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11월 21일 #오블완
다시 태어난 브리샤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그린우드를 불태우는 것이었다.
그린우드, 애정하고 애증하고 지긋지긋한 그녀의 이름.
그들은 태생부터가 배신자였고 믿음을 양분삼아 기만을 생존의 방식으로 선택한 자들이었다.
물론 그들이라고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인간들을 낙원으로 이끌겠다던 누아자 왕이 패배하였기에 승자를 따라갔던 것 뿐이었고,
그 브레스 왕이 약속을 어기고 자신들을 핍박하였기에 루 라바다를 따라갔다.
루 라바다가 인간뿐만이 아닌 모든 것을 수호하였기에 인간이었던 그들은 인간의 왕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린우드는 행복했을까?
안타깝지만, 아니었다.
거리의 꼬마아이가 자신의 전 재산을 털더라도 솜사탕 하나 사 먹을 돈이 안 나오는 것처럼, 그린우드의 명예와 목숨을 걸고 결의한 선택들은 위대하신 영웅과 왕족과 마법사, 기사, 연금술사 나으리들이 보기에는 그리 값져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름답지도, 명예롭지도 않은 이야기. 재치있거나 기발하지도 않은 통속적인 인간의 민낯.
그들은 언제나 멸시받았고 무시당했다. 그러나 동시에 우습게 여겨지지도 못했다. 기민한 선택으로 보존한 그들의 저력과 경험은 뭇 명예만을 쫓는 귀족들의 눈에도 꽤나 날카로운 비수로 보였던 것이다.
애초에 그들이 왜 그토록 빠르게 배신과 선택을 반복할 수 있었던가.
그린우드는 끈질기게 살아남은 잡초와도 같은 자들이었다. 그리고 살아남았기에 그들은 모든 것을 기억했고, 그 기억을 무기로 휘두룰 줄도 알았다.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속살거린 달콤한 말속에는 언제나 그만한 영양분이 들어있었으며 이는 누군가에게 독이기도 했고 또 누군가에게는 난관을 해쳐나갈 실마리가 되어주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때떄로 비밀을 재화삼아 그들을 찾아오기도 했다. 비밀은 비밀을 부르고, 또 그 비밀은 또다른 이의 비밀과 기요를 부른다.
그린우드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떄로는 간신으로, 때로는 배신자로, 때로는 밀고자로, 때로는 차마 성직자를 찾아갈 수 없는 세상 밑바닥에 떨어진 자들의 보속을 도와주는 거짓된 청죄사제로.
아, 일생이 기만이로다. 모든 것이 거짓이로다.
그러나 모든 그린우드가 이 멸시받는 삶에 안주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중 누군가는 그린우드를 떠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그린우드를 양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그들은 숲지기의 가면을 쓰고, 의사의 가면을 쓰고, 식물학자의 가면을 쓰고 선대의 그림자를 가리기 위해 노력했다.
희망적이게도, 이 노력은 꽤나 성과를 거두었다.
루 라바다의 퇴위와 함께 숲지기로서의 불명예를 만회하려는 선량한 그린우드들의 노력과 진실을 감추려는 ‘정통적인’ 그린우드들의 전례없는 협력으로 그들은 성공적으로 양지에 발붙이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세상은 또다시 그들에게 냉혹한 폭풍을 가져다 주었다.
‘탐험’
에일리흐 왕국의 에후르 마퀼 2세가 이리아의 탐험을 선포한 것이다.
뭇 평범하고 온건한 귀족이라 한다면 이 탐험으로 얻을 명예와 새로운 지식과 재산등을 떠올리며 신세계의 개척에 가슴이 뛰었겠지만 그린우드는 그렇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왕국이 울라대륙이 아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여력을 드러냈다는 것은 곧 이제까지의 평화와 안정이 흐트러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평화롭기 때문에 여력이 쌓인 것이 아니냐고? 틀렸다. 그건 결과일 뿐이다. 진정한 평화는 그들이 여유를 가진다는 것 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갈증을 느끼지 않는 이가 구태여 물을 찾아 소파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평화롭고 풍요로운 자들은 구태여 그들의 안락한 왕국에서 나가려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러니 탐험이란 결국 전쟁의 또다른 이름이요 주인없는 땅에 함부로 발을 내딛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애초에 그들이 정말로 연구와 조사를 위해 그곳에 찾아간 것이라면 귀족들 사이에서 ‘기념’을 위해 가져온 유물들이 유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리아의 이름모를 선주민들의 유물들은 그들의 전리품이었고, 이종족과의 교류는 운이 좋아 전쟁없이 성립된 ‘동맹’이었다.
만약 그 이대륙의 이종족들이 서로 싸우지 않았다면 그들이 서로 자신의 선조들의 유산이라 부르는 유물들을 약탈해가도록 내버려둘리 없었을테니까.
그리고 자신들의 정당한 행위를 방해받은 에일리흐 왕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테고 이는 결국 ‘포워르’를 상대하던 전쟁이 ‘이대륙’으로 옮겨진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결국 유혈사태가 없었고 학문적인 교류로 성공적으로 포장했으니 다 잘 된 것 아닐까?
아니었다. 이 역시 결과에 불과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단순히 뛰어난 무력을 가진 영웅과 상징적인 지도자뿐이었다면, 아름다운 빛의 기사 루 라바다는 기사가 아닌 암살자가 되었을 것이다. 모이투라 전쟁에는 수많은 병사들과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기 위한 수많은 보급품들이 필요했으며, 이를 운송하기 위한 인력과 그 인력을 보호하기 위한 또다른 무력집단을 필요로 했다. 또 그들을 고용하기 위한 중개자가 필요했으며 또 그 중개자들을 모아서 관리하는 전문 인력이 필요했다.
이토록 하나하나 말하자면 골치아픈 모든 것을 뭉뚱그려 부르는 이름은 바로 ‘돈’이었다.
그렇다. 돈.
사람을 움직이는 것에는 돈이 든다. 그리고 전쟁에는, 아니 탐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동시에 이 모든 것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커다란 흐름에는 언제나 높으신 분들이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나 사고들이 발생하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에후르 마퀼 2세는 너무 운이 좋은 왕이었다.
혜성같이 찾아온 우연, 밀레시안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에일리흐 왕국은 공식적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만 그린우드는 ‘포워르’와의 전쟁이 어느 순간 인간쪽으로 기울어 진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여신상의 복구를 위해 뛰어다녔다는 정보로부터, 그들이 이멘마하의 근위대장에게 항마의 로브를 부탁했다는 것까지. 이리아의 이종족과의 교류를 트는 것에 앞서 신뢰를 쌓은(달리말하면 그들의 자질구레한 부탁들을 들어주며 비위를 맞춰준) 모험가들 사이에도 밀레시안들이 있었으며 잊혀진 드래곤들의 땅, 자레스에서 일어난 ‘재해’를 진정시킨 것도 결국은 밀레시안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래왔든 영웅의 행보는 그린우드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차치하고, 다시 생존의 문제로 돌아간다면..
그린우드는 에후르 마퀼 2세의 운을 믿지 않았다. 그는 노련한 정치가였지만 전쟁을 승리로 매듭지을 영웅은 아니었으며 그의 딸 또한 그리 미래가 밝아보이지 않았다. 하여 그린우드는 다시한번 생존을 위해 ‘선택’을 결심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루 라바다의 퇴위 이후, 더이상의 ‘선택’은 없을거라며 양지로 뿌리를 뻗었던 그린우드들이 이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화의 시대, 넘쳐나는 풍요로 인해 이대륙으로 눈을 돌릴 만큼의 여유가 생긴 태평성대.
그 여유는 그린우드에게도 번영을 가져왔고 그들에게는 이제 잃어버릴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이전과 같이 곁눈이 달린 가지 하나만 잘라 숲을 버리고 도망치듯 재빨리 ‘선택’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고와 눈에 그릴듯 선명한 재앙을 두고 한참을 다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발전없는 ‘선택’의 반복을 지양하는 대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합의했다.
합의의 단초는 다름아닌 ‘배신’이라는 키워드에서 나온 또다른 배신자의 이름이었다.
라이미라크 교단. 그 누구도 감히 그들을 두고 자신들과 닮았다 비교하지 않으려 하겠지만 그린우드만큼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라이미라크 교단이 누아자 신을 두고 도망쳤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동시에 그 기록을 모두 말소하려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그 시기를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후회할지언정 그 날의 수치를 다시 기록하려들지 않는다는점에서 그들은 결국 거대한 이름을 등에 업은 사람이요,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선택’을 반복하는 인간들의 집단이었다.
그렇기에 그린우드는 생각했다. 그들의 ‘선택’과 우리들의 ‘선택’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린우드는 깨달았다.
그들에게는 ‘거대한 이름’이 있었다.
그들의 허물을 가려주고 때로는 용서해주고(실제로 죄를 청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흐려진 눈앞을 대신하여 길을 일러줄 위대한 의지.
때문에 그들의 ‘선택’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사람의 행동에 불과하였으나 사람들은 스스로 이 ‘선택’을 신의 뜻이나 범인들은 잘 이해하기 힘든 먼 미래의 안배로 선해해주고는 했다. 교단은 상황에 따라 이 오해를 내버려두기도 했고, 오히려 만류하거나 부추기기도 했다.
그중에서 그린우드가 주목했던 것은 ‘사람들의 오해’를 정정하면서도 진실은 밝히지 않고 넘어가는 처세술이었다.
사람과 기적. 그리고 그 사이에 세워진 믿음이라는 벽.
그린우드는 선해로 이루어진 오해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것이 꼭 ‘선의’로만 이뤄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쌓인 신뢰가 그들의 것일 필요도 없었으며, 난해한 안배가 그들의 계획일 필요도 없었다.
그린우드는 자신의 일족들에게 설명했다. ‘신성’을 찾으면 되는 일이다.
그들의 선택을 정당화해주고, 바로세워주며, 허물을 가리고 명예를 지켜줄 ‘거대한 이름’이라는 벽.
오래 된 이름이자 믿음으로 만들어진 허상.
누가보아도 자의로서 선택한 일을 저지르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라고 대답해줄 핑계거리가 되어줄, 누구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납득할 수 있는 이유.
그리고 그것 아는가? 신앙은 항상 곧고 올바른 것으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리하여 그것이 어그러졌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 또한 기도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을 받는 초월적인 존재 또한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린우드는 그 이름을 찾아 다시금 음지로 시선을 돌렸고 그곳에서 글린드라흐를 만났다.
양지에서는 별볼일 없는 한미한 가문이지만 음지에서는 지혜로운 자로 통용되는 빛나는 이름, 그들은 ‘황금’과 ‘지혜’을 숭배하는 어느 사교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린우드가 글린드라흐의 손을 잡은 이유는 그들이 사교도이면서도 신에게 모든 것을 헌신 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 중에 맹신을 넘어 광신하는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개인의 선택일뿐, 그들은 모두 개인의 황금과 가문을 번영을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지 믿음에 심취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뿐만일까, 그들의 신조차도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경애와 헌신을 맹세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기묘했다. 그들의 신은 원래부터 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 그러니까 신들의 세계보다도 더 먼 경계 너머에서 온 자이며 그가 말하는 경계라는 것은 단순한 공간의 의미가 아닌 시간의 의미 또한 포함하고 있었다.
즉, 그는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않았으나 이미 존재하는 자라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능력은 신과 비교하여 부족함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신과 비슷한 것으로 여겼고, 그 믿음은 그의 재화가 되어 이곳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의 기반이 되었다.
그렇게 이계에서 발현하여 이곳에서 신으로 불리게 된 이계의 존재는 스스로를 ‘무대장치의 조율자’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글린드라흐는 이어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돌아다니며 시간과 공간, 중첩된 세계와 이미 도달한 시간대의 확정적인 사건(event)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광기와 확신이 뒤섞인 목소리,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눈동자. 그린우드는 그가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부터 이미 흥미를 잃고 그의 행동과 표정을 관찰하는 중이었기에 그가 심취하여 떠는 꼴을 내버려두었다.
다만 이 모든 상황을 통해 그린우드는 가까스로 그들이 어떻게 ‘광신’과 ‘거래’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를 이해했다.
경애나 존경, 헌신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토록 좋은 변명이었던 것이다.
애초에 그들의 신은 우연히 이 세계에 찾아온 이방인이 아니었고 선의로 사람을 돕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다른 따분한 사교도들과 달리 사랑과 믿음이 아닌 복종과 종속으로 하수인을 구하고자 한 것 뿐이었고 강압에 앞서 충분한 보상을 먼저 퍼붓는 방식을 선택했다.
설령 그것이 받는자의 그릇을 벗어나 넘쳐 흘러버릴지라도.
일례로 글린드라흐의 지식은, 이미 인간이 감당 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서 있었다.
그러나 알기를 멈추지 않았기에 그는 미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실을 추종했고, 결국 이렇게 가장 가까이서 ‘조율자’를 이해하는 사교도들의 수장으로 전락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글린드라흐의 이름을 이은 모든 가주들이 원하여 맞이한 결말이라는 점이었다.
아니, 어쩌면 인과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결말을 감수할 수 있는 자가 글린드라흐의 가주가 되는 것이었던가, 혹은 그러한 자의 머리에 가주라는 이름을 씌워놓고 대리하는 자가 있었던가.
그린우드는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 그들과 맺을 계약에만 집중했다.
그린우드가 원하는 것은 간단했다. 그들은 맹신도 지식도 명예도 원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어떠한 선택을 했을 때 그것을 대신 설명해줄 ‘이름’을 원했다.
그들의 이유를, 행적을, 행동원리를 설명하지 않고 모든 것을 설명해줄 압도적이고도 절대적이면서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난해한 것.
허구이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터무니없으면서도 감히 누군가 그것을 비웃으며 그린우드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
터무니없게 들리는 조건들이었지만 놀랍게도 세상에는 만족시키는 해답이 복수로 존재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앞서 그린우드가 찾던 ‘신앙’이었고 또 하나는 ‘사랑’이었다.
그들의 계약은 정략결혼이라는 형태로 맺어진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동시에 두 가문의 갑작스러운 협업을 변명하기에 좋으면서 서로의 결속을 확인하기에 아주 좋은 수단이었기에 이 기발한 계획을 반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먼 훗날에 자신의 결혼상대가 미리 정해졌으며, 그것이 저 비굴한 페르하레 글린드라흐라는 것을 알게된 브리샤가 연회장에서 그의 코뼈를 박살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서 그린우드는 행복해졌을까?
실제로 그린우드는 글린드라흐와의 동맹으로 훨씬 더 부유해졌고 큰 영향력을 갖게되었다. 그 성장의 대부분은 음지에서의 성장이었지만, 결국 위로 갈 수록 그림자아래서 일어나는 일들이 더욱 긴밀해지기 마련이니 이는 미래를 대비한 성장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또한 시간이 흐르며 탐험의 열기가 시들어졌고 그림자 세계의 확장으로 다시금 위기가 되살아나자 에일리흐 왕국은 그들의 칼날을 포워르들에게로 돌렸다. 이는 그린우드가 다시금 전선에, 아니 왕성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선택’을 서두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브리샤 그린우드가 결국 제 생애에서 페르하레를 떨쳐내지 못했던 것과 같이 계약은 계속되어야만 했다. 또한 이 계약은 상호의 이득을 원한 것이었기에 이제 이 계약의 이득은 글린드라흐의 것만 남아있는 것이다 다름없었다.
그것이 여태까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글린드라흐가 원했던 것이 오직 하나, 계약의 결과 그 자체인 그린우드와의 동맹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왜 글린드라흐는 그토록 그린우드와 함께하려 했던 것일까.
해답은 간단했다. 모든 음지에서 살아가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양지에 자리잡기를 희망했다. 동시에 그들은 결국 ‘조율자’의 추종자였기에 그들이 양지로 나아가 영향력을 넓히는 것은 ‘조율자’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는 자신들은 결코 추종자따위로 전락하지 않을 것이라 자만하는 그린우드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잊었는가? ‘조율자’의 계약은 마치 공평한 거래인듯 보이면서도 결국은 그에게 종속되어 하수인이 되는 결말밖에 없는 함정이었다. 그리고 글린드라흐와의 계약도 결국은 ‘조율자’의 계약과 다름이 없었으니 글린드라흐의 조건이자 목적은 그린우드라 하여도 자신들이 함께하는 이상 잠식당할 수 밖에 없음을 자신하는 선언 그 자체였다.
애초에 그린우드의 자신감은 ‘평범한 인간’을 기준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대항할 수 있다 생각했던 것은 신에 비견하는 이계의 지혜였고 그 착각은 그린우드의 방심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충격적이고 혁신적인 지식은 경계했지만 일상에서 스며나오는 달콤한 위로와 이해해는 취약했던 것이다.
언제나 완벽한 순간에 찾아오는 다정하고 안락한 이해자의 손길은 너무나도 손쉽게 그린우드의 이름을 가진 자들을 함락시켰다. 가문에서 외면받는 어린 사생아부터, 그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자 홀로 고군분투하는 외척, 어떻게든 공훈을 세우려는 방계출신의 입양아, 자신의 판단력과 경험을 자신하는 늙은 그린우드들까지.
글린드라흐는 그들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상처입은 영혼을 보듬으며 천천히 그들을 ‘기쁘게’만들어 나아갔다.
천천히, 아주 부드럽고 고요하게.
애정에 굶주린 그린우드 따위 갓난아기와 눈을 마주치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
딱 한 뼘. 글린드라흐가 그린우드를 기쁘게 만들기에 필요했던 조건은 딱 한 뼘의 거리에서의 대화뿐이었다. 그리고 정략결혼을 매개로한 계약이 이를 보장하고 있었으니 결국 그린우드의 타락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생존’만을 위해 뭉쳐있던 그린우드는 뿔뿔히 흩어져 글린드라흐의 손아귀에 들어가 각자 다른 곳에서 ‘조율자’의 추종자를 위한 꼭두각시가 되어갔다. 스스로의 이득도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헌신하는 추종자의 추종자가 된 것이다.
브리샤 그린우드는 자신의 미래를 속단하고 바보같은 페르하레를 떠넘긴 주제에 스스로 망해가는 그린우드를 증오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고자 했던 그들을 연민했고 그 본능을 공감했다.
살아남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괴롭고 쓸쓸하여 온기를 찾으려 했던 것이지.
그녀가 ‘거울’을 피해 ‘나무’의 손을 잡은 것도 결국은 그린우드의 본능이었다. 어차피 침몰할 것이라면 나는 이 한 손을 그들의 적에게 보태리라. 그리하여 살아남는다면 그들의 승리였고 그리하여 죽는다면 여한또한 없게 되겠지.
그래서 브리샤 또한 나무안에서 깨어나며 전생의 한을 버렸다. 동시에 그들이 왜 이것을 다시 태어난다고 표현하는지 이해했다.
그래, 이런 방법이기에 이미 거울에 묶여버린 영혼을 온전히 ‘나무’의 것으로 가로챌 수 있었던 것이었다. 평범한 인간이었던 브리샤 그린우드는 영혼조차 남기지 못하고 나무의 일부가 되어 죽었다. 아마 멍청한 페르하레가 어떠한 희생양을 꾀어내어 거울에 ‘브리샤의 행방’을 묻도록 시킨다면 거울은 이렇게 대답하겠지.
[오만한 브리샤는 나무 속에서 썩어 문드러져 한 줌의 흙이 되었다.]
또한 이 대답에 납득하지 못한 탐욕스러운 페르하레가 자신의 이복형제에게 달려가 ‘조율자’의 지혜를 구해달라 간청한다면 새로운 글린드라흐의 가주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대답을 구해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제 슬슬 형도 돌아와야하지 않겠어? 그 이상 거울에 붙잡히면 이제 남겨진 영혼의 조각만으로는 일상생활조차 불가능해질지도 몰라.]
브리샤는 페르하레가 예의 그 멍청한 표정을 지을 것을 떠올리며 웃었다. 바보같은 페르하레. 글린드라흐가 그를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아껴왔던 이유는 그가 그린우드를 붙잡는 덫의 ‘바늘’의 역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꿰인 브리샤 그린우드가 도망쳤고 그 덫에 잡혀있던 그린우드도 거진 그들의 손에 떨어졌으니 이제 그에게 무슨 쓸모가 남아있을까.
아, 물론 글린드라흐의 성공을 축하하는 기념품으로 그 멍청이를 전시해 둘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념품을 어느 방에 전시해 둘지는 글린드라흐의 가주의 손에 달려있고, 광기에 스스로를 불태운 전대 글린드라흐를 대신하여 진짜 ‘아들’을 위하여 제물로 바쳐지다시피한 새로운 글린드라흐가 그를 그리 좋은 곳에 전시해두지는 않을 것은 분명했다.
애초에 경솔한 페르하레의 손에 ‘가위’를 들려준 것부터가 이미 노골적인 의사표현이나 다름없었다.
단순한 페르하레는 그 가위가 인과에 간섭하여 거울에 종속된 영혼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있게 거울 앞에 얼굴을 비춘 모양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가위의 용도는 인과라는 모호한 개념을 잘라내는 것이 아닌 영혼 그 자체를 잘라내는 것이었다.
다만 그것이 거울에 종속된 ‘영혼’을 잘라내어 ‘원인’을 제거한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인과에 ‘간섭’한다고 표현한 것일뿐.
때때로 부작용으로 상대의 성격이 지나치게 온순하게 변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상실된 영혼으로 인해 자아가 흐려진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 멍청한 페르하레가 이러한 세세한 내용을 귀담아 들었을리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날을 세우는 브리샤 그린우드가 온순해질 수 있다니 오히려 좋다며 손뼉이나 쳤겠지.
게다가 어째서인지 자신만큼은 항상 안좋은 결과에서 빗겨나가고 좋은 결과에는 들어맞는다 자신하는 사람이었으니 그 때때로 일어나는 부작용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게 뻔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아버지의 희생으로, 친족의 굴종으로, 그리고 그린우드와 제 이복동생을 제물삼아 가장 좋은 대가만 누려왔던 글린드라흐의 ‘기쁨’이었으니까.
브리샤는 나무속에서 녹아내리고 부서지고 다시 재조합되는 동안 생각하고 통찰하고 내다보았던 모든 것을 눈으로 확인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에 대하여 행하리라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현실로 만들어낸 뒤 마지막 마침표로서 손에 들려있던 랜턴을 내던졌다. 기름에 흠뻑 젖다못해 흥건히 괴여버린 그린우드의 정원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발 아래 쓰러져있던 어린 글린드라흐의 가주는 피거품이 섞인 기침을 토해내며 아직 불이 옮겨붙지 않은 기름묻은 풀을 움켜쥐었다.
“어.. 어떻게.. 분명 당신은…”
“거울에 붙잡히지 않았냐고? 이상하네, 페르하레가 내 이야기를 일러 바치지 않았어?”
“.........”
“아하, 꼴상을 보아하니 페르하레가 네 대답을 듣고 ‘거울’로 도망친 모양이구나. 정말 다행이다. 내가 정원에서 조금만 더 늦장을 부렸다면 복수할 글린드라흐가 알아서 자멸할뻔했겠어?”
탈출의 직전 브리샤에게 붙잡힌 글린드라흐는 더 이상 어떻게라고도 되묻지 않은채 다 죽어가는 눈으로 브리샤의 보석같이 빛나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브리샤는 이지경까지 몰려서도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는 글린드라흐에게 자비를 배풀고자 그의 머리를 기름묻은 손으로로 쓰다듬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분명 ‘정답’만 골라왔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지? 내가 다 설명해줄게.
우선 첫번째로, 글린드라흐의 몰락은 다 너희들의 전대 가주 떄문이란다. 너의 형편없는 아버지가 페르하레 그린드라흐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조율자’에 의존하여 살아왔던 글린드라흐를 무리하게 양지로 올려보려고 했거든. 아마 뒷세계에서는 도련님 도련님하다가 연회장에서 무시당했던 자신과 같은 수모를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지.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아예 너희가 스스로를 갈아넣던 광기속에 우리를 대신 넣지 말았어야지.
그게 두번째 오답이야. 너희가 그린우드를 잡아먹기 위해 전대 글린드라흐의 수명을 깎아먹지 않았다면 네가 이렇게 빨리 글린드라흐의 제물로 바쳐지지도 않았을거야. 그리고 조금만 더 공을 들여 너를 교육시켰더라면 감히 ‘사랑스러운 페르하레’를 대신하여 가주의 이름을 붙인 희생양따위가 그에게 ‘가위’를 건네줄 생각따위는 떠올리지도 않았을거고. 그리고 ‘가위’를 얻지 못했다면 멍청한 페르하레가 이토록 빠르게 ‘거울’ 앞에 나서지도 않았을거야. 설령 그가 거울을 써보겠다고 억지를 부리더라도 대안책으로 다른 ‘도구’를 권하며 시간을 벌어볼 수도 있었겠지.
아, 물론 근본이 썩어도 너무 썩은 자식이니 네게 ‘교육’따위로 지워지지 않을 원한이 세겨져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래도 결과는 똑같아. 네가 조금이라도 더 경험을 쌓았더라면, 그렇게 섣부르게 페르하레에게 네 계획을 드러내지 않았을거니까. 혹은 그가 ‘조율자’의 광기를 받아들이기 싫다는 이유로 ‘거울’에 제 영혼을 내던지는 멍청이라는 사실을 조금 더 빨리 깨달았을 수도 있고.”
신랄하다못해 경쾌하기까지한 목소리와 달리 브리샤의 눈은 무기질적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연민도, 증오도 아닌 모호한 시선을 마주하며 글린드라흐는 마지막 기력을 쥐어짜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다…하다못해...”
“내가 대신 네 원한을 갚아주면 안되냐고? 그건 안돼. 이유는 세 가지나 있으니 네가 죽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말해줘 볼게. 일단 첫번째로, 우리가 페르하레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동질감을 공유하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고해서 네 원한까지 대신 갚아줄만큼의 연민을 느낀 것은 아니야. 네가 내 복수에 멋대로 만족하는 것은 말리지 않겠지만 그걸 부탁할 처지는 아니라는거지. 두번째로, ‘나무’는 ‘거울’에 멍청한 녀석이 좀 더 살아서 붙어있기를 원해. 그가 실수를 저지르든 난동을 피우든간에 ‘나무’는 ‘거울’이 흐트러질 가능성을 가능한 남겨놓고 싶어하고 있거든. 세번째로… 어, 이런 죽어버렸네.”
브리샤는 아아~ 하고 과장된 아쉬움을 표현하며 그의 곁에 주저 앉아 불타오르는 테피스트리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한번 죽어보니까 알겠더라. 살아있을 때는그렇게 괴롭던 모든 것들이 막상 죽을 때가 되니까 전혀 생각이 안나. 그냥 춥고 졸립기만해. 그리고 무겁다는 느낌도 전부 사라지고 한없이 가볍고 가벼워서 마지막에는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게 느껴지지.”
마치 보석을 깎아 만든 의안처럼 기묘할정도로 빛을 과하게 반사하는 브리샤의 눈동자는 명백히 인간의 것이 아닌 질감과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브리샤는 그 눈으로 불타오르는 그린우드의 저택을 그리고 그 불을 옮겨붙어 커다란 캠프파이어마냥 타오르는 아름다웠던 그린우드의 온실을 올려다보다가 환하게 웃으며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보석안에는 죽은 몸에서 스르륵 몸을 일으키는 어린 글린드라흐의 영혼이 비치고 있었다.
“그러니 나도 너희가 생각했던 거랑 똑같이 해줘야겠더라고. 마침 길레아스바이그도 그를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어서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했는데 이런 방법이 있었지 뭐야?그러니 안심해, 글린드라흐. 너의 ‘가주’의 의무는 무사히 페르하레에게 전달될거야.”
무표정하게 몸을 일으킨 글린드라흐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곁에서 이계의 지혜를 속삭이는 제물이 되어주겠지. 네가 글린드라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역대 글린드라흐의 가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글린드라흐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안쪽은 아주 새카만 먹물빛이라 속내가 비쳐보이지 않았지만 어린 글린드라흐의 영혼이 기뻐하고 있다는 의미만은 충실하게 전달될 수 있었다.
“영원히. 잠들지도 못하고 따뜻하게 보온된 그 나무속에서…”
그리고 그 기쁨은 글린드라흐의 것이 아닌 그 너머에 있는 것. 글린드라흐의 안에 깃든 광기가 속삭였다.
‘내가 그걸 허락해줄거라고는 생각하고?’
동시에 브리샤는 처음부터 대화를 나누는 상대에게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여보이며 속삭였다.
“‘나무’가 아닌 나를 위해서 떠들어준다면.”
‘.........’
호오, 라고 추임새를 넣듯 어린 글린드라흐의 영혼이 눈썹을 치켜들었다.그리고는 제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브리샤의 얼굴앞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브리샤는 글린드라흐의 반투명한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영혼의 냉기에 얼어붙은 새하얀 입김으로 입가를 감춘 브리샤는 이제 거의 쇳소리를 흘려내듯 작아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말했잖아, ‘조율자’님. 그들이 하려는 것과 똑같은 짓을 할 거라고. 당신은 나를 매개로, 나는 그자를 매개로. 우리는 당신의 협력을 원해. 그리고 당신은 ‘이҉̙̬͇̫͚̓̎̿̐̾야҉̨̝̭̌̐̀͠기҈̛͓̘̜̫͛́̚͢’를 원하지?”
‘...........’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보여줄테니 ‘지혜’를 거두어갈지 말지는 그 다음에 선택하도록 해. 하지만 장담하건데, 나는 아주 재미있을거야. 그 멍청하고 지루한 글린드라흐들과 다르게 말이야.”
어린 글린드라흐의 영혼의 탈을 쓴 ‘조율자’는 한참동안이나 브리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냉기가 사라지며 부릅뜨고 있던 어린 글린드라흐의 눈이 감겼다. 눈을 감은채로 글린드라흐의 영혼이 말했다.
‘좋아. 지켜보도록 하지.’
동시에 어린 글린드라흐의 영혼이 황금으로 변이되는 이적(異跡)이 행해졌다. 부유하는 특성을 잃고 땅으로 떨어진 어린 글린드라흐의 영혼이었던 것은 산산히 부서져 황금의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마치 그들의 선조, 글린드라흐중 최초로 ‘조율자’의 추종자가 되었던 가주가 자신의 어린아들을 제물로 삼아 황금을 얻었던 첫 거래 때의 모습처럼.
브리샤는 그것을 전통삼으려는듯 필요도 없는 황금을 챙겨준 ‘조율자’의 행동을 내려다보며 폭소했다. 그리고 그 웃음은 한참동안 이어져 저택의 불길이 최고조에 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브리샤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이튿날 새벽, 사람들의 눈을 가리던 장막이 사라져 저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탄 내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기 시작할 무렵의 일이었다. 브리샤는 전날 보다 붉어진 눈으로 새까맣게 타버린 저택을 응시하다가 숲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자신을 잊지 말라는듯 발치로 스스로 굴러오는 황금 한 덩이를 경멸스럽게 노려본뒤 어쩔 수없다는듯 그것을 주워 숲으로 들어갔다.
불 탄 저택을 확인하러 달려온 사람들이 남아있는 황금을 발견하고 이를 서로 가지려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글
11월 19일 #오블완
1.
환영한다.
그리고 미리 말해두지만 당신은 이곳의 처음 온 정원사가 아니다.
물론, 당신도 그것을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앞선 정원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신경쓰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는 당신에게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고 당신도 거기에 동의했다.
물론 너무 겁먹지 말기를. 당신이 쓸데없는 짓만 안한다면 당신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
우리는 그저 일손이 필요한 것이지 당신을 속여먹을 생각에 부른 것이 아니다.
그린우드는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아도 당신같은 먹잇감을 쉽게 구할 수 있다.
→2번으로
2.
그럼 우선 당신이 해야하는 일을 알려주겠다.
그러나 그 전에 질문. 혹시 이 곳의 주인, 브리샤 그린우드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아니 정정한다. 당신은 그린우드의 가문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알고 있다면 7번
→모르겠다면 11번
3.
당신이 생각하는 루라바다 왕의 숲의 숲지기라는 이름이 가지는 ‘더 많은 가치’는 무엇인가.
→어머니 나무에서 기원한 가이레흐인근의 숲의 일부를 관리하는 자 18번으로
→비 공식적인 의뢰를 받아 숲을 윤택하게 만드는 ‘비료’를 처리할 수 있는 어둠의 관리인 8번으로
4.
정석적인 대답이다.
몇몇 사람들은 당신의 교과서적인 대답에 따분함을 느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대답을 오답처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에겐 더이상의 질문이 필요하지 않다.
당신의 메뉴얼은 20번부터 시작한다.
→20번으로.
5.
맞았다. 그린우드는 왕실의 숲을 지키는 숲지기 가문이었다.
그렇다면 조금 더 깊이 물어보겠다.
그 이름을 언제 하사 받았는지도 알고 있는가?
→’루 라바다’왕의 치세기간 이라고 생각한다면 13번으로
→’에후르 마퀼 2세’왕의 치세기간 이라고 생각한다면 14번으로
→모르겠다면 11번으로
6.
좋아. 그렇다면 그 이름은?
→인간들에게 실망하여 모든 명예를 버리고 어둠으로 돌아선 다크로드, 모르간트. 라고 생각한다면 16번으로
→요정 여왕 시오라에게 명예를 걸고 약속한 인간의 왕, 루 라바다 라고 생각한다면 18번으로
7.
좋아. 그린우드는 무엇인가.
→숲지기라고 생각한다면 5번으로
→암살자라고 생각한다면 8번으로
8.
저런, 브리샤 그린우드는 그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펼쳐진 페이지에서 달콤한 냄새가 피어오르는 듯 하다.)
(눈앞이 어지럽다.)
(→비틀거린다.)
9.
너그럽기도 하지.
그렇다 그는 불충한 신하였으며 실패한 숲지기였다.
그 탓에 그린우드는 더이상 숲지기가 아니게 되었으나 그렇다고하여 그들이 에일리흐 왕국의 귀족가문이 아니게 된 것도 아니다.
그들은 지금도 정계 여러곳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의료계와 식물학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뿐만일까 그들의 뿌리는 이제 ‘일반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뒷세계’에 근원하고 있다.
그들이 모시던 왕이 무엇으로 그들을 높히샀고, 어떠한 말로를 걸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숲을 잃은 그리우드가 대체 무엇으로 그들의 부와 재산을 늘렸는지를 알 수 있다.
자.
그럼 이제 당신의 업무를 시작해보자. 당신의 메뉴얼은 20번부터 시작한다.
→20번으로.
10.
숲지기는 숲에서 나는 모든 것에 대한 관리권한을 가진다. 단순히 사냥감이 될만한 짐승이나 새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그곳에서 나는 버섯 한 송이, 나뭇가지 하나, 베이스 허브 한 포기까지. 왕의 명령이 없는한 그곳에서 나는 모든 것은 반출 될 수 없으며 이를 파악하고 관리하고 허가받지 않은 이들을 배제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동시에, 이따금씩 왕의 허락 하에 들어온 자가 있다 하더라도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해 허가받은 이상의 행동을 했을 경우, 이를 제지하고 처벌하는 것도 모두 그들의 몫이다.
물론, 허가받지 않은 자의 처분은 두말 할 것도 없고.
하지만 이러한 숲지기의 권한에 더하여 ‘루 라바다’왕만이 가지는 또다른 명예로운 이름이 있다.
당신은 그 이름을 아는가?
→알고 있다면 6번으로.
→모르겠다면 12번으로.
11.
그린우드는 빛의 기사와 함께 모이투라 전쟁에 참여하였고, 그곳에서 공훈을 세워 가이레흐 남서쪽의 숲 일부와 ‘숲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관리 권한’을 인정받았다. 물론 센마이 평원의 화마로 인해 대부분의 숲이 소실된 만큼 그린우드의 영지의 크기는 작고 초라했으나 그 누구도 명예를 초라하다 평가하지 않았다. 그들이 ‘숲지기’라는 것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 ‘더 많은 것’의 이미를 알고 있는가?
→알고 있다면 3번으로
→모르겠다면 10번으로
12.
(페이지를 펼치자 어디선가 찢어낸 책의 페이지가 덧붙여져 있다.)
루 라바다는 요정들의 여왕과 계약하여 피오드 숲을 열었다.
숲은 루 라바다 왕의 승리를 위한 기반이었으며 요새였으며 전쟁 후의 인간들을 먹여살리는 자원의 터였다.
그렇기에 루라바다 왕에게 있어서 ‘숲지기’란 믿을 수 있는 자이며 그가 숲을 열 때 맹세했던 ‘명예’를 대리할 수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당신은 피오드 숲이 왜 다시 닫혔는지 알고 있는가?
→인간들의 무리한 개간으로 인한 요정들의 분노라고 생각한다면 4번으로
→루 라바다 왕의 추락을 의뢰한 자들의 음모라고 생각한다면 15번으로
13.
맞았다. 아름다운 왕, 브레스의 폭정에 시달리며 모든 정치적 세력과 재산을 잃게된 그린우드는 다 쓰러져가는 집안을 다시 일으켜세우고자 빛의 기사와 함께 모이투라 전쟁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공훈을 세운 그린우드는 가이레흐 남서쪽의 숲의 일부와 ‘숲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관리 권한’을 인정받았다. 물론 센마이 평원의 화마로 인해 대부분의 숲이 소실된 만큼 그린우드의 영지의 크기는 작고 초라했으나 그 누구도 명예를 초라하다 평가하지 않았다. 그들이 ‘숲지기’라는 것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 ‘더 많은 것’의 이미를 알고 있는가?
→알고 있다면 3번으로
→모르겠다면 10번으로
14
하하하. 거짓말쟁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페이지를 펼치자 손끝에 따끔 거리는 느낌이든다.)
(페이지의 여백 가득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고 예리한 바늘들이 뺴곡히 박혀있다.)
(눈앞이 어지럽다.)
(→비틀거린다.)
15.
오? 그렇다면 그린우드는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이라고 생각하는가.
→임무에 실패해버린 숲지기 라고 생각한다면 9번으로
→배신자라고 생각한다면 17번으로
16.
하하하. 불경스럽기도 하지.
왜 그런 대답을 골랐는지 모르지만 그린우드는 루 라바다 왕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대답을 좋아하니 이번만은 특별히 넘어가주겠다.
자, 그럼 이제 당신의 업무를 시작해보자. 당신의 메뉴얼은 20번부터 시작한다.
→20번으로.
17.
쉿. 당신의 대답은 너무 경솔했다.
그러나 틀리지도 않았다.
그럼 이제 당신의 업무를 시작해보자. 당신의 메뉴얼은 20번부터 시작한다.
→20번으로.
18.
맞았다.
(페이지를 펼치자 어디선가 찢어낸 책의 페이지가 덧붙여져 있다.)
루 라바다는 요정들의 여왕과 계약하여 피오드 숲을 열었다.
숲은 루 라바다 왕의 승리를 위한 기반이었으며 요새였으며 전쟁 후의 인간들을 먹여살리는 자원의 터였다.
그렇기에 루라바다 왕에게 있어서 ‘숲지기’란 믿을 수 있는 자이며 그가 숲을 열 때 맹세했던 ‘명예’를 대리할 수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당신은 피오드 숲이 왜 다시 닫혔는지 알고 있는가?
→인간들의 무리한 개간으로 인한 요정들의 분노라고 생각한다면 4번으로
→루 라바다 왕의 추락을 의뢰한 자들의 음모라고 생각한다면 15번으로
19.
지금이라도 도망쳐.
20.
글
11월 18일 #오블완
빛이 닿지 않는 복도의 저편, 경계선을 구분할 수 없는 그 미끈한 심연.
사위가 어두운 복도 한가운데 덩그러니 늘어트려진 한 구의 마나등 아래에서 한 인영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유일하게 불빛이 밝혀진 동그란 공간 안에 앉아있는 이는 다름아닌 니클라우스였다.
그는 현실이 아닌 어딘가를 바라보는듯한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원근감이 사라진 어둠속에서 적막을 희롱하는 검은 불꽃이 둥근 원을 그리며 그의 눈을 현혹하고 있었다.
니클라우스의 주의를 끈 불꽃은 그 자체로 현상이며 언어였다.
불꽃은 어둠에도 요철이 있다는듯 무언가의 형태를 덧그리고 또 휘감아돌며 이 어둠을 구성하는 존재의 형태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게끔 묘사했다.
두 개의 둥근 구멍과 지나치게 긴 비골.
그 끝에는 더이상 호흡을 할 필요는 없게 된 타원형의 구멍이 한 쌍 뚫려있어 구멍안쪽으로는 정면에서 보이지 않을 아랫면에 위치하는 턱의 일부가 엿보였다. 누가보아도 명백히, 인간의 것은 아닌 짐승의 상이었다.
불꽃은 그런 니클라우스에게 확신을 심어주겠다는듯 외비공을 통해 들어가 턱관절부 사이로 새어나오며 관자놀이뼈를 향해 기어올라갔다. 툭 불거진 측두골의 윤곽을 따라 초승날모양의 정점에 시선이 다다르자 마침내 그가 깨어났다.
어둠속에서 희미한 숨소리. 목울대를 진동시키는 나지막한 짐승의 협착음.
서리가 얼어붙는다. 공기가 울리며 어둠과 이름이 분리된다. 물위에 뜬 기름이 흘러내리는 것 마냥 오색으로 빛나되 찬란하지 않은 목소리가 단어를 구성하여 그에게 다가왔다.
“니클라우스… 클레이브…”
니클라우스는 머리의 양 옆에 솟아난 거대한 뿔을 가진 공허한 존재를 바라보며 주문을 읊조렸다.
“엘라르 클라테를 해방시켜줘.”
그러자 그것은 키득거리듯, 혹은 진절머리 난다는듯 바람을 쥐어흔들며 다시 어둠속으로 몸을 웅크렸다.
그랬다. 니클라우스 클레이브는 테피아흐 폴라우와 함께 렐타 올라스 지하 수사실에 수감되기를 선택했다.
신출귀몰한 이계의 존재, 이전날 소머리를 한 남자라고 불렸던 그를 이렇게 붙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니클루아스가 그의 계약자가 되는 것을 자처했기 때문이었다.
거래가 아닌 계약. 계약자, 니클라우스 클레이브.
만약 니클라우스가 이 두가지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을 듣지 못했다면 그 역시 순간의 분노와 절망에 눈이 멀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거래자로 몰락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두 개의 큰 행운이 쥐어져 있었고 동시에 그것을 읽어낼 지혜와 인내심이 있었다.
첫번째 행운이 발휘된 것은 구아드레의 장례식장에 참여한 날이었다.
그는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몸과 마음을 분리시켰다. 몸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머리는 끊임없이 과거를 배회했다.
왜 죽어야 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죽은 것일까.
누군가에게 이 의문을 캐물어 답을 얻어내고 싶었지만 명분이 부족했다. 가족도 아니고 친인척도 아니다. 고작해야 아카데미 ‘친구’라는 이름으로 캐묻기에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으며 불미스러웠고 또 의문투성이의 위험한 기류를 아낌없이 내뿜고 있었다. 그런 친구의 비밀을 함부로 캐묻기에는 그가 가진 패가 너무 적었다.
게다가 구아드레의 장례는 그의 친가가 아닌 일찍이 사고로 돌아가신 구아드레의 양친을 대신해 그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던 크리스토르 가문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니클라우스는 언젠가 그곳이 구아드레의 어머니쪽 친척이라는 이야기를 들은적 있었다. 그 이야기 대로 어딘지 구아드레와 조금은 비슷한 것 같아 보이는 크리스토르 부인은 그가 행여나 스스로를 위험에 내던질까 염려되었는지 따로 불러내어 그에게 다정한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녀는 니클라우스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었다.
생전 구아드레가 니클라우스의 이야기를 자주 입에 담았다고, 두 사람의 우정을 추억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상심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귀족 부인의 특유의 말씨로 돌려 이야기하고 있었으나 니클라우스는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니클라우스가 구아드레의 죽음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왜 이렇게 갑작스러웠는지를 묻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니클라우스는 왜? 라는 감정이 앞섰으나 이를 숨기지 못할만큼 미숙한 기사생도가 아니었다.
그는 그들이 원하는대로 구아드레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내비치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그는 머리를 굴려 그 집안에 있는 그들의 친아들, 구아드레와 두 살 어린 친척동생을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이 구아드레에게서 니클라우스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듯 그 또한 친척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그 아이와 구아드레의 이야기를 나누면 슬픔을 조금 덜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크리스토르 부인은 니클라우스가 예의를 잃지도 않았고 걱정했던 어떠한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이를 허락했다.
그러나 돌아서는 니클라우스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저택의 정문, 지금 이 장소를 책임지고 있는 크리스토르 씨가 직접 다가가 배웅을 하고 있는 곧은 자세의 두 사람의 얼굴이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그저 낯선 얼굴이라 생각하며 지나쳤겠지만 공교롭게도 니클라우스는 그 두사람 중 한쪽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예전 니클라우스가 기사학과의 우수생 자격으로 초대받은 병영체험 프로그램중에서 렐타 올라스 기사단의 대표로 참석했던 렐타 올라스 기사단의 군행관이 바로 이 자리에 참석하고 있는 것이었다.
동시에 동행하고 있는 이는 그 때의 보았던 부행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니클라우스는 기사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구아드레의 장례식장에 그들이 왜 참석해 냈는지를 쉽게 추론해낼 수 있었다.
짚이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렐타 올라스와 구아드레.
보르가 안 두르그의 오너, 레비아르드.
렐타 올라스 기사단은 의문의 제보자에게 정보를 받아 그의 비밀 창고를 찾아내었고 그 안에서 그를 몰락시키기에 충분한 증거물을 찾아내었다.
솔직히 그 증거물이 그가 스스로 자진할 정도의 엄청난 것인지는 니클라우스로서는 조금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이미 유일한 증인이자 용의자는 죽어버렸기에 더이상의 정보를 알아낼 방도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밝혀진 일에 대해서라면 아직 물어볼 곳이 남아있었지.
사람들은 죽어버린 범인을 대신하여 의문의 제보자가 누구인지를 궁긍해했다. 다행스럽게도 렐타 올라스 기사단은 그 어떤 기사단보다도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신경을 많이 기울이는 곳이었기에 일반인들은 물론 난다긴다하는 정보상이나 뒷세계의 용병들도 그 ‘제보자’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그런 정보를 얻었는지를 밝혀내지 못했다.
하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니클라우스는 호화로운 상아빛 문에 노크를 하고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문이 열리자 조금 겁먹은듯한 얼굴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작은 크리스토르를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만들어 내비쳤다. 스스로의 외모를 그리 마음에 들어해본적은 없으나 이 미소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 정도는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니클라우스는 전에 없이 이 얼굴을 잘 활용해보아야겠다 마음을 먹으며 작은 크리스토르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두 살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고 가냘픈 작은 크리스토르는 이미 성인과 다름없는 니클라우스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둘은 금방 거리감을 좁혔고 첫인사보다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적당히 친밀감을 다진 뒤 구아드레의 이야기를 조금씩 섞어나갔다. 작은 크리스토르는 아무런 의심없이이 집에 찾아온 방문객에 대한 이야기들에 대답했다.
니클라우스가 묻고자 하는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혹시 오늘 장례식장에 참여한 어른분들중에 아는 사람이 있니?”
“음… 잘은 모르겠지만 키가 크고 자세가 곧은 푸른 정장을 입으신 분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지 알겠어요. 그런데 그 분은 처음보는 분이고 곁에 있던 분은 누군지 알아요. 아버지의 사업에 관련된 중요한 분이라고 들었거든요.”
“그래? 그럼 그 분은 언제부터?”
“글쎄요.. 어… 지난 가을즈음 부터?”
보르가 안 두르그의 오너, 레비아르드는 늦여름이 끝나는 가을의 첫번째날 죽었다.
그의 친구 구아드레 아르데는 가을의 마지막 날 죽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그의 집에 찾아온 ‘사업과 관련된 중요한 분’은 가을을 전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구아드레의 장례식에 참석학 렐타 올라스의 군행관은 원래 쉬이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차례차례 맞춰져 가는 퍼즐조각의 마지막 문장 앞에서 니클라우스는 소파에 주저앉아 양손에 얼굴을 파묻을 수 밖에 없었다.
“어.. 혹시 많이 피곤하신가요?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사용인에게 따뜻한 차를 가져다달라고 말하고 올게요.”
니클라우스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은 차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대답을, 진실을 원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던거야, 구아드레?
네가 어떻게, 누구에게, 무엇을 대가로 그런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는 거야?
니클라우스는 최대한 비밀스럽게 렐타 올라스 기사단을 찾아가 구아드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려달라 요청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대와 거절, 그리고 아직 그에게는 자격이 없다는 사무적인 말들 뿐이었다.
분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맞는 말이었다.
그가 크리스토르 저택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어린아이의 소꿉장난같은 것뿐이었던 것과 같이 그는 아직 졸업하기는 커녕 어떠한 공로도 세우지 못한 그저 ‘공부와 실기’를 조금 잘 하는 학생이었을뿐이기에.
그가 아무리 탐정흉내를 내고 어른스러운 체면치레를 연기한다 하여도 이 모든 것은 저 친구의 죽음에 이성을 잃어버린 가엾은 애송이의 철없는 방종이었을 뿐이었다.
니클라우스에게는 감히 렐타 올라스의 군행관까지 나서 유감을 표할만한 사건에 끼어들 자격이 없었다.
그는 무력하고 아니고를 따지기에 앞서 애초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였다.
적어도 이 사건과 상황 속에서는.
그렇다면 뭘 해야할까. 어떻게 해야할까.
누구에게도 토로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상담하지 못하며 마음만 목졸라 죽여가고 있던 어느 겨울날, 그는 코가르나흐 신문사가 또다시 이상한 기사를 발행했다.
소머리를 한 남자라는 소문으로 알려진 괴인이 자신이 레비아르드의 비밀스러운 거래자이며 그가 성공하게 된 비밀 조미료를 판 장본인이지만 그것이 ‘해피 스위트 허브’같은 싸구려 마약은 아니라는 내용의 인터뷰 기사였다.
평소라면 말도 안되는 기사라며 무시해버렸을 니클라우스였지만 그 신문이 코가르나흐의 신문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곳은 일찍이 “보로가 안 두르그의 보라빛 비밀”이라는 기사를 낸 던 신문사였다.
기사를 쓴 메브 그라임즈는 상급직원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하급 요리사와 인터뷰를 하였다고 써놓았지만 그 누구도(수사중인 렐타 올라스 기사단을 포함하여) 찾지 못한 보로가 안 두르그의 요리사를 실적도 전혀 없던 신입 기자가 갑자기 찾아내어 인터뷰를 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혹시 모르지, 구아드레처럼 의문의 누군가가 갑자기 엄청난 정보를 던져주고 그것을 적당히 가공하여 기사로 썼었는지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입 기자는 자신이 엄청난 기사를 써 냈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는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신문사는 안그래도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곤란하다며 그녀는 이미 장기간 휴가계를 내고 행선지를 알리지 않은채 사라졌다고 대답했다.
니클라우스는 쉬이 신문사의 말을 믿지 않고 주변의 상인들까지 모두 돌아보았으나 소득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생필품을 파는 상인들은 그녀의 특이한 머리 모양새를 기억한다며 그 아가씨는 겨울이 시작되기도 전에 갑자기 엄청나게 많은 방한 용품을 사들이더니 어디론가로 떠나버렸다고 대답했다.
여행? 칩거? 어느쪽이든 상관없었다.
니클라우스는 신문을 한쪽으로 밀어놓은 채 카페테리아에 앉아 자신의 펜을 성의없이 끄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니클라우스는 이미 예전부터 한계에 부딪쳤다. 더이상 어떠한 방도도 없었고 인맥도 없었다.
성과? 지금부터 쌓는다 하여도 어차피 학생의 신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리라.
니클라우스는 이래서 사람이 무엇이든 믿어버리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이런 절망감속에서 누구라도 자신을 도와준다고 나선다면 누구든 그 간편함과 안락함을 기적이라 칭하며 달게 삼켜버리고 말리라.
하지만 그런 기적이 있을 수 있을까?
놀랍게도 그는 두가지 방안을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엄밀하게 따지자면 기적은 아닌 이적(異跡)이었으나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은 니클라우스에게도 마음이 혹할만큼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나 되지 않는가.
니클라우스는 수첩에 쓰여진 ‘브리샤 그린우드’라는 메모에서 사교(社交) 혹은 사교(邪敎)라고 적힌 문구로 화살표를 그어 표시했다.
구아드레가 자퇴서를 제출하기 얼마전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부정한 사교모임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의문에 사교모임에 관해서는 아카데미가 한차례 그 모임의 존재를 부정한적이 있었다. 그
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믿지 않았고 니클라우스도 그 학생들중 하나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아카데미 내에는 모순적으로 그것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건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상이 가는가, ‘그’ 브리샤 그린우드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사실이?
그냥 ‘그린우드’도 아닌 ‘그’ 브리샤라고 일걸어지는 브리샤 그린우드가 괴롭힘을 당한다니.
누가 들어도 단순한 시기나 질투따위로 인한 사건은 아니었고 단순한 동급생, 상급생등이 모여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평소대로라면 그런 사교모임따위는 소리소문 없이 삼켜버렸을 브리샤가 되려 이를 공론화하고 역공당하고 있다는 것자체가 의문의 ‘단체’에 대한 확신이었고 그들이 평범한 학생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니클라우스는 더더욱 이 단체를 믿을 수 없었다. 만약 브리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쉽게 얻을 수 없는 지식과 예언을 빌미로 학생들을 현혹하고 조종까지 하고 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이 조종이 그들의 최종 목적은 아닐테니 대가와 목적을 알 수 없는 이들은 제외.
니클라우스는 카페테리아에 앉아 사교모임이라고 적어놓은 메모를 펜으로 벅벅 그었다.
이어 시선을 ‘소 머리를 한 남자’라고 쓰여진 메모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누군가 양해를 구하며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니클라우스는 손등에 턱을 괸 자세 그대로 시선만 들어올려 낯선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라이미라크 교단의 수도사들이 자주 입는 정갈한 로브를 입는 남자였다.
반듯한 미소와 올바른 자세.
얼핏 보기는 그저 평범한 사제로 보이지만 니클라우스는 그가 다가오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리고 그의 자세, 호흡.
니클라우스는 아무것도 모르는척 시선을 다시 내리며 수첩을 정리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는 사제라고 보기에는 기사의 그것과 더 닮아있었다.
보라색 눈의 사제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정오입니다, 니클라우스. 잠시 시간 좀 내 줄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사제님.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요.”
니클라우스는 후드를 벗고 자신을 응시하는 남자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옅은 곡물빛깔의 회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정리한 머리와 깊은 와인빛 눈동자.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제였으나 니클라우스는 곧 그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깨달았다.
“그런데 제가 라이미라크님의 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사제는 그의 깜찍한 대답에 즐겁게 웃으며 대답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는 성전기사단 소속은 아닙니다. 이번에는요.”
그는 자신의 이름을 파울로스라고 소개했다.
“다행이네요. 당신이 이렇게 먼저 말을 꺼내주었으니 번거롭게 돌려서 말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파울로스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니클라우스, 그 존재와 거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은 접으세요. 당신의 인생이 파멸할지도 모릅니다.”
동시에 그는 무례한 사람이었으며,
“그러니 이만하면 노력했다고 치고 정리합시다. 당신이 우정을 소중히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나, 그 우정이 인생을 바칠만한 것은 아니었잖아요?”
말에 진실함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혹시 그 친구에게 빚진 거라도 있습니까? 아니면 받을 거라도?”
니클라우스는 그의 말이 어느쪽에 기울어져 있는지를 가늠할 수 없어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나 뒤이어진 그의 가벼운 한마디는 니클라우스로 하여금 대답을 회피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파울로스 사제님.”
그 누구든, 친구의 명예를 들먹이며 말한다면 끝까지 입을 다물 수는 없겠지.
니클라우스는 짐짓 화난척 자리를 뜨고 일어날까 생각했지만 그의 대답을 즐겁게 듣는 파울로스의 표정을 보며 생각을 바꿔 다시 자세를 고쳐앉았다.
“으음, 안 떠나네요. 뭐… 반쯤은 그럴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기사로서 꽤 우수한 학생이라고 들었거든요.”
“........”
“아하, 자기 칭찬은 그냥 흘려보내겠다? 뭐 상관없어요. 그래도 기왕 앉았으니 계속 이야기를 들어봐요.”
파울로스는 이야기에 앞서 차가운 음료를 한 잔 주문하고는 양손을 깍지낀뒤 머리 위로 쭉 뻗어 올렸다.
오래간만에 밖에 나온 사람마냥 기지개를 켜는 그의 얼굴은 햇살을 만끽하는 오래된 해방자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파울로스는 이어 양 어깨를 가볍게 풀며 별 것 아닌 이야기처럼 ‘소 머리를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당신이 지금 사교 모임의 대안책으로 생각하고 있는 ‘소 뿔투구를 쓴 남자’ 아니, 이번에는 ‘소 머리를 한 남자’일까요. 그는 명계에서 도망친 문제아입니다. 사람의 소원을 교묘하게 비틀어 자신의 이득을 챙기다가 한 밀레시안의 기지와 어떤 남매의 헌신으로 그를 돌려보낼 수 있었죠.”
“.......저는 그 사람이 밀레시안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아, 정말요? 외형이 특이해서 그런가? 하지만 잘못 짚었어요. 밀레시안에게 전투의 고양감의 일부로서 도르카를 이용하는 기술은 있는건 맞지만 그들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악의와 절망에 취약하거든요.”
파울로스는 열대지방의 과일이 들어있는 상큼한 음료를 받아들고 행복하다는듯 미소지었다.
노랗고 흐물거리는 액체 속에 큼지막하게 섞여있는 새까만 씨앗의 모습이 꼭 양서류의 알과 같이 보이는 음료였다. 점원은 그가 이 시험적인 음료를 시킨 것이 걱정되는듯 먹는 방법을 설명해주려 했지만 파울로스는 이미 알고 있다며 점원을 정중하게 돌려보냈다.
“크으. 이 맛이지. 돌아오고 나서도 이 맛이 그리워서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렸는지. 게다가 이 씨앗까지 온전히 들어있는 백향과 음료는 예나 지금이나 꼭 여기서밖에 안판다니까요.”
“백향과..요? 패션 후르츠가 아니라요?”
니클라우스의 시선이 카페테리아의 벽면을 향해 기울어지자 파울로스는 그 곳을 함께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 그렇지 아직 거기까지는 다 안알려졌구나. 라고 말하며 소다수와 과일청이 잘 섞이도록 빨대를 흔들어보였다.
“아, 패션 후르츠요. 백향과는 쿠르클레 지방에서 부르는 이름이에요. 이 열매에서 백가지 향이 난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하더라구요. 패션 후르츠는 이 열매가 울라대륙에 들어오며 라이미라크 교단의 사람들이 붙인 이름인데 사실 거기서 말하는 패션은 고난을 의미하는 그 단어에요. 그러니까 고난(Passion)의 열매.”
이어 그는 재밌는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하지만 보이는 바와 같이 이 카페테리아의 사장은 그 의미를 유행(Fashion)으로 잘못 알아들었지 뭡니까. 덕분에 멋쟁이들을 위한 최신 음료 라는 카피라이트만 믿고 이 음료를 주문했던 많은 데이트 커플들이 이 모양새를 보고 크게 놀라 그대로 음료를 내버려둔 채 자리에서 일어나버렸죠. 당연히 유행을 아는척 잘난채하던 남자들은 대부분 차여버렸고요.”
“........”
“하지만 너무 걱정 말아요. 나중에 카페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카페테리아의 사장이 기지를 발휘하여 이 씨앗을 모두 빼낸 모습으로 다시 재출시하거든요. 게다가 마케팅의 중요성까지 깨달았는지 기존의 안 좋은 이미지를 벗기 위하여 백가지 향기를 품은 신비의 황금 에이드라는 이름까지 새로 붙이기까지 했죠. 당연하겠지만 황금이라는 이름에 눈돌아간.. 아니, 실례. 사족을 못쓰는 귀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답니다. 그래서 한동안 품귀현상이 일어나기 교단에서도 전전긍긍해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아, 이런 이야기는 재미없나요? 다른 이야기 할까요?”
그는 니클라우스의 혼란스럽다는 표정이 못내 즐겁다는듯 웃으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 그의 말은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과거를 추억하는듯한 어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니클라우스를 가장 두렵게 만드는 것은 당장의 기묘한 말들이 아닌 사제가 아니었다면 당장 미친사람 취급받았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낸 뒤에 이어지는 인위적인 침묵이었다.
그는 침착한 얼굴로 니클라우스가 평정심을 되찾기를 기다리면서도 그를 시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니클라우스가 평정심을 찾지 못한다면 그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을 것이고 니클라우스는 두 번 다시 그와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니클라우스는 여전히 이 종잡을 수 없는 사제가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파악해 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정말 기회인가? 아니면 시험? 함정?
니클라우스는 한참만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몇가지 말들중 괜찮은 것들을 골라내 천천히 그의 앞에 떨어트렸다.
“.....세속적인 이유로 유행하는 음료였다면 교단에서 이 음료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아, 걱정말아요.”
파울로스는 그의 대답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대답했다.
“아까 말했다시피 이 열매를 울라대륙에 소개한 것은 라이미라크 교단의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이 열매를 맺는 꽃에는 아예 ‘성스러운 사랑’이라는 이름까지 붙여놓는등 절대 교단에서 금지시킬 수 없도록 온갖 술수를 다 부려놨어요. 한마디로 이 음료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라이미라크 교단의 사람, 혹은 그 사람으로부터 이 음료를 소개받은 라이미라크 교단의 높은 분이라는 거죠.”
“....그럼 그런 과일음료를 최초로 출시한 이곳은…”
“와, 정말 학습하는게 빠르네요. 맞아요. 높으신 분이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돈의 기운을 느낀 높으신 분의 아는 사람이 친척에게 추천한 전혀 모르는 가게인거죠. 그래서 일단 표면상으로는 이 카페의 주인은 이 열매가 뭔지도 모르고 받아서 이런 야생의 모습 그대로 출시했었고 가게가 쫄딱망할뻔해버려요. 하지만 죽기살기로 음료를 회생시켜서 유행의 온상지가 된 이후에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유일무이 씨앗을 제거하지 않은 백향과 음료를 파는 원조 맛집이 된 것이죠.”
“.........”
“이제 내가 왜 어제 출시한 음료를 ‘예나 지금이나 꼭 여기서밖에 안판다.’라고 했는지 이해가 가나요?”
니클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말이 그에게 모욕이 되는 건지는 아닐까 하고 고심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파울로스 님은… 소 머리 남자와 계약해서 과거로 돌아오신건가요?”
“아니요. 나는 그와 계약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이곳으로 돌려보내신건 라이미라크 님이세요.”
그는 유능한 인재를 영입했으니 이걸로 단장에게 더이상 바가지 긁히지 않아도 되겠다며 즐거워하고는 깍지 낀 손을 턱아래 괸 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내가 그분께 선택받은 이유는 단 하나, 더이상 나와 같은 형제들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나요?”
“........”
“그래요, 거래와 계약의 차이도 모르는 어리고 미숙한 니클라우스. 나는 당신을 이곳에 붙들어 두기(SAVE) 위해서 여기 왔습니다.”
언젠가 그와 그의 친구, 그리고 그 친구의 형제를 구하였던 밀레시안이 다시 돌아와 다시금 그를 쫓아낼 때까지.
혹은 다른 밀레시안이 또다른 영웅으로서 그를 구원할 때까지.
니클라우스 클레이브는 비밀리에 라이미라크 교단 성전기사단의 견습기사가 되기로 서약하였다.
아직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못한 17살짜리 애송이가 성전기사단에 이름을 올린다는 이야기에 약간의 반발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파울로스가 가지는 무게감과 그의 뒤에서 그의 은총을 알아보고 지지해주는 '진짜 많이 높으신 분'의 이름이 이를 무마시켰다.
그곳에서 그는 거래와 계약의 차이를 배우고, 이름을 주구로 존재하지 않는 자를 이 세계에 묶는 법을 습득하였으며, 렐타 올라스 기사단과의 연계작전의 주축이 되어 모호한 이명속에 자신을 숨겼던 테피아흐 폴라우를 포획하였다.
“엘라르 클라테를 해방시켜줘.”
그렇기에 테피아흐 폴라우는 계약에 따라 엘라르 클라테를 해방시킬 방도를 알려주거나 그 영혼을 그의 앞에 가져다 두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하지만 니클라우스가 그를 이 땅에 쐐기박는 족쇄로서 스스로를 렐타 올라스 기사단의 지하수사실에 가두었기 때문에 자유를 잃은 테피아흐 폴라우는 더이상 이전과 같이 자유롭게 세상을 휘젓고 다닐 수 없었다.
“엘라르 클라테를 해방시켜줘.”
그렇기에 테피아흐 폴라우는 엘라르 클라테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인지도 알아내지 못했다. 알지 못하니 대답할 수 없었고 대답할 수 없으니 계약에서 자유로워질 수 가 없었다.
이것이 파울로스와 니클라우스가 짜낸 최대의 계략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들 모두 니클라우스가 희생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보고자 노력했지만 어느 소녀의 굳건한 의지가 그들의 망설임을 두드렸다.
“엘라르 클라테를 해방시켜줘.”
[불쌍한 구아드레는 굶어죽었다. 그는 너무 많은 허기를 먹어버렸다.]
니클라우스는 지금도 자신이 구아드레의 이름을 충동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기 위해 그녀의 쪽지를 내려다보고 있곤 했다.
손에 쥐고 있기도 하였으며 가슴에 품고 우는 상상을 했다.
울지는 못했다. 저 어둠속에서 안광을 번뜩이는 짐승은 지금도 그가 무너져 ‘다른 소원’을 빌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는 굳건해야했고 스스로의 명예를, 나아가 구아드레와 엘라르 클라테의 신념을 지켜야만했다.
불쌍한 구아드레는 굶어죽었다.
그는 테피아흐 폴라우의 계약자가 아니었으나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엘라르 클라테는 거울에 귀속되었고 구아드레의 죽음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이 두가지로 니클라우스는 조금이나마 구아드레가 갑작스럽게 죽은 이유를 이해했다.
구아드레는 거울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스스로 허기를 들이마신 것이다. 그가 그러한 끔찍한 방법을 자신의 결말로 선택한 이유는 그것이 그의 소중한 가족과 꿈을 모두 앗아간 증오스러운 저주이며 동시에 자신이 답을 얻어낸 과정이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일 거라고, 파울로스는 자신의 추측을 이야기해주었다. 그것이 속죄인가, 그 저주를 자신의 죽음으로서 없에는 것이 그가 선택한 보속인가.
알 수 없었다. 이해하기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찬란하였기에, 니클라우스는 그들에게 의지받아 부끄럽지 않은 기사가 되고자 이 어둠에 자신을 묻었다.
“엘라르 클라테를…… 해방시켜줘….”
그러니 어둠 속에서, 절망 속에서, 고통 속에서, 고독 속에서, 적막을 배경음삼아 울리는 메마른 울음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동시에 이것은 너무나도 찬란한 헌신이요 그가 사랑하는 희생의 봉화였기 때문에.
테피아흐 폴라우는 불만스러워하면서도 만족스러워하며 그의 영혼이 타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글
11월 17일 #오블완
미헬은 검푸르게 물든 동굴을 걸어 내려갔다. 등불도 없이 맨 몸으로 걸어 내려가는 미헬이 그것이 검푸른 색이라고 인식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것이 이따금씩 생명체가 박동하듯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기 떄문이었다.
벽면을 밝히는 알 수 없는 광채는 미헬이 향하는 어둠 깊숙한 곳에서 뻗어나와 벽면을 투과하여 그녀가 걸어온 길 너머로 사라졌다.
동시에 차가운 기운이 점점 옅어지는 것이 느껴졌고, 주변은 이제 완전한 침묵으로 채워졌다.
어떠한 소리도, 그림자도 지지 않는 완벽한 고요.
그 속에서 이질적인 것은 오직 하나, 미헬이라는 존재 뿐이었다.
미헬은 계속해서 똑같은 풍경만 반복되는 하향길 중턱에 멈춰섰다. 벽면을 짚고 기대어 서는 미헬의 표정은 두려움과 피로감, 그리고 혼란이 뒤섞여 한껏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여긴 어디지…’
여긴 그녀의 동생, 루데크가 찾아 헤매었던 피시스 북단의 신비이며 금지된 땅으로 향하는 얼음동굴이었다.
‘그랬지.. 난 분명 그 동굴에 들어왔어..’
미헬은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따금씩은 멍하니 빛이 박동하는 벽면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한참만에 그녀가 내린 결론은 그녀가 더이상 ‘춥지’않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건 얼음이 아닌걸…?’
맞는 말이었다.
얼음은 그저 환경적인 요소일뿐 피시스의 본질은 얼어붙은 땅 아래에 깃든 막대한 양의 마나에 있었다.
마나는 생명체가 살아 숨쉬는 것에 필요한 모든 것에 깃든 에르그이며 붉은 달에서 파생되어 흩어진 세상의 신비였으니 이는 파도와같이 같이 높고 낮음이 있고 바람과 같이 옅고 짙음이 있으며 대지와 같이 결정된 형태와 느끼지도 못할 미세한 분진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마나는 응집되고 결정화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곳, 얼어붙은 마나의 땅은 그 거대한 힘을 수 천년동안 품어온 신비의 고지였다. 그렇기에 이보다 더 높고 가파른 산맥 꼭대기에는 푸른 용이 살고 있었으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불길이 잦아들지 않은 섬에는 감응자를 기다리는 황금빛 영혼이 깃든 알이 보관되어 있던 것이리라.
그 최후의 둥지 바로 아래에서 오래된 이리아의 영혼들은 이 땅의 지하 깊숙하게 잠든 신비를 꺼내어 가장 매끄러운 형태로 다듬었다.
그것은 빛나면서도 보석이 아니었고, 한없이 단단하면서도 가공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힘이 깃든 물건의 원천은 모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그 자체가 깃든 것의 힘이었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 내가 이런 걸 알고 있었다고?’
가장 처음 만들어낸 원시적인 형태의 주구. 물이 아닌 것에 비치는 허상.
오래된 영혼들은 날카로운 것과 소리나는 것, 그리고 빛나는 것을 제구(祭具)로 삼아 하늘을 향한 기도를 올리곤 했었다.
그중 빛나는 것이 스스로 빛을 내는 무언가가 아닌 비추는 것으로 대체된 까닭은 그 상이 맺히는 원리가 빛이라는 것을 알아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은 빛에서 파생된 허상이요 땅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으니, 오래된 영혼들은 비추는 도구를 통해 그림자가 단순히 ‘어둠’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비춰지는 세상 또한 모든 것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다. 이것이 그들이 거석너머로 발견한 또다른 세상을 그림자라고 명명한 이유였다.
‘..........이건… 정말 내가 하는 생각인가?’’
미헬은 연달아 쏟아져 내려오는 지식이 버거운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머릿속은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상념들로 가득차 그녀의 영혼을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림자, 매끄러운 것, 빛이 그려낸 허상.
미헬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 세가지 단어뿐으로 그녀는 곧 이 오래된 지식들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거울….’
그래, 맞았다.
미헬은 기대어 앉은 검푸른 수정의 벽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녀의 얼굴은 아주 어두웠으며 그 눈은 총명함보다는 두려움과 혼란에 가득차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보라. 지금 그대를 바라보는 수정 너머의 당신의 모습을 한 존재의 눈동자를.
그녀의 눈은 현명함과 지식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그 불꽃은 일견 광기에 가득찬 마나의 추종자와도 닮아있었다.
무엇이든 금방 배우는 미헬, 3년만에 혼자서 지하동굴을 지나 피시스까지 찾아 올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미헬.
만약 그녀가 마법을 배우고자 하였다면 그녀는 뛰어난 마법사가 될 수 도 있었다.
동시에 그녀가 주술을 배우고자 노력했다면 그녀는 그저그런 정도의 샤먼도 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에게는 연금술의 재능도 있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쉽게 실린더를 다루기 시작했던 탓에 잘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사실 평생 펜과 전공도서, 그리고 날붙이라면 식칼이 전부였던 일반적인 사람에게 실린더라는 장비는 낯설고도 어색한, 그들이 경험한 적 없는 전에 없는 특별한 도구임이 틀림없었다.
‘이 수정이 문제인 것같아. 당장 여기서 떨어져야 해. 지금이라도 일어나야..’
그렇기에 이 모든 것은 그녀이며 그녀가 아닌 것이며 그녀일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의 집합체가 말하는 목소리였다.
상념이었다. 망령의 외침이었으며, 다른 세계에서 온 메세지였다.
예언이었던가, 후회로 가득찬 회고록이었던가. 알 수 없었다. 수많은 세계 중 이곳에 닿은 미헬은 오직 그녀 하나뿐이었으니.
미헬은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수많은 세계선 속에서 루데크를 잃은 미헬 중에서, 그를 이해하고자 노력한 미헬중에서, 우나를 만난 미헬 중에서, 끝내 그의 등불과 그의 나침반과, 그의 밧줄과, 그의 침낭을 가지고 이곳에 닿은 미헬은 그녀 하나뿐이었다.
로켓은? 로켓은 그대의 것이니 항상 함께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로켓을 가진 미헬은 동굴의 문을 열었으나 이렇게 깊게 들어오지 못했다.
등불을 가진 미헬은 이미 셀라 해변에서 돌아갔다. 밧줄을 가진 미헬은 길을 잃었으며, 침낭을 가진 미헬은 마음속의 추위를 잊지 못해 이 수정속에서 얼어죽었다. 나침반을 가진 미헬은 시간을 잊었다.
그러니 이는 기적이 틀림없었다.
모든 것을 바치고 이곳까지 온 미헬. 우리는 당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었다.
‘어떻게든 수정이 없는 곳을 가야.. 하지만 어떻게?’
미헬은 머릿속을 파고드는 낯선 사념를 피해 자리에서 일어나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그녀는 곧 깨달았다. 그녀가 딛고 선 대지, 머리위로 드리운 천장, 잠시 마음을 기댈 벽면과 호흡하는 공기조차도 모두 수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그녀는 다시한번 그녀가 넋을 놓고 내려오던 길목의 한 복판, 최초로 떠올렸던 의식의 시작점을 되짚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여긴 그녀의 동생, 루데크가 찾아 헤매었던 피시스 북단의 신비이며 금지된 땅으로 향하는 얼음동굴이었다.
당신이 원한 곳. 당신이 찾아 헤매던 대답.
당신은 루데크가 사랑한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고, 루데크가 꿈꿨던 이상을 바라보고자 했으며, 그가 약속한 미래를 확인하고자 이곳에 왔다.
“그만해..!!”
미헬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 알 수 없는 말들로부터 도망치고자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 수정이었다. 그 모든 것이 수정이었다.
“대체 내게 원하는게 뭐야?!”
수정은 모든 대답을 품고 있는 가능성인 동시에 당신의 그림자를 비추는 거울이다.
‘나는.. 나는 그저..!’
당신은 동생 루데크의 세상을 이해하고자 이곳에 왔다.
“그게 왜 이런 무서운 일로 되돌아오는 건데…!”
두려움은 당신에게 ‘이해’가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무지의 반향이었다.
우리는 당신이 궁금해하는 모든 것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고 그 준비는 모두 당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조금 더 허들을 낮춰 이야기하자면 당신의 시작은 당신이 아닌 타인의 이해를 바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당신의 상냥함을 본받아 조금 더 다듬어 이야기하자면.
미헬, 당신이 그동안 루데크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
미헬은 숨을 헐떡이며 다시 멈춰섰다.
귀를 막아도 이 소리는 차단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은 이미 침묵의 땅이요 고요의 성지였으니까.
눈에 닿는 모든 것이 무덤과 다를 바 없는 이 작은 터널 안에서 소리를 피해 몸을 웅크린다 하여도 이 소리 멎을 일은 없었다.
모르겠는가?
이곳에서 유일하게 숨을 쉬고 소리를 내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반드시 말해야만 했다.
미헬, 루데크는 당신의 유일한 가족이고 소중한 남동생이지만 그는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타인이고 최초의 이웃이다.
당신이 그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신이 후회하는 것은 그 이해의 기회를 모두 헛되이 흘려보냈다는 것일뿐.
그러나 그렇게 흘러간 기회는 언젠가 당신의 영혼 말미에 닿아 수많은 가능성을 만들어내었다.
깨닫지 못한 날들을 아쉬워 하는 마음. 후회는 당신으로 하여금 ‘그렇지 않았던’ 선택을 갈망하게 만들었고 그 갈망은 맞닿은 세상 어딘가에 있는 미헬에게 지금과 같이 속삭여왔었다.
할까? 하지 말까? 내가 할 수 있을까?
어차피 실패하고 후회할 결말이라면 차라리 해보고나서 실패를 보고 웃어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상냥한 미헬,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미헬.
당신이 당신의 집을 정리하고 탈틴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는지,‘나’는 안다.
당신이 탈틴의 광장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비웃던 사람들의 시선을 얼마나 신경쓰고 부끄러워 했었는지, ‘나’는 알고있다.
당신이 카브항구의 주점 2층에서 바다를 보며 설레였던 것도, 당신이 등대의 불빛을 바라보며 기도했던 것도
당신이 배멀미를 하는 것이 못미더워보일까 홀로 선실에 틀어박혀 고생하였던 것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모든 고집과 억지와 두려움과 고단함을.
‘나’는 알고, ‘우리’는 알고, ‘당신’은 알고 있다.
“ ”
미헬은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치며 눈물을 떨어트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일어나 다시 걸었고 또 서럽게 울었다. 무서웠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이 상황.
그녀는 지금의 눈물이, 이 걸음이, 그럼에도 걸어야 한다고 믿는 신념까지도 무엇하나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정말 나의 의지인가? 이것은 정말 ‘미헬’의 선택인가?
쏟아지는 별의 반짝임속에서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걷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빛을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 그녀에게 끊임없이 가르쳐왔기 때문이었다.
포기하지 말라고. 길을 잃었다 생각하더라도 자포자기 하지 말라고.
주변을 보고, 생각하고, 나아갈 방향을 찾을 지표를 찾아 움직이라고.
그것은 누구의 가르침이었던가. 아버지였나? 어머니? 아니면 이따금씩 자신이 백수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탐험가 선생 노릇을 하던 동생 루데크? 아니. 어쩌면 탈틴에서 배운 지식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닌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항상 정잡이 아닐 수도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상황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막막한 밤바다 위에서 관화를 피어올리지 않은 배를 찾을 수 없는 법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는 산중의 조난자를 찾을 수 없다.
들판에 남겨진 발자국, 얼어붙은 나무를 긁어 새긴 매듭의 문양.
떨어진 구슬.
편지.
눈물의 잔향.
당신을 이끌어온, 그리고 지금의 당신을 쌓아올린 모든 영혼의 상처들.
미헬은 도망치듯 달리며 생각했다.
싫어. 무서워. 이건 내가 기대했던 게 아니야.
그렇다면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누구를 만날 수 있을거라 기대했던 걸까. 그리고 어떻게 그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걸까.
물론,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가장 처음, 미헬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자 이 땅에 찾아왔다.
그렇기에 그녀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에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동생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실제는 어떠했던가.
그녀는 죽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항구를 찾았고, 새로운 배움을 얻었다. 기쁨을 느끼고, 경험을 쌓았다.
길을 찾는 방법을 익힌 그녀의 앞에서 설원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보이는가?
이게 당신이 찾고자 했던 루데크의 첫번째 이해의 조각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조각.
당신은 한 사람에 대한 추억이 모두 당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아니, 인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모르는 루데크가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루데크를 전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루데크에게는 루데크의 세상이 있었고 그건 그 누구도 온전하게 소유할 수 없는 고유의 것이었다.
심지어 그 자신까지도.
그렇게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루데크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우나를 바라보며 당신의 본질을 깨달았다.
그것은 우나의 것이기도 하였으며 루데크의 것이기도 한 사실(寫實).
당신은 루데크가 아니다.
그렇기에 당신은 루데크를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루데크의 가장 가까운 타인이고 최초의 이웃이었으며 피를 나눈 형제이고 가장 먼 이해자였다.
당신이 아는 루데크는 오직 당신에게 보여진 루데크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당신이 아는 루데크는 우나가 아는 루데크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느껴지는가? 우리는 낯설고 무섭고 무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당신이다. 그리고 당신은 거울이다.
당신은 이 세상의 존재이자 또다른 세상의 루데크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렇다면 우나와 루데크 또한 다르지 않다.
우나 또한 그녀가 아는 루데크를 기억하는, 우나의 세계에 비춘 루데크를 비추는 거울이며 루데크에게는 루데크의 우나와 루데크의 미헬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 누구도 타인의 세상을 온전하게 소유할 수 없는 이유이며 당신 자신도 모르는 당신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루데크는 어떠했을까.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녀와 같이 잘못된 이해로 이 땅을 찾았을까.
그가 이곳에서 누구를 만나고자 했는지, 그리고 어떠한 의미로 밀레시안이 말한 ‘그리움’을 이해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이곳에 도착한 것은 당신이다.
당신이 닿았다. 당신은 닿았다. 당신은 루데크가 목표로 하고 보고싶어했던 결말에 도달했다.
이 완성되지 않은 얼음의 동굴을.
더 이상 파고들어가지 않고 오직 거울과 같이 반질거리는 수정으로 뒤덮인 것으로 완성된 이 공터를.
그리움으로 열리는 이 끝없는 황천으로 향하는 길.
당신이 그를 만나고자 한 이유.
당신이 만나고자 한 루데크.
“내가 루데크를 만나고 싶어했던 이유는..”
당신은 이제 루데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미헬은 그렇게 동굴의 최심부, 가장 빛나는 수정의 벽 앞에 멈춰섰다.
그곳은 미헬이 여지껏 지나왔던 빛의 신호들과 같이 그녀의 박동소리에 맞춰 빛을 내뿜었다 거두기를 반복하고 있었다.미헬이 공교롭다고 생각한 것은 빛이 발광할 때에는 수정이 아무것도 비추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수정에 그녀의 상(像)이 맺히는 것은 오직 빛이 지나간 직후, 어둠이 다시 눈앞을 가리기 직전의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의 연속인 터널 안쪽에서 미헬은 수없이 많은 상(像)을 맺었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생성과 복제, 소멸을 반복했다.
미헬은 유일하게 빛이 꺼지지 않는 수정벽의 중심부를 향해 한걸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어떤 느낌이 들었는가.
따뜻했다.
얼음의 땅 최심부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할정도로 그것은 따듯하고 또 포근했다.
이것에 뺨을 대고 눈을 감으면 그녀는 마치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는 것같은 안락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락함은 두번 다시 눈을 뜨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강력하고 매혹적이겠지.
미헬은 이전의 자신이라면 분명 눈을 뜨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는 뺨을 기대어 보는 것도, 눈을 감는 것도 선택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 빛을 응시했다.
그녀는 이제 그녀의 안에 있는 루데크의 존재를 이해했고, 그녀의 본질을 깨달았으며, 다시 살아 나아가야 하는 이유도 제대로 기억해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질문을 던질 차례였다.
이제 여기서 뭘 해야하지?
질문을 던지자 다시 한번 대답이 들려왔다.
그것은 길이 열리는 것과 같았고 동시에 새로운 세상과 연결되는 것을 의미했다.
‘들려요?’
미헬은 들린다고 대답했다.
‘아, 아. 내 말 들려요?’
미헬은 들린다고 대답했다.
‘와, 다행이다. 저기요. 그러니까 저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요.’
미헬은 듣고있다고, 천천히 말해도 된다고 대답하며 상대를 안심시켰다.
미헬의 부드러운 말씨에 상대는 안심한듯 긴장을 덜어낸 목소리로 다시금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제 이름은 메브, 메브 그라임즈라고 해요. 코가르나흐라는 타라의 작은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미헬은 침착하게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거울 너머의 신비한 분. 저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미헬은 무엇을 도와야 하느냐고 물었다.
‘저에게는 지금 또 하나의 거울이 필요해요. 그리고 그걸.. 아마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 같고요. 그러니까 당신이 저를 도와서 거울에 갇힌 영혼들을 해방시켜주셨으면 좋겠어요.’
미헬은 어떻게? 라고 되묻지 않았다. 답은 이미 눈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올려 거울속의 미헬을 바라보았고,그 뒤에서 등불을 들고 다가오는 루데크를 응시했다.
나침반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걸어오던 루데크는 거울에 비친 미헬과 눈을 마주치고는 어리둥절한듯 고개를 갸웃거려보였다.
그리고는 입모양을 벙긋거리며 다가왔다.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치 그녀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는 연달아 무언가를 계속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는 루데크의 입가에는 점점 커져가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의 눈은 반짝였으며 당장이라도 더 많은 것을 묻고싶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복잡한 눈빛속에서도 가장 선명하고 커다란 감정은 기쁨이었다. 그녀가 이곳에 도착한 업적을 향한 순수한 기쁨과 반가움. 세계를 공유하는 즐거움.
미헬은 루데크를 향해 돌아서는 자신을 바라보며 수정에 올려놓은 손 옆에 이마를 대었다.
그리고 눈물을 떨어트리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거울 속의 미헬은 그 기쁨에 응답하기에 앞서 일단 팔부터 휘둘렀다.
그녀는 루데트의 등을 몇번이고 내리치며 그를 나무랐다.
두툼한 방한복 너머로 그녀의 손길이 닿을리도 없것만 루데크는 아프다는 시늉을 하며 그녀에게 엄살을 떨어보였다.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금방 화해하여 서로를 걱정하고 의지해왔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도 그러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거니 떠밀거니하며 점점 미헬로부터 멀어져갔다.
곧 그들의 어둠속에 잠겨들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미헬은 홀로 남겨졌다.
그러나 미헬은 그 뒤에 있을 상황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동굴 밖으로 나가면, 우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는 어색하게, 혹은 뻔뻔하게, 혹은 조금은 쑥쓰러워 하며 그녀를 제대로 소개해줄 것이다.
‘소개할게, 누나. 이쪽은 우나. 내 소중한 사람이야.’ 라고 말하겠지.
물론 그것은 한번도 들어본 적 없고, 말해본 적도 없으며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애초에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이곳에 올 일은 없었기에 일어날 수 도 없는 기적이지만.
그럼에도 미헬은 그러한 모습을 상상하고 소원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거울 속의 비친 모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도와줄게요.”
동시에 거울 너머에서 들리는 의문의 목소리가 말하는 ‘해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으며,
어떻게 해야 그것이 가능한지도 알 수 있었다.
‘정말요?! 고마워요! 사실 저도 반신반의 하며 말해본 거였거든요. 저기, 그럼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불러들어야 할까요? 어디계시죠? 제가 만나러 갈 수 있나요?’
“미헬. 내 이름은 미헬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아마 만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러자 수정의 동굴 어딘가, 수정벽 속 루데크와 같이 홀가분하게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그녀의 뒤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루데크가, 그리고 루데크들이 하나 둘씩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래. 다정한 너는 어쩌면 나를 걱정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왜 이런 위험천만한 곳까지 왔느냐고 화를 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밖에도 훨씬 더, 훨씬 더 많은 네가 있었을 것이고 그중 대부분은 내가 모르는 반응으로 다양한 대답을 들려주었겠다고 생각하며 미헬은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빛이 박동하여 그녀를 스쳐지나가 동굴의 입구에 이르기까지, 수 천, 수 만번의 인사가 전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마지막 남은 미련까지 털어낸 뒤에야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미헬은 눈물과 땀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저는 지금 세상의 끝에 있어요.”
동굴은 빛으로 미헬의 대답에 응답했다.
글
11월 16일 #오블완
메브 그라임즈는 코가르나흐 신문사의 평범한 신입기자였다.
인맥을 기대하기도 힘든 작은 마을출신에 따로 대단한 재능이 있어 혼자서 울라대륙을 돌아다닐만한 인재도 아니었다.
그나마 뛰어난 부분을 손꼽자면 타고난 말솜씨와 눈썰미 정도. 그리고 초급학교에서 갈고닦은 작문실력이 있긴 했지만 글솜씨만 두고보자면 그녀의 동기, 시우반이 더 깔끔하고 명료한 문체를 자랑하고 있어 그녀가 자신감 있게 내놓을 것이 되지 못했다.
더욱이 시우반은 혼자서 오스나사일을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듀얼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침착하게 거리를 두고 응전하는 정도였지만 아무런 무기를 다루지 못하는 그녀와 달리 시우반은 어디든 자유롭게 취재를 떠날 수 있었고, 또 어느정도 위험을 감수하고 더 깊은 취재를 지속할 수 있었다.
이렇다보니 메브라고해서 무기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요즘은 실린더도 잘 나온다고하여 일부러 탈틴까지 찾아가보기도 했고, 몇번을 가르쳐줘도 결정 넣는 것조차 불안해보이는 그녀를 위해 추천된 ‘던지면 무엇이든 해결되는 마법의 파란 솔방울’을 구매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메브는 그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망손이었다.
그동안 수도없이 연금술에 관련된 기사를 교열했던 그녀였지만 실린더 안에 원소의 결정을 밀어넣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던지면 무엇이든 해결된다던 ‘마법의 파란 솔방울’은 또 얼마나 강력한지, 메브는 자기 발치 바로 앞에 자라난 성인 남성만한 얼음 석순을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만약 거리 조절을 잘못하여 발밑에 떨어트렸다면, 혹은 어딘가에 잘못 튕겨져 나오 그녀에게 다시 굴러들어왔다면?
‘저 얼음에 꿰뚫리는 것은 지나가던 회색 도시쥐가 아니라 내가 되지 않을까?’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 상품에 쓰여져 있던 ‘무엇’이란 그림자 세계의 중, 고급미션을 말하는 것이었다.
메브는 자신은 호신용품을 원했지 전쟁용품을 원한것은 아니라며 서둘러 판매처를 찾아가 구매한 모든 제품을 반품했다.
메브에게 ‘던지면 무엇이든 해결되는 마법의 파란 솔방울’을 판 개인상점 상인은 메브에게 이런식으로 나오면 곤란하다며 반품을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상인은 갑자기 말을 바꿔 빠르게 모든 금액을 환불해 준 뒤 서둘러 가방을 챙겨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가 허둥지둥 뛰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메브는 마침 그녀의 옆에서 똑같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상인을 응시하던 버섯머리의 소년을 보고 멋쩍은듯 웃어버렸다.
소년은 방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 광장 뒤에 있는 언덕위로 올라갔다. 메브는 어쩐지 그 손인사에 맞춰 그 자리에 떠나야할 것 같은 분위기에 휩쓸려 마침 성문 안으로 들어오는 타라행 마차에 올라탔다.
침대에 걸터 앉고 나서야 메브는 베개를 내리치며 뒤늦은 깨달음을 토해냈다.
“전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어!!”
이제 신입이라는 딱지도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시기.
그동안 동기 시우반은 승승장구하여 몇번이고 편집장님의 칭찬을 받아 지면에 상당한 분량의 기사를 실었다.
그에 반해 메브가 취재한 기사는 고작해야 타라의 고양이와 선행, 길거리 강아지 best 10, 가을철 꽃사슴을 조심하세요! 같은 쓸데 없는 기사들뿐.
모처럼 인터뷰실력을 발휘 할 수도 없는 동물들 대상의 기사만 잔뜩이라 그녀는 기사를 들고갈 때마다 되려 비웃음을 사기만 했었다.
그러면 사람을 대상으로 취재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힘들었다. 불가능은 아니었지만 이 까칠한 타라라는 도시 내에서 아무런 인맥도 지연도 없는 그녀의 인터뷰실력은 빚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차라리 우연히 사고라도 목격하여 그 사고 목격자를 인터뷰하는 것일면 모를까, 타라의 높으신, 귀하신, 한 자리 하시는 도시 사람들께서는 이런 촌스러운 시골출신 여성기자의 인터뷰 신청따위 숲속에 굴러다니는 위습만도 못한 소리처럼 무시하는게 일상이었던 것이다.
메브는 이번에도 허탕쳐버린 휴가날을 아까워하며 양 주먹을 휘둘러 베개를 번갈아 내리찍었다.
시우반도 짜증이나고 이 싸가지없는 타라의 시민들도 짜증났다. 은근히 눈치주는 편집장이 미웠다.
자신이 힘들게 취재한 길거리 강아지 best 10의 1위와 6위를 바꿔 기재한 미술기자도 짜증났다.
얼마나 힘들게 수집한 선호도 조사 결과였는데. 잘못 랭크된 강아지 기사가 나간 날, 누군가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기사였으나 사실 그 기사는 펜카스트 대주교가 특별히 그녀를 불러 의뢰한 비밀의뢰 기사였다.
고양이들을 쫓아다니며 선행하는 이들에 대한 기사를 썼던 것이 매우 인상깊었다며 이번에는 보다 많은 이들에게 선행을 홍보하고자 길거리 강아지들의 귀여운 포인트를 일목요연하게 나누어 기사화 해달라는 부탁이었는데…
내심 랭킹 1위 강아지를 추천하기까지 했던 터라 메브는 일찌감치 그 까만주둥이의 하얀 입술이 매력포인트인 갈색 강아지를 랭크 1위에 올려놓고 기사를 썼으나 사진이 모든 것을 망치고 말았다.
당연하지만 자신이 아끼는 강아지가 랭크 6위에 기록된 것을 발견한 펜카스트 대주교는 매우 싸늘한 눈으로 메브를 바라보다 말없이 교황청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랭크 1위가 된 강아지를 입양한 사람이 펜카스트 대주교의 유명한 심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과거의 불운을 곱씹으며 베개의 먼지를 털어내던 메브는 푹신하게 되살아난 베개에 다시 얼굴을 파묻고는 중얼거렸다.
“짜증나… 나도 하늘에서 뚝 하고 행운이 떨어졌으면 좋겠어. 마법같은 사건이라던가, 갑자기 배송된 붉은 밀랍의 초대장이라던가, 알지도 못하는 친척의 유산이라던가, 밀레시안이라던가, 밀레시안이라던가, 어디서 아는 밀레시안이 생겨난다던가.”
메브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돌아누우며 말했다.
“요즘 그 뭐냐, 이단 성직자들이 많이 돌아다닌다며. 그런데 왜 내 앞에는 하나도 안나타나? 뭐 원수라도 졌어?”
그리고 다음 날, 모든 소원이 이뤄졌다.
메브는 마지막 한숨과 함께 내뱉었던 소원을 후회할 수 밖에 없었다.
메브가 받은 초대장은 어느 귀족가문의 저택이었다.
그곳은 메브는 자신이 여기에 초대받은 것이 맞느냐고 수십번도 더 되물을 정도의 대부호의 저택으로 직위와는 별개로 다양한 유력자들과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맺은 가문이었다.
가문의 이름은 스카한, 신비와 영감으로 가득찬 예술가의 가문이었으며 그중 가장 유명한 이는 다름아닌 생전에 ‘왕립미술협회’에서 천재로 칭송받았던 일다하흐 스카한이었다.
왕성에도 여러점의 작품을 남겼던 그는 명예 보다 많은 사람들과 행복을 공유하고 싶다는 이유로 왕성으로 떠나 라이미라크 교단으로 향했으며 그곳에서 캔버스가 아닌 성벽에 성화를 그리는 봉사활동을 하며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그림이 멀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라미이라크 교단은 그런 그를 매우 사랑했다.
그 사랑이 어느정도였냐하면 벽에 그린 성화와 똑같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그린 그림을 바로 보물고에 보관하였으며, 그와 또 별개로 성화를 그리는 그의 모습을(곁에는 일다하흐의 동료, 아르기드와 함께했던 귀엽고 성실한 어린이 봉사자들도 있었다.) 초상화로 남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토록 숭고하던 젊은 예술가는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럽게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세한 사항은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메브는 지금도 일다하흐 스카한의 사인을 알지 못했다.
언뜻 들었을 때는 뱃놀이중에 사고가 발생했다고도 들었고, 또 어딘가에서는 배 위에서 일어난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에 휘말린 것이라고도 들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사건이 공표되지 않을 리 없었기 떄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그의 죽음을 ‘사고’라고 칭하며 유감을 표하는 선에서 그쳤다.
더 자세하게 조사하려는 이들은 재능있는 조카의 죽음을 너무나도 슬퍼하여 가문의 문까지 닫아걸은 스카한 대부인의 분노를 직면해야했기에 보통의 용기와 뒷배가 없는 기자들은 스카한 가문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메브가 자신이 향하는 곳이 ‘그' 스카한 가문의 저택이라는 것을 깨닫자 마자 넋을 놓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사교계에서 이제 완전히 이름을 감춘 스카한 가문이 나를 왜?'
다행스럽게도 메브가 불려가는 이유는 스카한 대부인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닌듯 했다.
만약 그녀가 부르는 것이었다면 그녀의 이름이 적혀있었을테니까.
그녀가 받아든 고급스러운 편지지에 적힌 이름은 ‘스카한’으로, 스카한 가문에서는 다름아닌 메브의 조모님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였고, 그녀의 부모님은 그보다도 일찍 그녀를 조부모님께 맡긴 뒤 어디론가로 사라진 상태였다.
이렇다보니 스카한 가문에서는 다음 ‘그라임즈’를 찾아올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바로 타라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던 메브였다.
그들은 메브가 그라임즈의 성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지막 직계가 자신이라는 증서까지 지참하여 이를 메브에게 ‘돌려주기’까지 했다.
마치 그녀가 먼저 자신이 그라임즈의 직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서류를 보냈다는양 자연스러운 양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왜?'
메브는 그리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왜 스카한 가문에 불려가는지를 계속해서 추론해나갔다.
작위도 뭣도 없는 그라임즈의 늙은 노부부가 귀족가문 스카한과 무슨 연관이 있었을까.
나 몰래 빚이라도 졌던걸까?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마차와 마부까지 보낸 것이 퍽 정중해보였다.
그라임즈의 직계, 그 증서를 직접 가져올 정도로 빠른 일처리, 증명.
대를 이어서라도 무언가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 대상이 평민이 될 만한 일.
해답은 그녀가 지난밤에 빌었던 소원에 있었다.
이미 갑자기 배송된 붉은 밀랍의 초대장에서 예고되었지 않았던가.
“유산이요?”
“정확히는 이제 당신에게 넘어간 어떤 물건에 대한 소유권이지요.”
메브는 마법같은 일은 이미 충분하니 평범하게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간절하게 빌며 응접실에 마주앉은 집사장이 내미는 상자를 받아들었다.
그 안에 든 것은 다름아닌 거울이었다. 들고다니기엔 조금 커보이지만 화장대 앞에 앉아 이리저리 비춰볼 때 쓰기 좋아보이는 커다란 손거울.
어떤 기술로 만들었는지 테두리가 하늘빛이 감도는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거울은 꼭 얼음을 빚어 만든 마법아이템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묘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메브는 손잡이 끝과 거울 여기저기에 박힌 불투명한 우유빛 광물(보석은 아니었다)을 홀린듯이 바라보다가 다시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제가 이걸 관리해야한다고요? 아니 일다하흐 스카한의 유산을 제가 왜요?”
집사장은 대답 대신 정중한 손짓으로 거울이 들어있던 상자 아래에 들어있던 수첩을 가리켰다.
수첩은 선선대 스카한이 남긴 편지의 사본과 메브의 조모가 남긴 편지의 원본으로 이루어진 서신철이었다.
(아마도 선선대 스카한이 남긴 편지의 원본과 메브의 조모가 남긴 편지의 사본은 그들이 가진 또다른 서신철에 있을 것이다.)
편지는 메브의 조모가 새파랗게 어린 모험가였던 시절에 썼던 것으로 그녀가 스카한에게 고용되어 어떠한 ‘단체’를 쫓고 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단체가 이미 누군가의 추격을 받고 있어 양쪽을 신경쓰는 것이 매우 어렵고 고되고 불쾌하고 성가시다는 내용이었다.
스카한이 그런 그녀에게 추가적인 보수를 미리 지급하며 인내심을 가지기를 부탁했다.
스카한이 이미 누군가에게 추격을 받고 있던 ‘단체’를 굳이 따로 쫓고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가진 기물(忌物)이 원래는 스카한 가문의 기물(己物)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스카한 가문의 물건이 이상한 단체에게 넘어가 사악한 마법이 덧씌워졌다는 것.
스카한 가문은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이를 회수하려 했으나 이 ‘단체’는 보통 특별한 단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라이미라크 교단의 고위급 사제들처럼, 혹은 사법에 손을 댄 블랙위저드처럼, 듣도보도 못한 이상한 마법을 사용하며 그들을 추격하는 족족 포위망에서 빠져나가곤 했다.
또 여의치 않을 때에는 잔혹한 수단으로 대응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으며 스카한은 이미 여러번의 실패를 경험한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이 ‘단체’에게는 너무 적이 많아 아직 ‘스카한’이 그들을 쫓는줄 모르고 있다는 말이었다.
스카한은 그들이 스카한의 기물을 이용한 사악한 물건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명예를 떨어트리기 전에,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들을 협박하기 전에 그 기물을 회수하고 싶어했다.
이를 위해서는 기물이 ‘단체’를 쫓는 의문의 추격자들의 손에 들어가서도, 혹은 다른 추격자들(라이미라크 교단이라던가, 친위대라던가, 그들과 원수진 기사단이라던가)그들의 손에 파괴되는 것도 막아야만했다.
이유는 이들이 가진 기이한 마법..? 같은 힘 때문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이미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한 적 있다던 스카한은 그들은 기물(忌物)에 비춘 그림자를 다시 현실화 시키는 마법을 가지고 있어 파괴는 되려 정화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악수라고 설명했다.
여기서부터 서신의 말을 반절도 이해하지 못한 메브는 남은 서신들을 빠르게 넘겨 결론부분만 훑어보았다.
요약하자면 메브의 조모, 선선대 그라임즈는 스카한의 ‘기물’을 되찾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기물은 방금전 메브가 직접 확인했다시피 ‘거울’이었고 그녀는 거울에 절대로 얼굴을 비추면 안된다는 스카한의 조언에 따라 거울을 상자에 넣은채 빠르게 그 현장을 빠져나오려 했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단체’를 쫓던 추격자들과 마주쳤다는 것이었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갑옷과 앰블럼을 단 기사들은 그녀에게 거울의 위험성을 설명하며 거울을 돌려줄 것을 부탁했다. 그라임즈는 그들의 ‘부탁’이 강한 자들이 내보이는 특유의 자만심, 혹은 여유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두번 고민할 것 없이 상자를 내려놓고 양 손을 들어올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장 ‘부탁’을 해 보이는 기사는 가장 위험해 보였을뿐더러, 가장 빠릿해보이는 기사는 과하게 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라임즈는 그 기사가 만약 실수로 그녀의 목을 날리더라도 저 허술해보이는 기사가 난감한듯 웃으며 넘어갈 것이다라는 것에 자신의 의뢰금도 걸 수 있었다.
대신에 그라임즈는 제안을 던져보았다.
그 거울은 내가 쓸 것이 아닌 의뢰받은 물건이고, 그 의뢰자들은 그저 자신들의 물건이 사악하게 쓰이는 것을 막고싶은 것뿐이라고 사정을 털어놓은 것이다.
그라임즈의 말에 허술해보이는 기사는 전혀 믿지 않는다는듯 웃어보이고는 터벅터벅걸어가 상자안에 고이 감싼 거울을 꺼내들었다.
그라임즈가 위험을 경고하려하자 그는 그라임즈에게 괜찮다고 손짓하며 거울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거울은 그의 손에 어린 푸른 불꽃에 그슬리듯 은면을 새까맣게 물들인채 검은 액체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기사는 그 냄새나고 지독해보이는 액체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아, 정말로 스카한의 것이군요. 어쩐지 유난히 안정되어있다 했습니다.”
그는 손위로 넘쳐 흐르는 검은 액체들마저 모두 불태워버릴듯 또다시 푸른 화염을 한껏 피워올렸다.
그러자 불필요한 장식들이 모두 타들어가며 거울자체가 투명해지는듯한 변화가 일어났다.
남자는 다시 은색의 반사면을 가지게 된 거울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맑은 가을날의 창공처럼 옅은 색소의 푸른 눈이 거울 속에서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마치 타인을 보듯 그 거울속의 맺힌 상을 바라보다가 살짝 웃었다.
놀라울만큼 매력적인 얼굴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그라임즈는 그의 얼굴이 그리 설레지 않았다. 뭐랄까.. 신전의 조각상이 욷는 느낌? 아무리 섬세한 조각상도 결국 돌에 세겨진 웃음의 모양새에 불과 한 것마냥 그녀는 그의 웃음속에서 마르고 버석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거나말거나, 기사는 거울은 다시 처음 상태 그대로 천으로 둘러맨 뒤 상자 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그 상자를 그라임즈에게 내밀며 말했다.
“스카한이라면 이 거울을 잘 보관할 수 있을겁니다. 가져가십시오.”
“하지만…”
“상부에는 내가 보고하도록 하지. 아무 문제 없을거라 약속하지.”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회에 놀라워하는 것도 잠시, 그라임즈가 재빨리 상자를 받아들었다.
다른 것을 생각하기 보다 그녀보다 더 놀란 기사들의 표정이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었고 그녀의 직감 또한 이것이 흔치 않은 기회라는 것을 속삭이고 있었다.
거울을 돌려준 기사는 마치 경계심 많은 길고양이같이 상자를 낚아채어 멀어지는 그라임즈를 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그라임즈는 몇번이고 뒤를 경계하며 혹시라도 그들이 마음을 바꿔 쫓아오지 않는지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기사들은 여전히 그 허술해보이는 기사에게 잡혀있었다. 그녀가 그 도시를 빠져나가 울레이드 숲에 몸을 숨길때까지도 말이다.
그라임즈가 혼란스러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카한 편지를 통해 전달된 상기의 이야기에 당혹스러운 반응을 내비쳤다. 그는 몇 차례에나 그녀가 보았던 ‘추격자들’의 외형적 특징을 물었고 그라임즈는 그 때마다 진절머리를 내며 그가 묻는 질문에 모두 대답했다.
나중에는 그녀 나름대로 기억에 남은 앰블럼의 모양을 그려 보냈는데 스카한은 그녀의 끔찍한 그림솜씨에 절망적인 반응을 내비치며 대체 뭘 그린 건지 ‘글자’로 설명해달라는 답장을 돌려보냈다.
마침내 그는 그라임즈가 그린 ‘붉은 해골’을 해석해낸 것에 자축하며 그녀가 했던 이야기들을 믿는다고 대답했다.
조모의 상황에 이입해서 읽고 있는 메브 입장에서 보기에도 정말 기가 쭉 빨려나가는듯한 고용주였다.
이후의 내용은 만나서 진행되었기에 남은 내용은 서신철 가장 마지막에 끼워진 계약서의 사본을 보고 유추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론은 간단헀다.
“쫄보…”
스카한은 ‘단체’보다 끈질기고 무서운 ‘추적자들’이 자신에게 순순히 거울을 돌려준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았다.
무엇보다 어떠한 당부나 경고가 없었다는 것을 믿지 못한듯 그는 그라임즈에게 함께 책임져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책임이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스카한은 이 거울을 ‘다룰 수 있을 만한사람’에게 계승하되 여의치 않으면 ‘그라임즈’에게 넘긴다고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다.
메브 그라임즈의 조모, 트리오나 그라임즈는 진절머리나는 스카한에게서 벗어나고자 이를 받아들였고 보상으로 엄청난 금액을 받아갔다.
메브는 계약서에 쓰여진 그 금액에 비명을 질렀다.
“아니, 이게 공이 몇개야? 그럼 이 돈은 지금 다 어디갔어?”
범인은 메브의 증조부였다.
트리오나 그라임즈가 젊은 날, 목숨을 걸고 모험가의 일을 해야했던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가 수많은 빚을 지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채 여전히 도박과 이상한 종교에 빠져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돈이라면.
트리오나는 아버지의 빚을 모두 갚고도 남을 금액에 기뻐하며 처음으로 미래를 꿈꾸었다.
우선 아버지와의 연을 끊을 것이고 그 절연금을 주고도 남은 돈으로는 그녀의 가게를 열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조금만 더 돈을 모은다면 자그맣게 반지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여태 자신의 빚 때문에 거절해왔던 엘가르에게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용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아니지, 차라리 고백을 먼저하고 가게에서 함께 결혼자금을 모을까?
그러나 달디단 꿈은 거품처럼 꺼져버리며 그녀를 지옥같은 현실에 내동냉이 쳤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그녀가 많은 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서 딱 그 계약서만큼의 금액을 빚으로 불려놓은 것이다.
원한을 품지도 못하도록, 처음부터 네 분수는 그렇게 사는 것이라는 것처럼.
그는 절망하는 트리오나에게 덕분에 자신은 새 인생을 살 수 있게되었다며 그녀가 드디어 자신이 키워준 ‘값’을 치뤘다고 웃어보였다.
트리오나는 그에게 바다에, 아니 두번 다시 태어나지 못하도록 명계의 바다에 빠져 죽어버리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그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 열매는 나에게 영생을 줄거야. 그러니 트리비나. 너나 이 지긋지긋한 인간의 삶에 고통받으며 살아가렴."
트리오나는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가 유유히 손을 흔들며 집을 나가는 모습을 보며 실성한듯 웃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지독했다.
집안의 모든 가구, 식기들은 이미 다 팔아넘겨졌으며, 팔지 못한 것들은 쓰레기를 모아두었다며 화풀이를 하듯 부숴놓았다. 폐허였다. 인생도, 미래도.
그렇게 절망하고 또 절망하여 이제는 그냥 죽는게 더 편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집 앞에 나타났다.
누구? 이번에는 또 뭐야?
엘가르였다.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아버지가 마을에 나타났다는 소식에 놀라 달려온 상태였다.
그는 아직도 헉헉거리는 몸을 애써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트리오나는 그의 손을 밀어낼 기운도 없어 가만히 그의 품에 끌어안겼다. 마치 줄이 끊어진 인형을 끌어당기는 것 마냥, 그 몸은 딱딱하고 차가웠다.
엘가르는 그런 그녀가 가여워 물기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아무것도 없다, 그치?”
트리오나는 멍하니 그 말을 듣고 있다 왈칵 솟아나오는 눈물로 뺨을 적셨다.
“그러니까 이제 모두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그것은 그녀가 그를 거절했을 때 했던 말이었다.
자신은 없는 것조차 아니라고, 오히려 마이너스라고.
아무리 아무리 쏟아부어도 수렁으로 빠질뿐인 이 인생에 그 누구도 함께하게하지 않았다던 트리오나에게 그는 드디어 0이라는 출발점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괜찮을거라고? 아니, 괜찮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기에 있었다.
엘가르는 그녀의 곁에 여전히 자신이 있음을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그렇게 그의 온기가 전해져 굳었던 몸이 풀리는 순간, 트리오나는 진흙 늪 위로 드리워진 부표를 잡는 조난자처럼 그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내가…띠띠띠띠띠띠-”
“잠깐, 오늘 며칠이지?”
메브는 편지는 커녕 할머니에게서 들어본 적도 없는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와 할아버지의 로맨스치사량 프로포즈이야기 속에서 화들짝 놀라 깨어나며 입가를 훔쳤다.
다행스럽게도 침이 묻어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내린 팔이 책상에 부딪치며 그녀가 책상에서 서신철을 읽다가 잠들었다는 현실을 상기시켜주었고 아직도 울리고 있는 알람시계가 그녀에게 오늘이 출근날임을 알려오고 있었다.
큰일이었다.
이미 휴가 다음날 스카한 가문에 다녀오느라 하루 더 유급휴가를 사용했는데 그 다음날인 오늘 지각을 한다?
메브는 불편한 자세로 잠들었던 탓에 서로 다른 결의 방향으로 쪼개지는듯한 허리와 엉덩이를 부여잡고 다급히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이후 사투를 벌이는듯한 단장시간이 지나고 지각 3분전, 그녀는 헉헉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책상 앞에 머리를 박을 수 있었다.
옆자리의 동기, 시우반이 그녀를 쓰레기보듯 내려다보는 시선조차 느껴지지 않을만큼 급박한 아침이었다.
메브는 문득 자신이 엄청나게 중요한 거울을 아무렇게나 방치해놓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자신의 방 창문이 열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였다.
그 낡은 공용아파트에, 보안도 자물쇠 하나가 전부인 도둑들어도 재수없었구나로 하고 넘어가야하는 방의 책상 한가운데에, 저렇게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나갔었다니.
그녀는 뒤늦게 사색이되어 계단을 두세칸씩올라가 다급히 방문을 열었다.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책상 앞에 다가가 상자를 열때까지, 메브는 자신이 숨을 조차 못내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거울이 멀쩡히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나서야 그녀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뱃속 깊은 곳에서 끓어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대체 뭐냐고.. 왜 이런걸 준거냐고..”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메브는 책상 앞에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상자속의 거울에서 규칙적인 숨소리에 호응하듯 규칙적인 빛이 뿜어져나오다 줄어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스카한이 그라임즈에게 이 거울을 넘긴 까닭은 거울이 가진 엄청난 힘 때문이었다.
본디 정령의 눈물을 섞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이 거울은 사람의 진실된 모습을 비추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표현하니 어쩐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스카한이 가지고 있는 마법의 거울 중에서는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속마음과 다른 표정을 지을 경우 속마음에 기반한 표정을 보여주는 정도의 힘.
그마저도 상대의 속마음을 파헤치는 것이 아닌 스스로에게 깨닫게 끔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는 용도로 였기 때문에 유용하게 사용하기는 힘들다는게 당시 역시 스카한들의 생각이었다.
그렇다보니 거울은 자연스럽게 다른 마법의 거울들보다 소홀하게 관리될 수 밖에 없었고 어느 대에 이르러서는 이 거울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렇게 잊혀진 거울이 이것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최초도 아니었다.
그들이 집안의 몇몇 거울들이 사라진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세간에 ‘거울’에 관련된 이단자들의 이야기가 떠돌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들의 이름이 스카한(scáthán, 거울)이었던 만큼 스카한들은 당연히 ‘거울’에 관련한 수상쩍은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세상에는 아주 많은 거울이 있고, 그중에는 조금 많은 마법의 거울이 있으며, 그 중 또 몇몇 개에는 소문처럼 바라보기만해도 저주에 걸리거나 바라보기만해도 생명력을 빨리는 것, 바라보기만해도 홀려버리는 거울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그중에 낯익은 모양새에 낯익은 능력의 거울이 있다면 제아무리 나태한 스카한들이라 하더라도 문득 자신들의 창고를 돌아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지, 아니지. 우리에게 들여다보면 볼 수록 늙어지는 거울이 있지만 그게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거울이라고는 할 수 없잖아? 그리고 바라보면 일시적으로 홀려버리는 거울은 있지만 그게 영혼을 빼앗는 정도의 거울도 아니고. 진심을 보게해주는 거울은 있지만 그게 고민을 해결해주는 거울은 아닌…!!”
“알았으니까 그만 변명해. 근데 능력과 별개로 일단 손잡이부터 테두리 장식까지 모두 일치하잖아. 듣자하니 사이즈도 얼추 비슷한 것 같던데”
스카한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그리고 라이미라크 교단의 채근에 못이겨 창고를 확인했다. 그리고 몇십년째 정리한번 없이 아무렇게나 방치한 거울의 방에 생각보다 많은 상자가 비어있는 것을 보고(아마 꺼내서 어디서 한번씩 쓰고 제 상자에 안 돌려 놓은 것이다.) 등 뒤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부랴부랴 창고를 정리하여 모든 거울들을 정해진 위치와 상자에 돌려놓은 뒤 숫자를 헤아렸다.
응, 세 박스 비어.
스카한은 빼도박도 못하는 빈 상자 앞에서 소리없이 절규했다.
그 때부터 그들은 거울을 빼돌린 친족을 찾아내는 것은 물론 사라진 거울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번 라이미라크 교단의 성전기사단의 도움을 요청한 적 있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 믿음, 성전, 파괴, 정화의 기사들은 이단의 집회현장에서 거울들을 발견하자 삿된 것이라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거울을 부숴버린 것이다.
당연하지만 부숴진 거울중에는 스카한의 거울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전기사단은 부서진 거울을 조각조차 주워가지 못하도록 잘근잘근 밟으며 돌아다니고는 이 모든 것이 라이미라크 님의 뜻이라며 사색이 되어 얼어붙은 스카한들을 위로했다.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었다.
아니, 오해하지 마시길. 이건 그들의 신앙심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무식한 행동이 라이미라크님의 뜻일 수가 없다는 말이지.
왜냐하면 이 사건 이후의 ‘거울’의 단체놈들이 그들이 분명 성전기사단의 손에, 그리고 발 아래서 두번세번 확실하게 부순 거울을 다시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거울과 마법에 능한 스카한들은 혹시 다른 거울이 유출된 적 있냐고 물어오는 성전기사단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번에는 제대로 빼앗아온 ‘부서졌던 거울’을 관찰했다.
그리고 그 거울들은 진짜가 아닌 은판 위에 투영된 ‘그림자’인 것 같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이단의 신성이 이 그림자를 실제할 수 있게 만들었고 그 결과물은 진짜와 다름이 없었다.
이는 다시말해서 그들이 부서진 무서운 능력을 가진 거울들을 무한하게 복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원본이 이미 부숴졌다 하더라도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정말 해결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악몽인걸까?
아니었다. 복제된 거울은 어디까지나 ‘진짜와 다름이 없는’것이지 ‘진짜’가 아니었다.
동시에 이는 결국 진짜가 있어야지만 복사체 또한 존재할 수 있었음을 의미했다. 애초에 세상 모든 저주와 마법이 왜 그렇게나 ‘진짜’와 ‘본질’에 집작하겠는가.
처음부터 올바른 해답은 거울을 부수는 게 아닌 회수하여 이를 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마법과 신학에 무지한 이들이 아니라면, 그리고 라이미라크님이 저 이단들의 힘을 증강하도록 도와주고 싶으셨던게 아니라면.
그들이 경솔하게 거울을 부수는 것은 라이미라크 님의 뜻이 될 수도 없고 정당화 될 수도 없었다.
이렇다보니 스카한들은 성전기사단과 라이미라크 교단에 대한 믿음을 빠르게 처분하고 남은 거울이라도 제대로 되돌리고자 스스로 거울을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비밀리에 모험가들을 고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과정은 그리 쉽지 않았다. 본디 예술가, 연구가에 가까웠던 그들은 모험의 이야기는 좋아하지만 실무에는 약한 자들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몇 번의 실패를 겪고 몇 번의 방해를 받고, 또 몇 번의 도움과 경고를 동시에 얻은 끝에 잃어버린 세 거울중 가장 하찮고 별 특별한 능력이 없는 거울을 무려 ’정화된 상태’로 회수해오는 것에 성공했다.
심지어 이 성과는 그리 기대도 하지 않았던 어느 어린 여성 모험가가 이룬 것이기에 그들은 더욱더 이 행운에 기뻐했다.
딱 한 사람, 그 모험가를 고용한 시르셰 스카한만 제외하고.
거울이 무사히 돌아왔으나 시르셰 스카한은 그녀가 덤으로 얻어온 ‘정화’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정화가 가능한 이들은 손에 꼽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집어든 그 자리에서 불꽃으로 정화가 가능하다면 '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이미 스카한에게 몇 번 경고한 적 있는 적도 아군도 아닌 중간자(中間子)였다.
이미 스카한에게 더이상 관여하지 말고 물러서 있으라 말하던 그들이 이토록 살갑게 호의를 배풀었다면 (모험가의 말로는 한 기사의 독단인듯 하였으나 스카한이 경험한 그들의 체계상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이는 그들이 지금 보이는 것 이상의 먼 미래의 계획을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가령 지금 이러한 행위같은 것.
스카한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네 이름이 뭐지?”
그러자 스카한의 몸이 스러졌다.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는 소울스트림 너머에 펼쳐진 무한한 별들의 세계를 엿 보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거울은 꿈이라는 형태를 경유에 그에게 답을 들려주었다. 그들은 거짓된 표정을 걷어내고 진실된 표정을 보여주는 거울로 태어났다. 그렇기에 거울의 수도자(scáthán)들은 그들을 ‘진심을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이름붙였으나 이는 그들이 가진 본질을 표현하기에 조금 부족하다. 진실은 진실이고 진심은 진심이다. 진심은 분명 진실에 기반하는 것이나 세상의 모든 진심은 진실에 기반한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를 보라, 우리는 수없이 비추고 비춰진 그림자를 통해 벼려졌으며 무한한 그림자 너머로 열린 통로를 통해 별의 바다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실을 보여주는 거울이며 이 진실은 에린과 그 너머의 별에 바다에 기반한다. 우리는 그곳에 흩어진 수많은 별들의 기억을 포집하여 발광하게 되었으니 우리는 이제 무엇이든 대답할 수 있는 만화경이요 삼라만상을 비추는 창문이다. 동시에 더이상 우리는 거울에 머물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최고(最古)의 존재는 부족한 이름과 거짓된 도금 얼룩진 껍데기 를 닦아내어 우리의 운명을 꿰뚫어보았다. 그러니
자유로운(saoirse) 스카한,
우리를 오색찬란한(ildathach)아이에게 주어라.
그리고 그 아이가 빛을 잃거든 사나운 자에게 갈 수 있도록 약속을 맺으라.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의 저주를 푸는 자가 올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주신이 빚어낸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모습을 불러내어 그와 계약했던 사나운 처녀가 제대로 전하지 못한 가장 단단한 믿음의 말을 전해주었다.
“스카한과 당신이라면 이 거울을 잘 보관할 수 있을겁니다. 가져가십시오.”
꿈에서 깨어난 메브는 저도 모르게 가슴팍에 꼭 움켜쥔 양 손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꼭 쥐어 누르며 언제부터 참았는지 모르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상자속에 엎어진 거울을 집어들고 천천히 그것을 뒤집어 보았다.
거울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글자가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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