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톨비밀레)페리도트-하-
12.
키리네를 향해 칼날이 번뜩이는 것을 본 것은 톨비쉬 뿐만이 아니였다.
그녀의 곁에 있던 크루크도 그 모습을 보았고 밀레시안을 스쳐지나가던 가드들도 모두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단지 칼날이 발레스의 여왕에게 닿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밀레시안을 막아세운 기사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막아선 타우네스는 가드들을 향해 몸을 돌리며 크게 발을 굴러 달려들려는 가드들을 멈춰세웠다.
타우네스는 밀레시안과 알반의 기사를 변호하는 말을 하며 톨비쉬가 도망칠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톨비쉬의 발자국을 따라 붉은 핏자국이 점점이 떨어지고 있었다.
눈이 멀었어도 자이언트 최고의 전사, 가드들은 타우네스에게 함부로 달려들지 못한채 도망치는 알반의 기사를 지켜보아야한 했다. 타우네스는 격분하는 크루크에게 호소했고 친애하는 동맹인 밀레시안의 이름을 언급했다. 밀레시안이 과거 자이언트족을 도와 준 것을 생각하더라도 일족의 어머니를 찌르려 했던 것이 정당화 될 수는 없지만, 당장이라도 처형명령을 내리려는 크루크에게 잠시나마 생각할 시간을 갖게할 만큼의 진정성은 갖고있는 듯 보였다.
정작 당사자인 키리네는 즐거운듯 웃음을 터트릴뿐. 타우네스가 크루크에게 밀레시안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동안 자이언트 가드들은 밀레시안 쫓아야할지 명령을 기다려야할지 선택하지를 못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멀리서 소란을 전해들은 바이데 재상이 서두르는 걸음으로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왔다.
벌써 마을 어귀까지 멀어진 톨비쉬에게 무엇인가를 호령하는 키리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톨비쉬는 명령의 내용까지 엿들을 만큼의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품안의 밀레시안의 뺨 위로 눈에 보일정도로 빠르게 비늘이 돋아나며 새하얗던 피부를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고 간헐적으로 이계의 신성력이 터져나왔다. 다행인것이라면 그릇을 부수기 위한 신성력이 아닌 채우기 위한 것이였다는 점. 톨비쉬는 밀레시안을 추슬러안으며 흔들리는 단검을 내리눌렀다. 상처는 고통을 내질렀지만 어중간하게 빠져버리는 것 보다는 이 편이 나을 것이다. 톨비쉬는 힘겹게 마나터널에 기대어섰다.
빛에 휩싸였던 마나 터널에서 내려오자 붕붕거리는 극지의 말벌들이 피냄새에 반응해 고개를 돌렸다. 말벌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피냄새를 쫓았지만 여기저기 흩어진 피자국속에서 희생자가 어디에 위치했는지 까지 추적할 의욕은 없는 듯 보였다. 발레스에서 먼 실바숲 남단인 것을 확인한 톨비쉬가 겨우 눈이 녹아내린 풀밭위에 밀레시안을 내려놓았다.
단내가 차오르는 숨을 잠시 참고 이를 악문 톨비쉬가 뜨겁다 못해 느낌이 사라져가는 상처위에 손을 올렸다. 단검을 빼내자 울컥하고 뜨거운 피가 쏟아져나오며 풀밭을 엉망으로 물들였다.
그위로 아무렇게나 포션을 쏟아부은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옆에 주저앉으며 대충 풀어낸 붕대를 뭉쳐 상처를 틀어막았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겠지만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이 편이 더 도움이 되겠지.
누워있는 밀레시안의 주머니를 뒤지자 아주 작은 포션 몇병이 굴러나왔다. 톨비쉬는 아쉬운 양의 포션을 입안에 털어넣고는 숨을 골랐다. 밀레시안의 비늘사이에서 검은 모래가 조금씩 떨어져내렸다. 톨비쉬는 품속에 있던 거울을 꺼내 밀레시안의 가슴위에 올려놓았다.
규칙적으로 부풀어오르고 꺼지기를 반복하던 가슴위에 놓여져 있던 거울이 잠시 빛을 내며 밀레시안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거울이 사라질때까지 불편한 몸을 숙여 상태를 확인하던 톨비쉬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터져나왔다. 통증을 참아내기 위헤 움켜쥐고 있었던 주먹이 겨우 풀리며 땅으로 널부러졌다. 톨비쉬가 잠시 눈을 감았다.
"당신이 명상을 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었을텐데"
톨비쉬는 좀 더 일찍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것을 밀레시안과 공유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피로 엉겨붙은 붕대를 때어냈다. 제대로 된 거즈가 없으니 일단 틀어막긴 했지만 붕대는 좀처럼 피를 제대로 머금지 못하고 톨비쉬의 손을 엉망으로 물들였다. 조근 끈적하게 굳으며 악취를 내는 것은 덤. 그나마 뜨거운 모래밭이 아닌것에 감사하며 눈더미에 대충 손을 문질러 닦은 톨비쉬가 다시 붕대를 꺼내들었다. 이번엔 꼼꼼하게 상처를 막는 톨비쉬의 머리위로 차가운 북풍이 스쳐지나갔다.
‘그런거 안해도 어쩄든 들어갈 수는 있어요.’
스산한 바람 어딘가에서 밀레시안이 대답하는 듯한 환청을 들은 톨비쉬가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렇겠지. 당신에게 불가능이라는 것이 있을까. 어딘지 자조적인 웃음을 서리바람속에 삼키는 톨비쉬의 귓가에 잔뜩 숨을 죽인 발자국소리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나무사이로 눈송이 아래로. 새까만 정장이 이 새하얀 설원아래에서 보이지 않을것이라 생각하는건지, 톨비쉬는 남말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을 지우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이동하는 동안 쏟아진 피에 젖어들었는지 손잡이가 미끈거려 불쾌한 느낌이였지만 닦아낼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실리엔의 탄환이 장착되는 특유의 소음이 나뭇가지 넘어에서 들려왔다. 붉은 코트를 입은 커다란 자이언트가 톨비쉬의 앞에 다가섰다.
“웃음 지을 여유가 있나보네?”
여유는 무슨, 이라고 대꾸하고 싶은 마음이 톨비쉬의 아랫입술을 간질이고 지나갔다.
축축해진 붕대에서 버석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매서운 추위가 숲을 휘감아 돌며 주변을 둘러싼 숨결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갔다. 측면 나무 뒤에 둘, 마나터널쪽에서 셋, 정면에 첩보조 대장을 비롯한 두명의 슈터들. 톨비쉬는 너무 많이 몰려온 것 아니냐고 능청스럽게 웃음지었지만 눈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모든 슈터들은 장전을 마친 상태였고 톨비쉬는 최소한의 무장으로 들고나왔던 롱소드뿐이였다. 그마저도 찔린 상처탓에 손잡이는 미끌미끌. 피로 범벅이된 폼멜을 흘겨본 톨비쉬는 검을 떨어트리고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시했다. 롱소드가 힘없이 눈속으로 파뭍히며 묵직한 소리를 내었다.
싸우지도 못하고 항복을 선언하는것은 톨비쉬의 입장에서도 별로 달가운 일이 아니였지만 발치에 누워있는 밀레시안의 가슴에서 검은 기류가 터져나왔다 사라지는 모습이 그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톨비쉬가 초조한 모습으로 밀레시안을 살펴보는 것을 눈치챈 다우라가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마. 알반, 우리도 너희와 싸우고 싶지는 않으니까.”
“너희라는것은 어느쪽을 포함해서 말하는 건가요?”
자이언트의 친구? 상대하기 껄끄러운 신성기사단? 어느쪽의 대답이 되는지에 따라 앞으로의 대화가 달라질것이라는 건지 톨비쉬는 차가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상처를 내리눌렀다.
멈춰라, 어서 멈춰라. 잠시만이라도 멈춰진다면 상황은 더 나아질 수 있어. 톨비쉬의 조급함에 다우라는 손을 저어 부하들을 물러세웠다. 다우라는 대화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양쪽 다야. 그러니 너무 그렇게 쏘아 죽일것같은 눈으로 웃지좀 마. 우리 애들이 불안해 하지않냐.”
다우라는 자자, 장전된 총들은 다 집어넣었다고? 라고 말하며 양손을 들어보였다. 맨손의 자이언트가 위협적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지만 톨비쉬는 차라리 근접이 낫다고 쓴웃음을 삼키며 발로 밟고있던 단검을 걷어 찼다. 다우라는 휘파람을 불며 무서운 형씨였네. 하고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던 것은 톨비쉬 뿐만은 아니였다. 다우라의 왼편에 서있던 자이언트는 그가 단검을 차내고 나서야 표정을 풀고 불만스럽게 입을 움직였다.
톨비쉬 또한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리숙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인지 애써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다우라는 자이언트의 어깨를 툭치며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우호적인 한걸음이였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자이언트의 한걸음은 다난의 것보다 훨씬 큰 발자국이였다. 톨비쉬는 너무 가까이 다가온 다우라를 쏘아보며 숨을 골랐다. 차가운 설원의 향기속에 짙은 피냄새가 섞여있었다.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엄살이 심하시군요”
“내 입으로 말하면 또 경계할 텐데, 일부러 자극할 필요는 없잖아?”
다우라가 한쪽 눈을 찡긋해보이자 부관인듯한 자이언트 한 명이 장난은 이제 그만하라며 투덜거려왔다. 저쪽도 융통성이 넘치는 집단이군, 톨비쉬가 이해한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보이자 다우라가 머쓱한 얼굴로 뒤돌아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자이언트들은 저마다 할말이 많지만 참는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가장하고 있지만 다우라의 어깨는 무거운 임무로 내려앉을 처지였다.
일족을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이라 하더라도 사건은 발레스의 왕비를 해하려 했던 최악질. 옛정과 몇가지의 오해로 넘어가기엔 고리타분한 절차와 관습이라는 것이 그들의 발목을 잡고 넘어트리려 하고 있었다. 톨비쉬는 오해가 있었다고 설명하려 했지만 다우라는 머리를 짚으며 손을 내저었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니야, 우리도 들었어. 저주같은게 있었다지?”
다우라는 타우네스가 그렇게 열성적으로 말하는 것은 오래간만에 보았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게파트르 선왕이 필리아 원정에서 진군 루트를 결정할 때 보다 더 흥분한 것 같았다며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보는 것은 크루크폐하도 처음이었는지 당황하시더라고 웃음짓던 다우라가 싸늘하게 노려보는 부관의 눈빛을 발견하곤 황급히 헛기침을 하며 말을 마무리했다. 톨비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은 당연한 일, 장난은 이제 그만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다우라가 손가락으로 밀레시안을 가르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를 데려가야 하는게 우리 일이라는거지”
“바이데 재상이 나선 모양이군요”
이봐, 너무 잘 알고 있잖아? 하고 눈쌀을 찌푸리는 다우라가 저도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장난스러운 모습과 달리 긴장을 하고 있는 모습에 조원들도 뭐라 말하기 힘든 표정을 무표정으로 감추려 애를 쓰며 살짝 시선만 내리깔았다.
첩보조는 크루크의 직속 휘하의 기관이였고 바이데는 다우라에게 직접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 가 없는 위치였지만 그럼에도 톨비쉬들을 추적해 나온 것은 일반 가드들이 아닌 첩보조의 엘리트들. 거기에 다우라가 직접 나왔다는 것은 크루크가 바이데의 의견을 무시 할 수없는 상황이였다는것. 아마 불만건 수가 밀려있었던 차였는지 키리네에 관한 문제가 터져 나오자마자 재상파가 빠르게 움직인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있을 문제에 대해 대비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였건만 실수했다. 라는 실패감이 톨비쉬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바쉬베르가에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면서 키리네에게만 집중한 것은 톨비쉬의 실책. 조금 돌아서 가더라도 재상을 달래놓고 들어갔어야 했는데.. 톨비쉬는 그 잠시의 시간을 분배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며 밀레시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긴 한숨과 함께 밀레시안의 눈가까지 비늘이 돋아나왔다. 목은 이미 푸른 비늘로 뒤덮여 옆은 분홍빛 금이 그어진 상태. 톨비쉬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으로 다우라들도 고개를 돌리며 눈쌀을 찌푸렸다. 오래 묵은 해수의 냄새가 자이언트들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꽤나 심각한 저주인가봐?”
“조금 복잡합니다. 두가지 저주가 엉켜있거든요. 왕비님의 거울로 도움을 받으려 했던 것은 첫번째 저주입니다”
밀레시안의 마음 저변부터 오염시키려는 보석의 저주와 잠든 밀레시안을 강제로 깨우는 대신 사하긴으로 만드는 바다의 저주. 톨비쉬는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 입술을 깨물었다. 자이언트들은 점점 변해가는 밀레시안의 모습에서 이전 악몽의 때를 생각하는 것인지 좀처럼 파란 비늘에서 시선을 때지 못하며 움찔거렸다.
건홀더에 손이 올라간 모습에 톨비쉬의 시선이 스쳐지나가지만 경계할 대상이 너무 많았다.
다우라가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나서야 희미하게 움직이던 에너지컨버터의 소음들이 줄어들었지만 이미 전환된 실리엔 탄환의 불빛이 설원 여기저기에서 깜빡거리며 톨비쉬의 신경을 갉아내렸다.
결정을 해. 어서 생각을 해내. 톨비쉬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상처를 내리눌렀다. 뜨뜻미지근한 온기가 얼어붙은 손끝을 녹였다.
“차라리 발레스로 가서 도움을 받는게 낫지 않겠어? 이렇게 엄동설한에 뉘어놓는게 더 안좋아보이는데”
“저를 밀레시안에게서 때어 놓지 않는다고 약속하실수 있겠습니까?”
톨비쉬의 말에 다우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뒤로 손깍지를 올려 보였다. 형식적으로라도 왕비를 시해하려한 범인을 추궁하는 자리에 알반의 기사가 있는것은 바쉬베르가의 입장에서도 자이언트 전체의 입장에서도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니였다. 재상이, 아니 재상의 압박을 받은 크루크도 밀레시안을 데리고 오라고만 이야기 했을 뿐, 톨비쉬에 대한 언급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는 상황.
다우라 또한 알반과 싸울 의사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시간을 내어주고 있는 모습을 취할뿐 강제력을 행사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자이언트들은 그저 추운 이 바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였다.
“자이언트들의 충분히 이해해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돌아가면 제가 밀레시안이 곁에 있을 수 없게 되겠죠. 저에겐 그 쪽이 더 위험합니다”
“……음…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톨비쉬는 다우라를 마주보고 있는 상황에서도 밀레시안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밀레시안의 영혼은 어둠안에 잠겨가고있었고 그 진행은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손 안을 휘감는 탐지 어디에도 밀레시안의 빛이 잡히지 않아 초조해진 것인지 톨비쉬는 떨러오는 손가락을 주먹쥐며 로브자락을 구겼다. 부풀어오르던 가슴의 높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낮아져갔고 몸은 얼음보다도 차갑게 얼어붙어갔다. 목에 그어진 선을 따라 파스스 일어나는 아가미의 선이 눈에 밟혀들어왔다. 작은 입이 열리며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검은 기류가 피어올라오는 모습을 보며 자이언트중 한명이 다우라를 향해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음……… 저기 있잖아. 초조한건 알지만 우리도 좀……”
다우라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어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흔들고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밀레시안의 오염은 큰 문제였고 다우라들은 이미 그 위력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여기에 누워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면 한시라도 바삐 전력이 충분한 위치로 옮기고 싶은것이 첩보조장의 마음이였다. 그러나 알반의 기사가 지키고 있는 밀레시안을 강제로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였고 눈앞에서 피어오르는 소름끼치는 검은 연기를 무시할 수도 없는 입장이였다.
“따뜻한 난로가 설치된 집안에 모시는것까진 무리이겠지만 넓은 공터에 양탄자라도 한장 깔아주고 모닥불은 피워줄 수 있어. 사실 나도 별로 옮기고 싶진 않지만, 여긴 우리들이 합류하기에 너무 멀거든.”
다우라는 이정도면 나름대로 예우를 갖춘것 아니냐고 자기자신을 납득시키며 톨비쉬들 쪽으로 한걸음 다가갔다. 톨비쉬의 새파란눈이 다우라의 걸음을 멈춰세웠다.
상처도 입었고 힘으로 밀어부칠까? 눈빛을 교환하는 자이언트들 사이로 새파란 신성력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들이 휘두르는 힘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그 푸른 불꽃들이 몰고다니는 소문은 에린 전역어 퍼져있었다. 바다건너 벨바스트와 이리아는 물론이고 그 이름이 알반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이언트들은 굳은 얼굴로 톨비쉬를 조준했다. 다우라는 이번만큼은 조원들을 막지 않았다.
“부탁 할 것이 있습니다.”
적대적인 분위기의 경계선에 선 자이언트들과는 다르게 톨비쉬는 신성력을 손안으로 모아 움켜쥐며 그 빛을 숨겼다. 그의 입에서 제안할 것이 있다 라는 말 대신 부탁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다우라가 질색을 하며 거절했다.
“그냥 제안을 해. 언제부터 그렇게 살가운 사이였다고”
거, 그냥 좀 진중하게 빚을 지워놓지 그러세요. 자이언트가 짜증스럽게 다우라를 질책했다.
“그렇군요. 그런 제안으로 바꾸도록하죠. 잠시 저희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톨비쉬는 두 번은 제안하지 않는 태도로 전환하며 바로 로브를 벗어들었다. 새하얀 옷은 안에 입은 붉은 옷과 다를바 없을 정도로 물들었지만 톨비쉬의 행동은 매우 간결하고 재빨랐다.
넓게 펼쳐진 로브자락이 밀레시안의 몸위로 쌓여가는 눈송이를 덮고는 드러나있던 파란 비늘들을 모두 가려버렸다. 힘없이 떨어지는 손을 로브의 위로 올려 꾹 눌러 고정시키는 톨비쉬의 손이 아주 잠시 떨렸다 떨어졌다. 손안에 있던 푸른 불꽃이 밀레시안의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톨비쉬가 완전히 경계를 포기하고 마음대로 행동하기 시작했지만 다우라는 그런 톨비쉬를 나름대로 걱정한다는 어투로 내려다 보았다. 자이언트들은 무방비한 알반의 기사가 신기한지 고갯짓으로 대화를 나누며 무기에서 손을 떼었다.
“이봐, 너희 둘 다 그러다가 죽는다고?”
“이정도로 죽을 만큼 나약하지는 않습니다”
약간의 무례함이 담긴 대답이였지만 다우라는 신경쓰지 않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재상에게 잘 말해 볼테니까.. 하고 좀더 안전한 방법을 제안해 왔지만 톨비쉬는 아무런 대꾸없이 밀레시안의 옆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은채 주저앉았다. 상처가 진한 피냄새가 다우라가 있는 장소까지 풍겨왔다.
“나 아직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말 안했는데?”
“채집된 힐웬광석의 일부가 어디론가 빼돌려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 있습니다. 그 판매루트를 가르쳐 드리지요”
“것봐, 내가 좋은 놈이라고 말했잖아”
다우라가 레우스 강의 얼음밑에서 흐르는 격류만큼이 빠르게 말을 바꾸며 부관에게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라고 대답하는 부관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짚었다. 톨비쉬를 노려보는 자이언트의 눈빛이 매서웠다.
톨비쉬는 눈을 감았고 다우라는 하는 수 없다는 손짓으로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첩보조원들을 불러 모았다.
크고 작은 검은 인영들이 실바숲 곳곳에서 튀어나오며 내키지 않은 얼굴로 잠든 톨비쉬와 밀레시안을 내려다보았다. 다우라는 갖고있는 부상포션있으면 좀 달라며 부하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톨비쉬의 상처를 눈여겨보던 첩보원 하나가 작은 포션병을 하나 내밀었다.
“그렇게 노려보지좀 말아봐라. 안그래도 인상이 험악한 시커먼 놈들이.”
“까만색으로 통일하자고 한건 조장님이였잖아요”
“그래, 그래. 일어나면 포션비랑 장작비랑 비싸게 받아내서 어디서 광산의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까지 다 받아낼테니까”
다우라는 톨비쉬의 상처쪽으로 포션을 흩뿌리고는 첩보조들을 둘러보았다. 몇몇은 고개를 돌렸고 몇몇은 말벌들을 정리하고 오겠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영문을 몰라 어정쩡하게 서있던 조원하나가 다우라와 시선을 마주쳐왔다.
“뭐해, 장작 안주워오고”
눈이 마주친 첩보원이 잔뜩 찡그린 얼굴로 마지못해서 몸을 돌렸다.
13.
밀레시안의 안으로 들어온 톨비쉬는 처음부터 길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어째서인지 밀레시안은 그를 거부하고 있었고 어둠으로 엉망이 된 마음속은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도 알 수없는 암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코리브계곡의 모습을 하고 있던 길은 일직선으로 이어져야할 길을 이리저리 비틀며 갈피를 잡지 못하도록 일렁거렸다.
그 길은 코리브계곡이기도 했고 두갈드아일이기도 했으며 때때로 블라고평원의 모습을 취하기도 했다.
정확히 향해야할 방향을 잡지 못해 제자리에 멈춰선 톨비쉬는 손안 가득 신성력을 모아 가슴앞에 움켜쥐었다. 밀레시안에게 교감을 하려하지만 톨비쉬에게서 뻗어나온 푸른 신성력은 어디에도 연결되지 못해 허공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톨비쉬의 영혼이 묵직한 울림소리를 내었다.
접니다, 톨비쉬기 말을 거는 동안 어딘가에서 울리는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톨비쉬가 고개를 들자 짙게 드리워져있든 구름 어딘가가 은은한 불빛을 내며 점멸하다 사라졌다. 톨비쉬는 푸른 불꽃 주변으로 모여드는 밀레시안의 신성력을 희미하게 느끼며 손을 내렸다.
부서진 조각들이 겨우 모여든것 처럼 희미한 반딧불이 같은 밀레시안의 신성력은 톨비쉬의 주변을 떠돌다 다시 사라졌다. 다시 한번 밀레시안의 신성력을 잡아당기며 그 능력을 빌려주기를 간청했지만 서늘한 바람이 거절의 의사를 밝히며 톨비쉬를 밀어낼 뿐. 바람에 흔들리는 불꽃이 꺼질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어째서입니까”
톨비쉬는 초조한 손을 움켜쥐며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검게 물들어서도 밀레시안은 톨비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의지가 되지 않아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톨비쉬는 스스로를 나약하게 느끼지 않기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겨울날 난롯불에 반짝이던 열쇠처럼 손안의 불꽃이 너무나도 작았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밀레시안의 마음속은 그때와 똑같은 말을 하며 톨비쉬를 거절했다. 그렇게까지, 그 말이 그어놓는 경계선이 어디 즈음인지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생각을 헤아리고 싶지 않아 그 눈을 외면했다.
게이트에 도달해서야 밀레시안은 톨비쉬에게 호의적를 내보였고 톨비쉬 그제서야 안심을 하며 밀레시안을 바라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 밉살맞은 입이 밀레시안에게 이제야 내가 보이냐고 묻는 것을 막을 수는 없ᄋᅠᆻ다. 밀레시안의 호의가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겨울이 되어서의 일. 누구에게도 제안하지 않았던 작은 손길에 기뻐하기에 앞서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거절이 누구에게나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톨비쉬여서 거절하는 것이 아닌 오직 다난이기에 그어진 선. 톨비쉬는 내민 손을 붙잡으면서도 밀레시안이 그어놓은 선 넘어로 나아가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되뇌이고 또 생각하며 미소를 그렸다.
천천히 시간을 같이 보낸다면 언젠가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톨비쉬는 실망하는 얼굴을 숨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밀레시안과의 대화를 계속했다.
밀레시안과 대화를 하고 나서, 톨비쉬는 다양한 각도에서 밀레시안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특급주시대상으로서가 아닌 인간인 밀레시안을.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해야했을까, 그 몸짓, 그 어조, 그 표정. 톨비쉬는 일부러 밀레시안에게 언어적 대화와 몸짓 대화라는 재미없는 책을 꺼내어 강의겸 이야깃거리로 삼아 샘플을 확인했다.
시험삼아 던져본 대화의 주제는 항상 만족스러운 결과를 갖고 왔고 그 결과들은 밀레시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곤 했다. 밀레시안은 곤란할때는 눈을 깜빡였고 눈치를 살필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만스러울때 입매에 힘을 주고 즐거울때는 눈동자가 먼저 대상을 향헀다. 그리고 부끄러울때는 뺨보다는 귀끝이 붉어졌다. 순진하고 읽기 쉬운 타입에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톨비쉬는 이따금씩 밀레시안의 턱끝을 잡아채지 않기 위해 주먹을 말아쥐어야 했다. 밀레시안은 꼭 무언가를 숨기려할때 입을 오물거리는 버릇을 갖고있었다. 시선을 피하고 말끝을 흐리고, 다른 버릇들보다도 그 작은 오물거림은 톨비쉬의 이성까지 위협할만큼 강렬한 것이였다. 그것은 대게 밀레시안이 밝히고 싶지 않은 사실들을 감출때 나타나는 반응이였다.
낚아채어 강제로 시선을 마주하게한 뒤 정말로요? 하고 묻고 싶었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톨비쉬는 방안에서 쿠션을 끌어안고 피곤한 얼굴로 누워있던 밀레시안을 떠올렸다.
"여차하면 환생하는 방법도 있고"
밀레시안은 톨비쉬가 입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정면으로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술이 오물거린 뒤 그건 그렇죠, 하고 고개를 돌리는 밀레시안을 보며 톨비쉬는 밀레시안에게 허리를 굽혔다.
쓸데없는 짓 할 생각하지마. 알반의 기사는 톨비쉬의 마음속에서 진지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알고 있다고 대답하면서도 그 뺨을 쓰다듬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손안의 미적지근한 온기가 고개를 돌렸다. 붉은 귀끝이 톨비쉬의 눈을 어지럽혔다. 지금이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톨비쉬는 쾅 하고 타라의 첨탑에 내리 찍히는 낙뢰의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 따뜻하고 안전한 방안에서 별을 꺼내놓지 말았어야했다. 보석을 다루듯 푹신하고 보드라운 천에 감싸 영원히 그 안에서 보관하도록, 조금 돌아서 행동하더라도 바이데를 설득할 중재안과 키리네를 유혹할만한 정보를 들고 톨비쉬 혼자 발레스에 왔어야 했다.
애초에 가장 좋은 방법은 보석을 타라에서 해결하고 돌아왔어야 했지만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일을 탓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더 잘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꼬리를 잡으며 톨비쉬의 발목을 무겁게 했다.
좀 더 다른 방법을......, 톨비쉬는 이 모든 말이 자신의 욕심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낙뢰가 떨어지는 건물 가까이에 다가갔다. 낙뢰는 도시 곳곳을 이동하며 일정한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톨비쉬는 좀 더 빠르게 광장으로 향하기 위해 연금술용품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복잡하게 돌아가고는 있었지만 사실 이 일의 모든 해결방법은 밀레시안에게 있었다.
별은 스스로 육체를 파기할 수 있었고 마침 밀레시안의 곁에는 단번에 밀레시안을 소울스트림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주신의 검도 자리하고 있었다.
별의 죽음, 불멸이되 불사가 아닌 이 기적의 존재가 스스로 죽음을 반복하도록 내버려두는 방법. 톨비쉬가 그 목을 베거나 심장에 검을 찌른다면 이질적인 신성의 존재라기보다 에린의 오류에 가까운 저주는 그 육체에 제대로 뿌리내리기도 전에 사멸할 것이 분명했다.
정말로 효과가 있을까 에대한 의문은 품을 필요도 없었다. 밀레시안은 이 일 이전에도 이따금씩 에린과 육체사이에서 균형이 틀어지는 오류를 경험하고 있었다. 밀레시안에게는 놀라울 일도 아니였다. 하지만 다난으로서는 알 수 없는 아주 사소한 오류.
그들은 가끔식 무역도중 자살하기도 헀고 성벽을 올려다보다 스스로를 자해하기도 했다. 그림자 미션의 클리어직전에도 갑자기 소울스트림으로 귀환하기도 했고 연극을 하다가도, 레네스의 상공을 날다가도, 심지어 게이트로 오겠다던 사람이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며 골렘에게 깔려죽는 바람에 이멘마하로 급히 약속장소를 바꾼적도 있었다.
톨비쉬의 눈앞이라도 오류의 수정은 망설임 없이 일어났고 밀레시안은 멋쩍은 표정으로 사과를 해왔다. 시간을 지체시켜서 미안하다고. 눈이 깜빡였고 고개가 살짝 틀어졌다.
톨비쉬는 그런 밀레시안을 바라보며 애써 웃음 지어야했다. 자신의 상식을 위해 밀레시안을 곤란하게 하고싶지 않았다. 다난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진심이였지만, 톨비쉬는 엠포리움 쇼윈도우에 비친 자신의 표정을 외면했다.
평범한 다난 남성의 눈동자가 그 유리창안에 비치고 있었다. 건물의 외벽넘어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최선책을 외면한 대가는 아주 비싸게 치러야만 했다. 알반의 이름을 숨기기는 했지만 엘베드의 조장으로서 재량껏 관리해왔던 자료 중 일부를 사용해야 했고 자이언트들은 이제 엘베드의 조장의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했다.
톨비쉬는 당분간은 시말서로 바쁘겠다며 쓰게 웃음지었다. 시말서로 끝날 수 있을까. 단장의 얼굴을 떠올리자 톨비쉬는 뱃속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끼며 손을 문질렀다. 검붉은 피가 배어나오는 모습에 눈이 저절로 아래쪽을 향해 숙여졌다. 실체의 영향이 영혼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었다.
벼락이 가까워졌고 모래바람이 일렁거렸다. 톨비쉬는 신성력을 이용해 익숙한 갑옷의 모습을 떠올리며 몸 전체에 둘렀다. 일렁이는 불꽃으로 상처를 지져 막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압박하는 느낌을 주는 것은 가능했다. 톨비쉬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며 공기중으로 목소리를 퍼트렸다. 별은 어디에? 광장으로 들어서자 검은 모래를 휘두르던 여성형의 그림자가 톨비쉬를 내려다보았다. 여성의 모습은 밀레시안과 비슷했으나 황금색 불빛이 번쩍이고 있었고 눈동자는 녹색이였다. 낯이익은 보석의 빛깔에 톨비쉬는 말없이 검을 뽑아내었다. 저주가 대답했다.
“너를 알아”
‘죄송해요, 저는 더이상 용기가 없어요’
톨비쉬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저주는 두가지 목소리를 내며 돌아보았다. 인간의 모습을 갖춘 저주의 실루엣은 끊임없이 일렁였고 그 꿈틀거리는 촉수같은것을 벼락은 쉴새없이 끊어내며 저주를 압박해 들어왔다.
아마도 밀레시안의 안에 잠들어 있는 방어본능. 소울스트림을 지키는 거대한 먹구름은 어울리지 않는 잔잔한 오르골소리와 함께 거대한 빛의 창을 쏟아내고 있었다. 신의 분노를 닮은 빛줄기가 도망치는 모래의 꼬리를 따라 쉼없이 쏘아져 내려왔다.
빛이 부숴버린 타일조각 아래로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흙길이 잠시 드러났다가 모래속으로 삼켜졌다. 톨비쉬는 날아드는 모래덩이를 칼날로 비스듬히 쳐내며 표정을 굳혔다.
밀레시안의 마음속 이었지만 의식은 어딘가로 사라진 건지 그의 탐지범위 내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과 페리도트, 그리고 시끄러운 천둥소리만이 이 공허한 마음속에 가득했다.
“그거 우연이군. 나도 너를 아는데 말이지.”
톨비쉬는 이런 일도 다 있다며 빈정거리고는 방패를 끌어당겼다. 저주는 조금 초조해하고 있었고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갸웃거린다기보다는 그렇게 해야한다는 강박증으로 머리를 흔들다 말기를 반복하는 것 같아 보였다.
아마도 숙주의 버릇을 그대로 카피하는 중인지 그 모습은 어색했고 괴기하기까지 했다. 밀레시안은 아마 저 모래 안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갑옷으로 둘러싼 옆구리에서 희미한 냉기가 스며 나왔다. 차갑고 액체같은 것이 핏물은 아니고 옅게 풍겨져 올라오는 다양한 약초의 향기 속에 금빛을 띄는 특유의 향기가 올라왔다.
이거 비싸게 먹히겠군, 톨비쉬는 자이언트의 통 큰 손길에 어정쩡한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상처를 쓰다듬었다.
상처가 막혔다면 조금 더 원활하게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을 터였다. 대부분의 방어형 기사들이 그러하듯이 톨비쉬 또한 신체능력을 강화하는 것에 대부분의 신성력을 사용하고 있었고 강화된 신체는 일반인의 신체보다 빠르게 박동하고 반응하며 더 큰 힘을 이끌어내곤 했다. 단점이라면 상처가 생겼을때 능력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것. 신성력을 두른 상태에서는 더 빠르게 치유되는 이점이 있지만 상처가 생긴 다음 능력을 사용한다면 상처가 더 크게 벌어진다는 단점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지. 내쉬는 깊은 숨결을 따라 푸르른 신성력이 반짝였다.
톨비쉬의 신성력이 밀레시안의 안으로 퍼져나갔고 작은 설원의 풍경이 톨비쉬의 발 아래로부터 퍼져나갔다. 얼어붙은 타라는 좀 전보다 바삭바삭하고 깨지기 쉬운상태가 되었고 신의 분노는 망설임없이 거짓된 도시의 그림자를 부숴나갔다. 톨비쉬는 다시 상처가 찢어지기 전에 결판을 내려는 생각이였다.
저주는 조금 당황해하며 설원을 덮으려 했지만 그것은 밀레시안의 마음처럼 간단하게 어둠으로 물들지 않았다. 새파랗기까지한 설원은 티없이 투명하고 맑은 빛을 내며 뻗어나가 거칠고 매마른 모래를 밀어내었다. 스파크의 빛이 얼음에 튕겨져나가 설원을 밝히자 빙판의 아래로 티르코네일의 그림자가 비춰졌다. 저주는 매우 불쾌하다는 반응으로 모래를 내리쳤다. 금이가며 갈라진 빙판은 곧 재생되며 매끈한 단면으로 저주의 모습을 반사시켰다. 얼음속에는 부숭부숭하게 솟아오른 검은 짐승이 그려져 있었다. 톨비쉬가 검을 고쳐잡으며 차가운 금속음을 내었다. 저주는 빠른 어조로 중얼거렸다.
기분나쁘고 음흉한 말투는 밀레시안의 목소리를 흉내내고 있었다.
“나는 너를 알아, 너는 알반이지. 네가 나를 밀레시안에게 데리고 왔어”
“아니, 나는 너를 봉인하기 위해 가지고 왔을 뿐이야”
“하지만 나를 네 방에 내버려두고 나가버렸지. 밀레시안이 마음대로 들어 올 수 있는 장소에 나를 두고 나갔어. 단 둘이 남을 수 있게말이야. 정말 고맙지 뭐야.”
저주는 일부러 톨비쉬를 자극하는 말을 찾기위해 눈을 굴렸다. 저주는 모습이 비치는 것에 초조해하고 있었다. 땅위로 솟아난 검은 그림자는 균형잡힌 실루엣의 여성형을 띄고 있었지만 설원의 아래 비치는 얼음에는 부숭부숭한 털을 가진 네 발달린 짐승이 눈만을 내어놓은채 흉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톨비쉬의 가슴에는 푸른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고 불꽃은 저주의 몸을 관통해 무언가를 찾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내 안에 있어. 별은 곧 나와 하나가 될 거야”
“별은 너를 수정할 거야. 별이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이젠 내가 이 안까지 들어왔으니 너를 정화시키겠지.”
“어떻게? 바다의 마녀는 육체를 죽이는 주술을 걸어 강제로 밀레시안을 깨어나게 했지만 그 주술이 밀레시안을 약화시켰어. 나는 밀레시안을 먹었고 수정은커녕 내안에 흡수될 위기에 처했지.
알반, 밀레시안이 사랑하는 알반. 너라고 다를까. 너는 밀레시안의 검에 찔렸고 몸도 성하지 않지. 게다가 밀레시안은 너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아. 너는 이 안에 초대받지 못했지. 온전히 서 있는 것이 고작인 네가 나를 해치운다고?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네가 저 벼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어? 정말?”
그 말이 부정하려 하는 것인지 톨비쉬는 설원의 가장자리까지 달려 나와 검을 휘둘렀다. 거센바람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궤적을 그린 바스타드 소드가 모래를 갈랐지만 저주는 여유로운 웃음소리를 내며 몸의 일부를 휘날렸다. 설원이 아무리 뻗어 나오더라도 밟지 않으면 그만.
멀리 떨어지려는 저주가 착지하는 지점의 바로 앞으로 오싹한 전율이 내달리며 모래를 불태웠다. 바로 한걸음 앞에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빛의 창이 대지를 태워 들어가다가 곧 투명하게 사라졌다. 저주는 하늘에서 으르렁거리는 구름을 올려다 보고는 신의 창에 움츠러든 톨비쉬를 확인했다. 톨비쉬는 놀란 얼굴을 감추기 위해 방패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짜릿하게 퍼져나가는 스파크는 빙판의 위에서도 톨비쉬를 피해 퍼져나가며 간헐적으로 반짝거렸다.
전격의 범위를 확인한 톨비쉬는 망설임 없이 검을 내질렀고 저주는 날아오는 검을 피해 다시 한 번 몸을 분해했다.
모래가닥이 설원의 위를 날아 톨비쉬의 발목을 향해 날을 세웠지만 곧 비처럼 쏟아지는 빛덩이들이 가느다란 모래자락을 부수어 빙판속에 파묻었다. 얼음에 닿은 모래는 꼼짝없이 얼어붙었고 창에 닿은 모래들은 잘게 부서지며 불타올랐다. 저주는 신경질적으로 모래를 긁어모아 굵은 다발로 만들어 휘둘렀다.
채찍처럼 휘둘러진 모래들이 톨비쉬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톨비쉬는 그리브를 빙판에 미끄러트리며 뒤로 후퇴했다. 얼음은 크게 갈라졌지만 곧 모래를 촉매삼아 갈라진 자리를 매꾸었다.
투명하던 빙판에 검은 얼룩이 상흔처럼 남았지만 모래가 얼어붙을수록 타라의 모습은 점점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광장의 일각이 무너져 내리고 티르코네일의 거대한 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모래로 무너진 분수대에서 우로보로스의 석판이 드러나자 구름은 흥분한 듯 일순 서너 개의 창을 연달아 내리꽂으며 저주를 압박해 들어왔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에 톨비쉬는 어정쩡하게 뒤로 머물러 저주가 타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저주는 그게 톨비쉬의 탓인 양 거세게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저주의 몸은 너덜너덜해져 줄줄이 모래를 쏟아내고 있었다.
“네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사라질리 없어!”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군.”
“너는 별이 되살아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네 손으로 그 목을 치지 못해 이렇게 될 때까지 시간을 허비했잖아.
네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 별에게 미움 받을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너는 나에게 있어서 열쇠이고 좋은 운반책 이였으니까.
나는 네가 만들어 낸거야. 네 잘못된 판단과 네 망설임, 네가 별에게 불어넣은 빈틈, 그리고 지금은 네가 만든 어둠이 나를 이 안에 뿌리내리게 했지. 너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한 망설임, 절망감, 후회감.”
네가 만든 어둠 이라는 단어는 톨비쉬에게 유효했다. 빈틈없이 검을 찔러오는 기사의 검 끝이 아주 잠시 동안 멈춰 섰고 그의 허술함을 질책하는 전격이 검 끝을 타고 흘러와 설원에 금을 내었다.
톨비쉬는 순간적으로 검을 놓치지 않게 위해 검을 내리꽂았고 짜릿한 통증이 온몸을 내달렸다. 왜 갑자기? 의문을 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날아 들어오는 모래줄기를 피해내기위해 톨비쉬는 얼음을 박차고 뒤로 물러서야 했다. 노련한 기사답게 자세를 바로잡았지만 온몸이 저릿하게 울려왔다. 저주는 녹색과 황금색의 불꽃을 피워올리며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같은 목소리지만 천진난만했던 밀레시안의 것과는 달리 거슬리고 짜증나는 목소리였다.
“내가 별에게 어둠을 만들었다고?”
“그래, 맞아. 네가 밀레시안에게 망설임을 불어넣었어. 왜 별에게 열쇠를 건내주려 했어? 왜 밀레시안을 네 방으로 끌어들였지? 그녀에게 무엇을 하려했어? 왜 밀레시안이 여성형인것이 익숙하다고 말했지?”
저주는 밀레시안의 사생활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며 톨비쉬를 조롱했다.
그것은 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운 이야기이기도 했고 함께보낸 시간의 추억이기도 했다. 톨비쉬는 때때로 일반 남성처럼 의미심장한 말을 속삭였고 밀레시안은 그게 무슨 말이냐며 웃어넘겼다. 부정당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주 닿지 않은 것은 아니었던가, 톨비쉬는 때에 맞지 않은 감상에 잠겨들려는 자신을 질책하며 검을 다잡았다.
아직 스파크의 충격이 가시지는 않았다. 녹색의 눈동자가 잠시 톨비쉬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별의 모습을 따라하는 저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동시에 매우 격렬하게 밀레시안의 모습이 그리워졌다. 밀레시안의 이름을 입술사이로 발음하자 구름이 낮은 천둥소리로 대답했다 톨비쉬는 심호흡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가늠이 되지 않는 동시에 약간의 조급함이 톨비쉬의 가슴을 두드렸다. 밀레시안이 그를 향해 돌아가라고 속삭였다. 밀레시안은 이미 방법을 선택했다는 태도였고 그 선택에 있어서 톨비쉬는 원치 않은 불청객이였다. 톨비쉬는 필사적으로 밀레시안의 바람을 붙잡아 소원했고 설득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제 특기를 아시잖아요. 몇 번이나 설명하고 설득했던가.
톨비쉬는 밀레시안이 그어놓은 선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밀레시안에게 자신의 모습을 이해시키고 싶었다. 오해하지 않기를 의심하지 않기를. 그 손이 내 손을 뿌리치지 않기를. 간절하고 열정적인 불꽃이 설원을 타고 흘러들어가 밀레시안의 마음을 비추었다.
발레스의 북풍이 톨비쉬의 뺨을 간지르며 이제 깨어날 시간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톨비쉬는 억지를 부리며 밀레시안의 신성력을 잡아당겼다.
벼락이 내리치고 꺾여 날아온 빛의 창이 저주의 모래채찍의 끝을 꿰뚫었다.
저주는 무언가 의심가는 것이 있는지 일부러 채찍을 끊어내지 않고 스파크를 뒤집어썼다.
“어쩐지, 너희들이 자랑하는 알반의 불꽃이 보이질 않는다 했더니 그런곳에 허비하고 있었구나. 이제야 보여, 네가 무얼 찾고 있는지 어떻게 찾아내는 것인지.”
은백색과 맞서싸우는 황금색의 불꽃을 온몸에 두른 저주가 창이 박혀든 채찍을 끊어내며 양팔을 내저었다. 탈피를 하는것처럼 한사이즈 작아진 저주가 설원으로 내려오며 한웅금 검은 모래를 쏟아내었다. 톨비쉬가 만들어낸 설원이 감당하지 못할정도로 짙고 음울한 원한들이 모래처럼 쏟아져나오며 은빛의 빙판을 검게 물들였다. 저주의 크기는 2/3으로 줄어들었지만 저주는 개의치 않아하는 것같았다.
저주는 양 손을 뻗어 구름에게 손짓했다. 어디 공격해볼테면 공격해보라는 태도였다.
“나에게도 너처럼 편리한 능력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건 아니야. 조금 아프고 귀찮지만”
“……”
“확실한건 너보다 빨리 찾을 방법이라는 거지.”
톨비쉬가 발밑을 엉겨오는 모래를 떨쳐내기 위해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하늘에 떠있던 빛의 창이 저주를 향해 내리꽂혔다. 언제나와 같이 정 중앙을 노리는 정직하고도 단순한 공격. 저주는 그 창을 기다렸다며 땅에 펼쳐놓았던 모래를 들어올려 창의 오롯한 모습 그대로를 잡아채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은백색의 스파크가 그대로 저주의 모래들을 태워버렸지만 저주는 오히려 그 전류를 받아들이며 몸 어딘가에서 이질적으로 반응하는 장소를 찾아 모래를 움직였다. 거대한 몸의 대부분이 타들어가지만 저주가 원하는 효과는 바로 그것이였다. 모든 모래는 균일하게 타들어갔고 그것은 순수하게 저주의 원한으로 만들어진 검은 모래였다. 그러나 단 한군데 다른 속도로 타들어가는 둥근 구체를 보며 저주는 녹색의 눈동자를 곱게 휘어접었다.
“찾았다”
창을 내팽겨 친 저주는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남은 모래를 끌어모아 그 작은 구체를 꿰뚫었다. 눈앞을 어지럽히던 빛이 가라앉고 나서야 주변 상황을 살피는 톨비쉬의 앞으로는 허공에 멈춰선 검은 모래가 서 있었다. 기묘한 예술을 표현하는것처럼 제 몸안의 둥근 구체를 꿰뚫은 녹색의 눈동자는 기기묘묘하게 웃음을 지으며 톨비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은 텅 비었고 황금의 불꽃은 모래의 구체 안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곧 강렬한 밀레시안의 신성력이 저주를 둘러싸며 모여들었다. 사방으로 솟아오르는 정방형의 거울이 마치 하나의 결계처럼 저주와 함께 밀레시안의 영혼을 가두어 잠갔다. 톨비쉬가 불러낸 설원보다도 맑고 반듯하며 저주의 어둠을 한번에 봉인할 수 있는 아름다운 상자에 톨비쉬는 느린 발걸음으로 밀레시안을 향해 다가갔다.
“방해하지 말아요”
밀레시안은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서 죽는것 또한 망설이지 않았다.
14.
“그러지 마십시오”
톨비쉬는 오갈곳 없는 주먹을 움켜쥐다가 그대로 거울을 내리쳤다. 혹여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무색하도록 밀레시안의 결계는 아주 튼튼했고 강인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거울은 아마 톨비쉬의 방패보다 튼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체력을 비롯한 모든 능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만든 결계. 하물며 그 신성력은 끊임없이 저주의 발을 잡아놓고 있었고 일부는 톨비쉬가 탈취하다시피 빼앗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릇의 크기가 다른 정도가 아니었다. 이 안에 담긴 것을 물이나 호수로 비견할 수 있었을까. 톨비쉬는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올려다보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당신은 무엇이 되려는 건가, 하지만 곧 무엇이라는 단어를 지운 톨비쉬가 머리를 내저었다.
당신은 사람이다. 오롯이 이 세계를 사랑하고 그 안에서 살아나가는, 톨비쉬는 이 말이 나만의 욕심은 아니었다며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설득했다. 손을 잡지 않았습니까, 내 이름을 불렀지 않나. 톨비쉬의 입술이 달싹거려졌지만 밀레시안의 이름은 발음되어 흘러나오지 않았다. 혀 안쪽에서 둥글게 몸을 말아 모습을 숨긴 말 한마디가 쓰디쓴 알약처럼 톨비쉬의 목을 훑어 내렸다. 마른기침이 폐를 두드렸고 서리조각같은 찬 기운이 온몸을 뒤덮었다. 톨비쉬는 입가를 한번 훔친 뒤 결계를 한 바퀴 훑어보았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결계의 모습을 확인한뒤 톨비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가장자리를 쓰다듬었다. 서글프도록 날카로운 얼음의 가시가 튀어나오며 톨비쉬를 밀어내었다. 톨비쉬는 끌어안을 수조차 없는 결계를 보며 절망해야했다.
나는 당신을 희생시켜야 합니까? 톨비쉬는 소리없이 물음을 던지며 한발자국 물러섰다. 짐승의 목울대처럼 그르렁거리던 구름이 기다렸다는 타이밍으로 벼락을 내리꽂았다. 잠시 은빛으로 빛나는 결계 안에서 매캐한 연기가 올라왔다. 해조류가 타오르는 냄새, 톨비쉬는 마녀의 저주채로 저주를 불사르는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밀레시안은 정말로 자신을 해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답답함에 소리쳤다.
“그만두세요, 제가 오지 않았습니까.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톨비쉬의 말소리는 공허하게 울려 퍼졌고 두 번째 벼락이 내리쳤다. 미세한 잿가루가 가장자리에서 흩날렸다. 첫 전류보다 좀 더 오래 거울은 빛을 품안에 끌어안으며 섬광을 번뜩거렸다. 톨비쉬가 전류에 휘말릴 것을 각오하고 거울에 손을 얹어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쿵하고 안쪽에서 작은 반항의 충격이 밀려나왔다.
‘바빠죽겠는데 당신까지 성가시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밀레시안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톨비쉬는 기가막힌 표정으로 손을 때었다.
“그게 지금 저에게 할 말입니까? 저는 지금 자이언트 첩보조 한가운데서 의식을 닫고 있습니다. 조원들도 없이, 당신 하나만을 보고요!”
당신이 찌른 상처도 끌어안고, 라는 말을 하기엔 자신이 너무 치졸해 보일 것 같은 느낌에 톨비쉬는 가까스로 마지막 막을 삼킨 채 거울을 노려보았다. 핏기 없이 조금 그슬린 금발의 남자가 초라한 모습으로 거울안쪽에서 노려보고 서 있었다.
밀레시안은 대답하지 않았고 톨비쉬는 거울의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다시 손으로 벽면을 잡고 불꽃을 피워 올렸다. 푸른 신성력이 거울을 뒤덮으며 밀레시안의 이름을 불렀다. 목구멍을 거슬러 올라온 쓴물이 그의 말자락을 붙잡았지만 고집이라면 그 또한 밀레시안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스파크로 밝아진 거울의 표면에 톨비쉬의 그림자가 비쳤다.
“그런 나를 조금 더 의지해 줄 수는 없습니까?”
여기서 당신을 잃어야한다면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순간을 이 순간처럼 납득해야하는 걸까. 이 물음은 톨비쉬를 위한 것도, 밀레시안을 위한 것도 아니였다.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대화. 당신은 나에게 대답해 줘야만해. 톨비쉬는 그렇게 이를 악물고 밀레시안의 영혼을 찾아 눈을 감았다. 아주 잠시동안 밀레시안의 모습이 비쳤고 사라졌던 저주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겁쟁이...!’
저주는 밀레시안을 비난하며 소리치다가 톨비쉬와 눈이 마주쳤다. 검은 모래는 톨비쉬의 신성력을 구원줄삼아 필사적으로 기어나와 거울의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제 뜻대로 되지 않았는지 저주는 밀레시안이 만들어낸 거울에 못박힌채로 겨우 머리만 들어 톨비쉬를 노려보았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거울주변은 톨비쉬의 설원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저주는 그런짓 하지 않아도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한다며 빈정거렸다.
“그렇게 애처롭게 불러봐도 소용없어. 별은 네 생각보다 나쁜놈이니까. 밀레시안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을꺼야. 내가 있든 없든, 도망치고 또 도망치며 네 손안에 얌전히 붙잡혀 있지 않을꺼라고.”
톨비쉬는 일부러 대꾸하지 않으려 했지만 저주의 말은 꽤나 아프게 찔러들어왔다. 저주가 보고 이해한 그대로 밀레시안은 언제나 도망쳐왔다 죽음으로, 또 다른 모험으로.
톨비쉬의 품으로 들어온 이유 조차 오래된 친구의 배신에 이은 도피였지만 톨비쉬는 그런 밀레시안을 비난하지 않았다. 내게로 오는 여정이 길었을 뿐.
그렇게 생각하기 위해 톨비쉬는 일부러 오랜 시간동안 밀레시안을 지켜보면서도 그 앞에 모습을 들어내지 않았다. 모습을 드러낸 후에도 거리를 유지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손을 뿌리치지 못하도록, 옭아매고 몰아넣으며 그렇게 기다리고 참아왔다. 일부는 포기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기적과도 같이 밀레시안의 시선이 톨비쉬를 향했고 그 순간까지의 시간은 너무나도 오래 걸렸었다. 톨비쉬는 이제 조급해하고 있었다.
열쇠를 거절하던 순간 자신이 서두르고 있음을 자각했지만 이미 달리기 시작한 마음을 멈춰 세울 수는 없었다. 엘베드의 조장으로서, 신의 검을 받드는 기사로서, 몇 가지의 이유가 주어진다면 응당 그 이름을 따라 이 마음을 접어야 하겠지만 톨비쉬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만 하더라도 벌써 몇 개나 해서는 안될 일을 몇 개나 저질렀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톨비쉬는 갑작스럽게 행동을 멈추고 검을 내렸다. 저주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점점 기묘하게 변해가는 톨비쉬의 얼굴을 응시했다. 웃음을 참지못하고 입꼬리를 올리는 톨비쉬가 고개를 숙인채 입을 가렸다. 해서는 안되는 일.
톨비쉬는 저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엘베드의 붉은 뱀이 그의 뱃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밀레시안이 이 모습은 보지 못하고 있기를.
저주는 밀레시안의 기억속에서 한번도 본적이 없는 그의 모습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이 품고있는 황금색 불꽃이나 밀레시안과 알반의 기사가 사용한 푸른 신성력과는 다른 무언가. 그것은 신성력이라고 하기엔 너무 위협적이였고 이질적인 무언가라 하기엔 저주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친숙한 무언가였다. 탐욕? 악의? 어느 것인지 특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분명 정갈하거나 순수한 감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운이였다. 그의 갑옷에서 붉은 해골이 번쩍이는 것처럼 보여졌다. 톨비쉬는 저주에게 다가가 그 눈동자를 움켜쥐었다. 뭐하는거냐고 소리지르는 저주의 말따위는 들리지 않는 것인지 톨비쉬는 보석안으로 신성력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뱀과 같이 새된 숨소리가 톨비쉬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동-”
“자..잠깐 기다려…! 그런짓을 했다간 밀레시안도 무사하지 못해!”
“변형-, 무슨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설마하니 제가 별을 포기하겠습니까?”
저주는 겁에 질린채로 머리를 구성하던 모래를 뻗어 톨비쉬의 팔을 휘감았다. 거울안에서도 갇혀있던 모래들이 꿈틀거리며 거세게 요동쳤지만 단단하고 매끄러운 거울을 뚫고 나올 수는 없었다.
황금색의 불꽃이 녹음을 따라 번쩍거리며 톨비쉬의 눈을 현혹시켰다. 톨비쉬는 당치도 않다는 눈으로 이교도의 신성력을 튕겨내고는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의 불꽃은 단단했고 강대했지만 붉은 색이였다. 때때로 푸른 색으로 돌아올 때도 있었지만 두가지 불꽃을 번갈아 내보이며 복잡하게 신성력을 운용하는 그의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나왔다. 너무 무리한 나머지 얇게 이어져있던 상처가 터져나온 것은 톨비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일에서 중요하다고 꼽을 것은 밀레시안과의 관계성과 바쉬배르 왕가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그리고 그 일을 시말서만으로 끝낼 수 있을지 정도. 아마 종이 몇 장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그의 마음을 잠시나마 무겁게 스치고 지나갔다. 안그래도 오늘 일을 모두 캔슬한 것으로 이를 갈고 있을 상부에서 얼마나 즐거워 할지. 톨비쉬는 약간의 사심을 담아 보석을 움켜쥔채 신성력을 주입했다.
“부여-”
톨비쉬는 자신의 특기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응용하는 것에도 부족함이 없는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신성력을 강제할 수도 있고 가져올 수도 있었으며 다른이에게 부여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능력을 옮기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을 옮기는 것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단지 그 대상이 기사가 아닌 정화해야할 저주의 영혼 이었을뿐.
마치 하나의 피해자처럼 톨비쉬 개인의 사욕을 담아낸 붉은 신성력이 저주의 보석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피해자의 영혼마냥 강제적으로 주입된 힘은 일시적이나마 모래줄기에 활력을 가져다주었고 모래는 곧장 솟구처 톨비쉬의 목을 내렸지만 그 뿐이였다.
마지막까지 건재한 밀레시안의 신성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톨비쉬의 양 옆으로 분노의 빛을 쏟아 부으며 남은 모래를 하얗게 태워버렸다.
저주는 잠시 푸른 신성력에 마비가 된 듯 보석을 파르르 떨었고 녹음을 잃은 채 잠시 멍하니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저주의 몸을 타고 들어간 톨비쉬의 신성력이 검은 모래속에서 눈을 떴다. 불투명한 녹색보석 너머로 지치고 상처입은 밀레시안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찾았다.’
거울속의 톨비쉬가 웃음지었다.
거울 속에서 들리는 것은 거울의 허상이 흉내 내는 말소리뿐이었다. 원래부터 거울이라는 것이 대화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었기에 진실의 거울은 대상의 말에 대답해야한다는 기능조차 갖출 필요성을 못 느낀 모양이었다. 정해진 마음을 복사하고 반전하여 그대로 출력해낸다.
좌우가 바뀐 것만으로도 거울의 주인들은 그 위화감을 기준으로 허상을 타자화 했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받아들였다.
키리네를 비추던 거울은 특히나 그 힘이 강력한 물건 이였고 그 효과는 확실했다. 거울은 저주를 비추었고 밀레시안을 비추었으며 지금은 톨비쉬가 비추어진 상태였다. 거울이 밀레시안을 향해 속삭였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손을 내밀어도 쳐내기에 급급한 당신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부당하다 여기면서도 사랑스럽다 여기는 이 마음은, 누구의 것입니까?”
원망했던가, 톨비쉬는 자신의 입을 가린채 턱을 쓸어내렸다. 미워했었던가, 부당하다고 느낀 적은 있었다. 하지만 밀레시안에게 그러한 감정을 내보일 생각은 없었다. 오른쪽의 표정은 완벽하게 통제했지만 왼쪽의 얼굴은 그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톨비쉬는 조금 냉정하게 머리를 식히며 스스로를 반성했다.
더 완벽하게 표정을 감췄어야지. 거울은 작은 소 동물처럼 귀를 팔락거리며 눈을 감았다. 톨비쉬의 신성력이 거울의 안쪽에서 타올랐고 밀레시안의 분노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났군. 톨비쉬는 쓰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거울의 시야가 멀어지며 결계 안쪽에서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믿을 수없어. 어떻게? 그렇게 탐욕적이고 어둡고 가라앉은 감정을 품으면서 빛을 낼 수 있는거야? 어떻게 그렇게 더럽고 악의 가득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깨끗한척 푸른 빛을 띌 수 있는거냐고”
톨비쉬의 일부를 흡수한 검은 짐승은 곧 정신을 되찾고는 경악을 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저주는 최대한 도망치기 위해 몸을 축소해 작은 짐승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지만 그 끝은 여전히 거울에 묶여있었다.
태연히 검을 들어 올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검은 짐승은 신경질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것은 당혹스러워 했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개의 상반된 감정. 그러나 절제된 마음은 깔끔한 모양새로 포장하는 그를 보며 저주는 차마 저열한 기만이라고 이름붙이지 못했다. 그 남자와 다를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그의 감정은 너무나도 충실하게 밀레시안을 향하고 있었다.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톨비쉬는 푸른 신성력으로 이어진 가슴을 확인하고서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이어진 디바인 링크로 느껴지는 밀레시안의 영혼이 그에게 여유를 되돌려준 모양이었다.
톨비쉬는 잠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다가 검을 들어 올렸다. 검은 날개장식이 온전하게 복원된 디바인소드가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내가 허술한 남자가 아니니까 가능한 일이지.”
톨비쉬의 검이 거울의 결계를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허공을 가르는 거대한 심판의 검이 소울스트림을 내저으며 거울의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한번, 금이간 거울을 확인한 톨비쉬가 다시한번 검을 들어올렸다. 부서진 결계안에서 쏟아져나올 모래에 밀레시안을 잃어버릴까 하는 걱정은 되지 않았다. 밀레시안은 그의 품속에 있는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저주는 앞발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황금색 불꽃이 불만스럽게 모래를 밀어내었지만 페리도트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페리도트의 안에 불어넣은 감정은 그러한 것이었다.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을정도로 낯 뜨거운 것, 원색적인 것, 때로는 상처 입히고 방치하며 그럼에도 소중하게 보듬어 안는것. 지나칠 정도로 신중하고 끈질길 정도로 인내하면서 스스로 그 함정 안에 빠질 때까지 지켜보고는 결정적인 순간 구해주러 손을 내미는 것, 그의 감정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그 꼬겨드는 과정은 저주가 증오하는 남자의 사탕발림과 닮아있었지만 그 속안을 채우는 말은 텅 빈 거짓된 말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거짓만을 피해 올바른 진실을 알려주지 않은 간교함, 저주는 톨비쉬를 사기꾼이라고 불렀고 톨비쉬는 책략이라며 검을 후려쳤다. 균열에서 거울조각이 튀어 올랐다.
“내 본체를 부순다고 해도 내가 바로 사라지지는 않아. 나는 밀레시안의 어둠 안에 뿌리내렸고 이 감정은, 밀레시안의 불안감은 완전히 제거해 낼 수는 없어. 나는 언제고 다시 돌아올 수 있어.”
나는 끊임없이 되살아날 꺼고 네 별을 괴롭힐 꺼야. 저주는 마지막에서야 본연의 모습을 되찾으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인간의 모습은 잃어버렸지만 아직 저주의 안에는 수많은 원혼들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공허했고 희생자를 원하며 특히나 타라에 강한 집착을 내보이고 있었다. 나에겐 미움이 있어, 절망이 있어, 타인을 질투하고, 욕망하며, 원망하는 마음이 남아있어. 이 모든 어둠은 언제고 나를 다시 불러내. 저주는 발톱을 꺼내려 애쓰며 자세를 낮추었다. 톨비쉬는 감흥 없는 싸늘한 눈으로 저주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건 상관없어. 네 말대로 그 어둠이 내가 준 것이라면, 밀레시안의 망설임이 나로 인한 것이라면”
톨비쉬는 한손으로 능숙하게 검을 회수하며 검을 고쳐 잡았다.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거대한 신성력이 검의 모습을 갖춰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신의 기사. 저주는 금방이라도 그에게 달려들 태세로 다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거대한 검이 검은 짐승채로 허공을 가르며 거울의 결계위로 내리 떨어졌다. 녹색의 보석을 불태우던 황금색 불꽃이 퍽 하고 터져나가며 푸른 불꽃으로 물들었다. 두 눈을 태우는 고통에 저주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와자작- 하는 소리와 함께 깨져나가는 거울의 틈새에서 검고 뜨거운 모래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음속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건지 모래들은 쉴 새 없이 흘러가며 저주의 몸을 뒤덮었다. 멀어지는 톨비쉬의 목소리가 저주의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별은 그 때마다 내 손을 찾아 올테니까.”
녹색, 모래속에 휩쓸려가는 저주는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어둠 너머에서 보이는 기사의 푸른 눈동자가 어째서인지 웃는 것 처럼 번져 보인다며 머리를 흔들었다. 열정적으로 타오르는 붉은 불꽃은 퍽이나 아름다웠지만 저주는 깨어져가는 보석으로 톨비쉬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녹색은 정말이지 붉은색이랑은 어울리지 않아. 황금의 불꽃이 검은 유사속에 쓸려내려가며 녹색의 눈동자도 검게 닫혔다. 톨비쉬는 쓸려 내려가려는 밀레시안을 건져올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의 별”
데리러 왔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톨비쉬의 의식도 빛속으로 번져나갔다.
15.
“사기꾼이네”
밀레시안은 키리네에게 25골드를 지불한 뒤 건네받은 붕대를 쫙 펼치며 대답했다.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사기꾼에 어리광쟁이에 거치적거리기까지 하네요.”
밀레시안은 당신 잘못이야. 라고 딱 잘라 이야기하며 조심스럽게 붕대를 감아내었다. 꽁꽁 얼어붙은 알반의 기사를 데리고 돌아온 다우라는 바이데 재상을 거친 크루크에게 한소리 들어야했지만 결과적으로 생명의 한계까지 밀레시안을 붙잡고 있었던 탓에 크루크는 왕가의 비밀을 거래조건으로 제시한 수상한 교단의 기사와 그가 데리고 온 자이언트 왕비의 암살 시도자를 마을에서 유일한 힐러 용품을 취급하는 여성의 집에 묵도록 허락해야했다. 크루크는 불만스러워했지만 알반의 기사를 동사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자이언트의 동맹이자 그림자의 영웅을 홀대 할 수도 없는 일이였다. 당연하게도 바이데 재상은 길길이 날뛰며 반대를 표시했지만 힐러의 역할을 맡은 키리네는 엄지손톱으로 목을 그어 보이며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럼 사망확인서에 재상의 이름을 적어도 되겠는가?”
밀레시안은 키리네를 돌아보며 베이스포션을 구입했다. 밀레시안의 옆에서 해맑은 얼굴로 앉아있던 골든 리트리버가 만드레이크와 베이스 허브를 꺼내들었다. 톨비쉬는 만드레이크는 맛이 없다고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밀레시안은 앉은자리에서 20개의 포션을 만들어내는 큰 손의 위엄을 보이며 톨비쉬에게 내밀었다.
“다 마시면 포션중독이 올 겁니다”
“괜찮아요. 중간에 온천에 떨어트리고 가면 되니까”
우선 세병. 밀레시안은 리트리버에게 병을 다 비우는지 확인하라고 말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레시안의 움직임에는 더 이상 비늘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고 걸음걸이 또한 더 이상 무겁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톨비쉬는 앞발을 기대어오는 금색의 개를 들어다 보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병을 들이켰다. 쓸데없이 복잡한 사람보다 단순하고 순수한 동물의 눈빛이 그에게는 더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왔다. 더욱이 거래로 제시할만한 고기조각이 없는 지금으로서는 더욱 더. 톨비쉬가 두번째 병을 비우다 사례가 들리자 리트리버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려오는 손을 코로 밀어 올렸다. 다 마시라는 압박에 톨비쉬가 한숨을 내쉬었다. 만드레이크는 정말 그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기억에는 없지만, 본의는 아니지만,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찌르려고해서 미안하고요”
밀레시안은 침상에서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키리네의 거울을 돌려주었다. 키리네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대답으로 거울을 끌어당기며 어디 흠집이 나지 않았는지 꼼꼼한 눈길로 살펴보았다. 겸사겸사 화장을 확인하는 여왕의 눈 속에는 대범함보다는 권태로움과 지루함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크루크들이 시끄러운 것이 마음이 들지 않는 눈치였다.
“왜들 그렇게 시끄러운 건지 모르겠어. 찔릴뻔 한 건 나고 정작 찔린 건 너의 기사인데 말이야.”
아마 죽을뻔 했지? 키리네는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가볍게 덧붙이며 머리를 정돈했다. 실제로 그것은 남의 일이였고 키리네의 암살은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이었다. 그것을 바쉬베르가의 위엄에 손상이 가는 일이라고 연결지을만한 사람은 바이데 재상뿐이 없을 것이라며 키리네는 한껏 인상을 찡그리며 입술을 모았다. 립스틱이 잘 발렸는지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피해를 입은 것은 없고 말이지”
“아, 실은 하나 있어요.”
밀레시안이 떨떠름하게 대답하자 키리네는 뭐가? 하고 고개를 돌렸다. 겨우 거울에서 시선이 떨어진 키리네는 잔뜩 심통이 난 채로 횃대위에서 등을 돌리고 있는 쉬나벨을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렇게 좋아하는 크루크의 어깨에서 푸드덕 날아오른 뒤로 절대로 밀레시안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쉬나벨은 밀레시안에게 한 웅큼 깃털을 잡아 뜯겼고 그 자리는 휑하도록 비어 차가운 발레스의 바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쉬나벨은 모낭의 모습이 잔뜩 돋아오른 자신의 오른쪽 엉덩이를 내려다보다가 불만스럽게 부리를 딸깍거렸다. 잠시 밀레시안을 노려볼 때도 있었지만 눈치 빠른 리트리버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자세를 낮추었기에 바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개판이네”
키리네는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하며 손톱 끝을 정리했다. 그녀의 목에는 저주가 빠져나간 페리도트 목걸이가 걸려있었고 보석에는 크게 금이 가 있었다. 밀레시안이 목걸이를 언급하자 키리네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카르펜 공주에게 보내 수리할 사람을 수배달라고 할거야. 보석이 깨진 건 아쉽지만 이 금장식은 마음에 들거든.”
“스카하가 들으면 좋아하겠네요.”
밀레시안은 일부러 스카하가 빈정거린 말들을 빼고 키리네를 위해 디자인한 것이라며 살짝 치켜세웠다. 세 번째 병을 따고 있던 톨비쉬가 의외라는 듯이 밀레시안을 쳐다보았다. 의외로 처세술을 잘 하고 있는 밀레시안의 옆모습이 조금 새로워 보이는 기분이었다. 톨비쉬의 시선을 느꼈는지 턱을 괴고 있던 밀레시안이 살짝 고개를 돌려 톨비쉬를 가리켰다.
‘마셔요’
리트리버가 다시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주는 아직도 네 안에?”
“응-, 완전히 정화되지는 않았어요.”
신성력을 옮기는 것과는 별개로 톨비쉬는 정화나 탐색에는 그다지 특화되어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거의 대부분, 아슬아슬할 정도로 저주를 태워놓기는 했지만 그 조각은 여전히 밀레시안의 마음속 어딘가를 떠돌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여전히 검은 짐승의 울음소리를 느끼고 흐느끼는 세 주인의 마지막 모습을 되풀이하는 것을 지켜보아야했다. 덤으로 마지막까지 저주에 얽매여있는 남자의 아내까지. 밀레시안은 가슴에 손을 올린 채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귓가에서 웅성거리던 메아리들이 잠시 숨을 죽인 채 밀레시안의 기척을 살폈다. 밀레시안은 한숨처럼 숨을 토해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톨비쉬가 세 번째 병을 리트리버에게 건네자 덩치만 큰 강아지는 엉덩이를 힘차게 흔들며 병을 물어들었다. 요령좋게 입구만 물고 슬렁슬렁 밀레시안에게로 다가간 리트리버는 곧 채워진 물약 세 개를 물고 돌아왔다. 톨비쉬가 항의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밀레시안은 외면한 채 키리네를 바라보았다. 키리네는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말라며 톨비쉬를 쏘아보고는 밀레시안을 향해 느긋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녀가 둘. 톨비쉬가 네 번째 병을 땄다.
“너무 많이 먹이는 거 아니야?”
“몰랐는데, 꽤 체력이 좋더라구요.”
밀레시안은 디바인링크로 주고받은 감각이 선명한지 살짝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에 키리네가 즐거운 웃음소리를 내며 톨비쉬를 흘겨보았다. 발레스의 팜므파탈이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 몰랐어?”
“까맣고 어두운 흑심을 가진 키리네, 나를 그 안에 끌어들이지 말아주세요.”
거기서 나온 지 얼마 안됐거든요? 밀레시안이 정색을 하며 물러서자 키리네는 더욱 큰 웃음소리를 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거울을 보는 척 이리저리 각도를 틀어 손부채질을 하는 밀레시안을 보는 재미가 쏠쏠한 모양이었다. 밀레시안은 이대로 키리네의 장난감이 되어야하는 것이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은, 그 것보다 더 큰 문제가 바로 옆에 있었지만. 밀레시안은 좀 더 빠르게 비워진 포션병을 받아들며 톨비쉬를 돌아보았다. 그는 더 이상은 못 먹겠다는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다가 밀레시안이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잔뜩 찌푸려졌다는 것은 거짓말같이 온화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사기꾼씨.”
톨비쉬는 그렇지 않다며 손을 들어보이고는 대답했다.
“정말입니다. 전부 마셨어요”
밀레시안이 이야기하는 것은 포션의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톨비쉬는 정말 꾹 참고 마셨다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옆구리가 당기는지 한쪽손이 조금 덜 올라온 상태였지만 톨비쉬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밀레시안은 그가 밀레시안의 마음속으로 들어 왔을 때 육체적으로나 능력적으로나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가 어느 정도 엘베드의 조장으로서 선을 넘은 것도 눈치 채고 있었지만 동시에 모두 그 모든 이유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도 전해 듣고 있었다.
뿌리밖에 남지 않은 검은 짐승은 끊임없이 자신이 보고들은 진실을 이야기했고 어둠이 속삭이는 그의 진심은 타라의 어느 클럽 못지않은 음침하고 어두운 내용들이였다.
부정해야 할 것 같지만 분명 톨비쉬의 디바인링크에서 스쳐지나갔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들. 밀레시안은 그 순간에서조차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톨비쉬를 보며 뺨을 쓰다듬었다. 전에 없던 다정한 손길에 톨비쉬의 눈이 잠시 커졌다 휘어졌다. 그는 밀레시안의 변화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자이언트의 여왕이 보고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여긴 그녀의 집이잖아요”
크루크의 왕비라고 부르지 않는 톨비쉬나 족장의 집이라고 부르지 않는 밀레시안이나. 둘중 어느 누구도 크루크의 존재감을 인정하지 않는 대화에 쉬나벨은 불만스럽게 울음소리를 내었다.
이리오렴, 키리네가 다정하게 쉬나벨을 불러 고기조각을 입에 물렸다. 리트리버가 아주 잠깐 부러운 눈으로 쉬나벨을 쳐다보았다.
잠시 쉬나벨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두사람은 다시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고 조금 빠르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살짝 입매에 힘이 들어간 모습에 톨비쉬는 밀레시안이 무언가를 이야기 하고 싶어 한다는 것까진 눈치 챘지만 왜 불만스러워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놓친 사인이 있었던 건가.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손을 잡자 한 박자 늦게 따라온 눈동자가 톨비쉬와 시선을 맞추었다. 이 이야기는 즐겁지 않은 모양이었다.
“음, 대충 알고 있다시피 내 저주가 아직 완전히 풀린 건 아니잖아요.”
톨비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밀레시안의 안에서 저주는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음을 깨트렸고 대부분의 몸체는 톨비쉬의 신성력에 불타올랐지만 여전히 그 조각들은 밀레시안의 어둠속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톨비쉬가 검을 내리고 나서도 티르코네일은 절반이상이 어둠에 잠겨있었지만 더 이상은 위험하다고 깨워오는 다우라의 경고에 내키지 않는 얼굴로 연결을 해제해야한 했다.
저주를 완전히 뿌리 뽑는 것은 게이트로 돌아가서의 일, 톨비쉬는 흐릿하게 자이언트에게 들려 이동되는 와중에도 해야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놓으며 눈을 깜빡였다. 상부에 밀레시안이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과 자신이 실수 했다는 것, 그리고 이교도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신도를 늘릴 방법을 찾아내었다는 것. 하나서부터 열까지 모두 번거로운 서류작업이 필요했지만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오류를 함께 해결했다는 사사로운 사실에 감사하며 눈을 감아야했다.
일어나자마자 사기꾼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은 조금 가슴 아프지만 뭐, 그정도야. 그렇게 넘겨들으려던 톨비쉬는 밀레시안이 남겠다는 말에 다정했던 미소를 흐트러트리며 손목을 움켜쥐었다. 밀레시안은 이럴 줄 알았다며 톨비쉬의 손을 다독였고 그 손마저 반대쪽 손에 움켜쥐어지며 양손을 모두 붙잡힌 꼴이 되어보였다.
톨비쉬는 스스로에게 진정하라고 짜증을 내며 인상을 찡그렸고 그 모습은 여과 없이 밀레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천천히 설득하는 어조로 톨비쉬의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돌아가면 이것저것 설명해야할 일이 많이 있잖아요. 보석은 키리네에게 넘어갔고 이건 당신 단독선택으로 나온 거고, 상부에서는 스카하에게 넘기는 것으로 되어있었다고 했죠? 그것도 당신 단독 결정이었고?”
밀레시안은 꽤나 아픈 방향으로 문제점을 파고들며 톨비쉬의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톨비쉬는 제볍 격식이 없어진 스킨쉽을 위안 삼으며 밀레시안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처음에 움켜잡은 팔에 손자국이 선명했다.
“키리네의 도움을 받아서 내가 저주를 해결했다고 하는 방식이 좀 더 원만할 꺼라고 생각해요. 키리네는 마나에 민감하고 내가 환생으로 완전히 저주를 떨어트려 낼 때까지 좋은 감시역이 되어줄 꺼고.... 크루크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키리네가 설득해준다고 했으니까 괜찮아요. 바이데는 당신에게 짐을 하나 지워놓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했어요.”
“언제 그런 일을?”
“당신이 디바인링크를 수습하지 못해서 비몽사몽하고 있었을 때.”
밀레시안은 약간의 질책을 담아 톨비쉬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찔러 넣었다. 딱딱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미묘한 푹신함이 손가락에 밀려났다가 다시 튕겨내었다. 키리네의 치료를 돕던 와중에 농담으로 나온 이야기였지만 약간의 중독성 생길 것 같은 촉감에 밀레시안이 한번 더 찔러넣어 보고싶은 마음을 접기 위해 손가락을 거두어들였다.
다음에, 밀레시안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톨비쉬를 바라보았다.
“미리 이야기 하지만 다음엔 절대 이렇게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요.”
밀레시안은 함부로 자신의 신성력을 가져가려했던 톨비쉬를 질책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단계적으로 경험해왔던 밀레시안과 달리 톨비쉬는 편법과 오용, 남용으로 인해 엉망이 된 디바인링크를 경험했던 터라 그 연결고리를 끊는 것조차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는 소울스트림과 에린 중간에 어중간하게 있었고 가혹할 정도로 단련된 신성력만이 그의 영혼을 육체에 묶어두는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기력이 거의 다 소모된 밀레시안이 응급처치로 정신을 차리자마자 했어야 했던것이 톨비쉬의 디바인링크를 수습하는 일. 그래서 상처치유가 더뎠었냐며 붕대를 쓰다듬는 톨비쉬의 손길이 어딘지 약간 어색해보였다.
“반대로군요, 처음 신성스킬을 당신에게 옮길 때는 내가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요. 정말 큰일 날 뻔 했다고요.”
푸념하듯 잔소리를 하는 밀레시안의 뺨을 쓰다듬자 잠시 동안 밀레시안의 입이 다물어졌다.
당신의 눈이 깜빡이지 않네요. 톨비쉬는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삼키며 미소 지었다. 늘 자신만보면 갸웃거리던 귀여운 버릇도, 가끔씩 이렇게 다가갈 때면 꾹 힘을 주던 입매도 모두 느슨하게 다물려있기만 할 뿐. 톨비쉬는 찬찬히 밀레시안의 눈을 들여다보며 허리를 숙였다. 늘 마음속으로 그려오기만 했던 손끝을 미끄러트려 턱 선의 끄트머리를 감싸 쥐며 끌어당기자 거짓말처럼 밀레시안의 입술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닿기만 하는 가벼운 키스. 그러나 파르르 떨리는 밀레시안의 속눈썹이 못내 사랑스러운 듯 톨비쉬는 감히 그 입술을 해집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살짝 부벼왔다. 말캉하면서 물기 있는 밀레시안의 입술이 까끌한 톨비쉬의 입술을 덮어오며 촉촉하게 젹서 나가는 감각은 그야말로 마른 목이 축여지는 것 같은 기적. 톨비쉬는 어린소년처럼 힘차게 뛰는 고동소리에 기가찬듯 숨을 토해내며 겨우 입술을 때어내었다.
“꾸르륵-”
횃대에 날아가지 못한 쉬나벨이 불만스럽게 웅얼거렸다.
“…………”
“…………”
“…………봤어요?”
“봤지”
“………그……”
“내 집인데, 뭔가 불만이라도?”
뻔뻔한 표정으로 밀레시안과 톨비쉬를 내려다보던 키리네는 톨비쉬를 흘겨보더니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재미없는 남자, 거기서 입술만 부벼? 톨비쉬는 왠지 모르게 문장으로 완성되어 찔러오는차가운 비소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얼굴을 대외용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지만 그의 자존심 어딘가가 차가운 발레스의 서리에 긁혀나간 모양이었다.
“남자들이란…”
키리네는 하나같이 다 똑같다며 고개를 내젓고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현관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손에는 어울리지 않는 작은 고기조각이. 다정한 손놀림으로 고깃조각을 카펫 가까이 내린 키리네는 사람을 부르는 것 보다 열 배는 더 다정한 목소리로 밀레시안의 리트리버를 불러내었다. 잠시 밀레시안의 눈치를 보던 리트리버가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꼬리를 흔들며 키리네를 향해 달려갔다. 쉬나벨이 불만스럽게 날개를 푸덕였지만 멀리서 이름을 부르는 크루크의 목소리에 망설임 없이 날개를 펼치며 집밖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키리네는 기대를 저버리지 말라는 미소를 지으며 고기조각을 집밖으로 던져버렸다. 리트리버도 쏜살같이 달려 나가며 힘차게 짖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부터 나의 크루크와 외출을 할꺼야. 아마, 두시간정도.”
충분하지? 라는 무언의 압박이 톨비쉬의 자존심에 다시 한 번 눈뭉치를 집어던졌다. 톨비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눈을 피했다. 당분간은 발레스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지만 상부에서 그런 푸념을 받아줄 리 없었다. 밀레시안이 톨비쉬를 대신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응. 알았어요. 대충 그때까진 치료를 마무리하고 내보낼테니까.”
“밀레시안, 그게 아닙니다”
밀레시안은 두시간 이내에 톨비쉬를 돌려보내라는 말로 알아들었는지 손을 흔들어보였다.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손을 잡아 내리려 했지만 잘 올라가지 않은 왼손은 그대로 톨비쉬의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으로.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에 키리네는 알아서 잘해보라며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
“…………왜 문을 잠가요?”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눈을 마주하며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