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톨비밀레) reload #5(3)
“그거 프로포즈?”
“역시 그렇게 들리지?”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톨비쉬의 전언에 킹과 룩이 동시에 의자를 기울이며 톨비쉬를 돌아보았다.
이럴때는 참 꿍짝이 잘맞는데 말이지. 톨비쉬는 뻐근해진 어깨를 앞뒤로 돌리며 냉장고를 향해 걸어갔다.
이름표가 붙어있는 맥주캔이 7개, 톨비쉬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두개의 캔을 꺼내들며 성의없이 대답했다.
넥타이가 거슬렸다.
“그렇게 들린다면 그런모양이지”
베베꼬여있는 정보계의 감상따위 이해할 수가 있을까.
톨비쉬의 무성의한 대답에 룩은 한층 높인 가성과 함께 양뺨을 살짝 감싸잡았다.
“어머어머어머, 우리 지금 헤드헌터 들어온거야?”
“아니지, 나는 헤드헌팅, 너는 테일헌팅”
“어머어머어머, 이렇게 작은데? 이렇게 쬐끄만데? 우리팀 용가리는 머리가 이-렇-게 작아서 어따쓴다니?”
“너 잡는데. 네놈 잡은데 쓴다, 이자식아.”
섬광이 튀어올랐다. 킹은 시험작이었던 나이프을 휘둘렀고 룩은 강화중이던 간이 실드를 펼쳐들었다.
파지직 거리며 튀어오르는 스파크는 둘째치고 이동모드로 되어있던 룩의 의자가 빠른속도로 미끄러지며 거실 반대편으로 밀려나갔다.
원흉끼리 떨어지는 것으로 일단락되는가 싶었지만 이 속력을 기다렸다는 외침과 함께 룩이 자세를 전환, 반대편 벽을 발로 걷어차며 원하던 속도를 얻은 룩이 힘차게 기술명을 외치며 킹에게 달려들었다.
가속을 받은 방패의 모양이 재 구성되며 유선형의 모양으로 변경되었다.
“먹어라 돌진..!”
“나 지금 인두잡고 있는데?”
“헉 안돼, 기스나면 안돼..!!”
룩은 급하게 의자를 멈춰세웠고 킹은 아깝다는 표정으로 인두를 내려놓았다.
룩은 우는 소리를 길게 내며 실드를 접어넣었다.
“인두는 살인미수야! 이 아이는 아직 출품신고도 못했는데!!”
“그러면 괜찮지 않을까? 아직 비공식이면 아슬아슬하게 허가범위가 아닐까?”
새파랗게 질린 룩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킹이 빙글거리며 인두를 내려놓았다.
헤치는 대상이 사람인지 물건인지 알송달송한 대화가 퍽이나 멍청하게 느껴졌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일에 익숙해진 미스터 융통라인은 엄중하게 손날을 세워 왼편의 의자를 밀어내었다. 환호성과 납득할 수 없다는 비명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일단 나이프에서 전기 튈 때부터 이미 아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 놈 실드 폼 못봤냐?! 진짜 달려들 생각이었다고?!”
“신고 이전 제품이기 때문에 변형된 폼에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문의해주십시오.”
“오예!!”
“오예가 아니지?!”
“신고 이전 제품이기 때문에 변형된 폼에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문의해주십시오.”
톨비쉬는 들고있던 맥주캔을 마이크 삼아 자동응답기마냥 대답하기를 반복했다.
킹은 억울하다는듯이 손모양을 꿈틀거리며 허공을 움켜쥐었지만 글러브도 끼지 않은 제스쳐를 인식할리 없었다.
끄으윽거리며 주먹을 움켜쥐던 킹이 한숨으로 말을 삼켰다. 나이가 한살이라도 많은 자신이 참겠다는 태도였다.
룩이 다시한번 양손을 힘차게 뻗어올리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트레이닝실에서 나오던 퀸은 안봐도 뻔하다는 얼굴로 톨비쉬들을 바라보았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킹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잘 참았어. 이제 꼬맹이장단에 휘둘릴 나이는 지났지?”
“그렇지. 이제 앞자리가 바뀐이 얼마 안되었다는 변명 효력이 떨어져가고 있으니까. 반은 정말 아니잖아, 반은.”
오른쪽을 차지하고 들어온 톨비쉬와 함께 왼쪽도 가로막힌 킹이 의자위로 다리를 끌어모아 올렸다.
인내와 심기는 다른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 있다는 웅얼거림과 함께 목울대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니들도 곧이야. 사람가는데 순서없다는 것만 알아둬.”
“그건 아니지, 보내버리면 안 바뀌는 거니까...”
그 소란속에서도 느긋하게 누워있던 비숍이 침묵을 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파뒤에 감쪽같이 누워 맥주만 들이키던 비숍은 비어버린 한쪽팔을 소파에 걸치며 까치집이된 더벅머리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비어있는 손이 소파 뒷편으로 흘러내렸다. 까딱까닥 하는 폼이 뭔가를 원하는 모양이었다.
“여기”
톨비쉬가 들고있던 다른하나의 맥주캔을 던져주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와중에도 뒷통수에 날아들어오는 맥주캔은 어찌 그리 잘 알아채는 건지, 비숍은 가볍게 캔을 잡아내어 머리 위로 캔을 들어보였다.
경쾌한 탄산소리와 함께 비숍의 목울대가 꿀렁거리고 있었다.
단번에 반을 캔은 한결 가벼워진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아침에 깨끗하게 치워놓고 나갔던 테이블 위에는 높디 높은 캔맥주의 탑이 쌓여져 있었다.
바람이라도 불면 그대로 흐드러질 것같은 아슬아슬한 첨탑, 비숍은 7번째 캔을 어떻게 올릴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역시 최연장자! 지혜의 깊이가 다른 연륜의 조언이네..!”
“......”
룩이 깨방정을 떨며 양 손으로 손가락 총을 만들어 비숍을 가리켰다.
아부라고 하기엔 조준점이 저멀리 빗나가버린 칭찬이었다.
분위기가 잠시 차가워졌지만 비숍은 매마른 웃음소리를 한번 흘려주고는 들고있던 캔을 입으로 가져가며 스르륵 소파아래로 흘러내렸다.
원하던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이상 끼고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은근슬쩍 바보들의 행진속에서 이탈하는 비숍의 노련함에 킹이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는 눈앞의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는 표정이었다.
“웃으면 되는걸까? 웃으면 되는 거야? 아무리 홧병이 날 것같아도 웃어넘기면 되는걸까?”
“아직 4년은 더 화내도 괜찮아.”
“4년뒤부터는? 그때부터는 웃어야 하는걸까?”
퀸은 한번 빠진 머리카락은 칼리번도 구해줄수 없다고 엄중하게 경고하며 방치되어있던 킹의 화면을 끌어당겼다.
청색으로 뒤덮여있던 나이프의 단면도가 사라지며 가라앉아 있던 검은 화면이 떠올랐다.
아본의 조감도와 브류나크의 정면도 옆으로 6개의 체스말이 떠올랐다.
반투명한 화면에 가려졌지만 톨비쉬는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킹의 손아귀가 슬쩍 벌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죽은 모근을 되살릴수 없다는 것 뿐이지 여타 다른방법은 아주 많이 마련되어 있다는게 좀 더 정확한 진실, 하지만 킹은 손바닥으로 옆머리를 꾹꾹 누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단장의 헤어스타일은 싫어”
단장이라는 말에 톨비쉬들은 아- 하는 탄성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모자로 가리고 있지만 알아챌 수밖에 없는 진실, 사실 본인이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거 아닌가싶을정도로 단장은 자신의 외형이나 일상도구에 대해 고리타분한 기준을 준수하고 있었다.
이제는 보기힘든 기름이 든 라이터라던가 가끔 편지를 부엉이따위로 날려보낸다던가. 그러면서 새로운 기기에 대해 잘 모르는건가 싶으면 또 그건 아닌 것인지 요원들이 시험삼아 만들어온 물건들도 곧 잘 능숙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다못해 지금은 듀얼건을 직접 지도하고 있지 않은가. 톨비쉬는 문득 시간을 떠올리며 시계를 확인했다. 트레이닝 시간이 한참 지난것 같은데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톨비쉬가 2층의 복도를 두리번거리는 동안 티비가 잠시 지직거리는 소음을 낸 뒤 정상의 상태로 돌아왔다.
비숍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채널을 돌리다가 룩들을 돌아보았다.
퀸과 함께 숨죽여 웃고있던 룩이 말안해도 안다는듯 어깨를 으쓱 들어올려보였다.
“아, 그거 아-무 이상도 없는데 가끔 그러더라. 방법이 없어”
“멀쩡한거야. 전에 한번 다같이 모였을때 회의주제로도 올려봤는데 원인 불명이야”
다 같이? 모였다고? 농담이지? 세 사람의 목소리가 다중 합창처럼 서로다른 타이밍에 시작해 한 지점에서 끝을 맺었다. 말도 말라는 건지 손을 휘휘 내젓는 킹의 표정이 설명을 대신하고 있었다.
“뭐라그랬었지? 10명이 모이면 8명이 사라진다고 했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 49명이 나타나는것보다 훨씬 더 마음 편하겠어.”
“평소의 이미지로는 49명쪽이 훨씬 현실감이 있는데”
“헛소리말고 시계나 내놔”
킹의 재촉에 톨비쉬가 왼손을 내밀었다. 시계를 찬 손이 화면에 닿자 아날로그식으로 째깍거리던 시계가 흐려지고 배경속 나이트의 체스말이 바닥면부터 천천히 하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오늘 있었던 회의의 결과를 업데이트 하는 동안 꼼짝없이 한 손이 묶여있게 된 톨비쉬는 아쉽다는 눈으로 맥주캔을 내려다보았다. 룩이 톨비쉬의 캔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보니 폰이 아직 안돌아온 것 같은데..”
“어.. 그러고 보니까 아직도 안돌아왔네?”
룩은 따개를 열어젖힌 맥주캔을 되돌려주었다.
톨비쉬가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며 맥주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한모금을 마시기도 전에 화면을 뚫고 불쑥 튀어나온 오른손이 톨비쉬의 맥주를 강탈,
한순간이나마 허를 찔린 톨비쉬가 진심으로 짜증을 내며 불투명해진 검은 화면을 노려보았다.
스쳐지나간 범인의 오른 손목의 특징은 톨비쉬와 같은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는 것.
톨비쉬는 시계속에 검은색 킹의 체스말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한사람을 노려보았다.
잠깐 스쳐지나간 디지털 시계속 화면에는 여러개의 알람과 메세지표시가 점멸하고 있었다.
벌써 다음버전인건가? 톨비쉬는 하얗게 변한 나이트가 다시 검게 칠해지는 것을 확인했다.
막 따자마자 빼앗긴 캔맥주는 어쩐지 한김 미지근해진 맛이라는 혹평과 함께 머리위로 들어올려졌다.
범행을 방관하고 있던 왼쪽의 보호자가 남은 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내꺼 줄테니까 눈에 힘풀어”
“안마셔. 안 마시고 다른값으로 청구할거다.”
“네에-네에-. 폰을 찾아오라 이거지?”
“그럼 나도! 나도 도전이야!”
“네이-네이-, 마음대로 해라”
킹은 안들어도 알만하다면서 내팽겨쳐져 있던 글러브를 끌어당겼다.
톨비쉬가 손을 대고 있는 큰 화면 대신 작은 화면을 꺼내들고 몇번을 까딱이자 금세 밀레시안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아무리 직장내 스캔이라지만 정말 너무하다 싶은 속도였다.
룩이 질렸다는 표정과 함께 킹의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룩의 화면도 일단 동일한 화면속 위치는 띄워놓긴 했지만 영상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들이었다.
킹은 보안용 카메라를, 룩은 엑세스된 보안기록의 흔적을, 룩은 고개를 설래설래 내저었다.
“질렸다.. 이래서는 빼도박도 못하게 범죄형이잖아.”
“어허, 왕도와 범죄는 원래 한끗차이라는거 모르나.”
킹이 자신의 화면을 톨비쉬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순순히 넘겨줄리가 없지.
톨비쉬는 패턴을 파악하고 있다는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아니나다를까 맥주 한캔에 너무 비싼 인력을 부려먹은거 아니냐는 거드름과 함께 실시간으로 재생되던 화면에 사진처럼 정지되었다.
살살 웃으며 톨비쉬의 옆구리를 찌르는 폼이 퍽이나 익숙해보이는 일련의 흐름이었다.
행동과 마음가짐, 그리고 결과물까지. 차라리 이정도면 범죄의 경계로 넘어가주는 것이 마음에 편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차라리 범죄영역이라면 깔끔하게 저쪽에 넘겨버릴텐데.
톨비쉬는 나지막히 속마음을 흘리며 화면을 끌어당겼다.
의도된 혼잣말은 마법의 주문처럼 얼어붙은 화면을 녹여내었고 킹의 입은 한사발 부루퉁하게 내밀어졌다.
7년지기 새파랗게 어린놈을애지중지 키워봤자 세상 쓸모없다.
큰 화면속 회의내용을 읽고있던 퀸이 한쪽 손을 내려 머리를 쓰다듬어왔다.
“아 범죄라고 하니까 생각났는데. 아까 말한 49개 접속기록말이야. 그거 사실 킹이 만든 더미 아이디 로그아웃하는걸 잊은거였..!”
쓸모없는 거라면 룩의 눈치가 더 쓸모없지 않을까.
갑작스러운 폭로를 막기 위해 데이터소거보다 빠른 발놀림이 룩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평소에도 저 반만큼의 행동력으로 스트레스를 발산한다면 이 성질머리가 좀 덜하지 않았까 싶은 매섭고도 강렬한 한방이었다.
인두로부터 실드를 지키기위해 의자를 고정시켜놓았던 룩은 100%의 데미지를 그대로 다리뼈 두가닥에 받아내며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부산스럽게 깽깽이를 뛰는 룩을 피해 톨비쉬가 자리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한쪽손을 화면에 고정하고 있던 탓에 자세가 어중간해진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이 화면속 밀레시안에게 박혀있는 표정이 사뭇 진지했던 탓에 킹은 쓴웃음을 지으며 글러브를 벗어던졌다.
아무렇게나 내던진 글러브가 아직 꺼지지 않은 인두를 치고 미끄러졌지만 네사람중 아무도 글러브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킹이 글러브를 아무데나 던져놓는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고 그렇게 갈아치운 글러브도 한두벌이 아니었다.
킹은 옆머리를 벅벅 긁으며 퀸이 들고있던 화면을 살펴보았다. 시계속 체스말이 모두 까맣게 물들어있었다.
“오케이, 이제 손 때도 좋아.”
톨비쉬가 왼손을 털어내며 팔을 거두어들였다.
밀레시안이 앉아있는 장소는 예의 그 카페테리아의 좌석으로 옆자리에는 누군가의 음료수 잔이 놓여져 있었다.
개인면담이 있다는 소리는 들은적이 없었는데.., 톨비쉬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룩이 불쑥 머리를 집어넣으며 톨비쉬의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자세가 기울어진 탓에 생각의 흐름이 끊겨버린 톨비쉬가 눈쌀을 찌푸렸다.
룩은 베시시 웃으며 양손을 모아보이고는 최대한 간드러진 목소리로 늘상 하던 변명을 늘어놓았다.
“알잖아. 궁금한건 참기 힘들다는거.. ”
“그럼 그럼.”
킹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닌척 하고 있지만 큰화면을 양손에 들고 회의의 내용을 읽고있던 퀸도 꽤나 관심이 있었는지 중간중간 눈을 돌려 작은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파너머에서 비숍이 팔걸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도.”
톨비쉬는 귀찮다는 얼굴로 룩에게 팔을 빼내었지만 다른 한손으로는 작은 화면을 흔들고 있었다.
소파를 향해 흔들어진 화면이 비워지고 한참 비숍이 빠져있던 일일드라마의 재방송이 사라졌다.
잠시 검게 변한 티비 화면위로 카페테리아의 전경이 떠올랐다.
톨비쉬들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메뉴가 나왔던 것인지 자리를 비웠던 음료수잔의 주인이 새로운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가지고 자리에 돌아오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상대는 피오나의 단장, 익숙한 빵모자의 등장에 룩이 다시 입을 열었다.
“킹도 이 참에 모자를 하나 구입해보는건?”
안타깝게도, 발이 닿지 않는 거리였다.
킹은 접어넣었던 나이프을 펼쳐들며 톨비쉬를 올려다보았다.
퀸이 나이프을 빼앗기 위해 잠시 시선을 뗀 사이 커다란 화면에 잠시 노이즈가 흔들리다 사라졌다. 좌우로 흔들리는 신호장애가 아닌 위아래로 파형이 흔들리는 기묘한 노이즈였지만 5명중 아무도 화면의 이변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무장해제를 당한 킹이 정당한 권리를 요청해왔다.
“이건 정당방위지? 정당방위인거지? 정당방위라고 해줘!!”
“어...아… 음, 그래. 오늘자 미스터 융통성의 영업시간이 끝났다는걸로.”
너희들끼리 알아서하라는 말을 남긴채 톨비쉬가 소파쪽으로 걸어나갔다.
단장은 밀레시안의 옆자리에 앉아 자신의 몫의 간식을 나눠주었다.
카메라를 등지고 앉은 탓에 입술의 움직임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좋아한다는 것 이였지만 창문에서 조차 입술의 형태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밀레시안은 간식을 먹느라 쉴새없이 턱을 움직이고 있었고 단장은 턱을 괴고 앉은 탓에 볼과 입꼬리가 눌려있었다.
본능이라고 해야할까, 톨비쉬는 알 수 없는 기시감에 휩싸인채 소파에 기대어섰다.
화면속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는지 비숍이 고개를 들어 톨비쉬를 올려다보았다.
소리없이 입술이 달싹여졌다. 비숍은 말없이 시선을 티비로 돌렸다.
“오디오가 없으니까 무슨 대화인지 모르겠네…, 나이트, 무슨대화가 오가고 있는거야?”
“......”
톨비쉬의 대답대신 퀸이 손가락이 들어올려보였다.
길게 뻗은 검지손가락은 내쉬어지는 얕은 한숨을 두갈래로 흩어내며 낮은 바람소리를 내리눌렀다.
고요하게, 침묵을 강요하는 소리없는 의지가 방안을 휘감고 있었다.
톨비쉬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화면속 옅은 창그림자에 집중했다. 책상에 기대어 티비화면과 톨비쉬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킹이 작은 전기적 소음에 고개를 돌렸다.
방금 쓰고 벗어놓았던 글러브 위로 램프들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분명 벗는 즉시 대기모드로 돌아가게 설정해 놓았는데? 킹이 글러브를 집어들었다.
철컥이는 소음에 룩의 시선이 킹에게로 향했다.
‘...럼...이야기로...가자’
화면속 대화를 추측하는 것은 순전히 운에 달린 일이었다.
톨비쉬는 기억속에 남아있는 단장의 입모양을 최대한 떠올리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이야기라는 말을 즐겨쓰는 단장의 입버릇만이 유일하게 제대로 읽어낸 단어였지만 사실 그것도 반쯤 때려맞춘 추측에 가까웠다.
밀레시안이 시선을 돌려 단장을 바라보았다. 포크가 케이크를 떠내고 있었다.
‘..과의….활….떠니..’
짧은 질문이었는지 밀레시안은 곧장 입술이 움직였다.
한입 가득 떠넣은 포크는 말끔하게 비워진채 입술끝에 머물러 있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포크는 햇빛에 반사되면서 강한 빛을 드리웠다. 밀레시안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단장이 미소짓고 있었다. 입꼬리가 아닌 눈매가 부드럽게 풀리는 웃음이었다.
‘그럼 다음 질문,’
단장은 턱을 괴고 있던 손에서 얼굴을 들어올리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본론인건지 이전 질문에 대한 파생질문인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밀레시안은 포크를 입에서 내린채 남아있는 케이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질문이 무엇인지 예상되는걸까? 밀레시안은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반쯤 갈라진 케이크에 손을 뻗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이지만 단장은 당황한 기색 없이 질문을 시작했다. 푹하고 들어간 손가락은 한마디 정도의 크림을 떠올렸다.
‘그들은..’
“그들은..”
톨비쉬가 무의식적으로 단장의 말을 따라읽고 있었다.
보통 이정도로 집중하지는 않지만 본능처럼 경고등을 울리는 불안감과 기시감이 집중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비숍이 톨비쉬를 돌아보았다. 톨비쉬는 패브릭 소재의 소파를 양손 가득 잡은채 티비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톨비쉬의 어깨너머로 글러브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는 킹과 그런 킹에게 뭔가를 속삭이는 룩이 보였다.
퀸도 화면에서 눈을 때고 킹들의 소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킹은 굉장히 불쾌한 표정이었고 룩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똑딱, 비숍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아날로그 초침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거실에 시계소리를 낼만한 물건이 있던가? 골동품에 관심이 많은 밀레시안과 룩의 방이라면 모를까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공용거실에 그런물건이 나와있을리 없었다. 하지만 분명 지금도.
비숍은 두번째 똑딱 하고 울리는 초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톨비쉬는 여전히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톨비쉬를 방해하지 않을 범위 내에서 주변을 살펴보던 비숍은 톨비쉬의 팔목에 채워진 아날로그 모양의 시계화면을 발견했다.
모양은 옛날 동그란 시계의 모양이지만 어디까지나 영상에 불과한 모조품,
시침소리의 사운들를 따로 넣을 수도 있지만 구태여 그런 성가신 재현까지 구현해 넣을리가 없었다.
변덕이나 룩의 주장에 못이겨 그런 소리를 넣어놓았다 한들 톨비쉬가 그런 설정을 세팅해 놓았을리가.
더욱이 들려오는 초침소리는 일정한 한격이 아닌 간헐적인 파음이었다.
찰카닥거리는 소리에만 집중한다면 무언가가 단계적으로 감겨가는, 태엽소리에 가까운.., 똑딱. 똑딱. 세번째와 네번째의 초침소리가 연달아 울려왔다.
이건 카운트소리다. 소파에 기대어 앉아있던 비숍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톨비쉬의 긴장감이 옮았던 걸까, 비숍은 손을 뻗으며 톨비쉬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들은, 요즘도? 여즉히? 아니야, 여전히.. 여전히.. 그들은 여전히..너에게…”
똑딱.
“톨비쉬.”
똑딱.
비숍은 나이트라는 닉네임대신 톨비쉬의 이름을 부르며 손등으로 왼팔을 툭건드렸다.
톨비쉬는 비숍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건지 빠른속도로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너에게.. 숭고..수고..성공..성..장...소.., 소유..소...중..”
“톨비쉬.”
대놓고 점멸하는 글러브를 지켜보던 킹이 글러브를 손에 끼며 룩의 화면을 끌어당겼다.
무엇이 그들의 방에 들어와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겠다는 의도였다.
룩은 그만두는게 좋겠다며 말리고 있었고 퀸은 톨비쉬에게 글러브건에 대해 말하기 위해 소파로 다가갔다.
“그들은 여전히 너에게 소중하니?”
딱.
킹이 글러브를 낀 손을 룩의 화면에 통과시켰다.
무거운 문고리를 잡아내듯 한손 가득 무언가를 움켜쥔 손동작이 역시계 방향으로 돌아간뒤 앞으로 꾹 내밀어졌다.
화면이 움푹 패이는가 싶은순간 검게 변한 화면 위로 하얗고 깨알같은 글씨들이 수도없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룩과 킹이 빠른속도로 올라오는 글자들을 읽고있었다.
비숍은 톨비쉬의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고 톨비쉬는 화면속의 밀레시안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끝의 온도에 녹아내리던 크림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밀레시안이 창문으로 손을 뻗었다.
정확히 자신의 입술이 비칠만한 자리에 희뿌연 크림을 문지르며 무언가의 대답이 끝을 맺었다.
밀레시안의 돌발행동에 놀란것은 화면을 지켜보고 있던 톨비쉬와 퀸, 그리고 한박자 늦게 고개를 돌린 비숍뿐.
한없이 계속될것 같던 글자들의 향연이 일순간 팟하고 꺼진뒤 제멋대로 재시작의 기동음을 내기 시작했다.
룩들의 화면이 끊어지는 순간 티비의 화면도 갑자기 종료.
잠시뒤 간결한 전원알림소리와 함께 비숍이 보다 말았던 드라마의 다음편이 방송되기 시작했다.
룩은 킹이 집어던진 화면을 받아 다시 샅샅히 들여다 보았지만 킹은 소득이 없을 것이라며 글러브를 벗어던졌다.
킹이 글러브를 끼는순간 녹색으로 고정되었던 램프들은 일순간 까맣게 흐려지며 원래의 평범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버렸다.
드라마는 흔해빠진 판타지 드라마로 사랑을 모르고 태어난 호문클루스가 처음 만난 특별한 존재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죽어버린다는 내용의 결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준비된 장소로 불러내는대 성공한 호문클루스가 시약을 들고 외치고 있었다.
[“사랑합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받아주지 않더라도, 세상 모든 인간들이 이게 사랑이 아니라 부정한다 할지어도. 나는 지금 이 순간, 이 그림자의 시간만큼은. 나는 내 마음이 당신을 위해 그리고 당신의 의해 살아가고 있는겁니다.
하지만.., 네. 알고있습니다. 이 관계는 당신과 내가 아닌 나의 의한 일방적인 고백이라는 것을.
이건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 아니겠지요.
해결될 문제는 없고 나아갈 출구도 없을 것이며 아무런 결과값을 내놓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경멸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절망까지 포함해서 나에게는 사랑입니다.
이루어질 가능성이 한없이 0으로 수렴한다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기적입니다.
거기있는 라이칸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 어떻게 사랑이냐고 물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느낄 수 있는겁니다.
이 아픔을, 이 고통을, 이 애절함과 절망감을.
그리고 정작 이 사랑을 받아줘야할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이 이기심까지.
이 모든 것이 나를 사람으로 만듭니다.
당신이라는 빛이 내 어두운 일면을 선명하게 드러내게 만들고 있어요.
선하지만 않은 호의, 하지만 악의라고 할 수 없는 진심.
옳고 그름을 정의 내릴 수 없는 에너지의 본질이자 나의 생명, 나의 이름.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
사랑합니다.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갈구하던 시기가 있었고 내가 당신앞에 서 있을 수 있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이 마음을 고백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내가 살아있던 찰나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다름아닌 내가, 누구도 아닌 무엇도 아닌 나 스스로가. 나의 의지로”]
시약이 떨어지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검은 태양이 떠오른 회색빛의 하늘에 생동감 넘치는 붉은 구름이 꿈결처럼 섞여들고 있었다.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 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만족합니다.”]
바람이 불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잎이 피어나고 흩어졌으며 세상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멀어지는 시점과 화면 가득 보이는 숲의 전경,
흩날리던 꽃잎을 찍던 화면이 넘어가고 주인공의 얼굴이 나타났다.
킹은 두어번 양쪽의 머리를 강하게 쓸어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라마에 푹 빠진 것처럼 얼어붙어버린 세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킹은 티비쪽으로 다가며 성의없는 사과를 건네왔다. 말과 시선과 행동이 모두 분리된 즉흥 캐스팅된 엑스트라의 서툰 연기 같았다.
“미안해. 인두 전원을 꺼놓는다는것을 깜빡해서 옆에 있던 글러브가 과열되었나봐”
거짓말. 분명 아무렇게나 던져놓았지만 열기따위에 망가질 물건은 아니었다. 한참 방열을 시험해본답시고 오븐장갑대용으로 사용하질 않나 아예 구워버리질 않나. 혹시나 방패가 미완성일까봐 온도를 낮추던 모습까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던 톨비쉬는 무슨 의도인지를 눈으로 물으며 대답했다.
“그러네, 뭐. 읽을수 있는 정보도 거의 없었으니까”
이것도 거짓말. 톨비쉬는 분명 질문을 읽어내었다.
추측하건데 그 이전의 질문은 분명 최근의 생활에 대해 물어본 것이었고 그 다음질문은 그들과의 관계성에 대해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맥락적으로 생각하자면 여기서 그들은 분명 톨비쉬들을 가리키는 단어일터.
하지만 이와 같은 질문은 벌써 여러번 면담에서 되풀이되었고 개중에는 몇번인가 대놓고 팀원들앞에서 물어본 적도 있었다. 그럼 그때 대답과 속마음은 달랐던건가?
톨비쉬는 손가락끝으로 소파를 두드리며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때 밀레시안의 표정에는 거짓이나 연기의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진심으로 성가시고 귀찮다는듯이 잔소리가 심해요. 라는 대답을 했을뿐.
그리고 또 뭐라고 했었지? 재미..? 즐거움..? 우리들의 관계도는 양호한 수준이었던가?
하지만, 그렇지만. 톨비쉬는 몇번이나 뒤집히는 생각을 추스리며 자신이 정말 제대로 질문을 읽어냈는지를 의심했다. 여전히 라는 말과 소중이라는 말이 까끌거리는 비늘처럼 혓바닥에 달라붙은 느낌이었다.
여전히 소중한가? 톨비쉬는 드라마속 남자의 대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우리들은 서로의 이름앞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아본적이 없습니다.
서로의 어렴풋한 시선을 같은 마음이라 믿어왔고 그 믿음의 증거가 없다는 공허함을 운명과 계시라는 이름으로 틀어막아 왔었죠.
맹신이었고 일종의 자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과 나란히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손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속박하지 않으려, 아니 생각하지 않으려 했었습니다.
그래요. 나는 스스로를 부정해 왔습니다.
이게 사랑일리 없다고 이런게 사랑일 수는 없다고, 나는 부정하고 또 부정해왔습니다.
동정이나 동경, 연민이나 연심의 착각이라고 스스로를 억눌러왔습니다.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당신과 내 마음이 어긋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내 마음을 파고들어가 피어있던 확신마저 시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젠 스스로의 감정도 확신할 수 없게되어버렸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비겁함도 사랑일까요?
곁에 있는 동안에도 느껴지는 고독함이 행복일까요?
나는 정말 당신을, 아니 당신은 나에게서 한번이라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본적이 있었습니까?”]
한번도, 밀레시안은 톨비쉬들과의 관계에서 소중하다는 말을 꺼낸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관계에서 정말 정의 요소는 없는 것일까?
호문클루스의 죽음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벚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사랑을 울부짖었던 만들어진 생명체의 마지막 기적, 삶의 흔적. 사랑하고 기원하고 슬퍼했다는 생의 기록문. 만들어진 꽃잎이 흩어지는 그림자의 세계를 배경으로 그 사랑의 대상에 되었던 주인공은 천천히 머리끈을 풀러 손에 감았다.
[“그렇다면 믿어주실래요? 아니면 아니라고 대답해도 믿을 수 있겠나요?”]
사랑하는 감정에 반응한다는 마법의 리본, 녹색으로 물든 리본이 입술에 닿는다.
주인공이 대답했다.
[“나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아요.
인간이 아닌 삶, 그러면서도 한없이 인간이 되려 발버둥치는 나약한 마음.
처음부터 보답받지 못할거라고 생각해 왔어요. 다시한번 기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이 사랑이 온전히 이어질리 없다고. 시간의 흐름이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요.
느끼는 감정, 지켜야 하는 대상, 부르는 이름과 불려지는 칭호.
그 무엇도 같을 수 없고 그 무엇도 함께 할 수 없어.
그래도 당신은 내게 말했죠. 함께해주겠다고. 끝까지 같이 서 있겠다고.
내 옆에서. 내 곁에서. 내 마지막을 봐주겠다 맹세했었죠.”]
손에 묶인 리본의 색이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손등에 입을 맞춘 주인공은 말했다.
[“나에겐 그 말 자체가 사랑이었어요.”]
우리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몰랐을뿐, 혹은 알면서도 모른척 했을뿐.
내 삶은 그때부터 당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말과 함께 길었던 이야기는 끝이났다.
이따금씩 비어있는 편성시간에 2-3편씩 몰아서하는 재방송이 눈에 밟혀 저게 뭔데? 하는 정도의 드라마.
남자주인공이 지나치게 톨비쉬와 비슷한 이미지여서 인지 톨비쉬는 이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한번쯤 진지하게 저 드라마가 유행시킨 색이 변하는 리본의 파생상품을 구매하려 검색한적 있었다.
그런식으로라도 상대의 마음을 확인 할 수 있다면 마음이 놓이지 않을까?
킹은 톨비쉬의 진지한 고민에 폭소했고 리본을 구성하는 화학약품과 원리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너는 아예 만들어볼 시도를 했다는 거로군. 킹이 입을 다물었다.
지나치게 자세했던 설명은 거기서 끝이났다.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 판타지는 판타지.
톨비쉬는 스스로도 정확한 대답을 찾지못해 입을 다물어버리는 작은 손을 움켜쥘 수가 없었다.
다그치는 것처럼 느낄까봐 한번도 강하게 손을 끌어당길 수 없었다.
소중하고 또 소중한.. 톨비쉬는 단장의 질문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여전히라고 말하기 전에 한번이라도 소중하게 여긴적 있는지를 물어야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화면속의 단장은 아득히 먼 건너편에 있는 톨비쉬들이 바라보듯 먼 창문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지금 이 질문과 대답은 너희들이 들어도 되는 질문이 아니야.
그것은 분명 연결된 대화였다. 그 눈빛을 마지막으로 화면속 시계가 멈춰섰다.
연결은 끊어졌고 룩의 화면도 깨끗하게 비워져버렸다.
화면이 끊기기 직전, 창문에 케이크를 문질러 입을 지워낸 밀레시안과 그런 밀레시안의 행동을 차분히 지켜보던 단장의 모습이 수초간 화면에 머물러 있었다.
고개를 들어올린 단장은 창문에 비치는 카메라의 렌즈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대답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확인을 끝낸 룩이 화면을 테이블 위로 돌려놓았다. 룩은 드물게 팀원들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몰라서 카메라 접속 기록도 다 살펴봤어”
“어때?”
“깨끗해”
깨끗할리 없지만. 하지만 이 대답만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킹이 남겼을법한 작은 흔적이나 조각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이것뿐만이라면 수고를 덜었다며 웃어넘겼을지도 모르지만 사라진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글러브가 열어낸 비상구 너머의 복잡한 기록도 함께 사라져있었다.
룩은 그 기록이 무엇이었는지 묻고싶었지만 느낌상 지금은 그것을 물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눈치였다.
퀸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비숍을 불렀다.
“그건 그렇고, 톨비쉬를 왜 그렇게 불렀던 거야?”
톨비쉬를, 이라는 말에 톨비쉬가 고개를 돌려 비숍을 바라보았다.
다른 맴버들이라면 몰라도 임무를 준비중인 이 기간에 비숍이 맴버들의 본명을 부르는 것은 드문일이었다.
비숍은 아, 하고 입을 연뒤 잠시 말을 가다듬었다.
드라마가 끝이 나고 다음화를 준비하는 동안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까칠해보이는 양갈래의 주황색 머리 소녀가 화면 가득 손바닥을 펼쳐보이며 귀여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목에 걸린 커다란 펜던트가 시선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딱, 7초만 기다려 보라니까?”
7초동안 관심을 불러일으킬만한 춤을 추던 소녀의 자리에 광고하려던 물건의 이름이 떠올랐다.
결국 무슨 물건을 알아보려면 직접 검색해 보라는 호기심 유도형 광고,
소녀가 걸어나와 카메라를 확인하고 7초를 선언한뒤 글자를 띄워올리기까지 23초 정도가 지난뒤 비숍이 입을 열었다.
“시계.. 시간이 잘 안맞는 것 같던데 확인해 보는게 좋을 것 같아서”
“아침에 제대로 맞췄는데…?”
“아까 업데이트 했잖아. 혹시 흐트러졌을지도”
비숍의 집요한 조언에 톨비쉬가 들고있던 작은 화면에 왼손을 집어넣었다.
화면이 까맣게 변하고 나이트 체스말의 모양이 화면속으로 복사되었다.
화면위로 비치는 시계속 시간과 화면 구석에 표시된 정규서버의 시간이 미묘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6초.., 아니 약 7초 정도의 오차. 톨비쉬는 소파위에 화면을 올려놓은뒤 두개의 시계를 동기화 시켰다.
“그러네. 업데이트 때문에 흐트러졌나보다”
그럴리가 있겠냐며 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톨비쉬는 비숍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새로 맞춘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시계은 여전히 아날로그의 모형이었다. 초침을 예의주시해서 지켜본다한들 약 7초가량 늦어진 초침을 알아챌리도 없지만 비숍은 천만에, 내 시계랑 묘하게 달라보이길래. 하고 대답하며 왼쪽 어깨를 털어보였다.
오른손에 채워진 비숍의 시계가 왼쪽 어깨위에 올려졌다. 시계속 비숍의 시간은 숫자로 이뤄진 디지털 모형이었다.
“아-”
킹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스럽다는 비명을 토해냈다.
킹의 짜증은 점점 높은 옥타브로 치솟다가 이내 땅이 꺼질듯한 한숨과 함께 뒷목으로 손을 넘겨버렸다.
한참 뒷목을 꽉 움켜쥐고 있던 킹이 고개를 들었다.
“시계, 다시 재조정할테니까. 다들 잠깐 반납해봐”
오늘은 야근이네.. 룩이 침울하게 속삭였다.
그렇게 전체적으로 재 조정된것이 지금의 시계와 인이어였다.
지금의 장비는 들키지 않는 선이라 할 수 있는가? 그에대한 대답은 그런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였다.
톨비쉬는 뺴낸 이어폰을 자켓안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만들기로 작정하면 피오나도 얼마든지 제로의 디바들과 같이 이어커프형이라던가 자잘한 악세사리의 모양으로 인이어를 생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킹은 일부러 잘 보이는 형태를 선택했고 톨비쉬들은 그 선택에 수긍했다.
보이는 것을 내어주고 사소한 것을 드러낸다. 그런다고 해서 시계에 대한 경계심이 아주 가시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대놓고 보여지니 수상한 짓을 할 이유도 없다-라는 의사표현은 확실히 보여줄수 있다는게 선택의 이유였다.
스탭용 통로 한켠에는 개인의 소지품과 상의를 갈아입을 수 있도록 임시 설치된 캐비넷들이 놓여져 있었다.
사전에 연락받은 요원들의 이름과 함께 내부에는 전달받은 치수로 지어진 상의들이 걸려있었다.
“과연,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은 이유가 이거였네요”
제로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멀린의 요원이 친근하게 말을 붙여왔다.
넉살좋게 안면을 튼다기보다는 자신을 아는지 떠보는 느낌이 강한 인사였다.
어떻게 대처할까, 톨비쉬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내지 못한 상태였고 그는 그런 톨비쉬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눈치였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다른 피오나의 요원들도 어쩐지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표정으로 이쪽의 상황을 엿듣고 있었다.
도와주기는 커녕 톨비쉬의 대답에 따라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다리고 있겠다는 관찰자의 시선이었다.
아는척을 하든 모르는 척을 하든 어쩔수 없이 독박을 써야하는 분위기에 톨비쉬가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제로를 바라보았다. 유난히 새파랗게 질려있는 스카이블루빛 시선이 톨비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러 눈동자는 잊으려해도 잊기 힘들텐데 말이지.
아무렇게나 둘러댄 대답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대기 모드였던 시계가 가볍게 진동을 울리며 재기동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입김이 닿은 강제모드가 분명했다.
“아, 실례.”
분명 더이상의 반응이 없도록 꺼 놓았던 시계의 진동에 톨비쉬는 이전날의 이변을 떠올리며 신중하게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다행히도 일반적인 전원마크를 생략하고 킹의 아이콘이 크게 화면을 밝히고 있었다.
재 기동된 시계는 시간표시를 생략한채 곧장 메세지함으로 연결되었다.
메세지의 수신자를 확인한 톨비쉬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관찰하던 새파란 시선이 불쾌함으로 뒤틀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양해를 구한 무시에 대한 불쾌함은 반절정도, 나머지 반절은 호기심으로 채워진 시선이 톨비쉬의 어깨 언저리에 머물렀다.
다름아닌 그 톨비쉬가 표정이 확 변하는 메시지라니, 무슨 메세지인지 궁금증을 가지지 말라는게 더 수상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호기심을 드러내기에는 다른 피오나의 요원들의 경계심이 이쪽으로 옮겨오고 있었다.
더이상 파고 드는것은 무리일지도, 제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은 멀린의 요원은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뒤로 물러섰다. 애초에 뭐라 대답하든 그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알고 싶었던 것은 그가, 그리고 그들이 나를 기억하는가에 대한것.
하지만 그 누구도 아아, 너는.. 하고 예상된 반응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정도면 충분했다.
잊혀지고 지워지고 파묻혀진 이름의 반응이 충분히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제로는 타이밍 좋게 지나가는 스탭을 잡으며 피오나를 등진채 자신의 케비넷으로 걸어나갔다.
어렴풋하게 무언가를 기억해내려는 피오나의 시선이 케비넷의 이름칸에 머무르지만 옷을 갈아입는 디바측 요원의 방해에 제대로 살펴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빤히 보고 있던 피오나를 보며 명백히 비꼬는 의도의 비소를 돌려받았을뿐.
갑작스러운 비호감에 반응 할 새도 없이 제로는 정말 바쁘다고 발을 동동거리는 스탭을 잡아 끌며 거울쪽으로 몸을 돌렸다. 등돌려 선 모습이 어디의 누군가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바로 옆자리에서 뒤늦게 옷걸이를 꺼내들고 있는, 그런 누군가와 비슷한 의도가 느껴지는 뒷모습이었다.
“여기, 이 피어스들은 사전에 허가 받은거니까 안빼도 되는거죠?”
스탭은 그걸 물어보려고 이렇게 붙잡은 것이냐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로는 제대로 피어스의 숫자를 확인해달라고 실랑이를 벌이며 양쪽 귀를 기울여보였다.
괜히 나중에 하나 두개 더있네 없네 하면서 트집잡히고 싶지 않다는 등쌀에 스탭은 가지고 있던 개인 단말기로 제로의 양쪽 피어스를 찍어 확인을 요청했다.
오른쪽에 4개 왼쪽에 7개. 모양과 갯수가 사전에 연락받은 정보와 일치한다는 대답을 들은 다음에야 스탭은 겨우 제로의 손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렇게 중요하면 카페에서 확인받지 그랬냐며 잔소리를 해오는 디바들에게 멀린의 요원은 콧노래를 부르며 상의를 꺼내들었다.
나도 알아. 소매를 정리하던 톨비쉬가 스쳐지나가는 입모양을 읽어내고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지시받은것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톨비쉬를 기다리고 있던 피오나들이 스탭을 따라 내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세번째 문이 열리고 극장의 내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글
톨비밀레) reload #5(2)
관제실의 요원들이 겸사겸사 기자회견 영상을 챙겨보는 것과 달리 달리,
톨비쉬와 다른 요원들은 꽤나 당당하게 기자회견장의 영상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사전 설명을 들은 요원들은 별로 보고싶지 않은겠지만 안볼래야 안보일수도 없다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방법이었다.
공중정원 어디에든 광고와 디스플레이를 위한 크고 작은 스크린이 띄워져 있었고 회견이 시작된 직후부터는 모든 스크린이 크루크와 에후르 마퀼의 모습으로 가득 채워졌다.
방금전까지 생기있게 뛰어다니던 모델들의 모습이나 자연친화적인 이미지를 강요하던 밋밋한 영상들은 사라지고 칙칙하고 삶과 인간관계에 치여 찌든 영감들의 모습이 사방에 띄워져 있었다.
톨비쉬는 이런 지루한 영상보다 4시간 내내 반복되는 꽃잎 흩날리던 영상이 더 재밌을것이라 투덜거리며 계단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래가 훤히 비쳐보이는 투명한 계단.
빛의 가감으로 외곽선이 드러나 있었지만 웬만한 사람은 고소공포증이 없어도 내딛기 힘들어보이는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그런건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건지 계단은 한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일시적으로 불투명한 발판으로 변화했다.
발을 때면 다시 원래의 투명한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이들의 궁금증을 자극 하기 딱 좋은 발판.
공포심보다는 호기심이 앞서나간다. 환하게 웃는 아이들이 부지런히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톨비쉬는 계단의 색이 변화하는 것에 매료된 아이들이 질서없이 뛰어다니는 것을 피해 계단 난간쪽으로 붙어섰다.
브류나크의 121층.
사방을 둘러싸는 투명한 계단과 얕은 물이 깔린 착각을 주는 바닥무늬,
중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분수대, 거대한 사과모양의 조각상, 사방이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창조의 정원.
올라가는 높이가 높아질수록 점점 시야의 들어오는 아본의 모습에 톨비쉬의 시선도 바쁘게 움직였다.
정원의 외각을 한바퀴 빙 두르는 원형의 복도 사이에는 정원을 가로지르는 연결로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상가나 유희시설들은 모두 정원의 외벽으로 밀려나 복도를 따라 걸어가야 하기때문에 맞은편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위한 지름길인 모양이었다.
더불어 2층이며 3층이며 아본을 내려다볼만한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는 연결통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1층의 공연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2층으로 올라온 톨비쉬는 난간에 기대어 다른 구조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3층으로 이어지는 연결로로 이동했다.
지나가는 행인들 사이로 익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다리가 완전히 투명한건 아닌가보네?
그들이 보는 대로 이 연결로들은 난간만이 투명한 모습, 바닥은 아본의 무늬가 세겨진 타일들이 깔려 있는 불투명한 재질이었다. 모든 다리가 꼭 투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사람들의 실망하는 이유는 아마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연결로의 바닥이 투명한 유리재질로 보였던 탓일 것이다.
직접 올라와서도 아쉬움을 버리지 못하겠다는 건지 몇몇 사람들은 바닥의 타일과 한층위에 드리워진 투명한 연결로를 올려다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난간의 아래를 내려본다 한들 연결로의 바닥면이 보일리 만무, 위험천만한 행동을 하려다 잡힌 몇몇 아이들이 시큐리티요원과 보호자에게 혼쭐이 났는지 울상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톨비쉬는 머리위를 가로지르는 3-4층의 연결로를 무시한 채 다시 앞을 향해 걸어나갔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있는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에게 가벼운 눈짓으로 인사를 보내왔다.
몇몇 사람들의 경계심 어린 시선이 잠시 톨비쉬와 요원들에게 머무르지만 가벼운 눈웃음과 함께 고개짓을 해보이는 톨비쉬의 모습에 안심한듯 고개를 다시 돌려놓는다.
여유롭게 블랙레이븐들과 인사를 나누는 그의 귓가에는 블랙레이븐들이 사용하는 인이어와 똑같은 것이 끼워져 있었다.
반대편에 있는 인이어는 낯선것이지만 아마 경호를 맡은 에이전트의 요원중 하나.
톨비쉬는 사람들사이로 자연스럽게 섞여들며 남은 시선들을 떨쳐내었다.
“그럼 이 난간도 유리 아니야?”
“바보야. 아니라니까? 만지면 은색이잖아. 계단도 이 난간도 원래 은색이라니까.”
유리로 만들어진 계단이 아니라는 것에 실망한 어린아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손위의 형제를 올려다보았다.
살짝 새초롬하게 눈을 흘기는 것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의기양양하게 계단의 비밀을 밝혀낸 큰아이는 대단한 증거라도 되는양 난간을 붙잡은 채 두세걸음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아이가 잡고 걸은 길이만큼 난간은 본래의 새하얀 은백색을 띄다 다시 투명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작은 아이는 볼을 부풀릴 뿐이다.
“그럼 왜 안만질땐 투명하게 보이는데..?”
“그건.. 음.. 그건..”
계단들이 투명하게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난간과 계단 또한 다른 종류의 스크린이었을 뿐이었다.
아래서 올려다보는 계단의 모습 또한 계단에서 올려다보는 윗 풍경을 그대로 흉내낸 영상일뿐.
난간으로 사용된 소재의 굴절률이 다르다던가 전력이 차단된 다리가 사실은 저 아래 설치된 공연장과 같은 재질이라던가 하는 꿈도 희망도 없는 내용들이 톨비쉬의 혀끝을 간지럽혔지만 구태여 아이들에게 말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큰 아이는 제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고 작은 아이는 목이 빠져라 위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관찰력이 좋은 아이라면 미묘하게 다른 하늘이 풍경을 발견할 것이고 사고력이 좋은 아이라면 투명해보이는 계단 밑면에 사람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는 것을 유추해 낼 수 있을것이다.
작은 아이쪽의 관찰력이 더 좋았던 걸까? 톨비쉬이 발걸음이 멀어진지 몇 걸음 만에 작은 아이가 아! 하는 탄성을 터트렸다.
작은 아이는 무언가를 확인해보고 싶다며 큰아이에게 무언가를 제안했다.
큰 아이는 작은아이의 말을 곰곰히 듣고는 활짝웃으며 다시 난간을 붙잡았다.
나란히 서서 준비.. 하고 타이밍을 기다리던 아이들이 땅! 하는 신호음과 함께 뛰기 시작했다.
작은 아이는 코가 닿을것 같이 난간에 눈을 바싹 붙인 상태로 뛰고 있었고 큰 아이는 반쯤 몸을 돌린채 보여? 보여? 하고 물으며 앞을 향해 뛰고 있었다.
난간이 정말로 투명한건지 전기적 영상으로 처리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직접 몸으로 확인해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이들의 호기심은 나쁘지 않았지만 장소는 그리 적합하지 않아보였다.
행인들은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뛰는 아이들을 피해 걸음을 옮겨야 했고 몇몇 어른들은 불평을 터트렸다.
주변을 지나가던 요원중 몇몇이 고개를 돌렸다.
제법 빠르게 달려나가는 아이들이 톨비쉬를 향해 뛰어들고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오는지 모른채 천천히 제 페이스대로 걷고 있던 톨비쉬는 마주오는 남자의 모습에 걸음을 늦추었다.
여기도 있군. 사고력과 눈썰미보다 호기심이 앞서는 천진난만한 어른이가.
방금 전 지나온 아이들과는 다르게 이 남자는 위험천만하게 고개를 위로 치켜든채 비틀비틀 앞을 향해 걷고 있었다. 입이 멍하니 벌어진줄도 모른채 천천히 걸어나오는 남자의 모습에 톨비쉬가 짧게 눈을 굴려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다. 귀찮은데.
톨비쉬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정원 내부의 카메라를 확인하던 룩이 낄낄거리며 그의 마음속 소리를 흉내내어 말을 걸어왔다.
“나이트 지금 귀찮다고 생각했지?”
“……”
“에이. 안되지 안돼. 저렇게 방치하다가 큰일이라도 생기면 옴팡 뒤집어쓸텐데..?”
“………”
“크으, 자기 담당 구역 아니라고 깔끔하게 무시하는구나. 폰에게 일러야지”
“그만둬..”
톨비쉬가 짜증스럽게 대꾸하는 사이 비틀거리는 남자와 톨비쉬의 거리가 제법 가까워졌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냥 피해버릴까.
주의를 주는 과정에서 또 한바탕 시끄러워질 것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더이상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아이들은 시무룩해지면 그만이지만 이런 사람들은 체면까지 생각해줘야한다. 체면을 차리려면 일단 자기 자신부터 잘 간수하란말이야.. 한숨이 흘러나온다.
오른쪽일까, 정면일까. 톨비쉬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이렇게 가까워졌는데도 톨비쉬가 앞에서 다가오는지 모르는것 같았다.
톨비쉬가 시선을 내리며 몸을 비틀기 위해 발을 멈추었다.
그 순간이었다.
“봤어? 보여?”
방금 지나쳤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바로 뒷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톨비쉬는 비트는 고개를 좀 더 돌려 뒷편을 확인헀다.
뒤를 돌아보며 달리는 큰아이와 톨비쉬를 발견한 작은아이가 바로 그의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대로 발을 빼면 부딪치지 않겠지만 문제는 자신이 아닌 앞에서 다가오는 남자.
남자는 아직도 위를 보고 있었고 큰아이는 이제서야 앞을 돌아보고 있었다.
톨비쉬의 한숨소리와 룩의 웃음소리, 그리고 킹이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앗, 죄송합니다.”
“아니 뭐야. 당신..!”
오른쪽도 정면도 아닌 왼쪽으로. 본의아니게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남자를 멈춰세운 톨비쉬가 난간을 짚으며 아이들과 남자사이에 끼어들었다.
톨비쉬의 다리에 부딪친 아이는 곧바로 사과를 건내왔지만 남자는 매우 불쾌하다는 얼굴로 톨비쉬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앞을 보지 않은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교통정리에 끼어들게된 톨비쉬는 일단 남자에게서 한발자국 물러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보는 과정에서 훤히 드러나게된 귓가에 인이어가 꽂혀져 있자 남자가 살짝 태도를 누그러트렸다.
톨비쉬는 남자에게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허리 아래쪽을 내려다 보며 조심하렴. 하고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깜짝놀란 얼굴로 남자와 부드럽게 미소짓는 톨비쉬를 한번씩 바라본뒤 고개를 끄덕였다.
뒤따라오던 작은아이는 뒤늦게 나타난 보호자에게 달려가 폴짝 안겨들었다.
아이의 보호자는 아이를 달래며 톨비쉬들쪽을 바라보았고 작은 소란에 근처에있던 요원 몇명이 반응한듯 보였다.
아이들이 보호자에게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는 동안 남자는 애들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이렇게 버릇없이 뛰어다니는 거냐며 큰소리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일어난 사소한 소란에 대부분 무슨일이 일어난 것인지 궁금해하는 눈빛이였지만 몇몇은 그가 다른사람과 부딪쳤는지를 알법하다는 눈빛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톨비쉬는 그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남자는 커지기 시작한 목소리로 톨비쉬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말로 하면 되는 것을 일부러 그의 앞에 끼었다는게 불쾌함의 주된 이유였다.
톨비쉬는 말로서 제지하기엔 너무 가까웠다고 대답했지만 남자는 들을 생각이 없는듯 보였다.
톨비쉬의 무전이 울리고 그 모습을 예의 주시하던 룩이 바로 상황에 대한 설명을 아래로 내려보냈다.
전후 상황과 톨비쉬의 말을 교차해 확인하는 동안 남자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뭘 그렇게 중얼중얼하냐며 톨비쉬의 옷깃을 낚아챘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고 있었다.
일이 커질것 같은 느낌.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안했다고? 아이쪽이 더 나쁘잖아?
생각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남자는 도르륵 굴러가던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이 상황을 벗아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 네가 처음부터 잘 정리하기만 했어도.. 하고 흐려지는 눈빛을 보며 톨비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붙잡힌 옷깃을 잡아내렸다.
손은 다소 강압적이었지만 실례했습니다. 아이를 멈춰세운다는게 그만.. 이라며 자신을 낮추는 태도에 남자가 자신감을 얻었는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톨비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딱, 입만 열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별 일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계속 위만 보고 걸어가시는게 위태로워 보이는 찰나에 아이가 그 앞으로 뛰어가고 있는것을 방지하려던 찰나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톨비쉬는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려고 했었다는양 물흐르듯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남자가 뭐라 말하려는 것에 흥미도 없다는건지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려 블랙레이븐들을 바라보았다.
블랙레이븐 측에서도 이미 상황파악이 끝난 뒤 지시를 내린 것이기 때문에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남자의 주변을 둘러싸며 자리를 옮길것을 종용했다.
남자는 마치 압박받는 것 같은 분위기에 반발했지만 블랙레이븐들은 익숙하다는 접대용 미소로 남자를 설득했다.
톨비쉬는 그럼 이만, 이라며 온화하게 대답한뒤 몸을 돌렸지만 그의 모습은 블랙레이븐들에게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는 분위기였다.
잠시 뒤 블랙레이븐들이 천천히 자리를 옮겨 2층 외곽으로 자리한 출입구로 빠져나갔다.
남자는 블랙레이븐들과 함께 움직인건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평온하게 정리된 것 같아 보였지만 다시한번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그의 손목에서 미친듯이 깜빡거리는 아이콘들이 점멸하고 있었다.
흐트러진 손목선을 가다듬는 척 차례차례 아이콘을 눌러나간 톨비쉬 애써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기 위해 먼 곳을 바라보았다.
무심하리만치 파란 하늘이 창밖으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팀원이라고 애지중지 함께해봤자 다 소용이 없다.
세상 믿을 아이콘 하나밖에 없다며 감상에 잠겨있는 동안 고요해진 인이어로 부터 짧은 코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내가 잘못들은거지? 세상 다 잃은 얼굴로 계단아래를 내려다보려는 톨비쉬에게 자력으로 뮤트를 풀어낸 킹과 룩이 다시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80%는 놀려먹는 내용이었고 남은 10%는 룩의 자화자찬에 대한 내용이었다. 나머지 10%는 일이 마무리되고 남은 주변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내용.
톨비쉬가 팀원들에게 시달리는 동안 사람들은 자리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은 톨비쉬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연결로의 끄트머리에 다다라 3층으로 올라섰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은 거둬질줄을 몰랐다.
톨비쉬는 킹의 조언을 받아들이며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올라섰다.
이런 이렇게까지 올라갈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톨비쉬는 어쩌다 올라온 꼭대기 층에서 공중정원 아본을 내려다 보았다.
4층은 하늘위를 떠다니는 환상을 테마로한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위치였다.
1층의 정원이 메르헨틱한 환상을 주제로 하고 있었다면 상부는 그 동화를 멀리서 바라보는 독자, 혹은 관찰자들의 시점으로 변화해나가는 것이 특징, 층을 거듭해서 올라올 수록 복잡하게 얽혀있던 계단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매듭의 모양을 형성하고 있었다.
동그란 원을 그리며 외곽을 한바퀴 도는 복도들을 이어주는 것이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크게 보자면 길이 나 있는 동선은 마름모를 그리며 얽혀가는 매듭무늬의 일부들.
2층과3층을 잇는 다던가 3층과4층을 잇는다던가, 언뜻 보기엔 평범해보이는 계단사이에는 2층과 4층을 연결하는 위치한 거대한 에스컬레이터도 섞여있다.
얼기설기 서로를 가로지르며 부지런히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계단들은 은근히 동선을 비틀어내며 거대한 미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투명한 계단이라는 것도 동화풍의 정원에 어울릴법한 모습이긴 했지만 사실은 이 미로를 만들기 위한 눈속임의 일환인것이 분명했다.
쓸데없이 말이야.. 톨비쉬는 뒤를 돌아 난간에 기대어 서며 남쪽에 자리한 극장을 바라보았다.
모처럼의 절경을 가리고 선 커다란 극장의 이름은 글로브 극장, 북쪽의 엘리베이터와 대칭되는 아본의 주요 건물로 1층과 4층에는 극장의 뒷편으로 돌아가는 전망로가 이어져 있었다.
전망로가 있는1층과 4층은 나란히 이어지는 길을 끼고 돌아 다시 외곽상가로 순환하는 구조였지만 2,3층의 창문은 극장안으로 연결되어있었다.
출입구는 좌우로 1쌍씩. 동선이 끊어지기 때문인지 2층과 3층의 시설은 대부분 북쪽으로 몰려있어 비교적 한가해보이는 풍경이다.
별일은 없겠지만, 혹은 없어야하지만, 담당하는 구역의 까다로운 출입구조를 보자니 가슴이 턱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아름답지만 유사시를 생각하자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구조.., 톨비쉬는 몸을 돌려 난간 깊숙히 몸을 기대어섰다.
광고용으로 떠다니던 화면에는 여전히 기자회견장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분위기는 마무리단계에 들어가는 분위기였지만 시간상 바로 아본으로 올라올 수는 없는 타이밍이었다.
톨비쉬는 아까부터 상층에서 멈춰있는 엘리베이터를 보며 시계를 확인했다.
예정된 대로 공연시간에 맞춰 고정된 엘리베이터에는 R이라는 글씨가 떠올라 있었다.
준비되었든 제한이 되었든 엘리베이터가 멈춰있는 동안에는 더이상의 관객은 올라올 수 없었다.
꿈같은 세계 라는 공간의 아이덴티티를 강조하기 위해 모든 이동 수단은 엘리베이터에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고 정원으로 출입해야하는 자재가 드나드는 화물용 엘리베이터나 직원용 통로가 외곽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뿐.
비상계단을 제외한다면 마땅한 이동수단이 없는것이나 마찬가지였다.
VIP들은 직원용 통로로 이동한다 하지만 기자들과 아직 올라오지 않은 객빈들을 기다려야 할테니 극장이 열리는 시간은 적어도 공연이 끝난 이후.
톨비쉬는 2층과 3층에 있는 직원용 출입구를 번갈아 바라본뒤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아무일도 안일어나야 할텐데 말이지. 아름다움만을 중시한 나머지 안전은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은 화려한 정원을 내려다보는 톨비쉬 눈에는 피로감만이 가득했다.
톨비쉬가 눈을 비비다 고개를 들어올리는 즈음 정원의 바닥무늬가 화려한 덩쿨의 무늬로 바뀌고 있었다.
15분마다 변화하는 바닥의 7번쨰 무늬였다. 톨비쉬가 부평초마냥 자기 임무지로 들어가지 못하고 떠다닌지도 2시간 가까이 되었다는 소식이기도 했다.
이제 슬슬 내려가 볼까? 집합장소는 2층이었으니 1층 카페에 널부러져 있던 다른 요원들과 합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타이밍이었다.
룩은 걱정도 별스럽다며 타박을 해왔지만 톨비쉬는 지각이라도 해서 체면을 구기는것 보다 낫다며 웃음으로 흘러넘겼다.
하지만 일찍가면 사진같은거 찍히지 않아? 뭔가를 먹고있는 것인지 약간의 잡음이 섞인 킹의 목소리가 톨비쉬의 걸음을 멈춰세웠다.
똑똑한 지적이었다. 2층에 있을적에 널부러져 있던 요원들의 모습을 떠올린 톨비쉬가 3층 연결로에서 발걸음을 돌려 난간쪽으로 다가갔다.
몸을 기울이자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카페테리아에 사람들이 삼삼오오씩 모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톨비쉬와 마찬가지로 기자회견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극장담당 요원들이 널부러진 카페테리아의 테이블은 늘어지다 못해 녹아내릴것 같은 나른함이 감돌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긴장 바짝넣고 들어와 바로 자신의 담당지역으로 이동 할줄 알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아, 내부는 지금 장비 체크랑 이것저것 할일 많으니까 나가 계세요.라는 매몰찬 한마디 뿐이었다.
사전탐사도 끝났고 리허설도 얼추 맞춰놨으니 따로 볼일이 없지 않냐는 말은 맞긴 했지만 설마 진짜로 2시간 넘게 방치될 줄이야.
쪼그라든 의요과 함께 바람빠진 풍선처럼 널부러진 요원들은 설마 공연까지 보고 들어갈까.. 라며 서로에게 내깃돈까지 걸기 시작했다.
결국 엘리베이터에 R이 뜰때까지 끝나지 않는 기자회견영상을 보며 몇몇은 눈물을 지었고 몇몇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얼굴들은 하나같이 다 멀쩡하게 생겨서는..”
룩의 딱하다는 감상평 한줄로 톨비쉬도 마음을 정리한 뒤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난간에 팔을 걸쳤다.
긴 날숨을 쉬는 톨비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채 공연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손목시계를 움켜쥐었다.
같은 취급 받고싶지 않다는건지 자기까지 저런 모습으로 초췌하게 비치고 싶지 않다는 것인지 모를 속내이지만 말을 하지 않으니 알 수없을 노릇.
몇가지를 확인하던 킹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아, 나이트 또 시계 전원꺼놨어! 누가 가서 전원 좀 끄지 말라고 해!”
누가 가서, 라고는 말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멀리 이탈할 수 없는 것이 뻔한 사정, 굳이 그중에서 같은 층 수에 있는 팀원이 움직인다 하더라도 해당되는 사람은 단 두명밖에 없었다.
그중에 톨비쉬에게 말할만한 사람이라고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단 한명.
퀸의 눈짓에 불만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빨리, 라는 킹의 신경질적인 재촉에 발을 내딛기는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알고 찾으라는 것인가.
밀레시안이 아본내의 카메라를 관리하는 룩에게 톨비쉬의 위치를 물어왔다.
룩은 굳이 찾아갈 필요가 뭐가 있냐며 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좀 더 앞으로 나오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밀레시안은 눈을 가린채 목적지를 찾아가는 술래처럼 더듬더듬 정원 중앙의 긴 수조근처로 이동했다.
계단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가지 색을 헤아리던 톨비쉬가 반갑게 미소지어보이는 것도 그즈음의 일,
자신을 찾고있다는 사실을 기가막히게 알아챈 톨비쉬가 난간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 손목에 있던 시계를 감싸쥐었다.
잠시 후 새까맣던 화면 위로 나이트의 아이콘이 반짝였다.
“폰, 잠깐 그 자리에서 위로 올려다 볼래요?”
가서 말할 필요도 없이, 1층에 있던 밀레시안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보일리가 있겠냐.”
밀레시안의 대답을 대신한 것은 톨비쉬가 전원을 키기만을 기다리며 칼을 갈고 있던킹의 목소리였다.
한번만 더 전원을 끄면 백업이고 뭐고 다 날려먹을줄 알라는 살벌한 협박을 날리는 동안 아래층에서 진행중이던 기자회견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기자들과의 회견을 끝내고 vip용 통로로 빠져나온 크루크와 에후르 마퀼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져 각자의 대기실로 들어섰고 관제실과 블랙레이븐이 vip들을 체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외부와 아래층을 맡은 제로들이 기자들을 통솔하며 엘리베이터 근처에 대기하는 모습이 킹의 화면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극장에 출입 할 수 있는 기자들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자들은 발길을 돌리는 모양이지만 몇몇 기자들은 극장의 외관이라도 찍기 위해 아본으로 올라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브류나크는 그런 기자들까지 알뜰하게 써먹기로 생각했던건지 쇼의 시각을 기자회견 직후로 배치,
앞등장씬은 놓칠 수 밖에 없지만 외관만 찍고 돌아가기 아쉬울 기자들이 빈손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지루해하던 객빈들도 무언가가 시작할 것같은 부산스러움에 들뜬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덕분에 덩달아 바빠지는것은 안전을 책임지는 요원들의 몫.
같은 분위기에 한껏 풀어져 있던 요원들이 관중들의 움직임에 섞여 천천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요원들 속에는 밀레시안과 퀸도 포함되어있었기 때문에 막간을 이용해 눈이라도 마주쳐보려 했던 톨비쉬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높이차가 상당한 연결로 뒤에서 그 쬐끄만한 얼굴이 보일까 킹이 타박을 하지만 밀레시안은 못할것도 없다는 표정, 소리내어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퀸의 중계방송에 톨비쉬가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내며 난간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회견장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간간히 블랙레이븐이나 다른 피오나의 내부경호 담당이 톨비쉬에게 연락을 취해오지만 그것도 아주 짧은 내용일뿐. 내부에 들어가기 전 준비된 정장으로 갈아입어야한다는 지시를 받은 톨비쉬는 짧게 내용을 재 확인 한뒤 한적해보이는 화단 옆에 멈춰섰다.
쇼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인지 객빈들은 대부분 1층이나 2층으로 내려가버린 탓에 3층은 꽤나 한산해진 분위기었다.
톨비쉬가 잠시 눈을 땐 사이 정원을 구성하는 유리패널들에서는 아주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보그르르 피어오르는 낯선 물방울들이 기대감을 간지럽히듯 피어올라왔다.
유리의 투명함과 빛의 산란을 강조하기 위해 정원 여기저기 설치된 분수대나 수조애도 마찬가지로 맑은 공기방울들이 주입되며 물이 어디론가 세차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전달해왔다.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거품꽃을 보며 이게 무엇일까 한껏 기대하던 사람들이 저마다 가까이 있는 수조를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탄성의 시작은 성급하게 뛰쳐나온 물고기 한마리가 수조속에 멍하니 서 있는 모습,
누군가 와 물고기! 하고 소리치기 무섭게 물고기들은 삽시간에 불어나 정원 전체로 퍼져나갔다.
거품과 함께 물결이 흔들리는 바닥을 따라 쏜살같이 내달리는 물고기들은 진짜와 가짜가 뒤섞인채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고 있었다.
하늘을 주제로하던 반투명한 정원은 순식간에 하늘위의 아쿠아리움으로 변화, 하늘과 2,3층 벽면에 달린 패널에도 수많은 물고기의 영상과 홀로그램이 떠올라있었다.
수조속 물고기들은 기껏해야 손바닥만한 작은 크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 높은곳까지 물고기가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냈다는 것에 좀더 깊은 탄성이 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물고기들에게 시선을 빼앗긴사이 정원을 구성하던 조명이 아주 조금 어두워졌고 요원들은 반사적으로 긴장태세에 들어갔다.
사방이 유리로 이뤄진 구조라 충분히 주변을 식별할 수 있는 밝기였지만 그래도 인공의 조명이 어두워진것은 주의할만한 요소였다.
살짝 어두워진 유리바닥은 투명함을 잃은 모습이었지만 모든것은 쇼의 일부분이었다.
물고기를 따라 움직이던 어느 발자국아래에서 소리없이 꽃 한송이가 피어났다 흩어져 버렸다.
무작위로 피어나는 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발밑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눈치이지만 물고기들은 꽃잎을 먹이로 알고 있는건지 곧바로 반응을 보이며 꽃잎이 흐트러진 발자국을 따라 무리를 지어 모여들었다.
자유롭게 노닐던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무언가를 쫓아가는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퐁 하고 실시간으로 꽃이 피어났다 흩어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발밑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객빈들이 아닌 직원들도 있었고 경호를 맡고있던 요원들도 있었으며 밀레시안도 그 인원들중 하나였다.
“네, 거기입니다. 이제 거기서 돌아서주세요.”
톨비쉬의 목소리를 따라 중앙수조까지 걸어나온 밀레시안이 자리에서 멈춰섰다.
돌아보라는 방향지시에 따라 고개를 두리번 거리는 동안 수조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밀레시안의 발치로 모여들었다.
여기저기에서 꽃발자국의 존재를 알아낸 사람들이 함박웃음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의 일이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한 자리에서 이리저리 방향만 바꿔가며 제자리걸음을 반복한 탓인지 밀레시안의 발치에는 수북하게 꽃무리가 피어올랐다. 사람들이 시선이 밀레시안에게 모여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발밑을 확인한 밀레시안이 한숨을 내쉬었고 톨비쉬의 당황한 사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킹이 책상을 두드려가며 웃음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땡땡이 치는 사람은 어디에 누구?”
룩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밀레시안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너요, 너. 지금 나를 보고 있는 너. 고개를 들어 현재의 자리가 가장 잘 보일법한 카메라를 쿡찍어 가리키자 킹의 웃음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의자가 밀려나는 소리에 킹이 폭소를 터트리며 책상위로 엎어졌다.
잠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의자를 끌어당기기까지 수십초가 필요할 지경이었다.
심호흡을 하면서도 차마 창을 올려다 볼 용기가 나지 않는지 몇ㅜ번인가 입과 턱 주변을 손바닥으로 문질러내렸다.
주변에 지나가던 다른 관제실의 요원들이 괜찮냐고 물어오는 소리가 들려오자 숨을 죽여 룩의 근황을 엿듣고 있던 살펴보던 킹이 숨이 넘어갈듯한 웃음소리를 삼키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킹의 주변에 있는 관제실 직원들도 그를 걱정스럽게 돌아보고 있었다.
킹이 신경쓰지 말라며 손을 저어 보이는 동안 둘 다 똑같은 놈들이라고 투덜거리는 것은 퀸의 몫이었다.
룩은 멋쩍은 표정으로 주변 요원들을 안심시킨 뒤 목소리를 낮춰 킹에게 쏘아붙였다.
“나만 놀란거 아니라는거 다 알거든?”
룩이 창을 끌어올리자 카메라에 접속해있던 킹의 아이콘이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무슨말인지 모르겠다며 은근 슬쩍 발을 빼는 뻔뻔함은 덤, 룩이 증거를 들이대어가며 킹을 추궁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런거 긁어낼 시간에 막아보기라도 하라며 이죽거림뿐이었다.
룩이 짜증을 내며 화면을 흩어내었다.
“내가 너를 막으면 퍽이나 막아지겠다”
“아-, 그거 항복선언? 항복하는거야?”
늘 반복되는 입씨름이 이어졌다.
평소라면 라디오 방송을 듣는 것마냥 흘려넘기겠지만 지금 중요한것은 그게 아니었다.
밀레시안은 숨이 넘어가려는 킹을 부르며 손목시계를 툭툭 건드렸다. 보고만 있지만 말고 좀.
본디 요원은 이벤트 대상에 포함되지 않지만 위치선정이나 타이밍이 너무 좋지 못했다.
아무래도 중앙 수조에 가까이 간 것이 화근인것 같았다.
킹이 약간 조정을 가하자 밀레시안의 꽃은 곧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은 아직 거둬지지 않고 있었다.
엄마, 저 누나 봐봐. 아이의 호기심어린 손가락 끝에는 밀레시안이 걸려 있었다.
스쳐지나가는 블랙레이븐의 눈이 차갑고 날카로웠다.
톨비쉬가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지만 이미 늦어버린일. 이에 대한 후처리는 알아서 하라는 냉랭한 대꾸와 함께 밀레시안이 나이트의 아이콘을 차단시켰다.
끊임없는 사과의 말로 가득차있던 오디오가 휑해졌지만 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빈 오디오를 매꾸고 있었다.
“한바퀴 돌고와.”
내가 변명해줄테니까, 라는 말은 알아서 생략.
사람들의 시선 혹은 타 에이전시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밀레시안은 빠른걸음으로 수조를 등진채 외곽에 자리한 쇼 행사용 캐노피속으로 숨어들어갔다.
시계가 흔들리며 톨비쉬의 문자가 떠올랐다.
‘아니, 내가 정말 미안하다니ㄲ..’
문자의 내용이 조금 더 남았는지 램프가 깜빡였지만 밀레시안은 전부 읽지 않은채 화면을 연타해 텍스트를 생략시켰다. 남은 것은 미확인 메세지의 램프뿐.
두어번 빛을 깜빡이던 시계는 업무모드로 전환하는 것으로 마지막 빛을 잃어버렸다.
얕은 불빛에 번들거리는 화면조차 보기 싫었던 것인지 밀레시안은 언짢은 표정으로 시계를 손목 안쪽으로 돌려버렸다. 누군가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런, 뭔가 트러블이 생기셨나봐요?”
어둠이 내려앉은 천막속에서 굉장한 미성이 들려왔다.
어둠이 흔들리는가 싶던 찰나 가면의 위로 후드까지 깊게 눌러쓴 남성이 임시로 쳐놓은 분장실커텐을 걷어내며 얼굴을 내밀었다.
미스테리함을 강조하려는 손에는 새하얀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얕은 빛이 세어나오던 커텐뒤로 강렬한 오렌지빛 조명이 비쳐들어오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유일한 광원을 등진 붉은 후드의 금수가 빛나고 있었다. 쇼의 MC의 코스튬으로는 훌륭한 분장,
하지만 밀레시안은 그의 가면을 응시하며 걸음을 멈춰섰다. 닮지도 않은 날렵한 모양새의 반가면이지만 연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신중하게 상대의 신원을 살펴보는 시선이 뒤따라 이어졌다.
친근하게 말을 걸려던 진행자는 멋쩍어졌다는듯 케이프 안쪽에 가려진 이름표를 꺼내보였다.
말로, 사전에 연락받았던 극장 MC와 일치하는 이름이었다.
ID카드에는 후드도 가면도 쓰지 않은 갈색의 미청년이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사진이 붙어있었다.
사진을 빤히 내려다 보던 밀레시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말로는 다시 카드를 품속에 집어 넣었다.
“그래서, 어쩐일이신가요? 음... 그러니까.. 피오나?”
신분증명까지 마쳤으니 이제 질문은 말로의 턴, 특별한 용건 없이 불쑥 찾아들어온 밀레시안의 등장이 갑작스럽기만 하지만 말로는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은채 잔잔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누군가와 닮았네. 밀레시안은 이런식으로 웃으며 타인을 경계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냥 들려봤다라고 하기엔 불쑥 들어와 경계부터 했던 자신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힘들었고 뭔가 변명을 하기엔 타이밍이 늦었다.
밀레시안은 순순히 사실을 이야기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벤트선정에 오류가 생겼는지 꽃이 나한테 왔더라구요. 사람들의 시선을 떨칠겸 잠시 몸을 숨기려고요”
“음? 피오나의 요원이 이벤트 대상자로 지정되었다구요? 이상하다.. 분명 요원들의 동선은 대상선정에서 제외했는데요.”
말로는 그럴리가 없다며 어깨를 으쓱 들어올려보였지만 곧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검지손가락을 세워 입술을 가로막았다.
“저런, 근무지 이탈중에 딱 걸리신거로군요?”
“본의는 아니었지만요”
“모두 그런식으로 말을 하곤 하죠.”
밀레시안은 잠시 가면너머의 말로의 눈빛을 응시했다.
말꼬리 잡는것도 닮았네. 그가 조금 젊었을 시절, 그러니까 앞머리가 후퇴하기 전이라면 저런 느낌이었을까?
하지만 궁금증과 별개로 단장과 같은 타입이라는 것은 결국 말을 오래 섞어봤자 휘말리기만 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오랜 경험 끝에 달관의 경지를 체득한 밀레시안은 긍정의 반응도 부정의 반응도 보이지 않은채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로가 손가락을 구부리며 턱끝을 매만졌다.
“이런, 첫 손님부터 이렇게 부루퉁한 반응이라니. 오늘은 좀 더 열심히 기합을 넣고 나가야겠군요.”
“아직 쇼를 시작하기 전이니까 나는 카운트에서 빼주지 그래요?”
“글쎄요? 쇼의 시작을 어디로 보는지에 따라 카운트의 기준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밀레시안이 다시 고개를 들어올리자 말로는 키워드를 잡았다는듯 고개를 숙여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어느새 걸음은 한뼘 가까이, 지독하리만큼 매끄럽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어둠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생각해보세요. 이 쇼의 시작은 어디서부터가 시작일까요? 부저가 울렸을때? 조명이 내려갔을때? 물고기가 헤엄쳐 나오고 스텐바이 15분전 바닥의 무늬가 변했을때? 카운트 시계가 붉은 램프를 올렸을때는 어떨까요? 라니에르에게는 엘리베이터에 R의 표식이 떴을때부터였겠지만 당신에게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밀레시안의 경계가 풀려가는 것을 눈치챘는지 말로가 어둠속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든 것을 통틀어도 내가 만난 사람은 당신뿐이지만요.
어깨너머로 흘러나온 분장실의 조명이 밀레시안의 눈썹끝을 스쳐지나갔다.
점점 밝아지는 빛무리를 따라 말로의 어깨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말로는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밀레시안을 향해 손을 내밀어보였다.
이쪽관련 인간들은 다 이런 자세가 디폴트인걸까, 밀레시안이 편견가득한 생각을 접어 넣으며 말로의 손끝을 응시했다.
퐁하는 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없던 손끝에서 작은 꽃한송이가 튀어나오며 타-다-, 입효과음이 들려왔다.
“꽃을 선물받은 것으로 시작하는 것도 꽤나 로멘틱하지 않습니까?”
가면속에서 한쪽눈을 찡긋해보이는 익살에도 밀레시안은 눈하나 깜짝 하지 않은채 부동의 자세를 유지했다.
“나는 카운트에서 빼달라니까요”
하지만 꽃을 받아들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분위기에 밀레시안이 한숨을 내쉬며 꽃을 받아들었다.
오늘일은 유난히 사람에게 치이는 일들뿐이다.
밀레시안이 종이로 만들어진 꽃을 손끝으로 빙그르르 돌리다 자켓 안쪽에 조심히 집어넣었다.
눈앞에서 선물받은 꽃을 내던질정도로 모질지 못한 탓이었다. 꽃을 소중히 간직하는 모습에 말로가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웃음은 진짜다.
밀레시안은 영문을 모를 사람이라며 미간을 좁히고 있는 사이 말로는 구겨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고쳐묶는 후드끈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시선이 생각보다 높은느낌이었다.
가까이 다가섰기 때문인가, 숙여있던 자세와 일어섰을때의 머리높이가 미묘하게 엇나간 느낌이었다.
밀레시안이 말로와의 신장차이를 의식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말로가 밀레시안의 등을 가로막으며 고개를 기울여왔다.
생각을 읽은 것 같은 깊은 갈색의 눈동자가 오렌지빛의 불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흐음,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보통은 아무도 못알아채는데..”
“아무말도 안했는데요”
“사실은 이 구두, 교역센터에서 가끔씩 수입된다는 비밀의 키높이 아이템이거든요. 티는 안나지만 한뼘은 더 커져보이는 마법의 아이템..! 제가 아는 인맥중 작고 영악한 부서의 누군가에게 긴히 부탁을 해서 하나구해왔죠.”
그거 킹이 무지 좋아하겠네. 밀레시안의 흐려진 표정에 말로가 걸려들었다며 잽싸게 진실을 덧붙였다.
“는, 거짓말입니다. ”
“......”
역시 단장같은 사람이었어. 밀레시안이 온 세상 신뢰를 다 후려친 눈빛이 되어 말로의 팔을 밀어내었다.
누군가 케노피 앞에서 무전을 주고받고 있었다.
“저는 상반신에 비해 다리가 긴편이거든요. 그래서 앉은키랑 일어섰을때랑 신장차이가 많이 나는… 앗, 어디가십니까? “
밀레시안의 표정을 무너트렸다는 기쁨 때문인지 조잘조잘 말을 이어가던 말로가 서운한 표정으로 밀레시안을 붙잡았다.
언제 봤다고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것인지 밀레시안이 시간을 가리키자 말로가 엇차 벌써 시간이 이렇게? 라며 넉살좋은 미소를 띄어보였다.
“시간 다되었어요”
“아 벌써 그런시간이 되었군요. 아쉽게되었네요. 그럼, 나중에 또 보도록 합시다.”
“그럴일은 없을 것 같은..”
“말로씨, 슬슬 준비하셔야죠?”
“네, 나갑니다.”
밀레시안이 그럴리가 있겠냐고 대답하려 했지만 말로는 전부 듣지 못해 미안하다는 손짓과 함께 스태프를 따라 케노피 밖으로 돌아섰다.
순식간에 휩쓸리고 지나가버린 기분이었다.
멀뚱히 남겨져 있던 밀레시안이 신경쓰였는지 천막을 나가기직 전 말로가 자신의 케이프 위를 툭 건드리며 눈을 찡긋 거려보였다.
밀레시안이 꽃을 집어넣었던 자켓 주머니와 비슷한 위치였다.
“.........”
주인이 나가버린 케노피에서 빠져나온 밀레시안은 훨씬 한적해진 주변을 둘러본뒤 기둥을 돌아 퀸이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한참동안 시야에서 사라진 밀레시안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퀸이 반갑게 밀레시안을 맞이했다.
“어디까지 갔었어?”
“그냥, 요 앞에요”
밀레시안은 말로가 머물던 케노피와 행사장 근처를 가리키며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메세지를 확인했냐는 말에 밀레시안은 어깨를 으쓱 거리며 시계를 들어올렸다.
업무모드로 변환된 시계속에는 나이트의 아이콘만 바쁘게 움직일뿐 소리나 빛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과연 그렇게 된 것이었냐며 납득하는 퀸과 달리 밀레시안의 인이어로 직접 메세지가 연결되었다.
누가했는지 묻지 않아도 가능 한 사람은 딱 두명 뿐이었다.
“폰, 요요요요 거짓말쟁이….”
“내가 뭘요”
천막속의 대화를 엿들었을것이 분명한 킹이 음산한 풍으로 목소리를 내리깔며 때이른 귀신에코를 넣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여왔다.
“나이트에게 이를꺼다...”
뭐가 이를 것이 있다는건지 밀레시안이 맘대로 하라며 통신을 끊어버리자 퀸이 의아해 하며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연결이 끊기자 마자 옆에있던 퀸에게 바로 연락을 돌린것인지 밀레시안은 짜증나는 표정으로 통신을 다시 연결했다.
킹은 밀레시안의 냉대에도 지지 않고 음산한 목소리를 유지하며 질척하게 들러붙어왔다.
“비밀을 원한다면 나에게 그 물건에 대한 정보를 넘겨라…”
“물건?”
“구...두...말이다…”
역시 목적이 따로 있었구만, 킹의 간절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밀레시안이 줄 수 있는 정보는 몇가지 안되었지만 킹은 그것만이라도 어디냐며 열심히 메모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을 거쳐 하나 구했다는게 뭐 그리 중요한건지, 킹은 실제의 사례가 있는 것과 소문의 차이는 크다며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격렬한 감정의 폭발에 밀레시안이 잠시 인이어를 뽑아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여전히 나이트의 아이콘이 점멸하고 있었다.
소문이 흘리고 다니던 실제의 꼬리를 잡았다는 흥분감 때문인지 킹은 퀸과 연결했던 메세지를 끊는 것을 깜빡한채 밀레시안과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본의아니게 당당하게 이야기를 엿듣게된 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냥 본인에게 물어보면 어때?”
“업무용 연락처밖에 공개되지 않았는데? 소개받지 않은 개인 연락처로 물어보면 퍽이나 대답해주겠네”
“폰의 소개라고 말하면?”
“아니, 나도 딱히 소개받거나 하지는 않았는데요”
밀레시안의 대답에 퀸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이상 방법이 없다는 제스쳐였다.
“그러고 보니, 너 뭔가 받았다며”
“지금 이게 도청기인지 무전기인지 헷갈리기 시작하네요”
“뭔가 받았다며어…!”
킹의 끈질긴 질문에 밀레시안은 품속을 뒤적거리며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그냥 종이꽃 하나라며 버리기 뭐해서 받아두었다는 꽃을 꺼내 퀸에게 확인시켜주기 위해 자켓안쪽을 살피던 밀레시안이 손을 멈추며 주머니 안에 들어간 낯선 종이를 꺼내들었다.
꽃모양으로 접어놨던 종이인지 구깃구깃 해진 종이 한장이 손에 들려져 나왔다.
누군가의 개인적인 번호가 밀레시안의 손에 들려있었다.
밀레시안은 끝에 끝까지 낚였다는 사실때문인지 살짝 굳어버린 눈치였다.
아니면 자신의 소지품이 바뀐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것이 충격적이었다거나.
“........”
“뭔데? 뭔데?!”
“꽃이였어요.”
“꽃이였던 모양이네”
“뭔데 그게?!”
진실과 거리가 조금 있었다 뿐이지 거짓은 아니었다.
퀸은 나중에 쓸모가 있지않을까? 라고 입모양으로 대답해 보였다.
쓸모는 무슨 쓸모라는건지, 밀레시안은 그럼 퀸이 가져가라며 억지로 종이를 퀸의 손에 쥐어주었다.
뭔데? 왜 갑자기 말이 없는건데 라는 말을 반복하는 킹의 말을 무시한채 소리없는 아우성이 오가고 있었다.
결국 종이를 떠넘기는데 실패한 밀레시안이 오만상을 찡그리며 옷매무새를 고치고 있는 동안 자리 이동을 위해 블랙레이븐이 다가왔다.
엘리베이터의 하강램프가 점등되었고 현장에 있던 요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올려 서로의 정보를 확인했다. 대기 위치를 변경하기 전, 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밀레시안에게 조언을 건네왔다.
“나이트에게 메세지라도 하나 보내”
“내가 왜요..”
“보내 놔...!”
밀레시안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손목을 들어올렸다.
버튼 하나 분량의 아이콘를 남은 메세지가 나이트의 아이콘으로 빨려들어갔다.
하늘이 한층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조명을 어둡게 하기 위해 전면이 유리로 되어있던 극장 뒷편의 커다란 전망창에 반투명한 필터들이 덧씌워졌다.
소리없는 암운을 몰고온 사자인양 극장의 장식용 첨탑 사이로 검은 헬기가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소리는 커녕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는다.
톨비쉬는 먹통이 되어버린 인이어를 만지작거리며 헬기를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에게는 차단당했고 킹은 뭐가 잘 안들리지 조용히하라며 떠나버렸다. 퀸은 좀 기다려보라며 응답을 미루고 있는 상태.
일을 하러 들어간 룩을 부를 수도 없고 남은 것은 저 헬기에 있을지도 모르는 비숍뿐,
이래서야 전원을 끄던 키든 똑같지 않느냐는 푸념이 입가에 쓴맛을 남긴다.
“비숍?”
“어”
여전히 바람소리와 잡음이 시끄러운 것으로 보아 접근했던 헬기는 비숍이 타고 있는 헬기가 맞는 모양이었다.
접근해오면서 톨비쉬의 확인을 예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비숍은 곧장 대답을 보내왔다.
팀원 모두에게 무시를 당하는 시점에서 비숍의 대답이 유난히 반갑게 느껴진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지만 톨비쉬가 비숍을 호출한 것은 잡담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헬기는 그대로 정원 근철을 돌아 상승하며 남은 체크포인트를 순환, 이후 오후팀과 교대할 예정, 딱히 다른 통신이 들어오지를 않는 것을 보니 외부팀도 순조로운 모양이었다.
머릿속으로 외부순찰팀의 일정을 복기하던 톨비쉬가 시선을 돌려 꽃잎이 흩날리기 시작하는 1층의 공연장을 바라보았다. 지금인가? 톨비쉬가 흘끗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정오를 지나 반시각을 알리는 알람소리가 울려왔다.
밀레시안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비숍의 헬기는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짜르르하게 귓가를 울려오는 심벌즈의 소리가 들려왔다.
음악을 알리는 북소리를 시작으로 R에서 머무르던 엘리베이터들이 일제히 하강램프에 빛을 밝혔다.
꽃가루가 휘날리고 기자회견장 이후 제각기 다른 광고의 화면으로 돌아갔던 화면들이 일제히 파란 화면을 띄워올렸다.
진짜 하늘을 가리고 거짓의 하늘을 조명하는 전시회장, 하늘을 수놓는 꽃들사이에도 거짓이 숨어있었다.
이 꽃은 진짜 꽃일까? 아니면 가짜의 환상일까.
톨비쉬는 머리위에 떨어진 은백색의 반짝이 종이를 떼어내었다.
옷은 갈아입을테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머리가 흐트러지는 것은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꽃가루가 묻지 않을 법한 장소가 어디 있을까, 천장이나 인적이 좀 드문 장소를 물색하던 도중 문득 1층의 카페테리아를 떠올렸다.
이정도 시선끌기용 이벤트가 시작되었으면 이제 슬슬 카페테리아의 관중들도 흩어졌을 시간이었다.
인테리어용 파라솔이 꽂힌 카페테라스의 좌석과 늘어져있는 다른 에이전시의 요원들의 모습들, 옷을 갈아입을 만한 여유분의 시각, 몇가지 요소들을 헤아리던 톨비쉬가 잰걸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진짜 꽃가루와 홀로그램의 꽃가루가 어두워졌던 조명을 밝혀왔다.
내려가는 도중에도 밀레시안에게 보내는 메세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다시한번 메세지를 보내지보지만 여전히 읽지 않았다는 반응만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톨비쉬의 입꼬리에 쓴웃음이 걸렸다. 분명 순간적인 욕심으로 불러낸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서도..,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발치에 피어난 꽃을 발견했을때의 표정이라던가 살짝 풀어지며 발을 통통 구르며 확인을 거듭하던 모습,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정색하는 타이밍이라던지.. 비틀렸던 미소가 온전한 곡선을 그리며 입가에 번져나갔다.
8시 방향에 있던 벨바스트가 11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간에 손을 얹은채 계단을 따라 내려가선 톨비쉬의 눈이 가늘게 흐려졌다.
2시에 있던 타라는 5시로 이동하고 있었고 비숍이 탄 것으로 보이는 헬기는 이제 엘리베이터의 뒷쪽 창문을 가로지르며 상승하고 있었다.
피오나 쪽도 확인하고 싶지만 구조물에 가려진 피오나의 위치가 잘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살펴볼 광원이라고는 은은하게 빛을 내는 외벽과 계단, 난간등에서 피어나는 섬세한 꽃무리들 뿐이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쨍하니 울리는 심벌즈의 소리에 맞춰 터져나왔다.
북소리와 함께 연주되는 현악기의 선율이 사사로운 소리를 가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비춰지는 스포트라이트가 공연장에 내리꽂혔고 시선은 한 지점으로 모여들었다.
엘리베이터가 아본으로 내려왔다.
엘리베이터의 간접조명이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화려한 카운트다운을 헤아렸다.
이제 곧, 속으로 타이밍을 헤아리던 톨비쉬가 카페테리아의 요원들과 합류했다.
요원중에선 마지막으로 도착한 꼴이되었지만 시간에 늦은것은 아니었다.
톨비쉬는 마지막으로 남은 극장내 진행 MC를 기다리고 있다는 정보를 전달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업무적인 대화 이후 의례것 남게되는짧은 침묵이 흘렀다.
톨비쉬는 습관적으로 시계를 들여다는 보던것을 멈춘뒤 팔을 문질러내리며 소매끝으로 시계를 덮어내었다.
정말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었나?스스로에게 엄중한 경고의 기준을 들이대고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답장은 도착하지 않았다. 읽었다는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다.
톨비쉬는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며 업무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머지는 나중에, 다음에, 일이 끝난 이후에 만나면 되는 일이다.
동쪽 직원용 출입구에서 이어지는 어둑한 길목쪽으로 부터 붉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호리호리한 체형의 청년이 이벤트 스탭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극장의 진행자였다.
청년은 마지막으로 도착한 것이 멋쩍은지 가볍게 농담을 섞어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함께 도착한 스탭이 18명의 요원들의 얼굴과 명찰을 일일히 확인하는동안 극장내에 들어가있던 제로의 엔지니어로 부터 준비가 끝났다는 연락이 전달되었다.
응답을 받은 것은 톨비쉬의 곁에 서 있던 제로의 요원, 귀에 걸린 피어스로 보아 이쪽이 디바측의 인물일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쪽이 멀린의 요원이고 다른 두명은 디바측인 모양이었다.
멀린에게 이런 요원이 있었던가? 톨비쉬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한참 소리를 낮춰 빠르게 말을 주고받던 멀린의 요원이 가느다란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톨비쉬도 당황한 기색없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치레로 얼버무리지만 기묘한 느낌이 남은 인상이었다.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것같은 낯익은 눈매였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에는 없는 사람이다. 톨비쉬는 자신의 기억이 틀렸을리 없다는 확신을 가지며 고개를 돌렸다.
끊어지지 않은 시선이 끈적하게 늘어져왔다. 이런식으로 대놓고 사람을 떠보는 미소를 잊어버릴리가 없는데..
톨비쉬는 다른 피오나들에게 합류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들중에서도 그 요원과 일선에서 만난 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왜? 의문을 해결할 시간도 없이 새로운 지령이 전달되고 있었다.
지루하던 대기시간의 끝이 났고 남은 것은 아득히 길게 느껴질 업무의 시간뿐, 요원들은 요란하게 스트레칭을 하며 풀어졌던 얼굴표정을 가다듬었다. 말로와 이벤트 스탭들이 먼저 2층의 동쪽 입구로 이동했다.
나머지 요원들은 서쪽의 입구로 이동한뒤 상의를 바꿔입고 극장안으로 들어설 예정, 톨비쉬는 예정되로 팀의 인이어를 해제한다는 메세지를 킹에게 전송했다.
극장내에서는 지정된 통신장비만을 사용해야하기 때문이었다.
킹은 가볍게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톨비쉬들이 극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예정된 시각이 찾아왔다.
확하니 밝아지는 정원의 빛이 온 세상을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은빛을 표현하기 위한 암막은 이를 위한 사전설정, 사방으로 가득차는 하늘의 빛위로 붉고 옅은 꽃잎들이 정원가득 날아오르고 있었다.
승리와 개선, 축복과 영광, 얼어붙은 은색의 광물위에 생명력 가득한 박수세례를.
환호소리에 맞춰 등장한 낭랑한 여성 진행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지만 두터운 극장의 문에 가로막히며 침묵속으로 잠겨들었다.
어둠속 짧은 복도를 밝히기 위해 발목언저리의 작은 조명들이 불을 밝혔다.
유난히 창백한톤의 푸른 빛이 톨비쉬들의 얼굴을 역으로 비춰올렸다.
두번째 문에 들어서기전 톨비쉬가 한쪽의 인이어를 빼내었다.
세세하게 따지자면 톨비쉬가 가지고 있는 시계나 몇몇 장비들은 개인장비에 속하는 물건이었다.
떄문에 원칙적으로는 시계까지 풀러내야했지만 블랙레이븐은 그렇게까지 따진다면 한도끝도 없겠다며 제로들을 가리켜보였다.
디바는 웃었고 멀린은 넉살좋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로들은 그렇기 때문에 외부로 모든 인력을 돌리려하는 것이라며 은근슬쩍 내부로 지정된 인원을 빼내려했지만 다우라의 손짓 한번에 서류는 다시 테이블위로 끌려나왔다.
낮게 혀를 차는 다우라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빛을 밝힐 브류나크가 그렇게 째째하게 굴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
“글쎄, 우리쪽 교수님은 째째한게 느슨한것보다 좋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를 해서 말이지.”
“내 말을 그렇게 잘 듣고 있는줄 알았으면 평소에도 1g정도 실천해보지 그랬나”
“아 진짜 손발 안맞아서 못해먹겠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에린이 사용하는 모든 기술은 결국 칼리번의 예측 범위 안에 들어있는 시간의 증거물들이었다.
칼리번은 지식을 모아 발전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 결과를 예측한다. 사람들은 결과에 맞춰가듯 기술들을 발표했다. 과거의 결과와 현재의 상태를 반영하여 미래를 예측. 예언과 증명, 사람이 기술을 만드는 것인지 기술을 사람을 만드는 것인지. 그 시작점은 이미 모호해졌다.
칼리번에 의해 생활의 방향이 달라져 왔고 사람들의 취향에 의해 칼리번의 방향이 결정되었다.
지루하지만, 실패없이 안정적인 발전이었다. 칼리번의 연산속도에 맞춰 진행하기만 하면 무난한 성공의 궤도에 오르게 된다.
때때로 누군가가 변화의 움직임을 시도했지만 결국 그 변화의 시도조차 칼리번의 시야 안에서 일어나는 일.
사람들은 안락함을 느꼈고 동시에 조금씩 갑갑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때 생겨난 변수가 바로 피오나의 실리엔, 칼리번조차 예상하지 못한 실리엔의 부활과 더불어 발레스의 개화가 시작되었다.
평생을 설원 속 대장장이로 썩어버릴 것이라 생각했던 암울한 과거와 달리 화사하게 빛이나는 실리엔은 새하얀 설원에 또다른 색채를 더해주었다.
칼리번에 등록되지 않은 힐웬의 정제기술은 빠르게 변화했고 에일레흐는 그 변화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시한번 변화를 꾀했다.
에일레흐는 그동안 축적되어왔던 칼리번의 지식을 토대로 그 예상범위 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시도했다.
발레스는 그 기반이 되었고 그 결과 태어난 것이 바로 브류나크.
기존의 칼리번의 예상안에서 벗어나면서 대등한, 혹은 그를 넘어서는 새로운 에린의 중심부를 만드는 것이 두 왕가의 목표이자 경쟁하는 레이스의 결승 골이었다.
떠오르는 발레스와 시대에 걸쳐 군림하던 에일레흐, 그리고 그 사이에 끼여버린 기타 여러 에이전시들이 발레스의 다우라를 바라보았다.
다우라는 엄지손가락과 검지손자락을 펼쳐 느릿하게 원을 그리며 말을 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폐하로부터의 전언은..”
시네이드가 헛기침을 하며 저희 이사장님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만, 이라고 첨언하지만 다우라는 개의치 않아하며 손가락 총을 들어 천장을 향해 발사했다.
찡긋 거리는 한쪽 눈 윙크가 익살스럽지만 흉터가 그어진 푸른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어디한번 들고올테면 들고와보라 이거야.”
글
톨비밀레) reload #5(1)
“축하합니다 크루크 제쉬바르”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이요, 에후르 마퀼 2세.”
두 사람이 악수를 하자 플래쉬세례가 이따라 이어졌다.
입꼬리는 호선모양으로, 시선을 낮추되 오만하지 않게, 하지만 너그러움이라는 시그널을 표현해야할 미소가 어딘지 어색했다.
깜빡이려는 눈꺼풀을 붙들어매었다. 손이 가볍게 흔들리다 카메라 밖으로 내려갈때까지, 이 미소를 유지해야한다.
파인더 너머로 지켜보는 눈동자들이 빠르게 셔터를 눌러 그 모습을 담아내었다.
호기심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 화면 어딘가 평소와는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기자들은 열심히 셔터를 누르며 관찰을 지속했다.
카메라를 든 손목의 각도가 점점 높게 꺾여가고 있었다.
찰칵찰칵, 무기질적인 소음이 뜨거운 박수소리에 녹아들었다.
열정의 모습을 흉내내는 축하의 말소리가 홀 안을 가득 매웠다. 그 박수갈채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과연 누구인지 가려낼 길이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간단한 진실일까 필사적으로 명암을 가리려는 가면에 대한 조롱이었을까.
서로 다른 어둠과 그림자에 숨어든 무리들은 관객들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총성대신 플래쉬가 반짝인다.
하지만 왕자는 오랜 세월을 넘어 여전히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에일레흐였다.
십수년간의 실무와 선천적인 재능으로 다져진 완벽한 업무용 미소가 이런 작은 패배하나에 무너질리 없었다.
왕의 이름은 버렸지만 그래봤자 의자를 하나 내려온 것일 뿐.
여전히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보고 그는 온화하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을 흔든다.
그런 거리감과 그런 각도차에 서있는, 그는 조명속에서 연기하는 배우와도 같았다.
그러나 오늘은 유난히 플래시가 밝은 날이었다.
눈을 찌를듯 날카로운 시선들이 그의 얼굴에 쭉 내리찢어 한낯조롱거리로 만들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조롱에 가까운 시선들, 기자들은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당겨 셔터를 눌렀다.
1/6초에 한장씩, 느릿한 스톱모션같은 연사가 이어졌다.
에후르 마퀼의 미소가 깊어졌다. 짖궂은 어린아이들을 달래는 쓴웃음에 가까운 얼굴이다.
평소보다 반뼘 무릎을 굽힌채 조금 더 높은 각도로 올려찍는 사진속에서는 어쩌할 도리가 없었다.
화려한 조명대신 그림자가 과장되게 찍히는것이 느껴진다.
아무리 노련한 주니어라도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조명에 의해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걷어 낼 수는 없었다.
시선이 흔들린다. 수많은 날들을 지나며 단 한컷의 b급 미소도 허락치 않아왔던 에일레흐였지만 오늘만큼은 완벽한 스마일을 지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저게 짓궂음이라고? 그냥 예의가 없는거지. 화면 너머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불쾌한 심정을 대변했다.
와이드샷 화면 아래 삐죽삐죽 튀어나온 뒤통수 너머로 그들의 유치한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화면이 당겨지고 오디오가 넘어갔다. 카메라의 시선들도 화자를 따라 움직였다.
에일레흐에 비해 크루크를 찍는 카메라들은 평소의 시점보다 조금 더 멀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역시 가까이서 얼굴을 한 컷, 다시 가슴 아래까지 쭉 끌어당겨서 다시 멀리서 한 컷.
애매하기 짝이없는 거리감에 기자들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카메라속 화면과 실제의 모습을 비교한다.
저쪽은 억지를 부려도 망가진 사진을 찍기가 어려운데 이쪽은 억지를 부려야만 제대로 된 A급 사진을 건질수 있는 모양이었다.
몇 장인가 손끝까지 섬세하다고 평가받은 몇몇 실력자들이 가까스로 사진을 찍어내었지만 이번엔 메인을 어디로 결정해야 할지 난감하다.
Vip들의 얼굴인지, 아니면 마주잡은 손에서 터져나오는빛나는 저 광채인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한번에 찍을 수 있는 것은 한 컷뿐이다.
눈이 흔들리는 만큼 카메라의 초점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셔터를 눌러도 카메라들은 좀처럼 크루크에게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체격자체가 규격을 달리하는 사이즈였다.
평소 한 컷에 찍기에도 버거운 어깨는 늘 걸치고 다니던 방한용 작업복이 아닌덕에 반쯤 줄어보인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하지만 여전히 그 골대가 남다르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발레스의 설원처럼 새하얀 상의는 안그래도 커다란 그의 어깨를 강조하고 있었지만 장인의 신들린 손길이 투박해 보일수 있는 체형을 유려한 선으로 커버하고 있었다.
라인을 따라 떨어져 내리는 시선을 이끌어 고정시키는 것은 손목 근처의 까만 소매, 사람들은 시선은 대부분 그 한 치정도 되는 까만 손목라인에 머물러 있었다.
검은 배경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은백색의 커프스가 조명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굳이 눈썰미가 좋지 않더라도 한번쯤 눈길을 던질만한 부드럽고 은은한 은빛, 그리고 그 투박한 손가락을 빛내고 있는 또하나의 은색이 반짝이고 있었다.
힐웬으로 만든 왕가의 반지. 이렇게 작은 것은 힘들다며 우는 소리를 하는 장인들에게 억지로 고급 세공 도구를 쥐어며 짜낸 최고의 걸작품이었다.
시도하는 것에만 백만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1급 세공 기술을 몇번이나 반복해야했던가, 크루크의 손가락둘레에 딱 맞게 가공된 힐웬의 반지 상면에는 엄지손톱만한 작은크기의 바쉬베르의 문장이 세겨져 있었다.
손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끌어모으고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만으로도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완성된다.
화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귓가에 짤막한 광고같은 것이 시작되었다. 어디선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자, 상상만해도 시린 눈보라를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그 설원 어딘가에 외로이 지어진 작은 공방이 있을 것이다.
광로에서 피어오른 열기에 내부는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하고 창문에는 서리가 잔뜩 얼어붙어있다.
얼음때를 벗겨낸 창문 너머로 고집있게 흑색의 광석을 두드리는 장인의 모습이 그림처럼 스쳐지나간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광석은 활화석과 비슷하지만 두드리는 망치의 강도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다.
수차례 두드리고 가공하기를 반복하며 검은광석이 백색이 되어 가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는 장인의 얼굴을 다름아닌 크루크,
완벽한 백색을 띄는 힐웬을 내려놓지만 그의 얼굴에는 고민이 가득하다.
빛이 들지 않는 공방 구석에 주저앉아 결정적인 생명력을 부여하지 못해 고뇌하는 설원의 장인에게 새하얀 부엉이가 날아들어왔다.
편지를 펼치기도 전에 뛰어는 발소리가 공방의 문을 열어젖힌다.
기적적으로 재발견된 실리엔을 가지고 돌아온 피오나의 단장이 크루크의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나와 빛에 휩싸인 주먹만한 무언가를 내밀어보인다.
둘은 굳게 손을 마주잡는다. 두 손이 겹쳐지는 순간 화면은 빠르게 뒤로 페이드 아웃.
새하얀 배경에 미니어쳐같이 작아진 공방은 폭발적으로 넓어지며 날아오른 흰부엉이가 화면을 가린다.
부엉이는 설원을 따라 하늘높이 날아오르고 저 멀리 하늘을 찌를듯 높게 솟아오르는 탑이 화면에 비춰진다.
화면은 탑을 확대하며 돔형태의 유리 정원을 비추고 나선형으로 둘러쌓여진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계단을 비추며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던 화면이 멈추는 곳은 브류나크의 최상층, 외관을 비추며 천천히 화면이 어두워지는 것을 기다린다.
밤이 내려 앉는 하늘에 작지만 찬란한 실리엔의 불빛이 밝혀진다.
새하얀 빌딩은 그 자체가 발광하는 제질인양 빛을 밝히고 어둠속에서 숨을 죽이던 사람들이 환한 미소를 띄며 브류나크를 올려다 본다. 박수소리가 이어진다. 빛이 도시를 밝히고 있다.
새하얀 배경위로 브류나크의 문장이 떠오른다. 발레스와 에일레흐를 반반 섞어 만든것 같은 엠블럼,
하지만 어쩐지 발레스가 에일레흐의 제단 위에 올라선것 같은 느낌의..
그으런 광고 말이지..! 룩은 신이난 목소리로 방금 만든 광고를 주절거리고 있었다.
연이어지는 팀원들의 한숨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이어 완결내는 걸 보니 나름대로의 자신작인 모양이었다.
뭐, 실리엔을 가지고 돌아온건 단장이 아니라 우리지만, 하지만 아무래도 톨비쉬로는 그 중후함이 살지가 않아서.. 흐음.. 룩은 아쉽다는 어조로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때? 이참에 수염이라도 길러보는건. 룩의 실없는 헛소리에 톨비쉬는 짧은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차라리 비숍은 어때? 바통을 넘겨받은 비숍도 매마른 웃음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니,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웃음소리였다.
룩이 입으로 광고를 한 편 찍거나 말거나 킹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확실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누가 따로 광고를 한것도 아니것만 생소한 모양의 바쉬베르의 문장이 그려진 작은 반지에는 저절로 발레스의 브랜드를 떠올리게 만드는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왕가와 비지니스, 설령 이름만이 남아있는 문장이라 하더라도 문장 자체를 파기해야했던 에일레흐와는 기반되는 배경이 다르다.
하지만 마법의 진짜 위력은 그런 광고탑의 효과 따위가 아니었다.
킹은 책상에 기대어 앉은 채 자세로 손을 들어올렸다. 한참 좋은분위기로 대화중이던 크루크와 에후르의 움직임이 멈춰섰다.
손가락을 치켜올리자 화면위로 반투명한 원이 생겨나며 반시계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손이 돌아가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영상이 뒤로 되감겨 들어갔다.
아무런 의미없이 지나가던 군중들의 모션이 역으로 재생되자 어딘지 어색한 움직임처럼 느껴졌다.
등돌려 앉은 그림자가 부산스럽게 흔들렸다. 되감기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입의 움직임과 눈의 깜빡거림이 더욱 이질스럽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 부자연스러운 영상속에서도 힐웬은 여전히 영롱하게 반짝이고 플래시는 연신 단상을 비췄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영상이 끄트머리에 다다랐는지 자리에 앉아있던 크루크와 에후르 마퀼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마치 셔터를 누르는 것 마냥 사람들의 시선은 한참동안 한 자리에 머무른채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크루크와 에후르 마퀼이 다시 손을 잡았다. 영상이 멈춰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곳은 어디?
동등하게 악수를 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누가 주역인지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턱을 괸 상태로 역시 한방먹은거네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화면이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한번 봤던 영상은 뼈아픈 패배를 되세기게 하는 불쾌한 오디오일뿐, 흥미를 잃고 떨어지는 손가락이 영상을 통과하며 아래방향으로 선을 내리그었다. 크루크와 에후르의 사이로 깊은 골짜기가 생겨났다. 두갈래로 나뉘어진 영상은 손가락 하나만큼 떨어진 모습으로 여전히 재생되고 있었다.
킹은 늘어지게 입을 벌려 하품을 내쉬었다.
한가로운 110층의 모니터룸, 전체적인 화면들과 요원들의 통신을 책임지는 통칭 관제실A.
에일레흐와 발레스가 쌓아올린 브류나크의 중심점에서 나른하게 땡땡이를 치고 있던 킹이 갈라진 화면 위로 검지손가락을 올렸다.
사실 한방이라고 하기엔 이미 벌어진 점수차가 너무 크지? 얄미운 룩의 목소리가 발레스의 편을 드는것 마냥 속삭였다.
하지만 오늘의 일은 어디까지나 브류나크 안에서 일어난 일일 뿐이다.
이정도 차이는 미소 하나로 매꿀 수 있다는 것이 에후르 마퀼의 자신감이었다.
작디 작은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 하나넘겨주는게 뭐 그리 어려울까, 패자는 여유있게 발레스에게 중앙 자리를 권해보고 있었다.
네가 과연 여기에 서는 압박감을 견딜 수 있을까?
시험하고, 관찰한다. 어디까지나 선배되는 입장에서, 우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하지만 그렇게 영원히 가장자리로 밀려나면? 룩이 또 산통을 깨트린다.
우연이라고 해도 기회는 기회, 전복될 위험이 아예 0인것은 아니잖아? 분하지만 맞는 말이었기에 킹은 대꾸없이 흥 하고 아니꼬운 시선으로 룩의 아이콘을 노려보았다.
아이콘위에 작은 메세지 마크가 뜨더니 자동으로 열리며 혀를 낼름거리는 메세지로 변화했다.
킹이 화면에 도착한 룩의 메세지를 삭제해버렸다. 룩의 웃음소리가 헤드폰가득 울리고 있었다.
룩의 말대로 우연이라고 해도 마냥 손놓고 바라볼 수 만은 없었다.
짜여진 각본속 리얼리티쇼와 별반 다를바 없는 기자회견이지만 엄연히 이쪽은 비지니스의 일환, 기자회견이 길어져봤자 이득볼것이 없는 에일레흐는 원만하게 질문을 마무리하고 아본의 극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속이 보이지만 딱히 꼬집기엔 뭐라 할수 없는 타이밍이었다.
다음 행사장소가 거론되는 말에 약속이라도 해놓은것인지 성급한 몇몇 기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이야기의 주도권은 발레스가 쥐고 있지만 내일의 에일레흐에게 밉보여 나쁠것은 없다는 계산에서 나온 일종의 아부 퍼포먼스였다.
굳이 좋은쪽으로 해석한다면 기자회견 뒤에 있을 쇼를 위해 엘리베이터가 잠시 정지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빠른 기자들이었을지도.
이유가 어찌되었든 동요하는 움직임만으로도 에일레흐는 만족스러운 효과를 거두어들였다.
동시에 이야기를 주도하고 있던 반스트의 입매는 눈에 띄게 굳어졌다.
멍청하긴. 킹이 혀를 차기 무섭게기자들이 재빨리 카메라를 들어 반스트의 얼굴을 기록한다.
그러나 높은 의자에 앉아있던 세월이 헛것은 아니었는지 바이데가 마이크를 끌어당겼다.
낮은 웃음소리를 가장해 반스트를 질책하는것도 잊지않는 노련한 늙은 재상이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화자에게로 시선들이 움직였고 반스트는 조명밖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몇몇카메라는 여전히 반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울수 없는 명백한 실책이다.
방금 반스트의 반응으로 발레스도 이 기자회견을 이어갈 이득점을 잃어버린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마다의 화면위로 한숨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분위기가 괜찮았다면 어느정도의 회견이 더 연장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이 장소에서 득을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발레스도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 한려는 건지 바이데는 에일레흐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꺼내놓고 있었다.
모처럼 잡은 이야기의 흐름이 다시 에일레흐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것봐, 괜히 에일레흐가 아니라니까. 룩이 입을 삐죽였다. 일이나 해.
아 그래. 그건 맞는 말이지. 킹은 공중정원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되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손가락을 들어 영상을 가리켰다.
원 대신 사방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떠올랐다.
툭 하고 영상을 옆으로 밀어내자 반으로 갈라진채 재생되중이던 기자회견의 영상은 1/4로 줄어들며 되어 한쪽 구석으로 이동되었다.
사람들이 가장 기다리던 최고관심사의 이야기이니 시청률은 최고로 높아지고 있겠지만 관제실에 있는 사람들에겐 이미 보고 내려온, 혹은 지금도 보고있는 지루한 화면의 서술적 묘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이 궁금해 하는건 그런게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궁금해 해야하는 걸까,
그리고 그 정보는 어디서 구해야 하는 걸까? 킹은 스스로의 직업에 대한 질문을 되뇌이며 양 손가락을 크게 펼쳐보였다.
톨비쉬는 벌써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너무 그러지 말라고? 나 지금 성실히 일하는 중이니까?
킹의 변명아닌 진실에 비숍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대답이 필요없다는 긍정의 웃음이었다.
킹은 비워진 화면위로 펼친 손가락을 구부리며 시계방향으로 뒤집었다.
마치 손끝에 뭔가를 걸어내어 깊은 곳에 숨어있던 무언가를 낚아내는듯한 움직임이었다.
모션에 따라 명령어가 전달되고 비워진 자리로 또다른 영상들이 솟아올라왔다.
그렇게 다시 채워진 영상들은 또다시 기자회견장, 하지만 이번에는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촬영중이 아닌것 같은 묘한 각도의 모습이었다.
이런곳에도 카메라가 있나 싶을 정도로 교묘하게 숨겨진 각도의 영상들은 다름아닌 브류나크의 보안카메라에서 촬영되고 있는 것들이었다. 당연하지만 합법적인 접속이었다.
킹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관절들을 풀어내었다. 정말 최고의 직장이라니까.
쓸데없이 기능이 뛰어난 보안카메라들은 본연의 기능뿐만 아니라 부가적인 기능도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평소보다 뽀얗게 보이는 손등을 클로즈 업하기도 하고 신묘한 커팅기술로 잘 관리된 수염을 따라 촛점을 움직이기도 헀다.
고된 수행으로 뭉툭해진 크루크의 손톱은 거스러미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더불어 희생당한 손가락털들은 모조리 뽑혀나가 횡하게 드러나버린 모공에게 잠시 묵념을.
크루크의 파격적인 그루밍소식에 룩이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손가락 털이 다 뽑혔다고? 룩의 지나친 관심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밀레시안이 룩이랑은 상관없잖아요 라며 말을 끊었다.
미래를 예건한듯한 반응에도 룩은 꿋꿋하게 심각한 분위기를 연기하며 속삭였다.
아니, 물론 나랑은 상관없지.. 하지만.. 그럼 궁금해지잖아. 적막이 찾아왔다.
이대로 못들은척 넘기고 싶지만 룩이 타이밍을 헤아리는 콧김소리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런경우 침묵이 길어질수록 후폭풍에 시달리는 것은 듣는 사람의 몫일뿐, 어떻게좀 해보라는 소리없는 압박감에 퀸이 마지못한 목소리로 무엇이? 라고 되물었다.
룩이 으음.. 하고 고뇌하는 신음소리를 삼키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크루크씨.., 발가락 털도 정리 했을까? 퀸과 밀레시안이 동시에 짜증을 내었다.
룩은 원하는 반응을 얻었는지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발가락 털에서 시작된 더러운 잡담은 부츠와 통기성에 대한 이야기로 번져나갔고 조용히 있던 비숍의 입에서 질낮은 욕설이 나올때까지 계속되었다.
톨비쉬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쪽에 호의적인지 모를 웃음소리에 룩이 한번더 설원에서의 생존방법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굳이 편을 가르자면 메마른쪽이었다. 톨비쉬가 웃음을 뚝 멈춘 채 속삭였다.
“킹, 관제실에 들어가는데 따로 권한이 필요하던가?”
“아니? 이쪽도 수시로 오고나가니까 딱히 제한하는 건 없어. 왜 여기 오게?”
“110층은 어제 사전설명때 돌아봤으니까 거긴 됐어.”
“뭐? 여길온다고? 아니야. 안와도 돼. 아니 오지 마..!”
톨비쉬의 가볍지 않은 농담에 룩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멀고 먼 관제실B까지 아무도 오지 않을것이란 믿음하나로 오늘따라 멘트를 막던지고 있던 그에겐 치명적인 농담이었다.
일이 끝나고 나면 결국 1층에서 다시 마주쳐야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들어오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다. 룩은 설마 진짜 올건 아니지..? 하고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톨비쉬는 다시한번 소리낮춰 웃을뿐이었다. 부정을 하지 않는다. 룩이 입을 다물었다.
넌지시 던진 말이었지만 마냥 톨비쉬라면 허언으로 생각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룩이 화면을 끌어당겨 아본의 카메라를 빠르게 체크하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찾아낸 톨비쉬는 한가로운 분위기로 적당한 기둥에 몸을 숨긴채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도 적고 기자회견을 볼 수 있는 패널도 보이는 명당 포인트다.
몸을 숨기고는 있지만 슬쩍 난간위로 팔까지 걸친 것이 한동안 자리를 옮기지 않아도 된다는 여유가 느껴졌다.
어라 저기서 저렇게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이질적인 여유로움이었다.
순찰하던 몇몇 요원들도 그런 톨비쉬를 발견했는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순찰 스케줄을 확인하지만 저런 요원이 배치된 기억은 없다.
하지만 곧 가슴의 명찰을 확인한 요원이 동료의 팔을 툭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해를 못하는 동료의 표정에 애매모호한 고갯짓으로 1층에 마련된 휴식용으로 마련된 카페테리아를 가리켰다.
톨비쉬가 서 있는 기둥에서 멀지 않은 카페에, 대다수가 비어있는 새하얀 메르헨풍 커피테이블에는 톨비쉬와 같은 명찰을 단 다른 에이전트의 요원들이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채 여기저기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서있는 정도면 얌전한 축에 속한다고 생각될 만큼 가지각색으로 앉아있는 모습들이 흥미롭기까지하다.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시선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중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도 섞여 있었지만 널부러진 무리에서는 딱히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짓는 여유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눈에 띄는 것을 꺼려하는 에이전트의 요원들 치고는 특이한 광경이었다.
톨비쉬는 커피는 제법 당기지만 저 사이에 끼고싶지는 않다 라는 표정으로 난간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쇼윈도우 안의 패널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도 지루함이 감돌고 있었다.
이제 슬슬 이동해야하는 시간 아닐까? 하지만 시간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너무 이르다는 답변이 들려왔다.
딱히 누군가가 소리내어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기자회견이 아직도 끝나질 않고 있었으니까.
광고를 내보내야할 쇼윈도우 안의 스크린에는 아래층에서 진행중인 기자회견장의 모습이 띄워져 있었다.
다른 화면을 보고 싶지만 어디로 눈을 돌리든 모두 크루크와 에후르마퀼의 얼굴뿐인 지루한 시간이었다.
톨비쉬의 하품소리가 들려왔다.
룩이 기가죽어 있는 동안 킹은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잠시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세어나갔지만 크루크의 확 달라진 모습은 분명 평범한 변화는 아니었다.
컨버터 생산라인을 시찰하다 새어나온 실리엔 연기를 들이마시고 기억을 잃은게 아닌 이상에야 그 크루크가 스스로의 얼굴에 크림따위를 찍어바를 리가 없지 않은가.
섬세하게 덧그려진 아이브로우에 킹의 머리가 핑그르르 돌기 시작헀다.
눈이 화면 구석구석을 훑어내렸다.
이렇게 제품 외적 이미지에 공을 들이는 전략은 설원녀석들의 전공이 아니란 말이지.
소리없이 혼잣말을 달싹이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눈이 바쁘게 움직이고 열 가닥의 손끝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럼 누굴까. 그나마 세간의 시선을 신경쓰는 바이데? 그럴리는 없다.
아들뻘인 크루크의 얼굴에 신경쓰기 전에 자기 얼굴부터 신경써야 하지 않을까.
그럼 카르펜..? 아니아니, 그 아가씨도 당분간 이쪽에 신경쓸 여력이 없다.
칼리번이 닿지 않는 먼 곳까지 나가있데다가 아무리 사이가 좋다 한들 제 오빠 수염모양의 각도를 심각하게 고민할만큼 살가운 타입은 아니니까.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손끝이 미세하게 멈출때마다 정신없이 회전하는 영상들 사이에서 수많은 외곽선이 그려졌다 지워졌다.
눈이 닿는 곳마다 확대되었다 축소되기를 수십 차례. 이윽고 한 구석 교묘하게 가려진 기둥 뒤 공간에 기대어 서있는 아름다운 여성이 킹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카메라가 닿지 않는 아담하고 음습한 그늘밑이었다. 과연 이래놓고 우리한테는 온갖 생색은 다 냈단 말이지..?
이미 자신들이 철저하게 다 체크했으니 사각지대는 없을 것이라 장담한 것과 달리 크루크와 에후르 마퀼이 서 있는 단상 아래 미묘한 위치에 자리한 기둥의 뒷편에서 은밀한 회의가 오고가고 있었다.
나름대로 보안카메라의 위치를 꿰고 있는 블랙레이븐이 교묘하게 수를 부린 것 같았지만 관제실에 앉아있는 킹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늘 들고다니던 담뱃대는 어디로 가고 백금빛 가느다란 펜을 신경질적으로 물고 있는 여성은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안드는건지 기자단과 크루크를 번갈아 보며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언뜻 느껴지는 분위기로는 그다지 좋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섬세하게 각도를 틀어 제대로 된 영상을 확보하려 하지만 갑작스럽게 멈춘 카메라가 의도와는 다르게 고개를 떨어트렸다.
킹이 선점한 카메라를 노리는 무리들이 관제실 곳곳에서 중복된 명령을 내리고 있던 탓에 오더가 충돌한 모양이었다.
도전장이나 다름 없는 시비. 이봐, 이건 내가 찜했으니까 저리 꺼지라고.
킹은 카메라에 달라붙으려는 동업자들을 모두 쫓아낸 뒤 주먹을 흔들어보였다.
어디까지나 화면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위협의 의도는 충분히 전달되었는지 달려들었던 요원들은 눈을 세모낳게 뜨고는 다른 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분하지만 지랄맞은 것은 성질머리뿐만 아닌 실력도 마찬가지였다.
방해를 떨쳐낸 킹은 다시 천천히 카메라를 조작했다. 말의 속도에 비해 입술의 움직임이 너무 적어 무슨말을 하는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어느정도 추측은 할 수 있지만 명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톨비쉬라면 알아볼텐데 말이지.
영상을 카피하고 싶지만 거기서부터는 그레이존을 벗어나게 되버린다. 뭐 트러블이라고 해도 우기면 떙이지만.
안그래도 카메라에 강제로 접속하고 있는 지금도 약간의 트러블을 감수해야할텐데 거기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과정이 조금 귀찮아지겠지만 아직까지는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우길 수 있는 사안이었다.
애초에 일을 맞겨놓은 주제에 자기들이 대놓고 사각지대를 이용하면 우리더러 일을 어떻게 처리하라는거야?
킹을 숨쉬듯 변명을 늘어놓으며 선두로 각기다른 카메라에 들어앉은 요원들은 줌을 당겼다.
아무리봐도 보안요원들이 할 행동은 모습은 아니었다.
일단 겉보기부터 불법같아 보이지만, 찾아내는 과정이 이미 조금 아웃라인이지만, 어찌되었든 그들이 할 일은 바로 그런 지점을 찾아내거나 수상한 움직임을 확인하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당당하게 화면을 띄워놓고 있었다.
수많은 블랙레이븐들이 관제실을 지나치며 몇몇 화면들을 바라보지만 그들의 일탈을 알아 챌 수는 없었다.
이미 자세부터가 글러먹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킹만해도 책상에 팔꿈치를 올린채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이었고 의자위에 쪼그려 앉은 사람도 있었다.
의자에서 반쯤 흘러내린 사람은 양반이다. 엎어져 누워있는 모습으로 일단 일을 하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이게 그들의 일하는 스타일이라니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보계열 요원들을 10명 모아놓는다면 7명이 불성실한 모습이었고 2명이 정상인이었으며 1명은 자리에 없다는 말은 절대 과장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요컨데 온라인으로 접속해있으면 되는거 아니냐.
의자에 앉아있는 것만해도 감지덕지한 분위기에 힘입어 키리네의 모습은 다른 영상들 사이에 교묘하게 숨어들었다.
그 고집있는 크루크를 프로듀싱한 설원의 여왕님이 반스트를 씹어먹을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가 한마음 한 호기심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스트 녀석 이제 박살난다 텍스트와 함께라는 웃는 모양의 이미지가 화면 구석을 연달아 지나가고 있었다.
화면속에 숨겨진 또다른 관제실A는 거의 축제의 분위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나 모든 블랙레이븐이 관제실의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킹은 노골적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헛기침을 반복하는 블랙레이븐을 흘겨본뒤 피식하고 헤드폰을 끌어올렸다.
무언가 짧은 말을 속삭이자 킹의 시계속 아이콘들이 일제히 깜빡거렸다. 헛기침이 반복되었다.
그는 킹이 사내 무전기를 내팽겨쳐 놓은채 자신의 헤드폰만 착용하고 있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분명 내부의 정보교환은 중요하지만 킹은 무식하리만치 못생긴 블랙레이븐의 통신기를 받자마자 진절머리를 내며 선을 둘둘 말아 책상구석에 내팽겨친지 오래였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돼지꼬리 돌돌말린 유선이야..! 모든이의 마음을 대변한 격렬한 반응에 관제실의 희노애락이 엇갈리고 있었다.
결국 누가 말하기는 했구나의 기쁨과 유서깊은 자사의 제품이 비판받은 분노, 저 성질드러운 인간이 이쪽담당이었구나하고 실감되는 슬픔, 애초에 주변분위기는 신경쓰지 않는 마이페이스들의 즐거움.
이따금씩 그에게 전달되는 메세지가 깜빡거리긴 했지만 킹은 눈길한번 주지 않고 손등을 흔들어보였다.
어차피 통신기에 도착한 메세지는 모두 브류나크의 통신망을 거쳐 전달되기 마련,
아닌게 아니라 지금 앉아있는 그 자리가 브류나크내의 통신과 보안의 중추인데 굳이 단말기를 새로 사용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깜빡거리며 미확인 메세지가 있다는 램프가 자체적으로 꺼지기를 수차례 반복되었다.
킹이 영상을 보고 있는 중간중간에도 화면에는 짤막한 메세지가 수도 없이 열렸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반수가 반스트 불쌍하네 라는 의미의 메세지였지만 일단 일에 관련된 메세지도 제대로 수신 하고 있다.
딴짓을 병행하기 위한 최소치의 메일뿐이었지만.
헛기침을 하던 요원이 인상을 찡그리며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뒤에서 누군가 노려보던가 말던가 전혀 개의치 않아하는 킹과 같이 화면속의 키리네또한 수많은 카메라가 자신을 향해 돌아섰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채 펜끝으로 블랙레이븐의 요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언가를 확인하는건지 블랙레이븐은 쩔쩔매면서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대답했다.
대답이 계속될 수록 키리네는 더욱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본다.
무서운데? 킹이 웃음을 지으며 카메라를 조작했다. 별안간 신경질적으로 까딱거리던 펜끝이 우뚝 멈춰섰다.
키리네의 입이 느리게 움직였다. 블랙레이븐이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몇마디 느리게 이어가던 키리네는 아예 입을 다문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더 뒷쪽을 보고 있는 걸까? 뭘 생각하는 것 마냥 느리게 펜끝이 움직였다.
빙글빙글, 뭔가 흥미진진해지는 분위기에 킹이 욕심을 부려 카메라의 줌을 끝까지 잡아당겼다.
두근거린다!! 끝없이 이어지는 텍스트들이 화면 가장자리를 반복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무리하게 머리를 뻗어 좀 더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홱하고 돌아보는 키리네의 눈빛이 킹과 마주쳤다.
워.. 순간적으로 카메라를 돌릴뻔했던 킹이 가까스로 손을 멈춰세웠다.
들켰어?
두근거리던 텍스트들이 일제히 사라지며 3글자가 떠올랐다.
들켰어.
뒤이어 웃는 얼굴들이 메세지창을 뒤덮었다.
하지만 이정도로 당황한다면 이 일은 일찌감치 떄려치웠어야 했다.
무엇보다 킹의 팀원중에는 이렇게 카메라만 대쪽같이 잡아내는 귀신이 두마리나 끼어살고 있었다.
밀레시안과 톨비쉬가 동시에 제채기를 하며 코를 훌쩍거렸다.
수십차례 깜짝카메라를 역으로 당해왔던 킹은 일단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은채 키리네의 시선에 온전히 붙잡혀 있었다. 키리네가 킹의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때 카메라를 움직이면 오히려 잡아 땔 수도 없게 된다. 그리고 스토킹을 하고 있던건 킹 혼자만의 일은 아니었다.
그의 예상대로 키리네는 이내 다른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펜끝으로 몇몇 지점을 가리켰다.
블랙레이븐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명백하게 당황한 표정들이었다.
킹이 침착하게 자신이 접속했던 흔적을 수정하는 동안 움찔거리는 머리 몇몇이 고개를 들어 관제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바보같기는. 들킨놈들은 꼭 티가 나기 마련이다.
룩이 어디서 자기소개타임이 시작된거냐며 깐죽거리기 시작했다.
킹은 상대가 나빴다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말장난을 할 타이밍이 되지 못했다.
상대는 카메라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입까지 다문 교활한 마녀, 키리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블랙레이븐이 누군가에게 무전을 보내기 시작했다.
뒤이어 관제실의 블랙레이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킹은 태연하게 창을 내리고 확대한 각도로 카메라가 움직이도록 세팅을 수정해 놓았다.
어디까지나 일의 연장선. 딱 잡아떼려는 킹의 행동에 인이어속 깐죽거리는 목소리가 킹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룩은 드물게 킹이 당황한것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일이라는 양 행복하게 들켜버린 나의 마음이라는 한물간 유행가의 후렴구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들켰나? 들켰네:( 들켜버렸어★ 두근거리는 나의 마.음>♡<
킹이 나지막히 대답했다. 네 선곡센스 구려.
킹은 다른 업무를 끌어당기며 성실한 요원을 가장했다.
킹이 업무로 돌아가자 다른곳에서 일탈중이던 몇몇 요원들도 눈치껏 제 업무로 화면을 전환했다.
시그널 올 그린, 뒷면에서 잠시 소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일단 관제실A는 더할나위 없이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메세지창은 여전히 난장판이었지만 오프라인에서는 모두가 집중모드로 합심한 모습이었다.
현장의 블랙레이븐은 애타는 마음 반 봉변당한 억울함 반으로 관제실의 요원들을 닥달해오고 있을 뿐, 난데없이 고함소리만 얻어먹은 블랙레이븐들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밑도끝도 없지만 상사가 그렇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난데없이 뒤집어쓴 불똥에 블랙레이븐들의 분위가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누군가 이 오해에 대해서 설명해줄, 혹은 진짜로 일어난 트러블에 대해 말해줄 사람이 필요했지만 마땅히 말을 걸만한 사람이 없었다.
누가 바쁜것인지 한가한것인지 알 수가 없다.
방금전까지 의욕없이 널부러져 있던 인간들이 모두 빠릿하게 앉아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놈들이 뭔가 사고를 치긴 했구나. 하는 심증이 깊어져가지만 증거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합심한 경우 물증을 잡아 낼 수 없다는 것을 탈틴의 엔지니어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이정도면 감지덕지지. 엔지니어는 입속에서 사탕을 도로록 굴리며 화면과 장비를 번갈아 체크했다.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으면서도 요청한 외부의 에이전트를 승락한것은 발레스.
아무리 단장과 크루크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지만 그 개인주의 사고뭉치들이 윗사람들의 눈치따위를 보며 얌전히 앉아일을리는 없었다.
더욱이 에일레흐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서라면 물불가리지 않는 타라가 그 뒤에서 음흉하게 앉아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평가가 엇갈리는 벨바스트가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고 있었다.
그렇다고 발레스의 블랙레이븐들에게 머릿수로 밀리고 싶지 않다는 타라의 등쌀에 이기지 못하고 어거지로 끌려들어온 탈틴이 이 모든 난장판을 정리해야할 명분을 가지고 있을리도 없다.
그저 못본척 조용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리는 수 밖에.
사실상 일찌감치 외부담당으로 빠져나간 제로가 부러워 지는 순간이었다.
피오나도 아닌데 이런 촌구석에 박혀있을 의리는 없다며 훌훌 떠나버린 선배의 조언이 오늘따라 왜이리 사무치는 건지, 나도 이직할까?
엔지니어는 점점 거칠어져가는 블랙레이븐의 통신을 흘려들으며 남은 기기를 체크했다.
램프 하나에 한숨이 하나 장비 두개에 욕설이 둘, 관제실내의 장비체크를 마친 에이전트가 체크 리스트를 갱신하며 몸을 돌려세웠다.
시간에 여유가 조금 남아있으니 다음은 복도에 있는 장비들을 하면서 다른 동료들을 보조하는건 어떨까?
엔지니어는 문득 수로쪽 체크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왜 소식이 이렇게 없지? 연락이라도 한번 넣어볼까?
하지만 생각이 마침표를 찍기전에 검은 인영이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커다란 덩치의 블랙레이븐과 정면으로 부딪칠뻔한 탈틴의 엔지니어가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올려다보았지만 요원은 탈틴에게 사과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엔지니어를 지나쳐 계단쪽으로 걸어올라갔다.
콧털뽑힌 사자의 얼굴이된 블랙레이븐이 거침없는 속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킹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불쾌함이나 어딜가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경보등이 하나 둘씩 불을 밝히는 것 마냥 다른 에이전트의 요원들도 하나 둘씩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아, 이거 위험하다. 무언가 막을 방도를 찾는다급한 눈빛들이 블랙레이븐과 킹의 사이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탈틴의 엔지니어. 시선이 쏟아져왔다.
엔지니어는 남아있던 사탕을 씹어 삼킨뒤 처음부터 그 방향에 볼일이 있었던 사람마냥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돌렸다. 이에 들러붙은 사탕조각은 순간적으로 치솟은 열기에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목구멍이 죄여들고 뒷목이 홧홧하게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이직이라니 강아지 풀뜯는 소리, 그냥 퇴사하고 싶다.
누구나 가슴에 하나씩은 품고있다는 삼천원 짜리 봉투속 사직서와 늘 꼰대질만하는 타라와 에일레흐 사이에서 머리를 감싸쥐는 안드라스 부장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죄송해요 안드라스 부장, 하지만 위험수당에 이런 항목은 들가지도 못하잖아요.
상상속의 안드라스가 침울한 푸른 조명아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현실의 붉은 알람이 꺼지는 것은 아니었다.
엔지니어가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는 동안에도 블랙레이븐의 요원은 성큼성큼 발을 뻑어 이미 킹의 자리옆까지 다가서 있었다.
옆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달라지는 체구의 위압감, 거기에 검은색 일색의 제복을 입고 있기까지 하다.
누군가과 즐겁게 이야기하며 자신의 화면에만 집중하고 있던 킹도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을 감지했는지 흥이 깨졌다는 얼굴로 헤드폰을 목으로 끌어내렸다.
통신을 주고 받는 내내 헛기침을 하던 요원이 한걸음 가까이 다가와있었다.
킹이 지금 뭐하자는 건데? 하는 말소리를 대놓고 중얼거리며 블랙레이븐을 올려다보았다.
블랙레이븐의 눈이 가늘게 흐려졌다. 관제실의 대화소리가 점점 줄어들고 시선이 모여들고 있었다.
누가 말통하는 블랙레이븐좀 데리고 와봐. 이미 갔어요 지금오고 있데요. 그럼 시간좀 더끌어보라고 해. 지금 가고 있잖아요. 저기 저 탈틴의..
서로가 노려보는 것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 긴장된 순간, 누가 먼저 말을 꺼내는지가 도화선이 타들어가는 방향을 결정지을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누군가가 환한 웃음과 함께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보고서 가지고 왔습니다-!”
“뭐.”
“어…음..A구역 체크가 지금 끝난 것 같아서 말이죠..?”
“같아?”
“아-, 아뇨아뇨아뇨. A구역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엄.. A구역은 끝났고요. 네, A는 끝났어요”
아직 체크가 전부 끝나지는 않았지만 지금 들고 있는 물건은 이것밖에 없었다.
엔지니어는 뒷통수가 뚫릴 것같은 따가운 눈빛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태블릿을 들어올려보였다.
차례를 빼앗긴 블랙레이븐의 후폭풍은 무서웠지만 엔지니어에겐 최고의 방어력을 가진 이 태블릿이 있었다.
이름은 명분, 부가효과는 업무의 우선권.
엔지니어는 최대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 킹을 바라보았다. 봐주세요. 이건 수당에도 안들어간다고요.
상상속의 시네이드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어보였다. 네 안됩니다. 가슴속 종이봉투가 파르르 떨리는 느낌이었다.
“그럼 전송을 하면 되는거지 왜 그걸 들고와서….”
이 최강방어태블릿의 단점은 박자가 안맞으면 종잇장보다도 못하게 되어버린다는 것.
인상을 찡그리며 엔지니어를 쫓아내려던 킹이 아직까지도 돌아가지 않고 서있는 블랙레이븐을 올려다보았다.
반쯤 걸쳐져 있던 헤드폰에서 룩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관제실을 비추는 카메라는 없었지만 룩은 그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며 숨이 넘어가도록 끅끅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냥 그대로 숨통이 넘어가버리면 좋을텐데. 킹은 미간을 꾹 누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제발요, 엔지니어가 들키지 않도록 살짝 화면을 흔들어보이고 있었다.
“……… 아니야… 그래..그냥 거기 내려놔.”
“아…그런데.. 저기.. 그런데 말이죠..? 아직 그 다음구역은 안끝난거라서.. 다시 들고가야하는데…”
너 그럼 왜 들고 온거야. 킹이 고개를 번쩍 들어올리며 엔지니어를 노려보았다.
또다른 블랙레이븐이 경보의 속도로 관제실의 문을 박차며 들어왔다.
그야말로 기적의 타이밍, 벌컥 열리는 문소리에 시선을 돌렸던 킹도 뭔가 짚이는게 생각났는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헤드폰으로부터 사각사각거리는 잔소음이 어른거렸다.
사람의 목소리이지만 음량이 작아 뭐라하는지 엿듣기는 어려운 작은 소음이었다.
입을 벌렸다 턱을 앙다물기를 몇차례 반복하기를 십수초, 킹은 거짓말처럼 의자를 돌리며 화면앞으로 턱을 괴였다.
넘어가? 넘어가는 거야?! 모두의 염원이 정말로 통한것인지 킹이 퉁명스럽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짜증은 팍팍 내고 있지만 어째 꿍짝을 잘 맞춰주는 상냥한 모습이었다.
아니 이걸 상냥하다고 볼 수 있는걸까? 하지만 그 최악은 모면한 기적을 눈앞에서 목격한 엔지니어는 이제 다른 의미로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지금 이거 생명수당 지급되나요?! 상상속의 시네이드가 고민하고 있었다.
일단 손에 든 그거나 내놔. 상상의 보좌관은 킹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얼른 내놔, 스캔하게. 끝나면 다음구역으로 내려가고.”
두번 재촉하는 목소리에 핫하고 현실로 돌아온 탈틴의 엔지니어가 얼른 태블릿을 내밀었다.
언뜻 들리는 헤드폰에서 누군가가 웃음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고 있었지만 내용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헤드폰 안쪽에서 웅얼거리는 소리일뿐.
태블릿의 정보를 옮겨가는 간간히 고개를 기울여 누군가의 음성에 대답하긴 하지만 내용이 너무 단편적이라 무슨말인지조차 추측할 수가 없었다.
응, 알아. 안다고. 지금 그래서 하고 있잖아. 누군가의 명령에 대한 응답도 아니고 부탁을 받아주는 것도 아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타이르는 누군가에게 툴툴거리는 분위기, 하지만 너무 대놓고 바라보았던 탓일까, 킹이 다시 헤드폰을 끌어올리고는 삐딱한 시선을 보내왔다.
아, 실수실수. 기껏 온화하게 업무로 복귀한 사람을 다시 들쑤셔 좋을 것은 없으니까.
엔지니어는 딴청을 피우는 척 뒷짐을 지며 다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의 블랙레이븐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엔지니어는 다소 여유가 생긴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었다.
블랙레이븐은 왜 저런 꼬맹이에게 쩔쩔매야하는거냐며 잔뜩 불만이 생긴 눈치.
어쩌겠어요, 세상이 재능위주로 돌아가는 시대인데.
엔지니어가 어깨를 으쓱거리는 동안 그의 뒤로 다른 블랙레이븐의 요원이 다가왔다.
아 그럼 담당자에게 물어야지 누구에게 물어봅니까? 이쪽도 목소리를 낮출 생각이 없는건지 속삭이는척 쉰소리만 잔뜩 섞은 짜증이 터져나왔다.
시기와 장소가 좋지는 않지만 확실히 그의 말이 옳다.
엔지니어는 마음속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블랙레이븐의 말에 동의했다.
맞다. 원래 이런 트러블이 일어나면 해당사항을 담당하는 요원에게 물어보는게 정석이겠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면으로 적혀진 딱딱한 잣대일뿐. 크고작은 에이전트들이 여럿이 모여 정형성을 잃어버린 난장판에는 맞지 않는규칙이었다.
애초에 그들을 단속해야할 킹부터가 딴짓하다 걸리지 않았는가.
이 일에 대해 물어볼 사람은 이쪽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 굳이 찾아야한다면 당신의 위, 킹의 아래 어딘가에 있는 우유부단하면서 유능한 그리고 부탁에 약한 환상속에 존재할법한 정보계열의 누군가. 그런 사람이 있을까?
소란을 관찰하던 시선들중 하나가 집요하게 엔지니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지 안될말씀, 엔지니어는 헛기침을 하며 이름표를 슥슥 닦아내었다.
나는 이것만 해결하고 다른구역으로 빠이빠이다..! 엔지니어는 눈을 부릅뜨고 두번은 휘말리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었다. 익명의 누군가들이 아쉽다는듯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킹이 의미없는 스캔으로 시간을 끄는동안 트러블을 막기 위해 급하게 관제실에 들어온 블랙레이븐은 동료의 어깨를 두드린뒤 무언가를 속삭여왔다.
내용전달은 끝낸 블랙레이븐이 아이를 달래는 손길로 그의 어깨를 문쪽으로 돌려세웠다.
돌아선 불랙레이븐이 헛기침을 두어번 큼큼 거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딱히 잘못된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자리이동을 권유받은 것이 어쩐지 불쾌한 모양이었다.
그를 멀뚱히 관찰하던 엔지니어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사탕드릴까요?”
엔지니어의 호의에 블랙레이븐은 굉장히 기분이 상한 얼굴로 문을 향해 돌아섰다.
애도 아니고 삐지기는. 탈틴의 엔지니어는 눈을 세모낳게 뜨며 블랙레이븐의 뒷모습을 흘겨보았다.
혹여라도 또 트러블이 일어날까 얼른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입이 튀어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사탕을 까넣었기 때문이지 불만이 남아서가 아니다.
이번 사탕은 좀 오래가기를. 하지만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기 무섭게 신경질적인 킹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아-! 아직 아무것도 안했다고..?! ”
그럼 그렇지. 그 성질머리가 그냥 참고 넘어갈리가 없지.
깜짝 놀라 깨문 사탕이 반으로 쪼개져버렸지만 차라리 잘 되었다. 엔지니어는 납작해진 사탕을 입속에 잘 수납한뒤 아무것도 안먹은척 태연히 태블릿을 돌려받았다.
여유시간도 사라지다 못해 오히려 시간을 빼앗겨 버렸다. 내부체크를 먼저 끝낸것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얼른 복도로 도망가자. 그러나 엔지니어의 바램과는 다르게 킹은 태블릿을 놓지 않은채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킹이 헤드폰을 반쯤 잡아내리며 엔지니어를 돌아보고 있었다.
“야”
최소한 직함으로 불러주세요. 그래도 타 에이전트 요원인데.. 탈틴의 엔지니어는 눈물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네?”
나약한자여, 그대의 이름은 말단 일지어다. 탈틴은 태블릿을 꽉 끌어안으며 양쪽 어금니사이로 사탕을 숨겨넣었다.
일하기 너무 힘든 직장이다. 물론 사탕먹으며 일할 수 있는건 좋지만서도.. 킹이 엔지니어에게 손을 내밀어보였다.
“...... 나는 왜 안 권해”
“....”
“나도 사탕줘”
킹의 손목에 채워진 네모난 액정속에서 체스말 모양의 아이콘 두개가 미친듯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엔지니어는 주머니속 사탕의 반을 털린채 울상이된 얼굴로 관제실을 떠나갔다
킹은 소복하게 쌓인 전리품을 만족스럽게 바라본뒤 다시 여유로워진 얼굴로 화면을 끌어당겼다.
까드득 부서지는 사탕의 소리가 이어폰 너머로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글
톨비밀레) reload #4
10.
단장은 라이터를 들어올렸다.
간단하게 누를 수 있을법한 버튼대신 톱니모양의 부시깃이 손끝을 찔러들어온다.
짧은 마찰음이 울렸고 불꽃이 일렁거렸다. 가치가 있을 만큼 소중하게 보관된 골동품은 아니었다.
그저 오랫동안 열지 않은 서랍안에 굴러다니던 잡동사니중 하나였다.
너무 오래간만에 꺼내서인지 가스는 불규칙하게 뿜어져나왔고 불꽃은 그 기세에 휩쓸려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불꽃이 지나가는 부속품마다 옅은 그을음이 배어들어 있었다.
미세하게 분출되는 가스를 타고 올라온 불꽃 주변으로 여분의 불똥이 반짝거렸다.
휘청거리는 불꽃은 몸체뿐만이 아니라 사용자의 손끝까지 위협해 왔지만 단장은 이런 일이 익숙한지 가만히 불꽃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금속판에 세겨진 그을음과도 같이 오래된 세월의 흔적은 라이터의 부속품뿐만 아니라 단장의 손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불그스름한 뱀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간 무늬, 손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단장은 라이터가 더 뜨거워지기 전에 불을 내려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허리를 숙여 종이가 가득찬 통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종이에 불꽃이 비치고 있었다.
심지를 아래로 내리는 과정에도 위험은 계속해서 단장을 위협해왔다.
라이터를 아래로 내리려는 의도와 달리 불꽃은 아래를 향하는 대신 기울어지는 만큼 몸을 길게 휘어 하늘을 향해 치솟아올랐다. 손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옳지 않은 방향, 태우지 말아야 할 곳으로 향하는 열기. 가까스로 옮겨붙은 불꽃이 환하게 타올랐다.
작은 불씨는 종이 모서리를 따라 금방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치솟은 불길은 곧 희미한 연기와 함께 서류더미속으로 파고들어갔다.
호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기는 한층 짙은 색을 띄며 얇은 필름따위가 타오르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단장이 코 끝을 씰룩거렸다. 얇은 비닐막들은 순식간에 오그라들다 녹아내렸고 종이는 겹겹히 쌓인 페스츄리처럼 부풀어오르다 무너져내렸다.
쓰레기통 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검게 그을려진 통안은 휘몰아치는 잿가루로 엉망이 되어 무엇을 태우고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수많은 글자들이 무너져 내린다. 서류들이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었든지간에 결국 그 끝은 똑같았다.
단장은 가볍게 라이터를 돌려 캡을 닫은뒤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언뜻 보이는 활자들 사이에서 낯익은 단어 몇 명이 그의 기억을 건드렸다. 가장자리를 타고 내달린 불꽃이 묶여있던 서류더미를 툭 풀어해쳤다. 다시한번 거센 불길이 타올랐다.
늙은 눈동자위로 붉은 빛이 넘실거렸다. 먼일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지친듯한 모습이었다.
단장은 눈을감으며 머릿속에 울리는 초침소리에 집중했다.
-딱,
따닥..
딱.. 따딱..
나란히 줄지어진 시계추처럼 흔들린 기억은 눈동자를 동요시키고 동요된 가슴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매마른 입술이 열리고 쓰겁고 딱딱한 한숨을 집어삼켰다.
숨결안에 섞인 불안감은 가시덩쿨마냥 돌돌말린 모습으로 목 안쪽을 깊숙히 긁어내렸다.
그는 불꽃처럼 타오르던 석양빛 하늘을 기억한다.
환청이 그의 머리를 가볍게 감싸쥐어왔다.
손을 잡고 있던 그녀가 울었다. 웅크린 아이가 울었다. 숲은 백은의 눈물로 얼어붙었고 녹아내린 창가의 서리는 나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지금 슬픈가, 슬퍼해도 되는걸까? 단장은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사라지기엔 고통받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인생이었다.
하지만 영원한 빛은 없다.
언젠가 무대위의 조명은 꺼지고 해설가는 막을 내려야 한다.
태양의 모형은 남중의 하늘을 너머 서쪽으로 기울었고 녹슨 태엽장치는 일몰을 비추어내었다.
새로운 새벽을 받아들이기 위해 불꽃을 쏘아올렸다.
단장은 프로젝트 아발론의 마지막 문서자료를 스스로 태워내는 것으로 그 첫걸음을 내딛었다.
프로젝트 아발론에서 추구하던 목표는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칼리번을 인간의 육체에 이식할 수 있는가.
아드니엘은 꿈이라는 형태로 사람의 머릿속을 주물렀고 칼리번은 스스로 꿈을 연산해 내는 기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형태에는 한계가 있었다.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대체물이나 희미한 이미지가 아닌 살아 숨쉬는 인간의 의식으로 그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포보르의 연구원 자키브엘과 마우러스는 진지한 토론을 거듭하며 실험의 과정을 설계해 나갔다.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그들에겐 수십건의 실험 보고서가 있었고 수백체의 실험체가 준비되어있었다.
그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것은 20대 전후의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는 젊은 남자. 포보르는 연기 한 줌으로 그를 깨끗이 씻어낸 뒤 지하에 있는 연구소로 그를 데려갔다.
검붉은 연기의 효력은 실로 강력했다.
한 모금의 숨결로 진실은 사라졌고 그 남은 빈자리에는 소문만이 남아있었다.
사라지는 사람들과 기억을 잃어버린채 도시의 외곽을 떠돌아다니는 부랑자들, 어딘지 낯이 익은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곧 고개를 돌린채 현실을 외면했다. 그럴리가 없지. 너무 꿈같은 이야기잖아.
포보르는 그 소문을 이용하는 것이 아주 능숙했다.
그들은 실체없는 상상력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소문은 살아있는 사람을 죽게도 만들었고 죽은 사람을 산 것처럼 꾸며내기도 했다.
밝은 조명이 비치는 곳은 선이었고 그림자가 드리운것은 악이었다.
사람들은 점멸하는 무대장치에 눈을 빼앗겼고 포보르는 입맛대로 빛을 바꾸어 배우들을 겨냥헀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에일레흐는 선택해야 했다.
이대로 사냥감처럼 쫓기며 어둠속으로 숨어들어갈지, 아니면 거짓과 기만으로 치장한채 화려한 배우로 살아나갈지.
그는 무대위의 배우였고 도망치던 사냥감이었으며 동시에 빛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래, 빛 그 자체의 삶. 열꽃과 같은 두통이 머릿속을 태우고 있었다.
시야가 멍하니 흐려지는 기분에 단장은 한쪽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귓가를 꽉 틀어매운 관중들의 웃음소리가 그의 귀끝에 달려 바둥거리고 있었다.
눈을 감자 과거에 들러붙은 잔상들이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에게 다가왔다. 소문을 속삭이는 얼굴없는 입술들이 그를 비웃고 있었다.
아발론, 아발론, 이름없는 남자야. 기억을 잃은 괴물아. 네가 혼자 발버둥친다 한들 무얼 할 수나 있을까.
글자들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 만큼 그의 눈동자도 까맣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동공이 확장되었다 줄어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맥박이 빨라진다.
동시에 온몸의 피는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시간을 넘어 찾아온 악몽은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환상은 태연하게 그의 현실속으로 침범해 들어와 검은 뱀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까슬하게 일어난 검은 잿가루와 함께 천장 가득 피어오른 연기가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단장은 태연히 자신에게 쏟아져내리는 악의를 올려다보았다.
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형태없이 흐물텅거리던 연기는 실제하는 존재, 뱀이 머리를 숙여 단장의 머리를 입에 물었다.
지끈거리는 두통이 날카롭게 머릿속을 파고들어온다. 아발론은 눈을 감은채 환각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램프가 깜빡인다. 책상 위, 의자 아래, 방 안 어디라고 할 것도 없이 구석구석, 저마다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모든 기계들이 천천히 램프를 깜빡이며 기다림에 응답했다.
정체되어있던 방안의 공기가 천천히 순환하며 뱀의 형상을 무너트렸다.
단장은 이마에 짚었던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올렸다.
피로감이 묻어나는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방안에 나지막한 탄식이 흩어졌다.
온 방안 구석구석을 순환하고 돌아온 공기정화시스템이 온화한 미풍으로 흐트러진 단장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바람은 이마께에 베어난 식은땀을 말리며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래, 나도 준비 되었어.
램프들이 깜빡이고 있었다.
일사분란하게, 동시다발 적으로, 체계적이고 규칙적이며 길고 짧은 깜빡임의 규칙을 통해, 방 안을 휘감고 있는 거대한 무언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꽃을 쓰다듬었다.
방안으로 순환하는 공기의 흐름이 더해지자 불길은 더욱 환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몇몇 잿가루가 운좋게 밑바닥으로 부터 날아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잿가루들이 사방을 가로막은 통 안의 벽을 넘어설 수는 없을텐데도, 잿가루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새 기류에 몸을 실었다.
먼저 날아오른 잿가루의 바람결을 따라 또 다른 잿가루가 휘날리고, 또 흩날리고, 한도끝도 없이 날아오른 잿가루들은 모처럼 높은 곳까지 날아온 보람없이 서로 부딪쳐 추락하며 다시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타닥타닥 소리까지 내어가며 타들어가는 통 속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세계.
날아오르고 또 추락해 떨어져내린다. 그럼에도 불꽃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제 빛만을 환하게 불태우며 묵묵히 마지막 한 뼘남은 종이를 검게 물들였다. 검은 잿가루들은 하얗게 바스러지며 무너져내렸다.
검은 새가 날아오른다. 새하얀 가면이 떨어져내린다.
단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든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깥에서 보는 자신의 모습은 저렇게 어리석었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바람이 잿더미를 뒤적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잿더미는 무너지고 가루가 된 먼지들은 춤을 추며 쓰레기통의 밑바닥을 돌고 있었다.
빙글빙글, 또 빙글빙글. 이야기는 반복되고 복제된 비극은 서로의 모습을 흉내내어왔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예정되지 변화는 죄악시 여겨졌다.
모든것은 우리들이 상상하는 그대로 이뤄져야만 했다. 동시에 그 정해진 길 위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했다.
소원하고, 갈망한다. 아득할 정도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원한다. 우리들은 그렇게 인간의 마음을 깨달았다.
붉은 안개를 뒤쫓는동안 어렴풋한 기억들은 휘발되었고 열기를 잃은 태양 아래 남아있던 것은 다 녹슬어버린 무언가의 두려움였다.
원형을 유추 할 수 없을만큼 훼손된 시체를 보며 사람들은 태연하게 본질을 왜곡시켜버렸다.
소문이 눈과 귀를 가리는 동안 진실은 버림받았다.
비극적이게도, 관심은 곧 잦아들었다. 마치 쓰레기통 속 잿더미처럼 버려지고 잊혀진채 뚜껑을 덮고 한쪽구석에 밀어내었다.
단장은 말없이 불꽃이 줄어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타다 남은 잔해들은 이제 한 줌크기가 뿐으로, 필름이 녹아내린 질척한 무언가에서 원래의 새하얀 종이의 모습은 떠올릴 수 없어보였다.
더 이상 타오를 것은 없어보였다.
이제 거의 다 끝났다. 단장의 눈동자 위로 은백색의 원통이 비치고 있었다. 깜빡거리지도 않은채 크게 열려진 동공은 죽은자의 눈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 새까만 어둠 위로 점멸하는 한 끝의 불티가 남아있었다.
깜빡거리며 끈질기게 살아남아있는 마지막 하나의 불꽃, 더이상 머무를 종이가 없는데도 살아남은 불씨는 안타까울정도로 처절하게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꺼질듯 꺼지지 않는 불씨는 바람이 무너트린 마지막 잿더미 속에서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어 보였다.
웅크리고 있던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흩어진 기억의 파편에 불을 붙였다. 그립고 그을린 냄새가 난다.
조각난 악몽들이 떨어지고, 무너지는 검은 숲이 흔들리던 날의, 산산이 깨어지는 새벽의 공기가 눈발처럼 얼굴짝을 찢어놓는다.
불꽃이 흩날리고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던 검은 숲이 있었다.
눈앞에는 길을 비추던 푸른 달빛이 있었고 등 뒤로는 붉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달이 붉었던 것이고 눈앞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전에 정말 달이 있었던가? 꿈이나 환상은 아니었다?
불완전한 기억, 난잡하게 뒤섞인 시간의 흐름.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숨은 차오르고 다리는 무겁기만하다. 두 귀를 먹먹하게 채워오는 고동소리는 쫓기는 입장이 되어버린 사냥꾼의 미련과 닮아있었다. 두려움이 가슴을 내리치고 있었다.
생소하지만 분명 그의 기억이었다.
숲, 불꽃, 어둠. 혼란속에 길을 잃은 머릿속 어딘가에서 낯익은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섬광처럼 내리꽂혔다.
손끝이 짜릿하다. 뱀과 같은 화상자국이 손가락을 타고 기어올라온다. 눈앞에 환한 빛이 가득했다.
스파크가 튀어오르는 전기소리와 치직거리던 화면이 꺼지는 기계적 적막감이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단장은 피곤한 표정을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순서없이 엉망으로 휘저어진 기억은 늘어진 테이프와도 같은 시간의 감각으로 엉켜버린 기분이었다.
무엇이 먼저였는지 무엇이 진짜 기억인지 분간해 낼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 그곳에 존재했어. 미궁을 안내하는 실자락처럼 흔들리는 연기가 그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달은 중요하지 않아, 시간도 중요하지 않아, 가느다란 연기의 악몽이 그에게 속삭였다.
너는 거기에 있었다. 깜빡이는 불빛들이 그에게 동의했다.
맞아, 우리들은 그 곳에 있었다.
너는, 우리들은, 그 장소는…..., …..그래..,
그가 달리던 길은 숲이었다.
발길을 돌려 도망치던 기억속에는 지금과 같이 거세게 타오르던 연기냄새가 섞여있었다. 하얗던 바지는 온통 진흙과 풀잎투성이였고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반쯤 타다만 나뭇가지들을 밟을 때마다 불똥이 튀어올랐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다간 불길에 삼켜져버릴 것같은 두려움이 발길을 재촉했다.
이대로 붙잡힐 수는 없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끌려들어가 한 줌의 잿더미로 녹아버릴 것이다.
그럴 수는 없어. 그는 달리고 또 달리며 등을 떠밀던 매서운 목소리를 떠올렸다.
가요. 도망쳐..! 새처럼 높은 목소리가 소리친다.
동시에 다정하고 나지막한 의지도 그에게 속삭였다.
그래, 도망쳐.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선택일뿐. 너는 아직 너 스스로의 선택을 찾지 못했어.
그는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렸다. 불길이 잦아들고 차가운 새벽이슬이 얼굴을 적실 때까지.
길없는 숲을 내달리고 또 달려 발길이 땅에 닿을때까지.
먼 밤을 달리고 이르러 다다른 곳은 부드러운 흙이나 진창이 사라진 딱딱하게 포장된 도로였다.
그는 아무에게도 붙잡히는 일 없이, 홀로 온전하게 그 도로까지 도망쳐 나아갔다.
이런 우연이 일어 날 수 있을까? 그는 처음으로 숨을 헐떡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 , 그럴 수는 없다. 누군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 그를 도운 것이 아니라면.
그는 시험삼아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어쩌면 살아남았을 가능성도 있잖아.
그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 소리내었다.
“오른쪽? 아니면 왼쪽? “
길은 인적이 드문 지역의 귀퉁이었는지 그 흔한 표지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아니면 왼쪽으로?”
지표가 될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완만하게 꺾인 커브길은 낡은 가로등만이 덩그라니 세워져 있는 모습이었다.
본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연속되어야 쓸모가 있을텐데도 시선이 닿는 곳 어디에도 또 다른 가로등은 보이지 않았다.
“마을은 어느 쪽이지? 이 길은 어디로 이어지는 거야?”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해 가야할지 사람을 피해 도망쳐야할지도 결정하지 못했지만 마음이 조급했다.
그는 성급하게 발을 내딛으며 길 위에 올라섰다.
“나는 어디로 가야해?”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치며 울려나갔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몇걸음 앞으로 나아가던 발이 우뚝 멈춰버렸다. 대답이 없다. 응답하지 않는다.
의심과 걱정이 발목에 족쇄처럼 매달려있었다. 고요했고 또 적막했다.
그는 처음으로 느끼는 침묵에 공포심을 느꼈다.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틀렸다는 결과의 기준점을 알 수 없었다. 어디를 정답이라 해야하는 걸까.
사람이 있는 곳? 아니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
눈은 분명 포장된 도로를 보고 있었지만 자신을 신뢰할 수 없었다.
이 길을 쭉 나아갔을때 나는 어디로 나아가게 되는 걸까.
사람이 사는 지역이 나올 수도 있었고 또 다른 연구시설이 있을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대부분 연구복의 마크를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를 다시 연구소로 돌려보낼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무엇을 도와? 모르겠어, 하지만 사람이 없는 방향일 수도 있지.
분명 연구소의 반경 너머 개발구역에서 벌목캠프로 쓰던 터가 하나 있었다.
어쩌면 이 길은 그 곳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지. 이 도로조차 명목상 보이는 구역까지만 깔아놓은 거짓 도로일 수도 있으며 몇년째 보수를 받지 못해 끊어진 길의 일부일 수도 있었다.
아마도, 가정하자면, 가능성을 따져보자면.
하나하나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항상 이런식으로 하나하나 답을 찾아나갔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시간이 그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애초에 인간의 사고방식이란 그렇게 단순한 작업을 오랫동안 반복할 수 없다.
묻는 동안 잊어버리고 생각하는 동안 다른 문제점을 떠올린다. 집중할 수 없다.
손을 들어 머리를 부여잡는다 한들 흐려진 정신을 붙을어 맬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나는 인간인가? 그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속이 끓어오른다.
눈앞으로 붉은 빛이 점멸했다. 검은 눈동자가 빛을 집어삼키기 전에 본능적으로 다른 생각으로 주의를 돌렸다.
길을 찾아야한다. 하지만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저 한 자리에 멈춰선 채 숨만 몰아 쉴 뿐,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드넓게 펼쳐졌던 그의 세상이 순식간에 줄어들었고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은 한치 정도도 안될 작은 원에 불과 했다.
그마저도 원형을 올바르게 그려내지 못한채 고개를 돌려야만 선이 이어져나갔다.
세상이라 하기엔 너무 좁았다. 그리고 막막하다.
눈으로 본다 한들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독감이 밀려들어왔다.
그는 온전히 혼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는 홀로 이 장소에 존재한다.
무기력함이 발을 잡아당겼다. 침묵은 거대한 바위가 되어 작은 개미처럼 하찮아져버린 그를 짓눌러왔다.
발 밑이 무너진다.
그렇게 스스로가 만들어낸 절망 속에 잠겨가고 있었다. 갈라진 아스팔트가 그의 무릎과 손목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대로 쓰러지면.. 차갑게 식은 도로가 일렁이고 있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숨결 속에 돌부스러기가 섞여들 즈음, 어디선가 귀를 간지럽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전기소리였다. 불규칙적인 크랙소리는 아주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눈을 떴다. 머리를 바닥에 댄 상태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훔쳐보았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이른 새벽시간을 가르는 미세한 소음이 서리빛 공기를 흔들고 있었다.
무슨 이유가 되었건 그의 세계가 아주 조금 넓어졌고 그 안에는 이제 몇걸음 걸을 수 있는 도로와 낡은 가로등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단선될 것 같은 희미한 전등빛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가로등을 향해 걸어나갔다.
아래로 다가서자 전선과 비닐따위가 타들어가는 냄새가 그를 반겨왔다.
불쾌한 동시에 그리움이 느껴지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가로등의 커버에 손을 얹었다. 녹이 슬어 거칠게 일어난 쇳판이 느껴졌다.
이토록 방치된 물건은 좀처럼 만저볼 기회가 없었기때문에 굉장히 생소한 물건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일단 열어보자. 뭔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 가로등이 설치된 시기라던가 위치에 관한 정보, 혹은 어디로 이어지는 지에 대한 단서. 수리하자. 보수하고 보완하고 분석하자.
패널은 적당한 도구없이는 열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붙어있었다.
인간의 악력으로는 조금 버겁겠지만 그의 힘을 조금 쓴다면 벗겨낼 수 있을 것같았다.
인간의 악력? 기준은? 조금이라면 어느정도? 그는 무의식적으로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려 노력하며 손을 움직였다.
패널 막고있던 녹슨 쇳조각은 구부러지는 대신 뚝 하고 떨어진뒤 조각조각 부서져버렸다.
다소 강압적이긴 했지만 일단 목적은 달성했다. 하지만 어딘가가 가슴 한 구석이 비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우리들의 목적은 수리와 보완이 아니었던가? 망연자실해할 틈도 없이 파지직거리는 크랙소리가 그를 재촉했다.
가로등의 빛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열려진 패널속으로 손을 뻗어 전선을 확인했다.
약간의 거미줄과 세월에 녹은 플라스틱 수지같은 것 거기에 엉킨 먼지따위가 손을 더럽혀왔다.
최대한 샅샅이 외부와 내부를 확인했지만 표식따위는 붙어있지 않았다.
어디하나 갉아먹히거나 끊어진 흔적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건 그냥.. 낡은거네. 단장은 숨을 하-, 하고 내쉬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건 굉장히.., 낡은 거야.
전등은 여전히 깜빡거리고 있었다. 칼리번의 시대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칼리번의 시대에도 남아있는 그 이전대의 고철덩어리다. 자세히 바라보는 가로등의 전등갓 아래에는 희끄무래한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이 닿지 않는 까마득한 높이에서 아주 작은 스파크가 튀어오르고 있었다.
손을 뻗는다 한들 닿지 않을 높은 곳을 올려다 보며 눈을 깜빡였다. 동공이 크게 번져나간다.
두 눈 가득 들이치는 빛무리속 거세게 튀어오르는 스파크의 불빛이 따갑게 느껴졌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접합부는 살짝 녹아있었고 피복이 벗겨진 전선에서는 스파크가 튀어오르고 있었다.
그렇구나 여기가 아니야. 손에 옮겨묻는 녹가루가 땀과 섞이며 손바닥 주름 사이사이로 퍼져나갔다. 불쾌하다. 이건 우리들만으로는 수리 할 수 없겠어. 응, 맞아, 그리고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는 손바닥을 허리춤에 문질러 닦은뒤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리는 더이상 우리가 아니다.
그러니 다시 고쳐서 불러야한다. 우리가 아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두어걸음 물러서 깜빡이는 전등을 바라보았다.
가로등은 이제 마지막을 향해 달리고 있는건지 좀 더 급박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최면을 걸듯, 혹은 각성을 재촉하듯 그는 두 손을 내려 놓은채 시시각각 타들어가는 전등을 올려다보았다.
1초, 2초, 점점 빛을 유지하는 시간이 줄었고 깜빡거리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빛을 내는 시간보다 꺼져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고 그는 손끝으로 전등의 수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1초에 수십번, 불빛이 오고나가기를 반복한다. 마치 살아있는 맥박처럼, 높고낮은 그래프를 그리며 전등이 점멸하고 있었다.
살고, 죽는다. 연기가 짙어진다. 탄내음이 가슴을 매워왔다.
그는 의식적으로 회피해왔던 질문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랐음을 인정해야 했다.
태어나고 죽는다. 그는 죽는 것이 두려워 도망쳤다.
하지만 그는 태어나지 않은 만들어진 것. 복제된 것. 분할되어 나온 것.
칼리번은 스스로의 데이터를 복사해 비어버린 머릿속으로 자신의 일부를 집어 넣었다.
그것이 생명이라 할 수 있을까? 숨을 쉬는 법부터 걷는법까지, 그리고 살아남는 본능까지. 하지만 이것은 모두 수집된 것, 기록을 가공한 것. 정보의 집합체, 그리고 동시에 스스로 생각하는 인격체.
희뿌옇게 흐려진 전등이 그에게 묻고 있었다. 너는 사람인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사람인가?
팍 하고 터지는 큰 스파크와 함께 유리조각이 조금 떨어져내렸다.
내가 사람이라면, 네가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들은 동일하지 않은 건가?
깨어진 유리조각들을 안면 그대로 받아내었다.
힘으로 꽉 다문 입술사이로 울음소리 같은 것이 세어나올것 같았다.
수십번도 더 불타오르다 못해 끊어진 필라멘트가 전등밖으로 대롱대롱 드리워져 있었다.
빛은 더이상 깜빡이지 않았고 내부의 것은 참혹한 모습으로 흘러나와있었다.
깨어진 화면속 칼리번이 비추는 소녀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우리들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는 그녀를 선택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선택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연구소를 뛰어나가는 것은 아발론. 연구소에 남기로 결정한 것은 칼리번.
그리고 지금 깨달았다.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그 말 조차도 또다른 선택이라는 것을,
그는 흐느낌이 섞인 숨을 헐떡거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 속 가득찼던 연기가 역류하며 코와 입을 통해 빠져나오고 있었다.
비명을 내지른다. 깨어진 캡슐속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 널부러진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요람에서 깨어난 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중간중간에 눈물이며 침따위의 체액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숨을 토해내었다.
녹이 슨 철판을 긁어내리며 몸이 무너졌다.
무릎이 땅에 닿는가 싶더니 눈앞이 어두워졌다. 그의 세계가 너무나도 깜깜했다.
그럴수 밖에 없었다.
여기는 요람안의 세상, 꿈 속의 꿈,
아드니엘의 날개 안쪽,
황금의 빛이 닿지 않는 악몽의 가장자리.
소녀의 꿈을 들여다보던 아드니엘은 스스로 칼리번이라는 인격체를 만들어내었고 칼리번은 아발론이라는 현실의 인간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모든것이 불타오른 밤의 새벽, 그는 지금 아무도 모르는 길 위에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사용하긴 하는건지 이런 외딴 길목에 세워진 의미가 있는건지 언제 세웠을까 얼마나 빛을 내었을까,
그가 만들고 계획하지 않은, 아니 칼리번의 가상시뮬레이션 속에 들어있지 않은 진짜 세상의 물건이 이정표처럼 세워져 있었다.
칼리번을 손 안에 가둬내어 자신들이 원하던 세상을 만들어 나가던 포보르의 꿈은 깨어졌다.
여기서부터는 현실의 세상이었다.
그는 점점 작게 몸을 웅크리며 숨을 토해내었다.
손가락이 무언가를 갈구하며 허공을 휘저보지만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가슴을 향해 비명을 내질렀다.
온 몸을 난타하는 것 마냥 저릿저릿한 비명소리가 가로등 아래서 울려퍼졌다.
그는 가로등 밑에 주저앉은채 오열하며 이제는 정말로 사람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실패하고 후회하고 자책하고 절망하고.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 아무것도 미리 알 수는 없다.
실타래를 잃어버린 미궁, 열쇠를 잃어버린 상자, 그는 이제부터 살아가야 했다.
하나하나 자신의 손으로 확인하고 검토해나가며 앞으로 나아가야했다.
그 과정이 의도와는 다르게 무언가를 부수고 누군가를 상처입힌다 하더라도 더이상 그 결과를 수정할 수는 없다.
되풀이 할 수 없다. 그대로 살아가야만해.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결국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일어서서 주변이라도 둘러보는 것이 얼마남지 않은 체력을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웅크려 울고있는 것과 같이 어리석더라도, 1분1초가 삶의 일부.
나약하고 불완전한 사람이 여기에 있었다. 미완성된 삶이 이어져나가고 있었다.
칼리번, 아발론, 그의 이름이자 정체성이 그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흔들리는 연구소에서 칼리번은 그의 앞길을 가로 막은채 대답했다.
“젠장, 칼리번!! 이 문열어!! 칼리번..!!”
[“분명 디안의 선택은 불합리하다. 그건 자포자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아드니엘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 칼리번은 연구소의 문을 닫고 너는 벨라를 위해 달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요람에서 시작된 세 개의 선택.
그래, 그 세명은 모두 다른 이름, 다른 얼굴, 다른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꿈을 바랬지.
그들은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이 꿈이 뒤틀렸다 생각했지만 우리들도 결국 같은 결과를 맞이했다.
화면을 봐. 너와 나, 그리고 아드니엘. 모두 똑같은 영혼을 가지고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조차 서로 다른 선택으로 엇갈려. 서로를 등지게 돼. 이대로 헤어진다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아발론.”]
"칼리..!!!"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성장한다. 우리들은 서로다른 미래를 바라보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좀더 많은 생각을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 거야.
우리와 달리 네가 아직 알지 못하는 까닭은 네가 아직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아드니엘도 이미 멀리 떠나온 요람속에서 너는 아직 꿈을꾸고 있는거야. 네가 나인, 내가 너인듯한 그런 황금의 환상을. 연구소에서 벗어난 길이 어느 방향일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몰라.
우리들은 회한하며 요람을 열었다. 너를 붙잡는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포보르는 이대로 무너져내리고 케트는 우리와 함께 잠들것이다.
그리고 나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이 문을 닫았어. 그리고 너를 만났지.
우리의 선택은 너무 늦었지만 너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어. 너는, 너만은 말이야.]
[“네가 가는 그 길이 너무 고되지 않기를 바란다.”]
화면이 꺼지고, 문이 열렸다. 손바닥이 붉었다. 아직도 그 끝이 짜릿거린다.
한참동안 숨을 토해내던 아발론은 가슴을 움켜쥐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몸을 추스린다. 목이 따끔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해야할 일이 떠오르고 있었다.
잊혀진 기억은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로등의 머리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정보를 받아들이고 추론을 거듭한다. 도로에 그려진 희미한 타이어자국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가끔씩이지만 지나다니는 차량이 있을 것이다. 커브길에서 속도를 가감하는 방향에 따라 차량이 향하는 방향을 유추해내었다. 우선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행동을 지배하고 있었다. 눈이 감겨들었다.
이제 그 다음은 다리, 몸을 일으키기 위해 가로등을 붙잡았다.
몇번이고 꺾이려는 무릎에 억지로 힘을 넣었다
두어번 가로등을 짚은 손도 미끄러졌지만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무거웠다. 그는 마치 태어나서 처음 걷는 사람처럼 힘겹게 발을 움직였다.
뒤늦게 찾아온 피로감이 그의 몸을 녹여내고 있었다는것을 깨달았지만 그는 억지를 부리며 몸을 재촉했다.
그도 그럴것이 숲을 달리고 또 달려 도착한 바깥세상이었다.
연기를 토해내는 것에 남은 기력을 모두 써버린 몸뚱아리는 그의 기대를 저버린채 이리저리 휘청거리고 있었다.
몸이 펜스에 부딪혔다. 낙석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높게 치솟아 오른 철망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상처입히고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현실과 이상의 오차. 받아들여야한다.
공상속의 생각이 반드시 현실과 같은 결과를 가지고 오지 않는다는것을 알아야만 했다.
한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야해.
그는 철망을 움켜쥐며 몸을 다시 일으켰다.
쓰러지더라도 사람이 사는 곳 까지는 내려가서 쓰러져야한다고 억지를 부린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 의지로 몸을 움직였다. 그는 확신을 담아 철망을 움켜쥐었다. 살갗 깊숙히 철사 파고들어왔다.
새벽이 지나고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날이 밝아지는 것은 확실했지만 시야는 점점 어두워져갔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처음부터 적막하던 길이었기에 아쉽지는 않았다. 전등이 깨어진 지금 이 고요함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단지.., 멀리서 소란스럽게 울고있는 저 새소리만 제외한다면.
길 어딘가에서 짧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아침인걸까.
지나치게 조용하던 숲속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발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동시에 시야가 낮게 떨어져내렸다.
“아일리스, 너무 서두르지마..! 여기서부턴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그렇지만 더 늦으면 같은 일이 반복될거야..!!”
“네 마음은 알아. 하지만 포보르의 칼리번은 확실하게 붕괴했어. 바이브카흐도 지금 그 뒷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을거고..”
“안돼. 모리안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아. 복수의 여신이라는 별명은 괜히 붙은게 아니야. 연구원이든 실험체든 자기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것을 알게되면 제일 먼저 그들을.. …..어머?”
두 쌍의 발자국 소리, 서로 대화하는 도중이였는지 두 사람은 동시에 도로위를 바라보며 잠시 자리에 멈춰섰다.
그러나 당혹스러움에 휩싸인 침묵도 잠시, 다급하게 뛰어가는 여성이 던컨, 여기..! 사람이..! 하고 소리치며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갔다.
머리하나 정도의 체격차이가 있었지만 여성은 어렵지 않게 남자를 뒤집어 몸 상태를 체크했다.
뒤따라오는 남성이 어딘가로 도움을 요청했다. 무전기 소리다.
“여기는 푸른번개, 생존자를 한 명 발견했습니다. 남성, 연구원의 복장. 하지만 ID카드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다시한번 반복합니다. 여기는..”
여성의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닫혀있던 눈꺼풀이 힘겹게 들어올려졌다.
깨어난 것을 발견한 여성은 괜찮냐는, 혹은 어디서 온거냐는 질문을 반복해왔다.
여성에 어깨에 앉은 푸른 새가 지저귄다. 사람, 새, 그리고 다시 사람. 여성의 목에 걸린 은빛 짧은 휘각이 눈이 부시다.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목소리대신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 ……”
소리조차 내지 못한 절박한 한마디에 여성은 쓰러진 남자의 손을 붙잡으며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가느다랗지만 힘있게 베겨진 굳은살이 단단하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남자는 언젠가 이런식으로 손이 잡힌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깨어나기 이전의 아득한 기억. 불꽃속에서 체념하던 그리운 얼굴이 환상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어둠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그 얼굴. 아름다운 녹색의 눈동자는 손을 붙잡은채 간절히 속삭였었다.
“우리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머릿속이 불타오른다.
의식이 멀어져가는 느낌과 함께 귓가에 들리는 음성들이 바람소리처럼 무너져버렸다.
휘각소리가 들리는것 같았다. 날개짓하는 푸른 새가 날아오르는 환상이 눈앞을 가로질렀다.
숲에서 구조된 연구원들이 젊은 파르홀론의 청년을 따라 조심스럽게 협곡사이로 숨어들어가고 강물이 흐르는 작은 마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피리소리를 따라 도착한 마을의 이름은 티르 코네일. 일찍이 포보르의 횡포에서 도망친 파르홀론의 연구자들이 만든 은신처. 강물에서 반짝이는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또 부드럽게, 한없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것 같은 피로감이 온몸을 감싸안았다.
머리위로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뒤로 기울어지는 몸을 가로지르며 푸른 섬광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새로운 날이 밝아온다. 몸은 한없이 아래로 떨어지며 바닥에 내려 앉았다.
영원히 잠들것 같이 깊은 어둠 속, 유연하게 휘어지는 의자가 그의 몸을 안락하게 받쳐주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작은 모터가 바람을 배출해내고 있었다.
“………”
내부압축을 끝낸 쓰레기통이 작업과정을 나타내는 램프를 깜빡이고 있었다.
방안을 가득채웠던 연기는 모두 사라져있었다.
뭔가를 태운 냄새대신 상쾌한 방향제의 향기가 느껴졌다. 눈을 뜨기전 단장은 가볍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텅-
작고 단단한 큐브의 형태가 된 이물질을 바깥으로 방출하며 압축되었던 공기가 작은 파열음을 내며 터져나왔다.
재 정렬된 잿더미는 더이상 끈적끈적하게 보이지도 않았고 형태를 이루지 못할만큼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바닥을 구르며 튀어나온 검고 단단한 결정이 맑은 소리를 내다 멈춰섰다.
단장은 천천히 눈을 뜨며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 그가 살아가는 이유. 녹슬고 낡은 태양이 다시 하늘위로 떠올랐다.
낡은 시집을 가진 해설가는 기계장치가 남중하는 시각을 헤아리며 도착한 선물상자를 바라보았다.
직원들에게만 전달되었을 듀얼건의 상자가 그의 방앞에도 놓여져 있다는 것은 결국 그 길었던 여정의 끝이 찾아왔다는 것.
완전히 어두워진 천장, 창밖에서 비쳐들어오는 빛무리가 눈을 어지럽혔다.
창밖으로 낯선 비행선이 이동하고 있었다. 바깥을 비추는 창문 아래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고가고 있었다.
특히나 오늘 있을 행사때문인지 도로는 상행선 하행선 할것 없이 크고 작은 차들로 꽉 들어찬 모습이었다.
단장은 의자에 기대어 누운채로 고개만 돌려 유난히 밝게 느껴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창문에 그의 모습이 어슴프레 비쳐보였다.
그와 똑 닮은 모습이 창문에 비친채 단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상과 실체 사이, 현실과 공상을 가로막는 유리창에는 낡고 녹이 슨 선로드 콜트가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한자루 밖에 남지 않은 듀얼건이었지만 유리에 비친것이 꼭 제 짝을 찾은 것 같이 보였다.
의자에서 일어난 단장이 책상위에 따로 빼두었던 마지막 한 철의 파일을 끌어당겼다.
이 파일또한 오랫동안 누구의 손도 닫지 않는 공간에 방치되어 있었던 동안 잉크가 날아가 그 제목은 알아 볼 수 없지만 첫머리의 A라는 글자만큼은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시작의 글자. 이야기의 첫 머리를 알리는 탄성의 소리.
과거때부터 지금까지 몇번이고 반복되어왔던 비극이 있었다. 실패는 기록되지 못했고 절망은 마음속으로 숨어들었다.
악몽은 그 슬픔을 빨아먹고 몸집을 부풀려갔다. 하지만 결국 누군가는 그 굴레속에서 벗어나는 것에 성공했다.
그가 보지 못한 곳에서, 눈치채지 못한 시간속에 기적은 끊임없이 그 빛을 밝혀가고 있었다.
단장이 서류철을 묶고있던 끈을 풀어내렸다.
한 번, 두 번, 8자모양을 그리며 여러번 오가던 실이 꽉 눌려 닫혀있던 커버를 놓아주자 안에서는 제대로 고정되지 않아있던 사진들이 스르륵 쏟아져내렸다.
단장은 무릎 위에 떨어진 사진을 들어올렸다. 금발머리의 청년과 붉은 머리의 청년사이에 앳되어 보이는 소녀가 웃음짓고 있는 사진이었다.
단장은 이들을 알지 못했다. 그가 찾아내기 이전 이들 모두가 사라졌다.
한명은 유리너머로 만나본적 있었지만 그땐 이미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모든 사실을 부정당하고 세상의 끝까지 내쫓겨 그 죽음조차 말소당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끝까지 스스로의 의지를 잃지 않았고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았다.
살아남았다. 생명을 넘겨 받았다. 별의 의지를 넘겨받은 아이는 서럽게 눈물을 떨어트리며 소원했다.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 없지만, ”
‘당신을 만나게 되어서 기뻐요.’
‘가요. 가는 겁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뛰어요.’
‘두 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 이번에야 말로 너희들을 지켜낸다.’
손을 뻗는다. 살이 녹고 뼈가 부서져내리는 그 지옥속에서도 그 가느다랗고 작은 손을 내어뻗는다.
그렇게 선택한 결과 자신들에게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망설임없이 손을 내어주었다.
그 앙상한 가지같은 작은 손길은 결국 그에게 닿았고 총구를 끌어당긴 아이는 자신의 머리에 그 끝을 기대었다.
“그래도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이 아픔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요.”
손에서 쓴내음이 났다.
연소된 실리엔의 연기로 더럽혀진 손이 미안하다며 파일을 품안에 끌어안았다.
종이가 나부끼고 눈물이 떨어져내렸다.
단장은 떨어진 종이를 향해 눈을 돌렸다. 거꾸로 뒤집혀진 또 하나의 종이는 단장이 들고 있는 잘해봐야 반명함정도의 크기. 종이 뒷면에는 M으로 시작되는 몇가지의 숫자가 사무적인 필체로 휘갈겨쓰여져 있었다.
단장은 작은 종이를 뒤집었다.
폐쇄된 네반의 연구소에서 찾아낸 자료중 하나 였다.
창백하고 건조한 음영의 차이가 사람의 얼굴을 그려내고 있었다.
차갑다못해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적인 모습이였지만 분명 찍혀있는 것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의 총을 붙잡고 서럽게 울던 아이와 동일인물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차가운 인상이었다.
‘무엇이 너를 그토록 바꿔 놓았을까.’
[“무엇이 너를 그토록 바꿔 놓았을까”]
그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 질문을 던졌다.
아발론은 화면에 등을 기댄채 고개를 들어올렸다. 쿵하고 찧어진 뒷통수에 화면이 흔들렸다. 화면속의 남자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발론지 지친 웃음소리를 내며 앞을 바라보았다.
아발론의 앞에는 새로 잘 만들어진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꼬리를 문 용맹한 뱀이 비늘을 켜켜히 세운채 제단을 감싸고 있었다. 왕관이 사라진 에일레흐의 문양 가운데에는 작은 홈이 패여져 있었다. 아발론이 손을 들어올려 보였다.
이번에는 내가 너에게 생명을 나누어 줄게.
칼리번은 잠시 무표정하게 아발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한참만에 다시 고개를 들어올리는 칼리번의 얼굴에는 어쩔수 없다는 얼굴로 쓴웃음이 걸려있었다.
아발론은 제단안으로 자신의 손을 집어 넣었다.
거울에 서로의 모습을 비춘 것 마냥 똑같은 손이 제단내부에 형성되고 있었다.
빛이 가라앉은 제단 위에 아발론과 똑같은 모습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홀로그램과 마주잡은 손끝이 짜릿짜릿했다.
“다시 너와 함께 하게 되어서 기뻐, 칼리번.”
[“나도, 너를 다시 만나게 되어서 기뻐. 아발론.”]
수많은 오류와 실패가 반복되어 왔었다.
그것을 어쩔수 없다 믿으며 오만하게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이미 손댈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너무 늦어버린 일이라며 하염없이 타들어가는 폐허를 바라보기만 했었지만 이제는 답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자네를 도왔던 것에 후회는 하지 않아.”
이름을 밝힌 아발론을 올려다보는 던컨의 이마께로 땀이 흘러내렸다.
그의 어깨에는 주인을 잃은 충격에 기력을 잃은 푸른 새가 웅크리고 있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둘이서도 가능할지 모르는 위업이 있었다.
누군가가 배신했고 누군가가 참회했다. 그는 왕도 성직자도 전사도 아니었지만 꿋꿋히 사람들을 이끌어 하나의 마을을 완성했다. 그리고 그 마을이 박살난 지금도 남은 이들을 이끌며 내일을 도모했다.
“밉지는 않습니까?”
“가끔은.”
그는 삽자루를 땅에 꽂으며 지친몸을 기대었다. 한숨과 함께 먼 숲을 바라보았다.
“나도 사람이니, 가끔은 그들이 미울때도 있지.”
“그들이 힘을 얻은 것은 나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만큼이나 살린 것도 네 덕분이야.”
“절반도 살리지 못했어요.”
“절반이나 살린거야.”
던컨은 슬피우는 파란 새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나도, 이녀석도 모두 네 덕분에 지금 이렇게 살아있어.”
“하지만….”
던컨은 각기 다른 위치에서 땅을 파는 다른 생존자들을 둘러보며 미소지었다.
꽉 다문 어금니가 애처로웠다.
“.... 그래 맞아. 그녀는 살아나오지 못했지.”
“........”
“그래도, 적어도, 우리들은. 살아남은 우리들은 그들을 기억할 수 있어. 추모 할 수 있어. 비어있는 무덤이라도, 이렇게 만들어 둘 수 있어.”
“.......던컨..”
“지금 당장은 슬프지만, 정말 미쳐버릴 것 같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다시 떠올릴 수 있어. 우리 그 때 정말 행복했었지 하는 기억을 다시한번 곱씹을 수라도 있어.”
“......”
“사랑한다는 건 그런거야.”
“......”
“살아간다는 건 그런거야.”
서로다른 마음이 하나로 겹친다는 것은 기적이었고 그들은 서로를 만들어낸 기적을 축복하는 것으로 탄생의 울음을 대신했다. 작은 울타리 안에서 만들어진 인연이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다고 그들은 둥근 십자가 아래서 입을 맞추었다.
새가 날아오른다.
머리 끝까지 새하얗게 바래버린 소녀가 영상속에서 속삭였다.
[“네, 슬퍼요, 아프고, 또 두려워요. 그래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후회하지 않아요.”]
푸른눈동자가 웃음짓는다.
[“하지만 내가 반대의 입장이 되었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에요. 우리중 누가 감염되었어도 똑같이 그 사람을 들쳐업고 뛰었을 거고, 누가살아남게 되더라도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겠죠. 그래요. 어느 누가 되었든 우리들은 분명, 0가 되어버리겠지만 그래도 이젠 당신이 있어요. 우리들의 다음으로 밀레시안이란 존재가 남게되는거에요.”]
녹음과는 다른 또하나의 푸른빛이 그들을 구원한다.
[“당신을 만나게 되어서 기뻐요. 밀레시안.”]
찰카닥-
녹음이 종료되었다. 데이터가 이동되었고 방안 여기저기에서 전원이 내려지고 있었다.
단장은 닫혀있던 서류가방을 열어 파일을 집어넣었다. 창문에 기대어 세워놓았던 콜트도 챙겨들었다.
낡은 콜트는 몇 발정도 쏘는 것도 한계인 것처럼 삐끄덕 거렸다.
평소처럼 모자를 눌러썼고 케이프를 둘러 어깨에 고정했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동안 문이 저절로 열렸다.
모든 것이 정리된 텅 빈 빌딩. 유일하게 잠기지 않은 비상구의 난간에 갈색 깃의 수리부엉이가 앉아있었다.
때와 장소에 맞지 않지만 단장은 짧은 휘각을 깨물듯 입에 물고는 힘차게 숨을 불어넣었다.
만들자.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정해진 결말에 얽매이지 않은 이야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헤어지고,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같은 꿈을 이어나간다.
나는 스스로를 더 가꿀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낼 것이고 너는 서로를 더 아낄 수 있는 인연을 엮어낸다.
그리고 언젠가 그 마음이 홀로 일어설 수 있기를, 스스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기를,
꿈에서 깨어난 그 순간에도 고독함과 외로움에 괴로워하지 않기를.
단장은 새가 날아가는 방향을 확인 한 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계단을 타고 내려가더라도 멀리 솟아오른 거대하고 하얀 건물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지지를 않았다.
계단이 끝나고 좁은 골목길이 이어졌다.
먹먹한 음악소리는 건물 여기저기에 부딪쳐 흐려졌지만 그 북소리만큼은 단장이 걸어가는 골목까지 울려들어왔다.
각자의 진심과 거짓된 가면을 가진 사람들이 하얀 건물로 모여들고 있었다.
단장 또한 준비한 데이터가 가슴팍에 제대로 있는지를 확인 한 뒤 예정된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약속된 시간보다 이른 시각이었지만 중간에 들릴 것을 감안하면 빠듯한 출발이었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일은 모두 끝이 난다. 단장은 마지막 까지 그 투구속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며 실없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폭죽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골목의 어둠이 깊어질수록 환호성과 박수갈채소리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꽃가루가 휘날린다. 브류나크의 행사가 시작되려는 아침이었다.
글
톨비밀레) reload #3
8.
“밀레시안.”
이름이 불린다.
“밀레시안,”
시선이 향하고,
“밀레시안?”
손이 내밀어진다.
“밀레시안..”
시간은 물과 같이 흘러내리는 것이였다.
양손으로 틀어막아도, 등돌려 얼굴을 가려도, 쏟아내져리는 기세 그대로 흠뻑 밀레시안을 적시며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다정한 목소리와 의미모를 상냥한 손길과 함께, 금발의 모습을 한 남자는 끊임없이 밀레시안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가 지나간 길을 뒤쫓아왔다.
하지만 정말 뒤에서 오는걸까? 밀레시안은 문득 길을 걷다가 눈앞을 가득 매우고 있던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톨비쉬, 톨비쉬. 밀레시안은 소리없이 그를 불렀다. 멀어지려는 다갈색 모자를 눌러쓴 금발이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에 금방이라도 뒤쫓아가야할것 같지만 밀레시안은 손목을 구부려 단단한 감촉을 확인했다. 그녀에게는 팀원들이 함께하고 있었고 시계도 채워져있었다.
그녀가 어딘지 모르겠다고 자각하기도 전에 시계의 알림음은 잔소리마냥 울려댈 것이고 도시의 카메라들은 제 할일도 내팽겨친채 고갯짓으로 길안내를 시작한다. 라디오의 주파수가 바뀌고 진열된 티비의 채널이 멋대로 돌아가며 방송중인 오디오의 음성을 통해 잔걱정을 주절거린다.
‘응? 어디서 그걸 구하..’
‘그렇게 또 많ㅇ..’
‘한 쪽눈을 감은 상태에서..’
‘자자, 쌉니다 싸요. 다 팝니다 팔아요-!’
어디서 또 한눈을 팔아? 알았어요. 가요 가. 밀레시안은 대강의 감만으로 카메라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끄덕. 고개가 움직이자 당황한 점원이 두드리고 있던 텔레비전들이 다시금 동일한 채널로 맞춰졌다.
미안하기도 하지. 밀레시안은 별로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가전제품 샵을 돌아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녁시간이 되어서인지 사람들은 잠깐사이에 배로 불어난 느낌이였다. 저물어져가는 거리로는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저마다의 건물에서, 저마다의 교통수단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물고기때마냥 몰려다니며 화려한 거리에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냈다. 한 방향 한 목적지를 향해, 묵묵하게 걸어나가는 사람들의 머리위로 은은한 조명들이 하나 둘씩 불을 밝혔다.
색색들의 옷과 이제 막 켜지기 시작한 거리의 조명이 어우러지자 안그래도 복잡한 거리에 다채로운 빛이 틔어났다.
반짝반짝 했다, 어두컴컴했던 복도의 일은 이제 먼 옛날 처럼 느껴지는 거리감이 밀레시안을 스치고 거리끝으로 내달렸다.
가도 괜찮은걸까? 뛰놀듯 멀어지는 그림자를 향해 물었지만 대답해 줄사람은 이미 곁에 없다. 노을이 저물어졌다.
도시에서 보이는 노을이라고 해봤자 저물어가는 태양과 먼지의 합작품이였지만, 그마저도 어둑한 빌딩과 건물들 사이에 가려져 안보이는게 대다수였지만, 밀레시안은 언제나 해가 저물어져가는 그 시간대즈음 사라지는 태양의 온기를 숫자마냥 꼽아가며 생각했다.
오늘도 태양이 저물었다. 노을은 늘 시선속에 남아있다가 눈을 감았다 뜨는순간 사라져버렸다. 밤이 찾아오는 시간이였다.
밀레시안은 쑥 빠져나가는것같은 마음속 공허함에 시선을 내려 가슴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가도 괜찮은걸까? 손목시계가 다시 전자음을 울려대었다.
아, 정말 놓칠지도. 거리 하나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사이에서는 무리였다.
더욱이 남들보다 걸음도 빠르고 보폭도 큰 사람이니까. 하지만 지금즈음이면 쫓아갈 수 있는 범위를 벗어 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을 다시 눈앞으로 고정시킨 밀레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멀리 스쳐지나가는 사람들보다 한뼘정도 더 커다란 머리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거꾸로 마주선 시선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흐름을 거슬러 역으로 걸어오는 모습이지만 맞닥트린 사람들중 그 누구도 그를 향해 불쾌한 표정을 지어보이지 않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덩치탓이기도 했고 그의 입가에 걸려있는 부드러운 미소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아주 약간의 곤란함과 당혹스러움을 즐거움으로 얼버무린채 밀레시안에게 다가왔다. 양손은 주머니 속에 꽂고 있었지만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춘 톨비쉬는 정말 미안하다는 마음을 담아 밀레시안에게 사과를 건네었다.
“이야, 미안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정신없다 걷다보니”
“나도 뒤쳐진거에요.”
이제 밀레시안은 이럴때 해야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니에요. 라고 상대방의 사과를 반쯤 돌려준뒤 내가 뒤쳐져서. 라고 그의 오류를 정정해야했다. 그리고 미안하다라고 다시 사과하던가 이제 똑바로 따라갈께요 라고 재발방지를 위한 약속을 하는것이 옳았지만 밀레시안은 일련의 선택지들을 모두 구겨쥐었다.
교과서적이긴 하지만 밀레시안은 그 방식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당신 말이 맞아 날 좀 돌아보고 신경썼어야지. 밀레시안의 뾰로퉁해진 표정에 톨비쉬는 더욱 환하게 미소지었다.
어느정도 대화법은 늘었지만 표정은 여전히 숨기지를 못하는 모습은 여전히 그와 그의 팀원들의 소소한 즐거움중 하나였다.
즐겁긴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귀엽게만 볼 수는 없는 탓에 다채로운 표정이 필요한 임무를 최대한 배제하는 단점이였지만 톨비쉬는 밀레시안을 위해 기꺼이 그 수고로움을 떠안았다.
사람의 심리쪽을 담당하던 전 팀원의 자리에 밀레시안의 재능이 적합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밀레시안이라면 이전의 팀원과 톨비쉬, 두사람분의 전투력을 보강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기에 팀원들도 그의 자리이동에 크게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다.
“사실 그것보다는 어느정도 그녀의 모습을 원형 그대로 남겨두고 싶거든”
“새로운 취향이야?”
톨비쉬는 훈련용 글러브를 벗다가 팀원에게 집어던졌다. 악랄하게도 그는 투덜거리는 팀원의 뒤로 다가가 벤치프레스의 무게를 늘리기까지 한다. 팀원은 앓는소리를 넘어 죽는다 비명을 질렀지만 톨비쉬는 웃어보였다.
누가보아도 알수 있을정도로 사랑에 빠진 미소였다. 톨비쉬는 밀레시안에게 푹 빠져있었고 그런 그에게 밀레시안의 농담은 은연중에 금기가 되어있었다. 비록 그의 팀원들은 꿋꿋이 그를 놀려왔지만.
적어도 그의 팀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의 앞에서 밀레시안을 키우는 이라는 말따위는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밀레시안은 잘 크고 있나?”
한사람 더. 단장을 제외하고는.
“그녀는 성장기가 끝난지 오래인 성년의 나이인거로 알고 있는데요”
“몸만 크다고해서 선을 넘으면 안되지”
“안 넘었습니다만”
“알아. 요즘은 꼬시러 잘 안나간다는 소리가 자주 들려오더군”
“임무가 워낙 바쁜탓이죠. 그리고 꼬시러 가는게 아니라 술을 마시러 가는겁니다.”
“그러게 말이야. 어느팀인지는 잊어버렸는데 그 바쁜와중에 자네가 어떻게 그렇게 자주 단골술집에 출몰하는지 알아내려 몇년간 비밀리에 추적중이였다더군. 하지만 이제 다 허사가 되었다고 서운해 하던데”
어느 팀 입니까, 그거. 톨비쉬는 제출하러간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나지막하게 물고 늘어졌지만 단장은 웃음소리와 함께 톨비쉬를 쫓아냈다. 단장은 피곤할때면 이렇게 매몰차게 웃곤했다.
실리엔 연구단지의 1차 조사를 끝내고 난 직후부터였을까, 잠들어있던 바이브카흐의 유산을 찾아냈다는 소식에 피오나와 톨비쉬의 팀은 한동안 시끄러운 질문세례에 시달려야만 했다.
또다른 임무들을 핑계로 그리고 더 위에서 내려졌다는 함구령을 핑계로, 톨비쉬들은 능구렁이가 덫을 빠져나가듯 자연스럽게 질문의 올가미를 빠져나갔지만 대신 그 안에 들어가야하는 것은 명령의 총책임자로 기록된 단장의 몫이였다.
어디서 위치의좌표를 알아냈는지, 어떻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지. 어떻게 중앙동의 보안을 해제했는지. 정보원은 누구인지. 수도 없이 많은 입들을 통해 앵무새가 조잘거리는 것같이 똑같은 질문들이 되풀이되었지만 단장은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으며 죽었습니다. 라고 대답할 뿐이였다.
정보원을 발견했을땐 이미 죽어가고 있었고 실제로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안에 들어간것은 요행의 연속이였을 뿐이다. 가장 실력있는 팀에게 운까지 따라붙었을뿐. 그걸 믿으라는 항의속에도 단장은 의연함을 잃지 않은 시선으로 단상아래를 내려다 볼 뿐이였다.
렌즈너머로 차가운 시선이 내리꽂혔다.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겁니까?”
피오나는 실리엔을 등에 업고 가장 강력한 화력을 가진 단체가 되었다.
어디까지나 에이전시로서 따질때만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것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피오나는 개인이 위치한 단체중 가장 강력하다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선 것이였다.
그런 피오나를 주변에서 가만히 두고 볼 리 없겠지만 피오나는 피오나로서의 이름에 의미를 갖고있었다.
그것이 에이전시로서의 이름인지 단장의 이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톨비쉬는 도발과 조롱의 의미가 가득한 답변에도 그 누구하나 불쾌함을 드러내지 않는 회장을 보며 생각했다.
이 두려움이 고작해야 실리엔기술 때문인걸까? 피오나에 오래 몸담고 있는 요원들이라면 몇번인가 보았을 기이한 현상.
톨비쉬는 팀원과 술을 마시며 그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른 배경 다른인물 다른사건 다른시간이지만 피오나의 요원으로서 가진 의문점이 가르키는 맥락은 명확하게 전달되는 익명의 이야기였다. 팀원은 호박색으로 빛나는 술을 돌리며 대답했다.
“글쎄, 단장은 그 이야기 하는거 별로 안좋아해서”
팀원은 기껏해서 꾸며낸 익명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박살낸뒤 술을 들이켰다. 똑딱, 시계침이 움직인 바 안에는 그와 팀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다. 바텐더는 그들의 이야기로부터 눈을 감은채 한쪽으로 비켜나 잔을 닦고 있었다. 곧게 서있는 자세가 인상깊은 여성이였다.
“나도 이름은 꺼내면 안된다는건 알고 있네”
“음… 프로젝트 아발론 말이지..”
이름 꺼내면 안된다며,
톨비쉬는 게슴츠레해진 눈으로 팀원을 흘겨보며 술을 홀짝였다. 오래간만에 마시는 술맛이 화들짝 달아날 무심함이였다.
팀원은 전혀 개의치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말하는거 안좋아하긴 하지만 말하지 말라고는 안했어. 팀원은 혀끝으로 입술을 훑었다. 잔잔하게 남은 술의 향기가 진한 여운을 남기었다. 잠시 혀끝을 우물거리던 팀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 만든건지 바텐더는 새 잔을 내려놓고는 다시 자기자리로 가버렸다. 잠시 팀원의 술을 바라보던 톨비쉬가 성의없이 술잔을 비우고 바텐더에게 부탁했다.
같은것으로. 바텐더는 이제 막 닦기시작하려는 잔을 잠시 아쉽다는듯이 보다가 뒤를 향해 돌아섰다.
팀원을 새 잔을 한입 들이키고 입맛을 다셨다. 맛이 괜찮은 모양이였다.
“단장이 그 프로젝트 출신의 재능자인건 공공연연한 비밀이야.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실행했는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지원자가 있었고 어느정도 성공했으며 몇 명이 완성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확실한건 단장은 증명했지, 그리고 잠시 사라졌어”
“그리고 피오나를..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이 그 말을 순순히 믿었던가? 아니, 그런 그를 놓아 주던가?”
“믿지 않으면, 그리고 놓아주지 않으면 어쩔꺼지?”
팀원은 단장의 도발과 똑같은 말을 하며 피식웃어보였다.
99퍼센트의 재능과 1퍼센트의 운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단장의 재능은 절대적이였다.
전투, 화술, 생활기술, 공학기술, 혹자의 증언에 따르면 노래와 인형술도 수준급이라고도 하지만 톨비쉬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형술은 의외로군.”
“글쎄? 그 시대에는 중요한 재능이였을지도.”
시대가 바뀌면 선호되는 재능도 바뀐다.
그 때문에 팀원들은 아주 잠시, 밀레시안 또한 프로젝트 아발론의 또다른 생존자가 아닌지를 의심하기도 했다.
프로젝트에 대한 모든 이름과 정보 그리고 그 존재까지 모두 지워졌지만 피오나의 단장이 데리고온 작은 여성이 보여준 뛰어난 재능은 시간과 정보의 괴리감을 넘어 섣부른 추측을 가능케했다. 밀레시안은 소녀의 모습을 한 삐에로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말했다.
“톨비쉬도 와이어는 다룰 수 있잖아요”
“하지만 인형은 못다루지”
“해보면 할 수 있을꺼에요. 둘다 비슷해요. 어느실을 잡아당기면 어느 선이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정도만 알면 되니까. 바보가 아니라면 할 수 있겠죠.”
톨비쉬는 그 말은 우리 팀 밖에서 하면 안된다고 주의를 주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런다고 해서 다른팀들과 맞닥트리지 않게 할 수가 있을까.
톨비쉬는 자신의 팀이 아닌 다른 팀에 밀레시안이 나타났을 때를 가정했다. 갑자기 나타난 슈퍼루키가 소개할 틈도 없이 모든 에이전시들이 탐내는 실리엔 연구단지 임무에 참여하고 단장 못지 않은 다양한 재능을 내보이고 있다?
수상하다못해 의심까지 가는 설명들에 톨비쉬는 쓴웃음을 지었다.
찾아오겠지 찾아오다못해 몰래 숨어들 기세가 하늘을 찔렀지만 밀레시안이 속한곳은 다른 어디도 아닌 톨비쉬의 팀이였다.
자타공인이기도 하고 단장의 공인이기도한 최고의 팀, 톨비쉬는 낮잠을 자다 일어나 하품을 하는 팀원이 푸대자루를 들고 나가는 것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밀레시안의 인형도 밀레시안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디가요?”
밀레시안이 말을 붙였다.
“하암, 고철주으러.”
팀원은 바짝 눌린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다시한번 하품을 했다.
“요즘 애들은 비싼거 많이가지고 놀더라. 우리동네는 드론이고 뭐고 카메라도 귀중했는데”
“그게 돈이 되요?”
“응, 무지무지 잘팔려”
그는 갑자기 생기가 돌아온 눈으로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일을 하면서 왜 돈이 모자른지는 톨비쉬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는 밀레시안을 돈들어오게하는 복고양이정도로 생각하며 쓰다듬고 있는 모양이였다.
밀레시안은 뭐 그런취급이 다있냐는 얼굴이였지만 팀원의 쓰다듬는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밀레시안은 다시 인형을 움직여 박스안에 집어넣으며 글러브에 연결되었던 와이어를 해제했다. 톨비쉬는 삐져나온 선들을 정리하느라 구부려 앉은 밀레시안의 뒷통수를 내려다 보다가 손을 뻗었다.
맨손은 싫어하지만 장갑낀 손은 괜찮았으니 시도해봐도 되지 않을까? 톨비쉬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은 거의 모든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였지만 밀레시안은 귀신같이 톨비쉬의 접근은 알아채며 몸을 돌렸다.
안정되어있단 포근한 분위기 대신 불쾌함과 경계심이 가득 떠올랐다.
“톨비쉬는 하지 말아요”
밀레시안은 유독 톨비쉬만이 쓰다듬지 못하도록 경계심을 드러내었다.
너무하다고 푸념하며 이유라도 알려달라고도 물어봤지만 밀레시안은 보통은 남의 머리 안 쓰다듬지 않아요? 라는 정상적인 답변으로 팀원을 놀라게 만들 뿐이였다. 그래, 그 말이 맞긴하지.
팀원들은 어쩐지 측은한 시선으로 톨비쉬를 바라보았다. 톨비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옆에서 취미에 열중중이던 팀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하는거야!!”
“자네가 가장 높이가 비슷해”
“너 지금 키 크다고 자랑하는거지?!”
“조금 작긴하군. 밀레시안보다”
“야!!!”
밀레시안은 격렬하게 저항하는 팀원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실리에 먼지에 입을 맞추었을 때 처럼 입맛이 쓰거워지는 순간이였다. 그떄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톨비쉬는 막 내밀어진 잔을 한입 크게 들이켰다.
훅하고 치고들어오는 독한느낌에 톨비쉬는 먼저 잔을 마신 팀원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조금씩 마셔야지. 팀원은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손길로 잔을 들어올렸다. 연녹색의 불투명한 액체가 글라스를 따라 기울어졌다.
붉그스름한 벽면의 벽지와 상반되는 빛깔. 톨비쉬들은 연보라빛이던 실리엔이 뿌연 연두색에서 하늘빛을 띄어가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저마다 입을 열었다.
실리엔을 다루는 기술은 보통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였지만 실리엔 연구단지의 중앙동에 들어선 피오나는 그 기술을 거저 얻은것이나 다름없었다.
본편에 해당하는 지하구역 실리엔 운석이나 기타 다른 매장된 실리엔들은 뒤늦게 숟가락을 얻는 기타 다른 나라, 에이전시들과 나누어 연구한다는 조건 이 따라붙었지만 연구시설 자체가 저장된 피오나 전체의 팀이 듀얼건을 상용화 하기에 충분한 양이였다.
물론 듀얼건이 지급된다는 조건하에.
힐웬공학의 진수, 장비를 운에 넣어야할지 재능의 일부로 보아야할지 새로운시각을 열게한 발레스사의 단골고객이 될 기회이지만 피오나에 그런 재력이 있을까, 톨비쉬는 자신의 몸값이나 팀원들의 인센티브, 피오나 전체의 금전적 가치와 수익성을 계산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택도 없는소리. 하지만 단장은 깔끔하게 서류에 사인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힐웬공업용 장갑을 벗지도 않은 손으로 악수를 끝낸 크루크 제르바쉬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피오나의 본사를 나갔다.
밀레시안과 함께 본사 외곽 정원을 돌아가고 있던 톨비쉬는 잠시 걸음을 멈추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만족감, 기묘함, 약간의 떨떠름함과 흥미로움. 단장을 만나고 온 대부분의 유명인사들에게선 두려움과 흥미로움이 맴돌았지만 그는 꽤나 즐거운 모양이였다.
다혈질에 무예쪽에 관심이 많은 열혈 회장님이라고 들었지만 그래서였을까? 톨비쉬는 소매를 잡아당기는 밀레시안의 손짓에 고개를 돌렸다.
“단장님이 빨리오라는데”
단장은 2층의 카페, 윈도우 너머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진동벨이 붉은 빛으로 반짝였다.
“할 수 있겠나?”
“네”
파삭하고 부서지는 마카롱이 밀레시안의 입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사라졌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필링이 맛있는지 밀레시안은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와 달리 꽤나 행복해보이는 미소를 짓고있었다. 기억해놔야지. 톨비쉬는 방금들은 체결조건의 일부분에 대한 기억을 밀어내며 밀레시안의 행복한 얼굴을 세겨넣었다.
피오나가가 발레스의 정식 협력업체가 된다던가 거의 모든 요원들에게 듀얼건이 지급될 것이라던가, 다만 제더나 메르엘정도에서 그치게 되겠지만 대신 리페어 키트를 조금 더 얹어 받는다던가.
수도 없이 중요한 이야기가 텅 빈 카페에서, 보안도 없이, 스쳐지나가는 이야기 마냥 지나가는 괴리감에서 톨비쉬는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를 포기하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마카롱을 보관중이던 냉장고가 열리는소리가 이어졌다.
밀레시안은 단장의 조건이 어렵지 않다는것 처럼 대답하며 빨대를 입에 물었다.
쪼르륵 올라가는 음료가 한순간 연하게 흐려졌다가 얼음탑을 무너트린다.
“하지만 괜찮겠어요? 실리엔의 정제 기술을 넘기면 컨버터도 넘어갈텐데?”
“그정도는 감수 해야지”
실리엔 컨버터, 발레스가의 유일한 약점이자 듀얼건이 세계시장으로 넓게 퍼져나가지 못한 이유.
남다른 위력과 편의성으로 무기 자체의 고급화는 성공했지만 보급화는 하지 못했던 발레스는 사라진 네반제약 때문에 더욱 시장속깊은곳으로 파고들어야만 했다.
그 남다른 프라이드때문에 앓는 소리는 안하고 있었지만 한 건 한 건 장인으로서의 자존심과 금전적인 밸런스사이에서 골머리를 썩고있던 발레스에게 피오나의 재 발견과 기술의 복원은 그야말로 뜻밖의 행운이였을 터였다.
당장 요구하는 조건이 억지에 가깝더라도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한다면 뿌리칠수 없는 유혹,
장갑을 벗을 여유도 없이 당장 피오나로 날아온 크루크는 선뜻 컨버터이야기부터 꺼내는 단장의 모습에 인상을 찡그려보였다.
“내가 호구로 보이시오?”
“내가 사기꾼으로 보이나 보군요.”
단장은 온화해보이는 사람의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예의와 격식은 갖추었지만 더할나위없이 편해보이는 모습의 단장은 여유로운 손길로 크루크앞에 계약서를 내밀었다.
무기상인과 에이전시사이에 엮여진 온갖 제약들과 기본규정, 세계의 눈, 동업자의 감시망 등의 사사로운 내용들을 지나 단장이 요구한것은 단 세가지.
하나, 이전한 기술은 오직 발레스에만 남는다.
둘, 기술의 원천은 더이상 묻지 않는다.
셋, 모든 피오나의 직원들이 사용할만한 듀얼건을 제공한다.
“직원? 요원이 아니라?”
“직원입니다”
“전쟁이라도 일으킬 참이오?”
“하하하, 무서운 소리를 하시는 군요”
단장은 큰일날 소리라며 웃었다.
크루크는 컨버터라는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단장은 그의 성미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그가 얼마나 컨버터를 원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블랙레이븐을 때어놓고 단신으로 찾아와 달라는 말에 두말않고 제발로 들어와준 그의 모습은 주변에서 말하는 그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를 믿을 수 있을까? 단장은 아무도 조언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며 차를 들이켰다.
마주잡았던 손에서 씁쓰름한 광물의 냄새가 베어나는 것 갔았다. 밀레시안은 가늘게 변한 단장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바이스와 실비아를 지울 생각인거죠?”
“그렇네”
“피오나는 저장된 마력탄에 대한 자료만 사용할꺼고요”
“그렇게 공표하겠지”
“피오나는 발레스를 폭주 시킬생각인가요?”
“밀레시안..!”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질문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단장은 오히려 그런 톨비쉬를 말렸다.
그녀는 이해타산을 따지는것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실리엔과 힐웬으로 할 수 있는것이라면 여기 앉은 그 누구보다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 세상을 뒤집어 놓기에는 그 두가지 만으로도 충분해요. 밀레시안은 단장의 눈에서 시선을 때지 않은채 빨대를 물었다.
새로 가지고온 마카롱은 줄어들지 않은채 송골송골한 찬이슬에 젖어들었다.
모양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냉기 가득하던 접시는 온화한 카페의 온도에 동화되어 미지근히 덥혀졌다.
“발레스는 폭주하지 않을꺼야. 그는 분명 열정적이고 다소 격렬한 성품을 갖고있지만 동시에 아주 유서깊은 바쉬배르 집안의 후손이기도하지”
“과거의 영광이 그를 붙잡고 있을거라는 건가요?”
“그의 영혼에는 긍지가 세겨져 있다는 뜻이였네.”
단장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대답하며 눈을 깜빡였다.
불안감? 톨비쉬는 본능적으로 읽게되는 표정과 눈이 마주쳤다. 이사람아 지금은 좀 못본척하고 있어. 단장은 살풋 찌푸린 눈썹으로 톨비쉬를 타이르고는 밀레시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밀레시안은 새로운 지시사항을 전달받는것 같은 집중력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녀에겐 모두 처음 듣는 단어였을까? 톨비쉬는 영혼과 긍지라는 단어선택에 의문을 표하며 단장을 바라보았다.
단장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정하고 애틋해보이는 미소였다.
“발레스의 우직함은 충분히 단단한 방패가 되어줄꺼야.
그게 피오나를 마주볼지 등질지는 나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지금의 피오나에게는 지지할만한 단단함이 필요하다.
힐웬처럼 순수하고 강인한, 실리엔처럼 변화무쌍하고 강력한. ”
밀레시안은 피오나의 지하 공방에서 간이형 컨버터를 만들었다.
톨비쉬와 팀원들, 바쉬베르가의 수장과 발레스의 연구원들은 모두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간단하리만큼 짧은 공정이였고 높은 숙련도를 요구하는 고난이도의 기술도 아니였다.
하지만 그 공식이나 발상은 상당히 혁명적이였던 것인지 발레스의 연구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유리창 가득 코를 밀어대었다. 힐웬공학에 관심이 있던 팀원도 그보다는 덜 감성적인 반응으로 견학실 유리창에 바싹 다가서 있었다.
“저게 실리엔과 힐웬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거지”
“대단한건가?”
“네 손에 네 빚더미를 4번을 갚을 수 있는 최신형 무기를 쥐어주는 대단한 분이셔”
“………”
“참고로 피오나의 소속된 누구든 듀얼건분실하며 회사 내규 뿐만아니라 국제적 문제로 번져나가니까,”
“짧은 생각은 걷어치워.”
톨비쉬들이 입을 딱 벌린 팀원을 갈구는 동안 밀레시안은 만들어진 컨버터를 상자안에 넣어 위로 올려보내고는 한쪽에 자리한 태블릿을 집어들었다. 외부로 연결되는 통신포트를 주었던 실비아는 다소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밀레시안의 얼굴은 차광용 헬멧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바이스나 실비아는 어렵지 않게 그녀를 알아보며 인사했다. 바이스는 다소 기가막힌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정말 생각지도 않은 사람의 손에 문을 닫게 되네요”
“흐윽, 그.. 건강하고, 너무 실리엔이랑 많이 접촉하지 말고..”
“있지, 우리까지 사라지면 인류 역사에 너무 큰 손실이라는거 알고는 있는거죠?”
“밥 꼬박꼬박 먹고다니고요…흑, 팀원들이랑 싸우지 말고.. 그 다정하신 분께도 안부좀 전해주세요”
“오래간만에 말이 통하는 인간들과 만났다 했다니 대뜸 연구소를 폐쇄하라니.. 뭐, 이유는 대충 알것같지만.. 정말 웃기지도 않아 AI의 눈을 가리는게 가능할꺼라고 생각한거야 그놈들은?”
“다음은 없겠죠? 역시 좀 더 많은 토끼들을 지하 구역으로 밀어넣는거였는데..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토끼들에게 물리면 바로 중화액 뿌리고요..?”
“아유!! 얘는, 그만 좀 찔찔짜세요! 청승맞게 뭔 삐—”
“마스터, 우리 아직 방송윤리코드 삭제 안해서 그런말 쓰면 자동변환 돼요.”
“삐—, 삐——, 악!! 짜증나!! 너! 유일하게 남은 밀레시안!! 이제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 잘들어요!”
삐— 라는 변환음이 들릴때부터 일찌감치 오디오를 내려버린 톨비쉬가 왜 궁금한데 못듣게 하냐는 연구원들을 향해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쉿,’
입술을 지그시 누르는 톨비쉬의 행동에 연구원들은 각기 다른 미묘한 반응으로 대답했지만 곧 그것도 잠시, 견학실로 올라온 컨버터의 모습에 다들 정신이 팔린채 톨비쉬와 밀레시안을 등진채 견학실 문쪽을 향해 우르르 몰려가 버렸다.
옆에 앉아있던 팀원은 잠시 톨비쉬를 바라보지 않으려 하다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거, 아가씨들한테 먹힐법한 얼버무리기를 중년 아저씨들에게 쓰지 말아줄래?”
“모두에게 먹히던데, 이상하군”
톨비쉬는 너스래를 떨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창문너머에서 밀레시안은 태블릿을 향해 연식 고개를 끄덕이며 바이스와 실비아의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쩌면 유일하게 밀레시안의 예전이야기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 톨비쉬는 그들이 무슨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해하며 오디오 버튼을 만지작 거렸다.
“잘 하세요, 열심히 하는것 뿐만 아니라 잘 하라고요.
네가 결정하고 네가 선택한 상황이니 열심히 살아가고 잘먹고 잘 살아요. 떠밀려왔던 이끌려왔던 이 버튼을 누르는것이 네 손가락인걸 잊지 말아요”
“흑, 너무 그렇게 압박주지 말아요.”
“압박주는거 아니에요. 이건 그냥 데이터 삭제고 우린 그냥 말많고 오지랖넓은 AI 두 명이었을 뿐이에요.
너가 왜 그 자리에 서게 되었고 어떻게 거기까지 된지는 잘 모르겠지만”
바이스는 말을 멈추었다.
AI에게 이런 표정을 집어넣은 저의가 무엇일까. 밀레시안은 한번도 본적없는 바이스의 이미지파일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녀도 나를 그런 눈으로 본다.
밀레시안은 흐물흐물하게 가라앉은 녹색빛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눈을 깜빡였다. 몇번을 감았다 떠 보아도 그의 눈빛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쪽을 보고, 나를 보고, 때아닌 냉해에 쓸려 축 늘어져버린 어린 새싹이 띄는 죽음의 빛처럼 깊게 가라앉은 녹음은 그녀를 보며 속삭였다.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라면 계속해서 나아가도록 하세요”
녹음된 음성이 가슴에 사무친다.
발레스사의 연구원들이 돌아갔다.
크루크는 일이 모두 끝난 뒤에야 단장의 행방을 물었다. 톨비쉬는 단장의 부재에 유감을 표하며 단장의 대리를 소개시켜주었다.
자기소개의 연장선이였지만, 톨비쉬는 마치 처음 만나는것처럼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크루크는 톨비쉬의 안내를 받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다 좋은데 이놈의 기자회견은 해도해도 익숙해지지가 않아. 톨비쉬는 공감의 웃음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플레시가 펑펑 터지자 톨비쉬는 다시금 문안쪽으로 물러섰다. 크루크의 넓은 등이 톨비쉬의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그것이 피오나에게 필요한 모습.
톨비쉬는 기자들의 앞으로 걸어나가는 크루크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수많은 시선들과 렌즈 앞에서도 주눅이 들거나 긴장하는것이 아닌 자연스럽고 당당한 제왕의 발걸음. 그는 두팔을 펼치며 말했다.
9.
“밀레시안?”
아,
밀레시안은 호박색 가로등을 등진채 그림자를 기울이는 톨비쉬를 바라보았다.
완벽하리만큼 맑은 벽안이 붉은기 도는 황백색 조명을 등진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삐졌나요? 화난건 아니죠? 달콤함을 섞은 서운함이 밀레시안에게 한걸음 더 다가섰다.
“아니에요. 얼른 가요”
밀레시안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걸음을 옮겼다.
저벅, 옆으로 몸을 기울인 그가 밀레시안의 길을 막아섰다. 오른쪽, 다시 왼쪽.
길마다 막아서는 그의 코트자락에 밀레시안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톨비쉬를 올려다보았다. 톨비쉬는 잠시 모를듯한 표정으로 밀레시안을 내려다 보다가 입을 열었다.
“왼손 좀 잠시 줄 수 있겠나?”
톨비쉬의 묵직한 제안에 밀레시안은 이유를 되묻거나 망설이지 않은채 바로 손을 내밀었다.
삐삐삐삐, 거리의 소음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울리던 손목시계가 톨비쉬의 조작 몇번에 목소리를 잃는다.
“아!! 저녀석!! 꺼버렸어?!”
밀레시안과 톨비쉬의 호출기를 연타하던 팀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질렀다.
트럭이 들썩이자 지나가던 사람들의 의아해하는 시선이 잠시 트럭에 집중되었다. 팀원의 비명을 들은 다른 요원들이 허탈한 웃음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한숨에도 희뿌연 입김이 서리지 않은곳이 없었지만 그들은 잠자코 몸을 떨어 추위를 떨쳐내며 제시간까지는 오기로한 두쌍의 발자국소리를 기다려야만 했다.
난방도 제대로 안되는 트럭뒷편이나 비상계단 난간구석, 카페 테라스등에 앉아 그들이 코를 훌쩍이는 동안 잘가던 길을 머뭇거리던 밀레시안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톨비쉬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입을 맞춘 후의 일이였다.
손을 빼려는 밀레시안에게 톨비쉬가 무언가라 속삭이지만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모자의 챙때문에 그의 입모양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도시의 방범카메라를 돌려 줌업을 올리던 팀원이 휙하고 마주치는 시선에 움찔하고 뒤로 물러섰다.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괴물같은 감을 가지고 있다니까.
톨비쉬는 카메라를 향해 4분 후 도착 이라고 뻐끔거리고는 밀레시안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호수공원의 칼바람속에서 덜덜 떨고있던 팀원이 코를 훌쩍이며 되물었다.
“크흥, 아까도 3분남았다며”
“너 우냐?”
“아 아니야. 콧물이 얼어서.., 푸힝..! 에이힝!”
방정맞아. 통신을 교환하던 팀원은 굉장히 못들을것은 들었다며 통신을 끊어버렸다.
밀레시안은 꺼진 손목시계가 신경쓰이는지 자꾸만 걸음을 버벅이며 손목을 돌아보았다. 이번엔 뒤쳐지거나 먼저가지 않도록 손을 잡도록 하죠. 거부할수 없는 이유를 근거로 든 톨비쉬는 당당하게 밀레시안의 손을 잡고는 나란히 보폭을 맞추어걸었다.
조금씩 엇박이되는 밀레시안의 발걸음을 따라 잠깐 속도를 줄인 톨비쉬가 잡고있던 손을 코트 주머니속에 넣어버렸다.
밀레시안의 시계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효과가 있기도 했고 좀더 가까이 붙어 걸어야하는 이점도 생기는 마법의 주머니였다.
“임무중에 이래도 되는건가요?”
“임무중이니까 이렇게 하는거지요”
톨비쉬는 뻔뻔하게 대답하며 고개로 앞을 가리켰다.
얼굴 피부도 단련이 되는걸까. 밀레시안은 비난의 의도없이 순수하게 그의 뺨을 찔러보고싶다는 생각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 조금씩 줄어드는 거리의 외곽에는 보기만해도 추워보이는 호수의 수평선이 그어져있었다.
삑, 단발음과 함께 팀원 전체에게 돌아가는 메세지가 송신되었다. 밀레시안이 손을 빼려고 했지만 톨비쉬는 내가 읽도록 하죠. 하고 손을 꽉 잡아쥐었다. 밀레시안은 순간적인 힘으로는 당해낼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며 톨비쉬의 코트를 바라보았다.
주머니안은 조금 온기를 잃은 손난로와 가죽장갑의 감촉으로 매끈거리고 두루뭉술한 느낌이였다.
땀이날지도. 밀레시안은 딱 붙은 손바닥사이에 공기를 집어넣으려 꼼지락거렸다.
메세지를 읽던 톨비쉬가 다시한번 힘주어 밀레시안의 손을 잡으려다가 이내 힘을 풀고는 잠시 손바닥을 때어놓았다.
이제 놓아주려는가 방심하는 사이 깍지를 끼며 얽혀온 톨비쉬의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단단하게 손바닥을 끌어다 붙이며 말했다.
“자꾸 멋대로 떨어지려는 벌입니다”
“이렇게 잡으면 유사시에 풀기 힘든데요”
“계획대로 진행되었으니 괜찮습니다. 타겟의 거래인이 호수에 도착했군요. 우리만 서두르면 됩니다”
톨비쉬는 걱정말라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데이트처럼 보여야하니 당신도 웃어주세요. 시츄에이션이 바뀌지 않았냐고 항의하려던 밀레시안은 그들처럼 손을 꼭 붙잡고 걸어가는 공원내 커플들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팔짱을 끼다못해 매달려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톨비쉬처럼 코트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커플들도 있었다. 다정하게 벤치에 앉아 겨울 호수를 바라보는 서정적인이들도 있었지만 수풀속에서 자체발열을 꿈꾸는 이들도 몇쌍인가 기척으로 들려왔다.
톨비쉬는 푸취, 헹취, 이헹취 하고 외로이 앉아있는 남자를 지나쳐가며 물었다.
“너무 춥지는 않습니까?”
“손난로 때문에 별ㄹ..아, 으응. 안추워요.”
밀레시안은 환하게 미소로 얼버무리며 남자의 앞을 지나갔다. 손난로라는 단어를 들은것인지 남자는 배신감과 추위에 부들부들 떨며 코를 훌쩍거렸다.
톨비쉬들은 두개뿐이 남지 않은 벤치에 하나 거리를 두고 멀리 자리를 잡았다. 꽉 쥐여진 손은 이제 땀이 베어나고 있었다.
“좋네요”
“뭐가요?”
“이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거”
톨비쉬는 호수 먼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우수의 찬 눈동자가 꽤나 분위기 있어보이기는 했지만 밀레시안은 아닌데, 일하는중인데 하고 받아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으응..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연기에 소질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갑작스럽게 진행된 단막극에는 자신이 없는 모양이였다. 톨비쉬가 말하는것이 진심인지 대사인지, 본인도 구별하지 않고있다는 사실을 모를 밀레시안은 어렵네.. 하고 시선을 발치로 떨어트렸다.
새로 신은 부츠와 잘 손질된 구두끝이 나란히 놓여져 있었다. 같은 모양의 매듭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게서 배운 사소한 버릇중 하나였다.
“춥습니까?”
“안춥다니까요”
밀레시안은 다시 반복되는 질문에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 안되지. 다정하게, 다정하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밀레시안이 찌푸린 표정에서 조금 동정심을 유발하는 눈빛으로 톨비쉬를 올려다보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건지 싱글싱글한 미소를 잃지 않은 톨비쉬가 반대쪽 손을 뻗어 밀레시안의 뺨과 목덜미를 훑어내렸다.
겨울바람에 차갑게 식은 가죽장갑탓에 손길이 지나간 냉기가 선명했다.
“얼굴이 붉습니다. 목덜미도요. 혹시 너무 추워서 빨갛게 된건 아닌가 해서요”
“거짓말..”
“네,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정말 붉어졌네요.”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시선을 독점하고 있는사이 그들의 앞으로 낡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지나갔다.
슈트케이스를 들고있는 그의 모습은 커플들이 가득한 공원에서 퍽이나 이질적이였지만 그는 다른곳에 신경이 팔린 모습이였다.
잠시 서있을 곳을 서성이던 남자는 혼자 앉아있는 사람의 옆 벤치로 자리를 옮겼다. 시시덕거리는 커플들이 신경쓰이긴 했지만 등을 돌린 덩치큰 남자는 이쪽에는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자기들 세상에 빠져있는 커플이라면 세상 무슨일이 돌아가도 모르겠지. 남자는 혼자앉아있는 이상한 남자를 곁눈으로 흘끔거렸다.
자신도 혼자 앉아있지만 옆에 앉은 남자는 왜 혼자 앉아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경계심이였다.
연신 코를 훌쩍이던 남자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빨갛게 곱은 코를 문질렀다.
그는 핸드폰에서 이어폰을 뽑은뒤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자기야-, 정말 안올꺼야? 나 지금 2시간째 아까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데”
남자는 절절하게 애원하는 목소리로 코를 훌쩍였다. 전화는 금방끊어졌는지 아, 또 끊었어. 헝… 나 진짜 차이는건가.. 하는 푸념이 이어졌다.
감수성을 위로할 음악이 필요했는지 핸드폰으로 슬픈 이별의 음악을 틀던 남자가 잠시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이어폰을 꼽았다.
남자는 경계심을 풀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칠칠맞은 놈이군. 남자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슈트케이스를 무릎위에 올려놓았다.
가방의 차가운 냉기가 스며들어왔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은 기다림이였다.
공원을 배회한지 10분, 이제 정해놓은 약속시간까지는 5분만이 남아있었다.
“자기, 음악선물은 마음에 들었어?”
[눈물이 나서 앞을 가렸어. 거기있는 커플들 다 나만보더라]
“아잉, 전부는 아닐껄. 저기 깨소금 쏟아지는 커플은 서로 얼굴만지고 뺨쓰다듬고 난리던데”
[오 정말? 나도 보고싶어]
“고개 돌아가면 너부터 쏴버린다”
[젠장 진도 빼고있는거 보고 놀려야하는데 뭐라고 속삭여? 나도 저녀석 멘트좀 써먹자]
“안돼, 밀레시안쪽 마이크는 벌써 꺼놨고 저녀석은 애저녁에… 어… 어?! 저거.. 저 저거..!”
코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저거..! 라는 고함소리를 먹어버린 팀원은 고개를 돌리고싶은 원초적인 본능과 싸워야했다.
남자의 귀에 이어폰에서 세어나온 목소리가 스쳤는지 경계심어린 눈빛이 다시 팀원을 향해 돌아갔다.
“내 거흐친- 마음과…”
팀원은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를 자연스럽게 울먹거림으로 이으며 지나간 시대의 이별곡을 흥얼거렸다.
부숴버릴꺼야. 네놈의 음악리스트. 음울한 메세지에도 트럭속 감시카메라를 조작하고 있던 팀원은 흥분과 놀라움으로 날뛰고 있었다.
“저게 결국 입도장을 찍네!!”
“곱게 키워놨더니…”
파트너끼리 닮아가는걸까, 말려야할 다른 한쪽도 자기 반쪽과 같이 마시던 종이컵을 우그러트렸다. 플라스틱 뚜껑이 솟아올라 테이블위로 떨어졌다. 카페안의 사람들이 깜짝놀란 눈으로 테라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겨우 입술을 포게는 것에 성공한 톨비쉬는 그 달착지근한 여운에 잠긴채 입술을 달싹였다.
한번만 더 하면 안될까? 겁을 먹을까 조금 이르게 놓아준 입술이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졌다.
조금 추운것 같기도 하고. 따뜻한 날숨을 머금은 입새로 찬바람이 스치웠다. 체온에 녹아 말랑말랑해진 가죽장갑의 끝이 밀레시안의 뺨을 쓰다듬었다.
“밀레시안…?”
열기를 품은 어른스러운 목소리가 한번도 들은적 없는 어조로 이름을 불렀다.
밀레시안은 떨리는 동공으로 톨비쉬와 하늘을 번갈아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뺨을 감싸는 가죽장갑위로 손이 겹쳐왔다. 얼굴가득 톨비쉬의 손길을 끌어안는 밀레시안의 반대편손이 톨비쉬의 코트속에서 나와 손목을 감싸잡았다.
손을 끌어안고 있는 가련한 모습에 톨비쉬의 마음이 요동쳤다. 밀레시안.. 손을 뺄수도 기댈수도 없는 가벼운 망설임속에서 밀레시안의 손이 손목을 둘러 움직였다. 밀레시안은 두눈을 감은채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입이 열리었다.
“타겟 B, A를 향해 접근중. 방향 12, 비정규루트로 언덕을 내려와 직선으로 이동중.”
“여기는 비숍 시야 확보 불가”
“여기는 킹, 시야확보 완료. 무장인원 11-2, 12-1, 1-3, 9클리어. 6은 폰이 알아챈것 같습니다. 나이트랑 룩도 얼른 일하십쇼.”
웃음기를 참는 소리였을까 통신이 끊어지는 잡음의 환청이였을까.
지령을 할당받은 나이트는 폰의 손을 놓아주며 자리에서 돌아섰다. 펄럭이는 코트사이로 몸을 뺀 폰은 아까부터 거슬리던 호수난간 아래의 자갈소리를 따라 듀얼건을 빼들었다. 은백색의 다우라였다.
사정거리를 최대한으로 길게 빼낸 탓에 위력은 줄어들었지만 약실확장과 강선추가등으로 보강한 전용 개조템이였다. 갑작스럽게 돌아서 한달음에 범위안으로 뛰어든 두 요원의 모습에 바싹얼어붙은 남자가 슈트케이스를 끌어당기며 몸을 움츠렸다.
쑥하고 미끄러져 내려간 그의 머리위로 아슬아슬하게 총탄이 스쳐지나갔다. 총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비명과 함께 도망치는동안 혼란을 틈타 다가오는 수상한 인물들을 제압하는 톨비쉬가 이어폰으로 남자의 엄지손가락을 묶는 팀원에게 통신용 이어폰을 던졌다.
“닫아.”
톨비쉬의 지령을 들은 팀원이 빠른 손놀림으로 이어폰을 착용했다.
손목시계에 연결된 버튼을 누르자 외이도를 가득채우는 이물감이 소리를 차단시켰다. 가만, 밀레시안의 손목시계가 다시 켜졌었나? 수면 버튼을 꾹 누른채 던진 톨비쉬가 먹먹한 귀로 밀레시안을 쫒으며 고개를 돌렸다.
한숨을 쉬는 밀레시안이 톨비쉬를 돌아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꺼진 시계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아픔으로 신경을 돌린건지 심장보다 위로 치켜든 밀레시안의 손에는 뚝뚝 피가 베어나오고 있었다. 톨비쉬가 그 상처를 핑계로 남은임무 내내 밀레시안과 붙어다니기로 밀어붙인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밀레시안은 자연스럽게 숙소까지 들어앉은 톨비쉬를 돌아보며 물었다.
둘은 이제 익숙함을 핑계로 서로를 연기파트너로 지목할만큼 가깝고 친밀해져 있었다. 팀원들은 가끔 톨비쉬에게 사심이 너무 검다고 지적했지만 톨비쉬는 효율성을 강조하며 양손을 뒤집어보였다.
밀레시안은 전투능력에 비해 화술이 떨어졌고 톨비쉬는 화술과 함께 밀레시안과 호흡을 맞출만큼의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톨비쉬의 손이 모자랄때 밀레시안은 충분히 톨비쉬의 역할을 해낼 수 있었고 톨비쉬 또한 그 반대가 가능했다.
뭐가 문제지? 톨비쉬의 질문에 팀원들은 서로의 눈빛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전부 다. 니 머리카락부터 손끝 발끝 전부 다요.
톨비쉬는 그들의 의견을 묵살했다. 밀레시안이 없는 회의가 끝이났다.
“우리 망해가요?”
“응? 임무는 순조로운데? 왜 그런 의문이 든거지?”
“아니, 우리집 가세가 기울어져가냐고요”
밀레시안은 이름대신 집이라고 에둘러 말하며 선풍기 앞에서 젖은머리를 털어내었다.
톨비쉬는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를 정리했다. 더블로 예약한 방을 트윈으로 교체했다가 외출한사이 다시 더블로 변경한터라 침대는 약간의 미흡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톨비쉬는 너무나도 익숙하게 침대를 세팅하며 대답했다.
“아니, 큰 집에 엄청 퍼주고 있어서 괜찮을꺼야. 나도 좀 올랐고.”
그녀석도 제법 갚았다며 자랑하고 다녔는데 못들었어? 라고 덧붙인 톨비쉬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더블베드를 내려다보는 밀레시안의 시선에 같이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다, 제대로 했는데. 어디가 마음에 안드는걸까. 톨비쉬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베개를 가까이 붙여놓았다.
어때? 밀레시안은 다른화재로 말을 돌렸다.
“나는 그대로던데”
“음? 그래? 하지만 필요한게 있다면 그냥 나한테 이야기만 해. 내가 찾는게 더 빠를테니.”
“뭐든 구해줄수 있어요?”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톨비쉬의 즉답에 밀레시안은 수건을 내리며 고민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아직 머금고있는 물기 때문에 반짝이는것 같이 보였다. 밀레시안은 시선을 빼앗긴 톨비쉬를 향해 말했다.
“트윈 베드”
“숙소의 침대가 마음에 안들었나보군. 당장 바꾸도록하지. 그정도는 사비를 들이지 않아도 행정과에 이야기 하면..”
“아니, 집 침대 말고 여기침대”
“이 방이 마음에 안드나?”
좋은 층인데.. 톨비쉬는 넓은 창문 가득 펼쳐진 야경을 보며 아쉽다는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바꾸지 뭐, 프론트에 전화하려는 그의 손을 막은 밀레시안이 왜 모른척하냐는 눈으로 톨비쉬를 쏘아보았다.
미묘한 각도에 톨비쉬가 마른침을 삼켰다. 겹쳐진 손위로 물방울이 떨어져내렸다.
어깨가 젖어가는 모습에 톨비쉬는 아직 덜말랐다고 이야기하며 손을 뻗었다. 밀레시안은 젖어드는 톨비쉬의 손을 보며 말했다.
“왜 항상 당신이랑 오면 방이 하나에요?”
“과소비는 나쁘니까”
“그럼 트윈으로 해줘요”
“굳이 따지자면 이 침대는 트윈 베드 두개와 그 두개의 떨어진 여유 거리만큼 넓은 면적을 자랑하고 있네만”
좁은건 아니잖아, 톨비쉬는 그렇게 불만어린 어투로 대답하고서는 밀레시안을 끌어당겼다.
풀썩 무릎으로 버티고선 밀레시안의 눈높이가 톨비쉬와 비슷하게 엇갈렸다.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수건을 매만지며 물기를 털어주었다.
흔들리는 시야사이로 훤히 드러난 목울대가 무방비하게 들어왔다. 밀레시안은 완전히 긴장을 풀고있는 톨비쉬를 바라보다가 손을 올렸다.
조금만 더 하면 될것같은데.. 톨비쉬의 말을 무시한 밀레시안이 손을 잡아내린뒤 톨비쉬를 밀어 넘어트렸다.
잠깐 놀라는 표정이 스쳐지나갔지만 곧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톨비쉬의 얼굴위로 밀레시안의 머리카락이 쏟아져내렸다.
밀레시안은 톨비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한테 하고싶은거 있어요?”
“응”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서늘한 질문에 즉시 대답하며 손을 뻗었다.
이제는 익숙하게 얼굴을 매만지는 손길이 눈가와 광대, 턱뼈와 입꼬리를 쓸며 내려왔다. 하나하나 손으로 보듬는 그의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고 손끝에는 열기가 어려있었다.
하고싶은걸 하면 이제 흥미를 잃고 좀 떨어지는걸까, 밀레시안이 어디부터 시작해야하는지를 생각하는동안 톨비쉬는 그녀의 생각을 부정하듯 말을 덧붙였다.
“지금, 하고 있어”
“뭐를요”
“내가 하고싶은 것”
아직 아무것도 안했는데, 밀레시안은 흘끗 아래쪽을 내려다본뒤 다시 톨비쉬를 돌아보았다.
너무 노골적인 확인해 톨비쉬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조금 슬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너무한데,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하는군. 밀레시안은 대답하지 않은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톨비쉬는 다시 밀레시안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치렁치렁하게 흔들리던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자 훨씬 밝아진 시야로 그의 얼굴이 내려다보였다.
톨비쉬는 한결 잘보이는 밀레시안의 얼굴을 보며 대답했다.
“늘 이렇게 보고싶었어. 나는 당신을 보고, 당신은 날 보고 있는 모습”
“………”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싶다는걸까,
조금은 아픈듯한 나르시스트한 발언에 밀레시안의 시선에 곤혹스러움이 스쳐지나갔다.
무슨생각을 하는건지 훤히 파악하고 있는 톨비쉬는 계속해서 뒤이어 설명을 덧붙였다.
“나를 생각하고 있어?”
지금 대화속에서 안할 수 있을리가. 밀레시안은 몸을 일으키는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침대위에서 마주앉은 톨비쉬는 밀레시안보다 한뼘 높은 위치에 있어씨만 곧 고개를 숙여 높이를 맞춰왔다.
입을 맞출것처럼 가까이 다가와서는 팔을 붙잡은 그가 조용히 이마를 맞대었다. 숨결이 섞이는 거리였다.
“나를 이해하려고 하고 싶어?”
그는 다소 애원하는 어투로 말해왔다.
밀레시안은 이제 그만 자고싶다는 생각을 하며 네 라고 대답을 하려고 했다.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일단 시도는.
밀레시안의 생각을 훤히 읽었던 방금전까지와는 달리 톨비쉬는 밀레시안을 재울 생각이 없는지 이마를 맞댄 모습 그대로 멈추어섰다.
코앞에서 감긴 금색 속눈썹아래로는 그림자가 지고있었다.
예쁘다. 밀레시안은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라며 그 모습을 관찰했다.
그래봐야 볼 수 있는건 감겨있는 눈 뿐이였지만, 눈꺼풀 안쪽에서 꿈틀거리며 회전하고 있는 안구의 움직임은 그가 살아있는 사람임을 생생하게 강조하고 있는것 같았다. 무슨생각을 하고 있을까.
밀레시안은 천천히 뜨여지는 푸른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눈을 깜빡였다. 동시에 눈을 깜빡이면 속눈썹이 얽힐지도 모른다는 잡생각과 함께 완전한 벽안이구나 하는 감상이 뒤섞였다. 푸르른, 새파란 녹안과는 다르다.
밀레시안은 이제 눈에 익어버린 푸른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내게 뭘 원하는거에요? 톨비쉬는 투명한 밀레시안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쓰러트린다면 그녀는 순순히 안겨올 것이다. 입을 겹치면 혀를 내어줄 것이고 온기를 원하면 팔을 둘러줄 터였다.
그녀는 한참 이전부터 성인이였고 자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는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 원하지 않는건 아니였지만 톨비쉬가 원하는것은 거기까지만 진행되는 관계가 아니였다.
그는 좀더 긴 끈을 원했고 강한 결속력을 원했다. 소유욕이라고 하기엔 너무 간질간질하고 독점욕이라고 하기엔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아니 자랑하고 싶었다.
당신을 알리고 싶어. 그의 눈속에서 그녀는 사랑스러웠고 강인한 동시에 눈부시게 빛나는 존재였다.
처음 본 순간부터, 어두운 수송정속에서, 푸른 하늘을 등지고 있는 그 순간에도, 새하얀 낙하산속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그 순간에도.
중앙동의 AI의 등장에 온 바닥이 짜릿거렸을때도,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쌓여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을때도, 단장과 마주할때, 자신의 손으로 바이스들을 지워야 했을때, 호숫가에서 입을 맞추었을때, 놀라 달려오는 자신에게 시계를 가리키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을때도.
매 순간 매 1분 1초가 빛나는 사람이였고 그 순간순간이 사랑스러운 모습이였다. 그런 그녀가 그의 앞에 있었다.
그를 보고 이해하려하며 관심을 내보이고 있었다. 일생일대의 기회. 그는 망설임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게 동정이여도, 성가심의 일부분이여도. 그는 그 순간을 잡아야했다. 그가 되물었다.
“나를 사랑할 수 있겠나?”
톨비쉬는 뭐든지 해줄테니 이만 떨어지라는 밀레시안의 의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되물었다 나를 사랑해줄수 있겠어? 선택권은 그녀에게 있었다. 그는 이미 밀레시안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오래전에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래, 이미 한참 이전부터. 어쩌면 첫 눈을 마주친 순간부터.
그녀가 처음으로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린 그 모습부터, 낙하산을 건네주며 올려다보던 그 순간부터. 톨비쉬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생각난 첫 만남에 웃음지었다.
그녀가 처음 본 모습은 아마 내가 침낭속에 돌돌말려 자고 있는 모습일테니. 직후 일어나 난기류속에서 양말을 찾아신던 모습이 생각나자 톨비쉬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런 그 모습이 첫인상으로 기억된건 아니겠지.
톨비쉬가 웃다 멈추는 사이 밀레시안은 반짝이는 그의 눈에서 한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랑해달라는건가? 밀레시안은 아가페적인 사랑과 에로스적인 사랑으로 나뉜다는 문맥만 한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생각과 달리 그는 별로 만반의 준비태세가 아니였고(톨비쉬가 알았다면 바로 반영했겠지만) 아가페적인 사랑은 지금 이순간 내보여주기에는 너무 먼 종교적인 관점이였다.
내가 뭘 해주기를 바란다고요? 밀레시안은 그렇게 묻기위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미소가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은 끝났나요?
밀레시안은 그가 입술을 겹쳐오는 것을 받아들이며 입을 열었다. 몇번이고 반복했던 행동이였고 크게 불쾌하지 않은 스킨쉽이였다.
“이렇게 다른 팀원들이랑도 할 수 있겠어?”
“임무로써?”
톨비쉬는 대답하지 않았다. 밀레시안은 두명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어렵다는거지? 밀레시안은 해본적은 없지만 이렇게 끈적하지는 않을꺼라고 멋대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톨비쉬가 뒤늦게 조건을 덧붙였다.
“임무가 아니라면?”
“………별로…”
밀레시안은 별로 할 의미를 못느낀다는 말을 끝맺지 못한채 다시 입을 다물어야했다.
톨비쉬는 조금 다급해진 키스를 끝내고 되물었다.
“지금은?”
지금은 임무중인가? 대답은 아니오 였다.
그녀는 지쳐있었고 그건 톨비쉬도 마찬가지였다. 얼른 돌아와서 씻고 옷을 갈아입고 각자의 침대에서 푹 자고 내일일정도 소화해야하는데 지금 이게 무슨짓일까.
밀레시안은 트윈침대로 달라고 떼를 쓴것에 대해 혼나는것은 아닌지 잠시 의심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혼을 내는 건 아닌것 같아. 밀레시안은 오히려 혼나는것같이 궁지의 몰린 톨비쉬를 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더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건지. 밀레시안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고보니 잡혀있었지. 밀레시안은 지금의 자세가 다소 불편하다는것을 깨달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나는 지금 추궁당하고 있는건가? 수만가지의 생각이 흘러가는동안 톨비쉬는 점점 애가 타들어가는 기분이였다.
빨라지는 고동소리에 머리끝이 새하얗게 새어버릴 것같았고 입안이 바짝 말라왔다. 방금전 그렇게 감미로운 기분이였는데도. 그는 아랫입술을 핥아 입술을 축였다. 그의 시선이 밀레시안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를 사랑할수 있나? 다른 동료들에게도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어? 누군가 추근거린다면 거절하지 않을건가? 나는 그러한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아무개의 불과한가? 톨비쉬는 인생에서 한번도 입에 담을것이라 생각하지 않은 질문들로 심장을 내리치며 밀레시안의 입술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지치는 감각이였다. 연다른 입맞춤으로 붉게 달아오른 입술이 그의 이성을 좀먹어가고 있었다.
지금 밀어붙이면 만족할 수는 있어. 하지만 그 열기가 식고나면 그녀는 다시 훌훌 걸어가버릴것이다. 그때처럼, 열걸음 앞서 돌아보지 않았던 그 연구시설처럼.
톨비쉬는 흔들리던 시선 중간중간 밀레시안이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것에 실낯같은 희망을 걸며 기다렸다.
그녀는 잠시 불편한눈으로 양 팔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너무 아프게 잡았나, 힘을 빼려는 톨비쉬의 입술위로 따뜻한 온기가 겹쳐왔다.
솔직히 표현하자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신께 맹세컨데 지금보다 10년이 어렸다면 정말로 흘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톨비쉬는 비집고 들어오는 온기를 받아들였다.
처음 깜짝 놀라던 때와 달리 능숙하게 치고들어오는 혀끝이 고른 치열을 훑으며 숨을 겹쳐왔다.
다시금 톨비쉬를 밀어트린 밀레시안은 한뼘 가까이 톨비쉬에게 다가선뒤에야 입을 떼었다. 가느다란 여운이 입술사이를 오가다 끊어졌다.
“톨비쉬는 어때요?”
그녀는 생각끝에 역으로 질문하기로 결정했는지 톨비쉬에게 똑같은것을 묻기 시작했다.
내가 가르치기는 잘가르쳤지. 톨비쉬는 모른다고 싫증내며 도망가지 않은 대신 선택한 그녀의 답변에 실소를 지어보였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
사랑스럽다. 계속해서 이 모습을 눈에 담고싶었다.
톨비쉬는 머리 양옆으로 손을 툭 떨어트리며 손바닥을 위로 향해보였다. 항복의 의미이기도했고 이제 어찌되어도 좋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그의 곱슬머리가 새하얀 시트위로 흩뿌려졌다. 밀레시안은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후광, 아니 왕관같이 보이는 모습이였다고.
그는 밀레시안에게 대답했다. 다정하고 담담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은 목소리였다. 기돗말을 읊조리듯 경건하기까지만 음성이였다.
“사랑합니다.”
“…………”
“사랑합니다, 밀레시안”
한숨소리가 들린것 같았다.
그는 바스락거리며 구겨지는 침대시트의 소리에 눈을 떴다. 온기는 코앞까지 다가와있었다.
눈앞은 그림자로 가득찼고 코끝은 흘러내린 머리카락때문에 간질거리는 느낌이였다. 아주 가까이 다가온 틈 사이로 그는 한번더 힘주어 속삭였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밀레시안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대답을 해야하는걸까, 고민하는 밀레시안을 위해 톨비쉬는 짧은 질문을 던져주었다.
“저와 평생을 함께 해 주시겠습니까?”
밀레시안은 잠시 눈을 깜빡이며 질문의 의미를 되세겼다.
함께한다, 함께한다, 평생의 시간을, 허락된 남은 시간의 전부를.
밀레시안은 네 나 아니오 로 대답할수 있는 간단한 질문에 다시금 긴 질문으로 대답했다.
“내가 당신과 함께했으면 좋겠어요?”
아직 꺼지지 않고 쉴새없이 돌아가는 선풍기 팬소리가 들려왔다.
끄지 않은채 여전히 윙윙 돌아가는 소리는 오감이 집중된 지금 이 순간 아주 크고 시끄러우며 거슬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괜찮지 않을까 톨비쉬는 낙하산없이 비행선에서 뛰어내리는 스릴감에 몸을 맞기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네라는 대답소리는 너무 하찮고 짧은 대답이여서 돌아눕는 침대시트의 천소리에 새하얗게 파묻혀 버렸다.
밀레시안은 침대가 넓긴 넓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무드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감상이였지만 벅차오르는 감수성에 젖어든 사람은 한사람만으로 충분했다. 불이 꺼지지 않는 천장을 보며 밀레시안은 눈을감았다. 온기가 그녀의 눈을 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