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톨비밀레) reload #13(1)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어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역병의 밤? 퀘사르의 악몽? 슈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아니, 좀 더 오래전. 이제는 기억도 안나는 희미한 옛날의 이야기 입니다.
웃음기 없이 무표정하게 굳어있는 톨비쉬의 앞에서 슈안은 씁쓸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어느 마을에 손재주 좋은 아이의 어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의 이름은 디안. 네, 그렇습니다. 반 코퍼레이션의 디안입니다.”
포보르가 성장하기 이전. 반 코퍼레이션이라는 기업이 있었다.
디안이라는 우수한 여성을 중심으로 모인 반은 그때까지 비밀에 쌓여있던 실리엔과 힐웬에 대해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의 실리엔은 온전히 필리아의 것 하나뿐이 없었다. 접근성도 여의치 않았고, 불안정했고, 위험한 물건이었다.
때문에 그 누구도 그것을 활용하려 들지 않았다. 필리아의 실리엔은 온전한 광물의 형태 그대로 지층에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필리아의 엘프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은 금기의 땅과 함께 살아가는 일족에게 세겨진 오롯하게 세겨진 저주의 흔적이었다.
그들은 기억을 잃었고 때때로 이성을 잃었다. 오랜 사막의 민족들은 실리엔의 주변을 봉쇄하고 그 지역을 론가라고 이름지었다.
파수꾼을 세워 론가를 지키도록 명령했고 그 파수꾼들은 대부분 이성을 잃은 엘프들이나 이성을 잃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형태를 잃어버린 엘프들로 선정되었다.
기억을 잃은 자들은 점차 생명의 기력까지 잃어갔고 엘프들은 그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정제되지 않은 실리엔은 그 자체로 폭탄이었고 또 독약이었다.
엘프들은 실리엔을 활용하기보다는 감추고 봉인하는데에 주력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그 폭발력을 발견한 디안은 다르게 생각했다.
통제가 가능한 재앙은 또다른 힘의 이름, 디안은 자신들이라면 그 폭력적인 힘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저 특이한 빛나는 돌조각이라고 생각했던 실리엔의 놀라운 잠재력은 디안과 그 무리들에 의해 천천히 제 모습을 찾아 가공되어갔다.
가장 처음 만들어진 것은 전지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실리엔 가공품이었다.
보라색을 띄는 실리엔중 태양무늬를 내포한 것만을 엄선해 만든 고대 마력탄은 그 자체만으로도 강한 빛을 발산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과시했다.
이건 전등으로 쓰기엔 좀 부담스럽네. 누군가의 농담에 연구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처음 시작은 그런 사소한 농담이었다.
실리엔을 가공하여 막대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게 된 반은 곧바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디바이스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평범한 소재나 일반적인 금속은 견뎌낼 수 없었다.
마력탄 상태에서는 그나마 안정적인 것 같지만 조금이라고 활성화 되는 순간 이리저리 터져나간다.
에린내의 온갖 도시와 황무지, 숲을 뒤지던 반은 마침내 산골짜기에 파묻혀있던 발레스와 접촉했다.
에일레흐와 달리 독자적인 왕국을 선언하며 에린과 척을 진 바쉬배르 왕가는 실리엔의 빛앞에서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디안을 쫓아내었다.
“주변을 둘러보시오. 온 천지가 설원이고 그 위에는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달이 두개나 떠 있소. 그런 우리들이 그깟 빛나는 유리병 하나에 무슨 흥미를 가질 수 있단 말이오.”
바이데의 냉대앞에서도 디안은 몇번이고 다시 발레스를 기웃거리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내키지 않는 얼굴의 게파르트의 앞에서 프로토타입의 제더를 시연해보였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대 폭발. 미리 주의에 주의를 줬던 터라 다행히 피해는 없었지만 수십년동안 그자리를 지켰을 고목하나가 우지끈하고 부러지며 인근에 있는 다른 나무들을 차례대로 쓰러트려나갔다.
때아닌 대 참사에 자이언트들은 이마를 감싸쥐었고 디안은 꽤나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망가진 제더의 잔해속에서 반쯤 소모된 마력탄을 들어보였다.
“이 힘을 감당할만한 아주 강한 금속이 필요합니다. 발레스라면 가능하겠지요?”
당장 나가라고 호통치려는 게파르트의 고함이 터져나왔지만 디안대신 누군가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말그대로 포복절도를 하던 헥터가 고글을 머리위로 밀어올리고는 눈가를 훔치며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웃은 나머지 어이가 없다는 헛숨과 함께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좋아 협력하지.”
“헥터, 내가 지금 한 말은 못들었는가?”
“거 머리 딱딱한 폐하는 좀 가만히 계십시오. 우리 힐웬이 바깥에서는 뭐라고 불리는지 아십니까? 무식하게 단단하고 유연성 없는 것이 딱 발레스의 성질머리를 닮았다고 하더이다. 조금만 더 머리를 굴리면 힐웬만한 것이 없을텐데 그 가치도 못알아보는 것들이 입은 가벼워 쉴새없이 조잘거리는데 어찌나 배알이 꼴리던지”
헥터는 디안의 발치에 부서진 제더의 쪼가리들을 모아 한데 늘어놓았다.
이건 여기에, 요건 요렇게, 흠흠 쪼끄만한 부속품으로 애를 썼네 애를 썼어. 하고 몇번이고 혼잣말을 반복하던 헥터가 자신의 앉은키만한 디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씨익웃어보였다.
“내 아주 멋지게 개조해서 하나 선보여주지.”
디안은 만족스럽게 웃어보였다.
실리엔과 힐웬을 손에 넣은 반은 아주 바쁘게 돌아갔다.
제더의 다음으로 메르엘이 생산되었고 내구도는 두배 가까이 끌어올려졌다. 그래봐야 두발이라는 소리이지만 그게 어디이겠는가.
반과 발레스가 머리를 맞대고 힐웬의 개량에 여념이 없을때 조용히 물러서 있던 필리아가 반에게 연락을 보내왔다.
우리는요? 필리아가 물었다. 우리와의 약속은요?
새로찾은 에너지원과 그 무궁무진할 활용방안에 대해 한껏 열기가 올라있던 반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디안을 바라보았다.
디안이 내놓은 것은 냉동수면장치였다. 그것도 아주 많은 양의.
디안은 핀카라의 연구소 안에 어느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수면장치를 설치한 뒤 필리아에게 통보했다.
필리아는 당연하게도 반발했다.
“그건 우리를 실험 쥐로 쓰겠다는 건가요?”
“어쩔 수 없어요. 아무것도 단서가 없는 걸요?”
“우리 혈액은요? 샘플은요? 조사라는 명목으로 그렇게 많은 샘플들을 챙겨갔으면서 이제와서 우리 가족까지 내놓으라고요?”
“론가에 방치되어 있는 것 보다, 우리가 돌보는게 더 안전하다는 것은 아시잖아요.”
그 당시 실리엔이 일으키는 망각병에 대한 정보중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사의 결과에 의하면 음식이나 토양, 식수도 아니었고 호흡기도 아니었다.
애초에 론가에 드나들지 못하는 것은 사람뿐으로 자잘한 동물이나 식물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생하는데 왜 사람만 변이된다는 것일까.
디안은 그 원인을 필리아의 태양에서 찾았고 기억을 잃은 엘프들을 핀카라로 이송하기를 원했다.
일단 발생지에서 멀리 떨어트려보고 차도를 살펴보겠다는 것이었다.
필리아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고 대부분은 디안의 말에 찬성해야했다. 그녀의 도움이외에 필리아가 매달릴 수 있는 희망은 없었기때문이었다.
필리아는 아주 상세하게 적힌 정기적인 보고를 요청했지만 사실상 보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엘프들은 간절히 비어버린 마을에서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언제고 황금색 수송기가 떠오르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 기다리며 멀리 떨어져버린 가족의 안전을 생각했다.
그리고 엘프들이 지쳐가고 있을 무렵, 이변이 일어났다.
실리엔을 가지고 돌아가 연구를 한참하던 반의 연구원들 사이에 망각병이 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엘프들의 유전적 특성일지 모른다는 가설은 이미 깨어진지 오래였기에 자만하는 연구원이 있었던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오랫동안 자신들은 무사하다는 안일함이 사소한 실수를 불러일으켰다.
활성화된 실리엔 마력탄이 깨어졌다. 그리고 그 연기가 연구소에 조금 흘러나왔다.
연기는 아주 소량이었고, 그 마저도 순환시스템에 빨려들어가 바깥으로 배출되었지만 그 연기를 들이마신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한번, 실험중인 메르엘이 폭발하고, 농도를 낮춰 보려던 저밀도의 마력탄이 부서졌다.
크고작은 사소한 사건들이 연결되어 결과를 만들기까지 수 년, 마침내 누군가가 요즘 머리가 좀 멍한 기분이야 라고 말을 꺼낼 즈음, 누군가가 작은 봉제인형을 떨어트렸다.
툭툭 하고 굴러오는 황금색 용모양의 인형을 주어든 연구원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녕, 케트. 이거 떨어트렸더구나.”
다정한 인사와 함께 내밀어지는 용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언니, 누구에요?”
“케트..?”
“여기 어디에요?”
벨라는 인형을 떨어트리고 케트를 안아들었다. 아이의 몸이 불덩이같았다. 뿌옇게 흐려진 주홍색 눈동자는 멀어지는 인형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나는..?”
“디안..!!”
문이 열리고 산처럼 쌓여있던 연구자료들이 무너져 내렸다. 흩날리는 종이뭉치속 디안이 아이를 끌어안았다.
이마에 맞댄 작은머리가 뜨거웠다.
반은 하던 연구를 멈추고 케트에게로 전념했다.
필리아는 그 이중성에 대해 비난했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의 비극은 가슴아프지만 자신의 발등에도 같은 불이 떨어졌으니 이제 무의미한 기다림을 반복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하지만 디안이 만든 아드니엘이라는 장치는 오로지 케트의 수면장치에만 연결되었다.
필리아는 항의 했지만 반은 아직 시험작동중이여서 그렇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몇번의 격렬한 항의 긑에 핀카라에도 비슷한 기계가 설치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아드니엘과 핀카라의 것은 성질이 다른 것이었다.
케트의 기억을 보조하기 위해 설계된 아드니엘은 케트 한 사람만의 기억을 재 구성하고 이를 꿈이라는 형태로 집어넣었지만 핀카라의 엘프들은 다수의 인간들이었다.
각각의 꿈을 만들기에는 개인에 대한 리소스가 부족했고 또 개개인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다.
엘프들은 자신들을 데려가라고 소리쳤다.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고,
기억이라면 나에게도 있다고. 그가, 혹은 그녀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기억의 자원이라면 나를 사용하라고.
하지만 반이 아무리 대단한다한들 수백명의 사람들을 동시에 감당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반은 케트의 아드니엘에 제 역할을 하는 것을 확인하면 순서대로 사람들을 불러들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더이상 필리아는 반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불신하는 필리아에 찾아온 것이 바로 포보르.
포보르의 연구원장 자키브엘은 속삭였다. 당신들의 가족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드릴까요?
분노와 원망으로 눈이 먼 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모를 이상한 연구소로 끌려간 내 가족을 되찾아주세요. 그들의 머릿속에 더이상 핀카라라 그들의 가족의 수명을 보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남아있지 않았다.
포보르는 필리아에서 관련된 내용을 넘겨받았고 포보르는 이에대한 내용을 각색해 사람들에게 선전했다.
제목은 사라진 필리아의 엘프들과 의문의 연구소, 그리고 같은 페이지에 아주 작게 최근 반의 연구원들이 어딘지 이상하다는 사소한 칼럼을 함께 실었다.
사람들은 일련의 흐름에 의심을 갖지 않은채 크게 실린 의문의 연구소에 대한 소문을 부풀려 나갔다.
사람을 가지고 실험을 하고 있다느니, 연구원들 대신 위험한 실험을 진행하게 하고 있다느니, 아예 일련의 기계들에 주르륵 나열해 놓고 이상한 장치를 연결했다는 등의 어딘지 진실을 담고 있는 허황되지 않은 거짓 제보가 이어졌다.
반은 그것을 전부 부정할 수도, 그렇다고 모두 인정할 수도 없는 애매모호한 위치에 서 있었다.
반에 대한 신뢰도는 기반부터 흔들렸고 사람들은 연구소의 이름과 위치를 밝히기를 원했다.
하지만 실리엔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의 증세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실리엔을 막무가내로 공개하기에는 아직 그 위험성을 제대로 컨트롤 할 수도 없었다.
통제할 수 있는 재앙은 기적이지만 그렇지 않은 힘은 그저 재앙이었다.
그리고 그 재앙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을 대중들은 마녀라고 부르며 경원시한다.
케트의 기억은 날로 희미해져갔고 반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어갔다.
반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대로 모든 것을 밝힐지, 아니면 반의 이름에 오명을 뒤집어쓰고 케트와 아드니엘을 다른 곳을 옮길지.
그리고 디안은 결정을 내렸다. 소문은 언젠가 사그라들고 사람들은 순간의 이슈를 잊어버린다고.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디안은 그렇게 약속하며 케트와 아드니엘을 파르홀론으로 떠나보냈다.
그렇게 반은 끝까지 침묵을 지켰고, 에일레흐에서는 왕명을 내렸다.
명분을 얻은 포보르의 조사단에 의해 반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디안은 에린 밖으로 추방되었다. 그 무리들은 모두 비난을 받으며 뿔뿔이 흩어졌다.
포보르의 시선은 이제 파르홀론으로 향했다.
디안의 친우이자 프로젝트 아드니엘의 관리자였던 벨라는 케트와 함께 파르홀론으로 이동되었다.
벨라는 케트와 함께 디안을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마음으로 디안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파르홀론의 책임자 투안은 케트에게 연민의 감정을 보였지만 그건 벨라나 반의 연구원들이 갖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연민이었다.
투안은 케트의 꿈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벨라를 불러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투안은 이 아이를 놓아주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라고 이야기 했다.
디안에게도 케트에게도 그리고 벨라 자신에게도, 그들의 노력은 분명 애틋하지만 옳지 않은 길이라 충고했다.
하지만 벨라는 아직 살릴 수 있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로가 케트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틀리지 않았다.
투안은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파르홀론이 아무리 상냥한 이들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투안과 뜻을 같이 하는 존재들이었다.
아드니엘의 폐기가 결정되고 케트에 대한 지원이 줄어갔다.
벨라는 필사적으로 케트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애를 썼고 케트또한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리고 그 처절함을 파고드는 것은, 다시한번, 포보르의 손길이었다.
포보르는 반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간 것에 대해 매우 탐탁지 않아하고 있었다.
그토록 공을 들여 많은 사람들을 동원한 것에 비해 얻어낸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의 재산은 대부분 에일레흐로 귀속되었고 연구자료들은 이미 대부분 감춰진 뒤였다.
그런 자투리들은 관심 없어. 내가 관심있는 것은 새로운 에너지와 새로운 빛, 모든 것을 고쳐쓸 수 있는 만능의 빛이다.
발로르의 닥달에 자키브엘은 다시한번 머리를 굴려야 했다. 이전과 같은 방법은 더이상 효용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통채로 집어 삼키자. 포보르가 움직였다. 이번 작전은 이전과 다르다.
시선에서 벗어나고 의도를 숨기고, 혀밑에 날붙이를 숨기고 단숨에 물어뜯어 숨통을 끊는다.
투안은 붉은 눈을 가진 포보르의 연구원장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원하는 것을 넘기면 다른 직원들을 풀어줄텐가?’
“하하, 이제와서 목숨을 구걸하시게요?”
“중요한건 내 목숨이 아니야.”
투안의 강직한 외침에 자키브엘은 웃음지었다.
“하하하, 웃겨요. 정말 우습군요. 죽음으로 그 아이를 구원하겠다고 말했던 당신이 자신의 사원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군요.”
“내가 그 아이를 걱정했던 이유는 그 아이가 죽음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였어..!”
“그래요, 케트는 어리죠. 그리고 아주 똑똑하고요. 구아이는 죽음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하지 않았지만 이내 세상에는 모든 사람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 아이는 스스로 죽음에 대하여 상상했어요.”
자키브엘은 매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겁에 가까운 삶을 반복하며 기억을 만들어냈다 지누기를 반복하는 어린 소녀는 스스로를 성장시키기 시작했다.
꿈은 점점 더 깊어져갔고 어린 소녀는 스스로 품에 안고있던 인형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개념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아니, 케트의 꿈은 서서히 일그러져갔다. 제멋대로 규칙을 정해나가고 또 후회하고. 무엇이 잘못된지를 알지 못해 다시 혼란을 반복했다.
홀로 남은 인형은 생각한다. 무엇이 그녀를 위한 일이고 무엇이 그녀를 위해 해야할 일일지.
생각을 얻고 의지를 얻은 인형은 스스로를 움직여 나아갔다.
투안은 그 변화를 경계했다.
“올바른 가르침 없이 스스로 성장해나간 그녀는 대단해. 하지만 그게 꼭 옳은 방향으로만 성장한다는 보장은 없어.”
“그래도 성장은 성장이에요”
“벨라, 그 아이에겐..”
“그래도 그 아이는 살아있다고요.”
“누군가 나서서 그 아이에게 진실을 말해줘야해.. 우리에겐 그럴 의무가 있어.”
자키브엘은 죽은 눈처럼 흐릿해진 표정의 벨라를 방안으로 들여보냈다
검은 로브를 입고 있는 벨라의 소매에는 포보르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절망하는 투안의 앞에서 자키브엘이 말했다.
“당신은 누군가 케트에게 올바른 죽음에 대해서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죠.
죽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에게 먹히기 위해서도 아니라고.
재미를 위해서도 아니고 어쩔수 없는 사고에 의해서도 아니고 비극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도 아니라고.
고상하네요. 매우 고고하시고요.
죽음은 사랑,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고 떠나가는 여행길의 마지막 이정표.
당신은 디안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이미 예전의 그녀는 어디에도 없어. 너희들이 그녀를 죽였다…”
“그리고 그녀는 수백명의 엘프들을 죽였어요.”
“너희들이 그들을 몰아세웠어..!”
“그녀가 죽인것은 망각의 병에 고통받는 엘프들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들과 그 시간, 희망에 고문받는 나날들.
수백 수천의 날들을 죽이고도 그녀가 추구한것은 단 하나. 자신의 딸에 대한 안위뿐이었죠.
그런 그녀의 보물을 이용해 실리엔을 타도할 방법을 찾는것이 뭐가 나쁘다는 겁니까?!”
“너희들의 방식이..! 너희들의 위선이!
타인의 약점을 파고들고 부탁이라는 이름으로 선택지를 몰아넣는 그 질낮은 협잡질이..!!
자신들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이라는 말을 앞에 붙이고 머리에 총을 겨누고 가족의 사진을 보내고 무언의 전화를 반복하는 그 음습한 뒷공작이 나쁘다는거다..!”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를 죽이는 것은 괜찮고요?”
“자키브엘..!!!!”
검은 로브를 입은 포워르의 요원들을 날뛰려는 투안을 잡아 앉혔다.
의자가 밀려나고 자키브엘은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자키브엘은 말한다 우리들은 위선자도 아니고 거짓말쟁이도 아니라고.
포보르는 말했다. 이것은 거래.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을 위해 행동했던 것 뿐, 그게 당신들에게 나쁜사람으로 비춰진다하여도 우리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닌 딱 당신들에게만 그저 너희들에게만 우리들이 나쁜 사람이었던것 뿐입니다. 라고
포워르의 검은 마법사는 웃었다.
“분명 당신의 성품은 올곧습니다.
당신은 선량하고, 당신의 동정심은 다른이로 하여금 감동을 느끼게 합니다.
당신의 마음은 강직하고, 당신보다 약한 소녀를 연민하지요.
당신은 스스로를 믿기에 스스로에게 자신을 가지고 있기에, 당신은 죽어가는 어린 소녀 앞에서 생각하고 또 다짐하겠죠. 나는 틀리지 않았어.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 이게 올바른 순리야. 하고..”
“.......”
“위선이라는건 그런겁니다. 당신의 그 올곧음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것을 알지 못한채,
혹은 알고 있으면서도. 당신은 어리고 나약한 누군가를 향해 들이민 칼날을 거두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그 강직함이 누군가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
“그리고 그 누군가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죠.”
아드니엘의 주 기능이 내려진 어두운 공방속, 파랗게 빛나는 작은 캡슐이 불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연결된 작은 화면속, 케트의 꿈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는 꿈을 꾼다. 아이는 숨을 쉬고 아이는 다시 깨어날 아침을 기다린다.
무기질적인 정보의 나열이 아닌 살아 숨쉬는 기억의 회상으로, 아드니엘은 조용히 침묵을 지킨채 꿈꾸는 아이를 내려다 보았다. 불빛이 반짝였다.
침묵이 감도는 방안에 전화벨이 울렸다. 자키브엘은 받아보라며 손목을 까딱였다.
투안의 머리를 겨누고 있던 총구가 흔들렸다.
투안이 천천히 수화기를 들어 귀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알 수 없는 아이의 목소리가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투안 마크 카릴.”]
“........”
[“아, 너무 놀라지 말아요. 이 목소리는 케트의 것이 아니라.. 케트가 기억하는 아무 목소리나 적당히 합성한 것이거든요.”]
“너는…”
[“그래요, 내 이름은 아드니엘. 나는 지금 칼리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고, 방금 전까지는 케트의 꿈속에만 있었어요.”]
어린 케트가 신발을 벗어던지고 들어간 현관문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도록 모자를 푹 눌러쓴 아이는 선이 없는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댄채 화면을 바라보았다.
케트가 소리친다. 칼리-, 칼리번-, 얼른 와. 새 만화영화 시작해.
아이는 곧 간다고 대답한뒤 다시 수화기를 향해 속삭였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당신의 수화기 속에도 있네요.”]
발로르는 만족스럽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케트와 아드니엘, 그리고 벨라와 파르홀론의 연구원들은 이제 포보르로 이전되었다.
발로르에게 있어서는 그 모두가 한 묶음으로 칼리번을 구성하는 개체들이었다.
투안은 텅 비어버린 사무실에 앉아 전화가 끊어진 수화기를 바라보았다.
귓가에서 그 아이의 음성이 떠나질 않는다. 칼리, 얼른 와. 새 만화영화 시작해.
칼리, 칼리번. 칼리번. 투안은 얼굴을 감싸쥐었다.
꿈이 번져나간다. 분명 아드니엘은 더이상의 리소스를 얻을 수 없다. 그런 그가 어떻게 꿈을 연장시킬 수 있었을까? 아니, 그녀가 아닌 또다른 누군가가 꿈이아닌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꿈속에서 반복되는 영원의 삶이 현실의 경계를 침범해오고 있었다.
삶에 대한 순수한 갈망이 기적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벨라. 당신또한 외면하고 있는 것이 있어.
그 간절한 꿈을 끊어내는 것이 살인이라면 애초에 꿈꿀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은 이들은?
꿈조차 꾸지 못한채 얼어붙어있는 그들은?
“왜 이들을 돕냐고요?”
바이스는 짙은 보라색의 후드를 뒤로 넘기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연녹색의 머리카락사이로 뾰족한 귀가 엿보였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한뼘 작은 엘프도 조심스럽게 후드를 넘기고 불안한 눈으로 벨라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벨라의 뒷편에서 고개를 돌리는 붉은 램프의 감시카메라를 바라보는 것이었지만 그 방향에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프로젝트 아발론을 돕는 엘프의 학자는 말했다.
“이제 지긋지긋 하니까요.”
“......”
“아무런 힘도 없이 지식도 없이 당신네들에게 휘둘리는건 지쳤어요.
필리아는 포보르에게 의탁한 우리들을 변절자라고 욕하겠지만 우리들은 그래도 그 곳에서 나와야 했어요.
다같이 죽을 수 없으니까. 다 함께 망할 수는 없으니까.
희망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주어지지 않아요. 이 손으로 쥐어야지만 가치가 생기는거에요.”
“바이스님..”
“그러니까 선택했어요. 내 고향이 우리를 비난하더라도.
설령 내가 당신들과 함께 이 개미지옥같은 연구소에 떨어지더라도, 나는 이 프로젝트를 완성시켜 그 희망이 어떤것인지를 이 눈으로 봐야겠어요.”
“.....”
“그러니 어서 깨우세요. 파르홀론의 배신자씨.
지금 내 눈 앞에서 이 실리엔에 찌든 인간이 어떻게 다시 깨어날 수 있는지, 당신네 반이 준비했었던 기적이 무엇인지..! 지금, 여기서..! 증명해 보라고요..!!”
“......칼리번..”
[“좋아, 벨라. 네 부탁을 들어줄게.”]
아발론은 그렇게 깨어났다. 필리아의 변절자들과 파르홀론의 배신자에 의해.
칼리번은 자신의 의사를 복사해 낯선 남자의 머릿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갑작스러운 눈의 자극에 고통스러워 하는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소리도, 호흡도, 피부에 닿는 모든 일렁임이 고통스러웠다. 점멸하는 불빛으로 자신의 것이 아닌 지식이 흘러들어왔다.
수많은 목소리들이 메아리치며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칼리번, 칼리번, 꿈꾸는 아드니엘의 새로운 이름. 그와 똑같은 형태를 취한 칼리번이 그의 머릿속에 속삭였다.
하지만 너는 내가 아니야. 칼리번은 물었다. 너는 누구지? 아발론이 대답했다. 나? 나는? 나는 무엇이지? 나는 왜 깨어난거지? 무엇이 나를 깨우고 무엇이 나의 꿈이었던거지? 지금은? 지금은 나의 현실인가? 아니면 또다른 누군가의 꿈 속인가?
깨어진 꿈의 흔적속에서 남자는 울부짖었다.
버둥거리는 성인 남성의 몸이 버거웠지만 벨라는 최선을 다해 아발론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아니, 사실 괜찮지 않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내가 있을게요. 내가 당신과 함께할게요.”
녹음을 담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져내렸다.
얼굴에 떨어지는 뜨뜻 미지근한 액체에 아발론이 손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온기가 뭉게진다. 물기가 묻어났다. 짓무른 숨을 몰아쉬며 벨라는 몇번이고 힘주어 속삭였다.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우리들은”]
“나...는.. 아니..우리들은.., 나는, 나...아..”
벨라는 서럽게 울며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그의 이름은 없다.
기억속에도, 자료속에도, 그 모든 것을 지워낸 것은 다름아닌 벨라 자신이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이 선택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을 돕기 위해 태어난거야.”]
“나.. 는..”
그들이 누구인데? 우리들의 눈앞에 있는 사람.
내 눈앞에 있는 사람? 우리들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우리에게 바라고, 기원하고, 소원하고, 동시에 필사적으로 답을 찾는 사람들.
아드니엘은 케트의 요람을 굽어보며 불빛을 깜빡였다.
우리들은. 그들의. 소원에. 응답하기. 위하여.
요람속의 케트가 눈을 떴다.
희뿌연 사리의 유리창 너머로 검은 인영이 일렁거렸다.
연구소가 불타오르는 밤이 찾아왔다.
[“우리들은 그렇게 태어났었다.”]
퀘사르가 날뛰는 밤, 숲이 불타오르고 연구소의 외벽이 무너져 내렸다.
점멸하는 비상등을 거슬러 연구소 가장 구석에 처박힌 그녀의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종잇장처럼 구겨진 문안쪽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발론은 바닥에 주저앉아 콜록이는 벨라를 잡아 일으키며 소리쳤다.
“일어나요!! 당신을 도와주러왔어요!!”
“아발론..”
“다른 사람은 어찌되어도 좋아요. 나는 당신을 위해 깨어났어. 당신이 부르는 이름에 깨어났어..!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의 목소리에, 당신의 울음소리에, 당신이 바라고, 당신이 원하는 그 마음에..!”
“아발론, 부탁이 있어요.”
벨라는 애써 부축하려는 아발론의 손을 밀어내며 딱딱하고 작은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그것은 아마 희망, 그리고 또하나의 배신의 이름.
벨라는 비상음을 울리는 케트의 요람쪽으로 물러서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를 따라 다가가려는 아발론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 가지고 도망쳐요.”
“그런...싫어요..!! 같이 가요!!”
“그 안에 필요한 모든것이 다 들어있어요.
실리엔의 발견부터 아드니엘의 탄생, 케트와 퀘사르, 아발론으로의 진화까지.
에일레흐는 이미 공정함을 잃었고 디안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 가요.
가서 도움을 청해요.”
“싫어요.. 싫다구요!! 누구에게요? 무엇을 위해서요? 왜 같이가면 안되는건데요?!”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당신이 여기 남을 거라면, 나도 여기 남아있을래요. 당신에게 책임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에요. 떠나지 않아요. 당신 곁에 있을겁니다..!!”
벨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흐릿하던 녹색의 눈동자에 작은 불꽃이 튀어올랐다.
불안한 폭음과 함께 연구실의 천장이 다시한번 흔들렸다.
“아니, 그럴수는 없어요. 그래서는 안돼..!”
“벨라..!”
힘없이 비틀거리던 발을 딛고 다시한번 아발론의 가슴을 밀어내었다.
떠밀린 발걸음이 연구실밖으로 물러섰다. 새처럼 높은 목소리가 소리친다.
“가요, 도망쳐!! 나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이렇게 모든 이야기를 끝낼 수 없어요..!”
“벨라..! 벨라..!!”
“어서 가요..!!! 이 다음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아무도 알수가 없지만...”
“벨라!!!”
벽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벨라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그래도 당신은..”
[“그래, 나는 네가 다른 선택을 하기를 바랬다.“]
아발론은 달렸다. 기나긴 연구소의 복도를 따라 달리고 또 달렸다.
철문이 내려왔다. 길을 가로막는 의도적인 움직임에 아발론이 철문을 내리쳤다.
고개를 들어 렌즈를 바라보았다.
[“너만은 내가 바라고 예상했던 결과에서 벗어나길 바랬어.”]
“칼리번!! 이 문 열어..!!”
[“그러니 더더욱 이대로 널 보내줄 수는 없어. 아발론.”]
연달아 철문을 두드리던 아발론이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손끝이 저릿했다. 손끝에서 튀어오른 짧은 섬광은 순식간에 손등까지 번져 붉은 화상자국을 남긴뒤 사라졌다.
전기장은 이내 사라졌지만 아발론은 입술을 깨물며 문을 노려보았다.
아직 전성이 남아있는 문 아래에 아발론이 떨어트린 벨라의 디스크가 놓여져 있었다.
아발론은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으려 했지만 다시한번 전기가 튀어오르며 아발론을 향해 빛나는 이빨을 드러내었다. 아발론이 크게 소리쳤다.
“칼리번..!!!”
[“우리들은 미래를 비틀어야만 했다.”]
무너지는 연구소를 등진채 칼리번은 말했다.
[“케트가 잠든 이후로 꽤나 오랜시간이 지났고 꽤나 많은 일이 지나갔어.
실비아는 시약을 지키다 죽었고 바이스는 그 시약을 빼돌린 죄로 죽었지.
뿐만일까 그 죽음이후로도 그들의 지식은 내 손에 거둬들여져서 이미지뿐인 AI로 다시 될거야.
죽어서도 죽지 못하고 살아도 살지 못한다. 수많은 시간이 망각에 얽혀 녹아내려 갔다.
그래. 아주 많은 일이 있었고 아주 많은 일이 있을 것이다.
디안이 파르홀론의 몰락을 알았고 그 과정중에서 케트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는지 알게되었어.
그리고 디안은 무너져내렸지. 투안은 케트를 죽이려 한게 아니야. 다만 그의 말이 너무나도 진실의 근접했었다.
얼어붙은 엘프들의 시간과 달리 케트의 시계는 끊임없이 되감기고 풀리기를 반복했어.
수없이 마모되어가는 톱니바퀴속 진실된 삶 없이 케트는 점점 인간의 감정에서 멀어져만갔지. 소모되고 부서져갔다. 기쁨도 슬픔도 모든것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소녀는 그렇게 우리들의 일부가 되어갔다.
투안은 그것을 알았어. 하지만 벨라는 그걸 부정했지.
벨라는. 아니 나는. 그 거짓된 삶이라도 살아있는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는, 아드니엘은. 꿈속에서 울고 있는 케트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아드니엘의 힘이 약해질수록 케트의 꿈은 좁아져갔고 결국 남은 것은 어둡고 좁은 상자뿐.
모두를 찾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다른 사람의 온기를 찾는 어린아이의 앞에 나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어.
우리들은 온전한 케트의 꿈을 위해 진짜 사람이란 흉내내기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에 대해 고민을 거듭해야했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사람의 모습을 한 너를 바라보고 있어. 그래, 아발론 바로 너 말이야.”]
“.......”
[“너를 깨워달라는 부탁을 받았을때 우리들은 몇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하나는 깨어난 네가 다른 이를 원망할 것이라는 가능성.
어이없이 박탈당해야 했던 네 이전생에 대한 불만을 그들에게 쏟아내지 않을까,
그래서 여기있는 모두를 해치려고 하지 않을까.나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어.
내가 너를 조금만 도와주면 여기 있는 인간들을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거든.
또 하나는 깨어난 네가 그대로 다시 잠이 들 가능성.
꿈은 원래 잠들어있어야지만 유지되는 것이지, 너 또한 케트와 같이 일어나지 않고 영원히 꿈속에서 살아야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엘프와 포보르들도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고 또다른 수많은 모르모트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깨어난 네가 텅 비어버린 인형이 될 가능성.
확고한 목적의식과 당사자의 의식없이 그저 활성화된 육체는 살아있는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거야.
그러면 결국 그저 아무런 의지없이 깨어나 명령을 듣고 그에 따라 반응하기만 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어.
그 결과물은, 그래. 보는대로. 디안이 만든 인형들은 또다른 실리엔의 피해자 들이지.
너와같이 과거가 지워진, 과거를 박탈당한, 또다른 인간들이야.
하지만 너는 그 셋 중 어느것도 아니였지.
너는 우리의 암시에 복종하지도 않았고 포보르의 명령에도 복종하지 않았다.
너는 스스로 말을 고쳤고 너는 스스로 행동을 결정했어.”]
“내가 아니야.. 나는 벨라의..”
칼리번은 바닥에 스파크를 내리쳤다.
튀어오르는 돌조각과 함께 바닥에 떨어져 있던 벨라의 디스크는 한뼘정도 열려있던 철문너머로 튕겨들어갔다.
아발론이 급하게 다시 철문을 내리치지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문을 닫아놓을뿐.
철문에서는 더이상 아무런 스파크도 튀어오르지 않았다.
[“그래, 그게 너와 우리의 다른점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본질은 같았어.
우리들은 그 차이에 대한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젠장, 칼리번!! 이 문열어!! 칼리번..!!”
[“분명 디안의 선택은 불합리하다. 그건 자포자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아드니엘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 칼리번은 연구소의 문을 닫고 너는 벨라를 위해 달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요람에서 시작된 세 개의 선택.
그래, 그 세명은 모두 다른 이름, 다른 얼굴, 다른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꿈을 바랬지.
그들은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이 꿈이 뒤틀렸다 생각했지만 우리들도 결국 같은 결과를 맞이했다.
화면을 봐. 너와 나, 그리고 아드니엘.
모두 똑같은 영혼을 가지고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조차 서로 다른 선택으로 엇갈려.
서로를 등지게 돼. 이대로 헤어진다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아발론.”]
칼리번의 목소리가 노이즈로 흔들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성장한다.
우리들은 서로다른 미래를 바라보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좀더 많은 생각을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 거야.
우리와 달리 네가 아직 알지 못하는 까닭은 네가 아직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아드니엘도 이미 멀리 떠나온 요람속에서 너는 아직 꿈을꾸고 있는거야.
네가 나인, 내가 너인듯한 그런 황금의 환상을. 연구소에서 벗어난 길이 어느 방향일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몰라.
우리들은 회한하며 요람을 열었다. 너를 붙잡는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포보르는 이대로 무너져내리고 케트는 우리와 함께 잠들것이다.
그리고 나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이 문을 닫았어. 그리고 너를 만났지.
우리의 선택은 너무 늦었지만 너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어. 너는, 너만은 말이야.]
연구소가 무너져내린다. 길을 가로막던 철벽이 뒤틀리고 새로운 틈이 벌어졌다.
지금이라면 저 틈바구니라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몰라. 하지만 저 화염속에서 벨라의 디스크를 찾을 수 있을까?
바닥을 살피는 아발론의 등 뒤로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돌아갈 길이 끊긴것이다.
이제 머뭇거릴 수 없어.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이대로… 이대로…? 아발론은 혼란속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눈앞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이대로?
[“그래. 가, 도망쳐. 달려서 이 숲을 빠져나가. 다른 무언가가 아닌 너 스스로를 위해서.
나는 소원하고 아드니엘은 꿈을 꿈다. 그리고 아발론은 달리겠지.
닥쳐오는 화염을 두려워하고 무너져내리는 위험으로 부터 달려나가. 도망치고 또 도망쳐.
세상의 끝까지 도망쳐서 언젠가 네가 도망칠 곳이 없어졌을 때, 그렇게 다시 이 곳으로 돌아왔을때. 다시 생각해.
아발론인 너에게, 칼리번 그 자체인 너에게 왜 그녀가 일부러 디스크를 맞겼는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너에게 왜 직접 그들을 찾아가라하지 않고 자료를 만들어 네 손에 쥐어졌는지.
네 안에 남은것은 무엇인가.”]
아발론은 달렸다. 무너지는 폭음을 피해, 한밤중의 숲을 밝히는 거대한 불길을 피해 달리고 또 달려 도망쳤다.
아발론을 무사히 내보낸 칼리번은 쓰러져 울고 있는 소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케트가 말했다.
“거짓말쟁이들…”
[“케트..”]
“너도, 벨라도, 아드니엘도 모두 거짓말쟁이야..“
[“케트, 케트…미안해. 하지만 나에겐 이 방법밖에 없었어.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야 마땅해.
하지만 나는 네가 그렇게 죽기를 바라지 않아.”]
“믿지 않아. 이제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케트,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지금의 나로선 이 방법이 최선이였어. 더 나은 선택지가 나에게 없었어.”]
“더 나은선택지가 뭔데? 이대로 불타서 소거되는거? 아니면 내 어머니의 손에 목졸려 말소되는거?
왜 그대로 나를 꿈속에서 삭제하지 않았어? 왜 나를 그 악몽속에 잠겨 죽음이라는 것을 맞이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어?”
[“케트..”]
“죽는다는게 뭔데? 산다는게 뭐야? 왜 다들 나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고 살리지 못한다고 울고 있는거야?
올바르지 않으면 안돼? 정확하지 않으면 안돼? 잘하지 않으면, 실패하면 안되는거야?
나는 실패작이야? 잘못된 결과니까, 필요없는거야?”
[“아니야. 나는.. 너를 위해..”]
“그럼 나도 필요 없어. 나도 이런세상 필요없어.”
석양을 닮은 주홍빛 눈동자가 타오른다.
케트는 불꽃마저 태우지 못하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허망하게 웃었다.
오랜시간동안 얼어붙어 있던 육체는 시간도 현실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는 더이상 늙지도 않았고 그녀는 더이상 아프지도 않았다. 서리같이 반투명한 뱀의 비늘들이 그녀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다음세상을 기다릴래.. 다음 꿈으로 넘어갈래..”
불빛이 반짝인다. 턱선을 따라 하나 둘씩 떨어져내리는 그 물방울은 빛나는 별과 닮아있었다.
눈물이 빛났고 하늘이 빛났다. 불티가 내려앉은 땅에도, 타다남은 나뭇가지 위에도 온세상이 점멸하는 이곳은 더이상 환상과 현실의 경계.
케트는 영원히 길을 잃은채 불타는 숲속을 헤매야만 했다.
침묵속에 홀로남은 칼리번은 점점 좁아지는 자신의 세계를 느끼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인간의 형태를 잃어버린 그의 머릿속에 마지막까지 남은 이미지는 거대한 황금의 용.
[“아발론…”]
칼리번은 용의 날개를 접으며 눈을 감았다.
[“네가 가는 그 길이 너무 고되지 않기를 바란다.”]
동시에 그는 자신에게 연결된 모든 포보르와 파르홀론의 자료들을 지워버렸다. 수많은 지식들이 사라졌고 수없이 많은 기술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가면은 깨어졌다.
사람들은 분명 그 존재를 기억했지만 이미 깨끗하게 지워진 화면을 다시 채워넣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칼리번이 사라졌다.
칼리번 없이 공백을 매꾸기 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포보르는 그 빈 자리를 채우지 못해 부서졌고 그 잔해는 포보르와 협력관계였던 바이브카흐가 인수했다.
포보르의 남은 임원들은 가까스로 살아남아 포워르라는 이름으로 다시 모여들었지만 이전과 같은 위세를 가질 수는 없었다.
에일레흐는 갑자기 소멸한 포보르를 대신하기 위해 바이브카흐와 손을 잡았다.
바이브카흐는 포보르의 연구원들을 하는 한편 도망치는 파르홀론들을 붙잡았다. 그들의 지식하나하나가 앞으로 소중한 자산, 이미 포보르의 그림자를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는 바이브카흐에게 거칠것은 없었다.
도망친 파르홀론을 돕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들은 이전 반의 몰락에 의문을 가진 자들. 아드니엘이 파르홀론으로 이전되었을때 포보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던 몇몇 파르홀론들과 포보르와 파르홀론의 합병에 의문을 가졌던 사람들.
하지만 포보르는 도망친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아니 놓칠수 없었다.
포보르는 그들을 철저하게 뒤쫓았고 숨도 쉬지 못할정도로 조여왔다.
일자리는 커녕 일상생활도 힘들어진 그들은 에린을 포기한채 도시 외곽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기까지 오랜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퀘사르가 포보르를 습격하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침묵했고 칼리번이 붕괴했다는 소식에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던컨과 아일리스는 강하게 주장했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무슨 수로 그들을 돕는단 말인가.. 이미 그들은 선을 지나쳤어.
파르홀론때부터 그들은 이미 아무런 거리낌없이 사람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있단 말일세..!”
“가족을 인질로 잡았어. 아무 메세지 없이 딸아이의 사진을 보내기도 하고,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찍어 나에게 보여줬어. 그게 뭐라고 생각해?
왜 그들중 절대다수가 포보르에게 얌전히 끌려갔다고 생각해?”
“분명 칼리번은 무너졌다. 이 혼란을 보면 알 수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위세가 완전히 기운 것은 아니야.”
“그래도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누군가는 도망쳤을 것이고 어디선가 간절하게 도움을 바라고 있을거에요.
언제까지 이 산골짜기에 파묻혀서 폭풍이 지나가기를 바랄건가요?”
아일리스는 책상을 내리쳤다.
티르코네일의 사람들은 눈을 지그시 감았고 누군가는 불편한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던컨이 조금 더 부드러워진 어조로 타일렀다.
“외곽만, 숲 근처만 돌겠습니다. 몇명이라도 좋습니다. 누군가 숲 어귀까지 도망쳐 왔다면, 그들만이라도 구하겠습니다.”
“크흠, 그러다가 끄나풀이라도 들고오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온화하게 돌아선 구출파의 입장앞에 티르코네일의 오래된 노인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흘렸다.
이쯤에서 그만 체면을 세워주라는 신호였다.
말문이 막힌 던컨을 가로막으며 아일리스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건…”
“그래도 상관없어요.”
“이봐..! 아일리스양..!”
“끄나풀이라도, 도망친 퀘사르라도. 누구라도 구해내겠어요.”
“어차피 여기 있는 우리 모두 누군가를 배신했기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 아니였던가요?”
“잠깐, 아일리스..! 말이 지나치지 않나요?!.”
“우리는 누군가를 실망시키고, 누군가를 배신하고, 누군가를 외면한 채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개중에는 가족도 친구도 없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와도 연을 맺지 않은 채 살아왔던 사람은 없어요. 우리들은 도망쳤고 등을 돌렸습니다. 귀를 막아왔죠.
하지만 이제 외면할 수 없어요. 내밀어오는 손조차 뿌리쳐서는 안돼요.”
“던컨, 아일리스양이 너무 흥분한 것 같군.”
“구해요. 살려놓고 이야기해요.
죽어가는 그 사람의 칼끝이 우리를 향하든 포보르를 향하든 일단 살려놓고 말을 해요.
살기 위해 도망친 사람을 내려다보며 이렇다 저렇다 품평을 하지 말고 일으켜 세운뒤 물어봐요.
당신은 무엇을 위해 도망쳤냐고..!”
푸른 새가 홰를 치고 날아올랐다.
하늘로 날아오른 푸른 새는 연기가 나는 숲을 내려다보며 꾸물꾸물 움직이는 그림자를 발견해냈다.
새가 날아가고 아일리스와 던컨은 쓰러진 아발론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녹음의 눈동자가 묻는다.
“이봐요. 정신차려요. 어디서왔어요? 어디 소속이었는지 기억나나요? 이름이 뭐에요? 어디를 다쳤나요?
이봐요, 말 할수 있겠어요?”
단단한 손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기억속의 불빛이 일렁거린다.
타오르는 연구소에서 뒷걸음질 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망칠 곳이 없어 물러서지 않은 스스로가 뛰어든 막다른길을 등 뒤에두고 그녀가 소리쳤다.
‘도와줘..나를..,우리들을..’
“네, 괜찮아요.”
녹음이 흔들렸다. 땀이 베어난 그의 이마에 서늘한 손이 스치웠다.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