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카즈밀레)별의 어항13(完)
모바일용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sk2_UEfXJck
정신이 드세요?
르웰린은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톨비쉬를 바라보았다.
톨비쉬는 흐릿한 눈을 깜빡였고 신음소리가 섞인 숨소리로 대답했다. 상처가 불타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등의 상처를 후벼파며 끌어내리는 듯한 통증이었다. 가슴은 저릿거렸고 속에서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톨비쉬는 결국 주변을 살펴보기 보다는 눈을 감은채 통증을 삼켜내는 것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르웰린이 잘 처신했을테니 남은 것은 저 혼자가 잘 참아내면 되는 일이었다.
멀린님은 스케줄이 있어서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톨비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쪽이 오히려 긍정의 신호였다.
톨비쉬는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르웰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밖으로 자리를 피했다.
홀로 남은 톨비쉬는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에 안도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고르륵, 고르륵. 어둠 저편에서 가느다란 물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깨어지고 부서지고 남은 형태는 얼마 없었지만 그 누구의 것과도 같지 않는, 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그만의 별.
톨비쉬는 어둠속에 홀로 놓여진 한줌의 별을 손안에 쥐고 속삭였다.
오늘따라 당신이 보고싶습니다.
병실 탁자 위에 놓여진 톨비쉬의 핸드폰에 짧은 메세지가 떠올랐다.
[나도요.]
톨비쉬는 비로소 마음을 놓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여기 어디? 정신을 차린 밀레시안은 낯선 섬 위에서 깨어났다.
섬? 아니면 바위? 밀레시안은 잠시 주변을 경계했지만 이내 자신의 생각이 모두 정답이었음을 확인했다.
그곳은 섬인 동시에 바위였다. 파도속에 깎여내려간 섬의 일부.
밀레시안은 기울어진 비탈길 아래 반쯤 잠겨있는 신전의 기둥을 바라보았다.
마치 어느 성격 나쁜 신이 남의 신전이 지어진 섬을 집어들었다가 대충 내팽겨친 모양새의 이상한 섬이었다.
밀레시안은 비 바람에 깎여 맨들맨들해진 바위 위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밀레시안의 추측이 맞다면 이곳이 아마 아발론이라는 곳일 것이다.
밀레시안은 내 말이 맞아? 하고 물었다.
밀레시안의 앞에는 오래간만에 만나는 도우갈이 앉아있었다.
맞아. 티르 나 노이 최후의 생존자의 몸 안에 깃든 이계의 영혼은 말했다.
이곳이 이 세계의 중심지. 최초의 땅. 이곳의 인간들은 이 땅을 창조주 아튼시미니가 축복을 내린 성지로 여겼었지.
밀레시안은 그 축복받아 마땅한 곳에 이계의 영혼만이 가득하다는 것에 비웃음을 보냈다.
그래서? 밀레시안은 그의 대답에 이죽거리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되물었다. 왜 나를 이곳에 데려온거야?
도우갈은 그런 여행자를 부드럽게 올려다보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지. 아니지 밀레시안. 그 어느것도 너를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았어. 도우갈이 단 한번도 그 작은 마을을 떠나지 않았던 것과 같이 밀레시안은 이곳에 속해 있었다.
아니야. 밀레시안은 부정했지만 도우갈은 맞아. 라고 대답했다.
이계의 영혼은 기이할 정도로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으로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은 막연히 그를 모래빛이라고 칭했지만 이런 요사스러운 반짝임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내 기억이 잘못된걸까 아니면 지금의 그가 변질된 걸까.
밀레시안은 그의 뺨에 손을 뻗었다. 따듯하고 조금은 거친 피부가 손바닥 가득 쥐어졌다.
황금의 눈동자는 기분좋게 휘어지며 웃었다. 밀레시안은 그 눈을 보며 말했다.
너는 그가 아니구나. 밀레시안이 기억하는 도우갈은 잿빛 눈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식으로 부드럽게 웃지도 못했다.
밀레시안은 그가 떠나갔음을 안타까워 했고 동시에 슬퍼했다. 내가 내가 아니듯이 너도 그가 아니야.
이계의 영혼은 말했다. 그 땅에서 이 몸을 가지고 나오기가 쉽지는 않았지.
버려진 세계, 티르 나 노이는 에린의 대칭점에 서 있는 세계였다.
그곳에 있는 곳은 에린에도 있었고 에린에 있는 것은 그곳에도 있었다.
에린에 밀레시안이 있었듯이 그 땅에는 글라스 기브넨이 있었다.
그의 육신은 붕괴하는 동시에 에린에 큰 상처를 남겼고 결국 그 상처는 이 세계를 집어삼켰다.
밀레시안은 몇번인가 에린에 나타났던 그가 아닌 또다른 글라스 기브넨의 육신들을 해치웠었지만 그것은 모두 그의 뼛조각에 가죽주머니를 뒤집어 씌운 인형일 뿐이었다.
밀레시안이 환생을 거듭하며 제 육신을 별빛에 소각했던 것 처럼, 그 영혼은 단 하나의 유일성을 유지했다.
그리고 결국 그 또한 신성을 얻었다. 밀레시안이 반쪽짜리 신성을 얻은 것과 같이 그 또한 변질되고 뒤틀리며 본래의 자신을 잃고 이 땅에 내려왔다.
무슨 용건으로? 밀레시안은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말했으면 내가 갔을텐데.
도우갈은 밀레시안이 쓴 미소의 가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체념을 삼키고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한 미소. 밀레시안이 그에게 말했듯이 밀레시안 또한 이런 식으로 어른스럽게 웃지 못했다.
이계의 신성은 말했다. 너에게 거래를 제안하려고.
밀레시안은 무엇에 대한 거래인지도 묻지 않은채 대가부터 물었다. 대가는?
그가 대답했다. '내가 낙원을 부술 수 있게 허락해줘.'
시간이 거꾸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거래의 대가는 낙원이었다.]
밀레시안은 말도 안된다는 듯이 웃으며 한발자국 물러섰다.
[밀레시안은 눈앞에 나타난 이계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안돼?’
당연하지.
[믿음은 이름이었고 마음이었으며 명예였고 육신이었다.]
‘어째서?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잖아’
남아있어, 문 밖에 아직 한참 더. 셀 수 없이 수많은 이들이 남아있어.
[수많은 믿음들 중에 밀레시안이 가질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계의 신성은 부정했다.
‘아니, 그들은 이제 없어. 문 안쪽도, 문 바깥쪽도. 더이상 구분할 필요는 없어. 네 귀에 들려오는 이 파도소리가 이 세상의 전부고 네가 보고 있는 이 작은 섬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안식처야. 이곳은 최초이자 최후의 성지. 밀레시안. 더이상 이 세계에 네가 지킬 것은 아무것도 없어.’
[밀레시안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의 믿음을 기다렸다.]
‘이제 넌 자유야’
[그 믿음은 이따금씩 나란히 서는 발걸음이었으며 그 믿음은 이따금씩 친애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부정했다. 아니야. 그는 내가 이곳에 다다르는 것이 승리라고 말했어.
[그 믿음은 이따금씩 동경의 색깔을 띄었고 그 믿음은 이따금씩 구원의 소리로 울렸다.]
‘누구의?’
[밀레시안은 언제나 답을 위해 증명해야 했고 언제나 그 과정을 설명해야 했다.]
알터의, 아벨린의, 피네, 그리고 그밖에 수많은 기사들의.
나를 믿어준 사람들의 승리.
[믿음으로 기반된 유예된 날들이 이어졌었다.]
‘그럼 왜 그에게 창을 던졌지?’
[미래가 결정되었을 때 그 남은 날들은 믿음으로 채울 수 밖에 없었다.]
이계의 신성은 물었다.
‘너는 무엇을 붙잡으려고 했지?’
[영원은 있었지만 자유는 없었다.]
밀레시안은 그를 톨비쉬라고 불렀지만 이계의 신성은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아니. 아니야. 밀레시안. 너는 그가 누군지 몰라.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고. 이 세계가 무엇인지도 몰라.’
[이해가 있었지만 신뢰가 없었다.]
‘너는 이 세계를 믿지 않아.’
[신뢰가 없었기 때문에 사랑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희망이 없었다.]
‘너는 네가 네 자신임을 믿지 않고 너의 기억을 믿지 않고 너의 운명을 믿지 않아. 네가 스스로를 부정했기 때문에 지금의 내(신성)가 있고 지금의 내가 있기에 내 앞에선 네(불완전한 반신)가 있다.’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러하였듯이’
[밀레시안은 기꺼이 자신의 이름을 저울 위에 올렸다.]
한 때 밀레시안의 믿음을 받았던 이계의 신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밀레시안의 양 뺨을 감싸쥐었다.
‘너는 이 세계를 사랑하지 못했지만 떠나는 것 조차 할 수 없었다.’
황금의 눈동자 가득 밀레시안의 얼굴이 담겼다. 따스하고 또 상냥했다.
그는 도우갈의 얼굴로 부드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이곳에 너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도우갈은 고개를 기울여 밀레시안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곳에 너를 신뢰할 이의 이름이 없었기에’
밀레시안은 도우갈의 팔을 붙잡았지만 이계의 신성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지독한 갈망속에서도 단 한번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되려 미련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하나쯤은, 한번쯤은. 이 날 이 때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면 이 다음번에는. 이 다음의 시대에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생명.
낙원이 될 수 없는 영혼이 있었다.
불완전하고 또 불안정해서, 밀레시안은 이따금씩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이 멈추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혹시 거기 누구 있어요?
밀레시안은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새벽녘에. 뜨거운 태양아래, 비가내리는 구름너머에. 눈이 내리는 설원. 세상의 끝에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말을 걸며 말을 걸기를 반복했었다.
나를 보고 있는 건 당신인가요?
밀레시안은 더듬더듬 그의 이름을 찾았지만 그 누구의 이름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것은 여신의 이름도 아니었고 마신의 이름도 아니었다.
밀레시안은 신들의 왕과 여신의 자매들의 이름도 알았지만 그들 또한 아니었다.
기사들이 말하는 위대한 신의 이름도 아니었다. 그 무엇도 당신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마음은 점점 커져서 하나의 신앙처럼 자라났지만 밀레시안은 신앙을 검으로 삼는 기사들을 보며 다시금 제 마음이 틀려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신앙은 아니었으나 전적으로 행해지는 믿음이었고, 그것은 아직 사랑이 아니었으나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이었다.
‘그럼에도 너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고 믿음을 버리지 못했다.’
홀로 존재하지 못하는 개인의 감정.
맹목적이었어도 이해와 설득, 설명을 필요로하지 않았던 온전한 한쌍의 관계.
그 어떤 고통과 시련이 있다 해도 무너지지 않았고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이 흘러도.
다시 만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증명의 존재를 알기에 알기에 매번, 밀레시안은 실망하고 또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끝자락 조차 닿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이 갈망을 채워줄 이름은 ‘이 세계’ 밖에 있었기에.
밀레시안은 밀어내려던 도우갈의 팔을 붙잡은채 숨을 헐떡였다.
물에 젖은 몸이 무거웠고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버거웠다.
무엇을 줄 수 있어?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거래였다.]
내가 낙원을 주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어?
이계의 신성은 웃었고 또 울었다.
‘그건 이 세계에 없어’
그는 애처롭기 짝이 없는 작은 이방자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오직 그것만이 이 불완전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었다.
‘쉬이- 착하지.’
어린 아이를 달래는 어른처럼 그는 밀레시안을 다독이며 말했다.
‘내가 너에게 받은 것을 되돌려주마.’
밀레시안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며 도우갈에게 매달렸다.
그 하나의 진실을 인정하기까지가 힘들었다. 너무 무서웠다.
의식의 시작(티르코네일)에서부터 이곳까지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이 너무나도 멀고 또 험난해서.
밀레시안은 울부짖으며 속안에 있던 서러움을 모두 토해내었다.
‘네가 나에게 그러했던 것과 같이’
세상은 뒤집히고 또 뒤집혔다.
‘너를 해방시켜 주마.’
빙글빙글 돌아가는 동전 한 닢.
심연의 깊은 곳에 떨어져내리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흐르고 지나가버렸다.
‘이곳을 떠나. 밀레시안.’
세상의 끝을 알리는 맑은 금속소리가 났다.
깨어진 황금의 심장으로부터 황금색 가지가 뻗어나왔다.
뿌리를 심장에 둔 이계의 거목은 위로, 옆으로, 아래로 다시 반대방향으로.
세상은 돌고 돌기를 반복하며 위와 아래를 바꿔나갔다.
금빛 궤적은 둥그스름한 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나뭇가지는 밀레시안을 꿰뚫었고 남아있던 바위를 부수며 거침없이 성장해나갔다.
이윽고 최후의 성지, 이름없는 작은 바위섬이 무너져 내리며 세상의 모든 것이 검은 파도 아래 가라앉아 버렸다.
밀레시안을 품은 황금색 별은 짙고 깊은 바다아래 가라앉으며 점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밀레시안이 바닥에 닿았을때 남은 것은 손아귀에 쏙 들어 올만큼 작은 조각 하나 뿐이었다.
그 안은 황금색보다는 붉은색에 가까운 보석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액체처럼 요동쳤으나 액체는 아니었고 형태를 갖추었으나 고체도 아니었다.
보석을 두른 황금색 얇은 막은 다른 가지들과 마찬가지로 금방 바다에 녹아들어가 버렸다.
남은 것은 붉은 보석뿐이었다.
붉은 조각은 바닷물이 닿자마자 파스스 녹아버리며 검붉은 연기를 흩어내었다.
옅은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흩어진 연기는 바다를 돌고, 다시 돌아 밀레시안에게로 돌아왔다.
아주 오랜 시간을 지나서. 아주 먼 거리를 돌아서.
밀레시안은 다시 온전해졌고 그 어떠한 것도 자신을 묶어둘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영혼을 붙잡던 맴돌이는 풀렸다. 에디드 소울 현상을 유지하던 매개체가 사라졌기 때문에 밀레시안은 비로소 육신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하늘에는 별이 없었고 바다 아래에는 땅이 없었다.
밀레시안은 다시 육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붕괴되기 시작한 밀레시안의 육신으로부터 거대한 신성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대한 힘의 붕괴는 에린의 질서를 거스르고 다른 세계를 잇는 통로를 만들어 내었다.
과거의 글라스기브넨의 육신이 티르 나 노이를 붕괴시켰던 것과 똑같은 현상.
그러나 불완전했던 그것과 달리 밀레시안은 수많은 칭호들을 손에 넣었다.
밀레시안은 여신의 구출자였으며 빛의 기사였고 에린의 수호자였다. 황금의 용은 밀레시안의 운명을 인정했다.
주신, 아튼시미니가 별의 이름을 인정했다.
수많은 인도를 받아 새로운 낙원이 완성되었다.
그 운명의 궤는 에린의 운명과 같은 것이니, 통로를 여는 신성은 이제 거스르는 방향이 아닌 올바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흠잡을 데 없이 아주 완벽한, 그리고 공정한.
세계와 세계를 맞바꾼 거래였기에 깨어진 이름의 주인은 기쁘게 그 거래를 받아들였다.
밀레시안은 눈을 감고 파도속에 잠겨들었다.
하늘도 땅도 없는 곳에 바다가 있었다.
그 바다의 한 가운데 별이 있었다.
별의 육신에서 시작된 거대한 흐름은 세계를 부수고 다시 또 이어내며 새로운 세계로 뻗어나갔다.
거꾸로 떨어지던 시계가 멈추고 밀레시안의 선택을 기다렸다.
어디로? 자유를 얻었기에 밀레시안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었다. 나아갈지, 계속해서 뒤로 돌아갈지.
그러나 더이상 이 땅에 남은 미련이 없었기에 밀레시안은 단 한번도 제 손에 쥐어보지 못한 것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물결이 흔들렸다. 보글 보글 피어오르는 은빛 기포가 수면을 뒤흔들며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카즈윈은 그러한 물결을 바라보며 나지막히 숨을 내쉬었다. 입술에 닿는 숨이 더웠고 뺨은 뜨거웠다.
밀레시안.
그가 이름을 불렀다.
파사삭거리는 작은 소음을 내며 깨어져 가는 자신의 별을 보며 그는 다시한번 나지 막히 별의 이름을 불렀다.
밀레시안.
시계는 한바퀴를 돌았고 또 한바퀴를 돌았다.
쉼없이 돌아가는 시계침을 바라보며 마법사는 조용히 화면을 응시했다.
또 하나의 세계가 깨어지고 있었다. 그 하나의 세계는 하나의 발걸음.
그 발걸음은 분명 하찮았지만 그들은 아주 천천히,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세상에서 가장 머나먼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한글자 한글자를 천천히 집어삼키는 세계의 뱀처럼, 모든 글자들이 지워지고 마침내 단 한마디의 말만이 하얀 화면 위에 남아있었다.
[당신 누구?]
멀린은 커서가 깜빡이는 화면을 바라보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대답해. 얼른 대답해 수리부엉이. 멀린은 초조하게 손톱끝을 깨물다가 문득 모니터 옆에 자리한 작은 어항을 바라보았다. 보골보골, 작은 거품이 수면을 두드리고 있었다.
걱정마. 멀린은 씩 웃으며 말했다. 저녀석은 제대로 대답할 거야. 날 믿어. 밀레시안.
그들은 오랜 여정을 결심했다. 보았으니 알 수 있었고 알 수 있으니 염원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분명 닿을 것이다. 무슨일이 있어도 네가 있는 세계의 문에 닿아 진정한 낙원(너)을 다시 만나고 말리라.
그는 그렇게 믿으며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즈윈은 한참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손을 움직였다. 나는 헤루인 팀의 팀장... 카즈윈.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당신과 직접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 동안 일어난 일들은 대충 들어서 알고 있어.
카즈윈의 말에 밀레시안은 환하게 웃었다.
[그거 참 궁금하네요.]
물거품은 부그르르 하고 흩어지며 수면을 잔잔하게 뒤흔들었다.
[어떤 이야기 였는데요?]
카즈윈은 어항 앞에 앉아 천천히 자신이 봐왔던 이야기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글
카즈밀레)별의 어항12
헌데도 그 별은 왜 그렇게 까지 고민하는 것인지.
어린 왕은 밀레시안의 고민을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밀레시안은 영웅이었고 또 자신을 도와 왕성의 탈환을 도와준 고마운 은인이긴 했지만 사람의 삶은 어딜가든 다 똑같다고만 생각했다. 어린 왕에게 있어서 삶은 속고 속이는 파워게임의 연속이었다.
밀어내지 않으면 밀려난다. 내어주지 않으면 빼앗을 수 밖에 없다.
고민은 나약한 자들의 것이었고 힘이 있는 자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왕은 휘두르는 자였다.
거침없이 나아가 쟁취하여 주변을 이끌어가는 자였다. 그것이 그녀의 삶이었고 운명이었으며 의무였다.
하지만 어린 왕은 아직 미성숙했고 자신이 그러한 매력을 갖추지 못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갖고 있는 네가 왜? 그래서 어린 왕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힘을 손에 쥐고 있는 밀레시안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밀레시안이 보여준 힘과 인맥, 그리고 그러한 위치까지 올라오기 위한 노련함. 그리고 앞서 말했던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힘까지. 그것들 모두가 어린 왕이 간절히 원하고 또 탐내는 능력이었다.
세상의 모든 보물을 한데 모아놓은 함이 있다면 그 함의 이르은 분명 밀레시안이라 붙여야 마땅했다.
그런 보물단지를 내려다보며 어린 왕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용하자고. 써먹을 줄 모르는 힘이 있다면 기꺼이 그 주인의 주인이 되어주자고.
하지만 온실속의 화초, 뿌리를 덮은 흙 아래에서 이뤄지는 영양분 강탈에만 익숙했던 어린 왕은 안타깝게도 밀레시안의 힘에 대한 큰 착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밀레시안의 여정을 삶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삶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비인간적이었고 천륜을 거스르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신과 마신.
이세계의 괴물과 세계의 붕괴.
팔라딘과 다크나이트.
저주하는 자와 저주받는자.
용과 인간.
빛과 그림자.
사람이 있었다.
신에게 대항하여 인간의 몸으로 신의 권위에 맞서려던 아득히 먼 전설과도 같은,
혹은 그 전설속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밀레시안이 만나고, 밀레시안을 관찰했던. 하지만 결국 그 누구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그런 사람이 가버렸기에 밀레시안의 안에는 더이상 인간성이라는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맹세했다. 이 땅을 수호하기로. 죽음의 용의 희생으로 태어난 새로운 황금과 그렇게 이야기 했고 네개의 머리의 뱀과 그렇게 계약했다.
여신에게 선언했다. 그에게 약속했다. 사람의 삶을 내어주고 수호자가 되기로 했다.
그래서 제대로 지켜낸 것이 있어? 하늘에서 추락하고 있던 밀레시안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손에 제대로 쥐어본 것이 있어? 손안에서 빠져나가는 모래를 집어던지 스스로에게 다그쳤다.
모든 것이 기만이었다. 사람을 끌어들이거나 주변을 휘어잡는 힘이 아닌 이것은 타인의 운명을 휘두르는 재앙이었다.
지켜내고자 했던 것은 세계가 아닌 자신이었고 이는 결국 거짓조차 되지 못했다.
한 세계는 하나의 생명이었고 이는 하나의 낙원.
밀레시안은 자기 자신만의 낙원을 위해 타인의 삶을 희생시켰다.
왜 나를 구했어. 밀레시안은 손을 들어 마른 모래가 쏟아져 나오는 입을 틀어막았다.
왜 나를 구했어. 죽지 않는 것은 나인데. 불멸을 가진 것은 나인데. 마법사는 용이 아닌 별을 구했다.
용의 마법사를 죽인 것은 자신이었는데도 그는 용을 선택하지 않았다.
미안해.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마법사가 말했다. 역시 아직은 좀 이른 것같다.
무엇이 이른걸까. 내가 죽기에? 내가 살아가기에? 밀레시안은 더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나아가는 것도 물러서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당신이 결국 나를 이겼다. 당신이 나를 이곳에 속박하여 당신이 나를 이곳에 못박았다.
나는 여기에 있고 당신은 여기에 없다. 밀레시안은 그렇게 떠나간 용의 계약자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곳에는 조롱도, 경의도, 축하도 없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멀리 멀리 울려퍼지는, 살과 살이 맞닿는 소리. 육신과 육신이 맞부딪히는 소리.
손과 손이 이어져 하나의 원을 그리는 소리.
나로 시작하여 나로 완결되는, 하나의 세계가 닫혀가는 소리.
밀레시안은 어둠속에 잠겨들었다. 사위가 고요하고 안락했다.
이대로 모든것이 끝났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세계는 아직도 밀레시안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툭툭 무언가가 정수리 근처를 스치고 지나갔다.
흘러들어간 찬기운의 절반은 머릿속으로 스며들었고 절반은 머리카락을 따라 흘러내렸다.
감겨진 눈꺼풀 너머로 비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소나기를 올려다보며 밀레시안은 어느새 자신이 왕성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래가 가득찬 것같았던 매스꺼움도 가라앉아있었다.
성문을 지키고 선 은백색의 철갑들은 갑작스러운 빗줄기에도 미동없이 자신의 자리에 서 있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두 인간들은 불안하다는 눈으로 밀레시안을 훔쳐보고 있었다.
왜 저러시지? 걱정이 절반, 두려움이 절반. 밀레시안은 서둘러 그 자리를 뜨기로 결정했다.
오랫동안 눈에 띄어봤자 좋을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언제였든, 어디였든간에.
밀레시안이 서둘러 광장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순간이었다.
밀레시안님…? 그리운, 아니 처음 듣는 낯선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밀레시안님이세요? 제가 꿈을 꾸고 있는건 아니겠죠? 녹색의 눈이 보였다.
다른 것보다 그 눈이 가장 먼저 밀레시안의 시야에 뛰어들어왔다.
여신이시여, 너무하십니다. 밀레시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누구? 다른 색도 아닌 새파란 녹색이었기에, 밀레시안은 그 낯선 소년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당신 누구? 비가 내렸다. 잿빛처럼 짙은 구름 아래, 눈송이로 여물지 못한 미숙한 얼음 알갱이가 방울방울 떨어져 밀레시안의 얼굴을 적셨다.
누구세요? 밀레시안은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삼켜내었다.
처음 만난 그가 자신의 소중한 인연이 되어줄 것을 알았기에. 또 한번 그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운명의 앞에서 무력하고 나약한, 그러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여행자의 모습이 다시 한번 그 녹음앞에 비치고 있었다.
눈이 되기엔 지나치게 따뜻한 온기가 밀레시안에게 다가왔다. 허둥거리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우와! 죄송해요! 혹시 놀라셨나요? 저는 수상한 사람은 아니고 … 앗, 제 소개가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저는 당신을 닮고 싶어서 열심히 수련 중인….
알터.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알터라고 말했다.
그리고 뒤이어 아벨린이라는 기사를 만나고 이어 ■■■라는 기사를 만났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밀레시안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답을 가지고 있습니까? 밀레시안은 잠시 망설이고 또 고민하고, 그리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지키고 싶어. 그것은 아마 반쪽짜리 대답이었지만 진심이 담겨져 있는 말이었다.
밀레시안은 몸안에 소용돌이치는 열기를 모두 토해내어 검으로 삼았다. 그 몸을 부딪혀 방패가 되었다.
쐐기를 들어 제 그림자를 못박고 나서야 자신이 이 땅에 속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폭주하던 힘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나자 밀레시안은 비로소 피로감을 느꼈다.
마치 처음 티르코네일에 왔었을 때와 같은 후련함이었다.
밀레시안은 오래간만에 아무런 꿈도 꾸지 않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지나치게 달콤한 휴식이었다.
휴가 잘 다녀오셨어요? 카즈윈이 눈을 떴다. 잠시 눈을 쉬게 한다는게 잠까지 들었던 모양이었다.
카즈윈은 두어박자 늦게 눈을 깜빡이고는 그래. 라고 나지막히 대답했다.
말소리는 짧았지만 귀가 밝은 헤루인답게 막내는 무언가 이상하다는듯 팀장님..?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고 선반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하기도 하지.
카즈윈은 막내가 기특하긴 했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것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기에 우선 고개부터 가로저었다.
피곤한 것만으로도 힘든데 아침부터 블러디 허브 드링크 F라니, 하루를 그렇게 끔찍하게 시작할 필요가 있을까?
카즈윈은 막내쪽을 돌아보지 않은채 손을 내저으려 했지만 막내는 한발 빠르게 카즈윈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불그스름한 작은 사탕 한알이었다. 카즈윈이 고개를 돌리자 막내는 베시시 웃으며 사탕을 쥐어주고는 반대편손에 들고 있던 블러디 허브 드링크 F를 잽싸게 책상위에 올려두었다.
허, 하고 카즈윈이 기가차다는듯이 웃자 막내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오늘도 좋은하루! 하며 프라데이리 제약회사의 선전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귀엽긴 하지만 기특함이 지나쳤다. 카즈윈은 부드럽게 웃으며 생각했다. 오늘 너는 나랑 나가야겠다.
아직 카즈윈의 표정을 읽을 줄 모르는 막내는 팀장님의 표정이 풀려서 기쁜지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자리에 돌아갔다.
카즈윈은 막내의 바람대로 블러디 허브 드링크 F를 원샷했고 사탕을 입에 까 넣었다.
인생은 짧고 뒷맛은 길다. 카즈윈은 끔찍한 맛으로 불평받은 블러디허브 드링크 F에 대해서 칼럼을 쓴 도렌 교수의 말을 떠올렸다.
앞뒤 주어가 반대로 되긴했지만 대충 그런느낌의 말이었다. 이 뒷맛이 어떻게 짧다고 할 수가 있을까.
카즈윈은 병을 쓰레기통에 집어 넣은뒤 책상에 올려져 있던 물병을 움켜쥐었다.
조금 우그러지는 소리가 나더라도 마시는 것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다.
카즈윈은 물병을 쥐어짜듯이 움켜쥔 뒤 단숨에 작은 페트병 하나를 비워내었다.
곧 쓰거운 숨 한 줌이 밀려나왔다. 액체로 가득찬 위장이 출렁이는 기분이었다.
본의아니게 물배를 채운 카즈윈은 우그러지는 소리에 움찔하고 이쪽의 눈치를 살피려는 막내의 시선을 무시한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걷다보면 내려가겠지. 막내가 제 선배에게 긴급질문을 보내는 동안 카즈윈은 사무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몇몇 직원들이 카즈윈에게 인사를 건네며 빠르게 스쳐지나 갔다.
햇살은 따스했고 공기는 나른했다.
카즈윈은 커다란 채광창에 비치는 풍경을 둘러보며 복도의 끝으로 걸어갔다.
자판기 설치대 겸 약간의 휴식을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는 곳이었다.
더이상 뭔가를 마실 생각은 없지만 유일하게 그곳만이 열 수 있는 창문이었기 때문에 옥상까지, 혹은 1층까지 움직이기 귀찮은 헤루인들은 종종 그곳으로 가서 바람을 쐬곤 했다.
카즈윈은 이미 그 장소에서 쉬고 있던 헤루인들에게 고개를 가로저어보였다.
딱히 자리를 비워줄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헤루인들은 웃으며 카즈윈을 반겼고 친근하게 안부인사를 건네왔다.
대부분 휴가를 잘 갔다왔냐는 내용이었다. 카즈윈은 대강 그들의 발에 대답하며 잠시 잡담을 나누었다.
헤루인들은 근황을 보고했고 카즈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중간중간 다른 이야기도 섞여있었다.
그중 하나가 창밖으로 보이는 아르후안의 차량이었다. 오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요.
음료수를 마시던 헤루인은 창가에 바싹 달라붙었고 카즈윈과 이야기를 나누던 헤루인도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카즈윈이 창가쪽으로 다가가자 창에 달라 붙어 있었던 헤루인은 자리를 비켜주며 아르후안의 팀장을 가리켰다.
저기 저쪽 팀장 옆에 있는 갈색머리 꼬맹이요. 원래 에일리흐사 담당이 L대리인데 이번에 사장님이 휴가가시면서 L대리까지 데려갔잖아요.
L대리는 아르후안의 소속이었지만 동시에 사장의 외가측 친척이었다.
사장이 L대리를 종종 데리고 다니는 것은 회사에서 공공연연한 사실이었기에 카즈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사장님이 갑작스럽게 휴가를 연장하셨거든요. 휴가지에서 어디 다치셨다나? 뭘 하다가 감전되었다던데 병원에서 조금 더 두고 봐야한다고 해서 아직 회사로 돌아오지 못하신다나봐요.
음료수를 마시고 있던 헤루인의 설명에 카즈윈이 인상을 찌푸려보이자 뒤에 서 있던 헤루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팀장님 못들으셨어요? 오늘 아침에 루나사가 말했었는데?
카즈윈은 자신의 책상위에 아무런 메모도 붙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먼저 떠올렸지만 일단 아침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짧게 대답한 뒤 턱끝을 까딱였다. 계속 이야기하라는 신호였다.
헤루인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뒤 남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같이 있었던 L대리까지 사장님 곁에 남기로 했는데.. 아시다시피 L대리가 담당하고 있는 곳이 까다로운 데 뿐이잖아요? 게다가 최근에는 그.. 조금… 사건사고가.. 흠흠흠! 아니요! 아무말도! 헤루인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죠.
네, 아무튼 L대리 백업으로 저기 저 꼬맹이 그러니까 이름이.. 아 A대리. 네. 그런이름이었죠.
A대리가 가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그 소식이 저쪽에도 알려진 모양이에요.
신시엘라크만 아니면 만만하다면서 A대리를 산채로 뼈까지 아작아작 씹어먹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쳤다나?
그래서 아르후안 팀장이 L대리는 신시엘라크가 아니라 아르후안이라면서 철체 파일폴더를 맨손으로 우그러트렸다던데.. 네.. 그 결과가 저렇게 아르후안의 팀장이 직접 가게되었다는 거겠죠.
뭐 우리야 시끄럽게 떽떽거리던 애들이 사라지는 거니까 상관은 없는데… L대리가 조금 불쌍하네요. 입사했더니 사장놈이 사촌이고, 휴가까지 빼앗기고.. 돌아왔더니 거래처는 박살나있고...
카즈윈은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것이 신시엘라크걱정이라고 대답하며 움직이는 차량을 눈으로 뒤쫓았다.
조수석에 앉은 분홍머리의 여성이 인상을 잔뜩 찡그린채 무언가를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다.
카즈윈은 질끈 묶은 분홍색 머리와 안경을 쓴 깐깐한 인상의 여성을 떠올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이름이 뭐였지? 카즈윈의 질문에 헤루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눈을 굴렸다.
A대리요? 아니… 카즈윈은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르후안의.. 누구였더라. 달콤한 사탕은 뜨거운 혓바닥 위에서 녹아내렸고 그 열기는 고스란히 카즈윈의 식도를 타고 몸속 깊은 곳까지 흘러내렸다.
고르륵, 하고 물방울이 요동치는 소리가 났다.
카즈윈의 안에서 부터 무언가. 자그마한 숨결이. 얕은 숨을 내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카즈윈은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눈앞이 흐려지고 있었다.
어… 아르후안이요? 헤루인의 팀원이 물었다. 아르후안 팀장님 이름 말씀하시는 건가요?
헤루인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께서 모를리 없지 않느냐고.
그들의 눈은 어디 아픈 것 아니냐고 말을 걸며 입으로는 다른 소리를 내뱉었다. 아벨린. 아벨린 팀장님이요.
눈앞이 새카맣게 흐려지며 몸이 기울어진다. 아르후안의 아벨린 님입니다.
아득해지는 의식 저편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벨린!! 밀레시안이 소리쳤다.
그 고함소리와 함께 분홍색 머리를 질끈 묶은 여기사가 헝겊인형처럼 내팽겨쳐지며 문의 반대편 성벽까지 날아가버렸다.
시체에서 태어난 죽은 자들의 왕, 제바흐는 포효하며 휘둘렀던 앞 발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아벨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치명상을 피해낸 ■■■는 재빨리 몸을 굴려 대검을 집어들고는 밀레시안을 향해 소리쳤다.
가십시오 밀레시안! 검은 갑옷을 입은 ■■■는 소리쳤다. 가세요! 문이 닫히기 전에!
밀레시안은 자신을 위해 희생한 기사들을 돌아보며 망설였다.
알터와 피네는 선지자들을 묶어두느라 여념이 없었고 아벨린은 방금 ■■■를 지키기 위해 쓰러졌다.
■■■는 소리쳤다. 밀레시안! 그들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제바흐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상황이 절망적이었기에 더더욱 밀레시안의 망설임은 깊어지기만 했다.
발은 움직이지 않았고 생각의 고리는 점점 더 일그러져만 갔다. 밀레시안은 도저히 그들을 버리고 갈 수 없었다.
당신이 그곳에 다다르는 것이 우리들의 승리입니다.
■■■는 제바흐의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흔들림없이 대답했다.
당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당신만이 완성시킬 수 있어요. 가십시오. 밀레시안.
그곳으로. 저 문너머로. 잃어버린 우리들의 성지. 아발론으로.
■■■는 깨어진 칼날을 분리한 뒤 양손으로 대검을 움켜쥐었다.
검게 물든 칼날이 솟아나며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불꽃은 하늘 높이 타오르며 검날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검이 있었다. 가장 고결하고, 가장 순수하고, 가장 날카로우며, 가장 강대한.
커다란 검이 있었다.
세상을 굽어볼 수 있을 만큼 밝고 멀리 뻗어나가는 빛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에서 운명을 기다리던 첫번째 수호자가 있었다.
밀레시안은 닫혀가는 문을 등진채 물었다.
당신 누구야?
■■■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 누구냐고..! 밀레시안은 문으로부터 도망치며 ■■■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고 밀레시안은 한없이 문으로 부터 가까워지고 있었다.
대답해요! 당신은 왜 거기에..!! 나는 어째서..!!!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왜 거기에, 나는 어째서 이곳에.
머나먼 기억 너머, 주신의 첫번째 검은 자신의 이름을 ■■■라고 말했고.
대답해요 톨비쉬!!! 밀레시안은 그를 톨비쉬라고 불렀다.
굉음이 울렸다.
이어 빛이 흔들렸다.
톨비쉬라고 불린 기사가 제바흐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등에는 피로 젖은 창자루가 꽂혀 있었고 그의 가슴에는 눈부신 번개에 휩싸인 창날이 튀어나와 있었다.
날카로운 전격은 톨비쉬의 가슴을 불태우며 빛으로 퍼져나갔다.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일 정도의 강한 빛. 톨비쉬는 가슴을 더듬어 번져나오는 핏자국을 확인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밀레시안은 제가 한 행동이 불려온 결과에 놀란듯 커다랗게 뜨여진 눈을 깜빡이며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단단히 창을 쥐고 있던 손이 허전했다.
창날은 아직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데 밀레시안의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밀려들어오던 검은 파도는 무방비하게 얼어붙어있던 밀레시안을 놓치지 않았고 밀레시안은 파도에 휩쓸려 문 안쪽으로 끌러들여가 버렸다.
밀레시안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강한 빛속에 파묻혀가던 제바흐와 자신을 돌아보는 톨비쉬의 희미한 미소, 그리고 새하얀 물거품이 이는 검은 바다의 끝자락이었다.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철썩거리며 강대한 별조차 갉아 한 줌의 모래로 깎아내는 끝없는 영원.
밀레시안은 그 파도에 삼켜진 채 짙고 깊은 바다에 끌려들어갔다.
푸르다 못해 새까맣게 변해버린 바다였다. 밀레시안은 필사적으로 팔을 내저으며 저항했지만 그러한 행동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고르륵, 고르륵. 입과 코를 통해 얕은 숨이 흘러나왔다.
불이 꺼지고 의식이 멀어졌다.
시계는 또다시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글
카즈밀레)별의 어항11
멀린은 몸이 으슬으슬하다며 담요를 요구했고 르웰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준비된 로브를 건네주었다.
미묘하게 재봉된 넓은 천을 받아든 멀린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아 진짜 이런 시대에도 이거 뒤집어쓰고 주문외워야해? 톨비쉬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번져나갔다.
르웰린은 잠시 짬을 내어 고개를 들어올리고는 룸미러 구석에 비친 톨비쉬를 슬쩍 살펴보았다.
르웰린은 드물게 친절한 어투로 대답했다. 옆에 사람은 대검에 중갑옷까지 입어야 하는데 로브정도야 가볍지. 라고 말씀하고 계시네요.
멀린은 투덜거리면서도 로브를 대충 꿰어입고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르웰린을 돌아보았다. 너 오늘 왜 친절하냐?
르웰린은 흥이 깨진다는 표정으로 멀린을 흘겨보고는 다시 입가에 가득 미소를 띄운채 화면을 응시했다.
나의 별이 드디어 내 편이 아닌 사람을 설득하는 법을 터득했거든요. 명백한 자랑이었다.
멀린은 아 그러셔 하고 심드렁하게 대답했지만 르웰린의 손은 바쁘게 페이지를 반대편으로 넘기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한참동안이나 같은 고민을 반복하고 있었다.
무도회장에서 있을 반발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중도파와 반대파를 설득해야하는데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어린 왕의 걱정어린 재촉에 밀레시안은 어쩔수 없다며 단호한 말투로 제안했다.
매수합시다.
어린 왕은 너… 상대를 매수하는 방법 알아..? 아니 의심하는건 아니고, 저번에 소문을 물으러 왔던 때가 생각나서 그래 하고 미심쩍다는 어투로 되물었지만 밀레시안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이론은 빠삭해요. 밀레시안은 손에 들린 붉은색 마도서를 탕탕 쳐보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왕과 호위병은 사색이 되었다.
어린 왕의 걱정대로 밀레시안의 매수계획은 매우 어설프게 시작했지만 실전의 감을 익히게 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상물정을 몰라서 그렇지 한번 배우면 잘한다니까.
멀린은 싱글싱글 웃고있는 르웰린이 적응되지 않는다며 팔을 문질러 열기를 더하고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 혹시 여기까지 어항가지고 온거 아니지? 그거 완전 섬세해서 돌부리는 커녕 보호방지턱에 한번 덜컹거리면 최소한 박살이야.
르웰린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며 멀린을 노려보았고 멀린은 지지않겠다는 눈빛으로 응수했다.
차 안의 공기가 급속도로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톨비쉬는 말없이 히터를 올린뒤 점점 굵어지는 눈송이를 올려다보았다. 와이퍼를 올리고 헤드라이트를 밝혔다.
깊게, 더 깊게. 미끄러지듯 고요하게 나아가던 검은색 차량은 폭포가 시원하게 내리꽂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입을 꾹 다문채 저마다의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두 청년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도착한 장소는 다 무너져가는 낡은 돌다리 건너 터만 남은 오래된 유적지였다.
성벽이 있었을 자리에는 터만이 남아있지만 수없이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이쪽과 저쪽을 갈라내는 게이트만큼은 굳건히 서 있었다.
이름모를 유적지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경건함으로 가득 했고 톨비쉬는 이 장소를 애정어린 눈으로 돌아보았다.
설산에 갇혀 시간조차 얼어붙어버린 것같은 고요함속에 잠든 유적지였다.
톨비쉬가 게이트를 둘러보는 동안 르웰린은 차의 뒷트렁크를 열어 준비한 장비들을 내려놓았다.
르웰린은 익숙하게 톨비쉬의 곁에 다가서서 그가 갑옷을 착용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톨비쉬가 검은 갑옷을 착용하는 동안 멀린은 차안에서 구겨진 로브를 탁탁 털어내고는 게이트에 대충 던져놓았던 긴 지팡이를 집어들었다.
그래서 그녀석은 어디까지 진행한거래? 르웰린은 잘 개어 놓았던 푸른빛 망토를 털어 내며 대답했다.
열 여덟번째요. 멀린은 우와 하고 인상을 찡그리며 뒷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나 완전 욕먹을 때잖아.
톨비쉬는 건틀렛을 확인하며 나지막히 웃었고 이번에도 친절한 신시엘라크 통역기가 이 웃음의 의미를 해석해주었다.
그정도로 우는 소리 하시면 톨비쉬 님이 섭섭해 하시죠.
톨비쉬는 웃음기를 뚝 그친채 르웰린을 돌아보았지만 르웰린은 이미 끝나면 부르세요. 라는 말과 함께 잽싸게 돌아선 뒤였다. 그 눈빛 아무리 차갑고 매섭다 한들 따뜻한 히터가 나오는 차 안으로 도망치면 닿지 않으리.
멀린은 키득거리며 웃고는 치렁치렁한 소매를 걷고 문앞으로 다가갔다.
마법사와 기사. 영원에 갇혀버린 게이트.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있었고 대체할 수 없는 기적이 있었다.
그 기적을 눈에 담은 이들의 기억속에서 별은 수없이 복제되고 열화되어 뒤틀리고 찢어져 결국 한 줌의 낱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영원을 방랑하는 기사가 있었고 그 영원을 뒤쫓던 시간의 미아가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기억들을 쪼개고 또 갈라내어 철저히 검증했다.
날실과 씨실이 된 기억이 교차될때마다 그들은 비어있는 공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을 채우는 것은 결국 다시 한줌의 낱말. 그들은 자신들의 오만을 인정했다.
똑같은 과오를 되풀이 할 수 없었고 수많은 논쟁의 끝에 그들을 찾기로 결심했다.
세상 어딘가에 있을 별의 유지를 품고 있는 사람들을. 그들은 조각조각 흩어진 그 낱말들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해 망각속에 묻어버리고 현실의 삶 속에 숨겨버린 채 살아가고 있었다.
톨비쉬는 그들의 안에 별의 유지가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을 확인했고 멀린은 그들을 별의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 잔의 물을 대가로 한방울의 피를 얻어내었다. 영혼의 정보값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제각각이었기에 그 누구의 기억과도 일치하지 않다.
같은가 싶으면 어딘가는 조금 다르고, 아예 다른가 싶으면 평소보다 조금 더 자세한 것뿐인, 같으면서도 다르면서도 결국은 단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
그들은 빠져있는 부분을 음지삼아 더해진 것을 양지삼아 그들은 조각난 낱말들을 짜 맞추어 한 사람의일생을 그려내었다.
별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각각의 어항속에 자신만의 별을 담아,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두 방랑자는 얼어붙은 문 앞에서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기다렸다. 톨비쉬는 검은 대검을 뽑아들었다.
문이 열리고 그 너머로 부터 세찬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문앞까지 치달은 검은 파도를 향해 마법사가 양손을 들어올렸다.
하늘이 무너져내린 옛 성지에는 부서진 은빛 잔해들이 가득했다.
나를 구하지 말았어야지. 밀레시안은 원망가득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나를 구하지 말았어야지. 나를 구하지 말았어야지!! 멀린은 수없이 많은 위기 속에서 밀레시안을 구해냈다.
불타는 대지의 끝에서, 시간으로부터 도망친 지하의 감옥의 결계 안에서, 사막의 하늘, 지옥같은 악몽속.
밀레시안은 몇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며 멀린에게 손을 휘둘렀다.
그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범한 마법사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고 정체성을 잃어버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남을 돕고 에린을 구하고, 대륙을 떠돌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여러가지 마음을 주고받았다.
삶에 대한 가능성을 보았고 욕망을 가졌다. 바램을 넘어선 간절함은 욕심이 되었고 뱃속 깊은 곳에서 부터 꾸역꾸역 밀려나오던 검은 안개는 마침내 밀레시안의 영혼을 제 빛깔로 뒤덮었다.
죽고싶지 않아. 밀레시안은 여신의 종언을 거부했다.
제손으로 유일무이한 조언자의 충고응 무시한채 도망쳤고 결국 그들 모두를 배신했다.
그러면서도 살아남은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밀레시안은 속죄를 맹세했다.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 세계를 수호하겠다고, 무슨일이 있어도 이 세상을 지켜내겠다고.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원망했다. 처음 이 눈에 비쳤던 그들을 무조건 적으로 믿었지만 되돌아온 것은 포기와 체념을 종용하는 말들 뿐이었다. 결국 그들은 밀레시안을 믿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제 아무리 호의적인 여행자라고 언젠가 제 곁을 떠나갈 것이라며, 밀레시안은 수없이 진심을 증명해 내었지만 그들의 의심은 끊어지지 않았다. 결국 먼저 지쳐버린것은 밀레시안이었다.
믿음을 받은 적이 없으니 이것은 배신이 아니라고, 밀레시안은 누구에게 외치는 말인지 모를 변명을 내뱉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발버둥치며 버텨왔다.
도우갈(글라스기브넨)에게 제 목을 들이밀었을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러나 원망의 저주는 언제나 대가를 요구했기에 밀레시안은 또다시 심판대 위에 올라섰다.
마주선 심판자는 금속과 뼈대로 불러들인 이계의 괴물보다도 끔찍한 것이었다.
뒤틀리고 찢겨진 날개를 펼치고, 안개보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검을 휘두르고. 검은 용기사는 그 어느때보다도 강한 힘으로 밀레시안을 압박하며 자신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가 웃었다.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서야 그는 운명과 고통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하늘을 만끽했다.
그렇게 그는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증오의 평행선을 끊어버리고 천 길 하늘 아래로 추락해버렸다.
운명은 다시한번 뒤집혔다.
운명이 뒤집혔기에 세상도 뒤집혔다.
밀레시안의 희생(승리)은 곧 그의 고통이었으나 뒤집힌 세상에선 그의 승리(희생)였고 이는 곧 밀레시안의 고통이었다.
그는 운명에서 풀려났고 밀레시안은 마법에 묶여 사막의 모래 위로 끌어내쳐졌다.
밀레시안은 모래투성이가 되어가는 마법사의 로브를 부여잡았다.
밀레시안. 멀린이 별을 불렀다. 미이라처럼 바싹바싹 말라가는 입을 벌려 새소리처럼 높게 갈라진 숨을 내쉬었다.
밀레시안. 대답없이 꺽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멀린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미안해. 역시 아직은 좀 이른 것 같다. 마법사는 그렇게 커다란 지팡이를 휘둘렀다.
어둠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세상은 그렇게 다시 얼음속에 잠겨들었다. 깊은 밤이 찾아왔다.
카즈윈은 어느새 한 밤중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깜빡였다.
(또다시 한바탕 난리를 치며)거실로 돌아온 별의 어항의 불빛이 꺼지고 나서야 카즈윈은 제법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라면 눈이 가려진채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도 점심시간 퇴근시간은 칼같이 반응했을 카즈윈이었지만 이번주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사장놈이 갑작스럽게 휴가를 간 덕에 카즈윈도 강제 휴가를 받아야 했던 탓이었다.
헤루인에게 지시를 내릴(그러면서 동시에 깽판친 뒷정리를 해줄) 책임자가 자리를 비웠으니 헤루인도 ‘자제’하는게 좋겠다며 루나사에서 억지로 휴가권을 안겨주었고 그의 금쪽같은 팀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아 맞아요! 팀장님은 조금 쉬셔야해요. 요즘 자꾸 피곤해하시잖아요. 라며 카즈윈을 떠밀었다.
금쪽같긴 금쪽같지. 돈에 죽고 돈에 사는 현대사회에서 금쪼가리 하나가 얼마나 많은 원한을 품었던가.
금쪼가리는 사랑이었고 원한이었으며 자식새끼들 같이 귀한 보물이었다. 그러니 그가 팀원들을 금쪽같이 여긴다는 말은 크게 틀린말이 아니었다.
금쪽같은 원수새끼들. 카즈윈은 쉬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요즘들어 몸이 무겁게 느껴지기는 했다.
피로가 누적된 탓도 있겠지만 오히려 일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닐때가 훨씬 더 가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그는 관심없는척 루나사 팀장의 속을 바득바득 긁으며 휴가를 받아들였고 덤으로 그의 주문어플 포인트를 털어내었다.
알반에는 수리부엉이가 병아리식판에 이어 장닭의 저금통도 털어먹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모두가 수근거리는 분위기속에서 소문에 민감한 루나사의 막내가 입을 삐죽이며 헤루인의 막내를 찾아간 것은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루나사의 막내는 헤루인의 옆구리를 쿡찌르며 물었다. 너 그거 아니? 야식으로 먹는 치킨이 제일 맛있단다?
헤루인의 막내는 무슨소리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루나사의 막내는 시치미떼지 말라며 옆구리를 두어번 찔렀지만 헤루인의 막내는 정말 영문을 몰라 억울할 뿐이었다.
헤루인은 몸을 슬쩍 비틀어 도망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몰라. 정말로 몰라. 우리 팀장님은 요즘 맨날 칼퇴하셔서 우린 야식같은거 못먹는단 말이야.
루나사의 막내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멈춰섰다. 저들의 부서는 아직도 바빠 미치겠는데 원흉이나 다름없는 헤루인이 야근을 안한다니.
루나사의 막내가 굳어버린 틈을 타서 헤루인은 잽싸게 비상구로 뛰어들었다.
와닥 와다닥 부츠소리를 내며 몇 계단씩을 한번에 뛰어올라가자 맞은편에서 내려오던 알반의 직원은 마치 길 가던중 고추장 푼 물을 마신 날짐승에게 습격당한 것마냥 깜짝 놀라며 난간을 부여잡았다.
헤루인! 외근용 장비 입고 회사에서 뛰어다니면 안된다니까요!
비상구에서 고함소리가 울리는 동안 루나사의 막내는 한참동안 입을 삐죽이다가 조용히 루나사로 돌아왔다.
막내는 팀장을 찾아가 말했다. 팀장님 저 오늘 야근하기 싫어요.
막내의 사(社)춘기 선언에 깜짝 놀란 팀장은 긴급회의를 시작했고 막내를 제외한 루나사의 총 집합체들은 이 사춘기가 장기적 사춘기인지 저번에 먹은 치킨이 맛이 없어서 찾아온 일시적 치킨울증인지에 대해 격력한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냥 쓸데없는 일에 열올리지 말고 제시간에 일을 해.. 부팀장은 현실적인 해결방법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는 팀원들을 흐린눈으로 바라보며 발걸음을 돌렸다.
최소한 자신이라도 빠져야 이 쓸모없는 회의의 화력이 줄어들 것같다는 판단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발을 돌리기 무섭게 눈만 굴리며 허둥거리던 팀장이 큰 결심을 마음에 세기며 소리높여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그럼 치킨 말고 야유회에 가서 고기를 구울까?! 부팀장은 단박에 테이블 사이에 끼어들며 이 시기에 야유회라니 그건 아니죠! 하고 소리쳤다.
새롭게 던져진 장작을 삼킨 불꽃이 하늘을 찌를듯이 높이 타올랐다.
밀레시안은 불꽃을 쏘삭거리며 한데 뭉친 장작더미를 넓게 퍼트렸다.
불길이 조금 잦아들고 나서야 밀레시안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고 던컨은 가만히 밀레시안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이야기 속의 영웅은 마지막까지 영웅이어야 하지. 그게 설령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 이름이 된다 하더라도 말이야.
그러나 그들의 뒷이야기를 밀레시안은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말하지 말았어야 했을까요?
말의 중간, 유난히 앞글자 하나를 작게 말한 것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던컨은 언제나 수많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푸른 깃을 가진 새의 나른한 하품소리와 풀벌레 소리, 풍차 아래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 던컨은 이 자그마한 구조요청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대답 대신 웃었다.
기분전환이라도 하는게 어떤가. 그는 대답 대신 손을 잡아주었다.
허술한 상자를 핑계로 나눠진 온기가 한치 앞에 떨어진 캠프파이어보다 따스했다.
밀레시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성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던바튼의 성당으로 갔고 또 타라의 법황청으로 갔다.
가는 길마다 라이미라크의 축복이 내려졌지만 그 어떠한 따스한 말도 밀레시안의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다.
어째서? 밀레시안은 자조했다.
반쯤 신성에 오른 탓이었을 수도 있고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 다른 욕망으로 충만해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내뱉은 말은 한없이 가벼웠고 삼켜진 침묵은 끝없이 무거웠다. 사랑이 가득한 세상에 단 한점의 진심이 없었다.
가라앉는 마음을 건져낼 길이 없어 밀레시안은 그들이 부탁하는 대로 움직였다.
톱니바퀴가 돌아가듯이 영혼이 마모되어가고 있었다.
언젠가 이 바퀴가 맞물리지 않을 날이 온다면 이러한 생각속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왕성으로 향한 밀레시안은 어린 왕을 만났다. 아직 지배자로서의 위엄을 찾지 못한 어린 소녀는 과장된 예법과 날선 눈빛으로 밀레시안을 맞이했다. 물론 흉내낸 위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너! 왜그렇게 기운이 없어보여? 뭐? 힘들다고? 한가해서 그래 한가해서..! 한가함이 넘치니 생각이 많아지는 거라고..!
카즈윈은 마른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왜 갑자기 목이 타지. 카즈윈은 찬물을 찾아 옆자리를 더듬었고 이내 빈 페트병을 우그러트리며 부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유 모를 갈증은 새로 딴 페트병의 반절 정도 비운 다음에야 사라졌다.
카즈윈은 차가워진 숨을 한껏 내쉬고 난 뒤에야 기침을 멈추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 한가한게 항상 나쁜건 아니지.. 헤루인들은 소금을, 루나사들은 종이로 만든 꽃가루를 철썩 휘갈기며 너 누구야! 하고 외칠만한 발언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카즈윈은 어떤지 입술이 짜다고 느끼며 혀를 두어번 낼름거리고는 반쯤 채워진 파란 라벨의 페트병을 든 채 거실로 들어왔다.
물맛이 변했나? 카즈윈은 두어번 더 입술을 핥은뒤 페트병에 남은 물을 들이키며 어항 앞에 앉았다.
카즈윈이 들고 있는 페트병에는 프롬 더 스카하 아일랜드. 라는 문구가 적혀져 있었다.
카즈윈은 물 맛이라는 것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회사에서는 유독 이 생수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차가움이 오래간다던가 몸에 좋은 성분이 많다던가. 물 맛에 민감한 몇몇 팀원들은 희미하게 숲의 냄새가 난다고 했지만 카즈윈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숲이라고 하기보다는.. 카즈윈은 페트병 입구를 코끝에 들이대고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직도 차가운 냉기가 올라오는 물병 주변에서는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지만 카즈윈은 막연히 바다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짙고 깊은, 푸르다 못해 새까맣게 변해버린 지저의 바다.
하지만 스카하 아일랜드에서 생산되는 생수의 수원지는 높고 높은 영혹의 산에서 흘러내린 자그마한 호수라고 알려져 있었다.
겉포장지에도 해양심층수가 아닌 만년설 청정수라고 쓰여있으니 아마 확실할 것이다.
그럼에도 바다를 떠올리는 것은 오직 카즈윈뿐이었다. 아마도 기분탓이겠지.
카즈윈은 시중에서 판매되는 것과 달리 라벨이 파란 색이고 알반의 방패마크가 붙어있는 병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핸드폰을 집어들고 자세를 고쳐 앉은뒤 읽다만 이야기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유가 뭐가되었든 그저 잠시 스쳐지나가는 사소한 잡념이었을 뿐이었다.
글
카즈밀레)별의 어항10
보답을 약속해드리도록 하죠.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지만요.
여신은 망설임의 끝에 저를 찾아온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그 영혼은 용기와 지혜, 그리고 거짓된 사랑으로 충만하게 차올라 있었다.
여신은 지쳐있었으나 통찰력을 잃지 않았고 동시에 전장를 두루 파악할 수 있는 노련함을 갖추고 있었다.
여신은 자신의 장기말을 움직여 이계에서 소환된 이형의 괴물을 쓰러트릴 것을 명령했다.
여신은 말했다. 그의 의미는 이미 이 땅에 나타나 있다고. 이 세계가 거울의 뒷면인지, 혹은 기만된 진실의 민낯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밀레시안이 여신의 의지에 따라 이 세계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그럼 그 평행선을 위에 놓여진 마신의 장기말(다른 세계의 영혼)은 누구일까.
밀레시안은 새파란 하늘 아래서 눈을 떴다.
온 세상은 흙이었고, 모래였고, 한 때 바다를 누비던 자들의 것이었으며 동시에 강이었다.
밀레시안은 도우갈을 마주보며 겨우 자신이 그와 같은 눈높이로 마주보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겹치지 않은 평행선 위였으나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그는 인간의 몸을 가진 괴물, 밀레시안은 괴물이 되지 못한 인간.
밀레시안은 안도했다. 이번 믿음또한 꿈이었음을, 못나고 하찮고, 나약한 본질을 깨지 못한 범인이었으나 그것이 제 온전한 그릇이었기에.
깨어지지 않음에 감사했고 변질되지 않았음에 기뻐했다.
밀레시안은 여신이 준 펜던트를 내밀었다.
세계를 이루던 경계선은 뒤집혔고 이제, 묶여있는 것은 밀레시안이 아닌 도우갈, 글라스 기브넨을 가진 그의 영혼이었다. 밀레시안이 그를 죽이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글라스기브넨은 처음부터 불완전한 육신으로 소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틈을 만든 것은 분노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은 현자의 재치와 용기였다.
시라, 시라. 당신의 남편이 만든 위대한 업적을 보세요. 밀레시안은 다시 만날 것을 의심치 않았던 고결한 영혼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였다.
그것은 달을 떨어트리려는 사악한 마법사의 음모를 저지하는 영웅의 이야기 보다 빛났고 세상을 부숴버리려던 잔혹한 배신자의 분노보다 뜨거웠다.
에르그의 붕괴, 두 세계의 연결. 기만하는 마신, 이를 저지하려는 여신. 착실하게 하나하나 밟혀가는 마지막으로 여정.
밀레시안은 마침내 여신의 앞에 섰다. 저는 죽는 건가요? 밀레시안은 마신을 물리친 여신을 바라보았다.
여신의 눈은 여전히 감겨있었기에 밀레시안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헤아릴 수 조차 없었다.
여신은 가만히 밀레시안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동전을 아무리 빠르게 돌린다 하더라도 양면을 동시에 볼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건너편을 들여다 보기 위해 동전에 구멍을 뚫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이야기지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생명, 하나의 낙원.
이곳이 티르 나 노이인지, 아니면 다른 어느 장소가 티르 나 노이 인지.. 지금의 당신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 같군요. 이미 이어진 통로는 거스를 수 없는 순리와 같으니 이곳은 제가 막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일단 에린으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포워르와 키홀이 에린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힘을 기르십시오.
여신은 밀레시안에게 가호를 내렸지만 그것은 결코 자신의 이름을 가진 가호가 아니었다.
라이미라크와 아튼 시미니의 가호를 빌겠습니다. 안녕히.. 그리고 때가 되었을때, 당신을 다시 만나러 가겠습니다.
밀레시안은 그렇게 에린으로 돌아왔다.
그는 떠났을까? 밀레시안은 글라스기브넨을 쓰러트리는 순간 깨어지던 여신의 펜던트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 장소로 다시 되돌아갈 용기는 없었고 머릿속에는 여전히 꿈결같은 여신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당신이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을 기억하세요.
그것은 에린을 수호하는 이를 위한 길이었고 빛으로 둘러싸인 거룩한 기사의 길이었다.
곧게 뻗어나간 고결한 검의 길. 밀레시안은 쓰게 웃으며 뒤틀리고 더러워진 브로드 소드를 꺼내들었다.
어느 음유시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캠프파이어 위에 버려진 검은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한창 달아오른 검신에 새벽의 빗방울이 떨어지던 때에, 검은 쩌적 하고 갈라지며 생을 마쳤다.
밀레시안의 첫번째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났다.
루나사는 최근 한가해 졌다는 것을 느꼈다.
손수 엿을 고아 모든 알반에게 하나하나 입에 물려주던 친절하고 상냥한 수리부엉이가 최근 얌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야행성 동물이 자꾸 낮에 돌아다니더라.
한없이 의욕없는 나른한 눈매로 되돌아온 카즈윈은 이전보다는 온순해진 모습으로 조용히 눈을 감은채 사무실 의자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수려한 이목구비가 가지런히 잠들어있는 모습은 제법 온화한 분위기로 보였지만 40%는 사진빨에 가까웠다.
화상액자 너머보다 현실이 가까웠던 카즈윈의 팀원들은 최소한의 소음을 위해 오타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모니터 너머로 소리없는 눈짓을 주고받고 있었다. 일명 아빠 아직 안잔다 상태.
카즈윈은 눈을 감은채 밤새 읽은 소설의 피로를 보충하고 있었지만 감긴 것은 눈이지 귀가 아니었다.
팀원들은 리모컨을 앞에 두고 바둑, 낚시, 혹은 종교방송을 강제시청하는 7살난 어린 아이마냥 끙끙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로 외근을 나가겠다는 기특하고도 마음씀씀이 깊은 양보의 현장이었다.
참다못한 고참 직원이 유령처럼 스르륵 일어나 사물함으로 재빨리 손을 뻗었지만 카즈윈은 사물함 문고리에 손이 걸리기도 전에 입을 열어 고참직원의 이름을 불렀다.
너, 저번 보고서 아직 안냈더라. 고참 직원은 일어났을때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책상앞으로 돌아왔다.
타닥타닥. 장작 타오르는 소리보다 고요하고 규칙적인 타이핑 소리가 하나 더 늘어나고 눈물을 삼키는 긴 콧소리가 한줄기 더 얹어졌다.
다행스럽게도, 카즈윈은 오늘도 칼퇴였다.
하지만 그런와중에도 카즈윈은 가장 중요한 현장보고서를 맨 나중에 넘긴다는 치밀함을 잊지 않았고 루나사의 팀장은 오늘도 치를 떨며 핸드폰을 집어들 뿐이었다. 오늘은 무슨 치킨 시킬까?
루나사의 막내직원이 대답했다. 오늘은 치킨 말고 불닭먹어요.
똑똑하기도 하지. 루나사의 팀장은 막내직원을 쓰다듬었지만 막내직원은 수줍어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은채 멍한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할 뿐이었다.
초롱초롱한 새내기는 이제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 이 등에, 하나가 되어.. 기억되려는 찰나 막내직원이 말했다.
팀장님 곧있으면 주문마감시간이니까 얼른 시키세요.
으응…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정보부의 팀장은 그렇게 핸드폰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차곡차곡 쌓이는 음식어플 포인트만이 유일한 그의 위안거리였다.
맛있네 이 집. 카즈윈은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맥주캔으로 식히며 습관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찬 바람과 닿는 혀끝이 얼얼했다. 부들부들한 계란찜을 먹어도, 고소한 마카로니 샐러드를 먹어도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통증에 카즈윈은 하는 수 없이 다시한번 불닭을 입에 집어 넣었다.
매운기가 정수리까지 확 치솟으며 묘한 쾌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체온이 확 달아오르는 매운기는 역설적으로 땀이 배어 나오며 느껴지는 찬 기운을 선사했고 카즈윈은 그 시원함에 진짜 청량감을 더하기 위해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진짜 맛있네. 어느정도 포만감이 차오른 카즈윈은 절반정도 남은 닭을 대충 포장지 채로 눌러놓은채 남은 계란찜과 샐러드를 깨작이며 핸드폰을 끌어당겼다.
밀레시안은 빛의 기사가 되었고, 또 에린의 구원자가 되어 있었다.
세번째 여신의 부름에서는 조금 위험했지만 밀레시안은 침착하게 죽음의 용과의 대면을 마치고 다시 에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으로 괜찮은 걸까? 괜찮은지 아닌지는 여신만이 알고 있었지만 여신은 별다른 말 없이 밀레시안을 에린으로 돌려보내주었다.
그 과정에서 세 용사의 해후라던가, 마리의 진실, 다난의 입장에서 바라본 밀레시안에 대한 고찰, 중간에 누군가 한 명 용에게 물려간 것 같았지만 카즈윈에게는 별로 중요하지는 않았다.
직접적인 위기 이외에도 몇 번인가 위험한 일이 생길 뻔한 적도 있었다.
타르라크가 밀레시안에게 부탁했던 위험한 갑옷조각을 모으기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다행(?)스럽게도 훌륭한 방해꾼이 한 명 남아있었기에 그 위협은 곧 무력화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즈윈의 금발곱슬 의심증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안갔어요? 밀레시안의 질문에 도우갈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안타깝게도요.. 도우갈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그의 육신은 굴레가 아니었다.
그의 정신은 생각보다 그 육신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고 그 결과 도우갈은 포워르들이 알베이를 떠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저세상에 머무르고 있었다.
기억을 되찾았기 때문인지 그는 별다른 도움없이도 멀쩡히 저세상에서의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는 본래 먹고 자고 마시고, 회복할 필요조차 없었고 느긋하게 세상을 지켜보는 것을 즐거워했다.
언제가려고요? 밀레시안은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 지루하지 않냐고 되물었지만 도우갈은 자신의 개인사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일축하며 말을 돌렸다.
글쎄요. 이 세상이 끝날때 즈음 나도 느즈막히 돌아가려고요. 그래서 용건은?
밀레시안은 다크나이트의 갑옷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하며 블랙위자드가 있는 장소에 대해서 물었다.
도우갈은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듯이 낮게 웃고는 천천히 밀레시안을 훑어보았다.
보다 강해지고 싶은 건 인간의 욕망이긴 하지만..뭐, 재미있네요. 당신이 그런 인간의 흉내를 낼 줄 몰랐는데?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그 선택지는 그때와 같이 착각으로 끝나지는 않을겁니다. 일종의 계약이니까요.
도우갈은 몇번이고 한번 선택하면 되돌아올 수 없다고 경고했다.
밀레시안은 그의 잔소리를 흘려들으며 자신의 개인적인 사정에 신경쓰지 말라고 대꾸했다.
도우갈은 순순히 통행증을 내어주었다.
물론 블랙위자드와 대면한 결과는 시원스러운 거절이었다.
가방속에 가득 찼던 검은 갑옷을 털어낸 밀레시안은 그 길로 케안항구로 내려갔고 이리아행 배에 올라 라노지역으로 떠나버렸다.
이후 한참동안 탐험퀘스트에 빠져있던 밀레시안은 불현듯 (카루숲에서 길잃은 야생 곰과 마주치고 나서야 ) 타르라크와 크리스텔, 던컨을 떠올렸고 부랴부랴 편지를 써서 부엉이를 날렸다. 답장은 매우 빠르게 돌아왔다.
아무래도 그들은 밀레시안이 다크나이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여러 날의 잠을 설친 모양이었다.
밀레시안은 반성의 의미로 손을 꼽아보며 따로 연락할 사람이 더 없었는지를 생각해보았지만 더이상 기억나는 사람이 없었던지 그대로 루트라 강을 건너 엘프의 마을로 떠나갔다.
그리고 딱 한번, 쌍검술에 관심이 생겼던 밀레시안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대륙이동을 통해 던바튼으로 귀환했을때.
밀레시안은 없는 양심을 닥닥 긁어모아 반으로 갈라낸 뒤 에반과 아이던에게 각각 한 조각씩 상납해야만 했다.
그 뒤로 잠시 주변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울라에 머무르는가 싶었지만 그것도 잠시, 설원의 자이언트 여왕이 붉은색 피빛 머리의 남자를 보았다는 소식에 밀레시안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곳으로 날아갔다.
그 남자의 소식이 궁금하다고 왜? 밀레시안은 대답했다. 오해를 풀려고요.
그에게 있어서 밀레시안은 원수였다. 동시에 대적자였고, 친구의 지인이었으며, 그의 운명을 비틀어낸 원흉이기도 했다.
비틀다? 훔쳐냈다? 밀레시안은 무엇으로 정의내려야 할지 모르겠다며 오랜시간동안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 종족의 예언이 밀레시안의 손에 들어왔다.
셋이서 하나의 이야기를 나누어가진 고대 종족들의 유물은 일찍이 용의 시대부터 운명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말하고 있었다.
예언은 단순히 이야기를 전하는 것 뿐만이 아닌 누군가가 이를 보고 듣고 행하려 한다는 것 까지 담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밀레시안은 자신을 예언하는 용의 시대의 마지막 계약자를 찾아 낼 수 있었다.
그 계약은 태어날때부터 정해져 있었던 그의 운명이었으나 밀레시안은 그 운명이 그의 의지로 결정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둘렀고, 그래서 실수했다.
밀레시안은 이미 비틀어진 운명을 반대로 꺾는다고 해서 비틀린 자국이 반듯하게 펴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또한 그 운명이 강하고 억셀 수록 접혀졌던 과거만큼이나 깊고 고통스러운 자국이 남는 다는 것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렇게 밀레시안은 자신의 손으로 죽음을 추락시켰다. 시대의 끝을 알리는 드래곤의 계약자를 보며 절망했다.
밀레시안은 그토록 바래왔던 불멸을 삼킬 있는 용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음(포기)에도 내비치지 않았던 실망감을 드러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에리..?
루에리는 그토록 증오하던 대적자가 눈앞에 나타났는데도 증오를 내비치지 않았다.
서리조각으로 만든 꽃을 가슴에 품어야 비로소 마주 설 수 있었던 지옥같은 열기의 바닥아래서, 그는 거울과도 같은 눈빛으로 밀레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전에 없이 따스하고 또 연민에 가득 차 있었기에, 밀레시안은 제 본성이 얼마나 나약하고 또 추악한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거울에 비친 시선을 마주하고 나서야 밀레시안은 자신이 변질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변질됨은 자신뿐만이 아닌 무고한자의 영혼마저 잠식해나갔고 밀레시안은 이제 그 죗값과 마주하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가슴팍 아래로 뚝뚝 흘러내리는 서리방울을 눈으로 쫓으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고개가 한없이 무거웠다. 가슴에서 목으로 그리고 혀끝으로, 아릿한 통증에 밀레시안은 더듬거리며 희미한 소리를 쥐어짜내야만 했다.
미안하다고 내가 어리석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당신을 돕고싶었다고. 마리를 만난 타르라크의 웃음이, 아련하게 스쳐지나가는 마리의 한숨이, 당신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을 도왔던 것처럼 내가 당신을 도우면. 그렇게 당신들을 지켜보다보면. 나도 언젠가 그런 이들을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혹 그게, 당신들이 되어주지는 않을까.
밀레시안은 온기를 희망했다. 애정을 갈구했고 안식을 바라며 의지할 곳을 찾아 온 대륙을 떠돌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나조차도 내가 변했다는 것을 몰랐는데 그 누가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고 깨달은 순간조차 시간이 부족했다. 화산 아래 떨어진 눈물과 회한을 모두 모아쥐어도 은둔자의 깊은 칼데라호와 같이 깊을 수는 없으리라.
현명한 칼데라호수의 드래곤은 말했다. 아직 모든 운명이 결정된 것은 아니네.
해야할 것은 해야했고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막아야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운명은 뒤집히고 뒤섞이는 것을 반복했다.
밀레시안은 운명의 마지막 결과는 직접 확인해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묶이는 것은 누구이고 풀려나는 것은 누구였나.
영혼과 운명, 세계와 생명. 하나의 이름을 가진 양면의 동전.
밀레시안은 문 앞에 멈춰 섰다. 어둠 저편에서 작은 금속 동전이 떨어져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트라타의 윈드벨 소리였다.
벨소리가 울리자 꾸벅꾸벅 졸던 학생들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잠시 휴식시간을 갖겠습니다.
지루하던 연강의 오아시스같은 존재, 유일한 희망. 대부분 스트레칭으로 부활을 알렸지만 몇몇 과한 수면상태였던 이들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한채 고개를 흔들어야만 했다.
그 모습은 솔직히 조금 공포스러웠다.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이들은 흰자위를 드러내놓고 고개를 돌리며 알 수 없는 주문 외우기 시작했고 이 소리에 반응한 시체들이 격한 숨을 토해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주문은 눈동자에 검은자위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광경을 난생처음 본 외부강사는 흠칫흠칫 놀라며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얘네 무서워..
하지만 이러한 죽음과 부활이 일상이었던 학생들은 강사의 시선이 어찌되었건 생기가 돌아온 몸에 좀더 신선한 카페인을 보급하기 위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일뿐. 겉보기엔 좀비영화가 따로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떠나간 탓에 강의실은 순식간에 한산해졌다. 강사는 조금 불안한 눈치였다.
안돌아오는거 아니야? 눈으로 가방의 수를 헤아리던 강사는 유난히 깨끗하게 정리된 자리들을 눈여겨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신경쓰지 말자. 당당하게, 담대하게. 내 할일을 하는거야. 외부강사는 심호흡을 하며 탁상에 있던 작은 페트병을 들어 가볍게 입안에 흘려넣었다.
페트병 중간에 둘러진 노란색 포장지에는 나침반 마크와 함께 물의 용량과 성분, 수원지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프롬 더 스카하 아일랜드.
냉장고에서 꺼낸지 한참 지났지만 영혹의 산 꼭대기 만년설이 녹아 만들어진 청정수는 언제 마셔도 특유의 청량감과 신선함이 살아있어 사람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물 한잔 마시며 숨을 돌리고 있던 그때.
첫 출진으로 나갔던 좀비떼 1부대가 급하게 강의실로 뛰어들어오며 멀린을 크게 불렀다. 멀린형! 멀린형!
귀한 값 얼굴에 안경자국 날 세라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뿔테안경을 건 채 퍼질러 자고 있던 멀린은 뮤직비디오풍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평소라면 일반 좀비 2,3,4처럼 컥커거걱 하고 오만상을 찌푸렸을 테지만 촬영이 끝난지 얼마 안된 그의 얼굴에는 아직 비지니스용 아우라가 남아있는 상태였다.
나름 인기있는 아이돌이었지만 이미 멀린의 실체를 알고 있는 동기들은 사기치지 말라는 시선으로 멀린을 흘겨보고는 갑작스럽게 뛰어들어온 좀비 1을 돌아보았다. 형! 그 금발머리 정장남자가 또왔어요!
멀린은 뭔데 그거.. 라고 느릿하게 대답했다.
좀비1은 답답하다며 다시 소리쳤다. 그때 그 곱슬머리 멋있게 생긴 남자요.
멀린은 곱슬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하고 눈을 깜빡이다가 뭐! 하고 크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처음부터 열지도 않은 가방을 휘딱 둘러매고 입구를 향해 뛰어갔다.
강사는 노골적으로 튀는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뒤따라가는 좀비 1의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형 진짜 조폭 같은 무리들이랑 엮인거 아니에요? 요즘 뉴스에서 많이 그러던데?
멀린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계단을 내달리기 시작했고 멀지 않아 현관에 모여든 의문의 무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멀린은 머리하나 툭 튀어나온 금발머리의 남성을 바라보며 잽싸게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좀비1이 걱정한 것과 같이 검은색 정장을 쫙 빼입고 나타난 금발머리의 미남은 호스트나 마피아 적어도 이쪽세계의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 곱슬은 멋있었다.
멀린의 소리없는 문자가 소리쳤다. 아 왜!
톨비쉬는 환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멀린쪽을 바라보며 문자로 답장했다. 조카님 스케줄이 비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지. 가자, 일해야지.
멀린은 ㅗhhhhhhhhhhh하고 영타를 치다가 소심하게 지우고는 머리를 벅벅 문지르며 톨비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책략가와는 말을 섞지 않는게 상책이었고 그 말에는 문자 그림 비언어적 몸짓언어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멀린은 자기가 공항나갔을때도 이런 인파는 안몰렸다며 툴툴거렸지만 몰려든 인파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밖으로 나오자 마자 제 2진이 멀린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너머에는 붉은색 가죽의 수첩형 스마트폰 케이스가 인상적인 화려한 인상의 청년이 서 있었다.
보석처럼 빼어난 비취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청년은 잘빠진 검은색 세단에 기대어 선 채 핸드폰에 열중하고 있었다.
계절과 맞지 않은 조금 두꺼운 옷차림이었지만 저 얼굴이면 폭염주의보를 뚫고 눈이 내린다 하여도 믿을 수 있는 설득력을 가진거나 마찬가지였다.
아이보리색 케시미어 목도리를 두르고 있던 청년은 한 여름특가상품 홈쇼핑에 나온 목도리를 완판시킬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오셨네요. 얼른 타세요. 르웰린은 화면에 시선을 떼지 않은채 문을 열어주었고 멀린을(뒤따라 나온 톨비쉬를) 뒤따라나온 타과 학생들은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역시 방송관계자가 맞다니까! 아니야 일반인이라고 본인이 그렇게 말했어. 당사자들을 앞에둔 추측은 점점 불이 붙었고 이는 강의실이 있는 층 창가에 모여든 멀린의 과 동기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강의실로 되돌아온 좀비1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속삭였다. 역시 마피아라니까. 왜 마피아야 야쿠자일 수도 있지.
앗 아니야 방금 문열어준 남자애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유명한 재벌 집안 신시엘라크가의 장자야.
창가에서 한발 떨어져 스마트폰을 검색중이던 동기의 말에 창가의 무리들은 조용히 머리를 맞댄채 떠오르는 추측들을 한데 그러모았다.
누군가가 조용히 한 단어를 읊조렸다. 삼합회…?
멀린은 크게 재채기를 하며 코끝을 문질렀다.
글
카즈밀레)별의어항9
알베이에 도착한 밀레시안은 모두 5번의 던전을 클리어 해야했다.
처음은 붉은 색이었고 그 다음은 푸른색이었다.
이어 녹색, 은백색의 구슬을 통행증으로 사용한 던전을 클리어하며 종이에 적힌 네개의 구슬 조각을 모았고 이 조각들은 도우갈이 준 종이뭉치에 깃들어 있던 마법에 반응하며 하나의 구슬로 완성되었다.
밀레시안은 검은 구슬을 바라보며 여정의 끝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문제가 한가지 생기고 말았다. 부상이 한계치를 넘어서 버린 것이었다.
일반적인 던전이라면 여신의 가호 받는 석상의 앞 돌아오고 말았지만 이 알베이에는 그러한 가호가 없었다.
이곳에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거지? 밀레시안은 검은 구슬을 만지작 거리며 고민했다.
그대로 글라스기브넨에게 영혼을 빼앗기나? 아니다. 영혼이 필요로한 곳은 아디만티움에 바를 시료였으니 적어도 무언가의 공정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러면 마신이? 그것도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신의 필사적인 노력 덕분에 마신은 아직 밀레시안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티르나노이에 도착한 만큼 존재여부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여신과 같이 밀레시안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버려진 세계에서의 죽음은 불확실했고 밀레시안은 확실성이 없는 불멸에 제 목숨을 걸 수가 없었다.
이 지옥같은 장소에 와서야, 밀레시안은 가까스로 죽음의 가치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곧 선지자에 의해 해결되었다. 도우갈이 밀레시안의 고민을 알아챈 것이었다.
도우갈은 상처입은 몸으로 되돌아온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다 죽어가던 은백색 마석 던전의 헤비가고일이 마지막 발악과 함께 밀레시안의 검을 튕겨낸 탓이었다.
헤비가고일은 제 몸집만큼이나 커다란 커다란 가고일 소드를 휘둘러 낸 치명적인 상처를 내었고 밀레시안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이 몸으로 마지막 검은 구슬의 던전까지 클리어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판단했다.
도우갈은 에린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밀레시안의 말에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밀레시안을 에린에 돌려보낼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동시에 이곳에 머무르게 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도우갈은 밀레시안에게 제안했다. 아주 약간의 거짓을 섞은 진실된 제안이었다.
지금 떠나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가시겠습니까?
도우갈은 죽음의 두려움을 되찾은 밀레시안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숨죽여서 죽음을 두려워 하고 삶을 경외시하면 되었다.
이미 헛돌기 시작한 시간의 태엽은 다시 되감을 수 없을지 몰라도 지금의 밀레시안이라면 에린에서 살아가는 시늉을 할 수가 있었다. 그가 그러했듯이, 자기 자신을 잊은채 목적없는 삶을 살아가게되겠지만.
사는 건 사는 것이었고 죽는 것과는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밀레시안은 그의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지금 이곳을 떠나면 두번다시 이곳에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곳을 떠나는 이유는 커다란 부상. 일반적인 모험가라면 이런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고 밀레시안은 실제로 그러한 드루이드를 한 명 알고 있었다.
그는 생존을 위해서 반절의 삶을 짐승에게 내어주어야 했고 생으로는 도저히 먹지 못할 마력이 깃든 뿌리를 억지로 씹어 삼켜야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밀레시안은 그러한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단 한치의 상처면 충분했고 아주 잠시동안의 인내면 충분했다. 돌아올 수 있어요.
밀레시안은 제 단검을 만지작 거리며 대답했다. 대답은 언제나 밀레시안의 안에 있었다. 잠깐이면 충분해요.
도우갈은 손을 거두었다. 아하, 그렇습니까..?
반쪽짜리 깨달음, 도망치는 것을 포기한 여행자에게 내밀어줄 만큼 그의 손길은 값싼 것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다른 제안을 제시했다. 밀레시안에게 실험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럼 이런 방법은 어떻습니까. 당신이 돌아가는 이유가 그런것이라면 나에게 한가지 확인하고 싶은 가설이 있습니다.
당신이 조금을 수고스럽겠지만 세계를 기만하는 것 보다는 쉬운 일일 겁니다.
도우갈은 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세계에 좀비들이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의 육신은 이미 무너져 자신의 영혼이 무엇이었는지 조차 ‘기억해 낼 수 없지만’ 버려진 세계의 영혼들은 끊임없이 그 주변을 맴돌며 생에 대한 집착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죽은 육신은 그런 영혼을 다시 빨아들이고 다시는 놓치지 않기 위해 영혼을 속박하죠.
간절히 바랬던 육신이 감옥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당신의 살육으로, 이런 실례, 눈 먼 자비쯤이라고 돌려말하도록 하죠. 당신의 야만스러운 칼날로 잠시나마 그들중 몇몇을 해방시키기는 했지만 좀비들의 총 량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시 되살아났고 여전히 저 묘지를 떠돌고 있죠. 설명이 너무 길었습니까?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그들의 방식을 이용하는 겁니다. 당신은 당신의 영혼이 이곳에서 부활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있지만 그건 이곳에 당신의 육신이 없기 때문이죠.
저쪽에서는 소울스트림의 인도자가 당신의 육신을 복원시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겠지만 이곳은 다르니까요.
하지만 당신의 신체의 일부가 이곳에 있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내가 그것을 매개로 당신을 소환해 낼수 있다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지만 이미 있던 것, 예를 들면 혈액이나 모발, 뼈따위를 기반으로 같은 것을 흉내내는 것은 조그마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세계.., 아니 내가 또 무슨 말을. 저쪽 세계에도 그런 지식은 충분히 존재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신은 혹시 모르십니까? 뭐.. 당신이 몰라도 상관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당신이라는 특수성과 나의 불완전한 기억, 버려진 세계라는 조건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일단 어느정도의 측정은 필요 한것 같습니다. 네, 당신이 해야할 수고로움 말입니다.
한 50마리정도, 묘지에 있는 좀비들을 해치워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이곳에서 부활 할 수 있는 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같습니다. 어떻습니까?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도우갈은 웃었다. 도망치는 길을 포기하겠다면 차라리 그 길을 없애버려주겠다고.
밀레시안은 도우갈이 자신을 치료하는 대신 처음부터 이러한 방법을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한마디의 원망도 내비치지 않았다. 고통은 기억이었고 기억은 영혼이었다.
밀레시안은 자신의 삶을 되살려준 이 지옥을 사랑했지만 이 땅에는 한 줌의 희망도 없었다.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고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신뢰는 신뢰가 아니었다.
밀레시안은 이제 도우갈이 자신을 신뢰 하지 않는 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밀레시안도 마찬가지였다.
밀레시안이 도우갈에게 품었던것은 연정도 동경도 아닌 일방적인 믿음이었다.
그저 맹목적으로 매달리려고 했던 믿음. 기도. 당신은 여신과 같이 나를 버리지 않을거라는 광신.
그렇다면 저쪽 세계를 향한 믿음은 어떤가. 고민할 필요도 없는 명백한 사실이 눈앞에 있었다.
그 땅에 희망이 있었다면 밀레시안은 망설임없이 그곳으로 도망을 쳤으리라.
그러나 밀레시안은 밀레시안은 50마리의 좀비를 쓰러트리고 다시 도우갈의 앞으로 돌아왔다.
참으로 용기가 가상한 여행자의 만행이었다.
도우갈은 마지막 실험 쟤료로 밀레시안에게 이곳에 묶어둘 육신의 일부를 요구 했다.
뼈라도 발라내야 하나? 밀레시안은 막연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고 도우갈은 취미가 나쁘다며 밀레시안을 비난했다.
도우갈은 지팡이에 의지한채 밀레시안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콰득.
기울여진 고개를 따라 얕은 피내음이 올라왔다. 밀레시안은 눈을 감았고 약간의 통증을 참아내었다.
의식이 아득해지며 온 세상에 어둠이 가득차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그 어둠속에서, 밀레시안은 돌이 아니었다.
다시 깨어난 세계는 버려지고 황폐화된 밀레시안의 낙원, 초대받지 않은 세계, 타르라크가 티르 나 노이라고 부르던 거짓된 낙원의 땅이었다.
다시 한번 제 손으로 영원을 부여한 밀레시안은 시간이 멈춰 있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 문장이 읽혀지지 않았기에 시간은 밀레시안을 허락하지 않았고 밀레시안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별을 지켜보던 자의 대답이었다.
카즈윈은 그 이야기를 꽤나 오랫동안 별의 어항을 외면하고 있었다. 사실 다 읽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예전과는 한참 달라져 있었고 그 미묘한 변화를 좀 더 적극적으로 부추기려는 이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티타임을 즐기던 L대리였다. 티켓예매계의 마탄의 사수, L대리의 손에 쥐어진 디바콘서트의 티켓은 곧 그의 상사에게로 넘어갔고 그 상사는 그 티켓을 미끼로 집안에 틀어박힌 조카를 불러내었다.
이번 디바의 콘서트를 위해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일하던 조카. 그렇게 안맞는다던 J가(家)놈과 같이 촬영도 하고 콘서트날 최고의 컨디션으로 가야한다며 멀쩡히 다음달로 잡혀있던 해외스케줄을 앞당기는등의 의욕을 불태우던, 하지만 그 앞당인 스케줄때문에 티켓예매전에 참가조차 못해서 하얗게 불타버린 바보같은 그의 조카.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조카님은 다시 태어나도 천재로 태어날 귀한 인재였고 톨비쉬는 그런 그를 귀애했다.
사랑을 담은 티켓을 손에 넣은 팬닉네임, 치킨과 디바를 사랑하는 마법사는 즉각 업데이트를 시작했다.
그 소식은 오래 지나지 않아 각각의 별의 어항 사용자들에게 전달되었고 이는 예외없이 카즈윈의 핸드폰에도 전달되었다.
띠링띵! 잠시 숨을 돌리며 다음 지역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던 카즈윈은 잠금화면에 떠오른 낯선 메세지를 발견했다.
한번은 본적이 있는 삼각형모양의 뱀머리 아이콘이었다.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어플을 재시작시 자동으로 적용됩니다.’
메세지가 도착한 시각은 두어시간 전. 카즈윈은 통신 연결이 불가한 지역에 들어가 있었던 핸드폰이 어떻게 업데이트를 다운 받은 것인지 의아해했지만 두어시간 전의 메세지가 지금 떠오른 것을 보면 업데이트는 더 이전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자신을 납득시켰다.
깊게 생각할 것 없어. 어차피 그는 다시는 이 이야기를 읽지 않을 것이고 어플이 업데이트 되었든 말든 상관없었다. 카즈윈은 내친김에 어플을 아예 삭제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평소와 같이 별의 어항의 아이콘을 꾹 누르며 아이콘이 흔들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장갑에 묻은 오물탓인지 핸드폰은 좀처럼 카즈윈의 터치를 인식하지 못한채 조용히 사용자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카즈윈은 몇번인가 검붉은색 자국을 남기며 화면을 두드렸고 이내 짜증스럽게 액정을 닦아내었다.
끈적하고 불그스름한 자국이 화면 위로 넓게 드리워졌다.
카즈윈은 아예 바지춤에 화면을 닦았고 성의없이 닦여진 화면은 차라리 닦지 않은 것만 못한 처참한 꼴이 되어버렸다.
화면을 잠그지 않고 닦았기 때문인지 화면에는 무언가의 어플이 작동되어 새하얗고 까만 줄들이 가득 늘어서 있었다.
오래간만에 읽는 ‘별의 어항’의 텍스트였다.
카즈윈은 엉겹결에 눌려진 화면에 잠시 눈이 갔지만 이내 보이는 문구 한줄에 인상을 찌푸렸다.
밀레시안이 도우갈에게 목을 내어주는 장면이었다.
카즈윈은 아예 전원키를 눌러 핸드폰을 강제종료 시켰고 옆에서 죽은 듯이 누워있는 부하직원을 걷어찼다.
다음 퀘스트 찾아봐. 시체처럼 잠들어있던 헤루인은 컥거걱 하고 깨어나 졸린 눈을 부비며 되물었다.
네? 이번 퀘스트 스케줄은 전부 팀장님이 고르신다면서요.
카즈윈은 핸드폰 베터리가 나갔다고 얼버무리며 눈썹을 찌푸렸고 헤루인은 얌전히 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팀장님 핸드폰 꺼져있으면 다른 부서에서 뭐라고 하지 않아요? 요즘 외장베터리도 안가지고 다니시던데...
핸드폰으로 알반에 접속하던 헤루인은 조용히 입모양으로 혹시 퇴근은.. 언제쯤..? 하고 뻐끔거리며 카즈윈의 눈치를 살폈다.
동시에 퇴근이라는 소리에(분명 소리는 안났지만)반응한 이들이 여기저기서 벌떡벌떡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람같은 몰골로 귀를 쫑긋 세운 좀비들이 간절하게 카즈윈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아니지, 좀비같은 몰골의 사람. 카즈윈은 제 관자놀이를 누르며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이 헛나가는걸 보니 피곤하긴 피곤한 모양이었다. 카즈윈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이 원하는 답변을 내어주었다.
그걸 마지막으로 하지. 카즈윈의 팀원들은 환호했고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고르라며 핸드폰을 든 팀원에게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꼭 이럴때만 가장 지랄맞은 임무가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즈윈은 기분좋은 미소를 띄워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렸다.
카즈윈은 물이 쏟아져 내리는 샤워기 아래 머리를 박았다.
이미 한번 씻고 온 몸이지만 스며든 냄새라는게 그리 쉬이 가시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카즈윈은 유난히 뜨겁게 그리고 오래 샤워를 한 뒤 안방으로 들어갔다.
푹 젖은 머리를 말리지 않은채 침대위로 쓰러졌기 때문에 베개는 금방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것처럼 피곤했지만 감겨있는 눈꺼풀이 쉼없이 꿈틀거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머릿속에 밀어 넣은 다량의 정보들중 일부 같은 말을 반복했고 자극적인 기억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회사 샤워실에서 만난 루나사의 팀장의 얼굴이었다.
작작해라 이자식아. 집에 좀 가자..!! 루나사의 치약거품어린 절규를 머릿속에서 밀어내버린 카즈윈은 아직 멀었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전원을 꺼놓은 핸드폰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오늘 하루는 베터리가 나갔다는 핑계로 방치해 놓았지만 내일 있을 일을 생각하면 다시 켜놓는 것이 옳았다.
카즈윈은 화장실앞에 뱀 허물처럼 벗겨진 바지를 털어내며 뒷주머니에 꽂혀있던 핸드폰을 챙겨들었다.
핸드폰이 켜지고 익숙한 잠금 화면이 보였다.
순서대로 부재중 전화와 메세지, 메신저, 그리고 마지막으로 확인한 알림창 베너가 눈에 들어왔다.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어플을 재시작시 자동으로 적용됩니다.’
카즈윈은 8시간 전으로 변해있는 베너를 바라보았다. 왜 안없어졌지.
카즈윈은 눈에 띄는 알림메시지라도 지우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베너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잠금화면 자체가 풀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액정에 말라붙은 오물이 문제인 모양이었다.
카즈윈은 짜증스러워 하며 안방으로 돌아가 물티슈 두어장을 뽑아들었지만 그는 또다시 6시간 전에 있었던 실수를 반복했다.
꺼지지 않은 화면은 물기 어린 휴지에 의해 깨끗이 닦이는 대신 무작위로 눌려진 화면중 일부를 인식했고 화면은 하얗게 빛을 내었다. 어김없이 뱀모양의 아이콘이 시계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카즈윈운 23가지의 업데이트중 21가지가 완료된 뒤에야 업데이트중 이라는 글씨를 발견했고 지긋지긋하다는 한숨과 함께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이내 그러한 경멸마저도 포기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기피한다는 것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일 뿐이야. 하지만 진심으로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카즈윈은 어플이 켜지던 말던 신경쓰지 말아야했다.
싫어한다는 것, 실망했다는 것, 이런 이야기가 취향이 아니라는 것조차 그에 대한 반증.
카즈윈은 이 이야기에 제법 취미를 붙이고 있었고 또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원한 것은 밀레시안의 비참한 결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는 납득이 가능한 결말을 원했다.
도망쳐. 그가 봐왔던 밀레시안은 충분히 도망칠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싫으면 싫다고 말해. 객관적으로 봤을때 밀레시안은 지나친 호인이었으나 이용당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따박따박 제 몫의 급료를 챙기고 이따금씩 잔머리를 굴리며 상대의 호감을 이용했다.
진지한 모습은 찰나였고 철없고 게으른 행동이 대부분이었다. 부당한것을 참지 못했다.
사소한 행운에 기뻐했다. 격렬한 감정에 휩쓸리기 쉬웠고 타인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사람들과의 교류를 소중히 여겼고 에린에서 살아가는 순간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 사랑속에 기댈 이름이 없었기에 밀레시안은 끊임없는 외로움에 휩싸여야했다.
이해를 원했지만 그에 앞서 속내를 털어 놓을 길이 없었다.
그것이 적어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도우갈)의 앞은 아니어야 했다.
더욱이 그가 한번 자비를 배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밀레시안은 제 발을 움직여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밀레시안은 운명앞에 무릎꿇었다. 카즈윈은 저항할 의지조차 상실해버린 밀레시안에게 실망했다.
그러한 이야기가 결말이 가리키는 끝은 명백했기에 카즈윈은 구태여 그 끝을 확인하려 조차 하지 않았다.
바로 지금, 업데이트가 되기 전까지는.
카즈윈은 새로 업데이트된 메인 화면을 보며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인터페이스는 커녕 카운트 다운만 표시되었던 메인화면의 시계 아래에 앙증맞은 아이콘들이 생긴 것이었다.
메인스트림, 외전, 문의하기, bgm칸이 생겼지만 카즈윈은 다른 것은 살펴볼 것 없이 문의하기에 손을 올렸다.
그가 아직도 발열이 나면서 강제종료되었던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즈윈은 미묘하게 그날 이후로 핸드폰이 버벅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장비관리실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이야기만 반복하며 핸드폰을 카즈윈에게 되돌려주었다.
주변에 기계에 익숙한 녀석들에게 맡겨보았지만 대답도 모두 한결 같았다. 의심은 가는데 심증은 없고, 물증도 없고.
카즈윈은 빨리 문의하기 창이 활성화 되기를 바랬지만 카즈윈을 반기는 것은 이 기능은 아직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라는 임시 메세지창 뿐이었다. 카즈윈은 핸드폰을 집어던졌다.
푹신한 이불이 핸드폰이 받을 충격을 완화시켜준 것과 달리 카즈윈이 받은 짜증은 조금도 완화되지 않았다.
간만에 업데이트했으면 제대로 하라고.
업데이트를 한 당사자는 코가 간질간질 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킁킁거리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입을 씰룩이며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그쳤다. 이상하다. 누가 내 욕하나?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하던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만) 한없이 조잡한 디바의 공식 블레이드 원드는 어느 새 무지개빛 빔 소드로 거듭나고 있었고 치킨과 디바를 사랑하는 마법사는 자신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누가 뭐라하든 그는 기분이 최고였기에 그의 손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어플을 업데이트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손놀림이었다.
그 열정으로 일을 해… 그의 매니저는 미간을 매만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딘가의 어플관리자가 마개조된 블레이드 원드를 휘두르고 있는 동안 카즈윈은 평소의 침착함으로 되찾은 뒤 조용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집어 던진 핸드폰은 이불의 어느 면과 접촉되었는지 또다른 화면으로 넘어가 있었다.
메인스트림으로 쓰여진 첫번째 아이콘이었다. 카즈윈은 6개의 챕터로 구성된 하위 목록을 보며 감흥없이 손을 움직였다.
각각의 챕터에는 2~3개의 제네레이션(Generation)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그중 활성화 되어 있는 것은 첫번째 제너레이션 뿐이었다.
카즈윈은 유일하게 활성화된 G1로 들어갔다.
뒤이어 떠오른 화면은 카즈윈에게 익숙한 옛 화면, 업데이트 되기 전의 이야기 목록창이었다.
카즈윈은 어차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나간 이야기들을 하나 하나 클릭하며 같은 경고창이 뜨는 것을 확인했다.
이미 열람한 ‘영혼의 정보’는 다시 열람 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별의 어항’을 작성하시길 바랍니다.
카운트다운을 하며 차례차례 공개 되는 이야기들은 카즈윈이 알고 있지 못하는 것일뿐, 그 배열은 이미 한 방울의 피(영혼)로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만약 자신이 새로운 결말을 찾아 새 어항을 구매한다고 해도 이 21가지의 이야기는 변하지 않으리라.
카즈윈은 이 이야기의 결말이 이미 어떠한 한가지 형태로 정해져 있다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예상은 또다시 절반의 정답일 뿐이었다.
그가 생각해내는 모든 답은 불완전했고 그가 예측할 수 있는 결말 또한 그러했다.
불완전하게 막을 내린 무대는 그 다음으로 이어지고, 또 다음으로 이어지고. 지나온 이야기가 제 아무리 길다 한들 그가 읽고 있었던 이야기는 첫번째 이야기의 마지막 에피소드일뿐.
결말을 추측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카즈윈은 이어질 수많은 시대의 이름들을 보며 다시한번 이야기를 불러들였다.
그저 밀레시안의 여정이 언젠가 온전히 보상받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그는 마지막 문장을 끌어당겼다.
카즈윈은 거짓된 낙원의 땅을 보았고 시계는 다시한번 거꾸로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어항의 불이 꺼졌다.
유난히도 깊고, 어두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