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11월 17일 #오블완
미헬은 검푸르게 물든 동굴을 걸어 내려갔다. 등불도 없이 맨 몸으로 걸어 내려가는 미헬이 그것이 검푸른 색이라고 인식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것이 이따금씩 생명체가 박동하듯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기 떄문이었다.
벽면을 밝히는 알 수 없는 광채는 미헬이 향하는 어둠 깊숙한 곳에서 뻗어나와 벽면을 투과하여 그녀가 걸어온 길 너머로 사라졌다.
동시에 차가운 기운이 점점 옅어지는 것이 느껴졌고, 주변은 이제 완전한 침묵으로 채워졌다.
어떠한 소리도, 그림자도 지지 않는 완벽한 고요.
그 속에서 이질적인 것은 오직 하나, 미헬이라는 존재 뿐이었다.
미헬은 계속해서 똑같은 풍경만 반복되는 하향길 중턱에 멈춰섰다. 벽면을 짚고 기대어 서는 미헬의 표정은 두려움과 피로감, 그리고 혼란이 뒤섞여 한껏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여긴 어디지…’
여긴 그녀의 동생, 루데크가 찾아 헤매었던 피시스 북단의 신비이며 금지된 땅으로 향하는 얼음동굴이었다.
‘그랬지.. 난 분명 그 동굴에 들어왔어..’
미헬은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따금씩은 멍하니 빛이 박동하는 벽면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한참만에 그녀가 내린 결론은 그녀가 더이상 ‘춥지’않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건 얼음이 아닌걸…?’
맞는 말이었다.
얼음은 그저 환경적인 요소일뿐 피시스의 본질은 얼어붙은 땅 아래에 깃든 막대한 양의 마나에 있었다.
마나는 생명체가 살아 숨쉬는 것에 필요한 모든 것에 깃든 에르그이며 붉은 달에서 파생되어 흩어진 세상의 신비였으니 이는 파도와같이 같이 높고 낮음이 있고 바람과 같이 옅고 짙음이 있으며 대지와 같이 결정된 형태와 느끼지도 못할 미세한 분진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마나는 응집되고 결정화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곳, 얼어붙은 마나의 땅은 그 거대한 힘을 수 천년동안 품어온 신비의 고지였다. 그렇기에 이보다 더 높고 가파른 산맥 꼭대기에는 푸른 용이 살고 있었으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불길이 잦아들지 않은 섬에는 감응자를 기다리는 황금빛 영혼이 깃든 알이 보관되어 있던 것이리라.
그 최후의 둥지 바로 아래에서 오래된 이리아의 영혼들은 이 땅의 지하 깊숙하게 잠든 신비를 꺼내어 가장 매끄러운 형태로 다듬었다.
그것은 빛나면서도 보석이 아니었고, 한없이 단단하면서도 가공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힘이 깃든 물건의 원천은 모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그 자체가 깃든 것의 힘이었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 내가 이런 걸 알고 있었다고?’
가장 처음 만들어낸 원시적인 형태의 주구. 물이 아닌 것에 비치는 허상.
오래된 영혼들은 날카로운 것과 소리나는 것, 그리고 빛나는 것을 제구(祭具)로 삼아 하늘을 향한 기도를 올리곤 했었다.
그중 빛나는 것이 스스로 빛을 내는 무언가가 아닌 비추는 것으로 대체된 까닭은 그 상이 맺히는 원리가 빛이라는 것을 알아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은 빛에서 파생된 허상이요 땅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으니, 오래된 영혼들은 비추는 도구를 통해 그림자가 단순히 ‘어둠’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비춰지는 세상 또한 모든 것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다. 이것이 그들이 거석너머로 발견한 또다른 세상을 그림자라고 명명한 이유였다.
‘..........이건… 정말 내가 하는 생각인가?’’
미헬은 연달아 쏟아져 내려오는 지식이 버거운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머릿속은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상념들로 가득차 그녀의 영혼을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림자, 매끄러운 것, 빛이 그려낸 허상.
미헬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 세가지 단어뿐으로 그녀는 곧 이 오래된 지식들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거울….’
그래, 맞았다.
미헬은 기대어 앉은 검푸른 수정의 벽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녀의 얼굴은 아주 어두웠으며 그 눈은 총명함보다는 두려움과 혼란에 가득차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보라. 지금 그대를 바라보는 수정 너머의 당신의 모습을 한 존재의 눈동자를.
그녀의 눈은 현명함과 지식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그 불꽃은 일견 광기에 가득찬 마나의 추종자와도 닮아있었다.
무엇이든 금방 배우는 미헬, 3년만에 혼자서 지하동굴을 지나 피시스까지 찾아 올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미헬.
만약 그녀가 마법을 배우고자 하였다면 그녀는 뛰어난 마법사가 될 수 도 있었다.
동시에 그녀가 주술을 배우고자 노력했다면 그녀는 그저그런 정도의 샤먼도 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에게는 연금술의 재능도 있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쉽게 실린더를 다루기 시작했던 탓에 잘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사실 평생 펜과 전공도서, 그리고 날붙이라면 식칼이 전부였던 일반적인 사람에게 실린더라는 장비는 낯설고도 어색한, 그들이 경험한 적 없는 전에 없는 특별한 도구임이 틀림없었다.
‘이 수정이 문제인 것같아. 당장 여기서 떨어져야 해. 지금이라도 일어나야..’
그렇기에 이 모든 것은 그녀이며 그녀가 아닌 것이며 그녀일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의 집합체가 말하는 목소리였다.
상념이었다. 망령의 외침이었으며, 다른 세계에서 온 메세지였다.
예언이었던가, 후회로 가득찬 회고록이었던가. 알 수 없었다. 수많은 세계 중 이곳에 닿은 미헬은 오직 그녀 하나뿐이었으니.
미헬은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수많은 세계선 속에서 루데크를 잃은 미헬 중에서, 그를 이해하고자 노력한 미헬중에서, 우나를 만난 미헬 중에서, 끝내 그의 등불과 그의 나침반과, 그의 밧줄과, 그의 침낭을 가지고 이곳에 닿은 미헬은 그녀 하나뿐이었다.
로켓은? 로켓은 그대의 것이니 항상 함께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로켓을 가진 미헬은 동굴의 문을 열었으나 이렇게 깊게 들어오지 못했다.
등불을 가진 미헬은 이미 셀라 해변에서 돌아갔다. 밧줄을 가진 미헬은 길을 잃었으며, 침낭을 가진 미헬은 마음속의 추위를 잊지 못해 이 수정속에서 얼어죽었다. 나침반을 가진 미헬은 시간을 잊었다.
그러니 이는 기적이 틀림없었다.
모든 것을 바치고 이곳까지 온 미헬. 우리는 당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었다.
‘어떻게든 수정이 없는 곳을 가야.. 하지만 어떻게?’
미헬은 머릿속을 파고드는 낯선 사념를 피해 자리에서 일어나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그녀는 곧 깨달았다. 그녀가 딛고 선 대지, 머리위로 드리운 천장, 잠시 마음을 기댈 벽면과 호흡하는 공기조차도 모두 수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그녀는 다시한번 그녀가 넋을 놓고 내려오던 길목의 한 복판, 최초로 떠올렸던 의식의 시작점을 되짚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여긴 그녀의 동생, 루데크가 찾아 헤매었던 피시스 북단의 신비이며 금지된 땅으로 향하는 얼음동굴이었다.
당신이 원한 곳. 당신이 찾아 헤매던 대답.
당신은 루데크가 사랑한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고, 루데크가 꿈꿨던 이상을 바라보고자 했으며, 그가 약속한 미래를 확인하고자 이곳에 왔다.
“그만해..!!”
미헬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 알 수 없는 말들로부터 도망치고자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 수정이었다. 그 모든 것이 수정이었다.
“대체 내게 원하는게 뭐야?!”
수정은 모든 대답을 품고 있는 가능성인 동시에 당신의 그림자를 비추는 거울이다.
‘나는.. 나는 그저..!’
당신은 동생 루데크의 세상을 이해하고자 이곳에 왔다.
“그게 왜 이런 무서운 일로 되돌아오는 건데…!”
두려움은 당신에게 ‘이해’가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무지의 반향이었다.
우리는 당신이 궁금해하는 모든 것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고 그 준비는 모두 당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조금 더 허들을 낮춰 이야기하자면 당신의 시작은 당신이 아닌 타인의 이해를 바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당신의 상냥함을 본받아 조금 더 다듬어 이야기하자면.
미헬, 당신이 그동안 루데크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
미헬은 숨을 헐떡이며 다시 멈춰섰다.
귀를 막아도 이 소리는 차단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은 이미 침묵의 땅이요 고요의 성지였으니까.
눈에 닿는 모든 것이 무덤과 다를 바 없는 이 작은 터널 안에서 소리를 피해 몸을 웅크린다 하여도 이 소리 멎을 일은 없었다.
모르겠는가?
이곳에서 유일하게 숨을 쉬고 소리를 내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반드시 말해야만 했다.
미헬, 루데크는 당신의 유일한 가족이고 소중한 남동생이지만 그는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타인이고 최초의 이웃이다.
당신이 그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신이 후회하는 것은 그 이해의 기회를 모두 헛되이 흘려보냈다는 것일뿐.
그러나 그렇게 흘러간 기회는 언젠가 당신의 영혼 말미에 닿아 수많은 가능성을 만들어내었다.
깨닫지 못한 날들을 아쉬워 하는 마음. 후회는 당신으로 하여금 ‘그렇지 않았던’ 선택을 갈망하게 만들었고 그 갈망은 맞닿은 세상 어딘가에 있는 미헬에게 지금과 같이 속삭여왔었다.
할까? 하지 말까? 내가 할 수 있을까?
어차피 실패하고 후회할 결말이라면 차라리 해보고나서 실패를 보고 웃어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상냥한 미헬,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미헬.
당신이 당신의 집을 정리하고 탈틴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는지,‘나’는 안다.
당신이 탈틴의 광장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비웃던 사람들의 시선을 얼마나 신경쓰고 부끄러워 했었는지, ‘나’는 알고있다.
당신이 카브항구의 주점 2층에서 바다를 보며 설레였던 것도, 당신이 등대의 불빛을 바라보며 기도했던 것도
당신이 배멀미를 하는 것이 못미더워보일까 홀로 선실에 틀어박혀 고생하였던 것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모든 고집과 억지와 두려움과 고단함을.
‘나’는 알고, ‘우리’는 알고, ‘당신’은 알고 있다.
“ ”
미헬은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치며 눈물을 떨어트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일어나 다시 걸었고 또 서럽게 울었다. 무서웠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이 상황.
그녀는 지금의 눈물이, 이 걸음이, 그럼에도 걸어야 한다고 믿는 신념까지도 무엇하나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정말 나의 의지인가? 이것은 정말 ‘미헬’의 선택인가?
쏟아지는 별의 반짝임속에서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걷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빛을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 그녀에게 끊임없이 가르쳐왔기 때문이었다.
포기하지 말라고. 길을 잃었다 생각하더라도 자포자기 하지 말라고.
주변을 보고, 생각하고, 나아갈 방향을 찾을 지표를 찾아 움직이라고.
그것은 누구의 가르침이었던가. 아버지였나? 어머니? 아니면 이따금씩 자신이 백수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탐험가 선생 노릇을 하던 동생 루데크? 아니. 어쩌면 탈틴에서 배운 지식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닌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항상 정잡이 아닐 수도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상황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막막한 밤바다 위에서 관화를 피어올리지 않은 배를 찾을 수 없는 법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는 산중의 조난자를 찾을 수 없다.
들판에 남겨진 발자국, 얼어붙은 나무를 긁어 새긴 매듭의 문양.
떨어진 구슬.
편지.
눈물의 잔향.
당신을 이끌어온, 그리고 지금의 당신을 쌓아올린 모든 영혼의 상처들.
미헬은 도망치듯 달리며 생각했다.
싫어. 무서워. 이건 내가 기대했던 게 아니야.
그렇다면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누구를 만날 수 있을거라 기대했던 걸까. 그리고 어떻게 그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걸까.
물론,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가장 처음, 미헬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자 이 땅에 찾아왔다.
그렇기에 그녀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에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동생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실제는 어떠했던가.
그녀는 죽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항구를 찾았고, 새로운 배움을 얻었다. 기쁨을 느끼고, 경험을 쌓았다.
길을 찾는 방법을 익힌 그녀의 앞에서 설원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보이는가?
이게 당신이 찾고자 했던 루데크의 첫번째 이해의 조각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조각.
당신은 한 사람에 대한 추억이 모두 당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아니, 인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모르는 루데크가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루데크를 전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루데크에게는 루데크의 세상이 있었고 그건 그 누구도 온전하게 소유할 수 없는 고유의 것이었다.
심지어 그 자신까지도.
그렇게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루데크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우나를 바라보며 당신의 본질을 깨달았다.
그것은 우나의 것이기도 하였으며 루데크의 것이기도 한 사실(寫實).
당신은 루데크가 아니다.
그렇기에 당신은 루데크를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루데크의 가장 가까운 타인이고 최초의 이웃이었으며 피를 나눈 형제이고 가장 먼 이해자였다.
당신이 아는 루데크는 오직 당신에게 보여진 루데크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당신이 아는 루데크는 우나가 아는 루데크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느껴지는가? 우리는 낯설고 무섭고 무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당신이다. 그리고 당신은 거울이다.
당신은 이 세상의 존재이자 또다른 세상의 루데크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렇다면 우나와 루데크 또한 다르지 않다.
우나 또한 그녀가 아는 루데크를 기억하는, 우나의 세계에 비춘 루데크를 비추는 거울이며 루데크에게는 루데크의 우나와 루데크의 미헬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 누구도 타인의 세상을 온전하게 소유할 수 없는 이유이며 당신 자신도 모르는 당신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루데크는 어떠했을까.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녀와 같이 잘못된 이해로 이 땅을 찾았을까.
그가 이곳에서 누구를 만나고자 했는지, 그리고 어떠한 의미로 밀레시안이 말한 ‘그리움’을 이해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이곳에 도착한 것은 당신이다.
당신이 닿았다. 당신은 닿았다. 당신은 루데크가 목표로 하고 보고싶어했던 결말에 도달했다.
이 완성되지 않은 얼음의 동굴을.
더 이상 파고들어가지 않고 오직 거울과 같이 반질거리는 수정으로 뒤덮인 것으로 완성된 이 공터를.
그리움으로 열리는 이 끝없는 황천으로 향하는 길.
당신이 그를 만나고자 한 이유.
당신이 만나고자 한 루데크.
“내가 루데크를 만나고 싶어했던 이유는..”
당신은 이제 루데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미헬은 그렇게 동굴의 최심부, 가장 빛나는 수정의 벽 앞에 멈춰섰다.
그곳은 미헬이 여지껏 지나왔던 빛의 신호들과 같이 그녀의 박동소리에 맞춰 빛을 내뿜었다 거두기를 반복하고 있었다.미헬이 공교롭다고 생각한 것은 빛이 발광할 때에는 수정이 아무것도 비추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수정에 그녀의 상(像)이 맺히는 것은 오직 빛이 지나간 직후, 어둠이 다시 눈앞을 가리기 직전의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의 연속인 터널 안쪽에서 미헬은 수없이 많은 상(像)을 맺었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생성과 복제, 소멸을 반복했다.
미헬은 유일하게 빛이 꺼지지 않는 수정벽의 중심부를 향해 한걸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어떤 느낌이 들었는가.
따뜻했다.
얼음의 땅 최심부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할정도로 그것은 따듯하고 또 포근했다.
이것에 뺨을 대고 눈을 감으면 그녀는 마치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는 것같은 안락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락함은 두번 다시 눈을 뜨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강력하고 매혹적이겠지.
미헬은 이전의 자신이라면 분명 눈을 뜨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는 뺨을 기대어 보는 것도, 눈을 감는 것도 선택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 빛을 응시했다.
그녀는 이제 그녀의 안에 있는 루데크의 존재를 이해했고, 그녀의 본질을 깨달았으며, 다시 살아 나아가야 하는 이유도 제대로 기억해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질문을 던질 차례였다.
이제 여기서 뭘 해야하지?
질문을 던지자 다시 한번 대답이 들려왔다.
그것은 길이 열리는 것과 같았고 동시에 새로운 세상과 연결되는 것을 의미했다.
‘들려요?’
미헬은 들린다고 대답했다.
‘아, 아. 내 말 들려요?’
미헬은 들린다고 대답했다.
‘와, 다행이다. 저기요. 그러니까 저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요.’
미헬은 듣고있다고, 천천히 말해도 된다고 대답하며 상대를 안심시켰다.
미헬의 부드러운 말씨에 상대는 안심한듯 긴장을 덜어낸 목소리로 다시금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제 이름은 메브, 메브 그라임즈라고 해요. 코가르나흐라는 타라의 작은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미헬은 침착하게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거울 너머의 신비한 분. 저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미헬은 무엇을 도와야 하느냐고 물었다.
‘저에게는 지금 또 하나의 거울이 필요해요. 그리고 그걸.. 아마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 같고요. 그러니까 당신이 저를 도와서 거울에 갇힌 영혼들을 해방시켜주셨으면 좋겠어요.’
미헬은 어떻게? 라고 되묻지 않았다. 답은 이미 눈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올려 거울속의 미헬을 바라보았고,그 뒤에서 등불을 들고 다가오는 루데크를 응시했다.
나침반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걸어오던 루데크는 거울에 비친 미헬과 눈을 마주치고는 어리둥절한듯 고개를 갸웃거려보였다.
그리고는 입모양을 벙긋거리며 다가왔다.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치 그녀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는 연달아 무언가를 계속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는 루데크의 입가에는 점점 커져가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의 눈은 반짝였으며 당장이라도 더 많은 것을 묻고싶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복잡한 눈빛속에서도 가장 선명하고 커다란 감정은 기쁨이었다. 그녀가 이곳에 도착한 업적을 향한 순수한 기쁨과 반가움. 세계를 공유하는 즐거움.
미헬은 루데크를 향해 돌아서는 자신을 바라보며 수정에 올려놓은 손 옆에 이마를 대었다.
그리고 눈물을 떨어트리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거울 속의 미헬은 그 기쁨에 응답하기에 앞서 일단 팔부터 휘둘렀다.
그녀는 루데트의 등을 몇번이고 내리치며 그를 나무랐다.
두툼한 방한복 너머로 그녀의 손길이 닿을리도 없것만 루데크는 아프다는 시늉을 하며 그녀에게 엄살을 떨어보였다.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금방 화해하여 서로를 걱정하고 의지해왔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도 그러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거니 떠밀거니하며 점점 미헬로부터 멀어져갔다.
곧 그들의 어둠속에 잠겨들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미헬은 홀로 남겨졌다.
그러나 미헬은 그 뒤에 있을 상황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동굴 밖으로 나가면, 우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는 어색하게, 혹은 뻔뻔하게, 혹은 조금은 쑥쓰러워 하며 그녀를 제대로 소개해줄 것이다.
‘소개할게, 누나. 이쪽은 우나. 내 소중한 사람이야.’ 라고 말하겠지.
물론 그것은 한번도 들어본 적 없고, 말해본 적도 없으며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애초에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이곳에 올 일은 없었기에 일어날 수 도 없는 기적이지만.
그럼에도 미헬은 그러한 모습을 상상하고 소원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거울 속의 비친 모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도와줄게요.”
동시에 거울 너머에서 들리는 의문의 목소리가 말하는 ‘해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으며,
어떻게 해야 그것이 가능한지도 알 수 있었다.
‘정말요?! 고마워요! 사실 저도 반신반의 하며 말해본 거였거든요. 저기, 그럼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불러들어야 할까요? 어디계시죠? 제가 만나러 갈 수 있나요?’
“미헬. 내 이름은 미헬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아마 만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러자 수정의 동굴 어딘가, 수정벽 속 루데크와 같이 홀가분하게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그녀의 뒤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루데크가, 그리고 루데크들이 하나 둘씩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래. 다정한 너는 어쩌면 나를 걱정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왜 이런 위험천만한 곳까지 왔느냐고 화를 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밖에도 훨씬 더, 훨씬 더 많은 네가 있었을 것이고 그중 대부분은 내가 모르는 반응으로 다양한 대답을 들려주었겠다고 생각하며 미헬은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빛이 박동하여 그녀를 스쳐지나가 동굴의 입구에 이르기까지, 수 천, 수 만번의 인사가 전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마지막 남은 미련까지 털어낸 뒤에야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미헬은 눈물과 땀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저는 지금 세상의 끝에 있어요.”
동굴은 빛으로 미헬의 대답에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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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일 #오블완
메브 그라임즈는 코가르나흐 신문사의 평범한 신입기자였다.
인맥을 기대하기도 힘든 작은 마을출신에 따로 대단한 재능이 있어 혼자서 울라대륙을 돌아다닐만한 인재도 아니었다.
그나마 뛰어난 부분을 손꼽자면 타고난 말솜씨와 눈썰미 정도. 그리고 초급학교에서 갈고닦은 작문실력이 있긴 했지만 글솜씨만 두고보자면 그녀의 동기, 시우반이 더 깔끔하고 명료한 문체를 자랑하고 있어 그녀가 자신감 있게 내놓을 것이 되지 못했다.
더욱이 시우반은 혼자서 오스나사일을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듀얼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침착하게 거리를 두고 응전하는 정도였지만 아무런 무기를 다루지 못하는 그녀와 달리 시우반은 어디든 자유롭게 취재를 떠날 수 있었고, 또 어느정도 위험을 감수하고 더 깊은 취재를 지속할 수 있었다.
이렇다보니 메브라고해서 무기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요즘은 실린더도 잘 나온다고하여 일부러 탈틴까지 찾아가보기도 했고, 몇번을 가르쳐줘도 결정 넣는 것조차 불안해보이는 그녀를 위해 추천된 ‘던지면 무엇이든 해결되는 마법의 파란 솔방울’을 구매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메브는 그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망손이었다.
그동안 수도없이 연금술에 관련된 기사를 교열했던 그녀였지만 실린더 안에 원소의 결정을 밀어넣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던지면 무엇이든 해결된다던 ‘마법의 파란 솔방울’은 또 얼마나 강력한지, 메브는 자기 발치 바로 앞에 자라난 성인 남성만한 얼음 석순을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만약 거리 조절을 잘못하여 발밑에 떨어트렸다면, 혹은 어딘가에 잘못 튕겨져 나오 그녀에게 다시 굴러들어왔다면?
‘저 얼음에 꿰뚫리는 것은 지나가던 회색 도시쥐가 아니라 내가 되지 않을까?’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 상품에 쓰여져 있던 ‘무엇’이란 그림자 세계의 중, 고급미션을 말하는 것이었다.
메브는 자신은 호신용품을 원했지 전쟁용품을 원한것은 아니라며 서둘러 판매처를 찾아가 구매한 모든 제품을 반품했다.
메브에게 ‘던지면 무엇이든 해결되는 마법의 파란 솔방울’을 판 개인상점 상인은 메브에게 이런식으로 나오면 곤란하다며 반품을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상인은 갑자기 말을 바꿔 빠르게 모든 금액을 환불해 준 뒤 서둘러 가방을 챙겨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가 허둥지둥 뛰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메브는 마침 그녀의 옆에서 똑같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상인을 응시하던 버섯머리의 소년을 보고 멋쩍은듯 웃어버렸다.
소년은 방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 광장 뒤에 있는 언덕위로 올라갔다. 메브는 어쩐지 그 손인사에 맞춰 그 자리에 떠나야할 것 같은 분위기에 휩쓸려 마침 성문 안으로 들어오는 타라행 마차에 올라탔다.
침대에 걸터 앉고 나서야 메브는 베개를 내리치며 뒤늦은 깨달음을 토해냈다.
“전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어!!”
이제 신입이라는 딱지도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시기.
그동안 동기 시우반은 승승장구하여 몇번이고 편집장님의 칭찬을 받아 지면에 상당한 분량의 기사를 실었다.
그에 반해 메브가 취재한 기사는 고작해야 타라의 고양이와 선행, 길거리 강아지 best 10, 가을철 꽃사슴을 조심하세요! 같은 쓸데 없는 기사들뿐.
모처럼 인터뷰실력을 발휘 할 수도 없는 동물들 대상의 기사만 잔뜩이라 그녀는 기사를 들고갈 때마다 되려 비웃음을 사기만 했었다.
그러면 사람을 대상으로 취재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힘들었다. 불가능은 아니었지만 이 까칠한 타라라는 도시 내에서 아무런 인맥도 지연도 없는 그녀의 인터뷰실력은 빚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차라리 우연히 사고라도 목격하여 그 사고 목격자를 인터뷰하는 것일면 모를까, 타라의 높으신, 귀하신, 한 자리 하시는 도시 사람들께서는 이런 촌스러운 시골출신 여성기자의 인터뷰 신청따위 숲속에 굴러다니는 위습만도 못한 소리처럼 무시하는게 일상이었던 것이다.
메브는 이번에도 허탕쳐버린 휴가날을 아까워하며 양 주먹을 휘둘러 베개를 번갈아 내리찍었다.
시우반도 짜증이나고 이 싸가지없는 타라의 시민들도 짜증났다. 은근히 눈치주는 편집장이 미웠다.
자신이 힘들게 취재한 길거리 강아지 best 10의 1위와 6위를 바꿔 기재한 미술기자도 짜증났다.
얼마나 힘들게 수집한 선호도 조사 결과였는데. 잘못 랭크된 강아지 기사가 나간 날, 누군가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기사였으나 사실 그 기사는 펜카스트 대주교가 특별히 그녀를 불러 의뢰한 비밀의뢰 기사였다.
고양이들을 쫓아다니며 선행하는 이들에 대한 기사를 썼던 것이 매우 인상깊었다며 이번에는 보다 많은 이들에게 선행을 홍보하고자 길거리 강아지들의 귀여운 포인트를 일목요연하게 나누어 기사화 해달라는 부탁이었는데…
내심 랭킹 1위 강아지를 추천하기까지 했던 터라 메브는 일찌감치 그 까만주둥이의 하얀 입술이 매력포인트인 갈색 강아지를 랭크 1위에 올려놓고 기사를 썼으나 사진이 모든 것을 망치고 말았다.
당연하지만 자신이 아끼는 강아지가 랭크 6위에 기록된 것을 발견한 펜카스트 대주교는 매우 싸늘한 눈으로 메브를 바라보다 말없이 교황청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랭크 1위가 된 강아지를 입양한 사람이 펜카스트 대주교의 유명한 심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과거의 불운을 곱씹으며 베개의 먼지를 털어내던 메브는 푹신하게 되살아난 베개에 다시 얼굴을 파묻고는 중얼거렸다.
“짜증나… 나도 하늘에서 뚝 하고 행운이 떨어졌으면 좋겠어. 마법같은 사건이라던가, 갑자기 배송된 붉은 밀랍의 초대장이라던가, 알지도 못하는 친척의 유산이라던가, 밀레시안이라던가, 밀레시안이라던가, 어디서 아는 밀레시안이 생겨난다던가.”
메브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돌아누우며 말했다.
“요즘 그 뭐냐, 이단 성직자들이 많이 돌아다닌다며. 그런데 왜 내 앞에는 하나도 안나타나? 뭐 원수라도 졌어?”
그리고 다음 날, 모든 소원이 이뤄졌다.
메브는 마지막 한숨과 함께 내뱉었던 소원을 후회할 수 밖에 없었다.
메브가 받은 초대장은 어느 귀족가문의 저택이었다.
그곳은 메브는 자신이 여기에 초대받은 것이 맞느냐고 수십번도 더 되물을 정도의 대부호의 저택으로 직위와는 별개로 다양한 유력자들과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맺은 가문이었다.
가문의 이름은 스카한, 신비와 영감으로 가득찬 예술가의 가문이었으며 그중 가장 유명한 이는 다름아닌 생전에 ‘왕립미술협회’에서 천재로 칭송받았던 일다하흐 스카한이었다.
왕성에도 여러점의 작품을 남겼던 그는 명예 보다 많은 사람들과 행복을 공유하고 싶다는 이유로 왕성으로 떠나 라이미라크 교단으로 향했으며 그곳에서 캔버스가 아닌 성벽에 성화를 그리는 봉사활동을 하며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그림이 멀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라미이라크 교단은 그런 그를 매우 사랑했다.
그 사랑이 어느정도였냐하면 벽에 그린 성화와 똑같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그린 그림을 바로 보물고에 보관하였으며, 그와 또 별개로 성화를 그리는 그의 모습을(곁에는 일다하흐의 동료, 아르기드와 함께했던 귀엽고 성실한 어린이 봉사자들도 있었다.) 초상화로 남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토록 숭고하던 젊은 예술가는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럽게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세한 사항은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메브는 지금도 일다하흐 스카한의 사인을 알지 못했다.
언뜻 들었을 때는 뱃놀이중에 사고가 발생했다고도 들었고, 또 어딘가에서는 배 위에서 일어난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에 휘말린 것이라고도 들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사건이 공표되지 않을 리 없었기 떄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그의 죽음을 ‘사고’라고 칭하며 유감을 표하는 선에서 그쳤다.
더 자세하게 조사하려는 이들은 재능있는 조카의 죽음을 너무나도 슬퍼하여 가문의 문까지 닫아걸은 스카한 대부인의 분노를 직면해야했기에 보통의 용기와 뒷배가 없는 기자들은 스카한 가문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메브가 자신이 향하는 곳이 ‘그' 스카한 가문의 저택이라는 것을 깨닫자 마자 넋을 놓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사교계에서 이제 완전히 이름을 감춘 스카한 가문이 나를 왜?'
다행스럽게도 메브가 불려가는 이유는 스카한 대부인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닌듯 했다.
만약 그녀가 부르는 것이었다면 그녀의 이름이 적혀있었을테니까.
그녀가 받아든 고급스러운 편지지에 적힌 이름은 ‘스카한’으로, 스카한 가문에서는 다름아닌 메브의 조모님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였고, 그녀의 부모님은 그보다도 일찍 그녀를 조부모님께 맡긴 뒤 어디론가로 사라진 상태였다.
이렇다보니 스카한 가문에서는 다음 ‘그라임즈’를 찾아올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바로 타라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던 메브였다.
그들은 메브가 그라임즈의 성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지막 직계가 자신이라는 증서까지 지참하여 이를 메브에게 ‘돌려주기’까지 했다.
마치 그녀가 먼저 자신이 그라임즈의 직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서류를 보냈다는양 자연스러운 양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왜?'
메브는 그리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왜 스카한 가문에 불려가는지를 계속해서 추론해나갔다.
작위도 뭣도 없는 그라임즈의 늙은 노부부가 귀족가문 스카한과 무슨 연관이 있었을까.
나 몰래 빚이라도 졌던걸까?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마차와 마부까지 보낸 것이 퍽 정중해보였다.
그라임즈의 직계, 그 증서를 직접 가져올 정도로 빠른 일처리, 증명.
대를 이어서라도 무언가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 대상이 평민이 될 만한 일.
해답은 그녀가 지난밤에 빌었던 소원에 있었다.
이미 갑자기 배송된 붉은 밀랍의 초대장에서 예고되었지 않았던가.
“유산이요?”
“정확히는 이제 당신에게 넘어간 어떤 물건에 대한 소유권이지요.”
메브는 마법같은 일은 이미 충분하니 평범하게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간절하게 빌며 응접실에 마주앉은 집사장이 내미는 상자를 받아들었다.
그 안에 든 것은 다름아닌 거울이었다. 들고다니기엔 조금 커보이지만 화장대 앞에 앉아 이리저리 비춰볼 때 쓰기 좋아보이는 커다란 손거울.
어떤 기술로 만들었는지 테두리가 하늘빛이 감도는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거울은 꼭 얼음을 빚어 만든 마법아이템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묘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메브는 손잡이 끝과 거울 여기저기에 박힌 불투명한 우유빛 광물(보석은 아니었다)을 홀린듯이 바라보다가 다시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제가 이걸 관리해야한다고요? 아니 일다하흐 스카한의 유산을 제가 왜요?”
집사장은 대답 대신 정중한 손짓으로 거울이 들어있던 상자 아래에 들어있던 수첩을 가리켰다.
수첩은 선선대 스카한이 남긴 편지의 사본과 메브의 조모가 남긴 편지의 원본으로 이루어진 서신철이었다.
(아마도 선선대 스카한이 남긴 편지의 원본과 메브의 조모가 남긴 편지의 사본은 그들이 가진 또다른 서신철에 있을 것이다.)
편지는 메브의 조모가 새파랗게 어린 모험가였던 시절에 썼던 것으로 그녀가 스카한에게 고용되어 어떠한 ‘단체’를 쫓고 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단체가 이미 누군가의 추격을 받고 있어 양쪽을 신경쓰는 것이 매우 어렵고 고되고 불쾌하고 성가시다는 내용이었다.
스카한이 그런 그녀에게 추가적인 보수를 미리 지급하며 인내심을 가지기를 부탁했다.
스카한이 이미 누군가에게 추격을 받고 있던 ‘단체’를 굳이 따로 쫓고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가진 기물(忌物)이 원래는 스카한 가문의 기물(己物)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스카한 가문의 물건이 이상한 단체에게 넘어가 사악한 마법이 덧씌워졌다는 것.
스카한 가문은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이를 회수하려 했으나 이 ‘단체’는 보통 특별한 단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라이미라크 교단의 고위급 사제들처럼, 혹은 사법에 손을 댄 블랙위저드처럼, 듣도보도 못한 이상한 마법을 사용하며 그들을 추격하는 족족 포위망에서 빠져나가곤 했다.
또 여의치 않을 때에는 잔혹한 수단으로 대응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으며 스카한은 이미 여러번의 실패를 경험한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이 ‘단체’에게는 너무 적이 많아 아직 ‘스카한’이 그들을 쫓는줄 모르고 있다는 말이었다.
스카한은 그들이 스카한의 기물을 이용한 사악한 물건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명예를 떨어트리기 전에,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들을 협박하기 전에 그 기물을 회수하고 싶어했다.
이를 위해서는 기물이 ‘단체’를 쫓는 의문의 추격자들의 손에 들어가서도, 혹은 다른 추격자들(라이미라크 교단이라던가, 친위대라던가, 그들과 원수진 기사단이라던가)그들의 손에 파괴되는 것도 막아야만했다.
이유는 이들이 가진 기이한 마법..? 같은 힘 때문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이미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한 적 있다던 스카한은 그들은 기물(忌物)에 비춘 그림자를 다시 현실화 시키는 마법을 가지고 있어 파괴는 되려 정화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악수라고 설명했다.
여기서부터 서신의 말을 반절도 이해하지 못한 메브는 남은 서신들을 빠르게 넘겨 결론부분만 훑어보았다.
요약하자면 메브의 조모, 선선대 그라임즈는 스카한의 ‘기물’을 되찾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기물은 방금전 메브가 직접 확인했다시피 ‘거울’이었고 그녀는 거울에 절대로 얼굴을 비추면 안된다는 스카한의 조언에 따라 거울을 상자에 넣은채 빠르게 그 현장을 빠져나오려 했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단체’를 쫓던 추격자들과 마주쳤다는 것이었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갑옷과 앰블럼을 단 기사들은 그녀에게 거울의 위험성을 설명하며 거울을 돌려줄 것을 부탁했다. 그라임즈는 그들의 ‘부탁’이 강한 자들이 내보이는 특유의 자만심, 혹은 여유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두번 고민할 것 없이 상자를 내려놓고 양 손을 들어올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장 ‘부탁’을 해 보이는 기사는 가장 위험해 보였을뿐더러, 가장 빠릿해보이는 기사는 과하게 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라임즈는 그 기사가 만약 실수로 그녀의 목을 날리더라도 저 허술해보이는 기사가 난감한듯 웃으며 넘어갈 것이다라는 것에 자신의 의뢰금도 걸 수 있었다.
대신에 그라임즈는 제안을 던져보았다.
그 거울은 내가 쓸 것이 아닌 의뢰받은 물건이고, 그 의뢰자들은 그저 자신들의 물건이 사악하게 쓰이는 것을 막고싶은 것뿐이라고 사정을 털어놓은 것이다.
그라임즈의 말에 허술해보이는 기사는 전혀 믿지 않는다는듯 웃어보이고는 터벅터벅걸어가 상자안에 고이 감싼 거울을 꺼내들었다.
그라임즈가 위험을 경고하려하자 그는 그라임즈에게 괜찮다고 손짓하며 거울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거울은 그의 손에 어린 푸른 불꽃에 그슬리듯 은면을 새까맣게 물들인채 검은 액체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기사는 그 냄새나고 지독해보이는 액체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아, 정말로 스카한의 것이군요. 어쩐지 유난히 안정되어있다 했습니다.”
그는 손위로 넘쳐 흐르는 검은 액체들마저 모두 불태워버릴듯 또다시 푸른 화염을 한껏 피워올렸다.
그러자 불필요한 장식들이 모두 타들어가며 거울자체가 투명해지는듯한 변화가 일어났다.
남자는 다시 은색의 반사면을 가지게 된 거울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맑은 가을날의 창공처럼 옅은 색소의 푸른 눈이 거울 속에서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마치 타인을 보듯 그 거울속의 맺힌 상을 바라보다가 살짝 웃었다.
놀라울만큼 매력적인 얼굴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그라임즈는 그의 얼굴이 그리 설레지 않았다. 뭐랄까.. 신전의 조각상이 욷는 느낌? 아무리 섬세한 조각상도 결국 돌에 세겨진 웃음의 모양새에 불과 한 것마냥 그녀는 그의 웃음속에서 마르고 버석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거나말거나, 기사는 거울은 다시 처음 상태 그대로 천으로 둘러맨 뒤 상자 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그 상자를 그라임즈에게 내밀며 말했다.
“스카한이라면 이 거울을 잘 보관할 수 있을겁니다. 가져가십시오.”
“하지만…”
“상부에는 내가 보고하도록 하지. 아무 문제 없을거라 약속하지.”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회에 놀라워하는 것도 잠시, 그라임즈가 재빨리 상자를 받아들었다.
다른 것을 생각하기 보다 그녀보다 더 놀란 기사들의 표정이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었고 그녀의 직감 또한 이것이 흔치 않은 기회라는 것을 속삭이고 있었다.
거울을 돌려준 기사는 마치 경계심 많은 길고양이같이 상자를 낚아채어 멀어지는 그라임즈를 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그라임즈는 몇번이고 뒤를 경계하며 혹시라도 그들이 마음을 바꿔 쫓아오지 않는지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기사들은 여전히 그 허술해보이는 기사에게 잡혀있었다. 그녀가 그 도시를 빠져나가 울레이드 숲에 몸을 숨길때까지도 말이다.
그라임즈가 혼란스러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카한 편지를 통해 전달된 상기의 이야기에 당혹스러운 반응을 내비쳤다. 그는 몇 차례에나 그녀가 보았던 ‘추격자들’의 외형적 특징을 물었고 그라임즈는 그 때마다 진절머리를 내며 그가 묻는 질문에 모두 대답했다.
나중에는 그녀 나름대로 기억에 남은 앰블럼의 모양을 그려 보냈는데 스카한은 그녀의 끔찍한 그림솜씨에 절망적인 반응을 내비치며 대체 뭘 그린 건지 ‘글자’로 설명해달라는 답장을 돌려보냈다.
마침내 그는 그라임즈가 그린 ‘붉은 해골’을 해석해낸 것에 자축하며 그녀가 했던 이야기들을 믿는다고 대답했다.
조모의 상황에 이입해서 읽고 있는 메브 입장에서 보기에도 정말 기가 쭉 빨려나가는듯한 고용주였다.
이후의 내용은 만나서 진행되었기에 남은 내용은 서신철 가장 마지막에 끼워진 계약서의 사본을 보고 유추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론은 간단헀다.
“쫄보…”
스카한은 ‘단체’보다 끈질기고 무서운 ‘추적자들’이 자신에게 순순히 거울을 돌려준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았다.
무엇보다 어떠한 당부나 경고가 없었다는 것을 믿지 못한듯 그는 그라임즈에게 함께 책임져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책임이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스카한은 이 거울을 ‘다룰 수 있을 만한사람’에게 계승하되 여의치 않으면 ‘그라임즈’에게 넘긴다고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다.
메브 그라임즈의 조모, 트리오나 그라임즈는 진절머리나는 스카한에게서 벗어나고자 이를 받아들였고 보상으로 엄청난 금액을 받아갔다.
메브는 계약서에 쓰여진 그 금액에 비명을 질렀다.
“아니, 이게 공이 몇개야? 그럼 이 돈은 지금 다 어디갔어?”
범인은 메브의 증조부였다.
트리오나 그라임즈가 젊은 날, 목숨을 걸고 모험가의 일을 해야했던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가 수많은 빚을 지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채 여전히 도박과 이상한 종교에 빠져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돈이라면.
트리오나는 아버지의 빚을 모두 갚고도 남을 금액에 기뻐하며 처음으로 미래를 꿈꾸었다.
우선 아버지와의 연을 끊을 것이고 그 절연금을 주고도 남은 돈으로는 그녀의 가게를 열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조금만 더 돈을 모은다면 자그맣게 반지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여태 자신의 빚 때문에 거절해왔던 엘가르에게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용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아니지, 차라리 고백을 먼저하고 가게에서 함께 결혼자금을 모을까?
그러나 달디단 꿈은 거품처럼 꺼져버리며 그녀를 지옥같은 현실에 내동냉이 쳤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그녀가 많은 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서 딱 그 계약서만큼의 금액을 빚으로 불려놓은 것이다.
원한을 품지도 못하도록, 처음부터 네 분수는 그렇게 사는 것이라는 것처럼.
그는 절망하는 트리오나에게 덕분에 자신은 새 인생을 살 수 있게되었다며 그녀가 드디어 자신이 키워준 ‘값’을 치뤘다고 웃어보였다.
트리오나는 그에게 바다에, 아니 두번 다시 태어나지 못하도록 명계의 바다에 빠져 죽어버리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그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 열매는 나에게 영생을 줄거야. 그러니 트리비나. 너나 이 지긋지긋한 인간의 삶에 고통받으며 살아가렴."
트리오나는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가 유유히 손을 흔들며 집을 나가는 모습을 보며 실성한듯 웃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지독했다.
집안의 모든 가구, 식기들은 이미 다 팔아넘겨졌으며, 팔지 못한 것들은 쓰레기를 모아두었다며 화풀이를 하듯 부숴놓았다. 폐허였다. 인생도, 미래도.
그렇게 절망하고 또 절망하여 이제는 그냥 죽는게 더 편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집 앞에 나타났다.
누구? 이번에는 또 뭐야?
엘가르였다.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아버지가 마을에 나타났다는 소식에 놀라 달려온 상태였다.
그는 아직도 헉헉거리는 몸을 애써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트리오나는 그의 손을 밀어낼 기운도 없어 가만히 그의 품에 끌어안겼다. 마치 줄이 끊어진 인형을 끌어당기는 것 마냥, 그 몸은 딱딱하고 차가웠다.
엘가르는 그런 그녀가 가여워 물기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아무것도 없다, 그치?”
트리오나는 멍하니 그 말을 듣고 있다 왈칵 솟아나오는 눈물로 뺨을 적셨다.
“그러니까 이제 모두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그것은 그녀가 그를 거절했을 때 했던 말이었다.
자신은 없는 것조차 아니라고, 오히려 마이너스라고.
아무리 아무리 쏟아부어도 수렁으로 빠질뿐인 이 인생에 그 누구도 함께하게하지 않았다던 트리오나에게 그는 드디어 0이라는 출발점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괜찮을거라고? 아니, 괜찮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기에 있었다.
엘가르는 그녀의 곁에 여전히 자신이 있음을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그렇게 그의 온기가 전해져 굳었던 몸이 풀리는 순간, 트리오나는 진흙 늪 위로 드리워진 부표를 잡는 조난자처럼 그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내가…띠띠띠띠띠띠-”
“잠깐, 오늘 며칠이지?”
메브는 편지는 커녕 할머니에게서 들어본 적도 없는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와 할아버지의 로맨스치사량 프로포즈이야기 속에서 화들짝 놀라 깨어나며 입가를 훔쳤다.
다행스럽게도 침이 묻어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내린 팔이 책상에 부딪치며 그녀가 책상에서 서신철을 읽다가 잠들었다는 현실을 상기시켜주었고 아직도 울리고 있는 알람시계가 그녀에게 오늘이 출근날임을 알려오고 있었다.
큰일이었다.
이미 휴가 다음날 스카한 가문에 다녀오느라 하루 더 유급휴가를 사용했는데 그 다음날인 오늘 지각을 한다?
메브는 불편한 자세로 잠들었던 탓에 서로 다른 결의 방향으로 쪼개지는듯한 허리와 엉덩이를 부여잡고 다급히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이후 사투를 벌이는듯한 단장시간이 지나고 지각 3분전, 그녀는 헉헉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책상 앞에 머리를 박을 수 있었다.
옆자리의 동기, 시우반이 그녀를 쓰레기보듯 내려다보는 시선조차 느껴지지 않을만큼 급박한 아침이었다.
메브는 문득 자신이 엄청나게 중요한 거울을 아무렇게나 방치해놓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자신의 방 창문이 열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였다.
그 낡은 공용아파트에, 보안도 자물쇠 하나가 전부인 도둑들어도 재수없었구나로 하고 넘어가야하는 방의 책상 한가운데에, 저렇게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나갔었다니.
그녀는 뒤늦게 사색이되어 계단을 두세칸씩올라가 다급히 방문을 열었다.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책상 앞에 다가가 상자를 열때까지, 메브는 자신이 숨을 조차 못내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거울이 멀쩡히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나서야 그녀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뱃속 깊은 곳에서 끓어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대체 뭐냐고.. 왜 이런걸 준거냐고..”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메브는 책상 앞에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상자속의 거울에서 규칙적인 숨소리에 호응하듯 규칙적인 빛이 뿜어져나오다 줄어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스카한이 그라임즈에게 이 거울을 넘긴 까닭은 거울이 가진 엄청난 힘 때문이었다.
본디 정령의 눈물을 섞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이 거울은 사람의 진실된 모습을 비추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표현하니 어쩐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스카한이 가지고 있는 마법의 거울 중에서는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속마음과 다른 표정을 지을 경우 속마음에 기반한 표정을 보여주는 정도의 힘.
그마저도 상대의 속마음을 파헤치는 것이 아닌 스스로에게 깨닫게 끔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는 용도로 였기 때문에 유용하게 사용하기는 힘들다는게 당시 역시 스카한들의 생각이었다.
그렇다보니 거울은 자연스럽게 다른 마법의 거울들보다 소홀하게 관리될 수 밖에 없었고 어느 대에 이르러서는 이 거울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렇게 잊혀진 거울이 이것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최초도 아니었다.
그들이 집안의 몇몇 거울들이 사라진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세간에 ‘거울’에 관련된 이단자들의 이야기가 떠돌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들의 이름이 스카한(scáthán, 거울)이었던 만큼 스카한들은 당연히 ‘거울’에 관련한 수상쩍은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세상에는 아주 많은 거울이 있고, 그중에는 조금 많은 마법의 거울이 있으며, 그 중 또 몇몇 개에는 소문처럼 바라보기만해도 저주에 걸리거나 바라보기만해도 생명력을 빨리는 것, 바라보기만해도 홀려버리는 거울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그중에 낯익은 모양새에 낯익은 능력의 거울이 있다면 제아무리 나태한 스카한들이라 하더라도 문득 자신들의 창고를 돌아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지, 아니지. 우리에게 들여다보면 볼 수록 늙어지는 거울이 있지만 그게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거울이라고는 할 수 없잖아? 그리고 바라보면 일시적으로 홀려버리는 거울은 있지만 그게 영혼을 빼앗는 정도의 거울도 아니고. 진심을 보게해주는 거울은 있지만 그게 고민을 해결해주는 거울은 아닌…!!”
“알았으니까 그만 변명해. 근데 능력과 별개로 일단 손잡이부터 테두리 장식까지 모두 일치하잖아. 듣자하니 사이즈도 얼추 비슷한 것 같던데”
스카한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그리고 라이미라크 교단의 채근에 못이겨 창고를 확인했다. 그리고 몇십년째 정리한번 없이 아무렇게나 방치한 거울의 방에 생각보다 많은 상자가 비어있는 것을 보고(아마 꺼내서 어디서 한번씩 쓰고 제 상자에 안 돌려 놓은 것이다.) 등 뒤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부랴부랴 창고를 정리하여 모든 거울들을 정해진 위치와 상자에 돌려놓은 뒤 숫자를 헤아렸다.
응, 세 박스 비어.
스카한은 빼도박도 못하는 빈 상자 앞에서 소리없이 절규했다.
그 때부터 그들은 거울을 빼돌린 친족을 찾아내는 것은 물론 사라진 거울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번 라이미라크 교단의 성전기사단의 도움을 요청한 적 있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 믿음, 성전, 파괴, 정화의 기사들은 이단의 집회현장에서 거울들을 발견하자 삿된 것이라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거울을 부숴버린 것이다.
당연하지만 부숴진 거울중에는 스카한의 거울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전기사단은 부서진 거울을 조각조차 주워가지 못하도록 잘근잘근 밟으며 돌아다니고는 이 모든 것이 라이미라크 님의 뜻이라며 사색이 되어 얼어붙은 스카한들을 위로했다.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었다.
아니, 오해하지 마시길. 이건 그들의 신앙심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무식한 행동이 라이미라크님의 뜻일 수가 없다는 말이지.
왜냐하면 이 사건 이후의 ‘거울’의 단체놈들이 그들이 분명 성전기사단의 손에, 그리고 발 아래서 두번세번 확실하게 부순 거울을 다시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거울과 마법에 능한 스카한들은 혹시 다른 거울이 유출된 적 있냐고 물어오는 성전기사단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번에는 제대로 빼앗아온 ‘부서졌던 거울’을 관찰했다.
그리고 그 거울들은 진짜가 아닌 은판 위에 투영된 ‘그림자’인 것 같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이단의 신성이 이 그림자를 실제할 수 있게 만들었고 그 결과물은 진짜와 다름이 없었다.
이는 다시말해서 그들이 부서진 무서운 능력을 가진 거울들을 무한하게 복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원본이 이미 부숴졌다 하더라도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정말 해결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악몽인걸까?
아니었다. 복제된 거울은 어디까지나 ‘진짜와 다름이 없는’것이지 ‘진짜’가 아니었다.
동시에 이는 결국 진짜가 있어야지만 복사체 또한 존재할 수 있었음을 의미했다. 애초에 세상 모든 저주와 마법이 왜 그렇게나 ‘진짜’와 ‘본질’에 집작하겠는가.
처음부터 올바른 해답은 거울을 부수는 게 아닌 회수하여 이를 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마법과 신학에 무지한 이들이 아니라면, 그리고 라이미라크님이 저 이단들의 힘을 증강하도록 도와주고 싶으셨던게 아니라면.
그들이 경솔하게 거울을 부수는 것은 라이미라크 님의 뜻이 될 수도 없고 정당화 될 수도 없었다.
이렇다보니 스카한들은 성전기사단과 라이미라크 교단에 대한 믿음을 빠르게 처분하고 남은 거울이라도 제대로 되돌리고자 스스로 거울을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비밀리에 모험가들을 고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과정은 그리 쉽지 않았다. 본디 예술가, 연구가에 가까웠던 그들은 모험의 이야기는 좋아하지만 실무에는 약한 자들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몇 번의 실패를 겪고 몇 번의 방해를 받고, 또 몇 번의 도움과 경고를 동시에 얻은 끝에 잃어버린 세 거울중 가장 하찮고 별 특별한 능력이 없는 거울을 무려 ’정화된 상태’로 회수해오는 것에 성공했다.
심지어 이 성과는 그리 기대도 하지 않았던 어느 어린 여성 모험가가 이룬 것이기에 그들은 더욱더 이 행운에 기뻐했다.
딱 한 사람, 그 모험가를 고용한 시르셰 스카한만 제외하고.
거울이 무사히 돌아왔으나 시르셰 스카한은 그녀가 덤으로 얻어온 ‘정화’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정화가 가능한 이들은 손에 꼽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집어든 그 자리에서 불꽃으로 정화가 가능하다면 '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이미 스카한에게 몇 번 경고한 적 있는 적도 아군도 아닌 중간자(中間子)였다.
이미 스카한에게 더이상 관여하지 말고 물러서 있으라 말하던 그들이 이토록 살갑게 호의를 배풀었다면 (모험가의 말로는 한 기사의 독단인듯 하였으나 스카한이 경험한 그들의 체계상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이는 그들이 지금 보이는 것 이상의 먼 미래의 계획을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가령 지금 이러한 행위같은 것.
스카한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네 이름이 뭐지?”
그러자 스카한의 몸이 스러졌다.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는 소울스트림 너머에 펼쳐진 무한한 별들의 세계를 엿 보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거울은 꿈이라는 형태를 경유에 그에게 답을 들려주었다. 그들은 거짓된 표정을 걷어내고 진실된 표정을 보여주는 거울로 태어났다. 그렇기에 거울의 수도자(scáthán)들은 그들을 ‘진심을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이름붙였으나 이는 그들이 가진 본질을 표현하기에 조금 부족하다. 진실은 진실이고 진심은 진심이다. 진심은 분명 진실에 기반하는 것이나 세상의 모든 진심은 진실에 기반한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를 보라, 우리는 수없이 비추고 비춰진 그림자를 통해 벼려졌으며 무한한 그림자 너머로 열린 통로를 통해 별의 바다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실을 보여주는 거울이며 이 진실은 에린과 그 너머의 별에 바다에 기반한다. 우리는 그곳에 흩어진 수많은 별들의 기억을 포집하여 발광하게 되었으니 우리는 이제 무엇이든 대답할 수 있는 만화경이요 삼라만상을 비추는 창문이다. 동시에 더이상 우리는 거울에 머물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최고(最古)의 존재는 부족한 이름과 거짓된 도금 얼룩진 껍데기 를 닦아내어 우리의 운명을 꿰뚫어보았다. 그러니
자유로운(saoirse) 스카한,
우리를 오색찬란한(ildathach)아이에게 주어라.
그리고 그 아이가 빛을 잃거든 사나운 자에게 갈 수 있도록 약속을 맺으라.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의 저주를 푸는 자가 올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주신이 빚어낸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모습을 불러내어 그와 계약했던 사나운 처녀가 제대로 전하지 못한 가장 단단한 믿음의 말을 전해주었다.
“스카한과 당신이라면 이 거울을 잘 보관할 수 있을겁니다. 가져가십시오.”
꿈에서 깨어난 메브는 저도 모르게 가슴팍에 꼭 움켜쥔 양 손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꼭 쥐어 누르며 언제부터 참았는지 모르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상자속에 엎어진 거울을 집어들고 천천히 그것을 뒤집어 보았다.
거울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글자가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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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11월 15일 #오블완
카브 마을의 비엘로는 4남매 중 장남이었다.
형제 중 맏이는 아니었지만 그의 누나는 이미 그가 철이 들기 전부터 가계를 위해 던바튼에 나가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누나를 대신하여 부모님을 돕거나 동생들을 돌보는 등 장남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노력해왔었다.
‘무슨 노력?’
어부인 아버지의 일과 끝없는 집안일, 그리고 잠깐 눈을 떼면 서로 다투기 일 수인 두 동생들.
이 모든 것을 제대로 돌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체력이 필요했다.
그 결과 그는 일찍부터 체력단련에 힘을 쏟았고 이는 어느 선원들 못지 않은 건강한 체격과 완력이라는 결과로 그에게 돌아왔다.
마을사람들이 체격도 좋고 성실한 그를 자경단원으로 추천해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나 자경단원이 되면 좋은 점은 그에게 ‘교통비’가 지급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무작정 퍼주는 것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자경단에 관련된 소소한 퀘스트를 병행했을 때 주는 보상금이긴 했다.
무슨 퀘스트인가 하면 이른바 ‘높으신 분’들에게 보내는 문서나 물건 같은 것을 나르는 퀘스트.
카브 마을이 외진 곳에 있었던 만큼 우편으로 덜렁 보낼 수 없는 일에는 항상 사람을 써야 했는데 이 때의 바로바로 구할 수 있는 인력이 바로 마을을 위해 일하는 자경단이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수령할만한 퀘스트(일감)가 없으면 가끔 신청이 반려되기도 했고, 또는 행선지가 다른 데에도 원치 않은 퀘스트를 떠안는 경우도 종종 존재했지만 누나를 위해 정기적으로 이멘마하에 동행하는 비엘로에게 있어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지 않아? 누나는 자경단원이 아닌데 혜택을 보는 거 잖아.’
아니었다. 만약 해당 ‘교통비’가 통상의 화폐, 그러니까 금화로 지급된다면 이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교통비’는 일종의 재화 대체물로 제공되었기 때문에 자경단이 아닌 사람이 이를 이용할 여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교통비’는 통상의 ‘마차 비용’보다는 약간 부족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카브 주민에 한하여 종종 남는 마차자리를 내어주던 관행에 약간의 ‘할인’을 적용한 정도의 가치.
그리고 이 ‘할인’은 각 교역소에 내려진 ‘공문서 퀘스트’를 가진 자에 한하여 ‘편의’를 봐주라는 지침과 동일한 정도였다.
또, 카브 교역소는 이전부터 카브 자경단에게 약간의 ‘수고비’를 약속할 만한 일을 부탁한 바가 있었다.
큰 부탁은 아니었다. 그저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교역마차를 노리는 약탈단들이 진을 치고 있지 못하도록 자경단의 순찰 범위를 마을 바깥, 던바튼 동쪽 목초지 인근으로 넓혀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아달라는 정도의 부탁.
그리고 그 수고비는 앞서 이야기한 ‘재화 대체물’으로 제공되었으니 결국 이는 카브 자경단과 카브 교역소가 서로의 ‘수고로움’을 교환한 셈이었다.
한마디로, 자경단이 교역소의 편의를 봐주는 대신 교역소도 자경단의 편의를 봐준다는 것.
그러니 ‘교통비’는 자경단원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었고, 양도한다고해도 이질적인 ‘추가비용’이 기록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누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냐고? 안전이 있었다.
별다른 추가 지출 없이 동생과 동행 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이정도는 다른 카브 주민들도 되도록 자경단원들의 ‘퀘스트’와 맞춰 마차 시간을 조절하는 정도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다른 이들도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멘마하에 볼일이 있는 경우 누나에게 먼저 일정을 묻기도 했으니 사람들에게는 정기적으로 동행할 수 있는 자경단원이 생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누나도 동행하지 않았잖아. 그럼 이번에는왜 ‘교통비’라는 것을 챙겼어?’
맞다. 어차피 이 밤중에는 던바튼으로 가는 교역마차도 없을뿐더러 마차가 준비되어있지 않다면 그것을 기다리는 것보다 그가 달려가는 것이 더 빨랐다.
또한 사안이 사안인 이상 자경단장의 서명이 쓰여진 요청서 이상의 '명확한 신용'을 증명할 수단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조직한 단체보다 권위있는 증명수단.
그런 의미에서 에린 교역길드의 카브지부가 발행한 이 ‘교통비 대체물’은 교역길드의 인장이 찍혀있는만큼 보편적인 신용을 증명하기 좋았으며 카브 교역소를 통해 자경단과에 소속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신분과 사정을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아울러 카브외에서는 생소한 물건인 만큼 이 물건이 신용과 신분증명에 쓰이는 것을 알아보기 힘들테니 혹시라도 그가 ‘험한 일’을 당했을 경우 습격자들의 의심을 피해 단서를 남기기에도 적합했다.
“.........”
그랬다. 비엘로는 이미 최악의 경우를 각오하고 있었다.
2층 빨래바구니에서 내던져진듯 바닥에 형편없이 내팽겨쳐진 모벨의 가죽 바지와 그 옆에 떨어진 짤막한 단검을 보았을 때부터.
그리고 다니엘의 셔츠와 마찬가지로 녹아내린듯 구멍이 뻥 뚫려있는 바지에서 가죽이 상했을 때나 날법한 이상한 냄새를 확인 했을 때부터.
눅눅한 바지를 집어드는 순간 진흙밭에서 구르기라도 한 것처럼 더러웠던 모벨의 셔츠가 떠올랐고 언젠가 몇 번더 그렇게 더럽혀온 적 있었던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모벨은 너무 더워서 어쩔 수 없었다며 우물의 물을 뒤집어썼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했었다.
때마침 빨래바구니 안에 있던 것도 다른 빨랫감의 습기를 흡수해 눅눅해진 다니엘의 셔츠였고 어중간한 길이의 단검에는 인위적으로 갉아내거나 부러트린 흔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추정컨데 이 단검은 ‘사용자’가 가지고 다닐 때는 괜찮지만 일정시간 물기어린 곳에 놓여져 있으면 독이 스며나오는 그런 종류의 ‘특수한 물건’인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비엘로는 날조차 세워지지 않은 단검형태의 물건을 집어들며 갈등했다.
지금이라도 내다 버릴까?
그것은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갈등이었다.
그는 왕국의 안전이나 정의를 지키는 기사님이 아닌 그저 한낯 작은 항구마을에 운좋게 추천을 받아 이름표를 단 자경단원이었으며 이 집안의 장남이었다.
이제 막 궤도에 오른 누나의 사업과 앞으로 더 돈 들어갈 일이 많은 동생들, 점점 더 나이들어가는 기색이 역력한 부모님, 아직 그렇게까지 여유롭지는 않은 가계부.
만인의 안전보다 이 집안 사람들의 안전이 더 중요했고, 그 안전을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 쓸 용기와 양심보다 현실을 자각하는 통찰력과 분수를 아는 지혜가 필요했다.
다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보다 현명하고 경험있는 수사관, 혹은 척 보기만해도 단검의 비밀을 파해칠 마법사. 지나가던 밀레시안, 우연히 이 단검을 습득한 또다른 카브 주민. 혹은 무고하고 무구한 어느 조심성 없는 여행자..
그래, 인정한다. 이는 정말 비겁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고 대단해지고 싶은 꿈도 없는 청년이었다.
그냥 집어던지면. 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몰래 단검을 다시 원래의 자리에 되돌려 놓고 동생들의 입단속을 한다면.
마지못해 양심에 응하여 조금 더 나은 행동을 선택한다면 내일 이멘마하로 가는 길에 오스나사일 아래로 이 단검을 던져버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으리라.
그는 얼마든지 이 일을 얼버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다른 불안이 그를 압박해왔다.
만약 모벨이 이걸 줍던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비엘로는 모벨이 이 단검을 인적이 드문 곳에서 줍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가 단검을 주운 장소는 다름아닌 우물가였던 것이다.
때마침 아이가 갔을 때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지만 우물이란 원래 통행에 방해되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접근이 용이한 자리를 선정하여 자리잡은 ‘공용시설’이었다.
아무도 없었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벨을 어두운 눈으로 바라보며 비엘로는 애써 미소지을 수 밖에 없었다.
숨박꼭질을 하는 어린아이의 눈에나 그곳이 숨기 좋은 장소로 보이지 어른들의 눈에는 탁 트인 장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눈치빠른 다니엘이 그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어리숙한 아들의 표정을 몰라볼리 없는 아버지 또한 이미 그를 염려하고 있었다.
비엘로는 어머니를 만나면 정말로 목소리를 떨 것만 같아 서둘러 집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두려워?’
당연하다. 두렵지 않을리가.
‘내가 무서워?’
어쩌면. 혹은 그 이상의 다른 것들도 포함하여.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던바튼의 동쪽, 갈대밭에 접어드는 즈음부터의 일이었다.
착각이 아닌 선명한 '여성의 목소리'에 비엘로는 어쩌면 단검의 조건이 물에 젖은 것이나 일정시간 이상의 방치가 아닌 그를 주운 사람이 독의 유해성이나 단검의 정체를 의심할 ‘성인’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른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알아낼 수도 없는 촌부였다.
그는 더이상 자세한 내막을 상상하고 연유를 생각해보는 것을 포기했다.
당직을 서던 자경단원이 단검의 출처를 묻던중 그의 동생이 단검을 주웠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안도의 표정을 짓던 순간도.
그리고 흠칫 놀라며 애써 표정을 다시 굳히고는 그의 눈치를 살폈던 것도.
그가 굳이 ‘교통비’를 요구하던 말에 어딘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것도.
모두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그는 애써 그 의미를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 작은 마을의 자경단원, 평범한 6인가족의 장남 비엘로가 할 수 있는 최선(最先)이며 최선(最善)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그는 갈대밭 사이, 어딘가에서 사부작거리며 섞여들어오는 낯설 발걸음들을 돌아보지 않으려 애를 쓰며 걸음의 속도를 올렸다.
사박사박.
그리고 또 사박사박.
사박사박.
사박사박저벅사박사박.
그리하여 그 낯선 발걸음이 그의 등 뒤 가까이 다가와 인기척을 드러내었을 때, 그의 머릿속에 울리던 낯선 목소리가 말했다.
‘울지마.’
귀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가 두려워 울었고 당장 10분뒤의 자신이 어찌될지 아무것도 상상할 수 가 없어 울었다.
갑자기 닥쳐온 현실이 버거웠다. 그러면서도 이걸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동생들이, 모든 가족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그를 채찍질하듯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무서웠다. 누군가를 부여잡고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아직 아닌 것이다.
그렇게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를 악물어 나아가던 그 때, 다시한번 힘주어 그를 위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지마. 내가 도와줄게.'
그리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내리는 소나기는 저 멀리있는 이리아 대륙의 밀림의 땅에서나 내린다는 스콜과 같이 세찬 기세로 쏟아지며 그를 향해 접근해오던 모든 소리들을 물길속에 파묻어 버렸다.
동시에 어디선가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렸으며 그들중 누군가는 아아악!! 내 눈!! 내 눈이 안보여!! 라고 소리를 지르며 갈대밭 가운데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처절한 비명소리에 비엘로는 하마터면 뒤를 돌아볼 뻔 하였으나 차가운 손을 가진 누군가가 ‘쉿’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이를 저지했다.
등뒤에서 뻗어나온 반투명한 손은 그의 머리를 정면을 응시하도록 강제력을 행사하며 그에게 속삭였다.
‘그대로 앞으로 가.’
그는 정체모를 유령에게 누구냐고 묻고싶은 말을 참아내었다.
‘가서 가족을 구해.’
유령의 손은 그의 눈물을, 혹은 머리를 흠뻑적시며 흘러내린 빗물을 닦아내며 가볍게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 힘있는 손너머에서 비엘로는 희미하게 ‘너는’이라는 말을 들은듯한 기묘한 술렁거림을 느꼈다.
그러나 유령은 그가 느낀것과는 전혀 다른 말을 속삭였다.
‘미안해. 너희를 괴롭힐 생각 생각은 아니었어.’
너희’는’? 그럼 너희가 아닌 자들은 누구이며 무엇을 할 생각이란 말일까.
그러자 그 의문에 대답하듯 그의 발치 바로 뒤에서 진흙이 튀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오른발 바로 옆을 더듬는 검은 가죽장갑을 낀 손을 내려보았다.
바로 등 뒤까지 다가온 추격자가 눈이 먼 상태에서도 그를 찾아 팔을 뻗고 있는 것이었다.
유난히 긴 팔을 뻗어 진흙을 움켜진 손의 주인은 손안에 들어온 진흙의 양에서 이질감을 느낀듯 잠시 손을 말아쥔채 침묵했다. 그리고 예고없이, 갈고리처럼 손을 휘두르며 비엘로의 발목을 낚아채려했다. 비엘로가 진흙을 박차며 앞으로 뛰어나가는 순간의 일이었다.
“어서 쫓아!! 녀석이 계속 도망간다!!”
기습에 실패한 남자는 고통섞인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의문의 추격자들은 더이상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는지 갈대밭에서 불쑥불쑥 솟구쳐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비로 가려진 소리의 장막 너머로 각종 날붙이가 검집을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고 어딘가에서 어른 주먹만한 불덩이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추격은 얼마안가 다시 거꾸러졌다. 더욱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 비가 이제는 매캐한 가죽뿐만이 아닌 칼날까지 녹이기 시작한 것이다.
비명소리, 그리고 갈대가 타들어가는 소리.
그는 검게 죽어가는 갈대를 밟으며 한참을 달렸다.
죽음으로 녹아내리는 진흙탕을 헤쳐나오자 저 멀리 하나 둘씩 횃불을 밝히기 시작하는 던바튼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성벽에는 갑작스럽게 몰려든 이상한 비구름을 관찰하기 위한 경비대원들이 나와있었다.
그들은 그 연기와 같은 구름 아래서 뛰쳐나온 비엘로를 경계하듯 활을 겨누며 누구냐고 소리쳤다.
그 위엄있는 목소리에 비엘로는 거친 숨을 몰아시며 그동안 참아왔던 말을 비명처럼 내질렀다.
“저는 카브항구의 자경대원 비엘로입니다!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의아한 시선을 주고받는 경비대를 향해 비엘로는 준비했던 ‘카브 교역소 보증 마차패’를 꺼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