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즈밀레)독이 든 잔이 놓여진 방
“아으, 머리야”
밀레시안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부스스 떨어져나가는 모래의 감촉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가는 느낌에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올린 밀레시안은 지끈거리는 반대편머리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옷의 안팍으로 건조하고 까슬거리는 느낌의 모래가 흘러내리며 잘 보이지 않는 옷의 무늬마져 검은일색으로 덮어버린다. 마치 어둠에 갉아먹혀들어가는것처럼 고운입자의 모래는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색.
빛을 반사하지 않는 무광택의 광물질들을 내려다보는 밀레시안은 시선을 사로잡는 기묘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늘도 땅도 분간이 가지 않는 검고 깊은 공간. 이정도는 익숙해. 밀레시안은 전혀 긴장하지 않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깜빡였다.
어딘지모르는 곳으로 날려오는것 쯤이야 환생한 횟수가 몇번인데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다만 이토록 길게 이어지는 두통은 난생 태어나서 처음이라는 것, 그리고 이전의 생에도 그 이전의 생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라는것.
밀레시안이 다시 머리를 좌우로 흔들자 머리를 짚고있던 손의 소매자락에서 소량의 모래드리 후두둑 하고 흩날렸다.
아마 소매단추사이에 끼어있던 이물질들이겠지. 밀레시안은 새하얀 와이셔츠자락 어디에 그런 모래가 끼어있었는지 모르겠다며 손을 내려 자신의 양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손가락에 손톱도 양호하고 어디하나 뒤틀리거나 접붙은것 없이 말짱한 손가락. 밀레시안은 검은 배경사이로 쭉 양손을 내밀어 손가락을 움직였다. 엄지부터 새끼까지. 다시 새끼부터 엄지까지.
좌우로 위아래로 까딱이고 굽혔다 펴기를 반복하며 손목을 돌려보는 동안 발가락과 발목으로도 비슷한 움직임을 시험해보던 밀레시안은 마지막으로 무릎을 구부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두둑 떨어지는 모래를 손으로 탁탁 털며 몸 이곳저곳을 확인한 밀레시안은 흥 하고 콧속에 들어갔을지 모를 모래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 빛은 내 몸에서 나는거지?”
태양도 달도 불빛없이 어두컴컴한 공간속에 밀레시안만이 존재하는 세계. 오롯이 눈으로 들어오는 제 몸의 손끝부터 발끝까지를 체크한 밀레시안이 고개를 들어 천정이라고 생각되는 위치를 올려다보았다.
스르륵 감기는 반달모양의 윤곽선이 어둠너머로 꿈틀거렸다. 누군가의 눈동자. 밀레시안은 긴장감에 말라오는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며 다시 고개를 내렸다. 어디로 가야하는건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앞으로 나선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의례것 그렇게 해왔듯이.
밀레시안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어둠 여기저기에서 반달모양의 눈꺼풀이 들어올려지며 붉은 눈동자를 드러냈다.
눈동자들은 동공을 크게 확장했다 축소하기를 반복하며 밀레시안의 뒷모습을 눈 안에 담고 있었다. 십여초 동안의 한번씩 서로 다른 눈들이 깜빡이는 동안의 공백을 매꾸기 위해서인지 무던이도 많은 눈동자들이 어둠속에서 솟아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지만 밀레시안에게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는 눈치.
“………”
밀레시안이 뒤를 돌아보았을때만 사라지는 눈동자들. 밀레시안의 미간이 깊게 찌푸리며 불쑥 솟아난 문고리를 잡아돌렸다.
“………하아”
어두운 공간에서 일어난 카즈윈이 가장 먼저 한것은 한껏 숨을 들이마시는 일이였다. 숨을 쉬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행동. 하지만 그 숨을 양껏 들이마시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조사과정인것 마냥 헤루인의 조장은 꽤나 신중한 태도로 입을 뻐끔거렸다.
폐를 가득 매운 공기가 입으로 빠져나가기까지. 주변의 온도와 습도, 독특한 향기와 환경의 특이점. 숨쉬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나서야 고요함속에 녹아든 카즈윈이 소리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검은 제자리에 있고 소지품은 모두 그대로인 상태. 카즈윈은 소리를 내지 않게 위해 주의하며 검의 손잡이에서 볼트통으로 미끄러트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모두 15발의 볼트깃이 빳빳하게 손가락의 측면을 문지르고 지나갔다. 손을 다시 앞으로 가지고 오는 동시에 검집의 잠금쇠를 풀어내자 특유의 탄력적인 느낌이 미묘하게 허리띠를 울리며 준비된 전투의지를 확인시킨다.
저마다 다른 타이밍으로 깜빡이는 어둠속의 관찰자들이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척도 소리도 나지 않는 검은 무언가들. 카즈윈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인식한채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있었다. 언제든지 검을 뽑을 수 있는 자세로. 언제든지 반격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
공격할 생각은 아닌건가. 카즈윈은 시선을 땅으로 고정한 상태로 등 뒤의 존재의 기척을 살폈다. 일렁이는 불길한 에테르와 그 것을 탐색하기 위해 허공을 맴도는 카즈윈의 신성력이 보이지 않는 공간 내에서 어지럽게 얽혔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애초에 탐색은 내 전문이 아니야. 카즈윈은 긴장상태를 해제하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일렁거리던 어둠이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고요하게 가라앉으며 침묵을 유지했다.
나아가야하는가 이자리에 남아있어야하는가. 카즈윈은 고민과 동시에 앞으로 발을 뻗으며 다시한번 주변의 어둠을 탐색했다.
발없는 눈동자들이 집요하게 카즈윈의 뒤를 따라오며 눈을 깜빡거렸다. 세 마리에서 네마리로. 외측면과 정수리 위에도. 한순간이라도 발걸음을 삐끗했다간 달려들 것만 같은 긴장감속에서 카즈윈은 되도록 무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정면을 응시했다.
이 어둠속 어디에서 갑자기 발밑이 꺼질지. 마음같아서는 앞으로 석궁을 쏘아가며 바닥을 확인하고 싶지만 화살의 갯수가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이곳을 만들어낸 상대가 무엇이든 저것들처럼 공중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존재라면 더없이 귀중하게 쓰일전력. 카즈윈은 금방이라도 발이 쑥 빠져버릴것 같은 공포심을 이성으로 찍어누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부드러운 모래로 이루어진 바닥은 발자국이 찍힐법도 하지만 빛마저 흡수하는것처럼 새카만 어둠속에서는 제 발자국은 커녕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라곤 유난히 새하얗게 빛나는 그리브의 앞코부분이 검은 모래속에 파묻혔다 빠져나오기를 반복하는 모습뿐.
생각의 자락이 겨우 흔들리던 이성의 벽에 닿았는지 카즈윈은 제자리에 천천히 멈춰서며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어둠속에서 어떻게 내 손이 보이는거지? 질문은 끝없는 어둠에 대한 해답.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카즈윈의 바로 앞에 검은 문의 운곽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문너머로 선명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검에 손을 올린 카즈윈이 최대한 적개심을 억누르려 애쓰며 문고리를 돌렸다. 얼마 열리지 않은 문틈사이로 고성이 먼저 비집고 들어와 카즈윈의 귀를 잡아 흔들었다.
“……!! ……!! 뭐야 형씨는..!!”
“카즈윈…!! 잠깐..!”
“…뭐야 당신이랑 아는 사람이… 히익..!”
카즈윈은 손목을 잡아 채는 동시에 검의 날을 세워 낯선 남자의 목을 겨누웠다.
“그 손, 치우는게 좋을꺼야”
“…방금 일은 선생님이.... 좀 성급하셨어요”
“내가 뭘..!!”
테이블을 둘러싼 다섯개의 문. 밀레시안은 멱살잡혔던 옷을 정리할 생각도 하지 못한채 잔뜩 찡그린 얼굴로 카즈윈의 앞을 막아섰다.
낯선곳에 떨어져 최고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수리부엉이의 앞에서 고성이라니 살아남은게 용하지. 밀레시안은 무표정하게 화를 식히고 있는 카즈윈을 흘끗 돌아본뒤 다시 남자를 경계했다.
밀레시안이 방에서 나오자마자 멱살을 틀어쥐었던 뚱뚱하고 신경질적인 남자는 밀레시안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다시금 두꺼운 손가락을 구부려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곧 카즈윈의 쌍검을 의식했는지 입매를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돌렸다. 남자를 부축해주려는 청년의 손길을 거칠게 쳐낸 남자는 무언가 혼잣말을 길게 중얼거리다가 카즈윈에게 삿대질을 하며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난장판속에서 한걸음 물러나 손톱만 들여다보고 있던 여성이 흐응 하고 길게 콧소리를 내며 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롱하는데 특화된것같은 얄밉도록 매끄러운 입꼬리였다.
“검 같은걸 쥐고 나대는 놈들 꼭 영웅이라도 된 것마냥 날뛰곤 하지..!”
“으아아아! 죄송합니다. 이 아저씨.. 아니 선생님이 진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흐응? 당신이 죄송할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 맞아. 네녀석이 죄송할 일은 아니지. 기껏해야 폼좀 잡으려 한쪽에만 갑옷 걸친 덜떨어진 놈이 바로 사람목에 칼을 들이대는 꼴이라니”
카즈윈이 눈을 깜빡인뒤 짧게 숨을 내쉬었다. 한걸음 앞으로 나서려는 몸짓이 밀레시안의 손길에 막혀 멈춰세워졌다. 밀레시안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상태로 카즈윈과 비슷하게 눈을 깜빡였다. 카즈윈이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자꾸 목, 목거리는데. 미안하군 손목둘레가 범상치 않아서 목과 착각했어.”
“카즈윈…!”
“거리상으로 별로 차이가 없는 팔길이를 가지고 있으니 미안할것도 아닌가”
남자를 잡으려는 청년, 말없이 앞으로 나서려는 카즈윈의 꾹 밀어 누르는 밀레시안, 일촉즉발의 상황속에서 느긋하게 담뱃대를 꺼낸 여성은 다리를 꼬아 앉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독특한 모양의 황금색 머리장식이 샹들리에 불빛아래서 어지러히 반짝였다.
“좋아, 거기까지들 하자고. 누구 불가진사람?”
“잠깐만요! 저는 기관지가 약해서 담배는 좀 참아주세요”
“당신, 정말 까다로운 남자네”
여성은 성가셔하는 눈빛으로 담뱃대를 뒤집었다. 태우지 않은 담뱃잎이 어지러히 흩어지며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그렇게 아무대나 버리면 안돼죠! 청년의 절규가 이어졌지만 여성은 흥미가 없다는듯 고개를 돌렸다. 청년이 느슨해진 틈을 타 남자가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청년이 기겁을 하며 남자의 등을 잡아당겼지만 두툼한 살집덕에 어떻게인가 움직임을 막을만큼 끌어안기가 벅찬 모습이였다. 혹은 행동만큼이나 말릴 의지가 없거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홀로 고전하는 청년에게서 카즈윈에게로 달콤한 향수빛 시선이 향하자 카즈윈을 말리는데 집중하고 있었던 밀레시안이 흠칫 놀라며 카즈윈의 품에 폭 안겨들었다.
앞으로 나서려는 발걸음을 필사적으로 막던 밀레시안의 체온이 아랫배를 감싸자 신경질적인 남자에게 신경을 쏟고 있던 카즈윈이 반사적으로 밀레시안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약간 당황한것 같으면서 무슨일인지 물어오는 다정한 눈빛. 경계심에 바짝 곤두선 밀레시안이 힘을 주어 여성을 노려보았다. 뭐하는거야. 카즈윈의 작은 한숨이 밀레시안의 신경을 간지럽히는 동안 남자가 한걸음 더 다가섰다.
“무슨일인데 그래.”
“아하하하하하. 아가씨 귀여운 타입이였구나? 겉보기와는 다르네?”
“그..!!”
“걱정마, 걱정마. 나도 저렇게 살벌하게 무장한 남자는 별로니까.”
“..... ….?”
밀레시안이 입술에 꾹 힘을 준채 카즈윈을 끌어안았다. 영문을 모를 여성들의 대화. 카즈윈은 별다른일이 아닌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사각지대에서 날아오는 남자의 손을 낚아채 바깥방향으로 비틀었다.
일반인에게 손을 데는 것은 기사로서나 성직자로서나 꺼져지는 일이지만 이토록 성가신 사람에게는 한번쯤 아픈맛을 봐야 조용해지기마련.
고작 손목하나 꺾인것으로 죽을듯이 날뛰는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차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시켜버린 카즈윈이 말리려는 밀레시안을 밀어내며 청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차하는 사이 남자를 놓친 청년이 허둥지둥거리며 바닥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남자가 뛰쳐나가기 위해 팔꿈치로 청년을 후려칠때 그의 안경이 떨어진 모양이였다.
안경은 여성의 발치에 떨어졌지만 여성은 빈 담뱃대만 신경질적으로 우물거리고 있을뿐. 청년이 바닥을 매만지는 모습이 즐거운지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띄워져있었다.
아무래도 담배를 피지 못하게 한 것에 대한 사소한 복수인듯 보였다.
“너도.”
카즈윈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말을 생략한채 입을 열었다.
“이게.. 이게.. 어디 떨어진거지.. 으으.. 앞이 안보여.. 네?저요?”
청년은 카즈윈의 부름에 두박자 늦게 몸을 일으키다가 테이블에 쿵하고 머리를 박아버렸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4개의 잔이 작은 소음을 내며 흔들렸다.
내용물이 넘치진 않았지만 아슬아슬하게 찰랑거리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위태로운 모습이였다.
4개의 잔, 4개의 보석. 똑 닮은 디자인의 잔이지만 서로다른 보석으로 치장되어있는 잔 안에는 검붉은 액체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셔보지도 가까이 다가가 향을 맡아보지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쌉싸름하고 달큰한 냄새, 농익다못해 떨어지기 직전의 과실에서 나는 퀴퀴하고 진한 단냄새가 연상되는 짙고 검은 액체는 샹들리에 불빛아래서만 가까스로 붉은 빛을 되찾고 있었다.
방에서 나와 주변을 둘러보기 무섭게 멱살이 잡혔던 밀레시안이 테이블 위의 술잔에게 시선을 빼앗기자 가만히 청년이 기어나오길 기다리던 카즈윈도 흘끗 테이블 위로 시선을 던졌다.
멱살잡힌 밀레시안의 모습에 테이블 위를 살펴보지 않았던 카즈윈도 잠시 테이블의 술잔들이 의아스러운지 눈을 가는게 뜨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을 방해하는 작은 소음에 꺾고있던 손목에 힘을 더한 것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였다.
“저-기-, 본보기를 보여주는건 좋은데 적당히 해줄래? 아저씨 멱따는 소리 시끄럽거든?”
“며..멱을 딴다니 그냥 손목을 잡은것 뿐이니 그런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그쪽 기사분도 부탁드리니 선생님의 손을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아- 그놈의선생님 선생님...! 당신에겐 대-단해 보일지 몰라도 나한텐 그냥 치마자락 보고 헤벌레해진 뚱뚱하고 성격나쁜 아저씨일 뿐이야. 아 정말이지 이런 방에 들어오게 된 것도 기분 상하는데 쓸만한 남자가 하나도 없는 곳이라니”
쓸만한 남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에 밀레시안이 잠시 발끈했지만 곧 입을 닫았다. 여성은 즐거운듯 깔깔거리며 높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마 아가씨가 귀여워서 좀 기분이 나아졌어”
“그만..! 그만!!”
카즈윈의 발치에서 연신 고통을 호소하던 남자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꺾인 손목을 잡고있는 카즈윈의 건틀렛에 손을 올렸다. 배를 밟은채 발목장식으로 지긋이 허벅지를 내리누르고 있던 카즈윈의 발이 먼저 남자에게서 떨어져나왔다. 손목은 아직도 잡혀져 있는 상태였다.
“밀레시안에게 손대지마.”
“젠장. 알았다고”
“말도 조심해.”
“…!!!!……!!!!!”
아마도 욕, 밀레시안은 그만하면 되었다는 신호로 카즈윈의 허리를 톡 건드렸다. 겉에서 보기엔 아무도 알아챌 수 없는 사인이지만 카즈윈에겐 그만한 자극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전달된 모양이였다.
끝까지 괜찮다고 말하지 않은 까닭은 밀레시안도 별로 그의 말을 그냥 넘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카즈윈이 잡아채지 않았다면 아마 밀레시안이 먼저 남자의 목을 잡아챘을지도 모를 노릇이였다. 다만 협박이라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밀레시안이 도를 넘은 모욕에 어떻게 반응했을지는 미지수.
누가 누구를 지킨것인지 알 수 없는 본보기가 끝날즈음 천정에 있던 반달 눈꺼풀이 스르륵 잠겨들었다. 밀레시안의 시선이 반초 늦게 천정으로 향했다가 눈쌀을 찌푸렸다.
“기분나쁘지?”
여성은 청년이 안경을 찾는 모습에 질렸는지 구두끝으로 툭 안경다리를 차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년의 손끝이 안경에 닿자 필사적이던 청년의 입가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테이블 밑이였기에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만큼의 작은 일렁거림.
테이블 장식 사이에서 붉은 눈동자가 깜빡이다 사라졌다. 청년이 무릎걸음으로 테이블 아래에서 나왔을땐 시큰거리는 손목을 움켜쥔채 숨을 고르고 있는 남자가 조용히 이를 갈며 카즈윈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성은 밀레시안을 꼭 끌어안으며 즐거운 표정으로 볼을 찔렀다.
“너-도-? 눈이 좋은 아이이구나. 응, 재능있는 귀여운 아이라니 너무 사기적인 조합아니야?”
새하얀 볼을 푹푹 찔러들어가는 붉은 손톱장식이 금방이라도 여린 살을 파고들어가 헤집어 놓을 것처럼 위협적으로 반짝였다. 카즈윈이 밀레시안의 허리를 끌어당기자 여성은 애완동물을 빼앗긴 어린 소녀마냥 볼을 부풀렸다.
어울리지 않는 유치한 반응, 하지만 틀어올린 머리탓에 고혹스러웠던 분위기를 한번에 날려버리고 사랑스러워 보이도록 연출하는 신선한 표정이였다. 청년은 흐려진 안경렌즈를 닦기위해 셔츠자락을 빼어잡았다.
아랫쪽 태두리에 마른 풀잎같은것이 교묘하게 낑겨져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던 탓이였다. 셔츠자락으로 안경알을 문지르던 청년은 렌즈에 입김을 불어넣어 신중하게 렌즈의 표면을 문질렀다. 잘 닦인 렌즈는 테이블 한가운데 걸린 샹들리에 불빛에 반사되어 천정의 일부를 비추었다. 깜빡이는 눈동자 한 개가 황급히 자취를 감추었지만 이미 청년과 눈이 마주친 후.
잘-해-. 청년은 그렇게 해야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귀에 걸쳤다. 너는 열심히 하는게 아니야 잘 해야해. 안경의 시야의 구석, 뿌옇게 흐려진 시선속의 어둠이 그렇게 속삭였다.
“닳는것도 아닌데 좀 넘겨주라”
“………닳아”
“째째하긴”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난 남자가 밀레시안을 노려보며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로 몸을 옮기는 동안 카즈윈의 시선이 남자를 따라 움직였다.
“이봐! 보고만 있지말고 부축좀 해!”
“아…네,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청년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얼버무리려 코와 입주변을 손등으로 쓱 훔치며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동공이 흔들렸지만 눈을 깜빡이는것으로 심호흡을 대신한다. 대놓고 걷어찬뒤 제압의 목적으로 짓누르고 있던 배와 다리가 아픈것인지 남자는 유난히 엄살을 부리며 티가나게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의자에 다가갔다. 털썩 주저앉음과 동시에 후 하고 한숨과 함께 다시금 손목을 주무르는 눈길이 다시금 밀레시안에게 내리꽂혔다.
“왜, 소중하신 자네의 레이디에게 시선도 던지면 안되는건가? 이것도 닳는 범위 안에 들어가나보지?”
“어머 아저씨, 그러다가 남은 손목도 날아가버린다?”
“그.. 폭력은 이제 그만둬주세요..”
비아냥거리는 남자와 지나치게 높은텐션으로 손을 흔드는 여성, 어딘지 불안에 잠식된 청년의 말투아래에는 감출수 없는 공포감이 깔려있었다.
이름모를 공간, 꺼림칙한 존재가 감시하는 방안. 영문을 모를 테이블 위의 네잔의 음료가 놓여져 있었지만 아무도 그 잔에대해 의문을 던지려 하지 않고 있었다.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진 감정들에 휘둘리는 사람들.
그 안에서 충분히 맨손만으로도 세 사람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 실력의 카즈윈만이 무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남자를 비롯한 다른 두 사람에게도 꽤나 신경쓰이는 눈치였다. 그에비해 그들이 밀레시안에게 보이는 태도는 일반적인 어린 여성 혹은 그 미만의 경계심.
나쁘지는 않는 비율, 카즈윈은 그렇게 생각하며 밀레시안의 동의를 구했다. 평소에는 반대의 포지션이였지만 이번에는 밀레시안이 조사, 카즈윈이 탐문을 하는것으로 그렇게 의견을 일치한 밀레시안은 카즈윈의 손안에서 빠져나와 양손을 펼쳐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맨 손의 여자아이. 그것만으로도 경계심이 풀리는 것인지 남자와 청년의 표정은 한결 누구러진 모습이였다.
“음… 저희에게 손대지 않는다고 약속하시면 저도 저 이...도 이 이상으로는 움직이지 않을꺼에요.”
저 이, 라고 표현하는것에 밀레시안은 아주 잠시 망설이는 듯 말꼬리를 끌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같이 임무를 할때는 연인인것을 말하지는 않지만 대놓고 보호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줘놓고 저사람이라고 칭하기도 뭐한 상황. 이번엔 어째 다 반대로네. 밀레시안은 속으로 급조된 설정들을 곱씹으며 남자와 청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성까지 꼼꼼하게 돌아보았다.
여성은 팔짱을 낀채로 담배대를 까딱거리다가 갑자기 돌아보는 밀레시안의 시선에 어색하면서 과장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핫, 당연하지. 애초에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인걸?”
애교있는 말투로 덮으려 하지만 손톱은 신경질적으로 담뱃대의 장식을 긁고 있었다. 엄지손가락에 장식된 큐빅 하나가 떨어져나가 허전한 모습이 되었지만 여성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였다.
밀레시안은 무해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즈윈이 다시금 밀레시안의 결으로 다가섰다. 밀레시안은 카즈윈이 유지한 적정거리에서 한걸음 다가서며 고개를 기울였다. 다정한 모습에 청년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저는 밀레시안이에요. 이쪽은 카즈윈. 저희는 같이 여행을 하고 있었어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다른분들도 이름을 알려주시겠어요?”
“아.. 저는…”
“나는 그냥 선생님이라 불러. 아니 꼭 선생님이라 불려야겠어. 님자를 꼭 붙여서 말이지”
“흐응, 아저씨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아가씨로 할래. 아, 아가씨는 이름을 밝혔으니까 그냥 밀레시안이라고 부르면 되지? 밀레? 시안? 레시? 어떻게 부르길 원해?”
“……… 저는 그냥 밀레시안으로”
“응- 재미없어라. 그러지 뭐.”
여성은 버릇없이 테이블에 걸터앉으며 다리를 꼬아 한껏 몸을 곧게 치켜올렸다. 과장되게 드러난 허벅지라인이 아찔하게 치마선을 따라 강조되었지만 고개를 돌린것은 청년뿐. 밀레시안도 카즈윈도 별로 감흥없는 눈빛으로 여성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뒤 청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한타이밍 늦게 고개를 돌린 선생님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여성은 다시한번 재미없어 라고 말하며 다리를 풀어내렸다. 시선이 쏠린 청년은 당혹스러운듯 선생님과 아가씨를 돌아보다가 우물쭈물거리며 셔츠자락을 만지작거렸다.
테이블밑을 뒤질때 옮겨붙었는지 셔츠의 밑단을 박아넣은 바느질자국사이에 말라비틀어진 담뱃잎이 하나 끼여있었다. 청년의 눈동자가 잠시 확장되었다가 작게 줄어들었다. 툭하고 담뱃잎을 떨어트려내는 청년의 입가는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 그쪽은 뭐라부르면 되는거지?”
“네? 네! 저는 그… 학생이라고 불러주세요”
갑자기 확 가라앉는 온도차이에 잠시 청년을 관찰하던 카즈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뭔가 잘못된거라도 발견한건가? 걱정반 의심반으로 청년의 표정을 살피는 것은 밀레시안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들의 시선과는 상관없이 다시 고개를 든 청년의 모습은 다시금 밝고 순수하며 어딘지 주눅이 든 모습 그대로의 평범한 모습이였다.
청년은 선생님을 의식했는지 한번 그쪽을 쳐다보고서는 대충 말을 지어내어 덧붙였다.
학생, 확실히 선생님과 학생이라면 그럴싸한 한쌍이다. 하지만 아무리봐도 둘사이에서는 아는 사이같지 않는 불편한 기류가 흐르는 눈치였기에 밀레시안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학생과 선생님을 번갈아쳐다보았다.
선생님은 이제 발목의 상태가 돌아왔다고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애초에 걷어찬것은 정강이였기에 관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선생은 아무래도 좋다는듯 몸을 움직이며 다리와 바지를 확인했다. 선생님이라는 말에 집착하는 직종이 어디어디 있더라 밀레시안은 그가 의학쪽에는 관심이 없을것이라 결론을 내리며 시선을 내렸다.
카즈윈이 걷어차고 밟았던 바지가 밀레시안의 눈에 들어왔다. 바지의 색은 유난히 눈에 튀는 아이보리색이였지만 구겨진 자국만 선명할뿐 발자국은 남아있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진 그리브. 선생은 꼬투리 잡을것을 잃어서인지 칫 하고 무례하게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의자에 다시 털썩 주저앉는것으로 보아 카즈윈과는 더이상 가까이 있고 싶지 않는 눈치였다.
선생이 앉은 의자뒤로 검고 어두운 문이 그림처럼 허공에 띄워져 있었다. 문에는 2라는 숫자가. 밀레시안은 그제서야 방을 둘러보며 문의 갯수를 확인했다.
분명 벽이나 가림막은 없지만 둥글게 늘어선 문의 배치탓에 공간은 상당히 협소해보이는 원형으로 느껴지는 이상한 공간 이였다.
머리위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그 아래에는 고급 원목으로 만들어진 원탁이. 원탁의 내측은 무슨가죽으로 되어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꼼꼼하게 마감이된 가죽장식으로 테가 둘러져있어 고급스러운 내부장식을 튼튼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가죽테두리의 안쪽으로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반복된 민무늬의 밝은 광석이 있어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밝아지는 정신사나운 디자인이였다.
처음보는 석재.. 밀레시안은 손으로 밝은 톤의 돌을 매만진 밀레시안은 손끝을 지분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리석은 아니야. 온기가 남아있는 기묘한 광석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무늬의 곁가지마다 얕은 폭으로 음각이 된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런걸 전문으로 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는것은 잘 알고 있지. 밀레시안은 자신이 나온 문을 확인하는 카즈윈이 선생의 옆자리에 가서 앉는 것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
“이봐! 자리는 저쪽에도 많이 있잖아! 왜 여기까지 쫓아오는거야?!”
“내가 나온 방이 4번이니까 4번의자에 앉는 것 뿐이야.”
“젠장, 그딴 숫자는 왜 이제와서 따지는 건데!”
“......그냥.”
이제와서..? 밀레시안이 나온 방은 5번 카즈윈이 나온 방은 4번. 밀레시안이 자신이 나온 문의 번호를 확인하는 동안 카즈윈은 듣기도 귀찮다는 태도로 팔짱을끼며 등에 매고 있던 석궁을 의자구석에 내려놓았다.
카즈윈이 석궁을 옆에 끼고 앉아서일까 나온 방의 번호를 따졌기 때문일까 선생은 불안한 눈치로 카즈윈과 등뒤로 늘어선 문을 살피다가 신경질적으로 일어섰다.
선생은 일어나며 테이블을 짚었지만 매우 의도적으로 테이블에 둘러진 가죽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가죽에 손끝이 닿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아주 불편한 자세로 손목을 꺾은 선생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선생은 1번 의자에서 2로 옮겨가기위해 테이블을 반바퀴 빙 둘러 걸어갔다. 카즈윈을 지나치기 싫어서였는지 가장 긴 거리를 돌아가는 루트였다.
의자는 원탁을 따라 놓여져 있었지만 숫자 순번대로 놓지지지는 않은 모양이였다. 방문은 순서대로인데.. 밀레시안은 5번 의자를 찾는첫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5개의 의자중 3개의 의자가 4번문을 향해 돌려져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랬지.
선생이 밀레시안의 멱살을 잡기 전 학생과 아가씨 모두 밀레시안의 문이 아닌 카즈윈의 문을 보고있었다. 마치 그것이 열릴것을 알고 있었듯이.
하지만 먼저 열려진것은 카즈윈이 아닌 밀레시안의 문. 남자, 아니 선생은 이렇게 소리쳤다.
이게 무슨짓이야!! 어긋나버렸잖아!!
밀레시안은 5번 의자의 장식을 손으로 덧그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어긋났다.
밀레시안은 화려하게 조각된 장식의 요철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숫자가 세겨진 조각은 어떠한 광석으로 만들었는지 눈부신 흭색. 이런거 본적 있지. 바로 지금. 밀레시안은 숫자를 둘러싼 기하학적인 문양이 테이블에 세겨진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뒤 자리에 앉았다.
바탕은 흰색이였고 숫자는 음각되어있었다. 카즈윈처럼 처음부터 앉을 생각으로 찾고있었던가 밀레시안처럼 한참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를만큼 희미한 숫자들.
하지만 아가씨와 청년은 어렵지 않게 자기자리를 찾은듯 바로 자리에 착석했다. 모두 약간씩 돌려세워진 의자들이였다. 청년은 카즈윈의 옆에 아가씨는 밀레시안을 지나쳐 선생님의 옆자리에. 카즈윈과 마주보는 자리에 앉게된 밀레시안은 의아해하는 시선으로 카즈윈을 응시했다.
카즈윈도 어딘가 어색한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눈치. 다섯명이서 원탁에 둘러앉는다. 어느 누구와도 시선이 마주치지 않아야 정상인 배치속에서 밀레시안과 카즈윈은 원탁에서 가장 먼 끝과 끝. 원을 가로지르는 직선을 그리며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카즈윈의 양 옆으로는 청년과 아가씨가 밀레시안의 옆자리에는 불편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는 선생님이
“……?”
밀레시안은 무릎위에 손을 올린채 정면을 응시하는 청년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밀레시안의 기시감이 잘못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듯 밀레시안의 시야안에는 카즈윈과 아가씨 청년이 모두 확연하게 시야 안에 들어와 있었다.
각도와 거리탓에 잘 보이지 않는것은 옆자리에 앉은 선생님뿐. 그나마도 두툼한 뱃살탓에 푸짐하게 부풀어오른 베스트의 자락은 의자에 가려지지 않은채 시야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들이마시고 내쉴때마다 꼬리처럼 흔들흔들거리는 옷자락. 밀레시안은 선생의 호흡이 조금 빨라졌다고 생각하며 눈을 깜빡였다.
마치 카즈윈에게 손목을 잡혔던것 처럼, 그의 검과 갑옷을 보고 놀랐을때 처럼. 악의로 가득찬 말로 일부러 자극하며 카즈윈의 섯부른 행동을 유도했을때 처럼. 그의 의도를 확인하고자 카즈윈이 도발에 화가난 것처럼 굴었을때 초조해 하던것 처럼.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배는 곳 바람빠진 고무공마냥 늘어져버리고 다시 부풀어오르기를 반복한다.
“밀레시안”
카즈윈이 밀레시안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평온함을 가장하지만 카즈윈도 마주보는 시선과 시야에 들어온 세 개의 의자가 혼란스러운지 선생부터 밀레시안까지 차례차례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네 옆에 앉은건 누구야?”
6번째 자리. 숫자는 0번. 공석인 자리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사람처럼, 다리를 꼬고 앉은 인영처럼. 밀레시안은 주인없는 그림자를 내려다 보다가 힘주어 입술을 깨물었다. 질까보냐. 밀레시안은 수도없이 깜빡임을 반복하는 붉은 눈동자들의 시선을 떨쳐내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어요”
순간 공기가 얼어붙는것 같은 정적이 방안에 내려앉았다. 투명한 유리막이 방 위에 덮어 씌워진 것 처럼 먹먹하고 공허한 침묵. 눈동자들은 깜빡여졌고 말소리는 새어나오지 않았다. 카즈윈도 갑작스러운 분위기에 긴장한 눈치였지만 평안함을 가장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입에서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모양이였다. 누군가의 강제가 아닌 그렇게 하기 꺼려지는 분위기. 밀레시안은 이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방에서 나온 직후,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몰려든 세 쌍의 시선들 사이에서의 침묵. 밀레시안은 아주 느리게 숨을 들이마시는 아가씨의 입을 보며 직감했다. 어긋났다.
아가씨의 웃음소리가 긴장된 침묵을 깨며 높게 울려퍼졌다.
“아하하하-. 대단하다 정말. 이런거 생각지도 못했어”
아가씨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건지 발을 야단법석을 떨며 발을 동동굴렀다. 화풀이를 하는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구두굽을 학대하는 것 같기도 한 움직임이였다. 날카로운 하이힐이 카펫을 엉망으로 짓밟았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그런 행동을 자제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그 누구도 그런 말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그런말은 방의 주인이 할만한 발언이였다.
아가씨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조금 과도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호들갑을 떨며 다른 두사람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녀가 말하는 그렇게 생각하는 모두들의 안에는 자연스럽게 밀레시안과 카즈윈은 제외되어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 타이밍에 그런 농담을 건넬 줄이야. 정말 뜻밖이야.”
요거요거 아주 장난끼 많은 커플이였네. 아가씨는 능청스럽게 카즈윈의 질문을 농담으로 넘겼지만 카즈윈도 밀레시안도 농담때문에 웃는것이 아니라는 것 쯤은 파악한 상태였다. 밀레시안은 카즈윈의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어떻게 하죠? 카즈윈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기대어앉았다. 돌과 나무로 만들어졌을 의자에서는 미묘하게 등에 달라붙어오는 온기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른 두사람은 별로 재미가 없었나보네?”
따라가. 카즈윈은 주먹을 말아쥐어 얼굴을 괴였다. 눈은 웃고있지만 입가는 딱딱하게 굳은 모습이 주먹쥔 손 뒤로 숨겨졌다. 손가락으로 툭툭툭툭 의자의 장식을 매만지는 카즈윈이 반박자 늦게 웃어오는 학생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선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선생은 제 페이스를 되찾은 호흡으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카즈윈을 비난했다.
“하필 이 순간에 그따위 농담이나 던지다니.. 보기보다 정말 실없는 인간이군”
“이 순간? 지금이 뭐가 어때서?”
카즈윈은 놓치지않고 선생의 말꼬리를 잡아채었다. 학생의 손이 테이블위로 올라왔다.
밀레시안은 학생과 아가씨의 표정속에서 선생의 일그러짐을 포착해내며 입술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입에 뭐가 신경쓰이는것처럼 손등으로 문질문질 입을 가리는 신호의 뜻은 따라가요. 카즈윈은 슬쩍 손을 내리며 다리를 꼬아앉았다.
평소에는 자세가 틀어진다고 그렇게 앉는것도 별로 안좋아하면서 이런의자에서 그런 포즈라니.
카즈윈은 더할나위 없이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선생을 압박해 들어갔다. 아가씨가 끼어들려 하지만 카즈윈은 말없이 아가씨를 노려보았다. 끼어들지마. 석궁을 허벅지 위로 올리자 철제그리브를 긁는 석궁의 활대가 샹들리에 불빛아래서 반짝거리는 빛을 반사시켰다.
천장의 매달리 눈들중 일부가 급하게 눈을 감았다. 카즈윈의 석궁은 어느순간엔가 장전된채 팽팽하게 활줄이 매여져 있는 상태였다. 붉은 눈동자에 두려움이 감돌았다.
“어머 싫다.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거야?”
“그야 곤두설만도 하지. 아무것도 모른채 이상한 방에서 나왔더니 이상한 사람들이 시비를 걸지 분명 보지 못했던 의자가 나타나지”
“의자는 원래부터 6개였는걸? 당신이 못보고 지나친걸 우리한테 화풀이 하는거야?”
“질나쁜 사기꾼같은 남자 셋이서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있으면서 그런말을 하다니 설득력없어. 애초에 잔은 4개만 놓여진 꼬락서니가 꼭 독이 든 잔을 찾아내시오 같은 느낌이잖아?”
카즈윈은 뻔하다는 얼굴로 석궁의 활줄을 쓰다듬었다. 얼어붙은 시선이 세 쌍 그 중 가장 바쁜것은 천정위에 매달린 붉은 눈동자 한쌍. 미친듯이 굴러다니는 두개의 눈동자는 깜빡일 틈도 없이 밀레시안이 감지하고 있다는 위기감도 없이 카즈윈을 향해 매서운 눈빛을 쏘아보내며 확대되었다가 축소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긋났다.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학생과 선생뿐. 또다시 높은 웃음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던 아가씨는 아슬아슬한 치마도 신경쓰지 않은채 다리를 의자위로 접어올려 깔깔거리며 웃다가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씹으며 몸을 둥글게 마는 통에 의자의 등받이에 쓸려내려간 머리가 엉망이 되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는듯 고개를 흔들어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떨쳐내었다. 그런 난리통사이에서도 용캐 붙어있는 머리장식은 거의 미동도 하지 않은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퉤 하고 입안에 들어온 큐빅조각을 뱉은 아가씨가 웃느라 스며나온 눈물을 성의없이 닦아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전의 높은 새소리같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낮고 탁한 목소리였다.
“더럽게 눈치 빠른 놈들같으니라고. 언제부터 안거야?”
“……어어?!”
“……왜?”
“………왜냐니요….? 저사람 남자야?!”
“아잉, 밀레시안은 모르고 있었던거야?”
밀레시안이 화들짝 놀라며 태클을 걸자 아가씨는 핫 하고 몸을 일으키며 눈을 문질렀다. 눈화장이 번져버렸지만 무슨 손수건인지 요령좋게 번져나간 부분을 날렵하게 닦아낸 아가씨는 번진 그대로를 다시 화장 기법처럼 수습하며 나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난 또, 우리 밀레시안이랑 저 카즈윈이란 작자랑 짝짜궁 말없이도 잘 통하는 사이인줄 알고 놈들이라고 불렀잖아”
“…………”
다 드러낸 마당에 뻔뻔하게 애교있는 말투라니. 밀레시안은 카즈윈과 아가씨를 번갈아 보며 마른침을 되삼켰다.
“가까이 왔을때, 못느꼈어?”
“내 향수에 트집잡는거야?”
“허벅지 근육도 남성형이잖아”
“아- 관심없는 척하면서 그렇게 자세하게 보다니 그쪽도 역시 별볼일 없는 변태구나?”
“몰라 그런거. 왜 아는거에요”
밀레시안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5명의 낯선이들이 모인 방안에 악의적으로 놓여진 4잔의 독이 든 잔.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6번째 의자. 붉은 눈동자와 빛을 먹는 모래로 가득 찬 방. 그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해져있는 밀레시안은 그중에가 가장 쓸모 없는 정보인 여장시 사용되는 대한 향수냄새와 남성 특유의 근육모양에 대한 고찰을 지우기 위해 괜스래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카즈윈을 노려보았다.
왜 나를 그렇게 보는거야. 카즈윈은 드물게 진심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가씨는 뭐 알게되었으면 이제 됐어. 이건 필요없겠네. 라며 신고있던 하이힐을 내던졌다.
유사시에 무기로 써도 될만한 높은 굽에 지쳤는지 아가씨는 양반다리로 의자위에 구겨 앉으며 양 발을 주물렀다. 터프하다못해 야성적이기까지한 태도변화에 밀레시안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듯 목을 움츠렸다.
“아 방금 그 반응 귀여워.”
아가씨는 낮아진 목소리 그대로 밀레시안의 반응에 윙크를 하며 고개를 찡긋거렸다. 여러모로 총체적난국인 상황이지만 선생과 학생은 침묵을 지킬뿐.
약간씩이나마 아가씨에게 노골적인 시선을 남기던 선생님조차 이 사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는지 별로 충격을 받지는 않는 모습이였다.
의자에 앉았을 때부터 말이 없어진 학생은 표정을 읽기도 어려울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있어지만 그 역시도 이 상황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눈치였다.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어느정도의 정보는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상대에게 맞지 않았던 사람들을 둘러보던 밀레시안은 밀레시안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자신을 관찰하는 아가씨의 시선을 피해 테이블 가운데에 놓여진 잔을 응시했다.
방의 수와 잔의 수를 생각하면 잔의 의미는 확실해진다. 누군가는 잔을 들이키고 누군가는 잔을 마시지 않는다. 누가보아도 수상한 이 잔에 담긴 내용물이 무엇일지는 불보듯 뻔한 일. 밀레시안은 테이블에 놓여진 잔에 손을 뻗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한번더 흔들어볼까?
“이봐 무슨짓이야!”
어긋남 그 네번째. 밀레시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가씨와 이제서야 고개를 번쩍 처드는 학생의 시선을 확인하며 시원하게 잔을 비워내었다.
한방울도 남김없이 원샷. 선생은 예상치 못한 행동에 대단히 충격을 받았는지 자리에서 벌떡일어나 고함을 내질렀다. 걱정이라기 보다는 경악, 그리고 제어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 밀레시안은 개운하게 입가를 훔치며 카즈윈을 내려다 보았다. 카즈윈이 나른하게 대답했다.
“어때?”
“독이네요”
밀레시안은 가볍게 대답하며 손목에 손가락을 얹어 맥박을 확인했다. 혈관을 모두 터트려버릴 것 같이 거세게 뛰어오르는 맥박수는 쉬이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날뛰며 밀레시안의 손끝을 두드렸다. 뛰어오르는 혈압은 밀레시안의 가느다란 목에 혈관을 부풀어오르게하고 맑은 눈동자는 곧 붉게 충혈. 선생과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난 학생이 밀레시안쪽으로 쭉 몸을 기울였다. 선생과는 다르게 그는 놀랐다기보다는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것을 발견한듯 즐거운 눈빛이였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다 급하게 다른쪽으로 시선을 크게 확장된 눈동자가 밀레시안을 주시하며 빠른속도로 깜빡였다.
“독이네요? 그게 지금 죽기전에 남길 유언의 전부인가?! 자네는 또 뭐야. 처음보는 사람에게 검을 들이댈 정도로 애지중지 난리를 치더니 이제와서 어떄?!”
“음,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걱정을 해주니까 꽤나 감동일지도”
“닥쳐!! 닥쳐!! 나는 지금 화를 내고 있는거야! 이 미친상황에 이딴 미친 일까지 더해지는데 내가 그딴 농담에 받아치는 말따위 신경쓸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어떻게 살아남아 왔는데!! 저런 사이코패스놈과 예쁘장한 변태놈에게 치여서 이딴 상황까지 내몰리고말이야!”
“저-기- 듣는 예쁜이 기분나쁘거든요?”
“…….”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나 싫어하는 사이코패스씨도 굉장히 싫어하는 표정인데”
“……아니에요. 저 그런 생각한적 없어요”
“에이, 내가 안경발로 찼을때랑 똑같은 표정인데 뭐”
아가씨의 지적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는 학생이 손을 내저으며 부정을 표했다. 급변하는 상황속에 내몰린 선생의 이성이 붕괴직전까지 내몰려 마구잡이로 폭언을 내뱉는 가운데 유난히 밀레시안을 의식하는 학생의 모습은 그가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매우 이질적으로 보이고 있었지만 그는 그러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것처럼 침착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는 그저 갑자기 독을, 아니 잔을 들이킨 밀레시안씨의 행동이 너무 놀라워서”
“……그래서, 당신들의 의도는 뭐야?”
지루하게 이어지는 변명과 비아냥거림 그리고 질낮은 연기생활에 질린탓일까 카즈윈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부지런하게 주변 인물들과 호흡을 맞춰 대사를 말할때보다도 느린 어조로, 그리고 나른한 표정으로.
아핫 하고 강박적으로 같은 웃음소리를 내는 아가씨가 카즈윈의 달라진 말투가 재미있다는듯 몸을 기울였다. 가죽부근에 손을 얹어 기울어진 몸을 지탱하자 선생이 눈에 띄게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 새빨간 손톱이 가죽장식에 스크레치를 남겼다.
“형씨도 연기하는 거였어?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
카즈윈은 대답없이 경박스러운 아가씨의 질문을 무시하며 학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봐- 무시하는거야-? 달짝지근한 아가씨의 목소리가 한톤 높은 소리를 내며 위협적으로 말꼬리를 잡아 늘렸다. 학생은 카즈윈보다는 밀레시안에게 더 관심이 많은 눈초리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선생님의 폭주로 서로의 약점들이 다 까발려진 마당에 더이상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되어서인지 학생은 매우 순수하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밀레시안을 관찰하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아직더 패를 덮어놔야하는지 확신이 안서는건지 심호흡을 하며 달아오르는 체온을 억눌렀다. 독은 이게싫어. 차오르는 양보다 깎여나가는 양이 더 많은 불편한 감각에 익숙하지 않은지 밀레시안은 애써 여기를 봐달라고 애원하는 눈망울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돌릴만한 공간도 많지 않은 곳에서 한 방향을 외면하면서까지 볼 수 있는 인물이라고는 아가씨와 선생님이 전부였지만 밀레시안은 끝까지 학생을 돌아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이봐아- 내가 말하고 있잖아. 아- 무기가 손에 있으니까 무서울께 없겠구나? 저 괴물같은 여자아이도 독을 벌컥벌컥 들이키니까 잔을 받을까봐 무서울 이유도 없고. 그런데 어쩌나? 여긴 그것만 있는게 아니거든?”
“이봐!! 더이상 이야기 하면 이쪽까지 곤란해진다고!!”
“뭐 어때- 이미 어긋날대로 어긋나있는거. 애초에 저 여자애가 나올때부터 이 세팅은 무너진거였어”
“저기요. 지금 가라앉고 있는거죠? 해독능력이 있는거에요? 한잔 더 마실 수도 있는건가요?”
“………카즈윈”
“하아”
“젠장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그냥 처음에 나온 저 여자애를 인질로 잡자고!!”
“어머 그건 안돼. 눈들이 기뻐하지 않을꺼야. 그들이 원하는건 스릴감과 긴장감이지 놀고 먹고 마시는 독극물 시트콤이 아니란 말이야”
“애초에 다 짜고 치는 연극판인데 스릴은 무슨 스릴!!”
“짜고치더라도 안마신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스릴이지. 설마 나와 저녀석을 굳게 믿고 이 방에 들어온거야? 아니지? 나 감동먹는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너와 나 둘중에 하나만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던져진 대본 하나만 믿고 임한다니 그런거 이상하잖아. 답을 알고 있어도 모르는척 답을 몰라도 아는척.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내 생존 하나만 믿고 달려야 겨우 살아나가는데 에이, 선생님. 너무 세상물정을 모르신다-”
“저기요. 지금 호흡 안정된거 맞죠? 눈도 충혈기가 가라앉았는데…, 혹시 맥박 제가 재도 괜찮을까요? 저 정말 손목만, 아니 손목이 싫으면 목만 만지면 되는데”
“밀레시안에게 가까이 갈 생각하지 마.”
“……..아, 저 이상한 사람아니고요.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건데”
언쟁을 벌이는 아가씨와 선생님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학생에게 석궁을 겨누는 카즈윈까지.
밀레시안은 가빠진 숨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마나실드를 활성화 시켰다. 여태까지 사라지지 않은채 카즈윈을 노려보던 눈동자가 밀레시안에게로 향했다.
이제 아주 대놓고 보는구나. 밀레시안은 천천히 줄어드는 마나를 확인하며 헛기침을 했다. 카즈윈이 석궁을 들어올렸다. 화살촉이 천장을 향해서인지 눈동자들은 황급히 자리를 이동하며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어둠이 술렁거렸다.
“그래서 말이죠”
“정말? 정말 그 짧은 사이에 회복된거야?”
“충분히 떠들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하는데요”
믿을수 없어. 선생과 아가씨는 괴물을 보는 눈으로 밀레시안을 응시하며 저마다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밀레시안을 호의로 바라보는것은 카즈윈과 학생뿐. 서로 다른의미이긴하지만 밀레시안에게 위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고 연신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학생은 마치 새로운 미지의 생물을 만난 소년마냥 눈을 반짝거렸다. 도서관에 쳐박혀 도감만 보다가 밖에 처음 나온 소년처럼, 개구리를 채집한 통을 들여다보는 아이처럼.
그 개구리를 해부할 생각에 가득차 다른 아이들의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는 꼬마 과학자처럼.
“아 그렇지 저 사이코패스 아니에요”
학생은 혹시 그것때문에 그런거냐는 얼굴로 카즈윈과 밀레시안을 번갈아쳐다보았다.
“전 소시오패스에요. 그러니까 해도 되는 일과 안되는 일정도는 구별한다구요”
저는 채집만하지 해부는 안해요. 마치 큰 차이가 있다는 것 처럼 학생은 활짝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저거 미친놈인건 확실하네”
선생이 드물게 카즈윈의 마음을 대변할만한 말을 해주며 의자에 기대었다.
가장 열성적으로 반응하고 떠둘었던 선생은 피곤한지 머리를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우린 다 끝났어. 그렇게 한숨을 내쉬는 선생을 보며 아저씨 그렇게 머리자꾸 만지면 앞머리선이 멀리멀리 날아가버린다? 비아냥거리던 아가씨가 아무런 반응도 없는 선생을 보며 눈쌀을 찌푸렸다.재미없게. 아가씨는 그렇게 말하며 철컥거리는 소리가나는 카즈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없이 겨누어진 볼트촉에 네, 알겠어요. 포기할께요 하고 아쉬운 항복을 선언하는 학생.
밀레시안은 빈 잔을 들어 샹들리에 불빛에 비춰보다가 조용해진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질문좀 해도 될까요?”
“마음껏. 이미 망가진 판이니까. 네 마음대로 해”
아가씨는 양팔을 벌려보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망가진 판. 아가씨는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어보였지만 그 미소는 카즈윈에게서 멀어지던 선생의 눈초리와 닮은 꼴을 공유하고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를 밑바탕에 깔아낸 허세에 가득찬 미소였다.
“망가졌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거에요?”
“음, 글쎄? 네가 먼저 박차고 나온 문이나 없다고 부정해버린 네 옆자리? 독이 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척 우리와 어울렸던 것도 포함이겠지. 아 물론 가장 크게 어긋나버린건 네가 한잔을 먼저 마셔버렸다는 거지만. 물론 여태까지 먼저 마셔버린 멍청이가 없던건 아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마셔버린뒤 말짱하게 살아있는건 처음이지만. 아무튼 뭐 이정도야. 다행이네 다섯손가락 이내에 셀 수 있는 범위내의 일이여서.”
“그래도 저희들 중 누군가가 죽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요”
아가씨의 악의 가득한 비꼼의 마지막으로 학생이 끼어들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완전히 안정된 밀레시안의 상태를 정확하게 확인하고 싶었던건지 학생은 계속해서 밀레시안을 관찰하며 말을 이었다.
밀레시안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이야기는 모두 내어줄 작정인듯 그는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아가씨는 잠깐, 내 독무대에 끼어들지 말아줄래? 하고 소리쳤지만 학생은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은 말없이 남아있는 잔 세개만을 노려본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우선 제 소개를 먼저 할께요 제 이름은.. 어.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넘어가요. 이젠 별로 미련도 없거든요. 어… 궁금하다는 눈치네요.
그럼 살짝 알려드리도록하죠. 음, 저는 왕립학교 약학과 5학년이에요. 그리고 부끄럽게도 꽤나 탑클래스였죠.
이전의 방인그 그 이전방인가, 어딘가에서 만난 같은 학교 학생이 제가 실종처리되었다고 말해줬으니 아마 제 이름을 찾아도 오래전에 사라진 사람으로 나올꺼에요.
제가 이 방에 오게된 이유는 간단해요 학교에서 의심을 받고 있었거든요. 아까 소개했다시피 제가 해야할 일 안해야할일은 잘 구별하는 편인데. 아시잖아요. 살다보면 그런거에 상관없이 내키는대로 행동하고 싶을때가 있는거.
그래서 몇번인가 제 나름대로 청춘의 일탈을 저질렀는데, 이 깐깐한 학교에선 저를 무척이나 싫어하더라구요.
길고양이도 안된다. 강아지도 안된다. 사냥개는 더더욱 안되고 국립 사냥터에 있는 맷돼지도 NG. 아니 애초에 죽이려고 키우는 맷돼지 몇마리 실험하는 거가지고 왜들 그렇게 난리인지.
그래도 용캐 정학당하지 않는게 제 나름대로의 프라이드였는데 홧김에 남은 약은 강물에 던져버렸던게 제 스트레스의 시작이였어요.
물고기들이 때로 떠올랐거든요. 그건 정말 제 실수였지만요. 산란철인줄 몰랐거든요.
약초 독초 외우기도 바빠죽겠는데 민물고기 산란철이 언제인지 알 리가 없잖아요. 산란철인줄 알았으면 강물에 던지지는 않았을꺼에요. 그걸 곰이 먹고 다이어울프들이 먹고 새가 쪼아먹으면 연쇄반응이 어떻다나 저떻다나.
오히려 독성이 몇 차까지 전염되는지 알고 싶은게 연구자로서의 심리아닌가요? 아 저도 그런거 드러내면 사람들이 싫어한다는것 정도는 알아요.
그래서 복잡하고 섬세한 자연계대신 안전망 빵빵하고 대체가능한 그리고 혹시나 있을 사태에 대비해 많은 힐러진과 격렬한 비판과 결점을 자극해줄 선생님들이 있는, 학교 식수탑에 약을 조금 풀었는데…
음, 그때 제게 온게 0번 자리의 주인이였어요. 당신도 만난적 있죠? 허름한 로브를 뒤집어쓴. 원래 그들이 이 방까지 들어와 모두 친절하게 안내해 줘야하는데 당신이 못들어오게 막아버렸잖아요.
아무튼 저는 그분의 초대를 받아 이 방에 왔죠. 처음왔을땐 다들 어리둥절해 했지만 곧 0번이 와서 정리해주었거든요.
4개의 잔중에 어느것이 독이 든 잔일까. 혹은 어느 잔이 독이 들지 않은 잔일까. 독을 사용하는 방법부터 희망을 주고 절망을 선사하는 방법까지.
힌트를 배분하는 타이밍이나 방식까지. 제가 있는 방은 모두가 처음이였을까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싱거운 이야기를 멍청한 사람들은 모두들 힘겨워하며 풀어내더군요.
저는 그래서 조금 수를 부렸어요. 알다시피 제가 약학과 탑클래스였잖아요. 그리고 이런저런 약학실험을 하려다보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먼저 거쳐간 선배들의 실험결과거든요
어디서 무얼하고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 어떤 결론이 났는지 같은 결과를 반복하는건 학습에는 좋은 영향을 줄지 몰라도 새로운 약을 개발하는데는 정말 지뢰거든요.
그래서 저는 소매단추를 분해해서 거기에 조그마한 약을 가지고 다녔어요. 어느날 어느때인가 제가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자가 되어버린다면, 너무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그런타이틀을 얻게된것도 모른채 연구에만 매진하다가 아차하는 사이 잡혀갈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잡혀가서 해독제를 만들라고 고문이라도 당하면 어떡해요. 그 대비책인거죠. 언제든지 자살하기위한.
아 너무 그렇게 빤히 보지 말아주세요. 맞아요 저도 어렸죠. 그정도 약에 사람이 죽을것이라 생각했으니. 독성이 너무 약했거든요.
제가 있던 방은...뭐랄까.. 너무나도 따뜻하고 미적지근한 그리고 잉크 냄새 폴폴나는 그러니까 갓 찍어낸 동화책속의 인물들만 모인방이였어요. 어른들만이 착실하게 죽음의 잔을 찾아 마시기 시작했어요.
처음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병을 가진 할아버지가 두번째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슬픔에 잠겨있던 어느 아주머니가 세번째는 아직 어리지만 아픈 병을 가지고 있어 약을 찾아 헤매이던 젊은 아버지.
네번째인 저와 다섯번째인 부모를 병으로 여의고 돌봐주던 조부모님마저 시름시름 앓아가는 불쌍한 어린 소녀는 그들의 아름다운 희생으로 살아남았어요.
그리고 어.. 말해도 되려나? 말해도 되겠죠 뭐. 0번이 약속한대로 소원을 이루는 0번의 문으로 들어가게되었죠.
당신에겐 별로 필요하지 않지만 원래 방마다 해당하는 잔에 대한 독이 설명되어 있거든요. 이 잔을 들이킨자 영원한 불꽃을 품으리라 서리의 숨결을 내뿜으리라 뭐 이런식으로요.
각자의 방에 애매모호한 힌트가 쓰여져 있는데 그걸 모아서 살아남은 두명의 생존자들은 0번의 방으로 가게되죠. 무조건 두명.
하나는 잔을 마시지 않은 사람. 다른하나는 독을 마시지 않은 사람. 이건 나중에 알게된 룰이지만 꼭 두명이 되어야 해요
왜냐하면 0번의 방에선 둘중 하나가 제물이 되어야 하거든요.
소원을 품은 사람중 가장 삶에 대한 열망이 강한사람을 잡아먹고 그 두번째를 살려보내죠. 기억을 지운채로요.
두번째는 달콤한 냄새를 내며 다른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고 그 냄새에 끌린 사람들을 0들이 데리고 오는거에요.
하지만 저는 그 룰을 몰랐어요. 그리고 저들도 그걸 몰랐죠. 저는 두사람이 소원을 이루는 방에 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소매에 있던 약을꺼내 소녀에게 먹였어요.
소녀는 괴로워하며 방 한가운데 쓰러졌죠. 소원의 신님이 오기전에요. 독성이 너무 약해서 제대로된 성인이라면 열병만 앓다가 난청이나 눈이 멀어버리는 것으로 끝났겠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았아요.
작은 몸안에 작은 알약. 아이는 얼마 괴로워하지 않다가 우뚝 멈춰버렸죠. 삶에대한 열망이 가득한 손으로 제 바지를 붙잡으면서요. 제가 그 모습을 내려다 보고 있는 동안 소원의 신님과 그 관객들도 제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0번이 나와 제게 말했죠. 넌 실격이야. 라고. 저는 제 이유를 설명했지만 제물을 먹지못한 신님은 들어주지 않았어요.
빛나는 영혼을 먹이로 먹고 그 찌꺼기를 씌워 밖으로 내보내야하는데 하나밖에 없으니 먹을수도 뱉을수도 없는거죠.
저는 다시 방으로 보내져야하지만 이미 룰을 다 알아버린 저는 0번에게 제안을 했어요. 그럼 제가 당신을 도울께요 라고. 그게 아마 우리들같은 역할이 생겨난 처음 제안이였을꺼에요.
아하, 이러게 생각하니까 조금 자랑스럽게도 느껴지네요. 예, 그래요. 저희는, 아니 저는 내부자가된거에요. 독이 든 잔이 하나에 해독제가 하나.
죽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방이 원만하게 흘러가도록 돕는거에요 0번이 아닌 숫자중의 한사람으로서. 하지만 그 해독제의 위치나 독의 잔의 위치는 계속해서 바뀌고 변화해요.
해독제를 찾지 못하면 저 또한 독을 마시고 죽는거고, 해독제를 복용하기전에 제가 잔을 마시게 되어도 죽어요. 아 이건 좀 당연하네요. 그리고 혹시나 그래서는 안되지만 마지막까지 살아 남게 되더라도 저는 죽어요.
저는 제물도 대상자도 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반복되는 지루한 잔마시기 게임속의 조커가 된거에요. 게임속의 게임이죠.
조커가 제 역할안에서 죽을지 선밖으로 나가 정말로 죽어버릴지 제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주인의 손에 돌아와버릴지. 그런 흥정속에서 제 전적을 말해드리자면…. 전 이번에 24번째 방이에요. 탑클래스죠. 이젠 아니지만”
아 정말 아쉬워요. 학생은 그렇게 말하며 턱을 문질렀다. 이제 죽는건가 하는 느낌이 들어 잃어버렸던 열정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기도 하네요 따위의 실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였다며 시선을 피하는 선생은 고개를 흔들다 밀레시안과 마주쳤다.
방금전까지만해도 죽음의 문턱앞에 갔다온 눈동자가 선생의 눈을 꿰뚫듯이 노려보자 선생은 있는 힘껏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뭐!! 나도 저 얼간이 미친놈처럼 고해성사라도 하기를 바라는거냐?”
“나는 사제도 아니고 신성직도 아니에요. 비슷하긴 하지만. 음...따지자면 나는 즉결심판쪽이죠?”
아니지, 그런쪽의 문제가 아니잖아. 카즈윈이 소리없이 태클을 걸었지만 밀레시안은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 있다는건 별로 반성의 의지가 없다는거잖아요?”
“나를..! 저런 놈들과..!! 같은 취급하지 ..!! 마..!!!!”
“하, 똑같이 방에 돌아온 처지면서 말하는 건 아주 당당하네"
“제가 선생님 이야기도 할까요? 저 이야기 들은거 많은데”
“아냐 내가 이야기 할께, 저 멍청한 아저씨와는 이번에 3번째거든”
“……뭐??”
“아- 아저씨 바보여서 모르겠구나. 나 중간에 한번 남장하고 참여한적 있었거든 아저씨 이번이 네번째지? 난 이번이 열여덟번째. 아저씬 내 2번째 생존자였어. 다시 돌아오게 됬을줄은 몰랐지만”
아가씨는 아쉽네. 그래도 아는 얼굴이 늘어난게 어디야. 라고 윙크하며 다리를 꼬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주절주절, 주절주절. 이거 무슨 티파티도 아니고 말이야.
말하다 목마르면 저기있는 잔이나 들이키면 되는건가? 상황 진짜 개떡같네.
저기있는 저 아저씨는 말이야. 선생님, 선생님이라 불리지못한 안팔리는 소설작가야.
내 2번째방, 그러니까 저 아저씨가 처음 방에 들어왔을때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았지. 저인간이랑 같이 들어온 작자가 소설계에서 끝발날리던 대 선생님이였거든.
비밀리에 만나던 정부를 살해한 혐의로 시체를 암매장하다가 여기 들어오긴 했지만 끝까지 선생님이라 부르라고 우기던 대-선생님 말이야.
응? 왜 다 배경이 시궁창이냐고? 여긴 말이야. 그냥 오는 사람은 없어. 모두 저마다 깊은 소원이나 욕망을 가지고 들어오지.
저 미친놈처럼 제발로 들어오는 놈도 있고 나처럼 고뇌끝에 선택해서 오는 경우도 있고 저 아저씨처럼 욕망에 이기지 못하고 뛰어드는 경우도 있지.
저 영감님의 소원은 뭔지 알아? 돈이야. 웃기지? 죽을 고비를 4번이나 넘겨가면서 얻고싶은게 고작 돈이라니 웃기지도 안잖아.
하지만 저 아저씨는 방에서 나갔어. 병이 깊은 어머니를 위해 멋모르고 들어온 순박한 시골청년에게 제일 먼저 잔을 먹이고 짤랑짤랑한 금붙이에 환장한 얼뜨기연기를 하는 나에게 바로 다음잔을 먹이고 나머지 한잔은 대 소설가 선생님에게 먹이고서 말이야.
첫번째 방에서 확보한 해독제를 들이키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두번째에서 죽었을뻔했지.
근데 웃긴건말이야 소설가선생이 독을 마신건 자의가 아니였다는거야. 그 소설가 선생이 이름을 밝힌 그 순간부터 질투에 불타오르는 그 눈빛이란.
너무 노골적이고 투명해서 그 대단하신 소설가 선생도 못번척 무시했었지. 그래서 죽었어.
저 불타는 감정선에 똘똘뭉친 아저씨가 이리튀든 저리튀든 예의주시 하지 않은탓에 건장한 청년 둘이 쓰러지자마자 그대로 하늘을 나르는 드롭킥.
소설가선생이 테이블에 머리박고 쓰러지면서 피를 한웅큼 쏟아내었지. 저 아저씨는 그렇게 흐려진 의식의 소설가선생속으로 잔을 흘려넣었어. 출혈과 쇼크로 죽기 전에 독으로 죽도록.
한잔, 남은 한잔 두개 모두. 그런걸보면 그 소설가 선생은 죽을 운명이 아니였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는 죽었고 저 아저씨는 살았지. 그리고 끝없이 학대당한 끝에 가느다랗게 말라버린 남자애를 끌고 0번방으로 들어갔어.
그 애를 살려둔 이유는 딱 하나야 자신을 말릴 수 없으니까. 그리고 보시는 바와 같이 이 모양 이 꼴.
0번방안에서 무슨일이 있었는지 나는 말못해. 하지만 이 아저씨가 여기 있는걸 보면 셋중하나겠지 그 남자애가 겁에질려 죽었거나, 신님의 선택을 거부하고 얘나 먹으라고 어거지를 부렸던가 이 아저씨의 욕망이 너무 지나쳐서 제물로 쓰이게되자 이 아저씨가 남자아이의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고자 두들겨 패다가 죽여버렸던가. 나는 3번을 추천하지.”
“저는 1번일 것 같아요. 그런경우가 있었거든요 다행히 0번방은 아니였지만”
학생은 아 있지있지 그런애들. 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며 말에 끼어들어왔다.
다정하게 경험을 나눌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학생도 별로 즐거움을 공유하고자 하는 난입은 아니였던건지 천천히 손가락을 세며 꼽기 시작했다.
“겁에 질려서 그자리에서 죽어버린 애는 웃기게도 영능력이라는게 있는 아이였어요.
마법과 연금술과는 다른 능력이라나? 드루이드들 중에서도 특히나 삼하인의 밤에 특화된 아이라고 하는데 아쉽게도 제대로된 드루이드를 만나지 못한채 자라난 터라 아예 제물이되라며 이 방에 보내진 경우였죠. 하지만 아쉽게도 붉은 눈과 마주쳐서 그대로 사망.
죽기전에 소원의 신님의 이름을 중얼거렸을땐 아무리 저라도 철렁했다니까요? 뭐, 서적이 있으니까 0번들도 소원의 신님을 불러낸 거겠죠?
그리고 그 다음으로 웃겼던건 0번방의 진실을 알게되고 동반자살한 커플.
남자가 여자를 대신해서 잔을 마셨지만 놀랍게도 뭐다? 독이 들지 않은 행운의 잔! 그리고도 기지와 재치 그리고 현명함을 이용해 용캐도 제 짝을 데리고 0번방에 들어갔지만.
아쉽게도 한명만 나갈 수 있는 상황. 그 선택의 기로에서 두사람이 갑자기 손을 꼬옥 잡는데. 어휴. 솔직히 난 두사람도 그들과 같은 결말을 맺게 될줄 알았어요.
물론 한끗이 어긋나긴 했지만 아직까지 수습할 수 있는 범위 내라고 생각했고 두사람이 찰싹 달라붙는 그 순간 아, 이거 잘하면 날로먹고 해독제 찾는 순으로 우리끼리 따따닥 하고 죽으면 되겠구나 하고 내심 즐거워 했는데. 거기서 이렇게 어긋나다니.”
학생은 0번의 자리를 가리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경험치의 차이라는걸까. 수습해? 네가? 라며 빈정거리는 아가씨를 보며 학생은 그럼 못해요? 고작? 이라고 받아치는 학생이 이를 훤히 들어내며 기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누군가에게 호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웃음. 아마도 저게 본모습이겠지. 아가씨와 학생이 치고받는 동안 잔을 노려본채 부들부들 떨고 있던 선생이 입을 열었다.
남은 잔은 세 개 그중 하나는 빈 독. 죽어야하는 사람이 세명인 상황에서 한참동안 눈을 굴리던 선생은 아가씨 쪽으로 공격의 방향을 틀었다. 학생의 웃음에 혐오감을 들어내던 아가씨가 짜증스럽게 반응했다.
“그럼 자네는 뭔가”
“뭐야 아저씨 벌써 부활한거야?”
“나나 저 미친놈은 말했지 않나. 자네는 왜 이 방으로 돌아온거지?”
“이봐, 아저씨. 지금 무슨 신입 사원뽑는 설명회인줄알아? 저 미친놈은 지가 알아서 나불거린거고 당신은 내가 까발린거지 말한게 아니잖아.”
아가씨는 기가 차지도 않는다듯듯 새침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아직도 그 때의 감촉이 무서워 가죽장식에 손도 못대는 겁쟁이주제에.”
그래서였구나 그 이상한 손움직임의 의미는. 만지면 생각이 나니까.
그때의 그 폭력의 감촉이. 뼈가 깨지던 불쾌한 감각이. 유달리 폭력적이고 감정적이던 선생이 아무말도 못한채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보며 밀레시안은 최대한 혀를 차지 않으려 애를 쓰며 고개를 돌려야했다.
전형적인 소인배, 폭력에 기대어 제 마음대로 하지못하면 앙심을 품는 좁은 인간. 눈에 담기도 싫은 마음에 고개를 돌리던 밀레시안은 손을 흔들어오는 학생의 밝은 미소에 혀를 차고 말았다.
아까처럼 이를 드러내는 미소는 아니지만 그래도 저 웃음의 의미를 알게되었으니 반가울리 없는 호의였다. 실험체 A를 보는 무례한 눈빛. 이리보지도 저리보지도 못하게된 밀레시안이 시선을 둘만한곳은 카즈윈이 있는정면.
그 구조의 신호를 뜨거운 눈빛으로 오해했는지 아가씨는 이죽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턱을 괴였다. 선생이 그렇게 싫어하는 가죽장식을 쓰다듬는 손길이 아주 의미심장하고 적대적이며 나긋하게 이어졌다.
“그래, 그럼 이제 이쪽 커플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이야기 다 끝난거야? 하고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카즈윈이 고개를 든 것은 아가씨의 이죽거림이 카즈윈쪽을 향했을 즈음이였다.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이 방안에서 한가롭게 낮잠이라니. 아가씨가 인상을쓰자 밀레시안이 작게 아, 치사해. 라고 속삭이며 의자에 풀썩 기대어 앉았다.
관심도 없고 경계도 없는 모습. 아가씨는 짜증스럽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잔들이 달캉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봐, 너무 허세부리는거 아니야?”
“지루한 이야기를 계속 들을 의리는 없는 것 같은데”
카즈윈은 아직 피로가 덜 풀렸는지 미간사이를 꽉잡아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예 안들엇어요?”
“0번방이 어쩌고 까지는 들었어”
“참 빨리도 잠들었네요”
밀레시안이 늘상 있었던 일이라는 것처럼 반응하자 학생의 입가에서 참지못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자신보다도 더 미친사람들. 학생은 실험체 이상으로 흥미가 생겼는지 아가씨의 질문에 가세하며 카즈윈과 밀레시안을 번갈아쳐다보았다.
한쪽은 작은 여성, 다른 한쪽은 반만 갑옷을 걸친 이상한 기사.
“그래서, 정말 두 사람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된건가요? 사랑의 도피? 독같은건 가뿐하게 이겨내는걸 보면 밀레시안에게 뭔가 저주같은거라도 걸렸나요? 아니면 돈? 명예?”
“음… 굳이 따진다면 스트레스 해소? 어 물질적인거라면 돈과 경험치라고 해야하나?”
그게 그렇게되는건가? 카즈윈은 새로운 시각에서의 접근방법에 낮은 목소리를 내며 활줄에 걸린 볼트깃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거짓말은 아니지만 또 그게 전부인 대답은 아니다. 애초에 보수로 쥐어지는 돈 몇푼을 위해 이런 말도 안되는 공간에 떨어지는 사람이 누가있을까.
카즈윈이 변명으로는 약하다고 생각하며 밀레시안의 반응을 살피려는 찰나 학생은 말도안된다는 웃음으로 고개를 흔들며 되물었다.
“에이, 설마. 밀레시안씨 혼자라면 믿어줄지도 모르지만 저 형씨가? 저 선생님과 동류라고?”
있었구나. 몇푼에 인생을 파는사람. 카즈윈은 지나간 이야기속에 뭐가 있었는지 듣지 않았던것을 아주 조금 후회하며 고개를 들었다. 카즈윈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할 것처럼 뚫어지게 보는 시선 한쌍이 카즈윈의 뺨을 찔러오고 있었다. 유혹한다기 보다는 대상을 낯낯이 분해하고 파악하기 위한 무기질적인 눈빛. 아가씨는 턱을 괸 자세 그대로 입을 열었다. 뭐야. 카즈윈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가씨를 노려봤다.
“하는 행동이나 걸치고 있는 장비들로 보아선 당신은 기사가 맞아.”
“장비를 가늠할 수 있는 눈이 있다면, 맞다고는 해주지”
“그리고 저 아가씨는 테일러야. 평범해보이는 옷가게의 아가씨가 왜 당신같은 기사와 함께하는지는 알 수없지만, 하는 행동가지에 조금씩 습관이 베어나”
뜻밖의 정답, 카즈윈은 동요하는 감정을 가라앉힌뒤 멋대로 움직이려는 입을 다물리며 고개를 돌렸다. 알반의 기사들이라면, 그리고 밀레시안을 아는 사람이라면 저 모습 어디에 재봉사의 모습이 있냐고 되묻게지만 이번만큼은, 이번 한 달의 한에서는 아가씨의 말은 정답에 가까웠다. 재능의 환생. 속사정을 아는 카즈윈만이 오늘은 무슨 재능이야 하고 화두로서 던지곤 하는 대화내용이지만 제 3의 인물에게서 관찰당한 적은 처음이였기에 카즈윈은 소름끼치도록 확장된 아가씨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고민했다. 어디소속의, 누구밑에서 일하는?
카즈윈의 고민을 알아챈건지 자신의 추측이 정답이라고 생각한건지 아가씨는 씨익 하고 웃어보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기사와 테일러라. 왜일까. 왜 그렇게 여유로운건지는 모르겠지만 형씨의 격렬한 반응을 보니 조금 기분이 좋아졌어. 재밌네. 계속 끝까지 지켜보고싶어졌어."
"그게 너의 원래 일인가?"
"응..? 일? 아아- 아니야 비록 여기에 이런모습으로 이렇게 앉아있지만 나는 그냥 평범한 전직 힐러출신이라고?.”
“………?”
카즈윈은 방금 들은 말이 굉장히 의외라는듯 눈썹을 치켜올려보였다. 되묻기도 귀찮지만 궁금증은 동하는 모습. 카즈윈의 호기심에 밀레시안도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는 갑자기 돌아오는 시선들이 의외라는듯 눈쌀을 찌푸렸다.
“아, 내 드레스에 불만이 있다는건 아니야. 지금 마음에 안드는건 눈화장이 번졌다는 말이니까.”
“그거말고”
“내 눈화장 말고? 딱히 마음에 안드는건 없는데..? 아 네일. 큐빅떨어지는거 정말 짜증난다닌까”
“그 전에”
카즈윈은 드물게 부지런하게 대꾸를 하며 아가씨에게서 손가락을 되감아보였다. 좀 더 뒤로, 아니 그 앞이야기.
일부러인지 아니면 모른척하는건지 아가씨는 한숨과 함께 아 내가 힐러였다는거. 라고 말하며 등받이에 기대어 누웠다.
별로 내이야기는 재미없는데 말이지. 아가씨는 말하기를 꺼려하는듯 빙글빙글 산발이된 머리를 빙빙 꼬아내리며 입을 열었다. 머리장식이 반짝이고 있었다.
“별거 없어. 나는 힐러였고 벨바스트에 와서는 주점에서 일했어.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지붕이 낮고 창문이 작은 너구리굴같은 작고 구석진 주점에서.
잘생긴 총독나으리는 이래저래 깐깐한 규정속에서도 술에 물만타지 않으면 대부분 오케이 사인을 내어주었으니까.
바닷사람들은 거칠었고 샌님들은 대부분 밝고 넓은 주점으로 찾아가곤 했지만 운나쁘게 내 동기녀석이 너구리굴로 들어왔어.
쓸데없이 나를 알아보았고 미케네스 절벽 아래로 나를 불러냈지. 지금모습도 좋지만 예전모습이 어쩌고. 내가 말하면 두번다시 타라에 돌아가지 못할꺼라며 저쩌고. 애
초에 타라에서 나를 쫓아낸건 그 훌륭하고 지엄하신 동기님들인데 아쉬울리가 있나.
고작해야 관찰하는 능력도 갖추지 못해서 어떻게 하는거냐고 발을 동동 구르는 열등생들. 그 치들이랑 엮여 사느니 자유롭게 내 하고싶은대로 살겠다고 뛰쳐나온 벨바스트였는데 그렇게 파리같은것이 또 꼬이더라고.
제 나름대로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짜낸 협박문이겠지만, 왜 그 있잖아 해적들 입담 끝내주는거. 술에 취하면 더 가관인데 그런거에 익숙해진 나한테 그런 날치 비늘만도 못한 협박이 먹혀들리 있나.
그래도 소란에 휘말리는건 이제 딱 질색이니 입을 다물게 하려고 했는데 벨바스트에서 살인은 아주 엄중하게 처벌되거든. 바다에 빠트려도 몇시에 빠트린건지 알아낼 정도로 집요한 놈들인데 이런 쓰레기때문에 위험을 감수할수는 없고 전전긍긍하던 차에 그가 나타났지.
0번말이야. 그래서 뭐… 녀석이고 타라에 있던 동기들이고 뭐고 싹다 방으로 던져줬고 나는 진정한 사랑을 찾아 떠났어. 그게 다야”
정말로. 라고 덧붙이며 씨익 웃어보인 아가씨는 그대로 다리를 꼬으며 발을 까딱였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들어야겠어. 거기 두 커플은 어떻게 오게 된거야? 뭣때문에 오게 된거야?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온거야? 쉴새없이 이어지는 질문이 조잘거리는 새소리처럼 높아졌다 음울한 동굴소리처럼 낮아지기를 반복했다.
아 이사람도 정상은 아니구나. 밀레시안은 새삼스러운 사실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즈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 가는거야? 나쁜 사람들이네. 우리이야기만 듣고 그렇게 쏠랑 내빼버리다니”
“우리 이야기도 말했잖아요. 약간의 푼돈, 약간의 경험치. 그게 다에요”
정말로. 밀레시안은 아가씨의 말투를 흉내내며 고개를 까딱였다. 잠시 이름모를 오한이 등골을 스쳐지나갔지만 밀레시안은 턱을 치며올리며 오싹한 기운을 떨쳐냈다.
것봐, 역시 거짓말이잖아. 소리없이 입모양만으로 이야기하는 아가씨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하나, 둘, 셋, 천장을 오가는 세쌍의 눈동자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며 밀레시안과 카즈윈의 머리위를 맴돌았다.
“뭐… 됐어. 어차피.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으니까. 0번으로 가고싶은거지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죽지 않으면 0번의 문은 열리지 않아.”
아가씨가 가장 가까이 있던 잔을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일시적으로 가사상태에 빠질 수 있는 해독제도 0번이 나타나지 않으면 얻을수가 없지”
0번이 나타나는것은 간단한 조건만 만족시키면 끝나는 일이였다. 필요한것은 적당한 공포감과 절박함 그리고 삶의 대한 욕구가 가장 높아졌을때의 빛나는 영혼.
모래의 방에서 나왔을 때 처럼, 빛나는 영혼을 가지게 된다면 그때부터가 탐색의 시작. 하지만 자신이 가진 열쇠를 제대로 사용할줄 모르는 이들을 위해 나타나는 것이 0번.
안내자이자 동기부여자, 설명하는 사람이자 인도하는 사람.
학생의 묘사를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돌린 밀레시안은 0이라는 숫자가 세겨진 의자를 노려보았다.
누군가에게 막연하게 무의식중에 기대어 바라고 도움을 요청한다면, 기도한다면, 소원한다면 나타나는,
그릇된 존재.
“선지자”
밀레시안의 속삭임이 어둠속으로 흩어지는 동안 샹들리에에 비친 잔을 감상하던 아가씨는 꾀꼬리같이 높은 톤으로 말을 이었다. 어찌보면 1인 2역의 연극같기도한 기묘한대화. 밀레시안은 그가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지 지금 자신이 그와 대화하는것인지 그녀와 대화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듯 인상을 찡그렸다.
어느새 밀레시안의 곁에 다가온 카즈윈이 밀레시안의 목 앞으로 팔을 둘렀다. 품속에 가두는 듯한 모습이기도 하고 지키기 위해 가드를 치는듯한 움직임이기도 했다. 하지만 목적은 팔이아닌손끝에.
홀리지마. 카즈윈은 손톱을 세워 귓볼을 꾹 누르며 밀레시안의 정수리 위에서 속삭였다. 누가 누구를 홀린다는것인지 알 수 없는 속삭임이였다.
“자 그럼 사제도 아니고 신성직도 아닌 즉결심판이 쪽이라는 테일러 아가씨, 네가 이겼어. 우린 모두 죽을꺼야 두명은 독물에 의해 남은 한명은 약속을 어기게된 계약자에 대한 처벌에 의해”
타인을 죽여야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과 죽어야 해방될 수 있는 사람들. 아름다운 잔에 담긴 검붉은 액체가 위험스럽게 찰랑거리자 밀레시안의 시선이 가늘어지며 표정을 차갑고 단단하게 굳히여 걸어잠갔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자들에 대한 동정이기도 했고 여태까지 지나왔던 일들에 대해 반성하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경멸이기도 했다.
끝에서 끝까지 구제 받지 못할 사람들. 그리고 동시에 그런 기회조차 갖지 못한사람들. 타인을 희생시키는 방법밖에 알지못했던 사람들, 혹은 그 방법만을 선택했던 사람들.
잔은 세 개 마셔야 하는 사람도 세 명.
마지막 건배를 지켜볼 의리는 없었기에 등을 돌리려는 순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일어난 선생이 아가씨의 잔을 채어가며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꺼져가던 영혼에 빛이 할하는 순간이였다.
“이거! 이 잔이지! 이 잔이 독잔이지?!”
“…뭐야…그건 나도 모르지”
아가씨는 잔을 빼앗긴 것이 불쾌한듯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거야. 이 잔이면 단번에 죽을 수 있는거야!”
“그렇게 살려고 애썼으면서 이제와선 죽으려 안달이네 선생님?”
학생은 그 잔이 아니라면 세 잔을 다 들이킬 것같은 정열적인 기세가 무섭다는듯 큭큭거리고 웃으며 잔을 한잔 빼어들었다.
“하! 너희같이 미친놈들이면 여기서 무슨짓을 하더라도 즐겁겠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아니라고. 나는 살고 싶었어 하지만 이렇게 어긋난 방에서 살아남아봤자 그 끔찍한 괴물은 나에게 대가를 요구하겠지. 그나마 처음은 빌고 또 빌면 살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이번은 아니야 자유도 목숨도 없는 나에게서 또 뭘 빼앗아 갈지 아무도 모를 노릇이야. 영혼을 생명을 평생을 저당잡힌 뒤의 일이라니 여기서 끝내야해. 이 타이밍에 죽어야해. 독으로 아주 짧게 단숨에 말이야!”
계약을 어긴 이에게 처벌을. 밀레시안이 잔을 들이켰을 때부터 남은 잔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선생은 보석이 박힌 잔을 단숨에 들이킨뒤 허공을 향해 승리의 주먹 내질렀다. 소리없는 승리의 함성속엔 해방감과 도취감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탈출을 꿈꾸는 낭만이 서린 퍼포먼스.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대단원의 마지막 선생의 머릿속에선 가장 먼저 잔을 비운 영웅적인 모습을 비춰졌겠지만 한다리를 의자에 올린 중년의 아저씨가 일생일대의 유언을 남기는동안 독이 든 잔을 홀짝홀짝 들이킨 두 사람은 음… 하고 점점 뜨거워 지는, 혹은 차갑게 식어가는 몸안의 이상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독약이라는건 심오하네”
마치 새로나온 과일음료를 마셨을때와 같은 반응. 독약인건가 아닌건가 분간이 가지않는 선생이 애가타는듯 목을 움켜쥐는 동안 학생은 천천히 느려지는 숨과 얼어붙어가는 입김을 눈으로 확인하며 미소지었다.
“유언치곤 너무 순수한거 아니야?”
“그런가요? 하지만 효과를 100% 체험해보는건 처음이니까.”
역시 조금더 공부해 볼껄그랬어. 학생은 뒤늦은 후회를 중얼거리며 소매깃을 만지작 거렸다 한쪽단추가 떨어져 나간 소매끝은 얼마나 많이 만지작 거렸는지 반대쪽 단추가 있는 소매에 비해 반들반들하게 닳아있었다.
“역시, 당신이 왜 방으로 돌아왔는지를 물어볼 껄 그랬어요”
“이제와서 그런걸 궁금해하다니 당신도 역시 어린애긴 어린애네”
“직접적으로 살인을 한걸 들킨것도 아니고 누가 쫓는것도 아니고 하지 말아야할 일을 한것도 아니고 해야할 일을 외면한것도 아닌데”
“음, 여태까지 그 약을 먹은 사람중에 가장 길게 말한 사람이네. 기록갱신이야. 축하해”
“왜 돌왔을까? 당신은… 왜….”
멀쩡한 산림을 죽음의 일대로 만들고 수천명이 다니는 학교 식수탑에 신경독을 풀던 범인 치고는 너무나도 유치하고 짧은 한마디 손끝까지 얼어붙는 냉기속에 푹 하고 앞으로 고꾸라진 학생이 침묵하자 목을 부여잡고 있던 선생의 눈이 사정없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메여오는 이감각이 죽음의 손길인지 공포뿐인 허상인지, 달캉 하고 떨어지는 잔이 아가씨의 발밑을 지나쳐 굴러 떨어지자 고운 붉은빛 드레스 위로 검게 물든 선혈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좋은거… 하나… 알려… 줄께….”
아가씨는 잔뜩쉬어버린 목소리로 학생을 가리켰다.
“소매는…. 두쪽에 있어…”
소매의 단추는 두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앞으로 풀썩 고꾸라진 아가씨의 얼굴은 입과 코 귀, 눈따위에서 흘러나온 피로 엉망이된채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나는… …… … …… ……이……야’
그리고 남은것은 말이 되지 못한 허망한 바람소리뿐.
비어진 잔은 네개 살아남은 사람들은 세명.
이게 저사람들이 원하던 결말인걸까? 밀레시안은 망설임없이 독이 든 잔을 들이킨 두 사람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선생이 무릎을 꿇은채 밀레시안의 밑으로 다가와 떨리는 손으로 애원을 했다.
“제발.. 제발.. 너희에겐 검도 있고 석궁도 있잖아. 네가 내 잔을 마셨잖아. 내가 마셨어야하는 잔. 내가 들이켜야 하는 잔…”
독약때문에 삶을 꿈꾸고 독약때문에 삶을 포기하고 독약을 구걸하며 죽기를 바라는 사람. 밀레시안은 감흥없는 눈으로 선생을 내려다 보며 인벤토리창 안에 있던 단검을 빼어들었다.
그런 작은검으로 뭘하려고? 선생은 단번에 머리를 날려버릴만한 대검이 아닌것이 두려운지 밀레시안의 단검과 카즈윈의 쌍검을 번갈아보며 신경질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단검에 세겨진 마법적 언어가 어떤것인지 알게된다면 그의 쓸데없는 걱정도 단번에 해소되겠지만 평생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살아온 선생에게 그러한 지식이 있을리 만무.
밀레시안이 단검을 손안에서 굴리는 동안 노골적으로 카즈윈의 쌍검을 바라보는 선생이 떨리는 입을 열었다.
“그만”
먼저 목소리를 가로막은 것은 카즈윈.
밀레시안이 순순히 검을 꺼내주는 것 조차도 마음에 안들었는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카즈윈은 밀레시안이 들고 있는 검을 멈춰세우며 다시한번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아가씨의 말은 번복했다
“소매의 단추는 두개”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선생에게 고갯짓으로 학생을 가르킨 카즈윈은 더이상 볼일이 없다는 눈으로 천장에 돋아난 붉은 눈동자를 올려다 보았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모두 끝냈어 길을 열어.”
스스로 방에서 나오려는 기묘하고도 낯선 방문객들. 눈은 좌우로 눈동자를 굴리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덜덜 떨며 학생의 소매를 확인하는 선생을 보고는 눈을 감았다. 0번의 문이 열리고 밀레시안과 카즈윈이 떠나가는 동안 선생은 짤깍이는 방울소리가 나는 소매 단추를 흔들며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실패작인 약, 어리고 작은 아이여야지만 간신히 듣는 시제품. 그러나 더이상 방안의 불빛은 없었고 어둠속의 눈동자들은 더이상 호의적으로 그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 희망이되길 단추속 작은 알약을 삼킨 선생은 알약이 녹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이야.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과연 알반의 기사들”
“가차없이 모두를 죽이고 나왔군요”
0번의 문을 지나 쭉 이어진 복도를 지나는 동안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밀레시안과 카즈윈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들의 가슴팍에 매어진 목걸이의 펜던트는 좋게 보면 수수한 동그라미였고 노골적으로 지적하자면 숫자 0의 모습이였다. 세세하게 보면 모두 다른 사람들이지만 같은 머리 같은 색깔 같은 표정과 같은 옷을 입으며 훌륭하십니다. 라는 말을 똑같이 반복하는 닮은꼴들의 집합은 여러 이단들을 파쇄시켜온 밀레시안들에게도 기괴하고 징그럽게 느껴졌다.
“이제 어쩌실 꺼죠? 저희들이 신을 부술 껀가요? 그분을 해칠 껀가요?”
“저희 교단을 베어버릴 껀가요? 남은 사람들을 구출 할껀가요?”
“그들을 구출한다면 뭐가 달라질까요? 뭔가 배워나갈까요?”
“아니요 아니죠. 그들은 달라지지 않아요. 그들은 우리들을 만나 망가진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망가지고 도태되어 도망치는 자들을 우리방으로 초대하는 것 뿐이에요”
“차린것은 없지만 마실것은 있습니다”
“달콤하진 않지만 계속 쓴맛만 나는것도 아니죠”
“우리들의 신은 빛을 먹고 어둠을 내뱉지만”
“우리들의 신은 현실을 먹고 꿈을 선물합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들과 변명들, 좌우에서 한명씩 밀레시안과 카즈윈에게 번갈아 말해오는 꼭두각시같은 선지자들.
길의 끝에 이어진 것은 두개의 접시를 가진 저울은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음에도 이리저리 기울며 평형을 찾으 헤매이고 있었다.
멈추지 않은 저울추의 어디를 믿어야하는걸까. 밀레시안은 어둠속에 숨어든 수십쌍의 눈들을 돌아보며 나머지 한쪽의 단검을 빼어들었다. 두 검의 짧막한 날 위로 휘몰아치는 붉고 푸른 기류가 밀레시안의 손등과 손목을 타고 팔꿈치까지 핥으며 올라왔다.
“너무 멀리 뛰지말고 중간에 두어번 도약해”
“한번이면 충분해요”
“너무 멀어. 두번에 나눠서해”
저울이 기울때마다 이리저리 머리를 움직이는 이계의 존재가 늘어진 입술을 끌어당겨 웃으며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다음 제물은 누구?”
저울까지 이어진 유일한 길은 가장자리를 돌아 관객석을 한바퀴 쇼잉하고 들어가는 기다긴 체념의 길. 그 길을 무시하고 허공으로 뭄을 날린 밀레시안은 타이밍에 맞추어 날아오는 볼트를 살짝 밟아 도약하며 단숨의 저울의 추까지 도착했다. 시계처럼 째깍째깍, 중심을 찾지못하고 좌우를 오가던 추시계가 멈춰서자 덜커덩하는 충격음과 함께 이계의 저울이 멈춰섰다.
오른쪽, 왼쪽. 저울의 접시가 내려갈때마다 혀를 낼름거리며 입맛을 다시던 이계의 괴물이 혀를 쭉 내밀며 다시한번 입을 열었다.
“다음 제물은 어디”
“이제 제물은 안와”
제 나름대로는 웅성거리는 밀레시안과 카즈윈의 귀에는 끽끽거리는 소리로 밖에 안들리는 수많은 변질된 몬스터들의 울음소리속에 커다란 대검이 푸른신성력과 함께 솟아올랐다. 밀레시안이 밟고 선것은 반평 남짓도 안되는 좁고 가파른 공간의 저울대위.
유연하게 다리를 휘돌려 자리를 잡고선 밀레시안이 정중앙을 향해 대검을 내리치자 어둠속 벽 가까이 붙어있던 눈동자들이 밀레시안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헀다.
멀리서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카즈윈이 밀레시안을 향해 뛰어든것도 거의 동시의 일. 무너지는 천장의 돌을 디딤대 삼아 단번에 밀레시안의 곁으로 다가간 카즈윈이 온전히 체중을 맞겨오는 밀레시안을 꽉끌어 안으며 속삭였다.
“고정했어?”
“지금하려고요”
“데미지는 들어가?”
“응, 그냥 후두려 패면 되겠네요”
끝없이 이어질것 같은 구멍속으로 추락하는 이계의 괴물을 쫓아 여덟개의 빛의 바늘이 섬광처럼 흩어지며 괴물의 몸을 꿰뚫었다. 추락하는 통로를 따라 울려퍼지는 포효소리에 벽면을 따라 밑으로 내려가던 밀레시안과 카즈윈은 꼼짝없이 인상만 찌푸린채 그 원망어린 울음소리를 고스란히 들어야만했다.
“엄살이 너무 심하네”
밀레시안은 카즈윈의 검을 노리며 따라 내려오는 눈동자들을 향해 볼트류 마법따위를 던지며 간간히 밑바닥을 살펴보았다.
끝나지 않을것처럼 깊게 이어지는 구덩이의 끝. 빛의 바늘에 꿰여져 바위에 찰싹 달라붙게된 괴물의 머리위로 두개의 저지먼트가 차례대로 내리꽂히며 큰 진동을 만들어냈다.
하나의 저지먼트에 반절의 신성력이. 세개의 검을 몸으로 받아낸 이계의 괴물이 검붉은 색의 진흙을 토하며 뒷걸음질 쳤다.
카즈윈은 그대로 남아서 뒤쫓아오는 괴물들의 대한 경계를. 평타용 단검대신 화려한 캘틱무늬가 세겨진 두자루의 검을 꺼내는 동안 잠시 한눈을 판 밀레시안은 동굴 안쪽에서 빼꼼히 삐져나와져 있는 붉은 드레스를 보며 걸음을 멈춰세웠다.
늘씬한 다리와 어딘지 잘 모르겠지만 남성형이라고 이름붙여진 잘 발달된 허벅지, 그리고 그 모든것이 돋보이도록 시원하게 트여올라간 드레스의 귀여운 나비매듭까지.
밀레시안은 예상했다는듯 고개를 까딱거리며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오래간만에 만나네요. 아가씨”
다 부서진 종유석 뒤에서 예의상 얼굴을 가리고 서 있던 아가씨가 모르는척 고개를 내밀었다.
주점의 꽃을 자처할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였지만 그 속에는 배우다 말고 뛰쳐나온 학생보다 더 집요함이 숨어있었다.
경력으로 쌓아온 실력고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척척 알아맞출 정도로 대단한 눈썰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전직 해적출신의 선원들을 구슬릴 수 있는담대함도 가지고 있었다 단 한명의 입을 막기위해 독잔이 든 방에 들어오고 하는김에 겸사겸사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동기들을 방안으로 끌고들어온사람.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쓰러졌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말하는 입술의 움직음을 알반의 수리부엉이가 놓칠리 없었다.
그리고 그의 바로 옆에 서있던 관문의 수호자도 그녀의 머리장식이 따로 떼어내거나 다듬은 것이 아닌 그녀의 머리에서 돋아난것임을 알아보지 못할리가 없었다. 타이밍 좋게 시간을 끌다가 아무래도 좋다는듯 툭 털어내듯이 말하는 이야기까지.
“모든걸 다 말해준것 같지만. 당신의 소원에 대해서는 들은적 없더라구요”
끈질인 사람들이네. 웃는 낯과는 다르게 아가씨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채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었다. 인간으로서의 몸은 독액으로 녹아내리고 남은것은 사도로서 변이된 부분들만 남은 변이된 인간의 옷자락 안으로 독약에 변색된 광물이 탁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밀레시안은 산송장과 다름없는 아가씨를 보며 검을 빼어들었자 두자루의 켈틱소드위에서 붉은 기운이 어른거렸다.
“그래서 당신의 소원은 뭐였어요?”
밀레시안의 질문에 어디선가 두개의 푸대자루가 아가씨의 양옆으로 떨어졌다.
목에는 동그란 목걸이를 꿰어만든 로브같은엇 안에는 똑같은 모습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밀레시안은 혐오감에 입을 비틀었고 0들은 그것을 즐기며 고개를 까딱였다.
과도한 신성력의 손실로 죽어가는 소리를 내고 있던 이계의 괴물이 고개를 들어 0들과 아가씨를 확인했다. 질척한 진흙기둥 같은것이 서서히 들어올려졌다.
“바보같은 밀레시안, 어리석은 밀레시안”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는 밀레시안, 어리석은 밀레시안”
“들으면 이루어 줄건가요?”
“들으면 공감해 줄건가요?”
“그녀의 소원은 마지막까지 아름다운것을 지켜보는 것이였고”
“그는 소원의 순간 우리들의 황금색 불꽃에 매료되었지요.”
“그는 자처해서 우리들에게로 왔어요”
“이 불꽃이 영원하도록 이 불꽃이 계속 타오르도록”
짤랑짤랑, 제자리를 뛸 때마다 들리는 목걸이의 금속소리에 밀레시안은 낮게 탄식을 내뱉으며 시선을 떨어트렸다. 아 그랬지 여기 정상적인사람은 없었지. 스쳐지나간 감동적인 이야기도 듣다 넘어간 가슴절절한 이야기도 모두 다 세세하게 듣다보면 광기와 무지 그리고 억지의 연속.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방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밀레시안은 검을 들어 거대한 검을 소환해냈다.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힘. 눈앞의 칼날보다 등뒤를 덮져오는 거대한 진흙기둥에 시선이 팔린 아가씨는 드디어 라는 얼굴로 미소지었다.
아가씨는 지금 불꽃 한가운데 들어와 있었다 이계의 신성력을 타오르는 황금색 불꽃.
나는 정말 이것에 매료되었던 걸까? 미케네스 절벽 아래에서 처음 방으로 끌려들어와 저울대의 앞에 서는 순간, 이계의 짐승의 입에서 타오르는 황금 불꽃에 눈을 빼앗긴 아가씨는 사소한 기억을 대가로 현실로 돌아온 뒤 다시금 대상자를 물색했다. 그 방에 가고싶은 사람을 찾아야해 그리고 나도 함께 데려가줘. 그 불꽃을 보고싶어. 그 황금색 광휘를 보고싶어. 어떻게 하면 다시 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불꽃을 다시 피울 수 있을까.
아가씨는 방과 현실을 오가며 희생자를 물어날랐고 그 안에는 휴가를 빙자한 도피행으로 벨바스트에 도착한 유명하지 않은 소설가도 있었고 실종된 힐러를 찾으러 벨바스트를 찾아오는 아가씨의 전 동기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거주구역 내에서 18명이나 되는 실종자가 발생하면 자연히 총독이 사건에 관여하기 마련.
밀레시안은 0들과 아가씨를 흡수한뒤 조금은 기운을 차린 이계의 짐승을 보며 저지먼트를 해제했다. 등뒤에서 잠시동안의 딜레이동안 무망비상태가된 밀레시안을 엄호하는 화살이 강렬한 파열음을 내며 날아들어왔다.
“그런데도 저희들을 없앨껀가요?”
“우리들을 필요없다, 부정하다, 징그럽다 라고 말하는건 어느시점에서 보는 시선인가요?”
“우리는 너희를 없앨꺼야. 그러기 위해서 여기 온거니까”
“거짓말, 거짓말이야. 당신도 소원이 있어서 이곳에 들어온 것이면서”
“당신도 저기 뒤에있는 수리부엉이도 모두 우리들을 불러들일만한 욕망이 있어서 이곳에 들어온것이면서”
뭐 틀리진 않지. 카즈윈은 텅비어버린 볼트통을 보고 아쉽다는듯 석궁을 고쳐매며 손을 앞으로 뻗어내었다. 다섯개의 손가락을 따라 방향을 틀어 이계의 신을 노려보는 천상의 바늘이 매그넘샷에 뚫린 몸을 복구하느라 주춤거리는 이계의 짐승을 향해 쏘아내어져 갔다. 그리고 뒤따라 움직이는것은 두자루의 검을 고쳐쥔 밀레시안.
“하-나, 둘-, 셋, 네엣,”
다섯 번째의 검격. 붉은 기운이 천장높이 치솟아오르며 검은 날에 예기를 더했다. 다섯, 밀레시안은 머리위로 날아오는 팔모양의 촉수를 걷어내며 짐승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다섯, 아래서 솟구쳐오는 점액질의 끈적거리는 턱주가리를 발로 밟으며 머리 위쪽으로. 다섯, 미간을 밟으며 자세를 바로잡은 밀레시안은 등뒤로 떨어져내리는 작은 촉수따위들의 자잘한 파열음을 들며 고개를 돌렸다.
"손대면 안돼요?"
"엄호해주는거잖아"
"이거 내 보상이라구요?"
카즈윈이 한숨을 내쉬었다.
“소원이 있으신가요?”
"아, 당신이 오언제독이 말한 그 수상한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죠?"
“소원이 있으신가요?”
"소원? 소원.. 음.. 딱히 뭐 없는데?"
"아니지, 뭐라도 말해야 그 방에 들어 갈 수 있잖아"
"소원이 없으신가요?"
“아니야, 아니야! 있어! 있어.. 어…… 잘 안죽고 튼튼하고 경험치좀 잘 주고 신나게 두둘겨 팰만한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어?”
“하아…”
“그쪽분은 소원이 있으신가요?”
“………그냥 얘 소원이나 이루어줘”
“………어.. 감동이긴 한데 보고서는 내가 안쓸꺼에요?”
“정말 그걸로 괜찮으신가요……?”
“………이번엔 분명 네가 보고서 쓰는 차례.. 아니, 아니다. 다른놈들에게 장난친다고 책잡힐테니까”
“애초에 제대로된 소원이 이루어질리도 없는데 진지하게 소원을 빈다는 것 자체가..”
"그래도 좀 더 간결하거나 깔끔한.. 됐다 그냥 들어가자 포탈 열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