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별의 어항

카즈밀레)별의어항9

Tecla 2019. 5. 9. 03:38

알베이에 도착한 밀레시안은 모두 5번의 던전을 클리어 해야했다. 

처음은 붉은 색이었고 그 다음은 푸른색이었다. 

이어 녹색, 은백색의 구슬을 통행증으로 사용한 던전을 클리어하며 종이에 적힌 네개의 구슬 조각을 모았고 이 조각들은 도우갈이 준 종이뭉치에 깃들어 있던 마법에 반응하며 하나의 구슬로 완성되었다. 

밀레시안은 검은 구슬을 바라보며 여정의 끝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문제가 한가지 생기고 말았다. 부상이 한계치를 넘어서 버린 것이었다. 

일반적인 던전이라면 여신의 가호 받는 석상의 앞 돌아오고 말았지만 이 알베이에는 그러한 가호가 없었다. 

이곳에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거지? 밀레시안은 검은 구슬을 만지작 거리며 고민했다. 

그대로 글라스기브넨에게 영혼을 빼앗기나? 아니다. 영혼이 필요로한 곳은 아디만티움에 바를 시료였으니 적어도 무언가의 공정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러면 마신이? 그것도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신의 필사적인 노력 덕분에 마신은 아직 밀레시안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티르나노이에 도착한 만큼 존재여부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여신과 같이 밀레시안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버려진 세계에서의 죽음은 불확실했고 밀레시안은 확실성이 없는 불멸에 제 목숨을 걸 수가 없었다. 

이 지옥같은 장소에 와서야, 밀레시안은 가까스로 죽음의 가치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곧 선지자에 의해 해결되었다. 도우갈이 밀레시안의 고민을 알아챈 것이었다. 

도우갈은 상처입은 몸으로 되돌아온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다 죽어가던 은백색 마석 던전의 헤비가고일이 마지막 발악과 함께 밀레시안의 검을 튕겨낸 탓이었다. 

헤비가고일은 제 몸집만큼이나 커다란 커다란 가고일 소드를 휘둘러 낸 치명적인 상처를 내었고 밀레시안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이 몸으로 마지막 검은 구슬의 던전까지 클리어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판단했다. 

도우갈은 에린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밀레시안의 말에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밀레시안을 에린에 돌려보낼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동시에 이곳에 머무르게 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도우갈은 밀레시안에게 제안했다. 아주 약간의 거짓을 섞은 진실된 제안이었다. 

지금 떠나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가시겠습니까? 

도우갈은 죽음의 두려움을 되찾은 밀레시안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숨죽여서 죽음을 두려워 하고 삶을 경외시하면 되었다. 

이미 헛돌기 시작한 시간의 태엽은 다시 되감을 수 없을지 몰라도 지금의 밀레시안이라면 에린에서 살아가는 시늉을 할 수가 있었다. 그가 그러했듯이, 자기 자신을 잊은채 목적없는 삶을 살아가게되겠지만. 

사는 건 사는 것이었고 죽는 것과는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밀레시안은 그의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지금 이곳을 떠나면 두번다시 이곳에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곳을 떠나는 이유는 커다란 부상. 일반적인 모험가라면 이런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고 밀레시안은 실제로 그러한 드루이드를 한 명 알고 있었다. 

그는 생존을 위해서 반절의 삶을 짐승에게 내어주어야 했고 생으로는 도저히 먹지 못할 마력이 깃든 뿌리를 억지로 씹어 삼켜야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밀레시안은 그러한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단 한치의 상처면 충분했고 아주 잠시동안의 인내면 충분했다. 돌아올 수 있어요. 

밀레시안은 제 단검을 만지작 거리며 대답했다. 대답은 언제나 밀레시안의 안에 있었다. 잠깐이면 충분해요. 

도우갈은 손을 거두었다. 아하, 그렇습니까..? 

반쪽짜리 깨달음, 도망치는 것을 포기한 여행자에게 내밀어줄 만큼 그의 손길은 값싼 것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다른 제안을 제시했다. 밀레시안에게 실험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럼 이런 방법은 어떻습니까. 당신이 돌아가는 이유가 그런것이라면 나에게 한가지 확인하고 싶은 가설이 있습니다. 

당신이 조금을 수고스럽겠지만 세계를 기만하는 것 보다는 쉬운 일일 겁니다.

 

도우갈은 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세계에 좀비들이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의 육신은 이미 무너져 자신의 영혼이 무엇이었는지 조차 ‘기억해 낼 수 없지만’ 버려진 세계의 영혼들은 끊임없이 그 주변을 맴돌며 생에 대한 집착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죽은 육신은 그런 영혼을 다시 빨아들이고 다시는 놓치지 않기 위해 영혼을 속박하죠. 

간절히 바랬던 육신이 감옥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당신의 살육으로, 이런 실례, 눈 먼 자비쯤이라고 돌려말하도록 하죠. 당신의 야만스러운 칼날로 잠시나마 그들중 몇몇을 해방시키기는 했지만 좀비들의 총 량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시 되살아났고 여전히 저 묘지를 떠돌고 있죠. 설명이 너무 길었습니까?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그들의 방식을 이용하는 겁니다. 당신은 당신의 영혼이 이곳에서 부활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있지만 그건 이곳에 당신의 육신이 없기 때문이죠. 

저쪽에서는 소울스트림의 인도자가 당신의 육신을 복원시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겠지만 이곳은 다르니까요. 

하지만 당신의 신체의 일부가 이곳에 있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내가 그것을 매개로 당신을 소환해 낼수 있다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지만 이미 있던 것, 예를 들면 혈액이나 모발, 뼈따위를 기반으로 같은 것을 흉내내는 것은 조그마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세계.., 아니 내가 또 무슨 말을. 저쪽 세계에도 그런 지식은 충분히 존재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신은 혹시 모르십니까? 뭐.. 당신이 몰라도 상관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당신이라는 특수성과 나의 불완전한 기억, 버려진 세계라는 조건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일단 어느정도의 측정은 필요 한것 같습니다. 네, 당신이 해야할 수고로움 말입니다. 

한 50마리정도, 묘지에 있는 좀비들을 해치워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이곳에서 부활 할 수 있는 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같습니다. 어떻습니까?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도우갈은 웃었다. 도망치는 길을 포기하겠다면 차라리 그 길을 없애버려주겠다고. 

밀레시안은 도우갈이 자신을 치료하는 대신 처음부터 이러한 방법을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한마디의 원망도 내비치지 않았다. 고통은 기억이었고 기억은 영혼이었다. 

밀레시안은 자신의 삶을 되살려준 이 지옥을 사랑했지만 이 땅에는 한 줌의 희망도 없었다.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고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신뢰는 신뢰가 아니었다. 

밀레시안은 이제 도우갈이 자신을 신뢰 하지 않는 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밀레시안도 마찬가지였다. 

밀레시안이 도우갈에게 품었던것은 연정도 동경도 아닌 일방적인 믿음이었다. 

그저 맹목적으로 매달리려고 했던 믿음. 기도. 당신은 여신과 같이 나를 버리지 않을거라는 광신. 

그렇다면 저쪽 세계를 향한 믿음은 어떤가. 고민할 필요도 없는 명백한 사실이 눈앞에 있었다. 

그 땅에 희망이 있었다면 밀레시안은 망설임없이 그곳으로 도망을 쳤으리라. 

그러나 밀레시안은 밀레시안은 50마리의 좀비를 쓰러트리고 다시 도우갈의 앞으로 돌아왔다. 

참으로 용기가 가상한 여행자의 만행이었다. 

도우갈은 마지막 실험 쟤료로 밀레시안에게 이곳에 묶어둘 육신의 일부를 요구 했다. 

뼈라도 발라내야 하나? 밀레시안은 막연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고 도우갈은 취미가 나쁘다며 밀레시안을 비난했다. 

도우갈은 지팡이에 의지한채 밀레시안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콰득. 

기울여진 고개를 따라 얕은 피내음이 올라왔다. 밀레시안은 눈을 감았고 약간의 통증을 참아내었다. 

의식이 아득해지며 온 세상에 어둠이 가득차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그 어둠속에서, 밀레시안은 돌이 아니었다. 

 

다시 깨어난 세계는 버려지고 황폐화된 밀레시안의 낙원, 초대받지 않은 세계, 타르라크가 티르 나 노이라고 부르던 거짓된 낙원의 땅이었다. 

다시 한번 제 손으로 영원을 부여한 밀레시안은 시간이 멈춰 있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 문장이 읽혀지지 않았기에 시간은 밀레시안을 허락하지 않았고 밀레시안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별을 지켜보던 자의 대답이었다.


카즈윈은 그 이야기를 꽤나 오랫동안 별의 어항을 외면하고 있었다. 사실 다 읽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예전과는 한참 달라져 있었고 그 미묘한 변화를 좀 더 적극적으로 부추기려는 이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티타임을 즐기던 L대리였다. 티켓예매계의 마탄의 사수, L대리의 손에 쥐어진 디바콘서트의 티켓은 곧 그의 상사에게로 넘어갔고 그 상사는 그 티켓을 미끼로 집안에 틀어박힌 조카를 불러내었다. 

이번 디바의 콘서트를 위해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일하던 조카. 그렇게 안맞는다던 J가(家)놈과 같이 촬영도 하고 콘서트날 최고의 컨디션으로 가야한다며 멀쩡히 다음달로 잡혀있던 해외스케줄을 앞당기는등의 의욕을 불태우던, 하지만 그 앞당인 스케줄때문에 티켓예매전에 참가조차 못해서 하얗게 불타버린 바보같은 그의 조카.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조카님은 다시 태어나도 천재로 태어날 귀한 인재였고 톨비쉬는 그런 그를 귀애했다. 

사랑을 담은 티켓을 손에 넣은 팬닉네임, 치킨과 디바를 사랑하는 마법사는 즉각 업데이트를 시작했다. 

 

그 소식은 오래 지나지 않아 각각의 별의 어항 사용자들에게 전달되었고 이는 예외없이 카즈윈의 핸드폰에도 전달되었다. 

띠링띵! 잠시 숨을 돌리며 다음 지역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던 카즈윈은 잠금화면에 떠오른 낯선 메세지를 발견했다. 

한번은 본적이 있는 삼각형모양의 뱀머리 아이콘이었다.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어플을 재시작시 자동으로 적용됩니다.’ 

메세지가 도착한 시각은 두어시간 전. 카즈윈은 통신 연결이 불가한 지역에 들어가 있었던 핸드폰이 어떻게 업데이트를 다운 받은 것인지 의아해했지만 두어시간 전의 메세지가 지금 떠오른 것을 보면 업데이트는 더 이전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자신을 납득시켰다. 

깊게 생각할 것 없어. 어차피 그는 다시는 이 이야기를 읽지 않을 것이고 어플이 업데이트 되었든 말든 상관없었다. 카즈윈은 내친김에 어플을 아예 삭제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평소와 같이 별의 어항의 아이콘을 꾹 누르며 아이콘이 흔들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장갑에 묻은 오물탓인지 핸드폰은 좀처럼 카즈윈의 터치를 인식하지 못한채 조용히 사용자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카즈윈은 몇번인가 검붉은색 자국을 남기며 화면을 두드렸고 이내 짜증스럽게 액정을 닦아내었다.

끈적하고 불그스름한 자국이 화면 위로 넓게 드리워졌다. 

카즈윈은 아예 바지춤에 화면을 닦았고 성의없이 닦여진 화면은 차라리 닦지 않은 것만 못한 처참한 꼴이 되어버렸다. 

화면을 잠그지 않고 닦았기 때문인지 화면에는 무언가의 어플이 작동되어 새하얗고 까만 줄들이 가득 늘어서 있었다. 

오래간만에 읽는 ‘별의 어항’의 텍스트였다. 

 

카즈윈은 엉겹결에 눌려진 화면에 잠시 눈이 갔지만 이내 보이는 문구 한줄에 인상을 찌푸렸다. 

밀레시안이 도우갈에게 목을 내어주는 장면이었다. 

카즈윈은 아예 전원키를 눌러 핸드폰을 강제종료 시켰고 옆에서 죽은 듯이 누워있는 부하직원을 걷어찼다. 

다음 퀘스트 찾아봐. 시체처럼 잠들어있던 헤루인은 컥거걱 하고 깨어나 졸린 눈을 부비며 되물었다. 

네? 이번 퀘스트 스케줄은 전부 팀장님이 고르신다면서요. 

카즈윈은 핸드폰 베터리가 나갔다고 얼버무리며 눈썹을 찌푸렸고 헤루인은 얌전히 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팀장님 핸드폰 꺼져있으면 다른 부서에서 뭐라고 하지 않아요? 요즘 외장베터리도 안가지고 다니시던데... 

핸드폰으로 알반에 접속하던 헤루인은 조용히 입모양으로 혹시 퇴근은.. 언제쯤..? 하고 뻐끔거리며 카즈윈의 눈치를 살폈다. 

동시에 퇴근이라는 소리에(분명 소리는 안났지만)반응한 이들이 여기저기서 벌떡벌떡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람같은 몰골로 귀를 쫑긋 세운 좀비들이 간절하게 카즈윈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아니지, 좀비같은 몰골의 사람. 카즈윈은 제 관자놀이를 누르며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이 헛나가는걸 보니 피곤하긴 피곤한 모양이었다. 카즈윈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이 원하는 답변을 내어주었다. 

그걸 마지막으로 하지. 카즈윈의 팀원들은 환호했고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고르라며 핸드폰을 든 팀원에게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꼭 이럴때만 가장 지랄맞은 임무가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즈윈은 기분좋은 미소를 띄워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렸다.


카즈윈은 물이 쏟아져 내리는 샤워기 아래 머리를 박았다. 

이미 한번 씻고 온 몸이지만 스며든 냄새라는게 그리 쉬이 가시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카즈윈은 유난히 뜨겁게 그리고 오래 샤워를 한 뒤 안방으로 들어갔다. 

푹 젖은 머리를 말리지 않은채 침대위로 쓰러졌기 때문에 베개는 금방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것처럼 피곤했지만 감겨있는 눈꺼풀이 쉼없이 꿈틀거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머릿속에 밀어 넣은 다량의 정보들중 일부 같은 말을 반복했고 자극적인 기억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회사 샤워실에서 만난 루나사의 팀장의 얼굴이었다. 

작작해라 이자식아. 집에 좀 가자..!! 루나사의 치약거품어린 절규를 머릿속에서 밀어내버린 카즈윈은 아직 멀었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전원을 꺼놓은 핸드폰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오늘 하루는 베터리가 나갔다는 핑계로 방치해 놓았지만 내일 있을 일을 생각하면 다시 켜놓는 것이 옳았다. 

카즈윈은 화장실앞에 뱀 허물처럼 벗겨진 바지를 털어내며 뒷주머니에 꽂혀있던 핸드폰을 챙겨들었다. 

핸드폰이 켜지고 익숙한 잠금 화면이 보였다. 

순서대로 부재중 전화와 메세지, 메신저, 그리고 마지막으로 확인한 알림창 베너가 눈에 들어왔다.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어플을 재시작시 자동으로 적용됩니다.’ 

 

카즈윈은 8시간 전으로 변해있는 베너를 바라보았다. 왜 안없어졌지. 

카즈윈은 눈에 띄는 알림메시지라도 지우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베너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잠금화면 자체가 풀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액정에 말라붙은 오물이 문제인 모양이었다. 

카즈윈은 짜증스러워 하며 안방으로 돌아가 물티슈 두어장을 뽑아들었지만 그는 또다시 6시간 전에 있었던 실수를 반복했다. 

꺼지지 않은 화면은 물기 어린 휴지에 의해 깨끗이 닦이는 대신 무작위로 눌려진 화면중 일부를 인식했고 화면은 하얗게 빛을 내었다. 어김없이 뱀모양의 아이콘이 시계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카즈윈운 23가지의 업데이트중 21가지가 완료된 뒤에야 업데이트중 이라는 글씨를 발견했고 지긋지긋하다는 한숨과 함께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이내 그러한 경멸마저도 포기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기피한다는 것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일 뿐이야. 하지만 진심으로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카즈윈은 어플이 켜지던 말던 신경쓰지 말아야했다. 

 

싫어한다는 것, 실망했다는 것, 이런 이야기가 취향이 아니라는 것조차 그에 대한 반증.

카즈윈은 이 이야기에 제법 취미를 붙이고 있었고 또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원한 것은 밀레시안의 비참한 결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는 납득이 가능한 결말을 원했다.

도망쳐. 그가 봐왔던 밀레시안은 충분히 도망칠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싫으면 싫다고 말해. 객관적으로 봤을때 밀레시안은 지나친 호인이었으나 이용당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따박따박 제 몫의 급료를 챙기고 이따금씩 잔머리를 굴리며 상대의 호감을 이용했다. 

진지한 모습은 찰나였고 철없고 게으른 행동이 대부분이었다. 부당한것을 참지 못했다. 

사소한 행운에 기뻐했다. 격렬한 감정에 휩쓸리기 쉬웠고 타인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사람들과의 교류를 소중히 여겼고 에린에서 살아가는 순간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 사랑속에 기댈 이름이 없었기에 밀레시안은 끊임없는 외로움에 휩싸여야했다. 

이해를 원했지만 그에 앞서 속내를 털어 놓을 길이 없었다. 

그것이 적어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도우갈)의 앞은 아니어야 했다. 

더욱이 그가 한번 자비를 배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밀레시안은 제 발을 움직여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밀레시안은 운명앞에 무릎꿇었다. 카즈윈은 저항할 의지조차 상실해버린 밀레시안에게 실망했다. 

그러한 이야기가 결말이 가리키는 끝은 명백했기에 카즈윈은 구태여 그 끝을 확인하려 조차 하지 않았다. 

바로 지금, 업데이트가 되기 전까지는. 

 

카즈윈은 새로 업데이트된 메인 화면을 보며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인터페이스는 커녕 카운트 다운만 표시되었던 메인화면의 시계 아래에 앙증맞은 아이콘들이 생긴 것이었다. 

메인스트림, 외전, 문의하기, bgm칸이 생겼지만 카즈윈은 다른 것은 살펴볼 것 없이 문의하기에 손을 올렸다.

그가 아직도 발열이 나면서 강제종료되었던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즈윈은 미묘하게 그날 이후로 핸드폰이 버벅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장비관리실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이야기만 반복하며 핸드폰을 카즈윈에게 되돌려주었다.

주변에 기계에 익숙한 녀석들에게 맡겨보았지만 대답도 모두 한결 같았다. 의심은 가는데 심증은 없고, 물증도 없고.

카즈윈은 빨리 문의하기 창이 활성화 되기를 바랬지만 카즈윈을 반기는 것은 이 기능은 아직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라는 임시 메세지창 뿐이었다. 카즈윈은 핸드폰을 집어던졌다.

푹신한 이불이 핸드폰이 받을 충격을 완화시켜준 것과 달리 카즈윈이 받은 짜증은 조금도 완화되지 않았다.

간만에 업데이트했으면 제대로 하라고.

 

업데이트를 한 당사자는 코가 간질간질 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킁킁거리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입을 씰룩이며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그쳤다. 이상하다. 누가 내 욕하나?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하던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만) 한없이 조잡한 디바의 공식 블레이드 원드는 어느 새 무지개빛 빔 소드로 거듭나고 있었고 치킨과 디바를 사랑하는 마법사는 자신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누가 뭐라하든 그는 기분이 최고였기에 그의 손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어플을 업데이트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손놀림이었다. 

그 열정으로 일을 해… 그의 매니저는 미간을 매만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딘가의 어플관리자가 마개조된 블레이드 원드를 휘두르고 있는 동안 카즈윈은 평소의 침착함으로 되찾은 뒤 조용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집어 던진 핸드폰은 이불의 어느 면과 접촉되었는지 또다른 화면으로 넘어가 있었다. 

메인스트림으로 쓰여진 첫번째 아이콘이었다. 카즈윈은 6개의 챕터로 구성된 하위 목록을 보며 감흥없이 손을 움직였다. 

각각의 챕터에는 2~3개의 제네레이션(Generation)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그중 활성화 되어 있는 것은 첫번째 제너레이션 뿐이었다. 

카즈윈은 유일하게 활성화된 G1로 들어갔다. 

뒤이어 떠오른 화면은 카즈윈에게 익숙한 옛 화면, 업데이트 되기 전의 이야기 목록창이었다. 

카즈윈은 어차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나간 이야기들을 하나 하나 클릭하며 같은 경고창이 뜨는 것을 확인했다. 

이미 열람한 ‘영혼의 정보’는 다시 열람 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별의 어항’을 작성하시길 바랍니다. 

카운트다운을 하며 차례차례 공개 되는 이야기들은 카즈윈이 알고 있지 못하는 것일뿐, 그 배열은 이미 한 방울의 피(영혼)로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만약 자신이 새로운 결말을 찾아 새 어항을 구매한다고 해도 이 21가지의 이야기는 변하지 않으리라. 

카즈윈은 이 이야기의 결말이 이미 어떠한 한가지 형태로 정해져 있다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예상은 또다시 절반의 정답일 뿐이었다. 

그가 생각해내는 모든 답은 불완전했고 그가 예측할 수 있는 결말 또한 그러했다. 

불완전하게 막을 내린 무대는 그 다음으로 이어지고, 또 다음으로 이어지고. 지나온 이야기가 제 아무리 길다 한들 그가 읽고 있었던 이야기는 첫번째 이야기의 마지막 에피소드일뿐. 

결말을 추측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카즈윈은 이어질 수많은 시대의 이름들을 보며 다시한번 이야기를 불러들였다. 

그저 밀레시안의 여정이 언젠가 온전히 보상받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그는 마지막 문장을 끌어당겼다.

 카즈윈은 거짓된 낙원의 땅을 보았고 시계는 다시한번 거꾸로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어항의 불이 꺼졌다. 

유난히도 깊고, 어두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