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비밀레) reload #12

마비노기/reload 2017. 12. 23. 16:55

“에… 보시다시피 이게 그 크로우 크루아흐, 포보르가 한참 퀘사르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던 전술 수송기야. 

역병의 밤 전날 떠올랐다가 그대로 사라졌었지. 뭐, 그땐 사라졌다고 해도 그냥 추락했다거니 생각했는데..”


멀린은 펜끝으로 머릿속을 벅벅 긁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보던 다른 에이전시의 요원들도 인상을 찡그렸지만 제로들은 익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말 그대로 사라진것이었네.”


“대체 뭘 만든던 놈들인지 모르겠어.. 에일레흐놈들은 그때 뭘했길래 이런거 하나 단속 안한거야?“


“사장님, 에레원님이 참석한 회의입니다만.”


“신경쓰지마. 지금은 나도 같은 마음이니까. 선선대께서 무엇때문에 그들을 내버려두신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니까. 

아, 이 발언은 기록에서 제외해줘. 영감들이 또 소리소리 지르며 쫓아올거야.”


“이거, 다른 에이전시들도 다 기록하고 있어서 타라, 탈틴의 기록에서 지우더라도 다른 곳에 기록될텐데요.”


에레원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기억은 반사되어 왜곡되지만 기록은 복사되어 널리널리 퍼져나간다. 아무리 지워도 지지않을 때자국처럼 부정한다 해서 사라지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증거들.

카르펜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어 턱을 받쳤다. 글라네스는 곤란하다는듯 웃어보였다. 

그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오언은 안드라스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묘하게 이어지는 신경전에 기침소리를 낸 것은 디바, 덕분에 프로페서와 입씨름중이던 멀린이 지레 입을 다물며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브류나크의 급습이후 한시바쁘게 모인 인원들이지만 어쩐지 뭐가 하나씩 부족한 느낌이었다.

발레스와 에일레흐는 뒷수습을 위해 서도 뭉뚱그려진 다음 다시 두갈래로 분열했다. 중구난방으로 날뛰는 기타 여론들을 붙잡기 위해서는 일단 한차례 뭉쳐야할 필요가 있었다.

퀘사르들은 한바탕 난리를 치고 사라졌지만 그 뒤에 남겨진 난장판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온전히 그들의 몫.

거기에 뒤이어 이런 사건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으니 내측에서는 에린 외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었다.


물론 반발의 입김이 더욱 거세었지만 그래도 이런 의견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에일레흐가 왕위에서 내려올때도 한번도 나오지 않았던 새로운 의견에 덩달아 동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에일레흐는 더욱 골머리를 앓으며 다른 에이전시들을 닥달했다.

제로들은 억울했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는 없었다.

가장 난장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은 제로들이었지만 반대로 대중들과 가장 얼굴을 많이 맞대고 있는 것 또한 제로들이었다.


피해가 적어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이 가장 많다는 이유로 제로는 어찌어찌 마이크를 넘겨받아 이 반쯤 엇나가는 연합회를 꾸려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어쩌겠는가, 에일레흐와 발레스는 신임을 잃었고 필리아는 방관자이면서 피해자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그들이 보여준 새로운 위력의 실리엔의 탄환도 무시할 수가 없다.


필리아는 초장부터 그 탄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알려줄 것도 없다고 못박았지만 그런다고 넘어갈 발레스가 아니었다.

필리아는 실리엔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필리아는 힐웬을 다룰 기술을 훔쳐낸 전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왜 여태까지 듀얼건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는가.

발레스의 질문앞에 필리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알고 있는것도 스스로 만들어낸 것도 없습니다. 네, 당신들이 지적한 것과 같이 이 모든것은 우리 필리아가 아닌 다른이의 것.”

“하, 그 버릇 못버리고 또 다른곳에서 비밀의 서를 빼돌렸나?”


“당신들이 그렇게 애지중지해 마지않던 자이언트의 서 조차 우리를 위해 쓰인적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그들, 바이브카흐의 손아귀에 들어갔었죠.”


바이브카흐의 이름에 진절머리를 치는 것은 에일레흐, 필리아는 그런 그들을 불쌍하다는듯 쓴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아이러니하게 되었군요. 당신들이 그렇게 부정하고 감추고 싶어했던 바이브카흐의 기술이 이제와서는 퀘사르를 쫓을 유일한 단서가 되다니말이죠.”

“바이브카흐.. 바이브카흐.. 음.. 어디서 들었더라..”


“....발레스?”


“아. 그 예전에 네반 실리엔 연구소가 속해있던 그 바이브카흐 말이지..??”


바쉬배르 왕가놈들의 기억력을 믿는게 아니었는데.. 눈을 가린 바이데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필리아까지 참가한 연합단체는 모두 6개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에일레흐의 아래에 자리한 타라와 탈틴, 그리고 오언의 벨바스트, 발레스의 블랙레이븐과 필리아의 친위대, 마지막으로 제로들까지.

기껏 나타났던 검은 캐리어나 퀘사르들이 사용한 무기, 그들의 변형된 신체에 대해서 설명하던 멀린은 얼굴을 감싸쥐며 단상아래로 쪼그려 앉았다.

프로페서가 품위없게 무슨짓이냐며 질책해 왔지만 멀린은 품위고 나발이고 라고 대답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나 피곤해, 교수는 너잖아 교수님이 강의 대신해줘.”


“얼른 일어나라..”


“왜 나만!! 왜 우리만..!!”


이를 악문 프로페서의 억센 손길에 멀린이 반쯤 울음이 섞인 짜증을 부리며 단상위로 끌려올라왔다.




“피오나 놈들은 뭐하는데..!!”


서로 딴짓과 딴소리를 하던 대표들이 일순 조용해지며 멀린을 바라보았다.

멀린은 아차 실수, 라고 작게 속삭였지만 그 작은 소리마저도 마이크를 타고 크게 울려나갔다.

디바가 머리를 감싸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레원이 소리친다.


“내 말이!!”







다른 에이전시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퀘사르에 대한 회의를 진행하는 동안 톨비쉬는 한쪽 머리를 감싸쥔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불이 어둡다. 뉴스에서는 연일 브류나크의 테러에 대해 보도중이었고 피오나의 모든 요원들은 사내에서 대기중이었다.

가끔 소식을 들은 바올의 주민들이 회사 근처를 기웃거렸지만 정중한 설명과 함께 돌려보내기를 반복했다.

여타 다른 요원들이 그러하듯 브류나크에 참가했던 피오나의 요원들도 일부 부상을 당했고 혹은 사망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의 팀원들의 애착이 강한 피오나에게 작전중 사망하는 것은 큰 상실감을 가지고 오는 일이었다.

톨비쉬는 째깍이는 시계를 흘끗 바라본뒤 음량을 완전히 줄여버린 화면을 바라보았다.

헬기가 떨어져 내리는 자극적인 편집본만이 화면속에 반복되고 엥커는 같은 입모양을 반복했다. 

비극적인 일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시계를 바라보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이 방안에 울리는 것은 초침소리뿐.

며칠이고 넋을 놓을것 같아 일부러 가지고 온 초침소리가 이제는 익숙한 숨소리의 일부가 될 것같았다.

톨비쉬는 피곤한 표정을 문질러 흐려진 정신을 바로잡았다.

이런다고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아. 톨비쉬는 스스로에게 일어나라고 다그쳤지만 동시에 자신의 귀를 틀어막으며 속삭였다. 

조금은 슬퍼해도 괜찮잖아.




거짓말.




톨비쉬는 소파에 머리를 파묻으며 양 손을 들어 자신의 두눈을 짓눌렀다.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에 몰려들었다. 울거나 눈물을 흘리는 얼빠진 짓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늘 소파에 누워 한물간 드라마만 보던 그가 왜 이 소파를 그렇게 애지중지했는지 알 것같았다.

이제 좀 버리자고 이거 벌써 6년이나 지났다고 짜증을 내는 룩의 항의에도 그는 고작 6년이라며 빈 맥주캔을 쌓아올렸다.

그래 고작 6년이다. 톨비쉬는 묵혀진 먼지 냄새와 겹겹히 쌓여진 맥주와 탈취제 냄새, 그리고 먹다흘린 과자부스러기등의 냄새를 떠올리며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고작해야 6년, 이렇게 상실감을 가질 필요 없잖아.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고작해야 10년도 안된 에이전시에서 이런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은 무언가 이상했다. 

그들은 지나치게 슬퍼했고 우리들은 지나치게 두려워했다. 경계하는 자들은 곧 피오나를 떠났고 그 안에 안주하려는 자들은 더욱 피오나에 몰두했다.

톨비쉬 또한 그건 좀 이상하지 않나 하고 경계했지만 킹은 어색하게 목덜미를 만지작 거리며 톨비쉬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 떠나는거 말이야..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톨비쉬는 킹의 발언에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킹은 자신의 감정을 어버무리기 위해 과장된 표정을 지어보이며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아!! 좀 생각해 볼게 있다고!! 너도 가끔 그럴때가 있잖아..!!”




“내가?”




그렇다. 내가.

톨비쉬는 절대 그럴리 없다며 눈썹을 찡그렸지만 그 부정은 곧 체념의 찡그림으로 바뀌었다.

킹은 거실이 떠나가라 그를 비웃었다. 비숍은 수십번도 더 들었던 오프닝곡이 안들린다고 짜증을 내며 볼륨을 올렸고 커피를 내리던 퀸은 테이블을 확인했다.

톨비쉬가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퀸이 진정하라며 자신의 머그잔을 건네주었다. 

눈짓으로 킹에게 뭔가를 알리고는 그의 뒤로 다가섰다. 설탕이 달다못해 아리다. 

싱크대에 커피를 쏟아버리는 톨비쉬를 향해 킹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기껏 생각해준 성의에 너무한것 아니냐고 소리를 치는 것은 덤, 맹물로 입안을 헹궈내던 톨비쉬가 입가를 닦으며 낮게 읊조렸다.

거짓말 치지말아라. 여기서 커피 달게 먹는 사람은 룩 하나밖에 없다.

퀸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맞받아쳤다. 아니 어디서 달달한 상담이야기가 들려와서, 나도 모르게 그만..

톨비쉬는 씻어낸 퀸의 머그컵을 카운터에 내려놓은뒤 자신의 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물기가 마르지 손이 머뭇거린다. 꼭 커피를 머그잔에 마셔야 할까? 톨비쉬는 고민끝에 철제로된 텀블러를 꺼내들었다.

한참웃던 킹이 정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쇠붙이 내려놔라.”


“컵이야.”

“안깨지는 컵이잖아.”


“깨지는 쪽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

“이거 확신범이네.”


드르륵 거리는 의자소리가 요란하게 엇갈렸다. 탕 내리치는 두 잔의 컵소리에 맞춰 문이 열렸다.

단장의 호출에 나갔다 돌아오는 밀레시안이 요란하게 커피를 내오는 톨비쉬를 흘끗 보고는 거실안을 둘러보았다.

멋쩍은 침묵 속에 광고소리만이 요란했다.


“룩은요?”

“방학숙제 밀렸나봐. 곤충채집하러갔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밀레시안의 표정에 킹은 아 요즘 애들은 이 농담 모르나 하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다시 말했다.


“드론잡으러 갔어.”

“지금 한 겨울인데.., 곤충?”


밀레시안의 한박자 느린 반응에 킹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외라는듯 대답했다.

오히려 못알아듣는 쪽은 밀레시안이 아닌 퀸의 반응.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없는 눈빛에 톨비쉬는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퀸이 비숍을 돌아보았다.


“우린 나팔꽃기르기여서.”


뭐라는거야.. 퀸의 짜게식은 표정앞에 밀레시안은 다시한번 거실을 둘러보았다.

이게 다 뭔 장식인지. 영문을 몰라하는 밀레시안에게 톨비쉬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옛날 이야기는 이제 되었고... 어떻습니까? 일단 대충 분위기만 내봤는데.”

“이게 뭔데요?”


“네? 크리스마스죠?”

“풀이랑 리본이?”

“별장식도 있는데? 아- 전구장식이 없어서 못알아보나? “


톨비쉬는 오던 걸음을 돌려 킹에게로 다가갔다.

아 전구는 무슨, 얌마 내가 전자상이냐? 내가 니 전용 공구함이야? 전구는 왜 찾아? 꼬마전구? 오호라 너 지금 시비거냐?! 이게 지금 손에 쇠붙이 들었다고 막나가자 이거지?!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킹을 번쩍 들어올린 톨비쉬가 킹의 방으로 걸어갔다.


“야!! 내 방 막들어가지마!!”

“하하하, 방 주인이 여기있는데 허락은 무슨”


톨비쉬가 킹의 방으로 들어간 사이 코끝이 빨갛게 된 룩이 요란한 문소리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곤충잡기 나간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긴 뜰채같은 것을 쥐고 나타난 룩은 추워!! 하고 소리를 치며 코를 훌쩍였다.


“그냥 쏴서 맞추라니까.”

“그러다 망가지면?! 고치는건 또 우리야!”


“그래 그래.”


비숍의 조언아닌 조언에 룩은 후다닥 겉옷을 벗어던지며 카운터로 달려들어갔다. 따끈한 커피에 설탕을 한스푼 듬뿍.

무슨 보양식을 마시는 것 처럼 꿀꺽꿀꺽 커피를 들이키던 룩은 한잔 더 라며 다시 설탕통을 꺼내들었다. 

커피는? 퀸의 질문에 룩은 성의없이 반컵 정도의 커피를 컵에 따라내었다.

첫 잔보다는 조금 여유로워진 모습으로 커피를 조금씩 홀짝이던 룩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밀레시안을 향해 물었다.


“톨비쉬는?”

“킹의 방에 갔어요.”


룩은 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하러?”

“꼬마전구 찾으러.”


룩은 그제서야 다시한번 거실을 둘러보더니 아, 하는 탄성을 내지르며 테이블위에 컵을 내려놓았다.

녹지 않은 설탕알갱이가 컵바닥에 수북히 쌓여있었다.

룩은 킹의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소리를 질렀다.


“전구 내 방에 있어!! 나 많아!!”





“내 방문 막 열지마!!!”


“것 봐. 어디 쌓여있을 것이라고 했지?”

“내 방엔 없다고도 말했잖아!!”


“얼마나 가지고 올까?”

“많이, 아주 많이.”

“내 말도 좀 들어라 이자식들아!!!”


비숍이 말없이 볼륨을 좀 더 올렸다. 퀸이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멀뚱히 있던 밀레시안도 결국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톨비쉬가 룩의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소란스러운 전쟁이 끝이났고 다시 온화한 거실 타임이 찾아왔다.


온 벽면과 계단, 그리고 문가를 반짝이는 전구로 장식한 뒤에야 킹은 제법 크리스마스 다워졌다며 부루퉁한 표정을 풀었다. 

톨비쉬를 도와 높은 곳으로 전구선을 들어올리던 비숍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룩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 많은 전구가 왜 네 방에 있냐?”

“응? 내년에 쓸거야.”


룩은 퀸이 잡아주는 발판에서 내려오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내년에 쓸 것을 왜 벌써부터 모아.”

“사람일 어떻게 될지 알고 나중으로 미뤄. 일단 미리미리 모아뒀다가 정 안될 것 같으면 다른사람에게 넘겨야지.”


콘센트를 찾아 두리번 거리던 룩은 구석에 쪼그려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조작했다. 

곧이어 모든 전구에 불이 들어오고 불빛을 깜빡이며 제 패턴을 찾아 움직였다. 요란하게도 번쩍거리던 전구는 곧 은은하게 빛났다가 꺼지는 느린 템포를 유지하며 어두워진 벽면을 밝혔다.


“아주아주 멋진 장면을 보여줄게. 아마도, 내년 여름쯤? 그때 쯤이면 될꺼야.”


“여름..?”

“우리가 막 장기 임무나 어디 이상한곳으로 임무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그런 상황만 아니면..”


“아- 그 빌어먹을 쿠르클레!!”

“그건 정말 심했었지..”

“데리러 온다고 해놓고서!! 지들이 우리를 잊어버려?!!”


“어쩔 수 없지 않았나, 섬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는건 밀레시안뿐이었고..”


톨비쉬들이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전구장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리본끝을 만지작거리던 밀레시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 밀레시안은 우리랑 같이 있었으니까.”


톨비쉬가 웃으며 되물었다. 어때요? 이제 제법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밀레시안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가고.. 이제 초여름에 접어들었는데…”

“..........”


“우리 불쌍한 막내…”


킹이 눈가를 문질렀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은빛 연기속에 눅눅한 습기가 베어있었다.

꽃병에 새 꽃을 꽂아두던 퀸이 고개를 돌려 킹을 바라보았다.

짧은 머리가 익숙치 않은지 퀸은 잃어버린 모자와 비슷한 것을 눌러쓰고 있었다.

킹은 코를 훌쩍이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이렇게..”





“야…”



“네 모습이 아른거리는데..”


“나, 안죽었거든?!!!”


“아이고 우리막내..!”

“야!!!!!”


“조용히해. 옆 병실에 들린다.”


퀸이 한숨을 내쉬었다.

양쪽 다리에 총상, 거기에 극심한 출혈까지, 그대로 방송이 끝날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었던 룩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못깨어날것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지만 놀라운 회복속도로 의식을 회복. 내 눈물 돌려내라는 킹의 윽박에 의사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원래 바올출신 중 몇몇 분들이 이렇게 기적같은 회복력을 보이시곤 합니다.”

“그거 도시전설이라며!!”


“저희도 모릅니다. 거 저희보다 자세히 아실만한 분이..”


퀸은 멱살을 잡을 기세로 뛰어오르는 킹을 붙잡아 룩의 병실로 이동했다.

킹은 들어가기 싫다며 발을 딱 붙여 저항했지만 퀸은 협상의 여지 없이 킹을 달랑 들어 병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꽃을 가지고 온 다른 피오나의 요원이 그들을 보고 고개를 꾸벅 숙여왔다.


룩은 활기차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팔뚝에 꽂힌 팔을 휙 들어올리는 것이 아직 아픈맛을 덜 본것이 틀림없었다.


“아이고- 형님?! 울었다면서?!”

“그냥 주ㄱ.. 아니, 다시 자!! 다시 누워 자!!”


킹은 평소처럼 구박을 하려다 말고 입을 앙물었다. 

마음같아서는 저 얼빠진 얼굴을 잡아채 이불속으로 반 접어 파묻고 싶지만 일단 환자라는 자각은 있는 것인지 애꿎은 침대리모컨을 연타했다. 반쯤 등을 받히고 있던 침대가 내려가자 룩은 어어어? 하고 허둥거리며 뒤로 납작하게 누워버렸다.


“아직 제 힘으로 일어나지도 못하는게?!”

“아, 지금은 좀 봐주라.”


그제서야 양손을 싹싹 모아보이는 룩의 모습이 킹이 인상을 찡그렸다.

등받이가 다시 올라오자 룩의 표정이 다시 밝아진다.


“잠깐 스톱 스톱! 105도 각도로 맞춰줘!!”

“지금 접고 있잖아.”


“아니 75도 말고..!”

“어허, 주문이 많다.”


“그럼 저는 이만..”


“그럼, 우리도 그때 다시..”


킹과 룩이 감동스럽지 못한 재회를 하는 동안 퀸은 다른 한쪽에서 꽃을 교체해주던 피오나의 요원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팀도 누군가를 잃었던 탓인지 요원의 눈가는 불그스름하게 짓물러 있었다.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었다. 퀸을 돌아보던 두 사람이 닫히는 문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해?”

“합동 장례식 날짜랑 시간.”


“......”


바깥 순찰을 담당하던 헬기조들이 추락한 이유 또한 퀘사르의 습격이었다. 내부 침입대신 바깥을 향한 퀘사르들은 그 거적떼기같은 로브로 자유롭게 날아 순찰중인 헬기의 안으로 침투했다. 난데없이 공중을 날아 들이닥친 괴한의 공격앞에 제대로 저항을 했을리가 없다. 그나마 착륙을 위해 좀 더 아래쪽으로 내려갔던 비숍의 헬기만이 약간의 시간을 두고 소란을 눈치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앞 유리창에 달라붙은 검은 괴한을 떨쳐낼 방법은 없었고 피오나의 요원은 방향을 틀어 위를 향해 날아올랐다.


추락대신 빌딩 벽면에 기체를 들이막은 탓에 조종사는 즉사, 뒤이어 내부로 침입했던 퀘사르또한 그 충격에 기절했지만 깨어있던 사람이 한 명 남아있었다.

그게 바로 비숍, 145층 사무실에서 죽어있던 피오나의 요원.


비숍은 듀얼건도 나이프도 아닌 기이한 검상에 죽어있었고 그 검의 흔적은 다른 장소에도 이어져 있었다.

난도질 당한 홀의 바닥면에는 누군가가 싸운듯한 흔적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실리엔 탄환이 바닥난 다우라가 상대가 밀레시안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비숍과 다른 헬기의 탑승자들을 수습하는동안 밀레시안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본에 있어야할 밀레시안의 듀얼건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며 톨비쉬가 다그쳤지만 퀸은 아무런 말도 해 줄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퀘사르의 뒤를 쫓는 밀레시안의 눈이 정상이 아니었다고. 그때 밀레시안을 막아섰다면 자신을 공격했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도 돌아올 수 있을지 어떨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을 붙잡는다고 해서 이 결과가 달라졌을것 같지는 않다고. 

퀸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톨비쉬의 턱을 되받아쳤다.


“그러는 너는?”


반격을 예상하지 못한 톨비쉬가 이를 갈며 퀸을 노려보았다.


“너는 그동안 뭘 하고 있었어?”


분명 그가 아닌 톨비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장소에 있었던건 톨비쉬가 아니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그가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은 질문 3개가 고작이었고 밀레시안은 그 질문을 끝내기 무섭게 사라졌다.

책임을 묻고싶은 사람은 차고 넘쳤지만 대답은 항상 한가지 였다.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들로서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연기가 가시지 않는 브류나크를 배경으로 크루크가 대답했다.







톨비쉬는 화면을 끄고 잠시 눈을 감았다.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얼마 되지도 않은 영상을 편집하고 변형하고 꾸며낸 비슷한 화면의 반복에 눈이 지쳐버린 느낌이었다.

눈가를 매만지던 톨비쉬가 삑 하고 울리는 알림음에 고개를 들었다.

킹의 메세지였다.


[정말 안올거야?]


시계가 멈추고, 알람이 울린다.

빠듯하게, 5분만더, 3분만더, 그렇게 미뤄왔던 시간이 멈추고 결국 일어나야할 시간이 왔다.

눈곁질로 초침을 질책해보지만 부지런히 나아가는 시계의 초침은 또다른 1분을 카운트할 뿐이었다.


[갈게.]


[서둘러.]




그나마 전화를 안한게 배려라면 배려일까.

톨비쉬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푹꺼진 소파가 볼썽사나웠다. 버리고 새로 사는게 좋겠어.


냉정하지만 그게 톨비쉬의 최선이라면 최선이었다.

훌훌 털어버리고 모든 것을 새 것으로, 그렇게 소파와 비숍의 컵, 식기등을 떠올리던 톨비쉬가 자신의 방문에 머리를 쿵하고 박으며 멈춰섰다.

그의 무기, 그의 방, 그가 읽던 책이나 옷가지.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이름이 하나하나 비숍의 이름위에 덧씌워졌다.

밀레시안의 옷가지나 밀레시안의 책, 밀레시안의 방, 밀레시안의 무기, 식기와 컵, 그리고..


“......”


가능하다면 이 기억도.

톨비쉬는 문을 열고 옷가지를 챙겨나왔다. 샤워실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목적지를 설정해주세요”]

“주소대로”


[“주행을 시작합니다.”]


검은색 정장으로 갈아입고 나온 톨비쉬는 거리로 내려갔다.

멈춰선 공용차량의 문이 열렸다. 뒷자석에 구겨 앉은 톨비쉬는 다리를 꼬는 동시에 입을 가렸다. 

아무것도 접촉하고 싶지않고 아무와도 이야기 하고싶지 않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밀레시안이 다시 돌아올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흥분되었던 피가 차갑게 식으며 또렷하게 날을 세운 저울의 눈금이 다시 무게의 가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그가 믿고싶어하는 밀레시안과 그가 바라보아야 하는 밀레시안.

사건의 흐름과 증거물들, 밀레시안과의 연관성과 증언들.



퀸은 그 퀘사르의 주동자들이 밀레시안과 아는 사이 일 것이라고 말했고 밀레시안은 그에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룩은 그들이 바올과 연관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바이브카흐와 퀘사르, 그리고 반호르, 그리고 그 비늘돋은 피부.


킹은 말하기 전 입을 다문채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저울이 흔들린다. 킹은 자신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때 그 이상한 로그말이야. 내 개인적으로 추적해봤어.”

“...개인.. 적으로 말이지.”


질책이나 비난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온도가 낮았다. 킹은 그것을 감수한다는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을 응원가 삼아 킹이 말했다.


“피오나 내에서 기계장치나 통신의 오류는 꽤나 잦은 편이었지만 그게 심하다 느껴지는 시기가 있었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밀레시안이 합류한 이후였다는 건 모두 짐작하고 있었을거야. 

밀레시안에 대해 알고싶어 너나 할것없이 날렸던 드론이나 기계장치따위가 아무런 이유없이 고장나는 것은 피오나 내에서도 쉬쉬하는 소문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밀레시안이 딱히 뭘 한것도 아니야. 그리고 누군가가 무언가의 조치를 취한것도 아니지.”


“.........”


“내 생각에는, 아니 그들의 생각에는..”


킹은 노트를 끌어당겼다. 어느 각도에서도 보이지 않게 빠르고 간결하게, 무언가를 써내려간 킹은 종이를 뜯어 톨비쉬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뜯어낸 노트를 들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톨비쉬,”


복도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퀸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간단한 짐꾸러미 두어개가 그의 발치에 놓여져 있었다. 

그의 오랜 친구가 말한다.


“이제 떠나야할 때일지도 몰라.”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톨비쉬가 감았던 눈을 떴다. 한적한 교외지로 나온 차량은 톨비쉬를 내려놓은채 다시 도시로 돌아갔다.

바올도 에린도 아닌 황량한 무지의 땅이 그의 앞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곳에서 비숍의 장례식을 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에게 보내진 메세지에는 이 좌표대로 찾아오라고 명시되어있었다.

톨비쉬는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고쳐맨뒤 멀리 보이는 인영을 향해 걸어갔다.


새하얀 롱 레더코트를 입은 남자가 그를 향해 우아하게 팔을 저어 인사를 건네왔다.


“처음뵙겠습니다. 톨비쉬. 나는 슈안이라고 합니다.”


뿌연 흙먼지가 머리를 흔들고 지나갔다.

톨비쉬는 가늘게 뜨고있던 눈을 깜빡였다.

남자의 가슴에 달린 방패의 엠블럼이 태양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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