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MAY

카즈밀레)별의 어항12

마비노기/별의 어항 2019. 5. 9. 04:37

헌데도 그 별은 왜 그렇게 까지 고민하는 것인지.

어린 왕은 밀레시안의 고민을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밀레시안은 영웅이었고 또 자신을 도와 왕성의 탈환을 도와준 고마운 은인이긴 했지만 사람의 삶은 어딜가든 다 똑같다고만 생각했다. 어린 왕에게 있어서 삶은 속고 속이는 파워게임의 연속이었다.

밀어내지 않으면 밀려난다. 내어주지 않으면 빼앗을 수 밖에 없다. 

고민은 나약한 자들의 것이었고 힘이 있는 자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왕은 휘두르는 자였다. 

거침없이 나아가 쟁취하여 주변을 이끌어가는 자였다. 그것이 그녀의 삶이었고 운명이었으며 의무였다. 

하지만 어린 왕은 아직 미성숙했고 자신이 그러한 매력을 갖추지 못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갖고 있는 네가 왜? 그래서 어린 왕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힘을 손에 쥐고 있는 밀레시안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밀레시안이 보여준 힘과 인맥, 그리고 그러한 위치까지 올라오기 위한 노련함. 그리고 앞서 말했던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힘까지. 그것들 모두가 어린 왕이 간절히 원하고 또 탐내는 능력이었다. 

세상의 모든 보물을 한데 모아놓은 함이 있다면 그 함의 이르은 분명 밀레시안이라 붙여야 마땅했다.

그런 보물단지를 내려다보며 어린 왕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용하자고. 써먹을 줄 모르는 힘이 있다면 기꺼이 그 주인의 주인이 되어주자고. 

하지만 온실속의 화초, 뿌리를 덮은 흙 아래에서 이뤄지는 영양분 강탈에만 익숙했던 어린 왕은 안타깝게도 밀레시안의 힘에 대한 큰 착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밀레시안의 여정을 삶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삶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비인간적이었고 천륜을 거스르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신과 마신. 

이세계의 괴물과 세계의 붕괴. 

팔라딘과 다크나이트. 

저주하는 자와 저주받는자. 

용과 인간. 

빛과 그림자. 

 

사람이 있었다. 

신에게 대항하여 인간의 몸으로 신의 권위에 맞서려던 아득히 먼 전설과도 같은, 

혹은 그 전설속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밀레시안이 만나고, 밀레시안을 관찰했던. 하지만 결국 그 누구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그런 사람이 가버렸기에 밀레시안의 안에는 더이상 인간성이라는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맹세했다. 이 땅을 수호하기로. 죽음의 용의 희생으로 태어난 새로운 황금과 그렇게 이야기 했고 네개의 머리의 뱀과 그렇게 계약했다. 

여신에게 선언했다. 그에게 약속했다. 사람의 삶을 내어주고 수호자가 되기로 했다. 

그래서 제대로 지켜낸 것이 있어? 하늘에서 추락하고 있던 밀레시안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손에 제대로 쥐어본 것이 있어? 손안에서 빠져나가는 모래를 집어던지 스스로에게 다그쳤다. 

모든 것이 기만이었다. 사람을 끌어들이거나 주변을 휘어잡는 힘이 아닌 이것은 타인의 운명을 휘두르는 재앙이었다. 

지켜내고자 했던 것은 세계가 아닌 자신이었고 이는 결국 거짓조차 되지 못했다.

 

한 세계는 하나의 생명이었고 이는 하나의 낙원. 

밀레시안은 자기 자신만의 낙원을 위해 타인의 삶을 희생시켰다. 

왜 나를 구했어. 밀레시안은 손을 들어 마른 모래가 쏟아져 나오는 입을 틀어막았다. 

왜 나를 구했어. 죽지 않는 것은 나인데. 불멸을 가진 것은 나인데. 마법사는 용이 아닌 별을 구했다. 

용의 마법사를 죽인 것은 자신이었는데도 그는 용을 선택하지 않았다.

미안해.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마법사가 말했다. 역시 아직은 좀 이른 것같다. 

무엇이 이른걸까. 내가 죽기에? 내가 살아가기에? 밀레시안은 더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나아가는 것도 물러서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당신이 결국 나를 이겼다. 당신이 나를 이곳에 속박하여 당신이 나를 이곳에 못박았다.

나는 여기에 있고 당신은 여기에 없다. 밀레시안은 그렇게 떠나간 용의 계약자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곳에는 조롱도, 경의도, 축하도 없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멀리 멀리 울려퍼지는, 살과 살이 맞닿는 소리. 육신과 육신이 맞부딪히는 소리.

손과 손이 이어져 하나의 원을 그리는 소리.

나로 시작하여 나로 완결되는, 하나의 세계가 닫혀가는 소리.

밀레시안은 어둠속에 잠겨들었다. 사위가 고요하고 안락했다.

이대로 모든것이 끝났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세계는 아직도 밀레시안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툭툭 무언가가 정수리 근처를 스치고 지나갔다.

흘러들어간 찬기운의 절반은 머릿속으로 스며들었고 절반은 머리카락을 따라 흘러내렸다.

감겨진 눈꺼풀 너머로 비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소나기를 올려다보며 밀레시안은 어느새 자신이 왕성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래가 가득찬 것같았던 매스꺼움도 가라앉아있었다.

성문을 지키고 선 은백색의 철갑들은 갑작스러운 빗줄기에도 미동없이 자신의 자리에 서 있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두 인간들은 불안하다는 눈으로 밀레시안을 훔쳐보고 있었다.

왜 저러시지? 걱정이 절반, 두려움이 절반. 밀레시안은 서둘러 그 자리를 뜨기로 결정했다.

오랫동안 눈에 띄어봤자 좋을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언제였든, 어디였든간에.

밀레시안이 서둘러 광장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순간이었다.

 

밀레시안님…? 그리운, 아니 처음 듣는 낯선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밀레시안님이세요? 제가 꿈을 꾸고 있는건 아니겠죠? 녹색의 눈이 보였다.

다른 것보다 그 눈이 가장 먼저 밀레시안의 시야에 뛰어들어왔다.

여신이시여, 너무하십니다. 밀레시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누구? 다른 색도 아닌 새파란 녹색이었기에, 밀레시안은 그 낯선 소년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당신 누구? 비가 내렸다. 잿빛처럼 짙은 구름 아래, 눈송이로 여물지 못한 미숙한 얼음 알갱이가 방울방울 떨어져 밀레시안의 얼굴을 적셨다.

누구세요? 밀레시안은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삼켜내었다.

처음 만난 그가 자신의 소중한 인연이 되어줄 것을 알았기에. 또 한번 그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운명의 앞에서 무력하고 나약한, 그러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여행자의 모습이 다시 한번 그 녹음앞에 비치고 있었다.

 

눈이 되기엔 지나치게 따뜻한 온기가  밀레시안에게 다가왔다. 허둥거리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우와! 죄송해요! 혹시 놀라셨나요? 저는 수상한 사람은 아니고 … 앗, 제 소개가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저는 당신을 닮고 싶어서 열심히 수련 중인….

알터.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알터라고 말했다.

그리고 뒤이어 아벨린이라는 기사를 만나고 이어 ■■■라는 기사를 만났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밀레시안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답을 가지고 있습니까? 밀레시안은 잠시 망설이고 또 고민하고, 그리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지키고 싶어. 그것은 아마 반쪽짜리 대답이었지만 진심이 담겨져 있는 말이었다.

밀레시안은 몸안에 소용돌이치는 열기를 모두 토해내어 검으로 삼았다. 그 몸을 부딪혀 방패가 되었다.

쐐기를 들어 제 그림자를 못박고 나서야 자신이 이 땅에 속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폭주하던 힘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나자 밀레시안은 비로소 피로감을 느꼈다.

마치 처음 티르코네일에 왔었을 때와 같은 후련함이었다.

밀레시안은 오래간만에 아무런 꿈도 꾸지 않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지나치게 달콤한 휴식이었다.


휴가 잘 다녀오셨어요? 카즈윈이 눈을 떴다. 잠시 눈을 쉬게 한다는게 잠까지 들었던 모양이었다.

카즈윈은 두어박자 늦게 눈을 깜빡이고는 그래. 라고 나지막히 대답했다.

말소리는 짧았지만 귀가 밝은 헤루인답게 막내는 무언가 이상하다는듯 팀장님..?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고 선반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하기도 하지.

카즈윈은 막내가 기특하긴 했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것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기에 우선 고개부터 가로저었다.

피곤한 것만으로도 힘든데 아침부터 블러디 허브 드링크 F라니, 하루를 그렇게 끔찍하게 시작할 필요가 있을까?

카즈윈은 막내쪽을 돌아보지 않은채 손을 내저으려 했지만 막내는 한발 빠르게 카즈윈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불그스름한 작은 사탕 한알이었다. 카즈윈이 고개를 돌리자 막내는 베시시 웃으며 사탕을 쥐어주고는 반대편손에 들고 있던 블러디 허브 드링크 F를 잽싸게 책상위에 올려두었다.

허, 하고 카즈윈이 기가차다는듯이 웃자 막내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오늘도 좋은하루! 하며 프라데이리 제약회사의 선전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귀엽긴 하지만 기특함이 지나쳤다. 카즈윈은 부드럽게 웃으며 생각했다. 오늘 너는 나랑 나가야겠다.

아직 카즈윈의 표정을 읽을 줄 모르는 막내는 팀장님의 표정이 풀려서 기쁜지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자리에 돌아갔다.

카즈윈은 막내의 바람대로 블러디 허브 드링크 F를 원샷했고 사탕을 입에 까 넣었다.

인생은 짧고 뒷맛은 길다. 카즈윈은 끔찍한 맛으로 불평받은 블러디허브 드링크 F에 대해서 칼럼을 쓴 도렌 교수의 말을 떠올렸다.

앞뒤 주어가 반대로 되긴했지만 대충 그런느낌의 말이었다. 이 뒷맛이 어떻게 짧다고 할 수가 있을까.

카즈윈은 병을 쓰레기통에 집어 넣은뒤 책상에 올려져 있던 물병을 움켜쥐었다.

조금 우그러지는 소리가 나더라도 마시는 것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다.

카즈윈은 물병을 쥐어짜듯이 움켜쥔 뒤 단숨에 작은 페트병 하나를 비워내었다.

곧 쓰거운 숨 한 줌이 밀려나왔다. 액체로 가득찬 위장이 출렁이는 기분이었다.

본의아니게 물배를 채운 카즈윈은 우그러지는 소리에 움찔하고 이쪽의 눈치를 살피려는 막내의 시선을 무시한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걷다보면 내려가겠지. 막내가 제 선배에게 긴급질문을 보내는 동안 카즈윈은 사무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몇몇 직원들이 카즈윈에게 인사를 건네며 빠르게 스쳐지나 갔다. 

 

햇살은 따스했고 공기는 나른했다.

카즈윈은 커다란 채광창에 비치는 풍경을 둘러보며 복도의 끝으로 걸어갔다.

자판기 설치대 겸 약간의 휴식을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는 곳이었다.

더이상 뭔가를 마실 생각은 없지만 유일하게 그곳만이 열 수 있는 창문이었기 때문에 옥상까지, 혹은 1층까지 움직이기 귀찮은 헤루인들은 종종 그곳으로 가서 바람을 쐬곤 했다.

카즈윈은 이미 그 장소에서 쉬고 있던 헤루인들에게 고개를 가로저어보였다.

딱히 자리를 비워줄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헤루인들은 웃으며 카즈윈을 반겼고 친근하게 안부인사를 건네왔다.

대부분 휴가를 잘 갔다왔냐는 내용이었다. 카즈윈은 대강 그들의 발에 대답하며 잠시 잡담을 나누었다.

헤루인들은 근황을 보고했고 카즈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중간중간 다른 이야기도 섞여있었다.

그중 하나가 창밖으로 보이는 아르후안의 차량이었다. 오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요.

음료수를 마시던 헤루인은 창가에 바싹 달라붙었고 카즈윈과 이야기를 나누던 헤루인도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카즈윈이 창가쪽으로 다가가자 창에 달라 붙어 있었던 헤루인은 자리를 비켜주며 아르후안의 팀장을 가리켰다.

저기 저쪽 팀장 옆에 있는 갈색머리 꼬맹이요. 원래 에일리흐사 담당이 L대리인데 이번에 사장님이 휴가가시면서 L대리까지 데려갔잖아요.

L대리는 아르후안의 소속이었지만 동시에 사장의 외가측 친척이었다.

사장이 L대리를 종종 데리고 다니는 것은 회사에서 공공연연한 사실이었기에 카즈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사장님이 갑작스럽게 휴가를 연장하셨거든요. 휴가지에서 어디 다치셨다나? 뭘 하다가 감전되었다던데 병원에서 조금 더 두고 봐야한다고 해서 아직 회사로 돌아오지 못하신다나봐요.

음료수를 마시고 있던 헤루인의 설명에 카즈윈이 인상을 찌푸려보이자 뒤에 서 있던 헤루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팀장님 못들으셨어요? 오늘 아침에 루나사가 말했었는데?

카즈윈은 자신의 책상위에 아무런 메모도 붙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먼저 떠올렸지만 일단 아침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짧게 대답한 뒤 턱끝을 까딱였다. 계속 이야기하라는 신호였다.

헤루인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뒤 남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같이 있었던 L대리까지 사장님 곁에 남기로 했는데.. 아시다시피 L대리가 담당하고 있는 곳이 까다로운 데 뿐이잖아요? 게다가 최근에는 그.. 조금… 사건사고가.. 흠흠흠! 아니요! 아무말도! 헤루인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죠.

네, 아무튼 L대리 백업으로 저기 저 꼬맹이 그러니까 이름이.. 아 A대리. 네. 그런이름이었죠.

A대리가 가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그 소식이 저쪽에도 알려진 모양이에요.

신시엘라크만 아니면 만만하다면서 A대리를 산채로 뼈까지 아작아작 씹어먹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쳤다나?

그래서 아르후안 팀장이 L대리는 신시엘라크가 아니라 아르후안이라면서 철체 파일폴더를 맨손으로 우그러트렸다던데.. 네.. 그 결과가 저렇게 아르후안의 팀장이 직접 가게되었다는 거겠죠.

뭐 우리야 시끄럽게 떽떽거리던 애들이 사라지는 거니까 상관은 없는데… L대리가 조금 불쌍하네요. 입사했더니 사장놈이 사촌이고, 휴가까지 빼앗기고.. 돌아왔더니 거래처는 박살나있고...

카즈윈은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것이 신시엘라크걱정이라고 대답하며 움직이는 차량을 눈으로 뒤쫓았다.

조수석에 앉은 분홍머리의 여성이 인상을 잔뜩 찡그린채 무언가를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다.

카즈윈은 질끈 묶은 분홍색 머리와 안경을 쓴 깐깐한 인상의 여성을 떠올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이름이 뭐였지? 카즈윈의 질문에 헤루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눈을 굴렸다.

A대리요? 아니… 카즈윈은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르후안의.. 누구였더라. 달콤한 사탕은 뜨거운 혓바닥 위에서 녹아내렸고 그 열기는 고스란히 카즈윈의 식도를 타고 몸속 깊은 곳까지 흘러내렸다.

고르륵, 하고 물방울이 요동치는 소리가 났다. 

카즈윈의 안에서 부터 무언가. 자그마한 숨결이. 얕은 숨을 내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카즈윈은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눈앞이 흐려지고 있었다.

어… 아르후안이요? 헤루인의 팀원이 물었다. 아르후안 팀장님 이름 말씀하시는 건가요?

헤루인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께서 모를리 없지 않느냐고.

그들의 눈은 어디 아픈 것 아니냐고 말을 걸며 입으로는 다른 소리를 내뱉었다. 아벨린. 아벨린 팀장님이요. 

눈앞이 새카맣게 흐려지며 몸이 기울어진다. 아르후안의 아벨린 님입니다. 

아득해지는 의식 저편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벨린!! 밀레시안이 소리쳤다. 

그 고함소리와 함께 분홍색 머리를 질끈 묶은 여기사가 헝겊인형처럼 내팽겨쳐지며 문의 반대편 성벽까지 날아가버렸다.

시체에서 태어난 죽은 자들의 왕, 제바흐는 포효하며 휘둘렀던 앞 발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아벨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치명상을 피해낸 ■■■는 재빨리 몸을 굴려 대검을 집어들고는 밀레시안을 향해 소리쳤다.

가십시오 밀레시안! 검은 갑옷을 입은 ■■■는 소리쳤다. 가세요! 문이 닫히기 전에!

밀레시안은 자신을 위해 희생한 기사들을 돌아보며 망설였다.

알터와 피네는 선지자들을 묶어두느라 여념이 없었고 아벨린은 방금 ■■■를 지키기 위해 쓰러졌다.

■■■는 소리쳤다. 밀레시안! 그들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제바흐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상황이 절망적이었기에 더더욱 밀레시안의 망설임은 깊어지기만 했다.

발은 움직이지 않았고 생각의 고리는 점점 더 일그러져만 갔다. 밀레시안은 도저히 그들을 버리고 갈 수 없었다. 

당신이 그곳에 다다르는 것이 우리들의 승리입니다.

■■■는 제바흐의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흔들림없이 대답했다.

 

당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당신만이 완성시킬 수 있어요. 가십시오. 밀레시안. 

그곳으로. 저 문너머로. 잃어버린 우리들의 성지. 아발론으로. 

■■■는 깨어진 칼날을 분리한 뒤 양손으로 대검을 움켜쥐었다. 

검게 물든 칼날이 솟아나며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불꽃은 하늘 높이 타오르며 검날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검이 있었다. 가장 고결하고, 가장 순수하고, 가장 날카로우며, 가장 강대한. 

커다란 검이 있었다. 

세상을 굽어볼 수 있을 만큼 밝고 멀리 뻗어나가는 빛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에서 운명을 기다리던 첫번째 수호자가 있었다. 

밀레시안은 닫혀가는 문을 등진채 물었다. 

 

당신 누구야? 

■■■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 누구냐고..! 밀레시안은 문으로부터 도망치며 ■■■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고 밀레시안은 한없이 문으로 부터 가까워지고 있었다. 

대답해요! 당신은 왜 거기에..!! 나는 어째서..!!!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왜 거기에, 나는 어째서 이곳에. 

머나먼 기억 너머, 주신의 첫번째 검은 자신의 이름을 ■■■라고 말했고. 

대답해요 톨비쉬!!! 밀레시안은 그를 톨비쉬라고 불렀다. 

 

굉음이 울렸다. 

이어 빛이 흔들렸다. 

 

톨비쉬라고 불린 기사가 제바흐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등에는 피로 젖은 창자루가 꽂혀 있었고 그의 가슴에는 눈부신 번개에 휩싸인 창날이 튀어나와 있었다.

날카로운 전격은 톨비쉬의 가슴을 불태우며 빛으로 퍼져나갔다.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일 정도의 강한 빛. 톨비쉬는 가슴을 더듬어 번져나오는 핏자국을 확인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밀레시안은 제가 한 행동이 불려온 결과에 놀란듯 커다랗게 뜨여진 눈을 깜빡이며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단단히 창을 쥐고 있던 손이 허전했다.

창날은 아직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데 밀레시안의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밀려들어오던 검은 파도는 무방비하게 얼어붙어있던 밀레시안을 놓치지 않았고 밀레시안은 파도에 휩쓸려 문 안쪽으로 끌러들여가 버렸다.

밀레시안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강한 빛속에 파묻혀가던 제바흐와 자신을 돌아보는 톨비쉬의 희미한 미소, 그리고 새하얀 물거품이 이는 검은 바다의 끝자락이었다.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철썩거리며 강대한 별조차 갉아 한 줌의 모래로 깎아내는 끝없는 영원.

밀레시안은 그 파도에 삼켜진 채 짙고 깊은 바다에 끌려들어갔다.

푸르다 못해 새까맣게 변해버린 바다였다. 밀레시안은 필사적으로 팔을 내저으며 저항했지만 그러한 행동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고르륵, 고르륵. 입과 코를 통해 얕은 숨이 흘러나왔다.

불이 꺼지고 의식이 멀어졌다.

 

시계는 또다시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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