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즈밀레)작별 (마비노기전력60분)
0430
"그럼 갈께요 카즈윈"
"그래"
"....."
"......."
인사를 마치고 게이트를 나서려는 밀레시안의 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반쯤 돌린 몸의 시선은 카즈윈의 얼굴에 고정된채 가만히 노려보기만. 무엇이 불만인것인지 알수가 없는 카즈윈은 뺨을 찔러오는 시선을 돌아보며 왜... 라고 나지막해 중얼거렸다.
".....또 그러기에요?"
"내가 뭘"
"인사 안해주잖아요"
분명 방금 전 작별인사를 건내었던것 같은데. 밀레시안은 게이트를 떠난다는 생각은 아예 잊어버린듯 빠른걸음으로 다가와 카즈윈에게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이번엔 넘어가지 않을 생각인지 밀레시안은 단호한 목소리로 카즈윈을 추궁했다.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카즈윈이 재빨리 탈출로를 찾아 시선을 돌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손질하던 검을 칼집에 젛은 카즈윈이 성의없이 검을 닦던 천을 집어던졌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게 아니에요. 노골적으로 피하고 있으니까 하는말이지."
밀레시안은 몇 달전부터 끊겨오던 미묘한 대화의 단절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짧게 말을 해서가 아닌 은근슬쩍 어느 한 주제를 피해가는 대화에 밀레시안은 별것 아닌 한마디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스트레스가 되는것을 보며 카즈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임무가 있었던것 같아"
도망갈 구실을 찾지 못한 카즈윈이 마지막 수단을 꺼내들었다.
"거짓말"
"진짜야. 조금 여유를 부렸을 뿐이야"
확실히 거짓말은 아니였다. 기사단의 주 축이되는 전투조장에게 임무가 끊긴다는것은 말도 안되는일.
그저 그의 변명처럼 아주 약간 여유가 남았었고 그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 기꺼이 귀환했던것 뿐이지만 추궁당하는 시간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카즈윈은 말라오는 입술을 축이며 멱살잡힌 옷을 풀어내었다.
기분이 상했다기 보다는 달래는 손터치에 밀레시안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패여졌다.
카즈윈은 아주 잠시 망설이다가 찌그러진 눈썹사이를 꾹 눌러 펴주었다.
밀레시안의 손에 힘이 들어간것은 당연한 수순이였다.
"인상쓰지 말고"
"당신때문이잖아요."
"아, 응, 그래."
카즈윈은 투닥거려오는 밀레시안의 손을 피해 나무기둥을 돌아 석궁을 집어들었다.
이르긴하지만 임무지로 돌아가기에 크게 어색하지 않은 시각이였다.
모처럼 느긋하게 쉬고 있을 조원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이겠지만 지금은 조원들의 편안함보다 카즈윈 본인의 안위가 더욱 중요했다. 카즈윈은 빠르게 입술을 달싹이며 짧게 인사를 건내었다.
"간다"
"잠깐...!"
본인 스스로 임무지까지 걸어야하는 밀레시안과 달리 지원을 받는 헤루인조의 조장은 야속하게도 푸른 여신의 날개를 부러트리며 휙 하니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임무지에 늦고 언쟁도 끝내지 못한 밀레시안이 발을 구르며 분한 마음을 소리쳐 카즈윈에 대한 불만을 한가득 쏟아내었다. 조원들 없이 텅 빈 벨테인에서 느긋하게 졸고있던 슈안만이 깜짝 놀라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을뿐.
밀레시안은 웃기지도 않는다며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슈안이 다기 책상에 고개를 숙였다.
"그거 이상한거 아니에요?"
"음......"
루아는 곤란하다는 미소로 얼버무리며 카드를 되섞었다.
일지라는 것을 끝냈다는 밀레시안이 맛있는 안주랑 적당히 챙겨달라며 베인루아 최고의 미인을 옆에 낀채 홧술을 퍼부으며 폭신한 루아의 팔뚝에 뺨을 비벼왔다.
원칙대로라면 술마시고 꼬장부리는 이 성희롱 취객은 쫓아내야 마땅하지만 루아의 부탁을 모두 들어준 절친이자 단 한번의 에누리없이 단골 클럽뱃지를 구입한 통 큰 고객에게 루카스는 관대한 미소를 보이며 뒤돌아 컵을 닦을 뿐이였다.
"귀여운 여자아이 둘이 붙어있으면 그림이 된다"
철저한 사장님 마인드까지 겸비한 루카스는 밀레시안이 여성형이기에 봐줬다는 말도 덧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아는 점볼 생각이 없는 밀레시안에게서 카드를 거두었다.
"확실히 조금 어색한 대화이기는 하지만"
사실 앞 뒤를 너무 생략하셔서 무슨말인지 모르겠어요. 라고 말하고 싶은 루아가 밀레시안의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연애상담이라며 엉엉 우는 밀레시안이 주섬주섬 꺼내놓은 이야기는 여기에서 보안 저기에서 기밀이라며 듬성듬성 잘려나간 책을 읽는 느낌이였다.
요컨데 이 철부지 영웅님이 말하고 싶은것은 연인이 잘가라는 인사를 안해준다는 것.
루아는 미묘하게 잡힐것 같은 실마리를 만지작 거리며 밀레시안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결 좋은 머리가 소파에 흐트러지는것이 묘하게 선정적이다. 루아는 붉은 립스틱이 매끄럽게 발린 입술로 호선을 그리며 밀레시안을 다독였다.
"하지만, 그 분께서 먼저 떠날 때는 인사를 해준다면서요"
어수선환 대화속에서 요령좋게 핀포인트를 잡아낸 루아의 화술에 밀레시안은 코를 훌쩍이며 탄산음료를 들이켰다. 술집에서 술보다 비싼 탄산음료를 비싼 술과 1:1로 섞어마시는 이상한 미각에 루카스는 싫어하면서도 별의 통장을 반기어 기꺼이 탄산음료를 내어주었다.
밀레시안은 차가운 음료의 목넘김을 즐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간다 라고는 말하긴 했는데"
정말 사귀기는 하는걸까. 밀레시안의 이야기 속에서의 연인은 아주 무뚝뚝하고 말이 거의 없으며 속을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사람으로 그려졌었다. 강하면서 무뚝뚝하지만 가끔씩은 다정한, 무엇을 닮았냐는 말에 밀레시안은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 한밤중의 수리부엉이 라고 대답했다.
어디서든지 지켜보고 있는 어둠속의 주시자. 달그림자속의 사냥꾼. 그러나 다정하고 폭신한 순간이 있다며 행복하게 웃는 밀레시안은 술에 취한 직후 부터 대성통곡의 연속.
밀레시안이 어리광을 부리며 안겨왔다.
"내가 다녀온다 라고 하면 그래 라고만 대답한단 말이에요"
"밀레시안씨는 어떤 대답을 원하시는데요?"
"별거 없어요! 잘가 라던가 다녀와 라던가..!"
루아의 질문에 밀레시안은 내가 이상한건가요? 하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붉으스름해진 밀레시안의 뺨을 보아 어지간히 취기가 올라온 모양이였다.
술은 치워야겠다. 그렇게 웃으며 손을 내저은 루아는 허벅지를 두드리며 양팔을 벌려보였다.
오늘은 대 서비스의 날. 밀레시안이 루아가 제일좋아 라며 폴싹 안겨왔다.
"그렇네요. 나쁜사람이네요. 당신이 바라는건 다정한 한마디인데"
"평소에는, 이런말 저런말 잘도 속삭이면서"
귀가 솔깃해질 이야기가 살짝 스쳐지나갔지만 루아는 못들은척 밀레시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몽실몽실한 뺨이 허벅지에 부비는것을 멈춰세웠다. 밀레시안은 잠이 오는지 살짝 하품을 하며 루아쪽을 돌아보았다.
귀엽기도 해라. 조그마한 동물이 올려다보는 느낌에 루아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간다 라는 말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응? 그럼 그때는 어떻게 말을 해줬으면 좋겠는데요?"
여기서라면 다 털어놔도 괜찮아요. 루아는 그렇게 속삭이며 밀레시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향기로운 장미향이 밀레시안의 코끝을 간질거렸다. 목에 걸린 붉은 장미의 초커가 어른거리며 뿌옇게 흐려졌다.
"다녀올께 라는 말을 해주길 바라는것 같아요. 어디로 떠난 다는게 아니라 다시 온다고.. 응.. 그렇게.."
밀레시안은 아닌가? 맞는것같은데, 응 졸려서 모르겠어. 라고 웅얼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네사람이 앉아도 널찍한 소파이지만 한사람 반 밖에 앉아있는것 같지 않은 부피에 루아는 조용히 입을 가린채 웃으며 경호원들에게 밀레시안을 부탁했다.
잠든 취객을 쫓아내야하기엔 밀레시안이 오늘 하루 빌린 룸의 연장시간이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있었다.루카스가 특별 서비스라며 내어준 담요를 걸친 밀레시안이 푹신한 소파에 몸을 뉘인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바니걸중 한명이 안절부절 못하는듯 술잔을 나르다가 급하게 휴식시간을 요청하며 밖으로 몰래 빠져나갔다.
이멘마하에서 부엉이가 한마리 날아올랐다.
"미안합니다는?"
"미...."
"......"
"미...안할께 뭐가있어요 내가 내 돈주고 마신건데?!"
새벽 직전 게이트로 돌아온 밀레시안은 방안에 앉아있는 카즈윈을 발견한뒤 무릎걸음으로 그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처지였다.
하루종일 걸릴 임무도 아니였지만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밀레시안을 걱정하느라 헤루인조원들이 발칵 뒤집힌것도 모른채 이 맹랑한 영웅님께서는 술판에 잠들어계셨다고.
루인베아에 잠입중이던 루나사조원의 쪽지가 없었다면 직접 밀레시안의 임무지로 나가기까지 하려했던 카즈윈은 갑주를 거의 다 입었을 즈음에 쭈볏거리면서 다가온 벨테인의 어린 견습기사의 쪽지에 아무말없이 갑옷을 다시 벗어던졌다.
그리고 밀레시안이 돌아올때까지 부르지마 라는 네글자를 남긴채 별의 방에서 조용히 침묵.
조원들은 야간임무는요? 라고 되묻지 못한채 조장님 안계실때의 메뉴얼을 들고 얌전히 게이트를 빠져나가야 했다.
남겨진 벨테인 조원들은 조금 불안한 얼굴로 조장님이 돌아오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지만, 무심하게 떠오른 이웨카는 남쪽 하늘을 지나 서쪽으로. 지쳐 잠든 조원들의 등불이 꺼졌을 즈음에 게이트로 귀환한 탈주영웅은 수리부엉이의 눈에 딱 걸린채 침대앞으로 끌려들어왔다. 밀레시안은 흥, 하고 콧바람을 내뿜으며 고개를 돌렸다. 카즈윈은 아무말 없이 밀레시안을 내려다 보았다.
"누구랑 마셨어?"
"다 보고받은거 아니에요?"
"네 입으로 듣고 싶어>"
"루아랑 바니언니랑 바니아가씨랑 바니바니요"
많이도 끼고 마셨다. 실제로 대화를 하며 술잔을 나눈것은 루아뿐이지만 밀레시안은 괜시리 과장하고 싶은 마음에 술잔을 치워주고 담요를 덮어주던 애꿎은 종업원들까지 모두 끼워넣으며 성대한 술판이였다며 허세를 부렸다. 카즈윈이 허리를 숙여 밀레시안의 턱을 들어 올리자 밀레시안은 그제서야 조금 불안한 눈치로 카즈윈의 안색을 살피며 눈을 도로록 굴려 다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즈윈이 낮게 잠긴 목소리로 밀레시안을 추궁했다.
"뭐가 불만인거야?"
"별로, 에요"
낮이랑은 정반대로 뒤바뀐 상황에 밀레시안은 그의 말을 흉내내며 이죽거렸다.
밀레시안의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켜졌다. 이제 슬슬 화낼텐데.
카즈윈의 얼굴이 가까이 오자 밀레시안은 슬쩍 고개를 뒤로 빼며 카즈윈이 다가오는것을 거부했다.
입술이 닿을듯 가까이 오는것은 꽤나 로맨틱한 분위기였지만 청회색의 눈동자에는 더이상 장난치지 말고 라는 경고가 서려있었다.
밀레시안은 이 분위기가 억울한지 입술을 깨물며 입꼬리를 일그러트렸다.
이건 불공평해. 밀레시안은 손을 들어 카즈윈을 밀어내며 바닥에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레시안이 신경질적으로 항의했다.
"내가 아침에 화냈을때는 당신 마음대로 도망갔으면서 나는 도망도 못가게 잡고 협박하는거에요?"
"협박하지 않았어"
"지금 화내는건 협박아니에요? 내 방에서! 그렇게 내려다 보면서!"
목소리 낮춰 라고 대꾸한 카즈윈이 머리를 짚으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누가 누구를 내려다 보는 구도는 해소되었지만 타고난 신장탓에 카즈윈쪽의 시선이 살짝 높았다.
카즈윈은 흥분한 밀레시안의 뺨을 붙잡으며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널 탓하려는게 아니야. 난 그저 네가 임무나간 뒤로 돌아오지 않으니까"
"당신이 먼저 돌아오라고 말 안해줬잖아!"
밀레는 참아왔던 화를 폭발시키며 카즈윈의 손을 쳐내었다. 카즈윈은 정곡을 찔린건지 다시 밀레시안에게 다가가지 않은채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밀레시안이 카즈윈을 추궁하듯 몰아세웠다.
"계속 그랬죠? 내가 다녀오겠다고 하면 그래 라거나 알았어 라거나 응 하고 고개만 끄덕이고 다녀와라던가 기다릴께 라는 말은 죽어도 안하고"
"....."
"중요한게 아니라고요? 나도 알아요. 그런거 안중요해. 그런거 안들어도 당신이 말 안하는거 하루이틀이 아니니까 괜찮아. 하지만 당신은 어땠어요? 카즈윈이 나한테 어떻게 했어요?"
"밀레시안.."
"항상 갈께 라고 했죠? 나 간다. 임무간다, 가볼께. 일나가야해 그러기만하고 한번도 갔다 올께 라고 말 안했죠? 못돌아올 것처럼 이야기 했죠?"
밀레시안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며 카즈윈의 가슴앞으로 다가갔다. 카즈윈은 진정해 라고 말하면서도 밀레시안의 말에 반박하거나 부정을 하지 않았다. 밀레시안의 눈꼬리에 물방울이 맺혔다.
"약은데다가 비겁하고 소심하기까지해요. 나빴어. 항상 나에게만 약속하길 바라면서 자기는 한번도 약속해주지 않아. 그렇게 무서워요? 그렇게 두려워요? 나에게 안녕이라고 말하는건 괜찮고 다녀왔어 라고 말하는건 부담스러워요?"
"밀레시안, 나는"
"나는 불사여서 그런 말이 가볍게 입에 담기는줄 알아요?"
밀레시안은 정확하게 카즈윈의 심장을 찌르며 그의 말을 잘라내었다.
밤은 침묵했고 별은 입술을 깨물었다. 깊고 어두운 한숨이 그들의 마음을 갈라놓고 눈을 가렸다.
밀레시안은 지친얼굴로 뒤로 물러서며 의자를 끌어당겼다. 작은 몸이 원목으로 된 의자안으로 빨려들어가듯 담기었다.
밀레시안은 무릎을 모아세워 고개를 수그렸다.
"나는 돌아와요. 오지 말라고 해도. 올 수 없는 곳이라고 해도. 내가 서있는 땅이 부지불식간에 꺼져 깨어진다 하더라도 나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려도 늘 그 장소에 돌아와요."
"......"
"그런 내가 두려워 하는건 그 장소에 내가 홀로 남겨지는 거에요. 돌아온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진 않아요. 당신과 내가 함께있어서 의미 있는 그 장소에 나 혼자 돌아온들 그런거 전혀 기쁘지 않아."
"미.."
"내가 상처입는건 돌아온다고 약속한 당신이 그 장소에 없는 어느 미래의 일이 아니라 아무 약속도 없이 하염없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일상이에요"
카즈윈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달싹거리며 숨을 들이마셨다.
밀레시안은 울고 있었고 카즈윈은 그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별은 눈물젖은 얼굴을 가리며 울먹였다.
"내게 그렇게 작별인사만 하지말아요."
원했던것은 다정한 한마디와 멀고 희미하기만 하더라도 분명히 주고받은 약속.
카즈윈은 조용히 밀레시안의 앞에 무릎꿇고 시선을 맞추어 뺨을 쓸어올렸다.
지치고 까슬해진 뺨에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미안해'
카즈윈은 가만히 눈을 감고 젖어든 뺨에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