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reload

톨비밀레) reload #10

Tecla 2017. 12. 22. 17:35

[“마을사람들은 정말 진심으로 자신들이 아이를 지키고 있다고 믿고있었습니다.

아이가 아픈것은 마녀의 저주때문이라고 믿고있었습니다.

죽어가는 아이를 구해내기 위해, 어머니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다름아닌 외진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보라빛 로브를 입은 한 명의 여성이었다.

다른 엘프들이 황급히 그녀를 말리려하지만 카스타네아는 그들을 뿌리치고는 단호한 발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블랙레이븐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필리아의 친위대가 블랙레이븐을 가로막았다.


“물러서주십시오. 카스타네아님.”


“자네들이야말로 물러나게, 블랙레이븐.”

“카스타네아님,저들은신경쓰지마세요.”


“저희는 필리아 여러분을 염려하는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니, 더이상의 접근은 서로에게 좋지 못할 것 같습니다만,”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어 예기치 못한 화제를 불러왔다. 사람들이 수근거린다. 

역시 필리아와 연관이? 필리아가 여기 왔기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 아니야? 

저것 봐, 카스타네아야. 어째서 그녀가 여기에 와 있지? 그녀는 오늘, 탈틴에서 열리는 정기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있지 않았나? 안드라스는 뭘 하는거야? 이런 일은 빨리빨리 연락했어야지?! 잠깐, 그러면, 지금 카르펜 공주가 만나는 것은 누구란 말이야?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녀가 아닌 그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가면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뭐 그 다음 이야기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입니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약간의 각색을 더했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알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겠지요.”]


질문 대신 무언의 눈초리가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카스타네아는 얕게 한숨을 내쉰뒤 자세를 바르게 고친뒤 턱을 조금 더 높게 들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깊게 눌러쓴 후드의 가장자리를 쓸어내렸다. 

촛점을 알 수 없는 흐린 동공이 서늘하게 빛나는 가운데 그녀의 머리께에서도 가느다란 은빛 세공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주 얇은 선으로 아름답게 드리워진 티카나무 잎파리, 그녀의 머리장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는 일부 인사들은 그녀의 당당함에 눈쌀을 찌푸렸지만 표정이 어두운 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카스타네아가 단상 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면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야기가 지루했나요?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원래 이런식으로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에는 영 서툴러서 말입니다.

눈높이에 맞춰주라는 조언은 들었지만 역시 내키지 않네요. 

나는 원래 이렇게 친절하게 가르쳐주기보다는 좀더 이렇게 뭐랄까..


직접적으로.”]


검은 가면의 말에 맞춰 건물이 흔들렸다. 갈 곳 없는 불안감을 카스타네아에게 쏟아내려던 사람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의자밑으로 주저앉았다. 

테이블 아래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그자리에 꼼짝없이 얼어붙은채 의자를 붙잡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아우성을 쳤다. 시선은 요원들에게 향했다.

어떻게 좀 해보라고, 무엇이라도 해달라고, 그러기 위해 여기에 들어온 것 아니냐며 질책의 껍질을 뒤집어쓴 억지가 이어졌다.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의 의도는 100퍼센트로 맞아떨어졌다. 

방금전까지 전원이 내려가거나 문이 잠기는 것을 일부 퍼포먼스로 생각하던 사람들은 확실하게 퀘사르의 존재를 각인했다.

두려운 것, 무서운 것, 언젠가 흘려들었던 뜬소문들이 부풀어오르며 근거없는 불안감을 부추긴다.

혹 기억력이 좋은 몇몇 사람들은 검은 가면이 이야기한 옛날 이야기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제안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부를 향해 겨냥해진 가공의 이야기일뿐. 

검은 가면은 직접 그 제안에 대해 부정했다.  나른한 음성이 이어졌다.


[“생각할 시간을 주어주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심장은 여전히 그 성질 그대로 찬찬히 동화를 음미할 시간을 주라고 했지만 안타깝네요.

어차피 나는 생활에 찌든 골방 늙으니 같은 성미를 가져서 말이죠.”]


두번째 폭발. 요원들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수장식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테이블의 앞으로 뛰어나갔다. 

만찬이 가득 차려졌던 테이블이 쏟아지고 임시 벽이 되어 터져나오는 유리조각을 막아내었다. 

온전치 못한 원형의 바리게이트 넘어 일부 파편이 튀었지만 그대로 앉아있었더라면 일부 파편이 아닌 온전한 유리 장식 전체를 그들의 몸으로 받아내었어야 했을 것이다. 마치 저 테이블 처럼.


분수대에 너무 가까이 있었던 몇몇 테이블은 폭원의 가까이 있었던 탓인지 흠뻑 젖은것으로 모자라 검게 그을려져있었다. 물기어린 목재를 태우는 잔불씨에서 흐릿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날카롭게 깨어진 유리조각 사이를 살피던 요원중 한명이 비활성화된 폭탄으로 보이는 기묘한 물체를 하나 건져올렸다. 어슴프레 빛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붉은 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뒷전에서 다른 시스템을 만지고 있던 탈틴의 엔지니어들이 불려나왔다. 

함께 따라나온 멀린의 요원이 잽싸게 그 사이에 끼어들며 물고기의 배를 갈라내었다.


누군가 말릴 새도 없이 멀린의 요원은 작은 단추모양의 작은 폭탄을 꺼내들었다.

크기나 모양, 규격까지,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모범적인 소형 폭탄이었다.

하지만 폭발력은 직접 체험했다시피 상상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 

요원들의 시선이 배가 갈라진 물고기로 향했다. 실체를 확인하고 나서야 엉망이 된 수조 파편 속 반짝거리는 것들이 유리조각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수조속 물고기들은 바깥에 있는 큰  분수대와 연결된 통로로 들어오는 하나의 구조, 폭탄을 나르던 것이 수조속 물고기였다면 지금쯤 바깥의 상황은..

상황을 눈치챈 사람들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있을 즈음 검은 가면은 계속해서 말했다.

아니,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떠들고 있었다. 

마치 이쪽의 상황은 알바가 아니라는 듯이.




[“아..방금것은 신경쓰지 마세요. 그냥 수도관 몇몇곳이 터져나간것 뿐이니까요.

아- 혹시 여기 브류나크의 구조에 대해 잘 알고 계신 분이 있을까요? 있겠죠? 있을겁니다.

뭐 정확히 몰라도 대충 감이 잡힐겁니다.

하지만 쉿, 조용히. 당신의 진실이 때로는 다른이들을 공포로 몰아 넣을수도 있답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그들을 조롱하고 있었다.


[“어떻게 아냐고요? 그걸 위해 여기있는 우리 모두가 한번씩은 스스로의 이름을 포기했지 않았습니까.”]



“마지막 경고입니다 필리아. 다시 자리로 돌아가주십시오.”


“마지막 경고라고요? 마치 우리들을 강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말합니다?”


“개인적인 경호인력과 동행하는 것에 대해 동의한 것 만으로도 이 이상의 호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거 참 이상하군요. 이와같은 일이 벌어졌을때는 한 명이라도 더 유효한 전력이 남아있다는 것에 기뻐해야 할텐데.”


“협력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제 3자를 유효 하다고는 할 수는 없겠지.”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군요. 어차피 우리들은 제3자, 그래서 그렇게 총구를 들이대는 것도 꺼리지를 않는거로군요?”


결국 서로의 밑바닥을 살살 긁어내리던 신경전에서 먼저 끈을 놓은 것은 블랙레이븐이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해졌고 불안감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뉘어졌다.

한 쪽은 필리아를 비난하며 머물러 있겠다는 쪽. 다른 하나는 필리아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나가겠다는 쪽.

물고기폭탄에 의해 밖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속에서 관계자들은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한채 머무르는 쪽에 몸을 숨긴채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는 그것이 똑똑하다고 생각했고 누군가는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이야기했다.

블랙레이븐은 벌컥 화를 내며 필리아를 비난했다.


“이렇게 나오는 저의를 헤아릴 수가 없군요. 필리아. 눈앞에서 터진 폭탄때문이라면 몰라도 당신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것은 아직 첫번째 폭탄이 터지기도 전, 혹시 이 상황에 대해 뭔가를 아는 것이 있으신지요?”


“뭐라고요?”

“지금 무슨 말을 입에 담고 있는 건지 알고는 있는 겁니까?”


언성이 높아졌다. 새된 비명소리같은 반박에 사람들의 귀가 쏠려왔다. 

이봐, 무슨일이야. 방금 무슨 말이 오간거야? 필리아가 뭘 알고 있데? 무슨일이야? 

필리아? 블랙레이븐이 뭘 알고 있는 모양인데. 이봐, 무슨일인지 말 좀 해봐. 이봐.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근처에 있던 블랙레이븐을 잡아끌며 질문을 쏟아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요원들은 곤란한 표정으로 모른다는 대답만 반복할뿐.




지정된 구역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거세졌다.

아직 남은 폭탄이 얼마나 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속에서, 사람들은 발밑에서 꺠어지는 유리조각 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요원들이 있는 쪽으로 슬금슬금 손을 뻗어왔다.

멀린의 요원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상황을 살펴보았다.

멋대로 폭탄을 꺼내든 탓에 탈틴의 엔지니어들로 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던 그는 결국 엔지니어들의 압박에 이기지 못한채 수조에서 물러섰다.


멀린의 요원은 초조한듯 엄지손톱의 끝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짧게 깎인 손톱은 그의 버릇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차선책인것 같았지만 그는 끈질기게 짧은 손톱을 갉아내며 손끝을 상처입혔다.

톨비쉬는 기묘한 감각에 휩싸인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이와 같은 기분으로 누군가를 바라본 적이 있었는데..

톨비쉬가 잠시 넋을 놓고 서 있는 사이 근처에서 사람들과 실랑이를 하던 타라의 요원이 톨비쉬의 곁으로 다가왔다.

직접 걸어왔다기보다는 사람들의 등쌀에 떠밀려 물러선 정도의 접촉이었다. 

허둥거리던 타라는 톨비쉬의 팔꿈치를 툭하고 건드리며 난색이 되어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이상의 정보는 저도 정말 아는게 없는지라.. 아, 죄송합니다. 피오나.”

“아닙니다.”


톨비쉬는 잔뜩 당황한 타라의 요원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주었다. 

도망칠 곳을 찾던 타라의 요원은 재빨리 그 길을 따라 다른 타라의 요원들에게 합류했다. 

타라에서 온것같은 고위층의 손님들은 톨비쉬를 껄끄러운 얼굴로 바라보다 자리로 돌아갔다.

아마 자신들이 함부로 할 수 있는 타라나 탈틴이 아닌 다른 측의 요원과는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이럴때 킹과 연락 할 수 있다면 참 편리할텐데. 톨비쉬는 괜히 이질감이 느껴지는 팔꿈치를 감싸쥐며 고개를 돌렸다. 알게모르게 타라에 대해 빠삭한 그의 지식이라면 방금 과민하게 반응을 보인 몇몇 타라의 손님을 알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봐, 방금 그 폭발은 뭔가. 저들이 원한다고 말하는게 뭐지? 누가 배후인지 짐작이 가나? 

외부에서의 연락은? 에일레흐는 이에 대해 알고 있나? 

웅성거리는 소란속 흐릿하게 기억되는 몇가지 질문이 입안에 껄끄러운 가시처럼 자리잡았다. 

마치 삼키면 안되는 독가시와 같은 이질적인 질문들. 

필리아와 다른 의미로 그들은 폭발이후 예민하게 반응하며 코와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에일레흐는 이에 대해 알고 있나? 

그들이 알고 있는 무언가가 또다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촉발제가 될지도 모른다.

가면의 남자는 속삭인다. 우리들은 모두 한때 자기자신이기를 포기했던 시기가 있었다고.





[“자, 그럼 다시 묻도록하죠.”]


나지막하게 웃던 검은 가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말에 스스로 호응이라도 보내는 것 마냥 또다른 폭발음이 울려왔다. 

이번에는 윗쪽, 기이한 울림소리와 함께 조금은 작은 진동소리가 잦게 이어졌다.

사람들이 불안해 하며 주변을 둘러보지만 이번 폭발은 극장 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외부의, 요원들의 시선이 바쁘게 오고간다.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는지 몇몇 요원들이 드나들기를 반복했고 필리아는 이제 무기를 꺼내들 기세로 블랙레이븐을 압박해왔다. 

누군가 필리아를 비난했다. 그러고 보니 필리아는 전용기로 식 순서 직전에 도착했다지? 

그걸 타고 자기네들끼리만 홀라당 도망가려는거 아니야?!

예의를 접어버린 가시돋힌 목소리가 필리아를 향해 날아들었다. 

카스타네아는 그 많은 군중속에서도 정확하게 첫 발화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색을 가진 눈동자속에 담긴 열기가 낯설다. 카스타네아는 말한다.


“그렇다한들 당신과 무슨상관입니까.”


“뭐..?”


“당신의 말대로 필리아는 발레스와 에일레흐가 협의한 대로 이번 식에만 참가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에 대한 이동수단이나 참가시간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기는 조건으로 말이죠. 

그래서 당신 말대로 우리들은 이동수단이 있고 그걸 이용할 권리는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라는 것이죠?”


“이봐, 지금 그게 외교적으로 적절한 발언인가?”


그것은 분명 협박에 가까운 말투였다.

필리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전투 태세를 갖추며 카스타네아의 주변을 둘러쌌다.

블랙레이븐은 응전하면 안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고 벨바스트도 이건 아니라는 표정으로 탈틴과 타라를 바라보았다. 타라의 귀족들의 시선이 두 집단의 요원들에게 쏠렸다.

그와중에 태연하게 웃고 있는 목소리까지 끼어들었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진다


[“아 폭파는 계속 일어나니 신경쓰지 마세요. 제가 지금 일하는 중이라서 말이죠.

그럼..음, 내가 묻고싶은것은 말입니다.”]


“아니라면 무슨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정말 궁금해지는 군요. 

여기에 앉아있기를 바랍니까? 여기에 남아있기를 바라세요? 

여기에, 당신들과 함께, 사이좋게 둘러앉아 저 자들의 이야기를 계속 귀담아 듣기를 바랍니까? 

우리가? 필리아가? 꿈에서도 보고싶지 않은 저 저주받은 가면들을 눈앞에 두고?

아니면 천만분의 일의 확률로 아무런 연고는 커녕 호의조차 없을 몇몇 귀족분들을 선택해 편안한 좌석이라도 안내해 드릴까요?”


[“거기 도망쳐있는 옷가게의 생존자들. 당신들 중에 혹시 일행을 잃어버린 손님은 없습니까?

자신이 살기위해서 옆에있는 부상자를 못본채 지나간 사람은 없나요?

그 옆 매장에 웅크려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아직 살아있지만 회생할 가망이 없는 누군가를 외면한 적은 없습니까? 혹시 그사람이 당신을 구해주지는 않았나요?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를 들은적은 없습니까? 혹시 지금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없나요? 이 목소리나 방송을 듣지 않게 하라고 억지를 부리지는 않습니까?”]


“무슨 의리가 있어서요?”


고요해진 극장안, 카스타네아의 잔잔한 분노가 메아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를 방해하는 것은 단 하나, 처음부터 쉼없이 자신의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검은색 가면의 음성.

무관심하게 즉흥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만을 고집하는 것 같지만 두번째 폭파와 음성 사이에 기묘한 공백이 삽입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번째 폭파이후 잡담과 질문사이에도, 몇몇 요원들이 영상에 대해서 고개를 돌린 것은 그 공백의 이후였고 그 요원들 사이에는 톨비쉬의 시선도 끼여있었다. 

분명 소름끼치도록 이 상황에 잘 맞아 떨어지기는 하지만, 분명, 무언가 이질감이 있다.





“이질감..”


톨비쉬는 움켜쥐고 있었던 자신의 팔을 돌아보았다. 이질감, 이질감.  뭐더라 이 느낌을 뭐라고 하더라. 

톨비쉬는 간질거리는 생각의 꼬리를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굴리며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무엇을 생각하던 도중에 이런 느낌을 느꼈었지.

기억을 더듬었다. 머릿속의 시계가 거꾸로 되감겼다. 


카스타네아가 다시 뒤로 돌아서고 필리아가 무기를 집어 넣는 모습을 눈앞에 그려넣었다. 

몰려나왔던 사람들이 뒤로 물러서고 허둥지둥 앞으로 나왔던 타라와 탈틴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간다.

객빈들의 위치는 대부분 거기서 거기,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은 경호를 맡은 요원들의 모습뿐이었다. 톨비쉬는 되도록 한자리에 머무르며 그 모습을 모두 눈에 담으려 애를 쓰고 있었고 대신 다른 피오나의 두 요원이 현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누군가 톨비쉬의 시선을 빼았는다. 그의 앞으로 스쳐지나갔던 타라의 요원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피오나.”


타라의 요원은 다시 몸을 돌려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타라의 객빈들을 향해 다가갔다.

다시 기억을 더듬는다.


“아, 죄송합니다. 피오나.”


다시 기억을 더듬는다.


“아, 죄송합니다. 피오나.”




반복되는 기억속 톨비쉬의 시선이 타라의 요원에게서 떨어져 다른 곳으로 향했다.

흐릿하던 기억의 구역을 넓혀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보았다. 흑백으로 흐려진 기억속에 선명한 파란색 피어스를 달고 있는 요원이 한명 서 있었다.

짧은 엄지손가락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이상한 버릇을 가지고 있는 멀린의 요원.


검은 그림자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초조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는 멀린의 요원의 뒷통수를 후려갈겼다.


“그만 좀 씹으라니까!”

“...아, 생각중이었는데 때리면 어떻게 해!!”

“손톱 또 너덜너덜해졌잖아..!

“말로 해 말로! 이번 임무는 우리만 온 것도 아니잖아..!”


“어? 아.. 맞다. 아, 죄송합니다. 피오나.”


어리둥절한 인사에 넋을 잃고 있던 톨비쉬의 곁에서 누군가가 팔꿈치를 툭 건드려왔다.


“.....아,”


“뭐해요. 톨비쉬. 사람을 빤히 보고 있었으면 실례되는 행동이라면서요.”


검게 가려진, 하지만 분명 밀레시안의 목소리를 가진 그림자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톨비쉬는 어떨결에 고개를 돌려 멀린의 요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니, 그게. 나도 미안하게 되었군. 그러니까.. 피오나.”


“아핫, 진짜 어색하다. 외부에서 이렇게 다른 팀원을 만나니까 이상한 인사가 되어버리네요.”

“하하, 그렇게 되었군. 특히나 이렇게 갑자기 다른 팀의 임무지가 겹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아- 미리 말해두는데요.”


멀린의 요원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우리팀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회수하는 것 뿐이니까요. 남아있는 괴물이든 변종이든 뭘 마주쳐도  우린 도망만 칠거니까요?”]


“피오나?”


흑백의 세계에서 현재의 시간으로 걸어들어온 멀린의 요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이봐요, 당신. 괜찮은 겁니까?”

“그래, 이제야 기억나는군.”


톨비쉬가 멍하니 대답했다.


“기억나, 그때 한번 만났었지.”


톨비쉬의 대답에 멀린의 요원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톨비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안경의 잔상이 멀린의 요원의 얼굴을 가리다가 사라진다. 분위기도 인상도 완전히 바뀌었지만 분명 그때의 그, 요원이다.


톨비쉬는 과연, 물어볼법도 하지 라는 생각과 동시에 하지만 그정도로? 라는 의문을 동시에 떠올렸다. 

팔꿈치가 고통을 호소해왔다. 너무 꽉 붙잡은 탓인지 팔부근에 선명하게 주름이 잡혀져버렸다.

뭐해요, 톨비쉬.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붉은 불빛이 그를 나무라듯 반짝였다. 


톨비쉬는 바깥 사물함에 두고온 시계를 떠올리며 팔꿈치를 붙잡고 있던 손을 미끄러트렸다.

멀린의 요원의 습관이 손톱을 물어뜯는 것이라면 그의 습관은 손목을 두드리는 것이리라. 

톨비쉬는 괜히 와이셔츠 끝을 잡아당기며 시선을 돌렸다. 멀린의 요원이 그를 불렀다.


“이봐요.”


[“반면 왜 이런일이 일어났는지 묻는 사람은.. 많겠군요. 

어떻게 이 많은 인원이 이런 바보같은 가면을 뒤집어 쓰고 있는 건지 저 거적떼기 같은 로브는 무엇인지 묻는 사람도 있을겁니다.

왜 이런일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준비에 미흡한점은 없었는지 묻는 사람도 있는 것 같군요.

여기에는 제가 답하도록 하죠. 못막습니다. 지금 당신들의 수준으로는.


예상하지도 대비하지도 못할겁니다. 어째서냐고요? 

거기에 대한 답변은 이미 내어주었습니다. 내가 말했죠. 

당신의 현실은 정말 자신의 것이냐고요. 당신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당신이 선택한 그 세상이 맞습니까?”]


분명 이름모를 그 타라의 남자의 지적은 올바른 것이었다.

필리아에게는 이 상황에서 도망칠 이동수단이 있었고 실제로 이 곳을 나가게 된다면 그들이 향할 곳은 두말 할 것도 없이 그 곳이었다.

그럼 남은 이들은? 누군가는 그 뒤에 남아있을 수많은 인원들의 생명을 걱정하겠지만 그 또한 필리아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필리아는 물었다.

무슨 의리로, 무슨 명분이 있어서, 무슨 권리로 우리에게 동정이나 연민이라는 단어를 강제로 씌워내려 하는가.

약하지 않으면 강자, 강자가 아니면 약자. 그것은 오직 그들이 살아가는 에린에서만 통용되는것. 엄밀히 이야기하면 필리아는 이미 에린의 일부가 아니었다. 


바이브카흐에게서 돌아섰을 때무터 에일레흐는 가까이 할 수도 멀리 할 수도 없는 필리아를 껄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발레스는.. 첨언 할 것도 없는 적대성향을 드러내었다.

처음부터 에일레흐와 발레스는 브류나크의 시작에 그들을 초대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좁쌀만한 그릇안은 팽이처럼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돌아갔고 묵혀지고 썩어버린 고민은 얕은 꾀를 부린 결과지를 내어놓았다.

그들이 초대장을 보낸 것은 필리아의 카스타네아가 아닌 그 보조역을 맡고 있는 하겔.

하지만 하겔은 동시간대에 이루어지는 에일레흐-발레스-필리아, 이 상 세 도시간의 힐웬무장에 관한 협의를 나누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브류나크의 주역으로서 자리를 뜰 수 없는 크루크와 에후르 마퀼 2세는 자연스럽게 그 대리인으로 카르펜과 에레원을 지목했고 에레원은 자신의 보좌역으로 탈틴의 안드라스를 요청했다

하겔은 선택을 해야했다. 이대로 에린의 모든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유일하게 불참자의 목록에 이름을 올릴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의 흐름을 위해 힐웬을 포기하고 브류나크로 향해야 하는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협의의 장은 이미 그 자체로 덫의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아무리 전대에서 왕좌에서 내려오긴 했지만 에일레흐의 위세는 아직도 칼리번에 기대어 선채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에레원은 그 적통자, 카르펜 공주의 체면은 말 할것도 없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세 도시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만해도 별스러운 일인데 그 자리를 고작 파티에 참여하기 위해 바람맞추는 것은 분명 또다른 입김을 불러올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하겔이 협의장으로 향한뒤 대리인을 브류나크에 보내는 것 또한 초대장을 보낸 크루크와 에후르 마퀼2세를 무시하게 되는일.

카스타네아는 서늘한 눈을 깜빡이며 하겔의 초대장을 집어들었다.


“차라리 어디, 휴가라도 다녀오도록 하세요. 하겔.”


카스타네아는 초대장을 세로로 길게 말아 손톱끝으로 확실하게 눌러접으며 은색으로 빛나는 펜대를 바라보았다. 

책상위의 작은 문진 이외에도 이곳저곳, 카스타네아의 방안에는 자잘한 은색의 물체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카스타네아는 서랍장의 앞으로 다가갔다. 

안쪽 깊숙히 넣어져있던 작은 벨벳상자를 보며 칼처럼 접힌 초대장의 날을 날카롭게 갈아내었다.


“가서 어디하나 부러져서 오면 더 좋고.”


서늘하다 못해 독기가 어린 목소리에 하겔이 무표정하게 카스타네아를 바라보았다.

모래빛 눈동자가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눈이 감긴다.


“이거 참, 어깨가 무거운 일을 시키시는군요.”


결국 하겔은 브류나크와 힐웬의 협의장 모두를 불참했다.

이유는 휴가를 떠난 동안의 갑작스러운 부상. 어깨뼈가 심각하게 손상을 당한 그는 꼼짝없이 필리아에 머무르는 수 밖에 없었다.

에일레흐와 발레스는 모두 핑계일뿐 아니라며 질책했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내지도 못할 노릇이었다.


필리아는 침착하게 양해를 구한뒤 양 측모두 적절한 대리인을 보낼 것이라고 통보했다.

협의장에 나타난 것은 그라나트. 친위대의 글라니테스도 아닌 이제 막 필리아 물류회에 이름을 올린 젊은 임원의 등장에 에레원은 대놓고 인상을 찡그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어디 한번 해보라는 카르펜의 도발과 달리 그라나트는 자리에 앉기도 전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한뒤 그동안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광물들의 이동 물량에 대해 서두를 던지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론 각자가 준비해온 힐웬에 대한 자료들이 각자의 테이블 앞에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중 어느것도 필리아가 제시한 주석의 숫자나 아연, 니켈, 에메랄드 코어의 숫자들과 맞지 않았다. 


일반적인 힐웬이라면 웃어넘길 자료들이지만 대상은 힐웬이 아닌 고강도로 합성된 힐웬 합금을 가리키는 쟤료들이었다. 그라나트가 가져온 자료는 불필요할 정도로 자세했지만 동시에 정확했다.

진짜용도가 무엇이 되었건 누가 그 일을 주도하고 있건 에메랄드 코어가 어디로 배송되는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필리아였다. 불신의 침묵이 테이블에 내려앉았다. 

느긋하게 테이블 앞에 착석한 그라나트는 나지막이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하, 종이가 마음처럼 안넘어가네요. 탈틴은 생각보다 습한 편이로군요. 그럼 협의를 나눠보도록 할까요?”





그들은 처음 부터 그랬다. 처음부터 우리들을 업신여겼고 처음부터 우리들을 골칫덩이로여겼다.

무례했고, 부당했다. 그래서 항의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를 그들은 곤란하다는 말로 어물쩍 떠넘기려했다.


“이러면 곤란합니다. 필리아.”


“곤란한건 당신네들 사정이죠. 당신들이 우리 체면치레를 신경쓰지 않는다면, 우리들도 당신네 사정에는 관심 없어요.”


“이러면 정말..”


“다른 객빈들은 뭘하고 있죠? 주최자는 뭘 하고 있고요? 애초에, 저 안에 지금 불은 켜져 있습니까? 

누군가 들어가는 있는건가요? 설마 우리더러 그 잘난 마이크 테스트 하는 음량을 청취해달라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잘들어요 블랙레이븐, 우리는 당신네들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도 아니고 에일레흐가 빌려온 애완용 고양이도 아닙니다. 주최자도 도착하지 않은 회의장 안에 이렇게 도둑처럼 숨어들어가지 않을거라고요.”


“......그흐.., 알겠습니다. 잠시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카스타네아는 씨근덕 거리는 젊은 친위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통신을 취하는 블랙레이븐을 보며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던 엘프는 잠시 표정을 누그러트리며 카스타네아를 돌아보았다. 저 열심히 할께요. 저희도 열심히 카스타네아님을 지킬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가는 것은 겁나고 안에 있는 것은 괜찮고, 하지만 누군가 혼자 탈출하는 것은 배아프다는 겁니까?”


“이보시오, 카스타네아..! 말이 심하지 않소..!”


[“일찍이 칼리번이 태어나고나서 너희들은 수많은 꿈을 반복했습니다.

한때는 하늘을 나는 것을 꿈꾸었고 또 한때는 바다를 나아가는것에 집중했습니다. 

사람의 가능성에 몰두한적도 있었고 물질의 풍요로움에만 촛점을 맞췄던 떄가 있었습니다.


하나의 꿈이 선택될 때마다 수십 수백가지의 가능성이 잘려나가며 한가지 길로 고정되었지만 너희들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살아왔습니다.”]


“우리 필리아가 보기엔 나갈생각도 없이 저 사기꾼들의 방송을 귀담아 듣는 당신들이 더 이상하게 보일 지경입니다.  그 누구도..! 이곳을 벗어나려하지 않고 그 누구도 저치들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는군요. 안그렇습니까? 페이단?”


[“몇몇은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중 대부분은 그 사실을 외면해왔습니다. 

이미 편한 길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모험을 하지 않고 평온함에 안주했습니다. 누군가가 해결해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에 그쳤으면 좋았을텐데 당신들은 옳은 것 까지 추구하려 애를 썼습니다.

명분만이 주어지면 이전의 꿈을 부정하며 자신의 잣대에서 벗어나려는 자들을 지워냈습니다.

뭐든 좋습니다. 뭐가 되었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다시한번 폭발음이 울렸다. 이번엔 가깝다. 

조명이 깜빡거리며 잠시동안 극장안이 어둠속에 잠겨들었지만 카스타네아는 그자리에 꿋꿋이 버티고 선 채 이를 악물었다. 

결국 몇개인가 조명장치가 떨어지며 식장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누군가가 쓰러졌고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폭탄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피냄새가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공포, 두려움, 침묵이 아닌 모든 소리가 폭음속에 빽뺵하게 들어차며 극장 안을 혼란스럽게 어지럽혔다.


[“만약 그 꿈이 잘못된 길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너희들이 치닫는 그 선택이 악몽으로 향하는 길이라면 어떨까요?”]







혼란을 틈 타 필리아의 친위대가 움직였다.

문이 열리고 카스타네아들이 사라졌지만 아무도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저지 할 수 없었다. 

아수라장이 된 극장 안, 카스타네아는 빠른 속도로 두개의 문을 지나 마지막 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잠겨진 문앞에 누군지 모를 퀘사르가 서 있었다. 


두어명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지만 어두운 탓에 어느 소속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퀘사르의 귓가에서 통신기가 반짝였다. 카스타네아는 퀘사르가 건내주는 통신기를 귀에 걸쳤다. 

통로를 따라 멀리서 울려오는 방송 소리가 울려왔다. 필리아가 사라진 것을 눈치챈 블랙레이븐이 그 뒤를 따라 복도를 향해 뛰어들어왔다.


[“때문에 우리들은 이미 한번 칼리번을 지워냈습니다. 

꿈을 꾼다는 명제 자체를 지우고 악몽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언젠가 너희 스스로가 잠에서 깨어나기만을 기다려왔습니다.

걷기도 전에 뛰려하는 너희들이 네발로 기는 단계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참을성있게 기다려왔습니다.”]


“이 문 열어요. 퀘사르.”


카스타네아가 빠르게 속삭였다


“어차피 이번도 똑같은거 아닌가요? 


퀘사르든, 칼리번이든. 모두 다 같은 원통안에 엉켜있는 독전갈들.

어차피 우리들의 이름은 또다시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우리들의 아이들은 똑같은 인형극을 반복할 생각이겠죠. 

반과 포보르때와 같이 바이브카흐와 아발론때와 같이. 이게 당신들이 원하는것 아닌가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칼리번도 한번 죽은 것으로 경험이 되었는지 이번에는 허튼 짓들 좀 덜하더군요. 

하지만 또다시, 이번에는 다른 반쪽짜리가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하더니 우리들이 구원한..아, 이건 이쪽의 이야기. 

진심이 새어나와 버렸네요.


하지만 뭐 이젠 상관 없습니다. 우리들의 무대는 여기서 끝이니까요.

지금까지 몇개가 터졌지..? 아.. 방금 것이 4개째네요. 미안합니다. 말이 길어지다보니 본업을 잊어버리고 말았네요.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있었던 탓인지 시간감각이 애매해져서 말이죠.”]


이중으로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카스타네아의 인상을 더욱 찡그리도록 만들었다.

요란한 문소리와 함께 총성이 들려왔다. 검은 가면이 두번째 문을 걸어잠근 모양이었다.

블랙레이븐은 다급하게 문을 걷어찼지만 문은 굳게 닫힌 뒤, 분명 아까까지는 두번째 문까지 통행이 가능했다고 말하는 탈틴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듀얼건으로 잠금쇠를 겨냥해서 쏴보지만 그렇게 열릴 문이었으면 이미 한참 전에 탈출했을 터였다.


[“아무튼 준비된 이야기는 이게 끝입니다. 더이상 들려주거나 물어야할 질문지는 남아있지 않네요”]


[“분명 당신들을 이용할 생각은 있었습니다만.. 뭐 지금은 배역을 좀 바꿔야 하겠군요.

당신의 결단만큼이나 이쪽도 상황이 변했습니다.


예전방식 그대로 칼리번의 흉내를 내 보면서 상황을 미리내다보는 척을 해봤지만, 

아무래도 인간의 계산인지라 그때처럼 명확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는군요.”]


“난 너따위를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린게 아니야.”


[“그렇겠죠. 그리고 그래야하지요.”]


[“그러니 여러분, 지금까지 꽤 길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상상이상으로 지루했고요.

멍청하게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당신들과 달리 나는 지금쯤 원하는 것을 찾고 이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의자가 삐걱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이 옮겨지는 소리, 바람의 소리

녹음된 음성에 잡다한 환경의 소리가 스며들어왔다


[“우리들도 너희들을 위해 이 바보같은 연극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남자의 말을 마지막으로 미동없이 멈춰서 있었던 퀘사르가 움직였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은 카스타네아. 친위대는 망설임없이 카스타네아를 끌어당기며 퀘사르를 막아섰다.

총성이 울린다. 가장 앞서 뛰어나갔던 친위대가 한 명 쓰러지고 그녀를 엄호하던 또다른 엘프도 쓰러졌다. 


카스타네아의 귀에 걸려있던 통신기가 떨어졌다. 비명이 울린다.

혼란스러운 발자국속 통신기가 박살이 나며 높은 비음을 울렸다.

검은 가면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이어폰을 빼내었다.


소리없는 카메라 속 번쩍이는 실리엔의 빛이 점멸한다. 

순식간에 엘프 3명을 해치운 퀘사르가 카스타네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카스타네아가 품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침묵속의 엘프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한 명, 또 한명 좁은 길목에서 날뛰는 퀘사르와 자신들의 수장을 지켜야하는 필리아의 친위대가 한데 엉켜 빛을 발산한다.

유난히 커다란 총성과 함께 보라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문이 열리고 뒤에 머물러 있어야 했던 블랙레이븐과 다른 에이전시의 요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피비린내와 기묘한 보라빛 실리엔의 연기가 감도는 좁은 통로안 자리에 주저앉은 카스타네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카스타네아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거울같이 푸르던 눈동자위로 검은 물방울이 번져나갔다.


손안에 쥐어진 듀얼건이 뜨거웠다. 

어두운 극장 통로속으로 어둠의 무게를 더하는 숨소리가 무너져 내렸다.검은 총 위로 드리워지는 연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을 기억 저편의 불빛속, 어린 엘프의 목소리가 속삭여왔다.


그러니까 카스타네아님. 


카스타네아를 향해 휘둘러지던 나이프는 그녀의 털끝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멈춰섰다.

겨낭을 잘못하거나 힘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등을 뚫고 나온 날이 너무 길어, 가슴의 꽂힌 자루의 끝이 보이지를 않았다.

다만 꿰뚫은 것이 그녀가 아니었을뿐.


반대편 문이 보일정도로 머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퀘사르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눈을 감지 못한 친위대의 몸 또한 반대편으로 쓰러졌다.

비명을 지르지 못해 입을 벌렸다. 


그렇게 괴로운 표정하지 말아주세요.


매마른 숨결속에 지독한 사막의 향기가 섞여있었다.

정신을 흐트러트리고 괴로움을 잊으라 속삭이지만 이미 그녀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은빛의 연기가 사슬이 되어 그녀의 정신을 옮아매었고 지독하리만치 선명한 현실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너의 선택, 너의 결과, 네 오기가 불러들인 또하나의 미래.


바이브카흐는 속삭였다. 그러니까, 일찌감치 우리말을 들으면 좋았잖아요.

복종하라, 믿고 따르라. 아무것도 보지말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저 그녀들이, 칼리번이 이르는 대로 믿고 행하라.


카스타네아는 넘어갈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쳐야해..”


불투명한 눈동자 위로 맑은 눈물이 흘러넘친다.

카스타네아가 아무리 적대성향이라 할지라도 한 도시의 수장, 

카스타네아의 안전을 살피던 블랙레이븐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악몽속에서.., 또 다시 도망쳐야만 해..”


넋이 나간 중얼거림에 블랙레이븐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누군가가 그녀의 명령에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 이봐, 뭐하는거야?”


조명이 어두운 어둠속이여서 그런것일까 쓰러진 퀘사르를 살피던 블랙레이븐 몇명이 유난히 검은 자위가 커 보이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다른 동료들의 만류에도 두 블랙레이븐은 카스타네아를 부축해 일으키며 문을 향해 다가갔다.

상관으로 보이는 블랙레이븐이 그들을 말리려 했지만 이미 카스타네아는 문 앞까지 다가간 뒤였다.


문이열린다. 

어두운 통로로 빛이 비쳐들어오고 나서야 카스타네아를 부축한 블랙레이븐 두명이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블랙레이븐이 두 요원이 멱살을 잡힌채 극장 안쪽으로 끌려들어갔다. 

요원들끼리 실랑이가 벌어지는 동안 카스타네아는 열린 문너머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무너진 아본의 다리들과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검은 괴한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요원들과 아직도 그녀를 돌아보는 하얀색 가면의 무리들.


카스타네아는 천천히 검은 별을 들어올려 퀘사르를 겨냥했다. 

보라색 흉흉한 실리엔이 빛을 발한다. 

고대의 실리엔으로 만들어진 마력탄을 발견한 퀘사르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넓히며 극장으로 부터 멀어져갔다.

퀘사르와 대치중이던 요원들이 극장 한켠에서 빛나는 보라색 빛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눈이 깜빡여진다. 불빛이 점멸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검은 가면의 방송이 뒤늦게 이어져나왔다.


[“이 오랜시간동안 아무도 내가 있는 층에 도달하지 못하다니, 여흥이라 할 것도 없었군요.

이제 여기까지 입니다. 나는 이만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생존자 여러분들. 몸조심하시고 안전하게 내려가시길.”]




보라빛 총성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