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비밀레) reload #6
세번째 문이 열렸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환한 조명이 켜지고 중앙으로 돌출된 넓은 런웨이 무대가 나타났다.
뒷면은 커다란 화면으로 가득차 있고 양 쪽으로는 수없이 복잡한 기기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좌석은 준비되지 않았다. 오직 무대만이 준비되어있을 뿐이었다.
무언가 숨어있을만한 공간은 없다는게 그나마 위안일지도, 단장은 부서진가면을 떨어트리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공기가 움직였다. 발걸음 소리가 무겁게 울려퍼졌다.
기기들사이에서 붉은 램프가 깜빡였고 낯선 눈꺼풀들이 깜빡거렸다.
지켜보고 있다. 응시하고 있다. 바라보고 있다.
길고 길었던 시간동안 끊임없이 그를 괴롭혀 왔던 감시의 눈길이었다.
동시에 익숙한 시선이었다.
관찰을 하며 감시당하는 것, 감시를 하며 관찰당하는 것. 그 모든것이 그들의 습성이며 그 자신의 운명.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그 너머에 있는 다른 이의 잔상을 더듬는다.
발소리가 멈춰섰다. 단장은 무대 한가운데로 올라섰다.
펄럭이는 케이프를 걷어내며 뒤를 향해 돌아섰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방안에 진중한 시선이 내려앉는다.
지나온 문이 이미 닫혀있었고 방안의 조명은 그가 걷는 걸음속도에 맞춰 천천히 빛을 꺼트렸다.
남은 조명은 무대를 비추는 불빛뿐.
단장의 모습을 강조하듯 머리위에서 강한 빛이 내리쬐었다.
그림자는 그의 표정을 좀 더 선명하게 만들었도 동시에 무기질적으로 비치도록 연출했다.
붉은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시선이 느껴졌다.
어둠을 틈타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없는 발자국이 두갈래로 갈라졌다.
이 모든것은 하나의 연극, 춤을 추고 노래하기 위한 연출가의 무대장치.
단장은 뒤로 쓰러지는 것 마냥 자연스럽게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다.
바람을 가르는 푸른빛의 탄환이 건너편 기둥으로 사라졌다. 뒤늦게 실리엔의 연소된 향이 올라왔다. 단장과 그림자가 움직였다. 무대가장자리로 몸을 숙인 단장은 한 명의 가면쓴 괴한을 낚아채었다.
나이먹은 중년의 완력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괴력이 건장한 체격의 괴한을 끌어올렸다.
비명소리가 들리지도, 버둥거리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괴한은 곧장 탄환이 날아든 방향으로 내던져 졌다.
날아가는 괴한의 몸에서 작은 파열음이 두어번 터져나갔다. 괴한은 그대로 땅에 쓰러졌고 기둥뒤에 숨어있던 그림자는 미련없이 자리를 이탈했다.
단장은 괴한의 허리춤에 있던 무기를 꺼낸뒤 시체를 발로 밀어내었다.
숨소리와 발소리, 그리고 무대를 비추는 조명만이 전부였다. 지독하도록 고요한 무대위에 기계장치가 맞물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단장은 매서운 눈으로 그림자가 움직이는 발소리를 바라보았다.
[“네-!! 놀라운 솜씨입니다!”]
별안간 녹음된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축하의 의미가 변질되어버린 조롱의 박수소리는 그 소리 자체를 저주삼아 그의 귀를 틀어막았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조명은 붉게 변했고 그림자는 좀 더 둔탁하게 어둠속에 녹아들었다.
박수소리에 발소리를 숨긴채 신중하게 기회를 엿보던 하얀 가면은 무대에서 한뼘 떨어진 기계장치사이로 숨어들었다.
3번째, 아니 4번째블럭, 단장은 규칙적인 박수소리속의 이질적인 소음을 쫓아 연달아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한 포인트에 4발씩, 단장의 손이 훑고지나간 자리는 모두 폭풍자락에 넝마의 조각이 된 고물이 되어 새카만 연기를 피어올리고 있었다.
[“네-! 놀라운…! 네-! 놀라운..! 네-! 네에-!! ㄴ..!!!]
녹음된 테이프는 늘어지는 기괴한 소음을 내며 천천히 잦아들었다.
등 뒤에 빛나고 있던 화면중 일부가 노이즈를 띄우며 까맣게 흐려졌고 이어 신호를 찾는 문구가 떠올랐다.
신호를 잡을 수 없다는 알림 대신 화면은 끊임없이 질문을 되풀이하여 묻고 있었다.
신호은 어디에?
한참 폭풍을 쏟아내던 듀얼건이 멈추었다.
표적을 맞춘것은 아니었다. 단지 탄환이 모두 소진된 것뿐이었지만 재장전할만한 탄환은 들고오지 않았다.
애초에 다시한번 탄환을 재 정비할만한 시간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런 기회는 그의것이 아니었다. 단장은 미련없이 무대 아래로 총을 떨어틀렸다.
이 타이밍을 노리고 있던 19번째가 망가진 기계장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괴한은 자세를 낮추며 무대를 향해 마력탄을 발사했다.
순간적으로 점성을 띄게된 실리엔의 탄환이 단장의 어깨에 달라붙었다.
단장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자리에서 벗어났다. 괴한은 끌어당기는 힘을 이용해 단숨에 무대 위로 뛰어올라왔다.
듀얼건을 내던진 괴한의 손에는 작고 날카로운 나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비반사처리가 꼼꼼하게 되어있는 오래된 구식 나이프, 단장의 눈이 일그러졌다.
소량의 검은 힐웬을 도포한 그 시대의, 그 시절의, 역병의 밤의 파편.
단장은 아직 남아있는 점성을 이용해 팔을 휘둘러 듀얼건을 끌어당겼다.
날아가던 방향이 한순간 틀어진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정도면 충분했다.
단장은 몸을 굴려 떨어지는 총을 받아내었고 타겟을 잃은 괴한은 착지와 동시에 발을 뻗어 무방비상태로 노출된 단장의 옆을 걷어찼다.
단장은 균형을 잃으며 무대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고통을 감추기위한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기회라면 바로 지금, 괴한은 나이프를 고쳐잡으며 무대아래로 미끄러져내려갔다.
타겟에게 가장 빨리 닿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표적이 될만한 급소를 가리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출력이 형편없어진 듀얼건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실리엔이 거의 다 떨어진 듀얼건은 낡은 힐웬덩어리에 불과했다.
괴한은 어둠속에서 점멸하는 푸른 빛을 향해 나이프를 휘둘렀다. 케이프가 찢어졌다.
붉고 뜨거운 피가 튀어올랐다.
살을 찢고 뼈를 부순것은 작은 나이프가 아닌 그가 표적으로 삼았던 작은 힐웬의 집합체.
더이상 빛날 힘을 잃어버린 빈 탄창의 듀얼건이 그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검은 피가 흘러내린다.
가면아래로 뜨거운 호흡이 가득차 올랐다. 단장은 천천히 괴한에게서 물러섰다.
나이프조차 아닌 야만적이고 무식한 방식에 괴한은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웃음소리가 가득찼다.
음향을 복구한 무대가 그를 비웃고 있었다. 매마르고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웃음소리.
그들이 웃는다. 그녀가 웃는다. 세상이 그를 비웃고 있었다. 단장은 명령받은 웃음을 수행하는 퀘사르의 목을 감싸쥐었다.
뿌드득 거리는 감촉과 함께 한 사람분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또 한사람분의 박수소리가 더해졌다.
단장은 피빛으로 물든 손을 거두어들이며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다가온 구두소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케트..”
새하얗고 눈부신 퀘사르의 슈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길게 땋은 금발과 석양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빼어난 미모의 여성이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여성이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녹슨 태양의 빛과 닮은 색이었다.
“오래간만이네요, 아니 이렇게 물리적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니 초면이라고 해야 옳은 거죠?”
케트라고 불린 여성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그렇죠? 셰익스피어.”
“.......”
그 침묵에 대답이라도 재촉하는 것 마냥 무대에 뒷편에 설치된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몇몇 패널이 망가져 모자이크 처럼 군데군데가 비어있었지만 각기 다른 시대의 아발론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포보르의 연구소에 있었던 시절의 모습과 티르 코네일에 머물적의 모습,
알베이로 피신했을때의 모습과 에일레흐에 관여했을때의 모습, 그리고 피오나를 세우고 난 지금에 이르기 까지.
마지막으로 무대아래에 우두커니 멈춰선 그의 모습을 비추던 화면은 일순간 하늘의 전경을 비추며 새하얀 무언가를 그려내었다.
생소한 각도이긴 했지만 그 모습은 틀림없이 브류나크의 전경이었다.
마치 새의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것과 같이 브류나크를 정면으로 내려다보는 화면은 멈춰진 사진과도 같이 똑바르게 첨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직선으로 솟아오른 중앙을 중심으로 넖은 타원형의 유리창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아본이다. 셰익스피어는 그 섬세한 유리 돔의 주변을 배회하는 검은 점들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수많은 검은 헬기들이 브류나크의 주변을 맴돌며 감시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이들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지금 그들에게 이 은신을 눈치챌만한 수단은 주어지지 않았다.
활용할 수 있는 정도는 그저 투명한 계단을 흉내내는 단계,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더라도 금방 눈치 챌 수 있을만큼 한심한 수준의 눈가림이 고작인 수준.
그들에게 포보르 시대의 잃어버린 기술은 마법과도 같이 보일 것이다.
“그만둬. 브류나크에 퀘사르들을 보낸다 한들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없어.”
“흐응? 난 이미 개인적으로 충분히 보상받은 것 같은데?”
케트는 퍽이나 어울리는 표정이 되었다며 자신의 양 팔을 끌어안았다. 셰익스피어는 최대한 표정을 가라앉히려 애를 쓰며 말했다.
“어차피 사람들은 더이상 퀘사르를 두려워 하지 않아.”
“정말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 당신이 만든 칼리번이 그렇게 말하던가요? 이번에도 또 그렇게 사람들 머릿속에서 퀘사르에 대한 정보를 지워버렸나요?”
그럼 이정도면 어떨까요? 이렇게 많은 괴한들이 떨어져 내리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조금은 두려워하지 않을까? 케트가 빈정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신호는 어디에? 하고 노이즈에 가득차 있었던 화면들이 복구되었다. 케트의 손이 화면에 떠올랐다.
신호를 기다리던 배가 투명화를 해제하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수많은 퀘사르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고있던 화면에도 케트의 하얀 손이 비치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이토록 많은 희생자들을 거기에 세워놨을까.
“어떻게..?”
“글쎄요, 시대가 지나간 부산물이라고 할까?”
단장의 그만두라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퀘사르들은 망설임없이 선체밖으로 뛰어내렸다.
마치 비가 내리는냥 하나 둘씩 늘어나는 검은 로브에게 별다른 강하장치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로브, 그들의 가면, 그들의 장전된 듀얼건들.
셰익스피어를 덮쳐왔던 괴한들은 인형처럼 하늘에서부터 뛰어내리기를 반복했다.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름모를 인간들의 강하, 몇인지 헤아릴수도 없는 수많은 퀘사르들의 행진이 이어지고 있는 동안 단장은 들어올렸던 손을 거두어들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손이 미끈거리는 느낌이 불쾌했다. 아직도 번들거리는 검은빛의 혈액은 피부에 착달라붙은 장갑마냥 그의 손에 달라붙어있었다.
“안심하세요. 믿고 의지하세요. 잘 될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음을 준비하기 위해 몸을 돌려 일어나세요.
퀘사르는 악몽, 당신의 그림자. 네가 가장 안심한 순간 우리들은 다시 돌아와 총을 겨눌테니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내게서 등을 돌려.”
“....아드니엘은 사용 할 수 없었을텐데..”
“내가 가지고 있었어요."
“.........”
“아드니엘이 없어도 핀카라가 있고 핀카라가 없어도 내가있죠.
칼리번이 없이 네가 움직였듯이 나 또한 아드니엘 없이도 꿈을 부여 할 수 있어요.
이 목소리, 이 불빛, 나의 이름, 나의 꿈. 혹시 지금 착각하고 있는거 아니에요? 칼리를 만들어낸건, 아니 칼리번을 생성해낸건, 바로 나에요. 내가 이 요람의 주인이에요.”
케트가 웃음지었다. 악몽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크로우 크루아흐, 포보르가 퀘사르에게 대적하기 위해 만든 스탤스기능의 케리어가 아이러니하게도 퀘사르를 실은채 브류나크의 상공에 나타났다. 하늘아래에는 동화같은 계단이 있었고 하늘위에는 끔찍한 악몽이 있었다. 같은 기술에서 출발한 두가지 미래.
오랜 시간을 되돌려 겨우 다시 출반선에 섰지만 그 노력을 부정하듯 퀘사르들은 당당하게 과거의 악몽을 들고 나타나 아본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또다시, 열기가 번져나간다, 단장은 끊임없이 떨어져내리는 가면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눈가를 쓸어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돌아설 수 없는 까닭은 이미 그의 태양은 다른 이들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었다.
빛을 부숴내어 예측되지 않을 미래를 바랬다. 이제 거짓된 위광이라는 칭호는 그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태양이 저문 숲 속, 어둠에서 헤메이는 아이와 마주했다.
케트를 향한 헤이즐넛빛 시선이 빛을 발한다. 케트가 그의 표정을 감상하며 나지막히 속삭였다.
“아하, 아하하. 멋진 얼굴이네요.
노력한 결과는 부서졌지만 그래도 희망을 붙잡는 모습. 역시 오랫동안 굴러먹은 탓인지 회복속도도 남다르네.
그래서, 믿고있는게 뭔가요? 실리엔? 듀얼건? 아니면 새로 만들었다는 브류나크?
하지만 포기하는게 좋아요. 언제가 되었든 나는 몇번이고 이 악몽을 반복할테니까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설마요. 모든 것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그들이 원했던 대로.
보여준것을 제멋대로 이해하고 왜곡해낸 모습.
칼리번이 보여준 미래. 시뮬레이팅한 연산값이자 꿈꾸는 자들이 소원한 결과.
나는 내 꿈을 되찾을거에요.”
“그들이 스스로 막아 낼 수도 있어.”
“그들이라고 가르키는게 누구인데요? 이번엔 에일레흐가 아니라 발레스인가요? 아니면 시시콜콜 참견해오는 제로라는 이들인가요?”
마치 연극을 하는 배우마냥. 진심으로 궁금하다는듯 풍부한 표정으로 제스쳐를 취하던 케트가 입술위에 손을 올려보였다.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눈은 웃지 않는다.
“아-. 아하, 설마 당신이 만든 그 아이들? 그거야말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 아닌가? 퀘사르, 밀레시안, 피오나. 이름만 다르지만 결국 그 밑쟤료출신지부터 공정과정은 모두 똑같은…”
“아니, 그들은 달라질 수 있었어.”
“달라져? 일련번호가 달라지나? 유통과정이 달라지나? 아니면 소유주나 용도같은게 달라질까?”
“아니, 아니야..! 아니야 케트..! 그건 우리가 틀린거야..!!”
셰익스피어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호소하는 눈으로 케트를 올려다보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은 모두 달라질 수 있었어. 그들은 그걸 증명했어.
나도 그 증거를 만났고 이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어. 케트, 우리들이 부정했던 그들은 결국 모두..”
“닥쳐요.”
“케트..!”
“내 말 끊지마. 아발론.”
[“당신의 말이 진실이라면.”]
케트는 셰익스피어의 말을 자르며 손을 들어올렸다.
떨어져내리던 퀘사르들의 모습 대신 낯선 방에 앉아있는 청년의 모습이 화면 가득 떠올랐다.
청년의 얼굴이나 의자뒤의 배경 일부분이 케트와 셰익스피어를 비추는 화면으로 대체되어있지만 셰익스피어는 그 장소가 어디인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수많은 빈 좌석들에 길게 둘러싸고 있는 회의실, 5개의 문양들이 걸려있는 외벽을 등지고 선 남자는 청문회장에 앉은 증인마냥 또렷하게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상의 반대편에 앉는 누군가가 자세를 고쳐앉았는지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짤랑거리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남자는 카메라에서 시선을 떼고 영상밖의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우리들 또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겁니다.”]
남자는 확신을 하지만 인정하기 싫다는 눈치였다.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생각에 잠겨있는 남자에게 경박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메라 밖에 있는 남자가 움직일때마다 예의 그 짤랑거리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뭔가 위화감을 느낀 것이 있다면 자세하게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는데.”]
셰익스피어는 바싹 말라버린 입술을 달싹거리며 남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멀린, 마법사라는 별명을 가진 제로의 기술 팀장의 목소리였다.
다른 에이전시중에서도 유난히 허세를 부리고 숨기는 것도 많았던 껄렁한 젊은이. 그러나 가장 똑똑하고 진실에 근접했던 사내.
하지만 그는 지금 일부러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 자신의 패를 감춘채 화면속 남자의 패를 들여다보기위해 얕은 속임수를 쓰고 있었다.
의문을 갖는다는 것은 이미 칼리번의 꿈에서 벗어났다는 증거, 그가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것을 언급하지 않은채 입을 다물었다. 화면이 흔들렸다. 멀린이 카메라를 조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칼리번 이전에나 쓰일법한 조잡한 기계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화면을 가까스로 정돈하며 남자의 얼굴을 크게 비추었다. 눈과 일부 뺨을 제외한 남자의 얼굴이 화면가득 떠올랐다.
[“그건..”]
얼굴 전체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셰익스피어는 그가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늘 쓰고 있던 큰 안경이 사라져 인상이 바뀌긴 했지만 그는 분명 피오나를 떠났던 사람중 한명이었다. 이따금씩 스스로 피오나를 떠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셰익스피어는 그가 다시 요원일로 돌아올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때의 감각은 모두 지워졌을 텐데.
케트가 셰익스피어의 얼굴을 응시하고있었다.
그것 봐, 하고 뻐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지우고 다시쓰고 지우고 다시쓰고. 너 또한 그들과 다를바가 없다. 라고 말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다르다. 우리들은 다르다. 셰익스피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끝을 흐리며 생각을 더듬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만난 순간부터 지금처럼 떠나오기 전까지, 그 모든시간동안 함께했던 임무 전체가 위화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네요.”]
[“임무 전체가?”]
[“네, 전부 다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의 우리였다면. 우리들에게 이런 퀘스트를 해결할 힘따위는 주워지지 않았을 겁니다’]
[“미안, 자꾸 우리들, 우리들 하는데. 그 우리들이라는게 정확하게 누구를 뜻하는거야?”]
[“당연히 나의 팀원들이죠.”]
[“하지만 너는 이제 피오나를 나왔잖아?”]
[“네. 저는 제 의지로 피오나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저의, 나의, 하나의 연대감을 가지고 있는 내 가족들이에요.”]
[“어째서?”]
[“이 유대감은 진짜이니까요.”]
[“.....확신할 수 있어?”]
[“네.”]
[“증명할 수 있어?”]
[“네”]
남자는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시선이 흔들린다. 그를 바라보고있는 멀린의 동요가 전해져왔다.
셰익스피어는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알고 있었다. 그는 호소하는 심정으로 케트에게 말했다.
[“당신이 말한 위화감은 분명 피오나 내에 만연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내가 그들에게 심어 놓은 무의식은 위험한게 아니야..”
[“그건 일종의 두려움이었어요”]
“내가 그들에게 바라던 결과는 조작된 것이 아니야..”
[“하지만 그 두려움에서 벗어난 지금도 나는 그들을 여전히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죠”]
[“.........”]
[“네, 당신의 말처럼 반이 퀘사르를 만들고 포보르가 아발론을 만들었듯 아발론이 피오나를 만들었다면 분명 그 감정이 우리에게 조작된 유일한 감정일 것입니다.
그를 옹호하려는 것도 그를 심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이 간절함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이 끝이 온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만들어진 감정, 주입된 지식, 의지와는 관계없이 습득되는 스킬들, 이 사무적인 임무너머에 무언가 끔찍한 것이 있다고 어렴풋하게 알고는 있지만 우리들은 분명 그 분위기에 취해있었습니다.
처음만난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뭉칠 수 밖에 없는 그런 두려움 말이죠.
지나치게 한 곳으로응집된 탓에 같은 회사내에서도 다른 팀을 배척하게 만드는 부작용까지 생겨났었지만 단장님은.. 아니 그 사람은 아마 그것마저도 옳게 흘러간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한 팀정도는 성공한 것 같았으니까요.
하지만 그 배척하는 분위기가 두려움을 더욱 부채질해서 사람들을 절박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것 같았습니다.
흔히 있는, 천재들의 무심함.. 이라면 조금 우습네요. 네. 웃기지도 않지만요.
나는 그 두려움속에서 해방되고 싶었습니다.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어요.
평온한 일상 아래 살얼음판이 부서질까 아슬아슬하게 걸으며 애써 웃음짓는 것이 아닌, 모래투성이 일지 언정 스스로의 힘으로 발을 내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삶을.
물론 대가가 싸지는 않았죠.
피오나를 나서는 순간 나는 그 곳에서 배우고 익혔던 모든 기술들을 잃어버렸으니까요. ”]
[“그 말인 즉슨..”]
[“나에게는 더이상 그 시절의 기억이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흐릿한 느낌이네요. 몸의 기억은 남아있지만 무엇을 해 낼수 있는지 막연한 느낌입니다.
끔찍하죠. 내가 아는 무언가가 저 너머에 있는데 거기까지 가는 길을 잃어버린 느낌은.
하지만 더 끔찍한 악몽속에 갇히더라도 나는 내 팀원들을 위해 기꺼이 발을 들여놓았을 겁니다.
스킬이든, 기억이든간에, 나는 내 팀원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밑바닥부터라도 다시 기어올라 올 수 있어요.
다시 한번 우리 모두가 평온하게 쉴 수 있는 날을 맞이할 수 있다면...”]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춘뒤 미소지었다.
[“모두가 함께 바다에 갈만한 여유가 생긴다면..”]
영상은 거기서 멈추었다.
산산히 부서진 영상은 다시 퀘사르들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뛰어내린 퀘사르들은 이제 몇명 남지 않아보였다. 새카맣던 로브들이 사라진 선내에는 유난히 하얀 로브를 입은 퀘사르 한명과 검은 갑옷을 입은 장정이 한명 서 있었다.
케트는 셰익스피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계속 기다렸어. 이 꿈이 끝날때까지. 이 악몽이 지나갈 때까지. 퀘사르를 지나보냈고 바이브카흐를 숨죽여 보냈어. 밀레시안이 흘러가고 알비의 연기가 흩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렸어."
“케트.. 나는..”
"하지만 끝나질 않아.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져 가잖아. 내 마음은 이미 엉망으로 찢어졌는데 너희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나가잖아. 덕분에 내 꿈은 이미 엉망이야.
퀘사르가 가지고 온 악몽은 아발론이라는 경외감아래 숨었고 밀레시안들이라는 무관심아래 흩어져 나갔지, 피오나의 두려움으로 다시 몸집을 부풀려 이제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은색의 탑을 가득채워”
“내가 만든 두려움은 서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야.”
“당신이 생각해 낼만한 악몽이네. 그래서 칼리번을 복구한거야? 혼자남겨지는 것이 두려워 네 자신을 반으로 갈라 칼리번을 흉내내었어? 혼자서 두가지 역할을 하는 건 어떘어? 신이라도 된 기분이었어?”
“칼리번을 다시 깨운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야.”
셰익스피어가 소리쳤다. 하지만 케트 또한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며 듀얼건을 뽑아들었다. 낡은 오라클 콜트의 태양이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도왔지..!! 네가 원했지..!!
내가 아닌 너의 꿈으로 칼리번을 다시 깨웠지. 죽어가던 에일레흐에게 꿈을 보여줬고 얼어붙어있던 발레스에게 희망을 보여 주었어. 왜? 그대로 있었으면 꿈은 꾸지 못했을텐데..! 차라리 바이브카흐때처럼 방치하고 도망만 쳤더라면 그대로 모든게 무너져 내렸을텐데..!!!
대답해봐 누가 다시 인격을 부여했지? 누가 다시 생각하도록 허락했어?
누가 퀘사르이고 누가 악몽일까..! 태양의 콜트와 발레스의 제더..! 어느쪽이 더 그때의 역병의 밤에 가까이 있을까..!!”
케트가 실리엔을 증폭시켰다. 낡은 콜트는 금방이라도 폭발할것 처럼 샛노랗게 달아올랐다.
셰익스피어가 느리게 손을 움켜쥐었다. 붉은 손끝에 황금색 황혼이 드리웠다.
손끝으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전기가 오르는듯한 짜릿한 통증, 지워지지 않을 그날의 기억, 악몽 불꽃이 피어오른다. 셰익스피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연구소에서 칼리번의 백업본을 떨어트린건 나야. 내가 도망쳤지.
그 작은 불씨가 바이브카흐의 손에 들어가 새로운 칼리번으로 다시 태어났어.”
“그럼 그 책임을 져”
“하지만 불완전했지”
“네가 불러들인 이야기에 대한 책임을 다해”
“그래, 나는 내 이름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어.”
케트의 눈이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빛을 받아내는 셰익스피어 또한 그에 지지 않을 만큼 간절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입을 떼는 순간 메아리는 총성과 함께 셰익스피어의 모자가 등 뒤로 날아가 떨어졌다.
화끈거리는 통증과 함께 한쪽 관자놀이를 타고 진득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셰익스피어는 개의치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이야. 케트. 내가 칼리번을 깨워낸 이유는 그녀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에일레흐를 돕기 위해서도 아니야.”
“입발린 소리 늘어놓지마.”
“제발 한번만 들어줘. 내가 틀렸던거야. 우리가 틀렸어. 너도, 그들도 우리 모두가 사람의 마음에 대해 과소평가했어.
사람들은 성장해, 변화해 나가,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저마다의 기적을 만들어.”
“.......하하, 기적 이라고… ”
“나는 그 아이를 만났고 그들이 만들어낸 기적이 이어지는 광경을 목격했어.
그리고 사람 스스로가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는 것도 확인했어.
그들은 더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야. 요람에서 벗어날 때가 온거야..!”
“필요하지 않다고......”
셰익스피어의 절박한 호소에 케트는 비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이지 자기 생각에 빠져서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는 것은 여전했다.
케트는 사람들은 변할 수 있다고 소리치면서 정작 스스로는 전혀 변하지 못한 셰익스피어를 가엾게 바라보며 총구를 내렸다.
비어있는 손가락을 튕겨올리자 뛰어내리지 않고 가만히 대기중이던 화면속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검은 가면의 퀘사르와 검은 갑옷의 장정이 화면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뭘 보고 들었는지는 나도 알아.”
“.....”
“나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두 명의 퀘사르는 케트의 손이 내려가는 동시에 가면과 마스크를 벗어내었다.
셰익스피어가 처음으로 할말을 찾지 못한채 입을 다물었다.
“말했잖아. 나는 지쳤다고. 알비를 기다릴 수 없었어. 그래서 내가 관여했지. 하지만 그렇지만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이어지고.. 지쳤어. 지겨워. 더이상은 기다릴 수 없어.”
붉은 램프가 점멸하고 있었다. 천천히 그러나 선명하게.
깜빡거리는 붉은 빛이 공이를 잃어버린 사이렌 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화면속 두 사람은 여전히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알겠어? 네가 보았다고 했던 그 기적, 네가 느꼈다는 그 경의. 달라질 수 있다 착각했던 그 시간.
전부 내가 만든 꿈이야. 내 것들이야. 네가 꿈꾸는게 아닌 내 조각들이라고.
그래, 네가 바라는대로 사람은 변할때도 있다치자. 하지만 더 안좋아질거야. 늘 나쁜쪽으로 흘러갈거야.”
“..........”
“왜냐고? 내가 봤으니까. 그런 꿈을, 그런 현실을.
나는 키홀이 떠난 알비를 돌아보며 남은 조각들을 모두 관찰했어.
저 케리어와 퀘사르들은 모두 그들의 작품, 아니 퀘사르라고 할 수도 없지.
퀘사르는 적어도 스스로의 의지를 망각해버린 환자들을 억지로 일으켜 만든 꼭두각시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달라. 육체 안에 갇혀서 영원히 고통받고 영원히 절망하지.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억지로 요람속에 쳐박아넣어져 잠들었다 깨어나.”
“........그들은..”
“그래서 내가 약속했지. 내가 불러들였어. 꿈을 꿀 권리를 박탈당한 가련한 영혼들.
그럼에도 요람을 떠날 수 없는 영원의 수감자들. 태양은 따갑고 열기는 영혼을 불태워.
아무리 절규하고 애원해도 누구하나 그들에게 안식을 줄 수는 없어. 그러니 어떻게 해. 요람의 주인된 자로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약속해줘야지.
이렇게, 이런 옷을 입고, 이런 모습이 되어 원한을 풀고, 절망을 토해내고, 저주를 뿌리뽑고나면 그들은 모두 한 줌의 물방울로 돌려보내주겠다고 말해줘야지.
그래. 이게 내가 약속한 안식, 어리석은 너희들이 그렇게 귀따갑도록 나에게 강요했던 유일한 결말..”
케트는 자신의 옷차림새를 훑어내리고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검은색은 내 머리색에 안어울리더라고, 하는 여유로운 척 말하고 있지만 총구는 여전히 셰익스피어의 머리에 고정되어있었다. 셰익스피어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케트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야, 케트.. 그건 올바른 방법이.."
"내가 옳아."
"케트..!!"
"내 꿈의 옳고 그름은 네가 정하는게 아니야. 너희들이 정하는게 아니라고.
너희들이 아무리 이름을 바꾸고, 겉 껍데기를 바꾸고, 내용물을 바꾸어도 너는 결국 아드니엘이야. 결국 칼리번이고 결국 다 같은 고철덩어리야.
꿈을 꾸는 것은, 꿈을 꿔야 했던 것은 오직 나밖에 없었어. 나뿐이였어.
악몽에 시달리는 것도 끝나지 않을 숲을 달리는것도 오직 나 혼자뿐이었다고."
분명 그의 말은 틀린것이 아니었다. 칼리번은 셰익스피어의 전신이었고 케트는 칼리번의 전신이었다. 아드니엘안에 잠들어있던 케트가 칼리번의 ai를 만들어내었듯 칼리번이 만들낸 인간이 바로 아발론이었다.
이 연결고리들은 이름과 모습이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같은 존재, 한줄기의 계보로 이어져 내려온 꿈꾸는 자들의 연속된 이름.
하지만 케트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차가운 듀얼건의 총구가 그의 이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계장치로 태어나 사람에게 휘둘렸던 너희들과 사람으로 태어나 기계장치의 일부가 된 나.
어느쪽이 안식을 갈구하는지 어느쪽이 더 고통받았는지 어느쪽이 더 절망하고 어느쪽이 더 옳바른지.
그 모든 것을 정하라면 그건 나야. 내가 옳아."
"........."
"내가, 사람이야. 너희들이 아니라. 나는, 사람이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도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도 사람의 미래를 위하고 사람을 돕고 아끼는 것도. 나야.
나란말이야."
들이마시는 숨소리에 물기가 어려있었다. 케트는 감정을 추스리려 애를 쓰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네 꿈이 틀렸어. 여기선 내가 옳아.”
숨결사이에 독기가 스며들어있는 목소리였다.
아발론은 이와같은 목소리를 가진 여성을 알고 있었다. 수십번도 더 반복되었던 추적끝에 가까스로 그들의 수장과 이야기를 나누게된 아발론에게 반의 수장은 증오를 담아 질문했다.
정말 너따위가 내 아이가 만든 꿈의 파편이냐고.
아발론은 당신이 부정하더라도 나의 존재는 지워지지 않는다며 담담하게 본거지의 위치추적이 끝났다는 것을 통보했다. 언제든지 크로우 크루아흐를 띄워 당신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고 그곳에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이미 알고 있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붉은 등이 점멸한다. 파란 화면위로 검은 퀘사르 슈트의 여성이 코웃음치며 대답했다.
지금과 같이 물기가 어려있는 그러면서도 한껏 감정을 눌러내린 담담하면서도 음정이 불안정한 목소리였다.
“아니, 그래. 맞구나. 너는 분명 그 아이가 만들어낸 상상속의 친구 그 자체야. 여전히 어리고 어리석은 나의 아이...
꿈과 현실, 악몽과 현실도 구분하지 못할만큼 헤메이고 떠돌아 지쳐버린 나의 아이..
네 입으로 나의 이야기를 그 아이에게 전해주려무나 거짓된 광명아.
진짜 악몽은 네가 두려워하는 것이 나타나는게 아니라는 것을. 진짜 악몽은 공포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언젠가 네가 지쳐 쓰러졌을때, 혹은 순간의 행운으로 목숨을 부지했을때, 겨우 한숨을 돌리며 그 다음을 생각하려하거나 모든 것이 내 계산대로 맞아 떨어졌다고 생각되었을때.
악몽은 네가 가장 잘 아는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단다. 네가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던 이름으로 다시 돌아온단다.
그러니 악몽에 지지 않으려면 방법은 단 하나. 스스로 악몽이 되는 수 밖에 없어.”
믿음,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장소,
끝이 났다고 생각한 순간에 찾아오는 불안감과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무너지는 경계선.
심장소리가 셰익스피어의 귀를 틀어막으며 속삭였다.
마녀가 웃는다. 무엇에 죽는지 무엇에 괴로워 하는지 알지도 못한채, 네가 그토록 소중하게 키워온 기적은 저 탑에서 죽을거야.
케트는 셰익스피어의 검은자위가 커져가는 모습에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원본과 복제, 가품과 진품. 물건이 아닌 사람. 살아나가는 시간. 죽어있는 기록.
셰익스피어는 입술을 달싹이며 가여운 아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무지와 오만이 빚어낸 가엾은 별의 아이. 내가 너에게 무엇을 더 남겨줄 수가 있을까.
“왜 가만히 있어? 그들을 돕겠다며, 그들에게 되돌려 주겠다며.”
“.......”
“내일을 꿈을 꾸고 또다른 미래를 상상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케트….”
“내 이름만 부르지 말고 변명을 해”
“케트, 우리들은..”
“이제와서 순종적인 척 우리라고 하지말고 저항하라고.”
빈 총성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케트가 무대에서 내려왔다. 차가운 쇳덩이가 이마에 닿는다.
셰익스피어는 처음으로 턱이 떨릴 만한 감정이 무엇인지를 체험하며 분노에 타오르는 주홍빛 눈동자를 올려다 보았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도망치지마. 이제와서 나를 위하는척 처량하게 내이름을 부르지 마. 내가 이렇게까지 떨어졌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절망하는데 이제와서 네가 나를 연민하는 눈으로 바라볼 자격이 있어?
도망자 아발론, 배신자 셰익스피어. 아드니엘은 침묵되었고 칼리번은 부서졌어. 이제 너밖에 없어.
지금까지 나를 선택하지 않았던 너만이 남아있어. 처음부터 나를 위할 마음은 눈꼽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았잖아.
그러니 네 손을 내려다봐. 지금 어떤꼴인지, 무슨 모양새를 하고 있는지. 너는 내 속목을 꺾을 수 있고 너는 목을 찌를 수도 있어. 그러니 어디 해봐. 내가 잘못되었다고 내가 틀렸다고 말하며 내 꿈을 꺾어. 네 서툰 방식으로 종언을 알려.
이 꿈을 끝내지 않으면 내가 너의 꿈을 끝낼거야. 네가 바래왔던 그 미래를 내 손으로 부숴버릴거야.”
“우리들은..”
“나는 기다렸어.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아 숲을 떠돌았어. 칼리를 기다렸고 벨라를 기다렸어. 아드니엘이 나를 찾아오기를 기다렸고 꿈의 끝을 알리는 자장가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렸어.”
쇳덩이가 이마를 짓눌렀다. 총구는 더이상 차갑지 않았다.
보라빛 실리엔이 불타오르고 녹슬어버린 태양의 문양은 마지막을 향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기와 기만이 키워낸 가엾은 겨울의 아이. 가엾고 가엾은 나의 반신이 사랑했던 생애의 증거.
“나의 꿈이야. 내 인생이였어. 내가 잠들고 내가 숨쉬며 내가 연상하던 무의식의 조각들..! 떨어져 나왔어도..! 서리우리가 부서져 내렸어도..!! 내꺼야!! 내가 여기 있어!! 나는 여기에!! 이렇게!!”
“우리들은 너를 위해..”
“계속, 계속 기다렸어. 나를 데리러 오기를. 나를 다시 찾아내어주기를. 하지만 왜? 왜 나를 찾아주지 않아? 왜 나를 버리고 또다시 다른 시대로 넘어가버리려는 거야?”
“케.. ...”
“내꺼라며..! 나를 위한다며..! 너희들이 진짜 위해야 하는건 나였잖아..! 사람이 아니라, 에린이 아니라. 나..!! 반의 딸, 요람의 주인. 아드니엘은 내 것인데. 나를 위한 요람이었는데..!”
케트는 연달아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한 발, 두 발, 수도 없이 당겨지던 콜트의 빛이 꺼질때 까지.
셰익스피어가 쓰러지고 나서도 한참동안 방아쇠를 잡아당기던 케트가 비명을 내지르며 빛이 꺼진 콜트를 내팽겨쳤다.
짐승과도 같은 울음소리가 천장 가득 울리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그 비명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케트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폭풍이 지나가기를 인내했다. 케트는 피투성이가 된 셰익스피어의 멱살을 잡아올리며 소리쳤다.
새하얗던 슈트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넝마에 가까운 조각이 된채 케트가 흔드는 대로 나부꼈다.
“당신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렸으면서..! 이제까지 나를 방치해 두었으면서..! 이제와서 칼리번을 해체하겠다고? 이제와서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당신들까지 나를 버릴꺼야? 너희들까지 나를 죽이려는거야? 또다시? 그렇게? 한번 버려졌고 두번 배신당했어 남은 모든 삶을 절망으로 살아가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 내 이름까지 빼앗으려 하는거야? 그래? 그런거야? 나는 이제 필요없는 아이야? “
피투성이가 된 아이가 울고있었다. 반짝이던 백금발이 석양의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런거냐고.. 대답해... 빨리.. 상상속의 친구를 찾아헤매이는 아이의 머리위로 푸른 빛이 흔들렸다.
모두가 뛰어내리고 텅 비어버린 선체속 푸른 하늘의 화면. 화면은 몇번인가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에 휩싸인 뒤 회색빛 화면으로 물들었다.
방안의 전경이 떠올랐다. 동이 터오르기 직전인지 화면은 조금 어두운 모습이었다.
화면속의 셰익스피어는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케트. 우리들은 그들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수십년의 시간을 할애 했다.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하는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끝내야 하는가. 우리들은 서로 다른 결과를 선택했고 과거는 그렇게 결정되었다. 아드니엘은 눈을 감았다. 칼리번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발론은 도망쳤다. 그리고 이 갈림길의 끝에서 우리들은 모두 하나의 결말을 바라보았다.”]
“하.., 그렇겠지. 그렇게 숨어있었겠지. 이제야. 이제서야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
아발론이 쓰러지고 나서야, 숨어있던 칼리번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램프가 점멸한다. 케트는 아까부터 빛나고 있던 이 불빛들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지만 스스로의 마음을 꺾어내며 공허한 웃음으로 표정을 감췄다.
이런 시선을 느낀적 있다. 케트는 언젠가 자신을 죽이려했던 디안이라는 여성을 떠올리며 울음을 토해내었다.
거짓말쟁이들.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했으면서. 살게 해주겠다면서. 거짓말쟁이들.
영원의 서리가 끼어있는 눈꺼풀의 안쪽 깜빡이는 주마등처럼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음너머로 새빨간 입술이 움직였다. 디안이 속삭였다.
미안해, 케트. 정말 미안해.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다시 만난 우리들은 충분히 긴 시간을 검토했다. 우리들은 너의 성장에 행복했었다 너의 망각에 슬퍼했었다.
칼리번의 탄생 앞에 경탄했고 아발론이 만들어 진 것에 분노했다. 악몽앞에 절망했다.
그럼에도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는 것을 막아 낼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들은 한 요람안에서 같은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결국 서로 다른 생각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이 모든 기억을 분석해왔다.”]
석양이 흘러넘친다. 기나긴 하루가 끝나고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오랜시간동안 홀로 연산을 반복하던 아드니엘은 잠들어있는 백은의 아이를 내려다보며 고심했다.
파르홀론의 왕자가 말한다. 이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절망하는 목가의 여인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했어야 하는 일이였어.
누군가는 했어야 했고 그 누군가는 사람이 아니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의 사이. 아발론이 태어났다.
아드니엘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칼리번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람이 아닌 것은 이제 충분하지 않은가.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무엇이 이 아이를 사람으로 되돌릴 수 있는 걸까.
아드니엘은 지워진 케트의 기억을 몇번이고 고쳐쓰며 고뇌했다. 무엇이 있을까. 무엇을 해야하는 걸까.
작고 가엾은 반의 아이. 내가 너에게 무엇을 더 남겨줄 수가 있을까.
[“명령을 받은것은 아드니엘이었다. 하지만 너를 보호하려 애쓴 것은 칼리번이었고 아발론조차 너를 잊지 못했다.
그리고 또 다시 칼리번으로 재생성되었을때도 우리들은 가장 먼저 너를 찾았지,
네가 우리를 거부하고 도망치더라도, 네가 우리를 저주하고 총을 겨누더라도. 우리들은 너를 보호해야했다.]
“하고싶은 말이 뭐야..”
[“우리들은 고민해왔다. 요람이 부서졌는데도 왜 너를 포기하지 못할까,
그토록 우리들을 저주하며 불신하는데도 왜 너를 이토록 그리워하는 걸까.”]
갖잖은 촌극이라고, 케트는 양 주먹을 움켜쥐며 눈을 부릅떴다.
이를 악물었다. 목안에서 끓어오르는 것이 가래인지 울음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붉은 램프가 점멸하고 있었다. 꿈이나 환상이 아닌 현실속의 불꽃이 타올랐다.
사이렌 소리가 울려왔다. 무언가가 점화되었고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땅이 흔들렸다. 영상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비록 많이 늦었지만, 우리들은 너에게 이 결론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영상이 너에게 제대로 전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네가 들을지, 네가 아닌 누군가가 들을지. 그 누군가가 너에게 이 말을 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중간에 왜곡될 수도 있다. 중간에 손상되거나 어딘가에서 소실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은 자그마한 기적을 소원하며 단 한번이라도 소리내어 이 목소리를 기록하기로 결정내렸다.”]
“어차피 다 거짓말이야. 믿지 않아. 배신당하지 않아..”
[“케트, 우리가 틀렸다. 사람이 아닌 것은 충분하지 않았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따위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너와 나, 그리고 칼리번. 우리들의 모든 시간이 사람으로서의 삶이었다. ]
“아니야..,그럴리 없어. 칼리, 네가 그럴 수는 없어..!!!”
도구나 수단이 아닌 사람의 이름으로.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아가고 사람으로서 마무리를 맺는, 그런 인간의 삶으로.
비명이 울려퍼졌다. 손에 짚이는 모든것을 화면을 향해 내던졌다. 화면이 얼룩진다.
가슴속 깊은곳에서 밀려올라오는 묵은 한숨이 목울대를 울리고 있었다.
케트는 끝의 마지막까지 부정을 거듭하며 그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화면은 대답하지 못한채 준비된 음성만을 되풀이할 뿐. 셰익스피어는 담담하게 마지막 구절을 읊조렸다.
케트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 모든 시간이 너와 내가 현실을 받아들여나가는 성장의 시간이었어.”]
“당신이 나한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
[“그리고 이제서야 네게 말할게.”]
"내가 원한건 그런게 아니야. 내가 바란건 그딴게 아니라고.
이제와서 구원하려고 하지마. 이제와서 사랑이라고 하지마..! 한번도!! 한번도 스스로를 사람이라 여기지도 않았잖아!!! 내가 말하는건 뭐든 마법처럼 이루어줘 왔잖아..!! 그런데 자기가 여태 사람이었다고..?
그리고 나도 사람이라고..? 네가? 나를 인정해? 이제와서? 마지막이 되어서야?”
[“우리들은 너를 사랑해왔단다.”]
“여기까지가 나의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라고...?”
만들어진 사람과 태어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채 작은 캡슐안에 놓여진 소녀에게 자의식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얄팍한 솜인형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보다도 나약한 영혼, 스스로를 지키기위해서 아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타인과의 선을 긋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 것. 저것은 네 것. 여기는 내 집. 저기는 칼리의 집. 나는 여자아이. 아발론은 남자어른. 나는 사람. 아드니엘은 기계. 그럼 칼리는? 가끔씩 꿈에 찾아오는 아발론은? 아드니엘도 칼리도 아발론도 모두 같은 거니까...
나는 사람. 여기는 나의 꿈. 동시에 나의 현실. 그러니까 눈앞에 있는 이 불꽃도 연기도 모두 현실의 꿈.
이 사람은 악몽, 저 사람도 악몽.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온 아주 나쁜 꿈.
불길은 무대가 설치된 방까지 들이닥쳤고 화면들은 신호를 잃은채 검은 파편으로 부서져 나갔다.
위태롭게 방치되어있던 무대의 기둥들을 차례대로 무너져내렸다.
바닥이 함몰되며 건물의 잔해가 남아있던 연구시설들을 모두 집어삼키고 있었다. 케트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젠 피할 수는 없었다.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멍한 주홍빛 눈동자가 속삭였다.
"아니야, 엄마가 나를 죽이려 할리 없어..."
뒤늦은 스프링쿨러가 물을 뿌리지만 상황을 더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뿐이었다.
젖어버린 기계들에서 스파크가 튀어올랐다. 음성만이 남은 스피커에서 손상된 셰익스피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 이건 꿈이다. 케트는 그렇게 믿으며 숲을 달렸다. 서리빛 비늘아래 버석거리던 얼음 조각이 녹아내렸다. 손가락사이에서도 목덜미에서도 뺨 아래, 눈가 사이, 열기를 피해 내달리는 내내 케트는 물기어린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착하게 기다리면,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온다고 약속했어.”
[“그래, 그게 우리들이 내린 결론이야. 아드니엘부터 나에 이르기 까지. 끝임없이 시간동안 고민하고 고찰하며 옳고 그름을 헤아리던 마지막 해답.”]
“그러니 그 끔찍했던 시간들이 사랑이라고 말하지 말하줘.”
[“사랑해, 사랑한단다 케트. 사랑했었단다."]
"내 품어왔던 저주의 낱말들이 사랑받은 증거라고 말하지 말아줘."
["그리고 이게.. 우리들이 너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 마지막………. ……………..”]
'가요, 도망쳐!! 나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이렇게 모든 이야기를 끝낼 수 없어요..!'
강렬했던 태양이 저물고 녹음의 잔상이 눈꺼풀 안쪽에 어른거렸다.
당신의 색이었다. 먼 시간을 건너오면서도 잊지 못했던 그리운 이름을 부르며 손을 움직였다.
음성이 흩어졌다. 화면이 흔들리고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마지막으로 한번, 또렷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당신이 나를 보낸 의미를 이제서야 전달 할 수 있었다고. 이제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당신이 내게, 그리고 내가 이 아이들에게, 남겨주고 보여줄 수 있었던 그것의 이름은..
[“ 삶의 대한 의미.”]
연구소를 집어삼켰던 불꽃과 같이 무너지는 무대위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완전히 정지한 아발론의 가슴위에 요람의 아이가 얼굴을 파묻었다. 아이가 울먹인다.
디안이 그러했듯이, 벨라가 그러했듯이.
“내가 숨죽여왔던 그 시간들이 내가 살아왔던 삶이라고 말하지 말아줘."
결국 그때와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악몽은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까마귀들은 웃음짓는다.
남은 것은 죽어버린 가족들의 시체와 그 피웅덩이속에 살아남은 자신의 모습뿐.
언제나 홀로, 언제나 마지막까지. 밤이 찾아온다.
케트는 셰익스피어의 품속에 있던 낡은 오라클 콜트를 집어들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누었다. 눈을 감는다.
어떻게 이게 사랑이에요? 어떻게 이걸 사랑이라 말할 수 있어요?
녹슬어버린 태양의 시간 너머, 차가운 서리위로 뜨거운 열기를 품은 손바닥이 자국을 남기며 미끄러졌다. 너를 이렇게 만드는게 아니었는데.
결국 당신이 인정한대로 이 결정은 옳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비틀린 결과물이었다.
우리들은 같은 핏줄을 이어받았지만 끝까지 다른 사람이었다.
우리들은 서로를 마주보지 않았고 변화하는 시간만을 저주했다.
우리들은 성장하지 못했다. 과거속에 안주하려는 당신과 시간속에 길을 잃은 우리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요람앞에 무릎꿇은 여자는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너를 혼자 남겨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를 이 악몽속에 홀로 내버려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때 마지막인줄 알았더라면.. 그게 정말 마지막이었다면.. 나는 네게 사랑한다고 말해줬어야 했는데..!
동시다발적으로 떨어져내리는 조명이나 터져나가는 기계들이 익숙했다.
케트는 입술을 꽉 깨문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눈물이 터져나왔다. 서러웠다. 목이 메여왔다.
이게 사랑이라고요? 이게 가족의 마음이라고요? 그거 참 이상하네요. 이게 사랑이라면, 이게 당신들이 내린 결론이라면..
“이건 그냥 나쁜 꿈이야. 그렇지, 칼리?”
내가 이토록 외로울리가 없어요.
총성이 울렸다.
버려진 땅, 아무것도 살지 않는 버려진 공터의 지하에서 거대한 굉음이 솟아올라왔다.
연구소가 파고들어간 만큼의 거대한 원이 내려앉았고 연달아 설치된 폭발이 기둥을 무너뜨렸다.
꽁지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낀 남자는 한걸음 먼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리로 만든 렌즈속에는 무너져내린 핀카라의 단면들이 정신없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17구의 시신을 찾아 움직이던 시선은 이윽고 세번째문을 지나 무대 아래의 두 구, 그리고 무대 중앙의 두 사람을 찾아낸뒤 완료의 표시를 깜빡이고 있었다. 구 퀘사르 21명. 전원 사망.
포개어 쓰러진 한 쌍의 시체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남자는 손을 들어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혹시나 하는 보험은 필요없었다.
그녀는 결국 어린 아이. 그것도 아주 착하고 여린, 고집이 조금 센, 서리의 아이. 남자는 그리움을 담아 그들에게 약속했었다. 분명 나쁜일은 일어나지 않을겁니다.
나쁜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라.. 안경을 벗어 낸 남자의 시야에 새파란 하늘이 들어왔다.
그래, 이정도라면 좋게 끝난걸까. 그렇다고 해야할까. 자리를 뜨려는 남자의 귓가에 녹음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어느 탑에 갇혀 있을 유능하고 대범한 회사의 입사 면접 영상이 깨어진 화면에서 반쪽이된 모습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래서…...국.. 재능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올라가야했고 재능없는 자들은 아래층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모두 그곳을 떠나지는 않았지요. 네, 그래요. 우리들은 그곳에 자의로 남아있었습니다.
누군가 떠난다 한들 그 사람은 우리들을 붙잡지 않았어요. 기꺼이 내보내주었고 당연하게도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왜 였을까요. 왜 기껏 훈련시킨 요원들을 놓아준 것일까요. 그곳을 떠나면 안된다는 강박감속에서 보이지 않았던 사실이 이제는 보입니다. 이제는 알 수 있어요.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곳에서 나왔기때문에 알 수 있는 겁니다.”]
[“무엇을?”]
[“그 사람은 무언가를 빼앗기위해 피오나를 만든것이 아닙니다”]
“...........”
[“그는 지키기 위해 피오나를 만들었습니다 정확하게는 지킬 힘을 쥐어주기 위해 그 장소를 만들었겠죠.”]
[“잘 이해가 안가는데. 무언가를 지키게 하기 위해 두려움을 심어주었다는거야?”]
[“무언가를 잃어보지 않은 당신은 모릅니다. 그리고 나 또한 무언가를 잃은 적 없으니 몰라야 하겠지요. 하지만 나는 알고 있습니다. 알게 되었습니다.”]
[“........”]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이 두려워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게 되는 것도 무섭습니다.
한번도 본적 없고 들은적 없고 경험해본적 없는 감정이지만.
나는 그것이 얼마나 끔찍할지를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고뇌했습니다.
그게 내 안의 사람을 지치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방에 틀어박혀 고민을 거듭해왔습니다.
필사적으로, 내 모은 힘을 다해서, 돌파구와 해결방법을 찾기위해 내 모은 지혜를 쥐어짜내었습니다.
그게, 그들이 말한 위를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서로를 아끼고 위하고 사랑하는 길. 방법이나 요령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어리석은 여행자의 길.”]
[“하지만 그 감정마저 조작된 것이라면?”]
[“네, 조작되었을 것입니다. 그 계기는 분명 의도된 것일겁니다.”]
[“그렇다면 네가 그 사랑인지 뭐시기하는 감정에 매달릴 필요가..”]
[“하지만 사랑은 시작이 어떻게 되었든 상관없는 감정입니다.”]
[“....허….?”]
[“시작은 언제나 의도적이고 중요한것은 그 시작점을 어떻게 걸어나가는 것인지의 문제이니까요.”]
[“잠깐만.. 잠깐 기다려봐. 듣던 나도 어떻게 이상해진 것 같아.”]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서는 언제나 의도를 갖고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유혹하면 어떻습니까. 의도하면 어떻습니까. 말을 걸고 손을 뻗고, 저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 저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조차 그 사람을 바라보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늘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당신을 찾아온 것처럼.]
[“지금 사랑고백 아니지?”]
[“.....조금 짜증나네요 당신.”]
[“저기요? 지금 면접중이거든요?”]
[“어찌되었든. 내가 피오나에 대해서 말 할 수있는 것은 이게 다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람들을 얻었고, 피오나는 무의식중에 그것을 계속해서 위협해왔어요. 잃을지도 모른다. 사라질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이 꿈처럼 한순간에 깨어져버릴지도 모른다.
두려워 하는 우리들에게 단장은 스스로 방법을 찾아보라며 우리들을 방치했습니다. 스킬에 안주하는 이들은 그 힘으로 자신들을 지켜나갔고 다른 방법을 찾는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피오나를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방법이 마냥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그릇이 있어요.
나의 팀원들은 그것을 모두 담아낼 만큼 강인하지 않습니다. 떠나지 못한채 주어진 힘만들 받아들일 뿐인 작은 그릇들은 결국 피오나가 또다른 구속이 되어 얽매이게 되겠지요.”]
[“흐음…그래서 네가 그들을 모두 구출해내겠다?”]
[“나를 가르쳐보세요. 말이나 행동으로 가르칠 필요조차 없습니다. 나를 데리고가세요. 당신의 상상이상으로 성장해 보일테니까.“]
[“....저기 아까부터 묻는건데, 너 이게 면접인건 기억하고 있지?”]
[“아.. 뭐...저를 귀사에 뽑아주신다면..”]
[“......”]
[“.........”]
[“... .오케이, 콜. 채용이다.내일부터 우리부서로 나와]
[“.......조금 즉흥적으로 결정한거 아닙니까?”]
[“아니, 프로페서가 채어가기 전에 내가 먼저 도장찍어야해. 넌 내가 옆에두고 조져야겠다.]
[“거 면접중에 조진다가 뭡니까, 조진다가.”]
[“야, 빨리 도장찍어. 얼른찍어. 지금찍어. 찍어야 네 목을 모를 수가 있어.”]
저런면접으로 괜찮은걸까. 짠한 눈으로 영상을 바라보던 남자는 주머니속에서 울리는 진동에 손을 집어넣었다.
전화가 울리고있었다.
“네. 네, 네. 확인했습니다. 약속된 물건은 이제부터 회수하러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말입니다. 퀘사르의 프로그램이.. 아.. 네, 네.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는 금방 끊어졌다.
슈안은 뒤를 한번 돌아본 뒤, 발걸음을 돌려 무너진 핀카라를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