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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오블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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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르는 세스티아 아카데미의 비밀스러운 사교(社交)모임의 회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여기서 말하는 비밀은 그들이 허가 받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일뿐 그들이 정말로 어떠한 교리(敎理)를 따르는 무리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들은 사교도(邪敎徒)가 아닌 사교도(社交徒)였다. 그저 모임의 의도가건전하지 못하고 에르그논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전을 가진 미지의 물건을 주술적인 의미로 믿고 있는 평범한에서 살짝 벗어난 세스티아 아카데미의 학생들.
물론 엘라르는 자신이 하는 일이 바보같아보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계속 이 사교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도덕적이지 못하거나 이 윤리적이지 않은 일이라고 믿고 있기 떄문이었다. 가끔 좀 요사스러운 것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어떠한 교리(敎理)를 따르지 않았으니 백 번을 묻더라도 백 번 모두 교도(敎徒)가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아직은. 그러니까, 아직까지는.
그럼 어디서부터가 문제가 되었을까.
“에델레드… 피운갈… 구아드레.. 브리샤..페르하레..”
엘라르는 그 시점이 언제나와 같이 사교회장(社交會長)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보다 앞서 사교모임에 소속된 이들뿐만이 아닌 늦게 들어와 대면자가 된 피운갈 선배와 같이, 거울을 대면하는 자의 선출은 단순히 근속한 날짜의 순서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기준은 사교회장(社交會長)만이 알고 있었고, 그들은 선택되는 입장이었다.
엘라르는 그 알 수 없는 기준의 아홉번째 대면자로 선택되었다.
원래는 다섯명만 선발하고 멈출 명단에 엘라르가 아홉번째 이름으로 불린 까닭은 처음 다섯안에 들지 못한 일부 사교회원들이 강한 불만을 드러낸 탓이었다. 이렇게 모임의 주기가 불규칙한 사교모임에서 입회한 순서도 아닌 명단이 다섯명 밖에 안뽑는 것이 너무 답답하다는 이유였다. 입회만큼이나 더욱이 탈퇴도 자유로운 곳이었기에 그들은 ‘혹시 모를’ 빈 자리를 채울 예비 대면자도 뽑아달라고 요청했다.
사교회장은 상당히 곤혹스러워 하는듯 하였으나 결국 그들의 요구를 승낙했다.
동시에 사교회장은 그들의 불만의 촛점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인지한듯 ‘예비’ 대면자의 명단에는 입회한 순번의 영향을 강하게 드러내었다. 입회의 초기 멤버 다음으로 들어온 엘라르가 아홉번째 이름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도 이 영향이 컸다.
그렇게 약간의 소란스러운 호명시간이 지나가고 다음으로 이 사교모임의 핵심, 거울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사교회장은 거울을 소개할 적에 단 두 가지 규칙만을 설명했다.
첫번째 규칙은 거울에는 어떠한 질문도 허용되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울에 비치는 것과 같이 그들의 거울의 답에는 어떠한 제한도 존재하지 않다고, 사교회장은 자신있게 그들의 신물을 소개했다.
다만 보이는 것과 같이 (성인 남성의 얼굴보다 조금 더 큰 정도였다) 거울의 표면적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으니 여기에 적힐 수 있는 글자 수를 넘어선다면 잘려보일 수도 있었다며 사교회장은 이지선다로 선택할 수 있는 질문이나 답변이 단답형으로 나올 수 있는 질문을 하는 것이 좋을 거라는 조언을 덧붙였다.
언뜻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설명에 첫 대면자 명단에 호명되었던 구아드레 선배가 손을 들고 간단한 예시를 부탁했다.
사교회장은 그리 어렵지 않다며 지금까지의 프롬포트를 모두 무시하고 로흐 리오스의 치즈케이크 레시피를 알려줘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레시피의 앞 부분만 제대로 읽을 수 있고 나머지는 흘러내릴 수 있는 형식이라고 대답했다.
사교회원들은 서로 수근거리며, 혹은 침묵속에 눈빛을 교환하며 사교회장의 설명능력과 이 모임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소란 속에서 한줄기 빛을 비춘 이는 모범생 에델레드였다. 평소에도 심미성을 겸미한 요약노트를 작성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그녀는 그러니까, 읽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개인의 문제이지만 답변은 무조건 나온다는 뜻이죠? 라는 말로 다른 사교회원들의 혼란을 말끔히 해소시켰다.
사교회장은 대단히 기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어 다음 규칙은 질문의 갯수에 관한 설명이었다.
질문은 오직 하나만. 한 사람에 한가지만.
말을 더듬어 다시 처음부터 읽는 정도는 괜찮았지만 이 기회를 틈타 질문의 뉘양스를 바꾸려 하거나 질문을 번복하는 등의 행위는 금지되었다.
또 당연하게도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여 다시 묻거나 더 자세한 질문을 던지는 것 또한 금지사항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질문에 끼어들어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도 금지되었다.
대면자의 명단은 이전의 모임에서 순번을 어기고 대면자의 권한을 약탈한 사람이 있어 생겨난 예방책이었다. 사교회장은 그 약탈자는 어떻게 되었냐는 말에 모임은 그대로 해산되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사교회장은 이곳에는 그런 무뢰한이 없을 것이라 믿으며 만약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해 그런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그 사람을 모임에서 제외하는 것으로 그칠거라며 회원들을 안심시켰다.
그들이 주의해야하는 것은,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자신의 대면자리를 약탈하지는 않을까 경계하는 것이 아닌 질문을 신중하게 골라야한다는 것 뿐이었다.
한번 내뱉은 말은 되돌릴 수 없다.
사교회장은 그 말을 강조하며 마지막으로 한가지 질문을 받겠다고 선언했다.
모두가 눈치를 보는 가운데 브리샤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그런데 대면은 꼭 모두가 보는 가운데에서만 해야하나요? 개인적인 질문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데요.”
사교회장은 난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모두가 지켜보지 않으면 꼭 두번 세번 질문하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심지어 지켜보는 중에도. 라고 말을 덧붙이는 그의 나지막한 혼잣말은 어딘지 성가시다는듯 옅은 짜증이 베어있어 엘라르로 하여금 위화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하지만 왜? 왜 아무도 이상하다는 걸 못 느끼는거지?
엘라르는 눈에 띄지 않되 완전히 잊혀지면 안된다는 미묘한 선을 지키기 위해 애써 웃으며 모임을 파하는 인사에 박수로 화답했다.
이후 첫번째 대면의식이 시작되었다.
첫번째 대면자는 모범생 에델레드였다.
에델레드가 물어본 것은 역시나 성적에 관해서였다. 모범생이라는 타이틀이 앞에 붙을만큼 그녀는 언제나 우수한 성적을 자랑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에게는 악연처럼 뒤따라오는, 그리고 때로는 그녀를 앞서나가기까지 하는 사촌동생이 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동생’이라는 이름은 몇 달의 차이조차 엄격하게 나누는 강조하는 집안의 풍조때문에 강요된 것일 뿐 두 사람의 학년은 항상 동일했다. 그녀는 요령좋게 깐죽거리며 그녀를 스트레스를 받게 만드는 크로제를 이번 시험에서 이길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러자 거울은 거짓말처럼 그녀에게 3개의 숫자를 보여줬다.
[5, 1, 3]
뭐지? 이 숫자로 찍으라는건가?
처음에는 의미를 모를 숫자라며 에델레드는 김샜다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바보같은 미신을 믿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라며 그녀는 정중하게 탈퇴 의사를 밝혀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 깔끔하면서도 미련없는 뒷모습에 여러 회원들이 동요를 일으켰으며 이 흔들림은 그녀를 동경하여 이곳에 참석했던 몇몇 추종자들이 함께 탈퇴의사를 밝힌 것으로 가속화 되었다.
특히나 그들중 하나는 대면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회원 중 몇몇은 이름도 제대로 말하지 않은채 아예 후드를 벗어 얼굴을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소개를 대신하며 저도 그만 둘래요. 라는 성의없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렇게 모임의 규모는 조금 줄어들었고 남겨진 회원들은 제각기 다른 의미의 침묵속에 잠겨들었다.
사교회장은 언제나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 모든 상황을 관망할 뿐이었다.
그러나 에델레드의 [숫자]의 의미가 곧 명확하게 밝혀졌다.
항상 10등 안쪽을 오르내리며 금방이라도 5위 안쪽으로 들어갈듯 기세좋게 성장하고 있던 크로제가 마지막 시험 날,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시험을 망치며 13등이 된 것이다. 13이라는 숫자에 동요한 몇몇 학생들은 급히 에델레드의 이름을 찾아 성적명단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들은 최상단의 다섯 이름표 사이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았다. 5등 이었다.
가채점이긴 하였으나 크로제의 성적은 언제나 가채점의 점수를 따라가곤 했기에 그녀와 크로제의 차이는 오직 마지막 시험날 밖에 없었다.
이는 다시말해서 크로제가 성적을 망치지 않았다면 그녀가아닌 크로제가 5등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하필이면 크로제에게 밀려 6등이 되었을 것이고 ,성적 우수자를 치하하는 행사장에서 그를 올려다 보아야 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 단상아래서 환하게 미소짓는 그녀를 바라보는 사촌처럼말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그냥 우연 아닐까?
에델레드는 분명 열성적으로 공부한 뛰어난 학생이었다. 크로제는 운이 없었을 뿐이고 에델레드는 노력한 결과를 얻은, 그야말로 순리에 의한 정당한 승리가 아닐까?
하지만 사교 모임의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델레드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에델레드는 곧바로 사교회장을 찾아와 자신의 섣부른 판단을 사과하며 모임에 돌아가고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사교회장은 예의 그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에델레드를 환영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거울과 대면했을 때 에델레드가 느낀 실망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에 동요되어 나간 이들은 전부 그들의 선택이고 그들의 책임이었으니까.
사교회장은 수많은 푸념과 원성을 뒤로하고 오직 에델레드만 대동한 채 네번째 모임회장에 나타났다.
그녀가 참석하지 못했던 세번째 모임, 에델레드가 떠난 직후 두번째로 거울을 대면한 것은 졸업반의 피운갈 선배였다.
원래 네 번째로 예정되어 있었던 피운갈 선배였으나 그의 앞에 있던 회원(에델레드를 뒤따라다니는 흔히말하는 추종자스타일의 학생이었다)이 탈퇴를 선언하며 순번을 앞당겨버렸고, 덕분에 두 번째가 된 구아드레 선배는 아직 질문을 생각하고 있다며 신중을 기하기 위해 순번을 뒤로 미루기를 희망했다. 결국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피운갈 선배는 예정보다 빠르게 두번째로 거울을 대면할 수 있었다.
질문의 시기가 빠르면 빠를 수록 좋았기에 피운갈 선배는 사양없이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가 묻고자 한 것은 과제의 방향성이었다. 조형학과에 소속된 그는 닥쳐오는 졸업과제의 작품선정에 깊은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첫번째 시안은 소, 그리고 두번째 시안은 고래였다.
졸업과제의 주제 또한 난해 하기는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적어도 바다와 육지중 어느것을 선택해야하는지를 고심했다.
그러자 거울이 대답했다.
[고래]
피운갈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로 향했다. 시일이 촉박했기에 이후의 모임부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사교회장은 그의 ‘일정’을 이해하고 이에대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을까? 에델레드도 이상한 헛소리를 들었다는듯 반응했는데 피운갈 선배는 너무 쉽게 믿은 거 아니야?
그렇기에 걱정과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고래]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그 자리에 참석한 사교회원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걱정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시험기간이 지나고 있을 무렵, 교외에서 기묘한 이야기가 하나 흘러들어왔다. 고민을 구매하고 싶어하는 소머리를 한 사나이에 대한 소문이다.
정확히는 당신을 괴롭히는 것.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의 원인을 구매한다는 의문에 남자에 대한 소문은 누군가에게는 ‘거울’을,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마족’을 떠올리게끔 만들었다.
특히나 옷은 어느 연회장에 참석할 수 있을 만큼 세련된 남성용 정장을 입고 있으면서 머리는 ‘소’의 형태라는 말은 익히 알려져있는 강력한 포워르, 우제류의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과 같이 행동하고 말할 수 있는 휴머노이드 나이트메어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를 만나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부정했다.
그는 분명 사람이었다고, 그것은 미노타우르스나 휴머노이드 같은 것이 아닌 분명 인간이었다고.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남성.
이렇게 격렬하게 그가 ‘인간’임을 강조하다보니 사람들은 되려 이 기이한 복장의 남성에게 큰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고민’을 대가로 뭘 주는데요?
그러나 그 질문에 답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앞서 흥분하듯 그의 ‘인간’을 주장했던 이들조차 그 질문에 대해서는 입술이 딱 다라붙는 저주를 받은 사람처럼 모두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으며 그렇게 침묵을 머금은 이들은 모두 똑같은 표정으로 질문자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질시, 그리고 경계였다고, 그들을 인터뷰했던 기자는 그 순간의 기묘한 광기를 묘사했다.
이렇게 말문이 닫혀버렸다보니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추측뿐이었다. 누군가는 막대한 금이라고 상상했고, 누군가는 고민을 대신 해결해주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나 그 문제가 사랑이라면? 살의라면?
단순히 물질이나 약간의 용기, 인내, 헌신, 사랑등으로 해결할 수 없는 깊고 오래된, 곪아터진 영혼의 상처에 관한 이야기라면?
신비하고 기괴한 이야기는 사람들을, 그리고 나아가 예술적 영감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빠르게 매료시켰다.
그 중 가장 빠르게 영향을 받은 이들은 바로 이 학교의 졸업작을 준비하는 학생들이었다.
졸업 전시회의 주제가 ‘환상’이었던 만큼 학생들은 앞다투어 작품을 ‘소머리를 한 신사’에 대한 내용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소재가 겹치는것? 상관없었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은 오로지 청자의 상상이고 작가의 솜씨에 의한 것이었으니.
그것이 탐미적이든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든 사람들은 그저 상상을 충족시킬 ‘결과물’을 원했다.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과 직접 만나면 위험할 테니 간접적으로 그를 볼 수 있는 ‘대체제’를 원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러한 ‘수요’라는 것은 한번이라도 시선을 끌어야하는 수많은 전시회에서 아주 중요한 고려요소이지 않았던가.
학생들은 시간과 고집사이에서 갈등하며 제각각의 선택을 내렸다.
그리고 그 선택을 내려야하는 학생들 중에는 당연히 거울에게서 [고래]의 답을 받은 피운갈도 있었다.
사교회원들은 그의 불운을 동정하며 또 몇몇의 학생들이 사교회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 즈음이었다.
중간 시험이 끝나는 날.
에델레드의 [5, 1, 3]의 의미가 밝혀지던 날.
에델레드의 이름을 찾아 명단을 올려다보던 학생들은 그 뒤를 이어 피운갈의 [고래]를 떠올렸다.
그는 과연 거울의 대답을 믿었을까? 아니면 대세를 따라 선택을 바꿨을까.
하지만 졸업작품을 위해 아틀리에에 틀어박힌 그가 무엇을 준비하는지는 같은 조형학과 상급생이라도 알기 어려운 정보였다. 사교회의 학생들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그가 다시 사교모임에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어 세번째 대면자는 구아드레 선배였다.
그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보로가 안 두르그의 비밀은 무슨색?”
거울은 대답했다.
[보라색]
그는 미련없이 일어나 사교회장에게 다가갔고 머리를 깊숙히 숙이며 사교모임을 탈퇴의사를 밝혔다.
사교회장은 그가 머리를 숙이는 모습에 놀라 되려 황송하다는듯 서로 자세를 낮추었지만 사교모임을 탈퇴한다는 말에는 묘한 미소를 보이며 그렇군요~ 라고 나긋하게 대답했다.
혹시 화가 난 걸까?
엘라르는 유심히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에델레드는 감흥없이 구아드레 선배의 어깨를 두드리는 사교회장의 곁에 서 있었다.
사교회장은 좋은 결과가 있을겁니다. 라고 말하며 격려하듯 구아드레 선배를 응원한 뒤 그를 배웅했다.
이번 모임에는 더이상 탈퇴하는 회원이 나오지 않았다.
에델레드의 사과와 더불어 그녀를 제외한 모든 탈퇴한 회원들이 재가입을 거부당했다는 소식이 이미 파다하게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탈퇴한 구아드레 선배는 더이상 질문이 없다는 건지, 아니면 에델레드와 같이 다시 받아줄 여건이 충족되었기에 잠시 자리를 비운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엘라르는 묘하게 이 모임의 열기가 변질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학생들은, 아니 회원들은 전에 없이 열성적인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열렬한 믿음은 어딘가의 종교현장과 같아서 엘라르는 괜히 자기도 모르게 눌러쓴 망토의 후드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어올리자 만면에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는 사교회장과 눈이마주쳐 버렸다.
엘라르는 애써 미소지으며 그의 파회 인사에 박수로 호응했다.
다섯번째 모임이 있기전, 학교에는 또다른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왔다.
이번에는 미스터리 쪽이라기 보다는 사고에 관련된 소식이었다.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린 기사는 다름아닌 타라의 인기있는 레스토랑 보로가 안 두르그의 오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었다.
한창 잘나가고 있는 사업가에다가 그 해의 창의적인 레스토랑으로 뽑힐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였던 그가 갑자기 목을 맸다는 소식은 당연하게도 사람들에게 큰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멀쩡한 사업가가 갑자기 자살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혹시 몰래 도박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에이,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감히 타라 한복판에서 도박내기를 하겠어. 차라리 수상한 약물이 더 신빙성이 높지.
사람들은 저마다의 억측을 내뱉으며 공신력있는 수사단체가 하루빨리 발표문을 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렐타 올라스 기사단이 발표한 조사결과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그들은 한 익명의 신고자의 제보를 받아 보로가 안 두르그의 비밀 허브 농장을 찾아내었고, 그곳에서 금지된 허브인 해피 스위트 허브를 다량 찾아내었던 것이다.
이들이 찾아낸 금지된 해피 스위트 허브는 이름 그대로 달콤한 맛을 가지고 있는 인공 합성허브였다.
언젠가 이멘마하에서 잠시 유행했던 ‘꿈처럼 달콤한 설탕’을 좋아했던 연금술사가 이를 재현하기 위해 만든 인공의 연금식으로 어떤 물건에든 단맛을 스며들게 하는 기술을 만들어 내었고, 이를 이름모를 조직에서 훔쳐간 뒤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중독성 허브와 섞어 개량한 품종이 바로 이 허브.
한마디로 꿈처럼 달콤하고 몽환적인 상태에 빠지게 만드는 위험한 허브였던 것이다.
게다가 기존의 위험한 약들과는 달리 뿌리채로 입에 넣어도 달콤한 맛 덕분에 젊은 층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유통 또한 알록달록한 사탕과 같은 형태로 돌아다녀 단속에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게 문제였다.
당연하지만 단속이 강화된 이후에는 소지하기 쉬운 알약만이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었을 뿐, 이 허브를 뿌리채 구하는 것은 하늘의 이웨카 조각 따오는 정도로 힘든 일이되었다.
그런데 그 금지된 약품의 원료가 타라에서 가장 유행하는 레스토랑에서, 그것도 조미료 창고의 비밀공간에서 재배되고 있었다니?
사람들은 저절로 예상되는 끔찍한 결과에 혐오감과 불쾌감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그게 요리에 들어갔었다는거야, 지금?
어떡해… 우리 가족은 그 레스토랑의 VIP단골이었단 말이야.
지금이라도 검사를 해 봐야겠어! 그런데 이거 누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해야해?!
모른다.
오너는 이미 자살했고 주요 레시피를 담당하는 요리사들 또한 그의 부고기사가 뜨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졌으니.
사람들은 그제서야 오너의 장례식장이 그토록 초라하고 한산한 이유를 이해했다.
소문처럼 살아생전 인덕이 부족한 것뿐만이 아닌, 같은 공범자들이 제 살길을 찾아 재빠르게 도망쳤던 것이었다.
도망치지 않고 남겨진 것은 주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종업원들이나 레시피에 접근 권한이 없는 요리사들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이 보로가 안 두르그에 속해있었다는 사실자체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된다며 그들 또한 도망친 범죄자들과 다를바 없다고 비난했다.
너무한 것 아니냐고?
글쎄.
확실히 그들 중 몇몇 이들은 무고했을 지도 모른다.
특히나 보로가 안 두르그에 오기 전에 근무했던 곳을 다시 찾아가 인정에 호소하는 모습은 제법 처량해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보로가 안 두르그의 직원들이 모두 하나같이 ‘피치 못할 이유로’ 매우 갑작스럽게 전 직장을 그만두었던 이들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요리업에 종사하고 있지 않더라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만큼 보로가 안 두르그의 ‘꽤 공격적인’ 인재영입은 모두가 의도를 알고 있는 공공연연한 비밀이었다.
이렇다보니 그들을 받아주고자 하는 요리점, 혹은 요리와 관련된 이들은 차라리 교황청에 가볼 것을 추천하며 그들에게 친히 길을 알려주기도 했다.
참 다행이지 않은가. 그들이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먹고 사는 타라의 식당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받았을 대응은 길안내가 아니라 소금결정을 담은 윈드 블레스트나 필리아산 암염을 묶어 만든 해머 스매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정도 ‘거부’는 상당히 점잖다고 할 수 있는 편이었다.
그밖에 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중독여부를 확인하고자 성당과 일부 힐러의 집 업무가 마비되는 상황이 일어났으며, 해피 스위트 허브 해독법이라며 소금물을 마시는 민간요법이 유행하고, 이 틈을 타서 가짜 해피 스위트 허브의 해독제(스테미나 포션에 레몬을 넣어 팔았다.) 판매가 유행, 또 한편에서는 진짜 해피 스위트 허브는 이런 맛이다.라며 가짜 허브사탕(판매자는 자신은 선량한 사업가이며 새로만든 이 사탕에 건강을 위한 허브를 넣어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뿐이라고 항의했다.)을 파는 사기꾼도 나왔다는 사건사고들이 있었다.
결국 이 일은 교황청까지 나서서 보로가 안 두르그의 요리에는 해피 스위트 허브가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 시켜주고 나서야 일단락 될 수 있었다.
일이 이렇게 끝나버렸다보니 사람들은 이제 왜 보로가 안 두르그의 오너가 그런 허브를 소지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익명의 신고자가 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신고했는지를 궁금해했다.
그러나 이미 여러차례 증인을 잃어버리는 ‘사고’들을 경험한 렐타 올라스는 이러한 호기심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얼마나 엄중하게 경고하고 사납게 반응했는지 기자들이 신고자의 신원을 알아내다가 자신들이 먼저 ‘사고’당하겠다며 혀를 내두르며 포기할 정도였다.
대신 그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동안 있었던 보로가 안 두르그의 수상쩍은 행적들이라던가, 관련한 사사로운 사건들, 뭔가 껀수가 될만한 흥미로운 이야기들.
그리고 그 시도들 가운데 마침내 모두가 기다리던 ‘그런’ 기사가 하나 발행되었다.
이미 타라에서는 살기 힘들어져 제각각의 고향이나 다른 지역으로 자취를 감춰버린 탓에 찾아내는 것 자체가 천년묵은 마족스크롤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던 보로가 안 두르그의 옛 직원의 기사, 그중에서도 중견급으로 승진하기 직전에 버려진 익명의 하급 요리사가 ‘허브’에 대한 말을 풀어낸 것이다.
그 문제의 기사의 이름은 다음과 같았다.
“보로가 안 두르그의 보라빛 비밀”
기사의 제목이 보라색을 강조한 이유는 문제의 해피 스위트 허브를 보관하는 비밀창고의 열쇠가 [보라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익명의 하급요리사는 그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다른 열쇠로 열면 평범하게 비품 창고로 연결되는 문이 사실은 마법으로 인해 다른 장소와 연결된 비밀의 문이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니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곳이 무슨 용도인지 추측할 수 있었고 알음알음 빼낸 렐타 올라스 기사단의 반응을 통해 그의 증언이 수사과정과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엘라르는 새롭게 밝혀진 사실로 소란스러워진 교실 한 구석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들은 알까?
자신들이 지금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보로가 안 두르그와 관련한 이름들 중에는 지금은 자퇴한 구아드레 선배의 이름도 있다는 사실을?
구아드레 선배는 유명한 레스토랑의 후계자였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이 운영하던 무르 나 하르데는 갑작스러운 영업부진으로 인해 문을 닫아야만 했다.
먼저 확실히 밝히고 가자면 그 레스토랑의 영업부진의 이유는 분명 여려가지 문제가 겹친 탓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들의 레스토랑이 어려운 기색이 보이자 마자 직원들이 하나 둘 그만두기 시작했고, 더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보로가 안 두르그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의 상투적인 비사였다.
보로가 안 두르그는 그즈음부터 새로운 메뉴로 ‘고원 맷돼지 로스트 포크’를 메뉴에 올리기 시작했다.
엘라르는 단 한번도 보로가 안두르그에 가 본적이 없었지만 그 맛이 무르 나 하르데의 ‘숲 맷돼지 로스트포크’와 비슷했을 거라는 사실에 100만 골드를 걸 수도 있었다. 물론 이 내기의 승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같은 곳에 돈을 거는 행위는 어떠한 승패도 가릴 수 없을테니까.
다섯번째 모임.
네번째 대면자 브리샤는 보로가 안 두르그의 오너의 사망기사가 한창이던 때에 거울과 대면했다.
브리샤는 원래 대면자 명단에 오르지 못했던 회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예비 대면자라는 자리를 얻어내었고 또 우연한 행운을 통해 순번이 앞당겨지며 이렇게 네번째로 대면할 수 있는 행운을 거머쥐게 되었다.
역시, 행운은 행동하는 사람의 것이야.
특히나 피운갈 선배의 대면 이후 또 한 명의 대면자가 코앞까지 다가온 자신의 순번을 포기하고 떠난 것이 그녀에겐 더할나위 없는 운명처럼 느껴졌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그녀는 몇번이고 행운이 만들어질 때까지 행동할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의외로 낭만을 아는 소녀였다. 애초에 직접 따낸 과실과 하늘에서 우연히 떨어진 과실의 달콤함은 각별히 다르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10살짜리 던바튼의 꼬마아이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당연하고 올바른 세상속에서 브리샤는 온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듯한 충만한 감정을 만끽하며 거울을 마주보았다.
빙글,빙글. 평범해보이는 탁상거울의 위로 비치는 그녀의 얼굴은 물기 어린 눈동자와 발긋하게 물든 뺨으로 인해 매우 사랑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두 눈을 샘물에 비치는 윤슬처럼 반짝이며 속삭였다.
“이번 졸업식날 고백하려고 해. 내 사랑은 이뤄질거야. 그렇지?”
그녀는 일부러 짝사랑이라는 단어에서 가장 앞글자를 아주 살짝 발음하며 거울이 자신의 말을 잘 알아들었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호시탐탐 그녀를 견제하는 수많은 경쟁자들에게 승리자는 바로 자신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거울 위로 드러나는 붉은 글씨는 그녀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아니]
브리샤는 뭐?! 라고 소리치며 거울을 움켜쥐었다.
반사적으로 그럼 어떻게 해야 이뤄질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당연하지만 첫날 소개하였듯이 두 번 질문하는 것은 금기였기 때문에 그대로 모임에서 퇴출되었다.
여섯번째 모임.
다섯번째 대면자 페르하레는 “보로가 안 두르그의 보라빛 비밀”으로 타라의 안팎이 모두 시끄러웠던 시기에 대면했다.
기존의 모임주기를 감안하자면 더 빨리 대면했어야 했었지만 모임에서 쫓겨난 브리샤가 앙심을 품고 학생회에 이 사교모임을 고발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오랜 시간동안 순번을 기다리던 사교회원들은 그녀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태도에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러나 사교회원들은 분노에, 혹은 자신이 이 모임의 소속인 것이 밝혀져 사회적 위신이 떨어질 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면서도 한 사람의 탈퇴없이 그대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미 [5, 1, 3]을 보았으며 [보라색]을 보았으니까.
그리고 아직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었지만 저 졸업생의 별관 아틀리에 어딘가에는 [고래]도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그들을 먼저 안정시킨 것은 다름아닌 탈퇴했던 구아드레 선배였다.
아니, 이제는 자퇴서를 제출하였으니 ‘전’ 선배.
그는 전에 없이 밝고 개운한 얼굴로 학교에 나타났다.
자퇴서를 제출하러 오래간만에 등교한 그는 주변의 눈치를 살핀 뒤 엘라르에게 다가가 사교회장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는 사교회가 고발당한 것에 깊은 유감을 표했다.
하지만 그는 뜻밖에도 브리샤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자신도 답변을 받지 못했다면 순간적으로 거울에게 매달려 다른 질문을 했을 것이라고, 그러다가 영원히 질문의 기회를 잃어버린다면 또다른 수를 강구했을 거라면서.
동시에 그 만약의 미래를 상상하는 그의 눈이 너무 깊고 어두어 엘라르는 무엇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배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천만다행스럽게도, 사교회장은 일반 학생들이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이 일을 무사히 처리했다.
만약 그가 이대로 모임을 파하고 자취를 감춘다면 사교회장과 브리샤 둘 중 하나는 결딴 날 것같았던 분위기는 금세 잦아들 수 있었고 사교회장은 그 열기를 매우 감명을 깊게 받아들였다고 대답했다.
마치 자신은 절대 결딴 날 일이 없다는 것처럼, 그는 모든 분노를 자연스럽게 ‘고발자’에게 돌리며 회원들의 인내와 헌신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모임은 서둘러 다섯번째 대면자, 페르하레를 단상 위로 올렸다.
페르하레가 물었다.
“내 짝사랑 상대의 소원이 이뤄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거울은 [잘하고 있어.]라고 대답했다.
페르하레는 행복하게 웃으며 그대로 모임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사교모임의 회원들은 그의 ‘졸업’을 축하하며 박수로서 그를 배웅했다.
엘라르는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예상이 맞다. 페르하레는 처음부터 브리샤를 따라 이 모임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그녀의 질문고민에 호응했다. 그러나 그 또한 짝사랑 상대의 앞에서 자신이 질문을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을테니 수를 강구해야 했겠지. 그건 곧 고백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그러나 그는 다른 질문으로 ‘지금’의 평가를 받을 기회도 놓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놓을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페르하레는 지금’도’ 잘하고 있는 것이고 브리샤의 짝사랑은 [이뤄지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다.
여기까지 왔으니 엘라르는 이 모임의 ‘힘’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조금 부족헀다.
딱 한번만 더. 한 가지 사례 정도만 더 모인다면 완벽할텐데.
문제는..
“까악.”
문제는 일곱번째 모임이 이번에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또다시 중단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엘라르는 집회의 중지를 알리는 까마귀전서구를 다시 돌려보내며 오늘 아침 비밀스럽게 배달되어온 신문 앞에 다시 앉았다.
어쩔 수 없었다. 사교회장이 아무리 학생회에 의문의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해도 그건 학교 내에서의 일일뿐 학교 바깥의 사건까지 컨트롤 할 수는 없었을테니까. 아니, 없었나?
없어야 하지 않나. 그도 어쨌든 그들과 같은 '학생'인데?
어찌되었건 이번 외부적 요인은 “보로가 안 두르그의 보라빛 비밀”을 발표한 신문사의 두번째 특종 건이었다.
그 두번째 특종기사란, 예의 그 ‘소 머리를 한 남자’의 인터뷰였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에 대하여 떠도는 ‘헛소문’에 대해 해명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무슨 ‘헛소문’? 그가 ‘마족’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가 나이트메어 휴머노이드의 변종이라는 것?
정답은 어느쪽도 아닌 해피 스위트 허브에 대한 소문이었다.
정확히는 지금까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을 조직에서만 생산 가능한 해피 스위트 허브가 어떻게 레스토랑 오너의 손에 뿌리채 들어가게 되었냐는 것에 대한 해명.
이 일의 시작은 사람들이 이 ‘쉽게 있을 수 없는 일’에 대한 의혹에 대하여 사람들은 가장 그럴싸한 ‘마법의 이론’을 상상해내었던 탓이었다.
“혹시 소머리를 한 남자라면 해피 스위트 허브도 구해다 줄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 경솔하게 ,떠오른 그대로 입밖으로 내뱉은 이 소문은 곧 소머리를 한 남자가 해피 스위트 허브를 구할 수 있다라는 소문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머리를 한 남자가 해피 스위트 허브를 보로가 안 두르그의 오너에게 준 것이다. 라는 소문으로 발전해 나아갔고, 이는 곧 정설처럼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능하냐고?
소머리를 한 남자의 기이한 행적이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소머리를 한 남자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한다는 사실에 진절머리를 냈다. 못한다고 하기엔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으며 그와 같은 사람을 모른다고 할 수도 없었다.
당신에게 고민을 판 사람 중에서 레비아르드 라는 사람이 있나요?
그랬다.
있지. 맷돼지를 닮은 영혼을 가진 살찐 요리사.
레비아르드, 사람들에게는 보로가 안 두르그의 오너로 알려진 그 남자는 놀랍게도 ‘소머리를 한 남자’와 거래를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말 사사로운 고민이 많은 사람이었어. 자신의 머리가 벗겨지고 있는 것도 고민이었고 뱃살이 나오고 있는 것도 고민이었지. 하지만 가장 큰 고민은 역시 사랑이었어.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현실에 고민하고 성애적인 사랑을 쏟을 대상이 없는 것에 한탄했지, 애정어린 관심과 열망어린 눈동자들을 필요로 했어. 하지만 제일 기분나빴던건 역시 그거야. 열등감.
그가 누군가를 질투했나요?
누군가를? 그렇게 헤아리면 3일 밤낮을 이야기해야할걸? 그는 자신의 주변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을 질투했어. 하지만 딱 하나 선의의 의미로 질투한 사람이 있었지.
그건 누군가요?
그건 말할 수 없어. 그는 내 고객이 아니니까. 나는 선량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영향력은 어디까지나 감정(고민)을 파는 사람을 대상으로 정당한 거래를 주고받는 선랑한 비지니스일 뿐 이 세계의 신과 적대할 의사가 없음을 강조했다.
그럼 그가 뭘 대가로 받았는지를 알려주세요.
원래 이런거 말해주면 안되는데 말이야.
하지만 저와 거래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해명기사를 쓸 수 있도록 도와주시도록요.
그래그래. 아주 대단한 특종이 될 만한 인터뷰를 해주기로 약속했지. 그러니까 이 재미없는 인터뷰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고 앉아있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 질문이 뭐였지? 아, 그에게 뭘 줬냐고?
그야 물론 조미료지. 나는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조미료를 줬어.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고, 어떤 말도 안되는 이유로도 납득하게 만드는 기적의 조미료를.
그러니까.. 그는 그 음식에 당신이 판 조미료를 뿌렸다는 말이군요.
그래, 맞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제공한 건 어디까지나 아주 뛰어난 내 ‘솜씨’뿐이니까.
그 조미료는 분명 이 세계에서 나는 원재료를 가지고 만들었고 거기에 우리들의 특별한 기술이 사용된 것 뿐이야.
그래도 걱정된다면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해주지.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과용하지만 않으면 건강에 나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그 맷돼지를 닮은 요리사가 멍청했던 것 치고 나와 약속한 정량을 잘 지켰다는 사실이야. 동시에, 그가 따로 찬 주머니속의 그 물건이 나를 실망시켰고 말이야.
그게 해피 스위트 허브인가요?
그래, 그 웃기지도 않은 풀쪼가리 말이야. 자네가 묻고싶은건 사실 이런거잖아? 내가 그에게 세상 나쁜 당덩어리 마약풀떼기를 팔아넘긴거 아니냐고. 웩. 내 대답은 ‘절대 아니야’야. 그건 내 미학에 어긋나. 애초에 나는 단 걸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내가 사랑관련 고민은 안받아주는 거 보면 모르겠어?
그러면 그는 대체 그 허브를 어디서 구한 걸까요?
몰라. 나는 남의 비지니스에 관심없어.
그러면 다시 질문을 돌려 당신의 ‘비지니스’에 대해 묻기로 하죠. 당신이 판 조미료는 대체 무엇인가요..? 교황청의 검사결과로도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그야 당연하겠지. 말했잖아. 나는 이 세계에서 난 것으로 그 조미료를 만들었어.
그리고 내가 이 세계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정당한 대가로 받은 너희들의 고민이고.
모르겠어? 세상에서 가장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것. 누구도 거부할 수 없고, 어떠한 말도 안되는 이유로도 그 접시를 납득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것.
잘.. 모르겠습니다?
하. 그 머리를 가지고 살면서 왜 자신의 멍청한 자신의 머리를 고민으로 여기지 않는지 갑갑하군. 아니 멍청해서 그걸 고민으로 여길 생각도 못 떠올리는 건가? 잘 들어봐, 덜 떨어진 비둘기 대가리 양반.
만약 자네가 하루종일, 아니 며칠동안 쫄쫄 굶었어. 지금 당장 입에 넣지 않으면 바로 졸도해서 쓰러질 것 같아.
그런데 자네의 앞에 자네가 너무나도 싫어하는 음식이 있다고 가정하자.
자네는 그걸 먹을건가? 아니면 그것마저 거부하고 ‘식성’을 고집할건가.
그야.. 일반적으로는 대부분 다 먹겠죠?
그래. 그게 내가 판 조미료야. [허기]. 상대가 어떤 맛을 좋아하고 어떤 미식을 추구하는 것과 별개로 반드시 그 접시를 비우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 과도한 허기는 음식의 맛을 느낄 새도 없게 만들어 역효과지만 아주 살짝의 ‘터치’정도라면 그 음식을 더욱 맛깔나게 느끼게 만들 수 있어.
그 맷돼지 요리사는 살찌고 멍청했지만 나에게 자신의 요리실력에 대한 고민을 팔려고 들지 않았어. 그는 그것이 자신의 보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내 말은, 너희들이 즐겼던 그 맛은 진짜였다는 거야.
하지만 그는 점점 자신의 실력을 믿지 못하게 되어가며 여러가지 ‘편법’에 손을 대기 시작했지.
남의 레시피를 빼온다던가, 종업원을 빼돌린다던가 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는 끝내 그 갖잖은 풀떼기를 몰래 키우는 것 같은 쓸데없는 일까지 저질러 나를 실망시켰지.
잠깐만요. 그가 요리실력에 대한 고민을 팔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왜 그는 조미료를 얻은건가요?
그야 그는 내게 자신의 요리가 ‘많이’팔릴 방법을 구하려고 했으니까.
완벽한 요리 위에 조미료의 터치 한스푼. 그게 내가 준 해답이야. 그가 뭘 원했는지까지 아예 다 말해주길 바래?
돈이야. 그는 돈을 바랬어. 돈이 있으면 그의 벗겨진 머리도, 툭 튀어나온 뱃살도, 떠나간 친구도, 연인도, 제자도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럼.. 당신은 왜 금화를 직접적으로 쥐어주지 않은 거죠?
내가 직접 해명문을 써서 너의 상사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너와 마주앉아 이 바보같은 인터뷰랑 같은 이유겠지. 나는 사람들의 고민이 좋아. 갈등이 좋아. 더 나아지려고, 변화하려고, 이상적인 모습에 다가가고자 스스로를 고통속에 가두는 모습이 좋아. 그리히여 그 질척한 감정속에서 끝내 빛나는 별과 같은 환희를 싹틔우지. 그러니 나는 너희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편법을 제공해 그 불꽃을 조금 빨리 끌어태우는 것 뿐이야. 그 결과 너희는 조금 더 일찍 시들거나 거꾸러지기도 하지만.. 가끔은 잘 살아남잖아?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고 나서도 다시 나라는 편법을 이용하면 안될까, 혹은 누군가 그 편법의 존재를 알아챌까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꽤 귀엽고 말이야.
….그러면 저도 그렇게 되나요?
글쎄. 너라면 어떻게 생각해? 이 기사가 데스크를 통과 할 수 있을까? 인쇄소에 전달될 수 있을까? 활판 위에 놓여질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 같아? 걱정 마. 우리의 계약은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하니까.약속하건데, 이 기사는 내일 무조건 1면에 실려 나가게 될 거야. 그리고 사람들은 내 존재를 ‘제대로’ 알게 되겠지. 내가 해피 스위트 허브 같은 것을 뿌리는 파렴치한 잡범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그의 말대로 기자의 기사는 인쇄소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가 뒤늦게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거래를 후회하며 인쇄소로 달려가 이를 알렸을 때, 인쇄소에는 이미 신문사 사장과 인쇄소의 직원들이 모여 그의 기사를 읽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인쇄소 직원이 건네는 신문은 받아들었다.
그의 기사는 눈에 띄는 검은 줄로 난도질 당한 상태로 가장 마지막 줄에는 낯선 문구가 쓰여져 있었다.
-귀하가 지불한 고민의 그릇이 정보값에 맞지 않아 거래의 균형을 맞추는 만큼을 제하였습니다. 매우 유감 :(
신문은 전량 폐기되었다.
기자는 친위대에 자신의 발로 출두하여 어떻게 그를 만났는지,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등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 과정에서 몇 부의 신문이 살아남아 증거물로 제출되었고, 또 그 제출의 과정에서 일부 인터뷰의 내용이 유출되어 소문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친위대는 증거를 관리하던 하사관을 비롯하여 신문을 눈으로 확인한 모든 관련자들을 추궁했지만 그 누구도 유출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결백만 증명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러니 편법일 수 밖에.
어찌되었건 그는 인터뷰를 했고 기자는 분에 넘치는 관심(부정적인 의미이지만)을 받게 되었으니 이 기사는 뿌려져야 마땅했고 사람들은 불분명한 인터뷰 속에서 단 한가지 사실만은 확실히 인지했다.
‘소 머리를 한 남자는 해피 스위트 허브를 유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의견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이 신비롭고도 위험한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
그리고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그리고 왕국은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은 공문을 내렸다.
‘만약 소 머리를 뒤집어쓴 수상한 사람이 거래를 요청한다면 응하지 말 것. 매우 위험함.’
왕국의 단호한 태도에 소머리를 한 남자에 대한 옹호론은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
동시에 그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그와의 만남을 부정하기 시작헀다.
특히나 ‘거래’를 한 적 있다는 사람들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으며 ‘정말 만난 적 있다’라고 강하게 말했던 사람들은 거래한 적은 없다고 해명하더라도 곧 사라졌다.
그러나 이렇게 말만으로 어떻게 잡아 땔 수 있는 ‘일반인’들과 달리 자신이 저지른 선택을 부정할 수 없는 이들도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한, 눈앞의 증거를 없앨 수 없는 사람들.
그러나 잡혀갈만큼 잘못하지는 않은 사람들.
맞다.
모두가 예상한 바와 같이, 소를 주제로 졸업주제를 만들던 학생들이었다.
작품의 마무리 단계를 앞두고 떨어진 폭탄에 그들은 울고 고함지르고 부정하고 웃고 작품을 내던지려하다가 제풀에 쓰러져 흐느끼는듯 광기에 잠식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내 눈물을 닦고 일어서 이 빌어먹을 소대가리를 고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뿔을 좀 길게 한다던가.. 아니면 그 끝을 꽃으로 장식한다던가,
옷을 화려하지 않게 바꾸어 농경으로 이미지를 틀어버린다는 식의 눈물겨운 노력들 같은 것.
당연하게도 그런 식으로 급조된 작품이 제대로 된 성과를 낼리 없었다.
그렇기에 가장 주목을 많이 받고 뛰어난 평가를 받은 작품은 세간의 유행과 소문에 흔들리지 않고 우직하기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친 학생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선정된 작품은 꿈결같이 아름다운 하늘의 강, 소울스트림 위를 날아다니는 뿔달린 ‘고래’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피운갈 선배의 작품이었다.
일곱번째 모임을 그렇게 피운갈 선배를 대동하고 나타난 사교회장의 축하의 인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는 다섯명의 대면자가 무사히 탄생한 것을 축하하며 함께 인내하던 예비 대면자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달했다.
그리고 이 성공적인 성과를 기념하여 남은 셋을 한번에 단상에 올려 질문을 할 기회를 주겠다며 차례차례 남은 이름들을 호명했다.
엘라르는 갑작스러운 '축하 호명'에 당황했지만 결국 회원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에 떠밀려 단상 위로 올라 갈 수 밖에 없었다.
자신과 바꿔줄 사람을 찾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녀는 이미 단상 위에 올라와 있었고 그녀가 미룰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한 사람의 질문순서 뿐이었다.
엘라르는 가까스로 마지막 순번으로 물러서 여섯번째 대면자를 바라보았다.
여섯번째 대면자, 디아르마드는 말했다.
“소 머리를 한 남자는 밀레시안인가요?”
[아니.]
그는 아깝다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일곱번째 대면자, 르셰르트는 말했다.
“저도 졸업주제를 점지받고 싶어요.”
[백조.]
그녀는 기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윽고 엘라르의 순번이 찾아왔다.
그녀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거울앞에 섰다.
사교회장은 그런 그녀를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요?”
엘라르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사교회장은 그녀에게 자비를 배풀듯 대답했다.
“좋아요. 5분을 드리도록 하죠.”
엘라르는 다시 하늘이 무너지는듯 한 표정으로 고개를 멈춰세웠다.
5분?
도망을 칠 수도, 지원을 부를 수도 없는 촉박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녀는 혹시나 이대로 단상 아래로 뛰쳐내려가면 어떻게 될까를 상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리였다.
그녀가 밀레시안이 아닌 이상, 혹은 밀레시안이 갑자기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 수많은 눈동자속에서 자신을 데리고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언제 이렇게나 불어났는지 좁다란 비밀회장가득 열기어린 눈동자들이 가득채워져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는 그녀를 부러움의 눈빛으로, 동경의 눈빛으로, 질시의 눈빛으로,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지금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이곳을 떠난다면 그들은 한 때 브리샤에게 내비쳤던 격렬한 증오를 그녀에게 쏟아부으려 들 것이 분명했다.
혹은, 당장 그녀의 옆에서서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재밌게 관찰하는 저 사교회(司敎會)의 장(長)이 자신을 잡으라고 명령할 지도 모르지.
언제부터인가 표정없이 그를 따라다니는 에델레드와, 지금 그녀와 똑같이 표정없이 서 있는 피운갈 선배에게 말이다.
그녀는 결국 물러설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 모든 기억이 자신의 수첩이 기록되었기를 바라며 심호흡을 한 뒤 거울앞에 멈춰섰다.
그녀를 바라보는 거울 속으로 기이한 빛깔의 에르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거구나.
이걸 대면하여 저들이 그렇게 되었구나.
엘라르는 되도록 그 소용돌이를 응시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거울에게 물었다.
“구아드레 선배는 어떻게 되었나요?”
[불쌍한 구아드레는 굶어죽었다. 그는 너무 많은 허기를 먹어버렸다.]
거울을 꽉 채우는 붉은 글씨.
그리고 그 마지막에 눈물을 흘리듯 떨어지는 붉은 잉크, 혹은 점성있는 액체를 보며 엘라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귓가에 가득찬 박수소리 사이로 나긋나긋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글
11월 10일 #오블완
1. 분열
2. 뿌리
3. (뭔가를)흡수
4. 화장
5. 기억
+) 키워드는 니힐 랜덤 키워드 https://nihilapp.github.io/keyword
마법사 라우리스는 실수에 대한 강박증이 있었다.
그는 혼자 있을 때면 끊임없이 과거 있던 일을 곱씹고, 되짚으며 그 때 해서는 안되었던 일들, 후회되는 부분들, 더 나아질 수 있는 개선점 등을 고민했다.
연구자로서, 그리고 학자로서는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자세.
그러나 문제는 그가 되짚어보는 ‘과거’가 단순히 자신의 과제나 근래의 일이 아닌 아주 어린 시절의 일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수’를 찾는 것이 그의 강박증이었기에 그의 기억은 오로지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던 사건들에만 머물러있었다.
그는 4살때 자신이 서고에서 무리하게 책을 꽂으려다가 머리를 부딪치고 울어버린 것을 부끄럽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7살 때, 저녁식사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던져진 숙부님의 언어유희 말장난을 능숙하게 받아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열 두살 때, 주스를 쏟은 동급생의 옆에 서 있다가 교복에 얼룩이 튀는 바람에, 또 그것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어 그대로 단상위에 올라간 것이 수치스러웠다.
열 네살 때, 댄스파트너의 발을 밟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열 아홉살 때, 졸업장을 받고 내려오던 단상에서 휘청거린 것이, 스물 한 살때 처음으로 술에 취해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잠들었던 것이.
기억은 그를 쫓는 맹견과 같이 그를 미래로 몰아쳐내었고 그는 살기 위해서라도 다음에 매달려야 했다.
다음에는 울지 않으리라. 다음에는 제대로 ‘농담’에 웃어보이리라. 다음에는 침착하지 못한 동급생을 예의주시하며 제때 몸을 빼낼 것이며, 다음에는 절대로 댄스파트너가 필요한 파티에 참석하지 않으리라. 단상에서 내려올 때도 긴장을 늦추지 않을 것이며, 두번 다시 술을 입에 대지 않으리라.
혹자는 그런 그에게 너무 ‘완벽주의자’같이 굴려고 한다며 마음을 편히 먹으라 충고했지만 라우리스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는 정말로 ‘완벽’해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평균’적으로 무난하게 살고 싶어 노력하는 것일뿐.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일상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소리소문없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공포는 무언의 시선과 공기속에 홀로 내버려지는 것이었기에 그는 정말이지 ‘그 사건’의 중심에 선 것이 자신이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너그러워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때 서고에서 울었던게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 아이’에게 연민을 가졌을 것이고,
자기 탓도 아닌데 엉겹결에 튄 주스자국에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동급생’이 있다면 일단 급한대로 자신의 마이를 빌려주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처럼.
그는 과거의 기억속에서 해결방법을 강구하며 그러지 못했던 자신을 저주하고 현실을 부정했으며 이상을 상상했다.
“그렇게 살면 지치지 않아?”
지치지 않을리가.
그의 망상은 언제나 스스로를 향한 흉기처럼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의 ‘지인’들은 언제나 그런 그에게 스스로를 용서하라고, 너무 완벽하게 살려고 하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사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너그러운 조언’이 아니었다.
지치지 않았을리가. 실망하지 않았을리가.
그는 필요한 순간에 내밀어지는 친절에 목말라 했고, 진심어린 위로를 갈구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똑같았다.
무심함으로 가장하여 흥미와 즐거움을 숨긴 ‘관찰’의 시선과,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기대하며 숨죽인 ‘침묵’들.
누군가가 먼저 웃어버리기를 기다리는 팽팽하게 당겨진 가는 실의 텐션.
그러다가 와르륵 쏟아져내리는 날 것 그대로의 ‘조롱’을 담은 새된 숨소리들.
부끄러움은 항상 한 희생자의 몫이었으나 즐거움과 죄책감은 모두가 나누어갖을 수 있는 작은 전리품이었다.
라우리스는 바로 그 제물이 되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참아내는 것도 이제는 한계.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매일같이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고함과 비명을 지르는 삶에 지친 그는 결국 한 남자가 두고 간 명함을 품에 안은 채, 타라의 어느 골목길을 찾아갔다.
“화분을 분양받으러 왔습니다.”
---
남자가 찾아가 골목은 오래 전에 쓰임을 다한 죽은 골목이었다.
건물과 건물로 이루어진 작은 틈새 사이, 창문을 통하여 ‘진열’되기에는 조금 부족한 물건들을 싼값이 팔거나 나누었던 공간. 지금은 상권이 아예 이동해버려 대부분의 건물이 공가나 다른 용도로 변경되어 버렸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옛 골목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노포들이 존재했다.
정확히는 제대로 된 가게라고 보기에는 다소 부족한 좌판이나 대충 못을 박아 만든 가판대 같은것들이말이다.
“약속한 물건은?”
라우리스가 찾아간 상인 또한 그러한 가판대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살펴본 그의 가판대는 좌판에 바퀴를 달았다기 보다는 수레에 판자를 댄 것에 가까웠다. 전후사정만 바뀌었을뿐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의 수레는 음식판매용 간이 마차를 흉내내고 싶었던듯 사방이 꽉 막혀있었으며 그 높이는 수레에 올라한 사람 한 명이 간식히 수그리고 앉아있을만한 빠듯한 높이였다. 마치 그럴싸한 거적데기만 덮는다면 교역품이 쌓여있는 평범한 수레라고 보일만한 아슬아슬한 높이의 차폐막이었다.
그러면서도 안에는 있을 것은 다 있는지 라우리스가 명함을 가판대 위에 올려놓는 순간 안쪽에서 앙상한 노인의 손 하나가 뻗어나와 그것을 가볍게 쓸어내어갔다.
이윽고 안쪽에서 램프의 불빛이 새어나오가 찰칵이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학과에 오랫동안 몸을 담고 있던 라우리스는 그 소리가 루페 안경의 결착소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착각일까. 그럴지도. 그리고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라우리스는 어설프게 못박힌 판자속에서 비쳐오는 불빛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 불빛의 움직임은 분명 내부의 들어앉은 인영의 머리부근의 움직임에 따라 빛의 각도를 달리하고 있었다.
“진품이군. 기다리게.”
수상해보이는 정체만큼이나 수상쩍은 확인을 마친 상인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작은 체구의 노인이라도 앉아있는 것만으로 빠듯해보이는 저 상자 안에서 대체 무엇을 저리 움직일 수 있는 것인지.
한참만에 토기 부딪치는 소리가 멈췄고 곧 흙이 퍼올려지는 소리와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저 안은 어떻게 된 구조일까.
혹시나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있어 겉에서 보기보다 안이 넓은 것은 아닐까.
그런 실없는 상상을 하며 차폐막 아래의 작은 문이 다시 열리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그 때, 다시한번 명함을 가져갔던 앙상한 노인의 손이 뻗어나와 그에게 화분을 건네주었다.
화분은 방금 흙을 대충 부어만든듯 채 닦이지 않은 배양토 부스러기가 가장자리에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안쪽에는 방금 심은 구근이 빼꼼히 머리를 드러내고 있었고 그 가운데서 자라난 작은 새순의 색깔은 어딘지 노란빛을 띄고 있었다.
라우리스는 이 구근이 뿌리 바로 위에서 노란 꽃을 피우는 종일지, 아니면 벌써 노랗게 떠버린 순일지를 고민하며 말없이 화분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탐탁치 않은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인은 뼈마디가 두드러지는 손가락을 길게 뻗어 정확하게 화분을 가리킨 뒤 하늘을 향해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하루에 한 번. 딱 하루에 한번만 그것에게 먹이를 주게. 안 그러면 버릇이 나빠져서 하루에도 몇번이나 먹이를 달라고 조르게 될거야.”
“조릅니까? 이 식물이?”
“식물에도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지. 알겠나? 딱 한 번이네. 가끔 주어진 먹이가 양이 차지 않아 제 주인을 재촉하는 놈도 있지만 자네라면 한 번의 양으로도 충분히 저것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군. 자. 그러면 돌아가게. 참고로 오늘치 먹이는 이미 주었으니까 더이상 건들지 말고.”
라우리스는 다시 문을 닫으려는 노인의 손을 응시하며 다급히 말을 걸었다.
“잠깐. 하루의 기준은 무엇으로 헤아립니까.”
“하.”
너무나도 ‘마법사’스러운 질문에 상인은 드물게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곧 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틈새만 남겨놓은 상태에서 라우리스의 질문에 대답했다.
“자네는 마법사이니 이웨카가 저무는 순간으로 삼으면 되겠군”
“그러면…”
“아니. 이제 돌아가.”
상인은 매몰찬 말을 남긴채 문을 닫았다. 그리고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문이 닫히는 동시에 판자 내부에서 새어나오던 불빛이 사라졌다.
“…….”
또한 인기척이 사라졌으며 기분탓인지 모르지만 주변의 공기가 조금 서늘해졌다. 마치 내부에 있던 모든 것이 한번에 사라진 느낌.
라우리스는 순간적으로 수레의 안쪽을 들여다모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의 직감대로라면 이 안은 비어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비어있는 수레를 향해 자신이 홀린듯 행동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어느쪽이 더 이성적인 행동인걸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척 돌아서는 것. 혹은 진실을 확인하고 현실을 파악하고 스스로가 미쳤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애초에 나는 여기에 왜 어떻게 찾아 온거지? 그 명함은 또 뭐고.
그렇게 명함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응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자신이 큰 실수를 한 것을 물끄러미 나무라는 눈빛. 그 침묵. 그가 가장 싫어하는 공기.
골목의 벽돌 하나하나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듯한 끔찍한 기분속에서 그는 감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더러운 화분을 품속에 넣고 서둘러 몸을 돌려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수치스럽다. 부끄러워.
나를 보지 말아줘.
라우리스는 황급히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진실을 확인하지도, 환상을 받아들이지도 못한 패배자의 발걸음은 유난스럽고도 경박스러웠다.
이름없는 괴물의 그림자는 그 발걸음을 받아먹고자라나듯 시시각각 몸을 키워나가며 그의 구두소리를 메아리치게끔 만들었다. 멀리 멀리. 모두가 그의 한심한 꼴을 전해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마냥 선명하게.
---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라우리스는 알 수 없는 탈력감에 우선 침대에 다가가 몸을 눕혔다.
사실상 쓰러지는 것과 다름없는 다이빙이었다.
옷을 갈아입을 기운도 없어 코트만 벗어낸 외출복 그대로의 차림새였으며 그의 베이지색 조끼에는 예의 그 화분의 가장자리에 묻어있던 얼룩이 짙게 베어들어있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화분을 꽉 끌어안아 생겨버린 불상사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의 그의 성정을 생각하면 이런 다급한 행동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쳤더라?
그는 분명 미리 화분을 담아올 가방을 준비해갔고, 품에 숨기더라도 그토록 꽉 끌어안지는 않았을 성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는 내내 누군가 자신을 쫓아오지는 않을지, 품안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추궁받지는 않을지 걱정했고 마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듯 방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러나 그 일련의 사건들중 가장 이상한 것은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그러한 긴장감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라우리스는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하품을 내뱉으며 가물거리는 시선너머 노랗게 흔들리는 화분을 응시했다.
이상한 화분. 이상한 상인.
그리고 이상한 긴장감과 이상한 자신의 행동.
하지만 이상하지 않다. 이상하다는 사실마저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기에 이는 이제 이상하지 않은 일인 것이다. 알겠는가? 이 평안함을? 그리고 이 안락함을? 그는 전에 없는 고요 속에 온몸을 내맡기며 한없이 나태하게 몸을 이완시켰다. 유일하게 붙잡고 있는 이성의 끈은 그가 저 화분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오늘은 아니라고했지.
그러니 성실하게 먹이를 줘야만한다. 그 먹이는 오늘이 아니다. 그럼 내일부터는 어떻게 해야할까.
물은 어떻게 주는거지? 물과 먹이는 별개인가? 조금 더 제대로 물어볼 것을 그랬다. 바보같이 겁먹지 말고 제대로 물어봤더라면.
아아..
그는 ‘실수’를 해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이 걱정이 전처럼 마음에 사무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일까. 방금 전 골목에서 겪은 일이 너무 충격적이여서? 아닐 것이다.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지 않았던가. 라우리스는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얕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한박자 늦게 미소지었다.
아아, 그렇구나. 다행이다.
그랬다. 그는 화분이 무엇을 먹이로 삼는지 알지 못했다. 동시에 자신이 어쩌다 이 화분을 가지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는지를 알지 못했고, 그 수단이 왜 명함이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명함의 진위여부를 왜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누구인가, 이 화분은 누구인가.
알지 못한다. 아니, 알지 않아도 된다.
그는 알고 있었고, 그 결과는 이미 화분이 되었니까.
라우리스는 달콤하게 밀려오는 수마를 기껍게 받아들이며 머리맡의 베개를 끌어당겼다.
이제 그의 앞날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날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매일 밤이 이렇게 졸리울 것이며 불면으로 밤을 지새우는 일도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렇게 쉬운 것을.
다들 이렇게 쉽고 고요한 세상속에 살고 있었던 거였어.
라우리스는 벌써 내일 밤을 기대된다고 생각하며 선홍색 눈을 깜빡이다가, 선홍색 눈을 깜빡이다가, 선홍색 눈을 깜빡이다가, 눈을 깜빡이다가, 깜빡이다가, 깜빡, 그대로 잠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에는 한 뼘정도 자라난 화분이 놓여져 있었다.
무기질적인 광택으로 둘러싸인 샛노란 줄기 끝에 맺힌 황금빛 꽃봉오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오늘도, 먹이를 더 부어달라고 조르듯이.
글
11월 9일 #오블완
- 설원
- 좀비
- 액체
장기- 과일/산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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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을 헤매에는 한 여성 탐험가가 있었다.
본래는 그녀가 아닌 그녀의 남동생이 탐험가로 탐험가들 사이에서는 꽤나 실력있는 인재로 촉망받던 이였으나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불의의 사고란 아이러니하게도 마차사고였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알 수 없는 신비의 유적을 지나 거대한 석상을 이겨냈던 동생치고는 너무나도 허무하고 온전한 죽음이었다.
항상 자신이 언제 어디서 죽을 지 몰라 머리카락을 한웅큼 잘라놓고 갔던 과거에 비하면 시신이라도 제대로 돌려받은 육지의 죽음은 얼마나 온건하던가.
바위를 밀어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온 손목만 잘라 돌아온 것도 아니었고 훗날 시신이 없었다는 이유로 얼굴을 가린 못된 사기꾼에게 시달릴 염려도 없었다.
아이의 부모는 연신 사죄와 감사를 반복하며 그녀를 선의의 지옥으로 밀어넣었다.
그래. 아이는 죄가 없지. 그러나 아이가 도로에서 뛰어놀고 있을 때, 당신들은 무엇을 했던가.
내 동생이 말에 치여 피투성이가 되어 날아갔을 때, 왜 힐러를 부르지 않고 비명만 지르며 제 아이만 챙겼던가.
원망과 분노가 가득차 그들을 노려보고 싶어도 세상의 시선이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의 동생은 영웅이 되었고, 마부는 죄인이되었으며 아이는 선량한 피해자가 되었으니까.
맞나? 이게 맞던가? 잘 모를 일이었다. 평소 인망이 좋았던 동생에게는 아주 많은 친구들이 있어 그녀가 넋을 놓고 있었을 때도 모든 일을 정리해 주었으니까.
흔히 갑작스럽게 많은 보상금을 얻은 친구의 가족을 등쳐먹는다는 사고조차 없을정도로 그들은 헌신적이었고 모든 보상을 그녀에게 몰아주었다.
비통한 일이었다. 누구하나 나에게 못되게 굴어주었다면 그를 원망하며 이 가슴속에 가득찬 울분을 토해냈을텐데.
아이를 원망할 수도 없었고 인생이 끝났다는듯 우는 마부를 나무랄 수도 없었다. 충실한 동생의 친구들과 상냥한 친구들. 예의를 다하여 전달된 보상금과 충분하게 주어진 애도의 시간.
당장 그녀가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 칩거한다 하여도 모두가 이해한다는듯이 웃을만큼,
이곳은 완벽하고 아름다운 세계였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루아침에 이뤄진 부와 명예 앞에서 그녀는 어떠한 미래도 상상할 수 없었다.
동생이 많이 그립지요?
아니었다. 집에도 잘 안들어오는 원수같은 동생새끼.
소름끼치게 머리카락만 잘라두고 떠나는 주제에 내가 진짜 멋진 거 보여줄게! 아니! 누나에게는 엄청 맛있는 과일이 더 좋겠다! 나만 믿어! 요즘 연금기술이 발달해서 보존식도 잘나와! 라던 탐험밖에 모르던 바보자식.
부모님을 일찍 여읜탓에 철이 너무 빨리 들어 귀엽지도 않은 동생이었고 그러면서도 제 몫보다는 사람을 챙기기를 좋아해서 호구라는 소리도 듣던 아이였다.
그래서였나 그래서 그 모든 노력이 이와같은 금과 명예와 사람으로 돌아와 버렸던가.
그녀는 이 모든것을 돌려줄테니 다시한번 동생을 만나 등짝을 후려갈기며 머리카락 자르지 말라고 소리지르고 싶었다. 편지를 쓸 때 괜히 아련하게 사망플래그 좀 꽂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먹고싶을 때 알아서 사 먹을 테니까 심부름하지말고 집에서 빈둥거리며 누워있다가 누나 아르페지오 홀 치킨 알아? 아~ 오늘따라 닭고기가 땡기네 라고 말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부모님의 장례식 때 처럼 어린아이마냥 이불을 뒤집어쓰고나서야 겨우 울음소리를 내지를 수 있었다.
이제는 동생이 잠들었을까 이제 울어도 되는걸까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었고 목이 쉬는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어서, 그녀는 그 옛날의 서러움까지 긁어모아 피를 토할때까지 소리를 내질렀다.
다시 이불밖으로 나왔을 때 그녀는 무언가 줄이 끊긴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험가가 되어야겠어. 지금 당장.”
그렇게 그녀는 장례를 끝마치자 마자 직장을 그만두고 체력을 단련하기 시작했다.
우선 동네를 달릴만한 체력을 기르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하자 그녀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여 미련없이 추억이 담긴 집을 정리하고 탈틴으로 이사하기 까지 했다.
덕분에 동네에는 그녀가 미쳤다는 소문이 기정사실화 되어버렸지만 그녀에게는 더이상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차라리 동생과 함께 모험을 하거나 인연을 맺은 동료들이 있는 탈틴이 훨씬 더 도움이 되었으니 집을 이사하는 것에 미련이 있을 리 없었다.
다행히 탈틴의 동료들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금세 이해했다.
당연히 이해하고말고. 누나 마음도 모르고 이대륙이나 쏘다닌 놈이 야속한 것은 여전했지만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냐고 한탄하기보다는 산 사람이 움직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 아이가 매료된 세상을 보고, 그 아이가 사랑했던 풍경을 보고, 그리하여 무엇이 그 아이를 그렇게 움직였는지를 알고 싶었다.
왜 이 잔인한 세상에 나약한 나만 남겨두고 갔느냐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튼튼하고 강인한줄 아냐고 쥐어박으려면 힘이 있어야 했다.
광장을 한바퀴 뛰어 도는 것에서 성벽을 따라 돌기까지. 16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검을 잡았다. 활은 재능이 없었다.
가장 추천받은 것은 전투 연금술이었지만 혼자 여행하려면 검도 알아야한다는 설득에 두 개 다 하기로 마음먹었다.
첫 여행지로 피시스를, 그것도 혼자서 간다고요? 괜찮겠어요?
모른다. 안 괜찮겠지. 애초에 괜찮은 여행을 하려거든 교역길드에서 부가적으로 운영하는 라노지역 관광패키지를 구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삶을 즐기려고 모험가를 자처하는게 아니었다.
죽으러 갈 것이다.
그러나 죽으러 가는 모험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려 할 것이기에 그녀는 일단 살아야 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고통을 양분삼아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기력이 빠진 모메 다시 음식을 쓸어 담으며.
그렇게 살아야 했다. 그렇게 해야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
마치 반짝이는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모두를 기만하듯 살아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는 켈라 베이스 캠프에 내려섰다.
요즘은 항로가 발달하여 바로 셀라해변에 내려설 수도 있겠지만 그 아이가 모험을 시작할 적에는 그런 것 따위는 없었기에 그녀 또한 미련없이 멀리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장비를 점검하고 누베스 산맥에 이를 때까지는 동생의 옛 동료들, 아니 이제는 그녀의 동료들이 되어버린 모험가들이 함께 동행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모험은 모험가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으니까.
누군가는 그녀가 결국 포기하거나 실패할거라고 비꼬았고, 누군가는 그녀의 재산을 질시했다.
누군가는 그녀의 도전을 흥미진진하게 보았으며, 또 누군가는 그녀가 가족에게 보내는 헌신을 경애했다.
“저기 보이는 커다란 동굴이 솔레아로 향하는 지하터널 입구에요. 우리가 같이 가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고요. 잘 할 수 있으시죠? 지도랑 나침반, 여분의 발광결정은 잘 챙겼어요?”
“네. 다 챙겼어요. 장비도 제대로 분산해서 장비했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한 여신의 날개도 여러 장 챙겼어요.”
“좋아요. 우리는 여기 원숭이 문양에서 나흘간 머물다 갈 예정이니까 안되겠다싶으면 미련없이 돌아와요. 알았죠? 명심해요. 당신에게는 제한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리하게 달성해야할 퀘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언젠가 동생과 함께 여행했다던 엘프 여행자, 우나. 개인의 자격으로 셀라해변에 가기 위해서 인간 여행자를 구하여 동행한 것 뿐이라지만 이따금씩 그녀가 가진 로켓을 의미 모를 눈빛으로 보던 그녀는 진실한 마음을 담아 그녀의 양 어깨를 힘주어잡고 또박또박하고 명료한 발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꼭 다시 만나요, 미헬.”
“……네.”
“살아서. 다시 만나요.”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나 또한 더이상 대답을 재촉하거나 그 의미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으로 되었을뿐.
그렇게 그녀는 어둠속으로, 무저갱과도 같은 깊은 동굴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단단히 장비를 갖추었음에도 어딘지 불안해보이는 모습에 동행한 한 모험가는 저도 모르게 카루숲 유적의 한 구절을 되뇌였다.
“오, 여왕이여.”
우나는 바로 그를 노려보며 입을 닥치게 만들었지만 모두가 그 구절만으로도 뒤따라오는 구절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오, 여왕이여. 명계의 율령은 완전한 것 여왕이여 명계의 의식에 대해서는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왕을 칭송하거나 경외하기 위한 것이 아닌 조롱의 문장.
아무것도 모르는 오만한 여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장신구를 빼앗기고 스스로 고난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구절이었다.
마치 지금의 그녀처럼.
아무리 단단히 준비한 장비들이라 하더라도 경험이
없다면 짐과 다를 바 없었기에 모험가들은 염려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원숭이 문장 앞에 텐트를 치고 그녀를 기다렸다.
당연하겠지만 오늘 저녁당번은 재수없는 방금 빛나는 항아리 거미의 어구를 외문 모험가의 몫이었다.
그는 겸허히 자신의 죗값을 받아들었다.
◆
한편 미헬은 그들의 염려와 달리 수월하게 지하터널의 중반을 지나가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안에는 미리 헤매고 있던 밀레시안이 한 마리, 아니 한 명 있었고 그 생태교란종 모험가는 미헬이 가진 지도와 등불을 반갑게 여기며 동행을 부탁했다.
밀레시안은 그녀가 어떤 이유로 여행을 하는지, 무슨 이유로 혼자 이곳에 들어왔는지 따위는 관심 없었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모험가였고, 그것이 당연한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을뿐.
미헬은 언젠가 동생이 흥분에 차서 보냈던 편지 속 밀레시안의 행동과 똑같은 모험가를 보며 잠시 평범하게 웃을 수 있었다.
머리위의 헤일로도, 함께 떠다니는 인형도, 등 뒤의 날개와 꼬리도 모두 동생이 말했던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사람이 왜 그런 꼬리와 날개를 달고 다니냐며 동생의 편지를 과장된 것이라 무시했지만 눈앞의 밀레시안은 진심으로 그 장신구들을 자신의 신체의 일부인양 부지런히 챙기고 다듬으며 지하터널을 앞서나갔다.
동생의 말대로 그들의 압도적인 무력은 그 특이한 패션을 고수하기 위해 발달된 일종의 방어기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호위였다.
그녀는 동생이 했던 것처럼 ‘그런데 그 날개랑 꼬리는 패션인가요?’라는 무심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 대화 주제에 신중을 기하며 최대한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말이야. 분명 선배는 왼쪽 위로만 가면 길이 나온다고 헀는데 지금 한창 오른쪽으로 왔잖아! 완전 속았다니까!”
미헬은 그 ‘선배’라는 밀레시안이 반드시 왼쪽길만 선택하라고 하지는 않았을거라 확신했지만 밀레시안의 명예를 위해 그 말은 꺼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정말이지, 미헬을 만나지 않았다면 큰일날뻔 했다니까?!”
“아하하하.. 그렇지는 않았을 거예요. 분명 조금만 더 찾으셨으면 제대로된 길을 찾을..”
”어, 저기 빛이 보인다! 출구인가봐!”
“찾을 수…”
찾을 수 없었을까? 정말 저 밀레시안은 길을 잃었던 것이었을까?
미헬은 뒤늦게 든 의구심에 발을 멈추고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이미 출구를 향해 달려가는 밀레시안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은채 천진난만하게 앞을 향해서만 달려나갔고, 빛 속에 몸을 반쯤 걸치고 나서야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혼란스러워 하는 그녀에게 밀레시안은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며 그대로 빛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동생이 편지에서 말하던 그 날의 경험담에서처럼.
미헬은 서둘러 밀레시안을 뒤쫓아 출구로 달려갔지만 역시나 밀레시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연했다. 그들은 길을 잃지 않는다. 그들의 인형은 길을 밝히는 것은 물론 적의를 가진 존재까지도 탐지하는 기능이 있었고, 정 귀찮으면 소울스트림의 힘을 이용해 원하는 위치로 이동할 수 있으니까.
동생은 세상에 취미로 인명구조를 하는 밀레시안도 있었다며 그들이 세상을 구하는 것도 분명 취미의 일부일거라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가 틀렸다.
일부러 같은 날개를 달고, 같은 인형과 같은 꼬리를 챙겨서 그녀의 앞에 나타난 밀레시안은 분명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도 알고 있었고.
미헬은 커다란 별이 그려진 솔레아를 내려다보며 그 때 그에게 답장했던 자신의 편지문구를 떠올렸다.
“뭐라는거야 바보야.”
하고싶었던 말이 있었다.
“사람을 구하는 것에 이유가 뭐가 있어. 그냥 구하는거지.”
동생의 죽음을 측은하게 여기면서도, 요즘 그런 젊은이는 또 없을거라 칭찬하는듯 하면서도.
“취미인지 뭔지가 뭐가 중요해. 도움을 받은 사람이 고맙다고 여기고, 그 고마워하는 마음을 소중하게 여기면 그만이지.”
그런 그를 조금은 미련하다고, 세상에 영웅이 되려는 바보가 아직도 있었다고 비웃는 사람들에게 쏘아붙이고 싶은 말이 있었다.
“사람을 구하는 것에..”
바보가 아니야. 미련한게 아니야.
“무슨 이유가 필요해!!!!!!”
내 동생은 영웅이 ‘되려는’ 것이 아니었다.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칭송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 누구도 그의 마음에 가격을 매길 수는 없다. 가치를 환산할 수 없다.
아무도 함부로 그의 인생을, 팔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바보 멍청이들아!!! 바보는 너희들이야!!!”
나는, 내가 받은 그 아이의 목숨값은.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지탱하기 위해 최소한의 단위로 분해한 삶의 요소중 일부로서 받은 것 뿐이다.
미헬은 장례식장에서 그렇게 못다내지른 가시박힌 말을 내지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도 없는 고산 증턱의 평원에서 울려퍼진 수신인 없은 욕설은 그렇게 파도소리에 묻혀 쓸려내려갔다.
미헬은 다시금 마음속에 충만하게 차오르는 흥분을 가득 눌러담고 짐을 내렸다. 밤이 지나고, 다시 설원을 향한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정말 온전히 혼자 걸어야 하는 동굴에서 미헬은 침착하게 준비했던 무기와 도구들을 이용해 길을 뚫기 시작했다.
앞서 밀레시안이 보여주었던 그대로.
옷하나, 장비하나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신중한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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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길을 나아가는 동안 미헬은 몇 번의 위기에 부딪쳤다.
중요한 장비를 잃었다.
설원늑대 때에게 식량을 빼앗기기도 했다.
나침반이 고장나 눈보라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정말 막막했지만 탈틴의 자이언트 친위대에게 배웠던 체력보존 방법과 길을 찾는 방법이 그녀를 살렸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게 셀라 항구에 닿았을 때는 정말 모험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울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건네준 한 잔의 코코아가, 또 언젠가의 동생이 보낸 편지와 닮아있어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맛있었다.
자이언트들은 코코아에 매콤한 향신료를 타는 순간부터 어른이라던 동생의 말이 떠올라 새빨갛게 얼은 코를 찡그리며 웃어버렸다.
그녀의 동생은 끝내 그 매콤한 코코아가 별로였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입에는 썩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길을 가기에 앞서 그녀는 간단한 퀘스트도 부탁받았다.
소용돌이 문양이 있는 언덕위에 있는 동료 랄프에게 화이트 허브를 전달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어차피 피시스를 들려 제대로 된 탐험 장비를 새로 구입해야 했기에 미헬은 어려운 고민없이 코코아를 배풀어준 블랙레이븐의 부탁을 수락했다.
화이트 허브꾸러미까지 미리 준비해준 덕분에 그녀의 어려움은 딱 하나 뿐이었다.
“그러니까.. 랄프씨?”
“….멍!”
“저는 레드고요. 얘가 랄프에요.”
미헬은 자신의 붉어진 얼굴을 추위탓으로 돌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 옆에있던 산드라라는 자이언트가 너무나도 유쾌하다는듯 웃어버렸지만 말이다.
◆
발레스에 도착하였을때 미헬은 완전히 지쳐있었다.
그녀는 숙소를 잡자마자 정신없이 골아떨어졌고, 그 사이 몇차례인가 부엉이가 날아올랐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미헬, 몸은 좀 어때요? 음… 아직 바르바 분지까지는 멀었으니까 긴장을 완전히 풀면 안되는거 알죠?”
자신을 불편해하는 자이언트들을 병풍취급하며 다가온 이는 누베스 산맥에서 헤어졌던 엘프 모험가, 우나였다.
그녀는 제더에게 떠밀려 멀어지는 반스트(이미 술에 취해있는지 우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뭐라 떠들고 있었다. 아마.. 피시스에 엘프가 들어오다니 말세라고 신경질을 부리고 있는듯 하다.)를 자연스럽게 미헬의 시선에서 차단시키며 그녀를 어스킨 뱅크쪽으로 이끌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모험가 조합에 미헬의 이름을 의뢰해놨거든요. 혹시나 당신이 어떤 여관이나 의료기관에 머물렀다는 서명이 적히면 나에게 알려주기로.”
“네?”
“아, 물론 선의의 의도라는걸 증명해야 해서 이번 여행만 간신히 허락받은 거예요. 다음에는 절대로 그럴 일 없으니까 안심해요.”
우나는 미헬에게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려했지만 미헬은 이미 우나가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모험가 커리어를 걸고 미헬의 보증을 서 준거나 마찬가지였다.
미헬은 당신이 내게 그럴 필요 없다며 다시한번 명확하게 그녀의 과도한 친절을 거절하려했지만 그녀가 자신의 은행에서 꺼낸 물건을 보자마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동생이 사용하던 탐험장비였다.
“사실 셀라 항구에서부터 연락은 받았는데 너무 쫓아다니면 싫어할까봐 당신이 피시스에 오길까지 기다렸어요. 당신이 눈보라속에서 장비를 많이 잃었다고 들었거든요.”
왜인지는 모르지만 우나의 말과 동시에 한 모험가가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다른 동료들이 그를 노려보거나 괜히 한대 후려치는등 그에게 작은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녀의 앞에선 늘 친절하려 애를 쓰는 우나까지도 꽤나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미헬의 시선을 발견하자마자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웃어보이기까지 했다.
“신경쓰지 말아요. 괜한 말을 입에 올린 벌이니까. 그보다. 새 장비를 사는 것보다 이것을 사용하는게 좋을 것 같아서 당신을 찾아왔어요. 선택은 당신 마음이지만.. 나는 언제나 이걸 당신에게 돌려주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이건.. 그 녀석이 당신에게 이 장비를 넘긴다고 미리 서명해서 당신에게 보내진 거잖아요. 내게 유품으로 주고싶었던 것이 아니라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요.”
“맞아요, 하지만..:
“나는 내 동생의 유언에 손대고 싶지 않아요.”
미헬의 단호한 거절에 우나는 아주 잠시 말을 고른 뒤 평이한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 때의 그는 당신이 모험가가 될 줄 몰랐잖아요?”
미헬은 우나의 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되물었다.
“우나 씨는 내가 모험가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럴것이다.
당장 저기에 지나가던 자이언트에게 물어보아도. 혹은 던바튼을 지나가는 백 명의 사람에게 되물어도 미헬은 이제 어엿한 모험가로 보일만한 눈빛과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은 그런의미가 아니었다.
“………”
“내가 왜 이 길을 떠나는지 알면서?”
미헬은 공허하게 웃으며 양 팔을 벌려보였다.
“내게 살아돌아오라고 당부하고 있으면서?”
그 모습은 마치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귀여운 몸집으로 보였지만 그녀의 눈은 솔레아의 지하터널보다 깊고 어두워보였다.
“만약에”
그러나 그 눈은 그녀만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나는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깨물어 딱 달라붙은 입을 억지로 벌리며 대답했다.
“당신이 이렇게 길을 나서지 않았다면.”
쩍쩍 달라붙는 침이 불쾌했다.
분명 자신의 입이고, 자신의 말이건만 우나는 그 말을 하는 것이 마치 타인의 목소리와 타인의 입을 빌어 이야기하는 것처럼 낯설었다.
“이 장비는 분명 내가 사용하고 있었겠죠.”
어쩔 수 없었다.
친절하고 상냥한 우나는 감히 그의 하나뿐인 가족 ‘미헬’에게 이렇게 날을 세우면 안되었을테니.
속내를 숨겨야한다는 강박과 그리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그녀의 영혼을 갈라 이러한 이질감을 만들어내었다.
“당신이 걸으려는 길을 똑같이 걸으며.”
그랬다. 만약 미헬이 미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추억이 깃든 집을 그토록 미련없이 정리하지 않았다면.
탈틴에서 일년하고 4개월을 달리지 않았다면, 다시 반년을 단련하고 다시 반년을 수행하고.
이리아에 오지 않았다면. 솔레아에 도착하지 못했다면.
눈보라속에서 길을 잃고 셀라항구에서 그냥 돌아가버렸다면.
이 설원에서 죽고자 하는 것은 분명 그녀였을 것이다.
미헬은 그녀가 왜 자신의 보증을 자처하고 나섰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질투였다. 선망이였다. 연민이었고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되는 자괴감에 몸부림치는 그녀의 마지막 단말마였다.
사랑했던가. 동경했던가.
그 만남은 정말 짧았던 동행이었던가.
모른다. 알 수가 없었다.
이 낯선 이종족의 동행에 대해서만큼은 그의 동생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편지에 잠깐 셀라항구를 다녀왔고 같이 동행한 사람이 있었으며 ‘그 사람’의 이름이 ‘우나’라고만 말했지 그 사람이 여성이며 그렇게 간절한 눈으로 자신의 로켓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는 설명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아무 일도 없었고 모든 것은 그녀 혼자만의 바람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쩌면, 이 멍청한 동생이 생애 처음겪는 첫사랑에 아무것도 못하고 돌처럼 굳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아, 미헬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에게 있어 동생 루데크는 멍청하고 귀여운, 그렇게 영원할 것 같은 작은 남동생이었지 이토록 많은 사람을 만나고 넓은 대륙을 두려움 없이 전진해 나아가던 모험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아주 조금의 시간과, 아주 조금의 기회와, 단 한번의 만남만 더 있을 수 있었더라면.
그녀는 자신에게 아무런 자격도 없음에 괴로워하며 하나뿐인 그의 가족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
그녀에게 헌신하는 것을 위안삼으며 그런 자신을 자조하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절망하지 않았으리라. 희망을 갈구하며 수십 수백번씩 자신의 가슴을 내리치지 않았으리라.
이 영혼이 찢겨 너덜거릴 때까지.
미헬은 마른 사막처럼 버석거리는 그녀를 끌어안고 울음을 참았다.
자이언트로 가득찬 이 낯선 설원에서 그녀를 약하게 보이게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 멍청한 자식은 왜 설원을 동경하여 죽어서도 이 고생을 시키는가.
멋드러지게 사막을 오시하는 대장군의 포부를 가지면 어디 덧난단말인가.
그리하여 이 사막에 작은 비가 내리는 결말정도로 끝나게 했다면.
나도 편하고 너도 편하고 우나 또한 편히 마음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겠는가.
아… 정말 죽고싶었다. 하나뿐인 가족을 잃어버려서.
미쳐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가족을 이리저리 품평하는 사람들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어버리고 싶어서.
그럼에도 살아야 하기에 달렸고, 죽지 못해 이곳까지 기어들어와 너를 이해해 보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삶의 궤적이 전혀 달리 살았듯 너를 사랑한 사람 또한 나만 남아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앞에 절망하고 죽고자했던 미친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는 장례식장조차 찾아오지 못해 마지막 작별을 고하지도 못했으며, 그녀앞에 도착한 장비를 보며 다른 이들에게 의구심 섞인 눈빛을 받아야 했다.
혼수는 못할망정 유품부터 남긴 멍청한 동생이 그녀의 동생이라는게 너무나도 한심스러웠다.
그리고 그렇게 멍청한 동생과 똑 닮은 가족이었던 만큼, 한심스럽고 눈치없는 것은 그녀또한 마찬가지였다.
미헬은 이 3년 조금 안되는 시간동안 단한번도 우나가 묻지 못했던 말을 대신 답해주었다.
“루데크의 묘비는 이멘마하 공동묘지 52구획 1-5번에 있어요.”
“………..”
“같이가요. 내가 돌아오면.”
우나는 서러운 물기가 얼어붙어 만들어진 얼음을 씹어 삼키며 대답했다.
“살아서."
“네. 살아서 돌아오면.”
그렇게 살기 위해서.
이번에는 우리 모두를 살게 하기 위하여 미헬은 동생의 장비를 집어들었다.
목표는 바르바 분지, 그녀의 동생이 최초의 탐험자가 되겠다고 큰소리쳤던 피시스 최 북단의 얼음동굴이었다.
◆
“그런데, 피시스에 가서 뭘 하려고요?”
미헬이 처음 동생의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이루겠다고 나섰을때 그 끝이 동굴의 탐험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로켓을 묻어두고 오려고요.”
“어~ 그러려면 땅을 꽤 깊게 파야할텐데. 설원의 들짐승들은 꽤나 유난스럽거든요. 얼어붙은 땅을 파려면 제대로 된 도구나.. 음.. 마도구를 가져가야 할 것 같네요. 당신 완력으로는 얼음을 깨는 것도 힘겨울테니.”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틀린 말이기도 했다.
그녀가 가려는 곳은 들짐승이 있는지, 아니면 제대로 된 짐승이 있는 지도 의문스러운 곳이었으니까.
얼어붙은 땅 피시스, 그 최북단인 바르바 분지에는 자르딘과 피시스를 나누는 이리니드의 결계가 있는 것으로 유며하지만 사실 그보다 조금 왼쪽의 북쪽 끝에는 자그마한 동굴이 하나 자리잡고 있었다.
뻗어나아간 방향을 보자면 그 또한 자르딘 지역으로 이어져 마땅했으나 이리니드의 힘으로 결계가 세워진 자르딘에 샛길따위가 존재할리가 없었다.
그러면 이 동굴은 왜 존재하는 걸까.
동굴은 오랫동안 모험가들 사이에서 흥미로운 주제로 언급되었다.
그리하여 몇몇은 실제로 들어가보기도 했고, 그 소문을 듣고 또 가본 이들도 제법 존재했으나 결국 들려오는 대답은 모두 동일한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대답이었다.
그렇다보니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얼음 벽과 눈덩이, 사람만한 고드름이 가득한 그곳을 제대로 탐험하겠다고 하는 이는 점점 줄어들어갔으며 결국 모두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더욱이 이리니드의 결계가 무너지고 자르딘 지역이 발견되며 왕립 지질학회원까지 정식으로 파견되었으니 이제 그 무의미한 얼음굴을 파고들어가보자 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동생은 바로 그 쓸모없는 동굴에 매료되었다.
“내 생각에는 조건이 필요한 것 같아.”
마치 콘누스의 지하굴의 몇몇 동굴들이 특정한 조건이나 문구에 반응하는 것처럼, 그는 피시스에도 고대 종족의 손길이 닿은 동굴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피시스와 관련된 그러한 특수한 조건은 무엇이 있을까.
그는 우연히 지하 터널에서 만난 사람을 구조하는 취미를 가진 밀레시안에게 뜻밖의 조언을 전해들었다.
“피시스에 있는 이리니드의 결계는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틀어 막은거야. 그러니 네 말 대로라면 그 결계를 우회하여 그곳으로 가고싶어하는 열망이 열쇠가 되겠지.”
감히 신의 뜻을 거스르면서 까지, 위대한 의지가 금지한 그곳으로 다시금 향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얼어붙은 빙벽을 파고들어가게 만들었나.
밀림에 있던 유적속 고대 자이언트의 기억은 그들의 선조가 세상을 불태우는 드래곤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땅속을 파고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대다. 그들은 드래곤이 있는 그 곳으로 가고자 했다.
왜?
피시스와 자르딘을 번갈아 다녀오며 자르딘에서 복원 화석들을 몇 점 구한 루데크는 마음의 확신이 섰다며 누나 미헬에게 다음 여행은 반드시 바르바분지의 얼음동굴의 비밀을 밝혀보이겠노라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그리움이야, 누나.”
카루숲 유적의 빛나는 조각들을 모아 복원했다는 유물 수집서의 복사본과 셀라해변 주변에 자생하는 빛나는 나무열매의 생태보고서를 늘어놓고 거실을 장악하고 있던 루데크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그 얼음의 비밀을 녹여낼 수 있을거야.”
그럴까? 정말 그럴까?
너는 왜 그 비밀을 밝혀 무엇을 이루려고 했을까.
모험가로서의 명예를 위해? 신비를 파해치는 꿈을 위해?
의미도 모르겠고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무지했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며 얼음벽 위로 미헬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동굴이라하기에 민망한 빙벽 아래의 작은 공동.
더이상 나아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그곳에서 미헬은 잠시 망설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거울처럼 반질거리는 얼음의 벽 위로 얼뜨기 같은 그녀의 모습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비춰지고 있었다.
미헬은 그 거울속 자신을 경계하듯 이리 저리 둘러보다가 말을 고르기 위해 눈을 꼭 감은뒤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 어쩌지.
뭐라고 말해야하지?
모르겠다. 평생을 평범한 사무직 직원으로 살아와 동생을 뒷바라지하고, 기다리고, 이제 막 모험가가 되겠다 뛰쳐나온 그녀는 어느 멋진 이야기속의 주인공처럼 번지르르한 말을 쏟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간절했고, 그렇기에 더욱 진심밖에 없는 말만이 그녀의 심장을 북처럼 두드리며 자신을 놓아달라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가족을!!”
미헬은 추위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눈물을 깜빡이며 소리쳤다.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그녀는 여신인지, 정령인지, 혹은 괴물인지 모를 무언가를 향해 간절히 소원했다.
“문을 열어주세요!!”
그러자 그녀의 목에 걸린 로켓이 사라졌다.
그러자 그녀의 등에 매어진 침낭이 사라졌다.
그러자 손에 들린 등불이 사라졌다.
그러자 그녀의 반대편 손에 쥐어진 나침반이 사라졌다.
그러자 그녀의 허리에 둘러매어진 바깥과 연결된 로프가 사라졌다.
그리하여 문이열리고
문이열리고
문이열리고
문이열리고
문이 열렸으니.
미헬은 이 길의 끝이 어디인지, 이 초대가 무슨 의미인지를 의심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떨리는 발끝을 들어 천천히 천천히.
청금색 얼음의 길 아래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