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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비밀레) reload #13(4)
“당신은 정말로 이 자가 협력할 거라 생각하나요?”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지 말게..”
포워르의 연구원, 마우러스는 밀레시안에게 멱살이 잡힌채 그렇게 대답했다.
타르라크는 냉기가 흘러나오는 실험대를 기대며 호흡을 고르고 있었고 루에리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오는 변이체들을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눈을 깜빡이며 어둠이 눈에 익기를 기다리는 타르라크의 귓가에 그의 목숨을 노리는 변이체들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변이체들을 풀어낸 것은 다름 아닌 마우러스, 타르라크들이 이곳으로 올 것이라 예상했던 것인지 마우러스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듀얼건을 장전한채 실험실 한 가운데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루에리는 그들에게 협력하게된 이유를 이야기 하며 마우러스를 설득하려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쓴미소가 어린 거절의 대답뿐.
연구실의 불이 꺼지는 순간, 마우러스는 타르라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인양 밀레시안이 마우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우러스는 방호벽으로 된 반투명한 부스로 도망쳤다.
뒤따라 달려나오는 변이체들에게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이성이 남아있을리 없었다.
동결캡슐에서 벗어난 변이체들은 두어걸음 잠에 취한듯 머뭇거렸지만 이내 바람빠진 쇳소리 같은것을 울부짖으며 양 손을 움켜쥐었다.
비늘사이에 끼어있던 서리조각이 깨어지고 따뜻한 온기속에 녹아내렸다.
글라스기브넨의 변이체들은 더 많은 열기를 갈망하며 살아있는 생명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방안에 있는 네명의 사람중 부상을 입은 타르라크를 향해 달려드는 것은 이미 예상되었던 결과였다.
루에리는 타르라크를 지키기위해 앞으로 나섰고 밀레시안은 그대로 마우러스를 쫓아 방호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간발의 차이로 밀레시안은 마우러스를 놓치고 잠겨진 부스벽 앞에 멈춰서야했다.
주먹으로 내리친다 한들 그 문이 열릴리는 없었다. 마우러스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부스벽 밖에서 노려보는 밀레시안을 향해 듀얼건을 겨냥했다.
밀레시안을 눈치챈 변이체 몇몇이 무방비하게 드러나있는 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타르라크가 밀레시안에게 경고했다. 밀레시안은 문고리를 놓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단단한 비늘로 덮힌 주먹이 방호벽을 후려쳤다.
철판을 뚫어낼것같은 굉음이 연달아 울렸지만 방호벽은 금하나 그어지지 않은 모습으로 굳건히 그 자리에서 세워져있었다. 마우러스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모습이 보였다.
밀레시안은 양 손을 모은채 글러브를 조작했다. 새까만 장갑의 솔기를 타고 새파란 스파크가 파직거리며 타올랐다. 밀레시안은 빛이 나기 시작하는 양 손을 말아쥐며 스텝을 밟았다. 어둠속에서 파란 빛이 흔들린다.
광원에 흥분한 변이체들이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밀레시안에게 달려들었다.
밀레시안은 재빨리 변이체들의 손톱을 피해내며 스파크가 발동된 주먹을 휘둘렀다.
비늘사이사이로 파고들어간 전기적 충격이 변이체들의 몸안을 파고들어갔다.
칠흑같이 어두운 연구실안에서 검은 비늘의 변이체들이 보일리가 없는데도 밀레시안은 침착하게 남은 변이체들을 기절시키고서는 다시 방호벽 가까이다가갔다.
빛은 희미해졌지만 아직 밀레시안의 손은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문고리를 움켜쥐자 벽의 경계선을 따라 푸른 전류가 퍼져나갔다. 밀레시안의 입이 달싹였다. 열어.
밀레시안의 반지가 아주 짧게 램프로 응답했다.
부스의 문이 열리자 마우러스는 책상의 뒤로 도망쳤다.
실험기구며 서류철따위를 아무렇게나 밀어내며 다급하게 듀얼건을 발사했다.
변이체의 괴력앞에서도 금조차 가지 않았던 방호벽은 마우러스의 성급한 사격을 맞고 설탕유리마냥 부스스 깨어져 나갔다.유리가 깨어지는 소리에 타르라크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밀레시안이 도망치려는 마우러스를 쫓아 그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마우러스가 벽에 부딪치며 책상위의 물건들을 쓰러트렸다. 유리병이나 자잘한 소재따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우러스의 멱살을 잡아챈 밀레시안은 근처에 떨어진 작은 메스를 집어들었다.
이름모를 날붙이가 휘둘러졌다. 타르라크는 저도모르게 밀레시안의 이름을 부르며 그만두라고 소리쳤다.
순식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깔끔한 일련의 동작, 목을 향해 정확하게 휘둘러지던 밀레시안의 손끝은 거짓말처럼 마우러스의 목덜미 바로 위에서 멈춰섰다.
반쯤 무너진 유리를 사이에두고 밀레시안은 타르라크를 돌아보지 않은채 물었다.
이 사람이 협력할까요? 한번의 믿음은 행운을 불러왔지만 두번의 믿음은 배신을 불러왔다.
마우러스는 쓴웃음과 함께 어리숙한 믿음의 대가를 총성으로 되돌려주었다.
망설임은 타르라크의 것이었지만 총구가 향하는 곳은 타르라크가 아닌 밀레시안의 미간, 뜨거운 열기가 밀레시안의 귓가를 스치고 날아갔다.
그나마 반쯤 세워져있던 방호부스가 깨어져내렸다.
밀레시안은 가까스로 마우러스의 손목을 꺾어내었지만 그 과정이 온건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노쇠한 연구자의 손목은 부러진 가지처럼 바깥을 향해 돌아갔다. 마우러스의 비명이 울리고 듀얼건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비탄과 고통에 찬 외마디의 비명이 메아리처럼 요동치며 가슴을 파고들어왔다.
머리가 뜨거웠다. 흘러넘친 열기를 식힐 길이 없어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는 실험대에 기대어 앉는동안 온 몸에서 버석서리는 환각이 느껴졌다.
타르라크는 눈을 질끈 감은채 마우러스의 비명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외면한다 한들 이 참상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가쁘게 차올랐던 호흡은 가라앉았다.
두어번 심호흡을 더 내쉬고 나서여 겨우 눈을 뜰 수 있게된 타르라크는 어쩐지 실험실이 이전보다 더 잘보이게 되었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아마 착각은 아닐 것이다. 몸 그자체를 양분삼아 검은 비늘이 자라나고 있었다.
손가락에서 손등, 손등에서 팔목. 이 눈또한 그 영향안에서 변이되고 있으리라. 쉬고 있을 틈이 없었다.
타르라크는 어둠에 지나치게 적응된 눈을 돌려 어디론가로 굴러떨어져버린 모리안의 반지를 탐색했다.
루에리는 점점 민첩해지는 변이체들의 공격을 버거워 했고 이제는 가까스로 막아내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군소리 하나 없이 타르라크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동결되었던 캡슐에서 냉각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질척한 발소리들이 그들을 둘러쌌다.
팔을 물어뜯는 변이체의 목을 베어냈을때 루에리는 이 이상은 버티기 힘들다고 소리쳤다.
흩어진 비늘조각 중에는 아직 붉은 빛이 남아있는 혈흔이 묻어있는 조각들이 섞여있었다.
루에리는 점점 가빠져오는 숨을 삼키기위해 헐떡였고 그의 글라스기브넨도 슬슬 제어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가능한한 빠르게 해결할 것을 확인하고 이 장소를 떠나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루에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실험실의 복도측 창가에서 희미한 붉은 빛이 어른거렸다.
잠시 타르라크들의 위치를 놓쳤던 키홀이 직접 안드로이드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굴위로 안드로이드들의 붉은 레이저가 스쳐지나갔다.
타르라크는 여러겹으로 겹쳐버린 상황을 생각하며 위해 바닥에 엎드렸다. 회색빛으로 보이는 실험실 바닥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물체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변이체들을 풀어낸 것은 마우러스, 마우러스는 타르라크들이 이곳으로 오는 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에리는 마우러스가 이러한 준비를 하고있다는 것이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무방비하게 마우러스에게 다가가려 시도했다.
그건 적어도 이전까지는 마우러스가 루에리에게 우호적이었다는 증거.
하지만 마우러스는 그를 공격했다. 탄환은 빗나갔지만 루에리는 그의 공격에 적잖이 당황했다.
알비의 연구소는 모두 개별적으로 분리되어있었고 각자의 연구원들은 자신의 실험실을 벗어날 수 없었다.
무엇이 일어나든 무슨일이 생기든, 연구원들은 모두 지정된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장소를 이동할 때조차 상부의 요청이 떨어져야만 이동 할 수 있었다.
모든 실험실은 주기적으로 순찰을 도는 안드로이드들에게 감시되고 있었고 그 사이를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한 글라스기브넨의 적응체인 루에리뿐이었다.
루에리는 다시 이 장소로 돌아오게 된 타르라크를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죽은 줄 알았던 동료를 만나는 기쁨과 아직까지도 모리안에 휘둘리는 타르라크의 선택 앞에 괴로워했다.
타르라크 또한 죽은 줄 알았던 루에리가 그나마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그르렁거리는 숨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감상에 젖을 시간따위는 없었다. 가까스로 치명타를 피하게된 밀레시안은 자신이 휘저어낸 외벽속 전선들을 가리키며 이정도 손상은 곧 회복될 것이라고 소리쳤다.
밀레시안을 기억해낸 루에리는 다시는 싸늘한 시선으로 밀레시안을 돌아보았지만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을 보호하듯 가로막았다. 그는 루에리에게 진심어린 목소리로 부탁했다.
루에리는 기가막히다는 표정이되어 타르라크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루에리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굴러다니던 헬멧을 다시 주워들었다. 검은 용의 가면을 뒤집어쓴 검은 기사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타르라크는 밀레시안과 함께 순찰루트의 역방향으로 돌아 마우러스의 실험실로 안내했다.
복도를 달리며 루에리는 바로 나갈것을 권고했지만 밀레시안은 타르라크에게 해독제를 주기 위해서는 글라스기브넨의 실험체가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루에리는 그런 이유라면 자신에게 사용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박했지만 밀레시안은 그 선택은 타르라크가 내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타르라크는 루에리를 바라보았다. 검은 투구너머로 시선이 마주친다.
그것이 신뢰인지 의심인지는, 밀레시안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마우러스의 실험실까지 걸린시간은 불과 수 분, 루에리의 이탈때문에 상부측에서 조금 더 빨리 습격자의 정체를 알아 낼 수 있었었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워르가 각각의 연구원들에게 주의지령을 내렸을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마우러스는 왜..? 누구를 경계하고? 무엇을 위해 그 방아쇠를 당겼을까.
루에리는 달려드는 변이체의 목 깊숙이 나이프를 박아넣으며 그대로 바닥까지 찍어내렸다.
앉아있던 타르라크와 변이체의 눈이 마주쳤다. 변이체는 어둠속에서도 타르라크를 선명하게 알아본다는 듯 괴성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루에리가 소리쳤다.
“타르라크..!”
어둠속 유일하게 빛을 내는 은빛이 손끝에 걸려들었다. 생각할 시간은 이제 끝났다.
변이체는 자신의 목을 고정하는 나이프를 빼내기 위해 버둥거렸다. 목을 긁어내리다 루에리를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짙어지는 피냄새에 변이체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타르라크가 루에리의 나이프를 움켜쥐었다.
손이 자유로워진 루에리는 곧장 뒤로 달려나가 타르라크가 기대었던 실험대를 잡아 당겼다.
끔찍하게 무거운 소음이 끌려왔다. 타르라크의 앞으로 커다란 실험대가 쓰러졌다.
루에리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타르라크를 흘끗 돌아보았다.
타르라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이프를 잡은 손이 푸르게 빛난다싶은 순간 일순 터져나오는 섬광과 함께 변이체의 날카로운 숨소리가 울렸다.
겨우 변이체를 기절시킨 타르라크는 모리안의 반지를 고쳐쥐었다.
힘없이 들어올려진 변이체의 손가락에 검은 비늘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검은 피로 범벅된 변이체의 손은 매우 미끄러웠다.
힘을 주어 움켜쥘수록 변이체의 손은 이리저리 빠져나가며 흔들렸고 타르라크는 울컥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기위해 이를 악물어야했다.
목덜미에서 찌걱거리는 기분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비늘이 점점 타르라크의 머리를 향해 뻗어올라오고 있었다.
살이 에어지는 고통은 가슴께로 번져내려갔다. 심호흡 그리고 한숨, 숨을 들이마시고 내어쉬었다.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잠시동안이지만 어두컴컴하던 실험실 안이 대낮처럼 밝게 보이는 듯한 환각이 찾아왔다.
바로 지금. 타르라크가 변이체의 손가락에 모리안의 반지를 채워 넣었다.
타르라크의 손가락을 파고들어갔던 반지가 한번 빛을 반짝였다.
마찬가지로 모리안의 반지가 반짝였고 밀레시안의 반지가 반짝였다.
변이체에게 끼워진 모리안의 반지로부터 희뿌옇게 피어오르는 연기속에는 살갗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섞여있었다.
타르라크가 반사적으로 소매로 호흡기를 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바로 등뒤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루에리 또한 뒤를 돌아보았다.
은빛으로 빛을 내는 반지의 연기는 순식간에 변이체의 몸 여기저기에서 뿜어져나왔다.
나이프가 꿰뚫어낸 목의 구멍을 기점으로 변이체는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며 마구잡이로 버둥거렸다.
글라스기브넨의 비늘이 녹아내려가고 있었다.
비늘이 녹아내린 변이체의 피부는 인간의 것처럼 매끈하게 드러나있었다.
단지 그 피부가 전부 드러난채 속살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는 것만을 제외하면.
서서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변이체를 바라보던 도중 잊고있었던 총성이 연달아 울려퍼졌다.
섬광은 하나였지만 타르라크와 루에리는 그것이 두개의 탄환이 폭발하며 터져나오는 빛인 것을 알아보았다.
뭉뚱그려진 소리를 섬세하게 나누어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타르라크 또한 이미 루에리만큼 변이되었다는 증거, 마우러스가 도망쳤던 방호부스쪽에서 섬광과 함께 검은 무언가가 날아들어왔다.
그게 무엇인지는 살펴볼 것도 없었다. 타르라크가 밀레시안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려는 순간 어둠속에서 그르렁거리는 숨소리가 울려왔다.
폭발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빼곡히 돋아나있던 비늘들이 어둠속에 속아들었다.
비늘이 사라진 새하얀 팔이 걷히며 밀레시안이 얕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 눈빛은 고민할 여지 없이 의심의 눈초리였다.
“왜….?”
타르라크가 변이체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밀레시안은 마우러스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사납게 노려보는 푸른 눈빛이 밀레시안을 응시했다. 틀어쥔 멱살을 조금 더 밭게 죄이며 그가 놓쳐버린 듀얼건을 바라보았다.
오렌지색 태양의 무늬가 반짝이는 오라클 콜트, 밀레시안이 마우러스에게 물었다.
“왜 퀘사르가 포워르의 연구원인 당신과 협력하고 있는거지요?”
“.....모리안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이다.”
마우러스의 답변에 밀레시안이 인상을 찡그렸다.
깨어진 유리벽 너머로 루에리와 타르라크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피냄새가 호흡속에 녹아들고 뜨거운 열기가 뺨을 간지럽혔다. 새까만 어둠속 이름모를 기계들의 불빛이 반짝였다.
열기와 불빛, 그리고 비명소리. 한 손에 들어올듯 작디 작은 실험실 보석함처럼 반짝임이 모여있는 작은 상자안을 들여다보던 검은 용의 조각상이 속삭인다.
밀레시안은 무너진 돌조각이 속삭이는 말소리를 그대로 따라 읽었다.
“당신이 만든 바이스의 시약에 대한 데이터는 전부 바이브카흐에 귀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전부 도르카페다인이 처리했지요. 그러니 당신이 누구에게서 자료를 얻었는지를 알아야겠습니다.”
“바이브카흐가 아니라 칼리번이겠다. 그리고 그 데이터가 칼리번에게 저장되어있었을지 언전 연구물들은 온전히 바이스의 것이야.
바이스는 분명 포보르의 도움을 받아 연구를 했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약속을 정한뒤 모든 일을 시작했었지.
필리아의 그랜드마스터는 그렇게 무르지 않다.”
“그녀의 연구는 칼리번이 없었다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녀의 연구와 집념이 칼리번에 닿아 두번째 변화가 일어났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아발론은 존재하지 않아.”
“궤변입니다.그녀들의 연구는 오로지 실리엔을 치료하기 위해서만 존재했어요.”
“글쎄다, 그게 궤변이라면 네반의 연구소에 있었던 두 AI들은 어떻게 설명할테지?”
“........”
마우러스는 나지막히 웃음을 지었다.
그는 밀레시안이 잠시 입을 다물게 된 것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래, 바이스는 결국 자신의 연구를 완성하지 못했다.
필리아로 보내려던 연구물을 중간에 탈취당했고 데이터로 남은 자료들조차 역병의 밤에 불타올랐지.
너희 바이브카흐가 칼리번을 복원하기는 했지만 그 조차도 불완전한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마하와 네반은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모든 포보르의 연구원들을 모아 리소스로 이용했지만 그들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그들의 기억과 남아있던 연구자료들, 재구성하는 실험의 기록들. 그래 칼리번은 다시한번 그 당시의 연구상황을 재현하였다.
그것이 모여 최종적으로 형성된것이 당시 바이스들의 인격, 그것을 흉내내는 AI들이 완성 되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너희들 모두가 실패작이야.”
“모리안님은 베이스가 된 데이터칩이 일부 손상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칼리번을 위해 만들어진 보조적인 프로그램에 불과합니다.”
“세상 누가 그런 비겁한 변명을 믿을까..”
“모두가요, 당신이 등돌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밀레시안의 서슬퍼런 목소리에 마우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나는 에린에게서 등을 돌렸고 칼리번을 배신했다.
어차피 죽을때까지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야..”
“......그럼 죽기전에 순순히 협력자가 누구인지 말하세요.”
밀레시안은 나이프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건 너희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마우러스는 밀레시안의 얼굴근처를 스쳐지나가는 레이저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우러스의 말대로 실험실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실험실은 마우러스가 강제로 깨워낸 변이체들이 날뛰고 있었고 밖은 이미 키홀이 배치한 안드로이드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공기가 긴장되어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은 아직 실험체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지만 만일 폭주한 실험체들이 실험실 밖으로 나가려 하거나 그들중 누가 실험실의 문을 열고 나온다면 지체없이 이 곳을 통채로 날려버릴 심산인 것 같았다.
루에리도 그의 방식을 알고 있기때문인지 실험체들을 밖으로 내던지기 보다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고 타르라크 또한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실험체를 잡아 누르며 반지를 끼워넣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자신의 반지를 한번 흘겨본뒤 다시 마우러스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밀레시안이라 하더라도 세번째 반지가 활성화되지 않으면 저 안드로이드들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타르라크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밀레시안은 마우러스의 목을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장갑의 끝이 마우러스의 목을 파고들었다.
손안이 흔들린다. 이 흔들림의 이름은 망설임일 것이다.
하지만 밀레시안은 그 이상을 쥐지 못한채 고개를 숙였다.
호흡이 흐트러져가고 있었다. 마우러스가 아닌 밀레시안의 것이, 불안하게 요동치며 알수 없는 불안감을 재촉하고 있었다. 흐느낌이 번져나갔다. 들이 마시고 내쉬는 숨결속에 하얀 김이 서려있었다.
추위가 느껴졌다.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모를 서늘한 북녁의 바람이 밀레시안의 가슴안을 휘젓고 있었다.
속삭이는 말소리가 검은 용의 파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것은 새하얀 입김이 환상처럼 마우러스의 머리카락위로 흩어지고 난 직후의 일이었다.
조금 더 작은 조각의, 부러져버린 용의 날개의 아래. 새하얀 가면이 밀레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 어둠속에 갇힌 밀레시안이 눈을 깜빡인다.
당신들은 누구? 밀레시안은 얼굴을 잃은 용과 목소리를 잃은 가면을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의 등 뒤로 눈부신 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바이브카흐의 세 여성은 눈부신 휘광을 두른채 밀레시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빌려진 입이 움직인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다해도 퀘사르가 순순히 포워르를 용서할리 없습니다. 그들과 접촉한 것은 아마 당신 개인과의 거래일터, 무엇을 약속받았습니까”
“왜 나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하는거지?”
“무슨이유로 루에리를 살려주었나요?”
“왜 이 목을 부러트리지 않나.”
“당신의 시약은 이미 완성에 가까워져 있습니다. 아니 이미 성공했을지도 모르죠. 저 붉은 머리청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이미 완성된 밀레시안과 비슷합니다. 당신은 무엇입니까. 누구를 위해 글라스기브넨을 완성시킨 것입니까?”
“누구의 기준에서 저 자를 완성이라 말하는 것이냐..”
“대답하세요. 마우러스”
“대답은 네가 해야 할 것이다. 밀레시안의 탈을 쓴 무언가여.
네 질문에 대하여 굳이 내 대답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나는 밀레시안이 무엇인지를 안다.
너희가 무엇으로 만들어 졌는지도 안다. 그럼에도 너희들은 굳이 인간의 답에 집착하는구나.”
“대답하십시오. 마우러스.”
“어째서 밀레시안의 입을 빌려 인간의 답에 집착하는 것이냐.
어째서 한번 결정을 내린 기억을 잊고 다시 같은 답을 찾아 헤메이지?
보거라. 나의 눈을, 내 시선을. 나는 지금 너를 괴물로 바라보고 있지만 내 앞에선 밀레시안은 여전히 사람처럼 흔들리고 있구나.”
“.........”
“너, 지금 무엇이 밀레시안의 입을 빌어 묻고있는 어리석은 가면아. 네 스스로 이름을 말할 수 있겠느냐.”
서리에 비친 환상이 깨어졌다.
밀레시안은 마우러스를 내동댕이 치고는 숨이 차오르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뒷걸음질 치며 방금 내뿜은 숨결로부터 멀어졌다.
마우러스는 자리에 쓰러졌고 밀레시안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메아리친 질문들은 서로의 꼬리를 얽어내며 밀레시안을 수렁속을 밀어넣었다.
머릿속이 점멸한다. 검은 용의 파편과 빛나는 바이브카흐의 목소리, 그 가운데 끼여버린 작디 작은 인간의 그림자.
눈이 깜빡거려진다. 언제나 정신없이 깜빡이던 불빛들이 느리게 흔들렸다.
딱,따닥 하고 타오르는 장작의 소리가 들려왔다.
설원의 세찬 바람과 함께 은빛의 환상이 밀레시안의 어둠을 몰아내었다.
“나… 는...”
“.....”
“나는…”
가슴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공기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밀레시안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세상을 바라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빛이 반짝인다. 은색의 설원이 대답했다.
당신의 염원이 나를 깨운다고, 언제나 어느때나 그들의 소원만이 꺼진 이 빛에 불씨를 다시 지펴온다고.
바이브카흐는 밀레시안을 향해 말 했다.
어째서 아발론을 직접 상대하고 온지도 않은 밀레시안들까지 이렇게 망가지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이 오류는 왜 자꾸만 생겨나는 것이냐고. 실패작. 폐기작. 쓸모없어진. 결함이 생긴.
우리들중 그 누구도 이들에게 연민이라는 감정을 가르치지 않았는데. 어째서?
밀레시안의 반지가 활성화되었다. 가슴 가득 들이마신 숨이 빠져나가며 희미한 목소리를 흘려내었다.
가장 처음, 연민의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은 누구였는가.
“나는 네가 가는 그 길이 너무 고되지 않기를 바랄뿐이야.”
고개를 숙인 밀레시안의 눈두덩이에서 무언가 두어방울 떨어져 내렸다.
마우러스는 품속에서 다른 한자루의 듀얼건을 꺼내들었다. 녹슨 태양이 점멸한다.
밀레시안은 머릿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고통을 견뎌내며 그 자리에 서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마우러스가 밀레시안을 올려다보았다.
“너희들 모두가 인간도, 괴물도 아닌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구나.”
마우러스는 밀레시안을 동정했다.
밀레시안은 스스로가 쏟아낸 말에 혼란스러워 하며 마우러스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뜨거웠다.
변이체들의 괴성사이로 낯익은 전자음이 울려왔다. 모리안의 반지가 내는 알림음에 따라 밀레시안의 반지또한 램프를 점멸하기 시작했고 밀레시안은 아주 잠시 그 빛에 시선을 빼앗겼다. 반지가 활성화 되었다.
가야해. 명령을 완수하러. 맡은 임무를 다하기 위해. 밀레시안은 마우러스의 존재를 잊은 것 마냥 발걸음을 돌렸다.
안타까운 한숨소리와 함께 듀얼건이 장전되었다. 무방비하게 돌아선 등 뒤로 녹슨 태양의 불빛이 밝게 타올랐다.
“불쌍하게도..”
듀얼건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굉음이 터져나오는 순간, 밀레시안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려 마우러스를 바라보았다.
양 팔을 교차시키며 몸을 웅크렸다. 큰 폭음과 함께 튕겨나온 밀레시안은 실험실 바닥을 굴러 타르라크들이 있는 곳까지 나가떨어졌다.
“밀레시안..!!!”
갑작스러운 섬광과 함께 밀레시안의 몸이 부스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산장에서 타르라크에 내밀었을때만해도 일반인과 다름없던 밀레시안의 양 팔은 루에리만큼이나 심각한 수준으로 변이되어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밀레시안의 팔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말끔한 인간의 형태로 되돌아갔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을 놓치지 않았는지 루에리는 말없이 변이체를 후려친뒤 밀레시안을 향해 돌아섰다.
타르라크 또한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한채 자리에 멈춰섰다.
“......”
“...........”
밀레시안은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 타르라크를 돌아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경계어린 두 시선뿐이었다.
밀레시안은 어쩐지 아, 하고 탄식하고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벌어지려는 입을 힘주어 다물었다.
결국 여기까지였다. 어차피 여기까지인 것이다. 철없는 기만의 연극의 끝,
이 탄식은 아쉬움일까, 해방감일까.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살아있는 인간인척 흔들리는 감정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던 행동도 이제 의미가 없었다.
밀레시안은 말없이 타르라크가 반지를 끼워넣은 변이체를 내려다보았다.
반지의 불빛이 점멸하는 속도에 맞춰 온몸을 들썩거리던 변이체는 얼굴전체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검게 물들어있던 눈동자가 수축했다 이완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소리가 멀어지고 열기가 차오른다.
지금 저 변이체의 세상은 분명, 온통 은빛으로 가득차 있는 환상으로 빛나고 있을것이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방호부스안에서 사람의 살이 타오르는 독특한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타르라크의 반지를 한번 쳐다본뒤 팔꿈치 까지 드러난 자신의 양 손을 내려다 보았다.
상처하나 없이 새하얀 양 팔은 루에리와의 싸움에서 다쳤던 흔적까지 지워져 있었다.
왼쪽 손가락의 끝, 새끼손가락에 모리안이 전달한 반지가 걸려있었다.
타르라크의 질문은 끝맺어지지 못한채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왜…..”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더이상 연기를 할 이유가 없었기에 밀레시안은 천천히 반지를 빼내었다.
밀레시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우러스의 기계를 향해 다가갔다.
그 걸음 걸이나 움직이는 속도는 느리다면 느리다 할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한 것이었지만 그 어떠한 변이체들도 밀레시안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수십쌍의 눈이 밀레시안의 손에 머물러 있었다.
손안에 쥘 수 있을만큼 작은 불빛이 그들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둥글게 말려있던 반지를 펼쳐 기계속으로 집어넣었다.
짧은 전자음이 울리며 시스템 전체로 무언가가 퍼져나갔다. 화면이 검게 암전되었고 복도너머의 조명들이 꺼져나갔다.
실험실 안에도, 실험실 밖에도, 불빛하나 남지 않은 연구소에 변이된 실험체들과 약간의 숨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기묘한 전자음이 반복되었다. 밀레시안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기묘한 은색의 안광이 타르라크를 돌아보고 있었다. 타르라크는 야생동물을 진정시키듯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었습니까. 나는 당신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고.”
“.......”
“다만 내가 묻고싶은 것은.. ”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잠시 검게 물들었던 포워르의 화면속 모리안의 새하얀 까마귀가 날아올랐다.
일순간 전등이 깜빡였다. 보잘것 없는 연극이 끝나고 막이 내리기만을 기다린다.
불이 켜지지 않은 무대 위 서있는 것은 괴물이 되다만 인간과 괴물이 되기를 받아들인 인간, 그리고 실패작의 괴물들 뿐이었다.
“왜 나를 동정하는지 모르겠어.”
“밀레시안.”
“왜 나를 불쌍하다 하는지 모르겠어.”
“밀레시안.”
램프들이 깜빡였다. 포워르의 연구소는 내부로 침입한 무언가를 밀어내려 애를 썼지만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이미 자리를 잡은 칼리번을 밀어낼 수는 없었다.
둥근 원을 두른 십자가모양의 포워르의 문양이 분해되어가며 균열이 간 글자들이 지나갔다.
밀레시안은 불안정하게 깜빡이는 전등을 한번 쳐다본뒤 대답했다.
“당신들이 나를 그런 눈으로 볼 때마다 나는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당신이면 됩니다.”
“내가 착한 사람이기를 바라나요? 아니면 나쁜 사람이기를 바라나요.
어디서 부터가 괴물이고 어디까지가 사람의 범위 안인가요?”
“당신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요.”
“두가지는 안돼요. 하나만 가능해요. 사람이면 사람이고 괴물이면 괴물이어야 해요.
어둠앞에 얼어붙은 발걸음이 용기있게 나아갈 수 는 없어요.
흔들리고 비틀리고 물러서고 멈춰서고 되돌아가지도 나아가지도 못한채 그 자리에 못박혀 있을지 언정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어요.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성공과 실패 옳은것과 옳지 않은 것을 결정하는 것은
꿈에서 깨어난자, 빛이 되는자, 서리밖에서 우리들을 바라보는 검은 시선.”
"......."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내가아닌 또다른 누군가의 결정."
화면이 밝아졌다.
밀레시안은 다시 고개를 돌려 화면을 조작했다.
날개짓을 하던 검은 까마귀가 멈춰서고 시스템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지금이 순간 알비를 움직이고 있는것은 포워르가 아닌 칼리번의 의지, 바이브카흐가 연구소를 집어삼켰다.
키홀이 책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리안이 원하는 것은 글라스기브넨의 사멸도 아니고 바이스의 시약에 관한 정보를 훔쳐가기 위함도 아니었다.
그의 통제를 벗어난 안드로이드들이 어디론가로 향하고 있었다.
연구소의 이상을 눈치챈 연구원들이 불안한 눈으로 연구실의 도어락을 바라보았다.
붉은 색으로 일관되던 연구실의 문에 푸른 불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나갈까? 나갈 수 있는걸까? 나가야한다면 바로 지금, 도망칠 기회는 단 한번. 누군가 문을 잡아당겼다.
실험실 안에서 흘러나온 서늘한 냉기가 복도의 뜨거운 공기와 맞물리며 나른한 은빛 한숨을 내쉬었다.
가자. 갈 수 있어. 누군가의 발소리가 복도위에 울려퍼졌다.
탁탁탁탁, 슬리퍼가 울리는 소리가 겹쳐울렸다.
북소리처럼 웅장하지도 않고 박수갈채처럼 따스하지도 않은 매마른 발자국소리가 울려왔다.
흔들리는 전등의 불빛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전원 조준. 무심한 은색의 눈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사격을 승인합니다.
총소리가 울렸다.
루에리는 이름모를 연구원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루에리가 한달음에 달려가 밀레시안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밀레시안은 우왁스러운 손길에 떠밀려 화면에서 멀어졌지만 이미 모든 것은 밀레시안의 손을 떠난 뒤의 일이었다.
화면을 조작하던 사람을 잃었음에도 칼리번은 스스로 움직이며 알비의 안드로이드들을 움직여 나갔다.
벽을 하나 사이에 두고 비명과 고함이 울렸다.
“그만두게 해..!! 저 사람들은 상관없잖아..!!”
“완전히 글라스기브넨을 지워내려면 우선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부터 사라져야해요.”
“밀레시안..!”
“그래요. 그게 내 명칭이죠. 당신들이 바라던 것이 무엇이 되었든 우리들은 어김없이 당신들을 실망시키기 위해 태어
났어요.”
내려갔던 조명 이 환하게 밝혀지고 난장판이된 실험실의 전경이 훤히 드러났다.
실험실을 포위하고 있던 레이저들은 사라졌다.
무엇이 일어난 것인지 누가 의도한 것인지는 너무나도 자명하게 알 수 있었다.
밀레시안은 한없이 검게 가라앉은 눈을 뜬채 타르라크들을 바라보았다.
온 세상이 은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 빛나는 세상속에 안식으로 삼을 만한 그림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잊어버려요. 당신들의 생존만 생각해요.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면 편해질거에요.”
“......”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의도로 만들어진 결과라고 생각하면 행복을 되찾을 수 있죠.”
“........”
“정해진 미래, 주어진 목표. 실패가 용서되지 않는 대신 성공만 한다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는 모든 행동들. 그 모든 것을 드릴테니, 그냥 잊고 이곳을 떠나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그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동안 눈치채는 사람이 생겨나지 않을리 없었다.
누군가가 그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동정했다.
밀레시안들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덮어두고 외면해 왔지만 그 가장된 평화속의 위화감을 모두가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고 어김없이 낯선 고발자가 찾아왔다. 강인하고 당당한 진실되는 칼리번의 빛.
거짓을 부정하고 허영을 걷어내었다. 그의 찬란한 선의를 향해 밀레시안들은 스스로의 발톱을 드러내었지만 역부족일 수 밖에 없었다. 진심을 확신할 수 없었다.
현실을 일깨워내려는 그의 칼날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거짓되었던 일상을 위해서일까? 아니면 못다한 명령을 위해서일까
울려퍼지는 비명, 도망치는 사람들, 고함을 내지르고 상처받은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아발론은 밀레시안들에게 자신이 책임을 지겠노라고 말했다.
이 모든 과정과 시간속에 일어난 비극에 대하여 책임지고 모든 밀레시안들을 멈추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정말 그러면 되는 걸까? 그가 책임지도록 내버려두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걸까?
책임이라는 것이 생기고 잠들어야 할 마땅한 이유를 갖게되면 그 가슴속의 공허함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 허기진 마음을 다시 입안으로 삼켜 낼 수가 있을까? 고민하는 밀레시안들의 앞에 깨어진 가면은 속삭였다.
불쌍하게도.
루에리는 이를 악물며 밀레시안의 어깨를 밀쳐내었다.
밀레시안은 아무런 반항없이 그에게 서 두어걸음 물러났다. 등뒤로 화면의 패널이 닿았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화면 아래로 검붉은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타르라크가 밀레시안에게 말했다.
“모리안이 원하는 것은 글라스기브넨을 이용하려는 것이었군요.”
“네”
“그러기 위해서 차후 증거가 될만한 것들을 모두 지워낼 필요가 있었던 것이고요..”
“네.”
“그럼 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입니까? 단순히 저런 실험을 하기 위해서라면 내 도움따위는 필요하지 않았을텐데요.”
타르라크는 온 몸이 매끈매끈하게 녹아버린 변이체를 가리켰다.
가까스로 숨은 쉬고 있었지만 그것도 곧 한계, 인간의 모습이 된 변이체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검은자위가 수축되었다 이완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꿰뚫린 목에서 질척한 거품소리가 끓어나왔다.
죽어가는 실패작. 밀레시안은 수십번도 더 지켜봐왔던 죽음을 가리켰다.
“저것이 포워르가 만들려 했던 밀레시안의 잔재.”
손을 거두어 자신의 가슴을 짚은 밀레시안은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바이브카흐가 성공했던 밀레시안의 사례.”
밀레시안의 시선은 타르라크에게 향했다. 그 시선속에는 모리안의 의문이 깃들어있었다.
미쳤군. 루에리는 죽어가는 변이체와 밀레시안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글라스기브넨의 실험체를 가지고 너같은 것을 더 만들겠다는거야? 그럼 너는 뭔데..? 너도 저 변이체들 같은거야? 모리안은 이미 예전부터 이와같은 실험을 해오고 있었다?”
“아니요. 우리들을 만든 것은 글라스기브넨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의 글라스기브넨이 우리들을 대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아니네요. 이제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우리들을 만들어낸 것이 글라스기브넨이 아니듯 그들또한 우리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 너를 만든 것은 뭔데..”
“......실리엔.”
루에리의 질문에 타르라크가 대신 대답했다. 글라스기브넨도 밀레시안도 모두 실리엔에서 시작되었다. 타르라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아디만티움의 자료속 반복해서 언급되던 케트라는 소녀의 이름을 떠올렸다.
실리엔에 중독된 소녀 케트, 그녀가 잠들어있던 요람에서 체취한 혈액에서부터 발현시킨 것이 글라스기브넨.
역병의 밤으로 지우졌던 포보르의 그림자가 그의 작은 손바닥 안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바이브카흐와 포보르, 그리고 실리엔이라는 이름이 반복해서 타르라크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포워르는 처음 부터 죽은 자의 이름이었다.
어차피 아무리 발악해봐야 모든 것을 잃어버린 현실을 뒤집을 수는 없었고 가까스로 이름만을 유지한 포보르의 찌꺼기에게 바이브카흐는 큰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큰 위협이 될리 없었고 도움이 될리도 없었다. 그녀들은 그들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에일레흐 왕가의 입장에서는 그 잔재마저도 껄끄러울 뿐이었지만 그들에게 불편함을 호소할 만한 용기는 없었다.
포워르는 그렇게 무관심과 멸시의 사이에 놓여졌지만 대신 소소한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물리적이지 않은 시간의 장벽에 가로막힌채 점점 고립되어갔다.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포워르의 시계가 바이브카흐의 시간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포워르는 여전히 밤에 사로잡혀있었고 바이브카흐는 자신들의 아침을 열어내려 하고 있었다.
그 무엇도 칼리번이 정해놓은 미래 뛰어넘을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칼리번조차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일으키면 어떨까. 키홀은 여명이 터오는 보라색의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시간을 황혼으로 되돌리자, 그리하여 그 어둠속으로 칼리번을 추락시키자.
포워르는 새로운 방식의 역병을 일으켜 두번째 역병의 밤을 준비했다.
케트의 혈액에서 뽑아낸 망각병의 아종을 안드로이드들로 하여금 운반시켜 에린 전역에 살포한다는 것이 프로젝트 아디만티움의 전말.
시간이 지난만큼 무대를 더 크게 확장시키고 끌어들이는 사람의 수를 더 늘렸다. 더 많이, 더 깊게, 더 잔인하게.. 공포를 전염시키기 위해선 사람의 목숨따위 아무래도 좋을 부가적인 사안이였다.
본디 실리엔의 망각병은 크게 세가지의 단계로 나뉘어 있었지만 포워르는 망각의 단계를 생략한 변이의 능력을 강화시켰다.
그 모든 기억을 지워내기도 전에 손끝부터 시작된 변이는 가냘픈 터럭따위가 아닌 단단한 비늘려 변질되었고 실험체들은 망각의 안식 없이 고통속에 이성을 잃어갔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 제대로된 변이가 되기 전에 모두 죽어버린다는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그정도는 개선할 수 있어. 포워르는 그렇게 연구를 거듭해 나갔다.
하지만 그 계획에는 한가지 제한이 걸려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글라스기브넨에는 결국 실리엔이 기반된다는 사실이었다.
아디만티움을 준비하고 있었던 당시 마하는 이미 실리엔을 중화시키는 중화제를 완성시킨 상태였고 당연하게도 그 존재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글라스기브넨에게 위협적이었다.
검은 비늘이 온몸을 뒤덮기전에 그 찬란한 은색의 광물이 연기를 걷어낸다면 그것은 바이브카흐의 승리.
목숨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좀 더 멀리 퍼져나가지 않으면, 아주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으면.. 포워르는 중화제를 이겨낼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시대의 시간은 한번더 그들의 손을 빠져나갔다. 도망쳤던 아발론이 되돌아왔고 마하가 무너졌다.
모리안은 마하의 연구소를 흡수했다.
바이브카흐는 마하의 연구소에서 일어난 일들을 최소화하여 그 존재자체를 은폐시켰고 남은 자료들은 엄중한 관리하에 폐기했다.
포워르는 어둠속에 우두커니 멈춰서서 아발론이 그 뒤를 쫓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들이 달려나가는 시간은 포워르의 것이 아니었다. 그 어디에도 포워르가 발을 딛을만한 틈은 남아있지 않았다.
나아가지 못했지만 물러서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영원히 약점에서 방도를 찾지 못한채 길 한가운데에 멈춰섰다.
포워르는 우선 도망친 마하의 연구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잔재들을 쫓아서라도 중화제의 기밀을 얻어보려했지만 결과는 당연하게도 실패였다.
대부분이 네반의 연구소로 이전되었고 남은 이들은 모두 모리안에게 사냥당했다.
의미없는 시간이 흘러갔다. 포워르는 물러서지도 나아가지도 못한채 그 자리에 못박혀 있었다.
어떻게 해야할까 어떤 방법을 생각해야할까. 포워르의 자원은 한계가 있었고 지식은 칼리번이라는 벽앞에 가로막혀 있었다.
하지만 그 견고할 것 같던 벽에도 작은 실금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네반이 죽었다. 그리고 모리안이 그녀의 연구소를 폐쇄했다.
기회라면 기회였고 위기라면 위기였다.
이때까지 아무래도 좋았던 포워르가 적대목록에 이름을 올렸고 모리안은 그들의 행적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뻐해야할까?
하지만 모리안은 우선 침묵을 지킨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의심했다.
정말로 그들에게 바이러스가 존재하는지를 그리고 그 바이러스가 실리엔에서 시작된 것이 맞는지를. 시간이 흐르고 아디만티움은 나날히 성장해나가고 있었지만 모리안은 여전히 그들을 방치해 두었다.
물론 인식한 문제에 대해 방치라는 결론을 내린것은 칼리번스럽지 않은 결론이었지만 사실 이 선택은 그 당시의 바이브카흐, 모리안 개인이 내린 결정에 가까웠다. 의견을 나눌길없고 새로운 의견을 발의하는 목소리조차 없었다.
모리안은 홀로 칼리번을 바라보며 의심을 거듭했다. 은막 밝히는 화면만이 어두운 회의실속 빛이었다.
화면 속 펼쳐진 정경은 역병의 밤이 일어난 다음날의 연구소.
검은 로브와 하얀 로브를 입은 요원들이 바쁘게 현장을 조사하고 있었다.
걸음을 걸을때마자 조금씩 흔들리는 카메라의 구석으로 새하얀 소매자락이 비춰지고 있었다. 걸음이 멈춰섰고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요람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고철덩어리는 찢어지고 불태워져 원래의 형태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 아래 굴러다니는 돌무더기 사이에서 누군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모리안의 요원들은 이 신원불명의 연구원이 누군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 일대를 샅샅히 조사하고 있었다.
그렇게 발견된 시신은 두가지의 이름으로 분류되었다.
네반은 오른쪽에 있는 것은 벨라의 시신이라 확신했지만 다른 하나는 케트의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마도, 라는 말에 확신이 깃들지 않은 것은 발견된 시신의 형태가 명백하게 인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요람안에서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던 케트가 요람 밖에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변이될 것인지는 미지수였기에 이러한 극적인 변화조차 감안해야 한다는 네반의 의견이 뒤따랐다. 하지만 그럴까? 모리안은 의심했다.
분명 아드니엘의 요람은 부서졌지만 그 아래 남은 두개의 시신이 벨라와 케트라고 확신 할 수만은 없었다. 분명 부분적으로 캐트와 일치하다는 결과가 나오기는 했지만 모리안은 또다른 누군가라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아무리 케트가 실리엔에 변질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시신은 전혀 다른 형태의 변이를 가지고 있었다. 야수화가 진행될 정도로 실리엔의 곁에 오래 머물러 있었지만 케트의 유전자를 가진, 제 3자의 시신.
생각해보자 일찍이, 칼리번이 없던 시기에 운명을 주도하던 총명한 여성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과연 정말로 아무런 해답을 찾아내지 못했을까? 모리안은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확인해보기로 했다.
모리안은 아디만티움 대한 화면을 띄워놓은채 세 병의 실험관을 바라보았다.
하나는 글라스기브넨에 감염원 연구원의 것 또다른 하나는 글라스기브넨에 감염시킨 밀레시안의 것. 그리고 마지막 것은 알비의 쓰레기장에서 찾아낸 이름모를 짐승의 검은 비늘.
은색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각기 다른 반응이 관찰되었다. 모리안은 꼼꼼하게 각 시험관의 반응을 기록한뒤 낮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험실을 나서 옷을 갈아입었다. 방진 모자를 벗어내자 길고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모리안은 손을 저어 화면에 떠있던 네반과 마하의 문장을 걷어내었다. 화면 가운데에 까마귀의 문양이 떠올랐다.
“밀레시안을 불러와.”
“그렇군. 같은 실리엔에서 시작되었지만 서로 다른 결과와 서로 다른 중화제. 변질된 것은 프로젝트 아디만티움이 아니었어. 글라스기브넨 자체가 중간부터 변질되었던거야.”
타르라크의 중얼거림에 루에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타르라크는 흥분하며 루에리를 돌아보았다.
“연구를 거듭하던 중, 깨달았던거지. 글라스기브넨의 근본이되는 혈액의 주인이 케트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모리안의 중화제가 듣지 않았던거야. 그래서 저 사람을 살릴 수 없었어. 그래서 모리안은 실험을 세가지로 나누어 진행한거야.
하나는 케트와 같은 기존의 실리엔을 가지고 있는 밀레시안. 다른 하나는 변질된 글라스기브넨을 가진 포워르의 실험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존의 글라스기브넨을 보관하고 있는 나 자신.”
“그게 뭐야..”
루에리를 주먹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그게 뭐야.. 그게 뭐냐고!! 결국 실험이었잖아..!! 나도!! 마리도!! 타르라크도!!
사람의 목숨을 실험체로 사용하는 거였잖아..! 살아도 살아있지 않는 생명을 이어나가며 이 날 이때까지 버텨왔어..! 근데 그게 실험이었다고? 서로 가지고 있는 패를 내려놓지 않기위해 졸개들만 움직이는 탐색전이었다고?”
왜 그랬습니까. 딱 한번 타르라크는 모리안과 연결된 통신기를 향해 물었었다.
왜 그래야 했습니까. 당신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까지 했어야 했습니까. 수많은 인력을 거느리고 있었고 수많은 자원을 쥐고 있었습니다.
우리들보다 더 많은 선택지를 바라볼 수 있었고 더 현명한 선택을 내릴 수도 있었는데도, 왜.
그녀는 아무런 고민없이 수중에 있는 장기말을 소비하기로 결정내렸다.
그녀는 그러한 선택이 더 나은 내일을 만들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당신들이 없어도 내일의 에린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장기말중 하나였기에, 모리안은 그들이 낙원에 필요하지 않다고 결론내렸다.
타르라크는 스스로의 손으로 통신을 끊었다.
당신이 틀렸다고, 그는 까맣게 흐려진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틀렸고 내가 틀렸다. 우리들이 틀렸다.
나는 당신에게 책임을 묻기위해 돌아왔지만 당신은 책임을 질 마음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리…”
타르라크는 소원했다. 그녀의 다리가 멈추지 않기를. 그녀의 숨소리가 끊어지지 않기를.
달리고 또 달려, 영원을 향해 달려나가기를. 언젠가 이 설원의 눈이 그치고 타르라크 또한 걸음을 멈추었을 때, 희망을 품고 있을 소녀의 앞에서 아무말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비참하지 않기를.
루에리는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우리들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달려나왔을까.
살아가는 것과 죽는 것, 그리고 모든 의미가 상실되었던 시간들이 종잇조각처럼 찢겨 흩날렸다.
삶을 끊어내지 못해 이어나갔다. 헤쳐 나갈 탈출구를 찾지못해 복도를 맴돌았다.
그래도 살아라. 그래도 살아남아. 끓어오르는 찻주전자와 반투명한 실험관, 서로다른 흰 연기를 바라보며 끓어오르는 원념을 되씹었다.
나무장작이 타오르면 몸이 녹아내렸다.
추위가 가시면 형태를 잃은 피부조각이 딱딱한 비늘의 형태로 변이되며 살결 깊숙히 상처를 남겼다.
타르라크는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서리내린 담요를 목끝까지 끌어당겼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릴때까지, 무슨이유가 되었든 저 문은 모리안의 명령에 의해 열릴 것이다.
그것이 죽음의 제안이든 또다른 절망의 선택지이든 그들은 이 문을 두드릴 수 밖에 없다.
그 때를 악착같이 살아남아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길이 끝에 다다르고 나서야, 네가 왔다.
거짓말을 하는 까마귀의 눈이 깜빡였다.
[“나와 함께…알비로 가주세요.”]
타르라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이 아려왔다.
비늘로 변이되려는 손가락을 옭죄어오는 금속의 고리에는 어떠한 불빛도 비치지 않았다.
이따금씩 빛을 밝히기 위해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지만 무언가의 의지가 반지의 작동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 당신은 때때로 나를 실망시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희망이 좌절된 것은 아니야.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을 향해 한걸음 나아갔다.
흥분에 소리치고 있던 루에리가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향해 돌아섰다,
[“나는 당신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 장소가 설원이 아니었다면. 감시하듯이 쳐다보는 조종사만 없었다면.
타르라크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더이상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상처입히지 말아요. 그 손을 내게 줘요.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밀레시안을 향해 격렬하게 소리를 지르던 루에리가 그를 돌아보았다.
루에리의 눈이 커지고 있었다. 내뱉은 숨을 다급하게 씹어삼키며 타르라크를 향해 입을 벌렸다.
눈이 멀어버릴 것같은 빛속을 걸어 밀레시안에게로 다가갔다.
새하얗게 변해버리는 시야속 타르라크의 눈에는 새하얀 설원이 보이고 있었다.
설원의 빛이 거치고 밀레시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눈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밀레시안, 나는 당신과 함께….”
말을 끝맺을 시간도 없이, 기회를 노리던 변이체가 무방비상태로 노출된 타르라크의 목을 물어뜯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왔다.
“타르라크..!!!!”
격렬한 열기와 함께 눈앞을 흐리게 만들정도의 고통이 찾아왔다.
설원은 온데간데 없고 새까만 어둠만이 눈앞에 가득했다.
그래, 나는 이걸 원했다. 타르라크는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움직여 한모금 숨을 들이켰다.
목소리가 되지 못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 어둠을 바랬다. 밀레시안, 나는 당신을 그 은빛의 세상속에서 데리고 나와주고 싶었습니다.
밀레시안은 두어걸음 물러서는 동안 루에리는 이를 악물며 타르라크에게로 뛰어나갔다.
더이상 물러날 길이 없이 차가운 기계더미들이 밀레시안의 등을 가로막았다.
새하얀 바닥을 타고 새까만 혈액이 바닥을 타고 흘러나왔다.
칼리번이 물었다.
있지, 이제 세번째 반지를 활성화 시켜도 될까?
양 손에 얼굴을 파묻은 밀레시안이 대답했다.
모르겠어.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어.
밀레시안은 자리에 주저앉은채 눈을 감았다.
그의 바램대로 검게 닫혀버린 시야속에서 밀레시안은 소리없이 날아든 까마귀의 깃털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녹아들지 않은채 이질적인 검은 빛을 발하는 검은 머리의 여신이 밀레시안을 내려다 보았다.
왜 이렇게 괴로운 일만 생기냐는 밀레시안의 질문에 여신은 소리없이 입을 움직여 말한다.
“네가 감히 인간이 되려 하지 않았니.”
검은 비늘의 조각이 밀레시안의 뺨에 돋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