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

카즈밀레)발렌타인데이

Tecla 2016. 2. 14. 00:31



http://youtu.be/ojprJLRSkkQ





"필요없어"


일의 시작은 카즈윈의 짤막한 한마디로 시작되었다.

난간에 걸터앉아있던 밀레시안이 손안에서 만지작거리던 나무막대기를 부러트렸다.

포물선을 그리며 튀어나가는 나무조각이 바로 앞에서 마도서를 쓰고있던 로간의 책상위까지 떨어졌다. 원래의 크기에 비해 조금 많은 조각으로 산산히 흩어지는 것이 밀레시안의 이성인지 바닥에 내팽겨쳐지는 나무조각인지, 저마다의 훈련을 하고 있던 특별조원들은 못볼 것을 봤다는 것마냥 제각기 눈을 돌리기 바쁘다.


그러나 현실감에 충실한 하, 하고 짜증섞인 웃음소리를 외면할 수는 없다.

노려보는 밀레시안의 시선이 따갑지도 않은건지 카즈윈은 분해했던 석궁을 재 조립하며 무심하게 덧붙였다.


"단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것도 아니고. 매 년 챙기는건 너무 번거롭고 피곤해. 넌 요즘 바쁘잖아?"


"아 그러세요"

"........? 뭐야, 한가해?"


밀레시안의 싸늘한 반응에 카즈윈이 의외라는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번엔 밀레시안의 외면. 바람이 일 정도로 빠르게 돌아선 밀레시안은 로간의 책상쪽으로 걸음을 옮기었다. 마도서로 얼굴을 가리고는 있지만 책장아래로 빠드득거리는 잇소리가 새어나온다.

밀레시안의 냉랭한 목소리가 카즈윈의 질문에 톡 쏘아붙이듯 답을 했다.


"아-아뇨, 바쁘죠. 엄청."

"....그렇잖아?"

"....."


카즈윈은 어깨를 으쓱 하며 다시 자신의 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필리아까지 나가야한다고 들었는데 잘못들었는줄 알았지"

"바쁘신 헤루인조 조장님이 내 일정까지 챙겨주다니 엄청 고맙네요."

"별로. 나는 이시즌에는 일이 한가해지니까"

"........"


마도서를 내리는 밀레시안이 진심이냐는 얼굴로 다시 카즈윈의 뒷통수를 쏘아본다. 

아니죠, 거기서 자랑하시면 안되죠. 태클을 걸고싶은 조원들의 마음이 가득하지만 함부로 입을 열 수는 없다. 마도서를 책상위로 내려놓는 밀레시안은 이제 꼴도보기싫은건지 카즈윈을 아예 외면한다. 소리없이 말을 말자.. 말을 말아. 하고 인내심을 끌어올리는 밀레시안이 로간과 눈을 마주치더니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로간의 등에 식은땀이 베어나오다.


"응, 괜찮은것 같아. 글씨가 깔끔하네"

"...예? 아 예. 감사합니다."


열심히 분석하여 적어내려간 마도서에 글씨가 깔끔하다는 평가를 내린 밀레시안의 말에도 로간은 착실하게 감사의 인사로 대답했다. 나무막대가 부서지는순간 펜촉을 너무 세게 누르는 바람에 생긴 잉크얼룩이 선명하지만 로간은 조용히 번진 잉크를 손으로 가릴뿐.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로간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어색한 미소를 지우고 돌아선 밀레시안이 짐을 챙겨들며 부스럭 거리지만 카즈윈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냥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밀레시안이 흐트러진 짐속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낼 때도, 밀랍날개를 찾아 낼 때도, 작은 물약가방을 허리춤에 두를 때까지 그 미묘하게 무거운 침묵은 계속되었다.


침묵의 원흉은 섬세한 손놀림으로 재조립하는 석궁에만 집중하고 있을뿐. 와그작 하고 밀레시안이 나무조각을 발로 밟고 난 뒤에야 카즈윈의 손이 잠깐이나마 멈추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손놀림에 밀레시안이 하, 하고 대놓고 혀를 찬다.

뒷통수가 따가웠다. 지금 밀레시안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로간. 연애경험이 있는 것도 로간. 힘내라 로간. 도와줘요 로간. 사방에서 쏟아지는 열렬한 눈총에 로간은 결국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웅을 위해, 혹은 게이트 내의 평화를 위해 로간이 밀레시안의 짐챙기는것을 도우려하자 밀레시안은 성의없이 손을 내저었다. 일어날 것 까지는 없다는 제스쳐. 짐을 모두 가져가지 않으려는건지 밀레시안은 몇가지인가 중요해보이는 꾸러미만을 가방에 쑤셔넣고는 자그마한 리라를 집어들었다.


"무기는 안가져가십니까?"

"지금 가져가면 큰일날 것 같아"


큰일요? 무슨 큰일요? 로간은 입천장까지 올라온 질문을 가까스로 삼키며 짐을 옮겨두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모래바람대신 피바람이 부는건가.."


별자리를 측정하는 디이의 뜻많은 한탄소리가 로간의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로간의 경고어린 눈빛에 디이는 휘파람부는 시늉을 하며 망원경으로 시선을 돌린다. 소리나지 않는 휘파람 대신 게이트를 간지럽히는것은 카즈윈의 석궁에서 나는 작은 철컥임들 뿐. 어디로 향하는 모를 시선의 밀레시안이 이거면 되겠지 하고 흉흉한 소리를 내며 리라를 휘둘렀다. 리라의 새로운 음색을 깨닫는 스윙이였다.


"그럼, 나 간다"


슬금슬금 가까이 오려던 카나와 로간의 눈이 맞부딫쳤다. 이대로 보내도 되는걸까?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세 지점의 한 가운데, 카즈윈의 손에서 철컥 하는 불협화음이 들려왔다. 카즈윈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며 공구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 김에 라는 느낌으로 슬쩍 밀레시안쪽으로 향하는 남색의 눈동자. 멀리 떨어진 카나가 잽싸게 손을 들어 밀레시안을 향해 소리쳤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조장님!"

"다녀와 조장!"

"다녀오십시오, 조장님"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특별조의 삼단 콤비네이션. 밀레시안은 카즈윈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서는 카나를 향해 방긋 웃어보였다. 살랑살랑 흔들어주는 손동작은 방금전까지 휘두르던 리라의 풍압과는 전혀 다른세계의 상냥함이 깃들어있었다. 카나는 높게 들었던 손을 어색하게 내리며 얼른 검을 집어들고서는 허수아비 뒤로 몸을 숨겼다. 수리부엉이의 눈이 의아해하는 빛으로 카나를 향해있었다.


"......"

"........"


로간과 디이가 눈이 침묵속에 마주쳤지만 밀레시안은 여전히 카즈윈에게 따로 인사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바로 전, 그러니까 그 분위기 안 좋았던 그 순간 밀레시안과 카즈윈이 암묵적인 동의로 서로 말을 놓기로 한게 아니라면 짧디 짧은 인사는 분명 자신들의 조원들을 향한 것. 잘못끼운 부품이 잘 안빠지는건지 쯧하고 혀를 차는 카즈윈의 미간이 잔뜩 찌푸리며 조립하던 부근을 아예 다시 분해한다. 밀랍날개를 부러트리는 손동작이 오늘따라 더디게 느껴진다.


날개가 활성화 되자 밀레시안은 나중에 또올께 라고 대답하면서 비틀린 공간속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몸 전체가 날개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밀레시안의 시선은 카즈윈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냉랭함이 감도는 짧은 침묵. 날개가 사라지는 동안 빠르게 조립을 마무리 짓는 카즈윈의 손에서 신경질적인 무언가가 느껴졌다. 밀레시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짐과 동시에 카즈윈의 손 안에는 완전히 재조립된 크로스보우가 놓여져 있었다. 드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카즈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카나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일...일찍 돌아오세요오.."


이미 떠난 밀레시안에게 간절하게 바램을 덧붙여보지만 모기만큼 작은 목소리가 닿을리 만무하다. 카즈윈의 서늘한 발자국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던 아침 훈련시간이 지난 오후, 벨테인조원들의 간식을 가지고 나오던 슈안이 정면으로 마주친 카즈윈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슬금슬금 게걸음으로 난간을 따라 움직이던 슈안이 위험한 위기를 넘겼다는듯 과장되게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머리에 둘렀던 위생두건을 풀러내렸다. 쪼르륵 달려온 엘시가 슈안에게서 간식 트레이를 받아들었다. 달콤한 향기가 가득 올라오는 특별간식에 근처에 있던 카오루도 고개를 돌렸다


"어휴 깜짝이야. 오늘도 헤루인조 조장님은 진지함이 넘치는 얼굴이네요."


"...그거.. 반어법이라는 건가요?"

"예? 아뇨아뇨. 그럴리가 있나요. 헤루인조 조장님은 정면으로 보면 정말 진지한 사람이랍니다?"


".....정면만..?"


엘시가 뭔가 알 수없는 표정으로 슈안을 올려다보았다. 오븐장갑을 빼는 슈안이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고 있었다.


"그래요, 정면으로 보면요... 보통 사냥감이 아니면 불러도 쳐다보지도 않는 인가.. 아니 사람이.. 큼흠. 방금 실수는 못들은거로 하는겁니다 엘시양. 음, 그래서 말입니다만 혹시 제 얼굴에 뭐 기분나쁜것이라도 묻어있나요?"


"있어요....빙글빙글 안경.."

"아니 이건 이상한게 아니라...."


"....음....머핀부스러기...?"


엘시가 슈안의 뺨에 붙은 초코색 빵부스러기를 떼어주었다.

오늘은 발렌타인데이, 달콤한 향기가 게이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게이트를 떠나 밀레시안이 나타난곳은 마도학자들의 연구소 앞. 학자로서의 발견과 미지의것에 대한 공포감이 뒤섞인 탐구의 현장에도 달콤한 초코렛의 향기가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언제나 끓고 있던 커다란 솥 옆으로 달콤해 보이는 쟤료들이, 책상가득 쌓여있는 책들 간간히 보이는 예쁜 리본들이, 보고서들 사이에 어색하지 않게 끼어있는 포장지들까지. 변이된 토끼들이 신나게 아몬드 조각을 갉아먹으며 때아닌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것은 여기저기 널려있는 택배용 박스들. 저마다 꽉꽉들어찬 새하얀 저것들은 만져볼것도 없이 보냉제임이 틀림없었다. 이미 녹은 보냉팩들을 피해 조심조심 걸어들어가자 유달리 파란 토끼가 행복한 표정으로 헤이즐넛을 갉아먹고 앉아있었다.


꼭 어딘가의 누구를 닮은 남빛에 밀레시안의 얼굴이 더욱 가라앉거나 말거나, 밀레시안이 오기를 손꼬박 기다리고 있던 마도학자들은 다급한 얼굴로 밀레시안을 이끌었다. 

빨리퇴근해야한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그들의 얼굴에는 거무튀튀한 카카오 파우더가 얼굴 헤나마냥 진하게 묻어있다. 얼굴에 묻은 초코나 좀 닦고 오지. 말을 삼킨 밀레시안이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공간이동 마법사쪽을 향해 걸어갔다.

한 마도학자가 그랜드마스터 쪽으로 뛰어간것을 확인한 공간이동 마법사는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악수를 건내었다. 어린마도학자는 용캐 넘어지지 않고 가파른 언덕을 뛰어내려갔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밀레시안님. 오늘따라 좀 어수선하죠?"

"응, 뭐... 날이 날이니까요"


"아하하,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후가 사막인지라 초콜렛을 만들어도 녹아서 망치기 일수거든요. 이 시즌이면 너도 나도 할 것없이 보냉제를 들여오는 통에..."

"아 그래서 택배박스가.. 용캐 친위대들이 패트록을 내부로 들여보내줬네요."


"사실 그게 친위대 분들도 같이 만들고 있거든요. 음, 뭔가 부끄러운 모습이네요. 하지만 만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가만히 앉혀 둘 수도 없으니 타협할 수밖에 없어서.."


그 깐깐하고 원리원칙주의자들도 초코렛앞에선 소녀의 마음이어라. 밀레시안이 피식 하고 웃자 공간이동마법사는 부끄럽다는듯이 뺨을 감싸쥐며 고개를 흔들었다. 너나 할 것없이 가득찬 사랑의 향기때문이였을까, 밀레시안은 짜증이 조금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얹었다. 가방속에서 맞부딫치는 포션병들 소리사이로 바스락거리는 리본소리가 섞여있다.


"그랜드마스터도 같이 만드나 봐요?"


"예?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그랜드마스터님은 초코렛을 싫어하시거든요. 아 솥! 그건 그랜드마스터님이,"

"오늘만 특별히 허가해 주셨거든요! 그랜드마스터님이 어제 일정을 모두 제시간에 마치면 오늘 솥을 써도 된다고 허가해주신다고 약속하셔서 어제 모두 철야로 일을 했어요"


통행허가증을 받아온건지 두 사람에 대화에 끼어든 마도학자가 팔랑거리는 서류를 내밀었다. 요녀석 대화중에 끼어드는거 아니랬지, 하고 꿀밤을 먹인 공간이동 마법사가 연신 고개를 주억거린다.

밀레시안은 상관없다는듯 손을 내젓고는 멀리서 끓어 오르는 솥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렇게 대놓고 솥을 쓰는거였구나. 그랜드마스터 마도학자까지 나서서 초코를 만드는 광경에 월권행위 아닌가 싶었지만 아예 공인일 줄이야. 밀레시안은 저도 모르게 관리자의 찌든 안색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오늘 일은 내가..?"


"아.... 그게 오늘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예정외의 일입니다. 예의 그 카테고리에 속하는 몬스터가 출현하면 꼭 밀레시안님께 연락하라고 지시가 내려왔었거든요"

"맞아요! 그랜드마스터님께서 이 일은 꼭 밀레시안님이 처리해야한다고..! 아, 물론 밀레시안님도 오늘 일하시는건 싫으시겠지만.. 으으..?"


"....괜찮아요. 난 줄 사람도 없으니까"

"엣...?"

"네..?"

"일이 바쁘다고 차였거든요. 오늘 아침에"


".....아.."

"...."


"........안갑니까?"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게이트를 연 공간이동 마법사가 서둘러 지팡이를 휘둘렀다.

웅얼거리는 주문사이에서 공간이동마법사의 옆에서 어린 마도학자는 겁에 질린듯 양 귀를 쥐어내리며 마법사의 로브 옆으로 파고들었다. 지금 밀레시안님, 왠지 메이크님 같았어.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공간이동 마법사가 보이지 않게 마도학자의 발을 밟았다.








평소 이동하던 생태지구보다 더욱 깊은 곳으로 온건지 좀더 눅눅한,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의 공기가 탁한 비린내를 내뿜었다. 보기만해도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거대한 짐승이 밀레시안을 감지한건지 쿵쿵 거리는 소리를 내며 어둠속에서 콧김을 내뿜는다. 언듯 식물표본의 빛에 비친 광택이 낯이 익은건지 밀레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돌연변이 짐승들과 비슷한 광석을 어깨 한가득 짊어진 변이된 사스콰치가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비틀린 치아를 한가득 들어내는 소림끼치는미소에 마도학자들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숨소리와는 다른 박자의 헐떡이는 호흡소리. 웃음소리가 저렇게 들리기도 하는구나 하고 호기심 가득한 밀레시안이 박자에 맞춰 고개를 끄떡였다.


밀레시안의 호기심과는 달리 그 괴기함에 질린건지 동행했던 마도학자는 잘 부탁드린다는 겁먹은 목소리와 함께 급하게 공간이동 마법사의 손을 부여잡았다. 희미한 빛과 함께 사라지는 두사람은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먼저가보라고 말하려던 밀레시안이 뻘쭘하게 손을 내리려는 찰나, 사라진 게이트를 광원삼아 무언가 반짝이는것이 그들의 발치가 있던 자리로 떨어져 내렸다. 낯이 익은 평범한 상자. 보기만해도 코끝에 단내가 스칠것 같은 포장지가 눈에 들어온다.


등 뒤에 사스콰치가 있다는것을 잊은것 마냥 밀레시안이 무방비하게 등을 돌렸다. 허리를 굽힌 풀숲, 무릎아래 깔린 안개속에는 희미한 짐승냄새가 가득했다.

밀레시안이 집어 든것은 마도학자가 떨어트린 포장된 초코렛 상자. 희미한 냉기가 감도는 것은 물론이고 냄새를 맡아보면 안에 내용물도 확실하게 들어있다. 


이것도 퀘스트인가, 또 갖다줘야겠네 하고 한숨을 내쉬는 밀레시안이 가방을 열었다. 이미 손에 들고있는 상자와 비슷한 것이 자리하고 있기에 가방안은 이미 만원. 살짝 가라앉은 표정의 밀레시안이 이미 들어있던 상자를 아무렇게나 가방 구석에 밀어넣은뒤 새로 주운 초코렛 상자를 집어 넣었다. 기존에 들어있던 상자의 리본이 엉망으로 구겨졌지만 아무렴 어때, 밀레시안은 가방의 덮개를 잘 덮으며 헹! 하고 큰소리로 누군가를 비웃었다. 


나쁜 사람, 못된 놈. 미리 준비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확 지금 내가 여기서 먹어버려? 등의 생각을 하며 몸을 돌리자 어느새 밀레시안의 등뒤로 다가온 사스콰치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머거..? 머거보려..?"


똑똑하기도 하지, 말도 따라할 줄 아는 몬스터의 재롱에 밀레시안이 가볍게 미소지었다. 잇몸이 훤히 들어나는 요란한 미소로 화답하는 사스콰치가 신이난듯 양손을 머리위로 들어올렸다.팔짱을 끼는 밀레시안이 피곤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설래설래 내저었다. 오늘 일진 사납네. 우렁차게 포효로 대답하는 사스콰치. 높게 치켜올린 두 주먹을 밀레시안의 정수리를 향해 정확하게 내리쳤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밀레시안이 서  있던 자리가 움푹 패이며 야광으로 빛나는 식물표본의 이파리들이 넓게 날리었다.










"라는거야"

"....."


"너무하지 않아?"

".....르르"


"...하아..."

"크르르르.."



1층으로 올라가기 무섭게 다시 내려오라는 연락을 맏은 마도학자들이 지금요? 벌써? 등의 호들갑으로 답신을 보낸지 십여분. 서둘러 우리를 준비해오겠다는 마도학자들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밀레시안은 적적함을 달래려는건지 변이된 사스콰치의 머리위에 걸터 앉았다. 무게로 따진다면 당장이라도 던져버리고도 남을 가벼운 무게의 밀레시안이지만 순식간에 상처투성이가 된 사스콰치는 분한 울음소리로 의미없는 대꾸를 할 뿐. 밀레시안도 별로 좋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건지 끊임없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기껏 취향에 맞춰서 만들어 가겠다니까 필요없다니, 그게 할 말이야? 물론 싫어할 수도 있어. 그럼 달지 않게라던가, 양을 작게해달라든가, 마음만으로 충분하다던가! 돌려이야기 할 수도 있잖아"


"....크..."


"물론! 귀찮아서 돌려이야기 하지도 않는다는거! 그래 나도 알지만!"


"크...!"


"그놈의 귀!!!"


"크아앙!!"


밀레시안의 언성이 높아지자 덩달아 높아진 사스콰치의 울음소리에 우리를 들고오던 마도학자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 쳤다. 리라로 사스콰치의 머리를 후려친 밀레시안이 짜증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미안해, 이제 죽었을꺼야. 아마도. 안죽었어도 일어나진 못하겠지만"

"그... 정말이죠?"

"뭣하면 확실하게 눈에 보이도록.."

"아,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표본이란 말이에요!"


잔뜩 겁을 먹었으면서도 마도학자들은 사스콰치의 광석의 표본을 포기 할 수 없다며 서로를 사스콰치쪽으로 떠밀었다. 엉거주춤하면서 최대한 접촉을 피하려는 마도학자들의 잔뜩 찡그린 모습. 어째 겁먹었다기보다는 닿는것을 꺼려하는 모습에 밀레시안은 한숨과 함께 턱을 괴였다. 언제쯤 끝나려나, 지루한 기다림을 계속하던중에 밀레시안의 눈에 종종거리는 로브자락이 들어왔다. 


"아, 저기.."


"아, 안돼요!"

"일어서지마세요!"

"끼야아악!"


별로 제압의 의미로 앉아있던것도 아니였는데 밀레시안의 움직임에 마도학자들은 금방이라도 변이된 사스콰치가 다시 완전부활 할 것 마냥 소란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몇몇은 울상을 지으며 스태프를 들이밀고 있는것이 사스콰치를 향한 건지 밀레시안을 향한건지.

밀레시안이 다시 자리에 앉고나서야 열걸음 밖으로 도망갔던 마도학자들이 다시 꾸물꾸물 모여들기 시작했다. 속태워서 뭐하랴, 어차피 일정도 다 캔슬된 터라 서두를 일도 없던 터였다. 깨지지 않는 광석을 두드리는 마도학자들을 구경하기나 할 뿐. 아무리 두드려도 금갈 기미도 없는 광성의 특수성에 마도학자들의 눈에 당황스러움이 떠올랐다.


"그거, 깨줄까요?"

"네? 아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그럼 그 끌은 나한테 주고 저기 저 마도학자좀 불러줄래요? 저기 작은 보라색"


밀레시안에게 끌을 넘겨주던 마도학자가 ***요? 하고 이름을 확인하며 어린마도학자를 가르켜보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분명 들어올때 소개받았던것 같지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파란 토끼가 헤이즐넛을 깔짝이던것에 정신이 팔려있었을뿐. 대답 대신 눈을 피하는 밀레시안은 신성력을 담아 끌을 찔러넣었다. 툭하고 떨어져내린 길쭉한 광석조각을 내밀자 마도학자는 그냥 손을 휘둘러 멀리있던 작은 마도학자를 불렀다. 


"아니면 다시부르면 되죠 뭐."


어깨를 으쓱하고서는 표본을 받아든 마도학자가 고개를 숙여보이고서는 다른 마도학자들에게로 걸어갔다. 종종거리며 다가오는 마도학자가 눈짓으로 무슨일이냐 묻지만 손으로 가르킨곳에는 사스콰치뿐. 밀레시안이 손을 흔들자 그제서야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가온 어린 마도학자가 밀레시안에게 말을 걸었다.


"밀레시안님?"


"이거 떨어트렸어요"

"네?"


가방속에서 초콜렛을 꺼내어 건내주자 마도학자는 모르는 물건이라는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간이동 마법사의 것이였나? 하고 손을 거두려는 밀레시안이 구겨진 리본을 보고서는 아아 하는 탄식을 내었다.


"미안, 이쪽이 아니라 이쪽"

"....앗! 내 초코렛!"


좁은 가방 안에있다보니 생각없이 꺼낸것이 화근이였다. 밀레시안의 구겨진 상자대신 잘 집어넣은 초코렛상자를 꺼내자 어린마도학자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쫑긋 거리는 기다란 귀가 귀엽게 팔락인다.


"감사합니다! 분명 토끼들 보고서를 작성할 때 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사라져서 정말 한참동안 찾았거든요."

"공간이동할 때 떨어트렸어요."

"아아, 그때였구나! 정말 고맙습니다. 겨우 만든 성공품인데 없어져서 정말 속상해 하고있었어요."


누가 토끼인건지 기쁨에 깡총깡총 뛰는 마도학자를 보자 밀레시안도 훈훈해졌는지 잘됬네요 하며 박수를 쳤다.


"무엇보다 토끼들이 초코렛을 먹은줄알고.. 그랬다간 여태까지 보고서가.. 야근이..  저 여기다가 이것저것 잔뜩 집어넣었거든요. 아니 애초에 이놈들은 토끼면 풀이나 먹고 살 것이지 왜 이런곳 까지 굴을 파고 들어와서는.."

"......"


진심으로 기쁜미소를 지으며 연신 초코렛을 보다 끌어안다 떨어트리기를 수차례. 마도학자는 무언가가 점점 연상되는건지 어두워지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마음의 병이 찌든 진심이 끊임없이 이어지는게 아무래도 버릇인 모양이였다.


"하다못해 식충식물이라도 뜯어먹을 것이지 몸에 좋은건 알아가지고... 이놈들은 말이죠 입도 고급이라 땅콩같은건 또 안먹어요. 꼭 고급 견과류만 골라서 먹는거 보고 이번에 지능지수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나오는 바람에 다음 연구는.."

"......어 저기.."


후후후 하고 낮게 웃던 마도학자가 퍼뜩 정신을 차린건지 머리를 붕붕 내저었다. 잠시 퀭해졌던 눈에 생기가 돌아오는것이 방금전의 어두운 미소는 아마도 사막의 신기루. 

여긴 습한 생태지구지만 아마도 그건 필리아의 신기루.


"핫, 제가 또 신세한탄을..! 아무튼 정말 고맙습니다 밀레시안님!"


그렇게 넘어가자는건지 마도학자는 다시금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밀레시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불쌍하게도 어린나에에. 밀레시안이 다른 한손에 든 초코렛상자를 다시 가방속에 우겨넣으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가방안에 억지로 들어간 탓인지 귀퉁이로 삐죽 널부러진 리본이 삐져나왔다.


"응, 잘 챙겨서 선물해요"

"....음...저.. 그리고 말인데요"


또 뭐가 남았던가? 밀레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마도학자는 조심스럽게 밀레시안의 가방을 가르켰다.


"혹시 포장지 필요하시면 좀 나누어드릴까요?"

"...아"

"...앗 그게 주제넘었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초코렛 벌써 준비하신거잖아요? 모처럼 발렌타인 데이인데..."


마법의 키워드가 들려서였을까 여기저기 퍼져있던 마도학자들이 뭐야뭐야 하는 소리를 내며 밀레시안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과연 큰 귀의 종족들. 남의 이야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서 모여든 엘프들이 하나 둘씩 새 상자와 포장지, 어느 리본이 어울릴 것인가를 두고 멋대로 토론을 시작하자 밀레시안은 난감한 미소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 나는 별로.."


"밀레시안님께는 노랑이 어울려"

"아니야 발렌타인은 레드지!!"

"다 비켜, 리화가 최고야"

"화이트가 그냥 화이트지 무슨 리얼이야"



"....왜 이세계 인간들은 내 의사는 물어보지 않는거지"


밀레시안이 대놓고 한숨을 쉬었지만 이미 토론모드로 들어간 학자들에게 그 말이 들릴리는 만무했다. 반짝이는 포장지. 물론 전투 전에 좀 거칠게 구겨넣어 찌그러지긴 했지만 내용물만 무사하다면 포장따위는 금방이다. 밀레시안도 잘 알고 있는 사실. 하지만 입을 삐죽내밀며 웃는건지 찡그리는건지 모를 애매한 표정을 짓는 밀레시안은 좀처럼 초코렛을 꺼낼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는..."


"고백은 쟁취하는 소녀의 것이에요"

"맞아요!"


망설이는 소녀를 눈치챈 것인지 어린마도학자는 불꽃이 튀는 눈으로 밀레시안의 손을 맞잡았다. 그냥 이번달은 남자로 환생할껄. 밀레시안이 시선을 피하자 주변에 모여든 엘프들은 힘을 불어넣으려는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부담스럽고 별로 필요없는 호의들. 하지만 이미 반쯤 마음이 넘어갔는지 잠금쇠를 만지작 거리는 밀레시안의 가슴속은 무언가의 욕구로 간질거리고 있었다.하는 말이 얄밉긴하지만 그 말이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서 라는것을 밀레시안도 잘 알고는 있기에, 단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디까지나 그렇게까지 챙길정도로 안좋아하는 것 뿐 사실은 있으면 한두조각씩 기분전환용으로 먹기는 한다. 

번거로운 것은 밀레시안이 수제품을 만드는걸 알고 있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임무가 떨어지면 나가야 하면서 바로 사용해야하는 크로스보우를 정비한다는 명목으로 일부러 게이트에 눌러앉아 있는것도 알고는 있었다. 물론 그놈의 귀찮음때문에 앞뒤 다잘라먹고 설명하지 않는게 문제였기에 눈치챈건 밀레시안이나 슈안정도 였지만. 밀레시안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살짝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그..."


활짝 웃는 엘프들이 어서 가자며 밀레시안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간편한 경갑옷에서 천옷으로 갈아입은 밀레시안을 발견한 공간이동 마법사가어머어머 하고 입을 가리며 자신이 더 부끄러운듯 발을 동동굴렀다. 손에는 예쁘게 새로 포장된 초코렛상자가. 

손바닥만한 그 리본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토론시계를 뒤집어가며 싸우는건지. 뭔가 정신적으로 지쳐버린 밀레시안을 보며 공간이동 마법사가 활짝 웃어보였다. 그래도 정말 예뻐요. 부럽네요. 상냥한 말과 함께 게이트를 연 밀레시안은 이제 막 떠오르려는 이웨카와 저물어가는 태양을 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곧장 필리아의 여관에서 씻고 게이트로 향하면 시간에 맞출수는 있을까, 그냥 벨바스트로 이동해서 거기서 씻을까 등의 생각을 하며 이제 막 생태지구에서 빠져나온 밀레시안이 사막으로 한걸음 내딛는 순간. 발 밑에서 어딘지모르게 부드러운것 같은 모래가 탐험가의 발을 이끌었다.


삑삑삑삑-


아니지? 라고 대꾸하고 싶은 밀레시안의 허리춤에서 선로드 콜트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건 아닌것 같아"


젖은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못한채 게이트로 귀환한 밀레시안은 피곤한지 눈을 비비며 혼잣말을 시작했다.


필리아로 이동하려는 찰나 일부러라고 생각할 정도로 완벽한 타이밍에 솟아오른 석관은 또 왜 두 개씩이나 찾아진건지, 설마 이 가여운 아이들을 사막에 두고 가진 않겠죠 라는 눈으로 밀레시안을 보면서 자기들은 근무지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일수 없다는 친위대들의 허리춤에 초코렛상자가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것을 밀레시안은 놓치지 않았다. 근무지 이탈로 다 밀고할꺼라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저마다 이벤트 준비를 위해 칼 퇴근을 외치는 그 열망어린 눈빛들. 


울며 겨자먹기로 탐색을 한 것을 본인의 업으로 삼고 사방팔방 제멋대로 길이 이쪽일 것 같다는 긿일은 엘프들을 억지로 이인용 말에 태워 말주인은 필리아까지 걸어가야 하는 기가막힌 탐험을 끝마치고 나서야 밀레시안은 겨우 손끝에 물을 묻힐수 있었다. 거기에 왠지오늘따라 여분이 없는 밀랍날개를 대신해 슈안에게 연락을 보내보아도 묵묵부답. 지금쯤 다들 자는시간이라는걸 깨닫고 대륙이동을 하고 문게이트를 타고 벨바스트로 이동하여 밤낮없이 흑사장을 배회하는 수정골렘을 지나 게이트의 숙소 근처에 도착한것은 어느덧 희미한 새벽. 아직 이웨카가 저물지는 않았지만 울레이드 숲의 버섯이 사라질 무렵의 애매한 시간대였다.


왜 이 고생을 해 가면서 하는 후회가 밀레시안의 목끝까지 차올랐다. 그렇다고 주기싫은건 안지만. 일단 주고는 싶지만! 어딘지 모르게 비뚤어진 자존심에 입을 툴툴거리게 되는것을 감출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직접건내주자니 그 나른한 얼굴로 필요없다니까 라고 말할것이 불보듯 뻔한 일. 

당장이라도 숙소에 기어들어가 차가울지언정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이고 싶지만 밀레시안은 품 속의 초코렛 상자위로 손을 올려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쓸데없이 시끄러웠지만 리본을 골라주던 마도학자들, 근무지 이탈을 무릅쓰고 초코렛을 만들던 근위대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반항의 포효를 멈추지 않았던 변이된 사스콰치. 모두 나에게 힘을줘.'


누가보면 한밤중의 원맨쇼이자 새로운 페르소나의 연습이라 생각할정도로 과장된 감정이입으로 마음을 다진 밀레시안이 눈을 떴다. 그래, 잠깐만 들어가서 주고 바로 나오자. 

넘고, 들어가서 놔두고 나온다. 그렇게 심플한 월담계획을 세운 밀레시안이 가볍게 게이트의 벽에 발을 딛었다. 두번, 혹든 세번. 짧고 정확하게 도약을 거듭하며 숙소의 열린 창문으로 쏙하고 들어가버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훌륭한 밤손님. 그리고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어둠속의 인영이 어색한 걸음걸이로 밀레시안이 서있던 자리까지 걸어나왔다.


"....조장님..?"


야간 순찰을 돌던 로간의 두 눈이 심하게 요동쳤다.














카즈윈의 방은 가장 꼭대기인 4층, 오른쪽 창가를 차지하는 ㄴ자의 기다란 방. 발끝을 세운채 날아가듯 복도를 지나간 밀레시안이 복도끝의 창문으로 슬쩍 몸을 내밀었다. 슈안에게 들킨다면 비행금지라고 한 소리 듣겠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없을것이라 확신한 밀레시안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허공을 향해 발끝을 내딛었다. 가볍게 부서지는 빛의 가루들이 동이 터오르기 전의 가장 깊은 어둠에 속에서 부서져 내렸다. 숨 쉬는 소리까지 조심스러운 밀레시안은 창문밖에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내쉬지 않은채 조심스럽게 창문을 잡아 당겼다.


두꺼운 커텐을 친 카즈윈의 방안에 희미한 새벽빛과 함께 찬 공기가 스며들어왔다. 빨리빨리. 마음이 조급해진 밀레시안이 창틀을 딛고 몸을 밀어넣으며 미끄러지듯 문을 닫는다. 흔들리던 커텐이 멈추고 나서야 완전한 어둠을 되찾은 방안의 공기가 따뜻하게 밀레시안의 뺨을 감싼다. 

낯익은 구조와 반갑기 까지한 향기, 방의 주인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있는건지 구부러진 방 안쪽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밀레시안은 잘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책상위에 놓여진 은빛 크로스 보우를 향해 걸어갔다. 


고대의 비밀을 복원한 기사단 전투조장의 무기. 고서에서 복원한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잘 손질된 은색의 석궁은 어둠속에서도 광택을 잃지 않은채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하나하나 세심하게 조율된 부품마다느껴지는 주인의 정성. 밀레시안은 이쯤에 두면 아침에 발견하기 쉽겠다 생각하며 품속에 넣어두었던 상자를 꺼내어 들었다.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리와 함께 크로스보우의 옆에 상자가 놓여지려는 찰나 밀레시안의 움직임에 맞춰 스며드는 그림자. 밀레시안의 목 앞으로 서늘한 칼날의 냉기가 스쳐지나갔다.




"누구냐"




잠에서 막 깨어난건지 조금 잠긴듯한 허스키한 목소리가 밀레시안의 머리 뒤에서 속삭였다. 따스했던 방안의 공기가 쇳냄새에 차랍게 얼어붙는다. 밀레시안이 돌아보기도 전에 목의 급소에 닿은 단검이 뜨겁게 느껴졌다. 위협으로 끝나는게 아니다. 살짝 파고드는 정도는 신경쓰지 않는 거친 손놀림. 검푸른 칼날을 앞세워 움직임을 막은 뒤 카즈윈의 손이 강한 힘으로 밀레시안의 손목을 내리쳤다. 힘없이 떨어지는 상자를 눈으로 쫓을 새도 없이에 그대로 팔을 꺾어 등뒤에서 밀어붙이는 동시에 발목으로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순식간에 물흐르듯이 일어난 일이였다. 균형을 잃은 밀레시안은 그대로 카즈윈의 책상위로 고꾸라진채 제압당하며 낮은 신음소리를 터트렸다. 희미하게 피냄새가 묻어난다.


"...카..!"


제압이 끝났는데도 벗어냐려는듯이 바르작거리는 움직임에 카즈윈은 긴장감을 풀지 않은채 검을 역수로 고쳐잡았다. 내리치는 것으로 동작을 최소화하는 숙련자의 움직임. 어둠속에서 빛나지도 않는 칼 끝이 살의을 싣고 쏘아지듯 내려온다. 누군진 몰라도 알반기사단에 잠입을 성공한 인물이라는 것 만으로도 카즈윈이 판단하는 위험도는 충분했다. 심문을 해야할지 아니면 무언갈 준비하기전에 그냥 죽여버릴지를 고민하는건은 나중의 일. 일단 전투불능정도로 만들어 두려는 찰나 찰나 카즈윈의 허리밑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즈윈..."

"...?"


"아프다구요."


못 알아 들을리가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들려올리 없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카즈윈은 좀처럼 쥐어누른 손아귀의 힘을 빼지 않는다. 커튼사이로 희미하게 동이 터오는 빛이 새어들어오지만 얼굴을 확인하기에 충분하지는 않았다. 책상위에 놓인 등불과 손에 쥔 침입자의 얼굴 옆에 꽂힌 칼날을 번갈아 보던 카즈윈이 누르는 힘에 체중을 더했다. 꽉눌린 가슴에서 새어나오는 짧고 가냘픈 비명소리가 짜부러진 병아리마냥 짧게 울려퍼진다.

꼼짝없이 움직이지 못하던 찰나에 성인 남성의 무게까지 더해지자 밀레시안은 더욱 죽을 맛으로 바르작 거리기시작했다. 등불의 스위치를 올리자 은은한 오렌지빛 광원이 책상위를 밝혔다.


".......하으.."


"...너....."

....저리 좀.... 비켜봐요..."


밀레시안의 얼굴을 확인한 카즈윈이 얼빠진 목소리로 잡고있던 손을 놓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찍어누르던 힘은 사라지자 사정없이 걷어차였던 발목이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지져내렸다. 눌렸던 폐가 급하게 공기를 들이마시자 콜록거리는 소리와 함께 먼지를 뱉어낸다. 카즈윈이 혼란스러운듯 검과 등불 그리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안에 질척거리는 느낌이 선명하다


".....여기서 뭘 하는거야"












책상아래에 몸을 기대어 앉는 밀레시안의 모습에 카즈윈이 밀레시안을 부르며 자세를 낮추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으로도 밀레시안의 고통이 느껴지는건지 카즈윈의 움직임에는 여유가 느껴지지 않는다. 눌렸던 가슴이 많이 아팠는지 한손을 가슴위에 얹은채 가만가만 숨을 고르는 밀레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즈윈과 시선을 맞추었다. 책상아래에 주저앉아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숨소리를 내는 밀레시안의 가슴팍으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허"

".....그..."


질척거리는 핏자국을 따라 더듬어 올라가다가 목근처 따끔한 곳에서 밀레시안의 손이 멈추었다. 동시에 어이없다는듯 공허한 한숨소리가 카즈윈을 질책한다. 카즈윈이 멋쩍은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분명 사태가 심각하지만 카즈윈도 억울하긴 마찬가지.



"왜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으로 들어온건지 모르겠어."


"....지금 그걸 사과라고.."



책상아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곳에 앉아있었기에 어떤 표정인지 볼 수 없지만 말을 하지 않는 밀레시안의 반응이 카즈윈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곁눈질로 밀레시안을 훔쳐보던 카즈윈이 자그맣게 시간이라면 내일도 있고.. 하고 덧붙이고 나서야 밀레시안쪽에서 바르작 거리는 움직임소리가 들려왔다. 약간의 원망, 약간의 분노 그리고 자업자득인것을 알고 있기에 따지지 못하는 억울함이 두 눈 가득하다.


사실 카즈윈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당연한 결과였다. 

밀레시안에겐 좀 너그러워 지긴 했지만 알반기사단은 엄연한 비밀 집단. 거기에 거대한 종교단체이기도 했다. 수없는 세월동안 비밀리에 교리를 지켜오던 그곳에서 정식 기사, 들 중에서 전투조를 이끄는 헤루인의 조장. 일반적인 침입자였으면 가장먼저 기피해야할 1순위 타겟인것은 물론이고 방에 침입한 이 허술한 밤손님에게 있어서는 사과는 커녕 바로 목을 그어버리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일이였다. 


하지만 억울한것은 억울한거고 얻어맞은것은 얻어맞은 일. 

밀레시안은 필터링에 걸리지 않을 말을 찾아 한참동안을 목끝을 억눌렀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것에 초초해진 카즈윈이 입을 열려고 하지만 손가락을 들어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말라는 사인을 보낸다. 내밀어진 손 아래로 다섯가닥으로 나뉜 손자국이 선명했다. 분명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  아직 통증이 남은건지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부자연스럽게 체중을 싣지 않은 발목이 카즈윈 쪽으로 뻗어져 있었다. 정확하게 관절을 걷어차인 발목은 이따금씩 경련처럼 움찔거리며 통증을 호소하고 있지만 아파해야할 밀레시안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 열기를 반복. 달싹거리면서도 끝끝내 말을 걸어주지 않는것이 마치 보이지 않는 두터운 벽을 사이에 둔 기분이였다. 




"...미.."


카즈윈이 자신없는 어투로 사과를 건내었다. 


"....미안해"


이 방이 이렇게 더웠던가, 나는 왜 사과를 하고 있는가. 카즈윈은 사막의 한 가운데 떨어진것 같은 갈증을 느끼며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한밤중의 봉변에 정신이 없는지 습관적으로 입가를 쓸어내리는 카즈윈은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였다. 슬쩍 밀레시안의 눈치를 살핀 수리부엉이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밀레시안과 눈마추어 쪼그려앉았다.


"당신인줄 몰랐어"


그 말과 함께 딱 한 발자국, 발을 내딛기 무섭게 카즈윈의 발 밑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어둠속에서 튀어나간 작고 둥그스름한 검은것이 책상 다리에 부딫치며 카펫위로 굴러간다. 작은 소리였지만 고요한 방안에서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리는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바닥으로 쏠렸다. 카즈윈이 밟고선 포장지가 오렌지빛 등불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특이한 점이라면 감싸고 있던 상자가 지나치게 납작해져 있다는것 그리고 내용물로 보이는 검은 부스러기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아직 자신이 밟은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가가지 않는것인지 카즈윈은 느릿한 움직임으로 발을 옆으로 비스듬이 치우며 완전히 내용물을 뭉게버린다. 바스락 거리는 포장지의 소리에 밀레시안의 어깨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


"...?"


좁은 공간안에 금새 가득차오른 피비린내와 먼지 냄새 속 어딘가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달콤한 내음이 섞여들었다.


".......그"


"깨워서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 내 볼일이 사라진 것 같으니까.."

"...어떤 볼 일.. 아 아니다.. 지금 알겠어."


"별로. 말하고 싶지가 않아요"


"밀레시안.."


카즈윈은 자신이 밟았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는지 일어나려는 밀레시안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여기서 나가고싶어요. 라는 말을 못꺼내게 하기위해 카즈윈은 필사적으로 말꼬리를 잡아 다른곳으로 이끌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내일 말해요"


밀레시안의 특유의 회복력으로 눈에 띄던 부상은 이미 아문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카즈윈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카즈윈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밀레시안의 발치에 검은 광택을 내는 구슬같은것이 등불에 반짝이고 있었다. 아까부터 피어오르던 달콤한 향기. 초코렛 조각을 집어든 카즈윈이 망므속으로 아튼시미니를 찾으며 밀레시안에게 물었다.


"볼 일 이라는거 이거야?"


아마도 정답. 밀레시안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카즈윈의 손에 들린 파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볍게 피한 카즈윈이 잽싸게 초코렛 조각을 입에 던져 넣고는 빈손으로 뻗어오는 손을 맞잡았다. 어깨와 손을 잡힌채 오도가도 못하게 된 밀레시안이 떨어진거잖아요 하고 볼멘소리를 하자 손을 끌어당긴 카즈윈이 달콤한 향기가 나는 입을 맞추며 짤막하게 감상을 늘어놓았다.


"필요없다고 말했었는데"


주여. 잡혀있던 밀레시안의 손이 강하게 카즈윈을 뿌리치는 것과 동시에 강하게 바람을 가른다. 그대로 클린 히트로 카즈윈의 가슴을 격타한 밀레시안이 조용히 남길말은 그 것뿐이에요? 라고 물었다. 겨우 입을 틀어막아 참사를 면한 카즈윈이 또 뭘 잘못했냐는듯 인상을 찌푸린다. 내 이 얼굴을 보기위해 그 난리를 겪은것인가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린 밀레시안이 나지막하게 카즈윈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얼굴을 안 친 것만해도 감사히 여겨요"


"......고마워."


카즈윈은 진심으로 말하는 밀레시안이 향해 짤막한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자다가 일어나서 맞는다. 뭔지 모르겠지만 초코렛냄새가 카펫을 망친것은 분명한 새벽. 밀레시안이 카즈윈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흔들리는 남색 눈동자가 오렌지색 등불에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었다. 시선을 피하지 않는 당당한 눈동자에 얄밉고 서운함이 가득밀려오는 기분이였다. 밀레시안이 눈을 감으며 멱살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었다. 스르륵 무너지는 밀레시안을 받쳐안은 카즈윈이 살짝 긴장을 하며 다른 한쪽의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두번은 맞고싶지 않은듯한 눈치였다.


"그런 얼굴 보고싶지 않아서 몰래 들어온건데.."

"...내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아서라는거야?"


"지금 그 얼굴이요. 귀찮아하는 얼굴. 한심해 하는 얼굴."


밀레시안이 카즈윈을 콱하고 끌어안자 아주 작은 신음소리가 카즈윈의 목울대를 울린다. 그것으로는 모자랐는지 밀레시안은 뺨을 꾹꾹 눌러 무표정한 입매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어거지로 삐딱한 미소를 지은 카즈윈이 고개를 돌려 밀레시안의 손가락에 입술을 갖다대었다. 이제 그만 용서해줘, 말없이 전해지는 달콤한 냄새가 얕은 숨에 배어나왔다.


"딱히 그런표정을 지으려고 한 건 아닌데"

"그런 얼굴이 있어요. 미간이라던가 뺨이라던가 눈가가 조금씩 달라지는 얼굴. 오늘 아침에도 그랬고, 방금도.."


밀레시안이 카즈윈의 손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카즈윈의 얼굴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뺨을 쓰다듬기도 하고 눈가를 매만지기도 하다가 슬쩍 꼬집어 늘리려는 시도도 간간히 엿보인다. 못됬어, 나빴어 등등 뭔가 불만을 투덜거리면서 입과 손이 바쁜 밀레시안을 올려다보던 카즈윈이 화가 풀릴때까지 내버려 두려는건지 잠시 눈을 감았다. 


"네가 무슨 얼굴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어. 내가 내 얼굴을 볼 수는 없으니까"

"이해 할꺼라고 기대도 안해요."

"하지만 네가 싫어한다면, 고쳐볼께. 미안해. 널 상처입힐 생각은 없었어"


솔직한 사과에 밀레시안의 손이 가만히 멈춰섰다. 평소에는 평범한 말도 다 잘라먹으면서 이럴땐 또 상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살짝 눈을 떠 분위기를 살펴보는 카즈윈의 손이 밀레시안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잔뜩 입을 내민채 뾰로퉁한 얼굴한 얼굴이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는 분위기. 카즈윈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승부수를 띄우며 밀레시안을 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제 키스해줄래?"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뜬금없는 부탁에 밀레시안은 얄짤없이 카즈윈의 입술을 때린다. 다행히 가슴을 후려쳤을때와는 차원이 다른 가벼운 투닥거림에 카즈윈은 입술로 밀레시안의 손을 물었다. 훑어내리는 손가락에서 희미하게 피냄새가 베어나왔다. 요 입, 요 입! 오늘 고생한 원인! 하며 카즈윈을 괴롭히던 밀레시안이 이윽고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눈가에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밀레시안의 입술에 카즈윈이 승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뭔가 진듯한 느낌.

밀레시안이 석연치 않아하는 얼굴로 내려다보자 카즈윈은 얼른 다음 짜증을 부리기 전에 재우겠다는듯 밀레시안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섞이는 숨결속에 아직 쌉싸름한 카카오의 향기가 풍겨왔다.


"해피 발렌타인. 밀레시안"


입술을 뗀 카즈윈이 작게 고마워, 맛있었어. 하고 속삭이며 밀레시안의 뺨에 코를 부벼왔다.

정말이지 얄미울정도로 분위기를 잘타는 사람, 그렇게 투덜거린 밀레시안이 하는수 없다는 듯이 카즈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따끈한 온기에 맞닿은 달콤한 향기, 그리운 숨소리까지. 이웨카의 기운이 사라지고 나서야 다사다난했던 발렌타인데이가 겨우 마무리 되었다.







































"라는 불법 침입신고를 받았습니다만, 특별조 조장님. 헤루인조 조장님"

"........"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