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즈밀레)별의 어항2

마비노기/별의 어항 2019. 5. 8. 16:47

카즈윈은 그제서야 어항에 자신의 피 한방울을 섞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냈다. 

카즈윈은 다시 어항의 뚜껑을 열었고 커터칼을 집어들었다. 

잠깐만. 카즈윈은 칼날을 밀어올리기에 앞서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이대로 거실 한가운데 둬야하나? 하지만 후회는 늦었고 물이 들어찬 어항은 너무 무거웠다. 

카즈윈은 거실의 테이블 한 가운데를 차지한 수조를 내려다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차피 집에 오는 손님도 별로 없었고 거실 어디에도 이 무거운 수조를 올려놓을 만한 튼튼한 선반은 없었다. 

그렇다고 나름대로 결정(카즈윈은 어항이 결정키우기 과학세트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을 키우는데 온도가 자주 오르내리는 바닥에 두기도 애매하고.. 카즈윈은 다소 무책임하지만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로 수조를 거실 한 가운데에 두기로 결정했다. 

비록 식탁 대용으로 쓰던 테이블이었지만 어차피 집에서 먹는 것이라고는 맥주와 그 안주거리들 약간 뿐이었다. 

카즈윈은 다시 커터칼을 밀어올려 망설임없이 손가락 끝을 찔렀다. 

익숙치 않은 탓에 커터칼을 잡은 손이 조금 떨렸지만 금방 붉은 핏방울이 솟아올랐다. 

한 방울이 어느정도지? 카즈윈은 피가 베어나온 손가락을 물에 넣고 흔들어야하는건지 혹은 상처를 쥐어짜서 핏방울을 떨어트려야하는 것인지를 고민했다. 

손을 넣으면 잡균같은것이 들어가서 결정에 영향을 끼칠것 같은 느낌이었기에 카즈윈은 두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가만 그럼 커터칼이 아니라 소독된 바늘같은거로 찔렀어야 했나? 카즈윈은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깨달음이었다. 

퐁 하고 물방울 소리가 울리는 듯한 환청속에 카즈윈의 핏방울이 어항속에 떨어져 내렸다. 

 

카즈윈은 피가 정량보다 더 들어갈까 염려하며 급히 손을 거두었고 먼지따위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뚜껑을 닫았다. 뭔가 정밀한 과학 실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가 느끼는 그대로 기묘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덮개가 닫힌 수조속에 조명이 켜졌고 핸드폰에는 연동중이라는 팝업창이 떠올랐다. 

꼬리를 문 뱀의 아이콘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가운데 마침내 수조속에 첫번째 반응이 일어났다. 

처음은 검정이었다. 어항속의 투명한 액체 소울스트림은 카즈윈의 혈액에 반응하듯 검게 물들었다. 

조명이 밝혀져 있었기에 카즈윈은 이 액체속에 검은 알갱이가 가득 차올랐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고 그 다음 변화는 하양으로 이어졌다. 

두번째 변화는 조금 느리게 일어났지만 카즈윈은 참을성있게 수조를 관찰했다. 

수조는 금방 희뿌연 알갱이로 가득찼다. 서로 맞부딪치기 시작한 알갱이들은 점점 굵어지며 수조의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알갱이들이 뭉치고 남은 자리는 노란색 반투명한 액체가 남아있었고 모여든 하얀 알갱이들은 이내 단단한 구체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둥글기도 했고 납작하기도 했으며 어느 반원을 갈라낸 내부의 모형이기도 했다. 

노랗게 된 액체는 잠시 녹색빛을 띄었고 녹색빛에 둘러쌓인 흰 모형은 붉게 물들었다. 그게 전부였다. 

어느새 투명해진다 싶었던 연녹색빛의 액체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어두워졌다. 

아마 저 부분이 별의 바깥 우주의 하늘인 모양이었다. 

이따금씩 수조 표면에 출렁이는 물결이 보이지 않았다면 아무도 이 안이 액체로 가득차 있었는지 모를 만큼 투명한 액체의 중앙에는 아마도 별이라고 불러야할 모형이 들어 앉아있었다. 

검정일색인 우주와는 달리 별에는 다채로운 색상이 가득했다. 

푸른것은 아마 바다였고 그 양 옆에 자리한 두가지 튀어나온 것은 대륙이었다. 

양 대륙 사이에 자그마한 섬이 자리하긴 했지만 카즈윈은 이 별이 턱없이 작다고 생각했다. 

피를 너무 적게 넣었나? 누군가에게 뽐낼 생각은 아니었지만 카즈윈은 기왕 장식품이라면 크고 화려했으면 좋았다고 후회했다. 

하지만 별은 완성되었고 핸드폰 또한 연동이 성공했다는 팝업창을 띄워보였다. 

카즈윈은 휴지로 상처가 난 손가락을 틀어막으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야기에는 세가지 버전이 있었다. 서쪽대륙의 북쪽부터 시작하는 처음부터와 동쪽대륙 사막에서 시작하는 중간부터, 그리고 벨바스트라는 이름의 작은 섬에서 시작하는 마지막 이야기. 

카즈윈은 마지막 선택지를 제처놓은 채 중간과 처음 사이에서 고민했다. 

기왕 시작하는 이야기 처음부터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앞부분이 지루하다면 중간부터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카즈윈은 진지하게 고민했고 결국 처음부터 보는 것을 선택했다. 다시한번 뱀모양의 아이콘이 돌아갔다. 

팝업창으로 세이브 포인트가 기록되었습니다. 라는 메세지가 떠오른 카즈윈은 확인을 누르며 첫 이야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기본적인 홈화면뿐. 

카즈윈은 별의 어항이라는 아이콘을 연타하며 어플이 재 실행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동안의 침묵끝에 돌아오는 팝업창은 이야기를 불러오는중. 다음 시간이 지난 후 제 1화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 23:59:xx 

 

카즈윈은 인상을 찡그렸다. 결국 하루에 하나씩이라는 소리였으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4만원? 하지만 별이 형성되는 과정이나 어플의 완성도는 이미 충분히 4만원의 값어치를 해내고 있었다. 

가장 허접해 보였던 수조도 뭔가 알 수없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니 카즈윈은 이 이상바라는 것은 사치라며 기대감을 접어내렸다. 그리고 수조의 불이 꺼진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카즈윈은 조명이 꺼져 어두워진 수조를 바라보다가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나름대로 칭찬하기 무섭게 이 모양이라니. 

카즈윈은 어떤 베터리로 교체해야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어항의 뚜껑을 두드렸다. 수조의 밑바닥을 살펴보기도 했고 수조의 뚜껑을 떼어내기 위해 틈새에 손톱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카즈윈의 행동이 이어지기 무섭게 핸드폰의 강한 진동소리가 울렸고 알 수 없는 팝업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경고! 별이 형성된 어항을 열지 마십시오. 영혼의 기록으로 복원 된 별은 시간이 단절된 세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수조를 억지로 열거나 손상시킬 경우 별이 소멸할 수 있습니다. 

경고! 별이 형성된 어항을 두드리지 마십시오. 별은 아주 섬세한 물건으로 과한 충격이 가해질 경우 소멸할 수 있습니다. 

경고! 별이 형성된 어항을 옮기지 말아주십시오 부득이하게 수조를 이전할 경우 핸드폰 어플을 통해 충격대비 이전신청을 접수한 뒤 이동하시길 바랍니다. 

 

카즈윈은 큼지막한 글씨로 띄워진 이전하시겠습니까? 라는 메세지를 보며 눈쌀을 찌푸렸다. 뭐가 이렇게 복잡한건지. 

카즈윈은 어플에 도움말코너가 있는지를 살펴보았지만 팝업창을 제외하고 그가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카즈윈은 이전신청을 취소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카즈윈은 비뚤어진 수조를 다시 바로잡았고(흔들지 말라는 경고팝업창은 어김없이 떠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돌아갔다. 

별을 만드는 과정에 푹 빠져 잊고있었지만 시간은 어느새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카즈윈은 여느때보다도 짙은 피곤함을 느끼며 침대위에 쓰러졌다. 

베개속에 머리를 파묻었던 카즈윈은 다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23:52:xx 카즈윈은 빠르게 줄어들어가는 시계를 보며 눈을 감았다. 

기대되는 걸까.. 아니면 단순한 흥미인걸까. 카즈윈의 의식이 흐려지는 동안 선명하던 핸드폰 화면도 점점 흐려져갔다. 

 

카즈윈이 다시 눈을 뜬 것은 다음날 아침, 알람이 울리는 시각이었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잠들었던 카즈윈은 어김없이 정해진 시각에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밤새 충전하는 것을 잊어버린 핸드폰을 급하게 충전기에 연결한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쓸어내리는 카즈윈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역력했다. 

많이 피곤했던가? 내가? 그렇게까지? 고민을 오래할 새도 없이 카즈윈은 다리를 움직여 화장실로 향했다.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울리고 카즈윈은 망설임없이 그 사이로 머리를 숙였다. 

물 온도가 평소보다 조금 차가웠지만 카즈윈은 그 정도가 딱 좋다고 생각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오늘도 바쁜 출근길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간 하루. 카즈윈은 일부러 느즈막히 퇴근하여 집으로 되돌아왔다. 

조금 더 일찍 퇴근했을 수도 있고 평소처럼 퇴근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핸드폰에 남아있는 시간을 보는 순간 어쩐지 자신이 이 어항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충동적으로 구매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심심풀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카즈윈은 원인 모를 집착을 버리기 위해 일부러 핸드폰에 표시된 시간을 무시했다. 

그렇게 느즈막히 돌아온 집의 도어락이 열리고 현관안으로 들어섰을때는 이미 한밤중이었고 어두운 집안에는 낯선 조명이 밝혀져 있었다. 어항이었다. 

어제 불이 꺼져 있었던 어항은 언제 어두워졌었냐는듯 밝은 빛을 빛내며 별을 비추고 있었다. 

흔들흔들 돌아가는 별의 모습은 빛을 받아 퍽 아름답게 보였다. 별의 주변에는 전날 발견하지 못한 두개의 부속물이 떠다니고 있었고 카즈윈은 어항에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그것이 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붉은색과 푸른색. 핸드폰에 진동이 울리며 각각의 달이 이웨카와 라데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갑자기 왠 설명? 혹시 이게 1화? 카즈윈은 실망을 감추지 않으며 팝업창을 닫았지만 어플은 그렇지 않다는듯 00:00:00이라는 숫자를 내보였다. 1화는 아직 시작도 안했다는 소리였다. 

 

카즈윈은 옷을 갈아입는 것도, 자신이 어항에 대해 과하게 집착하지 않으려 했다는 결심도 잊은채 거실에 주저앉았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내리며 다른한손으로는 핸드폰을 조작했고 로딩이 서둘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목이 탔다. 맥주라도 마실까. 카즈윈은 씻고 맥주를 마실지 맥주를 마시고나서 씻을지를 고민하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야기 구성에만 24시간이 걸리더니 1화를 로딩하는데에도 여러가지 업데이트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카즈윈은 귀찮음과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고 이내 5분도 안되어 다시 되돌아나왔다. 

조류의 목욕보다도 빠른 샤워였다. 

카즈윈은 물기는 알아서 마른다는 생각과 함께 물기 가득한 발로 걸어나와 안방으로 들어갔다. 

느슨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다시 거실로 나온 그의 손에는 어느틈엔가 시원한 맥주가 들려져 있었다. 

설마 몇 줄이 전부는 아니겠지. 카즈윈은 적어도 맥주 몇모금은 넘길만큼 긴 이야기이기를 바라며 어항옆에 엎어두었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기대하지 말자는 결심은 이미 카즈윈의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나오는 동안 로딩은 끝나있었고 카즈윈은 확인을 누르며 페이지 수를 확인했다. 

1/??? 로딩이 끝났음에도 끝 페이지는 확인되지 않은채 미지수로 남아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화면 가득 빽빽한 글자들이 떠올라 있었다는 것이었고 나쁜점도 읽기 힘들정도로 빡빡하게 쓰여져 있다는 점이었다. 

글자크기는 조절 못하나. 카즈윈은 다시한번 어플 여기저기를 눌러보았지만 여전히 설정창을 찾을 수는 없었다. 

잘 만든건지 대충 만든건지. 카즈윈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화면을 다시 처음으로 돌려 첫 마디를 읽어내렸다. 

이것은 밀레시안이라는 여행자의 이야기이다. 

카즈윈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 밀레시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카즈윈은 편안한 자세로 쿠션에 몸을 기대었고 캔을 홀짝이며 소설속에 빠져들었다.

여행자는 갑작스럽게 티르코네일에 나타났다. 카즈윈은 처음 이야기를 선택했을때 보았던 서쪽 대륙의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 티르코네일 일것이라고 추측했고 이 추측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렇군 여기서부터 여행을 시작해서 동쪽 대륙에 갔다가 벨바스트라는 작은 섬으로 가는건가. 

카즈윈은 밀레시안이 아르바이트를 통해 마을에 적응해 나가고 북쪽의 봉인지 시드스넷타에 들어가는 부근을 읽으며 어항 속 별을 살펴보았다. 

천천히 두개의 달과 함께 회전하는 별의 북쪽 구석에 조그맣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박혀있었다. 

어제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오늘에서야 보이는 것으로 보아서 어쩌면 저 반짝이는 점이 소설속 밀레시안의 위치를 나타내는 점일지도 몰랐다. 섬세한 설정인데. 

카즈윈은 어항의 원리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눈앞의 소설에 집중하기로 했다. 

밀레시안은 이제 제대로 자세히 잘 보았냐는 표지판에 화가 나서 닥치는 대로 눈사람을 걷어차고 있는 중이었다. 

 

밀레시안에게 눈사람 무덤에 대해서 가르쳐준 사람은 마을 촌장이었고 그는 자신이 어두운 밤중에 특별한 눈사람을 구경하던 도중 귀걸이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밀레시안은 특별한 눈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눈사람 무덤이라는 기이한 설원에는 밀레시안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 눈사람이 세워져 있는 모양이었다. 

코요테 떼거리는 호시탐탐 밀레시안을 노렸고 밀레시안은 신경이 잔뜩 곤두선태 눈사람들을 살펴보고있었다. 

날이 어두워짐에 따라 설원은 더욱 추워졌고 주위를 맴도는 코요테떼의 냄새는 지독했다. 

거기에 다 거기서 거기처럼 생긴 눈사람들은 이제 어둠에 반응하여 으스스한 빛을 내고 있었다. 

빛이 나는 것은 얼굴에 박힌 돌들뿐이었지만 그 쪽이 더욱 기분나쁘다며 밀레시안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어떤 눈사람의 무엇이 어떻게 특별하다는 건지. 한참동안 눈사람을 살펴보던 밀레시안은 다짜고짜 눈사람을 걷어차기 시작했고 그러던 중 붉은색 귀걸이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퍽 괴팍하고 비효율젇인 방법이지만 나름대로 효과는 있는 방법이었다. 

한참동안의 화풀이 뒤에야 밀레시안은 자신이 귀걸이를 발견한 눈사람의 이빨이 다른 눈사람들보다 한줄 많다는 것을 깨닫고는 분통을 터트렸다. 

이렇게 세세한 차이를 어떻게 알아. 하지만 소설을 읽고 있던 카즈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촌장이 눈사람을 관찰했던 시각이 밤이라고 이야기 했고 어두워지며 눈사람의 눈코입에서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밀레시안의 묘사를 연관지어 생각해보자면 촌장이 말한 특별한 눈사람의 특별함은 얼굴부위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눈치채지 못한 네가 고생한 것 뿐이잖아. 그런 생각으로 스크롤을 내리던 카즈윈은 이어지는 밀레시안의 생각을 읽으며 웃음지었다. 

밀레시안도 뒤늦게 그 점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을로 돌아와 눈송이에 젖어든 머리를 털어내던 밀레시안은 입을 삐죽거리며 나지막히 투덜거렸다. 

그런 똑똑하고 눈썰미 좋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시키던가 아니면 나에게 알려주고 나서 잘난척을 하던가. 밀레시안은 설원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차가운 밤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며 여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내려갔다. 

 

따끈한 목욕물이 간절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1화가 끝이났고 카즈윈은 저도 모르게 맥주 캔을 입가에 가져가다가 캔을 흔들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가볍게 찰랑거리는 소리를 끝으로 캔은 어느새 미지근하게 덥혀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카즈윈은 시큼해진 마지막 한모금을 털어놓고 시간을 확인했다. 

수조의 불은 어느틈에 꺼져있었고 시간은 한바퀴를 돌아 다음 숫자에 가까워져 있었다. 

한 시간, 하루 한편. 카즈윈은 시간때우기에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캔을 부엌에 버리고 안방으로  돌아오는 동안 핸드폰에 새 팝업창이 떠올랐다. 

23:57:xx부터 쉴새없이 깎아내려가는 숫자들이 서서히 어두워지며 붉은 램프빛을 반짝였다. 

카즈윈은 침대에 걸터앉아 핸드폰 충전기를 끌어당기고는 나른한 하품과 함께 침대에 몸을 뉘였다.

눈이 저절로 감기고 있었다. 카즈윈은 왠지모르게 피곤한 눈두덩이를 매만지며 몸을 구부렸다. 

원인 모를 피로감이 꿈결처럼 밀려와 그의 의식을 집어삼켰다. 

 

그렇게 새로운 날이 밝았고 또 하루가 지나갔다.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고. 두 손으로 헤아리기 힘든 여러 날이 지났을 무렵 카즈윈은 점차 소설속에 빠져들었고 별의 어항은 그의 유일한 취미거리가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플과 소설에 익숙해진 카즈윈은 별의 어항이 가진 숨겨진 규칙성을 발견해내기도 했다. 

친절한 설명서 한장이라도 동봉되어 있었다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규칙성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카즈윈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언어로 씌여진 보증서 한장뿐. 

다시 티비광고를 기다리는 수밖에없나. 카즈윈은 한동안 쇼핑채널을 뒤지고다니거나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기도 했지만 별다른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를 하는 어플이 있었지만 어플은 남은 표시와 업데이트된 이야기만 표시할뿐 그 어디에서도 문의처나 a.s 센터로 연결되는 링크를 발견할 수는 없기는 마찬가지. 

결국 카즈윈이 어항의 조작법이나 주의사항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시행착오와 관찰에 의지해야했고 그 결과 밀레시안이 반호르라는 광산마을에 도착할때까지 총 다섯가지의 규칙을 알아 낼 수 있었다. 

밀레시안이 글라스기브넨에 대해 조사하는 동안 카즈윈은 메모장에 어항의 숨겨진 규칙들을 정리했다. 

 

첫번째, 별의 어항은 충격에 취약했다. 별을 만들어낸 첫째날에 팝업창이 떠올랐다시피 별은 과한 충격을 받을 경우 소멸의 위험이 있었고 그 충격이라는 것은 수조를 옮기는 행동조차 포함하고 있었다.

어플을 통해 이전신청이라는 것을 하면 신호를 통해 뭔가의 조치를 취할 수도 있는 것 같지만 그것 그 다음 문제. 

카즈윈은 거실 한가운데 놓여진 수조를 보며 핸드폰의 메모어플을 뒤로 넘겼다. 

두번째 규칙은 24시간의 법칙. 별의 어항에 연동된 이야기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24시간에 한번씩 업데이트 되었다. 

첫  일주일이 그랬고 지난 3일간이 그러하였으며 어항을 설치한 보름간의 시간중 이틀을 제외하면 이야기는 어김없이 24시간의 카운트를 띄워올리며 만 하루동안의 준비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이 규칙에는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세번째 규칙이 그 예외였다. 

세번째 규칙은 그 이틀간의 예외 포인트. 24시간의 규칙은 가끔씩 소설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 

규칙이 처음 깨진 것은 밀레시안이 처음으로 던바튼이라는 마을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밀레시안은 사라진 세 용사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은둔한 드루이드 타르라크의 조언을 받아 오래전에 절판된 책 ‘영원의 땅, 티르나노이’의 책을 주문하려했고 던바튼서점의 어린 여주인 아이라는 밀레시안에게 40시간 정도를 기다려달라고 요청했다. 

총판에 연락을 보내책이 있는지를 확인해야한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하루 이틀정도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도 아닌 40시간이라는 묘하게 구체적인 숫자에 카즈윈은 의문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의문은 곧 현실로 다가왔다 정말로 남은시각이 40시간으로 띄워졌기 때문이었다. 

카즈윈은 곧장 인상을 찌푸렸다. 동시에 밀레시안의 마지막 표정묘사또한 그와 똑같이 일치했다. 

아이라에게 40시간을 요구받은 밀레시안은 불만스러워했고 여러번 정말 40시간인지를 되물었다. 

새로고침 마다 한번씩, 카즈윈은 시간이 더 빨리 줄어들거나 마지막 문장이 바뀌는 것은 아닌지 기대했지만 결국 그런 이스터에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40시간을 기다렸고 다음날 정오에 업데이트가 완료되었다는 팝업창이 떠올랐다. 

카즈윈이 점심메뉴를 고르고 있던 시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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