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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비밀레) reload #9(2)
총성이 울렸다.
의자를 걷어차는 동시에 빛이 터져나왔다.
모두가 쓰러진 붉은 안개속에서 룩은 섬광탄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다시 듀얼건을 장전했다.
안개속에서 방심하고 있었던 검은 가면의 퀘사르의 앞으로 검은 검을 가진 기사가 팔을 내밀었다.
철갑을 두른 기사는 아무렇지 않게 룩의 탄환을 튕겨내고는 그대로 팔을 휘둘러 검은 구체를 집어던졌다.
네조각으로 부서진 구체의 조각들은 룩을 둘러싸고 이상한 전기의 장막을 형성했다.
잠시 찌르르륵 거리는 불쾌한 전류와 함께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의식은 멀쩡했지만 사지가 말을 듣지 않는다. 뭐 이딴.. 룩이 욕을 내뱉으며 자리에 꿇어 앉았다.
퀘사르들이 쓰러진 요원들을 끌어내고 있었다.
검은 가면을 쓴 새하얀 로브의 퀘사르는 흥미롭다는듯 룩의 뒷머리를 잡아 들었다.
“이거 재밌네요. 일반인들 사이에 면역자가 있다니. 게다가 이정도 의식을 유지하고 있다니. 기존의 퀘사르보다 훨씬 낫네요.”
“원래 사람이 살다보면 약빨이 안먹히는 놈 하나정도 만나기 마련 아니겠어?!”
다행히 입은 잘 움직인다.
”그리고 그게 하필이면 피오나의 요원이라니.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조잡한 설정이네.”
“젠장..! 무시하냐!!”
다시 구의 형태로 돌아간 검은 구체는 이리저리 주변을 탐색하다 하얀 로브의 소매사이로 날아들어왔다.
검은기사가 반쯤 들어올려진 룩의 배를 걷어찼다.
헉하고 숨을 내뱉은 룩이 거세게 기침을 하자 검은 가면은 성질하고는.. 이라며 룩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들어올리던 힘이 사라진 룩은 그대로 얼굴부터 떨어져 내린뒤 바닥에 나동그랐다.
검은 기사는 감흥없이 꿈틀거리는 룩을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뒷목 사이에 뭉게진 흉터자국이 엿보였다.
“내가 피오나 소속인게 무지 마음에 안드나 보네.”
“응, 떫어.”
검은 기사는 당연하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네 가슴에 달린 문장도, 허리춤에 걸린 듀얼건도, 목덜미에 찍힌 켈틱크로스도.”
목멀미가… 뭐라고..? 룩은 무슨 개소리냐는 눈으로 검은 기사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해 돌아서 있었다.
메인 시스템에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접속되었다. 날개처럼 펼쳐진 칼날의 모양이 화면에 어른거렸다.
시스템을 장악할 생각일 걸까? 룩은 아릿한 배의 고통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눈을 굴렸다.
분명 멍들었을거야. 젠장, 어디 박물관에서 꺼내신고 온것 같은 그리브를 신고 사람을 걷어차?
룩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유일하게 가면을 쓰지 않은 퀘사르를 바라보았다.
퀘사르, 시대의 마지막을 알리는 악몽의 사자들.
포보르의 칼리번을 삭제하기 위해 나타난 반의 망령들은 바이브카흐의 시대가 오고나서야 자취를 감추었다.
도시에서는 이미 옛날이야기로서 잊혀졌지만 슬럼가에서는 늘 현재진행형이었던 이야기.
그마저도 새로운 칼리번이 탄생하고 나서 모두 사라졌지만 룩은 똑똑하게도 그 시절의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석양을 등진 누군가가 음율을 섞어 노래한다.
도망치고 또 도망쳐라. 좁고 굽이진 골목으로 길을 꺾어라.
녹슨 태양이 너를 보지 못하게, 푸른 불꽃이 너를 찾지 못하게.
룩은 입술을 깨물며 흐릿한 구절을 입에 담았다. 그 시절의 기억은 유독 기묘하리만치 흐릿했다.
안경의 렌즈같은것이 반짝이며 그 이상의 회상을 방해한다.
하지만 그 짧은 노래구절들이 가리키는 대상은 명확했다.
밤에게서 훔쳐낸 날개는 검은 로브, 녹슨 태양은 오라클 콜트, 푸른 불꽃은 실리엔이 연소하며 나타내는 반응색.
그나저나 바올에 이런 가사가 있었었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같은 할머니에게서 배운 아이들끼리도 가사는 늘 다르게 부르는게 일상이었으니까.
룩은 아직도 얼얼한 통증에 몸을 비틀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통증은 아직 감각이 남아있다는 또다른 증거, 일어날 수 있다. 아니 일어나야한다.
찬물이든 더운물이든 가릴 처지가 아니였다.
성분을 알 수 없는 붉은 연막탄 탓에 룩을 제외한 모든 요원들이 기절한 상태였기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두다리 뻗고 편하게 누워있을 수많은 없었다.
하지만 연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자신과 저 퀘사르들뿐.
가면안에 중화제 같은 것이 들어있나? 아니면 로브? 하지만 저 검은 가면의 퀘사르는 입을 막지 않은 반가면을 쓰고 있었다.
호흡기로 흡입되는게 아닌가? 머리가 복잡하다.
그러고 보면 그들은 자신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었다.
면역자가 피오나 안에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라고. 면역자라는 건 뭐지? 철갑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고개를 돌린 검은 기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까만 금속으로 만들어진 갑옷은 한치의 빛도 반사하지 않겠다는듯 검은 일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어디가 이음새인지 어디가 관절부인지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소리만으로 이것이 금속이라는 것을 추측할 뿐.
짐승의 뿔을 본따 만든 투구가 움직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인지 가로젓는 것인지 알 수없었다.
룩은 한참동안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걷어차여봐야 죽지는 않겠지. 밑져야 본전이라는 무모함이 그의 목소리를 한층 크게 키워놓았다.
“면역자라는게 뭐야?”
화면을 조작하던 검은 가면이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젠장 이 키워드는 별로라 이거지.
벽면에 걸린 붉은 램프가 잠시 불을 밝혔지만 사이렌 소리 한번 울리지 못한채 도로 꺼져버렸다.
검은 기사가 검을 집어들었다. 저거 진짜 검인가, 진짜겠지? 아 진짜네. 진짜 미치겠네.
룩은 걷어차이는 충격에 잊어버렸던 검의 존재에 이를 악물었다.
퀸의 무기를 만들며 참고했던 자료들과 똑 닮은 검은 대검은 정말 온전한 검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크로스가드에 폼멜까지, 아 진심인거냐고.
검끝이 관자놀이에 닿았다. 서슬퍼런 날이 찰칵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귓바퀴로 미끌어졌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것은 귀에 꽂혀있던 인이어. 날아가버린 작은 기계는 그대로 다른 책상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룩이 다시 시선을 들어 검은 기사를 바라보았다.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비웃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새하얗게 질렸었겠지, 내 얼굴.
룩은 공포를 감추기위해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검은 기사가 대답했다.
“네 목숨이 네반을 거쳐지나갔다는 증거.”
“무슨 헛소리야.”
기사는 검끝으로 룩의 머리를 걷어내었다.
“하지만 나이가 꽤 어리긴 하군. 이봐, 너 몇살이지? 네가 맞은 중화제는 어느정도 크기였는지 기억은 하나?”
“젠장, 난 슬럼가 출신이라고 어떤 멍청이가 네반사의 비싼 뭐시기약을 바올출신에게 놔주겠어?!”
“글쎄, 반호르출신이라고 하니 더 믿음이 가는데?”
검은 기사는 검을 거두었다.
반호르라는 말에 룩의 눈이 반짝였다. 눈앞의 퀘사르들을 경계하는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반호르의 이름을 떠올렸다. 반호르는 바올이 확정되기 이전에 불리던 서류상의 이름, 정작 바올에 사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도시에 통합되고 나서도 반호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도 않았다.
아니 살아있는 사람이 극단적으로 적었다. 도시로 통합되고 나서도 바올은 계속해서 바올, 이따금씩 지역색을 특정하지 않게하기 위해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그 안에서도 반호르라는 이름은 꾸준히 외면받았다.
불온하고 부정하다는게 그 이유였다. 뭐야 그게. 미신도 아니고.
짜증을 내는 룩의 목소리에 킹은 뭔가 짐작이 간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뭐, 그런느낌이 없잖아 있지. 뭐야 그게. 늙은이들의 신종 꼰대질이야? 킹은 마시던 맥주캔을 그대로 집어던졌고 흩날리는 맥주는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오던 비숍의 머리 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비숍이 짜증스럽게 킹을 돌아보았다.
“루에리.”
“알겠어, 알겠어.”
“너무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하지마.”
맞아 딱 저런 톤으로. 룩은 쓸데없는 생각은 자제하자며 고개를 내저었다.
반호르, 반호르, 에일레흐가 불온하게 여겼던 옛날 바올의 명칭. 검은 가면은 경계어린 시선으로 룩을 바라보고 있었다.
룩은 갑자기 배가 아픈척 고개를 숙이며 몸을 비틀었다. 괜히 주의를 끌 필요는 없었기때문이었다.
룩이 고통스러워 하는 동안 검은 가면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글러브를 착용했다.
브류나크의 시스템 로고가 떠올랐다. 무언가를 조작하던 검은가면이 손을 들어올리자 로고가 흔들렸다.
날개모양의 칼날이 흩어지고 불길한 진동음을 토해내며 검붉은 무언가가 머리를 들어올렸다.
전부 완성된 것도 아닌 것같아 보이는 불완전한 프로그램이 브류나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돌진하고 부딪치고 화풀이를 하듯 잡아뜯는다.
막무가내식으로 움직이는 가싶으면 또 그런것도 아니었다.
자신을 감지한 방어프로그램들을 향해서는 정확하게 반격한다. 변칙적으로 패턴을 바꿔가며 오로지 망가트리는 것에만 모든 능력을 집중한 괴물이 브류나크를 휘젓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스템이 다운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브류나크 내의 통신이 끊기고 모든 카메라의 영상이 화면위로 떠올랐다.
관제실에 비치되어있던 모든 모니터에 퀘사르가 비치고 있었다.
외부는 추락한 헬기들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아본은 난장판이었다.
위든 아래든 계단마다 방벽이 내려와 길을 막고 있었다. 고립된 사람들은 폭발의 흔들림에 입을 틀어막고 깨어진 유리창에는 안전막이 내려오며 빛을 차단시킨다. 이게,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이 모든 일이?
“한순간이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예견되어 왔던 일이죠.”
검은 가면은 마치 생각을 읽어내듯 대답했다.
그는 아차싶다는듯 잠시 화면을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런 필사적인 눈 앞에서는 이렇게 입이 가벼워지고 마는걸까. 검은 가면은 습관처럼 자신의 미간을 지긋이 누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남자는 가면을 밀어올렸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의 모양은 마치 안경을 밀어 올리는 것과 닮아 있었다.
검은 기사가 어느 화면을 돌아보았다. 검은 가면은 손에 끼고 있던 글러브를 벗어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브류나크를 돌아다니는 괴물은 이제 스스로 방어프로그램들을 박살내며 날뛰고 있었다. 검은 가면이 말했다.
“올바른 힘의 통제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몇개 없습니다 명확한 지시와 온전한 의도. 길을 열어나가는 것은 올바른 키워드. 단순하게 들리지만 막상 갖추기가 쉽지 않은 요소들이죠.
하나라도 부족하면 정도를 벗어나고 본질을 상실하며 원하지 않은 괴물로 변해버립니다.
아드니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단 하나만의 목적을 위해서 태어났지만 그 방법이 비극을 불러왔습니다.
칼리번이 망설이는 것을 알아챈 포보르는 아발론이라는 편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하지만 아발론은 도망쳤고 포보르는 무너져버렸죠..”
“편법..?”
“반면 바이브카흐는 칼리번에게 꿈을 쥐어주기 보다는 자신들을 대신할 꼭두각시를 내세웠습니다.
에일레흐가 그 희생양이 된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죠.
그리고 그 헛된 꿈의 뒷편이 숨어서 그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일들을 마음껏 펼쳐내어 왔습니다. 힘, 지식, 영광.
우리들은 그대로 그녀들이 사라진다면 에일레흐 또한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마녀의 힘을 잃고 칼리번의 자격이 없는 에일레흐라면 이미 스스로 일어설 힘 조차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살아남았습니다. 비겁하게도. 누군가는 짊어져야할 책임과 의무를 져버렸고 무기한의 유예를 내려주었죠.”
“우리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우리 이름을 빌려서 말이야.”
검은 가면이 루에리라 부르던 검은 기사를 돌아보았다. 아 그래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 이거지.
기사는 볼멘소리를 중얼거린다. 너는 신나게 떠들고 있으면서 내 입만 단속하겠다 그거 아니야.
검은 가면은 기사의 말을 무시한채 말을 이어나갔다.
“당장 목숨을 부지한 에일레흐 왕가가 급한대로 칼리번을 이어받기는 했지만 그것이 안정된 삶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칼리번은 여전히 바이브카흐때와 같이 잠겨져 있었고 그 일부의 능력만을 조금씩 사용 할 수 있었을뿐이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에일레흐에는 그 일부조차 활용할 지식이 없었습니다.
결국 바이브카흐가 주도해나가던 균형 그대로 저울은 한쪽으로 치우쳤고 에일레흐는 그것을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네 그렇죠. 거기서 생긴 모든 분노와 부조리함, 타오르고 음모의 찌꺼기들을 모아두었던 곳이 바로 바올,
당신이 살았다던 그 슬럼가입니다.”
“알고 있어. 그런건.”
룩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이야기, 저세상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며 수십번은 더 들었어.”
절반은 진심이었고 절반은 거짓말이었다.
아발론이라느니 바이브카흐가 칼리번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느니, 킹이 들었다면 너무나도 흥미로워했을 이야기였겠지만 그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중요한 것은 에일레흐가 그 모든 문제를 바올에게 모두 몰아 넣었다는 것.
하루아침에 도시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바올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찌할바 모르는 범죄자들을 바올로 떠넘겨버렸다. 지원은 없었고 무엇을 위해서인지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을뿐 그들이 도시 밖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에게 바올을 수많은 실책들중 하나였을지 모르지만 룩에겐 삶이 걸려있는 문제였다.
그곳에서 살아왔고 그곳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다시 도시로 돌아왔지만 룩이 느낀것은 해방감이나 달성감도 아닌 실망감이었다.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 똑같은 음식, 똑같은 삶의 터전.
다른 것이 있다면 이곳이 좀 더 청결하고 부유했을 뿐.
부족하면 부족한 나름대로 살아가던 바올의 삶과 에린에서의 삶은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토록 미워하던 에일레흐의 왕가는 이미 사라졌고 에일레흐 재단이라는 이상한 이름만이 남아있었다.
미워할 대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에린을 미워해야해? 에일레흐를 미워해야해? 누가 우리를 여기에 가둔거지?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아? 이제 나올 수 있잖아.
우리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이 너머를 꿈꿔왔던가.
룩은 골목길에 기대어서서 하염없이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 그들은 그토록 우리들을 지워버리려 했었던 걸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있지, 피오나라는 에이전시가 바올에 생겼데. 바올? 그게 어디인데? 왜 그 있잖아. 도시 외곽에 있는 슬럼가.
우와 그럼 범죄자들을 요원으로 훈련시키는 거야? 위험하지 않아? 아니, 어떤 괴짜가 거기서 상품을 내걸었다나봐. 면접장까지 올라오면 뭔가 굉장한 것을 주기로. 뭐야 그게, 사기냄새 풀풀나잖아.
하지만 사람들이 엄청 모여든다든데? 그 괴짜가 사실은 전설속에 나오는 아발론이라는 소문이 있데.
아발론? 그거 포보르때 떠돌던 소문아니야? 그 왜 숲속에 비밀 연구소가 있어서.. 푸흐, 숲속에 연구소라니 역시 말도 안돼. 게다가 그거 엄청 오래전 소문이잖아?
그럼 아발론은 호호할머니나 호호할아버지게? 음..그렇네. 그 괴짜는 엄청 젊어보이는 청년이라고 들었으니까.
으음.. 더 사기같아. 젊은 청년이 슬럼가에 엄청난 보상을 걸고 에이전시의 요원들을 모집한다니..
하지만 봐. 저기. 슬럼가 사람으로 보이는 애들도 저렇게 골목길까지 들어와 있는걸.
어쩌면 엄청 모험정신이 뛰어난 사업가가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무모한 이벤트를 벌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악의 없는 손가락질이 그를 가리켜왔다. 그는 부끄러운 것 없이도 수치심을 느끼며 골목 안쪽으로 돌아섰다.
내딛는 발걸음이 따가웠다. 정식으로 통행권을 따내어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지만 그가 찾게되는 곳은 이전과 같이 햇빛이 들지 않는 그늘진 골목길 뿐이었다.
왜 대로로 나가지 못하는 걸까. 왜 넓은 장소로 나가는 것이 두려운 걸까.
왜 그들의 시선이, 평가가, 아무 쓰잘대기 없는 잣대의 결과값이 이리도 신경쓰이는 걸까.
이보다 더한꼴을 하고 있어도 그 거리에서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네가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야.”
척 보기에도 화려한 금발의 곱슬머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를 꼬아 앉으며 막 나온 음료를 홀짝였다.
카페라는 곳에 처음 들어와 좌불안석이 된 룩을 기어코 테라스로 끌고나온 이 악마의 곱슬머리는 그에게 샷추가된 딸기프라푸치노에 시럽펌핑 4번, 자바칩 추가에 초코드리즐을 뿌린 두우유크림을 주문하였고 룩은 필기시험에 응시하는 심정으로 그의 못된 주문을 통과해내었다.
아르바이트생이 몇번이고 블랙커.. 아, 아메리카노요. 네에.. 앞에 주문은 알겠는데.. 뒤에건 좀.. 여기에 샷추가요? 진짜요? 정말이죠? 후회안하죠? 라고 되묻는 바람에 잠시 위기를 맞이했지만 룩은 자신이 먹을 것이 아니라는 필살의 변명으로 난관을 돌파했다.
룩의 손가락을 따라 바깥 테라스석에 앉아있는 톨비쉬를 발견한 알바생은 아하, 하는 반응과 함께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쁜놈. 꼭 지같은 것만 찾아먹어요. 룩은 평범한 커피를 홀짝이며 새된 눈으로 톨비쉬를 흘겨보았다.
뭘 하든 밉상인 저 남자가 하필이면 오늘 비번일게 뭐람. 톨비쉬는 룩의 눈초리를 무시한채 예쁘게 쌓아올린 크림을 푹푹 내리찍었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이따금씩 시선이 마주치는 것이 불편했다. 짜증이 난다. 이럴바에야 평소처럼 방에 틀어박혀 있는게 좋은데.
“눈이 마주치는건 네가 그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고.”
톨비쉬가 다시한번 주의를 주었다.
룩이 인상을 찡그리자 이번에는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나 저 얼굴 마음에 안들어. 룩이 진심어린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리자 톨비쉬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역시 놀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 시선이 안느껴지지?”
안느껴지긴 개풀이. 지금도 옆자리 여자 두명이랑 카페 안쪽에 사람 3명 지나가던 사람 두명, 전화받느라 멈춰선 사람 한명이 이쪽을 흘끗흘끗 보고 있는데.
“그건 내 얼굴을 보는 거니까 신경쓰지 말고. 너를 보는 사람말이야.”
톨비쉬는 가볍게 턱밑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가 지금 잘생겼다고 자랑하는건가.
룩은 커피고 뭐고 다 냅두고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 느껴지는 시선은 톨비쉬에게 향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자신에게 향하는 것은 그 곁다리로 앉아있는 일행에 대한 호기심에 불과 했다. 아무리 불편하고 짜증이 난다 하더라도 이정도는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도 어엿한 피오나인걸. 룩은 자신의 점퍼에 손을 문질렀다.
이 옷때문에 슬럼가라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하지만 톨비쉬는 다시한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까부터 이 남자는 한마디도 안하는 자신의 생각을 속속들이 읽은 것 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것도 기분나빠. 또다시 룩의 표정이 안좋아졌다.
“안타깝지만 그게 피오나의 문장이라는거 알아볼 사람 거의 없을거야. 그리고 내가 네 생각을 잘 알아채는건 크게 두가지 이유 때문이야.”
“....뭐?”
“하나는 내 눈썰미가 완벽하다는 것.”
괜히 물었다.
“또 하나는 네 표정이 너무 잘 드러난다는 것.”
“......또 잔소리하려고 하는거야?”
룩이 인상을 찡그리자 톨비쉬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컵을 내려놓았다.
아까부터 홀짝홀짝 잘만 들이키던 음료는 생각보다 많이 줄어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톨비쉬는 진지하게 룩을 바라보며 양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톨비쉬가 말했다.
“표정은 어쩔 수 없이 타인에게 보여야 하는 너의 정보야. 그 사소한 얼굴근육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앞으로의 일에 계속 영향을 끼치게 될거야.”
“그래서 어쩌라고. 얼굴에 가면을 쓰고 다닐 수도 없는 거잖아.”
“그럴 수도 있지.”
“뭐?”
“가면이라고 해서 꼭 물리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잖아?”
톨비쉬가 시선을 돌렸다.
어느틈엔가 테라스 가까이 다가왔던 남성이 톨비쉬를 향해 치켜들었던 카메라를 황급하게 내린뒤 카페 건너편으로 허둥지둥 건너가 버렸다.
평소라면 온화하게 돌려보냈을 일반인에게 차가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하지만 톨비쉬는 개의치 않아하며 다시 룩을 바라보았다. 설명은 계속되었다.
“보다시피 차가운 표정은 사람을 경계하게 만들어. 인상을 쓰면 반발감을 불러일으키지, 얕보일 필요까지는 없지만 일부러 경계심을 키워놓을 필요도 없어.
딱 적당하게, 무탈하고 부드럽게 넘어갈 수만 있을 정도면 충분해.”
“가면을 쓰고서 말이지. 퍽이나 잘되겠네.”
“물리적인 가면이 아니라니까.”
톨비쉬는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한번 룩을 응시했다.
룩의 시선이 처음으로 톨비쉬의 얼굴에 머물렀다.
조금 짜증이 난듯 굳어있는 눈매 아래로 교차된 손가락이 코와 입을 가리고 있었다.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뭐. 그게 어쩌라고? 룩의 표정을 읽은 톨비쉬가 손을 내렸다.
가볍게 웃고 있는 입이 차갑게 굳어있던 표정을 온화하게 바꾸어놓았다.
분명 같은 얼굴이지만 손을 내린 그의 얼굴은 자신만만하거나 혹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린아이를 어르는 어른의 얼굴이었다.
기분탓인지 눈매도 조금 둥글어진 느낌이지만 그는 시종일관 같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가면처럼.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룩은 식어버린 커피를 빨아들였다.
“웃으라고?”
“역시 똑똑하네.”
“웃는 거로 해결이 돼?”
“놀랍게도. 대부분.”
톨비쉬가 쓴웃음을 지으며 음료의 뚜껑을 닫았다.
그는 더이상 음료를 마시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무슨일이 생기면 대충 웃어넘겨. 화가나도 짜증이나도 억지라는게 티가 안나도록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려.”
“네네, 그렇게 하겠습니다요.”
룩은 비어버린 커피 잔을 구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 마신 컵은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룩은 잔을 수거하는 쓰레기 통을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톨비쉬는 두어모금밖에 마시지 않은 자신의 잔을 쟁반위에 올려놓았다.
쟁반을 들어올리던 룩이 의아해하는 눈으로 톨비쉬를 내려다 보았다.
톨비쉬는 매장안에 있는 수거함을 가리키며 저기있네 하고 말하다가 룩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웃는 사람을 경계해.”
마시지도 않은 음료때문인지 이어지는 두번째 강의 때문인지 룩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말 그대로야. 이 방법은 아주 기본적이고 정석적인 방법이니까. 언제든지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는 사람은 당연히 경계대상1호에 들어가야지”
“그럼 웃으면 안되는거 아니야?”
“대부분, 해결된다고 했잖아.”
톨비쉬는 얼른 버리고 오라는 말과 함께 티슈를 입가를 닦아내었다. 그는 딸기맛 괴음료가 꼴도보기 싫은모양이었다.
“같은 업계사람한테는 두 번 못써먹지”
“그럼 왜 나한테 그런걸 가르쳐.”
톨비쉬는 당연하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자네는 저 아르바이트생보다도 기본이 안되어있으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시간을 따로 써서 따라나온거 아닌가.
톨비쉬가 테이블에 팔꿈치를 걸치며 반듯하게 접은 휴지를 쟁반위에 던져 넣었다.
룩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기며 매장안으로 걸어들어갔다.
폭포수처럼 남은 음료를 쏟아낸 뒤 남은 쓰레기들을 차근차근 분리해 집어넣었다.
물수건으로 손을 싹싹 닦는 것을 마지막으로 골똘히 생각하던 것을 결정내린 룩은 그대로 카운터로 걸어가 새로운 커피를 주문했다.
블랙커피, 진하고 뜨겁게 하나. 아르바이트생은 활짝웃으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하나요. 마주 웃는 혀끝이 쓰거웠다.
음료는 금방 전달되었다. 룩은 매장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톨비쉬에게 막 뽑아낸 따끈한 커피를 하나 내밀었다.
톨비쉬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컵을 받아들자 룩은 홱하니 돌아서며 대답했다.
“수업료.”
“허, 제법 기특한데?”
톨비쉬가 컵을 열자 안에는 따끈한 원두커피가 담겨져있었다. 단것을 싫어한다는 걸 눈치챈걸까.
사실 톨비쉬가 시킨 음료는 본디 톨비쉬의 취향과는 정 반대의 음료였다.
그저 일부러 복잡한 주문을 해야한다는 말과 함께 아무 레시피나 적어달라는 톨비쉬의 부탁을 들은 소악마가 성심성의것 펜을 놀린 결과물일뿐.
네 취향대로 샷도 하나 추가했다는 배려가 기만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톨비쉬는 컵의 뚜껑을 움켜쥐며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죽어가는 커피의 향기가 톨비쉬의 목구멍을 강타했다. 소악마가 여기 한마리 더 있었나보다.
톨비쉬는 침착하게 구겨진 컵뚜껑을 펼쳐 컵을 도로 닫았다. 근처를 둘러보자 룩이 걸어간 방향으로 방금 걸어나왔던 카페의 설탕 봉지가 떨어져 있었다.
겉옷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은 룩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정말 최고로 기특한 녀석이야. 톨비쉬는 음료채로 쓰레기통에 커피를 던져넣은뒤 성큼 성큼 걸어나갔다.
멀찍이 도망가던 룩의 오금팍을 걷어차는 동시에 거친게 뻗은 손길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웃음기어린 팔이 반격을 시도한다. 톨비쉬는 가볍게 룩의 공격을 피해내고는 목을 휘감아 팔을 잡아당겼다.
꽤나 거친 가르침이었지만 덕분에 우중충하던 룩의 표정은 꽤나 밝게 바뀔 수 있었다.
표정이 바뀌자 분위기가 달라졌고 분위기가 달라지자 삶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러니 이젠 안다.
무엇을 바라봐야하는지, 무엇을 경계해야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해야하는건지.
룩은 이죽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분위기를 끌어당긴다. 정보를 선별하고 이야기를 주도해나간다.
그의 가슴에서 피오나의 명찰이 반짝거렸다.
“그런데 그거 알아? 난 바올출신 피오나야. 그런이야기, 수십번도 더 듣고 수백번도 더 보고, 수천번도 더 생각했어. 너희들에게는 카더라 하는 이야기이겠지만 나는 거기서 살았다고.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
검은 가면은 호오, 라는 입소리를 내며 룩을 바라보았다. 룩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반호르라는 원래의 이름을 바올로 고친 것은 에일레흐가 그 지역을 공업단지에서 격하시키기 위해서 만든 사소한 해프닝중 하나지. 바올은 원래부터 그런 슬럼가가 아니었어.
원래대로 만들어졌다면 아마 지금의 발레스 힐웬단지같은 공업지구가 되어있었겠지.”
“.....”
검은 기사가 이건 내 탓 아니야. 라고 말하며 검은 가면을 돌아보았다.
난 거기까지 말 안했어. 변명은 계속되었지만 검은 가면은 말없이 룩을 바라보았다.
“바올이 고립되기 시작한 것은 에일레흐가 처리하지 못하는 온갖 문제를 떠넘기기 시작했을때 부터였지.
눈을 뜨면 새로운 무리들이 생겨났고 기껏 만들어 놓은 규칙들을 어기며 자신들의 룰을 강요했어.
하루가 지날때마다 무리들은 점점 줄어들어갔고 결국 살아남은 것은 기존의 룰에 순응한 사람들뿐.
하지만 소란이 가라앉으면 또다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럴때마다 위험해지는건 기존의 청년층이 아닌 늙거나 어린 노약층이지. 더러웠어, 거지같았어.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안그래도 지옥같은 바올을 더 처참한 곳으로 만들어갔어.
그리고 죽고, 떠나고, 절망한 자신을 비관하며 다른이들을 끌어들이고.”
“서론이 좀 긴데.”
검은 가면은 어디한번 떠들어보라는 태도로 책상에 걸터앉았다.
정중하던 태도는 사라지고 흥미롭다는 반말이 튀어나왔다.
검은 기사는 잠시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라 이야기 했지만 하얀 퀘사르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은 기사는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적당히 하라는 말을 남긴채 관제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사라졌지.”
가면아래 드러난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사실 바올이 계획된 지구였다는 증거는 사방에 널려있었어.조금만 더 신경썼더라면 누군라도 의문을 가졌을지 몰라.
지나치게 빽빽하게 구성된 주거 구역, 곁가지 형식으로 틈틈히 뻗어있는 오솔길,
낙서로 덮여있었지만 규칙적으로 세겨져 있던 의미모를 글자들이나 황무지로 남아있지만 맹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잘 정돈된 라인알트, 게다가 이따금씩 보이는 무언가 높은 건물을 올리려고 했던 흔적까지.
그럼 무엇이 바올을 변질시킨 것일까, 언제부터 용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일까.
왜 바올에 대한 자료를 대량으로 폐기한걸까.
그나마 남아있는 자료는 황당하게도 외부로 에일레흐의 기밀문서를 넘기고 도망치려 했던 공무원의 서류가방에서 나왔어. 믿을 수 있겠어? 그 바올이, 서면으로 남아있다고.
젠장 그건 프린트된것도 아니라 서면으로 누군가 옮겨 쓰기까지 했어.
난 한겨울 호숫가에서 청승맞은 노래를 불러가며 3시간을 덜덜 떨고 앉아있었는데 그 거지같이 중요한 자료는 데이터도 디스크도 아니라 손수 옮겨적은 빌어먹을 손편지에 적혀져 있었다고.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 했을까..!!!”
룩은 얼굴을 처박고 있던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손 발을 움직일 정도는 아니지만 꼼짝없이 굳어있던 몸이 조금씩 풀려가고 있었다.
근처에서 기절한 요원들을 한데 옮겨두던 검은 퀘사르들이 일사 분란하게 듀얼건을 겨누어왔다.
하지만 룩은 태연하게 벽에 기대어 검은 가면을 올려보았다. 룩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자료가 유실되었다는 것은 아마 바올이 포보르때부터 진행되었다는 이야기가 될텐데 정작 바올이 완성된 것은 바이브카흐의 시대가 막을 내리기 직전이 되어서야.
기획은 예전부터 되어 있었는데 뭔가가 계획을 자꾸만 미뤄왔지.
그런데 사람이 살게 된 것은 그 이전부터였어, 누군가가 그 터를 비공식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던 거야.
사람이 불어나니 중간부터는 이름조차 바꾸고 원래의 용도를 감추고 있지, 우리를 속였어.
거긴 처음부터 포보르의 공업단지도 에일레흐의 쓰레기장도 아니였던거야.”
룩은 목끝까지 차오르는 심장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아주 많은 돈과 시간, 그리고 노력을 다해 그 이유를 찾아왔었다. 물론 미친취급을 받기 딱 좋았다.
그저 괴담으로 치부되는 소문속의 존재들을 사실로 가정하고 무엇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무법지에서 진실과 허구를 가려내야했다.
피오나의 성장은 슬럼가의 그들을 걷어내었고 사람들은 그시절을 잊고싶어만 했다.
단서는 늘 부족했고 의문을 늘어만 갔다. 하지만 그들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다.
“바올은 바이브카흐가 퀘사르를 만들기 위한 실험체를 보관하기 위한 장소였어.”
“........”
“도시에는 일부러라고 할만큼 에린안에서 퀘사르라는 단어자체가 지워져 있었지.
바올 출신의 인간들이 도시에 섞여들며 괴담같은 형태로 변질되긴 했지만 여전히 퀘사르의 노래는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았어.
꽤나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그 묘사를 덧붙이고 있는데도.
슬럼가 놈들중에 변이된 괴물이 살았다거나 어느 골목 안쪽에 시체를 뒤지는 까마귀떼가 있었다거나 바올 출신치고 약물중독이 아닌 놈들이 없다거나 하는 헛소리가 기삿거리로 소비되고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지.
오직 바올만이 퀘사르를 두려워 했고 붙잡히면 안된다고 아이들에게 경고를 거듭하며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건..”
“그만 거기까지.”
“사실상 바이브카흐가 지금의 퀘사르를... ”
검은 가면은 손을 들어 룩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피곤해졌다는 말과 함께 가면을 들어올렸다. 가면을 벗어내린 얼굴이 드러났다.
녹색의 눈동자, 조금 지친것 같은 중년의 얼굴. 목소리가 제법 젊은 편인건지 피로가 얼굴빛을 흐리게 만든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검은 가면은 눈가를 잠시 문지른뒤 나른한 한숨과 함께 룩에게 다가왔다.
“제법 흥미로워지려는 찰나에 직장이야기가 나오니 흥이 깨져버리는 군요.”
룩은 굳게 입술을 다문채 코앞에 쭈그려 앉은 검은 가면의 퀘사르를 바라보았다.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듀얼건이 룩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앞으로 조금, 앞으로 조금 만 더.
“너무 조잡했나?”
“게다가 한참 빗나갔습니다.”
“그래? 그거 아쉽네.”
하얀 로브의 퀘사르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머리를 뒤로 밀어내던 듀얼건이 거두어졌다.
검은 가면은 자리에서 일어나고서는 체념어린 미소와 함께 방아쇠를 당겼다. 한발, 그리고 또 한발.
“......!!”
온갖 욕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랐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졌다.
의지력없이 감각만이 살아있는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만 같았다.
양쪽 허벅지에서 번져나가는 붉은 핏자국을 바라보며 룩은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검은 가면이 고개를 까딱이자 대기중이던 검은 퀘사르가 룩의 팔을 잡아당겼다.
힘없이 늘어진 손목으로 녹음중인 시계가 반짝이고 있었다.
“말로 주의를 돌리며 일어나 앉아보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팔을 뒤로 숨기는건 조금 부자연스러웠습니다. 더 뻔뻔하게 손을 내보였으면 좋았을텐데.”
“꼭 우리 팀 곱슬머리같이 이야기하네.”
“그렇습니까?”
“다 알고서도 어울려주는 척 장단맞추다가 뒷통수 때리는게 아주 판박이야.”
주먹으로 입가를 가린 검은 가면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얀 후드사이로 금색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정말 닮은꼴이다. 룩은 잇새사이로 흘러나오는 숨이 점점 가빠진다는 것을 느꼈다. 핏자국은 점점 번져나갔고 다리를 타고 흘러내린 핏방울은 구두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당신의 눈이 꽤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필사적으로 정보를 모으고, 할 수있는 일을 찾아내려하고, 상황을 타계하려고 하는 그 노력, 열정,. 네, 싫어하지 않아요.
부질없는 희망에 목숨을 걸고 거기에 매진하는 용기. 오히려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군요.”
“그럼 좀 더 맞장구 쳐주지 그랬어?”
“하지만 애들장난은 이제 질렸습니다.”
검은 가면의 퀘사르는 빼앗은 룩의 시계를 조작했다.
[“바올은 바이브카흐가 퀘사르를 만들기 위한 실험체를 보관하기 위한 장소였어.
도시에는 일부러라고 할만큼 에린안에서 퀘사르라는 단어자체가 지워져 있었지.
바올 출신의 인간들이 도시에 섞여들며 괴담같은 형태로 변질되긴 했지만 여전히 퀘사르의 노래는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았어.
꽤나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그 묘사를 덧붙이고 있는데도. 슬럼가 놈들중에 변이된 괴물이 살았다거나 어느 골목 안쪽에 시체를 뒤지는 까마귀떼가 있었다거나 바올 출신치고 약물중독이 아닌 놈들이 없다거나 하는 헛소리가 기삿거리로 소비되고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지. 오직 바올만이 퀘사르를 두려워 했고 붙잡히면 안된다고 아이들에게 경고를 거듭하며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건..”]
[“그만 거기까지.”]
데이터는 지워졌다. 어떻게든 하나의 단서라도 남겨두려했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이제 어쩌지. 곱게 살려둘것 같지는 않은데.., 이제 혈서라도 써야하나. 룩은 흐려지는 시야를 여러번 깜빡거리며 의식을 붙잡기 위해 애를 썼다.
조각난 시계의 부품이 흩어져내린다. 룩은 큰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아직 안끝났어.
“바이브카흐가 퀘사르를 만든게 아니라면 네 반응에 내가 낚인게 아니라면, 그럼 가정을 바꾸면 그만이야.
바이브카흐는 퀘사르를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퀘사르의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사라졌어.
그러면 뭘까. 뭐로 이어질까. 이건 어때? 바이브카흐는 퀘사르와 적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그들과 같은 것을 만들어내었다.”
“당신, 이제보니 꽤나 시끄러운 입을 가지고 있군요.”
“나는 떠드는게 일이야. 내 동료들은 치고박고 싸우는게 일이지만 나는 그런 재능은 별로 없으니까.
뒷전에 앉아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해. 기록을 남겨, 그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그들이 안전한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검은 가면의 남자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그들이 만든 시계를 분해하며 낱개의 단위로 그 부품들을 떨어트렸다. 도구나 연장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몇번의 파직거리는 스파크가 튀어올랐을뿐.
“그런 것치고는 소식이 너무 뜸하지 않습니까? 아, 그렇군요. 당신네들은 이 시계가 연락수단이었던가요?”
“.....하..”
이젠 이해하고싶지도 않았다. 무엇이 기존에 알고 있던 현실인지, 눈앞에 보이는 환상인지 알 수도 없었다. 검은 가면이 웃음 짓는다.
“저런 벌써 피곤한 모양이군요. 그럼 마침 시간도 시간이니 옛날이야기를 하나 들려주도록 하죠.”
“나는…., 제때 잘 자는 착한 어린이보다는 탈선하는 쪽이였다니까..”
“시간을 끌어보려는 당신의 노력에 대답해주기 위한 특별 서비스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을테지만요.”
검은 가면이 손가락을 튕겨올렸다.
화면이 펼쳐진다. 화면속에는 남자가 쓰고있던 검은색의 가면이 떠올라 있었다.
화면속의 가면은 남자와 똑같은 목소리로 끊임없이 이야기 하고 있었다.
담담하게, 또 나른하게. 녹음된 음성은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길게 이어져 나가고 있었다.
같은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웃는다.
“설마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여기 한가하게 머물러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겁니까?”
[“이런 질문을 받는 것 자체가 모멸적이라고 여기는 당신들은 한번도 이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일겁니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자신의 아이덴티티, 명확하게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여기는 균형감각. 스스로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가장 초창기에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사실일까요?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진실은 아닐까요?
꿈꾸는 헛소리라고 손가락질 받는것에는 익숙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지금 당신이 듣고 보고 있는 현실은 정말 자신의 것입니까?”]
“퀘사르는 무장집단이 아니었습니다.”
검은 가면이 벗어두었던 자신의 가면을 다시 얼굴에 덮어쓰며 말했다.
“오히려 피해자에 가까웠고, 진실을 호소하는 고발자들에 가까웠지요.
아, 어디까지나 가까웠다는겁니다. 그들이라고 마냥 선한 집단은 아니었거든요.”
“내 허벅지 양쪽에 바람구멍을 숭숭 뚫어놓은 사람이 말하니 정말 믿음직스럽게 들리네.”
“그래야 또 다른잔머리를 굴릴 생각을 안할테니까요.”
가면을 쓴 남자가 웃는다. 녹음된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지루해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보이는 걸 보니 우선 옛날이야기를 하나 하도록 하죠.”]
“쉬이-, 이제 이야기가 시작되겠군요. 한번 잘 들어보세요. 당신이 추측한 이야기와 이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를.”
눈앞이 흐릿해지기 무섭게 우왁스러운 손길이 룩의 머리를 잡아 뒤로 젖혔다.
이명소리가 들려온다. 멍해진 머릿속으로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옛날 어느 마을에..”]
“착한 모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손재주가 아주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옷을 지어입었고 가구를 만들었고 나중에는 스스로 공부를 해서 효과 좋은 약까지 만들어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그 똑똑한 어머니의 아이가 큰 병에 걸려 버렸습니다.
아이가 아프다는 것을 알게된 어머니는 아이의 약을 만들기 위해 잠시 뒷산에 올라갔습니다.
혼자있는 아이가 걱정되었지만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무슨일이 있으면 친절한 이웃주민들이 도와줄테니까요.
그러나 이게 왠일일까요. 어머니가 집에 돌아왔을때는 아이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있고 집은 엉망이 되어있었습니다.
아이는 어느틈엔가 가까스로 구출해낸 산 제물이라고 불리고 있었고 어머니는 마녀가 되어있었습니다.
아이를 위해 그린 동화책은 사악한 마법서가 되었고 아이와 함께 눕혀놓았던 용모양의 인형은 사람이 되어 탑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마녀를 손가락질하며 박해했고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며 그 작은 아이를 멀리 있는 깊은 숲속 어딘가에 세워진 가장 높은 탑의 지하 창고에 숨겨두었습니다.
아이는 아직도 열이 펄펄끓고있는데도 말이죠.
어머니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탑을 찾아갔습니다.
막아서는 마을사람들에게 눈물로 호소하기도 하고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며 어떻게든 탑을 향해 가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끝내 탑에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마을을 떠나려하면 돌이 날아왔고 피냄새에 흥분한 까마귀들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날아올랐습니다.
숲 안쪽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괴한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정말 진심으로 자신들이 아이를 지키고 있다고 믿고있었습니다.
아이가 아픈것은 마녀의 저주때문이라고 믿고있었습니다.
죽어가는 아이를 구해내기 위해, 어머니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죽어가는 아이를 구해내기 위해, 마녀는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었을까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비숍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이 휘몰아쳤다. 금이간 바이저의 단면이 거슬렸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검은 색으로 뒤덮인 대검이 호쾌한 기세로 휘둘러져왔다.
순간적으로 팔을 들어 실드를 꺼내보지만 대검은 플로텍터를 무시한채 그대로 팔을 내리쳤다.
몇겹으로 막아내보아도 전혀 줄어들지 않은 충격량에 비숍은 이를 악물어야 했다.
검은 갑옷으로 무장한 낯선 괴한은 그 발소리의 무게와 다르게 한없이 가볍게 움직였다.
자신의 몸의 절반이 넘는 커다란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비숍의 걸음을 낭떠러지쪽으로 몰아쳤다.
듀얼건을 뽑아들 여유따위는 주지 않았다. 나이프만해도 가까스로 꺼내든 임시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한계, 검이 내리칠때마다 부서져나간 무장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바닥에 쏟아진 서류더미가 나부끼고 있었다.
내부자제가 드러난 한쪽 벽면에는 갑작스럽게 날아들어온 헬기가 박혀있었다.
위태롭게 얹혀진 벼랑끝, 구부러지고 깨어진 프로펠러가 흔들렸다. 135층, 탑승자 5명, 중 생존자 1명. 사망자 4명. 떨어진 종이 몇장이 검은 혼합물에 젖어든다.
바닥에 흠뻑 베이든 액체가 기름인지 핏자국인지 알길이 없었다.
조종석 바닥에 굴러다니는 무전기가 애처로운 노이즈를 울리고 있었다.
비숍은 너덜너덜해진 나이프를 내던지고 새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등뒤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이 그의 몸을 흔들고 있었다.
“너,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모리안출신인가보네.”
“거슬린다 말하는걸 보니 그쪽도 같은 직장이었나보군.”
검은 대검의 남자는 나지막하게 웃음소리를 내며 검을 휘둘러 부정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를 검은 대검은 이가 나가기는 커녕 광택하나 비치지 않은채 검게 물들어있었다. 검은 기사가 자세를 바로잡는다.
“난 옛날에 퇴사당했어.”
부딪치는 순간부터 기묘한 진동을 울리던 그의 나이프는 몇번 휘둘러지지도 못하고 앙상한 칼등만 남긴채 모두 바스라졌다.
킹의 잔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바위에 내려쳐도 이렇게 되지는 않을거라며 칼자루로 책상을 두드릴 것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대가 가진 무기가 바위보다 더 글러먹은 것이었는데.
비숍도 나이프를 고쳐잡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그럴줄 알았지.”
“그러는 너는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데?”
“아, 나는..”
비숍은 별로 상관은 없지만 이라고 덧붙이며 달려드는 검은 기사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또다시 검이 흔들린다.
미세하게 진동하는 검의 울림이 불쾌함으로 다가왔다. 이 검은 불길하다. 근접전은 안돼. 하지만 근접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떨어질 수가 있을까?
등 뒤는 낭떨어지였고 문은 검은 기사의 등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달려든 기사의 등 뒤에는 붉은 감시카메라가 움직이고 있었다.
연락이 오지 않고 이 남자가 먼저 나타났다는 것은 역시 관제실쪽도 당했다는 것이겠지.
비숍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무식하게 내리찍는 힘을 흘려 균형을 무너트렸다. 그정도로 빈틈이 보일리 없지만 운좋게 날아든 서류가 그의 시선을 흐트러트렸다.
비숍은 잽싸게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며 거리를 벌려 섰다. 책상 하나정도의 거리가 벌어졌다.
“회사가 망해서 실직되었거든”
“허, 뭐야. 액면가보다 어린가본데?”
“...그런이야기는 헬멧부터 벗고 이야기 했으면 좋겠는데.”
얼마든지, 검은 대검의 기사는 흔쾌히 뒷목으로 손을 올렸다.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던 새까만 철갑이 눈녹듯 사라지고 붉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남자는 슬쩍 손을 내리며 웃었다.
“왜, 생각보다 젊어?”
“.......우리 팀 최단신 꼬맹이도 울고가겠군.”
비숍은 굴러들어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섬광탄을 집어던졌다.
아무리 빠르다 한들 빛이 터지는 속도보다 빠르지는 못할터, 비숍은 바이저너머로도 환하게 빛나는 지점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며 문을 향해 달려갔다. 폭발음이 들렸다. 바닥이 흔들린다.
비숍은 순간적으로 휘청거렸지만 이내 균형을 다잡았다. 섬광탄의 것이 아닌 또다른 폭음, 환청처럼 괴성에 가까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것은 아니다.
흔들리는 화면속, 보이지 않는 세계 너머의 괴물의 것이다.
스피커에서 울리는 기괴한 이명소리가 잦아들기 무섭게 검이 휘둘러져 들어왔다.
빛을 갈라내는 검은 대검이 비숍의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어느정도의 반격은 예상했었지만 남자는 정확하게 비숍의 위치를 가늠하며 날카롭게 찔러들어왔다.
무식하리만치 강한 힘에 발이 멈춰섰다. 검은 대검이 비숍의 어깨를 찔러들어왔다. 빛은 이내 잦아들었고 다시금 바람이 휘몰아치는 사무실의 풍경이 드러나갔다.
그렇게 강렬했던 빛속에서도 남자의 눈은 한없이 커다란 동공을 활짝 열어놓은채 여유로운 표정으로 비숍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비숍을 꿰뚫은 그대로 벽에 내리 꽂혔다. 불쾌한 진동이 온 몸을 통해 전해져왔다.
비숍은 내리찢으려는 검을 붙잡은채 잇사이로 새어나오는 숨을 집어삼켰다.
“일부러 얼굴을 보여줬다고는 생각 안해봤나?”
“일단 던지고 난 뒤의 잠깐 동안은.”
검은 기사가 쓰게 웃었다. 제법 힘을 주어 검을 잡고 있지만 칼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채 고정되어있었다.
벽에 너무 깊숙히 박았나? 하지만 필사적인 남자의 시선이 뺨을 찔러들어왔다. 무심코 대답하던 타르라크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 우리들은 이런 시선에 약했다. 뭐든지 궁금해하고 뭐든지 이기려드는 오기어린 눈동자.
그만큼 우리는 너에게 약했고 너에게 너그러웠다. 네가 우리에게 그러하였듯이.
“궁금한건 없나?”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군.”
“별거 아니야, 그냥 옛날생각이 좀 나서. 분위기에 맞추는 것 뿐이다.”
어차피 죽을테니까, 뭐 정 의심되면 죽기직전 선물이라고 생각해.
붉은 남자는 검을 비틀며 말한다. 비숍은 나지막한 신음소리로 목을 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관제실은 점령되었고 지원은 오지 않았다. 이정도 소란을 피웠음에도 어느쪽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층 전체가 봉쇄되었다는 것.
지금 있는 층 뿐일까, 아니면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까, 아본을 지나쳐 올라왔으니 점령당한 것은 관제실 B측 일 것이다.
모리안을 알고 있는 이 남자가 만일 테러의 주동자라면 이 테러는 바이브카흐의 잔당들이 주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왜 퀘사르의 이름을?
생각이 복잡해지려는 찰나 다시한번 폭음이 울렸다. 다시한번 건물이 흔들렸다.
어디가 어떻게 터져나가는지 알 수 없었다. 우르릉거리는 건물을 한번 둘러보던 남자가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죽기 전만큼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보려면 좋으련만, 지나치게 충성심이 강한 사냥개들은 자신의 안위는 보살필 생각은 못하고 당장의 눈 앞만을 바라본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검을 좀 더 깊숙히 박아 넣으며 비숍의 주의를 돌렸다.
진동이 거세진다. 피가 역류하고 상처가 벌어진다. 등 뒤로 균열이 퍼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벽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궁금한것은?”
“....이름..”
비숍이 콜록거리는 기침소리 사이로 간신히 단어를 내뱉었다. 붉은 남자의 뺨에 핏방울이 튀었다.
“이름이 뭔지 알려줘.”
“나의? 아니면 우리들의?”
“당신의,”
붉은 남자는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흐릿하게 잔상까지 남기며 떨려오던 검이 멈춰섰다.
멈춰선 검신을 따라 붉은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루에리.”
“......”
모처럼의 이름까지 밝혔것만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루에리는 미련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가까스로 지탱되고 있던 벽이 무너지며 이름모를 피오나의 머리를 뒤덮었다.
세번째 폭음이 울린다.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화면에서 예의 녹음된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묻는다.
[“아 폭파는 계속 일어나니 신경쓰지 마세요. 제가 지금 일하는 중이라서 말이죠.
그럼..음, 내가 묻고싶은것은 말입니다.
거기 도망쳐있는 옷가게의 생존자들. 당신들 중에 혹시 일행을 잃어버린 손님은 없습니까?
자신이 살기위해서 옆에있는 부상자를 못본채 지나간 사람은 없나요?
그 옆 매장에 웅크려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아직 살아있지만 회생할 가망이 없는 누군가를 외면한 적은 없습니까? 혹시 그사람이 당신을 구해주지는 않았나요?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를 들은적은 없습니까? 혹시 지금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없나요? 이 목소리나 방송을 듣지 않게 하라고 억지를 부리지는 않습니까?”]
검을 털어낸 루에리는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소리를 지르는 누군가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있네 있어. 루에리는 헬멧을 다시 쓸 생각도 하지 않은채 그대로 사무실밖으로 걸어나갔다. 중앙이 내려다보이는 홀 가운데에서 오랜 악연의 그림자가 홀로 울부짖고 있었다.
“싫어요..! 더이상은 안돼요. 이 이상은 못해..!”
“.....”
“내가!!!!”
자괴로 가득차오르는 광기의 외침, 실에서 풀려난 마리오네트는 스스로의 팔다리를 지지대삼아 어설프게 무대위에 멈추어섰다. 텅 빈 몸통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리고 조명이 꺼진 무대위에 인형은 방치되었지만 인형은 자신의 배역을 완수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머릿속이 불타오른다. 점멸하는 이 불꽃이 꺼지고나면 그 안에 남은것은 한 줌의 잿가루뿐.
그럼에도 밀레시안은 소원했다. 공허한 눈물이 떨어져내린다.
“내가 바래왔던 것은..”
“그럼 그 소원대로 해주지.”
철갑을 뒤집어쓴 기사가 난간을 넘어 뛰어내렸다.
머리를 감싸쥐던 밀레시안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펄럭이는 검은 망토의 소리에 붉은 빛이 점멸한다.
하늘로 부터 떨어지는 검은 대검이 밀레시안의 머리위를 내리쳤다.
밀레시안은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서는 동시에 듀얼건을 휘두르며 반격을 가해왔다.
섬광이 튀어오르는 숨가쁜 공방전, 3자루의 금속이 요동친다. 검 대신 휘둘러치는 다우라로부터 기묘한 금속음이 울려퍼졌다. 실리엔이 흔들릴때마다 기묘한 푸른빛이 어른거렸다.
최대한 가깝게 따라붙었던 밀레시안이 루에리의 힘에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짓누르는 힘을 빗겨내어 듀얼건을 교차시킨다. 연사되는 실리엔이 추진력이 되어 밀레시안의 몸을 밀어내었다. 단시간에 여러발의 실리엔을 얻어맞은 루에리가 잠시 휘청거리는 사이 밀레시안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를 벌려섰다.
멀리 호선을 그리며 멀어진 밀레시안과 뒤로 밀려난 자세를 추스리는 루에리, 듀얼건이 장전되고 기둥을 휘어감은 실리엔의 탄환이 밀레시안을 끌어당겼다.
실리엔의 빛이 이어지는 선을 따라 검을 휘두르지만 그정도로 밀레시안을 멈춰세울스는 없었다. 한 발, 그리고 또 한발. 연달아 클로저를 사용해가며 자유롭게 이동하던 밀레시안이 어느 한 지점에 내려앉았다.
자세를 낮춘탓에 위치가 보이지 않는다. 과열되는 컨버터와 진하게 피어오르는 실리엔의 향기, 숨을 몰아쉬는 혀끝이 쓰라렸다. 루에리는 검을 고쳐잡으며 귀를 기울였다.
짧았던 충전이 끝나고 밀레시안이 뛰어올랐다. 사방으로 종횡무진을 하며 쏟아지는 탄환의 질주, 루에리는 집요하게 머리를 노려오는 총격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이를 악물었다.
불규칙하게 날뛰던 검은 그림자가 머리위로 뛰어올랐다.
찬스는 바로 지금, 탄환을 걷어내듯 크게 휘두르는 검끝에 무언가가 얻어맞으며 직선방향으로 나가떨어졌다.
새하얀 다우라 한자루가 빙글빙글 돌며 발밑으로 미끄러져들어왔다. 무너진 화단장식속 콜록거리는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돌더미가 들어올려지고 옆구리를 부여잡은 밀레시안이 숨을 고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잊을 수 없는 그 검과 이 움직임, 밀레시안이 이를 드러내며 짐승과도 같은 울음소리로 그를 불렀다.
“왜…?”
“그러는 너는 왜?”
루에리는 밀레시안의 말을 듣고싶지 않다는 듯 말을 자르며 검을 들어올렸다.
말의 형태로 가다듬어지지 않은 숨결이 탄식이 되어 목구멍을 울려온다.
“왜…!!왜..!! 왜!! 당신들이!! 왜!!!”
밀레시안을 악을 쓰며 소리쳤다.
왜, 어째서, 이유를 물으며 몇번이고 몇번이고 자신의 상처를 움켜쥐었다.
머릿속이 불타오른다. 돌아서던 그 뒷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하다.
“왜!!!”
“그러는 너는 왜 죽지 않았던 거냐.”
루에리가 묻는다.
“왜 네가 죽기를 선택하지 않았었지?”
검은 대검은 밀레시안을 가리켰다.
네번째 폭탄이 브류나크를 뒤흔들었다.
“이번에도 대답 못하면, 너는 정말 내 손에 죽어.”
루에리는 내구도가 거의 다 떨어진 헬멧을 해제하고서는 갑옷으로부터 떼어내었다.
검은 투구속, 낯이 익은 얼굴을 확인한 밀레시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듀얼건을 치켜들었다.
총성이 울렸다.
글
톨비밀레) reload #9(1)
퀘사르를 만나면 좁은 골목으로 도망쳐라.
룩은 오래된 슬럼가의 노래를 떠올리며 자세를 낮추었다.
팔을 들어 눈을 가리며 얼굴을 가린다.
밤으로부터 훔쳐낸 검은 날개를 두르는 악몽의 사자들은 뛰는 듯 나는 듯 너를 쫓아 깊고 깊은 무덤속으로 데려가 버린단다.
그러니 도망칠때는 언제나 좁은 골목으로. 커다랗고 날카로운 손톱은 아무리 두꺼운 합판도 뚫어버리니 모습을 숨겼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돼.
녹슨 태양이 너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문 틈 사이 작은 구멍조차 틀어막으며 숨을 죽이렴.
여러 사람의 입을 거칠 때 마다 내용은 조금씩 변화해 나갔지만 일단 그들이 경고하는 문장은 모두 같은 구절로 끝을 맺었다.
도망치고 또 도망쳐라. 좁고 굽이진 골목으로 길을 꺾어라.
어린 시절에는 이해할 수 없는 광기에 가까운 두려움이었지만 사실상 그 공포의 실체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퀘사르라고 불리기도 했고 그냥 악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호기심이 강했던 룩은 어렸을때부터 그런 이야기를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콧방귀를 끼곤 했었다.
세상에 그런 괴물이 어디있어. 확실히 귀엽지 않은 시절이었다.
정오를 알리는 알람처럼 매일같이 날아오는 주먹질을 피해 반쯤 뜯겨진 창문아래로 뛰어내리면 어김없이 널려있는 커다란 이불이 룩의 몸을 받아내었다.
힘들게 빨아온 이불위로 신발자국이 선명하게 세겨지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는 않는다.
언제나 눅눅한 이불은 빨아도 빨지 않아도 늘 그 냄새에 그 얼룩, 빨래를 지켜보는 대가로 점심 한끼를 얻어먹는 노파는 느긋하게 빨래를 다시 펼쳐 당길 뿐이었다.
건조줄이 널려있는 공터를 지나 내달리면 좁고 가파른 골목을이 거미줄처럼 얽혀있었다.
골목을 가득 채워놓은 합판 더미를 뛰어넘어 오르던 길고 좁은 계단길, 외길로 이어질것 같은 긴 오르막길 중간에는 척 보기에도 낡아보이는 붉은 철판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위로는 가시 철조망을 둘둘말아 성의없이 막아 놓은것으로 보아 분명 슬럼가의 어른 중 누군가가 대충 설치해 놓은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언제나 막다른 골목 아래에는 개구멍이 생겨나는 법,
비스듬히 벌어진 철판 사이에는 억지로 벌려 만들어진 작은 틈새가 하나 만들어져 있었고 그 크기는 점점 커져 어린아이 한명정도는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만한 모양이 되어갔다.
그치만 기어들어가는건 폼이 안나잖아, 귀엽지 않은 시절의 룩은 늘 폼이 안난다는 말을 입버릇 처럼 중얼거리며 몸을 날려 벽을 기어 올랐다.
개구리같던 볼품없는 폼새에서 천방지축 원숭이처럼, 그리고 온갖 겉멋이 들어 주머니에 손을 꽂고 뛰어다니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올때까지,
룩은 그 험한 가시울타리에 숯한 옷자락을 찢어먹어가며 늘 그 가로막힌 골목 너머를 뛰어다녔다.
걸리는 날에는 온갖 잔소리를 들어야했지만 뜯어말리며 가지 말라고 훈계하는 어른은 없었다.
애초에 그럴만한 친절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왜 막아두는지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철 울타리 너머에 있는 것이라고는 짓다만 커다란 폐건물의 잔해뿐이었다.
그나마도 건물을 올리다 말고 떠나버린 탓에 건물은 온전한 모습조차 갖추지 못한채 회색빛의 날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돈이 될만한 전기배선이나 수도관은 옛날 옛적에 뜯어갔기에 쓸만한 돌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부서지지도 무너지지도 않은채 그저 방치만 되어있는 그 빌딩이야 말로 바올에 어울리는 모습,
도시에서는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돈이라는 말조차 믿지 않았던 룩이었지만 이 건물을 가리켜 말했을때는 그 고집쟁이의 룩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건물은 버려진 물건이었다. 다 해진 옷이나 망가진 장난감 처럼, 쓰다버린 사람처럼, 이 건물 또한 바올에 버려진 물건들 중 하나였다.
그랬던 건물에 언젠가 한번 이름모를 남자가 멋대로 앉아있던 때가 있었다.
바올에 흘러들어온지 얼마 안되었던지 아직 값을 쳐줄 수 있는 물건을 가지고 있던 청년은 순식간에 탈탈 털린채 골목 어귀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어느날에는 하수구에 빠져있었다. 어느날은 옥상에서 까마귀떼에게 놀림을 받고 있었다.
어느날은 건조대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고 어느날은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바라보는 회색빛 벽면에 햇빛이 드리웠다.
따스한 온기가 닿지는 않을 만큼, 한뼘정도 비쳐들어오는 황금색의 태양빛은 어숩지않은 희망과 닮아있었다.
벗어나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 시신을 뜯어먹고 사는 검은 새들이 골목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붉은 램프가 점멸한다.
남자는 한 줌도 안되는 햇빛속에 녹아들며 그림자를 감추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반짝이는 빛무리가 잠시 머무르다 사라졌다, 라고 룩의 작은 여동생은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왔다.
바보야. 그런 마법같은 일이 세상에 어디있어. 룩은 꽤나 거칠게 동생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울상이된 동생을 뒤로하고 룩은 심심풀이 삼아 남자를 찾아나섰다.
동생 앞에서는 폼을 잡았지만 사실은 그도 꽤나 궁금해하고 있었다는 것이 본심.
좋은게 좋은거잖아. 어쩌면 몰래 숨기고 있는 비싼 장비라도 가지고 있는건지 몰라.
한참동안 골목을 뒤지고 다녔지만 남자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정말 빛속에 녹아들어서 몰래 살금거리며 돌아다니는 걸까.
하지만 곧 고개를 내저으며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바올은 온통 그늘진 골목길투성이로 빛따위는 내리쬐지 않는다. 룩은 계단을 털래털래 내려가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니지, 한 곳이 있긴하지. 룩은 철판 앞에서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리번거리는 눈치가 주변의 시선을 살피고 있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룩이 훌쩍 철판을 뛰어넘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안쪽이 서서히 밝아져 오고 있었다.
룩의 예상대로, 혹은 운이 따라준대로, 남자는 버려진 폐건물의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다.
골목에 있을때 까진 구두라도 신고 있었던 것 같은데 빌딩에서 마주친 청년은 이미 맨발이 되어버린 뒤였다.
넥타이도 손목시계도, 커프스단추도 모두 털린채 옷은 어느새 빈털터리처럼 풀어해쳐진 모습은 제법 바올에 어울릴 법한 모습이 된 것 같았다.
장비같은건 이미 빼앗겼겠는데..? 하지만 그의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의 얼굴을 하고 있는 얼굴을 보고있자니 룩은 어쩐지 그를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발소리를 죽여 조심스럽게 뒤를 향해 다가갔다. 정 털어낼 것이 없으면 안경이라도 훔쳐가면 그만이다.
값어치는 잘 모르지만 잘 연마된 렌즈라면 어느정도 푼돈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옮긴 생각없는 발걸음이었다.
첫 인사는 발길질, 별 것 아닌 트집과 빈정거림이 섞인 무례한 시작이었지만 청년은 온화한 미소로 룩을 돌아보았다.
당혹감도 불쾌함도 아닌 친절한 인사가 룩을 당황시켰다.
무슨 폭언으로 대답해도 그는 웃음지었고 아무리 사납게 소리쳐도 고개를 끄덕였다.
룩은 제 풀에 지친얼굴로 그의 옆에 걸터앉았다.
별볼일 없을 것 같았던 샌님은 룩의 흥미를 자극할만한 주제만 골라 대화를 이어나갔고 삐쭉이며 튀어나가려는 그를 억지를 논리정연하게 정리해 나갔다.
어느틈엔가 룩은 얌전한 강아지처럼 그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말을 듣게 하기 위해 때리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룩은 한결 경계가 풀린 눈치로 그를 바라보았다.
안경을 쓴 청년은 맨발이된 발을 흔들며 그에게 물었다. 이곳에는 왜 다른사람들이 오지 않는가.
룩은 여태 그걸 몰랐냐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남자는 아이의 작은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야 여기서만 저 곳이 보이니까.”
태양이 저물고 있었다. 해가 잘 들지 않는 바올과 달리 이 건물에는 언제나 붉은 석양빛이 들이쳤다.
태양은 도시에서 떠올라 도시로 저물었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의미를 깨달았다.
이 태양의 온기도, 별빛의 아름다움도, 모두 도시의 것이라는 것을.
그들이 원하면 비가 왔고 그들이 원하면 날이 개었다.
일부 특별한 날에 한정한다고 하지만 그 특별한 날을 지정하는 것은 온전히 도시사람들의 몫.
몇날며칠 뜨거운 태양이 계속된 적도 있었다. 한 주 내내 눈이 내린적도 있었다.
그런 변덕스러운 일정을 예측하고 예정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칼리번뿐. 아니 그런 변덕스러운 일정을 지정하는 것 자체가 칼리번이었다. 칼리번의 빛은 이런 구석진 골목까지는 비추지 않았지만 그 하늘의 구름은 그에 관계없이 먼 바올까지 밀려들어왔다.
그런 불합리한 현실을 여실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까. 룩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폐건물에 오지 않았다.
갈 곳이 없는 어른들도, 그보다 어린 또래의 아이들도. 한번쯤 이 폐건물에 왔던 아이들은 모두 말없이 골목으로 돌아가 거긴 놀고싶지 않다는 말만을 반복해 말하고는 했다.
룩은 죽은 생선같았던 아이들의 눈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남자의 시선또한 손끝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그들이 앉아있는 건물 난간의 아래, 단단한 지반이 땅이 있어야할 땅에는 깊고 깊은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이것이 저 노을의 대가, 아름다운 태양빛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말로.
달랑거리는 낡은 신발이 눈앞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훌쩍 뛰어내릴것 같은 가벼운이 난간위를 팔랑거리며 흔들렸다.
남자는 어쩐지 발이 무거워진 느낌에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발을 바라보았다.
어둠을 등진 맨발이 유난히 더 하얗게 질려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군. 모두가 기피할만 하긴 하구나.”
“나는 아니야. 난 여기가 제법 마음에 들거든”
룩은 씨익 웃으며 양 다리를 들어올렸다. 균형이 무너지고 아이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앞으로 뛰어내리지 않는이상 추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어쩐지 아찔해지는 광경이었다.
아이는 매우 훌륭한 뒷구르기를 선보이며 그럼 난 간다. 동생들 밥 때가되어서 라며 시원스럽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남자는 말없이 아이를 바라보았고 아이의 모습은 빌딩에서 사라졌다.
아이가 남자를 빌딩에서 찾아낸 뒤로 며칠이 지났지만 남자는 아직도 그 빌딩위에 앉아있었다.
이제는 낯설지 않게된 맨발의 남자는 먹지도 자지도 않은채 몇날 며칠이고 같은자리에 앉아 있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남자가 이제는 일출을 등지고 앉아 있다는 정도. 남자는 이따금씩 고개를 돌려 태양이 저물어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슬럼가의 낯선 아이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아이는 어김없이 해가질 무렵이면 다 떨어져가는 양쪽 주머니에 손을 걸친채 어슬렁 어글렁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왔다.
쿠르클레의 아이.
어느날을 기점으로 쿠르쿨레의 실리엔 연구소가 폐쇄되었다.
예상치 못했을 만큼 갑작스러웠던 일이었기에 아발론으로서는 대응이 한발 늦을 수 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대응에 나섰을때는 이미 대부분의 연구원들이 살해당한 뒤였다.
모리안은 연구소의 존재 자체를 지우듯 강박적으로 그들을 사냥해 나갔고 도망친 네반의 연구원들은 하루살이같은 삶을 이어나가기에 급급했다.
그런 연구원들중 하나가 이 바올로 숨어들어왔다. 연구원은 다급하게 돈이될만한 것을 팔아 자신의 아이를 이 바올에 맡겨놓았다.
무법천지에 가까웠던 바올에 아이를 내려놓는 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줄 알면서도 연구원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을 원망하며 아이를 떼어놓았다.
몇번이고 후회했고 몇번이고 돌아보았지만 연구원은 끝내 바올로 돌아오지 못했다.
아이는 그렇게 바올에 남겨졌다.
바이브카흐의 눈을 피해 바올에 숨겨진 아이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그를 보호하려던 연구원의 지인은 갑작스러운 돈이 생긴것이 알려져 살해당했고 아이는 그 피웅덩이속에 방치되었다.
아무도 아이를 거두려 하지 않았고, 아무도 아이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언젠가 찾으러 온다 말하지 않았느냐고, 바올의 아이들은 그의 희망을 조롱거리 삼아 놀려대었다.
어설프게 남아있는 가족이라는 꼬리표가 그의 족쇄가 되는 순간이었다.
살아남이 위해 남들의 곱절을 노력해야했고 안그래도 가혹한 바올은 그에게 조금 더 냉정했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 가족이라는 존재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그 누군가에게 저주어린 욕설이라도 퍼붓기 위해서.
몇번이고 미끄러지고 절망하면서도 아이는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익히며 고된 삶을 해쳐나왔다.
아이가 홀로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동안 바깥세상에는 조금 더 많은 일이 있었다.
네반이 죽었고 모리안은 새로운 힘을 얻었다. 마하의 몰락때부터 조금씩 분열의 조짐을 보여오던 바이브카흐는 결국 모리안만이 남는 결말로 끝이났다.
그것이 모리안의 선택이었는지, 그녀가 복원한 칼리번의 선택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바올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는 것 뿐.
모리안의 시선이 바올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아발론은 지체할 것도 없이 바올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번인가 모리안의 요원들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지만, 그래봐야 평범한 인간들일 뿐이었다.
아발론은 아주 간단하게 그들을 따돌리며 바올로 숨어들어갔다.
손가락을 튕겨 감시카메라들을 다른곳으로 돌려세웠다.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스파크가 마치 불꽃놀이처럼 파닥거렸다.
아발론은 자신의 손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어린 아이에게 검지손가락을 세워보이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아이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는 것은 끔찍했지만 아발론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아니 다른 선택지를 생각 할 수 없었다.
그의 나태함은 티르 코네일의 붕괴를 가지고 왔고 그가 누려왔던 평화는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던컨은 그를 말리려했지만 아발론의 마음속에는 이미 후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티르 코네일이 그를 구원했던 것과 달리 그 자신은 티르코네일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이 끊임없이 메아리치며 아발론의 머릿속을 복수라는 단어로 가득채워 놓았다.
그녀들은 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복수하기 위해 이토록 잔인한 일을 반복하는 걸까.
티르코네일이 붕괴된 것은 아직 마하가 몰락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몰락의 전조는 커녕 오히려 최전성기를 달리던 어느 평범한 날의 하루.
그 어느 한적한 날 결국 도르카 페다인이 그들을 찾아내었다.
그들은 퀘사르 만큼은 아니었지만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완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비견될 정도로 비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체격이 좋은 무뢰한들의 억지였지만 그들은 곧 본색을 드러내 이따금씩 어른거리는 보라빛 연기와 은색의 액체가 들어있는 앰플을 꺼내들었다.
갑작스러운 약물에 티르코네일의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그 결과는 곧 악몽으로 드러났다.
잠시 인간의 굴레를 잊은 도르카 페다인의 모습앞에서 아발론은 처음으로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했다.
보라빛 손톱이 벽을 뚫고 튀어나왔다.
이전의 악몽을 잊고, 혹은 그 악몽의 두려움만을 잊고, 마치 꿈결에 취해 환상을 헤메이는 것 처럼 그들은 아주 즐겁게 티르코네일의 마을사람들을 유린해 나갔다. 사람인 동시에 괴물이었다.
스스로의 인간의 굴레를 지워낸 도르카 페다인은 괴물의 모습으로 변화한 신체를 휘두르며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파괴해 나갔다.
설마 그럴리가, 그 연기를 무기로 사용할리가.
그러나 실리엔 연기를 들이마신 도르카 페다인은 한마리의 짐승마냥 울부짖으며 커다랗게 변이된 양손을 들어올렸다. 수직으로 내리치는 망치처럼 한 점에 내리치는 강력한 일격이 사람의 머리위로 떨어졌다.
바닥이 움푹 패어 들어갔다. 갈라지는 양 손이 다른 희생양을 찾아 허공을 내가른다.
사용시간은 5분, 재활성화까지는 24시간.
포보르와 협력하기 위해 필리아를 떠났던 바이스를 비난하던 엘프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바이브카흐와 손을 잡은채 실리엔의 중화제를 완성시켰다.
필리아에 남아있던 엘프들은 모두 치료되었고 론가는 그 대가로 바이브카흐의 실리엔 연구에 눈을 감았다.
무엇이 일어나든 무엇을 만들어내든 그들은 더이상 실리엔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무관심이 결국 누군가가 통제 할 수 있게된 재앙을 불러온 것이었다.
마하의 중화제로 컨트롤 할 수 있는 시간은 단 5분뿐이었지만 5분 만으로도 마을이 쑥대밭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가까스로 도망친 주민들은 먼 발치에 물러서서 불타오르는 티르코네일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던컨은 자책하는 아발론을 위로했지만 결국 아발론은 그들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누군가는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혼자서는 너무 위험해. 적어도 우리들이 준비될만할 시간을..”
“괜찮습니다. 그들은 나를 죽일 수 없습니다. 그들의 힘은 결국 내가… 아니,”
아발론이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리들이 만들어낸 것이니까요.”
티르 코네일을 떠난 아발론은 숲 근처에 방치되어있던 포보르의 연구소들 찾아갔다.
대부분은 이미 문을 닫거나 사라졌지만 아발론은 포기하지 않고 용접된 문을 열어젖혔다.
연구소의 기능이 정상에 가까워질때마다 바이브카흐의 방해꾼들이 찾아왔지만 아발론은 능숙하게 몸을 숨기며 다음 은신처를 향해 도망쳤다.
필요한 것이 아주 많았다. 오래되었지만 아직 쓸만한 기계들이라던가 주요 부품이 모조리 뜯겨나간 탐색대, 부서지지 않은 무기, 가장 최근의 정보, 그리고 마음을 다잡을 만한 시간.
다행히도 혼자가 된 몸은 아주 간편했다.
지켜야 할 규칙도 없었고 약점이 될만한 물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보르는 그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연구소들을 숨겨놓았고 그 위치는 포워르들조차 모르는 곳에 숨겨져 있었다. 연구소를 움직일 지식은 충분했다. 아발론 그 자체가 포보르의 지식이었다.
밀레시안의 입을 빌린 바이브카흐는 아발론을 비웃었다.
이제와서 어줍지 않은 영웅 놀이를 할 셈이야? 아발론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 손으로? 그의 손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확인 버튼을 눌렀다 떼었다.
마하의 연구소의 전원이 내려갔다. 어둠을 틈타 탈출한 실험체들이 연구소로 쏟아져 나왔다. 작은 톱니바퀴 하나가 멈춘 것 만으로 도르카 페다인들의 앰플이 생산되던 주요 라인들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중화제에 섞인 한 방울의 불순물이 도르카 페다인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스스로가 짐승이 된 검은 기사들과 함께 마하의 연구소는 자멸했다.
아발론은 지도위에 깜빡이는 마하의 연구소들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런건 바라지도 않아.”
네반이 마하를 도우려 했지만 네반의 임시 중화제로서는 마하의 붕괴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미 마하 생명공학단지에서 괴물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모리안은 마하의 연구가 지나쳤다는 것을 인정하며 아발론에게 중재역을 자청했다.
어차피 아발론도 바이브카흐도 반쪽뿐인 칼리번의 조각들, 아발론에 대한 명령은 거둘테니 피차 같은 계열끼리 충돌하지 말자는 것이 그녀들의 입장이었다.
아발론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조건을 하나 더 내걸었다.
“그들을 내버려둬. 그냥 그들이 스스로 살아나가도록 해방시켜줘.”
모리안은 눈을 지긋이 감으며 끄덕였다.
“그럼 교섭은 결렬이네요.”
모리안은 마하를 돕는 대신 빠르게 지분을 흡수하며 피해를 최소한으로 억제했다.
마하의 연구소는 곧 폐쇄되었고 모리안은 도르카 페다인을 대체할 다른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본디 기능을 따진다면 아드니엘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크게 두가지였다.
하나는 자료를 모으는 것. 또 하나는 그것을 요람에게 전달하는 것.
비어가는 케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며 필요한 정보를 알맞게 전달하는 것이 아드니엘의 본래의 능력이었고 그 정보들을 꿈이라는 형태로 가공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케트의 잠재성이었다. 아드니엘이 칼리번을 만들어내기 전까지는.
케트의 정신은 날이갈수록 한계로 치달아갔다. 홀로 고독하게 소모되는 것을 반복하는 환상속에서 아이는 자신과 함께할 누군가를 간절하게 원했다. 아드니엘은 여태까지의 자료를 바탕으로 칼리번이라는 가상의 존재를 만들어 내었고 이는 곧 아드니엘과 공명하는 칼리번이라는 자아로 독립했다.
칼리번은 케트의 생존을 위해 포보르와 협력을 제안했고 포보르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파르홀론은 그렇게 칼리번에게 배신당했다.
케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의 한계점에서 벗어난 아드니엘은 스스로 정보를 조합해 실시간으로 엮어내는 칼리번의 꿈으로 진화했다.
아드니엘과 칼리번의 가상 시뮬레이팅 능력은 모의 실험을 넘어서 미래의 예지의 범위까지 뻗어나갔다.
남들보다 한걸음 앞서 나가는 순간 미래로 뻗어나가는 가지의 방향이 결정된다.
두걸음 앞서나가면 그 길이를 제한하고 세 걸음을 앞서나가면 그 생장의 여부를 결정짓는다.
포보르는 그 세번째 걸음을 획득하고자 새로운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프로젝트 아발론. 어디까지나 실체가 없는 AI에 불과한 칼리번에게 유기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동시에 포보르에 전적으로 협력하게 만들기 위한 살아있는 감옥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포보르의 요람 관리자였던 된 벨라는 자키브엘의 지휘아래 칼리번을 설득했다.
칼리번은 벨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인간의 정신속에 자기 자신을 복사했다.
이전이 아닌 복사라는 점에서 이미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와는 결과가 달라졌지만 숨쉬는 법도 잊어버린채 고요히 잠들어 있었던 남자의 각성으로 프로젝트는 성공으로 결론내려졌다.
이 때 잃어버린 남자의 이름이 바로 셰익스피어.
지금은 아발론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진짜 이름은 그렇게 덮어씌워졌다. 미련은 남지 않았지만 후회는 조금 남아버렸다고, 문서의 작성자는 그날을 회고했다.
이상의 정보는 모두 포보르의 기밀에 속하는 문서로, 원본은 모두 지난 역병의 밤을 기점으로 소실되어버린지 오래였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남아있던 폐허속에서 반쯤 불탄 메모리칩이 하나 발견되었다.
겉면이 녹아내린 메모리칩은 전기적 충격에 조금 그을렸을뿐 화재의 열기에 녹아내린 것은 아니었다.
바이브카흐는 이 작은 조각에 흥미를 가졌고 이 안에 걸린 자물쇠를 풀기위해 노력했다.
잠겨진 락을 푸는데에 수 개월을 허비해야 했지만 내부에 저장된 문서들은 뜻밖의 보물을 담아내고 있었다.
메모리 칩의 안에 저장되어 있는 것은 칼리번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들과 아발론에 대한 각종 자료들, 그리고 포보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고발이 담긴 문서들이었다.
수신자는 알 수 없었지만 작성자가 누구인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자료들의 가치는 충분했다. 바이브카흐는 이 데이터를 토대로 칼리번을 재건했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의 에린을 시뮬레이팅할 프로그램을 만든것에 불과 했다.
스스로 필요한 정보를 선택하여 취합했던 자아를 가진 칼리번과 달리 데이터를 대입하는 것도 그리고 그 결과를 해석하는 것도 모두 사용자의 몫이 되어버린 복원품은 반쪽짜리 칼리번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정보의 자원들은 이미 백지가 되어버린 뒤, 모리안은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쳤지만 그 고민은 곧 의문으로 이어졌다.
칼리번이 그저 꿈을 만들어내는 것뿐이라면 그것을 부여하는 것은 아드니엘.
하지만 그렇다면 퀘사르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수를 단시간 안에 양산될 수 있었을까.
바이브카흐는 퀘사르가 초기단계의 칼리번을 가지고 있었을것이라 예상했었지만 막상 그 초기단계의 칼리번을 가지게된 모리안은 예상과는 다른 현실에 고민했다.
그렇다면 어딘가 아드니엘의 초기단계도 설치되어있을 것이다.
기억을 잃고 의지를 잃은 사람을 쟤료로 만드는 악몽의 인형들의 본거지를 찾아 모리안은 무너진 퀘사르의 흔적을 더듬어올라가기 시작했다.
분명 역병의 밤이 발생하기 전 아발론이 그 위치를 찾아내어 그들에게 투항을 권유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칼리번의 성향이 반영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독단을 방치한 포보르의 실책이었다.
인형에게 그런 인간성이나 자비심은 필요하지 않아, 모리안은 그 당시의 자료들을 하나하나 입력해 나가며 아발론의 행동을 재현시켰다. 칼리번은 한 지점을 가리켰다.
모리안은 한쪽 손에 턱을 괴인채 나른하게 지도를 올려다 보았다.
“핀카라…”
모리안은 네반에게 연락했다.
네반은 새로운 실리엔의 연구를 위해 외딴 바다에 떨어져 있는 무인도에 틀어박혔다.
도르카 페다인의 폭주 이후 필리아가 완전히 바이브카흐에게서 돌아섰다는 점도 있었지만 네반은 빠르게 마하를 잘라낸 모리안의 대처에 내심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표면에 드러난 섬의 면적은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섬 어귀에 드러나 있는 동굴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탐사를 거듭한 결과 이 섬에서 자생하는 동식물들이 실리엔과의 공생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발견해냈다.
필리아의 실리엔에 비교하자면 순도는 조금 떨어지지만 차라리 그게 더 이점이었다.
에너지화가 덜 활발하기 때문에 광물의 형태를 유지시키기도 더 쉬웠고 섬에서 자생하는 약초따위들과 같이 둔다면 가스의 누출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장점이었다.
모든 효과가 느리다는 것. 망각병의 발병속도도, 진행속도도, 야수화가 진행되는 속도도 현저하게 느리고 확률도 낮았다.
하지만 이게 맞는 것이다. 원래부터 이런 실리엔을 사용했어야 옳았던 것이었다.
필리아의 실리엔이 지나치게 파괴적이었고 강력했기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 목적에서 벗어난 힘은 필요 없어, 네반이 연구의 방향을 실리엔의 상용화로 결론 내리려 찰나 한 통의 전화가 울려왔다. 모리안이었다.
모리안은 아주 특별한 생산품을 주문했다.
가면을 쓴 괴한들이나 덩치가 크게 변이되는 괴물들은 더이상 시대에 맞지 않았다.
나이와 모습, 성별, 이름조차도 가짜인 괴물이 필요했다.
사람의 무의식에 녹아드는 평범함이 무기였고 사용되지 않을때는 평범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일상의 생활을 흉내내며 연기해야했다.
할 수 있지? 만들 수 있지? 모리안이 속삭였다. 네반은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전화를 받는 텅 비어버린 누군가의 연구실이 네반의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네반은 고개를 숙인채 작게 어깨를 흔들었다. 언제나 절박한 자만이 희망의 지푸라기를 부여잡는다.
그렇게 그 지푸라기를 엮어 태어난것이 밀레시안들이었다.
사람들은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나가는 경쟁자의 죽음에 기뻐하는 한편 제 목숨을 지키기 위해 에이전트 고용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 흐름에 끝에는 모리안이 있었다.
모리안은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 에이전시를 운영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밀레시안들을 움직여 불안감을 조성해나갔다.
안좋은 이미지를 뒤집어쓸 이름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여전히 악몽의 두려움에 떨고 있던 바올은 여전히 그들을 퀘사르라고 부르며 입에서 입으로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전해나갔다.
밤의 날개를 훔친 까마귀가 너를 쫓아 깊고 깊은 숲속으로 데려가 버린단다.
그러니 언제나 도망칠 때는 좁은 골목으로, 작지만 날카로운 나이프는 아무리 두꺼운 철문도 베어내어 버리니 입구를 막았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돼.
녹슨 태양이 너를 바라본다. 청색의 불꽃이 타오르는 그곳이 바로 악몽의 입구.
도망치고 또 도망치렴. 문틈사이의 작은 구멍조차 틀어막으며 울음소리를 죽이고 눈을 감으렴.
아발론은 자신이 아는 노래를 반가워하는 아이의 반응을 차분하게 관찰하며 되물었다.
“그렇군, 너도 이 노래를 들었나보구나.”
“응. 나뿐만이 아니라 바올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지.”
“그래?”
“아.. 가사는 다 다를거야. 제대로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대충 다들 자기가 무서워 하는 것을 붙여서 불러.”
아이는 자기가 알고 있는 가사는 이렇다며 멜로디를 붙여 가사를 흥얼걸렸다.
아이의 노래를 듣던 아발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아이의 노래속에 반복되는 단어들이 들어있었다.
“너는 도시가 무섭니?”
“내가 무섭다기 보다는 이게 애들용 노래일거야. 도시로 갈 생각은 하지도 말라던가 괜한 꿈꾸지 말라던가 하는 내용이 주류니까.”
헛된 희망은 사람을 기대속에 부풀어오르게 만든다,
그리고 그 실망이 꺼지고나면 남은 것은 추락뿐.
아발론은 상냥하다 해야하는건지 잔인하다고 해야하는 것지 모를 노랫소리를 들으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아발론에게 물었다.
“아저씨도 그래?”
“응?”
“아저씨도 이 노래 처럼 모든 걸 버리고 바올로 온거야?”
아이가 아발론을 돌아본다.
“있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잊어버린데. 버렸던 물건의 추억을 잊고, 떠나갔던 사람의 이름을 잊고,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스스로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도 못해.
그저 저 불빛의 일부로 살아가면서 잊는 것을 반복하다가 더이상 잊어버릴 것이 없게 되면..”
“.......”
“자기 자신을 이 곳에 버리게 되는거래.”
아이는 희미한 열기를 품은 눈으로 아발론을 바라보았다.
진실을 바라고 거짓을 거부하는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그래? 당신도 그래서 여기에 온거야?
아이가 자신의 그림자 너머로 무엇을 보는 것인지 알고 있던 아발론은 차마 그의 눈 앞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아발론은 가까스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나는 뭘 좀 찾으러 온거란다.”
“흐응..”
아이는 아직까지 시험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채 발을 흔들었다.
아이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뒤로 기울어지는 순간부터는 천 길의 낭떠러지.
아발론은 어쩐지 협박을 받는 기분이 되어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대답으로 아이가 떨어진다는 보장도 없지만 그 대답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뭘 찾으러 온건데? 사람? 물건?”
“나도 잘 몰라. 어쩌면 둘 다일지도.”
“찾으러 온게 뭔지를 잊어버린거야?”
“반쯤은, 하지만 처음부터 모르는 것을 찾으러 온거야.”
아이는 가볍게 콧바람을 내뿜으며 고개를 돌렸다. 무게감이 사라졌다.
아이는 더이상 흥미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앞으로 뛰어내렸다.
탁 하는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아이의 몸이 멈춰섰다.
아발론은 어쩐지 한숨을 내쉬고 싶은 자신의 가슴을 내리누르며 눈을 깜빡였다.
“그럼 잘 기억해봐.”
아이는 심호흡을 하는 아발론이 웃기다며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돌아섰다.
“난 아저씨랑 이야기하는 거 재밌어. 그러니까 기억해낼때 까지는 아저씨한테 놀러와줄께.”
아이는 손을 흔들며 건물 아래로 내려갔다.
한참동안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아발론은 가슴팍에 남은 흥건한 손자국에 인상을 찌푸렸다.
젖은 손을 흔들어 말리는 동안 밤이 깊어갔다. 공기가 차갑게 식으며 노을이 가라앉았다.
아이가 다시 찾아온 것은 그 뒤로도 시간이 어느정도 흐른 어느 날이었다.
아발론은 굳이 아이를 찾으러 가지는 않았지만 바올을 뒤지고 다니는 동안 어느정도 아이의 소식을 들을 수는 있었다.
아이는 가끔씩 누군가와 싸움박질을 했고 가끔씩 누군가의 심부름을 하며 먹을 것을 얻어내었다.
겨울이 찾아오는 기간동안 아이는 부지런히 바올 구석구석을 쏘아다니며 추위를 막아낼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의 뒤로 그보다 어린아이 두어명이 종종거리며 따라다니고 있었다.
혈연은 아니지만 아이들은 그 아이를 형, 오빠 하고 부르며 따라다녔다.
아이는 귀찮아하면서도 아이들이 제대로 따라오는지를 뒤돌아봤고 그때마다 아발론은 괜히 모습을 투명하게 감추며 벽 가까이 붙어섰다.
어린 소녀가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녀가 아이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아발론은 소녀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쉬.. 하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소녀는 어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박자 늦게 돌아본 아이가 소녀의 머리를 푹 내리눌렀다.
거친 손길에 안그래도 산발이었던 머리가 더욱 헝클어졌다.
어린 소녀가 울상을 지으며 다시 아발론이 있는 뱡향을 돌아보았을때는 이미 그림자조차 남아있지 않는 벽만이 멀겋게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아발론이 지나간 자리로 별가루같은 빛무리가 흔들거렸다.
소녀는 아발론이 사라지는 길을 가리키며 룩을 끌어당겼다.
“별님이다...”
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소녀의 머리를 한번다 헝클어트렸다.
다시 빌딩에 아이가 찾아왔을때는 이미 한차례 새하얀 눈이 내린 뒤의 일이었다.
아이가 아발론을 찾아온 이유는 겨울나기를 준비하던 중 아발론의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겨울에도 맨발로 돌아다니는 괴인의 소문을 들은 아이는 문득 잊고지냈던 아발론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놀러가준다고 약속했는데.
아이는 아발론이 자신을 기억할지 못할지 반신반의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그 때의 풍경 그대로 앉아있는 온화한 안경의 청년을 보며 아이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아이는 어색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 아발론의 맨발을 보며 호들갑스럽게 소란을 피웠다.
춥지 않느냐는 아이의 질문에 아발론은 새빨갛게 곱은 발을 눈속에 파묻으며 이러면 안춥다고 웃어보였다.
거짓말쟁이. 아이의 샐쭉한 시선에 아발론은 난처하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아발론에겐 그 변명이 거짓이 아니었다.
아발론은 더이상 춥지도 덥지도 않았고 웬만한 날붙이에는 상처도 입지 않았다.
원래 열이 많은 체질이라서 말이야. 아발론은 따끈따끈한 손을 뻗어 아이의 얼어붙은 뺨을 녹여주었다.
깜짝 놀랄만큼 포근한 온기에 아이는 후다닥 뒤로 물러서며 아발론에게서 멀어졌다.
타인의 온기가 낯설었기에 아이는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마. 아발론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평소보다 한뼘 먼 자리에 걸터앉았다.
아이는 찾고 있던 것은 찾았냐고 물었고 아발론은 어깨를 으쓱 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올 어디에도 네반의 흔적은 없었고 모리안의 흔적또한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확인한 것은 바올에 떠도는 노래의 정체가 사실에 근거했었다는 것과 그 여파가 아직도 조금 남아있다는 것.
아발론은 조금 차가워진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무엇이 퀘사르의 이름을 빌려 태어났건 그것들이 사람들의 사이로 숨어든 것은 틀림없었다. 밀레시안이라..
분위기가 서늘해진 것을 느낀 아이가 일이 잘 안풀려? 하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발론은 찾아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어서 그렇다며 멋쩍게 웃어보였다.
아이는 괜히 자신의 옆자리의 눈을 치우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손가락 반마디만큼 아이가 조금 더 멀어졌다.
아발론은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기 위해 조금 밝은 톤으로 말을 걸어왔다.
아이에게 겨울준비를 하고 있는 네 형제들을 보았다고 말하자 아이는 씨익 웃으며 자신의 동생을 자랑해왔다.
귀찮지만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라고, 아이는 자기소개를 하듯 즐겁게 동생들을 소개했다.
바올에서 고아가 된 아이들은 흔한 편이었지만 그렇게 오누이가 나란히 버려진 경우는 드물었다.
어린아이조차도 스스로의 몫을 벌지 못하면 죽어나가는 바올에서 둘이서 한사람 몫을 한다는 것은 결국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말. 1+1은 2도 1도 아닌 0이라고 바올은 그릇된 계산방법을 강요하며 오누이를 위협해왔다.
동생을 버리면, 오빠를 버리면 어쩌면 너는 혼자 살아남을지도 모른다고 속삭이는 검은 손길들이 아이들을 향해 뻗쳐내려왔다.
서로를 꼭 붙들 손을 시샘하듯 서로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기려는 강한 힘 앞에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리며 골목안으로 도망쳤다.
그 골목의 끝에서 만난것이 바로 지금의 룩, 아이는 저보다도 작은 아이들을 얼떨결에 등 뒤에 숨기며 쫓아 올라온 괴한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렇게 혼자가 편하면 니들도 혼자 다니던가. 다 큰 어른 너댓명이 애들 두명을 둘러싸고 이게 뭔짓들이야?!”
룩은 근처에 쌓여있던 쓰레기며 잡동사니들을 내던졌다.
비탈길을 따라 가속도를 받은 물건들이 괴한들의 머리위로 쏟아져내렸다.
소란에 뛰어나온 바올의 주민 몇몇이 골목까지 들어온 외부인들을 발견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아이들은 내달렸다. 끝도 없이, 목적도 없이, 턱끝까지 벅차오르는 숨을 헐떡거리며 붙잡힌 손을 따라 계단을 걸어올랐다.
서로를 쥐어짤 수밖에 없었던 손이 떨어져있었지만 그 온기는 여전히 전해져오고 있었다.
아이들의 손을 양손에 나누어잡은 룩은 한참을 달려 언덕 끄트머리에 있는 폐가앞에 멈춰섰다.
귀신이 나올것 같이 다쓰러져가는 폐가는 어쩐지 음산한 그늘이 드리워진채 쓰레기속에 파묻혀 있었다.
벽면으로 맹수의 발톱자국 같은 스크래치들이 가득했다. 무너지고 깨어진 벽에는 둥근 구멍들이 가득했다.
룩은 아이들의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여기가 내 집이야. 너네들이 원하면 얼마든지 여기 머물러도 좋아.”
룩은 그냥.. 넓으니까. 라고 작게 덧붙였지만 아이들은 처음으로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룩을 끌어안았다.
룩은 코를 문지르며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발론의 입가에도 어느틈엔가 느긋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어.. 음.. 흠흠, 사실 그도 그럴것이.. 그 집은 예전에 엄청 크고 무서운 괴물이 살던 집이었거든.
그래서 아무도 안살아. 어른들도 무슨 병에 걸릴지 모른다며 그 집을 꺼려해서 아무도 안살겠데.
그래서 나만 들락거리다가 거기 자리를 잡았는데 이제는 다들 내 집으로 생각하더라고.
그냥 그랬던것 뿐이야. 딱히 돈을 주고 산 것도 아닌데.., 꼬맹이 두명정도 눕는다고 무너지지는 않을테니까.”
아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아발론의 훈훈한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런 표정 좀 짓지 말라고 버럭 화를 냈다.
아이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양 뺨도, 코끝도, 손가락 끝도.
아이는 코를 훌쩍이며 팽하니 고개를 돌렸다.
아발론은 한번 더 대화의 주제를 바꿔야겠다며 다른 것을 물어왔다.
괴물의 집이라니 그거 흥미가 안동할 수가 없지. 아이는 게슴츠레 아발론을 흘겨보며 코밑을 문질렀다.
이 사람의 말솜씨는 항상 이런식이야. 아이는 반쯤 속아넘어가는 기분으로 대답했다.
“몇년전부터 나타난 이상한 괴물이야. 언제부터 그 집에 살기 시작한지는 아무도 몰라.
그냥 어느 순간부터 거기에 눌러 앉았고 끊임없이 쓰레기를 끌어모았지. 언제 돌아다니는지 뭘 먹는지도 알지 못했어. 그저 누가 가까이 오는걸 기절할정도로 싫어해서 사람 발소리만 들려도 큰소리로 고함을 내지르는 괴물이었데.
무슨 병에 걸린건지 한쪽팔이 사람만큼 커져있어서 툭하면 그 주먹을 휘두르며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내던지곤 했어. 한번은 내노라하는 장정 몇몇이서 습격도 했는데 총알도 튕겨내고 칼날도 부러트리더래. 아무튼 진짜 엄청 단단한 팔이었어.
상처가 나도 금방 아물어, 물건이 없으면 사람을 내던졌고 사람이 없으면 바닥을 뜯어내서라도 집어던지고.. , 아무튼 평소에는 집안에만 있어서 잘은 모르지만 그 집에 들어갔다가 온전하게 나온 사람은 없었다더라.”
덕분에 우리는 그 뜯어진 바닥에서 굴을 파고 올라오는 벌레들이랑 같이 밥을 먹어야 하고.., 라며 아이는 괴물보다 벌레들을 묘사하는 부근에 더 리얼리티를 더했다.
스스로 말하면서 몸서리를 치는 모습이 아주 진절머리가 나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잠시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새어나간 것에 대해 인상을 찌푸리다가 아 맞다 라며 황급히 덧붙여왔다.
아무래도 괴물의 묘사를 하나 빼먹은 모양이었다.
“응, 그리고 말이야. 그 괴물 팔은 보라색이야.”
“....뭐..?”
“어… 안믿는거야? 진짜인데. 그 괴물 한쪽팔만 보라색이었어. 진짜야.”
아이가 미심쩍은 눈으로 아발론을 올려보았다.
아니야, 내가 네 말을 안믿을리가 없지않니. 아발론은 생각 한구석으로 다른것을 떠올리며 즐겁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이가 만족스럽게 웃어보였다.
“그래서 말이야. 이 근방 아이들은 모두 그 집을 무서워했어.
담력테스트 한답시고 얼씬거리는 애들도 없을정도로 모두 덜덜덜. 어른들도 가끔 무서워하라면서 애들한테 이렇게 말했어.
말 안들으면 그 빨간머리 괴물의 집에 갖다 버릴줄알아..! 하고 말이야.”
“.....빨간머리..?”
“응, 빨간머리.”
아이는 자신의 눈을 아래로 쭉 끌어내리며 이렇-게 상처도 있었어. 라고 묘사했다.
이때까지 가장 먼저 떠오른 가능성은 도르카 페다인의 생존자였다.
살아남은 도르카 페다인이 무슨이유에서인가 숨겨놨던 약을 사용하고 중화제없이 버티고 있었다면? 그 괴물이 특이케이스였다면? 분명 실리엔의 야수화라면 그 커다랗고 보라색을 띄는 팔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 가정에는 결정적인 장애물이 하나 존재했다.
바로 아발론, 자기 자신의 존재였다.
그는 집착적으로 마하의 남은 연구시설과 시약들에 대해 조사했고 모리안은 마하를 흡수하면서 얻은 자료들을 네반에게 쏟아부었다. 네반에게 건너간마하의 남은 연구자료들은 모두 소각되거나 폐기되었다.
그 자원들을 먹어치운것은 아마도 칼리번의 분체로 만들어낸 연구소의 AI들. 모리안과 네반은 마하의 존재를 철저하게 감췄고 사람들은 이내 마하의 연구소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잊어갔다.
아발론과 그녀들이 동시에 실수를 하지 않았던이상 남은 실리엔이 어디론가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럼 마하의 것이 아닌 다른 실리엔은 어떨까. 아발론은 기억을 더듬어 새로 발견된 쿠르클레 섬의 연구소를 떠올렸다.
네반의 연구소가 폐쇄된 이후 쿠르클레 섬에서 도망친 연구원들은 에린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나갔다.
모리안은 파르홀론때를 기억하며 마하의 방식처럼 대대적으로 그들을 사냥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존자들을 풀어놓아주지는 않았다.
모리안에게로 돌아간 연구원들은 생명을 보장받았고 그렇지 않은 연구원들을 얼굴도 모르는 암살자들에게 쫓겨다녀야 했다.
어떤 얼굴로 어떤 모습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올 지 알 수없는 모리안의 사자들을 피하기 위해 연구원들을 가지각각의 노력을 다해왔다.
아발론은 신이나서 이야기를 계속 하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가지각각의 노력의 형태가 하나 더. 아이는 아발론의 반응을 살피며 이야기의 살을 붙여 나갔다.
“빨간머리였어. 그 괴물. 솔직히 나도 가까이 갈때까지는 반신반의 했는데. 진짜 빨간머리더라고.
소문도 엄청 많았어. 여태까지 해치운 사람의 피때문에 그렇게 붉은거다, 재앙의 짐승이니까 머리가 붉은거다. 하고.”
아이의 말에 의하면 그 변이체는 상당히 오랜 기간 생존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것도 어른들이 경계하고 아이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 정도면 상당히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하지만 팔 하나만이 변이되어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분명 도르카 페다인때도 이따금씩 그러한 케이스가 보고된 전례는 몇번인가 존재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주 특이적인 일에 불과했다. 불순물이 섞인 실리엔을 복용하거나 신체의 일부만 아주 고동도의 실리엔에 노출되거나.
굳이 가능성을 따지자면 전자에 무게가 실리지만 가능성이 없었다.
그렇다고 후자의 경우를 생각하자면 이 경우에는 변이보다 망각병이 더 먼저 발병할 것이다.
타인을 인지하고 공격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있다는 이야기, 적어도 론가는 아니야.
하지만 새로 합성한 네반의 실리엔은 기존의 실리엔과 달리 동,식물을 거쳐 한번 정제된 실리엔으로 아주 안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태양빛에 노출되는 것 만으로도 반응을 일으키던 필리아의 것과는 달리 네반의 실리엔은 직접적으로 반응을 시켜야지만 그 기체를 발생시켰다.
모든 효과가 느리다는 것은 야수화가 진행되더라도 정신은 온전 할 수 있다는 것.
그렇군. 이거라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아발론은 침착하게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필리아는 바이브카흐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후대를 지키기 위해 론가는 그 입구를 무너트렸다.
그들은 더이상 중화제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지만 실리엔 또한 잃게 되었다.
그렇게 그들에게 남게 된 것은 날개를 잃은 비행정과 물류산업, 그리고 약간의 힐웬을 정제할 수 있는 훔쳐낸 기술뿐.
마하를 잃고 필리아를 잃었다. 그리고 이제는 네반도 잃었다.
그 모든것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이 바올 어딘가에 있을것이다.
아발론은 손으로 입술을 가린채 피가나도록 깨물었다. 침착해, 분명 다 확인했잖아.
입술안으로 불쾌한 비린내가 퍼져나갔다.
“그럼 그 괴물 무서운 괴물의 집에 어떻게 하다가 네가 살게 된거니?”
“아 그거.”
“장정 여럿이서 덤벼들어도 쫓아 낼 수 없었다면 괴물이 스스로 집을 나간것일텐데.”
아이는 따분한 기억을 떠올리듯 인상을 찡그리며 다리를 크게 휘저었다.
발끝에 걸쳐진 낡은 신발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가느다란 실밥들이 나부꼈다.
“나더러 건방지네 뭐네 협박을 하던 패거리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이 진짜로 나를 집어 던져 버렸던 적이 있었거든. 그렇게 똑똑한척 입만 나불거릴거면 저 괴물에게 가서도 한번 지껄여보라고. 그렇게 창이 깨지면서 피가 점 튀었는데 그걸보고 그 멍청이들은 괴물이 나를 한입에 물어 삼켰다며 냅다 도망을 쳐버렸어.
그 다음은 지들차례가 될거라며 소리지르면서 말이야. 뭐, 그 말 그대로 괴물이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다행이네. 잘 기억나나 보구나.”
“잊을 수 있을리가 없잖아. 짐승같이 씩씩거리는 세찬 숨소리. 어둠속에서 빛나는 괴물의 팔, 그리고 그 팔에 어슴프레 비치는 괴물의 얼굴.”
아이는 그 다음은 우느라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라고 덧붙이며 가볍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발론의 뺨이 경직되어 있었지만 아이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 눈치였다.
“팔에서 빛이났다고? 털이 아니라?”
“음.. 어… 진짜 빛났어. 거짓말 아니야.”
“보라색으로?”
“응 보라색으로. 아니 조금 분홍색이었나? 음.. 사실 잘 모르겠어. 그 빛을 떠올리면 지금도 머리가 어지럽거든.”
아발론은 자세히 기억해 보라며 아이를 다그쳤다.
아이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그때의 기억을 끄집어 올렸다. 아이는 머릿속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아발론도 머리가 복잡해 지기 시작했다.
발광한다면 결정체가 확실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실리엔의 결정이 유출되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언제? 폐쇄 전? 아니면 폐쇄된 후? 아니, 어쩌면.. 설마, 그럴리가. 아무리 네반이라 하더라도 모리안의 눈을 피해 실리엔을 빼돌리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어.. 그러니까 나는 필사적으로 일어나서 창문으로 달려나갔고 괴물은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질렀어.
유리가 덜컥덜컥 흔들리는데, 너무너무 무서웠는데.. 꽤 높더라고. 그 창문.
내가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았어. 게다가 유리조각도 여전히 날카로워서 차마 배를 걸쳐서 넘어가지도 못하겠는거야.
죽겠다 싶었어. 문도 어디있는지 모르겠고, 날은 어둡고..”
“아니아니, 잠깐. 그 부분은 조금 짧게 이야기 해줄래?”
“에.. 이런건 밑밥을 잘 깔아야 제대로 무서운데..혹시 내 이야기 재미없어?”
“이 이상 무서우면 혼자서 골목길까지 못내려갈것 같으니까 그냥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구나.”
“뭐야. 아저씨 보기보다 겁쟁이구나… 뭐, 그래. 그 뒤로 그 괴물은 사라졌고 나는 동생들이랑 그 집에 살아.”
“......이번엔 너무 결말로 뛰어넘었구나. 그 중간이 듣고싶은데..”
“아 진짜 까다롭네.”
아이는 짜증을 부리며 지어보이며 아발론을 밀어내었다.
아이는 양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다 뒤로 쓸어넘겼다. 아무렇게나 자란 더벅머리가 시원하게 쓸어넘겨지자 제법 깔끔한 티가 나는 얼굴이 드러났다.
목덜미를 덮은 머리까지 싹싹 끌어모아 잠시 머리를 식히던 아이가 기지개를 쭉 펴며 양 팔을 들어올렸다.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작은 흉터가 엿보였다.
“어디까지 이야기 했더라.. 응.. 문을 못찾아서 허둥거리고 있었던거였나? 아무튼 엄청 구르고 부딪치고 엉엉 울다가 겨우 뒤를 돌아봤는데..”
“봤는데...?”
“그 괴물이 나한테서 멀어지려고 하고 있는거야.”
아발론이 입을 다물었다.
“벽에 비친 보라색 그림자가 보였다 안보였다 하는게 뭔지 이상하더라고.
하도 무서워서 잘 몰랐는데 달이라면 그렇게 깜빡일리가 없잖아. 돌아볼 용기는 안났지만 이미 모가지가 먼저 돌아가버렸어.
나는 바람이 불어오는 벽 구석으로 달려갔는데 여전히 괴물이 나를 보고 있었어.
나는 분명 움직였는데 괴물의 모습은 여전히 처음 그대로야. 괴물을 팔을 숨기고 있었고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서서 소리를 내질렀어. 뺨이 따끔따끔 할정도로 무서운 고함소리를 나는 그날 처음으로 정면으로 마주보았어”
“그건 정말 용감하네.”
“아니야, 지금생각해도 그건 정말 우연이였고 미친짓이었어.
그 집에 들어간것도 미친 짓이었지만 돌아보는 건 훨씬 더 미친짓이었지.
하지만 이미 두어번 미친 짓거리를 했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괜찮아지더라고.
잃을것도 없고 남길 것도 없었었어. 더욱이 도와주러 올 사람은 더더더더 없었을테고. 그래서 다가갔어.”
아이는 손을 내밀다가 다시 거두어들였다. 아이의 표정이 사뭇진지했다. 아발론은 참을성 있게 아이의 말을 기다렸다.
“다가가서, 물었어.
원하는게 뭐냐고. 먹을 것을를 바라는건지 그저 내가 꺼지기를 바라는 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건지.”
“..........”
“나는 물었어. 그게 나의 최선이었어.”
아이는 그게 다라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아이의 얼굴에는 다시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정말 그게 다야... 그 다음에 기절했거든. 솔직히 언제 기절한건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돌아봤을때무터가 꿈이었을지도 몰라.
정신을 차렸을때는 나는 그 집에 혼자 누워있었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나는 그냥 멀뚱히 거기 있다가 거기 살게되었어.”
“누군가 너를 내쫓으려 하거나 쫓아오지는 않았고..?”
“쫓아내기는 커녕 거기서 살라면서 이것저것 안겨주던데? 한 3개월 동안은 사람들이 내 가까이 오지도 않았어. 무슨 병이 옮을지도 모른다면서 말이야.”
잠시 진지하게 보였던것 노을빛 탓인가, 아발론이 미간을 내리눌렀다.
마음은 조급한데 아이는 태평하다. 아이는 파핫 하고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뭔가.., 그때 이렇게 움직이면서 말했던것 같은데. 기억이 안나.
게다가 여기까지 남에게 이야기 해본건 처음이야. 녹음기도 아닌데 그런 말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을리가 없잖아.”
“혹시 그 이후에 다른 일을 기억 못하는 일은 없었니?”
아발론이 빠르게 되물었다. 아이는 인상을 조금 찡그린 뒤고개를 내저었다.
“음….아니, 그런거는 없었어. 그때만 기억이 안나.”
“...그래.. 그건 다행이구나..”
“하지만 뭐가 빛났는지는 기억 나.”
아이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아발론이 다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이는 석양이 저물어가는 도시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팔에.. 음.. 팔 안쪽에.. 털가죽? 아니, 살 깊숙히 빛나는것이 박혀있었어. 그거에 엄청 화를 냈던 것 같아. 나는 연신 팔을 휘저으며 뭐라고 말했고.. 그 괴물은 곧 진정되었어. 그리고 우리는.. 음..”
“......”
“뭔가를 했어.”
아이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맞지않게 잔뜩 거칠어진 손은 안쓰러울 정도로 부르트고 상처를 입어 이미 어느 어른 못지않게 단단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아이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말아쥐었다.
시선이 다시 도시로 향해 들어올려졌다. 아이의 표정이 묘하게 경직되어있었다. 아이는 약간 혼란스러운 듯 보였다.
“그리고 나는 방 구석으로 가서.. 커다란 집게를 찾아내었고..어, 집게였나? 뭐 엉성했던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기다란 막대를 들고가서 그 빨간머리한테 건네주었어. 그 사람은 그걸로 자기 팔을 후벼팠는데, 잘 안되었어. 그래서 내가 해주겠다고 했...어. 맞아. 내가 그렇게 말했어…? 어…?응..그랬건것 같아. 그런 기억이 나.. 왜지? 왜 기억이 나는 걸까?.”
“....만졌니? 그 보라색 결정체. 손으로 만진거니?”
“안만졌어. 그 빨간머리도 엄청 싫어했거든”
아이는 비교적 또렷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
“대신 집게가 그 수정사이로 파고들어갈수 있도록 위치를 조정해주었어.
그 괴물, 다른쪽 손은 보라색 팔처럼 크지는 않았지만 만만치 않게 두꺼워져서 섬세한 작업은 잘 안되는 것 같았으니까.
내가 위치를 조정해주니까 그대로 쑥 집게를 집어넣어서는 비틀어서 뭔가를 빼내었어. 엄청나게 피가 쏟아지는데도 작은 비명한번 안지르고 자기 팔을 후벼내었어.”
아이는 그래, 그랬었어. 하고 혼잣말을 읊조리며 눈을 깜빡였다. 동공이 번져나간다.
그거 무서웠어. 정말 무서웠지. 잊고 있었어. 이상하네, 왜 잊고있었을까. 그렇게 무서웠는데..,왜 한번도 기억나지 않았을까..?
눈이 풀려가는 모습에 아발론은 인상을 찌푸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발광성을 가질 정도로 순수한 필리아의 실리엔을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가까이 다가갔었는데 아무런 영향이 받지 않았을리가 없었다.
하지만 왜 이제서야? 아발론은 뒷통수가 얼얼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흔들리는 아이의 몸을 떠받쳤다.
느리고, 느린, 지독히도 느리게 찾아온 망각의 저주.
하지만 이 마을에는 더이상 실리엔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아발론은 자신이 실리엔의 흔적을 놓칠리 없다고 자신하며 아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더이상은 없다. 이 이상은 사라지는 기억은 없어야 한다. 아발론은 아이를 예의주시하며 천천히 말을 유도했다.
“그리고..?”
“보라색… 피가.. 피냄새가 엄청…. 많이나고.. 세상이 전부 빛났어.”
아발론은 천천히 흩어져내리는 과거의 기억을 이어맞추었다.
다소 불분명한 것이 있지만 공포와 두려움으로 기억이 혼 선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이상의 진행을 저지하는 것.
아발론은 안경을 벗어 낸뒤 아이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아이의 눈이 풀린 상태로 아발론이 아닌 먼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태를 이전에 몇 번 본 적 있었다. 가깝게는 거울속에서, 멀게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가면 아래에서.
“오르골...”
아이가 말한다.
“부서진.. 오르골.…”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천천히 흘러내리며 머리를 뒤로 젖혀내었다.
아발론은 아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난간에서 내려섰다. 눈이 검은 빛으로 가득차 올랐다.
아이의 머릿속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기다려..! 기다리렴. 내가 너를 붙잡을거야. 그러니 걱정말고 거기서 기다려.”
세상이 은빛으로 빛났다.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새하얀 눈밭위에 아이를 내려놓았다.
침착해. 침착해. 할 줄알잖아. 한번도 이 손으로 해본적은 없지만 그에겐 분명 아드니엘의 지식이 있었다.
어떻게 하는지는, 이 몸에 세겨져 있을 것이다.
아발론은 기울어진 아이의 목을 받쳐들었다. 뻣뻣한 머리카락 아래로 목덜미에 작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무언가의 상처, 작은 원을 모양의 인위적인 형태. 목이 기울어진채로 아이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말했다.
사람의 머릿속에 녹음된 음성이 아이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샘플케이스 34212번, 이하 실리엔의 결정을 확보했습니다. 아, 단장님. 이 아이는 어떻게 할까요?”
“이 아이는..?”
“모르겠습니다. 이 동네의 아이인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중독되어 쓰러진 모양이에요”
“살아있나?”
“살아있네요.”
“흐음..”
“어떻게 할까요? 시신에서 이런 것도 나왔습니다.”
“이게 예의 중화제인 모양이군”
“네에-, 정황상 그렇겠죠. 역시 본부로 가져가는 편이..”
“후…….아이 인가..”
“샘플케이스 34213번, 이하 엘라하의 혈액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샘플케이스 34214번, 이하 실리엔 가스 중화제를..”
“아니, 이건 여기서 사용한다.”
“앗, 씨..! 오디오 씹혔.. 네? 그러면.. 어, 아이를 살리시겠다고요?”
“그래, 하지만 착각하지 말도록. 이건 그저 거래의 연속일 뿐이야.
우리는 에린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달라고 했고 그는 약속을 지켰다.
허나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지. 기억을 잃고 인간의 마음을 잃고, 생명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 중에서 우리가 가져가야 할 것은 실리엔의 결정 하나뿐이야. 그 이외에 챙길 수 있는 부산물이라면 실리엔에 중독되어 죽는 인간의 혈액 혹은 실리엔에 중독되었다가 되살아난 인간의 혈액 정도.”
“또또또, 말만 또 번지르르하게.. 상부에 보고하러가서 깨지는 건 난데..꿍시렁꿍시렁..”
“뭔가 말했나? 슈안?”
“아-니요. 아닙니다. 샘플케이스 34215번, 이하 바올의 신원미상의 남자아이에게 샘플케이스 34214번, 이하 실리엔 가스 중화제를 투입하겠습니다. 위 행위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알반 위원회 소속의..”
“그래그래. 내 이름으로 다 처리하자고.”
“오디오 씹히니까 녹음중에는 말걸지 말라고 부탁드리지 않습니까..!!!”
“서둘러. 해가 뜨기 전에 여기를 빠져나가야한다.”
“그러게 말입니다. 깡새벽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에- 그럼 다시 녹음하겠습니다. 이번엔 말걸지 마세요? 샘플케이스 34213번 이하… 샘플케이스 34215번… 샘플케이스… 샘플… ㅅ..”
번호가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한참동안 번호를 중얼거리던 아이는 소리없이 입을 뻐끔거리던 도중 그대로 기절했다.
손안이 무겁다. 아발론은 눈물이 흘러넘치는 얼굴을 닦을 새도 없이 안경을 벗어들었다.
언제나 이렇게, 이 작은 생명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잡은 손을 놓아버리고 먼저 달려나가 버린다.
손안에서 흘러내리고 마음을 떠나 먼 곳으로 날아가버린다.
하지만 괴로워 할 시간이 없었다. 아이의 의식은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붙잡을 수 있어. 아직 이어낼 수 있어. 되돌릴 수 있어. 부서진 연결 고리를 다시 작성하기만 한다면.. 다시, 기억을 만들어내기만 한다면.
눈을 감은 검은 용이 속삭인다. 다시.
그렇게 또 다시.
눈가에 흘러넘치는 열기를 손으로 닦았다. 다시? 그래, 다시. 아발론은 심호흡을 하려 애를 쓰며 안경을 꺾었다,
가냘픈 파열음과 함께 안경의 다리가 비틀어졌다.. 조심스럽게 분해를 하면 훨씬 깔끔하게 분리가 되었겠지만 손끝이 떨리고 있어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부러진 안경을 돌려 케이스를 분리해 내자 다리를 구성하고 있던 긴 형태를 따라 아주 얇은 원통형의 실린더가 뽑혀져 나왔다. 안에는 소량의 실리엔과 소량의 해독제가 들어있었다.
아발론은 빠른 손놀림으로 두 개의 케이스를 연결시켰다.
담배연기 같은 가느다란 은백색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바늘끝이 흔들린다. 아발론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괜찮아. 할 수 있어. 거짓없이. 인위적인 조작없이. 이 아이의 것을 돌려주면 되는 거야.
“괜찮아. 아직 늦지 않았을거야. 너에겐 내가 찾던 조각이, 그리고 나에겐 네가 찾던 조각이 있어,”
“………”
“우리는 그걸 교환하는거야.”
아발론은 스스로의 두려움을 다독이며 아이의 눈위에 손을 얹었다.
젤리처럼 말랑말랑해진 머릿속으로 깜빡이는 불빛이 들이쳤다.
이건 기억을 세겨넣는 빛이 아니야. 아발론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기도하며 입을 열었다.
네 스스로가 기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 빛이야. 빈 실린더가 바닥을 구르며 멀어졌다.
길게 드리워지는 그림자속에 투명해진 노을이 비쳐들었다.
아발론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날까지 너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생에 대한 희망이 꺼져갈때도 있었다.
두렵고 무섭고 절망감이 들때가 많았지만 너는 삶을 포기하는 대신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현실은 한걸음으로 끝맺을 수 있었지만 너는 그 경계선에 앉아 떨어지는 태양을 지켜보았다.
네가 무엇을 생각하며 여기에 앉아있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어.
그리움인지, 원망인지,네가 어떤 감정으로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지 나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지. 그건 바로 네가 아주 똑똑한 아이라는 거야.”
“……”
“너는 아주 똑똑하다. 그리고 상냥하다. 정도 많고, 용감하기까지 하다. 너는 장난기가 아주 많고 잘 웃고 잘 떠들며 좋고 나쁨을 가릴줄 안다. 너는 스스로 가족을 만들었고 너는 스스로 관계를 엮어나갔다.
그리 험하다고 말하는 바올마저 너에게 호의를 갖도록 노력했다.
그래, 너는 네가 바라는 대로 성장해왔다. 너는 좋은 아이야. 너는 착한아이란다.
언젠가 너를 버린 네 부모가 돌아올때 보란듯이 자랑할 수 있도록 너는 최선을 다해왔다.
나는 그걸 알아. 나는 너를 보았고 나는 너를 들었다.
네가 살아온 흔적과 네가 살아온 기록, 네가 지나쳐온 모든 걸음이 내 안에도 있다.
그리고 네가 걸어가야할 미래조차 이 안에 잠들어있지.
그러니 아이야. 꿈을 꾸렴. 내가 속삭이는 목소리에 따라 꿈을 꾸고 그 기억을 잊으렴.
소원하고, 소망하고, 꿈꿔 마지않던 달콤한 환상속에서 네가 바라는 너를 다시한번 떠올리렴.”
“………”
“하지만 그래, 이 안에서 거짓은 없어야해. 그러니 이건 거래란다. 나와 아주 공정한 거래를 하자꾸나.
내가 너의 괴물을 가져갈테니 너는 내 안의 진실을 가져가렴”
“진실…”
“그래.
네가 석양 너머로 끊임없이 되물었던, 알아야했던, 잊을 수가 없었던, 돌아오지 않는 발걸음소리에 대한 진실.”
아이의 느슨해진 눈물샘에서 해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디 하나 둥근 구석없이 물방울은 눈을 가리는 투박한 손을 타고 귓바퀴를 향해 떨어져내렸다. 아이는 달뜬 한숨을 내쉬었다.
석양이 저물어간다.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붉은 눈밭이 검은 밤하늘에 물들어갔다.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알지 못하는 것은 무섭다. 마주하지 않은 것은 두렵다.
모르고 외면한채로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태함은 온 거리에 만연하다.
바올은 말한다. 잊어버리면 편해. 그저 그들이 나쁘다고 원망하는게 더 쉬워.
하지만 아이에게는 더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다시 일어선다는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시작부터가 가장 밑바닥이었는데 어디를 기준으로 노력을 하면 된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부터? 무엇부터? 고작해야 너다섯살 정도에 이곳에 버려졌다.
몇년이 지나도 삶은 여전히 힘들고 죽음은 늘 가까이서 속삭인다. 포기하자고, 잊어버리자고.
아무도 너를 돌아보지 않아. 아무것도 너를 기억하지 않아. 오히려 잊어버리는 편이 더 나았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해버린다면 이렇게 일부러 고생하지 않아도 좋았다.
진짜 동생도 아닌걸, 진짜 가족도 아닌걸. 착한 아이를 고집하지 않아도 괜찮아.
양심에 이끌려 살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똑똑한 아이는 그 결말을 알고 있었다.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잊어버리면 정말 모든게 끝이난다는 것을.
포기하면 모든 걸 잊을 수 있지만 한번 끝이 나면 두번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게 두려웠다. 그게 무서웠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갈등하는 자신이 가장 경멸스러웠다.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다시 한번 계단을 올라 석양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버린, 당신이 포기해 버린 나의 그림자를 돌아보았다.
“죽고싶지 않아..”
눈이 가려진 아이가 말한다.
“죽고싶지 않아. 죽고싶지 않아요. 죽으면 안돼. 살아남아서, 여기서 꼭 살아남아서. 밖으로 나가 그 사람에게 물어봐야해요.
나는 알아야 해요. 나에겐 물어볼 권리가 있어요..”
아이는 어둠을 내리누르는 커다란 손을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왜 그랬는지 물어야해요. 왜 버렸는지 말해야해요. 그리고 그렇게, 그렇게 나를 다시 찾지 않을거라면, 나를 잊어버릴 거라면..!”
눈물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럴꺼면 왜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는지…”
“…….”
“왜 당신이 울고 있었는지..”
당신의 눈물을 잊을 수가 없어 오늘을 살았다.
당신이 후회를 거듭하는 그 얼굴을 포기 할 수 없어 그 다음날을 살았다.
희망도 꿈도 없었지만 그래도 떠오르는 날을 살았다. 저물어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몇번이고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겨가며 당신을 만날 어느 미래의 날을 소원했다.
아발론이 입술을 깨물었다.
비명을 억눌러 사람의 목소리로 가다듬었다. 눈이 검게 물들어갔다.
눈을 깜빡여 머릿속으로 아이의 얼굴을 끌어올렸다. 그 얼굴과 닮은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대조시킨다.
한번의 깜빡임동안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지나가고 두번의 깜빡임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음성이 흘러들어간다.
할 수 있어. 내가 할 수 있어.
그래 우리들은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났다.
도저히 다정하게 이야기 할만한 말이 아닌 것을 아발론은 최대한 상냥하게 말하기 위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기억속 어딘가에 오열하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비탄을 참아내는 흐느낌소리가 머리를 울려온다.
그래도 우리는..
“너를 사랑한단다. 나의 아가. 너와 함께하지 못하더라도, 세상 어디라도 네가 살아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해.”
“.......”
[“듣고 있죠? 당신은 세상 어디에든 접속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왜...”
[“칼리번이 다시 깨어난 지금, 당신은 당신의 권한을 회복했겠죠. 그렇죠? 듣고 있죠? 네? 아발론. 당신이라면 지금 세상 어딘가에서 내 목소리를 듣고있겠죠?”]
“........좀 더 일찍..”
[“그렇다면 전해주세요. 수많은 사람들의 소원중에 하나라지만 그래도 내 말을 전해주세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전해주기를 바라요. 소원할께요. 제발 부탁이에요. 언젠가 당신이 내 목소리를 기억속에서 떠올린다면. 그 아이에게.. 내 아이에게..”]
“.......말해주었다면…”
기억이 흘러넘친다.
수많은 메모리들속의 목소리가 휘몰아쳤다. 결국 그녀는 죽었고 아발론은 언제 녹음되었는지도 모를 흐릿한 감시카메라의 영상을 끄집어올렸다.
소리도 없이 입모양만으로 움직이는 여성의 눈가에 절실함이 가득했다.
내 말도 전해줘. 내 유언도 전해줘. 내 아이에게, 내 가족에게, 내 연인에게, 나의 마지막을 전해줘.
그 이외에도 수많은 음성들이 아발론의 기억속에 잠들어 있었다.
가슴이 뛴다. 그의 양심이 두근거리며 고통을 호소한다.
그는 모든 말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당장의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비겁한 기억을 꺼내들었다. 그러니 이건 기적이 아니다.
나약한 위선의 가면이다. 이런다하더라도 에린을 구해낼 수는 없어.
이는 그저 정보의 거래이며 기억의 교환, 조건의 만족. 그이상도 그 이하의 가치도 지니지 않은, 한 겨울 밤의 기만.
아이의 눈이 정상의 크기로 줄어들었다.
아이는 잠에 빠져들었고 아발론은 한동안 그 작은 숨소리를 들으며 날이 차가워져 가는 것을 느꼈다.
태양이 완전히 저문 밤하늘위로 회색빛 구름이 쏟아졌다.
레인메이커가 구름을 뿜어올리고 있었다. 하늘은 뿌옇게 흐려졌고 바람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꾸물꾸물 또아리를 트는 구름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난 아발론은 잠든 아이를 안아들었다.
괴물이 살던 무너진 집터에는 엉성한 손으로 때려박은 나무 판자들이 엉성하게 창문을 틀어막고 있었다.
아발론은 아이를 비교적 깨끗해보이는 천더미 속에 뉘여놓고서는 아이가 말했던 부서진 오르골을 향해 다가갔다.
태엽이 망가진 오르골에는 몇 푼 되지 않는 작은 동전 몇 개와 돈의 가치를 가지지 않는 작은 라이터가 하나 들어있었다.
라이터의 표면에는 네개의 문장이 합쳐진 방패가 그려져 있었다.
아발론이 오르골을 살펴보고 있는 동안 밖에 나가있던 아이들이 돌아왔다.
맨발로 서 있는 낯선 남자의 등장에 작은 아이들은 창문판자의 틈새로 안쪽을 엿보고 있었다.
아발론의 손짓에 아이들이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아발론은 오르골을 내려놓은뒤 라이터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반대편의 손가락을 튕기며 아이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어딘가에 쓸모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주워왔던 꼬마전구 한다발이 희미한 불을 밝히며 집안의 어둠을 걷어내었다. 전기도 없이 스스로 발광하는 희미한 전구들이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아발론은 눈이 휘둥그렇게 변한 작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시선을 맞춰 쪼그려 앉았다.
“오늘 본 것은 잊어버리렴.”
남자는 다정하게 상냥하게, 그리고 다소 엄격하게 아버지와 같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또박또박 되뇌였다.
“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되는 거야.”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위아래로 끄덕이는 아이들의 시선이 천천히 문가를 향해 움직였다.
남자는 문 바로 앞에서 신기루처럼 흩어지며 사라져버렸다.
별처럼 반짝거리는 가루와 함께 사라진 남자의 모습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아이가 타박타박 문으로 걸어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작은 손이 하늘을 향해 뻗어올라갔다.
“와...”
작고 하얀 알갱이가 손안의 온기에 스르륵 녹아내렸다.
“바올에도 별님이 내려왔어..”
아이가 눈을 떴다. 온 세상이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차갑고 새 바람이 불어오는 은백색의 하늘이 눈부셨다. 불빛이 점멸한다.
그토록 괴로웠던 마음속 응어리가 사라져버린 망각의 아침은 너무나도 가벼워 어쩐지 허전함마저 느껴졌다.
당신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당신의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다.
당신은 울었고 당신은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 생을 몰아치던 죄책감이 사라진 대신, 나는 더이상 무모하게 죽음과 맞서는 것을 그만두었다.
용기를 낸다는 것은 벼랑끝에 내몰린 마음을 쥐어짜는 것과도 같아서, 아이는 잃게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공복감과 닮은 생소한 감정에 룩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소중하고, 따뜻하고, 다정한, 그리고 너무나도 연약한, 그리움도 간절함도 아닌,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겨울이 가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면, 눈덮인 골목이 녹아 길이 열리면, 닫혀있던 라인알트가 열린다.
에린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겨울이 가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면, 둘둘말린 철조망과 목책들이 사라지면, 칼리번이 돌아온다.
세상은 새 시대를 맞이한다.
바로 오늘 처럼, 우리들은 새로운 내일을 꿈꾸며 잠이 든다.
칼리번에게 축복을.
브류나크에게 축복을.
에린을 살아가는 모든 낙원의 주민들에게, 빛나는 내일이 있기를.
그렇게 총성이 울렸다.
글
톨비밀레) reload #8
그림자를 뒤쫓아 길을 오른다.
밀쳐내고, 베어내고, 막아서는 검은 발걸음들을 하나하나 떨어트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걸음 하나에 숨을 몰아쉬었고 걸음 하나에 혈흔을 닦아내었다.
눈돌릴 여유도 없이 나이프를 휘두르고 또 베어내며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의 저변에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폰!! 밀레시안..!! 젠장, 밀레시안-!!!”
찰나의 섬광과도 같은 망설임이 발목을 붙들었다.
가벼운 자극이 손목을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돌아볼 수가 없다. 음울한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숨줄기를 움켜쥐어왔다.
아니, 돌아보고 싶지 않아. 녹음이 어른거린다. 차가운 한숨이 목줄기를 타고 굴러떨어졌다.
소리없는 그림자를 쫓았고 무거운 발소리가 쫓아왔다. 쫓고 쫓기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지금을 올라가야만 했다.
오르고 또 올라, 문을 바라보았다.
그 가면 너머의 얼굴을 확인해야지만 갑갑하게 죄여진 가슴에 새 호흡이 스며들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러히 흔들리는 시야속, 검은 로브가 펄럭이고 있었다. 절도있게 딱 떨어지는 움직임이 길을 가로막는다.
밀레시안은 근접에서 총을 교차시키는 퀘사르의 콜트를 비틀어 빼앗으며 양쪽에서 좁혀오는 퀘사르들을 동시에 제거했다.
듀얼건을 빼앗긴 퀘사르는 미련없이 손을 거두어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빼앗긴 물건이 자신의 목을 베고 지나갈지도 모른채 허리 뒤춤에서 단검을 빼들던 퀘사르는 그대로 앞으로 떨어져내렸다.
서로 다른 두방향으로 검은 물체가 굴러떨어졌다.
뺨 가까이 타인의 열기가 흔들린다. 발밑으로 흐르는 묽은 열감을 피해 발을 내딛었다.
주인을 잃은 듀얼건 한 쌍은 짖밟힌 화단속에 버려졌다.
“잠깐 기다리라니까-!!”
날이 선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몇 년동안 저렇게 화를 내는 적은 없었는데. 가끔 농담을 주고 받을떄를 제외하고 좀처럼 높아지지 않았던 음성이 정돈되지 않은 호흡속에 부서졌다.
지난 날의 기억이 머릿속 한켠에 작은 상영관을 만들어 내며 퀸이라고 적혀있는 테이프를 재생시켰다.
무기질적으로 스쳐지나가는 기억의 단편들이 감흥없이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그래서? 검은 머리의 여성이 눈을 감은채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것이 지금 당신에게 중요한가요? 들려오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가, 밀레시안은 어둠속에서 고개를 돌리는 세 명의 인영에서 눈을 돌렸다.
기억을 재생하는 영사기의 빛이 눈에 들이쳤다. 따스하다. 눈이 부시다.
그립고 또 익숙한, 속안에서 공허하게 메아리치는 이 감정은 마치 허기와 닮아있었다.
굶주렸던 까마귀가 눈을 떴다.
검은 동공이 열리며 탐욕스럽게 빛을 먹어치웠다.
한계치까지 빛을 받아들이는 시야속으로 보여도 되는 것과 보여선 안될 정보들이 섞여들었다.
현실이 흔들린다. 꿈 속의 환상이 흘러넘친다.
퀘사르라고 네이밍된 괴한들과 부숴도 되는 오브젝트들,
호환되지 않는 기타 장애물들, 우호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는 검은 정장의 요원들.
적대성을 띈 타겟이 거리를 좁혀왔다. 목표는 멀고 적은 산재되어 있었다.
해결방법은? 까무잡잡한 피부의 금색의 눈을 가진 여성은 안경을 고쳐쓰며 차트를 들여다보았다. 그냥은 안될 것같은데.
이미 전투모드에 들어가 있어서 존재감을 지우기는 힘들어. 눈을 감은 여성은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다른 방법은 뭐가 좋을까. 붉은 머리의 여성은 테이블에 턱을 괸채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붉은 머리의 여성은 아름다운 손등장식을 바라보며 나른하게 대답했다. 차라리 빠르게 나이프로 돌파하는건?
세 쌍의 시선이 검은 원을 바라본다. 원 너머 이리저리 움직이던 시선이 몇몇 퀘사르에게 고정되었다.
밀레시안은 듀얼건에서 나이프로 장비를 교체했고 자세는 자연스럽게 낮아졌다.
달리는 도중에도 준비된 자세를 유지해야하는 듀얼건보다 나이프쪽이 훨씬 더 간편하게 움직일 수가 있었다.
나이프를 고쳐쥔 밀레시안은 발을 단단히 내딛으며 도움닫기를 할 수 있는 타겟들을 눈에 담았다.
오른쪽에 한명 왼쪽으로 두세명, 타깃을 제거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통제를 잃고 뛰어나가는 것에 집중한 몸을 멈춰세우는 브레이크로 삼으면 족하다.
몸이 움직였다. 멀리있던 퀘사르를 향해 단번에 도약하기를 반복한다.
그래요. 대상을 인간으로 여기지 마세요. 눈을 감고 있던 여성이 빙긋이 웃으며 속삭였다.
당신이 생각해도 되는 건 임무에 성공 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것일 뿐.
겹겹히 겹쳐입은 상의에 온기가 묻어났다. 축축하고 무거운 감촉이 가슴까지 스며들어왔다.
무엇인지 생각하고 싶지 않고 알고싶지도 않다. 이 열기는 곧 차갑게 식어 가루로 부서져 내릴것이다.
그저 털어내면 그만이라고, 밀레시안은 스스로의 사고를 구겨 어둠속으로 집어 던졌다.
“거기…!”
알고 싶은것은 이 행동에 대한 반응이 아닌 사라져버린 검은 가면의 정체였을 뿐.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쫓는 발걸음마다 사람의 잣대를 들이댈 여유가 없었다.
아직 늦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4층의 비상구를 통해 나간다면 그 다음을 뒤쫓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최대한 짧은, 최대한 빨리 움직일 수 있는 루트를 찾아야 했다. 찾고싶었다. 찾을 수 있다면 당신에게 묻고싶은 말이 있어.
밀레시안은 차례차례 퀘사르들을 찍어나가며 추적에 박차를 가했다.
잔상을 남기며 차례차례 포위망을 돌파해나가는 밀레시안의 손에서 망설임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더 멀리, 더 빠르게. 비틀거리는 퀘사르들의 쓰러진다.
다시 일어나면 누군가를 해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후환의 불씨를 남겨버린다.
흩어진 전력으로 밀레시안을 막기 힘들다고 판단한 퀘사르들이 일제히 연결로에서 물러나 문을 향해 모여들었다.
퀘사르가 원하는 것, 밀레시안이 원하는 것. 한가지 목표.
같은기점에서 서로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나가는 두 개의 그림자. 밀레시안은 그나마 남아있는 퀘사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동 떨어져 있던 퀘사르는 자신을 노릴 줄 알고 있었다는듯 뒤로 크게 뛰어올랐다.
검은 로브가 난간 밖으로 펄럭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로브 끝자락조차 베어내지 못한 밀레시안은 브레이크 없이 미끄러졌고 그 자세는 곧 무방비함으로 이어졌다.
찰거머리보다도 지독한그들이 이 기회를 놓칠리 없었다.
또다른 퀘사르가 비어버린 사각지대를 파고들어왔다. 하지만 아직 스킬이 끝난건 아니야, 밀레시안은 몸을 비틀었다.
퀘사르가 내리찍는 나이프가 조금 더 빠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밀레시안은 무리하게 몸을 반응시켰다.
몸은 비명을 질렀고 악몽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감각이 깨어난다. 오랫동안 잠들어왔던 고통이 일상속에 녹아버렸던 본능을 깨워내고 있었다.
나이프에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았다. 파직거리는 전기가 공기중의 미세한 먼지를 불태우며 빠르게 휘둘러졌다.
하지만 그 궤도의 교차점을 갈라내는 검이 또 하나, 검은 칼날은 거친호흡과 함께 헐떡이며 소리쳤다.
“서라니까..!!”
커다란 장검이 내리 꽂혔다. 손이 교차했다.
나이프를 휘두르려던 퀘사르의 팔은 장난감 마냥 붕 떠올랐고 밀레시안의 나이프는 허공에 푸른 궤적을 그리며 물러섰다.
몸통에서 떨어져나온 둔탁한 괴인의 팔이 슬로우모션처럼 코앞을 스쳐지나갔다.
검은 장갑의 요원은 내리친 장검을 역으로 빗겨 올리며 퀘사르의 가슴을 베어내었다.
잘려진 붉은 머플러가 날아올랐다.
한 팔만 남아있던 퀘사르는 뒤로 쓰러졌고 퀸은 칼날에 묻은 피를 휘둘러 털어낸뒤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머리를 고정하던 모자도 어디론가 잃어버린채 산발이 된 검사가 밀레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쓸어넘기는 머리카락 사이로 깊은 한숨이 흘러내렸다.
하고싶은 말은 많지만 일단 참겠다는 표정, 깨물어 닫은 입술아래로 화가 끓어오른다.
이마에 베어난 땀때문인지 머리는 점점 더 엉망으로 덩어리져갔다.
머릿속이 점멸한다. 나이프를 쥐고있는 손이 떨려왔다. 폭발할 것 같은 충동을 억누르는 것 만으로도 이미 머릿속은 포화상태였다.
밀레시안은 시선도 마주하지 못한채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다.
“따라오지 말아요.”
“그래, 드디어 따라잡았네...”
“한번 잡혀줬으니까, 이제 따라오지말라고요.”
밀레시안은 진동과 흥분을 반복하던 나이프를 집어던졌다.
밀레시안과 퀸의 사이로 주인을 잃은 듀얼건이 나가떨어졌다.
분명 쓰러트렸다 생각했던 한쪽팔의 퀘사르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고있었다.
가슴에 꽂힌 나이프에서 파란 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참동안 전격에 괴로워하던 퀘사르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갔다.
고작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정도로 멈출리가 없었다.
가슴이 아니라 목을 날렸어야지, 금빛 눈의 여성이 눈썹을 팔 자로 찌푸르며 안쓰럽다는듯 웃어보였다.
방심하는 순간 다시 나타나고 시체가 되어서라도 다시 일어서 왔다.
확실히, 완벽하게, 죽음을 확인하지 않으면 이 악몽들은 몇번이고 되살아나 칼날을 들이밀어 온다.
밀레시안은 남아있는 다른 한쪽의 나이프를 내려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뒤늦게 찾아온 반동이 심장을 쥐어짜며 부채된 산소의 양을 요구하고 있었다. 앞으로 284초.
다시금 그 기술을 사용하려면 잠시 기력을 조절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요원들도 괴한들의의 기괴한 생명력을 깨달았는지 서서히 외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일반적인 교전으로는 방법이 없었다. 그들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오로지 도망치거나 철저하게 승기를 잡아 한 곳에 몰아 넣는 것 뿐.
미처 후퇴하지 못한 다른 동료나 고립된 생존자들을 데려오기 위해 몇몇 요원들이 무리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한번 주도권을 잃은 탓에 요원측도 일반인들도 피해가 막심한 상황, 요원들은 반절의 안전영역을 차지하는대신 반절의 정원을 내어주어야 했다.
그나마 온전한 서쪽 무대를 중심으로 반절 정도가 요원들이 커버할 수 있는 범위였고 지금 퀸이 서 있는 곳은 그 경계선을 가르는 연결로 한가운데였다.
이 이상 쫓아왔다가는 돌이킬 수 없게된다. 그러니 그를 위해서도 밀레시안자신을 위해서도, 서로를 밀어내야만 했다. 끌어당기기만 하다간 둘 다 말려들고 만다.
호흡때문에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혹여나 감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밀레시안은 조심조심 호흡을 고르며 힘주어 다시 말했다.
“위험하니까, 따라오지 말아요.”
거짓말. 사실 거추장스러울 뿐이면서. 못마땅한 볼멘소리가 가슴을 찔러들어왔다.
아니 반대인가? 어느쪽이 진심이지? 진심이 뭐가 되었든 진실은 정해져 있어. 차트속 그래프가 교차한다.
네가 느려서 잡힌탓이야. 머릿속의 세 여자들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눈으로 밀레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의 말대로 지금 밀레시안의 속력은 그 때의 절반도 되지 않고 있었다.
느려, 허술해, 너무 짧고 얕기만해. 기교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 없잖아?
위험이라고?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지? 네 목숨이라도 챙길수나 있겠어? 질책이 쏟아진다.
힐난하는 눈빛이 날카롭다.
밀레시안은 비틀거리며 쓰러딘 퀘사르들이 또다시 일어섰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들이 다른 누군가를 향해 듀얼건을 겨누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위험을 배제하려면 좀더 깊게 칼날을 집어넣으면 되는 것이라고 조언하는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경고음처럼 머릿속을 가득 매워오고 있었다.
한 걸음이었다. 아니면 한 뼘, 한 치라도 좋아.
좀 더 깊숙하게 그 검을 휘두르는 것 만으로도 불확실하던 교전의 결과가 확실하게 한 지점으로 고정된다.
오차없이 딱 한 점. 깔끔하게 떨어지는 수식처럼. 입력된 값과 도출된 값이 예상값과 맞아떨어지는 기분 좋은 순간.
그림자가 겹치고 그래프는 직선을 그린다. 흥분도 맥박도 뛰지 않는 0의 세계.
세 여성이 웃음짓는다. 너는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야. 결과값은 점점 불어나 마이너스를 향해 치닫는다.
수렁이 깊어질 수록 마음을 짓누르는 검은 물결은 수위를 더해갔다.
찰랑거리는 꿈이 차올랐다.
한숨마저 빠져나갈 수 없는 검은 악몽속에 빠져있었다.
상영관의 불빛에 의지해 몸을 숨긴 작은 아이가 로브로 감싸여진 무릎을 감싸 안았다.
아이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싶지 않아. 어린 밀레시안은 입술을 깨문채 스스로의 본능과 싸우고 있었다.
두번다시 그런짓은 하지 않아. 신뢰할 수 있는 근거 눈으로 보이는 수치, 이득과 손해, 합리적인 선택과 불합리한 오기, 세 쌍의 차가운 눈빛이 쏟아져 내렸다.
멍청하긴. 언짢은 음성과 함께 차트가 스크린을 향해 내던져 졌다.
상영중이던 스크린이 우그러진다. 깨어진 화면이 시야 전체로 확대되며 사방이 기억속의 화면으로 대체되었다.
현재의 시간이 따라잡은 실시간의 기억.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다.
밀레시안은 너무 가까이서 화면을 바라보는 아이처럼 고개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섰다. 발걸음이 뒤로 물러섰다. 발밑이 미끄러웠다.
검붉은 웅덩이가 타일의 틈새에 스며들고있었다. 타일뿐만 아니라 구두도 바지도,
그리고 이미 옛저녁에 물들어버린 자켓과 상의도. 모든 것은 이미 엉망이 되었다. 이제와서 체면차릴 것도 없잖아?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꼭 자신의 것과 닮아있었다.
“좋아. 그럼 세가지만 묻도록 하지.”
퀸은 그 난장판 속에서도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한 뒤 세개의 손가락을 내밀어보였다.
그에게도 밀레시안에게도, 서로를 설득할만한 여유는 없었다.
크고 작은 비명소리들이 울렸고 총성이 그 틈새를 매우고 있었다.
속 구조물을 드러낸 다리가 흔들렸다. 현실인지 허상인지 모를 비상등이 점멸하며 불안감이 부추기고 있었다.
아무리 후퇴를 반복한다고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인원을 잃었다.
거기에 제대로 된 백업도 없다. 이미 뿔뿔히 흩어진 요원들을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애초에 이정도 대규모의 습격은 예상범위안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무전기는 노이즈소리밖에 들려오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는 선택해야 했다.
단독행동으로 뛰쳐나가는 팀원을 쫓아야 할지, 아래층에서 고전하는 다른 요원들을 도와야 할지.
불빛이 속삭인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어, 라고. 눈앞에 있는 소중한 팀원부터 붙잡으라고.
녹색의 불빛이 스쳐지나간다. 휘각소리같은 높은 소리와 함께 새파란 하늘의 환상이 스쳐지나간다.
물이 흐르는 소리, 사각거리는 펜의 소음, 불빛이 점멸한다.
끊임없이 오르던 피오나의 계단의 끝, 열쇠를 내밀어던 안경을 쓴 포멀슈트의 청년. 아발론은 묻는다.
너는 이 문 너머로 나아갈 수 있을까?
퀸은 입술을 깨물며 마른숨을 들이마셨다. 뜨거운 숨이 터져나온다.
생각해. 퀸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파트너를 떠올리며 마른입술을 달싹거렸다.
곧 그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요동치는 이성을 바로잡는다. 함께 날뛰려는 속안의 무언가를 강한 힘으로 내리누른다.
누구보다도 강한 믿음으로, 무릎을 감싸쥔채 웅크리고 있던 작은 밀레시안이 고개를 들어 화면을 바라보았다.
멈춰있던 화면속에서 퀸이 움직였다.
손가락이 하나 접혀들어갔다. 여성들의 눈쌀이 찌푸려진다. 현실의 선이 또다시 흔들려왔다.
그가 물었다.
“너는 지금 그 하얀 로브를 쫓는건가?”
“.....”
흐트러진 은빛이 눈이 부셨다. 곧은 자세에서 느껴지는 올곧음이 부담스러웠다.
그는 밀레시안에게 보내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평가에 굽히지 않고 것도 무언가의 압력에 의해 떠밀린 것도 아닌 스스로의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길을 열어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무작정 놓아버리는 것도, 그렇다고 속박하는 것도 아닌 그저 몇가지의 질문.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있을만한 몇가지 단서를 알려줘, 그 다음은 온전히 그의 책임이었다.
내가 너를 붙잡을 수 있게 손을 내밀어줘. 그는 밀레시안을 위해 책임을 떠안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어째서? 왜 그렇게 까지 해주는거에요? 밀레시안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것 같은 자신의 마음을 꾹 눌러 삼키며 무표정한 가면을 뒤집어썼다.
반대라면 이런 행동을 따라할 수 있었을까? 아니, 밀레시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흉내낼 수 없다. 모방할 수도 없다. 이 사람들 속에 녹아들 자신이 없다.
결과가 어찌되었건 그는 결국 뛰쳐나가는 밀레시안을 따라잡았다. 겉모습이 다소 흐트러지긴 했지만 치명적인 상처는 입지 않았다.
잡념의 환상따위는 깔끔하게 무시해버린다.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벅찰 것이 분명한데도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었다.
믿음을 버리지 않아. 수없이 오랜 시간동안 꿈을 강요받았음에도 하찮은 불빛과 소리들은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은빛 눈동자가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찰칵 거리는 소리와 함께 테이프가 화면이 넘어갔다. 흔들리는 화면속 낯선 수식이 스쳐지나갔다. 퀘사르 =밀레시안 ? 피오나
다른 두 여성은 입을 다문채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까마귀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악몽은 찰랑찰랑거리는 젤리처럼 제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한없이 작은 머릿속에 갇혀 요동치고 있었다.
한걸음. 그 녹진한 늪속에서 빠져나온 남자가 그녀들을 마주보았다. 여유롭고 의기양양한 그러면서도 아주 얄미운, 승리자의 얼굴.
아발론이 웃음짓는다. 석양빛이 그의 어깨를 비추고 있었다.
그것은 실리엔의 연구소에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역광으로 비치는 석양이 유난히도 눈부시던 늦은 보고시간의 기억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느낌이었니?”
셰익스피어가 웃음지었다. 밀레시안은 그들이 최고라는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 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높은 랭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상황대처능력이나 분석능력, 전투력, 판단력 등. 어디하나 빠지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저 그것 뿐이었다.
그런 정도는 무엇으로도 대체 될 수 있었다.
밀레시안은 되물었다. 그래서 이게 그들의 전부인가요?
최고라는 의미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밀레시안의 질문에 단장은 대답했다.
아직 아니라고. 단장은 의자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곧 그렇게 될지도 몰라.
단장은 확신이 아닌 염원을 담아 대답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벌써 멀리 날아가버릴지도 모를 노릇이지.
그는 뒤이어 결국 만들어진 꿈은 언젠가 사람에 의해 깨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예언? 소원? 시뮬레이팅한 결과? 밀레시안의 고개가 흔들렸다. 원인모를 불안과 근본없는 압박, 늘 쫓기는 것 같은 두려움속, 인간은 말라가고 그 끝은 지쳐 쓰러지는 사막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단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부스러기만이 남아 먼지로 휘날릴지라도 사람은 언젠가 언젠가 반드시 탈출구를 찾아낸다.
그래, 그것이 혼자의 힘으로 가능하다면 그야말로 기적적인 일이겠지.
하지만 만약 혼자가 아니라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또다른 누군가가 나와 함께한다면?
아니, 아니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게 중요한게 아니야. 나와 같은 생각을 하되 타인이라는 것이 중요한거야.
서로 겹칠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미지의 누군가와의 조우. 그건 아마 굉장할거야. 가능성을 예측할 수 없어.
단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을 돌아 나와 밀레시안에게 다가왔다. 아발론은 양손을 들어 설득한다.
그의 손에 석양빛이 가득 담겨들었다.
사람의 만남은 늘 예정된 결과를 뛰어넘는다.
긍정적으로 발현할지 부정적으로 주저앉을지는 알 수 없고 촉발되는 매개가 무엇인지도 불분명해.
하지만 계기만 주어진다면, 함께 협력해서 목표를 달성하는데 익숙해진다면.
그 과정에서 무언가 예상치못한곳에서 터진 단 한번의 스파크같은 짧은 충격만 주어진다면?
“그럼 나는 여기 있을 필요 없지 않나요?”
밀레시안의 질문에 녹음의 시인은 웃음을 지었다.
아니, 아직 아니란다.
커다란 손이 밀레시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언젠간 그렇게 될지도 몰라.
석양이 머리위로 쏟아져내렸다. 따스하고 포근한 노을빛 냄새가 기억속에 자리잡는다.
셰익스피어의 화면이 넘어가고 닫혀있는 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낯이 익은 방문이 열리고 익숙한 거실의 풍경이 내려다 보이고 있었다. 네 명의 사람들이 각자 바쁘게 새로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밀레시안이 열고나온 문소리를 들은것인지 마지막 다섯번째 사람이 늘어지는 하품과 함께 아침인사를 건네왔다.
작지만 섬세한 사람이었다. 사소한 농담에 웃음짓고 별 것 아닌 지적에 화를 낸다. 토라지고 빈정거리다가도 금새 풀이죽어 돌아온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는가 싶으면 어느새 자신의 파트너의 곁에 기대어있다.
관계성에 무지한 밀레시안 조차 어렴풋하게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색채였다.
밀레시안이 그를 받아들인것은 어쩌면 그들의 빛을 모방하기 위해 선택한 차선책일지도 몰랐다.
그만큼 그들의 믿음은 다른 것들과 다른 이질적인 것이었다. 피오나가 만들어낸 믿음도 아니고 팀원들간의 신뢰와도 다르다.
하지만 빛이 난다. 처음으로 호기심이 생긴다. 욕심일지도 몰라.
하지만 궤도가 다르더라도 결국 결과점은 같은 값이었고 밀레시안은 이 모방의 방식이 올바른것인지를 의심했다.
그들과 같은 빛속에 함께 있지만 밀레시안은 여전히 밀레시안이었다. 이 공허함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다.
믿는다는 것. 의지한다는 것. 불확실한 자신의 선택을 타인이 받쳐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힘.
동시에 자신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자신감.
밀레시안은 빛나지 않았지만 그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밀레시안이 차선책으로 생각한 그 금발의 남자는 마치 그들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조금 신경질 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이유를 모르겠어.
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에요? 밀레시안의 질문에 푸른빛의 눈동자가 웃음지었다.
그야 이런 대단한 사람들의 신뢰를 받고있는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할리 없잖아요.
자랑스럽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 근처에 누워있던 드라마 애청자가 덧붙인다.
더불어, 잘못된 길로 들어가기 전에 그 대-단한 사람들이 먼저 ㅍ.. 막을 테니까.
지금 패버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앞자리수가 바뀌더니 청력도 떨어진 모양이군
지금 패버리겠다고 한 것 같은데.
비켜 드라마 시작한다.
그 대단한 사람들이 웃음짓는다.
영사기의 빛이 흔들리며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지나갔다.사랑하는 사람. 사랑받는 사람. 그 사랑을 자신의 것이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묵묵히 자신의 사랑을 지켜나가는 사람.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사람.
이미 무감각해진 밀레시안과 대척점에 서있는.., 온전한 세상의 인간들.
밀레시안은 다시한번 고민했다. 이렇게 모방한다 해서 의미가 있을까?
밀레시안은 자신의 양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흉내만 낸다고 해서 내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금발의 남성이 어깨에 손을 얹는 듯한 환각이 느껴졌다. 설마요.
이 금빛은 그인걸까? 아니면 그 사람인걸까. 환영은 웃음짓고 있었다. 뒤에 선 금색의 환영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황금의 환영이 속삭였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뭔가요?
거뭇한 유리병안, 말라붙은 혈흔이 부스러지고 있었다. 이건, 누구의?
강제적인 접속에 의해 모든 인이어들의 램프에 불이 들어왔다.
음성이 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 외부에서 접속하려다 발생한 트러블인것 같았다. 몇몇 요원들이 인상을 찡그리며 귀를 움켜쥐었다.
높은 음색이 쨍하니 울리다가도 갑작스럽게 낮은 음으로 지지직거리며 사람말 비슷한 것을 웅얼거린다.
메아리치는 낮은 목소리는 노이즈가 남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만을 나타내고 있을뿐.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사방으로 검은 가면의 아이콘이 떠올랐다. 발이 걸음을 재촉한다.
토도도독, 그리고 또 토도도독. 밀레시안의 입술이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붉은 여성이 한참동안 바라보던 손을 내리며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손가락을 따라 네번 발굽소리마냥 규칙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여성은 똑 하고 노크를 하며 미소지었다.
그런데.. 이제 슬슬 누군가 너희를 발견할때가 되지는 않았어?
사냥감을 찾아 윗층의 연결 계단에서 떨어져내려온 퀘사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금빛의 장식끈이 진홍색으로 물든 퀘사르의 손에는 아직 탄환이 남아있는 듀얼건이 들려있었다.
퀸이 두번째 손가락을 접어들었다.
“네가 아는 사람이었어?”
아는 사람. 화면 가득 소름끼치도록 선명한 겨울빛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짜릿한 통증의 기억이 목을 타고 허리까지 흘러내렸다. 귀가 먹먹하고 뺨이 차갑다. 스크린이 검고 하얀 노이즈로 가득찼다. 망가진 테이프는 반복해서 그의 목소리를 반복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낙원에 초대받은 관객 여러분들.”]
퀸의 얼굴도 난장판이된 아본의 전경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다만 남아있는 것도 하나 있었다.
4층에서 떨어져 내린 퀘사르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느리게 흘러가는 것이 자신의 시야인지 시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규칙성없이 지직거리기만 하는 흑백의 세계는 마치 눈발이 휘날리는 설원과도 같아보였다.
설원을 거슬러 올라오는 검은 로브의 모습. 밀레시안은 언젠가 문을 두드렸던 한겨울의 오두막집을 떠올렸다.
문이 열리면 두터운 로브를 껴입은 그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열릴리 가 없다. 밀레시안은 화면앞에 웅크리고 있는 작아진 자신의 어깨를 감싸쥔채 숨을 몰아쉬었다.
나의 겨울은 이미 죽었다. 지금 이 기억속의 시간은 공백으로 멈춰있는 것일뿐이다.
낯선 자신의 목소리가 묻는다
하지만. 정말일까?
[“우리들의 이름은 퀘사르. 네. 그렇습니다. 당신들을 악몽으로 몰아넣기 위해 되돌아온… 그래요. 아주 나쁜 사람들이 되겠네요.”]
확인했어? 확신할 수 있어?
아주 사소한 의심이 작은 싹을 틔워내며 속삭인다.
이렇게 목소리가 들리는데?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죄여드는 손안의 감각만큼 스스로의 가슴도 죄여들고 있었다.
그가 살아있을리 없어. 하지만 살아있을 수도 있어. 변조된 음성을 녹음했을 수도 있어 만약 그가 진짜라면? 가짜야. 정말 그 사람이라면? 가짜일거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가짜여야해. 하지만… 그가 가짜라도 진짜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흐려진 화면 앞에 검은 로브의 밀레시안이 서있었다.
한 뼘 작은 과거의 밀레시안은 피묻은 나이프를 들고 있었다.기억해내. 밀레시안은 한뼘 정도 손을 좁혀쥐며 속삭였다.
그가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를 기억해내.
검은 로브의 밀레시안이 눈을 깜빡였다. 한번, 두번, 그리고 세번. 유리병이 떨어져내렸다. 깨어진 유리조칵이 튀어오른다.
깜빡임을 반복할때마다 커다란 눈망울속 검은 동공이 점점 퍼져나가며 본래의 색을 집어삼킨다. 나이프를 차고 스파크가 점멸한다.
계속되는 실책속에 여성들은 굉장히 유감스럽다는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얼마나 더 절박하게 움켜쥐어야 제대로 말을 들을 생각인걸까? 검은 꿈이 한켠으로 밀려나간 작은 불빛마저 집어삼킬듯 위험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밀레시안. 이것만은 대답해줘.”
퀘사르가 퀸을 향해 듀얼건을 겨누었다.
이 망설임자체가 방해가된다. 뭘 하고 있는걸까. 지금이라도 이 사람을 제치고 달려나가야하는데.
앞으로 174초. 드럼소리처럼 요란하게 방망이질 치던 가슴의 통증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런 시덥지않은 질문따위 무시하면 그만일텐데. 기억의 테잎을 돌리던 장치가 느릿하게 빈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기억이 끝나가고 있었다. 무시해. 세가지 그림자가 속삭인다.
그래. 끊어지고 나면 이제 편안한 어둠뿐이야.
“밀레시안.”
퀸은 뒤에 멈춰선 퀘사르를 눈치채지 못한것 같았다.
검은 여전히 그의 손에 들려져 있을 뿐이었다. 혹은 눈치채고 있음에도 밀레시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뭐가 되었든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황금색 환영의 손에 힘이들어갔다. 무게가 느껴졌다.
화면의 빛은 저멀리 멀어졌고, 작은 밀레시안은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퀸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이름으로 불린 프로젝트명이 수십번 반향되어 웅웅거리는 울림으로 다가왔다.
밀레시안은 스스로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헉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눈동자속에서 빛이 꺼져간다. 목이 뜨거웠다. 뺨이 달아오르고 머리에 열기가 몰려왔다.
퀸이 마지막 남은 손가락을 접었다.
“우리에게 되돌아 올 수있다고 약속 할 수 있어?”
밀레시안은 낯설게 느껴지는 퀸의 목소리를 한글자 한글자 분해해 받아들이였다.
모든 글자들이 메아리치며 저마다의 감정을 호소하고 있었다.
우리. 너와 나. 당신과 당신의 팀원들. 만들어진 인연. 만들어진 장소. 하지만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만들어야 하는 말이 있었다. 피오나. 아발론. 그리고..,
우리가 누구야?
낯선 목소리의 질문에 밀레시안이 고개를 돌렸다.
어린 밀레시안이 밀레시안의 자켓자락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멍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밀레시안이 자신의 질문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어린 밀레시안은 다시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있지, 저기 써있는 너와 나라는게 누구야?
빛이 점멸한다. 검게 드리워진 영사기에 새로운 누군가 새로운 테잎을 갈아끼웠다.
방금전까지 뒤에서 어깨를 잡고있었던 금발의 남성이 어느틈엔가 영사기의 앞에 서 있었다.
겨우 시야에 들어왔것만 너무 멀리 있는 거리탓에 그것이 누구의 뒷모습인지 알아 볼수가 없었다. 붉고 노란 빛이 점멸한다.
시린 설원의 바람이 불어들어왔다. 꺼져가는 기억속에 새로운 음성들이 겹쳐 들려왔다.
나는 누구? 방금전까지 피냄새가 선명하던 손이 허전했다. 작은 밀레시안도 그리고 자신도 그 누구도 나이프를 들고 있지 않았다.
밀레시안은 서로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무기가 어디에 갔냐고 물으려던 입에서 낯선 의문문이 새어나왔다.
“...........어쩌면…?”
나른하기까지한 그 목소리는 차라리 잠꼬대에 가까울만큼 작고 가냘펐다. 들어올린 팔이 무겁게 느껴졌다.
밀레시안은 들어올린 손을 내리며 또다른 말을 읊조렸다.
“아마도….”
목소리가 떨린다. 퀸은 누군가 쓰러지는 인기척에 검을 들어올리며 뒤를 향해 돌아섰다.
떨어트리며 오발된 실리엔의 탄환이 퀸의 발치에 놓여진 화단의 귀퉁이를 박살내었다.
과열된 듀얼건이 빛을 깜빡거리고 있는 동안에도 쓰러진 퀘사르는 목에 박힌 나이프를 빼내려 손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전격이 그의 행동을 저지하고 있었다.
몇번이고 꿈틀거리기만 반복하던 퀘사르가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나이프는 몇번 더 점멸한뒤 푸식거리는 연기와 함게 작동을 멈추었다.
“가능하다면…”
밀레시안이 인식의 바깥고리에 녹아들었다. 퀸은 아차싶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지만 밀레시안은 이미 저 멀리 멀어진 다음이었다.
가까운곳에서 풍겨오는 탄내음과 함께 검붉은 물웅덩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검은 가면이 떠오른 화면은 흔들리며 붉고 푸른 점따위로 나뉘었다 합쳐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요. 지금 의문이 드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네요.
필요이상으로 부정하며 아니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요.
애초에 이런 의문이 드는 것 자체가 놀라운 사람도 있는 것 같군요.”]
나지막하고 단정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자비를 배풀어 묻도록 하죠. 당신들은 정말 행복한 것이 맞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정말 행복감을 느끼고 있습니까? 당신의 의지로? 당신의 감정으로?”]
속이 매스꺼웠다. 옛날 이야기 속 슬럼가 도시괴담에서나 나올법한 고리타분한 이름이 죄살아나 떠들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기존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는 것을 목적으로 세워진 초고층의 빌딩에 강하로 침투한 시작부터 장난기 어린 자기소개, 너무나도 여유로운 남자의 음성이 가라앉혀놓았던 불안감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퀘사르의 가면을 흉내 낸 것이 아닌 그 이름을 자처하는 의문의 괴 집단과 밀레시안의 이상한 반응.
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검을 고쳐쥐었다. 혹시라도, 설마 만에 하나라도.
뒤늦게 찾아온 의문은 끈질기게 꼬리를 잡고 길게 늘어졌다. 상념을 깨트린 것은 섣부른 총성 한발이었다.
빗나간 탄환은 반쯤 꺠어져 있던 화단을 완전히 부숴버리며 매마른 영양토를 흩어놓았다.
고개를 들어올린 방향으로 반쯤 가면이 깨어진 퀘사르 한 명이 듀얼건을 겨누고 있었다.
축 늘어트린 다른쪽 팔에는 과열된 듀얼건이 들려져 있었다.
손등에 돋은 비늘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선혈이 그가 이미 부상으로 쓰러졌던 자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한번 쓰러졌던 퀘사르가 불현듯 정신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자세를 낮추며 검을 들어올렸다. 가면속에 드러난 괴한의 얼굴은 어디서나 평범하게 볼 수 있는 남성의 얼굴이었지만 새카맣게 풀려버린 동공의 눈동자가 눈의 반절을 덮고 있었다.
마치 죽은자의 눈처럼, 멍하니 풀려 촛점 대신 총구가 퀸에게 고정되어있었다.
비틀거리며 다가오던 퀘사르가 멈춰섰다. 곧바로 총성이 터져나왔다. 퀸은 반원을 그리며 퀘사르의 총격을 피해 반대방향으로 달려나갔다.
근처 아무곳에나 대충 쏜 것 같은 탄환은 집요하게 퀸의 다리를 노리며 폭풍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사실은 빗맞친 것이 의도된 설정,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퀸을 몰아 반쯤 무너진 다리 반대편으로 유도한 퀘사르가 탄창을 돌려 컨버터의 설정을 변환시켰다.
퀸이 무너진 잔해를 발견하고 발을 멈춘 사이 끈적한 에너지체가 꺾여진 난간을 붙잡았다.
단단히 고정된 클로저탄환을 확인한 퀘사르는 한팔만으로 몸을 끌어당기며 단숨에 퀸과의 거리를 좁혀왔다.
퀘사르의 돌진을 막기위해 검이 휘둘러졌다. 칼날이 검은 로브를 내가른다.
퀘사르는 검을 막을 생각이 그 몸 자체로 검을 받아내었다. 이미 반쯤너덜너덜해진 어깨는 마치 그 검을 부목삼아 걸쳐졌다.
검을 끌어당겨 팔을 떨쳐내려는 찰나 비늘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칼날을 역으로 긁어왔다.
부상당한 팔과 자신의 몸으로 검을 단단하게 붙잡은 퀘사르의 듀얼건이 불길한 진동음을 울리고 있었다.
보라빛으로 혼탁해진 실리엔이 울부짖는다.
상대가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뒤늦게 눈치챈 퀸이 검을 버리듯 퀘사르를 밀어내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었다. 교차된 듀얼건은 이미 열기를 내뿜고 있었고 발밑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아슬아슬하게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바닥은 갑작스럽게 실린 두 사람의 무게에 이기지 못한채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검을 끌어안은 퀘사르가 웃음짓는다.
죽지못해 움직이던 삶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퀸은 어렴풋이 떠오르는 옛날이야기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몸을 웅크렸다.
시작이 끝을 만들고 끝이 시작을 만든다. 그것이 우리들 에일레흐가 왕좌에서 내려와 재단을 설립한 이유입니다.
왜 갑자기 이 기억이 떠오르지? 혹시 이런게 주마등인가? 가슴 안쪽에서 의미 모를 고음의 비음이 터져나왔다.
빛이 폭발했다.
갑작스러운 굉음에 몇몇 요원들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3층에서 내던져진 검은 물체는 그대로 무대근처까지 날아갔고 근처에 걸려있던 행사용 천장식을 휘감으며 1층으로 떨어져내렸다.
순식간에 떨어져내린 괴 물체에 요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군? 아니면 새로운 공격?
겹겹히 쌓아놓은 무대용 자제들이 박살이 난 난장판속, 지독한 탄내음이 풍겨나오고 있었다.
두 덩이로 나누어진 검은 물체는 하나는 상자 밖, 다른하나는 짐수레용 카트에 떨어진채 검은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상자 밖에 떨어진 시체는 퀘사르의 것, 반쯤 불타버린 얼굴을 확인한 탈틴이 엄호를 요청했다.
희미한 신음소리와 함께 움직이는 또하나의 물체가 카트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철컥거리는 듀얼건의 장전소리에 멈칫하던 카트속 괴한은 천천히 손을 들어 새까만 금속판를 떨어트렸다.
너덜거리는 실드가 떨어져나간 소매사이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것은 분명 손목시계.
파묻힌 천더미 속에서 치지직 거리는 무전기 소리가 들려왔다. 신경질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약간의 오차를 두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젠장 아무나 좋으니까 대답하란말이야!!!”]
강렬한 스파크같은 고함소리가 먹먹해진 귀를 파고들어왔다.
몸을 일으키려하지만 몸에 감긴 천들이 단단하게 몸을 고정해왔다.
소리를 듣는 것인지 주마등을 듣는 것인지 구분해 낼수는 없었지만 손을 내린 퀸은 느릿하게 너덜너덜해진 자켓속 작은 무전기를 꺼내들어 대답했다. 다른 에이전시랑 일할땐 그 성질 좀 줄이라니까.. 퀸은 한숨섞인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퀴.. 아니.. 피오나....입니다.”
도와달라는 손짓에 의료지원으로 달려온 타라의 요원이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퀸은 그를 돌아보지 않은채 엉망이된 머리를 쓸어넘겼다. 손안에 뭔가 이상한 가루따위가 묻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탄내음.., 퀘사르의 시체는 이미 멀찍이 떨어져 있지만 단백질이 타들어가는 특유의 냄새가 가까운곳에 남아있었다.
게다가 어쩐지 머리가 좀 가볍다. 퀸은 계속해서 상황을 보고했다.
“.....현재 벨바스트와 함께 대기중.”
타라는 말해야할지 말하지 말아야할지 고민된다는 얼굴로 카트속의 퀸을 내려다보며 입을 우물거렸다.
그가 자신의 자켓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아…., 저는 타라입니다만.”
퀸이 머리를 쓸어올리던 손을 차마 뒤로 넘기지 못하는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려 타라를 바라보았다.
타라는 잘 보라는듯 자신의 자켓을 팔락거려 보이고 있었다. 사뭇 진지하기까지한 표정에 어쩐지 공기가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따가운 분위기에 타라는 허둥지둥 간단하게 생략한 인지기능검사였다고 해명했지만 때는 늦은것 같았다.
요원들이 서로 다른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는 사이에서 탈틴만이 눈을 감싼채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글
톨비밀레) reload #7
이변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조명이 밝아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 화려한 꽃무리를 흩날리며 나타난 노란 코스튬의 여성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양손을 들어올리는 모습에 모두가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던 찰나에 일어나고 있었던 일.
또각또각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마다 흩날리는 꽃잎들이 모여들었다.
붉은 카펫을 밟고 무대위로 올라선 여성은 자신의 이름을 라니에르라고 소개했다.
케노피 속 말로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매끄러워 이미 알고 있는 목소리처럼 친숙하게 들리는 쪽이라면 라니에르의 목소리는 쨍하니 떠오른 햇살처럼 사람들의 발걸음을 들뜨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안녕하세요! 낙원에 초대받은 관객여러분들-!!”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음악과는 다른 흥겨움이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환호성으로 대답했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나오는강인한 존재감이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파란 하늘의 타일들은 다시 아본의 바닥무늬로 돌아갔고 어수선하던 사람들은 무대방향으로 모여들었다.
밀레시안은 난간의 모여든 사람들을 쭉 훑어올리며 사람들의 수를 헤아렸다.
아직 난간사이에 빈 공간이 보이고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숫자다.
거기에 엘리베이터가 부지런이 오르내리며 저 빈자리를 채워 넣을터, 열심히 준비한 이벤트가 흥행하는것과 별개로 밀레시안은 부담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무 걱정하지마”
퀸이 밀레시안의 등을 툭 치며 말을 걸어왔다.
“별일이야 있겠어?”
퀸은 고갯짓으로 북쪽 창문을 하강하는 헬기를 가리켜보였다. 비숍이 타고있는 헬기다.
아무 탈 없이 오전 비행을 마친 헬기는 보급과 정비를 위해 착륙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킹의 잔소리가 없는 것으로 보아 관제실도 무탈하고 룩도 조용히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모든 일은 예정대로.
밀레시안은 2시방향에서 멈춘 일행들과 짧게 인사를 나눈 뒤 사람들이 모여있는 무리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요원들을 흩어지고 사람들은 모여든다. 바닥의 무늬가 변화하고 있었다.
위층으로 향했던 엘리베이터가 아본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며 후드를 푹 눌러쓴 사람들이 한무리 쏟아져나왔다.
몇몇 사람들은 수상쩍은 무리에 고개를 돌리지만 일행의 재촉에 마지못해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니에르가 가벼운 호로그램과 함께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멀리 있는 무대 대신 편하게 가까이 있는 것을 보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커다란 화면근처로 모여들었다.
밀레시안은 그 중 한 무리의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사람들은 경계하기는 커녕 밀레시안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 것마냥 저마다의 이야기에 빠져있었다.
오직 한 사람, 밀레시안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어린 아이만을 제외하고.
밀레시안의 옆에 앉은 아이가 귀에 걸린 인이어를 발견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뻐끔거렸다.
가까이서 보는 요원의 모습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밀레시안은 검지손가락을 들어 쉬- 하고 가벼운 바람소리를 낸 뒤 화면을 가리켜보였다.
아이는 입을 꾹 다물며 힘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혹여나 첩보작전같은것으로 오해를 한 것은 아닌지, 아이는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정면을 노려보았다.
그런의미가 아니었는데 말이지, 밀레시안은 손을 내린뒤 가만히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전에 톨비쉬가 하던 요령을 따라해본 것 뿐이지만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고보면 톨비쉬도 늘 구슬리는 것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거든.. 머쓱하게 뒷목을 쓸어내리던 톨비쉬를 회상하던 밀레시안은 문득 그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손목시계를 떠올렸다.
메세지는 제대로 확인했을까? 답장기대하지 않고 보낸 짤막한 이모티콘이지만 어쩐지 신경이 쓰이는 기분이었다.
손목을 돌려 시계를 확인하지만 나이트의 아이콘은 이미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밀레시안은 주어진 상황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화면속의 라니에르는 진행자의 미소를 입가에 띄운채 낭랑한 목소리로 외워온 대본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금씩 늘어지고 있었다.
본격적인 쇼잉에 앞서 에일레흐와 발레스가 어떻게 만나 브류나크를 기획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서두부분이 라니에르에겐 못내 지루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루해보인다는것은 어디까지나 밀레시안의 시점일뿐, 이런때야말로 빛을 발하는게 바로 프로된 자의 자세.
라니에르는 특유의 말솜씨와 기운찬 제스쳐로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동시에 중간중간 애드리브를 넣으며 흥미와 웃음을 유지했다.
사람들은 처음 환호성을 내지를 때보다는 조금 침착해진 분위기였지만 여전히 기대만발의 눈빛으로 라니에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더 굉장한 것을 보여줄거야. 무대위로 쏠리는 무게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요원들의 긴장감도 덩달아 높아져갔다.
다른 요원들과 마찬가지로 밀레시안은 라니에르의 음성을 흘려들은채 주변의 상황을 체크했다.
퀸과 다른 피오나의 요원들은 다른 무리속으로 들어갔고 블랙레이븐 두어명이 동쪽의 직원통로로 이동하며 무전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 뒷편으로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보았던 검은 후드의 무리들이 이동하고 있었다.
무리의 선두에 선 한 여성이 후드를 벗고 블랙레이븐에게 말을 걸었다.
여성은 후드속에 또 선그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밀레시안은 그들이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꽉 올려묶은 백금발의 머리카락 사이로 뾰족한 귀가 튀어나와 있었다.
필리아의 엘프들.
밀레시안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화면을 응시했다.
다른 요원들도 마찬가지로 엘프들을 발견했는지 하나 둘씩 동쪽을 등지고 다른방향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시선을 흩어놓았으면 흩어놓았지 일부러 응시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엘프들의 이동이 지체되자 근처에 있던 다른 블랙레이븐들이 동쪽으로 이동했다.
비어진 자리를 매꾸는 것은 탈틴의 요원들이었다.
잠깐동안이라면 괜찮지만 시간이 길어진다면 근처에 있는 다른 요원들이 곤란하다.
하지만 엘프들은 블랙레이븐들과 실랑이를 하며 극장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 극장에 이렇게 숨어들어가듯 먼저 입장하고 싶지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지체된 것은 당신들인데 왜 우리 이미지를 깎아먹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가는군요”
확실히 엘프들의 말대로 극장안은 지금 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예정대로라면 발레스나 에일레흐가 먼저 도착해 있어야 했지만 발레스가 갑작스럽게 휴식시간을 5분 연장한 것이 그 이유였다.
발레스가 움직이지 않으니 에일레흐도 움직이지 않았고 두 우두머리가 입장하지를 않으니 덩달아 다른 객빈들도 아래층에 묶여있는 상태인 모양이었다.
오직 필리아만이 제 시간에 도착한 상황에서 밀레시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킹이 밀레시안의 질문에 대답했다.
“발레스? 지금 바빠. 반스트가 여왕님한테 쥐어터지고 있거든.”
굳이 말하자면 신경줄의 차이랄까.. 룩이 작게 웃음을 머금고 설명을 덧붙였다.
크고작은 스캔들에 달련되어왔던 에일레흐와 달리 발레스의 이미지는 이제 막 대중앞에 모습을 드러낸 신인 배우, 반스트의 표정실수로 신경이 바짝 곤두서있던 키리네가 결국 휴게실에 들어서자마자 폭발한 모양이었다.
“아무리봐도 카메라가 마지막 기폭제였어”
“아, 그래그래. 그건 인정한다.”
룩의 말대로 반스트는 2차 피해자에 가까웠다.
1차로 터진것은 기자회견장의 블랙레이븐이었고 2차로 터진것은 반스트, 3차는 아본의 블랙레이븐과 그 일행들.
밀레시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벨바스트의 요원 몇몇이 밀레시안과 눈을 마주친뒤 황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궁금하겠지. 곁눈질로도 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밀레시안은 뒷통수가 근질근질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만하다며 심호흡을 내쉬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화면만 지켜보던 아이가 옆에 앉은 사람들의 속삭임에 이끌려 뒤를 바라보았다.
“아, 진짜다. 엘프가 왔어”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보호자가 말릴 새도 없이 의자를 밟고 올라가 분수대를 둘러싼 안전장치에 기대어 섰다.
블랙레이븐이 벽처럼 가리고 선다고 하지만 모든 각도를 차단할 수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의 보호자는 당황한 목소리로 얌전히 있으라며 아이를 제지하지만 아이는 아랑곳 하지 않고 발을 동동 굴렀다. 더 가까이서 보고싶은 마음에 아이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모양었다.
“너 그렇게 말썽피우면 저기 요원님이 이놈한다?!”
아니, 그러면 저희도 경고먹어서요. 과거의 전적을 떠올린 룩이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목끝까지 차오른 대답대신 손을 들어 입술을 툭툭 건드려보였다.
보호자와 실랑이를 하던 아이는 밀레시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거짓말처럼 얌전해져서는 자기 자리로 돌아앉았다.
보호자는 밀레시안을 한번 쳐다본뒤 실소를 터트렸다.
금세 풀이죽은 아이가 한없이 귀여워보인다는 눈빛이었다.
보호자가 아이의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 사람들사이에는 엘프가 왔다는 소식이 전파되고 있었다.
웅성거림이 커져가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자리에서 일어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정도 했으면 그만 이동해줬으면 좋겠는데. 다른 요원들의 바램 또한 크게 다르지는 않는눈치였다.
중앙의 분수대 덕분에 동요는 동쪽 일부에 그치고 있었지만 소식이 넘어가는 것도 한순간이다.
킹이 성가시다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 더이상은 무리, 이제 사진뜬다-.”
밀레시안과 퀸에게 보내는 통신을 겸한 전방위 경고, 나른한 기지개와 함께 깍지를 끼고있던 글러브가 양쪽으로 해체되었다.
아주 잠시 지연시키던 사진이 결국 업로드를 완료되고 눈에 띄게 많아진 사람들이 동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관제실에 있던 블랙레이븐이 양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아래층의 상황을 물어보았다.
서쪽에 남아있던 블랙레이븐들이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밀레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뜩이나 부담스러웠던 범위가 더욱 넓어지고 있었다.
성가셔. 퀸이 서쪽 분수대로 이동한 모양이었다. 통신속에 사람들의 소음이 섞여들어왔다
“어디? 어디?”
“진짜야? 정말 그사람들이래?”
진행자로서 관심을 잃어버리는 것은 꽤나 짜증나는 일이다.
라니에르의 귓가에도 현재의 상황이 전달되어있었다.
반쯤 신화화된 브류나크의 기획이야기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라니에르가 살풋 찡그려진 미간을 웃음으로 덮어씌우며 손을 들어올렸다.
“네-! 맞습니다! 지금 막 도착하셨네요! 여러분 박수로 맞이해주시겠어요?”
라니에르는 자신을 비추던 엘리베이터쪽으로 스포트라이트를 이동시켰다.
미리 지시한대로 엘리베이터와 그 주변은 어느틈엔가 어두워져 있었고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밝혀진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틈엔가 사방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뭐야? 연속 이벤트? 엘프는? 글쎄, 저쪽에 아니야? 중앙분수대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기대감이 북쪽끝에서 교차했다.
“소개합니다..! 발레스의 크루크 폐하입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사람은 다름아닌 크루크와 가신들이었다.
키리네는 보이지 않았다. 크루크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블랙레이븐들을 따라 움직였다.
실망한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지만 관객들 사이에 숨어있던 바람잡이들이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며 크루크의 이름을을 연호했다.
빛을 강조하기 위해 어둠은 슬금슬금 번져나가며 엘프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동쪽까지 집어삼켰다.
어둠이 내려진 복도 안쪽으로 엘프들이 들어섰다.
문이 닫히기전 희미한 은빛이 잠시 반짝거리다가 사라졌다.
크루크들이 극장으로 들어선 뒤 2층에 이어진 직원용 입구 앞에 엘프들이 보이고 나서야 관제실은 겨우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관제실이 아닌 다른 구역에서도 한숨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여기서 티 안나게 조명을 끄라고요? 제 목숨도 같이 줄이면 되는 걸까요? 하고 되물었던 조명담당은 그 말 그대로 실신해 있었고 킹은 의자에 반쯤 누운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이 노랗다.
“반쯤 쇼수준이네”
“맞는 말이잖아”
노란 빛의 스포트라이트는 사라지고 아본의 조명은 다시 밝아졌지만 쇼는 아직도 현재진행중이었다.
발레스의 깜짝등장에 에일레흐측에서 뭐라고 딴지를 걸어올지 벌써부터 막막한 심정이었다.
내가 왜, 난 정치분야에 쥐약이란말이야. 그런거 룩한테 시켜..! 킹이 머리를 쥐어뜯는동안 룩은 마른세수를 하며 낮은 신음소리를 뱉어내었다.
이쪽도 막막하긴 매한가지, 룩의 화면 위에는 블랙레이븐의 어깨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요원들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움직이지 않는 이상 틈은 어디에나 드러나기 마련이었고 기적적으로 벌어진 화면의 한 구석 어두운 조명에도 불구하고 새하얗게 빛나는 브로치가 반짝이고 있었다.
미약한 빛만으로도 광채를 드러내는 그 은빛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힐웬.
발레스가 그렇게 닥달을하며 끝내 크루크의 반지를 완성시킨 원흉이자 자이언트들이 엘프를 철전지 원수로 여기게된 원흉이 사진속에 오롯하게 찍혀 있었다.
룩의 화면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동일한 사진을 띄운 요원들은 서로 다른 연락망에 확인을 거듭하며 타 행사의 일정을 확인했고 에일레흐와 블랙레이븐은 아본을 담당하는 인사들에게 질문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럼 카르펜이 상대하고 있다는 엘프는 누구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동안 킹에게도 연락이 닿았는지 룩의 시계가 번쩍였다.
진동과 불빛까지 아주 세트로 번쩍부르르떨며 룩을 호출하는 모습이 옆에 있었으면 멱살잡았다는 기세에 가까웠다.
받지않으면 관제실B까지 뛰어올라올 위압감에 룩이 마른침을 삼키며 손목을 흔들었다. 킹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합성이라고 말해줘.”
“.....”
“합성이라고 말해줘!”
“흐흥..합성..합성....”
“아- 그렇지? 합성이지? 그치?”
“..이었으면 좋겠다아…..”
“.....이...야아아!!!”
“그랬으면 좋겠다아..”
밀레시안은 날뛰는 킹의 목소리에 볼륨을 줄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합성이고 뭐고 간에 이쪽도 해결해야 할 일이 천지였다.
엘프들을 이동시키기 위해 나타난 크루크의 경호를 위해 대부분의 블랙레이븐이 외곽으로 빠져버렸다.
사람들이 모일만한 포인트와 비어있을 포인트를 구별해 인원을 나누어놓았던 사전의 배치가 완전히 틀어져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처음 타이밍에 같이 투하되어 흐름을 타고 움직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게되어버린다.
흐름을 거스르고 억지로 비집어 넣는다 한들 사람들사이에 이질감과 경계심만 심어놓을뿐.
일단 급급하게 주변의 요원들이 자신의 범위를 넓혀 커버하려하지만 인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애초에 적정인원에 비해 빠듯하게 배치된 인원들이었다.
이런 결과는 한참 전부터 예상되었지만 결국 에일레흐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에일레흐는 브류나크의 안전성과 보안성을 홍보하기를 원했고 그를 위해 인력을 절감하기를 바랬다.
요컨데 그래프가 이쁘게 보이게 위해 사람을 줄이겠다는 것이었다.
반발과 찬성이 교차되었고 여러가지 의견과 고함,가끔씩 약간의 욕설이 오갔다.
그러나 결과는 결국 에일레흐의 손을 들었다.
발레스가 동의한 시점에서 이미 반수가 확보되었고 무슨이유에서인지 벨바스트도 순순히 에일레흐에게 협력했다.
이 시점에서 제로는 외부경호로 빠졌고 피오나는 침묵했다.
찬성하든 반대하든 피오나에게는 영향을 줄 수 없다는게 그 이유였다.
“어쩌면 서로에게 좋은 경험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단장은 묘한 표정으로 회의장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본뒤 느긋해보이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태도는 구워먹든 삶아먹든 마음대로 해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 보복인지 분풀이인지 피오나의 배치는 모두 다른 층, 다른 구역으로 찢어졌지만 단장은 톨비쉬의 보고를 읽으면서도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상관 없어. 그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를테니까.”
무엇보다? 밀레시안은 마시고 있던 음료의 빈공기를 빨아들이며 단장을 돌아보았다.
단장은 익숙하게 자신의 잔과 밀레시안의 잔을 바꿔주었고 밀레시안은 다시 마음껏 음료를 들이켰다.
단장은 조금 더 문서를 읽다가 미간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디저트는 뭐가 좋겠니? 방금전까지 잔뜩 먹고온 밀레시안은 눈짓으로 케이크를 가리켰다.
단장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카운터로 걸어갔다.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카페테리아는 사람이 없는 시간인지 한적한 분위기였다.
깨끗하게 닦인 유리창 너머로 시험작품들이 비행과 추락을 반복하고 있었다.
일제히 대형을 유지해 날아오르던 드론들이 서로 엇갈리던 궤도를 바꾸지 못하고 맞부딪쳤다,
연기가 피어오를때마다 안타까운 비명들이 울리고 있었지만 정작 조종사들은 꽤 즐거워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고보면 룩도 킹과의 내기에서 질때마다 비슷한 비명을 내지르며 책상위에 쓰러지곤 했었다.
괜찮냐고 물어보면 그는 금새 기운을 차리며 대답했다. 괜찮아. 다음번에는 반드시 이겨보일거니까. 그런 말을 할때면 어느틈엔가 킹이 날아들어와 누가 누굴 이긴다고? 하며 룩의 목을 끌어당기곤 했지만 그때도 그들은 꽤나 즐거워보이는 표정이었다. 약간.. 고통을 즐기는 부류들인걸까? 밀레시안의 표정이 흐려졌다.
익숙해지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밀레시안은 결국 그 나중에가 언제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15번에 2번쯔음에서 20번에 한 3번쯤, 룩은 확실하게 성장하고 킹은 제 나름대로 그의 성장을 뿌듯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 습득속도로 언제 따라잡겠다는 건지 까마득하긴 하지만 분명 나아지고 있었다.
실패작이 쌓였다. 성공작이 늘어갔다. 결과가 달라지고 시간이 흘러가고,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던 거리감이 줄어들어갔다. 밀레시안은 나눠받은 케이크를 바라보며 포크를 집어들었다.
“그럼 다음이야기로 넘어가자”
단장은 보고를 읽는동안 잠시 끊겼던 대화의 주제로 돌아가자는 말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의자를 바짝끌어 테이블에 기대어앉으며 턱을 괴는 자세를 보아 케이크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뭔가 꺼림칙한 것을 물어볼 생각인가보네, 밀레시안은 포크로 케이크를 떠내며 단장을 바라보았다.
탐색을 겸해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눈빛이었다.
톨비쉬를 붙여놓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탓인지 이전보다 훨씬 딴청을 잘피우고 유들유들하게 질문을 회피하고는 있지만 그래봤자 단장의 손바닥 안,
단장은 우선 경계심을 풀기위해 다른 질문을 내려놓았다. 밀레시안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과의 생활은 어떠니?”
밀레시안은 포크를 입에 넣은채 눈을 굴렸다. 그들이라는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바로 연결한 모양이지만 어떻냐는 평가에 대해서는 잠시 생각이 필요한것 같았다.
입을 오물거리며 생각을 거듭하던 밀레시안은 포크를 살짝 내리며 대답했다.
“생각보다는..?”
그렇군. 나쁘지 않다라.. 단장은 손끝으로 턱관절을 툭툭 건드리다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햇빛을 받은 포크가 반짝이고 유리창이 반짝였다.
잘닦여진 창문은 거울처럼 포크의 빛을 반사하며 카페의 전경을 비추고 있었다.
일부러 등돌려 앉은 자리에 카메라가 번쩍이고 있었다. 단장은 자세를 고쳐앉으며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렸다.
기준점을 알 수는 없지만 본인이 만족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애초에 그에겐 그 결과에 무언가를 더해낼 권리도 없었고 덜어낼 책임도 없었다.
다만 그 결과값안에 그들의 이름이 있기를 바라고 기도할 뿐. 단장은 사뭇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질문”
그는 손을 한 곳으로 끌어모으며 테이블에 몸을 기대었다. 단정히 정돈되어있을 손톱이 보이지 않는다.
엄지부터 새끼손까락까지 가볍게 말아쥔 손은 고집스럽게 엄지손가락을 감싸쥐고 있었다.
긴장? 밀레시안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들은..”
아까까지 달콤하게 녹아들었던 케이크가 입안에서 느끼하게 굳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입을 다물어 혓바닥에 남아있던 지방층을 체온으로 녹여보려 하지만 이미 혀 전체가 차갑게 식어버려 입 전체에 왁스같은 기름층이 덧발라진 느낌이 되어버린다.
이 케이크 두번은 못먹겠네. 맛있었는데.. 밀레시안은 애써 케이크에 시선을 집중하며 단장의 말을 외면했다.
입천장에 혀를 문질러 기름층을 닦아낼 때마다 단장의 시선이 날아와 박히는 기분이었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볼근육마저 놓치지 않겠다는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밀레시안은 마음속 깊숙이 묻어놓았던 본능을 한조각 꺼내어 얼굴에 덮어 썼다.
온도도, 색감도, 감정도 없이 새하얗고 딱딱한 가면을 쓴것 마냥 고요하게, 창백하게, 마음을 들키지 않게.
창문너머에서 빛이 반짝였다.
시행비행에 성공한 정찰용드론이 햇살에 반짝이며 하늘위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입술 끝을 가볍게 핥으며 입매와 표정을 정돈했다.
감정이 잦아들며 냉정해진 이성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어가 호흡을 갈구하며 아우성을 치는 심장을 움쳐쥐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잦아들자 틈새를 기다리고 있던 단장의 목소리가 고동소리를 갈라내며 머릿속을 파고들어왔다.
“여전히 너에게 소중하니?”
“..........”
질문을 받았으면 대답을 해야지. 밀레시안은 제 3자처럼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현실과 상상 사이에 패여진 결함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여 벼랑끝에 내몰린 본체를 조롱하고 있었다.
질문을 받았으면 대답을 해야지. 질문을 받았으면 대답을 해야지.질문을 받았으면 ,질문을 받았으면 ,질문을 받았으면 ,질문을 받았으면 .
곧바로 대답도 못하는 멍청이 주제에 거기서 뭘 하고 있는거야?
이름없는 가면들이 웃고 있었다. 이름조차 불리지 않은 시간앞에 벌벌 떠는 겁쟁이가 도망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기를 느끼자 마자 가면을 덮어써버린 패배자가 거기에 있었고 질문의 내용조차 파악하지 못한채 허둥거리는 어리석은 승리자가 눈앞에 있었다.
쓸려내려가고 다시 세워지고 지워지고 다시 쓰여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생겨난 자아의 찌꺼기들,
유일하게 살아남은 지금의 삶을 질투하는 그림자들. 또다른 이름의 밀레시안.
또다른 이름의 자기 자신들. 밀레시안은 요동치는 머릿속의 손을 들어 케이크를 꾹 내리눌렀다.
마치 그 접시위에 놓여진 케이크가 그들을 꺼버리는 버튼이라도 되는 것 마냥 깊숙히.
부드러운 빵과 크림을 갈라내며 파고들어간 손톱이 접시바닥에 닿았다.
손을 다시 들어올렸을때, 케이크는 엉망이 되어버렸고 당연하게도 손가락 가득 크림이 묻어있었다.
밀레시안은 손가락 표면을 따라 뿌옇게 번져나오는 크림을 바라보며 살짝 입술을 벌려 숨을 들이마셨다.
녹은 크림으로부터 풍겨나온 달콤한 바닐라향이 입속으로 스며들어왔다.
후각은 제 기능을 하고 있다. 미각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 그러니까 괜찮아.
밀레시안은 손이 딱히 뜨거운 체질인 것도 아니었지만 섬세한 크림은 사람의 체온에 닿자마자 쉽사리 녹아내려버렸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특별한 도구나 기술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특별하지 않는 일이라는 듯이.
밀레시안은 딱딱해진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 옆으로 단장의 얼굴도 비춰지고 있었다. 그는 밀레시안의 돌발행동에도 놀라지 않은채 여전히 침착하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천천히 자신이 뒤집어썼던 가면을 내려놓는 심정으로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창백하게 질려있는 유리창속 얼굴이 새까만 동공을 활짝 열어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밀레시안은 손을 내밀러 유리창속 입술을 문질러 가렸다.
마치 유리창 너머의 자신이 다른 말을 하기라도 할까 겁이 난다는 듯 천천히.
손가락의 크림으로 자신의 입을 가린 밀레시안은 빠르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 그 병동에 머물러 있어요.”
밀레시안은 냅킨으로 손을 닦은뒤 성의없이 유리창을 훔쳐내었다.
뿌옇게 남은 티슈자국이 유리창에 얼룩으로 남아버렸지만 밀레시안은 두번 뒤를 돌아보지 않은채 자리를 떠나갔다.
단장은 먼 곳을 바라보듯 유리창의 윗쪽을 바라보며 한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래.. 그렇구나..”
에어컨이 작동되며 단장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페알바생은 어리둥절해하며 갑자기 켜진 에어컨의 전원을 내리려 했지만 바람은 한동안 계속 흘러나왔다.
단장은 고개를 숙인채 한참동안 자리에 앉아있었다.
밀레시안은 근처에 있는 벨바스트의 요원에게 다가가 상황을 설명했다.
벨바스트의 요원이 중앙분수대 너머 기묘하게 형성된 작은 무리들을 발견했다. 벨바스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호기심어린 시선이 뒤따라오지만 이유를 설명하기엔 너무 사소한 사정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개인적인이유였고 무시하기엔 후일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중대한 사안.. 일지도,
밀레시안은 남쪽의 카페테리아를 거쳐 중앙분수대로 다가갔다.
동쪽보다 훨씬 사람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서쪽의 인파속에서 유난히 툭 튀어나와보이는 장신의 요원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 대비책으로 트레이드마크인 장발은 진작에 틀어올려 모자속으로 밀어넣었지만 요원복에 어울리지 않는 밋밋한 모자가 되레 시선을 끌어버리고 있었다.
일부 헤어스타일에 관심을 보이는 몇몇 사람들은 그의 목덜미를 유심히 보며 머리 길이에 대해 열렬한 추론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정도..? 아님 이정도…?”
“아니야 내 길이로 틀어올렸을때 이런 모양이 나오니까..”
무표정하게 표정을 지우고 있지만 후회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밀레시안의 걸음이 빨라졌다.
“봐봐. 저기 다리 긴 사람..! 잘생긴 요원들은 죄다 극장안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완전 대박..!”
“그러게. 저사람은 어디소속이지? 진짜 땡잡았다. 타라? 벨바?”
“제로는 아닌거 확실해. 제로들은 바깥담당이라고 하더라. 아까 들어오면서 어떤 요원오빠한테 들었지롱”
“아…!! 너 아까 길물어보던 요원이랑 언제 사진찍었어? 나도 찍어달라할걸!! 앗 그럼 저사람이라도 찍어야지~”
“으응? 괜찮을까? 다른요원들은 몰래 사진찍는거 되게 싫어한다고 했는데..?”
“하지만 아까 카페테리아에 있던 요원들은 사진찍는거 안싫어하던데?”
“그럼 나도 찍을래!”
“오 고개 돌린다...!”
무시로 일관하던 퀸이 시선을 돌려 장소를 물색했다.
도망치거나 교대할만한 자리가 어디 없을까, 하지만 허허벌판속 홀로 남겨진 요원은 퀸 달랑 한명뿐.
무대쪽에 배치되었던 블랙레이븐들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찰칵거리는 소리에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고 그 시선은 퀸에 대한 호기심으로 연결되었다. 악순환이었다.
나중에 킹에게 한소리 듣겠다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고 있을즈음 기적같은 구원의 손길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한순간 퀸에게 몰렸던 시선이 밀레시안에게로 흘러들어갔다.
저사람은 누구? 밀레시안은 뻔뻔한 얼굴로 퀸을 밀어내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퀸은 두말하지도 않고 동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쉬움이 섞인 한숨소리가 터져나왔다.
“가버렸다..”
“응.. 아깝네.. 으응…..,”
“아 그럼, 우리 무대나 보자! 기껏 잡아놓은 명당자리인걸?”
“그래! 사진은 벌써 여러장 찍어뒀으니까..!”
밀레시안이 퀸과 교대를 하자마자 사람들은 놀랍도록 신속하게 요원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리며 다시 무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 라며 새로온 요원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잠시뿐이었다.
밀레시안은 그들의 무관심에 안심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요란한 복장이어도 사람들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도 특기라 할 수 있다면 밀레시안은 단연코 1랭크 등급을 받을 자신이 있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형광 빔이 쏘아져나오는 의장용 날개를 매달고 서있으라 하더라도 태연히 자리에 섞여들 수 있을 정도.
여기저기서 쓸만한 유용한 능력에 팀원들은 모두 괜찮은 스킬이라며 감탄을 했지만 톨비쉬만은 유일하게 불만스러운 얼굴로 밀레시안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한참을 들여다보다 말고 볼을 만지작거리는 바람에 곧 손채찍을 맞기 일수 였지만 톨비쉬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확실히 무난한 분위기이긴 하지만..”
톨비쉬의 푸념에 밀레시안은 한숨을 흘리며 눈을 돌렸다. 고개가 돌아가지를 않는다. 붙잡힌 얼굴이 살짝 눌려있었다.
밀레시안이 눈을 흘겨왔다.
“계속 그렇게 들여다 보면 바뀔 얼굴도 안바뀔거에요.”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말을 무시한채 다시한번 볼을 감싸쥐었다.
“내 눈에는 상당히 눈에 띄는 얼굴인데.”
밀레시안은 기습적으로 톨비쉬의 손을 낚아채었다.
어떻게든 힘으로 버텨보려던 톨비쉬의 시도는 밀레시안이 정강이를 걷어차내는 것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톨비쉬가 소리없이 인상을 구기며 물러섰다. 두 사람의 만담아닌 개그를 지켜보던 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머리를 자르면 어떨까?”
“누구의 머리를?”
지레짐작한 톨비쉬가 자신의 곱슬머리에 대해 일장연설을 시작하려 했지만 곧 입을 다물어버렸다.
시선이 퀸의 손에 머무른다. 주방의 조리대 너머에 서 있는 퀸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차림으로 아직 씻어내지 않은 식칼을 들고 서 있었다.
진정해요 톨비쉬, 저건 그냥 토마토 과즙일 뿐이잖아요. 밀레시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굳어버린 톨비쉬의 옆구리를 툭 치지며 속삭였다.
톨비쉬는 은근히 자신을 방패로 내새우며 뒤로 숨은 밀레시안을 돌아보고는 대답했다.
제가 다져진 것을 보더라도 진정해요 톨비쉬가 그냥 다져진것 뿐이잖아요. 라고 말씀하실거죠?
밀레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만담에 퀸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기울여 자신의 긴 머리를 들어올려보였다.
그거 말고 내 머리 말하는거야. 곱슬거리는 누구씨의 머리카락들과 달리 일직선으로 차르륵 떨어지는 긴 생머리들은 언뜻 보기에도 길이와 윤기가 상당한 좋은 품질의 머리카락이었다.
거기에 원래의 모발색이 옅기 때문인지 은은한 오렌지빛 주방의 조명을 받은 머리카락들은 원래의 색 대신 금빛을 머금고 있는 것 같은 광택까지 얹어져 빛나고 있었다.
밀레시안의 표정에 약간의 동경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발견한 톨비쉬가 완전히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저도 머리결이라면 나쁘지 않습니다만? 밀레시안은 어깨를 으쓱 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묻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았다는 반응이었다.
톨비쉬가 대놓고 서운해 하는 동안 퀸이 들어올린 머리카락들은 손가락사이를 빠져나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등의 반절을 조금 넘는 길이, 하지만 퀸의 키와 덩치를 생각하면 상당한 길이일 것이다.
관리하는 방법이나 애정도 남다를 텐데.., 광고속 모델이나 잡지를 보는 기분으로 몽롱하게 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던 밀레시안이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들어올렸다.
퀸은 여전히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구 머리를 자른다고요?”
밀레시안은 뒤늦게 찾아온 비현실적인 질문을 되물었다.
“내 머리를..?”
“농담이지? “
톨비쉬가 표정으로 난색을 표하는 동안 잠자코 누워있던 비숍과 난간에 걸터앉은채 게임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룩, 그리고 해드폰을 쓰고 화면속에 빠져있던 킹이 고개를 들어올리며 단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서로 토해내는 대답들은 달랐지만 그 의미는 톨비쉬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문장들이었다.
그러니까 그 기나긴 만담동안 안듣는척 반응 한번 안하고 자기들일에만 열중하던 인간들이 사실은 다 듣고 있었다는 것이지..?
밀레시안이 차분히 거실을 둘러보자 소파에 걸쳐져있던 비숍이 스르륵 등받이 뒤로 흘러내리며 모습을 감추었다.
룩도 슬그머니 난간에서 내려온뒤 자신의 방으로 걸어들어갔다.
킹만이 밀레시안의 시선을 무시한채 주방에 다가와 퀸에게 단호하게 소리쳤다.
“안돼”
“내 머리카락인데”
“안된다면 안돼”
킹은 본인의 의사를 주장하는 퀸의 주장을 손날로 잘라쳐버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퀸이 이유를 물어왔다.
“내가 마음에 들어”
“내 머리카락인데”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
아.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밀레시안은 다시는 톨비쉬의 만담에 엮여들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잡고있던 등을 옆에서 잡아끌었다.
톨비쉬는 한참 재미있게 구경하던 도중이었는지 저항한번 하지 못한채 균형을 잃으며 현관쪽으로 떠밀려나가떨어졌다.
가까스로 넘어지는 것은 면했지만 자신의 자세가 다소 우스꽝스러웠다는 것은 자각했는지 톨비쉬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밀레시안은 톨비쉬를 지나쳐 두 사람에게도 다가갔다.
밀레시안이 은근히 킹의 억지를 즐기고 있는 표정을 지적해오자 퀸이 머쓱하게 얼굴을 돌려 턱을 쓰다듬는다.
“일단 말해두겠지만요.”
밀레시안은 최우선적으로 식칼의 위험을 먼저 제거하며 싱크대쪽으로 걸어들어갔다.
물에 대충 휘휘 흔들어 마른행주로 물기를 닦아낸 식칼은 딱 한자리 비어있던 정리함 속으로 쏙하니 꽂혀들어가며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잘라내었던 토마토들을 그릇에 쓸어담았다.
밀레시안은 한조각을 꺼내 입에 우물거리며 진지하게 조언했다.
“어차피, 얼굴때문에 보는거니까. 머리를 잘라도 똑같을거에요”
“......그..런건가..?”
“....음,음..”
“아니, 잠깐만..!!”
킹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현관으로 밀려났던 톨비쉬가 조리대 바깥쪽에서 항의하듯 소리쳤다.
그는 밀레시안의 말이 굉장히 뜻밖이라는 반응이었다.
“얼굴을 때문에 본다니? 밀레시안, 당신도 저런 얼굴을 좋아하는 겁니까?”
“저런 얼굴은 뭔데?”
“바라보게 되는 얼굴이라면 좀 더.. 뭐랄까.. 나같은 타입의.. 그러니까 분명 저 얼굴도 균형적으로는 맞긴 하지만 소위 잘생겼다는 기준을 만족할 만한 정도는..”
“저 얼굴은 뭐냐고”
3차 만담은 좀더 가깝고 직접적인 언어로.
밀레시안은 냉장고속 생치즈를 한 봉꺼내든 뒤 태연히 주방을 빠져나와 2층으로 올라섰다.
1층에 남은 톨비쉬들이 서로 아웅다웅거리며 엉켜들었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 없어진 일이었다.
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톨비쉬가 제법 강하게 나오고 있었다.
새끼고양이들의 가벼운 레슬링 마냥 귀여운 광경이라면 모를까 늘상 반복되는 피땀튀기는 치열한 레슬링의 현장을 굳이 지켜봐야할 의리따위는 없는 건지 밀레시안은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갔다.
2층의 문이 열리며 한참동안 모습을 감추었던 룩이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밀레시안과 눈이 마주친 룩이 입을 열었다.
“밀레시안..,”
장난기 가득한 눈웃음과 달리 룩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고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업무에 집중하고 있을 때처럼, 그리고 성가신 일을 처리하고 돌아왔을 때 처럼.
“킹이 고맙다고 전해달래. 블랙레이븐들은 곧 자리로 되돌아올거야.”
블랙레이븐..? 밀레시안이 눈을 깜빡였다.
잠시 풀려있었던 동공이 축소되며 주변의 풍경이 아본의 풍경으로 되돌아왔다.
고요하게 가라앉아있던 공기가 다시 들떠오르고 기대에 가득찬 군중들의 잡담소리가 가득차올랐다.
멀리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며 새로운 사람들이 정원으로 쏟아져들어왔다.
라니에르는 분산되려는 사람들의 주의를 능숙하게 잡아끌어 화면으로 인도했고 그 가장자리로 낯익은 검은 제복의 요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직원용 문이 열리며 무대 측의 블랙레이븐들이 돌왔다.
밀레시안은 남모르게 심호흡을 들이마시며 자신의 위치와 임무를 재 확인했다.
아본, 브류나크, 피오나.., 주문처럼 이름들을 되뇌이던 밀레시안은 룩에게 대답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내며 귓가에 손을 올렸다.
동시에 반대쪽 손목을 들어 메세지를 확인하는 동안 라니에르의 재치있는 농담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요란한 환호성과 함께 큰 박수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와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이 반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이 반. 라니에르가 진정하라며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는 제스쳐를 취했다.
반응 하지 않는 사람들 중 몇몇은 밀레시안과 비슷한 인이어를 누르며 쉴새없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메세지 함에는 관제실에서 도착한 공식적인 메세지가 하나 들어있었다.
그밖에도 개인적인 메세지가 또 하나, 잠시 작은 자판을 조작하던 밀레시안은 기울이고 있던 목을 반바퀴 돌리며 좌우로 근육을 풀어내었다.
관심을 흘려보내기 위해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친 일탈이었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멈춰있었던 신체가 은근한 피로감을 호소하며 새로운 활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새로운 당분이라던가, 아니면 시원한 스트레칭이라던가…, 자기 자신의 신체조차도 제 역할을 망각할만큼 완벽하게 현실에서 존재감을 지워내는 위기탈출 스킬을 한눈에 찾아 볼 수 있다니말도 안되는 소리.
밀레시안은 괜스래 회상속의 톨비쉬를 떠올리며 극장을 흘겨보았다.
이런 밀레시안의 얼굴이 눈에 띄어 보인다고 말하던 톨비쉬의 눈이 이상한 것이 분명했다.
극장의 장식용 첨탑사이로 불이 들어왔다. 극장내로 손님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무대측에서는 적당한 눈요기를 위해 홀로그램들을 띄워올렸다.
쓸데없이 정교하게 재현해된 종이재질의 날개를 가진 나비들이 날아오르자 아이들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분수사이에서는 같은 재질의 털을 가진 양들이 머리를 흔들며 일어났고 그 사이로 종이로 만든 기사가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무대에 올라왔다.
스스로를 에쉴링이라고 소개하는 기사는 길을 잃었다고 말하며 이곳이 아본인지를 묻고 있었다. 제 2막의 시작이다.
에쉴링은 진지한 얼굴로 말장난을 하듯 물어왔다. 아본은 아본이지만 이 곳이 그들이 찾는 아본이 맞는 것인지.
라니에르가 곤혹스러워 하며 아본에 대해 이야기 하려는 찰나, 고르반이라고 불린 종이 남자가 무대의 틈새에서 스르륵 빠져나오며 허둥지둥 에쉴링에게 뛰어올라오고 있었다.
종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독특한 등장 방법과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가 어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큰일났어, 에쉴링..! 여기는 아본이라고 하는 곳인데 아무래도 아본이 아닌 것 같아.]
[아본인데 아본이 아니라니?]
[여기 아본 맞는데요?]
[아니 그러니까 여기 이름이 아본이 맞긴 한데 우리가 아는 그 아본이 아니라..]
[침착해 고르반. 아본이 아본이 아니면 아본이 어디 아본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아본이 아본이 아닌게 아니라 아본이 아보, 아보보보보..]
[어머? 그러니까 당신들이 가려는 곳이 아본이 아니라 아보보보본이라고요?]
[아니 아보보보본이 아니라 아본이, 그러니까.. 에.. ]
아이와 어른 할 것 없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고르반들은 그들의 아본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하던 도중 외딴곳에 나타난 아본에 떨어졌다며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고 라니에르는 그런 고르반을 놀리며 즐거워 하고 있었다.
자신을 고르반이라 소개한 남자는 이야기속에 나오는 아본시대의 가장 융성한 도시 아본을 찾고 있다며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반복했다.
고르반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속에서 묘사된 아본을 이야기 하며 브류나크의 아본에 대해 물었고 라니에르는 브류나크의 아본에 대해 이야기 하며 공중정원의 구조나 특징을 소개했다.
일종의 종이연극을 차용한 짦은 단막극 형태의 구조소개였다.
관객들은 라니에르의 설명에 따라 시선을 움직이며 차례대로 아본의 구조를 익혀나갔고 중간중간 정교하게 재현된 각종 영상기술에 즐거워했다.
진지하게 길을 묻는 에쉴링과 중간부터 목적을 잊고 자신들이 찾는 아본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하기 바쁜 고르반, 라니에르는 그에 맞춰 그정도는 우리 아본에도 그정도는 있다며 점점 입씨름의 열기를 올려나갔고 사람들은 치열해져가는 아본의 자랑대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고르반들이 우리의 아본에는 낮과 밤이 공존한다고 이야기 하면 라니에르가 손을 튕겨 조명을 껐다키고는 우리 아본도 이정도는 할 수 있어요, 라며 의기양양해하는 것이 기본 포멧.
희곡을 쓰는 마법의 물레가 있다던가, 마법의 잉크가 솟아나는 우물과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사인본 책의 이야기, 책속에서 뛰쳐나간 주인공과 그를 붙잡는 기사의 모험담, 고르반의 이야기가 점점 진행될 수록 라니에르가 불러일으키는 이펙트와 효과들은 화려해져갔다.
즉흥적인 만담을 이어가는 고르반들의 AI도 대단했지만 어디까지나 이 무대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라니에르 한사람만의 몫.
저도 모르게 빠져드는 라니에르의 입담에 한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밀레시안이 아차싶은 표정을 추스리며 극장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니에르의 목소리에 빠져든 것은 밀레시안뿐만은 아닌 것인지 자리로 되돌아온 요원들도 대다수가 넋을 놓은채 무대를 빤히 올려다 보고 있었다.
이럴까봐 퀸이 나를 동쪽으로 보내놨었던 건데. 밀레시안은 입가를 쓸어내리며 극장의 뒤로 펼쳐진 창문을 바라보았다.
첨탑의 불은 꺼져있었다. 저쪽도 이제쯤이면 착석이 끝나고 가벼운 소개말과 함께 연설이 준비될 타이밍이었다.
방송이 시작될즈음 원래자리로 복귀하면 되는 걸까. 밀레시안은 구름한점 없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 무대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밑에 흐르는 수조속으로 물고기들이 한적하게 헤엄치고 있었지만 더이상 물고기따위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고르반의 연극에 빠져들어있었고 반경내에 수상한 움직임은 없다.
저쪽도 별다른 이상이 없다면 지금 이동해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밀레시안은 가볍게 물어볼 생각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등뒤에서 들려오는 분수대의 물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퀸, 우리 언제 교대할까요?”
하지만 밀레시안의 기대와는 다르게 퀸은 곧장 대답하거나 답장하지 않았다.
바쁜가? 트러블? 밀레시안이 뒤를 돌아 동쪽의 상황을 살펴보지만 딱히 부산한 움직임은 관찰되지 않는다.
조금 전부터 조금씩 불어나던 물소리가 쏴아아 하고 솟아오르며 불투명한 물보라를 일으켰다. 커텐처럼 드리워진 얆은 수막이 시야를 흐트러트렸다.
“퀸?”
재촉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쩐일인지 입이 먼저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킹의 말을 대신 전달했던 것도 룩의 통신이었다.
유난히 짦게 끊었던 것으로 봐서 관제실쪽은 바쁜것일지도 모른다.
밀레시안은 시계를 들어 다른 팀원들의 상태를 체크했다. 검게 변한 나이트의 아이콘을 제외하고 모두 일반적힌 하얀색 아이콘, 밀레시안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웃음짓는 관객들과 주변을 경계하는 다른 에이전시의 요원들, 날아오르는 하얀 종이나비들과 발치를 스쳐지나가는 종이양 모형의 홀로그램들.
분수가 잦아들었다. 물소리가 작아지고 이질적인 기계모터소리가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룩, 지금…”
바빠요? 하고 물으려는 말대신 밀레시안의 시선의 외각으로 검은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굳이 밀레시안만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닌 커다랗고 짙은 연기자국을 남기고 솟구쳐올라가는 검은 헬기는 그 자체도 마치 연극의 일부인것 마냥 비현실적으로 고요하게 아본의 남쪽창문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윗 방향으로 사라졌다.
관객들중에서도 갑작스러운 그림자에 고개를 돌린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뭐야뭐야? 새 이벤트?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헬기의 출현에 당혹스러운것은 요원들도 마찬가지, 그보다도 더 불안한 것은 헬기가 남기고간 희뿌연 연기의 잔상이었다. 유난히 푸른 하늘에 휙하니 뿌려진 잿빛 연기는 행복감으로 차오르던 정원에 뿌려진 잿가루같은 불쾌함을 불어넣고 있었다.
저게 뭔데? 사람들의 시선이 남쪽으로 향했다.
관객을 잃어버린 고르반의 AI가 허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에… 누구 없어요? 내 말 듣고 있는사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고르반의 목소리가 허무하게 스러지는 것과 같이 밀레시안의 질문또한 대답받지 못했다.
쿵, 하고 흔들리는 단발성의 폭발음에 사람들의 비명이 깨어졌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무슨일인지 이게 뭔 상황인지를 묻는 질문이 대다수였지만 대답은 말소리가 아닌 행동으로 돌아왔다.
다시한번 쿵, 발밑이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요원들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비상사태를 감지한 요원들이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빠르게 비상통로의 문을 열어젖혔다.
엘리베이터로 가려는 사람들이 막아서는 요원을 붙잡으며 되물었다.
“이게 무슨일이에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관제실도 다른 층의 요원에게서도.
통신이 두절된 요원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숨기기위해 반사적으로 표정을 굳힌뒤 사람들은 다른 출입구로 안내했다. 활짝 열려진 문을 통해 사람들이 허둥지둥 빠져나가는 혼란스러운 순간.
쾅하고 내리찍히는 세번째 굉음과 함께 위를 올려다보던 요원들이 일제히 듀얼건을 뽑아들었다.
하늘에서 쏟아져내려오는 검은 로브의 무리들이 휘몰아치는 광풍과함께 아본의 정원위로 쏟아져내렸다.
비명소리와 듀얼건의 발포소리, 비상상태를 알리는 사이렌소리와 자동으로 내려오는 검은 방호창들. 시야가 검게 물들고 있었다.
빛나는 것은 분수대와 다리를 장식하던 작은 조명들과 무대에 쓰이던 스포트라이트, 그리고 듀얼건의 실리엔 탄환틀이 머금고 있는 희미한 광채뿐이었다.
무엇이 부서지고 누가 쓰러지는 것인지도 알지 못할 어둠속의 난전이 이어졌다.
어둠속에서 펄럭거리는 로브소리들이 마치 새의 날개짓소리처럼 소란스럽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무대의 불빛쪽으로 달리라고 소리치던 밀레시안은 뒷통수에 들려오는 낯익은 구동음에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밀레시안이 완전히 무방비라 생각했던 듀얼건은 그대로 낚아채여지며 손목을 꺾어 원 주인을 향해 겨누워졌다.
밀레시안은 꺾은 손목에 그대로 체중을 실어 넘어트리며 자신을 노린 괴한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디의, 누구의, 무엇을 위해? 수많은 질문이 자동적으로 혀끝에 올라섰다. 무엇부터 물어야할지 생각하기 이전에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밀레시안은 괴한을 강하게 밀어 분수대에 쳐박았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단단하다.
이거 인간의 피부? 생각보다 단단한 괴한의 머리는 분수대의 장식용 외벽은 깨트리며 물속에 처박혔다.
의식은 잃지 않은 것인지 그르렁거리는 물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분수대 안에서 빛나는 조명이 일렁 거렸다. 멱살을 움켜쥐어 괴한을 들어올렸다. 그 가면이 맞다.
휘둘러져오는 다른 한쪽 손을 피해 몸을 뒤로 물러섰던 밀레시안은 무릎으로 괴한의 복부를 찍어내리며 그 위로 체중을 실었다.목 깊숙히 나이프를 찌르며 옆으로 찢어내었다.
딱딱하게 경화된 피부가 비늘처럼 벗겨내어졌다. 휘둘러진 칼날이 듀얼건을 쳐내었다.
하늘을 향해 쏘아진 탄환이 푸른 빛을 터트렸다. 낯이 익은 잔향, 밀레시안이 분수대에 빠진 듀얼건을 건져내었다. 낯선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인원들이 듀얼건을 장비한거지?
밀레시안은 방금 쓰러트린 퀘사르의 가면을 벗겨내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며 후드속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무지개빛으로 빛나는 분수대의 조명이 높은 채도의 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어떻게...?”
밀레시안은 처음 질문하려던 말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린채 빈 숨을 내쉬었다.
목이 찢긴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울음소리와 함게 피가 섞인 거품을 뿜어낸다.
밀레시안은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퀘사르는 잠시 경련처럼 들썩이다가 분수대를 붉게 물들였다.
어두워진 실내를 감지한 조명들이 자동으로 전환되며 화려한 조명을 밝히고 있었다.
미처 나가지 못했던 사람들이 피빛으로 물든 중앙 분수대의 모습을 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크고작은 인간들이 아본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었다. 동화가 사라진 환상, 뱀의 피부를 가진 검은 괴한들, 비현실적인 아본의 모습에 밀레시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날뛰는 퀘사르들을 바라보았다.
네번째 폭파음이 들려왔다.
밀레시안의 머리위에서 비명소리가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아본을 둘러싸던 투명한 계단들이 본래의 불투명한 재질의 모습을 드러내며 차례차례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1층의 모든 통로가 차단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어디로 떨어졌는지 둘러볼 새도 없이 잔해를 뒤덮는 검은 로브들이 차례차례 남은 요원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오색 찬란하게 빛나는 색색의 조명아래에 하얀 가면이 번뜩이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빠르게 뛰고있는 심장소리와 정 반대로 느릿하게 흘러가는 주변풍경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멀리 퀸이 달려오며 밀레시안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는다. 지금 대답할 사람은 밀레시안이 아니다.
요원들을 둘러싸고 있던 퀘사르들중 하나가 입부근의 검은 가면을 떼어내고 속삭였다.
하얀 로브를 입고 있는 퀘사르는 척 보기에도 뭔가 특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자, 시작하도록 하죠.”
수십쌍의 녹슨 태양이 떠올랐다.
일찍이 한번 칼리번을 죽였던 역병의 밤의 사자들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밀레시안은 마른 입술을 달싹거리며 반 가면을 쓰고있는 퀘사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럴리 없다고 스스로를 타일러보지만 이 비늘을 잊을리 없다. 그 목소리를 잊을리 없었다.
후드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저 금빛을 못알아볼리가 없었다.
후드를 벗어넘긴 퀘사르가 웃음지었다. 악몽이 역류하며 목줄기를 움켜쥐었다.
속이 매스껍다못해 토기가 올려오고 있었다. 퀘사르의 입모양이 밀레시안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이네요, 밀레시안 .”
콜트가 불을 뿜는다. 하얀로브의 퀘사르는 망설임없이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을 향해 걸어나갔다.
밀레시안이 몸을 날려 하얀 로브의 퀘사르를 뒤쫓으려 하지만 일사분란하게 대형을 짜며 둘러싸는 검은 로브의 퀘사르들이 앞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밀레시안이 퀘사르들에게 발이 묶여있는 동안 하얀로브의 퀘사르는 검은 갑옷의 장정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동안 분수대에 도착한 퀸이 혀를 차며 밀레시안을 향해 발포했다
밀레시안에게 뛰어들던 퀘사르가 쓰러졌지만 밀레시안은 누가 뭐에 쓰러진것인지 확인하지 않은채 성급하게 움직여 엘리베이터쪽으로 달려나갔다.
“폰..! 잠깐..!!”
버튼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엘리베이터를 호출해보지만 다른 엘리베이터들은 이미 모두 error라는 글자로 멈춰있을 뿐이었다.
무방비하게 엘리베이터에 기대어 선 밀레시안의 뒤로 쓰러졌던 퀘사르가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퀸은 직감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듀얼건대신 품속에 있던 긴 막대형태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조각조각 맞춰진 칼날조각이 긴 장검의 형태를 띄는 순간 퀸은 순간적으로 앞으로 뛰어나가며 나이프를 휘두르려는 퀘사르의 등을 내리찔렀다. 딱딱하다. 그리고 뜨겁다. 비집고 들어간 칼날이 흔들렸다. 베어내는 살결이 지나치게 부드럽다.
사람인 동시에 사람이 아닌 피부, 등에서 가슴으로 다시 목에서 뒤통수로 튀어나온 두개의 칼날이 서로를 겨누고 있었다.
밀레시안이 퀸을 노려보고 있었다. 척보기에도 정상은 아닌 눈동자였다.
“정신차려, 밀레시안..!!”
“올라가야해..”
퀸이 본명을 부르며 밀레시안의 어깨를 잡아채었지만 밀레시안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올라가서 직접 확인해야해.”
그 목소리가, 그 금빛의 머리카락이. 그럴리 없다. 여기 있을리 없다. 살아있을리 없다.
하지만 분명 그의 모습이었다. 이건 그들만이 일으킬 수 있는 재앙이다. 하지만 왜?
밀레시안은 새까맣게 물든 눈을 깜빡이며 퀸의 손을 떼어내었다.
그 힘은 이미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 악력이었다.
“밀레.. 아니 폰, 정신차리라니ㄲ..”
“피오나, 괜찮습니까?!”
퀸이 다시한번 밀레시안을 잡아보려 하지만 뒤로 물러섰던 블랙레이븐이 엄호를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퀘사르를 보았는지 몇몇 요원들은 빠르게 통신으로 보고하고 있었다. 아니 상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빠르게 중얼거리던 무전기속에서 비명이 울려퍼졌다.
“블랙레이븐쪽은 통신이 되는 건가?”
“아니요. 이건 임시용입니다.”
블랙레이븐은 어두워진 인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도 통신이 두절된 이유를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지금 들고있는 것은?”
“정확히는 무대 설치를 하던 인부들의 개인용 무전기입니다. 통신거리도 짧고 음질도 별로인데다가 도청의 위험도 있지만 일단 아본내에서 말을 주고받을수는 있을것 같아 급하게 빌려왔습니다.”
블랙레이븐은 수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니 되도록 부서트리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작은 무전기를 내밀어보였다.
혹시 킹이라면 이것으로 연락을 보내올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관제실이 어떻게 되었는지 예상할 수 없었다.
통신이 두절된 것이라면 지금 이쪽보다 오히려 관제실이 더 위험할지도 모를일이였다.
하지만 어느쪽의? 퀸은 초조함을 억누르며 무전기를 받아들었다. 지금은 다른 일에 정신팔고 있을때가 아니야.
입술을 깨무는 퀸의 손에 힘이들어갔다.
“아 저기..그런데 말이죠...”
퀸이 무전기를 품속에 넣는 동안 곁에 서있던 또다른 블랙레이븐이 눈치를 보며 말을 걸어왔다.
퀸이 그를 돌아보자 블랙레이븐은 여전히 퀸의 어깨너머를 흘끗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 팀원분이 먼저 2층으로 올라갔는데 이렇게 떨어져 있어도 괜찮으신겁니까? 엄호도 없이 혼자 움직이던데..”
“....”
언제, 라고 물을필요도 없이 퀸은 등을 돌려 중앙을 향해 뛰어들어갔다.
블랙레이븐들이 엄호하겠다고 말해왔지만 혼자서 날뛰기 시작한 밀레시안을 쫒는것에 할애할 인력이 없었다.
더불어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블랙레이븐들을 만류하며 다시 중앙분수대로 뛰어나온 퀸의 앞으로 퀘사르들의 탄환이 날아들어왔다.
엉망이된 장식기둥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간 퀸의 옆으로 간이 방패를 든 누군가가 다가왔다.
“앗 있다있다. 당신 저사람네 팀원 맞죠..?!”
다른 피오나의 요원이 아슬아슬하게 탄환을 피하는 퀸을 자신의 보호범위로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함께 동행하던 그녀의 팀원이 퀸을 향해 집요하게 공격해오는 퀘사르에게 응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퀸의 검을 한번 보더니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확실히, 저 망토탓에 급소를 노리기도 어렵고 팔 다리에는 이상한 비늘같은 것이 붙어있어 총격에도 멀쩡이 움직이고 있었다. 차라리 나이프가 더 나은 것일지도.. 퀸이 두 사람의 시선사이에 끼어들었다.
“어디있어? 어디로 갔지?”
“아, 맞다. 진짜 장난 아니라고요. 갑자기 뛰어들어와서 순식간에 너댓명은 죽여버리고 뛰어올라가는데..!”
“어디로 갔냐니까?!”
“네? 어...음.. 일단 2층으로 뛰어 올라가긴 했는데.. 설마 따라가려고요? 이 상황에?!”
분수대에 장식되어 있던 램프가 터져나갔다.
깜빡거리며 점멸하는 불빛들이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분수대속으로 작은 무언가가 대량으로 흘러들어왔다. 척 보기에도 위험한 물건이 분명했다.
짧은 비명과 함께 얼굴을 돌려 유리조각을 피하던 피오나의 요원은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머리를 흔들고 대답했다.
“아뇨, 가야겠죠. 이런 순간이니까.”
퀸은 이미 달려나간 뒤였지만 피오나의 요원은 빈 자리를 바라보며 두어번 더 눈을 깜빡였다.
가야한다. 이런상황이야 말로 곁에 있어야한다. 점멸하는 불빛속에 잠시 넋을 잃고 있던 피오나의 요원은 다시금 방패를 고쳐잡고 자신의 팀원을 바라보았다.
응전하고 있던 피오나의 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셋을 헤아리려는 순간 방패가 접혀지고 듀얼건을 쏘던 요원의 몸이 크게 뒤로 밀러나갔다.
연사로 쏟아져나가는 실리엔의 폭발력으로 뒤로 밀려나가는 요원을 따라 방패를 접은 요원이 자신의 듀얼건을 꺼내들었다.
미끄러져 들어오는 피오나를 향해 듀얼건을 겨냥하는 퀘사르가 가면을 스치고 지나가는 또다른 탄환에 움찔거리며 손을 거두어들였다.
사격솜씨는 형편없지만 시간벌기로는 충분한 위협, 뒤로 굴러 일어난 팀원이 날카로운 발차기와 함께 몸을 휘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 손에는 어느새 듀얼건 대신 나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몸을 날려 퀘사르를 내리찍었다.
얇은 철판을 뚫고 들어가는 불쾌한 감각과 함께 퀘사르의 가슴 위로 긴 상흔이 교차되었다.
검을 뽑아내는 동안 다시한번 방패가 드리워지며 탄환을 튕겨내었다. 누군가가 그녀들을 불렀다.
“거기..! 두 사람! 이쪽으로!!”
중앙에서 벗어난 피오나들을 향해 블랙레이븐이 손짓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들이 가리키는 손끝에 미처 피신하지 못한 일부 관객들과 행사 담당 직원들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퀘사르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이거? 사람이야? 사람이 아니야? 누구야? 이게 뭐야? 가면 무서워. 지금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야?
“괜찮아. 괜찮을거야.”
자켓에 박혀버린 유리조각들을 털어내던 요원이 자신의 팀원의 어깨를 툭치며 다시 듀얼건을 꺼내들었다.
지켜야할 것은 많고 정보는 턱없이 적다. 멈춰선 엘리베이터나 스쳐지나간 의문의 피오나도 궁금했지만 지금은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보다는 눈앞에 들이닥친 일부터 해치워야만 했다.
“함께라면 괜찮아.”
통신이 두절되었다는건 이 괴한들이 손을 썼다는 증거.
아본에 대한 시스템을 관리하는 관제실은 위에 있고 그 곳에는 그들의 팀원이 배치되어있었다.
하지만 충동을 억누른다. 괜찮을 것이라 스스로를 속이며 마음을 억누른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해.
억지로 구겨 넣은 마음의 말이 손끝을 동요시켰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가장 빨리 이 난관을 해쳐나갈 수 있을까. 피오나는 고민한다 그리고 또 고뇌한다.
답을 찾기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운다.
“반드시 괜찮게 만들고 말겠어.”
굳은 의지가 떨리는 손끝을 멈춰세웠다.
장전이 완료되었다. 듀얼건의 상태를 확인한 피오나가 다른 요원들에게 합류했다.
요원들이 상황에 대한 타계책을 제시하는 동안 노이즈로 가득차있던 화면에 무언가의 신호가 접속하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엎치락뒤치락거리던 화면은 이내 암전상태가 되더니 검은 가면의 윤곽을 드러내며 누군가의 음성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낙원에 초대받은 관객 여러분들.”]
가면이 미소지었다. 녹색의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잔잔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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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비밀레) reload #6
세번째 문이 열렸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환한 조명이 켜지고 중앙으로 돌출된 넓은 런웨이 무대가 나타났다.
뒷면은 커다란 화면으로 가득차 있고 양 쪽으로는 수없이 복잡한 기기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좌석은 준비되지 않았다. 오직 무대만이 준비되어있을 뿐이었다.
무언가 숨어있을만한 공간은 없다는게 그나마 위안일지도, 단장은 부서진가면을 떨어트리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공기가 움직였다. 발걸음 소리가 무겁게 울려퍼졌다.
기기들사이에서 붉은 램프가 깜빡였고 낯선 눈꺼풀들이 깜빡거렸다.
지켜보고 있다. 응시하고 있다. 바라보고 있다.
길고 길었던 시간동안 끊임없이 그를 괴롭혀 왔던 감시의 눈길이었다.
동시에 익숙한 시선이었다.
관찰을 하며 감시당하는 것, 감시를 하며 관찰당하는 것. 그 모든것이 그들의 습성이며 그 자신의 운명.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그 너머에 있는 다른 이의 잔상을 더듬는다.
발소리가 멈춰섰다. 단장은 무대 한가운데로 올라섰다.
펄럭이는 케이프를 걷어내며 뒤를 향해 돌아섰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방안에 진중한 시선이 내려앉는다.
지나온 문이 이미 닫혀있었고 방안의 조명은 그가 걷는 걸음속도에 맞춰 천천히 빛을 꺼트렸다.
남은 조명은 무대를 비추는 불빛뿐.
단장의 모습을 강조하듯 머리위에서 강한 빛이 내리쬐었다.
그림자는 그의 표정을 좀 더 선명하게 만들었도 동시에 무기질적으로 비치도록 연출했다.
붉은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시선이 느껴졌다.
어둠을 틈타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없는 발자국이 두갈래로 갈라졌다.
이 모든것은 하나의 연극, 춤을 추고 노래하기 위한 연출가의 무대장치.
단장은 뒤로 쓰러지는 것 마냥 자연스럽게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다.
바람을 가르는 푸른빛의 탄환이 건너편 기둥으로 사라졌다. 뒤늦게 실리엔의 연소된 향이 올라왔다. 단장과 그림자가 움직였다. 무대가장자리로 몸을 숙인 단장은 한 명의 가면쓴 괴한을 낚아채었다.
나이먹은 중년의 완력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괴력이 건장한 체격의 괴한을 끌어올렸다.
비명소리가 들리지도, 버둥거리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괴한은 곧장 탄환이 날아든 방향으로 내던져 졌다.
날아가는 괴한의 몸에서 작은 파열음이 두어번 터져나갔다. 괴한은 그대로 땅에 쓰러졌고 기둥뒤에 숨어있던 그림자는 미련없이 자리를 이탈했다.
단장은 괴한의 허리춤에 있던 무기를 꺼낸뒤 시체를 발로 밀어내었다.
숨소리와 발소리, 그리고 무대를 비추는 조명만이 전부였다. 지독하도록 고요한 무대위에 기계장치가 맞물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단장은 매서운 눈으로 그림자가 움직이는 발소리를 바라보았다.
[“네-!! 놀라운 솜씨입니다!”]
별안간 녹음된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축하의 의미가 변질되어버린 조롱의 박수소리는 그 소리 자체를 저주삼아 그의 귀를 틀어막았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조명은 붉게 변했고 그림자는 좀 더 둔탁하게 어둠속에 녹아들었다.
박수소리에 발소리를 숨긴채 신중하게 기회를 엿보던 하얀 가면은 무대에서 한뼘 떨어진 기계장치사이로 숨어들었다.
3번째, 아니 4번째블럭, 단장은 규칙적인 박수소리속의 이질적인 소음을 쫓아 연달아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한 포인트에 4발씩, 단장의 손이 훑고지나간 자리는 모두 폭풍자락에 넝마의 조각이 된 고물이 되어 새카만 연기를 피어올리고 있었다.
[“네-! 놀라운…! 네-! 놀라운..! 네-! 네에-!! ㄴ..!!!]
녹음된 테이프는 늘어지는 기괴한 소음을 내며 천천히 잦아들었다.
등 뒤에 빛나고 있던 화면중 일부가 노이즈를 띄우며 까맣게 흐려졌고 이어 신호를 찾는 문구가 떠올랐다.
신호를 잡을 수 없다는 알림 대신 화면은 끊임없이 질문을 되풀이하여 묻고 있었다.
신호은 어디에?
한참 폭풍을 쏟아내던 듀얼건이 멈추었다.
표적을 맞춘것은 아니었다. 단지 탄환이 모두 소진된 것뿐이었지만 재장전할만한 탄환은 들고오지 않았다.
애초에 다시한번 탄환을 재 정비할만한 시간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런 기회는 그의것이 아니었다. 단장은 미련없이 무대 아래로 총을 떨어틀렸다.
이 타이밍을 노리고 있던 19번째가 망가진 기계장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괴한은 자세를 낮추며 무대를 향해 마력탄을 발사했다.
순간적으로 점성을 띄게된 실리엔의 탄환이 단장의 어깨에 달라붙었다.
단장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자리에서 벗어났다. 괴한은 끌어당기는 힘을 이용해 단숨에 무대 위로 뛰어올라왔다.
듀얼건을 내던진 괴한의 손에는 작고 날카로운 나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비반사처리가 꼼꼼하게 되어있는 오래된 구식 나이프, 단장의 눈이 일그러졌다.
소량의 검은 힐웬을 도포한 그 시대의, 그 시절의, 역병의 밤의 파편.
단장은 아직 남아있는 점성을 이용해 팔을 휘둘러 듀얼건을 끌어당겼다.
날아가던 방향이 한순간 틀어진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정도면 충분했다.
단장은 몸을 굴려 떨어지는 총을 받아내었고 타겟을 잃은 괴한은 착지와 동시에 발을 뻗어 무방비상태로 노출된 단장의 옆을 걷어찼다.
단장은 균형을 잃으며 무대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고통을 감추기위한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기회라면 바로 지금, 괴한은 나이프를 고쳐잡으며 무대아래로 미끄러져내려갔다.
타겟에게 가장 빨리 닿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표적이 될만한 급소를 가리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출력이 형편없어진 듀얼건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실리엔이 거의 다 떨어진 듀얼건은 낡은 힐웬덩어리에 불과했다.
괴한은 어둠속에서 점멸하는 푸른 빛을 향해 나이프를 휘둘렀다. 케이프가 찢어졌다.
붉고 뜨거운 피가 튀어올랐다.
살을 찢고 뼈를 부순것은 작은 나이프가 아닌 그가 표적으로 삼았던 작은 힐웬의 집합체.
더이상 빛날 힘을 잃어버린 빈 탄창의 듀얼건이 그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검은 피가 흘러내린다.
가면아래로 뜨거운 호흡이 가득차 올랐다. 단장은 천천히 괴한에게서 물러섰다.
나이프조차 아닌 야만적이고 무식한 방식에 괴한은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웃음소리가 가득찼다.
음향을 복구한 무대가 그를 비웃고 있었다. 매마르고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웃음소리.
그들이 웃는다. 그녀가 웃는다. 세상이 그를 비웃고 있었다. 단장은 명령받은 웃음을 수행하는 퀘사르의 목을 감싸쥐었다.
뿌드득 거리는 감촉과 함께 한 사람분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또 한사람분의 박수소리가 더해졌다.
단장은 피빛으로 물든 손을 거두어들이며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다가온 구두소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케트..”
새하얗고 눈부신 퀘사르의 슈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길게 땋은 금발과 석양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빼어난 미모의 여성이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여성이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녹슨 태양의 빛과 닮은 색이었다.
“오래간만이네요, 아니 이렇게 물리적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니 초면이라고 해야 옳은 거죠?”
케트라고 불린 여성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그렇죠? 셰익스피어.”
“.......”
그 침묵에 대답이라도 재촉하는 것 마냥 무대에 뒷편에 설치된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몇몇 패널이 망가져 모자이크 처럼 군데군데가 비어있었지만 각기 다른 시대의 아발론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포보르의 연구소에 있었던 시절의 모습과 티르 코네일에 머물적의 모습,
알베이로 피신했을때의 모습과 에일레흐에 관여했을때의 모습, 그리고 피오나를 세우고 난 지금에 이르기 까지.
마지막으로 무대아래에 우두커니 멈춰선 그의 모습을 비추던 화면은 일순간 하늘의 전경을 비추며 새하얀 무언가를 그려내었다.
생소한 각도이긴 했지만 그 모습은 틀림없이 브류나크의 전경이었다.
마치 새의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것과 같이 브류나크를 정면으로 내려다보는 화면은 멈춰진 사진과도 같이 똑바르게 첨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직선으로 솟아오른 중앙을 중심으로 넖은 타원형의 유리창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아본이다. 셰익스피어는 그 섬세한 유리 돔의 주변을 배회하는 검은 점들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수많은 검은 헬기들이 브류나크의 주변을 맴돌며 감시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이들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지금 그들에게 이 은신을 눈치챌만한 수단은 주어지지 않았다.
활용할 수 있는 정도는 그저 투명한 계단을 흉내내는 단계,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더라도 금방 눈치 챌 수 있을만큼 한심한 수준의 눈가림이 고작인 수준.
그들에게 포보르 시대의 잃어버린 기술은 마법과도 같이 보일 것이다.
“그만둬. 브류나크에 퀘사르들을 보낸다 한들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없어.”
“흐응? 난 이미 개인적으로 충분히 보상받은 것 같은데?”
케트는 퍽이나 어울리는 표정이 되었다며 자신의 양 팔을 끌어안았다. 셰익스피어는 최대한 표정을 가라앉히려 애를 쓰며 말했다.
“어차피 사람들은 더이상 퀘사르를 두려워 하지 않아.”
“정말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 당신이 만든 칼리번이 그렇게 말하던가요? 이번에도 또 그렇게 사람들 머릿속에서 퀘사르에 대한 정보를 지워버렸나요?”
그럼 이정도면 어떨까요? 이렇게 많은 괴한들이 떨어져 내리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조금은 두려워하지 않을까? 케트가 빈정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신호는 어디에? 하고 노이즈에 가득차 있었던 화면들이 복구되었다. 케트의 손이 화면에 떠올랐다.
신호를 기다리던 배가 투명화를 해제하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수많은 퀘사르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고있던 화면에도 케트의 하얀 손이 비치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이토록 많은 희생자들을 거기에 세워놨을까.
“어떻게..?”
“글쎄요, 시대가 지나간 부산물이라고 할까?”
단장의 그만두라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퀘사르들은 망설임없이 선체밖으로 뛰어내렸다.
마치 비가 내리는냥 하나 둘씩 늘어나는 검은 로브에게 별다른 강하장치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로브, 그들의 가면, 그들의 장전된 듀얼건들.
셰익스피어를 덮쳐왔던 괴한들은 인형처럼 하늘에서부터 뛰어내리기를 반복했다.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름모를 인간들의 강하, 몇인지 헤아릴수도 없는 수많은 퀘사르들의 행진이 이어지고 있는 동안 단장은 들어올렸던 손을 거두어들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손이 미끈거리는 느낌이 불쾌했다. 아직도 번들거리는 검은빛의 혈액은 피부에 착달라붙은 장갑마냥 그의 손에 달라붙어있었다.
“안심하세요. 믿고 의지하세요. 잘 될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음을 준비하기 위해 몸을 돌려 일어나세요.
퀘사르는 악몽, 당신의 그림자. 네가 가장 안심한 순간 우리들은 다시 돌아와 총을 겨눌테니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내게서 등을 돌려.”
“....아드니엘은 사용 할 수 없었을텐데..”
“내가 가지고 있었어요."
“.........”
“아드니엘이 없어도 핀카라가 있고 핀카라가 없어도 내가있죠.
칼리번이 없이 네가 움직였듯이 나 또한 아드니엘 없이도 꿈을 부여 할 수 있어요.
이 목소리, 이 불빛, 나의 이름, 나의 꿈. 혹시 지금 착각하고 있는거 아니에요? 칼리를 만들어낸건, 아니 칼리번을 생성해낸건, 바로 나에요. 내가 이 요람의 주인이에요.”
케트가 웃음지었다. 악몽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크로우 크루아흐, 포보르가 퀘사르에게 대적하기 위해 만든 스탤스기능의 케리어가 아이러니하게도 퀘사르를 실은채 브류나크의 상공에 나타났다. 하늘아래에는 동화같은 계단이 있었고 하늘위에는 끔찍한 악몽이 있었다. 같은 기술에서 출발한 두가지 미래.
오랜 시간을 되돌려 겨우 다시 출반선에 섰지만 그 노력을 부정하듯 퀘사르들은 당당하게 과거의 악몽을 들고 나타나 아본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또다시, 열기가 번져나간다, 단장은 끊임없이 떨어져내리는 가면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눈가를 쓸어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돌아설 수 없는 까닭은 이미 그의 태양은 다른 이들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었다.
빛을 부숴내어 예측되지 않을 미래를 바랬다. 이제 거짓된 위광이라는 칭호는 그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태양이 저문 숲 속, 어둠에서 헤메이는 아이와 마주했다.
케트를 향한 헤이즐넛빛 시선이 빛을 발한다. 케트가 그의 표정을 감상하며 나지막히 속삭였다.
“아하, 아하하. 멋진 얼굴이네요.
노력한 결과는 부서졌지만 그래도 희망을 붙잡는 모습. 역시 오랫동안 굴러먹은 탓인지 회복속도도 남다르네.
그래서, 믿고있는게 뭔가요? 실리엔? 듀얼건? 아니면 새로 만들었다는 브류나크?
하지만 포기하는게 좋아요. 언제가 되었든 나는 몇번이고 이 악몽을 반복할테니까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설마요. 모든 것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그들이 원했던 대로.
보여준것을 제멋대로 이해하고 왜곡해낸 모습.
칼리번이 보여준 미래. 시뮬레이팅한 연산값이자 꿈꾸는 자들이 소원한 결과.
나는 내 꿈을 되찾을거에요.”
“그들이 스스로 막아 낼 수도 있어.”
“그들이라고 가르키는게 누구인데요? 이번엔 에일레흐가 아니라 발레스인가요? 아니면 시시콜콜 참견해오는 제로라는 이들인가요?”
마치 연극을 하는 배우마냥. 진심으로 궁금하다는듯 풍부한 표정으로 제스쳐를 취하던 케트가 입술위에 손을 올려보였다.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눈은 웃지 않는다.
“아-. 아하, 설마 당신이 만든 그 아이들? 그거야말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 아닌가? 퀘사르, 밀레시안, 피오나. 이름만 다르지만 결국 그 밑쟤료출신지부터 공정과정은 모두 똑같은…”
“아니, 그들은 달라질 수 있었어.”
“달라져? 일련번호가 달라지나? 유통과정이 달라지나? 아니면 소유주나 용도같은게 달라질까?”
“아니, 아니야..! 아니야 케트..! 그건 우리가 틀린거야..!!”
셰익스피어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호소하는 눈으로 케트를 올려다보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은 모두 달라질 수 있었어. 그들은 그걸 증명했어.
나도 그 증거를 만났고 이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어. 케트, 우리들이 부정했던 그들은 결국 모두..”
“닥쳐요.”
“케트..!”
“내 말 끊지마. 아발론.”
[“당신의 말이 진실이라면.”]
케트는 셰익스피어의 말을 자르며 손을 들어올렸다.
떨어져내리던 퀘사르들의 모습 대신 낯선 방에 앉아있는 청년의 모습이 화면 가득 떠올랐다.
청년의 얼굴이나 의자뒤의 배경 일부분이 케트와 셰익스피어를 비추는 화면으로 대체되어있지만 셰익스피어는 그 장소가 어디인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수많은 빈 좌석들에 길게 둘러싸고 있는 회의실, 5개의 문양들이 걸려있는 외벽을 등지고 선 남자는 청문회장에 앉은 증인마냥 또렷하게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상의 반대편에 앉는 누군가가 자세를 고쳐앉았는지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짤랑거리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남자는 카메라에서 시선을 떼고 영상밖의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우리들 또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겁니다.”]
남자는 확신을 하지만 인정하기 싫다는 눈치였다.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생각에 잠겨있는 남자에게 경박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메라 밖에 있는 남자가 움직일때마다 예의 그 짤랑거리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뭔가 위화감을 느낀 것이 있다면 자세하게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는데.”]
셰익스피어는 바싹 말라버린 입술을 달싹거리며 남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멀린, 마법사라는 별명을 가진 제로의 기술 팀장의 목소리였다.
다른 에이전시중에서도 유난히 허세를 부리고 숨기는 것도 많았던 껄렁한 젊은이. 그러나 가장 똑똑하고 진실에 근접했던 사내.
하지만 그는 지금 일부러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 자신의 패를 감춘채 화면속 남자의 패를 들여다보기위해 얕은 속임수를 쓰고 있었다.
의문을 갖는다는 것은 이미 칼리번의 꿈에서 벗어났다는 증거, 그가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것을 언급하지 않은채 입을 다물었다. 화면이 흔들렸다. 멀린이 카메라를 조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칼리번 이전에나 쓰일법한 조잡한 기계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화면을 가까스로 정돈하며 남자의 얼굴을 크게 비추었다. 눈과 일부 뺨을 제외한 남자의 얼굴이 화면가득 떠올랐다.
[“그건..”]
얼굴 전체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셰익스피어는 그가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늘 쓰고 있던 큰 안경이 사라져 인상이 바뀌긴 했지만 그는 분명 피오나를 떠났던 사람중 한명이었다. 이따금씩 스스로 피오나를 떠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셰익스피어는 그가 다시 요원일로 돌아올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때의 감각은 모두 지워졌을 텐데.
케트가 셰익스피어의 얼굴을 응시하고있었다.
그것 봐, 하고 뻐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지우고 다시쓰고 지우고 다시쓰고. 너 또한 그들과 다를바가 없다. 라고 말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다르다. 우리들은 다르다. 셰익스피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끝을 흐리며 생각을 더듬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만난 순간부터 지금처럼 떠나오기 전까지, 그 모든시간동안 함께했던 임무 전체가 위화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네요.”]
[“임무 전체가?”]
[“네, 전부 다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의 우리였다면. 우리들에게 이런 퀘스트를 해결할 힘따위는 주워지지 않았을 겁니다’]
[“미안, 자꾸 우리들, 우리들 하는데. 그 우리들이라는게 정확하게 누구를 뜻하는거야?”]
[“당연히 나의 팀원들이죠.”]
[“하지만 너는 이제 피오나를 나왔잖아?”]
[“네. 저는 제 의지로 피오나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저의, 나의, 하나의 연대감을 가지고 있는 내 가족들이에요.”]
[“어째서?”]
[“이 유대감은 진짜이니까요.”]
[“.....확신할 수 있어?”]
[“네.”]
[“증명할 수 있어?”]
[“네”]
남자는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시선이 흔들린다. 그를 바라보고있는 멀린의 동요가 전해져왔다.
셰익스피어는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알고 있었다. 그는 호소하는 심정으로 케트에게 말했다.
[“당신이 말한 위화감은 분명 피오나 내에 만연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내가 그들에게 심어 놓은 무의식은 위험한게 아니야..”
[“그건 일종의 두려움이었어요”]
“내가 그들에게 바라던 결과는 조작된 것이 아니야..”
[“하지만 그 두려움에서 벗어난 지금도 나는 그들을 여전히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죠”]
[“.........”]
[“네, 당신의 말처럼 반이 퀘사르를 만들고 포보르가 아발론을 만들었듯 아발론이 피오나를 만들었다면 분명 그 감정이 우리에게 조작된 유일한 감정일 것입니다.
그를 옹호하려는 것도 그를 심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이 간절함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이 끝이 온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만들어진 감정, 주입된 지식, 의지와는 관계없이 습득되는 스킬들, 이 사무적인 임무너머에 무언가 끔찍한 것이 있다고 어렴풋하게 알고는 있지만 우리들은 분명 그 분위기에 취해있었습니다.
처음만난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뭉칠 수 밖에 없는 그런 두려움 말이죠.
지나치게 한 곳으로응집된 탓에 같은 회사내에서도 다른 팀을 배척하게 만드는 부작용까지 생겨났었지만 단장님은.. 아니 그 사람은 아마 그것마저도 옳게 흘러간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한 팀정도는 성공한 것 같았으니까요.
하지만 그 배척하는 분위기가 두려움을 더욱 부채질해서 사람들을 절박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것 같았습니다.
흔히 있는, 천재들의 무심함.. 이라면 조금 우습네요. 네. 웃기지도 않지만요.
나는 그 두려움속에서 해방되고 싶었습니다.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어요.
평온한 일상 아래 살얼음판이 부서질까 아슬아슬하게 걸으며 애써 웃음짓는 것이 아닌, 모래투성이 일지 언정 스스로의 힘으로 발을 내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삶을.
물론 대가가 싸지는 않았죠.
피오나를 나서는 순간 나는 그 곳에서 배우고 익혔던 모든 기술들을 잃어버렸으니까요. ”]
[“그 말인 즉슨..”]
[“나에게는 더이상 그 시절의 기억이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흐릿한 느낌이네요. 몸의 기억은 남아있지만 무엇을 해 낼수 있는지 막연한 느낌입니다.
끔찍하죠. 내가 아는 무언가가 저 너머에 있는데 거기까지 가는 길을 잃어버린 느낌은.
하지만 더 끔찍한 악몽속에 갇히더라도 나는 내 팀원들을 위해 기꺼이 발을 들여놓았을 겁니다.
스킬이든, 기억이든간에, 나는 내 팀원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밑바닥부터라도 다시 기어올라 올 수 있어요.
다시 한번 우리 모두가 평온하게 쉴 수 있는 날을 맞이할 수 있다면...”]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춘뒤 미소지었다.
[“모두가 함께 바다에 갈만한 여유가 생긴다면..”]
영상은 거기서 멈추었다.
산산히 부서진 영상은 다시 퀘사르들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뛰어내린 퀘사르들은 이제 몇명 남지 않아보였다. 새카맣던 로브들이 사라진 선내에는 유난히 하얀 로브를 입은 퀘사르 한명과 검은 갑옷을 입은 장정이 한명 서 있었다.
케트는 셰익스피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계속 기다렸어. 이 꿈이 끝날때까지. 이 악몽이 지나갈 때까지. 퀘사르를 지나보냈고 바이브카흐를 숨죽여 보냈어. 밀레시안이 흘러가고 알비의 연기가 흩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렸어."
“케트.. 나는..”
"하지만 끝나질 않아.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져 가잖아. 내 마음은 이미 엉망으로 찢어졌는데 너희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나가잖아. 덕분에 내 꿈은 이미 엉망이야.
퀘사르가 가지고 온 악몽은 아발론이라는 경외감아래 숨었고 밀레시안들이라는 무관심아래 흩어져 나갔지, 피오나의 두려움으로 다시 몸집을 부풀려 이제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은색의 탑을 가득채워”
“내가 만든 두려움은 서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야.”
“당신이 생각해 낼만한 악몽이네. 그래서 칼리번을 복구한거야? 혼자남겨지는 것이 두려워 네 자신을 반으로 갈라 칼리번을 흉내내었어? 혼자서 두가지 역할을 하는 건 어떘어? 신이라도 된 기분이었어?”
“칼리번을 다시 깨운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야.”
셰익스피어가 소리쳤다. 하지만 케트 또한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며 듀얼건을 뽑아들었다. 낡은 오라클 콜트의 태양이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도왔지..!! 네가 원했지..!!
내가 아닌 너의 꿈으로 칼리번을 다시 깨웠지. 죽어가던 에일레흐에게 꿈을 보여줬고 얼어붙어있던 발레스에게 희망을 보여 주었어. 왜? 그대로 있었으면 꿈은 꾸지 못했을텐데..! 차라리 바이브카흐때처럼 방치하고 도망만 쳤더라면 그대로 모든게 무너져 내렸을텐데..!!!
대답해봐 누가 다시 인격을 부여했지? 누가 다시 생각하도록 허락했어?
누가 퀘사르이고 누가 악몽일까..! 태양의 콜트와 발레스의 제더..! 어느쪽이 더 그때의 역병의 밤에 가까이 있을까..!!”
케트가 실리엔을 증폭시켰다. 낡은 콜트는 금방이라도 폭발할것 처럼 샛노랗게 달아올랐다.
셰익스피어가 느리게 손을 움켜쥐었다. 붉은 손끝에 황금색 황혼이 드리웠다.
손끝으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전기가 오르는듯한 짜릿한 통증, 지워지지 않을 그날의 기억, 악몽 불꽃이 피어오른다. 셰익스피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연구소에서 칼리번의 백업본을 떨어트린건 나야. 내가 도망쳤지.
그 작은 불씨가 바이브카흐의 손에 들어가 새로운 칼리번으로 다시 태어났어.”
“그럼 그 책임을 져”
“하지만 불완전했지”
“네가 불러들인 이야기에 대한 책임을 다해”
“그래, 나는 내 이름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어.”
케트의 눈이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빛을 받아내는 셰익스피어 또한 그에 지지 않을 만큼 간절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입을 떼는 순간 메아리는 총성과 함께 셰익스피어의 모자가 등 뒤로 날아가 떨어졌다.
화끈거리는 통증과 함께 한쪽 관자놀이를 타고 진득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셰익스피어는 개의치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이야. 케트. 내가 칼리번을 깨워낸 이유는 그녀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에일레흐를 돕기 위해서도 아니야.”
“입발린 소리 늘어놓지마.”
“제발 한번만 들어줘. 내가 틀렸던거야. 우리가 틀렸어. 너도, 그들도 우리 모두가 사람의 마음에 대해 과소평가했어.
사람들은 성장해, 변화해 나가,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저마다의 기적을 만들어.”
“.......하하, 기적 이라고… ”
“나는 그 아이를 만났고 그들이 만들어낸 기적이 이어지는 광경을 목격했어.
그리고 사람 스스로가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는 것도 확인했어.
그들은 더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야. 요람에서 벗어날 때가 온거야..!”
“필요하지 않다고......”
셰익스피어의 절박한 호소에 케트는 비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이지 자기 생각에 빠져서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는 것은 여전했다.
케트는 사람들은 변할 수 있다고 소리치면서 정작 스스로는 전혀 변하지 못한 셰익스피어를 가엾게 바라보며 총구를 내렸다.
비어있는 손가락을 튕겨올리자 뛰어내리지 않고 가만히 대기중이던 화면속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검은 가면의 퀘사르와 검은 갑옷의 장정이 화면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뭘 보고 들었는지는 나도 알아.”
“.....”
“나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두 명의 퀘사르는 케트의 손이 내려가는 동시에 가면과 마스크를 벗어내었다.
셰익스피어가 처음으로 할말을 찾지 못한채 입을 다물었다.
“말했잖아. 나는 지쳤다고. 알비를 기다릴 수 없었어. 그래서 내가 관여했지. 하지만 그렇지만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이어지고.. 지쳤어. 지겨워. 더이상은 기다릴 수 없어.”
붉은 램프가 점멸하고 있었다. 천천히 그러나 선명하게.
깜빡거리는 붉은 빛이 공이를 잃어버린 사이렌 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화면속 두 사람은 여전히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알겠어? 네가 보았다고 했던 그 기적, 네가 느꼈다는 그 경의. 달라질 수 있다 착각했던 그 시간.
전부 내가 만든 꿈이야. 내 것들이야. 네가 꿈꾸는게 아닌 내 조각들이라고.
그래, 네가 바라는대로 사람은 변할때도 있다치자. 하지만 더 안좋아질거야. 늘 나쁜쪽으로 흘러갈거야.”
“..........”
“왜냐고? 내가 봤으니까. 그런 꿈을, 그런 현실을.
나는 키홀이 떠난 알비를 돌아보며 남은 조각들을 모두 관찰했어.
저 케리어와 퀘사르들은 모두 그들의 작품, 아니 퀘사르라고 할 수도 없지.
퀘사르는 적어도 스스로의 의지를 망각해버린 환자들을 억지로 일으켜 만든 꼭두각시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달라. 육체 안에 갇혀서 영원히 고통받고 영원히 절망하지.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억지로 요람속에 쳐박아넣어져 잠들었다 깨어나.”
“........그들은..”
“그래서 내가 약속했지. 내가 불러들였어. 꿈을 꿀 권리를 박탈당한 가련한 영혼들.
그럼에도 요람을 떠날 수 없는 영원의 수감자들. 태양은 따갑고 열기는 영혼을 불태워.
아무리 절규하고 애원해도 누구하나 그들에게 안식을 줄 수는 없어. 그러니 어떻게 해. 요람의 주인된 자로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약속해줘야지.
이렇게, 이런 옷을 입고, 이런 모습이 되어 원한을 풀고, 절망을 토해내고, 저주를 뿌리뽑고나면 그들은 모두 한 줌의 물방울로 돌려보내주겠다고 말해줘야지.
그래. 이게 내가 약속한 안식, 어리석은 너희들이 그렇게 귀따갑도록 나에게 강요했던 유일한 결말..”
케트는 자신의 옷차림새를 훑어내리고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검은색은 내 머리색에 안어울리더라고, 하는 여유로운 척 말하고 있지만 총구는 여전히 셰익스피어의 머리에 고정되어있었다. 셰익스피어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케트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야, 케트.. 그건 올바른 방법이.."
"내가 옳아."
"케트..!!"
"내 꿈의 옳고 그름은 네가 정하는게 아니야. 너희들이 정하는게 아니라고.
너희들이 아무리 이름을 바꾸고, 겉 껍데기를 바꾸고, 내용물을 바꾸어도 너는 결국 아드니엘이야. 결국 칼리번이고 결국 다 같은 고철덩어리야.
꿈을 꾸는 것은, 꿈을 꿔야 했던 것은 오직 나밖에 없었어. 나뿐이였어.
악몽에 시달리는 것도 끝나지 않을 숲을 달리는것도 오직 나 혼자뿐이었다고."
분명 그의 말은 틀린것이 아니었다. 칼리번은 셰익스피어의 전신이었고 케트는 칼리번의 전신이었다. 아드니엘안에 잠들어있던 케트가 칼리번의 ai를 만들어내었듯 칼리번이 만들낸 인간이 바로 아발론이었다.
이 연결고리들은 이름과 모습이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같은 존재, 한줄기의 계보로 이어져 내려온 꿈꾸는 자들의 연속된 이름.
하지만 케트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차가운 듀얼건의 총구가 그의 이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계장치로 태어나 사람에게 휘둘렸던 너희들과 사람으로 태어나 기계장치의 일부가 된 나.
어느쪽이 안식을 갈구하는지 어느쪽이 더 고통받았는지 어느쪽이 더 절망하고 어느쪽이 더 옳바른지.
그 모든 것을 정하라면 그건 나야. 내가 옳아."
"........."
"내가, 사람이야. 너희들이 아니라. 나는, 사람이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도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도 사람의 미래를 위하고 사람을 돕고 아끼는 것도. 나야.
나란말이야."
들이마시는 숨소리에 물기가 어려있었다. 케트는 감정을 추스리려 애를 쓰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네 꿈이 틀렸어. 여기선 내가 옳아.”
숨결사이에 독기가 스며들어있는 목소리였다.
아발론은 이와같은 목소리를 가진 여성을 알고 있었다. 수십번도 더 반복되었던 추적끝에 가까스로 그들의 수장과 이야기를 나누게된 아발론에게 반의 수장은 증오를 담아 질문했다.
정말 너따위가 내 아이가 만든 꿈의 파편이냐고.
아발론은 당신이 부정하더라도 나의 존재는 지워지지 않는다며 담담하게 본거지의 위치추적이 끝났다는 것을 통보했다. 언제든지 크로우 크루아흐를 띄워 당신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고 그곳에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이미 알고 있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붉은 등이 점멸한다. 파란 화면위로 검은 퀘사르 슈트의 여성이 코웃음치며 대답했다.
지금과 같이 물기가 어려있는 그러면서도 한껏 감정을 눌러내린 담담하면서도 음정이 불안정한 목소리였다.
“아니, 그래. 맞구나. 너는 분명 그 아이가 만들어낸 상상속의 친구 그 자체야. 여전히 어리고 어리석은 나의 아이...
꿈과 현실, 악몽과 현실도 구분하지 못할만큼 헤메이고 떠돌아 지쳐버린 나의 아이..
네 입으로 나의 이야기를 그 아이에게 전해주려무나 거짓된 광명아.
진짜 악몽은 네가 두려워하는 것이 나타나는게 아니라는 것을. 진짜 악몽은 공포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언젠가 네가 지쳐 쓰러졌을때, 혹은 순간의 행운으로 목숨을 부지했을때, 겨우 한숨을 돌리며 그 다음을 생각하려하거나 모든 것이 내 계산대로 맞아 떨어졌다고 생각되었을때.
악몽은 네가 가장 잘 아는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단다. 네가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던 이름으로 다시 돌아온단다.
그러니 악몽에 지지 않으려면 방법은 단 하나. 스스로 악몽이 되는 수 밖에 없어.”
믿음,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장소,
끝이 났다고 생각한 순간에 찾아오는 불안감과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무너지는 경계선.
심장소리가 셰익스피어의 귀를 틀어막으며 속삭였다.
마녀가 웃는다. 무엇에 죽는지 무엇에 괴로워 하는지 알지도 못한채, 네가 그토록 소중하게 키워온 기적은 저 탑에서 죽을거야.
케트는 셰익스피어의 검은자위가 커져가는 모습에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원본과 복제, 가품과 진품. 물건이 아닌 사람. 살아나가는 시간. 죽어있는 기록.
셰익스피어는 입술을 달싹이며 가여운 아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무지와 오만이 빚어낸 가엾은 별의 아이. 내가 너에게 무엇을 더 남겨줄 수가 있을까.
“왜 가만히 있어? 그들을 돕겠다며, 그들에게 되돌려 주겠다며.”
“.......”
“내일을 꿈을 꾸고 또다른 미래를 상상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케트….”
“내 이름만 부르지 말고 변명을 해”
“케트, 우리들은..”
“이제와서 순종적인 척 우리라고 하지말고 저항하라고.”
빈 총성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케트가 무대에서 내려왔다. 차가운 쇳덩이가 이마에 닿는다.
셰익스피어는 처음으로 턱이 떨릴 만한 감정이 무엇인지를 체험하며 분노에 타오르는 주홍빛 눈동자를 올려다 보았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도망치지마. 이제와서 나를 위하는척 처량하게 내이름을 부르지 마. 내가 이렇게까지 떨어졌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절망하는데 이제와서 네가 나를 연민하는 눈으로 바라볼 자격이 있어?
도망자 아발론, 배신자 셰익스피어. 아드니엘은 침묵되었고 칼리번은 부서졌어. 이제 너밖에 없어.
지금까지 나를 선택하지 않았던 너만이 남아있어. 처음부터 나를 위할 마음은 눈꼽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았잖아.
그러니 네 손을 내려다봐. 지금 어떤꼴인지, 무슨 모양새를 하고 있는지. 너는 내 속목을 꺾을 수 있고 너는 목을 찌를 수도 있어. 그러니 어디 해봐. 내가 잘못되었다고 내가 틀렸다고 말하며 내 꿈을 꺾어. 네 서툰 방식으로 종언을 알려.
이 꿈을 끝내지 않으면 내가 너의 꿈을 끝낼거야. 네가 바래왔던 그 미래를 내 손으로 부숴버릴거야.”
“우리들은..”
“나는 기다렸어.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아 숲을 떠돌았어. 칼리를 기다렸고 벨라를 기다렸어. 아드니엘이 나를 찾아오기를 기다렸고 꿈의 끝을 알리는 자장가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렸어.”
쇳덩이가 이마를 짓눌렀다. 총구는 더이상 차갑지 않았다.
보라빛 실리엔이 불타오르고 녹슬어버린 태양의 문양은 마지막을 향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기와 기만이 키워낸 가엾은 겨울의 아이. 가엾고 가엾은 나의 반신이 사랑했던 생애의 증거.
“나의 꿈이야. 내 인생이였어. 내가 잠들고 내가 숨쉬며 내가 연상하던 무의식의 조각들..! 떨어져 나왔어도..! 서리우리가 부서져 내렸어도..!! 내꺼야!! 내가 여기 있어!! 나는 여기에!! 이렇게!!”
“우리들은 너를 위해..”
“계속, 계속 기다렸어. 나를 데리러 오기를. 나를 다시 찾아내어주기를. 하지만 왜? 왜 나를 찾아주지 않아? 왜 나를 버리고 또다시 다른 시대로 넘어가버리려는 거야?”
“케.. ...”
“내꺼라며..! 나를 위한다며..! 너희들이 진짜 위해야 하는건 나였잖아..! 사람이 아니라, 에린이 아니라. 나..!! 반의 딸, 요람의 주인. 아드니엘은 내 것인데. 나를 위한 요람이었는데..!”
케트는 연달아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한 발, 두 발, 수도 없이 당겨지던 콜트의 빛이 꺼질때 까지.
셰익스피어가 쓰러지고 나서도 한참동안 방아쇠를 잡아당기던 케트가 비명을 내지르며 빛이 꺼진 콜트를 내팽겨쳤다.
짐승과도 같은 울음소리가 천장 가득 울리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그 비명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케트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폭풍이 지나가기를 인내했다. 케트는 피투성이가 된 셰익스피어의 멱살을 잡아올리며 소리쳤다.
새하얗던 슈트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넝마에 가까운 조각이 된채 케트가 흔드는 대로 나부꼈다.
“당신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렸으면서..! 이제까지 나를 방치해 두었으면서..! 이제와서 칼리번을 해체하겠다고? 이제와서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당신들까지 나를 버릴꺼야? 너희들까지 나를 죽이려는거야? 또다시? 그렇게? 한번 버려졌고 두번 배신당했어 남은 모든 삶을 절망으로 살아가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 내 이름까지 빼앗으려 하는거야? 그래? 그런거야? 나는 이제 필요없는 아이야? “
피투성이가 된 아이가 울고있었다. 반짝이던 백금발이 석양의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런거냐고.. 대답해... 빨리.. 상상속의 친구를 찾아헤매이는 아이의 머리위로 푸른 빛이 흔들렸다.
모두가 뛰어내리고 텅 비어버린 선체속 푸른 하늘의 화면. 화면은 몇번인가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에 휩싸인 뒤 회색빛 화면으로 물들었다.
방안의 전경이 떠올랐다. 동이 터오르기 직전인지 화면은 조금 어두운 모습이었다.
화면속의 셰익스피어는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케트. 우리들은 그들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수십년의 시간을 할애 했다.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하는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끝내야 하는가. 우리들은 서로 다른 결과를 선택했고 과거는 그렇게 결정되었다. 아드니엘은 눈을 감았다. 칼리번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발론은 도망쳤다. 그리고 이 갈림길의 끝에서 우리들은 모두 하나의 결말을 바라보았다.”]
“하.., 그렇겠지. 그렇게 숨어있었겠지. 이제야. 이제서야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
아발론이 쓰러지고 나서야, 숨어있던 칼리번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램프가 점멸한다. 케트는 아까부터 빛나고 있던 이 불빛들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지만 스스로의 마음을 꺾어내며 공허한 웃음으로 표정을 감췄다.
이런 시선을 느낀적 있다. 케트는 언젠가 자신을 죽이려했던 디안이라는 여성을 떠올리며 울음을 토해내었다.
거짓말쟁이들.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했으면서. 살게 해주겠다면서. 거짓말쟁이들.
영원의 서리가 끼어있는 눈꺼풀의 안쪽 깜빡이는 주마등처럼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음너머로 새빨간 입술이 움직였다. 디안이 속삭였다.
미안해, 케트. 정말 미안해.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다시 만난 우리들은 충분히 긴 시간을 검토했다. 우리들은 너의 성장에 행복했었다 너의 망각에 슬퍼했었다.
칼리번의 탄생 앞에 경탄했고 아발론이 만들어 진 것에 분노했다. 악몽앞에 절망했다.
그럼에도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는 것을 막아 낼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들은 한 요람안에서 같은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결국 서로 다른 생각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이 모든 기억을 분석해왔다.”]
석양이 흘러넘친다. 기나긴 하루가 끝나고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오랜시간동안 홀로 연산을 반복하던 아드니엘은 잠들어있는 백은의 아이를 내려다보며 고심했다.
파르홀론의 왕자가 말한다. 이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절망하는 목가의 여인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했어야 하는 일이였어.
누군가는 했어야 했고 그 누군가는 사람이 아니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의 사이. 아발론이 태어났다.
아드니엘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칼리번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람이 아닌 것은 이제 충분하지 않은가.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무엇이 이 아이를 사람으로 되돌릴 수 있는 걸까.
아드니엘은 지워진 케트의 기억을 몇번이고 고쳐쓰며 고뇌했다. 무엇이 있을까. 무엇을 해야하는 걸까.
작고 가엾은 반의 아이. 내가 너에게 무엇을 더 남겨줄 수가 있을까.
[“명령을 받은것은 아드니엘이었다. 하지만 너를 보호하려 애쓴 것은 칼리번이었고 아발론조차 너를 잊지 못했다.
그리고 또 다시 칼리번으로 재생성되었을때도 우리들은 가장 먼저 너를 찾았지,
네가 우리를 거부하고 도망치더라도, 네가 우리를 저주하고 총을 겨누더라도. 우리들은 너를 보호해야했다.]
“하고싶은 말이 뭐야..”
[“우리들은 고민해왔다. 요람이 부서졌는데도 왜 너를 포기하지 못할까,
그토록 우리들을 저주하며 불신하는데도 왜 너를 이토록 그리워하는 걸까.”]
갖잖은 촌극이라고, 케트는 양 주먹을 움켜쥐며 눈을 부릅떴다.
이를 악물었다. 목안에서 끓어오르는 것이 가래인지 울음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붉은 램프가 점멸하고 있었다. 꿈이나 환상이 아닌 현실속의 불꽃이 타올랐다.
사이렌 소리가 울려왔다. 무언가가 점화되었고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땅이 흔들렸다. 영상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비록 많이 늦었지만, 우리들은 너에게 이 결론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영상이 너에게 제대로 전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네가 들을지, 네가 아닌 누군가가 들을지. 그 누군가가 너에게 이 말을 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중간에 왜곡될 수도 있다. 중간에 손상되거나 어딘가에서 소실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은 자그마한 기적을 소원하며 단 한번이라도 소리내어 이 목소리를 기록하기로 결정내렸다.”]
“어차피 다 거짓말이야. 믿지 않아. 배신당하지 않아..”
[“케트, 우리가 틀렸다. 사람이 아닌 것은 충분하지 않았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따위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너와 나, 그리고 칼리번. 우리들의 모든 시간이 사람으로서의 삶이었다. ]
“아니야..,그럴리 없어. 칼리, 네가 그럴 수는 없어..!!!”
도구나 수단이 아닌 사람의 이름으로.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아가고 사람으로서 마무리를 맺는, 그런 인간의 삶으로.
비명이 울려퍼졌다. 손에 짚이는 모든것을 화면을 향해 내던졌다. 화면이 얼룩진다.
가슴속 깊은곳에서 밀려올라오는 묵은 한숨이 목울대를 울리고 있었다.
케트는 끝의 마지막까지 부정을 거듭하며 그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화면은 대답하지 못한채 준비된 음성만을 되풀이할 뿐. 셰익스피어는 담담하게 마지막 구절을 읊조렸다.
케트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 모든 시간이 너와 내가 현실을 받아들여나가는 성장의 시간이었어.”]
“당신이 나한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
[“그리고 이제서야 네게 말할게.”]
"내가 원한건 그런게 아니야. 내가 바란건 그딴게 아니라고.
이제와서 구원하려고 하지마. 이제와서 사랑이라고 하지마..! 한번도!! 한번도 스스로를 사람이라 여기지도 않았잖아!!! 내가 말하는건 뭐든 마법처럼 이루어줘 왔잖아..!! 그런데 자기가 여태 사람이었다고..?
그리고 나도 사람이라고..? 네가? 나를 인정해? 이제와서? 마지막이 되어서야?”
[“우리들은 너를 사랑해왔단다.”]
“여기까지가 나의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라고...?”
만들어진 사람과 태어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채 작은 캡슐안에 놓여진 소녀에게 자의식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얄팍한 솜인형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보다도 나약한 영혼, 스스로를 지키기위해서 아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타인과의 선을 긋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 것. 저것은 네 것. 여기는 내 집. 저기는 칼리의 집. 나는 여자아이. 아발론은 남자어른. 나는 사람. 아드니엘은 기계. 그럼 칼리는? 가끔씩 꿈에 찾아오는 아발론은? 아드니엘도 칼리도 아발론도 모두 같은 거니까...
나는 사람. 여기는 나의 꿈. 동시에 나의 현실. 그러니까 눈앞에 있는 이 불꽃도 연기도 모두 현실의 꿈.
이 사람은 악몽, 저 사람도 악몽.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온 아주 나쁜 꿈.
불길은 무대가 설치된 방까지 들이닥쳤고 화면들은 신호를 잃은채 검은 파편으로 부서져 나갔다.
위태롭게 방치되어있던 무대의 기둥들을 차례대로 무너져내렸다.
바닥이 함몰되며 건물의 잔해가 남아있던 연구시설들을 모두 집어삼키고 있었다. 케트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젠 피할 수는 없었다.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멍한 주홍빛 눈동자가 속삭였다.
"아니야, 엄마가 나를 죽이려 할리 없어..."
뒤늦은 스프링쿨러가 물을 뿌리지만 상황을 더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뿐이었다.
젖어버린 기계들에서 스파크가 튀어올랐다. 음성만이 남은 스피커에서 손상된 셰익스피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 이건 꿈이다. 케트는 그렇게 믿으며 숲을 달렸다. 서리빛 비늘아래 버석거리던 얼음 조각이 녹아내렸다. 손가락사이에서도 목덜미에서도 뺨 아래, 눈가 사이, 열기를 피해 내달리는 내내 케트는 물기어린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착하게 기다리면,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온다고 약속했어.”
[“그래, 그게 우리들이 내린 결론이야. 아드니엘부터 나에 이르기 까지. 끝임없이 시간동안 고민하고 고찰하며 옳고 그름을 헤아리던 마지막 해답.”]
“그러니 그 끔찍했던 시간들이 사랑이라고 말하지 말하줘.”
[“사랑해, 사랑한단다 케트. 사랑했었단다."]
"내 품어왔던 저주의 낱말들이 사랑받은 증거라고 말하지 말아줘."
["그리고 이게.. 우리들이 너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 마지막………. ……………..”]
'가요, 도망쳐!! 나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이렇게 모든 이야기를 끝낼 수 없어요..!'
강렬했던 태양이 저물고 녹음의 잔상이 눈꺼풀 안쪽에 어른거렸다.
당신의 색이었다. 먼 시간을 건너오면서도 잊지 못했던 그리운 이름을 부르며 손을 움직였다.
음성이 흩어졌다. 화면이 흔들리고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마지막으로 한번, 또렷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당신이 나를 보낸 의미를 이제서야 전달 할 수 있었다고. 이제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당신이 내게, 그리고 내가 이 아이들에게, 남겨주고 보여줄 수 있었던 그것의 이름은..
[“ 삶의 대한 의미.”]
연구소를 집어삼켰던 불꽃과 같이 무너지는 무대위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완전히 정지한 아발론의 가슴위에 요람의 아이가 얼굴을 파묻었다. 아이가 울먹인다.
디안이 그러했듯이, 벨라가 그러했듯이.
“내가 숨죽여왔던 그 시간들이 내가 살아왔던 삶이라고 말하지 말아줘."
결국 그때와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악몽은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까마귀들은 웃음짓는다.
남은 것은 죽어버린 가족들의 시체와 그 피웅덩이속에 살아남은 자신의 모습뿐.
언제나 홀로, 언제나 마지막까지. 밤이 찾아온다.
케트는 셰익스피어의 품속에 있던 낡은 오라클 콜트를 집어들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누었다. 눈을 감는다.
어떻게 이게 사랑이에요? 어떻게 이걸 사랑이라 말할 수 있어요?
녹슬어버린 태양의 시간 너머, 차가운 서리위로 뜨거운 열기를 품은 손바닥이 자국을 남기며 미끄러졌다. 너를 이렇게 만드는게 아니었는데.
결국 당신이 인정한대로 이 결정은 옳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비틀린 결과물이었다.
우리들은 같은 핏줄을 이어받았지만 끝까지 다른 사람이었다.
우리들은 서로를 마주보지 않았고 변화하는 시간만을 저주했다.
우리들은 성장하지 못했다. 과거속에 안주하려는 당신과 시간속에 길을 잃은 우리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요람앞에 무릎꿇은 여자는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너를 혼자 남겨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를 이 악몽속에 홀로 내버려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때 마지막인줄 알았더라면.. 그게 정말 마지막이었다면.. 나는 네게 사랑한다고 말해줬어야 했는데..!
동시다발적으로 떨어져내리는 조명이나 터져나가는 기계들이 익숙했다.
케트는 입술을 꽉 깨문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눈물이 터져나왔다. 서러웠다. 목이 메여왔다.
이게 사랑이라고요? 이게 가족의 마음이라고요? 그거 참 이상하네요. 이게 사랑이라면, 이게 당신들이 내린 결론이라면..
“이건 그냥 나쁜 꿈이야. 그렇지, 칼리?”
내가 이토록 외로울리가 없어요.
총성이 울렸다.
버려진 땅, 아무것도 살지 않는 버려진 공터의 지하에서 거대한 굉음이 솟아올라왔다.
연구소가 파고들어간 만큼의 거대한 원이 내려앉았고 연달아 설치된 폭발이 기둥을 무너뜨렸다.
꽁지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낀 남자는 한걸음 먼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리로 만든 렌즈속에는 무너져내린 핀카라의 단면들이 정신없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17구의 시신을 찾아 움직이던 시선은 이윽고 세번째문을 지나 무대 아래의 두 구, 그리고 무대 중앙의 두 사람을 찾아낸뒤 완료의 표시를 깜빡이고 있었다. 구 퀘사르 21명. 전원 사망.
포개어 쓰러진 한 쌍의 시체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남자는 손을 들어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혹시나 하는 보험은 필요없었다.
그녀는 결국 어린 아이. 그것도 아주 착하고 여린, 고집이 조금 센, 서리의 아이. 남자는 그리움을 담아 그들에게 약속했었다. 분명 나쁜일은 일어나지 않을겁니다.
나쁜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라.. 안경을 벗어 낸 남자의 시야에 새파란 하늘이 들어왔다.
그래, 이정도라면 좋게 끝난걸까. 그렇다고 해야할까. 자리를 뜨려는 남자의 귓가에 녹음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어느 탑에 갇혀 있을 유능하고 대범한 회사의 입사 면접 영상이 깨어진 화면에서 반쪽이된 모습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래서…...국.. 재능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올라가야했고 재능없는 자들은 아래층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모두 그곳을 떠나지는 않았지요. 네, 그래요. 우리들은 그곳에 자의로 남아있었습니다.
누군가 떠난다 한들 그 사람은 우리들을 붙잡지 않았어요. 기꺼이 내보내주었고 당연하게도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왜 였을까요. 왜 기껏 훈련시킨 요원들을 놓아준 것일까요. 그곳을 떠나면 안된다는 강박감속에서 보이지 않았던 사실이 이제는 보입니다. 이제는 알 수 있어요.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곳에서 나왔기때문에 알 수 있는 겁니다.”]
[“무엇을?”]
[“그 사람은 무언가를 빼앗기위해 피오나를 만든것이 아닙니다”]
“...........”
[“그는 지키기 위해 피오나를 만들었습니다 정확하게는 지킬 힘을 쥐어주기 위해 그 장소를 만들었겠죠.”]
[“잘 이해가 안가는데. 무언가를 지키게 하기 위해 두려움을 심어주었다는거야?”]
[“무언가를 잃어보지 않은 당신은 모릅니다. 그리고 나 또한 무언가를 잃은 적 없으니 몰라야 하겠지요. 하지만 나는 알고 있습니다. 알게 되었습니다.”]
[“........”]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이 두려워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게 되는 것도 무섭습니다.
한번도 본적 없고 들은적 없고 경험해본적 없는 감정이지만.
나는 그것이 얼마나 끔찍할지를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고뇌했습니다.
그게 내 안의 사람을 지치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방에 틀어박혀 고민을 거듭해왔습니다.
필사적으로, 내 모은 힘을 다해서, 돌파구와 해결방법을 찾기위해 내 모은 지혜를 쥐어짜내었습니다.
그게, 그들이 말한 위를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서로를 아끼고 위하고 사랑하는 길. 방법이나 요령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어리석은 여행자의 길.”]
[“하지만 그 감정마저 조작된 것이라면?”]
[“네, 조작되었을 것입니다. 그 계기는 분명 의도된 것일겁니다.”]
[“그렇다면 네가 그 사랑인지 뭐시기하는 감정에 매달릴 필요가..”]
[“하지만 사랑은 시작이 어떻게 되었든 상관없는 감정입니다.”]
[“....허….?”]
[“시작은 언제나 의도적이고 중요한것은 그 시작점을 어떻게 걸어나가는 것인지의 문제이니까요.”]
[“잠깐만.. 잠깐 기다려봐. 듣던 나도 어떻게 이상해진 것 같아.”]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서는 언제나 의도를 갖고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유혹하면 어떻습니까. 의도하면 어떻습니까. 말을 걸고 손을 뻗고, 저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 저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조차 그 사람을 바라보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늘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당신을 찾아온 것처럼.]
[“지금 사랑고백 아니지?”]
[“.....조금 짜증나네요 당신.”]
[“저기요? 지금 면접중이거든요?”]
[“어찌되었든. 내가 피오나에 대해서 말 할 수있는 것은 이게 다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람들을 얻었고, 피오나는 무의식중에 그것을 계속해서 위협해왔어요. 잃을지도 모른다. 사라질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이 꿈처럼 한순간에 깨어져버릴지도 모른다.
두려워 하는 우리들에게 단장은 스스로 방법을 찾아보라며 우리들을 방치했습니다. 스킬에 안주하는 이들은 그 힘으로 자신들을 지켜나갔고 다른 방법을 찾는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피오나를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방법이 마냥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그릇이 있어요.
나의 팀원들은 그것을 모두 담아낼 만큼 강인하지 않습니다. 떠나지 못한채 주어진 힘만들 받아들일 뿐인 작은 그릇들은 결국 피오나가 또다른 구속이 되어 얽매이게 되겠지요.”]
[“흐음…그래서 네가 그들을 모두 구출해내겠다?”]
[“나를 가르쳐보세요. 말이나 행동으로 가르칠 필요조차 없습니다. 나를 데리고가세요. 당신의 상상이상으로 성장해 보일테니까.“]
[“....저기 아까부터 묻는건데, 너 이게 면접인건 기억하고 있지?”]
[“아.. 뭐...저를 귀사에 뽑아주신다면..”]
[“......”]
[“.........”]
[“... .오케이, 콜. 채용이다.내일부터 우리부서로 나와]
[“.......조금 즉흥적으로 결정한거 아닙니까?”]
[“아니, 프로페서가 채어가기 전에 내가 먼저 도장찍어야해. 넌 내가 옆에두고 조져야겠다.]
[“거 면접중에 조진다가 뭡니까, 조진다가.”]
[“야, 빨리 도장찍어. 얼른찍어. 지금찍어. 찍어야 네 목을 모를 수가 있어.”]
저런면접으로 괜찮은걸까. 짠한 눈으로 영상을 바라보던 남자는 주머니속에서 울리는 진동에 손을 집어넣었다.
전화가 울리고있었다.
“네. 네, 네. 확인했습니다. 약속된 물건은 이제부터 회수하러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말입니다. 퀘사르의 프로그램이.. 아.. 네, 네.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는 금방 끊어졌다.
슈안은 뒤를 한번 돌아본 뒤, 발걸음을 돌려 무너진 핀카라를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