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비밀레)신앙0306 #마비노기_전력
#마비노기_전력 0217주제 '신앙'
밀레시안은 눈을 감았다.
끝없이 넓게 펼쳐진 하늘, 무너져내리는 두개의 탑, 갇혀있던 거대한 무언가가 쏟아져내렸다. 흐름을 만들어 부서진 조각을 나른다. 비와 같이, 눈과 같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하늘을 등지고 선 그의 뒤에서 눈부신 빛이 들이치고 있었다.
구름이 가르며 쏟아지는 날카로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뒤흔든다. 말해준다고 약속했다. 그러니 믿어야지.
그래서 밀레시안은 그의 앞에서 눈을 감았다. 그가 그렇게 말해준다고 했으니 믿어야지.
누군가 밀레시안의 이름을 불렀지만 밀레시안은 눈을 감았고 어둠이 귀마저 틀어막았다.
믿어야지. 밀레시안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입을 다물었다. 뒤이어 스스로가 내뱉을 말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믿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자신에겐 기도를 받아줄 대상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밀레시안은 눈을 감았다.
“신을 믿으십니까?”
가장 먼저 물은 것은 역시나 그였다. 밀레시안의 첫 친구이자, 이해자.
남보다 먼저 알고 행동하는 이를 선지자라 부른다면 밀레시안의 선지자는 바로 그를 가리키는 말이리라.
타르라크는 멍하니 고개를 기울이는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밀레시안은 잠시 고민했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알아 들은 것이 분명한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그정도 일로 적대감을 품지는 않아요.”
“여신을 신뢰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밀레시안은 타르라크는 이제 막 티르코네일로 돌아온 참이었다.
여신과 마신, 붉은 여신의 환생체. 나오는 다시 소울스트림으로 돌아갔고 신들은 루에리의 행방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남은 이들은 밀레시안과 타르라크뿐이었다. 동시에 루에리를 기억하는 것도 그 두사람뿐이었다.
타르라크는 사라진 루에리의 행방에 대해서 알기 위해선 우선 이멘마하에서 행해졌던 검은 용의 계약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크로우크루아흐라는 이름은 옛 문헌에서나 발견되는 오래된 이름이었고 그와 이멘마하 영주의 계약은 라흐에서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비밀스러운 계약이었다.
게다가 이멘마하에 대한 조사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이미 한번 이멘마하의 비밀에 대해 조사한적 있던 밀레시안은 이멘마하의 성 근처에서 용이나 계약에 대한 언급은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아마 다른 루트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겠지.
타르라크는 어설픈 밀레시안에게 어떻게 조언해야하는지를 고민했지만 우선 그전에 짚고 넘어가야할만한 문제가 하나있었다. 밀레시안의 상처가 너무 깊었다. 마음이 다급했지만 지켜야할 단계를 거르고 지나갈 수는 없는 법, 타르라크는 우선 밀레시안에게 쉴 것을 당부했다.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영혼에 세겨진 경험에서 우러나온 드루이드의 충고에 밀레시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신이 듣는다면 고요하게 감겨진 눈꼬리가 씰룩거릴 정도로 턱없는 충고이겠지만 죽음과 함께 결계안으로 내던졌던 불멸의 여행자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지혜의 가치보다는 친구를 걱정하는 진심어린 눈빛이었다. 설령 그의 조언이 밀레시안을 향한 것이 아니더라도 구태여 그 따스한 호의앞에서 무신경하게 대꾸할 필요는 없었다. 밀레시안의 말없는 대답에 타르라크도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이 그의 녹색의 눈동자를 뒤흔들었다. 던져진 기억의 동전이 손등위로 떨어져내렸다.
은빛이고, 작았다. 불면 녹아내릴 것 같은 눈송이와 같이 생긴 것이었다. 추락하는 조각을 향해 움직이는 그의 고갯짓이 하찮았다. 떨리는 어깨가 애처롭다.밀 레시안은 아무말없이 손을 들었고 그를 위로하는 대신 눈송이가 떨어진 손등을 덮어내었다. 앞면이라면 경험, 뒷면이라면 트라우마. 흔들리는 시선속 그의 앞에 비치는 것은 옛 친구일까 아니면 불멸의 수호자인 것일까.
밀레시안은 겹친 손등을 열어보기보다는 손을 뒤집어 그가 반가워 할만한 물건을 내밀었다. 몸을 추스려야하는 것은 밀레시안 하나뿐만은 아니었다.
전보다 파리해진 안색의 타르라크가 나지막히 숨을 내뱉었다. 입가에 새하얀 김이 어렸다가 흩어졌다.
“고맙습니다.”
타르라크는 양손으로 받쳐 내밀어진 마나허브를 받아 소매속에 집어넣었다.
타르라크가 마나허브를 정제하는 동안 화덕에는 두 구의 냄비가 올라갔다.
하나는 마나허브를 위한 것이고 하나는 밀레시안을 위한 것이었다.
밀레시안은 익숙하게 두툼한 방석을 꺼내어 제단위에 내려놓았다. 밀레시안이 자리를 잡고 타르라크가 따듯한 허브티를 가지고 돌아왔다.
따끈한 차를 마시며, 결계에 흘러가는 마나의 소리를 배경소리 삼으며, 밀레시안과 타르라크는 다시 천천히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멘마하와 용에 대한 이야기 이외에도 두 사람이 나눠야할 대화는 아직 잔뜩 남아있었다. 대부분이 사사로운 것이었지만 타르라크는 이미 그 사사로운 것을 주제로 한차례 책을 써낸 경험이 있었다. 이 대화는 그 후속작에 대한 것.
타르라크는 불멸성을 가진 밀레시안이 아닌 에린에서 살아가는 밀레시안에 대해 알고싶어했다.
신을 믿냐는 질문도 이 사사로운 대화중 하나였다.
“그럼 무엇의?”
“신앙에 대해서 입니다. 당신들도 신을 믿는지, 혹은 당신들의 또다른 신이있는지 말입니다.”
밀레시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들의 신? 타르라크의 시선이 뒤따라온다.
밀레시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고 눈을 가늘게 떴다. 머그컵을 홀짝이고 한참동안 차를 입에 머금었다.
없어요. 라는 말이 혀뿌리를 휘감아 고정시킨다. 금방이라도 입밖으로 튀어나올듯 꿈틀거리는 대답이 찻물을 첨벙거리며 입천장을 두드렸다. 밀레시안은 입안을 오무려 덤벼드는 대답을 찻물속에 질식시켰다. 꿀꺽, 물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리는 기분이었다.
밀레시안은 식은 찻물을 삼킨뒤 혀를 튕겨 가벼운 소리를 내었다.
벌려진 입술사이로 다시 새 찻물이 흘러들어왔다. 입안 가득 허브향이 차올랐다.
이전의 세계라 하더라도 신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다른 세계에서 초대받은 영혼은 고민했다.
이전 세계에서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세계를 넘어왔다는 자각은 남아있었다.
이곳은 이방인의 땅, 하지만 그런 자신을 축복하는 땅. 그럼 왜 넘어오게 된걸까. 저쪽에서 나를 거부했던 것일까?
아니면 나를 떠나보낸 것인가. 그럼 그 거부는? 내가 이곳으로 넘어오게 허락한것은? 방치한 것은?
밀레시안은 눈을 깜빡였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다. 많은 사람이 있었고 많은 이름이 있었다. 고민하고 결정하고 살아나간다.
그러나 그 모두가 믿는것에 대한 고민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살아갈 뿐. 그저 사랑할 뿐. 과거를 돌아보기에는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너무 크고 아름다웠기에 우리들은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다. 에린의 미래는 밀레시안에게 달려있다고? 천만에, 우리들의 미래는 이제 에린에서밖에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필사적인것은 당신들뿐만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말을 한다 한들, 당신들에게는 온전히 전해지지 않겠지. 차라리 우리가 당신들의 세계를 차지하려한다 오해하지만 않는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밀레시안은 입안에 머금고 있던 미지근한 물을 넘기고 타르라크를 바라보았다.
타르라크의 어깨에 눈이 조금 쌓여있었다. 그건 아마 밀레시안의 머리나 어깨도 마찬가지일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믿어요.”
밀레시안은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잊혀진 자신의 세계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마도, 밀레시안은 가정의 말을 삼켜내고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아마 있었을 것이다. 부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신상을 이해하고 성당을 이해했듯이 밀레시안의 세계에도 분명 그런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식이 밀레시안의 믿음과 연결 될 수는 없었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을 달랐기에 밀레시안은 믿었던 신이 있었냐는 질문에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무엇이 되었든 이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들리지 않았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이제 더이상은 관련이 없다. 그것이 사실, 그것이 현실.
그 모호한 기억의 앞서 밀레시안은 이미 다른 세계에 내려와 있었다.
이곳에는 이곳의 신이 있었고 이곳의 믿음이 있었다. 때문에 밀레시안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대답을 내어놓았다.
이제는 믿는다고. 타르라크의 눈에 기묘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그렇군요.”
“그렇다고 해서 모리안에게 기도하고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밀레시안은 살짝 입을 삐쭉이며 머그컵의 가장자리를 물어뜯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목숨이 걸린일이었다. 우리들은 불멸이지 불사가아니다.
적대감을 품기전에 한번정도 이해를 구해볼 여지는 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아무런 감정이 남지 않을리는 없었다.
달칵달칵, 사기로된 유리컵에 앞니를 부딪치던 밀레시안은 입술로 소리를 덮고 남은 찻물을 들이마셨다.
꿀꺽이는 호쾌한 소리와 함께 적당히 식어버린 허브차가 목뒤로 넘어갔다. 향을 잃은 찻물은 쓰기만했다.
타르라크는 말없이 찻주전자를 들어올렸다.
“그럼 어느 신이라면 기도할 마음이 들겠습니까?”
재차 따라주는 차를 받아들며 밀레시안은 잘 모르겠다는듯 타르라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찻주전자를 기울이는 것에 집중하던 타르라크는 찻물이 찰랑거릴 만큼 가득 차를 따라준뒤 다시 눈을 퍼담아 주전자를 화구위에 올려놓았다.
밀레시안은 받아든 머그컵이 넘칠까 조심조심 입앞으로 가져와 찰랑거리는 찻물을 홀짝였다.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이 고개를 들기를 기다렸다.
“당신은 이미 여러신의 이름을 전해들었지요. 그렇다면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기도를 한다면 어떤 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겠습니까?”
몇번이고 후릅후릅 찻물을 빨아마시자 머그컵 가득 차올랐던 찻물의 높이가 안정권까지 내려갔다.
밀레시안은 축축해진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앞으로 내리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는 신이라고 해도 뭐 정상적인 신은 없는 것 같은데.. 밀레시안은 손가락을 꼽으며 마신과 전쟁의 여신, 파괴의 여신, 그리고 지나가는 길에 들었던 빛의 여신의 이름을 헤아렸다.
“음… 뭐…딱히...”
딱히 전쟁을 하거나 패권을 휘어잡을 생각은 없는데 말이죠. 밀레시안은 대답대신 표정으로 마음을 대변했다.
굳이 따진다면 사랑의 라이미라크 정도일까. 하지만 밀레시안은 메이크사제의 따분한 설교를 떠올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거긴 너무 조용조용하고 지루하단 말이지. 밀레시안이 다섯번째 손가락을 접어내렸다. 가볍게 쥐어진 손가락중 마음에 드는 이름을 꼽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밀레시안이 한참을 고민하는 동안 컵안의 찻잔위에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꽃잎처럼 떠있던 눈송이는 금세 사르르 녹아내렸다.
열기를 잃었다. 더운 김을 잃어버렸다. 향을 잃고, 맛을 잃고, 색을 잃고, 끝내는 본질마저 잃어버린다. 밀레시안은 옅어지는 수증기를 따라 고개를 들어올렸다.
새로 퍼담은 주전자속 물은 아직 끓지 않는다. 피어오르는 하얀 김은 이제 옅어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시선을 내린곳은 눈이 쌓여버린 빈 제단.
밀레시안의 손에는 이가 나간 빈 컵을 쥐어져있었다. 마음이 공허했다. 마나와 반응하지 않는 제단은 죽은 시체마냥 싸늘했고 고요했다.
그 때 내가 어떤 신을 믿는다 대답을 했어야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않았을까. 밀레시안은 얼어붙은 컵을 제단 아래 내려놓았다. 멀리서 푸른색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어때?”
나른한 목소리와 달리 날카로운 단검이 목을 향해 날아들어왔다.
밀레시안은 일부러 비워준 빈틈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기사가 예상한 방향으로 밀레시안이 몸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번째 단검이 날카롭게 치고들어왔다.
첫번째 강한 공격은 페이크, 가볍지만 진짜는 이쪽. 그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첫 공격에 맞아주느니 이번 것의 가벼운 공격을 맞는게 훨씬 나았다.
밀레시안은 일부러 칼등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공격을 맨 몸으로 받아내며 뒤로 굴러떨어졌다. 밀레시안은 언덕의 경사를 따라 굴러내려갔다.
그리브에 패여 쌓인 벌겋게 드러난 흙바닥이 뭉게지고 마르지 않은 풀잎이 짓눌려 진한 풀냄새가 피어올랐다.
짓이겨진 풀잎의 일부가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었고 온 몸에 흙투성이가 되었다.
팔뚝에는 얕지만 피가 베어나오는 상처도 생겼다. 어디로보나 일방적이었고 억지에 가까운 대련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진짜 무기를 꺼내들고 있는 상태, 아무리 신경을 써서 휘두른다고 해도 상처가 난다면 이제 최소한의 방어라도 준비해야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밀레시안은 여전히 무기를 꺼내지 않았고 방어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피하고 몸으로 받아내 뿐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 상황 또한 일종의 대화였다.
말을 사용하지 않다는 점에서 평화로운 분위기의 담화는 아니었지만 서로가 주고 받아야 성립된다는 점에서 그 둘은 쌍둥이처럼 쏙 뺴어닮아 있는 모양새였다. 어느한쪽이 이를 받아주지 않으면 무의미한 혼잣말이 되는 것 처럼 밀레시안은 카즈윈의 의도를 받아주지 않았다. 질문은 질문이 아니게되었고 대련은 더이상 대련이 아니었다. 한쪽의 일방적인 감정을 털어놓는 혼잣말이었고 자기만족이었다. 밀레시안은 그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한바탕 땅바닥을 구르고 일어난 밀레시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는 벌써 두번째 질문을 던졌지고 있었다.
고집쟁이. 은백색의 눈이 밀레시안을 흘겨왔다. 그래도 대답은 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어느때나 새로이 만나는 모든 이들이 밀레시안에 대해 의심할때마다 밀레시안은 온 진심을 다해 자신의 진실을 알리려 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포기했다. 진절머리가 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의심했고 사람을 고민의 대상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그들이 내린 답은 온전히 그들의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대답속에 밀레시안에 대한 배려나 마음은 한치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들이 내민 선택지 안에 밀레시안의 마음을 담을 틈새는 어디에도 없었고 밀레시안은 그렇게 한두마디씩 말을 잃어갔다.
주어진 낱말과 예정된 흐름, 그리고 결정.그들이 갇혀있는 생각의 고리안에서 밀레시안은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저울이 아니었고 올바른 답의 표본도 되지 못했다.
수많은 다난들과의 삶에서 밀레시안은 자신의 위치를 깨달아갔다. 밀레시안은 의심의 시작이 될 수는 있었지만 이해의 끝이 되는 일은 없었다. 매 중간마다 길을 잃어버리기 일 수였고 휘둘리는 것만이 그 삶의 모든 방향이었다.
시간은 밀레시안을 지치게 만들었지만 그 육신이 불멸이었기에 쓰러지거나 망가지는 일따위는 일어나지도 않았다. 울고싶었다. 스스로 정신을 망가트리기엔 그 삶이 한 손안에 들어올만큼 작고 하찮았고 그 나약한 마음위에 얹어진 기대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무엇이 영웅인가. 무엇이 광명인가.
밀레시안은 숨을 고르며 입에 씹히는 흙먼지를 뱉어냈다. 이제 스스로를 해명해야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결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밀레시안은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의도를 외면했다. 표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거절는 포기하는 것이었다. 끝내 싸우지 않으려는 밀레시안의 태도에 다짜고짜 검을 휘두르던 기사는 실망스럽다는 눈치를 주며 검을 거둬들였다.
그리브가 철컥거리는소리가 울려왔다. 푸른 머리의 기사가 검을 겨눠왔다. 이래도? 나른한 은청색의 눈이 밀레시안을 향해 물어왔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을 신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은데…”
“......”
밀레시안의 침묵앞에 기사가 비뚜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는 어떻지? 스스로를 신이라고 생각하나?”
“.....”
“그래서 아무것도 믿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건가?”
밀레시안은 입을 달싹였다. 소리를 내었던가? 아니면 입술을 깨무는 선에서 그쳤던가.
그 대답이 어떠한 것이 되었다하더라도 밀레시안의 목소리가 그에게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질문을 받은 적도 없었다. 질문을 부정하고 기사의 환영을 부정했다. 이것은 기억이 아니다. 밀레시안은 자신이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한번 되뇌였다. 눈앞으로 어둠이 짙었고 소리는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그러나 이 모든 부정앞에서도 전부 꿈은 아니었다. 현실도 아니고 환상도 아닌 이 어둠은 의식과 꿈의 사이.
겹겹이 쌓인 마음 틈새에 금빛의 옅은 빛이 비쳐들어왔다. 이 깊고 깊은 마음의 어둠속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예정된 이름과 운명을 묶인 그의 목소리뿐.
밀레시안은 뺨을 간지럽히는 이 온기에 고개를 기울였다. 눈꺼풀 너머로 황금색 광채가 비쳐들어왔다. 그의 손길이 다정하게 밀레시안의 뺨을 쓸어내렸다.
밀레시안은 그의 온기에 몸을 기대었다. 딱딱한 굳은 살 너머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조금은 떨리는가 싶은 순간 체념의 한숨이 이마께를 간지럽혔다. 말캉거리는 감촉이 눈가에 닿았다. 이윽고 온기가 멀어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밀레시안은 조용히 금빛나는 이름을 불렀다.
“아드니엘...”
한걸음 뒤로 물러선 금색의 빛이 말했다.
“최초에 불꽃으로 기억되었던 작은 빛은 비로소 완성된 의식을 통해 영원히 타오르는 레네스의 화염으로 다시 기억되리니.”
밀레시안은 뒤로 돌아섰다. 거대한 금색의 용이 밀레시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화염의 그늘 뒤로 아른거리는 대지의 어두운 운명은 아직 끝난게 아니었다.”
일찍이 황금의 용은 말했다. 그의 운명은 밀레시안의 것. 또 밀레시안의 운명은 그의 것. 용이 태어나는 순간 밀레시안의 운명은 이미 에린에 속박되었다.
용의 운명이 밀레시안에게 결정된다는 것은 결국 밀레시안이 용을 위해 행동하게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어린 용이 꿈꾸는 모든 것이 밀레시안의 행동을 결정지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결정들은 에린의 운명을 움직였다. 아니 그 이전부터 밀레시안의 운명은 에린과 함께하고 있었다.
여행자는 여신의 봉인을 풀어내었고 잊혀진 정령과의 약속을 복원해내었다. 그럼 아직 시간이 남아있던 계약의 때를 앞당긴 것은 누구였나. 선홍빛 악의에 속아 날카로운 화살을 벼려낸 것은, 끓어오르는 가슴의 혈기만으로 얼음마녀의 눈꽃을 녹여낸 것은.
밀레시안은 손을 내어 뻗었다. 까끌하고도 차가운 비늘이 손안 가득 느껴졌다. 차가웠다. 딱딱했다. 박동없이 멈춰서 하나의 커다란 석상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 온기가 네 것이 아니라면 나는 무엇에 뺨을 부볐던 것일까. 밀레시안은 검은 비늘을 쓸어내리던 손을 거두었다.
붉은 이름을 쓰다듬은 손안에 갈색빛의 흙먼지가 가득 묻어있었다. 용이 밀레시안의 귓가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죽음이 속삭였다.
“그대는 감응자. 소울스트림과 운명을 함께하고 에린과 운명을 함께하는 자. 이 세계에 속하되 속하지 않았고 인간들 사이에서는 광명의 이름으로 불리는 자. 너의 마음에는 아직도 여신이 남긴 혼란이 남아있구나.”
“.......나는..”
“망설이고 있구나. 두려워하고 있구나. 믿어야할지 믿지 않아야 할지. 외면하는 것이 정답인지 아니면 모른척 이용당하는게 읋은 일인지. 네 생각대로 여신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마신도 너를 받아들이지 않지. 한순간이라고는 하나 벨라가 들었던 단검이 네 가슴에 내리꽂히던 것은 일어났어야 했던 일이었다. 일어날 예정의 일이었다. 우리들은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그러나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벨라의 희생때문이었다. 사랑때문이었고 신앙 때문이었다. 그녀 또한 믿어의심치 않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믿음과 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우리들의 결정이 아닌 너희를 믿었다.
설령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모든 저주를 끌어안더라도 너와 너희들과 그가 변치 않으리라는걸. 여전히 이 땅을 사랑하리라는 걸. 그래서 그녀는 소울스트림을 좀먹고 들어가던 악몽을 끌어안아 제 한몸을 빛으로 불살랐다. 그녀의 작은 빛이 꺼져들어가던 너희들의 소울스트림에 다시 불을 밝혔다.
너는 그 믿음과 희생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가? 처음부터 선택권은 여전히 너희들의 손에 쥐어져있었다.
그래, 모리안도, 키홀도, 누아자도 아닌 바로 너희들의 손에 말이다.
너희들은 그것이 모리안의 손에 있었다 생각하였지만 모리안에게 그런 권한이 쥐어져 있었다면 구태여 그런 번거로운 의식을 준비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너희들 중, 가장 오래된 자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곳을 떠났다. 그리고 너는 이곳에 남았지. 같은 선택권을 가지고 너희들은 서로 다른 선택을 하였다. 이제 알겠는가? 그래, 우리들은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밀레시안은 뿌옇게 피어오르는 흙먼지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운명을 속삭이던 죽음이 먼지로 돌아갔다.
이미 감겨져 있는 눈에 빛이 새어 들어왔고 멀지 않은 곳에서 성소의 정령이 분홍빛 조각이 되어 산산히 부서지고 있는 모습이 엿보였다. 멀리 떨어져있던 현실로부터 메아리가 울려왔다. 구슬픈 울음소리인 동시에 기합을 내지르는 소리, 달칵이는 금속소리.
무거운 그리브를 신은 발소리가 찰칵이며 움직였다. 찰칵찰칵 좌우로 흔들리는 금속음,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마음을 술렁거리게 만든다. 코앞으로 눅진한 열기가 밀려들어다. 조금은 지친, 조금은 밭게 차오른, 서리가 녹은 철갑. 낡고 얄팍해진 양철 아래 물이 끓고 있었다. 텅비워져 있던 손안에 온기가 쥐어졌다. 더운김을 내뿜는 따스한 허브티. 밀레시안은 눈을 떴다. 상처입은 녹색의 눈동자가 밀레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이번에는 반드시. 기사는 검을 쥐고 끌어당겼다. 녹색의 눈동자위로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힘을 주어 검을 흔들자 단단히 박힌 가시처럼 꿈쩍도 안하는 검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 아래로 좌우로, 상처를 해집으며 흔들리는 검을 따라 가슴팍으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퍼져나갔다.
마치 따스한 차를 마셨을때처럼 떨리고도 촉촉한 약초향이 가득한 온기. 가슴가득 넘쳐나는 온기에 그리움이 담겨있었다.
뽑히지 않는 검 대신 밀레시안이 한걸음 그에게 다가섰다. 검이 흔들렸다. 한걸음, 또 한걸음. 검과 상처사이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환한 빛속에 잠겨버린 세상속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밀레시안은 새하얀 로브를 끌어안았다.
그의 따스한 품속에서 밀레시안은 이 모든 것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새하얀 장갑을 낀 손이 등을 덮어왔고 면목없다는듯 잔뜩 좁혀진 눈썹아래 희미한 미소가 자리잡았다. 입끝에 쓰거웠다.
꿈이라고, 이 모든게 찰나의 환상이라고, 그렇다면 이 환상은 누가 보여주는 것일까. 누가 원하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밀레시안은 현실도 꿈속도 아닌 어렴풋한 시간의 틈새를 헤매이는 것일까. 그러나 밀레시안은 오래전 전해들었던 드루이드의 지혜를 떠올렸다. 이것은 위로, 이것은 호의.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던, 친애하던 나의 선지자가 보여주는 다정한 동전의 앞면.
“감사합니다”
그가 말했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후회했고 그는 감사했으며 그는 떠나갔다. 밀레시안은 몸을 일으켜 온기를 때어내며 눈앞에서 말을 이어나가려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눈부시도록 빛나는 금발, 태양처럼 굽이는 광휘아래 세상의 모든 지혜를 모아놓은 푸른 눈동자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가슴가득 박혀있던 거대한 신성력이 밀레시안을 통과해 빠져나가며 새로 태어나는 주신의 검을 위해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기사에게는 커다란 신성력의 모습으로 밀레시안에게는 과거의 다정함의 모습으로 이 기억과 이 꿈은 모두 아이들의 이해를 위한 것.
새하얗게 변해버린 공간속 불꽃에 괴로워하는 어린 기사와 등돌려선 신의 검이 세워져 있었다. 돌아보지 않더라도 머릿속에 들어오는 전지적인 시점에 밀레시안은 몇번이고 눈을 깜빡여야 했다.
“그리고….”
“하지 마세요..”
밀레시안은 누가 그의 모습을 빌렸는지 알아챘지만 불경스럽고도 무례하게도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재차 말을 이어가려던 타르라크의 환영은 화를 내거나 의아해하지도 않은채 가만히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제게 정말 미안하다면 그러지 마세요.”
그것은 어쩌면 밀레시안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처음부터 그 모든 환상이 꿈일 수도 있었고 그 모든 환각이 어긋난 육신과 영혼의 불협화음일 수도 있었다.
밀레시안이 생각하는 그가 내려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설령 진짜라 하더라도 그의 모습을 빌린 그분이 다른이야기를 해야할 수도 있었다.
이 모든것이 그가 안배대로 따라온 뜻이었다면, 그가 사과를 할리 없었다.
하지만 용들은 말했다. 밀레시안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니라고. 그러나 동시에 이 세계에 속해있다고.
그렇기에 이 모든 일들이 필요했다. 그렇게 되기 위해 그 모든 시간들이 필요했다.
속하지 않은 것을 속하게 하기위해 몇번이고 흔들려도 이곳을 떠나지 않도록.
자비를 배풀면서도 의심했다. 엄숙하게 선을 그으면서도 파고들 여지를 남겨주었고 업신여기면서도 두려워했다. 의심하면서도 또 연민했다. 동정했다. 의지했다. 사랑했다. 그 모든것이 밀레시안이 이 땅을 사랑하도록 하고 사랑받게 하기 위한 오랜 준비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간이 역류한다. 어디가 올바른 방향인지 모르게 위로 아래로 앞으로 또 거꾸로.
마구잡이로 뒤섞이는 과거속에서 미래의 파편을 바라보았다. 돌아선 곧은 등이 뒤를 돌아보는 모습을, 낯설고도 위압적인 그의 얼굴에 혼란이 가득했다. 신실한 신성력의 불꽃이 고통스러운 색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뜨겁고 또 차갑다. 세상에 유일한 듯 한 곳에 뭉쳐 흔들리다가도 탁 하니 퍼져나가 온세상에 흩뿌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밀레시안은 감고있던 눈을 떠 올렸다. 그 순간 밀레시안의 표정은 톨비쉬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밀레시안 난생처음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그냥 제게 해야할 일을 말하세요.”
밀레시안은 성소의 수원지의 앞에서 돌아서는 톨비쉬를 올려다보았다.
오랜 고뇌속에 지쳐버린 톨비쉬가 물었다.
“저는…, 저는 대체.. 앞으로는..? 앞으로는 어떻게?”
모르겠어요. 언젠가 기도의 대상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때처럼 밀레시안은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미소지어보였다. 난들 알겠나요. 지금 일어난 일을 이해하기도 벅찬데 앞으로의 일따위 어떻게 될지 알게 뭐란 말인가.
하지만 밀레시안은 마음속에 차오르는 빛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과거에 당신의 뜻이 이뤄졌던 것과 같이 현재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부러진 검은 새로운 검으로, 스스로에게 갇혀있던 날개는 새로운 사명으로, 그리고 공허하던 이 마음은 믿음의 빛으로. 방패의 빛이 톨비쉬의 질문에 대답했다.
성소의 바람이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