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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비밀레) reload #5(3)
“그거 프로포즈?”
“역시 그렇게 들리지?”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톨비쉬의 전언에 킹과 룩이 동시에 의자를 기울이며 톨비쉬를 돌아보았다.
이럴때는 참 꿍짝이 잘맞는데 말이지. 톨비쉬는 뻐근해진 어깨를 앞뒤로 돌리며 냉장고를 향해 걸어갔다.
이름표가 붙어있는 맥주캔이 7개, 톨비쉬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두개의 캔을 꺼내들며 성의없이 대답했다.
넥타이가 거슬렸다.
“그렇게 들린다면 그런모양이지”
베베꼬여있는 정보계의 감상따위 이해할 수가 있을까.
톨비쉬의 무성의한 대답에 룩은 한층 높인 가성과 함께 양뺨을 살짝 감싸잡았다.
“어머어머어머, 우리 지금 헤드헌터 들어온거야?”
“아니지, 나는 헤드헌팅, 너는 테일헌팅”
“어머어머어머, 이렇게 작은데? 이렇게 쬐끄만데? 우리팀 용가리는 머리가 이-렇-게 작아서 어따쓴다니?”
“너 잡는데. 네놈 잡은데 쓴다, 이자식아.”
섬광이 튀어올랐다. 킹은 시험작이었던 나이프을 휘둘렀고 룩은 강화중이던 간이 실드를 펼쳐들었다.
파지직 거리며 튀어오르는 스파크는 둘째치고 이동모드로 되어있던 룩의 의자가 빠른속도로 미끄러지며 거실 반대편으로 밀려나갔다.
원흉끼리 떨어지는 것으로 일단락되는가 싶었지만 이 속력을 기다렸다는 외침과 함께 룩이 자세를 전환, 반대편 벽을 발로 걷어차며 원하던 속도를 얻은 룩이 힘차게 기술명을 외치며 킹에게 달려들었다.
가속을 받은 방패의 모양이 재 구성되며 유선형의 모양으로 변경되었다.
“먹어라 돌진..!”
“나 지금 인두잡고 있는데?”
“헉 안돼, 기스나면 안돼..!!”
룩은 급하게 의자를 멈춰세웠고 킹은 아깝다는 표정으로 인두를 내려놓았다.
룩은 우는 소리를 길게 내며 실드를 접어넣었다.
“인두는 살인미수야! 이 아이는 아직 출품신고도 못했는데!!”
“그러면 괜찮지 않을까? 아직 비공식이면 아슬아슬하게 허가범위가 아닐까?”
새파랗게 질린 룩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킹이 빙글거리며 인두를 내려놓았다.
헤치는 대상이 사람인지 물건인지 알송달송한 대화가 퍽이나 멍청하게 느껴졌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일에 익숙해진 미스터 융통라인은 엄중하게 손날을 세워 왼편의 의자를 밀어내었다. 환호성과 납득할 수 없다는 비명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일단 나이프에서 전기 튈 때부터 이미 아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 놈 실드 폼 못봤냐?! 진짜 달려들 생각이었다고?!”
“신고 이전 제품이기 때문에 변형된 폼에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문의해주십시오.”
“오예!!”
“오예가 아니지?!”
“신고 이전 제품이기 때문에 변형된 폼에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문의해주십시오.”
톨비쉬는 들고있던 맥주캔을 마이크 삼아 자동응답기마냥 대답하기를 반복했다.
킹은 억울하다는듯이 손모양을 꿈틀거리며 허공을 움켜쥐었지만 글러브도 끼지 않은 제스쳐를 인식할리 없었다.
끄으윽거리며 주먹을 움켜쥐던 킹이 한숨으로 말을 삼켰다. 나이가 한살이라도 많은 자신이 참겠다는 태도였다.
룩이 다시한번 양손을 힘차게 뻗어올리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트레이닝실에서 나오던 퀸은 안봐도 뻔하다는 얼굴로 톨비쉬들을 바라보았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킹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잘 참았어. 이제 꼬맹이장단에 휘둘릴 나이는 지났지?”
“그렇지. 이제 앞자리가 바뀐이 얼마 안되었다는 변명 효력이 떨어져가고 있으니까. 반은 정말 아니잖아, 반은.”
오른쪽을 차지하고 들어온 톨비쉬와 함께 왼쪽도 가로막힌 킹이 의자위로 다리를 끌어모아 올렸다.
인내와 심기는 다른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 있다는 웅얼거림과 함께 목울대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니들도 곧이야. 사람가는데 순서없다는 것만 알아둬.”
“그건 아니지, 보내버리면 안 바뀌는 거니까...”
그 소란속에서도 느긋하게 누워있던 비숍이 침묵을 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파뒤에 감쪽같이 누워 맥주만 들이키던 비숍은 비어버린 한쪽팔을 소파에 걸치며 까치집이된 더벅머리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비어있는 손이 소파 뒷편으로 흘러내렸다. 까딱까닥 하는 폼이 뭔가를 원하는 모양이었다.
“여기”
톨비쉬가 들고있던 다른하나의 맥주캔을 던져주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와중에도 뒷통수에 날아들어오는 맥주캔은 어찌 그리 잘 알아채는 건지, 비숍은 가볍게 캔을 잡아내어 머리 위로 캔을 들어보였다.
경쾌한 탄산소리와 함께 비숍의 목울대가 꿀렁거리고 있었다.
단번에 반을 캔은 한결 가벼워진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아침에 깨끗하게 치워놓고 나갔던 테이블 위에는 높디 높은 캔맥주의 탑이 쌓여져 있었다.
바람이라도 불면 그대로 흐드러질 것같은 아슬아슬한 첨탑, 비숍은 7번째 캔을 어떻게 올릴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역시 최연장자! 지혜의 깊이가 다른 연륜의 조언이네..!”
“......”
룩이 깨방정을 떨며 양 손으로 손가락 총을 만들어 비숍을 가리켰다.
아부라고 하기엔 조준점이 저멀리 빗나가버린 칭찬이었다.
분위기가 잠시 차가워졌지만 비숍은 매마른 웃음소리를 한번 흘려주고는 들고있던 캔을 입으로 가져가며 스르륵 소파아래로 흘러내렸다.
원하던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이상 끼고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은근슬쩍 바보들의 행진속에서 이탈하는 비숍의 노련함에 킹이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는 눈앞의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는 표정이었다.
“웃으면 되는걸까? 웃으면 되는 거야? 아무리 홧병이 날 것같아도 웃어넘기면 되는걸까?”
“아직 4년은 더 화내도 괜찮아.”
“4년뒤부터는? 그때부터는 웃어야 하는걸까?”
퀸은 한번 빠진 머리카락은 칼리번도 구해줄수 없다고 엄중하게 경고하며 방치되어있던 킹의 화면을 끌어당겼다.
청색으로 뒤덮여있던 나이프의 단면도가 사라지며 가라앉아 있던 검은 화면이 떠올랐다.
아본의 조감도와 브류나크의 정면도 옆으로 6개의 체스말이 떠올랐다.
반투명한 화면에 가려졌지만 톨비쉬는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킹의 손아귀가 슬쩍 벌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죽은 모근을 되살릴수 없다는 것 뿐이지 여타 다른방법은 아주 많이 마련되어 있다는게 좀 더 정확한 진실, 하지만 킹은 손바닥으로 옆머리를 꾹꾹 누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단장의 헤어스타일은 싫어”
단장이라는 말에 톨비쉬들은 아- 하는 탄성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모자로 가리고 있지만 알아챌 수밖에 없는 진실, 사실 본인이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거 아닌가싶을정도로 단장은 자신의 외형이나 일상도구에 대해 고리타분한 기준을 준수하고 있었다.
이제는 보기힘든 기름이 든 라이터라던가 가끔 편지를 부엉이따위로 날려보낸다던가. 그러면서 새로운 기기에 대해 잘 모르는건가 싶으면 또 그건 아닌 것인지 요원들이 시험삼아 만들어온 물건들도 곧 잘 능숙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다못해 지금은 듀얼건을 직접 지도하고 있지 않은가. 톨비쉬는 문득 시간을 떠올리며 시계를 확인했다. 트레이닝 시간이 한참 지난것 같은데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톨비쉬가 2층의 복도를 두리번거리는 동안 티비가 잠시 지직거리는 소음을 낸 뒤 정상의 상태로 돌아왔다.
비숍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채널을 돌리다가 룩들을 돌아보았다.
퀸과 함께 숨죽여 웃고있던 룩이 말안해도 안다는듯 어깨를 으쓱 들어올려보였다.
“아, 그거 아-무 이상도 없는데 가끔 그러더라. 방법이 없어”
“멀쩡한거야. 전에 한번 다같이 모였을때 회의주제로도 올려봤는데 원인 불명이야”
다 같이? 모였다고? 농담이지? 세 사람의 목소리가 다중 합창처럼 서로다른 타이밍에 시작해 한 지점에서 끝을 맺었다. 말도 말라는 건지 손을 휘휘 내젓는 킹의 표정이 설명을 대신하고 있었다.
“뭐라그랬었지? 10명이 모이면 8명이 사라진다고 했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 49명이 나타나는것보다 훨씬 더 마음 편하겠어.”
“평소의 이미지로는 49명쪽이 훨씬 현실감이 있는데”
“헛소리말고 시계나 내놔”
킹의 재촉에 톨비쉬가 왼손을 내밀었다. 시계를 찬 손이 화면에 닿자 아날로그식으로 째깍거리던 시계가 흐려지고 배경속 나이트의 체스말이 바닥면부터 천천히 하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오늘 있었던 회의의 결과를 업데이트 하는 동안 꼼짝없이 한 손이 묶여있게 된 톨비쉬는 아쉽다는 눈으로 맥주캔을 내려다보았다. 룩이 톨비쉬의 캔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보니 폰이 아직 안돌아온 것 같은데..”
“어.. 그러고 보니까 아직도 안돌아왔네?”
룩은 따개를 열어젖힌 맥주캔을 되돌려주었다.
톨비쉬가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며 맥주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한모금을 마시기도 전에 화면을 뚫고 불쑥 튀어나온 오른손이 톨비쉬의 맥주를 강탈,
한순간이나마 허를 찔린 톨비쉬가 진심으로 짜증을 내며 불투명해진 검은 화면을 노려보았다.
스쳐지나간 범인의 오른 손목의 특징은 톨비쉬와 같은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는 것.
톨비쉬는 시계속에 검은색 킹의 체스말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한사람을 노려보았다.
잠깐 스쳐지나간 디지털 시계속 화면에는 여러개의 알람과 메세지표시가 점멸하고 있었다.
벌써 다음버전인건가? 톨비쉬는 하얗게 변한 나이트가 다시 검게 칠해지는 것을 확인했다.
막 따자마자 빼앗긴 캔맥주는 어쩐지 한김 미지근해진 맛이라는 혹평과 함께 머리위로 들어올려졌다.
범행을 방관하고 있던 왼쪽의 보호자가 남은 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내꺼 줄테니까 눈에 힘풀어”
“안마셔. 안 마시고 다른값으로 청구할거다.”
“네에-네에-. 폰을 찾아오라 이거지?”
“그럼 나도! 나도 도전이야!”
“네이-네이-, 마음대로 해라”
킹은 안들어도 알만하다면서 내팽겨쳐져 있던 글러브를 끌어당겼다.
톨비쉬가 손을 대고 있는 큰 화면 대신 작은 화면을 꺼내들고 몇번을 까딱이자 금세 밀레시안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아무리 직장내 스캔이라지만 정말 너무하다 싶은 속도였다.
룩이 질렸다는 표정과 함께 킹의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룩의 화면도 일단 동일한 화면속 위치는 띄워놓긴 했지만 영상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들이었다.
킹은 보안용 카메라를, 룩은 엑세스된 보안기록의 흔적을, 룩은 고개를 설래설래 내저었다.
“질렸다.. 이래서는 빼도박도 못하게 범죄형이잖아.”
“어허, 왕도와 범죄는 원래 한끗차이라는거 모르나.”
킹이 자신의 화면을 톨비쉬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순순히 넘겨줄리가 없지.
톨비쉬는 패턴을 파악하고 있다는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아니나다를까 맥주 한캔에 너무 비싼 인력을 부려먹은거 아니냐는 거드름과 함께 실시간으로 재생되던 화면에 사진처럼 정지되었다.
살살 웃으며 톨비쉬의 옆구리를 찌르는 폼이 퍽이나 익숙해보이는 일련의 흐름이었다.
행동과 마음가짐, 그리고 결과물까지. 차라리 이정도면 범죄의 경계로 넘어가주는 것이 마음에 편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차라리 범죄영역이라면 깔끔하게 저쪽에 넘겨버릴텐데.
톨비쉬는 나지막히 속마음을 흘리며 화면을 끌어당겼다.
의도된 혼잣말은 마법의 주문처럼 얼어붙은 화면을 녹여내었고 킹의 입은 한사발 부루퉁하게 내밀어졌다.
7년지기 새파랗게 어린놈을애지중지 키워봤자 세상 쓸모없다.
큰 화면속 회의내용을 읽고있던 퀸이 한쪽 손을 내려 머리를 쓰다듬어왔다.
“아 범죄라고 하니까 생각났는데. 아까 말한 49개 접속기록말이야. 그거 사실 킹이 만든 더미 아이디 로그아웃하는걸 잊은거였..!”
쓸모없는 거라면 룩의 눈치가 더 쓸모없지 않을까.
갑작스러운 폭로를 막기 위해 데이터소거보다 빠른 발놀림이 룩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평소에도 저 반만큼의 행동력으로 스트레스를 발산한다면 이 성질머리가 좀 덜하지 않았까 싶은 매섭고도 강렬한 한방이었다.
인두로부터 실드를 지키기위해 의자를 고정시켜놓았던 룩은 100%의 데미지를 그대로 다리뼈 두가닥에 받아내며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부산스럽게 깽깽이를 뛰는 룩을 피해 톨비쉬가 자리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한쪽손을 화면에 고정하고 있던 탓에 자세가 어중간해진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이 화면속 밀레시안에게 박혀있는 표정이 사뭇 진지했던 탓에 킹은 쓴웃음을 지으며 글러브를 벗어던졌다.
아무렇게나 내던진 글러브가 아직 꺼지지 않은 인두를 치고 미끄러졌지만 네사람중 아무도 글러브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킹이 글러브를 아무데나 던져놓는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고 그렇게 갈아치운 글러브도 한두벌이 아니었다.
킹은 옆머리를 벅벅 긁으며 퀸이 들고있던 화면을 살펴보았다. 시계속 체스말이 모두 까맣게 물들어있었다.
“오케이, 이제 손 때도 좋아.”
톨비쉬가 왼손을 털어내며 팔을 거두어들였다.
밀레시안이 앉아있는 장소는 예의 그 카페테리아의 좌석으로 옆자리에는 누군가의 음료수 잔이 놓여져 있었다.
개인면담이 있다는 소리는 들은적이 없었는데.., 톨비쉬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룩이 불쑥 머리를 집어넣으며 톨비쉬의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자세가 기울어진 탓에 생각의 흐름이 끊겨버린 톨비쉬가 눈쌀을 찌푸렸다.
룩은 베시시 웃으며 양손을 모아보이고는 최대한 간드러진 목소리로 늘상 하던 변명을 늘어놓았다.
“알잖아. 궁금한건 참기 힘들다는거.. ”
“그럼 그럼.”
킹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닌척 하고 있지만 큰화면을 양손에 들고 회의의 내용을 읽고있던 퀸도 꽤나 관심이 있었는지 중간중간 눈을 돌려 작은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파너머에서 비숍이 팔걸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도.”
톨비쉬는 귀찮다는 얼굴로 룩에게 팔을 빼내었지만 다른 한손으로는 작은 화면을 흔들고 있었다.
소파를 향해 흔들어진 화면이 비워지고 한참 비숍이 빠져있던 일일드라마의 재방송이 사라졌다.
잠시 검게 변한 티비 화면위로 카페테리아의 전경이 떠올랐다.
톨비쉬들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메뉴가 나왔던 것인지 자리를 비웠던 음료수잔의 주인이 새로운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가지고 자리에 돌아오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상대는 피오나의 단장, 익숙한 빵모자의 등장에 룩이 다시 입을 열었다.
“킹도 이 참에 모자를 하나 구입해보는건?”
안타깝게도, 발이 닿지 않는 거리였다.
킹은 접어넣었던 나이프을 펼쳐들며 톨비쉬를 올려다보았다.
퀸이 나이프을 빼앗기 위해 잠시 시선을 뗀 사이 커다란 화면에 잠시 노이즈가 흔들리다 사라졌다. 좌우로 흔들리는 신호장애가 아닌 위아래로 파형이 흔들리는 기묘한 노이즈였지만 5명중 아무도 화면의 이변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무장해제를 당한 킹이 정당한 권리를 요청해왔다.
“이건 정당방위지? 정당방위인거지? 정당방위라고 해줘!!”
“어...아… 음, 그래. 오늘자 미스터 융통성의 영업시간이 끝났다는걸로.”
너희들끼리 알아서하라는 말을 남긴채 톨비쉬가 소파쪽으로 걸어나갔다.
단장은 밀레시안의 옆자리에 앉아 자신의 몫의 간식을 나눠주었다.
카메라를 등지고 앉은 탓에 입술의 움직임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좋아한다는 것 이였지만 창문에서 조차 입술의 형태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밀레시안은 간식을 먹느라 쉴새없이 턱을 움직이고 있었고 단장은 턱을 괴고 앉은 탓에 볼과 입꼬리가 눌려있었다.
본능이라고 해야할까, 톨비쉬는 알 수 없는 기시감에 휩싸인채 소파에 기대어섰다.
화면속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는지 비숍이 고개를 들어 톨비쉬를 올려다보았다.
소리없이 입술이 달싹여졌다. 비숍은 말없이 시선을 티비로 돌렸다.
“오디오가 없으니까 무슨 대화인지 모르겠네…, 나이트, 무슨대화가 오가고 있는거야?”
“......”
톨비쉬의 대답대신 퀸이 손가락이 들어올려보였다.
길게 뻗은 검지손가락은 내쉬어지는 얕은 한숨을 두갈래로 흩어내며 낮은 바람소리를 내리눌렀다.
고요하게, 침묵을 강요하는 소리없는 의지가 방안을 휘감고 있었다.
톨비쉬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화면속 옅은 창그림자에 집중했다. 책상에 기대어 티비화면과 톨비쉬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킹이 작은 전기적 소음에 고개를 돌렸다.
방금 쓰고 벗어놓았던 글러브 위로 램프들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분명 벗는 즉시 대기모드로 돌아가게 설정해 놓았는데? 킹이 글러브를 집어들었다.
철컥이는 소음에 룩의 시선이 킹에게로 향했다.
‘...럼...이야기로...가자’
화면속 대화를 추측하는 것은 순전히 운에 달린 일이었다.
톨비쉬는 기억속에 남아있는 단장의 입모양을 최대한 떠올리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이야기라는 말을 즐겨쓰는 단장의 입버릇만이 유일하게 제대로 읽어낸 단어였지만 사실 그것도 반쯤 때려맞춘 추측에 가까웠다.
밀레시안이 시선을 돌려 단장을 바라보았다. 포크가 케이크를 떠내고 있었다.
‘..과의….활….떠니..’
짧은 질문이었는지 밀레시안은 곧장 입술이 움직였다.
한입 가득 떠넣은 포크는 말끔하게 비워진채 입술끝에 머물러 있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포크는 햇빛에 반사되면서 강한 빛을 드리웠다. 밀레시안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단장이 미소짓고 있었다. 입꼬리가 아닌 눈매가 부드럽게 풀리는 웃음이었다.
‘그럼 다음 질문,’
단장은 턱을 괴고 있던 손에서 얼굴을 들어올리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본론인건지 이전 질문에 대한 파생질문인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밀레시안은 포크를 입에서 내린채 남아있는 케이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질문이 무엇인지 예상되는걸까? 밀레시안은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반쯤 갈라진 케이크에 손을 뻗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이지만 단장은 당황한 기색 없이 질문을 시작했다. 푹하고 들어간 손가락은 한마디 정도의 크림을 떠올렸다.
‘그들은..’
“그들은..”
톨비쉬가 무의식적으로 단장의 말을 따라읽고 있었다.
보통 이정도로 집중하지는 않지만 본능처럼 경고등을 울리는 불안감과 기시감이 집중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비숍이 톨비쉬를 돌아보았다. 톨비쉬는 패브릭 소재의 소파를 양손 가득 잡은채 티비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톨비쉬의 어깨너머로 글러브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는 킹과 그런 킹에게 뭔가를 속삭이는 룩이 보였다.
퀸도 화면에서 눈을 때고 킹들의 소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킹은 굉장히 불쾌한 표정이었고 룩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똑딱, 비숍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아날로그 초침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거실에 시계소리를 낼만한 물건이 있던가? 골동품에 관심이 많은 밀레시안과 룩의 방이라면 모를까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공용거실에 그런물건이 나와있을리 없었다. 하지만 분명 지금도.
비숍은 두번째 똑딱 하고 울리는 초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톨비쉬는 여전히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톨비쉬를 방해하지 않을 범위 내에서 주변을 살펴보던 비숍은 톨비쉬의 팔목에 채워진 아날로그 모양의 시계화면을 발견했다.
모양은 옛날 동그란 시계의 모양이지만 어디까지나 영상에 불과한 모조품,
시침소리의 사운들를 따로 넣을 수도 있지만 구태여 그런 성가신 재현까지 구현해 넣을리가 없었다.
변덕이나 룩의 주장에 못이겨 그런 소리를 넣어놓았다 한들 톨비쉬가 그런 설정을 세팅해 놓았을리가.
더욱이 들려오는 초침소리는 일정한 한격이 아닌 간헐적인 파음이었다.
찰카닥거리는 소리에만 집중한다면 무언가가 단계적으로 감겨가는, 태엽소리에 가까운.., 똑딱. 똑딱. 세번째와 네번째의 초침소리가 연달아 울려왔다.
이건 카운트소리다. 소파에 기대어 앉아있던 비숍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톨비쉬의 긴장감이 옮았던 걸까, 비숍은 손을 뻗으며 톨비쉬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들은, 요즘도? 여즉히? 아니야, 여전히.. 여전히.. 그들은 여전히..너에게…”
똑딱.
“톨비쉬.”
똑딱.
비숍은 나이트라는 닉네임대신 톨비쉬의 이름을 부르며 손등으로 왼팔을 툭건드렸다.
톨비쉬는 비숍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건지 빠른속도로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너에게.. 숭고..수고..성공..성..장...소.., 소유..소...중..”
“톨비쉬.”
대놓고 점멸하는 글러브를 지켜보던 킹이 글러브를 손에 끼며 룩의 화면을 끌어당겼다.
무엇이 그들의 방에 들어와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겠다는 의도였다.
룩은 그만두는게 좋겠다며 말리고 있었고 퀸은 톨비쉬에게 글러브건에 대해 말하기 위해 소파로 다가갔다.
“그들은 여전히 너에게 소중하니?”
딱.
킹이 글러브를 낀 손을 룩의 화면에 통과시켰다.
무거운 문고리를 잡아내듯 한손 가득 무언가를 움켜쥔 손동작이 역시계 방향으로 돌아간뒤 앞으로 꾹 내밀어졌다.
화면이 움푹 패이는가 싶은순간 검게 변한 화면 위로 하얗고 깨알같은 글씨들이 수도없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룩과 킹이 빠른속도로 올라오는 글자들을 읽고있었다.
비숍은 톨비쉬의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고 톨비쉬는 화면속의 밀레시안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끝의 온도에 녹아내리던 크림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밀레시안이 창문으로 손을 뻗었다.
정확히 자신의 입술이 비칠만한 자리에 희뿌연 크림을 문지르며 무언가의 대답이 끝을 맺었다.
밀레시안의 돌발행동에 놀란것은 화면을 지켜보고 있던 톨비쉬와 퀸, 그리고 한박자 늦게 고개를 돌린 비숍뿐.
한없이 계속될것 같던 글자들의 향연이 일순간 팟하고 꺼진뒤 제멋대로 재시작의 기동음을 내기 시작했다.
룩들의 화면이 끊어지는 순간 티비의 화면도 갑자기 종료.
잠시뒤 간결한 전원알림소리와 함께 비숍이 보다 말았던 드라마의 다음편이 방송되기 시작했다.
룩은 킹이 집어던진 화면을 받아 다시 샅샅히 들여다 보았지만 킹은 소득이 없을 것이라며 글러브를 벗어던졌다.
킹이 글러브를 끼는순간 녹색으로 고정되었던 램프들은 일순간 까맣게 흐려지며 원래의 평범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버렸다.
드라마는 흔해빠진 판타지 드라마로 사랑을 모르고 태어난 호문클루스가 처음 만난 특별한 존재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죽어버린다는 내용의 결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준비된 장소로 불러내는대 성공한 호문클루스가 시약을 들고 외치고 있었다.
[“사랑합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받아주지 않더라도, 세상 모든 인간들이 이게 사랑이 아니라 부정한다 할지어도. 나는 지금 이 순간, 이 그림자의 시간만큼은. 나는 내 마음이 당신을 위해 그리고 당신의 의해 살아가고 있는겁니다.
하지만.., 네. 알고있습니다. 이 관계는 당신과 내가 아닌 나의 의한 일방적인 고백이라는 것을.
이건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 아니겠지요.
해결될 문제는 없고 나아갈 출구도 없을 것이며 아무런 결과값을 내놓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경멸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절망까지 포함해서 나에게는 사랑입니다.
이루어질 가능성이 한없이 0으로 수렴한다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기적입니다.
거기있는 라이칸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 어떻게 사랑이냐고 물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느낄 수 있는겁니다.
이 아픔을, 이 고통을, 이 애절함과 절망감을.
그리고 정작 이 사랑을 받아줘야할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이 이기심까지.
이 모든 것이 나를 사람으로 만듭니다.
당신이라는 빛이 내 어두운 일면을 선명하게 드러내게 만들고 있어요.
선하지만 않은 호의, 하지만 악의라고 할 수 없는 진심.
옳고 그름을 정의 내릴 수 없는 에너지의 본질이자 나의 생명, 나의 이름.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
사랑합니다.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갈구하던 시기가 있었고 내가 당신앞에 서 있을 수 있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이 마음을 고백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내가 살아있던 찰나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다름아닌 내가, 누구도 아닌 무엇도 아닌 나 스스로가. 나의 의지로”]
시약이 떨어지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검은 태양이 떠오른 회색빛의 하늘에 생동감 넘치는 붉은 구름이 꿈결처럼 섞여들고 있었다.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 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만족합니다.”]
바람이 불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잎이 피어나고 흩어졌으며 세상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멀어지는 시점과 화면 가득 보이는 숲의 전경,
흩날리던 꽃잎을 찍던 화면이 넘어가고 주인공의 얼굴이 나타났다.
킹은 두어번 양쪽의 머리를 강하게 쓸어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라마에 푹 빠진 것처럼 얼어붙어버린 세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킹은 티비쪽으로 다가며 성의없는 사과를 건네왔다. 말과 시선과 행동이 모두 분리된 즉흥 캐스팅된 엑스트라의 서툰 연기 같았다.
“미안해. 인두 전원을 꺼놓는다는것을 깜빡해서 옆에 있던 글러브가 과열되었나봐”
거짓말. 분명 아무렇게나 던져놓았지만 열기따위에 망가질 물건은 아니었다. 한참 방열을 시험해본답시고 오븐장갑대용으로 사용하질 않나 아예 구워버리질 않나. 혹시나 방패가 미완성일까봐 온도를 낮추던 모습까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던 톨비쉬는 무슨 의도인지를 눈으로 물으며 대답했다.
“그러네, 뭐. 읽을수 있는 정보도 거의 없었으니까”
이것도 거짓말. 톨비쉬는 분명 질문을 읽어내었다.
추측하건데 그 이전의 질문은 분명 최근의 생활에 대해 물어본 것이었고 그 다음질문은 그들과의 관계성에 대해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맥락적으로 생각하자면 여기서 그들은 분명 톨비쉬들을 가리키는 단어일터.
하지만 이와 같은 질문은 벌써 여러번 면담에서 되풀이되었고 개중에는 몇번인가 대놓고 팀원들앞에서 물어본 적도 있었다. 그럼 그때 대답과 속마음은 달랐던건가?
톨비쉬는 손가락끝으로 소파를 두드리며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때 밀레시안의 표정에는 거짓이나 연기의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진심으로 성가시고 귀찮다는듯이 잔소리가 심해요. 라는 대답을 했을뿐.
그리고 또 뭐라고 했었지? 재미..? 즐거움..? 우리들의 관계도는 양호한 수준이었던가?
하지만, 그렇지만. 톨비쉬는 몇번이나 뒤집히는 생각을 추스리며 자신이 정말 제대로 질문을 읽어냈는지를 의심했다. 여전히 라는 말과 소중이라는 말이 까끌거리는 비늘처럼 혓바닥에 달라붙은 느낌이었다.
여전히 소중한가? 톨비쉬는 드라마속 남자의 대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우리들은 서로의 이름앞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아본적이 없습니다.
서로의 어렴풋한 시선을 같은 마음이라 믿어왔고 그 믿음의 증거가 없다는 공허함을 운명과 계시라는 이름으로 틀어막아 왔었죠.
맹신이었고 일종의 자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과 나란히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손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속박하지 않으려, 아니 생각하지 않으려 했었습니다.
그래요. 나는 스스로를 부정해 왔습니다.
이게 사랑일리 없다고 이런게 사랑일 수는 없다고, 나는 부정하고 또 부정해왔습니다.
동정이나 동경, 연민이나 연심의 착각이라고 스스로를 억눌러왔습니다.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당신과 내 마음이 어긋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내 마음을 파고들어가 피어있던 확신마저 시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젠 스스로의 감정도 확신할 수 없게되어버렸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비겁함도 사랑일까요?
곁에 있는 동안에도 느껴지는 고독함이 행복일까요?
나는 정말 당신을, 아니 당신은 나에게서 한번이라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본적이 있었습니까?”]
한번도, 밀레시안은 톨비쉬들과의 관계에서 소중하다는 말을 꺼낸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관계에서 정말 정의 요소는 없는 것일까?
호문클루스의 죽음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벚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사랑을 울부짖었던 만들어진 생명체의 마지막 기적, 삶의 흔적. 사랑하고 기원하고 슬퍼했다는 생의 기록문. 만들어진 꽃잎이 흩어지는 그림자의 세계를 배경으로 그 사랑의 대상에 되었던 주인공은 천천히 머리끈을 풀러 손에 감았다.
[“그렇다면 믿어주실래요? 아니면 아니라고 대답해도 믿을 수 있겠나요?”]
사랑하는 감정에 반응한다는 마법의 리본, 녹색으로 물든 리본이 입술에 닿는다.
주인공이 대답했다.
[“나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아요.
인간이 아닌 삶, 그러면서도 한없이 인간이 되려 발버둥치는 나약한 마음.
처음부터 보답받지 못할거라고 생각해 왔어요. 다시한번 기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이 사랑이 온전히 이어질리 없다고. 시간의 흐름이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요.
느끼는 감정, 지켜야 하는 대상, 부르는 이름과 불려지는 칭호.
그 무엇도 같을 수 없고 그 무엇도 함께 할 수 없어.
그래도 당신은 내게 말했죠. 함께해주겠다고. 끝까지 같이 서 있겠다고.
내 옆에서. 내 곁에서. 내 마지막을 봐주겠다 맹세했었죠.”]
손에 묶인 리본의 색이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손등에 입을 맞춘 주인공은 말했다.
[“나에겐 그 말 자체가 사랑이었어요.”]
우리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몰랐을뿐, 혹은 알면서도 모른척 했을뿐.
내 삶은 그때부터 당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말과 함께 길었던 이야기는 끝이났다.
이따금씩 비어있는 편성시간에 2-3편씩 몰아서하는 재방송이 눈에 밟혀 저게 뭔데? 하는 정도의 드라마.
남자주인공이 지나치게 톨비쉬와 비슷한 이미지여서 인지 톨비쉬는 이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한번쯤 진지하게 저 드라마가 유행시킨 색이 변하는 리본의 파생상품을 구매하려 검색한적 있었다.
그런식으로라도 상대의 마음을 확인 할 수 있다면 마음이 놓이지 않을까?
킹은 톨비쉬의 진지한 고민에 폭소했고 리본을 구성하는 화학약품과 원리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너는 아예 만들어볼 시도를 했다는 거로군. 킹이 입을 다물었다.
지나치게 자세했던 설명은 거기서 끝이났다.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 판타지는 판타지.
톨비쉬는 스스로도 정확한 대답을 찾지못해 입을 다물어버리는 작은 손을 움켜쥘 수가 없었다.
다그치는 것처럼 느낄까봐 한번도 강하게 손을 끌어당길 수 없었다.
소중하고 또 소중한.. 톨비쉬는 단장의 질문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여전히라고 말하기 전에 한번이라도 소중하게 여긴적 있는지를 물어야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화면속의 단장은 아득히 먼 건너편에 있는 톨비쉬들이 바라보듯 먼 창문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지금 이 질문과 대답은 너희들이 들어도 되는 질문이 아니야.
그것은 분명 연결된 대화였다. 그 눈빛을 마지막으로 화면속 시계가 멈춰섰다.
연결은 끊어졌고 룩의 화면도 깨끗하게 비워져버렸다.
화면이 끊기기 직전, 창문에 케이크를 문질러 입을 지워낸 밀레시안과 그런 밀레시안의 행동을 차분히 지켜보던 단장의 모습이 수초간 화면에 머물러 있었다.
고개를 들어올린 단장은 창문에 비치는 카메라의 렌즈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대답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확인을 끝낸 룩이 화면을 테이블 위로 돌려놓았다. 룩은 드물게 팀원들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몰라서 카메라 접속 기록도 다 살펴봤어”
“어때?”
“깨끗해”
깨끗할리 없지만. 하지만 이 대답만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킹이 남겼을법한 작은 흔적이나 조각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이것뿐만이라면 수고를 덜었다며 웃어넘겼을지도 모르지만 사라진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글러브가 열어낸 비상구 너머의 복잡한 기록도 함께 사라져있었다.
룩은 그 기록이 무엇이었는지 묻고싶었지만 느낌상 지금은 그것을 물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눈치였다.
퀸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비숍을 불렀다.
“그건 그렇고, 톨비쉬를 왜 그렇게 불렀던 거야?”
톨비쉬를, 이라는 말에 톨비쉬가 고개를 돌려 비숍을 바라보았다.
다른 맴버들이라면 몰라도 임무를 준비중인 이 기간에 비숍이 맴버들의 본명을 부르는 것은 드문일이었다.
비숍은 아, 하고 입을 연뒤 잠시 말을 가다듬었다.
드라마가 끝이 나고 다음화를 준비하는 동안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까칠해보이는 양갈래의 주황색 머리 소녀가 화면 가득 손바닥을 펼쳐보이며 귀여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목에 걸린 커다란 펜던트가 시선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딱, 7초만 기다려 보라니까?”
7초동안 관심을 불러일으킬만한 춤을 추던 소녀의 자리에 광고하려던 물건의 이름이 떠올랐다.
결국 무슨 물건을 알아보려면 직접 검색해 보라는 호기심 유도형 광고,
소녀가 걸어나와 카메라를 확인하고 7초를 선언한뒤 글자를 띄워올리기까지 23초 정도가 지난뒤 비숍이 입을 열었다.
“시계.. 시간이 잘 안맞는 것 같던데 확인해 보는게 좋을 것 같아서”
“아침에 제대로 맞췄는데…?”
“아까 업데이트 했잖아. 혹시 흐트러졌을지도”
비숍의 집요한 조언에 톨비쉬가 들고있던 작은 화면에 왼손을 집어넣었다.
화면이 까맣게 변하고 나이트 체스말의 모양이 화면속으로 복사되었다.
화면위로 비치는 시계속 시간과 화면 구석에 표시된 정규서버의 시간이 미묘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6초.., 아니 약 7초 정도의 오차. 톨비쉬는 소파위에 화면을 올려놓은뒤 두개의 시계를 동기화 시켰다.
“그러네. 업데이트 때문에 흐트러졌나보다”
그럴리가 있겠냐며 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톨비쉬는 비숍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새로 맞춘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시계은 여전히 아날로그의 모형이었다. 초침을 예의주시해서 지켜본다한들 약 7초가량 늦어진 초침을 알아챌리도 없지만 비숍은 천만에, 내 시계랑 묘하게 달라보이길래. 하고 대답하며 왼쪽 어깨를 털어보였다.
오른손에 채워진 비숍의 시계가 왼쪽 어깨위에 올려졌다. 시계속 비숍의 시간은 숫자로 이뤄진 디지털 모형이었다.
“아-”
킹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스럽다는 비명을 토해냈다.
킹의 짜증은 점점 높은 옥타브로 치솟다가 이내 땅이 꺼질듯한 한숨과 함께 뒷목으로 손을 넘겨버렸다.
한참 뒷목을 꽉 움켜쥐고 있던 킹이 고개를 들었다.
“시계, 다시 재조정할테니까. 다들 잠깐 반납해봐”
오늘은 야근이네.. 룩이 침울하게 속삭였다.
그렇게 전체적으로 재 조정된것이 지금의 시계와 인이어였다.
지금의 장비는 들키지 않는 선이라 할 수 있는가? 그에대한 대답은 그런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였다.
톨비쉬는 뺴낸 이어폰을 자켓안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만들기로 작정하면 피오나도 얼마든지 제로의 디바들과 같이 이어커프형이라던가 자잘한 악세사리의 모양으로 인이어를 생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킹은 일부러 잘 보이는 형태를 선택했고 톨비쉬들은 그 선택에 수긍했다.
보이는 것을 내어주고 사소한 것을 드러낸다. 그런다고 해서 시계에 대한 경계심이 아주 가시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대놓고 보여지니 수상한 짓을 할 이유도 없다-라는 의사표현은 확실히 보여줄수 있다는게 선택의 이유였다.
스탭용 통로 한켠에는 개인의 소지품과 상의를 갈아입을 수 있도록 임시 설치된 캐비넷들이 놓여져 있었다.
사전에 연락받은 요원들의 이름과 함께 내부에는 전달받은 치수로 지어진 상의들이 걸려있었다.
“과연,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은 이유가 이거였네요”
제로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멀린의 요원이 친근하게 말을 붙여왔다.
넉살좋게 안면을 튼다기보다는 자신을 아는지 떠보는 느낌이 강한 인사였다.
어떻게 대처할까, 톨비쉬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내지 못한 상태였고 그는 그런 톨비쉬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눈치였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다른 피오나의 요원들도 어쩐지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표정으로 이쪽의 상황을 엿듣고 있었다.
도와주기는 커녕 톨비쉬의 대답에 따라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다리고 있겠다는 관찰자의 시선이었다.
아는척을 하든 모르는 척을 하든 어쩔수 없이 독박을 써야하는 분위기에 톨비쉬가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제로를 바라보았다. 유난히 새파랗게 질려있는 스카이블루빛 시선이 톨비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러 눈동자는 잊으려해도 잊기 힘들텐데 말이지.
아무렇게나 둘러댄 대답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대기 모드였던 시계가 가볍게 진동을 울리며 재기동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입김이 닿은 강제모드가 분명했다.
“아, 실례.”
분명 더이상의 반응이 없도록 꺼 놓았던 시계의 진동에 톨비쉬는 이전날의 이변을 떠올리며 신중하게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다행히도 일반적인 전원마크를 생략하고 킹의 아이콘이 크게 화면을 밝히고 있었다.
재 기동된 시계는 시간표시를 생략한채 곧장 메세지함으로 연결되었다.
메세지의 수신자를 확인한 톨비쉬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관찰하던 새파란 시선이 불쾌함으로 뒤틀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양해를 구한 무시에 대한 불쾌함은 반절정도, 나머지 반절은 호기심으로 채워진 시선이 톨비쉬의 어깨 언저리에 머물렀다.
다름아닌 그 톨비쉬가 표정이 확 변하는 메시지라니, 무슨 메세지인지 궁금증을 가지지 말라는게 더 수상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호기심을 드러내기에는 다른 피오나의 요원들의 경계심이 이쪽으로 옮겨오고 있었다.
더이상 파고 드는것은 무리일지도, 제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은 멀린의 요원은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뒤로 물러섰다. 애초에 뭐라 대답하든 그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알고 싶었던 것은 그가, 그리고 그들이 나를 기억하는가에 대한것.
하지만 그 누구도 아아, 너는.. 하고 예상된 반응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정도면 충분했다.
잊혀지고 지워지고 파묻혀진 이름의 반응이 충분히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제로는 타이밍 좋게 지나가는 스탭을 잡으며 피오나를 등진채 자신의 케비넷으로 걸어나갔다.
어렴풋하게 무언가를 기억해내려는 피오나의 시선이 케비넷의 이름칸에 머무르지만 옷을 갈아입는 디바측 요원의 방해에 제대로 살펴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빤히 보고 있던 피오나를 보며 명백히 비꼬는 의도의 비소를 돌려받았을뿐.
갑작스러운 비호감에 반응 할 새도 없이 제로는 정말 바쁘다고 발을 동동거리는 스탭을 잡아 끌며 거울쪽으로 몸을 돌렸다. 등돌려 선 모습이 어디의 누군가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바로 옆자리에서 뒤늦게 옷걸이를 꺼내들고 있는, 그런 누군가와 비슷한 의도가 느껴지는 뒷모습이었다.
“여기, 이 피어스들은 사전에 허가 받은거니까 안빼도 되는거죠?”
스탭은 그걸 물어보려고 이렇게 붙잡은 것이냐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로는 제대로 피어스의 숫자를 확인해달라고 실랑이를 벌이며 양쪽 귀를 기울여보였다.
괜히 나중에 하나 두개 더있네 없네 하면서 트집잡히고 싶지 않다는 등쌀에 스탭은 가지고 있던 개인 단말기로 제로의 양쪽 피어스를 찍어 확인을 요청했다.
오른쪽에 4개 왼쪽에 7개. 모양과 갯수가 사전에 연락받은 정보와 일치한다는 대답을 들은 다음에야 스탭은 겨우 제로의 손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렇게 중요하면 카페에서 확인받지 그랬냐며 잔소리를 해오는 디바들에게 멀린의 요원은 콧노래를 부르며 상의를 꺼내들었다.
나도 알아. 소매를 정리하던 톨비쉬가 스쳐지나가는 입모양을 읽어내고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지시받은것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톨비쉬를 기다리고 있던 피오나들이 스탭을 따라 내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세번째 문이 열리고 극장의 내부가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