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reload

톨비밀레) reload #13(3)

Tecla 2017. 12. 23. 18:11



그 다음 자신이 어떻게 움직였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순간적인 괴력으로 문은 자물쇠 채로 나가떨어졌고 갑작스러운 냉기에 화로의 불꽃이 흔들렸다.


타르라크는 손을 들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그를 바라보고있었다.

마치 뺨을 내리치려는 기세로 손을 들어올렸던 타르라크의 눈이 흔들렸다. 

정신차려. 이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야. 이들은 그저 명령받은대로 대상을 자극할뿐이다. 이 사람은 모리안이 아니다. 

화풀이를 할 대상도, 원망을 받을 상대도 아니다.

하지만 이 열기는, 이 분노는, 이 원망은.. 아니야. 정신차려야해. 아니야.


타르라크는 자신이 무슨짓을 하려 했는지를 깨달으며 뒤로 물러섰다.

뒤늦게 손에 들려 있던 문고리가 떨어져 나갔다. 문고리와 함께 뜯어져나온 문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물기어린 바람이 화로속을 헤집었고 불꽃이 흔들렸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모든것이 엉망이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타르라크를 올려다 보았다. 안경이 떨어져 있었다.

밀레시안은 눈송이가 녹아내리는 안경을 들어 타르라크에게 내밀었다.


“이 다음에 찾아오는 밀레시안은 당신을 죽일겁니다.”


“마치 너는 나를 지키려는 것처럼 말하는 군요.”


타르라크는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뺨에 닿는 냉기가 뜨겁게 느껴질정도로 타르라크는 머리끝까지 고양되어있었다. 

타르라크는 몇번이고 자신의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눌러 감촉을 확인했다. 

처음은 어색하게 그리고 이내 조금 강하게. 

안경이 비뚤어질정도로 강하게 자신의 뺨을 두드리던 타르라크가 겨우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안경을 받아들고 다시한번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물방울 너머로 추위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일단 들어만 오세요”


밀레시안은 두말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타르라크는 자연스럽게 밀레시안의 로브를 받아 화로 근처에 널어놓았다.

서걱거리던 옷가지는 이내 축 늘어져 작은 물방울들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타르라크는 수건과 담요따위를 밀레시안에게 건네준뒤 하나뿐인 소파로 안내했다.


“일단, 추울테니까요.”


그런걸 걱정한다면 문을 부수지 않는게 더 먼저 아니었을까. 

밀레시안의 시선이 난장판이 된 현관으로 향하자 타르라크는 헛기침과 함께 밀레시안의 무릎위에 담요를 내려놓았다.

밀레시안은 어색하게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아내었다.


문이 수리되는 동안 밀레시안은 오두막 안을 둘러보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오두막안에는 딱 한사람분량의 먹고 자고 생활할 공간이 보장되어있었다. 

무언가에 쓸린 흔적이 있는 대들보는 웬만한 무게에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튼튼해보였고 유리창으로 보였던 창문들은 총격에도 깨어지지 않을 특수제품이었다. 

화로를 제외한 모든 방향에 감시카메라의 렌즈가 반짝이고 있었다. 밀레시안과 눈이마주친 렌즈하나가 천천히 각도를 돌려 타르라크쪽으로 시선을 비켰다. 밀레시안또한 그 카메라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타르라크의 뒷모습이 보였다.


타르라크는 완전히 박살이난 경첩을 보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얼추 문틀에 끼워넣어보지만 이미 휘어진 경첩이 본래의 역할을 해낼리 없었다.

그럼 하는 수 없지. 문을 일으켜 세운 타르라크는 그대로 대못을 박아 문을 고정시켰다.

아주 잠시 이러면 나갈때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원래부터 드나드는일은 거의 없는 문이었다. 

타르라크는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채 묵묵히 망치를 휘둘렀다. 


타르라크가 아차 싶은 생각이 든 것은 두사람 분량의 식료품을 계산하던 도중의 일이었다.

다행히 보급품이 도착한 지는 얼마 안되었시기이기에 식량사정은 아직 괜찮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사람일때의 이야기였다.

아무것도 자생할 수 없는 이 설원에서 두사람이서 다음 보급시기까지 버티는 것은 조금 힘들지도 모른다.

한참동안 식료품의 배분을 계산하던 타르라크는 곧 핫 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그게 아니지 하고 소리를 내어 말해버렸다. 혼잣말하던 버릇이 새어나온탓인지 타르라크는 재빨리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지, 돌려보낼 생각부터 해야하는거지.

밀레시안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타르라크를 바라보다가 카메라를 돌아보았다.

원래 이런 사람이냐는 무언의 질문에 카메라가 대답할 수 있는 것는 아무것도 없었다.

혼자서 바쁜사람. 밀레시안이 타르라크에 대해 내린 첫 평가는 딱 그정도였다.


문의 수리를 마친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에게 컵을 하나 내밀었다. 밀레시안이 컵안을 들여다보았다.


“독같은 것은 안들어있습니다.”


타르라크는 제 입으로 대답하면서도 혀끝이 쓰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확신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설원은 처음부터 그들이 만든 거대한 실험실의 일부. 

오랫동안 그들의 보급품에 의존해 끼니를 이어왔지만 그들이 이 보급품안에 장난질을 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설원에서 별다른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갇혔고, 죽지 못해 살아있었다.  밀레시안은 컵안의 내용물을 홀짝 들이키며 대답했다.


“상관없어요.”


밀레시안의 대답에 타르라크는 살짝 언짢아진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타르라크가 반대편 의자에 앉자 밀레시안은 설명을 덧붙여왔다.


“글라스기브넨에 대해서는 이미 다 알고 왔어요. 그리고 당신이 그 감염자라는 것도요. 

그걸 알면서도 이 오두막에 들어왔는데 이제와서 독따위를 겁낼리가 있을까요.”


“기분이 이상해지는 신뢰로군요.”


“이걸 신뢰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죠.”




장작이 타올랐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던 냉기가 가시고 다시 따스한 온기가 공기를 덥혀왔다.

납작하게 줄어들었던 장작불은 새로운 장작을 신나게 태우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새로 채운 주전자가 김을 뿜어 올리고 불규칙적으로 따닥거리는 장작소리가 울려왔다.


눈이 멀 것처럼 환하게 빛나던 설원은 금새 밤으로 바뀌어버렸다. 

오렌지빛으로 물든 오두막 안에 두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장작불에 흔들리는 그리자는 제법 운치가 있었지만 눈앞의 낭만보다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었다.


타르라크는 두번째 보급때 밀레시안을 돌려보낼수 있을지를 가늠하며 다시 보급품의 양을 가늠했다.

자신의 양을 줄이고 어떻게든 남은 물건을 잘 배분하면.. 쫓아낼 생각은 안하고 다음 보급 걱정부터 하다니 배가 불렀구나 타르라크.. 한숨소리가 정체되어있던 공기를 밀어내었다.

밀레시안은 그가 왜 인상을 찡그리는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밀레시안이 컵을 내려놓았다.


“다음 보급은 오지 않습니다.”


“....뭐?”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나는 당신과 함께 알비로 가기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그리고 내 다음에 올 밀레시안은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 오겠지요. 당신은 이제부터 나와 함께 알비로 가야합니다.”


타르라크는 인상을 찡그리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나마 조금씩 따뜻해져가던 공기가 다시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누구마음대로..?”


“포워르의 아디만티움 프로젝트는 여전히 그 연구소에서 진행중입니다.

뿐만아니라 이제는 변질되었죠. 글라스기브넨은 이제 안정적으로 변이체를 발생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고 또 그들을 제어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의 연구는 거의 다 완성 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이미 완성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랑은 더이상 상관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궁금할텐데요. 포보르가 어째서 치료제도 없이 글라스기브넨을 만들었는지.”

“.........”


“그리고 왜 모리안님이 가지고 있는 중화제가 효력을 발휘하는지.”

“그만.”


밀레시안은 두개의 반지를 꺼내보였다. 

은빛이 도는 두터운 반지 한 쌍이 무슨 의미인지 알 길은 없었지만 타르라크는 더이상 말도 섞이 싫다는 얼굴로 밀레시안의 말을 잘라내었다.


불쾌하게 일그러진 녹색의 눈동자가 밀레시안을 쏘아보았다.


“이제와서 치료제가 있었다고 말한들 사라진 내 동료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확인 했나요?”


“수작부리지 마세요.”


“정말, 확인했어요?”


밀레시안은 손안으로 반지를 굴리며 되물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밀레시안은 자신의 손등으로 타르라크의 시선을 유도했고 타르라크는 천천히 뒤집어 엎는 손등을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은 장갑을 벗었다. 밀레시안의 손등에는 예의 그 검은 비늘이 빼곡하게 돋아나 있었다.


타르라크가 고개를 돌리자 밀레시안은 익숙하다는듯 소매를 내렸다.

미쳤어 라는 속삭임이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다시 장갑을 끼는 밀레시안의 약지손가락에는 손에 쥐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은색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조금 더 얇고 무늬같은 것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밀레시안은 쥐고 있던 반지를 컵이 놓여진 테이블 옆에 내려놓았다.

물건은 확실히 전달했다고, 밀레시안은 힘주어 덧붙였다.


“내 혈액으로 자기 자신에게 글라스기브넨을 감염시킨 것입니까?”

“그리고 이 반지가 당신의 혈액에 대항하는 치료제입니다.”


“대답하세요. 당신의 감염원이 나입니까 아니면…!!”


아니, 상관없다. 이것이 마리의 혈액이든 타르라크의 혈액이든.

중요한건 눈 앞이었다. 지금 이 순간의, 마주하는 눈빛이 서늘했다. 

삶의 의욕은 커녕 표정이라는 것을 지어보일 의지조차 없는 인형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르라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밀레시안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그 사람은 타인의 목숨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요원은 보내야겠고 가서 뒤늦게 감염되면 저번과 같은 꼴이 되니 그냥은 못보내겠고, 그래서 나를 찾아왔나 했더니 이젠 멀쩡한 사람을 감염시켜서 보냈습니까? 변이체를 안정적으로 발생을 시켜요? 누가 말입니까. 포워르가? 아니면 바이브카흐가?


이번에는 아예 치료제를 보상으로 쥐어줄테니 아 그렇습니까 하고 알비로 갈줄 알았습니까?!”


“저야 모르죠. 저는 받은 임무만 수행할 뿐이니까요.”


밀레시안은 타르라크가 왜 흥분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겁에 질린것도 무모한것도 아니였다. 그저 타인의 이야기였고 다른 사람의 사정이었다.

이 선택지는 나의 것이 아닌 당신의 것. 이 운명은 밀레시안이 아닌 타르라크를 축으로 흘러간다.

밀레시안은 장갑을 두어번 잡아당기고는 화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작보다도 더 바싹 마른 건조한 목소리가 잿가루마냥 흩어져 내렸다.


“당신, 죽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도 죽겠죠. 당신이 거부한다면 우리들은 다음 선택지로 옮겨가면 그만 입니다.”





타르라크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쓸어올리는 그의 이마께에서 비늘같은것이 반짝이다 사라졌다. 울룩불룩 솟아올랐던 피부가 느리게 가라앉았다.

침착해. 아니라는 거 알잖아. 이런 얕은 도발에 속아넘어갈 정도로 그의 판단력을 흐려지지 않았다.

타르라크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릿속에 떠오르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지워내었다. 잘 생각해 마리가 있었다면, 마리가 정말 모리안의 손아귀에 있었다면.


이 날 이때까지 모리안이 필사적으로 그를 살려낼 필요는 없었다.


타르라크는 마지막으로 큰 숨을 내쉬며 자리로 돌아갔다. 집안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작은 렌즈들이 조심스럽게 방향을 돌려 타르라크의 움직임을 추적했다.


“......당신 이름은 뭡니까.”


“밀레시안.”


“나이는요?”

“적당히 있을거에요.”


“출신은?”

“몰라요.”


“소속은?”

“공식적으로는 없는 상태입니다.”


“가족이나 친지, 아니, 당신이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있습니까?”

“음...보시다시피..”


밀레시안은 이미 예상하고 있지 않느냐며 눈을 감았다.

가늘게 흘겨보는 따가운 시선에 밀레시안이 다시 눈을 떴다. 

검은 먹물을 떨어트린것 마냥, 눈동자 한가운데에서 부터 검은 동그라미가 서서히 확장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무엇인지 모를 목소리가 사람의 혓바닥을 빌려 이야기했다.


“우리들은 개인의 의지를 가질만큼 뚜렷한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마주하는 대상에 따라 변화하고 명령에 의지해 행동할 뿐.

이름이나 나이, 성별, 취향이나 특기 신체적 특징까지 모든지 바꿔 행동할 수 있지만 그것은 만능이 아닌 복사품. 가짜인 동시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공예품. 인형.

완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계산된 예측을 뛰어넘을 수 있는 까닭은 이 존재 자체가 처음부터 칼리번의 계산안에 들어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래요. 우리들은 이름이 아닌 명칭으로 불리우는 밀레시안.

네반이 만들고 모리안이 키워낸 마하의 잔재, 우리들은 바이브카흐의 그림자입니다.”


“.......바이브 카흐의 그림자..”


타르라크는 아주 느리게 밀레시안의 말을 따라 발음헀다. 눈을 깜빡였다. 밀레시안은 흐응.. 하는 작은 목소리를 내며 소파 깊숙히 기대어 앉았다.

나른함이 감도는 표정안에 부드럽게 말려올라간 입꼬리가 미소짓고 있었다.


“음.. 예시라도 보여드리는게 더 빠를까요?”


밀레시안은 안경을 치켜올리는 시늉을 하며 타르라크와 같은 포즈로 고쳐앉았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의미는 바로 이런 것.

밀레시안은 타르라크의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내며 말했다.


[“이런 건 어떠십니까?”]


녹음된 목소리가 울리는 것 마냥 똑같은 목소리가 타르라크를 향해 물어왔다.

타르라크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면 이런건?”]


밀레시안은 같은 개체의 조금 더 어린 목소리를 흉내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타르라크가 혀를 찼다. 밀레시안은 다시한번 눈을 깜빡였다. 미소가 사라졌다.


“그만두세요. 당사자가 보기엔 끔찍할 뿐이니까요.”

“네.”


밀레시안은 다시 원래의 자세로 고쳐앉았다. 

방금전의 생기있던 표정이 거짓인양 건조하고 무기질 적인 가면이 얼굴을 대신한다. 

방금 그것도  누군가를 흉내낸 것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의 행동일까.

관찰하는 시선 앞에 밀레시안은 아무런 대꾸없이 시선을 흘려보냈다. 

과연, 무작정 다 대답하는 것은 아니란말이지.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에게 물었다.


“좋아요. 일단 그 임무라는 것 부터 이야기를 끝냅시다. 일단 그 반지가 정말 치료제이긴 한겁니까?”


“이 반지는 모두 세개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손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손에. 마지막 하나는 알비에 있을 진짜 글라스기브넨의 실험체에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실험은 안해봤다는 이야기군요.”


“현재의 글라스기브넨을 대상으로는 실험을 끝낸 적은 없습니다.“


밀레시안의 모호한 대답에 타르라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반지의 작동원리는?”


“당신이 이 반지를 끼면 세번째 반지가 활성화 됩니다. 

세번째 활성화 된 반지가 글라스기브넨과 만나면 제 반지가 활성화 됩니다.

 제 반지가 활성화 되면 당신의 반지가 활성화 됩니다. 그럼 세 반지 모두 자신의 역할을 마치게 됩니다.”


“만약 세번째 반지에만 치료제가 들어있고 우리 둘의 반지는 독약이 들어있다면 어쩔겁니까”


타르라크의 질문에 밀레시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세번째 반지를 활성화 시킬때 까지 삶이 연장되는 것이겠네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는 것이군요.”


“더 정확히 말씀드려야 겠습니다. 당신도 나도 다른 것을 선택할만한 선택지는 없습니다.”


밀레시안은 양손을 깍지끼어서는 턱 아래를 받쳐들었다.

얼기설기 얽혀있는 손가락의 가장 마지막끝에 은색의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믿고 끼던가. 끼지않고 이 다음에 찾아올 밀레시안의 손에 죽던가.”

“만약 내가 다음 밀레시안을 기다린다면 너는 어떻게 됩니까.”


“나도 당신과 함께 죽습니다. 아니, 다음 밀레시안이 출발하기 직전 나는 죽습니다.”


“.......”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나의 죽음이 모리안님께 전달되고 그 신호를 출발신호 삼아 다음..”

“그만, 그만…거기까지 이야기 하면 됐어요. “


타르라크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너무 가벼운 대화에 타르라크는 자신의 정신마저 어디로 날아가버릴 것 같은 기분이되었다.


생명이 가벼웠고 삶이 가여웠다. 대화 속 목소리 어디에도 밀레시안의 의지를 붙들어 놓을만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숨 하나에 시선이 스쳐지나갔다.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름도, 나이도, 모든게 대상에 따라 변화한다 이거지..”


[“성별도 어느정도 흉내 낼수 있습니다만.”]


“내 목소리로 그런 흉내 내지 말라니까..!”

“네.”


밀레시안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타르라크는 유난히 꽉 다물린 입매를 보며 이마께를 어루만졌다.

그러니까 방금 그건.. 제 나름대로의 장난인걸까. 타르라크가 고민하는 동안 밀레시안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원에는 쉼 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팔랑팔랑 날리는 눈이 아닌 여러 결정이 뭉쳐내리는 굵고 소복한 함박눈.

지붕위에 쌓이고 쌓인 눈들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내려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렸다.

창문밖에 눈더미가 소복히 쌓이는 동안 타르라크와 밀레시안은 말없이 저마다의 침묵속에 빠져들었다.


“밀레시안.”

“네.”


“대상에 따라 반응을 달리한다고 말했죠?”

“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타르라크였다.

밀레시안은 처음부터 침묵의 공백은 없었던 것마냥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방금전의 목소리 장난도 나에 대한 반응입니까?”


“네, 당신이 질색하길래.”


“.... 하지만 나는 상대가 싫어하는 장난은 두번 반복 안하는 스타일인데요. 

그건 누구를 기반으로 만들어낸 반응이었습니까?”


“......”


밀레시안이 고개를 돌려 타르라크를 바라보았다.


“밀레시안, 상대에 맞추는것 이전에 기본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인격이 있습니까?”

“......”


“아니면 그건… …...”


타르라크는 하던 말을 멈춘채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은 대답없이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시 부르면, 이쪽을 돌아볼 것이다. 타르라크는 머리를 헝클어 트린뒤 다시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다시 물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녹색의 눈이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은 처음으로 눈을 깜빡였다. 

무의식중에 하는 깜빡임이 아닌 불편함과 회피의 의사.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의 시선이 향하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유리창 표면으로 타오르는 화롯불과 나란히 마주앉은 두 개의 의자가 보였다. 얼굴이 비치지 않는 먼 창문께에 타르라크의 슬리퍼가 비치고 있었다.

타르라크는 다시금 밀레시안을 불렀다.


“밀레시안.”


“네.”


“밀레시안.”


“듣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타르라크는 지금 이 모든 생각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동시에 의미가 없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서? 그렇다고 해서? 타르라크에겐 더이상 선택지가 없었고 이제 자신의 길이 끝나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 다음은 없다. 다음에 오는 밀레시안에게는 이러한 대화의 기회조차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타르라크는 자신의 생각을 거듭 부정하면서도 밀레시안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되돌아오고 무의미한 부름을 반복했다. 

시선이 마주쳤다.창을 통해 느껴지던 검은 시선이 타르라크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때보다는 작게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정상인의 범위보다는 조금 더 넓게 풀려있는 검은 동공 속, 화롯가의 불길이 반짝였다.

그 모습은 두말할 것 없이 따스한 빛을 품고 있었다. 

타르라크는 소리없는 한숨을 달싹거렸다. 말이 되지 못한 소원이 공기중에 녹아들었다.




밀레시안은 스스로 말했다. 자신은 타인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그러나 인간의 예상은 뛰어넘는다고. 

바람을 들어줄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신의 상상보다 더 나을 수도 있고 더 나쁠 수도 있다. 

과거가 정해지지 않았기에 그 미래는 무한. 다만 선택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나아갈 수 없었을 뿐이다. 

온전한 인간조차 운명에 휩쓸려 이런 설원까지 떨어지는 마당에 부여잡을 것 하나 없는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고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명령어뿐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변화한다. 수도 없이 많은 형태로 그 모습을 바꾸어가며 그 자리에서 몸부림친다.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이 들고 있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선택에 기로 앞에 섰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선택과 후회를 반복하며 살아온 생애에 끝에 또다시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죽지 못해 살고 있던 그에게 살아갈지 죽어버릴 지를 묻고 있었다. 

어느 것이 답일까 무슨 대답을 내어놓아야 올바른 선택일까. 타르라크는 깍지낀 손을 모아 턱을 받쳤다.

녹색의 눈이 또다시 흐려졌다.


살아도 죽은 목숨과 죽어도 살아가야하는 기묘한 두사람이 한 오두막에 마주앉아있었다.

그는 다시한번 이 모든 생각에 부정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밀레시안에게 머물러있는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버릴 수 없었다. 만일 그 때 마주보던 눈도 이렇게 포기와 실의가 가득했다면, 그는 그 숲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이름모를 열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를 떠나서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와. 소녀가 말했다.


언젠가 다시한번 우리들을 기억해줘. 설원 어딘가에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숲의 향기가 스쳐지나갔다. 

타르라크는 책상을 향해 일어서며 물었다.


“체스는 할 줄 아나요?”


밀레시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는 방법뿐이라면.. 이라고 대답했다.

타르라크는 온화한 미소를 띄워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택지 앞에서 등을 돌린 그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잠깐 어울려주시죠.”








시계가 움직인다. 

눈이 내리는 설원의 오두막,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장작불이 타오르는 소리와 차가 끓어오르는 소리, 

또각거리는 나무 말들이 움직이는 소리와 중간중간 식기따위를 사용하거나 의자가 끌리는 소리뿐.


밀레시안은 날마다 이어지는 체스게임에 의아해하는 눈치였지만 그저 타르라크의 의견에 따라 움직였다.

최소한 언제까지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충고에 타르라크는 달력을 한번 흘끗 보고는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의 생각을 헤아릴수 없었다. 차라리 이 체스판 처럼 훤히 드러나면 좋을텐데.

밀레시안은 몇 번의 고전끝에 체스판 끝에 다다른 폰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승격을..”


“무엇으로?”


“......”


밀레시안은 눈을 돌려 남은 말들을 헤아렸다. 

밀레시안의 꽤 위험했었지만 여왕은 아직 살아있었고 룩도 건재했다. 

부족한 것은 초반에 하나 허무하게 보내버린 나이트 하나정도.

하지만 밀레시안은 굳이 나이트를 필요로하지는 않았다. 이왕 여기까지 온거 가장 유용한 말을 고르는게 맞아. 


그렇지만 손은 여전히 머뭇머뭇 선택을 망설이고 있었다. 오랫동안 열지 않은 입안이 끈적거렸다. 

밀레시안은 미끌거리는 타액을 한데모으기 위해 입을 우물거렸다. 

끈적하고 우울한 기분을 삼켜내자 바싹 마른 혀끝이 입천장을 끌어당겼다.


밀레시안은 타르라크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타르라크를 이기기 위해서는 정석적인 방법보다는 조금 변칙적인 전략이 효과적이었다.


“나이트로..”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의 나이트를 손에 쥐어주었다. 

체스말을 건네는 그의 검지손가락에는 은색으로 반짝이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나이트를 내려놓은 밀레시안은 다시 게임을 재개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 타르라크가 선언했다.


“체크메이트.”


역시 나이트로 바꾼건 무리수였을까. 찬찬히 지난 게임의 내용을 복기하는 밀레시안을 바라보며 타르라크는 말했다.


“재미있었습니다.”

“그런가요?”


“즉석에서 생각한 것 치고는 아주 기발한 작전이었어요.”


“결국 져버렸지만요.”

“그렇지만..”


타르라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레시안은 타르라크가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승패를 떠나서, 당신의 나이트가 저의 퀸을 잡았을때는 당신도 주먹을 움켜쥐지 않았습니까?”

“.......”




밀레시안은 대답없이 남은 말들을 정리했다. 타르라크는 한 김 식은 찻주전자를 들고 돌아왔다. 

아직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주전자에서 향긋한 차향기가 풍겨져왔다.

타르라크는 이제는 익숙해진 두개의 컵에 적당히 나누어따른뒤 주전자를 치워놓았다. 

밀레시안은 체스판을 접고 컵을 끌어당겼다.


적막했다. 승부가 길어질때마다 잠시동안 찾아오는 휴식의 시간이었다.

이제 곧 타르라크는 예의 그 글러브속의 자료를 옮겨적을 것이고 밀레시안은 그의 개인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릴 터였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다시한번 체스를 두고 잠을 잔다.


벌써 며칠이나 이 무의미한 날들을 반복했던가.


타르라크는 이미 반지를 꼈지만 도무지 출발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원래 예정되었던 보급날까지 기다릴 생각인가. 하지만 그러기엔 식량이 부족할 것이 분명했다. 

원래 혼자서 살더라도 생존이 빠듯하도록 짜여진 식단, 철저하게 글라스기브넨을 통제하기 위해 짜여진 그의 보급품으로는 두사람의 식사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밀레시안은 텅 빈 종이와 아직 열리지 않은 펜을 바라보았다.

타르라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내일 출발하면 딱 맞을 것 같군요.”

“식량을 다 소비해야할 필요가 있었나요?”


“좀 더 넉넉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입니다.”

“내 몫의 식사는 신경쓰지 않아도 좋다고 미리 말씀드렸는데 말이죠.”


밀레시안의 말에 타르라크는 빙긋이 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그러면 의미 없지 않느냐는 의문의 대답과 함께 그는 기침을 토해냈다.


갈증과는 다른 버석거림이 그의 목덜미를 긁어내리고 있었다. 

차를 마셔도 가라앉지 않는 기침이 의미없다는 걸까, 아니면 혼자서 죽어가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일까.


기침을 가리기위해 말아쥔 타르라크의 손 가운데서 은색의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손가락 한마디를 거진 다 덮을 만큼 두꺼운 반지는 어쩐지 유약해보이는 그의 손가락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다. 차라리 같은 은색이라도 얇은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자신이 지급받은 것과 같은 얇은 디자인의.., 반지에 대한 생각을 거듭하던 밀레시안은 시선을 다른곳으로 돌리며 차를 홀짝들이켰다.


무의미한 상상. 애초에 반지가 뭐 어떻단 말인가. 이건 악세사리따위가 아니야. 

밀레시안은 흘려보낸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던 탓에 생겨난 잡념이라고 생각하며 컵끝을 깨물었다.

아무것도 없는 설원속, 단 둘만이 있는 오두막의 시간은 현실보다 느리게 흘러갔다. 

1분 40분같이 느껴졌고 하루가 지났다 생각하면 고작 30분이 조금 더 넘은 시간이 흘러갔을뿐이었다.

타르라크의 행동이 딱히 느린것도 빠른것도 아니었기때문에 밀레시안은 이 시간감각의 오류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이해 할 수 없었다. 시간을 가늠할 환경이 안되어서 그런걸까.


밀레시안은 하루종일 은색으로 빛나는 바깥풍경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순간 낮이 되고 아차싶은 순간 밤이되어버리는 설원은 오늘도 어제와 같은 풍경으로 눈보라가 휘날리고 있었다.

밀레시안이 창밖을 바라보는 동안 아주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타르라크는 천천히 글러브를 조작해 저장된 정보를 불러들였다. 사각거리는 종이소리와 함께 펜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한모금 더 차를 머금으며 그의 펜이 움직이는 것을 눈으로 쫓았다.

이 허비되는 시간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건 나태함일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한모금을 목너머로 넘긴 밀레시안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시선이 마주친다. 녹색의 눈동자는 어느새인가 밀레시안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꼬리를 바라보며 밀레시안은 눈앞에 비치는 씁쓸한 미소를 흉내내었다.



그 날 저녁, 밀레시안은 오래간만에 기억에 남는 꿈을 꾸었다.

기억속에 남아있는 것은 아주 일부분에 불과했지만 밀레시안은 녹색의 잔상이 흩어지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어리석은 녹음이 흩어지고 있었다. 끊없는 희망을 부여잡고 놓치 않는 끈질긴 녹색의 주박, 

밀레시안은 흩어진 녹색 어디선가 풀벌레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설원의 바람소리 대신 들려오는 작은 날벌레의 날개짓소리에는 열기 어린 여름의 풀내음이 섞여들어있었다.

나지막한 양의 울음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풀숲에서 작은 날벌레들이 날아오르는 환각이 밀레시안의 눈을 가렸다.

 쉴새없이 점멸하던 불빛이 사라졌다. 


밀레시안은 어둠을 향해 되물었다. 

이건 누구의 기억? 검게 변해버린 용의 석상은 말없이 밀레시안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석상아래 부서진 새하얀 가면이 밀레시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게 무슨 명령을 내리고 싶은거야?

가면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했지만 입부분이 없는 반쪽짜리 가면이었던 탓에 아무런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밀레시안은 고개를 들었다. 







어둠속으로부터 검은 칼날이 날아오고 있었다.







두려움, 혹은 긴장감, 힘이 들어가는 몸이 뻐근하게 통증을 호소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찌그러진 몸을 부풀렸다. 내동댕이쳐진 몸을 추스려 몸을 일으켰다.

칼날을 피해내기 무섭게 검은 그리브로 무장한 발이 날아들었다.

정면에서 걷어차인 탓에 몸이 좀 느리게 반응했지만 그래봤자 상대는 사람, 밀레시안은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으며 나이프를 휘둘렀다. 강한 바람소리와 함께 대검이 휘둘러져 들어왔다.


안드로이드들 속에서 태연하게 섞여있는 이질적인 검사가 하나 있었다.

밀레시안은 무식하리만치 강한 힘에 떠밀려 두어걸음 물러섰다.

검을 휘두른 검사는 말없이 손을 휘저어 경계모드로 전환된 안드로이드들을 내보냈다. 붉은 램프가 번쩍였다. 

밀레시안은 안드로이드들의 공격을 피하며 다시 거리를 좁혀왔다.


근접전으로 엉겨붙는 안드로이드들의 팔다리를 잘라내자 균형을 잃은 몸뚱이가 뒤로 쓰러졌다. 

텅 빈 몸뚱이에서 하얀 연기가 복도가득 피어올랐다.

시야가 흐려진 탓에 밀레시안의 공격은 거기서 중지, 하얀 안개사이로 붉은 빛이 쌍을 이루어 흔들렸다. 

안드로이드들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레시안은 그 빛을 징검다리 삼아 검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얗게 흐려진 복도의 정 중앙, 움직이지 않는 굵은 숨소리가 바로 그가 있는 위치였다.


검사는 태연하게 검을 들어 밀레시안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상대가 안보이는 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일텐데도 검사는 어렵지 않게 밀레시안의 공격을 방어하며 역으로 공격을 가해왔다.

미세하게 진동하는 검끝이 보호구를 깎아내었다. 엉망이 된 프로텍터를 미끼삼아 떨쳐내었다.


빈틈을 찾는다면 파고들 수 있을거야. 장검으로는 반응의 한계가 있어. 

몇번이고 달라붙기를 시도하던 밀레시안은 강한 스파크를 튀기며 검은 기사와 정면으로 맞붙었다.

텅하는 소리와 함께 밀레시안은 또다시 벽면으로 날아갔다.


누군가가 환풍기를 작동시켰다. 안개가 사라져갔다.


[“밀레시안..!”]


“아직 버틸만 해요. 서둘러요.”


“.......”


밀레시안은 순간적으로 잡아챈 검은 기사의 머리보호구를 내던졌다.

텅빈 금속음이 복도를 따라 굴러갔다. 

헬멧을 빼앗긴 검은 기사는 흐트러진 붉은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타르라크가 숨어있는 연구실을 흘끗 바라보았다. 


아직, 아직 할만해. 아직 할 수 있어. 밀레시안은 발자국이 선명한 옷을 털어내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나이프가 흔들렸다. 헐거워진 자루에서 좋지 못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이라는 말은 결국 언젠가는 지쳐버린다는 이야기, 반면 안드로이드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얼굴을 채워 절도있는 발소리로 복도를 울려오고 있었다. 검은 기사는 지치지 않았고 상황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다시 소모전으로 돌아간다면 지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조금 흐름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어. 밀레시안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누군지 궁금하나요?”


“.....”

“나를 쓰러트리기 전까지는 알려줄 수 없어요.”


대답은 안하겠지만. 밀레시안의 으름장에 붉은 머리의 기사가 고개를 살짝 비틀어졌다. 

갸웃거리는 움직임인지 시선을 돌리는 움직임인지 모호한 몸짓이었다.

대답은 없을테지만 반응은 보일것이다. 살짝 비틀어진 목덜미로 검은 비늘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붉은머리의 기사가 입을 열었다.


“그녀석이 누구여도 상관없어. 모리안의 요원은 모두 배제한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밀레시안으로서는 그의 대답이 굉장히 뜻밖의 반응이었다.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반, 그리고 상황에 대한 정확한 답변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반절이었다.

하지만 그는 상당히 침착하게 밀레시안의 말에 대답했다. 생각하듯 시선을 돌리고 시험하듯 밀레시안을 내려보았다.

밀레시안은 당혹감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요원이 아니에요.”

“그러면?”


분명, 요원은 아니지. 밀레시안의 대답에 검은 기사가 되물었다.


“그냥 그 비슷한..”


밀레시안은 말끝을 흐리는 동시에 붉은 머리의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대화에는 관심 없다는 걸까? 약아빠졌기는.. 밀레시안은 남자의 공격을 피해낸뒤 방향을 바꿔 달려나갔다.

몸을 틀어내는 중간, 나이프를 하나 집어던지며 남자의 헛점을 유도했다.

나이프를 쳐댄뒤 정직하게 들어오는 찌르기, 다시 한번 가드, 그리고 다시 힘겨루기.

하나밖에 남지 않은 나이프가 대검이 맞부딪치자 예의 그 불쾌한 진동이 팔을 타고 가슴까지 흘러들어왔다. 

양손으로 다잡은 나이프의 날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제 곧 이 나이프도 한계, 밀레시안은 나이프가 부서지는 것에 개의치 않고 대검을 밀어내었다. 

맨손이 된 밀레시안은 양 손가락을 넓게 펼치며 붉은 머리의 남자 뒷편으로 몸을 굴렸다. 검끝이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돌아섰다.

밀레시안은 와이어가 연결된 글러브를 꽉 움켜쥐며 검을 잡아당겼다. 

현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진동이 온 몸을 불쾌하게 흔들어 놓았다. 밀레시안은 이를 악물며 현을 조였다.


잠시 힘겨루기가 있었지만 대검은 결국 와이어의 속박을 이기지 못한채 부서져내렸다.

부서지는 검의 조각들과 흔들리는 금속의 현, 파편들이 튀어올랐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굉장히 뜻밖이라는 얼굴로 뺨을 스치고 지나간 붉은 선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한시름 덜어낸 밀레시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보는 밀레시안의 표정에는 여유로움까지 감돌고 있었다.


“전직 연구원과 체스친구정도?”

“그거 대단한 인연이군..”


피부가 갈라지며 비늘같은것이 튀어올랐다. 

상처는 비늘의 흔적으로 뒤덮였고 밀레시안은 그러면 그렇지 하고 대답하며 와이어를 회수했다.

밀레시안의 나이프는 부서졌고 남자는 대검을 잃었다. 와이어풀링으로 어떻게든 동점으로 만들었지만 이제부터가 문제, 밀레시안은 저릿거리는 양팔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양손을 움직여보았다. 


손끝이 둔하다. 하다못해 조금 온전한 모양의 안드로이드 라도 있었으면 꼭두각시 대용으로 사용해 볼텐데. 

하지만 이런 경우를 상정하지 않았던 밀레시안의 공격과 닿아있는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대검 때문에 안드로이드들은 모두 박살이 나있는 상태였다. 애초에 지나치게 연약하고 무른, 허수아비에 가까운 로봇들이었다.


그렇군, 이제는 어쩐다.. 이런식의 정면 공격은 불리해. 밀레시안은 어떻게든 남자의 주의를 끌기 위해 입을 열었다.


“대화가 가능한 상대를 만나면 묻고싶은게 있었어요. 

이렇게 본인에게 질문할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요.”


“시간이라도 끌어볼 생각인가? 어디 한번 해봐.”


“당신, 어떻게 살아있는거죠”


“신나게 싸워 놓고 갑자기 죽은사람 취급이야?”


남자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모리안은 이미 글라스기브넨을 손에 넣었어요. 

글라스기브넨의 약점이 냉기라는 것도 알고 조금만 날씨가 추워져도 활동을 멈추는 특성을 가진다는게 무슨 의미인지도 알고 있죠.


아디만티움의 기획대로 에린전역에 글라스기브넨이 살포된다 하더라도 에일레흐에게는 네반이 만든 레인메이커 시스템이 있으니 어느정도 소용없을거에요.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이외의 도시들. 레인메이커의 기후조작으로 어느정도 버티며 왕성에 중화제를 공급한다면 도시 안은 안전해지지만 그렇지 못한곳은 분명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버리겠죠.

포워르가 노린것은 칼리번의 의지가 닿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차이. 


그래요 분명 포워르가 노렸던 것은 병의 고통으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로 하여금 칼리번에서 등을 돌리게 만들 생각이었어요.

공정치 못하고 공명치 못한 위선을 드러내게 하려던것이 처음의 목적.


하지만 지금은 당신이 있네요. 그것도 몇단계나 되는 변이체의 고비를 뛰어넘고 어떠한 부작용도 없이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기적의 한 개체가.”


“......”


“어떻게 한건가요? 당신 이외의 모든 변이체들은 또 어떻게 된건가요. 모두가 이성이 없는 괴물이 되어 얼려져 있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적은 없나요?”


남자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익숙하게 눈을 피하며 표정을 얼버무렸다.


“글쎄, 나는 워낙 워낙 튼튼하게 태어난 체질이여서.”


“거짓말. 튼튼한 것으로 실리엔을 극복할 수 있었으면 나같은건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밀레시안의 확신어린 답변을 흘려들으며 남자는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대검에서 나이프로. 무기를 바꾸는 것 만으로도 남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동시에 그가 취한 자세는 아주 낯이 익은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그가 만들어진 모조품이 아닌 것을 확신했다.


“누구죠? 당신의 뒤에 서있는 사람은..?”

“글쎄..”


남자는 가볍게 대꾸하며 나이프의 자루끝으로 자신의 머리를 긁적거렸다. 

고개를 반쯤 기울인 남자의 옆모습에서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져왔다. 


“나를 쓰러트리기 전에는 알려줄 수 없어요.. 였나?”




남자의 뺨에 비늘이 돋아나고 있었다.

비늘은 뺨을 타고 올라가 귀를 덮었고 까맣게 물든 귓바퀴는 지러미모양으로 펼쳐졌다. 

눈동자가 변하고 숨소리가 변질되었다.  밀레시안은 속으로 온갖 욕을 다 내뱉으며 와이어를 펼쳤다. 

부분변이가 아니였잖아. 밀레시안은 근처있는 안드로이드의 팔과 다리따위를 잔뜩 끌어모으며 날붙이를 꺾어내었다. 

칼날을 붙든 와이어들이 카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면을 긁어내렸다. 잔뜩 경계를 하는 밀레시안을 향해  남자가 물었다.


“아, 그러고 보면 나도 하나 물어볼 것이 있었어.”

“.....무슨?”


“모리안은 왜 일부러 둘씩이나 사람을 보내온거지?”

“그야…”


남자는 짧게 웃으며 나이프를 휘둘렀다.

질문을 던지고 그 호흡을 파고드는것이 이 사람의 상습적인 페인트인 모양이었다. 

밀레시안은 안드로이드의 팔을 무게추 삼아 날카로운 와이어가 남자의 팔을 휘감았지만 이번은 다르다.

남자는 팔을 한번 당기는 것 만으로도 와이어의 속박을 끊어내었다. 부서진 상완의 철갑안으로 또다른 검은 비늘들이 돋아나있었다.


어깨까지 새카맣게 덮고 있는 비늘들은 그 자체가 갑옷인것 마냥 번들거렸다.

남자는 나이프를 휘두르며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네 손의 그 장갑, 분명 모리안의 연구원들이 기기를 다룰때 쓰는 그 장갑이야. 

그걸 개조해서 무기로 쓰는 녀석이 하나 있어서 그 정도 변형된건 알아 볼 수 있지. 

너 혼자서라면 어렵지 않게 이 연구소를 휘저으며 원하는 바를 얻어 갈 수 있을텐데. 왜 일부러 혹을 붙이고 들어온거야?”


“하나만 묻는다면서요.”


남자는 이미 인간이라기 보다는 반인반용, 밀레시안은 입술을 깨물며 터무니 없는 괴력을 어떻게 받아칠지를 고민했다.

어느정도를 예상해야 할까, 어느 정도를 상상해야할까. 약해질대로 약해진 타르라크 조차 강철로된 경첩을 그대로 뜯어낼 만큼의 근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저 사람은 어떨까, 타르라크보다 훨씬 더 많이 진행된 진짜 글라스기브넨의 숙주, 이성을 잃지 않은, 반인 반용의 남자. 용의 기사가 묻는다.


“까불지마라 모리안의 개. 내가 듣고싶은건 네녀석의 농담따먹기따위가 아니야.

네 말대로 모리안이 글라스기브넨을 손에 넣었다면 그건 내 동료들중 누군가가 살아서 돌아갔다는 것.

네가 모리안의 실험체라는건 그들중 누군가가 너와 만났다는 것. 혹은 모리안이 그들에게 무슨짓을 했다는 말이 되겠지.


그렇다면 어째서 이곳으로 돌아온거냐. 변질된 글라스기브넨을 얻기위해 찾기위해 온거냐?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일부러 두 사람으로 나뉘어 시간을 끄는거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밀레시안의 눈가에도 비늘 비슷한것이 돋아나고 있었다. 

한없이 예민하게 날을 세운 본능이 밀레시안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대답해. 머릿속을 지배하는 바이브카흐가 속삭였다. 대답하지마. 열이오른다. 머릿속 불빛이 점멸한다. 

남자가 물었다. 


“대답해, 너희는 무엇을 위해 이곳으로 돌아왔지?”


“나는..”


“너는 뭐지?”





보급선 대신 도착한 이송기에 오르기 직전 타르라크는 계단앞에 멈춰 선뒤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타르라크의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밀레시안은 무슨일이냐는 표정으로 타르라크를 올려다 보았다. 설마 이제와서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니겠지?

타르라크는 바람결에 흩어지는 목소리를 최대한 전달하기위해 크게 소리쳤다. 고함소리같은 대화가 오고갔다.


“한가지 확실히 해둡시다.”

“........?”


“나는 당신을 믿지는 않습니다.”


“발언 시점이 부적절하네요. 조종사가 이쪽을 돌아보고 있어요.”


“상관없습니다. 뭣하면 이 자리에서 죽이던가요.”

“그럴리는 없어요. 나는 당신을 알비로 데려가야 합니다.”


“내가 당신을 따라 알비에 가지 않으면 이용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인가요?”

“네.”

“당신이? 아니면 내가?”


“우리 둘 모두요. 당신이 없는 나는 이용가치가 없고 내가 죽은뒤에는 당신의 이용가치도 없어집니다.”


타르라크는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게 내가 당신을 따라 알비에 가는 이유입니다. 나의 가치는 당신의 목숨에 있고 당신의 가치는 나의 목숨에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목숨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지요. 아 물론 누군가에게 저당잡혔다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그 누군가가 모리안일리는 더더욱 없고요. 다만 이건 확실히 합시다. 

하루가 한달같고 한달이 사 년같았던 저 설원속에서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은 것은 삶에대한 갈망도 아니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아닙니다. 

그건 오로지 나와 내 동료들이 걸어온 길에 대하여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을뿐.”


타르라크는 자신의 가슴을 쳐보이며 말한다.


“밀레시안, 나는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정합니다. 연민하고 불쌍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나의 목숨에 가치를 걸고 있는 당신에게 내가 걸어왔던 길을 보여주겠습니다. 그 끝이 어떠한지 보여주겠습니다. 당신이 싫다고 해도 이미 이 선택지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네, 그래요. 당신도 나도 이미 한 길을 걷고있으니까요.


이 길의 끝에서 만난 당신에게 무언가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나와의 만남이 당신에게 무언가를 남겨주기를. 이 끝이 위선과 기만으로 얼룩지더라도 단 한점의 진심이 전해지기를.”


“........”


“나는 나의 길의 끝이 당신의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밀레시안은 소리없이 입을 움직였다. 이것은 연민이 낳은 비극의 시발점.


남자가 밀레시안의 입모양을 읽어내기도 전에 휘둘러진 와이어가 날아들어왔다.

밀레시안은 반대편으로 몸을 굴렸다. 안드로이드의 날카로운 파편을 축으로 삼아 날아든 와이어가 남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남자는 가볍게 안드로이드의 파편을 피해낸뒤 밀레시안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나이프는 이미 의미가 없이 격투에 가까운 난전, 밀레시안은 피하는데 급급해진채 최대한 신중하게 공격을 피해내었다.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간 주먹이 깊은 자국을 남기며 벽을 따라 이어져갔다.


벽을 후려칠때마다 전등이 흔들렸다. 

헝클어진 와이어를 회수할 길이 없어 마지막 남은 글러브마저 연결을 해제했다.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간 밀레시안이 숨을 헐떡거리며 벽에 기대어 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밀레시안이 지친것에 비해 남자는 호흡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밀레시안을 노려보았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남자도, 밀레시안도, 몸속의 피가 끓어오르는 동안 글라스기브넨이 더욱 활개를 치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애써 기침을 숨기기위해 큼큼 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속이 매스꺼웠다.


잠시 숨을 고른 밀레시안이 다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남자 또한 주먹을 허리춤 가까이 끌어당겼다. 손가락에 끼워진 작은 반지가 신경에 거슬렸다.

밀레시안은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흘끗 바라본뒤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번째 공격이 날아들었다.


밀레시안은 모리안에서의 훈련을 떠올리며 왼쪽으로 피해내었다. 

상대또한 이런 패턴에 익숙한지 곧장 왼쪽을 막아오는 공격이 날아들었다. 여기서는 가드를, 

하지만 그건 사람대 사람으로서의 이야기. 밀레시안은 날아드는 공격을 카운터로 받아치며 서로의 위치를 뒤바꾸었다. 상대의 힘을 이용해 구석진 자리에서 벗어난 밀레시안은 곧장 백스텝을 밟으며 긴 거리를 벌려내었다. 

파지직 거리는 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안..!! 이쪽은 거의 다 끝났습니다. 괜찮습니까? 대답 하세요..! 밀레...시…!!”]


밀레시안은 빠르게 따라붙는 공격을 피해내기에 급급했다. 

이렇게 피해내는 것으로는 승산이 없다. 하지만 한대라도 맞았다간 다음 연계기로 이어진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가 사용하는 기술을 밀레시안도 알고 있다는 점, 남자도 그 점을 알고 있는지 변칙적인 페이크를 섞어오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져왔다. 호흡이 흐트러지며 밀레시안의 반응속도도 점차 느려졌다. 비늘이 일어나려는듯 피부가 갈라졌다가 이어붙기를 반복했다.


온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억누르며 사람의 형태를 유지해야했다. 

잔뜩 열이 올라온 머릿속을 울려오는 불빛. 그리고 결국 한순간, 밀레시안은 힘차게 움켜쥐어진 차징 피스트를 막아낼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만 포기할까? 밀레시안의 눈가 아래에 작은 균열이 갈라졌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 할 수 없어. 어떻게든 무슨 방법을.. 

타르라크는 빠르게 흘러가는 실험체의 명단을 뒤지며 아직 살아있는 이름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알파벳순으로 나열된 이름들을 쭉 훑어 내리며 붉은 이름들을 지워내려가던 찰나 아직 흑색으로 남아있는 이름을 두 개 발견했다.

이름을 따라 날짜와 성별, 신장등의 정보를 지나 가장 마지막으로 시선을 옮겼다.

최근의 위치를 확인하는 순간 타르라크는 준비된 장치를 작동시키며 서둘러 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하지만 아직 포기할 수가 없어. 어떻게든 방어를.., 

밀레시안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들이칠 충격에 대비했다. 아무리 몸을 웅크려도 철벽을 움푹패이게 만드는 저 손길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밀레시안은 한쪽팔의 방어를 포기한채 힘주어 움켜쥔 손을 휘둘러 등뒤를 막고 있는 벽을 내리쳤다. 벽안을 지나가는 복잡한 전선이 손안에 얽혀들었다.  가슴을 가로막은 팔 아래 딱딱한 비늘이 차례차례로 일어나 딱딱한 보호막을 만들었다.


검은 주먹이 밀레시안을 향해 내질러지려는 찰나, 연구실의 문이 열리며 타르라크가 뛰쳐나왔다.


“루에리..!!”


루에리라고 불린 남자는 밀레시안을 복도 저편까지 날려보낸 뒤 인상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카메라가 그들을 예의주시하려는 순간, 연구소의 전원이 내려갔다. 

벽안을 헤집으며 멀찍이 밀려난 밀레시안이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토해내며 딱딱하게 경화된 팔을 꺼내들었다.

어둠속 누구도 볼 수 없었지만 그 팔은 루에리 못지 않게 변이된 용의 손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볼 새도 없이 손은 다시 인간의 형태로 돌아갔고 밀레시안은 갑작스러운 어둠에 혼란스러워 하는 두 사람을 향해 다시 다가갔다.

밀레시안의 앞으로 타르라크는 양팔을 벌린채 끼어들어왔다. 


밀레시안은 등돌려선 타르라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만두세요!! 그 사람은..!!”




“당신은 정말로 이 자가 협력할 거라 생각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