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카즈밀레)별의 어항6
팀원들의 입에서 빠져나간 얼이 알반 건물의 구석구석을 헤매이고 다니는동안 카즈윈은 어제 올라왔던 다음화 이야기를 불러들였다.
이야기는 밀레시안이 여관으로 돌아가 잠시 눈을 붙였다가 일어난 부분부터 시작되고 있었고 카즈윈은 이전 던바튼에서 있었던 40시간의 대기 이벤트를 떠올렸다.
갑작스럽게 카운트 다운 시간을 늘리는 이벤트가 있다면 그 역이되는 이벤트도 있는 뜻인가.
만약 그 짧은 대기 시간 또한 이야기 속에 포함되는 것이라면 그 기묘한 외전은 아마 밀레시안이 잠시 눈을 붙이는 동안 꿨던 꿈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밀레시안은 꿈도 꾸지 않고 푹 잘잤다고 말하고 있었고 카즈윈은 과한 추측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외전의 텍스트가 모두 지워졌기 때문에 밀레시안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떠한 실마리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카즈윈은 다시한번 생각을 깔끔하게 지워내고는 밀레시안의 이야기를 읽는 것에 집중했다.
밀레시안은 부지런히 눈밭을 헤치고 나아가 타르라크가 있는 숨겨진 제단에 도착했다.
밀레시안은 타르라크에게 글라스기브넨에 대해 물었고 타르라크는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주겠다며 약간의 쟤료를 부탁했다.
보존 처리된 낡은 안경을 사용하는 곳은 라비던전.
카즈윈은 하필 기억을 보는 곳이 그에게 호의적인 서큐버스가 있었던 라비던전이라며 타르라크 흑막설에 의심을 더했지만 밀레시안은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의 기억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여태까지 찾아왔던 진실이 충격이 너무 컸던 탓에 의심할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던 것에 가까웠다.
타르라크의 동료들은 다른이도 아닌 여신의 명령하에 공격당했고 글라스기브넨을 만들고 있었던 것은 사라진 인간들의 영웅 마우러스였다.
타르라크는 마법을 잃고 동료를 잃고 신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티르 나 노이는 거짓이었다. 혹은 인간들을 원한 곳이 아니었다.
그 척박한 땅은 인간뿐만이 아닌 마족조차 살기 어려워 보였지만 다크로드나 모리안은 전혀 신경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 물론 그동네에도 자이언트 웜은 있더라. 밀레시안은 이제 자이언트웜이라면 지긋지긋하다며 이를 갈았다.
보석이 열리는 나무니 들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이니, 들짐승과 날짐승은 커녕 평화의 노래의 삑사리조차 들리지 않은 세계가 진정한 낙원일리 없었다.
어쩌면 타르라크가 추측한대로 어딘가에 낙원의 힘을 빼앗기고 있던 탓인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밀레시안은 다른건 몰라도 자이언트 웜이 마을 어귀를 돌아다니는 그곳이 낙원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세계의 강림이었다. 어떠한 희생과 대가도 없이 그 척박한 땅이 낙원으로 변모 될 리 없었다.
밀레시안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솔직히 말해서, 밀레시안은 무서웠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레시안의 머릿속을 가득채웠다.
여신이 나를 부르는 의미가 만약에 자신의 구출이 아니라면? 같은 꿈을 꾸었던 타르라크는 그 꿈을 구조의 요청이라고 받아들였지만 밀레시안이 본 꿈에서 여신은 단 한번도 구조를 요청하지 않았다.
티르 나 노이가 파괴되려고 하기에 이쪽으로 와달라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이제 의심하려나? 금발곱슬 흑막설을 밀고 있는 카즈윈은 밀레시안에게 조금만 더 사고를 이어나가 보라고 응원했지만 밀레시안은 안타깝게도 타르라크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신뢰였다.
카즈윈은 어쩐지 답답한 마음에 탄산수를 벌컥 들이켰지만 혀끝은 여전히 쓰기만 했다.
이런 탄산이 든 맹물보다는 풍미좋고 목넘김이 깔끔한 맥주가 필요했다.
카즈윈이 입맛을 다시는 것과 별개로 밀레시안은 모리안의 배신이라는 말을 읊조리며 초조하게 던전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돌이 된 여신의 조각상이 있었고 수호와 안전을 기원하는 검이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자애롭고 또 따뜻하게 라비던전의 도전자들을 내려다보는 여신을 보며 밀레시안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밀레시안의 눈에는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카즈윈은 새로 시작 된 카운트 다운을 확인한뒤 어플을 종료했다.
습관처럼 메모장을 불러오기는 했지만 딱히 규칙의 문구를 수정할 필요도 없었다.
밀레시안의 메모란에 있던 여신=배신(?) 에서 물음표를 지워버리기는 했지만 특별히 추가할 만한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카즈윈은 타르라크=의심(왜 안하지?)라고 수정한 뒤 다시한번 탄산수를 벌컥 들이마셨다.
여신에게 반감을 보였기 때문인가. 내심 여신을 의심하고 있었던 밀레시안에게 여신의 반감을 보이는 전직 전설의 삼용사는 확실히 믿음직스러운 존재였지만 카즈윈은 여전히 그가 의심스럽기만 했다 하필 그만이 마족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았고 하필 그만이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역시 수상한데. 카즈윈은 눈을 가늘게 흘기며 빈 병을 분리수거용 박스에 빈 탄산수 병을 쑤셔 박았다.
이야기는 다음날, 또 그 다음날까지 계속 이어졌고 카즈윈의 탄산수 원샷은 계속 이어졌다.
소리없는 의심의 소용돌이는 날로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같은시각, 의심의 소용돌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루나사의 한 비밀회의실.
루나사의 팀장을 중심으로 음습하게 모여든 알반의 몇몇 직원들은 블러디허브 드링크 F들 한번에 들이키며 뜨거운 토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조정기간 486이 끝났는데도 카즈윈의 칼퇴가 계속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참가자는 지속적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스케줄의 문제로 대리인을 보내는 것일뿐 이 비밀모임의 단결력과 보안력은 알반의 기밀문서만큼이나 출중하고 또 엄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인자들의 이름만 늘어놓고 보면 알반의 주요인사들이 모두 모인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사자인 카즈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모여있다시피한 이 회의실은 이미 회사속의 작은 회사나 다름없었다.
그 대단한 능력들이 개인의 취미를 파해치기 위해 조직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등짝에 사장님의 검은장갑 스매시가 내리꽂힐 일이었지만 루나사 팀장외 36명은 이러한 위험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지하게 티비 편성표를 걸어놓고 카즈윈의 퇴근시간과 퇴근 경로, 딴길로 새었을 때 소비되는 시간의 평균 따위를 계산하며 어떤 프로그램이 그의 칼퇴근을 지속시키는지를 추측했고 이내 한 작은 직원이 손을 들어올렸다.
모이통을 빼앗긴 병아리 루나사였다.
혹시 드라마가 아니라 예능 아닐까요? 루나사 팀장은 느리게 박수를 치며 자신의 팀에 이런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인재가 들어왔을줄은 몰랐다며 감격했다. 그들은 드라마 편성표를 한쪽에 밀어낸 뒤 예능 편성표를 뽑아내었다.
사장의 부탁으로 이 모임에 잠입한 L 대리는 조용히 미간을 매만졌다.
이 열정으로 일을 해.. 레몬을 짜내던 카즈윈이 크게 재채기를 하고있던 시간대의 일이었다.
카즈윈은 이제 지겨워진 하지만 아직 반박스나 남은 탄산수에 레몬즙을 섞으며 거실로 돌아왔다.
그동안 밀레시안은 타르라크의 복수의 결의를 전해들었고 던컨에게서 마리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중간에 한번 여신의 꿈을 꾸기는 했지만 그녀의 간절한 구조 요청이 밀레시안의 불신을 무너뜨린 것은 아니었다. 이어지는 던컨의 말이 밀레시안의 두려움을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글라스기브넨의 뼈를 대체할 아디만티움의 골격에 마법의 시료를 덧바르기 위해서는 용기 있는 인간의 영혼이 필요하다네.
던컨은 사라진 세 용사의 방문으로 그 조건마저 충족되었을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밀레시안에게는 조언자 타르라크가 있었다.
그는 그 티르 나 노이에서 생환한 영웅이며 용기있는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렇다면? 만약 필요한 영혼이 세 개였다면? 또한 밀레시안은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글라스기브넨이 이미 한번 이 세상에 소환되었던 적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번 소환되었고 한번 뼈로 돌아갔다. 불완전한 뼈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용기있는 영혼이 필요하지만 그렇게 소환된 글라스기브넨이 영원불멸의 낙원을 지킬 수호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밀레시안은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멈춰섰다. 낙원의 수호자.
그 한마디와 함께 눈앞이 새하얗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뺨에 달라붙는 눈송이가, 입가에서 폭풍처럼 몰아치는 새하얀 입김이.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함께 다급히 달려오는 유약한 마법사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밀레시안은 어찔하고 당겨오는 두통과 함께 세상이 빙글 도는듯한 환상을 바라보았다.
소용돌이 치는 설원 저편에서 금발의 드루이드가 다급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당신, 제단을 떠날 수 있는 거였어? 밀레시안의 의문인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고 밀레시안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카운트다운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깨어난 밀레시안이 바라본 것은 곤히 눈을 감고 잠들어있는 커다란 곰의 얼굴이었다.
밀레시안은 흠칫 놀라며 몸을 굳혔지만 이내 짐승의 노린내가 아닌 은은한 허브향기에 긴장을 풀며 두툼하고 따뜻한 곰의 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갈색곰은 고개를 잠시 들었지만 이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밀레시안은 피곤했고 곰은 아픈 것 같았다.
밀레시안은 꼬박 반나절을 더 잠들어 있었고 창백한 안색의 드루이드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밀레시안은 조금 더 그 안락함 속에 파묻혀있고 싶었지만 품을 내어줄 곰이 사라진탓에 억지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타르라크는 평소보다 더욱 매마른 기침을 내뱉으면서도 밀레시안을 염려했다.
밀레시안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하고싶지 않아했지만 결국 그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에 여신의 꿈과 글라스기브넨의 시료에 대해 설명했다.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이 시료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들었다.
밀레시안은 자신이 겁에 질린 것을 보면 용기있는 영혼은 아닐거라며 웃어넘기려고 들었지만 타르라크는 그런 밀레시안을 비웃지 않았다.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도 용기라고, 그는 밀레시안이 가장 듣고싶지 않은 따듯한 위로를 건네주었다.
밀레시안이 무릎사이로 얼굴을 감춰버리자 타르라크는 그제서야 자신의 위로 또한 밀레시안에게는 두려움을 부추기는 말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자신의 말을 번복했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고 밀레시안도 알고 있었다.
여신의 배반이 어찌되었든, 혹은 구출이 목적이 되었든 글라스기브넨의 부활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그 두사람 뿐이었다.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을 혼자보내지 않겠다며 자신이 잃어버린 힘을 되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밀레시안은 타르라크가 제단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했지만 이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기절한 자신을 데려오는 것만으로도 꼬박 하루를 앓아야하는 그가 그 먼 곳까지 어떻게 간단 말일까.
밀레시안은 티르 나 노이에 가는 법을 물었지만 타르라크는 혼자는 안된다는 말만을 반복하며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지금의 당신의 힘으로서는 무리입니다. 타르라크는 또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밀레시안을 낭떨어지 방향으로 떠밀었다.
밀레시안은 그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밀레시안은 불멸이었고, 밀레시안은 영원이었다.
밀레시안은 어쩌면 당신이 보았던 그 황량한 티르 나 노이의 원인이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용기없는 자의 입술은 도무지 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낙원의 강림을 위해선 하나의 세계가 필요했고 하나의 세계는 하나의 생명과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비워진 의문사이에 타르라크와 자신의 이름을 우겨넣었다.
타르라크가 라비던전으로 돌아온 까닭은 여신이 돌려보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여신에게 부름을 받은 까닭은 그런 타르라크의 빈 자리를 채워넣기 위함인지도 몰랐다.
그와 달리 밀레시안에게는 용기는 없었지만, 혹 그가 말했듯이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 또한 일종의 용기라면.. 영원의 생명을 얻은 글라스기브넨은 분명 새로 태어나는 낙원에 걸맞는 수호자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카즈윈은 영원의 영혼을 얻는 것이 낙원인지 글라스기브넨인지 혹은 둘 다인지 파악할 수 없다며 몇번이고 밀레시안의 추측을 읽었지만 밀레시안의 추측에는 한가지 비틀린 곳이 있었다.
그렇다면 왜 여신은 인간들을 속여야 했을까.
인간들이 모리안 여신을 믿는 것은 하루 이틀된 일이 아니었고 아주 먼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된 믿음이었다.
단순히 글라스기브넨의 제작자와 용기있는 영혼 세 개를 얻기 위해서였다면 차라리 전쟁을 지속해서 그들을 빼앗는 것이 더 빠를 일이었다. 혹은 포워르들 중에서 뛰어난 마법사와 뛰어난 전사 셋을 뽑아내던가.
밀레시안이 이것저것 설명을 들으며 에린을 떠돌아다니게 두지 않고 잡아가는 것이 더 간편했으며 일부러 의심과 불신을 심어준 뒤 함정냄새가 폴폴나는 펜던트를 보내는 것도 이상했다.
여신은 인간의 편인가 마족의 편인가. 카즈윈은 밀레시안이 조금 더 신중하게 움직이기를 바랬지만 어디까지나 화면 밖에서의 작은 바램일 뿐이었다.
밀레시안은 라비던전에 떨어진 타르라크를 구조한 것이 크리스텔이었다는 점을 기억해내고는 그녀에게 그 당시 타르라크가 어느 길을 통해서 왔는지 알려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크리스텔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밀레시안에게 협력을 약속했고 조건으로 밀레시안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밀레시안은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거꾸로 돌아가는 뱀의 아이콘이 떠올랐다.
아이콘은 간헐적으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지만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카즈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꼼꼼히 지난 이야기등을 살펴보았지만 텍스트는 단 한줄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변경되지 않았다. 변경된 것은 카즈윈이 읽었던 마지막 문장 뿐이었다.
카즈윈은 변경된 문장 하나와 추가된 문장하나를 읽으며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는 것을 확인했다.
밀레시안은 단검을 만지작 거렸지만 이내 손을 떼어내고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증명을 할 수 있을까요? 다음날 밀레시안은 아침 일찍 티르코네일로 찾아가 레이널드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오거를 잡는 것과 한방에 곰을 잡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쉽냐는 것이 그 상담의 주된 질문이었다.
레이널드는 묘지에서 붉은 거미에게 물려 엉엉 울던 일이 엊그제 일이라며 밀레시안을 놀렸지만 이내 진지하게 고개를 가로젓고는 오거의 특성과 크리티컬 한 방의 효율을 극대화 시키는 요령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밀레시안은 오거의 체력과 단단한 피부, 강력한 공격따위를 흘려들으며 오거의 서식지를 물어보았다.
여행자들의 재앙, 식인 오거는 가이레흐의 서쪽 평원에 살고 있었고 포워르들이 독점한 희귀한 광물을 지키기 위해 배치된 오거 전사들은 바리던전의 깊숙한 지하던전에 살고 있었다.
그렇게 먼 곳까지 갈 여유가 없었던 밀레시안은 다시 질문을 바꿔 크리티컬의 효율을 극대화 하는 방법에 대해 물어보았다.
레이널드는 숙련도가 충분히 쌓인 브로드 소드를 발견하고는 자신이 이 검을 개조한다면 브로드 소드만의 특성을 최대한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개조를 하는 동안 검신의 균형과 칼날의 특성이 조금 변화하긴 하지만 레이널드는 보석따위로 보강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밀레시안은 보석까지는 예산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쓰게 웃은뒤 레이널드에게 개조를 부탁했다.
이후 퍼거스에게 담금질과 칼날갈기를 부탁하라는 말에 밀레시안은 대놓고 불신한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레이널드는 크게 웃으며 술을 마시지 않은 퍼거스는 굉장히 실력이 좋은 대장장이라며 강한 신뢰감을 보여주었다.
그럼 퍼거스씨가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은요? 레이널드는 웃음을 멈췄고 갑작스럽게 일이 생겼다며 자신의 교실로 들어가버렸다.
밀레시안은 한번 개조를 마친 브로드 소드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불신감이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칼날갈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담금질을 하기 위해서는 가마와 물통 모루가 필요했기 때문에 밀레시안의 선택지는 딱 두가지가 남아있었다.
퍼거스에게 맡기던가 에린 최고의 대장장이 아이데른을 찾아가던가.
누군가에게 이 선택지를 들이민다면 대부분 후자를 선택하겠지만 세계는 넓었고 인간상은 다양했다.
퍼거스의 악명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럭키한 운세 덕분에 퍼거스의 빗나간 손길이 무기가 아닌 모루를 후려쳤는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사람의 혈관에 술을 흐르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하루쯤은 안마신 날이 있을 것이고 가끔씩은 기분이 좋아 제정신으로 망치를 두드릴 지도 모르고..
하지만 전자를 선택하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생각했다. 어쩔 수 없다. 라고.
그들은 덮쳐오는 압도적인 불안감 앞에서 떨지언정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수리비를 감당해 낼 수가 없었고 가끔씩은 돈으로 해결 할 수없는 시간과 거리에 앞에 절망하며 자신들의 무기를 퍼거스의 앞에 진상해야만 했다.
밀레시안은 시간과 거리 앞에 무릎을 꿇은 쪽이었다. 퍼거스는 그렇게 걱정말라며 호쾌하게 웃고는 칼날을 갈아달라는 말에 앞서 망치부터 꺼내들었다.
칼날 갈아달라니까요. 퍼거스는 아차 하고 망치를 등 뒤로 숨겼지만 그는 여전히 아쉽다는 표정으로 밀레시안의 브로드 소드를 내려다 보았다. 그것은 굶주린 짐승의 눈빛이었다.
밀레시안의 엄중한 감시 하에 퍼거스는 가까스로 두번의 칼날갈기를 마쳤고 이제 남은 것은 검의 표면을 단단하게 만드는 담금질 단계였다.
퍼거스는 드물게 진지한 어조로 이미 검이 충분히 변형 되었기 때문에 이 이상 두드렸다간 밸런스만 나빠질 뿐이라고 조언했지만 밀레시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최고의 한방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퍼거스는 기껏 예쁘게 갈아낸 칼날을 두드리기 싫다는 듯이 이유를 물어보았다.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서요.
밀레시안이 한 방에 곰을 잡을 만한 치명적인 일격이 필요하다고 대답하자 퍼거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는 악마의 것이었다.
밀레시안은 값비싼 플레이트 갑옷을 깨먹었을때와 비슷한, 하지만 성질이 조금 다른 음흉한 미소를 보며 단검을 매만졌다.
지금이라도 말을 취소하고 반호르로 떠나가고 싶었지만 브로드소드는 이미 퍼거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퍼거스는 느릿하게 웃으며 망치를 고쳐쥐었다. 그는 오래간만에 진심을 보여주겠다며 결연한 발걸음으로 풀무를 밟기 시작했다. 광기어린 풀무질이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화로에서 불씨들이 훨훨 날아오르는 것을 보며 밀레시안은 조용히 눈을 감고 뒤로 돌아섰다. 내가 미쳤지.
밀레시안은 이만하면 용기있는 영혼의 조건은 충분히 달성 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조용히 브로드소드에 대한 미련을 접어내었다.
지금이라도 반호르로 가서 클레이모어를 산 뒤에 오거를 잡자. 어스킨 뱅크에 저금해 주었던 모든 예금을 닥닥 긁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밀레시안은 차라리 그게 낫겠다며 차분히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장간의 열기를 등지고 퍼거스의 어이쿠 소리를 기다리고 있던 그 때.
다 되었소. 퍼거스는 이거 실수했구려 하고 (제 나름대로의 애교를 담아) 살갑게 말하는 대신 몇 번 들어보지 못한 진지한 목소리로 밀레시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퍼거스는 은백색으로 날카롭게 빛나는 브로드 소드를 내밀었고 오래간만에 힘을 써서 힘들다고 투덜거리며 냇가로 걸어내려가 물을 뒤집어쓰기 시작했다.
밀레시안은 완벽하게 담금질이 끝난 브로드 소드를 바라보다가 놀라움에 가득 찬 눈으로 퍼거스를 응시했다.
저 인간.. 잘 할 줄 아는데 일부러 박살내고 있었구나..!!
밀레시안은 퍼거스의 기적, 혹은 기만에 치를 떨며 여관으로 돌아왔다.
내일 일정은 아침 일찍부터 시작할 예정이었고 그 목적지는 당연히 울레이드 숲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