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비밀레) reload #14

마비노기/reload 2017. 12. 24. 01:37


타르라크의 목덜미를 뜯어낸 변이체는 살점을 물고있는 모습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내렸다. 

검은 핏물이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머리 없는 몸체는 여전히 타르라크의 머리와 팔따위를 잡고 서 있었지만 그마저도 곧 루에리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떨어져 나갔다.

목덜미를 부여잡은 타르라크가 슬로우모션마냥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쓰러쓰러졌다.

벌려진 입에서 의미없는 신음소리가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숨이 휘어지지 않는다. 

뜯겨나간 상처보다 돋아나는 비늘의 속도가 더 빠른듯 보였다.


타르라크의 완연한 은색에서 순식간에 검게 변해버린 세상에 멈춰선 있었다.

바로 옆에 있을 루에리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메아리치고 흩어진다. 

안돼.. 타르라크는 필사적으로 눈을 움직여 검은 그림자를 쫓았다. 

루에리의 형상을 눈으로 쫓기 시작하자 조금더 선명하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와줘!! 아니 네가 도와야해..!!”


“......못해요.”


“젠장..! 못하는게 어디있어!! 도와!! 살려야 한다고..! 네가 여기까지 데리고 왔고 네가 지켜야할 사람이야..! 

내가 아닌 타르라크를, 너를 도우려 했던 유일한 사람을 도와..!”


“몰라요.. 모르겠다고요.. 내가 돕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요? 내가 움직인다고 해서 뭐가 나아져요?

소용없어요. 불필요한 노력이야..! 나는 여기까지에요. 내가 올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지금 이 순간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노력이었어요...”


타르라크는 가까스로 루에리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의식이 흐렸다. 뜨문뜨문 멀어지려는 시야속 참을 수 없는 열기가 치솟아올랐다.

손안에 잡힌 루에리의 팔목이 비늘에 덮여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이 손목을 반대방향으로 꺾어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갑작스러운 괴력에 루에리가 타르라크를 돌아보았다. 급속도로 진행된 목을 타고 올라온 비늘이 그의 얼굴까지 침범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편,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또한 점멸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이 반지, 즉각적으로 발동되던 모리안과 밀레시안의 것과 달리 타르라크의 것은 유난히 반응이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모리안의 중화제는 변질된 글라스기브넨에게 듣지 않는다. 그럼 타르라크의 글라스기브넨에게는?


타르라크의 무언의 시선을 응시하던 루에리는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머리를 부여잡은 밀레시안은 마른 숨을 헐떡이며 못한다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살리기 위해서 해독제의 발동을 늦췄고 살리기 위해서 숙주의 침식을 가속화했다.


어느쪽도 타르라크의 생명을 놓치지 않기위해 각자의 방향에서 그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돼, 이대로는 남은 생명력만 갉아먹힐 뿐다. 

루에리는 침착하게 타르라크의 손을 잡아때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타르라크는 다급하게 루에리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나...가..”


“안나가. 널 놔두고는 절대 안나가.”

“밀레시안.. 데리고…”


“널 놔두고는 절대 안나가!! 나도!! 그리고 저녀석도!! 두 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 

이번에야 말로 너희들을 지켜내겠다고..!! 나는 그렇게 맹세했어..!! 그렇게 마음먹었어!! 젠장, 타르라크!!”


처음부터 함정으로 걸어들어가는 여정이었다. 모든것은 모리안의 뜻대로. 

모리안은 필요없어진 밀레시안을 실험체로 사용했고 필요없어진 실험체들를 처분장으로 이동시켰다. 

제아무리 망가진 인형이라 해도 밀레시안은 밀레시안. 

칼리번을 맡긴다 한들 배신할 걱정도 없고 죽음을 명령한다 한들 거부할리도 없다.

한정된 요원의 수와 일시적인 중화제 무한이 증식하는 글라스기브넨과의 싸움에서는 승산이 없지만 일단 칼리번을 담은 반지가 연구소안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 때부터는 칼리번과 알비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는 승리할 것입니다. 모리안은 확신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알비의 스피커 곧곧에서 울려퍼졌다.


밀레시안이 불러들여온 칼리번은 닥치는대로 알비의 연구소를 집어삼키며 속 안부터 공백의 데이터로 지워나갔다.

연구소의 시스템이 사라지고 안드로이드들은 점차 제멋대로 움직이다 가동을 멈추기를 반복했다. 사격소리가 줄어들고 있었다.

문뒤에 숨어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대로 당하기만 할 것 같은가. 키홀은 알비의 시스템이 등록되지 않은 다른 안드로이드들을 대동한체 마우러스의 연구실로 향하고 있었다.


루에리는 마우러스가 쓰러졌던 방호부스로 달려갔다.


“어딘가 있을꺼야. 영감님이 나한테만 쓰던 라벨없는 시약. 분명 그거라면 타르라크를 구해낼 수 있을거야.”


“없어요. 없다구요. 있다면 포워르가 마우러스를 살려둘리 없잖아요. 

있다 하더라도 당신이 조합해 낼 수 있을리 없잖아..!!!”


“시도해볼 가치는 있잖아..!”


루에리는 닥치는대로 손에 잡이는 물건들을 집어던졌다. 

날카로운 메스나 유리조각따위가 이따금씩 그의 손을 향해 날을 새웠지만 이내 비늘에 튕겨져 나가거나 날이 닿기도 전에 꺾여져 나갈 뿐이었다. 서랍이란 서랍을 모두 꺼내 제꼈고 자물쇠를 부숴버렸다.

유리가 깨어진다. 챙강거리는 금속소리가 밀레시안의 신경을 몰아세웠다.

그렇게 절박하게 매달리지 말아줘. 그렇게 가능성없는 희망에 매달리지 말아줘. 

참다 못한 밀레시안이 루에리를 향해 소리질렀다.


“있었으면..! 키홀이 이렇게 당하고 앉아있지만도 않았겠죠. 

당신이 살아남은게 무엇이였건 그건 마우러스의 변덕이자 포워르를 설득시킬 증명서 같은 것이었어요..!!

마우러스는 그걸 완성시킬 시간을 벌기 위해 포워르와 거래를 했고 포워르는 이미 시약이 완성될때까지 장난감 처럼 당신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죠..! 알고있잖아요! 당신도 어느정도 눈치챘잖아요!!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마우러스에게 배신당했다는 것도 보고있잖아요!!”


“알게뭐야..! 실험을 했든 배신을 했든!!  네녀석이 채워넣은 저 무식한 약보다는 안전하다는거잖아..!!”


“중화제가 잘못되었을리는 없어요. 잘못된것이 있다면 아마 글라스기브넨 쪽.

추측대로라면 변이된 지점은 야수화의 촉발지점일거에요.

디안이 포보르에게 저항하기 위해 일부러 퀘사르들의 혈액에 조작을 가했고 그 결과 신체능력이 비상하게 증가된 퀘사르들이 만들어 졌었죠. 그리고 그건 자기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그게 디안이 남긴 저주에요. 반이 남긴 부정의 유산. 누군가 퀘사르를 부활시키려 한다면 찾아올 통제할 수 없는 재앙의 힘.. 그래서 듣지 않아요. 그래서 중화시킬 수가 없어.

힐웬이 실리엔과 반응해 그 원인물질을 제거하더라도 변형된 변이 인자가 끊임없이 남은 육신을 변질시키고 이미 한번 형태를 잃고 흐물흐물해진 몸은 야수화가 일어나기 가장 좋은 상태가 되어버렸고, 악순환의 악순환을 물고 변질된 글라스기브넨들은 계속해서 숙주의 몸을 공격해.. 약해빠진 털나부랭이가 아니라 단단한 비늘이 될떄까지, 대상자가 완전한 뱀이 될때까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날이선 고함소리가 수차례 오고 나서야 루에리가 겨우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설령 중화제가 있다해도 타르라크가 온전하게 되살아난다는 보장은 없어요. 오히려 더 고통만 가중시킬지도 모른다고요..!”


“그럼 나는 뭔데..! 나는 왜 효과를 본건데..!!”


밀레시안은 대답을 망설였다. 

당신은 기적이라고, 나도, 칼리번도, 아마 모리안조차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인정하고싶지 않았다. 왜 당신만, 왜 그가 아닌 당신만. 여기서 당신을 부정하고 원망한다한들 이 망가진 운명의 고리가 다시 굴러갈 길은 없기에 밀레시안은 들숨 한가득 설움을 깨물어부수며 입을 다물었다.

목이 따가웠다. 잇사이로 흘러나가는 숨결에 울음소리가 베어있었다. 당신이 미웠다. 동시에 당신이 부러웠다.

절망했고 당신과 같은 희망이 있기를 기원했다. 이미 한번 기도앞에 배신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밀레시안은 기원을 놓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며 고개를 돌렸다.

루에리가 다그치듯 소리쳤다.


“네가 물었지. 나는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그럼 내가 다시 역으로 물어볼테니 잘 생각해봐. 왜 나는 살아남았을까. 네 말대로 90%인지 10%인지 부족하게 만들어진 미완성의 시약을 가지고 나는 왜 완벽한 중화제와 비슷하게 살아남았을까.

물론 너처럼 깨끗하게 비늘을 폈다 접었다 정도는 할 수 없지만 나도 어느정도는 변이를 조절할 수 있어. 자..! 왜일까..! 생각해! 답을 이끌어내라고..!”


“몰라요. 모른다고요..! 그런게 가능했다면 여기 이렇게 들여보내지지 않았어. 버려지지 않았어. 폐기처분당하고 죽는 시간만을 기다렸겠지 이렇게 그를 따라 걸어나오지도 않았어..!”


“너..! 뭘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건데..!”


루에리는 밀레시안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무엇을 위해 이녀석을 속였어? 무엇을 위해 너 자신을 속였어? 

무엇이 하고싶었나? 무엇을 위해 나를 가로막고 이녀석에게 손끝하다 대지 못하게 하겠다고 소리쳤냐고!”




하고싶은 일이 있었다. 하고싶은 말이 있었다. 

해서는 안되고 허락받지 않은 미래라고 생각했지만, 그런거 이제 몰라. 

이미 손을 뻗어 발을 내딛었다. 


내려진 말을 되돌릴 수는 없어.전진, 오로지 전진만을.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졸병의 말은 앞을 향해서만 나아갈 뿐이다. 

당신이 나의 길을 열고 내 등을 떠밀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길의 끝에 선 나는.


밀레시안은 참고 참았던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당신이 말했다. 


“내가 나아가지 않으면..!!”


밀레시안은 금방이라도 울 것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이 끝에서 머물러 있으면..!”


내가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않으면.


“저사람의 길이 계속 이어질거라 생각했어요..!”


나의 죽음은 당신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당신의 죽음은 나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 고리의 끝이 어디에서 어디로 연결되어있는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나에게 나아갈 길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자신의 길이 끝나는 그 지점이 새로운 시작이 될것이라고. 허언아닌 희망을, 기만아닌 위로를.

당신은 나의 삶을 바랬다.


그러니 당신을 비추고 있는 나도 당신의 삶을 바랄 수 밖에. 

타트라크는 희미하게 눈을 떠 밀레시안이 서있을 법한 자리를 바라보았다.

은색으로 뒤덮인 새하얀 세상속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꿈을 꿨었다. 내가 이 자리에 남고 당신이 그 새하얀 말을 쥐고 서 있는 달콤한 꿈을. 

빼앗은 반지를 돌려주지 않으면, 이대로 반지를 작동시키지 않은채 돌아간다면.

꼭 그설원이 아닌 다른 차가운 눈의 숲으로 돌아간다면, 

임무를 완수한 당신은 적어도 살아 남을 수 있지 않을까. 모리안의 손에서 벗어날 기회를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이 내게 주려고 했던 그 모든 기회를 내가 당신에게 돌려줄 수 있지 않을까.


밀레시안은 머리가 깨어질 것같은 두통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칼리번이 그녀의 의사를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마지막 반지를 움직여야한다고 꿈이 없는 칼리번은 그녀에게 명령어를 내어놓으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줘. 조금만 더 망설일 시간을 줘. 붉게 점멸하는 빛이 강하게 그녀를 질책했다.


정말이지, 한치 앞만 보는 단순한 사람. 

그러니까 자꾸 간단한 트릭따위에 속아넘어가는 겁니다.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체스말을 내려놓는 것처럼 손끝을 까딱였다. 

그 손끝이 마치 이리오라는 손짓과 닮아있어 밀레시안은 일그러진 표정 그대로 타르라크를 돌아보았다. 

검은비늘들이 마치 반 가면처럼 그의 얼굴을 덮어가고 있었다.

녹색의 시선이 밀레시안의 발치에 굴러다니는 작은 주사기에 머물러있었다.







“젠장.. 젠장.. 영감님, 분명 이 근처에서 꺼냈잖아. 어디에 꽁꽁 숨겨둔거냐고..”

“.......네번째 서랍..”


루에리가 마우러스의 서랍을 뒤지는 동안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져있던 검은 꾸러미가 탁한 목소리로 입을열었다.


“......영감님..?”

“네번째 서랍.. 뒷면 안쪽에.. 상자가 하나 있을거다..”


루에리는 뜯어내다시피 서랍을 잡아당겼다. 

마우러스의 말대로 서랍 안쪽에는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작은 상자가 하나 붙어있었다. 

작다. 평소에 사용하던 것의 1/3정도.

루에리가 서둘러 타르라크에게 돌아가려는 찰나 마우러스가 불편한듯 기침했다.


“그것만으로는 안돼.”

“뭐? 조합해야해?”


“당연하지 않겠냐. 그렇지 않으면 뭘 하러 숨겨놨겠어.”


마우러스는 거의 움직이지도 않는 손끝을 까딱여 루에리를 불러들였다. 

흘끗 돌아본 타르라크의 방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밀레시안이 타르라크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벽면 여기저기에 레이저의 붉은 점들이 스치우고 있었다.

루에리는 바깥 복도와 타르라크를 한번씩 번달아본 뒤 마우러스에게 다가갔다.


마우러스의 가슴은 척 보기에도 심한 화상과 파편들로 가득 베여져 아무리봐도 일으켜 세울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우러스는 서두르라며 루에리를 재촉했다.

루에리는 눈을 딱 감고 마우러스를 일으켜세웠다. 죽음이 성큼 그를 향해 다가와섰다.

마우러스는 기침을 토해내지도 삼키지도 못한채 괴로워했다. 그러나 곧 이를 악물며 루에리의 팔을 움켜쥐었다. 필사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나약한 노인의 손이 그를 끌어당긴다.


“불러주는대로 조합해라.”

“하지만 영감님..!”


“내 의식이 있을 때, 서둘러 끝내야한다.”


차라리 저 두 녀석중에 한놈에게 시켰다면 서랍만 알려주고 죽은체 잠들었을 텐데. 

네놈은 역시 손이 너무 많이 간단말이지. 마우러스의 콧수염이 겨우 팔락일 작은 웅얼거림을 내뱉었다. 

숨이 가쁘다. 루에리는 다 깨어진 연구실의 병을 닥치는대로 집어들며 마우러스의 반응을 확인했다. 

가로젓는것인지 끄덕이는것인지 알 수 없는 미세한 움직임이 루에리의 신경을 바짝 긴장시켰다. 

무색 투명하던 병안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내 녹색빛 그리고 다시 하얀색으로 변화되어갔다.


바이스가 완성시키지 못했던 그 시약. 고순도의 힐웬합금 없이 완성되는 실리엔의 중화제.

마우러스는 결국 마지막 단계를 완성시켜버린 중화제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것 봐라. 맹랑한 엘프의 그랜드 마스터녀석. 내가 먼저 완성시킨다고 말했었지. 


하지만 말이다 바이스야, 이거 단가가 너무 비싸서 공급에 차질이 많을거야.

마우러스는 바이스가 화를 내며 그깟게 대수겠냐고 소리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웃겠지. 또 울겠지. 마우러스는 꿈결같이 느껴지는 아득한 과거를 상상하며 웃음지었다. 

기침이 울렸다. 너덜너덜한 몸이 요동쳤다.

중화제를 실린더로 빨아들인 루에리가 마우러스를 돌아보았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루에리는 여전히 그에게 뭐라 대답해야 하는지를 망설이고 있는 눈치였다.



“고맙다고 해야할지 왜 완성되었던걸 말하지 않았던거냐고 원망해야할지 모르겠어.”

“원망해라.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네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용하지는 않았을테니.”


“그래? 그럼 역시 말할게. 고마워.”



끝까지 말은 귓등으로 흘려넘기는 녀석. 

마우러스는 루에리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실험대위에 몸을 기대었다.

뽑아내지 않은 파편이 더욱 깊숙이 찔러들어왔지만 몸을 뒤집을만한 기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은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죽어도 숨겨서 그들이 가져가게 하고싶었다.


모리안에게 협력했던 애송이들따위 알게 뭐냐. 알게될게 무어냐.


하지만 그 필사적으로 실험실을 뒤지는 손길이 던진 물건이 그의 머리를 때렸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울음소리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제대로 지워지지도 세겨지지도 못한 어중간한 운명 앞에 저항했다.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침묵했던 입을 열 게 만들었다.


미안하다, 나는 결국 너를 두번이나 저버리게 되는구나. 마우러스는 눈을 깜빡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어차피 처음부터 자기만족이였으니까. 마우러스는 타다남은 로브의 안쪽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손끝이 둔해 무엇이 잡히는지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분명 그곳에 있을것이라고, 마우러스는 기도에 가까운 믿음을 웅얼거리며 아이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나마 이번에는 기다리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인걸까. 아니, 너는 나를 기다리지 않겠지. 

먼저 갔다면 벌써 멀리 날아갔을 것이고 가지 않았다면 아직 그들의 손길아래 누워있을것이다.

사실 믿을 수도 없었다. 하얀 가면의 퀘사르가 가져다준 소식이 가짜일 수도 있었고 설령 진짜라고 한들 그들이 그 아이를 정말로 소생시킬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확실했던 것은 모리안의 요원들이 연구실을 다녀갔다는 것, 그리고 어딘가의 그들 중 누군가가 이 연구실에서 도망쳤다는 것.

기억의 손상을 확인한다는 핑계로, 몇번이고 감시카메라의 영상을 빌려왔다. 

이제 막 깨어난 붉은 머리를 가진 실험체를 흔들어 묻고 또 물으며 아이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최선을 다했다.  아마도, 어쩌면,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나는 결국…


“마리오타…”


끝내 나는 너에게 이 한마디를 전해주지 못하는 구나.






루에리는 단숨에 달려가 타르라크의 앞에 멈춰섰다.

밀레시안이 타르라크를 안아들고 있었다. 봐봐. 멍청아. 있잖아. 루에리는 숨을 헐떡거리며 실린더를 들어보였다. 

잘 찾아보면 어딘가 반드시 해답이 있다고, 조사의 기본도 모르는 놈이니 어디가서 요원이라는 소리도 못하지. 

아 너 요원아니라고 했었나? 실없는 핀잔을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그런 말을 주고받을 여유는 남아있지 않았다.

눈을 감은 타르라크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목가죽이 헐렁거리며 흔들렸다. 

상처아래로 찐득한 피가 베어나오고 있었다.


엉망으로 깨물려 너덜거리는 상처는 보기만해도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그 이외에 그의 몸에 바늘을 찔러넣을 만한 자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온 몸이 단단하게 굳어버린 비늘투성이였다. 그리고 타르라크의 반지가 점멸하기 시작했다.

루에리는 서둘러 자리에 꿇어앉아 타르라크의 상처를 들춰내었다.


소리없는 비명이 가래끓는 소리와 함께 터져나왔다. 

루에리는 발버둥치는 타르라크를 내리눌렀고 밀레시안은 쉼없이 휘둘러지는 왼쪽 손을 붙잡았다.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밀레시안은 손목을 꺾어내듯 타르라크의 왼손을 잡아내었다. 

반지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밀레시안은 무엇인지 모를 말을 울얼거리 타르라크의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끔찍한 소리와 함께 비늘조각이 떨어져내렸다. 차라리 꺾어내는 편이 나았으려 생각이 들정도로 타르라크의 손은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반지는 손가락의 비늘을 대부분 깎아내며 겨우 타르라크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검지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이 밀레시안의 팔뚝을 파고들어왔다. 

소름이 돋아나듯 검은 비늘들이 팔뚝을 따라 돋아났지만 곧 부드러운 살결로 돌아왔다. 

그래요 잡아요. 차라리 나를 붙잡아. 루에리는 근처에 떨어진 나무조각과 린넨따위를 엮어 타르라크의 상처를 고정했다. 그리고 이어 이를 악물며 타르라크를 들쳐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가자”


“못가요.”

“계속 헛소리하지 말고 일어서..!”


“이번에는 진짜에요. 내가 가면 모리안이 즉시 칼리번의 반지가 멈출거에요. 내가 여기 있어야 다른 안드로이드들을 멈출 수 있어요.”


“그래도 가..!!!”


루에리는 더이상 시간쓰게 만들지 말라며 소리쳤다.

타르라크를 어깨에 매고도 손을 뻗어낸 루에리는 강제로 밀레시안을 일으켜세웠다.


“가!! 가야하는거야!! 네가 지금 해야하는건 방어도 서포트도 아니야!! 도망치는거지!!”


“나는…!”


“이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어? 비명하나 제대로 못지르는 이 멍청이가 네게 유언같은 거라도 남길 수 있었어?!”


“멍청이라 하지 말아요..!”


“못들었으면 가!! 그게 마지막에서 두번째로 한 말이니까!! 나가야해!! 네가 조금이라도 이녀석에게 미안하다면, 너에게 양심이라는게 있다면, 네게 사람마음을 손톱만큼이라도 이해할 여지가 남아있다면..!!”


루에리는 밀레시안을 잡아끌어 앞세웠다. 그리고 타르라크를 떠넘기듯 밀쳐내었다.

연구실의 구석, 실험체들이 오고가는 작은 샛길의 문이 찌그러져있었다.


“뒷일은 신경쓰지 말고 어서 도망쳐야 하는거야..!”


문이 열렸다. 모리안의 화면위로 손을 뻗었다. 

한손으로 움켜쥘 정도로 작게 변한 허공의 이미지가 그녀의 손에서 바스라졌다.

작동이 중지되었던 검은 화면위로 다시금 포워르의 문장이 떠올랐다. 안드로이드들의 눈에 불이 밝혀졌다.




밀레시안은 의문을 가진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내가 정말 울었던가? 내가 슬퍼했던가? 내가 달렸고 그가 뒤따랐던가?

어쩌면 반대였을 수도 있다. 내가 그를 업고 그의 뒤를 따라 달리고, 어쩌면 그가 없고 내가 그의 환상을 보며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고.


그래. 나는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어느새 사라져버린 붉은 머리의 청년 없이 홀로 숲으로 뛰어나와 점점더 무거워져가는 등뒤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뜨겁게 치솟아오르던 체온이 가라앉고 밀레시안은 숨소리가 작아지는 것을 듣고 있었다.

숲을 휘젓는 철갑의 발소리와 손전등의 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밀레시안은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밀레시안.”


사람의 목소리라기보다는 쉬어버린 바람소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밀레시안은 그 어느때보다도 선명하게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후회하세요.”


잔인하리만치 짤막한 진실이 가슴을 파고들어왔다.


“후회하고, 또 살아남으세요. 도망치고 도망쳐, 언젠가 당신이 다시한번 후회하는 날이 올때면 오늘날 이런일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세요. 당신이 아무리 미루고 도망쳐도 오늘을 피할 수 없었듯이 언젠가 이러한 순간이 또 찾아왔을때를 위해 오늘의 고통을 마음에 세기는 겁니다. 기억을 잊고 이름을 잊더라도 이 후회만큼은 끝까지 이어가세요.”


타르라크는 거의 움직이지 않을 팔을 움직여 밀레시안의 목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그것이 포옹이었는지 쓰다듬으려는 행동이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요. 가는 겁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뛰어요.”









[“여기서부터는 기억이 흐려요”]


화면속의 밀레시안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꿈속에서 일어난 일같이, 아주 나쁜 꿈을 꿨던 것같이, 밀레시안은 끊임없는 숲만을 반복해서 떠올렸다.

그를 내려놓았던가? 그를 숨겨두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가장 최초의 기억은 어느 숲의 언덕에서 철가면을 쓴 소년과 마주한것.

철컥이는 금속소리에 잔뜩 경계하는 밀레시안을 보며 어린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너,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온거야?”


그 한마디의 앞에서 밀레시안의 의지는 무너졌다.

본능이라고 해야할지 무의식속에 내제된 무언가의 지식이라고 해야할지, 알 수없는 안도감에 밀레시안은 몸을 웅크려 울음소리를 가두어내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땅을 향해 온 몸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을 토해내었다.

이 감정은 뭐라고 해야하는 걸까 기뻐해야하는걸까, 슬퍼해야하는걸까. 스스로가 저주스러웠고 수치스러웠으며 경멸스러웠다. 기쁜건 아니야. 이런게 기쁨의 감정이 될리는 없어. 철가면을 뒤집어쓴 소년은 잠시 당혹스러워 하던 손을 뻗어 밀레시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따뜻한 온기가 질척하게 베어든 검은 피를 닦아내었다.


“그래, 일단 원하는 만큼 울어.”


소년은 눈물 범벅이된 밀레시안을 바라보며 다시한번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 다음, 우리가 널 도와줄테니까.”


소년의 눈은 밀레시안의 뺨에 머물러 있었다. 살결의 모양으로 돌아가지 않는 검은 비늘이 한조각 뺨위에 얹어져있었다.

코레틴사에서 대량으로 생산한 힐러슈트를 입고 있는 소년은 다시금 웅크리는 밀레시안의 어깨를 토닥이며 반대편손으로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소년의 무전을 받은 치료원의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탈진하기 직전까지 울음을 토해내던 밀레시안은 소년의 팔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반도 안되는 신장으로 꿋꿋하게 밀레시안을 부축해 걸어나가는 소년의 옷에는 자그마한 문구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사립 알베이 파에톤 K요양병원. 








화면이 바뀌었다. 장소는 예의 그 병동으로 보였다. 벽은 새하얗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희뿌연 링겔병이 걸린 수액걸이를 밀며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한쪽팔을 붕대로 꽁꽁 싸맨 사람도 있었고 다리를 싸맨 사람도 있었다. 얼굴인 사람도 있었고 양 팔이나 전신을 감싼 사람도 있었다.

여긴 어디지? 의문이 들기 무섭게 카메라의 앞으로 누군가가 지나갔다. 촛점이 흔들렸다.

카메라를 가진 사람도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지럽도록 흔들리는 화면이 어딘가 볕이 잘 드는 복도 끝자락으로 이동했다.

병실문을 비추었다. 그리고 곧 바닥으로 렌즈를 내렸다.


[“여기에요”]


[“안될 것같아요.“]


[“괜찮아요.”]


[“내가 들어가면 안되는 곳이에요.”]

[“하지만 그녀가 당신을 만나길 바래요.”]


바닥을 비추던 화면의 구석 누군가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여성은 깜빡했다며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건네주었다.

힐러드레스를 입은 단발머리의 여성이 화면속에 스쳐지나갔다. 딜리스, 하얀 명찰이 햇빛에 반짝였다.

화면은 흔들림을 반복하다 딜리스의 어깨를 찍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밀레시안은 잠시 화면을 조작해 카메라를 전환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들고 있는 밀레시안의 모습이 비쳤다. 엉망인 모습이었다.

새하얀 환자복을 입고 있지만 얄팍한 흰 천 아래로 드러난 목선이나 어깨따위에는 울퉁불퉁한 비늘이 돋아나 있었다.


제어력을 잃어가는 모습에 톨비쉬는 저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흉측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렌즈를 바라보는 밀레시안이 너무 지쳐있었기에 모든것을 포기한 눈이었기에, 톨비쉬는 저도모르게 숲에서 울고 있었다는 밀레시안의 모습을 상상했다. 

고통과 후회, 상실감. 가슴한쪽이 아려왔다. 이것은 누구의 감정? 누구에 대한 공감? 

톨비쉬는 불편한 기색을 삼키며 화면에 집중했다.

빙글거리는 두꺼운 렌즈의 안경을 낀 사내의 시선이 톨비쉬의 얼굴에 진득하게 달라붙어있었다.


영상은 계속되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방안은 온통 하얀 빛이었다. 그러나 단 두가지 이질적인 색이 그 하얀 세상속에 섞여있었다.

하나는 검은 비늘에 뒤덮인 밀레시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검은 옷을 입은 소녀였다.

은발의 소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밀레시안을 반겨왔다. 

웃지 않아도 푸른 눈이 곱게 휘어져있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밀레시안은 천천히 카메라를 들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양해를 구한뒤 카메라를 테이블위에 올려 놓았다. 영상기록보다는 녹음에 의미를 두는 것인지 카메라는 누구의 얼굴도 비추지 않은채 소녀의 검은 옷을 비추고 있었다.

검은 옷은 치료를 중단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환자의 옷입니다. 슈안이 설명을 덧붙였다.


“딜리스 선생님께 먼저 이야기 들었어요. 밀레시안씨죠?”

“네, 밀레시안이라고 불러주세요.”


“반가워요. 제 이름은 나오 마리오타 프라이데이, 나오라고 불러주세요.”


알고있어요. 밀레시안은 차마 그녀에게 서류상에서 몇번이고 당신들을 보았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글라스기브넨이 변질된 시기를 가늠하는데에 하나의 지표로 사용되었던 그녀의 이름. 마리오타. 

수십번도 더 부르고 수백번도 더 써내려갔다. 마우러스 구이디온의 숨겨진 딸. 

모리안은 마리의 서류와 이전 포보르의 직원목록을 띄워놓은 화면을 번갈아 바라보며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파르홀론에서 포보르로 이적할 때까지 마우러스에게는 가족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은 칼리번에 의해 조작된 정보였다. 

그가 어떻게 이제 막 깨어난 칼리번과 거래를 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 거래는 벨라조차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 분명했다.

벨라가 백업한 칼리번의 자료속에는 마우러스의 가족관계가 남아있었고 현대에 남아있는 마우러스의 정보에는 그가 독신이었다고 쓰여져 있었다.


왜? 모리안은 칼리번에게 무슨 이유가 있었냐고 묻고싶었지만 그녀의 앞에 있는 칼리번은 단순한 인형, 의지가 없는 꼭두각시. 젊은시절의 아발론의 얼굴을 흉내낸 AI는 죽은 사람의 시선처럼 멍하니 모리안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너의 마음을 움직였나. 모리안은 잠시 자신의 말을 곱씹다가 불쾌하다는듯 칼리번을 흩어내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진 AI라니 터무니없는 것을 만들어내었군요 디안.


하지만 터무니 없는 것이라면 이쪽에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모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앞에는 검은 비늘을 제어하느라 괴로워하는 밀레시안이 앉아있었다. 

모리안은 밀레시안이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올때까지 기다린뒤 퀘스트 스트롤을 건네주었다.

검게 풀린 눈동자가 글자를 빨아들이듯 읽어내렸다.


“에린 어딘가에 마우러스 구이디온의 딸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입니다.

알비에 잡입했던 세명의 요원중 자신의 딸이 섞여있었다는 것을 알아내고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 안달이 났더군요.  찾아오세요.”


“......어느쪽을..?”


“해독제와 마리오타, 둘 다.”

“........이 사람은..?”


“마리오타의 지인이자 또다른 글라스기브넨의 생존자입니다. 그 자와 함께 알비로 끌어들이는 것이 첫 단계입니다. 

두번째는 그와 변질된 글라스기브넨 모두에게 이 약을 실험하는 것. 이후의 실험체는 치워도 좋습니다. 

세번째는 알비를 무너트리고 네번째는 마우러스를 심문해 그녀에 대한 정보를 캐내는 겁니다.”


“......찾으..면..?”

"죽이세요."


"......."


“이번에도 못하겠나요?”


모리안은 세가지 반지와 하나의 앰플이 담긴 케이스를 떨어트렸다.

세가지는 중화제였고 하나는 칼리번의 엑세스코드가 담긴 반지였다.

밀레시안은 케이스의 내용물을 확인한뒤 품속에 집어 넣었다.


모리안이 다시한번 되물었다.


“못하겠나요?”

“..할....수 ….있어요.”


케이스를 품속에 넣은 밀레시안의 눈이 조금씩 뚜렷하게 바뀌어갔다. 

검은 동공은 줄어들었고 원래의 눈의 색이 돌아왔다. 

마치 바람을 불어넣은 사람형 풍선처럼 밀레시안은 생기있는 젊은 요원의 모습이 되어 대답했다.


“문제없어요. 모리안님.”

“그럼 나가세요.”








[“그래서 나는 타르라크를 만났어요. 그리고 그와 체스를 두기 시작했죠.”]

[“많이 이겼나요?”]


[“많이 졌어요.”]


[“아핫, 맞아요. 타르라크는 체스를 아주 잘 두거든요. 나랑할때는 그래도 조금씩 봐줬었는데.., 루에리와 할 때는 무르는 것 하나 없이 아주 매몰차게 승부하더라구요.”]


[“나한테도 처음에는 조금 봐줬었는데 20승을 기점으로는 아주 매서운 공격형으로 바뀌었어요.”]


[“와.. 20승이나? 엄청 많이 이겼는데요? 얼마나 둔거에요?”]


[“많이요. 아주 많아.”]

[“잠도 안자고 계속 뒀나보네요?”]


[“잠은 잤어요. 밥도 먹었고요. 가끔 휴식시간도 있었고 그때마다 그는 글라스기브넨에 대해서 연구했어요. 나는 그걸 보고만 있었지만.”]

[“....그렇구나.. 계속, 계속 연구에 매달렸구나..”]


[“그리고 그 이외의 일과표는 체스로 가득채웠죠. 산책시간도 없이요.”]

[“아하하, 산책을 좋아하나요?”]


[“그곳은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산책을 즐길만한 장소는 아니었어요.”]


[“음. 아니요. 당신이요. 밀레시안은 산책을 좋아하나요?”]


[“.......”]




밀레시안은 잠시 말을 멈춘뒤 생각했다. 내가? 좋아했던가? 산책을?

언젠가 던바튼이라는 상업도시에서 3달여정도 잠입임무를 맡은 적이 있었다. 

옆집에 사는 중년부부의 정원을 돌보는 정원사를 살해하기 위해서 밀레시안은 세달넘게 취업생의 흉내를 내며 배울필요도 없는 직업학교를 다녀야했다.

밀레시안의 하숙집에는 커다란 황금빛의 개가 있었고 모든 하숙생들이 돌아가며 그 강아지를 산책시켜줘야 하는 룰이 있었다. 미루거나 떠넘기는 것은 자유였지만, 밀레시안은 그다지 다른 하숙생들과 교류하고 싶지 않았기때문에 꼬박꼬박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면 군말없이 그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나가곤 했다.


내가 그걸 좋아했던가?

강아지를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차이는 있었지만 하숙생중 그 누구도 휴일날의 강아지산책을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침 정원사의 근무가 없는 날은 주말이었고 밀레시안은 흔쾌히 그 주말의 산책을 담당했다. 강아지는 주말만 되면 밀레시안의 방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 강아지를 좋아했던가?

하지만 사건은 주말에 일어났다. 밀레시안이 강아지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 

중년부부의 정원에 소중한 열쇠고리를 떨어트린 정원사는 부부에게 양해를 구하고 정원을 살펴보기 위해 나오는 길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던 강아지는 집이 보이는 것에 즐거워하며 발걸음 속도를 높였다. 

밀레시안은 다소 부주의하게 강아지게에 끌려갔고 강아지는 밀레시안의 천천히 라는 음성에 자리에 멈춰섰다. 

밀레시안을 기다리던 강아지가 수풀에 떨어진 낯선 물건을 발견했다.

모르는 사람의 냄새. 강아지는 잘 정돈된 수풀에 머리를 박았다.


기껏 둥근 모양으로 다듬은 수풀이 무너질까 밀레시안은 강아지를 말렸지만 말만 강아지뿐이었던 덩치 큰 금색의 개는 밀레시안을 꼬리로 탁탁 쳐내며 수풀속 열쇠고리를 꺼내물었다.

강아지는 자랑스럽게 그것을 밀레시안에게 선물했다.

밀레시안은 열쇠가 달려있지 않은 둥그스름한 허리띠장식을 관찰했다. 

낡았지만 보드라운 털이 달린 허리띠 장식의 금속부분에는 낯이 익은 문장이 찍혀있었다.


“이건 파르홀론의..”

“.........”


밀레시안의 작은 속삭임을 들은 정원사가 수풀을 사이에두고 걸음을 멈춰섰다.

강아지와 실랑이를 하던 소리를 들은 중년 부부와 정원사가 밀레시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자신의 말소리가 그들에게 들렸을지를 고민했고 정원사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가씨가 그 문장이 파르홀론인걸 어떻게 알지..?”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밀레시안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정원사는 허겁지겁 수풀을 짓밟으며 반대편 대로로 뛰어나갔다.

중년부부는 비명을 질렀고 대로에는 큰 소리가 났다.


기나긴 크렉션이 울렸다.

 멈춰선 트럭과 갑자기 멈춰선 트럭에 추돌한 자동차들. 연기와 고함 비명이 순식간에 대로를 가득채웠다.

때아닌 휴일날의 대형사고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창밖을 내다보았다.

패닉에 빠진 중년의 부인을 밀레시안을 향해 소리쳤다.


“이 아가씨 때문이야..! 이 아가씨가 뭐라고 말하자 마자 친철하던 정원사씨가..!!”


“진정해 여보..! 이 아가씨는 그냥 물건을 주워준 것 뿐이잖아..!”

“하지만..! 당신도 봤잖아요..! 정원사씨가 이 아가씨를 보자마자 그렇게..!”


“미안해요, 학생..! 지금은 아내가 많이 놀라서 그런거니까 신경쓰지 말아요. 나중에 내가 잘 이야기 해줄테니까..!!”


중년의 남편은 패닉상태의 아내를 부축해 집으로 돌아갔다.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밀레시안과 큰소리에 깜짝 놀라 꼬리를 말아앉은 강아지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조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힘차게 달려오고 있었다.

산책을 마치고올 밀레시안을 위해 깜짝 간식을 준비하던 하숙집의 주인은 홀로돌아오는 강아지의 목을 긁으며 되물었다.

무슨일이 있었니? 네가 가장 좋아하던 산책친구는 어디갔고..?

강아지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주인의 뺨을 핥았다. 그리고 애처롭게 끙끙거렸다. 

밀레시안은 그대로 던바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소란을 수습해야하는 모리안의 심기가 불편해진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뭐가 문제였나요?”

“아무것도.”


“왜 그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죠?”

“최대한 빨리 벗어났어요.”


“사고가 난 순간에, 왜 그자리에 멍청하게 앉아있었냐는 말이에요.”

“혼자라면 인식속에 녹아들 수 있지만 개를 데리고 있었어요.”


“그럼 개를 포기했어야지.”


모리안의 말대로 밀레시안들은 순간적으로 상대의 주의를 흐트러트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한순간 주의를 흘리고 그 공백의 공간속에 존재감을 녹여 마치 그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에 불과한 것이어서 살아있는 대상이 있다면 통하지 않는다. 

감이 좋은 동물에게도 마찬가지였고. 만약 동물이 밀레시안을 따르는 동물이라면 더더욱 불가능이었다.

사람들이 밀레시안을 놓치더라도 그 강아지는 밀레시안에게 안겨들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개를 따라 다시 밀레시안을 발견했을 것이다.


해결책은? 모리안의 말이 맞았다. 

임무를 속행하기 위해서는 그자리에서 개를 죽이고 중년의 부부가 밀레시안을 인식하기 전에 모습을 감추면 되는 일이었다.

중년부부는 잠시 당혹스러워 하겠지만 밀레시안의 존재를 눈치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개의 존재를 기억해낸 부부는 옆집 하숙집에 이 사실을 물으러 갔을것이고 하숙집의 주인은 오늘 개를 산책시키던 담담의 밀레시안을 찾으려 하겠지만 실패할 것이 분명했다.


그 이름도, 그 얼굴도, 그 행적이나 등록된 모든 신분이 가짜. 얼굴이 어땠는지 무슨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밀레시안이 어느새 같은 집 다른 하숙생을 몰래 치워내고 그 자리를 채워 앉아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절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밀레시안은 개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아주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사라졌다. 

의심과 의혹을 남긴채 아주 지저분한 뒷자리를 남기고 모리안에게 돌아왔다.


“왜 죽이지 않았는지 설명하세요.”


“......”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대라고요.”


잘못을 빌 수는 없었다. 실수였다고 하기엔 너무 기초적인 일이었다. 

어째서였을까, 밀레시안은 생각을 거듭하려했지만 이 때는 늦었다. 그때의 생활은 이미 아득한 과거처럼 흐릿했고 주말마다 산책을 나가던 성실한 직업학교의 학생은 밀레시안의 안에서 사라졌다.

밀레시안은 대답대신 까맣게 풀려가는 눈동자로 대답했다.


은색의 눈이 밀레시안을 노려보았다.

뺨을 내리치는 대신 매서운 손날이 공기를 가르며 스쳐지나갔다. 나가라는 의미의 명백한 분노.

밀레시안은 다른 밀레시안들이 있는 대기실로 돌아왔고 그들의 사이에 끼어앉았다.

임무를 맡고 나야가 하는 또다른 밀레시안이 그녀에게 투덜거려왔다.


“아, 이게 뭐야. 기껏해야 개를 죽이라고? 정말 알 수가 없다니까.”


“.......”


“이봐, 뭐라고 말 좀 해봐. 네 탓이잖아. 내가 기껏 개한마리 죽이러 던바튼까지 가야해?”


“........”


“아아아.. 정말.. 최악이다.. 타라임무는 취소되고 고작 개.. 이번임무에서 돌아오면 분명 또 벽촌으로 밀려날거 아니야. 카브라도 가야하는거 아니야? 바닷냄새 완전 최악인데. 아 진짜 싫어. 다 너때문이야.”


“..........”


“너 때문이라고.. 하.. 뭐 이미 다 잊어버려서 말해도 무슨말인지 모르겠지만.”


“......아니야.”


유난을 떠는 성격으로 설정되었는지 모두가 침묵하는 대기실에서 혼자서 떠벌떠벌 이야기하던 밀레시안이 우뚝 멈춰섰다. 지금, 누가 말한거? 검은 동공들이 한 자리를 향해 웅직였다.


“내 탓이 아니라고.”


“.........하”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어.”






단 발의 박수소리가 울렸다. 

막은 여기까지. 잘짜여지지 못한 무대 위, 돌발행동을 한 인형은 어떻게 되어야 마땅할까.







밀레시안은 눈을 깜빡이며 머릿속 시계를 현재로 되돌렸다.

고통이라는 것을 지워낸 공백을 넘어 잊을 수 없는 악몽의 숲을 넘어, 새하얗고 신비로운 마리오타의 앞으로.

밀레시안은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짜내어 대답했다.


“아마도…”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있었다.


“그랬었다고 생각해요.”


울지마. 울지마. 울지마 제발. 지금 이정도로 눈물같은걸 보이지마.

은색이 아닌 황금색으로 비쳐들어오는 햇살이 너무나도 눈부셨다.

현실의 은빛은 약간의 잿빛과 보라색과 흐릿한 푸른색, 연녹색, 뿌연 노란색등이 섞인 다채로운 색의 총 집합채였다. 순백이 아닌 모든 상냥한 빛이 모여든 완전한 색.

나오는 밀레시안의 눈가를 닦아주며 대답했다.


“그렇구나. 나도 참 좋아해요. 산책나가는거. 정말정말 좋아해요.”


“......”


“우리 공통점이 하나 생겼네요?”


햇살이 눈부셨고 은색의 빛이 따스했다. 

손은 부드러웠고 그녀는 너무나도 상냥하게 웃어보였다.


너는 이런 사람의 목숨을 베어먹기 위해 여기까지 도망친거야. 

붉은 손톱을 가진 긴머리의 여성이 밀레시안의 귓가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네 목숨을 살리기 위해선 이 사람의 희생이 필요해. 황금의 눈을 가진 검은 여성이 냉철하게 차트를 적어내려갔다.

이것은 당신의 바램.

깍지를 낀 손을 가슴위에 얹은 하얀 옷의 여성이 밀레시안의 등 뒤로 다가섰다.


너가 사람이 되기위해선. 네가 사람이 되기위해선. 당신이 사람이 되기 위해선.

세명의 바이브카흐가 밀레시안을 향해 속삭였다.


나오 마리오타 프라이데이가 죽어야만해.




밀레시안은 나오의 손을 떼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면이 흔들린다. 

덜컹거리는 테이블소리에 문 바깥에서 섯부른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밀레시안은 양철의 의자 뒤로 밀어내며 자리에서 멀어졌다. 


딜리스와 마을 청년의 목소리가 문틈사이로 새어들어왔다. 괜찮다니까? 하지만 뭔가 소리가.., 트레보, 이런식으로 할거라면 다시 돌아가줘. 밀레시안은 나오의 요청과 내 감독하에 만나고 있는거야. 방해하지마..!

밀레시안과 나오는 동시에 문에서 시선을 때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오는 웃으며 밀레시안에게 앉으라고 권유했다. 밀레시안은 좀더 강경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를 버리고 당신이 살아요.”]

[“밀레시안, 앉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잘못되었어요. 내가 죽는게 맞아요. 그래야 옳아요.”]


[“밀레시안. 살고 죽는것에는 옳고 그른것이 없어요. 제발 진정하고 앉아요.”]


[“나는 밀레시안이에요. 내가 필요하다면 다른 개체를 잡아오면 되는 일이에요. 원한다면 내가 가서 잡아올게요. 그러니 당신이 희생할 필요는 없어요. 나를 대신할 개체는 아주 많이 있어요.”]


[“하지만 그들중 누구도 타르라크에게서 20승이나 따내진 못했잖아요?”]


[“......”]


[“그들중 누구도 화가난 루에리와 맞서 싸운적은 없어요.”]


[“.....”]


[“만약 당신이 잡아온 밀레시안들이 모두 산책을 싫어하면 어떻게해요?”]


[“......나...는...”]


[“나는, 당신의 밀레시안이라는 이름이 좋아요. 어쩐지 별을 닮은 이름같거든요. 아 그리고 그것도 알아요? ”]


나오는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밀레시안에게 손을 뻗었다. 

밀레시안은 그녀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서둘러 나오의 손을 붙잡았다.

밀레시안에게 체중을 기대어 반쯤 몸을 일으킨 나오는 밀레시안의 뺨을 쓰다듬으며 즐거운듯 이야기했다.


[“당신의 눈, 까만자위가 무척 커서 햇빛을 받으면 마치 별이 뜬 은하수처럼 반짝거려요. 

그런 눈은 처음보는 데 혹시 아픈 탓이라면 미리 사과할게요. ”]


[“아프거나 하지는 않아요.”]


[“그래요? 다행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순수하게 아름다운 눈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밀레시안은 조심스럽게 나오를 부축해 다시 침대위에 눕혀주었다.

깨어질듯 유리공예품을 다루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나오는 고맙다고 소리내어 인사했다.

고마워요. 미안해요. 다행이네요. 나도 좋아해요. 우리 공통점이 있네요.

그녀는 온 몸을 다해 밀레시안에게 호의를 표현하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두려움이 반 죄책감이 반, 그리고 그런 그녀를 실망시키면 안된다는 책임감에 짓눌려 있었다.

나오는 그런 밀레시안의 긴장을 풀어주려는듯 밀레시안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다 괜찮아.”


“.......”


“무서워하지 말아요.”


나오는 천천히 오래된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아주 어릴적 할머니가 들려주신 옛 전설에 대한 내용을 담은 과거의 노래. 

나오는 몇 번이고 반복되는 단순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밀레시안의 손을 쓰다듬었다.


혀끝에 닿는 공기가 달콤했다. 마치 동화속 환상의 일부분처럼 밀레시안은 이 눈부신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숲을 배경으로 밀레시안은 서로다른 빛깔의 두가지 기억을 가슴속에 세겨넣었다. 

후회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했다. 위로받고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노래는 밀레시안의 것, 오직 당신의 영혼만을 위한 노래.


바다빛 눈동자가 밀레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감은 밀레시안이 나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검은 용도 세명의 여신도 없이 오직 한 순간의 안식속에 머리를 기대었다. 

검다. 코끝에  검은 천이 닿으며 온 시야를 검게 물들였다. 


이것의 이름은 안식. 밀레시안은 처음으로 머릿속에서 깜빡이던 붉은 램프가 꺼진 정적을 맞이했다. 

어둡고, 따듯했다. 졸음이 몰려오는 기분은 난생 처음이야.




나오는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서는 딜리스를 향해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이야기는 다음에 해야할 것 같아요.”]


[“그래. 다음 스케쥴도 어떻게든 조정해볼께.”]


[“부탁드려요. 꼭 해주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아마 나는 그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해 아직까지 살아있었다고 생각해요.”]


[“얘는.. 아직 그런말 하면 못써. 조금 더 시간이 있을거야. 아직 더 나눠야할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그런 약한소리 하면 안돼.”]


[“아하하. 네 알겠어요. 잘부탁드려요.”]


[“그래. 웃으렴.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웃으렴. 마리오타.”]


딜리스는 테이블에 놓여진 카메라를 들어올렸다. 

쭈뼛거리며 들어온 건장한 청년이 잠이든 밀레시안을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저 청년이 아마 트레보라는 사람이겠지. 톨비쉬는 문밖으로 나가는 밀레시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반드시 너를 도울거란다. 그리고 저 아이도.”]


[“.....딜리스씨..”]


[“하지만 만약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면...”]


[“.....”]


[“그 선택은 우리들이 아닌 너희가 결정내려야 할거야”]


딜리스는 카메라를 접으며 이야기했다. 

렌즈는 닫혔지만 아직 마이크는 꺼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생각하렴. 대화하고 고민하고 또 괴로울때까지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으렴. 그리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스스로에게 묻는거야. 정녕 그 선택에 후회는 없는걸까. 다른 또다른 방법이 없는 걸까.”]


[“......”]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해 체념하고 스스로를 납득시켰을때.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조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를 확인하렴.”]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르작거리는 옷가지 소리 속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섞여있었다.


[“후회해도 괜찮아. 납득하지 못해도 괜찮아. 화를 내도 좋고 울음을 터트려도 좋아. 

원망하렴. 슬퍼하렴. 그렇게 그 모든 감정을 토해내렴. 그렇게 해서 마음이 풀리겠다면 네 마음껏 마음을 발산하렴. 

우리들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어. 그러기 위해 어른이 되었고 그러기 위해 이 옷을 입고 있는 거란다.”]


[“화가 나지는 않아요. 원망하지도 않고요.”]

[“하지만 슬퍼보이는데?”]


[“네, 슬프니까요.”]


문이 열렸다. 트레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조금, 슬픈 마음이 남아있는것 같아요.”]


[“그래. 다행이구나. 그게 너의 진심, 네가 가지고 있는 영혼의 빛.”]

[“그렇네요. 이 슬픔이 나의 진심…. 나의 마음.. 나의 영혼..”]


[“......”]


[“내가 그아이에게 전해줘야하는 마지막 감정.”]








문이 닫혔다.

그리고 다시 화면이 전환되었다.

장소는 다시한번 같은 병실, 노을이 내려앉는 늦은 시각 밀레시안은 석양을 등지고 앉아있는 나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자가 길어졌다. 나오는 앉으라는 말대신 찬찬히 밀레시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오는 수척해졌고 밀레시안은 손과 목 얼굴 일부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더이상 상온에서 활동 할 수 없게된 밀레시안은 온 몸에 냉기를 뿜는 간이 팩을 두른채 붕대를 감고 생활했다.


이제 그만 캡슐안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서리속에 잠든다는 것은 곧 다른 한쪽이 죽게 된다는것.

타르라크가 넣어준 해독된 글라스기브넨의 혈액과 밀레시안이 자살용으로 남겨두었던 모리안의 중화제. 그리고 오랫동안 나오와 함께 글라스기브넨을 저지해왔던 알베이의 연구자들. 

부서진 조각들이 모여 딱 한사람분량의 약이 만들어졌다.


딱 한사람분량의 목숨이 캡슐에 담겼다.

나오를 살릴 것인가 밀레시안을 살릴 것인가를 두고 알베이는 그 선택지를 구겨낸뒤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하고 싶니?


서로 합의해서 한쪽을 선택할 수도 있었고 다른 한쪽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둘은 안되었다. 두 사람의 몸은 아무런 처치없이 동결되기에는 너무 약해졌고 이렇게 햇살아래 생활하는 것도 이제는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적어도 이게 끝이라면 태양을 바라보며 스러지고 싶었다.

두 사람이 모두 목숨을 포기한다해도 알베이는 그들의 선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선택하렴. 생각하고, 고민하렴.

밀레시안은 단번에 자신의 선택권을 포기했지만 나오의 결정또한 거부했다.

포기하는 것 조차 또다른 선택이라는 것을 알지못한 밀레시안은 나오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내 곧 포기했다. 숨가쁜 날들이 지나갔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많은 추억들을 공유했다.

서로가 가진 공백의 시간을 매꾸며 헐거웠던 기억의 고리들을 새로히 엮어나갔다.


나오가 말했다.


“당신을 만나게 되어서 기뻐요.”


“나도 기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하지만 밀레시안, 하지만..”


나오는 이제 그만 이 끝없는 문답을 끝내야 한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은빛이 흔들린다.

끝없는 심연보다도 더 깊었던 은색의 세상이 흔들린다.


“내가 반대의 입장이 되었어도, 당신이 내가 되었어도, 우리들의 운명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에요. 

우리중 누가 감염되었어도 똑같이 그 사람을 들쳐업고 뛰었을 거고, 누가살아남게 되더라도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겠죠.”


“ 그래서는 전부 사라지는 결과밖에 남지 않아요.”


“그래요. 어느 누가 되었든 우리들은 분명,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채 헛되이 죽어가는 그런 티끌같은 존재가 되어버리겠지만 그래도 이젠 당신이 있어요. 우리들의 다음으로 밀레시안이란 존재가 남게되는거에요.”


그건 굉장한 기적에요. 나오는 밀레신안의 손을 붙잡고 웃었다.

내가 사라진 뒤에 무언가가 남는다는것 이 넓은 세상 한가운데 나라는 존재가 무언가를 남긴다는것. 

이름도 명예도, 어떠한 물리적인 흔적이 아닌 나라는 사람이 살았던 과거가 기억되는 것. 당신의 안에, 

그리고 당신이 만나갈 사람들의 안에, 부르고 또 불리어 이어질 이야기.


“슬퍼요.”


밀레시안이 대답했다.


[“지금, 굉장히 슬퍼지는 기분이에요.”]


[“네, 슬퍼요, 아프고, 또 두려워요. 그래도 이제는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후회하지 않아요.”]


내 모든 것을 당신에게 넘겨주었기에, 이제 이 가슴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리는 환하게 웃으며 밀레시안을 끌어안았다. 이제 되었다. 이제 당신은 괜찮아. 

사람으로, 다시한번 사람의 삶으로 살아가는거에요. 

아파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그로인해 아끼는 것들이 생겨나겠죠. 그로인해 사랑하는 마음을 배워가겠죠. 

살아가세요. 이 슬픔을 안고 이 이별을 안고. 다시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 당신이 보게 될 세상은..









[“도망치라고 했어요.”]


화면은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부자연스럽게 누워있는 화면속 기묘하게 마주선 두사람이 한 자루의 듀얼건을 사이에 둔채 이야기가 하고 있었다.

한쪽은 다시 사람의 모습에 가까워진 밀레시안, 그리고 다른 한쪽은 어딘지 낯이 익은 안경을 쓴 남자.

쓰러진 카메라속으로 남자의 울부짖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밀레시안의 말이 저주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모든 삶을 부정한 아이처럼 울부짖었다.

총을 쥐고 있는 것은 사내의 쪽. 밀레시안은 그가 언제든지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천천히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후회를 하더라도 살아남으라고 했어요.”

“내가 아는 너희들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어.”


“그런 나를 만나 기쁘다고 했어요.”

“그렇게 사람처럼..”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게 사람인 것 처럼..!!”


“그래도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이 아픔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요.”


“울면서 나를 보지 말란말이다..”


슬픔을 느끼는 밀레시안의 존재는 그에 대한 부정이었다. 

밀레시안들은 후회를 할 수 있고 밀레시안들을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조각조각 갈라져나온 하찮디 하찮은 영혼의 가루 어딘가 아직 남아있는 감정의 끄트머리 살아 숨쉬고 있었다.


살 수도 있었다.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걸 부순것은 다름아닌 그, 오만한 자의 이름 아발론.

그는 밀레시안에게 줄 수 있는 안식은 오직 죽음뿐이라고 생각했다. 

칼리번으로 부터 꿈을 이어받지도 실리엔으로 부터 망각을 부여받지도 않은 반쪽짜리 인형들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그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중간하게 지워지고 어중간하게 되살려졌다. 꿈꾸지 않은 칼리번은 그들의 머릿속에 기계적인 명령어만을 입력했다. 마음을 부수어 행동의 양식으로 사용했다.


죽어가는 마음의 비명을 듣지못한채 그들은 그렇게 차례차례 마모되어가고 공허하게 비워져나갔다.

하고싶지 않은 일이있었다. 싫어하고 괴로워하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일이 있었다. 

싫은것을 싫다 거절할 수도 없어 마음을 깨트렸다. 깨어진 조각으로 반대되는 자신을 만들었다. 

그렇게 또 깨어지고 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작은 머릿속안에 수십명의 인격들이 가득차고도 모자라 그 모든 고통을 이어받은 또다른 그림자를 바랬다.


명령어를 부여받기 전까지 그들은 인형처럼 나란히 앉아 자신들이 받은 상처에 대해 곱씹었다.

단 한명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단 한번도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소리치지 못했다.

아발론은 그런 그들을 모두 찾아내어 제 손으로 죽음까지 이끌었다.


너희들이 만들어진 것은 나의 과오. 너희들이 태어난 것은 나의 비겁함.

도망치는 동안 남겨온 잘못된 발걸음을 따라 나온 길을 잃은 아이들. 그렇게 믿으며 그 아이들을 해쳤다. 

그렇게 믿으며 그 아이들을 영원히 잠재웠다.  그렇게 믿으며 그 끝에 다다랐을때 아발론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밀레시안을 마주했다.




슬퍼했다. 외로워했다. 후회하고, 그러면서도 살아나가기를 희망했다.

잊으면 안된다고 이대로 잠들 수는 없다고. 한번만 더, 한번 더 살아가야할 이유를 찾아야한다고.


“당신이 나를 죽이려 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어요. 완성된 것은 당신이고 불완전한 것은 우리들이죠.

그래요. 우리는 당신에 대해서 들은적 있어요. 당신에 대해서 말한 적 있어요.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고 한없이 예상을 뛰어넘은 유일한 칼리번의 완성작. 


그런 당신이 우리들을, 아니 나를 부정한다면. 그건 정말 어쩔 수 없어요. 

당신에게서 달아나지도 맞서 싸우지도 못해요.”


“.....나는.”


“하지만 말할 수는 있죠. 하지만 시도해 볼수는 있을거에요.

바라고 소원한다. 그게 인간이 가진 최고의 무기이자 최후의 방패. 그 삶의 마지막 끝에서 이름모를 누군가를 부르며 기도한다는 것. 죽음앞에 자신의 후회를 드러내어 보인다는 것.”


녹슨 태양의 빛이 어린 콜트가 떨어져내렸다.

그가 울음을 터트리며 얼굴을 감싸쥐었다. 슬퍼했다. 외로워했다. 후회하고 또 살아나갔다.

그 길이 잘못되었지만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죽음의 끝에서 피어난 기적을 보며 절망했다.

조금 더,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조금 더 자세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면  조금 더 잘 했더라면.


열심히 한다고 해서 모든게 잘 되는 것은 아닐거야. 네반은 익숙하게 밀레시안들의 시약을 조제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녀의 앞에 있는 밀레시안들중 어느 누구하나 대답할 수 있을리는 없지만 그녀는 때때로 누군가에게 하지 못한 해묵은 앙금을 꺼내 홀로 털어놓았다.


“세상에는 언젠가 선택해야하는 순간이 있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반드시 한가지의 길만을 걸어 갈 수 있지. 하지만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너 자신. 누군가 너의 선택지를 막고 의도한 길만을 내어놓은다고 해도 꼭 그 길에 따라 움직일 필요는 없어.


네 길을 개척하렴. 너의 길을 나아가렴. 하지만 너무 서두르지 말고 무모하게 도전하지도 말고, 잘 보고 잘 생각하고 잘 고민해서 나아가렴. 한번 떠난 길은 되돌이킬 수 없어. 

그러니까 소중한거야. 그러니까 필사적인거야. 모든것을 없던 일로 지워버리고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렇게는 안되겠지. 그렇게는 못할거야.


너의 삶에 내가 있는한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비추고 비춰지는 타인과의 관계성이 남아있는한.

내가 너를 기억하고 네가 나를 기억해. 그렇기 때문에 기억은 영원히 이어져 세상에 각인된다. 

내가 나를 잊더라도 나를 기억하는 네가 있어. 네가 너 자신을 잊더라도 오늘을 기억하는 내가 있어. 

이 수많은 카메라들이, 수없이 긴 녹음된 시간들이 너를 기억하고 너를 기록하고 너의 성장을 저장해. 

그러니 얼마든지 나아가렴.  그 시작은 여기, 이 수십미터의 바다아래. 영원히 매장되어있을 분홍빛 아름다운 광석들과 함께 묻혀있을테니. 나아가렴. 날아가렴...”


나는 더이상 너를 쫓지 못할거야. 그게 미안해. 그게 너무나도 미안해. 작았던 나의 아이, 더이상 작지만은 않은 나의 그림자의 아이. 엘라하... 네반은 마지막 시약을 밀레시안들에게 주입했다. 

머리가 흔들린다. 눈앞이 흐려진다. 온세상이 은빛으로 빛나는 그 환상의 경계선.  그녀의 말소리가 들렸다. 

우리들은 그렇게 눈을 감고 어둠으로 빠져들었다.








[“그래요. 그렇게..”]


밀레시안은 다시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다.

지금의 그가 아닌 과거 어딘가에 있을 아발론과 마주하는 밀레시안은 아직 엣된, 쿠르클레로 향하는 헬기에 오르기 전 그 차림새로 앉아있었다.


[“당신은 다시한번 나를 재웠고, 이제 나를 깨어내었죠.”]

[“그래, 준비는 되었니?”]

[“언제든지. 얼마든지. 아직 모든게 낯설고 조금 흐릿하지만..”]


밀레시안은 오래간만에 깨어난 육체가 적응되지 않는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어보였다.

머리가 멍하게 느껴지는 건지 조금씩 고개를 흔드는 버릇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들어올려 예의 그 별이 반짝이는 눈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노력해볼게요.”]


살아가도록, 사람이 되어가도록. 카메라의 렌즈가 닫혔다. 아니, 눈을 감았다. 

눈꺼풀처럼 서서히 반타원형의 그림자가 밀레시안의 모습을 가렸다. 

검게 가려진 시야 사이로 헬기의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고 그리운 바람소리.


톨비쉬는 바람으로 엉망이된 오디오속 웃고 떠드는 자신과 팀원들의 목소리를 듣고있었다.

톨비쉬가 미간을 누른채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슈안은 화면과 영상장치들을 정리한뒤 가방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고개를 돌린 톨비쉬의 앞으로 작은 상자가 내밀어졌다.

섯불리 상자에 손을 대지 않는 톨비쉬에게 슈안은 직접 열어보라고 권해왔다.


상자안에는 은빛의 다우라가 한자루 들어있었다. 밀레시안이 쓰고 밀레시안이 버린, 무너진 브류나크의 홀 안에서 톨비쉬가 주워들었던 그 총이었다.

이게 무슨의미인지 설명해달라는 무언의 눈빛에 슈안은 주섬주섬 작은 흰색 종이를 꺼내들었다.

흰색 종이안에는 깔끔한 필체로 짤막한 주소지가 하나 쓰여져 있었다.


슈안이 말했다.


“그곳이, 밀레시안이 있는 장소입니다.”

“.........”



“알반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밀레시안이 영원히 에린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것.”


“내가 그걸 받아들일거라 생각하십니까?”


“네.”


“......내가 밀레시안을 선택했으니까?”


"당신만이 이 자료를 열람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단장이 그렇게 시키던가요?"


“어느쪽의 단장을 말하는지 모르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피오나의 단장은 선택권을 주었고 알반의 단장은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자료를 폐기하는것도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도, 당신이 이를 모두 보고 듣고 읽게되는 것도 중간에 뛰쳐나가는것도 어느것도 상관없었으니까요.


모든 자료들의 재생이 끝난 지금 당신이 밀레시안을 환멸할지 동정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거기까지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당신만이 선택할 수 있고 당신만이 물어볼 수 있습니다.

다시 깨어나서도 타인을 모방하는데 그쳤을 밀레시안이 제 3의 선택을 하게 선택지를 이끌어낸 것은 다름아닌 당신이니까요.”


“.....”


“죽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가 되겠지요.

하지만, 반대로 도망치는 것이 꼭 옳은 답이 될 수는 없을겁니다. 

알반이 아무리 숨겨도 누군가가 알아낼 것이고 누군가는 진실에 다가서겠죠. 누군가는 이를 오해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를 이용할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 끝나지 않고 끝나지 않는한 오해는 계속 이어집니다.


이것을 끊어내는 것에는 아발론의 선택이 매우 유효하지만..”


“......”


톨비쉬는 더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듯 몸을 돌려 앉았다. 

팔을 문쪽으로 뻗어내는 동안 그의 움직임에 휩쓸려 주소가 적힌 종이가 의자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톨비쉬의 시선이 종이에 머물렀다. 슈안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듯 안경을 고쳐쓰며 반대 방향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아닌 다른 요원을 보내는 수도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진행이네요.”

“글쎄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안경아래로 날카로운 눈매가 톨비쉬를 흘겨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듯 알지 못한다는듯 연극톤으로 말을 이어갔다.


“당신의 귀에는 어떻게 들렸습니까? 밀레시안이 설원을 두드렸을때 했던 그녀의 말은.”


“......”


“협박이었습니까? 아니면 그저 정보를 알려주는 까마귀의 울음소리였습니까.”


“........”


“아니면….”


톨비쉬는 문을 열었다. 슈안은 입을 다물었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차체의 진동에 눈을 감았다.

손이 무거웠고 가슴이 무거웠다. 고작해야 다우라 한 자루와 종이 한장 뿐이었는데도 돌아서는 발걸음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아무것도 없을 황무지에 거짓말 처럼 피오나의 공용 차량이 한대 서있었다.

창문을 내리고 짧은 머리의 남자가 고개를 까딱였다.

조수석 깊숙히 몸을 숙이고 있던 킹이 살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태워줄테니까 그 표정 좀 풀어..”


톨비쉬는 문을 세게 닫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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