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비밀레) reload #13(2)
화면이 넘어갔다. 무언가의 간섭이 생긴것 마냥 노이즈 섞이 음성이 화면위로 끼얹어졌다.
연구소의 설비들을 다시 복구하는 아발론의 얼굴위로 집요한 노이즈가 스쳐지나갔다.
“도망치라고 했어요.”
“그런말 하지마.”
“후회를 하더라도 살아남으라고 했어요.”
“내가 아는 너희들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어.”
“그런 나를 만나 기쁘다고 했어요.”
“그렇게 사람처럼..”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게 사람인 것 처럼..!!”
아발론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안았다.
삼키지 못할만큼 커다란 감정이 흘러넘쳤다. 당신들은 언제나 그렇게 수많은 얼굴들로, 서로다른 이름들로 다시금 또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수많은 시간이 지났다. 마하는 바이스의 시약을 가로챘고 그녀의 손에서 실리엔의 중화제가 완성되었다.
필리아는 다시한번 그녀들에게 속아주어야만 했다.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필리아의 카스타네아는 그들에게 필리아의 실리엔을 넘겨주었다.
뿐만일까, 바이스의 중화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순도로 정련된 힐웬합금을 필요로 했다.
바이스는 끝까지 그녀들이 충분히 얻지 못할 힐웬을 걱정하며 그 대체제를 만들려 했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실비아가 죽어야했고 바이스 또한 온전한 꼴로 죽지 못했지만 필리아가 그걸 알리가 없었다.
원망도 체념도 없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필리아는 자신의 남은 감정을 버려야 했다.
필리아는 발레스에 숨어들었고 그들이 보관중이던 힐웬에 대한 비서, 고대 자이언트의 서를 훔쳐내었다.
물증은 없었지만 모든 정황이 필리아를 가리키고 있었다.
발레스의 격분에도 필리아는 모른채 고개를 돌렸고 바이브카흐도 눈을 감았다.
에일레흐는 자신은 아무런 힘도 권한도 없다며 은근슬쩍 넘어가려했다.
반의 몰락이후로 에린의 연합에서 구석으로 밀려난 발레스는 그대로 분을 삭힐 수밖에 없었다.
그 풀어낼 길 없는 분노가 온전히 필리아에 향한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필리아는 그렇게 3번의 배신과 2번의 기만을 딛고 겨우 소원을 이루었다.
더이상 기억을 잃는 다는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었고 언제 괴물로 변할까 두려워하던 아이들은 편안하게 잠자리에 누울 수있게 되었다.
그래, 이거면 되었어. 론가에 마하의 부하들이 출입하고 있었지만 필리아는 애써 그 발걸음을 무시했다.
긍정적인 내일만을 바라보려했다. 문제를 덮고 미루며 회피했다.
그리고 그 어느 날, 마하의 연구소에 괴물들이 출몰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보라빛으로 흉흉하게 빛나는 안광이 뉴스화면을 가득채웠다.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지 모를 괴물들의 모습에 에린은 연일 심각한 표정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네반과 모리안의 뒷처리로 소문은 대충 가라앉았지만 그 괴물에 대한 두려움은 에일레흐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에일레흐는 그 불신감을 흡수할 완충제를 기획했다.
그들의 분노나 처리하기 껄끄러웠던 모든 소문들은 바올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그 눈가림에 속아주는 것은 아니었다.
잊는다고 해서 그 괴물들과 괴물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이 없던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필리아는 마침내 론가의 봉쇄를 선언한뒤 바이브카흐와의 결별을 통보했다.
오랜 시간동안 침묵을 지켜왔던 필리아의 선언에 바이브카흐는 조소어린 응답을 보내왔다.
늦었다. 너무나도 늦었다. 평생을 실리엔과 함께 살아가겠다던 오래된 망집을 내려놓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뒤였다.
모리안이 물었다.
“이제와서 그 괴물들과 관련이 없다고 잡아땔 참인가요?”
“필리아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닙니다.”
네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 모든것은 결국 당신들의 땅에서 시작되었죠.”
“바라지도 않았고 원한적도 없습니다.”
마하는 묻지도 부정하지도 않은채 확신을 담아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당신들의 소원이 결국 이 일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다시한번만이라도 보고싶어. 그렇게 말했었죠.”
“.......”
“반도, 당신들도 결국 똑같은 소원을 품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다른점이 있다면 반은 그렇게 스스로를 불태웠고 당신들은 타인에게 그 불씨를 떠넘겨왔었다는 것.”
거울빛 눈동자가 흐려졌다. 카스타네아는 사막의 밤보다도 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들은 우리를 비난 할 수 없어.”
“그래요, 맞아요. 하지만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바이브카흐가 아닌 에린이 말한다면?”
“그때도 그들에게 지금처럼 말할 수 있나요?”
“그들은..”
“할 수... 있겠어요?”
필리아의 론가가 닫혔다.
모리안은 필리아를 떠나보냈지만 그것이 필리아에 대한 구속력을 철회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입을 다물었고 바이브카흐의 눈치를 살펴야했다.
말할 수 있는 것보다 삼가해야할 것이 더 많았고 순간의 실수가 표면뿐인 평화를 그르칠 수도 있었다.
필리아는 침묵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검열해야했다.
필리아가 자기 자신안에 갇혀있는동안 네반은 새로운 실리엔을 찾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훨씬 더 안정적이고 훨씬 더 많은 양의, 순도가 조금 떨어진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그정도는 시간과 칼리번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연구소를 새로 세운지 얼마 안되어 네반은 실리엔의 연구소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일련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성을 잃은 연구소의 AI들은 모리안을 거부했고 모리안은 본질을 잃어버린 바이스들을 리셋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같은 칼리번의 분리되어나온 AI들은 마음처럼 쉽게 조작되지 않았다.
모리안은 일단 AI들이 멋대로 날 뛸 수 없도록 실리엔의 연구소를 폐쇄시켰다.
어차피 닫혀있는 땅덩어리 안에서의 농성,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에 목을 맬 필요는 없었다.
모리안은 시선을 돌려 다음 목적에 착수했다. 그녀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까마귀들이 소란스럽게 울기시작했다.
그녀의 새로운 수족으로 움직이는 밀레시안들은 그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 한명의 몸 안에 단 하나의 밀레시안이 들어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들은 얼굴과 이름을 몇번이고 바꿔가며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했다.
누군가는 한가롭게 양털을 깎았고 누군가는 하루종일 낚시터에 앉아 찌를 드리웠다.
실이 묶인 마리오네트와 함께 길거리 공연을 하기도 했고 요리를 음미하며 쟤료를 알아맞히기도 했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근면한 아르바이트생, 선원지망생이자 손끝이 살아있는 고대 유물의 감정가,
당신의 친구, 이웃, 혹은 연인.
그 모든 이름들은 모리안의 손짓 한번에 베일을 뒤집어쓰고 어둠속으로 녹아들었다.
가장 이른 새벽의 그림자 아래서 조용히 걸어나와 나지막히 종언을 고하는 까마귀 여신의 날개. 그 손길은 대상을 영원히 잠재우고 다시 그렇게 일상속으로 돌아갔다.
아발론은 끈질기게 그녀의 까마귀들을 쫓아왔고 그때마다 모리안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일상속에 녹아있던 밀레시안이 끌려나올때면 꼭 예상치 못한 트러블이 일어나곤 했다.
아발론은 강제로 그 가면을 벗기고 그 텅빈 내부를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한번 발각된 밀레시안은 두번다시 그 지역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덕분에 모리안에게는 임무를 포기하고 돌아온 밀레시안이라는 새로운 골치덩어리가 생겨났다.
거기에 이따금씩 폐기까지 해야하는 개체들이 나오기까지 헀다.
하지만 모리안은 언제까지고 이 작은 인형들에게만 신경을 쏟을 수 없었다.
그녀는 폐기해야하는 밀레시안을 하나 둘 정도를 미끼로 던져넣었다.
아발론의 시선을 다른곳으로 묶어둘 수만 있다면 싼값의 대가였다.
그가 밀레시안들에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사이, 포워르가 움직이고 있었다.
모리안은 일부러 방치하던 서류를 한장 꺼내들고 호출기를 끌어당겼다.
문이 열리고 호명을 받은 요원들이 방으로 들어왔다.모리안은 눈앞에 선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세 요원이 받은 임무는 어느 연구소에서 연구중인 프로젝트에 대한 것이었다.
연구소의 이름은 알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는 포워르의 연구소를 조사하고 그곳에서 만들고 있는 것에 대한 정보를 알아오라는 것이 주된 임무, 임무와 위치 이외에는 아무것도 적혀져 있지 않았던 탓에 퀘스트지를 본 붉은 머리의 검사는 짜증스럽게 종이를 구겨 등 뒤로 집어던졌다.
허공으로 붕 날아오르는 퀘스트지를 본 작은 소녀가 허둥지둥 손을 뻗으며 퀘스트지를 쫓아 뒷걸음질을 쳤다.
풀숲사이로 들어가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임무지를 잡아챈 마리는 루에리가 버린 것이 진짜 쓰레기가 아닌 임무지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언성을 높여 루에리를 불러세웠다.
당연하게도 루에리는 모르는척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발걸음은 조금 빨라졌고 보폭은 한뼘정도 넓어졌다.
뒤이어 따라오던 타르라크는 마리에게서 잔뜩 구겨진 퀘스트지를 받아들었다.
어설프게 펼쳐진 종이를 손으로 문질러보지만 이미 구깃구깃해진 종이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타르라크는 종이를 잘 접어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깟 두 줄밖에 안적힌 지령서를 본다 한들 누가 뭘 알겠냐며 투덜거리는 루에리의 머리위로 까마귀가 한마리 내려 앉았다.
한참 종알거리던 마리가 더이상 따라오지 않는 다는 것을 눈치챈 루에리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머리위를 올려다 보았다.
“타르라크..!!”
“임무지를 함부로 내던진 네가 제일 나빠.”
루에리가 다급하게 항복을 외쳤지만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홀로그램의 까마귀는 용서없이 부리를 내리찍었다.
딱딱한 부리대신 짜릿한 전기충격이 정수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루에리는 까마귀를 내쫓기 위해 손을 휘저었지만 본체는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작은 구체의 기계였기에 소용없는 행동이었다. 한참동안 루에리를 쪼아내던 까마귀는 곧 작은 전자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루에리의 손을 피해 날아오른 작은 기계가 타르라크의 소매로 쏙 들어갔다.
“아하하, 루에리 바보. 타르라크에게는 꼼짝도 못하네..!”
“꼼짝 못한게 아니라 받아준거거든? 저거 한번 망가트렸다가 내가 얼마나 고생했었는데..!”
“알면 잘 해. 괜히 쓸데없는 일에 전력쓰게 만들지 말고.”
“아하하하”
세 사람은 지령서대로 알비라는 지하 연구소로 향했다.
알비는 포보르의 연구시설중 하나로 그 기능은 이미 역병의 밤떄 모두 사라진 뒤였지만
비어버린 연구소가 되살아나는 것은 드물긴 하지만 아예 없었던 일은 아니었다.
이따금씩 바올에서 도망쳐나온 부랑자들이 어찌어찌 연구소의 전력을 복원해서 모여사는 경우도 있었고, 누군가가 바이브카흐에게 대항하기 위해 시설을 움직인 흔적도 곧 잘 발견되었다.
그때마다 모리안은 다른 부서의 요원들을 보내 그의 뒤를 쫓아갔지만 아직까지 실체를 만났다는 요원은 만나본적이 없었다.
그 특수 부서가 어디인지도 모호했고 누가 소속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바이브카흐는 늘 그 무언가의 흔적을 쫓아 바쁘게 움직이곤 했다.
모리안은 그 특수부서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꺼렸고 요원들 사이에서도 그것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다.
따로 부서까지 만들어서 쫓아야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골똘히 생각하는 마리의 혼잣말에 타르라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아마 퀘사르가 아닐까..? 타르라크의 대답에 루에리는 말도 안된다며 과장스럽게 말끝을 길게 늘어트렸다.
얄미운 표정과 제스쳐는 덤이었다.
퀘사르라는 이름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지난 십 몇년간 에린에 퀘사르같은것이 나타난적은 전혀 없었다며 루에리는 쓸데없는 소리야 하고는 타르라크의 추측을 압살시켰다.
타르라크는 물끄러미 루에리의 얄미운 표정연기를 바라보다가 정강이를 걷어찼다.
“사람이 그렇지 않을까 추측도 할 수 있는거지. 어딜 면박을 주면서..”
“넌 임마 사람이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거지 왜 걷어차..! 차기는..!”
“하아, 둘 다 바보같아.”
마리는 두 사람을 지나쳐 앞서나갔다.
날렵한 발놀림으로 길게 이어지던 숲길 어딘가로 사라진 마리는 이내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근처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마리가 떨어진 나무아래로 잔나뭇가지와 나뭇잎따위가 조금씩 떨어져 내렸다.
마리는 손에 들고 있는 곤충의 형태의 카메라를 타르라크에게 건네주었다.
타르라크는 선 자세에서 그것을 분해하며 내부를 살펴보았다.
“흐음, 음… 과연..”
“왜, 퀘사르인것 같아?”
“루에리.. 타르라크 일하잖아. 그만 물고 늘어져.”
“아, 왜.. 하지만 재밌지 않냐. 온갖 똑똑한 척은 다하다가 결론이 옛날이야기에서 나오는 퀘사르라니.
크으, 너도 참 순정파다. 너 어렸을때 퀘사르 관련 특집프로그램은 다 챙겨봤지? 응? 그치?”
“루 에 리...!!”
“알았다니까..”
마리의 만류에 루에리는 겨우 어깨를 으쓱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타르라크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나머지 부분을 살핀뒤 남은 부품들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아무리 보호용 글러브를 끼고 있었다 하지만 손안에서 부서지는 렌즈나 부품따위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부서져갔다.
“.....다 루에리탓이야.”
“.......야.. 화났냐..?”
“화는 안났어. 이건 그냥..”
타르라크는 부서지지 않은 딱딱한 부품들을 떨어트렸다.
탁탁 손을 털어내는 타르라크는 한숨과 함께 한발을 내딛었다. 무심한 한걸음에 남은 부품들이 부서진다.
“1절만 하자는 의미야.”
“....예이...”
루에리는 한숨 돌렸다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마리는 다시한번 루에리 바보 라는 입모양을 뻐금꺼리며 타르라크를 따라움직였다.
타르라크는 마리가 떨어내린 나무근처로 다가갔다.
마리가 낚아채온 카메라의 부재를 눈치챘는지 비슷한 모양의 카메라들이 부러진 나무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래봐야 잔가지 몇개 정도이지만 벌레들은 신중하게 그 주변을 탐색했다.
타르라크는 소매속에서 검은 구체를 꺼내들었다.
글러브 끝에서 튀어오른 전기적 자극에 모형은 네조각으로 나뉘어 작은 날개를 펼쳐들었다. 주변으로 새 모양의 홀로그램을 방사했다.
순식간에 까마귀의 탈을 뒤집어쓴 새의 모형은 벌레들이 모여든 가지에 내려앉았다.
가지가 휘청거리자 꾸물꾸물 움직이던 카메라들이 멈춰섰다. 그리고 고개를 까딱거리는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눈치가 빠른 진짜 벌레들은 허둥지둥 날아올랐지만 그렇지 않은 기계벌레들은 곧장 가상의 까마귀에게 잡아먹혔다
제대로 먹는 것도 아닌 먹는 시늉과 함께 퍼져나가는 방해 전류뿐이었지만 그정도 위협만으로도 카메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몇개인가 벌레를 쪼아먹은 까마귀가 크게 울음소리를 내었다.
숲어딘가에 한가로히 노닐고 있던 다른 까마귀들이 그 울음소리를 듣고 날아올랐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낯선까마귀를 찾아 모여든 숲의 까마귀들이 나뭇가지 사이를 유심히 살펴보며 저마다의 가지에 내려앉았다.
벌레들이 얼추 물러난 것을 확인한 타르라크가 고개를 까딱여보였다.
마리가 앞장서는 모습을 지켜보던 루에리가 느즈막히 발걸음을 옮겨 타르라크의 어깨에 팔을 걸쳐왔다.
“야, 삐지지 말고.”
“1절만.”
타르라크는 다시 루에리의 머리 위로 날아든 까마귀가 힘차게 부리를 내리찍은뒤 빛의 알갱이로 부서져 내렸다.
짜릿한 전기자극에 정수리를 움켜쥔 루에리가 투덜거리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원형탈모가 생기면 어쩔거냐며 세심하게 손끝으로 확인하는 모습에 타르라크는 헛웃음을 지어보일뿐이었다.
알비는 그렇게 별로 험하지 않은 깊은 숲속에 있었다.
내부의 잠입까지도 모두 순조로웠 연구소는 지나치게 넓었고 그에비해 연구소를 운영하는 연구원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들은 모두 연구실에 틀어박혀있었고 복도를 지나다니는 것은 반자동화되어있는 경호용 안드로이드들 뿐이었다.
연구소의 중반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계속해서 파고들어왔다.
중간에 낌새를 눈치챈 연구원중 누군가가 경보를 울렸고 마리는 몰려오는 로봇들을 따돌리기 위해 잠시 루에리들과 따로 움직였다.
마리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둘은 아무런 걱정없이 더 안쪽으로 파고들어갔다.
갈림길이 줄어들수록 포위망은 좁혀져 왔고 루에리는 타르라크에게 서두르라고 소리쳤다.
결국 안드로이드 들과의 교전, 루에리가 그들을 막는 동안 타르라크는 자료들을 회수하는 동시에 그 암호를 풀어내었다.
화면위로 깨알같은 글자들이 쏟아져내렸다.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글자들속 반복되는 단어가 몇몇개 보였다. 프로젝트 아디만티움...중독된...요람….망각병에 기반하여...야수화..활성화된 실리엔의...기계를 통하여 전파되는..기존의 중화제에 기본이 되는 물질인… 부재..확인 불가..
“글라스기브넨...?”
“그게 뭔데…?”
타르라크는 저도모르게 소리를 내어 의문의 단어를 입에 담았다.
루에리는 빨리 데이터를 처리하라며 안드로이드를 밀쳐낸뒤 타르라크를 향해 돌아섰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단순히 기계가 망가지면서 뿜어져나오는 가스가 아닌 무언가가.
타르라크는 인상을 쓰며 연기를 휘젓는 루에리를 바라보았다.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 그의 뺨에는 희미한 상흔같은 것이 갈라지고 있었다.
돌아갈 길을 막아서기 위해 수많은 안드로이드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해. 타르라크와 루에리는 서둘러 마리를 찾아 달려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걸음은 얼마 가지 못해 멈춰서야만 했다.
미로같이 얽힌 지하의 연구소에서 그들은 한 쌍의 실험쥐였고 실타래를 잃은 모험가들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포워르의 우두머리가 말했다.
[“글쎄.., 처음부터 모리안이 너희를 속였을지도 모르지.”]
“닥쳐..! 화면뒤에 숨어서 음습하게 훔쳐보는 주제에..!”
[“과연 그럴까? 화면뒤에 숨어있는게 나뿐은 아닐텐데 말이야. 애초에 이 연구소에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적은 없나?
숲을 지나 오는 동안 아무런 보초도 서있지 않은 것에 대해 의문은 가진적은 없어?
단순히 인력부족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나? 아니면 그저 허술할 뿐이라고 생각했나.
포보르와 바이브카흐는 본디 협력관계였던 사이, 처음부터 모리안이 우리들과 아는 사이라고 생각해본적은 없나?”]
“일부러 우리를 속였다고?”
[“물론 아는사이라고 해서 모두가 좋은 인연인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녀와 나는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섯불리 패를 내려놓지 않는 사이이거든. 그런 관계속에 먼저 바닥에 내려놓아진 너희들은 어떤 카드였을까.”]
버려진 카드.., 감염원이 로봇이라는 것 까지 생각이 미친 타르라크가 급하게 안드로이드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철갑으로 둘러진 작은 기계속 렌즈한가득 타르라크의 얼굴이 비쳤다. 조금 남아있는 여백사이로 괴로운듯 기침을 토해내는 붉은 머리의 청년이 비치고 있었다.
“마리는? 마리는 어떻게 되었지?!”
타르라크의 다급한 질문에 연구원은 친절하게 마리의 영상을 띄워주었다.
마리는 어딘지 불편한 기색으로 벽을 등진채 서있었다.
마리의 주변으로 산산조각이 난 안드로이드들의 부품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뿌연 연기를 연신 뿜어내며 꿈틀거리는 안드로이드의 잔해를 넘어 또다른 로봇들이 마리를 둘러싸고있었다.
공격은 하지 않은채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그 시선이 소름끼치도록 차가웠다.
그저 한마리의 실험체를 관찰하든 수십쌍의 눈들은 마리가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을 녹화하고 있었다.
타르라크가 보고있는 화면도 그중 하나의 시선, 타르라크는 급하게 안드로이드를 밀쳐내고는 루에리를 불렀다.
루에리는 알고 있다며 무기를 고쳐쥐었지만 좀처럼 공격을 가하지는 못한채 입술을 깨물었다.
속이 매스껍다. 갈증도 허기짐도 아닌 공허함이 뱃속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안드로이드들은 아무런 공격의사도 없다는 것 처럼 줄맞춰 길을 막고 서 있었다.
루에리와 타르라크에게는 돌아나갈 길도 나아갈 길도 주어지지 않았다. 나아가려면 정면돌파밖에 방법이 없었다.
루에리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타르라크를 돌아보았다.
“좋아. 내가 마리에게 가는 길을 열테니까 너는 최대한 숨쉬지 말고 따라와.”
[“이런, 눈물겹기도 하지..”]
“너는 닥쳐..! 타르라크, 준비되었어?”
“준비는 무슨 준비?! 너는 어쩌려고..!
아니 이미 들이마실 대로 들이 마신 뒤에 숨을 덜쉰다고 막아질 바이러스도 아니야..!”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루에리..!!!”
“젠장, 나도 몰라, 나도 모르겠다고!! 난 바이러스가 뭔지 지금 내가 어떤 상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어! 바이러스가 뭔데?! 지금이라도 약먹으면 나아? 백신은 있어? 찾으러 더 들어가는게 정답일까? 아니면 나가는게 맞는 선택지일까. 하지만 앉아있는건 아니겠지. 그렇지? 주저앉는게 답은 아니잖아..!
그렇다면 내가 고를 수 있는건 딱 두가지야..! 내가 나가는게 더 나을지 아니면 네가 나가는게 더 나을지. 그리고 마리를 포기 할지 아니면 구해서 나갈지!
“그렇게 되면 네가 죽어!!”
“그리고 네가 살아!!”
루에리는 검을 내리치며 타르라크에게서 돌아섰다.
이를 악무는 루에리의 검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검 끝이 가리키는 바닥재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결정했어. 그러니까 넌 뛰어! 내가 막고! 마리를 데리고 여기서 나가! 너는 똑똑하니까 이 길을 달려 무엇을 해야할지 잘 알 수 있을거야. 그러니 네가 가는거야. 자 달려..!”
루에리는 더이상의 선문답은 그만이라며 검을 휘둘렀다.
밀려드는 안드로이드들을 갈라내었다. 길이 열린다. 타르라크는 그 뒤를 따라 달려야만 했다.
처음 알비에 들어섰을때와는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 갈림길이 나타나고 나서야 루에리는 타르라크를 돌아보았다.
마리가 있는 구역은 이곳에서 왼쪽. 타르라크가 손짓하자 루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른쪽으로 달려갔다.
“루에리..!!”
“이봐!! 거기 폼잡고있는 연구원..! 지금도 그 잘난 화면으로 여기를 내려다보고 있지?”
루에리는 일부러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치며 주의를 끌었다.
타르라크가 멈춰선 것을 발견한 안드로이드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곧 어디선가 날아온 안드로이드의 머리가 그 손을 쳐내었다.
루에리는 머리 없이 움직이는 안드로이드를 검으로 쳐내며 소리쳤다.
“여기, 잔뜩 연기를 들이마시고도 팔팔한 검사가 하나. 그리고 반대편에는 한 대도 제 손으로 안해치운 연구직이 하나. 어느쪽이 더 모르모트로 적합하다고 생각해?”
[“내가 선택을 해야하는 입장인가? 왜? 둘 다 가지면 되는 것을.”]
“아니아니, 하나만 선택해야해.”
루에리는 검을 휘둘러 벽면에 꽂아넣었다. 끼기긱거리는 철판소리와 함께 검의 흔적을 따라 요란한 스파크가 튀어올랐다. 몇몇 전등이 깜빡이고 비상등이 울려퍼졌다. 지하에 있는 연구소가 대부분 그러하듯 그 벽면은 크고작은 전선들로 가득채워져 있었다.
루에리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소란을 못일으킨게 아니라 안 일으킨거거든.”
루에리의 시선이 타르라크로 향했다. 가. 어서 가. 지금.
그 진지한 눈동자를 앞에두고 억지를 부릴만큼 타르라크는 어리석지 못했다.
타르라크가 발길을 돌리는 모습이 화면속 카메라에 비쳤다.
멈춰선 안드로이드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마리가 쓰러져있는 구역까지 앞으로 한 블록.
그리고 약속이라도 했다는 것 처럼 한 무리의 안드로이드 들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굳이 다른 인원수를 충당해 쫓지 않아도 그가 향할 곳은 어차피 그들의 손아귀 안이었다.
타르라크는 손을 쥐었다 폈다. 녹색으로 점멸하던 글러브가 파랗게 물들어가며 요란한 스파크를 발생시켰다. 창같이 날카로운 장대를 겨누는 안드로이드의 얼굴위로 불빛이 어른거렸다. 타르라크는 소매끝에 달려있던 작은 기계들을 띄워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목소리없는 까마귀들이 안드로이드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루에리들과 수많은 임무를 함께하는 동안 타르라크는 생의 갈림길 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단 한가지뿐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것은 지식도 아니었고 경험도 아니었으며 공포나 희열감 따위로 몸안에 스며들어오는 독특한 감각이었다.
걷기 시작한 그 길의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살아남은 자들 뿐이었고 원망이나 푸념, 후회를 할 수 있는 것도 오직 도망친 자들 뿐이었다.
죽음으로 부터 도망친자들은 두서없이 찍혀있는 발걸음에 이름을 붙였다.
나아간 자의 이름은 운명이었고 돌아선 자의 이름은 책임이었다.
타르라크는 섬광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뻗어나온 오른손에 파지직거리는 작은 스파크가 점멸하고 있었다. 그을음이 묻은 안드로이드들중 몇몇이 전기음을 울리며 경련을 하고 있었다. 좁은 복도안으로 희뿌연 안개가 차올랐다.
타르라크는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린채 하얀 연기의 장막을 해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멀지 않은 복도의 끝, 일렬로 늘어서 있던 안드로이드 한무리가 타르라크를 향해 일제히 몸을 돌렸다.
타르라크는 다시한번 스파크를 뿜어내었다. 안드로이드들의 잔해를 해치고 안으로 뛰어들어가자 엉망으로 부서진 기계부품위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마리, 마리..!”
“타르라크.., 연기 들이마시지마...”
마리는 힘겹게 눈을 깜빡이며 타르라크의 어깨를 밀어내었다.
“뭔가 엄청 수상하니까. 그냥 이대로 루에리랑 같이 나가..”
“알아. 우리도 알아.”
“아, 뭐야.. 벌써 다들 알아? 내가 제일 늦게 알았어?”
타르라크는 마리를 들쳐 매었다.
몇번인가 다른 기체들이 타르라크를 쫓아왔지만 그때마다 타이밍 좋게 연구소가 흔들렸다.
그래 루에리는 아직 괜찮아. 타르라크는 위안거리도 되지 않는 말을 되세기며 위를 향해 나아갔다.
마리도 루에리가 오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타르라크는 필사적으로 숲을 향해 내달렸고 그 발걸음 뒤로 숲속에 있는 곤충모양의 카메라들이 뒤따라 왔다. 몇번인가 더 스파크를 내뿜은 탓에 타르라크의 전력은 이미 바닥났고 힘을 부여받지 못한 모형들은 땅바닥에 힘없이 추락했다.
숲이 깊었다.
처음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왔을때보다 숲은 어두웠고 더 우거진 느낌이었다.
타르라크는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타르라크…”
“.....”
마리는 스스로도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말을 입에 올렸다.
“여기서부터 혼자 갈 수 있지?”
그게 말이냐. 딴지를 걸어오는 붉은 목소리가 없이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혼자 갈 수 있을리가 없잖아. 바보야? 더 나은 방법은 못떠올렸어? 자책의 목소리가 속안에서 울려왔다. 공허하게 울리는 가슴속이 허하게 느껴졌다.
방법이 없어. 하지만 그들을 쫓는 철갑의 소리는 바로 등 뒤까지 몰려와있었다. 타르라크는 대답했다.
“그럼.., 할 수 있어. 힘없는 연구직이라도 밤길은 혼자 걸을 수 있어...”
마리는 그게 아주 재미없는 농담이라도 된다는것 마냥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기침소리가 이어졌다.
마리를 내려놓은 타르라크는 어찔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휘청거리는 몸을 나무에 기대어섰다. 아무리 입을 막으며 호흡에 주의를 했다고 하지만 그 연기를 아예 들이마시지 않는 것은 무리였다. 아니 그 연기가 정말 바이러스인지도 의문이었다. 그 연구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냥 이 어지러움은 일시적인 눈속임일지도 모른다. 타르라크는 일말의 희망을 품어보았지만 고개를 들어올리는 마리의 뺨에 돋은 비늘모양의 상흔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마리가 웃었다.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타트라크도 잘 도망쳐야해.”
“그래.”
“도망치고 도망쳐. 또 도망쳐서.”
마리가 나무둥치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리는 조금 또렷해진 눈빛으로 타르라크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나와 다시만나는날에.. 오늘 무슨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기로 약속하는거야. 알겠지?”
“....그래. 꼭 그럴게”
발소리가 다가온다.
어수선한 바람을 따라 숲이 흔들렸다. 악몽과도 같은 검은 숲이 흔들린다. 까마귀를 부르는 휘각이 달린 화살이 날아올랐다.
피리소리를 신호삼아 타르라크와 마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숲을 달렸다. 이미 한계치까지 다다른 가슴을 쥐어짜내 한걸음의 다리를 더 옮겼다.
다 꺼져가는 불빛이 다시 반짝일때까지, 누군가 자신의 신호를 잡아낼때까지 타르라크는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숲을 달려 멀리 반짝이는 불빛을 향해 이동했다.
바람이 불어오고 나서야 타르라크는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 멈춰설 수 있었다.
숲에 감돌던 스산한 움직임이 아닌 강한 바람이 풀을 베어내며 휘날렸다.
마리의 화살에 매달아 하늘 높이 날렸던 구조신호가 불빛과 바람이 되어 돌아왔다. 사방을 경계하던 다른 요원들이 타르라크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타르라크는 뜨문뜨문 이어지는 목소리를 짜내어 자신의 이름과 소속을 밝혔다. 그는 쓰러질것같은 정신을 부여잡으며 자신의 요원코드를 건네주었다.
“이름은 마리, 가지고 있는 요원코드는 제 것과 같습니다. 숲 어딘가에 숨어있을 겁니다.”
“그래, 알았어. 이제 안심해도 좋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부상을 당해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최대한 빨리 찾아야.”
“그래그래..! 알았다니까..! 이봐 얼른 이 환자 이송해..!”
“네, 알겠습니다.!!”
타르라크는 강제로 들것에 눕혀졌다.
한계치까지 몰아쳐있던 몸은 등에 부드러운 천이 닿자마자 실타래처럼 풀어져 힘을 잃었다.
만약 그때 조금이라도 더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타르라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그때 조금 더 그들을 의심했더라면, 조금 더 그자들의 행색을 살폈더라면 그들이 환자라고 부르는 호칭에 의문을 가졌더라면.
타르라크는 급하게 온 구조요원들 치고 지나치게 통일된 복장이나 의무적으로 착용하고 있는 마스크 따위를 떠올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수기로 옮겨적고 있는 자료위로 잉크방울 두어개가 떨어져 내렸다.
타르라크는 혀를 차며 번져낸 잉크를 찍어내었다. 어쩔수 없다. 이 페이지는 다시쓰자.
타르라크는 몇장인가의 휴지와 함께 적어내려가던 페이지를 구겨내었다.
화롯불은 얄팍한 종이를 낼름 삼키며 조금 거센 불길로 타올랐다.
그 날 이후로 시간이 흘렀지만 타르라크는 여전히 루에리를 구하러 그 숲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타르라크는 병원이 아닌 이 북쪽의 섬으로 이동되었고 아무것도 없는 오두막에 유폐되었다.
보급은 한달에 두번, 교환품은 일정한 양의 혈액.
아무것도 없는 설원에 갇힌 뒤에야 타르라크는 그 임무가 처음부터 준비되어있던 함정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죽어갈 것 같았던 타르라크는 아무도 없는 오두막에 홀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튜브가 팔뚝에 꽂혀져 있었다. 은빛의 반투명한 유리병이 머리맡에 흔들리고 있었다.
모리안은 추위속에서 더디게 성장하는 글라스기브넨과 함께 그를 방치했다. 타르라크는 살아있는 실험체가 되어 북쪽 섬에 갇혔다.
모리안은 타르라크가 그들의 자료를 입수했던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러브나 장비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
글러브속 글라스기브넨의 모든 자료를 수기로 옮겨적는 그를 보며 괜한일을 한다고 비웃었다.
이유는 타르라크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무엇을 알아내든, 그 무엇을 이해하든 그에겐 이 모든것을 뒤집을 힘이 없었다. 아무런 능력도 없었다. 그저 지식을 파고들어 스스로를 소화시킬뿐, 이 새하얀 설원은 그를 가두고 있는 거대한 고치였다.
타르라크는 건조해서 갈라진 것마냥 새하얗게 일어난 손등을 벅벅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
아무리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더라도 그날을 떠올릴 때면 열기가 가라앉지를 않았다.
마리는 잘 도망쳤을까? 어딘가에 갇혀있지 않을까.
분명 모리안도 마리의 행방을 찾아 사람을 풀었겠지만 이에대한 소식은 전해져오지 않았다.
그녀가 타르라크의 처분을 결정하지 않았다는건 어쩌면 그들또한 마리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마리를 찾았어도 이미 늦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타르라크는 마른기침을 하며 내려놓았던 머그컵을 다시 들어올렸다. 아무리 자료를 파고들어도 해답은 보이지 않았다. 마셔도 마셔도 사라지지 않은 갈증처럼, 글라스기브넨의 어둠은 깊게 가라앉았다. 타르라크는 냉기가 스며들어오는 창가에 기대어섰다.
뜨거운 입김이 창문에 낀 서리를 녹여내었다.
눈이 녹고 쌓이는 것의 차이만이 전부인 황량한 설원을 내어다 보는 녹색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마리가 발견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교차했다.
만약 잘 도망쳤다면 모리안이 후발대로 보낸 요원들에게 발견되었겠지, 하지만 중간에 잡혔다면? 아니 쓰러졌다면..?
타르라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라고 부정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어리석게 느껴졌다. 근거도 없이 믿음도 없이, 같은 부정을 반복하는 그의 머릿속은 마치 어딘가가 고장난 녹음기와도 같았다.
힘주어 잡는 머그컵에서 유리가 긁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마디에서 일어난 비늘이 머그컵을 긁어내리고 있었다. 타르라크는 조용히 머그컵을 내려놓은뒤 얼굴을 감싸쥐었다.
손바닥에 이질적인 부분이 몇군데 느껴졌다. 타르라크는 천천히 얼굴을 문지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것이다. 마리가 쓰러트렸던 수많은 안드로이드의 잔해들과 자욱했던 복도의 연기, 유난히 뜨거웠던 체온, 기억속 풍경이 흔들린다. 달빛조차 드리우지 못했던 검은 숲, 그를 올려다보던 눈동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분명 살아남지는 못했을거야. 하지만 잡히지는 않았어. 그게 뭐가 중요해.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해. 마리는 이미 죽었을텐데. 그래도, 나에겐. 그 사실이 중요해. 무엇을 위하여?
나는 그저 그 아이가 나 처럼 괴롭지 않기를 바라는 것 뿐이야. 그래야 네 마음이 편하니까? 그래야 돌아선 네 발걸음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니까?
낮은 숨소리가 공기를 채찍질했다. 타르라크는 얼굴을 문지르던 손을 내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서리가 낀 창문은 마치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울처럼 그를 비추고 있었다.
소리없는 유리벽 너머의 세상에서 그를 향해 질책어린 한마디가 쏘아졌다.
한숨같은 숨소리에 공기가 꿈틀거렸다.
뱀의 속삭임에 눈쌀을 찌푸린 타르라크는 손을 뻗어내어 숨결에 흐려진 유리창을 닦아내었다.
유리창 너머로 이질적인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새하얗던 설원을 너머 검은 로브를 두른 방문자가 오두막의 현관으로 올라섰다.
꽁꽁 얼어붙은 방문자는 덜컥거리는 얼음덩어리를 떨어트리며 문을 두드렸다.
타르라크는 적어도 그 검은 인영이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은 아니었다는 것에 안도하며 안경을 들어올렸다. 한밤중의 빛이 눈부시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시력은 비정상적으로 향상되었지만 그래도 이 안경은 일종의 상징같은 것이었다.
그가 아직도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과거의 미련같은것.
타르라크는 체인을 걸고 문을 열었다.
동시에 두어발자국 문에서 비켜섰다. 문틈사이로 검은 로브가 흔들렸다.
“누구십니까.”
“모리안님의 명령을 받고 왔어요. 당신이 타르라크인가요?”
“그렇습니다만.”
“내 명칭은 밀레시안. 밀레시안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당신과 함께 알비에 가기 위해 왔습니다.”
타르라크는 두번 말을 묻지 않은채 문을 닫았다.
코앞에서 문이 닫혔지만 방문자는 전혀 개의치 않은 얼굴로 멀뚱히 문을 바라보았다.
잠시 뜸을 들인뒤 다시한번 문을 두드렸다.
“타르라크씨..?”
“돌아가세요.”
타르라크는 듣지 않겠다는듯 자물쇠를 잠궜다.
모리안이 보낸 사자라면 이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따고 들어오겠지만 최소한의 거부감을 표현하기 위한 의미없는 행동이었다.
타르라크는 곧장 화로가에 다가갔지만 그게 전부였다.
몸을 눕힐만한 침구류와 화로, 책상, 약간의 책들과 찬장이 하나, 그리고 몸을 씻을만한 수로가 하나. 그게 전부인 단칸의 오두막.
안경을 들어올리고 뻐근해진 눈을 내리눌렀다. 보고싶지 않다. 듣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방문자는 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악의없는 목소리가 문을 두드려왔다.
“모리안님께선 당신이 알비에 가는 날을 고대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 입 다물어..! 그리고 얼른 돌아가..!!”
“모리안님께서 당신이 명령을 거부할 때를 대비해 키워드를 말씀해주셨습니다.”
“........”
타르라크는 듣지 않겠노라고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휘둘리지 않겠노라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허무하리만치 의미없는 저항을 배신한채 그의 몸에 기생하는 뱀의 비늘은 두 귀와 손바닥을 활짝열어 방문자의 목소리를 똑똑히 그의 귓가에 세겨넣었다.
유리창에 지워진 뱀의 사내가 웃음짓는다.
타르라크는 흐느낌같이 벌어지는 자신의 입매를 자각하지 못한채 천천히 손을 내렸다.
짤막한 그 한조각의 키워드가 그의 영혼을 산산히 부숴트렸다.
“위선자.”
거센 바람과 함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