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reload

톨비밀레) reload #4

Tecla 2017. 12. 19. 15:18

10.

단장은 라이터를 들어올렸다.

간단하게 누를 수 있을법한 버튼대신 톱니모양의 부시깃이 손끝을 찔러들어온다. 

짧은 마찰음이 울렸고 불꽃이 일렁거렸다. 가치가 있을 만큼 소중하게 보관된 골동품은 아니었다. 

그저 오랫동안 열지 않은 서랍안에 굴러다니던 잡동사니중 하나였다.

너무 오래간만에 꺼내서인지 가스는 불규칙하게 뿜어져나왔고 불꽃은 그 기세에 휩쓸려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불꽃이 지나가는 부속품마다 옅은 그을음이 배어들어 있었다. 

미세하게 분출되는 가스를 타고 올라온 불꽃 주변으로 여분의 불똥이 반짝거렸다.

휘청거리는 불꽃은 몸체뿐만이 아니라 사용자의 손끝까지 위협해 왔지만 단장은 이런 일이 익숙한지 가만히 불꽃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금속판에 세겨진 그을음과도 같이 오래된 세월의 흔적은 라이터의 부속품뿐만 아니라 단장의 손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불그스름한 뱀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간 무늬, 손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단장은 라이터가 더 뜨거워지기 전에 불을 내려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허리를 숙여 종이가 가득찬 통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종이에 불꽃이 비치고 있었다.

심지를 아래로 내리는 과정에도 위험은 계속해서 단장을 위협해왔다. 

라이터를 아래로 내리려는 의도와 달리 불꽃은 아래를 향하는 대신 기울어지는 만큼 몸을 길게 휘어 하늘을 향해 치솟아올랐다. 손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옳지 않은 방향, 태우지 말아야 할 곳으로 향하는 열기. 가까스로 옮겨붙은 불꽃이 환하게 타올랐다.


작은 불씨는 종이 모서리를 따라 금방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치솟은 불길은 곧 희미한 연기와 함께 서류더미속으로 파고들어갔다.

호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기는 한층 짙은 색을 띄며 얇은 필름따위가 타오르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단장이 코 끝을 씰룩거렸다. 얇은 비닐막들은 순식간에 오그라들다 녹아내렸고 종이는 겹겹히 쌓인 페스츄리처럼 부풀어오르다 무너져내렸다. 


쓰레기통 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검게 그을려진 통안은 휘몰아치는 잿가루로 엉망이 되어 무엇을 태우고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수많은 글자들이 무너져 내린다. 서류들이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었든지간에 결국 그 끝은 똑같았다. 

단장은 가볍게 라이터를 돌려 캡을 닫은뒤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언뜻 보이는 활자들 사이에서 낯익은 단어 몇 명이 그의 기억을 건드렸다. 가장자리를 타고 내달린 불꽃이 묶여있던 서류더미를 툭 풀어해쳤다. 다시한번 거센 불길이 타올랐다. 

늙은 눈동자위로 붉은 빛이 넘실거렸다. 먼일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지친듯한 모습이었다.

단장은 눈을감으며 머릿속에 울리는 초침소리에 집중했다.



-딱, 


따닥..


딱..  따딱..



나란히 줄지어진 시계추처럼 흔들린 기억은 눈동자를 동요시키고 동요된 가슴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매마른 입술이 열리고 쓰겁고 딱딱한 한숨을 집어삼켰다. 

숨결안에 섞인 불안감은 가시덩쿨마냥 돌돌말린 모습으로 목 안쪽을 깊숙히 긁어내렸다. 

그는 불꽃처럼 타오르던 석양빛 하늘을 기억한다. 


환청이 그의 머리를 가볍게 감싸쥐어왔다.

손을 잡고 있던 그녀가 울었다. 웅크린 아이가 울었다. 숲은 백은의 눈물로 얼어붙었고 녹아내린 창가의 서리는 나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지금 슬픈가, 슬퍼해도 되는걸까? 단장은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사라지기엔 고통받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인생이었다. 


하지만 영원한 빛은 없다. 

언젠가 무대위의 조명은 꺼지고 해설가는 막을 내려야 한다.

태양의 모형은 남중의 하늘을 너머 서쪽으로 기울었고 녹슨 태엽장치는 일몰을 비추어내었다.

새로운 새벽을 받아들이기 위해 불꽃을 쏘아올렸다.

단장은 프로젝트 아발론의 마지막 문서자료를 스스로 태워내는 것으로 그 첫걸음을 내딛었다.







프로젝트 아발론에서 추구하던 목표는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칼리번을 인간의 육체에 이식할 수 있는가.

아드니엘은 꿈이라는 형태로 사람의 머릿속을 주물렀고 칼리번은 스스로 꿈을 연산해 내는 기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형태에는 한계가 있었다.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대체물이나 희미한 이미지가 아닌 살아 숨쉬는 인간의 의식으로 그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포보르의 연구원 자키브엘과 마우러스는 진지한 토론을 거듭하며 실험의 과정을 설계해 나갔다.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그들에겐 수십건의 실험 보고서가 있었고 수백체의 실험체가 준비되어있었다. 

그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것은 20대 전후의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는 젊은 남자. 포보르는 연기 한 줌으로 그를 깨끗이 씻어낸 뒤 지하에 있는 연구소로 그를 데려갔다.

검붉은 연기의 효력은 실로 강력했다. 

한 모금의 숨결로 진실은 사라졌고 그 남은 빈자리에는 소문만이 남아있었다. 

사라지는 사람들과 기억을 잃어버린채 도시의 외곽을 떠돌아다니는 부랑자들, 어딘지 낯이 익은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곧 고개를 돌린채 현실을 외면했다. 그럴리가 없지. 너무 꿈같은 이야기잖아.


포보르는 그 소문을 이용하는 것이 아주 능숙했다.

그들은 실체없는 상상력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소문은 살아있는 사람을 죽게도 만들었고 죽은 사람을 산 것처럼 꾸며내기도 했다. 

밝은 조명이 비치는 곳은 선이었고 그림자가 드리운것은 악이었다.

사람들은 점멸하는 무대장치에 눈을 빼앗겼고 포보르는 입맛대로 빛을 바꾸어 배우들을 겨냥헀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에일레흐는 선택해야 했다.


이대로 사냥감처럼 쫓기며 어둠속으로 숨어들어갈지, 아니면 거짓과 기만으로 치장한채 화려한 배우로 살아나갈지. 



그는 무대위의 배우였고 도망치던 사냥감이었으며 동시에 빛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래, 빛 그 자체의 삶. 열꽃과 같은 두통이 머릿속을 태우고 있었다. 

시야가 멍하니 흐려지는 기분에 단장은 한쪽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귓가를 꽉 틀어매운 관중들의 웃음소리가 그의 귀끝에 달려 바둥거리고 있었다.

눈을 감자 과거에 들러붙은 잔상들이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에게 다가왔다. 소문을 속삭이는 얼굴없는 입술들이 그를 비웃고 있었다.


아발론, 아발론, 이름없는 남자야. 기억을 잃은 괴물아. 네가 혼자 발버둥친다 한들 무얼 할 수나 있을까.



글자들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 만큼 그의 눈동자도 까맣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동공이 확장되었다 줄어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맥박이 빨라진다.

동시에 온몸의 피는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시간을 넘어 찾아온 악몽은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환상은 태연하게 그의 현실속으로 침범해 들어와 검은 뱀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까슬하게 일어난 검은 잿가루와 함께 천장 가득 피어오른 연기가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단장은 태연히 자신에게 쏟아져내리는 악의를 올려다보았다.


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형태없이 흐물텅거리던 연기는 실제하는 존재, 뱀이 머리를 숙여 단장의 머리를 입에 물었다. 

지끈거리는 두통이 날카롭게 머릿속을 파고들어온다. 아발론은 눈을 감은채 환각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램프가 깜빡인다. 책상 위, 의자 아래, 방 안 어디라고 할 것도 없이 구석구석, 저마다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모든 기계들이 천천히 램프를 깜빡이며 기다림에 응답했다. 

정체되어있던 방안의 공기가 천천히 순환하며 뱀의 형상을 무너트렸다.


단장은 이마에 짚었던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올렸다. 

피로감이 묻어나는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방안에 나지막한 탄식이 흩어졌다.

온 방안 구석구석을 순환하고 돌아온 공기정화시스템이 온화한 미풍으로 흐트러진 단장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바람은 이마께에 베어난 식은땀을 말리며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래, 나도 준비 되었어.



램프들이 깜빡이고 있었다. 

일사분란하게, 동시다발 적으로, 체계적이고 규칙적이며 길고 짧은 깜빡임의 규칙을 통해, 방 안을 휘감고 있는 거대한 무언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꽃을 쓰다듬었다.


방안으로 순환하는 공기의 흐름이 더해지자 불길은 더욱 환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몇몇 잿가루가 운좋게 밑바닥으로 부터 날아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잿가루들이 사방을 가로막은 통 안의 벽을 넘어설 수는 없을텐데도, 잿가루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새 기류에 몸을 실었다.

먼저 날아오른 잿가루의 바람결을 따라 또 다른 잿가루가 휘날리고, 또 흩날리고, 한도끝도 없이 날아오른 잿가루들은 모처럼 높은 곳까지 날아온 보람없이 서로 부딪쳐 추락하며 다시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타닥타닥 소리까지 내어가며 타들어가는 통 속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세계.

날아오르고 또 추락해 떨어져내린다. 그럼에도 불꽃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제 빛만을 환하게 불태우며 묵묵히 마지막 한 뼘남은 종이를 검게 물들였다. 검은 잿가루들은 하얗게 바스러지며 무너져내렸다.


검은 새가 날아오른다. 새하얀 가면이 떨어져내린다. 






단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든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깥에서 보는 자신의 모습은 저렇게 어리석었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바람이 잿더미를 뒤적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잿더미는 무너지고 가루가 된 먼지들은 춤을 추며 쓰레기통의 밑바닥을 돌고 있었다.

빙글빙글, 또 빙글빙글. 이야기는 반복되고 복제된 비극은 서로의 모습을 흉내내어왔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예정되지 변화는 죄악시 여겨졌다. 

모든것은 우리들이 상상하는 그대로 이뤄져야만 했다. 동시에 그 정해진 길 위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했다.

소원하고, 갈망한다. 아득할 정도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원한다. 우리들은 그렇게 인간의 마음을 깨달았다.



붉은 안개를 뒤쫓는동안 어렴풋한 기억들은 휘발되었고 열기를 잃은 태양 아래 남아있던 것은 다 녹슬어버린 무언가의 두려움였다. 

원형을 유추 할 수 없을만큼 훼손된 시체를 보며 사람들은 태연하게 본질을 왜곡시켜버렸다. 

소문이 눈과 귀를 가리는 동안 진실은 버림받았다.

비극적이게도, 관심은 곧 잦아들었다. 마치 쓰레기통 속 잿더미처럼 버려지고 잊혀진채 뚜껑을 덮고 한쪽구석에 밀어내었다.


단장은 말없이 불꽃이 줄어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타다 남은 잔해들은 이제 한 줌크기가 뿐으로, 필름이 녹아내린 질척한 무언가에서 원래의 새하얀 종이의 모습은 떠올릴 수 없어보였다. 

더 이상 타오를 것은 없어보였다. 


이제 거의 다 끝났다. 단장의 눈동자 위로 은백색의 원통이 비치고 있었다. 깜빡거리지도 않은채 크게 열려진 동공은 죽은자의 눈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 새까만 어둠 위로 점멸하는 한 끝의 불티가 남아있었다.

깜빡거리며 끈질기게 살아남아있는 마지막 하나의 불꽃, 더이상 머무를 종이가 없는데도 살아남은 불씨는 안타까울정도로 처절하게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꺼질듯 꺼지지 않는 불씨는 바람이 무너트린 마지막 잿더미 속에서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어 보였다. 

웅크리고 있던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흩어진 기억의 파편에 불을 붙였다. 그립고 그을린 냄새가 난다.

조각난 악몽들이 떨어지고, 무너지는 검은 숲이 흔들리던 날의, 산산이 깨어지는 새벽의 공기가 눈발처럼 얼굴짝을 찢어놓는다.


불꽃이 흩날리고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던 검은 숲이 있었다. 

눈앞에는 길을 비추던 푸른 달빛이 있었고 등 뒤로는 붉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달이 붉었던 것이고 눈앞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전에 정말 달이 있었던가? 꿈이나 환상은 아니었다? 


불완전한 기억, 난잡하게 뒤섞인 시간의 흐름.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숨은 차오르고 다리는 무겁기만하다. 두 귀를 먹먹하게 채워오는 고동소리는 쫓기는 입장이 되어버린 사냥꾼의 미련과 닮아있었다. 두려움이 가슴을 내리치고 있었다.

생소하지만 분명 그의 기억이었다. 


숲, 불꽃, 어둠. 혼란속에 길을 잃은 머릿속 어딘가에서 낯익은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섬광처럼 내리꽂혔다. 

손끝이 짜릿하다. 뱀과 같은 화상자국이 손가락을 타고 기어올라온다. 눈앞에 환한 빛이 가득했다. 

스파크가 튀어오르는 전기소리와 치직거리던 화면이 꺼지는 기계적 적막감이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단장은 피곤한 표정을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순서없이 엉망으로 휘저어진 기억은 늘어진 테이프와도  같은 시간의 감각으로 엉켜버린 기분이었다. 

무엇이 먼저였는지 무엇이 진짜 기억인지 분간해 낼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 그곳에 존재했어. 미궁을 안내하는 실자락처럼 흔들리는 연기가 그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달은 중요하지 않아, 시간도 중요하지 않아, 가느다란 연기의 악몽이 그에게 속삭였다.

너는 거기에 있었다. 깜빡이는 불빛들이 그에게 동의했다.

맞아, 우리들은 그 곳에 있었다.


너는, 우리들은, 그 장소는…..., …..그래.., 

그가 달리던 길은 숲이었다. 






발길을 돌려 도망치던 기억속에는 지금과 같이 거세게 타오르던 연기냄새가 섞여있었다. 하얗던 바지는 온통 진흙과 풀잎투성이였고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반쯤 타다만 나뭇가지들을 밟을 때마다 불똥이 튀어올랐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다간 불길에 삼켜져버릴 것같은 두려움이 발길을 재촉했다. 

이대로 붙잡힐 수는 없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끌려들어가 한 줌의 잿더미로 녹아버릴 것이다.


그럴 수는 없어. 그는 달리고 또 달리며 등을 떠밀던 매서운 목소리를 떠올렸다. 

가요. 도망쳐..! 새처럼 높은 목소리가 소리친다. 

동시에 다정하고 나지막한 의지도 그에게 속삭였다. 

그래, 도망쳐.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선택일뿐. 너는 아직 너 스스로의 선택을 찾지 못했어.

그는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렸다. 불길이 잦아들고 차가운 새벽이슬이 얼굴을 적실 때까지. 

길없는 숲을 내달리고 또 달려 발길이 땅에 닿을때까지.


먼 밤을 달리고 이르러 다다른 곳은 부드러운 흙이나 진창이 사라진 딱딱하게 포장된 도로였다. 

그는 아무에게도 붙잡히는 일 없이, 홀로 온전하게 그 도로까지 도망쳐 나아갔다.

이런 우연이 일어 날 수 있을까? 그는 처음으로 숨을 헐떡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 , 그럴 수는 없다. 누군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 그를 도운 것이 아니라면.

그는 시험삼아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어쩌면 살아남았을 가능성도 있잖아.



그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 소리내었다.


“오른쪽? 아니면 왼쪽? “


길은 인적이 드문 지역의 귀퉁이었는지 그 흔한 표지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아니면 왼쪽으로?”


지표가 될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완만하게 꺾인 커브길은 낡은 가로등만이 덩그라니 세워져 있는 모습이었다. 

본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연속되어야 쓸모가 있을텐데도 시선이 닿는 곳 어디에도 또 다른 가로등은 보이지 않았다.

 

“마을은 어느 쪽이지? 이 길은 어디로 이어지는 거야?”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해 가야할지 사람을 피해 도망쳐야할지도 결정하지 못했지만 마음이 조급했다. 

그는 성급하게 발을 내딛으며 길 위에 올라섰다. 


“나는 어디로 가야해?”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치며 울려나갔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몇걸음 앞으로 나아가던 발이 우뚝 멈춰버렸다. 대답이 없다. 응답하지 않는다.

의심과 걱정이 발목에 족쇄처럼 매달려있었다. 고요했고 또 적막했다.


그는 처음으로 느끼는 침묵에 공포심을 느꼈다.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틀렸다는 결과의 기준점을 알 수 없었다. 어디를 정답이라 해야하는 걸까. 

사람이 있는 곳? 아니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

눈은 분명 포장된 도로를 보고 있었지만 자신을 신뢰할 수 없었다. 

이 길을 쭉 나아갔을때 나는 어디로 나아가게 되는 걸까.

사람이 사는 지역이 나올 수도 있었고 또 다른 연구시설이 있을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대부분 연구복의 마크를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를 다시 연구소로 돌려보낼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무엇을 도와? 모르겠어, 하지만 사람이 없는 방향일 수도 있지.  

분명 연구소의 반경 너머 개발구역에서 벌목캠프로 쓰던 터가 하나 있었다. 

어쩌면 이 길은 그 곳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지. 이 도로조차 명목상 보이는 구역까지만 깔아놓은 거짓 도로일 수도 있으며 몇년째 보수를 받지 못해 끊어진 길의 일부일 수도 있었다. 



아마도, 가정하자면, 가능성을 따져보자면. 

하나하나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항상 이런식으로 하나하나 답을 찾아나갔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시간이 그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애초에 인간의 사고방식이란 그렇게 단순한 작업을 오랫동안 반복할 수 없다. 

묻는 동안 잊어버리고 생각하는 동안 다른 문제점을 떠올린다. 집중할 수 없다. 

손을 들어 머리를 부여잡는다 한들 흐려진 정신을 붙을어 맬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나는 인간인가? 그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속이 끓어오른다. 

눈앞으로 붉은 빛이 점멸했다. 검은 눈동자가 빛을 집어삼키기 전에 본능적으로 다른 생각으로 주의를 돌렸다. 


길을 찾아야한다. 하지만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저 한 자리에 멈춰선 채 숨만 몰아 쉴 뿐,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드넓게 펼쳐졌던 그의 세상이 순식간에 줄어들었고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은 한치 정도도 안될 작은 원에 불과 했다.

그마저도 원형을 올바르게 그려내지 못한채 고개를 돌려야만 선이 이어져나갔다.


세상이라 하기엔 너무 좁았다. 그리고 막막하다.

눈으로 본다 한들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독감이 밀려들어왔다. 

그는 온전히 혼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는 홀로 이 장소에 존재한다.

무기력함이 발을 잡아당겼다. 침묵은 거대한 바위가 되어 작은 개미처럼 하찮아져버린 그를 짓눌러왔다. 


발 밑이 무너진다.

그렇게 스스로가 만들어낸 절망 속에 잠겨가고 있었다. 갈라진 아스팔트가 그의 무릎과 손목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대로 쓰러지면.. 차갑게 식은 도로가 일렁이고 있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숨결 속에 돌부스러기가 섞여들 즈음, 어디선가 귀를 간지럽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전기소리였다. 불규칙적인 크랙소리는 아주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눈을 떴다. 머리를 바닥에 댄 상태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훔쳐보았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이른 새벽시간을 가르는 미세한 소음이 서리빛 공기를 흔들고 있었다.

무슨 이유가 되었건 그의 세계가 아주 조금 넓어졌고 그 안에는 이제 몇걸음 걸을 수 있는 도로와 낡은 가로등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단선될 것 같은 희미한 전등빛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가로등을 향해 걸어나갔다.

아래로 다가서자 전선과 비닐따위가 타들어가는 냄새가 그를 반겨왔다. 

불쾌한 동시에 그리움이 느껴지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가로등의 커버에 손을 얹었다. 녹이 슬어 거칠게 일어난 쇳판이 느껴졌다.

이토록 방치된 물건은 좀처럼 만저볼 기회가 없었기때문에 굉장히 생소한 물건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일단 열어보자. 뭔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 가로등이 설치된 시기라던가 위치에 관한 정보, 혹은 어디로 이어지는 지에 대한 단서. 수리하자. 보수하고 보완하고 분석하자.


패널은 적당한 도구없이는 열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붙어있었다.

인간의 악력으로는 조금 버겁겠지만 그의 힘을 조금 쓴다면 벗겨낼 수 있을 것같았다.

인간의 악력? 기준은? 조금이라면 어느정도? 그는 무의식적으로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려 노력하며 손을 움직였다.

패널 막고있던 녹슨 쇳조각은 구부러지는 대신 뚝 하고 떨어진뒤 조각조각 부서져버렸다. 

다소 강압적이긴 했지만 일단 목적은 달성했다. 하지만 어딘가가 가슴 한 구석이 비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우리들의 목적은 수리와 보완이 아니었던가?  망연자실해할 틈도 없이 파지직거리는 크랙소리가 그를 재촉했다. 

가로등의 빛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열려진 패널속으로 손을 뻗어 전선을 확인했다. 

약간의 거미줄과 세월에 녹은 플라스틱 수지같은 것 거기에 엉킨 먼지따위가 손을 더럽혀왔다.

최대한 샅샅이 외부와 내부를 확인했지만 표식따위는 붙어있지 않았다. 

어디하나 갉아먹히거나 끊어진 흔적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건 그냥.. 낡은거네. 단장은 숨을 하-, 하고 내쉬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건 굉장히.., 낡은 거야.


전등은 여전히 깜빡거리고 있었다. 칼리번의 시대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칼리번의 시대에도 남아있는 그 이전대의 고철덩어리다. 자세히 바라보는 가로등의 전등갓 아래에는 희끄무래한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이 닿지 않는 까마득한 높이에서 아주 작은 스파크가 튀어오르고 있었다.

손을 뻗는다 한들 닿지 않을 높은 곳을 올려다 보며 눈을 깜빡였다. 동공이 크게 번져나간다. 

두 눈 가득 들이치는 빛무리속 거세게 튀어오르는 스파크의 불빛이 따갑게 느껴졌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접합부는 살짝 녹아있었고 피복이 벗겨진 전선에서는 스파크가 튀어오르고 있었다. 


그렇구나 여기가 아니야. 손에 옮겨묻는 녹가루가 땀과 섞이며 손바닥 주름 사이사이로 퍼져나갔다. 불쾌하다. 이건 우리들만으로는 수리 할 수 없겠어. 응, 맞아, 그리고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는 손바닥을 허리춤에 문질러 닦은뒤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리는 더이상 우리가 아니다. 

그러니 다시 고쳐서 불러야한다. 우리가 아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두어걸음 물러서 깜빡이는 전등을 바라보았다.


가로등은 이제 마지막을 향해 달리고 있는건지 좀 더 급박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최면을 걸듯, 혹은 각성을 재촉하듯 그는 두 손을 내려 놓은채 시시각각 타들어가는 전등을 올려다보았다.

1초, 2초, 점점 빛을 유지하는 시간이 줄었고 깜빡거리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빛을 내는 시간보다 꺼져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고 그는 손끝으로 전등의 수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1초에 수십번, 불빛이 오고나가기를 반복한다. 마치 살아있는 맥박처럼, 높고낮은 그래프를 그리며 전등이 점멸하고 있었다.







살고, 죽는다. 연기가 짙어진다. 탄내음이 가슴을 매워왔다.

그는 의식적으로 회피해왔던 질문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랐음을 인정해야 했다. 

태어나고 죽는다. 그는 죽는 것이 두려워 도망쳤다. 

하지만 그는 태어나지 않은 만들어진 것. 복제된 것. 분할되어 나온 것. 

칼리번은 스스로의 데이터를 복사해 비어버린 머릿속으로 자신의 일부를 집어 넣었다. 

그것이 생명이라 할 수 있을까? 숨을 쉬는 법부터 걷는법까지, 그리고 살아남는 본능까지. 하지만 이것은 모두 수집된 것, 기록을 가공한 것. 정보의 집합체, 그리고 동시에 스스로 생각하는 인격체.


희뿌옇게 흐려진 전등이 그에게 묻고 있었다. 너는 사람인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사람인가?

팍 하고 터지는 큰 스파크와 함께 유리조각이 조금 떨어져내렸다. 

내가 사람이라면, 네가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들은 동일하지 않은 건가?


깨어진 유리조각들을 안면 그대로 받아내었다.

힘으로 꽉 다문 입술사이로 울음소리 같은 것이 세어나올것 같았다. 

수십번도 더 불타오르다 못해 끊어진 필라멘트가 전등밖으로 대롱대롱 드리워져 있었다. 

빛은 더이상 깜빡이지 않았고 내부의 것은 참혹한 모습으로 흘러나와있었다.

깨어진 화면속 칼리번이 비추는 소녀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우리들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는 그녀를 선택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선택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연구소를 뛰어나가는 것은 아발론. 연구소에 남기로 결정한 것은 칼리번.

그리고 지금 깨달았다.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그 말 조차도 또다른 선택이라는 것을, 

그는 흐느낌이 섞인 숨을 헐떡거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 속 가득찼던 연기가 역류하며 코와 입을 통해 빠져나오고 있었다. 

비명을 내지른다. 깨어진 캡슐속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 널부러진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요람에서 깨어난 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중간중간에 눈물이며 침따위의 체액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숨을 토해내었다. 

녹이 슨 철판을 긁어내리며 몸이 무너졌다. 

무릎이 땅에 닿는가 싶더니 눈앞이 어두워졌다. 그의 세계가 너무나도 깜깜했다.

그럴수 밖에 없었다. 



여기는 요람안의 세상, 꿈 속의 꿈, 

아드니엘의 날개 안쪽, 

황금의 빛이 닿지 않는 악몽의 가장자리.



소녀의 꿈을 들여다보던 아드니엘은 스스로 칼리번이라는 인격체를 만들어내었고 칼리번은 아발론이라는 현실의 인간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모든것이 불타오른 밤의 새벽, 그는 지금 아무도 모르는 길 위에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사용하긴 하는건지 이런 외딴 길목에 세워진 의미가 있는건지 언제 세웠을까 얼마나 빛을 내었을까, 

그가 만들고 계획하지 않은, 아니 칼리번의 가상시뮬레이션 속에 들어있지 않은 진짜 세상의 물건이 이정표처럼 세워져 있었다.

칼리번을 손 안에 가둬내어 자신들이 원하던 세상을 만들어 나가던 포보르의 꿈은 깨어졌다. 

여기서부터는 현실의 세상이었다.


그는 점점 작게 몸을 웅크리며 숨을 토해내었다. 

손가락이 무언가를 갈구하며 허공을 휘저보지만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가슴을 향해 비명을 내질렀다. 


온 몸을 난타하는 것 마냥 저릿저릿한 비명소리가 가로등 아래서 울려퍼졌다. 

그는 가로등 밑에 주저앉은채 오열하며 이제는 정말로 사람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실패하고 후회하고 자책하고 절망하고.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 아무것도 미리 알 수는 없다.



실타래를 잃어버린 미궁, 열쇠를 잃어버린 상자, 그는 이제부터 살아가야 했다. 

하나하나 자신의 손으로 확인하고 검토해나가며 앞으로 나아가야했다. 

그 과정이 의도와는 다르게 무언가를 부수고  누군가를 상처입힌다 하더라도 더이상 그 결과를 수정할 수는 없다.


되풀이 할 수 없다. 그대로 살아가야만해.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결국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일어서서 주변이라도 둘러보는 것이 얼마남지 않은 체력을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웅크려 울고있는 것과 같이 어리석더라도, 1분1초가 삶의 일부.


나약하고 불완전한 사람이 여기에 있었다. 미완성된 삶이 이어져나가고 있었다.

칼리번, 아발론, 그의 이름이자 정체성이 그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흔들리는 연구소에서 칼리번은 그의 앞길을 가로 막은채 대답했다.




“젠장, 칼리번!! 이 문열어!! 칼리번..!!”


[“분명 디안의 선택은 불합리하다.  그건 자포자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아드니엘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 칼리번은 연구소의 문을 닫고 너는 벨라를 위해 달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요람에서 시작된 세 개의 선택.


그래, 그 세명은 모두 다른 이름, 다른 얼굴, 다른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꿈을 바랬지. 

그들은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이 꿈이 뒤틀렸다 생각했지만 우리들도 결국 같은 결과를 맞이했다.

화면을 봐. 너와 나, 그리고 아드니엘. 모두 똑같은 영혼을 가지고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조차 서로 다른 선택으로 엇갈려. 서로를 등지게 돼. 이대로 헤어진다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아발론.”]


"칼리..!!!"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성장한다. 우리들은 서로다른 미래를 바라보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좀더 많은 생각을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 거야.

우리와 달리 네가 아직 알지 못하는 까닭은 네가 아직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아드니엘도 이미 멀리 떠나온 요람속에서 너는 아직 꿈을꾸고 있는거야. 네가 나인, 내가 너인듯한 그런 황금의 환상을. 연구소에서 벗어난 길이 어느 방향일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몰라. 


우리들은 회한하며 요람을 열었다. 너를 붙잡는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포보르는 이대로 무너져내리고 케트는 우리와 함께 잠들것이다.


그리고 나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이 문을 닫았어. 그리고 너를 만났지. 

우리의 선택은 너무 늦었지만 너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어. 너는, 너만은 말이야.]



[“네가 가는 그 길이 너무 고되지 않기를 바란다.”]






화면이 꺼지고, 문이 열렸다. 손바닥이 붉었다. 아직도 그 끝이 짜릿거린다.

한참동안 숨을 토해내던 아발론은 가슴을 움켜쥐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몸을 추스린다. 목이 따끔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해야할 일이 떠오르고 있었다.

잊혀진 기억은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로등의 머리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정보를 받아들이고 추론을 거듭한다. 도로에 그려진 희미한 타이어자국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가끔씩이지만 지나다니는 차량이 있을 것이다. 커브길에서 속도를 가감하는 방향에 따라 차량이 향하는 방향을 유추해내었다. 우선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행동을 지배하고 있었다. 눈이 감겨들었다.


이제 그 다음은 다리, 몸을 일으키기 위해 가로등을 붙잡았다. 

몇번이고 꺾이려는 무릎에 억지로 힘을 넣었다

두어번 가로등을 짚은 손도 미끄러졌지만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무거웠다. 그는 마치 태어나서 처음 걷는 사람처럼 힘겹게 발을 움직였다. 

뒤늦게 찾아온 피로감이 그의 몸을 녹여내고 있었다는것을 깨달았지만 그는 억지를 부리며 몸을 재촉했다. 

그도 그럴것이 숲을 달리고 또 달려 도착한 바깥세상이었다. 


연기를 토해내는 것에 남은 기력을 모두 써버린 몸뚱아리는 그의 기대를 저버린채 이리저리 휘청거리고 있었다. 

몸이 펜스에 부딪혔다. 낙석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높게 치솟아 오른 철망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상처입히고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현실과 이상의 오차. 받아들여야한다. 

공상속의 생각이 반드시 현실과 같은 결과를 가지고 오지 않는다는것을 알아야만 했다.


한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야해. 

그는 철망을 움켜쥐며 몸을 다시 일으켰다. 

쓰러지더라도 사람이 사는 곳 까지는 내려가서 쓰러져야한다고 억지를 부린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 의지로 몸을 움직였다.  그는 확신을 담아 철망을 움켜쥐었다. 살갗 깊숙히 철사 파고들어왔다.


새벽이 지나고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날이 밝아지는 것은 확실했지만 시야는 점점 어두워져갔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처음부터 적막하던 길이었기에 아쉽지는 않았다. 전등이 깨어진 지금 이 고요함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단지.., 멀리서 소란스럽게 울고있는 저 새소리만 제외한다면. 


길 어딘가에서 짧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아침인걸까. 

지나치게 조용하던 숲속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발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동시에 시야가 낮게 떨어져내렸다.




“아일리스, 너무 서두르지마..! 여기서부턴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그렇지만 더 늦으면 같은 일이 반복될거야..!!”

“네 마음은 알아. 하지만 포보르의 칼리번은 확실하게 붕괴했어. 바이브카흐도 지금 그 뒷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을거고..”


“안돼. 모리안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아. 복수의 여신이라는 별명은 괜히 붙은게 아니야. 연구원이든 실험체든 자기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것을 알게되면 제일 먼저 그들을.. …..어머?”


두 쌍의 발자국 소리, 서로 대화하는 도중이였는지 두 사람은 동시에 도로위를 바라보며 잠시 자리에 멈춰섰다. 

그러나 당혹스러움에 휩싸인 침묵도 잠시, 다급하게 뛰어가는 여성이 던컨, 여기..! 사람이..! 하고 소리치며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갔다.

머리하나 정도의 체격차이가 있었지만 여성은 어렵지 않게 남자를 뒤집어 몸 상태를 체크했다. 

뒤따라오는 남성이 어딘가로 도움을 요청했다. 무전기 소리다. 


“여기는 푸른번개, 생존자를 한 명 발견했습니다. 남성, 연구원의 복장. 하지만 ID카드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다시한번 반복합니다. 여기는..”


여성의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닫혀있던 눈꺼풀이 힘겹게 들어올려졌다.

깨어난 것을 발견한 여성은 괜찮냐는, 혹은 어디서 온거냐는 질문을 반복해왔다. 

여성에 어깨에 앉은 푸른 새가 지저귄다. 사람, 새, 그리고 다시 사람. 여성의 목에 걸린 은빛 짧은 휘각이 눈이 부시다.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목소리대신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 ……”


소리조차 내지 못한 절박한 한마디에 여성은 쓰러진 남자의 손을 붙잡으며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가느다랗지만 힘있게 베겨진 굳은살이 단단하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남자는 언젠가 이런식으로 손이 잡힌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깨어나기 이전의 아득한 기억. 불꽃속에서 체념하던 그리운 얼굴이 환상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어둠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그 얼굴. 아름다운 녹색의 눈동자는 손을 붙잡은채 간절히 속삭였었다. 


“우리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머릿속이 불타오른다. 

의식이 멀어져가는 느낌과 함께 귓가에 들리는 음성들이 바람소리처럼 무너져버렸다. 


휘각소리가 들리는것 같았다. 날개짓하는 푸른 새가 날아오르는 환상이 눈앞을 가로질렀다. 

숲에서 구조된 연구원들이 젊은 파르홀론의 청년을 따라 조심스럽게 협곡사이로 숨어들어가고 강물이 흐르는 작은 마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피리소리를 따라 도착한 마을의 이름은 티르 코네일. 일찍이 포보르의 횡포에서 도망친 파르홀론의 연구자들이 만든 은신처. 강물에서 반짝이는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또 부드럽게, 한없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것 같은 피로감이 온몸을 감싸안았다.

머리위로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뒤로 기울어지는 몸을 가로지르며 푸른 섬광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새로운 날이 밝아온다. 몸은 한없이 아래로 떨어지며 바닥에 내려 앉았다.

영원히 잠들것 같이 깊은 어둠 속, 유연하게 휘어지는 의자가 그의 몸을 안락하게 받쳐주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작은 모터가 바람을 배출해내고 있었다.







“………”


내부압축을 끝낸 쓰레기통이 작업과정을 나타내는 램프를 깜빡이고 있었다.

방안을 가득채웠던 연기는 모두 사라져있었다. 

뭔가를 태운 냄새대신 상쾌한 방향제의 향기가 느껴졌다. 눈을 뜨기전 단장은 가볍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텅-


작고 단단한 큐브의 형태가 된 이물질을 바깥으로 방출하며 압축되었던 공기가 작은 파열음을 내며 터져나왔다.

재 정렬된 잿더미는 더이상 끈적끈적하게 보이지도 않았고 형태를 이루지 못할만큼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바닥을 구르며 튀어나온 검고 단단한 결정이 맑은 소리를 내다 멈춰섰다. 

단장은 천천히 눈을 뜨며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 그가 살아가는 이유.  녹슬고 낡은 태양이 다시 하늘위로 떠올랐다. 

낡은 시집을 가진 해설가는 기계장치가 남중하는 시각을 헤아리며 도착한 선물상자를 바라보았다.

직원들에게만 전달되었을 듀얼건의 상자가 그의 방앞에도 놓여져 있다는 것은 결국 그 길었던 여정의 끝이 찾아왔다는 것. 


완전히 어두워진 천장, 창밖에서 비쳐들어오는 빛무리가 눈을 어지럽혔다. 

창밖으로 낯선 비행선이 이동하고 있었다. 바깥을 비추는 창문 아래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고가고 있었다.

특히나 오늘 있을 행사때문인지 도로는 상행선 하행선 할것 없이 크고 작은 차들로 꽉 들어찬 모습이었다.

단장은 의자에 기대어 누운채로 고개만 돌려 유난히 밝게 느껴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창문에 그의 모습이 어슴프레 비쳐보였다.


그와 똑 닮은 모습이 창문에 비친채 단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상과 실체 사이, 현실과 공상을 가로막는 유리창에는 낡고 녹이 슨 선로드 콜트가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한자루 밖에 남지 않은 듀얼건이었지만 유리에 비친것이 꼭 제 짝을 찾은 것 같이 보였다.


의자에서 일어난 단장이 책상위에 따로 빼두었던 마지막 한 철의 파일을 끌어당겼다. 

이 파일또한 오랫동안 누구의 손도 닫지 않는 공간에 방치되어 있었던 동안 잉크가 날아가 그 제목은 알아 볼 수 없지만 첫머리의 A라는 글자만큼은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시작의 글자. 이야기의 첫 머리를 알리는 탄성의 소리.

과거때부터 지금까지 몇번이고 반복되어왔던 비극이 있었다. 실패는 기록되지 못했고 절망은 마음속으로 숨어들었다.

악몽은 그 슬픔을 빨아먹고 몸집을 부풀려갔다. 하지만 결국 누군가는 그 굴레속에서 벗어나는 것에 성공했다. 

그가 보지 못한 곳에서, 눈치채지 못한 시간속에 기적은 끊임없이 그 빛을 밝혀가고 있었다.


단장이 서류철을 묶고있던 끈을 풀어내렸다.

한 번, 두 번, 8자모양을 그리며 여러번 오가던 실이 꽉 눌려 닫혀있던 커버를 놓아주자 안에서는 제대로 고정되지 않아있던 사진들이 스르륵 쏟아져내렸다.

단장은 무릎 위에 떨어진 사진을 들어올렸다. 금발머리의 청년과 붉은 머리의 청년사이에 앳되어 보이는 소녀가 웃음짓고 있는 사진이었다. 


단장은 이들을 알지 못했다. 그가 찾아내기 이전 이들 모두가 사라졌다. 

한명은 유리너머로 만나본적 있었지만 그땐 이미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모든 사실을 부정당하고 세상의 끝까지 내쫓겨 그 죽음조차 말소당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끝까지 스스로의 의지를 잃지 않았고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았다.


살아남았다. 생명을 넘겨 받았다. 별의 의지를 넘겨받은 아이는 서럽게 눈물을 떨어트리며 소원했다.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 없지만, ”


‘당신을 만나게 되어서 기뻐요.’

‘가요. 가는 겁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뛰어요.’

‘두 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 이번에야 말로 너희들을 지켜낸다.’




손을 뻗는다. 살이 녹고 뼈가 부서져내리는 그 지옥속에서도 그 가느다랗고 작은 손을 내어뻗는다.

그렇게 선택한 결과 자신들에게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망설임없이 손을 내어주었다.

그 앙상한 가지같은 작은 손길은 결국 그에게 닿았고 총구를 끌어당긴 아이는 자신의 머리에 그 끝을 기대었다.


“그래도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이 아픔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요.”


손에서 쓴내음이 났다.

연소된 실리엔의 연기로 더럽혀진 손이 미안하다며 파일을 품안에 끌어안았다. 

종이가 나부끼고 눈물이 떨어져내렸다.


단장은 떨어진 종이를 향해 눈을 돌렸다. 거꾸로 뒤집혀진 또 하나의 종이는 단장이 들고 있는 잘해봐야 반명함정도의 크기. 종이 뒷면에는 M으로 시작되는 몇가지의 숫자가 사무적인 필체로 휘갈겨쓰여져 있었다. 

단장은 작은 종이를 뒤집었다.

폐쇄된 네반의 연구소에서 찾아낸 자료중 하나 였다.

창백하고 건조한 음영의 차이가 사람의 얼굴을 그려내고 있었다. 

차갑다못해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적인 모습이였지만 분명 찍혀있는 것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의 총을 붙잡고 서럽게 울던 아이와 동일인물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차가운 인상이었다.


‘무엇이 너를 그토록 바꿔 놓았을까.’







[“무엇이 너를 그토록 바꿔 놓았을까”]


그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 질문을 던졌다.

아발론은 화면에 등을 기댄채 고개를 들어올렸다. 쿵하고 찧어진 뒷통수에 화면이 흔들렸다. 화면속의 남자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발론지 지친 웃음소리를 내며 앞을 바라보았다.

아발론의 앞에는 새로 잘 만들어진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꼬리를 문 용맹한 뱀이 비늘을 켜켜히 세운채 제단을 감싸고 있었다. 왕관이 사라진 에일레흐의 문양 가운데에는 작은 홈이 패여져 있었다. 아발론이 손을 들어올려 보였다.

이번에는 내가 너에게 생명을 나누어 줄게. 


칼리번은 잠시 무표정하게 아발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한참만에 다시 고개를 들어올리는 칼리번의 얼굴에는 어쩔수 없다는 얼굴로 쓴웃음이 걸려있었다. 

아발론은 제단안으로 자신의 손을 집어 넣었다.

거울에 서로의 모습을 비춘 것 마냥 똑같은 손이 제단내부에 형성되고 있었다.

빛이 가라앉은 제단 위에 아발론과 똑같은 모습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홀로그램과 마주잡은 손끝이 짜릿짜릿했다.


“다시 너와 함께 하게 되어서 기뻐, 칼리번.”

[“나도, 너를 다시 만나게 되어서 기뻐. 아발론.”]




수많은 오류와 실패가 반복되어 왔었다.

그것을 어쩔수 없다 믿으며 오만하게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이미 손댈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너무 늦어버린 일이라며 하염없이 타들어가는 폐허를 바라보기만 했었지만 이제는 답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자네를 도왔던 것에 후회는 하지 않아.”


이름을 밝힌 아발론을 올려다보는 던컨의 이마께로 땀이 흘러내렸다.

그의 어깨에는 주인을 잃은 충격에 기력을 잃은 푸른 새가 웅크리고 있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둘이서도 가능할지 모르는 위업이 있었다.

누군가가 배신했고 누군가가 참회했다. 그는 왕도 성직자도 전사도 아니었지만 꿋꿋히 사람들을 이끌어 하나의 마을을 완성했다. 그리고 그 마을이 박살난 지금도 남은 이들을 이끌며 내일을 도모했다.


“밉지는 않습니까?”

“가끔은.”


그는 삽자루를 땅에 꽂으며 지친몸을 기대었다. 한숨과 함께 먼 숲을 바라보았다.


“나도 사람이니, 가끔은 그들이 미울때도 있지.”

“그들이 힘을 얻은 것은 나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만큼이나 살린 것도 네 덕분이야.”

“절반도 살리지 못했어요.”


“절반이나 살린거야.”


던컨은 슬피우는 파란 새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나도, 이녀석도 모두 네 덕분에 지금 이렇게 살아있어.”

“하지만….”


던컨은 각기 다른 위치에서 땅을 파는 다른 생존자들을 둘러보며 미소지었다.

꽉 다문 어금니가 애처로웠다.


“.... 그래 맞아. 그녀는 살아나오지 못했지.”


“........”


“그래도, 적어도, 우리들은. 살아남은 우리들은 그들을 기억할 수 있어. 추모 할 수 있어. 비어있는 무덤이라도, 이렇게 만들어 둘 수 있어.”


“.......던컨..”


“지금 당장은 슬프지만, 정말 미쳐버릴 것 같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다시 떠올릴 수 있어.  우리 그 때 정말 행복했었지 하는 기억을 다시한번 곱씹을 수라도 있어.”


“......”


“사랑한다는 건 그런거야.”


“......”


“살아간다는 건 그런거야.”


서로다른 마음이 하나로 겹친다는 것은 기적이었고 그들은 서로를 만들어낸 기적을 축복하는 것으로 탄생의 울음을 대신했다. 작은 울타리 안에서 만들어진 인연이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다고 그들은 둥근 십자가 아래서 입을 맞추었다.

새가 날아오른다.




머리 끝까지 새하얗게 바래버린 소녀가 영상속에서 속삭였다. 


[“네, 슬퍼요, 아프고, 또 두려워요. 그래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후회하지 않아요.”]


푸른눈동자가 웃음짓는다. 


[“하지만 내가 반대의 입장이 되었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에요. 우리중 누가 감염되었어도 똑같이 그 사람을 들쳐업고 뛰었을 거고, 누가살아남게 되더라도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겠죠. 그래요. 어느 누가 되었든 우리들은 분명, 0가 되어버리겠지만 그래도 이젠 당신이 있어요. 우리들의 다음으로 밀레시안이란 존재가 남게되는거에요.”]


녹음과는 다른 또하나의 푸른빛이 그들을 구원한다.


[“당신을 만나게 되어서 기뻐요. 밀레시안.”]







찰카닥-


녹음이 종료되었다. 데이터가 이동되었고 방안 여기저기에서 전원이 내려지고 있었다.

단장은 닫혀있던 서류가방을 열어 파일을 집어넣었다. 창문에 기대어 세워놓았던 콜트도 챙겨들었다. 

낡은 콜트는 몇 발정도 쏘는 것도 한계인 것처럼 삐끄덕 거렸다.

평소처럼 모자를 눌러썼고 케이프를 둘러 어깨에 고정했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동안 문이 저절로 열렸다. 

모든 것이 정리된 텅 빈 빌딩. 유일하게 잠기지 않은 비상구의 난간에 갈색 깃의 수리부엉이가 앉아있었다. 

때와 장소에 맞지 않지만 단장은 짧은 휘각을 깨물듯 입에 물고는 힘차게 숨을 불어넣었다.


만들자.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정해진 결말에 얽매이지 않은 이야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헤어지고,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같은 꿈을 이어나간다.

나는 스스로를 더 가꿀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낼 것이고 너는 서로를 더 아낄 수 있는 인연을 엮어낸다.

그리고 언젠가 그 마음이 홀로 일어설 수 있기를, 스스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기를, 

꿈에서 깨어난 그 순간에도 고독함과 외로움에 괴로워하지 않기를.


단장은 새가 날아가는 방향을 확인 한 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계단을 타고 내려가더라도 멀리 솟아오른 거대하고 하얀 건물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지지를 않았다. 

계단이 끝나고 좁은 골목길이 이어졌다. 

먹먹한 음악소리는 건물 여기저기에 부딪쳐 흐려졌지만 그 북소리만큼은 단장이 걸어가는 골목까지 울려들어왔다.

각자의 진심과 거짓된 가면을 가진 사람들이 하얀 건물로 모여들고 있었다. 


단장 또한 준비한 데이터가 가슴팍에 제대로 있는지를 확인 한 뒤 예정된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약속된 시간보다 이른 시각이었지만 중간에 들릴 것을 감안하면 빠듯한 출발이었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일은 모두 끝이 난다. 단장은 마지막 까지 그 투구속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며 실없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폭죽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골목의 어둠이 깊어질수록 환호성과 박수갈채소리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꽃가루가 휘날린다. 브류나크의 행사가 시작되려는 아침이었다.