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에리밀레)당신에게서 돌아오는길
"....."
신께 맹세하건데,
밀레시안은 그 급해먹은 성질머리가 첫소절만 듣고 경기를 하겠다며 스스로를 비웃으면 서도 등불을 치켜올렸다. 낡고 험하게 사용한 흔적이 가득한 대검. 무슨생각으로 이렇게 무겁게 만든걸까 짐작도 가지 않는 무게중심에 짤막한 손잡이. 밀레시안은 정말로 당신의 것이냐고 마음속으로 물으며 소울스트림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검의 주인을 떠올렸다. 별빛속에 잠들어있던 그도 이게 거기 있었냐며 깜짝 놀랄만한 장소, 밀레시안은 던바튼의 분실물 창고에서 검을 들어 등불빛에 비쳐보며 아름다운 켈틱무늬의 검면을 쓸어보았다.
" "
검의 주인의 이름을 불러보는 밀레시안의 목소리가 떨리었다.
한 걸음. 어서 나가서 태양빛 아래서 이 검을 보고싶어. 그렇게 생각한 밀레시안은 사다리의 가장자리에 발을 내딛으며 검을 움켜쥐었다.
밀레시안이 던바튼의 분실물 창고에 들어간 것은 에반이 보낸 한 장의 편지로 부터 시작되었다. 봄날은 맑았고 바람은 선선했으며 겨울의 자락은 모두 서풍에 실려 이국으로.
모처럼 밝은 태양빛에 기분이 좋아진 사람들은 너나할것없이 집안의 묵은 공기를 내보내며 겨우내 먼지 쌓였던 물건들을 밖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피어오르는 난로의 연기대신 뿌옇게 흩날리는 먼지가 파란하늘속으로 사라졌다.
가장 고생이 많을것 같은 사람은 서점의 아이리와 잡화점의 발터. 보안상 꺼낼 물건이 별로 없는 오스틴은 허리를 걱정하면서도 발터의 일손을 거들어주기 위해 두팔을 걷어붙이고는 사람좋은 미소와 함께 잡화점의 물건들을 밖으로 나르고 있었다.
무뚝뚝한 발터가 나중에 한잔 사겠다는 약속을 기분좋게 받아들이는 오스틴의 등뒤에서 맑은 여행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 너무 많이 드시면 또 아이리가 걱정할꺼에요?"
나는 봄청소 할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말하는듯한 별의 여행자는 봄을 맞이하여 밝은 색의 옷을 입고서는 날아갈듯한 발걸음으로 두 중년을 지나쳐갔다.
마냥 놀리러 온 것은 아니였는지 밀레시안의 손에는 낯익은 관청의 마크가 찍힌 편지가 한 장, 글리니스가 내어놓으려는 묵은 밀가루를 잠깐 옮겨주고는 관청으로 향하는 밀레시안은 일하기 좋은 복장의 옷맵시를 가다듭고는 관청에 매달린 작은 종을 울려대었다.
안쪽에서 서류철과 씨름하고 있던 에반이 콜록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콜록...콜록, 어서오세요. 밀레시안씨"
"안녕, 에반. 부탁할 일이 있다면서요?"
"네. 보시다시피 요즘 한창 봄청소철을 맞이해서.."
에반은 두어번 더 크흠 하는 헛기침을 하며 까끌까끌해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애를 썼다.
예쁘게 화장한 뺨에 죽 그어진 검은 잉크자국이 안쓰러워보이는지 밀레시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수건을 건내주었다. 에반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 감사합니다"
"저쪽 청소를 맡아달라는거죠?"
에반이 황급히 볼의 자국을 지우는동안 정식으로 작성된 퀘스트지를 받아든 밀레시안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보수는 많이 않지만 경험치는 꽤 짭잘한지 밀레시안은 별다른 고민없이 좋아요, 할께요 라며 에반을 향해 웃어보였다. 여전히 사람좋은 미소에 에반은 손수건을 접어 테이블에 올려 놓으며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에반은 테이블 밑에 준비해 두었던 등불을 꺼내들었다.
"손수건은 빨아서 돌려드릴께요."
"응?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럼, 창고를 잘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럴필요 없다고 거절하려는 밀레시안의 말을 자른 에반이 서둘러 등불을 안겨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가슴팍에 가득 안겨우는 철제 램프의 서늘한 감촉에 밀레시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건을 받아들었다.
"사-기-꾼-"
창고의 문이 열리자 밀레시안은 어이를 놓친 사람처럼 멍하니 입을 벌린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정확히는 천장을 찾기 위해 고개를 들었을뿐. 어두컴컴한 창고의 윗쪽은 마치 그림자세계의 하늘처럼 뻥뚫린 어둠으로 가득차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최소한으로 부엉이가 드나들만한 창문이 희미하게 빛을 내비치고 있지만 손도 닿지 않을 가장 높은곳에 생색내는 것 마냥 두어개 트여있을 뿐.
그 마저도 희미하게 덮어버리는 깊은 어둠에 밀레시안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설계한건지 처음부터 창문과 환기라는 단어를 배제하고 만든 무식한 구조에 밀레시안은 등불의 소중함을 깨우치며 잔불을 유리등안으로 떨어트렸다.
호르륵 하고 타오르는 불티의 잔소리와 함께 어두웠던 창고안에 작은 불빛이 떠올랐다.
"거-짓-말-쟁-이"
어렵지 않은 일이라면서! 밀레시안은 속으로 삼킨 말 대신 발을 쿵쿵 구르며 반사되어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까부터 소리치듯 느리게 말하는 말소리도 모두 울림소리를 체크하기 위해서일뿐, 원망의 소리는 아니야.
밀레시안은 아무도 듣지 않을 변명을 꿍얼거리며 어두운 창고안으로 한걸음 발을 내딛었다.
창고 안은 시간이 쌓은 먼지와 관리되지 않은 가죽의 오염된 냄새로 가득차 그야말로 유황지대를 방불케했다. 이러니까 다난들이 떠넘겼지. 밀레시안은 필시 자신의 hp가 줄어들고 있을것이라며 투덜거리고는 호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들었다.
관리 정책상 그리고 인간의 체력과 주어진 시간의 한계가 있는 이상 이 모든 물건을 밖으로 꺼내는 것은 무리. 대신 관청에서는 주기적으로 냄새나는(이 부분은 다른 잉크로 지워져 있었다.) 주인이 없는 몇몇가지 물건만 따로 빼어내어 폐기하고 있는 모양이였다.
주로 봄과 가을. 조금이라도 날씨가 선선해지는 계절에만. 에반에 건내준 종이에는 창고안의 요약도와 라벨 보는 방법. 그리고 물건의 이름들을 적혀있었다. 등불의 바닥에 딸려온 용의주도한 메세지에 밀레시안은 에반도 한패였음을 깨닫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들이마시는 숨에서 노린내가 났다.
"거기서 뭔가를 느꼈어야 했는데"
위기탈출이 아니라 위기감지같은 스킬이 필요하다며 투덜거리는 밀레시안은 종이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채 소심하게 코로만 숨을 들이마셨다. 거친 땀샘새와 노릿한 가죽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나가고 싶었지만 입과 코를 덮은 종이에서 피어나는 미약한 잉크의 냄새가 밀레시안의 책임감을 자극했다.
한 번 들어온 이상 약속은 지켜야지. 밀레시안은 어딘가의 여신이 빙긋이 웃음지을것같은 착실함으로 킁하고 콧바람을 내뿜었다. HP보다 스테미너가 더 빨리 닳아 없어질 것같은 기분이였다.
등불에 의지해 미로같이 꼬인 창고안을 누비는 밀레시안은 이 곳이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 사람이 아니라 부엉이의 눈으로만.
사람들에게 불친절하다못해 따로 보는 법을 배워야하는 이 창고는 날아다니는 눈에서는 꽤나 편리한 구조로 3층에 달하는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일층은 벽면없이 가운데에 모여있는 물류창고로 마치 커다란 식료품점에 온것같은 높은 선반들로 둘러 쌓여있지만 이, 삼층은 바닥없이 벽면으로만. 도서관의 책장마냥 붙박이로 늘어선 벽선반을 따라 사람한명만 겨우지나갈것같은 바닥표시에 밀레시안은 눈을 찡그렸다.
당연하게도 냄새가 가장 심하면서 노후화되기 쉬운 가죽제품들은 던전물건들이 모이는 이, 삼층에 가장 많이 모여있었기 때문이였다.
밀레시안은 우선 1층에 있다는 로브를 찾으러 거대한 선반의 숲으로 들어갔다.
1층은 던바튼 주변의 분실물들. 네 방향으로 나뉜 선반들에서는 각기 다른 짐승의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북쪽과 남쪽에서는 심심치 않은 너구리 똥냄새가, 서쪽은 냄새대신 자이언트 스파이더의 거미줄에 칭칭 감긴 무구들이 심상치 않게 뉘여져 있었다.
서쪽은 뭐 위험한 동물이 있다고 자꾸 눕는건지, 약탈자에게 부서진 듯한 독이 묻은 가죽건틀릿 사이로 특히나 고약한 냄새의 원인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찾던 물건인게 확실한 무늬에 밀레시안이 흠칫 하고서는 손을 거두며 뒤로 물러섰다.
잘 말라 건조된 상어로브가 버석버석한 소리를 내며 퀰한 눈으로 밀레시안을 마주보고 있었다.
"진짜 싫다"
밀레시안은 한숨을 쉬지 않으려 애쓰며 상어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선반이 밀레시안의 생명을 위협했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당겨야지. 약간의 씨름끝에 밖으로 나온 상어로브는 오염된 얼룩으로 여러가지 색을 띄며 만지고싶지 않은 모양새를 띄고 있었다.
건조된 상어로브를 잘 뒤집어 갈색이 된 물고기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싸맨 밀레시안은 등불을 치켜든채 2층 사다리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다음 가지러 가야할 물건은 라비던전의 가죽신발과 땀내나는 브레이슬렛 1뭉치 그리고 3층으로 올라가 마스던전의 모험가의상 3벌. 묵어 갈라진 저가형가죽 1뭉치(82장).
아무리 봐도 모험가가 잃어버린것이 아니라 그냥 드랍된 잡동사니를 안 주워간것 같은 느낌의 목록들이지만 부엉이들은 나몰라라 깃털만 다듬고 있을 뿐. 밀레시안의 말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 몇몇 놈들은 납작하게 드러누어 피유우 하는 콧소리까지 내며 잠들어 있었다.
발을 올린 사다리가 불안하게 삐걱거렸다.
여기서 죽으면 사인을 뭐라고 해야하는걸까 추락사? 중독사? 소울스트림으로 올라가도 씻겨질것 같지 않은 지독한 냄새에 밀레시안은 입으로 숨을 내쉬며 다시한번 종이로 코 근처를 팔락였다.
이미 다 날라간 잉크냄새였지만 그나마 이곳에서는 상쾌한축에 속하는 종이냄새였다.
2층이 분류라벨을 더듬어 가죽쪽으로 다가간 밀레시안이 멀찍이 떨어져 보이는 뒤집어진 상어로브를 향해 물건들을 내던졌다.
오래된 가죽으로 된 물건이라 충격에 갈라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지나갔지만 밀레시안은 축복의 힘을 믿으며 망설임없이 물건들을 내던졌다.
부서지면 라이미라크님 탓, 안부서지면 나의 혜안. 밀레시안의 뻔뻔함에 부엉이들이 홰를 치며 불만스럽게 부리를 딸깍거렸다.
2층의 브레이슬렛을 찾아내며 왜 1개가 아닌 1뭉치라는 것인지를 깨달은 밀레시안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3층으로 향하는 사다리에 매달렸다. 호흡이 부족한 느낌은 오래간만이였다.
어찔한 머리속에서 에반의 쓴웃음과 봄날의 좋은 향기가 환상처럼 스쳐지나갔다.
"......커헉..."
거짓말쟁이 라고 다시한번 말하고 싶었지만 목에서 나오는 것은 마른기침뿐. 밀레시안은 침이 튄 입가를 닦고싶지만 손에 배어든 냄새가 입가에서 느껴질것 같아 손대신 팔뚝으로 입을 닦았다.
나가서 보상 더 달라할꺼야. 말대신 입을 꾹 다문 밀레시안이 힘을 주어 사다리를 딛고 올라섰다.
여전히 사다리에서는 불안한 쇳소리가 삐걱거렸다.
고블린과 코볼트중 누가 더 체향이 지독할까.
밀레시안은 한번도 고민하지 않았던 새로운 주제에 대하여 깊은 고찰을 하며 등불을 치켜올렸다
솔직히 말하면 불을 질러버리고 싶었다. 아니, 불을 지르지 않더라도 자연발화할것같은 매캐한 냄새에 눈까지 매워지는 느낌이였다.
가죽 싫어, 철제품이 좋아. 밀레시안은 따가워오는 눈을 깜짝이며 뿌옇게 흐려지려는 시야를 바로잡았다.
빨리 라벨을 찾아서 집어던지고 내려가자. 그러나 급한 마음과는 달리 한참을 해메이는 밀레시안은 좀처럼 3벌의 모험가 슈트를 찾지 못한채 가죽이 가득한 선반을 따라 좌우로 서성거렸다.
이건 로브, 저건 모험가부츠. 지난 설에 받은 붉은 원숭이라도 꺼내 찾아볼까 했지만 한참을 호루라기를 불어보아도 원숭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소환수에게서도 버림받았다는 기분에 깊게 가라앉은 밀레시안은 등불에 반짝거리는 철제 분실물 선반 가장자리에서 작은 욕설을 내뱉었다.
누군가가 정성으로 염색해 놓은, 혹은 정성으로 장난쳐 놓은 반짝이는 모험가 슈트 세 벌이 한뭉치로 구겨진채 선반 구석 가장 밑자리에 처박혀 있었기 때문이였다. 3벌인 것을 알아본 이유는 반짝이는 색이 9가지였기 때문에.
뭉쳐놓은 크기가 건식화로에 들어가지 않자 버린것이 분명한(!), 아무리 좋게봐도 버린물건이 분명한(!!) 물건은 무식하게도 처박혀 선반의 구석을 꽉 틀어막고 있었다. 사람이 넣은 것이 틀림없다며 끊임없이 꿍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근처에 떨어진 막대기를 주워든 밀레시안은 선반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열심히 옷꾸러미를 찔러대었다.
언젠가 이 선반에 깔려 죽는 사람이 나오면 내가 증인설꺼야. 지랫대를 이용해 선반에서 빼낸 밀레시안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리며 발로 뻥 차 아래로 떨어트렸다.
사다리에서 조금 빗겨나간 위치에서 대각선으로 차여진 물체는 떨어지면서 무언가와 부딫쳤지만 밀레시안은 크게 신경쓰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까짓거 뭐 하나 부서진 모양이지.
밀레시안은 막대기로 땅을 짚은채 마지막 저가형 가죽 뭉치를 찾기위해 다시 등불을 들어올렸다. 바닥에서 수북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모험가 슈트를 찾기위해 몇번이고 가죽선반을 서성거렸지만 80여장이나 되는 큰 부피를 놓쳤을리는 없고, 브레이슬렛처럼 오래된 물건들끼리 눌어붙어 한덩이가 되어있는것은 아닌가 잠시 부피가 큰 덩어리들을 찔러보던 밀레시안이 고개를 들어 부엉이들의 횃대를 올려다보었다.
부엉이들이 관리하는 창고. 밀레시안이 자기도 모르게 천제품이 쌓여있는 선반으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장비가 아닌 것도 주워오는걸까.
하지만 선반들을 지나며 여러가지 물건들을 봐왔던 만큼 밀레시안은 그 물건도 여기에 있을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가죽선반을 지나쳐 철제품쪽으로 걸어갔다.
밀레시안이 멈춰선곳은 철제품을 사이에 두고 세칸 떨어진 천분류의 분실물.
양털과 각종 직물로 짜여진 물건들에게서도 눅눅하고 오래묵은 분실물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져왔다.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기 전에 세탁이라도 맞기는것인지 멀쩡한 물건도 삭아버릴것 같은 지독함에 밀레시안은 막대기로 이리저리 물건들을 쑤시며 작은 가방을 찾기 시작했다.
밀레시안이 선반을 어지럽힌다고 생각했는지 중간중간 부엉이 몇마리가 항의하듯 울음소리를 내었지만 밀레시안은 개의치 않아하며 긴 끈을 한가닥 찾아내었다.
알파카의 털로 짜여진 가방의 고리를 확인한 밀레시안이 희망에 찬 얼굴로 끈을 잡아당기자 선반이 덜컹 하고 앞으로 내려 앉았다.
아마도 뭔가에 끼인듯 빡빡하게 무거운 손맛에 밀레시안은 한손으로는 가방끈을 다른 한손으로는 막대기로 선반안쪽을 찌르며 천천히 저가형가죽이 들어있는 가방을 끄집어 내었다.
오랜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이거 끊어지는거 아니야? 하는 생각에 밀레시안은 위태롭게 기울어진 선반을 올려다보며 살짝 힘을 빼었다. 이대로 무너지면 창고와 함께 소울스트림으로 승천할것 같은 불안감에 빠진 힘이였지만 오히려 그게 도움이 된것인지 가방은 그동안의 힘자랑이 무색하도록 가볍게 축 하니 튀어나왔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튀어나온 가방이 반쯤 찢어진 상태였다는 것.
밀레시안은 망했다 라는 생각에 허둥지둥 가방을 살펴보며 울상을 지었다. 아니 버리는거니까 괜찮으려나? 부탁받은 물건인데 이래도 되는걸까.
울적해진 표정으로 가방이 들어있던 선반 뒷쪽을 들여다보자 저 안쪽 깊숙한 곳에서 희미하게 날을 세운 무언가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옆에 있는 철제품에 걸려 있었는지 가방이 나온 선반으로 불쑥 튀어나온 검의 모습에 밀레시안은 혀를 차며 등불을 들이밀었다.
왜 하필 이것만 찢어진건지. 용캐도 물건을 찾아내었다는 뿌듯함도 잠시 파손된 물건에 대한 불안감과 원흉이 되는 검에 대한 원망감에 밀레시안은 손을 뻗어 선반 뒷쪽으로 넘어간 검을 잡아 끌었다.
저가형가죽가방을 찢었다고 생각되지 않을만큼 날이 무뎌진 검은 밀레시안의 장갑에 착 달라붙는 느낌으로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순순히 선반 밖으로 끌려나왔다.
어디 누구 검인지 이름이나 좀 보자, 밀레시안은 화풀이가 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집을 부리며 검위로 등불을 가까이 했다. 은백색의 탁한 시간을 머금은 검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
밀레시안의 눈이 잠시 감기었다 떠졌다.
낯익은 검의 모습에 밀레시안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손을 옮겼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가방안에 넣어두었지만 분명 자신이 갖고있는 검과 똑같은 모양의 검이였다.
다른점이 있다면 자신의 것은 레플리카. 눈앞에 있는 검도 다른 별의 여행자가 가지고 있던 레플리카이기를 바라면서도 밀레시안은 확인을 해 봐야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혔다.
상점에서, 혹은 오래된 유물의 상자에서 나온 것이라면 지워지지 않을 그 이름.
도면으로 만들어진 무기라면 붙어있지 않을 파란 글자. 장인의 손길이 거쳐진다면 그 순간부터 오리지널이 아닌 개인의 물건이 되지만 밀레시안이 알기로 이 검은 더이상 손 댈수 있는 장인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오리지널이 아닐리가 없어.
밀레시안의 떨리는 손이 검신의 아름다운 장식에 닿았다 떨어졌다. 반투명하게 떠오르는 정보창에 밀레시안이 잠시 눈을 깜빡였다.
"........"
몇번이고 몇번이고 읽었던 메모창이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세상 어디에서도 사라졌던 그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 검에는 그 부분이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유였다.
어느 누가 자신의 검을 사용할 검사에게 휘두르는것은 무리 라는 설명을 적어 놓겠는가.
그저 무게가 앞쪽에 쏠려 있다는 설명만 덧붙일뿐.
이름모를 장인에게서 만들어진 진품을 분실물 창고에서 찾아낸 밀레시안은 자기도 모르게 부엉이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진짜야?"
잠들어 있던 부엉이들이 부스스 고개를 돌려 밀레시안을 내려다 보았다.
"진짜 마스던전에서 찾은 그 검이야?"
부엉이들은 저마다 뭐라 작게 속삭이면서도 누구하나 시원하게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꾸륵꾸륵 거리며 깃털을 손질하거나 날개를 퍼덕일뿐. 여행자의 질문에 답을 내어놓을 혜안을 감고서는 다시 날개깃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밀레시안이 등불의 그림자에 가려진 명패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마스던전. 오래전 언젠가 한번 그곳에 간적이 있었다. 수많은 기사들과 금맥을 찾던 코볼트들을 짓밟고 그 안쪽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것이 너희들의 정의인가. 분노에 찬 붉은 머리의 검사는 그곳에서 검을 내던지고 검은 갑옷을 집어들었다. 여신의 가호를 바라는 캘틱매듭이 세겨진 장인의 검은 그에게 있어서 무거운 쇳덩이로 전락한 물건일뿐. 검 손잡이의 낡은 천을 풀어내자 시선의 아랫쪽에 거칠고 투박한 솜씨로 검의 주인의 이름이 등불에 드러났다.
"아하하, 정말 손재주 없다."
밀레시안은 그리운 웃음소리를 내며 짧은 검의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틀림없는 그의 검이다. 그 사람의 조각이야. 밀레시안은 검은 든 채로 사다리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 "
"에반"
창고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밀레시안은 갑자기 밝아진 주변환경에 눈쌀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어야했다.
눅눅하고 매캐하게 산화된 공기대신 산뜻하고 맑은 공기가 반갑기도 하지만 밀레시안은 더 급해진 마음으로 에반을 찾았다.
그녀의 동의가 필요했고 그렇지 않다면 다른 거래조건을 찾아야 했다.
밀레시안은 급한 마음으로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생각하지도 않은채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해치고 에반의 이름을 불렀다.
관청의 직원인듯한 몇몇 사람이 어지럽거나 환각이 보이지 않느냐며 안부를 물어왔다.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 사이로 낯익은 연분홍빛 블라우스가 보였다.
에반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밀레시안씨! 걱정했습니다. 보통 저희 직원들은 20분만 들어가 있어도 나오는데 벌써 2시간 동안이나.."
"에반, 저 이거 주세요"
에반이 걱정을 하며 다가오는것도 무시한채 먼지와 지푸라기, 검댕이로 엉망이된 밀레시안은 반대손에 들려있던 검을 들어보였다.
한손에는 뒤집어진 상어로브 꾸러미를, 다른 한손에는 검을 든 밀레시안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진지하게 가라앉은 밀레시안의 눈빛에 에반은 네? 하고 되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밀레시안은 다시한번 진지한 목소리로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이거, 저 주세요"
"하지만 밀레시안씨. 아시다시피 이 안의 물건들은 모두 주인이 있는물건으로.."
"이 물건의 주인을 알아요"
".....아, 그렇지만 역시 본인이 오지 않는 이상은"
"그사람은 못와요. 죽었거든요."
딱잘라 말하는 차가운 한마디. 에반은 눈앞의 밀레시안을 낯설어하며 조금 움츠러 들었다.
언젠가 변이된 동물들에 대해서 물어오던 때의 기운없던 모습과 비슷한, 아니 그것보다도 훨씬 더 가라앉은 모습에 에반은 스커트를 살짝 잡아 내리고는 말을 골랐다.
밀레시안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에반의 손에 들려있던 수건을 받아들었다. 에반의 주머니에 넣어진 밀레시안의 손수건이 보였다.
"그렇게 걱정하지 말아요. 화난거 아니에요 나는 그저..."
밀레시안은 검을 대충 땅에 박아놓고서는 양손으로 수건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새하얀 수건으로 잔뜩 묻어나오는 검댕이에 밀레시안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내밀었다.
장난기 가득한 모습이지만 수차례 눈을 깜빡이는것이 일부러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듯 불안한 모습이였다. 수건으로 몸의 먼지를 털어내는 밀레시안이 별거아닌듯 가벼운 어투로 본심을 덧붙였다.
"그 친구가 무덤이 없어서 그래요."
무덤이라는 말에 에반은 살짝 갈등이 생기는지 단호하게 거절하려던 손을 그러모으며 손톱끝을 만지작거렸다. 분명한 억지이지만 밀레시안의 눈빛이나 말투는 허투로 하는 거짓말 같은것이 아니였다.
불사의 밀레시안에게 무덤을 만들어줄만한 친구라.. 에반은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다가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퍼뜩 정신을 차리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기대를 깨버리는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에반은 판에 박힌 말로 에둘러 밀레시안의 시선을 회피했다.
"하지만 역시 본인이 아닌 이상에는..,"
밀레시안은 명백하게 실망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역시 그렇죠? 하는 말소리와 함께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고 말하는 밀레시안이 검을 바닥에 끌며 햇빛에 검날을 비쳐보였다.
오랫동안 어두운 창고안에서 방치되었을 낡은 검은 둔탁한 빛을 내며 생의 마지막 햇빛을 받고있었다.
너무 오래되었거나 주인이 없는것으로 확인된 물건은 파기된다.
밀레시안이 알고있다는 주인, 특히나 죽었다고 확인한 이상 이 검은 파기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남아있지 않은 물건이였다. 그럴바에는 조금이라도 의미있는 일에 쓰이는게 더 낫지 않을까.
곤란해 하는 에반의 뒤로 관청의 다른 직원이 다가왔다.
분실물 관리를 맡은 직원인지 밀레시안이 가지고 온 다른 잡동사니들을 확인한 남자는 밀레시안의 눈치를 살피며 손을 내밀었다.
밀레시안이 부루퉁한 얼굴로 검을 내밀자 관청의 사람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밀레시안을 안심시켰다.
"잠시 물건을 확인하려는 것 뿐입니다."
"....."
"분실물번호 xxxxx. 예 확인했습니다. 마스던전의 물건이군요"
물건의 연식을 확인하려는 것인지 찾은 위치와 사물번호를 확인한 관청직원이 에반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달했다. 밀레시안이 조금 기대를 하는 눈치로 두 사람을 지켜보며 수건을 가지런히 접었다.
에반이 무언가를 반박하며 빠른속도로 이야기를 건냈지만 잔뜩 낮춘 목소리탓에 내용은 들려오지 않았다. 관청직원은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흘러나온 한마디가 밀레시안의 마음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괜찮습니다. 좋은게 좋은것이니까요"
에반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밀레시안과 직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베시시 웃으며 검을 끌어안은 밀레시안은 제발요 하고 애교섞인 미소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에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이 있습니다만.."
"...네"
"아르바이트 비는 받아겠습니다"
줄땐 주더라도 받을것은 받아간다. 관청의 얼음미인은 눈썹하나 까딱이지 않은채 밀레시안에게 퀘스트지를 받아들며 작은 펜으로 두줄을 그어내리며 보상란을 수정했다.
다른 직원들이 이래도 되는걸까 하고 눈치를 보는것과는 달리 에반은 시원하게 웃으며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안되는거 아시죠?"
밀레시안이 환하게 마주웃었다.
검을 받은 밀레시안은 곧장 문게이트로 달려가 반호르로 향했다. 비행금지라는 표지판이 무색하게 수차위로 뛰어내리듯 대장간에 달려든 밀레시안은 무려 아이데른과 에일렌에게서 냄새난다고 구박을 받고나서야 겨우 자리에 멈춰서며 자신의 몸상태를 확인했다.
멋쩍게 웃으며 건져놓듯이 검을 맞겨버린 밀레시안이 대장간 뒷편의 샤워시설을 빌리는 사이 아이데른은 추억에 잠긴 눈으로 받아든 검을 쓸어보았다.
"아는 검인가요?"
".....그런 편이지"
보조도구를 들고오던 에일렌이 담담한 눈으로 검의 뒤틀린 정도를 확인하던 아이데른이 큰소리로 밀레시안을 불렀다.
어디서 뭘했길래 검이 이 모양이 된거냐는 구박대신 어느정도로 수리하면 되냐는 할아버지의 말에 에일린은 적잖이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검과 할아버지를 번갈아보았다.
분명 아무말도 하지 않고 들어간 밀레시안이였지만 아이데른은 처음부터 이 검을 수리할 생각이 없는지 묵묵히 검면만 쓰다듬을 뿐이였다.
검에 관해선 한번도 보여준적 없는 관대함에 에일린이 밀레시안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그냥 반짝거리게만 해주세요"
"뒤틀린것은?"
"그냥 두세요. 어차피 더이상 검으로 휘둘러지지 않을테니까요."
".....그렇군"
물소리와 화로소리에 묻힌 대화는 큰 고성방가처럼 벽을 사이에 두고 반호르를 쩌렁쩌렁하게 울려대었다.
버려진 검이였다. 시간에 버려지기전에 주인손에 내던져져 버릇없는 포워르들의 발에 밟히고 내팽겨쳐져 돌고 돌아 이름모를 어느 던전방에서 성의없게 주워져 처박힌 유류품이였다.
너의 주인은 너를 찾으러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낡은 검은 묵묵히 제 날을 드세우며 창고의 한 구석에서 마지막 생명줄마냥 가죽 찔러잡고서는 세상으로 돌아왔다.
대장장이는 망가진 세월 그대로를 숫돌에 갈아내며 쇳가루로 뿌옇게된 물에 검신을 담갔다 건저올렸다.
그 주인만큼이나 순탄지 못한 삶을 살았던 검에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뜨끈하다못해 익어버릴것 같은 샤워를 끝낸 밀레시안이 벌겋게된 피부를 들여다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주 익어버리겠다며 무슨 물이 이렇게 뜨겁냐고 투덜거리는 밀레시안의 말투는 어딘지 흥분한것 같았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에일린에게 수건하나를 더 빌리며 머리를 털어낸 밀레시안은 일부러 아이데른 쪽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리고는 어떻게 되었어요? 라고 물어왔다.
아이데른은 묵묵히 검을 천으로 동여매며 대답했다.
"광택만내고 날은 별로 안세웠다"
"어차피 후려치는 용도라잖아요"
애써 웃는 낯으로 검을 받아든 밀레시안이 값을 치르려 하자 고개를 가로저은 노인은 조용히 밀레시안을 향해 되물었다.
"검의 주인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줄 수 있는가?"
"......."
밀레시안은 웃지 않는 눈을 어디다 두어야할지 모르는 얼굴로 입가의 미소를 계속 유지한채 시선을 떨구었다.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다난을 배신했어요? 포워르들의 앞잡이가 되었다가 용한테 물려갔어요? 포워르도 잡아먹고 용도잡아먹으며 신을 위협할 검은 용기사가되어 하늘을 찢어놓았어요? 그러다가.. 그러다가... 밀레시안의 머릿속으로 복잡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가닥속에서 사납게 날뛰는 붉은 기사의 검은 대검이 불쑥 튀어올라왔다. 손에 들린 하얀 대검이 분하다는듯이 바르르 떨려왔다.
모든것이 쓸데없는 수식어였고 필요치 않은 사실들이였다. 그 길들이 가르키는 말이 한마디로 정련되자 밀레시안은 느리지만 명확하게 아이데른을 응시한채 그의 마지막을 전했다.
"자신만의 정의를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자기 일만 하고 떠나버렸어요"
누가 뭐라 말해도 듣지도 않는 불굴의 전사. 기사로 자라났어야 했지만 스스로 뛰쳐나가 세상을 향해 검을 빼어든 어린 불꽃의 아이.
아이데른은 눈이 아프도록 어른거리는 붉은 머리를 떠올리며 그렇구나. 라고 검을 내어주었다.
밀레시안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케안항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항구는 폐쇄되었지만 그의 발걸음을 따라 움직이고 싶었다.
"아니, 물려서 날아간거니까 발걸음은 아닌가"
밀레시안의 무례한 혼잣말에 검이 다시한번 바르르 떨었다.
케안 항구에서 셰넌의 수다에 지친 밀레시안이 대륙의 이동으로 켈라에 도착한것은 이웨카가 떠오를 무렵의 늦은 오후의 일이였다.
밤낮에 상관없이 열려있는 마나터널은 편리하겠지만 밀레시안은 검을 두드리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네 주인이 걷던 길을 보여줄께"
펫도 없이, 탈 것도 없이. 변신하지도 않고 반신의 힘을 쓰지도 않은채 홀몸으로 그곳까지 걸어가보자. 느리긴하지만 그를 되돌아보는 시간으로 여기기엔 짧게 느껴질지도 모를일이였다. 걷자. 너와함께, 그때 그 시간대에 내버려진 기억과 같이. 용의 기사가 남기고 떠난 발자국을 따라서.
가만히 검을 쓰다듬으며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를 느끼던 밀레시안이 가만히 눈을 뜨며 작은 말을 덧붙였다.
"일단 갔을땐 날아갔지만"
때떄로 파르르 떨리는 검이 재미있는지 밀레시안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와 이야기 했다면 이렇게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했을까. 밀레시안은 따라오려는 말을 캠프에 맞기고는 솔레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네에게는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네. 베이릭시드의 말을 되뇌이며 밀레시안은 실없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계기가 없으면 할 수가 없는걸요.
밀레시안은 눈앞에 펼쳐진 솔레아 평원을 내려다보며 뒤를 돌아보았다. 무심하게 떠오른 마나터널이 사서 고생을 하려는 밀레시안의 뒷모습으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더럽게 무겁네"
옛 지기, 혹은 악우를 추억하는 여행의 감동은 시작한지 한시간도 안되어 박살이 난듯 보였다.
검도 동의한다는 건지 전처럼 파르르 떨리지 않은채 조용히 밀레시안에게 안겨있었다.
대체 왜 검을 이따위로 만든것인지 이걸 왜 한손으로 휘두르는건지 자이언트세요? 하고 물어보고싶은 밀레시안은 검을 추스러 올려 안은 뒤 달려드는 개미귀신을 발로 차버렸다.
품안에 1.5개 분량의 검이 있것만 천으로 둘러놨으니 그저 양손이 묶인 꼴.
말은 물론이고 그냥 보조 펫이라도 조금 간절한 밀레시안이지만 이미 펫을 동행하지 않기로 스스로와 약속한 몸. 밀레시안은 쓸데없이 천년을 묵은 쥐며느리를 향해 파이어볼트를 날리며 눈을 감았다.
이 길을 지나가는동안 이 모든 것들을 그 인간이라고 생각하자. 검이 떨려오건 말건 가는 발걸음마다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발로 차낸 밀레시안이 출구쪽에 도착했을 무렵, 밀레시안은 아주 오래간만에 마나와 스태미너의 한계치를 확인하며 벽에 기대어섰다.
뭐가 이쁘다고. 뭐가 그렇게 애틋하다고. 처음 시작때와 다른느낌으로 울컥이는 마음을 억누르며 출구에서 흘러내리는 찬서리바람에 얼굴을 들이민 밀레시안이 숨을 돌렸다.
실바숲 특유의 얼어붙은 숲내음에 잠시 기분을 전환한 밀레시안은 나지막히 떠오르는 한 추억에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저기서도 한번 사기를 당했지. 이를 악문 밀레시안이 가파른 출구의 발을 내딛었다.
"사-기-꾼!"
밀레시안은 아침에도 이런식으로 울분을 터트린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지하동굴의 출구에 올라섰다.
청량한 공기에 감동하는것도 잠시 발밑이 푹 꺼지며 발목까지 차오르는 느낌에 밀레시안은 킁 하고 콧바람을 내뿜었다. 순록들이 무심하게 입김을 내뿜으며 빈입을 질겅거리는 실바숲. 밀레시안은 깊은 한숨과 함께 발목을 털어내며 품속에 있던 검을 등으로 고쳐매었다. 막연하게도 밀레시안은 그를 찾기위해 이곳에 왔던 시간을 떠올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발레스의 자이언트 마을에 도착한것은 밀레시안이 이제 막 사막기후에 적응했을 무렵.
거주지구에서의 몇몇 사람들의 증언으로 이리아를 떠돌다가 지친 밀레시안의 앞에 기적처럼 나타난 제 3의 종족은 너무나도 달콤하게도 밀레시안을 향해 속삭였었다. 은빛의 숲을 해메고 있던 이름모를 붉은 청년을 보았다고.
왜 거기있는건가 어떻게 거기있는걸까. 수도 없이 찾고 또 해메이며 그의 흔적을 찾아 설원을 떠돌았다.
조금이라도 더 듣기 위해 그들을 위해 일하고 그들을 위해 행동했다.
왜 있는지도 모를 문양들을 조사하고 혹시라도 관련이 있지않을까, 용에 관련된것이라면 무엇이든 머릿속에 우겨넣었다. 종족간의 전쟁, 천년전의 저주. 모두 밀레시안에겐 겉도는 이야기일뿐.
그 넓은 이리아 대륙에서 찾은 단 하나의 단서. 몇번이나 울었을까. 실바숲에서 내리는 눈송이가 방금 자신이 남겼던 발걸음을 지우는 것조차 야속하게 느껴지던 날들이였다.
그렇게 지쳐가던도중 들려오는 두번째 소식은 멀리 비밀속에 감추어졌던 밀림의 유적지. 밀레시안이 그곳으로 향한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였다.
"사람이, 말이야, 좀, 멀쩡한 곳에"
흔적을 남겨두면 안되냐고, 라는 말은 폐를 얼려올 것 같은 시린 북풍에 삼킨채 몸을 부르르 떨어야했다.
밀레시안은 눈썹마저 얼어붙을것같은 서리바람속에서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말할 사람이 필요하다기 보다는 속안에 끓고 있는 말을 토해낼 거리가 필요했다. 들어줄 사람이 비록 검뿐만이라도 그와 연관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밀레시안에게는 위안이 되는듯 몇번이고 검을 끌어안았다. 깜빡이는 눈꼬리에서 뜨거운 눈물이 핑 돌았다 식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그에대해 생각하는게 얼마만의 일일까. 밀레시안은 어느새 멀어진 실바숲을 돌아보며 코를 훌쩍였다.
그땐 정말 힘들었어. 실바숲에서의 악몽을 한순간의 추억으로 회상하는 자신의 발자국은 밀레시안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기특한지 낮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다시 울음소리같은것을 입가에서 닦아내었다.
아침부터 냄새나는 창고에 질식할뻔하고 대장간 뜨거운 샤워물에 익어가고 벌레에게 쫓기고 이젠 서리바람에 얼어붙기까지. 온갖 생고생은 다하는 느낌에 밀레시안은 다시한번 뭐가 그렇게 이쁘다고! 라고 소리치며 이를 맞부딪쳤다.
용들마저 물러가게한 발레스의 북풍.
용에게 다가서려는 섣부른 여행자들을 멈춰세우는 동장군의 칼날에 얼어붙은 레우스강은 북풍이 무색하도록 용에게로 향하는 실버로드가 되어 이웨카의 빛 아래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은 잘 얼었나, 혹시 어디 낚시구멍은 없나 확인하기 위해 칼끝으로 얼음을 두드리는 밀레시안의 입김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강은 믿을수가 없어. 밀레시안은 잠시 끊어졌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멀리 보이는 강끝을 향해 몸을 돌렸다.
두번째 소식을 따라 이동한 곳은 목숨을 잠깐 걸어야하는 위험천만한 곳이였다.
땟목위로 뛰어드는 고블린들과 사투하기도 바빠죽겠는데 갈림길에서는 또 반대방향이라니, 달려드는 고블린을 윈드밀로 쳐낸뒤 급하게 노를 틀어낸 밀레시안은 황급히 물길로 뛰어드는 고블린 전사를 보며 왜 밀레시안들에게는 위기감지 능력이 없는건지 깊은 탄식을 내뱉어야했다. 왜긴 왜야. 목숨이 여러개니까.
부서지는 땟목속에서 이 정보는 쏙 빼고 유적으로 가는 길만 알려준 동료 여행자를 꼭 잡아내겠다는 다짐을 한 밀레시안은 한사발 배불리 강물을 들이마시며 폭포밑으로 떨어져야만 했다. 오로지 유적의 환상을 보기 위해서. 그의 흔적을 찾기위해서.
여러가지 문양의 석판이 품속에 있는지를 확인 한 밀레시안이 관심도 없는 이리니드의 예언을 감상하는동안 뒤에서 거대한 민물악어가 접근하는지도 모른채.
세가지 영상을 보고난 밀레시안이 눈물을 흘리며 오열을 하지 않은것은 모두 악어의 노력 덕분이였다.
강물이 넘쳐 흘렀고 발목을 적셨고 밀레시안은 거대한 꼬리에 맞고 나가떨어져 물속에 처박혀야했다.
온통 젖은 얼굴과 몸을 내려다보며 밀레시안은 자신이 콜록이는것이 울음소리인지 눈물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런것을 바란것은 아니였는데. 환상이길 바랬지만 그는 분명 그 곳에 있었다. 나지막히 속삭이던 예언과 지긋지긋한 영문모를 점괘들, 죽은자의 냄새를 닮은 유황의 향기와 어딘지모를 불기둥이 넘실거리는 곳.
그런 눈으로 살아가길 바라고 당신을 몰아부친것이 아니였어. 밀레시안은 온몸을 씹어삼킬 커다란 입을 보며 검을 놓았었다. 자신의 목숨도 그 강물에 흘려보내고 싶었다.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별빛은 또다시 몸을 빚어내었고 정신을 차린 밀레시안은 모든 운명을 포기하고싶은 절망속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코우사이의 오두막에서 잊어버리라는 보라빛 차를 내어줄때까, 밀레시안은 물빛으로 넘실거리는 벌레의 울음소리 사이로 자신을 숨긴채 가쁜 숨만을 몰아쉬었다. 코우사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기운을 차린뒤 밀레시안은 혹시나 하는 마음을 놓지 못하고 또다시 그를 찾아 사람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강 밑바닥에서 본 밀림의 유적에 대해서는 모두들 모른다는 말만.
말이 통하지 않는 노란 수달만이 미묘한 표정으로 대답을 회피했지만 밀레시안에게는 동물과 대화할만한 능력은 없었다. 그저 늑대를 닮은 소년이 해석해주기만을 기다릴뿐이지만 루와이는 그 주제에 관해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건진것 없이 상처만을 얻은 밀레시안이 용의 땅으로 발걸음을 돌린 것은 사람을 찾아달라는 한장의 소식지 때문이였다. 무시하고 계속해서 밀림에 머무르기엔 밀레시안 스스로가 사람을 찾는다는 고통이 무엇인지 뼈져리게 느끼고 있던 시간였다. 밀레시안은 에피의 말을 받아들였고 발레스의 강을 거슬러 잃어버린 봉인의 문앞에 멈춰 섰다. 용의 시간이 이 문 넘어에 남아있었다.
어째서 용들은 에린을 떠나갔을까.
쫓겨난 것인지 스스로 사라진것인지 누가 누구로부터 누구를 보호하는지 모를 봉인의 문을 지날때 밀레시안은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야했다.
에린에 잠들어있던 검은 용이 어떤 마음으로 날아올랐는지, 자신이 쏘아야할것도 쏘지 말아야할것도 알지 못한 어린 밀레시안은 도망치듯 이리아를 떠나왔고 다시 돌아왔다.
검을 끌어안은 별은 다시한번 마주한 봉인된 기둥을 올려다보았다.
"여기 있었어"
밀레시안은 제법 친숙해진 검에게 다정한 어투로 말을 걸며 어리석던 자신의 모습을 회상했다.
"드디어 그 검은 용을 찾았다는 생각에, 앞 뒤 생각하지 않고 하늘로 날아올랐지"
그때만큼 절망할 일이 또 있을까. 밀레시안은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던 그 순간을 떠올리는지 얼어붙은 검을 꽉 쥐며 고개를 숙였다. 날씨가 따뜻해지며 희미하게 유황의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내가 그를 죽였어. 내가 그를 위험에 몰아넣은거야.
멀리 호수가 올려다보이는 레네스에 돌아서면서 밀레시안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되풀이되던 질문을 털어놓았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갈길잃은 마음이 세상밖으로 나오는순간 밀레시안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녹은 서리에 젖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서리에 얼어터진 손끝마다 피빛이 맺혀 엉망이된 손이 검을 둘러싸던 천을 엉망으로 물들였다.
"내가 만약 그때 그 화살을 쏘지 않았다면, 그는 좀 더 다른 결말을 맞이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죽은 용은 말이 없었고 살아남은 용 또한 해답을 내어주지는 못했다.
그는 알고 있었고 보고 있었다. 이 세계의 미래를 보고, 흘러간 시간을 보며 그 운명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또한 알고 있었다. 얼음을 품은 심장을 마주하며 붉은 머리의 청년은 별의 이름을 불렀다.
누구보다도 담담하게, 누구와도 닮지 않도록 낯설게. 차라리 화를 내라고 리안은? 타르라크는? 마리의 이야기라도 해볼까요? 라고 그의 심장을 때리면서도 밀레시안은 가슴속의 눈꽃결정보다도 더한 냉기에자신의 눈을 가려야했다. 폐부를 찔러오는 뜨거운 열기가 별의 영혼을 망가트리고 있었다.
화산의 불꽃아래에서 누군가의 영혼이 타들어가거나 절망을 하거나 상관없이 황금용은 태어나야했다. 그가 아닌 별의 이름 아래에서.
오래전부터 준비되어왔던 검은 현자의 계획은 어리석고 자만에 찬 어린 별의 철없는 손짓에 스러져야했고 별은 그 책임을 져야만했다. 그 보상으로 주어진 행복의 꽃다발은눈꽃의 빛을 닮은 유니콘에게 던져주었다. 더이상 이 섬에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이 대륙의, 저주의, 엉망이 된 시간속에 잊혀진 이야기를 들어줄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기력을 다한 밀레시안은 기절하는 환상속에서 낯익은 뒷모습이 이리아를 떠나 에린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꿈꾸었었다.
그러나 그를 뒤쫓는 여행은 거기까지. 더이상 그를 쫓을 기력을 잃은 밀레시안은 눈을 감고 귀를 틀어 막은채 자신의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팔론의 뿔피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그때의 외면했던 시간들은 날카로운 비수가되어 오는지도 모른채 그림자를 떠돌던 밀레시안은 잠시 사람들의 말소리에 취해 자신이 걱정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었다.
그것이 밀레시안이 후회했던 두번째 실수, 두번째 절망의 시작점.
칼리다 호수의 푸른 용의 도움을 받아 레네스에 도착한 밀레시안은 잠시 넋을 잃은채 작은 화산섬을 올려다 보았다.
들어가고싶은것은 아니였다. 그저 검에게 보여주고 싶었을뿐. 네 주인이 갔어야 했던 곳이야.
밀레시안은 자신이 여행의 처음부터 이 검을 사람처럼 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모래밭에 주저앉았다.
길잃은 장님게가 따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가 사람의 기척에 놀라 반대편으로 도망가듯 숨어버렸다.
시력을 잃은 동물의 예리한 청각만이 들을수 있는 작은 울음소리가 고개숙인 밀레시안의 등에서 미세하게 떨어져 내렸다.
사실 이런곳에 오고싶지 않았어. 그가 죽은곳이 여기가 아니라는것도 알아.
밀레시안은 말로 만들어지지 못할 웅얼거림으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질책했다.
그때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고 성장하지 않았다. 별은 여전히 떠돌았고 진실과 마주했으며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수많은 곳을 떠돌며 입을 다물었다. 귀를 틀어막았다. 눈을 가리고 말을 삼키며 그자리에 주저 앉아있을뿐.
세상을 움직이는것은 영웅의 업적이 아닌 그 이외의 수많은 사람들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시간이였다. 검은 아무말 없이 밀레시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모래바닥에 누워있었다.
검은 원래 말을 하지 안잖아. 흘러가는 수많은 상념들중 하나가 밀레시안의 작은 안도감마저 현실로 때려부수며 일어나기를 재촉했다. 그의 검을 세울 장소가 필요했다.
돌아갈 방법은 생각하지 않았기에, 밀레시안은 머뭇거리는 발걸음으로 마나터널위에 올라섰다.
마치 그 터널을 이용하면 검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밀레시안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림자의 입구에 발을 내딛었다.
위치는 필리아의 오아시스. 반족의 유적이 잠든 지하의 땅으로. 눈을 감은 밀레시안의 뺨에 매마른 모래의 감촉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러나 이전처럼 텁텁한 모래뿐만이 아닌 수많은 냄새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희망이 싹트는 땅.
밀레시안은 그가 잠시 머물렀던 물가를 거닐며 발에 채이는 모래의 감촉을 감상했다.
검은 떨리지 않았고 밀레시안또한 검의 침묵에 동의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이 길목은 검을 잠들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밀레시안은 다시한번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이리아를 떠나는게 좋겠어.
검은 작게 몸을 떨었다.
던바튼의 광장에서 눈을 뜬 밀레시안은 자신이 말을 켈라에 맡기고 왔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아, 바보같은 짓을 했네 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바보같은 일의 연속으로 사실상 이리아를 떠도는 그 여행은 모두 부질없는 일로 끝난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뭘 위해서 그 먼길을 떠돈것일까. 밀레시안은 두꺼운 로브를 벗어 은행에 맡기고는 다시 가벼워진 차림으로 던바튼의 서쪽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온화한 에린, 그야말로 낙원. 크루타 브로드 소드는 고향의 향기가 마음에 드는듯 여러번 검신을 울려대며 밀레시안의 가슴팍을 울려대었다.
오스나사일의 가장자리에 팔라라가 걸려있었다. 밀레시안은 아무런 의심없이 협곡으로 들어갔다.
"잊어버렸던 내가 멍청했지"
협곡의 입구 직전까지 간헐적으로 울려대던 검신은 죽은듯이 조용히 멈춘채 밀레시안의 품속에 잠들어있었다.
왜 잊고 있었을까, 이 뒤틀린 검신을, 세워지지 않는 날을. 그냥 아주 새 검으로 만들어달라고 땡깡을 부릴껄.
밀레시안 용광로에 다시 들어가라, 미믹 안에 넣어버리겠다 등의 폭언을 퍼부으며 달려드는 갈색 다이어울프들을 내치며 좁은 길을 내달렸다.
무기도 없어, 너클도 없어, 악기라도 있으면 재워보기라도 할텐데.
며칠이 지난건지 시간도 가물거리는 밀레시안은 대체 이 고생길의 끝은 어디인지 알지도 못한채 이멘마하의 하얀 나무펜스에 몸을 기대었다.
허리를 숙이고 헉헉 거리는 밀레시안의 곁으로 새하얀 양이 다가와 검을 싸고 있던 천을 우물거렸다.
징- 하고 울리는 검신을 보며 밀레시안은 반쯤 풀린 눈으로 양에게 검을 내밀었다.
'양에게 크루타 브로드 소드를 선물하시겠습니까?'
"너 이거 가질래?"
양은 퉤 하고 거절한뒤 자시 자신의 무리로 돌아갔다.
"어서오십시오, 밀레시안씨"
"....안녕하세요"
"......."
사무적으로 인사를 건내는 아이던을 보며 밀레시안은 한박자 늦게 대답을 건내었다.
막상 그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게 잘하는 짓인지. 밀레시안은 괜시리 수상하게 보이도록 검을 등뒤로 숨기며 말을 늘어트렸다. 아이던은 엉망이된 밀레시안의 머리를 정돈해 준뒤 헛기침과 함께 손을 거두었다. 근위병들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곁눈질로 그 모습을 살펴보지만 투구때문에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아이던은 다 보인다는듯 심기불편한 기침으로 주의를 주며 밀레시안의 주의를 돌렸다.
밀레시안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정돈했다.
"아, 모습이 엉망이죠"
"....그렇게 엉망은 아닙니다만"
"오스나사일에서 다이어울프들에게 쫓기는바람에.."
멋쩍게 웃는 밀레시안의 모습에 이번에는 아이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인상을 찌푸렸다.
다이어울프? 미니곰이나 양의 탈을 쓴 늑대떼가 아니라? 확실히 요 근래에 보스몬스터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적 었었기에 아이던은 그저 새로운 수련방법인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밀레시안의 기행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였으니까.
머리 정돈을 끝낸 밀레시안은 다시한번 아이던 뒷편에 서 있는 새하얀 성을 보며 마음속으로 갈등을 계속했다.
정말 여기가 맞는걸까, 기부탓인지 모르지만 검도 복잡한 눈치로 울릴까 말까를 고민하는듯 보였다.
천으로 둘러싸인 검이 보이면 얼마나 보인다는건지 실없는 생각이라고 홀로 머리를 내젓는 밀레시안을 내려다보며 아이던은 다시한번 헛기침으로 밀레시안을 불렀다.
혼자있던것에 익숙해져있었던 밀레시안이 핫 하고 현실로 돌아왔다. 이곳은 이리아가 아니였다.
"어...."
"성 안을 견학하실 생각이십니까?"
대충 밀레시안의 행동을 읽어낸 아이던이 밀레시안씨에게는 언제든지 개방되어 있습니다. 라는 설명을 덧붙였지만 문장으로 마딱트린 이멘마하의 성이라는 이름에 검과 밀레시안 모두 거부감을 내보이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아니요, 괜찮아요."
밀레시안의 겁먹은 얼굴에 아이던이 밀레시안씨? 하고 별의 이름을 불렀다.
이상하게 보일 모습보다는 잠시 스쳐지나간 그의 어릴적 회상장면에 밀레시안은 자신이 장소를 잘못 찾아왔음을 깨닫고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치며 성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낯이 익은 검의 외곽에 아이던이 밀레시안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밀레시안은 괜찮아요, 이만 가볼께요 라고 말하며 눈을 감았다. 어느새 밀레시안의 반대편 손에는 새하얀 날개가 날린 순간이동책이 펼쳐져 있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밀레시안의 모습에 허공을 휘젓는 모습이 된 아이던이 깊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문질러 내렸다. 근위병들의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자세를 바로 고쳤다.
"망했다"
검은 조용히 밀레시안의 말에 동의하며 짧게 한번 진동했다.
"방금 완전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꺼야. 미친거로 오인하면 어쩌지?"
책을 접은 밀레시안은 충동적인 위기탈출 능력에 머리를 휘저으며 탈틴의 스톤헨지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온갖수상한 모습은 다보여놓고 거기서 탈출이라니 이놈의 책은 왜 갑자기 생각나가지고.
한참을 머리를 두드리다가 돌을 차다가 정서불안처럼 기둥사이를 돌아다니던 밀레시안은 손에 든 검의 천이 거의다 풀렸다는 것을 보며 깜짝 놀라 검을 흔들었다.
성의없이 둘둘말려진 천의 사이로 정성스럽게 광을낸 크루타브로드소드가 낡은 천사이에서 팔라라의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와- 멋진검이네요"
누가? 라는 말을 되묻기도 전에 혹시 방금전 머리박던 모습도 보인건 아닐까 불안해진 밀레시안이 고개를 돌리자 한뼘 아래에서 여기에요 밀레시안 누나 라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허리아래께에서 빙긋이 웃는 붉은 눈동자를 보며 밀레시안은 잠시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다가 검을 등뒤로 숨겼다.
타르라크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지 방글방글웃으며 바구니를 잡은 손을 치켜올렸다.
"안녕하세요 밀레시안 누나"
"안녕, 타르라크"
"오늘도 그림자제단에 순찰돌러 가시는건가요?"
저는 오늘 약초를 캤어요. 라고 덧붙이는 타르라크의 바구니에는 늘 가지고 다니는 곰인형과 함께 서툴게 캐낸 베이스 허브가 한다발 들어있었다.
자세히 보니 뺨고 소매끝에도 온통 흙자국이 가득, 밀레시안은 검을 옆에 내려놓은채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어? 잉크자국이 되려 번질것이라 생각한 밀레시안은 얼룩이 안으로 가도록 한번 접은 뒤 손수건으로 아이의 뺨을 문질렀다. 아이는 아프다며 이리저리 도망가기바쁘다.
밀레시안은 가만히 있으렴, 이라고 다정하게 말하며 손끝과 얼굴에 뭍은 흙을 털어주었다.
힘있에 팡팡 내리치는 로브에서는 향긋한 베이스허브의 향기와 흙냄새가 동시에 피어올랐다. 밀레시안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적으로 오래간만에 맡는듯한 안정감있는 향기였다. 밀레시안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머리가 잠깐 어찔했지만 곧 아이의 방긋 웃은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고맙습니다"
타르라크의 예의바른 인사에 밀레시안은 천만에요. 라고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어리고 여린 아이. 밀레시안은 외면했던 시간이 할퀴고간 상처를 보듬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 크루타 브로드 소드가 남은 조각이라면 타르라크의 조각은 이 아이겠지.
밀레시안은 잃어버린 두 지기의 흔적을 번갈아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운명이 장난을 친다면 이런 모습일까. 밀레시안이 검을 들고 자리를 떠나려고 했지만 그보다도 빠르게 타르라크가 먼저 검에게 관심을 보이며 몸을 수그렸다.
균형이 안맞는것 같은 커다란 머리인데도 용캐 넘어지지 않는다는 쓸데없는 감상을 하며 밀레시안이 급하게 검을 뒤로 빼었다. 흔들리는 천에서 피내음이 났다. 이렇게 진하게 났었던가. 밀레시안이 얼어터진 손끝이 덧난건 아닌가 잠시 고개를 돌리는 사이 타르라크는 조금 서운한듯 손을 거두었다. 상처는 더나지 않았고 천에 묻은 피는 모두 말라있었다. 밀레시안은 타르라크가 다친건 아닌가 고개를 돌렸지만 아이는 어딘가 아파하기보다는 혼날것같은 두려움에 울먹이고 있을 뿐이였다. 밀레시안은 입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베이스허브와 짙은 숲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아, 죄송해요. 만지면 안되는 검이였나봐요."
"아니, 그런건 아닌데"
밀레시안은 울먹이는 눈동자에 마음이 약해져서는 서둘러 다음말을 골랐다.
큰 머리의 반을 채우는 붉은 눈동자에 물기가 어리자 용의 머리위에서 떨어져내리는 메테오보다도 강력한 죄책감이 밀레시안의 마음을 덮쳐왔다. 밀레시안은 삐죽이는 입술을 보며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손 다칠까봐."
"그럼 보기만 할께요. 그건 괜찮나요?"
귀엽고 깜찍하게도 양손을 그러모아쥔 타르라크가 제발요 하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밀레시안은 자기도 모르게 검의 천을 푸르다가 헉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를 흔들었다.
타르라크는 그런 밀레시안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가렸다.
"아까부터 누나가 하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요"
"아..아까?"
"돌기둥에 머리를 박기도 하고 검을 붕붕 휘둘러서 천으로 감싸기도 하고 너무너무 즐거워 보여요"
"......."
역시 처음부터 다 본거구나. 생각해보니 타르라크가 처음 말을 걸었을때도 검에 대해 관심을 보이면서 였으니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에 밀레시안은 쓰게 웃으며 즐거워보였으면 됬어. 라고 대답했다.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의 검을 들여다보며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아이는 즐거워하는 듯 보이면서도 어딘지 서글픈 눈으로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 검. 왠지 익숙한게 낯설지가 않아요"
".....내가 전에도 들고 다녔었거든"
"아, 그랬던가요?"
가슴철렁하게 만드는 감상에 밀레시안은 한박자 늦게 타르라크에게 대답하며 검을 치웠다.
타르라크는 아쉬운듯 눈을 떼지 못한채 밀레시안이 일어서는 대로 시선을 움직였다.
내가 실수한걸까, 천으로 검을 감싸는 밀레시안을 보며 타르라크는 고개를 끄떡였다.
"맞아요, 언젠가 그 검을 들고 오셨던것 같아요."
".....응, 타르라크는 기억력이 좋구나."
천 겉면에 끈을 묶어 단단히 고정시킨 밀레시안이 한손으로 검을 돌려 팔 뒷면에 붙이며 다른 한손으로는 타르라크의 곱슬거리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의 시선이 검으로 향하려 했지만 밀레시안은 교묘하게 몸으로 가린채 타르라크에게 바구니를 가르켜보였다. 할 일을 상기시키는 밀레시안을 보며 검은 작게 몸을 떨었다.
"이제 돌아가봐야 하지 않니?"
"응... 조금 더 있다 가도 괜찮은데"
타르라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얼굴로 밀레시안의 등 뒤로 숨겨진 검을 올려다 보았다.
밀레시안의 방글거리는 웃음에서 이제 가야지, 라는 말을 반복해서 들은 타르라크가 아쉬운듯 입을 삐죽이며 몸을 돌렸다. 검이 한번 더 울리며 밀레시안을 질책했다.
손을 흔드는 밀레시안이 반대편 손에 힘을 주며 검을 꽉 움켜쥐었다. 추위에 터져나갔던 손끝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저 아이는 안돼"
어째서? 라고 묻는 검의 떨림에 밀레시안은 일부러 타르라크와 반대방향으로 몸을 돌려 목적지 없는 걸음을 재촉하며 대답했다.
"저 아이는 이미 끝난 이야기야."
네 주인과. 라는 말을 삼킨 밀레시안은 더이상 과거의 파편을 아이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왜 이곳에 왔을까. 왜 타라의 제단이 아닌 탈틴의 제단으로 이동했을까. 왜 하필 그 순간에 그 아이가 거기를 지나간걸까.
밀레시안은 아직도 계속되는 과거의 후회를 곱씹으며 멀리 서쪽에 있는 문게이트에 몸을 던졌다. 훅 하고 사라진 밀레시안이 문게이트에서 내려서자 또다시 차가운 눈송이가 뺨위로 내려앉았다.
주인을 잃은 또다른 과거의 파편. 시드스넷타의 숨겨진 제단의 모습에 검은 작게 대답을 하며 거부감을 표했다.
밀레시안은 망설임없이 걸어가 검을 감고있던 천을 풀어해졌다.
제단의 가운데, 오래된 그림자가 머물던 자리. 밀레시안은 웅웅거리는 검을 내다꽂으며 끓어오르는 숨을 토해냈다.
"여기가 그 장소야"
검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처음부터 여기에 왔어야 했어"
검은 파르르 떨며 밀레시안을 비난했다.
"왜 너를 세상에 내보이려 생각했을까. 그것부터가 잘못이였어. 우리는 잊혀져야해. 사라져야하고 시간에 묻혀야하며 추억으로 남아있어야해"
밀레시안은 더이상 검이 떨리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눈을 가렸다.
사실 처음부터 지금 이순간까지 검은 한번도 떨려온적이 없었다.
모든것은 밀레시안의 바램, 그리고 환상. 솔레아에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고독한 여행의 마침표까지.
밀레시안은 누군가가 긍정하거나 부정하기를 바라며 스스로의 환상이 만들어낸 대답으로 부터 피드백을 받고는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었다.
설원, 바람조차 불지 않는 침묵의 제단.
밀레시안은 고함같은 비명을 토해내며 몸을 웅크렸다. 에린에서 이리아까지. 그가 다녔던 모든 행적을 되짚어 보아도 어느곳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침묵의 여행.
미쳐버릴것 같았다. 마음이 죽어버릴 것 같았다.
세상을 두동강 낼뻔 했던 그 위대한 용기사의 자취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세상을 구해낼뻔 했던 전설의 세 용사의 전설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전부 자신의 이야기. 별의 이름, 나의 목소리.
밀레시안은 자신이 그의 흔적을 지우고 있음을 인정해야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자신밖에 남아있지 않았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에린의 끝에서 밀레시안은 그 두가지 사실을 뼛속깊이 받아들이며 소리를 내질렀다.
당신이 어디에도 없어. 밀레시안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했던 전사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그의 검앞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어디에도 그 이름이, 그 모습이, 그 발자취조차. 추억은 커녕 당신이 있었던 사실조차.
끝나버린 이야기. 그것은 밀레시안이 새로 태어난 타르라크에게 붙인 꼬리표이자 자신을 향한 경고메세지이기도 했다.
"그 아이에게, 너무 많은것을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네"
오래된 목관악기처럼 깊은 목소리를 낸 현자가 몇 년은 더 늙어보이는 한숨으로 밀레시안의 마음을 무겁게 눌러들어왔다. 드루이드는 가만히 밀레시안의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미래를 살아가게 여행자여"
"......"
"과거에 얽매였을때 절망에 빠져드는것은 자네가 아니라 자네 안에 들어있는 추억일세"
드루이드는 밀레시안의 가슴을 가르켰다.
"추억은 미화되고 아름답게 뭉뚱그려지며 희미하게 빛을내며 진실을 가려버리지. 하지만 밀레시안, 잊혀지는것을 그대로 놔두게. 억지로 덧그리고 닦아내며 원형을 유지하려 할수록 망가지고 부서져버려. 재가 되어 흩날리는 기억속에서 자네가 잡아내는것은 집착과 원망 뿐일세.
날아가도록 놓아주게, 자네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용도. 그 유적에서 떨어져 내리는 용기사도.
내가 보기에 자네는 아직도 이리아의 하늘에서 해메이고 있어. 이제 그만 에린의 땅으로 돌아오게. 자네는 지금 날고 있는 것이 아니야. 영원히 그림자와 함께 추락하고 있을 뿐."
그의 말은 대부분 맞는 것이였지만 밀레시안에게 있어선 어려운것을 쉽게 하라는 괴변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몰라서 못하는게 아니야. 날이 선 반신의 분노를 가만히 지켜본 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밀레시안은 지쳐있었다. 그러나 별이 내려앉을만한 횃대가 남아있지 않았다.
베이릭시드는 밀레시안의 가슴을 가르키며 속삭였다.
"자네에게는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네."
밀레시안이 숨을 토해내며 잠에서 깨어났다.
언제, 어느순간부터? 밀레시안은 몸위로 쌓인 눈의 양을 손으로 받아내며 적지않은 시간이 지났음을 확인했다.
몇 날 며칠을 내리 걷고 이동하고 끝에는 엄동설한에 기절까지 했지만 이 몸뚱이는 죽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생사의 갈림길이라도 올라갔다면 혹시 그의 환영이라도 봤을텐데.
밀레시안은 소울스트림에서 그는 어느 시간대의 모습으로 나올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몸위에 쌓여진 눈을 털어내었다. 웃기지도 않은 생각.
설령 소울스트림에 남아있다 하더라도 그사람이 자신을 만나줄 리 없었다. 허탈한 웃음과 함께 머리에 있던 눈을 털어낸 밀레시안의 고개숙인 시선위로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또다시 환상? 아니면 괴한?
무기도 없는데 귀찮게 되었다며 일단 얼굴이나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드는순간 밀레시안은 반사적으로 웃음을 지으며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숨겼다.
마스던전에서 만났던 젊은 루에리의 모습이 한심하다는듯이 밀레시안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예전에 놀림거리로 삼았던 다소곳하게 무릎꿇고 앉아있는 그 모습 그대로.
하하하, 하고 웃음소리를 내는 밀레시안의 머리으로 단련된 검사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콱 하고 뼈마디를 세워 아프게 눌러오는 통증에 밀레시안은 웃다가 울기를 반복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꿈인데 왜 아프지 라고 우는 밀레시안이 연신 웃음소리를 흉내내며 고개를 숙였다.
밀레시안이 울먹였다.
"왜, 왜 이럴때 보이는거에요"
"네가 하도 한심하게 보여서"
환영은 진짜처럼 한숨을 내쉬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밀레시안은 이렇게 생생하게 보일 환각이라면 처음부터 보였으면 좋았을꺼라고 울며 눈물로 흐려진 시야를 닦아내었다. 핑도는 시야를 보며 응? 하고 바닥을 짚은 밀레시안이 거친숨을 들이마셨다. 답답하고 턱턱 막혀오는 호흡에 루에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너 지금 이게 뭐같냐?"
"어.....환영? 환상이요."
"그럼 네가 어느 순간에 환상을 보는지 생각해봐"
"어... 잠잘때랑 약먹었을때, 저주걸렸을때, 목숨이 위험할때"
"많기도 하다"
밀레시안이 꼬박꼬박 손가락을 접으며 대답하자 루에리는 기가찬듯 고개를 내저으며 한주먹 더 쥐어박았다.
맞은 곳은 머리인데 심장이 터질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밀레시안이 루에리의 로브자락을 움켜쥐며 괴로워 하지만 루에리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모습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런모습을 보고싶어 했던 걸까. 그러나 루에리는 그 생각이 불쾌하다는듯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런 취미는 없는데"
그럼 도와줘요. 밀레시안은 말소리도 내지 못한채 루에리를 움켜쥐였다. 따듯한 온기라던가 말캉하거나 단단한 살의 감촉 대신 거칠고 갈라진 가죽의 감촉만이 손안을 가득 매웠다. 이 느낌을 어디서 경험했더라. 그러나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였다.
이것은 환상이다. 어느정도 현실이 섞인. 그렇게 생각하는 밀레시안의 머리 위에서 루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그의 목소리또한 웅웅거리며 성난 벌과 같은 소리를 내며 머리속에서 흩어졌다.
'밀레시안'
성별 모를 누군가가 밀레시안의 이름을 불러왔지만 루에리는 뻔뻔스러운 얼굴로 난 아니야. 라고 대답을 했다. 설원이 사라지고 어둠만이 남은 공간에서 빛나는 제단과 낡은 검. 뻔뻔한 환상과 격렬한 고통만이 밀레시안을 둘러싼채 부서져가는 꿈을 지탱하고 있었다. 루에리가 속삭였다.
"느끼고 있다시피, 너는 지금 죽어가고 있어. 그리고 지금 네가 보고 있는건 꿈이지."
"........."
밀레시안은 누가 모르냐는듯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통증은 점점 범위를 넓히며 복부와 허벅지 양 손목와 아깨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불에 타는듯한 통증은 가슴뿐. 누군가가 올라타는 갑갑함에 밀레시안은 옴짝달싹도 못하는 개구리같은 모습으로 루에리의 앞에 엎드려져 있었다. 루에리가 밀레시안의 앞으로 다가와 턱을 괴며 쭈그려 앉았다.
한심하다는 한숨소리가 밀레시안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밀레시안이 이를 악물었다.
"그럼, 여기서 문제. 어디서부터가 꿈이였을까요? 여기서 제일 비현실적인 부분이 어디였을까요?"
너, 너요. 임마. 너. 니가 제일 비현실이야. 밀레시안은 막말을 내던지며 능글거리는 루에리를 향해 비난의 말을 퍼부었다. 내가 왜 저런놈의 추억을 소중하다고 보듬으며 그 고생을 한건지 검만 찾지 않았어도 그냥 기억에 묻어두었을 망나니 자식같은 악우를 내가...
내가....
"내가 당신의 검을 찾아내었어. 던바튼 분실물 창고에서"
"맞았어"
"그럼 거기서 부터야..?"
"글쎄"
루에리는 빙글빙글 장난을 치는것 처럼 밀레시안의 머리를 꼬아내렸다. 그가 자진해서 나를 만직적이 있었었나. 밀레시안은 흐려지는 정신에서도 머리카락의 움직임에 집중하며 가쁜 호흡을 부여잡았다.
루에리는 약해지는 밀레시안의 호흡 밑에 손가락을 들이대며 맥박을 확인했다.
"확실이 그 부분이 가장 비현실적이지만 말이야. 진짜 삶에서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나는걸 뭐라고 하는지 알아?"
"몰라, 몰라 그런거. "
밀레시안은 울음을 터트렸고 루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죽어가는 별에게 살았네 라고 말한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을 돌려 떠나가는 그를 따라 밀레시안을 둘러싸던 어둠이 켜켜히 걷어져갔다.
떠나가는 그가 야속했지만 목소리는 계속해서 밀레시안의 머리위에 남아있는듯 생생하게 들려왔다.
"나도 잘 몰랐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런걸 기적이라고 부르더라?"
그가 웃는것 같다고 생각했다. 알비던전안에서, 마스던전에서 나오면서, 바리던전의 끝에서, 화산이 터지던 불꽃의 땅의 밑에서 언제나 상상하던 그 모습. 당신이 웃으면 어떤 모습일까.
그러나 시야는 너무 흐렸고 그의 등은 작아진채 검은 점처럼 멀어져 있었다.
사라졌던 소리들도 하나 둘씩 돌아오며 풋풋한 봄내음이 느껴졌다.
밝아진 하늘에서 떨어지는 벚꽃잎을 시작으로 밀레시안은 소리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에반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밀레시안! 밀레시안!"
"에반씨, 진정하세요"
"이봐! 부상포션좀 더 가지고 와봐!"
"이 검자루는 뭐야? 손에서 빼내봐"
"안빠집니다. 엄청 꽉 쥐고 있어서 빠지지가 않아요"
"그런건 신경쓰지 말고..! 어이! 포션 멀었어?!"
"왜 안일어나는거에요? 왜 못깨어나는거죠?"
소란스러운 사람들.
밀레시안은 빙글거리며 도는 시야를 다잡으려 애쓰며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검을 찾았어. 그리고 내려가려고 사다리에 올라섰지.
밀레시안은 벚꽃나무 뒤에서 등을 보인채 빙긋이 웃고있는 루에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에반이 눈을 떴다고 소리치며 직접 포션을 가질러간 마누스를 불러대었다. 루에리는 슬쩍 고개만 돌려 씨익 웃어보였다.
후회안해요? 밀레시안은 마음속을 말을 걸었다. 당신이 나를 구했잖아요.
말했잖아. 나는 그런 취미 없다고. 알비던전에서의 쾌활한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온 루에리는 자신의 가슴을 퉁퉁 쳐보이며 시원하게 웃음지었다.
검, 부러졌는데. 밀레시안이 손을 움찔거리며 남은 검자루를 들어올리려하자 루에리가 먼저 고개를 돌려 밀레시안을 외면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어디선가 들었던 말을 반복했다.
괜찮아. 괜찮아. 좋은게 좋은거잖냐.
검을 사용하는 자에게 여신의 가호를. 그렇게 바라고 기원하며 세겨진 기다란 켈틱매듭의 검신은 제 할일을 다한채 시간의 먼지가 되어 밀레시안의 상처위로 흩뿌려졌다.
3층의 높이에서 1층의 바닥까지. 그대로 추락하며 그 여파로 떨어진 사다리의 잔해에 짓눌린 밀레시안이 살아있는것은 그야말로 소울스트림의 가호, 누군가의 보호가 없는이상 불가능한 기적의 일이였다.
나는 그런거 없어도 괜찮아요. 다시 태어나면 되는걸.
밀레시안은 그러니까 가지말아요 라고 손을 뻗으며 광장을 떠나려는 루에리의 그림자를 붙잡았다.
"....가지말아요"
밀레시안의 말소리에 사람들은 더욱 바쁘게 움직이며 밀레시안을 들것에 옮겨실었다.
내가 가는게 아니라 네가 떠나는거야. 수염이 덮부룩하게 자라난 용기사는 힐러집으로 이송되는 밀레시안을 향해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다. 어느새인가 곁에 서있는 나오도 밀레시안을 향해 따듯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루에리는 땅에 떨어진 검자루를 집어 먼지로 되돌리며 눈을 감았다.
이미 멀어져 보이지 않을 던바튼의 거리를 보고있다는 사실에 밀레시안은 자신이 또다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감는다. 꿈속의 밀레시안은 의례것 그래왔듯이 이리아의 상공에 머물러 있었다.
이리아의 창공 떨어져내리는 반신의 날개와 용의 외날개.
푸른 마법의 구조끈을 뿌리친 밀레시안은 어떻게든 바람을 거슬러 망가져버린 용기사에게로 다가갔다.
한 걸음만 더. 한 뼘만더. 언제나 했왔던 상상. 만약 내가 그때 당신을 잡았더라면.
당신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나는 당신의 마지막을 지켜 볼 수 있었을까? 나는 죽지 않으니까, 만약 그때 내가 당신을 잡았더라면.
양손을 뻗는 밀레시안의 손끝에서 눈을 뜬 붉은 눈동자가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변이되고 뒤틀려 보기만해도 고통스러운 얼굴위로 평안한 미소가 떠오르자 울먹이던 밀레시안 손끝이 누그러졌다.
당신의 끝에는 내가 필요하지 않다. 루에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밀레시안의 손을 마주잡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거짓말이야. 당신은 이렇게 다정하게 말해주지 않아.
밀레시안은 그럼에도 기뻐하는 자신의 눈물을 하늘로 휘날리며 마주잡은 두 손을 행복하게 모아쥐었다.
그저 이렇게 하기를 바랬다. 깊은 연인이나 행복한 삶을 꿈꾼적 없어. 그저 한번만 당신의 손을 잡아보고싶었다. 그것이 비록 저주로 뒤틀려버린 운명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이 마주잡은 손에 감사한다.
루에리는 그런 밀레시안의 눈물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내 이야기의 끝은 네 여행의 시작점이야."
낙원의 진실과 잃어버린 반족의 역사.
그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용의 기사가, 끝은 별의 여행자가.
그리고도 계속되는 이야기는 노래가 되어 후세의 사람들에게.
루에리는 눈을 뜸과 동시에 밀레시안을 하늘을 향해 밀어내며 손을 놓아버렸다.
반동을 받아 밀려난 밀레시안은 순순히 루에리의 손을 놓으며 눈을 감고 접혀져 있던 반투명의 날개를 펼쳤다. 실체가 없는 날개이지만 여기는 꿈 속. 생각하는 것은 자신.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떠오른 밀레시안은 어느 지점에서 방향을 바꾸며 양팔을 벌려보였다. 당신은 떠났고 나는 여기에 남아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인 밀레시안은 마음 편한 얼굴로 추락하는 바람을 만끽했다.
빠르게 다가오는 대지로 떨어져내리는 장소는 에린, 울라대륙의 동쪽 던바튼, 남서부의 힐러의 집.
침상에 누워있는 자신의 육체로 화살마냥 떨어져내린 밀레시안은 별빛이 가시지 않은 숨을 토해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지러운 시야속에서 흐려지는 그림자를 향해 밀레시안은가장 먼저 해야할 말을 토해냈다.
"미안해요"
밀레시안은 켈록 하고 사레들린 호흡을 가다듬으며코를 훌쩍였다. 기겁을 하는 마누스에게 괜찮다며 손을 내저어 보인 밀레시안은 붕대를 둘둘 풀어내며 침대 주변을 둘러싼 다난들에게 멋쩍은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금 해메느라 늦었어요"
밀레시안이 천역덕스러운 웃음으로 어색해진 힐러집을 둘러보았다.
이리아의 하늘에서 여기 이자리까지. 별은 에린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