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비밀레)페리도트-하-

마비노기/페리도트 2016. 6. 30. 06:39

12.

키리네를 향해 칼날이 번뜩이는 것을 본 것은 톨비쉬 뿐만이 아니였다. 

그녀의 곁에 있던 크루크도 그 모습을 보았고 밀레시안을 스쳐지나가던 가드들도 모두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단지 칼날이 발레스의 여왕에게 닿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밀레시안을 막아세운 기사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막아선 타우네스는 가드들을 향해  몸을 돌리며 크게 발을 굴러 달려들려는 가드들을 멈춰세웠다.

타우네스는 밀레시안과 알반의 기사를 변호하는 말을 하며 톨비쉬가 도망칠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톨비쉬의 발자국을 따라 붉은 핏자국이 점점이 떨어지고 있었다.


눈이 멀었어도 자이언트 최고의 전사, 가드들은 타우네스에게 함부로 달려들지 못한채 도망치는 알반의 기사를 지켜보아야한 했다. 타우네스는 격분하는 크루크에게 호소했고  친애하는 동맹인 밀레시안의 이름을 언급했다. 밀레시안이 과거 자이언트족을 도와 준 것을  생각하더라도 일족의 어머니를 찌르려 했던 것이 정당화 될 수는 없지만, 당장이라도 처형명령을 내리려는 크루크에게 잠시나마 생각할 시간을 갖게할 만큼의 진정성은 갖고있는 듯 보였다.

정작 당사자인 키리네는 즐거운듯 웃음을 터트릴뿐. 타우네스가 크루크에게 밀레시안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동안 자이언트 가드들은 밀레시안 쫓아야할지 명령을 기다려야할지 선택하지를 못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멀리서 소란을 전해들은 바이데 재상이 서두르는 걸음으로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왔다.

벌써 마을 어귀까지 멀어진 톨비쉬에게 무엇인가를 호령하는 키리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톨비쉬는 명령의 내용까지 엿들을 만큼의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품안의 밀레시안의 뺨 위로 눈에 보일정도로 빠르게 비늘이 돋아나며 새하얗던 피부를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고 간헐적으로 이계의 신성력이 터져나왔다. 다행인것이라면 그릇을 부수기 위한 신성력이 아닌 채우기 위한 것이였다는 점. 톨비쉬는 밀레시안을 추슬러안으며 흔들리는 단검을 내리눌렀다. 상처는 고통을 내질렀지만 어중간하게 빠져버리는 것 보다는 이 편이 나을 것이다. 톨비쉬는 힘겹게 마나터널에 기대어섰다.


빛에 휩싸였던 마나 터널에서 내려오자 붕붕거리는 극지의 말벌들이 피냄새에 반응해 고개를 돌렸다. 말벌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피냄새를 쫓았지만 여기저기 흩어진 피자국속에서 희생자가 어디에 위치했는지 까지 추적할 의욕은 없는 듯 보였다. 발레스에서 먼 실바숲 남단인 것을 확인한 톨비쉬가 겨우 눈이 녹아내린 풀밭위에 밀레시안을 내려놓았다. 

단내가 차오르는 숨을 잠시 참고 이를 악문 톨비쉬가 뜨겁다 못해 느낌이 사라져가는 상처위에 손을 올렸다. 단검을 빼내자 울컥하고 뜨거운 피가 쏟아져나오며 풀밭을 엉망으로 물들였다.

그위로 아무렇게나 포션을 쏟아부은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옆에 주저앉으며 대충 풀어낸 붕대를 뭉쳐 상처를 틀어막았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겠지만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이 편이 더 도움이 되겠지. 

누워있는 밀레시안의 주머니를 뒤지자 아주 작은 포션 몇병이 굴러나왔다. 톨비쉬는 아쉬운 양의 포션을 입안에 털어넣고는 숨을 골랐다. 밀레시안의 비늘사이에서 검은 모래가 조금씩 떨어져내렸다. 톨비쉬는 품속에 있던 거울을 꺼내 밀레시안의 가슴위에 올려놓았다.

규칙적으로 부풀어오르고 꺼지기를 반복하던 가슴위에 놓여져 있던 거울이 잠시 빛을 내며 밀레시안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거울이 사라질때까지 불편한 몸을 숙여 상태를 확인하던 톨비쉬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터져나왔다. 통증을 참아내기 위헤 움켜쥐고 있었던 주먹이 겨우 풀리며 땅으로 널부러졌다. 톨비쉬가 잠시 눈을 감았다.


"당신이 명상을 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었을텐데"


톨비쉬는 좀 더 일찍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것을 밀레시안과 공유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피로 엉겨붙은 붕대를 때어냈다. 제대로 된 거즈가 없으니 일단 틀어막긴 했지만 붕대는 좀처럼 피를 제대로 머금지 못하고 톨비쉬의 손을 엉망으로 물들였다. 조근 끈적하게 굳으며 악취를 내는 것은 덤. 그나마 뜨거운 모래밭이 아닌것에 감사하며 눈더미에 대충 손을 문질러 닦은 톨비쉬가 다시 붕대를 꺼내들었다. 이번엔 꼼꼼하게 상처를 막는 톨비쉬의 머리위로 차가운 북풍이 스쳐지나갔다.


‘그런거 안해도 어쩄든 들어갈 수는 있어요.’


스산한 바람 어딘가에서 밀레시안이 대답하는 듯한 환청을 들은 톨비쉬가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렇겠지. 당신에게 불가능이라는 것이 있을까. 어딘지 자조적인 웃음을 서리바람속에 삼키는 톨비쉬의 귓가에 잔뜩 숨을 죽인 발자국소리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나무사이로 눈송이 아래로. 새까만 정장이 이 새하얀 설원아래에서 보이지 않을것이라 생각하는건지, 톨비쉬는 남말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을 지우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이동하는 동안 쏟아진 피에 젖어들었는지 손잡이가 미끈거려 불쾌한 느낌이였지만 닦아낼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실리엔의 탄환이 장착되는 특유의 소음이 나뭇가지 넘어에서 들려왔다. 붉은 코트를 입은 커다란 자이언트가 톨비쉬의 앞에 다가섰다.


“웃음 지을 여유가 있나보네?”


여유는 무슨, 이라고 대꾸하고 싶은 마음이 톨비쉬의 아랫입술을 간질이고 지나갔다. 

축축해진 붕대에서 버석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매서운 추위가 숲을 휘감아 돌며 주변을 둘러싼 숨결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갔다. 측면 나무 뒤에 둘, 마나터널쪽에서 셋, 정면에 첩보조 대장을 비롯한 두명의 슈터들. 톨비쉬는 너무 많이 몰려온 것 아니냐고 능청스럽게 웃음지었지만 눈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모든 슈터들은 장전을 마친 상태였고 톨비쉬는 최소한의 무장으로 들고나왔던 롱소드뿐이였다. 그마저도 찔린 상처탓에 손잡이는 미끌미끌. 피로 범벅이된 폼멜을 흘겨본 톨비쉬는 검을 떨어트리고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시했다. 롱소드가 힘없이 눈속으로 파뭍히며 묵직한 소리를 내었다.

싸우지도 못하고 항복을 선언하는것은 톨비쉬의 입장에서도 별로 달가운 일이 아니였지만 발치에 누워있는 밀레시안의 가슴에서 검은 기류가 터져나왔다 사라지는 모습이 그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톨비쉬가 초조한 모습으로 밀레시안을 살펴보는 것을 눈치챈 다우라가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마. 알반, 우리도 너희와 싸우고 싶지는 않으니까.”

“너희라는것은 어느쪽을 포함해서 말하는 건가요?”


자이언트의 친구? 상대하기 껄끄러운 신성기사단? 어느쪽의 대답이 되는지에 따라 앞으로의 대화가 달라질것이라는 건지 톨비쉬는 차가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상처를 내리눌렀다. 

멈춰라, 어서 멈춰라. 잠시만이라도 멈춰진다면 상황은 더 나아질 수 있어. 톨비쉬의 조급함에 다우라는 손을 저어 부하들을 물러세웠다. 다우라는 대화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양쪽 다야. 그러니 너무 그렇게 쏘아 죽일것같은 눈으로 웃지좀 마. 우리 애들이 불안해 하지않냐.”


다우라는 자자, 장전된 총들은 다 집어넣었다고? 라고 말하며 양손을 들어보였다. 맨손의 자이언트가 위협적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지만 톨비쉬는 차라리 근접이 낫다고 쓴웃음을 삼키며 발로 밟고있던 단검을 걷어 찼다. 다우라는 휘파람을 불며 무서운 형씨였네. 하고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던 것은 톨비쉬 뿐만은 아니였다. 다우라의 왼편에 서있던 자이언트는 그가 단검을 차내고 나서야 표정을 풀고 불만스럽게 입을 움직였다.

톨비쉬 또한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리숙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인지 애써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다우라는 자이언트의 어깨를 툭치며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우호적인 한걸음이였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자이언트의 한걸음은 다난의 것보다 훨씬 큰 발자국이였다. 톨비쉬는 너무 가까이 다가온 다우라를 쏘아보며 숨을 골랐다. 차가운 설원의 향기속에 짙은 피냄새가 섞여있었다.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엄살이 심하시군요”

“내 입으로 말하면 또 경계할 텐데, 일부러 자극할 필요는 없잖아?”


다우라가 한쪽 눈을 찡긋해보이자 부관인듯한 자이언트 한 명이 장난은 이제 그만하라며 투덜거려왔다. 저쪽도 융통성이 넘치는 집단이군, 톨비쉬가 이해한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보이자 다우라가 머쓱한 얼굴로 뒤돌아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자이언트들은 저마다 할말이 많지만 참는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가장하고 있지만 다우라의 어깨는 무거운 임무로 내려앉을 처지였다.

일족을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이라 하더라도 사건은 발레스의 왕비를 해하려 했던 최악질. 옛정과 몇가지의 오해로 넘어가기엔 고리타분한 절차와 관습이라는 것이 그들의 발목을 잡고 넘어트리려 하고 있었다. 톨비쉬는 오해가 있었다고 설명하려 했지만 다우라는 머리를 짚으며 손을 내저었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니야, 우리도 들었어. 저주같은게 있었다지?”


다우라는 타우네스가 그렇게 열성적으로 말하는 것은 오래간만에 보았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게파트르 선왕이 필리아 원정에서 진군 루트를 결정할 때 보다 더 흥분한 것 같았다며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보는 것은 크루크폐하도 처음이었는지 당황하시더라고 웃음짓던 다우라가 싸늘하게 노려보는 부관의 눈빛을 발견하곤 황급히 헛기침을 하며 말을 마무리했다. 톨비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은 당연한 일, 장난은 이제 그만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다우라가 손가락으로 밀레시안을 가르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를 데려가야 하는게 우리 일이라는거지”

“바이데 재상이 나선 모양이군요”


이봐, 너무 잘 알고 있잖아? 하고 눈쌀을 찌푸리는 다우라가 저도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장난스러운 모습과 달리 긴장을 하고 있는 모습에 조원들도 뭐라 말하기 힘든 표정을 무표정으로 감추려 애를 쓰며 살짝 시선만 내리깔았다. 

첩보조는 크루크의 직속 휘하의 기관이였고 바이데는 다우라에게 직접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 가 없는 위치였지만 그럼에도 톨비쉬들을 추적해 나온 것은 일반 가드들이 아닌 첩보조의 엘리트들. 거기에 다우라가 직접 나왔다는 것은 크루크가 바이데의 의견을 무시 할 수없는 상황이였다는것. 아마 불만건 수가 밀려있었던 차였는지 키리네에 관한 문제가 터져 나오자마자 재상파가 빠르게 움직인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있을 문제에 대해 대비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였건만 실수했다. 라는 실패감이 톨비쉬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바쉬베르가에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면서 키리네에게만 집중한 것은 톨비쉬의 실책. 조금 돌아서 가더라도 재상을 달래놓고 들어갔어야 했는데.. 톨비쉬는 그 잠시의 시간을 분배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며 밀레시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긴 한숨과 함께 밀레시안의 눈가까지 비늘이 돋아나왔다. 목은 이미 푸른 비늘로 뒤덮여 옆은 분홍빛 금이 그어진 상태. 톨비쉬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으로 다우라들도 고개를 돌리며 눈쌀을 찌푸렸다. 오래 묵은 해수의 냄새가 자이언트들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꽤나 심각한 저주인가봐?”

“조금 복잡합니다. 두가지 저주가 엉켜있거든요. 왕비님의 거울로 도움을 받으려 했던 것은 첫번째 저주입니다”


밀레시안의 마음 저변부터 오염시키려는 보석의 저주와 잠든 밀레시안을 강제로 깨우는 대신 사하긴으로 만드는 바다의 저주. 톨비쉬는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 입술을 깨물었다. 자이언트들은 점점 변해가는 밀레시안의 모습에서 이전 악몽의 때를 생각하는 것인지 좀처럼 파란 비늘에서 시선을 때지 못하며 움찔거렸다.

건홀더에 손이 올라간 모습에 톨비쉬의 시선이 스쳐지나가지만 경계할 대상이 너무 많았다.

다우라가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나서야 희미하게 움직이던 에너지컨버터의 소음들이 줄어들었지만 이미 전환된 실리엔 탄환의 불빛이 설원 여기저기에서 깜빡거리며 톨비쉬의 신경을 갉아내렸다.

결정을 해. 어서 생각을 해내. 톨비쉬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상처를 내리눌렀다. 뜨뜻미지근한 온기가 얼어붙은 손끝을 녹였다.


“차라리 발레스로 가서 도움을 받는게 낫지 않겠어? 이렇게 엄동설한에 뉘어놓는게 더 안좋아보이는데”

“저를 밀레시안에게서 때어 놓지 않는다고 약속하실수 있겠습니까?”


톨비쉬의 말에 다우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뒤로 손깍지를 올려 보였다. 형식적으로라도 왕비를 시해하려한 범인을 추궁하는 자리에 알반의 기사가 있는것은 바쉬베르가의 입장에서도 자이언트 전체의 입장에서도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니였다. 재상이, 아니 재상의 압박을 받은 크루크도 밀레시안을 데리고 오라고만 이야기 했을 뿐, 톨비쉬에 대한 언급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는 상황.

다우라 또한 알반과 싸울 의사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시간을 내어주고 있는 모습을 취할뿐 강제력을 행사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자이언트들은 그저 추운 이 바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였다.


“자이언트들의 충분히 이해해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돌아가면 제가 밀레시안이 곁에 있을 수 없게 되겠죠. 저에겐 그 쪽이 더 위험합니다”

“……음…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톨비쉬는 다우라를 마주보고 있는 상황에서도 밀레시안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밀레시안의 영혼은 어둠안에 잠겨가고있었고 그 진행은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손 안을 휘감는 탐지 어디에도 밀레시안의 빛이 잡히지 않아 초조해진 것인지 톨비쉬는 떨러오는 손가락을 주먹쥐며 로브자락을 구겼다. 부풀어오르던 가슴의 높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낮아져갔고 몸은 얼음보다도 차갑게 얼어붙어갔다. 목에 그어진 선을 따라 파스스 일어나는 아가미의 선이 눈에 밟혀들어왔다. 작은 입이 열리며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검은 기류가 피어올라오는 모습을 보며 자이언트중 한명이 다우라를 향해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음……… 저기 있잖아. 초조한건 알지만 우리도 좀……”


다우라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어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흔들고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밀레시안의 오염은 큰 문제였고 다우라들은 이미 그 위력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여기에 누워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면 한시라도 바삐 전력이 충분한 위치로 옮기고 싶은것이 첩보조장의 마음이였다. 그러나 알반의 기사가 지키고 있는 밀레시안을 강제로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였고 눈앞에서 피어오르는 소름끼치는 검은 연기를 무시할 수도 없는 입장이였다.


“따뜻한 난로가 설치된 집안에 모시는것까진 무리이겠지만 넓은 공터에 양탄자라도 한장 깔아주고 모닥불은 피워줄 수 있어. 사실 나도 별로 옮기고 싶진 않지만, 여긴 우리들이 합류하기에 너무 멀거든.”


다우라는 이정도면 나름대로 예우를 갖춘것 아니냐고 자기자신을 납득시키며 톨비쉬들 쪽으로 한걸음 다가갔다. 톨비쉬의 새파란눈이 다우라의 걸음을 멈춰세웠다.

상처도 입었고 힘으로 밀어부칠까? 눈빛을 교환하는 자이언트들 사이로 새파란 신성력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들이 휘두르는 힘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그 푸른 불꽃들이 몰고다니는 소문은 에린 전역어 퍼져있었다. 바다건너 벨바스트와 이리아는 물론이고 그 이름이 알반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이언트들은 굳은 얼굴로 톨비쉬를 조준했다. 다우라는 이번만큼은 조원들을 막지 않았다.


“부탁 할 것이 있습니다.”


적대적인 분위기의 경계선에 선 자이언트들과는 다르게 톨비쉬는 신성력을 손안으로 모아 움켜쥐며 그 빛을 숨겼다. 그의 입에서 제안할 것이 있다 라는 말 대신 부탁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다우라가 질색을 하며 거절했다.


“그냥 제안을 해. 언제부터 그렇게 살가운 사이였다고”


거, 그냥 좀 진중하게 빚을 지워놓지 그러세요. 자이언트가 짜증스럽게 다우라를 질책했다.


“그렇군요. 그런 제안으로 바꾸도록하죠. 잠시 저희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톨비쉬는 두 번은 제안하지 않는 태도로 전환하며 바로 로브를 벗어들었다. 새하얀 옷은 안에 입은 붉은 옷과 다를바 없을 정도로 물들었지만 톨비쉬의 행동은 매우 간결하고 재빨랐다.

넓게 펼쳐진 로브자락이 밀레시안의 몸위로 쌓여가는 눈송이를 덮고는 드러나있던 파란 비늘들을 모두 가려버렸다. 힘없이 떨어지는 손을 로브의 위로 올려 꾹 눌러 고정시키는 톨비쉬의 손이 아주 잠시 떨렸다 떨어졌다. 손안에 있던 푸른 불꽃이 밀레시안의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톨비쉬가 완전히 경계를 포기하고 마음대로 행동하기 시작했지만 다우라는 그런 톨비쉬를 나름대로 걱정한다는 어투로 내려다 보았다. 자이언트들은 무방비한 알반의 기사가 신기한지 고갯짓으로 대화를 나누며 무기에서 손을 떼었다.


“이봐, 너희 둘 다 그러다가 죽는다고?”

“이정도로 죽을 만큼 나약하지는 않습니다”


약간의 무례함이 담긴 대답이였지만 다우라는 신경쓰지 않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재상에게 잘 말해 볼테니까.. 하고 좀더 안전한 방법을 제안해 왔지만 톨비쉬는 아무런 대꾸없이 밀레시안의 옆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은채 주저앉았다. 상처가 진한 피냄새가 다우라가 있는 장소까지 풍겨왔다.


“나 아직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말 안했는데?”

“채집된 힐웬광석의 일부가 어디론가 빼돌려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 있습니다. 그 판매루트를 가르쳐 드리지요”

“것봐, 내가 좋은 놈이라고 말했잖아”


다우라가 레우스 강의 얼음밑에서 흐르는 격류만큼이 빠르게 말을 바꾸며 부관에게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라고 대답하는 부관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짚었다. 톨비쉬를 노려보는 자이언트의 눈빛이 매서웠다.

톨비쉬는 눈을 감았고 다우라는 하는 수 없다는 손짓으로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첩보조원들을 불러 모았다. 

크고 작은 검은 인영들이 실바숲 곳곳에서 튀어나오며 내키지 않은 얼굴로 잠든 톨비쉬와 밀레시안을 내려다보았다. 다우라는 갖고있는 부상포션있으면 좀 달라며 부하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톨비쉬의 상처를 눈여겨보던 첩보원 하나가 작은 포션병을 하나 내밀었다.


“그렇게 노려보지좀 말아봐라. 안그래도 인상이 험악한 시커먼 놈들이.”

“까만색으로 통일하자고 한건 조장님이였잖아요”

“그래, 그래. 일어나면 포션비랑 장작비랑 비싸게 받아내서 어디서 광산의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까지 다 받아낼테니까”


다우라는 톨비쉬의 상처쪽으로 포션을 흩뿌리고는 첩보조들을 둘러보았다. 몇몇은 고개를 돌렸고 몇몇은 말벌들을 정리하고 오겠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영문을 몰라 어정쩡하게 서있던 조원하나가 다우라와 시선을 마주쳐왔다.


“뭐해, 장작 안주워오고”


눈이 마주친 첩보원이 잔뜩 찡그린 얼굴로 마지못해서 몸을 돌렸다.





13.

밀레시안의 안으로 들어온 톨비쉬는 처음부터 길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어째서인지 밀레시안은 그를 거부하고 있었고 어둠으로 엉망이 된 마음속은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도 알 수없는 암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코리브계곡의 모습을 하고 있던 길은 일직선으로 이어져야할 길을 이리저리 비틀며 갈피를 잡지 못하도록 일렁거렸다.

그 길은 코리브계곡이기도 했고 두갈드아일이기도 했으며 때때로 블라고평원의 모습을 취하기도 했다.

정확히 향해야할 방향을 잡지 못해 제자리에 멈춰선 톨비쉬는 손안 가득 신성력을 모아  가슴앞에 움켜쥐었다. 밀레시안에게 교감을 하려하지만 톨비쉬에게서 뻗어나온 푸른 신성력은 어디에도 연결되지 못해 허공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톨비쉬의 영혼이 묵직한 울림소리를 내었다.


접니다, 톨비쉬기 말을 거는 동안 어딘가에서 울리는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톨비쉬가 고개를 들자 짙게 드리워져있든 구름 어딘가가 은은한 불빛을 내며 점멸하다 사라졌다. 톨비쉬는 푸른 불꽃 주변으로 모여드는 밀레시안의 신성력을 희미하게 느끼며 손을 내렸다.

부서진 조각들이 겨우 모여든것 처럼 희미한 반딧불이 같은 밀레시안의 신성력은 톨비쉬의 주변을 떠돌다 다시 사라졌다. 다시 한번 밀레시안의 신성력을 잡아당기며 그 능력을 빌려주기를 간청했지만 서늘한 바람이 거절의 의사를 밝히며 톨비쉬를 밀어낼 뿐. 바람에 흔들리는 불꽃이 꺼질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어째서입니까”


톨비쉬는 초조한 손을 움켜쥐며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검게 물들어서도 밀레시안은 톨비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의지가 되지 않아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톨비쉬는 스스로를 나약하게 느끼지 않기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겨울날 난롯불에 반짝이던 열쇠처럼 손안의 불꽃이 너무나도 작았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밀레시안의 마음속은 그때와 똑같은 말을 하며 톨비쉬를 거절했다. 그렇게까지, 그 말이 그어놓는 경계선이 어디 즈음인지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생각을 헤아리고 싶지 않아 그 눈을 외면했다. 

게이트에 도달해서야 밀레시안은 톨비쉬에게 호의적를 내보였고 톨비쉬 그제서야 안심을 하며 밀레시안을 바라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 밉살맞은 입이 밀레시안에게 이제야 내가 보이냐고 묻는 것을 막을 수는 없ᄋᅠᆻ다. 밀레시안의 호의가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겨울이 되어서의 일. 누구에게도 제안하지 않았던 작은 손길에 기뻐하기에 앞서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거절이 누구에게나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톨비쉬여서 거절하는 것이 아닌 오직 다난이기에 그어진 선. 톨비쉬는 내민 손을 붙잡으면서도 밀레시안이 그어놓은 선 넘어로 나아가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되뇌이고 또 생각하며 미소를 그렸다.

천천히 시간을 같이 보낸다면 언젠가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톨비쉬는 실망하는 얼굴을 숨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밀레시안과의 대화를 계속했다.


밀레시안과 대화를 하고 나서, 톨비쉬는 다양한 각도에서 밀레시안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특급주시대상으로서가 아닌 인간인 밀레시안을.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해야했을까, 그 몸짓, 그 어조, 그 표정. 톨비쉬는 일부러 밀레시안에게 언어적 대화와 몸짓 대화라는 재미없는 책을 꺼내어 강의겸 이야깃거리로 삼아 샘플을 확인했다. 

시험삼아 던져본 대화의 주제는 항상 만족스러운 결과를 갖고 왔고 그 결과들은 밀레시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곤 했다. 밀레시안은 곤란할때는 눈을 깜빡였고 눈치를 살필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만스러울때 입매에 힘을 주고 즐거울때는 눈동자가 먼저 대상을 향헀다. 그리고 부끄러울때는 뺨보다는 귀끝이 붉어졌다. 순진하고 읽기 쉬운 타입에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톨비쉬는 이따금씩 밀레시안의 턱끝을 잡아채지 않기 위해 주먹을 말아쥐어야 했다. 밀레시안은 꼭 무언가를 숨기려할때 입을 오물거리는 버릇을 갖고있었다. 시선을 피하고 말끝을 흐리고, 다른 버릇들보다도 그 작은 오물거림은 톨비쉬의 이성까지 위협할만큼 강렬한 것이였다. 그것은 대게 밀레시안이 밝히고 싶지 않은 사실들을 감출때 나타나는 반응이였다.

낚아채어 강제로 시선을 마주하게한 뒤 정말로요? 하고 묻고 싶었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톨비쉬는 방안에서 쿠션을 끌어안고 피곤한 얼굴로 누워있던 밀레시안을 떠올렸다.


"여차하면 환생하는 방법도 있고"


밀레시안은 톨비쉬가 입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정면으로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술이 오물거린 뒤 그건 그렇죠, 하고 고개를 돌리는 밀레시안을 보며 톨비쉬는 밀레시안에게 허리를 굽혔다. 

쓸데없는 짓 할 생각하지마. 알반의 기사는 톨비쉬의 마음속에서 진지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알고 있다고 대답하면서도 그 뺨을 쓰다듬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손안의 미적지근한 온기가 고개를 돌렸다. 붉은 귀끝이 톨비쉬의 눈을 어지럽혔다. 지금이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톨비쉬는 쾅 하고 타라의 첨탑에 내리 찍히는 낙뢰의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 따뜻하고 안전한 방안에서 별을 꺼내놓지 말았어야했다. 보석을 다루듯 푹신하고 보드라운 천에 감싸 영원히 그 안에서 보관하도록, 조금 돌아서 행동하더라도 바이데를 설득할 중재안과 키리네를 유혹할만한 정보를 들고 톨비쉬 혼자 발레스에 왔어야 했다. 

애초에 가장 좋은 방법은 보석을 타라에서 해결하고 돌아왔어야 했지만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일을 탓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더 잘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꼬리를 잡으며 톨비쉬의 발목을 무겁게 했다.

좀 더 다른 방법을......, 톨비쉬는 이 모든 말이 자신의 욕심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낙뢰가 떨어지는 건물 가까이에 다가갔다. 낙뢰는 도시 곳곳을 이동하며 일정한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톨비쉬는 좀 더 빠르게 광장으로 향하기 위해 연금술용품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복잡하게 돌아가고는 있었지만 사실 이 일의 모든 해결방법은 밀레시안에게 있었다. 

별은 스스로 육체를 파기할 수 있었고 마침 밀레시안의 곁에는 단번에 밀레시안을 소울스트림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주신의 검도 자리하고 있었다.

별의 죽음, 불멸이되 불사가 아닌 이 기적의 존재가 스스로 죽음을 반복하도록 내버려두는 방법. 톨비쉬가 그 목을 베거나 심장에 검을 찌른다면 이질적인 신성의 존재라기보다 에린의 오류에 가까운 저주는 그 육체에 제대로 뿌리내리기도 전에 사멸할 것이 분명했다. 

정말로 효과가 있을까 에대한 의문은 품을 필요도 없었다. 밀레시안은 이 일 이전에도 이따금씩 에린과 육체사이에서 균형이 틀어지는 오류를 경험하고 있었다. 밀레시안에게는 놀라울 일도 아니였다. 하지만 다난으로서는 알 수 없는 아주 사소한 오류. 

그들은 가끔식 무역도중 자살하기도 헀고 성벽을 올려다보다 스스로를 자해하기도 했다. 그림자 미션의 클리어직전에도 갑자기 소울스트림으로 귀환하기도 했고 연극을 하다가도, 레네스의 상공을 날다가도, 심지어 게이트로 오겠다던 사람이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며 골렘에게 깔려죽는 바람에 이멘마하로 급히 약속장소를 바꾼적도 있었다. 


톨비쉬의 눈앞이라도 오류의 수정은 망설임 없이 일어났고 밀레시안은 멋쩍은 표정으로 사과를 해왔다. 시간을 지체시켜서 미안하다고. 눈이 깜빡였고 고개가 살짝 틀어졌다.

톨비쉬는 그런 밀레시안을 바라보며 애써 웃음 지어야했다. 자신의 상식을 위해 밀레시안을 곤란하게 하고싶지 않았다.  다난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진심이였지만, 톨비쉬는 엠포리움 쇼윈도우에 비친 자신의 표정을 외면했다. 

평범한 다난 남성의 눈동자가 그 유리창안에 비치고 있었다. 건물의 외벽넘어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최선책을 외면한 대가는 아주 비싸게 치러야만 했다. 알반의 이름을 숨기기는 했지만 엘베드의 조장으로서 재량껏 관리해왔던 자료 중 일부를 사용해야 했고 자이언트들은 이제 엘베드의 조장의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했다. 

톨비쉬는 당분간은 시말서로 바쁘겠다며 쓰게 웃음지었다. 시말서로 끝날 수 있을까. 단장의 얼굴을 떠올리자 톨비쉬는 뱃속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끼며 손을 문질렀다. 검붉은 피가 배어나오는 모습에 눈이 저절로 아래쪽을 향해 숙여졌다. 실체의 영향이 영혼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었다.

벼락이 가까워졌고 모래바람이 일렁거렸다. 톨비쉬는 신성력을 이용해 익숙한 갑옷의 모습을 떠올리며 몸 전체에 둘렀다. 일렁이는 불꽃으로 상처를 지져 막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압박하는 느낌을 주는 것은 가능했다. 톨비쉬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며 공기중으로 목소리를 퍼트렸다. 별은 어디에? 광장으로 들어서자 검은 모래를 휘두르던 여성형의 그림자가 톨비쉬를 내려다보았다. 여성의 모습은 밀레시안과 비슷했으나 황금색 불빛이 번쩍이고 있었고 눈동자는 녹색이였다. 낯이익은 보석의 빛깔에 톨비쉬는 말없이 검을 뽑아내었다. 저주가 대답했다.



“너를 알아”

‘죄송해요, 저는 더이상 용기가 없어요’


톨비쉬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저주는 두가지 목소리를 내며 돌아보았다. 인간의 모습을 갖춘 저주의 실루엣은 끊임없이 일렁였고 그 꿈틀거리는 촉수같은것을 벼락은 쉴새없이 끊어내며 저주를 압박해 들어왔다. 

아마도 밀레시안의 안에 잠들어 있는 방어본능. 소울스트림을 지키는 거대한 먹구름은 어울리지 않는 잔잔한 오르골소리와 함께 거대한 빛의 창을 쏟아내고 있었다. 신의 분노를 닮은 빛줄기가 도망치는 모래의 꼬리를 따라 쉼없이 쏘아져 내려왔다. 

빛이 부숴버린 타일조각 아래로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흙길이 잠시 드러났다가 모래속으로 삼켜졌다. 톨비쉬는 날아드는 모래덩이를 칼날로 비스듬히 쳐내며 표정을 굳혔다. 

밀레시안의 마음속 이었지만 의식은 어딘가로 사라진 건지 그의 탐지범위 내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과 페리도트, 그리고 시끄러운 천둥소리만이 이 공허한 마음속에 가득했다.


“그거 우연이군. 나도 너를 아는데 말이지.”


톨비쉬는 이런 일도 다 있다며 빈정거리고는 방패를 끌어당겼다. 저주는 조금 초조해하고 있었고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갸웃거린다기보다는 그렇게 해야한다는 강박증으로 머리를 흔들다 말기를 반복하는 것 같아 보였다.

아마도 숙주의 버릇을 그대로 카피하는 중인지 그 모습은 어색했고 괴기하기까지 했다. 밀레시안은 아마 저 모래 안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갑옷으로 둘러싼 옆구리에서 희미한 냉기가 스며 나왔다. 차갑고 액체같은 것이 핏물은 아니고 옅게 풍겨져 올라오는 다양한 약초의 향기 속에 금빛을 띄는 특유의 향기가 올라왔다.

이거 비싸게 먹히겠군, 톨비쉬는 자이언트의 통 큰 손길에 어정쩡한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상처를 쓰다듬었다. 


상처가 막혔다면 조금 더 원활하게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을 터였다. 대부분의 방어형 기사들이 그러하듯이 톨비쉬 또한 신체능력을 강화하는 것에 대부분의 신성력을 사용하고 있었고 강화된 신체는 일반인의 신체보다 빠르게 박동하고 반응하며 더 큰 힘을 이끌어내곤 했다. 단점이라면 상처가 생겼을때 능력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것. 신성력을 두른 상태에서는 더 빠르게 치유되는 이점이 있지만 상처가 생긴 다음 능력을 사용한다면 상처가 더 크게 벌어진다는 단점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지. 내쉬는 깊은 숨결을 따라 푸르른 신성력이 반짝였다.

톨비쉬의 신성력이 밀레시안의 안으로 퍼져나갔고 작은 설원의 풍경이 톨비쉬의 발 아래로부터 퍼져나갔다. 얼어붙은 타라는 좀 전보다 바삭바삭하고 깨지기 쉬운상태가 되었고 신의 분노는 망설임없이 거짓된 도시의 그림자를 부숴나갔다. 톨비쉬는 다시 상처가 찢어지기 전에 결판을 내려는 생각이였다.


저주는 조금 당황해하며 설원을 덮으려 했지만 그것은 밀레시안의 마음처럼 간단하게 어둠으로 물들지 않았다. 새파랗기까지한 설원은 티없이 투명하고 맑은 빛을 내며 뻗어나가 거칠고 매마른 모래를 밀어내었다. 스파크의 빛이 얼음에 튕겨져나가 설원을 밝히자 빙판의 아래로 티르코네일의 그림자가 비춰졌다. 저주는 매우 불쾌하다는 반응으로 모래를 내리쳤다. 금이가며 갈라진 빙판은 곧 재생되며 매끈한 단면으로 저주의 모습을 반사시켰다. 얼음속에는 부숭부숭하게 솟아오른 검은 짐승이 그려져 있었다. 톨비쉬가 검을 고쳐잡으며 차가운 금속음을 내었다. 저주는 빠른 어조로 중얼거렸다. 

기분나쁘고 음흉한 말투는 밀레시안의 목소리를 흉내내고 있었다.


“나는 너를 알아, 너는 알반이지. 네가 나를 밀레시안에게 데리고 왔어”

“아니, 나는 너를 봉인하기 위해 가지고 왔을 뿐이야”

“하지만 나를 네 방에 내버려두고 나가버렸지. 밀레시안이 마음대로 들어 올 수 있는 장소에 나를 두고 나갔어. 단 둘이 남을 수 있게말이야. 정말 고맙지 뭐야.”


저주는 일부러 톨비쉬를 자극하는 말을 찾기위해 눈을 굴렸다. 저주는 모습이 비치는 것에 초조해하고 있었다. 땅위로 솟아난 검은 그림자는 균형잡힌 실루엣의 여성형을 띄고 있었지만 설원의 아래 비치는 얼음에는 부숭부숭한 털을 가진 네 발달린 짐승이 눈만을 내어놓은채 흉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톨비쉬의 가슴에는 푸른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고 불꽃은 저주의 몸을 관통해 무언가를 찾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내 안에 있어. 별은 곧 나와 하나가 될 거야”

“별은 너를 수정할 거야. 별이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이젠 내가 이 안까지 들어왔으니 너를 정화시키겠지.”


“어떻게? 바다의 마녀는 육체를 죽이는 주술을 걸어 강제로 밀레시안을 깨어나게 했지만 그 주술이 밀레시안을 약화시켰어. 나는 밀레시안을 먹었고 수정은커녕 내안에 흡수될 위기에 처했지.

알반, 밀레시안이 사랑하는 알반. 너라고 다를까. 너는 밀레시안의 검에 찔렸고 몸도 성하지 않지. 게다가 밀레시안은 너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아. 너는 이 안에 초대받지 못했지. 온전히 서 있는 것이 고작인 네가 나를 해치운다고?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네가 저 벼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어? 정말?”


그 말이 부정하려 하는 것인지 톨비쉬는 설원의 가장자리까지 달려 나와 검을 휘둘렀다. 거센바람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궤적을 그린 바스타드 소드가 모래를 갈랐지만 저주는 여유로운 웃음소리를 내며 몸의 일부를 휘날렸다. 설원이 아무리 뻗어 나오더라도 밟지 않으면 그만.

멀리 떨어지려는 저주가 착지하는 지점의 바로 앞으로 오싹한 전율이 내달리며 모래를 불태웠다. 바로 한걸음 앞에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빛의 창이 대지를 태워 들어가다가 곧 투명하게 사라졌다. 저주는 하늘에서 으르렁거리는 구름을 올려다 보고는 신의 창에 움츠러든 톨비쉬를 확인했다. 톨비쉬는 놀란 얼굴을 감추기 위해 방패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짜릿하게 퍼져나가는 스파크는 빙판의 위에서도 톨비쉬를 피해 퍼져나가며 간헐적으로 반짝거렸다.

전격의 범위를 확인한 톨비쉬는 망설임 없이 검을 내질렀고 저주는 날아오는 검을 피해 다시 한 번 몸을 분해했다. 


모래가닥이 설원의 위를 날아 톨비쉬의 발목을 향해 날을 세웠지만 곧 비처럼 쏟아지는 빛덩이들이 가느다란 모래자락을 부수어 빙판속에 파묻었다. 얼음에 닿은 모래는 꼼짝없이 얼어붙었고 창에 닿은 모래들은 잘게 부서지며 불타올랐다. 저주는 신경질적으로 모래를 긁어모아 굵은 다발로 만들어 휘둘렀다.

채찍처럼 휘둘러진 모래들이 톨비쉬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톨비쉬는 그리브를 빙판에 미끄러트리며 뒤로 후퇴했다. 얼음은 크게 갈라졌지만 곧 모래를 촉매삼아 갈라진 자리를 매꾸었다.

투명하던 빙판에 검은 얼룩이 상흔처럼 남았지만 모래가 얼어붙을수록 타라의 모습은 점점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광장의 일각이 무너져 내리고 티르코네일의 거대한 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모래로 무너진 분수대에서 우로보로스의 석판이 드러나자 구름은 흥분한 듯 일순 서너 개의 창을 연달아 내리꽂으며 저주를 압박해 들어왔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에 톨비쉬는 어정쩡하게 뒤로 머물러 저주가 타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저주는 그게 톨비쉬의 탓인 양 거세게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저주의 몸은 너덜너덜해져 줄줄이 모래를 쏟아내고 있었다.


“네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사라질리 없어!”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군.”


“너는 별이 되살아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네 손으로 그 목을 치지 못해 이렇게 될 때까지 시간을 허비했잖아. 

네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 별에게 미움 받을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너는 나에게 있어서 열쇠이고 좋은 운반책 이였으니까. 


나는 네가 만들어 낸거야. 네 잘못된 판단과 네 망설임, 네가 별에게 불어넣은 빈틈, 그리고 지금은 네가 만든 어둠이 나를 이 안에 뿌리내리게 했지. 너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한 망설임, 절망감, 후회감.”


네가 만든 어둠 이라는 단어는 톨비쉬에게 유효했다. 빈틈없이 검을 찔러오는 기사의 검 끝이 아주 잠시 동안 멈춰 섰고 그의 허술함을 질책하는 전격이 검 끝을 타고 흘러와 설원에 금을 내었다. 

톨비쉬는 순간적으로 검을 놓치지 않게 위해 검을 내리꽂았고 짜릿한 통증이 온몸을 내달렸다. 왜 갑자기? 의문을 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날아 들어오는 모래줄기를 피해내기위해 톨비쉬는 얼음을 박차고 뒤로 물러서야 했다. 노련한 기사답게 자세를 바로잡았지만 온몸이 저릿하게 울려왔다. 저주는 녹색과 황금색의 불꽃을 피워올리며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같은 목소리지만 천진난만했던 밀레시안의 것과는 달리 거슬리고 짜증나는 목소리였다.


“내가 별에게 어둠을 만들었다고?”

“그래, 맞아. 네가 밀레시안에게 망설임을 불어넣었어. 왜 별에게 열쇠를 건내주려 했어? 왜 밀레시안을 네 방으로 끌어들였지? 그녀에게 무엇을 하려했어? 왜 밀레시안이 여성형인것이 익숙하다고 말했지?”


저주는 밀레시안의 사생활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며 톨비쉬를 조롱했다. 

그것은 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운 이야기이기도 했고 함께보낸 시간의 추억이기도 했다. 톨비쉬는 때때로 일반 남성처럼 의미심장한 말을 속삭였고 밀레시안은 그게 무슨 말이냐며 웃어넘겼다. 부정당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주 닿지 않은 것은 아니었던가, 톨비쉬는 때에 맞지 않은 감상에 잠겨들려는 자신을 질책하며 검을 다잡았다. 

아직 스파크의 충격이 가시지는 않았다. 녹색의 눈동자가 잠시 톨비쉬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별의 모습을 따라하는 저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동시에 매우 격렬하게 밀레시안의 모습이 그리워졌다. 밀레시안의 이름을 입술사이로 발음하자 구름이 낮은 천둥소리로 대답했다 톨비쉬는 심호흡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가늠이 되지 않는 동시에 약간의 조급함이 톨비쉬의 가슴을 두드렸다. 밀레시안이 그를 향해 돌아가라고 속삭였다. 밀레시안은 이미 방법을 선택했다는 태도였고 그 선택에 있어서 톨비쉬는 원치 않은 불청객이였다. 톨비쉬는 필사적으로 밀레시안의 바람을 붙잡아 소원했고 설득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제 특기를 아시잖아요. 몇 번이나 설명하고 설득했던가.

 

톨비쉬는 밀레시안이 그어놓은 선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밀레시안에게 자신의 모습을 이해시키고 싶었다. 오해하지 않기를 의심하지 않기를. 그 손이 내 손을 뿌리치지 않기를. 간절하고 열정적인 불꽃이 설원을 타고 흘러들어가 밀레시안의 마음을 비추었다. 

발레스의 북풍이 톨비쉬의 뺨을 간지르며 이제 깨어날 시간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톨비쉬는 억지를 부리며 밀레시안의 신성력을 잡아당겼다. 

벼락이 내리치고 꺾여 날아온 빛의 창이 저주의 모래채찍의 끝을 꿰뚫었다.

저주는 무언가 의심가는 것이 있는지 일부러 채찍을 끊어내지 않고 스파크를 뒤집어썼다.


“어쩐지, 너희들이 자랑하는 알반의 불꽃이 보이질 않는다 했더니 그런곳에 허비하고 있었구나. 이제야 보여, 네가 무얼 찾고 있는지 어떻게 찾아내는 것인지.”


은백색과 맞서싸우는 황금색의 불꽃을 온몸에 두른 저주가 창이 박혀든 채찍을 끊어내며 양팔을 내저었다. 탈피를 하는것처럼 한사이즈 작아진 저주가 설원으로 내려오며 한웅금 검은 모래를 쏟아내었다. 톨비쉬가 만들어낸 설원이 감당하지 못할정도로 짙고 음울한 원한들이 모래처럼 쏟아져나오며 은빛의 빙판을 검게 물들였다. 저주의 크기는 2/3으로 줄어들었지만 저주는 개의치 않아하는 것같았다.

저주는 양 손을 뻗어 구름에게 손짓했다. 어디 공격해볼테면 공격해보라는 태도였다.


“나에게도 너처럼 편리한 능력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건 아니야. 조금 아프고 귀찮지만”

“……”


“확실한건 너보다 빨리 찾을 방법이라는 거지.”


톨비쉬가 발밑을 엉겨오는 모래를 떨쳐내기 위해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하늘에 떠있던 빛의 창이 저주를 향해 내리꽂혔다. 언제나와 같이 정 중앙을 노리는 정직하고도 단순한 공격. 저주는 그 창을 기다렸다며 땅에 펼쳐놓았던 모래를 들어올려 창의 오롯한 모습 그대로를 잡아채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은백색의 스파크가 그대로 저주의 모래들을 태워버렸지만 저주는 오히려 그 전류를 받아들이며 몸 어딘가에서 이질적으로 반응하는 장소를 찾아 모래를 움직였다. 거대한 몸의 대부분이 타들어가지만 저주가 원하는 효과는 바로 그것이였다. 모든 모래는 균일하게 타들어갔고 그것은 순수하게 저주의 원한으로 만들어진 검은 모래였다. 그러나 단 한군데 다른 속도로 타들어가는 둥근 구체를 보며 저주는 녹색의 눈동자를 곱게 휘어접었다.



“찾았다”



창을 내팽겨 친 저주는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남은 모래를 끌어모아 그 작은 구체를 꿰뚫었다. 눈앞을 어지럽히던 빛이 가라앉고 나서야 주변 상황을 살피는 톨비쉬의 앞으로는 허공에 멈춰선 검은 모래가 서 있었다. 기묘한 예술을 표현하는것처럼 제 몸안의 둥근 구체를 꿰뚫은 녹색의 눈동자는 기기묘묘하게 웃음을 지으며 톨비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은 텅 비었고 황금의 불꽃은 모래의 구체 안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곧 강렬한 밀레시안의 신성력이 저주를 둘러싸며 모여들었다. 사방으로 솟아오르는 정방형의 거울이 마치 하나의 결계처럼 저주와 함께 밀레시안의 영혼을 가두어 잠갔다. 톨비쉬가 불러낸 설원보다도 맑고 반듯하며 저주의 어둠을 한번에 봉인할 수 있는 아름다운 상자에 톨비쉬는 느린 발걸음으로 밀레시안을 향해 다가갔다.


“방해하지 말아요”


밀레시안은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서 죽는것 또한 망설이지 않았다.






14.


“그러지 마십시오”


톨비쉬는 오갈곳 없는 주먹을 움켜쥐다가 그대로 거울을 내리쳤다. 혹여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무색하도록 밀레시안의 결계는 아주 튼튼했고 강인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거울은 아마 톨비쉬의 방패보다 튼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체력을 비롯한 모든 능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만든 결계. 하물며 그 신성력은 끊임없이 저주의 발을 잡아놓고 있었고 일부는 톨비쉬가 탈취하다시피 빼앗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릇의 크기가 다른 정도가 아니었다. 이 안에 담긴 것을 물이나 호수로 비견할 수 있었을까. 톨비쉬는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올려다보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당신은 무엇이 되려는 건가, 하지만 곧 무엇이라는 단어를 지운 톨비쉬가 머리를 내저었다.

당신은 사람이다. 오롯이 이 세계를 사랑하고 그 안에서 살아나가는, 톨비쉬는 이 말이 나만의 욕심은 아니었다며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설득했다. 손을 잡지 않았습니까, 내 이름을 불렀지 않나. 톨비쉬의 입술이 달싹거려졌지만 밀레시안의 이름은 발음되어 흘러나오지 않았다. 혀 안쪽에서 둥글게 몸을 말아 모습을 숨긴 말 한마디가 쓰디쓴 알약처럼 톨비쉬의 목을 훑어 내렸다. 마른기침이 폐를 두드렸고 서리조각같은 찬 기운이 온몸을 뒤덮었다. 톨비쉬는 입가를 한번 훔친 뒤 결계를 한 바퀴 훑어보았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결계의 모습을 확인한뒤 톨비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가장자리를 쓰다듬었다. 서글프도록 날카로운 얼음의 가시가 튀어나오며 톨비쉬를 밀어내었다. 톨비쉬는 끌어안을 수조차 없는 결계를 보며 절망해야했다.

나는 당신을 희생시켜야 합니까? 톨비쉬는 소리없이 물음을 던지며 한발자국 물러섰다. 짐승의 목울대처럼 그르렁거리던 구름이 기다렸다는 타이밍으로 벼락을 내리꽂았다. 잠시 은빛으로 빛나는 결계 안에서 매캐한 연기가 올라왔다. 해조류가 타오르는 냄새, 톨비쉬는 마녀의 저주채로 저주를 불사르는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밀레시안은 정말로 자신을 해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답답함에 소리쳤다.


“그만두세요, 제가 오지 않았습니까.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톨비쉬의 말소리는 공허하게 울려 퍼졌고 두 번째 벼락이 내리쳤다. 미세한 잿가루가 가장자리에서 흩날렸다. 첫 전류보다 좀 더 오래 거울은 빛을 품안에 끌어안으며 섬광을 번뜩거렸다. 톨비쉬가 전류에 휘말릴 것을 각오하고 거울에 손을 얹어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쿵하고 안쪽에서 작은 반항의 충격이 밀려나왔다.


‘바빠죽겠는데 당신까지 성가시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밀레시안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톨비쉬는 기가막힌 표정으로 손을 때었다.


“그게 지금 저에게 할 말입니까? 저는 지금 자이언트 첩보조 한가운데서 의식을 닫고 있습니다. 조원들도 없이, 당신 하나만을 보고요!”


당신이 찌른 상처도 끌어안고, 라는 말을 하기엔 자신이 너무 치졸해 보일 것 같은 느낌에 톨비쉬는 가까스로 마지막 막을 삼킨 채 거울을 노려보았다. 핏기 없이 조금 그슬린 금발의 남자가 초라한 모습으로 거울안쪽에서 노려보고 서 있었다.

밀레시안은 대답하지 않았고 톨비쉬는 거울의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다시 손으로 벽면을 잡고 불꽃을 피워 올렸다. 푸른 신성력이 거울을 뒤덮으며 밀레시안의 이름을 불렀다. 목구멍을 거슬러 올라온 쓴물이 그의 말자락을 붙잡았지만 고집이라면 그 또한 밀레시안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스파크로 밝아진 거울의 표면에 톨비쉬의 그림자가 비쳤다.


“그런 나를 조금 더 의지해 줄 수는 없습니까?”


여기서 당신을 잃어야한다면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순간을 이 순간처럼 납득해야하는 걸까. 이 물음은 톨비쉬를 위한 것도, 밀레시안을 위한 것도 아니였다.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대화. 당신은 나에게 대답해 줘야만해. 톨비쉬는 그렇게 이를 악물고 밀레시안의 영혼을 찾아 눈을 감았다. 아주 잠시동안 밀레시안의 모습이 비쳤고 사라졌던 저주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겁쟁이...!’


저주는 밀레시안을 비난하며 소리치다가 톨비쉬와 눈이 마주쳤다. 검은 모래는 톨비쉬의 신성력을 구원줄삼아 필사적으로 기어나와 거울의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제 뜻대로 되지 않았는지 저주는 밀레시안이 만들어낸 거울에 못박힌채로 겨우 머리만 들어 톨비쉬를 노려보았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거울주변은 톨비쉬의 설원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저주는 그런짓 하지 않아도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한다며 빈정거렸다.


“그렇게 애처롭게 불러봐도 소용없어. 별은 네 생각보다 나쁜놈이니까. 밀레시안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을꺼야. 내가 있든 없든, 도망치고 또 도망치며 네 손안에 얌전히 붙잡혀 있지 않을꺼라고.”


톨비쉬는 일부러 대꾸하지 않으려 했지만 저주의 말은 꽤나 아프게 찔러들어왔다. 저주가 보고 이해한 그대로 밀레시안은 언제나 도망쳐왔다 죽음으로, 또 다른 모험으로. 

톨비쉬의 품으로 들어온 이유 조차 오래된 친구의 배신에 이은 도피였지만 톨비쉬는 그런 밀레시안을 비난하지 않았다. 내게로 오는 여정이 길었을 뿐. 

그렇게 생각하기 위해 톨비쉬는 일부러 오랜 시간동안 밀레시안을 지켜보면서도 그 앞에 모습을 들어내지 않았다. 모습을 드러낸 후에도 거리를 유지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손을 뿌리치지 못하도록, 옭아매고 몰아넣으며 그렇게 기다리고 참아왔다. 일부는 포기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기적과도 같이 밀레시안의 시선이 톨비쉬를 향했고 그 순간까지의 시간은 너무나도 오래 걸렸었다. 톨비쉬는 이제 조급해하고 있었다. 

열쇠를 거절하던 순간 자신이 서두르고 있음을 자각했지만 이미 달리기 시작한 마음을 멈춰 세울 수는 없었다. 엘베드의 조장으로서, 신의 검을 받드는 기사로서, 몇 가지의 이유가 주어진다면 응당 그 이름을 따라 이 마음을 접어야 하겠지만 톨비쉬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만 하더라도 벌써 몇 개나 해서는 안될 일을 몇 개나 저질렀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톨비쉬는 갑작스럽게 행동을 멈추고 검을 내렸다. 저주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점점 기묘하게 변해가는 톨비쉬의 얼굴을 응시했다. 웃음을 참지못하고 입꼬리를 올리는 톨비쉬가 고개를 숙인채 입을 가렸다. 해서는 안되는 일. 

톨비쉬는 저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엘베드의 붉은 뱀이 그의 뱃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밀레시안이 이 모습은 보지 못하고 있기를.

저주는 밀레시안의 기억속에서 한번도 본적이 없는 그의 모습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이 품고있는 황금색 불꽃이나 밀레시안과 알반의 기사가 사용한 푸른 신성력과는 다른 무언가. 그것은 신성력이라고 하기엔 너무 위협적이였고 이질적인 무언가라 하기엔 저주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친숙한 무언가였다. 탐욕? 악의? 어느 것인지 특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분명 정갈하거나 순수한 감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운이였다. 그의 갑옷에서 붉은 해골이 번쩍이는 것처럼 보여졌다. 톨비쉬는 저주에게 다가가 그 눈동자를 움켜쥐었다. 뭐하는거냐고 소리지르는 저주의 말따위는 들리지 않는 것인지 톨비쉬는 보석안으로 신성력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뱀과 같이 새된 숨소리가 톨비쉬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동-”

“자..잠깐 기다려…! 그런짓을 했다간 밀레시안도 무사하지 못해!”


“변형-, 무슨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설마하니 제가 별을 포기하겠습니까?”


저주는 겁에 질린채로 머리를 구성하던 모래를 뻗어 톨비쉬의 팔을 휘감았다. 거울안에서도 갇혀있던 모래들이 꿈틀거리며 거세게 요동쳤지만 단단하고 매끄러운 거울을 뚫고 나올 수는 없었다. 

황금색의 불꽃이 녹음을 따라 번쩍거리며 톨비쉬의 눈을 현혹시켰다. 톨비쉬는 당치도 않다는 눈으로 이교도의 신성력을 튕겨내고는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의 불꽃은 단단했고 강대했지만 붉은 색이였다. 때때로 푸른 색으로 돌아올 때도 있었지만 두가지 불꽃을 번갈아 내보이며 복잡하게 신성력을 운용하는 그의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나왔다. 너무 무리한 나머지 얇게 이어져있던 상처가 터져나온 것은 톨비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일에서 중요하다고 꼽을 것은 밀레시안과의 관계성과 바쉬배르 왕가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그리고 그 일을 시말서만으로 끝낼 수 있을지 정도. 아마 종이 몇 장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그의 마음을 잠시나마 무겁게 스치고 지나갔다. 안그래도 오늘 일을 모두 캔슬한 것으로 이를 갈고 있을 상부에서 얼마나 즐거워 할지. 톨비쉬는 약간의 사심을 담아 보석을 움켜쥔채 신성력을 주입했다.


“부여-”


톨비쉬는 자신의 특기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응용하는 것에도 부족함이 없는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신성력을 강제할 수도 있고 가져올 수도 있었으며 다른이에게 부여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능력을 옮기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을 옮기는 것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단지 그 대상이 기사가 아닌 정화해야할 저주의 영혼 이었을뿐. 

마치 하나의 피해자처럼 톨비쉬 개인의 사욕을 담아낸 붉은 신성력이 저주의 보석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피해자의 영혼마냥 강제적으로 주입된 힘은 일시적이나마 모래줄기에 활력을 가져다주었고 모래는 곧장 솟구처 톨비쉬의 목을 내렸지만 그 뿐이였다.

마지막까지 건재한 밀레시안의 신성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톨비쉬의 양 옆으로 분노의 빛을 쏟아 부으며 남은 모래를 하얗게 태워버렸다.

저주는 잠시 푸른 신성력에 마비가 된 듯 보석을 파르르 떨었고 녹음을 잃은 채 잠시 멍하니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저주의 몸을 타고 들어간 톨비쉬의 신성력이 검은 모래속에서 눈을 떴다. 불투명한 녹색보석 너머로 지치고 상처입은 밀레시안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찾았다.’


거울속의 톨비쉬가 웃음지었다.




거울 속에서 들리는 것은 거울의 허상이 흉내 내는 말소리뿐이었다. 원래부터 거울이라는 것이 대화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었기에 진실의 거울은 대상의 말에 대답해야한다는 기능조차 갖출 필요성을 못 느낀 모양이었다. 정해진 마음을 복사하고 반전하여 그대로 출력해낸다.

좌우가 바뀐 것만으로도 거울의 주인들은 그 위화감을 기준으로 허상을 타자화 했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받아들였다.

키리네를 비추던 거울은 특히나 그 힘이 강력한 물건 이였고 그 효과는 확실했다. 거울은 저주를 비추었고 밀레시안을 비추었으며 지금은 톨비쉬가 비추어진 상태였다. 거울이 밀레시안을 향해 속삭였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손을 내밀어도 쳐내기에 급급한 당신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부당하다 여기면서도 사랑스럽다 여기는 이 마음은, 누구의 것입니까?”


원망했던가, 톨비쉬는 자신의 입을 가린채 턱을 쓸어내렸다. 미워했었던가, 부당하다고 느낀 적은 있었다. 하지만 밀레시안에게 그러한 감정을 내보일 생각은 없었다. 오른쪽의 표정은 완벽하게 통제했지만 왼쪽의 얼굴은 그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톨비쉬는 조금 냉정하게 머리를 식히며 스스로를 반성했다. 

더 완벽하게 표정을 감췄어야지. 거울은 작은 소 동물처럼 귀를 팔락거리며 눈을 감았다. 톨비쉬의 신성력이 거울의 안쪽에서 타올랐고 밀레시안의 분노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났군. 톨비쉬는 쓰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거울의 시야가 멀어지며 결계 안쪽에서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믿을 수없어. 어떻게? 그렇게 탐욕적이고 어둡고 가라앉은 감정을 품으면서 빛을 낼 수 있는거야? 어떻게 그렇게 더럽고 악의 가득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깨끗한척 푸른 빛을 띌 수 있는거냐고”


톨비쉬의 일부를 흡수한 검은 짐승은 곧 정신을 되찾고는 경악을 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저주는 최대한 도망치기 위해 몸을 축소해 작은 짐승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지만 그 끝은 여전히 거울에 묶여있었다.

태연히 검을 들어 올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검은 짐승은 신경질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것은 당혹스러워 했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개의 상반된 감정. 그러나 절제된 마음은 깔끔한 모양새로 포장하는 그를 보며 저주는 차마 저열한 기만이라고 이름붙이지 못했다. 그 남자와 다를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그의 감정은 너무나도 충실하게 밀레시안을 향하고 있었다.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톨비쉬는 푸른 신성력으로 이어진 가슴을 확인하고서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이어진 디바인 링크로 느껴지는 밀레시안의 영혼이 그에게 여유를 되돌려준 모양이었다.

톨비쉬는 잠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다가 검을 들어 올렸다. 검은 날개장식이 온전하게 복원된 디바인소드가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내가 허술한 남자가 아니니까 가능한 일이지.”


톨비쉬의 검이 거울의 결계를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허공을 가르는 거대한 심판의 검이 소울스트림을 내저으며 거울의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한번, 금이간 거울을 확인한 톨비쉬가 다시한번 검을 들어올렸다. 부서진 결계안에서 쏟아져나올 모래에 밀레시안을 잃어버릴까 하는 걱정은 되지 않았다. 밀레시안은 그의 품속에 있는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저주는 앞발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황금색 불꽃이 불만스럽게 모래를 밀어내었지만 페리도트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페리도트의 안에 불어넣은 감정은 그러한 것이었다.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을정도로 낯 뜨거운 것, 원색적인 것, 때로는 상처 입히고 방치하며 그럼에도 소중하게 보듬어 안는것. 지나칠 정도로 신중하고 끈질길 정도로 인내하면서 스스로 그 함정 안에 빠질 때까지 지켜보고는 결정적인 순간 구해주러 손을 내미는 것, 그의 감정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그 꼬겨드는 과정은 저주가 증오하는 남자의 사탕발림과 닮아있었지만 그 속안을 채우는 말은 텅 빈 거짓된 말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거짓만을 피해 올바른 진실을 알려주지 않은 간교함, 저주는 톨비쉬를 사기꾼이라고 불렀고 톨비쉬는 책략이라며 검을 후려쳤다. 균열에서 거울조각이 튀어 올랐다.


“내 본체를 부순다고 해도 내가 바로 사라지지는 않아. 나는 밀레시안의 어둠 안에 뿌리내렸고 이 감정은, 밀레시안의 불안감은 완전히 제거해 낼 수는 없어. 나는 언제고 다시 돌아올 수 있어.”


나는 끊임없이 되살아날 꺼고 네 별을 괴롭힐 꺼야. 저주는 마지막에서야 본연의 모습을 되찾으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인간의 모습은 잃어버렸지만 아직 저주의 안에는 수많은 원혼들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공허했고 희생자를 원하며 특히나 타라에 강한 집착을 내보이고 있었다. 나에겐 미움이 있어, 절망이 있어, 타인을 질투하고, 욕망하며, 원망하는 마음이 남아있어. 이 모든 어둠은 언제고 나를 다시 불러내. 저주는 발톱을 꺼내려 애쓰며 자세를 낮추었다. 톨비쉬는 감흥 없는 싸늘한 눈으로 저주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건 상관없어. 네 말대로 그 어둠이 내가 준 것이라면, 밀레시안의 망설임이 나로 인한 것이라면”


톨비쉬는 한손으로 능숙하게 검을 회수하며 검을 고쳐 잡았다.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거대한 신성력이 검의 모습을 갖춰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신의 기사. 저주는 금방이라도 그에게 달려들 태세로 다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거대한 검이 검은 짐승채로 허공을 가르며 거울의 결계위로 내리 떨어졌다. 녹색의 보석을 불태우던 황금색 불꽃이 퍽 하고 터져나가며 푸른 불꽃으로 물들었다. 두 눈을 태우는 고통에 저주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와자작- 하는 소리와 함께 깨져나가는 거울의 틈새에서 검고 뜨거운 모래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음속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건지 모래들은 쉴 새 없이 흘러가며 저주의 몸을 뒤덮었다. 멀어지는 톨비쉬의 목소리가 저주의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별은 그 때마다 내 손을 찾아 올테니까.”


녹색, 모래속에 휩쓸려가는 저주는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어둠 너머에서 보이는 기사의 푸른 눈동자가 어째서인지 웃는 것 처럼 번져 보인다며 머리를 흔들었다. 열정적으로 타오르는 붉은 불꽃은 퍽이나 아름다웠지만 저주는 깨어져가는 보석으로 톨비쉬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녹색은 정말이지 붉은색이랑은 어울리지 않아. 황금의 불꽃이 검은 유사속에 쓸려내려가며 녹색의 눈동자도 검게 닫혔다. 톨비쉬는 쓸려 내려가려는 밀레시안을 건져올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의 별”


데리러 왔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톨비쉬의 의식도 빛속으로 번져나갔다.













15.

“사기꾼이네”


밀레시안은 키리네에게 25골드를 지불한 뒤 건네받은 붕대를 쫙 펼치며 대답했다.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사기꾼에 어리광쟁이에 거치적거리기까지 하네요.”


밀레시안은 당신 잘못이야. 라고 딱 잘라 이야기하며 조심스럽게 붕대를 감아내었다. 꽁꽁 얼어붙은 알반의 기사를 데리고 돌아온 다우라는 바이데 재상을 거친 크루크에게 한소리 들어야했지만 결과적으로 생명의 한계까지 밀레시안을 붙잡고 있었던 탓에 크루크는 왕가의 비밀을 거래조건으로 제시한 수상한 교단의 기사와 그가 데리고 온 자이언트 왕비의 암살 시도자를 마을에서 유일한 힐러 용품을 취급하는 여성의 집에 묵도록 허락해야했다. 크루크는 불만스러워했지만 알반의 기사를 동사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자이언트의 동맹이자 그림자의 영웅을 홀대 할 수도 없는 일이였다. 당연하게도 바이데 재상은 길길이 날뛰며 반대를 표시했지만 힐러의 역할을 맡은 키리네는 엄지손톱으로 목을 그어 보이며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럼 사망확인서에 재상의 이름을 적어도 되겠는가?”



밀레시안은 키리네를 돌아보며 베이스포션을 구입했다. 밀레시안의 옆에서 해맑은 얼굴로 앉아있던 골든 리트리버가 만드레이크와 베이스 허브를 꺼내들었다. 톨비쉬는 만드레이크는 맛이 없다고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밀레시안은 앉은자리에서 20개의 포션을 만들어내는 큰 손의 위엄을 보이며 톨비쉬에게 내밀었다.


“다 마시면 포션중독이 올 겁니다”

“괜찮아요. 중간에 온천에 떨어트리고 가면 되니까”


우선 세병. 밀레시안은 리트리버에게 병을 다 비우는지 확인하라고 말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레시안의 움직임에는 더 이상 비늘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고 걸음걸이 또한 더 이상 무겁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톨비쉬는 앞발을 기대어오는 금색의 개를 들어다 보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병을 들이켰다. 쓸데없이 복잡한 사람보다 단순하고 순수한 동물의 눈빛이 그에게는 더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왔다. 더욱이 거래로 제시할만한 고기조각이 없는 지금으로서는 더욱 더. 톨비쉬가 두번째 병을 비우다 사례가 들리자 리트리버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려오는 손을 코로 밀어 올렸다. 다 마시라는 압박에 톨비쉬가 한숨을 내쉬었다. 만드레이크는 정말 그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기억에는 없지만, 본의는 아니지만,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찌르려고해서 미안하고요”


밀레시안은 침상에서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키리네의 거울을 돌려주었다. 키리네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대답으로 거울을 끌어당기며 어디 흠집이 나지 않았는지 꼼꼼한 눈길로 살펴보았다. 겸사겸사 화장을 확인하는 여왕의 눈 속에는 대범함보다는 권태로움과 지루함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크루크들이 시끄러운 것이 마음이 들지 않는 눈치였다.


“왜들 그렇게 시끄러운 건지 모르겠어. 찔릴뻔 한 건 나고 정작 찔린 건 너의 기사인데 말이야.”


아마 죽을뻔 했지? 키리네는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가볍게 덧붙이며 머리를 정돈했다. 실제로 그것은 남의 일이였고 키리네의 암살은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이었다. 그것을 바쉬베르가의 위엄에 손상이 가는 일이라고 연결지을만한 사람은 바이데 재상뿐이 없을 것이라며 키리네는 한껏 인상을 찡그리며 입술을 모았다. 립스틱이 잘 발렸는지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피해를 입은 것은 없고 말이지”

“아, 실은 하나 있어요.”


밀레시안이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키리네는 뭐가? 하고 고개를 돌렸다. 겨우 거울에서 시선이 떨어진 키리네는 잔뜩 심통이 난 채로 횃대위에서 등을 돌리고 있는 쉬나벨을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렇게 좋아하는 크루크의 어깨에서 푸드덕 날아오른 뒤로 절대로 밀레시안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쉬나벨은 밀레시안에게 한 웅큼 깃털을 잡아 뜯겼고 그 자리는 휑하도록 비어 차가운 발레스의 바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쉬나벨은 모낭의 모습이 잔뜩 돋아오른 자신의 오른쪽 엉덩이를 내려다보다가 불만스럽게 부리를 딸깍거렸다. 잠시 밀레시안을 노려볼 때도 있었지만 눈치 빠른 리트리버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자세를 낮추었기에 바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개판이네”


키리네는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하며 손톱 끝을 정리했다. 그녀의 목에는 저주가 빠져나간 페리도트 목걸이가 걸려있었고 보석에는 크게 금이 가 있었다. 밀레시안이 목걸이를 언급하자 키리네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카르펜 공주에게 보내 수리할 사람을 수배달라고 할거야. 보석이 깨진 건 아쉽지만 이 금장식은 마음에 들거든.”

“스카하가 들으면 좋아하겠네요.”


밀레시안은 일부러 스카하가 빈정거린 말들을 빼고 키리네를 위해 디자인한 것이라며 살짝 치켜세웠다. 세 번째 병을 따고 있던 톨비쉬가 의외라는 듯이 밀레시안을 쳐다보았다. 의외로 처세술을 잘 하고 있는 밀레시안의 옆모습이 조금 새로워 보이는 기분이었다. 톨비쉬의 시선을 느꼈는지 턱을 괴고 있던 밀레시안이 살짝 고개를 돌려 톨비쉬를 가리켰다.


‘마셔요’


리트리버가 다시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주는 아직도 네 안에?”

“응-, 완전히 정화되지는 않았어요.”


신성력을 옮기는 것과는 별개로 톨비쉬는 정화나 탐색에는 그다지 특화되어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거의 대부분, 아슬아슬할 정도로 저주를 태워놓기는 했지만 그 조각은 여전히 밀레시안의 마음속 어딘가를 떠돌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여전히 검은 짐승의 울음소리를 느끼고 흐느끼는 세 주인의 마지막 모습을 되풀이하는 것을 지켜보아야했다. 덤으로 마지막까지 저주에 얽매여있는 남자의 아내까지. 밀레시안은 가슴에 손을 올린 채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귓가에서 웅성거리던 메아리들이 잠시 숨을 죽인 채 밀레시안의 기척을 살폈다. 밀레시안은 한숨처럼 숨을 토해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톨비쉬가 세 번째 병을 리트리버에게 건네자 덩치만 큰 강아지는 엉덩이를 힘차게 흔들며 병을 물어들었다. 요령좋게 입구만 물고 슬렁슬렁 밀레시안에게로 다가간 리트리버는 곧 채워진 물약 세 개를 물고 돌아왔다. 톨비쉬가 항의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밀레시안은 외면한 채 키리네를 바라보았다. 키리네는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말라며 톨비쉬를 쏘아보고는 밀레시안을 향해 느긋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녀가 둘. 톨비쉬가 네 번째 병을 땄다.


“너무 많이 먹이는 거 아니야?”

“몰랐는데, 꽤 체력이 좋더라구요.”


밀레시안은 디바인링크로 주고받은 감각이 선명한지 살짝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에 키리네가 즐거운 웃음소리를 내며 톨비쉬를 흘겨보았다. 발레스의 팜므파탈이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 몰랐어?”

“까맣고 어두운 흑심을 가진 키리네, 나를 그 안에 끌어들이지 말아주세요.”


거기서 나온 지 얼마 안됐거든요? 밀레시안이 정색을 하며 물러서자 키리네는 더욱 큰 웃음소리를 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거울을 보는 척 이리저리 각도를 틀어 손부채질을 하는 밀레시안을 보는 재미가 쏠쏠한 모양이었다. 밀레시안은 이대로 키리네의 장난감이 되어야하는 것이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은, 그 것보다 더 큰 문제가 바로 옆에 있었지만. 밀레시안은 좀 더 빠르게 비워진 포션병을 받아들며 톨비쉬를 돌아보았다. 그는 더 이상은 못 먹겠다는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다가 밀레시안이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잔뜩 찌푸려졌다는 것은 거짓말같이 온화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사기꾼씨.”


톨비쉬는 그렇지 않다며 손을 들어보이고는 대답했다.


“정말입니다. 전부 마셨어요”


밀레시안이 이야기하는 것은 포션의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톨비쉬는 정말 꾹 참고 마셨다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옆구리가 당기는지 한쪽손이 조금 덜 올라온 상태였지만 톨비쉬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밀레시안은 그가 밀레시안의 마음속으로  들어 왔을 때 육체적으로나 능력적으로나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가 어느 정도 엘베드의 조장으로서 선을 넘은 것도 눈치 채고 있었지만 동시에 모두 그 모든 이유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도 전해 듣고 있었다.

뿌리밖에 남지 않은 검은 짐승은 끊임없이 자신이 보고들은 진실을 이야기했고 어둠이 속삭이는 그의 진심은 타라의 어느 클럽 못지않은 음침하고 어두운 내용들이였다.


부정해야 할 것 같지만 분명 톨비쉬의 디바인링크에서 스쳐지나갔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들. 밀레시안은 그 순간에서조차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톨비쉬를 보며 뺨을 쓰다듬었다. 전에 없던 다정한 손길에 톨비쉬의 눈이 잠시 커졌다 휘어졌다. 그는 밀레시안의 변화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자이언트의 여왕이 보고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여긴 그녀의 집이잖아요”


크루크의 왕비라고 부르지 않는 톨비쉬나 족장의 집이라고 부르지 않는 밀레시안이나. 둘중 어느 누구도 크루크의 존재감을 인정하지 않는 대화에 쉬나벨은 불만스럽게 울음소리를 내었다. 

이리오렴, 키리네가 다정하게 쉬나벨을 불러 고기조각을 입에 물렸다. 리트리버가 아주 잠깐 부러운 눈으로 쉬나벨을 쳐다보았다.


잠시 쉬나벨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두사람은 다시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고 조금 빠르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살짝 입매에 힘이 들어간 모습에 톨비쉬는 밀레시안이 무언가를 이야기 하고 싶어 한다는 것까진 눈치 챘지만 왜 불만스러워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놓친 사인이 있었던 건가.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손을 잡자 한 박자 늦게 따라온 눈동자가 톨비쉬와 시선을 맞추었다. 이 이야기는 즐겁지 않은 모양이었다.


“음, 대충 알고 있다시피 내 저주가 아직 완전히 풀린 건 아니잖아요.”


톨비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밀레시안의 안에서 저주는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음을 깨트렸고 대부분의 몸체는 톨비쉬의 신성력에 불타올랐지만 여전히 그 조각들은 밀레시안의 어둠속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톨비쉬가 검을 내리고 나서도 티르코네일은 절반이상이 어둠에 잠겨있었지만 더 이상은 위험하다고 깨워오는 다우라의 경고에 내키지 않는 얼굴로 연결을 해제해야한 했다.

저주를 완전히 뿌리 뽑는 것은 게이트로 돌아가서의 일, 톨비쉬는 흐릿하게 자이언트에게 들려 이동되는 와중에도 해야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놓으며 눈을 깜빡였다. 상부에 밀레시안이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과 자신이 실수 했다는 것, 그리고 이교도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신도를 늘릴 방법을 찾아내었다는 것. 하나서부터 열까지 모두 번거로운 서류작업이 필요했지만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오류를 함께 해결했다는 사사로운 사실에 감사하며 눈을 감아야했다. 

일어나자마자 사기꾼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은 조금 가슴 아프지만 뭐, 그정도야. 그렇게 넘겨들으려던 톨비쉬는 밀레시안이 남겠다는 말에 다정했던 미소를 흐트러트리며 손목을 움켜쥐었다. 밀레시안은 이럴 줄 알았다며 톨비쉬의 손을 다독였고 그 손마저 반대쪽 손에 움켜쥐어지며 양손을 모두 붙잡힌 꼴이 되어보였다. 

톨비쉬는 스스로에게 진정하라고 짜증을 내며 인상을 찡그렸고 그 모습은 여과 없이 밀레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천천히 설득하는 어조로 톨비쉬의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돌아가면 이것저것 설명해야할 일이 많이 있잖아요. 보석은 키리네에게 넘어갔고 이건 당신 단독선택으로 나온 거고, 상부에서는 스카하에게 넘기는 것으로 되어있었다고 했죠? 그것도 당신 단독 결정이었고?” 


밀레시안은 꽤나 아픈 방향으로 문제점을 파고들며 톨비쉬의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톨비쉬는 제볍 격식이 없어진 스킨쉽을 위안 삼으며 밀레시안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처음에 움켜잡은 팔에 손자국이 선명했다.


“키리네의 도움을 받아서 내가 저주를 해결했다고 하는 방식이 좀 더 원만할 꺼라고 생각해요. 키리네는 마나에 민감하고 내가 환생으로 완전히 저주를 떨어트려 낼 때까지 좋은 감시역이 되어줄 꺼고.... 크루크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키리네가 설득해준다고 했으니까 괜찮아요. 바이데는 당신에게 짐을 하나 지워놓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했어요.”

“언제 그런 일을?”

“당신이 디바인링크를 수습하지 못해서 비몽사몽하고 있었을 때.”


밀레시안은 약간의 질책을 담아 톨비쉬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찔러 넣었다. 딱딱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미묘한 푹신함이 손가락에 밀려났다가 다시 튕겨내었다. 키리네의 치료를 돕던 와중에 농담으로 나온 이야기였지만 약간의 중독성 생길 것 같은 촉감에 밀레시안이 한번 더 찔러넣어 보고싶은 마음을 접기 위해 손가락을 거두어들였다. 

다음에, 밀레시안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톨비쉬를 바라보았다.


“미리 이야기 하지만 다음엔 절대 이렇게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요.”


밀레시안은 함부로 자신의 신성력을 가져가려했던 톨비쉬를 질책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단계적으로 경험해왔던 밀레시안과 달리 톨비쉬는 편법과 오용, 남용으로 인해 엉망이 된 디바인링크를 경험했던 터라 그 연결고리를 끊는 것조차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는 소울스트림과 에린 중간에 어중간하게 있었고 가혹할 정도로 단련된 신성력만이 그의 영혼을 육체에 묶어두는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기력이 거의 다 소모된 밀레시안이 응급처치로 정신을 차리자마자 했어야 했던것이 톨비쉬의 디바인링크를 수습하는 일. 그래서 상처치유가 더뎠었냐며 붕대를 쓰다듬는 톨비쉬의 손길이 어딘지 약간 어색해보였다.


“반대로군요, 처음 신성스킬을 당신에게 옮길 때는 내가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요. 정말 큰일 날 뻔 했다고요.”


푸념하듯 잔소리를 하는 밀레시안의 뺨을 쓰다듬자 잠시 동안 밀레시안의 입이 다물어졌다.

당신의 눈이 깜빡이지 않네요. 톨비쉬는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삼키며 미소 지었다. 늘 자신만보면 갸웃거리던 귀여운 버릇도, 가끔씩 이렇게 다가갈 때면 꾹 힘을 주던 입매도 모두 느슨하게 다물려있기만 할 뿐. 톨비쉬는 찬찬히 밀레시안의 눈을 들여다보며 허리를 숙였다. 늘 마음속으로 그려오기만 했던 손끝을 미끄러트려 턱 선의 끄트머리를 감싸 쥐며 끌어당기자 거짓말처럼 밀레시안의 입술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닿기만 하는 가벼운 키스. 그러나 파르르 떨리는 밀레시안의 속눈썹이 못내 사랑스러운 듯 톨비쉬는 감히 그 입술을 해집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살짝 부벼왔다. 말캉하면서 물기 있는 밀레시안의 입술이 까끌한 톨비쉬의 입술을 덮어오며 촉촉하게 젹서 나가는 감각은 그야말로 마른 목이 축여지는 것 같은 기적. 톨비쉬는 어린소년처럼 힘차게 뛰는 고동소리에 기가찬듯 숨을 토해내며 겨우 입술을 때어내었다.


“꾸르륵-”


횃대에 날아가지 못한 쉬나벨이 불만스럽게 웅얼거렸다.



“…………”

“…………”


“…………봤어요?”


“봤지”

“………그……”


“내 집인데, 뭔가 불만이라도?”


뻔뻔한 표정으로 밀레시안과 톨비쉬를 내려다보던 키리네는 톨비쉬를 흘겨보더니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재미없는 남자, 거기서 입술만 부벼? 톨비쉬는 왠지 모르게 문장으로 완성되어 찔러오는차가운 비소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얼굴을 대외용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지만 그의 자존심 어딘가가 차가운 발레스의 서리에 긁혀나간 모양이었다.


“남자들이란…”


키리네는 하나같이 다 똑같다며 고개를 내젓고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현관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손에는 어울리지 않는 작은 고기조각이. 다정한 손놀림으로 고깃조각을 카펫 가까이 내린 키리네는 사람을 부르는 것 보다 열 배는 더 다정한 목소리로 밀레시안의 리트리버를 불러내었다. 잠시 밀레시안의 눈치를 보던 리트리버가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꼬리를 흔들며 키리네를 향해 달려갔다. 쉬나벨이 불만스럽게 날개를 푸덕였지만 멀리서 이름을 부르는 크루크의 목소리에 망설임 없이 날개를 펼치며 집밖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키리네는 기대를 저버리지 말라는 미소를 지으며 고기조각을 집밖으로 던져버렸다. 리트리버도 쏜살같이 달려 나가며 힘차게 짖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부터 나의 크루크와 외출을 할꺼야. 아마, 두시간정도.”


충분하지? 라는 무언의 압박이 톨비쉬의 자존심에 다시 한 번 눈뭉치를 집어던졌다. 톨비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눈을 피했다. 당분간은 발레스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지만 상부에서 그런 푸념을 받아줄 리 없었다. 밀레시안이 톨비쉬를 대신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응. 알았어요. 대충 그때까진 치료를 마무리하고 내보낼테니까.”

“밀레시안, 그게 아닙니다”


밀레시안은 두시간 이내에 톨비쉬를 돌려보내라는 말로 알아들었는지 손을 흔들어보였다.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손을 잡아 내리려 했지만 잘 올라가지 않은 왼손은 그대로 톨비쉬의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으로.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에 키리네는 알아서 잘해보라며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

“…………왜 문을 잠가요?”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눈을 마주하며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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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비밀레)페리도트-중-

마비노기/페리도트 2016. 6. 23. 04:09


5.

"........크르릉"



식료품점에서 성당을 향해 작고 검은 그림자가 쏜살같이 내달리며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쫓아오는 발걸음을 따돌리기 위해 언덕을 타고 뛰어 내려가 학교 뒤편의 정원으로, 잠시 허수아비를 사이에 두고 술래잡기를 하듯 빙글빙글 돌던 그림자는 밀밭으로 몸을 던져 파사삭 하는 소리를 내며 대장간을 향해 달려 나갔다. 


급하게 몸을 내던져 방향을 꺾은 고양이가 다리를 향해 내달리는 것을 보고 길을 막아 세워보려 하지만 그쪽은 페이크, 유연하게 몸을 뒤틀어 반대방향으로 박차며 튀어 나간 고양이가 다리를 뛰어넘어 여관 쪽으로 숨어들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문이 열려 있지 않은 여관의 모습에 크게 당황한 건지 고양이는 발톱을 세워 문을 박박 긁어 내렸다.


"...!!"

"포기해."


혼란스러운 계획을 재정비하는 동안 발은 쉴 새 없이 제자리를 빙글빙글, 다가오는 밀레시안의 기척에 필사적으로 언덕을 타고 올라가 잡화점의 뒷마당에 내려선 검은 짐승이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몸을 털어내었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는 마을, 사람의 흔적이 의도적으로 지워진 듯한 밀레시안의 티르코네일은 모든 집이 문을 걸어 잠근 채 어떠한 소통도 요구하고 있지 않았다.

검은 짐승이 도망갈 곳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동안 다시 마을 쪽으로 돌아온 밀레시안의 신성력을 내뿜으며 잡화점으로 다가왔다.


허겁지겁 광장 쪽으로 달려 나가며 잡화점 항아리를 모두 깨부순 것으로도 모자라 베틀을 넘어트린 작은 동물이 허겁지겁 촌장의 집 쪽으로 뛰어올라 무덤가로 달려가 보지만 기다란 풀숲을 끼고 술래잡기를 계속할 생각이 없는 밀레시안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거대한 검을 내리쳤다. 

천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과 함께 마을길로 나동그라진 작은 짐승이 황급히 머리를 흔들고 몸을 추스르며 북쪽을 향해 일어섰다. 검은 짐승이 내디딘 발자국마다 검은 모래가 번져 나오며 티르코네일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밀레시안을 피해 마을 외곽지역까지 몰아넣어 진 검은 짐승은 알비던전의 목책을 뛰어넘어 아본의 기둥을 타고 무너진 유적 꼭대기에 올라섰다.

새하얀 기둥 위에서 등을 둥글게 말아 세운 채 사나운 울음소리로 위협하는 모습은 밀레시안에게 있어서 하찮은 짐승의 그르렁거림이었을 뿐이었다.

기가 차지도 않는 위협에 밀레시안은 쿨타임이 돌아온 신성력을 엮어 여러 개의 바늘을 엮어내었다.

정화시키기 전의 마지막 통보를 전하는 밀레시안은 스파이크를 겨눈 채 저주에게 말을 걸었다. 페리도트 빛 눈동자에 빛이 감돌았다


“이제 그만 포기해.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잖아.”

“도망치는건 내가 아니라 너야, 밀레시안. 나를 원하는것도 너고. 넌 내가 필요하잖아.”


저주는 코너에 몰려서도 지기 싫다는 어투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흔들고 신경질적으로 발톱을 긁어내리는 모양새는 살아 있는 들짐승과 다를 바 없었지만 저주에게는 특정한 형태가 없었다.

그것은 개이기도 했고 고양이기도 했고 너구리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여우였고 들짐승이었다. 그저 네 개의 다리가 달린 것이라면 모든 의태하고 있는 건지 그 모습과 형태는 시시각각으로 모습을 달리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두 개의 페리도트 빛 눈동자. 어둠 속에서 불타오르는 짐승의 안광처럼 저주는 눈 안 가득 밀레시안의 모습을 담은 채 미동 없이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난 저주같은거 필요없어”

“너에겐 어둠이 필요해”“우리들은 어둠을 담아내지 않아.”


밀레시안은 우리라는 단어를 기묘한 것을 뱉어내는 어조로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소울스트림은 밀레시안의 마음 위를 가로지르며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고 저주 또한 그것은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저주는 입을 삐죽거렸고 귀는 신경질적으로 팔락거렸다. 검은 발자국은 착실하게 퍼져 나가며 티르코네일의 전경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맞아, 하지만 아무리 촘촘한 야금 채라도 바닷물을 담아내면 거른다고 말할 수가 없지. 너의 은하수는 악몽은 걸러 낼 수 있지만, 불안감은 그대로 통과시켜버려.”


저주가 빈정거렸다.


“불안감만 걸러져 내려올까? 탐욕, 갈망, 절제하지 못하기도 하고 수치심에 후회를 느끼기도 해. 뿐만 아니라 너는 망설이기도 하지. 

두려워서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웃음으로 얼버무리면서 말이야.”


검은 짐승은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조금 몸집이 불어났고 어색하던 근육의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졌다.

티르코네일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진 밀레시안의 마음속은 고요했고 어떠한 사람이나 짐승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외관적으로 본다면 밀레시안이 재현해낸 마을은 훌륭했다. 수풀은 풍성했고 벽면에선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으며 지나가는 작은 돌조각 하나까지도 원래의 마을의 모습 그대로 닮은 모습, 다른점이 있다면 어느 문도 열려 있지 않았다는 것일뿐. 그저 스쳐 지나가는 길목의 전경처럼 한껏 꾸며놓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는 텅 비워진 마을을 돌아보며 저주는 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속삭였다.


“나는 이 풍경을 이해할 수 있어 밀레시안. 나는 너와 같아. 우리는 빛나고 희소하며 단단하지만, 조금이라도 소홀해지면 쉽게 상처를 받지. 우리들의 영혼은 모두 이 세상의 경계 밖에서 왔고 본능적으로 인간을 원해. 그들을 닮고 함께하고 생활을 공유하며 그들의 눈에 들고 싶어 하는 동시에 그들에게서 탐욕의 눈빛을 봐. 너는 그런 다난들을 경계하지만 동시에 놓칠까 겁을 내고 있지.”

“아니야”


저주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타고 꼬리를 살랑거렸다. 눈꺼풀을 내려 시선을 부드럽게. 교태 있는 몸짓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발놀림으로 기둥의 가장자리를 쓰다듬었다. 기울어진 몸의 곡선이 멋들어지게 드러났다.


“혼자남는건 외로워. 나도 그랬어.”


속내가 뻔히 보이도록 달콤한 목소리였지만 밀레시안은 저주가 말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저주는 밀레시안의 어둠아래로 뿌리를 내린채 문자 그대로 영혼의 기억을 읽어 내리고 있었다. 불안감은 저주의 양식이였고 의구심은 검은짐승을 살찌웠다. 바로 눈앞에서 성장을 거듭하는 검은짐승은 벌써 성체의 크기의 여우의 모습을 흉내 내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곳은 유리한 고지였고 저주가 기둥 위에 올라간 것은 정신없이 쫓긴 결과가 아니었다. 저주는 그 기둥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요령 좋게 발 디딜 곳을 골라 자리에 앉은 검은 짐승은 앞발을 핥는 여유까지 내보이며 꼬리를 흔들어 보였다. 

저주가 웃음 지었다


“우리들은 사람의 필요에 의해 태어났고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밀레시안. 그럼에도 다난들은 너를 상처입혔고 등돌린 뒤 배신했어. 너는 버림받았고 아무도 너와 대화하려 하지 않았지. 지치고 힘들고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 그럼에도 네가 찾아낸건 다난의 온기였어. 두려웠지, 무서웠지. 또 그가 떠나갈까봐”


“너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들이야”


“너는 그를 포기 못해. 동시에 선택하지도 못하지. 너는 경계선에 서서 어느쪽으로 넘어가지도 못한채 머뭇거리고 있어 설령 그 망설임이 관계성을 파멸시키게 된다 하더라도 너는 네 손으로 어느쪽도 선택하지 못할 거야.”


“아니야”“맞아”


저주는 밀레시안의 대답은 애초에 관심이 없었는지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새하얀 기둥은 검은 짐승이 흘리는 모래로 뒤덮였고 모래는 그대로 땅으로 스며들어 밀레시안의 심층부를 향해 뿌리를 뻗었다. 밀레시안의 감정, 밀레시안의 기억, 밀레시안의 비밀. 모든 것을 파헤치는 무례한 방문자의 행패에 밀레시안은 말없이 손을 들어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날을 들이밀었다.


“아니야!”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수십 개의 점들이 기둥 위의 검은 짐승을 노린 채 길게 뻗어 나가는 모습은 놀라움 그 자체였지만 저주는 겁먹은 기색 없이 꼬리를 흔들어보였다.

이미 알아야 할 것은 다 알았다는 얼굴로 저주는 한쪽 눈을 깜빡여 보이며 뿌리 뻗었던 모래를 떨어트렸다. 하얀 기둥은 모래로 둘러싸였지만 모래는 더 이상 꿈틀거리거나 움직이길 기미를 보이지는 않았다. 저주는 밀레시안을 조롱했다.


“내 주인도 그랬어. 그는 인간의 선량함과 자신의 절망속에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태어났어. 만들어졌지. 네가 선택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너를 또다른 선택지로 밀어낼 거야. 

나는 내 주인의 목숨을 삼켜야했고 그런 나를 누군가가 훔쳐내었어. 설령 내가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 공방에서 가지고 나오기 전까지는 나는 아무도 해치지 않은 채 그대로 잠들 수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되지 못했어. 

나는 보석이었고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는데도 사람들은 나를 조명아래 전시했지. 나를 불러낸 건 그들 스스로 선택한 탐욕 이였어.”

“……그들은 네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뿐이야.”


“알지 못했다고? 아니, 사람들은 내가 가는 곳마다 죽음이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를 소중하게 보관했어. 뒷골목의 암시장에서 은밀하게 감춰진 경매장에 들어설 때까지. 

사람들은 내 뒤로 죽어나간 시체를 치우며 아니라고 부정하고 다른 이유라고 생각을 꺾었지. 그들은 희미하게나마, 혹은 확신을 하면서 나를 의심했지만 아무도 나를 깨트리거나 버리려고 하지 않았어. 그래도 그들이 무지하고 무고한 피해자라고 생각해?”


밀레시안은 눈을 깜빡이며 침착하게 생각하기 위해 애를 썼다. 눈앞에 있는 저주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보석의 정보가 맞지 않아 혼란스러워 졌다. 밀레시안의 그림자 아래로 신문지같은 글자들이 떠올랐지만 곧 검은 모래에 잠겨들어 모두 검게 물들어버렸다. 저주는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러면 너는? 너는 어떨까, 너의 작은 기사들은 너와 그 금발기사의 관계성을 정말로 알지 못할까? 너를 주시하는 눈들이 네가 그의 방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할까? 창틀의 구석, 문틈에 쑤셔넣은 슬리퍼 하나까지도 탁탁 털어 가지런히 내려놓을 하얀 샌님은 정말로 불이 꺼진 등불을 살펴보지 않았을까?”


간드러지는 짐승의 웃음소리 속에서 밀레시안은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애를 썼다.

게이트는 언제나 크고 작은 사건들로 시끌벅적한 공간이였다. 눈을 돌리면 쏟아지는 일거리와 발을 딛으면 떨어지는 지령서에 치여 밤이 찾아오는 시간이면 모두 숙소로 돌아가 골아떨어지기 일 수. 밀레시안이 톨비쉬를 찾아가는 시각은 꽤나 늦은 시간대였고 설령 누군가 보았다 하더라도... 아니, 그런게 중요한 사실은 아니였다. 그 누구라도 그들에게 관계성을 명확하게 하라고 강요 할 수는 없었다. 그 사소한 시간에 이름을 붙일 수는...., 틀렸어. 이것도 아니야. 밀레시안은 머리를 흔들며 눈앞에 있는 문제에 집중했다. 손끝이 얼어붙은 아릿함과 함께 머릿속마저 둔해지는 느낌이였다. 검은 짐승이 아쉽다고 속삭이며 작고 귀여운 앞발을 몇 번인가 핥은 뒤 기둥의 가장자리에 나란히 내려놓았다. 

저주는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면 그저 나를 받아들여, 내가 너의 어둠이 되어줄게, 너의 그림자가 되어줄게. 소울스트림이 충족시켜주지 못한 네 어둠을 내가 매워줄게. 

네가 무엇을 원하든 너의 실패는 나의 탓으로 돌리고 너의 두려움은 나의 나약함으로 생각해. 너는 너의 기사를 붙들어 둘 시간을 얻고 나는 나의 악의를 실행시킬 그릇을 얻을 꺼야. 딱 한사람이야. 딱 한사람만 죽여주면 내 어둠은 너의 그림자가 될 수 있어.”


“……”


검은 짐승은 밀레시안의 망설임을 알고 있었고 그 간극을 매우기 위해 앞으로 발을 뻗었다. 그 작은 한걸음에 밀레시안은 본능적으로 손을 앞으로 뻗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닌 거부감과 매스꺼움이 밀레시안의 몸을 뒤로 밀어냈고 검은 짐승은 미소 지었다. 말려올라간 입꼬리가 벌어지며 다시한번 회유의 말을 꺼내보려는 찰나 밀레시안의 귓가에 떠있던 바늘 한 개가 요란한 바람을 일으키며 쏘아져 나갔다.


“아,”

“.......너!!!”


공격할 생각이 아닌 그저 겨누어 위협하려는 움직임 이였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셀레스티얼 스파이크는 밀레시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날아들어 검은 짐승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스쳐지나간 불꽃아래서 날카로운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글거리는 안광이 밀레시안을 쏘아보았다.

밀레시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 눈빛을 마주보려했지만 놀란 가슴이 빠르게 두근거리며 밀레시안의 귓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저주는 한동안 밀레시안을 향해 비난을 퍼붓다가 이를 악물었다. 밀레시안은 침묵을 지키며 뺨에 손을 올렸다. 

거친 비늘이 이질적인 소리를 내며 손톱끝을 울려대었다. 밀레시안은 의지와 상관없이 쏘아져나간 신성력에 이를 악물었다. 저주는 금방이라도 이빨을 드러낼 것같이 으르렁거렸고 밀레시안은 그런 저주의 모습 뒤로 잘그락거리는 마녀의 발소리를 겹쳐들었다.

밀레시안의 눈초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몸이 통제를 벗어나고 있는 감각은 전혀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었다. 저주 모두 동시에 인상을 찡그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안타깝네. 정말 안타까워 밀레시안. 나는 그래도 평화적인 방법을 원했는데. 네 대답이 이런거라니”

“나의 대답이 아니야”

“벌써부터 네 행동에 대한 책임을 나에게 돌리는거야? 말로만 거부하는 것 치고는 적응이 너무 빠르지 않아?

 뭐, 상관없어. 나는 이미 네 근본에 다가서 있어. 네 소원은 나의 소원과 반응하고 있고 마녀가 발라둔 비늘도 곧 모두 벗겨져나가고 말 꺼야”


밀레시안은 비늘의 꺼끌거림을 잊으려 애를 쓰며 머릿속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집중해. 저주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색 불꽃은 녹색의 보석을 강조하며 눈이 아프도록 번쩍거렸다. 밀레시안은 천천히 저주의 빈틈을 찾기위해 손을 움직였다. 생각을 정리하고는 소비해버린 스파이크를 재 소환했다 쐐기들의 표면으로 새하얀 스파크가 일어났다.


페리도트, 이 녹색의 보석을 다듬은 세공사의 3개월 전 날짜가 찍힌 신문에 이름을 올리기 전까진 그렇게 주목받던 세공사가 아니었다. 

짧은 토막기사에서 세공사는 분명 죽었다는 소식을 알리고 있었지만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묘사하고 있지 않았다. 하다못해 그가 음독사를 했는지, 목을 매달았는지, 누군가에게 찔린 것인지, 혹은 병으로 사망했는지. 어떠한 사인도 밝히지 않은 신문기사는 누군가의 통제를 받은것처럼 짧고 간결하며 뒷이야기를 잘라먹은 어정쩡한 모양새였다. 그 달에 죽은 사람이 그 뿐만이 아니었는데도 왜 기자들은 굳이 그의 이름을 따로 빼내어 기사를 써내려갔다. 

사람들이 궁금해 할 만한 기사는 가난한 세공사의 비극이 아닌 귀족 남자의 스캔들 이야기였는데도 그들은 굳이 지분을 할애하여 그의 이름을 휘갈겼다. 


“나는 아무 소원 없어”


밀레시안은 바짝 타들어가는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은 짐승의 시선이 끈덕지게 따라붙어왔다. 

타라는 교황청의 영향권 안 이였고 라이미라크 교환청은 표면적으론 알반에게 호의적인 대상이었다. 밀레시안은 톨비쉬가 처음 알반에 알린것이 라이미라크 교단에서 파견된 봉사자였다고 말했었다. 저주의 쉭쉭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너는 소원하고 있어. 네 스스로도 숨기고 싶어할 만큼. 네가 말했었잖아? 테이블 앞에 앉아서 말이야. 그 방에 누가 있었는지 벌써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밀레시안은 무슨말이냐는 듯 눈썹을 찌푸렸지만 밀레시안의 마음속은 정직하게 저주의 도발에 반응했다. 감추려고 해도 이 곳은 하나의 무대, 이곳에 있는 모든 소품과 장치와 이야기는 밀레시안의 심성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언젠가’


밀레시안은 스쳐지나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묻기 위해 크게 발을 내굴렀다. 천공을 꿰어낼 바늘들은 날카롭게 빛을 내었고 그중 몇몇은 금방이라도 쏘아져 나갈 것같이 요동쳤다. 

검은 짐승은 고통을 두려워하는 얼굴로 자세를 낮추었지만 밀레시안에게서 시선을 때지는 않았다. 어둠속에서 벌려진 입에서 황금색 불꽃이 토해져 나왔다.

어리석은 밀레시안, 나약한 밀레시안. 검은 짐승은 웃으며 꼬리를 바짝 세웠다. 저주가 올라탄 기둥의 표면이 일그러지며 밀레시안과 같은 모양의 입술이 솟아올랐다.

주변을 둘러볼 눈도, 반응을 확인할 귀도 없이 오로지 입만 솟아난 기둥은 내보이고 싶지 않은 진심을 속삭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밀레시안의 손이 기둥을 향해 휘둘러졌다.


“언젠가, 그의 진짜 방에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저주는 비웃었고 그 작고 동그란 검은 머리위로 셀레스티얼 스파이크가 날아들었다. 기둥을 부수어버리는 강력한 위력의 탄환들이 수도 없이 저주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커다란 짐승의 포효소리와 함께 부풀어오르며 먼지속으로 몸을 숨겼다. 거친 콧바람으로 흙먼지를 흩어놓는 저주의 몸 여기저기에서 꽂혀들었던 바늘이 몇몇개 튕겨져 나오며 검은 모래를 쏟아내었다.

밀레시안의 흔들리는 마음을 양식으로 삼아 자라난 검은 짐승은 포만감을 느끼는 건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맛을 다시었다. 

거대한 다이어울프의 크기가 된 검은 짐승은 빛나는 바늘들이 근육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몸을 일으켜 밀레시안과 마주했다. 

찢어진 몸체에선 피 대신 검은 모래가 새어나오고 있었고 아본의 기둥은 작은 돌조각이 되어 검은 모랫속에 잠겨들었다.


“그건 소원이 아니야. 그가 초대하더라도 나는 그의 방에 들어가지 않을 거야”

“네가 이미 드나들고 있는 그 방도 그의 공간이야”


“거긴 진짜 그의 방이 아니야”

“하지만 일부는 그 기사의 개인공간이지”


밀레시안은 부정했고 저주는 강하게 긍정했다.


“그가 앉는 의자, 그가 사용하던 책상, 머그컵 하나, 펜 한 자루. 어느 작은 부분일지언정 너의 기사가 머물렀고 사용하던 공간이야. 그건 그의 일부이고 그의 마음이고 너에 대한 애정이지. 그는 너를 허락했고 네가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어”


밀레시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숨이 조금 가빠지는 느낌이였다.


“그는 알반의, 엘베드의 조장이야”


밀레시안은 눈을 깜빡이며 머릿속에서 톨비쉬의 얼굴을 지워내기 위해 애를 썼다.


“그가 원하는 건 영웅과의 원만하고 친밀한 관계야”

“거짓말, 너는 그가 내민 열쇠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잖아.”


“받지 않았어.”


그는 겨울날, 밀레시안이 방문 앞에서 톨비쉬를 기다리던 그 날. 톨비쉬는 어제에 이어 계속하기로 했던 언어적 대화와 몸짓언어에 대한 설명을 계속하기에 앞서 작은 열쇠를 내밀었다. 따끈한 레몬티 옆에 놓여진 작은 은빛 열쇠를 보며 밀레시안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톨비쉬는 실망했지만 곧 다리를 꼬아 앉으며 소파에 기대었다. 입가에는 괜찮다는 의미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기에 밀레시안은 안심하고 그를 따라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따듯한 레몬 티만큼이나 상쾌하고 다정한 미소. 그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이렇게 할까요?’

밀레시안은 호주머니 대신 등불 안에 열쇠를 넣어놓기로 합의했고 톨비쉬는 밀레시안을 위해 그 등불을 켜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방이 있는 복도는 한층 어두워졌지만 밀레시안은 그 어둠을 핑계로 그의 방을 드나들었다.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것이다. 


“나는 받지 않았어.

“손에 쥐지는 않았을뿐, 사용했잖아?”


한층 힘주어 말하는 밀레시안을 보며 저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짐승의 몸체에서 검은 모래가 한층 더 요란한 기세로 쏟아져 내렸다.


“손에 들어오면 놓쳐버릴까봐 무서웠지? 잃어버릴 것 같아 두려웠지? 그가 언젠가 네게서 손을 거둘까봐 겁이 나니까. 두려우니까. 혹은 네 스스로가 그의 손을 놓아야 할지도 모르니까.”


티르코네일이 검은 모래속에 잠겨들고 있었다.











6.

검은 모래는 쉴 새 없이 쏟아져 밀레시안의 주변은 이미 사막처럼 버석버석한 모래들로 가득 차올라 있었다. 모래는 진흙처럼 발목 잡아끌었고 밀레시안은 그자리에 못박힌 채 가슴위로 손을 올렸다. 

얄팍한 천옷사이로 딱딱하고 넓은 표면의 무언가가 만져졌다. 발레스의 북풍을 품고 있는 매끄러운 표면은 손끝을 데는것 만으로도 입김이 서리도록 싸늘한 느낌을 전해왔다.

밀레시안은 잉크를 엎지른 지도처럼 어둠에 좀먹혀가는 티르코네일을 둘러보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영롱하게 빛나던 소울스트림이 뿌연 먹구름으로 가려지고 있었다. 천둥소리를 동반한 거대한 먹구름은 밀레시안의 머리위에 똬리를 틀고 앉으며 기회를 엿보듯 낮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밀레시안은 고개를 들었고 저주는 그런 밀레시안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천둥이 내리치며 잠시 환한 불빛을 밝히었다. 저주는 다시 회유를 하려는 건지 간들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녹색의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휘었다.


“너는 행복했고 그만큼 불안감을 느끼고 있어. 그런 너에겐 핑계가 필요해. 날 봐. 나를 봐, 밀레시안. 

나는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 낼 수 있고 아무도 너를 나무라지 않을 꺼야. 나는 그와 너를 이어주는 완충제가 되어줄꺼고 나는 너를 대신해서 그를 노려볼 거야. 물론 그가 너를 상처입힌다면, 그리고 네가 나의 칼자루가 되어준다면 말이지만.”


“나는 저주같은거 필요하지 않아”


구름사이에서 요동치는 빛은 낯이 익은 푸른 색이였다. 밀레시안은 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기를 느꼈고 그 열기는 별빛의 생명력과 닮아있었다. 

구름너머에서도 소울스트림은 여전히 빛이 났고 밀레시안은 그 너머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느낌에 정신을 집중했다. 거대한 빛의 창은 구름 속에 몸을 숨긴채 저주의 정수리를 내려다 보고있었다. 


“나는 이미 대답을 정했고 나와 그의 사이에는 명확하게 선이 그어져 있어. 그는 그걸 넘지 않아.”

“너는 넘을 생각이 있고?”


검은 짐승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밀레시안은 생물처럼 움직이는 그것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심해, 너무 한심해. 왜 그렇게 망설이는거야? 누가 너를 금제한다는거야? 그 선은 누가 정했어? 어째서 그런걸 만들었어? 팔리아스로 떠나간 검은 까마귀? 종말을 약속하고 고개를 돌린 붉은 여신? 황금을 품던 검은 빛의 여신은 이미 자리를 비웠고 발없이 그림자를 달리던 하얀 날개의 마신은 너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잖아? 누가 너를 강제한다는거야?”


신성력의 근원이 달라서일까, 저주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여러 신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조롱했다. 밀레시안은 촛점없이 저주의 웃음을 바라보았고 구름은 더욱 거세게 발을 굴렀다. 

별에 안에는 수많은 조각들이 잠들어 있었고 그 안에는 한때 그림자의 경계선을 걷던 아들의 이름 또한 그 안에 들어있었다. 구름은 사방에서 빛을 끌어 모았고 밀레시안은 저주를 노려보았다. 희미하게 오르골 소리가 들리다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이 땅을 떠났다는 것을 알아. 내 주인이 몸소 그것을 증명해 주었지.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착실하게 그들의 의지를 따르고 그들의 사랑을 기도했어. 은혜를, 자비를, 영광을 위해. 하지만 봐, 모두 헛된 일 들이였어. 

신의 은총아래 속삭였던 사랑은 깨졌고 영광의 이름아래 약속했던 영원을 사라졌지. 그는 영원한 삶과 끝없는 행복을 땅같은건 바라지 않았어. 내 주인들이 원했던 것은 한 뼘의 평화와 한 조각의 평안감, 그리고 만족감.”


저주는 끝으로 갈수록 말을 흐리며 쓴 것을 뱉어내듯 이야기했다.


“화합, 사랑. 그래,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녹색의 눈동자에서 잠시 황금색 불꽃이 사라졌지만 곧 다시 기세를 되찾으며 화려하게 불타올랐다. 이계신의 은총이 보석의 눈동자에.  저주는 고개를 비틀어 우두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세를 낮추었다. 

금방이라도 밀레시안에게 달려들 것같은 위협이였다. 티르코네일을 덮은 모래는 밀레시안의 발밑으로 모여들었고 모래들은 밀레시안을 통째로 집어삼킬것같이 소용돌이를 그리며 요동쳤다.


검은 짐승은 더욱 커져갔고 시선은 점점 위를 향해 올려다보아야만 했다. 저주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그것은 짐승의 참회이기도 했고 맹세이기도 했다. 


“나는 사랑을 기만하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기도를 이용해 상대방을 상처입히려는 자들을 증오해. 

들어봐 밀레시안. 나를 가졌던, 이런 모습이 아닌 진정으로 나의 보석을 가졌던 주인이 세 명이 있었어.

내 어린주인은 한 때의 유흥거리를 위해 상처입어야 했고 내 여주인은 남겨진 상처를 비난하는 목소리에 쫓겨 목을 매어야 했어. 나는 마지막 남은 내 주인이 죽음으로 떠밀어지는 것을 방치함으로서 힘을 얻었고 내 주인들을 부순 그 남자를 죽일 것이라 맹세했어. 


그걸 누가 탓할 수 있어? 누가 나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어?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왜 내 주인들이 죽었을 때 나타나지 않았어? 아니, 없을껄. 타라는 우리를 심판할 수 없어. 

신들을 우리를 나무랄 수 없어. 설령 내 복수에 무언가가 더 죽어나간들 그건 내 탓으로 돌릴 수는 없어. 나는 어둠이고 나는 절망이고 나는 원망이며 악의로 가득차있는 저주받은 물건이야. 

그들의 탐욕과 질투로서 나를 불러들였고 그건 그들이 책임져야할 업보야.”


“네 주인이 너에게 복수를 원했어?”

“아니, 원하지 않았어. 내 주인은 나를 사랑으로 두드렸고 아름다움으로 치장시켰지.”


저주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순간만큼은 그 녹색의 보석은 황금색 불꽃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아주 잠시 동안의 망설임 이후 저주는 다시 불을 밝히고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너도 알잖아. 사랑은 집착으로 변질되기 쉽고 아름다움은 욕망을 불러들여. 나는 녹음을 잃었고 녹색의 눈동자를 얻었어. 어둠속에 잠겨들게 한건 타라의 그림자야.”


밀레시안은 입을 다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모래들이 밀레시안의 몸을 타고 올라오며 온몸을 꽁꽁 묶어대기 시작했지만 밀레시안은 그것을 털어내는 시늉조차 하지 않은 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무거운 무게에 몸을 맞겼다.

자라나는 비늘들이 모래가 몸 안으로 파고들어오는 것을 막아내고 있지만 비늘이 자라나는 속도보다 빠르게 모래가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네가 바란다면 내가 너를 도와줄게. 이러한 방식이 아닌 인간의 방식으로. 나는 네 주인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고 네 악의가 향한 인간을 단죄시킬 수 있어. 네 주인의 이름을 저주받은 보석의 세공사로 남길 수는 없잖아?”


“내 주인의 이름?”

“그래, 네 주인의 이름”


구름은 끊임없이 천둥을 외치며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지만 밀레시안은 아직, 이라고 대답하며 비늘 덮인 손으로 가슴속 뿌리박힌 서리의 결정끝에 손을 얹었다. 발레스의 북풍이 밀레시안의 입가를 스쳐지나갔다. 춥고 고단한 바람사이로 옅은 피비린내가 흩어졌다.


“틀렸어. 밀레시안. 나는 선의를 바라는게 아니야. 내 주인을 목매달게 한 것은 착하고도 순해빠진 그 마음씨 때문이였어. 타라의 그 여자도 아들을 위한 시간 때문에 죽어버렸지. 나는 구원이 아닌 파멸을 원해.”

‘모든 것이 끝나버렸으면 좋겠어’


페리도트의 눈동자를 가진 거대한 짐승은 밀레시안의 정수리를 내려다 보기위해 몸을 일으켰다. 처음 작은 들짐승 이였던 저주는 이제 거대한 그리질리 베어의 모습이 되어 밀레시안을내려다보았다. 아직 어둠에 물들지 않은 시드스넷타의 결계가 검은 짐승의 등 뒤로 어른거렸다. 우연히라면 지독했고 의도였다면 아주 똑똑한 선택이였다. 밀레시안은 이 짐승이 먹고자란 것이 자신의 어둠이라는 것을 인정해야했다. 매마른 모래에서 약초향기가 나는 착각이 밀레시안의 머릿속을 흐트러트렸다. 저주는 그르렁거림과 함께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나를 봐. 내 모습을 보라고. 계속 말하고 있잖아. 나를 보고 내가 무엇인지 말해봐. 내가 이렇게 일그러지고 흉측해졌어도 인간들은 나를 사랑해. 내 뒷면에 새겨진 그의 이름을 칭송해. 그가 언제 어떻게 왜 죽었는지는 궁금해하진 않지만 그를 천재라고 부르고 행운을 손에 넣은 사나이라 불러. 그가 죽음으로 발견되고 나서는 분수에 맞지 않은 보석을 손에 넣어 벌을 받은 거라 떠들어.


그런 그들을 무고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그들을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주인의 명예를 되돌려준다는건 네 말대로 무척이나 끌리는 제안이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야. 

정당한 방법, 인간들의 방법.

틀렸어. 밀레시안. 그건 너무나도 옳지 못해. 내 어린주인의 목숨은 그렇게 싼값으로 치러졌는데 어째서 그는 존중받아야하지? 왜 내 여주인은 뿌리없는 소문에 떠밀려 목을 매어야했지? 나는 내 악의가 죗값을 받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그만큼이나 강렬하게 인간들의 도시가 부서지기를 바래. 혼란으로, 공포로, 두려움으로 물들어 모래처럼 스러지기를 바래.


하지만 원하는 모든 것을 바랄 수는 없었잖아.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 하나 찾아내기도 벅차 허둥거렸고 그건 벌써 한번 실패로 돌아갔는걸. 나는 후회해. 후회하고 괴로워하고 있어. 모든 소원을 품지 못해 하나를 포기했는데 그 하나의 소원마저 내가 담아내기엔 내 그릇이 너무 작았어. 왜 좀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왜 좀 더 강인한 숙주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래, 그랬었어. 내 목표가 그였던 건 내 그릇이 작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젠 상관없지.”


어둠은 미소 지었고 녹색의 눈동자는 비틀리며 흔들렸다.

저주는 웃음 지었고 스산한 발레스의 바람이 밀레시안의 뺨을 간질였다.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신성력의 불꽃이 끊임없이 밀레시안의 거울을 두드렸다. 밀레시안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를 뿌리쳤다. 불꽃은 잠시 기세를 늦추다가 큰소리와 함께 가슴을 두드렸다. 천둥이 울리며 귓가가 먹먹하게 먹혀들어갔다.

기세넘치는 천둥소리에 저주는 여유롭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두발로 일어섰던 검은 짐승은 쿵 소리를 내며 앞발을 크게 굴렀다. 입을 벌린 검은 짐승이 밀레시안에게 다가왔다. 

밀레시안은 사방이 깜깜해지는 것을 지켜보며 짐승의 입 안에서 울려퍼지는 목소리에 둘러싸였다. 저주는 밀레시안을 입에 머금은 상태로 대답했다


“신의 힘을 담는 위대한 그릇. 나는 너와 하나가 될 거야.”


“나를 삼킨다고 해서 이 힘이 네 것이 되는 것은 아니야.”

“상관없어. 네가 뭐든, 내가 어떻게되든간에”


저주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모래와 함께 밀레시안을 집어삼켰다. 실체가 있는 몸이었다면 씹거나 입안에서 굴려야 했겠지만 이곳은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

목으로 삼켜내듯이 모래를 쏟아부은 거대한 몸체가 밀레시안을 부숴트리며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푹 하고 형태를 잃고 모래로 돌아간 검은 짐승의 자리로는 밀레시안도 짐승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한박자 늦게 한쌍의 페리도트가 떨어져 내렸다.


가라앉은 사막은 요동쳤고 그 중심에는 녹색의 보석이 있었다. 저주를 중심으로 다시 솟아나기 시작한 검은 그림자의 형태는 짐승의 형태보다는 조금 작았지만 더 이상 네 발달린 짐승이 아닌 두발로 일어선 모습이었다.

어두워졌던 공간으로 붉은 라데카가 떠올랐고 사그라지는 모래사이로 타라의 전경이 펼쳐졌다. 달빛을 가리며 으르렁거리는 하늘을 올려다본 녹색 눈의 여성이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인사했다.


“도시를 무너트릴 만큼은 충분하다고 생각해.”


요동치던 구름사이에서 큰 소리와 함께 벼락이 내리쳤다.











7.

저주에게 삼켜진 밀레시안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흘러가는 유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었다. 백색의 소음처럼 쏟아지는 모래들을 흐르고 또 흘러 어딘가를 향해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시야는 어두웠고 밀레시안이 갖고 있는 단서의 조각은 오로지 검은 모래가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모래, 밀레시안의 본능은 떠오르는 기억을 갈피삼아 그동안의 경험들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하늘을 날았고 바다를 건넜던 기억, 라노의 평원을 날아 펼쳐졌던 무유사막. 결계가 풀려나며 드러나기 시작한 용의 뼈는 분명 흥미로운 장소였지만 지금은 그런 곳에 신경을 팔 시간이 없었다. 밀레시안을 둘러싼 모래는 그 곳의 모래보다 훨씬 가늘었고 격렬하게 움직였다. 

바람에 날려갈듯 가느다란 모래, 론가사막. 거대한 숲을 무너트릴 만큼 보드랍고 고운 모래들은 바람에 날려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을 모래폭풍을 만들어내어 여행자들의 길을 속이고는 했다. 과거를 품은 유적, 일부러 입구를 파내지 않으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게 묻힌 엘프들의 유산은 늘 모래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를 것 같던 엘프들의 유적.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좀 더, 흘러내리고 부서지며 휩쓸려 갈만한 강한 힘.


귓가를 가득 매우는 모래 소리 여행도중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실수했던 기억. 잘못 찾았다고 생각하며 뒷걸음 쳤던 순간, 엘로드가 울렸고 모래가 빨려 들어가던 개미굴의 입구에서의 기억.

밀레시안은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공포, 그 후회감. 언젠가 사막의 개미굴 앞에 섰을 때처럼 후회를 했던 장소가 있었다. 어디서 또 그런 것을 느꼈더라. 소용돌이처럼 흘러가던 모래, 흘러가는 강물, 폭포. 에르케. 밀레시안은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단어를 찾아 눈을 깜빡였다. 모래의 소리를 멈춰있었다.


적막 속에 고개를 드는 밀레시안의 몸에서 검은 모래들의 흩어져 내렸다. 어둠속으로 스며드는 모래들은 밀레시안의 발치에 모여 덩어리를 이루고는 사람의 모습을 빚어내어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웅얼거렸다.


‘죄송해요, 저는 더 이상 용기가 없어요’


밀레시안의 한숨이 서리의 결정으로 얼어붙었다. 아마도 태양이 저물어가는 시간. 옷사이로 바스락거리는 비늘소리가 나는 듯 했다. 본의는 아니였지만 마녀의 저주는 밀레시안의 영혼이 보석의 저주에 흩어지는 것을 강제로나마 막아내는데 일조를 한 모양이였다. 밀레시안의 몸은 거의 다 비늘로 뒤덮였고 목에는 따끔거리는 긴 상처가 나있었다. 꼴은 우스웠지만 결과적으로 검은 짐승의 뱃속에 들어오게 된 밀레시안은 휘파람을 불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운이 좋았다. 그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할 엉망인 결과를 돌아보며 밀레시안은 모래위에 주저앉았다.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던 티르코네일과 다를 바 없이 새카맣고 경계가 없는 모습위로 어스름한 그림자인형이 하나 솟아올라와 있었다. 

밀레시안이 다른 곳에 한눈을 팔고 있는 동안 검은 여성은 용서를 구하는 말을 읊조렸고 곧 울음을 터트렸다. 밀레시안은 검은 그림자로 위로 떠오르는 스크립트를 읽으며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저주의 검은 모래가 퍼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밀레시안은 이 검은 짐승이 품은 원혼이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실감했다. 저주는 능수능란하게 마음속을 파고들었고 타인의 목숨으로 몸을 불리는 것에 익숙했다. 주인이 세 명, 그리고 그들의 목숨을 기반으로 스스로 영혼을 틔운 보석. 밀레시안은 이교도들이 좋은 쟤료를 찾아낸 탓이라고 투덜거리며 검은 그림자가 신발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림자는 보석의 기억이였고 저주의 근원이였다. 아마도 이건 기억의 던전같은 것이겠지. 밀레시안은 오랜 여행동안 쌓아온 경험을 떠올리며 무릎을 두드렸다. 그림자는 느리게 가디건을 얻어 개어놓으며 흐느꼈다. 초조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만 밀레시안은 좀처럼 눈앞의 모노드라마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내 결정을 알아챘을까?

밀레시안은 지금쯤 반신화 상태로 돌입했을 육체를 생각하며 습관적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희미하게 빛을 품어낸 거울에서 서리조각이 얼어붙었다 떨어졌다.

톨비쉬는 좋은 기사였고 밀레시안 또한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가 이끄는 엘베드는 망설임으로 일을 그르칠 어리숙한 조가 아니었으니 아무리 고민하더라도 때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며 밀레시안은 스스로를 설득하며 스크립트창을 두드렸다. 마음속에 들어온 순간부터 도움의 손길을 거부한 자신의 의사를 눈치채지 못할리도 없었다. 맞아, 그는 그런사람이야. 밀레시안은 눈앞에 떠오른 두가지 선택지를 읽어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림자는 계곡으로 보이는 바위 위에서 눈을 가린채 망설이고 있었다.


당신은 어떠할까. 밀레시안은 그림자를 말리는 선택지와 포기하는 선택지 앞에서 다른 고민을 떠올렸다. 이것은 과거의 기억이였고 밀레시안이 개입한다고 해서 결과는 바뀌지 않을 선택지였다. 수많은 일들이 그래왔고 밀레시안 본인의 일도 그러해왔다.

톨비쉬와 밀레시안은 이 일의 끝을 알고 있으면서도 함께 발레스로 찾아왔다.

내 탓이야. 내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싶어서 억지를 부렸어. 거절하려면 거절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몸이 안좋다고 당신의 수완에 맡기겠다고. 그렇게 대답하고서 그 따뜻하고 안락한 방안에 누워 기다리면 되었을텐데. 하지만 밀레시안은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방안에서 풍기는 그 냄새는 분명 그의 것이였지만 그와 마주하고 대화하는 숨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옅은 향기였다. 그가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고 걱정스럽게 매만지는 손길이 좋았다. 네 탓이야. 밀레시안은 무릎을 모아 앉으며 중얼거렸다.


그가 나를 포기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밀레시안은 그런 것은 질문거리도 되지 않는다며 선택지로 손을 뻗었다. 완벽하고 훌륭하신 엘베드의 조장님이 그런 고민을 할 리가. 밀레시안은 어느쪽이 자명한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라며 선택지를 움켜쥐었다. 

그림자가 울음을 터트렸다. 나도 저런 표정일까 하고 멍하니 그림자를 올려다보던 밀레시안은 저주의 말을 인정해야 했다. 저런 모습이겠지. 당연하게도. 

그에게는 의무가 있었다. 그는 저주가 밀레시안의 몸을 차지하기 전에 소멸시켜야 할 의무. 엘베드의 이름.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는 망설임 없이 오염되어가는 육체를 불태울 것이였다.


하지만 톨비쉬로서는? 밀레시안은 괜스래 기울어지는 기대감을 잡아채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영웅은 어둠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밀레시안이 주먹을 말아쥐자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림자가 허공을 향해 뛰어올랐다.

진작 이렇게 결정할 것을. 밀레시안은 포기라는 선택지가 검은 모래로 변하는 모습을 보며 손을 펴보였다. 힘없이 흩어지는 모래가루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다음 기억을 기다렸지만 모래는 한참동안 그 풍경 그대로 굳어있었다. 누군가가 올때까지 기억의 시간이 지날 때 까지. 이대로는 안돼. 밀레시안은 칼리번이 저주를 억제하는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가슴팍을 뒤적거렸다. 

아주 약간의 도움은 받아도 괜찮겠지. 밀레시안은 얼마 없는 힘을 담아 거울 위로 얼어붙은 소리를 입으로 불어 날리고는 가장자리를 쓰다듬었다,

진실을 비추는 겨울마녀의 거울은 바다의 비늘로 뒤덮인 밀레시안의 얼굴을 비추었다. 거울 속에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이유가 단지 그 모습이 흉하기 때문이였을까. 밀레시안은 스스로에게 반문하며 거울을 뒤집어 들었다. 


검은 모래를 비추는 거울은 잠시 어둡게 물들었다가 이내 작은 진동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울의 저편에서 작은 어둠이 고개를 내밀었다. 몽글몽글하고 작은 구체는 힘겹게 거울 속에서 몸을 꺼내려 애를 쓰며 작은 머리를 흔들었다. 

네 개의 다리, 두개의 커다란 귀. 처음 밀레시안이 마주쳤던 작은 검은 짐승의 모습이 진실을 비추는 거울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간신히 거울을 빠져나와 몸을 털어낸 작은 짐승은 잠시 고개를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다가 눈앞에 있는 밀레시안을 올려다보았다.

밀레시안은 말없이 녹색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네가 그 보석이구나”


거울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비추어 낸다. 본체가 어떠한 감정을 품고 어떠한 표정으로 서있든간에 무정하리만치 매몰찬 얼음의 조각은 작고 초라한 페리도트를 토해낸뒤 다시 가라앉았다. 탁한 빛의 하급 보석은 악의도, 갈망도 품어내지 않은 본래의 녹음을 들어 밀레시안과 마주했다.


“내가 그 저주에요”


밀레시안은 옅은 한숨을 쉬며 거울을 뒤집었다. 서리 바람이 뺨을 조금 간질였고 머리가 조금 멍하게 비워졌다. 반신화로 회복되었던 작은 힘마저 다 쏟아낸 영혼은 어딘가가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여서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어서, 이야기의 끝에 있을 보상을 받기위해 밀레시안은 손짓으로 페리도트를 재촉했다.

밀레시안의 예상이 맞다면 이 이야기의 끝에서 받아낼 보상품은 저주의 근원. 원한의 집약체, 세 주인의 영혼을 묶은 원래의 보석임이 분명했다.

밀레시안이 거울을 갈무리해 넣는동안 작은 짐승은 잠시 머리를 털어 생각을 정리하고는 그림자 인형이 있던 장소로 뛰어갔다. 이야기의 시작은 여기가 아닌 좀 더 이전의 시점.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어둠속으로 사라진 소품들 사이에서 보석은 잠시 자리를 고르며 뒤돌아 앉았다. 

페리도트가 밀레시안을 응시했다. 


"나는 32년 전에 태어났습니다.”


모래의 장벽 먼 곳에서 천둥소리가 몰려왔다.








8.

보석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 개의 각기 다른 크기의 그림자가 어둠속에서 솟아났다. 하나는 보석세공사였고 또 하나는 그의 아내였다. 처음 나타난 그림자와 별로 다를 바 없는 모습의 세 번째 그림자는 조금 작아진 모습으로 앞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셋은 가족이었고 보석의 주인들이였다. 보석은 그들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무대 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긴 이야기였고 복잡한 이야기였으며 하찮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좀 더 이전의 역사를 따지자면 가이레흐의 유적지에서 용이 떨어져 내리던 순간에 만들어져 광부의 손에 캐내어졌지만 그때의 떠돌던 세월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기억은 32년 전, 타라의 작은 구멍가게 같은 세공사가 나에게 처음 구매한 순간이였습니다. 그는 언젠가 아내에게 선물할꺼라며 들떠 있었고 나는 어리숙한 세공사의 손끝아래서 나는 하찮은 크기가 될 때 정도로 부서져 내려가며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나의 첫 탄생의 순간 이였습니다."


보석은 미소 지으며 세공사의 기억을 돌아보았다. 행복했던 순간,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을 위해 쪼개어지던 기억. 밀레시안은 그런 페리도트의 미소를 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밀레시안의 가슴위로 푸른 신성력이 불타올랐다. 밀레시안은 낮은 신음소리를 삼키며 기사의 이름을 읊조렸다. 불꽃은 금방 사라졌고 밀레시안은 다시 힘겹게 정면을 응시했다 보석은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가 태어난 후 21년 뒤, 나는 주인의 말대로 새로운 주인의 목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16년 동안같이 살았고 나는 7년 전에 새 주인에게 발견되었지만 서로 침묵을 지킨채 눈을 돌리고 함께 비밀을 공유했습니다. 새 주인은 나를 매우 좋아했고 나 또한 주인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빛을 끌어안았습니다. 내 주인들은 나를 약속이라 불렀고 나는 새로 나를 걸게 될 어린 주인을 마주보며 웃었습니다. 4년전 까지는 말이죠.”


녹색의 보석은 눈을 깜빡인 채 꼬리를 흔들었다. 세 명의 인형중 작은 여성만을 남긴 채 모래들은 쓰러졌고 강물이 되어 흘러가기 시작했다. 혼자남겨진 여성이 얼굴을 묻은채 마른울음을 터트렸다. 


“X월xx일, 여주인이 나를 선물했습니다. 여주인은 나를 걸어주며 속삭였습니다. 그 길에 최선을 다하기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길을 잃지 않기를, 지혜롭게 성실하게 태양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뽐내며 네가 원하는 바를 모두 이르기를. 나는 금이었고 보석이였고 수호와 안녕을 기원하는 태양이였습니다. 내 녹음은 모두 그녀의 길을 비추기 위한것. 손에 꼽던 극단에 들어간다는 희망속에서 그녀는 기뻐하며 나를 어루만졌습니다. 행복했습니다.

나는 어린 주인과 함께 볼 새로운 세상에 설레고 있었고 내 어린주인에게는 잘차려입은 신사가 다가왔습니다. 나는 작았고 그의 어둠은 깊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아름답다고 말했고 재능이 있다고 속삭였습니다.


그건 여름날 이였고 태양이 뜨거웠던 기억은 남아있지만 그녀가 그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그 뒤로 내 어린 주인은 그를 만날 때마다 나를 호주머니에 넣어가곤 했으니까요. 

그가 어떤 말로 그녀를 속이고 꾀이고 기만했는지 나는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녀의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것은 어느 겨울날. 그 망할 자식은 내 작은 아이의 뺨을 때리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발을 구르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재능을 사랑한다 말하던 입은 매도하는 말을 내뱉었고 그의 발걸음은 순백의 마음을 짓밟으며 배신이라는 얼룩을 남기었습니다. 내 어린주인은 순정은 버림받았고 그 사랑은 재물을 탐한다는 오욕을 받으며 진흙탕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그녀와의 시간에 이름붙이기를 거부했고, 거짓된 관계는 그녀에게 가짜라는 낙인을 찍어버렸습니다.”


“가짜?”

“네, 가짜요”


그림자는 또다시 허공으로 뛰어올랐고 모래소리와 함께 스러졌다. 녹색 눈의 짐승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흔들며 눈을 깜빡였다. 보석의 눈앞에 잠시 이질적인 황금색의 불꽃이 타올랐다 사라졌다.


“그는 내 보석 같던 어린주인에게 모조품이라고 부르며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두 번째 인영이 계곡을 향해 걸어 나왔고 무릎을 꿇었다. 세공사의 아내였다.


“내 어린주인은 그렇게 코리브계곡에 몸을 던졌습니다. 아주 춥고 매섭던, 이제 막 겨울이 지나간 초봄의 어느 날. 여주인이 떠준 레이스 가디건을 차마 강물에 내버리지 못해 곱게 접고, 주인이 선물해준 꽃신으로 눌러놓았습니다. 아이는 나를 끌러 가디건위에 올려놓고 울었습니다. 

미안해요 어머니, 더 이상 살아갈 용기가 없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소리 없이 바위위로 올라서 양손으로 눈을 가렸습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까요?

이제 막 녹아 흐르는 계곡의 나뭇가지엔 꽃봉오리조차 맺히지 못했는데. 내 어린 주인은 성급하게 앞을 향해 발을 대딛었습니다. 매정한 강물은 그 작은 몸을 한입에 삼켜버렸습니다. 흘러갔습니다. 

내 주인은 멀리멀리 돌아 사라졌고 남은 옷가지는 이멘마하에 도착해서야 물속에서 떠올랐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험하고 먼 길이였는지는 나중에 내 내가 녹음을 잃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연고 없는 시체가 떠오르고 이멘마하에서 타라까지 연락이 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더 필요한지는 더 이상 헤아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내 여주인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어린 주인이 항상 끼고 있던 가느다란 은팔찌만을 돌려받았고 나는 여주인의 목에 걸린 채 동정하는 근위대장의 표정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어리고 작았던 내 아이. 그 아이의 죽음은 조막간한 신문 칸에도 실리지 못했습니다. 그녀를 버리고 떠난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보기를 원하지 않았으니까요. 내 어린 아이는 그렇게 타라에서 지워졌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꽃을 머리에 꽂고 춤추기를 좋아하고 노래하던 아름다웠던 작은 소녀는 그렇게 여름날이 가시기 도전에 온 에린에서 잊혀졌습니다.

그녀는 어둠속에서 길을 잃은 상태였지만 나는 한 뼘의 길조차 비추지 못했습니다. 내가 작았기 때문 이였을까요? 아니면 내가 두르고 있던 금이 하찮은 금박이였기 때문이였을까요? 

주인은 언제나 울었고 여주인은 울지 못해 가슴을 쥐어뜯었습니다. 여주인은 틈만 나면 코리브 계곡 끄트머리에 올랐고 내 주인은 그녀도 그 바위 위에서 뛰어내리진 않을까 걱정을 하며 쫓아왔습니다.

나는 주인의 걱정을 덜어 줄 수는 없었지만 애초에 그의 걱정은 쓸모없는 것이었습니다. 내 여주인은 뛰어내릴 필요도 없이 이미 강물바람으로 양 폐를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까요

그 차가운 기류는 그녀의 가슴속을 얼리고 부순 뒤 모두 찢어놓았습니다. 여주인은 멎지않는 기침에 괴로워했고 곧 붉은 피를 토해내다가.…”


그림자는 폭죽처럼 터져버리며 어둠속으로 스며들었다. 홀로 남은 검은 그림자만이 외로이 무대위에 서있는 가운데 강물과 옷가지, 여러 나무와 바위들이 모두 어둠속으로 스며들며 그림자의 어두움을 더욱 부각시켰다.


“죽었습니다.”


보석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후회? 동정? 확실하지 않은 보석의 감정 표현에 밀레시안은 눈을 깜빡였다. 

세공사의 그림자가 머리를 감싸 쥐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앞으로 로브를 입은 검은 사제들이 차례로 다가와 그를 둘러쌌다. 보석은 그의 머리위로 뛰어올라가 꼬리를 높게 세웠다. 사제들이 차례대로 다가와 보석을 쓰다듬었다. 보석은 잠시 눈을 감으며 그들의 손길을 받아들였고 다시 뜨는 녹색의 눈동자위에서 황금색 불꽃이 터져나갔다. 모래 속에서 희미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자살 이였습니다. 나를 서랍장위에 내려놓았을때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를 불렀고 그녀는 듣지 못했습니다. 

내가 좀 더 커지길 바랬고 그녀의 시선을 빼앗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녀가 나를 보고 그녀가 혼자가 아니라는것을 떠올리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고 두 손으로는 침대보를 거두어 대들보에 걸쳐 매듭을 만들었습니다. 그녀가 나에게 짧게 인사를 건내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그 아이를 혼자 남겨둘 수 없구나. 

나는 그녀에게 가지말아달라고 말했지만 여주인의 발은 이미 침대 위를 휘젓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잠시 괴로워하며 발버둥쳤지만 그 시간은 기침에 고통스러워 하는 것보단 짧았습니다. 


뒤늦게 침실로 돌아온 내 주인이 절망하며 나를 집어던졌지만 나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고통을 인내했고 나를 부여잡고 우는 주인을 동정했습니다. 아이를 잃은 슬픔에 마음이 먼저 였을까요? 오랫동안 찬바람을 들이킨 육체가 먼저 였을까요? 어느 쪽이 먼저 그림자에 삼켜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주인과 내가 확신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왔던 내 여주인이 축복받은 죽음을 얻지 못했다는 것.


그 불운의 냄새를 맡고 찾아온 들개들이 주인을 둘러쌌고 달콤한 향을 내뿜는 입으로 주인에게 속삭였습니다.”


“이교도들…”


“그들은 주인에게 딸을 되살려주겠다고 했고 아내를 되돌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평생의 이름을 남길 보석을 세공하게 해주겠다고도 말했고 가족을 파탄낸 그 남자를 잡아다 고통스럽게 죽여주겠다고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내 주인은 그 모든 것을 거절하고 울었습니다. 어떠한 것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울며 말했습니다. 내 어린딸은 이 세상의 손가락질을 피하지 못해 강물로 몸을 던졌고 내 아내는 딸아이를 지키지 못한 나에게서 도망쳐 목을 매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내 이기심으로 되돌릴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주인에게 되물었습니다. 그럼 그 남자는? 그 남자를 죽여달라고 부탁하면 되잖아요? 하지만 내 아버지, 아니 내 주인은 심약하고 심성이 고운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복수같은것은 꿈도 꾸지 않고 있었습니다. 스스로가 왜 이런일을 당하는 것인지 누군가를 원망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내 여주인이 사랑하던 라이미라크님, 지금이야말로 그를 구원해야하지 않나요? 내 아이가 가장 좋아하던 이야기의 까마귀 여신님, 지금이야 말로 내 주인의 복수를 응원해주어야 하지 않나요? 나는 소리치고 또 소리쳤지만 아무도 내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내 주인조차 내 외침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죠. 그럴 수 밖에 없었겠죠. 내 목소리는 원한이였고 분노였습니다. 나의 목소리가 그런 청렴한 사람에게 닿을리 없었겠죠. 


그래서였을까요? 나는 곧 사제들의 손에 발견되었고 그들은 나를 들여다보았습니다. 내 안에 담긴 오랜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이 말하기에, 나는 적합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마법을 시험해 볼 기회라고 말하며 나를 내 주인의 발치에 던져졌습니다. 내 주인이 괴로워하는 동안 그들은 내 주변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발치에 무엇이 그려졌고 어떤들이 더 놓여져 있는지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꺼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 그렇습니다. 내 주인은 그들에게 목이 매달려 내 머리위에서 죽었습니다.”


보석은 세명의 사제들을 부수고 무너진 세공사의 모래더미에서 내려왔다. 보석은 낡은 두 눈을 들어 밀레시안을 응시했다. 낡고 흠집이 났으며 색을 잃어가는 불투명한 녹색.

그러나 보석이 눈을 깜빡일수록 녹음은 점점 옅어져가며 기묘한 붉은색으로 번져나갔다.

녹음에 섞인 핏빛은 형편없는 갈색으로 아름다웠던 눈을 물들였고 황금색 불꽃이 번져나고 나서야 보석은 다시 녹색의 눈동자를 뜰 수 있게 되었다.

보석은 저주가 되었고 근처에 있는 모래들을 흡수해 큰 짐승이 되었다. 검은 늑대는 밀레시안의 앞에 얌전히 앉아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의 힘은 원망이었고 절망이었고 통곡의 눈물 이였습니다. 

나는 폭발할 것같이 요동쳤고 내 몸을 구성하기 위해 뿌려진 짐승들의 뼛가루는 너나할 것없이 고통에 아우성쳤죠. 그러나 나는 보석이길 고집했습니다. 그들에게 내 영혼, 아니 나의 이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마 본능적으로 이 모습이 주인을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지켜야할 주인조차 내 손으로 어둠 안에 밀어넣었다는 사실에 오열하며 잃어버린 조각들을 끌어안으며 몸을 웅크렸습니다. 


내 가족, 내 아이, 내 주인. 나는 저물지 않은 황혼아래 빛을 잃고 스러져가는 석영 이였습니다. 돌멩이였습니다. 밤을 물리쳐야 하는 대신 어둠에 삼켜진 나는 녹음을 잃고 뼛가루를 끌어 모았습니다. 나는 크게 자라났고 그렇게 탐욕을 배웠습니다. 

나는 내 주인의 시체아래서 몇 날을 버티었고 몇 밤을 지새웠습니다. 어느 눈 먼 도둑이 내 주인의 공방에 남는 금쪼가리라도 없을까 숨어 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조용히 짐승들의 뼛가루를 잘라붙여 광을 내며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를 찾았고 웃음지었습니다. 나 또한 그를 향해 웃어보였습니다. 그의 탐욕이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습니다.


나는 주인을 고르고 또 바꿔가며 어느 경매장으로 나를 유도했습니다. 화려한 숫자들에 치장되기까지 몇 명인가 나를 훔치기 위해 죽었고 그 보복을 위해 또 죽어나갔습니다. 나는 그들의 목숨을 조금씩 빼앗았고 내 녹색은 좀 더 선명해지고 짙어졌습니다.

내가 어둠으로 빠져들수록 나의 광채는 선명해졌고 사람들은 나를 보며 탐욕을 미소 지었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어쩌면 그 사람이 있을것이라 생각하며 그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담배연기와 향수냄새로 쪄든 어느 지하의 불법 경매장에서 나는 그 겨울의 고함소리와 닮은 박수소리를 들었습니다. 잊을수가 없지요. 내 아이의 뺨을 때릴 때 나던 짤랑이는 박수소리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그 남자가 그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밀레시안이 귀족의 성씨를 이야기하자 보석은 뭐 그랬던 이름이였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보석은 세세한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듯 커다란 귀를 흔들었다. 밀레시안은 그 모습이 어쩐지 낯이 익다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밀레시안이 곧 잘하는 행동이였다.

밀레시안이 불편해 하는동안 밀레시안의 가슴에는 다시 한번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는 자신의 특기를 잘 알고 있었고 밀레시안에게는 그가 필요한 능력이 잠들어 있었다. 아주 약간의 환희가 섬광처럼 스쳐지나가고 실망감이 밀레시안의 미소를 가렸다. 그의 이름 대신 엘베드의 이름을 불렀다. 

틀렸어요. 내가 원하는게 뭔지 알고 있잖아. 밀레시안은 붉게 물든 옷을 내려다 보며 다시한번 그의 손을 밀어냈다. 불꽃은 끈질기게 별의 가슴위에서 타올랐고 서리로 얼어붙은 거울은 조금씩 녹아내려가고 있었다. 데일 것같은 열정에 밀레시안이 괴로운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불꽃를 밀어내는 동안 저주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뒤로 돌아선 짐승의 모습은 좀 더 커졌고 둥그스름해졌다. 저주는 귀족가의 말씨를 흉내내며 새로촘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녹색의 보석이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나는 그 남자를 죽이려 했지만 내 발톱은 그에게 닿기는 커녕 실체화 할 힘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었어. 그는 나를 아내에게 선물했고 답례의 말을 듣기도 전에 방을 나가버렸지. 

아내는 허망한 얼굴로 나를 들여다보았고 나는 그를 쫒아가기 위해 안달이 난 상태였어. 그를 쫓아가, 그의 목을 움켜쥐란말이야. 나는 그렇게 그녀에게 나를 걸라고 유혹했어. 

하지만 그녀는 나를 보기만 하고 있었고 나는 나약함에 치를 떨어야 했지.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나는 이제 소중한 것을 모두 잃었는데 나는 내 의지로 그 방을 걸어나갈 힘조차 갖추지 못했어. 지금 저 무방비한 뒷모습에 날카로운 무언가를 꽂아넣을 수 있다면 나는 내 몸이라도 쪼게어 날을 세울텐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목소리에 반응 할만큼 타락하고 욕심에 눈이 멀어버린 자들을 부추기는 것일 뿐. 그녀는 한동안 나를 바라보기만 했고 눈물을 터트렸어. 

눈물을 맑았고 뜨거웠지. 나는 그녀의 눈물이 나를 녹이는건 아닐까 걱정했고 동시에 그녀가 그의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 


그녀는 내 아이와 다른 장소에 있었을 뿐. 그에게 있어선 자기 아내 또한 가짜에 불과했던거야.

감이언설로 속여 얻은 잠깐의 트로피. 그녀는 순종적이였고 가문의 이름에 얽매여 도망갈 수 조차 없었지. 그런 그가 그녀에게 녹색의 보석을 준 의미는 간단했어. 

시간이 되었으니까, 16년 결혼을 축하하는 보석. 

그녀는 행복대신 나를 목에 걸었고 한동안 그런 모습을 보여줘야 할 의무가 있었어.

나는 탐욕이 아닌 빛을 내는 것에 서툴렀고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지.


하지만 그런 사람의 곁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왔기 때문이였을까? 그녀는 때때로 밤중에 일어나 저택을 돌아다녔어. 부유하는 유령처럼, 하녀들은 돌아다니는 그녀를 못본 척 지나가고 수군거렸지. 어느 날은 정원까지 나가기도 하고 어느 날은 방문을 찾지못해 벽을 보고 서 있었어. 그녀는 때때로 강박적인 모습으로 나를 찾았고 나를 목에 걸고 잠들기도 했지. 나는 내가 뿌리를 내린다면 그녀의 영혼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어. 그녀의 방어막은 아주 약했고 영혼은 곧 깨지기 직전이였으니까.


내가 그녀에게 뿌리내리기로 결정했던 날. 그녀는 평소처럼 잠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어. 나는 내가 사용할 몸이 다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에 잠시 그녀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지.

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았고 화장품을 꺼내어 바르기 시작했어. 습관처럼 굳어진 행동은 그녀의 남편에 취향에 맞춘 고전풍의 화장법이었지. 나는 그런 그녀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속삭이며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내어 보석에서 벗어나 그녀에게 스며들려고 했지. 그녀는 숨이 막혔는지 잠시 행동을 멈추었고 나는 그 틈에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갔어.”


저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때의 충격이란, 저주는 그렇게 읊조리며 눈을 깜빡였다. 꼬리를 흔들었다.

저주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것을 생각해 내야하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몸을 핥았다.


“나는 그녀의 눈을 빌려서야 내 모습을 직접 보았어. 검고 부숭부숭하고, 손도 발도 없지만 몸뚱아리만 있는것도 아닌 존재.  짐승도 먼지도 아니면서 눈의 위치에는 보석이 자리매김하고 있었지. 그때문에 눈이 커다랗게 보여서 엄청 추했어. 더러웠어. 

진실속의 나는 이렇게 보였구나. 나는 녹색이 남지않은 내 모습을 살펴보았어. 나는 웃었고 또 울었어. 거울속의 나의 숙주는 아무런 표정도 지어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검은 짐승은 나를 따라 움직였어. 나는 깨달아야 했지. 아 이게 ‘나’구나 하고 말이야. 

나는 그렇게 나를 자각했고 거울속의 짐승도 같이 눈을 떴어. 

우리는 울었고 그녀는 웃었어. 나의 어둠, 나의 갈망. 나는 그녀의 눈을 빌려 눈물이라는 것을 흘려보았어.“


저주는 킬킬 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광기였고 순수한 악의였다. 조롱하는 웃음을 짓는 짐승은 서글프다는 말을 읊조리며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밀레시안은 금빛으로 빛나는 안광을 마주보았다.


“나는 아직도 내 주인이 나를 만들었을때의 미소를 기억해. 무언가에 집중하는 장인의 눈빛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연삭기도 그의 손길을 막을 수 없고 달아오른 쇳물도 그 열정에 비할 바가 못 돼. 그 정련을 거쳐 세상에 새로운 빛을 흩뿌리는 원석이 나왔을 때, 내 아버지의 미소가 해맑은 어린아이와도 같아 보였지. 그의 미소를 순수하다 말한다면 내 얼굴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나는 나를 마주보는 순간 나의 모습이 부끄러워졌어. 보고싶지 않았어. 여러 손을 거치는 동안 나는 그들의 욕망에 따라 장신을 꺾고 보석을 덧붙였지만 나는 여전히 먼지를 뒤집어쓴 작은 보석이였어. 나는 거울을 닫기 위해 그녀의 영혼을 부수지 않기로 결정했어.

숙주는 아무 말없이 거울을 덮었고 나는 보석으로 돌아갔지. 그녀는 한동안 그대로 화장대 앞에 앉아있었어. 그녀가 어머 내가 왜 거울을 닫았지? 라고 말하며 거울을 다시 연 숙주는 기절했지. 눈물로 화장이 번진 그녀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기절할 만했으니까.


나는 숙주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잠속에 돌아다니는 숙주의 몸에 들어가 통제하는 법을 연습헀어. 그녀는 더 이상 정원으로 나가지 않았고 복도를 배회하지도 않았지. 그녀는 나를 쓰다듬으며 다행이라고 이야기했어.

조금이라도 몽유병이 나아졌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내 덕이라고 여기고 있었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말이였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었던 것 뿐이였거든.

어느 날이 좋은 날. 나는 태양이 떠있는 시간인데도 그녀의 몸에 들어갔어. 그녀는 잠시 외출하기로 되어있었고 그 곳은 내가 잘 알고 있는 거리였어.

내 작은 아이가 뛰어놀던 공연장이 있는 거리. 나는 햇살아래 들어난 나의 모습을 누가 보지 못하게 옷속으로 숨긴채 골목으로 들어갔어. 허름하고 좁은 골목 사이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는 공방거리가 있었고 그 끄트머리에는 그나마 단독으로 떨어져있는 2층짜리 무너져가는 작은 집이 세워져 있었어. 이름없는 세공사의 최후.

그들은 나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르면서도 그가 어떻게 살고있는지 눈여겨 보지 않고 있었지. 그 손이 무엇을 쥐고 있는지 그 발이 땅에 닿아있기는 한지, 그들은 망가진 공방의 덧문을 보고 그저 그가 어디론가 떠났을 것이라 생각만 할 뿐.


나는 공방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숙주는 세간의 눈이라는 것을 의식했고 정신을 되찾았어. 나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려야했어. 불쌍하고 나약한 내 주인, 나의 아버지. 

나는 되돌아가는 숙주의 목을 끌어안고 한참동안 공방을 바라보았어.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 하는 일. 나는 최소한 그들을 안식으로 잠들게 하고 싶었어.


내가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 숙주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어. 숙주는 남편이 화를 낼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었어. 이렇게 멋대로 외출로 돌아다니는 소문이 난다면 그들의 사이는 더 안 좋아질 것이라고 두려워 하고 있었지. 

숙주는 마부를 재촉했고 마부는 성가시다는 듯이 대답했어. 그는 이 이상 빨리 달리면 벌금을 문다고 했고 숙주의 요청을 무시했지. 

하지만 잠시후, 그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곁거울을 통해 애가 타는 숙주의 얼굴을 확인했어. 그리고 그가 속삭였지. 오늘은 팁을 조금 더 주시면 안되냐고 말이야. 

순진한 내 숙주는 이유를 물었고 마부는 실실 웃으며 대답헀어.


요즘들어 자꾸 선물을 사야할 일이 생겨서 피곤하다고 말이야. 

그의 마차에는 안전을 기원하는 매듭이 장식되어 있었고 숙주는 그것을 보고 그에게 아내가 있다고 생각했지. 아내의 생일이냐고 묻는 그녀에게 마부는 인상을 찌푸려 보였지.

그녀가 잘못 추측한 것은 아니였지만 그는 아내의 이름을 불쾌하게 여기는 것 같았어. 얼굴도 모를 그녀를 폄하하고 깎아내렸어. 그의 아내는 그렇게 예쁘지는 않고 고지식할 정도로 성실한 사람이라고. 음식을 잘 만들고 누구에게나 상냥하지만 그냥 순해빠진 멍청이였다고. 


한참을 폭언을 토해내던 그는 아내를 위한 선물이 아니라고 대답했어. 그는 거리를 지나가는 어린 소녀들을 가르켰고 그녀들은 얼굴이 보이지도 않을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마차에서 모두 동일해 보였어. 그는 그 아이들을 어리고 예쁠 것이라고 불렀어. 마치 요정을 지칭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아이들은 작고 반짝이는 것을 좋아한다며 킬킬거렸지.


숙주는 입을 다물었고 고개를 숙인 채 장갑을 맞잡았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울것같은 눈을 감출수 없었거든. 숙주의 생각과 같이 그의 미소는 숙주의 남편과 닮아있었어.

숙주는 몰랐겠지만, 그도 내 어린주인에게 같은 말을 속삭인적이 있었지. 너희들은 작고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지? 라고 말이야. 내 어린주인은 그렇지 않다 라고 대답했지만 그는 나를 트집잡아오며 자신이 선물한 목걸이를 하고 오기를 종용했어.

망설이던 내 아이의 입술처럼 숙주의 입술이 떨려왔지. 나는 조용히 숙주의 몸을 일으켰어.


그리고 마부의 귓가에 속삭였지.

너에게 속은 네 아내가 가여워. 너의 아내가 나쁜게 아니야 멍청아. 그녀를 기만하고 휘두르려는 네가 나빠. 

마부가 갑자기 달라진 숙주의 말투에 놀라 거울을 확인했지만 그곳엔 이미 숙주의 모습이 비치지 않고 있었어. 나의 두 눈이 타오를 듯 뜨거워졌고 나는 발톱을 뽑아 이를 들어냈어.

내 분노는 길고 날카롭게 갈렸고 마차를 뚫을만큼 튼튼하게 뻗어나왔지. 마부는 떨어졌고 마차는 곧 벽에 부딪쳤어. 내 숙주는 그 사고에 휘말려 정신을 잃었고 일어나서 활동하게 되기까지 꼬박 3개월이 걸렸어”


저주는 앞발을 들어 발톱을 내었다가 다시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짐승의 작고 날카로운 날붙이가 아닌 검사들이 쓸법한 기다란 칼날이 발가락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저주는 나른하게 미소지었고 밀레시안은 보석의 모습 그대로 괴물이 되어버린 망령의 모습에 눈쌀을 찌푸렸다. 저주는 웃고있었다. 짐승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X월 xx일, 숙주는 나를 꺼림칙하게 여기며 한동안 나를 가까이 하지 않았어. 그녀는 언뜻 거울에 마부의 곁 거울에 비친 나를 기억하고 있었고 구멍이 뚫린 레이스장갑을 보며 소름끼쳐 했어. 그녀는 나를 장식대에 걸어두었지.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잠시 방황하는 동안 나는 얌전히 그 장식대에 걸터앉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어. 


마부가 죽은것에 대해 아무도 나를, 아니 숙주를 의심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에 안심했지만 나는 그런걸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었어. 

나는 그때 처음 내손으로 직접 따온 목숨의 맛에 취해있었고 그 달콤함을 갈망하고 있었지.

나는 처음 맛본 생명의 맛은 나에게 포만감이라는 것을 알려주었고 나는 좀 더 능숙하게 숙주를 통제할만한 힘이 생겼다는 것을 자각했어. 조금만 더, 라는 갈증이 내 목을 태웠고 나는 조용히 다음 타겟을 물색했지. 


누가 다음 희생양이 될까, 아무래도 좋았던 나는 일단 방을 청소하러오는 하녀들을 살펴보았어. 다른 곳으로 이동 할 수 없었으니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들밖에 없었지. 

그들은 어렸고 끊임없이 조잘거렸어. 언젠가 좀 더 나이많은 하녀가 그들에게 주의를 준 적도 있었지만 숙주가 자리를 비운 방안에서 그들은 아침에 일어난 새들보다 시끄럽게 지즐거렸고 나는 그들의 수다를 모두 귀 기울여 들었어.

일에 대한 푸념, 새로 열린 가게에 대한 호기심, 지워지지 않는 땟자국과 들어가고 싶지 않은 냄새나는 창고에 관한 이야기. 수없이 흘러가는 수다의 바다 속에서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희미한 질투의 향기를 맡았어.


그들은 어느 하녀의 이름을 언급하며 녹색의 불꽃을 피워올렸지. 아름답던 얼굴들이 새카만 어둠속으로 잠겨들었지만 그들중 어느 누구도 거울을 돌아보지 않았어. 

그들은 새빨간 혀를 넘실대며 속삭였어. 약속된 정인과 신분상승을 꿈꾸는 어느 예쁜 하녀의 이야기. 반지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언약은 하늘에서 진흙탕으로. 나는 그들과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고 한층 강렬한 녹색으로 빛을 뿜었지.


이브닝 에메랄드, 한때 어느 시인이 우리들에게 불러준 작고 사랑스러운 별명. 나와는 더이상 어울리지 않았지만 하녀들의 불꽃을 집어삼킨 나는 그때의  모습과 비슷하게 빛을 내뿜었어. 

나는 그 모습이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지만, 숙주가 나를 다시 목에 걸쳤으니 일단 시인의 눈이 틀리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했어.

나는 숙주를 움직여 하녀의 숙소로 다가갔어. 그녀는 여전히 반지를 반대로 끼고 있었고 다른 향수가 베인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지.


왜 그랬을까, 지금도 이유를 모르지만 나는 순간의 충동으로 그녀에게 제자리로 돌아갈 생각이 없냐고 물었어. 그녀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때었고 우물물을 길어올리며 소문일 뿐이라고 대답했지.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남아있는 고급 향수의 향기와 손가락에 걸려있는 싸구려 은반지의 차이를 언급했어.


그녀는 얼굴을 붉혔고 손수건을 감추려는듯 물통을 놓아버렸지. 엎질러진 물이 숙주의 신발을 엉망으로 만들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아하는 것 같았어. 그녀는 숙주에게 마님이 왜 이런 하찮은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지 알 수가 없다며 눈가를 찌푸렸지.


곧 하녀의 신분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당당함 이였을까 아니면 하녀 모두가 알고 있는 숙주의 뒷사정 때문 이였을까. 나는 그녀의 표정을 따라 해보면서 발톱을 꺼내들었어. 

마음약한 숙주라면 거기서 울음을 터트리고 도망갔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니잖아?


나는 망설임없이 숙주의 손을 휘둘렀고 더러워진 손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생명의 감각은 짜릿함을 즐겼어. 길어둔 큰 물통에 피묻은 손을 씻어내리는 동안 나는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어. 눈가를 일그러트리고 있지만 입은 웃고있는 이상한 모습. 나는 이제 숙주의 얼굴표정까지 세세하게 조절할 수 있게 되었고 나는 입가를 어루만지며 표정을 다듬었어.

돌아가기전에 나는 하녀의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빼내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었지. 그 손수건은 기념품이기도 했고 내 숙주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했지. 


숙주는 자신의 화장대에 들어있는 손수건을 보고 놀라 비명을 질렀어. 나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속삭였지. 안녕, 내 허약하고 어리석은 숙주아가씨. 그녀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 방안에서 우두커니 멈춰서서 거울을 보고 있어야 했어.

나는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나의 색으로 물들인 채 목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지. 내 뜻대로 움직여달라고, 내 마음대로 행동해달라고. 그리고 그녀에게 약속했어. 이전 사제들이 내 아버지에게 했듯이.


그러면 내가 너의 남편을 죽여주겠노라고.”


천둥소리가 들려왔고 달궈진 모래의 냄새가 피어올랐다. 어두운 모래안으로 황금색의 불꽃이 고요하게 타오르는 모습을 보며 밀레시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비늘이 떨리며 잔소리를 내었다.









9.

요란한 번개가 어둠을 갈라놓으며 잠시 저주와 밀레시안의 모습을 비추었다.

저주는 음흉하게 미소지었고 밀레시안은 모래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낯선 전격에 낮은 신음소리를 삼켰다.

자신의 신성력을 타인의 몸속에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디에서도 느껴볼 수 없을 것이라며 이를 악무는 밀레시안의 앞으로 어딘지 분위기가 달라진 저주가 고개를 숙였다. 저주는 낯뜨거운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울로 만들어낸 허상 안으로 진짜 검은 짐승의 영혼이 들어왔다. 흔들리는 머리를 따라 금빛 잔상이 일렁거렸다.


“여기에 있었구나, 한참을 기다려도 완전히 흡수가 되질않아서 왜인가 하고 있었는데, 이런곳에 숨어서 한가하게 옛날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니.”

“스파크가 좀 짜릿하긴 했나봐? 모습이 엉망이네?”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위해 한참을 헤매인건지 저주는 조금 흐트러진 모습이였다. 명상을 하는 방법도, 자아를 가라앉히는 방법도 알지못해 일부러 밀레시안의 스파크를 몸으로 맞은 저주는 자신의 안에서 이질적으로 반응하는 신성력을 발견하곤 망설임 없이 제 몸안으로 손을 찔러넣었다.

어차피 한번 더 부서져도 모래에 불과한 것. 저주는 날아드는 칼날아래 너덜해진 몸을 부숴트리며 의식을 자신의 내부로 흘려보냈다.

밀레시안를 찾아낸 저주는 몸이 흐트러지려는 것을 억지로 추스려 모양을 다듬으며 애써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스파크… 그 파르홀론족의 잃어버린 마법이지? 네 기억에서 봤어. 그건.. 그래, 네 말대로 조금 치명적 이였어. 하지만 그것도 이 번 뿐이야.”


너를 찾아냈으니까, 저주는 검에 베인 상처로 너졀거리는 허리를 잡고 일어나며 손을 뻗었다. 금방이라도 쳐내고 싶었지만 사실 밀레시안은 너덜거리는 저주보다도 못한 모습 이였다. 비늘사이에 남아있는 전격에 몸서리 치고 있었고 저주의 의지에 반응하는 모래가 엉겨오는 탓에 무거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최악으로 흘러가는 상황에서 밀레시안은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꽃까지 밀어내야 했다. 그런 어조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말아요.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잖아.


“방해하지 말아요”

“뭐가?”

“별거 아니야. 네가 바라는 것처럼 순순히 몸을 내어주지 않을꺼라는 내용.”


저주는 눈쌀을 찌푸리며 모래를 들어올렸다. 굵은 뱀의 몸뚱이처럼 모래들은 밀레시안의 몸을 꽉 죄여오며 남은 기력을 쥐어짰다. 비늘사이에 남아있던 전격들이 모래를 타고 흘러가 저주의 몸으로 흘러들어갔다. 아주 잠깐뿐인 경직였다.


“헛수고야. 나는 곧 밖으로 나갈꺼고 넌 지금 내 뱃속에 있잖아.”


이건 시간문제야. 저주는 초조하게 덧붙였다.


“그래, 시간문제야. 아주아주 긴 시간문제.”


고통을 인내하는 밀레시안의 입가에선 서리가 머물렀다 사라지기를 반목하고 있었다. 무례한 그리브소리가 밀레시안의 머릿속에서 울려퍼졌다. 밀레시안은 그를 밀어내기위해 거울을 움켜쥐었다.

모래를 짚은 손을 따라 밀레시안의 신성력을 매개로한 거울마녀의 서릿 조각이 모래를 얼려나가며 불투명한 거울을 만들어내었다. 검게 물들어버린 거울들은 사방으로 뻗어나가 불분명했던 경계선을 타고 올라가 천정을 매꾸었다. 저주와 밀레시안은 거울로 만들어진 방에 갇혔고 저주는 그런 밀레시안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매끈한 서리거울 바깥쪽으로 날카로운 얼음가시가 뻗어나갔다.


“나는 너를 가둘 생각이거든. 너에 대해서 듣고 이해하고 너를 내 안에 가둔 채로 네가 부서져나갈 때까지 죽음으로서 너를 붙들어 둘꺼야. 나는 불멸이고 영원한 삶을 살지. 설령 네가 타인의 목숨으로 부터 힘을 얻는다 하더라도 나에겐 상관없어. 나는 무한에 가까운 목숨을 갖고 있고 네가 터져나갈 때까지 이 일을 반복할 수 있어. ”


영원한 삶을 반복하는 존재. 밀레시안은 마치 스스로 빛을 내는것 처럼 몸안에 남은 전력을 흘려내었다. 피뢰침처럼 뻗은 얼음가시를 매개로 다시한번 스파크가 내리꽃혔다. 모래의 속박이 풀어졌다.

검은 거울은 환하게 빛이났고 저주는 온몸이 타오르는 밀레시안을 노려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거울 반대편으로 검사의 그림자가 비쳤다 사라졌다. 밀레시안은 초조하게 그림자를 쫓았고 그에게 나가라고 경고했다. 검사가 검을 들어올렸다. 저주도 움직이는 그림자를 눈치챈듯 빈정거렸다.


“나를 여기 가두어야 한다면 그도 네 안에 갇히게 될 거야. 너는 지금 죽을 수 없어.”

“그는 떠날 꺼야.”


밀레시안은 빠른어투로 받아쳤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모래처럼 떫고 으적거리는 느낌이였지만 밀레시안은 단호하게 마음을 잘라내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는 조금 욕심을 부린 선택지를 붙잡고 있는 것뿐이야.” 


욕심, 어느 쪽이 억지를 부리고 있는지 모를 단어에 밀레시안은 어째서인지 말을 흐리며 다시한번 스파크를 내리쳤다. 정신이 번쩍 드는 짜릿함에 밀레시안이 이를 악물었다. 그림자는 전격에 휘말리지 않도록 거울우리로부터 물러서야만 했다. 

연달아 몸을 태워오는 신의 불세례에 밀레시안의 몸에 돋아난 비늘은 모두 타올랐다. 힘없이 낱장단위로 떨어져나가는 은청색의 비늘들은 거무스름한 잿가루를 날리며 거울위로 흩어져 내렸다. 언뜻 보기엔 지저분한 모습이였지만 하얗게 드러난 피부 위 올라오는 모래가 잿가루를 가리며 밀레시안의 피부를 꼬집었다. 번쩍이는 스파크는 강박적으로 모래를 밀어내며 더 이상의 침범을 저지하려 애를 썼다. 


반신의 힘을 이용하고 있었지만 스스로를 공격하는 막무가내식의 저항이었던 탓에 밀레시안의 체력은 곧 바닥을 드러냈다. 입에서는 단내가 났고 차가운 손발과는 다르게 숨결만큼은 뜨거웠다. 지치고 힘든 상태였지만 그것은 곧 연결되어있는 저주가 빨아들일 힘도 줄어들었다는 뜻이었다.

거울위로 비쳐지는 저주의 모습이 점차 뭉그러지며 짐승의 형태를 띄어가자 저주가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밀레시안은 생명을 꺼트리는 것에 망설임이 없는 눈이었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네.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가장 소홀하게 여긴다니.”


저주는 밀레시안을 조롱하며 모래를 움직였다. 묵직하게 떠오른 모래주먹은 거울을 내리쳤지만 거울은 그대로 모래를 반사해 저주를 후려칠 뿐이였다. 밀레시안은 튕겨내는 것만으로도 벅찬지 격한 숨을 토해내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한번의 기적에 빨려나가는 신성력의 소비량이 생각보다 큰 모양이였다. 거울에선 다시금 푸른 불꽃이 타올랐고 밀레시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바빠죽겠는데 당신까지 성가시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밀레시안은 짜증스럽게 거울을 집어들었다. 바깥에서 불쾌한 기색의 발걸음이 거울을 맴돌고 있었다.


저주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거울을 후려쳤고 밀레시안은 그 공격을 그대로 반사시켰다. 밀레시안을 공격하면 거울은 기적을 잃고 부서지겠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밀레시안이 흡수되기도 전에 소울스트림과 연결될 상황. 

저주는 신경질적으로 한 거울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크리티컬이 터진 스파크가 모래주먹에 실려 저주의 금장식을 불태웠다. 저주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밀레시안을 비난했다.


“이건 불공평해! 넌 이미 나를 이유로 그를 거부하고 있어. 나를 핑계로 네 기사의 마음을 거절하고 있잖아. 너는 내 안에 숨어 눈을 돌리고 있는데 왜 나는 네 몸을 사용하면 안돼?”


“그야 내가 나쁜놈이니까”

“뭐?”

“묻어버릴꺼야. 끝까지 대답하지 않으면 돼. 너의 어둠으로 내 망각으로. 그런 감정같은거 알지 않아도 돼.”


그리고 또 하나의 선택지도. 스파크는 거울에 튕겨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그물을 만들어 검은 짐승을 둘러쌌다. 밀레시안과 저주 둘 모두에게 유효한 공격범위 안에서 저주는 크게 소리질렀다. 천둥과 비슷할 정도로 큰 원망은 어째서인지 낮은 남성의 목소리와 비슷하게 들려 밀레시안의 가슴을 후벼팠다. 그는 나에게 화내지 않아. 밀레시안은 또다른 선을 그어 마음을 잘라내며 손을 움켜쥐었다. 반사된 스파크들이 한점에 모여들었다.


“겁쟁이……!!”


팍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급하게 몸밖으로 도망쳐버린 저주의 모래인형이 뜨거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밀레시안은 급하게 손을 때며 얼굴을 가렸지만 뜨겁게 달궈진 모래는 이미 밀레시안의 몸 전체로 쏟아진 뒤의 일이였다. 화상으로 쓰라릴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잘 구워진 스카하의 비늘은 뜨겁게 튀겨진 모래들에게서 밀레시안은 지켜내며 힘없이 바스라졌다.

아무 쓸모도 없더니 이제서야 보호구실을 한다며 한시름 놓은 얼굴로 비늘을 털어내는 동안 자잘한 천둥소리가 울리며 아직 저주가 완전히 사라진게 아니라는 소식을 전해왔다. 밀레시안은 알고있다고 대답하며 바스라진 모래더미를 응시했다. 남아 있던 모랫속에서 작은 기척이 몸을 일으켰다.


황금빛이 튀어오르던 화려한 보석은 사라진채 다시 작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저주의 근본은 다시 가느다란고 힘없는 목소리로 낮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고통에 신음하는 것 같기도 했고 한순간이나마 다시 저주의 모습이 되었던 자신을 비통하게 여기는 것 같아보이기도 했다. 밀레시안은 검은 거울속에 비치는 수많은 짐승들을 돌아보며 심호흡을 했다. 


“계속해.”


고개를 치켜든 작은 짐승이 남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10.

“그녀는…… 그녀는 저를 믿지 못했고 저는 그녀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가까운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물리적인 거리가 아닌 그녀의 남편과 가까운 사람이요. 저는 그 남자가 귀족이라는 것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설득해야 했고 그들의 완력이나 지위가 죽음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추천에 따라 그 남자의 사촌동생이라는 남자를 찾아 움직였고 그녀는 꺼림칙해하면서도 나를 따라 움직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마차를 탔고 거울을 가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사촌이라는 남자가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의 뒤를 쫓았고 허름한 벽과 어울리지 않은 고급스러운 문을 발견하고는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안은, 말로써 설명하고 싶지 않은 곳이라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유쾌하지 못한 그곳을 지나 사촌남자의 방으로 들어간 나는 그 안의 전경을 보고 쓰게 웃었습니다. 그 남자도 내 아이에게 이런것을 요구했을까요? 남자는 숙주를 보며 어떻게 이런 곳 까지 왔냐며 놀라워했고 곧 숙주를 보며 입맛을 다셨습니다. 이런걸 원하냐면서 말이죠. 나는 아무말 없이 발톱을 꺼내들었고 그는 기절할 듯이 놀라 도망쳤습니다.


소리를 높여 누군가를 부르려했지만 이곳은 원래 그런 곳이었습니다. 누군가 죽어나갈 때까지 신음소리를 높여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 그런 장소였으니까 벽을 긁고 문고리를 잡아 흔드는 그의 행동은 소용없는 짓이였습니다. 나는 그를 향해 발톱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는 지례 겁을 먹고 놀라 자빠지며 이상한 도구에 뒷목을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내 발톱은 그의 얼굴대신 뱃가죽을 조금 긁었을 뿐이고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발톱을 집어넣었습니다.

조금 스친것 만으로도 그의 생명력은 내안으로 흘러들어왔지만 별로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거울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나를 믿을 수 있냐고 물었고 그녀는 파랗게 질린 입술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나는 그곳의 거울을 깨버린 채 그 숨막히는 공간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짙은 꽃향기가 더럽게 느껴졌습니다.


아주 조금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타라의 일대는 쑥대밭이 되어 수많은 근위병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숙주는 겁을 먹었고 나는 개의치 말라며 그녀를 안심시켜야 했습니다. 그녀는 울었고 다행히도 하녀들은 평소의 그녀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던바튼으로 보내고 싶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거래라고 이야기 했고 나도 그를 죽이기 전에 하고싶은 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탈틴으로 출장을 나간 남편에게 편지를 쓰는동안 나는 그때까지도 발견되지 못한 내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일부러 힘들게 구한 허름한 로브를 뒤집어 쓴 다음에야 나는 내가 태어난 공방에 다가갈 수 있었고 녹아내린 내 아버지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근위대의 근처를 서성이며 일부러 가만히 있던 아이에게 무서운 이야기라며 적당히 부풀린 이야기를 흘려놓고서는 자리를 떴습니다. 방울이 하나 따라붙었지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저택안까지 들어 올 수 없으니까요.


탈틴에서 편지가 돌아올때 즈음 신문에는 내 아버지와 그남자의 사촌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이 동시에 기재되어 세간에 알려졌습니다. 나는 어서 아이가 이 도시를 떠나기를 기다렸고 하녀는 아무런 의심없이 그 남자의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도시는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로 넘쳐났지만 아무도 그의 저택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내 아이가 죽었을때도 이 저택은 이렇게 한산하고 조용했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며 숙주를 기다리고 있을때 그녀가 울면서 침대에 쓰러졌습니다.

그녀는 나를 품에 안은채 울었고 나에게 영혼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녀가 육체를 남기고 도망가버린 탓에 나는 스스로 그녀의 육체를 추스려야 했고 편지를 처음부터 읽어야 했습니다.


편지는 달콤하고 아름다운 싯구절로 채워져 있었지만 그 향수는 평소의 것이 아니였습니다. 좀더 농밀하고 질척한 어필을 하는 향수는 어쩐지 그의 사촌의 취향을 닮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필체, 문체. 편지의 머릿글부터 끝까지 그 모든 것은 숙주가 모르는 또다른 사람의 편지였습니다. 서명란을 제외한다면 완전히 다른 사람의 것이였습니다.


그녀는 한번도 이러한 열정이 담긴 편지를 받아본적 없고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대놓고 무시를 받고 홀대받으며 조롱받고 있었던 반면에 한번도 증거가 될만한 물건을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혹여나 나약한 그녀가 증거를 품고 친정으로 돌아갈 것에 대비해 최소한의 주의는 기울였던 남자였지만 이번에야 말로 타라에서 가장 빛날 프리마 돈나의 원석을 발견해 흥분한 나머지 둘에게 가야할 편지를 반대로 보내게 된 것이였습니다. 


나는 그 편지를 들고 숙주가 집으로 돌아간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잠자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나는 녹색이였고 그녀의 눈동자 또한 녹색이였습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을 하나로 모아 어둠속으로 잠겨들었으며 서로에게 웃음짓는 비밀스러운 관계였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이멘마하로 갈 수 있냐고 물었고 나는 긍정했습니다. 나 또한 그가 찾아내었다는 진짜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이웨카가 휘양찬란하게 떴던 그 보름날의 밤. 나는 그녀를 데리고 문게이트의 앞으로 다가가 달에서 떨어진 보석을 향해 말을 걸었습니다. 우리를 이멘마하에 데려다 달라고. 문게이트는 나를 역겹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또한 동시에 동정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별에서 태어났고 그들은 나의 형제였고 자매였습니다. 그들은 더이상은 아니라고 못을 박았지만 그들은 친절하게 나와 숙주를 이멘마하의 서쪽으로 이동시켜주었습니다. 그녀는 처음 사용해 보는 문게이트의 이동에 놀라워하면서도 곧 정신을 차리고 공연장으로 향했습니다.

공연은 이미 끝났고 밤은 깊었지만 나는 극단의 단원들이 곧잘 간다는 술집 근처를 배회하며 작은 소녀를 기다렸습니다.


흥에 겨웠던 술자리는 맑고 청량한 노랫소리로 고조되었고 나는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숙주는 추위에 떨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편지의 향수냄새가 난다고 속삭였습니다. 그녀는 두 눈을 장작삼아 뜨겁게 타올랐고 호수는 고요히 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달이 기울고 나서야 작고 얄팍한 문이 열리며 한 소녀가 고양이 발걸음으로 빠져나왔습니다. 극단주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가수들은 종종 이런 식으로 술자리를 고취시켜 놓고 도망을 나오곤 했습니다. 

아주 잠시동안 나를 가졌던 어느 여배우가 그렇게 뒷골목으로 빠져나가다가 나를 도둑맞았었거든요. 나는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라가 인적없는 호숫가에서 그녀를 불렀습니다.

그녀는 깜짤 놀라하다가 알겠다고 말하며 펜을 꺼내더군요. 그녀는 나를 보고 단순한 팬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폭소를 터트렸습니다.


내 작은아이처럼 어리고 재능있는 아이. 그 아이는 언제부터 이러한 재능을 틔웠을까요? 진정으로 아름다웠고 빛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녀는 오만했죠. 그녀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숙주를 조롱헀습니다. 이렇게 행동력이 뛰어날 줄은 몰랐다고 그런 열정으로 남편을 붙잡았어야했다고 웃으며 편지를 꺼내들었습니다.

원래 숙주가 받았어야 할 편지에는 한줌의 향기도 다정한 말한마디도 들어있지 않은 딱딱한 문체였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함께 던바튼으로 떠나라. 어딜봐도 축객령에 가까운 문장이였지만 나는 침착하게 나는 그녀에게 그 편지를 읽었다면 그에게 처와 자식이 있다는 것을 알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웃었고 편지를 찢었습니다.


그런게 무엇이 중요하냐고. 그녀는 젊었고 아름다웠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였습니다. 세상의 모든것은 그녀를 칭송했고 그녀는 앞으로 나아갈 무대의 불빛에 취해 어둠속에 가려진 나의 손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승리자처럼 웃음지었고 나의 숙주에게 다가왔습니다. 그가 사랑을 속삭인 편지에 화가났나요? 거기에 쓰여진 내 이름이 질투났나요? 당신이 못난걸 왜 나한테 와서 화풀이지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걸고있는 가슴을 쿡찌르며 높은 소리로 웃으며. 

조롱하는 손톱의 끝까지 그녀는 아름다운 색으로 치장하고 있었지만 나는 별로 그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은색의 작은 큐빅을 박아넣은 녹색의 손톱끝에는 날카로운 장식에 찢긴 숙주의 피가 묻어나 있었습니다. 당신도 보고있다시피 녹색은 붉은색과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섞이면 그것이 어떠한 색이였는지도 알 수 없이 엉망이 되어버리지요. 


나는 발톱을 집어넣ᄋᅠᆻ고 그녀를 향해 한걸음 다가가 손을 치켜들었습니다. 그녀는 야만스러운 행동을 하려한다고 불쾌해 했지만 나보다 숙주가 더 빠르게 그 말에 긍정하며 그녀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맞아, 나는 그렇게 행동할꺼야. 숙주는 나의 힘을 이용해 그녀를 집어던졌고 그녀는 호수에 빠져 허우적 거렸습니다. 그녀는 헤엄을 칠줄 몰랐고 다급하게 소리를 높여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밤이 깊었죠, 모두가 잠들었던 시간이였죠. 

나는 돌의 가장자리를 잡으려는 그녀의 손을 밟았습니다. 별로, 그녀의 목숨을 먹고싶지 않ᄋᆞᆻ습니다. 나는 구두의 어느 부분이 가장 뾰족한지 살펴보고 있었고 그동안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갔습니다. 보글거리는 거품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그녀가 호수에 가라앉지 않도록 끌어올렸습니다. 문게이트를 향해 걸어가는 내내 내 숙주는 왜 그녀를 끌어올렸냐고 화를 냈습니다. 그냥 물고기에게 뜯어먹히도록 내버려두라고 원망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죽은 것을 확인하며 대답했습니다. 내 아이가 죽어간 호수에 그런 시체를 빠트려놓고 싶지 않았다고. 숙주는 알듯모를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는 블라고평원 어딘가에 대충 그것을 내버린 뒤 저택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를 죽인 직후부터 숙주는 발작적으로 화를 내다 기운없이 늘어지기를 반복했고 나는 내 힘을 조절하기 곤란해 지쳐가던 참이였습니다. 문게이트는 나에게 두번다시 오지 말라고 경고했고 나는 긍정했습니다. 나에게 이제 죽여야 할 사람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가 돌아오기 전에 나는 먹지 않은 영혼을 대신 할 희생자를 필요로 했습니다. 블라고평원까지 시체를 끌고 가는 것은 생각보다 지치는 노동이였습니다.


낮동안 숙주가 저택에서 지친 육신을 돌보는 동안 나는 종종 달이 가려진 밤을 찾아 저택의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는 욕망의 냄새를 맡았고 질투로 눈먼자들을 찾았습니다. 골목마다 놓여진 저급한 농담을 던지는 자들의 대부분은 내 어린아이같이 어리숙한 소녀들을 꾀어내기에 정신이 없었죠. 나는 하나 둘씩 그런 영혼을 삼켰고 내 뒤로는 철 신발을 신은 발자국소리같은 방울소리들이 따라붙었습니다. 나는 어둠속에 숨어들었고 내가 지나온 자리마다 거울이 깨진 조각들이 떨어졌습니다. 나는 크고 강대해졌고 숙주는 날이 갈 수록 지쳐갔습니다. 


내가 숙주의 영혼을 대신해 움직일 수 있을 때 즈음, 타라에서 그 남자가 돌아왔습니다. 저택의 주변에는 하녀들도 눈치  만큼 많은 기사들이 이 저택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 중에는 당신의 기사도 섞여있었습니다. 


남자는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고 화를 냈고 숙주는 두려워하기보다 나에게 모든 것을 떠맡긴 채 눈을 감았습니다. 나는 드디어 그 순간을 맞이했고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나의 발톱은 충분히 피를 머금었고 그의 목을 꿰뚫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탐했던 탓이었을까요? 

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내 발톱은 그가 데리고 들어온 근위대의 검에 의해 막혔지요. 내가 아무리 발톱을 휘두른 다해도 훈련받은 기사들을 피해 그 남자에게 닿을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이를 악물었고 그 남자는 겁을 먹었습니다. 그는 뒷걸음질 치다가 손에 닿은 아무물건을 집어 들어 나를 향해 던졌습니다. 

내 집에서 꺼져라 이 마물아. 그는 그렇게 말하며 화장대위에 있던 손거울을 숙주의 머리를 향해 집어던졌습니다. 자신의 아내를 향해서 망설임없이 물건을 던진다니, 그런 추례한 반응은 노련한 기사들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였겠지요.


숙주는 그대로 거울을 맞고 쓰러졌고 뒷걸음질 치던 몸은 허망하리만큼 간단하게 창문을 넘어가 쓰러졌습니다. 숙주는 그대로 부서졌고 나는 그녀의 목에 걸린 보석으로 돌아와 숨을 죽였습니다. 다시 기회가 있을 꺼야. 누군가 나를 집어갈 꺼야.

이번에는 힘이 센 기사에게 스며들자. 보석을 가지고 다녀도 의심받지 않을 만큼 높은 사람의 몸에 스며들자. 그렇게 다시 이 저택으로 돌아와 이번에야 말로 저 남자를 죽이고 말리라. 하지만 나의 바람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저택의 소란으로 황망히 달려온 기사들의 사이에는 당신의 기사와 동료들도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당신의 기사는 그 눈부실 정도로 파란 눈으로 정확하게 내가 숨어있는 보석을 집어냈습니다. 빠르게 손수건으로 감싸 다른기사들의 눈으로부터 나를 숨기는 그 솜씨는 인정해야했습니다. 


인적이 드문 담벼락 밑으로 와서야 그는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가 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나는 그를 내 숙주라고 착각했지요. 나를 볼 수 있는 눈은 욕망과 악의, 그리고 광기로 가득 찬 사람뿐 이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달랐습니다. 그는 나를 보고 봉인하라고 말했고 나를 받아든 기사는 어렵지 않게 나를 상자 안에 가두었습니다. 나는 나갈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그대로 작은 나무 상자 안에 갇혀 그의 호주머니 속에 넣어졌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였죠.

 

그는 내가 무엇인지 보고 있었으면서도 나를 거부했습니다. 나를 거절했습니다. 그도, 그의 기사도 어느 누구하나 내가 파고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탐욕을 가진 채 고결할 수 있는 그가 이상한거지 내가 잘못된게 아니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주머니에서 필사적으로 손에 닿는 누군가를 끌어당기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바다의 냄새가 지나고 해묵은 널빤지의 냄새가 날 때까지 나는 그가 쳐놓은 방패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다시 풀과 돌의 냄새를 맡은 것은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였고 새벽의 바람에는 어느 이름 모를 마법이 담겨있었습니다. 

기사는 나를 부순다 말했지만 바다향이 나는 사역마는 그에게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그가 그것을 받아들였는지 어쨌는지는 나는 모릅니다. 그는 나를 방안에 두고 나가버렸으니까요. 그래요, 그건 당신이 오기 바로 직전의 일이였죠.”


보석은 말을 멈추었고 밀레시안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다입니다. 이게 전부에요. 작은 동물은 말없이 밀레시안을 향해 다가와 다소곳이 발을 모아 앉았다.

이야기를 하는동안 페리도트의 기억을 모두 머금은 이 거울조각은 이제 보석의 마음 그 자체였다. 지금 이 작은 생물을 내리치면 그대로 부서지겠지.

데미지의 한계치를 이기지 못하고 저주가 도망갔듯이 이 보석이 부서진다면 이미 한번 데미지를 입은 저주는 제 힘에 못 이겨 폭주하고 말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육체 또한 멀쩡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뭐 어떠한가. 이곳은 발레스의  최남단, 아무것도 없는 실바숲의 한 구석이였다. 힘이 폭주한 검은 짐승이 아무리 날뛰어도 용 한마리 날뛰는 것보다는 덜하겠지.


밀레시안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기사의 그림자를 찾았다. 번쩍이는 번갯불이 거울을 비추었지만 어느곳에도 검고 무거운 그리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검은 짐승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보석을 수령하려는 밀레시안을 올려다보던 페리도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강합니다. 저주는 당신이 생명을 소홀히 한다고 비난했지만 그건 다시말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희생하는것에 주저가 없다는 뜻이겠지요. 당신은 마음을 잘라낼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자신에 대한 통제하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설령 운명이라 하더라도 당신은 자신의 힘으로 그 마음을 꺾고 스스로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이든 사랑이든 간에 말이죠.”

“.....? 지금 누구의 마음을 이야기 하는거야?”


“아니요, 나는 당신에게 묻고싶은 것이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누군가 당신앞에서 죽더라도 지나쳐왔고 한 마을이 날아가도 다시 일어섰으며 도시가 날아가도, 설령 자기 자신이 죽더라도 다시 여행을 계속해왔습니다. 수많은 배신과 의심이 당신을 할퀴어와도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의 위해 또 희생하겠죠.

티끌없이 맑게 개인 하늘 아래 닫혀진 문들과 그 공허한 광장. 놀라운 업적을 지나온 영웅의 마음은 속은 그렇게나 쓸쓸한 풍경이라는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평범한 사람이기를 바라는 나약한 마음은 당신이 가장 따듯하다고 생각하는 마을을 그려내고 있었죠. 이토록 사랑스러운 영혼이 또 있을까요.


마녀의 비늘은 당신을 기만했고 겨울의 거울은 당신을 동정했습니다. 보석은 당신을 겁쟁이라 비난했지만 나는 당신을 강인하다 평가했지요 하지만 밀레시안 이 원망하는 마음은 누구의 것입니까?”


밀레시안은 대답없이 손을 치워 보석을 내려다보았다. 보석은 금이가고 흐려졌으나 황금색의 불꽃은 내보이지 않았다. 벼락이 떨어지고 천둥이 크게 울리었다. 이 보석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걸까. 밀레시안은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마음을 다잡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손을 내밀어도 쳐내기에 급급한 당신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부당하다 여기면서도 사랑스럽다 여기는 이 마음은, 누구의 것입니까?”


보석은 태연한 표정으로 귀를 팔락였다.

거울 속에서 튀어나온 검은 짐승은 서리빛 푸른 결정으로 몸빛을 바꾸며 눈을 감았다. 모래는 서로 엉겨 붙어 커다란 덩어리가 되었고 희미하던 녹음은 붉게 물들었다. 핏빛이 아닌 영혼의 생명력. 약동하는 푸른 불꽃은 밀레시안의 가슴으로 이어져 있었다. 오고가는 생명력을 통해 몸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며 밀레시안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검은 거울에 비치는 주저앉은 밀레시안의 모습만 위로 푸른 신성력의 고리가 떠올랐다.


“어떻게……?”


어떻게 내 마음속인데 탐지에서 벗어 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연결될 수 있었을까. 명확한 자아를 가진 대상끼리 연결되는것은 불가능했고 이 연결은 둘 중 누구의 생명이 꺼져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이 두꺼운 거울넘어로 들어왔다는 것. 거울 어딘가에서 철컥이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돌아간 것이 아니였던건가. 밀레시안은 손바닥처럼 들여다 보여야할 마음속이 검은 그림자로 얼룩진 것을 확인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저주의 말이 옳았다. 

그 그림자는 어둠이였고 좋은 핑계였으며 눈을 가릴 거짓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가장 처음 사용한 것은 밀레시안이 아니였다. 밀레시안은 그가 저주의 어둠을 이용해 자신을 속였다는것에 분개해하며 거울을 내리쳤다. 나갔어야지. 나와 함께 자멸할 생각이 아니라면 내 안에서 떠났어야지. 밀레시안은 차오르는 마나와 생명력따위를 느끼며 거울을 후려쳤다.

천정을 통해 비쳐오는 빛이 밀레시안의 뺨을 쓰다듬었다. 부활을 준비하던 소울스트림은 생각보다 멀쩡한 밀레시안을 보며 조금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부활하면 어떻게 되는거지? 그의 영혼은? 육신은? 소울스트림에 휘말린 다난이 어떻게 되더라?

밀레시안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해집으며 소울스트림을 거절하려했지만 거울의 허상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늦었습니다.”

“뭐..?”

“그가 좀 더 빨랐습니다.”


보석의 말에 밀레시안이 급하게 다시 고개를 들어 천정을 바라보았다. 쿵- 하고 내리쳐진 무언가의 힘에 검은 거울들은 사방으로 은색의 금을 퍼트리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소울스트림의 빛이 갈라졌다.

쿵- 두번째 충격이 여기저기에 있던 균열들사이에서 비틀린 파편이 튀어올랐다. 푸른 불꽃은 더욱 격렬하게 타올랐고 영혼의 흐름들은 와글거리며 옷자락을 거두었다. 체력이 차오르는대신 밀레시안의 신성력은 더욱 빠르게 빨려나갔다. 체력과 마나들은 저주에게 신성력은 불꽃에게. 밀레시안은 오래간만에 몸안의 모든것이 빨려나가는 공허함 속에서 마른 한숨을 내뱉었다.


“     -”


거울의 방이 깨지며 밀레시안의 머리위로 은백색의 별빛이 쏟아져내렸다. 깨어져 나간 페리도트로 부터 휘몰아치는 검은 모래가 넝마가된 밀레시안의 의식을 휘감아 어둠속으로 끌어내렸다. 서리의 거울도, 부서진 마녀의 비늘도, 그림자속에 숨어들었던 톨비쉬의 그리브도 모두 흐르는 모래속으로 뒤섞이며 검은 빛으로 잠겨들었다.


표류하는 밀레시안이 눈을 감으려는 찰나 둔탁한 금속의 빛을 내며 모래를 뚫고 내려온 검은 건틀렛이 밀레시안의 팔을 붙잡았다. 억센 손길로 끌어낸 그의 손아귀힘에 밀레시안은 자기도 모르게 작은 신음소리를 흘리며 팔을 비틀었다. 네반의 빛무리가 두눈을 아프도록 찌르며 차가운 서리바람을 입안 가득 흘려넣었다.


“너무 오래걸려서 데리러 왔습니다”


어디가 어느곳인지 분간이 안가는 새하얀 빛속에서 웅웅 울리는 톨비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1.

“톨비쉬-”


어디있어요? 하고 되묻던 밀레시안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무언가 복슬거리는 것이 잡혔고 밀레시안은 아무런 생각없이 그것을 잡아당겼다.

놀라서 퍼덕거리는 독수리가 허둥지둥 도망쳤지만 용캐도 그 흉흉한 발톱이 밀레시안의 손을 할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깃털을 한 움큼 잡아뜯은 밀레시안이 잠시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찔한 두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닌 밤중의 뜯김에 고통스러워하는 쉬나벨이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크루크를 향해 날아올랐다.

놀란 숨을 몰아쉬는 밀레시안을 마뜩치 않은 눈으로 내려다보며 쉬나벨을 쓰다듬는 크루크가 입을 열었다.


“겨우 깨어난 모양이군. 발레스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오.”


환영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너클을 끼고 있는 발레스의 왕이 퉁명스러운 얼굴을 돌리며 키리네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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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비밀레)페리도트-상-

마비노기/페리도트 2016. 5. 31. 23:24

1.

햇볕이 이제 막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초여름의 날, 밀레시안은 어제 마무리한 보고서를 챙겨들고 방을 나설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조원들의 일정표는 늘 놔두던 탁자위에, 제출해야할 일일 지령서는 맨 뒷페이지에.

방을 나서기전 환기를 깜빡했다며 벗어던진 슬리퍼를 밟은 밀레시안이 발을 질질 밀며 창가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굽이 있는 구두로 바닥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라는 이유였지만 이렇게 꽉꽉 힘을 주어 누르는것과 또각소리를 내며 걷는 것 둘중에 어느것이 더 바닥을 상하게 하는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힘겹게 창문쪽으로 다가간 밀레시안은 잠시 보고서를 내려놓고 팔을 쭉 뻗어 창문의 잠금쇠를 잡아당겼다. 팡하고 조금 힘으주어 창문을 밀어내자 요란스럽게 열어젖혀진 창문 한가득 시원한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팔락이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보고서를 눌러잡고 벌써 그림자가 지기 시작하는 태양빛을 보며 오늘도 덥겠구나 하고 손부채를 두어번 흔든 밀레시안이 괜스래 보고서를 내려다보다가 빙긋이 웃음지었다.

보고서만 주고 나오기에는 조금 아쉬운 날씨. 손으로 톡톡 보고서를 두드리며 방문으로 돌아가는 밀레시안의 입가에는 연신 작은미소가 빙글거리고 있었다.

문을 닫고 열쇠를 걸어잠그던 밀레시안이 머리를 흔들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밖에선 표정관리를 해야지.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홀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밀레시안이 방문 밖까지 끌고나온 슬리퍼를 보고 아차,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가 가까이에 슬리퍼를 꾹꾹 밀어 넣은 밀레시안이 나중에 집어넣어야지 하고서는 닫힌 문의 잠금쇠를 확인하고서는 모르는척 복도를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엉망으로 뭉게진채 복도 구석에 남겨진 슬리퍼위로 먼지 섞인 바람이 흔들렸다.


'바쁘지 않다면 잠시 산책이라도 하자고 말해볼까, 아니면 그냥 방에서 차 한잔 얻어마시며 이야기를 할까. 혹시 바쁘다고 거절하면 어쩌지. 그래도 요즘은 조금 한가해진것 같기도 한데..'


거절할까? 아니면 의외로 받아줄까, 톨비쉬와 잡담을 하는것에 취미를 붙인뒤로 밀레시안은 종종 이런식으로 웃음을 삼키고는 홀로 즐거워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주로 걷거나 이동할때, 혹은 짧은 휴식시간때. 이런저런 생각으로 꽉들어찬 머릿속은 마치 꽃잎과도 같은 팔랑팔랑한 물건으로 가득찬 사탕상자같이 달콤하고 즐거운 소리를 내며 웃음을 흘려대었다.

중간중간 정신차리라는듯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어보지만 포실포실하게 풀린 뺨에는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밀레시안의 미소가 모습을 감춘것은 계단을 한층 올라가고 복도를 지나 꺽인 건물의 끝 부근, 날아가듯 복도를 걸어 도착한 커다란 창문 옆으로 단단해 보이는 재질의 나무문이 햇빛을 받으며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잘 짜여진 나무문 위로 걸린 명패에는 본인이 직접 쓴것같은 화려한필체로 엘베드 라는 문구가.

묵직한 나무문패 위로 비치는 햇빛 주변으로 창밖의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흩어지는것을 감상하던 밀레시안이 다시한번 양뺨을 쓰다듬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헤실거리면서 나왔던 모습과는 다르게 진지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온 밀레시안이 총천연색으로 빛나던 상상들을 치우고 어제와 오늘의 일정을 다시 떠올렸다.

오늘 아침에 회의가 있었던가, 조금 긴가민가해진 밀레시안이 조심스럽게 톨비쉬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한번 노크 한 뒤로 잠시 여유를 두고 뒤따르는 노크소리가 맑게 울려퍼졌다.

짧은 침묵이지만 밀레시안은 방문에 닿은것 만으로도 낯간지럽다 생각하며 괜히 손을 등뒤로 숨기고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가 문을 열어주는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살짝 붉어질것 같지만 티를 내고싶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공무로 온 것이니까- 하고 방금전까지 복도를 걸어오며 무슨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하고 고민하던 사실을 기억속에 묻어버린 밀레시안이 문안쪽으로 귀를 기울이며 방주인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바람소리가 시원하게 복도를 채우며 스쳐지나갔다.


"....."


바람 한번, 한숨 한번, 조금 더 기다려볼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의 침묵이 지나갔다

한걸음 다까이 문에 다가섰지만 두꺼운 나무문 넘어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시한번 회의일정을 머릿속으로 되짚어보지만 딱히 톨비쉬가 어디로 간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던 밀레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한번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문 안쪽은 여전히 침묵, 자신이 기척을 놓친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밀레시안이 임무는 어제 끝났을텐데..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꺼져있는 등불로 시선을 돌렸다.

불투명한 유리안에 놓여진 작은 그림자. 밀레시안은 가볍게 웃으며 다리를 꼬아 앉던 톨비쉬를 떠올리고는 등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전에도 한번 이런 일이 있었지만 등불에 손을 데는것은 이번이 처음.

밀레시안은 긴장이되는지 입술을 꼭 깨물고는 등불의 유리잔을 들어올렸다. 짤랑하는소리와 함께 열쇠가 떨어진다.


"그렇게 밖에 서있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문이 잠겨있었는걸요?"


문 밖에 톨비쉬를 기다리고 서있던 겨울 날, 벽에 기대어 기다리고 서 있는 밀레시안을 보며 허둥지둥 문을 열어주던 톨비쉬가 사과의 의미로 손수 차를 타 내어주던 어느 달 밝은 날의 저녁, 톨비쉬는 연신 밀레시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맞은편소파에 주저앉았다.

피곤하면 그만 갈까요? 하는 밀레시안을 향해 고개를 내젓는 톨비쉬의 미간이 유난히 깊어보였던 날이였다.


"미안합니다. 예정외의 일이 끼어드는 바람에.. 문을 열어두고 갈 껄그랬군요"

"방안에 서류가 많잖아요? 그러면 안되는거 아니에요?"
"여기 있는 서류는 다 잡다한 서류뿐입니다. 진짜 중요한것은 여기서 하지 않아요"

"흐음..."

"아니,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있는 방이 중요하지 않다는건 아닙니다. 다만 음... 당신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는것은 조금 문제가 큰 것 같아요."


엘베드의 조장이 아닌 톨비쉬와의 대화. 밀레시안이 찬찬히 그의 모습을 구경하는 동안 방법을 궁리해내던 톨비쉬는 소파에 편하게 기댄 자세 그대로 다리를 꼬아 앉으며 머그잔을 만지작거렸다.

편하게 보여주는 모습에 밀레시안은 기분이 좋아진나머지 가벼운 미소를 흘리고는 소파에 기대어 누웠다. 왜인지 모르지만 편안하게 지어보이는 밀레시안의 미소에 톨비쉬도 한결 마음이 놓인듯 마주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아직 대화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던 시기의 풋풋함. 톨비쉬는 바닥에 달라붙은 저며진 레몬을 이리저리 흔들다가 테이블로 몸을 숙였다. 다 마신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밀레시안쪽으로 몸을 기울인 톨비쉬의 입가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이렇게 할까요?"


책략가의 귀여운 제안에 밀레시안이 웃음을 터트디려 고개를 끄덕였었지만,


'실제로 사용해 본건 이게 처음이네'


열쇠를 집어든 밀레시안은  손안에서 반짝이는 은색의 금속을 내려다보다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벌컥안에 들어가있으면 더 당황스러워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밀레시안의 손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방문 옆 사용하지 않는 등불안에 열쇠를 넣어놓기로 한 이후, 톨비쉬는 단 한번도 밀레시안과의 약속에 늦지 않고 방으로 돌아와 있었기에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

방문 앞에서 멀뚱히 서있다가 마주치면 오히려 더 어색해지려나, 고민을 하려던 찰나 꺾여진 복도 끝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것은 다수, 톨비쉬는 없는것같은 편안한 말투에 밀레시안은 우물쭈물하던 열쇠를 집어들고 문고리를 돌렸다.

문 앞에 서있는 모습을 본다면 누군가 톨비쉬에게 밀레시안님이 기다리시던데요? 하고 말하곘지. 그렇게 생각한 밀레시안은 가까워져가는 발소리를 피해 빠르게 톨비쉬의 방문 안으로 몸을 숨겼다.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 보다 서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기묘한 관계에 문을 닫고서 잠시 긴장상태로 서있던 밀레시안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얼떨결에 들어온 톨비쉬의 방안은 뜨뜻해진 공기와 함께 톨비쉬의 향이 가득 차 있었다.

마치 품에 꽉 끌어안긴것같은 느낌에 슬쩍 달아오르려는 얼굴을 짝 하고 내리친 밀레시안이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고서는 테이블을 향해 다가갔다.

주인이 없이 닫혀져있던 방안은 커텐까지 내려져 어두컴컴해진 상태. 눈어림으로 소파를 찾아 앉은 밀레시안이 테이블 한 귀퉁이에 사용했던 열쇠와 함께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창문도 안열고 간거면 어제 안돌아왔던걸까. 녹아내린 촛대위의 캔들의 높이를 가늠하며 소파에 편하게 기대어 누운 밀레시안이 늘어지는 하품과 함께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디라고 했더라 탈틴? 아니 타라? 조금 어수선하게 놓여진 테이블 위에는 참고자료로 사용했던 것인지 타라의 일일신문들이 어지럽게 놓여져 있었다.

임무의 시작은 소문부터. 신문에 실릴 정도로 크면서 기사단이 관심을 가질 기묘한 이야기가 있었던가, 신문을 집어올린 밀레시안은 어두운 방안탓에 고개를 바싹들이민채 희미한 글자를 더듬어 신문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충격의 사건, 연달아 발생...]

[범인은 모두 xx가의...]

[의문의 실종사건의 피해자 xx가의 내연녀로 밝혀져..]


1면부터 가득한 커다란 글씨에 밀레시안은 어둠속에서 읽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신문을 접어 뒤집었다.

그렇게 자세하게 읽고싶지는 않은 자극적인 내용들의 연속에 밀레시안은 빠르게 흥미를 잃고는 크게 하품을 내쉬었다. 툭하고 신문을 내려놓는 손길에는 권태로움과 지루함이 가득했다.

소파에 눕고싶지만 참아야했다. 방 주인이 열쇠를 건네주긴 했지만 엄연히 다른사람의 방. 나태하게 풀어지고 싶은 마음을 참아 옆으로 기대어 앉은 밀레시안이 쿠션을 꼭 끌어안으며 신문을 응시했다.

실종과 살인, 음모와 계략. 분명 도시의 안전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흥미로운 사건임이 틀림없었지만 밀레시안에게 있어서는 늘 일상적인 이이였을 뿐.


'게다가 죽음이라니 별로 와닿지 않는걸.'


밀레시안이 다시한번 크게 하품을을 하며 눈을 깜빡였다. 포근한 냄새의 방안에 여름열기로 달아오른 온기는 마치 이불속 처럼 따뜻하고 게으름을 피우기딱 좋은 환경이였다.

얼른 돌아오지 않으려나, 눈을 깜빡이던 밀레시안이 몰려오는 졸음을 피하기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언뜻 보기엔 물건이 많아보이지만 사생활의 물건들은 거의 없는 톨비쉬의 방안.

거의 대부분이 자료에 서류따위의 종이뭉치뿐이지만 밀레시안은 그런 톨비쉬의 방을 좋아했다.

머무르지 않고 잠시 거쳐가는 장소로 사용하는 그 분위기가 밀레시안이 느끼는 게이트의 느낌 그대로를 축소시켜놓은 기분이였다. 언젠가 그가 정말로 머무는 방으로 갈 수 있을까.

거처없이 떠도는 모험가의 눈으로 약간의 동경을 담아 톨비쉬의 책상을 쓰다듬던 밀레시안의 시선은 이제 마룻바닥으로 햇살이 비쳐들어오는 금빛의 선을 따라 시선을 옮긴 밀레시안이 살짝 벌려진 커튼 틈사이로 다가섰다.

조금 퀴퀴한 먼지냄새가 스며든 커텐을 살짝 흔들며 흩날리는 은백색의 먼지를 따라 흥미롭다는듯 고개를 돌리던 밀레시안이 킁 하고 간지러워진 코를 문지르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주 살짝 만졌을 뿐인데도 풀풀날리는 먼지에 밀레시안은 숨을 들이마시지도 내쉬지도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코와 입을 막아눌렀다.

창문, 열어두는것이 좋으려나, 따뜻한 공기탓에 잠이 오는것인지도 모른다며 커텐을 내린 상태 그대로 밀레시안의 손이 창문의 가장자리를 더듬었다. 두꺼운 천 넘어로 더듬는 손길은 어색했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는 창문이였다. 어느 한 부근 즈음에 있을법한 잠금쇠를 찾아 잡아당기자 방에서 그랬던것 처럼 확 하는 느낌과 함께 창문이 열리며 큰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순간적으로 훅 하고 꺼지는 커텐의 큰 움직임에 아 맞다 서류, 라고 생각하지만 날리는 것은 곧 부풀어오르는 커텐은 위로 말려올라가며 커다란 바람의 폭탄을.

펄럭이는 천을 피해 뒤로 물러서려던 밀레시안이 의자의 다리부분에 발이 걸려 넘어지며 쿵하고 책상의 서랍에 머리를 부딪쳤다.

아려오는 뒷통수의  통증보다는 책상이 밀려나진 않았으려나를 걱정하는 자신이 어딘지 처량하지만 그것보다 걱정되는것은 엉망이 되었을것이 뻔한 방안의 상태.

서류가 팔락이는 시원한 바람소리가 마치 여름날의 새소리처럼 잔잔하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제 시간내에 치울 수 있으려나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보지만 의외로 날아간것은 밀레시안의 보고서와 널부러진 신문들뿐.

늘상 있던 일이였는지 서류마다 놓여진 무거운 문진에 밀레시안은 톨비쉬가 당황하며 날아간 서류를 바라보는 모습을 상상하고는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경험하지 않았다면 놓여져 있을리 없는 수많은 누름쇠들을 보며 밀레시안이 작게 낄낄거리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가로 돌아갔다. 철이 되어있는 보고서는 집어들면 되지만 문제는 날아가버린 신문지들.

한 장 한 장 낱낱개로 날아간 싸구려 종이들을 주워모은 밀레시안이 무언가 누를만한것이 없다 테이블을 두리번거리던 도중에 어둠속에 가려져있었던 작고 네모난 상자 하나가 눈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무게가 조금 나가려나? 하고 모아둔 신문지를 테이블에 올려놓은 밀레시안이 상자를 집어들어보지만 실망스럽게도 너무나도 가벼운 무게.

문진으로 쓰기엔 너무 가벼운 탓에 금새 흥미를 잃어버리고 내려놓으려는 찰나, 상자 안에서 달칵 거리는 소리가 밀레시안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


바람이 불어오는 창문사이로 어딘가의 기사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가까워지다가 멀어졌다.

잘못들었나 싶어 상자를 다시 흔들어보지만 역시다 다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벌레..같은건가? 뭔가 잡아놓은것?'


밀레시안이 상자를 들어 귓가에 가져가자 다시한번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상자의 기울임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상자의 크기를 보아 그리 크지 않은 물건. 금속이나 단단한 무언가, 이정도 크기라면...하고 상자를 흔들던 밀레시안이 의식에 흐름에 따라 움직이듯 그대로 상자의 뚜껑에 손을 올렸다.

열어도 괜찮은걸까?  하는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상자를 열어낸 밀레시안이 맞닥트린것은 연녹색의 아름다운 페리도트 한쌍, 원래 하나였던것을 두개로 갈라 낸건지 같은 모양 같은 크기의 보석을 둘러싼 파도모양의 금색 장식이 아름다운 펜던트에 밀레시안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녹색의 눈동자같이 아름다운 컷팅의 보석 한쌍. 햇빛을 받는다면 아마 훨씬 더 아름답게 빛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밀레시안의 머릿속을 지배하며 눈동자위로 녹색의 불꽃을 피워올렸다.

등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할만큼의 깊은 매력이 보석의 안에서 일렁거렸다. 햇빛을 받으면, 그 한마디를 웅얼거리는 밀레시안의 발걸음이 태양빛이 가득한 창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밀레시안?"

방으로 돌아온 톨비쉬가 테이블 앞에 서있던 밀레시안을 불러보지만 듣지 못한건지 어깨를 웅크리고 서 있던 밀레시안은 그대로 몸을 돌려 창가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손안에는 예의 상자가, 녹색으로 빛나는 밀레시안의 눈을 발견한 톨비쉬가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밀레시안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양손으로 보석을 떠받치고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아무리보아도 홀린 상태.

빛나는 보석이 햇빛에 닿기 직전, 밀레시안을 잡아챈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눈을 가린채 태양을 피해 그늘속으로 밀레시안의 몸을 끌어당겼다. 그대로 힘을 잃고 품속으로 무너지는 밀레시안의 눈에서 녹색의 불빛이 황급히 달아났지만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뺨을 두드리는것에 정신이 없는듯 연신 밀레시안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에 무언가 짐작이 가는것이 있는건지 톨비쉬가 상자의 뚜겅을 덮은뒤 방문을 향해 크게 소리를 높였다.

두어번의 부름만에 허겁지겁 달려온 기사들이 마주한것은 정신을 잃은 밀레시안을 안아든 톨비쉬의 분노한 얼굴. 

엘베드의 문패가 비뚤어지도록 쾅 하고 닫힌 방안에 침묵이 내려 앉았다.










2.

"그래서 날 찾아왔다고?"


정신을 잃은 밀레시안을 안아든 톨비쉬가 향한곳은 스카하의 동굴.

험악해진 신의 기사가 내어던지는 보석을 받아든 마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빈정거렸다.

완벽하고 신사적이라고 자랑하던 밀레시안의 꽃빛만발한 묘사와는 달리 스카하의 앞에 나타난 엘베드의 기사는 누가봐도 성이난 뱀의 눈초리를 한 채 동굴속의 마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뻔뻔하게도"
"누가 할소리를 먼저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너에게 말한것이 아니란다 뱀의 기사야. 네가 그렇게 싸고도는 별에게 하는 말이지"


마녀는 차갑게 식은 톨비쉬의 냉소를 쳐내며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정하고 달콤한 사람이라니 이런 남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는 너도 별수 없는 얼간이구나. 속마음을 삼켜보지만 분노의 열기에 타오르는 열정적인 눈을 마주하고 있자하니 몸이 근질근질해진 스카하가 비꼬는 미소를 지으며 톨비쉬에게 손을 내저어보였다.


"지금 네 모습을 저 꼬마가 봐야 내 속이 풀릴텐데. 네 모습을 보려무나. 머리는 차갑게 뱃속은 뜨겁게, 갈길잃은 검을 날카롭게 갈아 품안에 갈무리한 그 모습이 마치 독을 품은 뱀과 같구나. 온기도 없이 차가운 독니만을 깨물며 사냥감을 노리는 꼴이라니. 이리가지도 저리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온몸으로 지키겠다고 똘똘말아놓은 꼴이라니 손도 없이 발도없이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네 모습과 딱 맞는 말이야"

매도에 가까운 도발, 스카하는 말하지 않고서는 못배기겠단 말이지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톨비쉬의 모습을 살폈다.

머리는 차갑게, 손 안은 뜨겁게, 그 말 그대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톨비쉬는 마녀의 도발에도 침묵을 지킨채 밀레시안의 몸을 추스러 안아올리기만 할뿐.

밀레시안이 쓰러진 순간부터 동굴을 내려올때까지 단 한번도 품에서 내려놓지 않은 톨비쉬는 어느때보다도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밀레시안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눈을 감았다.

멀리 톨비쉬를 피해 숨어있던 사하긴들이 흠칫거리며 바위뒤로 숨어들었다.

톨비쉬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편안하게 지껄거리는 걸 보니 미래에도 살아있는 모습을 본 모양이군. 그만 입을 놀리고 저주를 풀어"

"마치 이 일이 내 탓인것 처럼 떠넘기는 느낌인데.."
"그대가 갑자기 요청하지만 않았어도 이 보석은 벌써 파괴되었을테고 밀레시안에게 피해가 갈 일도 없었겠지."


톨비쉬는 더이상의 잡소리는 듣고싶지 않다며 말을 끊고는 스카하를 추궁했다.

톨비쉬의 말 그대로 태양이 뜨자마자 톨비쉬를 찾아온 것은 스카하의 전언을 가진 씨 트롤. 어눌한 말솜씨로 전언을 따라 말하는것이 고작인 트롤을 끼고 대화를 진행 할 수는 없으니 동굴까지 찾아와달라는 정중한 초대에 미심쩍어하면서도 응했던것이 화근으로 톨비쉬는 감정을 감추지도 않은채 냉정하게 선을 그으며 사고에 대한 책임을 요구했다.

'쓸만한'보석을 찾아내어 손안에서 굴려보려고 했던것 뿐인데 쓸데없는 일을 떠맞게된 마녀도 불쾌하긴 마찬가지.

보석이 든 상자와 밀레시안을 번갈아 노려보던 마녀가 목에 달라붙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기고는 허리에 손을 얹은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놓고 약점을 드러내는군 이라고 쏘아붙인 스카하는 1초도 동요하지 않는 톨비쉬에게 재미없는 남자 라고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휘저어보였다.

톨비쉬의 발치에 내던져진 보석상자가 바닷바람같은 끈적한 기류에 휩싸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녀의 손에 안착한 상자가 열리자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금색과 연녹색의 아름다운 광채.

섬세한 보석의 세공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페리도트는 태양을 받아 한층 아름다운 연녹색 빛을 흩뿌리며 썩어버린 동굴안의 선체를 비추었다. 녹음과 황금빛이 섬세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상자속의 세계, 그 안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마녀는 슬쩍 분노에 가득찬 기사를 흘겨보고서는 상자를 닫아 잠갔다.

톨비쉬의 눈썹이 잠깐 꿈틀거렸다


"네 생각이 맞는것 같군. 저주는 보석을 떠났어. 아마 너의 보석안에 잠들어 있는것 같군"
"......"


마녀는 피어오르는 신성력이 불편한지 슬쩍뒤로 물러서며 짜증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첨벙첨벙소리를 내며 튀어오르는 물보라가 톨비쉬의 머리위로 흩뿌려졌다.

이거나 맞고 머리를 식히라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은 행동이였다.


"네게 진정하라는 신사적인 행동을 요구하지 않을것이니까 걱정하지 마렴"

톨비쉬는 마녀의 빈정거림에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을 닦아내었다.

기분이 좋지 않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마녀에게 감정을 드러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뻔히 의도가 들여다 보이는 굳은 표정에 마녀의 입에서 지근지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리고 오기로 똘똘뭉친 아이들같으니라고 마녀가 잠들어있는 밀레시안의 머리위에 손을 올렸다.


"이 꼬마가 잘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참는것이겠지. 분명 날붙이를가지고 살의를 품은 저주이지만 신의 힘을 품은 꼬마만은 못해. 너희에게 하루의 시간을 만들어주마"
"고작 하루?"
"무려 하루 이겠지"


마녀는 톨비쉬의 말투를 흉내내며 눈쌀을 찌푸렸다.

하루, 보석인 상태에서도 기사단 내의 사제들이 저주를 풀어내는것만 사흘이 걸린다고 혀를 내둘렀던 물건이였기에 톨비쉬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인상을 찡그렸다.

영혼의 안에 숨어든 저주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명상, 회한의 동굴? 밀레시안이 아닌 다른사람이였다면 밀레시안의 교감능력으로 찾아들어 갈 수 있다지만 이번엔 본인이 쓰러진 상태였기에 톨비쉬는 아무말없이 움켜쥔 주먹에 힘을 더했다. 강철보다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건틀릿이 괴로운소리를 내며 삐끄덕 거리기 시작했다.


"하루만에 뭘 할 수가 있다는거지?"
"그건 네가 생각해내야지"


마녀는 남의 일이라는듯 평온하게 대답하면서도 밀레시안의 머리에서 손을 치우며 등 뒤로 팔을 돌려세웠다.

우아하게 뻗어진 손끝으로 허공에 있는 그물을 잡아당기자 예의 그 찌뿌둥한 바람과 함께 부서진 나무통 위에 올려졌던 페리도트의 상자가 마녀의 손으로 날아들어왔다.

품안의 밀레시안이 없었다면 금방이라도 목을 베어낼것같은 날카로운 시선을 뻔뻔스럽게 받아내며 보석을 꺼내든 마녀가 양손가득 검은기류를 휘저으며 보석을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가운데 고정된 보석은 내버려둔채 겉을 둘러싸고 있는 황금만.  부서지고 날아가 다시 달라붙기를 반복하며 새로운 모습을 자아내는 신기한 광경이였지만 톨비쉬의 눈에는 쓸데없이 시선을 빼앗는 저급한 쇼와 다를바가 없어 보였다.

밀레시안이 꺠어나있었다면 아마 신이나서 손뼉을 치며 좋아했겠지. 잠시 밀레시안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자 기분이 좋아졌던 톨비쉬가 다시 감겨있는 밀레시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힘을 주었다.

마녀가 손을 얹었던 자리에 남아잇는 푸른 구슬이 밀레시안의 안으로 스며들어가며 양 뺨으로 푸른 색의 비늘 몇장이 돋아났다. 사하긴의 것과 비슷한 비늘이였다.


"만약 하루가 지나게 되면 밀레시안은 저들과 같은 모습이 되는건가?"
"왜? 저런모습의 꼬마는 사랑할 수 없니?"

마녀의 빈정거림에 톨비쉬는 소리없이 입을 뻐끔거리며 밀레시안의 몸을 끌어안았다.

말로 울리는것 보다 영혼으로 와 닿는 분노의 찬 한마디에 마녀는 하, 하고 웃음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는 모습이 아니꼬웠지만 톨비쉬가 무엇이라고 더 말을 붙이기도 전에 금빛의 무언가가 톨비쉬를 향해 날아들었다. 눈앞으로 날아드는 금속의 물체를 보면서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모습에 먼저 멈춰선 것은 날아들었던 물건쪽.

감정없는 조각상처럼 피하지도 잡아내지도 않은채 품에 안고 있는 밀레시안만 지키고 서있는 모습에 마녀는 재미없다며 손가락을 그어 내렸다. 밀레시안의 가슴팍으로 내려앉은 금속의 물체가 은은한 동굴의 조명에 반짝였다.

처음의 줄무늬모양의 황금세공은 밋밋하게 느껴질정도로 화려한 산호의 모양으로 재 탄생한 보석의 모습은 퍽이나 아름다웠지만 톨비쉬는 감흥없이 고개를 돌리고는 이걸로 뭘 어떡하라는 거냐며 눈썹을 치켜올려보였다.

마녀는 센스가 없구나 그런 보석을 보면 선물할 생각부터 해야지 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거라면 그 허영심많은 여자의 눈길을 잠시라도 끌 수 있겠지. 발레스의 여왕을 찾아가려무나. 그 여자가 가지고 있는 거울이라면 아마 꼬마가 드나들 만큼 강력한 것일테니."
"거울을 통해서 자기 자신과 교감하라는 건가. 확실히 그거라면 밀레시안이 명상을 배우지 않고서도 스스로의 마음속으로 들어 갈 수 있겠군.."

하나를 던지면 열을 파악하는 통찰력에 마녀는 교양없이 휘파람을 불며 뱃머리로 돌아갔다. 태양빛아래 푸스름하게 빛나는 마력의 문장이 톨비쉬를 보며 쉭쉭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보였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모습은 하나도 없는 기사님이구나"


얼마나 그 아이 앞에서 가식을 떨었을까, 마녀는 손등으로 입을 가린채 즐겁다는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계속되는 도발에도 톨비쉬는 처음부터 아예 듣고있지를 않은건지 평안하게 밀레시안을 고쳐안으며 보석을 들어올렸다. 푸른 신성력이 빠르게 브로치를 뒤덮었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건 밀레시안이 깨어나 있었을때의 이야기가 아닌가?"


브로치가 안전한 것인지 확인한 톨비쉬가 품안에 보석을 집어넣고서는 다시 밀레시안을 추스러올려며 품에 안았다 살짝 흘러내리는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는 다정한 모습에 동네구경나온 귀족부인처럼 손가락을 까딱거리던 스카하가 무슨말을 하는거냐며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정말이지 종잡을수 없는 아이들, 그렇게 폭소를 터트린 마녀는 톨비쉬에게 손가락을 흔들며 놀리듯 빙글거렸다.


"온갖 똑똑한 모습을 다 보여주더니 이게 무슨꼴이람"


이제와서 도발이 먹히는것은 아니였지만 톨비쉬는 마녀의 손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손길이 밀레시안을 향해 흔들리는것조차 위협으로 느껴지는 공간. 톨비쉬는 너무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생각에 밀레시안을 꽉 끌어안았다. 마법이 들어서인지 왠지 아까보다 따뜻해진것 같지만 톨비쉬는 이곳의 쌀쌀한 바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괜히 의식도 못차리는 사람을 여기까지 데리고온것은 아닌가, 톨비쉬는 조금이라도 더 체온가까이 밀레시안을 바싹 붙이며 마녀를 올려다보았다. 마녀의 새빨간 혀가 요염하게 움직였다.


"그 꼬마를 위해서, 라고 보다는 너를 놀려먹기 위해서 한마디를 보태어주마"
"용건은 끝났다. 그만 돌아가야겠어"

"나라면 그 아이를 그렇게 꽉 끌어 안지 않을꺼야"


마녀는 톨비쉬의 말을 무시한채 밀레시안을 툭툭 가르켜보이며 제 하고싶은 말을 지껄였다.

무슨 말을 하는거냐며 톨비쉬가 인상을 찡그려보이자 마녀는 즐거움을 숨기지 못한채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곧 있으면 그 아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다못해 터져버릴것 같거든"


마녀의 말에 톨비쉬가 천천히 밀레시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톨비쉬의 품 안에는 언제 일어나 있었던건지 새빨갛다못해 울것같은 표정의 밀레시안이 얼굴을 가린채 톨비쉬와의 시선을 마주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깨어났습니까...? 밀레시안, 몸은 괜찮은 겁니까?"
".... .... ...."


방금전까지의 차가웠던 기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다정하고 상냥한 걱정에 마녀는 분위기에 개의치않아하며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가 거슬리는 이유는 밀레시안의 작은 목소리를 가려버리기 때문에, 톨비쉬는 좀더 바싹 밀레시안에게 허리를 숙여 귀를 기울였다. 잠겨있는 목소리가 겨우 그의 귀에 와닿았다.


"내려주세요.."

밀레시안은 부끄러워 죽을것 같은 얼굴을 양손안에 파묻었다.










3.

동굴에서 돌아온 뒤로 한차례 힐러들에게 곤욕을 치르고 난 밀레시안은 지친 몸을 소파에 뉘이며 쿠션속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침에만 해도 이래도 되는걸까 하고 자리에 없는 방주인의 눈치를 살피던 밀레시안이였지만 방 주인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편하게 늘어진 밀레시안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톨비쉬의 모습을 눈으로 쫒았다.

가만히 서있기만해도 마나와 스테미너가 날아가는 감각은 그리 좋지 못했지만 간간히 걱정스럽게 돌아보는 톨비쉬의 눈빛이 나쁘지 않은 느낌이였다.

저주에 걸린것 치고는 너무 평온한 반응, 밀레시안은 오히려 걱정스러워 하는 톨비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그가 내려놓은 브로치를 집어들었다. 황금으로 만든 산호 가운데 놓여진 페리도트는 처음 보았을때 처럼 빨려들것 같은 마력은 남아있지 않지만 어쩄든 아름다운 브로치임이 틀림없었다.

톨비쉬는 가슴과 머리께에 보석을 올려보는 밀레시안을 보며 쓰게 웃었다.

밀레시안이 보석을 내려놓고 톨비쉬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차하면 환생하는 방법도 있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건그렇죠, 밀레시안은 얼마없는 환생의 규칙에 고개를 끄덕이며 톨비쉬의 말에 동의했다.

일주일에 한번, 약간의 변칙성은 있지만 일단 그정도 시간의 텀을 두고, 그리고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다른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고 손에 물건들 을고 있지 않을 것. 왠지모르게 쓸데없이 자잘한 규칙 몇가지중에서 하나를 집어든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양 뺨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톨비쉬의 손끝으로 우둘투둘한 비늘이 탁한 빛을 내뿜으며 자잘한 소리를 내었다.


"일단 오늘 하루는 어떻게인가 버티겠지만 다음날은 안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모르구요. 오늘당장 환생 할 수 없으니 다른방법을 찾아야합니다"
"음...."


죽으면 의식없어도 환생되는데 라는 말을 삼킨 밀레시안이 쑥스러움을 숨기기위해 고개를 돌렸다. 양 뺨에 와 닿은 온기가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지금은 얼굴을 붉힐 타이밍이 아니다.

밀레시안이 손안에서 빠져나가자 너무 지나치게 다가갔다는것을 자각한 톨비쉬가 어색하게 굽혔던 허리를 일으켰다. 밀레시안이 먼저 말을 돌리며 보석을 집어들었다. 저런것을 좋아하는건가 하는 쓸데없는 상념이 톨비쉬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래서, 정확하게 무슨 저주인거에요?"

밀레시안이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을 쓰다듬으며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느긋하게 신문을 읽으며 아침을 먹는 스타일은 아니니 아마도 임무와 관련된 정보. 톨비쉬는 고개를 끄덕이며 접혀져있는 신문 하나를 가르켰다. 페이지수와 문단의 위치, 이 많은 기사들을 다 외우고 있는건지 어렵지 않게 톨비쉬가 말한 기사를 찾아낸 밀레시안이 작게 실린 부고란을 꼼꼼하게 읽는동안 톨비쉬는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헀다.

신문은 각기 다른 연도의 것으로 여러장을 뒤적거리던 밀레시안은 곧 공통된 이름을 찾아 입으로 소리내어 발음했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과 함께 입에서 연녹색의 기체가 콜록 하고 튀어나왔다.

황급히 입을 가리고 톨비쉬의 눈치를 살피지만 톨비쉬는 옷장속에서 무언가를 찾는듯 밀레시안의 이변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 밀레시안의 기침대신 이름은 들은모양인지 옷장에서 무언가를 꺼낸 톨비쉬가 맞습니다 라는 말로 설명을 시작했다.


"x월 xx일, 타라의 한 보석세공사가 집에서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되었고 그의 신변을 정리를 위해 라이미라크 교단에서 봉사자가 파견되어 집을 정리하던 도중 저희에게 연락이 오게된것이 사건의 시작점이였습니다. 작업장의 아래서 발견된 수많은 동물들의 시신들과 타고남은 뼛조각들, 그리고 이교도의 서클링. 직접적인 무력이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우선 루나사조가 먼저 투입이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은 저희쪽으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살인사건때문에요"

밀레시안이 다른 신문을 잡아당기어 펼쳐들었다. 밀레시안이 흥미 없어하던 연쇄살인사건. 신문들중에서 가장 오래된 날짜를 찾는 손길사이로 어느새 다가온 톨비쉬가 한 신문기사를 뽑아주고는 다시 책상쪽으로 돌아가버렸다.


"음... 어떤걸 보라는건지 모르겠어요"
"3면 오른쪽에서 4번째 기사입니다. 마부의 피살사건이요"

연쇄살인의 시작이 어째서 귀족가의 마부에서 시작되는지 밀레시안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얼굴로 고개를 들어보였다. 톨비쉬는 찾아낸 물건을 확인하며 서류더미에서 여러가지를 뽑아내어 한꺼번에 책상위에 펼쳐놓았다. 그의 파란색눈이 바쁘게 책상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고있었다.


"저주의 시작점은 가까운 가족부터 시작되죠. 당시 마부는 길에서 날아든 돌을 맞고 놀란나머지 고삐를 놓친채 마차 밖으로, 이후 지나가는 다른 마차들에게 짓밟혀 죽은것으로 알려졌습니다만.."
밀레시안은 생각보다 끔찍한 디테일이 눈쌀을 찌푸리며 신문을 접어버렸다.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표정을 살피지 못한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체를 확인헀던 서류를 살펴보니 의문이 되는 상처가 있더군요. 어깨서부터 등까지 의문의 줄무늬 8줄"
"줄무늬 8줄?"
그리고 허리에 박힌 손톱자국들"


톨비쉬는 서류를 접어 상자안에 집어넣고서는 다른 몇개의 서류만을 뽑아 봉투안에 집어넣었다. 꼼꼼히 봉하는 손길이 퍽이나 능숙해 보였다.

톨비쉬는 다음 신문기사를 읽으라는듯 날짜를 불러주었다.


"x월 xx일, 같은 집의 하녀가 우물가에서 살해당한채 발견되었습니다. 마부가 사고를 당한지 4개월만의 일이였죠. 괴한에게 습격당했다고는 하지만-"
"얼굴이 끔찍하게 훼손.. 음.. 질이 나쁘네요"
"우물이 있는곳은 외곽지역이긴 해도 저택의 안쪽에 있는 것이였습니다. 하인들의 숙소에는 수도가 연결되지 않아 일일이 길어다녀야하긴 했지만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에서의 괴한이 발견되지 않을리 없지요"

그 다음으로 집어든 기사는 3개월 전의 부고장. 방금전까지 말하던 저택의 사람인듯 같은 이름이 쓰여진 화려한 부고란에 밀레시안은 이사람? 하고 신문기사를 들어보였다. 같은 달에 죽은 보석세공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큰 부고칸에 밀레시안은 자잘하게 적힌 애도의 말을 넘긴채 일어난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주르륵 흘러가는 글자들사이로 제법 쓸만한 정보들이 나오자 밀레시안의 눈이 가늘게 뜨여졌다. 톨비쉬가 서류를 담은 상자를 다시 옷장안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x월 xx일, -- 사교클럽의 비밀방 안에서도 줄무늬상처에 죽은 사람이 나타났죠. 피해자가 귀족이여서인지 타라의 근위대도 제법 빠릿하게 움직였던 사건이였습니다. 다만 장소가.."


장소의 이야기가 나오자 톨비쉬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두드렸다. 순진한 얼굴로 장소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밀레시안을 보며 쓰게 웃은 톨비쉬가 얼버무리려 하지만 밀레시안은 사교클럽이라는 글자를 톡톡 두드리며 뜻밖의 말을 꺼내었다. 

"이 사교클럽 알아요. xx에 위치한 xxxx전용 클럽 맞죠?"

"....."


톨비쉬의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밀레시안은 아닌가? 하고 말똥히 고개를 들어올릴뿐. 어디서 들었냐는 톨비쉬의 목소리고 조금 낮게 들렸는지 밀레시안은 조금 주눅이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 베안루아에서 들었는데.."

".....누구한테서요"
"....루카스..."
"당분간 그 사람 가까이 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톨비쉬가 눈을 흘기는 모습에 그럼 나는 정보를 어디서 얻어요 라고 웅얼거리는 밀레시안이 슬쩍 입을 다물며 신문을 내려놓았다. 읽은 신문은 제자리에. 반듯하게 접어 신문을 쌓아놓는 밀레시안을 보며 톨비쉬는 한번더 확인해야겠다는건지 다시한번 그 클럽에 대해 물어왔다. 교묘하게 주어를 가리긴 했지만 밀레시안은 그가 왜 그렇게 클럽의 이름을 싫어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또박또박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뭐라고 들었습니까?"
"별 말 없었어요 .질이 안좋으니 혹시 누가 권하더라고.. 음.. 아니에요.  권할 만한 사람 가까이 간적도 없으니까..!"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이럴때 쓰는 말일까. 마치 스카하의 앞에서처럼 잔뜩 날이선 톨비쉬의 눈빛에 밀레시안은 정말이라니까요 하고 다리를 모아 올리며 쿠션의 뒤로 숨어들었다. 톨비쉬가 밀레시안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끄응하고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내밀 손을 맞잡은 밀레시안이 불쑥 잡아당기는 손의 힘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션을 소파위에 던져놓는 밀레시안에게 톨비쉬는 두툼한 코트를 내밀었다.

밀레시안이 이건 왜요? 하며 로브를 받아들자 톨비쉬도 똑같은 로브를 꺼내들고는 여신의 날개 한장을 꺼내들었다.


"발레스로 갈 겁니다. 저도 함께요"

톨비쉬는 책상에서 꺼낸 고급스러운 나무상자에 보석을 넣고는 로브의 안쪽주머니에 안전하게 집어넣었다.

한손에는 서류봉투를 다른 한손에는 밀레시안의 손을 신성력으로 피어올린 불꽃에 날개가 녹아가는것을 지켜보며 밀레시안의 손을 맞잡은 톨비쉬가 좀더 가까이 붙어달라고 요청했다. 밀레시안이 한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남은 이야기는 발레스로 가서 이야기 하죠. 그리고 당분간 베안루아는 가지마세요"
"에-"


밀레시안이 불만스럽게 고개를 흔들었지만 톨비쉬는 굳게 밀레시안의 손을 한번 움켜쥘분. 여신날개의 빛이 두사람을 감싸자 따뜻했던 여름의 햇살사이로 차가운 설원의 북풍이 스며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적인 비밀방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근위대는 범윈이 귀족이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저희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였지요. 근위대 자체의 감시망과 함께 루나사조의 첩보조도 클럽에 관련된 귀족들 중에서 살인사건을 일으킬만한 사람을 추려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클럽 안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 11명, 죽은 피해자까지 12명이였지만 자살은 아니였으니까요. 여성 6명에 남성 5명. 혹시나하는 가능성도 있었지만 목이 부러져죽은 것을 감안하니 자연스럽게 시선은 5명에게 쏟아졌습니다"
"그럼 범인이 여성이였어요?"

성급한 밀레시안의 질문에 톨비쉬는 대답대신 밀레시안의 모자를 덮어씌워 준뒤 뺨을 쓰다듬었다. 찬 바람이 비늘에 닿아 차가워질까 노심초사하는 그의 모습에 밀레시안은 조금 부끄러운듯 얼굴을 붉혔다.

톨비쉬는 잠시 다정하게 마주웃다가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x월 xx일, 블라고 평원의 익사체가 발견되었죠."
"날짜별로 신문기사를 다 외우고 있는거에요?"
"음? 그 편이 더 간단하지 않습니까?"


감탄하는 밀레시안을 보며 톨비쉬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래 이 사람 그런쪽 사람이였지 밀레시안이 미묘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채 설원에 내려선 밀레시안은 뽀드득거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톨비쉬의 발자국을 따라 걷기시작했다. 발레스 마나터널보다도 훨씬 먼곳에 내려진 탓에 어느정도 걷지 않으면 안되는 미묘한 위치였지만 덕분에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생겼다고 여기는 밀레시안이 가까스로 톨비쉬의 걸음을 따라잡으며 손을 뻗어잡았다.

일부러 밀레시안을 기다리며 발걸음을 늦췄던 톨비쉬의 입가에 미소가 잠깐 떠올랐다가 슬며시 모습을 감추었다.

후드사이로 얼굴을 가리는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손을 꽉 쥐어왔다.


"블라고 평원에서 발견된 아가씨는 한참 공연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던 극단의 유망주였습니다. 사건의 당일날에도 이멘마하의 공연장에서 주연으로 올라갈 프리마 돈나였죠. 하지만 그날 새벽 레자르 양조장의 일꾼이 주변을 돌던 도중에 발견하고 근위대에 신고하는 바람에 일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불미스러운곳이긴 하지만 귀족이 살해당한 사건에 잔뜩 예민해져 있던 왕성에서 재상의 사유지에 시체까지 버려졌으니 불만이 터져나올 때도 되었지요. 하지만 포도밭에서 발견된 익사체는 말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진 물고기 같은 것이였습니다. 입속에서 나온 이멘마하의 수초를 증거로 그녀가 이멘마하에서 살해당한것은 확실해졌지만 왜 일부러 무거운 익사체를 끌고 블라고평원까지 온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저희가 이 브로치, 아니 보석에 대해서 알아내기 전까지는요"


마나터널이 보일만한 위치에서 톨비쉬는 잠시 이야기를 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발레스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뺨에 손을 얹어 온도를 확인하고서는 몸의 상태를 물어보았다. 마나와 스테미너가 지속적으로 빠져나가고는 있지만 마나터널의 안정권에 들어와서인지 몸은 한결 가벼워진 상태. 밀레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톨비쉬는 준비해온 자리를 깔아 밀레시안이 쉴만한 공간을 만든뒤 가지고온 캠프파이어 키트틀 꺼내 장작을 쌓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만에 여러가지를 준비해온듯 단단하게 둘러주는 담요를 받아든 밀레시안은 작은 소리로 고마워요 라고 대답했다.

톨비쉬는 쓴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저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제가 그렇게 부주의하게 두지만 않았어도. 아니, 마녀와 거래할 생각만 하지 않았어도 당신이 이런일을 겪을 필요는 없었을텐데"

처음 밀레시안이 쓰러지는 모습을 볼때부터 톨비쉬의 가슴을 찔러오던 후회감의 실체에 밀레시안은 아니에요. 내가 상자를 열지 않았어도.. 라고 말을 꺼냈지만 곧 피어오르는 불꽃과 함께 거절의 말이 날아들었다. 톨비쉬는 가슴속에 넣어둔 보석위에 잠시 손을 얹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있는 장소에 이것을 가지고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바로 마녀에게 가져가거나 게이트에 돌아오기전에 정화를 맡기거나, 어느 한쪽도 선택하지 않고 안일하게 대처한 탓이라며 후회하는 톨비쉬는 잠시 밀레시안의 곁에 앉아 손을 붙잡았다. 아까부터 밀레시안의 손끝이 물에 담갔다 뺀것처럼 차가웠던 탓에 톨비쉬는 조금 긴장한 눈으로 밀레시안의 상태를 살피었다. 밀레시안은 이야기를 계속해달라며 손가락을 움츠렸다. 차가운 손이 닿게 하고싶지 않은 눈치였다.


"사건을 쫓던 루나사조는 우선 블라고평원의 아가씨를 제외한 연결고리에 주목했습니다. 클럽에서의 피해자의 가족이면서 마부가 몰고가던 마차가 향하던곳, 하녀가 근무하던 저택 모두 한곳으로 연결되었지만 그 저택의 용의선상에 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저택의 주인은 탈틴으로 출장을 나가 있었고 안주인은 마부의 마차에 타고 있었던 휴우증으로 앓아누워있었으니까요. 장남이 있긴했지만 이제 막 말타기를 배울만한 어린아이뿐. 오히려 끔찍한 사건들을 듣지 않기 위해 던바튼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건 조원의 정보?"
"예, 저희 조원이 올린 보고서에만 있는 정보이지요"

톨비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작 몇개를 더 던져넣었다. 좀 더 센 열기가 필요한 모양이였다.


"처음에 보석세공사와 이교도의 관련성만 뒤쫓던 조원이 그 저택에 도착한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이였습니다. 저희쪽은 세공사의 행적에만 주목하고 있었고 루나사조는 중간에서 갈라져나와 살인사건과 이교도의 연관쪽을 조사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가 우연히 마주치게된 저택에서 세공사와 살인사건의 연결고리를 찾아낸 순간, 타라의 근위대에서도 저택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타라에서 갑자기 시선을 돌린이유는 블라고평원의 아가씨가 사실 처녀가 아니였다는 사실 때문이였죠. 사실 아무래도 좋은 사생활이였습니다만 극단에서는 그럴리 없다고 극구 부인을 하며 명예훼손이라고 들고 일어섰습니다만 아가씨의 짐속에서 나온 비밀 일기장의 존재에 모두들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꼼꼼한 성격 그대로 상세하게 기록된 사생활 겹겹히 쌓여진 비밀스러운 연인의 존재에 근위대에서는 저택의 누군가가 이 연쇄된 살인사건에 휩쓸려 가도록 뜬금없이 내연녀를 죽인것이 아니냐 하는 추측이 나돌았습니다. 물론 비공식으로.

레자르 제상의 귀에 들어가면 추가훈련은 커녕 전체감사명령이 떨어질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모여진 조각들을 모아 이어진 추리끝에 남은것이-"

"보석"

"네, 이 보석이였죠"


톨비쉬는 제법 뜨거워진 장작불 가까이 밀레시안의 손을 끌어놓고는 조물조물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밀레시안은 부끄럽다며 손을 빼려했지만 톨비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너무 차갑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내가 주무를께요."


밀레시안이 손을 빼내버리자 조금 섭섭한 표정을 짓던 톨비쉬는 금새 표정을 지우고는 고개를 돌려 다음이야기를 이어갔다.

밀레시안의 몸이 어느정도 안정이 된 것같으니 다음은 발레스의 여왕을 설득할 차례였다.


"보석세공사는 그렇게 이름있는 세공사는 아니였습니다. 그저 근근히 일을 받을정도였고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에겐 사이좋은 아내가 있었고 예쁜 딸이 있었으며, 행복한 가정이였다고들 말했었습니다. 다만 부고장에서 보았다시피 그의 딸은 몇 년 전에 자살을 하고 아내 또한 그때 병을 얻어 몇개월 전에 타계를 했죠. 그런 그가 이교도의 꾀임에 빠져든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측 할 수 있었지만 왜 그 많은 보석들중에서 하필 이 하나에만 저주를 걸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보석이 어떻게 그 저택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그러나 톨비쉬는 지금 말할 생각이 없다는든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다음은? 하고 물어오는 밀레시안의 모습이 마치 옛날이야기를 조르는 어린아이같아 보였지만 톨비쉬는 뺨에 입을 맞추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후드를 깊숙히 내려주며 뺨을 한번 쓰다듬었다.


"우선, 거울쪽을 해결하고 올테니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같이가는게 더 빠를것 같은데.."

밀레시안은 이제 다시 걸을수 있어요 하고 두주먹을 쥐어보였지만 톨비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깨를 내리눌렀다. 힘없이 푹하고 주저앉는 다리에 밀레시안은 어.. 하고 놀란눈으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조금 험한 소리가 오갈지도 모르니, 여기 있어주시길 바랍니다"
"동굴에서 처럼요?"

"........."


나쁜모습을 보일지도 몰라요 하고 멋쩍게 웃던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어깨에 얹었던 손을 떼어 얼굴을 가리고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마지막에 소리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천박한 말로 도발에 응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톨비쉬의 귓가까 불에 대인것 마냥 빨갛게 달아올랐다. 후드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야 톨비쉬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떨리는 음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셨습니까?"
"....듣지는 못했어요"
"잊어버리세요"

".....에...."

톨비쉬의 단호한 억지에 밀레시안은 그게 가능하겠냐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노력은 해 볼께요"


톨비쉬가 조금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발레스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4.

"신문, 가지고 올껄 그랬네"


톨비쉬가 떠나가고 잔뜩 쌓여진 캠프파이어용 키트에 둘러쌓인 밀레시안은 습관적으로 손을 문지르며 몸의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가급적 빠르게 거울을 손에 넣기위해 함께 발레스로 따라나온것이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떨어지는 체력에 내색하지 않던 밀레시안의 입에서도 힘겨운 한숨이 간간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장이라도 좀 더 해둘껄 그랬어. 그럼 좀 버틸만 했을텐데"


환생때마다 초기화 되긴하지만 밀레시안은 분명 조금씩 성장하는 존재. 최근 여유로워졌다는 느낌에 수련을 조금 게을리했던 밀레시안은 조원들에게 잔소리할 처지는 아니였다며 후회하고는 얼어붙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저릿한 손을 꿈지럭거렸다.

둔한 손의 감각에 불속에 집어넣어도 모르겠다며 화상을 입을 법한 가까운거리에서 장작을 던져넣는 밀레시안의 뒤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가까이 오는 동안 돌아보지 않는 밀레시안이 이상한건지 그림자의 주인은 잠시 떨어져있는 상태로 관찰을.

한참을 바라보던 자이언트는 자신이 알던 기척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살짝 헛기침을 하며 밀레시안을 향해 소리를 내어주었다.

멍하니 불꽃이 타오르던것을 보던 밀레시안이 깜짝 놀라 무기에 손을 얹으며 뒤돌아보았다.

곱은 손가락이 날렵하게 무기를 잡아채지는 못했지만 적당히 거리를 두어준 자이언트의 배려에 밀레시안은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미소지었다.


"안녕하세요, 타우네스"


발레스의 무기장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밀레시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무를 하러 나갔었던건지 그의 등 뒤로는 잘 잘린 나무장작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밀레시안이 반갑게 손을 내밀자 악수를 하던 타우네스가 의아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래간만이요, 밀레시안.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왜 이런곳에 있는거요?"
"일행이랑 여기서 만나기로 해서요."
"꽤나 오래 기다린 모양이군. 손이 완전히 얼음덩어리야"
"아하하, 조금 사정이 있어서. 타우네스씨야 말로 왜 이쪽길로?"
"집 뒤의 나무는 아직 자를 시기가 아니여서. 이렇게 마주친것도 인연이니 내 집에 가서 차라도 한잔 하는건 어떻소? 깔끔한 곳은 아니지만 동상을 피할만큼의 열기는 얻을 수 있을테지"


타우네스의 제안에 밀레시안은 뜻밖의 행운을 만난 얼굴로 기쁘게 박수를 쳤다.

습관적인 행동이였지만 아무소리도 느낌도 나지 않은 손을 확인하게된 밀레시안은 으음.. 하고 난감한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우네스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려하지 못한 대답이였지만 타우네스는 대강 밀레시안이 어떤 행동을 하고있는지 알겠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캠프파이어를 가르켰다.


"뒷마무리는 확실히 하는것이 좋겠소"


타우네스의 무기점이라면 아마 족장집에서 나오는 톨비쉬를 확인할 수 있을터. 딱 좋은 위치에서 만났다며 좋아요 라고 대답한 밀레시안이 눈을 끼얹어 불씨를 꺼트리며 담요를 집어들었다.

타우네스의 커다란 발자국이 따라 눈언덕을 내려가는 밀레시안의 뒤로 8개의 긴 줄무늬가 눈위로 그어지다 사라졌다.








"이렇게 되어서 말이죠"


게이트의 이야기는 적절하게 뺀 상태로 저주에 관해서 설명한 타우네스는 그렇군이라고 대답하며 차를 들이켰다. 무슨 약초를 우린것인지 모르지만 보온에서만큼은 확실한 효과가 있는건지 뜨겁게 달궈진 모루 바로 옆에 자리한 밀레시안은 한결 따뜻해진 몸을 느끼며 신이나서 잔을 내밀었다.


"이거 효과 엄청 좋네요. 쟤료가 뭐에요?"
"아트라타가 준것이여서 나도 잘 모르오. 아마 사막의 약초이겠지"

".....발레스에서 이렇게 막 우려먹어도 괜찮은거에요?"

사이는 조금 좋아졌지만. 발레스의 족장집 바로 옆에서 사막의 약초를 우려먹는 자이언트 전사(전직)의 담력에 밀레시안은 어꺠를 으쓱하는 타우네스에게서 잔을 받아들며 자신도 똑같이 으쓱하는 모습을 따라해보였다. 보일리 없지만 뉘양스는 전해진듯 타우네스는 나지막히 웃음을 지으며 차 주전자에 물을 보충했다.

추운지방에서 마시기 딱 좋은 차라고 말하며 꾸러미를 내밀던 아트라타의 손길에 타우네스는 기분이 좋아진듯 불을 돌본뒤 다시한번 나무잔에 차를 따라내었다. 어디선가 들짐승의 냄새가 스쳐지나갔다.


".....?"
"그래서  마녀에게서 일단 하루의 시간을 선고받았는데..."


밀레시안의 설명은 이제 막바지에 이른듯 마녀의 동굴로.

따듯한 차로 연신 목을 축여가며 조잘조잘 잘도 떠들던 밀레시안이 코를 킁킁거리는 타우네스의 행동에 잠시 말을 끊으며 왜요?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 별것 아니요. 밀레시안, 혹시 동물을 불러내었소?"
"응? 아니요? 난 혼자 있는데?"


밀레시안은 자신에게서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는지 빌려입은 로브 여기저기를 킁킁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뺨에서 바스락거리는 비늘을 생각해내고는 볼을 긁적이며 타우네스를 향해 되물었다.


"혹시 비린내 같은건 아니에요? 나 지금 얼굴에 비늘같은게 돋긴 했는데"
"아니, 물가의 냄새가 아니라 들짐승의 냄새요. 작고, 육식에... 고양이같은것이로군"


고양이 같은 것, 이라는 말에 가슴에서 찌르는 통증을 느낀 밀레시안이 불편한 기침을 토해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토해내는 기침속에 섞인 녹색의 기류.

밀레시안이 기침을 하며 몸을 수구리자 타우네스는 당황한듯 괜찮소? 하고 물어오며 손을 뻗어내었다. 날카로운 발톱의 기척에 급히 손을 거두는 타우네스가 부지꺵이를 움켜쥐자 근처를 맴돌던 짐승의 향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헉헉 거리던 밀레시안이 몸을 추스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잔에 남아있던 차를 들이킨 밀레시안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를 썼다.


"미안해요.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당신이 사과할 일이 아니요. 뭔가 나쁜것에 씌인것 같군"
"음- 알고는 있지만.. 일단 좀 떨어져있는게 좋겠어요 그만 가볼꼐요 타우네스"


차 잘마셨어요 하고 인사를 하는 밀레시안이 담요를 챙기며 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타우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지깽이를 다시 내려놓았다.

철근이 땡그랑 하고 손에서 떨어지는 소리에 잠시 짐승의 기척이 다시 주변을 맴돌았지만 애초에 자이언트의 전사는 얄팍한 철막대기에 의지할만한 나약한 종족이 아니였다.

커다란 그레이트소드의 위용에 보이지않는 무언가는 겁을 먹은듯 순식간에 기척을 지우고 사라지며 밀레시안을 옥죄고 있던 목을 풀어버렸다. 밀레시안이 숨을 토해내자 타우네스는 전사때의 기백을 실은 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세를 바로하고 당당하게 마주보시오"

".....네?"
"상대가 무엇이든 실체조차 갖추지못한 허상에 가까운 것이니, 그대가 두려워 하거나 당해내지 못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소"


뜻밖의 조언에 밀레시안은 그렇죠. 그렇네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발레스의 공기가 폐를 가득 체우지만 마나터널 옆에서 떨고 있을때보다는 한결 가벼워진 느낌. 밀레시안은 숙이고 있던 자세를 바로 세우며 타우네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것을 자꾸만 잊어버린 행동에 잠시 자신의 이마를 두드리던 밀레시안이 다시 인사를 건네었다.


"차 고마워요 타우네스. 덕분에 몸이 많이 좋아졌어요. 아트라타에게도 안부인사 전할께요"
"그렇게 해준다면 나야 고맙지. 잘가시오 밀레시안. 자네의 일행이 나오는 소리가 들리는군. 지금 내려가면 마주칠 수 있을 것이오"


타우네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밀레시안이 서둘러 무기점을 나서 발레스의 광장으로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족장집에서 나온다면 광장을 지나쳐 올라오겠지. 밀레시안이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모습에 근처를 지나가던 자이언트 가드 몇명이 밀레시안을 향해 잠시 고개를 돌렸다.

족장의 집에서는 무언가 격렬한 이야기가 오갔었던건지 약간 지친 모습의 크르투와 심기가 불현한 키리네, 그리고 후드를 눌러쓴채 얼굴이 보이지 않는 톨비쉬가 함께 걸어나오고 있었다.


"아, 톨비쉬..!"


밀레시안이 부르는 목소리에 톨비쉬는 놀란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키리네의 앞을 막아섰다.

그것이 밀레시안의 기억의 끝. 자이언트 가드들이 움직였고 톨비쉬가 밀레시안을 끌어안았으며 밀레시안의 시선끝에는 이상하게도 키리네의 얼굴이 고정되어있었다.


'고양이 울음소리'


톨비쉬의 품이 이상하리만치 따듯하다고 여기며 정신을 잃은 밀레시안이 어둠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의식속에서 녹색의 기침을 토해내며 목을 부여잡았다.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아트라타의 차의 향기와 들짐승의 냄새가 역하게 섞여 속을 뒤집어 놓오있었다.

녹색의 눈동자.

어둠속에서 떠오른 두개의 페리도트를 보며 밀레시안은 키리네의 가슴에 장식되었던 황금산호의 브로치를 기억해내며 눈쌀을 찌푸렸다.

모든 일의 시작은 이 두개의 보석. 밀레시안이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구야"


짤랑거리는 얼음밟는 소리와 함께 밀레시안의 눈 앞으로 키리네의 거울이 떠올랐다. 분명 톨비쉬가 키레네에게서 거래의 조건으로 빌려온것이겠지.

아마 현실과 꿈의 중간지점인듯한 어둠속에서 거울을 마주본 밀레시안은 비쳐진 거울속의 녹색의 눈동자를 노려보며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밀레시안의 모습, 하지만 그 눈동자는 페리도트빛 선명한 녹색의 눈. 무표정한 거울속의 밀레시안은 거울이 사라지자 곧 모습을 작고 둥글게 말며 밀레시안의 발 밑에서 몸을 일으켰다. 겨우 강아지만한 크기로 모습을 들어낸 저주의 실체에 밀레시안은 어이가 없다는듯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네가 그 저주야?"
"내가 그 보석이야"


페리도트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하고는 몸을 휙하니 돌려 어둠속으로 겅중겅중 뛰어들어갔다. 아무리 빨리 달리려 노력해도 페리도트의 짧은 다리로는 밀레시안이 뛰는것만 못한 속도.

그럼에도 열심히 어둠속을 달려 시커먼 구멍앞에 멈춰선 페리도트가 눈을 접어 웃어보이며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보석이라도 나는 조금 특별한 보석이지. 내가 어디서 태어난 보석인지 혹시 알고 있어?"
"알게뭐야"
"흐응, 성의없는 대답이구나. 상관없어 나는 야금채에 걸려질만큼 흔한 보석은 아니니까"

확실히 야금질에 발견될만큼 흔하진 않지만 하고 고개를 끄덕인 밀레시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페리도트를 가르켰다.


"흔하지 않은건 아닐텐데"
"다른 애들보다도 나는 더 특별해"


페리도트는 우아하게 몸을 세워보이며 눈을 깜빡였다


"나는 운석에서 태어났어. 그러니까 별에서 태어난 보석이야"

 

그 말과 함께 페리도트가 어둠의 구멍속으로 몸을 전졌다.

컥하고 차오르는 가슴속의 통증과 함께 다시한번 정신을 잃을뻔한 밀레시안이 어둠속에서 이어진 푸른 선을 보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세웠다. 푸르고 가느다란 선 신성력의 끝. 


'이 선의 끝이 어디인지알아.'


밀레시안은 가빠오는 숨을 안정시키려 애쓰며 벽으로이어진 푸른 선을 따라 다리를 움직였다.

검고 커다란 벽을 손으로 짚는 밀레시안이 마치 잠수하기 전의 사람처럼 크게 숨을 들미사며 눈을 감았다.

푹하고 벽을 향해 얼굴을 들이민 밀레시안은 진득하고 어두운 물속을 헤엄쳐들어가듯 팔과 다리를 휘저어 어둠 깊은곳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디바인링크가 이어져있던 어둠 아래 가라앉은곳.

밀레시안은 저주가 도망쳐버린 공간이 이곳일꺼라 확신하며 무겁게 잠겨있던 철문을 열기위해 안간힘을 썼다.


"당신이 명상을 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었을텐데"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공간에서 톨비쉬의 한숨섞인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울려퍼져왔다.

그런거 안해도 어쩄든 들어갈 수는 있어요. 마음속으로 환청에 대답한 밀레시안이 흡 하고 힘을주자 어렵게 움직이기 시작한 철문사이로 사람 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공간이 빠끔히 입을 열었다.

그 안으로 몸을 우겨넣는 밀레시안의 가슴팍에서 빛을 내기 시작하는것은 손바닥만한 거울의 표면.

키리네의 거울을 끌어안은 밀레시안이 철문안으로 고개를 숙여넣으며 눈을 감았다.




잠이들듯 눈을 감은 밀레시안의 의식을 깨우는것은 한줄기의 빛이였다.

구름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처럼 어둠으로 가득찼던 밀레시안의 시야속으로 한 두줄기의 빛이 스며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코와 입을 막는 압박감으로 흐려지는 의식을 흔들어 깨워대기 시작했다. 보글거리고 올라가는 기포가 향하는곳은 머리 윗쪽.

위를 향해 떠오르녀는 몸의 부력을 느끼며, 헤엄을 치기 시작한 밀레시안이 먼저 떠오른 물방울을 따라 손을 뻗자 가벼운 공기가 허공을 가르며 딱딱한 바위 표면을 긁어내렸다. 바위를 지지대삼아 위를 향해 몸을 끌어올린 밀레시안이 한참동안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자 진한 숲의 향기와 함께 텁텁한 민물의 향기가 밀레시안의 폐를 가득채웠다. 눈앞을 가리며 흘러내리는 머리카락과 물을 아무렇게나 쓸어남기 밀레시안이 둘러보는 풍광은 아무리 보아도 에린의 티르코네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심상세계를 확인한 밀레시안이 하필 또 여기냐 하고 투덜거리며 뭍가로 헤엄쳐갔다. 잔뜩 머금은 물을 짜내며 뜨거운 태양아래 걷는 밀레시안의 몸상태는 발레스에서의 기력없는 모습이 아닌 평소의 컨디션. 하늘은 푸르고 강물은 시원하며 몸은 개운하니 남는것은 고양이를 쫓는 어느 할일없는 모험가의 의욕뿐.

아무도 없다는 사실만 빼면 에린의 티르코네일과 다를바 없는 모습에서 움직이는 작은 그림자를 찾아낸 밀레시안이 뭉쳤던 어깨를 돌리며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자, 그럼 이제 잡으러 가 볼까?"


식료품점의 지붕위에 올라갔던 페리도트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울음소리를 내었다.








(하편이 있습니다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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