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르웰밀레) 무한의 티타임
밀레시안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르웰린은 문득 스쳐지나가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밀레시안님. 만약 이 시간이 반복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요?"
밀레시안은 손끝에 묻은 쿠키 부스러기를 털어내며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누가, 언제부터 어디까지를 반복시키고 있는지를 알아야겠지. 그리고 나서는 그 반복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하고. 그러다보면 무엇이 이 반복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했는지는 찾아보지 않으시나요?"
"글쎄, 막아야 하는 일이었다면 모를까. 이미 일어난 사건이니 그것까지는 내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솔직히 이제 나는 왜 그런짓을 벌인건지 궁금하지도 않거든."
밀레시안은 남은 차를 냉수처럼 한꺼번에 들이킨 뒤 소리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르웰린은 차 잘마셨어. 라는 인사를 남기며 일어서는 밀레시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요."
밀레시안은 말해보라는듯 고개를 까딱였다.
"이 대화는 몇번째 반복되었나요?"
"353번중에 174번째."
"그리 많지는 않네요."
"그래? 하지만 처음으로 눈치챈 것은 14번째였어. 너는 그때도 그리 빠르게 눈치채지는 못했네요. 라고 말했었지."
"354번째의 저에게 미리 알려줄 수는 없었나요?"
"나도 그렇게는 해봤는데 별로 효과는 없더라. 미리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진실을 말하더라도 '믿지 못하겠다.'라고 말하더라고. 하지만 이건 나에대한 신뢰의 문제라기 보다는 이 반복에 관련되어 있는 안전장치 같았어. 그게 우리를 위한 편의인지, 범인을 위한 방비책인지는 모르겠지만."
밀레시안은 이제 정말 시간이 되었다는듯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몸을 돌려세웠다.
때마침 입구쪽에서는 새로운 티포트를 준비해서 돌아온 메이드가 들어 오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레이트 홀의 입구방향으로 이동, 이내 메이드가 밀고오는 카트 위로 떨어져 내렸다.
고작 찻주전자 하나를 들고 오기에는 조금 과한 크기의 커다란 카트였다.
정원에서 벗어나 입구로 돌아가는 길은 세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도 충분한 넓이였지만 카트의 넓이가 한사람 하고도 반정도를 더 차지했기 때문에 밀레시안은 그녀가 붙어오는 길의 반대쪽 가장자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메이드는 밀레시안이 가까워져 오자 카트를 멈춰세운 뒤 공손히 손을 모아 고개를 숙여보였고 밀레시안은 그 앞을 지나가다가 문득 흥미가 생겼다는듯 말을 걸었다.
"차 향이 좋네. 무슨차야?"
"...카모마일 티 입니다."
"그래? 나도 다음에 마셔봐야겠다."
르웰린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부지런히 손끝을 놀려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특별할 것 없는 대화와, 특별할 것 없는 행동. 그것은 정말 특별할 것 없는 대화였던가.
메이드가 찻잔에 새로운 차를 따를 때까지 곰곰히 생각에 잠겨있던 르웰린은 맑은 찻물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고나서야 손가락을 멈춘 뒤 빙긋이 미소지었다.
그리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밀레시안의 뒤를 쫓아 걷기 시작했다.
"도련님?"
"나도 다음에."
".....예?"
"다음에 마신다고. 밀레시안님이 돌아오신 다음에."
메이드는 손 하나 대지 않고 남겨진 찻잔을 보고 당황한 눈치였지만 이내 침착하게 르웰린의 걸음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뒤 르웰린의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찻잔은 무사히 회수되어 그녀의 카트 위에 담겼고, 메이드는 테이블 위를 꼼꼼하게 정리한 뒤에 카트와 함께 정원을 떠났다.
메이드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치였지만 입구에 돌아왔을 즈음에는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가장하며 흐트러진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래, 기회는 이번만 있는게 아니지 않는가.
르웰린이 갑자기 밀레시안을 따라 정원을 박차고 나갔기 때문에 메이드는 르웰린이 벌써 저택을 나섰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러니 증거를 인멸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고 설령 이번 시간이 충분치 않다고 해도 다음 시간이 충분히 남아있었다.
기회도, 시간도. 그녀에게는 이번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으로 몇번째의 문이 열렸을까.
메이드의 희망찬 믿음과 달리 르웰린은 별관 복도에 선 채 메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이드의 마음에는 순간적으로 뭐지? 하는 불안감이 스쳐지나갔지만 이내 프로페셔널한 사용인의 몸가짐을 유념하며 조용히 고개를 숙인채 카트를 밀고 나아갔다.
그리고 르웰린을 지나쳐 주방쪽으로 향하려던 순간, 저택을 떠나있었을 밀레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르웰린. 깜빡하고 말 안한게 있는데."
"네, 밀레시안님"
너무나도 밝은 목소리와 그에 대답하는 나지막한 대답.
듣는 이로 하여금 섬찟함을 느끼게 하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소리에 메이드의 발끝 균형이 무너지자 트레이 카트가 삐끄덕 하는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돌아온거지?
서둘러 카트를 눌러 다잡아 보아도 이미 한번 뒤틀어진 앞바퀴의 궤적은 수정할 수 없었고 뒷바퀴는 그저 앞이 따라가는대로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었다.
잠깐의 흔들림이었지만 결과는 흥전하게 흘러넘친 찻물과도 같은 것.
메이드는 한줌도 되지 않는 찻물이 새하얀 린넨을 연노란색으로 물들이는 것을 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왜?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 때문에?
누군인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고 언제부터인지도 물을 필요가 없었다.
밀레시안은 거친 쇳소리와 함께 카트를 멈춰세운 메이드를 올려다보며
입가에 띄운 부드러운 미소와는 어울리지 않게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번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그렇군요."
르웰린은 노래하듯이 대답했다.
"그럼 이제 잡아들여도 되겠어요."
르웰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복도 여기저기에 잠복하고 있던 기사들이 뛰어나와 메이드를 짓눌렀다.
비명소리, 쇳소리, 그리고 덜커덩 하고 떠밀려나가는 카트의 소리가 차례대로 들려왔다.
메이드는 억울하다며 저항했지만 믿음의 자비는 주어지지 않았다.
밀레시안의 말대로 이번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저항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이내 별관 2층에서는 그르렁 거리는 짐승의 울부짖음이 시작되었다.
기사들은 곧장 본래의 직위로 되돌아갔다.
별관 한복판에 푸른빛의 광물로 뒤덮인 괴물과 이에 맞서는 기사들의 무위는 분명 환상적인 것이었지만 이미 한참 전에 주인을 잃은 카트에게는 남의 일과도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그저 소란통에 떠밀려나갔을 뿐인 카트는 주인없이 비틀비틀 굴러나가다가 장식용 난간에 부딪쳤고 린넨에 베어든 차 향을 폴폴 풍기며 다른 주인이 이끌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새 주인인지 원 주인인지 불한당인지 모를 누군가의 격렬한 몸짓에 떠밀려 난간 아래로 추락했고 맑은 도자기 소리 파편들과 함께 형편없이 뒤틀리며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밀레시안은 찻물과 찻잔, 티포트의 잔해로 엉망이 된 트레이 카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중 까맣게 변색되기 시작한 바닥을 보며 놀랍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와, 부잣집에서는 벽에 금을 칠한다는 말은 농담삼아 들어봤는데 이 집 바닥은 진짜 은을 칠해놨었나보네..?"
은이 아니라 미스릴이지만. 미관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습격'이 있을까봐 미리 보강을 해둔 것 뿐이지만.
뒤이어지는 말이 무엇인지 짐작한 기사들은 눈치껏 입을 다문채 시선을 교환했고 밀레시안의 곁에는 어느새 르웰린만이 남겨지게 되었다.
밀레시안은 주변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탐욕이 가시지 않는 눈빛으로 바닥을 꾹꾹 밟아보며 안타깝다는 듯이 읊조렸다.
"우리 게이트는 바닥 모자이크가 다 떨어져 가는데... 우리도 언제 한번 이렇게 보강을 해놔야 하는데..."
르웰린은 말소리 대신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입가심용이 아닌 진심으로 진하게 내린 차가 필요해지는 기분에 손을 내저었지만 이내 혀끝이 쓰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손을 내렸다.
그도 그럴것이 방금, 그의 차를 담당하는 메이드가 저택을 떠나갔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집착하고 있던 척 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밀레시안은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며 르웰린에게 손을 내밀어보였다.
르웰린은 그런 밀레시안의 행동에 조금 감명받은듯 고개를 들어올렸지만..
"술마시러 갈래?"
"아뇨. 그건 싫어요. 그렇게까지 감상에 젖을 일도 아니고요."
이내 인상을 팍 찡그리며 몸을 돌려 바깥에서 대기중인 기사들을 향해 걸어나갔다.
홀로 남겨진 밀레시안은 내밀었던 손을 주먹으로 말아쥐며 아깝네! 하고 허공을 휘저었다.
2021년 5월 26일
https://twitter.com/teclatia/status/1397466805346521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