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즈밀레)별의 어항11
멀린은 몸이 으슬으슬하다며 담요를 요구했고 르웰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준비된 로브를 건네주었다.
미묘하게 재봉된 넓은 천을 받아든 멀린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아 진짜 이런 시대에도 이거 뒤집어쓰고 주문외워야해? 톨비쉬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번져나갔다.
르웰린은 잠시 짬을 내어 고개를 들어올리고는 룸미러 구석에 비친 톨비쉬를 슬쩍 살펴보았다.
르웰린은 드물게 친절한 어투로 대답했다. 옆에 사람은 대검에 중갑옷까지 입어야 하는데 로브정도야 가볍지. 라고 말씀하고 계시네요.
멀린은 투덜거리면서도 로브를 대충 꿰어입고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르웰린을 돌아보았다. 너 오늘 왜 친절하냐?
르웰린은 흥이 깨진다는 표정으로 멀린을 흘겨보고는 다시 입가에 가득 미소를 띄운채 화면을 응시했다.
나의 별이 드디어 내 편이 아닌 사람을 설득하는 법을 터득했거든요. 명백한 자랑이었다.
멀린은 아 그러셔 하고 심드렁하게 대답했지만 르웰린의 손은 바쁘게 페이지를 반대편으로 넘기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한참동안이나 같은 고민을 반복하고 있었다.
무도회장에서 있을 반발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중도파와 반대파를 설득해야하는데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어린 왕의 걱정어린 재촉에 밀레시안은 어쩔수 없다며 단호한 말투로 제안했다.
매수합시다.
어린 왕은 너… 상대를 매수하는 방법 알아..? 아니 의심하는건 아니고, 저번에 소문을 물으러 왔던 때가 생각나서 그래 하고 미심쩍다는 어투로 되물었지만 밀레시안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이론은 빠삭해요. 밀레시안은 손에 들린 붉은색 마도서를 탕탕 쳐보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왕과 호위병은 사색이 되었다.
어린 왕의 걱정대로 밀레시안의 매수계획은 매우 어설프게 시작했지만 실전의 감을 익히게 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상물정을 몰라서 그렇지 한번 배우면 잘한다니까.
멀린은 싱글싱글 웃고있는 르웰린이 적응되지 않는다며 팔을 문질러 열기를 더하고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 혹시 여기까지 어항가지고 온거 아니지? 그거 완전 섬세해서 돌부리는 커녕 보호방지턱에 한번 덜컹거리면 최소한 박살이야.
르웰린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며 멀린을 노려보았고 멀린은 지지않겠다는 눈빛으로 응수했다.
차 안의 공기가 급속도로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톨비쉬는 말없이 히터를 올린뒤 점점 굵어지는 눈송이를 올려다보았다. 와이퍼를 올리고 헤드라이트를 밝혔다.
깊게, 더 깊게. 미끄러지듯 고요하게 나아가던 검은색 차량은 폭포가 시원하게 내리꽂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입을 꾹 다문채 저마다의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두 청년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도착한 장소는 다 무너져가는 낡은 돌다리 건너 터만 남은 오래된 유적지였다.
성벽이 있었을 자리에는 터만이 남아있지만 수없이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이쪽과 저쪽을 갈라내는 게이트만큼은 굳건히 서 있었다.
이름모를 유적지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경건함으로 가득 했고 톨비쉬는 이 장소를 애정어린 눈으로 돌아보았다.
설산에 갇혀 시간조차 얼어붙어버린 것같은 고요함속에 잠든 유적지였다.
톨비쉬가 게이트를 둘러보는 동안 르웰린은 차의 뒷트렁크를 열어 준비한 장비들을 내려놓았다.
르웰린은 익숙하게 톨비쉬의 곁에 다가서서 그가 갑옷을 착용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톨비쉬가 검은 갑옷을 착용하는 동안 멀린은 차안에서 구겨진 로브를 탁탁 털어내고는 게이트에 대충 던져놓았던 긴 지팡이를 집어들었다.
그래서 그녀석은 어디까지 진행한거래? 르웰린은 잘 개어 놓았던 푸른빛 망토를 털어 내며 대답했다.
열 여덟번째요. 멀린은 우와 하고 인상을 찡그리며 뒷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나 완전 욕먹을 때잖아.
톨비쉬는 건틀렛을 확인하며 나지막히 웃었고 이번에도 친절한 신시엘라크 통역기가 이 웃음의 의미를 해석해주었다.
그정도로 우는 소리 하시면 톨비쉬 님이 섭섭해 하시죠.
톨비쉬는 웃음기를 뚝 그친채 르웰린을 돌아보았지만 르웰린은 이미 끝나면 부르세요. 라는 말과 함께 잽싸게 돌아선 뒤였다. 그 눈빛 아무리 차갑고 매섭다 한들 따뜻한 히터가 나오는 차 안으로 도망치면 닿지 않으리.
멀린은 키득거리며 웃고는 치렁치렁한 소매를 걷고 문앞으로 다가갔다.
마법사와 기사. 영원에 갇혀버린 게이트.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있었고 대체할 수 없는 기적이 있었다.
그 기적을 눈에 담은 이들의 기억속에서 별은 수없이 복제되고 열화되어 뒤틀리고 찢어져 결국 한 줌의 낱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영원을 방랑하는 기사가 있었고 그 영원을 뒤쫓던 시간의 미아가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기억들을 쪼개고 또 갈라내어 철저히 검증했다.
날실과 씨실이 된 기억이 교차될때마다 그들은 비어있는 공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을 채우는 것은 결국 다시 한줌의 낱말. 그들은 자신들의 오만을 인정했다.
똑같은 과오를 되풀이 할 수 없었고 수많은 논쟁의 끝에 그들을 찾기로 결심했다.
세상 어딘가에 있을 별의 유지를 품고 있는 사람들을. 그들은 조각조각 흩어진 그 낱말들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해 망각속에 묻어버리고 현실의 삶 속에 숨겨버린 채 살아가고 있었다.
톨비쉬는 그들의 안에 별의 유지가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을 확인했고 멀린은 그들을 별의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 잔의 물을 대가로 한방울의 피를 얻어내었다. 영혼의 정보값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제각각이었기에 그 누구의 기억과도 일치하지 않다.
같은가 싶으면 어딘가는 조금 다르고, 아예 다른가 싶으면 평소보다 조금 더 자세한 것뿐인, 같으면서도 다르면서도 결국은 단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
그들은 빠져있는 부분을 음지삼아 더해진 것을 양지삼아 그들은 조각난 낱말들을 짜 맞추어 한 사람의일생을 그려내었다.
별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각각의 어항속에 자신만의 별을 담아,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두 방랑자는 얼어붙은 문 앞에서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기다렸다. 톨비쉬는 검은 대검을 뽑아들었다.
문이 열리고 그 너머로 부터 세찬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문앞까지 치달은 검은 파도를 향해 마법사가 양손을 들어올렸다.
하늘이 무너져내린 옛 성지에는 부서진 은빛 잔해들이 가득했다.
나를 구하지 말았어야지. 밀레시안은 원망가득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나를 구하지 말았어야지. 나를 구하지 말았어야지!! 멀린은 수없이 많은 위기 속에서 밀레시안을 구해냈다.
불타는 대지의 끝에서, 시간으로부터 도망친 지하의 감옥의 결계 안에서, 사막의 하늘, 지옥같은 악몽속.
밀레시안은 몇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며 멀린에게 손을 휘둘렀다.
그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범한 마법사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고 정체성을 잃어버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남을 돕고 에린을 구하고, 대륙을 떠돌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여러가지 마음을 주고받았다.
삶에 대한 가능성을 보았고 욕망을 가졌다. 바램을 넘어선 간절함은 욕심이 되었고 뱃속 깊은 곳에서 부터 꾸역꾸역 밀려나오던 검은 안개는 마침내 밀레시안의 영혼을 제 빛깔로 뒤덮었다.
죽고싶지 않아. 밀레시안은 여신의 종언을 거부했다.
제손으로 유일무이한 조언자의 충고응 무시한채 도망쳤고 결국 그들 모두를 배신했다.
그러면서도 살아남은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밀레시안은 속죄를 맹세했다.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 세계를 수호하겠다고, 무슨일이 있어도 이 세상을 지켜내겠다고.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원망했다. 처음 이 눈에 비쳤던 그들을 무조건 적으로 믿었지만 되돌아온 것은 포기와 체념을 종용하는 말들 뿐이었다. 결국 그들은 밀레시안을 믿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제 아무리 호의적인 여행자라고 언젠가 제 곁을 떠나갈 것이라며, 밀레시안은 수없이 진심을 증명해 내었지만 그들의 의심은 끊어지지 않았다. 결국 먼저 지쳐버린것은 밀레시안이었다.
믿음을 받은 적이 없으니 이것은 배신이 아니라고, 밀레시안은 누구에게 외치는 말인지 모를 변명을 내뱉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발버둥치며 버텨왔다.
도우갈(글라스기브넨)에게 제 목을 들이밀었을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러나 원망의 저주는 언제나 대가를 요구했기에 밀레시안은 또다시 심판대 위에 올라섰다.
마주선 심판자는 금속과 뼈대로 불러들인 이계의 괴물보다도 끔찍한 것이었다.
뒤틀리고 찢겨진 날개를 펼치고, 안개보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검을 휘두르고. 검은 용기사는 그 어느때보다도 강한 힘으로 밀레시안을 압박하며 자신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가 웃었다.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서야 그는 운명과 고통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하늘을 만끽했다.
그렇게 그는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증오의 평행선을 끊어버리고 천 길 하늘 아래로 추락해버렸다.
운명은 다시한번 뒤집혔다.
운명이 뒤집혔기에 세상도 뒤집혔다.
밀레시안의 희생(승리)은 곧 그의 고통이었으나 뒤집힌 세상에선 그의 승리(희생)였고 이는 곧 밀레시안의 고통이었다.
그는 운명에서 풀려났고 밀레시안은 마법에 묶여 사막의 모래 위로 끌어내쳐졌다.
밀레시안은 모래투성이가 되어가는 마법사의 로브를 부여잡았다.
밀레시안. 멀린이 별을 불렀다. 미이라처럼 바싹바싹 말라가는 입을 벌려 새소리처럼 높게 갈라진 숨을 내쉬었다.
밀레시안. 대답없이 꺽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멀린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미안해. 역시 아직은 좀 이른 것 같다. 마법사는 그렇게 커다란 지팡이를 휘둘렀다.
어둠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세상은 그렇게 다시 얼음속에 잠겨들었다. 깊은 밤이 찾아왔다.
카즈윈은 어느새 한 밤중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깜빡였다.
(또다시 한바탕 난리를 치며)거실로 돌아온 별의 어항의 불빛이 꺼지고 나서야 카즈윈은 제법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라면 눈이 가려진채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도 점심시간 퇴근시간은 칼같이 반응했을 카즈윈이었지만 이번주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사장놈이 갑작스럽게 휴가를 간 덕에 카즈윈도 강제 휴가를 받아야 했던 탓이었다.
헤루인에게 지시를 내릴(그러면서 동시에 깽판친 뒷정리를 해줄) 책임자가 자리를 비웠으니 헤루인도 ‘자제’하는게 좋겠다며 루나사에서 억지로 휴가권을 안겨주었고 그의 금쪽같은 팀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아 맞아요! 팀장님은 조금 쉬셔야해요. 요즘 자꾸 피곤해하시잖아요. 라며 카즈윈을 떠밀었다.
금쪽같긴 금쪽같지. 돈에 죽고 돈에 사는 현대사회에서 금쪼가리 하나가 얼마나 많은 원한을 품었던가.
금쪼가리는 사랑이었고 원한이었으며 자식새끼들 같이 귀한 보물이었다. 그러니 그가 팀원들을 금쪽같이 여긴다는 말은 크게 틀린말이 아니었다.
금쪽같은 원수새끼들. 카즈윈은 쉬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요즘들어 몸이 무겁게 느껴지기는 했다.
피로가 누적된 탓도 있겠지만 오히려 일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닐때가 훨씬 더 가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그는 관심없는척 루나사 팀장의 속을 바득바득 긁으며 휴가를 받아들였고 덤으로 그의 주문어플 포인트를 털어내었다.
알반에는 수리부엉이가 병아리식판에 이어 장닭의 저금통도 털어먹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모두가 수근거리는 분위기속에서 소문에 민감한 루나사의 막내가 입을 삐죽이며 헤루인의 막내를 찾아간 것은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루나사의 막내는 헤루인의 옆구리를 쿡찌르며 물었다. 너 그거 아니? 야식으로 먹는 치킨이 제일 맛있단다?
헤루인의 막내는 무슨소리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루나사의 막내는 시치미떼지 말라며 옆구리를 두어번 찔렀지만 헤루인의 막내는 정말 영문을 몰라 억울할 뿐이었다.
헤루인은 몸을 슬쩍 비틀어 도망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몰라. 정말로 몰라. 우리 팀장님은 요즘 맨날 칼퇴하셔서 우린 야식같은거 못먹는단 말이야.
루나사의 막내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멈춰섰다. 저들의 부서는 아직도 바빠 미치겠는데 원흉이나 다름없는 헤루인이 야근을 안한다니.
루나사의 막내가 굳어버린 틈을 타서 헤루인은 잽싸게 비상구로 뛰어들었다.
와닥 와다닥 부츠소리를 내며 몇 계단씩을 한번에 뛰어올라가자 맞은편에서 내려오던 알반의 직원은 마치 길 가던중 고추장 푼 물을 마신 날짐승에게 습격당한 것마냥 깜짝 놀라며 난간을 부여잡았다.
헤루인! 외근용 장비 입고 회사에서 뛰어다니면 안된다니까요!
비상구에서 고함소리가 울리는 동안 루나사의 막내는 한참동안 입을 삐죽이다가 조용히 루나사로 돌아왔다.
막내는 팀장을 찾아가 말했다. 팀장님 저 오늘 야근하기 싫어요.
막내의 사(社)춘기 선언에 깜짝 놀란 팀장은 긴급회의를 시작했고 막내를 제외한 루나사의 총 집합체들은 이 사춘기가 장기적 사춘기인지 저번에 먹은 치킨이 맛이 없어서 찾아온 일시적 치킨울증인지에 대해 격력한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냥 쓸데없는 일에 열올리지 말고 제시간에 일을 해.. 부팀장은 현실적인 해결방법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는 팀원들을 흐린눈으로 바라보며 발걸음을 돌렸다.
최소한 자신이라도 빠져야 이 쓸모없는 회의의 화력이 줄어들 것같다는 판단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발을 돌리기 무섭게 눈만 굴리며 허둥거리던 팀장이 큰 결심을 마음에 세기며 소리높여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그럼 치킨 말고 야유회에 가서 고기를 구울까?! 부팀장은 단박에 테이블 사이에 끼어들며 이 시기에 야유회라니 그건 아니죠! 하고 소리쳤다.
새롭게 던져진 장작을 삼킨 불꽃이 하늘을 찌를듯이 높이 타올랐다.
밀레시안은 불꽃을 쏘삭거리며 한데 뭉친 장작더미를 넓게 퍼트렸다.
불길이 조금 잦아들고 나서야 밀레시안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고 던컨은 가만히 밀레시안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이야기 속의 영웅은 마지막까지 영웅이어야 하지. 그게 설령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 이름이 된다 하더라도 말이야.
그러나 그들의 뒷이야기를 밀레시안은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말하지 말았어야 했을까요?
말의 중간, 유난히 앞글자 하나를 작게 말한 것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던컨은 언제나 수많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푸른 깃을 가진 새의 나른한 하품소리와 풀벌레 소리, 풍차 아래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 던컨은 이 자그마한 구조요청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대답 대신 웃었다.
기분전환이라도 하는게 어떤가. 그는 대답 대신 손을 잡아주었다.
허술한 상자를 핑계로 나눠진 온기가 한치 앞에 떨어진 캠프파이어보다 따스했다.
밀레시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성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던바튼의 성당으로 갔고 또 타라의 법황청으로 갔다.
가는 길마다 라이미라크의 축복이 내려졌지만 그 어떠한 따스한 말도 밀레시안의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다.
어째서? 밀레시안은 자조했다.
반쯤 신성에 오른 탓이었을 수도 있고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 다른 욕망으로 충만해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내뱉은 말은 한없이 가벼웠고 삼켜진 침묵은 끝없이 무거웠다. 사랑이 가득한 세상에 단 한점의 진심이 없었다.
가라앉는 마음을 건져낼 길이 없어 밀레시안은 그들이 부탁하는 대로 움직였다.
톱니바퀴가 돌아가듯이 영혼이 마모되어가고 있었다.
언젠가 이 바퀴가 맞물리지 않을 날이 온다면 이러한 생각속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왕성으로 향한 밀레시안은 어린 왕을 만났다. 아직 지배자로서의 위엄을 찾지 못한 어린 소녀는 과장된 예법과 날선 눈빛으로 밀레시안을 맞이했다. 물론 흉내낸 위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너! 왜그렇게 기운이 없어보여? 뭐? 힘들다고? 한가해서 그래 한가해서..! 한가함이 넘치니 생각이 많아지는 거라고..!
카즈윈은 마른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왜 갑자기 목이 타지. 카즈윈은 찬물을 찾아 옆자리를 더듬었고 이내 빈 페트병을 우그러트리며 부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유 모를 갈증은 새로 딴 페트병의 반절 정도 비운 다음에야 사라졌다.
카즈윈은 차가워진 숨을 한껏 내쉬고 난 뒤에야 기침을 멈추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 한가한게 항상 나쁜건 아니지.. 헤루인들은 소금을, 루나사들은 종이로 만든 꽃가루를 철썩 휘갈기며 너 누구야! 하고 외칠만한 발언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카즈윈은 어떤지 입술이 짜다고 느끼며 혀를 두어번 낼름거리고는 반쯤 채워진 파란 라벨의 페트병을 든 채 거실로 들어왔다.
물맛이 변했나? 카즈윈은 두어번 더 입술을 핥은뒤 페트병에 남은 물을 들이키며 어항 앞에 앉았다.
카즈윈이 들고 있는 페트병에는 프롬 더 스카하 아일랜드. 라는 문구가 적혀져 있었다.
카즈윈은 물 맛이라는 것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회사에서는 유독 이 생수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차가움이 오래간다던가 몸에 좋은 성분이 많다던가. 물 맛에 민감한 몇몇 팀원들은 희미하게 숲의 냄새가 난다고 했지만 카즈윈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숲이라고 하기보다는.. 카즈윈은 페트병 입구를 코끝에 들이대고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직도 차가운 냉기가 올라오는 물병 주변에서는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지만 카즈윈은 막연히 바다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짙고 깊은, 푸르다 못해 새까맣게 변해버린 지저의 바다.
하지만 스카하 아일랜드에서 생산되는 생수의 수원지는 높고 높은 영혹의 산에서 흘러내린 자그마한 호수라고 알려져 있었다.
겉포장지에도 해양심층수가 아닌 만년설 청정수라고 쓰여있으니 아마 확실할 것이다.
그럼에도 바다를 떠올리는 것은 오직 카즈윈뿐이었다. 아마도 기분탓이겠지.
카즈윈은 시중에서 판매되는 것과 달리 라벨이 파란 색이고 알반의 방패마크가 붙어있는 병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핸드폰을 집어들고 자세를 고쳐 앉은뒤 읽다만 이야기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유가 뭐가되었든 그저 잠시 스쳐지나가는 사소한 잡념이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