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톨비밀레)달과 깃털
어느 날 성소에 방문했을 때, 밀레시안은 그가 자신의 요람에 다녀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소가 전에 없이 맑은 공기를 품고 있었고 태양이 다른 날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날은 언제나와 같았으며, 신전은 어제와 같이 고요했다.
다른점이라면 더위의 기세가 한풀 꺾여 바람이 조금 서늘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밀레시안이 그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확신했고 또 바란다면 그 증거를 바라 볼 수도 있었다.
붉은 과실이 매달린 샘 위에 깃털이 하나 띄워져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깃털은 밀레시안의 손바닥 만한 크기로 그리 밝지 않은 빛에 둘러싸여 희미한 신성력을 내뿜고 있었다. 따스해보이는 빛이였다.
밀레시안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수원지에 다가갔지만 갑자기 바람이 불어 깃털이 날아간다던가 낯선 방문객의 발소리에 화들짝 놀라 빛으로 부서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깃털은 물 위에 떠 있었고 밀레시안은 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물 위로 밀레시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깃털은 그림자에 가라앉지도, 바람에 날려가지도 않은채 그저 고고하게 물위에 띄워져 있었다.
밀레시안은 무릎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슴에서 발끝까지 어수선하고 쓸쓸한 바람소리가 흘러내려갔다.
그가 이곳에 왔었다. 하지만 그는 밀레시안을 만나지않았다.
밀레시안은 그를 바라보는 대신 깃털을 바라보았다. 지독히도 작고 하찮은, 그러나 더할나위 없이 소중한 흔적이었다.
밀레시안은 아주 오랫동안 그의 깃털을 관찰했다.
태양이 저물었고 밤이 찾아왔어도 밀레시안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밀레시안도, 깃털도 미동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킨채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대부분의 새의 깃이 그러하듯이 톨비쉬의 깃털은 물에 젖어들지 않은채 제 모습을 유지했다.
아니, 오히려 반대. 깃털위에는 작은 물방울이 온전한 둥근 모양을 유지한채 올라 타 있었다.
물방울은 샘에 돌아가지 못한채 물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샘과 물방울 사이, 윤기가 흐르는 하얀 깃털은 촘촘한 결로 작은 은구슬을 가두어 놓고는 그것이 유일한 승객인 것마냥 애지중지 감싸안았다.
깃털은 작은 조각배인 동시에 항해자였고 물방울은 바다이면서 또 여행자였다.
본신에서 떨어져 나온 하찮은 깃털 한 장이 의미를 가지게 된 순간이었다.
그것이 운명이였는지 우연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만남은 둘에게 있어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름조차 가지지 못했던 물방울은 깃털만의 특별한 물방울이 되었고 버려진 깃털은 새 역할을 부여받았다.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한 줄기가 불어들어와 깃털을 흔들었지만 깃털은 유려한 호선을 그리며 제자리에서 빙그르 돌아 물방울을 지켜내었다. 깃털을 중심으로 희미한 파문이 퍼져나갔다.
물결이 일렁거리고 나서야 밀레시안의 그림자는 고개를 들었다.
온전히 고개를 들어올린 것은 아닌 무릎사이에 고개를 기댄채로 눈 만을 돌린 것에 불과 했지만 시선이 움직이기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밀레시안은 돌아선 깃털이 다시 자신을 마주보기를 기다렸다.
인내심이 필요한 기다림이었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한번 당겨진 힘의 시위는 끝없이 흔들리는 물결의 도움을 받아 깃털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았고 밀레시안은 자신이 원하던 진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깃털은 물방울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물방울은 보다 완전한 동그라미를 그리며 여전히 깃털의 안에 괴여 있었다.
달빛이 스며들어 물방울은 이전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빛이 깃털이 머금고 있는 신성력에 비할만큼 아름답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련을 이겨내기 전보다, 물방울은 한걸음 더 깃털의 모습에 가까워져 있었고 그건 물방울이 더욱 특별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밀레시안은 푸르게 물든 물방울을 바라보았다. 은백색으로 물결치는 샘과는 어울리지 않은 찬란한 빛이었다.
밀레시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고 바람은 밀레시안을 위해 구름을 걷어주었다.
검푸른 하늘 위로 두개의 달이 보였다.
푸른 라데카와 붉은 이웨카, 좀처럼 한 하늘에서 나란히 보기 힘든 에린의 두 달이 성소의 하늘 위를 동시에 밝힌 채 밀레시안의 머리 위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푸른 라데카가 조금 더 성소 가까이 다가와 있었지만 밀레시안에게는 붉은 이웨카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달에서 흘러나오는 마나의 흐름이 밀레시안에게 속삭였다.
당신이 보고 있던 것은 무엇이였나요? 당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은 무엇이였나요?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모두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말해줄 수도 없는 때가 있고 모든 것을 보여줄수 없는 순간도 있지요.
모든 것을 고하더라도 모든 것을 이해받지 않은 날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받치더라도, 모든 것을 보상받지 못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태양을 뜨고 달은 저물고, 세상의 끝에서 불어온 바람이 닿을 어느 언덕이 있습니다.
비가 내리고 물이 괴이고, 세찬 폭포가 되어 떨어지기전 매달릴수 있는 작은 풀잎사귀가 있습니다.
험하고 가파르고 절벽의 위, 가장 고요하고 안락한 요람의 앞에 그대가 있습니다.
당신이 보려 했던 것은 무엇인가요? 느끼고자 했던 것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푸르고, 붉은 달의 은밀한 속삭임은 다정하게 밀레시안의 귓가를 어루만지며 사라졌다.
밀레시안의 귀밑머리를 흔들고 지나간 바람은 곧 가라앉았지만 밀레시안은 눈을 뜨지 않았다.
서리결정이 스며드는듯한 고통에 눈물이 솟아올랐다.
밀레시안이 눈을 뜨지 않는동안 서로 다른 두 달이 겹쳐지고 있었지만 밀레시안은 그 순간을 놓치지는 않았다.
밤하늘을 가득채운 마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그 흔들림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가득찬 물 잔의 위로 새로운 물방울이 떨어져 내린 것 처럼, 깊고 균일한 울림이 성소의 하늘에 울려퍼졌다.
울림은 여기저기에 부딪쳤고 다시 흔들리기를 반복했다. 몇번이고 겹쳐지는 복잡한 파형들은 밀레시안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시작은 거대한 파도와도 같았지만 끝은 명쾌하리만큼 간단한 결말이었다. 차갑게 식은 몸속에 뜨거운 차를 한모금 삼킨것 같은, 속이 짜르르하게 울리는 가벼운 여운과 함께 달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밀레시안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깃털이 사라져 있기를 바랬다. 그와의 재회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밀레시안이 바란 것은 오직 그와의 재회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깃털은 그가 남긴 흔적임 동시에 밀레시안이 늦게 찾아왔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밀레시안이 절망하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밀레시안은 한순간이지만 삶의 의욕을 잃었고 깃털앞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시간을 죽였다.
밀레시안의 외면앞에서 태양은 빛을 잃은채 서쪽의 바다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게 숨을 죽이고 밤이 찾아올때까지 밀레시안의 마음속에는 원망과 서러움의 말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당신은 없다. 그토록 손쉽게 찾아 올수 있으면서도 당신은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당신은 언제고 나를 찾아 올 수 있지만 나는 그렇지 못해, 그것이 서러웠고 그것이 원망스러웠다.
눈물한방울 흐르지 못할 정도로 노여움이 커서, 밀레시안은 그저 그 자리에 주저앉아있을 뿐이었다.
누구도 위로하지 못할 곳에 홀로 틀어박혀 있는 것은 밀레시안에게 아주 익숙한 일이었기에 밀레시안은 스스로가 상처입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밀레시안은 깃털이 가라앉기를 바랬다. 늦었다고 질책하는것을 멈추기를 바랬다.
하지만 깃털은 가라앉지 못했고 밀레시안은 스스로를 책망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여기서, 더 어떻게? 밀레시안은 쉼없이 달려온 시간들을 떠올렸다. 이 이상 어떻게?
빠르게, 더 빠르게, 더, 더, 훨씬 더. 밀레시안은 손안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시간은 빛과 같았고 빛은 물과 같았다. 흘러내린 마음을 추스릴새도 없이 밀레시안은 세상의 시련이라는 거대한 폭포속에 휘말려 저 바다 먼곳까지 떠내려가 버렸다. 그러니 당신정도는 내 곁에 있어줘도 괜찮잖아.
밀레시안은 한조각의 작은 구원을 바라며 속삭였다.
당신 한명 정도는 내 곁에 남아있어줘도 되는 거잖아.
그렇게 약속했으면서.
당신은 내곁에 없고 나는 당신을 놓쳤다.
그 작은 흔적이 밀레시안에게는 눈부시도록 아픈 가시가 되어 가슴팍을 찔러들어왔다.
그렇게 약속했으면서. 그렇게 약속했으면서.
밀레시안은 첨벙이는 물소리에 양 눈을 틀어막았다.
차가운 물보라와 함께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지만 밀레시안은 앞을 보기를 거부했다.
야속했다. 너무나도 섭섭했다.
당신은 나를 만나러 올 수 있으면서, 나를 이 곳에 내버려두었다.
당신은 내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으면서, 나를 이 곳에 홀로 남겨두었다.
당신은 나를 알고 있으면서도, 당신은 나와 약속했으면서도.
"당신이..!!"
밀레시안은 끌어당기는 힘에 저항하며 입을 열었다.
말을 끝맺지는 못했지만 전하려는 바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팔을 휘저으며 저항하더라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입술을 꺠물어 이성을 멈추었고 마음이 이끄는대로 밀레시안을 품에 안았다. 그래야 할것 같은 생각만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충동과도 같은 마음은 맞닿은 가슴팍 가득 그리운 온기가 차오르고 나서야 차갑게 가라앉았고 밀레시안은 이제 그의 팔 안에 있었다. 울음소리같은 것이 들렸다.
슬픔에 흐느끼는 것보다는 상처입은 짐승의 울음소리였다. 출렁이는 샘 한가운데 빠져서 밀레시안은 서럽다는 듯이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물방울은 흩날렸고 깃털은 파도에 밀려 가라앉았다.
밀레시안을 감싸는 온기는 태양과도 같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당신이 나에게..!!"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지 못해 밀레시안은 울음소리로 그 말을 가렸다.
당신이 얼마나 자신을 기다렸는지를 알고 있기에 밀레시안은 차마 그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서러웠고, 그렇기에 더욱 아픈 것이었다.
밀레시안은 화를 내고 싶었다. 확신없는 기다림에 방황하는 것 보다 희망만을 남기고 떠난 상처가 더 크고 아프다고, 밀레시안은 감히 그의 앞에서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엄살이라 하더라도 괜찮았고 억지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밀레시안은 그에게 그정도는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나에게 약속했다면, 당신이 나에게 맹세했다면. 당신이 그 긴 시간을 견뎌 나의 손을 잡았다면.
우리에겐 그럴 자격이 있었다. 당신과 나, 우리 둘에겐 서로를 상처입하고 할퀴는 동시에 용서하고 보듬어 안을 권리가 있었다. 당신이 나에게 약속했기에, 나는 또 그런 당신을 믿고 있기에.
고개를 들어올리는 밀레시안의 눈 앞에 물에 흠뻑젖은 금발머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얼마나 놀라 달려왔는지 달뜬 숨소리를 애써 삼키며 손안에 쥐어진 작은 온기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밀레시안이 옷자락을 잡고 있던 손을 내리자 그는 조금 더 밭게 팔을 조여왔다.
아무런 말도 못한채 그저 끌어안기에 급급한 그에게 밀레시안은 아주 약간의 연민을 느끼며 다시한번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그 표정을 감추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당신은 나와같다. 나는 당신과 같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의 기다림을 넘어 세상의 끝에서 마주섰다.
그런 당신이 나에게,
"...... ........어요"
"....."
그러면 안되었다고. 밀레시안은 물먹은 종이에 번져나가는 잉크처럼 흐릿하게 속삭였다.
톨비쉬는 밀레시안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만 그는 더욱 깊히 밀레시안을 끌어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샘 위에 놓여진 조각상처럼 멈춰 서 있었다.
남아있는 밤의 길이에 비하면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지만 그들이 기다려온 세월에 비하면 찰나에 가까울 정도로 짧은 침묵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침묵이 그들이 원하던 결말은 아니었기에 톨비쉬는 다시금 움직여 밀레시안을 마주보았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뺨에 달빛이 스쳐지나갔다. 달빛은 곧 그림자에 가려졌고 부드러운 온기가 속삭였다.
고개를 돌린채 허리를 숙인 톨비쉬의 입술이 밀레시안의 귓가에 머물러 있었다.
부드러운 입술사이로 흘러나온 따스한 숨결은 밀레시안의 목덜미를 간지럽혔고 밀레시안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지막히 속삭이는 다정한 목소리는 마치 감미로운 찬송가와도 같아서 밀레시안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톨비쉬의 입술은 뺨가까이 스쳤고 아쉬움은 손안의 온기로 대신했다.
밀레시안이 다시 눈을 떴을때, 성소에는 물에 흠뻑 젖은 자신의 모습만이 오롯이 샘 위에 비치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샘물을 내려다 보았다.
물결치는 샘의 위로 두개의 달이 떠올라 있었지만 수원지 어디에도 더 이상의 하얀 깃털은 남아있지 않았다.
밀레시안은 천천히 손안에 남은 온기를 그러모아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희망이 쥐어진 기다림은 더이상 상처가 아니었기에 밀레시안은 양 손을 모아쥔채 기도했다.
"수호자들의 앞길에..."
밀레시안은 뒤이어 기도를 말하는 대신 가볍게 말아쥔 손 안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떨리는 열기를 담아 내쉰 한 줌의 숨결이 그가 남기고 간 온기와 섞였다.
열기는 손안을 덥히고 팔을 따라 가슴으로 흘러들어갔다.
식지 않은 두근거림이 귓가를 방망이질 치며 다시한번 살아있음을 실감케 하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다시한번 기도했다. 당신과 나, 기나긴 시간을 넘어 겨우 나란히 서게된 두 수호자들의 사이에..
...굳은 믿음이 함께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