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7일 #오블완

 

 

미헬은 검푸르게 물든 동굴을 걸어 내려갔다. 등불도 없이 맨 몸으로 걸어 내려가는 미헬이 그것이 검푸른 색이라고 인식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것이 이따금씩 생명체가 박동하듯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기 떄문이었다.
벽면을 밝히는 알 수 없는 광채는 미헬이 향하는 어둠 깊숙한 곳에서 뻗어나와 벽면을 투과하여 그녀가 걸어온 길 너머로 사라졌다.
동시에 차가운 기운이 점점 옅어지는 것이 느껴졌고, 주변은 이제 완전한 침묵으로 채워졌다.

 

어떠한 소리도, 그림자도 지지 않는 완벽한 고요.
그 속에서 이질적인 것은 오직 하나, 미헬이라는 존재 뿐이었다.
미헬은 계속해서 똑같은 풍경만 반복되는 하향길 중턱에 멈춰섰다. 벽면을 짚고 기대어 서는 미헬의 표정은 두려움과 피로감, 그리고 혼란이 뒤섞여 한껏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여긴 어디지…’



여긴 그녀의 동생, 루데크가 찾아 헤매었던 피시스 북단의 신비이며 금지된 땅으로 향하는 얼음동굴이었다.



‘그랬지.. 난 분명 그 동굴에 들어왔어..’



미헬은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따금씩은 멍하니 빛이 박동하는 벽면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한참만에 그녀가 내린 결론은 그녀가 더이상 ‘춥지’않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건 얼음이 아닌걸…?’



맞는 말이었다.
얼음은 그저 환경적인 요소일뿐 피시스의 본질은 얼어붙은 땅 아래에 깃든 막대한 양의 마나에 있었다.
마나는 생명체가 살아 숨쉬는 것에 필요한 모든 것에 깃든 에르그이며 붉은 달에서 파생되어 흩어진 세상의 신비였으니 이는 파도와같이 같이 높고 낮음이 있고 바람과 같이 옅고 짙음이 있으며 대지와 같이 결정된 형태와 느끼지도 못할 미세한 분진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마나는 응집되고 결정화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곳, 얼어붙은 마나의 땅은 그 거대한 힘을 수 천년동안 품어온 신비의 고지였다. 그렇기에 이보다 더 높고 가파른 산맥 꼭대기에는 푸른 용이 살고 있었으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불길이 잦아들지 않은 섬에는 감응자를 기다리는 황금빛 영혼이 깃든 알이 보관되어 있던 것이리라.

그 최후의 둥지 바로 아래에서 오래된 이리아의 영혼들은 이 땅의 지하 깊숙하게 잠든 신비를 꺼내어 가장 매끄러운 형태로 다듬었다.
그것은 빛나면서도 보석이 아니었고, 한없이 단단하면서도 가공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힘이 깃든 물건의 원천은 모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그 자체가 깃든 것의 힘이었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 내가 이런 걸 알고 있었다고?’

 

가장 처음 만들어낸 원시적인 형태의 주구. 물이 아닌 것에 비치는 허상.
오래된 영혼들은 날카로운 것과 소리나는 것, 그리고 빛나는 것을 제구(祭具)로 삼아 하늘을 향한 기도를 올리곤 했었다.
그중 빛나는 것이 스스로 빛을 내는 무언가가 아닌 비추는 것으로 대체된 까닭은 그 상이 맺히는 원리가 빛이라는 것을 알아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은 빛에서 파생된 허상이요 땅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으니, 오래된 영혼들은 비추는 도구를 통해 그림자가 단순히 ‘어둠’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비춰지는 세상 또한 모든 것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다. 이것이 그들이 거석너머로 발견한 또다른 세상을 그림자라고 명명한 이유였다.

 

‘..........이건… 정말 내가 하는 생각인가?’’

 

미헬은 연달아 쏟아져 내려오는 지식이 버거운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머릿속은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상념들로 가득차 그녀의 영혼을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림자, 매끄러운 것, 빛이 그려낸 허상.
미헬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 세가지 단어뿐으로 그녀는 곧 이 오래된 지식들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거울….’

 

그래, 맞았다.
미헬은 기대어 앉은 검푸른 수정의 벽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녀의 얼굴은 아주 어두웠으며 그 눈은 총명함보다는 두려움과 혼란에 가득차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보라. 지금 그대를 바라보는 수정 너머의 당신의 모습을 한 존재의 눈동자를.


그녀의 눈은 현명함과 지식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그 불꽃은 일견 광기에 가득찬 마나의 추종자와도 닮아있었다.
무엇이든 금방 배우는 미헬, 3년만에 혼자서 지하동굴을 지나 피시스까지 찾아 올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미헬.

만약 그녀가 마법을 배우고자 하였다면 그녀는 뛰어난 마법사가 될 수 도 있었다.
동시에 그녀가 주술을 배우고자 노력했다면 그녀는 그저그런 정도의 샤먼도 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에게는 연금술의 재능도 있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쉽게 실린더를 다루기 시작했던 탓에 잘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사실 평생 펜과 전공도서, 그리고 날붙이라면 식칼이 전부였던 일반적인 사람에게 실린더라는 장비는 낯설고도 어색한, 그들이 경험한 적 없는 전에 없는 특별한 도구임이 틀림없었다. 

 

‘이 수정이 문제인 것같아. 당장 여기서 떨어져야 해. 지금이라도 일어나야..’

 

그렇기에 이 모든 것은 그녀이며 그녀가 아닌 것이며 그녀일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의 집합체가 말하는 목소리였다.
상념이었다. 망령의 외침이었으며, 다른 세계에서 온 메세지였다.
예언이었던가, 후회로 가득찬 회고록이었던가. 알 수 없었다. 수많은 세계 중 이곳에 닿은 미헬은 오직 그녀 하나뿐이었으니.

미헬은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수많은 세계선 속에서 루데크를 잃은 미헬 중에서, 그를 이해하고자 노력한 미헬중에서, 우나를 만난 미헬 중에서, 끝내 그의 등불과 그의 나침반과, 그의 밧줄과, 그의 침낭을 가지고 이곳에 닿은 미헬은 그녀 하나뿐이었다.

로켓은? 로켓은 그대의 것이니 항상 함께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로켓을 가진 미헬은 동굴의 문을 열었으나 이렇게 깊게 들어오지 못했다.
등불을 가진 미헬은 이미 셀라 해변에서 돌아갔다. 밧줄을 가진 미헬은 길을 잃었으며, 침낭을 가진 미헬은 마음속의 추위를 잊지 못해 이 수정속에서 얼어죽었다. 나침반을 가진 미헬은 시간을 잊었다.

그러니 이는 기적이 틀림없었다.
모든 것을 바치고 이곳까지 온 미헬. 우리는 당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었다.

 

‘어떻게든 수정이 없는 곳을 가야.. 하지만 어떻게?’

 

미헬은 머릿속을 파고드는 낯선 사념를 피해 자리에서 일어나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그녀는 곧 깨달았다. 그녀가 딛고 선 대지, 머리위로 드리운 천장, 잠시 마음을 기댈 벽면과 호흡하는 공기조차도 모두 수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그녀는 다시한번 그녀가 넋을 놓고 내려오던 길목의 한 복판, 최초로 떠올렸던 의식의 시작점을 되짚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여긴 그녀의 동생, 루데크가 찾아 헤매었던 피시스 북단의 신비이며 금지된 땅으로 향하는 얼음동굴이었다.

당신이 원한 곳. 당신이 찾아 헤매던 대답.
당신은 루데크가 사랑한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고, 루데크가 꿈꿨던 이상을 바라보고자 했으며, 그가 약속한 미래를 확인하고자 이곳에 왔다.

 

“그만해..!!”

 

미헬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 알 수 없는 말들로부터 도망치고자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 수정이었다. 그 모든 것이 수정이었다.

 

“대체 내게 원하는게 뭐야?!”

 

수정은 모든 대답을 품고 있는 가능성인 동시에 당신의 그림자를 비추는 거울이다.

 

‘나는.. 나는 그저..!’

 

당신은 동생 루데크의 세상을 이해하고자 이곳에 왔다.

 

“그게 왜 이런 무서운 일로 되돌아오는 건데…!”

 

두려움은 당신에게 ‘이해’가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무지의 반향이었다.
우리는 당신이 궁금해하는 모든 것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고 그 준비는 모두 당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조금 더 허들을 낮춰 이야기하자면 당신의 시작은 당신이 아닌 타인의 이해를 바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당신의 상냥함을 본받아 조금 더 다듬어 이야기하자면.

미헬, 당신이 그동안 루데크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

 

미헬은 숨을 헐떡이며 다시 멈춰섰다.
귀를 막아도 이 소리는 차단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은 이미 침묵의 땅이요 고요의 성지였으니까.
눈에 닿는 모든 것이 무덤과 다를 바 없는 이 작은 터널 안에서 소리를 피해 몸을 웅크린다 하여도 이 소리 멎을 일은 없었다.

모르겠는가?
이곳에서 유일하게 숨을 쉬고 소리를 내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반드시 말해야만 했다.

미헬, 루데크는 당신의 유일한 가족이고 소중한 남동생이지만 그는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타인이고 최초의 이웃이다.
당신이 그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신이 후회하는 것은 그 이해의 기회를 모두 헛되이 흘려보냈다는 것일뿐.

그러나 그렇게 흘러간 기회는 언젠가 당신의 영혼 말미에 닿아 수많은 가능성을 만들어내었다.
깨닫지 못한 날들을 아쉬워 하는 마음. 후회는 당신으로 하여금 ‘그렇지 않았던’ 선택을 갈망하게 만들었고 그 갈망은 맞닿은 세상 어딘가에 있는 미헬에게 지금과 같이 속삭여왔었다.

할까? 하지 말까? 내가 할 수 있을까?
어차피 실패하고 후회할 결말이라면 차라리 해보고나서 실패를 보고 웃어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상냥한 미헬,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미헬.
당신이 당신의 집을 정리하고 탈틴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는지,‘나’는 안다.
당신이 탈틴의 광장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비웃던 사람들의 시선을 얼마나 신경쓰고 부끄러워 했었는지, ‘나’는 알고있다.

당신이 카브항구의 주점 2층에서 바다를 보며 설레였던 것도, 당신이 등대의 불빛을 바라보며 기도했던 것도
당신이 배멀미를 하는 것이 못미더워보일까 홀로 선실에 틀어박혀 고생하였던 것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모든 고집과 억지와 두려움과 고단함을.

 

‘나’는 알고, ‘우리’는 알고, ‘당신’은 알고 있다.

 

“        ”

 

미헬은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치며 눈물을 떨어트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일어나 다시 걸었고 또 서럽게 울었다. 무서웠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이 상황.
그녀는 지금의 눈물이, 이 걸음이, 그럼에도 걸어야 한다고 믿는 신념까지도 무엇하나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정말 나의 의지인가? 이것은 정말 ‘미헬’의 선택인가?

 

쏟아지는 별의 반짝임속에서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걷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빛을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 그녀에게 끊임없이 가르쳐왔기 때문이었다.

포기하지 말라고. 길을 잃었다 생각하더라도 자포자기 하지 말라고.
주변을 보고, 생각하고, 나아갈 방향을 찾을 지표를 찾아 움직이라고. 

그것은 누구의 가르침이었던가. 아버지였나? 어머니? 아니면 이따금씩 자신이 백수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탐험가 선생 노릇을 하던 동생 루데크? 아니. 어쩌면 탈틴에서 배운 지식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닌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항상 정잡이 아닐 수도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상황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막막한 밤바다 위에서 관화를 피어올리지 않은 배를 찾을 수 없는 법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는 산중의 조난자를 찾을 수 없다.
들판에 남겨진 발자국, 얼어붙은 나무를 긁어 새긴 매듭의 문양.
떨어진 구슬.
편지.

눈물의 잔향.

당신을 이끌어온, 그리고 지금의 당신을 쌓아올린 모든 영혼의 상처들.

 

미헬은 도망치듯 달리며 생각했다.
싫어. 무서워. 이건 내가 기대했던 게 아니야.

그렇다면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누구를 만날 수 있을거라 기대했던 걸까. 그리고 어떻게 그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걸까.

 

물론,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가장 처음, 미헬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자 이 땅에 찾아왔다. 
그렇기에 그녀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에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동생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실제는 어떠했던가.
그녀는 죽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항구를 찾았고, 새로운 배움을 얻었다. 기쁨을 느끼고, 경험을 쌓았다.
길을 찾는 방법을 익힌 그녀의 앞에서 설원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보이는가?
이게 당신이 찾고자 했던 루데크의 첫번째 이해의 조각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조각.
당신은 한 사람에 대한 추억이 모두 당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아니, 인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모르는 루데크가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루데크를 전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루데크에게는 루데크의 세상이 있었고 그건 그 누구도 온전하게 소유할 수 없는 고유의 것이었다.
심지어 그 자신까지도.

그렇게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루데크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우나를 바라보며 당신의 본질을 깨달았다.
그것은 우나의 것이기도 하였으며 루데크의 것이기도 한 사실(寫實).


당신은 루데크가 아니다.

그렇기에 당신은 루데크를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루데크의 가장 가까운 타인이고 최초의 이웃이었으며 피를 나눈 형제이고 가장 먼 이해자였다.
당신이 아는 루데크는 오직 당신에게 보여진 루데크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당신이 아는 루데크는 우나가 아는 루데크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느껴지는가? 우리는 낯설고 무섭고 무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당신이다. 그리고 당신은 거울이다.
당신은 이 세상의 존재이자 또다른 세상의 루데크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렇다면 우나와 루데크 또한 다르지 않다.
우나 또한 그녀가 아는 루데크를 기억하는, 우나의 세계에 비춘 루데크를 비추는 거울이며 루데크에게는 루데크의 우나와 루데크의 미헬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 누구도 타인의 세상을 온전하게 소유할 수 없는 이유이며 당신 자신도 모르는 당신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루데크는 어떠했을까.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녀와 같이 잘못된 이해로 이 땅을 찾았을까.
그가 이곳에서 누구를 만나고자 했는지, 그리고 어떠한 의미로
밀레시안이 말한 ‘그리움’을 이해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이곳에 도착한 것은 당신이다.
당신이 닿았다. 당신은 닿았다. 당신은 루데크가 목표로 하고 보고싶어했던 결말에 도달했다.

이 완성되지 않은 얼음의 동굴을.
더 이상 파고들어가지 않고 오직 거울과 같이 반질거리는 수정으로 뒤덮인 것으로 완성된 이 공터를.


그리움으로 열리는 이 끝없는 황천으로 향하는 길.
당신이 그를 만나고자 한 이유.
당신이 만나고자 한 루데크.


“내가 루데크를 만나고 싶어했던 이유는..”


당신은 이제 루데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미헬은 그렇게 동굴의 최심부, 가장 빛나는 수정의 벽 앞에 멈춰섰다.

 

 

그곳은 미헬이 여지껏 지나왔던 빛의 신호들과 같이 그녀의 박동소리에 맞춰 빛을 내뿜었다 거두기를 반복하고 있었다.미헬이 공교롭다고 생각한 것은 빛이 발광할 때에는 수정이 아무것도 비추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수정에 그녀의 상(像)이 맺히는 것은 오직 빛이 지나간 직후, 어둠이 다시 눈앞을 가리기 직전의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의 연속인 터널 안쪽에서 미헬은 수없이 많은 상(像)을 맺었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생성과 복제, 소멸을 반복했다.

 

미헬은 유일하게 빛이 꺼지지 않는 수정벽의 중심부를 향해 한걸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어떤 느낌이 들었는가.

따뜻했다.

 

얼음의 땅 최심부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할정도로 그것은 따듯하고 또 포근했다.
이것에 뺨을 대고 눈을 감으면 그녀는 마치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는 것같은 안락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락함은 두번 다시 눈을 뜨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강력하고 매혹적이겠지.

미헬은 이전의 자신이라면 분명 눈을 뜨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는 뺨을 기대어 보는 것도, 눈을 감는 것도 선택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 빛을 응시했다.

그녀는 이제 그녀의 안에 있는 루데크의 존재를 이해했고, 그녀의 본질을 깨달았으며, 다시 살아 나아가야 하는 이유도 제대로 기억해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질문을 던질 차례였다.

 

이제 여기서 뭘 해야하지?

 

질문을 던지자 다시 한번 대답이 들려왔다.
그것은 길이 열리는 것과 같았고 동시에 새로운 세상과 연결되는 것을 의미했다.

 

‘들려요?’

 

미헬은 들린다고 대답했다.

 

‘아, 아. 내 말 들려요?’

 

미헬은 들린다고 대답했다.

 

‘와, 다행이다. 저기요. 그러니까 저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요.’

 

미헬은 듣고있다고, 천천히 말해도 된다고 대답하며 상대를 안심시켰다.
미헬의 부드러운 말씨에 상대는 안심한듯 긴장을 덜어낸 목소리로 다시금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제 이름은 메브, 메브 그라임즈라고 해요. 코가르나흐라는 타라의 작은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미헬은 침착하게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거울 너머의 신비한 분. 저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미헬은 무엇을 도와야 하느냐고 물었다.

 

‘저에게는 지금 또 하나의 거울이 필요해요. 그리고 그걸.. 아마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 같고요. 그러니까 당신이 저를 도와서 거울에 갇힌 영혼들을 해방시켜주셨으면 좋겠어요.’

 

미헬은 어떻게? 라고 되묻지 않았다. 답은 이미 눈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올려 거울속의 미헬을 바라보았고,그 뒤에서 등불을 들고 다가오는 루데크를 응시했다.
나침반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걸어오던 루데크는 거울에 비친 미헬과 눈을 마주치고는 어리둥절한듯 고개를 갸웃거려보였다.
그리고는 입모양을 벙긋거리며 다가왔다.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치 그녀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는 연달아 무언가를 계속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는 루데크의 입가에는 점점 커져가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의 눈은 반짝였으며 당장이라도 더 많은 것을 묻고싶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복잡한 눈빛속에서도 가장 선명하고 커다란 감정은 기쁨이었다. 그녀가 이곳에 도착한 업적을 향한 순수한 기쁨과 반가움. 세계를 공유하는 즐거움.

미헬은 루데크를 향해 돌아서는 자신을 바라보며 수정에 올려놓은 손 옆에 이마를 대었다.
그리고 눈물을 떨어트리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거울 속의 미헬은 그 기쁨에 응답하기에 앞서 일단 팔부터 휘둘렀다.
그녀는 루데트의 등을 몇번이고 내리치며 그를 나무랐다.
두툼한 방한복 너머로 그녀의 손길이 닿을리도 없것만 루데크는 아프다는 시늉을 하며 그녀에게 엄살을 떨어보였다.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금방 화해하여 서로를 걱정하고 의지해왔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도 그러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거니 떠밀거니하며 점점 미헬로부터 멀어져갔다.
곧 그들의 어둠속에 잠겨들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미헬은 홀로 남겨졌다.

 

그러나 미헬은 그 뒤에 있을 상황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동굴 밖으로 나가면, 우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는 어색하게, 혹은 뻔뻔하게, 혹은 조금은 쑥쓰러워 하며 그녀를 제대로 소개해줄 것이다.
‘소개할게, 누나. 이쪽은 우나. 내 소중한 사람이야.’ 라고 말하겠지.

물론 그것은 한번도 들어본 적 없고, 말해본 적도 없으며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애초에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이곳에 올 일은 없었기에 일어날 수 도 없는 기적이지만.
그럼에도 미헬은 그러한 모습을 상상하고 소원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거울 속의 비친 모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도와줄게요.”

 

동시에 거울 너머에서 들리는 의문의 목소리가 말하는 ‘해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으며,
어떻게 해야 그것이 가능한지도 알 수 있었다.

 

‘정말요?! 고마워요! 사실 저도 반신반의 하며 말해본 거였거든요. 저기, 그럼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불러들어야 할까요? 어디계시죠? 제가 만나러 갈 수 있나요?’

 

“미헬. 내 이름은 미헬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아마 만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러자 수정의 동굴 어딘가, 수정벽 속 루데크와 같이 홀가분하게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그녀의 뒤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루데크가, 그리고 루데크들이 하나 둘씩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래. 다정한 너는 어쩌면 나를 걱정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왜 이런 위험천만한 곳까지 왔느냐고 화를 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밖에도 훨씬 더, 훨씬 더 많은 네가 있었을 것이고 그중 대부분은 내가 모르는 반응으로 다양한 대답을 들려주었겠다고 생각하며 미헬은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빛이 박동하여 그녀를 스쳐지나가 동굴의 입구에 이르기까지, 수 천, 수 만번의 인사가 전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마지막 남은 미련까지 털어낸 뒤에야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미헬은 눈물과 땀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저는 지금 세상의 끝에 있어요.”

 

동굴은 빛으로 미헬의 대답에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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