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비밀레) reload #2

마비노기/reload 2016. 12. 31. 05:10




3.


밀레시안의 시간은 어디쯤에 멈춰있는걸까. 

이따금씩 밀레시안이 부엌에 설 때마다 톨비쉬는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조금 일찍 테이블 한 귀퉁이에 앉아있고는 했다.

야무지게 오무려잡은 밀레시안의 손끝은 분명 부상을 당하거나 실수를 하지 않을테지만 톨비쉬는 가슴한구석이 꽉 죄여오는 것을 느끼며 테이블에 기대어 앉았다. 


1년이 지나면 이러한 답답함은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톨비쉬는 아려오는 속을 의식하지 않으려 밀레시안의 뒷모습에 신경을 쏟았다. 

곁눈한번 돌아보지 않는 밀레시안은 전에 없이 집중하는 얼굴로 쟤료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우물쭈물하거나 지긋이 바라보기만 하는 다른 행동들과는 다른 모습이였다.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해도 역시 날붙이는 위험한 물건. 

한때 톨비쉬는 밀레시안이 관심을 쏟을 만한 다른것을 찾아 이것저것 소개하기도 했었다.

휘두르는 게임기나 리모컨, 간단한 핸디크래프트 키트따위였지만.. 당연하게도 밀레시안은 어느것 하나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왜 이런걸 주냐는 의아해하는 눈썹만이 톨비쉬를 올려다볼 뿐이였다.

그나마 억지로 쥐어줄 때의 어색한 손모양은 톨비쉬의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그의 행동을 무시한채 밀레시안은 그가 사온 냉동식품따위로 시선을 돌리며 인상을 찡그려 보일 뿐이였다. 

맛이 없는건 아닌데, 톨비쉬는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부엌으로 들어가는 밀레시안을 따라가며 조건을 내걸었다. 칼을 사용할때는 톨비쉬의 시선안에서만. 

암묵적으로 체결된 규칙에도 밀레시안은 이견하다 없이 칼을 빼어들었다.  벌써 몇개째의 억지 규칙들인건지, 아무리 많은 규칙이 행동에 규제를 걸어와도 밀레시안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처럼 받아들이며 톨비쉬만의 규칙에 따라 움직여 주었다. 


순응해주는걸까? 아니, 톨비쉬는 단정지으며 테이블의 의자를 빼어 앉았다.  

그녀는 그저 관심이 없을뿐이였다. 이 상황과 이 장소, 이 시간이. 갑자기 이 집이 불타오른다고 해도 밀레시안은 태연하게 불티를 피해 걸어나올뿐 충격을 받거나 불을 끄려는 노력은 하지않는다.


톨비쉬가 있을땐 되도록 함께 있기, 말없이 멀리 떠나지 않기, 잠은 되도록 안방에서 자고 저녁은 꼭 함께먹기, 약은 정해진 시간에 맞춰 꼬박꼬박 먹고 한두알씩 빼먹지 않기. 칼과 불은 톨비쉬의 관리하에만.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아 뒷문 열지 않기. 

이 모든 규칙들을 밀레시안은 왜? 라는 의문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반항하지 않아 기뻐해야하는건지 반응이 없어 슬퍼해야하는건지, 톨비쉬는 끓어오르는 냄비의 간을 보는 밀레시안을 보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습관적으로 두드리는 이 손버릇은 일종의 불안감의 표현이였고 그리움에 대한 해소법이기도 했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나무소리너머에서 입을 삐죽 내밀고는 휙하니 돌아서는 밀레시안을 떠올리자 톨비쉬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져나갔다. 멀리서부터 보아도 나 화났어 라고 보이는 미간이 그를 향해 다가온다.


“톨비쉬, 손가락 좀.”


엄철 싫어했었지 이 소리.. 밀레시안이 소리없이 다가와 손가락을 꼬집어 올릴때마다 톨비쉬는 급하게 양 손을 털어보이며 항복하듯 손을 올려보였다. 마치 의도치 않았다는듯이, 정말 몰랐다는 것처럼. 

10의 9은 의도치 않은 버릇이였지만 한번정도는 꼭 풀죽은 강아지마냥 과장된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트리는것이 그의 소소한 즐거움중 하나였다. 

저거 또 연기한다, 다정하고 정다운 팀원들이 그를 힐난했지만 그는 정말 고민이라며 푸념하듯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으면며 눈치를 살폈다. 잠시동안 잔소리를 멈춘 밀레시안이 중요한 이야기를 듣는것 마냥 집중하며 시선을 고정시킨다.


“미안하다니까, 나도 못고치는 버릇이라 하지 않았나”

“……거짓말. 방금은 일부러 친거면서.”


속아주지는 않았지만. 


톨비쉬는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돌아보는 밀레시안의 시선이 아주 마음에 들었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표정이나 집중하며 귀기울이는 모습이나. 혹은 늘 똑같은 대화를 하면서도 속아주는 귀여움이나. 창립이래부터 지금까지 팀원 누구도 반응하지 않은 무의식적인 버릇이였지만 밀레시안은 달랐다.


똑똑똑 하고 테이블을 두드리는 순간 풀숲에 앉아있던 작은 동물이 일어서는것마냥 우뚝 멈춰선다. 

똑똑똑, 다시한번 들려온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똑,똑, 점점 느려져가는 단서소리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와 같은 상습범이 한박자 늦게 시선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어보이는 일상.




톨비쉬는 부엌에 서 있는 밀레시안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한번 크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딱딱딱딱, 손톱이 두드리는 나뭇소리에 밀레시안의 도마소리도 조금 속도를 더한다. 

돌아서있는 밀레시안의 뒷모습에서 아주 약간의 초조함이 느껴진다면 아직 꿈속에 여운이 남아있는걸까. 

톨비쉬는 박자의 규칙성을 아무렇게나 망가트리며 고개를 돌렸다. 딱, 딱딱딱, 따딱.

속이 답답해지는 느낌이였다.


꽉 틀어막혀지는 톨비쉬의 마음속과는 다르게 밀레시안의 움직임은 경쾌한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생선의 비늘을 벗기고 아가미사이로 칼을 넣고 내장을 발라낸다. 뼈쪽 가까이에서 움직이는 칼날에는 아무런 잔소리도 나지않을정도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리드미컬하다못해 일련의 훈련을 받은것 같은 빠르고 정확한 동작들이 이어졌다. 이러한 행동들도 재능의 일부인건지.. 톨비쉬는 애써 지금의 밀레시안과 기억속의 밀레시안을 연관짓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다시 들이마시고, 숨을 쉴때마다 달콤한 디퓨져의 향기가 음식들의 냄새를 밀어냈다. 

차분히 요리쟤료를 내려다보던 밀레시안이 톨비쉬의 숨소리에 눈만을 돌려 뒷쪽의 정황을 살폈다. 고개를 돌리고 있던 톨비쉬는 다른생각을 해야겠다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동안 주의를 환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밀레시안, 저 잠깐…”


바람좀 쐬고 오겠다는 톨비쉬의 말에 밀레시안은 무심하게 손을 올려 꺼져있던 환풍기의 전원을 올렸다.

중후한 진동소리와 함께 돌아가기시작한 환기팬이 갈곳없이 집안을 배회하던 수증기따위들을 모두 빨아올려 집밖으로 내보냈다. 

웅웅거리며 팬이 돌아가는 소리, 톨비쉬는 밀레시안이 지금 자신을 배려해준것인지 의아해하며 말을 멈추었다. 

여태까지 한번도 요리중에 환풍기를 사용한적이 없었는데, 바람이 필요하다는 말에 돌아가는 팬을 떠올린걸까?


톨비쉬가 홀린사람처럼 천천히 밀레시안을 향해 걸어갔다. 웅웅거리는 팬소리가 발걸음소리를 묻히게 만들지만 톨비쉬도 밀레시안도 그정도 소음은 걸러낸채 상대방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톨비쉬는 칼을 잡고 있는 밀레시안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멈춰선채  말을 골랐다. 의중을 파악하려하거나 떠보는 질문은 그녀가 싫어하는 행동중에 하나였지만 톨비쉬는 지금 그리움의 취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조금은 다정하게 대해주었으면 하는 기대감이 그의 이성을 흐트려트렸다. 

물어봐도 될까?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 잘 사용하지 않은 탓에 소음만 크게 키워진 팬이 톨비쉬의 무모함에 부채질을 하는 느낌이였다.


“저 가지 말까요?”


밀레시안은 남은 아채들을 냄비에 쏟아넣었다.


“저 나가지 말고 계속 테이블에 앉아있을까요?”


뭐라고 대답 좀 해봐. 톨비쉬는 윙윙거리는 환풍기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정신차리라고 하지만 톨비쉬는 마음속 깊숙히 가라앉았던 첫만남을 떠올리며 그때와 같은 질문을 꺼내들었다. 


“내가 자네와 함께했으면 좋겠나?”


밀레시안은 냄비뚜껑을 덮은 뒤 환풍기 스위치 옆에 붙은 타이머를 조작했다. 

몇가지 비프음이 울리고 세팅이 완료되자 앞치마에 손의 물기를 닦아낸 밀레시안이 톨비쉬를 향해 돌아섰다. 검게 풀려있는 동공이 톨비쉬의 간절하고도 멍청해보이는 얼굴을 비춰내고 있었다.

오물거리는 입술이 무언가라고 대답하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톨비쉬라면 입술의 움직미만으로도 말을 읽어낼 수 있지만 밀레시안이 입을 움직인것은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닌 숨을 들이마시기 행동이였을뿐, 

의미없는 희망고문이 끝나자 밀레시안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성가신걸까? 이만 물러나야하는 시간인가? 대답을 듣지 못한 톨비쉬가 초조하게 물러설 타이밍을 재고 있던 순간이였다. 까딱, 밀레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물기가 덜 마른 손을 뻗어 톨비쉬의 가슴 툭 건드렸다.

손은 금방 거두어졌다. 한박자 늦게 천천히 들어올려진 톨비쉬의 손이 간절함에 절어있던 얼굴을 가리었다. 


고개를 숙이는 톨비쉬를 지나쳐 테이블에 다가간 밀레시안은 시계를 한번 확인한뒤 의자를 빼어 앉았다. 

타이머가 흐르고 있는 시간이였다.  얼굴을 뜯어내버릴것처럼 손아귀에 힘을 주는 톨비쉬가 소리없이 입을 열었다. 

오열하는 그의 목 안쪽에선 수만가지 의미가 담신 숨소리들이 맴돌고 있었지만 겉으로 나온 바람속에는 신음소리 한줄기 섞여져 있지 못했다. 


요리를 기다리는 타이머는 계속해서 시간을 줄여나갔지만 톨비쉬는 그러지 못했다. 

밀레시안이 멈춰선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던것은 톨비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움이 팬소리에 찢겨져 낱낱이 갈려나갔다.


어느 지나간 날의 저녁시간 전에 일어난 일이였다.










4.


톨비쉬가 밀레시안을 만난것은 귀가 멀어버릴것 같은 소음의 한복판이였다. 

자다가 끌려나온 톨비쉬의 팀은 수송기 한복판에 주저앉아 비몽사몽한 얼굴로 투덜거리며 양말을 꿰어신고 있었고 밀레시안과 톨비쉬의 상관은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톨비쉬의 상관이자 단장이라는 귀여운 별명을 가진 장신의 사내는 멋쩍다는얼굴로 밀레시안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래보여도 저들이 피오나의 최고팀이라네”

“아무말도.”


밀레시안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뒤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한쪽 양말을 신다가 난기류에 머리를 부딪친 톨비쉬가 고통의 호소와 하품을 동시에 해결하며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여성인것을 인식했는지 매력적으로 웃어보인 톨비쉬가 남은 양말을 신으며 단장에게 물었다. 앳되어보이는 작은 여성이 왜 이 수송기에 함께 탑승했는지 궁금한 것은 그 뿐만이 아닌것 처럼 보였다.


“이 사람은 누굽니까?”


“클라이언트?”

“아니면 우리가 보호해야할 대상? 아직 어려보이는데 용감하군요.”


“아가씨 몇살이에요? 어디살아요? 우리말 할줄아나?”

“멍청아 요즘 누가 촌스럽게 어디살아요 라고 묻냐. 아가씨, znz해요? 아이디가 어떻게 되요?”


대답을 하기도 전에 쉴새 없이 쏟아지는 질문세례에 밀레시안은 어떻게 답변하면 좋을지 묻는것처럼 단장을 바라보았다. 

단장은 철없는 아이들을 보는 눈빛으로 시커먼 장정들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이 사람들은 손대면 안되네.”

“…………”


“살벌하군요.”

“응? 우리 이야기 한거에요. 지금?”


몇몇 팀원들은 여전히 능청스럽게 받아쳤지만 눈치빠른 인물들은 단장의 말에 밀레시안이 일반인은 아닌것을 깨달은 모양이였다.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평상복 같아 보이지만 밀레시안이 입고있는 검은 옷은 톨비쉬의 팀이 입고있는 방호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재질이였고 단장보다 반걸음정도 뒤에 선 밀레시안은 난기류속에서도 큰 흔들림없이 균형을 유지하고 서 있었다.


톨비쉬들이 침낭채로 수송기에 실려오기도 전부터 그 자리에 서있었던 것 같던 밀레시안은 한치의 흐트러짐없이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깐족거리던 장난기 많은 남자까지 미묘한 웃음기를 유지한 표정으로 밀레시안을 관찰하기 시작하자 단장은 이제 진정이 되었냐며 헛기침을 해 보였다.


쿵, 하고 다시한번 기체가 크게 요동치지만 이번엔 아무도 앓는소리를 하지 않고 각자의 자세를 유지했다.

되려놀란 부조종사가 잠시 카고 뒷편을 돌아보지만 조종사는 허튼짓 하지 말라며 부조종사에게 찡그린 눈빛을 보내왔다.

당장 비행기가 두동강이나더라도 이 비행기에서 나올 시신은 많아야 두 구, 그것도 조종석에서 발견될 확률이 제일 높은 탓이였다.


한장 한장 분해할것 같은 시선으로, 밀레시안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날카로운 시선 5쌍이 내리 훑었지만 밀레시안은 당혹스러움이나 수치심같은 반응 대신 권태로움을 내보이며 한명한명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실망감? 혹은 성가심? 톨비쉬는 좀처럼 읽히지 않는 속마음에 흥미로움을 느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잠이 덜깨서 머리가 느리게 돌아가는 기분이였다.

사람의 표정을 가장 잘 분석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지금 이 수송기에 올라있지 않았다. 

하루하루 목숨을 공던지듯 던졌다 받는 인생의 속에서도 꽃이 피긴하는건지, 톨비쉬와 함께 있으면서도 눈 하나깜짝하지 않던 그녀는 흔들림없이 편안한 여객선 퍼스트클래스에 앉아 아름답고 사람없는 어느 작은 섬으로 향했을 터였다. 행복해, 그는 그녀의 행복을 잠시 빌어주다가 다시 밀레시안에게 시선을 던졌다. 밀레시안은 그의 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어번 빗어넘긴 곱슬머리는 어느정도 정돈된 모습이였다. 그녀가 시선을 내렸다.


원래 6명이 한 팀인 그의 팀원에 자리가 비어있는 것 또한 그러한 까닭이였다. 톨비쉬들은 단장이 데리고온 저 작은 여성이 이 협업자인지 아니면 새 임무의 인수인계를 위해 불려온 사람인지 궁금해하며 눈을 돌렸다.

행동거지들이 어떻게 그렇게들 똑같은건지 단장은 단체로 이동해오는 시선들에 손을 흔들어 보이며 그들의 추측들을 흩어내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 머리들에서 나올것이 뻔하지.  톨비쉬들은 단숨에 하향평준화된 자신들의 평가에 항의하며 각자의 개성을 주장했다.


“분명 쟤는 멍청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저 둘이 좀 모자라긴 하지만 착한녀석들입니다”

“잠깐? 나도 모자라다고?”


“코멘트하지 않겠습니다.”


톨비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발언권을 위해 한 손을 들며 대답했다.


“이중에서 제가 가장 잘생기고 똑똑하지만 융통성 넘치게 팀원들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우우, 배신자다. 우우, 너무 과장된 평가다. 온갖 야유들이 쏟아졌지만 톨비쉬는 그 야유소리를 환호소리처럼 양손으로 붇돋아 올리며 고개를 까딱여보였다. 쇼맨쉽이나 팬서비스가 확실한 모습이였다.

언뜻 보기엔 즐거워보이는 만담의 모습이였지만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단장에게 쏠려있었다. 

그래서 저 여자는 누구? 톨비쉬는 얼굴도 모르는 저 여성을 정말로 소개할것인지 궁금해하며 단장에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설마, 대충 감을 잡은 톨비쉬마저도 거부감을 내보이는 그 상황속에서 단장은 고개를 까딱이고는 밀레시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슬리브리스로 드러났던 동그란 어깨가 꽤나 귀여웠다고 생각하던 톨비쉬의 시선이 한순간 밀레시안의 얼굴을 확인했다.

팀원들에게 완전히 무시당한 시간과 부정하는 시선들속에서도 무반응을 고집했던 밀레시안이 단장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두근두근, 

팀원중 누군가가 입으로 의성어를 흉내내며 밀레시안의 행동을 기다렸다.


“………후”

“큭..크크큭 하하하하”

“으핫하하”


밀레시안은 맨살에 닿은 단장의 손을 치워낸채 눈을 흘겨 단장을 노려보았다.

손이 떨어트려진 단장의 모습에 팀원들은 수송기바닥을 내리치며 웃었지만 톨비쉬와 다른 한명은 웃음기를 지운채 단장과 밀레시안을 주시했다.

단장은 당황한 기색없이 손을 올려 밀레시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퍽이나 가까운 행동이였다.

밀레시안의 시선이 다시 앞을 향하는것과 상관없이 단장은 밀레시안의 정수리를 툭툭 친뒤 밀레시안을 소개했다.

피오나의 단장이 직접 소개하는 중요한 인물, 웃으며 까불던 팀원들이 입을 다문채 단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소개하지, 밀레시안일세. 자네들의 새로운 팀원이지”


설마, 뒤늦은 설마를 꺼내드는 사람이 있었지만 톨비쉬는 이미 떨어진 명령에 뭐라고 거부를 해야할지를 고민하며 숨을 골랐다. 

꽤 높게 올라온 탓인지 벌써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이 드는 탓도 1할정도는 섞여있는 행동이였다. 웃고 까불던 삼인방에 들어가지 않는 다른 한명이 톨비쉬를 돌아본뒤 먼저 입을 열었다. 

누가 팀장이고 대장이고는 정해져있지 않았지만 그들은 어느정도 서로의 발언권을 인정해주는 분위기였다. 

그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확인한 팀원은 가장 먼저 단장을 향해 손을 들었다.


“거부합니다. 얼굴도 모르는 타인이랑 일하기 싫습니다”


톨비쉬는 굴리던 계산을 걷어치우고 다시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분노? 당혹? 하지만 밀레시안은 여전히 권태로움과 지루함이 담긴 눈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잡아끄는 톨비쉬의 금발도 아니고 까불거리는 뒷쪽 팀원도 아닌 정면. 톨비쉬는 그녀가 수송기가 향하는 목적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꺠달으며 고개를 돌렸다. 다왔다고?


새하얗게 번진 창밖은 어디인지도 별로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밀레시안은 나름대로 표지를 찾았는지 다시 시선을 내려 톨비쉬들을 관찰했다. 밀레시안은 톨비쉬들이 받아들이건 말건 별로 관심이 없는 모습이였다. 

그녀는 단지 빨리 임무를 해치우고 복귀하고 싶은 모양이였다. 피곤함. 톨비쉬는 처음으로 유의미한 정보를 읽어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팀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혼자서 움직이려는 신입은 팀워크를 배울 자세도 갖추지 않은거나 다름없었다.

톨비쉬가 거부를 표시하려 손을 들려는순간 다시한번 쿵 하고 불규칙한 바람이 비행기를 뒤흔들었다. 한손을 때려던 톨비쉬가 엉겹결에 손을 내딛는 사이 다른 두명도 손을 들며 톨비쉬와 같은 의사를 표시했다.


“저도 거부합니다. 전공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정보쪽은 너무 바빠서 새로 가르칠 시간이 없습니다. 아 여자라고 정보라고 단정지은것은 아닙니다. 그녀의 후임이라서 같은 과로 추측한것 뿐입니다.”


“저도 거부합니다. 저희 셋중 누구도 이 아가씨와 같은 타입일것 같지 않군요..”


“너네는 몸을 때우잖아”

“맞아, 너넨 구르면서 가르치잖아. 우린 한번 실수하면 몇 날 며칠이 걸린다고”


“보시다시피 떄려 잡을 놈들이 많아서 손도 모자랍니다”


목이 죄여진 두 정보쪽 팀원들은 두터운 팔뚝을 이리저리 내리치며 켁켁거리는 숨소리를 내었다. 잡히지 않은 두 다리가 흔들리는 수송기의 허공을 마구잡이로 휘젓고 있었다. 검사의 팔뚝은 강인하지, 톨비쉬는 허겁지겁 숨을 들이마시며 대답을 토해내는 팀원에게서 눈을 떼며 단장을 바라보았다.


“켁…아이고 죽겠다. 저도 거부합니다. 목숨이 아깝습니다”

“이런 모두가 거절하는군”


단장은 흥미롭다는 미소로 턱을 쓰다듬었다. 톨비쉬는 아직 손을 들지 않았지만 그가 손을 들려다가 땅을 내리친것은 조종사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본 웃음거리였기에 톨비쉬는 자신의 의사가 어느정도 전달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확실하게 말을 해야할까? 톨비쉬는 뒤따라오는 단장의 말에 고민했던 자신을 욕하며 손을 들어올렸다. 단장은 듣지 않는 태도였다.


“그럼 톨비쉬군이 가르쳐야겠군”


“저도 거부합니다. 사실 제가 두번째로 손들었는데..”

“응? 나는 아무말도 못들었는데”

“이미 팀내에 4명이나 거부를 하는데 왜 제가..”


“만장일치는 아니었지 않나”

“아니 지금 거부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남의 고통은 나의 행복. 톨비쉬가 걸려든 단장의 억지덫에 팀원들은 재미있는 팝콘거리를 찾았다며 옹기종기 모여앉아 톨비쉬의 항변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서있는 자리는 다르지만 밀레시안도 별로 크게 다르지 않은 시선, 톨비쉬는 이지경이 될 때까지 한마디도 안하는 밀레시안을 향해 양손을 들어보였다. 너도 입이 있으면 뭐든 말해보라는 제스쳐였다.


“애초에! 저 사람은 팀으로 활동할 의지도 없어보이는데 왜 여기 그렇게 끼워넣으시려고 억지이십니까? 안그래도 결혼식이 끝난지 얼마 안된 시기인데.. 설마 이걸위해서 일부러..?”

“어허, 사랑의 큐피드가 될지언정 방해는 하면 안되는게 단장의 책임. 요즘 세상에 결혼이 얼마나 힘든데 그걸 그런식으로 곡해하나”


“가르친다고 해도 뭐부터 가르칠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미리 이야기하는데 팀에 들어올려면 단체로 행동하는 법을 익히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얼굴도 모르고 이력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성씨도 모르지만 일단 맞춰나갈라면 기본적으로 자신의 실수가 다른 팀원의 생명을 위협할수도 있다는 것정도는 알아야한다구요”


“알고 있네, 아마도. 음, 알고 있을것이라 생각하네.”


그렇지? 단장의 물음에 밀레시안은 시선을 피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아마도라도 안됩니다.”


오래간만에 보는 열정적인 톨비쉬, 위기에 몰린 그의 신선한 반응에 팀원들은 예에, 좀 더 해봐요 단장, 사랑해요 단장. 이기는 편이 우리팀. 하지만 새 팀원은 거절합니다. 등등의 응원을 보내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도움이 될 생각은 1g도 없어보이지만 의욕이 없는 것은 밀레시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뭔가를 말할 타이밍이라고 눈짓하는 톨비쉬의 눈치에도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턱을 쓰다듬는 단장을 보며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후우..”

“……………”


그게 답니까? 톨비쉬는 밀레시안에게 대꾸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숨을 골랐다. 

한숨을 쉬고 싶은것은 톨비쉬도 마찬가지, 단장은 톨비쉬를 향해 한걸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톨비쉬는 처음으로 밀레시안의 행동에 공감을 느끼며 단장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톨비쉬보다 한뼘정도 작은 단장은 톨비쉬의 위협적인 눈빛에도 태연하게 어깨를 두드리며 웃음지었다. 밀레시안에게 보인 자애로운 미소와는 다른의미가 담긴 미소. 까불지마라 애송이. 톨비쉬는 토닥거림을 가장한 압박감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단장은 괜히 단장이라고 불리는게 아니였다.


“밀레시안은 나랑 같은 과라네.”


같은 과? 톨비쉬는 모든 분야에서 괴물같은 재능을 자랑하는 단장을 내려다보며 턱을 끌어당겼다. 좀더 설명이 필요하다는 얼굴에 단장은 어린아이에게 차근차근 설명하듯 말을 골라 속삭였다. 

속도를 감속하는 수송기의 엔진소리와 목적지에 다 왔다는 알림소리, 제자리에서 호버링하는것을 돕기위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기시작한 새로운 프로팰러의 소리또한 단장의 목소리를 속삭임정도로 낮추는것에 일조하고 있었다.


“가르치는 모든것을 해낼 수 있는 재능을 갖고있지”

“그게 무슨..?”

“아마 잘 가르치면 도움이 될것일세. 자네들 팀에도, 자네에게도.”


임무가 무엇인지 설명받지도 않았지만 수송기의 문이 열리자 팀원들은 언쟁을 구경하던것도 잊은채 자리에서 일어나 장비를 챙겨들었다. 휘몰아치는 칼바람이 불고나서야 밀레시안은 겨우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가 생겼는지 단장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단장은 밀레시안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녀 자신에게도”


정신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나? 유아적인 행동에 톨비쉬는 잠시 그녀의 손을 보다가 어꺠를 움켜쥐는 단장의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단장의 뒤로 팀원들이 하나둘씩 낙하산을 매고 있었다.


“단장-! 저희 먼저 가요-!”

“저도 갑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가장 쓸모가 많은 놈이여서 두고가기는 아깝네요. 단장님도 말씀 짧게하고 저희 팀원을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저도 쓸모있는 쪽만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인사들이였지만 톨비쉬는 이제 그만 떠나야한다는 생각에 단장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밀레시안이라는 이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한다면 자신을 임무에서 제외시킬 생각인걸까? 그건 너무 부당했고 비 효율적인 처사였다. 

그녀가 얼마나 큰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몰라도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은 종잇장을 베어내기는 커녕 떈석기로도 못쓸 짐덩이에 불과했다. 차라리 임무후 돌아가는 수송기에서 소개를 시키지 왜 이런 난리통으로 데리고 온건지. 

톨비쉬의 머리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지 단장은 톨비쉬의 어깨에서 손을 때며 한숨을 쉬었다. 미소짓는 얼굴에는 위압감이 사라져있지만 앞길이 9만리인 어린아이들을 보느라 지친 얼굴이였다. 

밀레시안은 단장의 말이 잘 안들리는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톨비쉬 몫으로 남아있는 집어들자 톨비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깐, 그거 마음대로 손대면..!”

“메게 놔두는게 좋을꺼야. 자기것이 아니라고 하면 맨몸으로 뛰어내릴껄?”


설마 그러겠습니까? 말도안된다는 표정에 단장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냥 뛰어내리게 하면 자네 팀원도 좀 더 수월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놀라긴 하겠지만 별개의 문제로 생각할겁니다”

“깐깐하긴”


인사문제에 너무 허술하신건 아니신지요. 톨비쉬는 비꼬고싶은 말꼬리를 숨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조종사들이 톨비쉬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


문을 닫으려던 조종사들이 좀 더 대기하기로 마음먹은것은 밀레시안의 행동 덕분이였다. 이제 곧 가나보다,

밀레시안은 톨비쉬의 외침을 들었던건지 낙하산을 메지 않은채 톨비쉬쪽으로 내밀었다. 불필요한 친절이였지만 일단 뭔가 움직인다는 신선함에 톨비쉬는 관찰하는 마음가짐으로 낙하산을 받아들었다.

설마 맨몸으로 뛰어내리는건 아니겠지. 이미 설마에 한번 데인 톨비쉬가 미심쩍은 눈으로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별로, 뛰어내릴 생각은 없는데”

“말은 할줄 알았군요. 다행입니다”


놀라운 대 발견. 톨비쉬는 박수라도 치고싶은 마음이였지만 보고있는 눈이 너무 많았다. 낙하산을 몸에 고정시키는 모든 행동을 단장과 밀레시안은 흥미로운 원주민의 행동을 바라보는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둘이서 같은과라는건 이런의미가 아닐까. 톨비쉬는 눈치를 주는것처럼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조종사들에게 손을 들어보이며 출구로 다가갔다. 귀가 멀어버릴것같은 팬의 소음이 바람을 일으키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아랫쪽은 목표가 뭔지도 모르겠는 허허벌판. 팀원들은 이미 모두 착륙한 것인지 희끄무레한 낙하산 몇개가 평원을 뒹굴고 있었다.

목표가 뭔지 파악하고 몇가지 필수적인 정보를 수집하려면 최대한 빨리 팀과 뭉치는것이 효율적인 행동. 하지만 톨비쉬는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몇번인가 문 가장자리를 쥐었다 놓으며 뛰어내리기를 망설였다.


“혹시 무서운걸까요”

“저사람이 피오나 최고의 팀의 일원이라니까”


조종사들의 의문속에서도 톨비쉬는 몸을 내밀었다 들여보내기를 반복하며 숨을 골랐다. 사실 공기라면 질식할것같이 퍼먹고있어 별로 숨이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톨비쉬는 말을 하지 않는 답답함에 습관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있는 중이였다. 

이러다가 과호흡으로 낙하중에 정신을 잃어버리겠다며 한참을 망설이던 톨비쉬가 다시 수송기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톨비쉬는 쓰고있던 고글까지 다시 들어올리며 밀레시안과 시선을 마주쳤다.


“정말 맨몸으로 뛰어내리거나 그러지는…”

“안한다니까.”


밀레시안은 톨비쉬의 말을 자르고 대답했다. 

성격도 꽤 있는것 같네. 톨비쉬는 유아적이라는 평가에 줄을 그어 지우며 정보를 수정했다. 이제 됐잖아. 톨비쉬는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머리를 쓸어넘겼다. 

수송기에는 더이상 낙하산도 없으니 임무에 참여하지도 못할 것이고 밀레시안은 맨몸으로 뛰어내리거나 하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약속한 정도는 아니지만. 톨비쉬는 정말 과호흡이 올것같은 한숨에 입을 다물었다.

숨만쉬다가 하루가 다 가겠군. 이제 정말 뛰어내릴 생각으로 문에 다가간 순간 톨비쉬는 등뒤에서 다가서는 발걸음에 고개를 돌렸다.

맨 몸의 밀레시안이 태연한 얼굴로 문가에 다가서 있었다.


“아까 안뛰어내린다고…!”

“맨몸이 아니면 되지 않나”


단장은 톨비쉬의 단발마같은 목소리에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맨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밀레시안은 손안에 작은 단도 하나를 들어보이며 톨비쉬를 향해 으쓱 어깨를 들어올렸다. 

아 그러네 맨몸은 아니네. 무장을 해서 그렇지. 하지만 안전장치도 없이 문가까이 다가오는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운 행동이였고 톨비쉬는 안전수칙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에 대한 평가에서는 야박했다. 이런 협박으로 내가 데리고 내려갈것 같나. 톨비쉬가 단장에게 항의하기 위해 몸을 돌린순간 밀레시안도 톨비쉬의 몸을 따라 한발자국 옆으로 움직였다.

아마도 톨비쉬의 몸이 바람을 가로막는 방향. 오호, 머리를 쓴다 이거지. 톨비쉬는 의외로 약은 행동에 눈을 가늘게 뜨며 밀레시안을 노려보았다.


고글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을 표정이였지만 톨비쉬쪽에서는 보는것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기에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톨비쉬는 어느정도 단련이된 움직임을 보이는 밀레시안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데리고 갈 생각은 없지만 못데려가는 것은 아니라며 머릿속에서는 밀레시안과 함께 착지하는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톨비쉬는 의외로 나쁘지 않을지도 라는 평가를 내리며 입을 열었다. 

밀레시안은 여전히 의욕없는 모습으로 톨비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의욕만 어떻게 해결되면 참 좋을텐데.. 


톨비쉬는 스스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도 자각하지 못한채 빙긋이 미소지었다. 

아마 웃는것도 스스로는 모르고 있는 모양인지 밀레시안은 빛을 반사하며 반쯤 가려진 그의 미소를 보며 삼류 영화에 나오는 악당의 모습을 떠올렸다. 

보통 저런 배경 저런 미소로 주절주절 자신의 동기와 행동의 이유, 앞으로의 계획을 떠벌리는 설명역의 인물들이 짓는 미소였다.


“내가 자네와 함께했으면 좋겠나?”


아, 진짜다. 밀레시안은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뭔가 대꾸하고 싶은 말이 있는건지 몇번인가 빈 숨을 뻐끔거리던 밀레시안이 단장을 돌아보았다. 

단장은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보는 기분인지 팔짱을 낀채 톨비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갈 연료가 걱정되어 초조한 얼굴이 된 것은 조종사 두명뿐. 

밀레시안은 슬슬 내려가야할 시간이 다 되었다는 생각에 톨비쉬를 응시했다. 아까부터 팀원이 어쩌고 목숨이 어쩌고 하는 이 고지식하고 형식따지기 좋아하는 남자는 해가 질때까지 여기서 말만하고 있을 것처럼 보였다. 


밀레시안은 대답대신 톨비쉬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톨비쉬는 갑작스러운 스킨쉽에 당혹스러운지 응? 하고 밀레시안을 내려다 보았다.


“내려가서 이야기하죠”


밀레시안은 갑자기 몰아치는 광풍에 목소리가 묻혔다는 자각도 없이 톨비쉬를 떠밀었다.

어느정도 밀레시안의 의도를 파악했다고 생각한 톨비쉬는 바람을 가로막아주는 것에만 신경이 팔려 밀레시안이 밀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모양이였다. 잠깐..! 하고 소리치려는 톨비쉬의 귀에 단장의 폭소가 들려왔다. 


여러가지 잡음에 묻혀가지만 그러한 소음을 뚫고 들릴정도로 대차게 웃고있는 것이 분명했다.

머리부터 거꾸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겁먹기는 커녕 몸의 균형을 되찾으려는 톨비쉬가 아직 뒤집히지 않은 시선 끝에서 뛰어내리는 검은 인영에 눈을 크게떴다.


“안 뛰어내린다고 하지 않았나!!”


무전기도 통신기도 없이 들릴리 없는 고함소리였지만 밀레시안은 태연하게 슈트를 펼치며 톨비쉬를 스쳐지나갔다. 

펄럭거리는 요란한 소리와 다르게 펼쳐진 천은 고작해야 몸을 두른정도. 저게 신제품이던가 아까 그녀가 입고있던게 그 슈트였나. 톨비쉬는 기억속 어딘가 연구부서에서 개발하고 있다는 새로운 타입의 경량형 슈트를 떠올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무리 뒤에 단장이 있었다지만 순순히 연구품을 내어준 연구부서의 안일함에 톨비쉬는 혀를 차며 양쪽팔을 몸 가까이에 바싹 붙였다. 

아직 낙하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테스트 허가도 받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이번 기회를 데이터를 얻을 행운으로 생각한건지 단장이 생각보다 무모하게 밀어붙인건지. 톨비쉬는 비슷한 과라는 말로 커버되지 않는 지나친 편애에 눈쌀을 찌푸렸다.


어느정도 실력이 있다는것은 대충 알겠지만 일단 그녀는 고글도 끼고 있지 않은 모습이였다. 착륙을 하곘다는건지 말겠다는건지 

톨비쉬는 바람에 눈도 뜨지 못하는 밀레시안의 모습을 눈에담으며 더욱 속도를 올려 하강했다. 가까이 다가간 밀레시안의 모습이 마치 바람을 느끼는것처럼 여유로워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착각이야. 톨비쉬는 슈트로 어느정도 감속이 된 밀레시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밀레시안은 갑자기 다가온 톨비쉬의 행동에 약간이나마 당황한 얼굴이였다.

묘한 만족감이 가슴언저리를 간질거려왔지만 곧 가느다란 눈초리가 그를 비난해 들어왔다. 저리가요, 당신 낙하산이나 펼쳐. 

밀레시안은 비행해 방해되는 톨비쉬를 피해 몸을 돌리려했지만 톨비쉬는 한박자 빠르게 밀레시안의 손을 낚아챘다. 


넓게 벌리고 있던 표면적이 줄어들자 균형을 잃은 밀레시안이 크게 휘청거리다 못해 펄럭였다. 톨비쉬는 밀레시안을 놓치지 않기위해 더욱 단단하게 부여잡으며 손을 끌어당겼다. 얼굴에 달라붙어오는 신소재의 슈트너머로 손을 더듬은 톨비쉬가 허리께 어딘가의 단추를 찾아 눌렀다.


늘어났던 슈트가 다시 몸에 착달라붙자 밀레시안은 본능적으로 톨비쉬의 목을 부여잡았다. 

밀레시안은 정말로 크게 놀란 얼굴이였다. 또다시 만족스러운 미소가 톨비쉬의 입꼬리를 간지럽혔다. 

톨비쉬는 목을 감싸오는 밀레시안의 온기에 고개를 숙였다. 밀레시안이 가까이 숙여진 톨비쉬의 귓가에 다급하게 소리쳤다.


“갑자기 무슨…”

“조용히 하게, 혀깨물고 싶지 않으면”


두사람의 무게가 합쳐져서일까 더욱 빠르게 낙하하게된 톨비쉬는 눈으로 착지 지점을 훑으며 낙하산을 잡아당겼다. 

한손으로 잡고있는 밀레시안이 다소 걱정되었지만 신체포지션만큼이라면 아직 시뮬레이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톨비쉬는 못하는게 아니라니까 라는 뜻모를 짜증을 중얼거리며 밀레시안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5.


“떨어져 죽기전에 숨 못쉬어서 죽는줄 알겠네요”


다소 불안정한 착륙의 직후 밀레시안은 비행기위에서의 권태로움이 씻겨져 나간것마냥 버럭 화를 내며 톨비쉬의 품에서 굴러나왔다.

밝은 조명아래서 보는 밀레시안의 모습은 어두컴컴한 수송기안에서보다 생기있어보였고 활동적으로 비춰졌다.


작고 가녀리게만 느껴졌던 체구는 검은슈트와 어둑한 조명탓이였던지 햇빛아래서 드러나 보이는 밀레시안의 모습은 탄력넘치는 균형잡힌 모습이였다.

톨비쉬는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것을 인정하며 낙하산을 해제했다. 

태양아래서 보이는 톨비쉬의 모습이 달라보이는 것은 밀레시안도 마찬가지인지 밀레시안은 잔뜩 경계를 하며 반걸음 물러섰다.

좀 시간을 줘야하는걸까, 잠시 고민을 한 톨비쉬는 쓰고있는 고글을 벗었다. 


밀레시안의 시선이 금빛 곱슬머리에서 톨비쉬의 새파란 눈동자로 이동했다.

굳게 다물린 밀레시안의 입술이 아주 잠시 달싹였다. 달라? 톨비쉬는 스쳐지나간 짧은 말을 보지 못한 척 능청스럽게 밀레시안의 안정거리를 침범해 들어갔다. 한쪽만 장갑을 벗은 맨 손이 허리께로 손을 뻗어나갔다. 


잠시 몸이 떨릴만큼 사나운 기세가 톨비쉬를 덮쳐왔다. 수송기에서 있었던 단장의 말때문인지 밀레시안은 불쾌한 표정으로 톨비쉬의 손을 쏘아보았다. 

톨비쉬는 야생동물을 만지는 기분으로 밀레시안의 허리 안쪽 단추를 지긋이 눌렀다. 슉하고 바람이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민망할정도로 감겨있던 슈트가 다소 느슨한 모습으로 풀어졌다. 

숨이 쉬기 편해졌는지 밀레시안은 반사적으로 큰숨을 들이마시며 한결편해진 표정을 톨비쉬에게서 물러섰다.

톨비쉬는 이제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의사표시로 양손을 들어보이며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약간의 조롱이 담겨있기도 했고 긴장을 풀어주려는 의도가 담겨있기도 했다.


“이제 숨쉴만 하나?”

“이 슈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나봐요?”


“우리팀에서도 눈독들이고 있던 물건이여서. 아직 정식허가가 안난게 문제지만”


톨비쉬는 애들앞에서는 슈트 펼치지 말게. 아마 3개월은 징징거리며 매달려올테니까 하고 말하며 오른쪽 눈을 깜빡여보였다. 

밀레시안은 친근하게 다가오는 톨비쉬가 익숙치 않은지 입을 다물었다. 또다시 경계하는 모습. 톨비쉬는 무관심에서 벗어났다는것에 좀더 큰 의미를 담자며 손을 내렸다. 

타이밍좋게 손목에 차고 있던 작은 시계에서 전자음이 들려왔다. 떨어진 팀원들이 수송기가 돌아간것을 확인한 모양이였다.


“아니 아저씨, 수송기에서 뭘 그렇게 오래 하셨어요”

“하하하, 조용히 하게”

“어디서 기름을 퍼먹고 왔나 목소리가 더 기름져졌네?”


능청스럽게 연락을 끊어버린 톨비쉬는 다른 팀원들에게 밀레시안을 뭐라고 설명해야하는건지 난감한지 턱끝을 쓸어내렸다.

생각은 하긴 했지만 정말 행동으로 옮기려 한건 아니였는데.. 톨비쉬는 팀원들에게 정말 한번 생각만 해본것 뿐인데.. 라고 운을 떼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선하다며  낮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역시 안믿겠지.


그럼 진실을 말해보면 어떨까, 사실은 그녀가 나를 떠밀고 맨몸으로 수송선에서 뛰어내렸어. 그리고 그녀는 시험용 신소재 슈트로 착지하려고 했지. 그래 우리가 전에 눈독들였던 그거. 낙하산부근이 아직 문제가 있다고 들어서 내가 그녀를 안고 착지했어. 그래서 지금 같이 있는데..


톨비쉬는 슈트라는 말을 듣는 즉시 밀레시안의 옷을 만져보려 달려들 두 명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안돼. 나도 아직인데. 톨비쉬는 뭔가 사사로운 감정이 끼어있다는것을 인지하지 못한채 입맛을 다셨다. 사적인 감상이 섞여있는 것과 더불어 밀레시안이 그를 보고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모습이였다.


밀레시안은 톨비쉬의 원맨쇼가 흥미로운지 가만히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삑삑, 다시 전자음이 울리며 톨비쉬를 호출했다. 

톨비쉬는 손목을 한번 내려다 보고는 밀레시안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세워 입술을 지그시 눌러보였다. 밀레시안은 그 행동이 미소지어야 하는 행동인지 의아해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톨비쉬가 입을 열었다.


“어. 그쪽은 어떻게 되었나”

“아니, 지금 그거 물어보려고 연락했는데.”


먼저 내려온 팀원들은 아무것도 찾지 못한 모양인지 톨비쉬에게 단장에게서 뭐 듣고 온거 아니야? 라는 질문을 되물었다. 

그들은 밀레시안이 내려왔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않는듯 톨비쉬가 늦은 이유가 단장에게 단독 브리핑을 받은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임무, 톨비쉬는 갑자기 떨어진 탓에 흩어졌던 정신이 차곡차곡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어… 하고 말을 끌었다.

알다시피 우리들 다 자다가 침낭에 진공포장되어서 실려온것이지 않나, 톨비쉬는 이렇게 말했다간 그럼 뭐하느라 늦었냐고 말꼬리를 잡을 팀원들을 떠올리며 머리를 굴렸다.


조종사들은 말이 없었고 단장은 밀레시안만 소개 했을 뿐이였다. 먼저 내려간 팀원들은 단서를 찾지 못한눈치. 밀레시안은 톨비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이 되는지 한쪽손을 들어보이며 입을 뻐끔거렸다.

톨비쉬의 팀원들이 단장에게 했던것과 비슷한 제스쳐였다. 빨리 배우고 빨리 습득한다. 

톨비쉬는 그녀에게 입모양으로 뭔가 알고 있나? 하고 물었다. 밀레시안은 입술만으로 말을 파악할 수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실 리 엔'


밀레시안은 톨비쉬처럼 목소리를 생략한 단어를 또박또박 말해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탓에 톨비쉬는 몇번인가 미간을 좁혀보이며 한번더 말해주기를 부탁해야했지만 곧 밀레시안의 시선이 향한 손목시계를 꺼버리며 마음편하게 이야기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리엔.”


밀레시안은 그제서야 다시 목소리를 내어 말하며 바닥을 가리켜보였다.


“실리엔? 그 신세대 에너지원 광물 말인가?”


밀레시안은 재차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확실히 여기에 실리엔이 있다면 그건 톨비쉬의 팀이 아닌 다른 조사팀이 왔어야 했지만 톨비쉬는 상황파악에 능하고 잔머리의 회전이 빠른 남자였다. 

그는 팽팽돌아가는 머릿속에서 밀레시안과 자신의 팀, 그리고 단장의 조건을 따져 적절한 후보지를 선출해냈다. 전투능력과 분석능력이 같이 있는 우리들을 집어 넣을 이유. 밀레시안은 뭘 그렇게 깊게 생각하냐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실리엔 생태 연구단지.”

“실리엔 생태 연구단지.”


톨비쉬도 비슷한 시간내에 추론을 끝냈는지 밀레시안과 동시에 목소리를 겹쳐 말하며 놀라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밀레시안은 잠시 그가 어떻게 알고있나 고개를 갸웃해 보였지만 이내 관심둘만한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손목을 가리켜보였다. 어서 팀원들이나 불러모으라는 손짓이였다.


“아니아니, 잠깐. 정말로 여기가 네반 제약회사의 실리엔 생태 연구단지인가? 실리엔을 가장 먼저 연구하다가 폐쇄된 그 장소? 바이브카흐의?”

“별로 비밀은 아닌거로 알고 있는데”


밀레시안은 별스럽지도 않다는 어투로 대답했다.


“위치가 자꾸 잊어버려서들 그렇지 연구단지는 늘 여기에 있었어요”


그 위치를 아는것이 가장 중요한것 아닐까, 톨비쉬는 슈트에 내장된 나침반으로 방향을 가늠하는 밀레시안을 보며 팀원들을 호출했다.

연달아 네번의 비프음이 울리고 각자 쨍알거리는 목소리로 응답을 한 팀원들은 이미 발신기켜고 가고있다며 톨비쉬의 나태함을 질책했다.


게으름피운게 아니라 정말 바빴다니까. 톨비쉬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팀원들의 귀에 짜증스럽게 설명을 늘어놓으며 밀레시안의 행동을 눈으로 쫓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를 뭐라고 설명해야하지? 팀원은 아니지만 일단 내가 데리고 다니기로 했어? 내가 교육담당이야? 의외로 쓸만할지도 몰라서 데리고 왔어?

톨비쉬는 이쪽, 하고 방향을 가리키는 밀레시안을 보며 변명의 타이틀을 결정했다.


“소개하네, 이번 임무 가이드를 맡은 밀레시안이라고 하네.”


밀레시안은 별 갖잖은 소리를 다듣는다는 눈초리로 톨비쉬를 흘겨보았다. 

모여든 팀원들 또한 밀레시안과 같은 표정으로 톨비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다들 죽이 잘 맞는것 같아 기쁘군”

“가솔린 퍼먹고 내려왔나.”


팀원들은 그가 늦은 것을 임무 내내 우려먹을 생각인듯 보였다. 

몰래먹은거 없다니까, 톨비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쓸어넘기고는 먼저 길을 찾아가는 밀레시안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밀레시안은 길안내를 하긴 하겠지만 딱히 그들이 따라오지 않는것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는 않는것 처럼 보였다. 그녀는 아직 톨비쉬의 팀이 아니였고 밀레시안또한 자신이 팀의 일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한가지, 단장이 부탁했기 때문에 이 섬에 따라온 것일 뿐. 밀레시안은 약 열걸음 정도를 앞서나가다가 어꺠를 들썩였다. 한숨을 쉬는 모양이였다.


“이쪽”


톨비쉬가 홀린듯이 밀레시안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팀원들은 톨비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허허벌판에 긴 기차놀이가 시작되었다.






6.


“거기 토끼간다-!”

“어허 그거 만지지 마!”

“아… 눈마주쳤다. 누구 수면버튼 남은사람?”


밀레시안의 기차놀이가 끝이난것은 팀원들의 눈빛에 불만이 차오를 즈음의 일. 

오직 태양과 나침반을 길잡이 삼아 이쪽 저쪽을 가리키는 밀레시안의 모습은 상당한 신뢰도를 쌓은 나레이터의 지시더라도 거부할 것같은 대중없는 움직임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막아세우지 않는 이유는 팀원들이 밀레시안을 믿지 않기때문에. 

0점을 넘어서 마이너스로 떨어지고 있는 신뢰도는 한번의 실수만으로도 그녀를 이 임무에서 제외하겠다는 무한한 인내심으로 이어져 아주 조용한 탐색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잘 가다가 오른쪽. 또 어느정도 가다가 왼쪽. 같은길을 반복하고 있는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때 즈음 밀레시안은 아, 여기. 라고 말하며 허리를 굽혀앉았다.

허리선이 잘록하게 드러난 모습에 잠시 걸음을 멈춰선 팀원중 하나가 어? 하고 밀레시안의 허리 뒤에 달린 단추를 가리켰다.


“저거 그 슈트 아니야? 그..그..!”

“아니, 비슷한거 아닐까. 그건 아직 테스트도 안했다잖아?”


톨비쉬는 다소 빠르게 말을 자르고는 밀레시안의 뒤로 다가갔다. 밀레시안은 풀숲사이의 뭔가를 잡아올리려는것 처럼 흙을 걷어내고 있었다.


“여기를 파면 되는건가?”

“파지지는 않을껄요. 잡아 올려야해요”


밀레시안이 찾고있던것은 손잡이인건지 톨비쉬는 주먹으로 흙바닥을 두드리며 되돌아오는 반동을 확인했다.

확실히 뭔가 아래 깔려있는 것같은 다른 반동이 되돌아왔다. 톨비쉬는 밀레시안이 걷어내던 흙근처를 손으로 훑어내렸다.

손끝에 힘이 얼마나 좋은건지 마치 갈고리로 갈아엎은것마냥 그의 손이 닿은 흙들은 벌건 속을 들어내며 밖으로 뒤집어졌다.


단 한군데, 톨비쉬의 손이 멈춘 장소만 뺴고. 우연치않게 얻어걸린 구멍이 손잡이의 끄트머리였는지 톨비쉬는 두어번의 동작뒤에 밀레시안이 찾으려던 손잡이를 잡아 올리며 원통형으로 묻혀져있던 터치패널을 끌어올렸다. 태양열에 반응하는건지 반응이 없어보이던 패널은 잠시 깜빡거리다가 삑, 하는 소리와 함께 패드의 불을 밝혔다.


“오, 정말 있네”

“없으면 없는대로 곤란하지 않았을까?”


아주 조금, 밀레시안에 대한 신뢰도가 올라갔지만 그건 팀원으로서가 아닌 안내역으로서의 신뢰도였다.

이제야 할일이 생겼다고 생각하는지 책가방마냥 장비를 지고 있던 팀원이 밀레시안 가까이 다가섰다. 좀 비켜보라는 손짓이 이어졌지만 밀레시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톨비쉬를 돌아보았다. 밀레시안도 듣지 않으려는 태도로 무장한 팀원들에게 별로 말을 걸고싶지 않아보였다.


톨비쉬는 밀레시안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그녀가 물러서지 않은것에 언짢아진 팀원도 그를 흘겨보고 있었다.

새 동생이 온것을 못받아들이는 재혼가정의 맏이가 된 기분이였다. 단장님 어디서 이런 아가씨를 데리고 온겁니까. 밀레시안은 다시한번 삑 하고 울리는 패널을 돌아보며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쩅하니 떠있는 하늘은 약간의 구름만 끼어있는 맑은 날씨였다.

밀레시안이 톨비쉬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짜증이 난것은 패널을 조사하려는 팀원뿐이였다.


“이봐,”


팀원에 부름에 밀레시안은 눈만을 돌려 팀원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문제냐는 표정이였다.


“일하는거 방해하지 말고 비켜”

“비켜도 할 수 있는게 없을텐데요”


밀레시안의 도발아닌 도발에 팀원의 인상이 확 찡그려졌다. 

아 그러셔? 빈정거리는 말투에서 고조되는 감정을 느낀 톨비쉬가 팀원을 불러세웠다. 잠깐 기다려봐. 톨비쉬가 감싸고 도는것이 못마땅한지 팀원의 미간은 더욱 좁아지며 톨비쉬를 향해 돌아섰다. 

단장이 뭐라고 했어? 왜 자꾸 이녀석을 감싸고 돌아? 톨비쉬는 감싸고 도는게 아니라고 설명하며 밀레시안을 가리켰다. 삑, 세번의 비프움이 울리고나자 더욱 환해진 패널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9-6-9-12-12-9-6-9 밀레시안은 차례대로 패드를 누르고는 내려가는 패널을 응시했다. 패널들은 누를때마다 째깍거리는 소리를 내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팀원은 아 하고 소리를 내며 물었다.


“방금 그건 충전중이였나보군”


밀레시안은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물러섰다. 땅속에서 진동과 함께 거대한 구멍이 열리기 시작했다. 

착착착착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속 저편으로 간이 계단이 펼쳐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척 보기에도 너무나도 수상해보이는 문이였다. 


팀원들은 밀레시안이 어떻게 이런 장소를 알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찾아냈는지를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그 허허벌판에서 어떻게 이 지점을 찾아냈는지 궁금한것은 톨비쉬도 마찬가지.

밀레시안은 열린 계단을 가리키며 일단은 말해둔다는 어투로 설명했다.


“여기, 실험용 동물 나르던 게이트인데”


밀레시안의 설명대로 햇빛아래 드러난 계단의 벽면에는 화물을 옮기는 용도인듯한 홈이 파여져 있었다. 

수레는 아랫쪽에 내려가 있는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지만 밀레시안은 먼저 계단을 한칸 내려가며 말을 끝맺었다. 그녀는 여전히 팀원과 같이 행동할 생각이 없는것 처럼 보였다.


“아래 토끼나 그런거 많으니까. 조심해서 내려와요”

“토끼? 토오끼? 지금 토끼 조심하라는게 누구한테 하는 말이야?”


패널의 느린 충전속도로 할수 있는게 없다는 말이 무슨뜻인지 알게된 팀원은 아직 분이 안풀렸는지 밀레시안의 말꼬리를 잡으며 쿵쾅거리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앗, 잠깐..!”

“포기해 톨비쉬, 저녀석 삐지면 오래가는거 알잖아”


정말 오래간다니까.. 톨비쉬의 어깨를 두드린 팀원이 고개를 설래설래 내저으며 자신의 파트너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하나 둘, 남은 팀원들이 톨비쉬를 지나쳐 내려가고 홀로남은 톨비쉬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해없이 말하는 법부터 가르쳐야 하는걸까. 톨비쉬는 걸음마부터 가르쳐야 할지 보육원에 입원한 아이에게 한글부터 가르쳐야할지 영어부터 가르쳐야할지를 고민하는 선생님의 심정을 가슴을 부여잡았다. 벌써부터 고생길이 훤히 열린 기분이였다.



“궁금한게 있습니다만”


두번의 성과와 두어번의 도발떄문이였을까. 달려는 토끼를 막아낸 팀원은 토끼의 발차기의 반동을 핑계로 밀레시안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톨비쉬의 시선이 잠시 그의 뒷통수에 머물렀지만 곧 갑자기 화를 낼만한 성미가 아니라는 이유때문인지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사스콰치를 향해 테이저건을 겨누었다. 두꺼운 털가죽대신 훤히 드러난 미간을 향해 연달아 전극이 쏘아지지만 얼굴가죽도 두께가 만만치 않은치 자그마한 전기침은 힘없이 튕겨져 나오며 파직거리는 스파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톨비쉬가 무기를 살상용으로 바꾸는 사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수면버튼을 찾아냈는지 누군가가 귀막아 하는 고함과 함께 버튼을 집어던졌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셋리며 통신용 이어폰의 가드버튼을 꾹 누르던 톨비쉬가 그사이 재조정된 무기를 들어 잠든 사스콰치에게 다가갔다. 수면을 확인할겸 발끝으로 툭 건드린 톨비쉬는 으릉하고 반응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모습이였다. 톨비쉬는 모드가 변경된 총을 내려 사스콰치의 뒷통수를 겨냥했다. 자그마한 전기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파열음이 누워있는 사스콰치의 뒷통수를 뚫어내었다.


“아까 그 문은 어떻게 찾은겁니까?”


뒤에선 거대한 털인간이 날뛰건 말건, 달려드는 토끼들이 성가진지 차례차례 콜트를 겨냥하던 밀레시안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팀원을 돌아보았다.

듀얼건을 사용하는 밀레시안의 모습은 멋지다는 조롱의 휘파람을 불러내기에 충분했지만 구식으로 보이는 조명권총처럼 생긴 듀얼건의 위력은 휘파람을 목구멍 깊숙지 들이마시게 하기에 충분했다. 위력만으로 따진다면 톨비쉬들이 사용하는 살상모드형 무기와 비슷. 그런 고위력의 무기를 권총정도의 반동으로 휘갈기는 밀레시안은 마법같은 손놀림으로 재장전으로 하며 토끼들을 거슬러 복도의 끝으로 걸어나갔다.

화물용 게이트로 들어올때부터 토끼들이 걱정되긴했지만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기간동안 무시무시하게 번식한 토끼들은 닥치는대로 주변자재들을 모두 뜯어먹은 모양이였다. 덕분에 가장 걱정되던 식충식물들은 전멸당한 모양이지만 사스콰치들을 묶어놓던 우리마저 모두 뜯어먹힌 상태.

복도를 점령하고 있던 토끼들의 기세가 수그러들자 반격의 떄를 노리고 뛰쳐나온 사스콰치들은 톨비쉬들의 공격에 다시금 복도 구석으로 숨어든 모양이였다.

밀레시안은 재장전하는동안 달려든 토끼하나를 슬쩍 피해내며 총신을 돌려잡았다. 물흐르는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손놀림이 착지하는 토끼의 머리를 겨냥했다. 한발이른 타이밍에 발사하자 밀레시안의 총구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뛰려는 토끼의 뒷다리가 횡하니 날아가버렸다. 균형을 잃은 토끼는 성의없는 조준에도 간단하게 사망.

밀레시안은 받은 질문에 대해 대답해야하는건지 잠시 생각하다가 톨비쉬를 바라보았다.

톨비쉬가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로 말한다면 설명하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톨비쉬는 훈련받은 그대로 총을 다시 기절모드로 전환시키며 숨을 골랐다.


“나도 궁금하네. 내려올땐 정신이 없어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거든”


밀레시안은 성가시다는 눈초리로 한숨을 쉬었다. 잠시동안의 관찰이지만 톨비쉬는 어느정도 밀레시안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한 상태였다. 그녀는 일단 부탁받은 행동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는 성격이였다. 정말 싫을떄는 싫어. 하고 거절하지만 어지간한 말이라면 꽤나 성실하게 대답하고 행동으로 옮겨주는 타입이였다.

이런걸 뭐라고 하더라.. 톨비쉬는 어수룩한 사람을 이르는 부드러운 말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호구는 좀… 초면인 상대에게 실례의 말이지. 이미 어수룩하다는 단어에서 얕잡아보는 느낌이 물씬 피어나지만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상냥한 성미를 잘 이용해먹을 생각이였다.

밀레시안 또한 단장에게 부탁받은것이 톨비쉬라는 것을 중요히 여기고 있는모양인지 대부분의 거절은 톨비쉬를 통해 하고 있는 모습이였다. 밀레시안이 거절한다고 해도 톨비쉬가 한번 더 부탁한다면 들어주는 루트. 팀원들은 노골적으로 톨비쉬의 곁에 붙어있는 밀레시안이 불편한 모습이였지만 딱히 자신에게 붙어오기를 바라지 않는 것도 사실이였기에 사사로운 결정들은 모두 톨비쉬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붙어있는다 해도 밀레시안은 팀원들을 버릴기세로 앞서나가고 있고 톨비쉬는 가장 뒷쪽에서 뒤치닥거리를 하느라 바빴지만.

톨비쉬는 어떻게 좀 해봐. 라는 오라로 둘러쌓인 시선들속에서 피로감이 늘어가는것을 느끼며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은 톨비쉬까지 같은 질문을 하자 내키지 않는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뭐 이런것까지 설명해야하나, 밀레시안의 목소리에는 굳이 라는 단어가 생략된 공백감이 묻어났다.


“내려올때 대충 어디쯤인지 알았으니까, 다음은 발 아래에 있는 가스관을 따라 움직이면 찾을 수 있어요”

“가스관?”

“이 섬은 감추기로 작정을 한 섬이라 겉에서 보기엔 다가오기도 힘들고 찾아내기도 힘들어요. 어떻게 찾아내어서 상륙한다고 해도 실리엔가스에 중독되도록 되어있어죠. 정제하고 남은 실리엔가스를 가스관으로 이동시켜서 풀숲사이에 풀처럼 심어놓은 미세한 분사장치로 항상 일정농도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건데.. 특히나 낙하산같은거로 내려오면 필연적으로 땅위를 구르게되어서 중독이 더 빨리돼요. 풀숲에서 벗어나면 곧 몸에서 빠져나가지만 가스가 없는데는 이 연구단지나 섬 밖 밖에 없으니까.”


“계속 섬에 머무르면?”

“음.. 사스콰치?”


밀레시안은 당연한거 아니냐며 어깨를 들어보였다. 중독되면 사스콰치, 중독되지 않으려면 섬 밖으로. 톨비쉬는 몇번이고 난기류에 휘말려야 헀던 섬의 위치를 헤아리며 혀를 내둘렀다. 그런 섬이니 여태 못찾지. 밀레시안의 설명에도 질문을 시작한 팀원은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지 다시금 손을 흔들어 보였다. 밀레시안은 일단 시작한 질문에는 친절하게 대답할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팀원은 양손을 들어보이며 부족한 궁금증을 물어보았다.


“가스관을 따라 움직인다는건 뭐야?”

“풀숲 전역에 가스관이 깔려있다니까요”

“하지만 넌 가스관을 두드리는 시늉도 하지 않았잖아”

“밟고 서있잖아요”


밀레시안은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냐는 얼굴로 팀원을 돌아보았다. 이쪽에서 보이지 않지만 톨비쉬는 다른 팀원들의 표정과 그의 얼굴이 다르지 않을것이라 생각하며 숨을 골랐다. 자신도 저런 멍한 얼굴이 되어있을까? 밀레시안은 발을 탕탕 구르며 말했다.


“걸으면서 반동을 느끼다보면 어느순간 갈라지는 구간이 느껴져요 좀더 굵은쪽으로 걸어가다보면 입구가 하나씩 얻어걸리니까... 물론 중간중간 중독때문에 방향이 틀어지지 않도록 방위를 확인하는게 번거롭지만 아무튼 길을 찾을 수 있어요”

“그게 발로 느껴진다고?”

“아니요, 이 듀얼건으로.  없어도 상관없지만. 있는건 쓰는게 편하죠."


그녀는 사용하던 듀얼건을 돌리며 탄창을 교환했다. 고쳐잡은 듀얼건은 털꼬리가 달린 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총신에 세겨진 태양무늬가 인상적인 듀얼건이였다.


"없어도 된다고?"

"아까 저…..”


밀레시안은 톨비쉬의 이름이 생각이 안나는지 톨비쉬를 가리키며 말을 끌었다.

여태까지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니, 톨비쉬는 잠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가슴을 두드렸다.


“톨비쉬입니다. 톨비쉬. 아니 여태 이름도 모르고 있었으면서 물어볼 생각도..”

“사람도 잘 하던데”

“톨비쉬는 손으로 했지”

"없으면 저도 손으로 해요"


팀원과 밀레시안은 톨비쉬의 말따위는 전혀 들리지 않은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했다.

톨비쉬는 살면서 저 사람이라고 칭해진 적은 처음이라며 충격에 몸을 떨었다. 여태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인상을 남기지 못한적은 없었는데.

팀원들은 톨비쉬를 흘겨보다가 밀레시안을 기특하다는 듯이 돌아보았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밀레시안에 대한 평가가 조금 올라간 모양이였다.


“그럼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아낸거야?”


갑자기 끼어든 질문이지만 팀원들은 아직 남아있는 의문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질문에 만족했다. 정 안되면 저사람에게 다시 질문하라고 하자. 팀원들은 벌써부터 톨비쉬를 이사람 저사람이라고 부르며 놀리기 시작했다. 

톨비쉬는 이름으로 부르라며 인상을 썼고 곧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밀레시안은 거절이나 불쾌감대신 살짝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처음 보는 반응에 질문에 끼어든 팀원은 응? 하고 되려 놀란반응으로 톨비쉬를 돌아보았다. 나 아무짓도 안했어. 자진신고하는 팀원의 모습에 톨비쉬는 마치 자신이 그녀의 보호자가 된 것같은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밀레시안은 부끄러운 기억을 이야기하는건지 입을 살짝 삐죽였다. 톨비쉬는 무의식중에 그 모습을 기억속 깊숙한 곳에 저장해 놓으며 새침하게 흘겨보는 시선과 마주했다. 뭐 이런것까지 물어보냐는 같으면서도 조금은 다른 분위기.


“임무중에 실수로….”


실수…? 실수로 눌렀다는건가? 팀원들이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밀레시안은 휙하니 몸을 돌려 복도끝에 다가섰다. 말라붙은 식충식물의 덩굴이 감싸고 있는 패널이 밀레시안의 손길 몇번에 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방금교체하면서 빼낸 듀얼건의 탄창을 얼추 전선따위로 연결하자 꺼져있던 패널에 전원이 들어왔다. 전투능력과는 별개로 그녀 또한 어느정도 공학지식을 갖추고 있는 모양이였다. 


새로운 정보의 발견이지만 톨비쉬들은 열리지 않는 문을 신경쓰기보다 밀레시안이 말한 실수가 무엇인지를 추측하기 위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실수.. 실수.. 한참을 생각하던 팀원중 한명이 수송기때를 떠올렸는지 고개를 들었다.

사실상 그들이 알고 있는 밀레시안에 대한 정보는 수송기에서부터 이 연구시설까지가 다였지만 팀원은 단장이 그녀에게 속삭이던 말을 기억해낸 모양이였다.


“확실히, 우리를 보며 이 사람들은 손대면 안된다고 했었지.”

“실수로 알아내려다가 손댔다는거야 손으로 쳤는데 알아냈다는거야”

“이미 다 말했는데 손대서 죽였다는거 아닐까”


웃고 떠드느라 정신없었던 세 사람과 달리 진지하게 밀레시안을 관찰하고 있던 팀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캐묻지 말자.

삐빅-. 짧은 전자음과 함꼐 닫혀져 있던 문이 반쯤 열리다 멈추었다. 안쪽에 감긴 식물덩굴이 문을 막고있는 모양이였다. 

톨비쉬들이 지나가기는 힘들지만 밀레시안은 유연하게 틈사이를 지나간뒤 잠시 눈썹을 찡그렸다. 이대로 버리고가면 안되나? 하는 생각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얼굴이였다.


“실수로 말이지..”


톨비쉬는 오래간만에 팀원들을 제치고 앞장선뒤 반쯤 열린 문을 좌우로 열어젖혔다.

꽈직 하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 걸려있던 마른덩쿨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실수로 우리를 두고가면 안되지. 톨비쉬는 수습하는 역할에 익숙해져가는 얼굴로 웃어보였다. 

밀레시안이 아쉬운 눈초리를 흘기며 다시 앞장섰다.










7.


복도 너머로 이어지는 톨비쉬들의 행보는 실리엔 연구시설을 탐험한다기 보다는 밀레시안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관찰일기에 가까웠다. 

밀레시안은 여전히 팀을 챙길 의지가 없어보였고 팀원들은 그런 밀레시안을 따라잡으며 그녀의 노력을 좌절시키는것에 집중했다. 

팀내의 누구도 변이된 동물들이나 식물, 천년은 묵은것같이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식인식물에 대해 놀라워하지 않았고  밀레시안은 그런 동식물들을 길가에 나있는 잡초 및 소동물마냥 밟고 지나갔다.


톨비쉬들이 노리는 것은 밀레시안이 이야기한 가스살포의 정지시스템과 시설내의 단면도 빛 프로젝트 파일의 회수, 밀레시안은 한참이 지나서야 톨비쉬에게 목표를 설명받은뒤 잠시 고개를 수그렸다. 

거침없이 나아가던 밀레시안이 고민에 빠지자 한동안 잠잠히 있던 팀원이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럼 지금까지 어디로 가고 있었던거야?”

“안내는 원래 문까지 만이였고 그 다음은 알아서 해도 된다길래.. 난 그냥 오래간만에 온김에 내 고밀도 탄환 만들러..”


애초에 난 팀이고 뭐고 내려올 생각이였고 너네팀은 그냥 부탁받은거라니까. 의 말이 축약된 짧은 대답에 톨비쉬는 다시한번 폭발하려는 팀원의 시야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톨비쉬의 넓은 등을 뚫어버릴것 같은 뜨거운 시선이 빈 공간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인간의 안광이 빛난다면 잔상을 남길것 같은 뜨거운 눈빛이였다. 그의 파트너가 흥분하려는 그를 잡아 토닥였다. 심호흡 해,  

과호흡을 부를것 같은 토닥임에 밀레시안은 메인시스템의 위치가 생각나지 않는지 한참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혹시 탄환은 어디서 만드는지 알고 있나?”


톨비쉬가 융통성을 발휘해 밀레시안이 아는 곳 부터 재 탐색을 하자는 제안을 내 놓았다.

톨비쉬의 팀은 실리엔의 생태학이나 관련기술인 매직크래프트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지만 마법이라고 불릴정도로 복잡한 매직크래프트의 꽃인 마력탄에 대해서는 어느정도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마력탄 중에서도 고밀도수준의 일정단계 이상의 물건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면 그만한 중요한 시설이 필요하지 않을까.. 톨비쉬의 제안에 다른팀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밀레시안이 이야기한 ‘가마솥’이라는 기구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자, 

그리고 뒤이어지는 추측성 계획들에대해 한참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팀원들의 사이로 밀레시안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가마솥’의 원래용도가 중앙시스템이였던 것 같기도 하고…”

“………“


일단 가자. 톨비쉬는 장비를 거꾸로 움켜쥐는 팀원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한걸음 앞장섰다. 

그의 눈이 밀레시안의 뒷통수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서라, 그의 파트너는 이글거리는 눈빛의 팀원을 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휘두르기도 전에 벌써 알아챌껄? 알아 안다고! 나도 알아!! 버럭버럭 내질러지는 소리가 복도를 울려왔다. 톨비쉬의 팀이 중앙동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밀레시안이 복도중간을 가로막고 있던 셔터를 열었다. 

당연하게도 토끼때가 쏟아져 나오는 장소였다.


“밀레시안은 여기 지리를 알고 있는거지?”


팀원들이 다시 입을 연것은 수십마리의 토끼를 범위형 전기장으로 일격사시킨 뒤의 일이였다. 

비싼 물건이라며 되도록 쓰고 싶지 않았지만 톨비쉬는 조준속도보다 빠르게 뛰어다니는 작은 아기토끼들을 잡는것에 한계를 느끼며 고개를 내저어야했다. 

실리엔에 노출된 토끼보다 훨씬 더 짙은 보라색을 띄고 있는 돌연변이 토끼들은 화물동에 있을때보다도 훨씬 날렵해져있었다. 

이제 슬슬 근접전으로 가야할지도. 톨비쉬는 눈짓을 보내는 팀원의 의견에 동의하며 무기를 바꿔들었다. 

삼단으로 펼쳐지는 가벼운 강철봉은 일반적인 재질보다도 훨씬 검은빛을 흡수하고 있었다. 파지직 거리며 흐르는 푸른 번개가 아주 잠시 검은 막대의 표면을 밝히다 사라졌다. 밀레시안은 그러거나 말거나 토끼피에 가려진 벽면 어딘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지리 말고 구조도 알고 있는것 같은데”


밀레시안이 외벽 중간을 뜯어내는 모습에 다쓴 전기지뢰를 회수한 팀원이 가까이 다가갔다. 

얽기설기 꼬여져잇는 전선의 어딘가를 뒤적이는 밀레시안은 노란선, 노란선.. 하고 무언가를 되뇌이고 있었다. 잠시 지켜보던 팀원이 토끼가 갉아먹은 노란선대신 갈색과 녹색을 가리켰다.


“이거랑 저거랑 이어도 될 것같아”


밀레시안이 잠시 성질만 내던 팀원을 올려다 보았다. 

우와 똑똑해. 칭찬의 의미지만 여태까지 자신을 어떻게 본것인지 투명하게 내보이는 밀레시안의 시선에 팀원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솟아오르지 마라 혈관아. 팀원이 화를 참는동안 문을 연 밀레시안은 보답인지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의외로 주고받은것은 확실한 성격인것 같았다.


“와본적도 있고 배운적도 있어요”

“와봤다고? 여긴 10년도 전에 폐쇄되었는데? 아니 그 전에 너 네반제약 소속이였어?”

“10년... .음...그런건 상관없어요”


밀레시안이 말한 그런 것이 10년의 세월인지 네반제약인지, 팀원들이 눈빛을 교환하는 동안 밀레시안은 다시뜯어낸 철판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이제 피오나 소속이랬으니까”


단장, 톨비쉬팀은 그녀의 말 뒤에 단장의 입김이 닿아있는것을 직감했다. 

그녀의 정보에 대해 말해주지 않은것도 이 때문이였을까? 이 임무에 갑자기 끌어들이고 그녀를 배치한것도 모두 단장의 안배인걸까. 

하지만 앳되어보이는 외모와 이 연구단지가 정보계 상으로 사라진 시기가 맞지 않는다. 

아무리 잘 쳐줘도 팀내의 막내를 벗아나지 못할 외모인데 10년전이라면 아주 꼬꼬마 어린아이의 시절일것이 분명했다. 

그런 어린아이가 실리엔 제 1연구 시설인 생태지구를 드나들었다고? 톨비쉬들이 퍼즐을 짜맞추는 동안 밀레시안은 불빛이 돌아온 패널에 손을 얹었다.


‘순간이동 승인자 확인, 밀레시안. 중앙게이트를 오픈합니다’


밀레시안의 발밑에 빛이 들어오자 팀원들은 즉각적으로 움직여 밀레시안을 붙잡았다. 

아주 잠시 눈을 땐 사이에 또다시 팀원들을 떨어트리고 갈 생각 만만인 밀레시안은 아쉽다는 건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너 임마, 우리가 얼마나 눈치가 빠른줄아냐?”


가장 가까이 서있던 팀원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밀레시안을 올려다 보았다. 

밀레시안은 잠시 한뼘아래의 신장인 그를 내려다보다가 콧바람을 내뿜으며 고개를 돌렸다 흥? 지금 흥이라고 했어? 확하고 치솟아 오른 팀원의 모습에 중재하려던 파트너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밀레시안과 그가 너무 가까이 있기도했고 파트너 또한 밀레시안에게서 손을 땔 수 없는 상황이였기도 했다. 순간이동기는 갑자기 늘어난 인원수에 재 연산을 시작한건지 잠시 붉은 빛으로 에러를 표시하다가 다시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조명이 바뀌는 동안 밀레시안의 가까이 붙어있던 팀원중 누군가가 밀레시안의 슈트를 알아봤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어, 이거 역시..”

“아하, 이동이 시작되는것 같네!”


톨비쉬가 그의 말을 자르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팀원들중 단 한사람을 제외한채 슈트의 진실을 알아낸 팀원들이 톨비쉬와 남은 팀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최소 3개월. 

톨비쉬와 같은 견적을 낸 팀원들이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밀레시안의 도발에 정신이 팔린 팀원은 야 이쪽 안봐? 너 지금 내가 키 작다고 무시하냐?! 등의 화를 내느라 밀레시안이 무엇을 입고 있는지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였다. 눈치가 빠르지 않다는건 그런의미이겠지. 

팀원의 파트너는 밀레시안의 솔직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이동기가 이동시킨 생태지구의 중앙동은 바깥 화물라인과는 다르게 깨끗하고 조용한 환경을 유지했다. 


“여기가 중앙동입니까?”


팀원의 질문에 밀레시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에 놓은 둥그런 원통을 중심으로 커다랗게 펼쳐진  기계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문양으로 마감된 일련의 예술품처럼 보였다. 빛의 여신이라고 별명붙여진 네반의 연구단지라니 딱 그 값어치는 해내는 모습. 밀레시안은 불꺼진 중앙동에 발을 내딛고는 의아해하는 얼굴로 물러섰다.


응? 밀레시안은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얼굴을 내보였다.

탁탁 발을 내리치는것으로 보아 방문자를 인식하면 자동으로 시스템이 켜지는 모양이였지만 쥐죽은듯 꺼져있는 중앙동의 시스템은 램프하나 반짝이지 않는 모습이였다.

무리한 순간이동탓에 권한이 손상된걸까? 톨비쉬들은 밀레시안이 중앙동의 출입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의문을 잠시 넘긴채 밀레시안의 행동을 관찰했다. 그녀가 시스템을 켜지 못한다면 톨비쉬들의 임무는 반쯤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은 가능성이라고는 수기로 저장된 파일을 찾거나 가스 분포 제어장치를 찾아 수동으로 멈추거나 번거롭거나 귀찮은 일들따위. 톨비쉬는 정보 공학쪽에 재능을 가진 팀원을 바라보았다. 그치만 당신도 봤잖아! 흥이라고! 그렇잖아?! 억울함을 토로하던 팀원이 톨비쉬와 파트너의 짠한 시선에 말을 멈추었다.

눈치가 느린건지 빠른건지 밀레시안이 아장아장 원통형 주변을 힘주어 걷고다니는 동안 팀원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쉴새없던 전투의 재정비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장비로 시스템에 접근할 생각인지 분해하던 팀원은 밀레시안이 돌고있는 원통 근처로 다가갔다. 무릎높이의 나지막한 원형의 기계장치는 둥그스름한 바닥가득 신비한 문양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게 ‘가마솥’이야?”

“지금은 밑바닥 뿐이지만.”


밀레시안은 왜 현관등의 센서를 찾는 사람처럼 손을 휘저으며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조금 귀엽기도, 하지만 팀원은 냉정하게 그녀를 나무랐다.


“정신없으니까 얌전히좀 있어”

“그거, 연결 안하는 편이 좋아요.”


밀레시안은 자리에 앉아 케이블을 뺴는 팀원의 모습에 톨비쉬를 찾기 시작했다. 

자신이 말해도 별로 듣지 않을것이라는 것에 이미 익숙한 모습이였다. 톨비쉬는 헐거워진 부츠를 다시 매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팀원은 그래그래 하고 반쯤 흘려들으며 케이블을 연결했다. 

밀레시안의 발밑으로 미세한 진동음이 감지되었다. 아 늦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우호적으로 부르면 되지 않을까?


밀레시안은 이 연구단지를 움직이는 시스템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말을 이었다. 말주변을 좀더 키워 놓을껄. 밀레시안은 처음으로 무언가에 대한 배움을 아쉬워하며 팀원을 설득했다. 밀레시안이 쩔쩔매는 목소리에 톨비쉬는 본능에 가깝게 고개를 들어 밀레시안을 찾기 시작했다.

애아빠 다 됐네. 팀원중 한명이 두리번거리는 톨비쉬를 놀려대었다.


“어디 접속할껀진 모르겠는데 분포시스템이라면’실비아’에게 묻는게 더 나아요. ‘실비아’가 정지 권한을 가진건 아니지만 다짜고짜 ‘바이스’를 찾아가는것 보다는… 아니 일단 시스템이 수면모드로 되어 있는것 같은데 무작정 연결하면 바이스에게 다이렉트로 전달되니까..”

“그거야 연구원들이 자리하고 있을때의 이야기고. 지금은 아무도 없잖아?”

“바이스랑 실비아는 연구원이 아니에요”


아 전기는 살아있네. 팀원의 컴퓨터가 로그를 띄워올리자 밀레시안의 발밑으로 더욱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진동은 이제 예민한 몇몇 팀원들도 느낄수 있는 수준인지 잠시 대기하고 있던 팀원이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뭔가 했어? 팀원이 소리치자 앉아있던 컴퓨터 담당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밀레시안을 찾아낸 톨비쉬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밀레시안은 다소 간절함이 섞인 눈으로 톨비쉬를 돌아보았다. 벌써 이렇게까지 의지받고 있나, 감개무량한 분위기도 잠시 밀레시안은 왜 이제왔냐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밀레시안은 톨비쉬의 팔을 잡아끌며 가장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무슨일인지 설명받고싶지만 톨비쉬는 습관적으로 앉아있는 팀원을 돌아보았다. 그는 올라오는 로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상한데, 시스템은 다 살아있는데. 왜 반응을 안한거지?”


“일단 물러서는게 나을 것 같아요.”

“물러선다고? 뭔가 문제가 발생한거라면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천천히, 차근차근.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양 어깨를 잡아 멈춰세우고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밀레시안의 맨 어깨에 톨비쉬의 장갑이 닿았지만 밀레시안은 단장때처럼 야무지게 그 손길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좋고 싫고를 판가름하기 보다는 일단 자리를 피하고싶어하는 것 같았다. 깜빡이며 전원이 들어오는 전등이 의아해하는 팀원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팀원과 톨비쉬, 밀레시안이 등지고 서있던 원통형의 위로 오망성의 타원이 떠올랐다. 바닥을 유지하는 원통을 감싸듯 부풀어오른 모습은 그야말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가마솥. 누가보아도 저것이 밀레시안이 찾고 있던 도구임이 확실해 보이는 모양에 밀레시안은 혀를 찼다.


“’바이스’”

“바이스? 그게 누구지?”

“바이스는 ‘가마솥’을 책임지는 그랜드마스터인데”


밀레시안의 설명보다는 보여주는게 더 빠르다는건지 가마솥은 빙그르르 회전하며 보라빛 연기를 피워올렸다. 둥그스름한 빛의 구체가 가마솥속에서 솟아나자 꺼져있던 중앙동의 모든 패널들이 일제히 전원을 키며 그녀의 귀환을 방송했다.


“성격이 좀 까다로워요. 방해받는걸 가장싫어하고 말이 많은 동시에…… "

‘그런 하찮은 데이터 패널로 내 연구를 방해하다니, 각오는 하고 오셨겠죠?”


"음.. 나를 굉장히 싫어하죠.”


바이스의 텍스트는 길이가 길어질수록 음성으로 전환되며 온전한 형태를 갖추었다. 보라빛 로브를 입은 연구원의 모습을 흉내낸 AI는 오우.. 하고 놀라는 팀원을 내려다보다가 밀레시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밀레시안의 승인권한으로 모두가 들어온만큼 바이스는 밀레시안에게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을 물을 생각인 모양이였다.

까다롭다는 범위가 어느정도일지.. 톨비쉬는 노골적으로 싫은 반응을 보이는 밀레시안의 모습에 눈을 굴려 팀원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가로젓는것으로 보아 그의 손으로는 이 AI의 까탈스러운 폭주를 막기 힘든 모양이였다.


“말해보세요 ‘밀레시안’ 당신이 왜 친구들을 데리고 여기서 하하호호 파티중인거죠?”

“딱히 하하호호 하는 분위기는 아니였는데..?”


“당신 권한으로는 초대자체가 불가능할텐데.. 흐응 다른 이의 권한을 사용한건가요? 그건 충분히 징계사유가 된다는건 알고 있죠? 거기에 출입문 기록에도 이름이 없는걸 보면 다른구멍으로 들어온 모양이군요. 어디로 들어온거죠? 또 토끼녀석들이 벽을 뚫기 시작했나요? 당신도 너무 태평하군요. 그런일을 보면 일단 수습을 해야하는게 당신의 역할 아닌가요? 아니면 또 다른곳으로 가야한다며 하던일도 내팽겨치고 떠날셈? 책임감이라는걸 조금 배워보는건 어때요? 당신이 떠난다고 해서 하나 아쉬울것은 없지만 수습해야하는 사람의 입장도.. ……… ……음? 날짜가 왜 이렇죠? 또 가마솥 바깥의 물건들을 건드린건가요?”


뚫는다기보단 이미 먹고있었지. 팀원들은 바깥상황을 모르는것 같은 바이스의 발언에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시설이 다운되며 잠들게 해놓았던 관리자가 외부의 시스템의 접근에 놀라 깨어난 모양이였다. 시스템을 다운모드로 만들면 그 연결이 끊어지는 것을 흔적삼을 추적들을 속이기 위해 관리시스템마저 허상속에 잠들게 한 것인지 바이스는 날짜를 제 계산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부에서 끌어당기는 정보와 자신의 기록이 맞지 않아 오류가 발생하는 모습이였다. 밀레시안을 추궁할 여유도 없는건지 어긋난 기록들을 짜맞추는 바이스가 사소하게 흘러간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팀원은 아무 생각없이 말한것이지만 바이스의 심기를 거스르는 가시같은 단어가 그녀를 자극했다.


“연구중이라니, 이 연구단지 아직도 가동중이였어?”


“연구단지라니 그런 맥락없는 이름으로 줄여서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여긴 실리엔 생태 보호지구에 있는 연구시설입니다. 

수천년전에 침몰한 거대 실리엔 덩어리가 그대로 잠겨있는 마지막 고대의 유산이지요. 여기에는 잊혀진 식충식물과 그 변이종인 식인식물, 그리고 성가신 토끼놈들과 인간이 실리엔에 중독되었을때를 연구 할 수 있는 윤리적인 실험체 사스콰치가 자연생식하는 장소입니다. 어느정도 예의와 특성을 갖추어서 불러주었으면 좋겠군요”

"헤에.. 그거 좀 더 자세히 듣고싶은 이야기인데"


밀레시안은 이미 시달린경험이 있는지 톨비쉬의 팔을 잡아당겼다. 가장자리는 그녀의 행동범위에서 벗어나는건지 밀레시안은 스크린이 둘러싸는 경계 바깥으로 나가기를 희망했다. 

연구단지의 구조도와 지하 실험장의 단면도를 딱딱 띄워 열정적인 설명을 거듭하는 바이스의 의도치 않은 친절함에 팀원은 갖고있던 기록용 카메라를 들어 영상을 카피했다. 

그는 간단한 언행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며 원하는 정보를 취득하는 것에 익숙해 보였다.


“토끼는 원했던 실험체가 아니였구나”

“누가 알았겠습니까. 어떤 멍청한 연구원이 애완동물로 토끼를 데리고 들어올지. 그리고 그게 도망쳐 새끼를 까고 또 새끼를 까고. 빌어먹을 토끼놈들, 식충식물에게 잡아먹힐것이지.. 그 얄미운놈들은 자기들에게 위협이 되는 식인식물가까이에는 가지도 않는다구요!”

“헤에.. 맞아맞아. 그거 정말 짜증나지.”


순순히 대화를 이어나가는 바이스의 모습에 밀레시안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모양이였다. 수시로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에 톨비쉬는 밀레시안에게 키를 맞춰 쉿 하고 입술을 눌러보였다. 

말을 하지 말라기보다는 목소리를 낮춰달라는 제스쳐였다.  그들은 팀원들에게서 떨어져 한적한 스크린 너머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톨비쉬의 눈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밀레시안은 그의 다정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였다. 왜 갑자기? 

톨비쉬는 그녀의 물음에 또다른 질문으로서 대답헀다.


“흥미로운가요?”

“바이스가?”

“아니, 그의 언행이요”


톨비쉬는 다 알고 있는 미소로 말을 유도했다. 정보를 얻어내는 팀원의 재능도 대단했지만 톨비쉬도 그에 못지 않은 재능을 갖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팀원중 아무도 그녀의 말을 귀기울여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떠한 언행으로도 오해나 언짢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의지했고 그에게 자신의 말을 떠넘겼다. 

톨비쉬를 통해 재 구성된 말은 같은 의미를 담고서도 온화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밀레시안의 본 의도를 손상시키지 않았다.

그건 대단한 것 같아. 밀레시안은 다정하게 웃는 톨비쉬의 온기를 부담스러워하며 몸을 뒤로 움직였다.


당신이 싫으면 가까이 가지 않을꺼야. 톨비쉬는 커다란 덩치가 위협이 된다는것을 알고있다며 최대한 작게 몸을 수그렸다.

그는 온화한 분위기를 위해 다정하게 말투를 바꾸었고 날카롭게 예기를 발하던 눈을 둥그스름하게 접어 웃었다. 밀레시안은 충분히 그의 의도된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지만 시선이 그의 곱슬거리는 금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춰주는 높이에서 보이는 금발은 그녀의 안에 잠든 그리움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단장은 내가 이 팀을 필요로 할꺼라고 말했어요”


“나도 단장이 왜 당신을 우리팀으로 밀어넣으려하는지를 알것 같군요”

“나는 필요 없다고 했고 지금도 필요 없다고 느끼지만”


어, 그건 섭섭한데. 톨비쉬는 장난으로 상처받은척 가슴을 툭 내리누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 안되지. 하지만 뒷 말이 남아있으니 좀더 들어볼 요랑인지 톨비쉬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중요한 이야기 하는 중이니까 방해하지 말것. 

그의 뒷모습은 남은 팀원들에게 소리없는 메세지를 보내고 있었다. 팀원 하나가 바이스를 붙잡고 있는동안 계속해서 컴퓨터를 만지던 팀원이 실비아를 불러내었다. 

바이스보다는 좀 더 작은 규모로 연두빛 빛무리와 나타난 둥근 ai는 곧 바이스보다도 좀 더 작은 소녀의 모습으로 팀원들 사이에 나타났다. 밀레시안이 바이스보다 실바이를 선호한 이유를 알것같은 상냥한 인사가 그녀의 주변에 있는 텍스트들을 변화시켰다. 

각국의 유창한 번역으로 안녕하세요 라고 말한 실비아는 팀원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밀레시안님, 밀레시안님, 밀레시안님, 밀레시안님, 밀레시안님. 그리고 밀레시안님도 굉장히 오래간만에 방문해 주셨네요. 그간 별일 없으셨나요?”


밀레시안의 권한으로 들어와서 일까? 팀원들은 한순간 실비아가 오류를 일으킨건 아닌가 잠시 긴장했다가 웃음을 지어보였다.

실비아가 따로 인사한 밀레시안은 아직 고민이 깊은 얼굴로 톨비쉬에게 붙잡혀 있었다.

정말로 그녀를 팀으로 받아들일 생각인건가? 

팀원들중 일부는 여전히 탐탁치는 않아했지만 그들 또한 톨비쉬연장선으로 그들 모두가 톨비쉬와 엇비슷한 사람들이였다. 


톨비쉬가 파악한 만큼 팀원들도 왜 밀레시안을 이 팀에 넣으려고 했는지 단장의 의도는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너무 뛰어난 피지컬과 다재다능한 지식분야. 하지만 결정적 오류를 불러일으키는 언행과 타인의 도움에 익숙하지 않은것같은 행동.

거기까지라면 팀원들은 충분히 밀레시안의 재능을 포기하며 팀의 결속력을 지키려하겠지만 밀레시안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단순히 낮은 것이 아니였다. 부족하다라던가 낮다 거의 없다 라는 평가보다는 비어있다 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공허함. 


실제로 밀레시안은 그들과 함께 중앙동으로 들어오는 동안 꽤 많은 대화를 하기 시작했고 그 대부분의 어조는 그들의 말을 카피하여 재구성한것에 가까웠다. 톨비쉬는 먼저 나아가버리는 밀레시안을 보며 팀원들을 설득했다.

가르친다면, 잘 할것이라고. 어린아이를 입양하자는 보호자같은 발언이였지만 밀레시안은 뛰어난 재능과 함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인재였다.

배우는것에도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아보였고 계기만 있다면 바로바로 말문을 열며 대화한에 섞여들었다. 




그녀는 단지 말을 해본 경험이 적은 것으로 보여. 톨비쉬와 함께 찬성쪽으로 돌아선 팀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보모노릇을 하겠다는건 아니지만.. 대충 줄거리가 상상은 가는군. 어린나이에 컴뱃마스터, 공학도 할줄알아, 함정도 해제할줄알아. 무기는 힐웬공학에, 부자재인 실리엔도 다룰 수 있어. 여기까지만해도 저녀석이 어떤 의도로 키워졌는지는 알 수 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어디서 왜 는 모르겠지만.”


“불쌍하니까 받아들이겠다는거야?”

“음…..불쌍하다기보다는 저대로 내버려두면 폐기처분되지 않을까싶은데”


폐기, 라는 말에 톨비쉬는 인상을 썼지만 스스로는 자각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였다. 이런, 말조심을 해야겠군. 입을 다문 팀원이 다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찬성파가 되었지만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서 반대를 말하고 있던 팀원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두사람 친해, 같이 술마시러 다닐정도로. 그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로 침묵을 마무리지었다.

그는 아직도 단장의 의도보다는 과정에 신경을 쓰는것 처럼 보였다. 저녀석의 말이 대충 맞아떨어진다면. 그는 찬성한 팀원이 제시한 동정심자극 줄거리를 언급하며 말했다.


“단장은 저녀석을 어떻게 얻은거야?”


정황상 톨비쉬의 팀에 떠넘기기전에도 단장은 그녀와 몇가지 임무를 진행한것이 확실해 보였다.

단장은 이 섬을 찾고 있었고 톨비쉬들또한 이 섬에대해 따로 설명을 듣지 않았더라도 알아서 움직일만큼 이 섬의 정보는 귀중한 것이였다.


밀레시안은 이 섬의 위치만 알고 있다고 했지만 그런거라면 밀레시안이 굳이 이섬에 상륙할 이유는 없었다. 실리엔의 가스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만 있어도 예방이 가능했고 그녀가 실수로 죽여버린 비밀번호 제공자또한 실수따위에 죽는 일 없이 노련한 재능자에게 맞기면 되는 일이였다.


하지만 단장은 굳이 그녀에게 그 사람을 맞기고 수송기에 밀레시안을 탑승시켰다.

팀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헀다. 그런건 별로야. 라고.


“단장은 단장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기 위해 저녀석을 여기에 내려보낸거야. 명령받은거라면 받아들이겠지만 선택권을 준거라면. 글쎄.. 난 단장의 의도보다는 내 선택을 더 중요시하고 싶어. 거부할 수 있으면 거부할래.”


“그건 너무 유치한 선택이야”

“너도 거부였잖아”


“굳이 끌어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럼 지금은 찬성이야?”


유치하다고 꼬집는 파트너의 말에 팀원은 발끈 화를 내며 돌아섰다. 

밀레시안이 커진 언성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이쪽이에요. 처음보다는 길어진 안내가 그들을 재촉했다. 


여전히 두고가고싶은 의도가 보이는 거리였지만 톨비쉬는 손을 흔들어보였다. 저정도면 짧은시간내에 만들어진 변화치고는 긍정적이지. 벌써부터 자랑하는 것같은 어투에 팀원들을 저사람이라고 불렸으면서 하고 다시 놀림꺼리를 꺼내들었다.

톨비쉬가 그건..! 하고 항변을 하려다가 말을 포기했다. 그는 그의 자랑인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떨쳐내려고 해도 쇼크가 큰 모양이였다.


“나는, 그렇군 너와 반대되는 의견이니 찬성이 되는군. 나는 네 말의 반대로 저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보고싶어. 

굳이 설명을 덧붙이자면 자기 선택이라는것을 할수 있는지 알고싶은것 뿐이지만. 결국 끝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밀레시안 본인의 선택도 마찬가지야. 그녀가 들어오겠다고 스스로 말한다면 나는 찬성하겠다”

“아 나도”


“………뭐야 갑자기!! 치사하게 끼어들기야?”


“아니, 듣다보니까 좋은말이 나오길래.”


저도 업혀서 좀 가겠습니다. 꾸벅 고개까지 숙여보이는 넉살에 팀원은 발을 쿵쿵 내딛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물러터져서는.


“그러니까 단장이 자꾸 억지로 임무를 떠넘기는거 아니야?!”

“음… 하지만 우리 단장이 없으면 그냥 사냥개가 될 뿐이고”

“사냥개가 하기싫으면 백수가 되는것 뿐이고..”


“백수는 곤란해. 나 아직 할부금 남아있단 말이야”


너 우리 받는 보수가 얼마인데.. 팀내에 할부금이 남은 이가 있다는 사실에 팀원들의 눈이 따뜻하게 젖어들었다.


“그… 힘내라. 보증이나 돈은 안빌려주겠지만”

“눈물나게 고마워서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주머니에 이거라도 꽂아줄까”


“아,”


먼저가던 밀레시안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다소 빨라진 걸음으로 돌아와 톨비쉬를 바라보았다. 낯을 가리는 것과는 별개로 밀레시안은 톨비쉬의 옷자락을 덥석덥석 잡으며 톨비쉬를 잡아당겼다. 역시 수송기에서.. 아무일도 없었다고 우기는 톨비쉬의 뒤로 밀레시안이 교차해 들어가며 입을 열었다.


“실수했어요”

“응?”

“인식당했는데, 쏘기전에 이미 날라와 버려서”


“가드!! 가드!!!”


잽싸게 파트너의 뒤로 숨은 팀원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밀레시안의 불충분한 설명뒤로 식인식물이 쏘아올린 위석덩어리가 날아들었다. 공기중에 불타는 성질을 가진 액체로 뒤덮인 거대한 캡슐덩어리의 안에는 겉과 마찬가지로 공기에 반응하는 고 위험성액체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얇은 위석껍질이 꺠지기라도 한다면 당장의 폭탄처럼 꽝. 허둥지둥 톨비쉬와 가드를 든 팀원뒤에 숨은 인원들이 톨비쉬들의 등을 떠밀며 가드를 연호했다. 팔뚝에 채워져있던 가드기어가 빠른속도로 펼쳐지며 코앞까지 날아온 위석을 밀쳐내었다. 


꽝.하고 귀가 멀것같은 폭음과 함께 톨비쉬가 두어걸음 뒤로 물러났다. 인이어의 차단이 없었으면 고막이 터져버릴것 같은 굉음에 톨비쉬는 반사적으로 밀레시안을 뒤돌아보았다. 양손으로 꽉 뀌를 틀어막은채 눈을 꼭 감고있는 밀레시안이 팀원들의 보호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네 선택은 어때?”


파트너의 질문에 팀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말부터 가르쳐야겠다. 두번 설명을 씹어먹었다간 팀 전원이 위액을 뒤집어 쓸지도 모를 노릇이였다. 자, 어서 선택하자. 팀원들은 가드마저 녹이려드는 위액을 털어내며 그를 돌아보았다.


“나한테 선택을 강요하지마!!”


영문모를 고함을 뒤로한 밀레시안은 다시 톨비쉬들을 내버려둔채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에이 거의 넘어온것 같은데 하는 장난기섞인 웃음에 잠시 밀레시안의 시선이 뒤를 바라보았다가 돌아섰다. 왜 안오냐는 표정이였다.

톨비쉬는 그런 밀레시안을 보며 미소지었다. 더 돌아보게 만들고 싶은 욕구가 그의 마음속에서 싹트고 있었다.


그래 돌아봐, 이쪽을봐. 흥미를 가지고. 호기심을 가지고.





점점 짙어지는 톨비쉬의 미소가 절정을 이룬것은 바이스와 실비아가 팀원들의 말재간속에서 놀아날 즈음의 일.


“그렇게 필요없다고 단정지으면 상처받는데”

“거짓말”

“음… 50퍼센트정도 표백된 거짓말이라고 해두죠. 상처까지는 아니에요. 좀 아쉬워서 그렇지”


팀원의 말대로. 결국 마지막은 밀레시안 본인의 선택일뿐이였다. 

그녀가 팀으로 남고싶다면 단장은 명령을 써서라도 밀레시안을 톨비쉬의 팀으로 밀어 넣을 것이였다. 설령 그녀가 고립된다고 해도. 

하지만 또 반대로 그녀가 떠나고싶다면 팀 전원이 찬성하더라도 밀레시안은 톨비쉬들을 떠나갈 것이였다.

부차적인 회의가 길어졌지만 결국 마지막 선택권을 가진것은 그녀 자신.  


톨비쉬는 그런 선택지에서도 자신에게 승기가 기울어져있다 확신하며 눈을 깜빡였다. 단장도 충분히 알고 있었겠지. 말에 어리숙한 밀레시안을 구슬리는것은 톨비쉬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닌 일이였다. 

그냥 몇분인가 개인적으로 만날 시간만 주어진다면, 톨비쉬는 미소지었다. 하지만 톨비쉬의 자신감과 달리 밀레시안은 얼굴을 붉히지도 부담스러워하지도 않은채 가만히 톨비쉬를 응시했다. 

경계심을 푼것은 아니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낼 정도도 아니였다. 그저 네가 뭘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관대함. 그리고 조금 빗겨나간 관찰의 시선. 밀레시안은 한참을 톨비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 다르지만..”


밀레시안은 여전히 알아듣기 힘든 말로 서문을 열며 눈을 깜빡였다. 한번 눈꺼풀이 움직일때마다 그녀의 동공은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지만 밀레시안은 스스로 그 과정을 조절할수 있는건지 한동한 커다란 동공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무얼보고 있는거지? 톨비쉬는 그녀의 시선이 쫓는것을 파악하지 못한채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깜빡, 줄어든 동공의 크기는 톨비쉬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은 날 보고 있다. 톨비쉬는 잠깐동안 발견하게된 밀레시안의 의문의 재능이 흥미로운지 계속해서 밀레시안의 시선을 쫓았다.

눈을 계속해서 바라보는것은 상대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행동이였지만 밀레시안은 두어번 시선을 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이제 스트레스를 받은 상황에서 벗어나는 화법도 사용할 줄 알았다.


“만약 내가 선택해야한다면 나는 역시 눈에 익은 얼굴이 좋아요”

“내 얼굴이 눈에 익나요?”


“아니요. 하나도 안 익어요.”


밀레시안은 딱잘라 선을 그어 대답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당신은 아니야. 하지만 밀레시안은 그러면서도 톨비쉬를 밀어내지 않았다.

톨비쉬는 일단 눈에 익은 닮지않는 사람의 이미지에 만족하며 밀레시안의 손을 잡았다. 아직은, 익지 않은것 뿐이였다.

장갑을 끼지 않은 그녀의 손은 끝은 여러 전투후에도 얼룩하나 묻어있지 않고 깨끗했다. 그만큼 실력이 좋은건지 요령있게 전투를 회피한건지.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손을 끌어당겨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쪽하고 울리는 낯뜨거운 소리에 실비아는 어머, 하고 행복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팀원들은 벌써 입을 댔구만 하고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바이스는 그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것 처럼 보였다.


“피오나 최고의 팀에 들어온것을 환영합니다. 밀레시안.”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는 톨비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밀레시안이 입을 열었다.


“내 손 지금 실리엔탄환때문에 많이 쓰거울텐데”

“…………"


톨비쉬는 입술을 핥지 않으려 애를 써야만 했다.


"확실히 그러네요”


밀레시안이 톨비쉬의 행동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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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비밀레) reload #1

마비노기/reload 2016. 12. 31. 00:34


1.

“감사합니다, 메리크리스마스!”


인구수가 적은 마을, 자칫 잘못하면 못본채 지나갈만큼 작은 와인샵에 활기찬 크리스마스인사가 울려퍼졌다.

겨우 대여섯사람 들어서면 가득찰 작은 가게이지만 그건 이 마을의 가장 큰 와인샵을 몰라보고 하는 소리일뿐, 자그마한 카운터의 너머에서 비어진 재고의 와인병들을 가지고 나오던 오너 소믈리에가 발갛게 상기된 손녀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 

방금전까지 시골은 역시 시골일 뿐이라며 울상이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반짝거리는 어린 눈망울이 눈이 부시다. 눈이 부시다 못해 못마땅하기까지 하다.

오너의 못마땅한 표정을 발견했는지 손님들중 몇몇이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톨비쉬는 그러한 시선이 익숙하다는 얼굴로 가볍게 목례를 해보였다.


마을의 상가가 외각의 자리한 이 와인샵은 사실 아주 큰 창고의 일 부분이였다. 

마을의 역사만큼이나 아주 오랜 세월 닫혀있던 창고가 개방된 것은 불과 5,6년전의 일. 문득 생각날 때마다 준비하고 잊을 때즈음이면 날짜를 확인하던 장례식이 끝난 뒤의 일이였다. 

마을에서 가장 부지런한 영감님는 입을 다물었다. 아주 잠시동안의 일이였지만 그는 그떄의 기억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움직였다


늙은 부부 둘이살기에 너무 넓었던 집이 비워지고 자신의 창고 근처에 새 보금자리를 꾸린 영감님은 젊었을적 입었던 소물리에의 정복을 입고 창고를 개방했다. 

오랫동안 묵혀왔던 창고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 싶었을 뿐이야.  안부를 물어오는 마을주민들에게 오너는 늘 성가시다는 얼굴로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와인잔을 닦았다. 오너의 모습은 다시금 마을속에 녹아들었다. 

예전에 매 장날마다 보이던 다정한 노부부의 모습이 사라진 대신 마을사람들이 날짜를 확인하는 또 다른 일상의 풍경이였다.

소물리에는 마을사람들이 방문하는 주기에 맞추어 와인병의 진열을 바꾸어놓았고 몇몇 건방증이 심한 사람들은 윈도우 너머로 보이는 라벨의 색을 보는것 만으로 무슨요일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단골들의 와인목록에 톨비쉬의 이름이 추가된것은 1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였다.

곧 있으면 1년인가, 오너소믈리에는 톨비쉬가 가져간 병의 라벨을 떠올리며 달력을 바라보았다. 추운 겨울 또 한 해가 가버린 고독한 겨울에 찾아온 금발의 청년.

잠시 몸을 녹일겸 말을 물을겸 진열된 와인을 살피던 낯선 청년은 달콤함이 강조된 와인들을 보며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 취향이 꼭 반영된 것만은 아니야, 사고뭉치로 유명한 쌍둥이 남매를 키우는 마시부인의 소소한 즐거움 목록이지. 오너는 그렇게 속으로만 부정하며 못마땅한 시선을 굴렸다.


모두가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일찍 집으로 돌아간 날, 문을 닫아도 돌아갈 곳이 없는 오너는 괜스래 뾰속스러운 눈을 흘기며 톨비쉬를 관찰했다.

온 몸을 두른 새까만 긴 코트탓에 체격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언뜻보기에도 아주 훤칠하고 다부진 모습이였다.

도시에서라면 모를까 이런 시골에서 만나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청년의 모습에 괜한 경계심이 커져갔다. 이러한 태도를 보인 것은 오너뿐만이 아니였을 것이다.

톨비쉬는 그런 시선이 익숙한지 호의가 담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가 병하나를 들고 카운터로 다가왔다. 알코올없이 달착지근한 발포음료였다.


“자네 술 할줄 모르나?”


아니면 보는 눈이 없던가. 오너는 노련한 눈썹의 대화로 불만스러움을 드러내었다. 분명 오늘은 달콤함으로 가득채운 날이지만 잘 찾아보면 좀 더 멋진 병들이 있기 마련이였다. 아니면 말이나 붙이러 대충골라온건가.

톨비쉬는 그런 오너를 향해 만면가득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 파트너가 술을 잘 안하거든요.”


하지만 이건 좋아하더라구요, 라는 덧붙이는 말은 오너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노쇠한 청력탓이라기보다는 그의 웃는 얼굴에 눈을 빼앗긴 탓이였다.

오너의 눈은 자연스럽게 그의 왼손으로 향했고 검은 장갑에 눈쌀을 찌푸렸다. 요즘 젊은 놈들은 죄다 검은색 일색이로군.

오너의 이마가 찌푸려지는 모습에 톨비쉬는 가볍게 말아쥐고 있던 왼손을 펴보였다. 꽤나 비싸보이는 가죽장갑은 손가락이 딱 달라붙은 디자인이였지만 어디하나 울퉁불퉁한 모습없이 매끄럽게 펼쳐져있었다.


“아, 아직 결혼은 못했습니다. 지금은 먼저 살 집부터 찾고 있거든요”

“여기와서 살게?”


오너는 와인병을 포장하며 물었다. 파트너라고 했으니 선물용이겠지, 어느 리본을 달까. 리본을 고르면서도 오너는 그가 이런 시골에서 살 사람은 아니라며 코웃음을 흘렸다. 아주 작고 일상적인 날숨같은 호흡이였지만 그는 분명 작게나마 자신의 질문에 실소를 머금었다. 톨비쉬는 난감하다는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싶지만.. 집을 짓기에는 시간이 좀 촉박해서 말이죠. 적당한 집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이 근처에는 남는 집이 없다는군요”


이런 작은 마을에 누가 이사를 올까, 오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본을 잘라내었다. 어떤모양을 할까, 꽃모양? 나비모양? 그냥 종이백에 넣어줄껄그랬나.

하지만 오너는 기억속에 선명이 남은 환하디 환하던 톨비쉬의 미소를 떠올리며 지갑을 준비하는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멀쩡하게 생겨서 의식적으로 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파트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미소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언젠가 손녀녀석이 가지고온 작은 카메라로 찍었던 홈 비디오속 자신처럼 철없어보이고 헤프며 아무생각없이 활짝 웃기만 하는 미소.

걸치고 있는 코트나 장갑, 지갑따위로 그런 미소를 지을만한 사람은 아닌것 같지만 톨비쉬는 이미 병을 선물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는지 다소 둥그러진 눈으로 오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식을 기다리는 커다란 청년의 모습은 좋게말해자면 간식을 기다리는 강아지의 눈망울가 닮아있었다.

이런 멍하니 보고만 있었군. 오너가 솜씨좋게 리본을 굴리기 시작했다. 별모양이 좋겠군. 오너는 막연하게 리본의 각을 잡으며 생각했다. 각을 너무 많이 잡으면 꽃이 되어버리겠지, 그는 화려하면서도 특징있는 모습을 잡아내기위해 고심했다. 손은 노련하게 움직였다.


“이런 시골에 누가 살겠다고 들어오겠나. 작은데다가 사람도 얼마 없는데”

“작지만 깨끗하고 좋은 마을입니다. 안식을 취하기엔 나쁘지 않은 곳 같습니다.”


요즘 젊은놈들 사이에서는 안식이라는 단어를 쓰는게 고상하게 느껴지나? 오너는 별을 두르며 톨비쉬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 안식이라는 단어는 너무 깊고도 다양하게 쓰여서 오너는 떠오르는 수만가지의 생각에 정확한 용도를 제시하라며 무언으로 톨비쉬를 나무랐다. 톨비쉬는 설명이 부족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제 파트너는…”


오너는 그가 파트너라는 단어를 사용할때마다 아내라는 단어를 잘못이야기 한것은 아닌가 고민에 빠져야 했다. 요즘은 아내를 파트너라고 부르나? 할아버지는 너무 구식이라며 온갖 방향으로 튀어나가는 손녀의 쨍알거리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겹쳐왔다. 

혼란스러운 머릿속과는 달리 오너의 손은 빠르고 정확하게 리본을 고정시켜 화려한 별모양의 장식을 만들어내었다. 너무 화려한가, 정신을 놓고 만들다 보니 너무 크게 만든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어쩐지 촌스러울 정도로 커져버린 장식에 고민할때 한박자 머뭇거리던 톨비쉬가 말을 끝맺었다.


오너의 고개가 톨비쉬를 향해 돌아갔다. 가슴에 얹어진 가죽장갑이 맵시있게 자리한 코트의 단추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는 애써 미소로 포장하려 했지만 입꼬리는 내려가 있었다. 

오너가 눈을 굴리다가 포장한 와인병을 종이백에 넣어 건네주었다. 톨비쉬가 가격을 치르고는 잔돈을 거절했다. 몇개 안되는 동전이지만 그는 장식값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길이 종이백속 병의 장식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였다.

오너는 떠나려는 톨비쉬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짜증을 낸 뒤 카운터 아래로 허리를 숙였다. 번거롭지만 오너는 조금 더 톨비쉬를 관찰하고 싶었다.

예상치못하게 붙잡힌 톨비쉬가 어색한 미소로 자리에서 멈춰섰다. 기본적인 예의는 알고있는 모양이였다.


“카드나 쓰게”

“어… 하지만”

“빚지는건 싫어. 남는 카드이니 쓰기나 하게”


너무 철지난 크리스마스 카드는 빼고, 오너는 눈사람이나 트리, 지팡이사탕이 그려진 카드를 빼고 남은 카드들을 주르륵 펼쳐놓았다. 선물용이라면 카드가 있어야지. 

쓸데없는 친절이라는 것을 알지만 오너는 고까운 시선을 유지하며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이 마을에서 살려면 이런 수고스러움은 일상이지. 톨비쉬가 머뭇거리다가 다가왔다.

종이백을 조심스럽게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새까맣던 장갑을 빼 맨손으로 펜을 잡았다. 장갑탓에 얄상하게 빠져보였던 손가락은 각종 굳은살과 흉터따위로 조금 험해보이는 모습이였다. 


낡아진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네모난 액정이 반들거리는 시계는 조금 긁히고 금이간 모습이였다.  수제인가? 시계는 어떠한 로고나 특징도 보이지 않았다. 요즘 물건들은 너무 빨리 소모되고 빨리 바뀌어 버린다. 오너는 불어나는 생각의 덩어리를 굴리며 관찰을 계속했다. 거친 손끝과는 다르게 유려하고 화려한 글씨체로 거침없이 써내려간 문구는 짤막가고 간결했다. 

내일도 당신과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너는 조금 애틋한 시선으로 카드를 내려다보는 톨비쉬의 시선을 훔쳐보다 급하게 눈을 돌렸다. 펜을 돌려준 톨비쉬가 아직 번들거리는 잉크를 보며 난감하게 웃음지었다.


“조금 말려야겠네요”

“너무 힘주어 써서 그래”


오너는 자기탓이 아니라며 펜을 다시 뽑아들었다. 이렇게 가볍고 부드럽게 써내려가야지. 남은 카드에 몇줄을 적어내려간 오너는 후후불어 잉크를 말리던 톨비쉬에게 철지난 크리스마스 카드를 건네었다. 

네? 하고 되묻는 톨비쉬가 음..! 하고 떠미는 손길에 카드를 받아들었다. 톨비쉬의 카드는 오너가 접어 종이백 속으로. 언뜻보이는 틈으로 어딘가의 주소와 번짓수가 눈에 들어왔다. 눈치없이 카드의 내용을 확인하려는 톨비쉬의 모습에 오너가 손사래를 쳐보였다. 


“이만 나가보게, 마감전에 와서 시간만 질질 끄는군”

“아니 영감님이 저를 잡지 않으셨습니까.. 게다가 아까까지 무료하게 계셨으면서..”

“어허, 말이 많아. 얼른 나가게”


카운터를 돌아 쭉쭉 밀기시작한 오너가 손수 문까지 열어 톨비쉬를 쫓아내었다.

그 와중에 소중하게 종이백을 보호하는건 마음에 들지만 눈앞에서 카드를 열어보는 모습따위는 보고싶지 않았다, 아니 보여주고싶지 않았다.

오너가 어흠! 하고 크게 헛기침을 하며 문을 닫았다. 저쪽 멀리가서 열어보라는 헛기침이였다.

짤라당 하고 흔들리는 은색 종을 바라보던 톨비쉬가 어꺠를 으쓱하며 하얀 입김을 내뿜었다. 한숨을 쉬고있는 모양이였다.



그리고 봄, 그가 울타리로 쓸만한 자재를 구하러 다닌것은 눈이 녹은 땅이 조금 단단하게 말라갈 즈음이였다. 부서진지 오래였지만 고칠엄두가 나지 않았던 울타리에는 새로 덧댄 나무와 페인트가 칠해졌고 쑥대밭이 되었던 화단은 곱게 정돈되어 새로운 싹을 틔워내었다. 

황량하게 비어졌던 집에 생기가 돌아오고 온기가 가득한 연기가 마을의 끄트머리에 올라오는 모습에 오너는 가게 문고리에 달린 은색 종을 바라보았다. 

세월이 또 지났네요. 짤랑거리며 말을 거는 종소리에 며칠전부터 뻐근하던 허리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맞아, 나는 이제 늙은것 같아. 오너는 종소리에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카운터에 앉아 장부를 펼쳐들었다. 시간은 물처럼 흐른다. 그는 평생을 퍼마실 미지근한 물대신 기분을 전환시켜줄 포도주를 고르며 턱을 괴였다. 요즘세대같지 않은 속늙은 놈에게는 뭘 마시게 하면 좋을까. 


그렇게 고민하던 시간이 1년이 지나가 다시 겨울로 돌아온 시간. 오너는 나지막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톨비쉬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건지 톨비쉬는 오너를 보며 나지막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메리크리스마스.”


귀여운 산타복을 입은 소믈리에의 손녀는 가볍게 눈을 휘어 웃어보이는 톨비쉬의 미소에 살풋 얼굴을 붉히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에게 저렇게 멋진 친구가 있었다니, 톨비쉬가 가게를 나서 윈도우 너머로 사라질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손녀가 꺄아 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발을 동동굴렀다. 오너가 채신머리가 없다며 혀를 찼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흥분감이 진정되질 않는 모양이였다.


“할아버지! 방금 그 사람 누구에요? 어디살아요? 뭐하는 사람이에요?!”

“아서라 이놈아. 계산이나 해”

“아잉 할아버지이이..! 그 사람 이름이 뭐에요? 장부에 적혀있어요? 여기살아요? 아니 여기 사는 사람같지는 않았는데..?”


손녀의 흥분에 계산을 기다리는 손님들이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1년에 한번 올까말까한 손녀는 큰 흥미거리가 생긴 모양이였다. 마을사람들은 할아버지와 다르게 친절하게 질문에 답해주었다. 그가 이전 오너의 집에 이사를 왔다는 것. 1년 조금 안되었다는 것, 그리고..

오너는 그들의 말을 끊으며 빠르게 대답했다. 그는 손녀가 성가신 모양이였다. 허리만 아프지 않았어도 안불렀을텐데. 그는 1년에 한번씩은 꼬박꼬박 써먹는 핑계를 들먹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그놈은 유부남이야. 아내도 있고 집도 있어. 얼추 나이도 있어. 그러니 이제 계산일이나 도와라”

“그렇게 젊어보였는데 유부남?! 거짓말이죠!”

“아 영감님, 유부남은 아니죠. 그 뭐시냐.. 파트너? 그렇게 부르던데요”


“할아버지 역시 거짓말쟁이야!!”


“아 파트너고 자시고 같이살면 결혼한거지!”

“맞아요! 그렇게 지극정성인데 결혼한거나 다름없죠!”


“엄마는 아빠랑 결혼했는데도 같이 안 살잖아?”

“맞아! 아빠는 엄마랑 결혼했는데도 같이 안 살잖아?”


쌍둥이가 깐족거리는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이들의 보호자는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오늘은 애들한테 한방 먹었는데”

“너희들, 조용히 안하면 오늘 성가대 행진에 못나가게 한다”

“에에에!!”

“에에에에에에!!”


시끌벅적해진 와인샵의 소란스러움에 오너가 한숨을 내쉬었다. 손녀는 아직도 포기를 못하겠는지 오너의 앞에서 정신없이 폴짝거리며 톨비쉬의 이름을 묻기 바쁘고 아이들은 성가대 행진에 못나갈까 기나긴 울음소리로 머릿속을 휘저어놓았다.

계산을 기다리던 마을손님도 괜히 자신이 말을 더한건 아닌거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때 그가 생각이 났다는듯이 소란을 끊어내었다.


“아, 그러고보니 며칠전에 내 조카가 근처 상가에서 톨비쉬를 봤다고 했었어요”


그 사람 이름이 톨비쉬에요? 손녀가 새로들린 이름을 놓치지 않고 물어왔다. 왜? 자네 조카라면 그 세공사? 요 옆마을에서 일한다고 했지? 거기는 좀더 마을이 크다며? 여기에 비하면 도시죠. 등의 대화가 소란스럽게 오가는 중에 눈치없이 웃음짓던 보호자는 그의 말에 되물었다.


“그게 왜? 맛있는거라도 사러간거 아니야?”


아까 보니까 차안에 엄청 많이 사가던데, 어깨를 으쓱해보이는 남자손님의 말에 아이들의 어머니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의 등을 철썩 내리쳤다. 어쩌자고 이런남자를 선택했을까. 그녀는 억울해 하는 남자에게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섬섬옥수같던 손가락은 집안일에 많이 험해져 보였지만 깨끗하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손끝에 걸려있었다. 그것 또한 옆마을 세공사의 작품중 하나였다. 그녀는 눈치좀 키우라고 나무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잘 좀 생각해 봐요. 세공사일을 하는 조카가 저 남자를 만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남자는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의 양쪽 엉덩이를 철썩 후려갈겼다.










2.


“와인은 되었고..”


차 뒷자석에 종이백을 잘 뉘여놓은 톨비쉬가 목도리를 끌어올리며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크리스마스에 정시에 퇴근하려는 그를 보는 눈빛들에는 책망과 부러움 혹은 간절함따위가 뒤범벅 되어있었다. 그는 수많은 감정의 덩어리를 외면하며 다소 뻔뻔하게 손을 들어보였다. 그의 손은 이미 외투를 챙겼다.


“예약한게 있어서, 이만.”


남은 사람들은 질투와 시기가 뒤섞인 한숨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사실상 질투보다는 부러움이 가득한 한숨이였지만 그런다고해서 화면속 일이 줄어드는것은 아니다. 차라리 고급 레스토랑의 예약이라면 조금 늦는정도야 문제도 아니지만 그는 1분 1초가 다급했다. 온기는 오래가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빠르게 빠져나가는 그의 차를 내려다보며 푸념했다. 


“저 정도면 신께서 너무 이기적으로 만든거 아니냐”


화려한 외모와 언뜻보기에도 단단하고 건강한 체격, 가장 빨리 맡은 일을 처리하는 노련함과 오탈자 및 실수가 없는 유능함. 거기에 로맨틱한 이벤트를 준비하는 꼼꼼함까지,.

 어느 여성이 넘어가지 않을까 싶었지만 놀랍게도 회사내의 소식통은 그가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한게 아니라 못했죠.”


언젠가의 저녁, 회식자리의 힘을 빌어 사실여부를 확인을 하러간 용감한 선발대에게 톨비쉬는 푸근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몰려오는 애정어린 술잔들을 흐트러짐 없이 물리친 톨비쉬는 다소 지겹다는듯 술잔의 가장자리를 문질렀다. 화려한 외모와 다르게 약간은 상처투성이인 굵직한 손가락 그 마저도 비밀스러운 매력으로 보이는 분위기에 자자, 쉬지 않고 마셔야지 하고 달려오던 동료직원한명이 잔을 비우지 못하고 고꾸라져 버렸다. 

떠나는 동료의 뒷모습에 빈잔을 흔들어보인 톨비쉬는 홀려버린 선발대에게 고개를 돌려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프로포즈해서 차였거든요”

“우와.. 톨비쉬가요?”

“그것도 세번이나. 아니 네번이던가?”


톨비쉬는 미리 거절당한 횟수도 세어야 하는지 고민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드디어 취한걸까? 몇몇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은듯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그래도 같이 살고 있으니까 또 기회는 올꺼라고 생각합니다. 성공하면 그 때 또 알려드리도록 하죠”


연다른 거절,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열정, 거기에 동거. 품절 아닌 품절에 연달아 마음을 치고 지나간 폭주족같은 미소는 눈물젖은 안주거리가 되어 여러 회식자리를 파토내고 돌아다녔다.

다음날 숙취속에 쓰라림에 모두 잊을 기억이였지만 톨비쉬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필름이 끊긴적이 한번도 없는 모양이였다.


겨울이 될 때까지 들려오지 않은 성공소식에 그는 심각하게 고민하며 겨울에 유명한 이벤트데이를 고민했다. 톨비쉬는 이번 겨울을 넘기지 않을 작정인지 꽤나 진지하게 메뉴를 고르며 태블릿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도 진지한 표정인 나머지 업무외의 모든 일을 고깝게 여기던 상사도 무슨일 있냐며 물어올 정도의 집중력이였다.

머뭇거리던 직원들이 그에게 다가오자 톨비쉬는 조금 곤란하다는듯 말을 꺼리다가 화면을 돌려보이며 진지하게 묻기 시작했다.


“오른쪽이 나을까요 왼쪽이 나을까요”


오른쪽은 로스트비프 다른 한쪽은 칠면조 오븐구이. 뭐? 하고 되묻는 동료들에게 집에서 만들 수 있는 간단하면서 있어보이는 크리스마스 요리를 설명하던 톨비쉬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뭐든 잘할것 같은 그에게 요리실력에 자신이 없다는 사실은 정말 의외의 소식이였지만 동료들은 어쩐지 솟아나는 측은한 동정심에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만들생각 하지말고 포장해 가라고. 

벌써 젊었을적 몇번 시도해본건지 자신의 경험담을 빙자한 실패담을 줄줄이 쏟아내던 동료들은 어느새 마음을 하나로 모아 회사 근처의 지도를 꾹꾹 눌러보였다.


“이 집이 포장되는 곳이야. 로스트비프는 맛있는데 닭고기는 별로였어”

“여기서 샐러드랑 매쉬포테이토만 사는것도 나쁘지 않아”

“집에 오븐 있다고 했지? 그럼 단호박이나 고구마 같은건 집에서 구워. 그건 사는것보다 직접하는게 싸니까. 호일 잊지말고”


의외의 친절함에 열심히 메모를 하던 톨비쉬는 짠한 얼굴이된 동료들의 얼굴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 얼굴을 하고서도 이렇게 노력을 해야한단 말이지..”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니, 응, 뭐.. 아니다. 열심히 해라”


신은 이상한데서 공평하시다. 그렇게 알수없는 신앙심을 갖게된 동료들은 톨비쉬의 어깨를 두드리며 각자의 자리로 떠나갔다. 

톨비쉬는 차례대로 어깨를 두드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전원이 꺼진 태블릿을 거울삼아들어올렸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묻어있지는 않았다.



“로스트비프랑 샐러드, 케이크.. 야채도 다 샀고..”


회사사람들이 조언해준대로 크거나 손이 많이가는 요리들은 모두 포장구매, 남은 야채들조차 크리스마스 오븐용으로 나박나박 잘려진것들로 구매한 톨비쉬는 새삼 편해진 세상에 놀라워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 때는 세상의 가장 빠른 정보를 만지며 살았지만 지금은 그저그런 회사의 말단일뿐. 톨비쉬는 뚝 떨어진 별세계의 기분을 느끼며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뒤처진 기분이 드는가, 그건 또 아니라는것이 톨비쉬의 대답이였다.


잠깐사이에 냉동고처럼 차가워진 차에 진동이 울리며 시동이 걸렸다. 하나둘씩 불을 밝히는 계기판을 보며 기울어진 백미러를 조정했다. 뒷자석에는 맛있는 냄새를 피워올리는 음식들과 선물용 인형 그리고 방금전 구매한 와인꾸러미가 놓여져있었다.

가끔씩 마시던 포도쥬스와 오너가 골라준 달지 않은 와인. 여러변 와인샵을 들락날락거리며 함께 메뉴를 고민해준 오너의 선택이라면 믿을만 하지만 새로운것을 싫어하는 밀레시안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좋아할까? 싫어할까? 여러가지 반응을 상상하는것 만으로도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는지 톨비쉬는 부드럽게 차를 돌려 상가를 빠져나갔다. 당일날 눈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이미 한차례 덮고지나간 하얀 눈밭위로 톨비쉬의 자동차는 매끄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눈덩이를 다져눌렀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 예전에 포도로 무성했던 거대한 밭은 이제 갈대나 들풀따위로 뒤덮였지만 아직도 집을 둘러싼 낮은 담장에는 포도덩쿨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만큼 오래된 집이였다. 둘이서 살기엔 조금 넓지만 생활패턴상 조금은 개인공간이 필요한 톨비쉬들에게는 안성맞춤인 집. 

그러고보니 주소를 건네받은 카드도 산타그림이였다. 오너는 빨간카드에 구름그림이라고 생각했던것 같지만. 

뒷자석의 짐을 꺼내려던 톨비쉬는 다소 난감한 얼굴로 뒷문에 기대어 섰다. 쇼핑백에 담긴 요리들은 어찌어찌 손가락에 우겨넣는다지만 인형과 케이크 그리고 와인병은 손잡이가 없어 한꺼번에 들기에는 힘든 모양새였다.

인형을 옆구리에 끼고 와인을 잡을까, 있느니만 못한 케이크의 손잡이를 새끼손가락으로 잡는 모습을 상상한 톨비쉬가 차고에서 조금 떨어진 뒷문을 바라보았다.


뒷문은 잠겨있겠지. 다름아닌 자신이 잠가놓은것을 알기에 짧은 루트는 고려할것도 없이 포기.

결국 두번에 왔다갔다 해야하나 포기하려는 찰나 톨비쉬의 눈에 폭죽이 눈에 들어왔다. 케이크를 살때면 의례것 붙여주는 두어개의 폭죽. 셀로판 테이프로 간단하게 고정해놓은 것이지만 어찌어찌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톨비쉬는 무모함을 손톱끝으로 꾹꾹 눌러 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되겠지 뭐.

손톱으로 싹싹 긁어 완전히 테이프를 밀착시킨 톨비쉬는 한손가득 쇼핑백을 걸어잡으며 인형을 들어올렸다. 옆구리가 가득차는 묵직한 솜덩이를 든 상태로 허리를 굽혀 와인병이 담긴 종이봉투를 잡아들었다. 짤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액체의 느낌이 손끝을 타고 전해져왔다. 


이제 남은 것은 케이크뿐. 톨비쉬는 당초 계획한대로 케이크의 어중간한 손잡이대신 폭죽을 손잡이삼아 네모난 상자를 들어올렸다.

묵직한 빵덩이의 무게를 이기지못한 셀로판테이프가 지직 하고 들어올려졌지만 어느정도 안정감있게 상자를 붙잡고 있다.

남은 것은 이제 걷는 일뿐.

톨비쉬는 케이크가 요동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현관은 별다른 장식없이 크리스마스 리스만 걸려있었지만 톨비쉬의 발걸음을 감지한 센서에 불이 들어오자 리스또한 금빛으로 빛을 반사하며 영롱한 빛깔을 뽐내었다. 

메리크리스마스 라고 쓰여진 금색의 글씨위로 긴장한 톨비쉬의 얼굴이 비쳤다.

케이크까 떨어질것같은 느낌에 문고리를 돌리는 일은 엄두도 못낼 상황. 톨비쉬는 흘끗 시선을 돌려 불꺼진 거실을 확인했다.


밀레시안은 자는걸까? 톨비쉬는 집안에 불이켜진곳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기울였다. 보이는 곳은 주방과 거실뿐이지만 두 곳은 모두 불이 꺼진 모습이였다. 차안에서 확인했던 시간은 여섯시 반 정도.

톨비쉬는 밀레시안이 잠들어있는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턱끝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누가 보지못한 것이 아까운 모습이였다.


딩-동-


중후한 벨소리가 어두운 거실을 가로질러 집안곳곳에 스며들었다. 팟 하고 켜진 파란 불빛은 초인종에 연결된 인터폰에서 흘러나오는 불빛.

잠들어있다가도 종소리면 가끔씩 깨어나 스코프를 확인하곤 하지만 문을 열어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톨비쉬는 카메라에 자신의 얼굴이 잘 비치도록 무릎을 구부렸다. 케이크가 또 지익 하고 들어올려졌다.


“밀레시안? 접니다. 톨비쉬. 혹시 깨어 있습니까?”


몇초정도 딜레이를 가지고 거실에서 들려오는 음질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던 톨비쉬가 굽혔던 무릎을 폈다.

톨비쉬는 두꺼운 벽 너머의 집안을 상상하며 잠시 반응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발소리나 뒤척이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한껏 예민하게 집중하던 청력이 잡아낸것은 스륵하고 미끄러자눈 케이크와 찌지직 하고 떨어지는 테이트의 소음뿐이였다.


“앗.”


정말 앗 하는 순간에 떨어진 케이크의 상자가 한귀퉁이를 찌그러지며 검은 크림이 튀어올랐다. 투명한 필름이 까맣게 변했지만 모처럼 통나무결처럼 모양을 낸 크림이 뭉게진것은 보지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냥 내려놓고 문을 열껄.. 톨비쉬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음식꾸러미늘 내려놓았다.

조금이라도 식지 않게하기 위해서 차가운 곳에 올려놓지 않고 싶었지만 너무 과한 욕심이였다. 잘못된 선택이 불러들인 결과에 톨비쉬는 아무도 듣지않는 푸념을 홀로 중얼거리며 흘러내린 인형을 치켜올렸다. 


정전기식으로 인식하는 패드를 위해 손끝을 물어 장갑을 벗어낸 톨비쉬는 한자한자 힘주어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삑삑거리는 전자음이 울리고나자 자물쇠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집안으로 들어선 톨비쉬는 거추장스러운 인형을 먼저 소파위에 던져놓고나서는 와인병이 담긴 종이봉투를 열어보았다. 

한손으로 잔뜩 힘주어 움켜진 종이봉투는 보기흉할정도로 구겨져있지만 안에든 와인의 리본장식은 무사한 모양이였다. 장식이 무사한것을 확인한 톨비쉬는 다시 급하게 현관문을 나서 바닥에 놓여진 음식들을 집어들었다.


한결 홀가분하게 양손으로 나누어든 음식들은 그다지 무겁지 않았지만 플라스틱 패키지위에 맺힌듯한 물방울의 흔적에 톨비쉬는 얼른 음식들을 집안으로 옮겨놓으며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 현관문을 걸어잠궜다. 

상당히 서두르긴했지만  어쩐지 온기가 조금 날아간 느낌이였다.

음식들이 무사히 집안으로 배송되고 나자 한결 마음이 편해진 톨비쉬는 집안을 둘러보며 밀레시안의 흔적을 쫓았다.


오늘은 거실에 나오지 않은 걸까, 남은 장갑을 마저 벗어낸 톨비쉬는 주머니에 장갑을 겹쳐 쑤셔놓고는 목도리를 풀러내었다. 곧 앉을 식탁이지만 준비해야할 것이 다소 있기에 일단 코트와 목도리는 여기에. 

홀가분해진 몸으로 거실을 살피던 톨비쉬가 아침보다 조금 풀려진 전구장식을 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혼자서 해보려고 시도한 흔적마저 사랑스러웠다.  아침에 바빠 장식을 완성하지 못하고 나갔던 전구였지만 일단 호기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운 톨비쉬는 전구장식을 들어 미리 박아두었던 못위로 전구를 걸쳐내었다.


트리는 사지 않았지만 벽 가장자리를 두르듯 넓게 펼쳐진 전구에 불이들어오자 어두컴컴했던 방안이 오렌지 빛으로 밝혀졌다. 전원버튼을 한번 더 누르는것으로 불빛은 이제 느리게 움직였다. 

정신없이 번쩍거리는것 보다 은은하게 밝아졌다 어두워지는 지금 상태가 딱 좋은 모습이였다.


전구로 대충 거실을 밝힌 톨비쉬가 오븐용 채소세트를 꺼내들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부엌에서도 익숙하게 움직이는 톨비쉬는 불꺼진 오븐안에 채소들을 우르르 쏟아넣은뒤 손끝으로 살살 밀어내었다. 

오븐이 이렇게 쓰는게 맞던가. 예열이라는 기능이 왜 있는건지 모르는 톨비쉬는 대충 오븐속에 채소들을 밀어넣고는 적당히 가스렌지를 쓸때처럼 온도조절기를 옆으로 꺾었다. 회사 동료가 호일을 잊지말라고 한 것같지만 톨비쉬의 관심은 이미 채소에서 떠난지 오래인 모습이였다.


“밀레시안-”


서서히 밝아지는 오븐의 붉은 불빛처럼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부엌밖으로 퍼져나갔다. 낮잠을 자는거라면 이제 슬슬 일어날 시간. 

톨비쉬는 밀레시안이 갑자기 상태가 안좋아져서 약을 먹고 잠든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작은 창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요 며칠 상태가 좋아보였던 덕에 이것저것 준비해왔는데 정작 당사자가 다시 잠에 취한다면  그것만큼 아쉬운일이 없을것 같아 보였다. 물론 자신의 욕심보다는 밀레시안의 마음이 더 우선이지만.. 톨비쉬는 부엌을 돌아 자리한 창고문을 조심스럽게 잡아 돌리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밀레시안, 여기 있습니까?”


아무도 없는듯 조용한 창고안에선 독특한 먼지의 냄새가 났다. 오랫동안 밀폐된 공간속에서 저마다의 냄새를 뿜어내는 이 창고가 뭐가 그렇게 좋다는건지. 톨비쉬는 어느순간부터 창고안에서 잠들게된 밀레시안을 위해 있는대로 물건을 쑤셔넣었던 창고를 다시 정리해야만 했다.

많고 많은 짐을 모두 정리해 한쪽으로 몰아놓고 나서야 확보된 다리뻗을 자리에 예비용으로 쓰려했던 매트릭스를 깔고 폭신폭신한 담요들을 한가득.


눈도장을 찍는것 같아보이는 인형따위를 모두 사 나르는 지극정성덕분인지 밀레시안은 창고가 아닌 다른 장소를 찾아나서지는 않았다. 마음에 드는가 물으면 그건 또 아니였지만.

기척만으로도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톨비쉬였지만 굳이 매트릭스의 장소까지 다가온 톨비쉬는 담요속으로 손을 넣었다.

겉은 차갑고 속 또한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라도 누웠다 이동한것도 아니고 아예 들리지 않은 모양이였다.


그럼 오늘도 기분이 괜찮은걸까. 톨비쉬는 손에 밀려난 담요들을 제대로 펼친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끔 이렇게 정신을 팔고 있을때면 소리없이 다가와 입을 꼭 다문채 자신을 바라보는 밀레시안이 뒤에있지는 않을까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뒤를 돌아봤지만 반쯤 열어진 창고문 너머에서는 틱틱틱틱하고 돌아가는 오븐의 타이머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였다.

그럼 어디에 있는거지, 톨비쉬는 살짝 답답해지는 가슴을 느끼며 창고를 나섰다. 역시 위치 추적기를 붙이고 싶지만 이미 들킨 전적이 있는터라 마음만 삼킬 수 밖에.. 


톨비쉬는 혹시나 늦게 잠든 낮잠은 아닌지를 생각하며 안방으로 향했다.

예외인 날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잠자기로 약속한 방은 안방이였고 안방은 창고와 정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안방에 가기 위해선 거실쪽으로 가는것이 제일 빨랐지만 톨비쉬는 창고의 문을 닫으며 시선과는 반대로 몸을 돌렸다.

부엌과 창고 사이 차고쪽으로 이어지는 마당으로 가는 뒷문의 문고리를 가볍게 잡아 비틀었다.

늘 그래왔고 늘 확인했듯이 굳건하게 잠겨있는 문은 꽉 틀어막혀있었던 톨비쉬의 가슴속에 자그마한 숨구멍을 틔워주었다. 

트라우마라는 것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법였다. 톨비쉬는 말없이 문고리를 노려보다가 다시 거실을 향해 이동했다. 안방에 있을꺼야. 톨비쉬는 힘주어 발을 내딛었다.


“………”


걸음은 몇걸음 떨어지지도 않은채 멈춰버렸다. 안방까지는 가지도 않았지만 톨비쉬는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에 고개를 멍하니 들어올렸다.

못봤던걸까? 아니, 뒤늦게 켜졌다는것이 훨씬더 신빙성있는 추측이였다. 어둠속에서도 훤히 집안을 돌아다니고 닫힌 문너머로 발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그가 이토록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발견하지 못할리 없었다. 

계단 윗쪽에 있는 방은 톨비쉬가 서재로 사용하는 방 뿐이였다. 

그이외에 안쓰는 생활용품들이나 1층에서 자리확보를 위해 올려놓은 물건들도 얼핏 섞여있었지만, 그곳에는 대부분 1층에 내려놓을 수 없는 말못할 물건들로 채워진 창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톨비쉬는 그 창고를 잠가놓고 있었고 밀레시안은 기본적으로 2층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왜? 크리스마스 장식이 좀 더 필요했던걸까? 톨비쉬는 조명빛이 흘러나오는 계단을 따라 천천히 윗층으로 올라갔다.


한걸음 한걸음이 너무나도 무거웠고 두려움이 차오르는 느낌이였다. 침착해, 아직 아무것도 보지 않았잖아.

사실 객관적으로 따지고 본다면 갑작스럽게 켜진 불빛은 좋은 신호였다. 밀레시안은 잠들어있지 않았고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올라간것 뿐일꺼야. 어쩌면 책을 읽고 있을지도 모르지.

밀레시안이 읽을만한 책들은 이미 거실에 내려놓았지만 때때로 그녀는 예전에 읽던 책들을 기억해내고 그 책들의 행방을 묻고는 했다.


이제는 필요로 하지 않을 지식들이였지만 톨비쉬는 확인해보고 싶다는 그녀의 말대로 갖고있던 예전의 물건들을 내어주었다.

단지 그 책을 가지러 2층에 올라가는 톨비쉬를 관찰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을뿐. 

한번도 스스로 올라가려 하지 않았던 2층에 무슨 볼일이 있었던 걸까. 톨비쉬는 아니야, 속단하지마 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다리를 들어올렸다. 1년이나 올라가지 않는것이 더 부자연스러워. 그는 그렇게 납득하려 하지만 역시 무리였다. 톨비쉬는 난감을 움켜잡으며 몸을 들어올렸다. 떨어지지 않던 발이 다음계단으로 올라섰다.



톨비쉬는 아주 유능한 인재였고 상황을 파악하거나 불온한 낌새를 느끼는 일에 특화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펜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이 긴장하고 있는것을 알 수 있었고 나지막하게 투덜거리는 소리는 속을 들여다보는것처럼 투명하게 들려왔다. 

윗층에 있는 잡다한 물건들은 가짓수로 따지자면 수십가지를 넘어 수백가지에 이르렀지만 톨비쉬는 어디에 무엇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훤하게 기억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것은 밀레시안도 마찬가지. 톨비쉬는 눈앞에서 치우는것 만으로는 밀레시안의 집념을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냥 순한 어린아이처럼 멀뚱히 서 있지만 그 속은 자신과 똑같으면 똑같았지 덜하지는 않았던 밀레시안이였다.


한 때, 세상에서 가장 이른 새벽의 그림자 아래서 조용히 걸어나와 나지막히 잠재우던 부드러운 손길을 기억했다. 톨비쉬는 그 때의 밀레시안이 자신을 바라볼때의 눈을 떠올리며 자신의 서재로 발을 움직였다. 

1층에서와는 다르게 묵직했던 발걸음은 소리없이 가볍게 움직이며 빛이 흘러나오는 문틈 사이로 다가갔다. 움직이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살아있는 사람 특유의 숨소리는 가만가만히 공기를 흔들고 있었다. 

얇은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이 톡하고 떨어지며 흔드는것과 같이 가느다랗고 섬세한 움직임이 톨비쉬의 오감을 긴장시켰다.

가볍게 문고리를 안쪽으로 밀자 바닥을 향하고 있던 한쌍의 시선이 톨비쉬를 향해 들어올려졌다.


그 눈빛이다. 


톨비쉬는 기억속에 남아있던 검푸른 새벽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헉 하는 숨소리조차 너무나도 큰 비명인것 마냥 인상을 찌푸리던 그때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무해하고 어리숙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검은 동공은 톨비쉬가 두려워하는 그 모습 그대로 톨비쉬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깜빡였다. 색의 면적이 줄어든 눈동자는 하얗고 까만색으로만 나뉜것 같았다. 숨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지친 음색이였다.

졸린걸까, 이제 그만 쉬고싶은걸까? 톨비쉬는 끌어올린 입꼬리가 제 모양을 갖추었는지를 신경쓰며 방안을 살펴보았다.

어젯밤에 보다 놔둔 보고서나 잠시 메모할것이 있어 쓰다 굴린 펜 두어자루, 며칠째 방치중인 자료 몇 장, 가지고 내려가지 않아 쌓여버린 컵 세개. 


톨비쉬는 1층까지 번질정도로 환하게 빛났던 광원이 스탠드인것을 보며 시선을 떨어트렸다. 문밖으로 비져나와 계단까지 드리울 강한 빛은 녹색의 유리갓에 가로막혀 아래쪽만을 비추고 있었다.

뜨거울정도로 이글거리는 전기등은 책상아래를 비추며 대각선으로 그림자꼬리를 빼내어 마루바닥에 드리워졌다.

본체를 꼭 빼어닮게 그려진 검은 그림자 중간에는 툭 튀어나온 서랍의 그림자도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하나, 둘, 톨비쉬는 눈대중으로 서랍의 위치를 파악하며 내려가려는 입꼬리를 힘주어 유지했다.


어떻게 거기 있는것을 알았을까.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탓이었을까 감히 신을 의심한 죗값이였을까. 

톨비쉬는 느리게 깜빡이는 눈동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밀레시안은 가만히 멈춰서있는 톨비쉬가 의아스러운 모양이였다.


“오늘 조금 늦게왔죠? 일찍 끝나긴했는데 들릴곳이 있었거든요 혹시 배안고픈가요? 맛있는거 잔뜩 사왔는데”


지금이 몇시지? 그런 디테일은 지금 톨비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말을 걸어서 시선을 분산시키고 싶었다. 그정도로 놓칠만한 인물은 아니지만 톨비쉬는 일단 매달려볼만한 모든것에 희망을 걸어야했다. 지금 내 말투가 괜찮은걸까?


정신이 조금 혼미해진탓에 톨비쉬는 지금이 상냥한 말씨를 써야하는건지 평소의 말투로 말해야하는건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분이 괜찮을때의 밀레시안은 크게 신경쓰지 않아했지만 조금이라도 가라앉은 날에는 곧잘 거부감을 나타내며 톨비쉬를 멀리하기 때문이였다. 상냥한 말씨는 가식적이라며 싫어했고 평소의 말투는 너무 가까운 사람처럼 군다며 싫어했다. 

까다롭지만 톨비쉬는 그런정도라면 얼마든지 맞춰줄수 있는 센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였다. 좀 더 지금보다 상황에 여유가 있을때의 일이였지만.


침착해, 침착해 톨비쉬. 톨비쉬는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며 말라가는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억지로 올린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눈웃음을 지어보이지만 톨비쉬의 시선은 밀레시안의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억지로 시선을 옮겨 밀레시안의 얼굴을보고 괜스래 굴러다니는 펜을 보다가 다시 손으로 시선을 옮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속에서 문고리를 잡고있는 손에 힘이들어갔다. 

위로 올리거나 아래로 내리면 소리가 날 것이 분명하기에 톨비쉬는 어디로도 힘을 과하게 주지 않기위해 섬세하게 팔근육을 조절했다. 모든것을 집어치우고 달려들고 싶은 그를 붙잡아세우는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성가신 문고리뿐이었다.


“마카롱이랑 케이크도 사왔어요. 저번에 먹고싶다고 한거에서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 되었더라구요.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는 메쉬포테이토도 호두랑 아몬드도 적당히 들어있는거 맞죠? 야채도 사왔어요. 지금 아마 구워지고 있을꺼에요. 제대로 되고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먹고싶은거 있어요? 일단 단호박이랑 고구마랑 양파를 좀 넣어 놨는데 중간에 더 넣어도 되는거 맞죠? 

원래 이런건 당신이 잘했는데, 하하... 혹시 지금이라도 내려가서 당신이 봐 준다면 뭐가 잘못됬는지 알아낼지도 모르니까..”


주절주절. 톨비쉬는 말이 빨라지지 않게하기위해 중간중간 멈춰 좋아 다시말해 다시 멈춰 등으로 스스로의 목을 쥐어짜야만했다. 

위협할수도 없는 수십의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위협을 당하고 있을때도 이렇게 말이 어렵지는 않았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말을 이어야했다. 중간마다 이어지는 침묵이 그를 미칠것같이 압박해 들어왔다. 


눈이 부실법한데도 크게 확장된 동공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모습이 보이고는 있습니까? 톨비쉬는 쓸데없이 나불거리려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소가 깨지고 침묵이 다시 방안을 가득채웠다. 

떨어진 시선이 열려진 서랍장을 찾아 샅샅이 더듬었다. 혹시라도 보이지 않도록 깁숙히 넣어놨는데, 무게탓에 알아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번째 서랍에는 무거운 문진과 철제 장식품 몇가지도 함께 들어있었다. 


그 용도와 결과에 법과 약간의 윤리, 그리고 선량하고 순박한 마을사람들의 실망한 시선이 따라붙을지도 모르지만 톨비쉬는 신께 맹세코 보호를 위해서였노라고 말할 수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서였습니다. 라고.

누구도 알아내지 못하고 누구도 그들을 찾아낼리 없지만 톨비쉬는 언제나 만약의 사태를 생각해야만 했다. 

더욱이 밀레시안이 스스로를 보호하기를 포기한 오늘날에는 톨비쉬의 책임감에는 한사람분의 목숨만이 걸려있는것이 아니였다. 


그는 결정해야했고 그 선택을 책상 깊숙히 숨겨두었다. 지금은 모두 까발려져 밀레시안의 손에 들려져 있지만 그는 그래야만했다고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같은 결정이였을 것이라고 항변했다.

모든 변호는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이였고 목구멍 바깥으로는 한 단어도 새어나오지 못할 지지한 변명이였다.

톨비쉬는 떨어트린 고개를 다시금 들어 웃어보였다. 놀라지말아요. 경계하지 말아요. 나를 거부하지 말아줘.

톨비쉬는 진심어린 마음을 담아 밀레시안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 총 내려놓아 줄래요? 그거, 장전되어 있어서 위험해요.”


은색의 총신에 반사된 스탠드 불빛이 그의 눈을 아프게 찔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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