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즈밀레)열병

마비노기 2017. 7. 15. 17:44


실수했다.

눈을 뜨는 순간 밀레시안은 직감적으로 모든 것이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슴으로부터 열기가 피어올랐고 그 열기는 곧장 위로 치솟아 머리속을 뭉근하게 녹여들어갔다. 끈적하게 녹아내린 머릿속 열기들은 다시 턱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대로 온 몸을 녹여버릴듯이 퍼져나가 발끝까지 모아쥐었다.

달뜬 한숨이 터져나왔고 뒤이어 탄식이 섞인 신음소리가 이불깃을 모아쥐었다. 외상과는 다르게 익숙치 않은 고통이였다.

밀레시안은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왔지만 비틀거리는 발끝을 가눌길이 없었다. 시야가 흔들렸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도망쳐야 한다 혹은 다른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위기의식이란 꽤나 강력한 것이여서 밀레시안은 제 몸 하나 못가누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중간에 테이블에 한번 기대었고 옷걸이를 쓰러트리며 큰 소리를 내었지만 밀레시안의 머리속에는 어찌되었든 걸어가나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옷걸이가 나무바닥을 세차게 두드리며 굴러나간 탓에 누군가 일어나버렸다는 사실을 알지못한채 밀레시안은 문고리를 잡은채 기대어서서 끓어오르는 숨결을 토해내었다.

병마라하기엔 지나치게 빠른 속도, 실수했다. 그럴생각은 아니였는데. 하지만 이미 저질러버린일, 밀레시안은 심장으로부터 퍼져나오는 열기에 도망칠길이 없이 닫힌문을 긁어내렸다. 

이마께로 진땀이 베어나오고 있었다. 송골거리며 맺히기 시작한 땀방울을 거친 나무결에문에 문질러 닦으며 문고리를 잡아돌렸다. 

몸을 기대는 것만으로도 문은 충분히 열릴테지만 밀레시안은 발끝이 떨어지질 않는다. 몸이 무거웠고 이 상태가 한계였다. 지금의 균형을 잃고 싶지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고 난 뒤에야 밀레시안은 이마를 떼는순간 사라질 이 찬기운이 너무나도 아쉬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은 있는 힘껏 열을 뿜어올렸고 의식은 악몽속으로 삼켜지고 있었다. 그 고통속에서 방문이 전해주는 서늘한 냉기는 유일한 구원이였고 마지막 정신줄이였다.

누군가, 하지만 도망쳐야, 어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하지만 마주서야, 아니, 그렇지만.. 혹시, 누군가가. 


“누군가가 지금 나를 도와줄 수 있다면…”


밀레시안은 필사적으로 숨을 들이삼키며 문에 꼭 붙이고 있던 이마를 들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뭇결의 냉기는 이마에서 전해져오는 열기에 달아오르고 있었고 이제 그만 발을 내딛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꽉 붙잡고 있던 문고리에 뿌연 손자국이 남은듯 보였다.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열기가 입으로 역류해 불꽃처럼 뿜어져나올것 같았다.

밀레시안은 가까스로 머리를 들어올린채 복도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쩡하는 금속음이 울렸다.

단단한 나무와 잘 제련된 금속이 맞부딪치는소리, 침묵에 깨어지며 현실이 무너지는소리. 

복도는 둔탁하리만치 희뿌연 새벽공기로 가득차 있었고 세상은 멈춘듯이 고요했다. 밀레시안은 방문을 열자마자 보이던 복도의 창이 일그러지는것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보아도 하늘에 떠있는 그믐달의 이웨카가 사라지지를 않았다. 눈꺼풀 안쪽에 각인된것 마냥 영원히 따라붙을 차디찬 시선을 기억해낸 밀레시안은 그제서야 자신이 쓰러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이름이 입에 담겨지는 것 만으로 쓴물이 혀끝을 적셔오는 것 같았다.

이정도 일로 화를 낼리는 없지만 역시, 이건 양쪽 모두에게 실례되는 일이라고, 밀레시안은 끝내 어디론가 숨어버리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복도위로 쓰러졌다. 


딱 거기까지, 밀레시안의 의식은 그것이 마지막이였다.






밀레시안이 쓰러진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디이 혹은 카오르의 착각이였다.

졸린눈을 비비며 조장 무슨일 있어? 하고 문을 열던 붉은 머리의 기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인기척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몸은 아직 방안에 있었고 내밀어진것은 얼굴뿐이였다. 머리를 손질하기 전이여서 그런지 시야의 대부분은 붉은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당사자는 개의치 않아하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복도는 기묘하리만치 고요했고 차가운 공기로 가득차 있었다. 손톱만한 달은 새벽빛에 잠겨 잘 보이지도 않는 그저그런 새벽의 하늘이였다. 

디이는 아직 졸린기운이 가득했기 때문에 이만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간절했다.

푹신하고 따끈한 침대까지는 불과 두어걸음이였기 때문에 별일 아닌가 하는 그의 생각은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나며 대부분의 머릿속을 잠식해 들어갔다. 

문고리를 움켜쥐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불과 0.5초. 손을 뻗고자시고 할것 없이 쥐고 있던 손에 힘만주면 되는 일이였다. 

이대로 밀어 닫고 다시 침대에 몸을 던져 아직 밝지 않은 태양을 기다릴겸 편히 자면 되는 일일텐데, 디이는 어쩐일인지 잠기운속에서도 예기를 잃지 않은 기묘한 촉에 반응하며 졸린눈으로 복도를 내다보고 있었다. 

무언가의 소리가 남아있었고 누군가가 머물렀던 기척이 느껴지는 기분이였다.

이상하다 분명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손등으로 눈을 비비는 동안 디이의 옆방이 열리며 잔뜩 짜증이난 카오르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일찍 일어난 디이가 성가시다는 듯이 똑같은 포즈로 얼굴만 내민채 디이의 방문을 노려보았다. 아침이 되기도 전 이른 발성이여서 그런지 잔뜩 잠겨들어 거칠어진 목소리가 디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뭐야”

“아 깜짝이야. 넌 왜 깼냐”

“네 방문, 움직일때마다 끼익끼익 엄청 시끄럽단말이야. 안자고 이 새벽에 왜 문에 기대어서 끼익끼익거리고 있는거야.”


그렇게 예민한 귀라면 아까 그 커다란 소리부터 깨어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디이는 애먼 자신의 문소리를 탓하는 카오르를 흘겨보던도중 한없이 벌려지는 입안 가득 크게 공기를 들이마시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카오르의 눈이 평소보다 더 날카로워졌지만 어쨌든 잘못한것은 이쪽. 디이는 성의없이 사과하며 다시금 복도를 둘러보았다. 하품을 하며 찬공기를 들이마신탓에 잠이 좀 깨어버린 것일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복도에서 더이상 기묘한 느낌은 전해져오지 않았다. 아니지 아니야, 백만년만에 이 디이님의 날카로운 감이 작동하는 건데 헛다리를 짚었을리가.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은 복도의 모습에 디이는 졸음에 겨운 머리를 문에 비비적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방문과 진한 이마키스를 하는 모양새에 카오르가 혀를 차며 방문에 기대어 섰다.


“아니야 내가 잘못들었나봐. 뭔가 큰소리가 난것 같았는데..”

“……쯧, 그것도 연기라고”


분명 무슨소리를 들은것 같았는데.. 라고 잠꼬대처럼 몇번이고 반복해 말하던 디이의 눈꼬리에 힘이 들어간 것은 카오르의 도발이 들려온 직후, 

무슨소리야. 내가 착각도 할 수 있지 하고 반박하는 디이에게 카오르는 코웃음을 치며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카오르는 디이가 자신을 놀래키기 위해 장난을 치려 했다는듯 디이에게 속이려면 좀 더 정교하게 준비하도록해 라고 충고까지 남기며 손가락으로 복도의 바닥을 가리켰다.


“무슨소리야 연기라니..”

“또또, 그런 장난에는 엘시도 안속을껄”


디이의 부정에도 카오르는 여전히 못말린다는듯한 표정으로 10살짜리 어린아이를 취급하는 말투를,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디이가 발끈하며 카오르의 발에 반박했지만 카오르는 턱끝으로 다시한번 복도바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요즘세상에 저런 손가락모양 장난감으로 놀랄 사람이 어디있냐?”

“손가락모양 장난감이라니 난 요즘 그런거 안가지고 놀.. …… ……? ……… 으아악!!”


장난감은 무슨 장난감이라는 건지. 디이가 카오르의 손을 따라 손가락모양의 장난감이 무엇인지 찾기위해 좀 더 고개를 내밀려던 순간 디이는 쏟아져나오듯 복도로 뛰쳐나온뒤 그대로 방문의 뒷쪽으로 달려나갔다.


“조장아!!!”


디이의 격렬한 반응에 되려 놀란것은 카오르로 무슨짓이냐며 목소리를 낮춰 디이를 질책했지만 뒤이어 터져나오는 것은 뜻밖의 인물의 이름. 

디이는 허둥지둥 문밖으로 무언가를 끌어당기며 도움의 요청하듯 카오르를 바라보았고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카오르가 복도에 나왔을때는 디이가 끌어당기려던 것의 윤곽을 알아보았다.

그리고나서 고함. 방금 자신이 주의를 줬던 것도 잊은채 카오르는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디이의 곁에 주저앉았고 소란은 복도를 울리며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일직선으로 자리한 벨테인의 숙소의 방문이 속속들이 달칵거리며 열리기 시작했다.

잠에 취한 견습기사들이 소란을 찾아 고개를 내밀었지만 눈이 채 떠지지도 않는 사람이 반이였고 개중 한명은 고개대신 훈련용 헤머만 문밖에 내려놓은채 다시 방으로 돌아가버렸다.

덜커덩 떨어지는 헤머자루의 소리에 놀란것은 카오르뿐.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는 카오르와 눈이 마주친 로간이 무슨일인지를 작게 물어보는동안 복도의 저편에서도 인기척이 들려왔다.

한다리건너 외곽건물에 묵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슈안, 복도 저편에서도 디이의 비명을 들은건지 아직 잠에 취해 머리도 묶지 않은 슈안이 안경만 손에 든 채 복도로 걸어나와 크게 하품을 하고는 카오르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얀옷에 찰랑찰랑한 검은색 긴 머리가 어느 호러소설의 삽화 같았지만 디이와 카오르는 그런 슈안을 돌아보지도 못한채 바닥에 쓰러진 무언가에 한눈을 팔고 있었다.

슈안이 복도의 절반을 건너오는동안 뒤늦게 방에서 나온 로간도 소란의 행렬에 합류, 간단하게 슈안에게 목례를 하며 대체 무슨일이냐며 묻던카나들을 제치고 튀어나간 로간이 급하게 누군가를 모포로 감싸며 단숨에 안아올렸다.

로간이 밀레시안을 안아들고 나서야 디이는 제정신을 차린건지 그렇지, 병동..! 일단 병동으로 옮겨야 라며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뭐라 말을 덧붙일 새도 없이 순식간에 떠나버렸고 슈안은 카오르는 멍하니 얼이빠져있는 카오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느새 등뒤로 다가온 슈안의 기척에 고개를 돌렸던 카오르가 귓가에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에 기겁을 하며 벽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사정을 설명하란은 슈안의 말에 마른침만 삼키는 카오르는 간신히 숨만 몰아쉬는 모습. 손에 무기라도 들려있었다간 바로 휘둘렀을것 같은 강인한 결의의 눈빛에 슈안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손에 들고 있던 안경을 착용했다.

빙글빙글안경에도 좀처럼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카오르를 배려해 양손으로 머리를 모아 움켜쥔 슈안이 다시 정식으로 질문을 던졌다.

“무슨일이 있었던 겁니까?”


소란을 설명하는 것은 어느새 카오르의 몫, 걱정스럽게 복도로 나오는 카나와 아이르리스를 바라보며 카오르는 갈라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방금전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명역을 맡게 된것은 카오르의 본의가 아니였지만 한번 설명을 시작한 이상 그는 입을 열었던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말 했다.

설명은 새벽에 슈안에게 한번, 아침에 아벨린에게 한번, 그리고 오전중에 도착한 카즈윈에게 총 3번에 걸쳐 반복되었고 카오르를 압박하는 난이도는 점점 높아져만 갔다.

잠이 제대로 깨기도 전에 쓰러진 밀레시안과 맨 눈의 슈안을 정면으로 바라본 탓에 어느정도 임시면역이 생기긴했지만 그 모든 면역은 어디까지나 일상적인 조장급 기사들의 표정 앞에서였을 뿐, 

밀레시안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수리부엉이들의 수장의 분노는 심장을 찔러들어올듯이 날카로웠고 또 살의를 담고 있었다.

누가보면 애가 밀레시안을 습격한줄 알겠다며 슈안이 중재에 나섰지만 카즈윈은 여전히 설명을 듣지 못한 상태였기에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카오르는 발견한 것은 저 혼자가 아닙니다 하고 지원군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디이는 지금 오전의 임무수행을 위해 게이트를 떠나버린 상태, 

원래 자신의 임무였을 오전임무를 오후로 바꿔준것에 후회할 시간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은 생략하고 간단하게 라는 카즈윈의 서늘한 한마디가 카오르의 목끝까지 바싹 다가서며 그때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고 있었다.

사실상 알고 있는 모든것이 그 쓸데없이라는 범위에 드는 이야기였기에 카오르는 그걸 제외하면 할말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고싶었지만 목숨은 소중한 것, 

카오르는 방 구조부터 설명하려는 서두에 카즈윈의 얼굴이 굳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꿋꿋하게 있었던 모든일을 이야기했다.



밀레시안의 발견이 늦어진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숙소의 구조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방문은 모두 복도쪽으로 열리는 구조였고 디이의 방은 밀레시안과 카오르의 방을 사이에 둔 위치였다. 카오르의 방문은 디이의 방문쪽으로 열리고 디이의 방문은 밀레시안의 방쪽으로 열리는 구조. 

문을 열면 각각의 옆방의 사람들이 드나들 수 없기 때문에 복도의 바닥에는 각 방문이 90도 이상 열리지 않도록 스토퍼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마감재는 금속의 재질로 되어 있었다. 

밀레시안이 들었던 금속질의 울리는 소리는 바로 이것이였고 디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 이유도 이것 때문이였다.

하지만 잠에 취한 디이는 복도 바닥을 내려다 볼 생각을 하지 못한채 열린문만을 찾아 문에 기댄 자세로 대충 주변을 훑어보느라 밀레시안을 발견하지 못했고 오히려 밀레시안을 발견한것은 옆방에 있던 카오르의 시선.

디이의 방문 끝에 손가락모양의 장난감이 떨어져 있다고 착각한것이였지만 그 장난감이라는 것을 찾으려 문을 열던 디이가 스토퍼가 아닌 무언가에 가로막힌 문의 느낌에 뒤를 확인하다가 그대로 비명.

이후의 과정은 로간과 디이가 병동으로 옮겨간 뒤이기 때문에 카오르는 알 수가 없었지만 카즈윈은 그래서? 그 다음은? 이라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카오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카즈윈이고 서있는 것은 카오르였는데도 한없이 작게느껴지는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카오르는 이런 침묵을 위해 미리 준비한 디이의 증언을 머릿속으로정리하며 눈빛으로는 슈안에게 구조를 요청했다.

슈안은 애끓는 한숨을 내쉬며 끼어들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던 조원의 말로는 조장님을 발견하기 전 이미 방에서 큰소리가 한번, 또 잠시후 큰소리가 한번 더 났다고 증언했습니다. 

잠결이였지만 그 밖에 누군가 드나드는 기척이 있었다면 분명히 반응했을 것이고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잘못들은것이라고 생각했던것 같지만 아마..”


“아마?”


카즈윈은 지금 네 추측을 듣고싶지 않다는듯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밀레시안은 쓰러진것이고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였다. 카오르가 말문이 막힌 사이 슈안이 카오르의 앞을 가로막으며 카즈윈을 진정시켰다. 

카즈윈은 슈안과 카오르, 의자밑에 깔린 카펫을 한번 바라본뒤 자신이 너무 날카로웠음을 인정하고 카오르를 내보냈다. 카오르가 목례를 한 뒤 슈안의 방에서 나가기 무섭게 방문 밖에서 발을 헛딛는 소리가 들려왔다.

슈안이 소리없이 카즈윈을 흘겨보자 카즈윈은 의자에 기대어 앉을채 이마를 쓸어올리며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인정했잖아. 너무 날카롭게 굴었다고. 카즈윈의 표정에는 반성의 기미는 없었지만 그게 어디 하루이틀일일까, 

슈안은 카즈윈의 옛 문장을 한번 흘겨본뒤 준비해둔 서류를 꺼내들었다. 카즈윈이 게이트에 도착하자마자 첫 발견자에게 직접이야기를 듣고싶다고 닥달한 탓에 조금 늦어졌지만 처음부터 본론은 이쪽, 

카즈윈은 다시한번 확신을 받아내려는건지 힘을 주어 방금 확인한 사실을 입으로 되풀이했다.


“그러니까 정말 외부에서 침입하거나 방안에 수상한 흔적이 있거나 한 것은…”

“아, 니, 라, 니, 까요. 아 정말 그렇게 게이트가 못미덥습니까?”


“아니, 아르후안을 못믿는것은 아니..”

“흐응? 그럼 밀레시안씨가 직접 고르고 훈련시킨 벨테인들은 못미덥다는 소리입니까?”


“….그건…”


“네에?! 그렇게 믿고 또 믿고 콩으로 팥을 틔워내도 믿겠다고 탈틴언덕 아래서 알콩달콩 약속한 밀레시안씨가 키운 순수 100% 보장 알반의 자라나는 새싸악..!!!”


알콩달콩의 어감이 문제였다고, 슈안을 빠르게 잘못을 시인하며 카즈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것을 잡아 앉혔다. 

품안에 안기듯 쥐어준 서류뭉치만 아니였다면 이미 문은 고사하고 창문으로 훌쩍 뛰어내렸을 성질머리이지만 슈안은 그나마 잡아 앉힌것이 어디다며 과장스러운 한숨과 함께 이마를 훔쳐내었다.

고삐를 놓친 망아지, 시미치가 떼여진 사냥매, 조련풀린 코끼리와 삑사리난 평화의 음악등 별의 별 희안한 예시를 들며 돌려욕을 하던 슈안의 잡담속에서도 카즈윈의 시선은 온전히 서류위에. 

이전 밀레시안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코르마을로 구조된 보고서를 읽고 있는 동안 슈안은 여유롭게 차를 따라내며 창밖으로 보이는 게이트의 병동을 내려다 보았다.


“디이군과 엘시양은 임무지로 떠나있고 아이르리스는 훈련중, 카오르군도 훈련스케쥴이 있었지만 이렇게 시간이 잡아먹혀서 남은시간동안 집중은 할 수 있을런지, 

카나양과 로간군이 번갈아 밀레시안씨를 돌보고는 있지만 글쎄말이지요…”


“내가 갈께”


“벨테인의 견습기사들은 원칙상 조장의 허가가 없으면 나갈 수 없는 입장이라.. 네? 지금 뭐라고 하셨죠?”

“내가…… 갑니다”


차를 우려내는 시간이 너무 길었었나, 슈안은 찻잔에 가득담긴 허브티를 한모금 입에 머금고는 차의 향기를 음미했다.

적당히 알싸하고 적당히 향긋한 녹색의 허브티, 설탕만 반스푼 첨가하면 마법의 음료가 되겠지만 요즘 허리띠가 조금 빠듯해서야말이지.. 

슈안은 입안으로 찻물을 궁굴리며 콧속 가득히 공기를 들이마셨고 내쉬기 직전 차를 삼킨뒤 카즈윈을 돌아보았다.

의도적으로 빼놓은 결정적 단서의 페이지를 내놓으라며 자리에서 일어난 카즈윈이 어두운 안색으로 슈안에게 손을 내밀어보이고 있었다.

슈안이 느릿하게 되물었다.


“존댓말을 할껀지 반말을 할건지 확실히 정해주시겠습니까, 헤루인조장님?”


수리부엉이는 대답하지 않은채 창틀위로 발을 올렸고 슈안은 어깨를 으쓱 들어올려보였다. 

그래, 저 성질머리가 몇년지난다고 죽을리가 없지. 게이트의 창문너머로 부엉이가 한마리 날아올랐다.




슈안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어디까지나 장난의 연장선이라 카즈윈이 이리아에 도착하기 무섭게 마나터덜앞에서 대기중이던 디이가 카즈윈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카즈윈이 자신을 돌아본 것을 확인한 디이가 카즈윈에게 자신을 소개하려 했지만 카즈윈도 이미 디이에게서 알아본 뒤였는지 손을 저어 인사를 생략시켰다.

슈안이라면 여기에 너를 배치시켰겠지, 알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카즈윈의 말에 디이의 머릿속에서는 저는 엊그제 카오르와 임무지를 바꿨는데요 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디이의 감은 여지없이 날카롭게 발휘되어 온 몸에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잘못 깝죽거렸다간 뼛조각도 못챙긴다. 건실한 조원모드가 된 디이가 슈안이 부엉이를 통해 보내온 서류의 복사본을 꺼내들자 카즈윈은 기다렸다는듯 그 낱장의 종이를 받아들었다. 

게이트를 나서자마자 바로 부엉이를 날린것인지 종이는 이제 막 도착한 것마냥 습습한 바다바람을 머금고 있는 느낌이였다.

디이는 카즈윈이 서류를 확인한것을 바라본뒤 목례와 함께 게이트에 발을 올렸고 카즈윈은 디이를 돌아보지 않은 채 고개를 까닥였다. 

원래 생각대로라면 디이에게도 카오르에게 물었던 것과 똑같은 것을 물었을 테지만 지금은 이 서류가 더 급한 상황이였다. 

이것도 슈안의 계산대로인건지 그냥 그의 장난에 말려들고 있는건지 서류속 글자를 하나하나 머릿속에 꼭꼭 집어넣은 카즈윈이 뒤늦게 게이트의 가장자리에 올라섰다. 

아득한 정글속 작은 마을의 풍경을 떠올리며 터널속으로 손을 뻗자 공간너머에서 꾸덕한 습지의 공기가 느껴져왔다. 눈을 감고 걸음을 하나 내딛은 곳, 

카즈윈은 발치아래 숨어있다 서둘러 도망가는 허약한 그린키위떼를 바라보며 고개를 돌렸다. 

마나터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촌장의 집이 있었다.



“흐음, 그래 리파이.. 리파이 차라…”


코우사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카즈윈은 차분히 그의 대답을 기다려야만 했다. 여기에서까지 성질을 부릴만큼 헤루인의 조장은 어리석지도 않았고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면 열시간은 더 기다릴 수 있었고 임무라고 생각하면 열흘은 더 기다릴 수 있었다. 교리속 예언에 관한것이라면 10달도 더 기다릴 수 있었짐나 글쎄, 지금 에린에 그만한 시간을 기다릴 시간이 남아있을까.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약 10여분을 기다린 카즈윈은 리듬에 맞춰 고개를 끄덕거리는 코우사이를 바라보며 반대편으로 발을 바꿔 체중을 기울였다. 물렁한 습지의 땅은 푹신하게 카즈윈의 발을 받쳐올리며 풀잎사이로 벌레날개깃이 부벼지는 소리를 내었다.


“안타깝지만, 머나먼 조상의 영을 모시는 젊은 전사여.”

“카즈윈, 헤루인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그렇군 수리부엉이의 기사여”


코우사이는 카즈윈의 의견을 1도 반영하지 않은채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카즈윈이 전달한 말을 듣긴한건지 아니면 흘려듣고 다른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하지만 이 촌장이 분명했고 이 마을만이 그때의 밀레시안을 알고 있었다. 

악몽도 악령도 모두 이 마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카즈윈은 어렴풋이 진실의 근처를 맴도는 촌장의 가벼운 리듬을 손가락끝으로 헤아리며 다음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10분 이내에 끝났으면 좋겠는데. 카즈윈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촌장은 빙긋이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드래곤의 기사가 마신 차의 이름은 분명 리파이 차, 보라빛으로 물든 악몽을 쫓는 묘약, 꽃부분은 고운 염료로 쓰이지만 뿌리부근은 강력한 진정제따위로 쓰인다네. 

쿠시나는 천을 물들일때 쓰고 투파이는 낚시할때 물에 풀어넣지만 워보카는 아픈짐승을 단숨에 죽일때 사용하지. 아 오해하지는 말게 밤의 사냥꾼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여. 

아픈짐승을 진정시키느라 사용한다는 것이지 죽음으로 이끄는것은 온전히 워보카의 검일뿐이니. 하하하 그래, 맞네. 정확히는 아픈 짐승에게 행복한 환각을 보게하는 틈을 타서 재빨리 숨을 끊어주는 역할이지. 

하지만 결국은 누가 어떤용도로 사용하냐의 차이일뿐.”


“용도를 물어보는 것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밀레시안을 위해서야. 어째서인지 다시 악몽에 찾아왔고 열과 함께 죽어가고 있어. 당신이 만든 약이 필요해.”


카즈윈은 짧게 말을 끊으며 코우사이의 말에 미리 대답을 했다. 코우사이의 리듬은 여전히 이어져갔고 그의 흔들림은 호롱조명속 작은 반딧불이의 날개짓과 닮아있었다. 

어둠속 유일하게 빛나는 작은 벌레의 불빛은 동료들을 끌어모으고 더 큰 빛으로 더 넓은 수원지로 그들을 안내한다. 

늙은 촌장의 눈빛속에는 서늘한 정글의 녹음이 깃들어있었고 그 안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쿠르쿨레의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태양이 저물고 어둠이 찾아온 마을, 하나둘씩 불을 밝히는 마을에서 촌장은 고리가 매달린 긴 장대를 흔들어 카즈윈의 상념을 깨트렸다. 코우사이가 물었다.


“악몽, 분명 밀레시안은 여기에서 수많은 꿈을 꾸다 떠나갔지. 

과거를 보기도 했고 현재에 고통받기도 했으며 미래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네. 

하지만 쿠르클레의 심장이 제자리를 찾아갔고 이리아에는 과거의 낙인을 지우는 재생이 시작되었는데 어째서 다시 악몽을 꾼다고 생각하는거지?”


“그건..”


“미리 정확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자면 밀레시안은 꿈을 꾸지 않네. 

본인은 자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밀레시안은 스스로 꿈을 꾸지 않아. 

꿈이라 생각한 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기억, 다른사람의 현실, 누군가가 만들어진 작은 모형정원에서의 정해진 시나리오. 

그럼에도 밀레시안은 그 모든것을 자신의 기억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현실이든 꿈이든 분간하지 않고 모든 부탁을 들어주려 하네. 

쿠르클레의 악몽, 드래곤의 고함. 그 모든것은 현실이자 현실이 아닌, 과거이자 미래에 일어났던 단편의 일들. 하지만 그 모든것이 결국 밀레시안을 괴롭게 만드는 악몽으로 이어지게 만들지.

다시 묻겠네. 헤루인의 기사여. 자네가 끊어내려 하는것은 어느 꿈의 연결고리인가”



코우사이는 지팡이를 무게중심삼아 모을 기울였다가 발을 한번 대딛었다. 파삭, 풀을 밟은 가벼운 노인의 발소리가 아무런 박력없이 풀잎사이로 흩어져 내렸다. 

그것은 그저 발을 내딛었을 뿐이고 몸을 한번 흔들었을 뿐이지만 그의 작은 움직임은 정글 전체로 퍼져나가며 가벼운 풀잎소리로 화답을 보내왔다. 

옅은 밤하늘의 어둠사이로 지나가는 짧은 소나기의 더운 비 한줌. 

천천히 등뒤로부터 다가오는 스콜자락이 머리를 스쳐 마나터널 너머로 사라지는것을 두눈으로 지켜보며 카즈윈은 눈앞에 선 노인이 레인메이커의 후손임을 받아들여야했다.

코우사이가 고개를 기울였고 카즈윈은 그의 시선을 응시했다. 녹색의 눈이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둠이 잠겨든 나뭇잎 어딘가에서 낮은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굵직하게 울려퍼졌다. 풀벌레소리가 멎어들었다. 

시끄럽게 푸드덕거리던 키위들의 날개짓소리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나는, 그냥 밀레시안이 내게 오는 길을 방해하는 모든것을 끊어내고 싶을 뿐이야.”



카즈윈은 현실과 악몽 틈새에서 촌장이 원하는 날 것 그대로의 마음을 내보이며 가볍게 미간을 찡그려트렸다.

평온함을 가장한 표정이 깨져서인지 원하는 대답을 들어서인지 기묘한 각도로 카즈윈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촌장은 다시금 물빛의 눈동자를 빛내며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흔들흔들, 그의 손이 바람을 따라 움직이자 어느 순간부터 다시 소란스러운 정글의 자잘한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하며 현실의 바람이 카즈윈의 피부를 어루만졌다.

끈끈하고 습한 비냄새가 풀비린내와 어우러져 형용할 수 없는 무게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리파이의 차를 내어주고 싶지만 그 차를 끓이기가 여간 까다로워야 말이지. 

우선 그 차를 올바르게 쓰기 위해서이니 밀림의 유적지에 다녀와보게. 그곳에서 밀레시안이 울음을 터트렸던 드래곤의 악몽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오는것이 좋겠군. 

무엇이 밀레시안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었고 무엇이 밀레시안의 심장을 움켜쥐었는지, 왜 밀레시안이 그 꿈을 잊기를 희망하며 스스로 차를 들이켰는지. 

그대는 확인하고 생각하고 또 헤아려야하네, 실수로 그대에게 향하는 사슬을 끊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지”


코우사이는 가벼운 농담을 하듯 경고했고 카즈윈은 그정도에 끊길리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진가를 내보였다기보다는 농락당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스콜이였다. 

카즈윈은 밀림의 유적에 받칠 제물을 찾을 시간이 없다고 대답했지만 코우사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변명을 한손가락으로 밀어내었다.

코우사이의 손끝이 헤루인의 문장을 가리켜보였다.


“이름과 강줄기는 달라졌을지언정 그 물이 솟아나온 수원지는 하나의 웅덩이를 가리킨다네. 그대는 잊혀진 이름을 노래하고 지워진 영광을 위해 검을 드는자, 위대한 영 이리니드는 결국 그대가 기리는 빛속에서 태어났으니”


유물은 필요 없었다. 필요한 것은 그 자신의 준비된 의지뿐. 

코우사이는 머리위로 지팡이를 흔들었고 샤말라가 촌장의 집 뒤로 다가가 커다란 솥을 꺼내왔다.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고, 코우사이는 카즈윈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폭포속 암초에게 땟목이 박살나는 고난을 겪으며 에르케의 폭포아래서 몸을 일으킨 카즈윈은 한숨과 함께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고행인건지 밀레시안이 쓰러졌고 슈안의 뻔히 보이는 속셈에 제발로 뛰어내리고, 코우사이에게 마음을 읽히질 않나 한밤중에 폭포에서 뛰어내리질 않나. 

거기에 예민하게 경계심이 오른 신성력은 유적지 위에 겹쳐진 샤먼들의 결계를 꿰뚫어보며 폭포 여기저기에 숨어있는 샤먼들의 발자국을 환영처럼 어른거리게 만들어 카즈윈의 시각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사방이 빛나는 유적지의 풀숲. 카즈윈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열기처럼 달떠오른 신성력을 가라앉히기 위해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야금지처럼 푸른빛이 반짝거리던 푸른빛이 사라진 유적지에서 남은 빛의 조각들은 작달만한 에메랄드의 조각들.


비가 내릴 것이다. 카즈윈은 아직 찾아오지 않은 비구름을 쫓아 하늘을 둘러본뒤 서둘러 유적지를 향해 다가갔다. 

태양과 눈과 번개의 조각이 뒤섞인 3개의 기둥들이 카즈윈에게 반응하며 9개의 돌조각을 바쁘게 돌려놓기 시작했다.

유적은 짧은 빛과 함께 삼각형으로 빛났고 카즈윈은 유적속에 잠든 기억을 들여다보았다. 이정도 옛결계의 해제는 훈련소의 모의결계해제에 비하면 쉬운축에 속하는 작업이였다.


기억은 각각 고대 엘프와 고대 자이언트 고대 쿠르쿨레 원주민들의 기억였다. 

이리니드는 그들에게 새로운 빛을 가져다 주었고 그들은 그 빛을 탐내며 각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신을 상대로 일으키는 전쟁, 카즈윈은 고개를 내저었고 그것은 기억속의 이리니드도 마찬가지였다. 

고대의 엘프들이 빛을 다루는 힘을 얻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을까, 아니면 고대의 자이언트들이 네반과 협력헀다면 판도가 조금 더 달라졌을까. 

이런저런 추측을 해본들 이 모든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였고 사사로운 흥미는 꿈결같이 일어났다 신기루처럼 사라지며 폭포소리와 함께 흘러가버렸다. 

이 모든 과거의 잔상에 무슨의미가 있을까.


카즈윈은 이미 이뤄진 예언에 대해 깊은 흥미를 느끼지 못한채 자리에서 제단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같은 기억을 보았지만 카즈윈은 밀레시안의 악몽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손끝에 피멍이 맺힐정도로 땅을 파고 내려가던 자이언트들이나 기억을 잃은채 절망하는 엘프들에 대한 동정심일지도 모르고 끝까지 신을 배반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땅에 남겨져버린 인간들에 대한 애착심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공포는 무엇일까. 카즈윈이 자리에 멈춰서 방금 받아들인 제단의 기억을 다시한번 훑어보았지만 어디에도 밀레시안이 두려워할만한 이미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카즈윈은 천천히 눈을 뜨며 검을 치켜들었다.

원숭이 얼굴의 가면을 쓴 샤먼이 결계 너머에서 불쑥 나타나 카즈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이쿠, 이게 누구야?! 귀하디 귀하신 신의 기사님아니야?”


카즈윈은 가면의 모양으로 그가 누군지를 알아보았고 아쿨은 이름이 불린것에 호들갑을 떨며 발을 동동굴렀다.


“나를 알아? 내 이름을 알아? 이야 나도 엄청 유명해졌구나? 그럼그럼, 내가 바로 밀레시안을 구한 영웅, 정신적 스승이자 위대하신 샤먼의 지도자!”

“쓸데없는 말 늘어놓지 말고 본론만 말해. 원하는게 뭐지?”


카즈윈은 겨누웠던 단검을 집어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료상으로 읽었을때도 직감했지만 이 인물과 카즈윈은 맞지않아도 한참 맞지 않는 타입이였다. 

카즈윈의 한숨만으로 아쿨은 더욱 즐거워졌는지 온갖 환호성과 오두방정을 떨며 카즈윈에게로.

하지만 안정거리를 지키며 은근히 카즈윈의 사정거리를 가늠하는 것이 카즈윈으로 하여금 더욱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아니 왜?! 일부러 델리케이트하게 프라이버시한 에어리어를 존중하며 이렇게 천천히 접근하고 있는데?!”


카즈윈이 아쿨을 무시하자 아쿨은 상처를 받았다며 어흑어흑 우는 시늉을 하며 제자리에 멈춰섰다. 

고개를 숙이고 가면앞에 양손을 모아 우는시늉을 하던 아쿨이 내 섬세한 하트에 커다란 저지먼트- 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둥글둥글하고 과장된 색체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던 원숭이 가면대신 날카로운 독수리의 가면을 뒤집어쓴 아쿨이 가면너머로 카즈윈을 바라보며 손날을 내밀었다. 

팔 전체를 칼날로 삼은것마냥 날카롭게 두어번 몸을 돌리는 모습은 유연하게. 

검무를 추듯 유연하고 재빠르게 카즈윈의 주변을 맴돌며 한 판 춤사위를 추던 아쿨이 짝 소리나게 양쪽 허벅지를 내리치며 다시한번 특정자리에 멈춰섰다.

신성력으로 정렬되었던 제단의 기둥이 어느새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아쿨의 뒤에서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아쿨이 입을 열었다.


“힘들다!!”


추라고 한 적 없어. 카즈윈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표정으로 아쿨을 노려보았지만 아쿨 자체를 얕보는 것은 아니였다. 

그는 확실히 밀레시안을 악령의 주술에서 구해낸 실력자였고 봉인된 검은용 바펠세파르의 대면에서 살아나올 만큼 예측불가능한 인물이였다.

방금 춘 춤이 무슨의미인지 그가 왜 카즈윈과 제단사이에 끼어들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카즈윈은 본능적으로 그를 경계하며 주변의 기척을 살펴보았다.

다른 샤먼들의 기척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처음 폭포에 떨어졌을 떄와 다른 이변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과 제단을 반경으로 한발자국도 남지 않은 깨끗한 풀숲.


카즈윈은 그제서야 아쿨이 다른 샤먼들의 기척을 지우기 위해 그토록 큰 동작으로 주변을 뛰어다녔다는 것을 깨달으며 아쿨을 바라보았다.

땀이 뻘뻘 흘릴정도로 뛰어다녔는데도 풀숲 어디에도 아쿨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자는 신성력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는 자, 카즈윈은 성가시게 되었다며 지긋이 입술을 깨물고는 허리춤으로 양손을 끌어당겼다. 

아쿨은 아아, 그러지마 제발. 네가 다치면 자던 밀레시안이 벌떡 일어나서 내 멱살을 잡을꺼란말이야? 하지만 나는 상의를 입지 않았으니까 그럴때 잡히는 멱살은..?! 하고 제목을 잡은뒤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흉내내었다.

그 멱살 나도 잡고 싶어지는데. 카즈윈이 반응없이 아쿨을 응시하자 아쿨은 쯧, 안웃네. 비장의 개그였는데 하는 혼잣말과 함께 양팔을 넓게 펼쳤다. 

발이 크게 굴러지며 풀숲이 움직였다. 어딘가에서부터 비가시작되고 있는 바람이 불어왔다.



“자! 그럼 이제 궁금한 것을 이야기해 보자고! 밀레시안은 쓰러졌고, 너는 이리아로 불려들어와졌어. 

밀레시안의 열병은 악몽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결론 났고 너는 악몽의 연쇄를 끊어낼 리파이의 묘약을 찾기위해 코르마을에 들어섰지. 

코우사이영감이 가끔씩 능구렁이 같이 굴긴하지만 본질은 착한영감이라 몇번 캐묻는 시늉만하고 너에게 약을 넘겨주겠다고 했겠지만 나는 달라! 괴짜거든! 

나는 밀레시안의 악몽을 보았고 밀레시안의 공포를 보았으며 밀레시안의 절망을 직접 목격했어. 너도 보았을까? 아님 전해들었을까. 

아아 모를 노릇이야 바다건너 역사건너 시간의 틈새로 숨어든 옛날 옛적 초 고대신을 모시는 제사장의 기사들따위 내가 헤아릴 수 있는 깊이가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건 저 머나먼 별에서 뚝떨어진 우리 영웅나으리도 마찬가지지. 누가 그런 덜떨어진 아이를 영웅으로 만들 생각을 했을까. 

모를노릇이야 정말 모를노릇이야. 하지만 우리들은 자연의 소리를 듣는자, 정글을 떠도는 영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생업이지. 

자 그러니 들어봐. 잘 들어봐 수리부엉이 친구. 밀레시안의 약점이자 밀레시안의 절망. 밀레시안의 어둠을 잘 이해하고 있는 이가 빚어내었던 악몽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을까..!”



그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아쿨은 성큼성큼 걸어가며 기둥들의 사이를 맴돌았다. 

비는 한걸음 내딛어질 때마다 점점 더 굵어졌고 뿌리의 행방을 묻는 외침이 울렸을때는 거센 장대비가 되어 카즈윈과 샤먼들의 머리위에서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비가 대지를 두드리는동안 흘러넘친 수이트의 강물은 점점 불어나 제단을 향해 번져왔다. 

넘쳐흐른 강물이 카즈윈의 발목을 적셔왔고 강바닥에 가라앉았던 크고작은 돌멩이들이 물길이 휩쓸려 제단의 바위근처까지 흘러들어왔다. 

흙탕물속 반짝이는 것은 보석이였고 날카로운것은 나무조각이였다. 


나무조각은 카즈윈의 그리브를 캉캉 두드리다 멀어져갔고 보석들은 더이상 카즈윈의 곁에 다가오지 않은채 고요히 물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가만히 내려다 보는 강물에는 일정한 흐름이 자리하고 있었고 강물은 카즈윈과 유적을 돌아 어디론가를 향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강물이 흘러가는 물결을 가리켜 보이는 것은 아직 가라앉지 않는 나무조각과 물결밑에서 떠올라온 풀잎의 쪼가리들.

카즈윈은 가만히 내려다 보는 강물위로 낯익은 이의 손길이 닿아있음을 깨달으며 고개를 하늘로 들어올렸다.

빗물이 뺨 위로 떨어지고 턱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눈길이 닿는 곳 어디에도 뿌연 비구름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 첫물방울이 떨어져 내리던 순간부터의 착각.


오늘 하루만 두번째로 느끼는 불쾌감은 뭉근하고 뜨거웠으며 막 피어오른 수증기처럼 텁텁하고 빡빡한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뺨을 스치는듯한 뜨거움에 카즈윈의 뺨이 씰룩 움직였다.

물에 가라앉아야할 소낙비 속에서 낯선 흙냄새가 섞여있었다.

이 이국의 냄새에 색을 입힐 수 있다면 그 빛은 보라빛에 가까울 것이고 그리고 그 색을 하얀 천에 베어들 수 있게 한다면 정글의 의류점 아가씨는 그 빛을 리피아빛이라고 부를 것이 분명했다.

카즈윈은 쓴웃음을 머금고 기둥위로 올라섯 아쿨을 올려다 보았다.

코우사이의 꿈속에 레라크가 끼어든 것일지 레라크의 주술속에 코우사이가 관여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것은 그 때, 그 갑작스러운 소낙비가 지금의 꿈까지 이어져 왔다는 것.


스콜을 나르던 열대의 기류는 그 자체가 거대한 손이 된것 마냥 카즈윈을 꽉 쥐어눌렀다. 

아직 듣지못한 말이 있다며 아쿨은 가면을 벗은뒤 카즈윈을 향해 깊히 허리를 숙여 얼굴을 바싹 들이대어왔다. 

물빛의 눈동자 너머로 시간이 뒤섞인 그림자가 물결치고 있었다.

아직 듣지못한 대답, 묻지못한 질문. 귀하시 귀한 아튼시미니의 수리부엉이를 쥐어짜서라도 확신하고 싶은 한마디.

하지만 카즈윈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은채 아쿨을 노려보았고 아쿨은 아이쿠 무셔라 하고 새는 발음으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기둥아래로 뛰어내렸다. 

첨벙 하고 울리는 물소리와 함께 밤하늘이 튀어올랐고 카즈윈은 가까운 거리에서 튀어오른 그 물을 고스란히 뒤집어 써야만 했다.

눈안으로 흙탕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감는 사이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둥둥, 울려오는 북소리 사이에는 크고 작은 발소리가 섞여있었고 젖은 풀잎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는 작은 발소리들은 숙련된 정글의 전사들이 아닌 평범한 원주민들의 것에 가까웠다. 

작은 새들이 홰를 치며 풀숲을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소리에 놀란 풀벌레들이 날개끝을 비비던것을 멈춘채 등불을 향해 날아들었다. 

벌레 한마리가 부딪친 정도로 등불은 깜빡거리다 꺼져버렸고 마을은 천천히 어둠속으로 잠겨들었다.

꿈은 계속된다. 카즈윈은 그럴 일은 없을것이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카즈윈을 꽉 잡아누르던 기류는 어느틈엔가 사라졌고 허공을 휘젓는 손은 마른공기를 만끽하며 푸르스름한 불꽃을 피어올렸다.

잘 정돈된 신성력이 비구름속으로 치솟아 올랐다. 하늘 높이 치켜든 저지먼트는 땅을 내리치는 대신 유려하게 하늘을 한번 휘저어내고는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드러나는 순간이였다. 

한참전에 저버렸다 생각했던 팔라라는 다시 찾아내어줄 이 시간을 기다렸다며 따스한 빛을 내리쬐었고 황금빛 태양아래 드러난 꿈속의 빗방울들은 서둘러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거꾸로 내리는 비가 정글의 풀숲에서 솟아오르는 동안 코우사이는 멋쩍은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볼을 긁적이고 있었다.

잠투정하나 없이 깨어난 조숙한 어린아이를 바라보는듯 그는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이였다.


“자네는 미련없이 잠에서 굉장히 빨리 깨는 타입이군.”


“리파이의 묘약는?”


“묘약이 아니라 차일세 차. 어디까지나 차로 마시는 거라니까”



코우사이는 아쿨같은 사기꾼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며 단단히 주의를 주었고 카즈윈은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코우사이의 찻잔을 받아들었다. 

선잠을 자는 동안 차가 완성되어 있는 것은 좋은 결과였지만 깨어나기 위한 대가로 지불된 신성력이 너무 꽤 크게 소모되어있었다.

카즈윈은 어찔한 피로감에 머리를 흔들었다. 마치 헤루인의 제단의 결계를 해제했던것과 같은 무거운 감각이 그를 덮쳐왔다. 

쉬어갈 시간이 없는데 이런 피로감은 부담스럽단 말이지, 카즈윈이 손을 쥐었다 펴는 것을 반복하며 몸상태를 확인하는 동안 차의 주의사항에 대해 끊임없이 설명을 늘어놓던 코우사이의 말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코우사이도 중간부터 카즈윈이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과는 상관없이 한번 시작된 설명은 끊을 수 없다는 태도로 긴 노래를 읊조리듯 홀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중간중간 촌장의 지팡이가 흔들리며 둔탁한 목각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코우사이는 카즈윈의 주변을 둥글게 걸으며 긴 말을 끝맺었다.



“자네의 피로감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걱정하지 말게. 이대로 수리부엉이가 둥지로 들어가는 것 또한 미리 준비하는 과정중에 하나일 뿐이니. 

성공적인 사냥을 위해서는 이른 아침부터 바삐 날아오른 날개를 잠시 쉬어두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 법일세.

악몽의 열기가 가라앉는 밤기운을 노려보게. 쫓고 쫓기던 시든 꽃길의 불길이 잦아들 무렵이면 산길아래 감춰진 빛나는 바위틈을 찾아낼 수 있을테지. 

달 없는 밤, 시간을 잃은 무덤, 불타오르던 족쇄는 식은지 오래건만 죽은흙에 손을 묻는이는 누구란 말인가.

자네가 바라는 대로 별을 묶는 사슬을 모조리 끊어버리건 외로운 외줄타기끝에 서로를 만나건 이제 이 땅이 관여할 재간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네. 

하지만 들어보게나 시간이 이미 지나갔고 비는 그쳐버렸는데 자네가 발을 담갔던 수이트의 강물위로 떠오른 빛은 정녕 강이 빚어낸 빛나는 돌만이 전부였는가.”



쿠르쿨레의 노래는 끝이났다. 

코우사이는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였지만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 카즈윈이 대답이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카즈윈은 코우사이의 시선을 무시한채 찻잔이 흘러넘치지 않도록 다시한번 손안을 확인했고 품속에서 푸른 여신의 날개를 꺼내들었다.

코우사이의 아쉬움과는 상관없이 푸른 여신의 날개는 속절없이 푸른 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흐르는 시간을 막을 방법이 없듯이 안개처럼 녹아드는 카즈윈의 모습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카즈윈의 입장에서는 주변의 풍경이 흐려지는 것이였지만 어느쪽이든 붙잡을 수 없는것은 매한가지였다. 

흐려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것.

꿈속에서 만났던 아쿨과 코우사이가 그러했듯이 어느쪽이 진짜 꿈의 주인이고 어느쪽이 끼어든 불청객의 꿈인지 구별할 필요는 없었다. 

카즈윈은 흐려지는 풍경속 코우사이의 눈이 물빛으로 흔들리는 것만을 확인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그 강물위에서 바라본 것은..”



현실이 돌아왔다. 

카즈윈은 게이트의 다리를 건너며 밀레시안의 상태를 먼저 물어보았다.







밀레시안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 끓어오르는 미열속에 잠들어 있었다. 

사방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동시에 노을빛을 닮은 그리움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동시에 검은 죽음의 색을 띄고 있었다. 

아니야, 여긴 내가 잠들어있을 곳이 아니야. 이 장소를 떠올려서는 안되었는데.

밀레시안은 스스로가 이곳에 있으면 안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얼굴부터 발끝까지 덮여있는 열기에 꼼짝없이 짓눌러 눈을 감아야만했다.

뜨겁고 또 괴로웠다. 숨쉬는 것조차 괴로운 시간이 계속해서 이어져갔다. 

용의 가호를 잃은 나약한 육신위로 이 열기는 폭력이였고 동시에 고문이였다. 


당신은 어땠을까 나는 어땠을까. 서로 다른 산맥을 등지고선 그림자들이 어둠속 너머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이 보이지 않았고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손이, 그 마음이, 엇갈렸던 시간만큼 켜켜히 쌓여왔던 절망은 어떠한 형태도 이루지 못한채 애끓는 열기가 되어 병마처럼 영혼을 집어삼킨다.

밀레시안은 무기력하게 누운채 매말라버린 눈물을 닦기위해 무거운 팔을 들어올렸다. 흙내음이 얼굴을 덮어왔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영생의 밀레시안에게 이보다도 더 어울리는 향기가 있을까. 밀레시안은 눈을 감고 있는데도 홧홧하게 불타오르는 주변을 느낄수 있었고 그 열기에 물든 밤하늘을 상상했다. 

이 무덤은 그러한 의미였다. 초승달을 집어삼킨 불타는 대지는 영원히 태양을 북쪽하늘 언저리에 옭아매어 두었고, 비가내리지 않는 활화산의 열기는 그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천혜의 파수꾼이였다. 

이 장소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그 안에 머무는 존재가 살아있는한 이 세계의 태양은 영원히 지지 않을 것이고 또한 영원히 떠오르지도 않을 것이다.


시간을 흐르는것을 보여줄 수 있는 물건이 있다면 오직 그 심장에 품고있었던 눈꽃의 결정뿐. 

하지만 그때와 달리 이곳을 찾아오는 여행자가 존재할리 마무했고 설령 그 작은 결정이 아직도 존재한다 하더라도 온전히 냉기를 품은채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리 없었다. 

한줌의 물로 녹아내린 결정이 기적같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하더라도 그 물방울이 가슴에 닿을일이 있을까.

밀레시안은 손끝으로 비틀어올리며 열기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녹아내린 눈꽃의 한방울은 가슴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버릴 것이고 이 굴레는 영원히 반복된다.

손끝에서 부서지는 매마른 흙의 감촉은 그 추측에 확신을 더하고 거칠고 쇠된 한숨소리는 일말의 희망마저 말려버렸다.


발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세상의 끝. 

지쳤어. 밀레시안은 끊임없이 이곳에 누워있으면 안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면서도 자신의 마음이 한구석 어딘가에선 언젠가 그의 체념을 마음으로서 이해할수 있을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뜨겁고 괴로웠으며 영원히 반복될 이 굴레 앞에서 절망했다. 매마르고 나약한 울음이 터져나왔다. 

이곳에 머무르는 것조차 기억의 왜곡이였고 추억을 덧칠하는 행위였다. 스스로가 가장 하고싶지 않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으면서도 지금 당장 이 굴레속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내가 하고싶었던건 이런일이 아니였는데.


그 날밤, 혹은 아직 날이 지나지 않은 새벽에서 이어지는 오늘날의 밤, 밀레시안이 하려던 것은 그들은 가버렸다는 사실은 인정이였고 그 납득의 과정이였다. 

그것은 문득 생각난 오래된 짐을 정리하는것과 같았고 잘 사용하지 않는 옛 옷장속 낡은 의복을 정리하는 것과 닮아있는 행동이였다.

삶의 여유와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을때만 하는 행동. 

밀레시안은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어 정리하듯 자신만의 저울위에 기억과 기록을 올렸고 추억과 현실의 무게를 비교했다.

진실과 거짓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균형을 맞추며 부풀려지거나 축소된 기억을 보완했고 적당한 이름과 멜로디를 붙여 마음속 한구석에 접어놓고는 했었다.

당신의 운명은 에린의 운명, 당신의 노래는 마비노기온의 한 이야기, 밀레시안은 오래전 떠나간 친구이자 스승이였던 자의 깃털을 움직였고 다시한번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때의 기억을, 그 순간의 아픔과 절망을,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었던 무언가와 빛나는 누군가를. 

하지만 그것은 밀레시안이 저지른 실수를 들춰냈고 그 오만을 지적했다. 자만했었다. 


밀레시안은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에 눈을 감으며 그렇게 생각헀다.




밀레시안은 상처입은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거대하고 위대했던 노이타르의 어둠이 고요하게 눈을 감았던과는 달리 처절하고 비참한 울음소리였다.

매마르다못해 건조한 울음소리속에 물기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밀레시안의 실수였다.

왜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왜 가라앉힌 기억을 꺼내들고 말았을까, 밀레시안은 이미 한차례 화산을 바라보았었고 한차례 화산의 정경으로부터 도망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이미 그 시기에 한번 이상 그에 대해 눈물을 쏟아내었고 그 눈물은 무더운 코르마을 풀숲 어딘가에 스며들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나은 울음소리였을지도 모르지만 기억이 몽롱한 탓에 확신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울며 멈춰서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쿠르쿨레의 지혜에 따라 밀레시안은 그 용의 포효소리를 마음속 깊숙한 곳에 가라앉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던 예언의 조각또한 추억과 기억 어딘가 즈음에 묻어버리고 만 것이였다.



찻잔을 내밀던 코우사이는 밀레시안에게 엄중히 경고했다. 

모든 불안과 두려움은 자신의 안에서 찾아오는것.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인가 현재의 기억인가 미래의 기억인가. 그리고 그 모든것은 누구를 비추는 거울에 반사된 상이였는가.



‘쿠르쿨레의 심장은 이리아의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자 현재, 그리고 미래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거울이라네’



쿠르쿨레의 심장은 결국 이리니드의 빛이였고 이리니드는 네반이였다. 

네반이 숨겨두었던 칼리번의 반쪽은 파르홀론의 제단 앞에서 마지막 진화를 선택했고 그 결과는 다름아닌 밀레시안 자신이였다.

밀레시안은 울음소리 대신 웃음소리 비슷한것을 내었고 죽은 흙과 함께 자신을 끌어안았다.


밀레시안은 꿈을 꾸지 않는다. 다만 다른사람의 꿈을 비출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꾸고 있는 이 열병같은 꿈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밀레시안의 꿈이 반복되는 순서에 따라 발자국소리가 찾아왔고 밀레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불타오를 심장없이 텅 빈 가슴을 가진 인형이 밀레시안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거짓을 숨길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인형은 비어있는 가슴을 눈꽃결정으로 가릴생각도 하지않은채 태연하게 밀레시안의 앞에 멈춰섰다.

인형은 쓰러진 밀레시안을 보고 슬퍼하지도 경악하지도 놀라워하지도 않은채 입을 열었다.


“드래곤의 계약자. 당신은 아드니엘의 감응의식에 선택된 존재입니다.”


그것은 밀레시안이었으되 밀레시안이 아닌 밀레시안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무언가의 찌꺼기였다. 

꿈을 꾸지 않는 밀레시안의 마음속으로 들어온 제단안의 무언가, 고대의 자이언트를 기억하던 눈꽃문장의 파편이기도하고 고대의 엘프의 절망을 떠올리던 태양문장의 빗살이기도하며 하며 고대의 쿠르쿨레 원주민의 기억중 가장 인간의 영혼을 닮은 소원이기도 한 망령.


밀림의 유적속에 잠들어있던 간절한 원념은 밀레시안의 속에서 그림자로서 성장해 나갔고 밀레시안은 끝내 자신이 키워낸 그림자의 꿈 속에 갇혀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뿌리치면 그만일텐데. 밀레시안이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인형은 두려워하지도 피하려하지도 않은채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연보라빛으로 빛나는 눈동자속에 비치는 모습은 밀레시안이 자신의 것이 아닌 꿈속에 갇힌것에 절망하는 모습을 비추고 있는 동시에 자신이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그의 모습을 외면해버린 결과물이기도 했다.


그 예언을 실제로 마주하고 싶지않아 그 시간으로부터 도망친 대가는 길고긴 시간을 돌아 지금 이 장소 이 시간, 이 모습으로.

밀레시안은 천천히 다가가 인형의 목을 모아쥐었다. 뻔뻔스러운 얼굴로 계약자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 그것의 목을 부러트리고 싶었다. 화살을 만들어 낸 부주의한 손을 용암에 담궈저리고 싶었다. 

그 거짓말에 속은 귀를, 열기구를 타고올라선 양 다리를, 두마리의 용을 추격하고 검고 푸른 비늘을 가진 아름다운 어둠을 겨누웠던 눈동자는 결국은 이것, 이 망령, 그리고 나 자신.

밀레시안은 또다시 같은 결론에 이르게되는 자신의 손을 원망하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고 인형은 가만히 주저앉는 밀레시안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꿈이 반복되고 있었다.


“불타는 대지의 족쇄는 부서지고…”

“아니야.”


“죽은 흙이 새어나온다”

“아니야 틀려.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았어.”


“나는 안다 그리고 보이나니”

“네가 보았던 시간은 오지않아. 운명은 비틀렸다. 그는 용의 감응자가 되지 않았어. 아드니엘의 이름을 등에 업은건 그가 아닌 나야”


밀레시안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꼬박꼬박 인형의 말에 대꾸했고 인형은 개의치 않아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안다, 그리고 보이나니. 

밀레시안은 그 뒤에 찾아올 예언아닌 저주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인형의 옷을 모아쥐었다. 

한순간 힘을 모았다가 저 용암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꿈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열병의 저주는 계속해서 밀레시안의 기억을 불태운다.


그러고 나면 밀레시안은 또다시 열병에 괴로워하며 인형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열기가 조금 사그라들어 밀레시안이 그날 밤, 무엇을 하려 했었는지 무엇을 떠올려 이곳에 왔는지를 기억해 낼 때까지.

밀레시안은 숨을 몰아쉬며 인형이 말하기를 기다렸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어두운 대지의 운명을 입에 담을때가 이 꿈을 끝내기에 가작 적기의 타이밍이였다.

하지만.



“하지만”


인형은 그런 밀레시안의 반복되는 꿈을 알고 있었다는듯 자신을 밀쳐내어 그 반동으로 용암에 몸을 던지려는 밀레시안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쥔뒤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멍하니 서있다 걸어오기만을 반복하던 평소의 모습이 아닌 좀더 강한 자아와 강한 완력 그리고 확고한 의지를 담아 인형은 밀레시안과 시선을 맞춰왔다.

어디서 이런 힘을 얻언걸까, 밀레시안이 생각을 이어가기도 전에 인형은 바싹 얼굴을 들이밀어 그 작은 입을 재잘거리기 시작헀다. 인형의 입으로부터 신선한 풀내음이 풍겨져왔다.

마치 이제 막 새 허브로 속을 채워넣은것 마냥 인형은 생기발랄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결국 그는 검은 용의 기사를 자처하며 반용의 재앙이 되었지요”

“……무슨”


“나는 압니다. 그리고 보았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신의 조각과 그들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이리아 상공의 문의 건너편을. 그리하여 나는 확신하여 말하건데 시간은, 이제..”

“그만, 말하지마”


밀레시안은 서둘러 꿈을 처음으로 되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인형의 완력이 너무 강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영향을 받을 정도로 밀레시안은 나약해져 있었고 그 영향은 곧 아드니엘에게, 에린의 운명으로 전해지게 된다. 

밀레시안이 강하게 몸부림칠수록 꺼져가던 화산은 격렬하게 타올랐고 멈춰있던 용암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불타는 족쇄가 흔들리며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우르릉 하고 울리는 심상치 않은 화산의 움직임이 인형의 목소리를 묻어버릴 듯이 강하게 대지를 흔들고 있었다.


밀레시안에게 기생하며 자라난 망령의 꿈, 그런 망령의 꿈을 비춰내며 그 안에 주민으로 갇혀버린 밀레시안. 

꿈속에 갇힌것이 밀레시안인건지 인형인건지 꿈을 제어하는 것이 인형인건지 밀레시안인건지, 

앞뒤가 어긋나게된 열기어린 꿈속에서 밀레시안은 인형의 손을 떼어내려 애를 쓰며 머리를 흔들었다. 


깨어나, 아니 다시 잠들어. 아니 깨어나. 밀레시안의 노력속에도 인형은 천천히 입을 열어 마지막 문장을 끝맺으려 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제.. 용이 울부짖는 울음소리가 나며 공간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는 그만 꿈에서 깨어나야할 시간. 밀레시안은 이대로 꿈속의 균형이 무너졌을때 표면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 누구인지를 확신하지 못한채 인형을 바라보았다. 

그때처럼 이 인형이 나가게 되는걸까 아니면 다시한번 자신이 표면의 인격으로 나가게 되는걸까. 

밀레시안이 확신하지 못하는 절반의 확률만큼 인형은 자신의 승리를 믿고 있었고 죽지 않는 별의 영혼과 죽을수 없는 망령의 찌꺼기 를 매단 운명의 저울은 서로다른 기울기로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영혼의 무게를 가늠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빛이 스며들어왔다. 밀레시안은 달없이 어두웠던 초승날의 밤하늘을 떠올리며 눈을 깜빡였다.

저 푸르고 곧은 빛이 달이 아니라면 누가 내는 빛이라는 말일까.


밀레시안의 의문에 대답하듯 곧게 뻗은 대검은 그대로 인형의 머리 위로 내리쳐졌고 밀레시안은 인형에게 양 팔이 붙잡힌 모습 그대로 인형이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바람이 불었다. 

검은 대지 깊숙히 패인 저지먼트의 흔적위로 하나 둘씩 물방울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마지 저가형 옷감으로 대충 만든 헝겁인형처럼 양 팔을 남긴채 V자 모양으로 찌그러진 인형으로부터 보라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나는 희미하게 빛이 바랜 모습이였고 다른하나는 선명하게 짙은 색채를 띄고 있는 모습이였다. 

두줄기의 연기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동안 구름은 점점 짙게 몰려들었고 기분탓이라 생각했던 두어방울의 빗줄기는 곧 장대비가되어 쏟아져내리며 불타오르던 활화산을 차갑게 식혀내었다. 

빗줄기에 잿가루가 씻겨져내리듯 남아있던 인형의 팔이 떨어져내렸고 밀레시안은 온전한 자유의 몸이 되어 그자리에 망연하게 앉아있었다. 

움직여야하고 움직일수 있었는데도 다리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비가내리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어떤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는지 실제로 그떄 어떤 표정으로 현실을 피해 도망쳤는지에 대한 기억이 천천히 검은 바위틈에 괴인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비가내리지 않은것은 제단속 예언이였고 비가내렸던 것은 현실의 라스파. 

밀레시안은 화산앞에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루에리를 몇번이고 다시 찾아가며 그가 다른말을 할때까지 그 어리석은 시간을 반복해나갔다.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 같은 꿈을 꾸고 있었던 걸까?”




비가 오던날, 활화석이 모두 식어 눈꽃결정이 필요하지 않던 그날. 밀레시안은 빗소리에 목소리를 숨긴채 오열했고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다신을 대체할 누군가를 간절히 바랬다. 

누군가, 하지만 도망쳐야, 어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하지만 마주서야, 아니, 그렇지만.. 혹시, 누군가가. 


“누군가가 지금 나를 도와줄 수 있다면…”




“그 누군가는, 지금 나를 부르는거야?”


밀레시안의 절망이 제단에서의 예언의 기억을 끌어올렸을때처럼. 빗속에서 오열하던 밀레시안은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는 검은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형태를 갖추지 못해 검고 끈적한 무언가로 흘러내리던 열기와 다르게 그는 온전히 제 모습을 갖춘채 서늘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밀레시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움직였지만 엄격하게 밀레시안을 질책했고 다정하게 팔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밀레시안을 품에 안았다.

식다 만 피부에 다른사람의 체온이 닿자 금방이라도 타오를것 같이 발갛게 달아올랐지만 밀레시안은 필사적으로 그의 등을 움켜쥐며 서툰 숨을 들이마셨다. 

이 냉기가, 아니 이 온기가, 유일한 구원처럼 맞닿아오는 이 마음이 밀레시안이 그토록 간절하게 찾던 탈출구였고 그렇게나 애타게 찾아해매던 유일한 이해자였다. 

밀레시안은 그가 화를 내지 않고 있다는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쉬는 숨결속에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런곳으로 찾으러 오게 해서 미안해요. 하고 속삭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대답없이 밀레시안의 등뒤로 두른 팔을 단단히 끌어당기고 있었고 그 시선은 밀레시안의 어깨너머 검은 대지로 내리꽂혀 있었다.


카즈윈이 밀레시안을 단단하게 붙잡아두는 동안 세차게 내리던 빗줄기는 주인을 잃은 꿈을 녹여가기 시작했고 깎아지를듯 높게 솟아올랐던 화산은 흐물흐물한 검은 모래사장으로 무너져내렸다. 

하늘이 굳게 닫혀있는 세상아래서 두 사람은 어느새 새까만 평지위에 서있게 되었지만 길을 잃을것 같지는 않았다. 멀리서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였다.

제 할일을 마친 비가 잦아들자 어두워졌던 하늘이 다시 제모습을 들어내었다. 

한동안 제 성질껏 비를 내린 하늘은 한결 깨끗하게 닦여진 모습으로 휘양찬란한 소울스트림의 모습을 드러내었고 밀레시안은 저도모르게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리며 숨을 골랐다.


“카즈윈”

“그래”


“별이 떴어요”

“그래 알아”


“이건 당신이 내게 보여주는 꿈일까요?”

“글쎄”


“아니면 내가 정말로 꾸고싶었던 리파이의 환상일까요.”


카즈윈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밀레시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채 다른 한쪽 팔을 둘러왔다. 

양팔 사이에 옴짝달싹할 수 없이 안겨든 모습이 되었지만 밀레시안도 그 자세가 한결 편한건지 천천히 머리를 뉘이며 카즈윈에게 온전히 체중을 기대어왔다.

별이 뜨고 또 떨어져내리는 모습이 가득한 세계가 하늘에 하나 발밑에 하나. 

물속에 비치는 소울스트림의 모습을 바라보던 카즈윈이 평온히 잠든 밀레시안을 고쳐 안아들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어느쪽이든, 네가 그것으로 편해진다면야.”








열기가 가라앉았다.





https://twitter.com/teclatia/status/884113098507943940

07.10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