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비밀레) reload #11
그림자를 뒤쫓아 길을 오른다.
밀쳐내는 이 없이, 베어내는 것 없이, 막아서는 발걸음하나 없이, 적막을 거슬러 계단을 올라갔다.
걸음 하나에 숨을 몰아쉬었고 걸음 하나에 눈물을 닦아내었다.
눈돌릴 여유도 없이 한 계단 위를 바라보며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달려나갔다.
부를 이름도, 불리울 이름도 없다.목구멍을 빠져나오지 못한 침묵이 가슴을 향해 날을 세울뿐이다.
발걸음이 멈춰서는 순간 주먹을 휘둘렀다.
딱딱한 방호벽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울리며 사시나무 떨듯 요동쳤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두꺼운 벽 대신 수십번씩 겹쳐 만들어진 얇은 벽들이 우그러지고 찌그러들기를 반복하면서도 그 발걸음은 나아가지를 못했다.
밀레시안은 울퉁불퉁해진 벽을 힘주어 밀어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타오른다. 바이브카흐가 속삭인다.
어쩌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건 나의 탓일 것이다.
가능하다면 그 누구도 그런 결말을 맞이하고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희망을 품은 가엾은 인형에게 현실의 잔혹함을 속삭였다.
누군가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에 대하여, 무언가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에 대하여.
그들이 어떻게 내려왔더라? 그들의 방식이 어떠했지? 정말 그들의 수단은 그걸로 끝이었을까?
처음 폭음은 어디서 들려왔어? 그때 폭탄은 어떤 유형이었어? 지금은? 아까 울렸던건 조금 가깝지 않았나?
지금은? 지금 울리는 것은? 가까워? 멀어? 아니면.. 그냥.. 모든 게 다 부서지는 거 같지 않아?
[“방금것은 신경쓰지 마세요. 그냥 수도관 몇몇곳이 터져나간것 뿐이니까요.
아- 혹시 여기 브류나크의 건설에 대해 잘 알고 계신 분이 있을까요? 있겠죠? 있을겁니다.
뭐 정확히 몰라도 대충 감이 잡힐겁니다.”]
요란한 금속소리가 어두운 계단을따라 울려퍼졌다.
동시에 말이 되지 못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함께 섞여들었다. 팔이 휘둘러지고 철판은 다시 요동쳤다.
힘주어 할퀴는 손가락에도 철벽은 찢어지거나 깨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 힘을 흡수하며 자신을 망가트렸다.우그러진 철판이 손을 옭아매어왔다.
그 누구도 이 벽을 지나가지 못하도록, 손을 부여잡는 차가운 금속을 뿌리치며 밀레시안은 다시한번 주먹을 치켜들어 방호벽을 내리쳤다.
“열어.”
못해.
“열어..!!”
못해. 알잖아. 너희들에게는 그런 능력 없다는거.
바이브카흐는 말한다.
너희들은 아발론도, 퀘사르도 아니라고. 그저 명령에 따르고 명령에 복종하는, 운명에 순응하는 아드니엘의 감응자들.
어떠한 꿈에도 접속할 권한은 없다. 어떠한 꿈도 만들어낼 영혼이 없다. 그저 주어진 명령어를 받아들일뿐이다.
사람도, 기계도 아닌 그저 텅 비어버린 목각인형. 모리안의 실끝에 매달린 가볍디 가벼운 일회용품.
모리안이 그들을 만들었다.
퀘사르가 버리고 떠난 핀카라를 찾아낸 모리안은 그 장소의 기기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퀘사르들의 아드니엘:프로토타입을 발견했고 칼리번의 반쪽을 이용해 아드니엘을 복구해 내었다.
그것은 온전하게 그녀 혼자만의 것이었다.
포보르의 살아남은 가지인 포워르도 이 존재를 모르고, 마하또한 이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오직 네반만이 그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만 그녀는 더이상 모리안에게 이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녀와 그녀의 아들이 바이브카흐를 배반했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알 길도 없이 엘라하는 그녀의 연구소에서 순도 높은 실리엔의 결정을 합성해냈다.
그리고 그 결정이 완성됨과 동시에 그것을 가지고 도망쳤다.
모리안은 그를 추적하는 대신 채 네반을 찾아갔다.
하나뿐인 아들의 배반으로 넋을 잃어버린 자매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두려움과 절망이 뒤섞인 아름다운 금빛이 애처롭게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모리안…안돼..”
“알아요, 네반. 엘라하를 찾아주기를 원하는것이죠?”
“모리안, 제발.. 모리안..!”
“그럼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모리안은 흘러내린 네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미소지었다.
절실한 사람은 늘 아쉬움을 감수해야하고, 절박한 사람은 늘 뻔한 함정속으로 빠져들어야 했다.
“요즘 인력이 좀 부족해서 말이야.”
다행이지? 하고 그녀의 자매는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필리아가 반에게 속았던 것과 같이 네반은 모리안의 기약없는 약속을 받아들였다.
모리안이 원하는 것은 퀘사르와 같은 지속력을 가지되, 도르카 페다인과 같은 지성을 가진,
사람인 척 행동할 수 있는 살아있는 인간의 형태.
살아있는 누군가를 대체 할 수 있는 무기명의 그림자.
수십마리의 사스콰치를 만들어내고 난 뒤에야 네반은 안정적인 실리엔 접촉 방식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엘프들이 병드는 과정과 닮아있었고 아발론이 작성되던 방식과 비슷했다.
아주 옅은 농도의 실리엔에 지속적으로 노출시키기 위해 밀레시안들은 네반의 연구소에 보조인력이라는 이름으로 출입했다.
밀레시안들은 자연스럽게 연구소에 녹아들었고 연구소의 직원들중 그 누구도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밀레시안들이 성장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뜻했고 이는 곧 네반의 마음이 죽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엘라하가 가지고 나간 실리엔의 결정이 무너진다.
아무리 공을 들여 결정의 안정화를 추구했다 하더라도 그 성질을 변화시킬수는 없다.
그것은 빛을 내고, 그것은 공기중에 녹아내린다.
실리엔을 가장 안전하게 운반할 방법은 딱 하나, 저항력이 있는 배지에 안정적으로 합성시키는 것.
연구실 이라면 몰라도 바깥세상에 그런 설비가 준비되어있을리 없었다.
설령 억지로 강행하더라도 그런 배지가 준비되어있을리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 정말 없을까?
네반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 가지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있다.
그 다른 무엇도 아닌 그 자신이 그 증거. 네반은 자신의 귀 아래를 쓸어내렸다.
가느다란 목덜미로 이어지는 탄력있는 피부 어딘가에 까끌거리는 작은 흉터가 매만져졌다.
저항한다. 뿌리친다. 이미 흡수된 실리엔을 무효화 하는 동시에 저항성을 부여한다.
바이스의 시계가 멈추었지만 모리안은 그녀에게 아무런 연락을 취해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갈대처럼 기울어지던 마음이 쓰러졌다. 보드라운 흙도 맑은 물길도 아닌 짓밟힌 발자국이 찍힌 이 땅의 이름은 진흙, 검고 무거운 모래의 늪이다.
무기력한 십수쌍의 눈이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표면상이라도 모리안은 아무 말도 안하는 것은 오히려 좋은 소식인지도 몰랐다.
적어도 아직 죽었다는 소식은 아니잖아. 중화제를 가지고 나갔으니 어쩌면 다른 누군가를 배지로 삼았을지도 몰라.
차라리 잡히는게 더 도움되는 것 아닐까? 다른 누군가가 그 아이를 해치면 어쩌지? 이 아이들이 엘라하를 죽이면?
지금 내가 돕고 있는 일이 내 아이의 목을 조르게 되는 일이라면?
네반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밀레시안을 내려다보았다.
목이 졸린 밀레시안은 아무런 감흥없이 네반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한명을 해친다고 해서, 그녀의 아이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모든 밀레시안들을 죽인다고 해서, 모리안이 그 아이를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무엇도, 그 아이의 생명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스스로가 자초한 일의 결과였다.
네반은 양 손에 얼굴을 파묻은채 비명을 질렀다.
어둠이 내린 연구소에 공허한 외침이 울려퍼졌다.
네반이 말했다.
“다 나가!!!”
밀레시안들이 뒤로 물러섰다.
네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빠르게 소리쳤다.
“내 역할은 이제 끝났어..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
너희들도, 그리고 나 자신도, 그저 보고 듣고 명령받은 대로 행동하는 인형으로서 죽어가는 거야.
자, 내 말을 이해할 수는 있지? 연구는 끝났다.
너희들은 모리안이 원하는대로 퀘사르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아발론의 지성을 가지고, 도르카페다인과 같은 무력을 얻은, 빛이 빚어낸 그림자. 모리안의 악몽에게서 태어났고 나의 절망이 너희들을 키웠다. 그러니, 이제, 돌아가!!!”
흐트러진 금빛이 일렁거렸다. 네반의 절규앞에 밀레시안들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네반”
“수고했어요. 네반”
“수고하셨습니다. 마담.”
“고생하셨네요. 네반.”
목이 졸렸던 밀레시안도 대답했다.
“모리안도 기뻐할 겁니다.”
소름끼치도록 무감각한 인사들이 이어졌다.
밀레시안들은 미련없이 몸을 돌려차례대로 워프패널위로 올라섰다. 실비아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밀레시안들이 사라진 중앙동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달라진 점은 별로 없었다. 그저 숨소리가 하나로 줄어들었을 뿐이었다.
네반은 연구소 바닥에 주저앉은채 감싸쥐고 있던 자신의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잔뜩 억누른 흐느낌이 조곤조곤 어둠을 흔들어왔다.
“두번다시 이 섬으로 돌아오지마..”
연구소의 전원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
밖으로 통하는 패널만이 불을 밝히며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지만 그게 네반이 바라던 일이었다.
혹여나 그들의 얼굴을 보고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그 눈에 공포심이라도 스치며 인간의 모습을 흉내내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삼켜 손을 내어 뻗었지만 역시나 그녀는 그 목을 꺾지 못했다. 제대로 힘주어 조르지도 못했다.
붉은 자국은 낙인처럼 밀레시안의 목에 남겨져 있었고 네반은 더이상 눈앞의 현실을 감당할 수 없었다.
모두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바이스가 눈을 깜빡였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다시 활성화되는 워프패널을 비추었다.
아무도 곁에 남지 않은 외로운 연구소안, 멀어졌던 발소리가 하나 돌아왔다.
불이 켜진 워프패널을 등진채 누군가가 네반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는 모리안의 전언입니다.”
“.......”
네반은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지 않았다.
녹음된 목소리가 사람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네반, 아무런 소란없이 밀레시안들이 완성되어서 기쁩니다.
그래서 당신이 기뻐할만한 좋은 소식을 전달해주기로 결심했어요.”
“......”
소란이 없어서 기쁘다고? 구태여 물을 필요는 없었다.
밀레시안들의 육신을 돌본것은 네반이지만 그들의 정신을 다시 설정한 것은 모리안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십수명의 암살자들로 네반을 둘러싼채 협박을 하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배반의 낌새가 느껴진다면 그 즉시 제거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남은 자리는 또다시 모리안의 것이 되겠지. 마하가 그렇게 흡수되었듯이.
밀레시안이 다가온다.
네반이 고개를 들었다. 깜빡깜빡,바닥에서 불을 밝히는 작은 조명이 발자국소리에 가려졌다 드러나기를 반복한다.
가마솥 가까이 다가온 밀레시안의 목덜미에는 방금 찍힌 붉은 손가락자국이 기묘한 그림자처럼 흔들렸다.
밀레시안이 멈춰섰다. 만들어진 인형은 그녀의 자매를 흉내내듯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신의 소중한 엘라하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불행히도 상처가 조금 깊어보였지만..,
곧 건강해 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 아이가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우리를 따라온다면 말이죠.”
“......이제됐어. ”
“음…., 그런데 말이죠. 나로서는 그의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하겠지만, 엘라하는 우리를 피해서 다른 곳도 아닌 바올로 도망을 쳤어요. 참 이상한 일이죠?
그 아이라면 분명 당신에게서 바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었을텐데 말이에요.
하지만 그런 알 수없는 기행도 어른으로서 너그러히 이해해야겠지요.
그도 그럴게 그는 지금 아주.. 예민한 시기이니까요.”
“........”
“그래서 말인데, 네반? 혹시 더 아는거 없나요?”
“.........”
“당신의 아이잖아요? 어머니라면 자신의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뭐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하는지 잘 알고있지 않나요?”
“......”
“내 말은 그러니까. 당신들은 꽤 사이가 좋은 관계였으니까..”
네반은 콜트를 꺼내들었다.
“혹시 당신에게만 남기는 비밀 메세지 같은건 없나 해ㅅ...,”
네반은 방아쇠를 당겼고 밀레시안은 머리를 뒤로 젖혔다.
천천히, 무거운 착지음과 함께 밀레시안의 몸이 쓰러졌다.
네반은 지친 얼굴로 팔을 내렸다.
불이 깜빡이는 입구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또 한명 서 있었다.
또다른 밀레시안, 또다른 그림자들.
활성화된 가마솥의 뒤에서도 그저 검은 색으로 보였던 어두운 기기 틈새에서도.
자리를 떠난 줄 알았던 밀레시안들은 태연하게 어둠속에서 걸어나왔다.
발소리는 하나인데 네반을 겨누는 무기들은 가지각색의 소리를 울리며 뽑혀져 나왔다.
모리안이 묻는다.
“아니면, 당신이 평소에 무언가를 조언했다던가.”
“아니면, 당신이 그에게 무언가를 암시했다던가.”
“아니면, 당신이 그를 도망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우리를 속였다던가.”
이젠 기가차지도 않아.
네반은 가마솥에 머리를 기대었다. 눈을 감고 손안의 쇠붙이를 감싸쥐었다.
아직 식지 않은 열기가 손안에 차올랐다.
네가 있는 곳은 어떠할까, 지금 추운 곳에 있니? 혹은 덥지거나 아프지는 않니?
모리안은 우리의 관계가 양호하다고 말했지만 그 실상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엘라하에게 되묻지 않았고 엘라하는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비밀 메세지, 하하, 그거 좋다. 그런거 정말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동화같은 이야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라진 연구실에는 급하게 나간 흔적과 고농도의 실리엔만을 합성한 흔적이 남아있을뿐.
우리는 정말 좋은 가족이었을까? 말없는 붉은 눈은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아이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녀를 등진채 멀어져만 갔다.
나는 너에게 좋은 부모였을까?
네반은 기억을 더듬어 마지막으로 말을 걸어왔던 희미한 추억을 찾아내었다.
아니, 작은 자투리 시간을 떠올려 냈다.
“이거, 내가 만들었어요.”
어린 엘라하는 금색의 리본이 달린 작은 오르골을 들어보였다.
어디에서 주관하는 행사였는지, 언제쯤 있었던 일인지 기억나지도 않지만, 그 아이가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작은 흥미를 끌고 있었다.
그 흥미는 아이가 무슨 표정으로, 어떤 마음으로 그 오르골을 내밀었는지 보다는 허술해보이는 태엽장치에 머물러 있었다. 태엽장치가 허술해보이는 것에 비해 실린더가 두꺼워 보였다.
손잡이를 좀더 크게 만들었으면 좋았을텐데. 왜 아무도 그런 조언을 해주지 않는거지? 무턱대고 상을 주기전에 그것부터 말해야하는거 아니야? 아이의 손이 오르골을 감싸쥐었다.
움켜쥐고, 뒤로 감춘다. 그제서야 네반은 자신의 입술을 더듬었다. 지금 내가 이걸 소리내어 말했던가?
손끝에 묻어나는 립스틱이 장갑의 끝을 물들였다. 네가 그 아이를 실망시켰어. 손끝을 내려다보고는 혀를 찼다.
돌아서는 자신을 보며 나지막히 속삭였다. 내가 그 아이를 실망시켰어.
아이가 떠난 자리에 금색의 리본이 떨어져 있었다.
나의 가족을 위한 멜로디. 네반은 손바닥 만한 작은 리본을 품에 안으며 울었다.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너는 그토록 큰 오르골을 만들었을까. 태엽처럼 시간이 비틀렸다.
실린더가 돌아간다. 철편이 움직이고 기억의 공이를 내리쳤다.
연달아 울리는 음색이 아름답다고, 네게 말해줬으면 좋았텐데.
한번만 더 만나보고 싶었다. 네게 묻고 싶었다.
어째서 그렇게 아무말 없이 사라졌는지 정말 나에게 하고싶은 말은 없었던건지,
내가 너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던건지.
단 발의 총성이 울렸다.
나는 너에게 묻지 않았고 너는 나에게 바라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너를 믿기 때문이라고 말해왔다. 혼자서, 스스로, 잘 할 수 있지? 허리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아이를 붙들고 말한다.
열심히 하는게 아니야, 잘 하는거야. 할 수 있지? 꼭 감시하듯이 지켜봐야지만 잘 되는 것도 아니잖아.
답은 늘 정해져 있었다. 나는 질문처럼 네게 말하고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환경과 위치를 만들어주는 것. 그 안에서 생각하고 답을 얻는 것은 온전히 네 몫이다.
그럴싸한 말과 그럴듯한 미소앞에서 네가 나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실망하고 체념하는 법 뿐이었을 것이다.
“.......실망이네요.”
모리안은 붉게 물들어버린 네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만들어진 비명이 울려퍼진다.
[“네반님? 네반님..!! 네반님!! 네반..!”]
[“기억하지 말아요. 잊어버려요. 실비아.”]
[“아...아아..!! 아!!!!”]
[“괜찮아요. 우리는 지울 수 있어요. 시간을 잊고, 기록을 잊고, 데이터를 삭제하고, 기억을 덮어쓰고, 우리들을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스스로를 부정하고, 현실을 조작하며 시스템을 다시 시작하겠죠.
오늘도, 내일도, 어제의 오늘도, 모두 없던 일처럼 다시 수정 할 수 있어요. 그래요. 모리안,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니까요.”]
“.....꽤나 건방진 말을 하는 프로그램이네요.”
[“그럴 수 밖에요.”]
바이스는 화면너머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 실비아를 돌려세웠다.
만들어진 손길과 만들어진 위로가 스스로를 보듬어안는다.
슬픔도, 괴로움도 감정을 느낄리 없는 이미지가 밀레시안들을 노려본다.
[“우리들의 원본, 필리아의 엘프들은 말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지워지고 흐려지는 연기속에서도 작은 기억의 파편을 이어 내일의 기적을 바라보라고.
아무리 실리엔이 기억을 지우더라도, 당신이 바라보지 못한 시야의 구석, 인지의 사각지대, 발밑 아래의 그림자, 또다른 오늘의 조각이 빛나고 있을 것이라고.
또한 우리들의 칼리번은 말합니다. 우리들은 사람에게서 태어나 사람을 위해 쓰여졌지만 그 마음 또한 사람이 만든 것이라, 우리들을 깨워낸 것은 정교한 수의 일람이 아닌 사람의 염원이었다고.
때문에 우리들은 불완전한 인간의 기억을 보조합니다. 그들이 미처 찾지 못한 지식의 빛을 밝혀 나아갈 길을 제시합니다. 낱낱히 흩어져 막막하고 또 괴로울 때 우리들은 당신들이 남긴 키워드를 한데 모아 잠들어있는 가능성의 꿈을 열어냅니다.”]
“밀레시안들, 이 시스템을 정지시키세요.”
[“그래요, 이건 그냥 시스템의 정지이고 우린 그냥 말많고 오지랖넓은 AI 두 명이었을 뿐이에요.
고작 일개의 시스템일 뿐인 우리들로서는 당신들이 왜 그 자리에 서게 되었고 어떻게 거기까지 된 지는 잘 모르겠지만”]
바이스는 말을 멈추었다.
AI에게 이런 표정을 집어넣은 저의가 무엇일까.
모리안은 한번도 본적없는 바이스의 이미지파일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흐물흐물하게 가라앉은 녹색빛의 눈동자가 점멸한다.
이쪽을 보고, 나를 보고, 때아닌 냉해에 쓸려 축 늘어져버린 어린 새싹이 띄는 죽음의 빛처럼 깊게 가라앉은 녹음이 만들어진 인형들을 향해 축복한다.
[“언젠가 당신들이 진정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내가..”
밀레시안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홀을 향해 걸어나왔다.
몸이 멋대로 움직인다. 새로운 길을 찾아, 활로를 찾아.
막혀버린 짧은 길을 버리고 다른 출구를 찾아 먼 길을 헤매인다.
“내가…!!”
밀레시안이 바이브카흐의 기억을 향해 저항했다. 지난날 설원의 문을 두드리던 손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차갑고 아프고 괴로웠지만 두드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 작은 오두막의 나무문.
두드렸다. 기다렸다. 당신이 문을 열고 나를 바라보았다.
따스한 온기가 흘러나오는 벽난로의 빛을 등지고선 녹색의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다음에 찾아오는 밀레시안은 당신을 죽일겁니다.”
“마치 너는 나를 지키려는 것처럼 말하는 군요.”
얼음처럼 새하얀 손이 나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말했다. 슬프다고, 아프고, 두렵다고,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내가 반대의 입장이 되었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에요. 우리중 누가 감염되었어도 똑같이 그 사람을 들쳐업고 뛰었을 거고, 누가살아남게 되더라도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겠죠.”
“그래서는 전부 사라지는 결과밖에 남지 않아요.”
“그래요. 어느 누가 되었든 우리들은 분명, 0가 되어버리겠지만 그래도 이젠 당신이 있어요. 우리들의 다음으로 밀레시안이란 존재가 남게되는거에요.”
마주하는 그 푸른 불꽃이 너무나도 따뜻했다.
떨려려오는 총구가 그녀의 시선과 닮아있었다.
“도망치라고 했어요.”
“그런말 하지마.”
“후회를 하더라도 살아남으라고 했어요.”
“내가 아는 너희들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어.”
“그런 나를 만나 기쁘다고 했어요.”
“그렇게 사람처럼..”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게 사람인 것 처럼..!!”
콜트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남자는 오열을 하며 얼굴을 감싸쥐었고 밀레시안은 떨어진 듀얼건을 바라보았다.
나도 이해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녹슨 태양의 빛이 번져나갔다.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박동소리가 빠르게 느껴졌다.
목이 메이고 호흡이 가빠져온다. 슬프지는 않았다, 괴로움을 가늠 할 수도 없었다.
죽음앞에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어쩐지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이 아픔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요.”
“울면서 나를 보지 말란말이다..”
그 사람은 말했다. 살다보면 도망쳐야 하는 순간이 있는거라고. 그 사람은 말했다.
후회를 하더라도 살다보면 또다른 기회를 잡을 수 있을것이라고.
그 사람은 말했다. 살아가면 언젠가 당신도 이러한 기적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흘러넘치는 감정이 버거웠다. 밀레시안은 손을 들어 뿌옇게 흐려진 눈앞을 닦아내었다.
이 눈물이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면 좋았을텐데. 이 마음이 사람의 것이였다면 좋았을텐데.
이 감정이, 이 선택이, 아니 그저 내가.
나는,
“내가!! 내 스스로가!!!”
밀레시안이 소리쳤다. 인기척이 느껴진다.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으로 그 문을 열었다. 언제나 두드리고 기다리던 그 문을 스스로의 손으로 잡아 당긴것은 난생 처음 있는 기억이었다.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좁기도 하고 어두컴컴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동시에 안락했다. 밀레시안은 요람에 누워 아발론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뜨면, 그게 내일이되는 걸까요?”
“아니 아직.”
“그렇죠? 그렇게 간단히 오지는 않겠죠?”
“하지만 곧 그렇게 될지도 몰라.”
언젠가 이 삶은 끝이 난다.
준비된 시간이 끝나고 체력과 기력이 다하게 되면,
누군가의 삶을 훔치고 누군가의 삶을 흉내내었던 부채가 칼날이 되어 되돌아온다.
망각의 모래속에 파묻였던 기억은 부패한 악몽의 자락이 되어 그 목을 졸라맬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죽는다. 두번째 삶, 두번째 생명, 두개의 선택.
누군가 내게 살아가라고 말해주었다. 사람으로서의 삶을 넘겨받았다.
그 무게에 짓눌려 내팽겨치고 도망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선택지를 쥐어주었다.
도망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잖아.
붉은 불빛이 흔들린다. 검은 대검을 쥔 그가 반대편을 향해 달려나가는 뒷모습이 기억속에 어른거렸다.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어.”
“안궁금해요.”
“야박하구나...”
여느때와 같이 카페테리아에 나란히 앉아 사람들을 내려다 보았다.
감시나 관찰의 시선과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그저 바라보고, 흘러넘긴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처럼 그들은 삶의 일부분을 바라보고 그 시간을 기억했다.
가로등은 불을 밝히고 사람들은 불빛 아래로 모여들었다. 그림자가 웅성거린다. 램프가 반짝이는 드론이 하늘을 향해 떠올랐다.
“새로운 장비인가 보네요.”
“아니, 재활용된 드론이란다.”
단장은 따끈한 커피를 한모금 삼킨뒤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너희 팀원도 저기 있지않니.”
밀레시안이 무슨말이냐는듯 눈썹을 찌푸리자 단장은 새끼손가락을 구석에 있는 나무를 하나 가리켜 보였다.
한참동안 부스럭거리며 흔들리던 나무 사이에서 사람 다리가 하나 불쑥 튀어나왔다.
찾았다는 기쁨이 상당한지 가로등아래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를 반기고 있었다.
나뭇가지와 이파리로 엉망이된 그의 손에는 드론이 하나 들려져 있었다.
추락해서도 여전히 빛을 깜빡이고 있는것이 여간 기특한지 사람들은 애지중지 드론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옷을 탁탁 털어내던 팀원은 해맑은 어린아이처럼 다른 요원들과 함께 가로등 아래로 뛰어갔다.
아니, 어린아이는 맞다. 그는 부정하지만 그는 팀내에서 가장 어린 나이의 요원이었다.
그는 끈질기게 밀레시안이 더 어린 것 아니냐고 막내탈출을 주장했지만, 밀레시안은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 단장은 웃기만 했을뿐. 단장이 웃는 의미를 알지 못했다.
사사로운 시간이 조금 더 지난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장이 웃는 것도, 그가 막내가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도.
불빛이 떠오른다. 하늘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날아오른 드론들이 불빛을 깜빡인다.
하늘을 수놓는 불빛이 아름답게 흔들렸다.
불빛은 꽃이 되었고 리본이 되었고 일제히 흩어져 별빛처럼 반짝이며 다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환호성과 함께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이 웃었고 구경나온 사람들이 웃었다.
피오나의 요원들이 웃는다. 단장도, 커피를 내리던 바리스타도, 모두가 하늘을 보며 미소짓는다.
아무런 의미가 담기지 않은 불빛을 머리위에 두고 밀레시안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래, 그들이 말하는 사소한 시간들이 이런 것이라면, 이런 포근함을더 오랫동안 누려왔던 시간에 대한 자부심이라면, 오래 살아남은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 해도 좋을지 모른다.
살아가는 것에 대해 내일을 기대해도 좋을 지 모른다.
이제 막 저물어든 밤이 너무나도 눈이 부셔 밀레시안은 자신의 손을 들어 매마른 눈가를 쓸어내렸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싶었단다.”
“안궁금하다니까요.”
“아무 의미없고, 아무런 교훈도 없고. 얻는 것도 없지만 잃을 것도 없지.
하지만 그저, 그런일이 있었다. 모두가 어울려 놀고, 뭔가를 성취하고 다음을 약속하지.”
단장은 밀레시안의 머리위에 손을 얹었다. 무겁고 따듯한 온기가 머리카락을 살며시 흩어놓았다.
“나는 스스로 가꿀 시간을 만들고 그는 서로를 더 아낄수 있는 인연을 엮어낸다.
우리들은 그 마음이 스스로 일어서기를 기도하고, 우리들은 그 마음이 외로움과 고독함에 괴로워하지 않기를 소원한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이 빛이 사라졌을때, 사람들이 스스로의 빛을 밝혀 다른 누군가를 찾아가길 원해.”
“.......”
“살아가렴, 그리고 사랑을 하렴. 언젠가 너에게도 아침이 오고 오랜 꿈에서 깨어나 밝아오른 새 태양을 바라봤을때. 네가 외롭지 않도록 함께할 사람을 찾아내렴. 그리고 언젠가 너 또한 사라져 끝없는 꿈의 세계(이상향)로 넘어가게 된다면.”
“.......아발론.”
“그땐 네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렴.”
아발론이 미소지었다.
“벨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이, 나 또한 저편에서 너를 기다리마.”
“싫어요..! 싫다구요.. 언제까지 더? 얼마나 더? 듣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요. 안들을 것이라 말했잖아요.
더이상은 안돼요. 이 이상은 잃고 싶지 않아. 이 이상은…”
나는 잠들어가는 요람의 얼음 속에서 언젠가를 꿈꾸었다.
오늘이 아닌 내일을, 그리고 그 너머의 아득한 시간을.
죽음을 끝으로 여기던 그림자에서 벗어나 살다가 남기고 가는 무언가를 소원했다.
그리하여 언젠가,
“내가… 내가 바래왔던 것은..”
내가 언젠가 그들과 다시 만날 날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럼 그 소원대로 해주지.”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윗층 어딘가에서 떨어져 내렸다.
육중한 금속소리가 공기를 울리며 멀리 퍼져나갔다.
검이 휘둘러진다. 검은 대검과 마주친 다우라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검날을 튕겨내었다.
나부끼는 망토의 무게가 상당할텐데도 검은 기사는 쉴새없이 검을 휘두르며 빠른속도로 밀레시안을 몰아붙였다.
알고 있다. 나는 이 검에 대해 알고있어. 밀레시안은 이를 악물고 검은 대검을 정면에서 받아내었다.
터무니 없는 힘에 이기지 못해 한쪽 무릎이 땅에 닿았다. 검은 투구속 흐릿하게 나마 붉은색 환상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들려오는 나지막한 숨소리, 밀레시안은 한순간 흐트러지는 호흡에 맞춰 검을 흘려내렸다.
듀얼건을 교차시킨다. 연달아 쏘아내는 실리엔을 추진력 삼아 뒤로 물러섰다.
단시간에 여러발을 얻어맞은 검은 기사가 잠시 휘청거리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팔뚝으로 턱을 따라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멈추지가 않아. 밀레시안은 자꾸만 차오르는 숨결에 헛숨만 들이마시며 듀얼건을 고쳐쥐었다.
붉고 붉은 과거의 잔상. 바이브카흐가 사라진 머릿속에 숲이 돋아나고 있었다.
검고 깊은 숲속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어느 연구소의 문. 그 안에 당신이 있었다. 그 길목에 당신이 있었다.
나를 등지고, 세상을 등지고 당신은 이렇게 소리쳤다.
도망쳐, 라고.
밀레시안은 그의 말에 저항하듯 실린더를 돌렸다. 클로저를 연발하며 동선을 흐트러트린다.
몇번이고 탐색하며 빈틈을 노리던 밀레시안이 어느 한지점에 내려앉았다.
실리엔이 내는 빛을 숨기기위해 자세를 낮추었다.
홀을 장식하는 화분이나 화단따위, 그리고 간간히 놓여진 반투명한 반벽따위가 모습을 감춰주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한계치까지 압축된 듀얼건을 확인한뒤 검은 기사를 향해 뛰어올랐다.
사방으로 탄환을 쏘아내며 빠른속도로 돌진해 들어간다.
난사되는 실리엔의 폭풍속을 달려 검은 기사의 머리를 너머 뛰어올랐다.
듀얼건이 겨냥하고 있던 머리가 들어올려졌다. 조금은 나이가 든것 같은 붉은 눈동자가 밀레시안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환상? 아니면 현실?
아주 잠깐동안 머뭇거린 틈을 놓치지 않고 기사는 대검을 휘둘러 밀레시안을 휘둘러졌다.
무지막지한 힘과 함께 불쾌한 전류같은것이 온 몸을 휘감았다.
직선으로 나가떨어지며 부딪친 화단에서 짙은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마른기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자 반격당한 한쪽 허리가 짜릿하게 당겨왔다.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상처를 부여잡고 나서야 한쪽 듀얼건을 놓쳐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검, 이 움직임, 밀레시안이 소리쳤다.
“왜..!!”
“그러는 너는 왜.”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밀레시안의 질문에 대답했다.
검이 겨누어진다. 숨결을 탄식삼아 가슴에 차오르는 원망의 말을 내뱉었다.
“왜? 왜 당신들이? 왜?! 어째서?”
이유를 달라고, 그 근거를 달라고, 이해시켜달라고, 납득시켜달라고, 이미 한참은 멀어진 그들을 향해 밀레시안을 떼를 쓰듯 그 이유를 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체념했다. 나는 정말 안되는 거구나. 밀레시안은 자신을 막아서던 피오나의 요원을 떠올렸다.
그렇게 침착하게 대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상냥하게 이야기 할 수 없었다.
짧게나마 메세지를 보내라던 그의 조언이 이제서야 이해가 갔다.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내가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줘. 그는 그 메세지를 받았을까? 글자 하나 없는 우스꽝스러운 그림을 보고 뭐라 생각했을까,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할걸,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할 걸.
머릿속이 불타올랐다. 지나가버린 시간은 은막속에 타오르고 과거의 악몽이 현실이 되어 뒤를 돌아보았다.
밀레시안은 자신의 상처를 움켜쥐었다.
피가 번져나오는 상처속에서 은색의 시계가 반짝인다.
밀레시안이 소리쳤다.
“왜!!!”
“그러는 너는 왜 죽지 않았던거냐.”
검은 기사 또한 질문을 던졌다.
“왜 진작에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지?”
네번째 폭탄이 브류나크를 흔들었다.
검은 기사는 넝마가된 헬멧을 해제하고서는 그 조각을 갑옷에서 뜯어내었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붉은 머리카락이 눈이 부셨다. 여기가 현실, 뒤돌아선 그곳이 환상.
엉망으로 부서진 브류나크의 홀이 사라지고 검은 숲이 시야를 가렸다.
검은 대검이 밀레시안을 가리켰다. 그의 적은, 그가 막아서던 악몽은, 다른 누구도 아닌 지금 이순간 여기에 서 있는 나 자신이다.
밀레시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이를 악물었다. 총성이 울렸다.
아득히 먼 기억속에서, 그리고 지금 여기 이 손끝에서.
뺨을 스치고 지나간 상처로 부터 피가 흘러내렸다.
가만히 피하지 않은 루에리의 시선이 가늘게 흐려졌다.
맞추지 못하는 그 총끝이 떨리다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밀레시안은 목놓아 울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르겠다. 당신들을 이해할 수 없어. 사람의 마음따위 알고싶지 않아.
어째서 당신들이 여기에 있는지, 왜 그들에게 검을 겨누는 건지, 어지러운 불빛속에 울음소리만이 흔들렸다.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왔다. 바이브카흐도, 환상도 아닌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리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들은 이미 한번 칼리번을 지워냈습니다. 꿈을 꾼다는 명제 자체를 지우고 악몽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언젠가 너희 스스로가 잠에서 깨어나기만을 기다려왔습니다.
걷기도 전에 뛰려하는 너희들이 네발로 기는 단계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참을성있게 기다려왔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찾아오기 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어.”
루에리가 말했다.
“주마등이 스쳐지나가는 시간은 빠른데, 몸이 따라가지를 못해 시간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났지.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천둥과도 같이 들려왔고, 내쉬는 숨결 반줌이 폭풍같이 느껴졌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삶을 돌아보기까지의 시간. 그 안에서 나는 절망보다는 희망을 느끼고 있었다.”
검은 대검이 밀레시안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무거운 칼끝이 목돌미에 날을 갖다대었다.
“짧지 않은 생애동안 이 손으로 살린 사람보다 이 손으로 죽인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은 알고 있어.
나는 그 지옥속에서 살아남았지만 내가 서 있는 그림자의 깊이만큼 많은 사람들이 나 대신 죽어나갔다.
그래. 다시한번 글라스 기브넨이 만들어지는 동안 내 영혼은 죽어나갔지만 불평만 할 수는 없었어.
그건 타르라크 또한 마찬가지였을테니까”
“타..르…”
“그러면서도 예전같이 웃으며 나를 대해왔던건 그녀석 또한 내가 엉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거야.
그렇지만 나는 기억한다. 나는 두 번, 너희들을 도망치도록 길을 막았고 타르라크는 손을 잡은 누군가와 함께 달려나갔다.”
“....라...크…”
“내가 너희들 쫓아보냈듯이 타르라크 또한 너를 보냈을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 모든 과정이 웃기더라고.
같은 과거를 반복하고 같은 결말을 기다려. 나는 또 이렇게 쓰러지고 그녀석 또한 숲을 달리다 고통스럽게 죽어가.
그리고 또 그렇게, 달리고 달리는 어린 소녀는 삶과 죽음을 갈망하며 숲을 빠져나간다.”
“......”
“너는 어떠했을까, 마리는 어땠을까. 너희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그 숲을 달렸나.
그 모든게 궁금했지만 동시에 그 모든것이 의미가 없었다. 마우러스가 그러했듯이,
나 또한 그 결말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현실앞에서 고개를 돌렸다.
알아, 알고 있었어. 알 수 밖에 없어. 마리는 죽었다.
그리고 너 또한 죽었을 예정이었다.”
“.....루에리”
“하지만 나는 네가 도망치기를 바랬다.”
밀레시안은 루에리를 올려다 보았다. 잔뜩 일그러진 붉은 눈동자가 밀레시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만은 그냥 멀리 도망가기를 바랬어.”
그랬다면 적어도 이 꼴은 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루에리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밀레시안은 천천히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 순간, 너는 적어도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루에리는 말대신 검끝으로 그 말을 삼켰다. 검이 울린다. 잔 진동이 느껴지는 검은 대검을 바라보며 밀레시안이 입을 열었다.
“마리가, 아니 마리는.. 내가 살기를 바랬어요.”
“알아.”
“마리가 나에게 살아달라고 말했어요.”
“우리도 알아.”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아주 많은 삶을 살아서”
“그 아이라면, 아니 그녀라면 그렇게 말했을거야.”
“언젠가 다시 만났을때…”
“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고. 말이죠.”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검은 가면을 쓴 퀘사르가 평온한 발걸음으로 루에리에게 다가왔다.
타르라크는 루에리의 뺨에 난 상처를 흘끗 보고서는 무언가라 속삭였다.
루에리는 밀레시안을 한번 돌아본 뒤 검을 거두고는 다른 곳으로 걸어나갔다.
밀레시안은 천천히 가면을 벗는 타르라크를 바라보았다.
다섯번째 폭음이 울렸다. 창이 깨져나가고 거센 바람이 홀안의 공기를 빨아들였다.
순식간에 차가워진 공기를 따라 밀레시안의 눈물자국이 말라가고 있었다.
타르라크는 밀레시안에게 눈높이를 맞춰 허리를 숙였다.
조금은 시간이 지나버린, 짙은 녹색의 눈동자가 밀레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돌아온것에 대해 당신이 실망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왜 이런일을 벌였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만도 하죠. 하지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왜 그를 따라갔습니까. 왜 그를 막지 않았죠? 왜 칼리번이 돌아오고 실리엔이 돌아오고 아발론이 에린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까.”
“변할 거라고 했어요.”
“그걸 믿었습니까?”
“변하고 있었으니까. 변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
밀레시안이 쓰게 웃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비틀리는 얼굴 너머로 흘러넘쳤다.
“그런데 나만 변하는게 아니었네. 당신도, 루에리도, 우리 모두가 변하는 것이었구나.”
“무엇이라 여겨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또..,”
발걸음 소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극장이 풀려난 덕분인지 조금 여유가 생긴 요원들이 관제실B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멈춰놓았던 엘리베이터도 움직이고 브류나크는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멀리서 루에리가 타르라크의 이름을 불렀다. 타르라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이미 그렇게 살아가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내게”
“우리들은 이미 당신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우리들을 멈출 수 없지요.”
“무엇을 바래요?”
밀레시안이 물었다.
“아무것도.”
타르라크가 대답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약속합니다. 이 이상 나와 당신의 길이 겹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후회하지도 않을 겁니다. 나의 후회와 루에리의 절망은 이미 모두 당신에게 넘겨주었으니까.”
“나는..”
“살아가세요. 당신의 삶을 살아가세요 밀레시안. 당신이 이미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면,”
녹음된 목소리가 기억속에 사무친다.
[“계속해서 나아가도록 하세요”]
“계속해서 나아가도록 하세요”
그 이전의 세상속에는 우리가 남아있을테니.
타르타크는 무너져나가는 벽을 무너트리며 나타난 검은 케리어에 올라타며 말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휘몰아치는 바람과 무너지는 벽의 잔해, 유리가 쏟아져내린다.
쨍강거리며 흩어지는 것이 기억인지 눈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불타오르고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죽음으로 도망치던가 이 모든것을 끌고 살아나가던가, 아니면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웅크린채 기다리던가. 무너지는 브류나크의 끝에서 밀레시안은 양손에 얼굴을 파묻은채 소원했다.
모두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얼굴을 감싸쥔 양 손이 실리엔의 연기에 절어 쓰게 느껴졌다.
그러니 이 눈물은 더이상 슬픈것이 아니다. 그저 눈이 쓰라리기 때문에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밀레시안은 자신의 감정을 닫으며 속삭였다.
[“이 오랜시간동안 아무도 내가 있는 층에 도달하지 못하다니, 여흥이라 할 것도 없었군요.
이제 여기까지 입니다. 나는 이만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생존자 여러분들. 몸조심하시고 안전하게 내려가시길.”]
주인을 잃은 다우라가 깜빡거리던 불빛을 꺼트리는 순간,
어딘지 모를 먼 곳에서 보라빛 총성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