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

톨비밀레)사막의 등불

Tecla 2018. 7. 18. 16:06


"가끔은 네 이름값 좀 하는 게 어때?"


"뭐?"


시작은 아주 단순한 입씨름이었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말싸움 상대가 상대였던 만큼 그 말싸움이라는 것이 동네 아이들끼리의 입씨름은 아니었지만 밀레시안에게는 이 또한 대충 어떻게든 지나갈 사소한 산들바람 같은 일에 불과했다.

에레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시네이드도 그런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밀레시안이 라흐왕성에 체류하고 있는 이 몇 개월동안 에레원의 잔소리는 이미 일상적인 아침 의례가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밀레시안이 라흐에 굴러들어온 것은 상기했다시피 몇 달 전의 일.

여전히 신출귀몰한 등장으로 라흐에 나타난 밀레시안은 근위병들의 절도 있는 경례를 차례차례 무시해가며 에레원의 집무실로 걸어들어갔다.

노크도 없이 이름을 밝히는 일 없이, 무뢰한처럼 덜컥 나타난 왕실의 귀한 손님이자 에레원의 친구는 한 나라의 여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 좀 먹여줘"

"지하에 글루아스 있어. 가서 내 이름대고 밥먹어."


"나 좀 재워줘."

"성에 빈 방 많아. 적당히 메이드 하나 붙잡아서 내 이름대고 안내하라 그래."


"나 좀 쓰다듬어줘"

".....밀레시안."


에레원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 놓고 고개를 돌렸다.

강렬한 빛으로 불타오르는 연보라빛 눈동자,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눈가에는 오늘따라 한층 더 퀭해보이는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고 사랑스럽게 오물거리는 작은 입술에는 형용하지 못할 사악한 말이 맴돌고 있었다.

에레원이 깃펜을 내려놓은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매만지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화를 참고 있는 것이 분명한 제스쳐였다.


귀를 막아야 할까 눈을 감아야 할까 근위병들의 눈빛이 바쁘게 움직였다.

비공식적인 방문과 비공식적인 대화이기에 이 일이 기록될 일은 없었지만 시네이드는 혹여나 여왕의 품위가 무너질까 걱정하고 있었다.

비서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밀레시안에게 향했지만 이내 그 시선은 근위병들의 얼굴로 옮겨가 그들의 얼굴을 외우기 시작했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영웅을 통제하려고 하기보다는 그 주변의 입들을 단속하는게 더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근위병들은 시네이드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빛을 꾹 감았다 뜨고는 냉철하고 이지적인 표정을 연기했다. 이성적인 눈, 매서운 눈, 날카로운 눈, 개중에는 또렷하지 못한 순진무구한 눈의 근위병도 있었지만 근위병이라고 해서 항상 딱딱한 인상을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지, 차례대로 8명의 근위병을 살펴보던 시네이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걸렸구나. 근위병들은 언젠가 걸릴것 같았던 무방비상태의 눈빛을 가진 근위병을 외면했다.

그는 방금 입에 넣은 간식을 통채로 삼키며 작게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시네이드가 그의 이름을 확인하려는 순간 에레원의 깊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마침내 여왕이 하나의 고개를 넘어선 모양이었다.

바로 그겁니다 폐하, 언제 어느때라도 평정심을 유지하시고.. 시네이드는 마음속 깊이 여왕의 성장을 기뻐하며 근위병에게 향하고 있던 시선을 돌려 에레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비서관의 기쁨은 여왕의 표정앞에서 덧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여왕은 혀끝으로 매말라가는 입술을 축인뒤 45도 각도로 고개를 꺾어 밀레시안을 흘겨보았다.

폐하, 쌍시옷 소리만은 안됩니다. 집무실에 여기저기에서 마른 침들이 꿀떡꿀떡 넘어가는 가운데 어린 여왕은 잠시 눈을 감았다 가 뜨며 밀레시안을 향해 손짓했다.

낭창하게 휘어지는 새하얀 손가락 끝에는 담뱃대 한 자루 정도 들려있을 것같은 피곤함이 어려있었다.


"너랑 노닥거릴 시간 별로 없으니까 빨리 말해"


서러워라. 밀레시안은 냉정하기 그지없는 친우의 말에 최대한 처량하게 눈썹을 늘어트리며 입을 삐죽였다.

여왕은 손을 좌우로 흔들며 말 안할거면 얼른 나가라는 축객령을 내리고 있었다.

근위병들이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저 영웅이 우리가 나가달라고 부탁하면 나가줄까? 애초에 인사에 대꾸도 안하고 벌컥 들어온 불청객이었다. 밀레시안은 순순히 쫓겨날 생각이 없는지 에레원을 향해 슬픈 표정을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나 차였어."


에레원은 무의식중으로 루 라바다에게 까였던 밀레시안의 모습을 떠올렸다.

여왕은 아주 조금 온화해진 표정이 되었고 속으로는 자신의 똑똑한 기억력을 칭찬했다.

밀레시안은 여왕의 표정은 눈치채지 못한채 뒤이어 말했다.


"쓰다듬어 달라는 말은 취소할게. 하지만 며칠 여기에서.."

"좋아."


여왕은 밀레시안의 말을 자르고 손짓했다.

얼마든지 있어도 좋아. 그러니까 얼른 나가. 여왕은 하해와 같은 은혜를 배풀어 영웅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건 매우 큰 실수였다.


이웨카가 라데카에게 한번 따라잡히고 라데카가 이웨카를 추월했하고 나서야 에레원은 밀레시안에게 말한 얼마든지라는 말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았다.

영원을 사는 영웅에게 얼마든지라는 말은 에레원의 임기 시작부터 끝날때까지라는 말과 다름이 없는 이야기였다.

먹고 자고, 가끔 정원에서 넋을 놓고 앉아있고. 알핀과 근위병들, 메이드와 글루아스에 이르기까지 에레원이 보고받는 시네이드의 문서 목록에는 어느새 당연하다는 듯이 밀레시안의 동향에 관한 이야기가 추가되어 있었다.

일이 늘어난 것이었다. 사태를 수집하기 위해 에레원은 밀레시안을 갈구기 시작했지만 이미 늦은일이었다.

밀레시안이 배째라는 식으로 나왔기 떄문이었다.


"진짜 째버리면..?"

"폐하.."


하해가 말라붙은 에레원의 자비심에 시네이드는 머리짚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에레원은 진지하게 농담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근위병들은 여왕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집무실 안에서 툭 하고 내뱉어진 여왕의 농담은 그것으로 끝날것이라 생각했지만 시네이드는 뜻밖의 인물들에게서 다시한번 그 농담을 들을 수 있었다. 있지 있지, 너도 봤어? 시네이드는 그레이트홀을 청소하는 메이드들의 잡담에 걸음을 멈춰섰다.


"응응, 나도 봤어. 밀레시안님의 등말이지?"

"그렇다니까? 어휴, 항상 어린모습으로만 나타나셔서 잘 몰랐는데 그렇게 큰 상처가 있을줄이야."

"그러게나 말이야. 배에도 똑같은 상처가 남아있다며? 혹시 용의 발톱같은거에 꿰뚫리신 걸까?"

"어쩌면 뱀의 송곳니라던가?"

"혹시 그 소문이 사실인지도 몰라,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글쎄 에레원 여왕님이.."


"거기..,"


시네이드가 말을 끊자 메이드들은 양떼같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메이드들을 추궁하면서도 시네이드는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밀레시안의 등이 어찌되었건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 흉터가 여왕의 흠집이 되는 것은 다른이야기였다. 어떻게든 쫓아내야겠어. 

여왕은 비서관의 의견에 동의했고 밀레시안에게는 비밀임무 지령서가 전달되었다.

밀레시안은 귀찮아 하면서도 거래조건을 잊지 않았다.


"이거 하면 한 달간은 잔소리 안하는걸로."

"열흘 정도는 생략하겠습니다."


시네이드는 누구때문에 아침조회시간이 10분 늘어났다고 생각하는 거냐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싼값에 지하수로를 토벌할 수 있다는 점 하나만을 생각하며 말을 아꼈다.

밀레시안은 그날 새벽 일찍 지하수로로 들어갔다.

그리고 영웅은 저녁식사 시간에 맞춰서 방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옷을 알아 입을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귀환이었다.







어려운 임무로 밀레시안을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여왕과 비서관은 다른 방법을 궁리해야만 했다.

여왕은 다른 지역의 시찰임무를 맡기기도 했고 글루아스의 보조요리사로 일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연회장에서 악단일을 시켰고, 일일 시종체험도 시켜보았다. 일거리를 줘보기도 했고 부담스러운 임무를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허드렛일부터 그림자 세계의 토벌까지, 쓸데없이 유능하고 다재다능한 그림자 영웅은 언제고 밥시간만 되면 제깍제깍 일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왕성의 한구석에 늘어져있기를 반복했다.

밀레시안은 아주 유능했지만 불성실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영웅의 무기력증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여왕은 말했다.


"가끔은 네 이름값 좀 하는 게 어때?"


"....뭐?"


시작은 아주 단순한 입씨름이었다.

하지만 밀레시안은 아주 오래간만에 한 대 얻어맞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에레원에게 되물었다.

언제나 나른하게 그래그래 하고 엎어져 있던 밀레시안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올렸기 때문에 에레원은 약간의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지만 에레원은 밀레시안에 대한 신뢰로 그 감정을 억누르며 새침하게 빈정거렸다.


"계속 이렇게 누워만 있지 말고 나가서 일거리라도 찾아보란 말이야. 너가 좋아하는 아르바이트라도 하던가, 아니면 평소처럼 뭔가 정보라도 찾아다니던가."

"......."


"내가 널 챙겨주는거야 어렵지 않지만, 확실하게 말하자면 너도 좀 껄끄럽잖아. 네가 나에게 검을 맹세한 기사라면 몰라도.."

"..검에 대한 맹세....?"

"뭐.. 뭐야..? 네가 바란다면 작위야 얼마든지 내려줄 수 있어. 하지만 네가 원하는게 정말 그런거야? 아니잖아?"


에레원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는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화난거 아니지? 어린 여왕은 아주 작게 속삭였다. 밀레시안은 그녀의 불안감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화난거 아니야."


그럼 왜 벌써 나가려는건데? 에레원은 저가 쫓아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말이 너무 심했나? 밀레시안은 에레원을 안심시키려는 건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혀왔다.

밀레시안은 다정하게 손을 뻗어 경직된 에레원이 뺨을 손가락등으로 쓸어내렸다.


"화난 거 아니야. 잠깐 뭐가 생각나서 그래."


밀레시안은 나중에 또 놀러올께. 하고 속삭였다.

에레원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밀레시안은 에레원을 향해 새끼 손가락을 내밀어보였다.


"자. 나는 언제든지 네가 부르면 다시 올테니까."


밀레시안과 손가락을 걸고 나서야 에레원은 안심된 표정이 되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곧 새로촘하게 눈을 흘기며 밀레시안을 쏘아보았다.


"애도 아니고, 손가락은 왜 걸어?"


밀레시안은 웃음지었다. 



밀레시안이 떠날 채비를 마치자 여왕님은 몸소 문게이트까지 마중을 나왔다.

어딜간다던가 뭘 할꺼라든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밀레시안은 간단한 안부인사만을 남기며 문게이트 위에 올라섰다.

에레원이 그래, 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밀레시안의 모습은 달빛에 녹아들며 사라졌다.

들이닥쳤을 때처럼 미련없는 퇴장이었다.

에레원은 흔들어보지도 못한 손을 어정쩡하게 내리며 뒤늦게 잘가. 라고 속삭였다. 

쇠사슬에 묶인 달의 조각이 허공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에레원은 자유롭게 떠나버린 영웅에게 약간의 야속함을 느끼며 별이 떠난 하늘을 바라보았다.

연보라빛 새벽 하늘이 걷히고 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시네이드"


시네이드가 시간을 대답했다.

에레원은 겨우 시선을 땅으로 내리고는 자신이 해야할 일정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주 조금만, 지금은 아주 잠시만.

에레원이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기분으로, 여왕은 자신의 손을 감싸쥐었다.

짧은 기도를 마친 여왕은 숄을 추스려 올리고는 고갯짓으로 왕성을 가리켰다.

그녀의 충실한 비서관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여왕의 뒤를 따라 성으로 돌아갔다.







라흐의 왕성을 떠난 밀레시안이 도착한 곳은 라인알트,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문게이트에 내려선 밀레시안은 어딘지 아련한 눈으로 황토빛 황무지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러하듯 라인알트는 조용했고 밀레시안은 이 적막함을 사랑했다.

바람과 녹슨 쇠지레의 냄새, 아침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눅눅한 공기 속에 경계심 어린 작은 코볼트의 눈빛이 느껴졌다.

밀레시안은 코볼트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처럼 태연히 라인알트를 걸어나갔다.

곤봉이며 곡괭이, 개중에는 맨손으로 다니는 코볼트도 있었지만 어느하나 섣부르게 밀레시안에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적막했지만 긴장감이 가득했다.

밀레시안은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같은 라인알트의 침묵이 자신이 지나온 여정들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아주 많이 노력했지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캐내어진 것은 아름다웠지만 그 자리는 황폐했다.

공허한 침묵은 많은 시선을 담고 있었다.

사방이 적이었고 언제 어디서 공격이 들어올지 몰라 두려워해야만 했다.

구원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지 거친 대지 어딘가에 아름다운 보석이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랑했었다. 그리고 지쳐버렸었다.

떠나기로 마음을 먹어 길을 걸었지만 이 붉은 대지는 끝없이 이어져만갔다.

하룻밤을 꼬박 걸어도 푸른 초원이 보이지 않아 절망했었다.

어린 여행자의 걸음앞에서 황량한 가이레흐의 대지는 너무나도 가혹한 여정길이었다.


지금은 별로 그렇지도 않지만.


밀레시안은 성큼성큼 넓어진 보폭으로 빠르게 라인알트를 빠져나왔다.

반호르의 문게이트가 있지만 굳이 라인알트 내부의 문게이트에서 내린것은 이 풍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태양이 제법 높은 위치까지 떠올라 있었다. 날이 밝고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흙이 매마르는 것이 느껴지는 가운데 발 아래에서는 버석거리는 모래알갱이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밀레시안은 흙에서 나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바위절벽의 가장자리로 빠져나왔다.

멀지 않은 곳에 또다른 달의 조각이 떠올라 있었다.

오른쪽은 용의 유적지였고 왼쪽은 꿈꾸며 잠든 마을, 반호르로 향하는 길.

밀레시안은 갈림길의 앞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있자니 가슴이 떨려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검붉게 물들어버린 대지와는 달리 하늘은 눈이 부시게 파랗고 또 청량했다

밀레시안은 그 대비가 마음에 들었다.

그 색깔들은 밀레시안과 여정과 닮아있는 동시에 그의 것이었기 떄문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은 그를 추억하기에 아주 적합했다.


라인알트와 반호르가 만나는 삼거리, 그 곳은 밀레시안과 그가 처음 만난 장소였다.

여정의 시작은 여기, 이 장소. 당신과 만나고 당신의 이름을 들었던, 당신과 처음 손을 잡았던 그 곳.

밀레시안은 자신의 머리 위로 손을 뻗어 두어번 허공을 쓰다듬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은 손을 내려다보고는 왼쪽으로 몸을 돌렸다.





거두절미하고,

밀레시안은 반호르의 길모어 영감을 찾아갔다.

밀레시안이 말을 걸기도 전부터 길모어는 이미 뿔난 눈매로 밀레시안을 흘겨보고 있었다.

길모어의 시선은 먼산을 향해 있었지만 밀레시안은 이미 그가 아이데른과 자신이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길모어는 물건을 사지 않을거라면 괜히 귀찮게 하지 말라며 밀레시안을 쫓아내었다.

밀레시안은 쓰게 웃었지만 이내 애교섞인 말투로 그러지 말고 이것좀 봐주시라며 살짝 길모어에게 다가섰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자그마한 키트묶음이었다. 풍등을 만들 때 썼던 쟤료들이 한데 모인 키트 안에는

얇은 살대와 십자모양의 살대, 그리고 약간의 종이와 접착제 따위가 들어있었다.

길모어는 누군가가 정성들여 기획한 키트의 구성품에 관심을 보였다.

밀레시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길모어에게 아부를 떨기 시작했다.


"아이데른 영감님이 그러는데 금속에 관한 도면은 자신있지만 나무를 다루는 것은 길모어 영감님이 한 수 위라던데요."


책략이라 하기엔 조잡했고 순수한 칭찬이라고 하기에는 과장이 심했다.

실제로 밀레시안과 아이데른이 나눈 대화는 이런 자질구레한 것은 길모어 영감이 더 잘 안다는 내용의 짦은 대화였지만 밀레시안은 이제 이런정도의 아부는 숨쉬듯이 지어낼 수 있었다.

스승이 얼마나 잘났는지 얼굴을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밀레시안은 착실하게 배운 바를 실천했다.

길모어는 답지 않은 짓을 한다는듯 밀레시안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밀레시안은 뻔뻔하게 얼굴을 굳히고 본론을 꺼내었다.


"이걸 다량으로 만들 수 있는 도면이 필요해요. 되도록 튼튼하게요."

"얼마나 튼튼하게?"


길모어는 못이기는척 키트를 받아들고는 작업대에 가져갔다.

조잡한 키트의 부속품은 그의 손에서 낱개의 단위로 분해되어갔다. 길모어는 능숙하게 살대들을 늘어놓은 뒤 완성된 물건의 모습을 상상했다.

분석을 마치고 도면에 옮기기 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길모어는 하고싶은 것이 무엇인지부터 물어왔다.


"일단 사막에 갈건데.."

"그럼 습기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


밀레시안은 이것은 아주 먼 곳으로 보내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길모어는 날려보내는 용도라면 이 중급이상의 장작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대답했다.

밀레시안은 중급장작을 사용한 풍등을 본적이 있다며 더 튼튼해야한다고 요구했다.

길모어는 그런 전문적인 것은 자신에게 말해도 소용없다고 투덜거렸지만 그의 손은 착실하게 무언가를 덧그리고 있었다.

길모어는 연료통의 크기를 계산하며 얼마나 사용할 것인지 물었다.


"좀 오랫동안 날려보내야 해요."

"연료에 관한건연금술사 놈들에게 말해."


"시간은 한.. 몇백년정도? 아, 과거방향이긴 한데.."


밀레시안은 흘러내린 안경 너머로 쏘아보는 길모어의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아이데른 못지 않은 매서운 눈빛이었다.

여왕앞에서도 당당했던 그림자의 영웅은 입술을 뻐금거리다가 가까스로 시선을 피하고 덧붙였다.


"음, 그건 차라리 드루이드에게 물어봐야겠죠. 네, 그렇죠."

"5000골드."


길모어는 가타부타 말을 붙이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새로 그린 도면이 들려져 있었다.

키트의 재료는 못쓰게 되었지만 도면이 훌륭했기 때문에 밀레시안은 별다른 미련을 두지 않고 값을 치뤘다.

길모어는 이번만 5천골드일뿐 다음에는 8천골드를 받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밀레시안은 그리고 그 다음은 1만골드죠? 하고 한쪽눈을 찡긋 웃어보였다.

괴팍하고 깐깐한 반호르의 숨겨진 장인은 반값으로 깎아준 것이 들통난것이 머쓱한지 얼른 마법사들이나 찾아가라며 성을 내었다.

밀레시안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다음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마법사와 연금술사가 동시에 있는 곳이라면 어디일까.

밀레시안은 탈틴의 문게이트에 내려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쪽에는 드루이드가 있었고 서쪽에는 연금술사가 있었다.

밀레시안은 잠시 고민했지만 일단 연금술사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베이릭시드는 좋은 상담자가 되어줄 테지만 그에게는 따로 부탁해야하는 것이 있었기 떄문이었다.


밀레시안은 도렌이 아닌 아이바를 찾아갔다.

봉긋한 버섯머리사이에 삐죽 튀어나온  가다듬고는 밀레시안을 반겨왔다.


"어쩐일이세요? 발걸음이 가벼운걸 보니 뭔가 새롭게 성공한 실험이라도 있었나요?"

"아니, 그런건 아닌데.."


밀레시안은 자신의 발치를 한번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아이바가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부터 해보려고."


맑게 개인 녹색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밀레시안은 어쩐지 새벽녘에 보았던 연보라빛 소녀를 떠올렸다.

환하게 웃는 밀레시안의 모습에 아이바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여보일 뿐이었다.


밤이 찾아오고 이웨카가 밝히는 달 그늘 아래, 밀레시안과 아이바는 적당한 나무 상자에 걸터앉아 토론을 이어갔다.

밀레시안이 원하는 것은 사막의 태양보다도 밝고 수백년의 시간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빛을 만드는 것이었다.

아이바는 팔라라의 결정을 가지고 왔지만 이 결정의 수명은 찰나에 불과했다.


"어떠한 결정이라도 수백년은 불가능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언제 마주치게 될지 모르는걸."

아이바는 차라리 밀레시안이 정기적으로 결정을 교체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번거롭지만 아이바가 개량한 팔라라의 결정이라면 만 하루정도는 그 밝기를 유지할 수 있다는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밀레시안은 펼쳐진 도면위에 놓여진 개량된 팔라라의 결정을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은 어쩔수 없다는듯 어깨를 으쓱 들어올리며 숨겼던 계획의 일부를 공개했다.


"음, 사실 그 장소는 내가 정기적으로 갈 수 없는 장소야."

"네? 사막이라고 하셨잖아요."

"사막은 사막인데.. 나는 갈 수 없어. 가긴 가더라도 돌아오는것도 꽤 힘든 일이라 들어서, 직접가는 것은 어려워."


아이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은 이제 진실을 털어놓아야 했다.


"내가 날리고 싶은 사막은 수백년 전의 시간속에 갇혀있어."


밀레시안은 사막의 색을 쏙 빼어닮은 팔라라결정의 표면을 바라보았다.

거꾸로 비친 아이바의 얼굴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 대신 차분하게 가라앉는 푸른 빛의 눈동자가 비치고 있었다.


"밀레시안님"

"알아, 나도 안다고."


"그건 안되는 일이에요."


밀레시안은 일부러 아이바를 보지 않은채 손사래를 쳤다.

고개를 돌리고 입을 가렸다.

지금 아이바와 시선을 마주한다면 밀레시안은 분명 실망해버릴 것 같았다.

안되는 일이라고 납득하고 포기할것만 같았다.

밀레시안은 곁눈질로 팔라라의 결정을 바라보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내 이름으로 그정도 값어치는 치를 수 있다고 생각해."




밀레시안이 다시 눈을 떴을때는 이미 한 밤중이었다.

밀레시안은 여전히 건식 화덕의 앞에 놓여진 상자에 걸터 앉아있었다.

밤이 깊어질때까지 아이바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밀레시안은 그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이바는 자정무렵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그는 소리없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걸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밀레시안은 그에게 잘자라고 인사하지 않았다. 지금 그 몸을 움직이는 아이바가 있는 세상에 밤이 찾아올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밀레시안이 고민하는 동안에도 팔라라의 결정은 옅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 결정에 약간의 에르그만 더한다면 이 결정은 마치 작은 태양이 된것마냥 환하게 불타오를 것이 분명했다.

다만 열기나 기류를 발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팔라라의 결정을 넣은 풍등에는 한가지 더 특별한 기능을 추가해야 했다.


밀레시안은 결정을 넣은 풍등을 날아오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줄 마법사를 알고 있었고 그는 이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그는 잠귀가 밝았다.

밀레시안은 이따금씩 그가 별을 읽기위해 한밤중에 오두막 밖으로 나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별을 보는 날이면 탈틴은 서쪽으로 향하는 가로등 불들을 모두 내려놓았기 때문에 그 날이 언제인지는 쉽게 알아 볼 수 있었다..

밀레시안은 불빛없는 어두운 숲길을 걸어 드루이드의 집으로 향했다.


청량하고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목관악기의 음색을 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밀레시안이로군."


별을 헤아리던 현자가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멀리서 등불을 든 여행자가 걸어오길래 누군가 했었다네. 그래, 오늘은 무슨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밀레시안은 그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안녕하세요, 베이릭시드. 하지만 밀레시안의 말은 입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했다.

말문이 트이지 않았다.


밀레시안은 그제서야 자신이 아주 오랜시간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날이 지났는지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풍등안의 팔라라의 결정의 빛이 바래지지 않았다는 것 뿐이었다.

어째서일까. 밀레시안은 시선을 내려 손안에 들린 등불을 바라보며 베이릭시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손안에서 희미한 열기가 느껴졌다. 팔라라의 것이 아닌 이 빛은, 밤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빛무리들과 닮아있었다.

밀레시안은 바람을 묻는 대신 시간을 묻기로 결심했다.


"베이릭시드, 나는 과거로 돌아가는 마법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베이릭시드는 밀레시안의손에 들린 풍등을 바라보았다.

지나간 시간 속에 파묻힌 여행자는 지친 고개를 들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멀린을 만나게 해주세요."


문게이트에서 작은 스파크가 터져나온것은 그로부터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안돼."


"돼."


"안된다니까..!"


"내가 된다면 되는거야."


베이릭시드가 그자리에 남아있는 까닭은 오직 두 사람의 논쟁이 과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돕지 않았고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한 그루의 나무처럼 그들의 뒤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스승의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온 천재 마법사는 대뜸 마법을 내놓으라는 밀레시안의 말에 고개부터 가로저었다.

밀레시안은 그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 마냥 한 자루의 창을 내밀었다.

목숨보다는 싼 값이었고 한순간의 치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비싼 대가였다.


"너말이야, 내가 돌아오고나서 야호, 다행이다 다시는 그런 위험한 마법은 연구 하지 말아야지. 하고 착실하게 살았을것 같냐?"


따끈한 허브차를 마시고 있던 베이릭시드가 불편한 기침으로 대답했다.

멀린은 스승의 눈치를 살짝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춰 그 일은 순전히 우연이 겹쳐서 생겨난 기적이라고 못박았다.

들어가는 것도 나오는 것도,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지나온 드루이드는 밀레시안의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간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멀린은 베이릭시드 쪽을 한번 돌아보고는 조금 초조한듯 입술을 깨물었다.

베이릭시드가 모른척 고개를 돌려주고 나서야 멀린은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건 신들의 영역이야. 팔리아스의 신들이 아닌 조금 더 먼 곳의..., 야아. 너도 알잖아 그건.."

"그건 운명에 매개의 이끌린 필연적인 일이었지."


밀레시안은 멀린의 가슴을 툭 밀어내며 대답했다.

멀린은 순순히 뒤로 물러섰지만 여전히 입맛이 쓰거운 눈치였다.


"에레원에게 잔소리를 듣고 있었어."

"그래, 네가 왕성에 죽치고 앉아있는 동안 나한테까지 와서 하소연을 하더라."

"별 일은 아니었지만 에레원이 했던 말 중에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말이야."


밀레시안은 이전의 했던 말인지, 이번에 들은말인지를 모호하게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손에 든 풍등을 한동안 만지작 거리자 환한 태양빛의 등이 묘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밀레시안은 풍등을 신성력으로 감싸 허공에 띄워올렸다.

바람을 이용하는 방법은 몰랐지만 방패의 기능을 응용한다면 이정도 조작은 밀레시안에게도 간단한 일이었다.

밀레시안은 풍등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멀린, 영웅이란 건 뭘까?"

멀린은 밀레시안이 이어 말하기를 기다렸다.


"영웅은 끝없는 시련을 이겨내는 사람을 말하는 걸까?"

"....."


"아니면 자신의 잘못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을 말하는 걸까."

"......."


"성실하게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영웅이 될 수 있는걸까? 아니면 올곧은 신념을 가진 이만이 영웅이라 불리는 걸까."

"......"


"너는 어때? 멀린, 내 친절하고 멋진 시간의 마법사님. 너는 내가 무슨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해?"

"그런게 뭐가 중요해. 너는 이미 네 이름을 스스로 선택했는데."


그 검은색 대검을 품에 안고서 말이야.


마법사의 입에서 오랜 침묵이 깨어졌다.

밀레시안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이름에 대한 값어치를 확인받고싶은거야."


멀린은 밀레시안의 손을 잡았다.

그는 아주 약간의 후회를 내비쳤다.

네게 모든 기억을 보여주지 말 걸 그랬어. 적어도 그와의 대화를 조금 덜 들려주었더라면, 너는 이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을 텐데말이야.

밀레시안은 그의 혼잣말을 듣지 못한척 눈을 감았고 두 사람의 모습은 빛과 함께 사라졌다.


더운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밀레시안은 이제 사막에 서 있었다.



".........."

"..........."


사막에 떨어진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용뼈무덤의 그늘 어딘가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주저앉는 것이었다.

멀린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밀레시안은 그에게서 잘 갈라진 살대를 받아들었다.

쿵짝이 이리도 잘 맞을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두 사람은 완벽한 침묵과 호흡속에 끊임없이 풍등을 조립하고 있었다.


"너말이야, 보통 나를 불러낼 단계에서는 이런 자질구레한걸 다 준비하고 부르는게 예의 아니냐?"

"어쩔 수 없었어. 탈틴에서 엄청 오랫동안 조는 바람에 만들 시간이 없었단 말이야."


밀레시안은 변명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며 열심히 종이를 잘라붙였다.

얇은 종이 너머로 보이는 살대는 어쩐지 기묘한 푸른빛을 띄고 있었다.

멀린은 밀레시안이 가지고 온 최고급 장작으로 캠프파이어를 피운뒤 자신의 가방속에서 푸른 마력이 깃든 장작을 꺼내보였다.

시간을 거스르는 마법을 견디기 위해서는 이정도는 써줘야한다며 한껏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못내 아니꼬았지만 밀레시안은 그럼 그 특별한 쟤료를 가공하는 것도 대단한 천재님의 일이겠지? 라며 멀린을 추켜세웠다.

멀린은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일이 어떻게 그렇게 되냐고 항의했지만 이미 장작에는 불씨가 옮겨붙은지 오래, 활활 타오르는 고급 장작은 남다른 화력을 자랑하며 아직 서늘한 사막의 밤을 따뜻하게 덥혀주었다.


"......"

".....으그그극..."


풍등의 조립이 끝난 것은 하늘이 은백색으로 흐려진 뒤의 일이었다.

찬란한 태양이 사막을 황금빛으로 채워넣기 전, 하늘은 밤사이 모여든 구름을 사방으로 흩어내며 사막의 새벽을 준비했다.

멀린은 오아시스 아래 무릎을 꿇었고 밀레시안은 풍등을 띄우기 위해 양손을 들어올렸다.


성공할까?


멀린의 귓가에 걱정어린 밀레시안의 혼잣말이 스쳐지나갔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가능성을 걱정하는 모습에 멀린은 오래된 기시감을 느끼며 웃음지었다.

마법사는 물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지나간 운명에 손을 대는 것에 비하면 너무도 손쉬운 행동이라고 생각하며 멀린은 오아시스속에 집어넣은 브류나크를 매개로 마법을 사용했다.

눈앞이 태양보다도 밝은 빛무리가 오아시스를 감쌌다.

서로에게 이끌리듯 오아시스의 위로 환한 빛의 고리가 떠올랐다. 브류나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밀레시안의 푸른 등불은 거꾸로 가는 시간의 여정의 흐름을 타고 하늘높이 떠올랐다.






등불이 다시 나타난 곳은 어느 한밤중의 사막.

방랑자는 멀리서 보이는 작은 빛무리를 보며 눈을 의심했다.


저 등불은 환상일까?


검은 대검을 든 방랑자는 걸음을 멈추고 고심했다.

그것이 환상인지 혹은 누군가의 흔적인지, 직접 다가가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나아가기를 망설였다.

불안했기 떄문이었다. 사실이 아니라면, 현실이 아니라면, 내 간절한 소망과 망념으로 빚어낸 허상이라면.

만일 이 끝에 아무것도 없다면.


나아갈 길을 정하지 못해 길없는 모래위를 떠돌았다.

그럼에도 눈은 끊임없이 하늘을 쫓았고 이어진 발자국들을 외면해 같은 길을 맴돌았다.

누군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러한 표지가 나타난 지금 그는 그 빛을 의심하고 있었다.

한심했다. 그는 스스로가 못마땅하다는듯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어떻게 할테냐, 이제는 눈을 뜨는 것 조차 두려워 할테냐.


그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몰아세워져 더이상 밀려날 곳이 없어졌는데도 그는 스스로를 쉬이 내버려두지를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가장 큰 적대자는 그 자신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눈을 떴다. 눈을 뜨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떄문이었다. 그는 두려워하면서도 절망하면서도 눈을 떠야만 했다. 눈꺼풀을 가르며 속눈썹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빛이 눈이 부셨다.

한 밤중이었는데도 그의 눈앞에 눈부신 빛이 내려와 있었다.


하늘에서 하늘거리며 천천히 가라앉은 그 푸른 등불은 그의 발치에 내려 앉아 환한빛을 내뿜었다.


그는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너머로 따스한 신성력이 느껴졌다.

톨비쉬는 소리없이 별의 이름을 불렀다.


"나 또한 언젠가 당신이 나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언젠가 긴 시간을 지나 당신이 내 눈 앞에 실재하기를.

그는 간절히 바라고 또 소원했다.

기사는 무릎을 꿇었다.

사막에서 나지막한 기도소리가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