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즈밀레)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아침, 이라고 정신이 들었지만 밀레시안은 한참을 눈을 뜨지 못했다.
몸을 짓누르는 성인 남성의 체중 때문이기도 헀도 뒷머리가 당겨오는 아릿한 통증떄문이기도 했다. 골반를 휘감아오는 카즈윈의 왼손이 무척이나 신경쓰여 버둥거려보지만 사냥감을 움켜쥔 수리부엉이는 좀처럼 힘을 빼주지를 않고 있었다.
고개가 삐딱하게 꺾여 목울대에 환상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모습이 아무리보아도 정상적이지는 않은 상태. 목을 돌려 자는동안 뭉쳐있었던 근육들을 시원하게 풀어주고 싶은 밀레시안이 자리에 일어나기에 앞서 카즈윈의 오른팔을 잡아내렸다.
가슴을 가로질러 왼쪽 손목을 잡고있는 오른팔의 무게가 고스란히 가슴위로 실려 숨쉬기도 불편하지만 정작 정수리 위쪽에선 도로롱도로롱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구부정한 새우잠자세로 잘도 잠들어있는 얼굴이 쓸데없이 가지런하고 단정했다.
부드럽게 감겨있는 눈꺼풀, 아래쪽으로 곱게 드리워진 속눈썹 사이사이에는 피곤함이 웅크리고 있었지만 못봐줄만큼 형편없는 안색은 아니였다.
눈머리에서 콧잔등으로 내려오는 선은 날렵했고 굳게 다물린 입술은 날숨때만 아주 살짝 열려 숨소리를 흘리다 닫혀버린다.
입꼬리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은 일자. 평소에 무슨 표정을 짓는지 알 수없는 모습은 잘때도 마찬가지인건지 밀레시안은 한참을 고개를 꺾어 카즈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로 표현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이 심장소리를 앞서 혀끝을 간질인다.
불편한 자세에서 어찌 몸을 돌려도 영 각도가 안나와 금방 지쳐버린 밀레시안은 다시금 목아래 오목한 공간에 머리를 쳐박으며 짜증스럽게 카즈윈의 팔을 할퀴어내렸다. 간지럼을 피우는 것 같이 가벼운 투정에 카즈윈은 깨어나긴 커녕 눈썹도 꿈틀이지 않는다.
아- 화나. 역시 잘생겼어. 밀레시안은 왠지 대전에서 진 기분으로 팔을 잡아 흔들며 몸을 빼내기위해 안간힘을 썼다. 자고있는 동안에는 입정도 벌리고 있어도 괜찮을텐데, 수갑처럼 채워진 팔은 꿈쩍이지도 않자 제풀에 지쳐버린 밀레시안이 기묘한 소리가 섞인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카즈윈의 품에 기대어 누웠다.
카즈윈의 쇄골께로 밀레시안의 뜨거운 한숨이 닿닸다 떨어졌다. 카즈윈의 족쇄가 좀더 꽉 죄여오며 밀레시안의 몸을 끌어안았다. 밀레시안이 작게 나쁜말을 투덜거렸다.
가슴사이에 꽉 끼워진 한쪽 어깨는 움직일 수도 없고 나머지 한 팔은 팔뚝에 가로막혀 제대로 뻗어올릴 수조차 없다.
밀레시안이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이며 고개를 들어올리지만 깊게 잠이든 부엉이는 눈두덩이를 두드리는 햇살의 따사로움에도 일어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카즈윈"
필리아의 바람처럼 매마른 목소리가 카즈윈의 턱끝을 스쳐지나갔다.
밤사이 칼칼해진 목은 그르렁거리는 숨소리와 함게 매마른 헛기침을 뱉어내었다. 갈증을 의식을 하고나서야 겨우 목이 타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밀레시안이 카즈윈의 가슴을 긁듯이 움켜쥐었다.
저리 좀 가봐요. 소리없는 투정이 카즈윈의 몸을 흔들었다. 잠이든 수리부엉이는 여전히 미동없이 밀레시안을 움켜쥐고 있을 뿐이였다.
깨어나는 기척없이 길고 고요한 숨소리만, 정수리를 스치는 숨결의 온도가 느껴질리도 없지만 숨소리에서 느껴지는 것같은 낯뜨거운 온기에 살갗이 맞닿는 부분 하나하나가 뜨겁게 느껴져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스킨쉽 자체는 밀레시안에게 꼭 필요한 온기였고 이 상황은 밀레시안이 바라 마지않던 시간이였다. 밀레시안으로서도 아주 오래간만에 카즈윈을 만나기 때문이였고 본래 좀 더 안겨오는 것은 밀레시안 쪽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갈증 속의 재회는 바라지 않았어.
밀레시안은 소리없이 입을 삐죽거리며 다시한번 카즈윈의 팔을 움켜쥐었다. 수없이 단련된 근육질의 팔뚝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련된 미스릴 괴 보다도 단단하고 수없이 겹쳐진 철괴들보다도 무겁게 느껴졌다. 손을 뻗어 카즈윈의 등을 긁어 내리던 밀레시안이 찰싹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도록 너른 등판을 두드렸다. 파닥파닥거리는 필사적인 움직임이 꽤나 애절하기까지 하지만 카즈윈은 일어날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친 밀레시안이 다시금 팔을 거두어들여 카즈윈의 팔을 들어올리기위해 애를 썼다. 이렇게 하지않으면 이제 숨이 조금 모자랄 지경이였다.
헤루인의 요즘 주요 미션이 어떤것이였더라. 밀레시안은 무엇 때문에 이 예민한 조장님이 죽은것 같이 잠들어 깨어나지 않는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이 잠기운에 굳어있는 머리를 억지로 쥐어짜는 것은 괴롭웠고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 자학의 일종이였다. 눈을 굴려 창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눈부신 새 날의 하늘빛이 찌푸린 눈꼬리를 쿡쿡 찔러들어왔다. 태양은 완전히 떠올랐고 닫혀있는 창문은 환한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깨어있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뿌옇게 흐려져있던 잠의 안개가 걷혀가는 것은 좋은 징조였지만 의식이 또렷하게 돌아오자 더욱 타는듯한 갈증이 밀레시안의 목줄기를 쭉쭉 끌어당겼다. 자꾸만 말라오는 입술을 혀로 달싹거리며 발을 굴렀다. 숨이 조금 벅차오르는 아찔함에 밀레시안의 짜증이 더욱 바싹 부추겨온다.
"카즈윈...!"
밀레시안이 조금 더 강한 어조로 카즈윈을 불러보았다. 목소리로 울려나오는 소리보다 쉰소리로 새어나가는 바람의 양이 훨씬 더 많게 들려왔다.
나 목마르단 말이에요 하고 제 사정을 하소연해본다 하더라도 들리지도 않겠지만 밀레시안으로서는 꽤나 필사적인 행동이였다. 다정하게골반을 감싸는 손길도 그 손목을 꽉 잡아 가두는 팔뚝도 지금은 모두 올가미같이 갑갑한 것들일뿐. 그나마 자유롭게 움직 일 수 있는 다리를 버둥거리며 카즈윈을 밀어내려하지만 몇 번 움직이자마자 카즈윈의 긴 종아리가 얽혀왔다.
"당신 깨어있지?"
카즈윈의 허벅지가 말없이 밀레시안의 다리를 겹쳐눌러왔다.
누가 옆에서 툭 하고 밀기만 한다면 바로 밀레시안의 위로 쓰러져 내릴것 같은 자세속에서 카즈윈은 여전히 달콤한 꿈속을 헤매이며 밀레시안의 머리를 턱끝으로 눌러왔다. 뭔가 웅얼거리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져야하지만 볼 수도 없고 볼 정신도 없다.
고개는 여전히 삐딱하게 꺾여있었고 밀레시안의 근육들은 뻐근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나마 밀레시안이 카즈윈에게 아주 바싹 끌어 안긴다면 이전보다는 편한 자세가 되겠지만 그렇게 고쳐 눕기 위해서는 우선 카즈윈에게 눌려버린 다리를 풀어야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불가능하겠지. 팔을 치우는 것에 실패한 밀레시안은 끝없는 패배감을 느끼며 겹쳐눌려진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밀레시안의 자세에서는 더이상 자신의 다리가 보이지 않았지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다리의 위치를 가늠하는 밀레시안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기울어졌다.
누가 헤루인의 갑옷이 가볍다 했던가. 상반신이 좀 더 가벼워 보인다 할 뿐이지 하갑은 중갑옷의 그것과 다를바 없는 무게, 그리고 그 무게를 무시하고 날아다니듯 뛰어다니는 카즈윈의 다리는 언뜻 보기에도 팔보다도 훨씬 치우기 어려워보였다.
그리고 만일 밀레시안이 자리를 고쳐 눕는다 하더라도 갈증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 앓는 소리 비슷한 신음소리와 함께 눈을 깜빡이던 밀레시안이 단단하게 굳어버린 카즈윈의 오른손을 만지작거렸다.
새끼손톱조차 들어가지 않도록 꽉 맞물린 손가락사이로 밀레시안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지분거리며 돌아다니지만 좀처럼 틈새를 찾아내지 못한다. 손등의 모양만 덧그려 피부결의 반대로 손을 쓸어올라간 손가락이 카즈윈의 팔꿈치에서 멈췄다 떨어져나갔다.
말라버린 입술위로 마른 혀끝이 살짝 삐져나와 고르지 못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쩌다 이런 모양새가 된 것인지, 밀레시안은 답답해하며 고개를 숙인 상태 그대로 좌우방향을 번갈아 고개를 흔들었다. 최후의 반항이기도 했고 소리없이 비명을 지르는 목근육에 대한 응급조치이기도 했다. 맞물린 고무를 억지로 비틀어 부대끼는 느낌처럼 꾸덕꾸덕한 피로감이 목과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 썩 시원하지 않은 느낌이였다.
그저 가만히 기울어져 있는 것보다는 나을것이라는 심적인 위로의 행동. 내친김에 카즈윈의 팔을 한번 더 잡아내려보지만 카즈윈은 여전히 미동없이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헝크러진 머리를 시원하게 쓸어넘기고 싶지만 손이 닿지를 않는다. 밀레시안은 헝크러진 머리 그대로 다시 카즈윈의 쇄골께를 향해 고개를 처박았다. 이 사람 언제일어나는거지. 밀레시안의 한숨이 깊어져갔다.
"음..."
갈증에 정신이 팔려 버둥거리고 있었지만 일단 잠시 포기하고나니 밀레시안의 머릿속으로 의문점이 하나둘씩 잉크방울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이사람은 언제 돌아온 것이고 자신은 왜 이 방에 있으며 언제부터 이런상태로 잠들어 있던건지 언제 자신이 잠이 들었던 것인지. 의식을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자러간다 라는 기억이 없던 탓에 밀레시안은 머리를 감싸쥐는 대신 눈가를 찡그리며 머리를 쥐어짜내고 있었다.
뭔가를 마셨던가..?하지만 술은 아니였다. 낮부터 술을 마셨을리 없어. 밀레시안은 스쳐지나가듯 떠오른 시간대의 기억에 눈을 깜빡였다. 낮, 창고에 뭔가 들여오는 조원들을 보고 뭐냐고 묻던 기억이 마치 먼 옛날의 기억처럼 피어오르다 흐드러졌다.
뭐가들었는지 잘모르겠다며 누구에게 받아온것인지도 잊어버린 카나가 낑낑거리며 나무박스를 들어나르는 모습에 문을 열어주던 기억, 밀레시안은 카나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상자를 열어 안에 들은 내용물을 확인했다.
갈증, 태양빛. 쏟아져내리는 퍼즐조각처럼 중구난방으로 솟아오르는 기억사이로 카즈윈이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손을 풀어주는 걸까? 제 손목을 잡은 이상한 자세가 불편하지도 않은건지 목을 조를듯 팔을 오무리며 자세를 고쳐누운 카즈윈이 다리를 움직였다.
잽싸게 한쪽 다리를 빼내자 그 빈 자리만큼 카즈윈의 종아리가 얽히며 남은 한다리를 꽉 잡아 눌렀다. 밀레시안이 짜증스럽게 카즈윈의 등을 내리쳤다. 빠져나온 다리가 저릿저릿한 것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영 유쾌하지 못한 기분이였다. 카즈윈은 여전히 깨어나지는 않을 모양이였다.
창고안에 들여보내진 상자에서 분홍빛 액체에 아무런 라벨링이 붙어있지 않은 포션병을 발견한 밀레시안은 아무런 의심없이 한 병을 집어 올려 내용물을 확인했었다. 술내음도 아닌 그저 달디단 향기가 나는 액체.새로운 포션인가? 하고 의문이 들어 상자를 살펴보았지만 설명서나 품질보증서, 혹은 성분에 관한 코멘트도 발견되지 않아 밀레시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창문밖을 바라보았다.
누구에게 받은지 모른다는 말은 슈안을 통해서 왔다는 걸까? 모르는 사람이 들어올 수도 없는 폐쇄된 공간에서 발신인 미상으로 불려진 상자의 존재에 밀레시안은 충동적으로 스쳐지나가는 갈증에 병을 입 가까이 들어올렸다.
유리주둥이를 입술에 대고나서야 아 마셔도 괜찮은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부드럽게 흘러나온 액체는 이미 밀레시안의 입술에 닿은 뒤의 일. 꼴깍 하고 반사적으로 한모금 삼켜버린 밀레시안이 혀를 감싸오는 산뜻하고 달콤한 사탕냄새에 입맛을 다시며 병을 다시 확인했다.
애들용 음료수? 확실히 그런 것이라면 특별히 라벨을 붙이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겠지. 내용물을 지레짐작한 밀레시안이 다시 병을 밀봉해 내려놓고 상자의 뚜껑을 집어들었었다.
마무리는 확실하게. 어려울 것도 없이 덮기만 하면 되는 상자였고 덮개 자체도 가볍고 얇은 나무판의 재질이였지만...
거기, 그 지점. 밀레시안은 기억이 끊긴 부근에서 혼란스러워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러고나서? 상자의 뚜껑을 집어 들었던가 놓쳤던가. 밀레시안은 아려오는 뒷통수가 기분탓이 아니였음을 인정하고서는 카즈윈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카즈윈은...? 창고에서 부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카즈윈이 돌아올만한, 그가 걱정할만한..? 하지만 밀레시안은 자연스럽게 그럴리 없다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였다. 너무 한쪽으로만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탓이였을까. 밀레시안은 왠지 생각까지 삐뚤어진 기분으로 매스꺼워진 속을 내리눌렀다. 카즈윈의 목덜미에서 그때 마신 물약의 향기가 섞여있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원래 이렇게 단 느낌의 향기였던가. 아니면 그냥 기분탓인걸까. 어찔한 느낌이 잠시 스쳐지나가자 밀레시안은 목덜미가 홧홧하게 타오르는 기분에 몸을 웅크렸다. 감각이 예민해지는 기분. 카즈윈의 향기가 원래 이랬던가, 하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카즈윈은 그 오랜 기간동안 밀레시안에게 연락한번 주지 않았으니까.
언제나 기밀사항으로 임무를 나가버리는 정식 조원, 그것도 조장급의 기사에 대한 정보를 밀레시안이 알아내기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밀레시안을 만나러 오는 것은 늘 카즈윈쪽, 혹은 연락을 하더라도 첫 부엉이는 카즈윈으로 부터.
애석하게도 그는 연락을 꼬박꼬박 챙길만큼 싹싹하고 바지런한 성격은 아니였다. 임무의 성실도와 인간관계의 세세한 배려심은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 연락은 없었다. 안부를 물을 연락책도 없었다. 돌아오는 날도 떠나가는 날도 늘 스쳐지나가는 바람만큼 덧없는 일정에 휘둘려 잊혀지곤 했다. 지난 몇주간도 그런 상태. 그는 밀레시안을 걱정하지도 밀레시안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알고 있어. 알고 있었어. 기대감을 잃어버린채 늘 그래왔겠거니 라는 생각으로 서운함을 덮어 놓고있던 밀레시안이 턱을 쳐올리는 느낌으로 불쑥 고개를 치켜들었다.
카즈윈의 미간이 처음으로 찌푸려지며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일어나요. 해가 중천이야"
나는 지금 화가 난걸까? 밀레시안은 스스로의 감정에 확신을 갖지 못한채 카즈윈의 팔을 움켜쥐었다. 여태까지 불쾌하게 일어나지 않게 배려하던 조심스러움은 더이상 밀레시안의 마음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팔을 당기고 몸을 움츠려 틈을 만들어낸 뒤 강한 힘을 실어 카즈윈의 배를 꾹 밀어내었다. 여태 카즈윈의 품속에 묻혀있다시피한 손이 어색하게 움직이자 카즈윈의 눈썹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단단하게 자리잡은 배의 근육을 꾹 밀어내자 마즈윈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밀레시안이 팔을 빼내며 몸을 뒤로 밀어냈지만 카즈윈의 고리는 여전히 단단하게 움켜쥐어져 있었다.
"놔달라니까요"
밀레시안이 한쪽 무릎을 세워 카즈윈의 허벅지 사이로 다리를 들이밀었다. 무릎사이로 조금 벌어진 틈으로 무리하게 무릎을 들이밀자 꿈쩍도 안할 것 같던 다리가 스르륵 뒤로 밀리며 눌려있던 다리가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빠져나갈 틈은 충분히 벌어졌지만 밀레시안은 불만어린 입술을 꾹 다물고는 카즈윈의 다리를 완전히 뒤로 밀어내었다.
눈을 뜬 카즈윈이 아무말 없이 밀레시안의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즈윈이 눈을 뜬 것을 알리가 없는 밀레시안은 잠시 카즈윈과의 틈사이로 허전해진 다리를 내려다보다 인상을 찡그렸다.
다 싫어. 짜증나. 닿지 않았으면 좋겠어. 차례대로 이성을 무너트려가는 불쾌함이 밀레시안의 손끝에 힘을 실었다. 금방이라도 살갗을 파고들것 같이 날을 세운 손톱들이 팔을 긁어내렸지만 카즈윈은 구태여 밀레시안을 말리지 않은채 슬쩍 품안의 공간을 내어주었다.
겨우 머리위에 있던 카즈윈의 머리가 치워진 것을 눈치챈 밀레시안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서러움에 불이 붙은 밀레시안의 얼굴을 갈곳잃은 원망과 스스로의 유치함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엉망으로 뒤섞여 있었다. 언제부터 깨어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카즈윈의 평온한 얼굴이 밀레시안의 양심을 자극했다. 다 이해해. 말없이 밀레시안을 바라보고 있는 카즈윈의 눈빛에는 늘 그런 말이 담겨져 있었다. 이해해야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내가 해야할 말인데. 밀레시안은 오기어린 눈빛으로 쏘아보며 카즈윈의 가슴을 팍 밀어내었다.
꽤나 아플것 같은 퍽소리가 카즈윈의 몸통을 울렸다.
"답답해. 목도 마르고. 그만좀 죄어와요. 숨쉬기도 힘들어"
"....깼어?"
"한참전에요."
이중 삼중으로 잠겨있는 것 같았던 자물쇠가 풀린듯 무거웠던 카즈윈의 입이 달싹거리자 밀레시안은 표독스럽게 노려보던 시선을 떨어트리며 눈을 반쯤 감아내렸다. 화풀이는 늘 뒷맛이 안좋은법. 밀레시안은 명확한 명분없이 타인을 노려볼 만큼 날이 선 성격은 되지 못했다.
됐어. 언제부터 그렇게 기대했다고.풀리지 않을 응어리보다는 지금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자며 몸을 일으켜세운 밀레시안이 시원하게 기지개를 펴며 가슴 깊숙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무거웠던 카즈윈의 족쇄가 풀어지자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같이 개운해진 몸이 절로 침대 밖으로 몸을 돌리지만 일단 스트레칭이 우선.
일어나자마자 목과 팔, 허리의 스트레칭. 뻐근했던 근육들이 잔인할 정도로 비틀어 당겨지자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투투툭거리는 잔소리를 울려대었다.
밀레시안이 스트레칭을 하는동안 누워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카즈윈이 한타이밍 늦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같은 자세로 오래 누워있는 것이 피곤한것은 카즈윈도 마찬가지였는지 팔을 돌리는 카즈윈의 어깨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목을 돌리는 순서까지. 밀레시안의 스트레칭을 거꾸로 돌려놓은 것같은 움직임이 끝나자 예의 그 안심시키는 뜨뜻미지근한 시선이 밀레시안의 뒷통수에 달라붙어왔다. 밀레시안이 애써 그를 외면하며 침대밖으로 다리를 돌렸다. 물을 마실 생각이였다.
"일어서지마. 내가 가져다 줄께"
"필요없어요"
고작 물을 마시러 가는데 무슨 상관이람. 밀레시안이 가볍게 대꾸하며 침대밑에 놓여져있을 슬리퍼를 찾아 고개를 숙였다.
침대 아래로 들어간것인지 애초에 밀레시안의 몫은 신고오질 않아 없는것인지 그냥 맨발로 카펫위를 걸어가려고 하는 찰나 밀레시안의 손목이 침대 중앙을 향해 끌어당겨졌다. 생각지도 못한 손길에 균형을 잃을뻔했지만 등을 받쳐오는 카즈윈의 팔뚝이 안정감있게 밀레시안의 몸통을 받쳐들어왔다. 밀레시안이 짜증을 내며 카즈윈을 밀어내려 하지만 카즈윈은 들어줄 생각이 없는지 말을 자르며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왔다.
"이게 무슨..!"
"오늘이 며칠인지 알아?"
밀레시안은 무슨 해괴한 질문이냐며 눈썹을 찌푸렸다.
며칠이긴 며칠이겠는가. 하고 기억을 더듬던 밀레시안이 어제의 날짜에서 하루를 더한 값을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xx일이겠죠."
채점 결과는 오답. 카즈윈은 그러면 그렇지 라는 한숨으로 밀레시안을 베개가까이 끌어당기며 다리 사이로 팔을 뻗었다.
무슨일인지 설명해달라는 밀레시안에게 답변이 되지 않는 가벼운 키스를 내리찍은 카즈윈이 반쯤 내려간 다리를 거두어 침대위로 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늘 물병을 놔두던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밀레시안이 곰곰히 생각하다가 다른 날짜를 던져 보았다.
"xx일이에요?"
"숫자를 조금 더 크게 불러봐."
이게 무슨 경매도 아니고. 밀레시안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컵을 받아들자 카즈윈은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밀레시안의 곁에 걸터앉았다.
해가중천에 뜰 때까지 푹 자 놓고는 무슨 엄살이람. 밀레시안이 물을 꼴깍꼴깍 들이키기 시작하자 매마른 목줄기에 시원한 청량감이 들며 머리속까지 파고들었던 불쾌한 가시들이 눈녹듯이 사라져갔다. 서운함이 가신것은 아니지만 조금 기분이 전환 된 느낌.
"한잔 더 줘요"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비스를 해준다니 일단 부려먹자는 결론이 나온 밀레시안이 자연스럽게 카즈윈을 향해 빈 컵을 내밀었다.
카즈윈은 귀찮은 기색없이 컵을 받아들었지만 물을 따르는 내내 밀레시안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있었다.
염려하는 것같기도 하고 관찰하는 것같기도한 이상한 시선. 밀레시안이 손을 뻗자 컵을 내려주는 대신 얼굴을 불쑥 들이민 카즈윈이 잠시 밀레시안의 얼굴을 잡고 진지한 눈으로 밀레시안의 얼굴 여기저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귓볼이나 귀 뒤쪽, 관자놀이에서 다시 옆 목선을 따라 내려가기까지. 갈증 말고 다른 증상은 없어? 하고 묻는 카즈윈의 염려에 밀레시안은 물이나 달라며 카즈윈의 손을 귀찮다는듯 쳐내었다.
카즈윈의 미간이 처음으로 찌푸려졌다.
"당신이 하도 꽉 끌어안고 잠들어버려서 온몸이 뻐근한거 이외에는 괜찮아요"
".........그건...어쩔 수 없었어."
카즈윈이 드물게 작은 목소리로 대꾸하자 물을 들이키던 밀레시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컵을 내려놓았다.
두 컵을 연달아 비워낸 밀레시안은 겨우 촉촉해진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래간만에 들어오는 카즈윈의 방. 하지만 어딘지 급하게 치운듯한 느낌에 밀레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즈윈을 돌아보았다.
오랫동안 방주인 없이 비워져있는 방이 왜 이렇게 어수선 한것인지 분명 마지막에 들어왔을 적에 깨끗하게 정돈되어있던 방의 풍경을 떠올리던 밀레시안이 카즈윈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빈 컵을 내밀었다. 다시 물을 뜨러가려는 카즈윈에게 거절의 의사를 전달한 밀레시안이 방을 둘러보며 말을 걸었다.
"방이 왜이렇게 지저분해요? 뭐가 들어와서 한번 뒤집고 갔어요?"
"....."
딱 소리를 내며 입이 벌어진 카즈윈이 ㄴ.. 하고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고개를 가로젓고는 빈 컵을 들고 테이블쪽으로 걸어갔다.
물 필요없는데.. 밀레시안이 입을 삐죽이는 모습에 다시 돌아온 카즈윈의 손에 들린것은 물이 든 컵이 아닌 작은 책상용 달력. 날짜가 줄지어 쓰여진 카즈윈의 일정표에는 그가 제출해야하는 서류의 기한들이 간결하게 적혀져 있었다. 카즈윈이 게이트에 머물때만 쓰이는 깨끗한 달력. 밀레시안은 이게 뭐요 하는 얼굴로 카즈윈을 올려다보다가 툭툭 주간표를 건드리는 손길에 다시 고개를 내렸다.
이날 때 까지 있는다는 소리인가. 주말까지면 꽤 길게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서운함이 스르륵 풀어지려는 찰나 카즈윈은 이해를 못하는 것 같은 밀레시안을 위해 무거운 입을 열어 설명을 덧붙였다.
"오늘은 xx일이야"
".......아 그래요?"
카즈윈이 가리키는 날짜를 보며 아무생각없이 대답한 밀레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뒤의 일정표를 살펴보았다. 일정이 xx일까지 쓰여져 있으니까 이 날때 까지는 머문다는 건가 그러면 오늘이 xx 일이니까.. 하고 머릿속으로 날짜를 헤아리던 밀레시안이 고개를 번쩍 든 것은 반타이밍 정도 어긋난 뒤의 일.
"....네?"
반 옥타브정도 올라간 목소리로 되묻는 밀레시안의 목소리에 기다렸다는듯 한숨을 푹 내쉰 카즈윈이 밀레시안에게서 달력을 받아들었다.
아까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테이블의 뒷편에는 미결제된 서류가 잔뜩. 아마 일정대로 흘러가지 않은 탓에 내근으로 바빠진 카즈윈이 가져다 놓은 것 같은 성의없는 서류의 산 앞에서 카즈윈은 이제야 한시름 돌릴 수 있겠다는 한숨을 쉬며 맨 위에 있던 보고서를 하나 집어들었다. 조원들이 오고가는 사무실이 아닌 잠깐잠깐 편지를 쓰거나 책을 놓아두는 용도의 작은 테이블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농담이죠? 왜 벌써 xx일이야? 내가 x일동안 잤다구요?"
"잠을 잔건 아니야"
카즈윈은 그랬다면 좀 더 수월했을 것이라며 말을 덧붙이고는 밀레시안을 지나쳐 구석에 놓여진 일인용 소파에 몸을 던졌다. 첫 장부터 피곤이 되살아나는 것인지 눈두덩이를 내리누르는 카즈윈이 흐리멍텅한 시선으로 보고서를 응시했다. 의욕이 별로 없는 모습이였다.
"잠을 잔게 아니면?"
"글쎄... 잠을 잔게 아니면 말이지.."
사람이 잠을 자는게 아니면 무얼 할까. 지극히 원초적인 질문을 의미심장하게 읖조리는 카즈윈이 서류철 너머로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날짜를 헤아리는 것인지 양손을 들어 이것저것 꼽아보던 밀레시안이 제 머리를 감싸쥔 채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모든것은 밀레시안이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너머에. 왜? 뭣때문에? 무슨일이 있었던 것인지 말해달라고 쨍알거리는 밀레시안의 질문을 피해 소파 깊숙히 몸을 묻은 카즈윈이 서류철을 넓게 펼처 얼굴을 가려버렸다. 보고서의 제목은 추출된 진실의 물약의 부작용 : 광폭화 사례.
"무슨일이 있었냐니까요..? 아니 다리는 또 왜이래. 나 정말 x일 동안... 어.. 그러니까..?"
"일어서지 않는게 좋을꺼야. 나에겐 네가 움직이는게 더 신기하게 보이거든"
체중을 버텨내지 못하는 다리의 느낌에 밀레시안이 당혹스러워하자 보고서뒤로 도망친 카즈윈이 넌지시 염려의 말을 건네어왔다.
무슨일이 있었냐고 캐물어오는 밀레시안의 질문에는 묵묵부답. 그저 잊었으면 되었다며 초월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카즈윈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질문세례에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아서인지 슬쩍 눈만을 내밀어 밀레시안과 시선을 맞추었다.
머리를 쥐어싸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몸상태를 확인하기 바빴던 밀레시안이 벽에 난 낯익은 주먹자국에 정신이 팔려 있다 카즈윈을 돌아보았다.
"저거.. 내가..?"
"밀레시안"
"설마 내가 당신 방에 들어와서 난동피웠어요?"
"앞으로 서운한게 있었다면 그냥 바로바로 이야기 하는게 좋을 것 같아."
"...........어"
"그리고 게이트에 들어온 물건들은"
".........."
"함부로 먹어보지 마."
밀레시안이 입을 다물었다.
"........부탁할께."
카즈윈이 보고서의 책장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