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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오블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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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르는 세스티아 아카데미의 비밀스러운 사교(社交)모임의 회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여기서 말하는 비밀은 그들이 허가 받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일뿐 그들이 정말로 어떠한 교리(敎理)를 따르는 무리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들은 사교도(邪敎徒)가 아닌 사교도(社交徒)였다. 그저 모임의 의도가건전하지 못하고 에르그논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전을 가진 미지의 물건을 주술적인 의미로 믿고 있는 평범한에서 살짝 벗어난 세스티아 아카데미의 학생들.
물론 엘라르는 자신이 하는 일이 바보같아보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계속 이 사교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도덕적이지 못하거나 이 윤리적이지 않은 일이라고 믿고 있기 떄문이었다. 가끔 좀 요사스러운 것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어떠한 교리(敎理)를 따르지 않았으니 백 번을 묻더라도 백 번 모두 교도(敎徒)가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아직은. 그러니까, 아직까지는.
그럼 어디서부터가 문제가 되었을까.
“에델레드… 피운갈… 구아드레.. 브리샤..페르하레..”
엘라르는 그 시점이 언제나와 같이 사교회장(社交會長)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보다 앞서 사교모임에 소속된 이들뿐만이 아닌 늦게 들어와 대면자가 된 피운갈 선배와 같이, 거울을 대면하는 자의 선출은 단순히 근속한 날짜의 순서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기준은 사교회장(社交會長)만이 알고 있었고, 그들은 선택되는 입장이었다.
엘라르는 그 알 수 없는 기준의 아홉번째 대면자로 선택되었다.
원래는 다섯명만 선발하고 멈출 명단에 엘라르가 아홉번째 이름으로 불린 까닭은 처음 다섯안에 들지 못한 일부 사교회원들이 강한 불만을 드러낸 탓이었다. 이렇게 모임의 주기가 불규칙한 사교모임에서 입회한 순서도 아닌 명단이 다섯명 밖에 안뽑는 것이 너무 답답하다는 이유였다. 입회만큼이나 더욱이 탈퇴도 자유로운 곳이었기에 그들은 ‘혹시 모를’ 빈 자리를 채울 예비 대면자도 뽑아달라고 요청했다.
사교회장은 상당히 곤혹스러워 하는듯 하였으나 결국 그들의 요구를 승낙했다.
동시에 사교회장은 그들의 불만의 촛점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인지한듯 ‘예비’ 대면자의 명단에는 입회한 순번의 영향을 강하게 드러내었다. 입회의 초기 멤버 다음으로 들어온 엘라르가 아홉번째 이름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도 이 영향이 컸다.
그렇게 약간의 소란스러운 호명시간이 지나가고 다음으로 이 사교모임의 핵심, 거울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사교회장은 거울을 소개할 적에 단 두 가지 규칙만을 설명했다.
첫번째 규칙은 거울에는 어떠한 질문도 허용되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울에 비치는 것과 같이 그들의 거울의 답에는 어떠한 제한도 존재하지 않다고, 사교회장은 자신있게 그들의 신물을 소개했다.
다만 보이는 것과 같이 (성인 남성의 얼굴보다 조금 더 큰 정도였다) 거울의 표면적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으니 여기에 적힐 수 있는 글자 수를 넘어선다면 잘려보일 수도 있었다며 사교회장은 이지선다로 선택할 수 있는 질문이나 답변이 단답형으로 나올 수 있는 질문을 하는 것이 좋을 거라는 조언을 덧붙였다.
언뜻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설명에 첫 대면자 명단에 호명되었던 구아드레 선배가 손을 들고 간단한 예시를 부탁했다.
사교회장은 그리 어렵지 않다며 지금까지의 프롬포트를 모두 무시하고 로흐 리오스의 치즈케이크 레시피를 알려줘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레시피의 앞 부분만 제대로 읽을 수 있고 나머지는 흘러내릴 수 있는 형식이라고 대답했다.
사교회원들은 서로 수근거리며, 혹은 침묵속에 눈빛을 교환하며 사교회장의 설명능력과 이 모임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소란 속에서 한줄기 빛을 비춘 이는 모범생 에델레드였다. 평소에도 심미성을 겸미한 요약노트를 작성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그녀는 그러니까, 읽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개인의 문제이지만 답변은 무조건 나온다는 뜻이죠? 라는 말로 다른 사교회원들의 혼란을 말끔히 해소시켰다.
사교회장은 대단히 기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어 다음 규칙은 질문의 갯수에 관한 설명이었다.
질문은 오직 하나만. 한 사람에 한가지만.
말을 더듬어 다시 처음부터 읽는 정도는 괜찮았지만 이 기회를 틈타 질문의 뉘양스를 바꾸려 하거나 질문을 번복하는 등의 행위는 금지되었다.
또 당연하게도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여 다시 묻거나 더 자세한 질문을 던지는 것 또한 금지사항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질문에 끼어들어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도 금지되었다.
대면자의 명단은 이전의 모임에서 순번을 어기고 대면자의 권한을 약탈한 사람이 있어 생겨난 예방책이었다. 사교회장은 그 약탈자는 어떻게 되었냐는 말에 모임은 그대로 해산되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사교회장은 이곳에는 그런 무뢰한이 없을 것이라 믿으며 만약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해 그런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그 사람을 모임에서 제외하는 것으로 그칠거라며 회원들을 안심시켰다.
그들이 주의해야하는 것은,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자신의 대면자리를 약탈하지는 않을까 경계하는 것이 아닌 질문을 신중하게 골라야한다는 것 뿐이었다.
한번 내뱉은 말은 되돌릴 수 없다.
사교회장은 그 말을 강조하며 마지막으로 한가지 질문을 받겠다고 선언했다.
모두가 눈치를 보는 가운데 브리샤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그런데 대면은 꼭 모두가 보는 가운데에서만 해야하나요? 개인적인 질문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데요.”
사교회장은 난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모두가 지켜보지 않으면 꼭 두번 세번 질문하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심지어 지켜보는 중에도. 라고 말을 덧붙이는 그의 나지막한 혼잣말은 어딘지 성가시다는듯 옅은 짜증이 베어있어 엘라르로 하여금 위화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하지만 왜? 왜 아무도 이상하다는 걸 못 느끼는거지?
엘라르는 눈에 띄지 않되 완전히 잊혀지면 안된다는 미묘한 선을 지키기 위해 애써 웃으며 모임을 파하는 인사에 박수로 화답했다.
이후 첫번째 대면의식이 시작되었다.
첫번째 대면자는 모범생 에델레드였다.
에델레드가 물어본 것은 역시나 성적에 관해서였다. 모범생이라는 타이틀이 앞에 붙을만큼 그녀는 언제나 우수한 성적을 자랑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에게는 악연처럼 뒤따라오는, 그리고 때로는 그녀를 앞서나가기까지 하는 사촌동생이 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동생’이라는 이름은 몇 달의 차이조차 엄격하게 나누는 강조하는 집안의 풍조때문에 강요된 것일 뿐 두 사람의 학년은 항상 동일했다. 그녀는 요령좋게 깐죽거리며 그녀를 스트레스를 받게 만드는 크로제를 이번 시험에서 이길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러자 거울은 거짓말처럼 그녀에게 3개의 숫자를 보여줬다.
[5, 1, 3]
뭐지? 이 숫자로 찍으라는건가?
처음에는 의미를 모를 숫자라며 에델레드는 김샜다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바보같은 미신을 믿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라며 그녀는 정중하게 탈퇴 의사를 밝혀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 깔끔하면서도 미련없는 뒷모습에 여러 회원들이 동요를 일으켰으며 이 흔들림은 그녀를 동경하여 이곳에 참석했던 몇몇 추종자들이 함께 탈퇴의사를 밝힌 것으로 가속화 되었다.
특히나 그들중 하나는 대면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회원 중 몇몇은 이름도 제대로 말하지 않은채 아예 후드를 벗어 얼굴을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소개를 대신하며 저도 그만 둘래요. 라는 성의없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렇게 모임의 규모는 조금 줄어들었고 남겨진 회원들은 제각기 다른 의미의 침묵속에 잠겨들었다.
사교회장은 언제나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 모든 상황을 관망할 뿐이었다.
그러나 에델레드의 [숫자]의 의미가 곧 명확하게 밝혀졌다.
항상 10등 안쪽을 오르내리며 금방이라도 5위 안쪽으로 들어갈듯 기세좋게 성장하고 있던 크로제가 마지막 시험 날,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시험을 망치며 13등이 된 것이다. 13이라는 숫자에 동요한 몇몇 학생들은 급히 에델레드의 이름을 찾아 성적명단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들은 최상단의 다섯 이름표 사이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았다. 5등 이었다.
가채점이긴 하였으나 크로제의 성적은 언제나 가채점의 점수를 따라가곤 했기에 그녀와 크로제의 차이는 오직 마지막 시험날 밖에 없었다.
이는 다시말해서 크로제가 성적을 망치지 않았다면 그녀가아닌 크로제가 5등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하필이면 크로제에게 밀려 6등이 되었을 것이고 ,성적 우수자를 치하하는 행사장에서 그를 올려다 보아야 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 단상아래서 환하게 미소짓는 그녀를 바라보는 사촌처럼말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그냥 우연 아닐까?
에델레드는 분명 열성적으로 공부한 뛰어난 학생이었다. 크로제는 운이 없었을 뿐이고 에델레드는 노력한 결과를 얻은, 그야말로 순리에 의한 정당한 승리가 아닐까?
하지만 사교 모임의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델레드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에델레드는 곧바로 사교회장을 찾아와 자신의 섣부른 판단을 사과하며 모임에 돌아가고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사교회장은 예의 그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에델레드를 환영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거울과 대면했을 때 에델레드가 느낀 실망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에 동요되어 나간 이들은 전부 그들의 선택이고 그들의 책임이었으니까.
사교회장은 수많은 푸념과 원성을 뒤로하고 오직 에델레드만 대동한 채 네번째 모임회장에 나타났다.
그녀가 참석하지 못했던 세번째 모임, 에델레드가 떠난 직후 두번째로 거울을 대면한 것은 졸업반의 피운갈 선배였다.
원래 네 번째로 예정되어 있었던 피운갈 선배였으나 그의 앞에 있던 회원(에델레드를 뒤따라다니는 흔히말하는 추종자스타일의 학생이었다)이 탈퇴를 선언하며 순번을 앞당겨버렸고, 덕분에 두 번째가 된 구아드레 선배는 아직 질문을 생각하고 있다며 신중을 기하기 위해 순번을 뒤로 미루기를 희망했다. 결국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피운갈 선배는 예정보다 빠르게 두번째로 거울을 대면할 수 있었다.
질문의 시기가 빠르면 빠를 수록 좋았기에 피운갈 선배는 사양없이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가 묻고자 한 것은 과제의 방향성이었다. 조형학과에 소속된 그는 닥쳐오는 졸업과제의 작품선정에 깊은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첫번째 시안은 소, 그리고 두번째 시안은 고래였다.
졸업과제의 주제 또한 난해 하기는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적어도 바다와 육지중 어느것을 선택해야하는지를 고심했다.
그러자 거울이 대답했다.
[고래]
피운갈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로 향했다. 시일이 촉박했기에 이후의 모임부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사교회장은 그의 ‘일정’을 이해하고 이에대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을까? 에델레드도 이상한 헛소리를 들었다는듯 반응했는데 피운갈 선배는 너무 쉽게 믿은 거 아니야?
그렇기에 걱정과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고래]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그 자리에 참석한 사교회원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걱정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시험기간이 지나고 있을 무렵, 교외에서 기묘한 이야기가 하나 흘러들어왔다. 고민을 구매하고 싶어하는 소머리를 한 사나이에 대한 소문이다.
정확히는 당신을 괴롭히는 것.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의 원인을 구매한다는 의문에 남자에 대한 소문은 누군가에게는 ‘거울’을,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마족’을 떠올리게끔 만들었다.
특히나 옷은 어느 연회장에 참석할 수 있을 만큼 세련된 남성용 정장을 입고 있으면서 머리는 ‘소’의 형태라는 말은 익히 알려져있는 강력한 포워르, 우제류의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과 같이 행동하고 말할 수 있는 휴머노이드 나이트메어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를 만나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부정했다.
그는 분명 사람이었다고, 그것은 미노타우르스나 휴머노이드 같은 것이 아닌 분명 인간이었다고.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남성.
이렇게 격렬하게 그가 ‘인간’임을 강조하다보니 사람들은 되려 이 기이한 복장의 남성에게 큰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고민’을 대가로 뭘 주는데요?
그러나 그 질문에 답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앞서 흥분하듯 그의 ‘인간’을 주장했던 이들조차 그 질문에 대해서는 입술이 딱 다라붙는 저주를 받은 사람처럼 모두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으며 그렇게 침묵을 머금은 이들은 모두 똑같은 표정으로 질문자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질시, 그리고 경계였다고, 그들을 인터뷰했던 기자는 그 순간의 기묘한 광기를 묘사했다.
이렇게 말문이 닫혀버렸다보니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추측뿐이었다. 누군가는 막대한 금이라고 상상했고, 누군가는 고민을 대신 해결해주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나 그 문제가 사랑이라면? 살의라면?
단순히 물질이나 약간의 용기, 인내, 헌신, 사랑등으로 해결할 수 없는 깊고 오래된, 곪아터진 영혼의 상처에 관한 이야기라면?
신비하고 기괴한 이야기는 사람들을, 그리고 나아가 예술적 영감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빠르게 매료시켰다.
그 중 가장 빠르게 영향을 받은 이들은 바로 이 학교의 졸업작을 준비하는 학생들이었다.
졸업 전시회의 주제가 ‘환상’이었던 만큼 학생들은 앞다투어 작품을 ‘소머리를 한 신사’에 대한 내용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소재가 겹치는것? 상관없었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은 오로지 청자의 상상이고 작가의 솜씨에 의한 것이었으니.
그것이 탐미적이든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든 사람들은 그저 상상을 충족시킬 ‘결과물’을 원했다.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과 직접 만나면 위험할 테니 간접적으로 그를 볼 수 있는 ‘대체제’를 원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러한 ‘수요’라는 것은 한번이라도 시선을 끌어야하는 수많은 전시회에서 아주 중요한 고려요소이지 않았던가.
학생들은 시간과 고집사이에서 갈등하며 제각각의 선택을 내렸다.
그리고 그 선택을 내려야하는 학생들 중에는 당연히 거울에게서 [고래]의 답을 받은 피운갈도 있었다.
사교회원들은 그의 불운을 동정하며 또 몇몇의 학생들이 사교회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 즈음이었다.
중간 시험이 끝나는 날.
에델레드의 [5, 1, 3]의 의미가 밝혀지던 날.
에델레드의 이름을 찾아 명단을 올려다보던 학생들은 그 뒤를 이어 피운갈의 [고래]를 떠올렸다.
그는 과연 거울의 대답을 믿었을까? 아니면 대세를 따라 선택을 바꿨을까.
하지만 졸업작품을 위해 아틀리에에 틀어박힌 그가 무엇을 준비하는지는 같은 조형학과 상급생이라도 알기 어려운 정보였다. 사교회의 학생들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그가 다시 사교모임에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어 세번째 대면자는 구아드레 선배였다.
그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보로가 안 두르그의 비밀은 무슨색?”
거울은 대답했다.
[보라색]
그는 미련없이 일어나 사교회장에게 다가갔고 머리를 깊숙히 숙이며 사교모임을 탈퇴의사를 밝혔다.
사교회장은 그가 머리를 숙이는 모습에 놀라 되려 황송하다는듯 서로 자세를 낮추었지만 사교모임을 탈퇴한다는 말에는 묘한 미소를 보이며 그렇군요~ 라고 나긋하게 대답했다.
혹시 화가 난 걸까?
엘라르는 유심히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에델레드는 감흥없이 구아드레 선배의 어깨를 두드리는 사교회장의 곁에 서 있었다.
사교회장은 좋은 결과가 있을겁니다. 라고 말하며 격려하듯 구아드레 선배를 응원한 뒤 그를 배웅했다.
이번 모임에는 더이상 탈퇴하는 회원이 나오지 않았다.
에델레드의 사과와 더불어 그녀를 제외한 모든 탈퇴한 회원들이 재가입을 거부당했다는 소식이 이미 파다하게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탈퇴한 구아드레 선배는 더이상 질문이 없다는 건지, 아니면 에델레드와 같이 다시 받아줄 여건이 충족되었기에 잠시 자리를 비운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엘라르는 묘하게 이 모임의 열기가 변질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학생들은, 아니 회원들은 전에 없이 열성적인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열렬한 믿음은 어딘가의 종교현장과 같아서 엘라르는 괜히 자기도 모르게 눌러쓴 망토의 후드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어올리자 만면에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는 사교회장과 눈이마주쳐 버렸다.
엘라르는 애써 미소지으며 그의 파회 인사에 박수로 호응했다.
다섯번째 모임이 있기전, 학교에는 또다른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왔다.
이번에는 미스터리 쪽이라기 보다는 사고에 관련된 소식이었다.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린 기사는 다름아닌 타라의 인기있는 레스토랑 보로가 안 두르그의 오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었다.
한창 잘나가고 있는 사업가에다가 그 해의 창의적인 레스토랑으로 뽑힐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였던 그가 갑자기 목을 맸다는 소식은 당연하게도 사람들에게 큰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멀쩡한 사업가가 갑자기 자살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혹시 몰래 도박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에이,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감히 타라 한복판에서 도박내기를 하겠어. 차라리 수상한 약물이 더 신빙성이 높지.
사람들은 저마다의 억측을 내뱉으며 공신력있는 수사단체가 하루빨리 발표문을 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렐타 올라스 기사단이 발표한 조사결과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그들은 한 익명의 신고자의 제보를 받아 보로가 안 두르그의 비밀 허브 농장을 찾아내었고, 그곳에서 금지된 허브인 해피 스위트 허브를 다량 찾아내었던 것이다.
이들이 찾아낸 금지된 해피 스위트 허브는 이름 그대로 달콤한 맛을 가지고 있는 인공 합성허브였다.
언젠가 이멘마하에서 잠시 유행했던 ‘꿈처럼 달콤한 설탕’을 좋아했던 연금술사가 이를 재현하기 위해 만든 인공의 연금식으로 어떤 물건에든 단맛을 스며들게 하는 기술을 만들어 내었고, 이를 이름모를 조직에서 훔쳐간 뒤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중독성 허브와 섞어 개량한 품종이 바로 이 허브.
한마디로 꿈처럼 달콤하고 몽환적인 상태에 빠지게 만드는 위험한 허브였던 것이다.
게다가 기존의 위험한 약들과는 달리 뿌리채로 입에 넣어도 달콤한 맛 덕분에 젊은 층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유통 또한 알록달록한 사탕과 같은 형태로 돌아다녀 단속에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게 문제였다.
당연하지만 단속이 강화된 이후에는 소지하기 쉬운 알약만이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었을 뿐, 이 허브를 뿌리채 구하는 것은 하늘의 이웨카 조각 따오는 정도로 힘든 일이되었다.
그런데 그 금지된 약품의 원료가 타라에서 가장 유행하는 레스토랑에서, 그것도 조미료 창고의 비밀공간에서 재배되고 있었다니?
사람들은 저절로 예상되는 끔찍한 결과에 혐오감과 불쾌감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그게 요리에 들어갔었다는거야, 지금?
어떡해… 우리 가족은 그 레스토랑의 VIP단골이었단 말이야.
지금이라도 검사를 해 봐야겠어! 그런데 이거 누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해야해?!
모른다.
오너는 이미 자살했고 주요 레시피를 담당하는 요리사들 또한 그의 부고기사가 뜨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졌으니.
사람들은 그제서야 오너의 장례식장이 그토록 초라하고 한산한 이유를 이해했다.
소문처럼 살아생전 인덕이 부족한 것뿐만이 아닌, 같은 공범자들이 제 살길을 찾아 재빠르게 도망쳤던 것이었다.
도망치지 않고 남겨진 것은 주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종업원들이나 레시피에 접근 권한이 없는 요리사들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이 보로가 안 두르그에 속해있었다는 사실자체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된다며 그들 또한 도망친 범죄자들과 다를바 없다고 비난했다.
너무한 것 아니냐고?
글쎄.
확실히 그들 중 몇몇 이들은 무고했을 지도 모른다.
특히나 보로가 안 두르그에 오기 전에 근무했던 곳을 다시 찾아가 인정에 호소하는 모습은 제법 처량해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보로가 안 두르그의 직원들이 모두 하나같이 ‘피치 못할 이유로’ 매우 갑작스럽게 전 직장을 그만두었던 이들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요리업에 종사하고 있지 않더라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만큼 보로가 안 두르그의 ‘꽤 공격적인’ 인재영입은 모두가 의도를 알고 있는 공공연연한 비밀이었다.
이렇다보니 그들을 받아주고자 하는 요리점, 혹은 요리와 관련된 이들은 차라리 교황청에 가볼 것을 추천하며 그들에게 친히 길을 알려주기도 했다.
참 다행이지 않은가. 그들이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먹고 사는 타라의 식당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받았을 대응은 길안내가 아니라 소금결정을 담은 윈드 블레스트나 필리아산 암염을 묶어 만든 해머 스매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정도 ‘거부’는 상당히 점잖다고 할 수 있는 편이었다.
그밖에 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중독여부를 확인하고자 성당과 일부 힐러의 집 업무가 마비되는 상황이 일어났으며, 해피 스위트 허브 해독법이라며 소금물을 마시는 민간요법이 유행하고, 이 틈을 타서 가짜 해피 스위트 허브의 해독제(스테미나 포션에 레몬을 넣어 팔았다.) 판매가 유행, 또 한편에서는 진짜 해피 스위트 허브는 이런 맛이다.라며 가짜 허브사탕(판매자는 자신은 선량한 사업가이며 새로만든 이 사탕에 건강을 위한 허브를 넣어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뿐이라고 항의했다.)을 파는 사기꾼도 나왔다는 사건사고들이 있었다.
결국 이 일은 교황청까지 나서서 보로가 안 두르그의 요리에는 해피 스위트 허브가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 시켜주고 나서야 일단락 될 수 있었다.
일이 이렇게 끝나버렸다보니 사람들은 이제 왜 보로가 안 두르그의 오너가 그런 허브를 소지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익명의 신고자가 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신고했는지를 궁금해했다.
그러나 이미 여러차례 증인을 잃어버리는 ‘사고’들을 경험한 렐타 올라스는 이러한 호기심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얼마나 엄중하게 경고하고 사납게 반응했는지 기자들이 신고자의 신원을 알아내다가 자신들이 먼저 ‘사고’당하겠다며 혀를 내두르며 포기할 정도였다.
대신 그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동안 있었던 보로가 안 두르그의 수상쩍은 행적들이라던가, 관련한 사사로운 사건들, 뭔가 껀수가 될만한 흥미로운 이야기들.
그리고 그 시도들 가운데 마침내 모두가 기다리던 ‘그런’ 기사가 하나 발행되었다.
이미 타라에서는 살기 힘들어져 제각각의 고향이나 다른 지역으로 자취를 감춰버린 탓에 찾아내는 것 자체가 천년묵은 마족스크롤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던 보로가 안 두르그의 옛 직원의 기사, 그중에서도 중견급으로 승진하기 직전에 버려진 익명의 하급 요리사가 ‘허브’에 대한 말을 풀어낸 것이다.
그 문제의 기사의 이름은 다음과 같았다.
“보로가 안 두르그의 보라빛 비밀”
기사의 제목이 보라색을 강조한 이유는 문제의 해피 스위트 허브를 보관하는 비밀창고의 열쇠가 [보라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익명의 하급요리사는 그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다른 열쇠로 열면 평범하게 비품 창고로 연결되는 문이 사실은 마법으로 인해 다른 장소와 연결된 비밀의 문이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니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곳이 무슨 용도인지 추측할 수 있었고 알음알음 빼낸 렐타 올라스 기사단의 반응을 통해 그의 증언이 수사과정과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엘라르는 새롭게 밝혀진 사실로 소란스러워진 교실 한 구석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들은 알까?
자신들이 지금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보로가 안 두르그와 관련한 이름들 중에는 지금은 자퇴한 구아드레 선배의 이름도 있다는 사실을?
구아드레 선배는 유명한 레스토랑의 후계자였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이 운영하던 무르 나 하르데는 갑작스러운 영업부진으로 인해 문을 닫아야만 했다.
먼저 확실히 밝히고 가자면 그 레스토랑의 영업부진의 이유는 분명 여려가지 문제가 겹친 탓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들의 레스토랑이 어려운 기색이 보이자 마자 직원들이 하나 둘 그만두기 시작했고, 더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보로가 안 두르그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의 상투적인 비사였다.
보로가 안 두르그는 그즈음부터 새로운 메뉴로 ‘고원 맷돼지 로스트 포크’를 메뉴에 올리기 시작했다.
엘라르는 단 한번도 보로가 안두르그에 가 본적이 없었지만 그 맛이 무르 나 하르데의 ‘숲 맷돼지 로스트포크’와 비슷했을 거라는 사실에 100만 골드를 걸 수도 있었다. 물론 이 내기의 승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같은 곳에 돈을 거는 행위는 어떠한 승패도 가릴 수 없을테니까.
다섯번째 모임.
네번째 대면자 브리샤는 보로가 안 두르그의 오너의 사망기사가 한창이던 때에 거울과 대면했다.
브리샤는 원래 대면자 명단에 오르지 못했던 회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예비 대면자라는 자리를 얻어내었고 또 우연한 행운을 통해 순번이 앞당겨지며 이렇게 네번째로 대면할 수 있는 행운을 거머쥐게 되었다.
역시, 행운은 행동하는 사람의 것이야.
특히나 피운갈 선배의 대면 이후 또 한 명의 대면자가 코앞까지 다가온 자신의 순번을 포기하고 떠난 것이 그녀에겐 더할나위 없는 운명처럼 느껴졌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그녀는 몇번이고 행운이 만들어질 때까지 행동할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의외로 낭만을 아는 소녀였다. 애초에 직접 따낸 과실과 하늘에서 우연히 떨어진 과실의 달콤함은 각별히 다르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10살짜리 던바튼의 꼬마아이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당연하고 올바른 세상속에서 브리샤는 온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듯한 충만한 감정을 만끽하며 거울을 마주보았다.
빙글,빙글. 평범해보이는 탁상거울의 위로 비치는 그녀의 얼굴은 물기 어린 눈동자와 발긋하게 물든 뺨으로 인해 매우 사랑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두 눈을 샘물에 비치는 윤슬처럼 반짝이며 속삭였다.
“이번 졸업식날 고백하려고 해. 내 사랑은 이뤄질거야. 그렇지?”
그녀는 일부러 짝사랑이라는 단어에서 가장 앞글자를 아주 살짝 발음하며 거울이 자신의 말을 잘 알아들었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호시탐탐 그녀를 견제하는 수많은 경쟁자들에게 승리자는 바로 자신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거울 위로 드러나는 붉은 글씨는 그녀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아니]
브리샤는 뭐?! 라고 소리치며 거울을 움켜쥐었다.
반사적으로 그럼 어떻게 해야 이뤄질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당연하지만 첫날 소개하였듯이 두 번 질문하는 것은 금기였기 때문에 그대로 모임에서 퇴출되었다.
여섯번째 모임.
다섯번째 대면자 페르하레는 “보로가 안 두르그의 보라빛 비밀”으로 타라의 안팎이 모두 시끄러웠던 시기에 대면했다.
기존의 모임주기를 감안하자면 더 빨리 대면했어야 했었지만 모임에서 쫓겨난 브리샤가 앙심을 품고 학생회에 이 사교모임을 고발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오랜 시간동안 순번을 기다리던 사교회원들은 그녀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태도에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러나 사교회원들은 분노에, 혹은 자신이 이 모임의 소속인 것이 밝혀져 사회적 위신이 떨어질 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면서도 한 사람의 탈퇴없이 그대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미 [5, 1, 3]을 보았으며 [보라색]을 보았으니까.
그리고 아직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었지만 저 졸업생의 별관 아틀리에 어딘가에는 [고래]도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그들을 먼저 안정시킨 것은 다름아닌 탈퇴했던 구아드레 선배였다.
아니, 이제는 자퇴서를 제출하였으니 ‘전’ 선배.
그는 전에 없이 밝고 개운한 얼굴로 학교에 나타났다.
자퇴서를 제출하러 오래간만에 등교한 그는 주변의 눈치를 살핀 뒤 엘라르에게 다가가 사교회장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는 사교회가 고발당한 것에 깊은 유감을 표했다.
하지만 그는 뜻밖에도 브리샤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자신도 답변을 받지 못했다면 순간적으로 거울에게 매달려 다른 질문을 했을 것이라고, 그러다가 영원히 질문의 기회를 잃어버린다면 또다른 수를 강구했을 거라면서.
동시에 그 만약의 미래를 상상하는 그의 눈이 너무 깊고 어두어 엘라르는 무엇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배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천만다행스럽게도, 사교회장은 일반 학생들이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이 일을 무사히 처리했다.
만약 그가 이대로 모임을 파하고 자취를 감춘다면 사교회장과 브리샤 둘 중 하나는 결딴 날 것같았던 분위기는 금세 잦아들 수 있었고 사교회장은 그 열기를 매우 감명을 깊게 받아들였다고 대답했다.
마치 자신은 절대 결딴 날 일이 없다는 것처럼, 그는 모든 분노를 자연스럽게 ‘고발자’에게 돌리며 회원들의 인내와 헌신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모임은 서둘러 다섯번째 대면자, 페르하레를 단상 위로 올렸다.
페르하레가 물었다.
“내 짝사랑 상대의 소원이 이뤄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거울은 [잘하고 있어.]라고 대답했다.
페르하레는 행복하게 웃으며 그대로 모임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사교모임의 회원들은 그의 ‘졸업’을 축하하며 박수로서 그를 배웅했다.
엘라르는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예상이 맞다. 페르하레는 처음부터 브리샤를 따라 이 모임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그녀의 질문고민에 호응했다. 그러나 그 또한 짝사랑 상대의 앞에서 자신이 질문을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을테니 수를 강구해야 했겠지. 그건 곧 고백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그러나 그는 다른 질문으로 ‘지금’의 평가를 받을 기회도 놓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놓을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페르하레는 지금’도’ 잘하고 있는 것이고 브리샤의 짝사랑은 [이뤄지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다.
여기까지 왔으니 엘라르는 이 모임의 ‘힘’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조금 부족헀다.
딱 한번만 더. 한 가지 사례 정도만 더 모인다면 완벽할텐데.
문제는..
“까악.”
문제는 일곱번째 모임이 이번에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또다시 중단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엘라르는 집회의 중지를 알리는 까마귀전서구를 다시 돌려보내며 오늘 아침 비밀스럽게 배달되어온 신문 앞에 다시 앉았다.
어쩔 수 없었다. 사교회장이 아무리 학생회에 의문의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해도 그건 학교 내에서의 일일뿐 학교 바깥의 사건까지 컨트롤 할 수는 없었을테니까. 아니, 없었나?
없어야 하지 않나. 그도 어쨌든 그들과 같은 '학생'인데?
어찌되었건 이번 외부적 요인은 “보로가 안 두르그의 보라빛 비밀”을 발표한 신문사의 두번째 특종 건이었다.
그 두번째 특종기사란, 예의 그 ‘소 머리를 한 남자’의 인터뷰였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에 대하여 떠도는 ‘헛소문’에 대해 해명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무슨 ‘헛소문’? 그가 ‘마족’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가 나이트메어 휴머노이드의 변종이라는 것?
정답은 어느쪽도 아닌 해피 스위트 허브에 대한 소문이었다.
정확히는 지금까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을 조직에서만 생산 가능한 해피 스위트 허브가 어떻게 레스토랑 오너의 손에 뿌리채 들어가게 되었냐는 것에 대한 해명.
이 일의 시작은 사람들이 이 ‘쉽게 있을 수 없는 일’에 대한 의혹에 대하여 사람들은 가장 그럴싸한 ‘마법의 이론’을 상상해내었던 탓이었다.
“혹시 소머리를 한 남자라면 해피 스위트 허브도 구해다 줄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 경솔하게 ,떠오른 그대로 입밖으로 내뱉은 이 소문은 곧 소머리를 한 남자가 해피 스위트 허브를 구할 수 있다라는 소문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머리를 한 남자가 해피 스위트 허브를 보로가 안 두르그의 오너에게 준 것이다. 라는 소문으로 발전해 나아갔고, 이는 곧 정설처럼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능하냐고?
소머리를 한 남자의 기이한 행적이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소머리를 한 남자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한다는 사실에 진절머리를 냈다. 못한다고 하기엔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으며 그와 같은 사람을 모른다고 할 수도 없었다.
당신에게 고민을 판 사람 중에서 레비아르드 라는 사람이 있나요?
그랬다.
있지. 맷돼지를 닮은 영혼을 가진 살찐 요리사.
레비아르드, 사람들에게는 보로가 안 두르그의 오너로 알려진 그 남자는 놀랍게도 ‘소머리를 한 남자’와 거래를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말 사사로운 고민이 많은 사람이었어. 자신의 머리가 벗겨지고 있는 것도 고민이었고 뱃살이 나오고 있는 것도 고민이었지. 하지만 가장 큰 고민은 역시 사랑이었어.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현실에 고민하고 성애적인 사랑을 쏟을 대상이 없는 것에 한탄했지, 애정어린 관심과 열망어린 눈동자들을 필요로 했어. 하지만 제일 기분나빴던건 역시 그거야. 열등감.
그가 누군가를 질투했나요?
누군가를? 그렇게 헤아리면 3일 밤낮을 이야기해야할걸? 그는 자신의 주변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을 질투했어. 하지만 딱 하나 선의의 의미로 질투한 사람이 있었지.
그건 누군가요?
그건 말할 수 없어. 그는 내 고객이 아니니까. 나는 선량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영향력은 어디까지나 감정(고민)을 파는 사람을 대상으로 정당한 거래를 주고받는 선랑한 비지니스일 뿐 이 세계의 신과 적대할 의사가 없음을 강조했다.
그럼 그가 뭘 대가로 받았는지를 알려주세요.
원래 이런거 말해주면 안되는데 말이야.
하지만 저와 거래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해명기사를 쓸 수 있도록 도와주시도록요.
그래그래. 아주 대단한 특종이 될 만한 인터뷰를 해주기로 약속했지. 그러니까 이 재미없는 인터뷰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고 앉아있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 질문이 뭐였지? 아, 그에게 뭘 줬냐고?
그야 물론 조미료지. 나는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조미료를 줬어.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고, 어떤 말도 안되는 이유로도 납득하게 만드는 기적의 조미료를.
그러니까.. 그는 그 음식에 당신이 판 조미료를 뿌렸다는 말이군요.
그래, 맞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제공한 건 어디까지나 아주 뛰어난 내 ‘솜씨’뿐이니까.
그 조미료는 분명 이 세계에서 나는 원재료를 가지고 만들었고 거기에 우리들의 특별한 기술이 사용된 것 뿐이야.
그래도 걱정된다면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해주지.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과용하지만 않으면 건강에 나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그 맷돼지를 닮은 요리사가 멍청했던 것 치고 나와 약속한 정량을 잘 지켰다는 사실이야. 동시에, 그가 따로 찬 주머니속의 그 물건이 나를 실망시켰고 말이야.
그게 해피 스위트 허브인가요?
그래, 그 웃기지도 않은 풀쪼가리 말이야. 자네가 묻고싶은건 사실 이런거잖아? 내가 그에게 세상 나쁜 당덩어리 마약풀떼기를 팔아넘긴거 아니냐고. 웩. 내 대답은 ‘절대 아니야’야. 그건 내 미학에 어긋나. 애초에 나는 단 걸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내가 사랑관련 고민은 안받아주는 거 보면 모르겠어?
그러면 그는 대체 그 허브를 어디서 구한 걸까요?
몰라. 나는 남의 비지니스에 관심없어.
그러면 다시 질문을 돌려 당신의 ‘비지니스’에 대해 묻기로 하죠. 당신이 판 조미료는 대체 무엇인가요..? 교황청의 검사결과로도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그야 당연하겠지. 말했잖아. 나는 이 세계에서 난 것으로 그 조미료를 만들었어.
그리고 내가 이 세계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정당한 대가로 받은 너희들의 고민이고.
모르겠어? 세상에서 가장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것. 누구도 거부할 수 없고, 어떠한 말도 안되는 이유로도 그 접시를 납득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것.
잘.. 모르겠습니다?
하. 그 머리를 가지고 살면서 왜 자신의 멍청한 자신의 머리를 고민으로 여기지 않는지 갑갑하군. 아니 멍청해서 그걸 고민으로 여길 생각도 못 떠올리는 건가? 잘 들어봐, 덜 떨어진 비둘기 대가리 양반.
만약 자네가 하루종일, 아니 며칠동안 쫄쫄 굶었어. 지금 당장 입에 넣지 않으면 바로 졸도해서 쓰러질 것 같아.
그런데 자네의 앞에 자네가 너무나도 싫어하는 음식이 있다고 가정하자.
자네는 그걸 먹을건가? 아니면 그것마저 거부하고 ‘식성’을 고집할건가.
그야.. 일반적으로는 대부분 다 먹겠죠?
그래. 그게 내가 판 조미료야. [허기]. 상대가 어떤 맛을 좋아하고 어떤 미식을 추구하는 것과 별개로 반드시 그 접시를 비우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 과도한 허기는 음식의 맛을 느낄 새도 없게 만들어 역효과지만 아주 살짝의 ‘터치’정도라면 그 음식을 더욱 맛깔나게 느끼게 만들 수 있어.
그 맷돼지 요리사는 살찌고 멍청했지만 나에게 자신의 요리실력에 대한 고민을 팔려고 들지 않았어. 그는 그것이 자신의 보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내 말은, 너희들이 즐겼던 그 맛은 진짜였다는 거야.
하지만 그는 점점 자신의 실력을 믿지 못하게 되어가며 여러가지 ‘편법’에 손을 대기 시작했지.
남의 레시피를 빼온다던가, 종업원을 빼돌린다던가 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는 끝내 그 갖잖은 풀떼기를 몰래 키우는 것 같은 쓸데없는 일까지 저질러 나를 실망시켰지.
잠깐만요. 그가 요리실력에 대한 고민을 팔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왜 그는 조미료를 얻은건가요?
그야 그는 내게 자신의 요리가 ‘많이’팔릴 방법을 구하려고 했으니까.
완벽한 요리 위에 조미료의 터치 한스푼. 그게 내가 준 해답이야. 그가 뭘 원했는지까지 아예 다 말해주길 바래?
돈이야. 그는 돈을 바랬어. 돈이 있으면 그의 벗겨진 머리도, 툭 튀어나온 뱃살도, 떠나간 친구도, 연인도, 제자도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럼.. 당신은 왜 금화를 직접적으로 쥐어주지 않은 거죠?
내가 직접 해명문을 써서 너의 상사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너와 마주앉아 이 바보같은 인터뷰랑 같은 이유겠지. 나는 사람들의 고민이 좋아. 갈등이 좋아. 더 나아지려고, 변화하려고, 이상적인 모습에 다가가고자 스스로를 고통속에 가두는 모습이 좋아. 그리히여 그 질척한 감정속에서 끝내 빛나는 별과 같은 환희를 싹틔우지. 그러니 나는 너희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편법을 제공해 그 불꽃을 조금 빨리 끌어태우는 것 뿐이야. 그 결과 너희는 조금 더 일찍 시들거나 거꾸러지기도 하지만.. 가끔은 잘 살아남잖아?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고 나서도 다시 나라는 편법을 이용하면 안될까, 혹은 누군가 그 편법의 존재를 알아챌까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꽤 귀엽고 말이야.
….그러면 저도 그렇게 되나요?
글쎄. 너라면 어떻게 생각해? 이 기사가 데스크를 통과 할 수 있을까? 인쇄소에 전달될 수 있을까? 활판 위에 놓여질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 같아? 걱정 마. 우리의 계약은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하니까.약속하건데, 이 기사는 내일 무조건 1면에 실려 나가게 될 거야. 그리고 사람들은 내 존재를 ‘제대로’ 알게 되겠지. 내가 해피 스위트 허브 같은 것을 뿌리는 파렴치한 잡범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그의 말대로 기자의 기사는 인쇄소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가 뒤늦게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거래를 후회하며 인쇄소로 달려가 이를 알렸을 때, 인쇄소에는 이미 신문사 사장과 인쇄소의 직원들이 모여 그의 기사를 읽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인쇄소 직원이 건네는 신문은 받아들었다.
그의 기사는 눈에 띄는 검은 줄로 난도질 당한 상태로 가장 마지막 줄에는 낯선 문구가 쓰여져 있었다.
-귀하가 지불한 고민의 그릇이 정보값에 맞지 않아 거래의 균형을 맞추는 만큼을 제하였습니다. 매우 유감 :(
신문은 전량 폐기되었다.
기자는 친위대에 자신의 발로 출두하여 어떻게 그를 만났는지,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등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 과정에서 몇 부의 신문이 살아남아 증거물로 제출되었고, 또 그 제출의 과정에서 일부 인터뷰의 내용이 유출되어 소문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친위대는 증거를 관리하던 하사관을 비롯하여 신문을 눈으로 확인한 모든 관련자들을 추궁했지만 그 누구도 유출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결백만 증명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러니 편법일 수 밖에.
어찌되었건 그는 인터뷰를 했고 기자는 분에 넘치는 관심(부정적인 의미이지만)을 받게 되었으니 이 기사는 뿌려져야 마땅했고 사람들은 불분명한 인터뷰 속에서 단 한가지 사실만은 확실히 인지했다.
‘소 머리를 한 남자는 해피 스위트 허브를 유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의견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이 신비롭고도 위험한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
그리고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그리고 왕국은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은 공문을 내렸다.
‘만약 소 머리를 뒤집어쓴 수상한 사람이 거래를 요청한다면 응하지 말 것. 매우 위험함.’
왕국의 단호한 태도에 소머리를 한 남자에 대한 옹호론은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
동시에 그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그와의 만남을 부정하기 시작헀다.
특히나 ‘거래’를 한 적 있다는 사람들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으며 ‘정말 만난 적 있다’라고 강하게 말했던 사람들은 거래한 적은 없다고 해명하더라도 곧 사라졌다.
그러나 이렇게 말만으로 어떻게 잡아 땔 수 있는 ‘일반인’들과 달리 자신이 저지른 선택을 부정할 수 없는 이들도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한, 눈앞의 증거를 없앨 수 없는 사람들.
그러나 잡혀갈만큼 잘못하지는 않은 사람들.
맞다.
모두가 예상한 바와 같이, 소를 주제로 졸업주제를 만들던 학생들이었다.
작품의 마무리 단계를 앞두고 떨어진 폭탄에 그들은 울고 고함지르고 부정하고 웃고 작품을 내던지려하다가 제풀에 쓰러져 흐느끼는듯 광기에 잠식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내 눈물을 닦고 일어서 이 빌어먹을 소대가리를 고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뿔을 좀 길게 한다던가.. 아니면 그 끝을 꽃으로 장식한다던가,
옷을 화려하지 않게 바꾸어 농경으로 이미지를 틀어버린다는 식의 눈물겨운 노력들 같은 것.
당연하게도 그런 식으로 급조된 작품이 제대로 된 성과를 낼리 없었다.
그렇기에 가장 주목을 많이 받고 뛰어난 평가를 받은 작품은 세간의 유행과 소문에 흔들리지 않고 우직하기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친 학생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선정된 작품은 꿈결같이 아름다운 하늘의 강, 소울스트림 위를 날아다니는 뿔달린 ‘고래’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피운갈 선배의 작품이었다.
일곱번째 모임을 그렇게 피운갈 선배를 대동하고 나타난 사교회장의 축하의 인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는 다섯명의 대면자가 무사히 탄생한 것을 축하하며 함께 인내하던 예비 대면자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달했다.
그리고 이 성공적인 성과를 기념하여 남은 셋을 한번에 단상에 올려 질문을 할 기회를 주겠다며 차례차례 남은 이름들을 호명했다.
엘라르는 갑작스러운 '축하 호명'에 당황했지만 결국 회원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에 떠밀려 단상 위로 올라 갈 수 밖에 없었다.
자신과 바꿔줄 사람을 찾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녀는 이미 단상 위에 올라와 있었고 그녀가 미룰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한 사람의 질문순서 뿐이었다.
엘라르는 가까스로 마지막 순번으로 물러서 여섯번째 대면자를 바라보았다.
여섯번째 대면자, 디아르마드는 말했다.
“소 머리를 한 남자는 밀레시안인가요?”
[아니.]
그는 아깝다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일곱번째 대면자, 르셰르트는 말했다.
“저도 졸업주제를 점지받고 싶어요.”
[백조.]
그녀는 기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윽고 엘라르의 순번이 찾아왔다.
그녀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거울앞에 섰다.
사교회장은 그런 그녀를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요?”
엘라르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사교회장은 그녀에게 자비를 배풀듯 대답했다.
“좋아요. 5분을 드리도록 하죠.”
엘라르는 다시 하늘이 무너지는듯 한 표정으로 고개를 멈춰세웠다.
5분?
도망을 칠 수도, 지원을 부를 수도 없는 촉박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녀는 혹시나 이대로 단상 아래로 뛰쳐내려가면 어떻게 될까를 상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리였다.
그녀가 밀레시안이 아닌 이상, 혹은 밀레시안이 갑자기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 수많은 눈동자속에서 자신을 데리고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언제 이렇게나 불어났는지 좁다란 비밀회장가득 열기어린 눈동자들이 가득채워져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는 그녀를 부러움의 눈빛으로, 동경의 눈빛으로, 질시의 눈빛으로,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지금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이곳을 떠난다면 그들은 한 때 브리샤에게 내비쳤던 격렬한 증오를 그녀에게 쏟아부으려 들 것이 분명했다.
혹은, 당장 그녀의 옆에서서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재밌게 관찰하는 저 사교회(司敎會)의 장(長)이 자신을 잡으라고 명령할 지도 모르지.
언제부터인가 표정없이 그를 따라다니는 에델레드와, 지금 그녀와 똑같이 표정없이 서 있는 피운갈 선배에게 말이다.
그녀는 결국 물러설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 모든 기억이 자신의 수첩이 기록되었기를 바라며 심호흡을 한 뒤 거울앞에 멈춰섰다.
그녀를 바라보는 거울 속으로 기이한 빛깔의 에르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거구나.
이걸 대면하여 저들이 그렇게 되었구나.
엘라르는 되도록 그 소용돌이를 응시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거울에게 물었다.
“구아드레 선배는 어떻게 되었나요?”
[불쌍한 구아드레는 굶어죽었다. 그는 너무 많은 허기를 먹어버렸다.]
거울을 꽉 채우는 붉은 글씨.
그리고 그 마지막에 눈물을 흘리듯 떨어지는 붉은 잉크, 혹은 점성있는 액체를 보며 엘라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귓가에 가득찬 박수소리 사이로 나긋나긋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