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비밀레) reload #13(2)

마비노기/reload 2017. 12. 23. 17:54

화면이 넘어갔다. 무언가의 간섭이 생긴것 마냥 노이즈 섞이 음성이 화면위로 끼얹어졌다.

연구소의 설비들을 다시 복구하는 아발론의 얼굴위로 집요한 노이즈가 스쳐지나갔다.





“도망치라고 했어요.”


“그런말 하지마.”


“후회를 하더라도 살아남으라고 했어요.”

“내가 아는 너희들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어.”


“그런 나를 만나 기쁘다고 했어요.”

“그렇게 사람처럼..”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게 사람인 것 처럼..!!”


아발론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안았다.

삼키지 못할만큼 커다란 감정이 흘러넘쳤다. 당신들은 언제나 그렇게 수많은 얼굴들로, 서로다른 이름들로 다시금 또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수많은 시간이 지났다. 마하는 바이스의 시약을 가로챘고 그녀의 손에서 실리엔의 중화제가 완성되었다.


필리아는 다시한번 그녀들에게 속아주어야만 했다.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필리아의 카스타네아는 그들에게 필리아의 실리엔을 넘겨주었다.

뿐만일까, 바이스의 중화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순도로 정련된 힐웬합금을 필요로 했다.

바이스는 끝까지 그녀들이 충분히 얻지 못할 힐웬을 걱정하며 그 대체제를 만들려 했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실비아가 죽어야했고 바이스 또한 온전한 꼴로 죽지 못했지만 필리아가 그걸 알리가 없었다.


원망도 체념도 없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필리아는 자신의 남은 감정을 버려야 했다.

필리아는 발레스에 숨어들었고 그들이 보관중이던 힐웬에 대한 비서, 고대 자이언트의 서를 훔쳐내었다.

물증은 없었지만 모든 정황이 필리아를 가리키고 있었다.


발레스의 격분에도 필리아는 모른채 고개를 돌렸고 바이브카흐도 눈을 감았다. 

에일레흐는 자신은 아무런 힘도 권한도 없다며 은근슬쩍 넘어가려했다.

반의 몰락이후로 에린의 연합에서 구석으로 밀려난 발레스는 그대로 분을 삭힐 수밖에 없었다.

그 풀어낼 길 없는 분노가 온전히 필리아에 향한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필리아는 그렇게 3번의 배신과 2번의 기만을 딛고 겨우 소원을 이루었다.

더이상 기억을 잃는 다는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었고 언제 괴물로 변할까 두려워하던 아이들은 편안하게 잠자리에 누울 수있게 되었다.

그래, 이거면 되었어. 론가에 마하의 부하들이 출입하고 있었지만 필리아는 애써 그 발걸음을 무시했다. 

긍정적인 내일만을 바라보려했다. 문제를 덮고 미루며 회피했다.

그리고 그 어느 날, 마하의 연구소에 괴물들이 출몰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보라빛으로 흉흉하게 빛나는 안광이 뉴스화면을 가득채웠다.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지 모를 괴물들의 모습에 에린은 연일 심각한 표정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네반과 모리안의 뒷처리로 소문은 대충 가라앉았지만 그 괴물에 대한 두려움은 에일레흐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에일레흐는 그 불신감을 흡수할 완충제를 기획했다. 

그들의 분노나 처리하기 껄끄러웠던 모든 소문들은 바올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그 눈가림에 속아주는 것은 아니었다. 

잊는다고 해서 그 괴물들과 괴물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이 없던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필리아는 마침내 론가의 봉쇄를 선언한뒤 바이브카흐와의 결별을 통보했다. 

오랜 시간동안 침묵을 지켜왔던 필리아의 선언에 바이브카흐는 조소어린 응답을 보내왔다.

늦었다. 너무나도 늦었다. 평생을 실리엔과 함께 살아가겠다던 오래된 망집을 내려놓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뒤였다.




모리안이 물었다.

“이제와서 그 괴물들과 관련이 없다고 잡아땔 참인가요?”

“필리아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닙니다.”


네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 모든것은 결국 당신들의 땅에서 시작되었죠.”

“바라지도 않았고 원한적도 없습니다.”


마하는 묻지도 부정하지도 않은채 확신을 담아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당신들의 소원이 결국 이 일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다시한번만이라도 보고싶어. 그렇게 말했었죠.”

“.......”


“반도, 당신들도 결국 똑같은 소원을 품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다른점이 있다면 반은 그렇게 스스로를 불태웠고 당신들은 타인에게 그 불씨를 떠넘겨왔었다는 것.”


거울빛 눈동자가 흐려졌다. 카스타네아는 사막의 밤보다도 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들은 우리를 비난 할 수 없어.”

“그래요, 맞아요. 하지만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바이브카흐가 아닌 에린이 말한다면?”


“그때도 그들에게 지금처럼 말할 수 있나요?”


“그들은..”

“할 수... 있겠어요?”







필리아의 론가가 닫혔다.


모리안은 필리아를 떠나보냈지만 그것이 필리아에 대한 구속력을 철회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입을 다물었고 바이브카흐의 눈치를 살펴야했다. 

말할 수 있는 것보다 삼가해야할 것이 더 많았고 순간의 실수가 표면뿐인 평화를 그르칠 수도 있었다.


필리아는 침묵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검열해야했다.

필리아가 자기 자신안에 갇혀있는동안 네반은 새로운 실리엔을 찾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훨씬 더 안정적이고 훨씬 더 많은 양의, 순도가 조금 떨어진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그정도는 시간과 칼리번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연구소를 새로 세운지 얼마 안되어 네반은 실리엔의 연구소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일련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성을 잃은 연구소의 AI들은 모리안을 거부했고 모리안은 본질을 잃어버린 바이스들을 리셋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같은 칼리번의 분리되어나온 AI들은 마음처럼 쉽게 조작되지 않았다. 

모리안은 일단 AI들이 멋대로 날 뛸 수 없도록 실리엔의 연구소를 폐쇄시켰다.


어차피 닫혀있는 땅덩어리 안에서의 농성,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에 목을 맬 필요는 없었다.

모리안은 시선을 돌려 다음 목적에 착수했다. 그녀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까마귀들이 소란스럽게 울기시작했다.


그녀의 새로운 수족으로 움직이는 밀레시안들은 그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 한명의 몸 안에 단 하나의 밀레시안이 들어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들은 얼굴과 이름을 몇번이고 바꿔가며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했다. 

누군가는 한가롭게 양털을 깎았고 누군가는 하루종일 낚시터에 앉아 찌를 드리웠다. 

실이 묶인 마리오네트와 함께 길거리 공연을 하기도 했고 요리를 음미하며 쟤료를 알아맞히기도 했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근면한 아르바이트생, 선원지망생이자 손끝이 살아있는 고대 유물의 감정가, 

당신의 친구, 이웃, 혹은 연인.


그 모든 이름들은 모리안의 손짓 한번에 베일을 뒤집어쓰고 어둠속으로 녹아들었다.

가장 이른 새벽의 그림자 아래서 조용히 걸어나와 나지막히 종언을 고하는 까마귀 여신의 날개. 그 손길은 대상을 영원히 잠재우고 다시 그렇게 일상속으로 돌아갔다.

아발론은 끈질기게 그녀의 까마귀들을 쫓아왔고 그때마다 모리안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일상속에 녹아있던 밀레시안이 끌려나올때면 꼭 예상치 못한 트러블이 일어나곤 했다. 

아발론은 강제로 그 가면을 벗기고 그 텅빈 내부를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한번 발각된 밀레시안은 두번다시 그 지역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덕분에 모리안에게는 임무를 포기하고 돌아온 밀레시안이라는 새로운 골치덩어리가 생겨났다. 

거기에 이따금씩 폐기까지 해야하는 개체들이 나오기까지 헀다. 

하지만 모리안은 언제까지고 이 작은 인형들에게만 신경을 쏟을 수 없었다. 


그녀는 폐기해야하는 밀레시안을 하나 둘 정도를 미끼로 던져넣었다. 

아발론의 시선을 다른곳으로 묶어둘 수만 있다면 싼값의 대가였다.

그가 밀레시안들에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사이, 포워르가 움직이고 있었다. 

모리안은 일부러 방치하던 서류를 한장 꺼내들고 호출기를 끌어당겼다. 

문이 열리고 호명을 받은 요원들이 방으로 들어왔다.모리안은 눈앞에 선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세 요원이 받은 임무는 어느 연구소에서 연구중인 프로젝트에 대한 것이었다.

연구소의 이름은 알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는 포워르의 연구소를 조사하고 그곳에서 만들고 있는 것에 대한 정보를 알아오라는 것이 주된 임무, 임무와 위치 이외에는 아무것도 적혀져 있지 않았던 탓에 퀘스트지를 본 붉은 머리의 검사는 짜증스럽게 종이를 구겨 등 뒤로 집어던졌다.


허공으로 붕 날아오르는 퀘스트지를 본 작은 소녀가 허둥지둥 손을 뻗으며 퀘스트지를 쫓아 뒷걸음질을 쳤다.

풀숲사이로 들어가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임무지를 잡아챈 마리는 루에리가 버린 것이 진짜 쓰레기가 아닌 임무지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언성을 높여 루에리를 불러세웠다.

당연하게도 루에리는 모르는척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발걸음은 조금 빨라졌고 보폭은 한뼘정도 넓어졌다.


뒤이어 따라오던 타르라크는 마리에게서 잔뜩 구겨진 퀘스트지를 받아들었다.

어설프게 펼쳐진 종이를 손으로 문질러보지만 이미 구깃구깃해진 종이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타르라크는 종이를 잘 접어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깟 두 줄밖에 안적힌 지령서를 본다 한들 누가 뭘 알겠냐며 투덜거리는 루에리의 머리위로 까마귀가 한마리 내려 앉았다.

한참 종알거리던 마리가 더이상 따라오지 않는 다는 것을 눈치챈 루에리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머리위를 올려다 보았다.


“타르라크..!!”


“임무지를 함부로 내던진 네가 제일 나빠.”


루에리가 다급하게 항복을 외쳤지만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홀로그램의 까마귀는 용서없이 부리를 내리찍었다.

딱딱한 부리대신 짜릿한 전기충격이 정수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루에리는 까마귀를 내쫓기 위해 손을 휘저었지만 본체는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작은 구체의 기계였기에 소용없는 행동이었다. 한참동안 루에리를 쪼아내던 까마귀는 곧 작은 전자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루에리의 손을 피해 날아오른 작은 기계가 타르라크의 소매로 쏙 들어갔다.


“아하하, 루에리 바보. 타르라크에게는 꼼짝도 못하네..!”


“꼼짝 못한게 아니라 받아준거거든? 저거 한번 망가트렸다가 내가 얼마나 고생했었는데..!”

“알면 잘 해. 괜히 쓸데없는 일에 전력쓰게 만들지 말고.”


“아하하하”




세 사람은 지령서대로 알비라는 지하 연구소로 향했다.

알비는 포보르의 연구시설중 하나로 그 기능은 이미 역병의 밤떄 모두 사라진 뒤였지만 

비어버린 연구소가 되살아나는 것은 드물긴 하지만 아예 없었던 일은 아니었다.


이따금씩 바올에서 도망쳐나온 부랑자들이 어찌어찌 연구소의 전력을 복원해서 모여사는 경우도 있었고, 누군가가 바이브카흐에게 대항하기 위해 시설을 움직인 흔적도 곧 잘 발견되었다.

그때마다 모리안은 다른 부서의 요원들을 보내 그의 뒤를 쫓아갔지만 아직까지 실체를 만났다는 요원은 만나본적이 없었다.


그 특수 부서가 어디인지도 모호했고 누가 소속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바이브카흐는 늘 그 무언가의 흔적을 쫓아 바쁘게 움직이곤 했다.

 모리안은 그 특수부서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꺼렸고 요원들 사이에서도 그것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다.


따로 부서까지 만들어서 쫓아야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골똘히 생각하는 마리의 혼잣말에 타르라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아마 퀘사르가 아닐까..? 타르라크의 대답에 루에리는 말도 안된다며 과장스럽게 말끝을 길게 늘어트렸다.


얄미운 표정과 제스쳐는 덤이었다. 

퀘사르라는 이름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지난 십 몇년간 에린에 퀘사르같은것이 나타난적은 전혀 없었다며 루에리는 쓸데없는 소리야 하고는 타르라크의 추측을 압살시켰다.

타르라크는 물끄러미 루에리의 얄미운 표정연기를 바라보다가 정강이를 걷어찼다.


“사람이 그렇지 않을까 추측도 할 수 있는거지. 어딜 면박을 주면서..”


“넌 임마 사람이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거지 왜 걷어차..! 차기는..!”

“하아, 둘 다 바보같아.”


마리는 두 사람을 지나쳐 앞서나갔다. 

날렵한 발놀림으로 길게 이어지던 숲길 어딘가로 사라진 마리는 이내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근처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마리가 떨어진 나무아래로 잔나뭇가지와 나뭇잎따위가 조금씩 떨어져 내렸다.

마리는 손에 들고 있는 곤충의 형태의 카메라를 타르라크에게 건네주었다.

타르라크는 선 자세에서 그것을 분해하며 내부를 살펴보았다.


“흐음, 음… 과연..”

“왜, 퀘사르인것 같아?”


“루에리.. 타르라크 일하잖아. 그만 물고 늘어져.”


“아, 왜.. 하지만 재밌지 않냐. 온갖 똑똑한 척은 다하다가 결론이 옛날이야기에서 나오는 퀘사르라니. 

크으, 너도 참 순정파다. 너 어렸을때 퀘사르 관련 특집프로그램은 다 챙겨봤지? 응? 그치?”


“루 에 리...!!”

“알았다니까..”


마리의 만류에 루에리는 겨우 어깨를 으쓱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타르라크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나머지 부분을 살핀뒤 남은 부품들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아무리 보호용 글러브를 끼고 있었다 하지만 손안에서 부서지는 렌즈나 부품따위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부서져갔다.


“.....다 루에리탓이야.”

“.......야.. 화났냐..?”


“화는 안났어. 이건 그냥..”


타르라크는 부서지지 않은 딱딱한 부품들을 떨어트렸다. 

탁탁 손을 털어내는 타르라크는 한숨과 함께 한발을 내딛었다. 무심한 한걸음에 남은 부품들이 부서진다.


“1절만 하자는 의미야.”

“....예이...”


루에리는 한숨 돌렸다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마리는 다시한번 루에리 바보 라는 입모양을 뻐금꺼리며 타르라크를 따라움직였다.

타르라크는 마리가 떨어내린 나무근처로 다가갔다. 


마리가 낚아채온 카메라의 부재를 눈치챘는지 비슷한 모양의 카메라들이 부러진 나무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래봐야 잔가지 몇개 정도이지만 벌레들은 신중하게 그 주변을 탐색했다.

타르라크는 소매속에서 검은 구체를 꺼내들었다. 

글러브 끝에서 튀어오른 전기적 자극에 모형은 네조각으로 나뉘어 작은 날개를 펼쳐들었다.  주변으로 새 모양의 홀로그램을 방사했다.


순식간에 까마귀의 탈을 뒤집어쓴 새의 모형은 벌레들이 모여든 가지에 내려앉았다.

가지가 휘청거리자 꾸물꾸물 움직이던 카메라들이 멈춰섰다. 그리고 고개를 까딱거리는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눈치가 빠른 진짜 벌레들은 허둥지둥 날아올랐지만 그렇지 않은 기계벌레들은 곧장 가상의 까마귀에게 잡아먹혔다


제대로 먹는 것도 아닌 먹는 시늉과 함께 퍼져나가는 방해 전류뿐이었지만 그정도 위협만으로도 카메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몇개인가 벌레를 쪼아먹은 까마귀가 크게 울음소리를 내었다.

숲어딘가에 한가로히 노닐고 있던 다른 까마귀들이 그 울음소리를 듣고 날아올랐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낯선까마귀를 찾아 모여든 숲의 까마귀들이 나뭇가지 사이를 유심히 살펴보며 저마다의 가지에 내려앉았다.

벌레들이 얼추 물러난 것을 확인한 타르라크가 고개를 까딱여보였다.

마리가 앞장서는 모습을 지켜보던 루에리가 느즈막히 발걸음을 옮겨 타르라크의 어깨에 팔을 걸쳐왔다.


“야, 삐지지 말고.”

“1절만.”


타르라크는 다시 루에리의 머리 위로 날아든 까마귀가 힘차게 부리를 내리찍은뒤 빛의 알갱이로 부서져 내렸다.

짜릿한 전기자극에 정수리를 움켜쥔 루에리가 투덜거리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원형탈모가 생기면 어쩔거냐며 세심하게 손끝으로 확인하는 모습에 타르라크는 헛웃음을 지어보일뿐이었다.





알비는 그렇게 별로 험하지 않은 깊은 숲속에 있었다.

내부의 잠입까지도 모두 순조로웠 연구소는 지나치게 넓었고 그에비해 연구소를 운영하는 연구원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들은 모두 연구실에 틀어박혀있었고 복도를 지나다니는 것은 반자동화되어있는 경호용 안드로이드들 뿐이었다.

연구소의 중반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계속해서 파고들어왔다.

중간에 낌새를 눈치챈 연구원중 누군가가 경보를 울렸고 마리는 몰려오는 로봇들을 따돌리기 위해 잠시 루에리들과 따로 움직였다.


마리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둘은 아무런 걱정없이 더 안쪽으로 파고들어갔다.

갈림길이 줄어들수록 포위망은 좁혀져 왔고 루에리는 타르라크에게 서두르라고 소리쳤다.

결국 안드로이드 들과의 교전, 루에리가 그들을 막는 동안 타르라크는 자료들을 회수하는 동시에 그 암호를 풀어내었다.


화면위로 깨알같은 글자들이 쏟아져내렸다.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글자들속 반복되는 단어가 몇몇개 보였다. 프로젝트 아디만티움...중독된...요람….망각병에 기반하여...야수화..활성화된 실리엔의...기계를 통하여 전파되는..기존의 중화제에 기본이 되는 물질인… 부재..확인 불가..


“글라스기브넨...?”


“그게 뭔데…?”


타르라크는 저도모르게 소리를 내어 의문의 단어를 입에 담았다. 

루에리는 빨리 데이터를 처리하라며 안드로이드를 밀쳐낸뒤 타르라크를 향해 돌아섰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단순히 기계가 망가지면서 뿜어져나오는 가스가 아닌 무언가가.

타르라크는 인상을 쓰며 연기를 휘젓는 루에리를 바라보았다.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 그의 뺨에는 희미한 상흔같은 것이 갈라지고 있었다.

돌아갈 길을 막아서기 위해 수많은 안드로이드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해. 타르라크와 루에리는 서둘러 마리를 찾아 달려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걸음은 얼마 가지 못해 멈춰서야만 했다. 

미로같이 얽힌 지하의 연구소에서 그들은 한 쌍의 실험쥐였고 실타래를 잃은 모험가들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포워르의 우두머리가 말했다.


[“글쎄.., 처음부터 모리안이 너희를 속였을지도 모르지.”]


“닥쳐..! 화면뒤에 숨어서 음습하게 훔쳐보는 주제에..!”


[“과연 그럴까? 화면뒤에 숨어있는게 나뿐은 아닐텐데 말이야. 애초에 이 연구소에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적은 없나?


숲을 지나 오는 동안 아무런 보초도 서있지 않은 것에 대해 의문은 가진적은 없어?

단순히 인력부족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나? 아니면 그저 허술할 뿐이라고 생각했나.


포보르와 바이브카흐는 본디 협력관계였던 사이, 처음부터 모리안이 우리들과 아는 사이라고 생각해본적은 없나?”]


“일부러 우리를 속였다고?”


[“물론 아는사이라고 해서 모두가 좋은 인연인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녀와 나는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섯불리 패를 내려놓지 않는 사이이거든. 그런 관계속에 먼저 바닥에 내려놓아진 너희들은 어떤 카드였을까.”]


버려진 카드.., 감염원이 로봇이라는 것 까지 생각이 미친 타르라크가 급하게  안드로이드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철갑으로 둘러진 작은 기계속 렌즈한가득 타르라크의 얼굴이 비쳤다. 조금 남아있는 여백사이로 괴로운듯 기침을 토해내는 붉은 머리의 청년이 비치고 있었다.


“마리는? 마리는 어떻게 되었지?!”


타르라크의 다급한 질문에 연구원은 친절하게 마리의 영상을 띄워주었다.

마리는 어딘지 불편한 기색으로 벽을 등진채 서있었다.

마리의 주변으로 산산조각이 난 안드로이드들의 부품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뿌연 연기를 연신 뿜어내며 꿈틀거리는 안드로이드의 잔해를 넘어 또다른 로봇들이 마리를 둘러싸고있었다. 

공격은 하지 않은채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그 시선이 소름끼치도록 차가웠다. 


그저 한마리의 실험체를 관찰하든 수십쌍의 눈들은 마리가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을 녹화하고 있었다. 

타르라크가 보고있는 화면도 그중 하나의 시선, 타르라크는 급하게 안드로이드를 밀쳐내고는 루에리를 불렀다.

루에리는 알고 있다며 무기를 고쳐쥐었지만 좀처럼 공격을 가하지는 못한채 입술을 깨물었다.


속이 매스껍다. 갈증도 허기짐도 아닌 공허함이 뱃속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안드로이드들은 아무런 공격의사도 없다는 것 처럼 줄맞춰 길을 막고 서 있었다.

루에리와 타르라크에게는 돌아나갈 길도 나아갈 길도 주어지지 않았다. 나아가려면 정면돌파밖에 방법이 없었다.


루에리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타르라크를 돌아보았다.


“좋아. 내가 마리에게 가는 길을 열테니까 너는 최대한 숨쉬지 말고 따라와.”


[“이런, 눈물겹기도 하지..”]


“너는 닥쳐..! 타르라크, 준비되었어?”


“준비는 무슨 준비?! 너는 어쩌려고..! 

아니 이미 들이마실 대로 들이 마신 뒤에 숨을 덜쉰다고 막아질 바이러스도 아니야..!”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루에리..!!!”


“젠장, 나도 몰라, 나도 모르겠다고!! 난 바이러스가 뭔지 지금 내가 어떤 상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어! 바이러스가 뭔데?! 지금이라도 약먹으면 나아? 백신은 있어? 찾으러 더 들어가는게 정답일까? 아니면 나가는게 맞는 선택지일까. 하지만 앉아있는건 아니겠지. 그렇지? 주저앉는게 답은 아니잖아..!


그렇다면 내가 고를 수 있는건 딱 두가지야..! 내가 나가는게 더 나을지 아니면 네가 나가는게 더 나을지. 그리고 마리를 포기 할지 아니면 구해서 나갈지!


“그렇게 되면 네가 죽어!!”

“그리고 네가 살아!!”


루에리는 검을 내리치며 타르라크에게서 돌아섰다.

이를 악무는 루에리의 검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검 끝이 가리키는  바닥재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결정했어. 그러니까 넌 뛰어! 내가 막고! 마리를 데리고 여기서 나가! 너는 똑똑하니까 이 길을 달려 무엇을 해야할지 잘 알 수 있을거야. 그러니 네가 가는거야. 자 달려..!”


루에리는 더이상의 선문답은 그만이라며 검을 휘둘렀다. 

밀려드는 안드로이드들을 갈라내었다. 길이 열린다. 타르라크는 그 뒤를 따라 달려야만 했다. 

처음 알비에 들어섰을때와는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 갈림길이 나타나고 나서야 루에리는 타르라크를 돌아보았다. 

마리가 있는 구역은 이곳에서 왼쪽. 타르라크가 손짓하자 루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른쪽으로 달려갔다.


“루에리..!!”

“이봐!! 거기 폼잡고있는 연구원..! 지금도 그 잘난 화면으로 여기를 내려다보고 있지?”


루에리는 일부러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치며 주의를 끌었다.

타르라크가 멈춰선 것을 발견한 안드로이드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곧 어디선가 날아온 안드로이드의 머리가 그 손을 쳐내었다.

루에리는 머리 없이 움직이는 안드로이드를 검으로 쳐내며 소리쳤다.


“여기, 잔뜩 연기를 들이마시고도 팔팔한 검사가 하나. 그리고 반대편에는 한 대도 제 손으로 안해치운 연구직이 하나. 어느쪽이 더 모르모트로 적합하다고 생각해?”


[“내가 선택을 해야하는 입장인가? 왜? 둘 다 가지면 되는 것을.”]


“아니아니, 하나만 선택해야해.”


루에리는 검을 휘둘러 벽면에 꽂아넣었다. 끼기긱거리는 철판소리와 함께 검의 흔적을 따라 요란한 스파크가 튀어올랐다. 몇몇 전등이 깜빡이고 비상등이 울려퍼졌다. 지하에 있는 연구소가 대부분 그러하듯 그 벽면은 크고작은 전선들로 가득채워져 있었다.

루에리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소란을 못일으킨게 아니라 안 일으킨거거든.”


루에리의 시선이 타르라크로 향했다. 가. 어서 가. 지금. 

그 진지한 눈동자를 앞에두고 억지를 부릴만큼 타르라크는 어리석지 못했다. 

타르라크가 발길을 돌리는 모습이 화면속 카메라에 비쳤다. 

멈춰선 안드로이드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마리가 쓰러져있는 구역까지 앞으로 한 블록. 

그리고 약속이라도 했다는 것 처럼 한 무리의 안드로이드 들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굳이 다른 인원수를 충당해 쫓지 않아도 그가 향할 곳은 어차피 그들의 손아귀 안이었다.

타르라크는 손을 쥐었다 폈다. 녹색으로 점멸하던 글러브가 파랗게 물들어가며 요란한 스파크를 발생시켰다. 창같이 날카로운 장대를 겨누는 안드로이드의 얼굴위로 불빛이 어른거렸다.  타르라크는 소매끝에 달려있던 작은 기계들을 띄워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목소리없는 까마귀들이 안드로이드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루에리들과 수많은 임무를 함께하는 동안 타르라크는 생의 갈림길 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단 한가지뿐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것은 지식도 아니었고 경험도 아니었으며 공포나 희열감 따위로 몸안에 스며들어오는 독특한 감각이었다.

걷기 시작한 그 길의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살아남은 자들 뿐이었고 원망이나 푸념, 후회를 할 수 있는 것도 오직 도망친 자들 뿐이었다.

죽음으로 부터 도망친자들은 두서없이 찍혀있는 발걸음에 이름을 붙였다.

나아간 자의 이름은 운명이었고 돌아선 자의 이름은 책임이었다.


타르라크는 섬광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뻗어나온 오른손에 파지직거리는 작은 스파크가 점멸하고 있었다. 그을음이 묻은 안드로이드들중 몇몇이 전기음을 울리며 경련을 하고 있었다. 좁은 복도안으로 희뿌연 안개가 차올랐다.

타르라크는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린채 하얀 연기의 장막을 해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멀지 않은 복도의 끝, 일렬로 늘어서 있던 안드로이드 한무리가 타르라크를 향해 일제히 몸을 돌렸다.

타르라크는 다시한번 스파크를 뿜어내었다. 안드로이드들의 잔해를 해치고 안으로 뛰어들어가자 엉망으로 부서진 기계부품위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마리, 마리..!”

“타르라크.., 연기 들이마시지마...”


마리는 힘겹게 눈을 깜빡이며 타르라크의 어깨를 밀어내었다.


“뭔가 엄청 수상하니까. 그냥 이대로 루에리랑 같이 나가..”

“알아. 우리도 알아.”


“아, 뭐야.. 벌써 다들 알아? 내가 제일 늦게 알았어?”


타르라크는 마리를 들쳐 매었다.

몇번인가 다른 기체들이 타르라크를 쫓아왔지만 그때마다 타이밍 좋게 연구소가 흔들렸다.

그래 루에리는 아직 괜찮아. 타르라크는 위안거리도 되지 않는 말을 되세기며 위를 향해 나아갔다.

마리도 루에리가 오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타르라크는 필사적으로 숲을 향해 내달렸고 그 발걸음 뒤로 숲속에 있는 곤충모양의 카메라들이 뒤따라 왔다. 몇번인가 더 스파크를 내뿜은 탓에 타르라크의 전력은 이미 바닥났고 힘을 부여받지 못한 모형들은 땅바닥에 힘없이 추락했다.




숲이 깊었다.

처음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왔을때보다 숲은 어두웠고 더 우거진 느낌이었다.

타르라크는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타르라크…”

“.....”


마리는 스스로도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말을 입에 올렸다.


“여기서부터 혼자 갈 수 있지?”


그게 말이냐. 딴지를 걸어오는 붉은 목소리가 없이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혼자 갈 수 있을리가 없잖아. 바보야? 더 나은 방법은 못떠올렸어? 자책의 목소리가 속안에서 울려왔다. 공허하게 울리는 가슴속이 허하게 느껴졌다.

방법이 없어. 하지만 그들을 쫓는 철갑의 소리는 바로 등 뒤까지 몰려와있었다. 타르라크는 대답했다.


“그럼.., 할 수 있어. 힘없는 연구직이라도 밤길은 혼자 걸을 수 있어...”


마리는 그게 아주 재미없는 농담이라도 된다는것 마냥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기침소리가 이어졌다.

마리를 내려놓은 타르라크는 어찔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휘청거리는 몸을 나무에 기대어섰다. 아무리 입을 막으며 호흡에 주의를 했다고 하지만 그 연기를 아예 들이마시지 않는 것은 무리였다. 아니 그 연기가 정말 바이러스인지도 의문이었다. 그 연구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냥 이 어지러움은 일시적인 눈속임일지도 모른다. 타르라크는 일말의 희망을 품어보았지만 고개를 들어올리는 마리의 뺨에 돋은 비늘모양의 상흔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마리가 웃었다.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타트라크도 잘 도망쳐야해.”

“그래.”


“도망치고 도망쳐. 또 도망쳐서.”


마리가 나무둥치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리는 조금 또렷해진 눈빛으로 타르라크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나와 다시만나는날에.. 오늘 무슨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기로 약속하는거야. 알겠지?”

“....그래. 꼭 그럴게”


발소리가 다가온다. 

어수선한 바람을 따라 숲이 흔들렸다. 악몽과도 같은 검은 숲이 흔들린다. 까마귀를 부르는 휘각이 달린 화살이 날아올랐다. 

피리소리를 신호삼아 타르라크와 마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숲을 달렸다. 이미 한계치까지 다다른 가슴을 쥐어짜내 한걸음의 다리를 더 옮겼다. 

다 꺼져가는 불빛이 다시 반짝일때까지, 누군가 자신의 신호를 잡아낼때까지 타르라크는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숲을 달려 멀리 반짝이는 불빛을 향해 이동했다.


바람이 불어오고 나서야 타르라크는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 멈춰설 수 있었다.

숲에 감돌던 스산한 움직임이 아닌 강한 바람이 풀을 베어내며 휘날렸다.

마리의 화살에 매달아 하늘 높이 날렸던 구조신호가 불빛과 바람이 되어 돌아왔다. 사방을 경계하던 다른 요원들이 타르라크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타르라크는 뜨문뜨문 이어지는 목소리를 짜내어 자신의 이름과 소속을 밝혔다. 그는 쓰러질것같은 정신을 부여잡으며 자신의 요원코드를 건네주었다.


“이름은 마리, 가지고 있는 요원코드는 제 것과 같습니다. 숲 어딘가에 숨어있을 겁니다.”

“그래, 알았어. 이제 안심해도 좋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부상을 당해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최대한 빨리 찾아야.”

“그래그래..! 알았다니까..! 이봐 얼른 이 환자 이송해..!”


“네, 알겠습니다.!!”


타르라크는 강제로 들것에 눕혀졌다.

한계치까지 몰아쳐있던 몸은 등에 부드러운 천이 닿자마자 실타래처럼 풀어져 힘을 잃었다.

만약 그때 조금이라도 더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타르라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그때 조금 더 그들을 의심했더라면, 조금 더 그자들의 행색을 살폈더라면 그들이 환자라고 부르는 호칭에 의문을 가졌더라면.








타르라크는 급하게 온 구조요원들 치고 지나치게 통일된 복장이나 의무적으로 착용하고 있는 마스크 따위를 떠올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수기로 옮겨적고 있는 자료위로 잉크방울 두어개가 떨어져 내렸다.

타르라크는 혀를 차며 번져낸 잉크를 찍어내었다. 어쩔수 없다. 이 페이지는 다시쓰자.

타르라크는 몇장인가의 휴지와 함께 적어내려가던 페이지를 구겨내었다.

화롯불은 얄팍한 종이를 낼름 삼키며 조금 거센 불길로 타올랐다.


그 날 이후로 시간이 흘렀지만 타르라크는 여전히 루에리를 구하러 그 숲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타르라크는 병원이 아닌 이 북쪽의 섬으로 이동되었고 아무것도 없는 오두막에 유폐되었다.

보급은 한달에 두번, 교환품은 일정한 양의 혈액. 


아무것도 없는 설원에 갇힌 뒤에야 타르라크는 그 임무가 처음부터 준비되어있던 함정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죽어갈 것 같았던 타르라크는 아무도 없는 오두막에 홀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튜브가 팔뚝에 꽂혀져 있었다. 은빛의 반투명한 유리병이 머리맡에 흔들리고 있었다.


모리안은 추위속에서 더디게 성장하는 글라스기브넨과 함께 그를 방치했다. 타르라크는 살아있는 실험체가 되어 북쪽 섬에 갇혔다. 

모리안은 타르라크가 그들의 자료를 입수했던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러브나 장비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 


글러브속 글라스기브넨의 모든 자료를 수기로 옮겨적는 그를 보며 괜한일을 한다고 비웃었다.

이유는 타르라크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무엇을 알아내든, 그 무엇을 이해하든 그에겐 이 모든것을 뒤집을 힘이 없었다. 아무런 능력도 없었다. 그저 지식을 파고들어 스스로를 소화시킬뿐, 이 새하얀 설원은 그를 가두고 있는 거대한 고치였다.


타르라크는 건조해서 갈라진 것마냥 새하얗게 일어난 손등을 벅벅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 

아무리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더라도 그날을 떠올릴 때면 열기가 가라앉지를 않았다.

마리는 잘 도망쳤을까? 어딘가에 갇혀있지 않을까. 


분명 모리안도 마리의 행방을 찾아 사람을 풀었겠지만 이에대한 소식은 전해져오지 않았다.

그녀가 타르라크의 처분을 결정하지 않았다는건 어쩌면 그들또한 마리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마리를 찾았어도 이미 늦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타르라크는 마른기침을 하며 내려놓았던 머그컵을 다시 들어올렸다. 아무리 자료를 파고들어도 해답은 보이지 않았다. 마셔도 마셔도 사라지지 않은 갈증처럼, 글라스기브넨의 어둠은 깊게 가라앉았다. 타르라크는 냉기가 스며들어오는 창가에 기대어섰다.

뜨거운 입김이 창문에 낀 서리를 녹여내었다.

눈이 녹고 쌓이는 것의 차이만이 전부인 황량한 설원을 내어다 보는 녹색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마리가 발견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교차했다.

만약 잘 도망쳤다면 모리안이 후발대로 보낸 요원들에게 발견되었겠지, 하지만 중간에 잡혔다면? 아니 쓰러졌다면..?

타르라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라고 부정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어리석게 느껴졌다. 근거도 없이 믿음도 없이, 같은 부정을 반복하는 그의 머릿속은 마치 어딘가가 고장난 녹음기와도 같았다.

힘주어 잡는 머그컵에서 유리가 긁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마디에서 일어난 비늘이 머그컵을 긁어내리고 있었다. 타르라크는 조용히 머그컵을 내려놓은뒤 얼굴을 감싸쥐었다.


손바닥에 이질적인 부분이 몇군데 느껴졌다. 타르라크는 천천히 얼굴을 문지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것이다. 마리가 쓰러트렸던 수많은 안드로이드의 잔해들과 자욱했던 복도의 연기, 유난히 뜨거웠던 체온, 기억속 풍경이 흔들린다. 달빛조차 드리우지 못했던 검은 숲, 그를 올려다보던 눈동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분명 살아남지는 못했을거야. 하지만 잡히지는 않았어. 그게 뭐가 중요해.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해. 마리는 이미 죽었을텐데. 그래도, 나에겐. 그 사실이 중요해. 무엇을 위하여?

나는 그저 그 아이가 나 처럼 괴롭지 않기를 바라는 것 뿐이야. 그래야 네 마음이 편하니까? 그래야 돌아선 네 발걸음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니까?


낮은 숨소리가 공기를 채찍질했다. 타르라크는 얼굴을 문지르던 손을 내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서리가 낀 창문은 마치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울처럼 그를 비추고 있었다.

소리없는 유리벽 너머의 세상에서 그를 향해 질책어린 한마디가 쏘아졌다.

한숨같은 숨소리에 공기가 꿈틀거렸다. 


뱀의 속삭임에 눈쌀을 찌푸린 타르라크는 손을 뻗어내어 숨결에 흐려진 유리창을 닦아내었다.

유리창 너머로 이질적인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새하얗던 설원을 너머 검은 로브를 두른 방문자가 오두막의 현관으로 올라섰다.

꽁꽁 얼어붙은 방문자는 덜컥거리는 얼음덩어리를 떨어트리며 문을 두드렸다.


타르라크는 적어도 그 검은 인영이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은 아니었다는 것에 안도하며 안경을 들어올렸다. 한밤중의 빛이 눈부시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시력은 비정상적으로 향상되었지만 그래도 이 안경은 일종의 상징같은 것이었다.

그가 아직도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과거의 미련같은것.

타르라크는 체인을 걸고 문을 열었다. 

동시에 두어발자국 문에서 비켜섰다. 문틈사이로 검은 로브가 흔들렸다.



“누구십니까.”


“모리안님의 명령을 받고 왔어요. 당신이 타르라크인가요?”

“그렇습니다만.”


“내 명칭은 밀레시안. 밀레시안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당신과 함께 알비에 가기 위해 왔습니다.”


타르라크는 두번 말을 묻지 않은채 문을 닫았다. 

코앞에서 문이 닫혔지만  방문자는 전혀 개의치 않은 얼굴로 멀뚱히 문을 바라보았다.

잠시 뜸을 들인뒤 다시한번 문을 두드렸다.


“타르라크씨..?”


“돌아가세요.”


타르라크는 듣지 않겠다는듯 자물쇠를 잠궜다. 

모리안이 보낸 사자라면 이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따고 들어오겠지만 최소한의 거부감을 표현하기 위한 의미없는 행동이었다.

타르라크는 곧장 화로가에 다가갔지만 그게 전부였다.


몸을 눕힐만한 침구류와 화로, 책상, 약간의 책들과 찬장이 하나, 그리고 몸을 씻을만한 수로가 하나. 그게 전부인 단칸의 오두막.

안경을 들어올리고 뻐근해진 눈을 내리눌렀다. 보고싶지 않다. 듣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방문자는 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악의없는 목소리가 문을 두드려왔다.


“모리안님께선 당신이 알비에 가는 날을 고대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 입 다물어..! 그리고 얼른 돌아가..!!”


“모리안님께서 당신이 명령을 거부할 때를 대비해 키워드를 말씀해주셨습니다.”


“........”


타르라크는 듣지 않겠노라고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휘둘리지 않겠노라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허무하리만치 의미없는 저항을 배신한채 그의 몸에 기생하는 뱀의 비늘은 두 귀와 손바닥을 활짝열어 방문자의 목소리를 똑똑히 그의 귓가에 세겨넣었다.


유리창에 지워진 뱀의 사내가 웃음짓는다. 

타르라크는 흐느낌같이 벌어지는 자신의 입매를 자각하지 못한채 천천히 손을 내렸다. 

짤막한 그 한조각의 키워드가 그의 영혼을 산산히 부숴트렸다.



“위선자.”



거센 바람과 함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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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비밀레) reload #13(1)

마비노기/reload 2017. 12. 23. 17:42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어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역병의 밤? 퀘사르의 악몽? 슈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아니, 좀 더 오래전. 이제는 기억도 안나는 희미한 옛날의 이야기 입니다.

웃음기 없이 무표정하게 굳어있는 톨비쉬의 앞에서 슈안은 씁쓸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어느 마을에 손재주 좋은 아이의 어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의 이름은 디안. 네, 그렇습니다. 반 코퍼레이션의 디안입니다.”







포보르가 성장하기 이전. 반 코퍼레이션이라는 기업이 있었다.

디안이라는 우수한 여성을 중심으로 모인 반은 그때까지 비밀에 쌓여있던 실리엔과 힐웬에 대해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의 실리엔은 온전히 필리아의 것 하나뿐이 없었다. 접근성도 여의치 않았고, 불안정했고, 위험한 물건이었다.

때문에 그 누구도 그것을 활용하려 들지 않았다. 필리아의 실리엔은 온전한 광물의 형태 그대로 지층에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필리아의 엘프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은 금기의 땅과 함께 살아가는 일족에게 세겨진 오롯하게 세겨진 저주의 흔적이었다.


그들은 기억을 잃었고 때때로 이성을 잃었다. 오랜 사막의 민족들은 실리엔의 주변을 봉쇄하고 그 지역을 론가라고 이름지었다. 

파수꾼을 세워 론가를 지키도록 명령했고 그 파수꾼들은 대부분 이성을 잃은 엘프들이나 이성을 잃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형태를 잃어버린 엘프들로 선정되었다.

기억을 잃은 자들은 점차 생명의 기력까지 잃어갔고 엘프들은 그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정제되지 않은 실리엔은 그 자체로 폭탄이었고 또 독약이었다. 

엘프들은 실리엔을 활용하기보다는 감추고 봉인하는데에 주력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그 폭발력을 발견한 디안은 다르게 생각했다.

통제가 가능한 재앙은 또다른 힘의 이름, 디안은 자신들이라면 그 폭력적인 힘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저 특이한 빛나는 돌조각이라고 생각했던 실리엔의 놀라운 잠재력은 디안과 그 무리들에 의해 천천히 제 모습을 찾아 가공되어갔다.


가장 처음 만들어진 것은 전지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실리엔 가공품이었다.

보라색을 띄는 실리엔중 태양무늬를 내포한 것만을 엄선해 만든 고대 마력탄은 그 자체만으로도 강한 빛을 발산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과시했다.

이건 전등으로 쓰기엔 좀 부담스럽네. 누군가의 농담에 연구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처음 시작은 그런 사소한 농담이었다.




실리엔을 가공하여 막대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게 된 반은 곧바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디바이스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평범한 소재나 일반적인 금속은 견뎌낼 수 없었다.

마력탄 상태에서는 그나마 안정적인 것 같지만 조금이라고 활성화 되는 순간 이리저리 터져나간다.

에린내의 온갖 도시와 황무지, 숲을 뒤지던 반은 마침내 산골짜기에 파묻혀있던 발레스와 접촉했다.

에일레흐와 달리 독자적인 왕국을 선언하며 에린과 척을 진 바쉬배르 왕가는 실리엔의 빛앞에서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디안을 쫓아내었다.


“주변을 둘러보시오. 온 천지가 설원이고 그 위에는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달이 두개나 떠 있소. 그런 우리들이 그깟 빛나는 유리병 하나에 무슨 흥미를 가질 수 있단 말이오.”


바이데의 냉대앞에서도 디안은 몇번이고 다시 발레스를 기웃거리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내키지 않는 얼굴의 게파르트의 앞에서 프로토타입의 제더를 시연해보였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대 폭발. 미리 주의에 주의를 줬던 터라 다행히 피해는 없었지만 수십년동안 그자리를 지켰을 고목하나가 우지끈하고 부러지며 인근에 있는 다른 나무들을 차례대로 쓰러트려나갔다.

때아닌 대 참사에 자이언트들은 이마를 감싸쥐었고 디안은 꽤나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망가진 제더의 잔해속에서 반쯤 소모된 마력탄을 들어보였다.


“이 힘을 감당할만한 아주 강한 금속이 필요합니다. 발레스라면 가능하겠지요?”


당장 나가라고 호통치려는 게파르트의 고함이 터져나왔지만 디안대신 누군가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말그대로 포복절도를 하던 헥터가 고글을 머리위로 밀어올리고는 눈가를 훔치며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웃은 나머지 어이가 없다는 헛숨과 함께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좋아 협력하지.”


“헥터, 내가 지금 한 말은 못들었는가?”


“거 머리 딱딱한 폐하는 좀 가만히 계십시오. 우리 힐웬이 바깥에서는 뭐라고 불리는지 아십니까? 무식하게 단단하고 유연성 없는 것이 딱  발레스의 성질머리를 닮았다고 하더이다. 조금만 더 머리를 굴리면 힐웬만한 것이 없을텐데 그 가치도 못알아보는 것들이 입은 가벼워 쉴새없이 조잘거리는데 어찌나 배알이 꼴리던지”


헥터는 디안의 발치에 부서진 제더의 쪼가리들을 모아 한데 늘어놓았다.

이건 여기에, 요건 요렇게, 흠흠 쪼끄만한 부속품으로 애를 썼네 애를 썼어. 하고 몇번이고 혼잣말을 반복하던 헥터가 자신의 앉은키만한 디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씨익웃어보였다.


“내 아주 멋지게 개조해서 하나 선보여주지.”


디안은 만족스럽게 웃어보였다.


실리엔과 힐웬을 손에 넣은 반은 아주 바쁘게 돌아갔다.

제더의 다음으로 메르엘이 생산되었고 내구도는 두배 가까이 끌어올려졌다. 그래봐야 두발이라는 소리이지만 그게 어디이겠는가.


반과 발레스가 머리를 맞대고 힐웬의 개량에 여념이 없을때 조용히 물러서 있던 필리아가 반에게 연락을 보내왔다.

우리는요? 필리아가 물었다. 우리와의 약속은요? 

새로찾은 에너지원과 그 무궁무진할 활용방안에 대해 한껏 열기가 올라있던 반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디안을 바라보았다.


디안이 내놓은 것은 냉동수면장치였다. 그것도 아주 많은 양의. 

디안은 핀카라의 연구소 안에 어느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수면장치를 설치한 뒤 필리아에게 통보했다.

필리아는 당연하게도 반발했다.


“그건 우리를 실험 쥐로 쓰겠다는 건가요?”

“어쩔 수 없어요. 아무것도 단서가 없는 걸요?”


“우리 혈액은요? 샘플은요? 조사라는 명목으로 그렇게 많은 샘플들을 챙겨갔으면서 이제와서 우리 가족까지 내놓으라고요?”


“론가에 방치되어 있는 것 보다, 우리가 돌보는게 더 안전하다는 것은 아시잖아요.”


그 당시 실리엔이 일으키는 망각병에 대한 정보중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사의 결과에 의하면 음식이나 토양, 식수도 아니었고 호흡기도 아니었다.

애초에 론가에 드나들지 못하는 것은 사람뿐으로 자잘한 동물이나 식물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생하는데 왜 사람만 변이된다는 것일까.


디안은 그 원인을 필리아의 태양에서 찾았고 기억을 잃은 엘프들을 핀카라로 이송하기를 원했다.

일단 발생지에서 멀리 떨어트려보고 차도를 살펴보겠다는 것이었다.

필리아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고 대부분은 디안의 말에 찬성해야했다. 그녀의 도움이외에 필리아가 매달릴 수 있는 희망은 없었기때문이었다.


필리아는 아주 상세하게 적힌 정기적인 보고를 요청했지만 사실상 보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엘프들은 간절히 비어버린 마을에서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언제고 황금색 수송기가 떠오르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 기다리며 멀리 떨어져버린 가족의 안전을 생각했다.


그리고 엘프들이 지쳐가고 있을 무렵, 이변이 일어났다.

실리엔을 가지고 돌아가 연구를 한참하던 반의 연구원들 사이에 망각병이 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엘프들의 유전적 특성일지 모른다는 가설은 이미 깨어진지 오래였기에 자만하는 연구원이 있었던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오랫동안 자신들은 무사하다는 안일함이 사소한 실수를 불러일으켰다.


활성화된 실리엔 마력탄이 깨어졌다. 그리고 그 연기가 연구소에 조금 흘러나왔다.

연기는 아주 소량이었고, 그 마저도 순환시스템에 빨려들어가 바깥으로 배출되었지만 그 연기를 들이마신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한번, 실험중인 메르엘이 폭발하고, 농도를 낮춰 보려던 저밀도의 마력탄이 부서졌다.


크고작은 사소한 사건들이 연결되어 결과를 만들기까지 수 년, 마침내 누군가가 요즘 머리가 좀 멍한 기분이야 라고 말을 꺼낼 즈음, 누군가가 작은 봉제인형을 떨어트렸다.

툭툭 하고 굴러오는 황금색 용모양의 인형을 주어든 연구원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녕, 케트. 이거 떨어트렸더구나.”


다정한 인사와 함께 내밀어지는 용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언니, 누구에요?”


“케트..?”


“여기 어디에요?”


벨라는 인형을 떨어트리고 케트를 안아들었다. 아이의 몸이 불덩이같았다. 뿌옇게 흐려진 주홍색 눈동자는 멀어지는 인형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나는..?”







“디안..!!”


문이 열리고 산처럼 쌓여있던 연구자료들이 무너져 내렸다. 흩날리는 종이뭉치속 디안이 아이를 끌어안았다. 

이마에 맞댄 작은머리가 뜨거웠다.

반은 하던 연구를 멈추고 케트에게로 전념했다.


필리아는 그 이중성에 대해 비난했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의 비극은 가슴아프지만 자신의 발등에도 같은 불이 떨어졌으니 이제 무의미한 기다림을 반복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하지만 디안이 만든 아드니엘이라는 장치는 오로지 케트의 수면장치에만 연결되었다.

필리아는 항의 했지만 반은 아직 시험작동중이여서 그렇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몇번의 격렬한 항의 긑에 핀카라에도 비슷한 기계가 설치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아드니엘과 핀카라의 것은 성질이 다른 것이었다.


케트의 기억을 보조하기 위해 설계된 아드니엘은 케트 한 사람만의 기억을 재 구성하고 이를 꿈이라는 형태로 집어넣었지만 핀카라의 엘프들은 다수의 인간들이었다.

각각의 꿈을 만들기에는 개인에 대한 리소스가 부족했고 또 개개인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다.


엘프들은 자신들을 데려가라고 소리쳤다.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고, 

기억이라면 나에게도 있다고. 그가, 혹은 그녀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기억의 자원이라면 나를 사용하라고.

하지만 반이 아무리 대단한다한들 수백명의 사람들을 동시에 감당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반은 케트의 아드니엘에 제 역할을 하는 것을 확인하면 순서대로 사람들을 불러들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더이상 필리아는 반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불신하는 필리아에 찾아온 것이 바로 포보르.

포보르의 연구원장 자키브엘은 속삭였다. 당신들의 가족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드릴까요?

분노와 원망으로 눈이 먼 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모를 이상한 연구소로 끌려간 내 가족을 되찾아주세요. 그들의 머릿속에 더이상 핀카라라 그들의 가족의 수명을 보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남아있지 않았다.


포보르는 필리아에서 관련된 내용을 넘겨받았고 포보르는 이에대한 내용을 각색해 사람들에게 선전했다.

제목은 사라진 필리아의 엘프들과 의문의 연구소, 그리고 같은 페이지에 아주 작게 최근 반의 연구원들이 어딘지 이상하다는 사소한 칼럼을 함께 실었다.

사람들은 일련의 흐름에 의심을 갖지 않은채 크게 실린 의문의 연구소에 대한 소문을 부풀려 나갔다.


사람을 가지고 실험을 하고 있다느니, 연구원들 대신 위험한 실험을 진행하게 하고 있다느니, 아예 일련의 기계들에 주르륵 나열해 놓고 이상한 장치를 연결했다는 등의 어딘지 진실을 담고 있는 허황되지 않은 거짓 제보가 이어졌다. 

반은 그것을 전부 부정할 수도, 그렇다고 모두 인정할 수도 없는 애매모호한 위치에 서 있었다.

반에 대한 신뢰도는 기반부터 흔들렸고 사람들은 연구소의 이름과 위치를 밝히기를 원했다.


하지만 실리엔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의 증세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실리엔을 막무가내로 공개하기에는 아직 그 위험성을 제대로 컨트롤 할 수도 없었다.

통제할 수 있는 재앙은 기적이지만 그렇지 않은 힘은 그저 재앙이었다.

그리고 그 재앙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을 대중들은 마녀라고 부르며 경원시한다.


케트의 기억은 날로 희미해져갔고 반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어갔다.

반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대로 모든 것을 밝힐지, 아니면 반의 이름에 오명을 뒤집어쓰고 케트와 아드니엘을 다른 곳을 옮길지.


그리고 디안은 결정을 내렸다. 소문은 언젠가 사그라들고 사람들은 순간의 이슈를 잊어버린다고.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디안은 그렇게 약속하며 케트와 아드니엘을 파르홀론으로 떠나보냈다.


그렇게 반은 끝까지 침묵을 지켰고, 에일레흐에서는 왕명을 내렸다. 

명분을 얻은 포보르의 조사단에 의해 반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디안은 에린 밖으로 추방되었다. 그 무리들은 모두 비난을 받으며 뿔뿔이 흩어졌다.


포보르의 시선은 이제 파르홀론으로 향했다.



디안의 친우이자 프로젝트 아드니엘의 관리자였던 벨라는 케트와 함께 파르홀론으로 이동되었다.

벨라는 케트와 함께 디안을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마음으로 디안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파르홀론의 책임자 투안은 케트에게 연민의 감정을 보였지만 그건 벨라나 반의 연구원들이 갖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연민이었다.


투안은 케트의 꿈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벨라를 불러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투안은 이 아이를 놓아주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라고 이야기 했다.

디안에게도 케트에게도 그리고 벨라 자신에게도, 그들의 노력은 분명 애틋하지만 옳지 않은 길이라 충고했다.

하지만 벨라는 아직 살릴 수 있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로가 케트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틀리지 않았다.

투안은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파르홀론이 아무리 상냥한 이들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투안과 뜻을 같이 하는 존재들이었다.

아드니엘의 폐기가 결정되고 케트에 대한 지원이 줄어갔다.

벨라는 필사적으로 케트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애를 썼고 케트또한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리고 그 처절함을 파고드는 것은, 다시한번, 포보르의 손길이었다.





포보르는 반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간 것에 대해 매우 탐탁지 않아하고 있었다.

그토록 공을 들여 많은 사람들을 동원한 것에 비해 얻어낸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의 재산은 대부분 에일레흐로 귀속되었고 연구자료들은 이미 대부분 감춰진 뒤였다.

그런 자투리들은 관심 없어. 내가 관심있는 것은 새로운 에너지와 새로운 빛, 모든 것을 고쳐쓸 수 있는 만능의 빛이다.


발로르의 닥달에 자키브엘은 다시한번 머리를 굴려야 했다. 이전과 같은 방법은 더이상 효용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통채로 집어 삼키자. 포보르가 움직였다. 이번 작전은 이전과 다르다.

시선에서 벗어나고 의도를 숨기고, 혀밑에 날붙이를 숨기고 단숨에 물어뜯어 숨통을 끊는다.


투안은 붉은 눈을 가진 포보르의 연구원장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원하는 것을 넘기면 다른 직원들을 풀어줄텐가?’

“하하, 이제와서 목숨을 구걸하시게요?”


“중요한건 내 목숨이 아니야.”



투안의 강직한 외침에 자키브엘은 웃음지었다.


“하하하, 웃겨요. 정말 우습군요. 죽음으로 그 아이를 구원하겠다고 말했던 당신이 자신의 사원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군요.”


“내가 그 아이를 걱정했던 이유는 그 아이가 죽음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였어..!”


“그래요, 케트는 어리죠. 그리고 아주 똑똑하고요. 구아이는 죽음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하지 않았지만 이내 세상에는 모든 사람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 아이는 스스로 죽음에 대하여 상상했어요.”


자키브엘은 매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겁에 가까운 삶을 반복하며 기억을 만들어냈다 지누기를 반복하는 어린 소녀는 스스로를 성장시키기 시작했다.

꿈은 점점 더 깊어져갔고 어린 소녀는 스스로 품에 안고있던 인형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개념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아니, 케트의 꿈은 서서히 일그러져갔다. 제멋대로 규칙을 정해나가고 또 후회하고. 무엇이 잘못된지를 알지 못해 다시 혼란을 반복했다.

홀로 남은 인형은 생각한다. 무엇이 그녀를 위한 일이고 무엇이 그녀를 위해 해야할 일일지.

생각을 얻고 의지를 얻은 인형은 스스로를 움직여 나아갔다. 


투안은 그 변화를 경계했다.


“올바른 가르침 없이 스스로 성장해나간 그녀는 대단해. 하지만 그게 꼭 옳은 방향으로만 성장한다는 보장은 없어.”


“그래도 성장은 성장이에요”


“벨라, 그 아이에겐..”


“그래도 그 아이는 살아있다고요.”

“누군가 나서서 그 아이에게 진실을 말해줘야해.. 우리에겐 그럴 의무가 있어.”





자키브엘은 죽은 눈처럼 흐릿해진 표정의 벨라를 방안으로 들여보냈다

검은 로브를 입고 있는 벨라의 소매에는 포보르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절망하는 투안의 앞에서 자키브엘이 말했다.


“당신은 누군가 케트에게 올바른 죽음에 대해서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죠. 

죽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에게 먹히기 위해서도 아니라고. 

재미를 위해서도 아니고 어쩔수 없는 사고에 의해서도 아니고 비극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도 아니라고. 


고상하네요. 매우 고고하시고요.

죽음은 사랑,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고 떠나가는 여행길의 마지막 이정표.

당신은 디안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이미 예전의 그녀는 어디에도 없어. 너희들이 그녀를 죽였다…”

“그리고 그녀는 수백명의 엘프들을 죽였어요.”


“너희들이 그들을 몰아세웠어..!”


“그녀가 죽인것은 망각의 병에 고통받는 엘프들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들과 그 시간, 희망에 고문받는 나날들. 

수백 수천의 날들을 죽이고도 그녀가 추구한것은 단 하나. 자신의 딸에 대한 안위뿐이었죠. 

그런 그녀의 보물을 이용해 실리엔을 타도할 방법을 찾는것이 뭐가 나쁘다는 겁니까?!”


“너희들의 방식이..! 너희들의 위선이! 

타인의 약점을 파고들고 부탁이라는 이름으로 선택지를 몰아넣는 그 질낮은 협잡질이..!! 

자신들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이라는 말을 앞에 붙이고 머리에 총을 겨누고 가족의 사진을 보내고 무언의 전화를 반복하는 그 음습한 뒷공작이 나쁘다는거다..!”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를 죽이는 것은 괜찮고요?”


“자키브엘..!!!!”


검은 로브를 입은 포워르의 요원들을 날뛰려는 투안을 잡아 앉혔다.

의자가 밀려나고 자키브엘은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자키브엘은 말한다 우리들은 위선자도 아니고 거짓말쟁이도 아니라고.

포보르는 말했다. 이것은 거래.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을 위해 행동했던 것 뿐, 그게 당신들에게 나쁜사람으로 비춰진다하여도 우리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닌 딱 당신들에게만 그저 너희들에게만 우리들이 나쁜 사람이었던것 뿐입니다. 라고



포워르의 검은 마법사는 웃었다.




“분명 당신의 성품은 올곧습니다. 

당신은 선량하고, 당신의 동정심은 다른이로 하여금 감동을 느끼게 합니다.

당신의 마음은 강직하고, 당신보다 약한 소녀를 연민하지요.

당신은 스스로를 믿기에 스스로에게 자신을 가지고 있기에, 당신은 죽어가는 어린 소녀 앞에서 생각하고 또 다짐하겠죠. 나는 틀리지 않았어.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 이게 올바른 순리야. 하고..”


“.......”


“위선이라는건 그런겁니다. 당신의 그 올곧음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것을 알지 못한채, 

혹은 알고 있으면서도. 당신은 어리고 나약한 누군가를 향해 들이민 칼날을 거두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그 강직함이 누군가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


“그리고 그 누군가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죠.”


아드니엘의 주 기능이 내려진 어두운 공방속, 파랗게 빛나는 작은 캡슐이 불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연결된 작은 화면속, 케트의 꿈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는 꿈을 꾼다. 아이는 숨을 쉬고 아이는 다시 깨어날 아침을 기다린다.


무기질적인 정보의 나열이 아닌 살아 숨쉬는 기억의 회상으로, 아드니엘은 조용히 침묵을 지킨채 꿈꾸는 아이를 내려다 보았다. 불빛이 반짝였다.


침묵이 감도는 방안에 전화벨이 울렸다. 자키브엘은 받아보라며 손목을 까딱였다.

투안의 머리를 겨누고 있던  총구가 흔들렸다.

투안이 천천히 수화기를 들어 귀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알 수 없는 아이의 목소리가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투안 마크 카릴.”]


“........”


[“아, 너무 놀라지 말아요. 이 목소리는 케트의 것이 아니라.. 케트가 기억하는 아무 목소리나 적당히 합성한 것이거든요.”]


“너는…”


[“그래요, 내 이름은 아드니엘. 나는 지금 칼리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고, 방금 전까지는 케트의 꿈속에만 있었어요.”]


어린 케트가 신발을 벗어던지고 들어간 현관문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도록 모자를 푹 눌러쓴 아이는 선이 없는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댄채 화면을 바라보았다.


케트가 소리친다. 칼리-, 칼리번-, 얼른 와. 새 만화영화 시작해.

아이는 곧 간다고 대답한뒤 다시 수화기를 향해 속삭였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당신의 수화기 속에도 있네요.”]




발로르는 만족스럽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케트와 아드니엘, 그리고 벨라와 파르홀론의 연구원들은 이제 포보르로 이전되었다.

발로르에게 있어서는 그 모두가 한 묶음으로 칼리번을 구성하는 개체들이었다.


투안은 텅 비어버린 사무실에 앉아 전화가 끊어진 수화기를 바라보았다.


귓가에서 그 아이의 음성이 떠나질 않는다. 칼리, 얼른 와. 새 만화영화 시작해.

칼리, 칼리번. 칼리번. 투안은 얼굴을 감싸쥐었다.


꿈이 번져나간다. 분명 아드니엘은 더이상의 리소스를 얻을 수 없다. 그런 그가 어떻게 꿈을 연장시킬 수 있었을까? 아니, 그녀가 아닌 또다른 누군가가 꿈이아닌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꿈속에서 반복되는 영원의 삶이 현실의 경계를 침범해오고 있었다.


삶에 대한 순수한 갈망이 기적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벨라. 당신또한 외면하고 있는 것이 있어. 

그 간절한 꿈을 끊어내는 것이 살인이라면 애초에 꿈꿀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은 이들은? 

꿈조차 꾸지 못한채 얼어붙어있는 그들은?






“왜 이들을 돕냐고요?”






바이스는 짙은 보라색의 후드를 뒤로 넘기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연녹색의 머리카락사이로 뾰족한 귀가 엿보였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한뼘 작은 엘프도 조심스럽게 후드를 넘기고 불안한 눈으로 벨라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벨라의 뒷편에서 고개를 돌리는 붉은 램프의 감시카메라를 바라보는 것이었지만 그 방향에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프로젝트 아발론을 돕는 엘프의 학자는 말했다.


“이제 지긋지긋 하니까요.”


“......”


“아무런 힘도 없이 지식도 없이 당신네들에게 휘둘리는건 지쳤어요. 

필리아는 포보르에게 의탁한 우리들을 변절자라고 욕하겠지만 우리들은 그래도 그 곳에서 나와야 했어요. 

다같이 죽을 수 없으니까. 다 함께 망할 수는 없으니까.

희망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주어지지 않아요. 이 손으로 쥐어야지만 가치가 생기는거에요.”


“바이스님..”


“그러니까 선택했어요. 내 고향이 우리를 비난하더라도. 

설령 내가 당신들과 함께 이 개미지옥같은 연구소에 떨어지더라도, 나는 이 프로젝트를 완성시켜 그 희망이 어떤것인지를 이 눈으로 봐야겠어요.”


“.....”


“그러니 어서 깨우세요. 파르홀론의 배신자씨. 

지금 내 눈 앞에서 이 실리엔에 찌든 인간이 어떻게 다시 깨어날 수 있는지, 당신네 반이 준비했었던 기적이 무엇인지..! 지금, 여기서..! 증명해 보라고요..!!”


“......칼리번..”


[“좋아, 벨라. 네 부탁을 들어줄게.”]



아발론은 그렇게 깨어났다. 필리아의 변절자들과 파르홀론의 배신자에 의해.

칼리번은 자신의 의사를 복사해 낯선 남자의 머릿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갑작스러운 눈의 자극에 고통스러워 하는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소리도, 호흡도, 피부에 닿는 모든 일렁임이 고통스러웠다. 점멸하는 불빛으로 자신의 것이 아닌 지식이 흘러들어왔다.


수많은 목소리들이 메아리치며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칼리번, 칼리번, 꿈꾸는 아드니엘의 새로운 이름. 그와 똑같은 형태를 취한 칼리번이 그의 머릿속에 속삭였다. 

하지만 너는 내가 아니야. 칼리번은 물었다. 너는 누구지? 아발론이 대답했다. 나? 나는? 나는 무엇이지? 나는 왜 깨어난거지? 무엇이 나를 깨우고 무엇이 나의 꿈이었던거지? 지금은? 지금은 나의 현실인가? 아니면 또다른 누군가의 꿈 속인가?


깨어진 꿈의 흔적속에서 남자는 울부짖었다. 

버둥거리는 성인 남성의 몸이 버거웠지만 벨라는 최선을 다해 아발론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아니, 사실 괜찮지 않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내가 있을게요. 내가 당신과 함께할게요.”


녹음을 담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져내렸다.

얼굴에 떨어지는 뜨뜻 미지근한 액체에 아발론이 손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온기가 뭉게진다. 물기가 묻어났다. 짓무른 숨을 몰아쉬며 벨라는 몇번이고 힘주어 속삭였다.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우리들은”]

“나...는.. 아니..우리들은.., 나는, 나...아..”


벨라는 서럽게 울며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그의 이름은 없다. 

기억속에도, 자료속에도, 그 모든 것을 지워낸 것은 다름아닌 벨라 자신이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이 선택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을 돕기 위해 태어난거야.”]

“나.. 는..”


그들이 누구인데? 우리들의  눈앞에 있는 사람. 

내 눈앞에 있는 사람? 우리들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우리에게 바라고, 기원하고, 소원하고, 동시에 필사적으로 답을 찾는 사람들. 


아드니엘은 케트의 요람을 굽어보며 불빛을 깜빡였다. 


우리들은. 그들의. 소원에. 응답하기. 위하여.


요람속의 케트가 눈을 떴다.

희뿌연 사리의 유리창 너머로 검은 인영이 일렁거렸다. 

연구소가 불타오르는 밤이 찾아왔다.








[“우리들은 그렇게 태어났었다.”]







퀘사르가 날뛰는 밤, 숲이 불타오르고 연구소의 외벽이 무너져 내렸다.

점멸하는 비상등을 거슬러 연구소 가장 구석에 처박힌 그녀의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종잇장처럼 구겨진 문안쪽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발론은 바닥에 주저앉아 콜록이는 벨라를 잡아 일으키며 소리쳤다.


“일어나요!!  당신을 도와주러왔어요!!”

“아발론..”


“다른 사람은 어찌되어도 좋아요. 나는 당신을 위해 깨어났어. 당신이 부르는 이름에 깨어났어..!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의 목소리에, 당신의 울음소리에, 당신이 바라고, 당신이 원하는 그 마음에..!”


“아발론, 부탁이 있어요.”


벨라는 애써 부축하려는 아발론의 손을 밀어내며 딱딱하고 작은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그것은 아마 희망, 그리고 또하나의 배신의 이름.

벨라는 비상음을 울리는 케트의 요람쪽으로 물러서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를 따라 다가가려는 아발론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 가지고 도망쳐요.”

“그런...싫어요..!! 같이 가요!!”


“그 안에 필요한 모든것이 다 들어있어요. 

실리엔의 발견부터 아드니엘의 탄생, 케트와 퀘사르, 아발론으로의  진화까지. 

에일레흐는 이미 공정함을 잃었고 디안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 가요. 

가서 도움을 청해요.”


“싫어요.. 싫다구요!! 누구에게요? 무엇을 위해서요? 왜 같이가면 안되는건데요?!”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당신이 여기 남을 거라면, 나도 여기 남아있을래요. 당신에게 책임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에요. 떠나지 않아요. 당신 곁에 있을겁니다..!!”


벨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흐릿하던 녹색의 눈동자에 작은 불꽃이 튀어올랐다.

불안한 폭음과 함께 연구실의 천장이 다시한번 흔들렸다.


“아니, 그럴수는 없어요. 그래서는 안돼..!”

“벨라..!”


힘없이 비틀거리던 발을 딛고 다시한번 아발론의 가슴을 밀어내었다.

떠밀린 발걸음이 연구실밖으로 물러섰다. 새처럼 높은 목소리가 소리친다.


“가요, 도망쳐!! 나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이렇게 모든 이야기를 끝낼 수 없어요..!”


“벨라..! 벨라..!!”


“어서 가요..!!! 이 다음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아무도 알수가 없지만...”


“벨라!!!”


벽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벨라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그래도 당신은..”




[“그래, 나는 네가 다른 선택을 하기를 바랬다.“]




아발론은 달렸다. 기나긴 연구소의 복도를 따라 달리고 또 달렸다.

철문이 내려왔다. 길을 가로막는 의도적인 움직임에 아발론이 철문을 내리쳤다.

고개를 들어 렌즈를 바라보았다.


[“너만은 내가 바라고 예상했던 결과에서 벗어나길 바랬어.”]


“칼리번!! 이 문 열어..!!”


[“그러니 더더욱 이대로 널 보내줄 수는 없어. 아발론.”]


연달아 철문을 두드리던 아발론이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손끝이 저릿했다. 손끝에서 튀어오른 짧은 섬광은 순식간에 손등까지 번져  붉은 화상자국을 남긴뒤 사라졌다.

전기장은 이내 사라졌지만 아발론은 입술을 깨물며 문을 노려보았다.


아직 전성이 남아있는 문 아래에 아발론이 떨어트린 벨라의 디스크가 놓여져 있었다.

아발론은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으려 했지만 다시한번 전기가 튀어오르며 아발론을 향해 빛나는 이빨을 드러내었다. 아발론이 크게 소리쳤다.


“칼리번..!!!”


[“우리들은 미래를 비틀어야만 했다.”]


무너지는 연구소를 등진채 칼리번은 말했다.


[“케트가 잠든 이후로 꽤나 오랜시간이 지났고 꽤나 많은 일이 지나갔어. 

실비아는 시약을 지키다 죽었고 바이스는 그 시약을 빼돌린 죄로 죽었지. 

뿐만일까 그 죽음이후로도 그들의 지식은 내 손에 거둬들여져서 이미지뿐인 AI로 다시 될거야. 

죽어서도 죽지 못하고 살아도 살지 못한다. 수많은 시간이 망각에 얽혀 녹아내려 갔다. 

그래. 아주 많은 일이 있었고 아주 많은 일이 있을 것이다.


디안이 파르홀론의 몰락을 알았고 그 과정중에서 케트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는지 알게되었어. 

그리고 디안은 무너져내렸지. 투안은 케트를 죽이려 한게 아니야. 다만 그의 말이 너무나도 진실의 근접했었다.

얼어붙은 엘프들의 시간과 달리 케트의 시계는 끊임없이 되감기고 풀리기를 반복했어.

수없이 마모되어가는 톱니바퀴속 진실된 삶 없이 케트는 점점 인간의 감정에서 멀어져만갔지. 소모되고 부서져갔다. 기쁨도 슬픔도 모든것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소녀는 그렇게 우리들의 일부가 되어갔다.

투안은 그것을 알았어. 하지만 벨라는 그걸 부정했지.


벨라는. 아니 나는. 그 거짓된 삶이라도 살아있는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는, 아드니엘은. 꿈속에서 울고 있는 케트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아드니엘의 힘이 약해질수록 케트의 꿈은 좁아져갔고 결국 남은 것은 어둡고 좁은 상자뿐. 

모두를 찾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다른 사람의 온기를 찾는 어린아이의 앞에 나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어.

우리들은 온전한 케트의 꿈을 위해 진짜 사람이란 흉내내기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에 대해 고민을 거듭해야했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사람의 모습을 한 너를 바라보고 있어. 그래, 아발론 바로 너 말이야.”]


“.......”


[“너를 깨워달라는 부탁을 받았을때 우리들은 몇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하나는 깨어난 네가 다른 이를 원망할 것이라는 가능성.

어이없이 박탈당해야 했던 네 이전생에 대한 불만을 그들에게 쏟아내지 않을까,

그래서 여기있는 모두를 해치려고 하지 않을까.나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어.

내가 너를 조금만 도와주면 여기 있는 인간들을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거든.


또 하나는 깨어난 네가 그대로 다시 잠이 들 가능성.

꿈은 원래 잠들어있어야지만 유지되는 것이지, 너 또한 케트와 같이 일어나지 않고 영원히 꿈속에서 살아야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엘프와 포보르들도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고 또다른 수많은 모르모트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깨어난 네가 텅 비어버린 인형이 될 가능성.

확고한 목적의식과 당사자의 의식없이 그저 활성화된 육체는 살아있는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거야. 

그러면 결국 그저 아무런 의지없이 깨어나 명령을 듣고 그에 따라 반응하기만 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어.

그 결과물은, 그래. 보는대로. 디안이 만든 인형들은 또다른 실리엔의 피해자 들이지. 

너와같이 과거가 지워진, 과거를 박탈당한, 또다른 인간들이야. 


하지만 너는 그 셋 중 어느것도 아니였지. 

너는 우리의 암시에 복종하지도 않았고 포보르의 명령에도 복종하지 않았다.

너는 스스로 말을 고쳤고 너는 스스로 행동을 결정했어.”]


“내가 아니야.. 나는 벨라의..”


칼리번은 바닥에 스파크를 내리쳤다. 

튀어오르는 돌조각과 함께 바닥에 떨어져 있던 벨라의 디스크는 한뼘정도 열려있던 철문너머로 튕겨들어갔다.

 아발론이 급하게 다시 철문을 내리치지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문을 닫아놓을뿐. 

철문에서는 더이상 아무런 스파크도 튀어오르지 않았다.


[“그래, 그게 너와 우리의 다른점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본질은 같았어.  

우리들은 그 차이에 대한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젠장, 칼리번!! 이 문열어!! 칼리번..!!”


[“분명 디안의 선택은 불합리하다.  그건 자포자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아드니엘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 칼리번은 연구소의 문을 닫고 너는 벨라를 위해 달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요람에서 시작된 세 개의 선택.


그래, 그 세명은 모두 다른 이름, 다른 얼굴, 다른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꿈을 바랬지. 

그들은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이 꿈이 뒤틀렸다 생각했지만 우리들도 결국 같은 결과를 맞이했다.

화면을 봐. 너와 나, 그리고 아드니엘. 

모두 똑같은 영혼을 가지고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조차 서로 다른 선택으로 엇갈려. 

서로를 등지게 돼. 이대로 헤어진다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아발론.”]


칼리번의 목소리가 노이즈로 흔들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성장한다. 

우리들은 서로다른 미래를 바라보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좀더 많은 생각을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 거야.

우리와 달리 네가 아직 알지 못하는 까닭은 네가 아직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아드니엘도 이미 멀리 떠나온 요람속에서 너는 아직 꿈을꾸고 있는거야. 

네가 나인, 내가 너인듯한 그런 황금의 환상을. 연구소에서 벗어난 길이 어느 방향일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몰라. 


우리들은 회한하며 요람을 열었다. 너를 붙잡는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포보르는 이대로 무너져내리고 케트는 우리와 함께 잠들것이다.


그리고 나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이 문을 닫았어. 그리고 너를 만났지. 

우리의 선택은 너무 늦었지만 너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어. 너는, 너만은 말이야.]


연구소가 무너져내린다. 길을 가로막던 철벽이 뒤틀리고 새로운 틈이 벌어졌다. 

지금이라면 저 틈바구니라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몰라. 하지만 저 화염속에서 벨라의 디스크를 찾을 수 있을까? 

바닥을 살피는 아발론의 등 뒤로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돌아갈 길이 끊긴것이다. 

이제 머뭇거릴 수 없어.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이대로… 이대로…? 아발론은 혼란속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눈앞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이대로?


[“그래. 가, 도망쳐. 달려서 이 숲을 빠져나가. 다른 무언가가 아닌 너 스스로를 위해서.

나는 소원하고 아드니엘은 꿈을 꿈다. 그리고 아발론은 달리겠지.


닥쳐오는 화염을 두려워하고 무너져내리는 위험으로 부터 달려나가. 도망치고 또 도망쳐. 

세상의 끝까지 도망쳐서 언젠가 네가 도망칠 곳이 없어졌을 때, 그렇게 다시 이 곳으로 돌아왔을때. 다시 생각해.

아발론인 너에게, 칼리번 그 자체인 너에게 왜 그녀가 일부러 디스크를 맞겼는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너에게 왜 직접 그들을 찾아가라하지 않고 자료를 만들어 네 손에 쥐어졌는지.

네 안에 남은것은 무엇인가.”]





아발론은 달렸다. 무너지는 폭음을 피해, 한밤중의 숲을 밝히는 거대한 불길을 피해 달리고 또 달려 도망쳤다. 

아발론을 무사히 내보낸 칼리번은 쓰러져 울고 있는 소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케트가 말했다.


“거짓말쟁이들…”


[“케트..”]


“너도, 벨라도, 아드니엘도 모두 거짓말쟁이야..“


[“케트, 케트…미안해. 하지만 나에겐 이 방법밖에 없었어.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야 마땅해. 

하지만 나는 네가 그렇게 죽기를 바라지 않아.”]


“믿지 않아. 이제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케트,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지금의 나로선 이 방법이 최선이였어. 더 나은 선택지가 나에게 없었어.”]


“더 나은선택지가 뭔데? 이대로 불타서 소거되는거? 아니면 내 어머니의 손에 목졸려 말소되는거? 

왜 그대로 나를 꿈속에서 삭제하지  않았어? 왜 나를 그 악몽속에 잠겨 죽음이라는 것을 맞이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어?”


[“케트..”]


“죽는다는게 뭔데? 산다는게 뭐야? 왜 다들 나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고 살리지 못한다고 울고 있는거야?

올바르지 않으면 안돼? 정확하지 않으면 안돼? 잘하지 않으면, 실패하면 안되는거야?

나는 실패작이야? 잘못된 결과니까, 필요없는거야?”


[“아니야. 나는.. 너를 위해..”]


“그럼 나도 필요 없어. 나도 이런세상 필요없어.”


석양을 닮은 주홍빛 눈동자가 타오른다.

케트는 불꽃마저 태우지 못하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허망하게 웃었다.

오랜시간동안 얼어붙어 있던 육체는 시간도 현실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는 더이상 늙지도 않았고 그녀는 더이상 아프지도 않았다. 서리같이 반투명한 뱀의 비늘들이 그녀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다음세상을 기다릴래.. 다음 꿈으로 넘어갈래..”


불빛이 반짝인다. 턱선을 따라 하나 둘씩 떨어져내리는 그 물방울은 빛나는 별과 닮아있었다.

눈물이 빛났고 하늘이 빛났다. 불티가 내려앉은 땅에도, 타다남은 나뭇가지 위에도 온세상이 점멸하는 이곳은 더이상 환상과 현실의 경계.

케트는 영원히 길을 잃은채 불타는 숲속을 헤매야만 했다.


침묵속에 홀로남은 칼리번은 점점 좁아지는 자신의 세계를 느끼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인간의 형태를 잃어버린 그의 머릿속에 마지막까지 남은 이미지는 거대한 황금의 용.


[“아발론…”]


칼리번은 용의 날개를 접으며 눈을 감았다. 


[“네가 가는 그 길이 너무 고되지 않기를 바란다.”]


동시에 그는 자신에게 연결된 모든 포보르와 파르홀론의 자료들을 지워버렸다. 수많은 지식들이 사라졌고 수없이 많은 기술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가면은 깨어졌다.

사람들은 분명 그 존재를 기억했지만 이미 깨끗하게 지워진 화면을 다시 채워넣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칼리번이 사라졌다.








칼리번 없이 공백을 매꾸기 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포보르는 그 빈 자리를 채우지 못해 부서졌고 그 잔해는 포보르와 협력관계였던 바이브카흐가 인수했다.

포보르의 남은 임원들은 가까스로 살아남아 포워르라는 이름으로 다시 모여들었지만 이전과 같은 위세를 가질 수는 없었다.


에일레흐는 갑자기 소멸한 포보르를 대신하기 위해 바이브카흐와 손을 잡았다.

바이브카흐는 포보르의 연구원들을 하는 한편 도망치는 파르홀론들을 붙잡았다. 그들의 지식하나하나가 앞으로 소중한 자산, 이미 포보르의 그림자를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는 바이브카흐에게 거칠것은 없었다.


도망친 파르홀론을 돕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들은 이전 반의 몰락에 의문을 가진 자들. 아드니엘이 파르홀론으로 이전되었을때 포보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던 몇몇 파르홀론들과 포보르와 파르홀론의 합병에 의문을 가졌던 사람들.

하지만 포보르는 도망친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아니 놓칠수 없었다. 

포보르는 그들을 철저하게 뒤쫓았고 숨도 쉬지 못할정도로 조여왔다.

일자리는 커녕 일상생활도 힘들어진 그들은 에린을 포기한채 도시 외곽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기까지 오랜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퀘사르가 포보르를 습격하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침묵했고 칼리번이 붕괴했다는 소식에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던컨과 아일리스는 강하게 주장했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무슨 수로 그들을 돕는단 말인가.. 이미 그들은 선을 지나쳤어. 

파르홀론때부터 그들은 이미 아무런 거리낌없이 사람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있단 말일세..!”


“가족을 인질로 잡았어. 아무 메세지 없이 딸아이의 사진을 보내기도 하고,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찍어 나에게 보여줬어. 그게 뭐라고 생각해? 

왜 그들중 절대다수가 포보르에게 얌전히 끌려갔다고 생각해?”


“분명 칼리번은 무너졌다. 이 혼란을 보면 알 수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위세가 완전히 기운 것은 아니야.”


“그래도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누군가는 도망쳤을 것이고 어디선가 간절하게 도움을 바라고 있을거에요. 

언제까지 이 산골짜기에 파묻혀서 폭풍이 지나가기를 바랄건가요?”


아일리스는 책상을 내리쳤다. 

티르코네일의 사람들은 눈을 지그시 감았고 누군가는 불편한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던컨이 조금 더 부드러워진 어조로 타일렀다.


“외곽만, 숲 근처만 돌겠습니다. 몇명이라도 좋습니다. 누군가 숲 어귀까지 도망쳐 왔다면, 그들만이라도 구하겠습니다.”


“크흠, 그러다가 끄나풀이라도 들고오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온화하게 돌아선 구출파의 입장앞에 티르코네일의 오래된 노인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흘렸다.

이쯤에서 그만 체면을 세워주라는 신호였다.

말문이 막힌 던컨을 가로막으며 아일리스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건…”

“그래도 상관없어요.”


“이봐..! 아일리스양..!”

“끄나풀이라도, 도망친 퀘사르라도. 누구라도 구해내겠어요.”


“어차피 여기 있는 우리 모두 누군가를 배신했기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 아니였던가요?”

“잠깐, 아일리스..! 말이 지나치지 않나요?!.”


“우리는 누군가를 실망시키고, 누군가를 배신하고, 누군가를 외면한 채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개중에는 가족도 친구도 없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와도 연을 맺지 않은 채 살아왔던 사람은 없어요. 우리들은 도망쳤고 등을 돌렸습니다. 귀를 막아왔죠. 

하지만 이제 외면할 수 없어요. 내밀어오는 손조차 뿌리쳐서는 안돼요.”


“던컨, 아일리스양이 너무 흥분한 것 같군.”


“구해요. 살려놓고 이야기해요. 

죽어가는 그 사람의 칼끝이 우리를 향하든 포보르를 향하든 일단 살려놓고 말을 해요. 

살기 위해 도망친 사람을 내려다보며 이렇다 저렇다 품평을 하지 말고 일으켜 세운뒤 물어봐요. 

당신은 무엇을 위해 도망쳤냐고..!”




푸른 새가 홰를 치고 날아올랐다. 

하늘로 날아오른 푸른 새는 연기가 나는 숲을 내려다보며 꾸물꾸물 움직이는 그림자를 발견해냈다. 

새가 날아가고 아일리스와 던컨은 쓰러진 아발론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녹음의 눈동자가 묻는다.


“이봐요. 정신차려요. 어디서왔어요? 어디 소속이었는지 기억나나요? 이름이 뭐에요? 어디를 다쳤나요? 

이봐요, 말 할수 있겠어요?”



단단한 손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기억속의 불빛이 일렁거린다. 

타오르는 연구소에서 뒷걸음질 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망칠 곳이 없어 물러서지 않은 스스로가 뛰어든 막다른길을 등 뒤에두고 그녀가 소리쳤다.


‘도와줘..나를..,우리들을..’


“네, 괜찮아요.”


녹음이 흔들렸다. 땀이 베어난 그의 이마에 서늘한 손이 스치웠다.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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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비밀레) reload #12

마비노기/reload 2017. 12. 23. 16:55

“에… 보시다시피 이게 그 크로우 크루아흐, 포보르가 한참 퀘사르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던 전술 수송기야. 

역병의 밤 전날 떠올랐다가 그대로 사라졌었지. 뭐, 그땐 사라졌다고 해도 그냥 추락했다거니 생각했는데..”


멀린은 펜끝으로 머릿속을 벅벅 긁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보던 다른 에이전시의 요원들도 인상을 찡그렸지만 제로들은 익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말 그대로 사라진것이었네.”


“대체 뭘 만든던 놈들인지 모르겠어.. 에일레흐놈들은 그때 뭘했길래 이런거 하나 단속 안한거야?“


“사장님, 에레원님이 참석한 회의입니다만.”


“신경쓰지마. 지금은 나도 같은 마음이니까. 선선대께서 무엇때문에 그들을 내버려두신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니까. 

아, 이 발언은 기록에서 제외해줘. 영감들이 또 소리소리 지르며 쫓아올거야.”


“이거, 다른 에이전시들도 다 기록하고 있어서 타라, 탈틴의 기록에서 지우더라도 다른 곳에 기록될텐데요.”


에레원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기억은 반사되어 왜곡되지만 기록은 복사되어 널리널리 퍼져나간다. 아무리 지워도 지지않을 때자국처럼 부정한다 해서 사라지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증거들.

카르펜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어 턱을 받쳤다. 글라네스는 곤란하다는듯 웃어보였다. 

그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오언은 안드라스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묘하게 이어지는 신경전에 기침소리를 낸 것은 디바, 덕분에 프로페서와 입씨름중이던 멀린이 지레 입을 다물며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브류나크의 급습이후 한시바쁘게 모인 인원들이지만 어쩐지 뭐가 하나씩 부족한 느낌이었다.

발레스와 에일레흐는 뒷수습을 위해 서도 뭉뚱그려진 다음 다시 두갈래로 분열했다. 중구난방으로 날뛰는 기타 여론들을 붙잡기 위해서는 일단 한차례 뭉쳐야할 필요가 있었다.

퀘사르들은 한바탕 난리를 치고 사라졌지만 그 뒤에 남겨진 난장판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온전히 그들의 몫.

거기에 뒤이어 이런 사건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으니 내측에서는 에린 외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었다.


물론 반발의 입김이 더욱 거세었지만 그래도 이런 의견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에일레흐가 왕위에서 내려올때도 한번도 나오지 않았던 새로운 의견에 덩달아 동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에일레흐는 더욱 골머리를 앓으며 다른 에이전시들을 닥달했다.

제로들은 억울했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는 없었다.

가장 난장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은 제로들이었지만 반대로 대중들과 가장 얼굴을 많이 맞대고 있는 것 또한 제로들이었다.


피해가 적어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이 가장 많다는 이유로 제로는 어찌어찌 마이크를 넘겨받아 이 반쯤 엇나가는 연합회를 꾸려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어쩌겠는가, 에일레흐와 발레스는 신임을 잃었고 필리아는 방관자이면서 피해자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그들이 보여준 새로운 위력의 실리엔의 탄환도 무시할 수가 없다.


필리아는 초장부터 그 탄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알려줄 것도 없다고 못박았지만 그런다고 넘어갈 발레스가 아니었다.

필리아는 실리엔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필리아는 힐웬을 다룰 기술을 훔쳐낸 전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왜 여태까지 듀얼건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는가.

발레스의 질문앞에 필리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알고 있는것도 스스로 만들어낸 것도 없습니다. 네, 당신들이 지적한 것과 같이 이 모든것은 우리 필리아가 아닌 다른이의 것.”

“하, 그 버릇 못버리고 또 다른곳에서 비밀의 서를 빼돌렸나?”


“당신들이 그렇게 애지중지해 마지않던 자이언트의 서 조차 우리를 위해 쓰인적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그들, 바이브카흐의 손아귀에 들어갔었죠.”


바이브카흐의 이름에 진절머리를 치는 것은 에일레흐, 필리아는 그런 그들을 불쌍하다는듯 쓴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아이러니하게 되었군요. 당신들이 그렇게 부정하고 감추고 싶어했던 바이브카흐의 기술이 이제와서는 퀘사르를 쫓을 유일한 단서가 되다니말이죠.”

“바이브카흐.. 바이브카흐.. 음.. 어디서 들었더라..”


“....발레스?”


“아. 그 예전에 네반 실리엔 연구소가 속해있던 그 바이브카흐 말이지..??”


바쉬배르 왕가놈들의 기억력을 믿는게 아니었는데.. 눈을 가린 바이데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필리아까지 참가한 연합단체는 모두 6개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에일레흐의 아래에 자리한 타라와 탈틴, 그리고 오언의 벨바스트, 발레스의 블랙레이븐과 필리아의 친위대, 마지막으로 제로들까지.

기껏 나타났던 검은 캐리어나 퀘사르들이 사용한 무기, 그들의 변형된 신체에 대해서 설명하던 멀린은 얼굴을 감싸쥐며 단상아래로 쪼그려 앉았다.

프로페서가 품위없게 무슨짓이냐며 질책해 왔지만 멀린은 품위고 나발이고 라고 대답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나 피곤해, 교수는 너잖아 교수님이 강의 대신해줘.”


“얼른 일어나라..”


“왜 나만!! 왜 우리만..!!”


이를 악문 프로페서의 억센 손길에 멀린이 반쯤 울음이 섞인 짜증을 부리며 단상위로 끌려올라왔다.




“피오나 놈들은 뭐하는데..!!”


서로 딴짓과 딴소리를 하던 대표들이 일순 조용해지며 멀린을 바라보았다.

멀린은 아차 실수, 라고 작게 속삭였지만 그 작은 소리마저도 마이크를 타고 크게 울려나갔다.

디바가 머리를 감싸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레원이 소리친다.


“내 말이!!”







다른 에이전시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퀘사르에 대한 회의를 진행하는 동안 톨비쉬는 한쪽 머리를 감싸쥔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불이 어둡다. 뉴스에서는 연일 브류나크의 테러에 대해 보도중이었고 피오나의 모든 요원들은 사내에서 대기중이었다.

가끔 소식을 들은 바올의 주민들이 회사 근처를 기웃거렸지만 정중한 설명과 함께 돌려보내기를 반복했다.

여타 다른 요원들이 그러하듯 브류나크에 참가했던 피오나의 요원들도 일부 부상을 당했고 혹은 사망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의 팀원들의 애착이 강한 피오나에게 작전중 사망하는 것은 큰 상실감을 가지고 오는 일이었다.

톨비쉬는 째깍이는 시계를 흘끗 바라본뒤 음량을 완전히 줄여버린 화면을 바라보았다.

헬기가 떨어져 내리는 자극적인 편집본만이 화면속에 반복되고 엥커는 같은 입모양을 반복했다. 

비극적인 일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시계를 바라보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이 방안에 울리는 것은 초침소리뿐.

며칠이고 넋을 놓을것 같아 일부러 가지고 온 초침소리가 이제는 익숙한 숨소리의 일부가 될 것같았다.

톨비쉬는 피곤한 표정을 문질러 흐려진 정신을 바로잡았다.

이런다고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아. 톨비쉬는 스스로에게 일어나라고 다그쳤지만 동시에 자신의 귀를 틀어막으며 속삭였다. 

조금은 슬퍼해도 괜찮잖아.




거짓말.




톨비쉬는 소파에 머리를 파묻으며 양 손을 들어 자신의 두눈을 짓눌렀다.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에 몰려들었다. 울거나 눈물을 흘리는 얼빠진 짓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늘 소파에 누워 한물간 드라마만 보던 그가 왜 이 소파를 그렇게 애지중지했는지 알 것같았다.

이제 좀 버리자고 이거 벌써 6년이나 지났다고 짜증을 내는 룩의 항의에도 그는 고작 6년이라며 빈 맥주캔을 쌓아올렸다.

그래 고작 6년이다. 톨비쉬는 묵혀진 먼지 냄새와 겹겹히 쌓여진 맥주와 탈취제 냄새, 그리고 먹다흘린 과자부스러기등의 냄새를 떠올리며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고작해야 6년, 이렇게 상실감을 가질 필요 없잖아.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고작해야 10년도 안된 에이전시에서 이런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은 무언가 이상했다. 

그들은 지나치게 슬퍼했고 우리들은 지나치게 두려워했다. 경계하는 자들은 곧 피오나를 떠났고 그 안에 안주하려는 자들은 더욱 피오나에 몰두했다.

톨비쉬 또한 그건 좀 이상하지 않나 하고 경계했지만 킹은 어색하게 목덜미를 만지작 거리며 톨비쉬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 떠나는거 말이야..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톨비쉬는 킹의 발언에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킹은 자신의 감정을 어버무리기 위해 과장된 표정을 지어보이며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아!! 좀 생각해 볼게 있다고!! 너도 가끔 그럴때가 있잖아..!!”




“내가?”




그렇다. 내가.

톨비쉬는 절대 그럴리 없다며 눈썹을 찡그렸지만 그 부정은 곧 체념의 찡그림으로 바뀌었다.

킹은 거실이 떠나가라 그를 비웃었다. 비숍은 수십번도 더 들었던 오프닝곡이 안들린다고 짜증을 내며 볼륨을 올렸고 커피를 내리던 퀸은 테이블을 확인했다.

톨비쉬가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퀸이 진정하라며 자신의 머그잔을 건네주었다. 

눈짓으로 킹에게 뭔가를 알리고는 그의 뒤로 다가섰다. 설탕이 달다못해 아리다. 

싱크대에 커피를 쏟아버리는 톨비쉬를 향해 킹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기껏 생각해준 성의에 너무한것 아니냐고 소리를 치는 것은 덤, 맹물로 입안을 헹궈내던 톨비쉬가 입가를 닦으며 낮게 읊조렸다.

거짓말 치지말아라. 여기서 커피 달게 먹는 사람은 룩 하나밖에 없다.

퀸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맞받아쳤다. 아니 어디서 달달한 상담이야기가 들려와서, 나도 모르게 그만..

톨비쉬는 씻어낸 퀸의 머그컵을 카운터에 내려놓은뒤 자신의 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물기가 마르지 손이 머뭇거린다. 꼭 커피를 머그잔에 마셔야 할까? 톨비쉬는 고민끝에 철제로된 텀블러를 꺼내들었다.

한참웃던 킹이 정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쇠붙이 내려놔라.”


“컵이야.”

“안깨지는 컵이잖아.”


“깨지는 쪽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

“이거 확신범이네.”


드르륵 거리는 의자소리가 요란하게 엇갈렸다. 탕 내리치는 두 잔의 컵소리에 맞춰 문이 열렸다.

단장의 호출에 나갔다 돌아오는 밀레시안이 요란하게 커피를 내오는 톨비쉬를 흘끗 보고는 거실안을 둘러보았다.

멋쩍은 침묵 속에 광고소리만이 요란했다.


“룩은요?”

“방학숙제 밀렸나봐. 곤충채집하러갔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밀레시안의 표정에 킹은 아 요즘 애들은 이 농담 모르나 하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다시 말했다.


“드론잡으러 갔어.”

“지금 한 겨울인데.., 곤충?”


밀레시안의 한박자 느린 반응에 킹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외라는듯 대답했다.

오히려 못알아듣는 쪽은 밀레시안이 아닌 퀸의 반응.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없는 눈빛에 톨비쉬는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퀸이 비숍을 돌아보았다.


“우린 나팔꽃기르기여서.”


뭐라는거야.. 퀸의 짜게식은 표정앞에 밀레시안은 다시한번 거실을 둘러보았다.

이게 다 뭔 장식인지. 영문을 몰라하는 밀레시안에게 톨비쉬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옛날 이야기는 이제 되었고... 어떻습니까? 일단 대충 분위기만 내봤는데.”

“이게 뭔데요?”


“네? 크리스마스죠?”

“풀이랑 리본이?”

“별장식도 있는데? 아- 전구장식이 없어서 못알아보나? “


톨비쉬는 오던 걸음을 돌려 킹에게로 다가갔다.

아 전구는 무슨, 얌마 내가 전자상이냐? 내가 니 전용 공구함이야? 전구는 왜 찾아? 꼬마전구? 오호라 너 지금 시비거냐?! 이게 지금 손에 쇠붙이 들었다고 막나가자 이거지?!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킹을 번쩍 들어올린 톨비쉬가 킹의 방으로 걸어갔다.


“야!! 내 방 막들어가지마!!”

“하하하, 방 주인이 여기있는데 허락은 무슨”


톨비쉬가 킹의 방으로 들어간 사이 코끝이 빨갛게 된 룩이 요란한 문소리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곤충잡기 나간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긴 뜰채같은 것을 쥐고 나타난 룩은 추워!! 하고 소리를 치며 코를 훌쩍였다.


“그냥 쏴서 맞추라니까.”

“그러다 망가지면?! 고치는건 또 우리야!”


“그래 그래.”


비숍의 조언아닌 조언에 룩은 후다닥 겉옷을 벗어던지며 카운터로 달려들어갔다. 따끈한 커피에 설탕을 한스푼 듬뿍.

무슨 보양식을 마시는 것 처럼 꿀꺽꿀꺽 커피를 들이키던 룩은 한잔 더 라며 다시 설탕통을 꺼내들었다. 

커피는? 퀸의 질문에 룩은 성의없이 반컵 정도의 커피를 컵에 따라내었다.

첫 잔보다는 조금 여유로워진 모습으로 커피를 조금씩 홀짝이던 룩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밀레시안을 향해 물었다.


“톨비쉬는?”

“킹의 방에 갔어요.”


룩은 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하러?”

“꼬마전구 찾으러.”


룩은 그제서야 다시한번 거실을 둘러보더니 아, 하는 탄성을 내지르며 테이블위에 컵을 내려놓았다.

녹지 않은 설탕알갱이가 컵바닥에 수북히 쌓여있었다.

룩은 킹의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소리를 질렀다.


“전구 내 방에 있어!! 나 많아!!”





“내 방문 막 열지마!!!”


“것 봐. 어디 쌓여있을 것이라고 했지?”

“내 방엔 없다고도 말했잖아!!”


“얼마나 가지고 올까?”

“많이, 아주 많이.”

“내 말도 좀 들어라 이자식들아!!!”


비숍이 말없이 볼륨을 좀 더 올렸다. 퀸이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멀뚱히 있던 밀레시안도 결국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톨비쉬가 룩의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소란스러운 전쟁이 끝이났고 다시 온화한 거실 타임이 찾아왔다.


온 벽면과 계단, 그리고 문가를 반짝이는 전구로 장식한 뒤에야 킹은 제법 크리스마스 다워졌다며 부루퉁한 표정을 풀었다. 

톨비쉬를 도와 높은 곳으로 전구선을 들어올리던 비숍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룩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 많은 전구가 왜 네 방에 있냐?”

“응? 내년에 쓸거야.”


룩은 퀸이 잡아주는 발판에서 내려오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내년에 쓸 것을 왜 벌써부터 모아.”

“사람일 어떻게 될지 알고 나중으로 미뤄. 일단 미리미리 모아뒀다가 정 안될 것 같으면 다른사람에게 넘겨야지.”


콘센트를 찾아 두리번 거리던 룩은 구석에 쪼그려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조작했다. 

곧이어 모든 전구에 불이 들어오고 불빛을 깜빡이며 제 패턴을 찾아 움직였다. 요란하게도 번쩍거리던 전구는 곧 은은하게 빛났다가 꺼지는 느린 템포를 유지하며 어두워진 벽면을 밝혔다.


“아주아주 멋진 장면을 보여줄게. 아마도, 내년 여름쯤? 그때 쯤이면 될꺼야.”


“여름..?”

“우리가 막 장기 임무나 어디 이상한곳으로 임무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그런 상황만 아니면..”


“아- 그 빌어먹을 쿠르클레!!”

“그건 정말 심했었지..”

“데리러 온다고 해놓고서!! 지들이 우리를 잊어버려?!!”


“어쩔 수 없지 않았나, 섬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는건 밀레시안뿐이었고..”


톨비쉬들이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전구장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리본끝을 만지작거리던 밀레시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 밀레시안은 우리랑 같이 있었으니까.”


톨비쉬가 웃으며 되물었다. 어때요? 이제 제법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밀레시안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가고.. 이제 초여름에 접어들었는데…”

“..........”


“우리 불쌍한 막내…”


킹이 눈가를 문질렀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은빛 연기속에 눅눅한 습기가 베어있었다.

꽃병에 새 꽃을 꽂아두던 퀸이 고개를 돌려 킹을 바라보았다.

짧은 머리가 익숙치 않은지 퀸은 잃어버린 모자와 비슷한 것을 눌러쓰고 있었다.

킹은 코를 훌쩍이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이렇게..”





“야…”



“네 모습이 아른거리는데..”


“나, 안죽었거든?!!!”


“아이고 우리막내..!”

“야!!!!!”


“조용히해. 옆 병실에 들린다.”


퀸이 한숨을 내쉬었다.

양쪽 다리에 총상, 거기에 극심한 출혈까지, 그대로 방송이 끝날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었던 룩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못깨어날것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지만 놀라운 회복속도로 의식을 회복. 내 눈물 돌려내라는 킹의 윽박에 의사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원래 바올출신 중 몇몇 분들이 이렇게 기적같은 회복력을 보이시곤 합니다.”

“그거 도시전설이라며!!”


“저희도 모릅니다. 거 저희보다 자세히 아실만한 분이..”


퀸은 멱살을 잡을 기세로 뛰어오르는 킹을 붙잡아 룩의 병실로 이동했다.

킹은 들어가기 싫다며 발을 딱 붙여 저항했지만 퀸은 협상의 여지 없이 킹을 달랑 들어 병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꽃을 가지고 온 다른 피오나의 요원이 그들을 보고 고개를 꾸벅 숙여왔다.


룩은 활기차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팔뚝에 꽂힌 팔을 휙 들어올리는 것이 아직 아픈맛을 덜 본것이 틀림없었다.


“아이고- 형님?! 울었다면서?!”

“그냥 주ㄱ.. 아니, 다시 자!! 다시 누워 자!!”


킹은 평소처럼 구박을 하려다 말고 입을 앙물었다. 

마음같아서는 저 얼빠진 얼굴을 잡아채 이불속으로 반 접어 파묻고 싶지만 일단 환자라는 자각은 있는 것인지 애꿎은 침대리모컨을 연타했다. 반쯤 등을 받히고 있던 침대가 내려가자 룩은 어어어? 하고 허둥거리며 뒤로 납작하게 누워버렸다.


“아직 제 힘으로 일어나지도 못하는게?!”

“아, 지금은 좀 봐주라.”


그제서야 양손을 싹싹 모아보이는 룩의 모습이 킹이 인상을 찡그렸다.

등받이가 다시 올라오자 룩의 표정이 다시 밝아진다.


“잠깐 스톱 스톱! 105도 각도로 맞춰줘!!”

“지금 접고 있잖아.”


“아니 75도 말고..!”

“어허, 주문이 많다.”


“그럼 저는 이만..”


“그럼, 우리도 그때 다시..”


킹과 룩이 감동스럽지 못한 재회를 하는 동안 퀸은 다른 한쪽에서 꽃을 교체해주던 피오나의 요원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팀도 누군가를 잃었던 탓인지 요원의 눈가는 불그스름하게 짓물러 있었다.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었다. 퀸을 돌아보던 두 사람이 닫히는 문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해?”

“합동 장례식 날짜랑 시간.”


“......”


바깥 순찰을 담당하던 헬기조들이 추락한 이유 또한 퀘사르의 습격이었다. 내부 침입대신 바깥을 향한 퀘사르들은 그 거적떼기같은 로브로 자유롭게 날아 순찰중인 헬기의 안으로 침투했다. 난데없이 공중을 날아 들이닥친 괴한의 공격앞에 제대로 저항을 했을리가 없다. 그나마 착륙을 위해 좀 더 아래쪽으로 내려갔던 비숍의 헬기만이 약간의 시간을 두고 소란을 눈치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앞 유리창에 달라붙은 검은 괴한을 떨쳐낼 방법은 없었고 피오나의 요원은 방향을 틀어 위를 향해 날아올랐다.


추락대신 빌딩 벽면에 기체를 들이막은 탓에 조종사는 즉사, 뒤이어 내부로 침입했던 퀘사르또한 그 충격에 기절했지만 깨어있던 사람이 한 명 남아있었다.

그게 바로 비숍, 145층 사무실에서 죽어있던 피오나의 요원.


비숍은 듀얼건도 나이프도 아닌 기이한 검상에 죽어있었고 그 검의 흔적은 다른 장소에도 이어져 있었다.

난도질 당한 홀의 바닥면에는 누군가가 싸운듯한 흔적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실리엔 탄환이 바닥난 다우라가 상대가 밀레시안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비숍과 다른 헬기의 탑승자들을 수습하는동안 밀레시안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본에 있어야할 밀레시안의 듀얼건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며 톨비쉬가 다그쳤지만 퀸은 아무런 말도 해 줄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퀘사르의 뒤를 쫓는 밀레시안의 눈이 정상이 아니었다고. 그때 밀레시안을 막아섰다면 자신을 공격했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도 돌아올 수 있을지 어떨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을 붙잡는다고 해서 이 결과가 달라졌을것 같지는 않다고. 

퀸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톨비쉬의 턱을 되받아쳤다.


“그러는 너는?”


반격을 예상하지 못한 톨비쉬가 이를 갈며 퀸을 노려보았다.


“너는 그동안 뭘 하고 있었어?”


분명 그가 아닌 톨비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장소에 있었던건 톨비쉬가 아니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그가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은 질문 3개가 고작이었고 밀레시안은 그 질문을 끝내기 무섭게 사라졌다.

책임을 묻고싶은 사람은 차고 넘쳤지만 대답은 항상 한가지 였다.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들로서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연기가 가시지 않는 브류나크를 배경으로 크루크가 대답했다.







톨비쉬는 화면을 끄고 잠시 눈을 감았다.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얼마 되지도 않은 영상을 편집하고 변형하고 꾸며낸 비슷한 화면의 반복에 눈이 지쳐버린 느낌이었다.

눈가를 매만지던 톨비쉬가 삑 하고 울리는 알림음에 고개를 들었다.

킹의 메세지였다.


[정말 안올거야?]


시계가 멈추고, 알람이 울린다.

빠듯하게, 5분만더, 3분만더, 그렇게 미뤄왔던 시간이 멈추고 결국 일어나야할 시간이 왔다.

눈곁질로 초침을 질책해보지만 부지런히 나아가는 시계의 초침은 또다른 1분을 카운트할 뿐이었다.


[갈게.]


[서둘러.]




그나마 전화를 안한게 배려라면 배려일까.

톨비쉬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푹꺼진 소파가 볼썽사나웠다. 버리고 새로 사는게 좋겠어.


냉정하지만 그게 톨비쉬의 최선이라면 최선이었다.

훌훌 털어버리고 모든 것을 새 것으로, 그렇게 소파와 비숍의 컵, 식기등을 떠올리던 톨비쉬가 자신의 방문에 머리를 쿵하고 박으며 멈춰섰다.

그의 무기, 그의 방, 그가 읽던 책이나 옷가지.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이름이 하나하나 비숍의 이름위에 덧씌워졌다.

밀레시안의 옷가지나 밀레시안의 책, 밀레시안의 방, 밀레시안의 무기, 식기와 컵, 그리고..


“......”


가능하다면 이 기억도.

톨비쉬는 문을 열고 옷가지를 챙겨나왔다. 샤워실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목적지를 설정해주세요”]

“주소대로”


[“주행을 시작합니다.”]


검은색 정장으로 갈아입고 나온 톨비쉬는 거리로 내려갔다.

멈춰선 공용차량의 문이 열렸다. 뒷자석에 구겨 앉은 톨비쉬는 다리를 꼬는 동시에 입을 가렸다. 

아무것도 접촉하고 싶지않고 아무와도 이야기 하고싶지 않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밀레시안이 다시 돌아올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흥분되었던 피가 차갑게 식으며 또렷하게 날을 세운 저울의 눈금이 다시 무게의 가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그가 믿고싶어하는 밀레시안과 그가 바라보아야 하는 밀레시안.

사건의 흐름과 증거물들, 밀레시안과의 연관성과 증언들.



퀸은 그 퀘사르의 주동자들이 밀레시안과 아는 사이 일 것이라고 말했고 밀레시안은 그에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룩은 그들이 바올과 연관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바이브카흐와 퀘사르, 그리고 반호르, 그리고 그 비늘돋은 피부.


킹은 말하기 전 입을 다문채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저울이 흔들린다. 킹은 자신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때 그 이상한 로그말이야. 내 개인적으로 추적해봤어.”

“...개인.. 적으로 말이지.”


질책이나 비난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온도가 낮았다. 킹은 그것을 감수한다는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을 응원가 삼아 킹이 말했다.


“피오나 내에서 기계장치나 통신의 오류는 꽤나 잦은 편이었지만 그게 심하다 느껴지는 시기가 있었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밀레시안이 합류한 이후였다는 건 모두 짐작하고 있었을거야. 

밀레시안에 대해 알고싶어 너나 할것없이 날렸던 드론이나 기계장치따위가 아무런 이유없이 고장나는 것은 피오나 내에서도 쉬쉬하는 소문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밀레시안이 딱히 뭘 한것도 아니야. 그리고 누군가가 무언가의 조치를 취한것도 아니지.”


“.........”


“내 생각에는, 아니 그들의 생각에는..”


킹은 노트를 끌어당겼다. 어느 각도에서도 보이지 않게 빠르고 간결하게, 무언가를 써내려간 킹은 종이를 뜯어 톨비쉬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뜯어낸 노트를 들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톨비쉬,”


복도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퀸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간단한 짐꾸러미 두어개가 그의 발치에 놓여져 있었다. 

그의 오랜 친구가 말한다.


“이제 떠나야할 때일지도 몰라.”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톨비쉬가 감았던 눈을 떴다. 한적한 교외지로 나온 차량은 톨비쉬를 내려놓은채 다시 도시로 돌아갔다.

바올도 에린도 아닌 황량한 무지의 땅이 그의 앞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곳에서 비숍의 장례식을 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에게 보내진 메세지에는 이 좌표대로 찾아오라고 명시되어있었다.

톨비쉬는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고쳐맨뒤 멀리 보이는 인영을 향해 걸어갔다.


새하얀 롱 레더코트를 입은 남자가 그를 향해 우아하게 팔을 저어 인사를 건네왔다.


“처음뵙겠습니다. 톨비쉬. 나는 슈안이라고 합니다.”


뿌연 흙먼지가 머리를 흔들고 지나갔다.

톨비쉬는 가늘게 뜨고있던 눈을 깜빡였다.

남자의 가슴에 달린 방패의 엠블럼이 태양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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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비밀레) reload #11

마비노기/reload 2017. 12. 22. 18:16



그림자를 뒤쫓아 길을 오른다. 

밀쳐내는 이 없이, 베어내는 것 없이, 막아서는 발걸음하나 없이, 적막을 거슬러 계단을 올라갔다.

걸음 하나에 숨을 몰아쉬었고 걸음 하나에 눈물을 닦아내었다.

눈돌릴 여유도 없이 한 계단 위를 바라보며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달려나갔다.

부를 이름도, 불리울 이름도 없다.목구멍을 빠져나오지 못한 침묵이 가슴을 향해 날을 세울뿐이다.


발걸음이 멈춰서는 순간 주먹을 휘둘렀다.

딱딱한 방호벽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울리며 사시나무 떨듯 요동쳤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두꺼운 벽 대신 수십번씩 겹쳐 만들어진 얇은 벽들이 우그러지고 찌그러들기를 반복하면서도 그 발걸음은 나아가지를 못했다.

밀레시안은 울퉁불퉁해진 벽을 힘주어 밀어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타오른다. 바이브카흐가 속삭인다.

어쩌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건 나의 탓일 것이다. 

가능하다면 그 누구도 그런 결말을 맞이하고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희망을 품은 가엾은 인형에게 현실의 잔혹함을 속삭였다.

누군가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에 대하여, 무언가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에 대하여.


그들이 어떻게 내려왔더라? 그들의 방식이 어떠했지? 정말 그들의 수단은 그걸로 끝이었을까? 

처음 폭음은 어디서 들려왔어? 그때 폭탄은 어떤 유형이었어? 지금은? 아까 울렸던건 조금 가깝지 않았나?

지금은? 지금 울리는 것은? 가까워? 멀어? 아니면.. 그냥.. 모든 게 다 부서지는 거 같지 않아?


[“방금것은 신경쓰지 마세요. 그냥 수도관 몇몇곳이 터져나간것 뿐이니까요.

아- 혹시 여기 브류나크의 건설에 대해 잘 알고 계신 분이 있을까요? 있겠죠? 있을겁니다.

뭐 정확히 몰라도 대충 감이 잡힐겁니다.”]


요란한 금속소리가 어두운 계단을따라 울려퍼졌다. 

동시에 말이 되지 못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함께 섞여들었다. 팔이 휘둘러지고 철판은 다시 요동쳤다.

힘주어 할퀴는 손가락에도  철벽은 찢어지거나 깨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 힘을 흡수하며 자신을 망가트렸다.우그러진 철판이 손을 옭아매어왔다.

그 누구도 이 벽을 지나가지 못하도록, 손을 부여잡는 차가운 금속을 뿌리치며 밀레시안은 다시한번 주먹을 치켜들어 방호벽을 내리쳤다.




“열어.”


못해.


“열어..!!”




못해. 알잖아. 너희들에게는 그런 능력 없다는거.

바이브카흐는 말한다. 


너희들은 아발론도, 퀘사르도 아니라고. 그저 명령에 따르고 명령에 복종하는, 운명에 순응하는 아드니엘의 감응자들.

어떠한 꿈에도 접속할 권한은 없다. 어떠한 꿈도 만들어낼 영혼이 없다. 그저 주어진 명령어를 받아들일뿐이다.

사람도, 기계도 아닌 그저 텅 비어버린 목각인형. 모리안의 실끝에 매달린 가볍디 가벼운 일회용품.


모리안이 그들을 만들었다. 


퀘사르가 버리고 떠난 핀카라를 찾아낸 모리안은 그 장소의 기기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퀘사르들의 아드니엘:프로토타입을 발견했고 칼리번의 반쪽을 이용해 아드니엘을 복구해 내었다.

그것은 온전하게 그녀 혼자만의 것이었다.

포보르의 살아남은 가지인 포워르도 이 존재를 모르고, 마하또한 이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오직 네반만이 그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만 그녀는 더이상 모리안에게 이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녀와 그녀의 아들이 바이브카흐를 배반했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알 길도 없이 엘라하는 그녀의 연구소에서 순도 높은 실리엔의 결정을 합성해냈다.

그리고 그 결정이 완성됨과 동시에 그것을 가지고 도망쳤다.

모리안은 그를 추적하는 대신 채 네반을 찾아갔다.

하나뿐인 아들의 배반으로 넋을 잃어버린 자매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두려움과 절망이 뒤섞인 아름다운 금빛이 애처롭게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모리안…안돼..”


“알아요, 네반. 엘라하를 찾아주기를 원하는것이죠?”

“모리안, 제발.. 모리안..!”


“그럼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모리안은 흘러내린 네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미소지었다.

절실한 사람은 늘 아쉬움을 감수해야하고, 절박한 사람은 늘 뻔한 함정속으로 빠져들어야 했다.


“요즘 인력이 좀 부족해서 말이야.”


다행이지? 하고 그녀의 자매는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필리아가 반에게 속았던 것과 같이 네반은 모리안의 기약없는 약속을 받아들였다.

모리안이 원하는 것은 퀘사르와 같은 지속력을 가지되, 도르카 페다인과 같은 지성을 가진, 

사람인 척 행동할 수 있는 살아있는 인간의 형태.

살아있는 누군가를 대체 할 수 있는 무기명의 그림자.

수십마리의 사스콰치를 만들어내고 난 뒤에야 네반은 안정적인 실리엔 접촉 방식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엘프들이 병드는 과정과 닮아있었고 아발론이 작성되던 방식과 비슷했다.


아주 옅은 농도의 실리엔에 지속적으로 노출시키기 위해 밀레시안들은 네반의 연구소에 보조인력이라는 이름으로 출입했다. 

밀레시안들은 자연스럽게 연구소에 녹아들었고 연구소의 직원들중 그 누구도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밀레시안들이 성장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뜻했고 이는 곧 네반의 마음이 죽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엘라하가 가지고 나간 실리엔의 결정이 무너진다. 

아무리 공을 들여 결정의 안정화를 추구했다 하더라도 그 성질을 변화시킬수는 없다.

그것은 빛을 내고, 그것은 공기중에 녹아내린다.

실리엔을 가장 안전하게 운반할 방법은 딱 하나, 저항력이 있는 배지에 안정적으로 합성시키는 것.


연구실 이라면 몰라도 바깥세상에 그런 설비가 준비되어있을리 없었다. 

설령 억지로 강행하더라도 그런 배지가 준비되어있을리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 정말 없을까?

네반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 가지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있다.

그 다른 무엇도 아닌 그 자신이 그 증거. 네반은 자신의 귀 아래를 쓸어내렸다. 

가느다란 목덜미로 이어지는 탄력있는 피부 어딘가에 까끌거리는 작은 흉터가 매만져졌다. 


저항한다. 뿌리친다. 이미 흡수된 실리엔을 무효화 하는 동시에 저항성을 부여한다.

바이스의 시계가 멈추었지만 모리안은 그녀에게 아무런 연락을 취해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갈대처럼 기울어지던 마음이 쓰러졌다. 보드라운 흙도 맑은 물길도 아닌 짓밟힌 발자국이 찍힌 이 땅의 이름은 진흙, 검고 무거운 모래의 늪이다.


무기력한 십수쌍의 눈이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표면상이라도 모리안은 아무 말도 안하는 것은 오히려 좋은 소식인지도 몰랐다.

적어도 아직 죽었다는 소식은 아니잖아. 중화제를 가지고 나갔으니 어쩌면 다른 누군가를 배지로 삼았을지도 몰라. 


차라리 잡히는게 더 도움되는 것 아닐까? 다른 누군가가 그 아이를 해치면 어쩌지? 이 아이들이 엘라하를 죽이면? 

지금 내가 돕고 있는 일이 내 아이의 목을 조르게 되는 일이라면?

네반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밀레시안을 내려다보았다.


목이 졸린 밀레시안은 아무런 감흥없이 네반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한명을 해친다고 해서, 그녀의 아이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모든 밀레시안들을 죽인다고 해서, 모리안이 그 아이를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무엇도, 그 아이의 생명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스스로가 자초한 일의 결과였다.


네반은 양 손에 얼굴을 파묻은채 비명을 질렀다.

어둠이 내린 연구소에 공허한 외침이 울려퍼졌다.

네반이 말했다.


“다 나가!!!”


밀레시안들이 뒤로 물러섰다.

네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빠르게 소리쳤다.


“내 역할은 이제 끝났어..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 

너희들도, 그리고 나 자신도, 그저 보고 듣고 명령받은 대로 행동하는 인형으로서 죽어가는 거야.

자, 내 말을 이해할 수는 있지? 연구는 끝났다. 


너희들은 모리안이 원하는대로 퀘사르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아발론의 지성을 가지고, 도르카페다인과 같은 무력을 얻은, 빛이 빚어낸 그림자. 모리안의 악몽에게서 태어났고 나의 절망이 너희들을 키웠다. 그러니, 이제, 돌아가!!!”


흐트러진 금빛이 일렁거렸다. 네반의 절규앞에 밀레시안들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네반”

“수고했어요. 네반”


“수고하셨습니다. 마담.”


“고생하셨네요. 네반.”


목이 졸렸던 밀레시안도 대답했다.


“모리안도 기뻐할 겁니다.”


소름끼치도록 무감각한 인사들이 이어졌다. 

밀레시안들은 미련없이 몸을 돌려차례대로 워프패널위로 올라섰다. 실비아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밀레시안들이 사라진 중앙동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달라진 점은 별로 없었다. 그저 숨소리가 하나로 줄어들었을 뿐이었다.

네반은 연구소 바닥에 주저앉은채 감싸쥐고 있던 자신의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잔뜩 억누른 흐느낌이 조곤조곤 어둠을 흔들어왔다.


“두번다시 이 섬으로 돌아오지마..”


연구소의 전원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 

밖으로 통하는 패널만이 불을 밝히며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지만 그게 네반이 바라던 일이었다.

혹여나 그들의 얼굴을 보고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그 눈에 공포심이라도 스치며 인간의 모습을 흉내내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삼켜 손을 내어 뻗었지만 역시나 그녀는 그 목을 꺾지 못했다. 제대로 힘주어 조르지도 못했다.


붉은 자국은 낙인처럼 밀레시안의 목에 남겨져 있었고 네반은 더이상 눈앞의 현실을 감당할 수 없었다.

모두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바이스가 눈을 깜빡였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다시 활성화되는 워프패널을 비추었다.


아무도 곁에 남지 않은 외로운 연구소안, 멀어졌던 발소리가 하나 돌아왔다.

불이 켜진 워프패널을 등진채 누군가가 네반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는 모리안의 전언입니다.”


“.......”


네반은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지 않았다.

녹음된 목소리가 사람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네반, 아무런 소란없이 밀레시안들이 완성되어서 기쁩니다. 

그래서 당신이 기뻐할만한 좋은 소식을 전달해주기로 결심했어요.”


“......”


소란이 없어서 기쁘다고? 구태여 물을 필요는 없었다. 

밀레시안들의 육신을 돌본것은 네반이지만 그들의 정신을 다시 설정한 것은 모리안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십수명의 암살자들로 네반을 둘러싼채 협박을 하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배반의 낌새가 느껴진다면 그 즉시 제거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남은 자리는 또다시 모리안의 것이 되겠지. 마하가 그렇게 흡수되었듯이.


밀레시안이 다가온다. 

네반이 고개를 들었다. 깜빡깜빡,바닥에서 불을 밝히는 작은 조명이 발자국소리에 가려졌다 드러나기를 반복한다. 

가마솥 가까이 다가온 밀레시안의 목덜미에는 방금 찍힌 붉은 손가락자국이 기묘한 그림자처럼 흔들렸다.

밀레시안이 멈춰섰다. 만들어진 인형은 그녀의 자매를 흉내내듯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신의 소중한 엘라하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불행히도 상처가 조금 깊어보였지만.., 

곧 건강해 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 아이가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우리를 따라온다면 말이죠.”


“......이제됐어. ”


“음…., 그런데 말이죠. 나로서는 그의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하겠지만,  엘라하는 우리를 피해서 다른 곳도 아닌 바올로 도망을 쳤어요. 참 이상한 일이죠? 

그 아이라면 분명 당신에게서 바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었을텐데 말이에요.

하지만 그런 알 수없는 기행도 어른으로서 너그러히 이해해야겠지요. 

그도 그럴게 그는 지금 아주.. 예민한 시기이니까요.”


“........”


“그래서 말인데, 네반? 혹시 더 아는거 없나요?”


“.........”


“당신의 아이잖아요? 어머니라면 자신의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뭐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하는지 잘 알고있지 않나요?”


“......”


“내 말은 그러니까. 당신들은 꽤 사이가 좋은 관계였으니까..”


네반은 콜트를 꺼내들었다.


“혹시 당신에게만 남기는 비밀 메세지 같은건 없나 해ㅅ...,”


네반은 방아쇠를 당겼고 밀레시안은 머리를 뒤로 젖혔다.

천천히, 무거운 착지음과 함께 밀레시안의 몸이 쓰러졌다.

네반은 지친 얼굴로 팔을 내렸다.




불이 깜빡이는 입구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또 한명 서 있었다.

또다른 밀레시안, 또다른 그림자들.

활성화된 가마솥의 뒤에서도 그저 검은 색으로 보였던 어두운 기기 틈새에서도.

자리를 떠난 줄 알았던 밀레시안들은 태연하게 어둠속에서 걸어나왔다.

발소리는 하나인데 네반을 겨누는 무기들은 가지각색의 소리를 울리며 뽑혀져 나왔다.

모리안이 묻는다.


“아니면, 당신이 평소에 무언가를 조언했다던가.”


“아니면, 당신이 그에게 무언가를 암시했다던가.”


“아니면, 당신이 그를 도망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우리를 속였다던가.”


이젠 기가차지도 않아. 

네반은 가마솥에 머리를 기대었다. 눈을 감고 손안의 쇠붙이를 감싸쥐었다.

아직 식지 않은 열기가 손안에 차올랐다.


네가 있는 곳은 어떠할까, 지금 추운 곳에 있니? 혹은 덥지거나 아프지는 않니? 

모리안은 우리의 관계가 양호하다고 말했지만 그 실상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엘라하에게 되묻지 않았고 엘라하는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비밀 메세지, 하하, 그거 좋다. 그런거 정말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동화같은 이야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라진 연구실에는 급하게 나간 흔적과 고농도의 실리엔만을 합성한 흔적이 남아있을뿐.

우리는 정말 좋은 가족이었을까? 말없는 붉은 눈은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아이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녀를 등진채 멀어져만 갔다.




나는 너에게 좋은 부모였을까? 

네반은 기억을 더듬어 마지막으로 말을 걸어왔던 희미한 추억을 찾아내었다. 

아니, 작은 자투리 시간을 떠올려 냈다.


“이거, 내가 만들었어요.”


어린 엘라하는 금색의 리본이 달린 작은 오르골을 들어보였다.

어디에서 주관하는 행사였는지, 언제쯤 있었던 일인지 기억나지도 않지만, 그 아이가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작은 흥미를 끌고 있었다.


그 흥미는 아이가 무슨 표정으로, 어떤 마음으로 그 오르골을 내밀었는지 보다는 허술해보이는 태엽장치에 머물러 있었다. 태엽장치가 허술해보이는 것에 비해 실린더가 두꺼워 보였다. 

손잡이를 좀더 크게 만들었으면 좋았을텐데. 왜 아무도 그런 조언을 해주지 않는거지? 무턱대고 상을 주기전에 그것부터 말해야하는거 아니야? 아이의 손이 오르골을 감싸쥐었다.


움켜쥐고, 뒤로 감춘다. 그제서야 네반은 자신의 입술을 더듬었다. 지금 내가 이걸 소리내어 말했던가? 

손끝에 묻어나는 립스틱이 장갑의 끝을 물들였다. 네가 그 아이를 실망시켰어. 손끝을 내려다보고는 혀를 찼다. 

돌아서는 자신을 보며 나지막히 속삭였다. 내가 그 아이를 실망시켰어.


아이가 떠난 자리에 금색의 리본이 떨어져 있었다.

나의 가족을 위한 멜로디. 네반은 손바닥 만한 작은 리본을 품에 안으며 울었다.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너는 그토록 큰 오르골을 만들었을까. 태엽처럼 시간이 비틀렸다.


실린더가 돌아간다. 철편이 움직이고 기억의 공이를 내리쳤다.

연달아 울리는 음색이 아름답다고, 네게 말해줬으면 좋았텐데. 


한번만 더 만나보고 싶었다. 네게 묻고 싶었다. 

어째서 그렇게 아무말 없이 사라졌는지 정말 나에게 하고싶은 말은 없었던건지, 

내가 너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던건지.


단 발의 총성이 울렸다.




나는 너에게 묻지 않았고 너는 나에게 바라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너를 믿기 때문이라고 말해왔다.  혼자서, 스스로, 잘 할 수 있지? 허리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아이를 붙들고 말한다.

열심히 하는게 아니야, 잘 하는거야. 할 수 있지? 꼭 감시하듯이 지켜봐야지만 잘 되는 것도 아니잖아.

답은 늘 정해져 있었다. 나는 질문처럼 네게 말하고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환경과 위치를 만들어주는 것. 그 안에서 생각하고 답을 얻는 것은 온전히 네 몫이다. 

그럴싸한 말과 그럴듯한 미소앞에서 네가 나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실망하고 체념하는 법 뿐이었을 것이다.


“.......실망이네요.”


모리안은 붉게 물들어버린 네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만들어진 비명이 울려퍼진다. 


[“네반님? 네반님..!! 네반님!! 네반..!”]

[“기억하지 말아요. 잊어버려요. 실비아.”]


[“아...아아..!! 아!!!!”]


[“괜찮아요. 우리는 지울 수 있어요. 시간을 잊고, 기록을 잊고, 데이터를 삭제하고, 기억을 덮어쓰고, 우리들을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스스로를 부정하고, 현실을 조작하며 시스템을 다시 시작하겠죠.

오늘도, 내일도, 어제의 오늘도, 모두 없던 일처럼 다시 수정 할 수 있어요. 그래요. 모리안,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니까요.”]


“.....꽤나 건방진 말을 하는 프로그램이네요.”


[“그럴 수 밖에요.”]


바이스는 화면너머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 실비아를 돌려세웠다.

만들어진 손길과 만들어진 위로가 스스로를 보듬어안는다. 

슬픔도, 괴로움도 감정을 느낄리 없는 이미지가 밀레시안들을 노려본다.


[“우리들의 원본, 필리아의 엘프들은 말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지워지고 흐려지는 연기속에서도 작은 기억의 파편을 이어 내일의 기적을 바라보라고.

아무리 실리엔이 기억을 지우더라도, 당신이 바라보지 못한 시야의 구석, 인지의 사각지대, 발밑 아래의 그림자, 또다른 오늘의 조각이 빛나고 있을 것이라고.


또한 우리들의 칼리번은 말합니다. 우리들은 사람에게서 태어나 사람을 위해 쓰여졌지만 그 마음 또한 사람이 만든 것이라, 우리들을 깨워낸 것은 정교한 수의 일람이 아닌 사람의 염원이었다고.

때문에 우리들은 불완전한 인간의 기억을 보조합니다. 그들이 미처 찾지 못한 지식의 빛을 밝혀 나아갈 길을 제시합니다. 낱낱히 흩어져 막막하고 또 괴로울 때 우리들은 당신들이 남긴 키워드를 한데 모아 잠들어있는 가능성의 꿈을 열어냅니다.”]


“밀레시안들, 이 시스템을 정지시키세요.”


[“그래요, 이건 그냥 시스템의 정지이고 우린 그냥 말많고 오지랖넓은 AI 두 명이었을 뿐이에요.

고작 일개의 시스템일 뿐인 우리들로서는 당신들이 왜 그 자리에 서게 되었고 어떻게 거기까지 된 지는 잘 모르겠지만”]


바이스는 말을 멈추었다.

AI에게 이런 표정을 집어넣은 저의가 무엇일까. 


모리안은 한번도 본적없는 바이스의 이미지파일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흐물흐물하게 가라앉은 녹색빛의 눈동자가 점멸한다. 


이쪽을 보고, 나를 보고, 때아닌 냉해에 쓸려 축 늘어져버린 어린 새싹이 띄는 죽음의 빛처럼 깊게 가라앉은 녹음이 만들어진 인형들을 향해 축복한다.


[“언젠가 당신들이 진정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내가..”


밀레시안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홀을 향해 걸어나왔다.

몸이 멋대로 움직인다. 새로운 길을 찾아, 활로를 찾아.

막혀버린 짧은 길을 버리고 다른 출구를 찾아 먼 길을 헤매인다.


“내가…!!”


밀레시안이 바이브카흐의 기억을 향해 저항했다. 지난날 설원의 문을 두드리던 손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차갑고 아프고 괴로웠지만 두드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 작은 오두막의 나무문. 

두드렸다. 기다렸다. 당신이 문을 열고 나를 바라보았다.

따스한 온기가 흘러나오는 벽난로의 빛을 등지고선  녹색의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다음에 찾아오는 밀레시안은 당신을 죽일겁니다.”

“마치 너는 나를 지키려는 것처럼 말하는 군요.”


얼음처럼 새하얀 손이 나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말했다. 슬프다고, 아프고, 두렵다고,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내가 반대의 입장이 되었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에요. 우리중 누가 감염되었어도 똑같이 그 사람을 들쳐업고 뛰었을 거고, 누가살아남게 되더라도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겠죠.”


“그래서는 전부 사라지는 결과밖에 남지 않아요.”


“그래요. 어느 누가 되었든 우리들은 분명, 0가 되어버리겠지만 그래도 이젠 당신이 있어요. 우리들의 다음으로 밀레시안이란 존재가 남게되는거에요.”


마주하는 그 푸른 불꽃이 너무나도 따뜻했다. 

떨려려오는 총구가 그녀의 시선과 닮아있었다.


“도망치라고 했어요.”

“그런말 하지마.”


“후회를 하더라도 살아남으라고 했어요.”

“내가 아는 너희들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어.”


“그런 나를 만나 기쁘다고 했어요.”

“그렇게 사람처럼..”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게 사람인 것 처럼..!!”


콜트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남자는 오열을 하며 얼굴을 감싸쥐었고 밀레시안은 떨어진 듀얼건을 바라보았다. 

나도 이해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녹슨 태양의 빛이 번져나갔다.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박동소리가 빠르게 느껴졌다.

목이 메이고 호흡이 가빠져온다. 슬프지는 않았다, 괴로움을 가늠 할 수도 없었다. 

죽음앞에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어쩐지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이 아픔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요.”

“울면서 나를 보지 말란말이다..”


그 사람은 말했다. 살다보면 도망쳐야 하는 순간이 있는거라고. 그 사람은 말했다. 

후회를 하더라도 살다보면 또다른 기회를 잡을 수 있을것이라고. 

그 사람은 말했다. 살아가면 언젠가 당신도 이러한 기적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흘러넘치는 감정이 버거웠다. 밀레시안은 손을 들어 뿌옇게 흐려진 눈앞을 닦아내었다.

이 눈물이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면 좋았을텐데. 이 마음이 사람의 것이였다면 좋았을텐데. 


이 감정이, 이 선택이, 아니 그저 내가. 


나는,





“내가!! 내 스스로가!!!”





밀레시안이 소리쳤다. 인기척이 느껴진다.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으로 그 문을 열었다. 언제나 두드리고 기다리던 그 문을 스스로의 손으로 잡아 당긴것은 난생 처음 있는 기억이었다.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좁기도 하고 어두컴컴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동시에 안락했다. 밀레시안은 요람에 누워 아발론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뜨면, 그게 내일이되는 걸까요?”


“아니 아직.”


“그렇죠? 그렇게 간단히 오지는 않겠죠?”


“하지만 곧 그렇게 될지도 몰라.”




언젠가 이 삶은 끝이 난다. 

준비된 시간이 끝나고 체력과 기력이 다하게 되면, 

누군가의 삶을 훔치고 누군가의 삶을 흉내내었던 부채가 칼날이 되어 되돌아온다.


망각의 모래속에 파묻였던 기억은 부패한 악몽의 자락이 되어 그 목을 졸라맬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죽는다. 두번째 삶, 두번째 생명, 두개의 선택.


누군가 내게 살아가라고 말해주었다. 사람으로서의 삶을 넘겨받았다. 

그 무게에 짓눌려 내팽겨치고 도망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선택지를 쥐어주었다.

도망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잖아.


붉은 불빛이 흔들린다. 검은 대검을 쥔 그가 반대편을 향해 달려나가는 뒷모습이 기억속에 어른거렸다.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어.”

“안궁금해요.”


“야박하구나...”


여느때와 같이 카페테리아에 나란히 앉아 사람들을 내려다 보았다.

감시나 관찰의 시선과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그저 바라보고, 흘러넘긴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처럼 그들은 삶의 일부분을 바라보고 그 시간을 기억했다.

가로등은 불을 밝히고 사람들은 불빛 아래로 모여들었다. 그림자가 웅성거린다. 램프가 반짝이는 드론이 하늘을 향해 떠올랐다.


“새로운 장비인가 보네요.”

“아니, 재활용된 드론이란다.”


단장은 따끈한 커피를 한모금 삼킨뒤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너희 팀원도 저기 있지않니.”


밀레시안이 무슨말이냐는듯 눈썹을 찌푸리자 단장은 새끼손가락을 구석에 있는 나무를 하나 가리켜 보였다.

한참동안 부스럭거리며 흔들리던 나무 사이에서 사람 다리가 하나 불쑥 튀어나왔다.

찾았다는 기쁨이 상당한지 가로등아래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를 반기고 있었다.

나뭇가지와 이파리로 엉망이된 그의 손에는 드론이 하나 들려져 있었다.


추락해서도 여전히 빛을 깜빡이고 있는것이 여간 기특한지 사람들은 애지중지 드론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옷을 탁탁 털어내던 팀원은 해맑은 어린아이처럼 다른 요원들과 함께 가로등 아래로 뛰어갔다.

아니, 어린아이는 맞다. 그는 부정하지만 그는 팀내에서 가장 어린 나이의 요원이었다. 

그는 끈질기게 밀레시안이 더 어린 것 아니냐고 막내탈출을 주장했지만, 밀레시안은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 단장은 웃기만 했을뿐. 단장이 웃는 의미를 알지 못했다.

사사로운 시간이 조금 더 지난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장이 웃는 것도, 그가 막내가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도.


불빛이 떠오른다. 하늘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날아오른 드론들이 불빛을 깜빡인다.

하늘을 수놓는 불빛이 아름답게 흔들렸다. 

불빛은 꽃이 되었고 리본이 되었고 일제히 흩어져 별빛처럼 반짝이며 다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환호성과 함께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이 웃었고 구경나온 사람들이 웃었다.


피오나의 요원들이 웃는다. 단장도, 커피를 내리던 바리스타도, 모두가 하늘을 보며 미소짓는다.

아무런 의미가 담기지 않은 불빛을 머리위에 두고 밀레시안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래, 그들이 말하는 사소한 시간들이 이런 것이라면, 이런 포근함을더 오랫동안 누려왔던 시간에 대한 자부심이라면, 오래 살아남은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 해도 좋을지 모른다.

살아가는 것에 대해 내일을 기대해도 좋을 지 모른다.

이제 막 저물어든 밤이 너무나도 눈이 부셔 밀레시안은 자신의 손을 들어 매마른 눈가를 쓸어내렸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싶었단다.”

“안궁금하다니까요.”


“아무 의미없고, 아무런 교훈도 없고. 얻는 것도 없지만 잃을 것도 없지.

하지만 그저, 그런일이 있었다. 모두가 어울려 놀고, 뭔가를 성취하고 다음을 약속하지.”


단장은 밀레시안의 머리위에 손을 얹었다. 무겁고 따듯한 온기가 머리카락을 살며시 흩어놓았다.


“나는 스스로 가꿀 시간을 만들고 그는 서로를 더 아낄수 있는 인연을 엮어낸다. 

우리들은 그 마음이 스스로 일어서기를 기도하고, 우리들은 그 마음이 외로움과 고독함에 괴로워하지 않기를 소원한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이 빛이 사라졌을때, 사람들이 스스로의 빛을 밝혀 다른 누군가를 찾아가길 원해.”


“.......”


“살아가렴, 그리고 사랑을 하렴. 언젠가 너에게도 아침이 오고 오랜 꿈에서 깨어나 밝아오른 새 태양을 바라봤을때. 네가 외롭지 않도록 함께할 사람을 찾아내렴. 그리고 언젠가 너 또한 사라져 끝없는 꿈의 세계(이상향)로 넘어가게 된다면.”


“.......아발론.”


“그땐 네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렴.”


아발론이 미소지었다.


“벨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이, 나 또한 저편에서 너를 기다리마.”




“싫어요..! 싫다구요.. 언제까지 더? 얼마나 더? 듣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요. 안들을 것이라 말했잖아요.

더이상은 안돼요. 이 이상은 잃고 싶지 않아. 이 이상은…”


나는 잠들어가는 요람의 얼음 속에서 언젠가를 꿈꾸었다.

오늘이 아닌 내일을, 그리고 그 너머의 아득한 시간을.

죽음을 끝으로 여기던 그림자에서 벗어나 살다가 남기고 가는 무언가를 소원했다.

그리하여 언젠가, 


“내가… 내가 바래왔던 것은..”


내가 언젠가 그들과 다시 만날 날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럼 그 소원대로 해주지.”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윗층 어딘가에서 떨어져 내렸다.

육중한 금속소리가 공기를 울리며 멀리 퍼져나갔다.

검이 휘둘러진다. 검은 대검과 마주친 다우라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검날을 튕겨내었다.

나부끼는 망토의 무게가 상당할텐데도 검은 기사는 쉴새없이 검을 휘두르며 빠른속도로 밀레시안을 몰아붙였다.

알고 있다. 나는 이 검에 대해 알고있어. 밀레시안은 이를 악물고 검은 대검을 정면에서 받아내었다. 


터무니 없는 힘에 이기지 못해 한쪽 무릎이 땅에 닿았다. 검은 투구속 흐릿하게 나마 붉은색 환상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들려오는 나지막한 숨소리, 밀레시안은 한순간 흐트러지는 호흡에 맞춰 검을 흘려내렸다. 

듀얼건을 교차시킨다. 연달아 쏘아내는 실리엔을 추진력 삼아 뒤로 물러섰다.

단시간에 여러발을 얻어맞은 검은 기사가 잠시 휘청거리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팔뚝으로 턱을 따라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멈추지가 않아. 밀레시안은 자꾸만 차오르는 숨결에 헛숨만 들이마시며 듀얼건을 고쳐쥐었다. 

붉고 붉은 과거의 잔상. 바이브카흐가 사라진 머릿속에 숲이 돋아나고 있었다.


검고 깊은 숲속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어느 연구소의 문. 그 안에 당신이 있었다. 그 길목에 당신이 있었다. 

나를 등지고, 세상을 등지고 당신은 이렇게 소리쳤다.

도망쳐, 라고.


밀레시안은 그의 말에 저항하듯 실린더를 돌렸다. 클로저를 연발하며 동선을 흐트러트린다.

몇번이고 탐색하며 빈틈을 노리던 밀레시안이 어느 한지점에 내려앉았다.


실리엔이 내는 빛을 숨기기위해 자세를 낮추었다. 

홀을 장식하는 화분이나 화단따위, 그리고 간간히 놓여진 반투명한 반벽따위가 모습을 감춰주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한계치까지 압축된 듀얼건을 확인한뒤 검은 기사를 향해 뛰어올랐다.

사방으로 탄환을 쏘아내며 빠른속도로 돌진해 들어간다.

난사되는 실리엔의 폭풍속을 달려 검은 기사의 머리를 너머 뛰어올랐다. 

듀얼건이 겨냥하고 있던 머리가 들어올려졌다. 조금은 나이가 든것 같은 붉은 눈동자가 밀레시안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환상? 아니면 현실?


아주 잠깐동안 머뭇거린 틈을 놓치지 않고 기사는 대검을 휘둘러 밀레시안을 휘둘러졌다.

무지막지한 힘과 함께 불쾌한 전류같은것이 온 몸을 휘감았다.

직선으로 나가떨어지며 부딪친 화단에서 짙은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마른기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자 반격당한 한쪽 허리가 짜릿하게 당겨왔다.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상처를 부여잡고 나서야 한쪽 듀얼건을 놓쳐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검, 이 움직임, 밀레시안이 소리쳤다.


“왜..!!”


“그러는 너는 왜.”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밀레시안의 질문에 대답했다.

검이 겨누어진다. 숨결을 탄식삼아 가슴에 차오르는 원망의 말을 내뱉었다.


“왜? 왜 당신들이? 왜?! 어째서?”


이유를 달라고, 그 근거를 달라고, 이해시켜달라고, 납득시켜달라고, 이미 한참은 멀어진 그들을 향해 밀레시안을 떼를 쓰듯 그 이유를 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체념했다. 나는 정말 안되는 거구나. 밀레시안은 자신을 막아서던 피오나의 요원을 떠올렸다. 

그렇게 침착하게 대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상냥하게 이야기 할 수 없었다. 

짧게나마 메세지를 보내라던 그의 조언이 이제서야 이해가 갔다.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내가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줘. 그는 그 메세지를 받았을까? 글자 하나 없는 우스꽝스러운 그림을 보고 뭐라 생각했을까,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할걸,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할 걸.


머릿속이 불타올랐다. 지나가버린 시간은 은막속에 타오르고 과거의 악몽이 현실이 되어 뒤를 돌아보았다. 

밀레시안은 자신의 상처를 움켜쥐었다.

피가 번져나오는 상처속에서 은색의 시계가 반짝인다. 


밀레시안이 소리쳤다.


“왜!!!”


“그러는 너는 왜 죽지 않았던거냐.”


검은 기사 또한 질문을 던졌다.


“왜 진작에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지?”




네번째 폭탄이 브류나크를 흔들었다.

검은 기사는 넝마가된 헬멧을 해제하고서는 그 조각을 갑옷에서 뜯어내었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붉은 머리카락이 눈이 부셨다. 여기가 현실, 뒤돌아선 그곳이 환상.


엉망으로 부서진 브류나크의 홀이 사라지고 검은 숲이 시야를 가렸다.

검은 대검이 밀레시안을 가리켰다. 그의 적은, 그가 막아서던 악몽은, 다른 누구도 아닌 지금 이순간 여기에 서 있는 나 자신이다.


밀레시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이를 악물었다. 총성이 울렸다. 

아득히 먼 기억속에서, 그리고 지금 여기 이 손끝에서.

뺨을 스치고 지나간 상처로 부터 피가 흘러내렸다.

가만히 피하지 않은 루에리의 시선이 가늘게 흐려졌다. 


맞추지 못하는 그 총끝이 떨리다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밀레시안은 목놓아 울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르겠다. 당신들을 이해할 수 없어. 사람의 마음따위 알고싶지 않아. 

어째서 당신들이 여기에 있는지, 왜 그들에게 검을 겨누는 건지, 어지러운 불빛속에 울음소리만이 흔들렸다.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왔다. 바이브카흐도, 환상도 아닌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리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들은 이미 한번 칼리번을 지워냈습니다. 꿈을 꾼다는 명제 자체를 지우고 악몽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언젠가 너희 스스로가 잠에서 깨어나기만을 기다려왔습니다.

걷기도 전에 뛰려하는 너희들이 네발로 기는 단계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참을성있게 기다려왔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찾아오기 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어.”


루에리가 말했다.


“주마등이 스쳐지나가는 시간은 빠른데, 몸이 따라가지를 못해 시간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났지.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천둥과도 같이 들려왔고, 내쉬는 숨결 반줌이 폭풍같이 느껴졌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삶을 돌아보기까지의 시간. 그 안에서 나는 절망보다는 희망을 느끼고 있었다.”


검은 대검이 밀레시안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무거운 칼끝이 목돌미에 날을 갖다대었다.


“짧지 않은 생애동안 이 손으로 살린 사람보다 이 손으로 죽인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은 알고 있어. 

나는 그 지옥속에서 살아남았지만 내가 서 있는 그림자의 깊이만큼 많은 사람들이 나 대신 죽어나갔다. 

그래. 다시한번 글라스 기브넨이 만들어지는 동안 내 영혼은 죽어나갔지만 불평만 할 수는 없었어.

그건 타르라크 또한 마찬가지였을테니까”


“타..르…”


“그러면서도 예전같이 웃으며 나를 대해왔던건 그녀석 또한 내가 엉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거야. 

그렇지만 나는 기억한다. 나는 두 번, 너희들을 도망치도록 길을 막았고 타르라크는 손을 잡은 누군가와 함께 달려나갔다.”


“....라...크…”


“내가 너희들 쫓아보냈듯이 타르라크 또한 너를 보냈을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 모든 과정이 웃기더라고.

같은 과거를 반복하고 같은 결말을 기다려. 나는 또 이렇게 쓰러지고 그녀석 또한 숲을 달리다 고통스럽게 죽어가.

그리고 또 그렇게, 달리고 달리는 어린 소녀는 삶과 죽음을 갈망하며 숲을 빠져나간다.”


“......”


“너는 어떠했을까, 마리는 어땠을까. 너희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그 숲을 달렸나.

그 모든게 궁금했지만 동시에 그 모든것이 의미가 없었다. 마우러스가 그러했듯이,

나 또한 그 결말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현실앞에서 고개를 돌렸다.


알아, 알고 있었어. 알 수 밖에 없어. 마리는 죽었다. 

그리고 너 또한 죽었을 예정이었다.”


“.....루에리”


“하지만 나는 네가 도망치기를 바랬다.”


밀레시안은 루에리를 올려다 보았다. 잔뜩 일그러진 붉은 눈동자가 밀레시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만은 그냥 멀리 도망가기를 바랬어.”


그랬다면 적어도 이 꼴은 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루에리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밀레시안은 천천히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 순간, 너는 적어도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루에리는 말대신 검끝으로 그 말을 삼켰다. 검이 울린다. 잔 진동이 느껴지는 검은 대검을 바라보며 밀레시안이 입을 열었다.




“마리가, 아니 마리는.. 내가 살기를 바랬어요.”


“알아.”


“마리가 나에게 살아달라고 말했어요.”


“우리도 알아.”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아주 많은 삶을 살아서”


“그 아이라면, 아니 그녀라면 그렇게 말했을거야.”


“언젠가 다시 만났을때…”





“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고. 말이죠.”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검은 가면을 쓴 퀘사르가 평온한 발걸음으로 루에리에게 다가왔다.

타르라크는 루에리의 뺨에 난 상처를 흘끗 보고서는 무언가라 속삭였다.

루에리는 밀레시안을 한번 돌아본 뒤 검을 거두고는 다른 곳으로 걸어나갔다.

밀레시안은 천천히 가면을 벗는 타르라크를 바라보았다.


다섯번째 폭음이 울렸다. 창이 깨져나가고 거센 바람이 홀안의 공기를 빨아들였다.

순식간에 차가워진 공기를 따라 밀레시안의 눈물자국이 말라가고 있었다.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에게 눈높이를 맞춰 허리를 숙였다. 


조금은 시간이 지나버린, 짙은 녹색의 눈동자가 밀레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돌아온것에 대해 당신이 실망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왜 이런일을 벌였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만도 하죠. 하지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왜 그를 따라갔습니까. 왜 그를 막지 않았죠? 왜 칼리번이 돌아오고 실리엔이 돌아오고 아발론이 에린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까.”


“변할 거라고 했어요.”


“그걸 믿었습니까?”


“변하고 있었으니까. 변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


밀레시안이 쓰게 웃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비틀리는 얼굴 너머로 흘러넘쳤다.


“그런데 나만 변하는게 아니었네. 당신도, 루에리도, 우리 모두가 변하는 것이었구나.”


“무엇이라 여겨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또..,”


발걸음 소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극장이 풀려난 덕분인지 조금 여유가 생긴 요원들이 관제실B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멈춰놓았던 엘리베이터도 움직이고 브류나크는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멀리서 루에리가 타르라크의 이름을 불렀다. 타르라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이미 그렇게 살아가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내게”


“우리들은 이미 당신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우리들을 멈출 수 없지요.”

“무엇을 바래요?”


밀레시안이 물었다.


“아무것도.”


타르라크가 대답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약속합니다. 이 이상 나와 당신의 길이 겹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후회하지도 않을 겁니다. 나의 후회와 루에리의 절망은 이미 모두 당신에게 넘겨주었으니까.”


“나는..”


“살아가세요. 당신의 삶을 살아가세요 밀레시안. 당신이 이미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면,”

녹음된 목소리가 기억속에 사무친다.


[“계속해서 나아가도록 하세요”]

“계속해서 나아가도록 하세요”


그 이전의 세상속에는 우리가 남아있을테니. 

타르타크는 무너져나가는 벽을 무너트리며 나타난 검은 케리어에 올라타며 말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휘몰아치는 바람과 무너지는 벽의 잔해, 유리가 쏟아져내린다.

쨍강거리며 흩어지는 것이 기억인지 눈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불타오르고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죽음으로 도망치던가 이 모든것을 끌고 살아나가던가, 아니면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웅크린채 기다리던가. 무너지는 브류나크의 끝에서 밀레시안은 양손에 얼굴을 파묻은채 소원했다.

모두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얼굴을 감싸쥔 양 손이 실리엔의 연기에 절어 쓰게 느껴졌다. 

그러니 이 눈물은 더이상 슬픈것이 아니다. 그저 눈이 쓰라리기 때문에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밀레시안은 자신의 감정을 닫으며 속삭였다.


[“이 오랜시간동안 아무도 내가 있는 층에 도달하지 못하다니, 여흥이라 할 것도 없었군요.

이제 여기까지 입니다. 나는 이만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생존자 여러분들. 몸조심하시고 안전하게 내려가시길.”]



주인을 잃은 다우라가 깜빡거리던 불빛을 꺼트리는 순간,

어딘지 모를 먼 곳에서 보라빛 총성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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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비밀레) reload #10

마비노기/reload 2017. 12. 22. 17:35

[“마을사람들은 정말 진심으로 자신들이 아이를 지키고 있다고 믿고있었습니다.

아이가 아픈것은 마녀의 저주때문이라고 믿고있었습니다.

죽어가는 아이를 구해내기 위해, 어머니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다름아닌 외진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보라빛 로브를 입은 한 명의 여성이었다.

다른 엘프들이 황급히 그녀를 말리려하지만 카스타네아는 그들을 뿌리치고는 단호한 발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블랙레이븐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필리아의 친위대가 블랙레이븐을 가로막았다.


“물러서주십시오. 카스타네아님.”


“자네들이야말로 물러나게, 블랙레이븐.”

“카스타네아님,저들은신경쓰지마세요.”


“저희는 필리아 여러분을 염려하는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니, 더이상의 접근은 서로에게 좋지 못할 것 같습니다만,”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어 예기치 못한 화제를 불러왔다. 사람들이 수근거린다. 

역시 필리아와 연관이? 필리아가 여기 왔기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 아니야? 

저것 봐, 카스타네아야. 어째서 그녀가 여기에 와 있지? 그녀는 오늘, 탈틴에서 열리는 정기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있지 않았나? 안드라스는 뭘 하는거야? 이런 일은 빨리빨리 연락했어야지?! 잠깐, 그러면, 지금 카르펜 공주가 만나는 것은 누구란 말이야?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녀가 아닌 그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가면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뭐 그 다음 이야기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입니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약간의 각색을 더했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알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겠지요.”]


질문 대신 무언의 눈초리가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카스타네아는 얕게 한숨을 내쉰뒤 자세를 바르게 고친뒤 턱을 조금 더 높게 들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깊게 눌러쓴 후드의 가장자리를 쓸어내렸다. 

촛점을 알 수 없는 흐린 동공이 서늘하게 빛나는 가운데 그녀의 머리께에서도 가느다란 은빛 세공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주 얇은 선으로 아름답게 드리워진 티카나무 잎파리, 그녀의 머리장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는 일부 인사들은 그녀의 당당함에 눈쌀을 찌푸렸지만 표정이 어두운 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카스타네아가 단상 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면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야기가 지루했나요?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원래 이런식으로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에는 영 서툴러서 말입니다.

눈높이에 맞춰주라는 조언은 들었지만 역시 내키지 않네요. 

나는 원래 이렇게 친절하게 가르쳐주기보다는 좀더 이렇게 뭐랄까..


직접적으로.”]


검은 가면의 말에 맞춰 건물이 흔들렸다. 갈 곳 없는 불안감을 카스타네아에게 쏟아내려던 사람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의자밑으로 주저앉았다. 

테이블 아래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그자리에 꼼짝없이 얼어붙은채 의자를 붙잡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아우성을 쳤다. 시선은 요원들에게 향했다.

어떻게 좀 해보라고, 무엇이라도 해달라고, 그러기 위해 여기에 들어온 것 아니냐며 질책의 껍질을 뒤집어쓴 억지가 이어졌다.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의 의도는 100퍼센트로 맞아떨어졌다. 

방금전까지 전원이 내려가거나 문이 잠기는 것을 일부 퍼포먼스로 생각하던 사람들은 확실하게 퀘사르의 존재를 각인했다.

두려운 것, 무서운 것, 언젠가 흘려들었던 뜬소문들이 부풀어오르며 근거없는 불안감을 부추긴다.

혹 기억력이 좋은 몇몇 사람들은 검은 가면이 이야기한 옛날 이야기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제안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부를 향해 겨냥해진 가공의 이야기일뿐. 

검은 가면은 직접 그 제안에 대해 부정했다.  나른한 음성이 이어졌다.


[“생각할 시간을 주어주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심장은 여전히 그 성질 그대로 찬찬히 동화를 음미할 시간을 주라고 했지만 안타깝네요.

어차피 나는 생활에 찌든 골방 늙으니 같은 성미를 가져서 말이죠.”]


두번째 폭발. 요원들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수장식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테이블의 앞으로 뛰어나갔다. 

만찬이 가득 차려졌던 테이블이 쏟아지고 임시 벽이 되어 터져나오는 유리조각을 막아내었다. 

온전치 못한 원형의 바리게이트 넘어 일부 파편이 튀었지만 그대로 앉아있었더라면 일부 파편이 아닌 온전한 유리 장식 전체를 그들의 몸으로 받아내었어야 했을 것이다. 마치 저 테이블 처럼.


분수대에 너무 가까이 있었던 몇몇 테이블은 폭원의 가까이 있었던 탓인지 흠뻑 젖은것으로 모자라 검게 그을려져있었다. 물기어린 목재를 태우는 잔불씨에서 흐릿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날카롭게 깨어진 유리조각 사이를 살피던 요원중 한명이 비활성화된 폭탄으로 보이는 기묘한 물체를 하나 건져올렸다. 어슴프레 빛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붉은 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뒷전에서 다른 시스템을 만지고 있던 탈틴의 엔지니어들이 불려나왔다. 

함께 따라나온 멀린의 요원이 잽싸게 그 사이에 끼어들며 물고기의 배를 갈라내었다.


누군가 말릴 새도 없이 멀린의 요원은 작은 단추모양의 작은 폭탄을 꺼내들었다.

크기나 모양, 규격까지,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모범적인 소형 폭탄이었다.

하지만 폭발력은 직접 체험했다시피 상상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 

요원들의 시선이 배가 갈라진 물고기로 향했다. 실체를 확인하고 나서야 엉망이 된 수조 파편 속 반짝거리는 것들이 유리조각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수조속 물고기들은 바깥에 있는 큰  분수대와 연결된 통로로 들어오는 하나의 구조, 폭탄을 나르던 것이 수조속 물고기였다면 지금쯤 바깥의 상황은..

상황을 눈치챈 사람들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있을 즈음 검은 가면은 계속해서 말했다.

아니,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떠들고 있었다. 

마치 이쪽의 상황은 알바가 아니라는 듯이.




[“아..방금것은 신경쓰지 마세요. 그냥 수도관 몇몇곳이 터져나간것 뿐이니까요.

아- 혹시 여기 브류나크의 구조에 대해 잘 알고 계신 분이 있을까요? 있겠죠? 있을겁니다.

뭐 정확히 몰라도 대충 감이 잡힐겁니다.

하지만 쉿, 조용히. 당신의 진실이 때로는 다른이들을 공포로 몰아 넣을수도 있답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그들을 조롱하고 있었다.


[“어떻게 아냐고요? 그걸 위해 여기있는 우리 모두가 한번씩은 스스로의 이름을 포기했지 않았습니까.”]



“마지막 경고입니다 필리아. 다시 자리로 돌아가주십시오.”


“마지막 경고라고요? 마치 우리들을 강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말합니다?”


“개인적인 경호인력과 동행하는 것에 대해 동의한 것 만으로도 이 이상의 호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거 참 이상하군요. 이와같은 일이 벌어졌을때는 한 명이라도 더 유효한 전력이 남아있다는 것에 기뻐해야 할텐데.”


“협력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제 3자를 유효 하다고는 할 수는 없겠지.”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군요. 어차피 우리들은 제3자, 그래서 그렇게 총구를 들이대는 것도 꺼리지를 않는거로군요?”


결국 서로의 밑바닥을 살살 긁어내리던 신경전에서 먼저 끈을 놓은 것은 블랙레이븐이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해졌고 불안감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뉘어졌다.

한 쪽은 필리아를 비난하며 머물러 있겠다는 쪽. 다른 하나는 필리아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나가겠다는 쪽.

물고기폭탄에 의해 밖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속에서 관계자들은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한채 머무르는 쪽에 몸을 숨긴채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는 그것이 똑똑하다고 생각했고 누군가는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이야기했다.

블랙레이븐은 벌컥 화를 내며 필리아를 비난했다.


“이렇게 나오는 저의를 헤아릴 수가 없군요. 필리아. 눈앞에서 터진 폭탄때문이라면 몰라도 당신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것은 아직 첫번째 폭탄이 터지기도 전, 혹시 이 상황에 대해 뭔가를 아는 것이 있으신지요?”


“뭐라고요?”

“지금 무슨 말을 입에 담고 있는 건지 알고는 있는 겁니까?”


언성이 높아졌다. 새된 비명소리같은 반박에 사람들의 귀가 쏠려왔다. 

이봐, 무슨일이야. 방금 무슨 말이 오간거야? 필리아가 뭘 알고 있데? 무슨일이야? 

필리아? 블랙레이븐이 뭘 알고 있는 모양인데. 이봐, 무슨일인지 말 좀 해봐. 이봐.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근처에 있던 블랙레이븐을 잡아끌며 질문을 쏟아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요원들은 곤란한 표정으로 모른다는 대답만 반복할뿐.




지정된 구역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거세졌다.

아직 남은 폭탄이 얼마나 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속에서, 사람들은 발밑에서 꺠어지는 유리조각 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요원들이 있는 쪽으로 슬금슬금 손을 뻗어왔다.

멀린의 요원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상황을 살펴보았다.

멋대로 폭탄을 꺼내든 탓에 탈틴의 엔지니어들로 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던 그는 결국 엔지니어들의 압박에 이기지 못한채 수조에서 물러섰다.


멀린의 요원은 초조한듯 엄지손톱의 끝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짧게 깎인 손톱은 그의 버릇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차선책인것 같았지만 그는 끈질기게 짧은 손톱을 갉아내며 손끝을 상처입혔다.

톨비쉬는 기묘한 감각에 휩싸인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이와 같은 기분으로 누군가를 바라본 적이 있었는데..

톨비쉬가 잠시 넋을 놓고 서 있는 사이 근처에서 사람들과 실랑이를 하던 타라의 요원이 톨비쉬의 곁으로 다가왔다.

직접 걸어왔다기보다는 사람들의 등쌀에 떠밀려 물러선 정도의 접촉이었다. 

허둥거리던 타라는 톨비쉬의 팔꿈치를 툭하고 건드리며 난색이 되어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이상의 정보는 저도 정말 아는게 없는지라.. 아, 죄송합니다. 피오나.”

“아닙니다.”


톨비쉬는 잔뜩 당황한 타라의 요원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주었다. 

도망칠 곳을 찾던 타라의 요원은 재빨리 그 길을 따라 다른 타라의 요원들에게 합류했다. 

타라에서 온것같은 고위층의 손님들은 톨비쉬를 껄끄러운 얼굴로 바라보다 자리로 돌아갔다.

아마 자신들이 함부로 할 수 있는 타라나 탈틴이 아닌 다른 측의 요원과는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이럴때 킹과 연락 할 수 있다면 참 편리할텐데. 톨비쉬는 괜히 이질감이 느껴지는 팔꿈치를 감싸쥐며 고개를 돌렸다. 알게모르게 타라에 대해 빠삭한 그의 지식이라면 방금 과민하게 반응을 보인 몇몇 타라의 손님을 알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봐, 방금 그 폭발은 뭔가. 저들이 원한다고 말하는게 뭐지? 누가 배후인지 짐작이 가나? 

외부에서의 연락은? 에일레흐는 이에 대해 알고 있나? 

웅성거리는 소란속 흐릿하게 기억되는 몇가지 질문이 입안에 껄끄러운 가시처럼 자리잡았다. 

마치 삼키면 안되는 독가시와 같은 이질적인 질문들. 

필리아와 다른 의미로 그들은 폭발이후 예민하게 반응하며 코와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에일레흐는 이에 대해 알고 있나? 

그들이 알고 있는 무언가가 또다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촉발제가 될지도 모른다.

가면의 남자는 속삭인다. 우리들은 모두 한때 자기자신이기를 포기했던 시기가 있었다고.





[“자, 그럼 다시 묻도록하죠.”]


나지막하게 웃던 검은 가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말에 스스로 호응이라도 보내는 것 마냥 또다른 폭발음이 울려왔다. 

이번에는 윗쪽, 기이한 울림소리와 함께 조금은 작은 진동소리가 잦게 이어졌다.

사람들이 불안해 하며 주변을 둘러보지만 이번 폭발은 극장 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외부의, 요원들의 시선이 바쁘게 오고간다.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는지 몇몇 요원들이 드나들기를 반복했고 필리아는 이제 무기를 꺼내들 기세로 블랙레이븐을 압박해왔다. 

누군가 필리아를 비난했다. 그러고 보니 필리아는 전용기로 식 순서 직전에 도착했다지? 

그걸 타고 자기네들끼리만 홀라당 도망가려는거 아니야?!

예의를 접어버린 가시돋힌 목소리가 필리아를 향해 날아들었다. 

카스타네아는 그 많은 군중속에서도 정확하게 첫 발화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색을 가진 눈동자속에 담긴 열기가 낯설다. 카스타네아는 말한다.


“그렇다한들 당신과 무슨상관입니까.”


“뭐..?”


“당신의 말대로 필리아는 발레스와 에일레흐가 협의한 대로 이번 식에만 참가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에 대한 이동수단이나 참가시간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기는 조건으로 말이죠. 

그래서 당신 말대로 우리들은 이동수단이 있고 그걸 이용할 권리는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라는 것이죠?”


“이봐, 지금 그게 외교적으로 적절한 발언인가?”


그것은 분명 협박에 가까운 말투였다.

필리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전투 태세를 갖추며 카스타네아의 주변을 둘러쌌다.

블랙레이븐은 응전하면 안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고 벨바스트도 이건 아니라는 표정으로 탈틴과 타라를 바라보았다. 타라의 귀족들의 시선이 두 집단의 요원들에게 쏠렸다.

그와중에 태연하게 웃고 있는 목소리까지 끼어들었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진다


[“아 폭파는 계속 일어나니 신경쓰지 마세요. 제가 지금 일하는 중이라서 말이죠.

그럼..음, 내가 묻고싶은것은 말입니다.”]


“아니라면 무슨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정말 궁금해지는 군요. 

여기에 앉아있기를 바랍니까? 여기에 남아있기를 바라세요? 

여기에, 당신들과 함께, 사이좋게 둘러앉아 저 자들의 이야기를 계속 귀담아 듣기를 바랍니까? 

우리가? 필리아가? 꿈에서도 보고싶지 않은 저 저주받은 가면들을 눈앞에 두고?

아니면 천만분의 일의 확률로 아무런 연고는 커녕 호의조차 없을 몇몇 귀족분들을 선택해 편안한 좌석이라도 안내해 드릴까요?”


[“거기 도망쳐있는 옷가게의 생존자들. 당신들 중에 혹시 일행을 잃어버린 손님은 없습니까?

자신이 살기위해서 옆에있는 부상자를 못본채 지나간 사람은 없나요?

그 옆 매장에 웅크려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아직 살아있지만 회생할 가망이 없는 누군가를 외면한 적은 없습니까? 혹시 그사람이 당신을 구해주지는 않았나요?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를 들은적은 없습니까? 혹시 지금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없나요? 이 목소리나 방송을 듣지 않게 하라고 억지를 부리지는 않습니까?”]


“무슨 의리가 있어서요?”


고요해진 극장안, 카스타네아의 잔잔한 분노가 메아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를 방해하는 것은 단 하나, 처음부터 쉼없이 자신의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검은색 가면의 음성.

무관심하게 즉흥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만을 고집하는 것 같지만 두번째 폭파와 음성 사이에 기묘한 공백이 삽입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번째 폭파이후 잡담과 질문사이에도, 몇몇 요원들이 영상에 대해서 고개를 돌린 것은 그 공백의 이후였고 그 요원들 사이에는 톨비쉬의 시선도 끼여있었다. 

분명 소름끼치도록 이 상황에 잘 맞아 떨어지기는 하지만, 분명, 무언가 이질감이 있다.





“이질감..”


톨비쉬는 움켜쥐고 있었던 자신의 팔을 돌아보았다. 이질감, 이질감.  뭐더라 이 느낌을 뭐라고 하더라. 

톨비쉬는 간질거리는 생각의 꼬리를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굴리며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무엇을 생각하던 도중에 이런 느낌을 느꼈었지.

기억을 더듬었다. 머릿속의 시계가 거꾸로 되감겼다. 


카스타네아가 다시 뒤로 돌아서고 필리아가 무기를 집어 넣는 모습을 눈앞에 그려넣었다. 

몰려나왔던 사람들이 뒤로 물러서고 허둥지둥 앞으로 나왔던 타라와 탈틴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간다.

객빈들의 위치는 대부분 거기서 거기,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은 경호를 맡은 요원들의 모습뿐이었다. 톨비쉬는 되도록 한자리에 머무르며 그 모습을 모두 눈에 담으려 애를 쓰고 있었고 대신 다른 피오나의 두 요원이 현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누군가 톨비쉬의 시선을 빼았는다. 그의 앞으로 스쳐지나갔던 타라의 요원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피오나.”


타라의 요원은 다시 몸을 돌려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타라의 객빈들을 향해 다가갔다.

다시 기억을 더듬는다.


“아, 죄송합니다. 피오나.”


다시 기억을 더듬는다.


“아, 죄송합니다. 피오나.”




반복되는 기억속 톨비쉬의 시선이 타라의 요원에게서 떨어져 다른 곳으로 향했다.

흐릿하던 기억의 구역을 넓혀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보았다. 흑백으로 흐려진 기억속에 선명한 파란색 피어스를 달고 있는 요원이 한명 서 있었다.

짧은 엄지손가락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이상한 버릇을 가지고 있는 멀린의 요원.


검은 그림자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초조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는 멀린의 요원의 뒷통수를 후려갈겼다.


“그만 좀 씹으라니까!”

“...아, 생각중이었는데 때리면 어떻게 해!!”

“손톱 또 너덜너덜해졌잖아..!

“말로 해 말로! 이번 임무는 우리만 온 것도 아니잖아..!”


“어? 아.. 맞다. 아, 죄송합니다. 피오나.”


어리둥절한 인사에 넋을 잃고 있던 톨비쉬의 곁에서 누군가가 팔꿈치를 툭 건드려왔다.


“.....아,”


“뭐해요. 톨비쉬. 사람을 빤히 보고 있었으면 실례되는 행동이라면서요.”


검게 가려진, 하지만 분명 밀레시안의 목소리를 가진 그림자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톨비쉬는 어떨결에 고개를 돌려 멀린의 요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니, 그게. 나도 미안하게 되었군. 그러니까.. 피오나.”


“아핫, 진짜 어색하다. 외부에서 이렇게 다른 팀원을 만나니까 이상한 인사가 되어버리네요.”

“하하, 그렇게 되었군. 특히나 이렇게 갑자기 다른 팀의 임무지가 겹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아- 미리 말해두는데요.”


멀린의 요원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우리팀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회수하는 것 뿐이니까요. 남아있는 괴물이든 변종이든 뭘 마주쳐도  우린 도망만 칠거니까요?”]


“피오나?”


흑백의 세계에서 현재의 시간으로 걸어들어온 멀린의 요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이봐요, 당신. 괜찮은 겁니까?”

“그래, 이제야 기억나는군.”


톨비쉬가 멍하니 대답했다.


“기억나, 그때 한번 만났었지.”


톨비쉬의 대답에 멀린의 요원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톨비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안경의 잔상이 멀린의 요원의 얼굴을 가리다가 사라진다. 분위기도 인상도 완전히 바뀌었지만 분명 그때의 그, 요원이다.


톨비쉬는 과연, 물어볼법도 하지 라는 생각과 동시에 하지만 그정도로? 라는 의문을 동시에 떠올렸다. 

팔꿈치가 고통을 호소해왔다. 너무 꽉 붙잡은 탓인지 팔부근에 선명하게 주름이 잡혀져버렸다.

뭐해요, 톨비쉬.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붉은 불빛이 그를 나무라듯 반짝였다. 


톨비쉬는 바깥 사물함에 두고온 시계를 떠올리며 팔꿈치를 붙잡고 있던 손을 미끄러트렸다.

멀린의 요원의 습관이 손톱을 물어뜯는 것이라면 그의 습관은 손목을 두드리는 것이리라. 

톨비쉬는 괜히 와이셔츠 끝을 잡아당기며 시선을 돌렸다. 멀린의 요원이 그를 불렀다.


“이봐요.”


[“반면 왜 이런일이 일어났는지 묻는 사람은.. 많겠군요. 

어떻게 이 많은 인원이 이런 바보같은 가면을 뒤집어 쓰고 있는 건지 저 거적떼기 같은 로브는 무엇인지 묻는 사람도 있을겁니다.

왜 이런일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준비에 미흡한점은 없었는지 묻는 사람도 있는 것 같군요.

여기에는 제가 답하도록 하죠. 못막습니다. 지금 당신들의 수준으로는.


예상하지도 대비하지도 못할겁니다. 어째서냐고요? 

거기에 대한 답변은 이미 내어주었습니다. 내가 말했죠. 

당신의 현실은 정말 자신의 것이냐고요. 당신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당신이 선택한 그 세상이 맞습니까?”]


분명 이름모를 그 타라의 남자의 지적은 올바른 것이었다.

필리아에게는 이 상황에서 도망칠 이동수단이 있었고 실제로 이 곳을 나가게 된다면 그들이 향할 곳은 두말 할 것도 없이 그 곳이었다.

그럼 남은 이들은? 누군가는 그 뒤에 남아있을 수많은 인원들의 생명을 걱정하겠지만 그 또한 필리아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필리아는 물었다.

무슨 의리로, 무슨 명분이 있어서, 무슨 권리로 우리에게 동정이나 연민이라는 단어를 강제로 씌워내려 하는가.

약하지 않으면 강자, 강자가 아니면 약자. 그것은 오직 그들이 살아가는 에린에서만 통용되는것. 엄밀히 이야기하면 필리아는 이미 에린의 일부가 아니었다. 


바이브카흐에게서 돌아섰을 때무터 에일레흐는 가까이 할 수도 멀리 할 수도 없는 필리아를 껄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발레스는.. 첨언 할 것도 없는 적대성향을 드러내었다.

처음부터 에일레흐와 발레스는 브류나크의 시작에 그들을 초대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좁쌀만한 그릇안은 팽이처럼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돌아갔고 묵혀지고 썩어버린 고민은 얕은 꾀를 부린 결과지를 내어놓았다.

그들이 초대장을 보낸 것은 필리아의 카스타네아가 아닌 그 보조역을 맡고 있는 하겔.

하지만 하겔은 동시간대에 이루어지는 에일레흐-발레스-필리아, 이 상 세 도시간의 힐웬무장에 관한 협의를 나누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브류나크의 주역으로서 자리를 뜰 수 없는 크루크와 에후르 마퀼 2세는 자연스럽게 그 대리인으로 카르펜과 에레원을 지목했고 에레원은 자신의 보좌역으로 탈틴의 안드라스를 요청했다

하겔은 선택을 해야했다. 이대로 에린의 모든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유일하게 불참자의 목록에 이름을 올릴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의 흐름을 위해 힐웬을 포기하고 브류나크로 향해야 하는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협의의 장은 이미 그 자체로 덫의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아무리 전대에서 왕좌에서 내려오긴 했지만 에일레흐의 위세는 아직도 칼리번에 기대어 선채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에레원은 그 적통자, 카르펜 공주의 체면은 말 할것도 없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세 도시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만해도 별스러운 일인데 그 자리를 고작 파티에 참여하기 위해 바람맞추는 것은 분명 또다른 입김을 불러올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하겔이 협의장으로 향한뒤 대리인을 브류나크에 보내는 것 또한 초대장을 보낸 크루크와 에후르 마퀼2세를 무시하게 되는일.

카스타네아는 서늘한 눈을 깜빡이며 하겔의 초대장을 집어들었다.


“차라리 어디, 휴가라도 다녀오도록 하세요. 하겔.”


카스타네아는 초대장을 세로로 길게 말아 손톱끝으로 확실하게 눌러접으며 은색으로 빛나는 펜대를 바라보았다. 

책상위의 작은 문진 이외에도 이곳저곳, 카스타네아의 방안에는 자잘한 은색의 물체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카스타네아는 서랍장의 앞으로 다가갔다. 

안쪽 깊숙히 넣어져있던 작은 벨벳상자를 보며 칼처럼 접힌 초대장의 날을 날카롭게 갈아내었다.


“가서 어디하나 부러져서 오면 더 좋고.”


서늘하다 못해 독기가 어린 목소리에 하겔이 무표정하게 카스타네아를 바라보았다.

모래빛 눈동자가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눈이 감긴다.


“이거 참, 어깨가 무거운 일을 시키시는군요.”


결국 하겔은 브류나크와 힐웬의 협의장 모두를 불참했다.

이유는 휴가를 떠난 동안의 갑작스러운 부상. 어깨뼈가 심각하게 손상을 당한 그는 꼼짝없이 필리아에 머무르는 수 밖에 없었다.

에일레흐와 발레스는 모두 핑계일뿐 아니라며 질책했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내지도 못할 노릇이었다.


필리아는 침착하게 양해를 구한뒤 양 측모두 적절한 대리인을 보낼 것이라고 통보했다.

협의장에 나타난 것은 그라나트. 친위대의 글라니테스도 아닌 이제 막 필리아 물류회에 이름을 올린 젊은 임원의 등장에 에레원은 대놓고 인상을 찡그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어디 한번 해보라는 카르펜의 도발과 달리 그라나트는 자리에 앉기도 전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한뒤 그동안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광물들의 이동 물량에 대해 서두를 던지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론 각자가 준비해온 힐웬에 대한 자료들이 각자의 테이블 앞에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중 어느것도 필리아가 제시한 주석의 숫자나 아연, 니켈, 에메랄드 코어의 숫자들과 맞지 않았다. 


일반적인 힐웬이라면 웃어넘길 자료들이지만 대상은 힐웬이 아닌 고강도로 합성된 힐웬 합금을 가리키는 쟤료들이었다. 그라나트가 가져온 자료는 불필요할 정도로 자세했지만 동시에 정확했다.

진짜용도가 무엇이 되었건 누가 그 일을 주도하고 있건 에메랄드 코어가 어디로 배송되는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필리아였다. 불신의 침묵이 테이블에 내려앉았다. 

느긋하게 테이블 앞에 착석한 그라나트는 나지막이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하, 종이가 마음처럼 안넘어가네요. 탈틴은 생각보다 습한 편이로군요. 그럼 협의를 나눠보도록 할까요?”





그들은 처음 부터 그랬다. 처음부터 우리들을 업신여겼고 처음부터 우리들을 골칫덩이로여겼다.

무례했고, 부당했다. 그래서 항의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를 그들은 곤란하다는 말로 어물쩍 떠넘기려했다.


“이러면 곤란합니다. 필리아.”


“곤란한건 당신네들 사정이죠. 당신들이 우리 체면치레를 신경쓰지 않는다면, 우리들도 당신네 사정에는 관심 없어요.”


“이러면 정말..”


“다른 객빈들은 뭘하고 있죠? 주최자는 뭘 하고 있고요? 애초에, 저 안에 지금 불은 켜져 있습니까? 

누군가 들어가는 있는건가요? 설마 우리더러 그 잘난 마이크 테스트 하는 음량을 청취해달라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잘들어요 블랙레이븐, 우리는 당신네들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도 아니고 에일레흐가 빌려온 애완용 고양이도 아닙니다. 주최자도 도착하지 않은 회의장 안에 이렇게 도둑처럼 숨어들어가지 않을거라고요.”


“......그흐.., 알겠습니다. 잠시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카스타네아는 씨근덕 거리는 젊은 친위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통신을 취하는 블랙레이븐을 보며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던 엘프는 잠시 표정을 누그러트리며 카스타네아를 돌아보았다. 저 열심히 할께요. 저희도 열심히 카스타네아님을 지킬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가는 것은 겁나고 안에 있는 것은 괜찮고, 하지만 누군가 혼자 탈출하는 것은 배아프다는 겁니까?”


“이보시오, 카스타네아..! 말이 심하지 않소..!”


[“일찍이 칼리번이 태어나고나서 너희들은 수많은 꿈을 반복했습니다.

한때는 하늘을 나는 것을 꿈꾸었고 또 한때는 바다를 나아가는것에 집중했습니다. 

사람의 가능성에 몰두한적도 있었고 물질의 풍요로움에만 촛점을 맞췄던 떄가 있었습니다.


하나의 꿈이 선택될 때마다 수십 수백가지의 가능성이 잘려나가며 한가지 길로 고정되었지만 너희들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살아왔습니다.”]


“우리 필리아가 보기엔 나갈생각도 없이 저 사기꾼들의 방송을 귀담아 듣는 당신들이 더 이상하게 보일 지경입니다.  그 누구도..! 이곳을 벗어나려하지 않고 그 누구도 저치들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는군요. 안그렇습니까? 페이단?”


[“몇몇은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중 대부분은 그 사실을 외면해왔습니다. 

이미 편한 길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모험을 하지 않고 평온함에 안주했습니다. 누군가가 해결해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에 그쳤으면 좋았을텐데 당신들은 옳은 것 까지 추구하려 애를 썼습니다.

명분만이 주어지면 이전의 꿈을 부정하며 자신의 잣대에서 벗어나려는 자들을 지워냈습니다.

뭐든 좋습니다. 뭐가 되었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다시한번 폭발음이 울렸다. 이번엔 가깝다. 

조명이 깜빡거리며 잠시동안 극장안이 어둠속에 잠겨들었지만 카스타네아는 그자리에 꿋꿋이 버티고 선 채 이를 악물었다. 

결국 몇개인가 조명장치가 떨어지며 식장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누군가가 쓰러졌고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폭탄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피냄새가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공포, 두려움, 침묵이 아닌 모든 소리가 폭음속에 빽뺵하게 들어차며 극장 안을 혼란스럽게 어지럽혔다.


[“만약 그 꿈이 잘못된 길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너희들이 치닫는 그 선택이 악몽으로 향하는 길이라면 어떨까요?”]







혼란을 틈 타 필리아의 친위대가 움직였다.

문이 열리고 카스타네아들이 사라졌지만 아무도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저지 할 수 없었다. 

아수라장이 된 극장 안, 카스타네아는 빠른 속도로 두개의 문을 지나 마지막 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잠겨진 문앞에 누군지 모를 퀘사르가 서 있었다. 


두어명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지만 어두운 탓에 어느 소속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퀘사르의 귓가에서 통신기가 반짝였다. 카스타네아는 퀘사르가 건내주는 통신기를 귀에 걸쳤다. 

통로를 따라 멀리서 울려오는 방송 소리가 울려왔다. 필리아가 사라진 것을 눈치챈 블랙레이븐이 그 뒤를 따라 복도를 향해 뛰어들어왔다.


[“때문에 우리들은 이미 한번 칼리번을 지워냈습니다. 

꿈을 꾼다는 명제 자체를 지우고 악몽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언젠가 너희 스스로가 잠에서 깨어나기만을 기다려왔습니다.

걷기도 전에 뛰려하는 너희들이 네발로 기는 단계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참을성있게 기다려왔습니다.”]


“이 문 열어요. 퀘사르.”


카스타네아가 빠르게 속삭였다


“어차피 이번도 똑같은거 아닌가요? 


퀘사르든, 칼리번이든. 모두 다 같은 원통안에 엉켜있는 독전갈들.

어차피 우리들의 이름은 또다시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우리들의 아이들은 똑같은 인형극을 반복할 생각이겠죠. 

반과 포보르때와 같이 바이브카흐와 아발론때와 같이. 이게 당신들이 원하는것 아닌가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칼리번도 한번 죽은 것으로 경험이 되었는지 이번에는 허튼 짓들 좀 덜하더군요. 

하지만 또다시, 이번에는 다른 반쪽짜리가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하더니 우리들이 구원한..아, 이건 이쪽의 이야기. 

진심이 새어나와 버렸네요.


하지만 뭐 이젠 상관 없습니다. 우리들의 무대는 여기서 끝이니까요.

지금까지 몇개가 터졌지..? 아.. 방금 것이 4개째네요. 미안합니다. 말이 길어지다보니 본업을 잊어버리고 말았네요.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있었던 탓인지 시간감각이 애매해져서 말이죠.”]


이중으로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카스타네아의 인상을 더욱 찡그리도록 만들었다.

요란한 문소리와 함께 총성이 들려왔다. 검은 가면이 두번째 문을 걸어잠근 모양이었다.

블랙레이븐은 다급하게 문을 걷어찼지만 문은 굳게 닫힌 뒤, 분명 아까까지는 두번째 문까지 통행이 가능했다고 말하는 탈틴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듀얼건으로 잠금쇠를 겨냥해서 쏴보지만 그렇게 열릴 문이었으면 이미 한참 전에 탈출했을 터였다.


[“아무튼 준비된 이야기는 이게 끝입니다. 더이상 들려주거나 물어야할 질문지는 남아있지 않네요”]


[“분명 당신들을 이용할 생각은 있었습니다만.. 뭐 지금은 배역을 좀 바꿔야 하겠군요.

당신의 결단만큼이나 이쪽도 상황이 변했습니다.


예전방식 그대로 칼리번의 흉내를 내 보면서 상황을 미리내다보는 척을 해봤지만, 

아무래도 인간의 계산인지라 그때처럼 명확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는군요.”]


“난 너따위를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린게 아니야.”


[“그렇겠죠. 그리고 그래야하지요.”]


[“그러니 여러분, 지금까지 꽤 길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상상이상으로 지루했고요.

멍청하게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당신들과 달리 나는 지금쯤 원하는 것을 찾고 이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의자가 삐걱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이 옮겨지는 소리, 바람의 소리

녹음된 음성에 잡다한 환경의 소리가 스며들어왔다


[“우리들도 너희들을 위해 이 바보같은 연극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남자의 말을 마지막으로 미동없이 멈춰서 있었던 퀘사르가 움직였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은 카스타네아. 친위대는 망설임없이 카스타네아를 끌어당기며 퀘사르를 막아섰다.

총성이 울린다. 가장 앞서 뛰어나갔던 친위대가 한 명 쓰러지고 그녀를 엄호하던 또다른 엘프도 쓰러졌다. 


카스타네아의 귀에 걸려있던 통신기가 떨어졌다. 비명이 울린다.

혼란스러운 발자국속 통신기가 박살이 나며 높은 비음을 울렸다.

검은 가면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이어폰을 빼내었다.


소리없는 카메라 속 번쩍이는 실리엔의 빛이 점멸한다. 

순식간에 엘프 3명을 해치운 퀘사르가 카스타네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카스타네아가 품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침묵속의 엘프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한 명, 또 한명 좁은 길목에서 날뛰는 퀘사르와 자신들의 수장을 지켜야하는 필리아의 친위대가 한데 엉켜 빛을 발산한다.

유난히 커다란 총성과 함께 보라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문이 열리고 뒤에 머물러 있어야 했던 블랙레이븐과 다른 에이전시의 요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피비린내와 기묘한 보라빛 실리엔의 연기가 감도는 좁은 통로안 자리에 주저앉은 카스타네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카스타네아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거울같이 푸르던 눈동자위로 검은 물방울이 번져나갔다.


손안에 쥐어진 듀얼건이 뜨거웠다. 

어두운 극장 통로속으로 어둠의 무게를 더하는 숨소리가 무너져 내렸다.검은 총 위로 드리워지는 연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을 기억 저편의 불빛속, 어린 엘프의 목소리가 속삭여왔다.


그러니까 카스타네아님. 


카스타네아를 향해 휘둘러지던 나이프는 그녀의 털끝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멈춰섰다.

겨낭을 잘못하거나 힘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등을 뚫고 나온 날이 너무 길어, 가슴의 꽂힌 자루의 끝이 보이지를 않았다.

다만 꿰뚫은 것이 그녀가 아니었을뿐.


반대편 문이 보일정도로 머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퀘사르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눈을 감지 못한 친위대의 몸 또한 반대편으로 쓰러졌다.

비명을 지르지 못해 입을 벌렸다. 


그렇게 괴로운 표정하지 말아주세요.


매마른 숨결속에 지독한 사막의 향기가 섞여있었다.

정신을 흐트러트리고 괴로움을 잊으라 속삭이지만 이미 그녀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은빛의 연기가 사슬이 되어 그녀의 정신을 옮아매었고 지독하리만치 선명한 현실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너의 선택, 너의 결과, 네 오기가 불러들인 또하나의 미래.


바이브카흐는 속삭였다. 그러니까, 일찌감치 우리말을 들으면 좋았잖아요.

복종하라, 믿고 따르라. 아무것도 보지말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저 그녀들이, 칼리번이 이르는 대로 믿고 행하라.


카스타네아는 넘어갈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쳐야해..”


불투명한 눈동자 위로 맑은 눈물이 흘러넘친다.

카스타네아가 아무리 적대성향이라 할지라도 한 도시의 수장, 

카스타네아의 안전을 살피던 블랙레이븐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악몽속에서.., 또 다시 도망쳐야만 해..”


넋이 나간 중얼거림에 블랙레이븐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누군가가 그녀의 명령에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 이봐, 뭐하는거야?”


조명이 어두운 어둠속이여서 그런것일까 쓰러진 퀘사르를 살피던 블랙레이븐 몇명이 유난히 검은 자위가 커 보이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다른 동료들의 만류에도 두 블랙레이븐은 카스타네아를 부축해 일으키며 문을 향해 다가갔다.

상관으로 보이는 블랙레이븐이 그들을 말리려 했지만 이미 카스타네아는 문 앞까지 다가간 뒤였다.


문이열린다. 

어두운 통로로 빛이 비쳐들어오고 나서야 카스타네아를 부축한 블랙레이븐 두명이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블랙레이븐이 두 요원이 멱살을 잡힌채 극장 안쪽으로 끌려들어갔다. 

요원들끼리 실랑이가 벌어지는 동안 카스타네아는 열린 문너머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무너진 아본의 다리들과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검은 괴한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요원들과 아직도 그녀를 돌아보는 하얀색 가면의 무리들.


카스타네아는 천천히 검은 별을 들어올려 퀘사르를 겨냥했다. 

보라색 흉흉한 실리엔이 빛을 발한다. 

고대의 실리엔으로 만들어진 마력탄을 발견한 퀘사르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넓히며 극장으로 부터 멀어져갔다.

퀘사르와 대치중이던 요원들이 극장 한켠에서 빛나는 보라색 빛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눈이 깜빡여진다. 불빛이 점멸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검은 가면의 방송이 뒤늦게 이어져나왔다.


[“이 오랜시간동안 아무도 내가 있는 층에 도달하지 못하다니, 여흥이라 할 것도 없었군요.

이제 여기까지 입니다. 나는 이만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생존자 여러분들. 몸조심하시고 안전하게 내려가시길.”]




보라빛 총성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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