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비밀레) reload #7
이변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조명이 밝아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 화려한 꽃무리를 흩날리며 나타난 노란 코스튬의 여성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양손을 들어올리는 모습에 모두가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던 찰나에 일어나고 있었던 일.
또각또각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마다 흩날리는 꽃잎들이 모여들었다.
붉은 카펫을 밟고 무대위로 올라선 여성은 자신의 이름을 라니에르라고 소개했다.
케노피 속 말로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매끄러워 이미 알고 있는 목소리처럼 친숙하게 들리는 쪽이라면 라니에르의 목소리는 쨍하니 떠오른 햇살처럼 사람들의 발걸음을 들뜨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안녕하세요! 낙원에 초대받은 관객여러분들-!!”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음악과는 다른 흥겨움이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환호성으로 대답했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나오는강인한 존재감이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파란 하늘의 타일들은 다시 아본의 바닥무늬로 돌아갔고 어수선하던 사람들은 무대방향으로 모여들었다.
밀레시안은 난간의 모여든 사람들을 쭉 훑어올리며 사람들의 수를 헤아렸다.
아직 난간사이에 빈 공간이 보이고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숫자다.
거기에 엘리베이터가 부지런이 오르내리며 저 빈자리를 채워 넣을터, 열심히 준비한 이벤트가 흥행하는것과 별개로 밀레시안은 부담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무 걱정하지마”
퀸이 밀레시안의 등을 툭 치며 말을 걸어왔다.
“별일이야 있겠어?”
퀸은 고갯짓으로 북쪽 창문을 하강하는 헬기를 가리켜보였다. 비숍이 타고있는 헬기다.
아무 탈 없이 오전 비행을 마친 헬기는 보급과 정비를 위해 착륙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킹의 잔소리가 없는 것으로 보아 관제실도 무탈하고 룩도 조용히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모든 일은 예정대로.
밀레시안은 2시방향에서 멈춘 일행들과 짧게 인사를 나눈 뒤 사람들이 모여있는 무리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요원들을 흩어지고 사람들은 모여든다. 바닥의 무늬가 변화하고 있었다.
위층으로 향했던 엘리베이터가 아본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며 후드를 푹 눌러쓴 사람들이 한무리 쏟아져나왔다.
몇몇 사람들은 수상쩍은 무리에 고개를 돌리지만 일행의 재촉에 마지못해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니에르가 가벼운 호로그램과 함께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멀리 있는 무대 대신 편하게 가까이 있는 것을 보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커다란 화면근처로 모여들었다.
밀레시안은 그 중 한 무리의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사람들은 경계하기는 커녕 밀레시안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 것마냥 저마다의 이야기에 빠져있었다.
오직 한 사람, 밀레시안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어린 아이만을 제외하고.
밀레시안의 옆에 앉은 아이가 귀에 걸린 인이어를 발견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뻐끔거렸다.
가까이서 보는 요원의 모습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밀레시안은 검지손가락을 들어 쉬- 하고 가벼운 바람소리를 낸 뒤 화면을 가리켜보였다.
아이는 입을 꾹 다물며 힘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혹여나 첩보작전같은것으로 오해를 한 것은 아닌지, 아이는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정면을 노려보았다.
그런의미가 아니었는데 말이지, 밀레시안은 손을 내린뒤 가만히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전에 톨비쉬가 하던 요령을 따라해본 것 뿐이지만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고보면 톨비쉬도 늘 구슬리는 것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거든.. 머쓱하게 뒷목을 쓸어내리던 톨비쉬를 회상하던 밀레시안은 문득 그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손목시계를 떠올렸다.
메세지는 제대로 확인했을까? 답장기대하지 않고 보낸 짤막한 이모티콘이지만 어쩐지 신경이 쓰이는 기분이었다.
손목을 돌려 시계를 확인하지만 나이트의 아이콘은 이미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밀레시안은 주어진 상황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화면속의 라니에르는 진행자의 미소를 입가에 띄운채 낭랑한 목소리로 외워온 대본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금씩 늘어지고 있었다.
본격적인 쇼잉에 앞서 에일레흐와 발레스가 어떻게 만나 브류나크를 기획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서두부분이 라니에르에겐 못내 지루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루해보인다는것은 어디까지나 밀레시안의 시점일뿐, 이런때야말로 빛을 발하는게 바로 프로된 자의 자세.
라니에르는 특유의 말솜씨와 기운찬 제스쳐로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동시에 중간중간 애드리브를 넣으며 흥미와 웃음을 유지했다.
사람들은 처음 환호성을 내지를 때보다는 조금 침착해진 분위기였지만 여전히 기대만발의 눈빛으로 라니에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더 굉장한 것을 보여줄거야. 무대위로 쏠리는 무게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요원들의 긴장감도 덩달아 높아져갔다.
다른 요원들과 마찬가지로 밀레시안은 라니에르의 음성을 흘려들은채 주변의 상황을 체크했다.
퀸과 다른 피오나의 요원들은 다른 무리속으로 들어갔고 블랙레이븐 두어명이 동쪽의 직원통로로 이동하며 무전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 뒷편으로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보았던 검은 후드의 무리들이 이동하고 있었다.
무리의 선두에 선 한 여성이 후드를 벗고 블랙레이븐에게 말을 걸었다.
여성은 후드속에 또 선그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밀레시안은 그들이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꽉 올려묶은 백금발의 머리카락 사이로 뾰족한 귀가 튀어나와 있었다.
필리아의 엘프들.
밀레시안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화면을 응시했다.
다른 요원들도 마찬가지로 엘프들을 발견했는지 하나 둘씩 동쪽을 등지고 다른방향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시선을 흩어놓았으면 흩어놓았지 일부러 응시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엘프들의 이동이 지체되자 근처에 있던 다른 블랙레이븐들이 동쪽으로 이동했다.
비어진 자리를 매꾸는 것은 탈틴의 요원들이었다.
잠깐동안이라면 괜찮지만 시간이 길어진다면 근처에 있는 다른 요원들이 곤란하다.
하지만 엘프들은 블랙레이븐들과 실랑이를 하며 극장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 극장에 이렇게 숨어들어가듯 먼저 입장하고 싶지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지체된 것은 당신들인데 왜 우리 이미지를 깎아먹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가는군요”
확실히 엘프들의 말대로 극장안은 지금 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예정대로라면 발레스나 에일레흐가 먼저 도착해 있어야 했지만 발레스가 갑작스럽게 휴식시간을 5분 연장한 것이 그 이유였다.
발레스가 움직이지 않으니 에일레흐도 움직이지 않았고 두 우두머리가 입장하지를 않으니 덩달아 다른 객빈들도 아래층에 묶여있는 상태인 모양이었다.
오직 필리아만이 제 시간에 도착한 상황에서 밀레시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킹이 밀레시안의 질문에 대답했다.
“발레스? 지금 바빠. 반스트가 여왕님한테 쥐어터지고 있거든.”
굳이 말하자면 신경줄의 차이랄까.. 룩이 작게 웃음을 머금고 설명을 덧붙였다.
크고작은 스캔들에 달련되어왔던 에일레흐와 달리 발레스의 이미지는 이제 막 대중앞에 모습을 드러낸 신인 배우, 반스트의 표정실수로 신경이 바짝 곤두서있던 키리네가 결국 휴게실에 들어서자마자 폭발한 모양이었다.
“아무리봐도 카메라가 마지막 기폭제였어”
“아, 그래그래. 그건 인정한다.”
룩의 말대로 반스트는 2차 피해자에 가까웠다.
1차로 터진것은 기자회견장의 블랙레이븐이었고 2차로 터진것은 반스트, 3차는 아본의 블랙레이븐과 그 일행들.
밀레시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벨바스트의 요원 몇몇이 밀레시안과 눈을 마주친뒤 황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궁금하겠지. 곁눈질로도 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밀레시안은 뒷통수가 근질근질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만하다며 심호흡을 내쉬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화면만 지켜보던 아이가 옆에 앉은 사람들의 속삭임에 이끌려 뒤를 바라보았다.
“아, 진짜다. 엘프가 왔어”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보호자가 말릴 새도 없이 의자를 밟고 올라가 분수대를 둘러싼 안전장치에 기대어 섰다.
블랙레이븐이 벽처럼 가리고 선다고 하지만 모든 각도를 차단할 수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의 보호자는 당황한 목소리로 얌전히 있으라며 아이를 제지하지만 아이는 아랑곳 하지 않고 발을 동동 굴렀다. 더 가까이서 보고싶은 마음에 아이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모양었다.
“너 그렇게 말썽피우면 저기 요원님이 이놈한다?!”
아니, 그러면 저희도 경고먹어서요. 과거의 전적을 떠올린 룩이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목끝까지 차오른 대답대신 손을 들어 입술을 툭툭 건드려보였다.
보호자와 실랑이를 하던 아이는 밀레시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거짓말처럼 얌전해져서는 자기 자리로 돌아앉았다.
보호자는 밀레시안을 한번 쳐다본뒤 실소를 터트렸다.
금세 풀이죽은 아이가 한없이 귀여워보인다는 눈빛이었다.
보호자가 아이의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 사람들사이에는 엘프가 왔다는 소식이 전파되고 있었다.
웅성거림이 커져가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자리에서 일어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정도 했으면 그만 이동해줬으면 좋겠는데. 다른 요원들의 바램 또한 크게 다르지는 않는눈치였다.
중앙의 분수대 덕분에 동요는 동쪽 일부에 그치고 있었지만 소식이 넘어가는 것도 한순간이다.
킹이 성가시다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 더이상은 무리, 이제 사진뜬다-.”
밀레시안과 퀸에게 보내는 통신을 겸한 전방위 경고, 나른한 기지개와 함께 깍지를 끼고있던 글러브가 양쪽으로 해체되었다.
아주 잠시 지연시키던 사진이 결국 업로드를 완료되고 눈에 띄게 많아진 사람들이 동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관제실에 있던 블랙레이븐이 양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아래층의 상황을 물어보았다.
서쪽에 남아있던 블랙레이븐들이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밀레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뜩이나 부담스러웠던 범위가 더욱 넓어지고 있었다.
성가셔. 퀸이 서쪽 분수대로 이동한 모양이었다. 통신속에 사람들의 소음이 섞여들어왔다
“어디? 어디?”
“진짜야? 정말 그사람들이래?”
진행자로서 관심을 잃어버리는 것은 꽤나 짜증나는 일이다.
라니에르의 귓가에도 현재의 상황이 전달되어있었다.
반쯤 신화화된 브류나크의 기획이야기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라니에르가 살풋 찡그려진 미간을 웃음으로 덮어씌우며 손을 들어올렸다.
“네-! 맞습니다! 지금 막 도착하셨네요! 여러분 박수로 맞이해주시겠어요?”
라니에르는 자신을 비추던 엘리베이터쪽으로 스포트라이트를 이동시켰다.
미리 지시한대로 엘리베이터와 그 주변은 어느틈엔가 어두워져 있었고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밝혀진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틈엔가 사방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뭐야? 연속 이벤트? 엘프는? 글쎄, 저쪽에 아니야? 중앙분수대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기대감이 북쪽끝에서 교차했다.
“소개합니다..! 발레스의 크루크 폐하입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사람은 다름아닌 크루크와 가신들이었다.
키리네는 보이지 않았다. 크루크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블랙레이븐들을 따라 움직였다.
실망한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지만 관객들 사이에 숨어있던 바람잡이들이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며 크루크의 이름을을 연호했다.
빛을 강조하기 위해 어둠은 슬금슬금 번져나가며 엘프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동쪽까지 집어삼켰다.
어둠이 내려진 복도 안쪽으로 엘프들이 들어섰다.
문이 닫히기전 희미한 은빛이 잠시 반짝거리다가 사라졌다.
크루크들이 극장으로 들어선 뒤 2층에 이어진 직원용 입구 앞에 엘프들이 보이고 나서야 관제실은 겨우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관제실이 아닌 다른 구역에서도 한숨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여기서 티 안나게 조명을 끄라고요? 제 목숨도 같이 줄이면 되는 걸까요? 하고 되물었던 조명담당은 그 말 그대로 실신해 있었고 킹은 의자에 반쯤 누운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이 노랗다.
“반쯤 쇼수준이네”
“맞는 말이잖아”
노란 빛의 스포트라이트는 사라지고 아본의 조명은 다시 밝아졌지만 쇼는 아직도 현재진행중이었다.
발레스의 깜짝등장에 에일레흐측에서 뭐라고 딴지를 걸어올지 벌써부터 막막한 심정이었다.
내가 왜, 난 정치분야에 쥐약이란말이야. 그런거 룩한테 시켜..! 킹이 머리를 쥐어뜯는동안 룩은 마른세수를 하며 낮은 신음소리를 뱉어내었다.
이쪽도 막막하긴 매한가지, 룩의 화면 위에는 블랙레이븐의 어깨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요원들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움직이지 않는 이상 틈은 어디에나 드러나기 마련이었고 기적적으로 벌어진 화면의 한 구석 어두운 조명에도 불구하고 새하얗게 빛나는 브로치가 반짝이고 있었다.
미약한 빛만으로도 광채를 드러내는 그 은빛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힐웬.
발레스가 그렇게 닥달을하며 끝내 크루크의 반지를 완성시킨 원흉이자 자이언트들이 엘프를 철전지 원수로 여기게된 원흉이 사진속에 오롯하게 찍혀 있었다.
룩의 화면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동일한 사진을 띄운 요원들은 서로 다른 연락망에 확인을 거듭하며 타 행사의 일정을 확인했고 에일레흐와 블랙레이븐은 아본을 담당하는 인사들에게 질문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럼 카르펜이 상대하고 있다는 엘프는 누구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동안 킹에게도 연락이 닿았는지 룩의 시계가 번쩍였다.
진동과 불빛까지 아주 세트로 번쩍부르르떨며 룩을 호출하는 모습이 옆에 있었으면 멱살잡았다는 기세에 가까웠다.
받지않으면 관제실B까지 뛰어올라올 위압감에 룩이 마른침을 삼키며 손목을 흔들었다. 킹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합성이라고 말해줘.”
“.....”
“합성이라고 말해줘!”
“흐흥..합성..합성....”
“아- 그렇지? 합성이지? 그치?”
“..이었으면 좋겠다아…..”
“.....이...야아아!!!”
“그랬으면 좋겠다아..”
밀레시안은 날뛰는 킹의 목소리에 볼륨을 줄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합성이고 뭐고 간에 이쪽도 해결해야 할 일이 천지였다.
엘프들을 이동시키기 위해 나타난 크루크의 경호를 위해 대부분의 블랙레이븐이 외곽으로 빠져버렸다.
사람들이 모일만한 포인트와 비어있을 포인트를 구별해 인원을 나누어놓았던 사전의 배치가 완전히 틀어져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처음 타이밍에 같이 투하되어 흐름을 타고 움직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게되어버린다.
흐름을 거스르고 억지로 비집어 넣는다 한들 사람들사이에 이질감과 경계심만 심어놓을뿐.
일단 급급하게 주변의 요원들이 자신의 범위를 넓혀 커버하려하지만 인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애초에 적정인원에 비해 빠듯하게 배치된 인원들이었다.
이런 결과는 한참 전부터 예상되었지만 결국 에일레흐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에일레흐는 브류나크의 안전성과 보안성을 홍보하기를 원했고 그를 위해 인력을 절감하기를 바랬다.
요컨데 그래프가 이쁘게 보이게 위해 사람을 줄이겠다는 것이었다.
반발과 찬성이 교차되었고 여러가지 의견과 고함,가끔씩 약간의 욕설이 오갔다.
그러나 결과는 결국 에일레흐의 손을 들었다.
발레스가 동의한 시점에서 이미 반수가 확보되었고 무슨이유에서인지 벨바스트도 순순히 에일레흐에게 협력했다.
이 시점에서 제로는 외부경호로 빠졌고 피오나는 침묵했다.
찬성하든 반대하든 피오나에게는 영향을 줄 수 없다는게 그 이유였다.
“어쩌면 서로에게 좋은 경험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단장은 묘한 표정으로 회의장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본뒤 느긋해보이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태도는 구워먹든 삶아먹든 마음대로 해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 보복인지 분풀이인지 피오나의 배치는 모두 다른 층, 다른 구역으로 찢어졌지만 단장은 톨비쉬의 보고를 읽으면서도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상관 없어. 그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를테니까.”
무엇보다? 밀레시안은 마시고 있던 음료의 빈공기를 빨아들이며 단장을 돌아보았다.
단장은 익숙하게 자신의 잔과 밀레시안의 잔을 바꿔주었고 밀레시안은 다시 마음껏 음료를 들이켰다.
단장은 조금 더 문서를 읽다가 미간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디저트는 뭐가 좋겠니? 방금전까지 잔뜩 먹고온 밀레시안은 눈짓으로 케이크를 가리켰다.
단장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카운터로 걸어갔다.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카페테리아는 사람이 없는 시간인지 한적한 분위기였다.
깨끗하게 닦인 유리창 너머로 시험작품들이 비행과 추락을 반복하고 있었다.
일제히 대형을 유지해 날아오르던 드론들이 서로 엇갈리던 궤도를 바꾸지 못하고 맞부딪쳤다,
연기가 피어오를때마다 안타까운 비명들이 울리고 있었지만 정작 조종사들은 꽤 즐거워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고보면 룩도 킹과의 내기에서 질때마다 비슷한 비명을 내지르며 책상위에 쓰러지곤 했었다.
괜찮냐고 물어보면 그는 금새 기운을 차리며 대답했다. 괜찮아. 다음번에는 반드시 이겨보일거니까. 그런 말을 할때면 어느틈엔가 킹이 날아들어와 누가 누굴 이긴다고? 하며 룩의 목을 끌어당기곤 했지만 그때도 그들은 꽤나 즐거워보이는 표정이었다. 약간.. 고통을 즐기는 부류들인걸까? 밀레시안의 표정이 흐려졌다.
익숙해지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밀레시안은 결국 그 나중에가 언제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15번에 2번쯔음에서 20번에 한 3번쯤, 룩은 확실하게 성장하고 킹은 제 나름대로 그의 성장을 뿌듯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 습득속도로 언제 따라잡겠다는 건지 까마득하긴 하지만 분명 나아지고 있었다.
실패작이 쌓였다. 성공작이 늘어갔다. 결과가 달라지고 시간이 흘러가고,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던 거리감이 줄어들어갔다. 밀레시안은 나눠받은 케이크를 바라보며 포크를 집어들었다.
“그럼 다음이야기로 넘어가자”
단장은 보고를 읽는동안 잠시 끊겼던 대화의 주제로 돌아가자는 말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의자를 바짝끌어 테이블에 기대어앉으며 턱을 괴는 자세를 보아 케이크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뭔가 꺼림칙한 것을 물어볼 생각인가보네, 밀레시안은 포크로 케이크를 떠내며 단장을 바라보았다.
탐색을 겸해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눈빛이었다.
톨비쉬를 붙여놓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탓인지 이전보다 훨씬 딴청을 잘피우고 유들유들하게 질문을 회피하고는 있지만 그래봤자 단장의 손바닥 안,
단장은 우선 경계심을 풀기위해 다른 질문을 내려놓았다. 밀레시안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과의 생활은 어떠니?”
밀레시안은 포크를 입에 넣은채 눈을 굴렸다. 그들이라는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바로 연결한 모양이지만 어떻냐는 평가에 대해서는 잠시 생각이 필요한것 같았다.
입을 오물거리며 생각을 거듭하던 밀레시안은 포크를 살짝 내리며 대답했다.
“생각보다는..?”
그렇군. 나쁘지 않다라.. 단장은 손끝으로 턱관절을 툭툭 건드리다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햇빛을 받은 포크가 반짝이고 유리창이 반짝였다.
잘닦여진 창문은 거울처럼 포크의 빛을 반사하며 카페의 전경을 비추고 있었다.
일부러 등돌려 앉은 자리에 카메라가 번쩍이고 있었다. 단장은 자세를 고쳐앉으며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렸다.
기준점을 알 수는 없지만 본인이 만족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애초에 그에겐 그 결과에 무언가를 더해낼 권리도 없었고 덜어낼 책임도 없었다.
다만 그 결과값안에 그들의 이름이 있기를 바라고 기도할 뿐. 단장은 사뭇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질문”
그는 손을 한 곳으로 끌어모으며 테이블에 몸을 기대었다. 단정히 정돈되어있을 손톱이 보이지 않는다.
엄지부터 새끼손까락까지 가볍게 말아쥔 손은 고집스럽게 엄지손가락을 감싸쥐고 있었다.
긴장? 밀레시안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들은..”
아까까지 달콤하게 녹아들었던 케이크가 입안에서 느끼하게 굳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입을 다물어 혓바닥에 남아있던 지방층을 체온으로 녹여보려 하지만 이미 혀 전체가 차갑게 식어버려 입 전체에 왁스같은 기름층이 덧발라진 느낌이 되어버린다.
이 케이크 두번은 못먹겠네. 맛있었는데.. 밀레시안은 애써 케이크에 시선을 집중하며 단장의 말을 외면했다.
입천장에 혀를 문질러 기름층을 닦아낼 때마다 단장의 시선이 날아와 박히는 기분이었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볼근육마저 놓치지 않겠다는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밀레시안은 마음속 깊숙이 묻어놓았던 본능을 한조각 꺼내어 얼굴에 덮어 썼다.
온도도, 색감도, 감정도 없이 새하얗고 딱딱한 가면을 쓴것 마냥 고요하게, 창백하게, 마음을 들키지 않게.
창문너머에서 빛이 반짝였다.
시행비행에 성공한 정찰용드론이 햇살에 반짝이며 하늘위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입술 끝을 가볍게 핥으며 입매와 표정을 정돈했다.
감정이 잦아들며 냉정해진 이성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어가 호흡을 갈구하며 아우성을 치는 심장을 움쳐쥐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잦아들자 틈새를 기다리고 있던 단장의 목소리가 고동소리를 갈라내며 머릿속을 파고들어왔다.
“여전히 너에게 소중하니?”
“..........”
질문을 받았으면 대답을 해야지. 밀레시안은 제 3자처럼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현실과 상상 사이에 패여진 결함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여 벼랑끝에 내몰린 본체를 조롱하고 있었다.
질문을 받았으면 대답을 해야지. 질문을 받았으면 대답을 해야지.질문을 받았으면 ,질문을 받았으면 ,질문을 받았으면 ,질문을 받았으면 .
곧바로 대답도 못하는 멍청이 주제에 거기서 뭘 하고 있는거야?
이름없는 가면들이 웃고 있었다. 이름조차 불리지 않은 시간앞에 벌벌 떠는 겁쟁이가 도망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기를 느끼자 마자 가면을 덮어써버린 패배자가 거기에 있었고 질문의 내용조차 파악하지 못한채 허둥거리는 어리석은 승리자가 눈앞에 있었다.
쓸려내려가고 다시 세워지고 지워지고 다시 쓰여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생겨난 자아의 찌꺼기들,
유일하게 살아남은 지금의 삶을 질투하는 그림자들. 또다른 이름의 밀레시안.
또다른 이름의 자기 자신들. 밀레시안은 요동치는 머릿속의 손을 들어 케이크를 꾹 내리눌렀다.
마치 그 접시위에 놓여진 케이크가 그들을 꺼버리는 버튼이라도 되는 것 마냥 깊숙히.
부드러운 빵과 크림을 갈라내며 파고들어간 손톱이 접시바닥에 닿았다.
손을 다시 들어올렸을때, 케이크는 엉망이 되어버렸고 당연하게도 손가락 가득 크림이 묻어있었다.
밀레시안은 손가락 표면을 따라 뿌옇게 번져나오는 크림을 바라보며 살짝 입술을 벌려 숨을 들이마셨다.
녹은 크림으로부터 풍겨나온 달콤한 바닐라향이 입속으로 스며들어왔다.
후각은 제 기능을 하고 있다. 미각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 그러니까 괜찮아.
밀레시안은 손이 딱히 뜨거운 체질인 것도 아니었지만 섬세한 크림은 사람의 체온에 닿자마자 쉽사리 녹아내려버렸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특별한 도구나 기술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특별하지 않는 일이라는 듯이.
밀레시안은 딱딱해진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 옆으로 단장의 얼굴도 비춰지고 있었다. 그는 밀레시안의 돌발행동에도 놀라지 않은채 여전히 침착하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천천히 자신이 뒤집어썼던 가면을 내려놓는 심정으로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창백하게 질려있는 유리창속 얼굴이 새까만 동공을 활짝 열어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밀레시안은 손을 내밀러 유리창속 입술을 문질러 가렸다.
마치 유리창 너머의 자신이 다른 말을 하기라도 할까 겁이 난다는 듯 천천히.
손가락의 크림으로 자신의 입을 가린 밀레시안은 빠르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 그 병동에 머물러 있어요.”
밀레시안은 냅킨으로 손을 닦은뒤 성의없이 유리창을 훔쳐내었다.
뿌옇게 남은 티슈자국이 유리창에 얼룩으로 남아버렸지만 밀레시안은 두번 뒤를 돌아보지 않은채 자리를 떠나갔다.
단장은 먼 곳을 바라보듯 유리창의 윗쪽을 바라보며 한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래.. 그렇구나..”
에어컨이 작동되며 단장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페알바생은 어리둥절해하며 갑자기 켜진 에어컨의 전원을 내리려 했지만 바람은 한동안 계속 흘러나왔다.
단장은 고개를 숙인채 한참동안 자리에 앉아있었다.
밀레시안은 근처에 있는 벨바스트의 요원에게 다가가 상황을 설명했다.
벨바스트의 요원이 중앙분수대 너머 기묘하게 형성된 작은 무리들을 발견했다. 벨바스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호기심어린 시선이 뒤따라오지만 이유를 설명하기엔 너무 사소한 사정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개인적인이유였고 무시하기엔 후일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중대한 사안.. 일지도,
밀레시안은 남쪽의 카페테리아를 거쳐 중앙분수대로 다가갔다.
동쪽보다 훨씬 사람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서쪽의 인파속에서 유난히 툭 튀어나와보이는 장신의 요원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 대비책으로 트레이드마크인 장발은 진작에 틀어올려 모자속으로 밀어넣었지만 요원복에 어울리지 않는 밋밋한 모자가 되레 시선을 끌어버리고 있었다.
일부 헤어스타일에 관심을 보이는 몇몇 사람들은 그의 목덜미를 유심히 보며 머리 길이에 대해 열렬한 추론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정도..? 아님 이정도…?”
“아니야 내 길이로 틀어올렸을때 이런 모양이 나오니까..”
무표정하게 표정을 지우고 있지만 후회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밀레시안의 걸음이 빨라졌다.
“봐봐. 저기 다리 긴 사람..! 잘생긴 요원들은 죄다 극장안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완전 대박..!”
“그러게. 저사람은 어디소속이지? 진짜 땡잡았다. 타라? 벨바?”
“제로는 아닌거 확실해. 제로들은 바깥담당이라고 하더라. 아까 들어오면서 어떤 요원오빠한테 들었지롱”
“아…!! 너 아까 길물어보던 요원이랑 언제 사진찍었어? 나도 찍어달라할걸!! 앗 그럼 저사람이라도 찍어야지~”
“으응? 괜찮을까? 다른요원들은 몰래 사진찍는거 되게 싫어한다고 했는데..?”
“하지만 아까 카페테리아에 있던 요원들은 사진찍는거 안싫어하던데?”
“그럼 나도 찍을래!”
“오 고개 돌린다...!”
무시로 일관하던 퀸이 시선을 돌려 장소를 물색했다.
도망치거나 교대할만한 자리가 어디 없을까, 하지만 허허벌판속 홀로 남겨진 요원은 퀸 달랑 한명뿐.
무대쪽에 배치되었던 블랙레이븐들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찰칵거리는 소리에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고 그 시선은 퀸에 대한 호기심으로 연결되었다. 악순환이었다.
나중에 킹에게 한소리 듣겠다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고 있을즈음 기적같은 구원의 손길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한순간 퀸에게 몰렸던 시선이 밀레시안에게로 흘러들어갔다.
저사람은 누구? 밀레시안은 뻔뻔한 얼굴로 퀸을 밀어내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퀸은 두말하지도 않고 동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쉬움이 섞인 한숨소리가 터져나왔다.
“가버렸다..”
“응.. 아깝네.. 으응…..,”
“아 그럼, 우리 무대나 보자! 기껏 잡아놓은 명당자리인걸?”
“그래! 사진은 벌써 여러장 찍어뒀으니까..!”
밀레시안이 퀸과 교대를 하자마자 사람들은 놀랍도록 신속하게 요원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리며 다시 무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 라며 새로온 요원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잠시뿐이었다.
밀레시안은 그들의 무관심에 안심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요란한 복장이어도 사람들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도 특기라 할 수 있다면 밀레시안은 단연코 1랭크 등급을 받을 자신이 있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형광 빔이 쏘아져나오는 의장용 날개를 매달고 서있으라 하더라도 태연히 자리에 섞여들 수 있을 정도.
여기저기서 쓸만한 유용한 능력에 팀원들은 모두 괜찮은 스킬이라며 감탄을 했지만 톨비쉬만은 유일하게 불만스러운 얼굴로 밀레시안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한참을 들여다보다 말고 볼을 만지작거리는 바람에 곧 손채찍을 맞기 일수 였지만 톨비쉬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확실히 무난한 분위기이긴 하지만..”
톨비쉬의 푸념에 밀레시안은 한숨을 흘리며 눈을 돌렸다. 고개가 돌아가지를 않는다. 붙잡힌 얼굴이 살짝 눌려있었다.
밀레시안이 눈을 흘겨왔다.
“계속 그렇게 들여다 보면 바뀔 얼굴도 안바뀔거에요.”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말을 무시한채 다시한번 볼을 감싸쥐었다.
“내 눈에는 상당히 눈에 띄는 얼굴인데.”
밀레시안은 기습적으로 톨비쉬의 손을 낚아채었다.
어떻게든 힘으로 버텨보려던 톨비쉬의 시도는 밀레시안이 정강이를 걷어차내는 것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톨비쉬가 소리없이 인상을 구기며 물러섰다. 두 사람의 만담아닌 개그를 지켜보던 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머리를 자르면 어떨까?”
“누구의 머리를?”
지레짐작한 톨비쉬가 자신의 곱슬머리에 대해 일장연설을 시작하려 했지만 곧 입을 다물어버렸다.
시선이 퀸의 손에 머무른다. 주방의 조리대 너머에 서 있는 퀸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차림으로 아직 씻어내지 않은 식칼을 들고 서 있었다.
진정해요 톨비쉬, 저건 그냥 토마토 과즙일 뿐이잖아요. 밀레시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굳어버린 톨비쉬의 옆구리를 툭 치지며 속삭였다.
톨비쉬는 은근히 자신을 방패로 내새우며 뒤로 숨은 밀레시안을 돌아보고는 대답했다.
제가 다져진 것을 보더라도 진정해요 톨비쉬가 그냥 다져진것 뿐이잖아요. 라고 말씀하실거죠?
밀레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만담에 퀸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기울여 자신의 긴 머리를 들어올려보였다.
그거 말고 내 머리 말하는거야. 곱슬거리는 누구씨의 머리카락들과 달리 일직선으로 차르륵 떨어지는 긴 생머리들은 언뜻 보기에도 길이와 윤기가 상당한 좋은 품질의 머리카락이었다.
거기에 원래의 모발색이 옅기 때문인지 은은한 오렌지빛 주방의 조명을 받은 머리카락들은 원래의 색 대신 금빛을 머금고 있는 것 같은 광택까지 얹어져 빛나고 있었다.
밀레시안의 표정에 약간의 동경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발견한 톨비쉬가 완전히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저도 머리결이라면 나쁘지 않습니다만? 밀레시안은 어깨를 으쓱 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묻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았다는 반응이었다.
톨비쉬가 대놓고 서운해 하는 동안 퀸이 들어올린 머리카락들은 손가락사이를 빠져나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등의 반절을 조금 넘는 길이, 하지만 퀸의 키와 덩치를 생각하면 상당한 길이일 것이다.
관리하는 방법이나 애정도 남다를 텐데.., 광고속 모델이나 잡지를 보는 기분으로 몽롱하게 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던 밀레시안이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들어올렸다.
퀸은 여전히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구 머리를 자른다고요?”
밀레시안은 뒤늦게 찾아온 비현실적인 질문을 되물었다.
“내 머리를..?”
“농담이지? “
톨비쉬가 표정으로 난색을 표하는 동안 잠자코 누워있던 비숍과 난간에 걸터앉은채 게임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룩, 그리고 해드폰을 쓰고 화면속에 빠져있던 킹이 고개를 들어올리며 단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서로 토해내는 대답들은 달랐지만 그 의미는 톨비쉬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문장들이었다.
그러니까 그 기나긴 만담동안 안듣는척 반응 한번 안하고 자기들일에만 열중하던 인간들이 사실은 다 듣고 있었다는 것이지..?
밀레시안이 차분히 거실을 둘러보자 소파에 걸쳐져있던 비숍이 스르륵 등받이 뒤로 흘러내리며 모습을 감추었다.
룩도 슬그머니 난간에서 내려온뒤 자신의 방으로 걸어들어갔다.
킹만이 밀레시안의 시선을 무시한채 주방에 다가와 퀸에게 단호하게 소리쳤다.
“안돼”
“내 머리카락인데”
“안된다면 안돼”
킹은 본인의 의사를 주장하는 퀸의 주장을 손날로 잘라쳐버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퀸이 이유를 물어왔다.
“내가 마음에 들어”
“내 머리카락인데”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
아.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밀레시안은 다시는 톨비쉬의 만담에 엮여들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잡고있던 등을 옆에서 잡아끌었다.
톨비쉬는 한참 재미있게 구경하던 도중이었는지 저항한번 하지 못한채 균형을 잃으며 현관쪽으로 떠밀려나가떨어졌다.
가까스로 넘어지는 것은 면했지만 자신의 자세가 다소 우스꽝스러웠다는 것은 자각했는지 톨비쉬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밀레시안은 톨비쉬를 지나쳐 두 사람에게도 다가갔다.
밀레시안이 은근히 킹의 억지를 즐기고 있는 표정을 지적해오자 퀸이 머쓱하게 얼굴을 돌려 턱을 쓰다듬는다.
“일단 말해두겠지만요.”
밀레시안은 최우선적으로 식칼의 위험을 먼저 제거하며 싱크대쪽으로 걸어들어갔다.
물에 대충 휘휘 흔들어 마른행주로 물기를 닦아낸 식칼은 딱 한자리 비어있던 정리함 속으로 쏙하니 꽂혀들어가며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잘라내었던 토마토들을 그릇에 쓸어담았다.
밀레시안은 한조각을 꺼내 입에 우물거리며 진지하게 조언했다.
“어차피, 얼굴때문에 보는거니까. 머리를 잘라도 똑같을거에요”
“......그..런건가..?”
“....음,음..”
“아니, 잠깐만..!!”
킹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현관으로 밀려났던 톨비쉬가 조리대 바깥쪽에서 항의하듯 소리쳤다.
그는 밀레시안의 말이 굉장히 뜻밖이라는 반응이었다.
“얼굴을 때문에 본다니? 밀레시안, 당신도 저런 얼굴을 좋아하는 겁니까?”
“저런 얼굴은 뭔데?”
“바라보게 되는 얼굴이라면 좀 더.. 뭐랄까.. 나같은 타입의.. 그러니까 분명 저 얼굴도 균형적으로는 맞긴 하지만 소위 잘생겼다는 기준을 만족할 만한 정도는..”
“저 얼굴은 뭐냐고”
3차 만담은 좀더 가깝고 직접적인 언어로.
밀레시안은 냉장고속 생치즈를 한 봉꺼내든 뒤 태연히 주방을 빠져나와 2층으로 올라섰다.
1층에 남은 톨비쉬들이 서로 아웅다웅거리며 엉켜들었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 없어진 일이었다.
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톨비쉬가 제법 강하게 나오고 있었다.
새끼고양이들의 가벼운 레슬링 마냥 귀여운 광경이라면 모를까 늘상 반복되는 피땀튀기는 치열한 레슬링의 현장을 굳이 지켜봐야할 의리따위는 없는 건지 밀레시안은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갔다.
2층의 문이 열리며 한참동안 모습을 감추었던 룩이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밀레시안과 눈이 마주친 룩이 입을 열었다.
“밀레시안..,”
장난기 가득한 눈웃음과 달리 룩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고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업무에 집중하고 있을 때처럼, 그리고 성가신 일을 처리하고 돌아왔을 때 처럼.
“킹이 고맙다고 전해달래. 블랙레이븐들은 곧 자리로 되돌아올거야.”
블랙레이븐..? 밀레시안이 눈을 깜빡였다.
잠시 풀려있었던 동공이 축소되며 주변의 풍경이 아본의 풍경으로 되돌아왔다.
고요하게 가라앉아있던 공기가 다시 들떠오르고 기대에 가득찬 군중들의 잡담소리가 가득차올랐다.
멀리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며 새로운 사람들이 정원으로 쏟아져들어왔다.
라니에르는 분산되려는 사람들의 주의를 능숙하게 잡아끌어 화면으로 인도했고 그 가장자리로 낯익은 검은 제복의 요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직원용 문이 열리며 무대 측의 블랙레이븐들이 돌왔다.
밀레시안은 남모르게 심호흡을 들이마시며 자신의 위치와 임무를 재 확인했다.
아본, 브류나크, 피오나.., 주문처럼 이름들을 되뇌이던 밀레시안은 룩에게 대답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내며 귓가에 손을 올렸다.
동시에 반대쪽 손목을 들어 메세지를 확인하는 동안 라니에르의 재치있는 농담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요란한 환호성과 함께 큰 박수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와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이 반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이 반. 라니에르가 진정하라며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는 제스쳐를 취했다.
반응 하지 않는 사람들 중 몇몇은 밀레시안과 비슷한 인이어를 누르며 쉴새없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메세지 함에는 관제실에서 도착한 공식적인 메세지가 하나 들어있었다.
그밖에도 개인적인 메세지가 또 하나, 잠시 작은 자판을 조작하던 밀레시안은 기울이고 있던 목을 반바퀴 돌리며 좌우로 근육을 풀어내었다.
관심을 흘려보내기 위해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친 일탈이었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멈춰있었던 신체가 은근한 피로감을 호소하며 새로운 활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새로운 당분이라던가, 아니면 시원한 스트레칭이라던가…, 자기 자신의 신체조차도 제 역할을 망각할만큼 완벽하게 현실에서 존재감을 지워내는 위기탈출 스킬을 한눈에 찾아 볼 수 있다니말도 안되는 소리.
밀레시안은 괜스래 회상속의 톨비쉬를 떠올리며 극장을 흘겨보았다.
이런 밀레시안의 얼굴이 눈에 띄어 보인다고 말하던 톨비쉬의 눈이 이상한 것이 분명했다.
극장의 장식용 첨탑사이로 불이 들어왔다. 극장내로 손님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무대측에서는 적당한 눈요기를 위해 홀로그램들을 띄워올렸다.
쓸데없이 정교하게 재현해된 종이재질의 날개를 가진 나비들이 날아오르자 아이들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분수사이에서는 같은 재질의 털을 가진 양들이 머리를 흔들며 일어났고 그 사이로 종이로 만든 기사가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무대에 올라왔다.
스스로를 에쉴링이라고 소개하는 기사는 길을 잃었다고 말하며 이곳이 아본인지를 묻고 있었다. 제 2막의 시작이다.
에쉴링은 진지한 얼굴로 말장난을 하듯 물어왔다. 아본은 아본이지만 이 곳이 그들이 찾는 아본이 맞는 것인지.
라니에르가 곤혹스러워 하며 아본에 대해 이야기 하려는 찰나, 고르반이라고 불린 종이 남자가 무대의 틈새에서 스르륵 빠져나오며 허둥지둥 에쉴링에게 뛰어올라오고 있었다.
종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독특한 등장 방법과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가 어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큰일났어, 에쉴링..! 여기는 아본이라고 하는 곳인데 아무래도 아본이 아닌 것 같아.]
[아본인데 아본이 아니라니?]
[여기 아본 맞는데요?]
[아니 그러니까 여기 이름이 아본이 맞긴 한데 우리가 아는 그 아본이 아니라..]
[침착해 고르반. 아본이 아본이 아니면 아본이 어디 아본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아본이 아본이 아닌게 아니라 아본이 아보, 아보보보보..]
[어머? 그러니까 당신들이 가려는 곳이 아본이 아니라 아보보보본이라고요?]
[아니 아보보보본이 아니라 아본이, 그러니까.. 에.. ]
아이와 어른 할 것 없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고르반들은 그들의 아본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하던 도중 외딴곳에 나타난 아본에 떨어졌다며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고 라니에르는 그런 고르반을 놀리며 즐거워 하고 있었다.
자신을 고르반이라 소개한 남자는 이야기속에 나오는 아본시대의 가장 융성한 도시 아본을 찾고 있다며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반복했다.
고르반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속에서 묘사된 아본을 이야기 하며 브류나크의 아본에 대해 물었고 라니에르는 브류나크의 아본에 대해 이야기 하며 공중정원의 구조나 특징을 소개했다.
일종의 종이연극을 차용한 짦은 단막극 형태의 구조소개였다.
관객들은 라니에르의 설명에 따라 시선을 움직이며 차례대로 아본의 구조를 익혀나갔고 중간중간 정교하게 재현된 각종 영상기술에 즐거워했다.
진지하게 길을 묻는 에쉴링과 중간부터 목적을 잊고 자신들이 찾는 아본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하기 바쁜 고르반, 라니에르는 그에 맞춰 그정도는 우리 아본에도 그정도는 있다며 점점 입씨름의 열기를 올려나갔고 사람들은 치열해져가는 아본의 자랑대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고르반들이 우리의 아본에는 낮과 밤이 공존한다고 이야기 하면 라니에르가 손을 튕겨 조명을 껐다키고는 우리 아본도 이정도는 할 수 있어요, 라며 의기양양해하는 것이 기본 포멧.
희곡을 쓰는 마법의 물레가 있다던가, 마법의 잉크가 솟아나는 우물과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사인본 책의 이야기, 책속에서 뛰쳐나간 주인공과 그를 붙잡는 기사의 모험담, 고르반의 이야기가 점점 진행될 수록 라니에르가 불러일으키는 이펙트와 효과들은 화려해져갔다.
즉흥적인 만담을 이어가는 고르반들의 AI도 대단했지만 어디까지나 이 무대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라니에르 한사람만의 몫.
저도 모르게 빠져드는 라니에르의 입담에 한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밀레시안이 아차싶은 표정을 추스리며 극장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니에르의 목소리에 빠져든 것은 밀레시안뿐만은 아닌 것인지 자리로 되돌아온 요원들도 대다수가 넋을 놓은채 무대를 빤히 올려다 보고 있었다.
이럴까봐 퀸이 나를 동쪽으로 보내놨었던 건데. 밀레시안은 입가를 쓸어내리며 극장의 뒤로 펼쳐진 창문을 바라보았다.
첨탑의 불은 꺼져있었다. 저쪽도 이제쯤이면 착석이 끝나고 가벼운 소개말과 함께 연설이 준비될 타이밍이었다.
방송이 시작될즈음 원래자리로 복귀하면 되는 걸까. 밀레시안은 구름한점 없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 무대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밑에 흐르는 수조속으로 물고기들이 한적하게 헤엄치고 있었지만 더이상 물고기따위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고르반의 연극에 빠져들어있었고 반경내에 수상한 움직임은 없다.
저쪽도 별다른 이상이 없다면 지금 이동해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밀레시안은 가볍게 물어볼 생각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등뒤에서 들려오는 분수대의 물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퀸, 우리 언제 교대할까요?”
하지만 밀레시안의 기대와는 다르게 퀸은 곧장 대답하거나 답장하지 않았다.
바쁜가? 트러블? 밀레시안이 뒤를 돌아 동쪽의 상황을 살펴보지만 딱히 부산한 움직임은 관찰되지 않는다.
조금 전부터 조금씩 불어나던 물소리가 쏴아아 하고 솟아오르며 불투명한 물보라를 일으켰다. 커텐처럼 드리워진 얆은 수막이 시야를 흐트러트렸다.
“퀸?”
재촉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쩐일인지 입이 먼저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킹의 말을 대신 전달했던 것도 룩의 통신이었다.
유난히 짦게 끊었던 것으로 봐서 관제실쪽은 바쁜것일지도 모른다.
밀레시안은 시계를 들어 다른 팀원들의 상태를 체크했다. 검게 변한 나이트의 아이콘을 제외하고 모두 일반적힌 하얀색 아이콘, 밀레시안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웃음짓는 관객들과 주변을 경계하는 다른 에이전시의 요원들, 날아오르는 하얀 종이나비들과 발치를 스쳐지나가는 종이양 모형의 홀로그램들.
분수가 잦아들었다. 물소리가 작아지고 이질적인 기계모터소리가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룩, 지금…”
바빠요? 하고 물으려는 말대신 밀레시안의 시선의 외각으로 검은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굳이 밀레시안만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닌 커다랗고 짙은 연기자국을 남기고 솟구쳐올라가는 검은 헬기는 그 자체도 마치 연극의 일부인것 마냥 비현실적으로 고요하게 아본의 남쪽창문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윗 방향으로 사라졌다.
관객들중에서도 갑작스러운 그림자에 고개를 돌린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뭐야뭐야? 새 이벤트?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헬기의 출현에 당혹스러운것은 요원들도 마찬가지, 그보다도 더 불안한 것은 헬기가 남기고간 희뿌연 연기의 잔상이었다. 유난히 푸른 하늘에 휙하니 뿌려진 잿빛 연기는 행복감으로 차오르던 정원에 뿌려진 잿가루같은 불쾌함을 불어넣고 있었다.
저게 뭔데? 사람들의 시선이 남쪽으로 향했다.
관객을 잃어버린 고르반의 AI가 허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에… 누구 없어요? 내 말 듣고 있는사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고르반의 목소리가 허무하게 스러지는 것과 같이 밀레시안의 질문또한 대답받지 못했다.
쿵, 하고 흔들리는 단발성의 폭발음에 사람들의 비명이 깨어졌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무슨일인지 이게 뭔 상황인지를 묻는 질문이 대다수였지만 대답은 말소리가 아닌 행동으로 돌아왔다.
다시한번 쿵, 발밑이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요원들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비상사태를 감지한 요원들이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빠르게 비상통로의 문을 열어젖혔다.
엘리베이터로 가려는 사람들이 막아서는 요원을 붙잡으며 되물었다.
“이게 무슨일이에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관제실도 다른 층의 요원에게서도.
통신이 두절된 요원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숨기기위해 반사적으로 표정을 굳힌뒤 사람들은 다른 출입구로 안내했다. 활짝 열려진 문을 통해 사람들이 허둥지둥 빠져나가는 혼란스러운 순간.
쾅하고 내리찍히는 세번째 굉음과 함께 위를 올려다보던 요원들이 일제히 듀얼건을 뽑아들었다.
하늘에서 쏟아져내려오는 검은 로브의 무리들이 휘몰아치는 광풍과함께 아본의 정원위로 쏟아져내렸다.
비명소리와 듀얼건의 발포소리, 비상상태를 알리는 사이렌소리와 자동으로 내려오는 검은 방호창들. 시야가 검게 물들고 있었다.
빛나는 것은 분수대와 다리를 장식하던 작은 조명들과 무대에 쓰이던 스포트라이트, 그리고 듀얼건의 실리엔 탄환틀이 머금고 있는 희미한 광채뿐이었다.
무엇이 부서지고 누가 쓰러지는 것인지도 알지 못할 어둠속의 난전이 이어졌다.
어둠속에서 펄럭거리는 로브소리들이 마치 새의 날개짓소리처럼 소란스럽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무대의 불빛쪽으로 달리라고 소리치던 밀레시안은 뒷통수에 들려오는 낯익은 구동음에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밀레시안이 완전히 무방비라 생각했던 듀얼건은 그대로 낚아채여지며 손목을 꺾어 원 주인을 향해 겨누워졌다.
밀레시안은 꺾은 손목에 그대로 체중을 실어 넘어트리며 자신을 노린 괴한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디의, 누구의, 무엇을 위해? 수많은 질문이 자동적으로 혀끝에 올라섰다. 무엇부터 물어야할지 생각하기 이전에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밀레시안은 괴한을 강하게 밀어 분수대에 쳐박았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단단하다.
이거 인간의 피부? 생각보다 단단한 괴한의 머리는 분수대의 장식용 외벽은 깨트리며 물속에 처박혔다.
의식은 잃지 않은 것인지 그르렁거리는 물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분수대 안에서 빛나는 조명이 일렁 거렸다. 멱살을 움켜쥐어 괴한을 들어올렸다. 그 가면이 맞다.
휘둘러져오는 다른 한쪽 손을 피해 몸을 뒤로 물러섰던 밀레시안은 무릎으로 괴한의 복부를 찍어내리며 그 위로 체중을 실었다.목 깊숙히 나이프를 찌르며 옆으로 찢어내었다.
딱딱하게 경화된 피부가 비늘처럼 벗겨내어졌다. 휘둘러진 칼날이 듀얼건을 쳐내었다.
하늘을 향해 쏘아진 탄환이 푸른 빛을 터트렸다. 낯이 익은 잔향, 밀레시안이 분수대에 빠진 듀얼건을 건져내었다. 낯선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인원들이 듀얼건을 장비한거지?
밀레시안은 방금 쓰러트린 퀘사르의 가면을 벗겨내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며 후드속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무지개빛으로 빛나는 분수대의 조명이 높은 채도의 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어떻게...?”
밀레시안은 처음 질문하려던 말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린채 빈 숨을 내쉬었다.
목이 찢긴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울음소리와 함게 피가 섞인 거품을 뿜어낸다.
밀레시안은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퀘사르는 잠시 경련처럼 들썩이다가 분수대를 붉게 물들였다.
어두워진 실내를 감지한 조명들이 자동으로 전환되며 화려한 조명을 밝히고 있었다.
미처 나가지 못했던 사람들이 피빛으로 물든 중앙 분수대의 모습을 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크고작은 인간들이 아본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었다. 동화가 사라진 환상, 뱀의 피부를 가진 검은 괴한들, 비현실적인 아본의 모습에 밀레시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날뛰는 퀘사르들을 바라보았다.
네번째 폭파음이 들려왔다.
밀레시안의 머리위에서 비명소리가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아본을 둘러싸던 투명한 계단들이 본래의 불투명한 재질의 모습을 드러내며 차례차례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1층의 모든 통로가 차단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어디로 떨어졌는지 둘러볼 새도 없이 잔해를 뒤덮는 검은 로브들이 차례차례 남은 요원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오색 찬란하게 빛나는 색색의 조명아래에 하얀 가면이 번뜩이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빠르게 뛰고있는 심장소리와 정 반대로 느릿하게 흘러가는 주변풍경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멀리 퀸이 달려오며 밀레시안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는다. 지금 대답할 사람은 밀레시안이 아니다.
요원들을 둘러싸고 있던 퀘사르들중 하나가 입부근의 검은 가면을 떼어내고 속삭였다.
하얀 로브를 입고 있는 퀘사르는 척 보기에도 뭔가 특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자, 시작하도록 하죠.”
수십쌍의 녹슨 태양이 떠올랐다.
일찍이 한번 칼리번을 죽였던 역병의 밤의 사자들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밀레시안은 마른 입술을 달싹거리며 반 가면을 쓰고있는 퀘사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럴리 없다고 스스로를 타일러보지만 이 비늘을 잊을리 없다. 그 목소리를 잊을리 없었다.
후드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저 금빛을 못알아볼리가 없었다.
후드를 벗어넘긴 퀘사르가 웃음지었다. 악몽이 역류하며 목줄기를 움켜쥐었다.
속이 매스껍다못해 토기가 올려오고 있었다. 퀘사르의 입모양이 밀레시안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이네요, 밀레시안 .”
콜트가 불을 뿜는다. 하얀로브의 퀘사르는 망설임없이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을 향해 걸어나갔다.
밀레시안이 몸을 날려 하얀 로브의 퀘사르를 뒤쫓으려 하지만 일사분란하게 대형을 짜며 둘러싸는 검은 로브의 퀘사르들이 앞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밀레시안이 퀘사르들에게 발이 묶여있는 동안 하얀로브의 퀘사르는 검은 갑옷의 장정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동안 분수대에 도착한 퀸이 혀를 차며 밀레시안을 향해 발포했다
밀레시안에게 뛰어들던 퀘사르가 쓰러졌지만 밀레시안은 누가 뭐에 쓰러진것인지 확인하지 않은채 성급하게 움직여 엘리베이터쪽으로 달려나갔다.
“폰..! 잠깐..!!”
버튼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엘리베이터를 호출해보지만 다른 엘리베이터들은 이미 모두 error라는 글자로 멈춰있을 뿐이었다.
무방비하게 엘리베이터에 기대어 선 밀레시안의 뒤로 쓰러졌던 퀘사르가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퀸은 직감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듀얼건대신 품속에 있던 긴 막대형태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조각조각 맞춰진 칼날조각이 긴 장검의 형태를 띄는 순간 퀸은 순간적으로 앞으로 뛰어나가며 나이프를 휘두르려는 퀘사르의 등을 내리찔렀다. 딱딱하다. 그리고 뜨겁다. 비집고 들어간 칼날이 흔들렸다. 베어내는 살결이 지나치게 부드럽다.
사람인 동시에 사람이 아닌 피부, 등에서 가슴으로 다시 목에서 뒤통수로 튀어나온 두개의 칼날이 서로를 겨누고 있었다.
밀레시안이 퀸을 노려보고 있었다. 척보기에도 정상은 아닌 눈동자였다.
“정신차려, 밀레시안..!!”
“올라가야해..”
퀸이 본명을 부르며 밀레시안의 어깨를 잡아채었지만 밀레시안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올라가서 직접 확인해야해.”
그 목소리가, 그 금빛의 머리카락이. 그럴리 없다. 여기 있을리 없다. 살아있을리 없다.
하지만 분명 그의 모습이었다. 이건 그들만이 일으킬 수 있는 재앙이다. 하지만 왜?
밀레시안은 새까맣게 물든 눈을 깜빡이며 퀸의 손을 떼어내었다.
그 힘은 이미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 악력이었다.
“밀레.. 아니 폰, 정신차리라니ㄲ..”
“피오나, 괜찮습니까?!”
퀸이 다시한번 밀레시안을 잡아보려 하지만 뒤로 물러섰던 블랙레이븐이 엄호를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퀘사르를 보았는지 몇몇 요원들은 빠르게 통신으로 보고하고 있었다. 아니 상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빠르게 중얼거리던 무전기속에서 비명이 울려퍼졌다.
“블랙레이븐쪽은 통신이 되는 건가?”
“아니요. 이건 임시용입니다.”
블랙레이븐은 어두워진 인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도 통신이 두절된 이유를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지금 들고있는 것은?”
“정확히는 무대 설치를 하던 인부들의 개인용 무전기입니다. 통신거리도 짧고 음질도 별로인데다가 도청의 위험도 있지만 일단 아본내에서 말을 주고받을수는 있을것 같아 급하게 빌려왔습니다.”
블랙레이븐은 수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니 되도록 부서트리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작은 무전기를 내밀어보였다.
혹시 킹이라면 이것으로 연락을 보내올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관제실이 어떻게 되었는지 예상할 수 없었다.
통신이 두절된 것이라면 지금 이쪽보다 오히려 관제실이 더 위험할지도 모를일이였다.
하지만 어느쪽의? 퀸은 초조함을 억누르며 무전기를 받아들었다. 지금은 다른 일에 정신팔고 있을때가 아니야.
입술을 깨무는 퀸의 손에 힘이들어갔다.
“아 저기..그런데 말이죠...”
퀸이 무전기를 품속에 넣는 동안 곁에 서있던 또다른 블랙레이븐이 눈치를 보며 말을 걸어왔다.
퀸이 그를 돌아보자 블랙레이븐은 여전히 퀸의 어깨너머를 흘끗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 팀원분이 먼저 2층으로 올라갔는데 이렇게 떨어져 있어도 괜찮으신겁니까? 엄호도 없이 혼자 움직이던데..”
“....”
언제, 라고 물을필요도 없이 퀸은 등을 돌려 중앙을 향해 뛰어들어갔다.
블랙레이븐들이 엄호하겠다고 말해왔지만 혼자서 날뛰기 시작한 밀레시안을 쫒는것에 할애할 인력이 없었다.
더불어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블랙레이븐들을 만류하며 다시 중앙분수대로 뛰어나온 퀸의 앞으로 퀘사르들의 탄환이 날아들어왔다.
엉망이된 장식기둥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간 퀸의 옆으로 간이 방패를 든 누군가가 다가왔다.
“앗 있다있다. 당신 저사람네 팀원 맞죠..?!”
다른 피오나의 요원이 아슬아슬하게 탄환을 피하는 퀸을 자신의 보호범위로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함께 동행하던 그녀의 팀원이 퀸을 향해 집요하게 공격해오는 퀘사르에게 응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퀸의 검을 한번 보더니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확실히, 저 망토탓에 급소를 노리기도 어렵고 팔 다리에는 이상한 비늘같은 것이 붙어있어 총격에도 멀쩡이 움직이고 있었다. 차라리 나이프가 더 나은 것일지도.. 퀸이 두 사람의 시선사이에 끼어들었다.
“어디있어? 어디로 갔지?”
“아, 맞다. 진짜 장난 아니라고요. 갑자기 뛰어들어와서 순식간에 너댓명은 죽여버리고 뛰어올라가는데..!”
“어디로 갔냐니까?!”
“네? 어...음.. 일단 2층으로 뛰어 올라가긴 했는데.. 설마 따라가려고요? 이 상황에?!”
분수대에 장식되어 있던 램프가 터져나갔다.
깜빡거리며 점멸하는 불빛들이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분수대속으로 작은 무언가가 대량으로 흘러들어왔다. 척 보기에도 위험한 물건이 분명했다.
짧은 비명과 함께 얼굴을 돌려 유리조각을 피하던 피오나의 요원은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머리를 흔들고 대답했다.
“아뇨, 가야겠죠. 이런 순간이니까.”
퀸은 이미 달려나간 뒤였지만 피오나의 요원은 빈 자리를 바라보며 두어번 더 눈을 깜빡였다.
가야한다. 이런상황이야 말로 곁에 있어야한다. 점멸하는 불빛속에 잠시 넋을 잃고 있던 피오나의 요원은 다시금 방패를 고쳐잡고 자신의 팀원을 바라보았다.
응전하고 있던 피오나의 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셋을 헤아리려는 순간 방패가 접혀지고 듀얼건을 쏘던 요원의 몸이 크게 뒤로 밀러나갔다.
연사로 쏟아져나가는 실리엔의 폭발력으로 뒤로 밀려나가는 요원을 따라 방패를 접은 요원이 자신의 듀얼건을 꺼내들었다.
미끄러져 들어오는 피오나를 향해 듀얼건을 겨냥하는 퀘사르가 가면을 스치고 지나가는 또다른 탄환에 움찔거리며 손을 거두어들였다.
사격솜씨는 형편없지만 시간벌기로는 충분한 위협, 뒤로 굴러 일어난 팀원이 날카로운 발차기와 함께 몸을 휘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 손에는 어느새 듀얼건 대신 나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몸을 날려 퀘사르를 내리찍었다.
얇은 철판을 뚫고 들어가는 불쾌한 감각과 함께 퀘사르의 가슴 위로 긴 상흔이 교차되었다.
검을 뽑아내는 동안 다시한번 방패가 드리워지며 탄환을 튕겨내었다. 누군가가 그녀들을 불렀다.
“거기..! 두 사람! 이쪽으로!!”
중앙에서 벗어난 피오나들을 향해 블랙레이븐이 손짓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들이 가리키는 손끝에 미처 피신하지 못한 일부 관객들과 행사 담당 직원들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퀘사르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이거? 사람이야? 사람이 아니야? 누구야? 이게 뭐야? 가면 무서워. 지금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야?
“괜찮아. 괜찮을거야.”
자켓에 박혀버린 유리조각들을 털어내던 요원이 자신의 팀원의 어깨를 툭치며 다시 듀얼건을 꺼내들었다.
지켜야할 것은 많고 정보는 턱없이 적다. 멈춰선 엘리베이터나 스쳐지나간 의문의 피오나도 궁금했지만 지금은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보다는 눈앞에 들이닥친 일부터 해치워야만 했다.
“함께라면 괜찮아.”
통신이 두절되었다는건 이 괴한들이 손을 썼다는 증거.
아본에 대한 시스템을 관리하는 관제실은 위에 있고 그 곳에는 그들의 팀원이 배치되어있었다.
하지만 충동을 억누른다. 괜찮을 것이라 스스로를 속이며 마음을 억누른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해.
억지로 구겨 넣은 마음의 말이 손끝을 동요시켰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가장 빨리 이 난관을 해쳐나갈 수 있을까. 피오나는 고민한다 그리고 또 고뇌한다.
답을 찾기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운다.
“반드시 괜찮게 만들고 말겠어.”
굳은 의지가 떨리는 손끝을 멈춰세웠다.
장전이 완료되었다. 듀얼건의 상태를 확인한 피오나가 다른 요원들에게 합류했다.
요원들이 상황에 대한 타계책을 제시하는 동안 노이즈로 가득차있던 화면에 무언가의 신호가 접속하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엎치락뒤치락거리던 화면은 이내 암전상태가 되더니 검은 가면의 윤곽을 드러내며 누군가의 음성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낙원에 초대받은 관객 여러분들.”]
가면이 미소지었다. 녹색의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잔잔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