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비밀레) reload #5(1)

마비노기/reload 2017. 12. 19. 15:45

“축하합니다 크루크 제쉬바르”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이요, 에후르 마퀼 2세.”


두 사람이 악수를 하자 플래쉬세례가 이따라 이어졌다. 

입꼬리는 호선모양으로, 시선을 낮추되 오만하지 않게, 하지만 너그러움이라는 시그널을 표현해야할 미소가 어딘지 어색했다. 

깜빡이려는 눈꺼풀을 붙들어매었다. 손이 가볍게 흔들리다 카메라 밖으로 내려갈때까지, 이 미소를 유지해야한다.


파인더 너머로 지켜보는 눈동자들이 빠르게 셔터를 눌러 그 모습을 담아내었다. 

호기심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 화면 어딘가 평소와는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기자들은 열심히 셔터를 누르며 관찰을 지속했다. 

카메라를 든 손목의 각도가 점점 높게 꺾여가고 있었다.


찰칵찰칵, 무기질적인 소음이 뜨거운 박수소리에 녹아들었다. 

열정의 모습을 흉내내는 축하의 말소리가 홀 안을 가득 매웠다. 그 박수갈채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과연 누구인지 가려낼 길이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간단한 진실일까 필사적으로 명암을 가리려는 가면에 대한 조롱이었을까.

서로 다른 어둠과 그림자에 숨어든 무리들은 관객들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총성대신 플래쉬가 반짝인다.




하지만 왕자는 오랜 세월을 넘어 여전히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에일레흐였다.

십수년간의 실무와 선천적인 재능으로 다져진 완벽한 업무용 미소가 이런 작은 패배하나에 무너질리 없었다. 

왕의 이름은 버렸지만 그래봤자 의자를 하나 내려온 것일 뿐.

여전히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보고 그는 온화하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을 흔든다. 

그런 거리감과 그런 각도차에 서있는, 그는 조명속에서 연기하는  배우와도 같았다.


그러나 오늘은 유난히 플래시가 밝은 날이었다. 

눈을 찌를듯 날카로운 시선들이 그의 얼굴에 쭉 내리찢어 한낯조롱거리로 만들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조롱에 가까운 시선들, 기자들은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당겨 셔터를 눌렀다. 

1/6초에 한장씩, 느릿한 스톱모션같은 연사가 이어졌다. 


에후르 마퀼의 미소가 깊어졌다. 짖궂은 어린아이들을 달래는 쓴웃음에 가까운 얼굴이다. 

평소보다 반뼘 무릎을 굽힌채 조금 더 높은 각도로 올려찍는 사진속에서는 어쩌할 도리가 없었다.

화려한 조명대신 그림자가 과장되게 찍히는것이 느껴진다. 

아무리 노련한 주니어라도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조명에 의해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걷어 낼 수는 없었다. 

시선이 흔들린다. 수많은 날들을 지나며 단 한컷의 b급 미소도 허락치 않아왔던 에일레흐였지만 오늘만큼은 완벽한 스마일을 지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저게 짓궂음이라고? 그냥 예의가 없는거지.  화면 너머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불쾌한 심정을 대변했다. 

와이드샷 화면 아래 삐죽삐죽 튀어나온 뒤통수 너머로 그들의 유치한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화면이 당겨지고 오디오가 넘어갔다. 카메라의 시선들도 화자를 따라 움직였다.


에일레흐에 비해 크루크를 찍는 카메라들은 평소의 시점보다 조금 더 멀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역시 가까이서 얼굴을 한 컷, 다시 가슴 아래까지 쭉 끌어당겨서 다시 멀리서 한 컷.

애매하기 짝이없는 거리감에 기자들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카메라속 화면과 실제의 모습을 비교한다. 

저쪽은 억지를 부려도 망가진 사진을 찍기가 어려운데 이쪽은 억지를 부려야만 제대로 된 A급 사진을 건질수 있는 모양이었다.


몇 장인가 손끝까지 섬세하다고 평가받은 몇몇 실력자들이 가까스로 사진을 찍어내었지만 이번엔 메인을 어디로 결정해야 할지 난감하다.

Vip들의 얼굴인지, 아니면 마주잡은 손에서 터져나오는빛나는 저 광채인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한번에 찍을 수 있는 것은 한 컷뿐이다. 

눈이 흔들리는 만큼 카메라의 초점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셔터를 눌러도 카메라들은 좀처럼 크루크에게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체격자체가 규격을 달리하는 사이즈였다. 

평소 한 컷에 찍기에도 버거운 어깨는 늘 걸치고 다니던 방한용 작업복이 아닌덕에 반쯤 줄어보인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하지만 여전히 그 골대가 남다르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발레스의 설원처럼 새하얀 상의는 안그래도 커다란 그의 어깨를 강조하고 있었지만 장인의 신들린 손길이 투박해 보일수 있는 체형을 유려한 선으로 커버하고 있었다. 


라인을 따라 떨어져 내리는 시선을 이끌어 고정시키는 것은 손목 근처의 까만 소매, 사람들은 시선은 대부분 그 한 치정도 되는 까만 손목라인에 머물러 있었다.

검은 배경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은백색의 커프스가 조명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굳이 눈썰미가 좋지 않더라도 한번쯤 눈길을 던질만한 부드럽고 은은한 은빛, 그리고 그 투박한 손가락을 빛내고 있는 또하나의 은색이 반짝이고 있었다.


힐웬으로 만든 왕가의 반지. 이렇게 작은 것은 힘들다며 우는 소리를 하는 장인들에게 억지로 고급 세공 도구를 쥐어며 짜낸 최고의 걸작품이었다.

시도하는 것에만 백만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1급 세공 기술을 몇번이나 반복해야했던가, 크루크의 손가락둘레에 딱 맞게 가공된 힐웬의 반지 상면에는 엄지손톱만한 작은크기의 바쉬베르의 문장이 세겨져 있었다. 

손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끌어모으고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만으로도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완성된다. 

화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귓가에 짤막한 광고같은 것이 시작되었다. 어디선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자, 상상만해도 시린 눈보라를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그 설원 어딘가에 외로이 지어진 작은 공방이 있을 것이다. 

광로에서 피어오른 열기에 내부는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하고 창문에는 서리가 잔뜩 얼어붙어있다. 

얼음때를 벗겨낸 창문 너머로 고집있게 흑색의 광석을 두드리는 장인의 모습이 그림처럼 스쳐지나간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광석은 활화석과 비슷하지만 두드리는 망치의 강도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다. 


수차례 두드리고 가공하기를 반복하며 검은광석이 백색이 되어 가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는 장인의 얼굴을 다름아닌 크루크, 

완벽한 백색을 띄는 힐웬을 내려놓지만 그의 얼굴에는 고민이 가득하다.

빛이 들지 않는 공방 구석에 주저앉아 결정적인 생명력을 부여하지 못해 고뇌하는 설원의 장인에게 새하얀 부엉이가 날아들어왔다. 


편지를 펼치기도 전에 뛰어는 발소리가 공방의 문을 열어젖힌다. 

기적적으로 재발견된 실리엔을 가지고 돌아온 피오나의 단장이 크루크의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나와 빛에 휩싸인 주먹만한 무언가를 내밀어보인다. 

둘은 굳게 손을 마주잡는다. 두 손이 겹쳐지는 순간 화면은 빠르게 뒤로 페이드 아웃. 

새하얀 배경에 미니어쳐같이 작아진 공방은 폭발적으로 넓어지며 날아오른 흰부엉이가 화면을 가린다. 

부엉이는 설원을 따라 하늘높이 날아오르고 저 멀리 하늘을 찌를듯 높게 솟아오르는 탑이 화면에 비춰진다. 


화면은 탑을 확대하며 돔형태의 유리 정원을 비추고 나선형으로 둘러쌓여진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계단을 비추며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던 화면이 멈추는 곳은 브류나크의 최상층, 외관을 비추며 천천히 화면이 어두워지는 것을 기다린다. 

밤이 내려 앉는 하늘에 작지만 찬란한 실리엔의 불빛이 밝혀진다. 

새하얀 빌딩은 그 자체가 발광하는 제질인양 빛을 밝히고 어둠속에서 숨을 죽이던 사람들이 환한 미소를 띄며 브류나크를 올려다 본다. 박수소리가 이어진다. 빛이 도시를 밝히고 있다.


새하얀 배경위로 브류나크의 문장이 떠오른다. 발레스와 에일레흐를 반반 섞어 만든것 같은 엠블럼, 

하지만 어쩐지 발레스가 에일레흐의 제단 위에 올라선것 같은 느낌의..




그으런 광고 말이지..! 룩은 신이난 목소리로 방금 만든 광고를 주절거리고 있었다. 

연이어지는 팀원들의 한숨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이어 완결내는 걸 보니 나름대로의 자신작인 모양이었다. 

뭐, 실리엔을 가지고 돌아온건 단장이 아니라 우리지만, 하지만 아무래도 톨비쉬로는 그 중후함이 살지가 않아서.. 흐음.. 룩은 아쉽다는 어조로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때? 이참에 수염이라도 길러보는건. 룩의 실없는 헛소리에 톨비쉬는 짧은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차라리 비숍은 어때? 바통을 넘겨받은 비숍도 매마른 웃음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니,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웃음소리였다.


룩이 입으로 광고를 한 편 찍거나 말거나 킹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확실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누가 따로 광고를 한것도 아니것만 생소한 모양의 바쉬베르의 문장이 그려진 작은 반지에는 저절로 발레스의 브랜드를 떠올리게 만드는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왕가와 비지니스, 설령 이름만이 남아있는 문장이라 하더라도 문장 자체를 파기해야했던 에일레흐와는 기반되는 배경이 다르다.


하지만 마법의 진짜 위력은 그런 광고탑의 효과 따위가 아니었다.

킹은 책상에 기대어 앉은 채 자세로 손을 들어올렸다.  한참 좋은분위기로 대화중이던 크루크와 에후르의 움직임이 멈춰섰다. 

손가락을 치켜올리자 화면위로 반투명한 원이 생겨나며 반시계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손이 돌아가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영상이 뒤로 되감겨 들어갔다.


아무런 의미없이 지나가던 군중들의 모션이 역으로 재생되자 어딘지 어색한 움직임처럼 느껴졌다. 

등돌려 앉은 그림자가 부산스럽게 흔들렸다. 되감기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입의 움직임과 눈의 깜빡거림이 더욱 이질스럽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 부자연스러운 영상속에서도 힐웬은 여전히 영롱하게 반짝이고 플래시는 연신 단상을 비췄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영상이 끄트머리에 다다랐는지 자리에 앉아있던 크루크와 에후르 마퀼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마치 셔터를 누르는 것 마냥 사람들의 시선은 한참동안 한 자리에 머무른채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크루크와 에후르 마퀼이 다시 손을 잡았다. 영상이 멈춰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곳은 어디?

동등하게 악수를 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누가 주역인지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턱을 괸 상태로 역시 한방먹은거네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화면이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한번 봤던 영상은 뼈아픈 패배를 되세기게 하는 불쾌한 오디오일뿐, 흥미를 잃고 떨어지는 손가락이 영상을 통과하며 아래방향으로 선을 내리그었다.  크루크와 에후르의 사이로 깊은 골짜기가 생겨났다. 두갈래로 나뉘어진 영상은 손가락 하나만큼 떨어진 모습으로 여전히 재생되고 있었다. 

킹은 늘어지게 입을 벌려 하품을 내쉬었다.




한가로운 110층의 모니터룸, 전체적인 화면들과 요원들의 통신을 책임지는 통칭 관제실A.

에일레흐와 발레스가 쌓아올린 브류나크의 중심점에서 나른하게 땡땡이를 치고 있던 킹이 갈라진 화면 위로 검지손가락을 올렸다. 

사실 한방이라고 하기엔 이미 벌어진 점수차가 너무 크지? 얄미운 룩의 목소리가 발레스의 편을 드는것 마냥 속삭였다. 


하지만 오늘의 일은 어디까지나 브류나크 안에서 일어난 일일 뿐이다. 

이정도 차이는 미소 하나로 매꿀 수 있다는 것이 에후르 마퀼의 자신감이었다.

작디 작은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 하나넘겨주는게 뭐 그리 어려울까, 패자는 여유있게 발레스에게 중앙 자리를 권해보고 있었다. 

네가 과연 여기에 서는 압박감을 견딜 수 있을까? 

시험하고, 관찰한다. 어디까지나 선배되는 입장에서, 우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하지만 그렇게 영원히 가장자리로 밀려나면? 룩이 또 산통을 깨트린다. 

우연이라고 해도 기회는 기회, 전복될 위험이 아예 0인것은 아니잖아? 분하지만 맞는 말이었기에 킹은 대꾸없이 흥 하고 아니꼬운 시선으로 룩의 아이콘을 노려보았다. 

아이콘위에 작은 메세지 마크가 뜨더니 자동으로 열리며 혀를 낼름거리는 메세지로 변화했다. 

킹이 화면에 도착한 룩의 메세지를 삭제해버렸다. 룩의 웃음소리가 헤드폰가득 울리고 있었다.

룩의 말대로 우연이라고 해도 마냥 손놓고 바라볼 수 만은 없었다.

짜여진 각본속 리얼리티쇼와 별반 다를바 없는 기자회견이지만 엄연히 이쪽은 비지니스의 일환, 기자회견이 길어져봤자 이득볼것이 없는 에일레흐는 원만하게 질문을 마무리하고 아본의 극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속이 보이지만 딱히 꼬집기엔 뭐라 할수 없는 타이밍이었다. 

다음  행사장소가 거론되는 말에 약속이라도 해놓은것인지 성급한 몇몇 기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이야기의 주도권은 발레스가 쥐고 있지만 내일의 에일레흐에게 밉보여 나쁠것은 없다는 계산에서 나온 일종의 아부 퍼포먼스였다. 

굳이 좋은쪽으로 해석한다면 기자회견 뒤에 있을 쇼를 위해 엘리베이터가 잠시 정지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빠른 기자들이었을지도.

이유가 어찌되었든 동요하는 움직임만으로도 에일레흐는 만족스러운 효과를 거두어들였다. 

동시에 이야기를 주도하고 있던 반스트의 입매는 눈에 띄게 굳어졌다. 


멍청하긴. 킹이 혀를 차기 무섭게기자들이 재빨리 카메라를 들어 반스트의 얼굴을 기록한다.

그러나 높은 의자에 앉아있던 세월이 헛것은 아니었는지 바이데가 마이크를 끌어당겼다. 

낮은 웃음소리를 가장해 반스트를 질책하는것도 잊지않는 노련한 늙은 재상이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화자에게로 시선들이 움직였고 반스트는 조명밖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몇몇카메라는 여전히 반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울수 없는 명백한 실책이다. 

방금 반스트의 반응으로 발레스도 이 기자회견을 이어갈 이득점을 잃어버린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마다의 화면위로 한숨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분위기가 괜찮았다면 어느정도의 회견이 더 연장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이 장소에서 득을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발레스도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 한려는 건지 바이데는 에일레흐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꺼내놓고 있었다. 

모처럼 잡은 이야기의 흐름이 다시 에일레흐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것봐, 괜히 에일레흐가 아니라니까. 룩이 입을 삐죽였다. 일이나 해. 

아 그래. 그건 맞는 말이지. 킹은 공중정원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되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손가락을 들어 영상을 가리켰다.

원 대신 사방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떠올랐다.



툭 하고 영상을 옆으로 밀어내자 반으로 갈라진채 재생되중이던 기자회견의 영상은 1/4로 줄어들며 되어 한쪽 구석으로 이동되었다. 

사람들이 가장 기다리던 최고관심사의 이야기이니 시청률은 최고로 높아지고 있겠지만 관제실에 있는 사람들에겐 이미 보고 내려온, 혹은 지금도 보고있는 지루한 화면의 서술적 묘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이 궁금해 하는건 그런게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궁금해 해야하는 걸까, 

그리고 그 정보는 어디서 구해야 하는 걸까? 킹은 스스로의 직업에 대한 질문을 되뇌이며 양 손가락을 크게 펼쳐보였다.

톨비쉬는 벌써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너무 그러지 말라고? 나 지금 성실히 일하는 중이니까? 

킹의 변명아닌 진실에 비숍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대답이 필요없다는 긍정의 웃음이었다.




킹은 비워진 화면위로 펼친 손가락을 구부리며 시계방향으로 뒤집었다. 

마치 손끝에 뭔가를 걸어내어 깊은 곳에 숨어있던 무언가를 낚아내는듯한 움직임이었다. 

모션에 따라 명령어가 전달되고 비워진 자리로 또다른 영상들이 솟아올라왔다.

그렇게 다시 채워진 영상들은 또다시 기자회견장, 하지만 이번에는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촬영중이 아닌것 같은 묘한 각도의 모습이었다. 

이런곳에도 카메라가 있나 싶을 정도로 교묘하게 숨겨진 각도의 영상들은 다름아닌 브류나크의 보안카메라에서 촬영되고 있는 것들이었다. 당연하지만 합법적인 접속이었다.

킹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관절들을 풀어내었다. 정말 최고의 직장이라니까. 


쓸데없이 기능이 뛰어난 보안카메라들은 본연의 기능뿐만 아니라 부가적인 기능도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평소보다 뽀얗게 보이는 손등을 클로즈 업하기도 하고 신묘한 커팅기술로 잘 관리된 수염을 따라 촛점을 움직이기도 헀다.

고된 수행으로 뭉툭해진 크루크의 손톱은 거스러미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더불어 희생당한 손가락털들은 모조리 뽑혀나가 횡하게 드러나버린 모공에게 잠시 묵념을. 


크루크의 파격적인 그루밍소식에 룩이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손가락 털이 다 뽑혔다고? 룩의 지나친 관심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밀레시안이 룩이랑은 상관없잖아요 라며 말을 끊었다. 

미래를 예건한듯한 반응에도 룩은 꿋꿋하게 심각한 분위기를 연기하며 속삭였다.

아니, 물론 나랑은 상관없지.. 하지만.. 그럼 궁금해지잖아. 적막이 찾아왔다. 


이대로 못들은척 넘기고 싶지만 룩이 타이밍을 헤아리는 콧김소리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런경우 침묵이 길어질수록 후폭풍에 시달리는 것은 듣는 사람의 몫일뿐, 어떻게좀 해보라는 소리없는 압박감에 퀸이 마지못한 목소리로 무엇이? 라고 되물었다.

룩이 으음.. 하고 고뇌하는 신음소리를 삼키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크루크씨.., 발가락 털도 정리 했을까? 퀸과 밀레시안이 동시에 짜증을 내었다. 

룩은 원하는 반응을 얻었는지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발가락 털에서 시작된 더러운 잡담은 부츠와 통기성에 대한 이야기로 번져나갔고 조용히 있던 비숍의 입에서 질낮은 욕설이 나올때까지 계속되었다. 

톨비쉬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쪽에 호의적인지 모를 웃음소리에 룩이 한번더 설원에서의 생존방법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굳이 편을 가르자면 메마른쪽이었다. 톨비쉬가 웃음을 뚝 멈춘 채 속삭였다.


“킹, 관제실에 들어가는데 따로 권한이 필요하던가?”

“아니? 이쪽도 수시로 오고나가니까 딱히 제한하는 건 없어. 왜 여기 오게?”


“110층은 어제 사전설명때 돌아봤으니까 거긴 됐어.”


“뭐? 여길온다고? 아니야. 안와도 돼. 아니 오지 마..!”


톨비쉬의 가볍지 않은 농담에 룩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멀고 먼 관제실B까지 아무도 오지 않을것이란 믿음하나로 오늘따라 멘트를 막던지고 있던 그에겐 치명적인 농담이었다. 

일이 끝나고 나면 결국 1층에서 다시 마주쳐야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들어오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다. 룩은 설마 진짜 올건 아니지..? 하고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톨비쉬는 다시한번 소리낮춰 웃을뿐이었다. 부정을 하지 않는다. 룩이 입을 다물었다.




넌지시 던진 말이었지만 마냥 톨비쉬라면 허언으로 생각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룩이 화면을 끌어당겨 아본의 카메라를 빠르게 체크하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찾아낸 톨비쉬는 한가로운 분위기로 적당한 기둥에 몸을 숨긴채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도 적고 기자회견을 볼 수 있는 패널도 보이는 명당 포인트다.

몸을 숨기고는 있지만 슬쩍 난간위로 팔까지 걸친 것이 한동안 자리를 옮기지 않아도 된다는 여유가 느껴졌다. 

어라 저기서 저렇게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이질적인 여유로움이었다.


순찰하던 몇몇 요원들도 그런 톨비쉬를 발견했는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순찰 스케줄을 확인하지만 저런 요원이 배치된 기억은 없다. 

하지만 곧 가슴의 명찰을 확인한 요원이 동료의 팔을 툭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해를 못하는 동료의 표정에 애매모호한 고갯짓으로 1층에 마련된 휴식용으로 마련된 카페테리아를 가리켰다. 


톨비쉬가 서 있는 기둥에서 멀지 않은 카페에, 대다수가 비어있는 새하얀 메르헨풍 커피테이블에는 톨비쉬와 같은 명찰을 단 다른 에이전트의 요원들이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채 여기저기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서있는 정도면 얌전한 축에 속한다고 생각될 만큼 가지각색으로 앉아있는 모습들이 흥미롭기까지하다.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시선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중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도 섞여 있었지만 널부러진 무리에서는 딱히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짓는 여유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눈에 띄는 것을 꺼려하는 에이전트의 요원들 치고는 특이한 광경이었다.


톨비쉬는 커피는 제법 당기지만 저 사이에 끼고싶지는 않다 라는 표정으로 난간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쇼윈도우 안의 패널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도 지루함이 감돌고 있었다. 

이제 슬슬 이동해야하는 시간 아닐까? 하지만 시간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너무 이르다는 답변이 들려왔다. 

딱히 누군가가 소리내어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기자회견이 아직도 끝나질 않고 있었으니까. 

광고를 내보내야할 쇼윈도우 안의 스크린에는 아래층에서 진행중인 기자회견장의 모습이 띄워져 있었다.

다른 화면을 보고 싶지만 어디로 눈을 돌리든 모두 크루크와 에후르마퀼의 얼굴뿐인 지루한 시간이었다.




톨비쉬의 하품소리가 들려왔다.

룩이 기가죽어 있는 동안 킹은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잠시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세어나갔지만 크루크의 확 달라진 모습은 분명 평범한 변화는 아니었다. 

컨버터 생산라인을 시찰하다 새어나온 실리엔 연기를 들이마시고 기억을 잃은게 아닌 이상에야 그 크루크가 스스로의 얼굴에 크림따위를 찍어바를 리가 없지 않은가. 

섬세하게 덧그려진 아이브로우에 킹의 머리가 핑그르르 돌기 시작헀다. 


눈이 화면 구석구석을 훑어내렸다. 

이렇게 제품 외적 이미지에 공을 들이는 전략은 설원녀석들의 전공이 아니란 말이지.

소리없이 혼잣말을 달싹이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눈이 바쁘게 움직이고 열 가닥의 손끝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럼 누굴까. 그나마 세간의 시선을 신경쓰는 바이데? 그럴리는 없다. 

아들뻘인 크루크의 얼굴에 신경쓰기 전에 자기 얼굴부터 신경써야 하지 않을까. 

그럼 카르펜..? 아니아니, 그 아가씨도 당분간 이쪽에 신경쓸 여력이 없다. 

칼리번이 닿지 않는 먼 곳까지 나가있데다가 아무리 사이가 좋다 한들 제 오빠 수염모양의 각도를 심각하게 고민할만큼 살가운 타입은 아니니까.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손끝이 미세하게 멈출때마다 정신없이 회전하는 영상들 사이에서 수많은 외곽선이 그려졌다 지워졌다. 

눈이 닿는 곳마다 확대되었다 축소되기를 수십 차례. 이윽고 한 구석 교묘하게 가려진 기둥 뒤 공간에 기대어 서있는 아름다운 여성이 킹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카메라가 닿지 않는 아담하고 음습한 그늘밑이었다. 과연 이래놓고 우리한테는 온갖 생색은 다 냈단 말이지..? 

이미 자신들이 철저하게 다 체크했으니 사각지대는 없을 것이라 장담한 것과 달리 크루크와 에후르 마퀼이 서 있는 단상 아래 미묘한 위치에 자리한 기둥의 뒷편에서 은밀한 회의가 오고가고 있었다.


나름대로 보안카메라의 위치를 꿰고 있는 블랙레이븐이 교묘하게 수를 부린 것 같았지만 관제실에 앉아있는 킹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늘 들고다니던 담뱃대는 어디로 가고 백금빛 가느다란 펜을 신경질적으로 물고 있는 여성은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안드는건지 기자단과 크루크를 번갈아 보며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언뜻 느껴지는 분위기로는 그다지 좋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섬세하게 각도를 틀어 제대로 된 영상을 확보하려 하지만 갑작스럽게 멈춘 카메라가 의도와는 다르게 고개를 떨어트렸다. 

킹이 선점한 카메라를 노리는 무리들이 관제실 곳곳에서 중복된 명령을 내리고 있던 탓에 오더가 충돌한 모양이었다. 

도전장이나 다름 없는 시비. 이봐, 이건 내가 찜했으니까 저리 꺼지라고. 

킹은 카메라에 달라붙으려는 동업자들을 모두 쫓아낸 뒤 주먹을 흔들어보였다. 

어디까지나 화면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위협의 의도는 충분히 전달되었는지 달려들었던 요원들은 눈을 세모낳게 뜨고는 다른 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분하지만 지랄맞은 것은 성질머리뿐만 아닌 실력도 마찬가지였다.


방해를 떨쳐낸 킹은 다시 천천히 카메라를 조작했다. 말의 속도에 비해 입술의 움직임이 너무 적어 무슨말을 하는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어느정도 추측은 할 수 있지만 명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톨비쉬라면 알아볼텐데 말이지. 

영상을 카피하고 싶지만 거기서부터는 그레이존을 벗어나게 되버린다. 뭐 트러블이라고 해도 우기면 떙이지만.

안그래도 카메라에 강제로 접속하고 있는 지금도 약간의 트러블을 감수해야할텐데 거기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과정이 조금 귀찮아지겠지만 아직까지는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우길 수 있는 사안이었다.

애초에 일을 맞겨놓은 주제에 자기들이 대놓고 사각지대를 이용하면 우리더러 일을 어떻게 처리하라는거야? 

킹을 숨쉬듯 변명을 늘어놓으며 선두로 각기다른 카메라에 들어앉은 요원들은 줌을 당겼다.


아무리봐도 보안요원들이 할 행동은 모습은 아니었다.

일단 겉보기부터 불법같아 보이지만, 찾아내는 과정이 이미 조금 아웃라인이지만, 어찌되었든 그들이 할 일은 바로 그런 지점을 찾아내거나 수상한 움직임을 확인하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당당하게 화면을 띄워놓고 있었다. 

수많은 블랙레이븐들이 관제실을 지나치며 몇몇 화면들을 바라보지만 그들의 일탈을 알아 챌 수는 없었다.

이미 자세부터가 글러먹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킹만해도 책상에 팔꿈치를 올린채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이었고 의자위에 쪼그려 앉은 사람도 있었다. 

의자에서 반쯤 흘러내린 사람은 양반이다. 엎어져 누워있는 모습으로 일단 일을 하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이게 그들의 일하는 스타일이라니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보계열 요원들을 10명 모아놓는다면 7명이 불성실한 모습이었고 2명이 정상인이었으며 1명은 자리에 없다는 말은 절대 과장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요컨데 온라인으로 접속해있으면 되는거 아니냐. 

의자에 앉아있는 것만해도 감지덕지한 분위기에 힘입어 키리네의 모습은 다른 영상들 사이에 교묘하게 숨어들었다. 

그 고집있는 크루크를 프로듀싱한 설원의 여왕님이 반스트를 씹어먹을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가 한마음 한 호기심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스트 녀석 이제 박살난다 텍스트와 함께라는 웃는 모양의 이미지가 화면 구석을 연달아 지나가고 있었다. 

화면속에 숨겨진 또다른 관제실A는 거의 축제의 분위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나 모든 블랙레이븐이 관제실의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킹은 노골적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헛기침을 반복하는 블랙레이븐을 흘겨본뒤 피식하고 헤드폰을 끌어올렸다. 

무언가 짧은 말을 속삭이자 킹의 시계속 아이콘들이 일제히 깜빡거렸다. 헛기침이 반복되었다. 

그는 킹이 사내 무전기를 내팽겨쳐 놓은채 자신의 헤드폰만 착용하고 있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분명 내부의 정보교환은 중요하지만 킹은 무식하리만치 못생긴 블랙레이븐의 통신기를 받자마자 진절머리를 내며 선을 둘둘 말아 책상구석에 내팽겨친지 오래였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돼지꼬리 돌돌말린 유선이야..! 모든이의 마음을 대변한 격렬한 반응에 관제실의 희노애락이 엇갈리고 있었다. 

결국 누가 말하기는 했구나의 기쁨과 유서깊은 자사의 제품이 비판받은 분노, 저 성질드러운 인간이 이쪽담당이었구나하고 실감되는 슬픔, 애초에 주변분위기는 신경쓰지 않는 마이페이스들의 즐거움. 


이따금씩 그에게 전달되는 메세지가 깜빡거리긴 했지만 킹은 눈길한번 주지 않고 손등을 흔들어보였다.

어차피 통신기에 도착한 메세지는 모두 브류나크의 통신망을 거쳐 전달되기 마련, 

아닌게 아니라 지금 앉아있는 그 자리가 브류나크내의 통신과 보안의 중추인데 굳이 단말기를 새로 사용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깜빡거리며 미확인 메세지가 있다는 램프가 자체적으로 꺼지기를 수차례 반복되었다.

킹이 영상을 보고 있는 중간중간에도 화면에는 짤막한 메세지가 수도 없이 열렸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반수가 반스트 불쌍하네  라는 의미의 메세지였지만 일단 일에 관련된 메세지도 제대로 수신 하고 있다. 

딴짓을 병행하기 위한 최소치의 메일뿐이었지만.

헛기침을 하던 요원이 인상을 찡그리며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뒤에서 누군가 노려보던가 말던가 전혀 개의치 않아하는 킹과 같이 화면속의 키리네또한 수많은 카메라가 자신을 향해 돌아섰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채 펜끝으로 블랙레이븐의 요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언가를 확인하는건지 블랙레이븐은 쩔쩔매면서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대답했다. 

대답이 계속될 수록 키리네는 더욱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본다. 

무서운데? 킹이 웃음을 지으며 카메라를 조작했다. 별안간 신경질적으로 까딱거리던 펜끝이 우뚝 멈춰섰다. 

키리네의 입이 느리게 움직였다. 블랙레이븐이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몇마디 느리게 이어가던 키리네는 아예 입을 다문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더 뒷쪽을 보고 있는 걸까? 뭘 생각하는 것 마냥 느리게 펜끝이 움직였다. 

빙글빙글, 뭔가 흥미진진해지는 분위기에 킹이 욕심을 부려 카메라의 줌을 끝까지 잡아당겼다. 

두근거린다!!  끝없이 이어지는 텍스트들이 화면 가장자리를 반복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무리하게 머리를 뻗어 좀 더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홱하고 돌아보는 키리네의 눈빛이 킹과 마주쳤다. 

워.. 순간적으로 카메라를 돌릴뻔했던 킹이 가까스로 손을 멈춰세웠다. 


들켰어?

두근거리던 텍스트들이 일제히 사라지며 3글자가 떠올랐다. 

들켰어. 

뒤이어 웃는 얼굴들이 메세지창을 뒤덮었다. 


하지만 이정도로 당황한다면 이 일은 일찌감치 떄려치웠어야 했다. 

무엇보다 킹의 팀원중에는 이렇게 카메라만 대쪽같이 잡아내는 귀신이 두마리나 끼어살고 있었다. 

밀레시안과 톨비쉬가 동시에 제채기를 하며 코를 훌쩍거렸다.

수십차례 깜짝카메라를 역으로 당해왔던 킹은 일단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은채 키리네의 시선에 온전히 붙잡혀 있었다. 키리네가 킹의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때 카메라를 움직이면 오히려 잡아 땔 수도 없게 된다. 그리고 스토킹을 하고 있던건 킹 혼자만의 일은 아니었다.

그의 예상대로 키리네는 이내 다른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펜끝으로 몇몇 지점을 가리켰다.  

블랙레이븐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명백하게 당황한 표정들이었다.


킹이 침착하게 자신이 접속했던 흔적을 수정하는 동안 움찔거리는 머리 몇몇이 고개를 들어 관제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바보같기는. 들킨놈들은 꼭 티가 나기 마련이다. 

룩이 어디서 자기소개타임이 시작된거냐며 깐죽거리기 시작했다. 

킹은 상대가 나빴다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말장난을 할 타이밍이 되지 못했다.

상대는 카메라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입까지 다문 교활한 마녀, 키리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블랙레이븐이 누군가에게 무전을 보내기 시작했다. 

뒤이어 관제실의 블랙레이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킹은 태연하게 창을 내리고 확대한 각도로 카메라가 움직이도록 세팅을 수정해 놓았다. 


어디까지나 일의 연장선. 딱 잡아떼려는 킹의 행동에 인이어속 깐죽거리는 목소리가 킹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룩은 드물게 킹이 당황한것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일이라는 양 행복하게 들켜버린 나의 마음이라는 한물간 유행가의 후렴구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들켰나? 들켰네:( 들켜버렸어★ 두근거리는 나의 마.음>♡< 

킹이 나지막히 대답했다. 네 선곡센스 구려. 


킹은 다른 업무를 끌어당기며 성실한 요원을 가장했다. 

킹이 업무로 돌아가자 다른곳에서 일탈중이던 몇몇 요원들도 눈치껏 제 업무로 화면을 전환했다. 

시그널 올 그린, 뒷면에서 잠시 소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일단 관제실A는 더할나위 없이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메세지창은 여전히 난장판이었지만 오프라인에서는 모두가 집중모드로 합심한 모습이었다. 

현장의 블랙레이븐은 애타는 마음 반 봉변당한 억울함 반으로 관제실의 요원들을 닥달해오고 있을 뿐, 난데없이 고함소리만 얻어먹은 블랙레이븐들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밑도끝도 없지만 상사가 그렇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난데없이 뒤집어쓴  불똥에 블랙레이븐들의 분위가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누군가 이 오해에 대해서 설명해줄, 혹은 진짜로 일어난 트러블에 대해 말해줄 사람이 필요했지만 마땅히 말을 걸만한 사람이 없었다.

누가 바쁜것인지 한가한것인지 알 수가 없다. 

방금전까지 의욕없이 널부러져 있던 인간들이 모두 빠릿하게 앉아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놈들이 뭔가 사고를 치긴 했구나. 하는 심증이 깊어져가지만 증거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합심한 경우 물증을 잡아 낼 수 없다는 것을 탈틴의 엔지니어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이정도면 감지덕지지. 엔지니어는 입속에서 사탕을 도로록 굴리며 화면과 장비를 번갈아 체크했다.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으면서도 요청한 외부의 에이전트를 승락한것은 발레스. 

아무리 단장과 크루크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지만 그 개인주의 사고뭉치들이 윗사람들의 눈치따위를 보며 얌전히 앉아일을리는 없었다. 

더욱이 에일레흐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서라면 물불가리지 않는 타라가 그 뒤에서 음흉하게 앉아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평가가 엇갈리는 벨바스트가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고 있었다.

그렇다고 발레스의 블랙레이븐들에게 머릿수로 밀리고 싶지 않다는 타라의 등쌀에 이기지 못하고 어거지로 끌려들어온 탈틴이 이 모든 난장판을 정리해야할 명분을 가지고 있을리도 없다. 

그저 못본척 조용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리는 수 밖에. 


사실상 일찌감치 외부담당으로 빠져나간 제로가 부러워 지는 순간이었다. 

피오나도 아닌데 이런 촌구석에 박혀있을 의리는 없다며 훌훌 떠나버린 선배의 조언이 오늘따라 왜이리 사무치는 건지, 나도 이직할까? 

엔지니어는 점점 거칠어져가는 블랙레이븐의 통신을 흘려들으며 남은 기기를 체크했다. 

램프 하나에 한숨이 하나 장비 두개에 욕설이 둘, 관제실내의 장비체크를 마친 에이전트가 체크 리스트를 갱신하며 몸을 돌려세웠다. 

시간에 여유가 조금 남아있으니 다음은 복도에 있는 장비들을 하면서 다른 동료들을 보조하는건 어떨까? 

엔지니어는 문득 수로쪽 체크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왜 소식이 이렇게 없지? 연락이라도 한번 넣어볼까?

하지만 생각이 마침표를 찍기전에 검은 인영이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커다란 덩치의 블랙레이븐과 정면으로 부딪칠뻔한 탈틴의 엔지니어가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올려다보았지만 요원은 탈틴에게 사과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엔지니어를 지나쳐 계단쪽으로 걸어올라갔다. 

콧털뽑힌 사자의 얼굴이된 블랙레이븐이 거침없는 속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킹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불쾌함이나 어딜가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경보등이 하나 둘씩 불을 밝히는 것 마냥 다른 에이전트의 요원들도 하나 둘씩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아, 이거 위험하다. 무언가 막을 방도를 찾는다급한 눈빛들이 블랙레이븐과 킹의 사이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탈틴의 엔지니어. 시선이 쏟아져왔다.

엔지니어는 남아있던 사탕을 씹어 삼킨뒤 처음부터 그 방향에 볼일이 있었던 사람마냥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돌렸다. 이에 들러붙은 사탕조각은 순간적으로 치솟은 열기에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목구멍이 죄여들고 뒷목이 홧홧하게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이직이라니 강아지 풀뜯는 소리, 그냥 퇴사하고 싶다. 

누구나 가슴에 하나씩은 품고있다는 삼천원 짜리 봉투속 사직서와 늘 꼰대질만하는 타라와 에일레흐 사이에서 머리를 감싸쥐는 안드라스 부장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죄송해요 안드라스 부장, 하지만 위험수당에 이런 항목은 들가지도 못하잖아요. 

상상속의 안드라스가 침울한 푸른 조명아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현실의 붉은 알람이 꺼지는 것은 아니었다.

엔지니어가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는 동안에도 블랙레이븐의 요원은 성큼성큼 발을 뻑어 이미 킹의 자리옆까지 다가서 있었다. 

옆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달라지는 체구의 위압감, 거기에 검은색 일색의 제복을 입고 있기까지 하다.

누군가과 즐겁게 이야기하며 자신의 화면에만 집중하고 있던 킹도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을 감지했는지 흥이 깨졌다는 얼굴로 헤드폰을 목으로 끌어내렸다. 


통신을 주고 받는 내내 헛기침을 하던 요원이 한걸음 가까이 다가와있었다. 

킹이 지금 뭐하자는 건데? 하는 말소리를 대놓고 중얼거리며 블랙레이븐을 올려다보았다. 

블랙레이븐의 눈이 가늘게 흐려졌다. 관제실의 대화소리가 점점 줄어들고 시선이 모여들고 있었다. 

누가 말통하는 블랙레이븐좀 데리고 와봐. 이미 갔어요 지금오고 있데요. 그럼 시간좀 더끌어보라고 해. 지금 가고 있잖아요. 저기 저 탈틴의..


서로가 노려보는 것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 긴장된 순간, 누가 먼저 말을 꺼내는지가 도화선이 타들어가는 방향을 결정지을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누군가가 환한 웃음과 함께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보고서 가지고 왔습니다-!”


“뭐.”


“어…음..A구역 체크가 지금 끝난 것 같아서 말이죠..?”


“같아?”


“아-, 아뇨아뇨아뇨. A구역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엄.. A구역은 끝났고요. 네, A는 끝났어요”


아직 체크가 전부 끝나지는 않았지만 지금 들고 있는 물건은 이것밖에 없었다.

엔지니어는 뒷통수가 뚫릴 것같은 따가운 눈빛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태블릿을 들어올려보였다.

차례를 빼앗긴 블랙레이븐의 후폭풍은 무서웠지만 엔지니어에겐 최고의 방어력을 가진 이 태블릿이 있었다. 

이름은 명분, 부가효과는 업무의 우선권.

엔지니어는 최대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 킹을 바라보았다. 봐주세요. 이건 수당에도 안들어간다고요.

 상상속의 시네이드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어보였다. 네 안됩니다. 가슴속 종이봉투가 파르르 떨리는 느낌이었다.


“그럼 전송을 하면 되는거지 왜 그걸 들고와서….”


이 최강방어태블릿의 단점은 박자가 안맞으면 종잇장보다도 못하게 되어버린다는 것. 

인상을 찡그리며 엔지니어를 쫓아내려던 킹이 아직까지도 돌아가지 않고 서있는 블랙레이븐을 올려다보았다.

반쯤 걸쳐져 있던 헤드폰에서 룩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관제실을 비추는 카메라는 없었지만 룩은 그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며 숨이 넘어가도록 끅끅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냥 그대로 숨통이 넘어가버리면 좋을텐데. 킹은 미간을 꾹 누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제발요, 엔지니어가 들키지 않도록 살짝 화면을 흔들어보이고 있었다. 


“……… 아니야… 그래..그냥 거기 내려놔.”


“아…그런데.. 저기.. 그런데 말이죠..? 아직 그 다음구역은 안끝난거라서.. 다시 들고가야하는데…”


너 그럼 왜 들고 온거야. 킹이 고개를 번쩍 들어올리며 엔지니어를 노려보았다. 

또다른 블랙레이븐이 경보의 속도로 관제실의 문을 박차며 들어왔다. 

그야말로 기적의 타이밍, 벌컥 열리는 문소리에 시선을 돌렸던 킹도 뭔가 짚이는게 생각났는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헤드폰으로부터 사각사각거리는 잔소음이 어른거렸다. 

사람의 목소리이지만 음량이 작아 뭐라하는지 엿듣기는 어려운 작은 소음이었다. 

입을 벌렸다 턱을 앙다물기를 몇차례 반복하기를 십수초, 킹은 거짓말처럼 의자를 돌리며 화면앞으로 턱을 괴였다.

넘어가? 넘어가는 거야?! 모두의 염원이 정말로 통한것인지 킹이 퉁명스럽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짜증은 팍팍 내고 있지만 어째 꿍짝을 잘 맞춰주는 상냥한 모습이었다. 

아니 이걸 상냥하다고 볼 수 있는걸까? 하지만 그 최악은 모면한 기적을 눈앞에서 목격한 엔지니어는 이제 다른 의미로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지금 이거 생명수당 지급되나요?! 상상속의 시네이드가 고민하고 있었다. 

일단 손에 든 그거나 내놔. 상상의 보좌관은 킹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얼른 내놔, 스캔하게. 끝나면 다음구역으로 내려가고.”


두번 재촉하는 목소리에 핫하고 현실로 돌아온 탈틴의 엔지니어가 얼른 태블릿을 내밀었다.

언뜻 들리는 헤드폰에서 누군가가 웃음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고 있었지만 내용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헤드폰 안쪽에서 웅얼거리는 소리일뿐.

태블릿의 정보를 옮겨가는 간간히 고개를 기울여 누군가의 음성에 대답하긴 하지만 내용이 너무 단편적이라 무슨말인지조차 추측할 수가 없었다.


응, 알아. 안다고. 지금 그래서 하고 있잖아. 누군가의 명령에 대한 응답도 아니고 부탁을 받아주는 것도 아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타이르는 누군가에게 툴툴거리는 분위기, 하지만 너무 대놓고 바라보았던 탓일까, 킹이 다시 헤드폰을 끌어올리고는 삐딱한 시선을 보내왔다.

아, 실수실수. 기껏 온화하게 업무로 복귀한 사람을 다시 들쑤셔 좋을 것은 없으니까. 

엔지니어는 딴청을 피우는 척 뒷짐을 지며 다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의 블랙레이븐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엔지니어는 다소 여유가 생긴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었다.


블랙레이븐은 왜 저런 꼬맹이에게 쩔쩔매야하는거냐며 잔뜩 불만이 생긴 눈치. 

어쩌겠어요, 세상이 재능위주로 돌아가는 시대인데. 

엔지니어가 어깨를 으쓱거리는 동안 그의 뒤로 다른 블랙레이븐의 요원이 다가왔다. 

아 그럼 담당자에게 물어야지 누구에게 물어봅니까? 이쪽도 목소리를 낮출 생각이 없는건지 속삭이는척 쉰소리만 잔뜩 섞은 짜증이 터져나왔다. 

시기와 장소가 좋지는 않지만 확실히 그의 말이 옳다. 

엔지니어는 마음속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블랙레이븐의 말에 동의했다. 


맞다. 원래 이런 트러블이 일어나면 해당사항을 담당하는 요원에게 물어보는게 정석이겠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면으로 적혀진 딱딱한 잣대일뿐. 크고작은 에이전트들이 여럿이 모여 정형성을 잃어버린 난장판에는 맞지 않는규칙이었다. 

애초에 그들을 단속해야할 킹부터가 딴짓하다 걸리지 않았는가. 

이 일에 대해 물어볼 사람은 이쪽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 굳이 찾아야한다면 당신의 위, 킹의 아래 어딘가에 있는 우유부단하면서 유능한 그리고 부탁에 약한 환상속에 존재할법한 정보계열의 누군가. 그런 사람이 있을까? 

소란을 관찰하던 시선들중 하나가 집요하게 엔지니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지 안될말씀, 엔지니어는 헛기침을 하며 이름표를 슥슥 닦아내었다. 

나는 이것만 해결하고 다른구역으로 빠이빠이다..! 엔지니어는 눈을 부릅뜨고 두번은 휘말리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었다. 익명의 누군가들이 아쉽다는듯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킹이 의미없는 스캔으로 시간을 끄는동안 트러블을 막기 위해 급하게 관제실에 들어온 블랙레이븐은 동료의 어깨를 두드린뒤 무언가를 속삭여왔다. 

내용전달은 끝낸 블랙레이븐이 아이를 달래는 손길로 그의 어깨를 문쪽으로 돌려세웠다. 

돌아선 불랙레이븐이 헛기침을 두어번 큼큼 거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딱히 잘못된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자리이동을 권유받은 것이 어쩐지 불쾌한 모양이었다.

그를 멀뚱히 관찰하던 엔지니어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사탕드릴까요?”



엔지니어의 호의에 블랙레이븐은 굉장히 기분이 상한 얼굴로 문을 향해 돌아섰다.

애도 아니고 삐지기는. 탈틴의 엔지니어는 눈을 세모낳게 뜨며 블랙레이븐의 뒷모습을 흘겨보았다. 

혹여라도 또 트러블이 일어날까 얼른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입이 튀어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사탕을 까넣었기 때문이지 불만이 남아서가 아니다.

이번 사탕은 좀 오래가기를. 하지만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기 무섭게 신경질적인 킹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아-! 아직 아무것도 안했다고..?! ”


그럼 그렇지. 그 성질머리가 그냥 참고 넘어갈리가 없지. 

깜짝 놀라 깨문 사탕이 반으로 쪼개져버렸지만 차라리 잘 되었다. 엔지니어는 납작해진 사탕을 입속에 잘 수납한뒤 아무것도 안먹은척 태연히 태블릿을 돌려받았다. 

여유시간도 사라지다 못해 오히려 시간을 빼앗겨 버렸다. 내부체크를 먼저 끝낸것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얼른 복도로 도망가자. 그러나 엔지니어의 바램과는 다르게 킹은 태블릿을 놓지 않은채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킹이 헤드폰을 반쯤 잡아내리며 엔지니어를 돌아보고 있었다.


“야”


최소한 직함으로 불러주세요. 그래도 타 에이전트 요원인데.. 탈틴의 엔지니어는 눈물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네?”


나약한자여, 그대의 이름은 말단 일지어다. 탈틴은 태블릿을 꽉 끌어안으며 양쪽 어금니사이로 사탕을 숨겨넣었다. 

일하기 너무 힘든 직장이다. 물론 사탕먹으며 일할 수 있는건 좋지만서도.. 킹이 엔지니어에게 손을 내밀어보였다.


“...... 나는 왜 안 권해”


“....”


“나도 사탕줘”



킹의 손목에 채워진 네모난 액정속에서 체스말 모양의 아이콘 두개가 미친듯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엔지니어는 주머니속 사탕의 반을 털린채 울상이된 얼굴로 관제실을 떠나갔다

킹은 소복하게 쌓인 전리품을 만족스럽게 바라본뒤 다시 여유로워진 얼굴로 화면을 끌어당겼다.

까드득 부서지는 사탕의 소리가 이어폰 너머로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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