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즈밀레)별의 어항3

마비노기/별의 어항 2019. 5. 8. 16:58

카즈윈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소설을 확인해보려했지만 어플은 다시 그 꼬리를 문 뱀의 아이콘을을 돌리기 시작했다. 

잠시후 꾸직 하고 장난스러운 알림음이 울리며 새로운 메세지가 떠올랐다. 

근처에서 ‘별의 어항’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매번 어항이 있는 거실에서 업뎃되기를 기다렸던 탓에 눈치채지 못했었지만 별의 어항과 연동된 이야기는 근처에 어항이 있어야만 열람이 가능했던 모양이었다. 

카즈윈은 사용설명서 라는 가제를 붙인 메모어플에 네번째 규칙을 적어 넣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카즈윈이 갑작스럽게 인상을 찌푸린탓에 그날 점심이 중화요리에서 갈비탕으로 급변경되었지만 카즈윈의 팀원들중 그 누구도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그 날 갈비탕은 맛있었다.

 

묘하게 친절한 팀원들의 배려에 배려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온 카즈윈은 저를 반기는 듯한 환한 조명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신발을 벗어던졌다. 

거실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별의 어항이었다. 

어둠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별의 어항을 발견한 카즈윈은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카운트다운 시계는 이미 00:00:00. 점심부터 정지되어 있던 시계는 11화가 업데이트 되었음을 알리며 조용히 카즈윈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즈윈은 홈화면으로 돌아가 메모어플을 누른뒤 네번째 규칙을 업데이트했다. 

별의 어항의 규칙 그 네번째. 어항의 불은 소설이 업데이트 되었을때만 밝혀진다. 

카즈윈은 대체 왜? 하고 의문을 가지면서도 말없이 자리를 잡고 앉으며 메모어플을 종료시켰다. 

구겨지고 있는 바지가 제법 마음에 들었던 것이고 더 늦기전에 샤워부터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이 잠시 스쳐지나갔지만 눈은 빠르게 돌아가는 뱀모양의 아이콘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항에 관련된 어플치고는 특이한 캐릭터선정이지만 자꾸보다보니 익숙해진 아이콘이었다.

꼬리를 물고 돌아가던 뱀은 곧 사라지고 화면 가득 텍스트가 올라왔다. 밀레시안의 이야기였다. 

 

밀레시안은 40시간동안의 지루한 기다림을 견디기 위해 던바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관광도 해본 사람이나 즐긴다고 책을 의뢰한 첫날에는 조금 느긋하게 돌아다니던 밀레시안은 결국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잡화점의 아르바이트를 수행했고 이후 의류점, 힐러집, 식료품점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티르코네일에서보다도 더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냈다. 

스스로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있는지 밀레시안은 자신이 일 중독일리 없다며 현실을 부정했지만 정신을 차렸을때는 이미 해가 저무는 시각. 

던바튼의 사제, 크리스텔이 밀레시안이 아슬아슬하게 마감시간 내에 달걀 15개를 가져온 것을 칭찬하며 약속한 성수 4병을 내밀어보이고 나서야 밀레시안은 벌써 오후 6시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지고 있는 도시의 동쪽, 아이라의 서점에도 막 가로등이 밝혀지고 있는 시각이었다. 

허둥지둥 성수를 챙겨넣은 밀레시안이 서점에 도착했을때는 벌써 8시. 

카즈윈은 시계를 흘끗 보며 스크롤을 내렸다. 

 

밀레시안은 아이라에게 양손을 모아보이며 깜빡 잊어버렸노라고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아이라는 서점주인이라기보다는 약속시간을 어긴 친구를 대하듯 토라진 표정으로 밀레시안을 흘겨보고 있었다. 

아이라의 품에는 한참 전에 도착한 절판도서 ‘영원의 땅, 티르나노이’가 안겨져 있었다. 

아이라는 밀레시안씨가 급하다고 해서 제가 얼마나 애를 쓴지 아세요? 이틀이라고 하면 실망할까봐 일부러 40시간이라고 까지 줄이고 줄여서 빠듯한 시간으로 말씀드린건데 하고 투덜거렸고 밀레시안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아이라를 올려다 보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양손으로 모은것이 때아닌 귀여운 척이었지만 밀레시안이 노리는 효과는 그것이 아니었다.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 아이라가 자식을 슬쩍 살펴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 밀레시안은 넉살좋은 목소리로 아이라를 회유하며 손에 들린 반짝이는 포장지를 흔들었다. 

솜씨 좋게 포장된 라일락빛 반짝이 리본이 가로등불을 반사시키며 아이라의 시선을 유도했고 아이라는 그게 뭐냐는듯이 팔짱을 풀고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이 들고 있는 것은 대 아이라용 결전뇌물 ‘세계의 명시’였다. 새벽 일찍 잡화점 아르바이트를 도우며 잡화점의 주인 발터가 아이라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된 밀레시안은 넌지시 아이라가 좋아할 법한 물건을 물어보았고 오후 늦게 아이라와의 약속시간을 한참 넘겨버렸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서점이 아닌 잡화점으로 달려갔다. 

발터가 밀레시안의 필사적인 표정을 보자마자 상황을 이해한 것은 두말 할 것 없는 이야기였다.

발터가(비록 한숨을 내쉬었지만) 일반 판매용이 아닌 특별부록 바이올렛 꽃이 압화되어있는 책갈피가 동봉된 한정판 세계의 명시를 꺼내준 덕분에 밀레시안은 2시간이나 더 늦어졌음에도 용기 백배의 미소를 지어보일 수 있었다. 

밀레시안이 살살 눈웃음을 지으며 아이라에게 애교반 애원반으로 매달리자 아이라는 못이기는 척 시집을 받으며 품에 꽉 끌어안고있던 책을 내어주었다. 

밀레시안이 책값을 치르려 하자 아이라는 손을 내저으며 밀레시안을 만류했다. 총판에서 책이 너무 오래되었다며 값을 받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었다. 

밀레시안은 그토록 어렵게(반쯤은 자신의 실수로)얻은 책을 더는 기다릴 수 없다며 광장 한켠에 주저 앉아 책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입고 있는 옷이 구겨지는 것이 조금 신경쓰였지만 그래도 읽고 싶은 마음이 한층 앞섰던 모양이었다. 

 

카즈윈은 이어지는 ‘영원의 땅, 티르나노이’의 내용을 대충 스크롤로 내려버리며 간단하게 내용을 파악했다. 

책은 낙원이니 영원이니 하는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지만 결국은 그런거 없다. 라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었고 카즈윈은 책의 세세한 내용보다는 밀레시안의 반응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카즈윈과 달리 밀레시안은 진지하게 책을 정독한뒤 낙원. 낙원이라.. 하고 읊조리며 책을 덮었다. 

 

밀레시안은 책의 겉 표지를 다시 바라보았고 저자, 레슬리의 이름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젊음, 영원, 낙원. 노쇠와 죽음의 힘이 닿지 않는 땅. ‘영원의 땅, 티르나노이’의 저자 레슬리와 마찬가지로 카즈윈은 그 단어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느니 다른일을 찾아보는게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밀레시안은 나지막히 신음소리를 삼키며 몸을 웅크렸다. 

뭐가 그렇게 진지한데? 카즈윈은 밀레시안의 캐릭터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며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이 땅(에린)에 없고 이 곳의 주민(다난)들이 바라며 어딘가에 있을, 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낙원의 힘. 

밀레시안은 고민했다. 그 낙원이라는거, 정말 어떠한 물리적 장소에 대한 이야기인가. 

세계를 정의하는 범위는 사람마다 달랐고 시대마다 달랐다. ‘영원의 땅,티르나노이’의 저자 레슬리는 낙원의 실재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밀레시안에게는 영원의 증거가 있었고 불멸을 증명할 수도 있었다. 

밀레시안은 눈물을 의심했고 분노를 경계했다. 그들이 말하는 낙원의 모습은 지나치게 밀레시안과 닮아있었고 밀레시안은 낙원을 그리는 이들의 형태와 동일했다. 

밀레시안은 책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영원의 땅, 티르나노이’의 저자 레슬리가 말했다. 

낙원의 삶에서는 절대로 타인이 묘사되지 않는다. 오로지 개인 혹은 그와 밀접한 사람의 삶만이 묘사된다. 

한 사람의 낙원은 누군가의 지옥될 수 있다면 누군가의 지옥은 다른 이의 낙원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낙원은 개인이며, 개인은 세계. 우리들은 각각의 별과 같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모임(흐름)을 소울스트림이라고 부른다. 

밀레시안은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밀레시안은 ‘그들’이라고 말하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느새 한밤중이된 던바튼의 하늘에는 유난히도 두꺼운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것 처럼. 밀레시안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구름을 꿰뚫어볼 듯 응시하며 혼잣말을 속삭였다. 

밀레시안은 소울스트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카즈윈은 고백하는 것같기도 하고 선언같기도 한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밀레시안이 갑작스럽게 말한 불멸의 비밀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설정이 있었던가? 카즈윈은 자신이  앞선 내용중에 뭔가 놓친것은 아닌가 고민했지만 이내 머리를 가로저으며 스크롤을 완전히 아래로 내려버렸다.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다. 

복선이 있었을수도 있고 이제부터 설명이 이어질 수도 있지. 카즈윈은 소설을 깊게 탐독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운 설정에도 혼란스러워하지 않았고 이내 밀레시안의 마지막 문장을 가벼히 흘려넘겼다.

굳이 신경을 쓴다고 한다면 기껏 이렇게까지 많은 공을 들여 불멸이라는 비밀을 공개했으니 염두에 두는 정도. 정 아니면 나중에 외전으로 어떻게 불멸이 되었는지 설명이라도 덧붙이겠지.

카즈윈은 카운트다운이 내려가는 것을 보며 메모장 어플 근처에서 망설였지만 굳이 밀레시안의 설정에 관한 메모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두번의 소설이 더 지났고 카즈윈은 마침내 다섯번째 규칙을 메모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그것은 소설을 읽는 도중에 든 의문이며 물음표가 찍힌 어중간한 준규칙이었다. 

별의 어항 사용설명서 다섯번째 규칙? 이스터에그? 이야기 수정기능? 카즈윈은 잠시 고민하다가 괄호와 함께 5-2번 규칙을 덧붙였다. 

다섯번째 규칙 그 두번째. 한번 읽은 이야기(영혼의 정보?)는 다시 열람할 수 없다. 

카즈윈은 홈키를 두번 눌러 다시 별의 어항 어플로 되돌아갔다. 

 

밀레시안은 반호르라는 마을에 있었고 그중에서도 바리던전이라는 깊은 광산아래 들어가 있었다. 

갈색의 통행증을 제출하고 나서야 들어 갈수 있는 이 숨겨진 광산에는 박쥐나 거미, 쥐새끼등이 아닌 그렘린과 임프, 위습이라는 이상한 몬스터들이 가득 숨겨져 있었다. 

미로같은 복도의 중간중간 쇠사슬이 얽혀진 문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 문을 열기 위해서는 몬스터들이 숨어있는 상자를 열어야만 했다. 

카즈윈이 다섯번째 규칙에 대해 의문을 가진 것은 그런 전투의 도중이었다. 

밀레시안은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지 몇번이나 부상을 입으며 미로를 돌파했고 오래지나지 않아 누적된 부상과 피로에 괴로워하며 복도 중간에 주저앉았다. 

장비라고는 롱소드 하나, 노련한 모험가들이 입는다는 경갑옷은 커녕 기본적인 가죽장갑도 없었고 신발조차 튼튼한 하이킹용 신발일뿐. 

키가 작은 그램린들이 집요하게 밀레시안의 다리를 노리며 공격해왔기 때문인지 밀레시안의 신발은 벌써 피투성이가 되었고 밀레시안은 자신이 남기며 걸어온 피빛 발자국을 보며 애써 비명을 억누르고 있었다. 

두려움과 절망감이 가득한 묘사들이었다. 

카즈윈은 설마하니 여기서 죽겠나 싶은 마음으로 조력자(이를테면 시드스넷타에 은거하고 있는 그 드루이드)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소설속의 밀레시안에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밀레시안은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억지로 다리를 동여매어 자리에서 일어났고 벽을 짚으면서도 끝까지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그 앞에서 훨씬 더 위험한 몬스터를 만나게 되면? 카즈윈은 밀레시안의 행동이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모험가의 소설에서는 대충 이런 느낌으로 뭔가 사건이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저도모르게 미간을 찌푸린채 소설을 읽고 있던 카즈윈은 아 혹시 그건가 하고 잠시 손가락을 멈춰세웠다. 며칠 전에 갑자기 등장했던 그 불멸의 설정. 

카즈윈은 그거라면 굳이 조력자가 나타나지 않아도 밀레시안이 홀로 이 난관을 해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가볍게 스크롤을 내리기 시작했다. 카즈윈의 예상은 대부분 정답이었다. 

하지만 하나의 오답이 있었고 카즈윈은 밀레시안이 새로운 방에 들어설 때까지 그 오답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우선 상자를 열자마자 첫번째 정답이 튀어나왔다. 부상중에 맞닥뜨리게된 훨씬 더 강한 몬스터였다. 

나타난 몬스터는 단 한마리. 눈도 귀도 없이 입과 겉껍질만이 기괴할 정도로 단단하게 성장한 거대한 벌레는 자이언트웜이라고 불리는 하급 마수였다. 

자이언트웜은 방안에 나타나서도 한참동안 가만히 서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밀레시안이 살짝 발을 떼려는 순간 움찔하고 머리를 치켜든 거대한 벌레는 마치 땅속을 헤엄치는 것처럼 몸을 위아래로 뒤틀며 밀레시안을 향해 달려들어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인식이었다. 

사실 자이언트 웜이 실제로 파고드는 것은 단단한 땅 속이 아닌 제 커다란 몸집아래 가려진 검은 에르그의 공간이었고 이러한 불안정한 그림자를 두르고 있는 특성으로 자이언트 웜은 튼튼한 외피에도 불구하고 마법앞에 촛농처럼 녹아버린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이언트 웜을 처음보는 밀레시안도 카즈윈도 이러한 세세한 사정을 알고있을리 없었다.

밀레시안이 한번이라도 마법을 사용했었더라면 최소한 첫 공격을 카운터로 흘려냈더라면. 

하지만 밀레시안은 처음 만나는 몬스터에 당황하여 무작정 검부터 내리치고 있었고 자이언트 웜은 거대한 몸체답지 않은 민첩함으로 그 검을 피해내었다. 혹은 튕겨내었다. 

보다 강하게 보다 튼튼하게. 날카로운 비늘처럼 겹겹히 쌓여진 자이언트웜은 검을 피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묵직하게 머리를 휘저어 밀레시안의 검을 후려쳤다. 

역으로 전해져오는 찌릿한 통증에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정도의 충격이었다. 

밀레시안은 검을 놓치지 않은 것에 안도했지만 그런 커다란 빈틈을 자이언트웜이 놓칠리 없었다. 

 

카즈윈은 밀레시안이 자세를 바로잡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런 카즈윈의 생각에 이어 밀레시안 또한 이 다음 닥쳐올 공격에 대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이언트웜은 검을 튕겨내었을때와 같이 거센 몸짓으로 다시한번 머리를 휘둘렀고 밀레시안은 자이언트웜의 강력한 일격에 날아가 반대편 벽에 부딪쳤다. 

머리를 부딪친 밀레시안은 바닥에 널부러지고 나서야 자이언트웜이 움직일때 땅을 파고드는 진동이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겉껍질에 작은 모래알갱이 따위가 으적거리는 소리는 이미 코앞. 

가까스로 눈을 떴을때 퇴화된 눈과 귀따위를 뒤덮을만큼 커다란 입이 밀레시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촘촘히 이중 삼중으로 박혀있는 둥근 원형의 이빨들은 하나같이 날카로워보였다. 

밀레시안은 이를 악물었지만 눈앞에 닥쳐오는 공포를 이겨낼수는 없었다. 콰직. 

 

카즈윈은 저도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묘사를 읽을지 그냥 넘길지 고민하려는 순간, 누군가 카즈윈의 현관문을 두드렸다. 

치킨님이었다.

설정

트랙백

댓글

카즈밀레)별의 어항2

마비노기/별의 어항 2019. 5. 8. 16:47

카즈윈은 그제서야 어항에 자신의 피 한방울을 섞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냈다. 

카즈윈은 다시 어항의 뚜껑을 열었고 커터칼을 집어들었다. 

잠깐만. 카즈윈은 칼날을 밀어올리기에 앞서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이대로 거실 한가운데 둬야하나? 하지만 후회는 늦었고 물이 들어찬 어항은 너무 무거웠다. 

카즈윈은 거실의 테이블 한 가운데를 차지한 수조를 내려다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차피 집에 오는 손님도 별로 없었고 거실 어디에도 이 무거운 수조를 올려놓을 만한 튼튼한 선반은 없었다. 

그렇다고 나름대로 결정(카즈윈은 어항이 결정키우기 과학세트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을 키우는데 온도가 자주 오르내리는 바닥에 두기도 애매하고.. 카즈윈은 다소 무책임하지만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로 수조를 거실 한 가운데에 두기로 결정했다. 

비록 식탁 대용으로 쓰던 테이블이었지만 어차피 집에서 먹는 것이라고는 맥주와 그 안주거리들 약간 뿐이었다. 

카즈윈은 다시 커터칼을 밀어올려 망설임없이 손가락 끝을 찔렀다. 

익숙치 않은 탓에 커터칼을 잡은 손이 조금 떨렸지만 금방 붉은 핏방울이 솟아올랐다. 

한 방울이 어느정도지? 카즈윈은 피가 베어나온 손가락을 물에 넣고 흔들어야하는건지 혹은 상처를 쥐어짜서 핏방울을 떨어트려야하는 것인지를 고민했다. 

손을 넣으면 잡균같은것이 들어가서 결정에 영향을 끼칠것 같은 느낌이었기에 카즈윈은 두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가만 그럼 커터칼이 아니라 소독된 바늘같은거로 찔렀어야 했나? 카즈윈은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깨달음이었다. 

퐁 하고 물방울 소리가 울리는 듯한 환청속에 카즈윈의 핏방울이 어항속에 떨어져 내렸다. 

 

카즈윈은 피가 정량보다 더 들어갈까 염려하며 급히 손을 거두었고 먼지따위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뚜껑을 닫았다. 뭔가 정밀한 과학 실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가 느끼는 그대로 기묘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덮개가 닫힌 수조속에 조명이 켜졌고 핸드폰에는 연동중이라는 팝업창이 떠올랐다. 

꼬리를 문 뱀의 아이콘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가운데 마침내 수조속에 첫번째 반응이 일어났다. 

처음은 검정이었다. 어항속의 투명한 액체 소울스트림은 카즈윈의 혈액에 반응하듯 검게 물들었다. 

조명이 밝혀져 있었기에 카즈윈은 이 액체속에 검은 알갱이가 가득 차올랐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고 그 다음 변화는 하양으로 이어졌다. 

두번째 변화는 조금 느리게 일어났지만 카즈윈은 참을성있게 수조를 관찰했다. 

수조는 금방 희뿌연 알갱이로 가득찼다. 서로 맞부딪치기 시작한 알갱이들은 점점 굵어지며 수조의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알갱이들이 뭉치고 남은 자리는 노란색 반투명한 액체가 남아있었고 모여든 하얀 알갱이들은 이내 단단한 구체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둥글기도 했고 납작하기도 했으며 어느 반원을 갈라낸 내부의 모형이기도 했다. 

노랗게 된 액체는 잠시 녹색빛을 띄었고 녹색빛에 둘러쌓인 흰 모형은 붉게 물들었다. 그게 전부였다. 

어느새 투명해진다 싶었던 연녹색빛의 액체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어두워졌다. 

아마 저 부분이 별의 바깥 우주의 하늘인 모양이었다. 

이따금씩 수조 표면에 출렁이는 물결이 보이지 않았다면 아무도 이 안이 액체로 가득차 있었는지 모를 만큼 투명한 액체의 중앙에는 아마도 별이라고 불러야할 모형이 들어 앉아있었다. 

검정일색인 우주와는 달리 별에는 다채로운 색상이 가득했다. 

푸른것은 아마 바다였고 그 양 옆에 자리한 두가지 튀어나온 것은 대륙이었다. 

양 대륙 사이에 자그마한 섬이 자리하긴 했지만 카즈윈은 이 별이 턱없이 작다고 생각했다. 

피를 너무 적게 넣었나? 누군가에게 뽐낼 생각은 아니었지만 카즈윈은 기왕 장식품이라면 크고 화려했으면 좋았다고 후회했다. 

하지만 별은 완성되었고 핸드폰 또한 연동이 성공했다는 팝업창을 띄워보였다. 

카즈윈은 휴지로 상처가 난 손가락을 틀어막으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야기에는 세가지 버전이 있었다. 서쪽대륙의 북쪽부터 시작하는 처음부터와 동쪽대륙 사막에서 시작하는 중간부터, 그리고 벨바스트라는 이름의 작은 섬에서 시작하는 마지막 이야기. 

카즈윈은 마지막 선택지를 제처놓은 채 중간과 처음 사이에서 고민했다. 

기왕 시작하는 이야기 처음부터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앞부분이 지루하다면 중간부터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카즈윈은 진지하게 고민했고 결국 처음부터 보는 것을 선택했다. 다시한번 뱀모양의 아이콘이 돌아갔다. 

팝업창으로 세이브 포인트가 기록되었습니다. 라는 메세지가 떠오른 카즈윈은 확인을 누르며 첫 이야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기본적인 홈화면뿐. 

카즈윈은 별의 어항이라는 아이콘을 연타하며 어플이 재 실행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동안의 침묵끝에 돌아오는 팝업창은 이야기를 불러오는중. 다음 시간이 지난 후 제 1화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 23:59:xx 

 

카즈윈은 인상을 찡그렸다. 결국 하루에 하나씩이라는 소리였으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4만원? 하지만 별이 형성되는 과정이나 어플의 완성도는 이미 충분히 4만원의 값어치를 해내고 있었다. 

가장 허접해 보였던 수조도 뭔가 알 수없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니 카즈윈은 이 이상바라는 것은 사치라며 기대감을 접어내렸다. 그리고 수조의 불이 꺼진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카즈윈은 조명이 꺼져 어두워진 수조를 바라보다가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나름대로 칭찬하기 무섭게 이 모양이라니. 

카즈윈은 어떤 베터리로 교체해야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어항의 뚜껑을 두드렸다. 수조의 밑바닥을 살펴보기도 했고 수조의 뚜껑을 떼어내기 위해 틈새에 손톱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카즈윈의 행동이 이어지기 무섭게 핸드폰의 강한 진동소리가 울렸고 알 수 없는 팝업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경고! 별이 형성된 어항을 열지 마십시오. 영혼의 기록으로 복원 된 별은 시간이 단절된 세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수조를 억지로 열거나 손상시킬 경우 별이 소멸할 수 있습니다. 

경고! 별이 형성된 어항을 두드리지 마십시오. 별은 아주 섬세한 물건으로 과한 충격이 가해질 경우 소멸할 수 있습니다. 

경고! 별이 형성된 어항을 옮기지 말아주십시오 부득이하게 수조를 이전할 경우 핸드폰 어플을 통해 충격대비 이전신청을 접수한 뒤 이동하시길 바랍니다. 

 

카즈윈은 큼지막한 글씨로 띄워진 이전하시겠습니까? 라는 메세지를 보며 눈쌀을 찌푸렸다. 뭐가 이렇게 복잡한건지. 

카즈윈은 어플에 도움말코너가 있는지를 살펴보았지만 팝업창을 제외하고 그가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카즈윈은 이전신청을 취소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카즈윈은 비뚤어진 수조를 다시 바로잡았고(흔들지 말라는 경고팝업창은 어김없이 떠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돌아갔다. 

별을 만드는 과정에 푹 빠져 잊고있었지만 시간은 어느새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카즈윈은 여느때보다도 짙은 피곤함을 느끼며 침대위에 쓰러졌다. 

베개속에 머리를 파묻었던 카즈윈은 다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23:52:xx 카즈윈은 빠르게 줄어들어가는 시계를 보며 눈을 감았다. 

기대되는 걸까.. 아니면 단순한 흥미인걸까. 카즈윈의 의식이 흐려지는 동안 선명하던 핸드폰 화면도 점점 흐려져갔다. 

 

카즈윈이 다시 눈을 뜬 것은 다음날 아침, 알람이 울리는 시각이었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잠들었던 카즈윈은 어김없이 정해진 시각에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밤새 충전하는 것을 잊어버린 핸드폰을 급하게 충전기에 연결한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쓸어내리는 카즈윈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역력했다. 

많이 피곤했던가? 내가? 그렇게까지? 고민을 오래할 새도 없이 카즈윈은 다리를 움직여 화장실로 향했다.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울리고 카즈윈은 망설임없이 그 사이로 머리를 숙였다. 

물 온도가 평소보다 조금 차가웠지만 카즈윈은 그 정도가 딱 좋다고 생각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오늘도 바쁜 출근길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간 하루. 카즈윈은 일부러 느즈막히 퇴근하여 집으로 되돌아왔다. 

조금 더 일찍 퇴근했을 수도 있고 평소처럼 퇴근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핸드폰에 남아있는 시간을 보는 순간 어쩐지 자신이 이 어항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충동적으로 구매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심심풀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카즈윈은 원인 모를 집착을 버리기 위해 일부러 핸드폰에 표시된 시간을 무시했다. 

그렇게 느즈막히 돌아온 집의 도어락이 열리고 현관안으로 들어섰을때는 이미 한밤중이었고 어두운 집안에는 낯선 조명이 밝혀져 있었다. 어항이었다. 

어제 불이 꺼져 있었던 어항은 언제 어두워졌었냐는듯 밝은 빛을 빛내며 별을 비추고 있었다. 

흔들흔들 돌아가는 별의 모습은 빛을 받아 퍽 아름답게 보였다. 별의 주변에는 전날 발견하지 못한 두개의 부속물이 떠다니고 있었고 카즈윈은 어항에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그것이 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붉은색과 푸른색. 핸드폰에 진동이 울리며 각각의 달이 이웨카와 라데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갑자기 왠 설명? 혹시 이게 1화? 카즈윈은 실망을 감추지 않으며 팝업창을 닫았지만 어플은 그렇지 않다는듯 00:00:00이라는 숫자를 내보였다. 1화는 아직 시작도 안했다는 소리였다. 

 

카즈윈은 옷을 갈아입는 것도, 자신이 어항에 대해 과하게 집착하지 않으려 했다는 결심도 잊은채 거실에 주저앉았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내리며 다른한손으로는 핸드폰을 조작했고 로딩이 서둘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목이 탔다. 맥주라도 마실까. 카즈윈은 씻고 맥주를 마실지 맥주를 마시고나서 씻을지를 고민하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야기 구성에만 24시간이 걸리더니 1화를 로딩하는데에도 여러가지 업데이트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카즈윈은 귀찮음과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고 이내 5분도 안되어 다시 되돌아나왔다. 

조류의 목욕보다도 빠른 샤워였다. 

카즈윈은 물기는 알아서 마른다는 생각과 함께 물기 가득한 발로 걸어나와 안방으로 들어갔다. 

느슨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다시 거실로 나온 그의 손에는 어느틈엔가 시원한 맥주가 들려져 있었다. 

설마 몇 줄이 전부는 아니겠지. 카즈윈은 적어도 맥주 몇모금은 넘길만큼 긴 이야기이기를 바라며 어항옆에 엎어두었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기대하지 말자는 결심은 이미 카즈윈의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나오는 동안 로딩은 끝나있었고 카즈윈은 확인을 누르며 페이지 수를 확인했다. 

1/??? 로딩이 끝났음에도 끝 페이지는 확인되지 않은채 미지수로 남아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화면 가득 빽빽한 글자들이 떠올라 있었다는 것이었고 나쁜점도 읽기 힘들정도로 빡빡하게 쓰여져 있다는 점이었다. 

글자크기는 조절 못하나. 카즈윈은 다시한번 어플 여기저기를 눌러보았지만 여전히 설정창을 찾을 수는 없었다. 

잘 만든건지 대충 만든건지. 카즈윈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화면을 다시 처음으로 돌려 첫 마디를 읽어내렸다. 

이것은 밀레시안이라는 여행자의 이야기이다. 

카즈윈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 밀레시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카즈윈은 편안한 자세로 쿠션에 몸을 기대었고 캔을 홀짝이며 소설속에 빠져들었다.

여행자는 갑작스럽게 티르코네일에 나타났다. 카즈윈은 처음 이야기를 선택했을때 보았던 서쪽 대륙의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 티르코네일 일것이라고 추측했고 이 추측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렇군 여기서부터 여행을 시작해서 동쪽 대륙에 갔다가 벨바스트라는 작은 섬으로 가는건가. 

카즈윈은 밀레시안이 아르바이트를 통해 마을에 적응해 나가고 북쪽의 봉인지 시드스넷타에 들어가는 부근을 읽으며 어항 속 별을 살펴보았다. 

천천히 두개의 달과 함께 회전하는 별의 북쪽 구석에 조그맣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박혀있었다. 

어제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오늘에서야 보이는 것으로 보아서 어쩌면 저 반짝이는 점이 소설속 밀레시안의 위치를 나타내는 점일지도 몰랐다. 섬세한 설정인데. 

카즈윈은 어항의 원리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눈앞의 소설에 집중하기로 했다. 

밀레시안은 이제 제대로 자세히 잘 보았냐는 표지판에 화가 나서 닥치는 대로 눈사람을 걷어차고 있는 중이었다. 

 

밀레시안에게 눈사람 무덤에 대해서 가르쳐준 사람은 마을 촌장이었고 그는 자신이 어두운 밤중에 특별한 눈사람을 구경하던 도중 귀걸이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밀레시안은 특별한 눈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눈사람 무덤이라는 기이한 설원에는 밀레시안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 눈사람이 세워져 있는 모양이었다. 

코요테 떼거리는 호시탐탐 밀레시안을 노렸고 밀레시안은 신경이 잔뜩 곤두선태 눈사람들을 살펴보고있었다. 

날이 어두워짐에 따라 설원은 더욱 추워졌고 주위를 맴도는 코요테떼의 냄새는 지독했다. 

거기에 다 거기서 거기처럼 생긴 눈사람들은 이제 어둠에 반응하여 으스스한 빛을 내고 있었다. 

빛이 나는 것은 얼굴에 박힌 돌들뿐이었지만 그 쪽이 더욱 기분나쁘다며 밀레시안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어떤 눈사람의 무엇이 어떻게 특별하다는 건지. 한참동안 눈사람을 살펴보던 밀레시안은 다짜고짜 눈사람을 걷어차기 시작했고 그러던 중 붉은색 귀걸이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퍽 괴팍하고 비효율젇인 방법이지만 나름대로 효과는 있는 방법이었다. 

한참동안의 화풀이 뒤에야 밀레시안은 자신이 귀걸이를 발견한 눈사람의 이빨이 다른 눈사람들보다 한줄 많다는 것을 깨닫고는 분통을 터트렸다. 

이렇게 세세한 차이를 어떻게 알아. 하지만 소설을 읽고 있던 카즈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촌장이 눈사람을 관찰했던 시각이 밤이라고 이야기 했고 어두워지며 눈사람의 눈코입에서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밀레시안의 묘사를 연관지어 생각해보자면 촌장이 말한 특별한 눈사람의 특별함은 얼굴부위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눈치채지 못한 네가 고생한 것 뿐이잖아. 그런 생각으로 스크롤을 내리던 카즈윈은 이어지는 밀레시안의 생각을 읽으며 웃음지었다. 

밀레시안도 뒤늦게 그 점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을로 돌아와 눈송이에 젖어든 머리를 털어내던 밀레시안은 입을 삐죽거리며 나지막히 투덜거렸다. 

그런 똑똑하고 눈썰미 좋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시키던가 아니면 나에게 알려주고 나서 잘난척을 하던가. 밀레시안은 설원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차가운 밤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며 여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내려갔다. 

 

따끈한 목욕물이 간절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1화가 끝이났고 카즈윈은 저도 모르게 맥주 캔을 입가에 가져가다가 캔을 흔들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가볍게 찰랑거리는 소리를 끝으로 캔은 어느새 미지근하게 덥혀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카즈윈은 시큼해진 마지막 한모금을 털어놓고 시간을 확인했다. 

수조의 불은 어느틈에 꺼져있었고 시간은 한바퀴를 돌아 다음 숫자에 가까워져 있었다. 

한 시간, 하루 한편. 카즈윈은 시간때우기에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캔을 부엌에 버리고 안방으로  돌아오는 동안 핸드폰에 새 팝업창이 떠올랐다. 

23:57:xx부터 쉴새없이 깎아내려가는 숫자들이 서서히 어두워지며 붉은 램프빛을 반짝였다. 

카즈윈은 침대에 걸터앉아 핸드폰 충전기를 끌어당기고는 나른한 하품과 함께 침대에 몸을 뉘였다.

눈이 저절로 감기고 있었다. 카즈윈은 왠지모르게 피곤한 눈두덩이를 매만지며 몸을 구부렸다. 

원인 모를 피로감이 꿈결처럼 밀려와 그의 의식을 집어삼켰다. 

 

그렇게 새로운 날이 밝았고 또 하루가 지나갔다.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고. 두 손으로 헤아리기 힘든 여러 날이 지났을 무렵 카즈윈은 점차 소설속에 빠져들었고 별의 어항은 그의 유일한 취미거리가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플과 소설에 익숙해진 카즈윈은 별의 어항이 가진 숨겨진 규칙성을 발견해내기도 했다. 

친절한 설명서 한장이라도 동봉되어 있었다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규칙성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카즈윈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언어로 씌여진 보증서 한장뿐. 

다시 티비광고를 기다리는 수밖에없나. 카즈윈은 한동안 쇼핑채널을 뒤지고다니거나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기도 했지만 별다른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를 하는 어플이 있었지만 어플은 남은 표시와 업데이트된 이야기만 표시할뿐 그 어디에서도 문의처나 a.s 센터로 연결되는 링크를 발견할 수는 없기는 마찬가지. 

결국 카즈윈이 어항의 조작법이나 주의사항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시행착오와 관찰에 의지해야했고 그 결과 밀레시안이 반호르라는 광산마을에 도착할때까지 총 다섯가지의 규칙을 알아 낼 수 있었다. 

밀레시안이 글라스기브넨에 대해 조사하는 동안 카즈윈은 메모장에 어항의 숨겨진 규칙들을 정리했다. 

 

첫번째, 별의 어항은 충격에 취약했다. 별을 만들어낸 첫째날에 팝업창이 떠올랐다시피 별은 과한 충격을 받을 경우 소멸의 위험이 있었고 그 충격이라는 것은 수조를 옮기는 행동조차 포함하고 있었다.

어플을 통해 이전신청이라는 것을 하면 신호를 통해 뭔가의 조치를 취할 수도 있는 것 같지만 그것 그 다음 문제. 

카즈윈은 거실 한가운데 놓여진 수조를 보며 핸드폰의 메모어플을 뒤로 넘겼다. 

두번째 규칙은 24시간의 법칙. 별의 어항에 연동된 이야기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24시간에 한번씩 업데이트 되었다. 

첫  일주일이 그랬고 지난 3일간이 그러하였으며 어항을 설치한 보름간의 시간중 이틀을 제외하면 이야기는 어김없이 24시간의 카운트를 띄워올리며 만 하루동안의 준비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이 규칙에는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세번째 규칙이 그 예외였다. 

세번째 규칙은 그 이틀간의 예외 포인트. 24시간의 규칙은 가끔씩 소설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 

규칙이 처음 깨진 것은 밀레시안이 처음으로 던바튼이라는 마을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밀레시안은 사라진 세 용사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은둔한 드루이드 타르라크의 조언을 받아 오래전에 절판된 책 ‘영원의 땅, 티르나노이’의 책을 주문하려했고 던바튼서점의 어린 여주인 아이라는 밀레시안에게 40시간 정도를 기다려달라고 요청했다. 

총판에 연락을 보내책이 있는지를 확인해야한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하루 이틀정도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도 아닌 40시간이라는 묘하게 구체적인 숫자에 카즈윈은 의문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의문은 곧 현실로 다가왔다 정말로 남은시각이 40시간으로 띄워졌기 때문이었다. 

카즈윈은 곧장 인상을 찌푸렸다. 동시에 밀레시안의 마지막 표정묘사또한 그와 똑같이 일치했다. 

아이라에게 40시간을 요구받은 밀레시안은 불만스러워했고 여러번 정말 40시간인지를 되물었다. 

새로고침 마다 한번씩, 카즈윈은 시간이 더 빨리 줄어들거나 마지막 문장이 바뀌는 것은 아닌지 기대했지만 결국 그런 이스터에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40시간을 기다렸고 다음날 정오에 업데이트가 완료되었다는 팝업창이 떠올랐다. 

카즈윈이 점심메뉴를 고르고 있던 시각이었다.

설정

트랙백

댓글

카즈밀레)별의 어항 1

마비노기/별의 어항 2019. 5. 8. 16:24

카즈윈은 지루했다. 

 

늘 보던 방송의 재방송이 지루했고 멜로디의 첫소절만 들어도 지긋지긋한 광고음악이 지루했다.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러보아도 그 채널이 그 채널일뿐. 

카즈윈의 인내심이 줄어들어가는 만큼 텔레비전의 볼륨소리가 줄어들어갔다. 

작게, 더  작게. 이윽고 방안에 다시금 침묵이 찾아왔을때 카즈윈은 나지막한 숨소리를 내며 리모컨을 떨어트렸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카즈윈은 텔레비전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특별히 보고싶은 프로그램도 없었고 선호하는 연예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 말했다시피 그는 너무 지루했고 또 적적했다. 심심했다. 

방안 가득 사람소리라도 깔리면 뭔가 달라질까 싶어 텔레비전을 켜 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카즈윈은 소리없이 입만 벙긋거리는 화면을 바라보며 다시한번 리모컨 조작을 시도했다. 

영화는 다를지도 몰라. 그러나 그의 기대는 불편하기 짝이없는 리모컨 조작방법앞에 무너졌고 어렵사리 찾아낸 영화 목록 앞에서 형편없이 구겨졌다. 생각보다 종류가 얼마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장, 구매, 예고편, 특별 인터뷰, 같은 포스터를 공유하는 동시에 다른 이름을 가진 프로그램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시험삼아 두어번 탭을 넘겨본다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 

검색 요령을 알고있는 사람이라면 최신영화 추천탭에서 벗어나 좀 더 편리한 검색화면으로 전환했겠지만 vod구매에 익숙치 않은 카즈윈은 성의없이 아래버튼을 연타할 뿐이었다. 

결국 카즈윈은 몇 번 화면을 넘기지 않아 멈춰섰고 나가기 버튼으로 화면을 치우기보다는 종료버튼을 누르는 쪽을 선택했다. 

 

텔레비전은 짧은 종료음과 동시에 꺼졌고 방안에는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사실 방안에서 가장 시끄러웠던 것이 텔레비전의 불빛이였으니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 변화였다. 

달라진 것이 있었다면 카즈윈의 표정쯤? 카즈윈은 검게 변환 텔레비전 화면위에 비치는 멍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무기력한 표정이 영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설령 그 것이 자신이 얼굴이라도, 혹은 자신이 얼굴이었기 때문에. 

카즈윈은 가차없이 리모컨을 내던진 뒤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피부에 달라붙는 공기조차 불쾌했다. 

꿉꿉해진 공기과 가라앉은 기분을 전환하기에는 뜨거운 샤워가 제격이었다. 

몸을 씻고 나온 카즈윈은 조금 더 뽀득뽀득해진 발소리를 내며 거실로 돌아왔다. 

그가 샤워부스에 틀어박혀 있는동안 밖은 조금 어두워졌고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카즈윈은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철제 난간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다섯시. 멍한 기분은 가셨지만 카즈윈은 아직도 심심했다. 이쯤되면 재방송이 아닌 본방송의 무언가를 볼 수 있지않을까.. 

그 무언가가 티비 프로그램일지 광고일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카즈윈은 9백 9십개의 채널중 하나는 흥미를 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발을 움직였다. 

아직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길쭉한 발끝에 내던졌던 리모컨이 걸렸다. 

솜씨 좋게 리모컨을 끌어당긴 카즈윈은 텔레비전을 응시하며 가볍게 리모컨의 모서리를 밟기 시작했다. 꾹. 그리고 다시 꾹. 

자그마한 고무버튼위에 올려진 엄지발가락이 섬세하게 꿈틀거리며 전원버튼을 비롯한 기타 용도모를 버튼을 눌렀고 카즈윈은 그 반응을 기다렸다. 꾹꾹. 꾹꾹꾹. 

하지만 카즈윈의 마음과 달리 텔레비전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누르는 횟수가 늘어날 수록 카즈윈의 발등에는 어느새 굵직한 힘줄이 불거지고 있었다. 

몇번인가의 실패가 반복되었고 몇번인가의 인내심의 분기점을 지났다. 

카즈윈은 한참뒤에야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며 발끝을 거둬들였다. 

 

그냥 손으로 하고 말지. 카즈윈은 작게 혀를 차며 리모컨으로 발걸음을 옮겨 허리를 숙였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흩어져내렸지만 카즈윈은 개의치 않아하며 리모컨을 털어내었다. 

텔레비전의 전원이 켜진것은 그즈음의 일이었다. 허무한 결과였다. 

아직 전원버튼을 누르지 않은 카즈윈은 타이밍 참 거지같다는 표정으로 화면을 노려보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리모컨에 들어간 물기가 오작동을 일으켰다던가, 아니면 아까 누른 리모컨의 명령이 이제야 이행되었다던가. 

카즈윈의 추측이 어떠한 것이었건 밝혀진 화면은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광고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광고는 어항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텔레비전이 켜졌다는 것에 만족한 카즈윈은 마실것을 가지고 오기 위해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광고는 '별의 어항'이라는 제품에 대한 설명을 떠들어대고 있었다. 

광고에서 말하는 별의 어항은 일종의 과학실험장치에 가까웠다. 

 

광고는 여러분의 몸 속에 별의 유지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들은 모두 별의 아이들입니다. 라는 어디선가 유행했던 어느 과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되었고 별의 어항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를 관찰하세요! 라는 광고문구와 함께 전문적인 설명파트로 이어졌다. 

광고라기 보다는 다큐, 굳이 분류하자면 페이크 다큐멘터리같은 느낌이었지만 카즈윈은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그 광고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외로 설명의 내용이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즈윈은 냉장고에서 붉은 딱지가 붙은 맥주를 한 캔 꺼내들었고 나초칩 한봉지를 옆구리에 끼워넣었다. 

맨살에 닿는 과자봉지의 느낌이 조금 불쾌했지만 손안에서 터져나오는 맥주 기포소리가 그 불쾌함을 씻은듯이 지워내었다. 

카즈윈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거실에 돌아와 자리를 잡고 앉았고 티비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가만, 내가 음소거를 풀었던가? 카즈윈의 머릿속에 잠시 의문이 스쳐지나갔지만 전원이 한번 꺼졌다가 켜졌으니 설정값이 리셋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카즈윈은 리모컨을 내려놓았고 봉지를 펼쳐 고소한 칩을 하나 입에 가져다 대었다. 

어항에 관한 설명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풍으로 이어지는 어항에 대한 설명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무엇보다도 이 어항이 물고기를 키우는 용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카즈윈은 어항이라며, 물고기가 아니면 대체 왜? 하고 의문을 가졌지만 구태여 입밖으로 그 질문을 꺼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혼잣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광고 속 아이슈타인 풍의 과학자 노인은 목관악기와 같은 깊은 울림을 가진 목소리로 조곤조곤 그의 의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럼 당신은 궁금해하실겁니다. 어항인데 물고기를 기르지 않으면 무엇을 기르는 걸까. 

카즈윈은 맥주캔을 홀짝였다. 그는 어느새 광고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어항에서 기르는 것은 다름아닌 별입니다. 이 광고의 첫머리에 말했던 문구를 기억하십니까? 우리의 모두의 몸속에는 별의 일부가 들어있습니다. 우리들의 몸을 구성하는 원소 하나하나가 모두 우주로부터 온 것이지요 그중에서 DNA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인 인(P)이라는 것이 있는데.. 설명은 카즈윈의 맥주가 반캔 비워질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그가 습관적으로 입에 넣은 나초칩은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광고에는 아직도 전화번호 한줄 표시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체 그 별의 어항이라는 것을 어디서 사는건데. 

카즈윈은 이제 슬슬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광고인지 다큐멘터리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혹시 요즘 광고는 36분동안 이어지나? 카즈윈은 편성표를 확인하기 위해 리모컨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광고의 분위기가 변화되었다. 

진지한 과학자의 얼굴이 사라지고 쾌활한 나레이션, 조잡한 3D화면등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모든 구성이 얼마냐구요! 3만 9천 9백원 단돈 3만 9천 9백원에 이 모든 구성이 따라갑니다! 합성인것이 분명한 우주를 배경으로 분홍머리 소녀가 나타났다. 

포니테일로 머리를 높게 묶은 작은 소녀는 노란 병아리빛 스커틀을 팔랑팔랑 휘날리며 화면을 깡총깡총 뛰어다니고 있었다. 정말 영문모를 화면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전혀 개의치 않다는 표정으로 어항의 사용방법을 설명해나갔다. 

어항의 사용방법은 간단했다. 저 약 4만원짜리 패키지에 따라가는 소울스트림이라는 용액을 가득 채우고 구매자의 피를 한방울 떨어트리면 저 어항안에 별이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별.. 이라기보다는 크리스털 키우기 실험세트 아닐까? 카즈윈은 광고의 내용을 대부분 믿지 않았지만 흥미가 동하는 부분이 몇군데 존재했다. 어항과 연동되는 어플서비스가 바로 그 부분이었다. 

광고속 소녀(소녀는 자신의 이름을 마리라고 소개했다.)는 어플을 통해 별에서 진행되는 영혼의 기록을 직접 살펴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조금 더 생생한 전달을 위해 어플에서 재생되는 기록은 누군가를 3인칭으로 관찰하는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로 연재되지만 크리스털(별)의 내부를 배경으로 매일 1일 연재되는 소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퍽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이쯤되면 주 제품이 소설이고 어항이 부록제품 아닐까? 카즈윈은 시험삼아 핸드폰을 꺼내들었고 텔레비전 화면에 띄워진 코드를 촬영했다. 

코드를 읽어들인 핸드폰이 곧바로 숍으로 연결되자 이내 어플이 자동으로 다운로드 되었다. 

카즈윈은 어플은 별다른 동의 없이 설치되는 것에 잠시 불안감을 느꼈지만 이내 화면에 떠오르는 문구를 보며 안심했다. 

기기의 근처에서 '별의 어항'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새로 주문하시겠습니까? 카즈윈은 요즘 광고는 참 특이하게 진행한다고 생각하며 예 버튼을 눌렀다. 

대부분의 구매 과정이 그러하듯 처음 구매하는 샵에서 입력해야 하는 정보는 한도 끝도 없었기 때문에 카즈윈은 구매가 진행되는 내내 텔레비전이 꺼져버렸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3번째인가 주소를 다시 입력하고 2번의 구매인증만료화면을 새로고침하고 나서야 카즈윈은 겨우 주문을 끝낼 수 있었다. 

 

핸드폰에 집중하는 동안 맥주는 미지근해졌고 나초칩는 바닥을 드러냈다. 

카즈윈은 남은 맥주로 입안을 헹구며 리모컨을 들어올렸다. 

나른한 손짓으로 리모컨을 누르자 언제 꺼진지 모를 텔레비전이 즉각 반응했다. 

검정색 일색이었던 화면 가득 박장대소하는 연예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음소거된 화면이었기에 큰 소리는 울리지 않았지만 카즈윈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행하는 특유의 자막을 읽으며 어떤 배경의 상황인지를 곧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왜 갑자기 음소거가 되었지? 카즈윈은 혹시라도 내부에 물기가 남아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마음에 리모컨을 탁탁 내리치며 음소거를 해제했다. 

파하하하 걸쭉한 웃음소리와 함께 수다스러운 자이언트의 목소리가 빠르게 이어져 나갔다. 

카즈윈은 언짢은 표정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하는 이보나를 바라보았다. 게스트와 자막때문에 예능프로그램인줄 알았는데 이보나의 음유캠프였던 모양이었다. 

음악프로그램이라면 듣기에 나쁘지 않겠지. 텔레비전을 챙겨보지 않는 카즈윈도 그녀의 인터뷰나 음악선곡 센스가 좋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카즈윈은 리모컨을 내려놓았고 띵동 하고 울리는 핸드폰의 메세지를 확인했다. 

별의 어항의 배송이 벌써 시작되었다는 메세지였다. 

카즈윈은 다시금 시계를 확인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메세지를 삭제했다. 

가끔 주말에도 도착하는 택배도 있는데 오후 늦게 출발하는 택배도 있겠지. 

카즈윈은 택배에 대한 생각을 지워내며 수다스러운 악기장인 아트가 연구하는 론카도라 연주를 경청했다. 

빗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어항은 바로 다음날 아침에 도착했다. 진심이야? 카즈윈은 이른 아침부터 띵동거리는 초인종소리에 짜증스럽게 문을 열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확인절차도 없이 덩그러니 놓여져 버린 택배박스 하나뿐이었다. 

어디 회사길래 서비스가 이모양인지 절로 눈쌀이 찌푸려졌지만 아침부터 이 무거운 택배를 배달해야했던 택배기사의 고충도 어느정도 이해가 가긴 했다. 

어찌되었건 이 택배는 취급주의(유리)인 동시에 액체가 두병 분량 들어있는 까다로운 제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카즈윈은 위태롭게 달칵거리는 유리소리와 출렁이는 액체소리를 동시에 들으며 택배박스를 집안으로 들여놓았다. 

새로 받은 택배박스가 늘 그러하듯 카즈윈은 단숨에 박스를 개봉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지만 그뿐이었다. 

카즈윈은 입다만 웃옷을 꿰어입고 뒤늦게 도착한 택배도착 알림 메세지를 지우며 신발을 구겨신었다. 

아홉시가 되기도 전에 무슨 택배가 오는건지. 카즈윈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걸어내려가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카즈윈이 도착하는 동시에 무언가를 기다리던 택배트럭이 다급하게 주차장을 빠져나갔지만 카즈윈은 아무런 이질감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찌되었거나 바쁜 아침이었다. 카즈윈은 서둘러 차에 올랐고 이내 택배에 대해서 잊어버렸다. 

 

카즈윈이 집으로 돌아온 시각은 늦은 오후 시간이었다. 

도어락이 잡기고 신발을 벗는 소리가 그나마 사람사는 집같은 소음을 내었지만 그것도 곧 그쳐들었다. 

카즈윈은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가볍게 세안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어찌나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럽고 완벽한 과정인지 집은 마치 현관과 화장실과 안방만이 전부인듯한 움직임이었다. 

사실 부엌이라 하더라도 안주거리와 빈 맥주캔을 보관하는게 전부였고 거실은 가끔씩 구겨져 있는 용도가 전부였기에 틀린말은 아니었지만 카즈윈도 나름대로 집의 모든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를 테면 어제의 텔레비전 챌린지 정도. 

하지만 어제 실패했다시피 텔레비전에도 취미가 없는 그에게 집은 거추장스럽고 쓸데없이 넓은 공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평소라면 그대로 안방에 틀어박혀 잠시 인터넷을 살펴보다가 잠들었을 카즈윈은 한손에 핸드폰을, 다른 한손에는 커터칼을 꼭 움켜쥔채 거실로 걸어나왔다. 

거실에는 그가 아침에 올려두고  떠난 커다란 택배가 자리하고 있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빠져나온 커터칼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상자를 단숨해 해체해내었다. 

굳이 곡선을 그릴 필요가 있느냐고 묻느냐면 그냥 개인적인 습관, 카즈윈은 칼날을 집어 넣고 상자의 잔해를 치워내었다. 

 

안에는 광고에서 보았던 어항과 소울스트림이라는 허접한 스티커가 붙어있는 플라스틱 병 두 개, 그리고 보증서가 붙어있었다. 

무슨 보증서씩이나. 카즈윈은 쓸데없는 종이를 치워버리고는 네모난 어항을 꺼내들었다. 

뚜껑과 바닥에는 자그마한 조명장치가 붙어있는 것을 확인한 카즈윈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구성품들을 둘러보았다. 

물 두병과 부실해보이는 유리수조가 4만원. 카즈윈은 벌써부터 사기당한 것은 아닌가 의심하며 물병을 집어들었다.

허술해보이는 라벨과 달리 안에 들어있는 액체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향긋하고 신선한 냄새가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프롬 더 아발론. 

카즈윈은 아발론이라는 지명이 어디인지 혹은 어느 회사인지 모르겠다며 계속해서 코를 킁킁거렸다. 

어딘지 익숙한 향이 느껴지는데 도저히 설명할 수없는 친근감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참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즈윈은 물을 모두 수조에 쏟아넣고 수조의 뚜껑을 닫았다. 

무슨 원리인지 모르지만 뚜껑을 닫아도 조명이 밝혀지지는 않았다. 

혹시 베터리로 작동하는 걸까? 카즈윈은 스위치, 혹은 배터리를 넣는 위치를 알아두기 위해 수조덮개를 쓸어내렸다. 

하지만 뚜껑은 매끈한 통짜로 만들어진 플라스틱으로 어디하나 흠결이 보이지 않았다. 

덮개 안쪽인가, 혹은 아래쪽? 한참동안 수조를 살펴보던 카즈윈은 다시 동봉된 구성품들을 살펴보았지만 이제 남은 물건은 보증서라는 이상한 종이 한장 뿐이었다. 

알 수 없는 외국어로 적힌 보증서를 살펴보던 카즈윈은 문든 핸드폰의 진동이 울리는 것을 발견했다. 

핸드폰의 화면에는 낯선 팝업창이 띄워져 있었다. 근처에 '별의 어항'이 있습니다. 연동하시겠습니까? 카즈윈은 수조를 흘끗 바라본뒤 예 버튼을 눌렀다. 무엇으로 인식하는거지..? 카즈윈은 뭔지 모르겠지만 핸드폰이 저절로 수조를 찾아낸 것을 신기하게 여기며 연동과정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팝업창에는 언 스마일 아이콘이 떠오르며 새로운 문구가 적혀져 있었다. 해당하는 '별의 어항'에서 영혼의 정보를 불러내지 못했습니다. 정보를 입력한뒤 다시 시도해 주십시오.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