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reload

톨비밀레) reload #3

Tecla 2016. 12. 31. 10:53




8.


“밀레시안.”


이름이 불린다.


“밀레시안,”


시선이 향하고,


“밀레시안?”


손이 내밀어진다.


“밀레시안..”


시간은 물과 같이 흘러내리는 것이였다. 

양손으로 틀어막아도, 등돌려 얼굴을 가려도, 쏟아내져리는 기세 그대로 흠뻑 밀레시안을 적시며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다정한 목소리와 의미모를 상냥한 손길과 함께, 금발의 모습을 한 남자는 끊임없이 밀레시안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가 지나간 길을 뒤쫓아왔다.


하지만 정말 뒤에서 오는걸까? 밀레시안은 문득 길을 걷다가 눈앞을 가득 매우고 있던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톨비쉬, 톨비쉬. 밀레시안은 소리없이 그를 불렀다. 멀어지려는 다갈색 모자를 눌러쓴 금발이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에 금방이라도 뒤쫓아가야할것 같지만 밀레시안은 손목을 구부려 단단한 감촉을 확인했다. 그녀에게는 팀원들이 함께하고 있었고 시계도 채워져있었다.


그녀가 어딘지 모르겠다고 자각하기도 전에 시계의 알림음은 잔소리마냥 울려댈 것이고 도시의 카메라들은 제 할일도 내팽겨친채 고갯짓으로 길안내를 시작한다. 라디오의 주파수가 바뀌고 진열된 티비의 채널이 멋대로 돌아가며 방송중인 오디오의 음성을 통해 잔걱정을 주절거린다.


‘응? 어디서 그걸 구하..’

‘그렇게 또 많ㅇ..’

‘한 쪽눈을 감은 상태에서..’

‘자자, 쌉니다 싸요. 다 팝니다 팔아요-!’


어디서 또 한눈을 팔아? 알았어요. 가요 가. 밀레시안은 대강의 감만으로 카메라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끄덕. 고개가 움직이자 당황한 점원이 두드리고 있던 텔레비전들이 다시금 동일한 채널로 맞춰졌다. 

미안하기도 하지. 밀레시안은 별로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가전제품 샵을 돌아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녁시간이 되어서인지 사람들은 잠깐사이에 배로 불어난 느낌이였다. 저물어져가는 거리로는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저마다의 건물에서, 저마다의 교통수단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물고기때마냥 몰려다니며 화려한 거리에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냈다. 한 방향 한 목적지를 향해, 묵묵하게 걸어나가는 사람들의 머리위로 은은한 조명들이 하나 둘씩 불을 밝혔다. 


색색들의 옷과 이제 막 켜지기 시작한 거리의 조명이 어우러지자 안그래도 복잡한 거리에 다채로운 빛이 틔어났다. 

반짝반짝 했다, 어두컴컴했던 복도의 일은 이제 먼 옛날 처럼 느껴지는 거리감이 밀레시안을 스치고 거리끝으로 내달렸다. 

가도 괜찮은걸까? 뛰놀듯 멀어지는 그림자를 향해 물었지만 대답해 줄사람은 이미 곁에 없다. 노을이 저물어졌다. 

도시에서 보이는 노을이라고 해봤자 저물어가는 태양과 먼지의 합작품이였지만, 그마저도 어둑한 빌딩과 건물들 사이에 가려져 안보이는게 대다수였지만, 밀레시안은 언제나 해가 저물어져가는 그 시간대즈음 사라지는 태양의 온기를 숫자마냥 꼽아가며 생각했다. 

오늘도 태양이 저물었다. 노을은 늘 시선속에 남아있다가 눈을 감았다 뜨는순간 사라져버렸다. 밤이 찾아오는 시간이였다.


밀레시안은 쑥 빠져나가는것같은 마음속 공허함에 시선을 내려 가슴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가도 괜찮은걸까? 손목시계가 다시 전자음을 울려대었다.

아, 정말 놓칠지도. 거리 하나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사이에서는 무리였다. 

더욱이 남들보다 걸음도 빠르고 보폭도 큰 사람이니까. 하지만 지금즈음이면 쫓아갈 수 있는 범위를 벗어 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을 다시 눈앞으로 고정시킨 밀레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멀리 스쳐지나가는 사람들보다 한뼘정도 더 커다란 머리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거꾸로 마주선 시선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흐름을 거슬러 역으로 걸어오는 모습이지만 맞닥트린 사람들중 그 누구도 그를 향해 불쾌한 표정을 지어보이지 않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덩치탓이기도 했고 그의 입가에 걸려있는 부드러운 미소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아주 약간의 곤란함과 당혹스러움을 즐거움으로 얼버무린채 밀레시안에게 다가왔다. 양손은 주머니 속에 꽂고 있었지만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춘 톨비쉬는 정말 미안하다는 마음을 담아 밀레시안에게 사과를 건네었다.


“이야, 미안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정신없다 걷다보니”

“나도 뒤쳐진거에요.”


이제 밀레시안은 이럴때 해야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니에요. 라고 상대방의 사과를 반쯤 돌려준뒤 내가 뒤쳐져서. 라고 그의 오류를 정정해야했다. 그리고 미안하다라고 다시 사과하던가 이제 똑바로 따라갈께요 라고 재발방지를 위한 약속을 하는것이 옳았지만 밀레시안은 일련의 선택지들을 모두 구겨쥐었다.

교과서적이긴 하지만 밀레시안은 그 방식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당신 말이 맞아 날 좀 돌아보고 신경썼어야지. 밀레시안의 뾰로퉁해진 표정에 톨비쉬는 더욱 환하게 미소지었다.


어느정도 대화법은 늘었지만 표정은 여전히 숨기지를 못하는 모습은 여전히 그와 그의 팀원들의 소소한 즐거움중 하나였다.

즐겁긴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귀엽게만 볼 수는 없는 탓에 다채로운 표정이 필요한 임무를 최대한 배제하는 단점이였지만 톨비쉬는 밀레시안을 위해 기꺼이 그 수고로움을 떠안았다.

사람의 심리쪽을 담당하던 전 팀원의 자리에 밀레시안의 재능이 적합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밀레시안이라면 이전의 팀원과 톨비쉬, 두사람분의 전투력을 보강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기에 팀원들도 그의 자리이동에 크게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다.


“사실 그것보다는 어느정도 그녀의 모습을 원형 그대로 남겨두고 싶거든”

“새로운 취향이야?”


톨비쉬는 훈련용 글러브를 벗다가 팀원에게 집어던졌다. 악랄하게도 그는 투덜거리는 팀원의 뒤로 다가가 벤치프레스의 무게를 늘리기까지 한다. 팀원은 앓는소리를 넘어 죽는다 비명을 질렀지만 톨비쉬는 웃어보였다. 

누가보아도 알수 있을정도로 사랑에 빠진 미소였다. 톨비쉬는 밀레시안에게 푹 빠져있었고 그런 그에게 밀레시안의 농담은 은연중에 금기가 되어있었다. 비록 그의 팀원들은 꿋꿋이 그를 놀려왔지만. 

적어도 그의 팀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의 앞에서 밀레시안을 키우는 이라는 말따위는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밀레시안은 잘 크고 있나?”




한사람 더. 단장을 제외하고는.


“그녀는 성장기가 끝난지 오래인 성년의 나이인거로 알고 있는데요”

“몸만 크다고해서 선을 넘으면 안되지”

“안 넘었습니다만”


“알아. 요즘은 꼬시러 잘 안나간다는 소리가 자주 들려오더군”

“임무가 워낙 바쁜탓이죠. 그리고 꼬시러 가는게 아니라 술을 마시러 가는겁니다.”


“그러게 말이야. 어느팀인지는 잊어버렸는데 그 바쁜와중에 자네가 어떻게 그렇게 자주 단골술집에 출몰하는지 알아내려 몇년간 비밀리에 추적중이였다더군. 하지만 이제 다 허사가 되었다고 서운해 하던데”


어느 팀 입니까, 그거. 톨비쉬는 제출하러간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나지막하게 물고 늘어졌지만 단장은 웃음소리와 함께 톨비쉬를 쫓아냈다. 단장은 피곤할때면 이렇게 매몰차게 웃곤했다.


실리엔 연구단지의 1차 조사를 끝내고 난 직후부터였을까, 잠들어있던 바이브카흐의 유산을 찾아냈다는 소식에 피오나와 톨비쉬의 팀은 한동안 시끄러운 질문세례에 시달려야만 했다. 

또다른 임무들을 핑계로 그리고 더 위에서 내려졌다는 함구령을 핑계로, 톨비쉬들은 능구렁이가 덫을 빠져나가듯 자연스럽게 질문의 올가미를 빠져나갔지만 대신 그 안에 들어가야하는 것은 명령의 총책임자로 기록된 단장의 몫이였다.


어디서 위치의좌표를 알아냈는지, 어떻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지. 어떻게 중앙동의 보안을 해제했는지. 정보원은 누구인지. 수도 없이 많은 입들을 통해 앵무새가 조잘거리는 것같이 똑같은 질문들이 되풀이되었지만 단장은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으며 죽었습니다. 라고 대답할 뿐이였다.

정보원을 발견했을땐 이미 죽어가고 있었고 실제로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안에 들어간것은 요행의 연속이였을 뿐이다. 가장 실력있는 팀에게 운까지 따라붙었을뿐. 그걸 믿으라는 항의속에도 단장은 의연함을 잃지 않은 시선으로 단상아래를 내려다 볼 뿐이였다.

렌즈너머로 차가운 시선이 내리꽂혔다.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겁니까?”


피오나는 실리엔을 등에 업고 가장 강력한 화력을 가진 단체가 되었다. 

어디까지나 에이전시로서 따질때만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것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피오나는 개인이 위치한 단체중 가장 강력하다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선 것이였다.

그런 피오나를 주변에서 가만히 두고 볼 리 없겠지만 피오나는 피오나로서의 이름에 의미를 갖고있었다. 

그것이 에이전시로서의 이름인지 단장의 이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톨비쉬는 도발과 조롱의 의미가 가득한 답변에도 그 누구하나 불쾌함을 드러내지 않는 회장을 보며 생각했다.


이 두려움이 고작해야 실리엔기술 때문인걸까? 피오나에 오래 몸담고 있는 요원들이라면 몇번인가 보았을 기이한 현상. 

톨비쉬는 팀원과 술을 마시며 그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른 배경 다른인물 다른사건 다른시간이지만 피오나의 요원으로서 가진 의문점이 가르키는 맥락은 명확하게 전달되는 익명의 이야기였다. 팀원은 호박색으로 빛나는 술을 돌리며 대답했다.


“글쎄, 단장은 그 이야기 하는거 별로 안좋아해서”


팀원은 기껏해서 꾸며낸 익명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박살낸뒤 술을 들이켰다. 똑딱, 시계침이 움직인 바 안에는 그와 팀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다. 바텐더는 그들의 이야기로부터 눈을 감은채 한쪽으로 비켜나 잔을 닦고 있었다. 곧게 서있는 자세가 인상깊은 여성이였다.


“나도 이름은 꺼내면 안된다는건 알고 있네”

“음… 프로젝트 아발론 말이지..”


이름 꺼내면 안된다며, 

톨비쉬는 게슴츠레해진 눈으로 팀원을 흘겨보며 술을 홀짝였다. 오래간만에 마시는 술맛이 화들짝 달아날 무심함이였다.

팀원은 전혀 개의치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말하는거 안좋아하긴 하지만 말하지 말라고는 안했어. 팀원은 혀끝으로 입술을 훑었다. 잔잔하게 남은 술의 향기가 진한 여운을 남기었다. 잠시 혀끝을 우물거리던 팀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 만든건지 바텐더는 새 잔을 내려놓고는 다시 자기자리로 가버렸다. 잠시 팀원의 술을 바라보던 톨비쉬가 성의없이 술잔을 비우고 바텐더에게 부탁했다.

 같은것으로. 바텐더는 이제 막 닦기시작하려는 잔을 잠시 아쉽다는듯이 보다가 뒤를 향해 돌아섰다. 

팀원을 새 잔을 한입 들이키고 입맛을 다셨다. 맛이 괜찮은 모양이였다.


“단장이 그 프로젝트 출신의 재능자인건 공공연연한 비밀이야.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실행했는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지원자가 있었고 어느정도 성공했으며 몇 명이 완성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확실한건 단장은 증명했지, 그리고 잠시 사라졌어”


“그리고 피오나를..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이 그 말을 순순히 믿었던가? 아니, 그런 그를 놓아 주던가?”

“믿지 않으면, 그리고 놓아주지 않으면 어쩔꺼지?”


팀원은 단장의 도발과 똑같은 말을 하며 피식웃어보였다.

99퍼센트의 재능과 1퍼센트의 운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단장의 재능은 절대적이였다. 

전투, 화술, 생활기술, 공학기술, 혹자의 증언에 따르면 노래와 인형술도 수준급이라고도 하지만 톨비쉬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형술은 의외로군.”

“글쎄? 그 시대에는 중요한 재능이였을지도.”


시대가 바뀌면 선호되는 재능도 바뀐다. 

그 때문에 팀원들은 아주 잠시, 밀레시안 또한 프로젝트 아발론의 또다른 생존자가 아닌지를 의심하기도 했다. 

프로젝트에 대한 모든 이름과 정보 그리고 그 존재까지 모두 지워졌지만 피오나의 단장이 데리고온 작은 여성이 보여준 뛰어난 재능은 시간과 정보의 괴리감을 넘어 섣부른 추측을 가능케했다. 밀레시안은 소녀의 모습을 한 삐에로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말했다.


“톨비쉬도 와이어는 다룰 수 있잖아요”

“하지만 인형은 못다루지”


“해보면 할 수 있을꺼에요. 둘다 비슷해요. 어느실을 잡아당기면 어느 선이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정도만 알면 되니까. 바보가 아니라면 할 수 있겠죠.”


톨비쉬는 그 말은 우리 팀 밖에서 하면 안된다고 주의를 주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런다고 해서 다른팀들과 맞닥트리지 않게 할 수가 있을까.

톨비쉬는 자신의 팀이 아닌 다른 팀에 밀레시안이 나타났을 때를 가정했다. 갑자기 나타난 슈퍼루키가 소개할 틈도 없이 모든 에이전시들이 탐내는 실리엔 연구단지 임무에 참여하고 단장 못지 않은 다양한 재능을 내보이고 있다?

수상하다못해 의심까지 가는 설명들에 톨비쉬는 쓴웃음을 지었다. 

찾아오겠지 찾아오다못해 몰래 숨어들 기세가 하늘을 찔렀지만 밀레시안이 속한곳은 다른 어디도 아닌 톨비쉬의 팀이였다. 

자타공인이기도 하고 단장의 공인이기도한 최고의 팀, 톨비쉬는 낮잠을 자다 일어나 하품을 하는 팀원이 푸대자루를 들고 나가는 것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밀레시안의 인형도 밀레시안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디가요?”


밀레시안이 말을 붙였다.


“하암, 고철주으러.”


팀원은 바짝 눌린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다시한번 하품을 했다.


“요즘 애들은 비싼거 많이가지고 놀더라. 우리동네는 드론이고 뭐고 카메라도 귀중했는데”

“그게 돈이 되요?”


“응, 무지무지 잘팔려”


그는 갑자기 생기가 돌아온 눈으로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일을 하면서 왜 돈이 모자른지는 톨비쉬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는 밀레시안을 돈들어오게하는 복고양이정도로 생각하며 쓰다듬고 있는 모양이였다.


밀레시안은 뭐 그런취급이 다있냐는 얼굴이였지만 팀원의 쓰다듬는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밀레시안은 다시 인형을 움직여 박스안에 집어넣으며 글러브에 연결되었던 와이어를 해제했다. 톨비쉬는 삐져나온 선들을 정리하느라 구부려 앉은 밀레시안의 뒷통수를 내려다 보다가 손을 뻗었다.


맨손은 싫어하지만 장갑낀 손은 괜찮았으니 시도해봐도 되지 않을까? 톨비쉬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은 거의 모든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였지만 밀레시안은 귀신같이 톨비쉬의 접근은 알아채며 몸을 돌렸다.

안정되어있단 포근한 분위기 대신 불쾌함과 경계심이 가득 떠올랐다.


“톨비쉬는 하지 말아요”


밀레시안은 유독 톨비쉬만이 쓰다듬지 못하도록 경계심을 드러내었다. 

너무하다고 푸념하며 이유라도 알려달라고도 물어봤지만 밀레시안은 보통은 남의 머리 안 쓰다듬지 않아요? 라는 정상적인 답변으로 팀원을 놀라게 만들 뿐이였다. 그래, 그 말이 맞긴하지. 

팀원들은 어쩐지 측은한 시선으로 톨비쉬를 바라보았다. 톨비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옆에서 취미에 열중중이던 팀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하는거야!!”

“자네가 가장 높이가 비슷해”

“너 지금 키 크다고 자랑하는거지?!”

“조금 작긴하군. 밀레시안보다”


“야!!!”


밀레시안은 격렬하게 저항하는 팀원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실리에 먼지에 입을 맞추었을 때 처럼 입맛이 쓰거워지는 순간이였다. 그떄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톨비쉬는 막 내밀어진 잔을 한입 크게 들이켰다.

훅하고 치고들어오는 독한느낌에 톨비쉬는 먼저 잔을 마신 팀원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조금씩 마셔야지. 팀원은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손길로 잔을 들어올렸다. 연녹색의 불투명한 액체가 글라스를 따라 기울어졌다.


붉그스름한 벽면의 벽지와 상반되는 빛깔. 톨비쉬들은 연보라빛이던 실리엔이 뿌연 연두색에서 하늘빛을 띄어가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저마다 입을 열었다. 




실리엔을 다루는 기술은 보통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였지만 실리엔 연구단지의 중앙동에 들어선 피오나는 그 기술을 거저 얻은것이나 다름없었다.

본편에 해당하는 지하구역 실리엔 운석이나 기타 다른 매장된 실리엔들은 뒤늦게 숟가락을 얻는 기타 다른 나라, 에이전시들과 나누어 연구한다는 조건 이 따라붙었지만 연구시설 자체가 저장된 피오나 전체의 팀이 듀얼건을 상용화 하기에 충분한 양이였다. 

물론 듀얼건이 지급된다는 조건하에.


힐웬공학의 진수, 장비를 운에 넣어야할지 재능의 일부로 보아야할지 새로운시각을 열게한 발레스사의 단골고객이 될 기회이지만 피오나에 그런 재력이 있을까, 톨비쉬는 자신의 몸값이나 팀원들의 인센티브, 피오나 전체의 금전적 가치와 수익성을 계산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택도 없는소리. 하지만 단장은 깔끔하게 서류에 사인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힐웬공업용 장갑을 벗지도 않은 손으로 악수를 끝낸 크루크 제르바쉬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피오나의 본사를 나갔다. 

밀레시안과 함께 본사 외곽 정원을 돌아가고 있던 톨비쉬는 잠시 걸음을 멈추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만족감, 기묘함, 약간의 떨떠름함과 흥미로움. 단장을 만나고 온 대부분의 유명인사들에게선 두려움과 흥미로움이 맴돌았지만 그는 꽤나 즐거운 모양이였다.

다혈질에 무예쪽에 관심이 많은 열혈 회장님이라고 들었지만 그래서였을까? 톨비쉬는 소매를 잡아당기는 밀레시안의 손짓에 고개를 돌렸다.


“단장님이 빨리오라는데”


단장은 2층의 카페, 윈도우 너머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진동벨이 붉은 빛으로 반짝였다.




“할 수 있겠나?”

“네”


파삭하고 부서지는 마카롱이 밀레시안의 입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사라졌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필링이 맛있는지 밀레시안은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와 달리 꽤나 행복해보이는 미소를 짓고있었다. 기억해놔야지. 톨비쉬는 방금들은 체결조건의 일부분에 대한 기억을 밀어내며 밀레시안의 행복한 얼굴을 세겨넣었다. 

피오나가가 발레스의 정식 협력업체가 된다던가 거의 모든 요원들에게 듀얼건이 지급될 것이라던가, 다만 제더나 메르엘정도에서 그치게 되겠지만 대신 리페어 키트를 조금 더 얹어 받는다던가. 


수도 없이 중요한 이야기가 텅 빈 카페에서, 보안도 없이, 스쳐지나가는 이야기 마냥 지나가는 괴리감에서 톨비쉬는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를 포기하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마카롱을 보관중이던 냉장고가 열리는소리가 이어졌다.

밀레시안은 단장의 조건이 어렵지 않다는것 처럼 대답하며 빨대를 입에 물었다. 

쪼르륵 올라가는 음료가 한순간 연하게 흐려졌다가 얼음탑을 무너트린다.


“하지만 괜찮겠어요? 실리엔의 정제 기술을 넘기면 컨버터도 넘어갈텐데?”

“그정도는 감수 해야지”


실리엔 컨버터, 발레스가의 유일한 약점이자 듀얼건이 세계시장으로 넓게 퍼져나가지 못한 이유. 

남다른 위력과 편의성으로 무기 자체의 고급화는 성공했지만 보급화는 하지 못했던 발레스는 사라진 네반제약 때문에 더욱 시장속깊은곳으로 파고들어야만 했다. 

그 남다른 프라이드때문에 앓는 소리는 안하고 있었지만 한 건 한 건 장인으로서의 자존심과 금전적인 밸런스사이에서 골머리를 썩고있던 발레스에게 피오나의 재 발견과 기술의 복원은 그야말로 뜻밖의 행운이였을 터였다.


당장 요구하는 조건이 억지에 가깝더라도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한다면 뿌리칠수 없는 유혹, 

장갑을 벗을 여유도 없이 당장 피오나로 날아온 크루크는 선뜻 컨버터이야기부터 꺼내는 단장의 모습에 인상을 찡그려보였다.


“내가 호구로 보이시오?”

“내가 사기꾼으로 보이나 보군요.”


단장은 온화해보이는 사람의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예의와 격식은 갖추었지만 더할나위없이 편해보이는 모습의 단장은 여유로운 손길로 크루크앞에 계약서를 내밀었다. 

무기상인과 에이전시사이에 엮여진 온갖 제약들과 기본규정, 세계의 눈, 동업자의 감시망 등의 사사로운 내용들을 지나 단장이 요구한것은 단 세가지. 

하나, 이전한 기술은 오직 발레스에만 남는다. 

둘, 기술의 원천은 더이상 묻지 않는다. 

셋, 모든 피오나의 직원들이 사용할만한 듀얼건을 제공한다.


“직원? 요원이 아니라?”

“직원입니다”


“전쟁이라도 일으킬 참이오?”


“하하하, 무서운 소리를 하시는 군요”


단장은 큰일날 소리라며 웃었다.

크루크는 컨버터라는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단장은 그의 성미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그가 얼마나 컨버터를 원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블랙레이븐을 때어놓고 단신으로 찾아와 달라는 말에 두말않고 제발로 들어와준 그의 모습은 주변에서 말하는 그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를 믿을 수 있을까? 단장은 아무도 조언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며 차를 들이켰다.

마주잡았던 손에서 씁쓰름한 광물의 냄새가 베어나는 것 갔았다. 밀레시안은 가늘게 변한 단장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바이스와 실비아를 지울 생각인거죠?”


“그렇네”


“피오나는 저장된 마력탄에 대한 자료만 사용할꺼고요”


“그렇게 공표하겠지”


“피오나는 발레스를 폭주 시킬생각인가요?”



“밀레시안..!”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질문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단장은 오히려 그런 톨비쉬를 말렸다. 

그녀는 이해타산을 따지는것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실리엔과 힐웬으로 할 수 있는것이라면 여기 앉은 그 누구보다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 세상을 뒤집어 놓기에는 그 두가지 만으로도 충분해요. 밀레시안은 단장의 눈에서 시선을 때지 않은채 빨대를 물었다. 

새로 가지고온 마카롱은 줄어들지 않은채 송골송골한 찬이슬에 젖어들었다. 

모양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냉기 가득하던 접시는 온화한 카페의 온도에 동화되어 미지근히 덥혀졌다.


“발레스는 폭주하지 않을꺼야. 그는 분명 열정적이고 다소 격렬한 성품을 갖고있지만 동시에 아주 유서깊은 바쉬배르 집안의 후손이기도하지”


“과거의 영광이 그를 붙잡고 있을거라는 건가요?”

“그의 영혼에는 긍지가 세겨져 있다는 뜻이였네.”


단장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대답하며 눈을 깜빡였다. 

불안감? 톨비쉬는 본능적으로 읽게되는 표정과 눈이 마주쳤다. 이사람아 지금은 좀 못본척하고 있어. 단장은 살풋 찌푸린 눈썹으로 톨비쉬를 타이르고는 밀레시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밀레시안은 새로운 지시사항을 전달받는것 같은 집중력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녀에겐 모두 처음 듣는 단어였을까? 톨비쉬는 영혼과 긍지라는 단어선택에 의문을 표하며 단장을 바라보았다. 

단장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정하고 애틋해보이는 미소였다.


“발레스의 우직함은 충분히 단단한 방패가 되어줄꺼야. 

그게 피오나를 마주볼지 등질지는 나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지금의 피오나에게는 지지할만한 단단함이 필요하다. 

힐웬처럼 순수하고 강인한, 실리엔처럼 변화무쌍하고 강력한. ”




밀레시안은 피오나의 지하 공방에서 간이형 컨버터를 만들었다. 

톨비쉬와 팀원들, 바쉬베르가의 수장과 발레스의 연구원들은 모두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간단하리만큼 짧은 공정이였고 높은 숙련도를 요구하는 고난이도의 기술도 아니였다. 

하지만 그 공식이나 발상은 상당히 혁명적이였던 것인지 발레스의 연구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유리창 가득 코를 밀어대었다. 힐웬공학에 관심이 있던 팀원도 그보다는 덜 감성적인 반응으로 견학실 유리창에 바싹 다가서 있었다.


“저게 실리엔과 힐웬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거지”


“대단한건가?”

“네 손에 네 빚더미를 4번을 갚을 수 있는 최신형 무기를 쥐어주는 대단한 분이셔”


“………”


“참고로 피오나의 소속된 누구든 듀얼건분실하며 회사 내규 뿐만아니라 국제적 문제로 번져나가니까,”

“짧은 생각은 걷어치워.”


톨비쉬들이 입을 딱 벌린 팀원을 갈구는 동안 밀레시안은 만들어진 컨버터를 상자안에 넣어 위로 올려보내고는 한쪽에 자리한 태블릿을 집어들었다. 외부로 연결되는 통신포트를 주었던 실비아는 다소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밀레시안의 얼굴은 차광용 헬멧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바이스나 실비아는 어렵지 않게 그녀를 알아보며 인사했다. 바이스는 다소 기가막힌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정말 생각지도 않은 사람의 손에 문을 닫게 되네요”


“흐윽, 그.. 건강하고, 너무 실리엔이랑 많이 접촉하지 말고..”

“있지, 우리까지 사라지면 인류 역사에 너무 큰 손실이라는거 알고는 있는거죠?”


“밥 꼬박꼬박 먹고다니고요…흑, 팀원들이랑 싸우지 말고.. 그 다정하신 분께도 안부좀 전해주세요”

“오래간만에 말이 통하는 인간들과 만났다 했다니 대뜸 연구소를 폐쇄하라니.. 뭐, 이유는 대충 알것같지만.. 정말 웃기지도 않아 AI의 눈을 가리는게 가능할꺼라고 생각한거야 그놈들은?”


“다음은 없겠죠? 역시 좀 더 많은 토끼들을 지하 구역으로 밀어넣는거였는데..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토끼들에게 물리면 바로 중화액 뿌리고요..?”

“아유!! 얘는, 그만 좀 찔찔짜세요! 청승맞게 뭔 삐—”

“마스터, 우리 아직 방송윤리코드 삭제 안해서 그런말 쓰면 자동변환 돼요.”


“삐—, 삐——, 악!! 짜증나!! 너! 유일하게 남은 밀레시안!! 이제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 잘들어요!”


삐— 라는 변환음이 들릴때부터 일찌감치 오디오를 내려버린 톨비쉬가 왜 궁금한데 못듣게 하냐는 연구원들을 향해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쉿,’


입술을 지그시 누르는 톨비쉬의 행동에 연구원들은 각기 다른 미묘한 반응으로 대답했지만 곧 그것도 잠시, 견학실로 올라온 컨버터의 모습에 다들 정신이 팔린채 톨비쉬와 밀레시안을 등진채 견학실 문쪽을 향해 우르르 몰려가 버렸다.

옆에 앉아있던 팀원은 잠시 톨비쉬를 바라보지 않으려 하다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거, 아가씨들한테 먹힐법한 얼버무리기를 중년 아저씨들에게 쓰지 말아줄래?”

“모두에게 먹히던데, 이상하군”


톨비쉬는 너스래를 떨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창문너머에서 밀레시안은 태블릿을 향해 연식 고개를 끄덕이며 바이스와 실비아의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쩌면 유일하게 밀레시안의 예전이야기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 톨비쉬는 그들이 무슨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해하며 오디오 버튼을 만지작 거렸다.


“잘 하세요, 열심히 하는것 뿐만 아니라 잘 하라고요. 

네가 결정하고 네가 선택한 상황이니 열심히 살아가고 잘먹고 잘 살아요. 떠밀려왔던 이끌려왔던 이 버튼을 누르는것이 네 손가락인걸 잊지 말아요”


“흑, 너무 그렇게 압박주지 말아요.”

“압박주는거 아니에요. 이건 그냥 데이터 삭제고 우린 그냥 말많고 오지랖넓은 AI 두 명이었을 뿐이에요. 

너가 왜 그 자리에 서게 되었고 어떻게 거기까지 된지는 잘 모르겠지만”


바이스는 말을 멈추었다.

 AI에게 이런 표정을 집어넣은 저의가 무엇일까. 밀레시안은 한번도 본적없는 바이스의 이미지파일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녀도 나를 그런 눈으로 본다. 

밀레시안은 흐물흐물하게 가라앉은 녹색빛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눈을 깜빡였다. 몇번을 감았다 떠 보아도 그의 눈빛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쪽을 보고, 나를 보고, 때아닌 냉해에 쓸려 축 늘어져버린 어린 새싹이 띄는 죽음의 빛처럼 깊게 가라앉은 녹음은 그녀를 보며 속삭였다.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라면 계속해서 나아가도록 하세요”


녹음된 음성이 가슴에 사무친다.



발레스사의 연구원들이 돌아갔다. 

크루크는 일이 모두 끝난 뒤에야 단장의 행방을 물었다. 톨비쉬는 단장의 부재에 유감을 표하며 단장의 대리를 소개시켜주었다. 

자기소개의 연장선이였지만, 톨비쉬는 마치 처음 만나는것처럼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크루크는 톨비쉬의 안내를 받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다 좋은데 이놈의 기자회견은 해도해도 익숙해지지가 않아. 톨비쉬는 공감의 웃음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플레시가 펑펑 터지자 톨비쉬는 다시금 문안쪽으로 물러섰다. 크루크의 넓은 등이 톨비쉬의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그것이 피오나에게 필요한 모습. 


톨비쉬는 기자들의 앞으로 걸어나가는 크루크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수많은 시선들과 렌즈 앞에서도 주눅이 들거나 긴장하는것이 아닌 자연스럽고 당당한 제왕의 발걸음. 그는 두팔을 펼치며 말했다. 











9.


“밀레시안?”


아,


밀레시안은 호박색 가로등을 등진채 그림자를 기울이는 톨비쉬를 바라보았다. 

완벽하리만큼 맑은 벽안이 붉은기 도는 황백색 조명을 등진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삐졌나요? 화난건 아니죠? 달콤함을 섞은 서운함이 밀레시안에게 한걸음 더 다가섰다.


“아니에요. 얼른 가요”


밀레시안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걸음을 옮겼다. 

저벅, 옆으로 몸을 기울인 그가 밀레시안의 길을 막아섰다. 오른쪽, 다시 왼쪽.

길마다 막아서는 그의 코트자락에 밀레시안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톨비쉬를 올려다보았다. 톨비쉬는 잠시 모를듯한 표정으로 밀레시안을 내려다 보다가 입을 열었다.


“왼손 좀 잠시 줄 수 있겠나?”


톨비쉬의 묵직한 제안에 밀레시안은 이유를 되묻거나 망설이지 않은채 바로 손을 내밀었다. 

삐삐삐삐, 거리의 소음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울리던 손목시계가 톨비쉬의 조작 몇번에 목소리를 잃는다.


“아!! 저녀석!! 꺼버렸어?!”


밀레시안과 톨비쉬의 호출기를 연타하던 팀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질렀다. 

트럭이 들썩이자 지나가던 사람들의 의아해하는 시선이 잠시 트럭에 집중되었다. 팀원의 비명을 들은 다른 요원들이 허탈한 웃음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한숨에도 희뿌연 입김이 서리지 않은곳이 없었지만 그들은 잠자코 몸을 떨어 추위를 떨쳐내며 제시간까지는 오기로한 두쌍의 발자국소리를 기다려야만 했다.


난방도 제대로 안되는 트럭뒷편이나 비상계단 난간구석, 카페 테라스등에 앉아 그들이 코를 훌쩍이는 동안 잘가던 길을 머뭇거리던 밀레시안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톨비쉬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입을 맞춘 후의 일이였다. 

손을 빼려는 밀레시안에게 톨비쉬가 무언가라 속삭이지만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모자의 챙때문에 그의 입모양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도시의 방범카메라를 돌려 줌업을 올리던 팀원이 휙하고 마주치는 시선에 움찔하고 뒤로 물러섰다.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괴물같은 감을 가지고 있다니까. 

톨비쉬는 카메라를 향해 4분 후 도착 이라고 뻐끔거리고는 밀레시안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호수공원의 칼바람속에서 덜덜 떨고있던 팀원이 코를 훌쩍이며 되물었다.


“크흥, 아까도 3분남았다며”


“너 우냐?”

“아 아니야. 콧물이 얼어서.., 푸힝..! 에이힝!”


방정맞아. 통신을 교환하던 팀원은 굉장히 못들을것은 들었다며 통신을 끊어버렸다. 

밀레시안은 꺼진 손목시계가 신경쓰이는지 자꾸만 걸음을 버벅이며 손목을 돌아보았다. 이번엔 뒤쳐지거나 먼저가지 않도록 손을 잡도록 하죠. 거부할수 없는 이유를 근거로 든 톨비쉬는 당당하게 밀레시안의 손을 잡고는 나란히 보폭을 맞추어걸었다.


조금씩 엇박이되는 밀레시안의 발걸음을 따라 잠깐 속도를 줄인 톨비쉬가 잡고있던 손을 코트 주머니속에 넣어버렸다. 

밀레시안의 시계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효과가 있기도 했고 좀더 가까이 붙어 걸어야하는 이점도 생기는 마법의 주머니였다.


“임무중에 이래도 되는건가요?”


“임무중이니까 이렇게 하는거지요”



톨비쉬는 뻔뻔하게 대답하며 고개로 앞을 가리켰다. 

얼굴 피부도 단련이 되는걸까. 밀레시안은 비난의 의도없이 순수하게 그의 뺨을 찔러보고싶다는 생각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 조금씩 줄어드는 거리의 외곽에는 보기만해도 추워보이는 호수의 수평선이 그어져있었다.


삑, 단발음과 함께 팀원 전체에게 돌아가는 메세지가 송신되었다. 밀레시안이 손을 빼려고 했지만 톨비쉬는 내가 읽도록 하죠. 하고 손을 꽉 잡아쥐었다. 밀레시안은 순간적인 힘으로는 당해낼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며 톨비쉬의 코트를 바라보았다. 

주머니안은 조금 온기를 잃은 손난로와 가죽장갑의 감촉으로 매끈거리고 두루뭉술한 느낌이였다. 


땀이날지도. 밀레시안은 딱 붙은 손바닥사이에 공기를 집어넣으려 꼼지락거렸다.

메세지를 읽던 톨비쉬가 다시한번 힘주어 밀레시안의 손을 잡으려다가 이내 힘을 풀고는 잠시 손바닥을 때어놓았다.

이제 놓아주려는가 방심하는 사이 깍지를 끼며 얽혀온 톨비쉬의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단단하게 손바닥을 끌어다 붙이며 말했다.


“자꾸 멋대로 떨어지려는 벌입니다”

“이렇게 잡으면 유사시에 풀기 힘든데요”

“계획대로 진행되었으니 괜찮습니다. 타겟의 거래인이 호수에 도착했군요. 우리만 서두르면 됩니다”


톨비쉬는 걱정말라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데이트처럼 보여야하니 당신도 웃어주세요. 시츄에이션이 바뀌지 않았냐고 항의하려던 밀레시안은 그들처럼 손을 꼭 붙잡고 걸어가는 공원내 커플들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팔짱을 끼다못해 매달려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톨비쉬처럼 코트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커플들도 있었다. 다정하게 벤치에  앉아 겨울 호수를 바라보는 서정적인이들도 있었지만 수풀속에서 자체발열을 꿈꾸는 이들도 몇쌍인가 기척으로 들려왔다. 

톨비쉬는 푸취, 헹취, 이헹취 하고 외로이 앉아있는 남자를 지나쳐가며 물었다.


“너무 춥지는 않습니까?”

“손난로 때문에 별ㄹ..아, 으응. 안추워요.”


밀레시안은 환하게 미소로 얼버무리며 남자의 앞을 지나갔다. 손난로라는 단어를 들은것인지 남자는 배신감과 추위에 부들부들 떨며 코를 훌쩍거렸다. 

톨비쉬들은 두개뿐이 남지 않은 벤치에 하나 거리를 두고 멀리 자리를 잡았다. 꽉 쥐여진 손은 이제 땀이 베어나고 있었다.


“좋네요”


“뭐가요?”

“이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거”


톨비쉬는 호수 먼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우수의 찬 눈동자가 꽤나 분위기 있어보이기는 했지만 밀레시안은 아닌데, 일하는중인데 하고 받아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으응..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연기에 소질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갑작스럽게 진행된 단막극에는 자신이 없는 모양이였다.  톨비쉬가 말하는것이 진심인지 대사인지, 본인도 구별하지 않고있다는 사실을 모를 밀레시안은 어렵네.. 하고 시선을 발치로 떨어트렸다. 

새로 신은 부츠와 잘 손질된 구두끝이 나란히 놓여져 있었다. 같은 모양의 매듭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게서 배운 사소한 버릇중 하나였다.


“춥습니까?”

“안춥다니까요”


밀레시안은 다시 반복되는 질문에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 안되지. 다정하게, 다정하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밀레시안이 찌푸린 표정에서 조금 동정심을 유발하는 눈빛으로 톨비쉬를 올려다보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건지 싱글싱글한 미소를 잃지 않은 톨비쉬가 반대쪽 손을 뻗어 밀레시안의 뺨과 목덜미를 훑어내렸다. 

겨울바람에 차갑게 식은 가죽장갑탓에 손길이 지나간 냉기가 선명했다.


“얼굴이 붉습니다. 목덜미도요. 혹시 너무 추워서 빨갛게 된건 아닌가 해서요”


“거짓말..”

“네,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정말 붉어졌네요.”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시선을 독점하고 있는사이 그들의 앞으로 낡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지나갔다. 

슈트케이스를 들고있는 그의 모습은 커플들이 가득한 공원에서 퍽이나 이질적이였지만 그는 다른곳에 신경이 팔린 모습이였다.


잠시 서있을 곳을 서성이던 남자는 혼자 앉아있는 사람의 옆 벤치로 자리를 옮겼다. 시시덕거리는 커플들이 신경쓰이긴 했지만 등을 돌린 덩치큰 남자는 이쪽에는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자기들 세상에 빠져있는 커플이라면 세상 무슨일이 돌아가도 모르겠지. 남자는 혼자앉아있는 이상한 남자를 곁눈으로 흘끔거렸다. 


자신도 혼자 앉아있지만 옆에 앉은 남자는 왜 혼자 앉아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경계심이였다. 

연신 코를 훌쩍이던 남자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빨갛게 곱은 코를 문질렀다.

그는 핸드폰에서 이어폰을 뽑은뒤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자기야-, 정말 안올꺼야? 나 지금 2시간째 아까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데”


남자는 절절하게 애원하는 목소리로 코를 훌쩍였다. 전화는 금방끊어졌는지 아, 또 끊었어. 헝… 나 진짜 차이는건가.. 하는 푸념이 이어졌다.

감수성을 위로할 음악이 필요했는지 핸드폰으로 슬픈 이별의 음악을 틀던 남자가 잠시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이어폰을 꼽았다.

남자는 경계심을 풀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칠칠맞은 놈이군. 남자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슈트케이스를 무릎위에 올려놓았다. 

가방의 차가운 냉기가 스며들어왔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은 기다림이였다. 

공원을 배회한지 10분, 이제 정해놓은 약속시간까지는 5분만이 남아있었다.



“자기, 음악선물은 마음에 들었어?”


[눈물이 나서 앞을 가렸어. 거기있는 커플들 다 나만보더라]


“아잉, 전부는 아닐껄. 저기 깨소금 쏟아지는 커플은 서로 얼굴만지고 뺨쓰다듬고 난리던데”


[오 정말? 나도 보고싶어]


“고개 돌아가면 너부터 쏴버린다”


[젠장 진도 빼고있는거 보고 놀려야하는데 뭐라고 속삭여? 나도 저녀석 멘트좀 써먹자]


“안돼, 밀레시안쪽 마이크는 벌써 꺼놨고 저녀석은 애저녁에… 어… 어?! 저거.. 저 저거..!”


코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저거..! 라는 고함소리를 먹어버린 팀원은 고개를 돌리고싶은 원초적인 본능과 싸워야했다.

남자의 귀에 이어폰에서 세어나온 목소리가 스쳤는지 경계심어린 눈빛이 다시 팀원을 향해 돌아갔다.


“내 거흐친- 마음과…”


팀원은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를 자연스럽게 울먹거림으로 이으며 지나간 시대의 이별곡을 흥얼거렸다. 

부숴버릴꺼야. 네놈의 음악리스트. 음울한 메세지에도 트럭속 감시카메라를 조작하고 있던 팀원은 흥분과 놀라움으로 날뛰고 있었다.


“저게 결국 입도장을 찍네!!”

“곱게 키워놨더니…”


파트너끼리 닮아가는걸까, 말려야할 다른 한쪽도 자기 반쪽과 같이 마시던 종이컵을 우그러트렸다. 플라스틱 뚜껑이 솟아올라 테이블위로 떨어졌다. 카페안의 사람들이 깜짝놀란 눈으로 테라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겨우 입술을 포게는 것에 성공한 톨비쉬는 그 달착지근한 여운에 잠긴채 입술을 달싹였다. 

한번만 더 하면 안될까? 겁을 먹을까 조금 이르게 놓아준 입술이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졌다. 

조금 추운것 같기도 하고. 따뜻한 날숨을 머금은 입새로 찬바람이 스치웠다. 체온에 녹아 말랑말랑해진 가죽장갑의 끝이 밀레시안의 뺨을 쓰다듬었다.


“밀레시안…?”


열기를 품은 어른스러운 목소리가 한번도 들은적 없는 어조로 이름을 불렀다. 

밀레시안은 떨리는 동공으로 톨비쉬와 하늘을 번갈아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뺨을 감싸는 가죽장갑위로 손이 겹쳐왔다. 얼굴가득 톨비쉬의 손길을 끌어안는 밀레시안의 반대편손이 톨비쉬의 코트속에서 나와 손목을 감싸잡았다.


손을 끌어안고 있는 가련한 모습에 톨비쉬의 마음이 요동쳤다. 밀레시안.. 손을 뺄수도 기댈수도 없는 가벼운 망설임속에서 밀레시안의 손이 손목을 둘러 움직였다. 밀레시안은 두눈을 감은채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입이 열리었다.



“타겟 B, A를 향해 접근중. 방향 12, 비정규루트로 언덕을 내려와 직선으로 이동중.”

“여기는 비숍 시야 확보 불가”

“여기는 킹, 시야확보 완료. 무장인원 11-2, 12-1, 1-3, 9클리어. 6은 폰이 알아챈것 같습니다. 나이트랑 룩도 얼른 일하십쇼.”


웃음기를 참는 소리였을까 통신이 끊어지는 잡음의 환청이였을까. 

지령을 할당받은 나이트는 폰의 손을 놓아주며 자리에서 돌아섰다. 펄럭이는 코트사이로 몸을 뺀 폰은 아까부터 거슬리던 호수난간 아래의 자갈소리를 따라 듀얼건을 빼들었다. 은백색의 다우라였다.


사정거리를 최대한으로 길게 빼낸 탓에 위력은 줄어들었지만 약실확장과 강선추가등으로 보강한 전용 개조템이였다. 갑작스럽게 돌아서 한달음에 범위안으로 뛰어든 두 요원의 모습에 바싹얼어붙은 남자가 슈트케이스를 끌어당기며 몸을 움츠렸다. 

쑥하고 미끄러져 내려간 그의 머리위로 아슬아슬하게 총탄이 스쳐지나갔다. 총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비명과 함께 도망치는동안 혼란을 틈타 다가오는 수상한 인물들을 제압하는 톨비쉬가 이어폰으로 남자의 엄지손가락을 묶는 팀원에게 통신용 이어폰을 던졌다.


“닫아.”


톨비쉬의 지령을 들은 팀원이 빠른 손놀림으로 이어폰을 착용했다. 

손목시계에 연결된 버튼을 누르자 외이도를 가득채우는 이물감이 소리를 차단시켰다. 가만, 밀레시안의 손목시계가 다시 켜졌었나? 수면 버튼을 꾹 누른채 던진 톨비쉬가 먹먹한 귀로 밀레시안을 쫒으며 고개를 돌렸다.


한숨을 쉬는 밀레시안이 톨비쉬를 돌아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꺼진 시계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아픔으로 신경을 돌린건지 심장보다 위로 치켜든 밀레시안의 손에는 뚝뚝 피가 베어나오고 있었다. 톨비쉬가 그 상처를 핑계로 남은임무 내내 밀레시안과 붙어다니기로 밀어붙인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밀레시안은 자연스럽게 숙소까지 들어앉은 톨비쉬를 돌아보며 물었다. 

둘은 이제 익숙함을 핑계로 서로를 연기파트너로 지목할만큼 가깝고 친밀해져 있었다. 팀원들은 가끔 톨비쉬에게 사심이 너무 검다고 지적했지만 톨비쉬는 효율성을 강조하며 양손을 뒤집어보였다. 


밀레시안은 전투능력에 비해 화술이 떨어졌고 톨비쉬는 화술과 함께 밀레시안과 호흡을 맞출만큼의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톨비쉬의 손이 모자랄때 밀레시안은 충분히 톨비쉬의 역할을 해낼 수 있었고 톨비쉬 또한 그 반대가 가능했다. 

뭐가 문제지? 톨비쉬의 질문에 팀원들은 서로의 눈빛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전부 다. 니 머리카락부터 손끝 발끝 전부 다요.

톨비쉬는 그들의 의견을 묵살했다. 밀레시안이 없는 회의가 끝이났다.



“우리 망해가요?”

“응? 임무는 순조로운데? 왜 그런 의문이 든거지?”

“아니, 우리집 가세가 기울어져가냐고요”


밀레시안은 이름대신 집이라고 에둘러 말하며 선풍기 앞에서 젖은머리를 털어내었다. 

톨비쉬는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를 정리했다. 더블로 예약한 방을 트윈으로 교체했다가 외출한사이 다시 더블로 변경한터라 침대는 약간의 미흡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톨비쉬는 너무나도 익숙하게 침대를 세팅하며 대답했다.


“아니, 큰 집에 엄청 퍼주고 있어서 괜찮을꺼야. 나도 좀 올랐고.”


그녀석도 제법 갚았다며 자랑하고 다녔는데 못들었어? 라고 덧붙인 톨비쉬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더블베드를 내려다보는 밀레시안의 시선에 같이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다, 제대로 했는데. 어디가 마음에 안드는걸까. 톨비쉬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베개를 가까이 붙여놓았다. 

어때? 밀레시안은 다른화재로 말을 돌렸다.


“나는 그대로던데”

“음? 그래? 하지만 필요한게 있다면 그냥 나한테 이야기만 해. 내가 찾는게 더 빠를테니.”


“뭐든 구해줄수 있어요?”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톨비쉬의 즉답에 밀레시안은 수건을 내리며 고민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아직 머금고있는 물기 때문에 반짝이는것 같이 보였다. 밀레시안은 시선을 빼앗긴 톨비쉬를 향해 말했다.


“트윈 베드”


“숙소의 침대가 마음에 안들었나보군. 당장 바꾸도록하지. 그정도는 사비를 들이지 않아도 행정과에 이야기 하면..”

“아니, 집 침대 말고 여기침대”


“이 방이 마음에 안드나?”


좋은 층인데.. 톨비쉬는 넓은 창문 가득 펼쳐진 야경을 보며 아쉽다는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바꾸지 뭐, 프론트에 전화하려는 그의 손을 막은 밀레시안이 왜 모른척하냐는 눈으로 톨비쉬를 쏘아보았다.

미묘한 각도에 톨비쉬가 마른침을 삼켰다. 겹쳐진 손위로 물방울이 떨어져내렸다. 

어깨가 젖어가는 모습에 톨비쉬는 아직 덜말랐다고 이야기하며 손을 뻗었다. 밀레시안은 젖어드는 톨비쉬의 손을 보며 말했다.


“왜 항상 당신이랑 오면 방이 하나에요?”

“과소비는 나쁘니까”


“그럼 트윈으로 해줘요”

“굳이 따지자면 이 침대는 트윈 베드 두개와 그 두개의 떨어진 여유 거리만큼 넓은 면적을 자랑하고 있네만”


좁은건 아니잖아, 톨비쉬는 그렇게 불만어린 어투로 대답하고서는 밀레시안을 끌어당겼다. 

풀썩 무릎으로 버티고선 밀레시안의 눈높이가 톨비쉬와 비슷하게 엇갈렸다.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수건을 매만지며 물기를 털어주었다. 

흔들리는 시야사이로 훤히 드러난 목울대가 무방비하게 들어왔다. 밀레시안은 완전히 긴장을 풀고있는 톨비쉬를 바라보다가 손을 올렸다. 

조금만 더 하면 될것같은데.. 톨비쉬의 말을 무시한 밀레시안이 손을 잡아내린뒤 톨비쉬를 밀어 넘어트렸다.

잠깐 놀라는 표정이 스쳐지나갔지만 곧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톨비쉬의 얼굴위로 밀레시안의 머리카락이 쏟아져내렸다. 

밀레시안은 톨비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한테 하고싶은거 있어요?”

“응”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서늘한 질문에 즉시 대답하며 손을 뻗었다. 

이제는 익숙하게 얼굴을 매만지는 손길이 눈가와 광대, 턱뼈와 입꼬리를 쓸며 내려왔다. 하나하나 손으로 보듬는 그의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고 손끝에는 열기가 어려있었다. 

하고싶은걸 하면 이제 흥미를 잃고 좀 떨어지는걸까, 밀레시안이 어디부터 시작해야하는지를 생각하는동안 톨비쉬는 그녀의 생각을 부정하듯 말을 덧붙였다.


“지금, 하고 있어”


“뭐를요”

“내가 하고싶은 것”


아직 아무것도 안했는데, 밀레시안은 흘끗 아래쪽을 내려다본뒤 다시 톨비쉬를 돌아보았다. 

너무 노골적인 확인해 톨비쉬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조금 슬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너무한데,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하는군. 밀레시안은 대답하지 않은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톨비쉬는 다시 밀레시안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치렁치렁하게 흔들리던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자 훨씬 밝아진 시야로 그의 얼굴이 내려다보였다.


톨비쉬는 한결 잘보이는 밀레시안의 얼굴을 보며 대답했다.


“늘 이렇게 보고싶었어. 나는 당신을 보고, 당신은 날 보고 있는 모습”

“………”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싶다는걸까, 

조금은 아픈듯한 나르시스트한 발언에 밀레시안의 시선에 곤혹스러움이 스쳐지나갔다. 

무슨생각을 하는건지 훤히 파악하고 있는 톨비쉬는 계속해서 뒤이어 설명을 덧붙였다.



“나를 생각하고 있어?”



지금 대화속에서 안할 수 있을리가. 밀레시안은 몸을 일으키는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침대위에서 마주앉은 톨비쉬는 밀레시안보다 한뼘 높은 위치에 있어씨만 곧 고개를 숙여 높이를 맞춰왔다. 

입을 맞출것처럼 가까이 다가와서는 팔을 붙잡은 그가 조용히 이마를 맞대었다. 숨결이 섞이는 거리였다.



“나를 이해하려고 하고 싶어?”



그는 다소 애원하는 어투로 말해왔다. 

밀레시안은 이제 그만 자고싶다는 생각을 하며 네 라고 대답을 하려고 했다.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일단 시도는. 

밀레시안의 생각을 훤히 읽었던 방금전까지와는 달리 톨비쉬는 밀레시안을 재울 생각이 없는지 이마를 맞댄 모습 그대로 멈추어섰다.


코앞에서 감긴 금색 속눈썹아래로는 그림자가 지고있었다. 

예쁘다. 밀레시안은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라며 그 모습을 관찰했다. 

그래봐야 볼 수 있는건 감겨있는 눈 뿐이였지만, 눈꺼풀 안쪽에서 꿈틀거리며 회전하고 있는 안구의 움직임은 그가 살아있는 사람임을 생생하게 강조하고 있는것 같았다. 무슨생각을 하고 있을까. 


밀레시안은 천천히 뜨여지는 푸른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눈을 깜빡였다. 동시에 눈을 깜빡이면 속눈썹이 얽힐지도 모른다는 잡생각과 함께 완전한 벽안이구나 하는 감상이 뒤섞였다. 푸르른, 새파란 녹안과는 다르다. 


밀레시안은 이제 눈에 익어버린 푸른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내게 뭘 원하는거에요? 톨비쉬는 투명한 밀레시안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쓰러트린다면 그녀는 순순히 안겨올 것이다. 입을 겹치면 혀를 내어줄 것이고 온기를 원하면 팔을 둘러줄 터였다. 

그녀는 한참 이전부터 성인이였고 자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는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 원하지 않는건 아니였지만 톨비쉬가 원하는것은 거기까지만 진행되는 관계가 아니였다. 

그는 좀더 긴 끈을 원했고 강한 결속력을 원했다. 소유욕이라고 하기엔 너무 간질간질하고 독점욕이라고 하기엔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아니 자랑하고 싶었다.


당신을 알리고 싶어. 그의 눈속에서 그녀는 사랑스러웠고 강인한 동시에 눈부시게 빛나는 존재였다. 

처음 본 순간부터, 어두운 수송정속에서, 푸른 하늘을 등지고 있는 그 순간에도, 새하얀 낙하산속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그 순간에도.

 중앙동의 AI의 등장에 온 바닥이 짜릿거렸을때도,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쌓여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을때도, 단장과 마주할때, 자신의 손으로 바이스들을 지워야 했을때, 호숫가에서 입을 맞추었을때, 놀라 달려오는 자신에게 시계를 가리키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을때도.

매 순간 매 1분 1초가 빛나는 사람이였고 그 순간순간이 사랑스러운 모습이였다. 그런 그녀가 그의 앞에 있었다. 

그를 보고 이해하려하며 관심을 내보이고 있었다. 일생일대의 기회. 그는 망설임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게 동정이여도, 성가심의 일부분이여도. 그는 그 순간을 잡아야했다. 그가 되물었다.


“나를 사랑할 수 있겠나?”


톨비쉬는 뭐든지 해줄테니 이만 떨어지라는 밀레시안의 의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되물었다 나를 사랑해줄수  있겠어? 선택권은 그녀에게 있었다. 그는 이미 밀레시안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오래전에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래, 이미 한참 이전부터. 어쩌면 첫 눈을 마주친 순간부터. 

그녀가 처음으로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린 그 모습부터, 낙하산을 건네주며 올려다보던 그 순간부터. 톨비쉬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생각난 첫 만남에 웃음지었다. 

그녀가 처음 본 모습은 아마 내가 침낭속에 돌돌말려 자고 있는 모습일테니. 직후 일어나 난기류속에서 양말을 찾아신던 모습이 생각나자 톨비쉬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런 그 모습이 첫인상으로 기억된건 아니겠지.


톨비쉬가 웃다 멈추는 사이 밀레시안은 반짝이는 그의 눈에서 한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랑해달라는건가? 밀레시안은 아가페적인 사랑과 에로스적인 사랑으로 나뉜다는 문맥만 한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생각과 달리 그는 별로 만반의 준비태세가 아니였고(톨비쉬가 알았다면 바로 반영했겠지만) 아가페적인 사랑은 지금 이순간 내보여주기에는 너무 먼 종교적인 관점이였다. 


내가 뭘 해주기를 바란다고요? 밀레시안은 그렇게 묻기위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미소가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은 끝났나요?

밀레시안은 그가 입술을 겹쳐오는 것을 받아들이며 입을 열었다. 몇번이고 반복했던 행동이였고 크게 불쾌하지 않은 스킨쉽이였다.



“이렇게 다른 팀원들이랑도 할 수 있겠어?”

“임무로써?”



톨비쉬는 대답하지 않았다. 밀레시안은 두명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어렵다는거지? 밀레시안은 해본적은 없지만 이렇게 끈적하지는 않을꺼라고 멋대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톨비쉬가 뒤늦게 조건을 덧붙였다.


“임무가 아니라면?”

“………별로…”


밀레시안은 별로 할 의미를 못느낀다는 말을 끝맺지 못한채 다시 입을 다물어야했다. 

톨비쉬는 조금 다급해진 키스를 끝내고 되물었다.


“지금은?”




지금은 임무중인가? 대답은 아니오 였다. 

그녀는 지쳐있었고 그건 톨비쉬도 마찬가지였다. 얼른 돌아와서 씻고 옷을 갈아입고 각자의 침대에서 푹 자고 내일일정도 소화해야하는데 지금 이게 무슨짓일까. 

밀레시안은 트윈침대로 달라고 떼를 쓴것에 대해 혼나는것은 아닌지 잠시 의심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혼을 내는 건 아닌것 같아. 밀레시안은 오히려 혼나는것같이 궁지의 몰린 톨비쉬를 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더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건지. 밀레시안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고보니 잡혀있었지. 밀레시안은 지금의 자세가 다소 불편하다는것을 깨달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나는 지금 추궁당하고 있는건가? 수만가지의 생각이 흘러가는동안 톨비쉬는 점점 애가 타들어가는 기분이였다.

빨라지는 고동소리에 머리끝이 새하얗게 새어버릴 것같았고 입안이 바짝 말라왔다. 방금전 그렇게 감미로운 기분이였는데도. 그는 아랫입술을 핥아 입술을 축였다. 그의 시선이 밀레시안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를 사랑할수 있나? 다른 동료들에게도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어? 누군가 추근거린다면 거절하지 않을건가? 나는 그러한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아무개의 불과한가? 톨비쉬는 인생에서 한번도 입에 담을것이라 생각하지 않은 질문들로 심장을 내리치며 밀레시안의 입술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지치는 감각이였다. 연다른 입맞춤으로 붉게 달아오른 입술이 그의 이성을 좀먹어가고 있었다. 

지금 밀어붙이면 만족할 수는 있어. 하지만 그 열기가 식고나면 그녀는 다시 훌훌 걸어가버릴것이다. 그때처럼, 열걸음 앞서 돌아보지 않았던 그 연구시설처럼.


톨비쉬는 흔들리던 시선 중간중간 밀레시안이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것에 실낯같은 희망을 걸며 기다렸다. 

그녀는 잠시 불편한눈으로 양 팔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너무 아프게 잡았나, 힘을 빼려는 톨비쉬의 입술위로 따뜻한 온기가 겹쳐왔다.


솔직히 표현하자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신께 맹세컨데 지금보다 10년이 어렸다면 정말로 흘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톨비쉬는 비집고 들어오는 온기를 받아들였다. 

처음 깜짝 놀라던 때와 달리 능숙하게 치고들어오는 혀끝이 고른 치열을 훑으며 숨을 겹쳐왔다. 

다시금 톨비쉬를 밀어트린 밀레시안은 한뼘 가까이 톨비쉬에게 다가선뒤에야 입을 떼었다. 가느다란 여운이 입술사이를 오가다 끊어졌다.


“톨비쉬는 어때요?”


그녀는 생각끝에 역으로 질문하기로 결정했는지 톨비쉬에게 똑같은것을 묻기 시작했다. 

내가 가르치기는 잘가르쳤지. 톨비쉬는 모른다고 싫증내며 도망가지 않은 대신 선택한 그녀의 답변에 실소를 지어보였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


사랑스럽다. 계속해서 이 모습을 눈에 담고싶었다. 

톨비쉬는 머리 양옆으로 손을 툭 떨어트리며 손바닥을 위로 향해보였다. 항복의 의미이기도했고 이제 어찌되어도 좋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그의 곱슬머리가 새하얀 시트위로 흩뿌려졌다. 밀레시안은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후광, 아니 왕관같이 보이는 모습이였다고.

그는 밀레시안에게 대답했다. 다정하고 담담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은 목소리였다. 기돗말을 읊조리듯 경건하기까지만 음성이였다.



“사랑합니다.”


“…………”

“사랑합니다, 밀레시안”


한숨소리가 들린것 같았다.

그는 바스락거리며 구겨지는 침대시트의 소리에 눈을 떴다. 온기는 코앞까지 다가와있었다. 

눈앞은 그림자로 가득찼고 코끝은 흘러내린 머리카락때문에 간질거리는 느낌이였다. 아주 가까이 다가온 틈 사이로 그는 한번더 힘주어 속삭였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밀레시안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대답을 해야하는걸까, 고민하는 밀레시안을 위해 톨비쉬는 짧은 질문을 던져주었다.


“저와 평생을 함께 해 주시겠습니까?”




밀레시안은 잠시 눈을 깜빡이며 질문의 의미를 되세겼다. 

함께한다, 함께한다, 평생의 시간을, 허락된 남은 시간의 전부를.

밀레시안은 네 나 아니오 로 대답할수 있는 간단한 질문에 다시금 긴 질문으로 대답했다.



“내가 당신과 함께했으면 좋겠어요?”




아직 꺼지지 않고 쉴새없이 돌아가는 선풍기 팬소리가 들려왔다. 

끄지 않은채 여전히 윙윙 돌아가는 소리는 오감이 집중된 지금 이 순간 아주 크고 시끄러우며 거슬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괜찮지 않을까 톨비쉬는 낙하산없이 비행선에서 뛰어내리는 스릴감에 몸을 맞기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네라는 대답소리는 너무 하찮고 짧은 대답이여서 돌아눕는 침대시트의 천소리에 새하얗게 파묻혀 버렸다.

밀레시안은 침대가 넓긴 넓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무드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감상이였지만 벅차오르는 감수성에 젖어든 사람은 한사람만으로 충분했다. 불이 꺼지지 않는 천장을 보며 밀레시안은 눈을감았다. 온기가 그녀의 눈을 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