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카즈밀레)별의 어항8
그들이 두려워 하던 헤루인식 후폭풍이 날아온것은 습격당한 회의실이 본래의 용도로 되돌아갔을 즈음의 일이었다.
카즈윈은 쓸데없이 자신의 사생활에 관심을 보인 루나사외 11명, 그리고 아직 찾아내지 못한 a 명을 찾아내기 보다는 조금 더 근본적인 이유를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가해서 그래. 카즈윈은 팀원들을 몰아치며 이런 쓸데없는 모임이 생겨난 원흉과 해결방법을 묶어 설명했다.
한가했기 때문에 눈이 돌아가고 한가했기 때문에 손이 놀게 되는 것이었다.
모든 과를 통틀어 가장 바빠야 하는 정보과인 루나사가 한가하다는 것은 사장이 너무 유능한 인력들을 많이 뽑았거나 다른 부서에서 루나사의 비범한 처리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카즈윈은 그동안 너무 칼퇴를 많이 했다는 것을 반성하며 솔선수범하여 루나사의 즐거운 일거리들을 마구잡이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헤루인식 야근의 시작이었다.
처음 시작은 근방에 있는 지역이었고 이따금씩 먼 지역을 다녀오기도 했다. 팀원들은 퇴근시간을 자르던 칼날이 자신들의 목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이따금씩 카즈윈의 무자비한 일처리 방식에 반발한 이들이 알반에게 항의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지만 알반의 사장은 가볍게 웃음소리로 대답했고 냉정하게 항의전화를 끊어버렸다.
그의 비밀측근이자 차세대 알반의 보좌관인 L대리도 헤루인의 방식이 조금 거칠긴 하다고 염려했지만 융통성이 충만한 알반의 사장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헤루인은 원래부터 마피아같은 부서야.. L대리는 총책임자가 그런 소리를 해도 되냐고 되물으려던 입을 다문채 침묵했다.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옛저녁에 체념한 사장은 쓸데없는 고민 말고 이 뒷처리를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잠시 눈을 감는 것으로 골치아픈 상념들을 전부 치워버린 L대리는 리프레쉬한 마음을 가득 담아 활짝 웃어보이며 물었다. 매수합시다. 사장은 웃었고 알반의 미래만큼이나 밝은 미소는 쌍으로 번져갔다.
그렇게 임시보좌관의 수첩에서 몇몇 전화번호가 지워졌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
아주 오래간만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카즈윈은 씻는것도 뭔가를 마시는 것도 생각하지 않은채 곧장 안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거실이 텅 비워진 대신 베란다 구석에는 거실용 테이블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검은 천이 꼼꼼하게 덧씌워져 있긴 했지만 틈새사이로 빛이 새어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별의 어항은 여전히 그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카즈윈은 복잡한 이전신청을 통해 별의 어항 들고 옮기는 대신 치우는 대신 아예 거실테이블째로 옮기는 것을 선택했고 몇번인가의 경고메세지를 무시한 끝에 결국 어항을 거실에서 치워 버리는 것에 성공했다.
남들이 보기엔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반응일지 몰라도 카즈윈은 정말이지 그 별이 꼴도보기도 싫은 상태였다.
카즈윈은 보기 싫은 이야기라면 안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두운 집에서 홀로 빛나는 별을 볼때면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들기 일 수 였다.
카즈윈은 이따금씩 신발을 벗는것 조차 잊어버린채 어두운 현관에 우두커니 기대어 서서는 어둠속에서 홀로 빛나는 별을 보았다.
별처럼 스산하게 빛나는 핸드폰이 얼굴을 비출때면 그의 은청색 눈동자는 부지런히 움직였고 이는 어항의 불빛이 꺼질때까지 계속되었다.
어항속의 별은 언제나 혼자였듯이 그 별에 떨어진 밀레시안 또한 혼자였다.
크리스텔을 쫓는 포워르의 추적자를 처치할때도, 검은 통행증을 들고 찾아간 바리던전의 지하 통로를 열어내었을때도.
황량함과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티르 나 노이에 도착했을 때조차 밀레시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이러한 변화는 티르코네일에 처음 아르바이트를 배워나가던 시절 곧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모습과는 정반대되는 모습이었다.
밀레시안은 마치 스스로에게 사망판정을 내린 것 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도우갈이라는 새로운 인물과 만났을 때는 그나마 입을 열어야 했지만 그것도 잠시.
이곳이 티르 나 노이 였던 그것조차 아니었던 여신을 만나야하는 밀레시안의 운명은 바뀌지 않았다.
아니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카즈윈은 밀레시안의 섣부른 판단을 비난했지만 인간을 위해 제 몸을 돌로 봉인하기까지한 여신이었다.
그 봉인이 자신의 위협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로 지금과 같이 마신에게 붙잡히는 위험을 초래했어도.
여신은 여전히 에린을 염려했고 누군가 인간들을 구해내기를 희망했다.
그런 여신의 앞에 낙원의 힘을 품은 이 세계의 영혼이 나타난다면 어떤 반응을 내보일까.
밀레시안은 산 채로 돌이되는 악몽에 몸서리 치다 깨어나고 돌이 된 자신의 육체가 조각조각 부서지는 꿈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불사가 아닌 불멸이었던 까닭에, 밀레시안은 그 누구보다도 처절하게 죽음을 두려워했다.
카즈윈은 밀레시안이 가진 불멸이나 영원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원래부터 밀레시안에게 속해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헤루인의 눈으로 보는 밀레시안은 평범한 사람이었고 나약한 성정이었다.
적당히 모험을 즐기고 사람들과 교류하고 제 힘으로 스스로의 다리와 눈으로 어디까지, 무엇까지 볼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하는 근성은 대단했으나 누군가를 상처입히는 것에는 재능이 없었다.
카즈윈은 처음 던전에 간 밀레시안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알고 있었고 처음 인간형 몬스터를 만났을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무거운 장비를 기피하고 가볍고 다루기 쉬운 무기를 선호했던 밀레시안이 어떠한 이유로 브로드소드를 선택했는지, 그 날 띄워졌던 loading이라는 메세지창이 무슨 의미인지.
카즈윈은 아직도 자이언트 웜이라면 치를 떠는 밀레시안이 태연히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며 이야기의 끝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여신을 구하고 나면, 밀레시안은 여신이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스스로 제 목숨을 바칠 것이 분명했다.
밀레시안의 영혼은 이미 처절하게 고통받았고 그 누구의 이해도 구하지 못한채 쓸쓸하게 부서져내리고 있었다.
타르라크. 카즈윈은 마지막으로 밀레시안의 조언자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여신의 배신은 커녕 제발로 거닐었던 티르 나 노이의 진실조차 알아내지 못한 드루이드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석 제대로 아는게 하나도 없었네. 카즈윈은 입술을 삐두름하게 말아올리고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카즈윈의 움직임에 현관등 센서가 반응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인 빛이었다. 안방의 문이 닫혔다.
밀레시안은 도우갈의 제안대로 이 버려진 세계를 조금 더 자세히 둘러보았다.
수상한 점이 많았지만 쉬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버려진 세계의 마을은 티르코네일과 지나칠 정도로 흡사했고, 어떠한 인간도 이 땅에서 안식을 취하지 못했다.
그런 척박한 땅에서 홀로 살아가는 도우갈이 의심스러운 것은 당연했다. 도우갈은 무덤에서 내려오던 밀레시안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는 공허하게 비틀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 저도 베어내실 생각입니까? 도우갈은 당신은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며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밀레시안에게 다가갔다. 좀비떼에게 물어뜯긴 상처에 혈흔이 선명했다.
도우갈은 밀레시안을 데려가 치료해주었고 해가 진 뒤엔 직접 땔감을 모아 불을 밝혀 주었다.
한참동안 캠프파이어의 불길을 바라보던 밀레시안은 왜요? 하고 뒤늦게 도우갈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불을 싫어하는 도우갈은 캠프파이어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짧고 불친절한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신은 지나치게 선량합니다.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오랫동안 홀로 살아남아왔던, 인간인지 인간이 아닌지 모를 낯선 세계의 청년은 제 주변의 어둠을 불사르는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웃었다.
선하지 않은 이의 마음이 그렇게까지 망가질리 없습니다.
밀레시안은 웃지 못했고 도우갈은 그런 밀레시안을 보며 낮은 웃음소리를 이어나갔다.
불을 밝힌 것치고는 지나치게 서늘한 밤이었다.
밀레시안은 도우갈의 치료에 의존하며 버려진 세계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동쪽 목초지부터 남쪽 버려진 농작지까지, 밀레시안은 최대한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여신이 말한 다섯개의 마석에 관한 단서는 얻어낼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밀레시안의 몸에는 착실하게 부상이 쌓여만 갔고 도우갈은 끝내 진절머리를 내며 작작다쳐오라는 험한 말과 함께 밀레시안에게 마지막 붕대를 감아주었다.
밀레시안은 다치고싶어서 다치는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입을 우물거리면서도 일단 도우갈의 치료에 감사의 인사를 건내며 조심스럽게 붕대 재고에 대해 질문했다.
내가 에린에 돌아가서 물품을 조금 사올까요? 도우갈은 코웃음을 치며 밀레시안의 제안을 거절했다.
도우갈은 이 땅에 사는 것이 나와 당신만 있는게 아니라며 잊었습니까? 이곳은 마족의 땅입니다. 그런 곳에서 내가 어떻게 이런 물품들을 구했을까요? 하고 비뚤어진 미소를 지어보였다.
도우갈의 말대로 떨어진 물품들은 바로 다음날 원상복구 되었고 도우갈은 붕대가 모자라서 감지 못했던 반대쪽 팔에도 붕대를 감아주었다.
밀레시안은 마족과 도우갈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새 붕대를 바라보았다.
도우갈은 눈치를 살피는 밀레시안이 아니꼽다는 듯이 눈을 흘겼다.
차라리 저번처럼 살의등등한 눈으로 노려보지 그러십니까. 밀레시안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이번에는 북쪽 봉인된 설원으로 향했다.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미 알면서도 밀레시안은 밤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도우갈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온 밀레시안을 내려다보며 묻지 않은 질문에 대답했다.
내 대답은 나도 모른다. 입니다. 나는 어떠한 이유로 그들에게 살려지고 있고 나는 그 이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합니다. 나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눠본 당신이라면 내가 때때로 기묘한 이야기를 하거나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겠지요.
나는 내가 기억해낼 수 없는 무언가이며 이 땅의 최후의 생존자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포워르들은 나를 살려두기위해 약간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나는 쉽게 잠들지 않습니다. 자, 이제 답이 되었습니까?
밀레시안은 어둠속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도우갈의 표정을 살피려 애를 쓰며 소리내어 물었다.
하나 더 질문이 있어요. 도우갈은 턱끝을 까딱였다.
당신이 나에게 잘해 주는 이유는 ‘우리’가 같은 처지이기 때문인가요? 도우갈은 기가차다는 듯이 웃었지만 밀레시안은 미동없이 도우갈을 응시했다.
내가요? 당신에게? 도우갈은 사납게 되물었다.
그게 잘 해준겁니까?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요?
당신은 마치 어디 감옥 같은 곳에라도 갇혔다 온 사람처럼 말하는 군요. 진정으로 갇혀있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도 알지 못하는 자유로운 여행자가. 당신은 진정 나를 당신과 같은 범위 안에 묶일 수 있는 존재라고 보고 있는 겁니까?
그러나 이내 도우갈은 이러한 말로 밀레시안의 간절함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고 조용히 밀레시안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평소와 같은 건조하고 메마른 눈빛이 아닌 짐승의 것에 가까운 날 선 눈빛이었다.
도우갈은 몇번인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고 힘주어 어금니를 깨물었다.
건방진. 그가 말했다.
그는 스스로가 입을 움직이고 있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가 보이는 호의는, 그가 말하는 연민은. 밀레시안은 그것이 인간 대 인간으로 주고 받은 감정의 교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보다 상위의 존재와 하급자간의 대화.
형식만 남은 겉치레였으며 진실된 이름도 조차 주고받지 않은 이들의 맥락없는 대화였다.
도우갈은 계단 위에 서 있었고, 밀레시안은 광장이었던 폐허 아래 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차이는 명확했다.
도우갈은 밀레시안에게 종이뭉치 한장을 던져 주었다. 당신이 찾던 마석에 대한 위치입니다.
도우갈은 그것을 누구에게, 혹은 어디에서 찾았는지 말하지 않았다.
가십시오. 도우갈은 평소와 같이 돌아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곳을 떠나라고 경고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방적인 통보였다.
나아갈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밀레시안이 조사하지 않은 장소는 이제 딱 한군데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밀레시안은 말없이 종이를 주워들고 알베이로 떠나갔다. 도망칠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카즈윈의 횡포아닌 횡포는 계속되었다.
루나사는 고통받았고 이에 대한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사장실로 도망쳤다.
헤루인이 너무 열심히 일을 합니다. 사장은 루나사의 비명을 즐겁게 곡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더군. 루나사는 복고양이같이 나른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L대리를 돌아보았고 무언의 항의를 담아 발끝을 탁탁 두드렸다.
회사 안의 작은 회사와 융통성이 넘치시는 인자한 사장님. 그리고 옴팡뒤집어쓴 루나사.
루나사의 팀장은 선언했다. 전직하겠습니다. 사장은 차 향을 음미하며 되물었다. 어디로?
옥상 카페테리아로 갈겁니다. 오늘부터 저희 팀은 루 나사가 아니라 루 팡이라고 불러주십쇼.
사장은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나는 자네들이 탐정과인줄 알았는데.
루나사는 이죽거리며 대답하고는 손을 휘저었다. 원래 털어본 놈들이 범인도 더 잘찾는 겁니다. 모르셨습니까?
L대리는 아무런 대꾸없이 일어나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조금 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고 어두워진 사장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먼저 소리를 낸 것은 톨비쉬였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는 조용히 양 손을 모아 턱을 기대었다. 갱신이 멈췄나?
루나사는 대답했다. 예.
톨비쉬는 한숨을 내쉬었고 곰곰히 생각을 더듬었다. 어디에서?
루나사는 대답했다. 아직 첫번째 입니다. 곧 끝물이긴 하지만요.
톨비쉬는 첫 걸음도 떼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라워 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곧 납득했다.
그렇지. 그랬지. 그 남자라면 가능했다. 그는 아주 신중했고 늘 조심스러웠다.
한걸음 물러서서 상황을 살피는 것에 익숙했고, 무심한척 하면서도 남들에게 휩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들에 집착했다.
마음을 준 것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위험을 마다하지 않았고 납득할 수 없는 결과 앞에서 절망하지 않았다.
그는 도전자였으며 의심 하는 자, 스스로 답을 구하는 자.
톨비쉬는 맑은 찻찬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내저었다.
루나사는 잠시 그런 톨비쉬의 정수리를 내려다 보았고 이내 말없이 고개를 숙여보인뒤 몸을 돌려 톨비쉬를 떠나갔다.
톨비쉬는 한참동안의 고민했고 이내 결론을 내렸다.
손을 뻗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한 톨비쉬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하는 목소리를 향해 즐겁게 물었다.
조카님. 다음 주부터 해외스케줄이었지? 그런데 네가 기대한 그 콘서트 티켓 예매날이 언제더라?
며칠 후, L대리는 근무시간에도 불구하고 옥상 카페테리아로 올라갔다.
테이블에는 평소보다 진하게 탄 차가 놓여져 있었고 찻잔 옆에는 강렬한 레드 색상과 네가지 무늬의 패턴마크가 돋보이는 신시엘라크 L2(Limited Edition 2) 가 놓여져 있었다.
L대리는 느긋하게 차를 음미한 뒤 날카로운 눈으로 시계를 노려보았다.
57, 58, 59.. 화면이 깜빡이는 것은 단 한순간. L대리는 눈 깜짝 할 사이에 마우스를 움직였고 만족할만한 숫자가 결과 창에 떠올랐다.
생각보다 좀 밀리긴 했지만 이만하면 납득할 만한 순번이었다.
애초에 같은 업계에서 일하면 자기 연줄로 구하라고.
L대리는 이런 쓸데없는 일까지 시키는 사장이 원망스러웠지만 그가 말하는 그 연줄이 불행하게도 자신의 상사였고 그 상사의 밑에는 콘서트나 공연 티켓예매에 도가 튼 (그리고 아주 유능한) 젊은 사원이 하나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비밀 회의 참석도, 콘서트 티켓 예매도, 명백하게 부당한 업무외 지시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지만 불쌍하고 가련한 정식사원에게는 참는 수 밖에 없었다.
L대리는 위아래로 이리저리 치이기만 하는 불쌍한 자신의 회사생활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며 다시 마우스를 붙잡았다.
사장이 명령한 특수 업무를 끝냈지만 아직 시간은 조금 남아있었다.
그는 남은 시간동안 느긋하게 웹서핑이나 즐겨야 겠다고 생각하며 찻주전자를 끌어당겼다.
찻주전자를 감싸고 있던 티코지를 벗겨내자 가장자리에 달린 다섯가지 색의 구슬장식을 다그락거리며 맑은 도자기 소리를 내었다.
찻잔에는 금방 따끈한 차가 채워졌고 르웰린은 오늘따라 각별한 차 향을 즐기며 손끝을 움직였다.
몇 번의 조작을 통해 르웰린의 노트북은 어느 기기와 연결되었고 곧 그 기기의 화면을 고스란히 르웰린의 모니터에 띄워보였다.
르웰린은 자신의 방, 항시 충전기에 연결되어있는 핸드폰의 어플을 마우스로 더블 클릭하며 새로 올라온 이야기를 열람했다.
어플의 이름은 ‘별의 어항’.
르웰린은 차를 홀짝이며 22번째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는 자신의 별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글
카즈밀레)별의 어항7
침대에서 일어난 밀레시안은 아무리 작아도 곰이라며 최대한 작고 어린, 허약한 곰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너무 어린 곰은 강함을 증명 할 수 없으니 안되었고 이제 막 성체가 된, 그러면서도 조금 약한.. 그래, 더도 말고 덜도말고 딱 타르라크만큼 허약했으면 좋겠다며 적당한 비교대상을 떠올린 밀레시안은 무게감이 전혀 달라진 브로드소드를 휘둘러 확인하며 스스로의 표현력에 감탄했다.
방금 달빛을 받아 막 인간으로 돌아온 타르라크가 들었다면 네??? 하고 기겁할 혼잣말이었지만 밀레시안은 그저 새로 개조한 검을 시험해볼 생각에 푹 빠져있을 뿐이었다.
밀레시안이 방안에서 새로운 검의 밸런스에 적응하려 하고 있던 그때 여관의 방문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여관의 주인, 피르아스는 밀레시안에게 던컨촌장님이 찾으셨다는 전언을 남긴채 다시 1층으로 내려가버렸다.
밀레시안은 아직 이른 태양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각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던컨의 부름이었기에 아무런 의심없이 촌장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안개가 스산하게 깔린 새벽이었다.
던컨은 마리와 그 부모에 대한 이야기로 화두를 꺼내며 그녀의 부모님이 남긴 유품을 꺼내 보여주었다.
언젠가 마우러스의 분실물과 똑 닮은 부러진 토크의 반쪽이었다.
밀레시안은 마우러스의 절망은 이미 보았다고 대답했다.
던컨은 마우러스의 절망이라는 밀레시안의 말에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드루이드들이 만들 수 있는 수호의 부적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것은 영혼과 영혼을 이어준는 특별한 부적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나였으나 둘이 되었고 둘이서 하나의 문장을 완성시키는 토크의 표면에는 그들이 바란 간절한 소원이 쓰여져 있었다.
그 어떤 고통과 시련이 있다 해도. 우리는 다시 만나리.
그 고통이 인간을 저버리는 절망이었든 죽음의 강을 건너는 시련이었든, 그들은 다시 만날 날을 약속했고 그 기원은 고스란히 이 토크에 깃들어있었다.
밀레시안은 자신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한채 던컨이 내민 붉은 여신의 날개를 받아들었다.
세상은 어떠한 설명도 요구하지 않은 채 잠시 흐려졌고 밀레시안의 앞에 돌로 만든 여신상을 내려놓았다.
돌이 된 여신에서 빠져나온 백색 투명한 유령이 밀레시안의 옆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괜찮나요? 유령이 된 여성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많이 여위였네요. 고생이 많이 심하셨나봐요.
그녀는 밀레시안의 앞으로 다가왔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붉은 로브 속에 손을 넣고 거칠어진 뺨을 쓰다듬었다.
남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밀레시안의 뺨에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 온기는 유령의 것도 아니었고 마우러스의 것도 아니었다.
밀레시안은 스스로의 열기를 자각하지 못한 채 소리죽여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뱉어내었다.
타인의 기억을 빌어 쏟아지는 커다란 호의와 애정이 버거웠고 목소리에서 내비치는 믿음이 부러웠다.
그가 그녀를 보고있지 않았음에도 시라는 마우러스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고 그가 가는 길을 따라 거닐었다.
마우러스의 절망은 깊고 고통스러웠지만 시라가 보내는 믿음은 그런 그를 구원하고 지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가 단 한번이라도 그녀의 영혼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면. 밀레시안은 일어나지 못한 기적을 아쉬워 하며 모리안 여신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자신에게 이러한 신뢰와 믿음을 보여준다면. 밀레시안은 눈을 감고 자신의 심장위에 손을 올렸다.
나 또한 기쁜 마음으로 이 세계에 낙원을 선물할 수 있는 걸까?
눈을 감은 밀레시안은 그러한 미래를 떠올려보고자 노력했지만 그 눈에 비치는 것은 모두 검정, 어둠, 허무한 공백의 공간이었다.
밀레시안의 마음이 그 어둠결에 조금씩 젖어들어 가는동안 마우러스의 곁에 서 있던 그의 아내 시라가 속삭였다.
모리안…? 믿음으로 가득 찬 영혼은 혼란스럽다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냐, 틀려. 뭔가 이상해. 영혼의 말에 밀레시안은 눈을 떴고 아까와는 달리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영혼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이목구비가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행동과 고갯짓으로 그녀가 보는 방향을 가늠한 밀레시안은 그녀가 두려움을 느끼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새하얀 날개를 가진 낯선 신족에 서 있었다.
키홀, 저 사악한 마신이 어떻게 살아남았지?! 시라는 마우러스(밀레시안)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쳤다.
영혼의 메아리가 닿는 것은 꿈속의 기억이 아닌 영혼뿐이었기에 그녀의 손길에 흔들리는 것은 마우러스의 환영이 아닌 밀레시안 그 자체였다.
시라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니에요! 여기는 티르 나 노이가 아니에요! 저건 모리안이 아니야! 속지 말아요!
밀레시안은 깨어지는 듯한 높은 비명소리에 고통스러워 했고 시라의 목소리는 그 고통속에 스며들어 몇번이고 메아리를 이어나갔다.
밀레시안은 유령처럼 흐느끼는 목소리로 앓는 소리를 내뱉다가 급한 숨을 들이마시며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무거웠고 머리가 깨질 것같았다. 눈을 뜬 곳은 낯선 곳이었으나 밀레시안은 곧 그 장소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힐러의 집, 아마도 던바튼의.. 밀레시안은 던바튼의 힐러, 마누스가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긴장을 풀었다.
뒤늦게 골이 흔들리는 통증이 찾아들었다. 밀레시안은 머리를 부여잡으면서도 제가 할 일에 대해 떠올렸다.
타르라크에게 이 사실을 알려줘야해.
밀레시안은 여신의 배신이 아닌 마신의 책략이라는 것에 안도하며 몇번이고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타르라크에게 알려줘야해. 그들은 배신당한게 아니야. 이용당하지 않았어. 희생당하지 않았어.
여신은 인간들의 편이야. 시라의 믿음은 마우러스를 구원할 수 있는 열쇠인 동시에 타르라크의 용서가 되었고 밀레시안의 명분이 되었다.
밀레시안의 운명은 변하지 않았다. 영원과 불멸. 이 땅에 낙원을 꿈꾸는 자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밀레시안은 영원히 그 위협에서 벗어 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것을 원하는 것이 인간들을 사랑하는 여신이라면, 그 것이 이 땅에 내려선 낯선 여행자를 따뜻하게 맞이해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밀레시안은 자신이 희생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제물과 희생은 같은 결과 였지만 받아들여지는 의미는 정 반대의 것이었다.
밀레시안은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일으켜 현관문으로 향했다.
마누스가 밀레시안을 말리려 했을때는 이미 침대를 빠져나간 뒤였고 밀레시안은 통증이 많이 사그러들었다고 재빨리 대답했다.
한발자국 뗄 때마다 구토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정도면 정말 양호한 것이었다.
막말로 자이언트 웜에게 산채로 씹히는 것보다 가볍지 않은가.
정 상태가 안좋다면 한번정도 □□다가 □□□나면 그만인 일이라고 생각하며 밀레시안은 매우 가벼운 말투로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괜찮아요. 나는 괜찮아요. 힐러의 집 문을 열고 밤의 공기를 들이마신 밀레시안은 더운 숨을 뿜으며 유령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괜찮을 수 밖에 없어요.
무엇을 해도 □□않으니 괜찮을 수 밖에. 밀레시안은 태양이 뜨기 직전 타르라크에게 도착 할 수 있었고 마신 키홀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해주었다.
타르라크는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자신이 직접 가지 못하는 것에 분개하며 밀레시안에게 부탁했다.
부디 여신을 구해주십시오. 밀레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사지로 떠밀린 것이 아닌 자신의 선택이라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밀레시안이 세번째 여신의 꿈을 꾸고 검은 마족통행증을 통해 티르 나 노이로 가고 있던 그때 알반은 내부에도 불온한 운명의 기척이 감지되었다.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수리부엉이었다.
루나사의 비밀스럽고도 결의 가득했던 비밀 회의장은 결국 그 지독하고 악착같은 수리부엉이에게 발각되었고 회의실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혀졌다.’
비밀 회의장을 급습당한 루나사 팀장은 자신들이 선량한 블러디허브 드링크 F 애호가들의 모임이라고 주장했지만 카즈윈은 그들 중 반수 이상이 더 이상 블러디허브따위로는 체력을 회복 할 수 없는 중증의 포션 중독자임을 지적했다.
힘뿐만이 아닌 논리까지 완벽한 날카로운 한방이었다.
이에 루나사는 효능이 아닌 맛으로 마시는 거라는 무리수를 던졌고 이 악수는 그들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쐐기로 작용했다.
구성원들은 입맛과 건강을 잃었이지 양심을 잃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직속 팀원들조차 차마 블러디허브 드링크 F가 맛있다고 말할 수 없었던 탓에 루나사들은 우물쭈물거리며 카즈윈의 시선을 피했고 어린 루나사의 신입직원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블러디허브 드링크 F는 개암버섯찜 이상의 공포였던 모양이었다.
멀지 않은 미래에 F의 효능을 깨닫게되며 증오하는 동시에 사랑할, 그리고 조금 더 먼 미래에는 F조차 통하지 않는 만독(카페인)불침의 운명을 가진 아이였지만 그녀의 선배들은 루나사의 젊은 미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루나사들은 어린 직원을 달래어 복도로 나간 뒤 닥터 블러드의 허브페퍼 G를 한아름 안겨주었다.
F보다는 약하지만 패키지 디자인과 내용물의 맛을 조금 인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나름대로의 매니아층을 확보한 에너지 드링크였다.
드링크의 맛을 따지고 있다는 자체가 이미 그들의 미래가 메투스 하늘보다 어둡다는 이야기였지만 그 소수의 매니아층에 막 첫발을 내딛게된 신입 직원은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듯이 눈을 반짝이며 이정도면 맛이 괜찮은 것 같아요. 라고 대답했다.
블러디 허브 액기스 특유의 향이 남아있음에도 그녀의 미각은 뛰어난 적응력을 보였고 선배 루나사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루나사 팀장이 인정한 인재. 그렇게 신입직원의 메신저함에 선배들의 애정(이라는 이름의 연민)이 가득 찬 꿀맛유지방감자칩의 기프트콘이 쉴 새 없이 쏟아져내리던 같은 시각, 철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코너의 내몰린 루나사 팀장의 머리위로 찢어진 예능 프로그램의 편성표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카즈윈의 장기자랑중 하나인 인간아닌 악력이 또다시 마술을 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화번호부 두께정도 쌓인 텔레비전 편성표를 찢고 찢고 또 찢고. 무심한 눈빛으로 남은 문서들의 필적을 하나 하나 씹어먹듯이 눈에 담아내던 카즈윈은 그렇게 힘쓰지 말고 문서파쇄기를 이용하라는 루나사 팀장의 깐족거리는 얼굴 앞으로 고개를 숙인뒤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남의 사생활을 예능프로그램으로 삼으니까 재밌어? 루나사의 팀장은 부정의 대답 대신 진한 미소를 지으며 턱끝을 들어올렸다.
카즈윈은 이대로 그를 추궁해봤자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카즈윈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누가 이 쓰잘데기 없는 모임에 어울리고 있었는지를 물었지만 루나사의 팀장은 카즈윈에게 뒤지지 않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쥐를 잡자랑 토끼토끼, 그리고 다운&업중에서 원하는 방법을 골라봐. 몇 명 정도로 예상하고 왔어?
기가 죽긴 커녕 더욱 신이 난 루나사를 보며 인상을 찡그린 카즈윈은 미련없이 발걸음을 돌려 복도 밖으로 빠져나왔다.
막내를 달래며 팀장님의 이빨을 추스릴 준비를 하던 루나사들은 화들짝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카즈윈의 퇴장에 루나사들은 당혹스러운 눈치였지만 재빨리 스캔한 카즈윈의 손이나 옷가지는 다행스럽게도 깨끗한 모습이었다.
루나사들은 오히려 코뼈하나 건들지 않았다는 점을 의아해하며 자신들의 팀장 역으로 무슨 불법적인일을 저지른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루나사들은 카즈윈이 멀어지자 마자 우르르 몰려가 난장판이 된 회의실 안을 들여다 보았다.
설마 피 한줌 안남기고 씹어먹었다던가.. 바보야 카즈윈 팀장님은 헤루인이지 엘베드가 아니야.
루나사들이 저들이끼 티격태격하는 동안 루나사의 팀장은 온화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자신들의 팀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우아하고 또 화보와도 같아서 루나사들은 괜스레 한기를 느끼며 쭈뼛쭈뼛 회의실 가장자리에 나란히 몰려섰다.
무슨일이에요? 용기있는 한 루나사의 질문에 루나사의 팀장은 믿음직스러운 자신들의 팀원들을 보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어. 팀장의 대답은 그것으로 끝이었고 루나사들의 질문도 거기서 끊어졌다.
그 기묘한 침묵은 뒤늦게 외근에서 돌아온 부팀장이 팀장님 C회의실 털렸다면서요? 하고 큰 뒷북을 울릴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녀가 외친 뒷북소리는 떨려오는 심장소리와 요동치는 테이블비트소리에 묻혀 맥없이 흩어지고 말지만 루나사의 부팀장은 다시한번 팀장과 다른 팀원들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를 환기시키려 애를 썼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만에 생각에 잠긴채 대답을 거부하고 있었다고 부팀장은 하는 수 없이 막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영문을 몰라서 입다물고 있던 막내 직원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모르시겠데요. 루나사의 팀장은 다리에서 선라이트 옐로우 빛을 낼 것같은 요란한 속도로 빠르게 무릎을 떨며 자그맣게 웃기 시작했다.
정말 즐겁다기 보다는 앓는 소리와 한숨이 뒤섞인 것이 대충 입가 근처에서 경련을 일으키는 느낌이었다.
부팀장은 상사의 칠칠맞은 웃음소리에 인상을 찡그리며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고 주변 선배들의 눈치를 보던 막내는 다시한번 조곤조곤 상황을 정리하여 부팀장에게 현재 상태에 대해 전달했다.
회의실을 습격하신 헤루인 팀장님이 그냥 돌아갔는데 왜 돌아갔는지를 모르겠어요. 종이를 찢긴 하셨는데 이건 아주 온건한 반응이라면서요?
부팀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가를 쓸어내리다가 그.. 외나무 다리는? 알고 물었지만 막내는 눈썹을 찌푸리며 무슨 외나무 다리요? 라고 되물었다.
루나사 팀장의 웃음소리는 더욱 짙어졌고 부팀장은 테이블이 더욱 박살나기 전에 말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루나사 팀장의 등짝을 철썩 휘갈겼다.
그만 좀 떨어요. 복달아나게시리..!! 팀장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무릎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의 행운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행운이었다.
글
카즈밀레)별의 어항6
팀원들의 입에서 빠져나간 얼이 알반 건물의 구석구석을 헤매이고 다니는동안 카즈윈은 어제 올라왔던 다음화 이야기를 불러들였다.
이야기는 밀레시안이 여관으로 돌아가 잠시 눈을 붙였다가 일어난 부분부터 시작되고 있었고 카즈윈은 이전 던바튼에서 있었던 40시간의 대기 이벤트를 떠올렸다.
갑작스럽게 카운트 다운 시간을 늘리는 이벤트가 있다면 그 역이되는 이벤트도 있는 뜻인가.
만약 그 짧은 대기 시간 또한 이야기 속에 포함되는 것이라면 그 기묘한 외전은 아마 밀레시안이 잠시 눈을 붙이는 동안 꿨던 꿈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밀레시안은 꿈도 꾸지 않고 푹 잘잤다고 말하고 있었고 카즈윈은 과한 추측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외전의 텍스트가 모두 지워졌기 때문에 밀레시안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떠한 실마리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카즈윈은 다시한번 생각을 깔끔하게 지워내고는 밀레시안의 이야기를 읽는 것에 집중했다.
밀레시안은 부지런히 눈밭을 헤치고 나아가 타르라크가 있는 숨겨진 제단에 도착했다.
밀레시안은 타르라크에게 글라스기브넨에 대해 물었고 타르라크는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주겠다며 약간의 쟤료를 부탁했다.
보존 처리된 낡은 안경을 사용하는 곳은 라비던전.
카즈윈은 하필 기억을 보는 곳이 그에게 호의적인 서큐버스가 있었던 라비던전이라며 타르라크 흑막설에 의심을 더했지만 밀레시안은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의 기억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여태까지 찾아왔던 진실이 충격이 너무 컸던 탓에 의심할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던 것에 가까웠다.
타르라크의 동료들은 다른이도 아닌 여신의 명령하에 공격당했고 글라스기브넨을 만들고 있었던 것은 사라진 인간들의 영웅 마우러스였다.
타르라크는 마법을 잃고 동료를 잃고 신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티르 나 노이는 거짓이었다. 혹은 인간들을 원한 곳이 아니었다.
그 척박한 땅은 인간뿐만이 아닌 마족조차 살기 어려워 보였지만 다크로드나 모리안은 전혀 신경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 물론 그동네에도 자이언트 웜은 있더라. 밀레시안은 이제 자이언트웜이라면 지긋지긋하다며 이를 갈았다.
보석이 열리는 나무니 들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이니, 들짐승과 날짐승은 커녕 평화의 노래의 삑사리조차 들리지 않은 세계가 진정한 낙원일리 없었다.
어쩌면 타르라크가 추측한대로 어딘가에 낙원의 힘을 빼앗기고 있던 탓인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밀레시안은 다른건 몰라도 자이언트 웜이 마을 어귀를 돌아다니는 그곳이 낙원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세계의 강림이었다. 어떠한 희생과 대가도 없이 그 척박한 땅이 낙원으로 변모 될 리 없었다.
밀레시안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솔직히 말해서, 밀레시안은 무서웠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레시안의 머릿속을 가득채웠다.
여신이 나를 부르는 의미가 만약에 자신의 구출이 아니라면? 같은 꿈을 꾸었던 타르라크는 그 꿈을 구조의 요청이라고 받아들였지만 밀레시안이 본 꿈에서 여신은 단 한번도 구조를 요청하지 않았다.
티르 나 노이가 파괴되려고 하기에 이쪽으로 와달라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이제 의심하려나? 금발곱슬 흑막설을 밀고 있는 카즈윈은 밀레시안에게 조금만 더 사고를 이어나가 보라고 응원했지만 밀레시안은 안타깝게도 타르라크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신뢰였다.
카즈윈은 어쩐지 답답한 마음에 탄산수를 벌컥 들이켰지만 혀끝은 여전히 쓰기만 했다.
이런 탄산이 든 맹물보다는 풍미좋고 목넘김이 깔끔한 맥주가 필요했다.
카즈윈이 입맛을 다시는 것과 별개로 밀레시안은 모리안의 배신이라는 말을 읊조리며 초조하게 던전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돌이 된 여신의 조각상이 있었고 수호와 안전을 기원하는 검이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자애롭고 또 따뜻하게 라비던전의 도전자들을 내려다보는 여신을 보며 밀레시안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밀레시안의 눈에는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카즈윈은 새로 시작 된 카운트 다운을 확인한뒤 어플을 종료했다.
습관처럼 메모장을 불러오기는 했지만 딱히 규칙의 문구를 수정할 필요도 없었다.
밀레시안의 메모란에 있던 여신=배신(?) 에서 물음표를 지워버리기는 했지만 특별히 추가할 만한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카즈윈은 타르라크=의심(왜 안하지?)라고 수정한 뒤 다시한번 탄산수를 벌컥 들이마셨다.
여신에게 반감을 보였기 때문인가. 내심 여신을 의심하고 있었던 밀레시안에게 여신의 반감을 보이는 전직 전설의 삼용사는 확실히 믿음직스러운 존재였지만 카즈윈은 여전히 그가 의심스럽기만 했다 하필 그만이 마족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았고 하필 그만이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역시 수상한데. 카즈윈은 눈을 가늘게 흘기며 빈 병을 분리수거용 박스에 빈 탄산수 병을 쑤셔 박았다.
이야기는 다음날, 또 그 다음날까지 계속 이어졌고 카즈윈의 탄산수 원샷은 계속 이어졌다.
소리없는 의심의 소용돌이는 날로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같은시각, 의심의 소용돌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루나사의 한 비밀회의실.
루나사의 팀장을 중심으로 음습하게 모여든 알반의 몇몇 직원들은 블러디허브 드링크 F들 한번에 들이키며 뜨거운 토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조정기간 486이 끝났는데도 카즈윈의 칼퇴가 계속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참가자는 지속적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스케줄의 문제로 대리인을 보내는 것일뿐 이 비밀모임의 단결력과 보안력은 알반의 기밀문서만큼이나 출중하고 또 엄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인자들의 이름만 늘어놓고 보면 알반의 주요인사들이 모두 모인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사자인 카즈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모여있다시피한 이 회의실은 이미 회사속의 작은 회사나 다름없었다.
그 대단한 능력들이 개인의 취미를 파해치기 위해 조직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등짝에 사장님의 검은장갑 스매시가 내리꽂힐 일이었지만 루나사 팀장외 36명은 이러한 위험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지하게 티비 편성표를 걸어놓고 카즈윈의 퇴근시간과 퇴근 경로, 딴길로 새었을 때 소비되는 시간의 평균 따위를 계산하며 어떤 프로그램이 그의 칼퇴근을 지속시키는지를 추측했고 이내 한 작은 직원이 손을 들어올렸다.
모이통을 빼앗긴 병아리 루나사였다.
혹시 드라마가 아니라 예능 아닐까요? 루나사 팀장은 느리게 박수를 치며 자신의 팀에 이런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인재가 들어왔을줄은 몰랐다며 감격했다. 그들은 드라마 편성표를 한쪽에 밀어낸 뒤 예능 편성표를 뽑아내었다.
사장의 부탁으로 이 모임에 잠입한 L 대리는 조용히 미간을 매만졌다.
이 열정으로 일을 해.. 레몬을 짜내던 카즈윈이 크게 재채기를 하고있던 시간대의 일이었다.
카즈윈은 이제 지겨워진 하지만 아직 반박스나 남은 탄산수에 레몬즙을 섞으며 거실로 돌아왔다.
그동안 밀레시안은 타르라크의 복수의 결의를 전해들었고 던컨에게서 마리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중간에 한번 여신의 꿈을 꾸기는 했지만 그녀의 간절한 구조 요청이 밀레시안의 불신을 무너뜨린 것은 아니었다. 이어지는 던컨의 말이 밀레시안의 두려움을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글라스기브넨의 뼈를 대체할 아디만티움의 골격에 마법의 시료를 덧바르기 위해서는 용기 있는 인간의 영혼이 필요하다네.
던컨은 사라진 세 용사의 방문으로 그 조건마저 충족되었을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밀레시안에게는 조언자 타르라크가 있었다.
그는 그 티르 나 노이에서 생환한 영웅이며 용기있는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렇다면? 만약 필요한 영혼이 세 개였다면? 또한 밀레시안은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글라스기브넨이 이미 한번 이 세상에 소환되었던 적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번 소환되었고 한번 뼈로 돌아갔다. 불완전한 뼈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용기있는 영혼이 필요하지만 그렇게 소환된 글라스기브넨이 영원불멸의 낙원을 지킬 수호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밀레시안은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멈춰섰다. 낙원의 수호자.
그 한마디와 함께 눈앞이 새하얗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뺨에 달라붙는 눈송이가, 입가에서 폭풍처럼 몰아치는 새하얀 입김이.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함께 다급히 달려오는 유약한 마법사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밀레시안은 어찔하고 당겨오는 두통과 함께 세상이 빙글 도는듯한 환상을 바라보았다.
소용돌이 치는 설원 저편에서 금발의 드루이드가 다급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당신, 제단을 떠날 수 있는 거였어? 밀레시안의 의문인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고 밀레시안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카운트다운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깨어난 밀레시안이 바라본 것은 곤히 눈을 감고 잠들어있는 커다란 곰의 얼굴이었다.
밀레시안은 흠칫 놀라며 몸을 굳혔지만 이내 짐승의 노린내가 아닌 은은한 허브향기에 긴장을 풀며 두툼하고 따뜻한 곰의 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갈색곰은 고개를 잠시 들었지만 이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밀레시안은 피곤했고 곰은 아픈 것 같았다.
밀레시안은 꼬박 반나절을 더 잠들어 있었고 창백한 안색의 드루이드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밀레시안은 조금 더 그 안락함 속에 파묻혀있고 싶었지만 품을 내어줄 곰이 사라진탓에 억지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타르라크는 평소보다 더욱 매마른 기침을 내뱉으면서도 밀레시안을 염려했다.
밀레시안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하고싶지 않아했지만 결국 그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에 여신의 꿈과 글라스기브넨의 시료에 대해 설명했다.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이 시료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들었다.
밀레시안은 자신이 겁에 질린 것을 보면 용기있는 영혼은 아닐거라며 웃어넘기려고 들었지만 타르라크는 그런 밀레시안을 비웃지 않았다.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도 용기라고, 그는 밀레시안이 가장 듣고싶지 않은 따듯한 위로를 건네주었다.
밀레시안이 무릎사이로 얼굴을 감춰버리자 타르라크는 그제서야 자신의 위로 또한 밀레시안에게는 두려움을 부추기는 말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자신의 말을 번복했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고 밀레시안도 알고 있었다.
여신의 배반이 어찌되었든, 혹은 구출이 목적이 되었든 글라스기브넨의 부활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그 두사람 뿐이었다.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을 혼자보내지 않겠다며 자신이 잃어버린 힘을 되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밀레시안은 타르라크가 제단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했지만 이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기절한 자신을 데려오는 것만으로도 꼬박 하루를 앓아야하는 그가 그 먼 곳까지 어떻게 간단 말일까.
밀레시안은 티르 나 노이에 가는 법을 물었지만 타르라크는 혼자는 안된다는 말만을 반복하며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지금의 당신의 힘으로서는 무리입니다. 타르라크는 또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밀레시안을 낭떨어지 방향으로 떠밀었다.
밀레시안은 그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밀레시안은 불멸이었고, 밀레시안은 영원이었다.
밀레시안은 어쩌면 당신이 보았던 그 황량한 티르 나 노이의 원인이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용기없는 자의 입술은 도무지 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낙원의 강림을 위해선 하나의 세계가 필요했고 하나의 세계는 하나의 생명과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비워진 의문사이에 타르라크와 자신의 이름을 우겨넣었다.
타르라크가 라비던전으로 돌아온 까닭은 여신이 돌려보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여신에게 부름을 받은 까닭은 그런 타르라크의 빈 자리를 채워넣기 위함인지도 몰랐다.
그와 달리 밀레시안에게는 용기는 없었지만, 혹 그가 말했듯이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 또한 일종의 용기라면.. 영원의 생명을 얻은 글라스기브넨은 분명 새로 태어나는 낙원에 걸맞는 수호자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카즈윈은 영원의 영혼을 얻는 것이 낙원인지 글라스기브넨인지 혹은 둘 다인지 파악할 수 없다며 몇번이고 밀레시안의 추측을 읽었지만 밀레시안의 추측에는 한가지 비틀린 곳이 있었다.
그렇다면 왜 여신은 인간들을 속여야 했을까.
인간들이 모리안 여신을 믿는 것은 하루 이틀된 일이 아니었고 아주 먼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된 믿음이었다.
단순히 글라스기브넨의 제작자와 용기있는 영혼 세 개를 얻기 위해서였다면 차라리 전쟁을 지속해서 그들을 빼앗는 것이 더 빠를 일이었다. 혹은 포워르들 중에서 뛰어난 마법사와 뛰어난 전사 셋을 뽑아내던가.
밀레시안이 이것저것 설명을 들으며 에린을 떠돌아다니게 두지 않고 잡아가는 것이 더 간편했으며 일부러 의심과 불신을 심어준 뒤 함정냄새가 폴폴나는 펜던트를 보내는 것도 이상했다.
여신은 인간의 편인가 마족의 편인가. 카즈윈은 밀레시안이 조금 더 신중하게 움직이기를 바랬지만 어디까지나 화면 밖에서의 작은 바램일 뿐이었다.
밀레시안은 라비던전에 떨어진 타르라크를 구조한 것이 크리스텔이었다는 점을 기억해내고는 그녀에게 그 당시 타르라크가 어느 길을 통해서 왔는지 알려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크리스텔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밀레시안에게 협력을 약속했고 조건으로 밀레시안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밀레시안은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거꾸로 돌아가는 뱀의 아이콘이 떠올랐다.
아이콘은 간헐적으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지만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카즈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꼼꼼히 지난 이야기등을 살펴보았지만 텍스트는 단 한줄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변경되지 않았다. 변경된 것은 카즈윈이 읽었던 마지막 문장 뿐이었다.
카즈윈은 변경된 문장 하나와 추가된 문장하나를 읽으며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는 것을 확인했다.
밀레시안은 단검을 만지작 거렸지만 이내 손을 떼어내고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증명을 할 수 있을까요? 다음날 밀레시안은 아침 일찍 티르코네일로 찾아가 레이널드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오거를 잡는 것과 한방에 곰을 잡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쉽냐는 것이 그 상담의 주된 질문이었다.
레이널드는 묘지에서 붉은 거미에게 물려 엉엉 울던 일이 엊그제 일이라며 밀레시안을 놀렸지만 이내 진지하게 고개를 가로젓고는 오거의 특성과 크리티컬 한 방의 효율을 극대화 시키는 요령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밀레시안은 오거의 체력과 단단한 피부, 강력한 공격따위를 흘려들으며 오거의 서식지를 물어보았다.
여행자들의 재앙, 식인 오거는 가이레흐의 서쪽 평원에 살고 있었고 포워르들이 독점한 희귀한 광물을 지키기 위해 배치된 오거 전사들은 바리던전의 깊숙한 지하던전에 살고 있었다.
그렇게 먼 곳까지 갈 여유가 없었던 밀레시안은 다시 질문을 바꿔 크리티컬의 효율을 극대화 하는 방법에 대해 물어보았다.
레이널드는 숙련도가 충분히 쌓인 브로드 소드를 발견하고는 자신이 이 검을 개조한다면 브로드 소드만의 특성을 최대한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개조를 하는 동안 검신의 균형과 칼날의 특성이 조금 변화하긴 하지만 레이널드는 보석따위로 보강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밀레시안은 보석까지는 예산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쓰게 웃은뒤 레이널드에게 개조를 부탁했다.
이후 퍼거스에게 담금질과 칼날갈기를 부탁하라는 말에 밀레시안은 대놓고 불신한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레이널드는 크게 웃으며 술을 마시지 않은 퍼거스는 굉장히 실력이 좋은 대장장이라며 강한 신뢰감을 보여주었다.
그럼 퍼거스씨가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은요? 레이널드는 웃음을 멈췄고 갑작스럽게 일이 생겼다며 자신의 교실로 들어가버렸다.
밀레시안은 한번 개조를 마친 브로드 소드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불신감이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칼날갈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담금질을 하기 위해서는 가마와 물통 모루가 필요했기 때문에 밀레시안의 선택지는 딱 두가지가 남아있었다.
퍼거스에게 맡기던가 에린 최고의 대장장이 아이데른을 찾아가던가.
누군가에게 이 선택지를 들이민다면 대부분 후자를 선택하겠지만 세계는 넓었고 인간상은 다양했다.
퍼거스의 악명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럭키한 운세 덕분에 퍼거스의 빗나간 손길이 무기가 아닌 모루를 후려쳤는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사람의 혈관에 술을 흐르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하루쯤은 안마신 날이 있을 것이고 가끔씩은 기분이 좋아 제정신으로 망치를 두드릴 지도 모르고..
하지만 전자를 선택하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생각했다. 어쩔 수 없다. 라고.
그들은 덮쳐오는 압도적인 불안감 앞에서 떨지언정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수리비를 감당해 낼 수가 없었고 가끔씩은 돈으로 해결 할 수없는 시간과 거리에 앞에 절망하며 자신들의 무기를 퍼거스의 앞에 진상해야만 했다.
밀레시안은 시간과 거리 앞에 무릎을 꿇은 쪽이었다. 퍼거스는 그렇게 걱정말라며 호쾌하게 웃고는 칼날을 갈아달라는 말에 앞서 망치부터 꺼내들었다.
칼날 갈아달라니까요. 퍼거스는 아차 하고 망치를 등 뒤로 숨겼지만 그는 여전히 아쉽다는 표정으로 밀레시안의 브로드 소드를 내려다 보았다. 그것은 굶주린 짐승의 눈빛이었다.
밀레시안의 엄중한 감시 하에 퍼거스는 가까스로 두번의 칼날갈기를 마쳤고 이제 남은 것은 검의 표면을 단단하게 만드는 담금질 단계였다.
퍼거스는 드물게 진지한 어조로 이미 검이 충분히 변형 되었기 때문에 이 이상 두드렸다간 밸런스만 나빠질 뿐이라고 조언했지만 밀레시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최고의 한방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퍼거스는 기껏 예쁘게 갈아낸 칼날을 두드리기 싫다는 듯이 이유를 물어보았다.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서요.
밀레시안이 한 방에 곰을 잡을 만한 치명적인 일격이 필요하다고 대답하자 퍼거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는 악마의 것이었다.
밀레시안은 값비싼 플레이트 갑옷을 깨먹었을때와 비슷한, 하지만 성질이 조금 다른 음흉한 미소를 보며 단검을 매만졌다.
지금이라도 말을 취소하고 반호르로 떠나가고 싶었지만 브로드소드는 이미 퍼거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퍼거스는 느릿하게 웃으며 망치를 고쳐쥐었다. 그는 오래간만에 진심을 보여주겠다며 결연한 발걸음으로 풀무를 밟기 시작했다. 광기어린 풀무질이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화로에서 불씨들이 훨훨 날아오르는 것을 보며 밀레시안은 조용히 눈을 감고 뒤로 돌아섰다. 내가 미쳤지.
밀레시안은 이만하면 용기있는 영혼의 조건은 충분히 달성 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조용히 브로드소드에 대한 미련을 접어내었다.
지금이라도 반호르로 가서 클레이모어를 산 뒤에 오거를 잡자. 어스킨 뱅크에 저금해 주었던 모든 예금을 닥닥 긁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밀레시안은 차라리 그게 낫겠다며 차분히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장간의 열기를 등지고 퍼거스의 어이쿠 소리를 기다리고 있던 그 때.
다 되었소. 퍼거스는 이거 실수했구려 하고 (제 나름대로의 애교를 담아) 살갑게 말하는 대신 몇 번 들어보지 못한 진지한 목소리로 밀레시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퍼거스는 은백색으로 날카롭게 빛나는 브로드 소드를 내밀었고 오래간만에 힘을 써서 힘들다고 투덜거리며 냇가로 걸어내려가 물을 뒤집어쓰기 시작했다.
밀레시안은 완벽하게 담금질이 끝난 브로드 소드를 바라보다가 놀라움에 가득 찬 눈으로 퍼거스를 응시했다.
저 인간.. 잘 할 줄 아는데 일부러 박살내고 있었구나..!!
밀레시안은 퍼거스의 기적, 혹은 기만에 치를 떨며 여관으로 돌아왔다.
내일 일정은 아침 일찍부터 시작할 예정이었고 그 목적지는 당연히 울레이드 숲이었다.
글
카즈밀레)별의 어항5
카즈윈은 아직 이야기가 남았을 처럼 불을 밝히고 있는 별의 어항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류가 나면서 꺼졌기 때문에 인식이 안되었나? 확실하게 오늘치의 이야기를 읽었던 카즈윈은 어째서 어항의 불이 밝혀져 있는지 납득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어항에 고정되어 있는 시선은 핸드폰으로 향하고 다시 거실로 향했다. 눈빛에 의문이 스쳐지나갔다.
안방으로 돌아온 카즈윈은 침대에 걸터앉은채 핸드폰의 전원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1분, 혹은 2분. 카즈윈은 저도 모르는 사이 침대에 몸을 눕혔지만 시선은 여전히 방문너머로 비쳐들어오는 환한 어항의 불빛에 고정되어 있었다.
편히 뉘여진 몸은 조금더 안락한 자세를 찾기 위해 꿈틀거리며 침대위를 유영했다.
포근한 침구가 뺨에 닿았고 카즈윈은 이유모를 미련이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이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냥 잘까. 카즈윈은 핸드폰도 기계인데 오류정도는 일어날 수 있는 거라며 스스로를 납득시키려했지만 이유도, 근본도 없는 알 수 없는 집착이 그의 수면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있었다.
피곤한데. 카즈윈은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손을 뻗어 핸드폰을 끌어당겼다.
뜨끈뜨끈하면서도 매끄러운 철제 프레임 가장자리에 톡 튀어나온 버튼이 느껴졌다.
이번에 켜지지 않으면 그냥 포기하자. 카즈윈은 거의 잠들 생각으로 핸드폰을 베개 밑으로 쑤셔넣으며 전원을 눌렀고 잠시 뒤 그의 베개 아래서 드륵 하고 얕은 진동음이 들려왔다.
눈을 감고 있던 카즈윈은 베개밑면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카즈윈은 한숨과 함께 돌아누웠다. 핸드폰에서 전원이 켜질때만 나는 특유의 진동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화면은 틀림없이 신시엘라크사의 로고가 떠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카즈윈의 예상과는 달리 화면에는 핸드폰은 오류가 났던 어플의 메세지 창이 그대로 띄워져 있었다.
다른점이 있다면 띄워진 메세지창 속에 처음보는 매듭무늬가 있었다는 것 정도.
카즈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매듭무늬를 이루는 선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에도 뱀이었다. 디자인적으로 간략화된 뱀의 머리는 꼬리라고 구분하기도 힘든 매듭의 끄트머리를 문채 마름모꼴의 복잡한 매듭무늬의 내부를 순환하고 있었다.
이런 무늬를 뭐라고 하지? 켈틱? 카즈윈은 이 아이콘이 오류를 표시하는 아이콘이 아니기를 간절히 빌고 있었다.
아까부터 다시 발열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반절정도 차 있었던 베터리는 붉은 빛으로 깜빡이고 있었고 핸드폰은 한겨울 갓 구워낸 고구마마냥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대기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다림에 응답하듯 메세지창에는 조각난 기록을 불러오는 중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역시 오류였나. 카즈윈은 핸드폰의 충천기가 분리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한번 읽으면 다시는 열람할 수 없는 어플의 특성상 지금 전원이 끊어진다면 다시는 이 조각난 기록인지 뭔지를 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러한 신중한 행동에도 카즈윈은 결정적인 단서를 놓치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흔들림이었다.
거실을 밝히는 어항의 불빛중 일부가 미세하게 일렁거리는 그림자를 내비치고 있었고 보글거리는 작은 소리들이 백색가전들의 특유의 낮고 지속적인 소음속에 파묻혀 버렸다.
만약 카즈윈이 거실에서 핸드폰을 충전했더라면 메세지창에 기록을 불러온다는 문구가 뜨는 동시에 어항 속 별에서부터 수많은 기포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카즈윈은 거실쪽을 내다볼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카즈윈이 알지 못하는 사이 어항은 격렬한 고요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그 모든 이변이 정지한 것은 카즈윈의 핸드폰에 새로운 문자들이 떠오른 직후였다.
00:00:01 카즈윈은 갑작스럽게 떠오른 숫자들을 바라보며 슬쩍 스크롤을 내렸다. 숫자 아래 첫 문장이 보였다.
이어지는 문자들은 모두 자간과 줄높이가 이상하게 설정되어 읽기가 조금 불편했지만 글씨가 깨어진 것은 아니었다. 카즈윈은 첫문장이 화면에 드러나는 동시에 카운트다운, 혹은 스톱워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뭔지 모를 조급함을 느꼈다. 딱 한번만 읽을 수 있다던가, 갑자기 이야기가 갱신된다던가.
영문모를 스톱워치까지 등장한 것으로 보아 이 어플의 제작자는 여러의미로 사람을 조급하게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분명했다.
카즈윈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시간을 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게 이러한 측정을 할때면 빨리 끝내면 끝낼 수록 좋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카즈윈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대신 아예 외워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본편처럼 긴 글이라면 조금 곤란하지만 대게 이런식으로 나오는 글들은 아마도..
‘외전’.. 카즈윈은 몸을 반쯤 굴린 뒤 몸을 반쯤 일으켰다.
화면을 응시하는 눈이 맹금류의 그것처럼 맑고 투명했다.
방금전까지 집착을 버리고 잠이나 자야겠다며 이불속을 파고들던 사람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모를 날카롭고 진지한 눈빛이었다. 카즈윈은 윗입술을 살짝 핥으며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눈은 금방 빛의 세기에 적응되었고 카즈윈은 마치 업무시간처럼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손끝을 굴리는 동시에 은청색 눈동자가 빠르게 화면을 훑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정하지 못했던 거래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거래였다.]
[밀레시안은 기꺼이 자신의 이름을 저울 위에 올렸다.]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신뢰가 없었기 때문에 사랑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희망이 없었다.]
[이해가 있었지만 신뢰가 없었다.]
[영원은 있었지만 자유는 없었다.]
[미래가 결정되었을 때 그 남은 날들은 믿음으로 채울 수 밖에 없었다.]
[믿음으로 기반된 유예된 날들이 이어졌었다.]
[밀레시안은 언제나 답을 위해 증명해야 했고 언제나 그 과정을 설명해야 했다.]
[그 믿음은 이따금씩 동경의 색깔을 띄었고 그 믿음은 이따금씩 구원의 소리로 울렸다.]
[그 믿음은 이따금씩 나란히 서는 발걸음이었으며 그 믿음은 이따금씩 친애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의 믿음을 기다렸다.]
[수많은 믿음들 중에 밀레시안이 가질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믿음은 이름이었고 마음이었으며 명예였고 육신이었다.]
[밀레시안은 눈 앞에 나타난 이계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이 거래의 대가는 낙원이었다.]
카즈윈이 문장을 모두 읽은 것은 1분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실수가 있었다면 내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스크롤을 크게 크게 내렸다는것 정도.
내용이 이정도로 짧을줄 몰랐던 카즈윈은 얼마내리지 않아 페이지의 마지막 부분에 다다랐고 낙원이었다. 라고 쓰여진 마지막 문장 옆에 반짝이는 직선의 짧은 줄을 발견했다.
글자의 높이와 똑같은 직선모양의 아이콘은 너무 익숙한 나머지 이질감을 느끼기 어려운 짧은 패턴의 불빛이었다.
텍스트 커서? 카즈윈의 의문에 대답하는 것처럼 깜빡이는 커서가 옆으로 한 칸 움직였다.
마침표를 하나 건네띄고 낙원이었다 라는 문구를 지우기 시작한 텍스트커서는 빠른 속도로 문장들을 지워나가기 시작했고 스크롤바는 점차 짧아지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더이상 짧아질 것이 없었던 스크롤바가 사라지고 가장 윗 페이지로 올라왔을때 카즈윈은 스톱워치처럼 정방향으로 올라가던 숫자들이 언제부터인가 다시 카운트 다운이 되어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문장이 지워지기 시작하고 나서부터겠지. 문장이 지워지는 속도는 카즈윈이 읽어내려가던 속도보다 빨랐고 어느새 마지막 문장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시계에는 아직도 20여초가 남아있었다. 카즈윈은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거래였다.. 라는 문장의 끝에 멈춰선 커서를 바라보았다.
낙원이었다. 라는 문장의 온점을 남기고 지워낸 탓에 공정하지 못한 거래의 문장 끝은 어쩐지 미련과 후회감이 가득한 느낌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시간은 한자릿수로 줄어들었고 커서는 천천히 문장의 중간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후회가 가득한, 그럼에도 차마 포기할(지워낼) 수 없었던.
거꾸로 돌아가던 시계는 멈춰섰고 카즈윈은 문장의 일부가 지워지고 남은 00:00:00의 문장을 바라보았다. 남겨진 것은[그것은 공정한 거래였다.] 의 한 문장뿐이었다.
세계와 세계를 맞바꾼 거래였기에 깨어진 이름의 주인은 기쁘게 그 거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메세지창은 카즈윈이 그러한 내막에 대해 해아려볼 시간도 주지 않고 사라졌고 화면에는 내일 올라왔어야할 다음 이야기가 올라와 있었다.
이벤트성이건 정식 카운트건 어플안에 내장된 시계가 0이라는 조건을 채웠으니 다음 화가 올라온 모양이었다.
카즈윈은 이런 피말리는 연출의 1+1이벤트는 더이상 사양이라고 생각하며 메모장 어플을 불러왔다.
뒷내용은 얼마 읽지 못했지만 일단 앞부분은 어느정도 외워놓았던 조각난 기록을 적어넣기 위해서였다.
카즈윈은 어차피 지워진 문장들이 무슨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이러한 연출과 함께 굳이 ‘외전’을 등장시킨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줄거리와 동떨어진 외전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카즈윈은 기억나는 문장과 부분적인 단어, 뉘양스등을 기록한 뒤 핸드폰을 뒤집어 엎었다. 어두운곳에서 밝고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눈이 너무 피로해진 탓이었다.
머릿속 한 구석에 방금 막 올라온 따끈따끈한 최신화가 궁금하다는 생각이 떠오르긴 했지만 카즈윈의 눈에는 이미 졸음기가 가득했다.
내일도 출근이 있었고 읽지 않은 이야기가 어디론가 사라질리도 없었다. 카즈윈은 뿌옇게 흐려져가는 시야 너머로 거실에서 비쳐들어오는 불빛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꼬르륵 거리는 물거품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카즈윈은 둔하게 울려오는 냉장고 소리를 들으며 깊은 수마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조용하던 안방에 작은 진동소리가 울렸고 이내 엎어진 핸드폰과 침대의 틈새사이에 불빛이 밝혀졌다.
시작 로고와 함께 재부팅이 완료된 핸드폰은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경고음을 울리다가 충전기가 연결되었다는 화면으로 바뀌는등 홀로 요란을 떨었고 이내 천천히 수면모드로 전환되었다.
핸드폰의 불빛이 줄어드는 동안 어항의 물거품도 줄어들었고 이내 요동치던 수면도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모든 것은 카즈윈이 잠든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카즈윈이 다음 이야기를 읽은 것은 여전히 퇴근 후 집에 돌아오는 시간대의 일이었다.
카즈윈은 자신이 제법 이 이야기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은 퇴근후 기분전환을 위한 취미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누구에게 인정받을 필요도 설명할 의무도 없었지만 카즈윈은 그렇게해서라도 이야기에 빠져드는 자신과 현실의 자신을 구분하고 싶었다.
솔직하지 못하긴.. 어딘가 먼곳에 있는 어느 곱슬머리 상관이 투덜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이미 퇴근한 카즈윈에게는 들리지 않을 푸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카즈윈은 자신을 절제하는 것에 익숙한 환경속에서 자라났고 그렇게 훈련받았다.
인내심과 자제심, 끈기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평소와 같은 패턴, 평소와 같은 시간. 카즈윈은 스스로의 충동을 잘 제어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 뒤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늘 무슨일 있었어? 너네 팀원들 얼굴이 하나같이 하얗게 질려있던데. 라는 옆부서 동료의 메세지에 짧게 답장을 보내며 핸드폰을 들고 거실로 나온 카즈윈은 맥주대신 탄산수를 한 병따며 테이블 앞에 주저앉았다.
맛으로 먹기보다는 입에서 톡톡튀는 청량감있는 탄산을 위한 맥주의 대체안이었다.
카즈윈의 ‘취미’에 대한 경계는 단순히 소설을 읽는 시간만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생각하는 것. 카즈윈은 점점 세를 불려가고 있는 냉장고 속의 군것질거리들을 경계했고 왔다갔다하기 매번 사러가기 귀찮았던 캔맥주들의 박스구매를 고민했다.
매주 일정했던 수건 빨래의 양이 조금 줄었다던가 무거운 것이 싫어 지갑조차 얇은 것으로 가지고 다니던 카즈윈의 자켓 안에 보조베터리가 들어있다던가.
카즈윈의 생활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고 이제는 주변 사람들마저 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
카즈윈은 옆부서 동료가 보낸 그래? 별일 아니면 됐어. 드라마 즐겁게 봐. 라는 답장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지만 따로 오해를 정정하지는 않았다.
모두 점심에 있었던 사소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오해였다.
카즈윈이 날마다 칼퇴근을 하던 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타부서의 직원중 한 명이 용기있게 카즈윈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 그 오해의 시작이었다.
헤루인 팀장님.. 혹시 요즘 챙겨보는 드라마 있으세요? 질문을 한 타 부서의 직원은 루나사 팀에 들어온지 얼마 안된 신입 직원이었다.
비록 신입이라 하더라도 정보과 소속이었던 그녀가 카즈윈의 위험도를 모를리 없었건만 그녀는 대담하게도 신입이라는 방패를 내세워 카즈윈에게 질문을 걸어왔다.
무해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그녀의 얼굴 위에는 35%의 투명도의 루나사 팀장을 겹쳐져 있었다.
카즈윈은 아무것도 못들은 척 눈을 가늘게 흘기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카즈윈의 냉담한 반응에도 신입 루나사 직원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도 이 반응은 루나사 팀장의 계산내의 반응이었다.
외근이 많은 카즈윈 팀이 사내식당을 이용할 확률과 입맛까다로운 카즈윈이 어슬렁거리며 식당으로 내려올 확률, 그리고 그 확률을 더욱 높일 수 있는 특별 메뉴가 추가되는 시점.
결전의 날은 왔다. 루나사의 팀장은 결의에 가득찬 표정으로 식권을 내밀며 신입직원에게 특수한 임무를 하달했다.
오늘은 비가 내리고 있었고 수요일이었으며 매달 바뀌는 특산품 소비촉진 이벤트의 마지막 주였다.
대다수의 직원들은 비가오는 날이면 밖에서 사먹는 것 보다 사내식당을 이용하는 것을 선호했고 그중에는 늘 식권이 남아도는 카즈윈의 팀원들도 끼어있었다.
수요일은 카즈윈이 그나마 마음에 들어하는 고등어 스테이크가 나오는 날이었다.
그리고 이번달 특산품은 개암버섯. 루나사의 팀장은 지난 팀장급 회식자리에서 소금간만 살짝 더하여 부드럽게 쪄낸 개암버섯 찜이 카즈윈의 공략포인트라는 것을 확인했다며 이번 공략 확률은 98%라고 확신했다.
신입 사원은 자신의 사수에게 이거 미연시에요? 라고 물었다.
그녀의 선임직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히든몬스터 레이드 뛴다고 생각해.
고개를 슥 돌리는 카즈윈을 보며 신입직원은 사수의 표현이 정확했음을 확인했다.
고개를 돌린 카즈윈이 이제 막 찜기에서 나온 개암버섯찜을 바라보는 모습이 마치 한번 더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엑스트라 턴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진짜로 찌른다면 신입이고 뭐고 할것없이 당장 둘러매쳐져서 식당바닥에 거꾸로 매다 꽂히겠지만 신입 직원은 호신술의 ㅎ도 경계심도 ㄱ도 모르는 루나사였다. 게다가 카즈윈이 가장 껄끄러워 하는 어린 신입 직원.
카즈윈은 개암버섯찜의 순번을 기다리는, 그러면서도 루나사의 그 (끈질긴) 인간의 입김이 닿은 것이 분명한 질문을 던진 분명한 어린 직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무슨임무를 수행중인지 완전히 망각해버린 루나사의 신입은 갓 나온 따끈따끈한 버섯냄새에 정신이 팔린채 제 멍하니 찜통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은 요리그릇을 옮기는 트레이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고 이내 카즈윈의 손끝에서 멈춰섰다.
신입직원은 겨우 자신이 아직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카즈윈을 올려다보았다.
카즈윈은 이미 제 몫의 그릇을 챙긴뒤 몸을 돌려서고 있었다.
그냥 무시하시려나? 그녀는 사수가 말했던 안전이 제일. 사람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조언을 떠올리고 어색하게 버섯찜으로 시선을 내렸다. 안되면 그냥 빠지라는 소리였다.
신입직원이 자신의 버섯찜을 챙겨가는 동안 카즈윈은 버섯찜 대기줄에서 한발자국 앞으로 걸어가며 고민했다.
이대로 떠나가는 것이 카즈윈의 평소 패턴이었지만 루나사는 공과 사는 구별하지 못하더라도 0과 null에는 예민한 인간들이었다.
이대로 온건히 물러난다면 루나사는 또다시 다음기회를 노릴것이고 이는 결국 루나사의 집착을 허락한다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결국 카즈윈은 (자의적 지원으로) 이용당했을 뿐인 신입 직원을 울리지 않는 선에서 루나사에게 경고를 보내야겠다고 결론내렸다.
그렇게 카즈윈은 뒤로 돌아서서는 막 버섯찜을 들고 대기줄을 벗어나려는 어린 직원에게 다가갔다.
카즈윈은 고개를 슬쩍 기울여 신입의 귓가에 나지막히 속삭였다.
비슷해. 갑작스럽고도 온화한 목소리에 어린 직원은 네? 하고 되물으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카즈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물흐르듯이 움직여 어린 직원의 트레이에 있던 버섯찜을 가져갔고 곧 다른 사람들 틈으로 섞여들었다.
루나사의 신입은 자신이 뭐에 당했는지 알지도 못한채 멍하니 카즈윈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한참 뒤에야 자신이 정보값을 강제징수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신입은 울지도 웃지도 못한채 자신의 사수에게 돌아갔다.
사수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막내에게 조용히 자신의 디저트 푸딩을 양보해주었고 보고를 들은 루나사의 팀장은 미친듯이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다.
다행스럽게도 루나사의 강력한 요청을 받아들인 상부는 버섯찜 기간을 일주일 더 연장시켜 주었다.
카즈윈의 모호한 대답으로 루나사에서는 잠시 내부토의의 시간을 가졌지만 더이상의 정보수집은 무리라고 판단내렸다.
조사대상인 수리부엉이가 병아리의 식판까지 노리는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으니 다음에는 또 어떤 잔혹한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게 그 이유였다.
덕분에 루나사의 신입은 가는 곳 마다 간식이며 주전부리를 잔뜩 얻어먹으며 동정아닌 동정을 받았지만 반은 쓴웃음이었고 반은 유쾌한 소식을 가져다 준것에 대한 답례에 가까웠다.
제 팀장의 소식을 남의 입에서 듣게된 카즈윈의 팀원들은 소문의 진위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되어버렸지만 카즈윈은 깔끔하게 그들을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오늘 일찍 퇴근할건데 뭐 다른 보고사항 없지? 카즈윈의 제안아닌 선언에 대부분의 팀원들은 홀린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 팀원은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것마냥 하얗게 질려있었다.
카즈윈은 별다른 사항이 없는 것을 체크한뒤 퇴근했고 남은 팀원들은 의자를 밀쳐내다시피 내던져버리며 하얗게 얼굴이 질렸던 팀원의 뒤로 모여들었다.
카즈윈의 팀에서 가장 드라마를 즐겨보는 드라마 매니아의 자리였다.
모든 동료들의 기대를 한 눈에 받으며 드라마 메신저클럽에 접속한 매니아 팀원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올렸다.
오늘 뭐 중요한 드라마 있나요? 잠시 뒤 여러명의 클럽원들이 각양각색의 드라마를 추천하며 오늘 방영되는 티비 프로그램에 대해서 이야기 했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빈도수로 추천되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오늘 조정기간 486 막방회에요. 조정기간486은 조정기간 4주, 6주, 8주 후에 뵙겠습니다의 약자로 도덕과 윤리의 끝자락을 달리는 논픽션 이론법률관련 재현드라마였다.
사안이 심각할 수록 조정기간이 짧다는 것이 특징인 이 드라마는 하나같이 막장시나리오를 달린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루나사는 또 책상을 두드렸고 헤루인은 비명을 질렀다.
카즈윈은 차 한번 막히는 일 없이 집에 일찍 잘 도착했다.
글
카즈밀레)별의 어항4
소설에 빠져들었건 혹은 방금 읽고 있던 부분이 긴장되는 부분이었건 치킨님의 행차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카즈윈은 미련없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현관으로 향했다.
배달부는 익숙하게 카즈윈에게 치킨을 내밀었고 카즈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준비한 돈을 내밀었다.
누가보면 수상한 물건을 밀매라도 하는것마냥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
하지만 분위기가 어찌되었건 카즈윈의 손에 든 종이박스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는 틀림없이 치킨의 냄새일뿐이었다.
카즈윈은 재빨리 거실로 돌아왔고 별의 어항 위에 그 꾸러미들을 내려놓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별의 위에 어울리지 않는 피라미드였으나 테이블을 정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별의 어항이였으니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카즈윈은 이어 새로 구입한 작은 주안상용 소반을 가지고 왔고 맥주와 치킨을 세팅한뒤 다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카즈윈이 읽고 있던 이야기는 온데간데 없었고 화면속에는 난데없이 꼬리를 문 뱀의 아이콘이 돌아가고 있었다.
뱀아이콘 아래에는 Loading… 이라는 글씨가 깜빡이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업데이트? 카즈윈이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Loading은 금방 끝이났고 소설은 다시 처음 페이지로 돌아가 있었다.
시드스넷타의 드루이드에게 낙원에 대해 묻고 그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갈색의 통행증을 전해 받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내용은 카즈윈이 읽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었다.
밀레시안이 던반튼에서 티르코네일로 돌아왔고, 곧 드루이드를 찾아갔다. 드루이드는 직접 그 눈으로 확인해보라는 다소 냉정한 어조의 말을 또한번 반복했지만 내어준 것은 오직 통행증이었다.
사용할 때 조금 더 주의하라는 충고의 말이 덧붙여졌고 물건이 하나 사라졌다.
붉은 날개는? 카즈윈은 밀레시안이 드루이드가 선물해주었던 바리던전으로 날아갈 수 있는 마법의 날개를 써서 바리던전에 도착했었다는 묘사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변경된 내용속의 밀레시안은 남쪽 목축지에 있는 문게이트를 통해 반호르의 입구에 내려서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반호르의 사제, 컴건에게 많은 약의 붕대와 포션을 주문했고 대장장이의 손녀 에일렌에게 적당한 가격의 그리브를 부탁했다.
롱소드는 묵직한 브로드소드로 바뀌었고 노련한 대장장이 아이데른의 조언에 따라 검사용 가죽장갑까지 착용했다.
경갑옷까지는 살 수 없었지만 그동한 근면성실하게 아르바이트를 해온 덕분에 밀레시안은 이러한 준비들을 무리없이 지불 할 수가 있었다.
단단히 준비를 마친 밀레시안은 긴장하며 갈색의 통행증을 지불했고 그렇게 첫 던전의 탐험자가 되었다.
카즈윈은 여기까지 읽은채 뒤로 가기를 눌렀다. 혹시 다른 이야기도 변화되지 않았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변
경된 전개는 분명 밀레시안에게 더 좋은 방향이었지만 위화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위화감은 불합리함이 되었고 이는 곳 짜증으로 이어졌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대책없이 주인공을 험하게 굴리랬나.
카즈윈은 갑자기 던전 레벨이 훅 뛰어오른 것이 문제였다며 바로 뒷편인 13번째 이야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꼿꼿하게 세워진 삼각형 모양의 뱀머리 아이콘 뿐이었다.
이미 열람한 ‘영혼의 정보’는 다시 열람 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별의 어항’을 작성하시길 바랍니다.
카즈윈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어플과 어항을 바라보았지만 12번째도 11번째도, 1번째 까지 거슬러올라가도 모든 대답은 마찬가지일 뿐이었다.
그럼 갑자기 스토리가 변경되어도 알 수 없다는거잖아? 카즈윈은 밀레시안의 불멸설정도 갑자기 변경된 스토리탓에 튀어나온 설정이 아닌지를 의심했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춰서 그런 그의 의심에 대답하는 메세지가 떠올랐다.
마치 누군가 그의 마음을 읽고 있는 듯한 타이밍이었다.
영혼의 정보를 담은 기록지가 변경되셨나요? 라고 굵은 글씨의 제목과 함께 떠오른 팝업창에는 카즈윈이 궁금해하는 질문들에 대한 답이 쓰여져 있었다.
일단 업데이트된 이야기는 절대 변경되지 않으며 기록지에 대한 열람은 일생 단 한번이라고 이미 광고 말미에 주의사항을 덧붙였다는 것,(카즈윈은 광고가 끝날즈음 보험광고마냥 빠르게 낭독하던 깨알같은 주의문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변경된 텍스트는 이미 해석된 정보의 일부이며 기록지의 변경은 일종의 연출이라는 것이 주된 설명의 내용들이었다.
메세지는 기록지의 변경시에 나타나는 아이콘은 시계방향이 아닌 반시계방향으로 돌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이야기하며 아래 나타나는 텍스트도 update가 아닌 Loading이라는 것을 확인해 달라고 당부하고 있었다.
과연. 카즈윈은 지나치게 세세한 설정에 인상을 찡그렸지만 지난 이야기를 대충 흘려읽은 것은 자신이었기에 더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요컨데 한번 밖에 못읽는 이야기이니 집중해서 잘 읽던가 아니면 처음부터 그냥 대충 훑어보라는 소리였다.
카즈윈은 심심풀이로 읽는 소설에 그다지 공을 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이전처럼 빠르게 넘기는 것은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메모장에 다섯번째 규칙들을 적어놓았다.
그러고보면 11번째에 있던 그 책, 낙원에 관한 이야기였지. 좀 더 자세히 읽을 것을 그랬나.
카즈윈은 후회는 늦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빠르게 14번째 이야기를 가장 처음으로 돌렸다.
카즈윈은 다시 꼼꼼하게 시드스넷타부터 반호르까지의 읽었고 밀레시안은 신중하게 갈색 바리던전의 철로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그렘린과 임프따위의 방을 지나고 마침내 방의 중간. 밀레시안은 상자트랩에서 튀어나온 자이언트 웜과 마주했다.
밀레시안은 잠시 두려움에 굳어있었지만 이내 침착하게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자이언트 웜의 시각과 청각, 후각등은 매우 퇴화했기 때문에 움직이지만 않으면 선공을 빼앗길 염려도 없었다.
밀레시안은 그저 움직이지 않는 것에만 집중하며 파이어볼트를 다섯번 반복하여 외웠다.
마침내 다섯번째 불씨가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불덩이가 되었고 밀레시안은 검을 길게 뻗어 먼쪽 벽을 날카롭게 두드렸다. 선공을 알리는 기합소리였다.
자이언트 웜이 반응을 보이자 밀레시안은 달려드는 자이언트 웜의 입을 노려 불덩이를 던져넣은뒤 빠른 속도로 다가가 스매시를 내다꽂았다.
밸런스에 치중한 롱소드와 달리 공격력에 집중한 브로드소드는 빠르게 내지르는 밀레시안의 속도에 힘입어 보기 좋게 자이언트 웜의 껍질을 파고들었고 자이언트 웜은 옴짝달싹할 새도 없이 밀레시안의 검에 꿰여 뒤로 크게 물러나고 말았다.
빠르게 몸을 추스린 자이언트 웜이 밀레시안에게 달려들었지만 밀레시안은 이미 카운터를 준비하고 있는 상태.
밀레시안은 카운터와 스매시, 마법을 적절하게 섞어가며 침착하고 끈기있기 자이언트웜을 상대했다.
자이언트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졌고 밀레시안은 자이언트 웜이 튀어나온 상자 밑바닥에서 붉고 커다란 열쇠를 하나 집어들었다.
마지막 방을 여는 열쇠였다. 밀레시안이 도착한 마지막 커다란 방에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낯선 마법사가 여러마리의 위습들을 거느린채 무언가를 지키고 서 있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는 밀레시안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은 여신의 뜻이며 인간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라 소리치며 밀레시안을 향해 공격을 지시했다.
밀레시안은 위습들의 기세에 눌려 잠시 방 밖으로 후퇴했지만 이내 아이스볼트를 이용해 하나하나 꾀어내어 손쉽게 위습들을 해치우고서는 다시 검은로브의 마법사가 있는 방으로 되돌아갔다.
카즈윈은 보스격인 검은 로브의 마법사가 일부러 밀레시안을 내버려두고 있다는 것에 의문을 품었지만 밀레시안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은채 검은 로브의 마법사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함정인가? 하지만 그런 카즈윈의 걱정과 달리 검은 로브의 마법사는 밀레시안의 실력이 뜻밖이라는 듯이 다급하게 도망쳤고 밀레시안은 마법사가 도망친 자리에서 작은 열쇠를 발견해 낼 수 있었다.
던전의 출구에 숨겨진 작은 나무상자에 꼭 맞는 열쇠였다.
밀레시안이 그 상자속에서 낯선 사제의 메달을 발견하는 것으로 14번째 이야기가 끝났다.
이미 다음화의 카운트다운이 돌아가고있는데도 카즈윈은 어플을 종료하지않은채 치킨을 입에 넣었다.
카즈윈은 여전히 석연치 않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스크롤을 올려 다시한번 검은로브의 마법사와의 전투를 살펴보았다.
뭔가가 그의 예리한 감각에 걸리고 있었지만 그 거슬리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두세번 검은 로브의 마법사의 대사를 읽어보던 카즈윈은 점점 식어가는 치킨을 부지런히 씹어 삼켰고 간간히 음료를 들이켰다.
카즈윈은 쓰레기들을 정리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검은 로브의 마법사, 그 시드스넷타의 금발 드루이드 아니야?
몸이 아프다면서도 밀레시안을 도와주는 것도 그렇고 여신이 배신했다면서도 굳이 밀레시안을 이 위험한 던전으로 보내버리는 것도 그렇고 지금은 없어진 설정이지만 처음에는 아예 바리던전 코앞까지 데려다주는 붉은 날개라는 아이템도 주는게 영 수상쩍은 느낌이라며 카즈윈은 금발 곱슬은 믿을수가 없어..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래 밑도끝도 없이 퍼주는 조력자는 의심하고 봐야한다는게 요즘 트랜드 아니던가.
카즈윈은 고민끝에 메모장 어플에 두번째 메모를 만들었다. 밀레시안에 대한 메모목록이었다.
아르바이트 중독자. 본능적인 아부근성, 초보 모험가, 현재 장비(브로드소드, 롱그리브, 검사장갑-14화), 등을 적어가던 카즈윈은 몇번인가 줄을 바꾼뒤 불멸(?) 이라고 적어넣었다.
이어 여신=배신(?) 타르라크=의심(?) 등을 적던 카즈윈은 이것도 적어넣어야 하나? 하고 망설이다가 규칙 메모장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다섯번째 규칙이 신경쓰였기 때문이었다.
넉넉한 여백을 두고 update와 Loading를 써내려가던 카즈윈은 뭔지 모를 허무함을 느끼며 메모장을 종료시켰다.
막상 자세하게 써넣고 보니 슬쩍 한심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파고들 일인지, 혹은 기억만 해두면 될 것을 메모까지 할 필요가 있는지.
카즈윈은 누가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 볼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에 메모어플과 별의 어항 어플을 묶어 새로운 폴더 안에 집어 넣었다.
아이콘들이 깨알만큼 작아진 것을 보자 카즈윈의 거부감도 티끌만큼 작아지긴 했지만 카즈윈은 확실히 자신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단 한번만 볼 수 있다는 어플의 규칙이 그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끼친것이 틀림 없었다.
카즈윈은 불이 꺼진 수조를 한번 더 바라본뒤 음소거 되어 있었던 텔레비전의 볼륨을 올리며 남은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입안에 남은 기름기가 가시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카즈윈은 맥주를 홀짝이며 채널을 돌렸다. 딱히 뭔가 눈에 들어오는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에 카즈윈은 성의없이 화면을 훑으며 채널을 돌리기만을 반복했다.
홈쇼핑광고가 나올때마다 손끝이 미묘하게 느려졌지만 원하던 것은 아니었다. 무의미한 소음은 계속 이어져 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뒤적이다가 마침내 결정을 내린 것은한 예능 프로그램.
혼자사는 연예인의 집에서 냉장고를 가져와 밥 해주는 생활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카즈윈은 룸메이트가 먹다 남은 치킨을 처리 할 수 있는 요리 두 종류가 완성되는 것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납득할 수 없다는 카즈윈과 마찬가지로 요즘 사막 탐사 예능 프로그램으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방랑전문 아이돌, 멀린은 상대편에 앉은 게스트 프로페서 J를 보며 드물게 진지한 어조로 질문했다.
치킨이 남아요? 왜요? 제이는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카즈윈은 한동안 메모장과 별의 어항 어플을 오고가며 열심히 밀레시안의 이야기를 탐독했다.
이어지는 밀레시안의 이야기는 대부분 책을 번역하는 이야기였다. 밀레시안이 만나야 하는 사람들은 단 한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낮에만 활동하는 사람들이었고 덕분에 밀레시안은 정말 원없이 두갈드아일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3권의 번역서를 손에 넣었을 때는 돌연 눈물을 내비칠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다 끝났다는 밀레시안의 기대와는 달리 티르코네일의 촌장, 던컨은 3권에서 언급된 이세계의 마수 글라스기브넨의 책을 반호르에 있는 브라이스라는 사람에게 빌려주었다며 그를 찾아가라고 조언했다.
밀레시안은 소리없이 어금니를 깨물었고 입을 벌리지 않은채 알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새로운 스킬을 선보였다.
랭크가 낮은탓인지 대부분의 발음이 뭉게졌지만 던컨은 신경쓰지도 않는 눈치로 인자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반호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시간. 야속하리만치 영롱한 문게이트가 어두워진 가이레흐의 끝자락을 밝히고 있었다.
여행자가 많이 오지 않는 반호르의 특성상 어스킨 뱅크 반호르점은 다른 곳보다 일찍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고 굳게 닫힌 어스킨뱅크 반호르점을 바라보던 밀레시안은 홧병의 초기 증세를 내보이며 주점 겸 여관에 들어섰다.
결국 밀레시안이 어스킨 뱅크 반호르점의 직원, 브라이스와 만날 수 있는 것은 꼬박 밤이 지난 아침의 시각이었다.
밤새 울리는 수차소리 덕분에 밤잠을 설친 밀레시안은 졸린 눈을 비비며 브라이스에게 책이야기를 꺼냈다.
브라이스는 겸연쩍어하며 책을 넘겨 주었고 얼마간의 호의와 융통성을 발휘해 밀레시안이 티르코네일까지 가는 교역마차에 탈 수 있도록 언질을 넣어주었다.
브라이스 덕분에 티르코네일까지 편하게 돌아갈 수 있게된 밀레시안은 달리는 마차안에서 책을 읽다가, 멀미를 하다가, 결국 기절같이 목을 꺾으며 모자란 잠을 보충했다.
정신을 차렸을때는 이미 두갈드아일의 마지막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는 즈음이었다.
밀레시안은 점심이 조금 늦은 시각에 티르코네일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서둘러 던컨에게로 돌아갔다.
던컨은 밀레시안의 추측과 아디만티움의 고갈, 글라스기브넨이 실제했던 시기등을 정리하며 아디만티움의 고갈이 글라스기브넨의 소환촉매의 뼈를 대신할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도출해내었다.
자세한 것은 역시 전문가인 드루이드에게 물어봐야한다는 말과 함께 책을 돌려받은 밀레시안은 아직 환하게 떠있는 태양을 올려다보며 잠시 피곤한 눈을 깜빡였다.
잠깐 잘까? 밀레시안은 힐러집과 여관쪽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여관을 향해 터널터널 내려가기 시작했다.
따끈한 물과 고소한 빵과 스프, 푹신하면서도 햇살냄새가 간질거리는 침대에 몸을 던진 밀레시안은 도롱이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이불을 말아낸뒤 몸을 웅크리고 잠시동안의 행복을 만끽했다.
카즈윈은 오래간만에 사건없이 끝난 에피소드에 감흥없이 페이지 수를 확인했고 습관처럼 마지막 문장에서 길게 스크롤을 내렸다. 이제 카운트다운이 뜰 차례였다.
하지만 카운트다운은 여느때와 딸리 몇번이고 스크롤을 내려도 나타나지 않았고 카즈윈은 의아해 하며 다시 스크롤을 위로 올렸다. 그리 멀지 않은 높이에 마지막 문장이 나타났다가 이내 팝업창 나타났다.
이번에도 이야기가 로딩인가? 카즈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이 사라지기를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갑작스러운 핸드폰의 발열과 강제종료결과였다.
카즈윈은 손안에 핸드폰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찡그렸고 전원 버튼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화면이 점멸하다가 꺼져버렸다. 아직 버튼을 누르지 않았던 카즈윈은 혀를 차며 핸드폰을 살펴보았고 체온계의 온도를 떨어트리듯이 핸드폰을 흔들기 시작했다.
서늘한 바람에 어울리지 않은 열기가 가슴께를 간지럽혔다. 카즈윈은 한참동안 핸드폰을 흔들다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방전된 베터리를 떠올리며 안방으로 돌아갔다.
카즈윈은 방으로 돌아가기전, 방 먼쪽에 있는 주방전등 스위치를 향해 걸어갔다.
이후 거실전등을 끄고 화장실의 전등을 확인했다. 한 손으로는 아직도 뜨끈뜨끈한 핸드폰의 열기를 식히며 집안의 모든 전등을 확인한 뒤에야 안방의 문이 열렸다. 혼자사는 사람의 전형적인 행동이었다.
안방에 들어서며 습관적으로 불을 끈 카즈윈은 익숙하게 어둠속을 걸어 충천기쪽으로 다가갔다.
카즈윈은 핸드폰 충전기를 잡아끌고는 핸드폰에 연결했다.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충전기의 전선을 따라 고개를 들어올린 카즈윈은 아직도 거실에서 환한 불빛이 밝혀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즈윈은 몸을 일으켜 바깥을 확인했다.
거실에 놓여져 있는 별의 어항이 아직도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