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별의 어항

카즈밀레)별의 어항7

Tecla 2019. 5. 9. 02:51

침대에서 일어난 밀레시안은 아무리 작아도 곰이라며 최대한 작고 어린, 허약한 곰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너무 어린 곰은 강함을 증명 할 수 없으니 안되었고 이제 막 성체가 된, 그러면서도 조금 약한.. 그래, 더도 말고 덜도말고 딱 타르라크만큼 허약했으면 좋겠다며 적당한 비교대상을 떠올린 밀레시안은 무게감이 전혀 달라진 브로드소드를 휘둘러 확인하며 스스로의 표현력에 감탄했다.

방금 달빛을 받아 막 인간으로 돌아온 타르라크가 들었다면 네??? 하고 기겁할 혼잣말이었지만 밀레시안은 그저 새로 개조한 검을 시험해볼 생각에 푹 빠져있을 뿐이었다.
밀레시안이 방안에서 새로운 검의 밸런스에 적응하려 하고 있던 그때 여관의 방문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여관의 주인, 피르아스는 밀레시안에게 던컨촌장님이 찾으셨다는 전언을 남긴채 다시 1층으로 내려가버렸다. 

밀레시안은 아직 이른 태양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각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던컨의 부름이었기에 아무런 의심없이 촌장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안개가 스산하게 깔린 새벽이었다. 

던컨은 마리와 그 부모에 대한 이야기로 화두를 꺼내며 그녀의 부모님이 남긴 유품을 꺼내 보여주었다.

언젠가 마우러스의 분실물과 똑 닮은 부러진 토크의 반쪽이었다.

밀레시안은 마우러스의 절망은 이미 보았다고 대답했다.

던컨은 마우러스의 절망이라는 밀레시안의 말에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드루이드들이 만들 수 있는 수호의 부적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것은 영혼과 영혼을 이어준는 특별한 부적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나였으나 둘이 되었고 둘이서 하나의 문장을 완성시키는 토크의 표면에는 그들이 바란 간절한 소원이 쓰여져 있었다.

 

그 어떤 고통과 시련이 있다 해도. 우리는 다시 만나리. 

그 고통이 인간을 저버리는 절망이었든 죽음의 강을 건너는 시련이었든, 그들은 다시 만날 날을 약속했고 그 기원은 고스란히 이 토크에 깃들어있었다. 

밀레시안은 자신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한채 던컨이 내민 붉은 여신의 날개를 받아들었다. 

세상은 어떠한 설명도 요구하지 않은 채 잠시 흐려졌고 밀레시안의 앞에 돌로 만든 여신상을 내려놓았다. 

돌이 된 여신에서 빠져나온 백색 투명한 유령이 밀레시안의 옆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괜찮나요? 유령이 된 여성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많이 여위였네요. 고생이 많이 심하셨나봐요. 

그녀는 밀레시안의 앞으로 다가왔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붉은 로브 속에 손을 넣고 거칠어진 뺨을 쓰다듬었다. 

남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밀레시안의 뺨에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 온기는 유령의 것도 아니었고 마우러스의 것도 아니었다. 

밀레시안은 스스로의 열기를 자각하지 못한 채 소리죽여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뱉어내었다. 

타인의 기억을 빌어 쏟아지는 커다란 호의와 애정이 버거웠고 목소리에서 내비치는 믿음이 부러웠다. 

그가 그녀를 보고있지 않았음에도 시라는 마우러스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고 그가 가는 길을 따라 거닐었다. 

마우러스의 절망은 깊고 고통스러웠지만 시라가 보내는 믿음은 그런 그를 구원하고 지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가 단 한번이라도 그녀의 영혼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면. 밀레시안은 일어나지 못한 기적을 아쉬워 하며 모리안 여신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자신에게 이러한 신뢰와 믿음을 보여준다면. 밀레시안은 눈을 감고 자신의 심장위에 손을 올렸다. 

나 또한 기쁜 마음으로 이 세계에 낙원을 선물할 수 있는 걸까? 

눈을 감은 밀레시안은 그러한 미래를 떠올려보고자 노력했지만 그 눈에 비치는 것은 모두 검정, 어둠, 허무한 공백의 공간이었다. 

밀레시안의 마음이 그 어둠결에 조금씩 젖어들어 가는동안 마우러스의 곁에 서 있던 그의 아내 시라가 속삭였다. 

 

모리안…? 믿음으로 가득 찬 영혼은 혼란스럽다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냐, 틀려. 뭔가 이상해. 영혼의 말에 밀레시안은 눈을 떴고 아까와는 달리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영혼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이목구비가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행동과 고갯짓으로 그녀가 보는 방향을 가늠한 밀레시안은 그녀가 두려움을 느끼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새하얀 날개를 가진 낯선 신족에 서 있었다. 

키홀, 저 사악한 마신이 어떻게 살아남았지?! 시라는 마우러스(밀레시안)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쳤다. 

영혼의 메아리가 닿는 것은 꿈속의 기억이 아닌 영혼뿐이었기에 그녀의 손길에 흔들리는 것은 마우러스의 환영이 아닌 밀레시안 그 자체였다. 

시라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니에요! 여기는 티르 나 노이가 아니에요! 저건 모리안이 아니야! 속지 말아요! 

밀레시안은 깨어지는 듯한 높은 비명소리에 고통스러워 했고 시라의 목소리는 그 고통속에 스며들어 몇번이고 메아리를 이어나갔다. 

밀레시안은 유령처럼 흐느끼는 목소리로 앓는 소리를 내뱉다가 급한 숨을 들이마시며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무거웠고 머리가 깨질 것같았다. 눈을 뜬 곳은 낯선 곳이었으나 밀레시안은 곧 그 장소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힐러의 집, 아마도 던바튼의.. 밀레시안은 던바튼의 힐러, 마누스가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긴장을 풀었다. 

뒤늦게 골이 흔들리는 통증이 찾아들었다. 밀레시안은 머리를 부여잡으면서도 제가 할 일에 대해 떠올렸다. 

 

타르라크에게 이 사실을 알려줘야해. 

밀레시안은 여신의 배신이 아닌 마신의 책략이라는 것에 안도하며 몇번이고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타르라크에게 알려줘야해. 그들은 배신당한게 아니야. 이용당하지 않았어. 희생당하지 않았어. 

여신은 인간들의 편이야. 시라의 믿음은 마우러스를 구원할 수 있는 열쇠인 동시에 타르라크의 용서가 되었고 밀레시안의 명분이 되었다. 

밀레시안의 운명은 변하지 않았다. 영원과 불멸. 이 땅에 낙원을 꿈꾸는 자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밀레시안은 영원히 그 위협에서 벗어 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것을 원하는 것이 인간들을 사랑하는 여신이라면, 그 것이 이 땅에 내려선 낯선 여행자를 따뜻하게 맞이해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밀레시안은 자신이 희생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제물과 희생은 같은 결과 였지만 받아들여지는 의미는 정 반대의 것이었다. 

밀레시안은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일으켜 현관문으로 향했다. 

마누스가 밀레시안을 말리려 했을때는 이미 침대를 빠져나간 뒤였고 밀레시안은 통증이 많이 사그러들었다고 재빨리 대답했다. 

한발자국 뗄 때마다 구토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정도면 정말 양호한 것이었다. 

막말로 자이언트 웜에게 산채로 씹히는 것보다 가볍지 않은가. 

정 상태가 안좋다면 한번정도 □□다가 □□□나면 그만인 일이라고 생각하며 밀레시안은 매우 가벼운 말투로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괜찮아요. 나는 괜찮아요. 힐러의 집 문을 열고 밤의 공기를 들이마신 밀레시안은 더운 숨을 뿜으며 유령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괜찮을 수 밖에 없어요. 

무엇을 해도 □□않으니 괜찮을 수 밖에. 밀레시안은 태양이 뜨기 직전 타르라크에게 도착 할 수 있었고 마신 키홀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해주었다. 

타르라크는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자신이 직접 가지 못하는 것에 분개하며 밀레시안에게 부탁했다. 

부디 여신을 구해주십시오. 밀레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사지로 떠밀린 것이 아닌 자신의 선택이라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밀레시안이 세번째 여신의 꿈을 꾸고 검은 마족통행증을 통해 티르 나 노이로 가고 있던 그때 알반은 내부에도 불온한 운명의 기척이 감지되었다.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수리부엉이었다. 

루나사의 비밀스럽고도 결의 가득했던 비밀 회의장은 결국 그 지독하고 악착같은 수리부엉이에게 발각되었고 회의실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혀졌다.’ 

비밀 회의장을 급습당한 루나사 팀장은 자신들이 선량한 블러디허브 드링크 F 애호가들의 모임이라고 주장했지만 카즈윈은 그들 중 반수 이상이 더 이상 블러디허브따위로는 체력을 회복 할 수 없는 중증의 포션 중독자임을 지적했다. 

힘뿐만이 아닌 논리까지 완벽한 날카로운 한방이었다. 

이에 루나사는 효능이 아닌 맛으로 마시는 거라는 무리수를 던졌고 이 악수는 그들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쐐기로 작용했다. 

구성원들은 입맛과 건강을 잃었이지 양심을 잃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직속 팀원들조차 차마  블러디허브 드링크 F가 맛있다고 말할 수 없었던 탓에 루나사들은 우물쭈물거리며 카즈윈의 시선을 피했고 어린 루나사의 신입직원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블러디허브 드링크 F는 개암버섯찜 이상의 공포였던 모양이었다. 

멀지 않은 미래에 F의 효능을 깨닫게되며 증오하는 동시에 사랑할, 그리고 조금 더 먼 미래에는 F조차 통하지 않는 만독(카페인)불침의 운명을 가진 아이였지만 그녀의 선배들은 루나사의 젊은 미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루나사들은 어린 직원을 달래어 복도로 나간 뒤 닥터 블러드의 허브페퍼 G를 한아름 안겨주었다. 

F보다는 약하지만 패키지 디자인과 내용물의 맛을 조금 인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나름대로의 매니아층을 확보한 에너지 드링크였다. 

드링크의 맛을 따지고 있다는 자체가 이미 그들의 미래가 메투스 하늘보다 어둡다는 이야기였지만 그 소수의 매니아층에 막 첫발을 내딛게된 신입 직원은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듯이 눈을 반짝이며 이정도면 맛이 괜찮은 것 같아요. 라고 대답했다. 

블러디 허브 액기스 특유의 향이 남아있음에도 그녀의 미각은 뛰어난 적응력을 보였고 선배 루나사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루나사 팀장이 인정한 인재. 그렇게 신입직원의 메신저함에 선배들의 애정(이라는 이름의 연민)이 가득 찬 꿀맛유지방감자칩의 기프트콘이 쉴 새 없이 쏟아져내리던 같은 시각, 철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코너의 내몰린 루나사 팀장의 머리위로 찢어진 예능 프로그램의 편성표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카즈윈의 장기자랑중 하나인 인간아닌 악력이 또다시 마술을 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화번호부 두께정도 쌓인 텔레비전 편성표를 찢고 찢고 또 찢고. 무심한 눈빛으로 남은 문서들의 필적을 하나 하나 씹어먹듯이 눈에 담아내던 카즈윈은 그렇게 힘쓰지 말고 문서파쇄기를 이용하라는 루나사 팀장의 깐족거리는 얼굴 앞으로 고개를 숙인뒤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남의 사생활을 예능프로그램으로 삼으니까 재밌어? 루나사의 팀장은 부정의 대답 대신 진한 미소를 지으며 턱끝을 들어올렸다. 

카즈윈은 이대로 그를 추궁해봤자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카즈윈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누가 이 쓰잘데기 없는 모임에 어울리고 있었는지를 물었지만 루나사의 팀장은 카즈윈에게 뒤지지 않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쥐를 잡자랑 토끼토끼, 그리고 다운&업중에서 원하는 방법을 골라봐. 몇 명 정도로 예상하고 왔어? 

 

기가 죽긴 커녕 더욱 신이 난 루나사를 보며 인상을 찡그린 카즈윈은 미련없이 발걸음을 돌려 복도 밖으로 빠져나왔다. 

막내를 달래며 팀장님의 이빨을 추스릴 준비를 하던 루나사들은 화들짝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카즈윈의 퇴장에 루나사들은 당혹스러운 눈치였지만 재빨리 스캔한 카즈윈의 손이나 옷가지는 다행스럽게도 깨끗한 모습이었다. 

루나사들은 오히려 코뼈하나 건들지 않았다는 점을 의아해하며 자신들의 팀장 역으로 무슨 불법적인일을 저지른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루나사들은 카즈윈이 멀어지자 마자 우르르 몰려가 난장판이 된 회의실 안을 들여다 보았다. 

설마 피 한줌 안남기고 씹어먹었다던가.. 바보야 카즈윈 팀장님은 헤루인이지 엘베드가 아니야. 

루나사들이 저들이끼 티격태격하는 동안 루나사의 팀장은 온화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자신들의 팀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우아하고 또 화보와도 같아서 루나사들은 괜스레 한기를 느끼며 쭈뼛쭈뼛 회의실 가장자리에 나란히 몰려섰다. 

무슨일이에요? 용기있는 한 루나사의 질문에 루나사의 팀장은 믿음직스러운 자신들의 팀원들을 보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어. 팀장의 대답은 그것으로 끝이었고 루나사들의 질문도 거기서 끊어졌다. 

그 기묘한 침묵은 뒤늦게 외근에서 돌아온 부팀장이 팀장님 C회의실 털렸다면서요? 하고 큰 뒷북을 울릴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녀가 외친 뒷북소리는 떨려오는 심장소리와 요동치는 테이블비트소리에 묻혀 맥없이 흩어지고 말지만 루나사의 부팀장은 다시한번 팀장과 다른 팀원들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를 환기시키려 애를 썼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만에 생각에 잠긴채 대답을 거부하고 있었다고 부팀장은 하는 수 없이 막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영문을 몰라서 입다물고 있던 막내 직원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모르시겠데요. 루나사의 팀장은 다리에서 선라이트 옐로우 빛을 낼 것같은 요란한 속도로 빠르게 무릎을 떨며 자그맣게 웃기 시작했다. 

정말 즐겁다기 보다는 앓는 소리와 한숨이 뒤섞인 것이 대충 입가 근처에서 경련을 일으키는 느낌이었다. 

부팀장은 상사의 칠칠맞은 웃음소리에 인상을 찡그리며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고 주변 선배들의 눈치를 보던 막내는 다시한번 조곤조곤 상황을 정리하여 부팀장에게 현재 상태에 대해 전달했다. 

회의실을 습격하신 헤루인 팀장님이 그냥 돌아갔는데 왜 돌아갔는지를 모르겠어요. 종이를 찢긴 하셨는데 이건 아주 온건한 반응이라면서요? 

부팀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가를 쓸어내리다가 그.. 외나무 다리는? 알고 물었지만 막내는 눈썹을 찌푸리며 무슨 외나무 다리요? 라고 되물었다. 

루나사 팀장의 웃음소리는 더욱 짙어졌고 부팀장은 테이블이 더욱 박살나기 전에 말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루나사 팀장의 등짝을 철썩 휘갈겼다. 

그만 좀 떨어요. 복달아나게시리..!! 팀장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무릎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의 행운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