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NJAN

톨비밀레) reload #15

마비노기/reload 2017. 12. 25. 18:02


장례식이 끝났고 유품의 정리도 끝났다. 피오나의 건물을 흔적도 없이 비워졌다.

알반은 건물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저 건물은 어떻게 될까, 누군가가 매입할까? 아니면 그대로 방치되는 걸까. 킹은 걱정스럽게 구 피오나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요원들중 누구도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는 없었다. 

주인이 사라진 건물은 순식간에 초라하게 변해버렸고 이내 스산한 분위기까지 흘러나왔다. 

불이 켜지지 않는 회색빛의 거대한 빌딩은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무덤같이 느껴졌다. 

톨비쉬는 삼삼오오씩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전 직장 동료들을 뒤로한채 몸을 돌렸다.


모여있던 사람들중 붉은 머리의 청년이 그를 붙잡았다. 알반의 수습요원인듯 보였다.

꼭 오늘이어야 하냐는 질문앞에 톨비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면 빠를수록 이 고통은 짧아지고 늦으면 늦을 수록 이 책임감은 가벼워 질 것이다. 

하지만 결국 스스로의 결심은 변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톨비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려 팔을 뻗어내었다.

문이 열렸고 구두소리가 울렸다. 차에서 내리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둔탁한 구둣소리를 이끌로 걷고나서 머지 않아 멀리 주택가가 보였다.




사라진 피오나의 단장에 대한 소문은 마치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거품무리와도 같았다. 무성했지만 곧 가라앉았다. 

그에대한 소문은 여전히 흥미로운 가십거리였지만 지금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 하고 있는것은 브류나크에 나타났던 과거의 악몽, 퀘사르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무엇을 위해 브류나크에 왔던 것일까. 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브류나크를 떠났던 것일까.

궁금증은 음모론이나 과장된 소문으로 번져나갔다.

이러저러한 추측이 난무했지만 역시 가장 신빙성이 높은 것은 그들이 다시한번 칼리번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이름모를 누군가가 머리를 들었다.

그들은 새로 만들어진 브류나크가 제2의  칼리번의 제단이라 생각하고 급습했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칼리번은 아직 에일레흐의 재단에 머물러 있던 상태였고 브류나크의 해석을 끝낸 퀘사르가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 바로 도망을 쳤다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사실이 어찌되었건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맛을 당겼고 누군가가 승인하기도 전에 뉴스의 틀을 흉내낸 허가받지 않은 종이가 먼저 인쇄되었다. 그리고 이날을 기다려왔던 몇몇이들이 피켓을 들고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그들만의, 그리고 그들을 위한 축제가 시작되었다.


톨비쉬는 차량이 떠나가기 무섭게 도로를 점거해오는 사람들의 행렬을 피해 옆으로 비켜섰다.

새까만 상복이 눈에 띄긴하겠지만 장례식장내에서의 시선에 비하면 이정도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톨비쉬는 으슥한 골목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반칼리번을 외치는 사람들의 행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벽끝에 기대어 섰다.

그들은 모든 발전과 개선이 칼리번에 의한 것이라면 실패와 부작용또한 칼리번에 의한것이라 외치고 있었다. 

그래서 칼리번은 사라져야하는 걸까? 하고 물으면 의견이 갈린다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이었지만 지금은 웃음기조차 말라버린 뒤. 

그런 엉성함이 통한다는 것이 오히려 짜증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들은 이 모든 비극이 칼리번 때문에 일어났다고 이야기하며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세력을 불리는 것 만이 그들의 즐거움이자 목표였다. 해결할 의지는 아무것도 없잖아.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행렬에 참여해 즐거운듯 구호를 이어나갔다.

그들은 퀘사르에대한 두려움을 호소하는것 보다 그들의 이름을 뒤집어 쓰고 다른이들을 겁주는 것을 더 즐거워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이건 누구 잘못이야? 왜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 이분법으로 분류되지 않을 질문들이 이어졌다.

경비를 소홀히한 에이전시들의 잘못일까? 아니면 인원수를 줄인 에일레흐의 잘못일까.

괴한들에게 뚫릴만큼 허술한 건물을 만든 발레스의 잘못일까? 아니면 누구의? 사람들의 관심은 과할정도로 빠르게 끓어올랐고 또 빠르게 옮겨붙었다.


누군가에 의해 크로우 크루아흐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었고 여론의 판도가 한번 뒤집혔다.

과장된 표현이라고 조작된 영상이라고 매도받던 자료들은 진실이 되었도 이리저리 알기 쉬운대로 가공되었던 음모론들은 사장되었다.

소문이 부풀려져나간다, 혼란이 가중된다. 사람들은 책임을 묻고 또 옳고그름을 따진다.

적어도 상복을 입은 요원들은 내버려뒀으면 좋겠지만, 그들은 슬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그 반짝이는 눈빛과 호기심은 흥미로움과 스릴감에 가까웠다.


진실을 파고드는 것이 그렇게 즐겁던가. 톨비쉬는 어쩐지 사과를 움켜쥐는 자신을 떠올렸다.

뚝하고 반으로 잘라낸 과육속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새하얗고 균일하게 차있는 과육의 표면으로 반투명한 과즙이 베어나오고 있었다. 그 완벽해보이는 유백색의 향긋한 과일귀퉁이 끄트머리 불과 1-2cm정도를 파고든 무언가가 매끄러웠어야할 사과의 표면을 망쳐내고 있었다. 파고들었을 무언가는 이미 사라지고 남은것은 말라비틀어진 굴착의 상처뿐.

갈색으로 변질된 상처를 도려내고 온전한 부분을 찾아 사과를 돌려보았다. 여기도 하나, 또 저기도 하나 벌레먹은 자국을 조금씩 도려내어가는 동안 사과가 점점 작아져갔다.

결국 그의 손에 남은것은 딱딱하고 질긴 섬유대와 둥그스름한 씨방, 그리고 갈변되어가는 얄팍한 사과대의 반쪽이었다.


피곤했다. 톨비쉬는 마른 한숨을 내과 함께 입가를 쓸어내렸다. 환상을 걷어낸 현실아래 매마른 입술이 쓰게 느껴졌다.

품안에 집어넣기까지 너무 많이 망설인 탓이었다.

다우라를 너무 오랫동안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이라고, 그래서 손이 쓰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톨비쉬는 아무도 듣지 않을 변명을 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 씁쓸함은 아마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몇번이고 무심코 입가를 매만질때면 그는 오늘의 기억을 떠올릴것이다. 결과가 어찌되었든 이건 그가 선택한  책임이었다.

다시 골목에서 나와 걸음을 걷기 시작하자 발밑에 바스락거리는 전단지가 밟혔다.

누구를 위한 칼리번인가. 라는 붉은 글자가 눈을 어지럽혔다. 톨비쉬는 발끝을 끌어 종이를 길 구석으로 밀어내었다.





밀레시안의 주소지까지 가는 것은 오래걸리지 않았다.

한적한 동네였다. 가끔실 길이 휘어져있긴했지만 길마다 늘어선 것은 모두 보급형 주택뿐, 끝없이 이어진 주택가의 한 구석 길안내용 안드로이드가 꾸벅꾸벅 졸고있었다.

부엉이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에게 길안내를 부탁하자 부엉이는 언제 졸았냐는듯 크게 기지개를 켜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개짓은 오래지 않아 활짝 펼쳐졌고 하늘을 두어번 선회한 부엉이는 크게 한번 울어보인뒤 다시 자신의 횃대로 돌아갔다. 

톨비쉬는 한 주택앞에 멈춰선뒤 잠시 고민했다. 문을 두드릴까. 

말아쥔 손이 너무나도 가볍게 느껴졌다. 톨비쉬는 잠시 자신의 손을 어색하게 바라보며 손톱끝을 매만졌다.

뭔가를 들고 왔어야 했나? 뭐라고, 진심이야? 서로 상충되는 마음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나왔다.

정신차려. 한가하게 대화하러 온게 아니라는거 알잖아.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톨비쉬는 문을 장식하는 놋쇠장식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얼굴이지? 온통 노란빛에 일그러진 쇠장식은 거울대용으로 쓰기에는 너무 최악의 조건이였다.


지금 나는 어떤 얼굴로 여기까지 온거지? 요원으로서일까? 아니면 전직 동료로서일까. 만나면 뭐라고 해야할까. 안녕 폰, 오늘 장례식장에는 왜 안왔습니까? 모두가 흘끔거리는 불편한 식장이었지만 그런대로 훌륭한 식을 마쳤습니다. 당신을 찾는 사람들이 아주 많더군요. 하지만 걱정마세요. 아무도 당신이 있는 위치를 모르는 눈치였으니까요. 나도, 그리고 우리 동료들도. 모두 당신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럼 지금 여기 도착한 나는 무엇일까. 불청객에 더 가깝지. 가슴속 은빛의 다우라가 대꾸했다.


다행히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그가 머뭇거리는 모습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톨비쉬는 꽤나 오랜 시간동안 그렇게 문앞에 서 있었다. 문을 두드리라고 요원의 톨비쉬가 말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걸 보면 집에 없는 것일지도 몰라. 놋쇠에 일그러진 톨비쉬가 대답했다.

그는 간절하게 밀레시안의 부재를 바랬다. 아니면 그 소문속의 능력처럼 미리 자신의 걸음을 알아채고 도망치기를 바랬다. 

마주치지 않기를 바랬다. 동시에 그 얼굴이 보고싶었다. 묻고싶은 말이 있었다. 

가능하다면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할 방법을 찾고싶었다.

그래, 전화라도 해서 당신에게 묻고싶었다. 왜 저를 떠났습니까?


톨비쉬는 천천히 열리는 문을 따라 고개를 들어올리며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그의 망설임과는 다르게 누군가의 그림자를 발견한 밀레시안은 한달음에 달려와 아무럼 경계심없이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문틈 사이로 머리가 빼꼼히 기울어져 나왔다.


“누구세요?”


당신이다. 동시에 당신이 아니다.

또다른 인격, 그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의 그림자, 허상의 가면뒤에 숨어버린 밀레시안이 가벼운 의문을 담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시한번 물어왔다.


“혹시 누군가를 찾아오셨나요?”


우리집은 아닌 것 같은데.. 라며 밀레시안은 완전히 문을열고 현관앞으로 한걸음 걸어나와왔다 집 주변을 둘러본듸 톨비쉬를 바라본다.

검은 양복에 키가 큰 남자, 가방도 짐꾸러미도 없이 맨손. 밀레시안은 잠시 고개를 기울이다가 한쪽 골목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혹시 가구매입하러 오신 분이라면 저쪽 골목건너 3번째 집이에요. 곧 이사나가시거든요. 

아, 혹시 악기관련 업자분이신가요? 그렇다면 이길로 쭉 따라서 피아노소리가 들리는 집으로 가시면 되는데.. 지금쯤이면 매일 하는 연습시간이겠네요.”


“아뇨 저는..”


“아니면 집을 보러오신걸까? 음.. 제가 안내해드리고는 싶은데 저도 지금 집에 손님이 오기로 약속되어 있어서.. 

하지만 멀지는 않아요. 여기서 바로 꺾어서 쭉 가시면 나무둥치모양의 광장이 나오는데, 거기 은행직원에게 문의하시면 바로 빈집을 찾으실 수 있을거에요.”


‘아닙니다. 나는..”


“아 그렇네요. 제 소개가 늦었죠. 반가워요. 저는 이 집에 살고 있는…”


손을 뻗어내지 못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뺨과 입술, 코끝에 익숙한 스킨냄새가 어린 열기가 스쳐지나갔다.


“....밀레시안..”


“나는 이 집에 살고 있는....”


“그만. 밀레시안. 이제 그만하세요.”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들어올리던 손을 거두어 가슴위로 끌어당겼다.

커다랗고 마른 주먹이 가슴을 짓누른다. 평정을 가장하려는 표정사이로 괴로움과 당혹스러움이 스쳐지나간다.

흔들리는 금빛이 눈이 부시다. 원망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그 눈이 너무나도 푸르렀다.


당신이다. 


기억을 지워도, 얼굴을 가려도. 이름을 버리고 시간을 버려도.

이 열기와 이 냄새, 그 눈빛, 그 목소리. 모든것이 당신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

나는 내가 아니고 나는 그것이 아니다.

부정하고 또 부인하며 흔적을 지워냈다. 더이상 그 모습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마음을 베어내어 또다른 가면을 만들었다.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줘.

밀레시안은 다시금 했던 말을 반복했다. 고장난 녹음기처럼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요, 내 이름은, 나의 이름은, 이름은. 이름. 은.


“나는…”


쏟아지는 눈물이 뺨을 적시고나서야 밀레시안은 이 하찮은 가면놀이를 이어가기엔 자신이 너무 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 수 있을줄 알았지만 이미 자신은 성장해버렸다.

예전처럼, 자신을 감추고 마음을 죽이고 그렇게 사람들 틈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줄 알았지만 그건 이미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었다.


사람의 모습을 되찾았지만 사람이기를 포기했다. 생을 이어나갈 수는 있지만 그 의미를 포기했다.

이 마음은 너무나도 얕았고 너무나도 가벼웠다. 생각을 포기하고 도망친 결과는 이토록 가여웠다.

그런데도, 그랬는데도 밀레시안은 차마 그를 앞에두고 아무런 이름도 댈 수가 없었다.

거짓말은 숨쉬듯이 할 수 있었을텐데, 기만하는 것이 자신의 본질이었을텐데.


눈앞에 선 남자의 실망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두려웠다. 지금 양 손으로 눈을 가리고 나면 두번다시 당신을 볼 수 없을것 같았다. 

그래서? 새까만 어둠속 검은 손이 밀레시안의 팔을 떠받혀 올렸다. 눈을 가린다.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한채 양 손을 모아 그 눈물을 받아내었다.

고개 숙인 밀레시안의 머리위로 차가운 금속소리가 울려왔다.


탄식과도 같은 한숨이 혀끝을 간지럽혔다. 밀레시안은 얼굴을 들어올리지도 못한채 양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허탈하리만치 간단하게 돌아온 그것이 무엇인지 보지않고서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버리기 위해 나를 버렸어야 했는데 당신들은 그렇게 간단하게 그 물건을 주워들어 내게 겨눠온다.

총을 겨눈 피오나의 요원이 말했다.


“밀레시안, 나는 당신을 죽이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그럼 죽여요.”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쏟아져 나왔다.

눈을 가렸는데도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 얼굴, 그 자세, 그 손끝과 그 총구가 가리키는 방향. 

마치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 마냥 조각조각난 이미지가 머릿속을 점멸한다. 숨을 들이마시고 바람을 내뿜는다. 

램프가 반짝인다. 나는 이곳에, 너의 안 공허한 이 밑바닥 아래. 오랜시간동안 잘게 부숴져왔던 검은 용의 조각이 밀레시안의 발목을 부여잡았다. 떠받혀올렸던 팔을 잡아내렸다. 목을 타고 올라왔고 가슴을 헤집고 들어섰다.

피부를 갈라내고 자리잡은 검은 돌의 파편들이 비늘과도 같은 모양새로 밀레시안을 감싸안았다. 비늘조각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기대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꿈이 있었다 예상한대로 흘러가지 않는 꿈이 있었다. 

만능은 아니라 실망이었지만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막연한 기대감에 부풀던 꿈이 있었다.

오랜시간동안 깨고 잠들기를 반복하던 백일몽에 절어있던 자신이 있었다. 뱀이 입맞춘 귓가에 뾰족한 비늘이 돋아났다.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전에 당신에게 묻고싶은 것이 있습니다.”


“......”


“내가 당신을 죽인다면”


“........”


“내가 당신을 쏘겠다고 말한다면.”


“..........”


“당신은 내게 저항하실 겁니까?”






공허한 바람이 딱딱하긴 귀끝을 간지럽혔다. 허기진 뱀이 흩어지는 숨결속에 남아있을 온기를 핥고 있었다. 

은빛의 입김이 흩어졌다. 이 마음은 슬픔이라 이름붙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절망이라 이름붙일 수도 없었다. 

후회도 아니었고 연민도 아니었다. 긍지도 아니었으며 현명하지도 않았다.  강인하지 못했다. 

솜씨좋게 빠져나가지도 못할 것이고 두려움에 숨어버리지도 못할 것이다.


이 마음에 붙일 이름이 없었다.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기엔 너무 보잘것 없는 믿음이었고 얄팍하고 하찮은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다. 

마음이 깨어졌고 가면은 떨어져내렸다. 밀레시안은 한없이 검고 깊은 눈으로 톨비쉬를 올려다보았다.

바이브카흐도, 검은 용도, 은빛의 상영막도, 터널터널 돌아가던 테이프도 사라진 칠흑의 공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어둠속 검은 비늘로 가득 채워진 뱀의 아이가 대답했다.


“왜 내가  못할거라고 생각해요?”








“.........”


착각이겠지..? 톨비쉬는 한순간 보인 밀레시안의 입김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숨결사이로 은색의 안개가 뿌옇게 서리다 사라졌다. 착각이겠지, 잘못 본 것이겠지. 밀레시안의 눈이 무슨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모든 빛이 검었고 또 검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다. 방금 들었던 그 목소리가 원래의 목소리인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당신을 알지 못한다. 이런 모습의 밀레시안을 알지 못한다.

극장에서 나와 가장 먼저 퀸을 찾아간 그는 밀레시안을 안막고 뭘했냐고 따져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그러는 너는 무엇을 했냐고.


그는 최선을 다했다. 이 낯선 바이브카흐의 그림자를 앞에두고 최선을 다해 밀레시안을 붙잡았다.

한순간이라도 눈을 때면 그 깊은 어둠속 어디론가로 빨려들어갈 것같은 심연의 눈동자속, 밀레시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한다. 모든 가면이 깨어진 밀레시안은 완전한 타인, 완전한 별개의 개체.

톨비쉬는 지금이라도 당장 방아쇠를 당겨야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손을 움직여. 요원된 톨비쉬의 의지가 속삭였다. 

지금 당장 방아쇠를 당겨. 밀레시안을 만나기를 희망했던 놋쇠의 그림자가 속삭였다. 

저 검은 짐승의 어딘가 그가 알고 있던 밀레시안이 있을것이다. 그럼 이 짐승의 거죽을 걷어내면 그 밀레시안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 또한 가짜, 혹은 그것또한 그림자. 왜 못하겠는가. 왜 저항하지 않겠는가. 

시대에서 떨어져나온 휘광의 그림자에겐 단 하나의 목표가 주어져 있었다. 살아남을 것. 살아남고 또 살아남을 것.

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포기한 검은 짐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자신을 죽이려는 타인의 총구 아래서 밀레시안들이 선택할 행동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톨비쉬는 그자리에 얼어붙었고 밀레시안은 그런 톨비쉬를 빤히 바라보았다.

수십가지의 생각을 떠올렸다. 어느 방향으로 공격을 피할지 어느방향으로 반격할지 어떻게 그를 제압하고 어떻게 그를 수습할지. 어떻게 이 일을 숨길지. 없었던척, 모르는척, 그를 만나지 않았던척, 혹은 이 자리에 없었던 척 거짓의 정보를 만들어낼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마음 한구석에서 꿈틀거리는 괴로움을 꺾어내고 밀레시안은 다시금 생각했다.


죽일까?

누구를?


이 사람을.

그러니까 누구를?


피오나의 요원을

그러니까 누구를?


….


“.......”


눈물로 씻어내린 손바닥이 밀레시안의 입을 가렸다. 

움직이는 입술을 숨기고 흘러나온 숨결을 끈적한 물방울로 붙잡아 소리를 죽였다. 

소리가 되어 흘러나오지 못한 이름이 손바닥안을 맴돌다 허망하게 흩어져버렸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대상을 인지한다는 것. 대상을 인지한다는 것을 상대를 떠올린다는 것.

누구를?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도망쳤던가. 무엇을 두려워해서 이토록 도망쳤던가.

그일까? 아니면 그들일까. 밀레시안은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던 이름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무엇을 위한 노력인지 헤아릴 길도 없이 밀레시안은 까맣게 물들어버린 스케치북을 긁어 덮여진 색을 드러내었다. 덧발라진 녹음이 사무친다. 쌔까맣게 물들어버린 거친 손끝 아래로 녹색의 빛이 드러났다. 당신일까? 아니면 당신일까.

눈을 깜빡일때마다 녹색은 붉게, 혹은 다시 녹음으로 변하며 눈을 어지럽혔다.

거뭇한 그을음을 걷어낸 종이아래 글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동시에 속에서 매스꺼운 기분이 느껴졌다. 

밀레시안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으며 집안으로 도망쳤다.




돌아서는 밀레시안에게 한박자 늦게 반응한 것은 톨비쉬도 마찬가지였다. 

그자리에서 도망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톨비쉬는 현관을 밟는 것을 주저하며 어설프게 다리를 뻗어내었다.

톨비쉬가 황급히 밀레시안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 낯익은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너무나도 익숙한 밀레시안의 방에서 나던 특유의 그 잔향과 잘 다려진 페브릭따위의 냄새, 그리고 아주 옅은 피냄새. 


밀레시안은 그대로 화장실앞에 주저앉아 연거푸 속을 개워내었다.

괴로운 기침이 이어지다가도 곧 위장을 쥐어짜내어 속을 뒤집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톨비쉬는 당황스러워하며 변기앞에 주저앉은 밀레시안을 내려다보았다.

엉겹결에 손을 내려 등을 두드려주려 하지만 매서운 손날과 함께 손등위로 날카로운 손톱자국이 그어졌다. 경계어린 시선이 이어졌다.

톨비쉬를 쏘아보던 밀레시안은 그의 손에 들린 다우라를 한번 돌아본뒤 다시한번 헛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멈춰있던 시간이 휘몰아쳐 들어오는 것 처럼 집안에는 또다른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밀레시안이 대답하기도전에 세차게 문을 두드리던 방문객은 요란하게 발소리를 울리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톨비쉬는 반사적으로 현관문을 바라보았지만 현관문은 여전히 열려져있는 상태. 닫혀있던 것은 부엌쪽의 작은 쪽문이었다. 

부엌을 건너 거실로 들어온 사람은 밀레시안의 이웃집에 사는듯한 작은 꼬마아이 두명이였다.


“누나!! 오늘도 티비 먼저 보고 시작할게요!!”

“시작할게요!!”


골목에서 가장 목소리가 클 것같은 남자아이와 너덜너덜한 토끼인형을 든 작은 여자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거실소파에 걸터앉았다.

아이들은 익숙한듯 리모컨을 찾아 티비를 틀었고 작은 아이는 테이블에 놓여져있던 과자를 까 입에 넣었다.

아이들은 티비가 켜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호기심어린 눈으로 톨비쉬를 바라보았다.

누굴까? 손님? 설령 손님이라 하더라도 아이들은 비켜줄 생각이 없다는듯 뻔뻔한 얼굴로 톨비쉬를 훑어보았다. 


아이들의 시선이 다우라로 향하기전에 톨비쉬는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감추었다. 

의심어린 시선이 이어졌다. 톨비쉬가 어정쩡하게 손을 뒤로 감추는 동안 밀레시안은 입가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꺼풀안쪽으로 검은 비늘이 떨어져내렸다. 마른 모래가 버석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울리며 옷깃을 움켜쥐었다. 비켜.

밀레시안은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톨비쉬를 움켜쥐었다. 검은 눈동자가 줄어들고 본래의 색이 드러났다. 깜빡거리는 눈동자가 촛점을 맞추지 못하는 카메라처럼 연거푸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같은 위태로움이 그의 품안에 멈춰있었다. 톨비쉬는 밀레시안을 끌어안고 싶었지만 손이 충분하지 않았다. 은백색의 다우라가 서늘한 빛을 내며 흔들렸다.

아주 사소한 금속소리에 밀레시안은 미련없이 톨비쉬를 밀어내며 몸을 돌렸다.

다시한번 옅은 피내음이 스쳐지나갔다.


언제 무엇이 피빛을 비쳤는지 알길도 없이 사용자가 떠난것을 감지한 변기가 물을 빨아들였다. 휘몰아치는 검붉은 물결사이로 겹겹이 말린 휴지 한뭉치가 쓸려내려갔다.

톨비쉬가 흘러가는 물소리에 주의를 빼앗긴 동안 밀레시안의 시선은 곧장 아이들을 향해 돌아갔다. 

걸음마다 검은 모래가 떨어져 내렸다. 밀레시안이 미소짓는다. 

환하지는 않지만 선량하게, 부드럽게, 방금전까지 온몸을 죄어오던 뱀의 비늘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양, 밀레시안은 아이들을 향해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아이들은 아는 얼굴이 보이고 나서야 다소 안심이 된 얼굴이 되어 활짝 웃음지었다.


“있지 있지. 누나!! 아까 도로에 이상한 사람들이 막 지나갔다?”

“커다란 피켓들고 현수막도 들고 막 축제처럼 지나갔어!”

“하지만 엄마는 축제같은거 아니니까 보지 말래..!”

“막 꽃가루같이 종이도 많이 많이 뿌렸는데 아빠가 줍지도 말로 읽지도 말래..! 나 이제 글자 잘 읽을 수 있는데..!”


아이들은 골목에서 마주친 반칼리번단체가 궁금한 눈치였다.

밀레시안은 아이들이 만난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는 눈치이지만 대강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톨비쉬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무방비하게 등을 돌린채 소파에 기대어 고개를 숙였다.

방금전까지 살벌하던 검은 짐승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자아이는 여전히 자신이 어떤 글자까지 예습해왔는지를 자랑하기에 바빴고 남자아이는 길에서 마주친 이상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고싶어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퍼레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중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사람도 있었다는게 그 이유였다.


단 두 명의 아이들인데도 집안이 소란스러웠다.

화장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문득, 대화가 끊기고 세 쌍의 시선이 고개를 돌렸다.

톨비쉬는 문고리를 잡은채 머쓱한듯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한쌍으로 맞춘듯한 가면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가면으로 가려지지 않을 날카로운 시선이 그의 몸을 훑어내렸다. 오른손은 문고리 위에 왼손은 허벅지 앞에.

양 손이 모두 빈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밀레시안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밀레시안이 아이들에게 속삭였다.

미안해, 오늘은 같이 책읽어주는건 못할것 같아 과자를 다먹으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줄래? 급한 손님이 왔거든 아이들은 내키지는 않지만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입 안가득, 그리고 양손에도 가득, 테이블위로 아직 까지도 않은 과자가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톨비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면 선약이 있다고 했었던가.

밀레시안은 여전히 톨비쉬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채 가까이 다가왔다. 

다가선 숨결이 어쩐지 차갑게 느껴졌다.

밀레시안은 언젠가 나이프를 내려다보던 서늘한 눈빛으로 톨비쉬를 바라보았다.


“주방으로 가있어요.”


“.......”


“애들앞에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나가라고.”


아이는 손안에든 과자까지 모두 삼킨뒤 마지막 과자의 포장지를 찢으며 소파 깊숙히 몸을 기대어 앉았다. 

제멋대로 돌아가던 채널이 드디어 멈춰섰다. 아이가 조작한 것인지 아니면 무슨 기능이 달린 버튼을 눌렀던 것인지 한참동안 돌아가던 티비에서는 잠시 요란한 프로펠러소리가 들리는 화면앞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오디오소리가 사라진채 청명한 하늘을 비추는 화면속에는 어딘가의 검은 바닥을 비추며 바람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 빈 공간이 뭐가 그리 흥미로운건지 눈을 크게 뜨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밀레시안의 기세에 밀려 뒤로 물러서려던 톨비쉬도 그 화면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밀레시안도 고개를 돌렸다. 

한눈을 파는 그에 대한 경멸이기도 했고 어쩐지 스산하게 들려오는 프로펠러 소리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을 먼저 이야기해야할 지 모르겠네요.”]


가면을 잃어버린 하얀 로브의 퀘사르가 말한다.


[“시간은 부족하고 해야할 말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것을 털어놓을 만큼 당신은 너그럽지 않았겠죠. 

그래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부터 해야할 것같네요.

당신이 알고 있건, 알지 못했건 이 에린에 역병의 밤은 모두 세번 찾아왔습니다.

한번은 불완전했고 다른 한번은 시작되기 전에 막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번은 지금 바로 지금이될겁니다.”]


안돼. 톨비쉬는 생각이 머릿속에 도달하는 것보다 빨리 소리내어 입을 열었다. 

보면 안돼. 아이들에게 말해야하는 것인지 밀레시안에게 말해야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한마디가 입안에서 툭 굴러떨어졌다. 

톨비쉬의 목소리를 들은 아이들은 고개를 돌렸다.

왜요? 하고 묻고싶은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테니까요.

왜 오늘이어야 했는지는 모릅니다. 반대로 오늘이면 안 될이유도 없지요. 

아무래도 좋은 이유였었고 아무 이유도 아닌것은 아니었습니다.

빨리 끝내면 빨리 끝낼 수록 좋았지만 느리게 끌면 느리게 끌 수록 좋은 점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내게 화가 났을 겁니다. 왜 그랬어야 했을까.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어야 했을까.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을 휘말리게 해놓고 그렇게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을까.

이에 관해서는 해야할 말이 길어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만은 말해두도록 합시다. 

당신이 모르던 내가 있었습니다. 당신을 모르던 내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겹친 시간은 찰나에 불과할만큼 짧았고 그럼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잘모르겠나요? 그럼 당신의 주변을 둘러보세요. 당신의 주변에도 나와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고 나와같은 동료가 있을겁니다. 루에리는 당신에게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지만 당신의 안에도 우리와 같은 모습이 있을 겁니다. 

당신의 이름을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그 앞에 붙었던 명칭을 생각해보세요,


그리요. 우리에게는 이 또한 하나의 퀘스트에 가까웠던 것 뿐입니다. 

당신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 이름들이 지나왔던 수많은 시간들을 가까이서 들여본다면 이와같은 일들의 반복이었습니다. 

사람이 적었건 규모가 더 넓었건 늘 일어나던 일이었고 늘 스쳐지나가던 당신의 일상이었습니다. 음.. 이런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제발 밀레시안. 지금은 내 말을 들어요. 지금 당신은 이걸 보면 안돼.

그는 지나치게 총명했다. 그리고 지나치게 눈치가 빨랐다. 그는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었고 그는 지나치게 경계하고 있었다. 

화면의 사이사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만큼 짧은 시간.

화면이 점멸한다. 타원형의 어둠이 연속된 영상을 단절시킨다. 톨비쉬는 밀레시안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밀레시안 또한 그 어둠을 발견해 내었다. 시선이 마주친다. 녹음이 흔들린다.

밀레시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니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죠. 당신과 당신의 사람들과 당신이외의 사람들도 포함되는 본론입니다.


자 우리가 질문했던 날로부터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는데 당신들의 대답은 어땠습니까? 생각해보셨나요? 고민해보셨나요? 

무엇이 주어졌고 무엇이 스스로 구해낸 것인지 한번 가늠해보셨나요? 내게 주어진 것이 정말 내것이었나요? 

남에게 배풀었던 것이 정말 그를 위한 일이었나요? 

어디서부터가 꿈이었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이었습니까. 당신과 여러분들은 어디까지의 꿈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레시안..!!”


[“무엇을 바랬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꿈꿨습니까. 무슨 꿈을 포기했고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붙잡혀 당겨진 팔이 멀게 느껴졌다. 

바로 옆에있을 그 너무나도 느리게 움직였고 머나먼 곳에서 이야기하고 있을 그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소리가 끊어졌다. 톨비쉬의 목소리가 유리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부서진 목소리는 꿈결같이 아름다운 빛으로 흩어져내렸고 그 빛은 곧 설원의 색을 띄며 소복히 쌓여들어갔다. 

아이들이 앉아있는 소파를 사이에 두고 기묘한 설원이 내려 앉았다. 발밑으로 두개 이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당신이 서 있는 설원위로 아무런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 꿈의 시작이 언제부터인지를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꿈은 깨어나는 순간 모두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가끔씩 그 찝찝한 기분이 남기도 하지만, 괜찮습니다. 다 괜찮아요. 

이해하려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무엇때문인지 무엇을 위해서인지 이 모든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사람들은 그 대부분을 이해하지 않은채 흘러넘깁니다. 그러니 당신도 이해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그날부터 지금까지를, 그냥 나쁜 꿈으로 생각하세요. 아주 나쁜 꿈이요. 

처음부터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그렇게 생각하세요. 

언제인지 모를 까마득한 언젠가 당신은 그저 도망쳤고 이 일은 단순한 사고였습니다. 

처음부터 퀘사르따위는 아무데도 없었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일찍이 같은 면을 가지고 있는 동전이 있었죠.

 한쪽 면에는 아발론이라 적혀있고 다른 한쪽면에는 퀘사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둘 모두 필리아의 실리엔에 의해 쓰러졌고 둘 모두 죽음의 문턱까지 흘러나갔다 돌아왔는데도 그 운명은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칼리번의 반신이 되었고 다른 한쪽은 칼리번의 그림자가 되었지요. 무엇이 그 차이를 갈라놓았을까요. 간절함? 절실함? 진실성이었을까요? 아니면 영혼을 불태울만큼 강렬한 마음이었을까요.


그리고 또하나, 실리엔에서 태어나 칼리번에 의해 작성되었지만 스스로가 칼리번을 다룰 수 없을 것이라 여기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발론도 아니고 퀘사르도 아니었지만 그 둘 모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왜 그들은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게 되었을까요? 왜 어느쪽도 선택하지 못한채 누군가가 평가내리기를 기다렸을까요?

기억의 처음 시작이 어디인지도 모를텐데 그들은 처음 들은 목소리와 처음 본 얼굴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무엇이 당신들을 강제했습니까 무엇이 당신들을 옭아매었나요? 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맹목적이고 헌신적이었습니까?


첫번째 역병의 밤은 사물의 기록이었고 두번째 역병의 밤은 사람의 육신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세번째 밤이 무엇인지는 당신도 알겠지요?”]


섬광이 터져나왔다. 환상을 넘어 그가 손을 뻗어왔다.

꽁꽁옭아매어오는 강인한 팔을 통과해 유령처럼 반투명한 하얀 장갑이 뺨을 어루만져왔다.

따스하다. 하지만 이 온기가 누구의 것인지를 모르겠다.

지금 자신을 꽉 끌어안는 이사람의 것인지 환상속의 그의 것인지 아니면 흘러넘치는 눈물의 것인지.


[“네. 밀레시안, 이것은 한 낮에 일어나는 아주 짧은 환상입니다.

다른 이들이라면 찰나의 기시감으로 인식하겠지만 당신은 아니죠. 당신만은 아닙니다.

아발론에게도 아닐것이고 케트양에게도 아니겠지만 이젠 당신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퀘사르들도 도르카 페다인도 없어진 오늘은 세상이 당신에게만 상냥하지 못한 날.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상처가 지나갔습니다.

당신은 루에리에게서 절망하는 마음을 받았고 나에게서 후회하는 마음을 받았습니다. 마리에게서는 슬퍼하는 마음을 받았고 아발론에게서는 추억하는 마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고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걸 내려놓을 때가 왔습니다. 숨가쁘게 달려왔던 당신을 멈출때가 왔어요.

잃어버린 과거를 찾는 일을 그만 두고 넘겨받은 마음을 지키는 일을 그만두고.

당신의 마음을 당신의 것으로 채워야 할 때가 왔습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모든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온거에요.


나의 여정이 끝났던 것과 같이 당신의 여정에도 끝이 찾아왔습니다. 

부서지고 갈라져 갈피를 잃었던 이야기도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습니다. 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생각하세요.

당신이 지나왔던 길의 흔적이 아닌 지금 당신의 모습을, 당신의 말들을, 곁에 무엇이 있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해야할지를.


세상의 끝에 다다른 기분은 참담할 겁니다. 겁이나고 막연히 두려울 겁니다.

이것이 끝인지 이렇게 끝내야 할 것인지 그동안의 여정은 무엇이였고 왜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를 후회할 겁니다. 슬플겁니다. 잃어버린 말들이 지나쳐왔던 전장들이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일때 떨어져나온 자신의 모습이 원망스럽고 부끄러울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것또한 당신이 건너온 운명. 흑과 백 검고 하얗던 여정의 끝에서 당신이 가장 바라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리세요. 


그리고 이름을 붙이는 겁니다.

그게 당신의 새로운 이름이고 당신의 새로운 생명일겁니다. 당신이 나아갈 당신만의 길. 

그 이상부터는 되돌아오는 것도 나아가는 것도 오롯이 당신의 운명이겠지만..”]


운명이겠지만..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허상을 걷어내는 거친 손길이 뺨을 돌린다.

나를 보라고, 제발 자신을 보라고. 간절하게 바라는 푸른 눈이 억지로 밀레시안의 얼굴을 잡아돌렸다. 

기대는 품속에서 잘그락거리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심장의 소리를 가로막는 커다란 금속의 막대가 딱딱하게 뺨을 짓눌러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들이마시지도 내쉬지도 못한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일그러지는 입술위에 낯선 온기가 짓뭉게졌다.



[“나아가세요 당신의 삶을 향해 나아가세요. 나의 폰. 

당신이 스스로 살기로 마음먹었다면 과거의 이름을 넘어서라도 나아가도록 하세요.”]



끝까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당신들이 무슨생각을 하는지 왜 그런 이름으로 돌아왔는지 무엇을 위해 그들을 희생시켰고 무엇을 위해 또다시 그렇게 자신들을 희생시키는지. 왜 나를 돌아보는 것인지 왜 그렇게도 나를 가엾게 여기는 것인지. 나는 무엇을 해왔던 걸까. 무엇을 믿었던 걸까.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지키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동시에 어렴풋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이 던진 그 모든 질문이 사람의 것이었다. 당신이 보여준 그 모든 기만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당신이 알려준 그 모든 헌신이 사랑이었고 당신이 내어준 그 모든 상처가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밀레시안은 생각했다. 차라리 당신이 있는 그 설원으로 넘어간다면 이 마음이 편해질텐데.

하지만 옭아매어오는 이 팔이 너무 강인해서 뿌리칠 수가 없었다. 눈이 부셨다. 호흡이 차오른다. 

뜨겁고 달착지근한 열기가 억지로 입을 벌리고 숨을 쉬도록 강요했다.


빛은 점멸했고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섬광에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깜빡인다. 머릿속에서 그리고 또 눈앞에서 한참을 점멸하던 그 빛은 한순간에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잠시동안의 침묵이 지난 후, 톨비쉬는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이들이 울고 있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실감과 기묘한 공백감에, 그리고 놀란 마음에.

아이들은 이내 사이렌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크게 소리내어 자신들의 보호자를 찾아 현관으로 걸어나갔다.

아이들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 동시에 품안으로 묵직한 무언가가 쓰러져내렸다.


톨비쉬는 정신을 잃은 밀레시안은 추스려 안으며 생각했다. 어디로 가야할지를. 무엇을 해야할지를.

기억이 점멸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결론내였다. 혼란이 가라앉으면 곧 추격자들이 올 것이다.

그것이 밀레시안을 쫓기 위해서건 퀘사르들을 쫓기위해서건 상관없이 에린의 모든 진실을 쫓는 이들이 밀레시안을 찾아낼 것이다. 떠나야한다. 사라져야한다. 누군가가 밀레시안의 이름을 결정하기 전에, 누군가가 밀레시안의 이름대신 책임이라 부르기전에.


하지만 어떻게? 혼란스러워하는 톨비쉬의 귓가에 낯이 익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친듯 피곤에 잠긴 웃음소리는 사뭇 태평할정도로 나른하게 속삭였다. 가엾고 다정한 별의 아이. 내가 너에게 무엇을 더 남겨줄 수 있을까. 톨비쉬는 홀린듯이 자신의 손목을 들여다 보았다. 

이윽고 활짝 열린 현관문 앞으로 차가 멈춰선뒤 다급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톨비쉬..!!”











“기억 안나.”


“그럴 줄 알았다니까.”


에일레흐의 대리자, 에레원은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멀린을 쏘아보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멀린은 얄미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에레원의 친필로 쓰여진 종이를 흔들고 있었다.

종이는 평소의 에레원이라면 공식석상에서는 절대로 쓰지 않았을법한 거친 필체로 쓰여져 있었다.

내용은 자신이 무언가를 기억못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사전에 공지받았으며 만일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때는 제로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겠다는 내용의 각서였다.

전적으로라는 말에서 얼마나 망설였던 것인지 종이는 몇번이고 다시 고쳐쓴 흔적이 역력했다.

수상하기짝이 없는 문서이지만 에레원은 꼼짝없이 그 종이를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서명과 필체, 그리고 흘려쓰는 버릇까지 모두 자신의 것, 에레원은 짜증스럽게 멀린을 흘겨보았다.


“문서따위는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잖아. 다른 증거를 가져와.”


멀린은 두번째 서류를 내밀었다. 영상과 음성, 기타 기기를 사용한 모든 증거물은 조작 혹은 훼손 될 위험이 있으며 이에대한 내용을 사전에 충분히 공지받았다는 내용의 문서였다. 에레원은 폭발했고 안드라스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에레원이 떠드는 동안 다우라는 숙취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며 고심하는 표정으로 테이블에 팔을 괴었다. 눈을 감고 고요하게 입을 다물었다. 곱게 감겨진 그녀의 눈꺼풀은 도무지 다시 들어올려질 생각을 하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혼란이 가라앉지를 않는 연합회의 회의장. 이제는 전 연합회가 되어버린 네 그룹의 모임은 약간의 시름과 약간의 한숨 그리고 아주 많은 짜증과 불쾌함을 가지고 멀린을 바라보았다. 대비책은 없었어? 누군가가 멀린을 향해 물어왔다.

멀린은 말없이 디바와 프로페서를 가리켰다. 서로의 기억을 확인중이던 두 사람은 멋쩍은 혹은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조증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과거의 사례를 조사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밤중에 일어났다면 수상하게 여겼을까? 기묘한 전자음이 났다면 경고의 의미로 받아들였을까?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그리고 무엇까지?  모든 것이 그들의 시선이었고 모든 것이 그들의 귀였다. 

불빛 하나, 작은 소리 한 음에도 칼리번의 의지가 담겨있었고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

멀린은 아예 회의실을 떠나지 조차 않았지만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을때는 이미 깜빡거리던 회의실의 전등에 시선을 빼앗긴 뒤였다.


그 주체가 가면을 잃어버린 퀘사르였는지 아니면 짝을 잃어버린 칼리번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오직 아발론이 키운 피오나의 요원들과 일부 에린의 특수한 몇몇 사람들, 그리고 필리아의 엘프들 뿐이었다.

그러나 유난히 온화했던 푸른 머리의 엘프는 어쩐지 저도 몸상태가 너무 나쁜것같네요 라며 은근슬쩍 회의장을 빠져나갔고 대신 짙은 남빛을 가진 대리인을 보내왔다.

멀린은 메이크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딴청을 부리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혀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완전 난장판이네. 사람의 옷을 입은 작은 원숭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막대한 영향력이 사라졌음에도 에린은 너무나도 평온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간의 기시감을 느끼는 정도에서 끝났다.

민감한 이들은 상실감을 느꼈지만 곧 신경이 예민해진 탓이라며 잊어버렸다.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을 꼽으라면 그나마 도시 곳곳을 순회하던 반칼리번단체의 일원이 일제히 겁에 질렸다는 것 정도.


그들은 스스로가 무엇에 반대하고 무엇에 열광했는지 조차 잊어버린채 자리에서 멈춰섰다.

피켓은 곧 바닥으로 떨어졌고 종이뭉치는 바닥에 흩어졌다. 사람들은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무언가에 이끌려 알지못했다는 행동을 했다는 공포감에 질려 자리를 박차고 떠나갔다.

그 물건들은 보다못한 누군가가 쓰레기 봉지를 들고 나올 때까지 방치되었고 이내 분리수거장으로 이동되었다.


이전 퀘사르의 이름이 터부시되었던것과 같이 칼리번의 이름이 불길함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막연한 불안감으로 외면한 진실과 달리 일부러 조작된 진실들도 있었다.

피오나는 도산으로 처리되었고 브류나크는 특정할수 없는 괴단체에게 습격받은 것으로 조작되었다. 

허공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크로우 크루아흐에서 뛰어내리는 맨몸의 괴한들보다 이름도 출신도 모를 공습부대가 브류나크로 강하하는 영상이 훨씬 더 현실성있게 받아들여졌다.

연출이 너무 영화같지 않느냐는 멀린의 핀잔에 레자르는 투명화가 가능한 커다란 캐리어가 발명되거든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며 삐딱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가상의 이야기라면 당신이 담당하는 이야기가 더 허구에 가깝지요. 멀린은 화면을 내린 뒤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제로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었고 가상의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반인중에서도 칼리번의 영향을 견뎌낸 사람들은 있었기에 이따금씩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이 튀어나오기도 했지만 의례것 그래왔듯 뜬소문으로 사라졌다.

무슨생각인지 모르겠어 그 영감. 멀린은 한번더 머리를 휘저으며 테이블위로 엎어졌다.

이제와서 피오나의 단장을 원망해봤자 자리에 없는 이를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쫓을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 그가 무슨 세상을 바랬는지 왜 피오나라는 요원들을 남겨두었는지 언제 사라졌고 어떻게 사라졌는지.

멀린은 막연하게 생각했다. 만약 브류나크가 온전히 남아있고 제 기능을 다했다면 분명 그가 원하는대로 칼리번의 입지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어 갔을거라고. 그랬다면 이와같은 혼란도 없었을 것이고 이와같은 논란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그 영광된 빛의 이름을 잊게되었을때 밤의 그늘아래 걸어나온 광명의 그림자가 마지막 빛을 꺼트릴 예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떤 얼굴인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역할을 확실히 깨달은 마지막 후계자가 번복된 예언을 깨고 시대의 막을 내렸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하지만 그렇게되지 않았지. 결국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조차도 어쩌면 예언의 번복.

머릿속이 복잡했다. 머리를 헤집는 동안에도 지도속 작은 아이콘들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뿔뿔히 흩어지는 피오나의 요원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었다. 

도시속에서, 숲 어딘가에서, 바다한가운데서, 도로 어딘가에서. 점점히 줄어가는 지도위로 누군가의 비정규적 통신이 들어왔다.

멀린은 삐딱한 자세로 통화를 받았다.


“반갑네, 멀린군.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연락하게 되었네.”


“........누구신데 이렇게 귀하신곳에 누추한 영상을.”

“아.. 나는.. “


화면속 투구를 쓴 낯선이는 얼굴을 드러내어보이며 가볍게 웃어보였다.

가슴팍에 달린 방패의 앰블럼이 반짝거린다.


“일단 단장이라고 부르면 될 것같네.”










신호가 끊겼다.

킹은 집요하게 따라붙던 누군가의 추적이 끊어졌다는 것을 보고하며 쓰고있던 고글을 끌러내렸다.

6인용 차량에 4명밖에 타지 않았지만 유난히도 공기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톨비쉬는 피곤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밀레시안은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고 정처없이 달리던 차 또한 어딘지모를 휴게소에 정차했다.

퀸이 따끈한 캔 음료를 내밀었다. 포장만 보아도 달착지근한 맛이 느껴질 정도로 노골적인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뭐든 입에 밀어넣는것이 중요했다.

톨비쉬는 맛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뜨뜻한 음료를 한입에 털어넣었다.


“밀레시안은?”

“자고 있어”


밀레시안은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마신뒤 길게 내쉬었다. 

눈꺼풀이 아래로 간헐적인 움직임이 보이고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걸까. 킹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길고 긴 여정동안 한번도 깨지 않은 그 꿈이 고되고 힘든 이야기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킹이 뒤를 돌아보는 동안 다시 운전대 앞에 앉은 퀸은 느릿하게 페트음료의 뚜껑을 돌렸다. 

경쾌한 탄산음과 함께 역시나 달착지근한 사탕냄새가 풍겨왔다.

조금은 새큼한 음료를 꿀꺽꿀꺽 마시던 퀸이 반짝거리는 램프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룩의 연락이었다.


“연락...”


“아, 응.”


킹은 서둘러 무릎에 내려놓았던 고글을 다시 뒤집어썼다. 손가락이 움직인다, 고개를 몇번 가로젓다가 끄덕이고는 허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조금 더 가면 알반에서 이쪽으로 마중을 보내올거야.”


“믿을 수 있어?”

“추적을 끊어낸 것도 저쪽이라나봐. 제로랑 합의를 봤나봐.”


다른 이들과는? 퀸은 차마 떨어지지 못한 입술을 탄산음료로 축이며 고개를 돌렸다. 

무릎을 내려다보고 있던 새파란 시선이 거울을 향해 움직였다. 출발할까? 톨비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 여행이 될것이라고, 킹은 다시금 뒤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아주 멀리, 에린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그 누구도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며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곳으로.




“눈이 내리는 곳이면 좋겠어.”


톨비쉬는 아무런 맥락없이 입을 열었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 따뜻해지겠지만, 겨울에는 온세상이 하얗도록 눈이 내리는 지역이면 좋겠어.”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마중을 나갈것이라고 이번에야말로 이 손으로 데리고 돌아올 것이라고.

나는 당신이 싫어해도 쫓아갈 것이고.  당신이 나를 거부해도 따라나설 것이다.

당신의 입으로 나를 거절할때까지 몇번이고 이름을 부를 것이고, 당신이 진심으로 나를 미워 할때까지 이 마음을 전달할 것이다. 온전한 당신의 눈으로 당신의 목소리로 당신의 이름으로 나를 밀어낼 때까지. 밀레시안. 나는.


톨비쉬는 눈을 감았다.











총성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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