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비밀레)페리도트-상-

마비노기/페리도트 2016. 5. 31. 23:24

1.

햇볕이 이제 막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초여름의 날, 밀레시안은 어제 마무리한 보고서를 챙겨들고 방을 나설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조원들의 일정표는 늘 놔두던 탁자위에, 제출해야할 일일 지령서는 맨 뒷페이지에.

방을 나서기전 환기를 깜빡했다며 벗어던진 슬리퍼를 밟은 밀레시안이 발을 질질 밀며 창가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굽이 있는 구두로 바닥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라는 이유였지만 이렇게 꽉꽉 힘을 주어 누르는것과 또각소리를 내며 걷는 것 둘중에 어느것이 더 바닥을 상하게 하는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힘겹게 창문쪽으로 다가간 밀레시안은 잠시 보고서를 내려놓고 팔을 쭉 뻗어 창문의 잠금쇠를 잡아당겼다. 팡하고 조금 힘으주어 창문을 밀어내자 요란스럽게 열어젖혀진 창문 한가득 시원한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팔락이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보고서를 눌러잡고 벌써 그림자가 지기 시작하는 태양빛을 보며 오늘도 덥겠구나 하고 손부채를 두어번 흔든 밀레시안이 괜스래 보고서를 내려다보다가 빙긋이 웃음지었다.

보고서만 주고 나오기에는 조금 아쉬운 날씨. 손으로 톡톡 보고서를 두드리며 방문으로 돌아가는 밀레시안의 입가에는 연신 작은미소가 빙글거리고 있었다.

문을 닫고 열쇠를 걸어잠그던 밀레시안이 머리를 흔들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밖에선 표정관리를 해야지.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홀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밀레시안이 방문 밖까지 끌고나온 슬리퍼를 보고 아차,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가 가까이에 슬리퍼를 꾹꾹 밀어 넣은 밀레시안이 나중에 집어넣어야지 하고서는 닫힌 문의 잠금쇠를 확인하고서는 모르는척 복도를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엉망으로 뭉게진채 복도 구석에 남겨진 슬리퍼위로 먼지 섞인 바람이 흔들렸다.


'바쁘지 않다면 잠시 산책이라도 하자고 말해볼까, 아니면 그냥 방에서 차 한잔 얻어마시며 이야기를 할까. 혹시 바쁘다고 거절하면 어쩌지. 그래도 요즘은 조금 한가해진것 같기도 한데..'


거절할까? 아니면 의외로 받아줄까, 톨비쉬와 잡담을 하는것에 취미를 붙인뒤로 밀레시안은 종종 이런식으로 웃음을 삼키고는 홀로 즐거워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주로 걷거나 이동할때, 혹은 짧은 휴식시간때. 이런저런 생각으로 꽉들어찬 머릿속은 마치 꽃잎과도 같은 팔랑팔랑한 물건으로 가득찬 사탕상자같이 달콤하고 즐거운 소리를 내며 웃음을 흘려대었다.

중간중간 정신차리라는듯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어보지만 포실포실하게 풀린 뺨에는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밀레시안의 미소가 모습을 감춘것은 계단을 한층 올라가고 복도를 지나 꺽인 건물의 끝 부근, 날아가듯 복도를 걸어 도착한 커다란 창문 옆으로 단단해 보이는 재질의 나무문이 햇빛을 받으며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잘 짜여진 나무문 위로 걸린 명패에는 본인이 직접 쓴것같은 화려한필체로 엘베드 라는 문구가.

묵직한 나무문패 위로 비치는 햇빛 주변으로 창밖의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흩어지는것을 감상하던 밀레시안이 다시한번 양뺨을 쓰다듬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헤실거리면서 나왔던 모습과는 다르게 진지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온 밀레시안이 총천연색으로 빛나던 상상들을 치우고 어제와 오늘의 일정을 다시 떠올렸다.

오늘 아침에 회의가 있었던가, 조금 긴가민가해진 밀레시안이 조심스럽게 톨비쉬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한번 노크 한 뒤로 잠시 여유를 두고 뒤따르는 노크소리가 맑게 울려퍼졌다.

짧은 침묵이지만 밀레시안은 방문에 닿은것 만으로도 낯간지럽다 생각하며 괜히 손을 등뒤로 숨기고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가 문을 열어주는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살짝 붉어질것 같지만 티를 내고싶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공무로 온 것이니까- 하고 방금전까지 복도를 걸어오며 무슨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하고 고민하던 사실을 기억속에 묻어버린 밀레시안이 문안쪽으로 귀를 기울이며 방주인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바람소리가 시원하게 복도를 채우며 스쳐지나갔다.


"....."


바람 한번, 한숨 한번, 조금 더 기다려볼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의 침묵이 지나갔다

한걸음 다까이 문에 다가섰지만 두꺼운 나무문 넘어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시한번 회의일정을 머릿속으로 되짚어보지만 딱히 톨비쉬가 어디로 간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던 밀레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한번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문 안쪽은 여전히 침묵, 자신이 기척을 놓친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밀레시안이 임무는 어제 끝났을텐데..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꺼져있는 등불로 시선을 돌렸다.

불투명한 유리안에 놓여진 작은 그림자. 밀레시안은 가볍게 웃으며 다리를 꼬아 앉던 톨비쉬를 떠올리고는 등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전에도 한번 이런 일이 있었지만 등불에 손을 데는것은 이번이 처음.

밀레시안은 긴장이되는지 입술을 꼭 깨물고는 등불의 유리잔을 들어올렸다. 짤랑하는소리와 함께 열쇠가 떨어진다.


"그렇게 밖에 서있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문이 잠겨있었는걸요?"


문 밖에 톨비쉬를 기다리고 서있던 겨울 날, 벽에 기대어 기다리고 서 있는 밀레시안을 보며 허둥지둥 문을 열어주던 톨비쉬가 사과의 의미로 손수 차를 타 내어주던 어느 달 밝은 날의 저녁, 톨비쉬는 연신 밀레시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맞은편소파에 주저앉았다.

피곤하면 그만 갈까요? 하는 밀레시안을 향해 고개를 내젓는 톨비쉬의 미간이 유난히 깊어보였던 날이였다.


"미안합니다. 예정외의 일이 끼어드는 바람에.. 문을 열어두고 갈 껄그랬군요"

"방안에 서류가 많잖아요? 그러면 안되는거 아니에요?"
"여기 있는 서류는 다 잡다한 서류뿐입니다. 진짜 중요한것은 여기서 하지 않아요"

"흐음..."

"아니,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있는 방이 중요하지 않다는건 아닙니다. 다만 음... 당신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는것은 조금 문제가 큰 것 같아요."


엘베드의 조장이 아닌 톨비쉬와의 대화. 밀레시안이 찬찬히 그의 모습을 구경하는 동안 방법을 궁리해내던 톨비쉬는 소파에 편하게 기댄 자세 그대로 다리를 꼬아 앉으며 머그잔을 만지작거렸다.

편하게 보여주는 모습에 밀레시안은 기분이 좋아진나머지 가벼운 미소를 흘리고는 소파에 기대어 누웠다. 왜인지 모르지만 편안하게 지어보이는 밀레시안의 미소에 톨비쉬도 한결 마음이 놓인듯 마주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아직 대화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던 시기의 풋풋함. 톨비쉬는 바닥에 달라붙은 저며진 레몬을 이리저리 흔들다가 테이블로 몸을 숙였다. 다 마신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밀레시안쪽으로 몸을 기울인 톨비쉬의 입가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이렇게 할까요?"


책략가의 귀여운 제안에 밀레시안이 웃음을 터트디려 고개를 끄덕였었지만,


'실제로 사용해 본건 이게 처음이네'


열쇠를 집어든 밀레시안은  손안에서 반짝이는 은색의 금속을 내려다보다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벌컥안에 들어가있으면 더 당황스러워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밀레시안의 손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방문 옆 사용하지 않는 등불안에 열쇠를 넣어놓기로 한 이후, 톨비쉬는 단 한번도 밀레시안과의 약속에 늦지 않고 방으로 돌아와 있었기에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

방문 앞에서 멀뚱히 서있다가 마주치면 오히려 더 어색해지려나, 고민을 하려던 찰나 꺾여진 복도 끝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것은 다수, 톨비쉬는 없는것같은 편안한 말투에 밀레시안은 우물쭈물하던 열쇠를 집어들고 문고리를 돌렸다.

문 앞에 서있는 모습을 본다면 누군가 톨비쉬에게 밀레시안님이 기다리시던데요? 하고 말하곘지. 그렇게 생각한 밀레시안은 가까워져가는 발소리를 피해 빠르게 톨비쉬의 방문 안으로 몸을 숨겼다.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 보다 서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기묘한 관계에 문을 닫고서 잠시 긴장상태로 서있던 밀레시안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얼떨결에 들어온 톨비쉬의 방안은 뜨뜻해진 공기와 함께 톨비쉬의 향이 가득 차 있었다.

마치 품에 꽉 끌어안긴것같은 느낌에 슬쩍 달아오르려는 얼굴을 짝 하고 내리친 밀레시안이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고서는 테이블을 향해 다가갔다.

주인이 없이 닫혀져있던 방안은 커텐까지 내려져 어두컴컴해진 상태. 눈어림으로 소파를 찾아 앉은 밀레시안이 테이블 한 귀퉁이에 사용했던 열쇠와 함께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창문도 안열고 간거면 어제 안돌아왔던걸까. 녹아내린 촛대위의 캔들의 높이를 가늠하며 소파에 편하게 기대어 누운 밀레시안이 늘어지는 하품과 함께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디라고 했더라 탈틴? 아니 타라? 조금 어수선하게 놓여진 테이블 위에는 참고자료로 사용했던 것인지 타라의 일일신문들이 어지럽게 놓여져 있었다.

임무의 시작은 소문부터. 신문에 실릴 정도로 크면서 기사단이 관심을 가질 기묘한 이야기가 있었던가, 신문을 집어올린 밀레시안은 어두운 방안탓에 고개를 바싹들이민채 희미한 글자를 더듬어 신문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충격의 사건, 연달아 발생...]

[범인은 모두 xx가의...]

[의문의 실종사건의 피해자 xx가의 내연녀로 밝혀져..]


1면부터 가득한 커다란 글씨에 밀레시안은 어둠속에서 읽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신문을 접어 뒤집었다.

그렇게 자세하게 읽고싶지는 않은 자극적인 내용들의 연속에 밀레시안은 빠르게 흥미를 잃고는 크게 하품을 내쉬었다. 툭하고 신문을 내려놓는 손길에는 권태로움과 지루함이 가득했다.

소파에 눕고싶지만 참아야했다. 방 주인이 열쇠를 건네주긴 했지만 엄연히 다른사람의 방. 나태하게 풀어지고 싶은 마음을 참아 옆으로 기대어 앉은 밀레시안이 쿠션을 꼭 끌어안으며 신문을 응시했다.

실종과 살인, 음모와 계략. 분명 도시의 안전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흥미로운 사건임이 틀림없었지만 밀레시안에게 있어서는 늘 일상적인 이이였을 뿐.


'게다가 죽음이라니 별로 와닿지 않는걸.'


밀레시안이 다시한번 크게 하품을을 하며 눈을 깜빡였다. 포근한 냄새의 방안에 여름열기로 달아오른 온기는 마치 이불속 처럼 따뜻하고 게으름을 피우기딱 좋은 환경이였다.

얼른 돌아오지 않으려나, 눈을 깜빡이던 밀레시안이 몰려오는 졸음을 피하기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언뜻 보기엔 물건이 많아보이지만 사생활의 물건들은 거의 없는 톨비쉬의 방안.

거의 대부분이 자료에 서류따위의 종이뭉치뿐이지만 밀레시안은 그런 톨비쉬의 방을 좋아했다.

머무르지 않고 잠시 거쳐가는 장소로 사용하는 그 분위기가 밀레시안이 느끼는 게이트의 느낌 그대로를 축소시켜놓은 기분이였다. 언젠가 그가 정말로 머무는 방으로 갈 수 있을까.

거처없이 떠도는 모험가의 눈으로 약간의 동경을 담아 톨비쉬의 책상을 쓰다듬던 밀레시안의 시선은 이제 마룻바닥으로 햇살이 비쳐들어오는 금빛의 선을 따라 시선을 옮긴 밀레시안이 살짝 벌려진 커튼 틈사이로 다가섰다.

조금 퀴퀴한 먼지냄새가 스며든 커텐을 살짝 흔들며 흩날리는 은백색의 먼지를 따라 흥미롭다는듯 고개를 돌리던 밀레시안이 킁 하고 간지러워진 코를 문지르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주 살짝 만졌을 뿐인데도 풀풀날리는 먼지에 밀레시안은 숨을 들이마시지도 내쉬지도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코와 입을 막아눌렀다.

창문, 열어두는것이 좋으려나, 따뜻한 공기탓에 잠이 오는것인지도 모른다며 커텐을 내린 상태 그대로 밀레시안의 손이 창문의 가장자리를 더듬었다. 두꺼운 천 넘어로 더듬는 손길은 어색했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는 창문이였다. 어느 한 부근 즈음에 있을법한 잠금쇠를 찾아 잡아당기자 방에서 그랬던것 처럼 확 하는 느낌과 함께 창문이 열리며 큰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순간적으로 훅 하고 꺼지는 커텐의 큰 움직임에 아 맞다 서류, 라고 생각하지만 날리는 것은 곧 부풀어오르는 커텐은 위로 말려올라가며 커다란 바람의 폭탄을.

펄럭이는 천을 피해 뒤로 물러서려던 밀레시안이 의자의 다리부분에 발이 걸려 넘어지며 쿵하고 책상의 서랍에 머리를 부딪쳤다.

아려오는 뒷통수의  통증보다는 책상이 밀려나진 않았으려나를 걱정하는 자신이 어딘지 처량하지만 그것보다 걱정되는것은 엉망이 되었을것이 뻔한 방안의 상태.

서류가 팔락이는 시원한 바람소리가 마치 여름날의 새소리처럼 잔잔하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제 시간내에 치울 수 있으려나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보지만 의외로 날아간것은 밀레시안의 보고서와 널부러진 신문들뿐.

늘상 있던 일이였는지 서류마다 놓여진 무거운 문진에 밀레시안은 톨비쉬가 당황하며 날아간 서류를 바라보는 모습을 상상하고는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경험하지 않았다면 놓여져 있을리 없는 수많은 누름쇠들을 보며 밀레시안이 작게 낄낄거리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가로 돌아갔다. 철이 되어있는 보고서는 집어들면 되지만 문제는 날아가버린 신문지들.

한 장 한 장 낱낱개로 날아간 싸구려 종이들을 주워모은 밀레시안이 무언가 누를만한것이 없다 테이블을 두리번거리던 도중에 어둠속에 가려져있었던 작고 네모난 상자 하나가 눈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무게가 조금 나가려나? 하고 모아둔 신문지를 테이블에 올려놓은 밀레시안이 상자를 집어들어보지만 실망스럽게도 너무나도 가벼운 무게.

문진으로 쓰기엔 너무 가벼운 탓에 금새 흥미를 잃어버리고 내려놓으려는 찰나, 상자 안에서 달칵 거리는 소리가 밀레시안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


바람이 불어오는 창문사이로 어딘가의 기사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가까워지다가 멀어졌다.

잘못들었나 싶어 상자를 다시 흔들어보지만 역시다 다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벌레..같은건가? 뭔가 잡아놓은것?'


밀레시안이 상자를 들어 귓가에 가져가자 다시한번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상자의 기울임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상자의 크기를 보아 그리 크지 않은 물건. 금속이나 단단한 무언가, 이정도 크기라면...하고 상자를 흔들던 밀레시안이 의식에 흐름에 따라 움직이듯 그대로 상자의 뚜껑에 손을 올렸다.

열어도 괜찮은걸까?  하는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상자를 열어낸 밀레시안이 맞닥트린것은 연녹색의 아름다운 페리도트 한쌍, 원래 하나였던것을 두개로 갈라 낸건지 같은 모양 같은 크기의 보석을 둘러싼 파도모양의 금색 장식이 아름다운 펜던트에 밀레시안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녹색의 눈동자같이 아름다운 컷팅의 보석 한쌍. 햇빛을 받는다면 아마 훨씬 더 아름답게 빛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밀레시안의 머릿속을 지배하며 눈동자위로 녹색의 불꽃을 피워올렸다.

등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할만큼의 깊은 매력이 보석의 안에서 일렁거렸다. 햇빛을 받으면, 그 한마디를 웅얼거리는 밀레시안의 발걸음이 태양빛이 가득한 창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밀레시안?"

방으로 돌아온 톨비쉬가 테이블 앞에 서있던 밀레시안을 불러보지만 듣지 못한건지 어깨를 웅크리고 서 있던 밀레시안은 그대로 몸을 돌려 창가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손안에는 예의 상자가, 녹색으로 빛나는 밀레시안의 눈을 발견한 톨비쉬가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밀레시안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양손으로 보석을 떠받치고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아무리보아도 홀린 상태.

빛나는 보석이 햇빛에 닿기 직전, 밀레시안을 잡아챈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눈을 가린채 태양을 피해 그늘속으로 밀레시안의 몸을 끌어당겼다. 그대로 힘을 잃고 품속으로 무너지는 밀레시안의 눈에서 녹색의 불빛이 황급히 달아났지만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뺨을 두드리는것에 정신이 없는듯 연신 밀레시안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에 무언가 짐작이 가는것이 있는건지 톨비쉬가 상자의 뚜겅을 덮은뒤 방문을 향해 크게 소리를 높였다.

두어번의 부름만에 허겁지겁 달려온 기사들이 마주한것은 정신을 잃은 밀레시안을 안아든 톨비쉬의 분노한 얼굴. 

엘베드의 문패가 비뚤어지도록 쾅 하고 닫힌 방안에 침묵이 내려 앉았다.










2.

"그래서 날 찾아왔다고?"


정신을 잃은 밀레시안을 안아든 톨비쉬가 향한곳은 스카하의 동굴.

험악해진 신의 기사가 내어던지는 보석을 받아든 마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빈정거렸다.

완벽하고 신사적이라고 자랑하던 밀레시안의 꽃빛만발한 묘사와는 달리 스카하의 앞에 나타난 엘베드의 기사는 누가봐도 성이난 뱀의 눈초리를 한 채 동굴속의 마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뻔뻔하게도"
"누가 할소리를 먼저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너에게 말한것이 아니란다 뱀의 기사야. 네가 그렇게 싸고도는 별에게 하는 말이지"


마녀는 차갑게 식은 톨비쉬의 냉소를 쳐내며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정하고 달콤한 사람이라니 이런 남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는 너도 별수 없는 얼간이구나. 속마음을 삼켜보지만 분노의 열기에 타오르는 열정적인 눈을 마주하고 있자하니 몸이 근질근질해진 스카하가 비꼬는 미소를 지으며 톨비쉬에게 손을 내저어보였다.


"지금 네 모습을 저 꼬마가 봐야 내 속이 풀릴텐데. 네 모습을 보려무나. 머리는 차갑게 뱃속은 뜨겁게, 갈길잃은 검을 날카롭게 갈아 품안에 갈무리한 그 모습이 마치 독을 품은 뱀과 같구나. 온기도 없이 차가운 독니만을 깨물며 사냥감을 노리는 꼴이라니. 이리가지도 저리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온몸으로 지키겠다고 똘똘말아놓은 꼴이라니 손도 없이 발도없이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네 모습과 딱 맞는 말이야"

매도에 가까운 도발, 스카하는 말하지 않고서는 못배기겠단 말이지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톨비쉬의 모습을 살폈다.

머리는 차갑게, 손 안은 뜨겁게, 그 말 그대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톨비쉬는 마녀의 도발에도 침묵을 지킨채 밀레시안의 몸을 추스러 안아올리기만 할뿐.

밀레시안이 쓰러진 순간부터 동굴을 내려올때까지 단 한번도 품에서 내려놓지 않은 톨비쉬는 어느때보다도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밀레시안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눈을 감았다.

멀리 톨비쉬를 피해 숨어있던 사하긴들이 흠칫거리며 바위뒤로 숨어들었다.

톨비쉬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편안하게 지껄거리는 걸 보니 미래에도 살아있는 모습을 본 모양이군. 그만 입을 놀리고 저주를 풀어"

"마치 이 일이 내 탓인것 처럼 떠넘기는 느낌인데.."
"그대가 갑자기 요청하지만 않았어도 이 보석은 벌써 파괴되었을테고 밀레시안에게 피해가 갈 일도 없었겠지."


톨비쉬는 더이상의 잡소리는 듣고싶지 않다며 말을 끊고는 스카하를 추궁했다.

톨비쉬의 말 그대로 태양이 뜨자마자 톨비쉬를 찾아온 것은 스카하의 전언을 가진 씨 트롤. 어눌한 말솜씨로 전언을 따라 말하는것이 고작인 트롤을 끼고 대화를 진행 할 수는 없으니 동굴까지 찾아와달라는 정중한 초대에 미심쩍어하면서도 응했던것이 화근으로 톨비쉬는 감정을 감추지도 않은채 냉정하게 선을 그으며 사고에 대한 책임을 요구했다.

'쓸만한'보석을 찾아내어 손안에서 굴려보려고 했던것 뿐인데 쓸데없는 일을 떠맞게된 마녀도 불쾌하긴 마찬가지.

보석이 든 상자와 밀레시안을 번갈아 노려보던 마녀가 목에 달라붙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기고는 허리에 손을 얹은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놓고 약점을 드러내는군 이라고 쏘아붙인 스카하는 1초도 동요하지 않는 톨비쉬에게 재미없는 남자 라고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휘저어보였다.

톨비쉬의 발치에 내던져진 보석상자가 바닷바람같은 끈적한 기류에 휩싸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녀의 손에 안착한 상자가 열리자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금색과 연녹색의 아름다운 광채.

섬세한 보석의 세공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페리도트는 태양을 받아 한층 아름다운 연녹색 빛을 흩뿌리며 썩어버린 동굴안의 선체를 비추었다. 녹음과 황금빛이 섬세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상자속의 세계, 그 안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마녀는 슬쩍 분노에 가득찬 기사를 흘겨보고서는 상자를 닫아 잠갔다.

톨비쉬의 눈썹이 잠깐 꿈틀거렸다


"네 생각이 맞는것 같군. 저주는 보석을 떠났어. 아마 너의 보석안에 잠들어 있는것 같군"
"......"


마녀는 피어오르는 신성력이 불편한지 슬쩍뒤로 물러서며 짜증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첨벙첨벙소리를 내며 튀어오르는 물보라가 톨비쉬의 머리위로 흩뿌려졌다.

이거나 맞고 머리를 식히라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은 행동이였다.


"네게 진정하라는 신사적인 행동을 요구하지 않을것이니까 걱정하지 마렴"

톨비쉬는 마녀의 빈정거림에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을 닦아내었다.

기분이 좋지 않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마녀에게 감정을 드러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뻔히 의도가 들여다 보이는 굳은 표정에 마녀의 입에서 지근지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리고 오기로 똘똘뭉친 아이들같으니라고 마녀가 잠들어있는 밀레시안의 머리위에 손을 올렸다.


"이 꼬마가 잘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참는것이겠지. 분명 날붙이를가지고 살의를 품은 저주이지만 신의 힘을 품은 꼬마만은 못해. 너희에게 하루의 시간을 만들어주마"
"고작 하루?"
"무려 하루 이겠지"


마녀는 톨비쉬의 말투를 흉내내며 눈쌀을 찌푸렸다.

하루, 보석인 상태에서도 기사단 내의 사제들이 저주를 풀어내는것만 사흘이 걸린다고 혀를 내둘렀던 물건이였기에 톨비쉬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인상을 찡그렸다.

영혼의 안에 숨어든 저주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명상, 회한의 동굴? 밀레시안이 아닌 다른사람이였다면 밀레시안의 교감능력으로 찾아들어 갈 수 있다지만 이번엔 본인이 쓰러진 상태였기에 톨비쉬는 아무말없이 움켜쥔 주먹에 힘을 더했다. 강철보다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건틀릿이 괴로운소리를 내며 삐끄덕 거리기 시작했다.


"하루만에 뭘 할 수가 있다는거지?"
"그건 네가 생각해내야지"


마녀는 남의 일이라는듯 평온하게 대답하면서도 밀레시안의 머리에서 손을 치우며 등 뒤로 팔을 돌려세웠다.

우아하게 뻗어진 손끝으로 허공에 있는 그물을 잡아당기자 예의 그 찌뿌둥한 바람과 함께 부서진 나무통 위에 올려졌던 페리도트의 상자가 마녀의 손으로 날아들어왔다.

품안의 밀레시안이 없었다면 금방이라도 목을 베어낼것같은 날카로운 시선을 뻔뻔스럽게 받아내며 보석을 꺼내든 마녀가 양손가득 검은기류를 휘저으며 보석을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가운데 고정된 보석은 내버려둔채 겉을 둘러싸고 있는 황금만.  부서지고 날아가 다시 달라붙기를 반복하며 새로운 모습을 자아내는 신기한 광경이였지만 톨비쉬의 눈에는 쓸데없이 시선을 빼앗는 저급한 쇼와 다를바가 없어 보였다.

밀레시안이 꺠어나있었다면 아마 신이나서 손뼉을 치며 좋아했겠지. 잠시 밀레시안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자 기분이 좋아졌던 톨비쉬가 다시 감겨있는 밀레시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힘을 주었다.

마녀가 손을 얹었던 자리에 남아잇는 푸른 구슬이 밀레시안의 안으로 스며들어가며 양 뺨으로 푸른 색의 비늘 몇장이 돋아났다. 사하긴의 것과 비슷한 비늘이였다.


"만약 하루가 지나게 되면 밀레시안은 저들과 같은 모습이 되는건가?"
"왜? 저런모습의 꼬마는 사랑할 수 없니?"

마녀의 빈정거림에 톨비쉬는 소리없이 입을 뻐끔거리며 밀레시안의 몸을 끌어안았다.

말로 울리는것 보다 영혼으로 와 닿는 분노의 찬 한마디에 마녀는 하, 하고 웃음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는 모습이 아니꼬웠지만 톨비쉬가 무엇이라고 더 말을 붙이기도 전에 금빛의 무언가가 톨비쉬를 향해 날아들었다. 눈앞으로 날아드는 금속의 물체를 보면서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모습에 먼저 멈춰선 것은 날아들었던 물건쪽.

감정없는 조각상처럼 피하지도 잡아내지도 않은채 품에 안고 있는 밀레시안만 지키고 서있는 모습에 마녀는 재미없다며 손가락을 그어 내렸다. 밀레시안의 가슴팍으로 내려앉은 금속의 물체가 은은한 동굴의 조명에 반짝였다.

처음의 줄무늬모양의 황금세공은 밋밋하게 느껴질정도로 화려한 산호의 모양으로 재 탄생한 보석의 모습은 퍽이나 아름다웠지만 톨비쉬는 감흥없이 고개를 돌리고는 이걸로 뭘 어떡하라는 거냐며 눈썹을 치켜올려보였다.

마녀는 센스가 없구나 그런 보석을 보면 선물할 생각부터 해야지 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거라면 그 허영심많은 여자의 눈길을 잠시라도 끌 수 있겠지. 발레스의 여왕을 찾아가려무나. 그 여자가 가지고 있는 거울이라면 아마 꼬마가 드나들 만큼 강력한 것일테니."
"거울을 통해서 자기 자신과 교감하라는 건가. 확실히 그거라면 밀레시안이 명상을 배우지 않고서도 스스로의 마음속으로 들어 갈 수 있겠군.."

하나를 던지면 열을 파악하는 통찰력에 마녀는 교양없이 휘파람을 불며 뱃머리로 돌아갔다. 태양빛아래 푸스름하게 빛나는 마력의 문장이 톨비쉬를 보며 쉭쉭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보였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모습은 하나도 없는 기사님이구나"


얼마나 그 아이 앞에서 가식을 떨었을까, 마녀는 손등으로 입을 가린채 즐겁다는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계속되는 도발에도 톨비쉬는 처음부터 아예 듣고있지를 않은건지 평안하게 밀레시안을 고쳐안으며 보석을 들어올렸다. 푸른 신성력이 빠르게 브로치를 뒤덮었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건 밀레시안이 깨어나 있었을때의 이야기가 아닌가?"


브로치가 안전한 것인지 확인한 톨비쉬가 품안에 보석을 집어넣고서는 다시 밀레시안을 추스러올려며 품에 안았다 살짝 흘러내리는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는 다정한 모습에 동네구경나온 귀족부인처럼 손가락을 까딱거리던 스카하가 무슨말을 하는거냐며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정말이지 종잡을수 없는 아이들, 그렇게 폭소를 터트린 마녀는 톨비쉬에게 손가락을 흔들며 놀리듯 빙글거렸다.


"온갖 똑똑한 모습을 다 보여주더니 이게 무슨꼴이람"


이제와서 도발이 먹히는것은 아니였지만 톨비쉬는 마녀의 손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손길이 밀레시안을 향해 흔들리는것조차 위협으로 느껴지는 공간. 톨비쉬는 너무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생각에 밀레시안을 꽉 끌어안았다. 마법이 들어서인지 왠지 아까보다 따뜻해진것 같지만 톨비쉬는 이곳의 쌀쌀한 바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괜히 의식도 못차리는 사람을 여기까지 데리고온것은 아닌가, 톨비쉬는 조금이라도 더 체온가까이 밀레시안을 바싹 붙이며 마녀를 올려다보았다. 마녀의 새빨간 혀가 요염하게 움직였다.


"그 꼬마를 위해서, 라고 보다는 너를 놀려먹기 위해서 한마디를 보태어주마"
"용건은 끝났다. 그만 돌아가야겠어"

"나라면 그 아이를 그렇게 꽉 끌어 안지 않을꺼야"


마녀는 톨비쉬의 말을 무시한채 밀레시안을 툭툭 가르켜보이며 제 하고싶은 말을 지껄였다.

무슨 말을 하는거냐며 톨비쉬가 인상을 찡그려보이자 마녀는 즐거움을 숨기지 못한채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곧 있으면 그 아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다못해 터져버릴것 같거든"


마녀의 말에 톨비쉬가 천천히 밀레시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톨비쉬의 품 안에는 언제 일어나 있었던건지 새빨갛다못해 울것같은 표정의 밀레시안이 얼굴을 가린채 톨비쉬와의 시선을 마주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깨어났습니까...? 밀레시안, 몸은 괜찮은 겁니까?"
".... .... ...."


방금전까지의 차가웠던 기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다정하고 상냥한 걱정에 마녀는 분위기에 개의치않아하며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가 거슬리는 이유는 밀레시안의 작은 목소리를 가려버리기 때문에, 톨비쉬는 좀더 바싹 밀레시안에게 허리를 숙여 귀를 기울였다. 잠겨있는 목소리가 겨우 그의 귀에 와닿았다.


"내려주세요.."

밀레시안은 부끄러워 죽을것 같은 얼굴을 양손안에 파묻었다.










3.

동굴에서 돌아온 뒤로 한차례 힐러들에게 곤욕을 치르고 난 밀레시안은 지친 몸을 소파에 뉘이며 쿠션속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침에만 해도 이래도 되는걸까 하고 자리에 없는 방주인의 눈치를 살피던 밀레시안이였지만 방 주인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편하게 늘어진 밀레시안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톨비쉬의 모습을 눈으로 쫒았다.

가만히 서있기만해도 마나와 스테미너가 날아가는 감각은 그리 좋지 못했지만 간간히 걱정스럽게 돌아보는 톨비쉬의 눈빛이 나쁘지 않은 느낌이였다.

저주에 걸린것 치고는 너무 평온한 반응, 밀레시안은 오히려 걱정스러워 하는 톨비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그가 내려놓은 브로치를 집어들었다. 황금으로 만든 산호 가운데 놓여진 페리도트는 처음 보았을때 처럼 빨려들것 같은 마력은 남아있지 않지만 어쩄든 아름다운 브로치임이 틀림없었다.

톨비쉬는 가슴과 머리께에 보석을 올려보는 밀레시안을 보며 쓰게 웃었다.

밀레시안이 보석을 내려놓고 톨비쉬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차하면 환생하는 방법도 있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건그렇죠, 밀레시안은 얼마없는 환생의 규칙에 고개를 끄덕이며 톨비쉬의 말에 동의했다.

일주일에 한번, 약간의 변칙성은 있지만 일단 그정도 시간의 텀을 두고, 그리고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다른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고 손에 물건들 을고 있지 않을 것. 왠지모르게 쓸데없이 자잘한 규칙 몇가지중에서 하나를 집어든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양 뺨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톨비쉬의 손끝으로 우둘투둘한 비늘이 탁한 빛을 내뿜으며 자잘한 소리를 내었다.


"일단 오늘 하루는 어떻게인가 버티겠지만 다음날은 안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모르구요. 오늘당장 환생 할 수 없으니 다른방법을 찾아야합니다"
"음...."


죽으면 의식없어도 환생되는데 라는 말을 삼킨 밀레시안이 쑥스러움을 숨기기위해 고개를 돌렸다. 양 뺨에 와 닿은 온기가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지금은 얼굴을 붉힐 타이밍이 아니다.

밀레시안이 손안에서 빠져나가자 너무 지나치게 다가갔다는것을 자각한 톨비쉬가 어색하게 굽혔던 허리를 일으켰다. 밀레시안이 먼저 말을 돌리며 보석을 집어들었다. 저런것을 좋아하는건가 하는 쓸데없는 상념이 톨비쉬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래서, 정확하게 무슨 저주인거에요?"

밀레시안이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을 쓰다듬으며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느긋하게 신문을 읽으며 아침을 먹는 스타일은 아니니 아마도 임무와 관련된 정보. 톨비쉬는 고개를 끄덕이며 접혀져있는 신문 하나를 가르켰다. 페이지수와 문단의 위치, 이 많은 기사들을 다 외우고 있는건지 어렵지 않게 톨비쉬가 말한 기사를 찾아낸 밀레시안이 작게 실린 부고란을 꼼꼼하게 읽는동안 톨비쉬는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헀다.

신문은 각기 다른 연도의 것으로 여러장을 뒤적거리던 밀레시안은 곧 공통된 이름을 찾아 입으로 소리내어 발음했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과 함께 입에서 연녹색의 기체가 콜록 하고 튀어나왔다.

황급히 입을 가리고 톨비쉬의 눈치를 살피지만 톨비쉬는 옷장속에서 무언가를 찾는듯 밀레시안의 이변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 밀레시안의 기침대신 이름은 들은모양인지 옷장에서 무언가를 꺼낸 톨비쉬가 맞습니다 라는 말로 설명을 시작했다.


"x월 xx일, 타라의 한 보석세공사가 집에서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되었고 그의 신변을 정리를 위해 라이미라크 교단에서 봉사자가 파견되어 집을 정리하던 도중 저희에게 연락이 오게된것이 사건의 시작점이였습니다. 작업장의 아래서 발견된 수많은 동물들의 시신들과 타고남은 뼛조각들, 그리고 이교도의 서클링. 직접적인 무력이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우선 루나사조가 먼저 투입이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은 저희쪽으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살인사건때문에요"

밀레시안이 다른 신문을 잡아당기어 펼쳐들었다. 밀레시안이 흥미 없어하던 연쇄살인사건. 신문들중에서 가장 오래된 날짜를 찾는 손길사이로 어느새 다가온 톨비쉬가 한 신문기사를 뽑아주고는 다시 책상쪽으로 돌아가버렸다.


"음... 어떤걸 보라는건지 모르겠어요"
"3면 오른쪽에서 4번째 기사입니다. 마부의 피살사건이요"

연쇄살인의 시작이 어째서 귀족가의 마부에서 시작되는지 밀레시안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얼굴로 고개를 들어보였다. 톨비쉬는 찾아낸 물건을 확인하며 서류더미에서 여러가지를 뽑아내어 한꺼번에 책상위에 펼쳐놓았다. 그의 파란색눈이 바쁘게 책상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고있었다.


"저주의 시작점은 가까운 가족부터 시작되죠. 당시 마부는 길에서 날아든 돌을 맞고 놀란나머지 고삐를 놓친채 마차 밖으로, 이후 지나가는 다른 마차들에게 짓밟혀 죽은것으로 알려졌습니다만.."
밀레시안은 생각보다 끔찍한 디테일이 눈쌀을 찌푸리며 신문을 접어버렸다.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표정을 살피지 못한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체를 확인헀던 서류를 살펴보니 의문이 되는 상처가 있더군요. 어깨서부터 등까지 의문의 줄무늬 8줄"
"줄무늬 8줄?"
그리고 허리에 박힌 손톱자국들"


톨비쉬는 서류를 접어 상자안에 집어넣고서는 다른 몇개의 서류만을 뽑아 봉투안에 집어넣었다. 꼼꼼히 봉하는 손길이 퍽이나 능숙해 보였다.

톨비쉬는 다음 신문기사를 읽으라는듯 날짜를 불러주었다.


"x월 xx일, 같은 집의 하녀가 우물가에서 살해당한채 발견되었습니다. 마부가 사고를 당한지 4개월만의 일이였죠. 괴한에게 습격당했다고는 하지만-"
"얼굴이 끔찍하게 훼손.. 음.. 질이 나쁘네요"
"우물이 있는곳은 외곽지역이긴 해도 저택의 안쪽에 있는 것이였습니다. 하인들의 숙소에는 수도가 연결되지 않아 일일이 길어다녀야하긴 했지만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에서의 괴한이 발견되지 않을리 없지요"

그 다음으로 집어든 기사는 3개월 전의 부고장. 방금전까지 말하던 저택의 사람인듯 같은 이름이 쓰여진 화려한 부고란에 밀레시안은 이사람? 하고 신문기사를 들어보였다. 같은 달에 죽은 보석세공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큰 부고칸에 밀레시안은 자잘하게 적힌 애도의 말을 넘긴채 일어난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주르륵 흘러가는 글자들사이로 제법 쓸만한 정보들이 나오자 밀레시안의 눈이 가늘게 뜨여졌다. 톨비쉬가 서류를 담은 상자를 다시 옷장안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x월 xx일, -- 사교클럽의 비밀방 안에서도 줄무늬상처에 죽은 사람이 나타났죠. 피해자가 귀족이여서인지 타라의 근위대도 제법 빠릿하게 움직였던 사건이였습니다. 다만 장소가.."


장소의 이야기가 나오자 톨비쉬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두드렸다. 순진한 얼굴로 장소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밀레시안을 보며 쓰게 웃은 톨비쉬가 얼버무리려 하지만 밀레시안은 사교클럽이라는 글자를 톡톡 두드리며 뜻밖의 말을 꺼내었다. 

"이 사교클럽 알아요. xx에 위치한 xxxx전용 클럽 맞죠?"

"....."


톨비쉬의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밀레시안은 아닌가? 하고 말똥히 고개를 들어올릴뿐. 어디서 들었냐는 톨비쉬의 목소리고 조금 낮게 들렸는지 밀레시안은 조금 주눅이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 베안루아에서 들었는데.."

".....누구한테서요"
"....루카스..."
"당분간 그 사람 가까이 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톨비쉬가 눈을 흘기는 모습에 그럼 나는 정보를 어디서 얻어요 라고 웅얼거리는 밀레시안이 슬쩍 입을 다물며 신문을 내려놓았다. 읽은 신문은 제자리에. 반듯하게 접어 신문을 쌓아놓는 밀레시안을 보며 톨비쉬는 한번더 확인해야겠다는건지 다시한번 그 클럽에 대해 물어왔다. 교묘하게 주어를 가리긴 했지만 밀레시안은 그가 왜 그렇게 클럽의 이름을 싫어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또박또박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뭐라고 들었습니까?"
"별 말 없었어요 .질이 안좋으니 혹시 누가 권하더라고.. 음.. 아니에요.  권할 만한 사람 가까이 간적도 없으니까..!"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이럴때 쓰는 말일까. 마치 스카하의 앞에서처럼 잔뜩 날이선 톨비쉬의 눈빛에 밀레시안은 정말이라니까요 하고 다리를 모아 올리며 쿠션의 뒤로 숨어들었다. 톨비쉬가 밀레시안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끄응하고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내밀 손을 맞잡은 밀레시안이 불쑥 잡아당기는 손의 힘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션을 소파위에 던져놓는 밀레시안에게 톨비쉬는 두툼한 코트를 내밀었다.

밀레시안이 이건 왜요? 하며 로브를 받아들자 톨비쉬도 똑같은 로브를 꺼내들고는 여신의 날개 한장을 꺼내들었다.


"발레스로 갈 겁니다. 저도 함께요"

톨비쉬는 책상에서 꺼낸 고급스러운 나무상자에 보석을 넣고는 로브의 안쪽주머니에 안전하게 집어넣었다.

한손에는 서류봉투를 다른 한손에는 밀레시안의 손을 신성력으로 피어올린 불꽃에 날개가 녹아가는것을 지켜보며 밀레시안의 손을 맞잡은 톨비쉬가 좀더 가까이 붙어달라고 요청했다. 밀레시안이 한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남은 이야기는 발레스로 가서 이야기 하죠. 그리고 당분간 베안루아는 가지마세요"
"에-"


밀레시안이 불만스럽게 고개를 흔들었지만 톨비쉬는 굳게 밀레시안의 손을 한번 움켜쥘분. 여신날개의 빛이 두사람을 감싸자 따뜻했던 여름의 햇살사이로 차가운 설원의 북풍이 스며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적인 비밀방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근위대는 범윈이 귀족이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저희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였지요. 근위대 자체의 감시망과 함께 루나사조의 첩보조도 클럽에 관련된 귀족들 중에서 살인사건을 일으킬만한 사람을 추려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클럽 안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 11명, 죽은 피해자까지 12명이였지만 자살은 아니였으니까요. 여성 6명에 남성 5명. 혹시나하는 가능성도 있었지만 목이 부러져죽은 것을 감안하니 자연스럽게 시선은 5명에게 쏟아졌습니다"
"그럼 범인이 여성이였어요?"

성급한 밀레시안의 질문에 톨비쉬는 대답대신 밀레시안의 모자를 덮어씌워 준뒤 뺨을 쓰다듬었다. 찬 바람이 비늘에 닿아 차가워질까 노심초사하는 그의 모습에 밀레시안은 조금 부끄러운듯 얼굴을 붉혔다.

톨비쉬는 잠시 다정하게 마주웃다가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x월 xx일, 블라고 평원의 익사체가 발견되었죠."
"날짜별로 신문기사를 다 외우고 있는거에요?"
"음? 그 편이 더 간단하지 않습니까?"


감탄하는 밀레시안을 보며 톨비쉬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래 이 사람 그런쪽 사람이였지 밀레시안이 미묘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채 설원에 내려선 밀레시안은 뽀드득거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톨비쉬의 발자국을 따라 걷기시작했다. 발레스 마나터널보다도 훨씬 먼곳에 내려진 탓에 어느정도 걷지 않으면 안되는 미묘한 위치였지만 덕분에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생겼다고 여기는 밀레시안이 가까스로 톨비쉬의 걸음을 따라잡으며 손을 뻗어잡았다.

일부러 밀레시안을 기다리며 발걸음을 늦췄던 톨비쉬의 입가에 미소가 잠깐 떠올랐다가 슬며시 모습을 감추었다.

후드사이로 얼굴을 가리는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손을 꽉 쥐어왔다.


"블라고 평원에서 발견된 아가씨는 한참 공연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던 극단의 유망주였습니다. 사건의 당일날에도 이멘마하의 공연장에서 주연으로 올라갈 프리마 돈나였죠. 하지만 그날 새벽 레자르 양조장의 일꾼이 주변을 돌던 도중에 발견하고 근위대에 신고하는 바람에 일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불미스러운곳이긴 하지만 귀족이 살해당한 사건에 잔뜩 예민해져 있던 왕성에서 재상의 사유지에 시체까지 버려졌으니 불만이 터져나올 때도 되었지요. 하지만 포도밭에서 발견된 익사체는 말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진 물고기 같은 것이였습니다. 입속에서 나온 이멘마하의 수초를 증거로 그녀가 이멘마하에서 살해당한것은 확실해졌지만 왜 일부러 무거운 익사체를 끌고 블라고평원까지 온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저희가 이 브로치, 아니 보석에 대해서 알아내기 전까지는요"


마나터널이 보일만한 위치에서 톨비쉬는 잠시 이야기를 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발레스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뺨에 손을 얹어 온도를 확인하고서는 몸의 상태를 물어보았다. 마나와 스테미너가 지속적으로 빠져나가고는 있지만 마나터널의 안정권에 들어와서인지 몸은 한결 가벼워진 상태. 밀레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톨비쉬는 준비해온 자리를 깔아 밀레시안이 쉴만한 공간을 만든뒤 가지고온 캠프파이어 키트틀 꺼내 장작을 쌓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만에 여러가지를 준비해온듯 단단하게 둘러주는 담요를 받아든 밀레시안은 작은 소리로 고마워요 라고 대답했다.

톨비쉬는 쓴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저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제가 그렇게 부주의하게 두지만 않았어도. 아니, 마녀와 거래할 생각만 하지 않았어도 당신이 이런일을 겪을 필요는 없었을텐데"

처음 밀레시안이 쓰러지는 모습을 볼때부터 톨비쉬의 가슴을 찔러오던 후회감의 실체에 밀레시안은 아니에요. 내가 상자를 열지 않았어도.. 라고 말을 꺼냈지만 곧 피어오르는 불꽃과 함께 거절의 말이 날아들었다. 톨비쉬는 가슴속에 넣어둔 보석위에 잠시 손을 얹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있는 장소에 이것을 가지고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바로 마녀에게 가져가거나 게이트에 돌아오기전에 정화를 맡기거나, 어느 한쪽도 선택하지 않고 안일하게 대처한 탓이라며 후회하는 톨비쉬는 잠시 밀레시안의 곁에 앉아 손을 붙잡았다. 아까부터 밀레시안의 손끝이 물에 담갔다 뺀것처럼 차가웠던 탓에 톨비쉬는 조금 긴장한 눈으로 밀레시안의 상태를 살피었다. 밀레시안은 이야기를 계속해달라며 손가락을 움츠렸다. 차가운 손이 닿게 하고싶지 않은 눈치였다.


"사건을 쫓던 루나사조는 우선 블라고평원의 아가씨를 제외한 연결고리에 주목했습니다. 클럽에서의 피해자의 가족이면서 마부가 몰고가던 마차가 향하던곳, 하녀가 근무하던 저택 모두 한곳으로 연결되었지만 그 저택의 용의선상에 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저택의 주인은 탈틴으로 출장을 나가 있었고 안주인은 마부의 마차에 타고 있었던 휴우증으로 앓아누워있었으니까요. 장남이 있긴했지만 이제 막 말타기를 배울만한 어린아이뿐. 오히려 끔찍한 사건들을 듣지 않기 위해 던바튼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건 조원의 정보?"
"예, 저희 조원이 올린 보고서에만 있는 정보이지요"

톨비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작 몇개를 더 던져넣었다. 좀 더 센 열기가 필요한 모양이였다.


"처음에 보석세공사와 이교도의 관련성만 뒤쫓던 조원이 그 저택에 도착한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이였습니다. 저희쪽은 세공사의 행적에만 주목하고 있었고 루나사조는 중간에서 갈라져나와 살인사건과 이교도의 연관쪽을 조사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가 우연히 마주치게된 저택에서 세공사와 살인사건의 연결고리를 찾아낸 순간, 타라의 근위대에서도 저택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타라에서 갑자기 시선을 돌린이유는 블라고평원의 아가씨가 사실 처녀가 아니였다는 사실 때문이였죠. 사실 아무래도 좋은 사생활이였습니다만 극단에서는 그럴리 없다고 극구 부인을 하며 명예훼손이라고 들고 일어섰습니다만 아가씨의 짐속에서 나온 비밀 일기장의 존재에 모두들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꼼꼼한 성격 그대로 상세하게 기록된 사생활 겹겹히 쌓여진 비밀스러운 연인의 존재에 근위대에서는 저택의 누군가가 이 연쇄된 살인사건에 휩쓸려 가도록 뜬금없이 내연녀를 죽인것이 아니냐 하는 추측이 나돌았습니다. 물론 비공식으로.

레자르 제상의 귀에 들어가면 추가훈련은 커녕 전체감사명령이 떨어질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모여진 조각들을 모아 이어진 추리끝에 남은것이-"

"보석"

"네, 이 보석이였죠"


톨비쉬는 제법 뜨거워진 장작불 가까이 밀레시안의 손을 끌어놓고는 조물조물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밀레시안은 부끄럽다며 손을 빼려했지만 톨비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너무 차갑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내가 주무를께요."


밀레시안이 손을 빼내버리자 조금 섭섭한 표정을 짓던 톨비쉬는 금새 표정을 지우고는 고개를 돌려 다음이야기를 이어갔다.

밀레시안의 몸이 어느정도 안정이 된 것같으니 다음은 발레스의 여왕을 설득할 차례였다.


"보석세공사는 그렇게 이름있는 세공사는 아니였습니다. 그저 근근히 일을 받을정도였고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에겐 사이좋은 아내가 있었고 예쁜 딸이 있었으며, 행복한 가정이였다고들 말했었습니다. 다만 부고장에서 보았다시피 그의 딸은 몇 년 전에 자살을 하고 아내 또한 그때 병을 얻어 몇개월 전에 타계를 했죠. 그런 그가 이교도의 꾀임에 빠져든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측 할 수 있었지만 왜 그 많은 보석들중에서 하필 이 하나에만 저주를 걸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보석이 어떻게 그 저택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그러나 톨비쉬는 지금 말할 생각이 없다는든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다음은? 하고 물어오는 밀레시안의 모습이 마치 옛날이야기를 조르는 어린아이같아 보였지만 톨비쉬는 뺨에 입을 맞추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후드를 깊숙히 내려주며 뺨을 한번 쓰다듬었다.


"우선, 거울쪽을 해결하고 올테니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같이가는게 더 빠를것 같은데.."

밀레시안은 이제 다시 걸을수 있어요 하고 두주먹을 쥐어보였지만 톨비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깨를 내리눌렀다. 힘없이 푹하고 주저앉는 다리에 밀레시안은 어.. 하고 놀란눈으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조금 험한 소리가 오갈지도 모르니, 여기 있어주시길 바랍니다"
"동굴에서 처럼요?"

"........."


나쁜모습을 보일지도 몰라요 하고 멋쩍게 웃던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어깨에 얹었던 손을 떼어 얼굴을 가리고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마지막에 소리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천박한 말로 도발에 응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톨비쉬의 귓가까 불에 대인것 마냥 빨갛게 달아올랐다. 후드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야 톨비쉬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떨리는 음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셨습니까?"
"....듣지는 못했어요"
"잊어버리세요"

".....에...."

톨비쉬의 단호한 억지에 밀레시안은 그게 가능하겠냐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노력은 해 볼께요"


톨비쉬가 조금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발레스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4.

"신문, 가지고 올껄 그랬네"


톨비쉬가 떠나가고 잔뜩 쌓여진 캠프파이어용 키트에 둘러쌓인 밀레시안은 습관적으로 손을 문지르며 몸의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가급적 빠르게 거울을 손에 넣기위해 함께 발레스로 따라나온것이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떨어지는 체력에 내색하지 않던 밀레시안의 입에서도 힘겨운 한숨이 간간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장이라도 좀 더 해둘껄 그랬어. 그럼 좀 버틸만 했을텐데"


환생때마다 초기화 되긴하지만 밀레시안은 분명 조금씩 성장하는 존재. 최근 여유로워졌다는 느낌에 수련을 조금 게을리했던 밀레시안은 조원들에게 잔소리할 처지는 아니였다며 후회하고는 얼어붙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저릿한 손을 꿈지럭거렸다.

둔한 손의 감각에 불속에 집어넣어도 모르겠다며 화상을 입을 법한 가까운거리에서 장작을 던져넣는 밀레시안의 뒤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가까이 오는 동안 돌아보지 않는 밀레시안이 이상한건지 그림자의 주인은 잠시 떨어져있는 상태로 관찰을.

한참을 바라보던 자이언트는 자신이 알던 기척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살짝 헛기침을 하며 밀레시안을 향해 소리를 내어주었다.

멍하니 불꽃이 타오르던것을 보던 밀레시안이 깜짝 놀라 무기에 손을 얹으며 뒤돌아보았다.

곱은 손가락이 날렵하게 무기를 잡아채지는 못했지만 적당히 거리를 두어준 자이언트의 배려에 밀레시안은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미소지었다.


"안녕하세요, 타우네스"


발레스의 무기장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밀레시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무를 하러 나갔었던건지 그의 등 뒤로는 잘 잘린 나무장작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밀레시안이 반갑게 손을 내밀자 악수를 하던 타우네스가 의아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래간만이요, 밀레시안.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왜 이런곳에 있는거요?"
"일행이랑 여기서 만나기로 해서요."
"꽤나 오래 기다린 모양이군. 손이 완전히 얼음덩어리야"
"아하하, 조금 사정이 있어서. 타우네스씨야 말로 왜 이쪽길로?"
"집 뒤의 나무는 아직 자를 시기가 아니여서. 이렇게 마주친것도 인연이니 내 집에 가서 차라도 한잔 하는건 어떻소? 깔끔한 곳은 아니지만 동상을 피할만큼의 열기는 얻을 수 있을테지"


타우네스의 제안에 밀레시안은 뜻밖의 행운을 만난 얼굴로 기쁘게 박수를 쳤다.

습관적인 행동이였지만 아무소리도 느낌도 나지 않은 손을 확인하게된 밀레시안은 으음.. 하고 난감한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우네스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려하지 못한 대답이였지만 타우네스는 대강 밀레시안이 어떤 행동을 하고있는지 알겠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캠프파이어를 가르켰다.


"뒷마무리는 확실히 하는것이 좋겠소"


타우네스의 무기점이라면 아마 족장집에서 나오는 톨비쉬를 확인할 수 있을터. 딱 좋은 위치에서 만났다며 좋아요 라고 대답한 밀레시안이 눈을 끼얹어 불씨를 꺼트리며 담요를 집어들었다.

타우네스의 커다란 발자국이 따라 눈언덕을 내려가는 밀레시안의 뒤로 8개의 긴 줄무늬가 눈위로 그어지다 사라졌다.








"이렇게 되어서 말이죠"


게이트의 이야기는 적절하게 뺀 상태로 저주에 관해서 설명한 타우네스는 그렇군이라고 대답하며 차를 들이켰다. 무슨 약초를 우린것인지 모르지만 보온에서만큼은 확실한 효과가 있는건지 뜨겁게 달궈진 모루 바로 옆에 자리한 밀레시안은 한결 따뜻해진 몸을 느끼며 신이나서 잔을 내밀었다.


"이거 효과 엄청 좋네요. 쟤료가 뭐에요?"
"아트라타가 준것이여서 나도 잘 모르오. 아마 사막의 약초이겠지"

".....발레스에서 이렇게 막 우려먹어도 괜찮은거에요?"

사이는 조금 좋아졌지만. 발레스의 족장집 바로 옆에서 사막의 약초를 우려먹는 자이언트 전사(전직)의 담력에 밀레시안은 어꺠를 으쓱하는 타우네스에게서 잔을 받아들며 자신도 똑같이 으쓱하는 모습을 따라해보였다. 보일리 없지만 뉘양스는 전해진듯 타우네스는 나지막히 웃음을 지으며 차 주전자에 물을 보충했다.

추운지방에서 마시기 딱 좋은 차라고 말하며 꾸러미를 내밀던 아트라타의 손길에 타우네스는 기분이 좋아진듯 불을 돌본뒤 다시한번 나무잔에 차를 따라내었다. 어디선가 들짐승의 냄새가 스쳐지나갔다.


".....?"
"그래서  마녀에게서 일단 하루의 시간을 선고받았는데..."


밀레시안의 설명은 이제 막바지에 이른듯 마녀의 동굴로.

따듯한 차로 연신 목을 축여가며 조잘조잘 잘도 떠들던 밀레시안이 코를 킁킁거리는 타우네스의 행동에 잠시 말을 끊으며 왜요?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 별것 아니요. 밀레시안, 혹시 동물을 불러내었소?"
"응? 아니요? 난 혼자 있는데?"


밀레시안은 자신에게서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는지 빌려입은 로브 여기저기를 킁킁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뺨에서 바스락거리는 비늘을 생각해내고는 볼을 긁적이며 타우네스를 향해 되물었다.


"혹시 비린내 같은건 아니에요? 나 지금 얼굴에 비늘같은게 돋긴 했는데"
"아니, 물가의 냄새가 아니라 들짐승의 냄새요. 작고, 육식에... 고양이같은것이로군"


고양이 같은 것, 이라는 말에 가슴에서 찌르는 통증을 느낀 밀레시안이 불편한 기침을 토해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토해내는 기침속에 섞인 녹색의 기류.

밀레시안이 기침을 하며 몸을 수구리자 타우네스는 당황한듯 괜찮소? 하고 물어오며 손을 뻗어내었다. 날카로운 발톱의 기척에 급히 손을 거두는 타우네스가 부지꺵이를 움켜쥐자 근처를 맴돌던 짐승의 향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헉헉 거리던 밀레시안이 몸을 추스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잔에 남아있던 차를 들이킨 밀레시안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를 썼다.


"미안해요.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당신이 사과할 일이 아니요. 뭔가 나쁜것에 씌인것 같군"
"음- 알고는 있지만.. 일단 좀 떨어져있는게 좋겠어요 그만 가볼꼐요 타우네스"


차 잘마셨어요 하고 인사를 하는 밀레시안이 담요를 챙기며 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타우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지깽이를 다시 내려놓았다.

철근이 땡그랑 하고 손에서 떨어지는 소리에 잠시 짐승의 기척이 다시 주변을 맴돌았지만 애초에 자이언트의 전사는 얄팍한 철막대기에 의지할만한 나약한 종족이 아니였다.

커다란 그레이트소드의 위용에 보이지않는 무언가는 겁을 먹은듯 순식간에 기척을 지우고 사라지며 밀레시안을 옥죄고 있던 목을 풀어버렸다. 밀레시안이 숨을 토해내자 타우네스는 전사때의 기백을 실은 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세를 바로하고 당당하게 마주보시오"

".....네?"
"상대가 무엇이든 실체조차 갖추지못한 허상에 가까운 것이니, 그대가 두려워 하거나 당해내지 못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소"


뜻밖의 조언에 밀레시안은 그렇죠. 그렇네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발레스의 공기가 폐를 가득 체우지만 마나터널 옆에서 떨고 있을때보다는 한결 가벼워진 느낌. 밀레시안은 숙이고 있던 자세를 바로 세우며 타우네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것을 자꾸만 잊어버린 행동에 잠시 자신의 이마를 두드리던 밀레시안이 다시 인사를 건네었다.


"차 고마워요 타우네스. 덕분에 몸이 많이 좋아졌어요. 아트라타에게도 안부인사 전할께요"
"그렇게 해준다면 나야 고맙지. 잘가시오 밀레시안. 자네의 일행이 나오는 소리가 들리는군. 지금 내려가면 마주칠 수 있을 것이오"


타우네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밀레시안이 서둘러 무기점을 나서 발레스의 광장으로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족장집에서 나온다면 광장을 지나쳐 올라오겠지. 밀레시안이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모습에 근처를 지나가던 자이언트 가드 몇명이 밀레시안을 향해 잠시 고개를 돌렸다.

족장의 집에서는 무언가 격렬한 이야기가 오갔었던건지 약간 지친 모습의 크르투와 심기가 불현한 키리네, 그리고 후드를 눌러쓴채 얼굴이 보이지 않는 톨비쉬가 함께 걸어나오고 있었다.


"아, 톨비쉬..!"


밀레시안이 부르는 목소리에 톨비쉬는 놀란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키리네의 앞을 막아섰다.

그것이 밀레시안의 기억의 끝. 자이언트 가드들이 움직였고 톨비쉬가 밀레시안을 끌어안았으며 밀레시안의 시선끝에는 이상하게도 키리네의 얼굴이 고정되어있었다.


'고양이 울음소리'


톨비쉬의 품이 이상하리만치 따듯하다고 여기며 정신을 잃은 밀레시안이 어둠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의식속에서 녹색의 기침을 토해내며 목을 부여잡았다.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아트라타의 차의 향기와 들짐승의 냄새가 역하게 섞여 속을 뒤집어 놓오있었다.

녹색의 눈동자.

어둠속에서 떠오른 두개의 페리도트를 보며 밀레시안은 키리네의 가슴에 장식되었던 황금산호의 브로치를 기억해내며 눈쌀을 찌푸렸다.

모든 일의 시작은 이 두개의 보석. 밀레시안이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구야"


짤랑거리는 얼음밟는 소리와 함께 밀레시안의 눈 앞으로 키리네의 거울이 떠올랐다. 분명 톨비쉬가 키레네에게서 거래의 조건으로 빌려온것이겠지.

아마 현실과 꿈의 중간지점인듯한 어둠속에서 거울을 마주본 밀레시안은 비쳐진 거울속의 녹색의 눈동자를 노려보며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밀레시안의 모습, 하지만 그 눈동자는 페리도트빛 선명한 녹색의 눈. 무표정한 거울속의 밀레시안은 거울이 사라지자 곧 모습을 작고 둥글게 말며 밀레시안의 발 밑에서 몸을 일으켰다. 겨우 강아지만한 크기로 모습을 들어낸 저주의 실체에 밀레시안은 어이가 없다는듯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네가 그 저주야?"
"내가 그 보석이야"


페리도트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하고는 몸을 휙하니 돌려 어둠속으로 겅중겅중 뛰어들어갔다. 아무리 빨리 달리려 노력해도 페리도트의 짧은 다리로는 밀레시안이 뛰는것만 못한 속도.

그럼에도 열심히 어둠속을 달려 시커먼 구멍앞에 멈춰선 페리도트가 눈을 접어 웃어보이며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보석이라도 나는 조금 특별한 보석이지. 내가 어디서 태어난 보석인지 혹시 알고 있어?"
"알게뭐야"
"흐응, 성의없는 대답이구나. 상관없어 나는 야금채에 걸려질만큼 흔한 보석은 아니니까"

확실히 야금질에 발견될만큼 흔하진 않지만 하고 고개를 끄덕인 밀레시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페리도트를 가르켰다.


"흔하지 않은건 아닐텐데"
"다른 애들보다도 나는 더 특별해"


페리도트는 우아하게 몸을 세워보이며 눈을 깜빡였다


"나는 운석에서 태어났어. 그러니까 별에서 태어난 보석이야"

 

그 말과 함께 페리도트가 어둠의 구멍속으로 몸을 전졌다.

컥하고 차오르는 가슴속의 통증과 함께 다시한번 정신을 잃을뻔한 밀레시안이 어둠속에서 이어진 푸른 선을 보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세웠다. 푸르고 가느다란 선 신성력의 끝. 


'이 선의 끝이 어디인지알아.'


밀레시안은 가빠오는 숨을 안정시키려 애쓰며 벽으로이어진 푸른 선을 따라 다리를 움직였다.

검고 커다란 벽을 손으로 짚는 밀레시안이 마치 잠수하기 전의 사람처럼 크게 숨을 들미사며 눈을 감았다.

푹하고 벽을 향해 얼굴을 들이민 밀레시안은 진득하고 어두운 물속을 헤엄쳐들어가듯 팔과 다리를 휘저어 어둠 깊은곳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디바인링크가 이어져있던 어둠 아래 가라앉은곳.

밀레시안은 저주가 도망쳐버린 공간이 이곳일꺼라 확신하며 무겁게 잠겨있던 철문을 열기위해 안간힘을 썼다.


"당신이 명상을 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었을텐데"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공간에서 톨비쉬의 한숨섞인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울려퍼져왔다.

그런거 안해도 어쩄든 들어갈 수는 있어요. 마음속으로 환청에 대답한 밀레시안이 흡 하고 힘을주자 어렵게 움직이기 시작한 철문사이로 사람 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공간이 빠끔히 입을 열었다.

그 안으로 몸을 우겨넣는 밀레시안의 가슴팍에서 빛을 내기 시작하는것은 손바닥만한 거울의 표면.

키리네의 거울을 끌어안은 밀레시안이 철문안으로 고개를 숙여넣으며 눈을 감았다.




잠이들듯 눈을 감은 밀레시안의 의식을 깨우는것은 한줄기의 빛이였다.

구름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처럼 어둠으로 가득찼던 밀레시안의 시야속으로 한 두줄기의 빛이 스며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코와 입을 막는 압박감으로 흐려지는 의식을 흔들어 깨워대기 시작했다. 보글거리고 올라가는 기포가 향하는곳은 머리 윗쪽.

위를 향해 떠오르녀는 몸의 부력을 느끼며, 헤엄을 치기 시작한 밀레시안이 먼저 떠오른 물방울을 따라 손을 뻗자 가벼운 공기가 허공을 가르며 딱딱한 바위 표면을 긁어내렸다. 바위를 지지대삼아 위를 향해 몸을 끌어올린 밀레시안이 한참동안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자 진한 숲의 향기와 함께 텁텁한 민물의 향기가 밀레시안의 폐를 가득채웠다. 눈앞을 가리며 흘러내리는 머리카락과 물을 아무렇게나 쓸어남기 밀레시안이 둘러보는 풍광은 아무리 보아도 에린의 티르코네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심상세계를 확인한 밀레시안이 하필 또 여기냐 하고 투덜거리며 뭍가로 헤엄쳐갔다. 잔뜩 머금은 물을 짜내며 뜨거운 태양아래 걷는 밀레시안의 몸상태는 발레스에서의 기력없는 모습이 아닌 평소의 컨디션. 하늘은 푸르고 강물은 시원하며 몸은 개운하니 남는것은 고양이를 쫓는 어느 할일없는 모험가의 의욕뿐.

아무도 없다는 사실만 빼면 에린의 티르코네일과 다를바 없는 모습에서 움직이는 작은 그림자를 찾아낸 밀레시안이 뭉쳤던 어깨를 돌리며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자, 그럼 이제 잡으러 가 볼까?"


식료품점의 지붕위에 올라갔던 페리도트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울음소리를 내었다.








(하편이 있습니다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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