 잡고 서 있었지만 그마저도 곧 루에리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떨어져 나갔다.
목덜미를 부여잡은 타르라크가 슬로우모션마냥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쓰러쓰러졌다.
벌려진 입에서 의미없는 신음소리가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숨이 휘어지지 않는다.
뜯겨나간 상처보다 돋아나는 비늘의 속도가 더 빠른듯 보였다.
타르라크의 완연한 은색에서 순식간에 검게 변해버린 세상에 멈춰선 있었다.
바로 옆에 있을 루에리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메아리치고 흩어진다.
안돼.. 타르라크는 필사적으로 눈을 움직여 검은 그림자를 쫓았다.
루에리의 형상을 눈으로 쫓기 시작하자 조금더 선명하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와줘!! 아니 네가 도와야해..!!”
“......못해요.”
“젠장..! 못하는게 어디있어!! 도와!! 살려야 한다고..! 네가 여기까지 데리고 왔고 네가 지켜야할 사람이야..!
내가 아닌 타르라크를, 너를 도우려 했던 유일한 사람을 도와..!”
“몰라요.. 모르겠다고요.. 내가 돕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요? 내가 움직인다고 해서 뭐가 나아져요?
소용없어요. 불필요한 노력이야..! 나는 여기까지에요. 내가 올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지금 이 순간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노력이었어요...”
타르라크는 가까스로 루에리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의식이 흐렸다. 뜨문뜨문 멀어지려는 시야속 참을 수 없는 열기가 치솟아올랐다.
손안에 잡힌 루에리의 팔목이 비늘에 덮여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이 손목을 반대방향으로 꺾어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갑작스러운 괴력에 루에리가 타르라크를 돌아보았다. 급속도로 진행된 목을 타고 올라온 비늘이 그의 얼굴까지 침범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편,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또한 점멸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이 반지, 즉각적으로 발동되던 모리안과 밀레시안의 것과 달리 타르라크의 것은 유난히 반응이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모리안의 중화제는 변질된 글라스기브넨에게 듣지 않는다. 그럼 타르라크의 글라스기브넨에게는?
타르라크의 무언의 시선을 응시하던 루에리는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머리를 부여잡은 밀레시안은 마른 숨을 헐떡이며 못한다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살리기 위해서 해독제의 발동을 늦췄고 살리기 위해서 숙주의 침식을 가속화했다.
어느쪽도 타르라크의 생명을 놓치지 않기위해 각자의 방향에서 그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돼, 이대로는 남은 생명력만 갉아먹힐 뿐다.
루에리는 침착하게 타르라크의 손을 잡아때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타르라크는 다급하게 루에리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나...가..”
“안나가. 널 놔두고는 절대 안나가.”
“밀레시안.. 데리고…”
“널 놔두고는 절대 안나가!! 나도!! 그리고 저녀석도!! 두 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
이번에야 말로 너희들을 지켜내겠다고..!! 나는 그렇게 맹세했어..!! 그렇게 마음먹었어!! 젠장, 타르라크!!”
처음부터 함정으로 걸어들어가는 여정이었다. 모든것은 모리안의 뜻대로.
모리안은 필요없어진 밀레시안을 실험체로 사용했고 필요없어진 실험체들를 처분장으로 이동시켰다.
제아무리 망가진 인형이라 해도 밀레시안은 밀레시안.
칼리번을 맡긴다 한들 배신할 걱정도 없고 죽음을 명령한다 한들 거부할리도 없다.
한정된 요원의 수와 일시적인 중화제 무한이 증식하는 글라스기브넨과의 싸움에서는 승산이 없지만 일단 칼리번을 담은 반지가 연구소안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 때부터는 칼리번과 알비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는 승리할 것입니다. 모리안은 확신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알비의 스피커 곧곧에서 울려퍼졌다.
밀레시안이 불러들여온 칼리번은 닥치는대로 알비의 연구소를 집어삼키며 속 안부터 공백의 데이터로 지워나갔다.
연구소의 시스템이 사라지고 안드로이드들은 점차 제멋대로 움직이다 가동을 멈추기를 반복했다. 사격소리가 줄어들고 있었다.
문뒤에 숨어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대로 당하기만 할 것 같은가. 키홀은 알비의 시스템이 등록되지 않은 다른 안드로이드들을 대동한체 마우러스의 연구실로 향하고 있었다.
루에리는 마우러스가 쓰러졌던 방호부스로 달려갔다.
“어딘가 있을꺼야. 영감님이 나한테만 쓰던 라벨없는 시약. 분명 그거라면 타르라크를 구해낼 수 있을거야.”
“없어요. 없다구요. 있다면 포워르가 마우러스를 살려둘리 없잖아요.
있다 하더라도 당신이 조합해 낼 수 있을리 없잖아..!!!”
“시도해볼 가치는 있잖아..!”
루에리는 닥치는대로 손에 잡이는 물건들을 집어던졌다.
날카로운 메스나 유리조각따위가 이따금씩 그의 손을 향해 날을 새웠지만 이내 비늘에 튕겨져 나가거나 날이 닿기도 전에 꺾여져 나갈 뿐이었다. 서랍이란 서랍을 모두 꺼내 제꼈고 자물쇠를 부숴버렸다.
유리가 깨어진다. 챙강거리는 금속소리가 밀레시안의 신경을 몰아세웠다.
그렇게 절박하게 매달리지 말아줘. 그렇게 가능성없는 희망에 매달리지 말아줘.
참다 못한 밀레시안이 루에리를 향해 소리질렀다.
“있었으면..! 키홀이 이렇게 당하고 앉아있지만도 않았겠죠.
당신이 살아남은게 무엇이였건 그건 마우러스의 변덕이자 포워르를 설득시킬 증명서 같은 것이었어요..!!
마우러스는 그걸 완성시킬 시간을 벌기 위해 포워르와 거래를 했고 포워르는 이미 시약이 완성될때까지 장난감 처럼 당신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죠..! 알고있잖아요! 당신도 어느정도 눈치챘잖아요!!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마우러스에게 배신당했다는 것도 보고있잖아요!!”
“알게뭐야..! 실험을 했든 배신을 했든!! 네녀석이 채워넣은 저 무식한 약보다는 안전하다는거잖아..!!”
“중화제가 잘못되었을리는 없어요. 잘못된것이 있다면 아마 글라스기브넨 쪽.
추측대로라면 변이된 지점은 야수화의 촉발지점일거에요.
디안이 포보르에게 저항하기 위해 일부러 퀘사르들의 혈액에 조작을 가했고 그 결과 신체능력이 비상하게 증가된 퀘사르들이 만들어 졌었죠. 그리고 그건 자기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그게 디안이 남긴 저주에요. 반이 남긴 부정의 유산. 누군가 퀘사르를 부활시키려 한다면 찾아올 통제할 수 없는 재앙의 힘.. 그래서 듣지 않아요. 그래서 중화시킬 수가 없어.
힐웬이 실리엔과 반응해 그 원인물질을 제거하더라도 변형된 변이 인자가 끊임없이 남은 육신을 변질시키고 이미 한번 형태를 잃고 흐물흐물해진 몸은 야수화가 일어나기 가장 좋은 상태가 되어버렸고, 악순환의 악순환을 물고 변질된 글라스기브넨들은 계속해서 숙주의 몸을 공격해.. 약해빠진 털나부랭이가 아니라 단단한 비늘이 될떄까지, 대상자가 완전한 뱀이 될때까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날이선 고함소리가 수차례 오고 나서야 루에리가 겨우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설령 중화제가 있다해도 타르라크가 온전하게 되살아난다는 보장은 없어요. 오히려 더 고통만 가중시킬지도 모른다고요..!”
“그럼 나는 뭔데..! 나는 왜 효과를 본건데..!!”
밀레시안은 대답을 망설였다.
당신은 기적이라고, 나도, 칼리번도, 아마 모리안조차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인정하고싶지 않았다. 왜 당신만, 왜 그가 아닌 당신만. 여기서 당신을 부정하고 원망한다한들 이 망가진 운명의 고리가 다시 굴러갈 길은 없기에 밀레시안은 들숨 한가득 설움을 깨물어부수며 입을 다물었다.
목이 따가웠다. 잇사이로 흘러나가는 숨결에 울음소리가 베어있었다. 당신이 미웠다. 동시에 당신이 부러웠다.
절망했고 당신과 같은 희망이 있기를 기원했다. 이미 한번 기도앞에 배신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밀레시안은 기원을 놓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며 고개를 돌렸다.
루에리가 다그치듯 소리쳤다.
“네가 물었지. 나는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그럼 내가 다시 역으로 물어볼테니 잘 생각해봐. 왜 나는 살아남았을까. 네 말대로 90%인지 10%인지 부족하게 만들어진 미완성의 시약을 가지고 나는 왜 완벽한 중화제와 비슷하게 살아남았을까.
물론 너처럼 깨끗하게 비늘을 폈다 접었다 정도는 할 수 없지만 나도 어느정도는 변이를 조절할 수 있어. 자..! 왜일까..! 생각해! 답을 이끌어내라고..!”
“몰라요. 모른다고요..! 그런게 가능했다면 여기 이렇게 들여보내지지 않았어. 버려지지 않았어. 폐기처분당하고 죽는 시간만을 기다렸겠지 이렇게 그를 따라 걸어나오지도 않았어..!”
“너..! 뭘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건데..!”
루에리는 밀레시안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무엇을 위해 이녀석을 속였어? 무엇을 위해 너 자신을 속였어?
무엇이 하고싶었나? 무엇을 위해 나를 가로막고 이녀석에게 손끝하다 대지 못하게 하겠다고 소리쳤냐고!”
하고싶은 일이 있었다. 하고싶은 말이 있었다.
해서는 안되고 허락받지 않은 미래라고 생각했지만, 그런거 이제 몰라.
이미 손을 뻗어 발을 내딛었다.
내려진 말을 되돌릴 수는 없어.전진, 오로지 전진만을.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졸병의 말은 앞을 향해서만 나아갈 뿐이다.
당신이 나의 길을 열고 내 등을 떠밀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길의 끝에 선 나는.
밀레시안은 참고 참았던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당신이 말했다.
“내가 나아가지 않으면..!!”
밀레시안은 금방이라도 울 것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이 끝에서 머물러 있으면..!”
내가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않으면.
“저사람의 길이 계속 이어질거라 생각했어요..!”
나의 죽음은 당신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당신의 죽음은 나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 고리의 끝이 어디에서 어디로 연결되어있는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나에게 나아갈 길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자신의 길이 끝나는 그 지점이 새로운 시작이 될것이라고. 허언아닌 희망을, 기만아닌 위로를.
당신은 나의 삶을 바랬다.
그러니 당신을 비추고 있는 나도 당신의 삶을 바랄 수 밖에.
타트라크는 희미하게 눈을 떠 밀레시안이 서있을 법한 자리를 바라보았다.
은색으로 뒤덮인 새하얀 세상속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꿈을 꿨었다. 내가 이 자리에 남고 당신이 그 새하얀 말을 쥐고 서 있는 달콤한 꿈을.
빼앗은 반지를 돌려주지 않으면, 이대로 반지를 작동시키지 않은채 돌아간다면.
꼭 그설원이 아닌 다른 차가운 눈의 숲으로 돌아간다면,
임무를 완수한 당신은 적어도 살아 남을 수 있지 않을까. 모리안의 손에서 벗어날 기회를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이 내게 주려고 했던 그 모든 기회를 내가 당신에게 돌려줄 수 있지 않을까.
밀레시안은 머리가 깨어질 것같은 두통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칼리번이 그녀의 의사를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마지막 반지를 움직여야한다고 꿈이 없는 칼리번은 그녀에게 명령어를 내어놓으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줘. 조금만 더 망설일 시간을 줘. 붉게 점멸하는 빛이 강하게 그녀를 질책했다.
정말이지, 한치 앞만 보는 단순한 사람.
그러니까 자꾸 간단한 트릭따위에 속아넘어가는 겁니다.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체스말을 내려놓는 것처럼 손끝을 까딱였다.
그 손끝이 마치 이리오라는 손짓과 닮아있어 밀레시안은 일그러진 표정 그대로 타르라크를 돌아보았다.
검은비늘들이 마치 반 가면처럼 그의 얼굴을 덮어가고 있었다.
녹색의 시선이 밀레시안의 발치에 굴러다니는 작은 주사기에 머물러있었다.
“젠장.. 젠장.. 영감님, 분명 이 근처에서 꺼냈잖아. 어디에 꽁꽁 숨겨둔거냐고..”
“.......네번째 서랍..”
루에리가 마우러스의 서랍을 뒤지는 동안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져있던 검은 꾸러미가 탁한 목소리로 입을열었다.
“......영감님..?”
“네번째 서랍.. 뒷면 안쪽에.. 상자가 하나 있을거다..”
루에리는 뜯어내다시피 서랍을 잡아당겼다.
마우러스의 말대로 서랍 안쪽에는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작은 상자가 하나 붙어있었다.
작다. 평소에 사용하던 것의 1/3정도.
루에리가 서둘러 타르라크에게 돌아가려는 찰나 마우러스가 불편한듯 기침했다.
“그것만으로는 안돼.”
“뭐? 조합해야해?”
“당연하지 않겠냐. 그렇지 않으면 뭘 하러 숨겨놨겠어.”
마우러스는 거의 움직이지도 않는 손끝을 까딱여 루에리를 불러들였다.
흘끗 돌아본 타르라크의 방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밀레시안이 타르라크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벽면 여기저기에 레이저의 붉은 점들이 스치우고 있었다.
루에리는 바깥 복도와 타르라크를 한번씩 번달아본 뒤 마우러스에게 다가갔다.
마우러스의 가슴은 척 보기에도 심한 화상과 파편들로 가득 베여져 아무리봐도 일으켜 세울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우러스는 서두르라며 루에리를 재촉했다.
루에리는 눈을 딱 감고 마우러스를 일으켜세웠다. 죽음이 성큼 그를 향해 다가와섰다.
마우러스는 기침을 토해내지도 삼키지도 못한채 괴로워했다. 그러나 곧 이를 악물며 루에리의 팔을 움켜쥐었다. 필사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나약한 노인의 손이 그를 끌어당긴다.
“불러주는대로 조합해라.”
“하지만 영감님..!”
“내 의식이 있을 때, 서둘러 끝내야한다.”
차라리 저 두 녀석중에 한놈에게 시켰다면 서랍만 알려주고 죽은체 잠들었을 텐데.
네놈은 역시 손이 너무 많이 간단말이지. 마우러스의 콧수염이 겨우 팔락일 작은 웅얼거림을 내뱉었다.
숨이 가쁘다. 루에리는 다 깨어진 연구실의 병을 닥치는대로 집어들며 마우러스의 반응을 확인했다.
가로젓는것인지 끄덕이는것인지 알 수 없는 미세한 움직임이 루에리의 신경을 바짝 긴장시켰다.
무색 투명하던 병안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내 녹색빛 그리고 다시 하얀색으로 변화되어갔다.
바이스가 완성시키지 못했던 그 시약. 고순도의 힐웬합금 없이 완성되는 실리엔의 중화제.
마우러스는 결국 마지막 단계를 완성시켜버린 중화제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것 봐라. 맹랑한 엘프의 그랜드 마스터녀석. 내가 먼저 완성시킨다고 말했었지.
하지만 말이다 바이스야, 이거 단가가 너무 비싸서 공급에 차질이 많을거야.
마우러스는 바이스가 화를 내며 그깟게 대수겠냐고 소리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웃겠지. 또 울겠지. 마우러스는 꿈결같이 느껴지는 아득한 과거를 상상하며 웃음지었다.
기침이 울렸다. 너덜너덜한 몸이 요동쳤다.
중화제를 실린더로 빨아들인 루에리가 마우러스를 돌아보았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루에리는 여전히 그에게 뭐라 대답해야 하는지를 망설이고 있는 눈치였다.
“고맙다고 해야할지 왜 완성되었던걸 말하지 않았던거냐고 원망해야할지 모르겠어.”
“원망해라.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네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용하지는 않았을테니.”
“그래? 그럼 역시 말할게. 고마워.”
끝까지 말은 귓등으로 흘려넘기는 녀석.
마우러스는 루에리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실험대위에 몸을 기대었다.
뽑아내지 않은 파편이 더욱 깊숙이 찔러들어왔지만 몸을 뒤집을만한 기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은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죽어도 숨겨서 그들이 가져가게 하고싶었다.
모리안에게 협력했던 애송이들따위 알게 뭐냐. 알게될게 무어냐.
하지만 그 필사적으로 실험실을 뒤지는 손길이 던진 물건이 그의 머리를 때렸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울음소리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제대로 지워지지도 세겨지지도 못한 어중간한 운명 앞에 저항했다.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침묵했던 입을 열 게 만들었다.
미안하다, 나는 결국 너를 두번이나 저버리게 되는구나. 마우러스는 눈을 깜빡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어차피 처음부터 자기만족이였으니까. 마우러스는 타다남은 로브의 안쪽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손끝이 둔해 무엇이 잡히는지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분명 그곳에 있을것이라고, 마우러스는 기도에 가까운 믿음을 웅얼거리며 아이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나마 이번에는 기다리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인걸까. 아니, 너는 나를 기다리지 않겠지.
먼저 갔다면 벌써 멀리 날아갔을 것이고 가지 않았다면 아직 그들의 손길아래 누워있을것이다.
사실 믿을 수도 없었다. 하얀 가면의 퀘사르가 가져다준 소식이 가짜일 수도 있었고 설령 진짜라고 한들 그들이 그 아이를 정말로 소생시킬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확실했던 것은 모리안의 요원들이 연구실을 다녀갔다는 것, 그리고 어딘가의 그들 중 누군가가 이 연구실에서 도망쳤다는 것.
기억의 손상을 확인한다는 핑계로, 몇번이고 감시카메라의 영상을 빌려왔다.
이제 막 깨어난 붉은 머리를 가진 실험체를 흔들어 묻고 또 물으며 아이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최선을 다했다. 아마도, 어쩌면,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나는 결국…
“마리오타…”
끝내 나는 너에게 이 한마디를 전해주지 못하는 구나.
루에리는 단숨에 달려가 타르라크의 앞에 멈춰섰다.
밀레시안이 타르라크를 안아들고 있었다. 봐봐. 멍청아. 있잖아. 루에리는 숨을 헐떡거리며 실린더를 들어보였다.
잘 찾아보면 어딘가 반드시 해답이 있다고, 조사의 기본도 모르는 놈이니 어디가서 요원이라는 소리도 못하지.
아 너 요원아니라고 했었나? 실없는 핀잔을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그런 말을 주고받을 여유는 남아있지 않았다.
눈을 감은 타르라크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목가죽이 헐렁거리며 흔들렸다.
상처아래로 찐득한 피가 베어나오고 있었다.
엉망으로 깨물려 너덜거리는 상처는 보기만해도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그 이외에 그의 몸에 바늘을 찔러넣을 만한 자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온 몸이 단단하게 굳어버린 비늘투성이였다. 그리고 타르라크의 반지가 점멸하기 시작했다.
루에리는 서둘러 자리에 꿇어앉아 타르라크의 상처를 들춰내었다.
소리없는 비명이 가래끓는 소리와 함께 터져나왔다.
루에리는 발버둥치는 타르라크를 내리눌렀고 밀레시안은 쉼없이 휘둘러지는 왼쪽 손을 붙잡았다.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밀레시안은 손목을 꺾어내듯 타르라크의 왼손을 잡아내었다.
반지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밀레시안은 무엇인지 모를 말을 울얼거리 타르라크의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끔찍한 소리와 함께 비늘조각이 떨어져내렸다. 차라리 꺾어내는 편이 나았으려 생각이 들정도로 타르라크의 손은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반지는 손가락의 비늘을 대부분 깎아내며 겨우 타르라크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검지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이 밀레시안의 팔뚝을 파고들어왔다.
소름이 돋아나듯 검은 비늘들이 팔뚝을 따라 돋아났지만 곧 부드러운 살결로 돌아왔다.
그래요 잡아요. 차라리 나를 붙잡아. 루에리는 근처에 떨어진 나무조각과 린넨따위를 엮어 타르라크의 상처를 고정했다. 그리고 이어 이를 악물며 타르라크를 들쳐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가자”
“못가요.”
“계속 헛소리하지 말고 일어서..!”
“이번에는 진짜에요. 내가 가면 모리안이 즉시 칼리번의 반지가 멈출거에요. 내가 여기 있어야 다른 안드로이드들을 멈출 수 있어요.”
“그래도 가..!!!”
루에리는 더이상 시간쓰게 만들지 말라며 소리쳤다.
타르라크를 어깨에 매고도 손을 뻗어낸 루에리는 강제로 밀레시안을 일으켜세웠다.
“가!! 가야하는거야!! 네가 지금 해야하는건 방어도 서포트도 아니야!! 도망치는거지!!”
“나는…!”
“이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어? 비명하나 제대로 못지르는 이 멍청이가 네게 유언같은 거라도 남길 수 있었어?!”
“멍청이라 하지 말아요..!”
“못들었으면 가!! 그게 마지막에서 두번째로 한 말이니까!! 나가야해!! 네가 조금이라도 이녀석에게 미안하다면, 너에게 양심이라는게 있다면, 네게 사람마음을 손톱만큼이라도 이해할 여지가 남아있다면..!!”
루에리는 밀레시안을 잡아끌어 앞세웠다. 그리고 타르라크를 떠넘기듯 밀쳐내었다.
연구실의 구석, 실험체들이 오고가는 작은 샛길의 문이 찌그러져있었다.
“뒷일은 신경쓰지 말고 어서 도망쳐야 하는거야..!”
문이 열렸다. 모리안의 화면위로 손을 뻗었다.
한손으로 움켜쥘 정도로 작게 변한 허공의 이미지가 그녀의 손에서 바스라졌다.
작동이 중지되었던 검은 화면위로 다시금 포워르의 문장이 떠올랐다. 안드로이드들의 눈에 불이 밝혀졌다.
밀레시안은 의문을 가진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내가 정말 울었던가? 내가 슬퍼했던가? 내가 달렸고 그가 뒤따랐던가?
어쩌면 반대였을 수도 있다. 내가 그를 업고 그의 뒤를 따라 달리고, 어쩌면 그가 없고 내가 그의 환상을 보며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고.
그래. 나는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어느새 사라져버린 붉은 머리의 청년 없이 홀로 숲으로 뛰어나와 점점더 무거워져가는 등뒤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뜨겁게 치솟아오르던 체온이 가라앉고 밀레시안은 숨소리가 작아지는 것을 듣고 있었다.
숲을 휘젓는 철갑의 발소리와 손전등의 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밀레시안은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밀레시안.”
사람의 목소리라기보다는 쉬어버린 바람소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밀레시안은 그 어느때보다도 선명하게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후회하세요.”
잔인하리만치 짤막한 진실이 가슴을 파고들어왔다.
“후회하고, 또 살아남으세요. 도망치고 도망쳐, 언젠가 당신이 다시한번 후회하는 날이 올때면 오늘날 이런일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세요. 당신이 아무리 미루고 도망쳐도 오늘을 피할 수 없었듯이 언젠가 이러한 순간이 또 찾아왔을때를 위해 오늘의 고통을 마음에 세기는 겁니다. 기억을 잊고 이름을 잊더라도 이 후회만큼은 끝까지 이어가세요.”
타르라크는 거의 움직이지 않을 팔을 움직여 밀레시안의 목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그것이 포옹이었는지 쓰다듬으려는 행동이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요. 가는 겁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뛰어요.”
[“여기서부터는 기억이 흐려요”]
화면속의 밀레시안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꿈속에서 일어난 일같이, 아주 나쁜 꿈을 꿨던 것같이, 밀레시안은 끊임없는 숲만을 반복해서 떠올렸다.
그를 내려놓았던가? 그를 숨겨두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가장 최초의 기억은 어느 숲의 언덕에서 철가면을 쓴 소년과 마주한것.
철컥이는 금속소리에 잔뜩 경계하는 밀레시안을 보며 어린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너,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온거야?”
그 한마디의 앞에서 밀레시안의 의지는 무너졌다.
본능이라고 해야할지 무의식속에 내제된 무언가의 지식이라고 해야할지, 알 수없는 안도감에 밀레시안은 몸을 웅크려 울음소리를 가두어내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땅을 향해 온 몸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을 토해내었다.
이 감정은 뭐라고 해야하는 걸까 기뻐해야하는걸까, 슬퍼해야하는걸까. 스스로가 저주스러웠고 수치스러웠으며 경멸스러웠다. 기쁜건 아니야. 이런게 기쁨의 감정이 될리는 없어. 철가면을 뒤집어쓴 소년은 잠시 당혹스러워 하던 손을 뻗어 밀레시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따뜻한 온기가 질척하게 베어든 검은 피를 닦아내었다.
“그래, 일단 원하는 만큼 울어.”
소년은 눈물 범벅이된 밀레시안을 바라보며 다시한번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 다음, 우리가 널 도와줄테니까.”
소년의 눈은 밀레시안의 뺨에 머물러 있었다. 살결의 모양으로 돌아가지 않는 검은 비늘이 한조각 뺨위에 얹어져있었다.
코레틴사에서 대량으로 생산한 힐러슈트를 입고 있는 소년은 다시금 웅크리는 밀레시안의 어깨를 토닥이며 반대편손으로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소년의 무전을 받은 치료원의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탈진하기 직전까지 울음을 토해내던 밀레시안은 소년의 팔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반도 안되는 신장으로 꿋꿋하게 밀레시안을 부축해 걸어나가는 소년의 옷에는 자그마한 문구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사립 알베이 파에톤 K요양병원.
화면이 바뀌었다. 장소는 예의 그 병동으로 보였다. 벽은 새하얗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희뿌연 링겔병이 걸린 수액걸이를 밀며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한쪽팔을 붕대로 꽁꽁 싸맨 사람도 있었고 다리를 싸맨 사람도 있었다. 얼굴인 사람도 있었고 양 팔이나 전신을 감싼 사람도 있었다.
여긴 어디지? 의문이 들기 무섭게 카메라의 앞으로 누군가가 지나갔다. 촛점이 흔들렸다.
카메라를 가진 사람도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지럽도록 흔들리는 화면이 어딘가 볕이 잘 드는 복도 끝자락으로 이동했다.
병실문을 비추었다. 그리고 곧 바닥으로 렌즈를 내렸다.
[“여기에요”]
[“안될 것같아요.“]
[“괜찮아요.”]
[“내가 들어가면 안되는 곳이에요.”]
[“하지만 그녀가 당신을 만나길 바래요.”]
바닥을 비추던 화면의 구석 누군가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여성은 깜빡했다며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건네주었다.
힐러드레스를 입은 단발머리의 여성이 화면속에 스쳐지나갔다. 딜리스, 하얀 명찰이 햇빛에 반짝였다.
화면은 흔들림을 반복하다 딜리스의 어깨를 찍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밀레시안은 잠시 화면을 조작해 카메라를 전환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들고 있는 밀레시안의 모습이 비쳤다. 엉망인 모습이었다.
새하얀 환자복을 입고 있지만 얄팍한 흰 천 아래로 드러난 목선이나 어깨따위에는 울퉁불퉁한 비늘이 돋아나 있었다.
제어력을 잃어가는 모습에 톨비쉬는 저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흉측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렌즈를 바라보는 밀레시안이 너무 지쳐있었기에 모든것을 포기한 눈이었기에, 톨비쉬는 저도모르게 숲에서 울고 있었다는 밀레시안의 모습을 상상했다.
고통과 후회, 상실감. 가슴한쪽이 아려왔다. 이것은 누구의 감정? 누구에 대한 공감?
톨비쉬는 불편한 기색을 삼키며 화면에 집중했다.
빙글거리는 두꺼운 렌즈의 안경을 낀 사내의 시선이 톨비쉬의 얼굴에 진득하게 달라붙어있었다.
영상은 계속되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방안은 온통 하얀 빛이었다. 그러나 단 두가지 이질적인 색이 그 하얀 세상속에 섞여있었다.
하나는 검은 비늘에 뒤덮인 밀레시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검은 옷을 입은 소녀였다.
은발의 소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밀레시안을 반겨왔다.
웃지 않아도 푸른 눈이 곱게 휘어져있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밀레시안은 천천히 카메라를 들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양해를 구한뒤 카메라를 테이블위에 올려 놓았다. 영상기록보다는 녹음에 의미를 두는 것인지 카메라는 누구의 얼굴도 비추지 않은채 소녀의 검은 옷을 비추고 있었다.
검은 옷은 치료를 중단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환자의 옷입니다. 슈안이 설명을 덧붙였다.
“딜리스 선생님께 먼저 이야기 들었어요. 밀레시안씨죠?”
“네, 밀레시안이라고 불러주세요.”
“반가워요. 제 이름은 나오 마리오타 프라이데이, 나오라고 불러주세요.”
알고있어요. 밀레시안은 차마 그녀에게 서류상에서 몇번이고 당신들을 보았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글라스기브넨이 변질된 시기를 가늠하는데에 하나의 지표로 사용되었던 그녀의 이름. 마리오타.
수십번도 더 부르고 수백번도 더 써내려갔다. 마우러스 구이디온의 숨겨진 딸.
모리안은 마리의 서류와 이전 포보르의 직원목록을 띄워놓은 화면을 번갈아 바라보며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파르홀론에서 포보르로 이적할 때까지 마우러스에게는 가족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은 칼리번에 의해 조작된 정보였다.
그가 어떻게 이제 막 깨어난 칼리번과 거래를 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 거래는 벨라조차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 분명했다.
벨라가 백업한 칼리번의 자료속에는 마우러스의 가족관계가 남아있었고 현대에 남아있는 마우러스의 정보에는 그가 독신이었다고 쓰여져 있었다.
왜? 모리안은 칼리번에게 무슨 이유가 있었냐고 묻고싶었지만 그녀의 앞에 있는 칼리번은 단순한 인형, 의지가 없는 꼭두각시. 젊은시절의 아발론의 얼굴을 흉내낸 AI는 죽은 사람의 시선처럼 멍하니 모리안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너의 마음을 움직였나. 모리안은 잠시 자신의 말을 곱씹다가 불쾌하다는듯 칼리번을 흩어내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진 AI라니 터무니없는 것을 만들어내었군요 디안.
하지만 터무니 없는 것이라면 이쪽에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모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앞에는 검은 비늘을 제어하느라 괴로워하는 밀레시안이 앉아있었다.
모리안은 밀레시안이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올때까지 기다린뒤 퀘스트 스트롤을 건네주었다.
검게 풀린 눈동자가 글자를 빨아들이듯 읽어내렸다.
“에린 어딘가에 마우러스 구이디온의 딸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입니다.
알비에 잡입했던 세명의 요원중 자신의 딸이 섞여있었다는 것을 알아내고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 안달이 났더군요. 찾아오세요.”
“......어느쪽을..?”
“해독제와 마리오타, 둘 다.”
“........이 사람은..?”
“마리오타의 지인이자 또다른 글라스기브넨의 생존자입니다. 그 자와 함께 알비로 끌어들이는 것이 첫 단계입니다.
두번째는 그와 변질된 글라스기브넨 모두에게 이 약을 실험하는 것. 이후의 실험체는 치워도 좋습니다.
세번째는 알비를 무너트리고 네번째는 마우러스를 심문해 그녀에 대한 정보를 캐내는 겁니다.”
“......찾으..면..?”
"죽이세요."
"......."
“이번에도 못하겠나요?”
모리안은 세가지 반지와 하나의 앰플이 담긴 케이스를 떨어트렸다.
세가지는 중화제였고 하나는 칼리번의 엑세스코드가 담긴 반지였다.
밀레시안은 케이스의 내용물을 확인한뒤 품속에 집어 넣었다.
모리안이 다시한번 되물었다.
“못하겠나요?”
“..할....수 ….있어요.”
케이스를 품속에 넣은 밀레시안의 눈이 조금씩 뚜렷하게 바뀌어갔다.
검은 동공은 줄어들었고 원래의 눈의 색이 돌아왔다.
마치 바람을 불어넣은 사람형 풍선처럼 밀레시안은 생기있는 젊은 요원의 모습이 되어 대답했다.
“문제없어요. 모리안님.”
“그럼 나가세요.”
[“그래서 나는 타르라크를 만났어요. 그리고 그와 체스를 두기 시작했죠.”]
[“많이 이겼나요?”]
[“많이 졌어요.”]
[“아핫, 맞아요. 타르라크는 체스를 아주 잘 두거든요. 나랑할때는 그래도 조금씩 봐줬었는데.., 루에리와 할 때는 무르는 것 하나 없이 아주 매몰차게 승부하더라구요.”]
[“나한테도 처음에는 조금 봐줬었는데 20승을 기점으로는 아주 매서운 공격형으로 바뀌었어요.”]
[“와.. 20승이나? 엄청 많이 이겼는데요? 얼마나 둔거에요?”]
[“많이요. 아주 많아.”]
[“잠도 안자고 계속 뒀나보네요?”]
[“잠은 잤어요. 밥도 먹었고요. 가끔 휴식시간도 있었고 그때마다 그는 글라스기브넨에 대해서 연구했어요. 나는 그걸 보고만 있었지만.”]
[“....그렇구나.. 계속, 계속 연구에 매달렸구나..”]
[“그리고 그 이외의 일과표는 체스로 가득채웠죠. 산책시간도 없이요.”]
[“아하하, 산책을 좋아하나요?”]
[“그곳은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산책을 즐길만한 장소는 아니었어요.”]
[“음. 아니요. 당신이요. 밀레시안은 산책을 좋아하나요?”]
[“.......”]
밀레시안은 잠시 말을 멈춘뒤 생각했다. 내가? 좋아했던가? 산책을?
언젠가 던바튼이라는 상업도시에서 3달여정도 잠입임무를 맡은 적이 있었다.
옆집에 사는 중년부부의 정원을 돌보는 정원사를 살해하기 위해서 밀레시안은 세달넘게 취업생의 흉내를 내며 배울필요도 없는 직업학교를 다녀야했다.
밀레시안의 하숙집에는 커다란 황금빛의 개가 있었고 모든 하숙생들이 돌아가며 그 강아지를 산책시켜줘야 하는 룰이 있었다. 미루거나 떠넘기는 것은 자유였지만, 밀레시안은 그다지 다른 하숙생들과 교류하고 싶지 않았기때문에 꼬박꼬박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면 군말없이 그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나가곤 했다.
내가 그걸 좋아했던가?
강아지를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차이는 있었지만 하숙생중 그 누구도 휴일날의 강아지산책을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침 정원사의 근무가 없는 날은 주말이었고 밀레시안은 흔쾌히 그 주말의 산책을 담당했다. 강아지는 주말만 되면 밀레시안의 방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 강아지를 좋아했던가?
하지만 사건은 주말에 일어났다. 밀레시안이 강아지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
중년부부의 정원에 소중한 열쇠고리를 떨어트린 정원사는 부부에게 양해를 구하고 정원을 살펴보기 위해 나오는 길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던 강아지는 집이 보이는 것에 즐거워하며 발걸음 속도를 높였다.
밀레시안은 다소 부주의하게 강아지게에 끌려갔고 강아지는 밀레시안의 천천히 라는 음성에 자리에 멈춰섰다.
밀레시안을 기다리던 강아지가 수풀에 떨어진 낯선 물건을 발견했다.
모르는 사람의 냄새. 강아지는 잘 정돈된 수풀에 머리를 박았다.
기껏 둥근 모양으로 다듬은 수풀이 무너질까 밀레시안은 강아지를 말렸지만 말만 강아지뿐이었던 덩치 큰 금색의 개는 밀레시안을 꼬리로 탁탁 쳐내며 수풀속 열쇠고리를 꺼내물었다.
강아지는 자랑스럽게 그것을 밀레시안에게 선물했다.
밀레시안은 열쇠가 달려있지 않은 둥그스름한 허리띠장식을 관찰했다.
낡았지만 보드라운 털이 달린 허리띠 장식의 금속부분에는 낯이 익은 문장이 찍혀있었다.
“이건 파르홀론의..”
“.........”
밀레시안의 작은 속삭임을 들은 정원사가 수풀을 사이에두고 걸음을 멈춰섰다.
강아지와 실랑이를 하던 소리를 들은 중년 부부와 정원사가 밀레시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자신의 말소리가 그들에게 들렸을지를 고민했고 정원사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가씨가 그 문장이 파르홀론인걸 어떻게 알지..?”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밀레시안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정원사는 허겁지겁 수풀을 짓밟으며 반대편 대로로 뛰어나갔다.
중년부부는 비명을 질렀고 대로에는 큰 소리가 났다.
기나긴 크렉션이 울렸다.
멈춰선 트럭과 갑자기 멈춰선 트럭에 추돌한 자동차들. 연기와 고함 비명이 순식간에 대로를 가득채웠다.
때아닌 휴일날의 대형사고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창밖을 내다보았다.
패닉에 빠진 중년의 부인을 밀레시안을 향해 소리쳤다.
“이 아가씨 때문이야..! 이 아가씨가 뭐라고 말하자 마자 친철하던 정원사씨가..!!”
“진정해 여보..! 이 아가씨는 그냥 물건을 주워준 것 뿐이잖아..!”
“하지만..! 당신도 봤잖아요..! 정원사씨가 이 아가씨를 보자마자 그렇게..!”
“미안해요, 학생..! 지금은 아내가 많이 놀라서 그런거니까 신경쓰지 말아요. 나중에 내가 잘 이야기 해줄테니까..!!”
중년의 남편은 패닉상태의 아내를 부축해 집으로 돌아갔다.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밀레시안과 큰소리에 깜짝 놀라 꼬리를 말아앉은 강아지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조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힘차게 달려오고 있었다.
산책을 마치고올 밀레시안을 위해 깜짝 간식을 준비하던 하숙집의 주인은 홀로돌아오는 강아지의 목을 긁으며 되물었다.
무슨일이 있었니? 네가 가장 좋아하던 산책친구는 어디갔고..?
강아지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주인의 뺨을 핥았다. 그리고 애처롭게 끙끙거렸다.
밀레시안은 그대로 던바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소란을 수습해야하는 모리안의 심기가 불편해진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뭐가 문제였나요?”
“아무것도.”
“왜 그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죠?”
“최대한 빨리 벗어났어요.”
“사고가 난 순간에, 왜 그자리에 멍청하게 앉아있었냐는 말이에요.”
“혼자라면 인식속에 녹아들 수 있지만 개를 데리고 있었어요.”
“그럼 개를 포기했어야지.”
모리안의 말대로 밀레시안들은 순간적으로 상대의 주의를 흐트러트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한순간 주의를 흘리고 그 공백의 공간속에 존재감을 녹여 마치 그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에 불과한 것이어서 살아있는 대상이 있다면 통하지 않는다.
감이 좋은 동물에게도 마찬가지였고. 만약 동물이 밀레시안을 따르는 동물이라면 더더욱 불가능이었다.
사람들이 밀레시안을 놓치더라도 그 강아지는 밀레시안에게 안겨들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개를 따라 다시 밀레시안을 발견했을 것이다.
해결책은? 모리안의 말이 맞았다.
임무를 속행하기 위해서는 그자리에서 개를 죽이고 중년의 부부가 밀레시안을 인식하기 전에 모습을 감추면 되는 일이었다.
중년부부는 잠시 당혹스러워 하겠지만 밀레시안의 존재를 눈치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개의 존재를 기억해낸 부부는 옆집 하숙집에 이 사실을 물으러 갔을것이고 하숙집의 주인은 오늘 개를 산책시키던 담담의 밀레시안을 찾으려 하겠지만 실패할 것이 분명했다.
그 이름도, 그 얼굴도, 그 행적이나 등록된 모든 신분이 가짜. 얼굴이 어땠는지 무슨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밀레시안이 어느새 같은 집 다른 하숙생을 몰래 치워내고 그 자리를 채워 앉아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절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밀레시안은 개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아주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사라졌다.
의심과 의혹을 남긴채 아주 지저분한 뒷자리를 남기고 모리안에게 돌아왔다.
“왜 죽이지 않았는지 설명하세요.”
“......”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대라고요.”
잘못을 빌 수는 없었다. 실수였다고 하기엔 너무 기초적인 일이었다.
어째서였을까, 밀레시안은 생각을 거듭하려했지만 이 때는 늦었다. 그때의 생활은 이미 아득한 과거처럼 흐릿했고 주말마다 산책을 나가던 성실한 직업학교의 학생은 밀레시안의 안에서 사라졌다.
밀레시안은 대답대신 까맣게 풀려가는 눈동자로 대답했다.
은색의 눈이 밀레시안을 노려보았다.
뺨을 내리치는 대신 매서운 손날이 공기를 가르며 스쳐지나갔다. 나가라는 의미의 명백한 분노.
밀레시안은 다른 밀레시안들이 있는 대기실로 돌아왔고 그들의 사이에 끼어앉았다.
임무를 맡고 나야가 하는 또다른 밀레시안이 그녀에게 투덜거려왔다.
“아, 이게 뭐야. 기껏해야 개를 죽이라고? 정말 알 수가 없다니까.”
“.......”
“이봐, 뭐라고 말 좀 해봐. 네 탓이잖아. 내가 기껏 개한마리 죽이러 던바튼까지 가야해?”
“........”
“아아아.. 정말.. 최악이다.. 타라임무는 취소되고 고작 개.. 이번임무에서 돌아오면 분명 또 벽촌으로 밀려날거 아니야. 카브라도 가야하는거 아니야? 바닷냄새 완전 최악인데. 아 진짜 싫어. 다 너때문이야.”
“..........”
“너 때문이라고.. 하.. 뭐 이미 다 잊어버려서 말해도 무슨말인지 모르겠지만.”
“......아니야.”
유난을 떠는 성격으로 설정되었는지 모두가 침묵하는 대기실에서 혼자서 떠벌떠벌 이야기하던 밀레시안이 우뚝 멈춰섰다. 지금, 누가 말한거? 검은 동공들이 한 자리를 향해 웅직였다.
“내 탓이 아니라고.”
“.........하”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어.”
단 발의 박수소리가 울렸다.
막은 여기까지. 잘짜여지지 못한 무대 위, 돌발행동을 한 인형은 어떻게 되어야 마땅할까.
밀레시안은 눈을 깜빡이며 머릿속 시계를 현재로 되돌렸다.
고통이라는 것을 지워낸 공백을 넘어 잊을 수 없는 악몽의 숲을 넘어, 새하얗고 신비로운 마리오타의 앞으로.
밀레시안은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짜내어 대답했다.
“아마도…”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있었다.
“그랬었다고 생각해요.”
울지마. 울지마. 울지마 제발. 지금 이정도로 눈물같은걸 보이지마.
은색이 아닌 황금색으로 비쳐들어오는 햇살이 너무나도 눈부셨다.
현실의 은빛은 약간의 잿빛과 보라색과 흐릿한 푸른색, 연녹색, 뿌연 노란색등이 섞인 다채로운 색의 총 집합채였다. 순백이 아닌 모든 상냥한 빛이 모여든 완전한 색.
나오는 밀레시안의 눈가를 닦아주며 대답했다.
“그렇구나. 나도 참 좋아해요. 산책나가는거. 정말정말 좋아해요.”
“......”
“우리 공통점이 하나 생겼네요?”
햇살이 눈부셨고 은색의 빛이 따스했다.
손은 부드러웠고 그녀는 너무나도 상냥하게 웃어보였다.
너는 이런 사람의 목숨을 베어먹기 위해 여기까지 도망친거야.
붉은 손톱을 가진 긴머리의 여성이 밀레시안의 귓가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네 목숨을 살리기 위해선 이 사람의 희생이 필요해. 황금의 눈을 가진 검은 여성이 냉철하게 차트를 적어내려갔다.
이것은 당신의 바램.
깍지를 낀 손을 가슴위에 얹은 하얀 옷의 여성이 밀레시안의 등 뒤로 다가섰다.
너가 사람이 되기위해선. 네가 사람이 되기위해선. 당신이 사람이 되기 위해선.
세명의 바이브카흐가 밀레시안을 향해 속삭였다.
나오 마리오타 프라이데이가 죽어야만해.
밀레시안은 나오의 손을 떼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면이 흔들린다.
덜컹거리는 테이블소리에 문 바깥에서 섯부른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밀레시안은 양철의 의자 뒤로 밀어내며 자리에서 멀어졌다.
딜리스와 마을 청년의 목소리가 문틈사이로 새어들어왔다. 괜찮다니까? 하지만 뭔가 소리가.., 트레보, 이런식으로 할거라면 다시 돌아가줘. 밀레시안은 나오의 요청과 내 감독하에 만나고 있는거야. 방해하지마..!
밀레시안과 나오는 동시에 문에서 시선을 때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오는 웃으며 밀레시안에게 앉으라고 권유했다. 밀레시안은 좀더 강경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를 버리고 당신이 살아요.”]
[“밀레시안, 앉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잘못되었어요. 내가 죽는게 맞아요. 그래야 옳아요.”]
[“밀레시안. 살고 죽는것에는 옳고 그른것이 없어요. 제발 진정하고 앉아요.”]
[“나는 밀레시안이에요. 내가 필요하다면 다른 개체를 잡아오면 되는 일이에요. 원한다면 내가 가서 잡아올게요. 그러니 당신이 희생할 필요는 없어요. 나를 대신할 개체는 아주 많이 있어요.”]
[“하지만 그들중 누구도 타르라크에게서 20승이나 따내진 못했잖아요?”]
[“......”]
[“그들중 누구도 화가난 루에리와 맞서 싸운적은 없어요.”]
[“.....”]
[“만약 당신이 잡아온 밀레시안들이 모두 산책을 싫어하면 어떻게해요?”]
[“......나...는...”]
[“나는, 당신의 밀레시안이라는 이름이 좋아요. 어쩐지 별을 닮은 이름같거든요. 아 그리고 그것도 알아요? ”]
나오는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밀레시안에게 손을 뻗었다.
밀레시안은 그녀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서둘러 나오의 손을 붙잡았다.
밀레시안에게 체중을 기대어 반쯤 몸을 일으킨 나오는 밀레시안의 뺨을 쓰다듬으며 즐거운듯 이야기했다.
[“당신의 눈, 까만자위가 무척 커서 햇빛을 받으면 마치 별이 뜬 은하수처럼 반짝거려요.
그런 눈은 처음보는 데 혹시 아픈 탓이라면 미리 사과할게요. ”]
[“아프거나 하지는 않아요.”]
[“그래요? 다행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순수하게 아름다운 눈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밀레시안은 조심스럽게 나오를 부축해 다시 침대위에 눕혀주었다.
깨어질듯 유리공예품을 다루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나오는 고맙다고 소리내어 인사했다.
고마워요. 미안해요. 다행이네요. 나도 좋아해요. 우리 공통점이 있네요.
그녀는 온 몸을 다해 밀레시안에게 호의를 표현하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두려움이 반 죄책감이 반, 그리고 그런 그녀를 실망시키면 안된다는 책임감에 짓눌려 있었다.
나오는 그런 밀레시안의 긴장을 풀어주려는듯 밀레시안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다 괜찮아.”
“.......”
“무서워하지 말아요.”
나오는 천천히 오래된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아주 어릴적 할머니가 들려주신 옛 전설에 대한 내용을 담은 과거의 노래.
나오는 몇 번이고 반복되는 단순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밀레시안의 손을 쓰다듬었다.
혀끝에 닿는 공기가 달콤했다. 마치 동화속 환상의 일부분처럼 밀레시안은 이 눈부신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숲을 배경으로 밀레시안은 서로다른 빛깔의 두가지 기억을 가슴속에 세겨넣었다.
후회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했다. 위로받고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노래는 밀레시안의 것, 오직 당신의 영혼만을 위한 노래.
바다빛 눈동자가 밀레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감은 밀레시안이 나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검은 용도 세명의 여신도 없이 오직 한 순간의 안식속에 머리를 기대었다.
검다. 코끝에 검은 천이 닿으며 온 시야를 검게 물들였다.
이것의 이름은 안식. 밀레시안은 처음으로 머릿속에서 깜빡이던 붉은 램프가 꺼진 정적을 맞이했다.
어둡고, 따듯했다. 졸음이 몰려오는 기분은 난생 처음이야.
나오는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서는 딜리스를 향해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이야기는 다음에 해야할 것 같아요.”]
[“그래. 다음 스케쥴도 어떻게든 조정해볼께.”]
[“부탁드려요. 꼭 해주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아마 나는 그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해 아직까지 살아있었다고 생각해요.”]
[“얘는.. 아직 그런말 하면 못써. 조금 더 시간이 있을거야. 아직 더 나눠야할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그런 약한소리 하면 안돼.”]
[“아하하. 네 알겠어요. 잘부탁드려요.”]
[“그래. 웃으렴.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웃으렴. 마리오타.”]
딜리스는 테이블에 놓여진 카메라를 들어올렸다.
쭈뼛거리며 들어온 건장한 청년이 잠이든 밀레시안을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저 청년이 아마 트레보라는 사람이겠지. 톨비쉬는 문밖으로 나가는 밀레시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반드시 너를 도울거란다. 그리고 저 아이도.”]
[“.....딜리스씨..”]
[“하지만 만약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면...”]
[“.....”]
[“그 선택은 우리들이 아닌 너희가 결정내려야 할거야”]
딜리스는 카메라를 접으며 이야기했다.
렌즈는 닫혔지만 아직 마이크는 꺼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생각하렴. 대화하고 고민하고 또 괴로울때까지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으렴. 그리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스스로에게 묻는거야. 정녕 그 선택에 후회는 없는걸까. 다른 또다른 방법이 없는 걸까.”]
[“......”]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해 체념하고 스스로를 납득시켰을때.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조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를 확인하렴.”]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르작거리는 옷가지 소리 속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섞여있었다.
[“후회해도 괜찮아. 납득하지 못해도 괜찮아. 화를 내도 좋고 울음을 터트려도 좋아.
원망하렴. 슬퍼하렴. 그렇게 그 모든 감정을 토해내렴. 그렇게 해서 마음이 풀리겠다면 네 마음껏 마음을 발산하렴.
우리들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어. 그러기 위해 어른이 되었고 그러기 위해 이 옷을 입고 있는 거란다.”]
[“화가 나지는 않아요. 원망하지도 않고요.”]
[“하지만 슬퍼보이는데?”]
[“네, 슬프니까요.”]
문이 열렸다. 트레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조금, 슬픈 마음이 남아있는것 같아요.”]
[“그래. 다행이구나. 그게 너의 진심, 네가 가지고 있는 영혼의 빛.”]
[“그렇네요. 이 슬픔이 나의 진심…. 나의 마음.. 나의 영혼..”]
[“......”]
[“내가 그아이에게 전해줘야하는 마지막 감정.”]
문이 닫혔다.
그리고 다시 화면이 전환되었다.
장소는 다시한번 같은 병실, 노을이 내려앉는 늦은 시각 밀레시안은 석양을 등지고 앉아있는 나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자가 길어졌다. 나오는 앉으라는 말대신 찬찬히 밀레시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오는 수척해졌고 밀레시안은 손과 목 얼굴 일부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더이상 상온에서 활동 할 수 없게된 밀레시안은 온 몸에 냉기를 뿜는 간이 팩을 두른채 붕대를 감고 생활했다.
이제 그만 캡슐안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서리속에 잠든다는 것은 곧 다른 한쪽이 죽게 된다는것.
타르라크가 넣어준 해독된 글라스기브넨의 혈액과 밀레시안이 자살용으로 남겨두었던 모리안의 중화제. 그리고 오랫동안 나오와 함께 글라스기브넨을 저지해왔던 알베이의 연구자들.
부서진 조각들이 모여 딱 한사람분량의 약이 만들어졌다.
딱 한사람분량의 목숨이 캡슐에 담겼다.
나오를 살릴 것인가 밀레시안을 살릴 것인가를 두고 알베이는 그 선택지를 구겨낸뒤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하고 싶니?
서로 합의해서 한쪽을 선택할 수도 있었고 다른 한쪽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둘은 안되었다. 두 사람의 몸은 아무런 처치없이 동결되기에는 너무 약해졌고 이렇게 햇살아래 생활하는 것도 이제는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적어도 이게 끝이라면 태양을 바라보며 스러지고 싶었다.
두 사람이 모두 목숨을 포기한다해도 알베이는 그들의 선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선택하렴. 생각하고, 고민하렴.
밀레시안은 단번에 자신의 선택권을 포기했지만 나오의 결정또한 거부했다.
포기하는 것 조차 또다른 선택이라는 것을 알지못한 밀레시안은 나오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내 곧 포기했다. 숨가쁜 날들이 지나갔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많은 추억들을 공유했다.
서로가 가진 공백의 시간을 매꾸며 헐거웠던 기억의 고리들을 새로히 엮어나갔다.
나오가 말했다.
“당신을 만나게 되어서 기뻐요.”
“나도 기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하지만 밀레시안, 하지만..”
나오는 이제 그만 이 끝없는 문답을 끝내야 한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은빛이 흔들린다.
끝없는 심연보다도 더 깊었던 은색의 세상이 흔들린다.
“내가 반대의 입장이 되었어도, 당신이 내가 되었어도, 우리들의 운명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에요.
우리중 누가 감염되었어도 똑같이 그 사람을 들쳐업고 뛰었을 거고, 누가살아남게 되더라도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겠죠.”
“ 그래서는 전부 사라지는 결과밖에 남지 않아요.”
“그래요. 어느 누가 되었든 우리들은 분명,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채 헛되이 죽어가는 그런 티끌같은 존재가 되어버리겠지만 그래도 이젠 당신이 있어요. 우리들의 다음으로 밀레시안이란 존재가 남게되는거에요.”
그건 굉장한 기적에요. 나오는 밀레신안의 손을 붙잡고 웃었다.
내가 사라진 뒤에 무언가가 남는다는것 이 넓은 세상 한가운데 나라는 존재가 무언가를 남긴다는것.
이름도 명예도, 어떠한 물리적인 흔적이 아닌 나라는 사람이 살았던 과거가 기억되는 것. 당신의 안에,
그리고 당신이 만나갈 사람들의 안에, 부르고 또 불리어 이어질 이야기.
“슬퍼요.”
밀레시안이 대답했다.
[“지금, 굉장히 슬퍼지는 기분이에요.”]
[“네, 슬퍼요, 아프고, 또 두려워요. 그래도 이제는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후회하지 않아요.”]
내 모든 것을 당신에게 넘겨주었기에, 이제 이 가슴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리는 환하게 웃으며 밀레시안을 끌어안았다. 이제 되었다. 이제 당신은 괜찮아.
사람으로, 다시한번 사람의 삶으로 살아가는거에요.
아파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그로인해 아끼는 것들이 생겨나겠죠. 그로인해 사랑하는 마음을 배워가겠죠.
살아가세요. 이 슬픔을 안고 이 이별을 안고. 다시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 당신이 보게 될 세상은..
[“도망치라고 했어요.”]
화면은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부자연스럽게 누워있는 화면속 기묘하게 마주선 두사람이 한 자루의 듀얼건을 사이에 둔채 이야기가 하고 있었다.
한쪽은 다시 사람의 모습에 가까워진 밀레시안, 그리고 다른 한쪽은 어딘지 낯이 익은 안경을 쓴 남자.
쓰러진 카메라속으로 남자의 울부짖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밀레시안의 말이 저주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모든 삶을 부정한 아이처럼 울부짖었다.
총을 쥐고 있는 것은 사내의 쪽. 밀레시안은 그가 언제든지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천천히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후회를 하더라도 살아남으라고 했어요.”
“내가 아는 너희들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어.”
“그런 나를 만나 기쁘다고 했어요.”
“그렇게 사람처럼..”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게 사람인 것 처럼..!!”
“그래도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이 아픔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요.”
“울면서 나를 보지 말란말이다..”
슬픔을 느끼는 밀레시안의 존재는 그에 대한 부정이었다.
밀레시안들은 후회를 할 수 있고 밀레시안들을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조각조각 갈라져나온 하찮디 하찮은 영혼의 가루 어딘가 아직 남아있는 감정의 끄트머리 살아 숨쉬고 있었다.
살 수도 있었다.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걸 부순것은 다름아닌 그, 오만한 자의 이름 아발론.
그는 밀레시안에게 줄 수 있는 안식은 오직 죽음뿐이라고 생각했다.
칼리번으로 부터 꿈을 이어받지도 실리엔으로 부터 망각을 부여받지도 않은 반쪽짜리 인형들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그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중간하게 지워지고 어중간하게 되살려졌다. 꿈꾸지 않은 칼리번은 그들의 머릿속에 기계적인 명령어만을 입력했다. 마음을 부수어 행동의 양식으로 사용했다.
죽어가는 마음의 비명을 듣지못한채 그들은 그렇게 차례차례 마모되어가고 공허하게 비워져나갔다.
하고싶지 않은 일이있었다. 싫어하고 괴로워하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일이 있었다.
싫은것을 싫다 거절할 수도 없어 마음을 깨트렸다. 깨어진 조각으로 반대되는 자신을 만들었다.
그렇게 또 깨어지고 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작은 머릿속안에 수십명의 인격들이 가득차고도 모자라 그 모든 고통을 이어받은 또다른 그림자를 바랬다.
명령어를 부여받기 전까지 그들은 인형처럼 나란히 앉아 자신들이 받은 상처에 대해 곱씹었다.
단 한명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단 한번도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소리치지 못했다.
아발론은 그런 그들을 모두 찾아내어 제 손으로 죽음까지 이끌었다.
너희들이 만들어진 것은 나의 과오. 너희들이 태어난 것은 나의 비겁함.
도망치는 동안 남겨온 잘못된 발걸음을 따라 나온 길을 잃은 아이들. 그렇게 믿으며 그 아이들을 해쳤다.
그렇게 믿으며 그 아이들을 영원히 잠재웠다. 그렇게 믿으며 그 끝에 다다랐을때 아발론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밀레시안을 마주했다.
슬퍼했다. 외로워했다. 후회하고, 그러면서도 살아나가기를 희망했다.
잊으면 안된다고 이대로 잠들 수는 없다고. 한번만 더, 한번 더 살아가야할 이유를 찾아야한다고.
“당신이 나를 죽이려 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어요. 완성된 것은 당신이고 불완전한 것은 우리들이죠.
그래요. 우리는 당신에 대해서 들은적 있어요. 당신에 대해서 말한 적 있어요.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고 한없이 예상을 뛰어넘은 유일한 칼리번의 완성작.
그런 당신이 우리들을, 아니 나를 부정한다면. 그건 정말 어쩔 수 없어요.
당신에게서 달아나지도 맞서 싸우지도 못해요.”
“.....나는.”
“하지만 말할 수는 있죠. 하지만 시도해 볼수는 있을거에요.
바라고 소원한다. 그게 인간이 가진 최고의 무기이자 최후의 방패. 그 삶의 마지막 끝에서 이름모를 누군가를 부르며 기도한다는 것. 죽음앞에 자신의 후회를 드러내어 보인다는 것.”
녹슨 태양의 빛이 어린 콜트가 떨어져내렸다.
그가 울음을 터트리며 얼굴을 감싸쥐었다. 슬퍼했다. 외로워했다. 후회하고 또 살아나갔다.
그 길이 잘못되었지만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죽음의 끝에서 피어난 기적을 보며 절망했다.
조금 더,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조금 더 자세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면 조금 더 잘 했더라면.
열심히 한다고 해서 모든게 잘 되는 것은 아닐거야. 네반은 익숙하게 밀레시안들의 시약을 조제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녀의 앞에 있는 밀레시안들중 어느 누구하나 대답할 수 있을리는 없지만 그녀는 때때로 누군가에게 하지 못한 해묵은 앙금을 꺼내 홀로 털어놓았다.
“세상에는 언젠가 선택해야하는 순간이 있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반드시 한가지의 길만을 걸어 갈 수 있지. 하지만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너 자신. 누군가 너의 선택지를 막고 의도한 길만을 내어놓은다고 해도 꼭 그 길에 따라 움직일 필요는 없어.
네 길을 개척하렴. 너의 길을 나아가렴. 하지만 너무 서두르지 말고 무모하게 도전하지도 말고, 잘 보고 잘 생각하고 잘 고민해서 나아가렴. 한번 떠난 길은 되돌이킬 수 없어.
그러니까 소중한거야. 그러니까 필사적인거야. 모든것을 없던 일로 지워버리고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렇게는 안되겠지. 그렇게는 못할거야.
너의 삶에 내가 있는한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비추고 비춰지는 타인과의 관계성이 남아있는한.
내가 너를 기억하고 네가 나를 기억해. 그렇기 때문에 기억은 영원히 이어져 세상에 각인된다.
내가 나를 잊더라도 나를 기억하는 네가 있어. 네가 너 자신을 잊더라도 오늘을 기억하는 내가 있어.
이 수많은 카메라들이, 수없이 긴 녹음된 시간들이 너를 기억하고 너를 기록하고 너의 성장을 저장해.
그러니 얼마든지 나아가렴. 그 시작은 여기, 이 수십미터의 바다아래. 영원히 매장되어있을 분홍빛 아름다운 광석들과 함께 묻혀있을테니. 나아가렴. 날아가렴...”
나는 더이상 너를 쫓지 못할거야. 그게 미안해. 그게 너무나도 미안해. 작았던 나의 아이, 더이상 작지만은 않은 나의 그림자의 아이. 엘라하... 네반은 마지막 시약을 밀레시안들에게 주입했다.
머리가 흔들린다. 눈앞이 흐려진다. 온세상이 은빛으로 빛나는 그 환상의 경계선. 그녀의 말소리가 들렸다.
우리들은 그렇게 눈을 감고 어둠으로 빠져들었다.
[“그래요. 그렇게..”]
밀레시안은 다시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다.
지금의 그가 아닌 과거 어딘가에 있을 아발론과 마주하는 밀레시안은 아직 엣된, 쿠르클레로 향하는 헬기에 오르기 전 그 차림새로 앉아있었다.
[“당신은 다시한번 나를 재웠고, 이제 나를 깨어내었죠.”]
[“그래, 준비는 되었니?”]
[“언제든지. 얼마든지. 아직 모든게 낯설고 조금 흐릿하지만..”]
밀레시안은 오래간만에 깨어난 육체가 적응되지 않는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어보였다.
머리가 멍하게 느껴지는 건지 조금씩 고개를 흔드는 버릇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들어올려 예의 그 별이 반짝이는 눈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노력해볼게요.”]
살아가도록, 사람이 되어가도록. 카메라의 렌즈가 닫혔다. 아니, 눈을 감았다.
눈꺼풀처럼 서서히 반타원형의 그림자가 밀레시안의 모습을 가렸다.
검게 가려진 시야 사이로 헬기의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고 그리운 바람소리.
톨비쉬는 바람으로 엉망이된 오디오속 웃고 떠드는 자신과 팀원들의 목소리를 듣고있었다.
톨비쉬가 미간을 누른채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슈안은 화면과 영상장치들을 정리한뒤 가방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고개를 돌린 톨비쉬의 앞으로 작은 상자가 내밀어졌다.
섯불리 상자에 손을 대지 않는 톨비쉬에게 슈안은 직접 열어보라고 권해왔다.
상자안에는 은빛의 다우라가 한자루 들어있었다. 밀레시안이 쓰고 밀레시안이 버린, 무너진 브류나크의 홀 안에서 톨비쉬가 주워들었던 그 총이었다.
이게 무슨의미인지 설명해달라는 무언의 눈빛에 슈안은 주섬주섬 작은 흰색 종이를 꺼내들었다.
흰색 종이안에는 깔끔한 필체로 짤막한 주소지가 하나 쓰여져 있었다.
슈안이 말했다.
“그곳이, 밀레시안이 있는 장소입니다.”
“.........”
“알반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밀레시안이 영원히 에린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것.”
“내가 그걸 받아들일거라 생각하십니까?”
“네.”
“......내가 밀레시안을 선택했으니까?”
"당신만이 이 자료를 열람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단장이 그렇게 시키던가요?"
“어느쪽의 단장을 말하는지 모르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피오나의 단장은 선택권을 주었고 알반의 단장은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자료를 폐기하는것도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도, 당신이 이를 모두 보고 듣고 읽게되는 것도 중간에 뛰쳐나가는것도 어느것도 상관없었으니까요.
모든 자료들의 재생이 끝난 지금 당신이 밀레시안을 환멸할지 동정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거기까지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당신만이 선택할 수 있고 당신만이 물어볼 수 있습니다.
다시 깨어나서도 타인을 모방하는데 그쳤을 밀레시안이 제 3의 선택을 하게 선택지를 이끌어낸 것은 다름아닌 당신이니까요.”
“.....”
“죽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가 되겠지요.
하지만, 반대로 도망치는 것이 꼭 옳은 답이 될 수는 없을겁니다.
알반이 아무리 숨겨도 누군가가 알아낼 것이고 누군가는 진실에 다가서겠죠. 누군가는 이를 오해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를 이용할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 끝나지 않고 끝나지 않는한 오해는 계속 이어집니다.
이것을 끊어내는 것에는 아발론의 선택이 매우 유효하지만..”
“......”
톨비쉬는 더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듯 몸을 돌려 앉았다.
팔을 문쪽으로 뻗어내는 동안 그의 움직임에 휩쓸려 주소가 적힌 종이가 의자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톨비쉬의 시선이 종이에 머물렀다. 슈안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듯 안경을 고쳐쓰며 반대 방향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아닌 다른 요원을 보내는 수도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진행이네요.”
“글쎄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안경아래로 날카로운 눈매가 톨비쉬를 흘겨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듯 알지 못한다는듯 연극톤으로 말을 이어갔다.
“당신의 귀에는 어떻게 들렸습니까? 밀레시안이 설원을 두드렸을때 했던 그녀의 말은.”
“......”
“협박이었습니까? 아니면 그저 정보를 알려주는 까마귀의 울음소리였습니까.”
“........”
“아니면….”
톨비쉬는 문을 열었다. 슈안은 입을 다물었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차체의 진동에 눈을 감았다.
손이 무거웠고 가슴이 무거웠다. 고작해야 다우라 한 자루와 종이 한장 뿐이었는데도 돌아서는 발걸음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아무것도 없을 황무지에 거짓말 처럼 피오나의 공용 차량이 한대 서있었다.
창문을 내리고 짧은 머리의 남자가 고개를 까딱였다.
조수석 깊숙히 몸을 숙이고 있던 킹이 살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태워줄테니까 그 표정 좀 풀어..”
톨비쉬는 문을 세게 닫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글
톨비밀레) reload #13(4)
“당신은 정말로 이 자가 협력할 거라 생각하나요?”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지 말게..”
포워르의 연구원, 마우러스는 밀레시안에게 멱살이 잡힌채 그렇게 대답했다.
타르라크는 냉기가 흘러나오는 실험대를 기대며 호흡을 고르고 있었고 루에리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오는 변이체들을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눈을 깜빡이며 어둠이 눈에 익기를 기다리는 타르라크의 귓가에 그의 목숨을 노리는 변이체들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변이체들을 풀어낸 것은 다름 아닌 마우러스, 타르라크들이 이곳으로 올 것이라 예상했던 것인지 마우러스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듀얼건을 장전한채 실험실 한 가운데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루에리는 그들에게 협력하게된 이유를 이야기 하며 마우러스를 설득하려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쓴미소가 어린 거절의 대답뿐.
연구실의 불이 꺼지는 순간, 마우러스는 타르라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인양 밀레시안이 마우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우러스는 방호벽으로 된 반투명한 부스로 도망쳤다.
뒤따라 달려나오는 변이체들에게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이성이 남아있을리 없었다.
동결캡슐에서 벗어난 변이체들은 두어걸음 잠에 취한듯 머뭇거렸지만 이내 바람빠진 쇳소리 같은것을 울부짖으며 양 손을 움켜쥐었다.
비늘사이에 끼어있던 서리조각이 깨어지고 따뜻한 온기속에 녹아내렸다.
글라스기브넨의 변이체들은 더 많은 열기를 갈망하며 살아있는 생명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방안에 있는 네명의 사람중 부상을 입은 타르라크를 향해 달려드는 것은 이미 예상되었던 결과였다.
루에리는 타르라크를 지키기위해 앞으로 나섰고 밀레시안은 그대로 마우러스를 쫓아 방호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간발의 차이로 밀레시안은 마우러스를 놓치고 잠겨진 부스벽 앞에 멈춰서야했다.
주먹으로 내리친다 한들 그 문이 열릴리는 없었다. 마우러스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부스벽 밖에서 노려보는 밀레시안을 향해 듀얼건을 겨냥했다.
밀레시안을 눈치챈 변이체 몇몇이 무방비하게 드러나있는 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타르라크가 밀레시안에게 경고했다. 밀레시안은 문고리를 놓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단단한 비늘로 덮힌 주먹이 방호벽을 후려쳤다.
철판을 뚫어낼것같은 굉음이 연달아 울렸지만 방호벽은 금하나 그어지지 않은 모습으로 굳건히 그 자리에서 세워져있었다. 마우러스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모습이 보였다.
밀레시안은 양 손을 모은채 글러브를 조작했다. 새까만 장갑의 솔기를 타고 새파란 스파크가 파직거리며 타올랐다. 밀레시안은 빛이 나기 시작하는 양 손을 말아쥐며 스텝을 밟았다. 어둠속에서 파란 빛이 흔들린다.
광원에 흥분한 변이체들이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밀레시안에게 달려들었다.
밀레시안은 재빨리 변이체들의 손톱을 피해내며 스파크가 발동된 주먹을 휘둘렀다.
비늘사이사이로 파고들어간 전기적 충격이 변이체들의 몸안을 파고들어갔다.
칠흑같이 어두운 연구실안에서 검은 비늘의 변이체들이 보일리가 없는데도 밀레시안은 침착하게 남은 변이체들을 기절시키고서는 다시 방호벽 가까이다가갔다.
빛은 희미해졌지만 아직 밀레시안의 손은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문고리를 움켜쥐자 벽의 경계선을 따라 푸른 전류가 퍼져나갔다. 밀레시안의 입이 달싹였다. 열어.
밀레시안의 반지가 아주 짧게 램프로 응답했다.
부스의 문이 열리자 마우러스는 책상의 뒤로 도망쳤다.
실험기구며 서류철따위를 아무렇게나 밀어내며 다급하게 듀얼건을 발사했다.
변이체의 괴력앞에서도 금조차 가지 않았던 방호벽은 마우러스의 성급한 사격을 맞고 설탕유리마냥 부스스 깨어져 나갔다.유리가 깨어지는 소리에 타르라크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밀레시안이 도망치려는 마우러스를 쫓아 그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마우러스가 벽에 부딪치며 책상위의 물건들을 쓰러트렸다. 유리병이나 자잘한 소재따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우러스의 멱살을 잡아챈 밀레시안은 근처에 떨어진 작은 메스를 집어들었다.
이름모를 날붙이가 휘둘러졌다. 타르라크는 저도모르게 밀레시안의 이름을 부르며 그만두라고 소리쳤다.
순식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깔끔한 일련의 동작, 목을 향해 정확하게 휘둘러지던 밀레시안의 손끝은 거짓말처럼 마우러스의 목덜미 바로 위에서 멈춰섰다.
반쯤 무너진 유리를 사이에두고 밀레시안은 타르라크를 돌아보지 않은채 물었다.
이 사람이 협력할까요? 한번의 믿음은 행운을 불러왔지만 두번의 믿음은 배신을 불러왔다.
마우러스는 쓴웃음과 함께 어리숙한 믿음의 대가를 총성으로 되돌려주었다.
망설임은 타르라크의 것이었지만 총구가 향하는 곳은 타르라크가 아닌 밀레시안의 미간, 뜨거운 열기가 밀레시안의 귓가를 스치고 날아갔다.
그나마 반쯤 세워져있던 방호부스가 깨어져내렸다.
밀레시안은 가까스로 마우러스의 손목을 꺾어내었지만 그 과정이 온건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노쇠한 연구자의 손목은 부러진 가지처럼 바깥을 향해 돌아갔다. 마우러스의 비명이 울리고 듀얼건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비탄과 고통에 찬 외마디의 비명이 메아리처럼 요동치며 가슴을 파고들어왔다.
머리가 뜨거웠다. 흘러넘친 열기를 식힐 길이 없어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는 실험대에 기대어 앉는동안 온 몸에서 버석서리는 환각이 느껴졌다.
타르라크는 눈을 질끈 감은채 마우러스의 비명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외면한다 한들 이 참상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가쁘게 차올랐던 호흡은 가라앉았다.
두어번 심호흡을 더 내쉬고 나서여 겨우 눈을 뜰 수 있게된 타르라크는 어쩐지 실험실이 이전보다 더 잘보이게 되었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아마 착각은 아닐 것이다. 몸 그자체를 양분삼아 검은 비늘이 자라나고 있었다.
손가락에서 손등, 손등에서 팔목. 이 눈또한 그 영향안에서 변이되고 있으리라. 쉬고 있을 틈이 없었다.
타르라크는 어둠에 지나치게 적응된 눈을 돌려 어디론가로 굴러떨어져버린 모리안의 반지를 탐색했다.
루에리는 점점 민첩해지는 변이체들의 공격을 버거워 했고 이제는 가까스로 막아내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군소리 하나 없이 타르라크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동결되었던 캡슐에서 냉각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질척한 발소리들이 그들을 둘러쌌다.
팔을 물어뜯는 변이체의 목을 베어냈을때 루에리는 이 이상은 버티기 힘들다고 소리쳤다.
흩어진 비늘조각 중에는 아직 붉은 빛이 남아있는 혈흔이 묻어있는 조각들이 섞여있었다.
루에리는 점점 가빠져오는 숨을 삼키기위해 헐떡였고 그의 글라스기브넨도 슬슬 제어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가능한한 빠르게 해결할 것을 확인하고 이 장소를 떠나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루에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실험실의 복도측 창가에서 희미한 붉은 빛이 어른거렸다.
잠시 타르라크들의 위치를 놓쳤던 키홀이 직접 안드로이드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굴위로 안드로이드들의 붉은 레이저가 스쳐지나갔다.
타르라크는 여러겹으로 겹쳐버린 상황을 생각하며 위해 바닥에 엎드렸다. 회색빛으로 보이는 실험실 바닥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물체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변이체들을 풀어낸 것은 마우러스, 마우러스는 타르라크들이 이곳으로 오는 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에리는 마우러스가 이러한 준비를 하고있다는 것이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무방비하게 마우러스에게 다가가려 시도했다.
그건 적어도 이전까지는 마우러스가 루에리에게 우호적이었다는 증거.
하지만 마우러스는 그를 공격했다. 탄환은 빗나갔지만 루에리는 그의 공격에 적잖이 당황했다.
알비의 연구소는 모두 개별적으로 분리되어있었고 각자의 연구원들은 자신의 실험실을 벗어날 수 없었다.
무엇이 일어나든 무슨일이 생기든, 연구원들은 모두 지정된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장소를 이동할 때조차 상부의 요청이 떨어져야만 이동 할 수 있었다.
모든 실험실은 주기적으로 순찰을 도는 안드로이드들에게 감시되고 있었고 그 사이를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한 글라스기브넨의 적응체인 루에리뿐이었다.
루에리는 다시 이 장소로 돌아오게 된 타르라크를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죽은 줄 알았던 동료를 만나는 기쁨과 아직까지도 모리안에 휘둘리는 타르라크의 선택 앞에 괴로워했다.
타르라크 또한 죽은 줄 알았던 루에리가 그나마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그르렁거리는 숨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감상에 젖을 시간따위는 없었다. 가까스로 치명타를 피하게된 밀레시안은 자신이 휘저어낸 외벽속 전선들을 가리키며 이정도 손상은 곧 회복될 것이라고 소리쳤다.
밀레시안을 기억해낸 루에리는 다시는 싸늘한 시선으로 밀레시안을 돌아보았지만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을 보호하듯 가로막았다. 그는 루에리에게 진심어린 목소리로 부탁했다.
루에리는 기가막히다는 표정이되어 타르라크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루에리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굴러다니던 헬멧을 다시 주워들었다. 검은 용의 가면을 뒤집어쓴 검은 기사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타르라크는 밀레시안과 함께 순찰루트의 역방향으로 돌아 마우러스의 실험실로 안내했다.
복도를 달리며 루에리는 바로 나갈것을 권고했지만 밀레시안은 타르라크에게 해독제를 주기 위해서는 글라스기브넨의 실험체가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루에리는 그런 이유라면 자신에게 사용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박했지만 밀레시안은 그 선택은 타르라크가 내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타르라크는 루에리를 바라보았다. 검은 투구너머로 시선이 마주친다.
그것이 신뢰인지 의심인지는, 밀레시안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마우러스의 실험실까지 걸린시간은 불과 수 분, 루에리의 이탈때문에 상부측에서 조금 더 빨리 습격자의 정체를 알아 낼 수 있었었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워르가 각각의 연구원들에게 주의지령을 내렸을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마우러스는 왜..? 누구를 경계하고? 무엇을 위해 그 방아쇠를 당겼을까.
루에리는 달려드는 변이체의 목 깊숙이 나이프를 박아넣으며 그대로 바닥까지 찍어내렸다.
앉아있던 타르라크와 변이체의 눈이 마주쳤다. 변이체는 어둠속에서도 타르라크를 선명하게 알아본다는 듯 괴성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루에리가 소리쳤다.
“타르라크..!”
어둠속 유일하게 빛을 내는 은빛이 손끝에 걸려들었다. 생각할 시간은 이제 끝났다.
변이체는 자신의 목을 고정하는 나이프를 빼내기 위해 버둥거렸다. 목을 긁어내리다 루에리를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짙어지는 피냄새에 변이체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타르라크가 루에리의 나이프를 움켜쥐었다.
손이 자유로워진 루에리는 곧장 뒤로 달려나가 타르라크가 기대었던 실험대를 잡아 당겼다.
끔찍하게 무거운 소음이 끌려왔다. 타르라크의 앞으로 커다란 실험대가 쓰러졌다.
루에리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타르라크를 흘끗 돌아보았다.
타르라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이프를 잡은 손이 푸르게 빛난다싶은 순간 일순 터져나오는 섬광과 함께 변이체의 날카로운 숨소리가 울렸다.
겨우 변이체를 기절시킨 타르라크는 모리안의 반지를 고쳐쥐었다.
힘없이 들어올려진 변이체의 손가락에 검은 비늘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검은 피로 범벅된 변이체의 손은 매우 미끄러웠다.
힘을 주어 움켜쥘수록 변이체의 손은 이리저리 빠져나가며 흔들렸고 타르라크는 울컥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기위해 이를 악물어야했다.
목덜미에서 찌걱거리는 기분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비늘이 점점 타르라크의 머리를 향해 뻗어올라오고 있었다.
살이 에어지는 고통은 가슴께로 번져내려갔다. 심호흡 그리고 한숨, 숨을 들이마시고 내어쉬었다.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잠시동안이지만 어두컴컴하던 실험실 안이 대낮처럼 밝게 보이는 듯한 환각이 찾아왔다.
바로 지금. 타르라크가 변이체의 손가락에 모리안의 반지를 채워 넣었다.
타르라크의 손가락을 파고들어갔던 반지가 한번 빛을 반짝였다.
마찬가지로 모리안의 반지가 반짝였고 밀레시안의 반지가 반짝였다.
변이체에게 끼워진 모리안의 반지로부터 희뿌옇게 피어오르는 연기속에는 살갗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섞여있었다.
타르라크가 반사적으로 소매로 호흡기를 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바로 등뒤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루에리 또한 뒤를 돌아보았다.
은빛으로 빛을 내는 반지의 연기는 순식간에 변이체의 몸 여기저기에서 뿜어져나왔다.
나이프가 꿰뚫어낸 목의 구멍을 기점으로 변이체는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며 마구잡이로 버둥거렸다.
글라스기브넨의 비늘이 녹아내려가고 있었다.
비늘이 녹아내린 변이체의 피부는 인간의 것처럼 매끈하게 드러나있었다.
단지 그 피부가 전부 드러난채 속살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는 것만을 제외하면.
서서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변이체를 바라보던 도중 잊고있었던 총성이 연달아 울려퍼졌다.
섬광은 하나였지만 타르라크와 루에리는 그것이 두개의 탄환이 폭발하며 터져나오는 빛인 것을 알아보았다.
뭉뚱그려진 소리를 섬세하게 나누어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타르라크 또한 이미 루에리만큼 변이되었다는 증거, 마우러스가 도망쳤던 방호부스쪽에서 섬광과 함께 검은 무언가가 날아들어왔다.
그게 무엇인지는 살펴볼 것도 없었다. 타르라크가 밀레시안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려는 순간 어둠속에서 그르렁거리는 숨소리가 울려왔다.
폭발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빼곡히 돋아나있던 비늘들이 어둠속에 속아들었다.
비늘이 사라진 새하얀 팔이 걷히며 밀레시안이 얕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 눈빛은 고민할 여지 없이 의심의 눈초리였다.
“왜….?”
타르라크가 변이체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밀레시안은 마우러스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사납게 노려보는 푸른 눈빛이 밀레시안을 응시했다. 틀어쥔 멱살을 조금 더 밭게 죄이며 그가 놓쳐버린 듀얼건을 바라보았다.
오렌지색 태양의 무늬가 반짝이는 오라클 콜트, 밀레시안이 마우러스에게 물었다.
“왜 퀘사르가 포워르의 연구원인 당신과 협력하고 있는거지요?”
“.....모리안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이다.”
마우러스의 답변에 밀레시안이 인상을 찡그렸다.
깨어진 유리벽 너머로 루에리와 타르라크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피냄새가 호흡속에 녹아들고 뜨거운 열기가 뺨을 간지럽혔다. 새까만 어둠속 이름모를 기계들의 불빛이 반짝였다.
열기와 불빛, 그리고 비명소리. 한 손에 들어올듯 작디 작은 실험실 보석함처럼 반짝임이 모여있는 작은 상자안을 들여다보던 검은 용의 조각상이 속삭인다.
밀레시안은 무너진 돌조각이 속삭이는 말소리를 그대로 따라 읽었다.
“당신이 만든 바이스의 시약에 대한 데이터는 전부 바이브카흐에 귀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전부 도르카페다인이 처리했지요. 그러니 당신이 누구에게서 자료를 얻었는지를 알아야겠습니다.”
“바이브카흐가 아니라 칼리번이겠다. 그리고 그 데이터가 칼리번에게 저장되어있었을지 언전 연구물들은 온전히 바이스의 것이야.
바이스는 분명 포보르의 도움을 받아 연구를 했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약속을 정한뒤 모든 일을 시작했었지.
필리아의 그랜드마스터는 그렇게 무르지 않다.”
“그녀의 연구는 칼리번이 없었다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녀의 연구와 집념이 칼리번에 닿아 두번째 변화가 일어났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아발론은 존재하지 않아.”
“궤변입니다.그녀들의 연구는 오로지 실리엔을 치료하기 위해서만 존재했어요.”
“글쎄다, 그게 궤변이라면 네반의 연구소에 있었던 두 AI들은 어떻게 설명할테지?”
“........”
마우러스는 나지막히 웃음을 지었다.
그는 밀레시안이 잠시 입을 다물게 된 것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래, 바이스는 결국 자신의 연구를 완성하지 못했다.
필리아로 보내려던 연구물을 중간에 탈취당했고 데이터로 남은 자료들조차 역병의 밤에 불타올랐지.
너희 바이브카흐가 칼리번을 복원하기는 했지만 그 조차도 불완전한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마하와 네반은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모든 포보르의 연구원들을 모아 리소스로 이용했지만 그들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그들의 기억과 남아있던 연구자료들, 재구성하는 실험의 기록들. 그래 칼리번은 다시한번 그 당시의 연구상황을 재현하였다.
그것이 모여 최종적으로 형성된것이 당시 바이스들의 인격, 그것을 흉내내는 AI들이 완성 되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너희들 모두가 실패작이야.”
“모리안님은 베이스가 된 데이터칩이 일부 손상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칼리번을 위해 만들어진 보조적인 프로그램에 불과합니다.”
“세상 누가 그런 비겁한 변명을 믿을까..”
“모두가요, 당신이 등돌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밀레시안의 서슬퍼런 목소리에 마우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나는 에린에게서 등을 돌렸고 칼리번을 배신했다.
어차피 죽을때까지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야..”
“......그럼 죽기전에 순순히 협력자가 누구인지 말하세요.”
밀레시안은 나이프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건 너희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마우러스는 밀레시안의 얼굴근처를 스쳐지나가는 레이저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우러스의 말대로 실험실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실험실은 마우러스가 강제로 깨워낸 변이체들이 날뛰고 있었고 밖은 이미 키홀이 배치한 안드로이드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공기가 긴장되어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은 아직 실험체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지만 만일 폭주한 실험체들이 실험실 밖으로 나가려 하거나 그들중 누가 실험실의 문을 열고 나온다면 지체없이 이 곳을 통채로 날려버릴 심산인 것 같았다.
루에리도 그의 방식을 알고 있기때문인지 실험체들을 밖으로 내던지기 보다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고 타르라크 또한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실험체를 잡아 누르며 반지를 끼워넣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자신의 반지를 한번 흘겨본뒤 다시 마우러스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밀레시안이라 하더라도 세번째 반지가 활성화되지 않으면 저 안드로이드들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타르라크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밀레시안은 마우러스의 목을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장갑의 끝이 마우러스의 목을 파고들었다.
손안이 흔들린다. 이 흔들림의 이름은 망설임일 것이다.
하지만 밀레시안은 그 이상을 쥐지 못한채 고개를 숙였다.
호흡이 흐트러져가고 있었다. 마우러스가 아닌 밀레시안의 것이, 불안하게 요동치며 알수 없는 불안감을 재촉하고 있었다. 흐느낌이 번져나갔다. 들이 마시고 내쉬는 숨결속에 하얀 김이 서려있었다.
추위가 느껴졌다.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모를 서늘한 북녁의 바람이 밀레시안의 가슴안을 휘젓고 있었다.
속삭이는 말소리가 검은 용의 파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것은 새하얀 입김이 환상처럼 마우러스의 머리카락위로 흩어지고 난 직후의 일이었다.
조금 더 작은 조각의, 부러져버린 용의 날개의 아래. 새하얀 가면이 밀레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 어둠속에 갇힌 밀레시안이 눈을 깜빡인다.
당신들은 누구? 밀레시안은 얼굴을 잃은 용과 목소리를 잃은 가면을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의 등 뒤로 눈부신 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바이브카흐의 세 여성은 눈부신 휘광을 두른채 밀레시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빌려진 입이 움직인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다해도 퀘사르가 순순히 포워르를 용서할리 없습니다. 그들과 접촉한 것은 아마 당신 개인과의 거래일터, 무엇을 약속받았습니까”
“왜 나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하는거지?”
“무슨이유로 루에리를 살려주었나요?”
“왜 이 목을 부러트리지 않나.”
“당신의 시약은 이미 완성에 가까워져 있습니다. 아니 이미 성공했을지도 모르죠. 저 붉은 머리청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이미 완성된 밀레시안과 비슷합니다. 당신은 무엇입니까. 누구를 위해 글라스기브넨을 완성시킨 것입니까?”
“누구의 기준에서 저 자를 완성이라 말하는 것이냐..”
“대답하세요. 마우러스”
“대답은 네가 해야 할 것이다. 밀레시안의 탈을 쓴 무언가여.
네 질문에 대하여 굳이 내 대답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나는 밀레시안이 무엇인지를 안다.
너희가 무엇으로 만들어 졌는지도 안다. 그럼에도 너희들은 굳이 인간의 답에 집착하는구나.”
“대답하십시오. 마우러스.”
“어째서 밀레시안의 입을 빌려 인간의 답에 집착하는 것이냐.
어째서 한번 결정을 내린 기억을 잊고 다시 같은 답을 찾아 헤메이지?
보거라. 나의 눈을, 내 시선을. 나는 지금 너를 괴물로 바라보고 있지만 내 앞에선 밀레시안은 여전히 사람처럼 흔들리고 있구나.”
“.........”
“너, 지금 무엇이 밀레시안의 입을 빌어 묻고있는 어리석은 가면아. 네 스스로 이름을 말할 수 있겠느냐.”
서리에 비친 환상이 깨어졌다.
밀레시안은 마우러스를 내동댕이 치고는 숨이 차오르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뒷걸음질 치며 방금 내뿜은 숨결로부터 멀어졌다.
마우러스는 자리에 쓰러졌고 밀레시안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메아리친 질문들은 서로의 꼬리를 얽어내며 밀레시안을 수렁속을 밀어넣었다.
머릿속이 점멸한다. 검은 용의 파편과 빛나는 바이브카흐의 목소리, 그 가운데 끼여버린 작디 작은 인간의 그림자.
눈이 깜빡거려진다. 언제나 정신없이 깜빡이던 불빛들이 느리게 흔들렸다.
딱,따닥 하고 타오르는 장작의 소리가 들려왔다.
설원의 세찬 바람과 함께 은빛의 환상이 밀레시안의 어둠을 몰아내었다.
“나… 는...”
“.....”
“나는…”
가슴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공기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밀레시안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세상을 바라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빛이 반짝인다. 은색의 설원이 대답했다.
당신의 염원이 나를 깨운다고, 언제나 어느때나 그들의 소원만이 꺼진 이 빛에 불씨를 다시 지펴온다고.
바이브카흐는 밀레시안을 향해 말 했다.
어째서 아발론을 직접 상대하고 온지도 않은 밀레시안들까지 이렇게 망가지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이 오류는 왜 자꾸만 생겨나는 것이냐고. 실패작. 폐기작. 쓸모없어진. 결함이 생긴.
우리들중 그 누구도 이들에게 연민이라는 감정을 가르치지 않았는데. 어째서?
밀레시안의 반지가 활성화되었다. 가슴 가득 들이마신 숨이 빠져나가며 희미한 목소리를 흘려내었다.
가장 처음, 연민의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은 누구였는가.
“나는 네가 가는 그 길이 너무 고되지 않기를 바랄뿐이야.”
고개를 숙인 밀레시안의 눈두덩이에서 무언가 두어방울 떨어져 내렸다.
마우러스는 품속에서 다른 한자루의 듀얼건을 꺼내들었다. 녹슨 태양이 점멸한다.
밀레시안은 머릿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고통을 견뎌내며 그 자리에 서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마우러스가 밀레시안을 올려다보았다.
“너희들 모두가 인간도, 괴물도 아닌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구나.”
마우러스는 밀레시안을 동정했다.
밀레시안은 스스로가 쏟아낸 말에 혼란스러워 하며 마우러스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뜨거웠다.
변이체들의 괴성사이로 낯익은 전자음이 울려왔다. 모리안의 반지가 내는 알림음에 따라 밀레시안의 반지또한 램프를 점멸하기 시작했고 밀레시안은 아주 잠시 그 빛에 시선을 빼앗겼다. 반지가 활성화 되었다.
가야해. 명령을 완수하러. 맡은 임무를 다하기 위해. 밀레시안은 마우러스의 존재를 잊은 것 마냥 발걸음을 돌렸다.
안타까운 한숨소리와 함께 듀얼건이 장전되었다. 무방비하게 돌아선 등 뒤로 녹슨 태양의 불빛이 밝게 타올랐다.
“불쌍하게도..”
듀얼건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굉음이 터져나오는 순간, 밀레시안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려 마우러스를 바라보았다.
양 팔을 교차시키며 몸을 웅크렸다. 큰 폭음과 함께 튕겨나온 밀레시안은 실험실 바닥을 굴러 타르라크들이 있는 곳까지 나가떨어졌다.
“밀레시안..!!!”
갑작스러운 섬광과 함께 밀레시안의 몸이 부스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산장에서 타르라크에 내밀었을때만해도 일반인과 다름없던 밀레시안의 양 팔은 루에리만큼이나 심각한 수준으로 변이되어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밀레시안의 팔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말끔한 인간의 형태로 되돌아갔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을 놓치지 않았는지 루에리는 말없이 변이체를 후려친뒤 밀레시안을 향해 돌아섰다.
타르라크 또한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한채 자리에 멈춰섰다.
“......”
“...........”
밀레시안은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 타르라크를 돌아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경계어린 두 시선뿐이었다.
밀레시안은 어쩐지 아, 하고 탄식하고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벌어지려는 입을 힘주어 다물었다.
결국 여기까지였다. 어차피 여기까지인 것이다. 철없는 기만의 연극의 끝,
이 탄식은 아쉬움일까, 해방감일까.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살아있는 인간인척 흔들리는 감정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던 행동도 이제 의미가 없었다.
밀레시안은 말없이 타르라크가 반지를 끼워넣은 변이체를 내려다보았다.
반지의 불빛이 점멸하는 속도에 맞춰 온몸을 들썩거리던 변이체는 얼굴전체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검게 물들어있던 눈동자가 수축했다 이완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소리가 멀어지고 열기가 차오른다.
지금 저 변이체의 세상은 분명, 온통 은빛으로 가득차 있는 환상으로 빛나고 있을것이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방호부스안에서 사람의 살이 타오르는 독특한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타르라크의 반지를 한번 쳐다본뒤 팔꿈치 까지 드러난 자신의 양 손을 내려다 보았다.
상처하나 없이 새하얀 양 팔은 루에리와의 싸움에서 다쳤던 흔적까지 지워져 있었다.
왼쪽 손가락의 끝, 새끼손가락에 모리안이 전달한 반지가 걸려있었다.
타르라크의 질문은 끝맺어지지 못한채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왜…..”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더이상 연기를 할 이유가 없었기에 밀레시안은 천천히 반지를 빼내었다.
밀레시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우러스의 기계를 향해 다가갔다.
그 걸음 걸이나 움직이는 속도는 느리다면 느리다 할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한 것이었지만 그 어떠한 변이체들도 밀레시안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수십쌍의 눈이 밀레시안의 손에 머물러 있었다.
손안에 쥘 수 있을만큼 작은 불빛이 그들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둥글게 말려있던 반지를 펼쳐 기계속으로 집어넣었다.
짧은 전자음이 울리며 시스템 전체로 무언가가 퍼져나갔다. 화면이 검게 암전되었고 복도너머의 조명들이 꺼져나갔다.
실험실 안에도, 실험실 밖에도, 불빛하나 남지 않은 연구소에 변이된 실험체들과 약간의 숨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기묘한 전자음이 반복되었다. 밀레시안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기묘한 은색의 안광이 타르라크를 돌아보고 있었다. 타르라크는 야생동물을 진정시키듯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었습니까. 나는 당신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고.”
“.......”
“다만 내가 묻고싶은 것은.. ”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잠시 검게 물들었던 포워르의 화면속 모리안의 새하얀 까마귀가 날아올랐다.
일순간 전등이 깜빡였다. 보잘것 없는 연극이 끝나고 막이 내리기만을 기다린다.
불이 켜지지 않은 무대 위 서있는 것은 괴물이 되다만 인간과 괴물이 되기를 받아들인 인간, 그리고 실패작의 괴물들 뿐이었다.
“왜 나를 동정하는지 모르겠어.”
“밀레시안.”
“왜 나를 불쌍하다 하는지 모르겠어.”
“밀레시안.”
램프들이 깜빡였다. 포워르의 연구소는 내부로 침입한 무언가를 밀어내려 애를 썼지만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이미 자리를 잡은 칼리번을 밀어낼 수는 없었다.
둥근 원을 두른 십자가모양의 포워르의 문양이 분해되어가며 균열이 간 글자들이 지나갔다.
밀레시안은 불안정하게 깜빡이는 전등을 한번 쳐다본뒤 대답했다.
“당신들이 나를 그런 눈으로 볼 때마다 나는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당신이면 됩니다.”
“내가 착한 사람이기를 바라나요? 아니면 나쁜 사람이기를 바라나요.
어디서 부터가 괴물이고 어디까지가 사람의 범위 안인가요?”
“당신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요.”
“두가지는 안돼요. 하나만 가능해요. 사람이면 사람이고 괴물이면 괴물이어야 해요.
어둠앞에 얼어붙은 발걸음이 용기있게 나아갈 수 는 없어요.
흔들리고 비틀리고 물러서고 멈춰서고 되돌아가지도 나아가지도 못한채 그 자리에 못박혀 있을지 언정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어요.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성공과 실패 옳은것과 옳지 않은 것을 결정하는 것은
꿈에서 깨어난자, 빛이 되는자, 서리밖에서 우리들을 바라보는 검은 시선.”
"......."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내가아닌 또다른 누군가의 결정."
화면이 밝아졌다.
밀레시안은 다시 고개를 돌려 화면을 조작했다.
날개짓을 하던 검은 까마귀가 멈춰서고 시스템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지금이 순간 알비를 움직이고 있는것은 포워르가 아닌 칼리번의 의지, 바이브카흐가 연구소를 집어삼켰다.
키홀이 책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리안이 원하는 것은 글라스기브넨의 사멸도 아니고 바이스의 시약에 관한 정보를 훔쳐가기 위함도 아니었다.
그의 통제를 벗어난 안드로이드들이 어디론가로 향하고 있었다.
연구소의 이상을 눈치챈 연구원들이 불안한 눈으로 연구실의 도어락을 바라보았다.
붉은 색으로 일관되던 연구실의 문에 푸른 불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나갈까? 나갈 수 있는걸까? 나가야한다면 바로 지금, 도망칠 기회는 단 한번. 누군가 문을 잡아당겼다.
실험실 안에서 흘러나온 서늘한 냉기가 복도의 뜨거운 공기와 맞물리며 나른한 은빛 한숨을 내쉬었다.
가자. 갈 수 있어. 누군가의 발소리가 복도위에 울려퍼졌다.
탁탁탁탁, 슬리퍼가 울리는 소리가 겹쳐울렸다.
북소리처럼 웅장하지도 않고 박수갈채처럼 따스하지도 않은 매마른 발자국소리가 울려왔다.
흔들리는 전등의 불빛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전원 조준. 무심한 은색의 눈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사격을 승인합니다.
총소리가 울렸다.
루에리는 이름모를 연구원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루에리가 한달음에 달려가 밀레시안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밀레시안은 우왁스러운 손길에 떠밀려 화면에서 멀어졌지만 이미 모든 것은 밀레시안의 손을 떠난 뒤의 일이었다.
화면을 조작하던 사람을 잃었음에도 칼리번은 스스로 움직이며 알비의 안드로이드들을 움직여 나갔다.
벽을 하나 사이에 두고 비명과 고함이 울렸다.
“그만두게 해..!! 저 사람들은 상관없잖아..!!”
“완전히 글라스기브넨을 지워내려면 우선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부터 사라져야해요.”
“밀레시안..!”
“그래요. 그게 내 명칭이죠. 당신들이 바라던 것이 무엇이 되었든 우리들은 어김없이 당신들을 실망시키기 위해 태어
났어요.”
내려갔던 조명 이 환하게 밝혀지고 난장판이된 실험실의 전경이 훤히 드러났다.
실험실을 포위하고 있던 레이저들은 사라졌다.
무엇이 일어난 것인지 누가 의도한 것인지는 너무나도 자명하게 알 수 있었다.
밀레시안은 한없이 검게 가라앉은 눈을 뜬채 타르라크들을 바라보았다.
온 세상이 은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 빛나는 세상속에 안식으로 삼을 만한 그림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잊어버려요. 당신들의 생존만 생각해요.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면 편해질거에요.”
“......”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의도로 만들어진 결과라고 생각하면 행복을 되찾을 수 있죠.”
“........”
“정해진 미래, 주어진 목표. 실패가 용서되지 않는 대신 성공만 한다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는 모든 행동들. 그 모든 것을 드릴테니, 그냥 잊고 이곳을 떠나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그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동안 눈치채는 사람이 생겨나지 않을리 없었다.
누군가가 그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동정했다.
밀레시안들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덮어두고 외면해 왔지만 그 가장된 평화속의 위화감을 모두가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고 어김없이 낯선 고발자가 찾아왔다. 강인하고 당당한 진실되는 칼리번의 빛.
거짓을 부정하고 허영을 걷어내었다. 그의 찬란한 선의를 향해 밀레시안들은 스스로의 발톱을 드러내었지만 역부족일 수 밖에 없었다. 진심을 확신할 수 없었다.
현실을 일깨워내려는 그의 칼날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거짓되었던 일상을 위해서일까? 아니면 못다한 명령을 위해서일까
울려퍼지는 비명, 도망치는 사람들, 고함을 내지르고 상처받은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아발론은 밀레시안들에게 자신이 책임을 지겠노라고 말했다.
이 모든 과정과 시간속에 일어난 비극에 대하여 책임지고 모든 밀레시안들을 멈추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정말 그러면 되는 걸까? 그가 책임지도록 내버려두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걸까?
책임이라는 것이 생기고 잠들어야 할 마땅한 이유를 갖게되면 그 가슴속의 공허함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 허기진 마음을 다시 입안으로 삼켜 낼 수가 있을까? 고민하는 밀레시안들의 앞에 깨어진 가면은 속삭였다.
불쌍하게도.
루에리는 이를 악물며 밀레시안의 어깨를 밀쳐내었다.
밀레시안은 아무런 반항없이 그에게 서 두어걸음 물러났다. 등뒤로 화면의 패널이 닿았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화면 아래로 검붉은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타르라크가 밀레시안에게 말했다.
“모리안이 원하는 것은 글라스기브넨을 이용하려는 것이었군요.”
“네”
“그러기 위해서 차후 증거가 될만한 것들을 모두 지워낼 필요가 있었던 것이고요..”
“네.”
“그럼 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입니까? 단순히 저런 실험을 하기 위해서라면 내 도움따위는 필요하지 않았을텐데요.”
타르라크는 온 몸이 매끈매끈하게 녹아버린 변이체를 가리켰다.
가까스로 숨은 쉬고 있었지만 그것도 곧 한계, 인간의 모습이 된 변이체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검은자위가 수축되었다 이완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꿰뚫린 목에서 질척한 거품소리가 끓어나왔다.
죽어가는 실패작. 밀레시안은 수십번도 더 지켜봐왔던 죽음을 가리켰다.
“저것이 포워르가 만들려 했던 밀레시안의 잔재.”
손을 거두어 자신의 가슴을 짚은 밀레시안은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바이브카흐가 성공했던 밀레시안의 사례.”
밀레시안의 시선은 타르라크에게 향했다. 그 시선속에는 모리안의 의문이 깃들어있었다.
미쳤군. 루에리는 죽어가는 변이체와 밀레시안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글라스기브넨의 실험체를 가지고 너같은 것을 더 만들겠다는거야? 그럼 너는 뭔데..? 너도 저 변이체들 같은거야? 모리안은 이미 예전부터 이와같은 실험을 해오고 있었다?”
“아니요. 우리들을 만든 것은 글라스기브넨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의 글라스기브넨이 우리들을 대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아니네요. 이제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우리들을 만들어낸 것이 글라스기브넨이 아니듯 그들또한 우리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 너를 만든 것은 뭔데..”
“......실리엔.”
루에리의 질문에 타르라크가 대신 대답했다. 글라스기브넨도 밀레시안도 모두 실리엔에서 시작되었다. 타르라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아디만티움의 자료속 반복해서 언급되던 케트라는 소녀의 이름을 떠올렸다.
실리엔에 중독된 소녀 케트, 그녀가 잠들어있던 요람에서 체취한 혈액에서부터 발현시킨 것이 글라스기브넨.
역병의 밤으로 지우졌던 포보르의 그림자가 그의 작은 손바닥 안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바이브카흐와 포보르, 그리고 실리엔이라는 이름이 반복해서 타르라크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포워르는 처음 부터 죽은 자의 이름이었다.
어차피 아무리 발악해봐야 모든 것을 잃어버린 현실을 뒤집을 수는 없었고 가까스로 이름만을 유지한 포보르의 찌꺼기에게 바이브카흐는 큰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큰 위협이 될리 없었고 도움이 될리도 없었다. 그녀들은 그들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에일레흐 왕가의 입장에서는 그 잔재마저도 껄끄러울 뿐이었지만 그들에게 불편함을 호소할 만한 용기는 없었다.
포워르는 그렇게 무관심과 멸시의 사이에 놓여졌지만 대신 소소한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물리적이지 않은 시간의 장벽에 가로막힌채 점점 고립되어갔다.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포워르의 시계가 바이브카흐의 시간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포워르는 여전히 밤에 사로잡혀있었고 바이브카흐는 자신들의 아침을 열어내려 하고 있었다.
그 무엇도 칼리번이 정해놓은 미래 뛰어넘을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칼리번조차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일으키면 어떨까. 키홀은 여명이 터오는 보라색의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시간을 황혼으로 되돌리자, 그리하여 그 어둠속으로 칼리번을 추락시키자.
포워르는 새로운 방식의 역병을 일으켜 두번째 역병의 밤을 준비했다.
케트의 혈액에서 뽑아낸 망각병의 아종을 안드로이드들로 하여금 운반시켜 에린 전역에 살포한다는 것이 프로젝트 아디만티움의 전말.
시간이 지난만큼 무대를 더 크게 확장시키고 끌어들이는 사람의 수를 더 늘렸다. 더 많이, 더 깊게, 더 잔인하게.. 공포를 전염시키기 위해선 사람의 목숨따위 아무래도 좋을 부가적인 사안이였다.
본디 실리엔의 망각병은 크게 세가지의 단계로 나뉘어 있었지만 포워르는 망각의 단계를 생략한 변이의 능력을 강화시켰다.
그 모든 기억을 지워내기도 전에 손끝부터 시작된 변이는 가냘픈 터럭따위가 아닌 단단한 비늘려 변질되었고 실험체들은 망각의 안식 없이 고통속에 이성을 잃어갔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 제대로된 변이가 되기 전에 모두 죽어버린다는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그정도는 개선할 수 있어. 포워르는 그렇게 연구를 거듭해 나갔다.
하지만 그 계획에는 한가지 제한이 걸려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글라스기브넨에는 결국 실리엔이 기반된다는 사실이었다.
아디만티움을 준비하고 있었던 당시 마하는 이미 실리엔을 중화시키는 중화제를 완성시킨 상태였고 당연하게도 그 존재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글라스기브넨에게 위협적이었다.
검은 비늘이 온몸을 뒤덮기전에 그 찬란한 은색의 광물이 연기를 걷어낸다면 그것은 바이브카흐의 승리.
목숨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좀 더 멀리 퍼져나가지 않으면, 아주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으면.. 포워르는 중화제를 이겨낼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시대의 시간은 한번더 그들의 손을 빠져나갔다. 도망쳤던 아발론이 되돌아왔고 마하가 무너졌다.
모리안은 마하의 연구소를 흡수했다.
바이브카흐는 마하의 연구소에서 일어난 일들을 최소화하여 그 존재자체를 은폐시켰고 남은 자료들은 엄중한 관리하에 폐기했다.
포워르는 어둠속에 우두커니 멈춰서서 아발론이 그 뒤를 쫓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들이 달려나가는 시간은 포워르의 것이 아니었다. 그 어디에도 포워르가 발을 딛을만한 틈은 남아있지 않았다.
나아가지 못했지만 물러서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영원히 약점에서 방도를 찾지 못한채 길 한가운데에 멈춰섰다.
포워르는 우선 도망친 마하의 연구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잔재들을 쫓아서라도 중화제의 기밀을 얻어보려했지만 결과는 당연하게도 실패였다.
대부분이 네반의 연구소로 이전되었고 남은 이들은 모두 모리안에게 사냥당했다.
의미없는 시간이 흘러갔다. 포워르는 물러서지도 나아가지도 못한채 그 자리에 못박혀 있었다.
어떻게 해야할까 어떤 방법을 생각해야할까. 포워르의 자원은 한계가 있었고 지식은 칼리번이라는 벽앞에 가로막혀 있었다.
하지만 그 견고할 것 같던 벽에도 작은 실금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네반이 죽었다. 그리고 모리안이 그녀의 연구소를 폐쇄했다.
기회라면 기회였고 위기라면 위기였다.
이때까지 아무래도 좋았던 포워르가 적대목록에 이름을 올렸고 모리안은 그들의 행적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뻐해야할까?
하지만 모리안은 우선 침묵을 지킨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의심했다.
정말로 그들에게 바이러스가 존재하는지를 그리고 그 바이러스가 실리엔에서 시작된 것이 맞는지를. 시간이 흐르고 아디만티움은 나날히 성장해나가고 있었지만 모리안은 여전히 그들을 방치해 두었다.
물론 인식한 문제에 대해 방치라는 결론을 내린것은 칼리번스럽지 않은 결론이었지만 사실 이 선택은 그 당시의 바이브카흐, 모리안 개인이 내린 결정에 가까웠다. 의견을 나눌길없고 새로운 의견을 발의하는 목소리조차 없었다.
모리안은 홀로 칼리번을 바라보며 의심을 거듭했다. 은막 밝히는 화면만이 어두운 회의실속 빛이었다.
화면 속 펼쳐진 정경은 역병의 밤이 일어난 다음날의 연구소.
검은 로브와 하얀 로브를 입은 요원들이 바쁘게 현장을 조사하고 있었다.
걸음을 걸을때마자 조금씩 흔들리는 카메라의 구석으로 새하얀 소매자락이 비춰지고 있었다. 걸음이 멈춰섰고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요람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고철덩어리는 찢어지고 불태워져 원래의 형태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 아래 굴러다니는 돌무더기 사이에서 누군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모리안의 요원들은 이 신원불명의 연구원이 누군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 일대를 샅샅히 조사하고 있었다.
그렇게 발견된 시신은 두가지의 이름으로 분류되었다.
네반은 오른쪽에 있는 것은 벨라의 시신이라 확신했지만 다른 하나는 케트의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마도, 라는 말에 확신이 깃들지 않은 것은 발견된 시신의 형태가 명백하게 인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요람안에서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던 케트가 요람 밖에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변이될 것인지는 미지수였기에 이러한 극적인 변화조차 감안해야 한다는 네반의 의견이 뒤따랐다. 하지만 그럴까? 모리안은 의심했다.
분명 아드니엘의 요람은 부서졌지만 그 아래 남은 두개의 시신이 벨라와 케트라고 확신 할 수만은 없었다. 분명 부분적으로 캐트와 일치하다는 결과가 나오기는 했지만 모리안은 또다른 누군가라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아무리 케트가 실리엔에 변질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시신은 전혀 다른 형태의 변이를 가지고 있었다. 야수화가 진행될 정도로 실리엔의 곁에 오래 머물러 있었지만 케트의 유전자를 가진, 제 3자의 시신.
생각해보자 일찍이, 칼리번이 없던 시기에 운명을 주도하던 총명한 여성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과연 정말로 아무런 해답을 찾아내지 못했을까? 모리안은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확인해보기로 했다.
모리안은 아디만티움 대한 화면을 띄워놓은채 세 병의 실험관을 바라보았다.
하나는 글라스기브넨에 감염원 연구원의 것 또다른 하나는 글라스기브넨에 감염시킨 밀레시안의 것. 그리고 마지막 것은 알비의 쓰레기장에서 찾아낸 이름모를 짐승의 검은 비늘.
은색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각기 다른 반응이 관찰되었다. 모리안은 꼼꼼하게 각 시험관의 반응을 기록한뒤 낮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험실을 나서 옷을 갈아입었다. 방진 모자를 벗어내자 길고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모리안은 손을 저어 화면에 떠있던 네반과 마하의 문장을 걷어내었다. 화면 가운데에 까마귀의 문양이 떠올랐다.
“밀레시안을 불러와.”
“그렇군. 같은 실리엔에서 시작되었지만 서로 다른 결과와 서로 다른 중화제. 변질된 것은 프로젝트 아디만티움이 아니었어. 글라스기브넨 자체가 중간부터 변질되었던거야.”
타르라크의 중얼거림에 루에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타르라크는 흥분하며 루에리를 돌아보았다.
“연구를 거듭하던 중, 깨달았던거지. 글라스기브넨의 근본이되는 혈액의 주인이 케트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모리안의 중화제가 듣지 않았던거야. 그래서 저 사람을 살릴 수 없었어. 그래서 모리안은 실험을 세가지로 나누어 진행한거야.
하나는 케트와 같은 기존의 실리엔을 가지고 있는 밀레시안. 다른 하나는 변질된 글라스기브넨을 가진 포워르의 실험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존의 글라스기브넨을 보관하고 있는 나 자신.”
“그게 뭐야..”
루에리를 주먹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그게 뭐야.. 그게 뭐냐고!! 결국 실험이었잖아..!! 나도!! 마리도!! 타르라크도!!
사람의 목숨을 실험체로 사용하는 거였잖아..! 살아도 살아있지 않는 생명을 이어나가며 이 날 이때까지 버텨왔어..! 근데 그게 실험이었다고? 서로 가지고 있는 패를 내려놓지 않기위해 졸개들만 움직이는 탐색전이었다고?”
왜 그랬습니까. 딱 한번 타르라크는 모리안과 연결된 통신기를 향해 물었었다.
왜 그래야 했습니까. 당신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까지 했어야 했습니까. 수많은 인력을 거느리고 있었고 수많은 자원을 쥐고 있었습니다.
우리들보다 더 많은 선택지를 바라볼 수 있었고 더 현명한 선택을 내릴 수도 있었는데도, 왜.
그녀는 아무런 고민없이 수중에 있는 장기말을 소비하기로 결정내렸다.
그녀는 그러한 선택이 더 나은 내일을 만들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당신들이 없어도 내일의 에린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장기말중 하나였기에, 모리안은 그들이 낙원에 필요하지 않다고 결론내렸다.
타르라크는 스스로의 손으로 통신을 끊었다.
당신이 틀렸다고, 그는 까맣게 흐려진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틀렸고 내가 틀렸다. 우리들이 틀렸다.
나는 당신에게 책임을 묻기위해 돌아왔지만 당신은 책임을 질 마음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리…”
타르라크는 소원했다. 그녀의 다리가 멈추지 않기를. 그녀의 숨소리가 끊어지지 않기를.
달리고 또 달려, 영원을 향해 달려나가기를. 언젠가 이 설원의 눈이 그치고 타르라크 또한 걸음을 멈추었을 때, 희망을 품고 있을 소녀의 앞에서 아무말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비참하지 않기를.
루에리는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우리들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달려나왔을까.
살아가는 것과 죽는 것, 그리고 모든 의미가 상실되었던 시간들이 종잇조각처럼 찢겨 흩날렸다.
삶을 끊어내지 못해 이어나갔다. 헤쳐 나갈 탈출구를 찾지못해 복도를 맴돌았다.
그래도 살아라. 그래도 살아남아. 끓어오르는 찻주전자와 반투명한 실험관, 서로다른 흰 연기를 바라보며 끓어오르는 원념을 되씹었다.
나무장작이 타오르면 몸이 녹아내렸다.
추위가 가시면 형태를 잃은 피부조각이 딱딱한 비늘의 형태로 변이되며 살결 깊숙히 상처를 남겼다.
타르라크는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서리내린 담요를 목끝까지 끌어당겼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릴때까지, 무슨이유가 되었든 저 문은 모리안의 명령에 의해 열릴 것이다.
그것이 죽음의 제안이든 또다른 절망의 선택지이든 그들은 이 문을 두드릴 수 밖에 없다.
그 때를 악착같이 살아남아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길이 끝에 다다르고 나서야, 네가 왔다.
거짓말을 하는 까마귀의 눈이 깜빡였다.
[“나와 함께…알비로 가주세요.”]
타르라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이 아려왔다.
비늘로 변이되려는 손가락을 옭죄어오는 금속의 고리에는 어떠한 불빛도 비치지 않았다.
이따금씩 빛을 밝히기 위해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지만 무언가의 의지가 반지의 작동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 당신은 때때로 나를 실망시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희망이 좌절된 것은 아니야.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을 향해 한걸음 나아갔다.
흥분에 소리치고 있던 루에리가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향해 돌아섰다,
[“나는 당신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 장소가 설원이 아니었다면. 감시하듯이 쳐다보는 조종사만 없었다면.
타르라크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더이상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상처입히지 말아요. 그 손을 내게 줘요.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밀레시안을 향해 격렬하게 소리를 지르던 루에리가 그를 돌아보았다.
루에리의 눈이 커지고 있었다. 내뱉은 숨을 다급하게 씹어삼키며 타르라크를 향해 입을 벌렸다.
눈이 멀어버릴 것같은 빛속을 걸어 밀레시안에게로 다가갔다.
새하얗게 변해버리는 시야속 타르라크의 눈에는 새하얀 설원이 보이고 있었다.
설원의 빛이 거치고 밀레시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눈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밀레시안, 나는 당신과 함께….”
말을 끝맺을 시간도 없이, 기회를 노리던 변이체가 무방비상태로 노출된 타르라크의 목을 물어뜯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왔다.
“타르라크..!!!!”
격렬한 열기와 함께 눈앞을 흐리게 만들정도의 고통이 찾아왔다.
설원은 온데간데 없고 새까만 어둠만이 눈앞에 가득했다.
그래, 나는 이걸 원했다. 타르라크는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움직여 한모금 숨을 들이켰다.
목소리가 되지 못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 어둠을 바랬다. 밀레시안, 나는 당신을 그 은빛의 세상속에서 데리고 나와주고 싶었습니다.
밀레시안은 두어걸음 물러서는 동안 루에리는 이를 악물며 타르라크에게로 뛰어나갔다.
더이상 물러날 길이 없이 차가운 기계더미들이 밀레시안의 등을 가로막았다.
새하얀 바닥을 타고 새까만 혈액이 바닥을 타고 흘러나왔다.
칼리번이 물었다.
있지, 이제 세번째 반지를 활성화 시켜도 될까?
양 손에 얼굴을 파묻은 밀레시안이 대답했다.
모르겠어.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어.
밀레시안은 자리에 주저앉은채 눈을 감았다.
그의 바램대로 검게 닫혀버린 시야속에서 밀레시안은 소리없이 날아든 까마귀의 깃털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녹아들지 않은채 이질적인 검은 빛을 발하는 검은 머리의 여신이 밀레시안을 내려다 보았다.
왜 이렇게 괴로운 일만 생기냐는 밀레시안의 질문에 여신은 소리없이 입을 움직여 말한다.
“네가 감히 인간이 되려 하지 않았니.”
검은 비늘의 조각이 밀레시안의 뺨에 돋아났다.
글
톨비밀레) reload #13(3)
그 다음 자신이 어떻게 움직였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순간적인 괴력으로 문은 자물쇠 채로 나가떨어졌고 갑작스러운 냉기에 화로의 불꽃이 흔들렸다.
타르라크는 손을 들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그를 바라보고있었다.
마치 뺨을 내리치려는 기세로 손을 들어올렸던 타르라크의 눈이 흔들렸다.
정신차려. 이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야. 이들은 그저 명령받은대로 대상을 자극할뿐이다. 이 사람은 모리안이 아니다.
화풀이를 할 대상도, 원망을 받을 상대도 아니다.
하지만 이 열기는, 이 분노는, 이 원망은.. 아니야. 정신차려야해. 아니야.
타르라크는 자신이 무슨짓을 하려 했는지를 깨달으며 뒤로 물러섰다.
뒤늦게 손에 들려 있던 문고리가 떨어져 나갔다. 문고리와 함께 뜯어져나온 문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물기어린 바람이 화로속을 헤집었고 불꽃이 흔들렸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모든것이 엉망이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타르라크를 올려다 보았다. 안경이 떨어져 있었다.
밀레시안은 눈송이가 녹아내리는 안경을 들어 타르라크에게 내밀었다.
“이 다음에 찾아오는 밀레시안은 당신을 죽일겁니다.”
“마치 너는 나를 지키려는 것처럼 말하는 군요.”
타르라크는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뺨에 닿는 냉기가 뜨겁게 느껴질정도로 타르라크는 머리끝까지 고양되어있었다.
타르라크는 몇번이고 자신의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눌러 감촉을 확인했다.
처음은 어색하게 그리고 이내 조금 강하게.
안경이 비뚤어질정도로 강하게 자신의 뺨을 두드리던 타르라크가 겨우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안경을 받아들고 다시한번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물방울 너머로 추위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일단 들어만 오세요”
밀레시안은 두말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타르라크는 자연스럽게 밀레시안의 로브를 받아 화로 근처에 널어놓았다.
서걱거리던 옷가지는 이내 축 늘어져 작은 물방울들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타르라크는 수건과 담요따위를 밀레시안에게 건네준뒤 하나뿐인 소파로 안내했다.
“일단, 추울테니까요.”
그런걸 걱정한다면 문을 부수지 않는게 더 먼저 아니었을까.
밀레시안의 시선이 난장판이 된 현관으로 향하자 타르라크는 헛기침과 함께 밀레시안의 무릎위에 담요를 내려놓았다.
밀레시안은 어색하게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아내었다.
문이 수리되는 동안 밀레시안은 오두막 안을 둘러보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오두막안에는 딱 한사람분량의 먹고 자고 생활할 공간이 보장되어있었다.
무언가에 쓸린 흔적이 있는 대들보는 웬만한 무게에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튼튼해보였고 유리창으로 보였던 창문들은 총격에도 깨어지지 않을 특수제품이었다.
화로를 제외한 모든 방향에 감시카메라의 렌즈가 반짝이고 있었다. 밀레시안과 눈이마주친 렌즈하나가 천천히 각도를 돌려 타르라크쪽으로 시선을 비켰다. 밀레시안또한 그 카메라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타르라크의 뒷모습이 보였다.
타르라크는 완전히 박살이난 경첩을 보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얼추 문틀에 끼워넣어보지만 이미 휘어진 경첩이 본래의 역할을 해낼리 없었다.
그럼 하는 수 없지. 문을 일으켜 세운 타르라크는 그대로 대못을 박아 문을 고정시켰다.
아주 잠시 이러면 나갈때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원래부터 드나드는일은 거의 없는 문이었다.
타르라크는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채 묵묵히 망치를 휘둘렀다.
타르라크가 아차 싶은 생각이 든 것은 두사람 분량의 식료품을 계산하던 도중의 일이었다.
다행히 보급품이 도착한 지는 얼마 안되었시기이기에 식량사정은 아직 괜찮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사람일때의 이야기였다.
아무것도 자생할 수 없는 이 설원에서 두사람이서 다음 보급시기까지 버티는 것은 조금 힘들지도 모른다.
한참동안 식료품의 배분을 계산하던 타르라크는 곧 핫 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그게 아니지 하고 소리를 내어 말해버렸다. 혼잣말하던 버릇이 새어나온탓인지 타르라크는 재빨리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지, 돌려보낼 생각부터 해야하는거지.
밀레시안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타르라크를 바라보다가 카메라를 돌아보았다.
원래 이런 사람이냐는 무언의 질문에 카메라가 대답할 수 있는 것는 아무것도 없었다.
혼자서 바쁜사람. 밀레시안이 타르라크에 대해 내린 첫 평가는 딱 그정도였다.
문의 수리를 마친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에게 컵을 하나 내밀었다. 밀레시안이 컵안을 들여다보았다.
“독같은 것은 안들어있습니다.”
타르라크는 제 입으로 대답하면서도 혀끝이 쓰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확신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설원은 처음부터 그들이 만든 거대한 실험실의 일부.
오랫동안 그들의 보급품에 의존해 끼니를 이어왔지만 그들이 이 보급품안에 장난질을 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설원에서 별다른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갇혔고, 죽지 못해 살아있었다. 밀레시안은 컵안의 내용물을 홀짝 들이키며 대답했다.
“상관없어요.”
밀레시안의 대답에 타르라크는 살짝 언짢아진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타르라크가 반대편 의자에 앉자 밀레시안은 설명을 덧붙여왔다.
“글라스기브넨에 대해서는 이미 다 알고 왔어요. 그리고 당신이 그 감염자라는 것도요.
그걸 알면서도 이 오두막에 들어왔는데 이제와서 독따위를 겁낼리가 있을까요.”
“기분이 이상해지는 신뢰로군요.”
“이걸 신뢰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죠.”
장작이 타올랐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던 냉기가 가시고 다시 따스한 온기가 공기를 덥혀왔다.
납작하게 줄어들었던 장작불은 새로운 장작을 신나게 태우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새로 채운 주전자가 김을 뿜어 올리고 불규칙적으로 따닥거리는 장작소리가 울려왔다.
눈이 멀 것처럼 환하게 빛나던 설원은 금새 밤으로 바뀌어버렸다.
오렌지빛으로 물든 오두막 안에 두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장작불에 흔들리는 그리자는 제법 운치가 있었지만 눈앞의 낭만보다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었다.
타르라크는 두번째 보급때 밀레시안을 돌려보낼수 있을지를 가늠하며 다시 보급품의 양을 가늠했다.
자신의 양을 줄이고 어떻게든 남은 물건을 잘 배분하면.. 쫓아낼 생각은 안하고 다음 보급 걱정부터 하다니 배가 불렀구나 타르라크.. 한숨소리가 정체되어있던 공기를 밀어내었다.
밀레시안은 그가 왜 인상을 찡그리는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밀레시안이 컵을 내려놓았다.
“다음 보급은 오지 않습니다.”
“....뭐?”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나는 당신과 함께 알비로 가기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그리고 내 다음에 올 밀레시안은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 오겠지요. 당신은 이제부터 나와 함께 알비로 가야합니다.”
타르라크는 인상을 찡그리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나마 조금씩 따뜻해져가던 공기가 다시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누구마음대로..?”
“포워르의 아디만티움 프로젝트는 여전히 그 연구소에서 진행중입니다.
뿐만아니라 이제는 변질되었죠. 글라스기브넨은 이제 안정적으로 변이체를 발생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고 또 그들을 제어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의 연구는 거의 다 완성 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이미 완성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랑은 더이상 상관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궁금할텐데요. 포보르가 어째서 치료제도 없이 글라스기브넨을 만들었는지.”
“.........”
“그리고 왜 모리안님이 가지고 있는 중화제가 효력을 발휘하는지.”
“그만.”
밀레시안은 두개의 반지를 꺼내보였다.
은빛이 도는 두터운 반지 한 쌍이 무슨 의미인지 알 길은 없었지만 타르라크는 더이상 말도 섞이 싫다는 얼굴로 밀레시안의 말을 잘라내었다.
불쾌하게 일그러진 녹색의 눈동자가 밀레시안을 쏘아보았다.
“이제와서 치료제가 있었다고 말한들 사라진 내 동료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확인 했나요?”
“수작부리지 마세요.”
“정말, 확인했어요?”
밀레시안은 손안으로 반지를 굴리며 되물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밀레시안은 자신의 손등으로 타르라크의 시선을 유도했고 타르라크는 천천히 뒤집어 엎는 손등을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은 장갑을 벗었다. 밀레시안의 손등에는 예의 그 검은 비늘이 빼곡하게 돋아나 있었다.
타르라크가 고개를 돌리자 밀레시안은 익숙하다는듯 소매를 내렸다.
미쳤어 라는 속삭임이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다시 장갑을 끼는 밀레시안의 약지손가락에는 손에 쥐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은색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조금 더 얇고 무늬같은 것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밀레시안은 쥐고 있던 반지를 컵이 놓여진 테이블 옆에 내려놓았다.
물건은 확실히 전달했다고, 밀레시안은 힘주어 덧붙였다.
“내 혈액으로 자기 자신에게 글라스기브넨을 감염시킨 것입니까?”
“그리고 이 반지가 당신의 혈액에 대항하는 치료제입니다.”
“대답하세요. 당신의 감염원이 나입니까 아니면…!!”
아니, 상관없다. 이것이 마리의 혈액이든 타르라크의 혈액이든.
중요한건 눈 앞이었다. 지금 이 순간의, 마주하는 눈빛이 서늘했다.
삶의 의욕은 커녕 표정이라는 것을 지어보일 의지조차 없는 인형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르라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밀레시안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그 사람은 타인의 목숨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요원은 보내야겠고 가서 뒤늦게 감염되면 저번과 같은 꼴이 되니 그냥은 못보내겠고, 그래서 나를 찾아왔나 했더니 이젠 멀쩡한 사람을 감염시켜서 보냈습니까? 변이체를 안정적으로 발생을 시켜요? 누가 말입니까. 포워르가? 아니면 바이브카흐가?
이번에는 아예 치료제를 보상으로 쥐어줄테니 아 그렇습니까 하고 알비로 갈줄 알았습니까?!”
“저야 모르죠. 저는 받은 임무만 수행할 뿐이니까요.”
밀레시안은 타르라크가 왜 흥분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겁에 질린것도 무모한것도 아니였다. 그저 타인의 이야기였고 다른 사람의 사정이었다.
이 선택지는 나의 것이 아닌 당신의 것. 이 운명은 밀레시안이 아닌 타르라크를 축으로 흘러간다.
밀레시안은 장갑을 두어번 잡아당기고는 화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작보다도 더 바싹 마른 건조한 목소리가 잿가루마냥 흩어져 내렸다.
“당신, 죽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도 죽겠죠. 당신이 거부한다면 우리들은 다음 선택지로 옮겨가면 그만 입니다.”
타르라크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쓸어올리는 그의 이마께에서 비늘같은것이 반짝이다 사라졌다. 울룩불룩 솟아올랐던 피부가 느리게 가라앉았다.
침착해. 아니라는 거 알잖아. 이런 얕은 도발에 속아넘어갈 정도로 그의 판단력을 흐려지지 않았다.
타르라크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릿속에 떠오르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지워내었다. 잘 생각해 마리가 있었다면, 마리가 정말 모리안의 손아귀에 있었다면.
이 날 이때까지 모리안이 필사적으로 그를 살려낼 필요는 없었다.
타르라크는 마지막으로 큰 숨을 내쉬며 자리로 돌아갔다. 집안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작은 렌즈들이 조심스럽게 방향을 돌려 타르라크의 움직임을 추적했다.
“......당신 이름은 뭡니까.”
“밀레시안.”
“나이는요?”
“적당히 있을거에요.”
“출신은?”
“몰라요.”
“소속은?”
“공식적으로는 없는 상태입니다.”
“가족이나 친지, 아니, 당신이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있습니까?”
“음...보시다시피..”
밀레시안은 이미 예상하고 있지 않느냐며 눈을 감았다.
가늘게 흘겨보는 따가운 시선에 밀레시안이 다시 눈을 떴다.
검은 먹물을 떨어트린것 마냥, 눈동자 한가운데에서 부터 검은 동그라미가 서서히 확장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무엇인지 모를 목소리가 사람의 혓바닥을 빌려 이야기했다.
“우리들은 개인의 의지를 가질만큼 뚜렷한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마주하는 대상에 따라 변화하고 명령에 의지해 행동할 뿐.
이름이나 나이, 성별, 취향이나 특기 신체적 특징까지 모든지 바꿔 행동할 수 있지만 그것은 만능이 아닌 복사품. 가짜인 동시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공예품. 인형.
완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계산된 예측을 뛰어넘을 수 있는 까닭은 이 존재 자체가 처음부터 칼리번의 계산안에 들어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래요. 우리들은 이름이 아닌 명칭으로 불리우는 밀레시안.
네반이 만들고 모리안이 키워낸 마하의 잔재, 우리들은 바이브카흐의 그림자입니다.”
“.......바이브 카흐의 그림자..”
타르라크는 아주 느리게 밀레시안의 말을 따라 발음헀다. 눈을 깜빡였다. 밀레시안은 흐응.. 하는 작은 목소리를 내며 소파 깊숙히 기대어 앉았다.
나른함이 감도는 표정안에 부드럽게 말려올라간 입꼬리가 미소짓고 있었다.
“음.. 예시라도 보여드리는게 더 빠를까요?”
밀레시안은 안경을 치켜올리는 시늉을 하며 타르라크와 같은 포즈로 고쳐앉았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의미는 바로 이런 것.
밀레시안은 타르라크의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내며 말했다.
[“이런 건 어떠십니까?”]
녹음된 목소리가 울리는 것 마냥 똑같은 목소리가 타르라크를 향해 물어왔다.
타르라크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면 이런건?”]
밀레시안은 같은 개체의 조금 더 어린 목소리를 흉내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타르라크가 혀를 찼다. 밀레시안은 다시한번 눈을 깜빡였다. 미소가 사라졌다.
“그만두세요. 당사자가 보기엔 끔찍할 뿐이니까요.”
“네.”
밀레시안은 다시 원래의 자세로 고쳐앉았다.
방금전의 생기있던 표정이 거짓인양 건조하고 무기질 적인 가면이 얼굴을 대신한다.
방금 그것도 누군가를 흉내낸 것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의 행동일까.
관찰하는 시선 앞에 밀레시안은 아무런 대꾸없이 시선을 흘려보냈다.
과연, 무작정 다 대답하는 것은 아니란말이지.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에게 물었다.
“좋아요. 일단 그 임무라는 것 부터 이야기를 끝냅시다. 일단 그 반지가 정말 치료제이긴 한겁니까?”
“이 반지는 모두 세개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손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손에. 마지막 하나는 알비에 있을 진짜 글라스기브넨의 실험체에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실험은 안해봤다는 이야기군요.”
“현재의 글라스기브넨을 대상으로는 실험을 끝낸 적은 없습니다.“
밀레시안의 모호한 대답에 타르라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반지의 작동원리는?”
“당신이 이 반지를 끼면 세번째 반지가 활성화 됩니다.
세번째 활성화 된 반지가 글라스기브넨과 만나면 제 반지가 활성화 됩니다.
제 반지가 활성화 되면 당신의 반지가 활성화 됩니다. 그럼 세 반지 모두 자신의 역할을 마치게 됩니다.”
“만약 세번째 반지에만 치료제가 들어있고 우리 둘의 반지는 독약이 들어있다면 어쩔겁니까”
타르라크의 질문에 밀레시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세번째 반지를 활성화 시킬때 까지 삶이 연장되는 것이겠네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는 것이군요.”
“더 정확히 말씀드려야 겠습니다. 당신도 나도 다른 것을 선택할만한 선택지는 없습니다.”
밀레시안은 양손을 깍지끼어서는 턱 아래를 받쳐들었다.
얼기설기 얽혀있는 손가락의 가장 마지막끝에 은색의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믿고 끼던가. 끼지않고 이 다음에 찾아올 밀레시안의 손에 죽던가.”
“만약 내가 다음 밀레시안을 기다린다면 너는 어떻게 됩니까.”
“나도 당신과 함께 죽습니다. 아니, 다음 밀레시안이 출발하기 직전 나는 죽습니다.”
“.......”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나의 죽음이 모리안님께 전달되고 그 신호를 출발신호 삼아 다음..”
“그만, 그만…거기까지 이야기 하면 됐어요. “
타르라크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너무 가벼운 대화에 타르라크는 자신의 정신마저 어디로 날아가버릴 것 같은 기분이되었다.
생명이 가벼웠고 삶이 가여웠다. 대화 속 목소리 어디에도 밀레시안의 의지를 붙들어 놓을만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숨 하나에 시선이 스쳐지나갔다.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름도, 나이도, 모든게 대상에 따라 변화한다 이거지..”
[“성별도 어느정도 흉내 낼수 있습니다만.”]
“내 목소리로 그런 흉내 내지 말라니까..!”
“네.”
밀레시안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타르라크는 유난히 꽉 다물린 입매를 보며 이마께를 어루만졌다.
그러니까 방금 그건.. 제 나름대로의 장난인걸까. 타르라크가 고민하는 동안 밀레시안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원에는 쉼 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팔랑팔랑 날리는 눈이 아닌 여러 결정이 뭉쳐내리는 굵고 소복한 함박눈.
지붕위에 쌓이고 쌓인 눈들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내려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렸다.
창문밖에 눈더미가 소복히 쌓이는 동안 타르라크와 밀레시안은 말없이 저마다의 침묵속에 빠져들었다.
“밀레시안.”
“네.”
“대상에 따라 반응을 달리한다고 말했죠?”
“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타르라크였다.
밀레시안은 처음부터 침묵의 공백은 없었던 것마냥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방금전의 목소리 장난도 나에 대한 반응입니까?”
“네, 당신이 질색하길래.”
“.... 하지만 나는 상대가 싫어하는 장난은 두번 반복 안하는 스타일인데요.
그건 누구를 기반으로 만들어낸 반응이었습니까?”
“......”
밀레시안이 고개를 돌려 타르라크를 바라보았다.
“밀레시안, 상대에 맞추는것 이전에 기본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인격이 있습니까?”
“......”
“아니면 그건… …...”
타르라크는 하던 말을 멈춘채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은 대답없이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시 부르면, 이쪽을 돌아볼 것이다. 타르라크는 머리를 헝클어 트린뒤 다시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다시 물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녹색의 눈이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은 처음으로 눈을 깜빡였다.
무의식중에 하는 깜빡임이 아닌 불편함과 회피의 의사.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의 시선이 향하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유리창 표면으로 타오르는 화롯불과 나란히 마주앉은 두 개의 의자가 보였다. 얼굴이 비치지 않는 먼 창문께에 타르라크의 슬리퍼가 비치고 있었다.
타르라크는 다시금 밀레시안을 불렀다.
“밀레시안.”
“네.”
“밀레시안.”
“듣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타르라크는 지금 이 모든 생각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동시에 의미가 없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서? 그렇다고 해서? 타르라크에겐 더이상 선택지가 없었고 이제 자신의 길이 끝나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 다음은 없다. 다음에 오는 밀레시안에게는 이러한 대화의 기회조차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타르라크는 자신의 생각을 거듭 부정하면서도 밀레시안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되돌아오고 무의미한 부름을 반복했다.
시선이 마주쳤다.창을 통해 느껴지던 검은 시선이 타르라크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때보다는 작게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정상인의 범위보다는 조금 더 넓게 풀려있는 검은 동공 속, 화롯가의 불길이 반짝였다.
그 모습은 두말할 것 없이 따스한 빛을 품고 있었다.
타르라크는 소리없는 한숨을 달싹거렸다. 말이 되지 못한 소원이 공기중에 녹아들었다.
밀레시안은 스스로 말했다. 자신은 타인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그러나 인간의 예상은 뛰어넘는다고.
바람을 들어줄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신의 상상보다 더 나을 수도 있고 더 나쁠 수도 있다.
과거가 정해지지 않았기에 그 미래는 무한. 다만 선택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나아갈 수 없었을 뿐이다.
온전한 인간조차 운명에 휩쓸려 이런 설원까지 떨어지는 마당에 부여잡을 것 하나 없는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고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명령어뿐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변화한다. 수도 없이 많은 형태로 그 모습을 바꾸어가며 그 자리에서 몸부림친다.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이 들고 있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선택에 기로 앞에 섰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선택과 후회를 반복하며 살아온 생애에 끝에 또다시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죽지 못해 살고 있던 그에게 살아갈지 죽어버릴 지를 묻고 있었다.
어느 것이 답일까 무슨 대답을 내어놓아야 올바른 선택일까. 타르라크는 깍지낀 손을 모아 턱을 받쳤다.
녹색의 눈이 또다시 흐려졌다.
살아도 죽은 목숨과 죽어도 살아가야하는 기묘한 두사람이 한 오두막에 마주앉아있었다.
그는 다시한번 이 모든 생각에 부정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밀레시안에게 머물러있는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버릴 수 없었다. 만일 그 때 마주보던 눈도 이렇게 포기와 실의가 가득했다면, 그는 그 숲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이름모를 열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를 떠나서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와. 소녀가 말했다.
언젠가 다시한번 우리들을 기억해줘. 설원 어딘가에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숲의 향기가 스쳐지나갔다.
타르라크는 책상을 향해 일어서며 물었다.
“체스는 할 줄 아나요?”
밀레시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는 방법뿐이라면.. 이라고 대답했다.
타르라크는 온화한 미소를 띄워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택지 앞에서 등을 돌린 그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잠깐 어울려주시죠.”
시계가 움직인다.
눈이 내리는 설원의 오두막,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장작불이 타오르는 소리와 차가 끓어오르는 소리,
또각거리는 나무 말들이 움직이는 소리와 중간중간 식기따위를 사용하거나 의자가 끌리는 소리뿐.
밀레시안은 날마다 이어지는 체스게임에 의아해하는 눈치였지만 그저 타르라크의 의견에 따라 움직였다.
최소한 언제까지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충고에 타르라크는 달력을 한번 흘끗 보고는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의 생각을 헤아릴수 없었다. 차라리 이 체스판 처럼 훤히 드러나면 좋을텐데.
밀레시안은 몇 번의 고전끝에 체스판 끝에 다다른 폰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승격을..”
“무엇으로?”
“......”
밀레시안은 눈을 돌려 남은 말들을 헤아렸다.
밀레시안의 꽤 위험했었지만 여왕은 아직 살아있었고 룩도 건재했다.
부족한 것은 초반에 하나 허무하게 보내버린 나이트 하나정도.
하지만 밀레시안은 굳이 나이트를 필요로하지는 않았다. 이왕 여기까지 온거 가장 유용한 말을 고르는게 맞아.
그렇지만 손은 여전히 머뭇머뭇 선택을 망설이고 있었다. 오랫동안 열지 않은 입안이 끈적거렸다.
밀레시안은 미끌거리는 타액을 한데모으기 위해 입을 우물거렸다.
끈적하고 우울한 기분을 삼켜내자 바싹 마른 혀끝이 입천장을 끌어당겼다.
밀레시안은 타르라크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타르라크를 이기기 위해서는 정석적인 방법보다는 조금 변칙적인 전략이 효과적이었다.
“나이트로..”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의 나이트를 손에 쥐어주었다.
체스말을 건네는 그의 검지손가락에는 은색으로 반짝이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나이트를 내려놓은 밀레시안은 다시 게임을 재개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 타르라크가 선언했다.
“체크메이트.”
역시 나이트로 바꾼건 무리수였을까. 찬찬히 지난 게임의 내용을 복기하는 밀레시안을 바라보며 타르라크는 말했다.
“재미있었습니다.”
“그런가요?”
“즉석에서 생각한 것 치고는 아주 기발한 작전이었어요.”
“결국 져버렸지만요.”
“그렇지만..”
타르라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레시안은 타르라크가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승패를 떠나서, 당신의 나이트가 저의 퀸을 잡았을때는 당신도 주먹을 움켜쥐지 않았습니까?”
“.......”
밀레시안은 대답없이 남은 말들을 정리했다. 타르라크는 한 김 식은 찻주전자를 들고 돌아왔다.
아직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주전자에서 향긋한 차향기가 풍겨져왔다.
타르라크는 이제는 익숙해진 두개의 컵에 적당히 나누어따른뒤 주전자를 치워놓았다.
밀레시안은 체스판을 접고 컵을 끌어당겼다.
적막했다. 승부가 길어질때마다 잠시동안 찾아오는 휴식의 시간이었다.
이제 곧 타르라크는 예의 그 글러브속의 자료를 옮겨적을 것이고 밀레시안은 그의 개인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릴 터였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다시한번 체스를 두고 잠을 잔다.
벌써 며칠이나 이 무의미한 날들을 반복했던가.
타르라크는 이미 반지를 꼈지만 도무지 출발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원래 예정되었던 보급날까지 기다릴 생각인가. 하지만 그러기엔 식량이 부족할 것이 분명했다.
원래 혼자서 살더라도 생존이 빠듯하도록 짜여진 식단, 철저하게 글라스기브넨을 통제하기 위해 짜여진 그의 보급품으로는 두사람의 식사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밀레시안은 텅 빈 종이와 아직 열리지 않은 펜을 바라보았다.
타르라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내일 출발하면 딱 맞을 것 같군요.”
“식량을 다 소비해야할 필요가 있었나요?”
“좀 더 넉넉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입니다.”
“내 몫의 식사는 신경쓰지 않아도 좋다고 미리 말씀드렸는데 말이죠.”
밀레시안의 말에 타르라크는 빙긋이 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그러면 의미 없지 않느냐는 의문의 대답과 함께 그는 기침을 토해냈다.
갈증과는 다른 버석거림이 그의 목덜미를 긁어내리고 있었다.
차를 마셔도 가라앉지 않는 기침이 의미없다는 걸까, 아니면 혼자서 죽어가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일까.
기침을 가리기위해 말아쥔 타르라크의 손 가운데서 은색의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손가락 한마디를 거진 다 덮을 만큼 두꺼운 반지는 어쩐지 유약해보이는 그의 손가락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다. 차라리 같은 은색이라도 얇은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자신이 지급받은 것과 같은 얇은 디자인의.., 반지에 대한 생각을 거듭하던 밀레시안은 시선을 다른곳으로 돌리며 차를 홀짝들이켰다.
무의미한 상상. 애초에 반지가 뭐 어떻단 말인가. 이건 악세사리따위가 아니야.
밀레시안은 흘려보낸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던 탓에 생겨난 잡념이라고 생각하며 컵끝을 깨물었다.
아무것도 없는 설원속, 단 둘만이 있는 오두막의 시간은 현실보다 느리게 흘러갔다.
1분 40분같이 느껴졌고 하루가 지났다 생각하면 고작 30분이 조금 더 넘은 시간이 흘러갔을뿐이었다.
타르라크의 행동이 딱히 느린것도 빠른것도 아니었기때문에 밀레시안은 이 시간감각의 오류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이해 할 수 없었다. 시간을 가늠할 환경이 안되어서 그런걸까.
밀레시안은 하루종일 은색으로 빛나는 바깥풍경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순간 낮이 되고 아차싶은 순간 밤이되어버리는 설원은 오늘도 어제와 같은 풍경으로 눈보라가 휘날리고 있었다.
밀레시안이 창밖을 바라보는 동안 아주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타르라크는 천천히 글러브를 조작해 저장된 정보를 불러들였다. 사각거리는 종이소리와 함께 펜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한모금 더 차를 머금으며 그의 펜이 움직이는 것을 눈으로 쫓았다.
이 허비되는 시간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건 나태함일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한모금을 목너머로 넘긴 밀레시안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시선이 마주친다. 녹색의 눈동자는 어느새인가 밀레시안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꼬리를 바라보며 밀레시안은 눈앞에 비치는 씁쓸한 미소를 흉내내었다.
그 날 저녁, 밀레시안은 오래간만에 기억에 남는 꿈을 꾸었다.
기억속에 남아있는 것은 아주 일부분에 불과했지만 밀레시안은 녹색의 잔상이 흩어지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어리석은 녹음이 흩어지고 있었다. 끊없는 희망을 부여잡고 놓치 않는 끈질긴 녹색의 주박,
밀레시안은 흩어진 녹색 어디선가 풀벌레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설원의 바람소리 대신 들려오는 작은 날벌레의 날개짓소리에는 열기 어린 여름의 풀내음이 섞여들어있었다.
나지막한 양의 울음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풀숲에서 작은 날벌레들이 날아오르는 환각이 밀레시안의 눈을 가렸다.
쉴새없이 점멸하던 불빛이 사라졌다.
밀레시안은 어둠을 향해 되물었다.
이건 누구의 기억? 검게 변해버린 용의 석상은 말없이 밀레시안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석상아래 부서진 새하얀 가면이 밀레시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게 무슨 명령을 내리고 싶은거야?
가면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했지만 입부분이 없는 반쪽짜리 가면이었던 탓에 아무런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밀레시안은 고개를 들었다.
어둠속으로부터 검은 칼날이 날아오고 있었다.
두려움, 혹은 긴장감, 힘이 들어가는 몸이 뻐근하게 통증을 호소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찌그러진 몸을 부풀렸다. 내동댕이쳐진 몸을 추스려 몸을 일으켰다.
칼날을 피해내기 무섭게 검은 그리브로 무장한 발이 날아들었다.
정면에서 걷어차인 탓에 몸이 좀 느리게 반응했지만 그래봤자 상대는 사람, 밀레시안은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으며 나이프를 휘둘렀다. 강한 바람소리와 함께 대검이 휘둘러져 들어왔다.
안드로이드들 속에서 태연하게 섞여있는 이질적인 검사가 하나 있었다.
밀레시안은 무식하리만치 강한 힘에 떠밀려 두어걸음 물러섰다.
검을 휘두른 검사는 말없이 손을 휘저어 경계모드로 전환된 안드로이드들을 내보냈다. 붉은 램프가 번쩍였다.
밀레시안은 안드로이드들의 공격을 피하며 다시 거리를 좁혀왔다.
근접전으로 엉겨붙는 안드로이드들의 팔다리를 잘라내자 균형을 잃은 몸뚱이가 뒤로 쓰러졌다.
텅 빈 몸뚱이에서 하얀 연기가 복도가득 피어올랐다.
시야가 흐려진 탓에 밀레시안의 공격은 거기서 중지, 하얀 안개사이로 붉은 빛이 쌍을 이루어 흔들렸다.
안드로이드들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레시안은 그 빛을 징검다리 삼아 검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얗게 흐려진 복도의 정 중앙, 움직이지 않는 굵은 숨소리가 바로 그가 있는 위치였다.
검사는 태연하게 검을 들어 밀레시안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상대가 안보이는 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일텐데도 검사는 어렵지 않게 밀레시안의 공격을 방어하며 역으로 공격을 가해왔다.
미세하게 진동하는 검끝이 보호구를 깎아내었다. 엉망이 된 프로텍터를 미끼삼아 떨쳐내었다.
빈틈을 찾는다면 파고들 수 있을거야. 장검으로는 반응의 한계가 있어.
몇번이고 달라붙기를 시도하던 밀레시안은 강한 스파크를 튀기며 검은 기사와 정면으로 맞붙었다.
텅하는 소리와 함께 밀레시안은 또다시 벽면으로 날아갔다.
누군가가 환풍기를 작동시켰다. 안개가 사라져갔다.
[“밀레시안..!”]
“아직 버틸만 해요. 서둘러요.”
“.......”
밀레시안은 순간적으로 잡아챈 검은 기사의 머리보호구를 내던졌다.
텅빈 금속음이 복도를 따라 굴러갔다.
헬멧을 빼앗긴 검은 기사는 흐트러진 붉은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타르라크가 숨어있는 연구실을 흘끗 바라보았다.
아직, 아직 할만해. 아직 할 수 있어. 밀레시안은 발자국이 선명한 옷을 털어내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나이프가 흔들렸다. 헐거워진 자루에서 좋지 못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이라는 말은 결국 언젠가는 지쳐버린다는 이야기, 반면 안드로이드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얼굴을 채워 절도있는 발소리로 복도를 울려오고 있었다. 검은 기사는 지치지 않았고 상황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다시 소모전으로 돌아간다면 지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조금 흐름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어. 밀레시안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누군지 궁금하나요?”
“.....”
“나를 쓰러트리기 전까지는 알려줄 수 없어요.”
대답은 안하겠지만. 밀레시안의 으름장에 붉은 머리의 기사가 고개를 살짝 비틀어졌다.
갸웃거리는 움직임인지 시선을 돌리는 움직임인지 모호한 몸짓이었다.
대답은 없을테지만 반응은 보일것이다. 살짝 비틀어진 목덜미로 검은 비늘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붉은머리의 기사가 입을 열었다.
“그녀석이 누구여도 상관없어. 모리안의 요원은 모두 배제한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밀레시안으로서는 그의 대답이 굉장히 뜻밖의 반응이었다.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반, 그리고 상황에 대한 정확한 답변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반절이었다.
하지만 그는 상당히 침착하게 밀레시안의 말에 대답했다. 생각하듯 시선을 돌리고 시험하듯 밀레시안을 내려보았다.
밀레시안은 당혹감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요원이 아니에요.”
“그러면?”
분명, 요원은 아니지. 밀레시안의 대답에 검은 기사가 되물었다.
“그냥 그 비슷한..”
밀레시안은 말끝을 흐리는 동시에 붉은 머리의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대화에는 관심 없다는 걸까? 약아빠졌기는.. 밀레시안은 남자의 공격을 피해낸뒤 방향을 바꿔 달려나갔다.
몸을 틀어내는 중간, 나이프를 하나 집어던지며 남자의 헛점을 유도했다.
나이프를 쳐댄뒤 정직하게 들어오는 찌르기, 다시 한번 가드, 그리고 다시 힘겨루기.
하나밖에 남지 않은 나이프가 대검이 맞부딪치자 예의 그 불쾌한 진동이 팔을 타고 가슴까지 흘러들어왔다.
양손으로 다잡은 나이프의 날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제 곧 이 나이프도 한계, 밀레시안은 나이프가 부서지는 것에 개의치 않고 대검을 밀어내었다.
맨손이 된 밀레시안은 양 손가락을 넓게 펼치며 붉은 머리의 남자 뒷편으로 몸을 굴렸다. 검끝이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돌아섰다.
밀레시안은 와이어가 연결된 글러브를 꽉 움켜쥐며 검을 잡아당겼다.
현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진동이 온 몸을 불쾌하게 흔들어 놓았다. 밀레시안은 이를 악물며 현을 조였다.
잠시 힘겨루기가 있었지만 대검은 결국 와이어의 속박을 이기지 못한채 부서져내렸다.
부서지는 검의 조각들과 흔들리는 금속의 현, 파편들이 튀어올랐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굉장히 뜻밖이라는 얼굴로 뺨을 스치고 지나간 붉은 선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한시름 덜어낸 밀레시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보는 밀레시안의 표정에는 여유로움까지 감돌고 있었다.
“전직 연구원과 체스친구정도?”
“그거 대단한 인연이군..”
피부가 갈라지며 비늘같은것이 튀어올랐다.
상처는 비늘의 흔적으로 뒤덮였고 밀레시안은 그러면 그렇지 하고 대답하며 와이어를 회수했다.
밀레시안의 나이프는 부서졌고 남자는 대검을 잃었다. 와이어풀링으로 어떻게든 동점으로 만들었지만 이제부터가 문제, 밀레시안은 저릿거리는 양팔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양손을 움직여보았다.
손끝이 둔하다. 하다못해 조금 온전한 모양의 안드로이드 라도 있었으면 꼭두각시 대용으로 사용해 볼텐데.
하지만 이런 경우를 상정하지 않았던 밀레시안의 공격과 닿아있는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대검 때문에 안드로이드들은 모두 박살이 나있는 상태였다. 애초에 지나치게 연약하고 무른, 허수아비에 가까운 로봇들이었다.
그렇군, 이제는 어쩐다.. 이런식의 정면 공격은 불리해. 밀레시안은 어떻게든 남자의 주의를 끌기 위해 입을 열었다.
“대화가 가능한 상대를 만나면 묻고싶은게 있었어요.
이렇게 본인에게 질문할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요.”
“시간이라도 끌어볼 생각인가? 어디 한번 해봐.”
“당신, 어떻게 살아있는거죠”
“신나게 싸워 놓고 갑자기 죽은사람 취급이야?”
남자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모리안은 이미 글라스기브넨을 손에 넣었어요.
글라스기브넨의 약점이 냉기라는 것도 알고 조금만 날씨가 추워져도 활동을 멈추는 특성을 가진다는게 무슨 의미인지도 알고 있죠.
아디만티움의 기획대로 에린전역에 글라스기브넨이 살포된다 하더라도 에일레흐에게는 네반이 만든 레인메이커 시스템이 있으니 어느정도 소용없을거에요.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이외의 도시들. 레인메이커의 기후조작으로 어느정도 버티며 왕성에 중화제를 공급한다면 도시 안은 안전해지지만 그렇지 못한곳은 분명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버리겠죠.
포워르가 노린것은 칼리번의 의지가 닿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차이.
그래요 분명 포워르가 노렸던 것은 병의 고통으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로 하여금 칼리번에서 등을 돌리게 만들 생각이었어요.
공정치 못하고 공명치 못한 위선을 드러내게 하려던것이 처음의 목적.
하지만 지금은 당신이 있네요. 그것도 몇단계나 되는 변이체의 고비를 뛰어넘고 어떠한 부작용도 없이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기적의 한 개체가.”
“......”
“어떻게 한건가요? 당신 이외의 모든 변이체들은 또 어떻게 된건가요. 모두가 이성이 없는 괴물이 되어 얼려져 있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적은 없나요?”
남자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익숙하게 눈을 피하며 표정을 얼버무렸다.
“글쎄, 나는 워낙 워낙 튼튼하게 태어난 체질이여서.”
“거짓말. 튼튼한 것으로 실리엔을 극복할 수 있었으면 나같은건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밀레시안의 확신어린 답변을 흘려들으며 남자는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대검에서 나이프로. 무기를 바꾸는 것 만으로도 남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동시에 그가 취한 자세는 아주 낯이 익은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그가 만들어진 모조품이 아닌 것을 확신했다.
“누구죠? 당신의 뒤에 서있는 사람은..?”
“글쎄..”
남자는 가볍게 대꾸하며 나이프의 자루끝으로 자신의 머리를 긁적거렸다.
고개를 반쯤 기울인 남자의 옆모습에서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져왔다.
“나를 쓰러트리기 전에는 알려줄 수 없어요.. 였나?”
남자의 뺨에 비늘이 돋아나고 있었다.
비늘은 뺨을 타고 올라가 귀를 덮었고 까맣게 물든 귓바퀴는 지러미모양으로 펼쳐졌다.
눈동자가 변하고 숨소리가 변질되었다. 밀레시안은 속으로 온갖 욕을 다 내뱉으며 와이어를 펼쳤다.
부분변이가 아니였잖아. 밀레시안은 근처있는 안드로이드의 팔과 다리따위를 잔뜩 끌어모으며 날붙이를 꺾어내었다.
칼날을 붙든 와이어들이 카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면을 긁어내렸다. 잔뜩 경계를 하는 밀레시안을 향해 남자가 물었다.
“아, 그러고 보면 나도 하나 물어볼 것이 있었어.”
“.....무슨?”
“모리안은 왜 일부러 둘씩이나 사람을 보내온거지?”
“그야…”
남자는 짧게 웃으며 나이프를 휘둘렀다.
질문을 던지고 그 호흡을 파고드는것이 이 사람의 상습적인 페인트인 모양이었다.
밀레시안은 안드로이드의 팔을 무게추 삼아 날카로운 와이어가 남자의 팔을 휘감았지만 이번은 다르다.
남자는 팔을 한번 당기는 것 만으로도 와이어의 속박을 끊어내었다. 부서진 상완의 철갑안으로 또다른 검은 비늘들이 돋아나있었다.
어깨까지 새카맣게 덮고 있는 비늘들은 그 자체가 갑옷인것 마냥 번들거렸다.
남자는 나이프를 휘두르며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네 손의 그 장갑, 분명 모리안의 연구원들이 기기를 다룰때 쓰는 그 장갑이야.
그걸 개조해서 무기로 쓰는 녀석이 하나 있어서 그 정도 변형된건 알아 볼 수 있지.
너 혼자서라면 어렵지 않게 이 연구소를 휘저으며 원하는 바를 얻어 갈 수 있을텐데. 왜 일부러 혹을 붙이고 들어온거야?”
“하나만 묻는다면서요.”
남자는 이미 인간이라기 보다는 반인반용, 밀레시안은 입술을 깨물며 터무니 없는 괴력을 어떻게 받아칠지를 고민했다.
어느정도를 예상해야 할까, 어느 정도를 상상해야할까. 약해질대로 약해진 타르라크 조차 강철로된 경첩을 그대로 뜯어낼 만큼의 근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저 사람은 어떨까, 타르라크보다 훨씬 더 많이 진행된 진짜 글라스기브넨의 숙주, 이성을 잃지 않은, 반인 반용의 남자. 용의 기사가 묻는다.
“까불지마라 모리안의 개. 내가 듣고싶은건 네녀석의 농담따먹기따위가 아니야.
네 말대로 모리안이 글라스기브넨을 손에 넣었다면 그건 내 동료들중 누군가가 살아서 돌아갔다는 것.
네가 모리안의 실험체라는건 그들중 누군가가 너와 만났다는 것. 혹은 모리안이 그들에게 무슨짓을 했다는 말이 되겠지.
그렇다면 어째서 이곳으로 돌아온거냐. 변질된 글라스기브넨을 얻기위해 찾기위해 온거냐?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일부러 두 사람으로 나뉘어 시간을 끄는거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밀레시안의 눈가에도 비늘 비슷한것이 돋아나고 있었다.
한없이 예민하게 날을 세운 본능이 밀레시안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대답해. 머릿속을 지배하는 바이브카흐가 속삭였다. 대답하지마. 열이오른다. 머릿속 불빛이 점멸한다.
남자가 물었다.
“대답해, 너희는 무엇을 위해 이곳으로 돌아왔지?”
“나는..”
“너는 뭐지?”
보급선 대신 도착한 이송기에 오르기 직전 타르라크는 계단앞에 멈춰 선뒤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타르라크의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밀레시안은 무슨일이냐는 표정으로 타르라크를 올려다 보았다. 설마 이제와서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니겠지?
타르라크는 바람결에 흩어지는 목소리를 최대한 전달하기위해 크게 소리쳤다. 고함소리같은 대화가 오고갔다.
“한가지 확실히 해둡시다.”
“........?”
“나는 당신을 믿지는 않습니다.”
“발언 시점이 부적절하네요. 조종사가 이쪽을 돌아보고 있어요.”
“상관없습니다. 뭣하면 이 자리에서 죽이던가요.”
“그럴리는 없어요. 나는 당신을 알비로 데려가야 합니다.”
“내가 당신을 따라 알비에 가지 않으면 이용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인가요?”
“네.”
“당신이? 아니면 내가?”
“우리 둘 모두요. 당신이 없는 나는 이용가치가 없고 내가 죽은뒤에는 당신의 이용가치도 없어집니다.”
타르라크는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게 내가 당신을 따라 알비에 가는 이유입니다. 나의 가치는 당신의 목숨에 있고 당신의 가치는 나의 목숨에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목숨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지요. 아 물론 누군가에게 저당잡혔다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그 누군가가 모리안일리는 더더욱 없고요. 다만 이건 확실히 합시다.
하루가 한달같고 한달이 사 년같았던 저 설원속에서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은 것은 삶에대한 갈망도 아니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아닙니다.
그건 오로지 나와 내 동료들이 걸어온 길에 대하여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을뿐.”
타르라크는 자신의 가슴을 쳐보이며 말한다.
“밀레시안, 나는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정합니다. 연민하고 불쌍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나의 목숨에 가치를 걸고 있는 당신에게 내가 걸어왔던 길을 보여주겠습니다. 그 끝이 어떠한지 보여주겠습니다. 당신이 싫다고 해도 이미 이 선택지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네, 그래요. 당신도 나도 이미 한 길을 걷고있으니까요.
이 길의 끝에서 만난 당신에게 무언가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나와의 만남이 당신에게 무언가를 남겨주기를. 이 끝이 위선과 기만으로 얼룩지더라도 단 한점의 진심이 전해지기를.”
“........”
“나는 나의 길의 끝이 당신의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밀레시안은 소리없이 입을 움직였다. 이것은 연민이 낳은 비극의 시발점.
남자가 밀레시안의 입모양을 읽어내기도 전에 휘둘러진 와이어가 날아들어왔다.
밀레시안은 반대편으로 몸을 굴렸다. 안드로이드의 날카로운 파편을 축으로 삼아 날아든 와이어가 남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남자는 가볍게 안드로이드의 파편을 피해낸뒤 밀레시안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나이프는 이미 의미가 없이 격투에 가까운 난전, 밀레시안은 피하는데 급급해진채 최대한 신중하게 공격을 피해내었다.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간 주먹이 깊은 자국을 남기며 벽을 따라 이어져갔다.
벽을 후려칠때마다 전등이 흔들렸다.
헝클어진 와이어를 회수할 길이 없어 마지막 남은 글러브마저 연결을 해제했다.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간 밀레시안이 숨을 헐떡거리며 벽에 기대어 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밀레시안이 지친것에 비해 남자는 호흡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밀레시안을 노려보았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남자도, 밀레시안도, 몸속의 피가 끓어오르는 동안 글라스기브넨이 더욱 활개를 치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애써 기침을 숨기기위해 큼큼 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속이 매스꺼웠다.
잠시 숨을 고른 밀레시안이 다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남자 또한 주먹을 허리춤 가까이 끌어당겼다. 손가락에 끼워진 작은 반지가 신경에 거슬렸다.
밀레시안은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흘끗 바라본뒤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번째 공격이 날아들었다.
밀레시안은 모리안에서의 훈련을 떠올리며 왼쪽으로 피해내었다.
상대또한 이런 패턴에 익숙한지 곧장 왼쪽을 막아오는 공격이 날아들었다. 여기서는 가드를,
하지만 그건 사람대 사람으로서의 이야기. 밀레시안은 날아드는 공격을 카운터로 받아치며 서로의 위치를 뒤바꾸었다. 상대의 힘을 이용해 구석진 자리에서 벗어난 밀레시안은 곧장 백스텝을 밟으며 긴 거리를 벌려내었다.
파지직 거리는 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안..!! 이쪽은 거의 다 끝났습니다. 괜찮습니까? 대답 하세요..! 밀레...시…!!”]
밀레시안은 빠르게 따라붙는 공격을 피해내기에 급급했다.
이렇게 피해내는 것으로는 승산이 없다. 하지만 한대라도 맞았다간 다음 연계기로 이어진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가 사용하는 기술을 밀레시안도 알고 있다는 점, 남자도 그 점을 알고 있는지 변칙적인 페이크를 섞어오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져왔다. 호흡이 흐트러지며 밀레시안의 반응속도도 점차 느려졌다. 비늘이 일어나려는듯 피부가 갈라졌다가 이어붙기를 반복했다.
온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억누르며 사람의 형태를 유지해야했다.
잔뜩 열이 올라온 머릿속을 울려오는 불빛. 그리고 결국 한순간, 밀레시안은 힘차게 움켜쥐어진 차징 피스트를 막아낼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만 포기할까? 밀레시안의 눈가 아래에 작은 균열이 갈라졌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 할 수 없어. 어떻게든 무슨 방법을..
타르라크는 빠르게 흘러가는 실험체의 명단을 뒤지며 아직 살아있는 이름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알파벳순으로 나열된 이름들을 쭉 훑어 내리며 붉은 이름들을 지워내려가던 찰나 아직 흑색으로 남아있는 이름을 두 개 발견했다.
이름을 따라 날짜와 성별, 신장등의 정보를 지나 가장 마지막으로 시선을 옮겼다.
최근의 위치를 확인하는 순간 타르라크는 준비된 장치를 작동시키며 서둘러 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하지만 아직 포기할 수가 없어. 어떻게든 방어를..,
밀레시안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들이칠 충격에 대비했다. 아무리 몸을 웅크려도 철벽을 움푹패이게 만드는 저 손길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밀레시안은 한쪽팔의 방어를 포기한채 힘주어 움켜쥔 손을 휘둘러 등뒤를 막고 있는 벽을 내리쳤다. 벽안을 지나가는 복잡한 전선이 손안에 얽혀들었다. 가슴을 가로막은 팔 아래 딱딱한 비늘이 차례차례로 일어나 딱딱한 보호막을 만들었다.
검은 주먹이 밀레시안을 향해 내질러지려는 찰나, 연구실의 문이 열리며 타르라크가 뛰쳐나왔다.
“루에리..!!”
루에리라고 불린 남자는 밀레시안을 복도 저편까지 날려보낸 뒤 인상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카메라가 그들을 예의주시하려는 순간, 연구소의 전원이 내려갔다.
벽안을 헤집으며 멀찍이 밀려난 밀레시안이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토해내며 딱딱하게 경화된 팔을 꺼내들었다.
어둠속 누구도 볼 수 없었지만 그 팔은 루에리 못지 않게 변이된 용의 손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볼 새도 없이 손은 다시 인간의 형태로 돌아갔고 밀레시안은 갑작스러운 어둠에 혼란스러워 하는 두 사람을 향해 다시 다가갔다.
밀레시안의 앞으로 타르라크는 양팔을 벌린채 끼어들어왔다.
밀레시안은 등돌려선 타르라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만두세요!! 그 사람은..!!”
“당신은 정말로 이 자가 협력할 거라 생각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