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cla 2024. 11. 12.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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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티아 아카데미의 브리샤 그린우드는 요즘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원래 적이 많은 성격으로 어디서나 원한을 쉽게 만드는 그녀였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목숨을 위협받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무렴. 이런 일을 두 번 이상 당하면 살아남는 것 부터가 문제였으니까.

처음에는 그냥 소소한 괴롭힘인줄만 알았다. 자리에 섬뜩하게 찢어진 책이 놓여져 있고 (브리샤의 것은 아니었다. 직접적인 피해 및 상해는 반격의 빌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방에 날카롭게 벼려진 사금파리 조각이 한 두개씩 들어있었다는 것. 누군가 일부러 그녀를 따라 걸으며 압박해오거나, 뒤를 돌아서는 순간 웃으며 사라지는 행위 등.

음습하고 천박한 괴롭힘에 브리샤는 이 아카데미의 수준도 바닥에 떨어졌다며 혀를 한번 차 보일뿐,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푸념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 학생회에 그 학생들.
다 떠먹여준 비허가 사교모임회를 해체시킬 수도 없는 바보같은 아카데미의 한통속 양아치들인 것이다.
그러니 하나같이 이렇게 왈패같고 부도덕한 행동들을 일삼는 것이겠지.


브리샤는 오늘도 들어있는 사금파리 조각을 신경질적으로 쓰레기 통에 내던지며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아-!! 짜증나! 정말!”

 

어디선가 그녀의 고통을 즐거워하는 웃음소리가 스쳐지나갔다.
또 어딘가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사교회원’이 모습을 감춘 것이 틀림없었다.
웃음소리와 함께 나타나는 것이 아닌 사라지는 인기척은 이제 그녀에게 너무 익숙한 것이 되었다.

브리샤는 괜히 얼뜨기처럼 두리번거리며 아직 사라지지 않은 사교회원에게 얕보이지 않고자 신경질적으로 상처의 주변을 짓누르며 주변의 수도가를 찾아 움직였다.

 

얇은 조각으로 쪼개지는 특성을 가진 조각이었기 때문에 괜한 부스러기가 상처 위에 남아있으면 큰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식음이 가능한 식수대가 있었고 브리샤는 그곳으로 다가가 상처난 손바닥을 씻었다.

옅은 붉은 기가 섞인 물이 한참을 흘러가며 상처가 난 부위를 차갑게 식혀나갔다.
한참동안 상처위로 물을 흘려보낸 브리샤는 그제서야 제대로 살펴볼 수 있게된 상처부위를 꼼꼼히 들여다본뒤 다시 배어나오는 핏물을 위로 손수건을 접어 강하게 압박했다. 제법 깊게 베인 상처였다.

 

아무래도 의무실에 들리지 않으면 안 될 것같은 상처.

평소대로라면 자신이 방안에서 응급처치를 하면 될 일이었지만 이미 손수건의 여기저기가 피로 얼룩졌다는게 문제였다. 지금 압박하며 배어나온 것과 별개로 처음 상처를 덮었을때 묻은 핏자국은 괜히 브리샤가 큰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이게끔 만들었다.
브리샤는 피묻은 손수건을 보고는 수근거릴 기숙사생들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벌써부터 인상을 찌푸린채 험한 말을 내뱉었다.

 

앞에서는 아무말도 못하는 녀석들이.

 

브리샤는 천연덕스럽게도 브리샤의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불운’ 혹은 ‘기분탓’이라고 떠드는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불운’이 자신에게도 영향을 끼칠까 슬금슬금 피하는 것도 정말 갖잖은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하기도 하지.
앞서 말한대로 브리샤는 자신의 괴롭힘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떻게 브리샤의 불운을 알고 찾아와 그토록 동정하는 말을 내뱉는 것일까.

 

브리샤는 습관처럼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되뇌이며 의무실로 향했다.

 

의무실은 고요한 곳이었다.
담당직원은 있었지만 그는 브리샤의 얼굴을 한번 슬쩍 볼 뿐 아무 말 없이 돌아앉았다.
몸을 완전히 돌리기 직전 그가 눈짓으로 치료 스테이션을 한번 가리켜보인 것이 유일한 대답이었다.

그가 이토록 태만한 태도로 그녀를 맞이하는 이유는 그녀 또한 치료학과의 학생이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그녀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치료업계에 종사하는 유명인이었고 학교 내에서도 그 사실을 모르는 교직원은 거의 없었다.

 

그녀가 여태 그토록 방만하고 오만한 태도로 학생들을 대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녀를 막을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다만 지금 이 의무실의 직원과 같이 승진에 목매지 않는 부류라면 상대하기 까다롭다는게 그녀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근무태도를 지적하기엔 그는 이미 다른 일을 하고 있었으며, 사실 브리샤는 그동안 다른 사람이 자신을 치료하도록 허락한 적이 거의 없었다.
애초에 자신의 방에 따로 치료용 도구들을 두는 이유도 그녀가 다른 힐러, 혹은 치료학과 학생들의 실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저 직원의 뒷모습이 거슬려보이는지.
브리샤는 속으로 되뇌이던 이름에 의무실 직원의 이름을 추가했다.

 

그 때 였다.
브리샤를 등지고 돌아앉아 자신의 서류에만 집중하던 직원이 입을 열어 혼잣말 같은 것을 중얼거렸다.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나?”

 

“뭐라고요?”

 

브리샤가 날카롭게 되묻자 직원이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브리샤는 그제서야 자신이 직원의 얼굴을 처음으로 본 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정식으로 소개받지 않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는 주의였으며 정식 교사도 아닌 의무실 직원에 불과한 그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이름표만 보고 스쳐지나갔기 때문에 그 ’얼굴’을 볼 일이 없었을뿐.

 

그는 연분홍색 눈동자를 나른하게 깜빡거리며 그녀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녀가 깜짝 놀란 이유는 바로 바로 저 얼굴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놀라워할 만큼 잘생겼고, 또 균형적으로 완벽한 조형의 비율을 가지고 있었다.


저만한 미남이라면 교내에 소문이 나지 않을리 없는데 왜 여태까지 잠잠했지?

브리샤는 어쩌면 그가 그녀가 짝사랑하는 니클라우스 선배보다도 잘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이 좀 다른 미남이기에 쉽게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그만큼 잘생긴 사람이었다.
그러나 잘생긴건 잘생긴거고 근무태도는 근무태도인법. 브리샤는 겉포장지만 멀쩡한 쭉정이에는 관심이 없다고 자부하는 만큼 그의 첫인상과 불성실한 태도를 이유로 그에대한 평가를 대차게 깎아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가 직접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고정하고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감점의 요인이었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작은 머리통 안에서 어떤 복잡한 수식이 오고가는지 알만하다는듯 큭큭거리고 웃으며 책상에 팔꿈치를 기댄채 고개를 꺾어보였다.

 

“진짜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사는 사람이네요. 바쁘겠어요. 안그래도 복잡하게 사는 삶에 이상한 무리들까지 끼어들어와서.”

 

“당신도 그 사교모임을 알아?”

 

“그럼요. 무리를 이루기 위해 찾아온 이방인은 언제나 경계의 대상이죠. 나뿐만이 아니라 아카데미에서도 처음부터 그를 주시하고 있을걸요?”

 

“그럼 왜 해체를 막은건데!”

 

아카데미가 일찍부터 사교회장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말에 브리샤는 벌컥 화부터 내며 그를 추궁했다.
직원은 나른하게 손을 내저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대충 그런 뉘양스의 움직임이었던 것같기도 했다.

 

“그야 물론 앞에 두고 있어야 뒷공작을 덜 할테니까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에요. 어차피 이미 스며들어왔고, 이제와서 그를 쫓아내는 것은 분명 큰 소란을 동반할테죠. 그 또한 그리 멍청하게 쫓겨나고싶지 않을테니 일부러 자신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소란을 최대한 크게 키우려 들거고요. 그러면 이제 잡고싶어도 잡을 수 없어요. 지금 양지를 표방하기 때문에 사교(社交)모임을 자처하고 있는 연극도, 음지로 들어가는 순간 끝이라고요.”

 

“그러니까.. 그들이 진짜 사교도(邪敎徒) 모임이라는 말이야? 내가? 내가 그 간악한 사교무리들에게 속은거라고?”

 

브리샤의 진지한 태도에 직원은 드물게 당황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속은건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오히려 열성적으로 대면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어요? 일부러 앞선 순번의 대면자를 충동질한다던가.. 그녀에게 수상쩍은 기분이 들만한 사고를 일으켜 괜히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던가 하는 그런 장난들말이에요.”

 

브리샤는 곧바로 눈을 치켜뜨며 그에게 다가섰다.


이런, 그녀가 방금 핀셋을 내려놓았던가.
직원은 자세를 고쳐앉으며 일부러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몽환적으로 빛나는 연분홍빛 눈동자가 그녀를 꿈결같은 빛깔로 유혹하며 반짝였지만 그녀의 뺨에는 이미 냉기만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이미 ‘이 얼굴’에 대하여 평가를 끝마친 모양이었다.
야속하기도 하지. 제법 어렵게 얻은 얼굴이었는데 이렇게 한번만에 버려지다니.

직원은 아쉽다는듯 아랫입술을 살짝 핥으며 그녀가 어느정도의 거리에서 멈춰설 지를 지켜보았다.
브리샤는 직원의 한걸음 앞에 멈춰선뒤 뒷짐을 진 상태로 물어보았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저도 같은 과라서요.”

 

“그거, 무슨 뜻?”

 

“당신의 가방속에 자주 들어있던 사금파리조각들 말이에요. 혹시 같은 그릇의 조각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어요?”

 

직원은 장난스럽게 그거 나름대로 신경쓴 수수께끼였는데. 라며 혀를 살짝 빼어물어보였지만 브리샤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대답했다.

 

“그게 네 짓이라고?”

 

“당신이 이곳에 올만한 사건을 만들어야 했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그릇에 의무실로 와달라는 편지를 써서 깨트린건데.. ”

 

“아니면 그 조각을 버리다가 지금처럼 상처를 입는다던가 하거나 말이지.”

 

“네에.. 맞아요.”

 

그 순간이었다. 브리샤는 번개같은, 그야말로 어느 기사학과 학생 못지 않은 빠른 손놀림으로 뒷짐진 손안에 숨긴 의료용 나이프를 내리꽂아 직원의 손등을 관통시켰다.
찰나에 일이라고 생각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관통상, 동시에 손의 주요 신경들은 피해 내리꽂은 계산된 일격이었다.

 

직원은 비명을 참아내는 한편 이 아카데미에 암살학과 같은 것이 없어서 아쉽다고 생각했다.
아마 수석은 못하더라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을테니까.

직원은 문득 그녀가 속한 ’그린우드’가 원래는 숲지기 출신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왕의 신임을 받아 숲과 사냥터를 관리하던 그들이 과거의 가업과는 전혀 상관없는 ‘의료계통’에 종사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원래 숲에서 나는 모든 것을 관리했던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독에 능하였고 약에 박식하였으며 나아가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에도 익숙했다.

그렇군, 검은 숲의 그린우드는 아직도 건재한 모양이야.
어쩐지 학교 관계자들이 그녀를 ‘무서워’하더라더니. 그는 뜻밖의 좋은 정보를 얻었다고 얻었다고 생각하며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계산은 충분한가요?”

 

“얼추.”

 

“너무하네요. 그래도 저는 관통상인데.”

 

“사금파리보다는 위생적이고, 일부러 위험한 곳은 피했으니까 상관없잖아? 게다가 관통되는게 무서웠으면 알아서 손바닥을 뒤집었어야지.”

 

그녀는 되려 그가 잘못했다는듯 자연스럽게 잘못을 전가하고는 어려운 기색없이 매스를 뽑아 회수하고는 가벼운 힐링 마법을 시전했다. 딱 지혈만 하는 정도의 부상회복마법. 그녀는 핏물로 엉망이된 책상의 깨끗한 부분을 골라 앉으며 그를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넌 누구고 나는 왜 불렀는데?”

 

용건부터 간단히 말하라는 그녀의 태도에 직원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는 그러니까.. 아가씨가 속하셨던 사교(邪敎)모임의…”

 

“속였던”

 

“네에~ 아가씨를 속였던 사교모임의 라이벌격인 단체의 영업사원입니다. 이름은 비밀이고, 사실 이 얼굴도 타인의 것을 빌린 상태입니다. 그래서 아가씨가 저에 대한 평가를 매기셨다고 해도 다 소용없는 일이지요.”

 

“그래? 그러면 진짜 이름과 얼굴은 뭔데?”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리고 지금부터 알려드릴 정보라면 당신께 좋은 점수를 딸 수 있을거라고 자신합니다. 본론부터 이야기하죠. 아가씨, 그들의 거울과 대면하셨죠?”

 

브리샤는 짧게 긍정했다.
직원은 그녀가 매우 빠르게 상황파악을 한 것에 만족감을 표하며 계속해서 대답했다.

 

“그들의 대답은 거울에 비춘 자의 영혼을 자신들에게 귀속시키는 것으로 내놓은 것입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영혼들이 귀속되어있고, 그 영혼의 일부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감시자의 역할로 타라 이곳저곳에 못박혀 있지요. 이 아카데미도 물론 예외는 아니에요. 아가씨라면 이해가 가실겁니다. 갑자기 사라지는 인기척이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웃음소리 같은 것.. 그리고 실체없는 발소리들 말이에요.”

 

“아하.”

 

“그것들이 아가씨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이유는 아가씨도 이미 그들과 같이 거울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관련없는자들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같은 대면자들에게는 약간의 영향을 끼칠 수 있거든요. 그 영향은 집회에 참가하면 참가할 수록, 그리고 거울에 대한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강력해집니다.”

 

“그런데 그는 날 이미 쫓아냈는걸? 그러면 나를 포기한 거 아니야?”

 

“아니요. 그건 다 퍼포먼스입니다. 거울에 대한 경외심과 모임 내부의 결속력 강화를 위하여 일부러 본보기로 한 사람을 내치는 연극이지요. 하지만 이미 대면을 했으니 그들은 언제든지 아가씨를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나중에 살짝 아가씨를 찾아가 구제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지요. 그 때의 일을 잘 반성했다면 다시 기회를 주겠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브리샤를 몰랐고 그녀의 ‘그린우드’를 몰랐다.
브리샤는 한번의 실수로 안달복달해하는 얼간이가 아니었으며 자신에게 들어온 모욕을 몇 배로 갚아주는 복수의 화신이었으니까.
그들은 브리샤의 고발에 잠시 당황한듯 혼란스러워했지만 결국 이를 이겨내고 모임을 이어나갔다.
브리샤는 그들을 양지에 묶어두는 대신 대의를 포기한 학생회를 욕하며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래서, 뭘 하라는거야. 고발도 불가능하고 영혼도 이미 저당잡혔으니 포기하고 괴롭힘이나 받아라?”

 

“아~니요~! 그랬다면 제가 아가씨를 부르려고 그렇게 애를 쓰지도 않았겠죠. 제가 제안하고 싶은건 이런겁니다.”

 

직원은 호들갑스럽게 고개를 내저은 뒤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브리샤에게 다가갔다.

 

“브리샤 아가씨, 이 참에 제대로 된 사교도(邪敎徒)가 되어보시지 않겠습니까?”

 

“하, 난 또 뭐라고. 어쩐지 영업사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더니.”

 

“저는 괜한 말씀을 드리는게 아닙니다. 그들은 당신을 속였지만 저는 아니지요. 오히려 그들보다 정중하게 당신을 스카우트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직원은 피에 물든 손을 들어 가슴에 정중하게 올려보인뒤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말씀드렸다시피 당신의 영혼은 이미 사교(邪敎)의 힘에 물들었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이제 남은 해결책은 하나뿐입니다. 보다 제대로 된 신성에게 온전한 세례를 받고 그 힘을 받아들이는 것.”

 

브리샤는 그의 연분홍빛 눈동자 안에서 황금처럼 타오르는 불꽃을 응시했다.
그 불꽃은 어딘지 친숙하여 브리샤로 하여금 거울속에서 보았던 소용돌이 모양의 기류를 떠올리게끔 만들었다.


동시에 그 때의 분위기와 같은, 시선이 느껴졌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단상을 우러러보며 그녀를 질시하던 시선.

 

“그들에게 복수를 하자고, 저는 제안하고 있는겁니다.”

 

그리고 [아니]라는 글자가 떠오르는 순간 그녀의 추락을 비웃는듯한 시선.

 

“감히 제 주제에 단언하건데 아가씨는 ‘열매’를 취할 재목을 가지고 있으십니다. 아마 당신의 그 순수하고 강인한 영혼이라면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우화 하실 수 있을테지요.”

 

브리샤는 의무실 바깥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구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허리높이 윗쪽으로 내어진 전면창에는 어느새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 직원과 그녀를 들어다보고 있었다.

 

“새 육신으로 갈아입는다면, 더이상 그들도 당신을 따라다니지 못할 겁니다. 뿐만일까요. 저따위 하급교도들은 더이상 당신을 쳐다볼 수도 없게되겠지요.”

 

창문가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학생들은 모두 하나같이 똑같은 세스티아 아카데미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여기서 똑같다고 한 것은 단순히 디자인 뿐만이 아닌 옷깃이 삐뚤어진 위치, 구겨진 자국, 누구나 자유롭게 커스텀 할 수 있는 리본의 색상이나 브로치의 흠집같은 것을 이야기했다.

마치 서로 다른 영혼의 몸체 위로 하나의 교복을 붙여넣은 것 같은 이질감.
동시에 그들의 눈은 모두 황금색 소용돌이로 가득채워져 있었다.

 

“그래?”

 

브리샤는 성의없이 반문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소용돌이오 달리 눈앞에 있는 남자의 눈동자 속에는 가지모양으로 부서져 있는 것과 같은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 두가지 특이점이 모두 맥락이라면 그가 말하는대로 이들은 똑같은 사교도(邪敎徒)이며 서로 다른 신을 믿고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 분명했다.

 

“예. 그만한 힘을 가진 저희의 신께서 당신을 원하고 있으니까요.”

 

“그럼 내가 지불해야하는 대가는 뭔데?”

 

“당신의 과거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말대로 그녀의 영혼은 이미 저들의 농간대로 더럽혀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러니까 아예 저쪽으로 넘어오라고?

브리샤가 자세한 조건을 묻자 남자는 반색하며 제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의 과거, 당신의 트라우마. 무엇이든 좋습니다. 새로운 육신으로 가져가기에 부적합한 것들은 모두 양분으로 썩게 내버려두시고 원하는 것만 가져가세요.”

 

“그래?”

 

브리샤는 그 조건이 아주 만족스럽다는듯이 웃으며 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가 마주웃는다.
마치 거울과 대면하는듯 그녀의 눈앞으로 현혹하는 불꽃이 넘실거리며 그녀의 머릿속을 반짝거리게 만들었다.
마치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도는 듯한 충만한 느낌. 온 만물이 반짝이는 듯한 즐거움.

그러나 그녀는 안다. 그곳에서 추락했을 때의 고통과 수치를.

 

“그 말은 결국 나더러 새 육신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말이겠지? 헌 육신은 너희에게 주고 말이야. 달리말하자면 그건 곧 나더러 한번 죽어달라는 뜻이잖아?”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저희에게는 육신을 재구성하는 비술이 있습니다. 원래는 오랜시간 정성을 기울여야 맺을 수 있는 ‘열매’인데 특별히 아가씨께 우선권을 돌아가게 만들겁니다.”

 

“그거 이미 저쪽에서 한번 써먹었는데.”

 

그러니 그들 역시 그녀를 이용하기 위한 사교도일뿐이었고 막상 거래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녀는 또 다시 예상밖의 상황속에서 무력하게 끌려갈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이번에는 속지 않았고, 그들 또한 그녀를 최대한 ‘정중하게’ 데려가려는 기회를 한번 건네주었다.

그는 자신의(혹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얼굴을 알차게 써먹고 싶다는듯 은밀하게 각도를 틀며 속삭였다.

 

“그럼 뭔가 당신을 만족시킬만한 더할 조건을 찾아볼까요?”

 

그 밀접한 분위기에 창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거칠게 주먹을 내리쳤다.

남자가 작게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그는 거기까지 알고 있는 것이다. 브리샤 또한 일부러 창가로 눈길을 돌리지 않았지만 그 주먹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사실 처음부터 그가 그들 사이에 끼어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딱 한명, 모두가 같은 교복을 입은 가운데 혼자만 ‘반전된’듯한 교복을 입고 있는 남학생이 하나 서 있었다.
물론 세간의 상식으로는 그의 교복이 ‘정위치’이고 나머지가 ‘반사된 상’이 되겠지만 옳고 그름이 뒤바뀐 지금의 상황에선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가 여전히 그녀를 쫓아다닌 다는 사실이었다

.

페르하레, 그 끈질긴 자식. 그녀는 언제나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붙여준 종자이며 약혼자이고, 보좌관이었지만 그 음습한 작자는 어디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이 질척거리고 구질거렸다.

그런 주제에 그녀를 항상 따라다녔고,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나타나지 않는 치졸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다음 집회에 나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와 아무것도 모른다는척 그녀에게 ‘좋은말’을 속삭이러 접근하는 것도.

브리샤는 손등을 타고 올라오는 끈적한 손길을 마다하지 않으며 눈을 감았다.

 

그래 좋아. 어차피 저 유령들의 추격을 떨쳐내야 한다면 추가적으로 하나 더 떨어트려 놓는 것이 이득일 것이다.
동시에 이제껏 ‘그’의 매력을 깎아내릴만한 평가는 모두 무의미한 것이 되어 사라졌으니 그녀는 이제 처음보는 사람에 대한 매력에 설렐 준비가 되어있었다.

 

“내게 ‘당신’을 줘. 거기에 저들 사이에 ‘불신자’를 끼워넣는 조건이라면 꽤 균형이 맞을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의 상황.
그녀는 보란듯이 유령들의 침입을 막아내는 강력한 결계를 소리소문 없이 펼친 남자를 들여다보며 딱 그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당신, 사실은 일개 영업사원 나부랭이가 아니지?

남자는 그런 브리샤의 지적에 마치 깜짝 놀랐다는듯 나른하게 감았던 눈을 깜빡이며 잠시 손을 멈춰세웠다. 그리고는 곧 개구지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하하. 셈이 무척 빠르시네요. 게다가 눈치도 좋고요.”

 

그는 맞아요. 라고 말하며 다시 손을 움직여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는 손안으로 들어온 브리샤의 엄지손톱을 꼼꼼하게 더듬으며 흥미가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처음에 생각했던 이곳을 뒤집을 방법도 마침 ‘그런 방법’이었어요. 대신 그때는 당신이 거절하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는 식의 가벼운 생각이긴 했죠. 그래요. 그렇긴 했는데…”

 

그는 그것이 진짜 자신의 습관이라도 된다는양 코끝을 살짝 찡그려 웃으며 브리샤의 얼굴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브리샤가 했던 것처럼 아주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짜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죠.”

 

서로의 속눈썹이 맞닿을 듯 밀접한 거리. 그 뒤에서 울리는 벽을 울리는 소리는 전혀 운치가 있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지만 브리샤는 이미 피냄새도 진동하는 가운데서 그게 다 무슨소용인가 싶어 웃어버렸다.

 

“그럼 당신의 이름을 줘. 진짜 이름.”

 

나중에 번복하거나 거짓임이 밝혀지면 가만히 두지 않을거라는 서슬퍼란 농담에 그는 순순히 그녀의 손바닥 안쪽에 입을 맞추며 자신의 이름을 속삭였다.

브리샤는 ‘길레아스바이그’라는 음소가 잘게 쪼개어져 손바닥에 깃드는 생경한 감촉에 어깨를 잠시 움츠렸다가, 살짝 몸을 떨었다가, 다시 손바닥을 펼쳐 그 이름을 읽은 뒤 만족스럽게 웃었다.

것 봐. 역시 그 거울이 틀렸잖아.

 

그녀의 사랑은 이뤄질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을 자신의 중심으로 돌게 ‘만들’ 것이다.

 

그녀는 그 사실이 아주 마음에 든다는듯 활짝 웃으며 손바닥을 말아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