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비밀레)발렌타인데이

마비노기 2016. 2. 13.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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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비밀레 /톨비밀레중심은 1.4.5 순으로 읽어주시면 빠르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순번대로 읽어주실때 1/3정도 특별조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 5부터는 15세 톨비x밀레 입니다













1.

"...아 이건 이쪽"

"이건...저쪽인가요..?"

"7번 화물은 어디로 두면 되는거죠?"

"....."


"톨비쉬 님, 여기 이것좀"

"톨비쉬님! 여기도 확인을!"

"저..., 이건 어떻게 하죠?"


"그건 아 거기 두면 되네. 그리고 이것 좀 부탁하지. 이건..."


수많은 초코렛이 날라다니는 어느 한가한 날의 새벽.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라고. 잘 자고있던 특별조원들은 때아닌 집합소식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 게이트의 중앙으로 집합했다. 밀레시안의 허가를 얻었다는 톨비쉬가 어디서 승인을 얻은것인지 루나사 조원 몇몇과 함께 임시로 묵고있는 숙소앞으로 수많은 상자를 나른다. 특이한 점이라면 초코렛이 담긴 상자는 톨비쉬의 발치에 내려졌다가 다시 바쁘게 옮겨간다는것. 영문을 모르는것은 밀레시안뿐만이 아닌지 일손을 도우라 나온 특별조원들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상자를 내려놓고 옮기기를 반복한다. 하는일은 크게 세가지, 앉아서 하는 분류작업과 상자를 옮기는 이동작업 그리고 뭔가를 적어야하는 서류작업. 요령좋게 배분해가며 널널하게 쉬거나 지쳐 쓰러지는 인원없이 알뜰살뜰하게 부려먹는 톨비쉬의 수완에 밀레시안은 점점 흑색이 되어가는 조원들을 동정했다.


".....하암"

"....밀레시안"


너무 대놓고 하품을 했던것 때문일까, 사람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는 톨비쉬가 어딘지 불편한 기색으로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혹시 심심하십니까?"

"아, 거절할께요. 힘쓰는 일은 딱 질색이라"


"......"


밀레시안의 대쪽같은 대답에 루나사 조원들이 움직임에 눈에 띄게 휘청거렸다. 전투조 조장에게 허물없이 말을 건낼 수 있는 이방인. 익숙해진 게이트 식구들이 아닌, 어딘가에서 차출되왔음이 분명한 기사단원들은 느긋하게 난간에 걸터앉은 밀레시안이 익숙치 않은듯 연신 틈이날 때 마다 고개를 돌리곤 했다. 작달만하고 화려한 색상의 옷을 걸친 낯선 얼굴. 어색함이나 어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슈안님이나 톨비쉬님께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사람. 그러나 이름만은 수없이 들어본 전설속의 영웅, 밀레시안. 그 수많은 전적의 주인공치고는 작고 가냘프다. 맡은일을 착실하게 수행하면서 한눈을 파는 기사단원의 모습에 톨비쉬의 미소가 짙어졌다. 흐음.. 이라는 알수없는 반응을 남기는 무언의 압박이 기사단원의 뒤통수에 따라붙는다.


'우와, 눈빛 살벌해'

'독점욕...'

'..질투 하시는구나'


특별조원들이 저마다 속으로 혀를 내두르는 사이 밀레시안은 기가차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시선도 허락하지 않는 독점욕을 내비치면서 발렌타인 초코렛을 받아챙기는 톨비쉬의 모습을 뭐라고 받아들여야 하는건지. 이 비밀주의 기사님은 도통 설명을 할 생각 없이 소포의 수취인과 발신자를 확인하고서는 서류에 체크하기를 반복할 뿐이였다. 애초에 연인이 받는 초코렛이 화물로 몇 상자씩 오는 걸 보고 달가울리가 없지만 저렇게 당당하게 도와달라고 하는 그 꿍꿍이속이 궁금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톨비쉬의 옷자락을 잡아당기자 다른의미의 미소를 지은 톨비쉬가 슬쩍 밀레시안의 손가락을 잡았다 놓았다. 짤게 스쳐지나갔지만 명백한 애정표현. 손에 들고있는 누군가가 보낸 하트모양의 상자가 번쩍이며 밀레시안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비밀 기사단이라는거 다 거짓말이죠."

"비밀 맞습니다"

"아니 무슨 비밀이라는 집단에 이렇게 택배가 많이와요?"

"정확히는 에린 곳곳에 퍼져있는 임시 숙소로 배달되는 것입니다. 각기 다른 가명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거지만 알맹이의 사람이 저인것 뿐이지요"


투아데 다난 닉변 환생하는 소리하고있네. 밀레시안이 입을 삐죽이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톨비쉬는 카나가 건낸 두툼한 하트모양 상자를 조심스럽게 흔들어보았다. 찰랑이는 소리를 들은 톨비쉬가 슈안에게 건내자 슈안은 모르는 복장의 기사단원에게 상자를 다시 건내었다.


"나눠먹기?"
"와..저를 어떻게 보시고..."


톨비쉬가 상처입었다는듯이 고개를 내젓지만 밀레시안은 감흥없이 그를 외면했다. 기사단원들도 외면하고 싶었다. 기사단에서 가장 완벽하다는 엘베드 조장님의 위트넘치는 애교를. 아튼시미니님, 이건 어떤 시련입니까. 연애? 연애를 하라는건가? 사랑고백의 날을 맞이하여 너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배풀라는 범종교적 전방위 연애훈련인건가, 무언가 계시를 깨달을때와 같이 동공이 흔들리던 기사단원의 귓가에 한심하다는 의도를 감추지않는 밀레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초에, 왜 당신이 나를 여기에 부른지도 모르겠어요. 특별조원들이라면 데려가도 좋다고 슈안씨에게 미리 말 해 뒀는데"


밀레시안의 말에 슈안도 저도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개적으로 처리하고 어린 특별조원들의 손도 빌리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잡일의 영역일뿐. 루나사조와 엘베드조의 합동작전에 가까운 이번일에 밀레시안을 꿋꿋하게 세워둔 톨비쉬의 의도가 궁금햇던건 슈안도 마찬가지였는지 흔들린 고개를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졸지 않았습니다? 정말이라구요?"

"........예에.."


아튼시미니님. 이쪽 말투도 적응되지 않습니다. 오늘따라 신실한 기도를 연달아 올리는 루나사조 소속 기사단원이 울고싶은 마음을 추스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슈안과 기사단원들이 만담을 나누거나 말거나 톨비쉬는 자신의 진심이 전해지지 않은것이 의외라는듯 밀레시안에게 놀란표정을 지어보였다.


"제가 왜 부른지 모르시겠다구요?"
"말해두는데, 난 이번인 진짜 안도와줄꺼에요"


특별조원들의 어깨가 축 늘어졌지만 밀레시안의 입장도 완고했다. 톨비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러길 바래서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무슨말인지 모르겠다는 밀레시안의 반응에 톨비쉬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가장 많이 쌓인 상자에서 소포를 하나 집어들었다. 자신의 물건을 수령하는것 뿐인데 왜들 저렇게 놀라는것인지. 밀레시안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기사단의 방침이 공동소유로 바뀌었는지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동안 톨비쉬 포장지가 손상되지 않게 주의를 해가며 소포를 뜯기시작했다.

반짝이는 종이로 감싸진 포장지를 벗기자 모습을 들어낸 것은 근사한 모양을 낸 초코렛. 왠 갑자기 간식타임인가 의아해하는 밀레시안 앞에서 톨비쉬는 잘보라는듯 조심스럽게 초코렛을 부러트렸다. 특별한 쟤료를 넣어 정성껏 포장한 아름다운 초코렛 안에는 반짝거리는 상아색의 무언가가 알알이 박혀있었다. 둥글고 어딘가는 모났으며 불규칙적인 진주같은 것, 밀레시안이 눈을 가늘게 뜬다. 치아다.


"정열적이네요 한 입만 잘못먹었다간 타인의 일부가 내 뱃속으로 직행하는.."

"전 부드러운 사람이 좋습니다"
"누군지 몰라도 당신에게 정말 큰 인상을 남기려 한 것 같네요.두번다시 잊지못할 강렬함이 담긴 초코렛...이라기엔 좀 기분이 별로지만."


"밀레시안,"


밀레시안은 별로 보고싶지 않은건지 입과 코주변을 문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초코렛으로 포장하긴 했지만 불쾌함을 감출 수는 없는 물건이였다. 톨비쉬는 슈안에게 미안하네 하고 짧게 사과를 건내었다. 포장지를 뜯은 초코렛상자는 이름모를 기사단원의 손에 들린 상자에 따로 넣어져 어디론가로 보내졌다.


"그럼 이게 다 그런 물건들이에요?"
"인것도 있고 아닌것도 있습니다. 걔중에는 먹을 수 있는것도 있다고 들었지만.."

"먹어요? 그걸?"


차라리 키트를 까고말지, 하고 고개를 설래설래 내젓는 밀레시안은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새벽의 공기가 차가웠다


"먹을수는 있지만 먹고싶지 않은 쟤료들이 섞인 경우가 많거든요."

"아,"

"당신이 주는 황금버섯 정도는 먹을 수 있는데"


"그만 거기까지만 말해주세요. 그리고 난 당신에게는 호감도 포션 쓴 적 없어요."

"포션뿐이겠습니까, 말한적도 없습니다."

"....굳이 말로 해야 아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군침이 당기는 대화소리에 루나사조의 귀가 쫑긋 하고 솟아올랐지만 톨비쉬의 헛기침이 그들의 눈빛보다 빠르게 밀레시안을 막아섰다. 역시나 기사단 최강의 방패. 

자신이 보호받고 있다는 자각도 없는 밀레시안은 머리위에서 무슨 시선싸움이 오가는지도 모른채 아직 분류되지 않은 상자 앞으로 걸어갔다. 방해되지 않을 정도의 거리만은 유지하며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톨비쉬가 밀레시안이 소포를 집어들기 무섭게 넘겨받는다.


"포장은 정말 정성들인것들 뿐인데"

"조심해주시길 바랍니다. 개중에는 폭발형 물건도 있으니까요."

".....?"


톨비쉬의 조언에 소포를 분류하던 특별조원들의 손이 잠깐 멈추었다. 그런말은 들어본적 없는건지 디이의 눈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루나사 조원들이 어린 특별조원들의 눈을 피해 다른 상자를 향해 몸을 돌린다. 살아남아라! 벨테인조. 밀레시안이 고른 상자를 요리조리 살펴보던 톨비쉬가 직접 걸어가 다른 박스에 집어넣었다. 손끝에 푸른 신성력이 이어지다 끊어진다.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곁으로 돌아왔다.


"뭐, 이런 저런 일이니까. 신경쓰지 마시라는 의미에서 자리에 동석해달라고 요청한겁니다"

"....."


톨비쉬는 자신이 뭐랬냐는듯 자신만만하고 상쾌한 미소로 밀레시안을 향해 두팔을 벌려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캥기는게 없다는 화려한 금발 미남자의 미소에 밀레시안은 손가락을 까닥이며 포인트를 되짚었다.

그러니까, 전부 이상한 초코렛이니 자기는 받아도 안먹는거다? 밀레시안은 하나같이 신성력을 집중해가며 상자안을 체크하는 조원들과 어디론가 박스를 날라가는 루나사 기사단원들을 손가락으로 번갈아 가르키다가 톨비쉬를 향해 돌아섰다. 밀레시안의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에 톨비쉬는 머쓱하게 팔을 내렸다.


"하지만, 저 안에는 진심이 담긴 초코렛, 그러니까 먹을 수 있고 안전하면서 터지지 않는 그런 평범한 것들도 있는거잖아요?"

"예, 뭐 그렇겠죠. 잘은 모르겠지만"

"조금 무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톨비쉬는 턱을 쓰다듬으며 가장 많이 분류된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저것은 무해등급의 평범한 소포들. 척 보기에도 전체 쌓여있던 양에 비해선 1/10도 안되는 분량이지만 절대값으로 따진다면 상당한 양의 초코렛이였다. 저기에서 또 먹지 못할 쟤료들이 첨가된것을 제하여야 겠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상당한 양의 선물들이였다. 


"별로 관심없습니다. 정말로 저에게 온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톨비쉬는 별 감흥이 없는지 피식 웃어보이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먹을 수 있건 없건, 탈이 나건 안나건 톨비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런 요소가 아니였다. 중요한 포인트를 놓친 밀레시안을 내려다보며 톨비쉬는 쓴 것이라도 삼킨양 찌푸림에 가까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전 이런건 좋아하지 않거든요."

"....이런거..?"


오, 이제 알겠다. 소리없이 톨비쉬를 향해 눈썹을 올린 밀레시안이 심호흡과 함께 입술을 달싹거렸다. 감정을 추스리고 표정을 연기하기 전 아본에서 배운 습관. 밀레시안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거 참 잘되었네요."










2.

밀레시안이 어디론가로 사라진 뒤에도 특별조원들의 일은 계속되었다. 터진다는 말을 들은 뒤로 더욱 조심스러워진 손길을 비웃듯 그저 계속 쏟아지고 쏟아지고 또 쏟아지던 택배들. 페이스 배분을 하며 어떻게든 다른 조원들의 부담을 덜어주려던 로간이 생각보다 많다는 혼잣말을 흘리고 나서야 루나사조 기사단원은 고개를 내저으며 진실을 말해주었다.


"한명이 하나만 보낸다고 생각하니까 많은거야. 하트모양이나 프릴리본에 눈을 빼앗기면 안돼. 이건 평범한 사랑 고백용 초코렛이 아니야. 물론 정상적인 게 1/100에 하나정도 있겠지만.. 매년 이런걸 처리해왔던 우리들 입장에서 보자면 이건 그냥..."

".....말하자면요..?"

"욕망의, 검은 결정체랄까... 크.."


그러니까 초코렛이라는 뜻이죠? 하고 묻는 엘시의 질문에 슈안은 저런사람 모릅니다 하고서는 뱅글뱅글 안경을 치켜올렸다. 뒤에서 뭐라 하거나말거나  루나사조 기사단원은 스스로의 작명센스에 취했는지 크 하고 여운을 즐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카오르가 노골적으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것은 덤. 

슬슬 지켜가는 기사단원들의 뒤에서 명단을 대조해보던 무언가를 찾은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벽쪽에서 다가오는 그리브소리에 잠시 딴짓으로 빠졌던 조원들이 다시 빠릿하게 움직이려하지만 보지않아도 대충 어떤모습인지 알고 있는건지 톨비쉬는 되었다는 손짓을 보내고는 슈안에게 다가갔다. 서서히 자신들의 작업을 멈추는 기사단원들의 시선이 엘베드 조장의 발걸음을 따라간다.


"찾던 이름이 나왔습니다."

"오 그거 좋은 소식이네요"

"이쪽의 ..."

"아, 이사람말이군요. 예, 기억납니다."


무언가를 찾고있었던 기억은 없지만 의례있던 상황이였다..모든것은 주어진 지시대로. 할 수 있는 능력만큼. 톨비쉬와 슈안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루나사 조원들이 수고했다는 인사를 남기며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특별조가 관여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라는 의미였다.


"크흐, 힘들었어. 하필 이전 명단에 들어있었을게 뭐람."
"그러니까 말이야. 어이 벨테인들. 너희도 수고 많았다"


"엣.....끝난건가요?"

마지막 박스를 날라오던 카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시 갔다놔야 하는건지 갈팡질팡하는 카나의 머리를 쓰다듬은 루나사 조원이 손을 흔들자 어디에 숨어있었던건지 기척없던 게이트에 몇몇 낯선 얼굴들이 불쑥 나타나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는 어린 조원들이 귀여운건지 루나사 소속의 기사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특별조원들을 귀여워 하며 늘어져 있던 짐들을 순식간에 챙겨 들었다. 진작 이 인원을 모두 동원했으면 그렇게 허덕이지 않아도 되었을것을.. 마음속으로나마 야속하다 통곡하는 특별조원들을 향해 경쾌한 그리브소리가 다가왔다


"이야, 미안하네. 보고 듣는 손을 최소화 했어야 했었거든. 하지만 덕분에 빨리 찾아낸 것 같아 매우 만족스럽네. 모두들 수고했어."
"아니요, 저희야 말로 도울수 있게되어서 영광이였습니다."


톨비쉬가 팔을 넓게 벌리며 특별조원들에게 다가오자 로간이 대표로 나서서 경례로 답했다.


이미 자신들을 보고 손이라고 부르는 시점에서 톨비쉬가 해 줄수 있는 설명은 끝난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손에는 눈도 귀도 달려있지 않다. 더불어 입도 필요로하지 않다. 밀레시안에게는 그저 질투방지, 루나사조에게는 이 일이 독단이 아닌 것이라는 증인을. 처음부터 일손이 필요했던 엘베드 조 조장은 격려를 암호삼아 로간의 어깨를 두드렸다. 로간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톨비쉬가 잠시 자리를 비운 밀레시안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타이밍 좋게 돌아올리 없다는걸 알면서도 둘러보는 스스로가 우스웠는지 톨비쉬는 입을 가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 미안하군. 습관같은거라"

"....아닙니다"


로간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말한 톨비쉬가 루나사 조원에게 손을 까딱였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조원들인양 일사분란하게 예의 반짝거리는 꾸러미들을 챙겨든 기사단원들은 휘몰아친 바람처럼 시원스럽게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더불어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던 안도 잠시 볼일이 있다며 건물안으로 들어가 버린 게이트. 

모두가 떠나고 나서야 긴장하고 있던 엘시의 입에서 제일먼저 자그마한 한숨이 세어나왔다. 그리고 또 한명, 또 한명. 잠시 공허함에 자리를 지키고 서있던 특별조원들은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만세를 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육체적인 피로감과 정신적인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끝났다-!"

"드디어...!"


"후우... 끝났네요."


로간도 지친몸을 이끌고 난간을 붙잡았다. 새벽아침부터 예정에 없던 집합에 엘베드 조장님의 등장, 거기에 막노동과 다를 바 없는 특별임무. 정신없는 시간이 지나고나자 벌써 정오를 훌쩍 지나있는 점심시간대였다. 지금부터 준비하더라도 확실하게 늦은 점심. 당장이라도 느긋하게 몸을 쉬게 하고 싶지만 옹기종기모여앉아 어깨를 기대어 앉은 여자아이들의 피로감을 확인한 본 로간이 애써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간단하고 빨리 먹을 수 있는것으로. 눈을 감고 쟤료목록을 되짚으며 부엌으로 향하는 로간의 뒤로 두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따라왔다. 원래 점심 당번인 엘시가 로간을 불러 세우며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오늘, 당번은.. 저랑 디이오빠인데.."

"맞아. 로간씨는 너무 돌봐주려고해서 탈이라니까"


말은 유쾌하게 건내지만 짐을 나르는 작업을 연속으로 하던 디이는 서있는 것도 피곤한건지 이리저리 몸을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만 쉬는게 좋다는 만류에도 손사레를 치지만 난간을 잡고나서야 바른자세를 유지하는 디이에게 주방일은 무리일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키가 작은 엘시에게 쟤료손질을 모두 맞기는것도 효율성에는 맞지 않을 노릇. 로간은 처음부터 마음먹은대로 자신이 해야겠다 생각하며 디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쟤료손질까지만 도와주겠습니다"

"응...그건 엄청 구미가 당기는 제안인데, 거절해야하는데, 알고는 있는데.."

"하지만, 로간씨도 힘들텐데.."


엘시가 조심스럽게 로간을 올려다 보았다. 애써 웃는 얼굴을 보이지만 로간의 눈가에도 피로감이 가득하다.

이미 자리를 잡고 짧은 잠을 청한 카오르는 미동도 않고 벽에 기대어 앉아있었고 카나와 아이르리스는 서로 머리를 맞댄채 눈을 감고있다. 디이는 주눅이 들어가는 엘시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생각하는것도 염려하는것도 모두가 비슷한 상황. 디이는 생각보다는 행동이라며 큰소리로 활기차게 소리쳤다.


"로간 씨, 우리 간단한거로 해요. 쉬운거. 혼합요리. f랭크!"

"그래, 그게 좋겠다. 엘시양도 가서 손 씻어야 겠네."

"왜 그런거 있잖아요. 치즈빵이라던가 마늘빵이라던가.. 아, 샌드위치! 샌드위치 좋다. 어디보자 재료가 분명.."


부엌으로 향하는 디이가 천재적인 생각을 해냈다는듯 활기넘치는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을 들었는지 누군가 부엌문을 열며 고개를 내밀어 대답했다. 


"식빵, 토마토, 양배추. 그리고 디이는 베이컨구이 추가해서., 맞지?"

"어.., 조장!"

"조장님!!"


톨비쉬와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틈엔가 사라졌던 밀레시안은 양손가득 쟁반을 들고서는 로간들을 향해 걸어왔다.

깃발로 고정을 한 예쁜 클럽샌드위치들이 양손 가득. 눈짓으로 부엌을 가르키는것을 보니 아직 안에 남아있는 음식이 있는 눈치에 로간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서는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 카오르! 일어나봐! 조장님이 점심만들어주셨어!"

"엣? 조장님.. 요리.."

"으음.. 카나.. 갑자기 그렇게 움직이면.. 네? 밀레시안님이요?"


옹기종기 모여든 조원들에게 간단하게 먹을수 있는 샌드위치를 나누어주자 축 늘어졌던 게이트에 약간이나마 활력이 돌아왔다. 목이 메이지도 않는건지 허겁지겁 빵을 우겨넣는 디이가 손에 묻은 베이컨 기름을 핥은뒤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역시 조장 요리가 최고야!"

"아직 우리 먹고있잖아. 조용히 해"

"하지만 조장님 요리 정말 맛이 있어요.빵도 바삭하면서 따뜻하고 야채도 신선한데 베이컨은 잡쪼름.. 정말 천상의 맛이 이런건가 싶다니까요! 그렇죠 아이르리스씨?"

"흐흥, 조장님의 취향이 대부분 이런 음식이니까요. 아, 그렇다고 딱히 맛이없다는건 아니고.."


조원들이 뭐라고 말하건 밀레시안은 잘 먹는 모습이 기분좋은지 그래그래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비워진 5개의 접시들 사이로 남은 음식은 1인분. 부엌에 있는 남은 음식을 가질러간 로간이 돌아오지 않자 디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간씨는?"
"글쎄, 오븐에 남아있는게 있어서 가지고 와달라고 부탁하긴 했는데.."


"로간씨 쓰러진거 아니야? 왜 그 있잖아 저...저혈당! 음, 밥을 오랫동안 안먹으면 온다는 그거"


디이가 자랑스럽게 새 단어를 꺼내들자 접시를 모으던 카오르와 아이르리스가 과장되게 놀라는 반응을 내보였다. 엘시도 자신이 모르는 단어를 말한 디이가 낯선건지 틀린거 아니냐는 무언의 질문을 보내왔다.


"디이 입에서 저렇게 어려운 단어가 나올 줄이야"

"요 며칠 응급치료책을 끼고있더니 뭔가를 배운모양이네요"


"아니, 그전에 로간에게 갑자기 저혈당이 올리가 없잖아."


거기부터 지적을 해줘야지 하고 밀레시안이 이마를 부여잡는동안 부엌을 나온 로간은 요령좋게 발을 밀어 문을 닫고서는 양손가득 무언가들 날라왔다. 한손에는 달콤한 가토 오 쇼콜라가 다른한손에는 담백한 우유를. 로간이 다가오자 사탕같은걸 찾아야한다고 호들갑을 떨던 디이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행복한 숨을 내뱉으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조장님, 마실 것을 조금 찾느라 늦었습니다."

"로간씨, 빨리! 빨리!"

"로간씨, 빨리요~!"


멀리서부터 풍겨오는 달콤한 쇼콜라의 향기에 두번째 파티가 시작된 것 마냥 특별조원들은 다시 접시를 나누어 가지며 로간의 이름을 연호했다. 밀레시안은 로간에게 수고했다고 인사를 건내곤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와 쇼콜라가 담긴 접시를 교환했다. 카오르가 우유단지를 받아 각자의 컵에 따라주는동안 행복한듯 쇼콜라를 입에 머금은 카나와 아이르리스가 고개를 붕붕저으며 행복한 탄성을 터트렸다. 엘시도 쇼콜라가 마음에 드는건지 양 볼을 빨갛게 물들인채 열심히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눈앞에 보면서도 먹지못했던 초코렛을 배려한 밀레시안의 깜짝선물에 로간도 탄성을 내뱉으며 눈을 반짝였다.


"이 질감, 이 촉촉함! 굉장합니다. 조장님! 저도 몇번이나 시도해 봤지만 이 택스쳐는 정말이지.."

"택스쳐가 뭐야? 아 아니야 그냥 맛있는 거라고 생각할께"

"너란 녀석은 정말.. 아니다. 그냥 그렇게 정리하자."


로간이 흥분해서 쇼콜라를 분석하는동안 이미 한입에 털어넣은 디이가 접시에 뭉게진 조각을 포크로 싹싹 긁어내며 아쉽다는듯이 중얼거렸다. 포크를 입에 물고도 성이 안차는지 방금전에 느꼈던 맛의 행복을 회상하던 디이가 소원을 빌듯이 중얼거렸다.


"으음, 진짜 맛있었어. 또 먹고싶다."

"한번에 많이 먹으면 질릴껄"


"아니 아니, 그럴리 없어"

"아니요, 절대 그럴리 없습니다"


밀레시안의 제지에 디이와 카오르가 그럴리 없다며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럴때면 호흡이 찰떡같은 두사람의 모습에 밀레시안이 큭큭거리며 웃음을 흘린다. 서로가 창피하다며 투닥거리는 두사람에게서 접시과 포크를 돌려받은 밀레시안이 아직 분석이 끝나지 않은 로간을 확인하고는 남은 인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를 조용히 논의중이던 여자아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밀레시안을 마주봤다.


"앗..!"

"....? 접시줄래?"


밀레시안이 손을 내밀자 우물쭈물하던 엘시가 카나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은것이 있을 때 나오는 엘시의 버릇에 밀레시안이 카나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괜찮을꺼에요! 하고 응원하는 아이르리스도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지 열망에 넘치는 눈으로 밀레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밀레시안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세 아이들을 내려다 보았다.


"저...."


어느새 자기몫을 다 먹은 로간이 실례하겠습니다 하고서는 밀레시안의 무릎에 있던 접시들을 가지러 다가왔다. 기다려보라는 밀레시안의 제지에 의아해하는 로간이 카나를 바라보았다. 카나는 다급함에 살짝 붉어진 얼굴로 밀레시안에게 소리쳤다.


"저희에게 이 요리를 가르쳐주실 수 있으신가요?"

"응..?"

"내..내년부터는 직접 만들생각이니까요!"


"아, 뭐... 그러지 뭐. 아, 부엌은..."


카나의 용기에 힘을 얻은 아이르리스가 부끄러운듯 호기롭게 소리를 치며 얼굴을 붉혔다. 그게 뭐 어려운이야기라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밀레시안이 로간을 향해 눈짓하자 로간도 고개를 끄덕였다.


"청소만 잘 해 주신다면야"

"할...께요! 깨끗하게 할 수 있어요...!"


엘시가 의욕적으로 나오자 로간은 그럼 기대하겠다며 엘시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남은 그릇을 챙겨들었다.

맥이 빠지도록 시원한 대답에 카나와 아이르리스는 잠시 멍한 얼굴로 그릇을 내밀고 있다가 밀레시안의 무릎가로 다가가 속사포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쟤료는 무엇이며 양은 얼마나하는것이며 주의해야할점이 있는지, 로간씨가 말했던 텍스쳐라는게 무엇인지. 촉촉하다는건 좋다는 뜻인지를 하나서부터 열까지를 묻는 질문에 밀레시안은 진정하라며 양손을 들어보였다.


"f랭크에 간단한 굽기요리야. 너무 그렇게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하지만 방금 요리는 밀레시안님의 쟤료로 만든거죠?  이번 달 창고에 보급은 아직 없었으니까 분명 초코렛이 없을텐데.."


평소 근검절약, 검소를 기본으로 하는 기사단의 식쟤료 창고에 초코렛은 항시 비치되는 쟤료와는 거리가 먼 물건이였다. 기껏해야 외출할때나 심하게 다쳤을때, 혹은 임무때 나가서 사먹는 정도. 이번달 창고정리를 맡은 카오르가 숫자를 헤아리자 카나의 표정은 금방 울상이 되어버렸다.방금전까지 의욕이 넘쳤던 엘시와 아이르리스도 조금 의기소침해진 표정으로 밀레시안을 올려다보았다. 


"걱정마. 주인없는 초코렛이 좀 생겼거든. 그 것을 사용해 만들면 충분 할꺼야"


주인없는 초코렛이라는 말에 디이가 먼저 반응했지만 여성진의 뜨거운 눈빛에 몸을 사리며 카오르의 등뒤로 숨어들었다. 얼떨결에 친구방패가된 카오르가 자신은 노린적 없다며 양손을 내젓지만 이미 전투모드에 가깝도록 의욕이 치솟아오른 여성 조원들에게는 적대적인 의사표현으로 비친 모양이였다.


"다..만들고나서.. 또.. 다 같이 먹어요"


엘시가 또박또박 그러나 타협은 절대없는 매서운 눈빛으로 디이와 카오르, 특히 디이에게 손가락을 들이밀며 여성조원들의 의사를 명확하게 전달했다. 겁에질린 디이가 알겠다는건지 건들지 않겠다는건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끄덕이기를 반복한다. 손가락이 카오르를 향하고 다시 디이를 향하기를 반복한다. 밀레시안이 말릴생각이 없이 구경에 재미를 붙인 모양새였다. 카나가 엘시를 진정시키며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같이 먹는건 즐거우니까요"


멀리서 로간이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하고 손나팔을 만들어 큰소리로 소리쳤다.

벌써 멀찌감치 앞서가는 아이르리스를 보고 밀레시안이 엘시와 카나의 손을 잡고 얼른갈까? 하며 부엌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3.

"그렇지, 그렇게 뿔모양이 올라올때 까지"

"예쁜 상아색이 될때까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 아이르리스양의 머리와 비슷한 정도면 되겠군요. 고르고 균일하게요"


본격적으로 머릿수건까지 두른 여성조원들이 로간과 밀레시안의 지도아래 각자의 쟤료를 열심히 섞어내고 있는 주방의 열기는 뜨거웠다. 한명은 머랭을 다른한명은 계란노른자를 열심히 섞어내는 가운데 계단식 의자위에 올라간 엘시가 펄펄 끓는 물위에 작은 냄비를 올려두었다.


"조장님, 정말 이거 사용해도 괜찮은 건가요?"


척 보기에도 신경써서 만들어낸 수제품이 분명한 초콜렛이 엘시가 든 작은 봉지안에 아무렇게나 넣어진채 흔들리고 있었다. 표면에 올렸던 섬세한 장식들은 이미 산산조각이 나 녹아버린지 오래. 처음 밀레시안이 초코렛을 꺼냈을때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던 조원들이 곁눈질로 밀레시안의 눈치를 살핀다.


"응, 다 녹여버려"


활짝 웃는 미소가 아침에본 엘베드 조장님의 미소와 비슷해 보였지만 조원들중 아무도 그 말을 꺼내지 않는다.

이자리에 디이가 없는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로간은 조심스럽게 밀레시안을 만류했다.


"하지만 역시.."

"안좋아한다는걸. 억지로. 줄 수는 없잖아?"


웃는 미소를 유지하지만 딱딱 끊어지는 발음에 로간은 본전도 못찾았다는 후회감과 함께 그렇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밀레시안에게 오해를 받지 않겠다며 자리에 부른 톨비쉬의 의도와는 달리 밀레시안은 톨비쉬의 동석 요청의 의미를 받기 싫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겸사겸사 그 자리에 있게 만든것 이라고 받아들인 모양이였다.

연애는 어렵지. 응. 어려웠어. 로간이 오래간만에 이미 떠난지 오래인 연인을 회상하며 다시한번 연애의 난해함을 깨닫는 동안 힘차게 머랭을 치던 카나가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됬어요! 부드럽게 휘어지는 예쁜뿔!"

"저도 됬어요. 이정도면 충분하죠?"


"응, 충분하네. 노른자 반죽도 잘 되었어. 자 머랭은 잠시 차게 식혀두고. 엘시? 괜찮으니까 녹이렴"


밀레시안이 이제 엘시차례라는듯 웃으며 손을 떠밀자 엘시는 입술을 꼭 깨물고 로간을 돌아봤다.

순수한 어린아이의 눈망울에서 세상의 진리를 엿보는 기분이였다. 연애란 빠져드는 것, 연애란 도전하는 것, 연애란 극복하는 것. 연애란.... 연애란 무엇인가.. 로간이 답을 알 수 없는 수렁의 질문을 던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렌지 불빛으로 활활 타오르는 냄비의 불꽃 어딘가에서 엘베드 조 조장의 얼굴이 환상이 잠시 스쳐지나가는 기적이 일어났지만 로간은 못본것으로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니까 왜 조장님을 그 자리에 동석시켜서는. 톨비쉬의 원래 의도가 뭔지 전달받은 로간으로서는 엘베드 조 조장님도 본전 못찾기는 매한가지라며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엘시가 쥐고있던 봉지의 입구를 풀자 동글동글한 초코렛들이 작은 중탕냄비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톡토도도독 하고 냄비바닥을 두드리기 무섭게 따끈한 열기를 맞은 초코렛은 점심에 먹었던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풍부한 향기를 뿜어내며 사르륵 녹아들어갔다. 아마도 고급, 그것도 손에 꼽히는 최상급 품질. 언뜻 술 향도 조금 스쳐지나가는 것이 분명 특별한 사람을 위해 만든것이 분명하지만 지금은 녹아버린 초코렛일 뿐이였다. 잘가라 주인못만난 초코렛아, 로간은 자기도 모르게 성호를 그으며 헛된 삶의 마무리를 맞이한 초코렛의 명복을 기원했다.


"로간씨..?"

"...응?"


카나가 갑자기 성호를 긋는 로간을 의아해하는 얼굴로 올려다 보자 로간은 정신이 돌아온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르리스와 엘시는 물론이고 밀레시안마저 뭐하냐는 얼굴로 로간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로간은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기 위해 눈을 굴렸다. 녹아버린 초코렛의 명복을 빌었다고 말했다간 밀레시안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건 물론이고 다른 조원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은 덤으로 따라붙을 결과. 로간은 초조하게 더듬던 도마위에서 신선한 생선의 비늘을 느끼며 아튼시미니의 이름을 불렀다. 감사합니다 주여. 저를 버리지 않으실줄 믿고 있었습니다.


"청새치의 명복을 빌어주려고요"


"...오"

"....오우"

"...."

".....네에.."


밀레시안과 엘시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는것과 달리 아이르리스는 차가운눈으로 로간을 외면하고 있었다. 카나도 잘 납득이 가지 않는지 어색하게 웃음으로 얼버무리려 애쓰고 있었다.


"피곤하면 먼저 들어가서 쉬셔도 괜찮아요."


카나의 상냥한 말에 로간은 아니라고 애써 거절을 하며 청새지의 머리를 내리쳤다. 고마운 청새치는 저항없이 로간의 식칼밑에서 낱낱이 분해되어 갔다. 오늘 저녁으로 맛있게 구워줄께. 로간이 소리없는 울음을 삼키는동안 엘시는 잘 녹은 초코렛 냄비를 들고 내려온 엘시가 조심스럽게 밀레시안쪽으로 다가왔다.


"조장님, 아뜨, 아뜨."

"응 조심하고"


엘시가 밀레시안과 초코렛을 노른자 반죽에 붓는동안 카나와 아이르리스가 신중한 손길로 밀가루를 계량했다. 

엘시가 냄비를 치우고 나면 카나가 밀가루를 체에 치고 머랭 그릇을 든 아이르리스가 대기.


"그렇지, 거품이 죽지 않게. 살살"

"하지만 섞으려면 거품을 젓게되는걸요?!"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되는걸까."


밀레시안이 적당한 말을 찾는동안 패닉상태의 아이르리스가 어찌어찌 반죽을 섞고나자 카나가 반짝이는 얼굴로 예열한 오븐앞을 서성거렸다. 엘시의 손으로 조심스럽게 반죽을 틀에 옮기는동안 정신적으로 탈진한 아이르리스가 오븐의 근처에 주저앉았다. 장갑을 낀 카나가 엽니다! 하고 크게 소리를 치며 오븐의 문을 잡아당겼다.

따끈따끈하게 예열된 오븐의 온기에 단숨에 따뜻해진 부엌안. 모두의 시선속에서 초코렛반죽이 오븐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제 30분정도만 기다리면 되는거야"

"30...분..!"

"반죽섞는것도 별거아니였어요. 다음엔 카나 당신이 해보는거에요?"

"응, 그때는 아이르리스씨가 가르쳐주면 되겠네요!"

"나..나도"


여성조원들이 화기애애하게 내년을 다짐하는동안 자잘하게 뭉친 어깨를 풀던 밀레시안이 박수를 쳐 조원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해가 저물기 시작한  저녁부엌에는 가토 오 쇼콜라의 쟤료 이외에도 많은 분량의 쟤료들이 쌓여 있었다. 대강 껄끄러운 쟤료들의 손질을 끝낸 로간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 그럼 오늘 저녁당번은 누구?"


내년이 오기전에 일단 오늘 저녁부터, 그렇게 한숨을 쉰 아이르리스와 카나가 벗었던 머리두건을 다시 쓰고는 주방앞에 섰다.











4.

"늦-어-"

"조용히좀 있어라"

"하지만 늦는다고, 늦어 카오루. 기다리고 기다려도 늦는다구"

"점심도 늦게 먹었잖아. 좀 느긋하게 기다려"


로간이 밀레시안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버린지라 본의아니게 두 명이서 게이트를 지키고 있게된 디이와 카오르는 일찌감치 게이트 정문을 중간선 삼아 양 옆으로 나란히 앉아 저녁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긴급 소집으로 오후 일정이 모두 캔슬된것은 정말 최고였지만 아무것도 안하고 앉아있기에는 조금 지루한 시간이였다. 잠깐이면 된다며 들어간 밀레시안과 조원들은 무얼 하고 있는건지. 이웨카의 기운이 충만해지고 나서야 환호성이 터져나오는 부엌의 소란에 디이와 카오르가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와, 웃는건 좋은소식인거지?"

"이제야 완성된 모양이네"


디이가 카오르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기나긴 기다림의 끝을 자축했다. 디이를 떨어트려내려는 카오르의 반항에 자극을 받은 디이가 더욱 팔을 휘감으며 신난다 노래를 부기 시작하자 적막했던 게이트는 금세 소란으로 가득찼다. 케이크, 케이크 맛있는 디저트-. 카오르가 언성을 높이는 소리에 묻힌 그리브소리가 그들의 뒤에서 멈춰섰다. 누군가 다가온것도 모르는 어린 조원들의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온화한 어투로 말을 걸었다,


"음? 특별조는 아직도 뭔가 하는 일정이 남은 모양이군요?"


"일정이랄까 리벤지랄까. 조장이 만든 초코케이크에 여자애들이 자극을 받은것 뿐이라..."

"뭐 우리야 초코케이크를 또 먹을 수 있으니까 좋지뭐. 아무튼 오늘은 초 럭키..."


"....초코렛?"


"......"

"......."


익숙치 않은 존댓말이여서 였을까 한번에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한 카오르와 디이는 하던 장난을 멈추며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무채색의 육중한 갑옷에 화려한 금발머리. 어딘지 피곤하지만 재미있어보인다는 눈이 날카롭게 디이들을 내려다본다. 미소지은 입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카오르를 재촉했다.


"계속 말씀해 보시죠"


아튼시미니님, 엘베드 조장님이 저희에게 존댓말로 말씀하십니다. 디이가 기절할것 같은 얼굴로 카오르를 붙잡았다. 빨리 말하는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두 견습조원은 그것이 인사평가인지 자신의 신상의 문제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강렬하게 고동치는 본능에 따라 너나할것 없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그게.."

"그게..."


어디서부터 말해야하지? 조장님이 요리해주셨어요? 조장님이 디저트도 만들어주셨어요? 조장님이 저녁도 해주신데요? 근데 그게 중요하나? 야 카오르 뭐라 말좀해봐. 아 왜 그걸 나한테 물어. 그거 말고 말할 것도 없는데 뭘 더 말하라는거지. 초코렛 금지령이였나? 조장님은 아무말씀도 없으셨는데?


"...... 왜 둘 다 말문을 열지...."

"톨비쉬?"


영혼의 대화를 나누느라 현실세계의 입을 딱 다물어 버린 견습조원들을 구해준것은 더도말고 덜도말고 영웅인 밀레시안이였다. 어깨동무 하고 있길잘했어. 안그랬으면 지금 다리풀려서 넘어졌을지 몰라. 디이가 희미해져가는 소울링크에서 큰소리로 조장님의 이름을 외치는동안 카오르는 디이의 체중을 버티고 서있느라 이를 악물었다. 당사자에게 물어보는게 빠르다고 생각했는지 톨비쉬도 하려던 말을 멈추고는 밀레시안쪽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세삼스럽게 톨비쉬를 당당하게 마주하는 밀레시안의 모습이 위대해 보이는 순간이였다.


"일찍돌아왔네요?"

"당신이야말로 이제야 돌아왔습니까?"


마치 신혼부부인듯한 대화였지만 어딘지 삐걱거리는 불안감이 밑에 깔려있었다.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뺨에 묻은 밀가루를 문지르며 어디있었는지를 캐물었다.


"계속 여기 있엇어요"

"제가 나갈때도요?"
"부엌에 있었죠. 당신이 내 조원들을 부려먹느라 점심준비도 못하게 붙들어 놓고 있었으니까"


아니죠, 조장님. 그렇게 말하시면 안되죠. 부엌에서 공용식탁으로 나가려던 엘시를 집어들다시피 부엌으로 옮겨둔 로간은 창틀에 기대며 쓰린 위장을 부여잡았다. 졸지에 부엌일을 떠맞기도록 부추긴게 된 엘베드 조장이 호오 하고 웃음지었다. 이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디이와 카오루가 애처로운 눈으로 부엌의 문을 훔쳐본다. 오렌지색 등불이 따뜻한 낙원과도 같아보였다.


"그거, 참, 미안하게 되었군요. 말씀해주셨으면 저도 거들었을텐데요"

"글쎄요. 열댓명이 먹기엔 그릇이 부족해서."


밀레시안이 숨어있던 루나사조를 언급하며 톨비쉬의 의표를 찌르자 톨비쉬의 눈이 가느러졌다. 짙어지는 미소와 웃지않는 눈매. 두 조장급 기사들의 화기애애한 연극에 조원들은 숨쉬는 소리도 조절해가며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렇군요. 당신이 만들었다던 초코렛 케이크의 양도 모자를 테니까요"

"...? 그런것 까지 신경쓸 필요까지야"


애초에 당신것이 아닌데 어째서? 라는 말이 환청처럼 게이트의 공기중으로 울려퍼졌다. 오늘 저녁 거를까 생각하는 로간의 뒤에서 우와.. 하는 카나와 아이르리스의 목소리가 자그맣게 부엌의 침묵을 가른다.

저것이 연애. 녹아버린 초코렛같은 질척임. 눈치없이 맛있게 구워지는 오븐속 주인못만난 초코렛의 환생체는 고소하면서 달큰한 향기를 내뿜으며 자신의 탄생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지금 안꺼내면 타버릴텐데.."


엘시가 간절한 눈으로 꺼내면 안되나요? 하고 로간을 향해 물어왔다.

꺼내자니 뱀의 눈이 이쪽을 향하고 안꺼내자니 커다란 눈망울 세쌍이 이쪽을 향하는 진퇴양난의 순간.

톨비쉬가 호오, 하는 웃음과 함께 부엌쪽으로 먼저 시선을 돌렸다.


"군침이 도는 냄새네요. 당신이 만들었습니까?"

"조금은, 조원들이 대부분 만든거에요. 나는 뒤에서 보조만"

"오늘 특별조의 훈련은 요리였나보군요. 그럼 이 둘은 땡땡이라던가.."


"그럴리가 있나"


톨비쉬가 애꿎은 조원들을 놀리려하자 밀레시안이 단칼에 쳐내며 앞을 가로막아섰다. 작달막한 덩치뒤에 숨겨질 청년들이 아니지만 밀레시안은 한뼘 머리큰 톨비쉬에게 애먼짓 하지말라는듯 고개를 내저었다.


"여자애들이 가르쳐달라고 해서 간 것 뿐이에요"

"하지만 여긴 둘 만있는것 같은데요. 그 뭐였지 괜찮은 친구였는데... 이름이 로간이였던가요?"

왜 그사람은 같이 있는건데? 잘구워진 쇼콜라를 보며 기뻐하는 엘시들을 보며 긴장의 끈을 늦추고 있던 로간이 갑자기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에 입술을 혀를 깨물었다. 아튼시미니님, 저는 그저 제명에 살다 제때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로간의 간절한 기도가 닿았는지 밀레시안은 다행히 적당한 답변으로 로간을 보호했다.


"저녁당번이 부엌에 있는게 당연하잖아요?"
"....."

"좋아요. 뭣떄문에 당신이 이렇게 까칠한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럼 저녁이나 함께하실래요? 당신 한명 분 정도는 금방 만드니까"


밀레시안이 이제 그만하자며 중재안을 내놓았지만 톨비쉬는 가소롭다는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밀레시안의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톨비쉬를 비난한다. 왜 당신이 화를 내는거야? 톨비쉬는 질문의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


"아니요, 애석하게도 간단하게 때우고 들어온 참이라. 괜찮습니다. 아직 서류작업이 남아있거든요."

"아 그래요? 그럼 다음에"

"예, 다음에 초대하기를 기다리도록 하죠"


밀레시안이 물러서자 짧게 대화를 끝마친 톨비쉬가 뜻모를 웃음을 흘리며 디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밀레시안이 식사초대를 할때는 사색, 톨비쉬가 그것을 거절할때는 화색이 도는 두사람에 낯빛에 톨비쉬는 슬쩍 말을 던져주었다.


"다음엔 꼭 같이 식사하도록 하지"

"......예 톨비쉬 조장님"

".....네..네... 그럼요 톨비쉬 조장님"


두사람이 흙빛이 되는것이 조금 톨비쉬의 기분을 풀어준듯 밀레시안의 비난하는 눈을 유유자적하게 웃어넘긴 톨비쉬가 임시 거처가 배정된 건물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짜증이 잔뜩난 밀레시안을 돌아보지 않고 쭉 제갈길만을 가던 톨비쉬의 발자국 소리가 없어지고 나서야 밀레시안이 부르는 소리에도 대답못하던 디이들이 털썩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와...."

"와는 무슨 와! 조장! 무서웠어! 엄청무서웠다고! 왜 그런 사, 아니 조장님을 박박 긁는거야?!"

"너네 우니..?"


아직 넋을 찾지 못한 카오르와 다르게 디이는 눈물콧물을 훔치며 밀레시안을 붙잡았다.

으이그 못났다 정말. 밀레시안이 손수건으로 디이의 얼굴을 훔쳐주는동안 식탁으로 음식을 나른 여성 조원들이 쭈뼛쭈볏 밀레시안의 곁으로 다가왔다. 멀리서 위장을 붙잡은채 식탁에 기대어선 로간의 낯빛이 새하얗게 떠있었다.


"저녁 준비 다 되었어요 조장님"


방금전까지만해도 신나게 뛰어놀던 조원들이 바싹 얼어붙은 것을 차례대로 둘러보던 밀레시안은 애써 웃는얼굴로 식탁으로 조원들을 잡아 끌었다. 아침엔 육체노동 밤에는 정신노동. 악덕조장이 된 밀레시안이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5.

"그럼 내일 일정은 이렇게"

"...음, 예, 예 알곘습니다. 그럼 이렇게"

"응. 오늘 수고 많았어요"


저녁식사는 빠르게 끝이났다. 다른조원들이 뒷정리를 마무리하는사이 식탁에서 내일 일정을 짠 밀레시안이 피곤한 얼굴로 미간을 내리눌렀다. 피곤하다. 육체노동보다도 정신적인 소모가 컸던 하루였다. 쓸데없이 의뭉스럽기는. 누구라도 딱 잘라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밀레시안의 혼잣말에 로간은 괜시리 주변을 둘러보고서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디선가 뱀의 눈이 이쪽을 지켜볼 것같은 오한이 드는 느낌이였다.


"그럼,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빠르게 자리를 뜨고싶다는 로간의 의사에 밀레시안은 눈을 내리누른채 잘자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로간 다음엔 엘시가, 그리고 카나가. 남은 조원들이 모두 식당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밀레시안은 조금 쌀쌀해진 공기를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늘해진 저녁공기와 함께 따끈한 무언가가 간절했다.


생각할 것도 없이 마실거리를 만들러 부엌으로 되돌아가자 눅진한 주방의 습기가 밀레시안을 반기었다. 부엌 한켠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대강 풀어해쳐진 밀레시안의 개인 짐이 아무렇게나 들쑤셔진채 방치되어있었다. 남은게 뭐가 있나 싶은 밀레시안이 평소습관대로 안을 마구잡이로 휘저으며 닥치는대로 꺼내보기 시작했다. 부쟤료로 썼던 견과류와 생크림 약간의 초코렛 조각들. 어제 밤새 만들었던 완성품의 남은 잔해들을 찾아낸 밀레시안은 럭키, 하고 흥얼거리며 화롯가로 돌아갔다.


"싫다는 사람은, 안주면 되는거지"


밀레시안은 일부러 소리내어 말하며 스스로를 합리와 했다. 초코렛을 녹였던 중탕냄비를 그대로 불에 올리며 남은 생크림의 뚜껑을 열었다.

우유와 생크림 약간의 향신료와 부숴넣은 견과류. 하얗던 생크림우유가 마법처럼 색이 바뀌면 간단하게 핫초코가 완성된다. 따끈해진 머그잔을 든 밀레시안이 입구쪽으로 난 창틀에 걸터 앉았다. 화로의 온기가 식지 않은 부엌은 적어도 바깥보다는 따듯했다. 가만히 불이 꺼진 게이트를 둘러보는 밀레시안은 갑갑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지 멍하니 견과류를 혀끝으로 굴리었다. 아직 잠들지 않은 모양인지 창문 하나가 노란색 등불을 일렁이고 있었다. 어딘지 헤아리지 않아도 지금 이 시간대에 일을 하고 있을 사람은 한 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아마 저쪽에선 부엌에 불이 켜진것을 보고 누가 있는지 알고 있듯이, 밀레시안은 나지막히 그의 이름을 발음했다.


"톨....음... 톨비쉬..."


마음은 소리가 되고 소리는 기억이 된다. 밀레시안은 그의 이름을 말하는 것 만으로  아침의 일이 생각났는지 흥, 하고 아무도 듣지않을 콧바람을 내뿜었다. 저녁내내 한조각 갖다드려야 하는것 아니냐며 안절부절 못하는 조원들은 무슨 죄인지. 자기가 다시만들어 갈테니 안심하고 먹으라고 달래던 것이 생각났는지 밀레시안이 빈정거리며 고개를 까닥인다.


"'전 이런건 좋아하지 않거든요.' 라니 결국 그 말이 하고싶어서 부른거잖아?"


톨비쉬의 말투를 흉내내며 아침에 있었던 짜증을 씹어 먹으려는듯 입가에 닿은 견과류를 으적으적 씹어먹었다. 도무지 종잡을수 없는사람. 초코렛 선물받은걸 보러오라 하질않나, 사실 다 못 먹는 것이라 하질않나. 싫어한다고 못박아두고서는 자기만 안줬다고 삐져서 애먼 애들을 갈구질 않나.

톨비쉬의 창문가에서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아마 잠깐 휴식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겠지. 혹시라도 이쪽의 불빛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괜스리 기대감이 생기는 밀레시안이 괜시리 머그잔을 후후 불면서 창문을 올려다 보았다.


"지금 내려오면 순순히 져줄께요"


들리지 않을것이 분명하지만 바램을 담아 말해본다. 머그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밀레시안은 숫자를 읊조리며 핫초코가 식어가기를 기다렸다. 하나, 둘, 서른, 백.. 톨비쉬의 걸음으로 두번정도 왕복할만큼의 시간을 세고 나서야 밀레시안은 차가워진 머그잔을 냄비에 쏟아부으며 화롯불을 당겼다. 하나는 핫초코의 냄비 다른하나는 주전자의 물.


"정말이지..."


지지리 타이밍도 못마추는 사람.

밀레시안이 머그잔 두개를 들고 톨비쉬의 방으로 걸어올라갔다.




"...누군가"


노크도 하기전에 기척에 민감한 톨비쉬가 문앞에 도착한 방문객의 이름을 물었다.

와 귀도 밝아라. 그렇게 귀가 밝은 사람이 져준다 할 땐 왜 못들었을까. 마음속으로 톨비쉬를 빈정거린 밀레시안이 대답을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열어줘요. 왠지모를 오기로 밀레시안은 톨비쉬가 방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

".....누구냐니까"


두번째 물음에는 조금 짜증이 섞여있었다. 한밤중에 홀로 야근을 해야하는데 방 앞에서 누가 가만히 서있으면 신경쓰이기 마련. 안그래도 민감한 톨비쉬는 낯선 방문객의 숨쉬는 소리마저 거슬리는건지 짜증스럽게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으려는 톨비쉬와 머그컵을 들고 선 밀레시안이 닫힌 방문을 사이에 두고 잠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마치 문짝의 서로의 모습이 투영되는것 마냥 한동안 나무 문을 노려보던 톨비쉬가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방문을 열었다. 벽넘어에서도 호흡소리만 들린다면 누군지 알아 볼수 있는 방문객이 삐딱한 자세로 톨비쉬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뭐하는 장난인지 모르겠군 밀레시안"

"난 당신이 왜 까칠한지 모르겠어요"


톨비쉬의 으르렁거림에 지지않는 밀레시안이 반박자도 늦추지않고 바로 카운터를 날린다.

잠옷은 커녕 겨우 갑옷만 벗어던진 톨비쉬는 갑갑한 차림 그대로 문고리를 잡은채 서있었다. 그에 비해 밀레시안은 아직 서늘한 밖에 서있기 위험한 가벼운 천옷차림. 손에 든 머그잔을 본 톨비쉬가 옆으로 비켜서자 고개를 까딱인 밀레시안이 방안으로 들어갔다. 톨비쉬의 책상에 머그잔을 내려놓은 밀레시안에 소파에 안기 무섭게 톨비쉬는 손님용 담요를 밀레시안에게 덮어주며 나무랐다. 거의 던져주는 것에 가까웠지만 톨비쉬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염려가 가득했다.


"아직 밤에는 춥습니다. 이렇게 얇게 입고 다니면 감기걸린다는건 밀레시안에게 상식밖의 일인가보죠?"

"그렇게 상식에 충실한 분이시면  좀 일찍열어주지 그랬어요"
"차라리 좀 일찍 대답하지 그랬습니까"

"난 당신 이럴 때 정말 싫더라"


짧게 대화하고 짧께 싸우고 길게 노려본다. 아까부터 반복되는 까칠한 대화는 어디로보나 파경직전의 황혼부부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다 식어버린 커피를 냉수처럼 들이킨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담요로 채 덮히지 않은 뺨이나 귓바퀴를 손으로 문지르는 톨비쉬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완전 얼어있지 않습니까"

"음.. 따뜻한 잔을 들고 있으니까 괜찮을줄 알았죠"

"따뜻하다고요? 전 일부러 아이스커피를 가져오신줄 알았습니다."

"그 입은 한번이라도 예쁘게 말하면 어디가 덧난데요?"


"예쁜말이라. 글쎄요 일단 어느정도가 예쁜말인지 들어본적이 없어서"


밀레시안의 빈정거림에 비슷한 비꼼으로 응수한 톨비쉬가 입술을 꺠물었다. 그리고는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겨 밀레시안의 몸을 끌어당긴다.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차갑게 얼어붙은 귓바퀴에 뜨거운 입김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리고 곧 찾아오는 날카로운 잇자국과 뜨거운 혀의 감촉. 히익하는 소리와 함께 밀레시안이 싫어 라고 말하며 톨비쉬를 밀어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숨결을 불어넣으며 촉촉해진 입술이 차가운 귓바퀴를 쓸어내렸다. 연골에서부터 귓바퀴, 귓등으로 내려갔다가 살짝 깨무는 귓볼.  밀레시안이 바르작거리며 톨비쉬를 밀어내려 애를 쓰자 볼에 키스를 퍼붇던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턱을 끌어당겼다.

씁슬하고 신맛이 가득 배어난 커피의 냄새와 밀레시안의 달콤한 핫초코냄새가 서로의 혀를 타고 섞여들었다.

금방이라도 휩쓸려 갈것같은 열정적인 애정공세에 밀레시안은 톨비쉬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정신을 추스렸다. 톨비쉬가 불만스러운듯 손바닥을 빨아들이며 쪽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만이라고 이야기 했잖아요. 이 (비속어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야"

"안들리는군요. 하지만 따뜻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네요. 머리끝까지 피가 솟구쳐서 이젠 뜨뜻해졌네요!"


밀레시안의 험한말에도 톨비쉬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은채 웅얼거렸다. 어느새 밀레시안의 위로 올라탄 톨비쉬를 보고 밀레시안은 기가찬듯 다리를 버둥거렸다. 한쪽다리는 소파와 톨비쉬 사이에, 다른 한 다리는 톨비쉬의 옆구리사에 단단하게 고정된 민망한 자세에 밀레시안은 살짝 입을 삐죽였다. 물러서지 않을 예정이라는 건지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손바닥 깊숙히 키스를 퍼부으며 혀끝으로 손바닥을 쿡쿡 찔러대었다.


"...왜 당신이 화를 내는건지 아직도 이해가 안가요"

"유감이군요. 난 당신이 왜 나에게 그랬는지가 이해가 가지 않는데"

"내가 뭘 했다고 이렇게 화를 내는건데요?"


밀레시안이 억울함을 항변하자 톨비쉬는 잡고있던 밀레시안의 다리를 놓았다. 자유로워진 다리를 빼려는 순간 바로 체중으로 눌러오는 통에 밀레시안이 다시한번 자신의 다리의 자유를 포기해야했다. 짜증스럽게 톨비쉬의 이름을 소리치자 톨비쉬는 자유로워진 자신의 한쪽 손으로 입을 막고있는 밀레시안의 손을 톡톡 쳐보였다.

당신이 먼저. 톨비쉬의 말을 알아들은 밀레시안이 손을 거두자 기다란 은사가 손바닥에서 부터 늘어지다가 끊어진다. 밀레시안이 톨비쉬의 가슴팍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꼭 그런얼굴로 문질러야겠습니까?"

"미안하네요. 누구처럼 표정연기를 잘하는게 아니여서"


밀레시안의 얄미운 대답에 톨비쉬는 싣고있던 체중을 뒤로 넘기며 밀레시안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갑작스럽게 사지의 자유를 되찾은 밀레시안이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소파에 누워있자 톨비쉬는 안일어나면 다시 올라타고요 라는 말을 덧붙인다. 밀레시안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것을 확인한 톨비쉬는 이번엔 소파 밑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밀레시안의 배에 귀를 바싹 붙여왔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민망한 자세에 밀레시안이 밀어내려 하지만 톨비쉬는 한번정도는 보듬어주십시오 하고서는 때에 맞지않는 어리광을 부려왔다. 누가 누구를 보듬는다는건지, 밀어도 밀려나지 않는 커다란 어리광에 밀레시안은 어찌 할 도리가 없다는것을 깨닫고서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맨날 자기 마음대로만 하면서, 밀레시안은 양보하는 척하는데 1등인 커다란 금발의 곱슬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

"......."

"....."

"............"


"무슨말이나 좀 해봐요."


밀레시안이 한참을 톨비쉬를 스다듬도록 밀레시안의 품을 끌어안은 톨비쉬는 아무말 없이 그자리에 앉아있었다.

분노나 서운함, 원망, 억울함. 부정적인 감정을 삭히는 푸른 벽안이 흘끗 밀레시안을 향해 돌려진다.

여전히 퉁명스럽지만 어딘지 한 조각 정도 다정한 목소리로 톨비쉬? 하고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아랫배에 얼굴을 부비며 입을 열었다. 위치가 민망하니까 그만두라는 말을 해봤자 귓등으로도 안들을 인간이니 밀레시안은 머리나 부비지 말라는 의미로 톨비쉬의 뒷통수를 꽉꽉 쓰다듬었다.


"제 것이지 않습니까"

"......뭐가요"

"....그 쇼콜라"


와 눈치 진짜 빠르네요. 밀레시안의 머릿속에서 정신줄을 놓은 인내심이 호들갑스럽게 달려나오며 톨비쉬의 뺨을 다독였다. 뺨 뿐일까, 곱슬거리는 귀밑머리라든가 동글동글한 가마부근, 눈썹근처의 움푹 파인 부근이나 날카롭게 잘 뻗은 코 선까지. 머릿속으로는 톨비쉬의 얼굴 이곳저곳을 쥐어 박거나 말거나 밀레시안의 눈치를 살핀 톨비쉬는 삐졌다는 의사표현을 확실하게 표시하며 밀레시안의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왜 그들에게 준겁니까?"

"....초코렛이요?"

"예"

"당신이 안먹는다면서요"


밀레시안이 어이가 없어하며 대답하자 톨비쉬가 그런적 없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쪽 머리가 헝클어진 모습에 밀레시안은 저도모르게 톨비쉬의 머리를 빗어 넘겨주었다.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오늘! 아침! 게이트! 앞에서!"


밀레시안이 또박또박 끊어서 대답하자 톨비쉬는 그런적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불신과 불만이 가득한 얼굴에 밀레시안이 톨비쉬의 말투를 흉내냈다.


"'전 이런건 좋아하지 않거든요.' 라고 당신이 나한테 그랬잖아요!"

"아니 제가 언제 그렇게 폼을 잡으면서말했다고...!,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당연하지 않습니까! 뭐가들었는지도 불분명한 물건들인데! 당신이 주는것도 아니고..."


톨비쉬는 억울하다는듯 손을 흔들다가 밀레시안을 잡아 흔들었다.


"제가 왜 당신을 그자리에 불렀는데요..!"

"뭐긴 뭐에요. 우리애들 부려먹는거 허락받은거라고 루나사조에 자랑하는거랑 나한테 초코렛많이 받는다고 자랑하는거, 그리고 나한테 초코렛 주면 바보라고 놀릴려고 부른거죠"


의도는 대충 파악했지만, 어딘가가 비틀어진 문장들이였다. 비꼬는 밀레시안의 표정에 톨비쉬는 허탈한건지 밀레시안을 잡고 있던 손을 떨어트렸다. 톨비쉬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제가 그렇게 까지 신뢰도가 떨어지는 남자입니까?"
"뭐... 그냥저냥... 밤중에 방에 찾아오면 귀랑 손바닥이 핥아지고 올라타는정도의 남자?"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살피지 않은 밀레시안이 평소처럼 빈정거리는 말을 던지자 톨비쉬는 진심으로 상처입은건지 충격에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기? 아니 진까 충격받은건가? 밀레시안이 조금 미안해하며 톨비쉬의 이름을 부르자 톨비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톨비쉬가 눈을 감고 이마를 쓸어올렸다. 거부의 몸짓이였다. 손을 더듬어 커피잔을 찾은 그가 떨리는 입술로 벌컥벌컥 잔을 들이켰다.


"물론 당신의 조원들을 제 마음대로 차출해서 사용하는것에 대해 다른부서에서 클레임이 걸려올 수 있기때문에 당신을 부르긴 했었고.."

"거봐요"


톨비쉬가 입을 열자 밀레시안이 안심하고 다시 입을 삐죽였지만 곳 정색한 톨비쉬의 눈에 입술을 다물었다.

그는 상처입은 눈으로 더이상 아무 말 하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여성들에게서 초코렛을 받긴 하지만 모두 내것이 아니라는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당신을 부른 제 사심도 섞여있긴 했지만.."

"......아..뭐......"


"저는 당신을 바보취급 한적은 없습니다."

"........"

"당신을 망신주려고 하거나 당신에게 상처를 주려고 한적은 없었습니다."

"....."


"당신이 나에대한 믿음이 없다면 감히 주신의 이름아래서 맹세하건데,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없을거라고 단언 할 수 있습니다"

"......"



두번째 맹세, 한번은 외로운 별을 위해. 또 한번은 상처입은 자신을 위해. 톨비쉬는 진심으로 상처를 입은건지 다가오는 밀레시안에게서 단 한번도 시선을 떼지 않으며 속삭였다. 밀레시안의 톨비쉬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불안감 가득한 손짓에도 톨비쉬는 반응하지 않았다. 한번 터진 원망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지 떨리는 목소리가 밀레시안을 책망한다.


"음... 미안해요. 나는.."


"내가 당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사람을 보였습니까?"

"아니요, 내가..음.. 미안해요. 내가 오해한거에요. 미안해요 톨비쉬."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세워놓고 광대취급을 할 것 처럼 나쁜사람이였나요?"


".........미안해요"


사과하는 밀레시안이 입술을 깨무는 톨비쉬의 입매에 손을 뻗었다. 아직 피가나진 않지만 엉망이 되기 직전의 압박감에 입술은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가느다란 손가락이 톨비쉬의 입술을 쓰다듬자 그제서야 자신의 행동을 알아챈 톨비쉬가 고개를 돌려 밀레시안의 손가락을 외면했다. 


"....저야말로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당신을 불러내서 미안합니다"


정중하고 명확한 사과의 말이 두사람의 거리감을 더욱 멀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려앉는 침묵이 더욱 깊고 넓게 그 구멍을 넓게 파고 내려간다. 무거운 침묵을 이길수 없었는지 밀레시안이 몸이 그에게서 멀어지려는것 처럼 움츠러들었다. 그러다가 한발자국. 밀레시안이 톨비쉬에게서 멀어졌지만 톨비쉬는 미동없이 책상에 기대어 서있었다. 그리고 또 한발자국. 다시 한발자국. 밀레시안이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톨비쉬는 억지로나마 책상위에 널부러진 서류들에 눈을 고정했다. 


지금 이렇게 멀어지면 다시 붙잡기 힘들다는걸 알면서도 자신의 상처에 급급해 그토록 손에 넣길 원하던 별이 떠나가는것도 잡지 못한다. 달칵 하는 머그컵의 소리에 톨비쉬는 밀레시안과의 관계가 끝났음을 직감했다. 부디 바라건데 내가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만은 믿어주길. 문소리가 두려운 톨비쉬가 눈을 감는동안 밀레시안의 발걸음소리가 그의 귓가를 가득매웠다. 지금이라도 귀를 막으면 조금은 편해질까? 의미없는 고민에 톨비쉬가 괴로워 할 무렵. 밀레시안의 온기가 톨비쉬의 뺨에 와 닿았다. 


"...?"


그리고 이어지는 말캉한 입술의 촉감과 차가운 음료의 느낌. 후두를 가득 매우는 감미로운 초코렛의 향기가 불안정하던 톨비쉬를 진정시켰다. 목을 끌어당기는 가느다란 팔의 힘과 함께 뾰족하고 단단한 혀끝이 톨비쉬의 입술을 더듬었다. 품안으로 쏙 들어오는 밀레시안의 양팔을 붙잡으며, 다시돌아온 별을 놓치지 않으려는 톨비쉬가 본능적으로 밀레시안을 끌어당기며 입술을 탐했다. 훑고 휘저으면서 깨물고 빨아올린다. 

자리를 뒤바꾸면서이미 입술을 벗어난지 오래이지만 한번 켜진 스위치가 쉽게 내려가지 않는건지 밀레시안을 책상에 뉘인 톨비쉬가 다급하게 목의 단추를 끌러내렸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많이. 갈증이 나는 사람처럼 목에서 가슴까지 밀레시안의 살을 깨무는 톨비쉬가 거칠게 밀레시안을 몰아세운다. 그런 톨비쉬를 밀어내지도 진정시키지도 않는 밀레시안은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문채 조금은 겁먹은 눈으로 톨비쉬를 올려다 보았다. 해저에서 숨을 쉬러 올라온 사람처럼 숨을 들이마시던 톨비쉬가 밀레시안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스위치를 꺼트리며 자리에서 멈춰섰다. 제정신이 돌아온건지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던 톨비쉬가 한숨과 함께 휘청거리며 책상에서 물러섰다. 밀레시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동정하시는 겁니까?"


톨비쉬가 먼저 입을 열자 밀레시안이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찢어지다시피 흐트러진 천쪼가리는 더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할것처럼 나풀거렸다. 목에서부터 드리워진 천조각 사이로 거친 잇자국이 선명하게 톨비쉬의 양심을 물어뜯는다. 밀레시안은 흐트러진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톨비쉬의 질문에 대답했다.


"동정은 아니에요"


"...."

"연민도 아니고요"


"....하"


톨비쉬의 비웃음에 밀레시안은 정신을 바로차리려 노력하며 손을 깍지꼈다. 맞잡은 두손에 용기를 기도하며. 밀레시안은 자괴감에 휩싸여가는 톨비쉬를 향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톨비쉬, 이번기회에 제대로 말할께요. 난 당신 좋아해요"


"압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고 있지요. 당신은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이 기사단의 다른 조장들도 좋아하고, 그 조원들도 좋아합니다. 당신의 조원들에게 그러하듯이. 당신의 지인들에게 그러하듯이. 하지만 나는 다릅니다. 당신의 좋아가 나의 좋아와 같았던 순간이 있다고 믿고싶지만 지금은 모르겠군요. 당신의 안에서 나에 대한 신뢰도가 얼마나 되는지를 깨달은 지금은.."


"다시 말할께요 다른 조원들이나 다른 기사들을 좋아하는것 처럼이 아니라 이런저런 의미를 포함해서 좋아한다는 거에요."


이런저런, 이라는 말을 할때 밀레시안은 조금 신경이 쓰이는지 자세를 고쳐앉았다. 분명 아침에 이 단어로 싸움이 시작된 것 같은데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였다. 밀레시안은 살짝 말라오는 혀를 축이며 톨비쉬를 응시했다. 밀레시안을 외면했던 톨비쉬였지만 이런저런이라는 말에 슬쩍 찌푸려진 눈썹에 밀레시안은 초조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톨비쉬가 겨우 반응을 내보였다.


"그 이런저런이란게 뭔지 모르겠군요"

"....음...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이번에는 오해하지 않도록. 밀레시안은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다가 생각나는 첫 단어를 내던졌다.


"당신의 키스가 좋아요"

"...."

"그리고 중간중간에 깨무는 것도 좋아해요"

"...."

"손끝으로 장난치는것도 좋아하고"

"............"

"혀끝으로 애...무...하는 것도 좋아하고.."

"....."

"핥... 크흠... 핥는것도 좋아해요. 그...., 귀는 빼고. 귀는 하지 말아요. 아까 정말 놀랬으니까'


이런저런에 구체적인 예시를 들기로 한 밀레시안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단지 스스로가 부끄러워하는것을 감추지 못해 더듬는것이 흠일뿐. 아이에게 설명하는것 처럼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는 대화의 내용은 전혀 아이들을 위한 것은 아니였지만 밀레시안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중간중간에 설명할 때 저도모르게 소파로 눈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는지 밀레시안은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내저은적은 있었지만. 귀는 정말 아니였다며 고개를 흔드는 밀레시안의 모습에 굳어있던 톨비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당신 의뭉스러운것도 나름 좋아해요. 많이는 아니지만 싫어하지는 않아요"

"....."

"비밀이라며 이리저리 빼는것도 열받지만 당신 매력이라고 생각하고"

"........"

"잘먹는거. 내가 해준 요리라고 아무거나 덥석덥석 잘도 먹는데, 그럴때마다 좀 뿌듯해서 좋아요."

"......."

"유능한것도 인정해요. 아침에 애들 굴리는거 보면서 허언증은 아니였구나 생각했으니까요"

"......"

"그리고 또... 뭐가있더라.."



".....잘생긴거.."


"아, 맞아 당신 잘생겼어요. 응 그걸 말 안했네, 나 진짜 정말로 당신 얼굴  좋아하.... .... 아..니지 이 사람아. 자기입으로 이야기 하면 안되지!"

"왜 안됩니까"


양손 가득 손가락을 꼽아가며 귀여운 고백을 이어가던 밀레시안이 갑작스러운 난입에 휩쓸려 고개를 끄덕였다.

신에게 기대지 않는 별의 영혼이 내보일 수 있는 진심어린 말이 몇가지나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을까. 그저 전쟁터에서 무기를 휘두르는것으로 자신의 순수성을 증명하던 밀레시안이 자신을 위해 필사적으로 말을 짜내는 것을 보자 톨비쉬는 조금 울컥하는 가슴을 느끼며 밀레시안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귀여운 연인에게 사랑받고 있는데. 잘생긴거 하나정도 자랑해도 밉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능글맞은 자신감과 자아도취같은 말장난. 그리고 갑옷을 입었을때의 습관 그대로 어디하나 눌리거나 부딫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가며 끌어안는 손길. 밀레시안은 자신이 아는 톨비쉬가 돌아왔음을 느끼며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힘을 빼었다. 축 늘어진 밀레시안이 톨비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좀 괜찮아 졌어요?"
"...... 아마도"


맞닿은 온기에서 톨비쉬를 품안 가득 끌어안으며 크게 숨을 들이킨 밀레시안이 나지막히 속삭였다.

"그래요..? ...음... 그렇다면.. "

"...."

"다행이네요."


'"........다행인겁니까?"

밀레시안은 대답없이 눈을 감으며 등뒤로 팔을 둘렀다. 한아름에 안지도 못할 단단한 등을 잡아당기는 손이 마치 구명줄을 잡아당기는것 마냥 간절했다. 밀레시안이 드물게 뺨을 비비며 톨비쉬를 끌어안았다.


"당신을 잃어버리는줄 알았어요"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잃어버리는줄 알았어요"


톨비쉬를 잡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안도감이 들었는지 톨비쉬는 눈을 감은 밀레시안의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다가 그 자세 그대로 별을 안아들었다. 흐트러진 소파, 담요가 있던 자리에 밀레시안을 내려주고서는 엉망이된 상의를 덮어주었다.


"바보같은 한 쌍입니다. 서로 오해하고 상처주고 상처입고"

"그 놈의 초코렛 때문에"

"그 놈의 초코렛 때문에 말이죠"


밀레시안과 톨비쉬가 동시에 말을 꺼내자 두사람은 이마를 맞댄채 낮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거짓된 초코렛으로 시작되었던 오해가 겨우 일단락되는 순간이였다. 결국 올해도 초코렛다운 초코렛은 못받았다며 투정부리는 톨비쉬에게 밀레시안이 근사한것을 만들어주겠다 약속하며 새끼손가락으로 톨비쉬의 입술을 매만졌다. 가느다랗고 보들거리는 손끝의 느낌에 톨비쉬는 입술로 작디 작은 손톱을 희롱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정말로 초코렛을 즐기는 편은 아니니까요"

"맛있는거 먹어본적 없잖아요"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맛을 외모로 표현한다면 당신얼굴 정도.."

" ...가볍게 별 다섯개 정도는 되겠네요 하지만 정말 괜찮습니다 내년까지 기다릴 것도 없으니까."


톨비쉬가 손을 뻗어 커피테이블 가장자리에 걸쳐진 밀레시안의 머그잔을 집어들었다. 오늘도 좋은하루, 라고 써있는 새하얀 컵 안에는 견과류가 둥둥 떠있는 밀레시안의 특제 핫초코가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게 왜요? 라고 묻는 밀레시안에게 기다려보라는듯 눈웃음을 지은 톨비쉬가 한모금 핫초코를 들이켰다.

더이상 뜨겁지 않기에, 초코를 입에 머금은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입술을 끌어당겼다. 미적지근해진 음료와 함께 뜨끈하고 물컹거리는 혀가 자연스럽게 뒤따라 들어온다. 조금 양이 많았는지 입가에 흘러내리는 초코음료를 닦아낸 밀레시안이 금새 짜증을 부리자 톨비쉬는 한번만 더 해보자며 손가락을 하나 세워보였다.


"응으응(한번만)"

"싫어요"

"응으응으(딱한번만)"


입안에 초코렛을 머금은 톨비쉬가 밀레시안을 끌어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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