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톨비밀레)페리도트-중-
5.
"........크르릉"
식료품점에서 성당을 향해 작고 검은 그림자가 쏜살같이 내달리며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쫓아오는 발걸음을 따돌리기 위해 언덕을 타고 뛰어 내려가 학교 뒤편의 정원으로, 잠시 허수아비를 사이에 두고 술래잡기를 하듯 빙글빙글 돌던 그림자는 밀밭으로 몸을 던져 파사삭 하는 소리를 내며 대장간을 향해 달려 나갔다.
급하게 몸을 내던져 방향을 꺾은 고양이가 다리를 향해 내달리는 것을 보고 길을 막아 세워보려 하지만 그쪽은 페이크, 유연하게 몸을 뒤틀어 반대방향으로 박차며 튀어 나간 고양이가 다리를 뛰어넘어 여관 쪽으로 숨어들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문이 열려 있지 않은 여관의 모습에 크게 당황한 건지 고양이는 발톱을 세워 문을 박박 긁어 내렸다.
"...!!"
"포기해."
혼란스러운 계획을 재정비하는 동안 발은 쉴 새 없이 제자리를 빙글빙글, 다가오는 밀레시안의 기척에 필사적으로 언덕을 타고 올라가 잡화점의 뒷마당에 내려선 검은 짐승이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몸을 털어내었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는 마을, 사람의 흔적이 의도적으로 지워진 듯한 밀레시안의 티르코네일은 모든 집이 문을 걸어 잠근 채 어떠한 소통도 요구하고 있지 않았다.
검은 짐승이 도망갈 곳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동안 다시 마을 쪽으로 돌아온 밀레시안의 신성력을 내뿜으며 잡화점으로 다가왔다.
허겁지겁 광장 쪽으로 달려 나가며 잡화점 항아리를 모두 깨부순 것으로도 모자라 베틀을 넘어트린 작은 동물이 허겁지겁 촌장의 집 쪽으로 뛰어올라 무덤가로 달려가 보지만 기다란 풀숲을 끼고 술래잡기를 계속할 생각이 없는 밀레시안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거대한 검을 내리쳤다.
천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과 함께 마을길로 나동그라진 작은 짐승이 황급히 머리를 흔들고 몸을 추스르며 북쪽을 향해 일어섰다. 검은 짐승이 내디딘 발자국마다 검은 모래가 번져 나오며 티르코네일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밀레시안을 피해 마을 외곽지역까지 몰아넣어 진 검은 짐승은 알비던전의 목책을 뛰어넘어 아본의 기둥을 타고 무너진 유적 꼭대기에 올라섰다.
새하얀 기둥 위에서 등을 둥글게 말아 세운 채 사나운 울음소리로 위협하는 모습은 밀레시안에게 있어서 하찮은 짐승의 그르렁거림이었을 뿐이었다.
기가 차지도 않는 위협에 밀레시안은 쿨타임이 돌아온 신성력을 엮어 여러 개의 바늘을 엮어내었다.
정화시키기 전의 마지막 통보를 전하는 밀레시안은 스파이크를 겨눈 채 저주에게 말을 걸었다. 페리도트 빛 눈동자에 빛이 감돌았다
“이제 그만 포기해.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잖아.”
“도망치는건 내가 아니라 너야, 밀레시안. 나를 원하는것도 너고. 넌 내가 필요하잖아.”
저주는 코너에 몰려서도 지기 싫다는 어투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흔들고 신경질적으로 발톱을 긁어내리는 모양새는 살아 있는 들짐승과 다를 바 없었지만 저주에게는 특정한 형태가 없었다.
그것은 개이기도 했고 고양이기도 했고 너구리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여우였고 들짐승이었다. 그저 네 개의 다리가 달린 것이라면 모든 의태하고 있는 건지 그 모습과 형태는 시시각각으로 모습을 달리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두 개의 페리도트 빛 눈동자. 어둠 속에서 불타오르는 짐승의 안광처럼 저주는 눈 안 가득 밀레시안의 모습을 담은 채 미동 없이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난 저주같은거 필요없어”
“너에겐 어둠이 필요해”“우리들은 어둠을 담아내지 않아.”
밀레시안은 우리라는 단어를 기묘한 것을 뱉어내는 어조로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소울스트림은 밀레시안의 마음 위를 가로지르며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고 저주 또한 그것은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저주는 입을 삐죽거렸고 귀는 신경질적으로 팔락거렸다. 검은 발자국은 착실하게 퍼져 나가며 티르코네일의 전경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맞아, 하지만 아무리 촘촘한 야금 채라도 바닷물을 담아내면 거른다고 말할 수가 없지. 너의 은하수는 악몽은 걸러 낼 수 있지만, 불안감은 그대로 통과시켜버려.”
저주가 빈정거렸다.
“불안감만 걸러져 내려올까? 탐욕, 갈망, 절제하지 못하기도 하고 수치심에 후회를 느끼기도 해. 뿐만 아니라 너는 망설이기도 하지.
두려워서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웃음으로 얼버무리면서 말이야.”
검은 짐승은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조금 몸집이 불어났고 어색하던 근육의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졌다.
티르코네일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진 밀레시안의 마음속은 고요했고 어떠한 사람이나 짐승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외관적으로 본다면 밀레시안이 재현해낸 마을은 훌륭했다. 수풀은 풍성했고 벽면에선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으며 지나가는 작은 돌조각 하나까지도 원래의 마을의 모습 그대로 닮은 모습, 다른점이 있다면 어느 문도 열려 있지 않았다는 것일뿐. 그저 스쳐 지나가는 길목의 전경처럼 한껏 꾸며놓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는 텅 비워진 마을을 돌아보며 저주는 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속삭였다.
“나는 이 풍경을 이해할 수 있어 밀레시안. 나는 너와 같아. 우리는 빛나고 희소하며 단단하지만, 조금이라도 소홀해지면 쉽게 상처를 받지. 우리들의 영혼은 모두 이 세상의 경계 밖에서 왔고 본능적으로 인간을 원해. 그들을 닮고 함께하고 생활을 공유하며 그들의 눈에 들고 싶어 하는 동시에 그들에게서 탐욕의 눈빛을 봐. 너는 그런 다난들을 경계하지만 동시에 놓칠까 겁을 내고 있지.”
“아니야”
저주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타고 꼬리를 살랑거렸다. 눈꺼풀을 내려 시선을 부드럽게. 교태 있는 몸짓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발놀림으로 기둥의 가장자리를 쓰다듬었다. 기울어진 몸의 곡선이 멋들어지게 드러났다.
“혼자남는건 외로워. 나도 그랬어.”
속내가 뻔히 보이도록 달콤한 목소리였지만 밀레시안은 저주가 말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저주는 밀레시안의 어둠아래로 뿌리를 내린채 문자 그대로 영혼의 기억을 읽어 내리고 있었다. 불안감은 저주의 양식이였고 의구심은 검은짐승을 살찌웠다. 바로 눈앞에서 성장을 거듭하는 검은짐승은 벌써 성체의 크기의 여우의 모습을 흉내 내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곳은 유리한 고지였고 저주가 기둥 위에 올라간 것은 정신없이 쫓긴 결과가 아니었다. 저주는 그 기둥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요령 좋게 발 디딜 곳을 골라 자리에 앉은 검은 짐승은 앞발을 핥는 여유까지 내보이며 꼬리를 흔들어 보였다.
저주가 웃음 지었다
“우리들은 사람의 필요에 의해 태어났고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밀레시안. 그럼에도 다난들은 너를 상처입혔고 등돌린 뒤 배신했어. 너는 버림받았고 아무도 너와 대화하려 하지 않았지. 지치고 힘들고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 그럼에도 네가 찾아낸건 다난의 온기였어. 두려웠지, 무서웠지. 또 그가 떠나갈까봐”
“너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들이야”
“너는 그를 포기 못해. 동시에 선택하지도 못하지. 너는 경계선에 서서 어느쪽으로 넘어가지도 못한채 머뭇거리고 있어 설령 그 망설임이 관계성을 파멸시키게 된다 하더라도 너는 네 손으로 어느쪽도 선택하지 못할 거야.”
“아니야”“맞아”
저주는 밀레시안의 대답은 애초에 관심이 없었는지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새하얀 기둥은 검은 짐승이 흘리는 모래로 뒤덮였고 모래는 그대로 땅으로 스며들어 밀레시안의 심층부를 향해 뿌리를 뻗었다. 밀레시안의 감정, 밀레시안의 기억, 밀레시안의 비밀. 모든 것을 파헤치는 무례한 방문자의 행패에 밀레시안은 말없이 손을 들어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날을 들이밀었다.
“아니야!”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수십 개의 점들이 기둥 위의 검은 짐승을 노린 채 길게 뻗어 나가는 모습은 놀라움 그 자체였지만 저주는 겁먹은 기색 없이 꼬리를 흔들어보였다.
이미 알아야 할 것은 다 알았다는 얼굴로 저주는 한쪽 눈을 깜빡여 보이며 뿌리 뻗었던 모래를 떨어트렸다. 하얀 기둥은 모래로 둘러싸였지만 모래는 더 이상 꿈틀거리거나 움직이길 기미를 보이지는 않았다. 저주는 밀레시안을 조롱했다.
“내 주인도 그랬어. 그는 인간의 선량함과 자신의 절망속에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태어났어. 만들어졌지. 네가 선택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너를 또다른 선택지로 밀어낼 거야.
나는 내 주인의 목숨을 삼켜야했고 그런 나를 누군가가 훔쳐내었어. 설령 내가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 공방에서 가지고 나오기 전까지는 나는 아무도 해치지 않은 채 그대로 잠들 수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되지 못했어.
나는 보석이었고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는데도 사람들은 나를 조명아래 전시했지. 나를 불러낸 건 그들 스스로 선택한 탐욕 이였어.”
“……그들은 네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뿐이야.”
“알지 못했다고? 아니, 사람들은 내가 가는 곳마다 죽음이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를 소중하게 보관했어. 뒷골목의 암시장에서 은밀하게 감춰진 경매장에 들어설 때까지.
사람들은 내 뒤로 죽어나간 시체를 치우며 아니라고 부정하고 다른 이유라고 생각을 꺾었지. 그들은 희미하게나마, 혹은 확신을 하면서 나를 의심했지만 아무도 나를 깨트리거나 버리려고 하지 않았어. 그래도 그들이 무지하고 무고한 피해자라고 생각해?”
밀레시안은 눈을 깜빡이며 침착하게 생각하기 위해 애를 썼다. 눈앞에 있는 저주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보석의 정보가 맞지 않아 혼란스러워 졌다. 밀레시안의 그림자 아래로 신문지같은 글자들이 떠올랐지만 곧 검은 모래에 잠겨들어 모두 검게 물들어버렸다. 저주는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러면 너는? 너는 어떨까, 너의 작은 기사들은 너와 그 금발기사의 관계성을 정말로 알지 못할까? 너를 주시하는 눈들이 네가 그의 방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할까? 창틀의 구석, 문틈에 쑤셔넣은 슬리퍼 하나까지도 탁탁 털어 가지런히 내려놓을 하얀 샌님은 정말로 불이 꺼진 등불을 살펴보지 않았을까?”
간드러지는 짐승의 웃음소리 속에서 밀레시안은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애를 썼다.
게이트는 언제나 크고 작은 사건들로 시끌벅적한 공간이였다. 눈을 돌리면 쏟아지는 일거리와 발을 딛으면 떨어지는 지령서에 치여 밤이 찾아오는 시간이면 모두 숙소로 돌아가 골아떨어지기 일 수. 밀레시안이 톨비쉬를 찾아가는 시각은 꽤나 늦은 시간대였고 설령 누군가 보았다 하더라도... 아니, 그런게 중요한 사실은 아니였다. 그 누구라도 그들에게 관계성을 명확하게 하라고 강요 할 수는 없었다. 그 사소한 시간에 이름을 붙일 수는...., 틀렸어. 이것도 아니야. 밀레시안은 머리를 흔들며 눈앞에 있는 문제에 집중했다. 손끝이 얼어붙은 아릿함과 함께 머릿속마저 둔해지는 느낌이였다. 검은 짐승이 아쉽다고 속삭이며 작고 귀여운 앞발을 몇 번인가 핥은 뒤 기둥의 가장자리에 나란히 내려놓았다.
저주는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면 그저 나를 받아들여, 내가 너의 어둠이 되어줄게, 너의 그림자가 되어줄게. 소울스트림이 충족시켜주지 못한 네 어둠을 내가 매워줄게.
네가 무엇을 원하든 너의 실패는 나의 탓으로 돌리고 너의 두려움은 나의 나약함으로 생각해. 너는 너의 기사를 붙들어 둘 시간을 얻고 나는 나의 악의를 실행시킬 그릇을 얻을 꺼야. 딱 한사람이야. 딱 한사람만 죽여주면 내 어둠은 너의 그림자가 될 수 있어.”
“……”
검은 짐승은 밀레시안의 망설임을 알고 있었고 그 간극을 매우기 위해 앞으로 발을 뻗었다. 그 작은 한걸음에 밀레시안은 본능적으로 손을 앞으로 뻗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닌 거부감과 매스꺼움이 밀레시안의 몸을 뒤로 밀어냈고 검은 짐승은 미소 지었다. 말려올라간 입꼬리가 벌어지며 다시한번 회유의 말을 꺼내보려는 찰나 밀레시안의 귓가에 떠있던 바늘 한 개가 요란한 바람을 일으키며 쏘아져 나갔다.
“아,”
“.......너!!!”
공격할 생각이 아닌 그저 겨누어 위협하려는 움직임 이였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셀레스티얼 스파이크는 밀레시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날아들어 검은 짐승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스쳐지나간 불꽃아래서 날카로운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글거리는 안광이 밀레시안을 쏘아보았다.
밀레시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 눈빛을 마주보려했지만 놀란 가슴이 빠르게 두근거리며 밀레시안의 귓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저주는 한동안 밀레시안을 향해 비난을 퍼붓다가 이를 악물었다. 밀레시안은 침묵을 지키며 뺨에 손을 올렸다.
거친 비늘이 이질적인 소리를 내며 손톱끝을 울려대었다. 밀레시안은 의지와 상관없이 쏘아져나간 신성력에 이를 악물었다. 저주는 금방이라도 이빨을 드러낼 것같이 으르렁거렸고 밀레시안은 그런 저주의 모습 뒤로 잘그락거리는 마녀의 발소리를 겹쳐들었다.
밀레시안의 눈초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몸이 통제를 벗어나고 있는 감각은 전혀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었다. 저주 모두 동시에 인상을 찡그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안타깝네. 정말 안타까워 밀레시안. 나는 그래도 평화적인 방법을 원했는데. 네 대답이 이런거라니”
“나의 대답이 아니야”
“벌써부터 네 행동에 대한 책임을 나에게 돌리는거야? 말로만 거부하는 것 치고는 적응이 너무 빠르지 않아?
뭐, 상관없어. 나는 이미 네 근본에 다가서 있어. 네 소원은 나의 소원과 반응하고 있고 마녀가 발라둔 비늘도 곧 모두 벗겨져나가고 말 꺼야”
밀레시안은 비늘의 꺼끌거림을 잊으려 애를 쓰며 머릿속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집중해. 저주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색 불꽃은 녹색의 보석을 강조하며 눈이 아프도록 번쩍거렸다. 밀레시안은 천천히 저주의 빈틈을 찾기위해 손을 움직였다. 생각을 정리하고는 소비해버린 스파이크를 재 소환했다 쐐기들의 표면으로 새하얀 스파크가 일어났다.
페리도트, 이 녹색의 보석을 다듬은 세공사의 3개월 전 날짜가 찍힌 신문에 이름을 올리기 전까진 그렇게 주목받던 세공사가 아니었다.
짧은 토막기사에서 세공사는 분명 죽었다는 소식을 알리고 있었지만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묘사하고 있지 않았다. 하다못해 그가 음독사를 했는지, 목을 매달았는지, 누군가에게 찔린 것인지, 혹은 병으로 사망했는지. 어떠한 사인도 밝히지 않은 신문기사는 누군가의 통제를 받은것처럼 짧고 간결하며 뒷이야기를 잘라먹은 어정쩡한 모양새였다. 그 달에 죽은 사람이 그 뿐만이 아니었는데도 왜 기자들은 굳이 그의 이름을 따로 빼내어 기사를 써내려갔다.
사람들이 궁금해 할 만한 기사는 가난한 세공사의 비극이 아닌 귀족 남자의 스캔들 이야기였는데도 그들은 굳이 지분을 할애하여 그의 이름을 휘갈겼다.
“나는 아무 소원 없어”
밀레시안은 바짝 타들어가는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은 짐승의 시선이 끈덕지게 따라붙어왔다.
타라는 교황청의 영향권 안 이였고 라이미라크 교환청은 표면적으론 알반에게 호의적인 대상이었다. 밀레시안은 톨비쉬가 처음 알반에 알린것이 라이미라크 교단에서 파견된 봉사자였다고 말했었다. 저주의 쉭쉭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너는 소원하고 있어. 네 스스로도 숨기고 싶어할 만큼. 네가 말했었잖아? 테이블 앞에 앉아서 말이야. 그 방에 누가 있었는지 벌써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밀레시안은 무슨말이냐는 듯 눈썹을 찌푸렸지만 밀레시안의 마음속은 정직하게 저주의 도발에 반응했다. 감추려고 해도 이 곳은 하나의 무대, 이곳에 있는 모든 소품과 장치와 이야기는 밀레시안의 심성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언젠가’
밀레시안은 스쳐지나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묻기 위해 크게 발을 내굴렀다. 천공을 꿰어낼 바늘들은 날카롭게 빛을 내었고 그중 몇몇은 금방이라도 쏘아져 나갈 것같이 요동쳤다.
검은 짐승은 고통을 두려워하는 얼굴로 자세를 낮추었지만 밀레시안에게서 시선을 때지는 않았다. 어둠속에서 벌려진 입에서 황금색 불꽃이 토해져 나왔다.
어리석은 밀레시안, 나약한 밀레시안. 검은 짐승은 웃으며 꼬리를 바짝 세웠다. 저주가 올라탄 기둥의 표면이 일그러지며 밀레시안과 같은 모양의 입술이 솟아올랐다.
주변을 둘러볼 눈도, 반응을 확인할 귀도 없이 오로지 입만 솟아난 기둥은 내보이고 싶지 않은 진심을 속삭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밀레시안의 손이 기둥을 향해 휘둘러졌다.
“언젠가, 그의 진짜 방에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저주는 비웃었고 그 작고 동그란 검은 머리위로 셀레스티얼 스파이크가 날아들었다. 기둥을 부수어버리는 강력한 위력의 탄환들이 수도 없이 저주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커다란 짐승의 포효소리와 함께 부풀어오르며 먼지속으로 몸을 숨겼다. 거친 콧바람으로 흙먼지를 흩어놓는 저주의 몸 여기저기에서 꽂혀들었던 바늘이 몇몇개 튕겨져 나오며 검은 모래를 쏟아내었다.
밀레시안의 흔들리는 마음을 양식으로 삼아 자라난 검은 짐승은 포만감을 느끼는 건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맛을 다시었다.
거대한 다이어울프의 크기가 된 검은 짐승은 빛나는 바늘들이 근육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몸을 일으켜 밀레시안과 마주했다.
찢어진 몸체에선 피 대신 검은 모래가 새어나오고 있었고 아본의 기둥은 작은 돌조각이 되어 검은 모랫속에 잠겨들었다.
“그건 소원이 아니야. 그가 초대하더라도 나는 그의 방에 들어가지 않을 거야”
“네가 이미 드나들고 있는 그 방도 그의 공간이야”
“거긴 진짜 그의 방이 아니야”
“하지만 일부는 그 기사의 개인공간이지”
밀레시안은 부정했고 저주는 강하게 긍정했다.
“그가 앉는 의자, 그가 사용하던 책상, 머그컵 하나, 펜 한 자루. 어느 작은 부분일지언정 너의 기사가 머물렀고 사용하던 공간이야. 그건 그의 일부이고 그의 마음이고 너에 대한 애정이지. 그는 너를 허락했고 네가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어”
밀레시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숨이 조금 가빠지는 느낌이였다.
“그는 알반의, 엘베드의 조장이야”
밀레시안은 눈을 깜빡이며 머릿속에서 톨비쉬의 얼굴을 지워내기 위해 애를 썼다.
“그가 원하는 건 영웅과의 원만하고 친밀한 관계야”
“거짓말, 너는 그가 내민 열쇠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잖아.”
“받지 않았어.”
그는 겨울날, 밀레시안이 방문 앞에서 톨비쉬를 기다리던 그 날. 톨비쉬는 어제에 이어 계속하기로 했던 언어적 대화와 몸짓언어에 대한 설명을 계속하기에 앞서 작은 열쇠를 내밀었다. 따끈한 레몬티 옆에 놓여진 작은 은빛 열쇠를 보며 밀레시안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톨비쉬는 실망했지만 곧 다리를 꼬아 앉으며 소파에 기대었다. 입가에는 괜찮다는 의미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기에 밀레시안은 안심하고 그를 따라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따듯한 레몬 티만큼이나 상쾌하고 다정한 미소. 그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이렇게 할까요?’
밀레시안은 호주머니 대신 등불 안에 열쇠를 넣어놓기로 합의했고 톨비쉬는 밀레시안을 위해 그 등불을 켜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방이 있는 복도는 한층 어두워졌지만 밀레시안은 그 어둠을 핑계로 그의 방을 드나들었다.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것이다.
“나는 받지 않았어.
“손에 쥐지는 않았을뿐, 사용했잖아?”
한층 힘주어 말하는 밀레시안을 보며 저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짐승의 몸체에서 검은 모래가 한층 더 요란한 기세로 쏟아져 내렸다.
“손에 들어오면 놓쳐버릴까봐 무서웠지? 잃어버릴 것 같아 두려웠지? 그가 언젠가 네게서 손을 거둘까봐 겁이 나니까. 두려우니까. 혹은 네 스스로가 그의 손을 놓아야 할지도 모르니까.”
티르코네일이 검은 모래속에 잠겨들고 있었다.
6.
검은 모래는 쉴 새 없이 쏟아져 밀레시안의 주변은 이미 사막처럼 버석버석한 모래들로 가득 차올라 있었다. 모래는 진흙처럼 발목 잡아끌었고 밀레시안은 그자리에 못박힌 채 가슴위로 손을 올렸다.
얄팍한 천옷사이로 딱딱하고 넓은 표면의 무언가가 만져졌다. 발레스의 북풍을 품고 있는 매끄러운 표면은 손끝을 데는것 만으로도 입김이 서리도록 싸늘한 느낌을 전해왔다.
밀레시안은 잉크를 엎지른 지도처럼 어둠에 좀먹혀가는 티르코네일을 둘러보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영롱하게 빛나던 소울스트림이 뿌연 먹구름으로 가려지고 있었다. 천둥소리를 동반한 거대한 먹구름은 밀레시안의 머리위에 똬리를 틀고 앉으며 기회를 엿보듯 낮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밀레시안은 고개를 들었고 저주는 그런 밀레시안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천둥이 내리치며 잠시 환한 불빛을 밝히었다. 저주는 다시 회유를 하려는 건지 간들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녹색의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휘었다.
“너는 행복했고 그만큼 불안감을 느끼고 있어. 그런 너에겐 핑계가 필요해. 날 봐. 나를 봐, 밀레시안.
나는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 낼 수 있고 아무도 너를 나무라지 않을 꺼야. 나는 그와 너를 이어주는 완충제가 되어줄꺼고 나는 너를 대신해서 그를 노려볼 거야. 물론 그가 너를 상처입힌다면, 그리고 네가 나의 칼자루가 되어준다면 말이지만.”
“나는 저주같은거 필요하지 않아”
구름사이에서 요동치는 빛은 낯이 익은 푸른 색이였다. 밀레시안은 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기를 느꼈고 그 열기는 별빛의 생명력과 닮아있었다.
구름너머에서도 소울스트림은 여전히 빛이 났고 밀레시안은 그 너머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느낌에 정신을 집중했다. 거대한 빛의 창은 구름 속에 몸을 숨긴채 저주의 정수리를 내려다 보고있었다.
“나는 이미 대답을 정했고 나와 그의 사이에는 명확하게 선이 그어져 있어. 그는 그걸 넘지 않아.”
“너는 넘을 생각이 있고?”
검은 짐승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밀레시안은 생물처럼 움직이는 그것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심해, 너무 한심해. 왜 그렇게 망설이는거야? 누가 너를 금제한다는거야? 그 선은 누가 정했어? 어째서 그런걸 만들었어? 팔리아스로 떠나간 검은 까마귀? 종말을 약속하고 고개를 돌린 붉은 여신? 황금을 품던 검은 빛의 여신은 이미 자리를 비웠고 발없이 그림자를 달리던 하얀 날개의 마신은 너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잖아? 누가 너를 강제한다는거야?”
신성력의 근원이 달라서일까, 저주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여러 신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조롱했다. 밀레시안은 촛점없이 저주의 웃음을 바라보았고 구름은 더욱 거세게 발을 굴렀다.
별에 안에는 수많은 조각들이 잠들어 있었고 그 안에는 한때 그림자의 경계선을 걷던 아들의 이름 또한 그 안에 들어있었다. 구름은 사방에서 빛을 끌어 모았고 밀레시안은 저주를 노려보았다. 희미하게 오르골 소리가 들리다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이 땅을 떠났다는 것을 알아. 내 주인이 몸소 그것을 증명해 주었지.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착실하게 그들의 의지를 따르고 그들의 사랑을 기도했어. 은혜를, 자비를, 영광을 위해. 하지만 봐, 모두 헛된 일 들이였어.
신의 은총아래 속삭였던 사랑은 깨졌고 영광의 이름아래 약속했던 영원을 사라졌지. 그는 영원한 삶과 끝없는 행복을 땅같은건 바라지 않았어. 내 주인들이 원했던 것은 한 뼘의 평화와 한 조각의 평안감, 그리고 만족감.”
저주는 끝으로 갈수록 말을 흐리며 쓴 것을 뱉어내듯 이야기했다.
“화합, 사랑. 그래,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녹색의 눈동자에서 잠시 황금색 불꽃이 사라졌지만 곧 다시 기세를 되찾으며 화려하게 불타올랐다. 이계신의 은총이 보석의 눈동자에. 저주는 고개를 비틀어 우두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세를 낮추었다.
금방이라도 밀레시안에게 달려들 것같은 위협이였다. 티르코네일을 덮은 모래는 밀레시안의 발밑으로 모여들었고 모래들은 밀레시안을 통째로 집어삼킬것같이 소용돌이를 그리며 요동쳤다.
검은 짐승은 더욱 커져갔고 시선은 점점 위를 향해 올려다보아야만 했다. 저주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그것은 짐승의 참회이기도 했고 맹세이기도 했다.
“나는 사랑을 기만하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기도를 이용해 상대방을 상처입히려는 자들을 증오해.
들어봐 밀레시안. 나를 가졌던, 이런 모습이 아닌 진정으로 나의 보석을 가졌던 주인이 세 명이 있었어.
내 어린주인은 한 때의 유흥거리를 위해 상처입어야 했고 내 여주인은 남겨진 상처를 비난하는 목소리에 쫓겨 목을 매어야 했어. 나는 마지막 남은 내 주인이 죽음으로 떠밀어지는 것을 방치함으로서 힘을 얻었고 내 주인들을 부순 그 남자를 죽일 것이라 맹세했어.
그걸 누가 탓할 수 있어? 누가 나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어?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왜 내 주인들이 죽었을 때 나타나지 않았어? 아니, 없을껄. 타라는 우리를 심판할 수 없어.
신들을 우리를 나무랄 수 없어. 설령 내 복수에 무언가가 더 죽어나간들 그건 내 탓으로 돌릴 수는 없어. 나는 어둠이고 나는 절망이고 나는 원망이며 악의로 가득차있는 저주받은 물건이야.
그들의 탐욕과 질투로서 나를 불러들였고 그건 그들이 책임져야할 업보야.”
“네 주인이 너에게 복수를 원했어?”
“아니, 원하지 않았어. 내 주인은 나를 사랑으로 두드렸고 아름다움으로 치장시켰지.”
저주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순간만큼은 그 녹색의 보석은 황금색 불꽃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아주 잠시 동안의 망설임 이후 저주는 다시 불을 밝히고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너도 알잖아. 사랑은 집착으로 변질되기 쉽고 아름다움은 욕망을 불러들여. 나는 녹음을 잃었고 녹색의 눈동자를 얻었어. 어둠속에 잠겨들게 한건 타라의 그림자야.”
밀레시안은 입을 다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모래들이 밀레시안의 몸을 타고 올라오며 온몸을 꽁꽁 묶어대기 시작했지만 밀레시안은 그것을 털어내는 시늉조차 하지 않은 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무거운 무게에 몸을 맞겼다.
자라나는 비늘들이 모래가 몸 안으로 파고들어오는 것을 막아내고 있지만 비늘이 자라나는 속도보다 빠르게 모래가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네가 바란다면 내가 너를 도와줄게. 이러한 방식이 아닌 인간의 방식으로. 나는 네 주인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고 네 악의가 향한 인간을 단죄시킬 수 있어. 네 주인의 이름을 저주받은 보석의 세공사로 남길 수는 없잖아?”
“내 주인의 이름?”
“그래, 네 주인의 이름”
구름은 끊임없이 천둥을 외치며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지만 밀레시안은 아직, 이라고 대답하며 비늘 덮인 손으로 가슴속 뿌리박힌 서리의 결정끝에 손을 얹었다. 발레스의 북풍이 밀레시안의 입가를 스쳐지나갔다. 춥고 고단한 바람사이로 옅은 피비린내가 흩어졌다.
“틀렸어. 밀레시안. 나는 선의를 바라는게 아니야. 내 주인을 목매달게 한 것은 착하고도 순해빠진 그 마음씨 때문이였어. 타라의 그 여자도 아들을 위한 시간 때문에 죽어버렸지. 나는 구원이 아닌 파멸을 원해.”
‘모든 것이 끝나버렸으면 좋겠어’
페리도트의 눈동자를 가진 거대한 짐승은 밀레시안의 정수리를 내려다 보기위해 몸을 일으켰다. 처음 작은 들짐승 이였던 저주는 이제 거대한 그리질리 베어의 모습이 되어 밀레시안을내려다보았다. 아직 어둠에 물들지 않은 시드스넷타의 결계가 검은 짐승의 등 뒤로 어른거렸다. 우연히라면 지독했고 의도였다면 아주 똑똑한 선택이였다. 밀레시안은 이 짐승이 먹고자란 것이 자신의 어둠이라는 것을 인정해야했다. 매마른 모래에서 약초향기가 나는 착각이 밀레시안의 머릿속을 흐트러트렸다. 저주는 그르렁거림과 함께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나를 봐. 내 모습을 보라고. 계속 말하고 있잖아. 나를 보고 내가 무엇인지 말해봐. 내가 이렇게 일그러지고 흉측해졌어도 인간들은 나를 사랑해. 내 뒷면에 새겨진 그의 이름을 칭송해. 그가 언제 어떻게 왜 죽었는지는 궁금해하진 않지만 그를 천재라고 부르고 행운을 손에 넣은 사나이라 불러. 그가 죽음으로 발견되고 나서는 분수에 맞지 않은 보석을 손에 넣어 벌을 받은 거라 떠들어.
그런 그들을 무고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그들을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주인의 명예를 되돌려준다는건 네 말대로 무척이나 끌리는 제안이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야.
정당한 방법, 인간들의 방법.
틀렸어. 밀레시안. 그건 너무나도 옳지 못해. 내 어린주인의 목숨은 그렇게 싼값으로 치러졌는데 어째서 그는 존중받아야하지? 왜 내 여주인은 뿌리없는 소문에 떠밀려 목을 매어야했지? 나는 내 악의가 죗값을 받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그만큼이나 강렬하게 인간들의 도시가 부서지기를 바래. 혼란으로, 공포로, 두려움으로 물들어 모래처럼 스러지기를 바래.
하지만 원하는 모든 것을 바랄 수는 없었잖아.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 하나 찾아내기도 벅차 허둥거렸고 그건 벌써 한번 실패로 돌아갔는걸. 나는 후회해. 후회하고 괴로워하고 있어. 모든 소원을 품지 못해 하나를 포기했는데 그 하나의 소원마저 내가 담아내기엔 내 그릇이 너무 작았어. 왜 좀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왜 좀 더 강인한 숙주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래, 그랬었어. 내 목표가 그였던 건 내 그릇이 작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젠 상관없지.”
어둠은 미소 지었고 녹색의 눈동자는 비틀리며 흔들렸다.
저주는 웃음 지었고 스산한 발레스의 바람이 밀레시안의 뺨을 간질였다.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신성력의 불꽃이 끊임없이 밀레시안의 거울을 두드렸다. 밀레시안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를 뿌리쳤다. 불꽃은 잠시 기세를 늦추다가 큰소리와 함께 가슴을 두드렸다. 천둥이 울리며 귓가가 먹먹하게 먹혀들어갔다.
기세넘치는 천둥소리에 저주는 여유롭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두발로 일어섰던 검은 짐승은 쿵 소리를 내며 앞발을 크게 굴렀다. 입을 벌린 검은 짐승이 밀레시안에게 다가왔다.
밀레시안은 사방이 깜깜해지는 것을 지켜보며 짐승의 입 안에서 울려퍼지는 목소리에 둘러싸였다. 저주는 밀레시안을 입에 머금은 상태로 대답했다
“신의 힘을 담는 위대한 그릇. 나는 너와 하나가 될 거야.”
“나를 삼킨다고 해서 이 힘이 네 것이 되는 것은 아니야.”
“상관없어. 네가 뭐든, 내가 어떻게되든간에”
저주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모래와 함께 밀레시안을 집어삼켰다. 실체가 있는 몸이었다면 씹거나 입안에서 굴려야 했겠지만 이곳은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
목으로 삼켜내듯이 모래를 쏟아부은 거대한 몸체가 밀레시안을 부숴트리며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푹 하고 형태를 잃고 모래로 돌아간 검은 짐승의 자리로는 밀레시안도 짐승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한박자 늦게 한쌍의 페리도트가 떨어져 내렸다.
가라앉은 사막은 요동쳤고 그 중심에는 녹색의 보석이 있었다. 저주를 중심으로 다시 솟아나기 시작한 검은 그림자의 형태는 짐승의 형태보다는 조금 작았지만 더 이상 네 발달린 짐승이 아닌 두발로 일어선 모습이었다.
어두워졌던 공간으로 붉은 라데카가 떠올랐고 사그라지는 모래사이로 타라의 전경이 펼쳐졌다. 달빛을 가리며 으르렁거리는 하늘을 올려다본 녹색 눈의 여성이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인사했다.
“도시를 무너트릴 만큼은 충분하다고 생각해.”
요동치던 구름사이에서 큰 소리와 함께 벼락이 내리쳤다.
7.
저주에게 삼켜진 밀레시안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흘러가는 유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었다. 백색의 소음처럼 쏟아지는 모래들을 흐르고 또 흘러 어딘가를 향해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시야는 어두웠고 밀레시안이 갖고 있는 단서의 조각은 오로지 검은 모래가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모래, 밀레시안의 본능은 떠오르는 기억을 갈피삼아 그동안의 경험들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하늘을 날았고 바다를 건넜던 기억, 라노의 평원을 날아 펼쳐졌던 무유사막. 결계가 풀려나며 드러나기 시작한 용의 뼈는 분명 흥미로운 장소였지만 지금은 그런 곳에 신경을 팔 시간이 없었다. 밀레시안을 둘러싼 모래는 그 곳의 모래보다 훨씬 가늘었고 격렬하게 움직였다.
바람에 날려갈듯 가느다란 모래, 론가사막. 거대한 숲을 무너트릴 만큼 보드랍고 고운 모래들은 바람에 날려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을 모래폭풍을 만들어내어 여행자들의 길을 속이고는 했다. 과거를 품은 유적, 일부러 입구를 파내지 않으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게 묻힌 엘프들의 유산은 늘 모래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를 것 같던 엘프들의 유적.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좀 더, 흘러내리고 부서지며 휩쓸려 갈만한 강한 힘.
귓가를 가득 매우는 모래 소리 여행도중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실수했던 기억. 잘못 찾았다고 생각하며 뒷걸음 쳤던 순간, 엘로드가 울렸고 모래가 빨려 들어가던 개미굴의 입구에서의 기억.
밀레시안은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공포, 그 후회감. 언젠가 사막의 개미굴 앞에 섰을 때처럼 후회를 했던 장소가 있었다. 어디서 또 그런 것을 느꼈더라. 소용돌이처럼 흘러가던 모래, 흘러가는 강물, 폭포. 에르케. 밀레시안은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단어를 찾아 눈을 깜빡였다. 모래의 소리를 멈춰있었다.
적막 속에 고개를 드는 밀레시안의 몸에서 검은 모래들의 흩어져 내렸다. 어둠속으로 스며드는 모래들은 밀레시안의 발치에 모여 덩어리를 이루고는 사람의 모습을 빚어내어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웅얼거렸다.
‘죄송해요, 저는 더 이상 용기가 없어요’
밀레시안의 한숨이 서리의 결정으로 얼어붙었다. 아마도 태양이 저물어가는 시간. 옷사이로 바스락거리는 비늘소리가 나는 듯 했다. 본의는 아니였지만 마녀의 저주는 밀레시안의 영혼이 보석의 저주에 흩어지는 것을 강제로나마 막아내는데 일조를 한 모양이였다. 밀레시안의 몸은 거의 다 비늘로 뒤덮였고 목에는 따끔거리는 긴 상처가 나있었다. 꼴은 우스웠지만 결과적으로 검은 짐승의 뱃속에 들어오게 된 밀레시안은 휘파람을 불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운이 좋았다. 그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할 엉망인 결과를 돌아보며 밀레시안은 모래위에 주저앉았다.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던 티르코네일과 다를 바 없이 새카맣고 경계가 없는 모습위로 어스름한 그림자인형이 하나 솟아올라와 있었다.
밀레시안이 다른 곳에 한눈을 팔고 있는 동안 검은 여성은 용서를 구하는 말을 읊조렸고 곧 울음을 터트렸다. 밀레시안은 검은 그림자로 위로 떠오르는 스크립트를 읽으며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저주의 검은 모래가 퍼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밀레시안은 이 검은 짐승이 품은 원혼이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실감했다. 저주는 능수능란하게 마음속을 파고들었고 타인의 목숨으로 몸을 불리는 것에 익숙했다. 주인이 세 명, 그리고 그들의 목숨을 기반으로 스스로 영혼을 틔운 보석. 밀레시안은 이교도들이 좋은 쟤료를 찾아낸 탓이라고 투덜거리며 검은 그림자가 신발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림자는 보석의 기억이였고 저주의 근원이였다. 아마도 이건 기억의 던전같은 것이겠지. 밀레시안은 오랜 여행동안 쌓아온 경험을 떠올리며 무릎을 두드렸다. 그림자는 느리게 가디건을 얻어 개어놓으며 흐느꼈다. 초조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만 밀레시안은 좀처럼 눈앞의 모노드라마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내 결정을 알아챘을까?
밀레시안은 지금쯤 반신화 상태로 돌입했을 육체를 생각하며 습관적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희미하게 빛을 품어낸 거울에서 서리조각이 얼어붙었다 떨어졌다.
톨비쉬는 좋은 기사였고 밀레시안 또한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가 이끄는 엘베드는 망설임으로 일을 그르칠 어리숙한 조가 아니었으니 아무리 고민하더라도 때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며 밀레시안은 스스로를 설득하며 스크립트창을 두드렸다. 마음속에 들어온 순간부터 도움의 손길을 거부한 자신의 의사를 눈치채지 못할리도 없었다. 맞아, 그는 그런사람이야. 밀레시안은 눈앞에 떠오른 두가지 선택지를 읽어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림자는 계곡으로 보이는 바위 위에서 눈을 가린채 망설이고 있었다.
당신은 어떠할까. 밀레시안은 그림자를 말리는 선택지와 포기하는 선택지 앞에서 다른 고민을 떠올렸다. 이것은 과거의 기억이였고 밀레시안이 개입한다고 해서 결과는 바뀌지 않을 선택지였다. 수많은 일들이 그래왔고 밀레시안 본인의 일도 그러해왔다.
톨비쉬와 밀레시안은 이 일의 끝을 알고 있으면서도 함께 발레스로 찾아왔다.
내 탓이야. 내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싶어서 억지를 부렸어. 거절하려면 거절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몸이 안좋다고 당신의 수완에 맡기겠다고. 그렇게 대답하고서 그 따뜻하고 안락한 방안에 누워 기다리면 되었을텐데. 하지만 밀레시안은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방안에서 풍기는 그 냄새는 분명 그의 것이였지만 그와 마주하고 대화하는 숨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옅은 향기였다. 그가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고 걱정스럽게 매만지는 손길이 좋았다. 네 탓이야. 밀레시안은 무릎을 모아 앉으며 중얼거렸다.
그가 나를 포기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밀레시안은 그런 것은 질문거리도 되지 않는다며 선택지로 손을 뻗었다. 완벽하고 훌륭하신 엘베드의 조장님이 그런 고민을 할 리가. 밀레시안은 어느쪽이 자명한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라며 선택지를 움켜쥐었다.
그림자가 울음을 터트렸다. 나도 저런 표정일까 하고 멍하니 그림자를 올려다보던 밀레시안은 저주의 말을 인정해야 했다. 저런 모습이겠지. 당연하게도.
그에게는 의무가 있었다. 그는 저주가 밀레시안의 몸을 차지하기 전에 소멸시켜야 할 의무. 엘베드의 이름.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는 망설임 없이 오염되어가는 육체를 불태울 것이였다.
하지만 톨비쉬로서는? 밀레시안은 괜스래 기울어지는 기대감을 잡아채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영웅은 어둠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밀레시안이 주먹을 말아쥐자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림자가 허공을 향해 뛰어올랐다.
진작 이렇게 결정할 것을. 밀레시안은 포기라는 선택지가 검은 모래로 변하는 모습을 보며 손을 펴보였다. 힘없이 흩어지는 모래가루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다음 기억을 기다렸지만 모래는 한참동안 그 풍경 그대로 굳어있었다. 누군가가 올때까지 기억의 시간이 지날 때 까지. 이대로는 안돼. 밀레시안은 칼리번이 저주를 억제하는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가슴팍을 뒤적거렸다.
아주 약간의 도움은 받아도 괜찮겠지. 밀레시안은 얼마 없는 힘을 담아 거울 위로 얼어붙은 소리를 입으로 불어 날리고는 가장자리를 쓰다듬었다,
진실을 비추는 겨울마녀의 거울은 바다의 비늘로 뒤덮인 밀레시안의 얼굴을 비추었다. 거울 속에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이유가 단지 그 모습이 흉하기 때문이였을까. 밀레시안은 스스로에게 반문하며 거울을 뒤집어 들었다.
검은 모래를 비추는 거울은 잠시 어둡게 물들었다가 이내 작은 진동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울의 저편에서 작은 어둠이 고개를 내밀었다. 몽글몽글하고 작은 구체는 힘겹게 거울 속에서 몸을 꺼내려 애를 쓰며 작은 머리를 흔들었다.
네 개의 다리, 두개의 커다란 귀. 처음 밀레시안이 마주쳤던 작은 검은 짐승의 모습이 진실을 비추는 거울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간신히 거울을 빠져나와 몸을 털어낸 작은 짐승은 잠시 고개를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다가 눈앞에 있는 밀레시안을 올려다보았다.
밀레시안은 말없이 녹색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네가 그 보석이구나”
거울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비추어 낸다. 본체가 어떠한 감정을 품고 어떠한 표정으로 서있든간에 무정하리만치 매몰찬 얼음의 조각은 작고 초라한 페리도트를 토해낸뒤 다시 가라앉았다. 탁한 빛의 하급 보석은 악의도, 갈망도 품어내지 않은 본래의 녹음을 들어 밀레시안과 마주했다.
“내가 그 저주에요”
밀레시안은 옅은 한숨을 쉬며 거울을 뒤집었다. 서리 바람이 뺨을 조금 간질였고 머리가 조금 멍하게 비워졌다. 반신화로 회복되었던 작은 힘마저 다 쏟아낸 영혼은 어딘가가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여서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어서, 이야기의 끝에 있을 보상을 받기위해 밀레시안은 손짓으로 페리도트를 재촉했다.
밀레시안의 예상이 맞다면 이 이야기의 끝에서 받아낼 보상품은 저주의 근원. 원한의 집약체, 세 주인의 영혼을 묶은 원래의 보석임이 분명했다.
밀레시안이 거울을 갈무리해 넣는동안 작은 짐승은 잠시 머리를 털어 생각을 정리하고는 그림자 인형이 있던 장소로 뛰어갔다. 이야기의 시작은 여기가 아닌 좀 더 이전의 시점.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어둠속으로 사라진 소품들 사이에서 보석은 잠시 자리를 고르며 뒤돌아 앉았다.
페리도트가 밀레시안을 응시했다.
"나는 32년 전에 태어났습니다.”
모래의 장벽 먼 곳에서 천둥소리가 몰려왔다.
8.
보석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 개의 각기 다른 크기의 그림자가 어둠속에서 솟아났다. 하나는 보석세공사였고 또 하나는 그의 아내였다. 처음 나타난 그림자와 별로 다를 바 없는 모습의 세 번째 그림자는 조금 작아진 모습으로 앞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셋은 가족이었고 보석의 주인들이였다. 보석은 그들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무대 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긴 이야기였고 복잡한 이야기였으며 하찮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좀 더 이전의 역사를 따지자면 가이레흐의 유적지에서 용이 떨어져 내리던 순간에 만들어져 광부의 손에 캐내어졌지만 그때의 떠돌던 세월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기억은 32년 전, 타라의 작은 구멍가게 같은 세공사가 나에게 처음 구매한 순간이였습니다. 그는 언젠가 아내에게 선물할꺼라며 들떠 있었고 나는 어리숙한 세공사의 손끝아래서 나는 하찮은 크기가 될 때 정도로 부서져 내려가며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나의 첫 탄생의 순간 이였습니다."
보석은 미소 지으며 세공사의 기억을 돌아보았다. 행복했던 순간,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을 위해 쪼개어지던 기억. 밀레시안은 그런 페리도트의 미소를 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밀레시안의 가슴위로 푸른 신성력이 불타올랐다. 밀레시안은 낮은 신음소리를 삼키며 기사의 이름을 읊조렸다. 불꽃은 금방 사라졌고 밀레시안은 다시 힘겹게 정면을 응시했다 보석은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가 태어난 후 21년 뒤, 나는 주인의 말대로 새로운 주인의 목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16년 동안같이 살았고 나는 7년 전에 새 주인에게 발견되었지만 서로 침묵을 지킨채 눈을 돌리고 함께 비밀을 공유했습니다. 새 주인은 나를 매우 좋아했고 나 또한 주인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빛을 끌어안았습니다. 내 주인들은 나를 약속이라 불렀고 나는 새로 나를 걸게 될 어린 주인을 마주보며 웃었습니다. 4년전 까지는 말이죠.”
녹색의 보석은 눈을 깜빡인 채 꼬리를 흔들었다. 세 명의 인형중 작은 여성만을 남긴 채 모래들은 쓰러졌고 강물이 되어 흘러가기 시작했다. 혼자남겨진 여성이 얼굴을 묻은채 마른울음을 터트렸다.
“X월xx일, 여주인이 나를 선물했습니다. 여주인은 나를 걸어주며 속삭였습니다. 그 길에 최선을 다하기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길을 잃지 않기를, 지혜롭게 성실하게 태양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뽐내며 네가 원하는 바를 모두 이르기를. 나는 금이었고 보석이였고 수호와 안녕을 기원하는 태양이였습니다. 내 녹음은 모두 그녀의 길을 비추기 위한것. 손에 꼽던 극단에 들어간다는 희망속에서 그녀는 기뻐하며 나를 어루만졌습니다. 행복했습니다.
나는 어린 주인과 함께 볼 새로운 세상에 설레고 있었고 내 어린주인에게는 잘차려입은 신사가 다가왔습니다. 나는 작았고 그의 어둠은 깊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아름답다고 말했고 재능이 있다고 속삭였습니다.
그건 여름날 이였고 태양이 뜨거웠던 기억은 남아있지만 그녀가 그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그 뒤로 내 어린 주인은 그를 만날 때마다 나를 호주머니에 넣어가곤 했으니까요.
그가 어떤 말로 그녀를 속이고 꾀이고 기만했는지 나는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녀의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것은 어느 겨울날. 그 망할 자식은 내 작은 아이의 뺨을 때리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발을 구르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재능을 사랑한다 말하던 입은 매도하는 말을 내뱉었고 그의 발걸음은 순백의 마음을 짓밟으며 배신이라는 얼룩을 남기었습니다. 내 어린주인은 순정은 버림받았고 그 사랑은 재물을 탐한다는 오욕을 받으며 진흙탕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그녀와의 시간에 이름붙이기를 거부했고, 거짓된 관계는 그녀에게 가짜라는 낙인을 찍어버렸습니다.”
“가짜?”
“네, 가짜요”
그림자는 또다시 허공으로 뛰어올랐고 모래소리와 함께 스러졌다. 녹색 눈의 짐승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흔들며 눈을 깜빡였다. 보석의 눈앞에 잠시 이질적인 황금색의 불꽃이 타올랐다 사라졌다.
“그는 내 보석 같던 어린주인에게 모조품이라고 부르며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두 번째 인영이 계곡을 향해 걸어 나왔고 무릎을 꿇었다. 세공사의 아내였다.
“내 어린주인은 그렇게 코리브계곡에 몸을 던졌습니다. 아주 춥고 매섭던, 이제 막 겨울이 지나간 초봄의 어느 날. 여주인이 떠준 레이스 가디건을 차마 강물에 내버리지 못해 곱게 접고, 주인이 선물해준 꽃신으로 눌러놓았습니다. 아이는 나를 끌러 가디건위에 올려놓고 울었습니다.
미안해요 어머니, 더 이상 살아갈 용기가 없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소리 없이 바위위로 올라서 양손으로 눈을 가렸습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까요?
이제 막 녹아 흐르는 계곡의 나뭇가지엔 꽃봉오리조차 맺히지 못했는데. 내 어린 주인은 성급하게 앞을 향해 발을 대딛었습니다. 매정한 강물은 그 작은 몸을 한입에 삼켜버렸습니다. 흘러갔습니다.
내 주인은 멀리멀리 돌아 사라졌고 남은 옷가지는 이멘마하에 도착해서야 물속에서 떠올랐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험하고 먼 길이였는지는 나중에 내 내가 녹음을 잃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연고 없는 시체가 떠오르고 이멘마하에서 타라까지 연락이 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더 필요한지는 더 이상 헤아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내 여주인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어린 주인이 항상 끼고 있던 가느다란 은팔찌만을 돌려받았고 나는 여주인의 목에 걸린 채 동정하는 근위대장의 표정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어리고 작았던 내 아이. 그 아이의 죽음은 조막간한 신문 칸에도 실리지 못했습니다. 그녀를 버리고 떠난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보기를 원하지 않았으니까요. 내 어린 아이는 그렇게 타라에서 지워졌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꽃을 머리에 꽂고 춤추기를 좋아하고 노래하던 아름다웠던 작은 소녀는 그렇게 여름날이 가시기 도전에 온 에린에서 잊혀졌습니다.
그녀는 어둠속에서 길을 잃은 상태였지만 나는 한 뼘의 길조차 비추지 못했습니다. 내가 작았기 때문 이였을까요? 아니면 내가 두르고 있던 금이 하찮은 금박이였기 때문이였을까요?
주인은 언제나 울었고 여주인은 울지 못해 가슴을 쥐어뜯었습니다. 여주인은 틈만 나면 코리브 계곡 끄트머리에 올랐고 내 주인은 그녀도 그 바위 위에서 뛰어내리진 않을까 걱정을 하며 쫓아왔습니다.
나는 주인의 걱정을 덜어 줄 수는 없었지만 애초에 그의 걱정은 쓸모없는 것이었습니다. 내 여주인은 뛰어내릴 필요도 없이 이미 강물바람으로 양 폐를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까요
그 차가운 기류는 그녀의 가슴속을 얼리고 부순 뒤 모두 찢어놓았습니다. 여주인은 멎지않는 기침에 괴로워했고 곧 붉은 피를 토해내다가.…”
그림자는 폭죽처럼 터져버리며 어둠속으로 스며들었다. 홀로 남은 검은 그림자만이 외로이 무대위에 서있는 가운데 강물과 옷가지, 여러 나무와 바위들이 모두 어둠속으로 스며들며 그림자의 어두움을 더욱 부각시켰다.
“죽었습니다.”
보석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후회? 동정? 확실하지 않은 보석의 감정 표현에 밀레시안은 눈을 깜빡였다.
세공사의 그림자가 머리를 감싸 쥐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앞으로 로브를 입은 검은 사제들이 차례로 다가와 그를 둘러쌌다. 보석은 그의 머리위로 뛰어올라가 꼬리를 높게 세웠다. 사제들이 차례대로 다가와 보석을 쓰다듬었다. 보석은 잠시 눈을 감으며 그들의 손길을 받아들였고 다시 뜨는 녹색의 눈동자위에서 황금색 불꽃이 터져나갔다. 모래 속에서 희미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자살 이였습니다. 나를 서랍장위에 내려놓았을때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를 불렀고 그녀는 듣지 못했습니다.
내가 좀 더 커지길 바랬고 그녀의 시선을 빼앗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녀가 나를 보고 그녀가 혼자가 아니라는것을 떠올리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고 두 손으로는 침대보를 거두어 대들보에 걸쳐 매듭을 만들었습니다. 그녀가 나에게 짧게 인사를 건내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그 아이를 혼자 남겨둘 수 없구나.
나는 그녀에게 가지말아달라고 말했지만 여주인의 발은 이미 침대 위를 휘젓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잠시 괴로워하며 발버둥쳤지만 그 시간은 기침에 고통스러워 하는 것보단 짧았습니다.
뒤늦게 침실로 돌아온 내 주인이 절망하며 나를 집어던졌지만 나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고통을 인내했고 나를 부여잡고 우는 주인을 동정했습니다. 아이를 잃은 슬픔에 마음이 먼저 였을까요? 오랫동안 찬바람을 들이킨 육체가 먼저 였을까요? 어느 쪽이 먼저 그림자에 삼켜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주인과 내가 확신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왔던 내 여주인이 축복받은 죽음을 얻지 못했다는 것.
그 불운의 냄새를 맡고 찾아온 들개들이 주인을 둘러쌌고 달콤한 향을 내뿜는 입으로 주인에게 속삭였습니다.”
“이교도들…”
“그들은 주인에게 딸을 되살려주겠다고 했고 아내를 되돌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평생의 이름을 남길 보석을 세공하게 해주겠다고도 말했고 가족을 파탄낸 그 남자를 잡아다 고통스럽게 죽여주겠다고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내 주인은 그 모든 것을 거절하고 울었습니다. 어떠한 것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울며 말했습니다. 내 어린딸은 이 세상의 손가락질을 피하지 못해 강물로 몸을 던졌고 내 아내는 딸아이를 지키지 못한 나에게서 도망쳐 목을 매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내 이기심으로 되돌릴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주인에게 되물었습니다. 그럼 그 남자는? 그 남자를 죽여달라고 부탁하면 되잖아요? 하지만 내 아버지, 아니 내 주인은 심약하고 심성이 고운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복수같은것은 꿈도 꾸지 않고 있었습니다. 스스로가 왜 이런일을 당하는 것인지 누군가를 원망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내 여주인이 사랑하던 라이미라크님, 지금이야말로 그를 구원해야하지 않나요? 내 아이가 가장 좋아하던 이야기의 까마귀 여신님, 지금이야 말로 내 주인의 복수를 응원해주어야 하지 않나요? 나는 소리치고 또 소리쳤지만 아무도 내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내 주인조차 내 외침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죠. 그럴 수 밖에 없었겠죠. 내 목소리는 원한이였고 분노였습니다. 나의 목소리가 그런 청렴한 사람에게 닿을리 없었겠죠.
그래서였을까요? 나는 곧 사제들의 손에 발견되었고 그들은 나를 들여다보았습니다. 내 안에 담긴 오랜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이 말하기에, 나는 적합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마법을 시험해 볼 기회라고 말하며 나를 내 주인의 발치에 던져졌습니다. 내 주인이 괴로워하는 동안 그들은 내 주변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발치에 무엇이 그려졌고 어떤들이 더 놓여져 있는지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꺼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 그렇습니다. 내 주인은 그들에게 목이 매달려 내 머리위에서 죽었습니다.”
보석은 세명의 사제들을 부수고 무너진 세공사의 모래더미에서 내려왔다. 보석은 낡은 두 눈을 들어 밀레시안을 응시했다. 낡고 흠집이 났으며 색을 잃어가는 불투명한 녹색.
그러나 보석이 눈을 깜빡일수록 녹음은 점점 옅어져가며 기묘한 붉은색으로 번져나갔다.
녹음에 섞인 핏빛은 형편없는 갈색으로 아름다웠던 눈을 물들였고 황금색 불꽃이 번져나고 나서야 보석은 다시 녹색의 눈동자를 뜰 수 있게 되었다.
보석은 저주가 되었고 근처에 있는 모래들을 흡수해 큰 짐승이 되었다. 검은 늑대는 밀레시안의 앞에 얌전히 앉아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의 힘은 원망이었고 절망이었고 통곡의 눈물 이였습니다.
나는 폭발할 것같이 요동쳤고 내 몸을 구성하기 위해 뿌려진 짐승들의 뼛가루는 너나할 것없이 고통에 아우성쳤죠. 그러나 나는 보석이길 고집했습니다. 그들에게 내 영혼, 아니 나의 이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마 본능적으로 이 모습이 주인을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지켜야할 주인조차 내 손으로 어둠 안에 밀어넣었다는 사실에 오열하며 잃어버린 조각들을 끌어안으며 몸을 웅크렸습니다.
내 가족, 내 아이, 내 주인. 나는 저물지 않은 황혼아래 빛을 잃고 스러져가는 석영 이였습니다. 돌멩이였습니다. 밤을 물리쳐야 하는 대신 어둠에 삼켜진 나는 녹음을 잃고 뼛가루를 끌어 모았습니다. 나는 크게 자라났고 그렇게 탐욕을 배웠습니다.
나는 내 주인의 시체아래서 몇 날을 버티었고 몇 밤을 지새웠습니다. 어느 눈 먼 도둑이 내 주인의 공방에 남는 금쪼가리라도 없을까 숨어 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조용히 짐승들의 뼛가루를 잘라붙여 광을 내며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를 찾았고 웃음지었습니다. 나 또한 그를 향해 웃어보였습니다. 그의 탐욕이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습니다.
나는 주인을 고르고 또 바꿔가며 어느 경매장으로 나를 유도했습니다. 화려한 숫자들에 치장되기까지 몇 명인가 나를 훔치기 위해 죽었고 그 보복을 위해 또 죽어나갔습니다. 나는 그들의 목숨을 조금씩 빼앗았고 내 녹색은 좀 더 선명해지고 짙어졌습니다.
내가 어둠으로 빠져들수록 나의 광채는 선명해졌고 사람들은 나를 보며 탐욕을 미소 지었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어쩌면 그 사람이 있을것이라 생각하며 그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담배연기와 향수냄새로 쪄든 어느 지하의 불법 경매장에서 나는 그 겨울의 고함소리와 닮은 박수소리를 들었습니다. 잊을수가 없지요. 내 아이의 뺨을 때릴 때 나던 짤랑이는 박수소리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그 남자가 그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밀레시안이 귀족의 성씨를 이야기하자 보석은 뭐 그랬던 이름이였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보석은 세세한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듯 커다란 귀를 흔들었다. 밀레시안은 그 모습이 어쩐지 낯이 익다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밀레시안이 곧 잘하는 행동이였다.
밀레시안이 불편해 하는동안 밀레시안의 가슴에는 다시 한번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는 자신의 특기를 잘 알고 있었고 밀레시안에게는 그가 필요한 능력이 잠들어 있었다. 아주 약간의 환희가 섬광처럼 스쳐지나가고 실망감이 밀레시안의 미소를 가렸다. 그의 이름 대신 엘베드의 이름을 불렀다.
틀렸어요. 내가 원하는게 뭔지 알고 있잖아. 밀레시안은 붉게 물든 옷을 내려다 보며 다시한번 그의 손을 밀어냈다. 불꽃은 끈질기게 별의 가슴위에서 타올랐고 서리로 얼어붙은 거울은 조금씩 녹아내려가고 있었다. 데일 것같은 열정에 밀레시안이 괴로운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불꽃를 밀어내는 동안 저주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뒤로 돌아선 짐승의 모습은 좀 더 커졌고 둥그스름해졌다. 저주는 귀족가의 말씨를 흉내내며 새로촘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녹색의 보석이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나는 그 남자를 죽이려 했지만 내 발톱은 그에게 닿기는 커녕 실체화 할 힘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었어. 그는 나를 아내에게 선물했고 답례의 말을 듣기도 전에 방을 나가버렸지.
아내는 허망한 얼굴로 나를 들여다보았고 나는 그를 쫒아가기 위해 안달이 난 상태였어. 그를 쫓아가, 그의 목을 움켜쥐란말이야. 나는 그렇게 그녀에게 나를 걸라고 유혹했어.
하지만 그녀는 나를 보기만 하고 있었고 나는 나약함에 치를 떨어야 했지.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나는 이제 소중한 것을 모두 잃었는데 나는 내 의지로 그 방을 걸어나갈 힘조차 갖추지 못했어. 지금 저 무방비한 뒷모습에 날카로운 무언가를 꽂아넣을 수 있다면 나는 내 몸이라도 쪼게어 날을 세울텐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목소리에 반응 할만큼 타락하고 욕심에 눈이 멀어버린 자들을 부추기는 것일 뿐. 그녀는 한동안 나를 바라보기만 했고 눈물을 터트렸어.
눈물을 맑았고 뜨거웠지. 나는 그녀의 눈물이 나를 녹이는건 아닐까 걱정했고 동시에 그녀가 그의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
그녀는 내 아이와 다른 장소에 있었을 뿐. 그에게 있어선 자기 아내 또한 가짜에 불과했던거야.
감이언설로 속여 얻은 잠깐의 트로피. 그녀는 순종적이였고 가문의 이름에 얽매여 도망갈 수 조차 없었지. 그런 그가 그녀에게 녹색의 보석을 준 의미는 간단했어.
시간이 되었으니까, 16년 결혼을 축하하는 보석.
그녀는 행복대신 나를 목에 걸었고 한동안 그런 모습을 보여줘야 할 의무가 있었어.
나는 탐욕이 아닌 빛을 내는 것에 서툴렀고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지.
하지만 그런 사람의 곁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왔기 때문이였을까? 그녀는 때때로 밤중에 일어나 저택을 돌아다녔어. 부유하는 유령처럼, 하녀들은 돌아다니는 그녀를 못본 척 지나가고 수군거렸지. 어느 날은 정원까지 나가기도 하고 어느 날은 방문을 찾지못해 벽을 보고 서 있었어. 그녀는 때때로 강박적인 모습으로 나를 찾았고 나를 목에 걸고 잠들기도 했지. 나는 내가 뿌리를 내린다면 그녀의 영혼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어. 그녀의 방어막은 아주 약했고 영혼은 곧 깨지기 직전이였으니까.
내가 그녀에게 뿌리내리기로 결정했던 날. 그녀는 평소처럼 잠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어. 나는 내가 사용할 몸이 다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에 잠시 그녀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지.
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았고 화장품을 꺼내어 바르기 시작했어. 습관처럼 굳어진 행동은 그녀의 남편에 취향에 맞춘 고전풍의 화장법이었지. 나는 그런 그녀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속삭이며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내어 보석에서 벗어나 그녀에게 스며들려고 했지. 그녀는 숨이 막혔는지 잠시 행동을 멈추었고 나는 그 틈에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갔어.”
저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때의 충격이란, 저주는 그렇게 읊조리며 눈을 깜빡였다. 꼬리를 흔들었다.
저주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것을 생각해 내야하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몸을 핥았다.
“나는 그녀의 눈을 빌려서야 내 모습을 직접 보았어. 검고 부숭부숭하고, 손도 발도 없지만 몸뚱아리만 있는것도 아닌 존재. 짐승도 먼지도 아니면서 눈의 위치에는 보석이 자리매김하고 있었지. 그때문에 눈이 커다랗게 보여서 엄청 추했어. 더러웠어.
진실속의 나는 이렇게 보였구나. 나는 녹색이 남지않은 내 모습을 살펴보았어. 나는 웃었고 또 울었어. 거울속의 나의 숙주는 아무런 표정도 지어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검은 짐승은 나를 따라 움직였어. 나는 깨달아야 했지. 아 이게 ‘나’구나 하고 말이야.
나는 그렇게 나를 자각했고 거울속의 짐승도 같이 눈을 떴어.
우리는 울었고 그녀는 웃었어. 나의 어둠, 나의 갈망. 나는 그녀의 눈을 빌려 눈물이라는 것을 흘려보았어.“
저주는 킬킬 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광기였고 순수한 악의였다. 조롱하는 웃음을 짓는 짐승은 서글프다는 말을 읊조리며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밀레시안은 금빛으로 빛나는 안광을 마주보았다.
“나는 아직도 내 주인이 나를 만들었을때의 미소를 기억해. 무언가에 집중하는 장인의 눈빛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연삭기도 그의 손길을 막을 수 없고 달아오른 쇳물도 그 열정에 비할 바가 못 돼. 그 정련을 거쳐 세상에 새로운 빛을 흩뿌리는 원석이 나왔을 때, 내 아버지의 미소가 해맑은 어린아이와도 같아 보였지. 그의 미소를 순수하다 말한다면 내 얼굴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나는 나를 마주보는 순간 나의 모습이 부끄러워졌어. 보고싶지 않았어. 여러 손을 거치는 동안 나는 그들의 욕망에 따라 장신을 꺾고 보석을 덧붙였지만 나는 여전히 먼지를 뒤집어쓴 작은 보석이였어. 나는 거울을 닫기 위해 그녀의 영혼을 부수지 않기로 결정했어.
숙주는 아무 말없이 거울을 덮었고 나는 보석으로 돌아갔지. 그녀는 한동안 그대로 화장대 앞에 앉아있었어. 그녀가 어머 내가 왜 거울을 닫았지? 라고 말하며 거울을 다시 연 숙주는 기절했지. 눈물로 화장이 번진 그녀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기절할 만했으니까.
나는 숙주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잠속에 돌아다니는 숙주의 몸에 들어가 통제하는 법을 연습헀어. 그녀는 더 이상 정원으로 나가지 않았고 복도를 배회하지도 않았지. 그녀는 나를 쓰다듬으며 다행이라고 이야기했어.
조금이라도 몽유병이 나아졌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내 덕이라고 여기고 있었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말이였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었던 것 뿐이였거든.
어느 날이 좋은 날. 나는 태양이 떠있는 시간인데도 그녀의 몸에 들어갔어. 그녀는 잠시 외출하기로 되어있었고 그 곳은 내가 잘 알고 있는 거리였어.
내 작은 아이가 뛰어놀던 공연장이 있는 거리. 나는 햇살아래 들어난 나의 모습을 누가 보지 못하게 옷속으로 숨긴채 골목으로 들어갔어. 허름하고 좁은 골목 사이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는 공방거리가 있었고 그 끄트머리에는 그나마 단독으로 떨어져있는 2층짜리 무너져가는 작은 집이 세워져 있었어. 이름없는 세공사의 최후.
그들은 나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르면서도 그가 어떻게 살고있는지 눈여겨 보지 않고 있었지. 그 손이 무엇을 쥐고 있는지 그 발이 땅에 닿아있기는 한지, 그들은 망가진 공방의 덧문을 보고 그저 그가 어디론가 떠났을 것이라 생각만 할 뿐.
나는 공방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숙주는 세간의 눈이라는 것을 의식했고 정신을 되찾았어. 나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려야했어. 불쌍하고 나약한 내 주인, 나의 아버지.
나는 되돌아가는 숙주의 목을 끌어안고 한참동안 공방을 바라보았어.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 하는 일. 나는 최소한 그들을 안식으로 잠들게 하고 싶었어.
내가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 숙주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어. 숙주는 남편이 화를 낼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었어. 이렇게 멋대로 외출로 돌아다니는 소문이 난다면 그들의 사이는 더 안 좋아질 것이라고 두려워 하고 있었지.
숙주는 마부를 재촉했고 마부는 성가시다는 듯이 대답했어. 그는 이 이상 빨리 달리면 벌금을 문다고 했고 숙주의 요청을 무시했지.
하지만 잠시후, 그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곁거울을 통해 애가 타는 숙주의 얼굴을 확인했어. 그리고 그가 속삭였지. 오늘은 팁을 조금 더 주시면 안되냐고 말이야.
순진한 내 숙주는 이유를 물었고 마부는 실실 웃으며 대답헀어.
요즘들어 자꾸 선물을 사야할 일이 생겨서 피곤하다고 말이야.
그의 마차에는 안전을 기원하는 매듭이 장식되어 있었고 숙주는 그것을 보고 그에게 아내가 있다고 생각했지. 아내의 생일이냐고 묻는 그녀에게 마부는 인상을 찌푸려 보였지.
그녀가 잘못 추측한 것은 아니였지만 그는 아내의 이름을 불쾌하게 여기는 것 같았어. 얼굴도 모를 그녀를 폄하하고 깎아내렸어. 그의 아내는 그렇게 예쁘지는 않고 고지식할 정도로 성실한 사람이라고. 음식을 잘 만들고 누구에게나 상냥하지만 그냥 순해빠진 멍청이였다고.
한참을 폭언을 토해내던 그는 아내를 위한 선물이 아니라고 대답했어. 그는 거리를 지나가는 어린 소녀들을 가르켰고 그녀들은 얼굴이 보이지도 않을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마차에서 모두 동일해 보였어. 그는 그 아이들을 어리고 예쁠 것이라고 불렀어. 마치 요정을 지칭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아이들은 작고 반짝이는 것을 좋아한다며 킬킬거렸지.
숙주는 입을 다물었고 고개를 숙인 채 장갑을 맞잡았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울것같은 눈을 감출수 없었거든. 숙주의 생각과 같이 그의 미소는 숙주의 남편과 닮아있었어.
숙주는 몰랐겠지만, 그도 내 어린주인에게 같은 말을 속삭인적이 있었지. 너희들은 작고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지? 라고 말이야. 내 어린주인은 그렇지 않다 라고 대답했지만 그는 나를 트집잡아오며 자신이 선물한 목걸이를 하고 오기를 종용했어.
망설이던 내 아이의 입술처럼 숙주의 입술이 떨려왔지. 나는 조용히 숙주의 몸을 일으켰어.
그리고 마부의 귓가에 속삭였지.
너에게 속은 네 아내가 가여워. 너의 아내가 나쁜게 아니야 멍청아. 그녀를 기만하고 휘두르려는 네가 나빠.
마부가 갑자기 달라진 숙주의 말투에 놀라 거울을 확인했지만 그곳엔 이미 숙주의 모습이 비치지 않고 있었어. 나의 두 눈이 타오를 듯 뜨거워졌고 나는 발톱을 뽑아 이를 들어냈어.
내 분노는 길고 날카롭게 갈렸고 마차를 뚫을만큼 튼튼하게 뻗어나왔지. 마부는 떨어졌고 마차는 곧 벽에 부딪쳤어. 내 숙주는 그 사고에 휘말려 정신을 잃었고 일어나서 활동하게 되기까지 꼬박 3개월이 걸렸어”
저주는 앞발을 들어 발톱을 내었다가 다시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짐승의 작고 날카로운 날붙이가 아닌 검사들이 쓸법한 기다란 칼날이 발가락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저주는 나른하게 미소지었고 밀레시안은 보석의 모습 그대로 괴물이 되어버린 망령의 모습에 눈쌀을 찌푸렸다. 저주는 웃고있었다. 짐승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X월 xx일, 숙주는 나를 꺼림칙하게 여기며 한동안 나를 가까이 하지 않았어. 그녀는 언뜻 거울에 마부의 곁 거울에 비친 나를 기억하고 있었고 구멍이 뚫린 레이스장갑을 보며 소름끼쳐 했어. 그녀는 나를 장식대에 걸어두었지.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잠시 방황하는 동안 나는 얌전히 그 장식대에 걸터앉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어.
마부가 죽은것에 대해 아무도 나를, 아니 숙주를 의심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에 안심했지만 나는 그런걸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었어.
나는 그때 처음 내손으로 직접 따온 목숨의 맛에 취해있었고 그 달콤함을 갈망하고 있었지.
나는 처음 맛본 생명의 맛은 나에게 포만감이라는 것을 알려주었고 나는 좀 더 능숙하게 숙주를 통제할만한 힘이 생겼다는 것을 자각했어. 조금만 더, 라는 갈증이 내 목을 태웠고 나는 조용히 다음 타겟을 물색했지.
누가 다음 희생양이 될까, 아무래도 좋았던 나는 일단 방을 청소하러오는 하녀들을 살펴보았어. 다른 곳으로 이동 할 수 없었으니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들밖에 없었지.
그들은 어렸고 끊임없이 조잘거렸어. 언젠가 좀 더 나이많은 하녀가 그들에게 주의를 준 적도 있었지만 숙주가 자리를 비운 방안에서 그들은 아침에 일어난 새들보다 시끄럽게 지즐거렸고 나는 그들의 수다를 모두 귀 기울여 들었어.
일에 대한 푸념, 새로 열린 가게에 대한 호기심, 지워지지 않는 땟자국과 들어가고 싶지 않은 냄새나는 창고에 관한 이야기. 수없이 흘러가는 수다의 바다 속에서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희미한 질투의 향기를 맡았어.
그들은 어느 하녀의 이름을 언급하며 녹색의 불꽃을 피워올렸지. 아름답던 얼굴들이 새카만 어둠속으로 잠겨들었지만 그들중 어느 누구도 거울을 돌아보지 않았어.
그들은 새빨간 혀를 넘실대며 속삭였어. 약속된 정인과 신분상승을 꿈꾸는 어느 예쁜 하녀의 이야기. 반지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언약은 하늘에서 진흙탕으로. 나는 그들과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고 한층 강렬한 녹색으로 빛을 뿜었지.
이브닝 에메랄드, 한때 어느 시인이 우리들에게 불러준 작고 사랑스러운 별명. 나와는 더이상 어울리지 않았지만 하녀들의 불꽃을 집어삼킨 나는 그때의 모습과 비슷하게 빛을 내뿜었어.
나는 그 모습이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지만, 숙주가 나를 다시 목에 걸쳤으니 일단 시인의 눈이 틀리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했어.
나는 숙주를 움직여 하녀의 숙소로 다가갔어. 그녀는 여전히 반지를 반대로 끼고 있었고 다른 향수가 베인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지.
왜 그랬을까, 지금도 이유를 모르지만 나는 순간의 충동으로 그녀에게 제자리로 돌아갈 생각이 없냐고 물었어. 그녀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때었고 우물물을 길어올리며 소문일 뿐이라고 대답했지.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남아있는 고급 향수의 향기와 손가락에 걸려있는 싸구려 은반지의 차이를 언급했어.
그녀는 얼굴을 붉혔고 손수건을 감추려는듯 물통을 놓아버렸지. 엎질러진 물이 숙주의 신발을 엉망으로 만들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아하는 것 같았어. 그녀는 숙주에게 마님이 왜 이런 하찮은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지 알 수가 없다며 눈가를 찌푸렸지.
곧 하녀의 신분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당당함 이였을까 아니면 하녀 모두가 알고 있는 숙주의 뒷사정 때문 이였을까. 나는 그녀의 표정을 따라 해보면서 발톱을 꺼내들었어.
마음약한 숙주라면 거기서 울음을 터트리고 도망갔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니잖아?
나는 망설임없이 숙주의 손을 휘둘렀고 더러워진 손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생명의 감각은 짜릿함을 즐겼어. 길어둔 큰 물통에 피묻은 손을 씻어내리는 동안 나는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어. 눈가를 일그러트리고 있지만 입은 웃고있는 이상한 모습. 나는 이제 숙주의 얼굴표정까지 세세하게 조절할 수 있게 되었고 나는 입가를 어루만지며 표정을 다듬었어.
돌아가기전에 나는 하녀의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빼내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었지. 그 손수건은 기념품이기도 했고 내 숙주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했지.
숙주는 자신의 화장대에 들어있는 손수건을 보고 놀라 비명을 질렀어. 나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속삭였지. 안녕, 내 허약하고 어리석은 숙주아가씨. 그녀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 방안에서 우두커니 멈춰서서 거울을 보고 있어야 했어.
나는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나의 색으로 물들인 채 목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지. 내 뜻대로 움직여달라고, 내 마음대로 행동해달라고. 그리고 그녀에게 약속했어. 이전 사제들이 내 아버지에게 했듯이.
그러면 내가 너의 남편을 죽여주겠노라고.”
천둥소리가 들려왔고 달궈진 모래의 냄새가 피어올랐다. 어두운 모래안으로 황금색의 불꽃이 고요하게 타오르는 모습을 보며 밀레시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비늘이 떨리며 잔소리를 내었다.
9.
요란한 번개가 어둠을 갈라놓으며 잠시 저주와 밀레시안의 모습을 비추었다.
저주는 음흉하게 미소지었고 밀레시안은 모래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낯선 전격에 낮은 신음소리를 삼켰다.
자신의 신성력을 타인의 몸속에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디에서도 느껴볼 수 없을 것이라며 이를 악무는 밀레시안의 앞으로 어딘지 분위기가 달라진 저주가 고개를 숙였다. 저주는 낯뜨거운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울로 만들어낸 허상 안으로 진짜 검은 짐승의 영혼이 들어왔다. 흔들리는 머리를 따라 금빛 잔상이 일렁거렸다.
“여기에 있었구나, 한참을 기다려도 완전히 흡수가 되질않아서 왜인가 하고 있었는데, 이런곳에 숨어서 한가하게 옛날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니.”
“스파크가 좀 짜릿하긴 했나봐? 모습이 엉망이네?”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위해 한참을 헤매인건지 저주는 조금 흐트러진 모습이였다. 명상을 하는 방법도, 자아를 가라앉히는 방법도 알지못해 일부러 밀레시안의 스파크를 몸으로 맞은 저주는 자신의 안에서 이질적으로 반응하는 신성력을 발견하곤 망설임 없이 제 몸안으로 손을 찔러넣었다.
어차피 한번 더 부서져도 모래에 불과한 것. 저주는 날아드는 칼날아래 너덜해진 몸을 부숴트리며 의식을 자신의 내부로 흘려보냈다.
밀레시안를 찾아낸 저주는 몸이 흐트러지려는 것을 억지로 추스려 모양을 다듬으며 애써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스파크… 그 파르홀론족의 잃어버린 마법이지? 네 기억에서 봤어. 그건.. 그래, 네 말대로 조금 치명적 이였어. 하지만 그것도 이 번 뿐이야.”
너를 찾아냈으니까, 저주는 검에 베인 상처로 너졀거리는 허리를 잡고 일어나며 손을 뻗었다. 금방이라도 쳐내고 싶었지만 사실 밀레시안은 너덜거리는 저주보다도 못한 모습 이였다. 비늘사이에 남아있는 전격에 몸서리 치고 있었고 저주의 의지에 반응하는 모래가 엉겨오는 탓에 무거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최악으로 흘러가는 상황에서 밀레시안은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꽃까지 밀어내야 했다. 그런 어조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말아요.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잖아.
“방해하지 말아요”
“뭐가?”
“별거 아니야. 네가 바라는 것처럼 순순히 몸을 내어주지 않을꺼라는 내용.”
저주는 눈쌀을 찌푸리며 모래를 들어올렸다. 굵은 뱀의 몸뚱이처럼 모래들은 밀레시안의 몸을 꽉 죄여오며 남은 기력을 쥐어짰다. 비늘사이에 남아있던 전격들이 모래를 타고 흘러가 저주의 몸으로 흘러들어갔다. 아주 잠깐뿐인 경직였다.
“헛수고야. 나는 곧 밖으로 나갈꺼고 넌 지금 내 뱃속에 있잖아.”
이건 시간문제야. 저주는 초조하게 덧붙였다.
“그래, 시간문제야. 아주아주 긴 시간문제.”
고통을 인내하는 밀레시안의 입가에선 서리가 머물렀다 사라지기를 반목하고 있었다. 무례한 그리브소리가 밀레시안의 머릿속에서 울려퍼졌다. 밀레시안은 그를 밀어내기위해 거울을 움켜쥐었다.
모래를 짚은 손을 따라 밀레시안의 신성력을 매개로한 거울마녀의 서릿 조각이 모래를 얼려나가며 불투명한 거울을 만들어내었다. 검게 물들어버린 거울들은 사방으로 뻗어나가 불분명했던 경계선을 타고 올라가 천정을 매꾸었다. 저주와 밀레시안은 거울로 만들어진 방에 갇혔고 저주는 그런 밀레시안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매끈한 서리거울 바깥쪽으로 날카로운 얼음가시가 뻗어나갔다.
“나는 너를 가둘 생각이거든. 너에 대해서 듣고 이해하고 너를 내 안에 가둔 채로 네가 부서져나갈 때까지 죽음으로서 너를 붙들어 둘꺼야. 나는 불멸이고 영원한 삶을 살지. 설령 네가 타인의 목숨으로 부터 힘을 얻는다 하더라도 나에겐 상관없어. 나는 무한에 가까운 목숨을 갖고 있고 네가 터져나갈 때까지 이 일을 반복할 수 있어. ”
영원한 삶을 반복하는 존재. 밀레시안은 마치 스스로 빛을 내는것 처럼 몸안에 남은 전력을 흘려내었다. 피뢰침처럼 뻗은 얼음가시를 매개로 다시한번 스파크가 내리꽃혔다. 모래의 속박이 풀어졌다.
검은 거울은 환하게 빛이났고 저주는 온몸이 타오르는 밀레시안을 노려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거울 반대편으로 검사의 그림자가 비쳤다 사라졌다. 밀레시안은 초조하게 그림자를 쫓았고 그에게 나가라고 경고했다. 검사가 검을 들어올렸다. 저주도 움직이는 그림자를 눈치챈듯 빈정거렸다.
“나를 여기 가두어야 한다면 그도 네 안에 갇히게 될 거야. 너는 지금 죽을 수 없어.”
“그는 떠날 꺼야.”
밀레시안은 빠른어투로 받아쳤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모래처럼 떫고 으적거리는 느낌이였지만 밀레시안은 단호하게 마음을 잘라내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는 조금 욕심을 부린 선택지를 붙잡고 있는 것뿐이야.”
욕심, 어느 쪽이 억지를 부리고 있는지 모를 단어에 밀레시안은 어째서인지 말을 흐리며 다시한번 스파크를 내리쳤다. 정신이 번쩍 드는 짜릿함에 밀레시안이 이를 악물었다. 그림자는 전격에 휘말리지 않도록 거울우리로부터 물러서야만 했다.
연달아 몸을 태워오는 신의 불세례에 밀레시안의 몸에 돋아난 비늘은 모두 타올랐다. 힘없이 낱장단위로 떨어져나가는 은청색의 비늘들은 거무스름한 잿가루를 날리며 거울위로 흩어져 내렸다. 언뜻 보기엔 지저분한 모습이였지만 하얗게 드러난 피부 위 올라오는 모래가 잿가루를 가리며 밀레시안의 피부를 꼬집었다. 번쩍이는 스파크는 강박적으로 모래를 밀어내며 더 이상의 침범을 저지하려 애를 썼다.
반신의 힘을 이용하고 있었지만 스스로를 공격하는 막무가내식의 저항이었던 탓에 밀레시안의 체력은 곧 바닥을 드러냈다. 입에서는 단내가 났고 차가운 손발과는 다르게 숨결만큼은 뜨거웠다. 지치고 힘든 상태였지만 그것은 곧 연결되어있는 저주가 빨아들일 힘도 줄어들었다는 뜻이었다.
거울위로 비쳐지는 저주의 모습이 점차 뭉그러지며 짐승의 형태를 띄어가자 저주가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밀레시안은 생명을 꺼트리는 것에 망설임이 없는 눈이었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네.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가장 소홀하게 여긴다니.”
저주는 밀레시안을 조롱하며 모래를 움직였다. 묵직하게 떠오른 모래주먹은 거울을 내리쳤지만 거울은 그대로 모래를 반사해 저주를 후려칠 뿐이였다. 밀레시안은 튕겨내는 것만으로도 벅찬지 격한 숨을 토해내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한번의 기적에 빨려나가는 신성력의 소비량이 생각보다 큰 모양이였다. 거울에선 다시금 푸른 불꽃이 타올랐고 밀레시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바빠죽겠는데 당신까지 성가시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밀레시안은 짜증스럽게 거울을 집어들었다. 바깥에서 불쾌한 기색의 발걸음이 거울을 맴돌고 있었다.
저주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거울을 후려쳤고 밀레시안은 그 공격을 그대로 반사시켰다. 밀레시안을 공격하면 거울은 기적을 잃고 부서지겠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밀레시안이 흡수되기도 전에 소울스트림과 연결될 상황.
저주는 신경질적으로 한 거울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크리티컬이 터진 스파크가 모래주먹에 실려 저주의 금장식을 불태웠다. 저주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밀레시안을 비난했다.
“이건 불공평해! 넌 이미 나를 이유로 그를 거부하고 있어. 나를 핑계로 네 기사의 마음을 거절하고 있잖아. 너는 내 안에 숨어 눈을 돌리고 있는데 왜 나는 네 몸을 사용하면 안돼?”
“그야 내가 나쁜놈이니까”
“뭐?”
“묻어버릴꺼야. 끝까지 대답하지 않으면 돼. 너의 어둠으로 내 망각으로. 그런 감정같은거 알지 않아도 돼.”
그리고 또 하나의 선택지도. 스파크는 거울에 튕겨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그물을 만들어 검은 짐승을 둘러쌌다. 밀레시안과 저주 둘 모두에게 유효한 공격범위 안에서 저주는 크게 소리질렀다. 천둥과 비슷할 정도로 큰 원망은 어째서인지 낮은 남성의 목소리와 비슷하게 들려 밀레시안의 가슴을 후벼팠다. 그는 나에게 화내지 않아. 밀레시안은 또다른 선을 그어 마음을 잘라내며 손을 움켜쥐었다. 반사된 스파크들이 한점에 모여들었다.
“겁쟁이……!!”
팍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급하게 몸밖으로 도망쳐버린 저주의 모래인형이 뜨거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밀레시안은 급하게 손을 때며 얼굴을 가렸지만 뜨겁게 달궈진 모래는 이미 밀레시안의 몸 전체로 쏟아진 뒤의 일이였다. 화상으로 쓰라릴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잘 구워진 스카하의 비늘은 뜨겁게 튀겨진 모래들에게서 밀레시안은 지켜내며 힘없이 바스라졌다.
아무 쓸모도 없더니 이제서야 보호구실을 한다며 한시름 놓은 얼굴로 비늘을 털어내는 동안 자잘한 천둥소리가 울리며 아직 저주가 완전히 사라진게 아니라는 소식을 전해왔다. 밀레시안은 알고있다고 대답하며 바스라진 모래더미를 응시했다. 남아 있던 모랫속에서 작은 기척이 몸을 일으켰다.
황금빛이 튀어오르던 화려한 보석은 사라진채 다시 작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저주의 근본은 다시 가느다란고 힘없는 목소리로 낮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고통에 신음하는 것 같기도 했고 한순간이나마 다시 저주의 모습이 되었던 자신을 비통하게 여기는 것 같아보이기도 했다. 밀레시안은 검은 거울속에 비치는 수많은 짐승들을 돌아보며 심호흡을 했다.
“계속해.”
고개를 치켜든 작은 짐승이 남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10.
“그녀는…… 그녀는 저를 믿지 못했고 저는 그녀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가까운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물리적인 거리가 아닌 그녀의 남편과 가까운 사람이요. 저는 그 남자가 귀족이라는 것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설득해야 했고 그들의 완력이나 지위가 죽음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추천에 따라 그 남자의 사촌동생이라는 남자를 찾아 움직였고 그녀는 꺼림칙해하면서도 나를 따라 움직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마차를 탔고 거울을 가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사촌이라는 남자가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의 뒤를 쫓았고 허름한 벽과 어울리지 않은 고급스러운 문을 발견하고는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안은, 말로써 설명하고 싶지 않은 곳이라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유쾌하지 못한 그곳을 지나 사촌남자의 방으로 들어간 나는 그 안의 전경을 보고 쓰게 웃었습니다. 그 남자도 내 아이에게 이런것을 요구했을까요? 남자는 숙주를 보며 어떻게 이런 곳 까지 왔냐며 놀라워했고 곧 숙주를 보며 입맛을 다셨습니다. 이런걸 원하냐면서 말이죠. 나는 아무말 없이 발톱을 꺼내들었고 그는 기절할 듯이 놀라 도망쳤습니다.
소리를 높여 누군가를 부르려했지만 이곳은 원래 그런 곳이었습니다. 누군가 죽어나갈 때까지 신음소리를 높여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 그런 장소였으니까 벽을 긁고 문고리를 잡아 흔드는 그의 행동은 소용없는 짓이였습니다. 나는 그를 향해 발톱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는 지례 겁을 먹고 놀라 자빠지며 이상한 도구에 뒷목을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내 발톱은 그의 얼굴대신 뱃가죽을 조금 긁었을 뿐이고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발톱을 집어넣었습니다.
조금 스친것 만으로도 그의 생명력은 내안으로 흘러들어왔지만 별로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거울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나를 믿을 수 있냐고 물었고 그녀는 파랗게 질린 입술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나는 그곳의 거울을 깨버린 채 그 숨막히는 공간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짙은 꽃향기가 더럽게 느껴졌습니다.
아주 조금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타라의 일대는 쑥대밭이 되어 수많은 근위병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숙주는 겁을 먹었고 나는 개의치 말라며 그녀를 안심시켜야 했습니다. 그녀는 울었고 다행히도 하녀들은 평소의 그녀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던바튼으로 보내고 싶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거래라고 이야기 했고 나도 그를 죽이기 전에 하고싶은 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탈틴으로 출장을 나간 남편에게 편지를 쓰는동안 나는 그때까지도 발견되지 못한 내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일부러 힘들게 구한 허름한 로브를 뒤집어 쓴 다음에야 나는 내가 태어난 공방에 다가갈 수 있었고 녹아내린 내 아버지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근위대의 근처를 서성이며 일부러 가만히 있던 아이에게 무서운 이야기라며 적당히 부풀린 이야기를 흘려놓고서는 자리를 떴습니다. 방울이 하나 따라붙었지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저택안까지 들어 올 수 없으니까요.
탈틴에서 편지가 돌아올때 즈음 신문에는 내 아버지와 그남자의 사촌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이 동시에 기재되어 세간에 알려졌습니다. 나는 어서 아이가 이 도시를 떠나기를 기다렸고 하녀는 아무런 의심없이 그 남자의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도시는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로 넘쳐났지만 아무도 그의 저택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내 아이가 죽었을때도 이 저택은 이렇게 한산하고 조용했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며 숙주를 기다리고 있을때 그녀가 울면서 침대에 쓰러졌습니다.
그녀는 나를 품에 안은채 울었고 나에게 영혼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녀가 육체를 남기고 도망가버린 탓에 나는 스스로 그녀의 육체를 추스려야 했고 편지를 처음부터 읽어야 했습니다.
편지는 달콤하고 아름다운 싯구절로 채워져 있었지만 그 향수는 평소의 것이 아니였습니다. 좀더 농밀하고 질척한 어필을 하는 향수는 어쩐지 그의 사촌의 취향을 닮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필체, 문체. 편지의 머릿글부터 끝까지 그 모든 것은 숙주가 모르는 또다른 사람의 편지였습니다. 서명란을 제외한다면 완전히 다른 사람의 것이였습니다.
그녀는 한번도 이러한 열정이 담긴 편지를 받아본적 없고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대놓고 무시를 받고 홀대받으며 조롱받고 있었던 반면에 한번도 증거가 될만한 물건을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혹여나 나약한 그녀가 증거를 품고 친정으로 돌아갈 것에 대비해 최소한의 주의는 기울였던 남자였지만 이번에야 말로 타라에서 가장 빛날 프리마 돈나의 원석을 발견해 흥분한 나머지 둘에게 가야할 편지를 반대로 보내게 된 것이였습니다.
나는 그 편지를 들고 숙주가 집으로 돌아간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잠자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나는 녹색이였고 그녀의 눈동자 또한 녹색이였습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을 하나로 모아 어둠속으로 잠겨들었으며 서로에게 웃음짓는 비밀스러운 관계였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이멘마하로 갈 수 있냐고 물었고 나는 긍정했습니다. 나 또한 그가 찾아내었다는 진짜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이웨카가 휘양찬란하게 떴던 그 보름날의 밤. 나는 그녀를 데리고 문게이트의 앞으로 다가가 달에서 떨어진 보석을 향해 말을 걸었습니다. 우리를 이멘마하에 데려다 달라고. 문게이트는 나를 역겹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또한 동시에 동정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별에서 태어났고 그들은 나의 형제였고 자매였습니다. 그들은 더이상은 아니라고 못을 박았지만 그들은 친절하게 나와 숙주를 이멘마하의 서쪽으로 이동시켜주었습니다. 그녀는 처음 사용해 보는 문게이트의 이동에 놀라워하면서도 곧 정신을 차리고 공연장으로 향했습니다.
공연은 이미 끝났고 밤은 깊었지만 나는 극단의 단원들이 곧잘 간다는 술집 근처를 배회하며 작은 소녀를 기다렸습니다.
흥에 겨웠던 술자리는 맑고 청량한 노랫소리로 고조되었고 나는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숙주는 추위에 떨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편지의 향수냄새가 난다고 속삭였습니다. 그녀는 두 눈을 장작삼아 뜨겁게 타올랐고 호수는 고요히 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달이 기울고 나서야 작고 얄팍한 문이 열리며 한 소녀가 고양이 발걸음으로 빠져나왔습니다. 극단주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가수들은 종종 이런 식으로 술자리를 고취시켜 놓고 도망을 나오곤 했습니다.
아주 잠시동안 나를 가졌던 어느 여배우가 그렇게 뒷골목으로 빠져나가다가 나를 도둑맞았었거든요. 나는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라가 인적없는 호숫가에서 그녀를 불렀습니다.
그녀는 깜짤 놀라하다가 알겠다고 말하며 펜을 꺼내더군요. 그녀는 나를 보고 단순한 팬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폭소를 터트렸습니다.
내 작은아이처럼 어리고 재능있는 아이. 그 아이는 언제부터 이러한 재능을 틔웠을까요? 진정으로 아름다웠고 빛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녀는 오만했죠. 그녀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숙주를 조롱헀습니다. 이렇게 행동력이 뛰어날 줄은 몰랐다고 그런 열정으로 남편을 붙잡았어야했다고 웃으며 편지를 꺼내들었습니다.
원래 숙주가 받았어야 할 편지에는 한줌의 향기도 다정한 말한마디도 들어있지 않은 딱딱한 문체였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함께 던바튼으로 떠나라. 어딜봐도 축객령에 가까운 문장이였지만 나는 침착하게 나는 그녀에게 그 편지를 읽었다면 그에게 처와 자식이 있다는 것을 알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웃었고 편지를 찢었습니다.
그런게 무엇이 중요하냐고. 그녀는 젊었고 아름다웠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였습니다. 세상의 모든것은 그녀를 칭송했고 그녀는 앞으로 나아갈 무대의 불빛에 취해 어둠속에 가려진 나의 손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승리자처럼 웃음지었고 나의 숙주에게 다가왔습니다. 그가 사랑을 속삭인 편지에 화가났나요? 거기에 쓰여진 내 이름이 질투났나요? 당신이 못난걸 왜 나한테 와서 화풀이지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걸고있는 가슴을 쿡찌르며 높은 소리로 웃으며.
조롱하는 손톱의 끝까지 그녀는 아름다운 색으로 치장하고 있었지만 나는 별로 그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은색의 작은 큐빅을 박아넣은 녹색의 손톱끝에는 날카로운 장식에 찢긴 숙주의 피가 묻어나 있었습니다. 당신도 보고있다시피 녹색은 붉은색과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섞이면 그것이 어떠한 색이였는지도 알 수 없이 엉망이 되어버리지요.
나는 발톱을 집어넣ᄋᅠᆻ고 그녀를 향해 한걸음 다가가 손을 치켜들었습니다. 그녀는 야만스러운 행동을 하려한다고 불쾌해 했지만 나보다 숙주가 더 빠르게 그 말에 긍정하며 그녀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맞아, 나는 그렇게 행동할꺼야. 숙주는 나의 힘을 이용해 그녀를 집어던졌고 그녀는 호수에 빠져 허우적 거렸습니다. 그녀는 헤엄을 칠줄 몰랐고 다급하게 소리를 높여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밤이 깊었죠, 모두가 잠들었던 시간이였죠.
나는 돌의 가장자리를 잡으려는 그녀의 손을 밟았습니다. 별로, 그녀의 목숨을 먹고싶지 않ᄋᆞᆻ습니다. 나는 구두의 어느 부분이 가장 뾰족한지 살펴보고 있었고 그동안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갔습니다. 보글거리는 거품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그녀가 호수에 가라앉지 않도록 끌어올렸습니다. 문게이트를 향해 걸어가는 내내 내 숙주는 왜 그녀를 끌어올렸냐고 화를 냈습니다. 그냥 물고기에게 뜯어먹히도록 내버려두라고 원망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죽은 것을 확인하며 대답했습니다. 내 아이가 죽어간 호수에 그런 시체를 빠트려놓고 싶지 않았다고. 숙주는 알듯모를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는 블라고평원 어딘가에 대충 그것을 내버린 뒤 저택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를 죽인 직후부터 숙주는 발작적으로 화를 내다 기운없이 늘어지기를 반복했고 나는 내 힘을 조절하기 곤란해 지쳐가던 참이였습니다. 문게이트는 나에게 두번다시 오지 말라고 경고했고 나는 긍정했습니다. 나에게 이제 죽여야 할 사람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가 돌아오기 전에 나는 먹지 않은 영혼을 대신 할 희생자를 필요로 했습니다. 블라고평원까지 시체를 끌고 가는 것은 생각보다 지치는 노동이였습니다.
낮동안 숙주가 저택에서 지친 육신을 돌보는 동안 나는 종종 달이 가려진 밤을 찾아 저택의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는 욕망의 냄새를 맡았고 질투로 눈먼자들을 찾았습니다. 골목마다 놓여진 저급한 농담을 던지는 자들의 대부분은 내 어린아이같이 어리숙한 소녀들을 꾀어내기에 정신이 없었죠. 나는 하나 둘씩 그런 영혼을 삼켰고 내 뒤로는 철 신발을 신은 발자국소리같은 방울소리들이 따라붙었습니다. 나는 어둠속에 숨어들었고 내가 지나온 자리마다 거울이 깨진 조각들이 떨어졌습니다. 나는 크고 강대해졌고 숙주는 날이 갈 수록 지쳐갔습니다.
내가 숙주의 영혼을 대신해 움직일 수 있을 때 즈음, 타라에서 그 남자가 돌아왔습니다. 저택의 주변에는 하녀들도 눈치 만큼 많은 기사들이 이 저택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 중에는 당신의 기사도 섞여있었습니다.
남자는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고 화를 냈고 숙주는 두려워하기보다 나에게 모든 것을 떠맡긴 채 눈을 감았습니다. 나는 드디어 그 순간을 맞이했고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나의 발톱은 충분히 피를 머금었고 그의 목을 꿰뚫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탐했던 탓이었을까요?
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내 발톱은 그가 데리고 들어온 근위대의 검에 의해 막혔지요. 내가 아무리 발톱을 휘두른 다해도 훈련받은 기사들을 피해 그 남자에게 닿을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이를 악물었고 그 남자는 겁을 먹었습니다. 그는 뒷걸음질 치다가 손에 닿은 아무물건을 집어 들어 나를 향해 던졌습니다.
내 집에서 꺼져라 이 마물아. 그는 그렇게 말하며 화장대위에 있던 손거울을 숙주의 머리를 향해 집어던졌습니다. 자신의 아내를 향해서 망설임없이 물건을 던진다니, 그런 추례한 반응은 노련한 기사들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였겠지요.
숙주는 그대로 거울을 맞고 쓰러졌고 뒷걸음질 치던 몸은 허망하리만큼 간단하게 창문을 넘어가 쓰러졌습니다. 숙주는 그대로 부서졌고 나는 그녀의 목에 걸린 보석으로 돌아와 숨을 죽였습니다. 다시 기회가 있을 꺼야. 누군가 나를 집어갈 꺼야.
이번에는 힘이 센 기사에게 스며들자. 보석을 가지고 다녀도 의심받지 않을 만큼 높은 사람의 몸에 스며들자. 그렇게 다시 이 저택으로 돌아와 이번에야 말로 저 남자를 죽이고 말리라. 하지만 나의 바람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저택의 소란으로 황망히 달려온 기사들의 사이에는 당신의 기사와 동료들도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당신의 기사는 그 눈부실 정도로 파란 눈으로 정확하게 내가 숨어있는 보석을 집어냈습니다. 빠르게 손수건으로 감싸 다른기사들의 눈으로부터 나를 숨기는 그 솜씨는 인정해야했습니다.
인적이 드문 담벼락 밑으로 와서야 그는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가 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나는 그를 내 숙주라고 착각했지요. 나를 볼 수 있는 눈은 욕망과 악의, 그리고 광기로 가득 찬 사람뿐 이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달랐습니다. 그는 나를 보고 봉인하라고 말했고 나를 받아든 기사는 어렵지 않게 나를 상자 안에 가두었습니다. 나는 나갈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그대로 작은 나무 상자 안에 갇혀 그의 호주머니 속에 넣어졌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였죠.
그는 내가 무엇인지 보고 있었으면서도 나를 거부했습니다. 나를 거절했습니다. 그도, 그의 기사도 어느 누구하나 내가 파고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탐욕을 가진 채 고결할 수 있는 그가 이상한거지 내가 잘못된게 아니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주머니에서 필사적으로 손에 닿는 누군가를 끌어당기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바다의 냄새가 지나고 해묵은 널빤지의 냄새가 날 때까지 나는 그가 쳐놓은 방패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다시 풀과 돌의 냄새를 맡은 것은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였고 새벽의 바람에는 어느 이름 모를 마법이 담겨있었습니다.
기사는 나를 부순다 말했지만 바다향이 나는 사역마는 그에게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그가 그것을 받아들였는지 어쨌는지는 나는 모릅니다. 그는 나를 방안에 두고 나가버렸으니까요. 그래요, 그건 당신이 오기 바로 직전의 일이였죠.”
보석은 말을 멈추었고 밀레시안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다입니다. 이게 전부에요. 작은 동물은 말없이 밀레시안을 향해 다가와 다소곳이 발을 모아 앉았다.
이야기를 하는동안 페리도트의 기억을 모두 머금은 이 거울조각은 이제 보석의 마음 그 자체였다. 지금 이 작은 생물을 내리치면 그대로 부서지겠지.
데미지의 한계치를 이기지 못하고 저주가 도망갔듯이 이 보석이 부서진다면 이미 한번 데미지를 입은 저주는 제 힘에 못 이겨 폭주하고 말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육체 또한 멀쩡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뭐 어떠한가. 이곳은 발레스의 최남단, 아무것도 없는 실바숲의 한 구석이였다. 힘이 폭주한 검은 짐승이 아무리 날뛰어도 용 한마리 날뛰는 것보다는 덜하겠지.
밀레시안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기사의 그림자를 찾았다. 번쩍이는 번갯불이 거울을 비추었지만 어느곳에도 검고 무거운 그리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검은 짐승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보석을 수령하려는 밀레시안을 올려다보던 페리도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강합니다. 저주는 당신이 생명을 소홀히 한다고 비난했지만 그건 다시말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희생하는것에 주저가 없다는 뜻이겠지요. 당신은 마음을 잘라낼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자신에 대한 통제하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설령 운명이라 하더라도 당신은 자신의 힘으로 그 마음을 꺾고 스스로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이든 사랑이든 간에 말이죠.”
“.....? 지금 누구의 마음을 이야기 하는거야?”
“아니요, 나는 당신에게 묻고싶은 것이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누군가 당신앞에서 죽더라도 지나쳐왔고 한 마을이 날아가도 다시 일어섰으며 도시가 날아가도, 설령 자기 자신이 죽더라도 다시 여행을 계속해왔습니다. 수많은 배신과 의심이 당신을 할퀴어와도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의 위해 또 희생하겠죠.
티끌없이 맑게 개인 하늘 아래 닫혀진 문들과 그 공허한 광장. 놀라운 업적을 지나온 영웅의 마음은 속은 그렇게나 쓸쓸한 풍경이라는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평범한 사람이기를 바라는 나약한 마음은 당신이 가장 따듯하다고 생각하는 마을을 그려내고 있었죠. 이토록 사랑스러운 영혼이 또 있을까요.
마녀의 비늘은 당신을 기만했고 겨울의 거울은 당신을 동정했습니다. 보석은 당신을 겁쟁이라 비난했지만 나는 당신을 강인하다 평가했지요 하지만 밀레시안 이 원망하는 마음은 누구의 것입니까?”
밀레시안은 대답없이 손을 치워 보석을 내려다보았다. 보석은 금이가고 흐려졌으나 황금색의 불꽃은 내보이지 않았다. 벼락이 떨어지고 천둥이 크게 울리었다. 이 보석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걸까. 밀레시안은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마음을 다잡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손을 내밀어도 쳐내기에 급급한 당신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부당하다 여기면서도 사랑스럽다 여기는 이 마음은, 누구의 것입니까?”
보석은 태연한 표정으로 귀를 팔락였다.
거울 속에서 튀어나온 검은 짐승은 서리빛 푸른 결정으로 몸빛을 바꾸며 눈을 감았다. 모래는 서로 엉겨 붙어 커다란 덩어리가 되었고 희미하던 녹음은 붉게 물들었다. 핏빛이 아닌 영혼의 생명력. 약동하는 푸른 불꽃은 밀레시안의 가슴으로 이어져 있었다. 오고가는 생명력을 통해 몸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며 밀레시안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검은 거울에 비치는 주저앉은 밀레시안의 모습만 위로 푸른 신성력의 고리가 떠올랐다.
“어떻게……?”
어떻게 내 마음속인데 탐지에서 벗어 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연결될 수 있었을까. 명확한 자아를 가진 대상끼리 연결되는것은 불가능했고 이 연결은 둘 중 누구의 생명이 꺼져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이 두꺼운 거울넘어로 들어왔다는 것. 거울 어딘가에서 철컥이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돌아간 것이 아니였던건가. 밀레시안은 손바닥처럼 들여다 보여야할 마음속이 검은 그림자로 얼룩진 것을 확인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저주의 말이 옳았다.
그 그림자는 어둠이였고 좋은 핑계였으며 눈을 가릴 거짓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가장 처음 사용한 것은 밀레시안이 아니였다. 밀레시안은 그가 저주의 어둠을 이용해 자신을 속였다는것에 분개해하며 거울을 내리쳤다. 나갔어야지. 나와 함께 자멸할 생각이 아니라면 내 안에서 떠났어야지. 밀레시안은 차오르는 마나와 생명력따위를 느끼며 거울을 후려쳤다.
천정을 통해 비쳐오는 빛이 밀레시안의 뺨을 쓰다듬었다. 부활을 준비하던 소울스트림은 생각보다 멀쩡한 밀레시안을 보며 조금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부활하면 어떻게 되는거지? 그의 영혼은? 육신은? 소울스트림에 휘말린 다난이 어떻게 되더라?
밀레시안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해집으며 소울스트림을 거절하려했지만 거울의 허상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늦었습니다.”
“뭐..?”
“그가 좀 더 빨랐습니다.”
보석의 말에 밀레시안이 급하게 다시 고개를 들어 천정을 바라보았다. 쿵- 하고 내리쳐진 무언가의 힘에 검은 거울들은 사방으로 은색의 금을 퍼트리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소울스트림의 빛이 갈라졌다.
쿵- 두번째 충격이 여기저기에 있던 균열들사이에서 비틀린 파편이 튀어올랐다. 푸른 불꽃은 더욱 격렬하게 타올랐고 영혼의 흐름들은 와글거리며 옷자락을 거두었다. 체력이 차오르는대신 밀레시안의 신성력은 더욱 빠르게 빨려나갔다. 체력과 마나들은 저주에게 신성력은 불꽃에게. 밀레시안은 오래간만에 몸안의 모든것이 빨려나가는 공허함 속에서 마른 한숨을 내뱉었다.
“ -”
거울의 방이 깨지며 밀레시안의 머리위로 은백색의 별빛이 쏟아져내렸다. 깨어져 나간 페리도트로 부터 휘몰아치는 검은 모래가 넝마가된 밀레시안의 의식을 휘감아 어둠속으로 끌어내렸다. 서리의 거울도, 부서진 마녀의 비늘도, 그림자속에 숨어들었던 톨비쉬의 그리브도 모두 흐르는 모래속으로 뒤섞이며 검은 빛으로 잠겨들었다.
표류하는 밀레시안이 눈을 감으려는 찰나 둔탁한 금속의 빛을 내며 모래를 뚫고 내려온 검은 건틀렛이 밀레시안의 팔을 붙잡았다. 억센 손길로 끌어낸 그의 손아귀힘에 밀레시안은 자기도 모르게 작은 신음소리를 흘리며 팔을 비틀었다. 네반의 빛무리가 두눈을 아프도록 찌르며 차가운 서리바람을 입안 가득 흘려넣었다.
“너무 오래걸려서 데리러 왔습니다”
어디가 어느곳인지 분간이 안가는 새하얀 빛속에서 웅웅 울리는 톨비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1.
“톨비쉬-”
어디있어요? 하고 되묻던 밀레시안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무언가 복슬거리는 것이 잡혔고 밀레시안은 아무런 생각없이 그것을 잡아당겼다.
놀라서 퍼덕거리는 독수리가 허둥지둥 도망쳤지만 용캐도 그 흉흉한 발톱이 밀레시안의 손을 할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깃털을 한 움큼 잡아뜯은 밀레시안이 잠시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찔한 두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닌 밤중의 뜯김에 고통스러워하는 쉬나벨이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크루크를 향해 날아올랐다.
놀란 숨을 몰아쉬는 밀레시안을 마뜩치 않은 눈으로 내려다보며 쉬나벨을 쓰다듬는 크루크가 입을 열었다.
“겨우 깨어난 모양이군. 발레스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오.”
환영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너클을 끼고 있는 발레스의 왕이 퉁명스러운 얼굴을 돌리며 키리네의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